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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38 호 (2016.4) 부경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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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역과 역사 제38호 차 례 특집논문 한일역사연구의 쟁점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 김강식 5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염정섭 49 내재적 발전론과 소농사회론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 이와가타 히사히코 105 연구논문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 안홍좌 133 ꡔ일본서기ꡕ 민달~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 백승충 167 韓 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 이종봉 215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 우정임 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 김동철 309 都中 洪在昇, 朴時奭, 李塤의 사례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 최성환 347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 이가연 391 연구동향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 심민정 429 국내 연구동향을 중심으로 서 평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 김훈식 449 장동표 지음, ꡔ조선시대 영남 재지사족 연구ꡕ, 태학사, 2015 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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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ꡔ지역과 역사ꡕ 38, , 5~47쪽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5 특집논문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1)김 강 식* 머리말 Ⅰ. 전쟁의 원인 Ⅱ. 전쟁의 경과 1. 전투 2. 義兵 3. 軍需 문제 Ⅲ. 전쟁의 영향 1. 降倭 2. 被虜人 3. 倭城 Ⅳ. 전쟁의 성격 앞으로의 연구방향 국문초록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지금까지 행해진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보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전쟁 사적 측면에서 크게 분류해 보면 전쟁의 명칭, 성격, 원인, 경과, 영향으로 나눌 수 있 다.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구조적 측면에서 시대구분, 국가구조와 체제, 군량 운송과 피로인 송환체제 등에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난극복사 적 측면에서 전쟁의 극복 문제, 의병과 주요 인물의 역할, 전쟁이 국내에 미친 영향 등 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래서 양국의 연구 성과 가운데는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시각 을 달리 하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원인을 국내적인 시각 *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인문한국교수(ks1592@hanmail.net).

6 6 지역과 역사 38호 에서 볼 것인가,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전쟁의 경과에서는 전 쟁의 극복이라는 시각에서 의병의 역할을 중시할 것인가, 군수의 운송이 원활하지 못한 점을 중시할 것인가의 입장이 있다. 전쟁의 영향에서는 국내적 차원에서 볼 것인가, 국 외적 시각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피로인 문제와 성격에서 남아 있다. 전쟁의 성격에 서는 倭亂으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나라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의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의 시각 에서 전쟁을 통해서 문화충돌과 접변이 발생하였으며, 海域을 통해 문화교섭이 진행된 시기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임진왜란을 국가적 규모의 倭寇인가, 아니면 국가 사 이의 전쟁인가에 따라 객관적인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각국의 민족주의적 관 점을 벗어나 전쟁의 원인, 경과, 영향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전쟁이 남긴 교훈을 얻으려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넷째,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전쟁 당사국의 자료를 활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사료도 지역을 중 심으로 발굴하고 객관화시켜서 이용해야 한다. 주제어 : 임진왜란, 구조적 측면, 국난극복사적 측면, 왜구, 전쟁 머리말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일본은 서로의 역사에서 공통으로 경험 한 부분이 많다. 이렇게 서로의 역사에서 공유하거나 중첩된 부분이 많은 사실은 상호 간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지나 온 역사과정에서 선린 우호의 관계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지만, 동시에 상호 투쟁하거나 지배와 예속의 관계에 놓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 스럽게 상호 중첩된 역사사실에 대한 이견도 발생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존재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데에는 의견을 달리하기 어렵다. 반면에 역사는 객관적 사

7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7 실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고 있는데,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역사 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함께 인정하고 있는 역사 적 사실에 대한 해석해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하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및 사실 해석에 대한 이견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는 역사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不可分의 관계에 있었던 일본과 조선이 오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임진 왜란으로 첫 전면전을 치렀다. 1592~98년에 전개되었던 임진왜란은 한국 과 일본 양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양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다.1) 이러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사는 대부분 시대별 연 구현황과 주제별 연구현황을 언급하면서 정리되고 있다.2) 그리고 임진왜란 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1992년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 2012년의 7周甲 을 계기로 연구 성과가 늘어나면서 재정리되기도 했다.3) 본고에서는 지금 까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임진왜란에 대하여 연구된 연구경향을 전쟁사의 입장에서 주요한 쟁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광복 70주년 이후에 임진왜란 에 대한 연구가 양국의 공감 속에 진전되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방안에 대 1)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연구휘보에는 2016년 4월 기준으로 임진왜란 1,025편, 임진란 55편, 임란 390편의 논문이 검색된다. 2)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한 글로는 국내에서 오종록, 壬辰倭亂~丙子 胡亂時期 軍事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ꡔ軍事ꡕ 38,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추이와 과제 ꡔ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ꡕ, 창작과비평사, 민 덕기, 조선후기의 회고와 전망 ꡔ한일관계사연구의 회고와 전망ꡕ, 국학자료원, 박재광,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ꡔ임진왜란과 한일관계ꡕ, 경인문 화사, 노영구, 임진왜란의 학설사적 검토 ꡔ동아시아세계와 임진왜란ꡕ, 경인문화사, 2010이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北島万次, 豊臣政權の朝鮮侵略に關 する學說史的檢討 ꡔ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掠ꡕ, 校倉書房, 六反田 豊 외 6인, 文祿慶長의 役(壬辰倭亂) ꡔ한일역사공동보고서ꡕ 제3권, 中 野等, 文祿慶長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ꡔ제2기 한일역사공동보고서ꡕ, 北島万次,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ꡕ, 경인문화사, 2010이 대표적이다. 3)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편저, ꡔ임란의병사의 재조명ꡕ, (사)임진란정신문화선 양회ㆍ안동시, 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 편, ꡔ壬辰亂文獻目錄(Ⅰㆍ Ⅱ)ꡕ, 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 2013.

8 8 지역과 역사 38호 해서 전쟁사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에 임진왜란에 대한 전체 연구 성과를 모두 언급하기보다는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주요한 연구 쟁점 을 중심으로 정리하면서 나아갈 바를 간략하게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Ⅰ. 전쟁의 원인 전쟁사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볼 때 주목되는 것이 임진왜란이 발 생한 원인이다.4) 먼저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있어 왔다. 일본에서는 국내의 통일과 전국시대의 수습, 16세기의 무역, 근 세국가로서의 체제 정비라는 관점에서 많은 연구를 하였다. 첫째,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영토확장설을 내세우는데, 이는 豊臣秀吉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연계하여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豊臣政權이 조선 침략 을 감행했던 원인에 대한 논의는 江戶時代부터 시작되어 堀正意과 林羅山 등이 愛兒 鶴松의 요절에 따른 울분 해소라는 설, 具原益軒과 賴山陽 등에 의한 유력자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공명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해외 침략을 기도했다는 설이5)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임진왜란의 전체상을 처음으로 그려낸 池內宏은 勘合貿易復興說을 비판하 고, 秀吉의 공명심이 조선 침략에 이르는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6) 둘째,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16세기의 무역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입장이 다. 일본에서 근대 역사학이 성립된 후 임진왜란의 원인론은 勘合貿易復興 說과 영토확장설이라는 대립의 틀로 전개되면서 나타났다. 즉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과 더불어 아시아 침략의 선례로서 辻善之助가 임진왜란을 다루 4) 임진왜란 원인에 대한 일본의 연구에 대해서는 이계황, 한국과 일본학계의 임진 왜란 원인에 대하여 ꡔ동아시아의 세계와 임진왜란ꡕ, 경인문화사, 2010을 참조. 5) 北島万次, ꡔ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役ꡕ, 校倉書房, ) 池內宏, ꡔ文祿慶長の役ꡕ 正編 第一, 南滿洲鐵道, 1914(1987年 吉川弘文館 復刊).

9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9 면서 勘合貿易復興說을 제기하였는데,7) 이것이 조선정벌사관으로 이어지 는 바탕을 만들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할 의도 는 없었지만, 명나라에 대한 감합무역의 중재를 조선이 거절했기 때문에 조 선을 침략했다는 입장이다. 셋째, 임진왜란의 원인을 풍신정권의 성격 변화 속에서 찾는 견해이다. 태평양전쟁 종결 이후인 1950~70년대에 일본에서는 전쟁 이전의 皇國史 觀에 대한 반성에서 민중을 중시하는 사회경제사관이 나타나자, 太合檢地 論爭의 영향을 받아 豊臣政權論이라는 틀 안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다. 대표적으로 해외파병을 하려는 내부적 논리는8) 岩澤愿彦의 실 증연구로 나타났다.9) 그는 임진왜란은 豊臣政權에 의한 전국 통일 사업의 일환 혹은 그 연장선에 있는데, 풍신정권이 대외 침략 성향을 가지고 있었 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풍신정권의 외적인 변화와 연계하여 이해 하기도 했다. 즉 유럽 세력의 東漸을 맞게 된 동아시아 정세라는 외적인 조 건에 대해서, 16~17세기의 일본을 둘러싼 대외 관계사 연구에 의해 실증 연구가 축적되면서10) 豊臣期를 국제적 국민주권의 확립이나 프로토 국민 국가의 성립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넷째, 임진왜란의 원인을 16세기의 아시아의 변화와 연계하여 복합적으 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1980년 이후에 豊臣政權論의 전국 통일 기조를 군 사적 정복뿐만 아니라 豊臣政權이 明國에 대해서는 勘合貿易 부활을 기조 로 하고, 朝鮮國에 대해서는 惣無事令의 적용을 정책 기조로 삼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외부적인 조건으로서 동아시아 지역사의 전체적 전개 속에서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왜구적 상황이 전쟁으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해 해명하고자 하였다. 한편 서양의 동아시아 진출은 16세기 중반 무렵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해역에서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가져왔다. 이에 중국 7) 辻善之助, 豊臣政權の支那朝鮮征伐の原因 ꡔ海外交通史話ꡕ 190, 東亞堂書房, ) 鈴木良一, 秀吉の朝鮮征伐 ꡔ歷史學硏究ꡕ 155, ) 岩澤愿彦, 秀吉の唐入りに關する文書 ꡔ日本歷史ꡕ 163, ) 田中健夫, 朝鮮の役の分析視覺について ꡔ九州史學ꡕ 33ㆍ34, 1966.

10 10 지역과 역사 38호 주변 해역의 무역권에서는 중국, 조선, 일본, 琉球, 북부 베트남을 축으로 하여 중국산 생사, 견직물, 도자기 등이 조선의 면포, 일본의 금과 은이 주 로 교역되었다. 그런데 명이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海禁令을 내리고 자신들과 조공과 책봉 관계를 맺은 나라의 선박에 대해서만 무역을 허락하 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증가하는 무역 욕구와 충돌하면서 倭寇 발생의 배경이 되었으며, 이런 흐름이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고11) 파악하는 입장 이다. 다음으로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1950년대부터 국난극복사 관이 등장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서술도 국난극복사의 일환으로 인식하게 되었다.12) 여기서 나아가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서도 동양전란사와 세계 전란사의 입장에서 접근하게 되었다. 첫째, 임진왜란의 원인을 豊臣政權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결하여 선구적 인 성과를 남겼다.13) 한우근은 豊臣秀吉이 전쟁광이었다는 탐병설 내지는 개인 공명심, 領地를 주지 못해 大名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설, 풍신수길이 정복욕이 있었다는 설, 영토확장설, 명나라와 감합무역을 재개 하기 위해서라는 설,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정복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임진왜란 발발 원인을 복합적인 요인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최근에는 15ㆍ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豊臣秀吉 정권을 통해 임진왜란의 원인을 재검 토하기도 하였다.14) 둘째, 임진왜란의 전쟁의 원인을 16세기의 동북아의 경제 변화의 흐름 속 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제시되었다.15) 1592년의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15세 11) 岸本美緖, ꡔ東アジアの'近世'ꡕ, 山川出版社, ) 1950년 10월 한국전쟁중에 국방부에 전사편찬위원회가 발족되어 다수의 소장 학자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3) 韓㳓劤, 壬辰亂 原因에 關한 檢討-豊臣秀吉의 전쟁 도발 원인에 대하여- ꡔ역 사학보ꡕ 1, ) 박수철, 15ㆍ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역사학회 엮음, ꡔ전 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ꡕ, 일조각, ) 정두희ㆍ이경순, ꡔ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ꡕ, 휴머니스트, 2007.

11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11 기 후반의 대항해시대의 개막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계 기로 藩國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공과 책봉체제의 기본 틀이 흔 들릴 조짐을 보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진행된 인적ㆍ물적 교섭으로 얻은 자 산은 일본 근세사회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6세기 후 반에 조ㆍ중ㆍ일 사이에서 전개된 국제무역에서 일본이 처한 교역상의 열 세와 불리를 군사력을 통해서 한꺼번에 타파하려는 목적에서 豊臣秀吉이 일으킨 전쟁이라고16) 파악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15세기 후반 대항해시대 의 여파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아시아까지 밀려오는 은을 유럽과 중국이 연결되는 유동적인 국제질서와 관련시켜 임진왜란의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 다.17) 셋째, 임진왜란의 발발 요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동북아의 체제변혁 전쟁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대외적으로 16세기까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는 명 황제와 주변국의 왕을 군신관계로 맺는 冊封體制는18) 조공의 범위 내에서만 교류를 인정한 중국 중심의 동북아 국제질서였다. 이것은 당시 동 남아시아까지 확대된 교역권을 하나의 질서로 안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책봉체제 아래서는 명에 대한 朝貢과 回賜가 합법적인 공무역이었다. 그러 나 사회경제적 발전 속에서 사무역이 중심이 되었으며, 포르투갈이나 琉球 상인들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전개된 원격지 무역과 시 장의 개척이 동아시아에서도 나타났다. 16세기 동아시아 3국은 중국의 비 단ㆍ原絲ㆍ도자기, 조선의 곡물ㆍ면포, 일본의 구리ㆍ은 등의 상품을 중심 으로 상호 교역체계를 발전시켰다.19) 조선은 명-조선-일본을 연결하는 중 개무역을 통하여 많은 이득을 올렸다. 중국과 조선이 수출품을 가진 반면, 일본은 구리와 은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서 무역적자를 벗어나기 어려웠 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 대해 중국 비단과 조선 면포 등의 수출량을 늘려 16) 이태진, 16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 ꡔ한국사회사연구ꡕ, 지식산업 사, ) 한명기, 교류와 전쟁, 한국사연구회 편, ꡔ새로운 한국사 길잡이ꡕ 상, ) 손승철, ꡔ조선전기 한일관계사연구ꡕ, 경인문화사, ) 김동철, ꡔ한국사ꡕ 22, 국사편찬위원회, 1997.

12 12 지역과 역사 38호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양국은 국내 수요 관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에 일본 상인들은 교역특설지역인 조선의 삼포와 명의 영파에서 반란을 일 으켰다.20) 중국은 반란을 막기 위해 해안을 봉쇄하는 海禁政策을 취했다. 豊臣秀吉은 주요 상품의 수입을 위해 정규무역의 부활을 요구했으나, 명나 라는 연안에 들끓었던 왜구에 대한 경계심으로 응하지 않았으며, 조선도 마 찬가지였다. 결국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과 조선 사이에서 겪고 있던 국제무 역상의 난제를 외교적인 노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검토처럼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연구는 정치사 적, 경제사적인 요인을 16세기 후반의 동북아시아의 변화와 관련시켜 연구 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풍신정권의 성격 을 중시하면서도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종합 적으로 파악하지만, 깊이 있는 연구는 없는 부족한 형편이다. 앞으로 임진 왜란의 원인에 대해 국내와 국외 요인을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연구하데, 문 화교류와 문화약탈이라는 시각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Ⅱ. 전쟁의 경과 1. 전투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 동안 육지와 바다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과 한국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거 두고 있다. 여기에서는 육전과 해전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연구 상황에 대해 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육전의 경우이다. 첫째, 일본에서 전쟁의 경과에 대해 처음으로 실 증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木下眞弘으로 알려져 있는데,21) 그는 전쟁의 시작 20)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ꡔ임진왜란사ꡕ, 1987.

13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13 에서부터 1593년의 평양성전투 직전까지를 문헌사료를 중심으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고22) 한다. 일본에서 임진왜란 전쟁에 대해서 획기적인 실증연구를 선도한 사람은 池內宏이다.23) 그는 전쟁의 동기에서 경과에 이르기까지 일본 측 사료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측 사료를 이용하여 임진왜란 전체를 전쟁사 입장에서 서 술하여 방대한 분량의 저술로 체계화시켰다. 한편 일본 參謀本部는 상세한 연구를 통해서 전쟁의 구체적 사실을 확정지었는데,24) 임진왜란을 본격적 으로 통사적 흐름 속에서 다루면서 많은 분량으로 집대성하였다. 지금까지 도 임진왜란의 전쟁 경과에 대해서는 두 연구 성과에 따르는 바가 많은데, 일본의 조선 침략전쟁사의 연구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전체 목차 설 정에서 경성진격, 평양점령, 황해도경략 등 일본군의 승리를 강조하고 있는 데, 특히 1592년 초전에 국한하여 일본군이 우세를 보인 전투, 조선의 패전 을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일본의 팽창주의를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쟁 이전의 사관이 비판당하면서 임 진왜란의 경과에 대해서도 실증적인 부분에서 심화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에서 침략과 저항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는 종전의 학설을 비판하고, 조선 침략에 대한 조선 인민의 저항을 부각시 키는 흐름이 나타났다. 中村榮孝는 1960년대에 일본, 조선, 중국 사료를 이 용하여 실증적 논증을 구체화 했는데,25) 그는 조선 측 사료를 적극적으로 소개ㆍ활용하면서 객관적인 연구를 시도했다. 임진왜란의 전쟁의 경과에 대한 연구는 北島万次가 더욱 객관화시켰다. 그는 종군 무장인 田尻鑑種의 ꡔ高麗日記ꡕ를 발견하고, 이 자료를 통해서 민의 입장에서 본 전투 현장의 21) 木下眞弘, ꡔ豊太合征外新史ꡕ, 靑山堂, ) 1900년대에는 黑板勝美가 高野山에 島津氏가 세운 공양비의 존재를 밝혀 전승 을 과시하기도 했다. 23) 池內宏, 앞의 책, 1914 ; ꡔ文祿慶長の役ꡕ 別編 第一, 東洋文庫, ) 參謀本部, ꡔ日本戰史 朝鮮役ꡕ, 偕行社, ) 中村榮孝, ꡔ日鮮關係史の硏究ꡕ 中, 吉川弘文館, 1969.

14 14 지역과 역사 38호 모습을 찾아내었다고26) 평가된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에 관한 선행연구를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ꡔ조선왕조실록ꡕ 등의 조선 측 사료와 ꡔ兩朝平攘錄ꡕ 등의 명나라 측 사료, 또한 새롭게 발견된 일기류 등의 일본 측 사료를 체계 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전쟁의 경과를 다면적으로 그려내어 임진왜란을 객관 화시켰다고 평가받았다. 둘째, 한국에서는 해방 직후 임진왜란의 경과에 대해서 이순신에 대한 연 구가 처음으로 나왔는데,27) 그것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대외관계사 정립이 시도된 것이었다. 손진태는 일본과의 7년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조선 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義兵에 대한 서술을 상세하게 했는데, 그는 人民軍의 봉기라는 항목에서 의병은 농민군이었으며, 계급을 떠나 민족을 수호한 것이라고28) 평가하였다. 한국에서 임진왜란의 경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국방부의 지원 속에 이형석이 임진왜란을 6기로 나누어 주요 전투를 분석ㆍ소개하면서 이루어 졌다. 그는 전투사를 중심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했는 데,29) 7년간에 걸쳐서 수ㆍ육군의 전투상황을 다룬 편년체 형식의 전투사 위주의 통사체 전사를 편찬했다. 그는 국내외의 방대한 문헌자료를 수집ㆍ 인용하여 임진왜란에 대한 군사적인 정리를 하였다.30) 한편 임진왜란 7주 갑을 맞아 ꡔ한국군사사ꡕ가 정리되면서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객관적이면서 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주요 내용은 16세기 동아시아 군사적 상황, 제1 차 조선-일본 전황과 조선군의 대응, 절강병법의 도입과 훈련도감의 창설, 전쟁 중 지방군의 정비와 속오군의 창설, 제1차 조선-일본 전쟁 초기 수군 26) 北島万次, ꡔ朝鮮日々記ㆍ高麗日記-秀吉の朝鮮侵略とその歷史的告發-ꡕ, 株式 會社そしえて, ) 대표적으로 이윤재의 ꡔ성웅 이순신ꡕ, 이은상의 ꡔ이충무공 일대기ꡕ, 이무영의 ꡔ이순신ꡕ이 있다. 28) 손진태, ꡔ國史大要ꡕ, 을유문화사, ) 이형석, ꡔ임진왜란사ꡕ(상ㆍ중ㆍ하),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 이현수, 제4장 조선후기 외침과 국방체제 제1절 조선-일본 전쟁(임진왜란ㆍ 정유재란), 육군군사연구소 편, ꡔ한국군사사ꡕ 개설, 경인문화사, 2012 ; ꡔ한국 군사사ꡕ 조선후기에 상세히 서술.

15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15 의 활약과 전술, 제2차 조선-일본 전쟁과 조선 수군의 위기 극복으로 서술 되어 있다.31) 그리고 당시까지의 군사사 각 부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전 투의 유형을 규정지으면서 주요 전투에 대한 상황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성 과도 있으며,32) 임진왜란 초기 육전의 대표적인 세 전투에 나타난 관방과 무기를 중심으로 방위전략과 전술적 분석을 시도한 종합적인 연구도 있 다.33) 이 외에도 각 지역의 개별전투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되었는 데, 진주성전투와 행주대첩 등을 들 수 있다.34) 다음으로 임진왜란의 수군과 수운에 관한 연구는 실제 海運이라는 시각 에서 중요한 과제이다. 첫째, 일본에서는 渡辺世祐가 伊勢 水軍 등 중세 해 적의 발전 형태로서 豊臣期의 수군과 조선사업에 대해 살피면서 연구를 개 척하였다. 이후 有馬成甫에 의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그는 자 신이 해군 大佐로서 제1차 출병 단계에서 풍신정권의 해전 연구가 부족했다 는 반성에 입각해 제2차 출병 때는 安宅船의 조선을 포함하여 수군 전력의 확보를 위해 노력했었다고35)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 수군의 패전을 기술하면서 변명을 통해 임진왜란 해전사를 왜곡하였다고 평가받았다. 이후 풍신정권에 의한 수군 편성을 바다에서의 兵農分離의 체계적 실현으로 규 정하는 三鬼淸一郞의 연구는 임진왜란 시기의 수군에 대한 일본에서의 연 구를 한 차원 진전시켰다고36) 평가된다. 그는 임진왜란 시기의 수군과 선 박 동원을 풍신정권의 국내 통일과 연계시켜 이해하였다. 둘째,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수군의 활동을 다룬 연구가 심화되면서 다양한 연구 성과가 나왔다. 崔碩男은 한국 전시대에 걸친 수군 활동사를 다루었지만, 이순신의 수군 활동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31) 이현수, 위의 논문. 3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ꡔ임진왜란사ꡕ, )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 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 문, ) 국립진주박물관 편, ꡔ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ꡕ, 국립진주박물관, ) 有馬成甫, ꡔ朝鮮役水軍史ꡕ, 空と海社, ) 三鬼淸一郞, 朝鮮役における軍役体系について ꡔ史學雜誌ꡕ 75-2, 1966.

16 16 지역과 역사 38호 임란 수군활동사라고 할 수 있다.37) 1954년에는 해군본부 전사편찬실에 서 임란 해전전사를 다룬 ꡔ한국해양사ꡕ를 출간했는데, 전투사 중심의 국내 최초 임진해전사 연구라고 평가된다. 1980년대에는 이순신의 전략전술이라 는 관점에서 임진왜란 해전의 승리를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움직임이 나타났 다.38) 이후 장학근과 이민웅은 임진왜란의 해전 양상을 3단계로 구분하여 육상전과 연계시키고 전쟁의 전반적인 상황까지를 분석함으로써 조선 수군 의 승인과 일본 수군의 패인을 도출해 내는 등 임진왜란 해전사를 체계화하 였다고39) 평가받았다. 즉 임진왜란의 해전을 초기전쟁기, 강화교섭기, 정 유재란기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이후 강화교섭기 이후의 수군의 동태와 정유재란기의 상황을 실증하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40) 이처럼 지속적으로 임진왜란의 수군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도 대부분 이순신을 중심으로 연구되지만, 한국에서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보인 분야 이기도 하다. 한편 임진왜란 시기의 선박에 대한 연구도 심화되었다.41) 대 표적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주력 함대였던 판옥선에 대한 연구, 거북선의 구 조와 성능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의 검토처럼 임진왜란 시기의 전투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전체적인 틀에서의 특정 전투에 대한 연구 성과와 달리 한국에서는 구 체적인 개별전투 전반에 대한 분석이 최근 많이 행해지고 있다. 아울러 이 문제에서는 두 나라가 모두 자국에 유리하거나 의미 있는 전투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문제점이 부분적으로 있지만, 큰 방향에서는 극복되어 나가고 있 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육전에서도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틀에서 전투를 연계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 해전 전반에 37) 최석남, ꡔ한국수군사연구ꡕ, 명양사, 1964 ; ꡔ한국수군활동사ꡕ, 명양사, ) 허선도, 壬辰倭亂論에 있어서 이충무공의 승첩-그 전략적 전술적 의의를 중심 으로- ꡔ한국학논총ꡕ 3, ) 이민웅, ꡔ임진왜란 해전사ꡕ, 청어람미디어, ) 제장명, 정유재란 시기 해전과 조선 수군 운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金在瑾, 板屋船考- ꡔ한국사론ꡕ 3, 1976.

17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17 대해 조선과 일본 수군의 승패 양상을 재검토하면서 전술 운용, 전선과 화 기의 성능 및 운용 실태를 종합적으로 분석 평가할 필요가 있다. 2. 義兵 일본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의 저항에 대해서도 연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연구에서 가장 많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에 대한 연구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승리라는 종래의 잘못된 인 식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다. 대부분의 의병 연구가 의병장 중심, 사림의 의병운동과 시회적 배경 규명, 의병의 조직과 전술, 의병지도층의 성분 분 석, 지역별 의병 연구, 의병운동을 민중의 동태와 관련하여 사회경제적 관 점에서 연구되고 있다.42) 먼저 일본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이란 조선 왕조의 정규 군인이 아니 며, 주자학의 뜻을 받드는 군대로서 사대부가 중심이 되고 일반 농민도 참 가했다고 파악하였다. 의병에 대해 실증사학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의병의 존재를 다룬 것은 池內宏이다.43) 그는 일본과 조선 양측의 사료를 대조하 면서 1592년에 발생한 함경도의 의병에 대해 밝혔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 에서 鍋島直茂의 본진에 의병이 습격을 가하고, 함경북도에서는 鄭文孚를 지도자로 하는 의병이 궐기하여 일본군으로 귀순한 鞠世弼 등이 지배하는 경성을 탈취한 사실 등을 밝혔다. 이후 일본에서 임진왜란의 의병에 대한 연구는 민중사의 입장에서 심화 되었다. 旗田巍는 조선 사람이 걸어온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 을 강조하면서, 의병 전투가 일본군의 침략을 붕괴시켰다고 평가하여 조선 민중의 힘을 높이 평가했다.44)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킨 사람은 貫井正之인 42)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편, ꡔ임진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가치ꡕ, 선인, ) 池內宏, 앞의 책, ) 旗田巍, ꡔ朝鮮史ꡕ, 岩波書店, 1951.

18 18 지역과 역사 38호 데, 그는 일관되게 의병을 연구했다. 그는 일본군 침략을 계기로 조선 각지 에서 조선왕조에 대한 투쟁과 반란이 발생하여 혼란 상태에 빠졌으며, 의병 을 통솔하는 장수들이 대개 양반층(사족 계급) 출신인데 비해 부하 병사의 대부분이 신분 해방의 요구를 갖는 양인 농민과 노비였다. 이런 점 때문에 의병운동이 순수한 민족적 투쟁으로 승화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 으며,45) 의병의 성격에 대해서도 충의군과 향병으로 파악하기도46) 하였 다. 矢澤康祐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의병운동을 다루었다.47) 그는 조선 민 중의 고통이 일본군 침략과 명군에 대한 다양한 봉사에 따른 부담뿐만 아니 라 조선 정부가 부과하는 축성 등 토목 공사와 무기, 군량 운반 등의 노역, 공납 의무 이행 등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승 병 통솔자인 惟政(송운 대사)의 동향에 초점을 맞춘 仲尾宏의 연구로48) 조 선의 승병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는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의병 연구가 시작되어, 의 병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와 지역별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1960년 대에 임진왜란 중 육상전투는 의병의 주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순신, 명군과 함께 의병이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이었다고 서술되 었다. 임진왜란 의병에 대한 연구를 선도했던 최영희는 전란이 잦은 한국사에 서 다른 민족의 점령하에서 광범위하게 민중이 전쟁에 참여한 사례로 의병 을 주목하고,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 의병장의 성격, 의병의 변천을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는 의병을 민족적 저항으로 규정하고, 향 토방위의식과 일본 민족에 대한 한국 민족의 감정을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 45) 貫井正之, 壬辰倭亂 初期におけゐ朝鮮人民の活動について ꡔ朝鮮硏究月報ꡕ 23, 1963 ; ꡔ豊臣政權の海外侵略と朝鮮義兵硏究ꡕ, 1996 ; 壬辰倭亂における 義兵活動と民衆反亂 ꡔ朝鮮史硏究會論文集ꡕ 16, ) 貫井正之, 豊臣秀吉の朝鮮侵略戰爭における朝鮮人民の動向について-特に朝鮮 義兵を中心にして- ꡔ朝鮮史硏究會論文集ꡕ 1, ) 矢澤康祐, 壬辰倭亂 と朝鮮民衆のたたかい ꡔ人文學報ꡕ 118, ) 仲尾宏ㆍ曹永祿 編, ꡔ朝鮮義僧將松雲大師と德川家康ꡕ, 明石書店, 2002.

19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19 의 사상적 기반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전이 었다는 종래의 그릇된 인식을 불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降倭 등에서 보듯이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강인하였음을 보여주었다고49) 파악하였다. 한 편 전투사적인 시각에서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를 정리한 이형석은 의병 부 대가 수행한 주요 전투를 구체적으로 소개ㆍ분석하였다. 그는 의병의 활약 을 國運을 바로잡는 민족정기의 발휘로 평가하고, 임진왜란의 10가지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의병을 규정하였다.50) 허선도는 의병 활동이 점차 국가의 일정한 조정과 통제를 받는 성격을 가졌다고51) 파악하였다. 그의 의병 연 구는 단순히 민족 항쟁 차원에서 검토되던 것에서 한 단계 진전된 연구이며, 의병 활동과 국가의 존재를 완전히 분리하여 이해하던 수준에서 탈피할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1980년대 초에는 저명한 의병장과 그의 활동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가 시 도되면서 의병 활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며,52) 임진왜란 시기의 지역별 주요 전투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1980년 후반부터 지방자치에 대한 관심은 지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지역 의병 부대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나타났으며, 저명한 의병장을 중심으 로 하던 연구와 달리 향촌사회의 사료를 활용한 소규모 의병 부대 및 의병 장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최근에 의병의 활동 영역을 조선시 대의 진관체제와 연계하여 이해하기도 한다.53) 그리고 의병의 성격도 충의 군과 향병의 두 형태가 있음을 확인하였으며,54) 최근에는 의병의 역할보다 49) 최영희, ꡔ임진왜란 중의 사회동태ꡕ, 한국연구원, ) 李炯錫, ꡔ壬辰倭亂史ꡕ(上ㆍ中ㆍ下),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 허선도, 鶴峰 金先生과 壬辰義兵運動 ꡔ國譯 鶴峰全集ꡕ 第三部 논고, 국역 학 봉전집 간행위원회, ) 李章熙, ꡔ郭再祐硏究ꡕ, 양영각, 趙湲來, ꡔ壬亂義兵將 金千鎰硏究ꡕ, 학 문사, 이석린, ꡔ임란의병장 중봉 조헌연구ꡕ, 신구문화사, ) 노영구,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 의병의 성립과 활동 영역-金沔 의병부대를 중 심으로- ꡔ역사와 현실ꡕ 64, 2007(하지만 의병의 활동 영역을 진관체제와 일치 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의병장 곽 재우의 활동 영역은 진관 단위가 아니었다).

20 20 지역과 역사 38호 관군의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도 나타나고 있다.55) 한편 2012년 임진왜란 7주갑을 계기로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를 중심으로 의병장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이상의 검토처럼 임진왜란 의병에 대한 연구 성과는 한국에서 매우 많은 데, 다루고 있는 주제의 범위에 따라서 크게 의병운동에 관한 전반적인 문 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연구,56) 각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의 전투와 의병 조직, 起兵의 배경 등을 다룬 개별인물 중심의 연구로57) 구분할 수 있다. 의병운동에 대한 연구를 내용면에서 분석해 보면 의병운동의 배경 문제,58) 의병운동의 기반과 조직 문제,59) 의병의 성격 문제, 의병운동의 전개와 변 화 문제,60) 의병에 대한 전쟁사적인 연구로61) 나눌 수 있다. 한편 일본에 54) 金錫禧ㆍ金康植, 壬辰倭亂의 義兵運動에 關한 一考 ꡔ부산사학ꡕ 23, 조원래, 壬辰倭亂과 綾州義兵 ꡔ綾州牧의 歷史와 文化ꡕ, 목포대 박물관ㆍ화 순군, ) 대표적으로 김경숙, 임진왜란 초기 지방관의 守土活動-善山府使 丁景達 형제 의 활동을 중심으로- ꡔ조선시대사학보ꡕ 65, 2013 등이 있다(이 문제는 전쟁 초기에 관군의 패배와 도망 상황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고 난 후, 관군의 재정비 라는 입장에서 연구될 필요가 있다. 특히 관군의 재정비 시기는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해당 지역을 침입하고 난 후였다. 아울러 관군이 재정비되는 것은 전쟁 중에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 때문에 의병의 활동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56) 金錫禧, 李載浩, 崔永禧, 이장희, 조원래, 이석린의 업적이 대표적이다. 57) 각 지역의 義兵將에 대한 연구는 경상도의 郭再祐, 金沔, 鄭仁弘 전라도의 金千 鎰ㆍ高敬命, 충청도의 趙憲, 함경도의 鄭文孚 등을 다룬 논고도 있다. 58) 崔永禧, 壬辰丁酉亂時 沿海民의 動態 ꡔ史叢ꡕ 2, 金潤坤, 壬辰亂 勃 發 直前의 地方郡縣 實態 ꡔ柳洪烈博士 華甲紀念史學論叢ꡕ, 李泰鎭, 16세기 沿海地域의 堰田開發-勳臣政治의 經濟的 背景 일단- ꡔ金哲埈博士華 甲紀念史學論叢ꡕ, 1983 ; ꡔ韓國社會史硏究ꡕ, 지식산업사, 尹用出, 壬辰 倭亂 時期 軍役制의 動搖와 改編 ꡔ釜大史學ꡕ 13, ) 李泰鎭, 壬辰倭亂 극복의 社會的 動力-士林의 義兵活動의 基底를 중심으로- ꡔ韓國史學ꡕ 5, 金錫禧, 郭再祐의 起兵과 社會的 基盤 ꡔ忘憂堂郭再祐 硏究ꡕ 2, 忘憂堂紀念事業會, 鄭震英, 壬亂前後 尙州地方 士族의 動向 ꡔ民族文化論叢ꡕ 8, ) 崔永禧, ꡔ壬辰倭亂中의 社會動態ꡕ, 韓國硏究院, 鄭震英, 壬亂前後 尙 州地方 士族의 動向 ꡔ民族文化論叢ꡕ 8, 李章熙, 壬辰倭亂中 民間叛 亂에 대하여 ꡔ鄕土서울ꡕ 32, 朴容淑, 李夢鶴亂에 대한 考察 ꡔ朝鮮後

21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21 서도 임진왜란의 의병에 대한 연구는 제한적이지만, 조선의 저항이라는 객 관적인 시각에서 연구되어 의병장에 대해 정치사적인 시각을 고려하면서 연 구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 연구에서는 전쟁 중의 일본군의 점령정책과 그에 따른 민중들의 대응책,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 들의 생활상, 반전의식, 의병 활동의 다양한 전개 양상과 변화 등 다양한 시 각에서 객관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3. 軍需 문제 임진왜란은 일본군이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너와서 전투를 했기 때 문에 전쟁 과정에서 전쟁 물자의 운반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때문에 임 진왜란은 군수전이라는 시각에서 접근ㆍ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 해서 일본에서는 다양한 접근의 연구가 시도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연구 가 아주 제한적이다. 먼저 군량 조달과 운반 문제이다. 첫째, 일본에서는 전쟁 행위를 뒷받침 한 일본 국내 정세와 세력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62) 이것은 일본의 각 大名들을 국가가 동원해서 임진왜란을 수행했기 때문이었 다.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풍신정권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연구가 진행 되고 있는데, 풍신정권의 軍役 체계를 실증적ㆍ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은 三 鬼淸一郞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모든 영주 계급을 장악한 통일적 군역 체제 의 완성에 의해 실현 가능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63) 新城常三은 일본 각 지의 運船業者가 병참지로 물자를 수송하여 거대한 이윤을 축적하고, 江戶 時代에 들어와 초기 豪商으로 활동하게 된 점을 지적하여,64) 사회 경제사 期 社會史 硏究ꡕ, 늘함께, ) 許善道, 壬辰倭亂의 克服과 嶺右義兵-그 戰略的 意義를 中心으로- ꡔ晉州文 化ꡕ 4, ) 일본 측의 임진왜란 군수 문제에 대해서는 六反田豊, 문록경장의 역(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측의 군량조달과 그 운송 ꡔ한일역사공동보고서ꡕ 제 3권, 2005를 참조. 63) 三鬼淸一郞, 朝鮮役における軍役體系について ꡔ史學雜誌ꡕ 75-2, 1966.

22 22 지역과 역사 38호 적인 측면에서 전쟁의 배경과 군수물자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한편 中村質은 군역을 부과한 九州 諸大名의 대응을 규명하였다. 그는 이 를 통해서 실제 동원수가 풍신정권의 요구보다 적었던 점, 과중한 군역 부 담에 의한 재정 궁핍이 九州 諸大名의 전국 시장의 자본 의존도를 높이게 한 점 등을 지적했다. 이에 일본군의 전선 기지가 놓인 九州 諸大名의 동향 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65) 지적했다. 森山恒雄은 임진왜란 시기의 병참으 로의 공급 기반이 풍신정권의 九州 藏入地였던 점에 주목하고, 검출을 통하 여 九州가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역과 같은 강고한 지배 체제로 편입되어 간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전쟁을 계기로 九州가 일본 통일로 편입되고 평준화 가 이루어졌다고 지적했다. 한편 北島万次는 임진왜란 시기에 九州 諸大名 중 對馬島 宗氏 외에 大名이었던 島津氏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파악했다. 그 는 島津 영지 내에서 실시된 太合檢地에 주목하고, 이에 따라 조선 출병체 제가 마련되었다고66) 주장하였다. 둘째,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초기의 군량 문제를 다룬 연구가 있다.67) 그 런데 대부분 연구에서도 주로 명나라 군사에 대한 군량 조달, 군량의 부족 이 민간반란으로 이어진 점, 일본군의 군량 조달이 의병운동을 가중시킨 점 등이 다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으로 武器에 대한 연구는 전쟁에서 중요한 연구주제이다. 특히 임진 왜란이 동북아시아에서 전개되었던 전면적인 보병전이자 화약전쟁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다. 대표적으로 조총이 개 인 화기로서 큰 위력을 보인 전쟁이었다. 첫째,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임진왜란 시기의 무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었다. 吉岡新一과 宇田川武久에 의해서 일본, 조선, 명 삼국 64) 新城常三, 朝鮮役に於ける水運の諸問題 ꡔ交通文化ꡕ 20, ) 中村質, 朝鮮の役と九州 ꡔ九州史學ꡕ 33ㆍ34, ) 北島万次, 豊臣政權の軍役體系と島津氏, 北島正元 編, ꡔ幕藩制國家成立過 程の硏究ꡕ, 吉川弘文館, ) 金鎔坤, 朝鮮後期 軍糧米의 確保와 運送-宣祖-顯宗 年間을 中心으로- ꡔ韓國 史論ꡕ 9-朝鮮後期 國防體制의 諸問題-, 1981.

23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23 간의 火器 비교 연구가 진행되었다. 吉岡新一은 조선, 명군은 대포와 함선 이 뛰어났었다고68) 지적했다. 특히 조선군이 군선에 탑재한 천자총통, 지 자총통, 현자총통 등의 중화기가 위력을 발휘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 으며, 또한 조선을 구원한 명군의 불랑기, 대장군포, 위원포 등을 일본군은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대해 宇田川武久는 조선이 임 진왜란 중에 명의 兵器와 武技를 습득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지만, 일본군 降倭(투항병) 등으로부터 철포제법 등을 배워 이를 자국의 상용 무기로 만 들어 나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철포는 鳥銃이라 불렸는데, 정밀도가 매우 높았다고69) 파악하였다. 둘째, 한국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화약 병기에 대한 연구는 조선에 전해진 조총에 관한 연구가 중심이 되고 있다. 전쟁은 무기를 발전시키는데, 일본 에 조총이 전해지는 과정과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서 조총을 제조하는 과정 을 밝히고 있다.70) 한편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은 많은 인적 교류를 가져왔 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은 일본문화를 조선에 전하였다. 특히 항왜 沙也可는 鳥銃의 제조법을 전하여 주었으며, 전투에도 참가하여 싸웠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유승주는 조총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군수산업 발전에 관하여 규명하고 있으며,71) 하우봉은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에게 전 해진 문물의 하나로서 조총을 꼽고 있으며,72) 박재광은 화약무기의 발달과 정에 대해서 살피고 있다.73) 한편 군선과 거북선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집 적되었다.74) 68) 吉岡新一, 文祿ㆍ慶長の役における火器についての硏究 ꡔ朝鮮學報ꡕ 108, ) 宇田川武久, 壬辰ㆍ丁酉の倭亂と李朝の兵器 ꡔ國立歷史民俗博物館硏究報告ꡕ 17, ) 박재광,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화약병기에 대한 일고찰 ꡔ군사ꡕ 30, ) 유승주, 조선후기 군수광공업의 발전-조총 문제를 중심으로- ꡔ사학지ꡕ 3, ) 하우봉, 임란 직후 조선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 의 변동ꡕ, 경인문화사, 김강식, ꡔ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ꡕ, 선인, ) 박재광, 임진왜란기 朝ㆍ明ㆍ日 삼국의 무기체계와 교류-火藥兵器를 중심으 로- ꡔ軍史ꡕ 51, 2004.

24 24 지역과 역사 38호 이상의 검토처럼 군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동 원된 군역과 군량 문제에 대한 연구가 구체화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국가 적 차원에서의 군량 조달과 동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아울러 무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경우 화약 무기의 전래와 제조에 대해서 구체적으 로 파악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조총의 전래 문제에만 초점이 두어진 연구 가 많다. 그러나 해전에서의 화포의 성능과 선박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척 되어 있다. Ⅲ. 전쟁의 영향 임진왜란은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전쟁이었다. 이에 임진왜란은 문 화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전쟁 관련국이었던 조선, 명, 일본에서는 정 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에서는 전쟁을 통해서 진행되었던 사람과 문 물의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대표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降倭 전쟁은 당대나 후대에 많은 영향을 남긴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전이었던 임진왜란은 인적, 물적, 정신적인 면에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역사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먼저 일본에서는 항왜에 대한 연구가 여러 측면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졌 지만, 초기에는 沙也可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조선 측 사료에서는 항왜, 투 항왜, 귀순왜, 生擒倭, 被虜歸順倭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항왜에 대해 서는 加藤淸正의 선봉이었던 沙也可(金忠善)가 알려져 있다. 그의 문집 ꡔ모 화당문집ꡕ에 따르면, 사야가는 종군 중에 조선의 東土禮儀의 풍속을 보고, 중화 문물이 번성한 것을 숭모하여 부하를 이끌고 조선 측에 투항하여 일본 74) 金在瑾, ꡔ朝鮮王朝軍船硏究ꡕ, 일조각, 1977.

25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25 의 鳥銃(火繩銃)을 전수시키는 등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 강제 병합 이후 沙也可의 존재를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부 정하는 학설이 나타났다.75) 內藤虎次는 沙也可의 사적을 가공의 위작이라 고 단정하였으며, 靑柳綱太郞은 충군애국이념이 왕성한 加藤淸正의 肥後藩 에서 그런 국민이 나올 이유가 없다면서 사야가를 가공의 존재라고 단정하 였다. 항왜에 대한 일본 측의 연구 성과는 中村榮孝의 연구를76) 시작으로 1970년대에 內藤寯輔,77) 1990년대 이후 본격적인 연구 성과가 나타났다.78) 그런데 사야가에 대한 비과학적인 학설들은 中村榮孝에 의해 부정되었는데, 그는 ꡔ조선왕조실록ꡕ에 근거하여 사야가의 존재를 새롭게 실증했다. 그는 전쟁 이후에도 조선군을 위하여 활약하는 沙也可의 모습을 그려냈는데, 사 야가가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왕조로부터 관직을 하사받고, 이름도 金忠善 으로 바꿔 살아간 그의 생애를 현존하는 많은 사료의 소개와 함께 규명해 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沙也可 외에도 많은 항왜가 존재했는데, 北島万次는 李 舜臣의 ꡔ난중일기ꡕ에서 다양했던 항왜의 모습을 지적하였다. 그는 항왜의 발생시기, 이순신의 항왜 활용 등에 대해 고찰하고, 항왜가 발생한 절정기 는 1595~96년의 강화협상기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일본군이 경 상도 남해안에 왜성을 축성하고 장기 주둔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왜성 75) 幣原坦, 壬辰丁酉倭亂および戰後の日朝交涉おけるの活動に關すゐ考察 ꡔ歷史 地理ꡕ 10-1, ) 中村榮孝, 朝鮮役の投降倭將金忠善-その文集と傳記の成立- ꡔ日鮮關係史の 硏究ꡕ 中, 吉川弘文館, ) 內藤寯輔, 壬辰丁酉役における謂ゆる 降倭 について ꡔ文祿ㆍ慶長役における 被擄人の硏究ꡕ, 東京大學出版會, ) 歷史群像シリ-ズ 35, 朝鮮の土となった朝投降武將 降倭, 東京, 仲尾 宏, 壬辰倭亂と降倭-沙也可 ꡔ朝鮮通信使と壬辰倭亂-日朝關係史論ꡕ, 明石書 店, 北島万次, ꡔ豊臣秀吉の朝鮮侵略ꡕ, 吉川弘文館, 1995 ; ꡔ壬辰倭亂 と秀吉ㆍ島津ㆍ李舜臣ꡕ, 校倉書房, 貫井正之, 降倭論 ꡔ豊臣政權の海 外侵略と朝鮮義兵硏究ꡕ, 靑木書店, 1996.

26 26 지역과 역사 38호 축성 작업이 어려워지고 군량 부족도 심화되자 많은 수의 일본 병사가 조선 측에 투항했다고79) 보았다. 또 이순신 휘하에 모인 항왜는 단결하여 존재 했던 것이 아니라 각각 다양한 삶을 살았음을 밝혀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항왜는 투항한 왜군을 말하는 것으로 한정하는데, 한 국문화에 감화를 받았거나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자발적으로 조선 陣中에 투항한 자들로 파악하였다. 최근 항왜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80) 그 런데 이런 연구를 종합하면, 당시 조선 진중에서 많은 항왜를 수용하지 못 한 것은 군량미의 부족 때문이었는데, 항왜의 규모는 약 1만 명이다고 한다. 또 항왜에 대한 인식도 지배층과 일반민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였으 며, 항왜의 역할 및 처리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항왜가 전쟁 중에 조선에 미 친 영향과 이들의 삶을 재검토하고 있다. 이상의 검토처럼 항왜에 대해 일본에서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부정하다 가 다양한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항왜의 발생 배경, 유 치, 활용에 초점이 주어져 연구되다 임진왜란 400주년을 계기로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앞으로 전쟁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여 존재했던 항왜의 조 선에서의 생활과 역할에 대해서 개별사례를 검토하는 연구가 필요가 있다. 2. 被虜人 16세기 후반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새로운 경제질서의 변화 때문에 임진왜 란에서는 전쟁 포로의 필요성이 어느 전쟁보다도 많았으며, 실제 전쟁 포로 가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전쟁 포로들은 일본과 유럽 등지로 팔려나갔는 79) 北島万次, 위의 책, ) 이장희, 임란시 투항왜병 ꡔ한국사연구ꡕ 6, 최장근, 근세일본의 조선 침략과 영토확장 ꡔ한국사연구ꡕ 10, 김재덕, 사야가 일대기-조국을 바 꾼 사람들ꡕ, 대일, 김문자, 임란시 항왜문제,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 위원회 편, ꡔ임진왜란과 한일관계ꡕ 경인문화사, 원작 KBS역사스페셜, 임진왜란 비사, 일본군과 싸운 일본군 ꡔ역사스페셜ꡕ 6, 효형출판, 한문종, ꡔ조선전기 향화 수직 왜인 연구ꡕ, 국학자료원, 제장명, 임진 왜란 시기 降倭의 留置와 활용 ꡔ역사와 세계ꡕ 32, 2007.

27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27 데, 이들의 일본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다양한 형태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먼저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인 포로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세 측면에서 연 구하고 있다. 즉 일본 피로인으로 보는 시각,81) 渡來人으로 보는 경우,82) 피로인 납치와 송환행위를 고대 이래의 일본적 관행으로 보는 시각이83) 있 다. 1930년대에 山口正之가 선교사들의 자료를 이용하여 조선 포로들의 실 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84) 1960년대에 內藤雋輔는 자료 수집과 고증을 통해서 포로의 실체에 접근하여 일본의 신분제 사회 속에서 포로를 다루었다.85) 최근에는 米谷均이 피로인 송환과정과 내용에 대해 중 점적으로 분석하였으며,86) 仲尾宏은 피로인이 조선으로 귀국하는 경우와 일본에 정착하는 경우를 비교분석하고 있다.87) 그런데 일본에서 조선 피로인에 관한 연구는 문화전파의 입장에서 전쟁 의 결과 한반도와 대륙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본 격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平井鏗次郞은 조선 도공의 일본 연행에 대해 주목 하고, 이를 계기로 근세 일본의 도공업이 발달했다고88) 파악했다. 德富猪 一郞은 도기와 활판인쇄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결과적으로 국민적 자신감으 로 이어졌다고89) 지적한다. 최근 北島万次는 薩摩 苗代川의 도공들은 제2차 출병(정유재란) 때 島津氏에 의해 강제 연행된 도공들로 苗代川에서 공동 생활을 하였다고90) 한다. 그는 苗代川의 조선식 도자기 기술과 생산구조를 內藤雋輔, ꡔ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被擄人の硏究ꡕ, 東京大學出版部, 鶴園裕, ꡔ日本近世初期における渡來朝鮮人硏究, 1990年 科學硏究報告書ꡕ, 米谷均, 近世日朝關係における戰爭俘虜の送還 ꡔ歷史評論ꡕ 595, 山口正之, 朝鮮におけゐ被虜人の行方 ꡔ靑丘學叢ꡕ 8, 內藤雋輔, 앞의 책, 米谷均, 17세기 日ㆍ朝 관계에서의 피로인의 송환-惟政의 在日 쇄환활동을 중 심으로- ꡔ사명당 유정ꡕ, 지식산업사, ) 仲尾宏, 壬辰ㆍ丁酉倭亂の朝鮮人とその被虜定住ㆍ歸國 ꡔ朝鮮通信社と壬辰 倭亂ꡕ, 明石書店, ) 平井鏗次郞, 文祿役の我が工芸に及ばせゐ影響 ꡔ弘安文祿征戰偉績ꡕ, 史學 會, 1905 收錄. 89) 德富猪一郞, 壬辰の役と朝鮮文化の移入及び其の感化 ꡔ積翠先生華甲壽記念 論纂ꡕ, 積翠先生華甲壽記念會, ) 82) 83) 84) 85) 86)

28 28 지역과 역사 38호 밝히고, 서일본에서 발전한 도자기 기술과 생산구조와의 차이점을 밝혔다. 이와 달리 內藤雋輔는 조선 민족에 비참한 상흔을 남긴 사실을 밝히는 관 점에서 정치, 군사, 외교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피로인의 실태에 주목했 다. 그에 따르면 피로인은 크게 주자학자, 농민, 도공 등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퇴계 李滉의 학파에 속하는 姜沆처럼, 주자학자의 경우에는 일반 被虜 人과 구별되어 일본 학자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대우를 받았지만, 농민과 도공 등의 피로인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오로지 육체노동을 강요 받았기 때문에 같은 피로인이라도 그들을 일률적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고91) 지적하였다. 한편 피로인의 송환제도에 대해서는 조선 통신사, 특히 임진왜란 직후에 회답사 겸 쇄환사로 일본에 온 통신사가 피로인을 소집해 달라는 요구를 했 다고 밝힌 米谷均은 귀국 후의 피로인에 대한 조선 왕조의 대응에 주목하였 다.92) 그는 당초 피로인에게 약속되었던 免罪, 免役, 免賤, 復戶 등의 특전 부여가 실제 시행되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부산 근처에 버려졌기 때문에 귀 국 후의 피로인 개인에 대한 추적조사가 중요하다고93) 지적하였다. 李元植 은 피로인들이 일본 사회에 정주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은 본토로 돌아가도 전혀 이득이 없다 며 동료들에게 말하며, 송환을 방해한 자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라고94)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포로를 연구한 崔書勉은 임진왜란 때 일본 측의 조선인 납치가 우발이 아닌 정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으 며,95) 申一澈은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이 일으킨 일본도자기 문화를 李參平 90) 北島万次, 李朝の燒きものと薩摩の燒きもの 壬辰倭亂と薩摩の陶工をめぐっ て ꡔ歷史評論ꡕ 595, ) 內藤雋輔, 앞의 책, ) 米谷均, 近世日本關係におけゐ戰爭捕虜の送還 ꡔ歷史評論ꡕ 592, ) 米谷均, 앞의 논문, ) 이원식, 사명당기념사업회 편, ꡔ사명당 유정-그 인간과 사상과 활동-ꡕ, 지식산업 사, ) 최서면, 壬辰ㆍ丁酉七年戰役の被虜たち ꡔ韓日文化の後榮ꡕ, 韓國資料硏究所 (日本), 1963.

29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29 의 업적을 중심으로 소개하였으며,96) 金泰俊은 포로가 일본에 문화 전파를 한 모습을 비교문화적인 접근 방법으로 검토하고 있으며,97) 김옥희는 가톨 릭 사료를 중심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포로들과 포로 여성 신자가 겪은 신 앙적 박해에 대해 검토하였다.98) 李元淳은 일본으로 끌려간 피납인의 행방 을 구분, 분석하여 임진왜란을 포로전쟁이라 규정하였다. 즉 일본인 노예상 뿐만 아니라 조선 침략 전쟁에 출진한 각 大名들조차도 노예 획득과 매매로 폭리를 얻으려 하면서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99) 평 가하였다. 최근 김문자는 피로인 가운데 납치된 조선인 여성에 주목하여 일 본에서의 지위와 생활, 송환한 여성 피로인에 대한 조선정부의 대우를 구체 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100) 민덕기는 포로의 일본에서의 생활과 지위, 쇄 환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101) 한편 포로에 대한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는 피납인의 기록을 문학적 작품으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였다.102) 이 밖에도 조선인 포로 문제는 전 쟁 후 이들을 송환하는 문제가 조일 양국의 교섭 재개의 중요한 단서가 되 었는데, 德川幕府의 성립, 근세 일본유교의 성립, 일본문화에 끼친 영향과 관련하여 연구되기도 한다. 한 예로 임진왜란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 沙也可 (金忠善)가 일본인으로 조선인이 되었으며, 침략군이었지만 평화주의자였 다고103)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남은 포로들의 일본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96) 신일철, 임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陶祖 李參平을 찾아보고 ꡔ문학사상ꡕ 10월호, ) 김태준, 고려의 자손들과 임란의 陶磁문화 ꡔ임진난과 조선문화의 東漸ꡕ, 한 국연구원, ) 김옥희, 임란 때 납치된 조선여인들의 일본에서의 순교와 신앙생활 ꡔ사학연 구ꡕ 36, ) 이원순, 壬辰 丁酉倭亂時의 朝鮮俘虜奴隷 問題; 倭亂 性格 一貌 ꡔ邊太燮博 士 華甲紀念史學論叢ꡕ, 삼영사, ) 김문자, 16~17세기 朝日 관계에 있어서 被虜人 귀환 ꡔ상명사학ꡕ 8ㆍ9, ) 민덕기,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귀환과 잔류로의 길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0, ) 李採衍, ꡔ임진왜란 피로실기문학 연구ꡕ, 박이정, 1994.

30 30 지역과 역사 38호 도 연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104) 하였다. 이상의 검토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피로인 연구는 피로인과 포로라는 용 어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전쟁 포로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 인가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앞으로 용어에 대한 검토 후에 피로인을 통 한 문화교섭의 시각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3. 倭城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경과와 영향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倭城 문제 이다. 왜성은 임진왜란 중에는 전투의 무대이기도 했지만, 문화가 교류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왜성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諸大名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성한 일본식 산성을 말하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소강기에 두 차례 한반도의 남해안에 축조되었다. 먼저 일본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왜성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전황 분석을 통해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鈴木圓二가 加藤淸正의 울산 농성과 명 군 격파의 배경에 대해 분석하였으며, 이후 조선 각지에서 이루어진 전쟁에 대한 분석이 진전되면서 왜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후 풍신정권에 대한 연구가 고조됨에 따라 왜성 연구가 진전되었는데, 李進熙는 진주, 웅 천, 울산, 순천 등에 현존하는 왜성터를 실제 둘러보고 조선 측의 군사거점 과 함께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였다.105)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戰國 시 기에서 織豊期에 걸친 성곽의 구조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확실하게 건 축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임진왜란 시기의 왜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즉 한반도 남부에 산재하는 왜성은 豊臣期의 일본식 성곽이 그대로 적용된 것인데, 일본에서 최신 성곽 연구의 진전을 이끌어 낸 繩張圖 수법에 의해 103) 한문종, 임진왜란시의 降倭將 金忠善과 慕夏堂文集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4, ) 노성환, ꡔ일본에 남은 임진왜란ꡕ, 제이앤씨, 2011 ; ꡔ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ꡕ, 민속원, ) 李進熙, 倭館 倭城を步く ꡔ季刊三千里ꡕ 30, 三千里社, 1982.

31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31 왜성 경관의 개요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일본에서 왜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짐에 따라 1997년부터 왜 성에 관한 전문 잡지 ꡔ倭城硏究ꡕ가 간행되었다. 이에 따라 왜성이 문헌사, 고고학, 건축학 등 학제적인 시각에서 연구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黑田慶一 은 大阪의 성곽사간담회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거제도, 순천, 부산, 서생포, 김해 죽도, 남해, 안골포, 옹천 등의 왜성을 연구하였으며, 遺構와 유물 조 사를 통해 당시 왜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106)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일본군의 전략적 배치, 수비군의 규모와 지휘자, 성곽 자체의 구조 라는 세 가지 논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나아가 왜성과 조선 민중이 접촉하 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는 최근에 조선 측의 사료를 이용한 연구 성과가 발 표되고 있다. 한편 왜성의 현황 파악을 중심으로 자료를 소개한 ꡔ倭城 Ⅰꡕ과107) ꡔ倭 城の硏究ꡕ가108) 발간되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한반도 남해안에 분포 한 왜성들의 연구에 대한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조사의 대부분이 왜성의 본성보다는 지성부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여서 왜성의 구조 파악 과 해석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성곽과 한국성곽의 상호 비교 연구를 통하여 상호 축성 기술의 영향 및 전파 관계 등을 규명하기 위 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남해안의 왜성은 물론 임진ㆍ정유재란 전 후 내륙의 왜성 관련 유적지나 관방의 변화 양상까지 연구범위가 확대되고 있다.109) 이러한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서 석축 성곽은 근세 초기인 織豊期 를 중심으로 전통 석축 성곽의 축조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 때에 축조된 한국 남해안의 왜성은 일본 성곽 축조에 있어 전통기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었다. 106) 黑田慶一, 西生浦倭城の特輯にあたって ꡔ倭城の硏究ꡕ 5, 高田徹, 熊川倭城の縄張り ꡔ倭城の硏究ꡕ 5, ) 倭城址硏究會, ꡔ倭城ꡕⅠ, ) 城郭談話會, ꡔ倭城の硏究ꡕⅠ~Ⅴ, 1979~ ) 黑田慶一 編, ꡔ韓國の倭城と壬辰倭亂ꡕ, 岩田書院, 太田秀春, ꡔ朝鮮 の役と日朝城郭史の硏究-異文化の遭遇ㆍ受容ㆍ變容-ꡕ, 淸文堂, 2006.

32 32 지역과 역사 38호 다음으로 한국에서 왜성 연구의 시작은 1961년 한일문화연구소의 ꡔ慶南 의 倭城址ꡕ가 출간되면서110) 시작되었다. 이 연구는 왜성을 현장조사 하고 실측한 최초의 국내 연구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왜성에 대한 연구가 지속 되면서 유재춘은 한반도 내부에 남아 있는 일본 성곽과 한국의 읍성과의 비 교연구를 통해서 임진왜란 시기에 왜성이 남긴 영향을 밝혔다.111) 한편 나 동욱은 부산왜성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축성을 개시한 왜성이었으며, 임진ㆍ 정유재란에 있어서 본국과 최전선을 이어주는 병참보급기지로서 자성대왜 성과 함께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왜성으로 평가받고 있다고112) 파악하였다. 이처럼 왜성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하면서 연구 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왜성 연구는 일본 측 사료 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매우 정밀하게 행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 측 사료를 충분히 참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왜성에 대한 본 격적인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아울러 왜성 자체뿐만 아니라 왜성이 문화교 섭의 무대였다는 시각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왜성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교류와 문화전파의 공간이었음을 주목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Ⅳ. 전쟁의 성격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에서 다양하게 불려왔다. 무엇보다도 전쟁을 올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 때문에 임진왜란 110) 부산대학교 韓日文化硏究所, ꡔ慶南의 倭城址ꡕ, ) 유재춘, ꡔ近世 韓日城郭의 比較硏究ꡕ, 국학자료원, ) 나동욱, 부산왜성에 대한 고찰 ꡔ博物館硏究論集ꡕ 19, 2013 ; 임진ㆍ정유 재란 전후의 조선성과 일본성의 상호이용에 관하여 ꡔ박물관연구논집ꡕ 13, 2009 ; 남해안지역 왜성의 竪石垣에 관한 연구 ꡔ靑村論叢ꡕ 9, 2008.

33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33 에 대해 한ㆍ중ㆍ일에서 공통된 용어가 사용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것이 임진왜란 연구에서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먼저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초기에 朝鮮陣과 高麗陣 등으로 불렀지만, 幕末~明治 초기부터 朝鮮征伐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 한 일합방 에 의해 조선인을 동포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朝鮮征伐이란 표현을 지양하고, 제1차 출병(1592~93년)을 文祿의 役, 제2차 출병을 慶長의 役 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을 文祿ㆍ慶長의 役이라 부르게 되었다.113) 최근에는 朝鮮侵略이라 부르면서 일반화되고 있지만,114) 임진왜란과 정유재 란을 1ㆍ2차 出進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한국에서는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으로 부르는데,115) 전체를 아 울러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조선후기의 ꡔ燃藜室記述ꡕ 에서 처음으로 壬辰倭亂이라는 목차를 설정ㆍ사용하였으며, 한말 교과서에 서는 壬辰亂으로 표현하였는데, 김성칠의 ꡔ조선역사ꡕ에서 임진왜란이라 사 용하여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116) 한다.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 쟁으로 부르며, 임진왜란은 일본 침략자로부터 조국의 안전을 지켜낸 정의 의 조국방위전쟁이라고117) 평가한다. 그런데 전쟁의 성격은 전쟁의 명칭과 연관되어 있다고118) 볼 수 있다. 이 에 임진왜란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 생각한다. 첫째, 임진왜란은 국제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약탈적 성격을 띤 국가적 규모의 왜구의 침입으로 보면 壬辰倭亂이나 壬辰倭禍가 적당하다. 그러나 113) 石原道博, ꡔ文祿慶長の役ꡕ, 塙書房, ) 北島万次, ꡔ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役ꡕ, 校倉書房, ) 중국에서는 壬辰倭禍, 萬曆遠征, 援朝抗倭, 萬曆東援之役, 萬曆朝鮮役, 萬曆 日本役이라 부르면서 조선을 원조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16) 정구복,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ꡔ임진왜란과 한일관계ꡕ, 경인문화사, )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ꡔ조선통사ꡕ 하, ) 김기봉, 1592년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문명사적 관점에서의 성찰- ꡔ한 국사학사학보ꡕ 25, 2012.

34 34 지역과 역사 38호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보면 왜란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임진왜란 은 일본이 계획적이고 불법적으로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이며, 동아시아 삼 국이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싸운 국제전쟁이었다.119) 아울러 임진왜란은 16세기 최대의 국제전이었는데, 전쟁을 통해서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교 섭,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여러 측면에서 교류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장기간의 임진왜란에는 조선, 명, 일본군 외에도 태국, 유구국, 스페 인, 포르투칼인이 참여한 국제전이었으며, 참전한 군사의 규모에서도 세계 사적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이자 문화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전쟁으로 10만 명의 조선인이 포르투갈과 일본인 노예상인에게 끌려가 일부는 전쟁 뒤의 일본 복구에 혹사당하고, 대부분은 세계 곳곳에 노예로 팔려갔다. 1992년 에 이탈리아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의 후예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당시에 잡혀갔던 포로 명단이 남아 있다. 한편 임진왜란을 문화약탈이라는 점에서 바라보면,120) 대표적으로 조선의 도공을 잡아가고 도자기를 약탈해 갔기 때 문에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른다.121) 고려 후기부터 왜관을 중심으로 우수한 조선 문화를 경험했던 일본은 조선 문화를 본국으로 직접 가져가고자 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이 특수 임무를 띤 도서부ㆍ포로부 등 여섯 부를 두어 조선 문물을 약탈하였음을122) 고려해서 임진왜란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 임진왜란은 해양을 통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은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 국가적인 차원의 해양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많은 문화충돌이 일어났으며, 문화변동도 발생했다. 한마디로 임진왜란은 해역 세력 대 육역 세력의 대립이었으며, 해역을 통한 문화교섭이 진행된 시기였 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해양을 건너서 침략한 전쟁이었지만, 임진왜란이라 119) 120) 121) 122) 하우봉,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서의 임진전쟁,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9, 김강식,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ꡔ한국사와 한국인ꡕ, 선인, 국립진주박물관, ꡔ임진왜란ꡕ, 이원순, 왜란과 朝鮮俘虜 ꡔ조선시대 史論集-안과 밖의 만남-ꡕ, 느티나무, 이미숙, ꡔ400년 전의 도자기 전쟁-임진왜란과 조선사기장-ꡕ, 명경사, 2013.

35 壬辰倭亂을바라보는한국과일본의시각 35 는전쟁을계기로문화교섭이촉진된면이있다. 123) 전쟁을통하여조선과일본은많은인적ㆍ물적인교섭이있었다. 이제조선시대를해양사관의입장에서도바라볼수있어야한다. 124) 임진왜란때일본군은육전에서는승승장구했지만해전에서는거의참패를면하지못하였다. 이런점에서는해양국가일본의한계를드러낸전쟁이었다. 총체적으로임진왜란이라는전쟁의결과는승리한국가도패배한국가도없는전쟁이되었다. 전쟁은방화, 파괴, 질병등엄청난피해를조선에남겼다. 그러나문화교섭이라는입장에서보면임진왜란은많은부분을한꺼번에해결한기회를제공하였다. 대표적으로조총, 고추등새로운문화가전파되어조선으로들어왔다. 아울러서양의동아시아진출로서양의문화가동양의문화에영향을미치게되었는데, 일본은적극적으로서양문화를받아들이는등문화교섭의기회를이용하였다. 이에전쟁으로인한문화전파에대한연구가필요하다. 넷째, 임진왜란은체제를강화시켜준전쟁이었다. 16세기후반에발발했던임진왜란은조선왕조의체제를붕괴시키고, 전쟁터였던조선에많은피해를남긴충격적인전쟁이었다. 그렇지만전쟁이후에명나라와일본에서는정권교체가이루어졌지만, 가장많이피해를입었던조선왕조는지속되었다. 이렇게조선왕조가지속될수있었던요인으로는여러가지를지적할수있지만, 무엇보다도통치이념이었던성리학과이런토대위에서전개된붕당정치의전개과정에서찾을수있다. 때문에임진왜란이끝난후조선왕조는통치체제의안정을위한여러대책을강구할수있었다. 즉통치체제의안정을위해서는통치이념을강화할수있는여러방안과정책들이시행되었다. 그가운데대표적인것이국가차원에서임진왜란을기억하고추인하는절차였다. 이를위한국가의노력은선조후반대에시작되어조선왕조의말기까지일관성을가지고지속적으로펼쳐졌다. 이런측면에서조선은조선후기에임진왜란을계속강조하면서체제유 123) 김강식, ꡔ 문화교섭으로본임진왜란 ꡕ, 선인, ) 하우봉, 해양사관에서본조선시대의재조명 - 동남아시아국가와의교류를중심으로 - ꡔ 일본사상 ꡕ 10, 2006.

36 36 지역과 역사 38호 지에 이용하였는데, 최근에 전쟁의 기억이란 측면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다. 우선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이 선조 후반 공신 선정을 통한 임진왜란 초기 기억의 형성과 17세기 이후 의병 중심의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과 의미를 전 반적으로 밝힌 연구,125)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한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과 서사화 절차가 갖는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살핀 연구,126) 임진왜란 이후 특 정 지역에서 임진왜란 순절자에 대한 기억 작업과 임진 유적에 대한 기념화 작업의 의미를 살핀 연구,127) 임진왜란 관련 그림을 통해서 기억의 대상과 기억 이미지가 주는 의미를 살핀 연구가128)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피해를 남긴 전쟁의 기억은 오랜 지속성을 지니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전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형태의 전쟁 기억을 재생해 낸다. 그리고 전 쟁 활동에 대한 평가는 해당 인물의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미치며, 당대뿐 만 아니라 인물과 정치세력의 변동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전쟁의 기억을 이용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렇게 보면 임진왜란이 남긴 영향은 조선을 유지시킨 최대의 공신 역할을 했다고 보여지며, 이런 연구들은 전쟁의 영향을 새로운 차원에서 파악했다 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125) 노영구, 공신 선정과 전쟁 평가를 통한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 ꡔ역사와현실ꡕ 51,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 ꡔ지역과 역사ꡕ 31, ) 정두희 외, ꡔ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ꡕ, 휴머니스트, 2007(정두희, 이순 신에 대한 기억의 역사와 역사화-4백 년간 이어진 이순신 담론의 계보학. 김 자현, 임진왜란 과 기생 의 기억-한국전쟁 이후의 논개 에 대한 상상과 전 유-. 하영휘, 화왕산성의 기억-신화가 된 의병사의 재조명 ). 정호훈, 임진 왜란과 17세기 조선 사회의 기억-元豪의 戰功과 조선 사회의 褒獎을 중심으로- ꡔ歷史와 實學ꡕ 39, 오인택, 조선후기 忠烈公 宋象賢 敍事 의 사회문 화적 성격 ꡔ역사와 세계ꡕ 41, ) 변광석,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사의 동래지역 인식과 기억사업 ꡔ지역과 역사ꡕ 26, ) 손승철,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ꡕ, 동북아역사재단, 경인문화사, 이현주, 기억 이 미지로서의 동래지역 임진전란도-1834년작 변곤의 <동래부순절도>와 이시눌 의 <임진전란도>를 중심으로- ꡔ한국민족문화ꡕ 37, 2010.

37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37 앞으로의 연구 방향 이상과 같은 일본과 한국에서의 임진왜란에 대해 전쟁사의 전개라는 측 면에서 검토한 연구사를 토대로 하여 앞으로의 임진왜란 연구에서 두 나라 가 지향하며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 다. 이 문제는 연구자에 따라 다른 문제이며 시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 적으로 지금까지 연구에서 전쟁에 대해 구조적인 면을 많이 다룬 일본의 연 구, 정신사적 면에 보다 집중한 한국의 연구 시각이나 주제들을 상호 융합 하면 좋은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지금까지 상호 충돌하던 문제에 대한 극복도 가능할 것이다. 첫째, 국제전의 시각과 대외관계사와의 연계이다. 임진왜란은 전투 상황 이나 국내문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129) 이에 임진왜란이 발생한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을 주목하고,130)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임진왜란을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해야 한다.131) 이를 위 해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전제되어 동남아시아 참전 등을 살펴야 한다. 이를 토대로 대명외교의례의 관점에서 조선, 유구, 일본의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을 다루어야 한다.132) 나아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실리보 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국제질서에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강조하는 국제질서 로의 이행과정을 파악해 새로이 형성되는 동아시아 질서의 특징을 임진왜란 129) 최영희 외, ꡔ임진왜란의 재조명ꡕ, 국사편찬위원회, ) 한일문화교류기금 동북아역사재단 편,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ꡕ, 경 인문화사, ) 堀新,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ꡕ, 경인문화사, 桑野榮治, 동아시아 세계와 文祿慶長의 役 ꡔ제2기 한일 역사공동연구보고서ꡕ 제3권, ) 계승범, 임진왜란 중 조명관계의 실상과 조공책봉관계의 본질 ꡔ한국사학사 학보ꡕ 26, 2012.

38 38 지역과 역사 38호 을 통해서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고133) 본다. 둘째, 국가 차원의 구조적 시각이다. 전쟁 수행에서 병참과 군량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임진왜란 연구에서 일본 측의 군량 공급 제도에 대해서는 藏入地와 수송체계에 대한 연구가 다수 있지만, 조선군과 명군의 군량 조달 공급 제도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명군의 주둔, 파병 문 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쌀 가격과 시장 유통의 문제 등은 조선 사 회를 파악하기 위한 단서일 뿐만 아니라 군량 조달 제도의 해명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제이다.134) 아울러 피로인의 실태와 송환제도도 국가 구조적인 차원에서 연구가 필요하며, 피로인의 본국 송환 이후에 대한 개별사례 연구 가 필요하다. 이에 피로인 송환제도, 피로인과 포로의 실태를 다각도로 검 증할 필요가 있다. 셋째, 시대의 구분과 설정에 대한 입장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전기의 군사 제도가 무너지고, 조선후기적인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임진왜란을 전쟁사라는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사회의 변화에 적용해야 한다. 조 선시대의 구분에는 크게 조선시대 자체의 변화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 는 입장과 전기ㆍ중기ㆍ후기로 나누어 보는 입장이 있다.135) 무엇보다도 이를 임진왜란과 연계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조선시대를 대외관계사라는 큰 시각에서 조선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전개했지만, 16세기 이후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하지 못하고, 명분 위주의 외교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시기적으로 변화한 동아시아 국제관계 에 대한 구조적인 파악을 시도하여, 일관된 체계 속에서 대외관계사와 연계 시켜야 한다. 아울러 조선전기의 대일 인식의 변화 계기와 중요한 분쟁이었 던 倭變을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변화상을 밝히고, 이것이 임진왜란으로 133) 이계황, 임진왜란과 동아시아-국교 재개 교섭기를 중심으로- ꡔ하나의 역사, 두 가지 생각, 한일역사의 쟁점 2010ꡕ, 경인문화사, ) 桑野榮治, 앞의 논문, ) 김성우, 조선사회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시기구분 ꡔ역사와현실ꡕ 18, 1995.

39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39 이어지는 흐름을 구조적으로 밝혀야 한다. 나아가 동아시아 국제질서, 특히 冊封體制에 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豊臣政權 이후의 국가를 프로토 국민국가, 주권국가로 평가하여 종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벗 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독립을 지향하는 중ㆍ근세 이행기 의 일본 사회와 명나라가 주도하는 책봉체제가 어느 정도 저촉ㆍ모순되는 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136) 특히 전쟁 중의 강화협상에서 책봉 과 조공을 豊臣政權은 감수했으며, 책봉관계의 해소가 바로 자립을 의미했 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명대의 책봉체제와 책봉관계 실태에 대해 아직까 지도 막연하게 파악되고 있으며, 전쟁 전후의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일본 의 근세를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규정할 필요가 있다. 넷째, 전쟁에 대한 각국의 인식과 객관화 문제이다. 지금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각국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평화의 관점과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임진왜란에 대한 一國史의 시각에서 타자 없는 관계사로 시종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무엇보다도 명과 일본 측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연구를 하고, 한국의 지방 사료를 발굴하고 객관화해서 이용해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實記와 遺稿 등을 비판적으로 이용해야 하는데, 특정 인물에 대 한 지역별 연구에 기인한 과장과 문중 향토사학적 성격의 연구에서 벗어나 야 한다. 이 부분은 일본 측의 자료 이용할 때도 전쟁 기록이 가지는 전승적 이며 과장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전문 연구자의 양성과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 다행히 최근 새로운 신진 연구자의 등장이 있으며,137) 기존 연구와는 다른 성과가 이순 136) 노영구, 征韓偉略 에 나타난 일본의 임진왜란 海戰 이해 ꡔ이순신연구 논총ꡕ 22, 국립진주박물관, ꡔ루이스 프로이스, 임진난의 기록-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ꡕ, 살림, 김시덕, ꡔ그림이 된 임진왜란-근세 일본 고문헌의 삽화로 보는 7년 전쟁-ꡕ, 학고재, 윤인식, ꡔ역사추적 임 진왜란-임진왜란 한국 일본 기록 비교-ꡕ, 북랩, 김시덕, ꡔ그들이 본 임 진왜란-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와 전쟁의 기억-ꡕ, 학고재, ) 최재호, 남명학파의 임진왜란 戰爭實記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40 40 지역과 역사 38호 신의 경우에도 자료 발굴을 통해서 새로운 성과가138) 나타나고 있다. 그러 나 최근에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많은 것은 일반연구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진 결과이며,139) 다른 시대 전공자들의 참여도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전문연구자의 부족으로 만족할 만한 심층적인 성과가 뒷받침되지 못하자, 다른 시대와 주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곁가지를 치 는 경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런 연구에서는 심층적인 연구 결과를 찾 기 어렵다. 아울러 특정 인물 중심 연구가 집중되는 모습도 여전하다. 이순 신, 유성룡, 권율, 원균, 유정 등 대표적인 인물 중심으로 연구가 집중되고 있음은140) 극복해야 할 시급한 문제다. 그렇지만 2005년의 한일역사공동연구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에서 임진왜 란을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지속적인 교류와 연구를 통해 서 임진왜란을 보는 시각을 조합해 나갈 수 있는 기대와 토대가 마련되었으 며, 앞으로 지속적인 학문 교류를 통해서 두 나라의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가 공감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許太 榕, 朝鮮後期 中華繼承意識의 展開와 北方古代史認識의 强化,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미선,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 연구, 전남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최두환, 임진왜란 시기 朝明聯合軍 연구, 경상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임익순, 統制師 李舜臣과 元均의 指揮ㆍ統率에 대한 軍事史學的 比較硏究,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제장명, 정유 재란 시기 해전과 조선 수군 운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민웅,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몇 가지 인식문제 고찰-가계, 관력, 역사적 평 가를 중심으로- ꡔ역사와 경계ꡕ 77, ) 권오상, ꡔ바로 보는 한 토막 임진전쟁ꡕ, 삼진기획, 김영헌, ꡔ김덕령 평 전ꡕ, 향지사, 노성환, ꡔ일본에 남은 임진왜란ꡕ, 제이앤씨, 양광식 편저, ꡔ울돌목 승리, 김억추 장군ꡕ, 강진군문화재연구소, 김영헌, ꡔ권 율과 전라도 사람들-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다ꡕ, 심미안, 이덕일, ꡔ설득과 통합의 리더-유성룡-ꡕ, 역사의아침, 도현신, ꡔ원균과 이순신ꡕ, 비봉출판사, 장석규 편저, ꡔ장만장군ꡕ, 기창, ) 이장희 외, ꡔ임진왜란과 권율장군ꡕ, 전쟁기념관, 김인호, ꡔ칠천량의 백 파-원균이야기ꡕ, 경인문화사, 2015.

41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41 참고문헌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 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계승범, 임진왜란 중 조명관계의 실상과 조공책봉관계의 본질 ꡔ한국사학사학보ꡕ 26,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ꡔ임진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가치ꡕ, 선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ꡔ임진왜란사ꡕ,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 ꡔ지역과 역사ꡕ 31, 김강식, ꡔ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ꡕ, 선인,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기봉, 1592년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문명사적 관점에서의 성찰- ꡔ한국사학 사학보ꡕ 25, 김문자, 16~17세기 朝日 관계에 있어서 被虜人 귀환 ꡔ상명사학ꡕ 8ㆍ9, 김문자, 임란시 항왜문제 ꡔ임진왜란과 한일관계ꡕ, 경인문화사, 김문자, 임진왜란기의 조일관계 ꡔ동아시아세계와 임진왜란ꡕ, 경인문화사, 金錫禧, 郭再祐의 起兵과 社會的 基盤 ꡔ忘憂堂郭再祐硏究ꡕ 2, 忘憂堂紀念事業會, 김옥희, 임란 때 납치된 조선여인들의 일본에서의 순교와 신앙생활 ꡔ사학연구ꡕ 36, 羅東旭, 임진ㆍ정유재란 전후의 조선성과 일본성의 상호이용에 관하여 ꡔ박물관연 구논집ꡕ 13, 나동욱, 부산왜성에 대한 고찰 ꡔ博物館硏究論集ꡕ 19, 노성환, ꡔ일본에 남은 임진왜란ꡕ, 제이앤씨, 노성환, ꡔ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ꡕ, 민속원, 노영구, 공신 선정과 전쟁 평가를 통한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 ꡔ역사와현실ꡕ 51, 노영구, 임진왜란의 학설사적 검토 ꡔ동아시아세계와 임진왜란ꡕ, 경인문화사, 노영구, 征韓偉略 에 나타난 일본의 임진왜란 海戰 이해 ꡔ이순신연구논총ꡕ 22, 민덕기, 조선후기의 회고와 전망 ꡔ한일관계사연구의 회고와 전망ꡕ, 국학자료원, 민덕기,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귀환과 잔류로의 길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0, 2004.

42 42 지역과 역사 38호 박수철, 15ㆍ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역사학회 엮음, ꡔ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ꡕ, 일조각, 박재광,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화약병기에 대한 일고찰 ꡔ군사ꡕ 30, 박재광, 임진왜란기 朝ㆍ明ㆍ日 삼국의 무기체계와 교류-火藥兵器를 중심으로- ꡔ軍史ꡕ 51, 박재광,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ꡔ임진왜란과 한일관계ꡕ, 경인문화사, 변광석,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사의 동래지역 인식과 기억사업 ꡔ지역과 역사ꡕ 26, 부산대학교 韓日文化硏究所 편, ꡔ慶南의 倭城址ꡕ,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편저, ꡔ임란의병사의 재조명ꡕ,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ㆍ 안동시, 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 ꡔ壬辰亂文獻目錄(ⅠㆍⅡ)ꡕ, 社團法人 壬辰亂精 神文化宣揚會,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ꡔ조선통사ꡕ 하, 오인택, 조선후기 忠烈公 宋象賢 敍事 의 사회문화적 성격 ꡔ역사와 세계ꡕ 41, 오종록, 壬辰倭亂~丙子胡亂時期 軍事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ꡔ軍事ꡕ 38, 劉九成, 壬亂時 明兵의 來援考 ꡔ史叢ꡕ 20, 유승주, 조선후기 군수광공업의 발전-조총 문제를 중심으로- ꡔ사학지ꡕ 3, 이계황, 임진왜란과 동아시아-국교 재개 교섭기를 중심으로- ꡔ하나의 역사, 두 가 지 생각, 한일역사의 쟁점ꡕ, 경인문화사, 이민웅, ꡔ임진왜란 해전사ꡕ, 청어람미디어, 이민웅,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몇 가지 인식문제 고찰-가계, 관력, 역사적 평가를 중 심으로- ꡔ역사와 경계ꡕ 77, 이석린, ꡔ임진왜란과 청주 의병ꡕ, 서경문화사, 이원순, 왜란과 朝鮮俘虜 ꡔ조선시대 史論集-안과 밖의 만남-ꡕ, 느티나무, 李章熙, 壬辰倭亂中 民間叛亂에 대하여 ꡔ鄕土서울ꡕ 32, 이장희, 임란시 투항왜병 ꡔ한국사연구ꡕ 6, 李章熙, 壬辰倭亂 ꡔ韓國史論ꡕ 4, 李章熙, ꡔ郭再祐硏究ꡕ, 양영각, 李泰鎭, 壬辰倭亂 극복의 社會的 動力-士林의 義兵活動의 基底를 중심으로- ꡔ韓 國史學ꡕ 5, 이현수, 제4장 조선후기 외침과 국방체제 제1절 조선-일본 전쟁(임진왜란ㆍ정유재 란), 육군군사연구소 편, ꡔ한국군사사ꡕ 개설, 경인문화사, 2012.

43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43 이형석, ꡔ임진왜란사ꡕ(상ㆍ중ㆍ하),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정두희ㆍ이경순, ꡔ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ꡕ, 휴머니스트, 鄭震英, 壬亂前後 尙州地方 士族의 動向 ꡔ民族文化論叢ꡕ 8, 정호훈, 임진왜란과 17세기 조선 사회의 기억-元豪의 戰功과 조선 사회의 褒獎을 중심으로- ꡔ歷史와 實學ꡕ 39,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降倭의 留置와 활용 ꡔ역사와 세계ꡕ 32, 제장명, 정유재란 시기 해전과 조선 수군 운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趙湲來, ꡔ壬亂義兵將 金千鎰硏究ꡕ, 학문사,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추이와 과제 ꡔ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ꡕ, 창작 과비평사, 최석남, ꡔ한국수군사연구ꡕ, 명양사, 최석남, ꡔ한국수군활동사ꡕ, 명양사, 崔永禧, ꡔ壬辰倭亂中의 社會動態ꡕ, 한국연구원, 최영희 외, ꡔ임진왜란의 재조명ꡕ, 국사편찬위원회, 하우봉, 해양사관에서 본 조선시대의 재조명-동남아시아국가와의 교류를 중심으로- ꡔ일본사상ꡕ 10, 하우봉, 임란 직후 조선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 동ꡕ, 경인문화사, 하우봉,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서의 임진전쟁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9, 한문종, 임진왜란시의 降倭將 金忠善과 慕夏堂文集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4, 한일관계사연구회논집 편찬위원회 편, ꡔ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ꡕ, 경인문화사, 한일문화교류기금 동북아역사재단 편, ꡔ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ꡕ, 경인문화 사, 허남린, ꡔ조선시대 속의 일본ꡕ, 경인문화사, 허선도, 壬辰倭亂論에 있어서 이충무공의 승첩-그 전략적 전술적 의의를 중심으로- ꡔ한국학논총ꡕ 3, 許善道, 壬辰倭亂의 克服과 嶺右義兵-그 戰略的 意義를 中心으로- ꡔ晉州文化ꡕ 4, 허선도, 壬辰倭亂論-올바르고 새로운 認識- ꡔ千寬宇先生 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ꡕ, 貫井正之, 豊臣秀吉の朝鮮侵略戰爭における朝鮮人民の動向について-特に朝鮮義 兵を中心にして- ꡔ朝鮮史硏究會月報ꡕ 23, 貫井正之, 壬辰倭亂における義兵活動と民衆反亂 ꡔ朝鮮史硏究會論文集ꡕ 16, 1989.

44 44 지역과 역사 38호 貫井正之, 降倭論 ꡔ豊臣政權の海外侵略と朝鮮義兵硏究ꡕ, 靑木書店, 吉岡新一, 文祿ㆍ慶長の役における火器についての硏究 ꡔ朝鮮學報ꡕ 108, 內藤雋輔, ꡔ文祿ㆍ慶長の役におけゐ被虜人の硏究ꡕ, 東京大出版會, 米谷均, 近世日本關係におけゐ戰爭捕虜の送還 ꡔ歷史評論ꡕ 592, 米谷均, 17세기 日ㆍ朝 관계에서의 피로인의 송환-惟政의 在日 쇄환활동을 중심으 로- ꡔ사명당 유정ꡕ, 지식산업사, 北島万次, 豊臣政權の軍役體系と島津氏, 北島正元 編, ꡔ幕藩制國家成立過程の 硏究ꡕ, 吉川弘文館, 北島万次, ꡔ朝鮮日々記ㆍ高麗日記-秀吉の朝鮮侵略とその歷史的告發-ꡕ, 株式會社 そしえて, 北島万次, 豊臣政權の朝鮮侵略に關する學說史的檢討 ꡔ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 鮮侵掠ꡕ, 校倉書房, 北島万次, ꡔ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役ꡕ, 校倉書房, 北島万次, ꡔ豊臣秀吉の朝鮮侵略ꡕ, 吉川弘文館, 山口正之, 朝鮮におけゐ被虜人の行方 ꡔ靑丘學叢ꡕ 8, 三鬼淸一郞, 朝鮮役における軍役體系について ꡔ史學雜誌ꡕ 75-2, 石原道博, ꡔ文祿慶長の役ꡕ, 塙書房, 城郭談話會, ꡔ倭城の硏究ꡕⅠ~Ⅴ, 1979~2002. 矢澤康祐, 壬辰倭亂 と朝鮮民衆のたたかい ꡔ人文學報ꡕ 118, 倭城址硏究會 編, ꡔ倭城-文祿慶長役における日本軍築城遺跡1-ꡕ, 倭城址硏究會, 有馬成甫, ꡔ朝鮮役水軍史ꡕ, 空と海社, 六反田豊 외 6인, 文祿慶長의 役(壬辰倭亂) ꡔ한일역사공동보고서ꡕ 제3권, 仲尾宏, 壬辰倭亂と降倭-沙也可 ꡔ朝鮮通信使と壬辰倭亂-日朝關係史論ꡕ, 明石書 店, 仲尾宏, 壬辰ㆍ丁酉倭亂の朝鮮人とその被虜定住ㆍ歸國 ꡔ朝鮮通信社と壬辰倭亂ꡕ, 明石書店, 中村榮孝, 朝鮮役の投降倭將金忠善-その文集と傳記の成立- ꡔ日鮮關係史の硏究ꡕ 中, 吉川弘文館, 中村榮孝, ꡔ日鮮關係史の硏究ꡕ 上~下, 吉川弘文館, 中村質, 朝鮮の役と九州 ꡔ九州史學ꡕ 33ㆍ34, 池內宏, ꡔ文祿慶長の役ꡕ 正編 第一, 南滿洲鐵道, 1914(1987年 吉川弘文館 復刊) 池內宏, ꡔ文祿慶長の役ꡕ 別編 第一, 東洋文庫, 參謀本部, ꡔ日本戰史 朝鮮役ꡕ, 偕行社, 崔書勉, 壬辰ㆍ丁酉七年戰役の被虜たち ꡔ韓日文化の後榮ꡕ, 韓國資料硏究所(日

45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45 本), 太田秀春, ꡔ朝鮮の役と日朝城郭史の硏究-異文化の遭遇ㆍ受容ㆍ變容-ꡕ, 淸文堂, 平井鏗次郞, 文祿役の我が工芸に及ばせゐ影響, 史學會, 鶴園裕, ꡔ日本近世初期における渡來朝鮮人硏究ꡕ, 黑田慶一, 西生浦倭城の特輯にあたって ꡔ倭城の硏究ꡕ 5, 黑田慶一 編, ꡔ韓國の倭城と壬辰倭亂ꡕ, 岩田書院,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46 46 지역과역사 38 호 Abstract Korea and Japan Views of Imjin War Kim, Kang-Sik Studies on the Imjin Wa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conducted in both Korea and Japan have made progress in many aspects, but the hard truth is the two countries have different perspectives on the same historic event. The Imjin War can be studied by the name, characteristics, causes, developments and effects from a perspective of war history. Japan's studies of the war have been focused on a systematic perspective including the era, structure of state and systems, transportation of provisions for the army and repatriation of prisoners. Korea's studies of the war, on the other hand, have been focused on a mental perspective such as how to overcome the war, roles of army raised in the name of justice and key figures, and effects of the war on Korea. Taking into both of the two different perspectives account should be the way studies on the Imjin War are conducted. To this end, researching and studies on many aspects are required. These aspects should include the following; first, the war should be looked into from East Asia's perspective to understand that the warcaused conflicts of cultures and brought changes as well as it took place when cultures were exchanged through the seas. Second, objective terms need to be defined for the studies depending on the view of whether to see it as an invasion of Japanese raiders or a war between two countries. Third, the studies should be carried out jointly and avoid nationalistic views. Furthermore, both counties' archives of the war need to be

47 壬辰倭亂을바라보는한국과일본의시각 47 exchanged for comparative studies and Korea's historical records should be searched for and interpreted objectively. Keywords : The Imjin War, A Systematic Perspective, A Mental Perspective, East Asia's Perspective, The Nature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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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49 ꡔ지역과 역사ꡕ 38, , 49~103쪽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내재적 발전론과 소농사회론 141)염 정 섭** 머리말 Ⅰ.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과정 Ⅱ. 자본주의 맹아론의 비판적 검토 Ⅲ. 경영형 부농에 대한 실증적 비판 Ⅳ. 동아시아 小農社會論 비판 맺음말 : 내재적 발전론의 재정립 시론 국문초록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설명하는 주요한 입장으로 내재적 발전론과 소농사회론을 지 목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성격 규정과 발전 방향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그 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의 이해는 대체로 內在的 發展論에 입각한 것이었다. 내재적 발전 론의 핵심요소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17~19세기의 조선 사회에 자본가적 借地農, 즉 경영형 부농의 성립하고 성장하였다는 주장이다. 그 런데 자본주의맹아론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발전이 서양사의 역사발전단계론을 한국사 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점을 갖고 있다. 농업에서의 자본주의 등장이 세계사 에서도 영국에 국한된 현상이었다는 점도 자본주의 맹아론에 불리한 점이다. 경영형 부 농의 존재 유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실증의 측면에서 비판하 는 것이다. 경영형부농의 존재를 밝힌 양안의 성격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경영형부농 의 존재는 새로운 역사적 논증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역사적 존재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농사회론은 農民 대중의 자립적 농업경영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 이 논문은 2016년도 한림대학교 교비연구비(HRF )에 의하여 연구 되었음. ** 한림대 사학과 교수(yeobul@hallym.ac.kr).

50 50 지역과 역사 38호 야 가능하였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라 18세기 이후 1950년대까지 조선사회의 성격을 소농사회로 규정한다. 그런데 小農이 과연 조선 후기에 특별히 성숙된 것인지 의문이 다. 그리고 조선사회의 農法 변화에서 더욱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었던 것은 14세기 후 반 벼농사 연작법의 정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소농사회론은 일면적인 분석결과 의 혐의가 짙고 게다가 동아시아의 근대 에 대한 설명이 거의 不在하다는 점도 문제점 이다. 내재적발전론의 내용을 재정립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배체제의 변화를 파악하는 점이다. 주제어 :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경영형 부농, 소농사회론, 지배체제 머리말 한국사에서 특히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조선 후기 사회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무엇을 우 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갖추어야 하는 내 용은 무엇일까.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간주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내용을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조선 후기 사회 가 갖고 있는 주요한 특징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해답이어야 한다는 점이 다. 다름 아니라 조선 후기 대체로 17~19세기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조 선사회를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하게 지목해야 하는 특징을 제시하고 이를 설 명해달라는 아주 어려운 과제이다.1)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사회를 앞선 시기, 그리고 나중 시기와 연결시켜 1)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의 규정 문제는 장기간에 걸쳐 집중적인 연구 수행이 필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본 논문은 시론적인 성격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속으로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사료 분석, 해석을 중심으로 보다 실증적으로 검토하여 제시하 는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51 조선후기사회성격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 51 연속성을잃지않는관계속에서해명하는것을해답의내용에담아주기를요구하는것으로볼수있다. 우선조선전기, 그리고고려시대와조선후기사회를연속적으로이해하는데커다란난점이없어야하고, 또한이와더불어 19세기중후반이후의조선 ( 한국 ) 사회의변동과정을설명하는데에도충분한시사점을갖고있어야한다는요구이다. 조선후기사회성격을밝히는해답을제시하기위해필요한내용을위에서 2가지로나누어살펴보았지만, 사실이 2가지는따로떼어놓고논의하는것이거의불가능한성격의것이라고보지않을수없다. 다시말해서조선후기사회의주요한특징을당대와앞뒤시기에걸쳐연속적으로이해하는데에어려움을주지않고설명할수있다면굳이 2가지해답을따로제출할필요는없을것이다. 따라서조선후기사회성격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라는연구과제는조선후기사회를독립적이고또한연속적인차원에서검토하는작업그자체라고정리할수있을것이다. 한편조선후기사회성격에대한적절하고충실한설명을제시하기위해서는사회를구성하고있는제반요소에대한총체적이고구체적인검토작업이필수이라고생각된다. 조선후기사회성격을논의하는과제는분류사적인연구시각을감안하여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사상사등각분야의여러연구자들과연구성과들을모두포착하고살피는총체적인연구를통해서적절한해답을찾을수있을것이다. 달리말해서조선후기사회성격을논의하는과제는경제사를비롯한각분야사에서획득한조선후기사회의독립적인특징과연속적인속성에대한연구성과를다각도로검토하는과제라고할수있다. 조선후기사회성격에대하여천착한지금까지의연구성과들가운데주요한것을검토하면서본논문의문제의식과내용전개에대하여설명하려고한다. 그동안조선후기사회성격을살핀연구의주요한논점은 조선후기 가변동기, 또는해체기라는규정을전제로삼는것이었다. 그리하여대체로조선후기사회성격의변동, 사회구조의해체를거쳐새로운 근대사회로나아가는전환기 로조선후기를규정하고있었다. 그리하여조선후기

52 52 지역과 역사 38호 사회성격을 검토하는 연구 성과는 주로 사회성격의 변화, 사회구성체의 변 동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조선 후기 사회 성격에 대한 연구사적 추이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책 이 1987년에 근대사연구회가 펴낸 ꡔ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상ㆍ하ꡕ 이다.2) 이 책은 1980년대 후반까지 조선 후기 관련 연구 성과를 전체적으로 총망라하여 정리한 연구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근대사연구회는 1980년 대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사회변혁운동과 학술운동의 결합이라는 학계의 흐름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근대사연구회는 조선 후기에 관한 연 구논저를 광범위하게 정리하면서 연구활동의 의의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위 책에서 제시하였다. 이들은 학계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던 한국사회성격논쟁 에 주목하였고, 그리하여 현단계 변혁운동의 성격과 주체의 문제를 해명하 기 위해서는 근대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후기 사회의 해명이 필 요하다고 인식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3) ꡔ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ꡕ에서 근대사연구회는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와 변동에 대하여 중세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이루어진 조선후기사 연구 에 대하여 조선후기를 근대로의 전환기로 파악하고 조선사회 내부에서 이 루어졌던 발전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내는 한편, 이를 통해 과거 정체성론 자들의 주장을 불식시키고 한국사를 주체적이고 발전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4)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에서 조선 후기를 근 대로의 전환기로 자리매김하는 관점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를 근대로의 전환기로 파악하는 관점은 1960년대 이후 특히 金 容燮의 연구에서 원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김용섭은 조선후기 농업 사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를 수행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연구자들에 2) 近代史硏究會編, ꡔ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ꡕ 上ㆍ下, 한울, ) 배성준, 제4장 민중사학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역사학 비판의 관점에서, 역사문 제연구소, 민중사반 지음, ꡔ민중사를 다시 말한다ꡕ, 역사비평사, 2013, 108쪽. 4) 近代史硏究會編, 總論 ꡔ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ꡕ 上, 한울, 1987.

53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3 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이 수행한 한국근대농업사연구에 대하 여 中世的인 農業體制의 解體과정이 현실적으로 여하히 近代的인 農業體 制로 연결되었는가 5)라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연구작업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용섭이 한국근대 농업사를 탐구하던 연구시각이 바로 중세적(조선후기) 농업체제의 해체와 근대적 농업체제로의 연결 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 선 후기 사회를 바라보는 김용섭의 연구시각은 앞서 살펴본 근대사연구회에 서 제시하였던 1980년대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김용섭이 제시한 조선 후기 사회 성격에 대한 연구시각에 기반을 두고 또 한 그 영향 하에서 오랜 기간 동안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연구가 진행되었 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의의에 대한 최윤오의 다음 과 같은 언급에서 이러한 입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의 의의는 근대사회로의 연결통로를 마련하고 그것을 통해 오늘의 한국현실을 검토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때 초점 은 조선후기라는 변동기에 두어진다. 중세사회 변동과 해체양상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통해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다.6) 최윤오가 제시한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의의는 변동기로서의 성 격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조선 후기를 근대와의 통로라는 지 점에 한정하여 매어두는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김용섭과 근대사연구회, 그리고 최윤오의 언급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를 다루는 많은 연구가 공유하고 있던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연구자들도 같 이 공유하던 연구시각, 분석틀은 바로 내재적 발전론 이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후기사 연구에 관한 문제의식의 밑바탕에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 이 깔 5) 김용섭, 序 (1975년 초판) ꡔ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ꡕ 上, 一潮閣, 1988, 5쪽. 6) 최윤오,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와 근대-지주제와 소농경제를 중심으로 ꡔ역 사와 현실ꡕ 45, 2002, 39쪽.

54 54 지역과 역사 38호 려 있었던 것이다. 김인걸이 정리한 바와 같이 1990년대 이후 다수의 연구 사 정리들이 1960년대 70년대 역사 연구 일반을 민족주의 사학 의 발전 또 는 민족사학 의 전개 등과 같은 시각에서 정리하면서 그것이 內在的 發展 論 에 입각하고 있었다 7)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가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논하는 연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韓國史學의 주요한 흐름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내재적 발전론 에 입각한 조선 후기사 연구는 결 국 조선 후기 사회의 변동, 조선 후기 사회의 해체, 그리하여 근대적 체제로 의 전환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상을 각 분야사 연구에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거칠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 후기 사회성격의 변동, 사회구성체 이행,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 등으로 표현되는 주장들이 바로 내 재적 발전론의 문제의식, 연구시각을 공통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 된다. 내재적 발전론은 1960년대 이래 커다란 사학사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 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사학사적 위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 은 박찬승의 지적을 연구자들이 대체적으로 공감할 것으로 생각된다. 박찬 승은 한국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내재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60년대 이후 한국학계를 지배해온 이론은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 전론이란 식민주의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대두한 이론이 다. 즉 한국사는 타율에 의해 움직여 온 역사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내재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라는 것, 그리고 정체된 역사가 아니라 꾸준히 발전해온 역사라 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사에서 시작되어, 국문학, 한국철학 등 한국학 전반에 걸쳐 확대되어 한국학계의 통설 이 되었다. 8) 7) 김인걸, 1960ㆍ70년대 내재적 발전론 과 한국사학 ꡔ한국사 인식과 역사이론ꡕ (김용섭교수정년기념논총 1), 지식산업사, 1997, 114쪽. 8) 박찬승, 한국학 연구 패러다임을 둘러싼 논의-내재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ꡔ한 국학논집ꡕ 35, 2007, 74~75쪽.

55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5 박찬승의 정리를 여기에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터이지만, 내재적 발전 론을 정체된 역사가 아니라 꾸준히 발전해온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 이라고 제시한 부분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 재적 발전론의 주요한 핵심 요소 를 새로운 내용으로 채운다면 박찬승이 간 략하게 정리한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학계의 통설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박찬승을 비롯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내재적 발 전론에 대한 연구사적 정리와 비판적 검토를 수행하였고, 그에 따라 관련 연구 성과를 찾아볼 수 있다.9) 본 논문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과정과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요소 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10)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살피는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같이 검토해야 할 주장이 바로 小農社會論이다. 소농사회론이 제시하는 조선 후기 역사상 은 내재적 발전론의 그것과 일정 부분에서 공통적인 지점을 갖고 있다. 하 지만 소농사회론이 제시하는 역사상의 전체적인 흐름을 눈여겨본다면, 소농 사회론과 내재적 발전론이 전혀 다른 역사상을 제시하는 입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小農社會論에 따르면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農民 대중의 자립 적 농업경영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고 설명된다. 이에 따라 자립적 농업경영이 가능하였던 小農을 중심으로 18세기 이후 1950년대까 지 조선사회의 성격을 소농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소농사회론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내재적 발전론에서 제기하는 조선 후기 농촌사회에서의 양극분 해, 그리고 소농의 몰락이라는 상황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농민 9) 내재적 발전론을 사학사적으로 검토한 논문으로 다음과 같은 논문을 살펴볼 수 있다. 김인걸, 앞의 논문 이헌창,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 제점 ꡔ한국사 시민강좌ꡕ 40, 일조각, 박찬승, 앞의 논문, 김정인, 내재적 발전론과 민족주의 ꡔ역사와 현실ꡕ 77, ) 본 논문의 초고를 완성한 이후 시점에 권내현이 최근에 발표한 다음 논문을 참 고할 수 있었는데, 필자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권내현, 내재적 발전론과 조선후기사 인식 ꡔ역사비평ꡕ 2015년 여름호(통권 111호), 역사비평 사, 2015.

56 56 지역과역사 38 호 들의경작규모가양극으로분해되기는커녕위아래가모두아래쪽으로수렴하는하향평균화경향에있었다는것이다. 이러한경향은 20세기전반식민지기의농촌사회에서도마찬가지였고나아가서는 1950년대까지도그러하였다고설명하고있다. 11) 미야지마는소농사회론을동아시아역사의흐름과관련시켜설명한다. 그는동아시아에서유교사회가어떻게성립될수있었던가를사회구조상의변동에서찾아보려는문제의식을제기하였고, 그리하여주자학의성립과수용에적합한사회구조로 소농사회 를지목하였다. 12) 그에따르면소농사회는 자신의토지를소유하거나다른사람의토지를빌리거나간에기본적으로자신과그가족의노동력만으로독립적인농업경영을행하는소농의존재가지배적인농업사회 를가리킨다고한다. 그는계속해서동아시아를이러한소농사회로파악하는것은다른농업사회와비교되는특징 2가지를가지고있기때문이라고설명한다. 하나는중세와근세유럽에서전형적으로보이는영주층의대토지소유에기초를둔직영지경영이존재하지않는다는점이라고설명하고, 다른하나는농업노동자층즉스스로독립적인경영주체라고할수있는농업종사자층이거의존재하지않는다는점을지목한다. 미야지마의연구가동아시아사를전체적으로살펴보는관점을제기하고, 이를유럽농업사회의특징과비교하는점에서커다란의의가있지만중요한점은그의 소농사회 형성론이과연역사적사실로성립할수있는것인지, 조선후기를포함한당대의역사상의정곡을찌른것이었는지검토가필요하다는점이다. 본논문에서는소농사회론의문제점에대하여보다심층적으로검토할것이다. 내재적발전론과소농사회론에대한본격적인비판적검토로나아가기전에간략하게두입장을검토한연구성과가운데몇가지를살펴보고자한 11) 이영훈, 조선후기이래소농사회의전개와의의 ꡔ 역사와현실 ꡕ 45, 미야지마히로시, ꡔ 미야지마히로시, 나의한국사공부 - 새로운한국사의이해를찾아서 -ꡕ, 너머북스, ) 미야지마히로시, 동아시아소농사회의형성 ꡔ 인문과학연구 ꡕ 5, 1999, 138~ 139 쪽.

57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7 다. 내재적 발전론과 소농사회론이 과연 조선 후기 사회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 적절하고 명쾌한 이론인지 여부를 놓고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 가운데 이영호는 내재적 발전론을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내재적 발전론의 사학사적 의의를 살펴보고 있다.13) 그는 내재적 발전론의 개념에 대한 기왕의 이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광의의 내재적 발전론으로 식민주의사학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에 대한 反비판으로 서 타율이 아닌 내적 능력, 정체가 아닌 발전을 내용으로 한국역사를 재구 성하려 한, 1960~70년대의 민족주의사학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를 한국사의 (과학적) 체계화 를 목표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영호는 내재적 발전론의 다른 하나로 조선 후기 이래 사회경제의 내적 변화에서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경향을 지목한다. 이영호에 따르면 이러한 연구경향에서 이른바 자본주의맹아론 이 등장한다고 설명한 다. 이와 같이 이영호는 내재적 발전론이 형성된 계열을 한국사의 (과학적) 체계화 와 자본주의맹아론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내재적 발전론의 주요한 흐름으로 지목한 한국사의 (과학 적) 체계화 라는 계열은 외연이 너무 넓기 때문에 내포로 묶을 만한 것을 오 히려 찾아내기 어려운 그러한 개념화라는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사 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외면하고 도외시한 채 한국사를 연구한다고 스스로 자처할 만한 연구자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 이다. 사실 그러한 연구자는 종교적 믿음이나 비과학적 주술로 한국사를 연 구하는 경우에서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 연구의 많 은 흐름이 한국사의 (과학적) 체계화 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임이 확실하다 고 할 것이다. 이럴 경우 하나의 연구 경향으로 한국사의 (과학적) 체계화 라는 것을 하나의 연구경향, 연구계열로 자리매김하는 것의 의의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까지의 내재적 발전론 의 내용을 보다 분 명하게 규정하고,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재적 13) 이영호, 내재적 발전론 역사인식의 궤적과 전망 ꡔ한국사연구ꡕ 152, 2011, 240쪽.

58 58 지역과역사 38 호 발전론 이나아가야할방향, 내재적발전론 의구체화방략등을고민해야할것으로생각된다. 그리하여 내재적발전론 을새롭게탈바꿈시켜새로운연구방향과연구시각으로재정립하는것이필요하다고생각된다. 한편이헌창은내재적발전론을비판적으로검토하면서조선시대를바라보는 제3의시각 이라는것을주장하였다. 14) 그는 이글에서 제3의시각 이라고한것은사학사적으로조선사회정체론과내재적발전론에이은세번째의사론이라는의미뿐만아니라현재내재적발전론과그것을비판하고부정하는입장과는다른제3의시각이라는의미도가진다. 이러한시각은일제시대에대해서도제국주의수탈론과식민지근대화론과다른제3의시각으로연결될수있다. 라고설명하였다. 15) 그는 제3의시각의첫째특성은대립하는두시각을절충하고종합하려는것이다. 내재적발전론이조선사회정체론을극복하고발전적한국사상을제시한의의를가지나, 그것이조선시대발전상을과대평가하고사론으로서한계를가진다는비판론에일리가있다고생각한다. 그래서내재적발전론을전면부정한위에서의대안이아니라, 조선시대사의성취와한계를종합적으로파악하는역사인식이모색될필요가있다. 제3의시각은조선시대에근대화에필요한물이컵에많이차올랐다는점에서발전적인역사상을제시하지만, 자본주의내지근대경제로이행하기에는물이여전이많이부족하다는점에서내재적발전론에대한비판을수용한다 고주장하였다. 16) 이헌창의입론은조선시대의역사상을 근대화라는컵에필요한물 이라는기준으로평가한다는점에서근대주의적입장과동일한것이라고생각된 14) 이헌창, 조선시대를바라보는제 3 의시각 ꡔ 한국사연구 ꡕ 148, 2010, 117 쪽. 15) 이헌창, 위의논문, 118 쪽. 16) 한편이헌창은다른글에서최근자본주의맹아론에기초한실증적연구성과를수용하면서조선후기발전적역사상을승인하되, 다만그것이자생적근대화의가능성이있었던가라는문제의식을근대적경제성장을위한선행조건이어느정도충족되고있었는가라는방식으로시각을전환할것을제시하면서자본주의맹아론에대한대안을찾으려는입장을보여주고있다 ( 이헌창, 조선후기자본주의맹아론과그대안 ꡔ 한국사학사학보 ꡕ 17, 2008).

59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9 다.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의 여러 양상과 무관하게 근대화 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여부로 조선 후기 역사상을 재단하는 시각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각은 기본적으로는 내재적 발전론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재적 발전론과 조선사회정체론을 절충하고 종합하려 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각은 내재적 발전론에서 멀리 떨 어져 있다. 그의 입론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조선사회정체론에 대한 평가에서 찾을 수 있다. 사학사적으로 조선사회 정체론은 봉건제 결여론에서 출발하 는 것으로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는 한국의 경제적 발전단계를 일본의 후 지와라(藤原)시대(헤이안<784~1185> 후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후 쿠다는 자신이 견문한 한국의 경제적 발전단계를 自足經濟, 村落經濟의 단 계에 비정하고 즉 일본사와 한국사를 비교할 때, 재화의 유통면과 교환형태 에 있어서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일본에 봉건제도가 성립되기도 전인 고대사 회 말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정체성이론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학술적으로 합리화ㆍ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에서 나타난 것으 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도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 논하면 서 자율적ㆍ내재적 요건의 결여로 인하여 한국의 자본주의는 외세 세력(일 본)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강제된 것에 불과하다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한국 이 그러한 자본주의화의 과정을 밟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된 기본요인은, 바 로 당시의 한국의 사회ㆍ경제가 놓여있던 낙후된 정체상태와 직접 연결되 어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사회 정체론은 한국사에서 사회적ㆍ경제적 낙후성을 지적 하는 학문적인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중점이 있었다고 비판되고 있으며 실제로 아 예 역사적 실체가 없고,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주장이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여 砂上樓閣의 空論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재적 발전론과 절충 종합하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砂上樓閣의 空論을 쌓

60 60 지역과 역사 38호 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사회정체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절충 종합하려는 발상 자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두 입론은 서 있는 자리가 너무나 다르고, 따라서 두 입론을 절충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매우 엉성한 것에 불과할 것 이다. 모래위에 세운 누각에 다른 무엇을 덧씌운 듯 결국 모래가 무너지면 그 위의 누각이나 건축물을 모래 속으로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 가지의 결과를 빚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는 조선사회 정체론에 대한 그동안의 수많은 비판적 연구에도 불구 하고 근대화 라는 기준으로 다시 조선사회를 재단하는 연구시각에 의지할 경우 정체론적인 해석 이 부지불식 간에 재차 등장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 다는 점을 여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를 바탕으로 본 논문의 성격, 내용 등에 대해서 소개한다. 필자는 본 논문의 위치를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사료에 입각하여 구체적 으로 다루는 연구 작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수행하는 선행작업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여기에서는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연구에 앞서서 그동안 조선 후기 사회성격에 대하여 주요하게 살 펴볼 이론 으로 내재적 발전론과 소농사회론을 제시하고 두 가지를 집중적 으로 검토할 것이다. 두 이론이 갖고 있는 내용에 대한 검토뿐만 아니라 두 이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두 이론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된 연구 성과보다 두 이론을 검토한 史論的 성격의 연 구 성과를 주로 살펴볼 것이다. 물론 사론적인 연구 성과를 살피는 과정에 서 歷史像에 대한 분석, 대안적인 역사상에 대한 제시, 주요 논증 대상이 되 는 史料 검토 등의 내용도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본 논문의 내용은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검토한 주요 사론 성격 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검토 논의하는 방식으로 서술될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이나 소농사회론을 살펴본 연구 성과를 하나씩 하나씩 검토하는 방식 이 아니라 논의의 흐름에 따라 주요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살필 것이다. 그 리하여 차후에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실증적으로 다루는 연구와 긴밀하게

61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1 연결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할 것이다. 본 논문의 구성에서 앞 부분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과정을 먼저 정리 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 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이어서 경영형 부농의 존재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할 것이다. 계속해서 소농사회론의 논거 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검토ㆍ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맺음말 에 대신하여 내재적 발전론의 재정립을 위한 시론으로 지배체제의 성격을 중심으로 주요한 변화 양상 등을 정리하여 제시할 것이다. Ⅰ.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과정 조선 후기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그동안 내재적 발 전론을 정리한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론이 등장하는 과정과 관련하여 김용섭 의 연구 성과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과정을 김용섭의 연구 성과를 우선 검토하면서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17) 먼저 김용섭 자신이 설정한 연구목표에 관한 설명을 살펴보자. 김용섭이 농업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를 졸업한 다 음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재학하던 때부터이다. 그는 2007년의 강연에서 학 부와 대학원과정에서 東學亂 관계 연구를 경험하면서 앞으로 연구할 방향을 역사학 속의 농업사임을 확인하였다 18)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東學亂의 性格을 다룬 석사논문을 심사받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를 발전적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의 질문을 받았는데, 이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연구 과제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한다. 그는 우 17)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관한 비판적인 검토는 아래 글을 참조하였다. 염정섭, 조 선후기 內的 發展과정 연구와 중세사회 解體論의 동거- 朝鮮後期農業史硏 究[I]-農村經濟ㆍ社會變動-,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農業變動ㆍ農學思 潮- ꡔ韓國史硏究ꡕ 147, ) 金容燮, 농업사(農業史)로 진로를 정하기까지, 국제역사학 한국위원회 국제 역사학 일본위원회 편, ꡔ역사가의 탄생ꡕ, 지식산업사, 2007, 214쪽.

62 62 지역과 역사 38호 리나라의 중세사회(전통사회)의 해체과정을 農業ㆍ農村ㆍ農民에 관해서 그 內的 發展過程의 입장에서 해명하는 것 19)을 연구목표로 설정하고 있었 다. 김용섭이 제시한 연구목표에서 중세사회, 해체, 農業ㆍ農村ㆍ農民, 內的 發展過程 등의 용어가 주목된다. 이 용어들은 다름아니라 그의 연구 시각을 구체화시켜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가 조 선 후기와 근대를 연구할 때 내면화시키고 있었던 나름의 역사상을 보여주 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연구목표를 좀더 선명하게 표현한 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조선 사회를 중세 사회로 규정하고 그것의 해체 과정을 농업과 농촌, 농민과 관련해서 자본주의로의 內的 發展過程으로 해 명하는 것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섭은 자신의 연구를 내적 발전과정의 해명 이라고 언급하는 것에 그 치고 있어, 하나의 이론 으로서 내재적 발전론 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러 연구 성과들이 바로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 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그는 자신의 연구방향 에 대하여 제시하였지만, 그의 연구 성과들이 거기에 덧붙여지면서 그의 연 구방향과 연구 성과가 내재적 발전론 이라는 하나의 이론 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내재적 발전론의 주 요한 핵심 요소 를 김용섭의 연구 성과의 주요한 쟁점 부분인 자본주의 맹 아론, 경영형 부농론으로 지목하는 것은 당연한 설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 리고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영향을 받은 많은 연구들은 내재적 발전론을 내 면화하여 연구를 수행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바로 근대로의 전환과정의 해 명에 빠질 수 없었던 자본주의 맹아, 경영형 부농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김용섭이 우리나라의 중세사회(전통사회)의 해체과정을 農業ㆍ 農村ㆍ農民에 관해서 그 內的 發展過程의 입장에서 해명 하기 위해 수행한 연구의 결과들을 학계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에 의거한 연구 성과로 간주하는 19) 金容燮, 序 ꡔ朝鮮後期農業史硏究[I]-農村經濟ㆍ社會變動-ꡕ, 一潮閣, 1970, 4쪽.

63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3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용섭이 가지고 있던 내면 의 연구시각, 연구목표가 바로 내재적발전론이었고, 이를 아직 이론화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내적 발전과정의 해명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파 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김용섭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 던 연구목표(시각)와 차후에 거둔 연구 성과를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이점 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내재적 발전론 자체가 목적론적인 연구시각, 연구 방법론이 아닌가 이러한 혐의를 받게 만드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이론이 애초에 완결적인 모습을 갖고 등장하기보다는 연구의 진전에 따라서 점차 뚜렷한 형체를 지니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김용섭의 연구 시각이 연구 성과와 결합되면서 내재적 발전론으로 정립되었다고 보아도 무 리가 없을 것이다. 김용섭의 연구에 힘입어 한국사학계에 내재적 발전론이 뿌리내리면서 조 선후기가 내재적 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역사 사료 분석과 해석을 통해 입 증하는 과제가 조선후기 연구자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하여 경제사 분야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수많은 연구 성과들을 내재적 발전 론에 입각하여 제출하였다.20) 조선후기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후기의 주로 경제와 사회 변동 을 이해하는 지배적인 문제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기초하여 상업, 수 공업, 광업, 사상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조선후기 歷史像이 만들어졌 다.21)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 사회에 대한 성격 규정과 20) 내재적 발전론과 연결되는 많은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김인걸, 박찬승, 이영호 등의 논문에 소개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21) 조선 후기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경향을 한국 역사에서 서양 역 사를 찾는 시도였다고 지목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서양 역사의 발전 패턴과 유 사한 것을 한국사에서 찾아내어 이것을 가지고 한국에도 근대적 요소가 있었다 고 서술하는 시각으로 내재적 발전론을 간주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김용 옥, 楓石 徐有榘가 산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ꡔ풍석 서유구 탄생 250주년 기념 학술대회ꡕ, 한국고전번역원ㆍ임원경제연구소, 2014.

64 64 지역과 역사 38호 발전 방향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의 이해는 대체로 內在的 發展論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2) 내재적 발전론에서 제 시하고 있는 조선후기 이래의 내재적 발전이란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추출 될 수 있는 내적ㆍ외적, 아래ㆍ위로부터의 발전 계기를 확인해 내는 것이 다.23) 19세기 후반 이후 한국사회의 시대적 과제를 반봉건ㆍ반침략 민족 국가 건설로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근대사회를 설명해 내려는 것이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24) 그리하여 농민층의 양극분해와 경영형 부농의 등장,25) 그리고 유통경제의 발달과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신분제 변동 등이 나타났고, 이러한 변화가 조선 후기 농민항쟁으로 이어져나갔다 는 설명이 바로 내재적발전론의 기본 설명틀이다.26) 19세기 후반 이후 한 국사회의 발전은 외적 충격에 직면하여 그 발전의 맹아를 피워내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내재적발전론을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자본주의 맹아의 성립과 일본에 의한 말살로 정리되기도 한 다.27) 필자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 조선 후 기 사회 성격을 살피는 모든 연구, 그리고 조선 후기 사회를 각 분야로 나누 어 살피는 구체적인 연구, 또한 조선 사회를 통시적으로 천착하는 연구 등 은 당연히 내재적 발전론을 기본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22) 한국사학계에서의 내재적발전론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金仁 杰, 앞의 논문, 최윤오, 앞의 논문, ) 내재적발전론의 입장에서 한국사의 성과를 집대성하려는 시도로 다음 책을 들 수 있다. 金容燮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刊行委員會, ꡔ金容燮敎授停年紀 念 韓國史學論叢ꡕ, 지식산업사, ) 최윤오, 앞의 논문, ) 金容燮, 朝鮮後期의 經營型富農과 商業的 農業 ꡔ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ꡕ Ⅱ, 一潮閣, ) 金容燮이 관심을 기울이고 해명한 많은 주제들이 대부분 내재적발전론의 구성요 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7) 박섭, 내재적 발전론의 의의와 한계 ꡔ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ꡕ, 생각 의 나무, 2003, 111쪽.

65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5 내재적 발전론은 내재 와 발전 에 방점이 찍힌 것이며 그 어떤 선험론적인 편견이 미리 개재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내재 는 조선 사회 내부의 구성원, 제요소, 제요인의 주도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발전 이란 점진적인 개선, 또는 급격한 변혁, 아니면 퇴영적인 변화를 포함하여 상하로 요동치는 양상을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조선 사회의 구성원 이 주변 환경 변화 속에서 펼쳐나가고 있는 역사적인 변화, 변동 등을 내재 적 발전 이라고 파악하고자 한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내재적 발전 론의 핵심요소 로 간주되었던 자본주의 맹아론과 경영형 부농의 존재를 불 식하고, 다시 새로운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구성 개념을 역사적 연구과정을 통해 논증적으로 계발하고 수정 보완해나가는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Ⅱ. 자본주의 맹아론의 비판적 검토 조선 후기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요소 인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런 연후에 경영형 부농에 대하여 장을 바꾸어 살피려고 한다. 이영훈은 내재적 발전론이 곧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영훈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는 글에서 조선 후기 사회를 해체기의 봉건사회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후기 연구경향을 요약하 였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진보적 발전의 모든 현상은 조선 후기 자본주의의 맹 아를 찾고자 했던 60년대 이후의 연구경향에 의해 상당부분 확인되고 또 그렇 게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 28) 그는 자신의 자본주의 맹아론 비판이 50년대까지의 停滯論으로 복귀하는 28) 李榮薰, 제2장 經營型富農論ㆍ賭地論 批判 ꡔ朝鮮後期社會經濟史ꡕ, 한길사, 1988, 79쪽.

66 66 지역과 역사 38호 것이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이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 면서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현상황과 성과를 총체적으로 검 토하는 과정에서 그 대안(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이영훈의 자본주의 맹아론 비판은 내재적 발전론에 의지한 60년대 이 후 한국사 연구경향 전반에 걸쳐 제기한 것이었다. 이영훈의 자본주의 맹아 론 비판 이외에도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 이 되었다. 여기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잠깐 소개하면 다음 과 같다.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17~19세기의 조선 사회에 비록 느린 속도 에 제한된 범위였지만 자본주의를 향한 萌芽的인 경제 형태가 발생하고 있 었다는 설명이다. 단적으로 조선의 농업에서는 16~18세기 영국에서의 자 본가적 借地農과 유사한 존재가 성립하고 성장했다 29)고 서술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맹아론이 곧 자본가적 借地農, 즉 경영형 부농의 성립, 성장이라 는 주장과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여 기에서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을 이론적 측면, 실증적 측면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먼저 이론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 맹아 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본다. 그리고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실증적인 비판 은 경영형 부농의 존재 여부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장을 바꾸어 설명할 것 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이론적 비판의 경우 특히 서양역사의 발전방향, 영국의 전형적인 자본주의 모델과 빗대어 비판하는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 다. 김용옥은 최근의 글에서 자본주의맹아론 을 비판하면서, 역사발전단계 론에 입각하여 중세를 필요충분조건으로 선행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다. 그리고 중세 가 없는 역사는 근대 로 이행하지 못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도대체 근대란 무엇이냐? 역사는 29) 金容燮, 朝鮮後期의 經營型富農과 商業的農業 ꡔ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農 業變動ㆍ農學思潮-ꡕ, 一潮閣, 1971, 223쪽.

67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7 반드시 근대를 향해서 가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덧붙인다. 김용옥은 결 국 자본주의맹아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발전이 곧 자본주 의체제의 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한국사에 합당하게 적용되는 가 아닌가 이러한 점을 묻는 것30)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 중세에서 근 대로의 발전이라는 서양사의 역사발전단계론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 지 묻고 있다. 김용옥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우선 농업에서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은 英 國에서만 나타난 특수한 현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 서양 중세 농업 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사정을 비교하여 농업에서의 자본주의 등장이 영국에 국한된 현상이었음을 설명하는 연구31)를 살펴본다. 서양 중세 농업사와 자 본주의 사이의 연관관계를 살펴본 이연규의 연구를 살펴볼 수 있다. 이연규에 따르면 농민이 실질적인 토지소유권을 지니고 있던 중세에는 영주가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농민으로부터 잉여를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인구 증가와 농업의 발전은 영주에게 유리하기 보다는 농민에게 유리 하게 작용했고, 이에 영주는 경제외적 강제를 강화하려고 시도하게 되었는 데, 이것이 바로 부역강화로 나타났다. 하지만 경제외적 강제의 성격은 나 라에 따라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지방분권이 극도로 이루어져 있는 가운데 영주가 직접 농민 에 대해 경제외적 강제를 부과했고, 그에 따라 권력이 상부로 이동하는 가운 데 상층 권력자들은 농민에 대한 영주의 경제외적 강제를 약화시킴으로써 세 금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반면에 영국에서는 비교적 권력이 중앙집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중앙정부가 영주 계급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그에 따라 농민에 대한 영주의 경제외적 강제를 강화시키고 더 나아가 영주의 토지소유 권을 뒷받침함으로써 이른바 경제적 강제 를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농 업자본주의를 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30) 김용옥, 앞의 논문, 2014, 12~13쪽. 31) 이연규, 서양 중세의 농업사와 자본주의 ꡔ인문과학논총ꡕ 9, 2004, 153~156쪽.

68 68 지역과 역사 38호 이와 같이 정리할 수 있는 프랑스와 영국의 농업에서의 변화 양상을 조선 의 경우와 대비하여 살펴보면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양상을 보다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사회의 경우 18, 19세기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훨씬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지주나 부농이 프랑스나 영국의 영주적 존재로 간주할 수 없 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조선의 경우 중앙정부는 직접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 두어들이는 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이미 농민들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한 상태이거나,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경작권을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두는 데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지주의 지대량이 격감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배후 여건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18, 19세기 조선의 농업의 커다란 문제는 지주의 지대량이 아니라 국가의 수세량이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의 주요한 원인이 바로 三政의 紊亂이었다는 점은 바로 영국, 프랑스와 다른 조선의 농업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조선의 농업현실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地主, 커다란 토지를 경영하는 富農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자 본가적 借地農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 즉 영국과 같은 경제적 강제 를 가 능하게 해주는 조건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정약용이 지적하는 바 와 같이 전체 戶數의 7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借地農은 田租를 地主 대신 내야 할 정도로 稅役의 부담이 힘겨워하고 있었다.32) 이들 가운데 借地를 통해 농업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부류가 있었는지 여부는 좀더 세밀한 고찰 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 맹아론에 관하여 중국의 상황과 연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기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이나 중국은 제국주의적 歷史像에서 벗어나 32) 정약용의 다음 기사는 19세기 초반 호남지역 作人(소작농)의 처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지만, 借地農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대의 실상을 추정하는 발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丁若鏞, ꡔ與猶堂全書ꡕ 제1집 詩文集 권9, 擬嚴禁湖南諸邑佃夫 輸租之俗. 今計湖南之民大約百戶 則授人田而收其租者不過五戶 其自耕其田者 二十有五戶 其耕人田而輸之租者七十

69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9 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데, 그러한 노력들 중에서 주목되는 것이 제국주의 세력이 선전한 停滯性理論을 타파하고, 自國의 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 전법칙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논리의 개발이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자본주의맹아론 33)이었던 것이다. 박기수는 농업부문에서도 세계사 에서 영국사의 유일한 사례로서 평가되는 자본가적 借地農을 무리하게 검증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經營型 富農이나 廣作農의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 였지만 애초에 무리한 시도였다고 판단 34)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새롭게 정체론을 극복하고 올바른 역사상을 수립해야 하는 책무가 역사과학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설명으로 마무리하고 있다.35) 중국의 경제사학자 리보중은 20세기 후반까지 중국 경제사 연구가 서양 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도 비 판적으로 몇 가지 논점을 지적하고 있다. 리보중은 해외학계가 20세기 중국 을 연구하면서 제시한 몇몇 중심이론이 중국의 실제상황을 이해하려는 시도 가 아니라 서양의 경험에서 얻은 이론들은 중국의 사회경제에 끼워맞춤으로 써 그 이론들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하였다.36) 그는 중국 경제사 연구에 자본주의 맹아 강박관념 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자본주의 맹야의 시점에 대한 견해를 몇 가지 예시하고 있는데, 1950년대 宋元說, 明淸說로 나뉘었는데, 1980년대에는 戰國說, 西漢說, 唐代說, 宋 代說, 元代說, 明代說, 淸代說까지 백화제방하는 국면이라고 한다. 리보중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성립시킨 이론의 기초를 분석하는 것이 가 장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영국형 모델과 이 모델이 세계사에서 가지고 있 는 보편성에 주목한다. 그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중국 명청시대 江南과 관련하여 영국형 모델을 비교하고 있다.37) 영국형이 세계 경제사 연구에서 33) 34) 35) 36) 박기수, 韓國과 中國의 資本主義萌芽論 ꡔ사림ꡕ 28, 2007, 203쪽. 박기수, 위의 논문, 241쪽. 박기수, 위의 논문, 245쪽. 리보중 지음, 이화승 옮김, ꡔ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ꡕ, 책세상, 2006, 13쪽(원저는 李伯重, ꡔ理論, 方法, 發展趨勢: 中國經濟史硏究新探ꡕ, 北京: 淸 華大學出版社, 2002).

70 70 지역과역사 38 호 중요한의미를갖는이유를 2가지제시한다. 하나는세계모든국가 ( 혹은지역 ) 중유일하게영국만이 자발적 으로전통농업사회에서근대공업사회로전환했다는점이다. 영국이외의다른모든국가가근대화과정에서어느정도외부의영향을받은것과달리오직영국만은 스스로완성한경제순환 의기초위에서성공함으로써자립성을띠고있었다고한다. 그리고다른하나는영국의경험이마르크스의재생산이론에서제시되는보편적규칙과일치했다는점을지적한다. 공업화이전의경제가근대공업경제로전환한다는것은낮은수준의사회재생산이확대재생산으로전환하는것을말하는데이전환과정이바로산업혁명이라는점을주목하여설명하고있다. 38) 그는영국형모델에대한탐색을바탕으로삼아, 명청시대강남에영국형을적용할수없다는점을강조한다. 그리고명청시대강남경제발전의가장중요한원동력을노동분업과전문화라고설명한다. 이어서그는 서양의침략이없었다면강남경제가근대공업화를이룰수없었을까? 이렇게반문하면서, 그에대해 근대공업화를이룰가능성은있었지만매우적었다고말할수밖에없다 고대답하고있다. 강남의확대재생산을막은것은에너지와원료의부족이라고지목한다. 또한리보중은경제성장이론으로서의자본주의맹아론의결함을지적한다. 맹아론역시생산력을이야기하지만그러나그주안점이생산관계이고생산력을생산관계에의해변화되는하나의조건일뿐으로간주하고있다고하면서마르크스의생산력과생산관계의이론과모순되는결론을낳고있다 37) 리보중지음, 이화승옮김, 위의책, 42~62 쪽. 38) 영국산업혁명이 18 세기후반에서 19 세기전반사이단기간에집약적으로발생한것이아니라 17 세기이래서서히지속적으로이루어진변화과정으로파악해야한다는수정주의주장이새로운통설의지위를획득하였다는점, 영국농업부문에서의변화도잠정적으로 16 세기중반에서 19 세기후반까지여러차례에걸쳐발생한것으로정리할수있다는점등도같이검토해야할것이다. 송병건, 농업혁명, 의회인클로저와농촌사회의변화, ꡔ 영국연구 ꡕ 23, 2010, 92~97 쪽.

71 조선후기사회성격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 71 고설명한다. 그리고생산관계가사회의생산발전의결정적요소로보고생산관계만끊임없이발전한다면 맹아상태의자본주의 는 성숙한자본주의 로발전할수있다고맹아론에서설명한다고지적한다. 이러한시각은논리상, 사실관계상모두문제가있다고한다. 그는명청시대중국에자본주의맹아가출현했는가를깊이연구할가치가있는주제이지만새로운시각, 방법론를바탕으로새로운성과를거두어야할것이라고결론을내리고있다. 리보중은결론에서매우유보적이고소극적인입장을보여주고있지만, 그의결론은다름아니라자본주의맹아론이아닌다른설명틀로명청시대의경제양상을설명하지않을수없다는것이라생각된다. 소농사회론을제시한미야지마히로시는내재적발전론을비판하는입장을상세하게보여주고있다. 미야지마의비판은서구적인모델을일본사, 한국사에적용하려는연구가문제를갖고있다는주장으로요약된다. 미야지마는자신도언급하고있는것처럼애초에내재적발전론의입장에서연구를수행하던학자였다. 그는다음과같은의문이생겨났다는점을토로한다. 한편으로는내재적발전론에대한의문도점점싹트기시작했다. 그의문이란내재적발전론이주장하는것처럼조선후기에근대의맹아로볼수있는변화들이존재했었다면개항이후그것이쉽게사라지지않았을거라고여겨지는데, 그러한연구가별로없다는것이었다. 39) 미야지마는자본주의맹아론이갖고있는문제점, 즉맹아에서성숙으로나아가는과정을실제로보여주는연구성과가제대로제시되지않고있다는점을지목하였다. 결국자본주의맹아론에서벗어난미야지마는내재적발전론을대체하기위한논리적설명으로소농사회론을제기하였다. 다시말해서미야지마는그자신이내재적발전론이제시하는논리적설명에점차회의를갖게되면서대안으로소농사회론을제시한것이었다. 39) 미야지마히로시, 한ㆍ일양국의역사를다시본다 : 동아시아사의입장에서 ꡔ 아시아리뷰 ꡕ 3-1( 통권 5 호 ), 2013, 13 쪽.

72 72 지역과 역사 38호 미야지마는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면서 일본의 일본사 연구자들이 서구 적인 모델을 일본사에 적용하면서 일본의 역사가 서구와 비슷한 발전을 해 왔다고 주장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일본사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사 연 구자들의 내재적 발전론 역시 서구 모델을 한국사에 적용하려고 하는 의미 에서 대동소이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40) 이와 같이 그는 일본사 연구 경 향과 한국사 연구동향의 유사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 하였다. 또한 미야지마는 내재적 발전론은 일제시기에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장하 던 한국사 이해를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주장 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내재적 발전론이 타율성 에 대해 내재 를, 그리고 정체성 에 대해 발 전 을 대치함으로써 한국사를 이해하려는 주장 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 야지마는 이러한 새로운 한국사 이해가 일본인 연구자의 한국사 이해를 비 판하는 면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고 많은 연구 성과를 낳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이 존재했었다 지 적하고 있다. 하나는 내재 를 강조한 나머지 외부와의 관계가 경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 교사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발전 의 모델 로서 서구 모델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서구 모델을 한국사에 적용하려고 했 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문제는 봉건제 에 관한 문제다. 봉건제 란 서구 중세사회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데, 이러한 서구적인 봉건제 가 한국에서도 존재했었을 뿐만 아니라 18, 19세기에 봉건제 가 해체기에 접어 들었다는 것이 내재적 발전론 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기실 전전(戰前) 일 본인 연구자가 주장했던 봉건제 부재론, 즉 한국의 역사에는 봉건제 의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한국은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을 비 판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었다.41) 미야지마의 지적은 앞에서 우리나라의 중세사회(전통사회)의 해체과정 40) 미야지마 히로시, 위의 논문, 16쪽. 41) 미야지마 히로시, 위의 논문, 17쪽.

73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73 을 農業ㆍ農村ㆍ農民에 관해서 그 內的 發展過程의 입장에서 해명하는 것 42)이라고 정리하였던 김용섭의 언명에서 중세사회 를 봉건제 로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봉건제 개념으로 조선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시대 양반은 개별 토지의 소유자로 존재할 뿐, 영역적인 지배자 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양반이 많은 경우 일반사람보다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주로서 토지를 소유했던 것일 뿐, 일정한 지역 전체를 지배하는 영주로서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파 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중국의 사대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즉, 중 국의 사대부들도 어린도책에 일반사람들과 나란히 토지 소유자로 등장하지 만 영역적 지배자로서의 성격은 전혀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양반과 사대부의 존재 형태를 봉건제 론에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 에 없다고 지적한다.43) 미야지마의 설명 가운데 양반 지주가 토지를 소유하는 존재였을 뿐 지역 전체를 지배하는 영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야지마의 지적은 봉건제로 조선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는 분 명한 증거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조선 사회의 특색의 하나를 보여주는 史實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고도화된 중앙집권적 관료국 가에서 향촌사회의 양반의 권위는 점차 하락하고 희소화되어 나가고 있다는 역사적 현상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향촌사회에서 양반의 권위가 하락하 면서 반대로 국가권력의 크기는 점점 더 강건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향 촌사회의 동네, 마을까지 국가권력의 촉수가 미치게 되었다. 이는 조선후기 사회의 특징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내재 적 발전론의 핵심인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하여 영국의 상황, 중 국의 연구, 일본의 사례 등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42) 金容燮, 앞의 책, 1970, 4쪽. 43) 미야지마 히로시, 앞의 논문, 2013, 18쪽.

74 74 지역과 역사 38호 Ⅲ. 경영형 부농에 대한 실증적 비판 박찬승이 이미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맹아론의 핵심은 경 영형 부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재적 발전론의 또 다른 이름인 자본 주의 맹아론은 바로 경영형 부농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할 것이다. 박찬승은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경영형 부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은 농업, 상업, 수공업, 광업 등의 연구에서 진행 되었다. 김용섭은 일련의 양안 연구를 통하여 서양의 자본가적 차지농과 유사한 경영형 부농 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였다... 연구의 결과, 김용섭은 농법의 개량, 상업적 농업, 광작 등을 통하여 새로운 농업 담당자층인 경영형 부농이 등장하 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44) 박찬승이 강조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 맹아론의 뿌 리는 김용섭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단초가 되는 농업에서의 새로운 농업담당자층인 경영형 부농의 존재를 검출하는 연구가 김용섭에 의해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경영형 부농의 존재 유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실증의 측면에서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영형 부농 에 대 한 사료적 차원에서의 검증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맹아론 그 자체인 경영형 부농의 존재가 바로 김용섭의 1960년대 量案 연구에서 제시 되고 있었다. 김용섭이 量案을 분석하는 연구를 통해 조선후기 사회의 내적 발전과정을 해명하면서 찾아내어 세상에 내놓은 역사적 존재 가 바로 경영 형 부농이었던 것이다.45) 그는 경영형부농층에 대해서 봉건지주층의 佃作 44) 박찬승, 앞의 논문, 2007, 80쪽. 45) 경영형 부농과 양안에 관한 서술은 아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염정섭, 앞의 논 문, 2009.

75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75 地를 借耕함으로써 富를 축적하고 있는 농민층으로 소위 資本家的 借地農 에 가까운 농민층으로 볼 것인데 조선후기에는 그와 같은 농민층이 광범하 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46)고 설명하였다. 그는 1990년에 펴낸 ꡔ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ꡕ에서는 경영형부농이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는 설명을 빼놓고 있었다.47)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농민계층으 로 경영형부농이 등장하였다는 주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경영형부농론은 조선 후기 사회의 내적발전과정과 중세사회해체론 이 잘 결합되어 있는 설명틀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경영형부농을 개별적 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농민계층 으로 보면서 우리나라의 中世 的인 사회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잇는 過渡期에 일정한 기능 을 지니고 등장하는 부농층 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사회변동 의 주요 양상인 신분제 동요, 농업생산력 발전, 임노동시장, 상업적 농업 등 의 배경 속에서 경영형부농층은 봉건적인 생산양식을 타도하고 새로운 시 대의 새로운 생산양식을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계층(사회세력) 48)으 로 규정되었다. 결국 그의 중세사회 해체시기 농민층의 분화과정에서 새롭 게 등장한 경영형부농층이 자신이 중심이 된 새로운 생산양식이 등장시킬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김용섭은 經營型富農의 존재를 經營型富農을 제목에 명시한 논문이 아니 라 續ㆍ量案의 硏究 49)라는 글에서 밝혀놓고 있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주로 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50)의 분석을 통해서 경영형부농 46) 47) 48) 49) 金容燮, 앞의 책, 1971, 223쪽. 金容燮, 앞의 책, 1990, 375쪽. 金容燮, 앞의 논문, 1971, 227쪽. 金容燮, 續ㆍ量案의 硏究(上)-朝鮮後期의 佃戶經濟- ꡔ史學硏究ꡕ 16, 1963 ; 續ㆍ量案의 硏究(下)-朝鮮後期의 佃戶經濟- ꡔ史學硏究ꡕ 17, 1964 ; 續ㆍ 量案의 硏究-民田地主制의 佃戶經濟狀態- ꡔ朝鮮後期農業史硏究[I]-農村經濟 ㆍ社會變動-ꡕ, 一潮閣, 1970, 재수록. 50) 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 되어 있고, 청구기호는 奎18308이다. 1830년(純祖 30) 4월에 全羅道 古阜郡에

76 76 지역과 역사 38호 의 존재를 밝혔다. 이영훈이 경영형부농론을 비판할 때 바로 이 양안의 성 격을 새롭게 규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하였다.51) 따라서 ꡔ全羅道古阜郡所在 龍洞宮田畓量案ꡕ이 과연 어떤 성격의 양안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구체적으 로 검토하면서 경영형부농의 존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은 김용섭의 지적대로 1830년에 작 성된 것이 분명한 궁방양안이다.52) 김용섭은 본 庄土가 1708년(숙종 34 년)에 처음 형성된 이후 여러 궁방 아문을 거쳐 용동궁으로 획득되었다는 점, 장토를 매입할 당시의 토지소유자인 前主를 그대로 기재하는 관행이 있 다는 점 등을 근거로 본 양안의 主名, 時作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활동시 기를 숙종 34년 이전으로 비정하고 있다. 결국 1830년 양안에서 100여 년 이전의 主名, 時作名을 검출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時作은 小作佃戶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본 양안에서 地主-小作관계를 분석한 것은 그가 이 양 안을 宮房의 有土免稅田을 정리한 양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53) 경영형부농론을 비판한 이영훈도 본 양안에 수록된 庄土가 宮房의 有土 임이 분명하다고 보았다. 그는 1894년 甲午陞摠에 의해 無土가 폐기된 뒤 에도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로 有土宮房田 양안임을 주장하였다. 이영 훈은 본 양안에서 宮房-地主-小作으로 이어지는 중층적인 소유관계를 뽑아 내어, 地主-小作의 私的 地主制論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영형부농을 통하여 해체기의 봉건적 토지소유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된 1830년 전라도 고부군 용동궁장토의 양안은 실은 거꾸로 조선후기 사회구성을 私的 지주제론과 또는 그에 입각한 해체기의 봉건사회와는 별도 의 시각에서 전구조적으로 파악하고 재규정해야 함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 다 54)고 주장하였다. 서 작성한 同郡內 德林面ㆍ東部面ㆍ北部面의 龍洞宮 소속 田畓에 대한 量案이 다. 51) 李榮薰, 앞의 책, 1988, 82~83쪽. 52) 內題에 道光拾年肆月, 즉 1830년(순조 30년)이라는 연대표기가 분명하게 기 재되어 있다(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 奎18308). 53) 金容燮, 앞의 책, 1970, 211쪽.

77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77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이 양안이 有土에 해당하는 궁방전을 수록한 양안이 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다만 김용섭은 양안의 기재 내용 속에서 地 主-小作관계를 추출하였고, 이영훈은 宮房-地主-小作으로 이어지는 중층적 인 소유관계를 뽑아내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본 양안은 19세기말의 분 류에 따르면 第2種有土에 속하고, 17세기말 이후의 구분에 따르면 民結免 稅地에 해당하는 宮房田의 量案으로 비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 양안에 들어 있는 主 또는 時作에 들어있는 인명은 시기를 달리하지만 모두 田主에 해당하는 인물이고 小作人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본 양안에 서 밝힐 수 있는 부분은 경영형부농층을 비롯한 地主-小作관계가 아니고, 또한 宮房-地主-小作으로 이어지는 중층적인 소유관계도 아니며, 1830년 대 전라도 고부 소재 용동궁 민결면세지에 해당하는 民田 내부의 토지소유 관계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55) 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이 용동궁 궁방전 가운데 民結免稅 地, 나중에 제2種有土로 불리던 토지의 상황을 정리한 양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양안에서 地主-佃戶관계를 찾기는 어렵고, 田主의 토지소유관계 의 변동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양안에서 검출한 平民, 賤民 신분의 경영형부농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섭이 제시한 경영형부농은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경영규모의 확대, 상업적 농업의 지향, 賃勞動의 고용을 통하여 富를 축적한 부농이다. 그리고 借耕地를 확보하여 富를 축적 하는 농민층으로 소위 資本家的 借地農에 가까운 농민층으로 규정되었다. 54) 李榮薰, 앞의 책, 1988, 82~83쪽. 55) 宮房量案이 宮房이 田主, 즉 地主일 때만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민결면세지와 같이 田租를 수취하는 경우에도 작성된다는 점을 파악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양안의 정리 및 해설사업 의 공동연구자들과 같이 量案을 검토하면 서 착안한 것이었다. 다음 자료집에 수록된 양안 해설을 참고할 수 있다. 서울대 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ꡔ궁방양안ꡕ ꡔ둔토양안ꡕ ꡔ일반양안 기타양안ꡕ(조선 후기 대한제국기 양안 해설집 1~3), 민속원, 2012.

78 78 지역과 역사 38호 그리고 신분측면에서 平民이나 賤民에 해당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을 찾아낸 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의 성격을 달리 파악하게 된다 면 경영형부농의 존재는 새로운 역사적 논증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역사적 존재로 재정립될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인 자본주의 맹아론, 경영형 부농의 존재 등은 이론적인 측면과 실증적인 측면에서 재검토가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Ⅳ. 동아시아 小農社會論 비판 이영훈과 미야지마는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면서 소 농사회론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조선 전통사회의 경제적 발전은 그 방향이 西유럽과 같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賃勞動에 기초한 자본가적 借地農이 아 니라, 가족노동에 기초한 小農경제가 17~19세기에 걸쳐 성숙했다는 주장 을 제시했다. 小農社會論은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農民 대중의 자립적 농업 경영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고, 이에 따라 18세기 이후 1950 년대까지 조선사회의 성격을 소농사회로 규정하려는 주장이다. 소농사회론 을 주창하고 있는 이영훈은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규정하면서56) 조선후기 農牛의 확대보급, 그에 따른 다량의 퇴비제조, 쟁기를 비롯한 주요 農具의 개량 등으로 토지생산성의 향상과 더불어 一人當 경지면적의 감소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 농업발전의 기본 내용으로 집약적 농법의 발전을 생산력적 토대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사회는 안정적 구조의 자립적 소경영의 발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 였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소농사회론을 주장하고 있다.57) 미야지마는 소농사회론 이 일본도 포함해서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특색 56) 李榮薰, ꡔ朝鮮後期社會經濟史ꡕ, 한길사, ) 미야지마 히로시, 앞의 책, 2013.

79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79 을 파악하기 위한 가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소농사회론의 의도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건제 로 대표되는 것 같은 서구 모델로 동아시아 사회를 보 려고 하는 입장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서구 모델로부터 일단 떠나서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최대 특색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주목해서 그것을 개념화한 것이 소농사회론 이라는 설명이다.58) 미야지마는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집약적인 벼농사가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것이 단순히 농업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구조와 국가구조까지도 크게 변화시켰다는 점을 크게 주목한다. 즉, 집 약적 벼농사가 확립되는 가운데 소농민이 생산주체로서 성장한 결과, 사대 부, 양반, 무사 등의 지배계층이 농업 생산에서 손을 떼며 토지귀족으로서 의 성격을 잃게 되었고, 이러한 소농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주자학 이 국가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고 주자학으로 무장한 관료들에 의한 통치체제가 구축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소농사회론 의 골격이다. 그에 따르면 소농사회론 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집약적 벼농사의 확립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먼 옛 날부터 건조 지대에서는 밭농사, 그리고 濕潤 지대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 져 왔다. 주지하듯이 중국 대륙의 황하문명은 건조 지대의 관개 밭농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이러한 밭농사와 벼농사의 비중이 바뀐 것은, 중국 대륙에서는 송나라 시대 이후이고, 한반 도와 일본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규모에서는 16세기 이후다. 동아시아 농업이 이처럼 획기적으로 변화한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산 간의 좁은 평야 지역에서만 가능하던 移植式 집약적 벼농사(모내기를 행하 는 벼농사)가 대하천의 하류 평야지역에서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중국대 륙에서 이런 변화는 송나라 시대에 시작되어 명나라 시대인 16세기에 이르 러 장강(長江, 양자강) 델타 지역의 治水가 안정화됨에 따라서 확립되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16~18세기에 기본적으로 같은 변화를 볼 수 있 58) 미야지마는 소농사회론 의 내용을 위의 책에서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80 80 지역과 역사 38호 다. 이러한 집약적 벼농사의 획기적 확대가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 는 고도의 토지생산성과 높은 인구밀도를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몽골제 국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어 16세기에 비약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 형성의 움직임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부유함을 동경하면서 기동한 것이었는데, 중국의 부의 원천은 집약적 벼농사의 성립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변화를 바탕으로 소농사회 는 중국에서는 송나라 시 대부터, 한국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대체로 16세기쯤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의 경우는 차이가 있다. 즉, 일본에서도 집 약적인 벼농사가 보급, 일반화되었다는 면에서는 중국, 한국과 마찬가지지 만, 그에 대응하는 국가구조 면에서는 다른 형태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 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국가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었으며 과거제도도 도입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식 인이 아닌 무사가 통치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위는 신분제도를 바탕 으로 세습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농사회론 은 한편에서는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공통점을 파악하기 위한 이론임과 동시에 그중에서 일본의 특이함을 파악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59) 소농사회론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농촌사회에서의 양극 분해, 그리고 소농의 몰락이라는 상황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의 경작규모는 양극으로 분해되기는커녕 위 아래가 모두 아래쪽으로 수렴하는 하향 평균화 경향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전반 식민지기의 농촌사회에서도 마찬가지고 나아가서는 1950년대까지도 그러 하였다고 설명하였다.60) 다시 말해서 소농사회론에서는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소농사회가 성숙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근대 한국사회의 성격을 서유럽의 전근대와 상 이한 소농사회 로 정식화하고, 한국사의 근대=자본주의는 서유럽에서 이식 59) 미야지마 히로시, 앞의 논문, 2013, 18~19쪽. 60) 李榮薰, 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소농사회론을 중심으로 ꡔ역사와 현실ꡕ 45, 2002.

81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81 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1) 소농사회론은 동아시아사의 틀에서 제기된 것으로 유럽과 다른 역사적 전개과정의 특색에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소농사회론은 한 시기의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이론으로서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요구했던 부 분과 관련해서 적절한 부분을 찾기 어렵다. 조선 후기 사회의 특색 자체를 제시하는 부분이 부재하고 또한 앞 시기인 조선 전기, 뒷 시기인 개항기 일 제강점기 등을 연속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도 별다른 시사점이 보이지 않는 다. 이제 소농사회론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소농사회론 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먼저 小農의 성격 규명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소 농사회론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小農이 과연 조선 후기에 특별히 성숙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소농이 조선 후기에만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성숙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소농사회론의 논거가 희박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小農의 존재는 과전법에 의해 분급된 과전의 田主(收租者)와 대립 관계에 있던 佃客이었지만, 동시에 국가적 수조지에서 田租를 납부하던 田 主(所有者)였다.62) 또한 소농은 조선 전기 이래 계속해서 국가가 실행한 農政策의 주된 대상 이었다. 농업 생산의 실질적인 監督과 農事 장려, 그리고 국가의 農形 파악 과정 등 조선왕조 국가가 監農 차원에서 수행한 일체의 움직임의 대상은 바로 농민, 小農이었다. 특히 조정에서 飢民을 구제하기 위해 賑濟場을 설 치하여 기민에게 먹을 것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또한 의창곡을 활용하여 還 上로 분급할 때 주된 대상층은 農民이었다. 61) 李榮薰, 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Ⅱ-조선후기 신분제ㆍ신분변동의 재검토- ꡔ역사와 현실ꡕ 48, ) 金泰永, ꡔ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ꡕ, 지식산업사, 李景植, ꡔ朝鮮前期土 地制度硏究ꡕ, 一潮閣, 1986.

82 82 지역과 역사 38호 그런데 조선 전기 義倉을 통한 救荒은 결국 種糧, 즉 種子와 糧食의 분급 이었다. 種糧의 분급이란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의 농민이 담당한 농업생산 의 일부를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와 농민 사이의 관계가 상호부조와 상호보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사회의 小農의 존재는 奴婢 신분의 農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立役奴婢의 경우 主家의 使喚에 의해 家內의 家事勞動이나 家作地의 農業勞動에 종사하기 때문에 小農으로서의 존재양태 자체를 살피는 것이 불필요하다. 하지만 納貢奴婢의 경우 자신의 經理를 통해서 자기 재생산뿐 만 아니라 주가에 대한 奴婢 年貢을 납부하고 있었다. 이들 납공노비가 노 비 연공과 자기 재생산의 재화를 획득하는 방법은 농업생산 외에 상업활동 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당연히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통로라고 할 것이다. 이 경우 납공노비의 농업생산활동을 당연히 小農의 범주에 넣어서 살펴야 한다. 따라서 조선 사회의 소농은 신분적으로 良人農民인 경우, 納貢奴婢인 경우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소농의 존재양태를 다양하게 설정하고 검토하는 것이 보다 시급 하게 요구되는 연구과제일 것이다. 소농의 자립성이라는 잣대만으로 소농의 존재양태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협소한 접근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소농의 성격과 관련해서 농민적 가족경영의 존재를 설명한 차야노프의 설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63) 소농사회론에서 제시하는 소농이라는 존재 가 갖고 있는 사회경제적 특색은 가족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 농업생 산이라는 점에서 차야노프가 설명하고 있는 농민적 가족경영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차야노프는 농가가 생산경제(경영)와 소비경 제(가계)의 양면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가족 구성을 분석하였고, 특히 가 족주기와 농업경영규모의 관계에 대해서 이론적인 모색을 추구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최적 규모의 농업생산을 추구하여 무한정 경영규모를 확대해나가 63) 차야노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였다. 한정숙, 알렉산드르 차야노프의 농민경제론과 농민협동조합론 ꡔ西洋史論ꡕ 47, 1995, 83~133쪽.

83 조선후기사회성격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 83 지않는다고설명한다. 농민들에게경영규모의확대는생산공간의증대를의미하는데이는단위면적당생산비용의감소라는효과를가져다주기도하지만또한경영내수송비용의증가를초래하는것이기도하다는것이다. 따라서경영의최적규모는수송비용증가곡선 ( 상승곡선 ) 과생산비용감소곡선 ( 하강곡선 ) 이라는두곡선이교차하는지점에서결정된다고설명한다. 이를 최적규모론 이라고하는데, 그는농민가족경영이자본주의적경영뿐만아니라사회주의적농업경영에도적용된다고생각하고있었다고한다. 64) 차야노프의가장가까운학문적동료가운데하나였던니꼴라이마까로프는차야노프의접근방법을 농업경제학의조직생산적접근방향 이라이름붙였다. 마까로프는농민문제에대한당시맑스주의자들및전통적인문주의자들의접근방식을사회경제적접근방향으로명명하는한편, 자신이지지하는새로운접근방식을조직생산적접근방향이라이름하였다. 마까로프에따르면사회경제적접근방향의옹호자들은농민계급의분화, 농촌에서의자본주의의발전, 대경영과소경영간의투쟁등농업의외적제도를가장중요한문제로여기고있던반면, 조직생산적접근방향의옹호자들은농민경영의내적구조에더욱큰관심을기울여, 농민들이실제로그들의경영과생산노동을어떻게조직하는가를설명하는데주력했다. 65) 조직생산전접근방향의옹호자들은생산관계의문제, 토지소유의구조와같은문제를표면적인주된논의의대상으로다루지는않았다고한다. 차야노프의농민적가족경영이론에서살핀바와같이농민의농업생산은노동과정이면서생산활동이라는성격을갖고있고, 생산규모는비용과의관계속에서규정되는점이있다고할수있다. 조선의소농 ( 농민 ) 의생산활동에도노동력, 비용, 이윤등의문제가개재되어있다는점에서조선의농민경영은다각적인검토가필요한부분이다. 따라서소농사회론에서집약적벼농사의확대라는기준만을고려하여농민경영의자립성, 소농사회의형성등으로사회성격을규정하는것은너무한쪽만생각하고전체를고려 64) 한정숙, 위의논문, 97 쪽. 65) 한정숙, 위의논문, 89~90 쪽.

84 84 지역과 역사 38호 하지 못한 설명틀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소농 존재양태의 시대적 변천의 양 상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도 같이 지적하고자 한다. 신분과 지위, 생 존과 재생산, 노동력 동원의 특색 등의 측면에서 소농의 존재는 그 자체로 무수한 연구 성과를 필요로 하는 연구과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소농 존재의 시대적 성격 변화를 포착하고 설명하는 것이 소농사회 의 성립을 규정하는 것보다 더욱 의미있는 연구 성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다음으로 미야지마의 소농사회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집 약적 벼농사의 확립 과정 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미야지마의 소농사회론이 의지하고 있는 기본 논거에 해당하는 것은 그의 언급대로 집 약적 벼농사의 확립 과정 에 대한 설명이다. 벼농사의 담당주체로서 소농이 移植式 집약적 벼농사를 수행하게 된 것은 조선의 경우 16세기~18세기에 변화를 겪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미야지마가 언급하는 집약적 벼농사 는 노농과정, 자본 투하 등의 측면에서 集約性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이는 곧 앞선시기의 농업생산을 粗放性이 강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에 서 문제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집약과 조방, 집약성과 조방성이라는 규정은 너무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상대적인 관념으로만 사용하는 것으로 한정해야 마땅하다는 점에서 특정시기를 집약적 벼농사 를 수행하거 나 확립한 시기로 규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사회의 農法 변화에서 더욱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고, 소농사회론자 들이 지적하는 小農의 成熟에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된 것은 14세기 후반 벼 농사 연작법의 정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15세기에 편찬된 ꡔ 농사직설ꡕ에 정리된 벼 재배법이 水耕 直播法 중심의 連作法이었다. 그리 고 태종대에 만들어진 ꡔ농서집요ꡕ의 水稻作法 가운데 休閑法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 있다는 점도 확인된다. 이러한 점에서 14세기 후반 무렵 水稻 耕 作法이 休閑法에서 連作法으로 변화 발달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정리 할 수 있다.66) 이 시기에 벌어진 휴한법에서 연작법으로의 전환은 농업기 66) 이태진, ꡔ한국사회사연구-농업기술발달과사회변동ꡕ, 지식산업사, 염정 섭, 14세기 高麗末, 朝鮮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水稻 耕作法을 중심으로

85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85 술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量田法의 전환도 불러일으킨 커다란 경제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었다.67) 이렇게 볼 때 14세기 후반에 벼농사의 휴한법이 극복되고 연작법으로 전환되었으며, 그러한 생산력 발전의 결과물 이 15세기 후반 농촌사회의 정기시장인 場市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으로 정 리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은 조선의 국가권력의 정립이라는 측면에 서도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ꡔ經國大典ꡕ과 ꡔ國朝五禮儀ꡕ가 완 성되어 法과 禮의 측면에서 조선 국가를 이끌어나갈 골격이 제 모습을 드러 내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소농사회론의 문제점으로 논리 구성의 한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자 한다. 앞서 머리말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밝히는 과 제는 조선 후기 사회를 독립적이고 연속적인 차원에서 검토하는 작업 그 자 체라는 점, 그리고 조선 후기 사회의 독립적인 특징과 연속적인 속성에 대 한 연구 성과 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정한 사회 를 구성하는 지배체제의 성격, 지배층의 구성, 사회적 이념의 특색, 주변 환 경적 요소 등을 포괄하여 사회의 성격 을 찾아내고 이를 독립적이고 연속적 으로 파악하는 사회성격론 에 비추어볼 때 소농사회론은 일면적인 분석결과 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농업이 사회적 생산의 기초적인 토대이자 사회적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 하던 전근대 농업사회 에서 소농의 自立性이라는 기준으로 소농사회의 성 립, 성숙을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많은 부문을 도외시하고 있다.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 농업생산이 사회적 생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사회는 다양한 역사적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사회성격을 파악하고 여러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은 통시적인 관점에서 지배-피지배관 계의 성격, 예속민의 다양한 존재양태, 그리고 당대 지배이념의 변화 등을 감안한 여러 가지 역사적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소농 사회론의 입지는 매우 협소한 지점에 놓여 있다고 보인다. ꡔ농업사연구ꡕ 6-1, ) 金泰永, 앞의 책, 1983.

86 86 지역과 역사 38호 소농사회론의 또 다른 문제점은 동아시아의 근대 에 대한 설명이 거의 不 在하다는 점이다. 18세기 이후 1950년대까지 소농사회라는 주장은 조선사 회의 개항,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식민지로 전락 등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격변을 설명하는 데 별다른 유효한 설명을 보태주지 못하고 있다. 농촌사회에서 小農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식민지 근대 시기에 조선의 농민이 직면해야 했던 역사적 현실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보이 지 않는다. 또한 소농사회 이후의 사회성격에 대한 전망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미야지마가 일국사적 역사파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타율 과 내 재 의 문제를 지적한 다음과 같은 설명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타율성론 을 비판, 극복하기 위해 내재 를 강조했다. 하지 만 타율과 자율, 종속과 독립이라는 문제가 과연 양자택일 식으로 볼 수 있는 문제일까? 역사적으로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완전한 자율, 독립이라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68) 그는 현재 국제화, 지구화가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역사적으 로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완전한 자율, 독립이라는 것은 오히려 예외 적인 상황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의문을 던지고 있다. 역사적 으로 동아시아 3국을 비교 분석하는 연구의 중요성과 실제 동아시아 3국 사 이의 상호 영향관계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 사회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에게 조금 과장하여 말하자면 중국와 일본 은 먼 이웃나라 였을 뿐이다. 피지배층 일반 생산대중에게 중국과 일본은 혹시라도 한성부나 커다란 도회지에서 수입품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이름 만 들어본 존재였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가까운 이웃나라 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갔을 때의 사건이었다. 위와 인용한 미야지마의 논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자아내는 데 불씨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즉 그의 주장을 이어나가면 19세 68) 미야지마 히로시, 앞의 논문, 2013, 26쪽.

87 조선후기사회성격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 87 기이후조선사회가소농사회수준에머무르고있었고, 19세기후반근대산업사회로의전환에실패하였으며, 그에따라식민지로전락한것이라는설명으로이어지는것이아닌가라는의구심이다. 맺음말 : 내재적발전론의재정립시론 맺음말에서는조선후기사회성격을설명하는자본주의맹아론과소농사회론에대한비판에서한발앞으로나아가 18세기에서 19세기중반까지조선사회의성격을어떻게규정해야하는지그대안을시론적으로모색하려고한다. 당시조선사회의변화요인을내부적으로찾고또한역사상의변화발전이라는점을포착하기위한이론적, 실증적모색이라는점에서그대안은 내재적발전론의재정립 이라는방향성을갖고있어야한다고생각한다. 달리말해서자본주의맹아론이나경영형부농론에얽매이지않으면서, 또한조선전기와연속적으로이해되고 19세기후반조선사회의변동과연결되는대안은 내재적발전론의재정립, 새로운규정 일수밖에없다고생각한다. 조선후기특히 18세기에서 19세기중반에걸친시기의조선사회의내재적발전양상을규정할때주목해야할중심적인요소가바로 지배체제의성격ㆍ변화 로파악된다. 지배체제의성격그리고지배체제의변화는조선후기사회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각부문에서의변화변동이라는배경속에서나타난것이었다. 그리고조선후기지배체제는앞선시기와크게다른것이었고, 또한뒷시기와연속선상에서파악되는것이었다. 조선후기지배체제의변화를중심으로당시조선사회에서나타난주요한특징적인모습을정리하려고한다. 당대의사회경제적변화에대한논의뿐만아니라지배체제의변화양상에대한설명이사회성격을논의할때반드시필요하다고생각된다. 조선후기지배체제의변화양상을살피고그것을개념화하는귀납적인연구방법을통해서조선후기내재적발전론의재정립이이루어질

88 88 지역과 역사 38호 수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살피고 나아가 내재적 발전론을 재정립할 때 가장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관건, 키워드가 바로 支配體制라고 생각된다. 지배체 제는 국가권력의 행사를 중심으로 지배층이 피지배층 일반에 대하여 지배력 을 관철시키는 방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지배체제의 변화양상에 대한 검토는 國家權力의 주된 발현형태인 賦役체제, 賦役의 주된 담당층인 農民層, 그리고 권력집단으로서의 支配層 등 여러 가지 중심적인 역사상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부역체 제, 농민층, 지배층 등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 성격을 재구성하고 내재 적 발전론을 재정립하는 시론적인 설명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국가권력은 賦役체제를 통해서 農民 등에게 갖가지 명목의 賦役을 수취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농민들은 都結을 중심으로 地稅化되고, 군현 단 위로 總額制로 운영되어 나가는 國家 부세체제의 변동 속에서 流離民이 되 거나 도시 貧民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와 더불어 宮房이나 衙 門의 토지 침탈에 자기 소유토지를 상실한 無田農이 되기도 하였다. 또는 적극적으로 궁방과 아문의 토지집적과정에 참여하는 농민도 나타났다. 경우 에 따라서는 소작인으로서 永代小作權, 賭地權 등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하 지만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지 못한 소작농들은 전주와 국가가 자행하는 경 제적 압박이 더욱 심화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田主의 지대 수취에 저항 하는 抗租운동이나 국가의 田結稅 수취 등에 저항하는 抗稅움직임을 펼쳐 나갔다. 나아가 군현의 부세행정에 저항하는 富民과 연합하여 농민항쟁(民 亂)을 일으키기도 하였다.69) 조선 후기 사회에서 국가권력과 농민 사이에 부역체제를 둘러싼 관계에 69) 조선 후기 농민항쟁, 농민의 동향 등에 대해서는 다음 논저를 참고할 수 있다. 安秉旭, 19세기 壬戌民亂에 있어서의 鄕會 와 饒戶 ꡔ韓國史論ꡕ 14, 金容燮, 哲宗朝의 民亂發生과 그 指向 -晋州民亂 按覈文件의 分析- ꡔ東方學 志ꡕ 94, 고석규ㆍ한상권, 18ㆍ19세기 봉건모순의 심화와 민의 성장 ꡔ역사와 현실ꡕ 3, 高錫珪, 19세기 전반 鄕村社會勢力間 對立의 推移; 慶尙道 英陽縣을 중심으로 ꡔ國史館論叢ꡕ 8, 1989.

89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89 서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물리적 대립관계로 표출되 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오수창에 따르면 조선 후기 억압에 대한 民의 저 항은 국가권력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70)고 한다. 19세기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많이 만들어지고 읽혀졌던 野 談과 小說 등에서 다루어진 주제들 중에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 로 제기된 문제들은 압도적으로 國家와 民의 대립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비 주인과 노비 사이의 대립을 제외하면 양반 지배층과 양민ㆍ천민 사이 의 신분적 대립에도 별다른 관심이 두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물며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대립이라는 사회경제적 관계는 대립 관계의 하나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대립 양상이 현실의 그것과 동질적인 것이 라고 간주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민이 의식하고 있던 사회적 모순이 주로 자신들과 국가권력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던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71) 19세기에 발생 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인 1812년의 홍경래난, 1862년 농민항쟁,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 등이 모두 민의 국가 권력에 대한 직접 적인 투쟁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였다는 사실에 더욱 큰 주의를 기울일 필 요가 있다. 19세기와 그 이전 시기 농민들을 억압하고 그에 대한 저항을 불러 일으킨 주된 대상은 國家 權力이었다. 조선 후기의 국가권력은 중앙의 각종 관청과 관료, 그리고 지방의 수령, 향리, 面任ㆍ洞任ㆍ里任 등의 관료체제에 의해 서 행사되었다. 그리고 이와같은 관료체제에서 국가 권력의 주요한 지향은 바로 민에게 賦役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각종 부세, 요역ㆍ신역의 부과는 향촌지배구조에서 실현되었는데, 19세기에 이르러 정립된 守令-吏ㆍ鄕 지 배체제 아래에서 부역을 민에게 부과하였다. 70) 조선 후기 민의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 관련 부분의 서술을 다음 논문을 참고하 였다. 오수창, 조선후기 체제인식과 민중운동 試論 ꡔ한국문화ꡕ 60, 2012, 265~ 266쪽. 71) 오수창, 조선후기 야담과 소설에 담긴 사회적 갈등과 신분인식 ꡔ시대와 인물, 그리고 사회의식ꡕ, 태학사, 2009.

90 90 지역과 역사 38호 19세기에 들어와 민의 항쟁은 여러 형태로 공공연하게 전개되었다. 그것 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抗租나 유리ㆍ도망이라던가 呈訴의 형태로 전개되 기도 하였고,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訛言, 山呼, 擧火, 掛書, 等訴 등으로 나 타나고도 있었다.72) 그중에서도 관주도의 향촌통제책을 위기로 몰고 간 것 은 바로 당시 합법적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집단적인 저항이었다. 당시 민인들의 공개적인 모임의 장이었던 里會(洞會)나 鄕會 등에서 일어나는 반관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73) 이 중 里會나 洞會를 통한 저항은 아직 주 로 等狀 의 형식을 빈 집단적 呈訴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때 로 里任, 洞任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중심 내용은 부세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민에 대한 부역 부과에서 나타난 문란상이 바로 三政의 문 란이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농민항쟁(민란)이 조선 전역에서 크게 일어난 것이 1862년의 일이었다. 농민들의 요구에 철종대에 삼정이정청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제시한 많은 三政策을 검토하고 나름의 개선 방안으 로 1862년 윤8월 19일에 三政釐正策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삼정이정책은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실시가 유보되다가 10월 29일부터 다시 본래의 제도로 환원되었다.74) 오수창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후기의 사회 모순이 어떤 양상으 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두루 동의를 얻는 통설은 현재 수립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주-소작인의 대립을 상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러한 모순 관계가 민의 저항과 변혁운동에서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조선후기 사회 문제의 핵심을 수령-吏ㆍ鄕 수탈체제 로 규정 72) 망원한국사연구실, ꡔ1862년 농민항쟁ꡕ, 동녘, 1988, 15~20쪽. 73) 鄭震英, 壬戌民亂의 性格,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鄭昌烈, 조선후 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 ꡔ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ꡕ, 安秉旭, 朝 鮮後期 自治와 抵抗組織으로서의 鄕會 ꡔ聖心女子大學論文輯ꡕ 18, 高東煥, 조선후기 농민항쟁의 역사적 성격 ꡔ한신ꡕ 3, ) 김용섭, 철종 임술년의 응지삼정소와 그 농업론 ꡔ한국사연구ꡕ 10, 1974 ; ꡔ韓 國近代農業史硏究-농업개혁론 농업정책ꡕ, 일조각, 1975.

91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91 한 연구들은 수령과 관속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적 위계질서가 향촌의 사회 모순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지적하여 왔다. 이러한 연구시각에서는 부를 축적한 새로운 사회세력이 신분제가 이완된 틈을 타서 이ㆍ향층에 진 출하였음을 강조하고, 사회운영의 지표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앞시기에 는 명분이었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경제력으로 변화했다고 하였다.75) 하 지만 19세기에 이르도록 민을 억누르는 사회적 지배력은 관권 그 자체에 핵 심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76) 이러한 입장을 결국 조선 후기 18, 19세 기의 주요한 모순관계가 지배체제에서 설정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국 가권력을 중심으로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관철하는 권력관계가 부역체제 라는 기구로 농민들에게 부과되고 있었다. 그런데 농민들에게 삼정의 문란 과 같은 과중한 부역이 부과되었을 때 농민들의 저항, 항쟁이 나타나지 않 을 수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운영의 특색을 다음 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英祖, 正祖, 純祖로 이어지는 國 王이 재위하던 기간이다. 숙종대의 빈발하였던 換局은 영조 재위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숙종대부터 대두하였던 蕩平論은 영조가 본격적으로 추 진한 蕩平策으로 이어졌다. 또한 정조는 영조가 추진한 탕평책을 계승하면 서 나름대로 발전시킨 독자적인 탕평책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순조가 즉위 하면서 탕평의 색깔은 사라지고 勢道家門이 득세하는 세도정치시기로 변환 되었다.77) 이와 같은 정치사적 변동과정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 자체는 커 다란 타격을 받는 것 없이 유지, 지속되었다. 75) 고석규, ꡔ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연구ꡕ, 서울대출판부, 1998, 341~347쪽. 76) 오수창, 앞의 논문, 2012, 263쪽. 77) 18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 조선사회의 정치적 변화 흐름에 대 해서 다음 논저를 주요하게 참고할 수 있다. 鄭奭鍾, ꡔ朝鮮後期의 政治와 思想 ꡕ, 한길사, 朴光用, 조선후기 蕩平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成潤, ꡔ朝鮮後期 蕩平政治 硏究ꡕ, 지식산업사,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반연구반, ꡔ조선정치사 1800~1863 상ㆍ하ꡕ, 청년사, 김백 철, ꡔ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 ꡔ속대전ꡕ의 편찬과 백성의 재인식-ꡕ, 태학사, 2010.

92 92 지역과 역사 38호 1800년 정조가 急逝하자 영조의 계비였던 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개시 하면서 일시에 권력은 노론 僻派의 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정순왕후를 중 심으로 한 벽파세력은 우선 정조의 신임으로 중앙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남인세력을 천주교도라는 혐의를 씌워 전부 제거하였다(辛酉邪獄). 그러나 규장각의 抄啓文臣 출신으로 정조 생전에 定婚한 사이였던 金祖淳의 딸을 순조비로 책봉하는 데 時派세력이 성공하자, 권력은 자연히 김조순을 중심 으로 한 시파의 손으로 다시 넘어가게 되었다. 순조 초년 벽파세력의 도전 을 이겨낸 김조순은 備邊司와 훈련도감을 장악하고, 핵심권력을 굳혀나갔 다. 특히 중앙권력은 서울에 사는 소수 姓貫의 거대한 유력가문, 즉 京華巨 族에 의해 독점되는 결과를 빚었다. 세도정권의 핵심가문은 安東 金氏, 大 邱 徐氏, 豊壤 趙氏, 潘南 朴氏, 延安 李氏, 南陽 洪氏 등이었다.78) 세도정권이 나타나는 배경은 18세기까지 활약했던 山林의 전반적인 쇠퇴 와 핵심산림의 중앙정계로의 편입, 그리고 재야산림의 無力化와 국왕친위 관료의 경화거족적 閥閱로의 성장 등이었다. 이에 따라 중앙정치는 지방에 거주하던 산림이 아니라 국왕과 그 친위관료가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도정치기에는 중앙과 지방과의 정치적 단절이 심화되었고, 순조 이후 왕 권이 무력화되었을 때 중앙의 일부 경화거족적 外戚門閥에 의해 권력이 독 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 그리고 산림으로 대표되는 재야산 림과 중앙관료의 유기적 연결에 기초한 사림정치의 주자학적 정치이념은 파 탄되고, 지방사회의 여론과 움직임이 중앙정계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차 단된 채 국왕과 척족관계에 따라 몇몇 문벌이 세도를 찬탈하게 되었다.79) 이와 아울러 세도정권은 18세기 이래 발전하고 있었던 상품경제의 이권 을 독점함으로써 그 자체의 존립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정조대에는 남인층 의 대거 등용으로 중소지주와 중소상공업자를 대변하는 정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18세기 말 이후 발전한 상품경제는 이제 더이상 중앙권력 장악자들 로 하여금 중소지주층에게 권력을 배분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부를 상업 78)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지음, 위의 책. 79) 유봉학, 19세기전반 세도정국의 동향과 연암일파 ꡔ동양학ꡕ 19, 1989.

93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93 에서 얻을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상업에서의 이익이라는 것은 그 본질에 있 어서 아직 봉건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독점을 통한 것이 대부분이 었다. 상업에서의 이익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의 독점이 필 요하였다. 이러한 주ㆍ객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현한 정치운영원리가 바 로 세도정치였던 것이다. 세도정권하에서는 지방에 기반을 둔 세력이나 또 는 발전하는 수공업이나 상업을 바탕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층의 정치세력화 가 오랫동안 차단당하였다. 즉 중앙권력의 기반이 소수의 벌열가문과 특권 상인으로 축소되면서 그동안 중앙권력의 방임하에서 중국과의 밀무역이나 봉건적 법체계를 피하면서 潛採광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던 신흥상공인들 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성장이 저지되었던 것이다.80) 한편 향촌사회의 지배층이었던 在地士族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8 세기 초중반 이후 조선의 향촌사회에서 在地士族들은 앞선 시기에 鄕案과 洞約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행사하던 지배력을 점차 상실하였다. 경제적인 변동, 그리고 이와 연관된 신분질서의 변동은 新鄕이라 불린 새로운 신흥세 력의 대두를 촉발하였다. 이와 더불어 숙종대 중반 이후 官主導 향촌통제책 이 점차 面里制의 강화와 더불어 자리를 잡아가면서 吏鄕세력과 守令이 향 촌사회를 통제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 가운데 경제적을 축적한 饒戶 또는 富民이라고 불린 새로운 사회세력들은 總額制로 운영되는 수령의 부 세행정에 적극 동조하면서 기존의 사족들이 장악하던 향촌사회 지배력에 대 항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鄕戰이란 불린 신구 세력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 기도 하였다.81) 요호 부민으로 불린 부유한 농민층은 국가적인 勸分에 참 80) 정석종, 정약용(1762~1836)과 정조ㆍ순조년간의 정국 ꡔ역사와 인간의 대 응ꡕ, 한울, )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 논저를 참조할 수 있다. 김인걸, 조 선후기 향촌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고석규, 앞의 책, 김준형, 18세기 里定法의 전개-촌락의 기능강화와 관련하여 ꡔ진단학보ꡕ 58, 이태진,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변화 ꡔ한국사회발전사 론ꡕ, 일조각, 鄭震英, ꡔ朝鮮時代 鄕村社會史ꡕ, 한길사, 이해준, 조 선후기 사회사연구의 성과와 전망 ꡔ韓國史論ꡕ 24, 오영교, ꡔ조선후기 향촌 지배정책 연구ꡕ, 혜안, 2001.

94 94 지역과 역사 38호 여하여 여러 가지 보상을 받거나,82) 수령-이향 지배체제라 불리는 새로운 관주도 향촌지배질서에 참여하여 기존의 기득권 행사층으로 발돋움하려는 움직임도 보여주었다.83) 19세기 전반 향촌사회에서 백성의 동향을 보여주는 民狀의 처리결과를 모아놓은 民狀置簿冊 의 분석한 연구결과84)에 따르면 당시 백성의 청원 내 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세와 관련된 문제였으며 동시에 相鬪 문 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기가 내려올수록 상투 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공동납적 부세운영이 가지는 모순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관주도 향촌통제책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부세정책에서의 공동납이 향촌사회 내부의 갈등을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전반 향촌사회에서의 사회적 갈등은 물론 부세문제만을 둘러싸고 야기되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거기에는 소작문제라든가, 地代 收奪, 地代 拒納 등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서 촉발되고 있었던 것이다.85) 조선 후기 국가권력과 민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조선이 표방하였던 民本 이념과 관련된 것이었다.86) 조선은 건국된 직후 지방에 대한 행정적 통제 를 강화하기 위한 수많은 조치들을 단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지방 관료의 지위와 권위를 향상시키고 지방 행정 단위를 재정비하고 모든 도과 읍에 중 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는 일등이 포함되었다. 지방에 중앙에서 파견 한 관리가 상주했던 것이 비지식인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역사회에만 속한 것이 아니고 왕조로 상징되는 보다 큰 사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이세영, 조선 후기 勸分과 富民의 실태 ꡔ역사문화연구ꡕ 34, 고석규, 앞의 책, 金仁杰, 民狀 을 통해 본 19세기 전반 향촌 사회문제 ꡔ韓國史論ꡕ 23, 金容燮, 民庫制의 厘正과 民庫田 ꡔ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ꡕ 上, 일조각, ) 오수창은 조선 초기 이래 민본 이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국왕 이 인민에 의해 축출될 가능성을 국왕 자신과 신하들이 공개적으로 경계하던 조 선초기의 정치상황은 그 시기 民本 이념의 확립과 맞물려 있었다. 민본사상의 핵심은 民惟邦本 이라 하여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오수창, 앞의 논문, 2012, 251쪽). 82) 83) 84) 85)

95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95 했음에 틀림없다. 조선왕조가 民本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民本의 현실화가 지체되거나 왜곡될 경우 민들은 국가권력에게 특히 국왕에게 民本 의 회복, 실현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과 민은 상호배 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개혁론, 이른바 實學과 관련된 實學者 의 주요 인물들이 國家 改革論을 제시한 것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실 학자들의 개혁론의 주요한 줄기가 國家 改革論이라는 사실은 당대의 주요 한 廢政의 진원이 바로 국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당대의 시대 적 문제가 바로 국가의 개혁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柳馨遠은 ꡔ磻溪隨錄ꡕ을 통해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방안 을 제시하고자 하였다.87) 그가 표방한 耕者有田과 均田制의 논리는, 토지 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 주는 균전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균전제는 토지국유제를 바탕으로 하여 당 시의 신분질서를 인정하고 모든 농민에게 균일하게 토지배분을 하려는 것이 었다. 그리고 丁若鏞은 19세기 초반 농촌사회에서 토지를 가진 자와 없는 자가 분명하게 구별되면서 토지소유의 불균등이 뚜렷하게 자리 잡은 상황을 국가 권력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국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며, 强弱의 다툼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수 령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러한 지적은 바로 국가 의 개혁을 통한 농촌사회의 변혁을 도모하는 논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백성들의 貧富격차가 생겨 난 근본 원인으로 토지소유의 불균 등을 지적하고, 이러한 토지의 불균등한 소유를 바로잡기 위한 가장 근원적 인 개혁방안으로 여전론을 제기하였다.88) 정약용의 농업개혁론의 가장 급 87) 천관우, 반계 유형원 연구 실학 발생에서 본 이조사회의 일단면 상, 하 ꡔ역 사학보ꡕ 2ㆍ3, 1952 ; 반계 유형원 연구 疑補 ꡔ역사학보ꡕ 10, 1952(이상 ꡔ근 세조선사연구ꡕ, 일조각, 1979에 재수록). 정구복, 반계 유형원의 사회개혁사 상 ꡔ역사학보ꡕ 45, ) 丁若鏞, ꡔ與猶堂全書ꡕ, 第1集, ꡔ詩文集ꡕ, 第11卷, 文集 論, 田論三. 今欲使

96 96 지역과 역사 38호 진적인 것은 蕩論 과 原牧 에 나타나는 정치사상에89) 필적하는 이상적 인 전제개혁론인 閭田論 이다.90) 여전론 은 ꡔ여유당전서ꡕ 田論 에 제 시되어 있다. 토지에 대한 사유私有를 부인하고 공동소유, 공동경작, 노동 에 따른 수확분배 등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이상적인 토지제도개혁안이었 다. 소수의 대지주가 대다수의 토지를 집적하고, 많은 소작농민을 착취하고 있는 당시 현실을 비판하고 전면적으로 뒤집어 엎는 내용의 전제개혁안이었 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균전제와 한전제가 비현실적인 주장이라고 비판하였 다.91) 그런데 오수창은 정약용이 군주제를 부정한 것은 아니어서 군주와 백성 의 관계에 대하여 군주는 부모이고 백성은 자녀 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 였다고 하였다. 또 군주란 교체하여 개선할 수 있는 것이므로 왕도 에 따라 현명한 군주가 되어 仁政 과 德治 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전제군주 를 비 판한 것일 뿐 어디까지나 봉건적 사상의 틀 내에 있었다.92) 그리하여 오수 창은 정약용 정치이념의 한계가 이와 같다면, 정약용이 조선초기에 정립된 민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 사상의 맹아 를 수립시켰다는 내용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고 결론을 내렸다.93) 89) 90) 91) 92) 農者得田 不爲農者不得之 則行閭田之法而吾志可遂也 何謂閭田 因山谿川原之 勢而畫之爲界 界之所函 名之曰閭 周制二十五家爲一閭 今借其名 約於三十家 有出入 亦不必一定其率. 임형택, 다산의 민 주체 정치사상의 현실적ㆍ이론적 근거 탕론, 원목 의 이 해를 위하여 ꡔ이우성교수정년기념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ꡕ, 창작과비 평사, 丁若鏞, ꡔ與猶堂全書ꡕ 第2集, ꡔ詩文集ꡕ 第11卷, 文集 論, 田論一~七. 丁若鏞, ꡔ與猶堂全書ꡕ 第2集, ꡔ詩文集ꡕ 第11卷, 文集 論, 田論二. 將爲井 田乎 曰否 井田不可行也 井田者旱田也 水利旣興 秔稌旣甘矣 棄水田哉 井田者 平田也 柞旣力 山谿旣闢矣 棄餘田哉 將爲均田乎 曰否 均田不可行也 均田者 計 田與口而均分之者也 戶口增損 月異而歲殊 今年以甲率分 明年以乙率分 毫忽之 差 巧歷莫察 饒瘠之別 頃畝莫限矣 均乎哉 將爲限田乎 曰否 限田不可行也 限田 者 買田至幾畝而不得加 鬻田至幾畝而不得減者也 藉我以人之名而加之焉 孰知 之乎 藉人以吾之名而減之焉 孰知之乎 故限田不可行也. 신용하, ꡔ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ꡕ, 지식산업사, 1997, 54~63쪽.

97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97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의 조선 사회에서 특히 지배체제의 변화가 가속화하여 나타나고 있었다. 권력집단으로서 중앙지배 층은 협소한 규모의 몇몇 세도가문에 한정되고 있었다. 이들 세도가문을 중 심으로 세도정치가 불리는 정치운영이 수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부역체제의 경우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당대의 사료에 등장하는 바와 같이 三政의 紊亂 이라는 독특한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농민층은 삼정의 문란에 맞서 民亂, 즉 농민항쟁을 일으키면서 정상적인 三政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움직임은 부역체제의 개선, 개혁을 통한 지배체제의 변화를 지향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7, 18세기를 거쳐 나타난 지배체제의 변화가 19세기 후 반에 이르러 경제적인 측면과 의식적인 측면에서 성장한 농민층의 강력한 저항과 요구에 따라 부역체제를 중심으로 가일층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지배체제의 새로운 국 면으로의 전환이 임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하더라도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지 배체제라는 성격을 띤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의 民本을 내세운 지배체제는 완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영조, 정조 시기에 전형적 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세도가문의 세도가 정치권력을 농단하던 시기 에 이르러서도 그 본질적인 모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 문에 조선 후기 사회 특히 19세기 사회의 경우도 앞선 시기의 사회성격이 유지된 측면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ꡔ全羅道古阜郡所在龍洞宮田畓量案ꡕ(奎18308), 丁若鏞 ꡔ與猶堂全書ꡕ. 高東煥, 조선후기 농민항쟁의 역사적 성격 ꡔ한신ꡕ 3, 高錫珪, 19세기 전반 鄕村社會勢力間 對立의 推移; 慶尙道 英陽縣을 중심으로 ꡔ國史館論叢ꡕ 8, ) 오수창, 앞의 논문, 2012, 257쪽.

98 98 지역과 역사 38호 고석규, ꡔ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 연구ꡕ, 서울대학교 출판부, 고석규ㆍ한상권, 18ㆍ19세기 봉건모순의 심화와 민의 성장 ꡔ역사와 현실ꡕ 3, 권내현, 내재적 발전론과 조선후기사 인식 ꡔ역사비평ꡕ 2015년 여름호(통권 111 호), 近代史硏究會編, ꡔ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ꡕ 上ㆍ下, 한울, 김백철, ꡔ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ꡔ속대전ꡕ의 편찬과 백성의 재인식-ꡕ, 태학사, 金成潤, ꡔ朝鮮後期 蕩平政治 硏究ꡕ, 지식산업사, 金容燮, 續ㆍ量案의 硏究(上)-朝鮮後期의 佃戶經濟- ꡔ史學硏究ꡕ 16, 金容燮, 續ㆍ量案의 硏究(下)-朝鮮後期의 佃戶經濟- ꡔ史學硏究ꡕ 17, 金容燮, 續ㆍ量案의 硏究-民田地主制의 佃戶經濟狀態- ꡔ朝鮮後期農業史硏究[I]農村經濟ㆍ社會變動-ꡕ, 一潮閣, 김용섭, 철종 임술년의 응지삼정소와 그 농업론 ꡔ한국사연구ꡕ 10, 金容燮, ꡔ韓國近代農業史硏究-농업개혁론 농업정책ꡕ, 일조각, 金容燮, 民庫制의 厘正과 民庫田 ꡔ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ꡕ 上, 일조각, 金容燮, 朝鮮後期의 經營型富農과 商業的農業 ꡔ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ꡕ, 一潮閣, 金容燮, 哲宗朝의 民亂發生과 그 指向-晋州民亂 按覈文件의 分析- ꡔ東方學志ꡕ 94, 金容燮, 농업사(農業史)로 진로를 정하기까지, 국제역사학 한국위원회 국제역사학 일본위원회 편, ꡔ역사가의 탄생ꡕ, 지식산업사, 金容燮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刊行委員會, ꡔ金容燮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ꡕ, 지식산업사, 김용옥, 楓石 徐有榘가 산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ꡔ풍석 서유구 탄생 250주년 기념 학술대회ꡕ, 한국고전번역원ㆍ임원경제연구소, 金仁杰, 民狀 을 통해 본 19세기 전반 향촌 사회문제 ꡔ韓國史論ꡕ 23, 김인걸, 조선후기 향촌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仁杰, 1960, 70년대 內在的 發展論 과 韓國史學 ꡔ韓國史 認識과 歷史理論ꡕ, 金 容燮敎授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 김정인, 내재적 발전론과 민족주의 ꡔ역사와 현실ꡕ 77, 김준형, 18세기 里定法의 전개-촌락의 기능강화와 관련하여 ꡔ진단학보ꡕ 58, 金泰永, ꡔ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ꡕ, 知識産業社, 리보중 지음, 이화승 옮김, ꡔ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ꡕ, 책세상, 2006(원저

99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99 李伯重, ꡔ理論, 方法, 發展趨勢: 中國經濟史硏究新探ꡕ, 北京: 淸華大學出 版社, 2002). 망원한국사연구실, ꡔ1862년 농민항쟁ꡕ, 동녘, 미야지마 히로시,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형성 ꡔ인문과학연구ꡕ 5, 미야지마 히로시, 한ㆍ일 양국의 역사를 다시 본다: 동아시아사의 입장에서 ꡔ아시 아리뷰ꡕ 3-1(통권 5호), 미야지마 히로시, ꡔ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새로운 한국사의 이해를 찾아 서-ꡕ, 너머북스, 朴光用, 조선후기 蕩平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기수, 韓國과 中國의 資本主義萌芽論 ꡔ사림ꡕ 28, 박 섭, 내재적 발전론의 의의와 한계 ꡔ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ꡕ, 생각의 나무, 박찬승, 한국학 연구 패러다임을 둘러싼 논의-내재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ꡔ한국학 논집ꡕ 35, 배성준, 제4장 민중사학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역사학 비판의 관점에서, 역사문제 연구소 민중사반 지음, ꡔ민중사를 다시 말한다ꡕ, 역사비평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ꡔ궁방양안ꡕ ꡔ둔토양안ꡕ ꡔ일반양안 기타양안ꡕ(조선 후기 대한제국기 양안 해설집 1~3), 민속원, 송병건, 농업혁명, 의회 인클로저와 농촌사회의 변화, ꡔ영국 연구ꡕ 23, 신용하, ꡔ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ꡕ, 지식산업사, 安秉旭, 19세기 壬戌民亂에 있어서의 鄕會 와 饒戶 ꡔ韓國史論ꡕ 14, 安秉旭, 朝鮮後期 自治와 抵抗組織으로서의 鄕會 ꡔ聖心女子大學論文輯ꡕ 18, 염정섭, 14세기 高麗末, 朝鮮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水稻 耕作法을 중심으로 ꡔ농업사연구ꡕ 6-1, 염정섭, 조선후기 內的 發展과정 연구와 중세사회 解體論의 동거- 朝鮮後期農業 史硏究[I]-農村經濟ㆍ社會變動-,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農業變動ㆍ 農學思潮- ꡔ韓國史硏究ꡕ 147, 오수창, 조선후기 야담과 소설에 담긴 사회적 갈등과 신분인식 ꡔ시대와 인물, 그리 고 사회의식ꡕ, 태학사, 오수창, 조선후기 체제인식과 민중운동 試論 ꡔ한국문화ꡕ 60, 오영교, ꡔ조선후기 향촌 지배정책 연구ꡕ, 혜안, 유봉학, 19세기 전반 세도정국의 동향과 연암일파 ꡔ동양학ꡕ 19, 1989.

100 100 지역과 역사 38호 李景植, ꡔ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ꡕ, 一潮閣, 이세영, 조선 후기 勸分과 富民의 실태 ꡔ역사문화연구ꡕ 34, 이연규, 서양 중세의 농업사와 자본주의 ꡔ인문과학논총ꡕ 9, 이영호, 내재적 발전론 역사인식의 궤적과 전망 ꡔ한국사연구ꡕ 152, 李榮薰, ꡔ朝鮮後期社會經濟史ꡕ, 한길사, 李榮薰, 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소농사회론을 중심으로 ꡔ역사와 현실ꡕ 45, 李榮薰, 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Ⅱ-조선후기 신분제ㆍ신분변동의 재검 토- ꡔ역사와 현실ꡕ 48, 이태진, ꡔ한국사회사연구-농업기술발달과사회변동ꡕ, 지식산업사, 이태진,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변화 ꡔ한국사회발전사론ꡕ, 일조각, 이해준, 조선후기 사회사연구의 성과와 전망 ꡔ韓國史論ꡕ 24, 이헌창,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 ꡔ한국사 시민강좌ꡕ 40, 일조각, 이헌창,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과 그 대안 ꡔ한국사학사학보ꡕ 17, 이헌창,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제3의 시각 ꡔ한국사연구ꡕ 148, 임형택, 다산의 민 주체 정치사상의 현실적ㆍ이론적 근거- 탕론, 원목 의 이해를 위 하여 ꡔ이우성교수정년기념논총-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ꡕ, 창작과비평사, 정구복, 반계 유형원의 사회개혁사상 ꡔ역사학보ꡕ 45, 정석종, 정약용(1762~1836)과 정조ㆍ순조년간의 정국 ꡔ역사와 인간의 대응ꡕ, 한울, 鄭奭鍾, ꡔ朝鮮後期의 政治와 思想ꡕ, 한길사, 鄭震英, 壬戌民亂의 性格,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鄭震英, ꡔ朝鮮時代 鄕村社會史ꡕ, 한길사, 鄭昌烈, 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 ꡔ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ꡕ, 천관우, 반계 유형원 연구 疑補 ꡔ역사학보ꡕ 10, 1952(ꡔ근세조선사연구ꡕ, 일조각, 1979에 재수록). 천관우, 반계 유형원 연구 실학 발생에서 본 이조사회의 일단면 상, 하 ꡔ역사학보ꡕ 2ㆍ3, 1952(ꡔ근세조선사연구ꡕ, 일조각, 1979에 재수록). 최윤오,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와 근대-지주제와 소농경제를 중심으로- ꡔ역사 와 현실ꡕ 45,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반연구반, ꡔ조선정치사:1800~1863 상ㆍ하ꡕ, 청년사, 1990.

101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01 한정숙, 알렉산드르 차야노프의 농민경제론과 농민협동조합론 ꡔ西洋史論ꡕ 47,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102 102 지역과역사 38 호 Abstract How Can We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Late Joseon Society -Indigenous Development Theory and Peasant Society Theory- Yeom, Jeong-Sup As the main entrance explaining the late Joseon society, we can point out indigenous development theory and peasant society theory. Meanwhile most researchers of Korean history largely based on the indigenous development theory. Key element of the indigenous development theory is maybe sprout of capitalism thoery. Sprout of capitalism thoery argued wealthy managerial peasants during century Joseon society as a type of capitalist tenant who managed a lot of arable land. But Sprout of capitalism thoery has a problem in that it would have to apply historical development of Western history from the Middle Ages to the Modern Ages into Korean history. The emergence of capitalism in agriculture was the unique phenomenon confined to the UK in world history, that is a downside to sprout of capitalism thoery. The presence of wealthy managerial peasants needs to go through the new certification process and then wealthy managerial peasants could be re-established as a historical existence. Peasant society theory explained that the peasants are self-reliant farming farmers not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But there are lots of question about peasant society theory esp. maturity of peasa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fore they don t explain the problems of modern East Asia. Finally I think

103 조선후기사회성격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 103 that the most important part to re-establish the contents of the indigenous development theory is that we understand the changes in the governance system. Keywords : Indigenous Development Theory, Sprout of Capitalism Thoery, Wealthy Managerial Peasants, Peasant Society Theory, Governing System

104

105 ꡔ지역과역사 ꡕ 38, , 105~132 조선통신사쪽 연구에대한비판적검토와제안 105 조선통신사연구에대한비판적검토와제안 94) 이와가타히사히코 * Ⅰ. 조선통신사연구의출발과현재 Ⅱ. 조선통신사연구의한계 Ⅲ. 역지통신의연구사 Ⅳ. 앞으로의제안 국문초록 일본에서통신사는무관심속에서 조공사 취급을받아왔다. 이에대해재일한국인연구자인이진희, 이원식, 신기수등이조선후기통신사를 조공사 로보지말고 선린우호의상징 으로보자는연구를시작했다. 그러면서 대립 과 갈등 이라는한일관계의고정적인이해방식을벗어나조금더다른시각으로한일관계를이해하고자노력했다. 그결과통신사는선린우호의중심에우뚝섰던것이다. 그러나최근조선의외교정책연구가진행됨에따라통신사를선린만으로설명할수없는경우가제기되었다. 통신사연구를돌이켜보면, 일본이항상적극적이고조선이항상소극적이었다는인상을주었다. 그러나역지통신은다르다. 조선이교섭의주도권을갖고원하는결과를얻을때까지양보하지않았다. 조선의교린외교의또다른모습이기때문이다. 선린우호연구에서는외면받아왔던역지통신연구를이제본격적으로할때가온것이다 년에통신사가세계기록유산으로등재되기전, 조선통신사의문제점을고쳐재구성할필요가있다. 예를들어, 조공사로본것을문제로삼기보다위정자들이정치적으로어떻게활용했는지, 그리고어떤정책적인역할을했는지를주목해야한다. 조선의경우도마찬가지이다. 정치적인효과또는외교적인효과라는측면에서접근해야당시의상황을정확히파악할수있다. 이와같은작업을거처현재의멸시와선린이라는 * 전남대학교 ( 여수 ) 문화사회과학대학국제학부일본학전공초빙조교수 (iwakata@hanmail.net).

106 106 지역과 역사 38호 틀을 보완한다면, 통신사는 지금보다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통신사, 교린, 멸시, 선린, 조공사 Ⅰ. 조선통신사 연구의 출발과 현재 조선통신사 연구의 성과를 알려주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재단법인 부산 문화재단과 NGO 법인 조선통신사연고지연락협의회 는 2016년 3월 30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사무국으로 조선통신사 기록유산 등재 신청서를 한ㆍ 일 공동으로 발송했다. 고 밝혔다. 국제자문위원회 최종 심의를 거쳐 2017년 6~8월 등재가 최종 결정된다고 한다.1)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 싼 양국의 갈등을 생각하면, 적어도 통신사는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을 수 있겠다는 좋은 본보기가 될 전망이다.2) 조선통신사는 조선전기부터 일본에 파견되었지만, 선린우호 가 강조된 것은 주로 조선후기를 말한다. 임진왜란 으로 단절된 조일관계가 양국의 노력으로 재개된 것과 전쟁 없는 평화로운 우호관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통신사는 17세기에 7번(3번의 회 답겸 쇄환사를 포함), 18세기에 4번, 19세기에 1번 등 모두 12차례 파견되 었다.19세기에는 1811년 대마도 역지통신 이외에도 1840~50년대와 1850~ 60년대에 각각 오사카(大坂)3)와 대마도에서 역지통신을 할 계획이 있었지 1) 또한 등재신청 자료들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한일 외교 교류의 기록으로 외 교기록 5건 51점, 여정 기록 65건 136점, 문화교류 기록 41건 146점의 양국 총 111건 333점이다(ꡔ한국일보ꡕ ). 2)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일본 남부 규슈(九州) 일대에 있는 탄광ㆍ항만ㆍ제철소 등 스물세 곳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 되기에 적합하다 고 판정했다.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한 장소가 포함되어 있다 고 반발해, 또 하나의 역사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ꡔ조선일보ꡕ ). 3) 현재 일본에서는 오사카를 大阪 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明治維新 전에는 大坂 이

107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07 만 모두 무산되었다.4) 19세기에는 의례 간소화 와 빙례장소 변경 이라는 뜻으로 易地 또는 易地通信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일본 자료에는 易地聘禮 로 나온다.5) 역지통신 시행으로 양국의 국서교환은 쇼군(將軍) 거주지인 에도(江戶)에서 하지 않고, 대마도 혹은 오사카로 변경되었다. 중 국사행인 연행사와 비교하면 파견 횟수는 적지만, 통신사는 한일관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6) 통신사가 善隣友好 의 상징이라는 평가는 이제 뿌리를 내린 것 같다. 그 러나 통신사가 처음부터 선린우호의 시각으로 연구된 것은 아니었다. 즉 일 본에서는 바쿠후의 외교정책을 살피는 과정에서 언급된 것이 시작이었다. 최초의 통신사 연구는 1910년 ꡔ歷史地理 朝鮮號ꡕ에 실린 쯔지 젠노스케 (辻善之助)의 徳川時代初期に於ける日韓の関係, 후지타 아키라(藤田明) 의 江戸時代に於ける朝鮮使節の来朝について 이다. 쯔지 젠노스케는 국교재개 과정을 논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실용외교를 평가 했지만, 대마도의 국서개작 사건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후지타는 조선후 기 통신사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서 준비과정부터 시행까지를 살폈다.7) 두 4) 5) 6) 7) 라고 표기했다. 당대 자료에는 모두 大坂 으로 나타나는 만큼 이 글에서는 이를 따랐다. 이와가타 히사히코, 1811年 對馬島易地通信硏究-기미책을 중심으로-, ꡔ韓日 關係史硏究ꡕ 23, 2005, 168~169쪽. 손승철은 일본 자료에 나오는 易地聘禮 의 의미는 조선에서 예를 갖추어 찾아뵙 는다는 의미로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조선 자료에 나오는 역지통신 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孫承喆, ꡔ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교린관계의 허와 실ꡕ, 경인문화사, 2006, 239쪽 주1). 연행사의 파견 횟수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夫馬進의 견해를 소개한다. 명나라 시대에는 1,252회 파견되고, 연평균 4.6회였다. 청나라(1637~1894)시 대에는 950회, 연평균 3.7회라는 기록이 있다(夫馬進, 朝鮮の外交原理, 事大 と 交隣 ꡔ朝鮮燕行使と朝鮮通信使ꡕ, 名古屋大學出版會, 2015, 4~5쪽). 辻善之助, 徳川時代初期に於ける日韓の関係 ꡔ歷史地理 朝鮮號ꡕ, 1910, 252~ 253쪽. 이 논문은 일부 수정되어 朝鮮との修好と当局者の失態 ꡔ増訂海外交通史話ꡕ, 內外書籍, 1930에 수록되었다. 藤田明, 江戸時代に於ける朝鮮使節の来朝について ꡔ歷史地理 朝鮮號ꡕ 1910.

108 108 지역과 역사 38호 사람의 논고에는 통신사를 조공사 취급하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흔적은 없 었다. 1920년대 통신사행과 일본인의 시문 교류를 소개하면서 통신사를 긍 정적으로 평가한 마쯔다 고우(松田甲)와 1940년대 구로다 쇼죠(黑田省三) 의 문화사 연구가 있다. 비록 內鮮一體 라는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한 연구 성과라는 결함이 있지만, 조선통신사 연구의 원조라는 것도 사실이다.8) 이 들 연구 성과 모두에서 통신사 조공사론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글에서 언 급하지 않겠지만, 통신사 조공론의 시작도 중요한 연구과제의 하나일 것이 다. 한편, 한국에서는 통신사를 기행문학(문학작품)의 하나로 간주한 연구가 처음이었다. 金台俊은 1931년에 출판한 ꡔ朝鮮漢文学史ꡕ에서, 1719년 통 신사 제술관 신유한이 쓴 ꡔ海遊錄ꡕ을 박지원의 ꡔ熱河日記ꡕ와 쌍벽을 이루 는 기행문학으로 평가했다. 또 1763년 통신사 서기 김인겸이 한글로 쓴 ꡔ日 東壯遊歌ꡕ도 기행문학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초기 연구의 경우 국문학사의 시각으로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통신사연구로 보기 는 어렵고 개설서 수준의 내용이었다.9) 연구자들도 통신사가 조공사 취급 을 받았다거나 천대를 받았다는 시각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확인만 했다. 통신사는 해방 후에도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 지 못했고, 하나의 잊혀진 역사 에 불과했다. 실은 善隣友好 연구의 출발은 일본 내에 만연된 통신사를 조공사 취급하 는 풍조를 바뀌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선구자인 이진희는 조 선통신사의 선린우호의 훌륭한 사실이 정반대의 멸시 수단으로 둔갑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ꡔ李朝の通信使:江戸時代の日本と朝鮮ꡕ을 저술했다 고 고 백했다.10) 한 마디로 멸시 를 극복하는 수단(또는 대안)으로 선린 이 선택 8) 松田甲, 德川時代の朝鮮通信使 ꡔ日鮮史話ꡕ 1, 朝鮮總督府, 1926, 15쪽. 黑 田省三, ꡔ朝鮮通信使史話ꡕ 1~9, 人文社, 1942~43. 9) 한태문, 通信使 使行文学 硏究의 回顧와 展望, ꡔ국제어문ꡕ 27, 2003, 70~ 71쪽. 金台俊, ꡔ朝鮮漢文学史ꡕ, 조선어문학회, 1931, 171쪽. 10) 李進煕, 朝鮮通信使とはなにか, 李元植 等, ꡔ朝鮮通信使と日本ꡕ, 學生社, 1992, 21쪽.

109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09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조선통신사 연구의 장점이면서도 단점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진희를 비롯해 辛基秀, 姜在彦 등의 활동으로 조선통신 사는 대중들의 무관심에서 해방되었다. 특히 辛基秀는 ꡔ江戸時代の朝鮮通 信使ꡕ의 상영활동을 통해, 조선통신사가 조선왕조와 徳川幕府의 善隣友好 의 상징인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11) 한편 한국에서는 아직 연구를 이끌어갈 만한 원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었 다. 동시에 통신사를 높이 평가하거나 관심을 표하는 연구자도 별로 없었 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 통신사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 본에서 통신사의 재평가가 진행함에 따라, 연구 성과들이 번역되어 한국에 잇따라 소개된 것이다. 번역서는 이진희뿐만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조선 통신사 연구자인 미야케 히데도시(三宅英利)의 저서도 포함되었다. 또 金 泰俊 외 편, ꡔ한일문화교류사ꡕ에는 신기수,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의 글 도 소개되었다.12) 또 1994년에 출판된 ꡔ조선통신사ꡕ에서 이원순이 통신 11) 대표적인 것만을 제시한다. 監督: 滝沢林三, 脚本: 辛基秀, 滝沢林三, 映画 ꡔ江戸時代の朝鮮通信使ꡕ, 映像文化協会編, ꡔ江戸時代の朝鮮通信使ꡕ, 毎日新聞社,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1, ꡔ季刊三千里ꡕ 1号, 三千里社, 1975, 150~170쪽 ; 通 信使の道をゆく 2, ꡔ季刊三千里ꡕ 2号, 三千里社, 1975, 86~106쪽 ; 通信使 の道をゆく 3, ꡔ季刊三千里ꡕ 3号, 三千里社, 1975, 152~169쪽 ; 通信使の 道をゆく 4, ꡔ季刊三千里ꡕ 4号, 三千里社, 1975, 164~180쪽 ; 通信使の道 をゆく 5, ꡔ季刊三千里ꡕ 5号, 三千里社, 1976, 162~178쪽 ; 通信使の道を ゆく 6, ꡔ季刊三千里ꡕ 6号, 三千里社, 1976, 132~147쪽 ; 秀吉の侵略と家 康の善隣外交 ꡔ季刊三千里ꡕ 9号, 三千里社, 1977 ; 唐子踊りと朝鮮 ꡔ季 刊三千里ꡕ 19号, 三千里社, 1979, 72~79쪽 ; ꡔ江戸時代の日本と朝鮮 : 李朝 の通信使ꡕ, 講談社, 1976 ; ꡔ江戸時代の朝鮮通信使ꡕ, 講談社, 申維翰 著, 姜在彦 訳注, ꡔ海游録:朝鮮通信使の日本紀行ꡕ, 東洋文庫 252. 平凡社, 姜在彦, 室町ㆍ江戸時代の善隣関係 ꡔ季刊三千里ꡕ 37, 三千里社, 1984, 28~39쪽. 西川宏, 牛窓港に伝わる朝鮮の踊り ꡔ日本文化と朝鮮ꡕ 第一集, 朝 鮮文化社, 岡田精司, 朝鮮人街道のこと ꡔ日本文化と朝鮮ꡕ 第一集, 朝 鮮文化社, ) 80年代부터 90년대까지 통신사 및 한일관계사 한글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中村榮孝 외, 金龍鮮 역, ꡔ朝鮮通信使 日本은 우리가 키웠다 ꡕ, 東湖書館, 李進熙, ꡔ韓国과 日本文化ꡕ, 乙酉文化社, 1982 ; ꡔ韓国속의 日本 : 李

110 110 지역과 역사 38호 사 일행은 한국문화의 일본전파라는 문화적인 기능을 훌륭하게 담당한 문화 사절단이었다 고 지적했다.13) 적어도 이 시기에 조선통신사가 선린우호의 상징 이며 선진문화의 전달자 라는 인식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 로는 다소 전후하지만, 한국의 국사교과서에도 선린우호의 통신사라는 기술 이 일반화되었고, 역사교과서를 통해 선린우호의 통신사라는 인식이 퍼졌 다.14) 이처럼 한국에서도 대중을 향해 통신사의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하였 지만, 많은 연구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여기에는 조선통신사가 보여준 일본과의 문화교류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었다. 예를 들어, 국사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는 한국정부가 과거청산에는 인색하면서도 우호협력만 강조한다. 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일본에선 통신사를 일본에 대한 조공으로 해석하고 있다. 는 말도 했다.15) 조선통신사에 대한 인식이 대중들과 연구자들 사이 에 간격이 있었다. 통신사 연구를 일본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연구 성과 가 많았다. 손승철의 2002년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서 통신사를 주제로 한 연구는 61편이고, 일본은 10배 이상이 많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다만 조선 전ㆍ후기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논문 편수가 다소 많은 것도 사실이 다.16)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 조금 다른 양상에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은 90년대 후반부터 통신사를 전공한 한국인 연구자들이 박사 13) 14) 15) 16) 進熙 歷史紀行ꡕ, 同和出版社, 田代和生 저, 孫承喆ㆍ柳在春 역, ꡔ近世 韓日外交秘史; 国書改作과 韓日外交의 심층분석ꡕ, 江原大学校出版部, 三宅英利 저, 河宇鳳 역, ꡔ역사적으로 본 일본인의 한국관ꡕ, 풀빛, 三宅 英利 저, 孫承喆 역, ꡔ근세한일관계사연구ꡕ, 이론과 실천, 金泰俊 외편, ꡔ韓日文化交流史ꡕ, 민문고, 三宅英利 저, 김세민ㆍ강대덕ㆍ유재춘ㆍ엄 찬호 역, ꡔ조선통신사와 일본ꡕ, 지성의 샘, 신성순, 이근성, ꡔ조선통신사ꡕ, 중앙일보, 1994, 11쪽, 272쪽. 허신혜, 한일 중학교 교과서의 한일관계사 서술 및 관점 검토-조선 통신사 관 련 기술을 중심으로- ꡔ歷史敎育論叢ꡕ 50, 2013, 151~152쪽. ꡔ동아일보ꡕ 孫承喆, 조선시대 通信使硏究의 회고와 전망 ꡔ韓日關係史硏究ꡕ 16, 2002 참 조.

111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11 논문을 잇따라 발표한 것으로 비롯되었다. 이 경향은 일본에서도 비슷해서 통신사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의 66%가 한국인 연구자였다. 박사논문만 놓 고 보면 양적인 역전현상이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17) 주제별로 본다면, 17) 한국에서 통신사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은 다음과 같다(RISS 학위논문 검색을 이용했다). (1) 使行録 한태문, 朝鮮後期 通信使 旅行文學 硏究, 부산대학교, 정응수, 한 일간의 상호 이미지 연구 : 新井白石와 申維翰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정영문, 朝鮮時代 對日使行文學 硏究 : 海行摠載 所在 作品을 中心으로, 숭실대학교, 구지현, 癸未(1763) 通信使 使行文學 硏究, 연세대학 교, 최성애, 18ㆍ19세기 使行錄에 표현된 劍舞 俠 의 특징 연구, 성 균관대학교, 이재훈, 申維翰의 仙 : ꡔ海游錄ꡕ의 仙 과 그 배경을 중심 으로, 경희대학교, 김미정, 壺谷 南龍翼의 使行文學 硏究, 충남대 학교, 정은영, 조선후기 통신사행록의 글쓰기 방식과 일본담론 연구, 부산대학교, 이효원, <海游錄>의 글쓰기 특징과 일본 인식, 서울대학 교, 박상휘, 조선후기 일본에 대한 지식의 축적과 사고의 전환-朝鮮使 行의 記錄類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2) 文学ㆍ文化交流 안대수, 崔天宗 殺害事件을 소재로 한 實錄體 小說 연구, 경희대학교, 문경철, 朝鮮通信使로 본 韓日文化交流 : 唐人춤과 唐子춤을 中心으 로, 원광대학교, 신로사, 1811년 辛未通信使行과 朝日 문화 교류:筆 談ㆍ唱酬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김혜일, 朝鮮通信使 醫學筆談 錄에 대한 考察 : 醫學 文獻, 理論, 疾患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3) 美術ㆍ服装 이정은, 朝鮮通信使 隨行畵員 硏究ꡕ, 경성대학교, 박선희, 18세기 이후 통신사 복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4) 政治外交ㆍ儀式 박정희, 17~18세기 通信使에 대한 日本의 儀式茶禮 硏究, 원광대학교, 이와가타 히사히코, 19세기 朝鮮의 對日 易地通信 硏究, 고려대학교, 일본에서 통신사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은 다음과 같다(CiNii 박사논문 검색을 이용했다). (1) 政治外交 三宅英利, 近世日朝関係史の研究, 九州大学, (2) 相互認識ㆍ文化交流

112 112 지역과 역사 38호 한국에서 간행된 박사논문 18편 중 통신사가 남긴 사행록 을 주제로 한 논 문이 10편, 문학ㆍ문화교류 4편, 미술ㆍ복장 2편, 정치외교ㆍ의례 2편 이었다. 사행록 및 문화교류에 관련된 연구가 전체 77%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 간행된 박사논문 12편 중 정치외교 1편, 상호인식ㆍ문화 교류 6편, 美術ㆍ服飾 2편, 기타 3편이다. 상호인식ㆍ문화교류 가 전체 50 로 가장 많았다. 공교롭게도 한일 양국의 연구경향에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 문학, 문화 교류 연구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통신사 연구가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며, 한국에서는 통신사연구가 기행문학 연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외교사연구의 부재 또는 부진이다. 먼저 일 본의 경우 미야케 히데도시(三宅英利)의 체계적인 연구 성과가 있다는 점이 클 것이다. 그리고 박사 논문은 아니지만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의 연구 성과를 통해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는 인식이 역시 있는 것 같다.18) 한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90년대 손승철과 민덕기의 연구를 통해 조 선의 교린책에 대한 총합적인 검토가 일단 끝났다는 점이 크다. 더 나아가 일본의 연구 성과도 번역서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따라가기 바빴다는 것 李元植, 朝鮮通信使の訪日と筆談唱和の研究, 京都大学, 梅村佳代, 日本近世民衆教育史研究, 名古屋大学, 박찬기, 朝鮮通信使と日本 近世文學, 二松學舍大學, 姜錫元, 上田秋成の研究-朝鮮をめぐる秋 成国学の世界, 大阪大学, 文嬉眞, 前近代における韓国の日本認識通信使が見た日本, 名古屋大学, 鄭英實, 朝鮮通信使と日本知識人の 相互認識研究:雨森芳洲ㆍ新井白石ㆍ林羅山と林家を中心に, 関西大学, (3) 美術,服飾 洪善杓, 近世韓日絵画交流史研究, 九州大学, 鄭銀志, 朝鮮通信使 の服飾に関する研究, 日本女子大学, (4) 기타 西嶋啓一郎, 風景生成における心的過程に関する研究:朝鮮通信使を例として, 九州工業大学, 韓承希, 近世における朝日関係に関する総合的考察:朝 鮮通信使を中心として, 兵庫教育大学, 横山恭子, 朝鮮通信使迎送体 制の研究, 慶應義塾大学, ) 三宅英利 저, 孫承喆 역, 앞의 책, 仲尾宏, ꡔ朝鮮通信使と德川幕府ꡕ, 明石書店, 1997.

113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13 이다. 손승철은 조선시대 교린책에 주목하며 조선의 대일정책을 밝히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책봉 과 조공 이라는 동아시아국제질서를 한일관계에 적용해 1607~1635년까지를 중화적 교린체제 부활, 1636~1810년까지를 탈 중화의 교린체제, 1811~1872년까지를 교린체제의 변질과 붕괴 로 파 악했다.19) 또 민덕기는 조선전기를 연구했는데, 손승철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즉 책봉은 조선전기의 교린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상대국을 夷 로 간주하지도 화이관도 없었다. 그래서 책봉체제론 이나 화이질서 론으 로 교린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등 관계의 교린(적례교린)과 상하관계의 교린(기미권 교린)을 각각 지향했다고 결론을 내렸다.20) 결국, 2000년대에 들어서 두 사람의 연구를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는 연구가 없어 서 차이점은 그대로 유지되고, 학설로 정착되었다. 후술하겠지만, 기존의 교린에 대한 이해방식은 현재 도전을 받고 있으며 체계적인 검토가 시급하 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편 한일역전 현상은 학술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경진ㆍ박혜민 의 연구에 의하면, 통신사와 일본문인들 간의 필담ㆍ수창을 연구대상을 한 논문이 2000년~2010년 사이에 약 300편 발표되었다고 한다.21) 그러나 아쉬운 것은 전체의 목록이 없어서 과연 어떤 논문인지 알 길이 없다는 점 이다. 물론 지금은 여러 분야에서 통신사 논문이 발표되는 상황에서 모든 논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단 범위를 2002년~ 2015년까지로 확대하며 KCI등재지 및 등재후보지에 한정해 조사를 시도했 다, 단행본의 경우 학술지 논문과 중복될 수가 있어서 학술지 논문만을 대 상으로 했다. 또 2002년으로 연도를 설정한 이유는, 2001년까지 3~4편이 19) 孫承喆, ꡔ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ꡕ, 지성의 샘, 1994, 14쪽. 20) 민덕기, ꡔ前近代 동아시아세계의 韓ㆍ日관계ꡕ, 경인문화사, 2007, 서론과 1장 참조(이 책은 이미 일본에서 출판된 ꡔ前近代東アジアのなかの韓日關係ꡕ, 早稲 田大学出版部, 1994를 저자가 번역출판한 것이다). 21) 허경진ㆍ박혜민, 이덕무의 필담창화집 문학연구 ꡔ통신사 필담창화집 문학연 구ꡕ, 보고사, 2010, 364쪽, 각주4번.

114 114 지역과 역사 38호 었던 논문발표가 2002년에 10편 이상 발표되고 그 후에도 꾸준히 증가하였 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약 310편의 논문이 발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여 기에는 저서로 출판되거나 학술대회 발표문은 포함되지 않는다. 10편 이상 통신사 관련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로서 구지현(문학) 21편, 한태문(문학) 18편, 미노와 요시츠구(箕輪吉次)<1682년 통신사> 11편 등이 있다.22) 또한 일본의 연구 성과는 2005년에 발표된 제1기 ꡔ日韓歴史共同研究報 告書ꡕ 조선통신사(근세 편) 에 381편의 목록이 정리되어 있다. 다만 필자 와는 달리 자료집이나 저서까지 포함되어 있고 2002년까지만 수록했다.23) 필자는 한국연구와 비교하기 위해 2002~15년까지 발표된 학술논문만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그 결과 약 70편 정도 발표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 인 연구자로 尹芝惠 5편, 鄭銀志 5편, 横山恭子 4편, 夫馬進 3편, 鄭英實 3편 등이 있다.24) 이처럼 한국에서 일어난 통신사연구의 확대는 앞으로의 통신사 연구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22) 조사 방법은 RISS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연구휘보를 이용했다. 검색어는 조선통신사, 통신사 이다. 이번 조사는 조선후기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 전기 통신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등재지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통 신사학회가 간행한 ꡔ조선통신사연구ꡕ의 결과물 약 37편은 제외했다. 23) 吉田光男, 田代和生, 六反田豊, 伊藤幸司, 橋本雄, 米谷均, 조선통신사(근세 편) ꡔ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第1期)ꡕ, 일한문화교류기금 ( 24) 조사 방법은 국립정보학연구소 CiNii를 이용했다. 검색어는 조선통신사, 통신 사 이다. 그리고 강의록, 발표문, 10페이지 이하의 짧은 글은 제외했다. 이번 조 사에서 빠진 논문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일본의 연구 성과에 대한 전체 목록은 지면 관계상 싣지 못했다. 앞으로 보완 작업을 거쳐 별도 논문으로 발표 할 계획이다.

115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15 Ⅱ. 조선통신사 연구의 한계 조선 외교는 사대교린 이므로, 교린의 대상인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한 것이다. 그래서 선린연구의 확산 이후 교린은 선린관계의 대명사처럼 인식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조선전기의 교린 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 제기가 나 와 주목된다. 키무라 타쿠(木村拓)는 조선이 대일외교로 인해 명나라로부 터 問罪를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交隣을 私交 로 규정 하며, 일본이 요청하면 할 수 없이 허락하는 형태로 교린을 운영했다고 봤 다.25)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빠르나, 혹시 조선후기 대일외교에서 조선이 보여준 소극적인 모습에는 임란의 영향 이외에도 私交 문제가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후마 수수무(夫馬進) 도 교린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는 조선은 중국(大國)에 사대를 바치지만, 주변국(小國)들에는 대 국의 입장으로 교린에 임했다고 하면서, 조선이 상하관계의 교린을 운영했 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조선전기에 고려대장경을 일본이 요청할 때마다 하 사한 것이다. 조선은 대국으로서 소국에 仁과 禮를 전하야 한다는 내적인 동기가 있었다.26) 한국에서는 정다함의 문제 제기가 있다. 그는 교린이라는 용어는 原典 상 으로는 互惠的ㆍ理想的 관계를 의미하지만, 실제 교린에는 문화적인 위계 질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항상 조선을 위에 두고 여진과 대마도, 바쿠후는 조선의 선진문화를 전수 받는 수혜자로 설정했다. 조선의 문명을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당연시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에 대해서도 반성하거나, 실은 문명의 실체가 중화문명을 수용한 것이라는 신중한 고려가 없었다고 비판했다.27) 단순히 교린의 어원을 밝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연구자들의 25) 木村拓, 朝鮮王朝世宗による事大交隣兩立の企圖 ꡔ朝鮮學報ꡕ 221, ) 夫馬進, 앞의 책, 31~33쪽. 27) 정다함, 事大 와 交隣 과 小中華 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 략 ꡔ韓國史學報ꡕ 42, 2011, 302~304쪽.

116 116 지역과 역사 38호 문제의식까지 분석한 연구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지금까지 논한 것처럼 조 선통신사는 한일관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통신사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일이다. 그러나 문제점도 지적할 수밖에 없 다. 통신사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교린에 관한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다. 선 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교린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그동안 진행 된 선린 이라는 구도를 넘은 새로운 시각이 절실하다. 선린연구는 이제 보 완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8) 교린에 관한 명확한 답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의 시기구분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통신사의 시기구분은 미야케 히데도시(三宅 英利)와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가 조일관계사의 시 각으로 시도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본사의 관점에서 시기구분을 한 점 이다. 즉 바쿠후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미야케는 통신사를 아래와 같이 시기 구분했다.29) ① 국교재개기(1608, 1617, 1624) ② 전기 안정기(1636, 1643, 1655, 1682) ③ 改變期(1711) ④ 안정기(후기)(1719, 1748, 1763) ⑤ 쇠퇴기(1811)로 또 나카오는 아래와 같이 시기 구분했다.30) ① 국교재개기(1607, 1617, 1624) ② 신통교체제 확립기(1636, 1643, 1655, 1682, 1711) ③ 상대적 안정기 또는 舊慣墨守期(1719, 1748, 1763) ④ 동요기(1811~1867) 두 연구자의 차이점은 1711년 통신사의 평가이다. 나카오는 바쿠후의 의 28) 교린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만큼 쟁점도 많다. 이번 연구에 서 모든 쟁점을 검토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번 연구에서는 일단 교린에 대한 문제 제기만 하고, 필자의 교린에 대한 생각은 지면 관계상 별도의 논고로 발표하도록 한다. 29) 三宅英利, 앞의 책, 1991, 450쪽. 30) 仲尾宏, 앞의 책, 1997, 20~22쪽.

117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17 례 개편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책상 변화가 없다고 하며 1711년 통신 사를 2期에 포함해 쇠퇴기를 1867년까지로 했다. 즉 미야케는 쇠퇴기를 통 신사 파견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나카오는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인해 바 쿠후가 소멸한 1867년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나 河宇鳳은 미야케의 시기구분은 일본의 정치적인 변화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시기 구분했다.31) ① 교린관계회복 교섭기(1599~1635) ② 교린체제의 확립 및 안정기(1636~1811) ③ 쇠퇴기(1812~1867) 또 한태문은 사행문학의 관점에서 시기 구분했다.32) ① 교린체제 모색기(1607, 1617, 1624)의 문학 ② 교린체제 확립기(1636, 1643, 1655)의 문학 ③ 교린체제 안정기(1682, 1711, 1719, 1743, 1763)의 문학 ④ 교린체제 와해기(1811)의 문학 선행 시기구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한국인 연구자들이 사용한 교린 용어에 관한 심층 연구가 필요하 다. 교린을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따라 통신사의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다 만 합의점을 찾을 때까지는 조건부 인정이 가능하다고 보고, 앞으로의 연구 성과를 기대한다. 둘째,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18세기 통신사를 幕藩체제 안정기 또 는 상대적 안정기 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18세기에 이루어진 개혁은 31) 河宇鳳, 壬辰倭亂以後의 日本關係 ꡔ港都釜山ꡕ 9, 1992, 82~95쪽. 32) 한태문, 朝鮮後期 通信使 使行文學의 特徵과 文學史的 意義-交隣體制 安定期 (1682~1763)의 ꡔ사행록ꡕ을 중심으로-, 조규익ㆍ정영문 엮음, ꡔ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ꡕ 2, 학고방, 2008, 373쪽. 또 이원순, 이혜순, 김문식 등도 시기구분을 하고 있으나 큰 틀은 다르지 않았다 (정영문, 사행의 시기별 유형과 성격 ꡔ朝鮮時代 通信使文學硏究ꡕ, 지식과 교 양, 2011, 4~50쪽).

118 118 지역과 역사 38호 1711년 아라이 하쿠세키의 통신사 접대개편이 유일하다. 그러나 1719년 통신사를 제외하고 통신사 규모를 줄이자는 논의가 계속 있었다.33) 18세기 통신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 역시 필요하다. 기존의 선린우호의 시기라는 이해보다 개혁의 태동기 라는 시각을 제안하고 싶다. 셋째, 모든 연구자가 1811년 통신사 이후를 이른바 쇠퇴기 또는 와해기 로 보고 있다. 물론 19세기에는 이전 시기보다 통신사외교가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특히 통신사가 에도까지 가지 않았으므로 다양한 문화교류는 없 었다. 에도를 방문하지 않았던 오사카 역지통신을 연구자들이 회피한 것도 문화사적 측면의 연구 가치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오사카 이후에도 대마 도 역지통신이 다시 추진되었는데, 이 시기를 주제로 한 연구논문은 전혀 없다. 그 결과 1811년 역지통신 이후의 조일관계의 실상은 파악하기 힘든 상태로 남아 있다. 선린우호 연구는 평화로운 문화교류라는 조선통신사의 존재를 널리 알리 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통신사의 발견으로 많은 일본인이 한국에 관 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의 위상도 조공사 부터 선린우호의 상징 으로 격상했다. 조선멸시와 싸워야 했던 재일한국인 학자들은 일본 각 지에 산재한 조선통신사의 유물에 주목했다. 그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 문화를 선진문화로 여겨 좋아하거나 열광하는 모습을 찾아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 하나의 결과물이 신기수가 감수한 ꡔ善隣 と友好の記録大系朝鮮通信使ꡕ이다.34) 따져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과연 통신사가 문화사절단인지 아니 면 정치적인 사명감이 있는 사절단인지다. 만일 통신사가 문화사절단으로서 의 성격이 강하면 문화교류 중심의 기존 연구 경향은 앞으로도 확대해 나가 야 할 것이다. 반대로 정치적인 사명감이 있는 사절단이었다면 기존의 연구 경향은 일정 정도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문화사절단이 아니라 정치 33) 이와가타 히사히코, 18世紀の通信使改革論 ꡔ日本文化硏究ꡕ 39, 2011 참조. 34) 辛基秀, 仲尾宏 編, ꡔ善隣と友好の記録大系朝鮮通信使ꡕ 1~8, 明石書店, 1993~1996.

119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19 적인 목적을 가진 사절단으로 본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 현지에서 문화교류 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행위였고, 통신사 파견 목적 은 국서를 쇼군이 거주한 에도에 가서 직접 전달하는 의례행위였다. 양국의 우호관계는 통신사의 에도 방문을 통해서 재확인되고 유지되었다. 그리고 통신사 파견 목적이 정치적인 의례행위에 있다면 이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조선통신사 연구가 진행되고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가 이루어짐에 따라 취약 점이 발견된 것이다. 선린우호 연구는 이제 전환점에 와 있다. 실마리는 역지통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역지통신은 필자가 지적한 시기 구분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첫 번째로 지적한 교린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린에 대한 조정 내부의 논의과정을 살 피는 것이 필수적인데, 다른 시기에는 논의 과정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역 지통신 교섭시기에는 교린 문제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교린을 재 검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지적한 18세기를 어떻게 볼 것 인가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역지통신 교섭은 18세기에 시작하며 19세기에 끝나기 때문에 기존의 시각과 다른 관점에서 18세기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 다. 세 번째 19세기 통신사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1811년 역지통신과 시행 되지 않았던 역지통신 교섭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아직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는 점이다.35) 그러므로 조선통신사 연구의 보완 작업에는 역지통 신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Ⅲ. 역지통신의 연구사 선린우호의 시각이 주류였기 때문에 역지통신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대마도 역지통신 연구에서 다보하 시 키요시(田保橋潔)의 연구는 독보적이다. 다보하시의 연구는 최초의 연 35) 자세한 것은 이와가타 히사히코, 앞의 박사학위논문, 2014 참조.

120 120 지역과 역사 38호 구인 동시에 현재에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연구 성과이다. 다보하시는 조선 자료뿐만 아니라 대마도종가문서까지 활용하면서 역지통신을 검토했다. 다 보하시의 목적이 바쿠후의 외교정책을 밝히는 데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외 교정책은 소략했다. 물론 조선의 외교정책에 관한 연구 성과가 거의 없는 시기라는 시대적인 한계도 있었다.36) 김정희 연구자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는 한ㆍ중ㆍ일의 문화교류에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한 사람이다. 그는 對馬における日ㆍ鮮學人の文化 工作と淸朝學 에서 김선신에 주목했다. 김선신은 역지통신 때 서기로서 일 본을 방문했고, 연행사 군관으로도 북경을 방문했다. 김선신과 일본문사의 교류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역지통신을 문화교류에 관점에서 연구했다.37) 다보하시와 후지츠카의 연구 이후 역지통신뿐만 아니라 통신사도 이렇다 연구 성과가 없었다. 이원식은 1973년에 다보하시와 달리 문화사의 관점에 서 역지통신을 연구했다.38) 이원식은 문화교류라는 관점에서 연구를 계속 해 1991년에 ꡔ조선통신사ꡕ를 출판했다. 앞서 언급한 1920년대 마쯔다와 1940년대 구로다의 연구를 계승한 것이다.39) 1970년대에는 이외에도 長正統과 가수야 켄이치(糟谷憲一) 연구가 있 다. 長正統은 역지교섭 때 조선 역관과 대마도 통사가 주고받은 8통의 한글 편지를 분석했다.40) 가수야의 연구는 조선 자료를 활용하면서 통신사가 36) 田保橋潔,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上, ꡔ東洋學報ꡕ 23-3, 1936 ; 朝鮮國 通信使易地行聘考 中, ꡔ東洋學報ꡕ 23-4, 1936 ;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下1, ꡔ東洋學報ꡕ 24-2, 1937 ;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下2, ꡔ東洋學報ꡕ 24-3, ) 藤塚鄰, 對馬における日ㆍ鮮學人の文化工作と淸朝學 ꡔ日鮮淸の文化交流ꡕ, 中文館書店, 그의 박사 논문이 1975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는데, 2009년에는 한국어로 번 역출판 되었다. ꡔ清朝文化東傳の研究 : 嘉慶ㆍ道光学壇と李朝の金阮堂ꡕ, 国書 刊行会, 1975 ; ꡔ秋史 金正喜 硏究 淸朝文化 東傳의 研究ꡕ, 과천문화원, ) 李元植, 純祖十一年 辛未日本通信使 差遣에 對하여-對馬島易地通聘을 中心 으로- ꡔ史學硏究ꡕ 23, ) 松田甲, 앞의 책, 1926 참조. 黑田省三, 앞의 책, 1942~43 참조. 이원식, ꡔ조 선통신사ꡕ, 민음사, 1991.

121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년 이후 왜 단절되는지를 밝힌 것이다. 가수야의 연구는 통신사의 단 절을 재정적인 이유에서 찾는 연구의 근거가 되었다.41) 미야케 히데도시(三宅英利)는 60년대부터 통신사 논문을 발표해, 조선시 대 통신사를 체계화했다. 그의 연구 성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한국에서 도 번역본을 통해 소개되었다.42) 그러나 역지통신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다보하시 연구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정성일이 역지통신의 참가인원을 분석한 연구와 조선이 역지 통신 실시를 전후해서 禮單蔘을 山蔘으로부터 家蔘에 바뀐 교섭과정을 검 토했다. 역지통신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논문이다.43) 1997년에는 나카오 히로시(仲尾宏)가 조선후기 통신사에 관한 총합적인 연구물을 출판했다. 나카오는 역지통신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변 화를 밝혔지만, 조선의 외교정책까지 밝히지 못했다.44)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역지통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년에는 이승민이 역지통신 시행을 앞두고 체결된 1809년 기사약조에 대해 분석했다. 이 약조는 조선이 역지통신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조일무역의 폐 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45) 또 같은 해에 종합적인 조명이 이루어졌 40) 長正統, 倭学訳官書簡よりみた易地行聘交渉 ꡔ史淵ꡕ 115, 최근 한글 서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김주필ㆍ岸田文隆, 対馬島宗家文庫所蔵한글書簡의 性格과 特徵, 2012年10 月7日, 朝鮮学会発表자료. 정승혜, 한글 簡札을 통해 본 近世 譯官의 對日外 交에 대하여 ꡔ대동한문학ꡕ 37, 2012 ; 조선통사(朝鮮通事)가 남긴 대마도 (對馬島)의 한글편지에 대하여 ꡔ어문논집ꡕ 65, 양흥숙ㆍ김동철ㆍ조강 희ㆍ김경미, 對馬島 易地通信과 譯官, 그 의례적 관계와 은밀한 교류의 간극 ꡔ韓日關係史硏究ꡕ 50, ) 糟谷憲一, なぜ朝鮮通信使は廃止されたか ꡔ歴史評論ꡕ 355, ) 三宅英利, ꡔ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ꡕ, 文獻出版, ) 鄭成一, 對馬島易地聘禮에 참가한 통신사 일행에 대하여ꡕ, ꡔ湖南文化硏究ꡕ 20, 1991 ; 易地聘禮 실시 전후 對日貿易의 動向(1809~1812) ꡔ經濟史學ꡕ 15, ) 仲尾宏, 辛未ㆍ文化度(1811년) ꡔ朝鮮通信使と徳川幕府ꡕ, 明石書店, ) 이승민, 조선후기 대일무역상의 폐해와 己巳約條(1809)의 체결, ꡔ韓日關係

122 122 지역과 역사 38호 다. 金德珍, 1811년 通信使의 使行費와 戶曹의 부담, 卞光錫, 1811년 通信使 파견과 慶尙道의 財政 부담,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 일본의 조선통신사 접대와 도쿠가와 바쿠후의 재정-道中人馬役을 中心으로-, 李 薰, 朝鮮通信使 접대와 對馬藩의 재정 46) 金德珍과 卞光錫의 연구는 조 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때 호조와 경상도가 얼마나 부담을 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케우치 사토시는 바쿠후의 통신사 접대에 관한 재정 부담을 연구 했다. 이훈의 연구는 대마도의 통신사 접대비용을 산출한 것이지만, 동시에 바쿠후의 재정지원도 다루고 있다. 일본의 재정부담은 기존의 연구에도 강 조되었지만, 대마도의 재정 문제도 일련의 연구를 통해 파악할 수 있게 되 었다. 2006년 일본에서는 역지통신을 사상사에서 다룬 연구가 나왔다. 오쿠야 고이치(奥谷浩一)는 일본사상사의 관점에서 역지통신의 사상사적인 배경을 고찰했다.47) 그러나 일본의 지식인들에 관한 논의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에 황은영은 1811년 수행서원 이의양에 대해 연구했고, 같은 해 신로사는 서기 金善臣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제 역지통신 연구가 문화사까 지 확대한 것을 알 수 있다.48) 이케우치는 1811년 대마도 역지통신 교섭을 앞서 이루어진 통신사 연기교섭을 연구했다. 그는 마쯔다이라 사다노부(松 史硏究ꡕ 22, ) 金德珍, 1811년 通信使의 使行費와 戶曹의 부담 ꡔ역사와 경계ꡕ 55, 卞光錫, 1811년 通信使 파견과 慶尙道의 財政 부담 ꡔ역사와 경계ꡕ 55, 池内敏, 일본의 조선통신사 접대와 도쿠가와 바쿠후의 재정-道中人馬役 을 中心으로- ꡔ역사와 경계ꡕ 55, 李薰, 朝鮮通信使 접대와 對馬藩의 재정 ꡔ역사와 경계ꡕ 55, ) 奥谷浩一, 朝鮮通信使47年間の空白と易地聘禮にかんする思想史的考察 ꡔ札 幌學院大學人文學紀要ꡕ 80, ) 황은영, 1811년 신미통신사 수행서원 이의양에 대하여 ꡔ江原史學ꡕ 22ㆍ23, 구영진, 12차 통신사 필답집의 특집 ꡔ洌上古典硏究ꡕ 29, 신로 사, 金善臣의 生涯와 그의 著作에 관한 一考 ꡔ東方漢文學ꡕ 36, 2008 ; 辛 未(1811) 通信使行과 문화 교류에 관하여 ꡔ漢文學報ꡕ 23, 2010 ; 辛未通信 使(1811)를 통한 朝日 교류와 그 이면 ꡔ韓國實學硏究ꡕ 22, 2011.

123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23 平定信)가 연기교섭 때 相國寺의 승려 바이소우 켄조우(梅莊顯常)와 어떻 게 관여했는지를 고찰했다.49) 신로사는 2011년에 1811년 辛未通信使行 과 朝日문화교류: 筆談ㆍ唱酬를 중심으로 는 제목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ꡔ국역 海行總載ꡕ에는 군관 柳相弼의 사행록만이 있어 서 다른 사람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 연구는 서기 김선신, 이명오, 제술관 이현상 등의 시문 교류를 처음으로 밝혔다.50) 역지통신의 문화교류 연구도 이어지고 있다. 정은지는 그림 자료를 통해 조선통시사의 金冠朝服의 변천을 밝혔다. 역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 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51) 정은주는 역지통신 때 이루어진 서화교류와 외교의례를 기록한 서화를 검토했다.52) 졸저는 역지통신을 일본의 외교정책으로 이해하는 연구가 대부분이었지 만, 조선의 시각으로 조선의 외교정책에서 보려고 한 것이다. 또한, 1811년 역지통신 이외에도 오사카 역지통신도 검토했다.53) 지금까지 본 것처럼 역지통신 연구는 최근 증가세를 보인다. 이것은 연구 자들이 선린 이라는 키워드에서 벗어나 영역을 확대한 결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70년 전에 발표된 다보하시 연구의 틀을 벗 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다보하시 연구의 모두가 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교린관계 속의 통신사 외교를 이제 해결하려는 시도 가 필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보하시의 시대에는 교린의 연구 성과 가 없었기 때문에, 제도의 변화과정을 통해 역지통신을 이해했다. 무엇보다 조선의 외교정책 변화에 인색했다는 측면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지금 49) 池内敏, 조선통신사 연빙 교섭과 梅莊顯常 ꡔ한일교류와 상극의 역사ꡕ, 경인 문화사, ) 신로사, 앞의 박사학위논문, ) 정은지, 絵画資料における朝鮮通信使の金冠朝服の変遷 ꡔ朝鮮通信使研究ꡕ 18, ) 정은주, 1811년 쓰시마 통신사행의 서화교류 ꡔ동아시아문화연구ꡕ 60, 2015 ; 1811년 신미통신사 빙례 관련 회화 연구 ꡔ정신문화연구ꡕ 38-1, ) 이와가타 히사히코, 앞의 박사학위논문, 2014.

124 124 지역과 역사 38호 절실한 것은 조선의 시각에서 교린이 무엇이며, 통신사는 무엇인지를 밝히 는 일이다. 지금은 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의 모습은 보이지만, 통신사를 보낸 조선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조선의 외교 정책을 밝히는 연구 성과가 기다린다. Ⅳ. 앞으로의 제안 善隣友好 연구가 진행되기 전, 일본에서는 무관심 속에서 통신사를 멸 시 하는 풍조였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연구자들조차 그다지 관심이 없는 주제이며 존재였다. 통신사는 확실한 검증도 받지 못한 채 조공사 라 는 낙인을 찍힌 것이다. 그 배경을 생각하면, 조선은 쇼군이 바뀔 때마다 통 신사를 보냈지만, 바쿠후는 조선국왕이 바꿔도 직접 국왕사를 보내지 않아 상호왕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뿐만 아니라 유구, 네덜란드 상인도 쇼군을 뵙기 위해 에도에 찾아왔다. 바쿠후는 그들 이 에도에 온 것을 쇼군에 대한 복속의례로 여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통신 사의 일본방문이 복속의례로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 다 그러한 에도시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잔존된 것이 문제였다. 이진희, 이원식, 신기수 등 재일 한국인 연구자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었 다. 그들은 對立 과 葛藤 이라는 한일관계의 고정적인 이해 방식을 벗어나 선린으로 조일관계를 재해석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이 조선후기 통신사였 고, 조선통신사 라는 명칭이 선택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후기 교린관계 를 조공관계 가 아닌 선란우호 로 재규정한 것이다.54) 그리고 조선통신사 가 일본에 남긴 유물은 문화선진국을 자부한 조선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 로 이해했다. 선린우호 연구는 통신사 연구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대하 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54) 池内敏, 朝鮮通信使 使行이 끝난 후에 ꡔ조선통신사연구ꡕ 10, 2010, 25쪽.

125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25 그러나 최근 조선의 외교정책에 관한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자, 교린을 선 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실은 조선통신사연구는 바 쿠후의 평화외교를 평가한 것으로 조선의 외교정책에 관한 관심은 상대적으 로 적었다. 조선통신사 연구에는 조선외교에 대한 평가 작업이 빠져있었다. 예를 들어, 조일양국이 교린을 지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에서 말하는 교린과 조선이 말하는 교린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교린에 관한 문제 제기는 조선통신사 연구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정다함의 지적처럼 원래 교린의 뜻과 달리 호혜적 이기거나 이상적 이지도 않는 교린 외교를 선린 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르다.55) 선린연구는 일본 의 조선멸시를 극복했을지 모르나, 조선의 일본멸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 는지도 필자는 의문이다. 서로 멸시하는 선린관계는 과연 성립하는지 등이 다. 이처럼 선린의 틀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뿐만 아니다. 조선통신사연구는 선린 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멸시와 선 린을 동시에 평가할 수 없었다. 한번 선린연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제외되기 마련이다. 선린연구를 선린연구사관 이라고 표현하기는 어색하지 만, 하나의 사관처럼 역할이 커지다 보니 부작용도 보이기 마련이다. 통신 사행의 시문 교류를 높이 평가하다 보니 신유한과 아메노머리 호슈(雨森芳 洲)의 교류는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되었으니, 1811년 대마도역지통신 은 연구대상에서 제외되기 쉬웠다.56) 분명히 역사적인 가치가 있음에도 불 구하고 외면만 당하게 되었다. 조선통신사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거론되는 지금이, 조선통신사의 문제 점을 고쳐 재구성할 좋은 기회이라고 생각한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필 55) 정다함, 앞의 논문, 2011 재인용. 56) 이진희는 18세기 말에 싹튼 조선멸시 사상은 19세기에 들어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졌다. 18세기 말경부터 해방론 이 대두하는 가운데 나카이 치쿠잔이 老中마 쯔다이라 사다노부에게 ꡔ草茅危言ꡕ을 보냈다 고 지적하며 조선멸시가 역지에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李進熙, ꡔ江戸時代の日本と朝鮮 : 李朝の通信使ꡕ, 講談 社, 1976, 225쪽).

126 126 지역과역사 38 호 자는두가지문제점을지적하며해결방안을제안하고자한다. 첫째, 조선통신사는교린에대한문제제기를해결할필요가있다. 선행연구는교린과통신사의관계가분명하지않았다. 즉조선의외교정책연구의부재에서나온당연한결과인것이다. 연구를주도해온일본연구자들은일본의통신사개혁만언급하고, 조선의통신사개혁에는관심이없었다. 그래서조선이교린을어떻게생각해통신사를보내는지를밝히는작업이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 필자는역지통신을통해접근하는방안을제안하고싶다. 역지통신은시행까지 20년이라는오랜시간을필요했기때문에, 다른시기보다교린에대한언설이자주등장한다. 즉교린에대한고민이어느시기보다깊었던시기라는점이다. 그리고통신사교섭에임하는조선의자세도주목할필요가있다. 역지통신은조선이교섭의주도권을갖고원하는결과를얻을때까지양보하지않아, 일본이항상적극적이고조선이항상소극적이라는인식과는다른모습을보인다. 다시말해결론을내리지못한교린을다른시각에서접근할수있는좋은사례연구가될것이다. 둘째, 멸시, 조공사 도재검토가필요하다. 이러한용어를 21세기에사는우리기준으로이해하고나해석하는오류를범하지않았는지냉정하게판단해야한다. 예를들어, 조공사 로본것을문제로삼기보다위정자들이정치적으로어떻게활용했는지, 그리고어떤정책적인역할을했는지주목해야한다. 중요한것은지금우리의인식이아니라조선시대사람들의인식인것을명심해야한다. 그리고 조공사 취급했다는것과실체로 조공사 였다는것은전혀다른문제다. 그런데도아직논쟁이끝나지않는것은, 에도시대외교연구가아직도과거의틀을벗어나지못한다는뜻이다. 조공사 문제는어디까지나일본의일반적인주장이며조선이인정한사실은없다. 그동안조선멸시문제가나올때마다역지통신이항상언급되었다. 결국 멸시 와 조공사 도역지통신과관련지어사실여부부터검토할필요가있다. 역지통신을추진한목적이조선통신사연구자들이주장한것이맞는지, 아니면다른목적인지검토할필요가있다. 57) 이제조선통신사연구는 1811 년역지통신에관심을가져야한다고생각한다. 마지막으로현재한일관계

127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27 가 마무리 어렵다고 해도 조선시대 조일관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역사에 배우는 자세는 중요하지만 지나치면 역사적 인 사실에서 멀어진다. 조선통신사는 전근대사회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입각 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조선통신사는 지금보다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ꡔ동아일보ꡕ, ꡔ조선일보ꡕ, ꡔ한국일보ꡕ 映画 ꡔ江戸時代の朝鮮通信使ꡕ 구영진, 12차 통신사 필답집의 특집 ꡔ洌上古典硏究ꡕ 29, 金德珍, 1811년 通信使의 使行費와 戶曹의 부담 ꡔ역사와 경계ꡕ 55, 김주필ㆍ岸田文隆, 対馬島宗家文庫所蔵한글書簡의 性格과 特徵, 2012年10月7 日, 朝鮮学会発表資料. 金台俊, ꡔ朝鮮漢文学史ꡕ, 조선어문학회, 金泰俊 외편, ꡔ韓日文化交流史ꡕ, 민문고, 민덕기, ꡔ前近代 동아시아세계의 韓ㆍ日관계ꡕ, 경인문화사, 卞光錫, 1811년 通信使 파견과 慶尙道의 財政 부담 ꡔ역사와 경계ꡕ 55, 三宅英利 저, 김세민ㆍ강대덕ㆍ유재춘ㆍ엄찬호 역, ꡔ조선통신사와 일본ꡕ, 지성의 샘, 三宅英利 저, 孫承喆 역, ꡔ근세한일관계사연구ꡕ, 이론과 실천, 三宅英利 저, 河宇鳳 역, ꡔ역사적으로 본 일본인의 한국관ꡕ, 풀빛, 孫承喆, ꡔ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ꡕ, 지성의 샘, 孫承喆, 조선시대 通信使硏究의 회고와 전망 ꡔ韓日關係史硏究ꡕ 16, 孫承喆, ꡔ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교린관계의 허와 실ꡕ, 경인문화사, 신로사, 金善臣의 生涯와 그의 著作에 관한 一考 ꡔ東方漢文學ꡕ 36, 신로사, 辛未(1811) 通信使行과 문화 교류에 관하여 ꡔ漢文學報ꡕ 23, ) 필자는 일본의 외교정책을 御威光의 시각에서 논한 적이 있다(이와가타 히사히 코, 正祖代 대마도 易地通信 교섭과 江戶通信 연구 ꡔ韓日關係史硏究ꡕ 52, 2015).

128 128 지역과 역사 38호 신로사, 辛未通信使(1811)를 통한 朝日 교류와 그 이면 ꡔ韓國實學硏究ꡕ 22, 신성순, 이근성, ꡔ조선통신사ꡕ, 중앙일보, 양흥숙ㆍ김동철ㆍ조강희ㆍ김경미, 對馬島 易地通信과 譯官, 그 의례적 관계와 은 밀한 교류의 간극 ꡔ韓日關係史硏究ꡕ 50, 이승민, 조선후기 대일무역상의 폐해와 己巳約條(1809)의 체결, ꡔ韓日關係史硏究ꡕ 22, 이와가타 히사히코, 1811年 對馬島易地通信硏究-기미책을 중심으로-, ꡔ韓日關係 史硏究ꡕ 23, 이와가타 히사히코, 18世紀の通信使改革論 ꡔ日本文化硏究ꡕ 39, 이와가타 히사히코, 19세기 朝鮮의 對日 易地通信 硏究, 고려대학교 博士學位論 文, 이와가타 히사히코, 正祖代 대마도 易地通信교섭과 江戶通信 연구 ꡔ韓日關係史硏 究ꡕ 52, 李元植, 純祖十一年 辛未日本通信使 差遣에 對하여-對馬島易地通聘을 中心으로-, ꡔ史學硏究ꡕ 23, 이원식, ꡔ조선통신사ꡕ, 민음사, 李進熙, ꡔ韓国과 日本文化ꡕ, 乙酉文化社, 李進熙, ꡔ韓国속의 日本 : 李進熙 歷史紀行ꡕ, 同和出版社, 李 薰, 朝鮮通信使 접대와 對馬藩의 재정 ꡔ역사와 경계ꡕ 55, 田代和生 저, 孫承喆ㆍ柳在春 역, ꡔ近世韓日外交秘史; 国書改作과 韓日外交의 심층 분석ꡕ, 江原大学校出版部, 정다함, 事大 와 交隣 과 小中華 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략 ꡔ韓 國史學報ꡕ 42, 鄭成一, 對馬島易地聘禮에 참가한 통신사 일행에 대하여ꡕ, ꡔ湖南文化硏究ꡕ 20, 鄭成一, 易地聘禮 실시 전후 對日貿易의 動向(1809~1812) ꡔ經濟史學ꡕ 15, 정승혜, 한글 簡札을 통해 본 近世 譯官의 對日外交에 대하여 ꡔ대동한문학ꡕ 37, 정승혜, 조선통사(朝鮮通事)가 남긴 대마도(對馬島)의 한글편지에 대하여 ꡔ어문 논집ꡕ 65, 정영문, 사행의 시기별 유형과 성격 ꡔ朝鮮時代 通信使文學硏究ꡕ, 지식과 교양, 정은주, 1811년 쓰시마 통신사행의 서화교류 ꡔ동아시아문화연구ꡕ 60, 정은주, 1811년 신미통신사 빙례 관련 회화 연구 ꡔ정신문화연구ꡕ 38-1, 정은지, 絵画資料における朝鮮通信使の金冠朝服の変遷 ꡔ朝鮮通信使研究ꡕ 18, 2014.

129 조선통신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129 中村榮孝 외, 金龍鮮 역, ꡔ朝鮮通信使 日本은 우리가 키웠다 ꡕ, 東湖書館, 池内敏, 일본의 조선통신사 접대와 도쿠가와 바쿠후의 재정-道中人馬役을 中心으로- ꡔ역사와 경계ꡕ 55, 池内敏, 조선통신사 연빙 교섭과 梅莊顯常 ꡔ한일교류와 상극의 역사ꡕ, 경인문화사, 池内敏, 朝鮮通信使 使行이 끝난 후에 ꡔ조선통신사연구ꡕ 10, 河宇鳳, 壬辰倭亂以後의 日本關係 ꡔ港都釜山ꡕ 9, 한태문, 通信使 使行文学 硏究의 回顧와 展望, ꡔ국제어문ꡕ 27, 한태문, 朝鮮後期 通信使 使行文學의 特徵과 文學史的 意義-交隣體制 安定期 (1682~1763)의 ꡔ사행록ꡕ을 중심으로-, 조규익ㆍ정영문 엮음, ꡔ조선통신 사사행록 연구총서ꡕ 2, 학고방, 허경진ㆍ박혜민, 이덕무의 필담창화집 문학연구 ꡔ통신사 필담창화집 문학연구ꡕ, 보고사, 허신혜, 한일 중학교 교과서의 한일관계사 서술 및 관점 검토-조선 통신사 관련 기 술을 중심으로- ꡔ歷史敎育論叢ꡕ 50, 황은영, 1811년 신미통신사 수행서원 이의양에 대하여 ꡔ江原史學ꡕ 22ㆍ23, 姜在彦, 室町ㆍ江戸時代の善隣関係 ꡔ季刊三千里ꡕ 37, 三千里社, 岡田精司, 朝鮮人街道のこと ꡔ日本文化と朝鮮ꡕ 第一集, 朝鮮文化社, 藤田明, 江戸時代に於ける朝鮮使節の来朝について ꡔ歷史地理 朝鮮號ꡕ 藤塚鄰, 對馬における日ㆍ鮮學人の文化工作と淸朝學 ꡔ日鮮淸の文化交流ꡕ, 中文 館書店, 木村拓, 朝鮮王朝世宗による事大交隣兩立の企圖 ꡔ朝鮮學報ꡕ 221, 夫馬進, 朝鮮の外交原理, 事大 と 交隣 ꡔ朝鮮燕行使と朝鮮通信使ꡕ, 名古屋大 學出版會, 西川宏, 牛窓港に伝わる朝鮮の踊り ꡔ日本文化と朝鮮ꡕ 第一集, 朝鮮文化社, 松田甲, 德川時代の朝鮮通信使 ꡔ日鮮史話ꡕ 1, 朝鮮總督府, 辛基秀, 仲尾宏編, ꡔ善隣と友好の記録大系朝鮮通信使ꡕ 1~8, 明石書店, 1993~1996. 申維翰著, 姜在彦訳注, ꡔ海游録:朝鮮通信使の日本紀行ꡕ, 東洋文庫 252, 平凡社, 辻善之助, 徳川時代初期に於ける日韓の関係 ꡔ歷史地理 朝鮮號ꡕ, 映像文化協会編, ꡔ江戸時代の朝鮮通信使ꡕ, 毎日新聞社, 奥谷浩一, 朝鮮通信使47年間の空白と易地聘禮にかんする思想史的考察 ꡔ札幌學 院大學人文學紀要ꡕ 80, 2006.

130 130 지역과 역사 38호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1, ꡔ季刊三千里ꡕ 1号, 三千里社,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2, ꡔ季刊三千里ꡕ 2号, 三千里社,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3, ꡔ季刊三千里ꡕ 3号, 三千里社,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4, ꡔ季刊三千里ꡕ 4号, 三千里社,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5, ꡔ季刊三千里ꡕ 5号, 三千里社, 李進熙, 通信使の道をゆく 6, ꡔ季刊三千里ꡕ 6号, 三千里社, 李進熙, ꡔ江戸時代の日本と朝鮮 : 李朝の通信使ꡕ, 講談社, 李進熙, 秀吉の侵略と家康の善隣外交 ꡔ季刊三千里ꡕ 9号, 三千里社, 李進熙, 唐子踊りと朝鮮 ꡔ季刊三千里ꡕ 19号, 三千里社, 李進熙, ꡔ江戸時代の朝鮮通信使ꡕ, 講談社, 李進熙, 朝鮮通信使とはなにか, 李元植等, ꡔ朝鮮通信使と日本ꡕ, 學生社, 長正統, 倭学訳官書簡よりみた易地行聘交渉 ꡔ史淵ꡕ 115, 糟谷憲一, なぜ朝鮮通信使は廃止されたか ꡔ歴史評論ꡕ 355, 田保橋潔,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上, ꡔ東洋學報ꡕ 23-3, 東洋學術協會, 田保橋潔,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中, ꡔ東洋學報ꡕ 23-4, 東洋學術協會, 田保橋潔,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下1, ꡔ東洋學報ꡕ 24-2, 東洋學術協會, 田保橋潔,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聘考 下2, ꡔ東洋學報ꡕ 24-3, 東洋學術協會, 仲尾宏, ꡔ朝鮮通信使と德川幕府ꡕ, 明石書店, 黑田省三, ꡔ朝鮮通信使史話ꡕ 1~9, 人文社, 1942~43.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131 조선통신사연구에대한비판적검토와제안 131 Abstract Critical Review and Suggestion about Joseon Tongsinsa IWAKATA HISAHIKO Tongsinsa was indifferently recognized as paying tribute in Japan. Thus, Korean Japanese researchers, Jin-hee Lee, Won-sik Lee, Gi-soo Shin, and etc., started researches on the tongsinsa in late Joseon dynasty in perspective of a symbol of good-neighborly relations instead of delegation paying tribute. Accordingly, they made effort to understand Korea-Japan relationship in different aspects, beyond traditional way of understanding with confrontation and conflict. As the result, the tongsinsa was established in the center of good-neighborly relations. However, recent researches on foreign policies in Joseon dynasty suggested some cases regarding the tongsinsa beyond good-neighborly relations. In review of researches on the tongsinsa, Japan was impressively active and Korea was always passive. However, Yeokji Tongsin contained different information. It described that Joseon did not give up until they obtained what they wanted while they took leadership in the negotiation. It showed another aspect of Joseon s good-neighbor policy. Now, it became the time to study Yeokji Tongsin, which was relatively ignored in researches on foreign policy of good-neighborly relations. Before the tongsinsa would be listed in the World Register in 2017, problems of the tongsinsa in Joseon dynasty should be identified. For example, instead of pointing out that the tongsinsa was recognized to pay tribute, attentions should be paid to how politicians used the policy and in which the policy played a

132 132 지역과역사 38 호 political role. It was the same in the cases of Joseon dynasty. It would be accurately known in aspect of political or diplomatic effects. When the frame of contempt and good-neighborly relations would be reinforced through the process, it must be more supported. Keywords : Tongsinsa, Good-neighbor, Contempt, Good-neighborly Relations, Delegation Paying Tribute

133 ꡔ지역과 역사ꡕ 38, , 133~166쪽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연구논문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58)안 홍 좌* 머리말 Ⅰ. 다호리유적과 변진주조마국 1. 다호리지역의 유적현황과 그 성격 2. 변진주조마국의 위치 Ⅱ. 변진주조마국의 형성과 변천 1. 변진주조마국의 형성 2. 변진주조마국의 성장과 발전 3. 변진주조마국의 쇠퇴 맺음말 국문초록 가야사연구가 한ㆍ일관계사 연구에서 벗어나 가야를 주체로 한 연구로 전환하게된 것은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낙동강유역의 개발로 인한 고고자료의 확대와 ꡔ일본서기ꡕ 에 대한 재해석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가야 및 변한의 발전과정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그 시기 소 국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이어져 지역정치집단의 성장 및 대외관계 등과 같은 한정된 지역과 시기로 접근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안야국과 구야국을 비롯한 변한 12 국의 위치뿐만 아니라 그 세력의 발전과 쇠퇴에 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경향 속에서 창원지역의 정치집단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바 로 骨浦國과 卓淳國이다. 하지만 3세기까지 창원 인근 지역의 유적으로 볼 때 골포국과 는 다른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창원 동읍에는 현재까지 많은 지석묘유적이 조사되었다. 특히 봉산리를 비롯한 신방 * 창원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elecnext@changwon.ac.kr).

134 134 지역과 역사 38호 리, 용잠리 지역 지석묘의 경우 아주 강력한 지배세력이 이 지역에 있었음을 상정할 수 있는 유적으로 다호리유적과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봉산리를 비롯한 인 근 지석묘집단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弁辰走漕馬國이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호리는 지역적인 특성상 여러 교역로를 가지고 있었다. 변진주조마국은 이러한 교 역로와 뛰어난 철제품을 바탕으로 한군현, 일본, 그리고 변ㆍ진한 지역과 교류하면서 한반도 남부 무역의 중심지로서 발달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2세기경 국제정세의 혼란으로 인한 교역의 쇠퇴는 변진주조마국의 쇠퇴를 가 져왔고, 창원분지 내에서 탁순국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다호리지역의 유적현황을 봤을 때 이 지역 정치세력의 완전한 몰락은 아니었 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이긴 하지만 목관묘 이후에도 목곽묘를 비롯한 이후 시기의 묘가 5세기경 가야제국들이 멸망할 때까지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어 : 변진주조마국, 다호리, 삼한, 창원, 고대국가 머리말 한국고대사를 흔히 三國時代 라 부르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 제, 신라 외에도 가야, 부여와 같은 고대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1) 본고에 서 살펴보고자 하는 창원지역에도 가야에 속했던 정치집단들이 존재하고 있 었는데, ꡔ삼국사기ꡕ와 ꡔ삼국유사ꡕ에 등장하는 骨浦國과 ꡔ일본서기ꡕ에 등 장하는 卓淳國2)이 그것이다. 전자는 3세기까지 창원에 존재했던 정치집단 으로, 후자는 4세기대 이후 창원지역에 있었던 정치집단으로 이해되고 있 1) 가야에는 다양한 국명이 존재하는데, 가야 전기(삼한시기)에는 弁韓 12국이 ꡔ三 國志ꡕ에 전해지고 있으며, 가야 후기에는 ꡔ日本書紀ꡕ에 13개의 나라 이름이 기 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가야에 속했던 나라이름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국명들이 ꡔ三國史記ꡕ와 ꡔ三國遺事ꡕ에 등장하고 있다. 2) 탁순국에 대해 칠원, 창녕동남쪽~밀양, 대구, 창녕, 의령설이 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창원설이 우세하다.

135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35 다. 하지만 3세기까지 창원 인근 지역의 유적으로 볼 때 골포국과는 다른 정 치집단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3) 창원분지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유적들과는 별개로 동읍 다호리 지역에 김해지역이나 함안지역보다 우 수한 문화적 양상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창원 동읍에는 현재까 지 많은 지석묘유적이 조사되었는데, 특히 봉산리를 비롯한 신방리, 용잠지 석묘 유적의 경우 강력한 지배세력을 상정할 수 있는 유적으로 다호리유적 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이에 필자는 창원지역 유적의 밀집도를 중심으로 변한시기 창원에 창원 분지 와 동읍 다호리 에 각각의 정치집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또한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 및 그간의 연구 성과4)를 바탕으로 다호리 지역에 자리 잡았던 정치집단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고, 그 정치집단이 ꡔ三 國志ꡕ 韓傳에서 보이는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弁辰走漕馬國이었을 가능성 도 확인하려 한다. Ⅰ. 다호리유적과 변진주조마국 1. 다호리지역의 유적현황과 그 성격 창원시 동읍에 있는 茶戶里遺蹟은 도굴로 인한 유물 반출을 시작으로 3) 南在祐, 加耶時代 昌原ㆍ馬山地域 政治集團의 對外關係 ꡔ昌原史學ꡕ 4, 1998, 51쪽 ; 骨浦國의 형성과 발전 ꡔ역사와경계ꡕ 54, 2005, 133~135쪽. 4) 李健茂ㆍ李榮勳ㆍ尹光鎭ㆍ申大坤,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Ⅰ) ꡔ考古 學志ꡕ 1,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坤ㆍ金斗喆,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 報告(Ⅱ) ꡔ考古學志ꡕ 3,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坤ㆍ鄭聖喜, 昌原茶戶 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Ⅲ) ꡔ考古學志ꡕ 5, 李健茂ㆍ宋義政ㆍ鄭聖喜ㆍ韓 鳳奎,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Ⅳ) ꡔ考古學志ꡕ 7, 南在祐, 위의 논문, 田炯權, 4~6세기 昌原지역의 歷史的 實體 ꡔ昌原史學ꡕ 4, 國立中央博物館ㆍ慶尙南道, ꡔ昌原茶戶里遺蹟ꡕ, 김현미, 卓淳國의 성립 과 대외관계의 추이 ꡔ역사와경계ꡕ 57, 남재우, 위의 논문, 2005.

136 136 지역과 역사 38호 1988년부터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김해박물관에 의해 11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고, 마지막으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12차 발굴5) 이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현재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와 유물을 이용해 茶戶里유적의 성격을 살펴보고, 다호리지역에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 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다호리지역의 청동기는 대부분 기원전후로 편년되는데,6) 비록 출토 량 및 다양성이 그 이전시기 청동기 유적들에 비해서는 적으나, 여전히 다 수 존재하며, 鐵製武器가 출토되는 무덤에서 靑銅武器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이들을 종합하면 당시 다호리지역의 집단은 청동기 위세품을 철기로 대체하는 과도기에 있었고, 여전히 주술적인 의미로 일부 청동기가 사용되 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당시 다호리지역에는 鐵器제품들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유물로 1호묘를 비롯해 다수의 유구에서 출토되는 釗로 만든 따비ㆍ낫 등의 농기구와 도끼ㆍ자귀ㆍ끌 등의 공구들을 들 수 있다. 이러 한 공구와 농기구까지 鐵로 제작되었다는 점은 당시 철이 단순 위세품이 아 닌 생활용품 제작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또 한 17호묘에서 출토된 쇠망치와 3호묘의 숫돌은 다호리 사람들이 철을 단 순히 소비할 뿐만 아니라 생산도 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茶戶里유적의 철기에서 발견되는 鑄造기법과 鍛造기법, 19호묘에서 출토된 고사리무늬장신구의 정교함으로 볼 때 다호리의 철기 제작기술이 단 5) 송의정, 茶戶里遺蹟 발굴 조사의 성과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原 茶 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2008, 18~24쪽. 國立金海博物館, ꡔ昌原 茶戶里 遺蹟-9차 발굴조사보고서ꡕ, 동아세아문화 재연구원, 창원시 관로시설 개선구간 내 유적-정밀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 ) 이청규, 茶戶里遺蹟의 靑銅器와 辰弁韓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原 茶 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2008, 62~80쪽. 국립중앙박물관, ꡔ갈대밭속의 나라 다호리-그 발굴과 기록ꡕ, 國立金海博 物館, 위의 책.

137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37 순 생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된 漆器제품에서 동시기 낙랑 칠기에서 볼 수 있는 織物心7)과 복잡한 재료로 만든 바탕칠 등을 찾기 힘들다는 점은 다호 리가 단지 낙랑 혹은 중국의 칠기들을 수입만 한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칠 기제작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8) 이는 생옻을 다룰 때의 옻오름 위험성9)과, 생옻의 이동, 보관의 취약성 등을 생각해 봤을 때, 다호 리 인근지역에 옻을 관리하는 전문 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 만 토기ㆍ목기ㆍ신발 등의 생활용품 뿐만 아니라 철제 혹은 청동 화살촉ㆍ 투겁창ㆍ갑옷ㆍ화살통 등의 무기류도 칠기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칠기 자 체의 실용성보다는 부장품과 위세품의 목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즉 당시 다호리 사회는 위세품을 목적으로 자체적인 칠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당시 다호리에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집 단 혹은 철기가 보편화되었으나 일부 청동기가 잔존하는 집단이 있었던 것 으로 추측되며, 이 집단은 자체적인 칠기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이를 이용해 위세품을 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다호리에 있었던 집단을 변한시기 정치집단으로 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다호리지역 목관묘와, 인근 지역 목관묘 유적을 비교 해 보고자 한다. 그 대상에는 김해 대성동유적, 김해 구지로유적, 김해 가야 의숲 조성 부지 내 유적, 김해 양동리유적, 함안 말산리유적, 밀양 교동유적 등이 있다. 이들 지역에서 발굴된 다호리와 비슷한 시기로 예상되는 목관묘 7) 목기표면 전체에 천을 발라 피복하는 방법으로 직물심바름이라고도 한다. 한반도 내에서는 삼국, 통일신라시대 칠기에서 나타난다. 8) 이용희, 다호리 유적 출토 칠기유물의 칠기법 특징 연구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 果와 課題-昌原 茶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2008, 82~115쪽. 9) 옻나무 수확을 위해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옻오름 현상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공기 를 통해 인근으로 퍼진다.

138 138 지역과 역사 38호 유구는 모두 193기로 대상유구가 훼손된 것을 제외하면 167기인데 이들 중 깊이 1.05m이상인 목관묘 36기 중 24기가 다호리에 소속되어 있다. 또한 다호리 목관묘 중 가장 넓은 유구는 4.72 으로 양동리의 5.39 과는 비슷 하지만, 대성동의 3.1 이나 말산리의 3.06, 교동의 2.6 에 비해서는 상당히 크다.10) 그중 다호리 1호묘(깊이 2.05m)는 다호리유적의 목관묘뿐 만 아니라 인근 다른 유적의 목관묘 중 가장 깊은 유구(밀양 교동 1.53m, 함안 말산리 1.46m, 김해 양동리 1.45m, 김해 대성동 1.16m)보다 0.5m 이상 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다호리 지역에 인근 지역 목관묘시 기 정치집단에 비견할 정도의 세력이 있었고, 다호리 1호묘의 피장자는 그 중에서도 큰 세력가였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좀더 다양한 비교를 위해 깊이 1.05m 이상인 유구 중 지역별로 부장되어 있는 철기류가 많은 2기의 유구에 대해 유물현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을 보면 다른 지역 목관묘들에 비해 다호리유적 목관묘의 부장 유 물수가 많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다호리지역 피장자가 다른 지역피장 자들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 세력가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다호리 1호묘의 청동기/은, 장신구/그 외 의 경우에는 다른 지역 목관묘에 비해 그 수가 월 등한데, 이로 보아 다호리 1호묘의 피장자는 다른 지역 목관묘 피장자들에 비해 선진적인 집단의 지배층으로도 볼 수 있다. 10) 李健茂ㆍ李榮勳ㆍ尹光鎭ㆍ申大坤, 앞의 논문,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 坤ㆍ金斗喆, 앞의 논문,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坤ㆍ鄭聖喜, 앞의 논문, 李健茂ㆍ宋義政ㆍ鄭聖喜ㆍ韓鳳奎, 앞의 논문, 慶星大學校博物 館, ꡔ金海大成洞古墳群Ⅱꡕ, 慶星大學校博物館, ꡔ金海大成洞古墳群Ⅲꡕ, 密陽大學校博物館, ꡔ密陽校洞遺蹟-밀양시 종합체육시설 건립공사 예정 부지 내 유적발굴조사 보고서-ꡕ,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ꡔ金海 伽耶의 숲 造成敷地內, 金海 茂溪里 共同 住宅 建設敷地內 遺蹟 發掘調査 報告書ꡕ, 신용민, 다호리유적 목관묘 시기의 묘제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 題-昌原 茶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2008, 135~140쪽. 東義大學校博物館, ꡔ金海良洞里古墳群Ⅰꡕ, 國立金海博物 館, 앞의 책, 2011.

139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39 <표 1> 목관묘 출토 유물 현황11) 유적 유구 토기 창원 다호리 1 6종류 7점 15종류 42점 9종류 12점 25종류 64점 55종류 94점 32 2종류 2점 8종류 11점 - 5종류 7점 밀양 교동 10 3종류 3점 8종류 8점 종류 11점 20 2종류 2점 6종류 9점 - - 8종류 11점 함안 말산리 30 3종류 4점 종류 4점 70 3종류 3점 2종류 2점 - - 5종류 5점 66-1종류 1점 1종류 1점 - 2종류 2점 종류 1점 52 5종류 6점 2종류 2점 - 1종류 1점 8종류 9점 목걸이 55 2종류 3점 6종류 14점 3종류 4점 - 11종류 21점 요갱 김해 대성동 v-12 1종류 1점 김해 양동리 철기 청동기/은 장신구/그외 합계 비고 요갱 15종류 20점 철촉다수 이제까지의 비교를 통해 목관묘시기 다호리에는 동시기 인근 지역에 비 견되는 강력한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다호리 1호묘 시기에는 그 지배력이 타지역에 비해 월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염사치 설화12) 에 나오는 염사 를 지명비정하는 경우 아산설, 김해설, 창원설이 있는데,13) 고대 창원지명에 簾山古城이 보이므로,14) 염사 와 염산 이 동일지명을 이 해할 경우 염사치는 창원세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한시기에 창원에 변진 주조마국과 같은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고학적 분석과 사료를 보아 이 지역에 김해의 변진구야국과 함안의 변진안야국에 비견되는 변한의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11) 신용민, 위의 논문, 135~140쪽.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위의 책. 密陽大學校 博物館, 위의 책. 12) ꡔ三國志ꡕ 魏書 東夷傳 韓傳. 13) 李丙燾, 目支國의 位置와 그 地理 ꡔ韓國古代史硏究ꡕ, 1976, 243쪽. 정중환, 廉斯鑡 說話考-加羅前史의 試考로서- ꡔ大丘史學ꡕ 7ㆍ8, 1973, 67~85쪽. 西本昌弘, 帶方郡治の所在地と辰韓廉斯邑 ꡔ朝鮮學報ꡕ , 60~63쪽. 14)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慶尙道 昌原都護府.

140 140 지역과 역사 38호 2. 변진주조마국의 위치 1)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倭 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 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예전 辰國과 같다.15) 2)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접하고 있 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접 해 있다.16) 위 사료들은 三韓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들로, 韓의 세 정치집단 馬韓, 辰 韓, 弁韓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사료 1)은 이들이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했음을, 사료 2)는 그중 마한의 동쪽, 倭의 북쪽, 진한의 남쪽에 변한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창원을 비롯한 경남 일대에 弁韓 혹은 弁辰이라 불리우는 정치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그렇다면 변진 혹은 弁韓12국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을까. 3) 已柢國ㆍ不斯國ㆍ弁辰彌離彌凍國ㆍ弁辰接塗國ㆍ勤耆國ㆍ難彌離彌凍國ㆍ 弁辰古資彌凍國ㆍ弁辰古淳是國ㆍ冉奚國ㆍ弁辰半路國ㆍ弁[辰]樂奴國ㆍ 軍彌國ㆍ(弁軍彌國)ㆍ弁辰彌烏邪馬國ㆍ如湛國ㆍ弁辰甘路國ㆍ戶路國ㆍ 州鮮國ㆍ馬延國ㆍ弁辰狗邪國ㆍ弁辰走漕馬國ㆍ弁辰安邪國ㆍ(馬延國)ㆍ 弁辰瀆盧國ㆍ斯盧國ㆍ優由國이 있다. 弁辰韓 을 합쳐 二十四國이다. (ꡔ三 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弁辰條.) 위 사료는 弁ㆍ辰韓시기 渠帥들이 통치했던 정치집단 중 24國17)에 대해 15) ꡔ三國志ꡕ 권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韓條.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 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16) ꡔ後漢書ꡕ 권85 東夷列傳75 韓傳.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17) 개별 정치집단들을 세어보면 모두 26國이 나오지만 말미에 24國이라고 서술하 고 있어,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에 학자들은 ꡔ三國志ꡕ의 저 자인 陳壽 혹은 이후 사본을 만들었던 옮긴이들에 의해 실수로 국명들이 추가된 것으로 보고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馬延國 이 반복되어 두 곳에 있으

141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41 기록하고 있다. 이 사료 3)에 나오는 弁韓 12국들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의 의견이 있으나, 이 중 변진고자미동국ㆍ변진구야국ㆍ변진 안야국은 대부분 고성ㆍ김해ㆍ함안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다소 이견은 있 지만 변진감로국을 김천, 변진독로국을 동래, 변진미리미동국을 영산 남방 에서 밀양에 걸치는 지역, 변진반로국을 성주, 변진미오야마국을 고령 혹은 그 일대로 본다면 위치 비정이 되지 않은 곳은 변진접도국ㆍ변진고순시국 ㆍ변진낙노국ㆍ변진주조마국 등 4국으로 정리된다.18) 그렇다면 이들 중 변진주조마국은 어디에 있었던 정치집단이었을까. <표 2> 변진주조마국의 위치에 관한 견해 현재의 지명 ꡔ일본서기ꡕ에 기록된 卒 加祚-더조-닷조뫼-주조마 卒馬國과 동일, 함양 경남 경북 칠원ㆍ 변화로 보고, 지리상 함안 옛 지명 速含郡과 연 麻로 舊金山 助馬部曲(금 김천 마산 함양 천 조마면) 비정 칠원과 마산일대 비정. 관. <표 2>에서와 같이 弁辰走漕馬國과 ꡔ일본서기ꡕ에 나오는 卒麻國을 같은 곳 혹은 인근 지역에 있었던 정치집단으로 보고 지금의 경상북도 금릉군 조 마면일대19)와 함양일대20)로 비정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 니, 그중 한 馬延國 을 제외하고, 軍彌國 아래에 弁軍彌國이 또 있으니 이 또한 같은 나라로 보아 총 24국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한치윤) 또한 이와는 달리 중복되는 馬延國은 삭제하는 게 맞지만, 軍彌國과 弁軍彌國은 다른 나라로 보아 총 25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이병도, 軍彌國의 위치는 미상으 로 弁軍彌國의 위치는 사천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 주장들을 비롯한 관련 논의 는 사료의 해석에 있어 중요하지만, 馬延國, 軍彌國, 弁軍彌國 모두 현재 弁韓 으로 추증되는 弁辰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정치집단들이 아닌 관계로 이 논문에 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弁韓을 비롯한 三韓 각국의 연구에 있어 필요한 사 료의 신빙성에 관한 내용인 바, 차후 이에 관해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 각된다. 18) 김현미, 앞의 논문, 2005, 15쪽. 단, 김현미는 변진감로국을 김천시 개령면으 로, 변진독로국을 동래가 소속되어 있는 부산시로 각각 비정했다. 19) 이병도, ꡔ韓國古代史硏究ꡕ, 博英社, 1976, 274~276쪽.

142 142 지역과 역사 38호 순히 지명을 근거해 비정한 것으로 더욱이 조마면의 경우 인근 지역에 아직 동시기 관련 유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타당성이 부족하다. 이 외에도 茶戶里유적 인근 지역의 弁辰走漕馬國과 관련된 지명으로 漆 吐-漆隄-漆園-漆原으로 이어지는 현재 칠원면의 지명에서 찾는 의견도 있 다. 이 칠원면의 지명에 보이는 漆 이 弁辰走漕馬國의 走漕 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들어 주조마국을 漆原과 마산 일 대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지만,21) 칠원 어느 지역에서도 다호리와 동시대에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이 나오는 곳은 없다. 때문에, 이 시기 변한 12國 중 하 나였던 변진주조마국은 칠원보다는 동읍으로 비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 다. 그 근거로 먼저 ꡔ삼국지ꡕ에서의 국명의 위치와 지리적 위치의 동일성을 들 수 있다. ꡔ삼국지ꡕ 弁韓 12國 국명 기사에, 弁辰狗邪國ㆍ弁辰走漕馬 國ㆍ弁辰安邪國 순서로 적혀 있는데 이 중 변진구야국은 김해로 비정되 고, 변진안야국은 함안으로 비정되니, 그 사이에 다호리지역으로 비정하고 자 하는 변진주조마국이 있다. 즉 김해-동읍 다호리지역-함안 순으로 기록 되어 있는 것이다.22) 또한 弁辰走漕馬國의 이름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선 走漕 는 물에서 배를 통해 간다 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馬 는 南 의 古訓에 서 음차된 것으로 남쪽 을 뜻한다.23) 즉 변진주조마국은 변진지역, 그중에 남쪽의 바다나 강에 접한 나라 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弁辰走漕 馬國의 馬 는 宗, 主, 大, 王 를 뜻하는 고대어 리 에서 변형된 단어로 볼 수 있어,24) 변진지역 그중 바다나 강을 통해서 갈 수 있는 큰 나라 를 의미 20) 21) 22) 23) 24) 김태식, ꡔ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ꡕ 2, 푸른역사, 2002, 164~169쪽. 천관우, 辰ㆍ弁韓諸國의 位置 試論 ꡔ白山學報ꡕ 20, 1976, 13~14쪽. 천관우, 위의 논문, 13~14쪽. 김현미, 앞의 논문, 2005, 15쪽. 梁柱東, ꡔ增訂 古歌硏究ꡕ, 一潮閣, 1983, 421쪽. 김종택, 고대국어 어휘형태의 내적 연구 ꡔ국어교육연구ꡕ 32, 2000, 150쪽. 李炳銑, ꡔ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ꡕ, 螢雪出版社, 1982, 89쪽. 국명 走漕馬 중 馬 로 借字된 말 의 고대어가 城邑을 뜻하던 단어 [kara/kərə]에서 나왔다는

143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43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弁辰走漕馬國은 당시 다호리의 위치와 상황에 부 합하는 국명인 것이다. <그림 1> 기원전 1세기 전후 다호리 인근 고지형25) 물론 창원 인근에서 弁辰走漕馬國 과 유사한 지명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茶戶里유적을 弁辰走漕馬國으로 비정하기 힘들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창 주장이 있으므로, 이를 ~國 과 같은 의미로 볼 수도 있다. 25) 황상일ㆍ윤순옥, 蔚山 太和江 中ㆍ下流部의 Holocene 自然環境과 先史人의 生活 變化 ꡔ한국고고학보ꡕ 43, 2000, 67~112쪽. 비봉리유적과 다호리유적 인근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패총을 비롯한 유적들을 종합해 볼 때 신석기 시대부터 일정기간 동안 현재 창원 동읍 대산분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 로 보인다. 단지 이 지역에 언제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논 란의 여지가 있으나, 다호리를 비롯한 유적의 분포로 봤을 때, 기원전후 시기에 도 이 지역에 바닷물이 들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읍 대산분지와 같이 고대에 바닷물이 들어온 지형에 대해서 황상일과 윤순욱을 비롯한 지질학자들이 古蔚山灣, 古屈火灣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동읍 대산분지 또한 임학 종을 비롯한 연구자들에 의해 기존에 古大山灣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 라서 본고에서도 이 지역을 古대산만 이라 표기한다. 任鶴鐘, 洛東江 下ㆍ支流域의 貝塚文化에 對한 再認識 ꡔ大東考古ꡕ 창간호, 2007, 1~13쪽.

144 144 지역과 역사 38호 원으로 비정되고 있는 卓淳國과 走漕馬國의 중세 漢語 발음26)상의 유사성 을 찾아볼 수 있다. 즉 走漕 [tsə u:][dzʻau-] 27)와 卓淳[ ɔk][ʑi uěn] 28) 의 발음에서 각 단어의 자음인 走의 ㅈ[ts] 와 卓의 ㅈ[ ], 그리고 漕의 ㅈ[dz ] 와 淳의 ㅅ[ʑ] 가 같은 계열의 발음인 것이다.29) 이 외에도 ꡔ世宗實錄地理志ꡕ에 나오는 창원 북면 외산리 낙동강 변에 있 던 나루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ꡔ세종실록지리지ꡕ에는 나루터인 主勿淵 津 30)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와 走漕馬國간의 연관성을 찾는 견해가 26) 변한의 국명은 동시기 중국과 백제에 전해졌을 것이고, 이를 漢語로 차자표기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문헌에 사용된 한자의 중세 漢語 발음을 복원한다면 당시 사용된 고대 한국어 발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27) 上海辭書出版社, ꡔ漢文典 修訂本ꡕ, (발음표기 [周초/A.D.6C(切韻)/현 대])) 중국에서 ꡔ삼국지ꡕ가 작성되었을 시기의 走漕 의 漢語 발음을 찾아보면, [tsə u:][dzʻau-]로, 이 발음을 추정하기 위해 한국 한자발음을 참고했다. 이는 漢語의 古발음이 한국의 한자발음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중세 漢語에서 走의 [ts] 발음이 들어간 다른 단어를 찾아보면, 罝([tsi a] [ㅈ]), 早([tsau:] [ㅈ]), 左([tsa:] [ㅈ]), 挫([tsua-] [ㅈ])으로 모두 [ㅈ]로 나고 있다. 또한 漕의 [dzʻ] 발음이 들어간 다른 단어의 현재 발음을 찾아보면, 瘥([dzʻa] [ㅊ]), 座([dzʻua:] [ㅈ]), 鑿([dzʻak] [ㅊ]), 憔([dzʻi ɛu] [ㅊ]) 으로 모두 [ㅈ] 혹은 [ㅊ]로 읽고 있다. 28) ꡔ일본서기ꡕ에 기록되어 있는 卓淳國의 卓淳은 [tokujun]이라 읽지만(김종택,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고대한국어 자료 연구 ꡔ국어교육연구ꡕ 30, 1998, 44쪽), ꡔ일본서기ꡕ의 원형으로 예상되는 백제역사서 작성 시기의 卓淳 의 漢語발음은 [ ɔk][ʑi uěn]이다(上海辭書出版社, 위의 사전). 이 단어의 당시 발음을 추정하기 위해 중세 漢語에서 卓의 [ ] 발음이 들어간 다른 단어를 찾아 보면, 株([ i u] [ㅈ]), 拄([ i u:] [ㅈ]), 罩([ au-] [ㅈ]), 朝([ i ɛu] [ㅈ]), 奓([ a] [ㅊ])으로 모두 [ㅈ] 혹은 [ㅊ]로 읽고 있다. 또한 淳의 [ʑ] 이 들어간 다른 단어를 찾아보면, 殊([ʑi u] [ㅅ]), 殳([ʑi u] [ㅅ]), 垂([ʑ wie ] [ㅅ]), 巡([ʑi ue n] [ㅅ])으로 모두 [ㅅ]로 읽고 있다. 29) 李永圭,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異表記語 硏究-資料 分析을 중심으로-, 공 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100쪽. 삼국유사 등에서 ㅈ[ts] 와 ㅅ[s] 를 혼 용한 예가 있어, ㅈ[ts] 를 고대 국어 자음 체계에 포함시키지 않는 견해가 있 고, 고대 국어 음운상 지명ㆍ인명으로 혼용된 한자로 走[ㅈ] 와 鄒 [ㅊ] 가 보 이고 있어 이를 참고해, [ㅅ], [ㅈ], [ㅊ]를 같은 계통의 발음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더해 같은 단어에 대해 ꡔ삼국사기ꡕ와 ꡔ삼국유사ꡕ에는 朱蒙 혹은 鄒 로 표기된 고구려 시조가 ꡔ광개토대왕릉비ꡕ에는 鄒牟 로 표기되어 있다.

145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45 있다.31) 즉 主勿淵津의 主 는 走漕馬國의 走 와 음이 같고, 勿 의 음과 漕 의 뜻이 통한다. 마지막으로 주물 과 주조 는 전체적인 발음에서도 유사하 다. 따라서 국명의 해석과 지명의 유사성, 다호리유적 목관묘의 우월성 등을 봤을 때, 기원전 1세기 전후 弁韓 12국의 하나였던 弁辰走漕馬國을 창원 동 읍 일대, 즉 다호리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32) Ⅱ. 변진주조마국의 형성과 발전 1. 변진주조마국의 형성 한반도 전역에 있는 지석묘의 분포는 당시 사람들의 단위사회 영역을 보 여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삼한 성립 이전 정치집단의 존재여부를 살펴보 는데 유용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33) 창원 인근에도 많은 지석묘가 있어, 청동기시대 정치집단의 존재를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는데, 창원과 김해 인근의 지석묘 집단을 표시하면 아래 <그림 2>와 같다. <그림 2>를 통해 창원지역 청동기시대 정치집단의 세력권을 나누어 보면, 크게 북면 일대, 동읍 일대, 창원분지 일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북면 일 대에는 외감리(1기), 월백리(1기)34) 두 기가 있어, 동읍이나 창원분지와 30)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32권 慶尙道와 ꡔ海東地圖ꡕ 昌原府, 그리고 ꡔ大東輿地圖ꡕ 에 주물연진이 기록되어 있다. 31) 김현미, 앞의 논문, 2005, 16쪽. 32) 김태식, ꡔ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ꡕ 3, 푸른역사, 2002, 207~214쪽. 임나 (任那) 의 일본 발음인 미마나(みまな) 를 변진미오야마(彌烏邪馬)국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보고, 백제와 왜국의 중개기능을 담당하던 탁순국의 전신으로 보아, 창원으로 비정하는 의견이 있다. 33) 김현미, 앞의 논문, 2005, 10쪽. 34) 창원대학교박물관, ꡔ文化遺蹟分布地圖-昌原市ꡕ, 2005, 126쪽. 지석묘인지에 대해 일부 이견이 있으나, 상석으로 추정되는 돌이 안정적으로 놓여 있는 점들

146 146 지역과 역사 38호 비교하면 지석묘의 수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범례1 산남리지석묘군 2 봉곡리지석묘 3 우암리지석묘 4 금산리지석묘 5 월백리지석묘 6 화양리지석묘군 7 신방리지석묘군 8 용잠1구지석묘 1,2 9 봉산리지석묘군 10 용잠6구지석묘군 11 용잠3구지석묘 12 덕천리지석묘 용정리지석묘군 진영리지석묘 용성리지석묘군 사림동반계동지석묘 사림동지석묘 상남동지석묘군 가음정동지석묘 외동지석묘군 외감리지석묘 봉림동유적 남산유적 신명지석묘 용곡지석묘 원질국계지석묘 내연지석묘 연지지석묘 망덕 지석묘 구산동 지석묘 구지봉지석묘 내동지석묘 수로왕릉내지석묘 서상동지석묘 회현리지석묘 부원동패총 감로리지석묘 감내리지석묘 지라지석묘 유하리지석묘 광석지석묘 무계리지석묘군 명법2동지석묘 명법1동지석묘 율하리지석묘 <그림 2> 창원과 김해의 지석묘 분포도35) 을 들어 지석묘로 파악되고 있다. 35) 동아대학교박물관, ꡔ문화유적분포지도-김해시ꡕ, 창원대학교박물관, 위의 분포지도. 남재우, 문헌으로 본 駕洛國의 형성과 발전 ꡔ제18회 가야사국제학

147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47 둘째, 창원분지 일대로, 반계동(1기), 사림동(1기), 상남동(1기), 가음정 동(1기), 외동(1기) 등이 해당되는데, 이에 더해 상석 없는 지석묘유적이 발견된 봉림동유적과 환호와 주거지가 발견된 남산유적도 있다. 이곳은 古 마산만과 김해 인근 지역으로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골포국과 4세기 이후 탁순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셋째,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동읍을 포함한 古대산만 일대는 산남리(4기), 봉곡리(1기), 우암리(1기), 금산리(1기), 화양리(4기), 신방 리(3기), 용잠리(1區 2기, 3區 1기, 6區 3기), 봉산리(8기), 덕천리(3기), 용정리(2기), 진영리(1기), 용성리(2기) 등이 있다. <그림 2>를 보면 古대 산만 일대 지석묘분포가 다른 두 지역에 비해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밀집도 로도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古대산만 일대에는 창원 인근 지역에서 세력이 강력한 청동기시대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바로 이곳이 기원전 1세기 이전 변진주조마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 정되는 지역이다. 古대산만 지석묘집단 중에서도 <그림 3>의 봉산리(8기)를 비롯한 인근 지석묘집단(덕천리 3기, 신방리 6기, 용잠 6기, 용정리 2기, 화양리 4기)은 지석묘의 규모나 분포로 봤을 때, 타 집단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우월 하며, 茶戶里유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이로 보아 취락의 연속 성 측면에서, 봉산리 인근 지석묘집단과 다호리유적의 목관묘집단과의 계승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바로 인근 지역에 여러 청동기와 삼한시기 유물산포지(남산리, 노연 리, 다호리, 봉산리, 석산리, 신방리, 용잠리, 우암리, 월잠리, 화양리)와, 신방리모암유물산포지 내 주거유적(신방리 동중학교 인근)이 존재하는 것 으로 보아, 이 일대의 지석묘들은 단순히 제례공간만이 아닌 실제 생활공 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 지역의 지석묘집단을 중심으로 다른 古대산 만 지석묘집단들의 세력이 합해져, 弁辰走漕馬國의 지역적 바탕이 성립된 술회의 김해 양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세아ꡕ,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2012, 142쪽.

148 148 지역과역사 38 호 것이다. -지석 1 산남리지석묘군 2 봉곡리지석묘 3 우암리지석묘 4 금산리지석묘 5 월백리지석묘 6 화양리지석묘군 7 신방리지석묘군 8 용잠1구지석묘 1,2 9 봉산리지석묘군 10 용잠6구지석묘군 - 범례 - 묘- 11 용잠3구지석묘 -유물산포지 ( 청동기 )- 12 덕천리지석묘 3 우암리유물산포지Ⅰ 13 용정리지석묘군 7 신방리유물산포지Ⅱ 14 진영리지석묘 16 낙동강변선사유적Ⅰ 15 용성리지석묘군 17 낙동강변선사유적Ⅱ 18 낙동강변선사유적Ⅲ -패총- 19 노연리유물산포지Ⅱ 21 산남리합산 20 월잠리유물산포지Ⅱ ( 신석기, 삼한 ) 월잠리유물산포지Ⅲ 22 가술리 ( 시대미상 ) < 그림 3> 古대산만인근유적분포도 36) -유물산포지 ( 삼한 )- 6 화양리유물산포지Ⅲ 7 신방리유물산포지Ⅰ 8 용잠리유물산포지 9 봉산리유물산포지 23 석산리유물산포지Ⅰ 24 다호리유물산포지 25 신방리모암유물산포지 26 남산리유물산포지Ⅱ 36) 창원대학교박물관, 위의분포지도.

149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변진주조마국의 성장과 발전 지석묘를 형성했던 집단이 변진주조마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낙동강, 古마산만, 古대산만을 이용하였던 교 역의 발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4) 첫째가 洛東江이다. <중략> 星州에서 東安津, 加利縣에서 茂溪津이 되고, 草溪에 이르러 陜川의 南江 물과 합하여 甘勿倉津이 되고, 靈山에 이르러 또 晉州 南江의 물과 합하여 岐音江이 되며, 漆原에서는 亐叱浦가, 昌原에 서는 主勿淵津이 되어 金海에 이르고, 密陽 凝川을 지나 磊津(海陽江)이 되고, 梁山에서 伽倻津이 되고, 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 다.(ꡔ世宗實錄地理志ꡕ 慶尙道) 5) 主勿淵津은 부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金海에 이르기까지 17 리, 서쪽으로 咸安에 이르기까지 27리, 남쪽으로 金海任內熊神에 이르기까 지 32리, 북쪽으로 漆原에 이르기까지 24리이다.37) 변진주조마국으로 추정되는 동읍은 낙동강 뱃길의 주요관문으로 낙동강 을 이용하게 되면 김해, 칠원을 비롯하여 경남 내륙지역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사료 5)에서 古대산만 인근의 주물연진과 가까운 지역인 김해와 함안에는 대부분 그 시기 변한의 정치집단인 목관묘집단이 존재했 다. 따라서 이들과 변진주조마국의 교역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에서 보이는 주물연진에 있었던 왜의 사신을 위한 공관 38)과 古대산만 지석묘집단의 우월성을 생각해보면, 변한 이전 시 기부터 이 지역 정치집단은 교역을 통해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교역루트들을 이용한 古대산만의 위치는, 삼한시기까지도 계속 이어 져, 변진주조마국을 인근 어느 정치집단보다도 강력한 집단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37) ꡔ世宗實錄地理志ꡕ 慶尙道 晋州牧. 主勿淵津在府北 四境 東距金海十七里 西距 咸安二十七里 南距金海任內熊神三十二里 北距漆原二十四里 38)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慶尙道 昌原都護府. 主勿淵津 佐府北西十里 漆原縣 買浦 下流 峯上 設小公館 以待倭使之 乗船徃来

150 150 지역과 역사 38호 교역의 증거를 보여주는 유물도 조사되었다. 다호리에서 발견된 한경을 비롯한 외례계 유물, 문서작성 도구인 붓과 작성된 문서를 수정하기 위한 삭도가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다호리1호묘에서 출토된 銅環은 무게가 5.20g, 10.25g, 11.55g, 22.73g으로 당시 양팔저울을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 이라고 생각된다.39) 즉 삼한시기 이들은 이미 대규모의 교역을 위해 언어 와 문자를 이용했으며, 저울도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변진주조마국의 주요교역품은 무엇이었을까. 6) (弁辰) 나라에서는 鐵이 생산되는데, 韓ㆍ濊ㆍ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매매는 모두 鐵을 이용해 이루어져서 마치 中國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樂浪과 帶方의) 두 郡에도 이를 공급한다.40) 7) (韓) 나라에는 鐵이 생산되는데 濊ㆍ倭ㆍ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鐵을 화폐로 삼아 사용한다.41) 사료 6)과 7)에서 철은 그 시기 변진주조마국을 비롯한 변한지역의 특산 품이자 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변진주조마국도 국가 간 교역을 비롯하여 개 인의 거래시에도 물물교환 혹은 다호리에서 출토된 판상철부와 같은 철 을 사용하여 물건을 거래했을 것이다.42) 그런데 철을 화폐로 사용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철부와 같은 덩이쇠 를 일반인이 다량으로 생산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당 시 인근에서 가장 강력한 집권자가 광산을 비롯해 제철과정에 필요한 것들 39) 남재우ㆍ김주용ㆍ천성주ㆍ성진석, ꡔ가야인의 삶, 그리고 흔적ꡕ, 도서출판 선 인, 2012, 224쪽. 40) ꡔ三國志ꡕ 권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弁辰條. 國出鐵 韓ㆍ濊ㆍ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41) ꡔ後漢書ꡕ 권85 東夷列傳 第 75 韓傳. 國出鐵 濊ㆍ倭ㆍ馬韓並從市之 凡諸貿 易皆以鐵爲貨 - 이 중 貿 글자는 汲古閣本 에서는 質, 宋本 에서는 貨, 殿 本 에서는 貿 로 표기되어 있다. 42) 일찍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철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을 전해준다. 기원 전 1세기 유적인 金海貝塚이나 熊川貝塚에서 이미 다량의 철기들이 도구화해 나타난 바 있다.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많은 철정이 보인다.

151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51 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관리했고, 다호리 1호묘의 규모와 부장품으로 봤 을 때, 기원 전후 이 지역 제철과정 집권자는 변진주조마국 거수층으로 추 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다호리 64호묘에서 출토된 철광석을 들 수 있는 데, 이 철광석의 분석결과 미량 원소 중 구리의 양이 많은 편인데,43) 이는 경남지역 광산에서 나온 것으로 예상된다.44) 즉, 변진주조마국은 경남 인 근에서 나는 철을 이용하여 철제품을 생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림 4>를 보면 古대산만에 접하는 지역에는 아직 발견된 철광산이 없다. 단지 청동의 재료가 되는 구리광산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창원시 전체에서 철광산과 관 련된 곳으로는 조선시대 사철이 났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불모산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변진주조마국이 이용했던 철광산은 어디였을까. <그림 4>를 보면 古대산만 인근 철광산으로는 양산의 물금광산, 양성광 산, 그리고 김해의 매리광산이 있는데, 이 세 광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강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를 봤을 때, 교역을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이 될 조건을 갖춘 변진주조 마국이 그 힘과 철기제작기술 등을 이용해 철광산이 모여 있는 물금, 매리 광산 인근의 철을 장악 혹은 수입해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유적으로 <그림 4>의 제철유적을 들 수 있는데, 현재까지 인근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이전의 제철유적들은 대부분 古대산만부근(여래 리, 하계리) 혹은 물금을 비롯한 철광산지 인근이기 때문이다. 이 중 김해 여래리의 경우 제철유적뿐만 아니라 도로 및 생활유구와 유통시설까지 조사 되었으며, 하계리의 경우에도 제련로와 수혈주거지, 철광석, 송풍관편 등이 출토되어 철을 생산하는 공인집단의 생산 및 생활유적으로 추정된다. 따라 서 김해 여래리와 하계리에 철을 다루던 전문가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43) 송의정, 앞의 논문, 2008, 22쪽. 44) 우리나라 철광은 부산에서 내륙방향으로 Fe-Cu대, Cu-Pb-Zn대, W-Mo대가 차례로 나타나는데, 양양, 연천 등은 구리가 0.001~0.003 이하인 반면 울산광 의 경우 0.01 이하로 약 10배가 넘게 차이가 난다.

152 152 지역과 역사 38호 있다.45) 또한 <그림 4>를 보면 삼국시대 이전 제철유적들이 모두 낙동강변 - 범례-삼 국1 김해 여래리 2. 김해 하계리 3. 창원 현동 4. 창원 봉림동 상동 우계 동척철광지 물금 가촌리 물금 범어리 -고려 조선9. 창원 불모산 10. 장유 신안 11. 어곡동 화룡 12. 소석리 제리골 -인근광산13. 물금광산(철) 14. 양성광산(철) 15. 매리광산(철) 구룡광산(구리) <그림 4> 창원 인근 지역의 제철관련 유적 및 광산 분포도46) 45) 남재우ㆍ김주용ㆍ천성주ㆍ성진석, 앞의 책, 2012, 222쪽. 46) 동아대학교박물관, ꡔ京釜高速鐵道 建設區間(釜山ㆍ慶南圈)文化遺蹟發掘豫備調 査報告ꡕ, 1997 ; ꡔ양산물금유적ꡕ, (재)경남발전연구원역사문화센터, ꡔ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공동주택 사업예정지내 문화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ꡕ, 낙동강수계관리위원회, ꡔ낙동강 유역 휴ㆍ폐광산 폐수의 특성 및 적정관 리방안 연구ꡕ, 2004, 42~43쪽. 慶南大學校博物館, ꡔ文化遺蹟分布地圖-馬山 市ꡕ, 한국문물연구원, ꡔ창원 봉림 국민임대주택단지 사업부지 내 유적

153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53 (우계, 동척, 가촌리, 범어리) 혹은 古대산만(여래리, 하계리), 아니면 古마 산만(현동, 봉림동)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제철유적들이 위치한 곳도 물길이라는 교통로 확보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원료인 철과 노동력의 확보, 그리고 제철을 위한 나무와 물을 원활하게 얻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철기의 판매를 위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즉, 여 래리와 하계리와 같이 철광산 인근이 아닌 古대산만 인근에 철을 다루던 전 문가 집단이 존재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古대산만 정치집단과 여래리ㆍ하 계리 제철집단 간의 교류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변진주조마국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다호리의 위치를 봤을 때, 변진주조마국은 古대산만이라는 교통 로와 발달한 제철기술을 이용해 물금 혹은 매리광산 인근에서 생산되는 철 을 이용하여 덩이쇠와 철제품을 생산했을 것이고47), 이 제품들을 이용한 한군현ㆍ일본 및 한반도 내륙 정치집단들과의 교역으로 점점 더 성장해 나 갔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사료들은 그중 한군현들과의 교역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사료들이다. 8) 그 풍속은 衣幘을 좋아해, 下戶들도 (樂浪이나 帶方)郡에 가서 朝謁할 적에 는 모두 衣幘를 빌려 입으며, 자신의 印綬와 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48) 9) 建武 20년(A.D.44)에 韓의 廉斯 사람인 蘇馬諟 등이 樂浪에 이르러 공물 을 바쳤다.49) 발굴조사 결과약보고ꡕ, (재)동서문물연구원, ꡔ마산 현동 국민임대주택 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ꡕ, 부산대학교박물관, ꡔ金海 新安 遺蹟ꡕ, ) <그림 4>의 철광산 유적이 보이지 않는 古대산만에서 제철유구와 제철유물이 출 토되는 것으로 보아, 변진주조마국에서 자체적인 철기를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 해 볼 수 있다. 48) ꡔ三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 東夷傳 韓條.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皆假 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49) ꡔ後漢書ꡕ 卷85 東夷列傳 第 75 韓傳.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 蘇馬諟 等詣樂 浪 貢獻

154 154 지역과 역사 38호 사료 8)과 사료 9)에는 韓의 사람들이 조공하는 모습을 적고 있다. 이 중 사료 8)에 조공하는 사람을 천여 명이라 서술하고 있어 한군현과 교역하고 있던 韓의 나라가 많았음을 보여주는데, 이 중 변진주조마국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로 오수전, 한경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다호리 1호 묘에서 출토된 오수전을 비롯한 한대 화폐의 경우 <그림 5>에서와 같이 대 부분 남해안에서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들을 잇고 있었던 교역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일본과의 교역은 다호리에서 도굴된 야요이 토기 1점 과 다호리 105호묘 인근에서 발견된 야요이토기 파편 등으로 뒷받침된다. 또한 한반도 남부의 한경 출토지를 표시한 <그림 6>을 보면 늑도를 비롯 한 해안보다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내륙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 것을 알 수 있다.50) 이로 보아 김해, 다호리를 거쳐 낙동강 상류를 잇는 교역로도 상정할 수 있다. 이런 교역로를 이용했던 변진주조마국은 한군현과 일본의 상인들이 드나 들었을 것이고, 아마도 변진주조마국의 교역로와 관련된 변ㆍ진한 내륙의 정치집단들 또한 한군현, 일본 그 외 지역들과의 교역을 위해 주조마국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51) 이를 통해, 변진주조마국은 한군현, 일본, 그리고 변ㆍ 진한 지역들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한반도 남부 무역의 중심지로서 발달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50) 이양수, 한반도 삼한ㆍ삼국시대 동경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0, 108쪽. 같은 漢代 유물인 한경과 한 대화폐 출토지에 차이가 나는 것은 화폐로서 오수전의 기능과 위세품으로서 한경의 역할차이라고 생각된다. 그 예로 한경 출토지 중 진한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 며, 많은 수의 동경이 동시에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 집단 수장의 필요 에 의해 한경이 유입됐던 것이다. 51) 다호리에서 율무와 운모가 출토되었는데, 원산지가 베트남등인 율무 와 신성한 약재로 생각해 신라 적석목곽에 간혹 매장되던 운모 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활발한 교류를 했던 지역임을 짐작케 한다.

155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55 <그림 5> 삼한시기 한대 화폐 출토지52) <그림 6> 삼한시기 한경 출토지53) 52) 박선미, 한반도 출토 漢代 화폐와 그 의미-古朝鮮 멸망이후 삼한지역 교역체계 의 변동과 관련하여- ꡔ先史와 古代ꡕ 28, 2008, 257쪽.

156 156 지역과 역사 38호 3. 변진주조마국의 쇠퇴 교역과 중계무역을 통해 그 기착지이자 출발지로서 성장을 이루었던 변 진주조마국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다호리지역에서 삼한시기 이후 가 야의 정치적 성장을 보여주는 수혈식 석곽묘와 같은 묘제 등의 분포가 인근 지역인 함안, 창녕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발굴된 목관묘에서도 그 변화를 알 수 있는데, 창원 다호리와 김해 양동리 목관묘에서 출토된 토기로, 시기를 구분하여 비교한 <표 3>54)을 보 면, 그러한 변화가 잘 보인다.55) <표 3> 변한지역 목관묘 유적의 시기별 현황56) 시기구분57) 유적명 유구 번호 77 주머니호, 장경호, 소형옹, 철부 Ⅰ기 B.C 1C 전엽 철기/ 칠기 유물 56) 57) 다호리 81 두형토기2, 삼각형점토대토기, 소형옹 41 무문토기, 원통형칠기 양동리 70 장경호(무문)2, 삼각점토대토기 합계 1종류 4종류 1점 4점 - 3종류 4점 1종류 2종류 1점 2점 - 2종류 3점 53) 이양수, 앞의 박사학위논문, 2010, 107쪽 ; 圓形으로 再加工된 漢鏡에 대하여 : 破鏡과의 關係를 中心으로 ꡔ영남고고학ꡕ 57, 2011, 81~102쪽. 54) 사용된 고고학적 자료의 구분과 편년이 학자마다 논란의 여지가 있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힘들지만, 정치집단의 발전흐름을 판단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고 생각된다. 55) 홍보식, 考古學으로 본 金官伽倻 ꡔ考古學을 통해 본 加耶ꡕ, 한국고고학회, 세기 전반까지는 양동리고분군 집단이 대성동고분군 집단보다 우세한 세력의 중심이었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므로, 대성동고분군과의 비교는 생략한다. 56)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坤ㆍ鄭聖喜, 앞의 논문, 1993, 42~43쪽. 동아세아문화 재연구원, 앞의 책, 東義大學校博物館, 앞의 발굴보고서, 김현희, 茶戶里遺蹟의 編年과 弁辰韓의 土器文化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 原 茶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2008, 26~33쪽. 國立金海博物館, 앞의 책, 박진일, 김해 양동리 유적 2011

157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57 시기구분57) 유적명 Ⅱ기 B.C 1C 중엽~ A.D 1C 전엽 유구 번호 유물 철기/ 칠기 합계 칠초철검, 철검, 철검편2, 철창4, 철과, 칠초철제 환두도자, 목병부철부5, 판상철부12, 단조철부2, 철촉 주조철부6, 철제따비2, 겸형철기. 칠초동검 2, 닻형철기2 철제작살, 칠봉, 봉상칠초, 칠걸이 들, 동제검파, 동모, 성운문경, 청동대구, 거치문동 34종류 55종류 1 환, 동환, 오수전3, 소동탁. 칠기원형두, 칠가방형 70점 94점 두, 칠기배, 유개통형칠기, 원통형칠기2, 칠기개3, 칠기반 칠기합, 칠기소쿠리2, 칠기붓, 칠선, 칠기 편3, 칠궁3, 궁시, 호편, 파수편, 장동호편2, 토기 편, 주머니호편, 목병, 골제낚시바늘, 유리구슬, 노 끈뭉치, 동아줄, 밤, 율무, 감, 나뭇잎들 다호리 17 파수부호2, 쌈지형토기, 주머니호, 완, 청동제금파 두식, 철편, 단조철부, 주조철부, 철망치, 반형칠기 11종류 17종류 2, 원반형칠기2, 원통형칠기, 칠기고배, 판상칠기, 13점 20점 칠기잔, 칠기편, 동검편 25 주머니호, 메병형토기, 보시기2, 조우파2, 철창2, 4종류 8종류 철겸, 단조철부, 통형칠기편 5점 11점 29 파수부호, 보시기2, 승문호편, 토제방추차, 철부, 6종류 10종류 소환두도자, 철착, 통형칠기, 칠기개, 칠기편 6점 11점 연질호, 소형호, 주머니호2, 승문단경호, 철겸, 단 9종류 13종류 35 조철부, 철사, 이형철기2, 철기편, 칠배, 원형칠기, 10점 15점 칠기개, 칠기고배 양동리 52 Ⅲ기 A.D 1C 중엽~ 후엽 단경호, 옹, 두형토기 대각부2, 삼각점토대토기, 무 2종류 8종류 문토기편, 철부, 철겸, 목걸이 2점 9점 주머니호, 승문단경호, 칠초철검, 철창, 철촉다수, 철부3, 철착, 철사, 철겸, 철제낚시바늘2, 원통형 다호리 32 칠기2, 이형칠기, 칠화살통, 유개원통형칠기2, 방 추차 12종류 17점 15종류 (철촉 20점 다수) 17 단경호, 주머니호, 파수부호편, 무문토기편, 철겸, 2종류 8종류 철부3, 청동팔찌, 목걸이 4점 10점 427 방제경3,58) 변형세형동검, 철겸, 철촉, 철부, 따 4종류 7종류 비, 목걸이 4점 9점 양동리 년도 발굴성과 ꡔ제18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김해 양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세아ꡕ,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2012, 7쪽. 林東在, 金海 良洞里古墳群의 編年 과 外來系 遺物의 檢討 ꡔ제18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김해 양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세아ꡕ,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2012, 27~30쪽. 57) 林東在, 위의 논문. 토기의 변화를 들어 다섯으로 구분했는데, 그중 Ⅰ기 (B.C. 2C 말~B.C 1C전 엽)는 세장방형 유구와 무문토기 삼각점토대토기의 등장을, Ⅱ기(B.C. 1C 중엽~A.D. 1C 전엽경)에는 와질토기가 등장하며, 토기의 기종 도 조합우각형파수부호(본문 파수부호 표기), 단경호, 주머니호 등으로 다양해

158 158 지역과 역사 38호 시기구분57) 유적명 유구 번호 유물 합계 31 승문단경호, 양유부호2, 조우파, 주머니호, 소형편 3종류 9종류 구호, 따비, 철겸, 단조철부, 천하석제식옥 3점 10점 36 조우파, 장란형토기2, 철창, 단조철부, 철제검파부 4종류 7종류 검, 칠선3, 석제대팻날 6점 10점 55 주머니호, 단경호2, 철부, 철겸, 철손칼, 철촉8, 철 6종류 11종류 검2, 철창, 방제경, 청동검장식2, 목걸이 14점 21점 양동리 99 파수부호2, 주머니호, 철부, 철겸, 철창2, 철촉7, 6종류 10종류 철검, 따비, 청동편, 목걸이 13점 18점 다호리 Ⅳ기 A.D 1C 후엽~ 2C전엽 151 주머니호, 파수부호2, 양유부호, 단경호, 철부, 철겸 Ⅴ기 A.D 2C 전엽~ 중엽 철기/ 칠기 2종류 6종류 2점 7점 259) 단경호, 옹, 고배편, 꺽쇠2, 철촉5, 주조철부, 단조 5종류 8종류 철부, 철창 10점 13점 7 단경호4, 고배3, 소형광구호, 노형토기2, 대호, 대 2종류 9종류 부직구호, 철손칼, 철부 2점 14점 양동리 즉, <표 3>은 변진주조마국이 기원전후에는 양동리보다 훨씬 뛰어난 세 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기원후 2~3세기경에는 양동리보다 세력이 약해 졌던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변진주조마국이, 2 세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도태되는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즉 문화와 경제의 기착지이자 중심지로서의 변진주조마국의 역할이 혼란스러운 국제 진다고 했다. Ⅲ기(A.D. 1C 중엽~1C 후엽경)에는 파수부장경호에서 흑도장 경호의 특징이 사라지고, 구연이 나팔상으로 외반되는 등의 변화가 있고, Ⅳ기 (A.D. 1C 후엽 혹은 2C 전엽경)에는 조합우각형파수부호의 경부 길이가 길어 지며 동체부의 폭도 좁아지고, 주모니호의 구연부가 전시기에 비해 나팔상으로 크게 외반하는 변화를 특징으로 구분했다. Ⅴ기(A.D. 2C 전엽의 늦은 시 기~2C 중엽)에는 조합우각형파수부호의 경부가 극히 짧아지고 밀집된 침선 문 양이 나타나며, 일부에서는 대각이 부착되고 파수도 다수가 부착되는 형태가 나 타나는 것으로 구분했다. 58) 한나라 등의 중국 거울을 본따 우리나라에서 만든 청동거울로서 427호 출토 방 제경에 대해서 林孝澤은 전한경을 모방한 방제경으로 보고 그 출토시기를 A.D. 1세기 전반대로 편년하고 있다. 59) 바닥에 시상석이 깔려 있어서 2008년 보고서에는 수혈식 석곽묘로 분류되어 있 다.

159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59 정세로 인해 안정적으로 보장되지 못하면서, 이후 변한사회 속에서 그 주도 권을 잃어갔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진주조마국의 교역권 쇠퇴와 관련된 주변정세는 어떠했을까 10) 和帝(A.D )때, 鮮卑 대도호 교위 廆가 그 무리들을 이끌고 烏丸교 위 任尙을 따라 반란자들을 공격하고, 교위 廆를 率衆王으로 삼았다. 殤帝 延平(A.D.106년)중에 鮮卑가 동쪽 요새로 들어가 漁陽태수 張顯을 죽였 다.60) 11) 殤帝ㆍ安帝 연간(A.D ) (고)句麗王 宮이 여러 차례 遼東을 침범 하니 다시 玄菟에 속하게 하였다.61) 12) 順帝ㆍ桓帝 연간( ) 다시 요동을 침범해 신안과 거향을 약탈했 다.62) 13) 烏丸, 鮮卑가 점차 강성해지고 또한 漢나라 말의 혼란으로 인해 中國에 일 이 많아 밖을 토벌할 겨를이 없으니 그런 이유로 (오환, 선비가) 넓은 남쪽 땅을 가질 수 있었다. 성읍을 난폭하게 약탈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빼앗으 니 북쪽 변경은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63) 14) 桓帝ㆍ靈帝(A.D )말기에 韓ㆍ濊가 강성해 (漢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64) 위 사료들은 1~2세기경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로 인 한 결과에 대한 것이다. 우선 사료 10)은 1세기 후반 선비족이 오환족과 함 께 어양태수를 공격하는 내용을 적고 있고, 사료 11)과 사료 12)는 2세기 초ㆍ중반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했다고 적고 있다. 즉 전한의 멸망 이후 낙 60) ꡔ三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鮮卑傳. 和帝時 鮮卑大都護校尉廆 帥 部衆從 烏丸校尉任尙擊叛者 封校尉廆 爲率衆王 殤帝延平中 鮮卑乃東入塞 殺 漁陽太守張顯 61) ꡔ三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傳. 至殤安之間 句麗王宮數寇 遼東 更屬玄菟 62) ꡔ三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傳.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 居鄕 63) ꡔ三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烏丸傳. 然烏丸 鮮卑稍更彊盛 亦因漢 末之亂 中國多事 不遑外討 故得擅漠南之地 寇暴城邑 殺略人民 北邊仍受其困 64) ꡔ三國志ꡕ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韓專.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160 160 지역과 역사 38호 랑을 비롯한 요동지방에는 빈번한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를 좀더 직접 적으로 적고 있는 것이 사료 13)으로 전한의 멸망으로 인해 중국대륙은 혼 란스러웠고, 변경에 오환과 선비가 자주 출몰해 약탈을 자행했다고 적고 있 다. 또한 사료 14)에는 이러한 불안정한 지역을 떠나 군현의 많은 유이민들 이 韓으로 유입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1~2세기 한반도 북쪽에서의 혼 란은 2세기 중ㆍ후반 한군현 유이민들의 남하로 이어져 이제까지 한군현과 의 교역을 통한 문화교류 라는 변한 사회의 흐름을 유이민들의 정착을 통한 문화이식 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국제사회의 흐름 속에서, 한군현ㆍ일본과 내륙 정치집단들 간의 교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변진주조마국은 점점 도태되어 갔을 것이 고, 인근에서 세력을 키워 나가던 안야국과, 대일본 무역의 관문으로서 성 장하고 있던 구야국, 창원분지에서 성장하던 골포국 사이에서 서서히 그 세 력을 잃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뒤 이은 313년 낙랑의 멸망은 선진문물의 교류를 더 이상 불가능 하게 하였을 것이며, 오히려 선진문화를 가진 유이민들의 이동을 가속화시 켜 변한 사회에 정착해 내부적으로 선진적인 기술을 활용한 상품들을 생산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역으로 성장한 변진주조마국의 쇠퇴를 빠르게 했고, 4 세기 이후 창원분지 내에서 탁순국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변진주조마국이 3세기 이후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지 는 못했으나, 여전히 이를 전신으로 하는 가야시기 세력이 다호리를 비롯한 창원 동읍지역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호리 구릉에 존재하는 대 형 석곽묘와 석실묘의 존재로 설명할 수 있다. 즉 2~3세기경 변진주조마국 의 강력한 정치권력은 주변국들에게 양도되어 갔지만,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변진주조마국을 뒤이은 세력은 5세기까지 창원 동읍 인근에 일부 유지 되고 있었던 것이다.65) 65) 이 세력과 탁순국 및 인근 지역 정치집단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후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161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61 맺음말 가야사연구가 한ㆍ일관계사 연구에서 벗어나 가야를 주체로 한 연구로 전환하게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이다. 가야지역에 해당하는 낙동강유역 의 개발사업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야시기의 고고학 자료가 축적되었고, ꡔ일 본서기ꡕ에 대한 재해석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가야 및 변한의 발전 과정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그 시기 소국에 초점을 맞춘 연 구가 이어져 지역정치집단의 성장 및 대외관계 등과 같은 한정된 지역과 시 기로 접근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안야국과 구야국을 비롯한 변한 12국의 위치뿐만 아니라 그 세력의 발전과 쇠퇴에 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 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 속에서 창원지역의 정치집단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바로 骨浦國과 卓淳國이다. 하지만 3세기까지 창원 인근 지역의 유 적으로 볼 때 골포국과는 다른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다호리 지역은 지역적인 특성상 여러 교역로를 가지고 있었다. 변진주조 마국은 이러한 교역로와 뛰어난 철제품들을 바탕으로 한군현, 일본, 그리고 변ㆍ진한 지역과 교류하면서 한반도 남부 무역의 중심지로서 발달했을 것 이다. 하지만 1~2세기경 중국대륙 내부의 불안한 정세와 한반도 북부의 전쟁 들로 인한 국제 교역의 쇠퇴, 그리고 313년 낙랑의 소멸이 계기가 되어 서 서히 쇠퇴했을 것이다.66) 그러나 다호리지역의 유적현황을 봤을 때 이 지역 정치세력의 완전한 몰 락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이긴 하지만 목관묘 이후에도 목곽묘 를 비롯한 이후 시기의 묘가 5세기경 가야제국들이 멸망할 때까지도 보이고 66) 탁순국의 등장시기가 3세기인 점과 다호리와 양동리세력 간의 목관묘 변화를 통 한 비교표 <표 3>의 시기를 감안하면 변진주조마국의 쇠퇴 또한 3세기경으로 추 정된다.

162 162 지역과 역사 38호 있기 때문이다. 즉 교역국가로서 강력했던 변진주조마국의 영향력은 주변국 들에게 양도되어 갔지만,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은 5세기까지 여 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강력한 정치집단으로서 변진주조마국이 존재했던 기원전 1세기~기 원후 3세기까지의 변한의 기록 및 변진주조마국에 관한 사료는 부족하다. 그러나 창원 다호리에 변한시기의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미약한 근거로나마 지석묘집단에서 출발해 다호리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던 변진주조마 국에 대해 비정해 보았다. 변진주조마국을 다루며 미처 검토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데, 특히 국가 형 성과 발전에 집중해 변진주조마국 성격과 쇠퇴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다는 점을 통감하며, 앞으로 인근 변한국가들의 발전과정과의 비교사적 접근을 통해 주조마국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ꡔ낙랑ꡕ, 솔출판사, 김종택,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고대한국어 자료 연구 ꡔ국어교육연구ꡕ 30, 김종택, 고대국어 어휘형태의 내적 연구 ꡔ국어교육연구ꡕ 32, 김태식, ꡔ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ꡕ, 푸른역사, 김현미, 卓淳國의 성립과 대외관계의 추이 ꡔ역사와경계ꡕ 57, 김현희, 茶戶里遺蹟의 編年과 弁辰韓의 土器文化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 -昌原 茶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南在祐, 加耶時代 昌原ㆍ馬山地域 政治集團의 對外關係 ꡔ昌原史學ꡕ 4, 남재우, 骨浦國의 형성과 발전 ꡔ역사와경계ꡕ 54, 남재우, 문헌으로 본 駕洛國의 형성과 발전 ꡔ제18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김해 양 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세아ꡕ,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남재우ㆍ김주용ㆍ천성주ㆍ성진석, ꡔ가야인의 삶, 그리고 흔적ꡕ, 도서출판 선인, 박선미, 한반도 출토 漢代 화폐와 그 의미-古朝鮮 멸망이후 삼한지역 교역체계의 변 동과 관련하여- ꡔ先史와 古代ꡕ 28, 2008.

163 弁辰走漕馬國의 형성과 변천 163 박진일, 김해 양동리 유적 2011년도 발굴성과 ꡔ제18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김해 양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세아ꡕ,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송의정, 茶戶里遺蹟 발굴 조사의 성과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原 茶戶 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신용민, 다호리 유적 목관묘 시기의 묘제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原 茶 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梁柱東, ꡔ增訂 古歌硏究ꡕ, 一潮閣, 李健茂ㆍ李榮勳ㆍ尹光鎭ㆍ申大坤,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Ⅰ) ꡔ考古學 志ꡕ 1,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坤ㆍ金斗喆,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Ⅱ) ꡔ考古學 志ꡕ 3, 李健茂ㆍ尹光鎭ㆍ申大坤ㆍ鄭聖喜,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Ⅲ) ꡔ考古學 志ꡕ 5, 李健茂ㆍ宋義政ㆍ鄭聖喜ㆍ韓鳳奎,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Ⅳ) ꡔ考古學 志ꡕ 7, 이병도, ꡔ韓國古代史硏究ꡕ, 博英社, 李炳銑, ꡔ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ꡕ, 螢雪出版社, 이양수, 한반도 삼한ㆍ삼국시대 동경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양수, 圓形으로 再加工된 漢鏡에 대하여 : 破鏡과의 關係를 中心으로 ꡔ영남고고 학ꡕ 57, 李永圭,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異表記語 硏究-資料 分析을 중심으로-, 공주대학 교 석사학위논문, 이용희, 다호리 유적 출토 칠기유물의 칠기법 특징 연구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原 茶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이청규, 茶戶里遺蹟의 靑銅器와 辰弁韓 ꡔ茶戶里 遺蹟 發掘 成果와 課題-昌原 茶 戶里 遺蹟 發掘 20周年 國際學術 심포지움ꡕ, 국립중앙박물관, 林東在, 金海 良洞里古墳群의 編年과 外來系 遺物의 檢討 ꡔ제18회 가야사국제학 술회의 김해 양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세아ꡕ,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任鶴鐘, 洛東江 下ㆍ支流域의 貝塚文化에 對한 再認識 ꡔ大東考古ꡕ 창간호, 田炯權, 4~6세기 昌原지역의 歷史的 實體 ꡔ昌原史學ꡕ 4, 천관우, 辰ㆍ弁韓諸國의 位置 試論 ꡔ白山學報ꡕ 20, 황상일ㆍ윤순옥, 蔚山 太和江 中ㆍ下流部의 Holocene 自然環境과 先史人의 生活

164 164 지역과 역사 38호 變化 ꡔ한국고고학보ꡕ 43, 홍보식, 考古學으로 본 金官伽倻 ꡔ考古學을 통해 본 加耶ꡕ, 한국고고학회, 上海辭書出版社, ꡔ漢文典 修訂本ꡕ,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165 弁辰走漕馬國의형성과변천 165 Abstract Formation and Evolution of the Byeonjinjujomaguk Ahn, Hong-Jwa It was the 1980s when studies on the history of Gaya, which had been conducted mainly within a range of Korea-Japan relations. Since then, it was begun to focus on Gaya of its own. As the government embarked on the development project for the Nakdong River valley (the region of Gaya), it helped collect archaeological materials for Gaya and reinterpret Nihon shoki, the chronicles of Japan, leading to the shift in the studies on the history of Gaya. The change in the studies helped establish the foundation of studies on how Gaya and Byeonhan developed. At the same time, as studies focusing on small states started, more and more studies tended to focus on specific subjects such as the growth of local political parties or foreign relations. That is, studies began to be conducted not only on the location of Byeonhan s 12 small states including Anyakuk and Kuyakuk but also on their influence, development and fall. Also, studies on political parties, Golpokuk and Taksunkuk, in the present-day Changwon area are underway. Given archaeological monuments in the Changwon area, there is a fair chance that another political party other than Golpokuk used to exist there until the 3rd century. At Dong-eup in Changwon, a large number of dolmens have been investigated so far. In particular, dolmens in Bongsan-ri, Sinbang-ri and Yongjam, which are located near the remains of Dahori, can be evidence that an influential political party used to exist there. In light of this, Byeonjin Jujoma was established in

166 166 지역과역사 38 호 Bongsan-ri and other near areas where the dolmens were found. Looking at where Dahori was located, the Dahori area had numerous trade routes. With such trade routes and its quality ironware, Byeonjin Jujoma traded with the four commanderies of Han, Japan, Byeonhan and Jinhan, developing as the center of trade in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By the 2nd century, however, as the international turmoil drove a tremendous decrease in the foreign trade, there is a good chance that Taksunkuk, which was growing in the present-day Changwon area, took over Byeonjin Jujoma. Given archaeological tombs in the Dahori area, the political force in the area did not collapse completely. That was because wooden chamber tombs and other tombs as well as wooden coffin tombs, albeit not many, were found to have existed until the fall of Gaya in the 5th century. Keywords : Byeonjinjujomaguk, Dahori, Three-Han, Changwon, Ancient Nations

167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67 ꡔ지역과 역사ꡕ 38, , 167~213쪽 ꡔ일본서기ꡕ 민달~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 67)백 승 충** 머리말 Ⅰ. 민달~추고기의 紀氏 관련 기사 1. 紀男麻呂宿禰 2. 紀國造押勝 3. (難波)吉士木蓮子 Ⅱ. 민달기 이전의 紀氏 와 임나 Ⅲ. 민달~추고기의 紀氏 관련 인물의 활동 1. 기씨 관련 인물의 활동 양상 2. 기씨 관련 씨족 전후의 기사 Ⅳ. 민달~추고기의 紀氏 관련 기사의 성격 1. 신라 정벌 인식 2. 復興任那, 建任那 인식 맺음말 국문초록 ꡔ일본서기ꡕ의 임나 관계 기사의 경우, 계체ㆍ흠명대는 주로 백제 목씨 의 활동이 주 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가야 멸망 이후는 왜 왕권의 기씨 관련 씨족의 활동이 두드러진 다. 즉 민달~추고대는 도왜한 목(협)만치 후예 씨족인 왜 왕권의 기씨 관련 인물이 대 신라( 임나 포함) 활동의 중심에 있는데, 전대의 백제 목씨의 대 임나교섭의 전통을 잇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달~추고대의 임나 문제 에 집중적으로는 나오는 기씨 관련 씨족의 중심 인물로 는 紀男麻呂宿禰, 紀國造押勝 및 (難波)吉士木蓮子 등이 있다. 기남마려숙녜 의 활 동은 흠명대 임나 땅인 哆唎 와 관련하여 나오면서 임나 를 위해 출병하고 있고, 숭준 대의 筑紫 出居도 임나 와 무관하지 않다. 기국조압승 은 복흥임나 를 위해 소환한 달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schbaek@pusan.ac.kr).

168 168 지역과 역사 38호 솔 일라 사건에 보인다. (난파)길사목련자 는 오로지 임나 에만 파견된 왜 왕권의 실무 관료이다. 기씨 관련 기사가 보이는 시기는 왜 왕권과 신라의 교섭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다. 민달ㆍ숭준대까지 양국은 우호관계 속에 있었다. 그러나 추고대 전반기는 건임나 등의 인식에 이어 신라 정벌 이 상투적으로 보인다. 후반기에 가면 이와는 달리 신라에 대한 빈례 의 외교형식으로 양국 간의 우호관계가 보인다. 이때는 임나의 조 가 순조롭게 진 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말기에 가면 다시 신라 정벌 이 대두한다. ꡔ일본서기ꡕ 민달~추고대 기씨 관련 씨족의 활동에서는 복흥임나, 건임나 인식을 전제로 한 신라와 임나의 항쟁(침공), 신라 정벌, 임나의 조 등이 항상 짝하여 나오 는 점은 주목된다. 신라ㆍ임나에의 사신 파견과 두 국의 견사진조 에 의한 임나의 조 는 어느 정도 역사성을 담보한 것이다. 다만 왜 왕권과 신라 사이에 임나(의 조) 문제는 신라의 조 에 부수한 인식에 불과했다. 기씨 관련 씨족의 임나 와의 관계의 사적 의의 도 여기에 있다. 주제어 민달~추고대, 기씨, 筑紫, 건임나, 임나의 조 머리말 ꡔ일본서기ꡕ의 백제 목씨ㆍ기씨의 활동은 계체ㆍ흠명대에 가장 활발하 다. 주로 목씨 를 중심으로 한 기문ㆍ대사 병합 과 안라와 임나일본부 의 친신라 활동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은 왜 왕권의 기씨 관련 씨족을 중심으로 민달~추고대까지 전개된다. 달솔 일라 의 소환과 임나의 조 등 임나 문제 가 거론되는 시기이다. 즉 백제 목씨의 활동은 흠명대 중반에 끝나고, 이후에는 도왜한 목만치 후예 씨족 가운데 하나인 왜 왕권의 기씨 관련 인물이 임나 관련 대 신라 활동의 중심에 있 다.1) 흠명대 후반의 紀男麻呂宿禰 활동은 비록 신빙성에 문제가 있지만, 임

169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69 나 땅인 哆唎 와 관련하여 나오면서 임나 를 위해 출병하고 있고, 숭준대의 筑紫 出居도 임나 와 무관하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또한 민달대 마지막 왜 계백제관료 인 달솔 일라 의 소환은 그 목적이 復興任那 이고, 이를 위해 기 씨 인 紀國造押勝 이 길비씨 와 함께 파견되는 점이 주목된다. 기씨 는 이제 왜 왕권의 명령을 받아 임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등 백제 목씨의 전 통을 잇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 멸망 이후 왜 왕권의 임나 관련 기사에서 백제의 목씨 가 아닌 왜 왕권의 기씨 가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들 기씨 와 함께 왜사로서 임나 에만 파견된 (難波)吉士木蓮子 가 주목되는데, 기씨 혹은 목씨 가 아 니라 (난파)길사씨 라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길사(キシ) 는 수장 에서 유래한 한반도 도왜계 성씨로서, 원래는 목씨 로 볼 수 있는 여지 가 있다. 따라서 이 인물도 목씨 의 후예 씨족인 기씨 의 활동과 함께 다루 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신공~현종기, 계체ㆍ흠명기의 목씨ㆍ기씨 기사에 대해서는 전고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2) 본고는 그 연장선에서 가야 멸망 이후인 민달~추 고기의 기씨 기사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기씨 관련 인물을 기초적으로 검 토해 보고, 다음으로는 대 신라 임나(의 조) 기사를 통해 신라 정벌, 복흥 임나, 건임나 등의 인식과 관련지어 기씨 관련 인물의 성격을 추출해 해 보고자 한다.3) 자료상의 한계로 추론을 거듭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 1) 본고는 왜 왕권의 기씨 가 백제 목씨 에서 유래했음을 전제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백제 목씨 의 후예 일족으로 기씨 가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는 5세기 후반 백제 최고 귀족으로서 웅진 천도를 주도한 목(협)만치 의 도왜를 상정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 된다. 岸俊男, 紀氏に關する一考察 ꡔ日本古代 政治史硏究ꡕ, 塙書房, 門脇禎二, 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百濟の木劦滿致 と蘇我滿智- ꡔ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ꡕ 12, 講談社, 1971 ; 蘇我氏の形成と朝 鮮文化 ꡔ季刊 三千里ꡕ 7, 三千里社, 1976(秋). 2) 백승충, ꡔ일본서기ꡕ 木氏ㆍ紀氏 기사의 기초적 검토-신공~현종기를 중심으로- ꡔ한국민족문화ꡕ 54, 2015a ; ꡔ일본서기ꡕ 계체ㆍ흠명기 백제 목씨 기사의 검 토 ꡔ지역과 역사ꡕ 37, 2015b. 한편 ꡔ일본서기ꡕ의 목씨ㆍ기씨 관련 연구 논저는 백승충, 위의 논문, 2015a, 59쪽 각주 3) 참조.

170 170 지역과역사 38 호 을수없다. 관련연구자들의많은비판과질정을바란다. Ⅰ. 민달 ~ 추고기의 紀氏 관련기사 ꡔ일본서기ꡕ 의목씨ㆍ기씨관련자료는다음과같이대별할수있다. 첫째, 신공 ~ 현종기 백제기 중심의목라근자ㆍ목만치의 가야정복과지배, 가라국사직복구, 그리고 임나와통모한기생반숙녜 (= 목만치 ) 의반백제활동의실패와도왜 기사이다. 둘째, 계체ㆍ흠명기 백제본기 중심의 기문ㆍ대사병합 및안라와 임나일본부 의친신라경향해소를위한백제의 목씨ㆍ기씨 활동기사이다. 셋째, 민달 ~ 추고기의신라ㆍ임나에의왜사파견, 달솔일라 의소환사건, 임나의조 등 임나문제 의 기씨 관련기사이다. 본고의주검토대상은세번째기사군이다. 이시기는가야멸망 (562) 이후 ꡔ일본서기ꡕ 에서술된바왜왕권의대신라ㆍ임나인식및당대신라ㆍ백제와의관계의추이를잘보여주고있어주목된다. 왜사파견지역, 달솔일라 의소환목적인 복흥임나, 신라에요청한 임나의조 등의기사에는이미멸망한 임나 국명이개재되어있어논란이되고있음은주지하는바와같다. 이시기는흠명대중반까지주로보이던백제의 목씨 가사라지고, 왜왕권의 기씨 관련인물의활동이두드러지는특징을보인다. 민달 ~ 추고기에보이는 기씨 관련인물을정리하면 < 표 1> 과같다. 기씨 가중심이되는데, 숭준기에나오는인물과동일인으로추정되는흠명기용례를먼저배치했다. 또한 ( 난파 ) 길사목련자 는 난파길사씨 임은분명하 3) 달솔일라 소환사건및그의부 아리사등 의성격에대해서는별고를통해구체적으로살펴볼예정이다. 본고에서는 임나일본부 와대척점에있는 왜계백제관료 의일원인그의성격을 임나문제 와밀접한관계에있는 기씨 의활동과관련지어간단하게언급할것이다. 또한 임나의조 도단독주제로다루어져야할사안이기때문에여기에서는 기씨 활동과관련하여기본적인시각만을제시하고자한다.

171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71 지만, 후술할 바와 같이 목련자 이름을 통해서는 기씨 의 원조인 목씨 와의 관련성을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시켰다. 나머지 추고기 말 년과 황극기 임나 관련 용례는 임나 파견 왜사 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 이 될 것이다. <표 1>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 기씨 관련 인물 기사 인물 시기 ① 紀男麻呂宿禰 ㆍ흠명 23년 추7월 시월 ② 吉士木蓮子 ㆍ민달 4년 하4월 ③ 紀國造押勝 ㆍ민달 12년 추7월 ㆍ민달 12년 동10월 ④ 難波吉士木蓮子 ㆍ민달 13년 춘2월 氏 목적 관련 국 가야 공격한 신라 문책, 紀 왜 임나 정벌 吉士 신라ㆍ임나ㆍ백제에 사 왜 임나 신 보냄. 紀 달솔 일라 소환 吉士? 왜 백제 왜 (신라 ) 임나 ⑤ 紀男麻呂宿禰 ㆍ숭준 즉위전기 추7월 紀 物部守屋大連 토벌 왜 ⑥ 紀男麻呂宿禰 ㆍ숭준 4년 동11월 紀 建任那官家 (?) 왜 축자 ⑦ 吉士木蓮子 ㆍ숭준 4년 동11월 吉士 問任那事 왜 임나 ⑧ 難波吉士木蓮子 ㆍ추고 8년 시세 吉士 檢校事狀 왜 임나 ⑨ 吉士倉下 ㆍ추고 31년 시세 吉士 問任那之事 왜 임나 ⑩ 坂本吉士長兄 ㆍ황극 원년 2월 吉士 고려ㆍ백제ㆍ신라ㆍ임나 왜 임나 에 사신 보냄 달솔 일라 소환 사건의 대반씨 중심의 가기류 기사도 마찬가지지만, 민 달~추고기의 임나 관련 기사는 백제 3서 가 아닌 일본 측 자료에 근거하 고 있고, 왜 왕권의 기씨 만 보인다는 점에서 가야 멸망 이전의 목씨 자료와 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ꡔ일본서기ꡕ에서 왜 왕권 자신의 자료에 바탕 을 둔 한반도 관련기록은 흠명기 후반(560)부터 보이기 시작하고, 그 이전 은 제 씨족의 전승이나 가야ㆍ신라ㆍ백제 등이 자료원이며, 흠명기~추고 기에는 왜계고유명사 표기가 다수 사용된다고 한다.4) ꡔ일본서기ꡕ에 백제 3서 가 보이는 신공~흠명기 전ㆍ중반 이후에는 다수 4) 山尾幸久, ꡔ古代の日朝關係ꡕ, 塙書房, 1989, 90~92쪽.

172 172 지역과 역사 38호 의 왜 자체 자료가 참고 되었음을 말한 것인데,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 다. 왜 왕권은 흠명대를 전후하여 ꡔ일본서기ꡕ 편찬 자료로 이용된 帝紀 나 舊辭 를 집록하기 시작했다는 지적5)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겠다. 또한 추고대에 백제 3서 의 편찬 작업이 있었다는 견해6)도 있는데, 만약 타당성 이 있다면 이것도 흠명대의 자국사 중심의 서술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을 것이다. 본장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민달~추고기의 기씨 관련 인물의 활동 양상을 기초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주요 인물로는 紀男麻呂宿禰 ㆍ 紀國造押勝 ㆍ (難波)吉士木連子 등이 있다. 1. 紀男麻呂宿禰 민달~추고기의 기씨 가운데 먼저 주목되는 인물이 흠명대 후반에 보이 는 기남마려숙녜 이다(<표 1>-①). 물론 이 인물은 숭준 즉위 전기의 物部 守屋大連 토벌과 4년 동 11월의 出居筑紫 기사에도 보인다(<표 1>-⑤⑥). 모두 임나 문제와 관련하여 나오는데, 다만 전자와 후자는 한 세대 정도의 큰 시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 전혀 다른 시기에 같은 대장군 을 칭하면서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료A> 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哆唎에서 출발하다. 부 ① 이달에 대장군 紀男麻呂宿禮 장 河邊臣瓊缶를 居曾山에 보내다. 그리고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상황을 문 책하려고 하다. 마침내 임나에 이르러 薦集部首登弭를 백제에 보내 군의 계 가 승리하여 돌아온 군사를 취하여 百濟 획을 약속하다 (중략) 紀男麻呂宿禮 營에 들어가다 (하략).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3년 추7월 시월) ② 가을 7월 蘇我馬子宿禰大臣은 여러 황자와 군신에게 권하여 物部守屋大連 5) 李根雨, ꡔ日本書紀ꡕ에 引用된 百濟三書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 士學位論文, 1994, 8쪽. 6) 木下礼人, ꡔ日本書紀ꡕにみえる 百濟史料 の史料的價値について ꡔ日本書紀と 古代朝鮮ꡕ, 塙書房, 1993, 50~60쪽.

173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73 을 멸할 것을 모의하다. 泊瀨部皇子ㆍ竹田皇子ㆍ廏戶皇子ㆍ難波皇子ㆍ春 ㆍ巨勢臣比良夫ㆍ膳臣賀沱夫 日皇子ㆍ蘇我馬子宿禰大臣ㆍ紀男麻呂宿禮 ㆍ葛城臣烏那羅가 함께 軍旅를 이끌고 나아가서 大連을 토벌하다 (하략). (위의 책, 권21, 숭준기 즉위전기) ㆍ巨勢猿臣ㆍ大伴囓連ㆍ葛城烏奈良臣을 대장 ③ 기묘삭 임오 紀男麻呂宿禰 군으로 삼다. 각 씨족의 臣과 連을 이끌고 裨將部隊로 삼아 2만 여 군사를 거느리고 筑紫로 출병하여 居하다. 吉士金을 신라에 보내고, 吉士木蓮子를 임나에 보내 임나의 일을 묻게 하다. (위의 책, 권21, 숭준기 4년 동11월) 기남마려숙녜 는 흠명대 임나 멸망 직후부터 보인다. 그는 대장군이 되 어 哆唎 에 병사를 보내 임나를 공격한 신라를 문책 하기 위해 임나에 파견 되어 백제와 함께 계책을 세워 항복을 받아낸다(A-①). 그가 출병한 다리 는 계체대의 임나 4현 에 포함된 上ㆍ下哆唎 7)로서 지금의 여수시 와 돌 산읍 으로 추정되고,8) 河邊臣瓊缶 가 출병한 居曾山 은 지금의 장수 번암 혹은 하동 고소성 지역을 가리킨다.9) 다리 는 백제 무령왕대 섬진강 유역 의 기문ㆍ대사 병합 때 가라국 땅이었던 것을 빼앗아 백제 권역으로 편입 한바 있다. 신라가 항복하자 기남마려숙녜 가 백제영으로 들어갔다(A-①) 는 것도 이와 무관한 서술은 아닐 터이다. 물론 위의 기사에서는 다리 는 가야와 신라가 쟁패한 곳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가야와 백제가 쟁패한 가야 땅으로서 종국에는 백제에 병합된다. 이 같은 서술 행태는 지역적으로도 그렇고 마치 ꡔ신찬성씨록ꡕ과 ꡔ속일본후기ꡕ에 전하는 塩乘津 의 三己汶 진출 기사를 연상케 한다. 이때 도 가야와 백제가 다툰 것을 가야와 신라가 다툰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10) 어쨌든 기남마려숙녜 의 다리 를 거점으로 한 임나 출병은 백제의 다리 병 7) ꡔ일본서기ꡕ 권17, 계체기 6년 동12월. 8) 백승충, 임나 4현 의 위치 비정 ꡔ역사와 경계ꡕ 85, 2012, 66~79쪽. 9)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ꡔ譯註 加耶史史料集成ꡕ 제1권(高麗以前篇), (財)駕洛國事蹟開發硏究院, 2004, 253쪽의 각주 699). 연민수ㆍ김은숙ㆍ이근 우ㆍ정효운ㆍ나행주ㆍ서보경ㆍ박재용 역주, ꡔ역주 일본서기2ꡕ, 동북아역사재단, 2013, 395쪽의 각주 300). 10) ꡔ신찬성씨록ꡕ 좌경황별하 길전련. ꡔ속일본후기ꡕ 권6, 인명기 4년 6월.

174 174 지역과 역사 38호 합과 신라의 가야 병합 사실을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즉 임나 멸망 직후인 6세기 후반에 기남마려숙녜 가 다리 를 거점으로 출 병하여 신라로부터 임나를 구원하기 위해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할 계획 을 세우고 실행했다는 내용은 허구이다. 천황사관과 가야ㆍ신라에 대한 지 배ㆍ적대 인식을 전제로, 기씨 가기류 작성 때 백제계 자료 가운데 왜 왕권 중심으로 윤색된바 왜가 백제에 할양 한 다리 (임나4현 및 기문ㆍ대사) 관 련 기사를 임나 멸망 시기에 맞추어 신라 정벌 과 출병 으로 작문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기남마려숙녜 를 원래 임나 구원의 책임자인 백제장군을 왜 장으로 대체한 것으로 본 견해11) 혹은 다리 와 거증산 의 위치를 백제에서 가야로 가는 내륙으로 비정하여 진흥왕 23년 7월 백제의 신라 공격을 모델 로 천황사관에 의해 윤색된 것 혹은 동일 사건으로 본 견해12)도 있다. 그러 나 전자는 단지 주체만 왜에서 백제로 바꾼 것으로 자료 자체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고, 후자의 경우 지명 비정과 두 기사를 동일 사건을 서술한 것으 로 본 것에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가라국의 멸망은 신라의 기습공격으로 병합되기 때문에13) 백제가 가라 국을 구원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신라본기를 기준으로 하면, 가라국 병 합 두 달 전에 백제의 신라 변경 경략만 있을 뿐14) 가라국 구원 등의 출병 기록은 전혀 없다. 더욱이 다리 는 가야 남부해안의 섬진강 유역에 위치하 고 6세기 초에 백제에 병합되기 되기 때문에 위치상ㆍ시기상 가라국 멸망 과는 무관하다. 다만 백제의 신라 변경 경략은 가라국 멸망 이후 완충지가 11) 金鉉球, ꡔ任那日本府硏究-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ꡕ, 一潮閣, 1993, 146쪽. 12) 김현구ㆍ박현숙ㆍ우재병ㆍ이재석, ꡔ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ꡕ, 일지 사, 2003, 305~306쪽. 李文基, 新羅의 大加耶 故地 支配에 대하여 ꡔ歷史敎 育論集ꡕ 45, 2010, 220쪽. 尹星鎬, 新羅의 大加耶 복속 과정에 대한 재검토 ꡔ韓國史硏究ꡕ 155, 2011, 13쪽. 13) ꡔ삼국사기ꡕ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23년 9월.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3년 춘정월. 14) ꡔ삼국사기ꡕ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23년 추7월, 권27, 백제본기5 위덕왕, 8년 추7월.

175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75 사라짐에 따라 양국이 본격적으로 충돌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는 있다. 기남마려숙녜 는 이 사건 이후 25여 년이 경과한 숭준 즉위 전기에 다시 등장한다. 蘇我馬子宿禰大臣의 주도 아래 物部守屋大連 토벌을 모의할 때 인데, 泊瀨部皇子ㆍ竹田皇子ㆍ廏戶皇子ㆍ難波皇子ㆍ春日皇子ㆍ蘇我馬 子宿禰大臣ㆍ紀男麻呂宿禰ㆍ巨勢臣比良夫ㆍ膳臣賀沱夫ㆍ葛城臣烏那羅 등이 함께 참가한다(A-②). 이어 숭준 4년 동11월에는 巨勢猿臣ㆍ大伴囓 連ㆍ葛城烏奈良臣 등과 함께 대장군이 되어 각 씨족의 臣 과 連 을 이끌고 裨將部隊로 삼아 2만여 군사와 함께 筑紫에 出居한다(A-③). 그는 파견 이 후 4년이 경과한 시점에 제 장군들과 함께 축자에서 돌아온다.15) 2. 紀國造押勝 기국조압승 은 민달대에 왜 천황의 명에 의해 백제에 장기간 거주하고 있 던 火葦北國造 阿利斯登 의 아들 달솔 일라 를 귀국시킬 목적으로 吉備海 部直羽嶋 와 함께 백제에 파견되었다(<표 1>-③). 달솔 일라 는 ꡔ일본서기ꡕ 에 보이는 마지막 왜계백제관료 로 추정되는 인물인데, 그의 출자 및 귀국 이후의 행적 밖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특히 장기간 거주했던 백제에 서의 활동은 베일에 싸여 있다. <사료B> ① 丁酉朔 詔하여 말하기를 마침 나의 先考天皇 때에 신라는 內官家의 나라를 멸했다[天國排廣庭天皇 23년 임나는 신라로 인하여 망했다. 고로 신라는 內官家를 멸했다고 하다]. 先考天皇은 임나를 회복하려고 도모했다. 그러나 행하지 못하고 崩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짐은 마땅히 神謀를 도 와 復興任那 하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火葦北國造阿利斯登의 아들 達 率日羅가 현명하고 용기가 있다. 고로 짐이 그와 함께 계획하고자 한다 라고 과 吉備海部直羽嶋를 백제에 보내 부르다. (ꡔ일본서 하다. 이에 紀國造押勝 기ꡕ 권20, 민달기 12년 추7월) 등이 백제로부터 돌아오다. 조정에 복명하기를 百濟國王이 日 ② 紀國造押勝 15)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3년 추7월.

176 176 지역과 역사 38호 羅를 아낀 까닭에 듣지 않는다 라고 말하다. (위의 책, 권20, 민달기 12년 동10월) ③ 다시 吉備海部直羽嶋를 보내 백제에서 日羅를 부르다. 羽嶋는 백제에 이미 가서 먼저 몰래 日羅를 보고자 하여 혼자서 집의 문에 향하여 이르다. 잠시 후 집안에 있던 韓婦가 와서 韓語로 말하기를 그대의 뿌리를 나의 뿌리 속 에 넣으라고 하고 즉시 집으로 들어가다. 羽嶋는 그 뜻을 깨닫고 곧 뒤를 따 라 들어가다. 이에 日羅가 마중을 나와 손을 잡고 좌석에 앉히다 (중략) 日 羅 등이 吉備兒嶋屯倉에 도착하다. 朝庭에서 大伴糖手子連을 보내서 위로 하다. 또 大夫 등을 難波館에 보내서 日羅를 방문하게 하다 (하략). (위의 책, 권20, 민달기 12년 시세). 여기에서는 우선 왜 천황이 달솔 일라 를 귀국시키려는 목적과 그의 귀국 후의 행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민달천황은 先考天皇(=흠명천 황) 때 신라에 병합된 내관가 의 나라인 임나 를 회복하고자 도모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다시 복흥임나 를 위해 백제에 있는 현명하고 용기 있는 달솔 일라와 함께 계획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면서 기국조압승 과 길비해부직우도 를 백제에 보내 귀국할 것을 명했다(B-①). 달솔 일라 의 귀국은 첫 번째 견사에서는 실패한다(B-②). 그러나 이후 다시 시도한 두 번째 견사에서 성공하는데, 그의 귀국 과정은 시세조에 다 소 설화적이지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B-③). 여기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앞 기사에서 달솔 일라 를 귀국시키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기국 조압승 이 빠진 점을 들 수 있다. 아마 대반씨ㆍ물부씨의 가기류를 바탕으 로 별전 즉 길비해부직우도 씨족 자료를 참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B-①을 참고해 볼 때 먼저 언급된 기국조압승 도 여기에 포함되 었음은 물론 달솔 일라 의 귀국을 실무적으로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 각한다. 시세조의 특성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것은 후술할 바와 같이 기 씨 와 대반씨 가 밀접한 관계였고, 달솔 일라 의 소환 목적이 기씨 와 불가 분의 관계에 있는 복흥임나 등 임나 문제에 있으며, 그리고 이 기사는 오 로지 일라의 귀국 과정과 그 이후의 행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 등으 로도 추정 가능하다.

177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77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달솔 일라 와 기씨 의 관계이다. 달솔 일라 의 부는 화위북국조 아리사등인데, 아리[라]사등 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 이 많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16) 다만 수인기 2년 시세조에 의면 都怒我 阿羅斯等 으로 나오는데, 전칭하고 있는 도노(아) 는 후술할 각신 으로서 기씨 와 동일 씨족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 달솔 일라 도 어떤 형태로든 기 씨 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의 귀국에 기국 조압승 을 파견한 것도 우연이 아님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3. (難波)吉士木蓮子 (난파)길사목련자 는 민달ㆍ숭준ㆍ추고대에 걸쳐 나오는 인물이다(<표 1>②④⑦⑧). 난파길사씨 는 한반도계 씨족으로, 길사씨 의 길사 는 원래 신 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료C> 를 임나에 보내다. 吉 ① 乙酉朔 庚寅 吉士金子를 신라에 보내다. 吉士木蓮子 士譯彦을 백제에 보내다. (ꡔ일본서기ꡕ 권20, 민달기 4년 하4월) 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마침내 임나에 가 ② 癸巳朔 庚子 難波吉士木蓮子 다. (위의 책, 권20, 민달기 13년 추2월) ③ 기묘삭 임오 紀男麻呂宿禰ㆍ巨勢猿臣ㆍ大伴囓連ㆍ葛城烏奈良臣을 대장 군으로 삼다. 각 씨족의 臣과 連을 이끌고 裨將部隊로 삼아 2만 여 군사를 를 거느리고 筑紫로 출병하여 居하다. 吉士金을 신라에 보내고, 吉士木蓮子 임나에 보내 임나의 일을 묻게 하다. (위의 책, 권21, 숭준기 4년 동11월) ④ 境部臣을 대장군으로 삼다. 穗積臣을 부장군으로 하다[모두 이름이 빠지 다]. 일만 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임나를 위해 신라를 치다 (중략) 이에 를 임나에 보내 천황은 또 難波吉師神을 신라에 보내다. 또 難波吉士木蓮子 다. 아울러 사정을 살피게 하다. 이에 신라와 임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중략) 장군들이 신라로부터 돌아오다. 곧 신라는 또 임나를 침범 하다. (위의 책, 권22, 추고기 8년 시세) 16) 阿利[羅]斯等 의 성격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 된다. 백승옥, ꡔ日本書紀ꡕ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ꡔ한국민족 문화ꡕ 51, 2014.

178 178 지역과 역사 38호 (난파)길사목련자 는 왜 왕권의 한반도 파견 사신으로 모두 네 차례 보인 다(C-①②③④). 그는 임나로 직접 향하거나 신라를 거쳐 임나로 간다. 그 와 같은 시기에 신라와 백제에 파견된 인물로는 각각 吉士金(子) ㆍ 難波吉 師神 과 吉士譯彦 (C-①③④) 등이 있는데, 모두 같은 길사씨 이다. 가야 멸망 이전의 경우, 임나 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파견된 길사 용례로 는 계체기의 吉士老,17) 調吉士 18) 등이 있다. 길사 씨명은 吉志ㆍ吉師로도 쓰이는데, 신라 경위에 14위 길사 가 보인 다. 대체로 고대 한반도의 수장을 뜻한 것에서 유래하여 왜 왕권의 대외교 섭 업무를 수행한 관인으로 추정된다.19) 길사 용례는 웅략기~천무기까지 난파길사씨 를 비롯하여 기씨ㆍ판본씨 등 계통이 다양하고, 관련 국도 삼 국ㆍ가야 및 당 등을 포괄한다.20) (난파)길사목련자 는 민달~추고기에 걸 쳐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오로지 임나 에만 파견된 난파길사 씨 족의 일원으로서 목련자 는 이름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난파)길사목련자 에 대한 종래 이 같은 해석과는 다 르게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길사씨 는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 ㆍ가야도 포함한 한반도 도래인 집단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난파)길사목련자 는 최종 목적지로서 오로지 (신라 )임나 에만 파견되어 임나의 일 을 묻거나 임나의 조 를 바치도록 유도한 것에 국한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1) 한편에서는 ꡔ일본서기ꡕ 편찬 때 참여한 난파련대형 의 본 래성은 난파길사 로서 같은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22) 어쨌든 (난파)길사씨 의 이 같은 특징을 감안하여, (난파)길사목련자 의 ꡔ일본서기ꡕ 권17, 계체기 23년 춘3월 시월. ꡔ일본서기ꡕ 권17, 계체기 24년 추9월ㆍ동10월. 坂本太郞ㆍ平野邦雄 監修, ꡔ日本古代氏族人名辭典ꡕ, 吉川弘文館, 1990, 230쪽. 박재용, ꡔ日本書紀ꡕ 편찬과 百濟系 史官 ꡔ百濟學報ꡕ 6, 2011, 228쪽. 난파길사씨 전체를 보더라도 신라( 임나) 이외에 파견된 경우는 오직 다음의 한 예만이 있는데, 난파길사덕마려 등이 백제 승 도흔 등과 함께 본국으로 보냈 다 고 한다(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17년 하4월ㆍ5월). 22) 박재용, 앞의 논문, 2011, 228쪽. 17) 18) 19) 20) 21)

179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79 성격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보고자 한다. 목련자 는 인명으로 보기에는 특 이하고 그 활동도 임나 에 국한되어 나온다. 즉 그는 원래 백제에서 임나와 통모 하다가 도왜한 목만치의 후손인 목씨성을 가진 목련자 였는데, 계체ㆍ 흠명대 백제 목씨 의 대 가야 교섭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야 멸망 이후 난파 를 중심으로 임나 를 병합한 신라와의 교섭 활동에 종사한 까닭에 난파길사 성씨를 부여 받아 편입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난파)길사목련자 의 씨명에 대한 이 같은 추정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 이 백제 멸망 후 도왜한 의자왕의 子이자 풍장왕과는 형제간인 선광(왕) 의 표기이다. 즉 선광 은 正廣肆百濟王余禪廣 23)이라고 하여 百濟王氏 와 余 氏 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지통천황(등원조정) 때 선광에게 백제왕 의 칭호 =성을 내렸는데,24) 여기에 이전의 백제왕족성인 여씨 가 함께 기술된 것 이다. 단순한 오기로는 볼 수 없고, 과도기적 현상으로 옛 성씨와 새 성씨를 함께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비교 대상을 살펴보면, 청녕기의 城丘前來目[궐명] 25)이 있다. 이 인물의 경우 행적은 상이하지만 후술할 웅략기의 기소궁숙녜 기사에 나 오는 紀岡前來目連 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는 본래 紀伊國 海 草郡 岡崎村 주변을 본거로 한 래목씨 였는데,26) 기씨 세력이 팽창하여 래목씨 본거지를 아우르면서 기씨 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도 다 른 성으로 바뀌면서 본래성을 이름으로 함께 남긴 사례라고 하겠다. (난파)길사목련자 의 씨명과 관련하여, 목만치 도왜 이후 그 후예 씨족으 로 기씨 와 소아씨 가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데 반해 정작 목씨 는 거의 보 이지 않는 점도 주목된다. 이것은 도왜한 목만치 집단이 제 씨족으로 분기 화 되는 과정에서 애써 목씨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까닭에 (난파)길사씨 등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후대까지 목씨를 칭한 예로 木臣麻 23) 24) 25) 26) ꡔ일본서기ꡕ 권30, 지통기 5년 춘정월. ꡔ속일본기ꡕ 권27, 칭덕천황 천평신호 2년 6월. ꡔ일본서기ꡕ 권15, 청녕기 즉위전기. 坂本太郞 等 校注, ꡔ日本書紀(上)ꡕ, 岩波書店, 1967, 481쪽 頭注 23).

180 180 지역과 역사 38호 呂 가 있는데,27) 기씨 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분명하다. (난파)길사목련자 활동이 주로 보이는 민달~추고대로 한정해 볼 때, 임 나 문제와 관련된 신라ㆍ임나 활동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즉 백제 목 씨의 도왜 이전의 활동이 주로 가야 관계였음을 감안하면, 그의 활동이 임 나의 조 등 임나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난파)길사목련자 가 임나 에 파견될 때 함께 길사(금)자 는 신라 로 파견되는데, 비록 형식적이지만 그 행선지가 길사목련자 와는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점은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야 멸망 이후 왜 왕권의 가야 인식을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임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기씨 관련 인물의 활동이다. 달솔 일라 의 귀국은 복 흥임나 에서 비롯되었고, 기남마려숙녜 의 다리 를 거점으로 한 임나 파견과 축자 출거 그리고 (난파)길사목련자 의 임나 파견도 모두 임나(의 조) 문 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임나 는 이미 신라에 병합된 상태였 기 때문에 기씨 관련 씨족의 활동이 어느 정도 사실성을 반영한다면, 이들 의 임나 파견 활동은 전적으로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Ⅱ. 민달기 이전의 紀氏 와 임나 기씨 와 임나 의 관계는 사실 그 전통이 오래되었다. ꡔ일본서기ꡕ에 의하 면, 흠명대 이전 응신대부터 기씨 는 목씨 와 함께 나오고 있다. 왜 왕권의 기씨 가 백제의 목씨 를 그 선조로 한 것이라면, 여기에는 목라근자 의 子로 나오는 목만치 도왜 이전의 기씨 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 다. 목씨 와 기씨 두 씨족이 나오는 시기와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각각 백제와 왜 왕권의 대외활동의 일환인 임나 문제에 국 한되고 그 활동 양상도 상당히 유사하다.28) 27) ꡔ일본서기ꡕ 권25, 효덕기 대화 5년 3월. 28) 백승충, 앞의 논문, 2015a, 89~91쪽.

181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81 기씨 활동의 이러한 특징은 백제 목씨 의 활동을 근간으로 왜 왕권 중심 으로 바꾸어 서술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계체ㆍ흠명대 백제 목씨 의 활동이 거의 전적으로 임나 와의 관계임을 감안해 보면, 그 전대의 목씨 ㆍ기씨 기사 상당 부분은 이 시기의 사실이 소급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 다. 즉 목만치의 도왜는 임나 와 밀접한 관계 속에 전개되었고, 이것이 기준 이 되어 흠명대 백제ㆍ임나 관계를 그 이전 서술에도 크게 참고한 것이다.29) 왜 왕권 아래에서의 기씨 의 중심지역은 紀伊國 紀の川 유역의 那賀ㆍ 名草 양군으로부터 有田ㆍ日高二郡에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30) 기씨 와 기이국 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기씨 와 대반씨 의 관계이다. 기씨 와 대반씨 의 관계는 임신의 난 때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천무 쪽에 속한 유력씨족이 기씨 와 대반씨 였고, 장군 大伴御行 의 처가 紀音那 였다는 점도 주목된다.31) 대반씨는 攝津~和泉에 이르는 大阪灣 연안이 발상지로서 大和國 高市와 広瀨郡에도 세력의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32) 후술할 기소궁숙녜 의 장례 와 관련하여 천황은 그대 대반경은 기경 등과 같은 곳의 가까운 이웃으로 사귀어온지가 오래되었다 田身輪邑에 묘를 만들어 장사지내게 했다 33)고 한다. 그런데 전신륜읍 은 기씨 와 대반씨 양 씨족의 국경지대인데, 지역적 으로는 오히려 기이 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4) 한편 판본신 의 본거지도 和泉郡의 판본 인데, 무[건]내숙녜의 자 기각숙 녜의 후예로서 족적으로도 기씨 관련 씨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35) 기씨 와 길비씨 의 경우, 大伴室屋大連 은 吉備上道采女大海 를 기소궁숙녜 에 게 주어 따라다니며 돌보게 했다고 하는 등36) 양 씨족도 깊은 관계임을 추 29) 30) 31) 32) 33) 34) 35) 백승충, 위의 논문, 91~93쪽. 岸俊男, 앞의 책, 1966, 104쪽. 岸俊男, 위의 책, 109쪽 각주 13). 坂本太郞ㆍ平野邦雄 監修, 앞의 책, 1990, 141~142쪽.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9년 하5월. 岸俊男, 앞의 책, 1966, 105쪽. 坂本太郞ㆍ平野邦雄 監修, 앞의 책, 1990, 327쪽.

182 182 지역과 역사 38호 정해 볼 수 있다. 기씨 와 각신 은 동조동족이고, 기씨 와 길사씨 의 경우 日鷹吉士 는 기이국 일고군에 있었던 길사집단인데 ꡔ日本靈異記ꡕ에는 기이 국 명초군에 貴志里가 있는 등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7) 즉 7세기 이래 왜 왕권에서의 기씨는 유력 귀족으로서 기이군 에 근거지 를 가지고 있었고, 대반씨와 판본씨의 근거지인 섭진~화천군 과 인접해 있 다. 다만 6세기 후반에 들면 왜 왕권은 소아씨 의 주도 아래 대내외 정책이 실현되었는데, 기씨 는 그 관장 아래 있으면서 임나 문제를 그 정책에 따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왜 왕권의 기씨 의 활동은 그 원조인 백제 목씨 의 대 임나 활동의 전통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ꡔ일본서기ꡕ에서 주요 기씨 는 응신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기씨 가 ꡔ고 사기ꡕ에는 목씨 로 나오고 있고, 木 紀伊 紀 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38) 기씨 가 목씨 에서 유래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씨 가운데 첫 인물은 기각숙녜 이고, 이후 기소궁숙녜 와 기대[생]반숙녜 등이 나온 다. 이하 관련 인물의 성격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39) 첫째, 기각숙녜 이다. 무[건]숙녜의 자로서 ꡔ고사기ꡕ에는 목각숙녜 로 나오는데, 목신ㆍ도노[각]신ㆍ판본신의 조상으로서 실재 여부는 미상이 다.40) 그는 백제에 파견되어 왕위 교체(진사왕 아화왕) 및 국군 강역의 분정과 향토 물산의 기록을 주도하고 있다.41) 왕위계승과 지방제도와 관련 된 백제 내부사정을 전한 것이라면 별도의 의미는 찾을 수 있겠지만, 두 기 사를 2갑자 인하하면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이 된다. 따라서 각각의 활동 이 80년 상당의 긴 시간 폭을 가지고 있고, 천황사관으로 윤색된 실례, 무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9년 3월. 岸俊男, 앞의 책, 1966, 129쪽 각주 2). 岸俊男, 위의 책, 108쪽 각주 4). 기씨 에 관한 이하의 내용은 백승충, 앞의 논문, 2015a, 74~86쪽의 기본 시각 을 바탕으로 하되 기씨 관련 기사의 상호관련성, 백제 인식, 㖨地 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서술했다. 40) 坂本太郞ㆍ平野邦雄 監修, 앞의 책, 1990, 228쪽. 41) ꡔ일본서기ꡕ 권19, 응신기 3년 시세, 권11, 인덕기 41년 춘3월. 36) 37) 38) 39)

183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83 례 용례가 보이는 등 동일 인물의 활동으로 보기는 힘들다. 전자의 경우 ꡔ일본서기ꡕ와 ꡔ삼국사기ꡕ에서 각각 목씨와 진씨의 역할만을 강조한 결과라든가,42) 전ㆍ후자 모두 백제기 에 기초한 것으로 본 견해 가 있다.43) 귀국 등의 용례로 볼 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백제 의 역사에 부회하여 작성한 기씨 가기류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 각한다. 또한 주로 신라ㆍ가야와 관련하여 나오는 설화적인 인물인 습진언 이 백제와 관련하여 갑자기 보이는 것도 사료 내용은 물론 인물 자체의 신 빙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둘째, 기소궁숙녜 이다. 기소궁숙녜 등 4인의 卿은 大將으로 王師(=관 군)를 이끌고 신라로 들어가서 근처의 郡 을 약취하고, 㖨地 를 모두 평정 했다고 한다. 또한 대반실옥대련 의 중재로 길비상도채녀대해 로 하여금 그 를 돌보게 했다고 한다. 이후 신라왕과의 싸움에서 대반담련 과 기강전래목 련 이 죽고, 대장군 기소궁숙녜 는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천황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전신륜읍 에 장사지내게 했다고 한다.44) 기소궁숙녜 기사는 任那國司, 日本府 등 임나 관련 용례와 함께 (吉 備)弟君 의 신라 정토 를 골자로 한 내용45)을 이어서 서술하고 있다. 기씨 가기류를 바탕으로 일부 대반씨 가기류도 포함하여 설화담으로 재구성한 것 이다.46) (길비)제군 은 흠명대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에 吉備弟君臣 47)으 로 나오기도 한다. 기소궁숙녜 활동 시기는 ꡔ일본서기ꡕ에서 아직 복흥임 나 인식이 나오는 단계는 아닌데, 칭신(국)으로서 조공을 거르고 공부를 닦 지 않아 신라를 정토하는 등48) 천황사관으로 윤색되었다. 42) 李根雨, 앞의 학위논문, 1994, 255~265쪽. 盧重國,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木劦(木)氏 세력을 중심으로- ꡔ大丘史學ꡕ 48, 1994, 16~17쪽. 43) 岸俊男, 앞의 책, 1966, 98쪽. 44)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9년 3월ㆍ하5월. 45)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7년 시세, 8년 춘2월. 46) 岸俊男, 앞의 책, 1966, 98쪽. 47)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5년 3월. 48)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9년 3월.

184 184 지역과 역사 38호 그런데 비록 설화적이기는 하지만, 기소궁숙녜 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라와의 전장이 근처의 군 과 㖨地 라는 점이다. 임나 라고 말하고 있 지는 않지만, 이 땅은 소위 남부가야 3국 가운데 한 나라인 㖨國 을 가리키 는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49) 그러나 이 내용은 당대의 기사로는 볼 수 없는 소급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접경지대의 가야 지역 및 탁국 이 전장화되는 것은 계체ㆍ흠명대이다. 어쨌든 기소궁숙녜 의 활동은 가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한편 기소궁숙녜 기사에 등장하는 씨족을 보면, 기씨 로는 대장군 기소 궁숙녜 와 직책을 알 수 없는 기강전래목련 이 있다. 대반씨 로는 웅략천황 때 대련 이 된 중신인 대반실옥대련 50)과 역시 직책을 알 수 없는 대반담 련 이 있고, 길비씨 로는 길비상도채녀대해 가 있다. 기씨 와 두 씨족의 상 관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데, 특히 기씨 와 대반씨 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 은 앞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이외에 소아한자숙녜 와 소록화숙녜 가 있다. 전자는 소하만지숙녜 의 子 로서 목씨의 후예 일족이다. 후자는 기소궁숙녜 장례 이후 기대반숙녜 와 는 함께 천조를 섬길 수 없다고 하여 角國 에 살면서 角臣 으로 불렸다고 한 다. 그런데 각신 은 都奴ㆍ都久ㆍ都濃 이라고도 하고 ꡔ고사기ꡕ 효원기에 의하면 모두 기[목]각숙녜 를 조상으로 하는데,51) ꡔ고사기ꡕ에는 소록화숙 녜 를 소궁숙녜의 子 로 서술하고 있다.52) 자인지 일족인지 분명하지 않지 만, 각신 은 목씨 의 후예 씨족인 기씨 와 동족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셋째, 기강전래목련 이다. 기소궁숙녜 는 또한 군사를 거두어 대반담련 등과 만났는데, 군사들은 크게 떨쳐 일어나 남은 무리들과 함께 힘껏 싸우 다가 대반담련 과 기강전래목련 은 죽었다고 한다. 담련의 시종이자 같은 성을 가진 津麻呂 는 대반공이 죽은 것을 알고 뒤이어 적에게 나아가 죽었 49) 50) 51) 52) 백승충, 앞의 논문, 2015a, 25쪽.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즉위전기. 坂本太郞ㆍ平野邦雄 監修, 앞의 책, 1990, 436쪽. 坂本太郞 等 校注, 앞의 책(上), 1967, 480쪽 頭注 10).

185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85 다고 한다.53) 기강전래목련 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로는 청녕 즉위전 기의 城丘前來目 [궐명]54)이 있다. 그런데 성구전래목 은 대반실옥대련이 東漢掬直에게 웅략천황의 유조가 중요한 때가 되었다. 유조에 따라 황태자를 섬겨라 고 말하자 군사를 일으켜 大藏을 에워싸고 밖에서 굳게 닫고 타죽게 했다고 한다. 이때 吉備稚媛, 반 성황자의 이부형 형군, 그리고 성구전래목 이 성천황자를 따라 타죽었다고 한다. 기강전래목련 과 성구전래목 은 동일 인물로 보이지만, 활동 시기와 내용이 전혀 다르게 설화적으로 기술되고 있어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넷째, 기대반숙녜 이다. 기대반숙녜 기사의 주된 내용은 그의 부 기소궁 숙녜 가 차지한 신라의 땅(실제는 가야의 땅인 탁지 )에서의 전횡 및 소아 한자숙녜, 소록화숙녜 와의 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55) 즉 그는 신라로 가 서 죽은 부의 권한은 물론 그의 부와 함께 파견되었던바 위의 두 사람이 관 장하던 현지 에서의 제 권한을 모두 빼앗았는데, 이런 까닭으로 소록화숙 녜 와는 사이가 멀어지고 소아한자숙녜 도 죽였다고 한다. 기대반숙녜 의 가 야 땅에서의 전횡을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주목되는 것은 그를 포함한 이들 세 인물의 갈등 속 에 표출된 백제의 인식이다. 백제왕은 이들 3인의 활동을 언급하면서 일본 의 장수들 사이에 조그만 일 때문에 틈이 생겼다 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소아한자숙녜 에게 사람을 보내 國界를 보여주겠으니 부디 오 라 고 말했는데, 강가에 이르자 먼저 한자숙녜 가 기대반숙녜 를 쏘았는데 기대반숙녜 가 놀라 활을 쏘아 한자숙녜 를 죽였다고 한다. 백제는 이에 왜 왕권의 이들 세 신하가 이전부터 경쟁하여 질서를 어지럽게 한 까닭에 백제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설화적이지만, 기대반숙녜 기사에 보이는바 위 세 사람의 동향 및 이에 대한 백제의 이 같은 상황 설명과 인식을 통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중 53)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9년 3월. 54) ꡔ일본서기ꡕ 권15, 청녕기 즉위전기. 55)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9년 하5월.

186 186 지역과역사 38 호 요한사실을추출해볼수있을것같다. 1백제는 기대반숙녜 와반목하고있던 소아한자숙녜 에게먼저접근했다는사실이다. 2백제의초청을제안받은 소아한자숙녜 가 기대반숙녜 에게죽임을당했다는사실이다. 3이들세명의장수가서로경쟁하여어지럽혔기때문에백제왕궁에이르지못하고왜로돌아갔다는사실이다. 4 기대반숙녜 가 ( 탁지 에서 ) 전권을행사함에따라상호틈이생겼다는언급을통해볼때백제는이들이자국의왕궁에이르지못한원인을 기대반숙녜 에게돌리고있음을추론할수있다는점이다. 기대반숙녜 에대한백제의이같은인식은, 비록직접적이지않고원전자료도다르지만, 후술할현종기의 기생반숙녜 에대한부정적인인식과상통한다. 즉 기대반숙녜 기사가 기대반숙녜 를포함한 소아한자숙녜 와 소록화숙녜 세사람의갈등과귀국을서술한것이라면, 기생반숙녜 기사는 임나를거점으로한반백제활동과실패, 그리고귀국 에초점을맞추어서술하고있다. 이들에대한백제의인식이좋지못한점, 임나 에서활동했다는점, 백제에가지못하고 임나 로부터왜로귀국했다는점등은완전히동일하다. 다섯째, 기생반숙녜 이다. 기대반숙녜 와동일인물로서, 도왜한 목만치 의또다른이름으로추정된다. 고려와통계하고삼한왕이되려고관부를정비하고스스로신성 이라고했는데, 임나에근거를두고통모하여고려땅인이림과대산성에서백제와대립하다가실패하여임나에서귀국했다 고서술하고있다. 56) 천황사관으로윤색되었지만, 백제계지명ㆍ인명ㆍ사건등이보이고있어내용상의신빙성을높이는부분도있다. 그러나 원백제계자료 도많은의문점이있다. 고려와의통계및이림ㆍ대산성전투가대표적인데, 구체적이기는하지만당시 기생반숙녜 의활동반경이나임나의경역과는전혀맞지않은근본적인문제점을가지고있다. 따라서이들내용은 기생반숙녜 와는무관한별개의사건으로서, 웅진천도 56) ꡔ 일본서기 ꡕ 권 15, 현종기 3 년시세.

187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87 를 전후하여 고려와 통계한 다른 귀족의 반백제 활동 내용이 기생반숙녜 의 활동에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57) 기생반숙녜 기사의 핵심은 그가 임나에 머물렀고, 임나와 통모하여 반 백제 활동을 벌였으며, 이것이 실패하자 왜로 돌아갔다 는 것이다. 이 점은 기생반숙녜 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한 흠명대 爲哥可君 의 행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임나의 거짓을 믿고 백제를 배반하고 포악한 일을 한 까닭에 쫒겨났다 58)고 하는 등 기생반숙녜의 행적과 완전히 일치한다.59) 쫓겨났다, 귀국했다 는 것은 도왜 에 대한 백제 혹은 왜 중심의 작위적인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여섯째, 기신나솔미마사 이다. 父 紀臣이 韓婦를 취하여 백제에서 나서 백제에 머물러 나솔 이 된 자인데, 그의 부의 출자는 알 수 없고 다른 사람 도 모두 이에 따른다고 한다. 흠명대 왜계백제관료 로서 백제 목씨와 함께 안라와 임나일본부 의 친신라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라와 왜 왕권을 왕래 하면서 활동한 백제 사신이다.60) 따라서 그는 백제 목씨의 후예이지만 앞 서 언급한 다른 기씨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데, 6세기 전반 백제와 왜 왕권 의 대외관계사의 한 편린으로 추정된다. 한편에서는 다른 왜계백제관료 와 마찬가지로 그의 선조대부터 외정 에 참여했다가 백제에 정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61) 외정 은 아무런 근거 가 없는바 ꡔ일본서기ꡕ의 인식에 불과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는 기 씨 의 일원으로 백제에서 출생하여 왜계백제관료 가 되었고, 목씨와 함께 당 시 백제의 대외관계의 중요 현안으로 떠올랐던 안라와 임나일본부 문제에 참여했으며, 기씨 로서는 유일하게 임나 문제 로 안라와 왜 왕권에 파견되 57) 白承忠, 安羅의 移那斯ㆍ麻都에 대한 검토 ꡔ지역과 역사ꡕ 2, 1996, 112~ 114쪽. 58)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5년 2월. 59) 백승충, 앞의 논문, 2015a, 26쪽. 60)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년 첫 번째 추7월ㆍ두 번째 추7월, 4년 하4월, 5년 2월. 61) 岸俊男, 앞의 책, 1966, 102쪽.

188 188 지역과 역사 38호 어 활동했을 뿐이다.62) 이상에서 응신~흠명기 가야 멸망 이전의 기씨 관련 인물을 살펴보았다. 백제계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 기생반숙녜 일부 내용과 기신나솔미마사 를 제외하면 모두 기씨 가기류를 근간으로 서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씨 의 원조 혹은 모티프가 된 인물로는 목라근자 와 목만치 인데, 기소궁숙녜-기 대[생]반숙녜 기사는 목라근자-목만치 기사와 대응한다.63) 기씨ㆍ목씨 기사는 모두 임나, 신라와 밀접한 관계 속에 나오고 있음은 물론 두 씨족 사이에 상통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다만 기각숙녜 는 임 나 와는 무관하게 백제와 관련지어 나오는데, 백제계 사료와 결부하여 천황 사관으로 창작 윤색한 것이고, 전설상의 인물인 무[건]내숙녜 의 자 가운데 포함되는 등 인물 자체로서도 신빙성이 없다. 기소궁숙녜 와 子 기대반숙녜 기사는 기씨 설화담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반씨, 각신씨 가기류도 참고하여 윤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소궁숙녜 의 영웅담인 탁지 지배와 신라에의 출병은 신빙할 수 없고, 인물 자체도 사적 인 존재로 보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탁지 즉 가야의 탁국 을 지배했다는 인 식은 기씨 와 임나 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대반숙녜 와 기생반숙녜 기사에서는 신라 정벌 은 전혀 언급되지 않 고, 임나 관계 내용만 나온다. 탁지 에서의 전횡/ 임나를 거점으로 계략을 써서, 세 사람의 경쟁으로 어지럽혀 백제 왕궁으로 오지 못하고 돌아왔다 / 跨據任那, 用任那左魯那奇他甲背等計 하다가 실패하자 임나에서 돌아왔 다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임나 문제 가 깊숙하게 개재되어 있고, 백제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귀국 했음을 말하 고 있음은 분명하다. 62) 백승충, 앞의 논문, 2015b, 60쪽. 63) 백승충, 앞의 논문, 2015a, 89~91쪽.

189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89 Ⅲ. 민달~추고기의 紀氏 관련 인물의 활동 1. 기씨 관련 인물의 활동 양상 가야 멸망 이후 민달~추고기의 기씨 가운데 처음으로 나오는 인물은 기남마려숙녜 이다. 흠명대에 임나를 침략한 신라를 문책하기 위해 다리 에 서 출발하여 임나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빙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계체대 임나 4현 의 다리 가 보이는 점과 가야 멸망 직후의 신라 정벌 등 임나 와 직접 연관 짓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이하의 내용은 하변신경부 와 신라의 전투를 전한 설화담인데, 그는 소아씨 와 동족이고 부인 甘美媛의 父 坂本 臣은 기씨 와 동족이다. 기남마려숙녜 는 숭준기에 蘇我馬子宿禰大臣 과 함께 물부수옥대련 토 벌 때도 나온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이때부터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 이후 그는 巨勢猿臣ㆍ大伴囓連ㆍ葛城烏奈良臣 등과 함께 축자로 출 거하는데, 대반씨를 제외한 기씨ㆍ거세씨ㆍ갈성씨는 모두 무[건]내숙녜를 시조로 하고 소아씨와도 같은 씨족이다. 출병 목적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같은 시기 길사금과 길사목련자를 각각 신라ㆍ임나에 보내 任那事 를 묻게 한 것 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임나 문제가 개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국조압승 의 씨성은 紀直 인데, 紀伊國造系図 에는 押勝 은 忍勝 으 로 나온다.64) 押 과 忍 은 뜻으로도 상통하기 때문에 훈차한 것으로서 동일 인으로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달솔 일라 의 소환을 위해 길비해 부직우도 와 함께 백제에 파견되었다. 기이국 출신으로 왜 왕권의 대외교섭 의 실무자로 추정되는데,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길비해부직 은 길 비의 호족으로 그 지방 해부 의 직을 관장했던 씨족인데, 길비씨 는 인덕ㆍ 웅략기부터 보이는 등 한반도 교섭 활동과 관련이 깊다. 64) 坂本太郞 等 校注, 앞의 책(下), 1967, 143쪽의 두주 12).

190 190 지역과 역사 38호 백제에서 어렵게 귀국한 달솔 일라 는 吉備兒嶋屯倉 에 도착한 뒤 난파 관 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곳은 (신라 )임나에 파견된 (난파)길사목련자 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점이 주목된다. 달솔 일라 의 소환은 길비 지역을 지 배하고 阿部氏와 협조하고 있던 소아씨와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65) 어쨌든 백제가 개재되어 있지만, 달솔 일라 의 소환 목적이 복흥임나 에 있 음을 감안해 보면 이 사건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임나 문제로부터 촉발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난파)길사목련자 는 민달 4년(575) 하4월~추고 8년(600) 시세까지 모 두 네 차례 보인다. 길사 집단이 주로 외교 활동을 중심으로 나오는 것과 관련하여, 사서 편찬 때 난파련대형 이 참여한 사실과 관련이 있고, 당시 소 아씨가 대외교섭을 길사집단에게 전담케 함으로써 대외교섭권을 독점했으 며, 소아씨가 임나의 조 등 대 한반도 정책에 주도적으로 깊이 간여했던 것 으로 보기도 한다.66) 난파련대형 의 길사 관련 기사의 편찬 목적에 대해서 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전체적인 논지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길사 가운데서도 (난파)길사목련자 는 (신라 )임나 파견이 가장 꾸준 하고 횟수로도 절대적으로 많다. 또한 그는 오로지 임나 에만 파견되는 특 징을 가진 점도 중요 사항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그를 가야 출신으로 보기 도 하지만,67) 어쨌든 소아씨 휘하의 왜 왕권의 관료로서 임나 문제 를 전담 한 외교사신의 특징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즉 기씨 가 임나 문제에 간접적 으로 간여했다면, (난파)길사목련자 는 임나 문제 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실 무자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사실 (난파)길사씨 의 활동은 웅략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최초 용례는 안강기의 難波吉士日香蚊 父子 이고, 웅략기에는 日鷹吉士 와 難波吉士赤 目子 용례에 이어 難波吉士日香香 의 자손을 찾아서 大草香部吉士 의 성을 65) 서보경, 達率 日羅를 통해 본 倭系百濟官僚 ꡔ역사와 담론ꡕ 56, 2010, 128~132쪽. 66) 박재용, 일본서기 의 任那 와 任那日本府, 그리고 任那의 調 ꡔ지역과 역 사ꡕ 35, 2014, 167~168쪽. 67) 박재용, 위의 논문, 167쪽.

191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91 내리고 있다.68) 그러나 위의 웅략기 길사 용례는 일본부 용례와 함께 보 이는 등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膳(臣)氏 의 공적을 특별하게 서술하는 경향 이 보이는 기사에 나온다.69) 그렇다고 하더라도 5세기대부터 섭진국 난파 가 왜 왕권의 대외교섭 창 구이자 도래인의 집결지로 부각된 것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길비씨 와 함께 난파 를 중심으로 한 난파길사씨 의 대 한반도 교섭 활동도 인정할 수 있을 듯하다. 비록 신빙성은 없지만, 웅략기의 난파길사적목자 가 임나왕의 요청으로 고려를 공격 하고 있는 등70) 난파길사씨 와 임나 가 긴밀하게 연 관되어 있는 것은 역시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한편 기씨 와 (난파)길사목련자 이외에 길사씨 로서 이후 왜 왕권에서 임나 에 파견된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즉 吉士倉下 71)와 坂本吉士長兄 72) 이 유이하게 보인다(<표 1>-⑨⑩). 길사창하 는 길사반금이 신라에 파견될 때 비 기씨 계열로서 임나에 파견된 사례라고 하겠고, 판본 씨는 기씨 계 열의 길사씨로서 판본길사장형 이후 임나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판본길사장형 은 임나 의 독자적인 조공이 종료73)된 이후 임나 가 단독 으로 나온 마지막 용례이다. 이후에는 백제의 조공사가 임나사를 겸하여 임 나의 조를 올리고, 소덕 高向博士黑麻呂 를 신라에 보내 貢質 하게 하여 마 침내 임나의 조를 그만두게 했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그 사이에 고려ㆍ백 제ㆍ임나ㆍ신라가 견사ㆍ공헌했다는 기사가 있다.74) 그러나 이 기사는 68) ꡔ일본서기ꡕ 권13, 안강기 원년 춘2월, 권14, 웅략기 7년 시세, 8년 춘2월, 14년 하4월. 69) 坂本太郞, 纂記と日本書紀 ꡔ史學雜誌ꡕ 56-7, 1946 ; ꡔ古事記と日本書紀ꡕ, 坂本太郞著作集 第二卷, 吉川弘文館, 1988, 139쪽. 70) ꡔ일본서기ꡕ 권14, 웅략기 8년 춘2월. 71)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31년 시세. 72) ꡔ일본서기ꡕ 권24, 황극기 원년 2월. 천황이 대신에게 고려에 津守連大海, 백제 에 国勝吉士水鶏, 신라에 草壁吉士真跡, 임나에 坂本吉士長兄에 사신 파견을 명한 것인데, 귀국 기사가 없기 때문에 실제 파견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73) ꡔ일본서기ꡕ 권23, 서명기 10년 시세.

192 192 지역과 역사 38호 ꡔ일본서기ꡕ의 내관가 인식에 따른 관용적인 서술로서 신빙하기 어렵다. 2. 기씨 관련 씨족 전후의 기사 민달~추고기의 기씨 관련 기사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나 문 제를 중심으로 하여 신라와의 관계 속에 많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이 기 간 동안의 왜 왕권의 외교관계는 획일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 면, 고려 즉 고구려와 왜 왕권 교섭이 주목되는데,75) 흠명대에 이은 민달대 의 고구려와의 관계는 고구려의 대 신라 견제와 승려ㆍ불교 관련 선진 문물 의 전수로 전개되었다. 추고대는 수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후방인 백제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76) 먼저 민달대부터 왜 왕권의 외교관계를 살펴보면, 달솔 일라 소환 사건 이 발생한 민달 12년을 전후해서 ꡔ일본서기ꡕ에는 일부 고구려 기사와 함께 유독 신라 관계 기사가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왜 왕권의 외교관계가 백제 이외에 여러 국가로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하 편의상 달솔 일라 소환 사건을 기준으로 전후 시기로 나누어 왜 왕권과 신라ㆍ임 나ㆍ백제와의 관계의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ㆍ3년 11월, 신라가 견사 진조함. ㆍ4년 2월, 백제가 견사 진조함. 예년 보다 많음. 新羅未建任那 하자 任那之 事 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조함. ㆍ4년 하4월, 吉士金子ㆍ吉士木蓮子ㆍ吉士譯語彦을 각각 신라ㆍ임나ㆍ백제 에 사신으로 보냄. ㆍ4년 6월, 신라가 견사 진조함. 예년 보다 많음. 아울러 多多羅ㆍ須奈羅ㆍ和 74) ꡔ일본서기ꡕ 권25, 효덕기 대화 원년 추7월, 2년 2월ㆍ9월. 75) 고구려와 왜 왕권 관계 기사가 주로 보이는 것은 흠명~민달대 초기이고, 추고 대 3년 5월부터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31년 하4월ㆍ 5월ㆍ추7월, 32년 춘3월 시월, 권20, 민달기 원년 5월ㆍ6월ㆍ추7월, 2년 하5 월ㆍ추7월, 3년 하5월ㆍ추7월조 참조. 76) 이재석, 6세기 야마토 정권의 對韓政策 ꡔ임나 문제와 한일관계ꡕ, 경인문화 사, 2005, 171쪽.

193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93 陀ㆍ發鬼 4읍의 조를 바침. ㆍ6년 하5월, 大別王과 小黑吉士를 보내 백제국의 宰로 함. ㆍ6년 동11월, 백제왕은 경론 약간 권과 아울러 율사 등 6인을 헌상함. ㆍ8년 동10월, 신라가 枳叱政奈末 을 보내 진조함. 아울러 불상을 바침. ㆍ9년 하6월(11년 동10월과 중복), 신라가 安刀奈末 ㆍ 失消奈末 을 보내 진 조함. 받지 않고 돌려보냄. ㆍ11년 동 10월, 신라가 安刀奈末과 失消奈麻를 보내 調를 바침. 받지 않고 돌 려보냄. * 12년 추7월, 紀國造押勝과 吉備海部直羽嶋를 백제에 보내 (달솔 일라 를) 부름. ㆍ13년 춘2월, 난파길사목련자 를 신라에 보내 임나에 이르게 함. ㆍ13년 추9월, 백제에서 온 鹿深臣과 佐伯連이 각각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 를 가져옴. ㆍ14년 3월, 천황은 建任那 를 생각하고 坂田耳子王 을 (임나의) 사자로 삼음. 이때 천황과 대련이 두창에 걸림. 이 때문에 보내는 것이 중지됨 考天皇의 칙을 배반하지 말고 任那之政 을 잘 돌보라고 함. 달솔 일라 소환 사건 이전에는 백제와 신라의 진조가 꾸준하고, 불상 등 불교 관련품의 진상이 보인다. 특히 新羅未建任那 하자 任那之事 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이후 신라는 전례가 없는 (임나) 4읍의 조 를 바쳤 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신라의 진조를 받지 않는 사건이 두 차례 있었는데, 중출 기사이고 상투적인 서술로서 믿기 어렵다. 진조 거 부 사례는 흠명대 후반 신라와의 초기 교섭관계에서도 보인다.77) 이것을 왜 왕권 내부의 대외정책을 둘러싼 대립의 소산으로 보기도 하는데,78) 어 쨌든 진조 거부 직후 복흥임나 를 위한 달솔 일라 소환이 전개되었음은 주 목된다. 달솔 일라 소환 사건 이후에는 왜 왕권 내적으로는 물부씨 주도로 탑을 허물고 불상과 불전을 불태우는 등 소아씨와의 숭불과 배불 대립이 극에 달 했음을 생생하게 전하는 등79) 정치ㆍ외교상의 주도권 다툼의 정쟁이 치열 77)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2년ㆍ시세. 78) 金鉉球, ꡔ大和政權の對外關係史硏究ꡕ, 吉川弘文館, 1985, 143~144쪽.

194 194 지역과 역사 38호 했다.80) 외적으로는 왜사 난파길사목련자 의 (신라 )임나 파견이 있었고, 건임나 를 염두에 두고 판전이자왕 을 사자로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중단되 었으며, 선천황의 칙인 任那之政 을 잘 돌볼 것을 당부하고 있기도 하다. ꡔ일본서기ꡕ의 서술 행태로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야 멸망 이후의 복흥임나, 건임나 인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사 난파길사목련자 의 (신라 )임나 파견 기사의 경우, 이미 멸망한 임 나에 파견되고 있는 점과 기사 끝 부분에 첨가되고 있는 점을 들어 믿기 어 렵다는 견해도 있다.81) 그러나 임나 파견 자체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당시 왜 왕권과 백제가 달솔 일라 소환 문제로 갈등하는 상황에서 왜 사신이 신 라에 파견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에 파견 자체를 신빙하지 못할 이유 는 없다고 생각한다. (난파)길사목련자 가 여러 차례 나온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달솔 일라 의 소환이라는 경색된 국면이 있기는 했지만, 20여 년간 단절되었던 백제의 관계는 교섭 재개 이후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었다. 또한 신라ㆍ임나와의 관계도 보면, 왜 사신의 파견이 있었고, 신라로부터의 조가 예년보다 많았으며, 아울러 (임나) 4읍의 진조 가 있는 등 상당히 긴밀했다. 백제보다 오히려 신라가 더 많은 사신을 파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왜 왕권 차원에서의 복흥임나, 건임나 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된 것은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용명대(585~587)와 숭준대(587~592)인데, 불교문화 전래 를 매개로 백제와는 더욱 활발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전개했다. 숭준대 백제 는 恩率 首信 등 3명의 사신을 보내 조공했고, 불사리와 함께 聆照律師 등 6명의 승려를 파견했으며, 寺工 太良未太 등을 보내왔다고 한다. 蘇我馬子 宿禰 는 이에 계를 받는 법을 물으면서 처음으로 法興寺를 짓고, 이 땅을 飛 79) ꡔ일본서기ꡕ 권20, 민달기 14년 3월. 80) 加藤謙吉, ꡔ蘇我氏と大和王權ꡕ, 吉川弘文館, ) 박찬흥, 6세기 신라와 야마토 정권의 관계 ꡔ임나 문제와 한일관계ꡕ, 경인문화 사, 2005, 133쪽.

195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95 鳥의 眞神原이라고 했으며, 學問尼 善信 등을 백제 사신에 딸려 보냈다.82) 이들은 2년 뒤 돌아와 櫻井寺에 거주했다.83) 그런데 이듬해 왜 왕권에서는 기남마려숙녜 의 축자 출병이 있었고, 한 차례에 걸쳐 신라ㆍ임나에 각각 길사금 과 길사목련자 를 파견했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왜 왕권은 백제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임나 문제 를 빌미로 한 진조 를 두고 신라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불 교문화를 매개로 한 왜 왕권과 백제의 관계는 소아씨 주도로 활발하게 행해 졌는데, 이와는 별도로 민달대에 이어 신라와도 우호관계를 모색했을 것으 로 추정된다. 이하에서는 장을 달리하여 임나(의 조) 문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추 고대를 중심으로 왜 왕권과 신라와의 관계의 추이를 살펴볼 것이다. 즉 신 라 정벌 및 그 전제가 되는 복흥임나, 건임나 등의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Ⅳ. 민달~추고기의 紀氏 관련 기사의 성격 1. 신라 정벌 인식 왜 왕권의 외교관계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인식적이고 설화적인 성 격이 강하여 신빙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 점은 신라에 대한 강ㆍ온 양면 외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민달ㆍ숭준대에 이어 추고대 에 전개되는바 기씨 관련 인물의 활동을 통해 본 신라와 임나에 대한 일련 의 서술상의 패턴이 그것이다. 추고 8년 시세조 (난파)길사목련자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년 전에는 (난파)길사반금 을 신라에 보냈는데 돌아와 두 마리의 까치를 바친 82) ꡔ일본서기ꡕ 권21, 숭준기 원년 시세. 83) ꡔ일본서기ꡕ 권21, 숭준기 3년 춘3월.

196 196 지역과 역사 38호 적이 있고,84) 일곱 달 전에는 백제왕이 왕자 阿佐를 보내 조공하기도 한 다.85) 그런데 신라와 임나가 서로 공격하니 천황은 임나를 돕기 위해 대장 군 경부신과 부장군 수적신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신라를 쳐 다섯 성을 공략 했는데, 신라왕이 多多羅ㆍ素奈羅ㆍ弗知鬼ㆍ委陀ㆍ南加羅ㆍ阿羅羅 6성 을 들어 복종을 청하니 강제로 공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이에 (난 파)길사목련자 등의 사신을 파견하여 사정을 살피게 한 것이다. 또한 사신 파견 직후에는 신라ㆍ임나가 遣使貢調 하면서 서로 싸우지 않 고 해마다 조공하겠다고 하여 신라로부터 장군을 소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가 또 임나를 침범했다 고 한다. 또한 사신 파견 바로 다음 해에는 뜬금 없이 고려에 大伴連囓, 백제에 坂本臣糠手를 보내 속히 임나를 도우라 고 명하기도 한다.86) 이것을 왜의 대수외교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교통로 확보의 방편으로서 대 고구려ㆍ백제 군사동맹 협상으로 본 견해87)도 있지 만, 사료의 신빙성 문제와 함께 너무 미시적인 추정으로서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후 신라 첩자 迦摩多가 대마에 오니 붙들어 上野에 유배했다고 한다.88) 또한 왜 왕권은 또 신라를 칠 것을 논의했는데, 형식적으로는 신라가 다시 임나를 침범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즉 장군 래목황자 에게 군사 2만 5천 명을 주어 축자에 보내 선박을 모으고 군량을 날랐다고 하는데, 그 가 와병으로 죽자 다시 그의 형 당마황자를 난파에서 발선했으나 여의치 못 해 돌아옴으로써 결국 정벌을 포기했다.89) 앞서 기남마려숙녜 의 축자 출 병과 관련지어 볼 때, 축자 출병과 신라 정벌 즉 임나 문제 와의 상관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신라에 임나 문제를 추궁하기 위해 신라 정벌 을 논의한 것은 사실 민달 84) 85) 86) 87) 88) 89)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5년 동11월~6년 하4월.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5년 하4월.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9년 3월. 박재용, 앞의 논문, 2014, 169쪽.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9년 추9월.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9년 동11월, 10년 춘 2월, 11년 춘2월ㆍ하4월ㆍ추7월.

197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97 대부터 보이는 것으로 임나의 조 를 받기 위한 서술상의 방편에 불과하다. 즉 왜 왕권의 대 신라 강경책은 임나 를 빌미로 한 신라의 조공을 강요한 관 념이다. 이 점은 (난파)길사목련자 파견 직전에 馬子宿禰大臣 이 둔창의 일을 복명한 점, 관산성 전투 이후 근 20년 동안 단절되었던 백제가 평소보 다 많은 조를 바친 점, 천황이 신라가 임나를 세우지 않으니 임나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 90)고 언급한 점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 왕권은 민달대에 (난파)길사목련자 를 임나에 파견된 직후 신라가 4 읍의 조를 바친데 이어 추고대 전반기에는 5(6)성 이 왜에 복종하며, 신라 ㆍ임나가 함께 조공하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왜사 파견의 성 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신라가 임나를 침범했다 고 하여 이미 멸망 한 임나 를 거론하고 있다. 특이하면서도 ꡔ일본서기ꡕ 인식으로는 당연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추고대까지의 임나의 조 관련 기사에는 그 전제로 서 항상 복흥임나, 건임나, 신라의 임나 침략(상쟁), 신라 정벌 등이 짝 하여 나온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임나의 조 관련 기사에는 신라가 임나를 공격했다 는 표현이 상투적 으로 보인다. 이때는 왜 왕권에 대한 신라의 임나의 조, 즉 조공사 파견과 헌물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임나의 조 는 형식적으로는 왜 왕권과 신라와의 외교관계의 사실적 추이를 반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 특히 신라와 왜 왕권의 특수한 관계에 기인한 인식일 뿐이다. 왜 왕권은 종 종 신라의 조 를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 있는데, 백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그 런 적이 없다는 점은 이것을 방증한다. 왜 왕권이 지속적으로 요구한바 복흥임나, 건임나 를 전제로 한 실체가 없는 임나의 조 의 진조 주체는 당연히 임나를 병합한 신라일 수밖에 없고, 그 성과는 신라 조공사의 파견과 그가 가져온 헌물이다. 그 헌물이 임나의 물산91)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사실 큰 의미도 없다. 또한 그 이면에 또 다 90) ꡔ일본서기ꡕ 권20, 민달기 4년 2월. 91) 鬼頭淸明, ꡔ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ꡕ, 校倉書房, 1976, 84~85ㆍ120~ 122ㆍ250~254쪽. 山尾幸久, 앞의 책, 1989, 328~346쪽. 이들 논고에서는

198 198 지역과 역사 38호 른 목적 예를 들면 금ㆍ은ㆍ동 광물의 진조92) 혹은 견수사 항로 개척93) 등이 있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다만 백제와의 우호 관계 속에 신라 정벌 과 임나의 조 의 진작을 위한 끊임없는 요구를 통해 당시 왜 왕권의 소아씨 중심의 친신라외교94) 등 대외교섭의 다양한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추고대 전체로 보면, 신라의 왜 견사가 꾸준하게 보이고 있는 점은 분명 하다. 그러나 그 경향성을 보면, 앞서 살펴본 전반대가 신라 정벌 인식을 전제로 한다면 이하 살펴볼 후반대는 성격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추고 18년 추7월~31년 추7월의 제 기사가 그것이다. <사료D> ① 신라 使人 沙㖨部奈末竹世士가 임나 使人 㖨部大舍首智買와 같이 筑紫에 이르다(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18년 추7월). ② 사신을 보내어 신라ㆍ임나 使人을 부르다(위의 책, 권22, 추고기 18년 9월). ③ 己丑朔 丙申 신라ㆍ임나 使人이 京에 이르다. 이날 額田部連比羅夫에 명하 여 신라객을 맞이하는 장식한 기마의 우두머리로 삼다. 膳臣大伴을 임나객 을 맞이하는 장식한 기마의 우두머리로 삼다. 곧 阿斗河邊館에 안치하다. 丁酉 객 등이 조정에 배알하다. 이에 奏造河勝ㆍ土部連菟에게 명하여 신라 의 인도자로 삼다. 間人連盬蓋ㆍ阿閉臣大籠을 임나의 인도자로 삼다. 함께 이를 인도하여 남문으로 들어와 정중에 서다. 이때 大伴咋連ㆍ蘇我豐浦蝦 夷臣ㆍ坂本糠手臣ㆍ阿倍鳥子臣이 함께 자기 위치에서 일어나 나아가 조정 에 엎드리다. 이에 양국 객들은 각각 재배하고 사신의 취지를 주하다. 이에 4명의 大夫는 일어나서 나아가 大臣에게 아뢰다. 때에 大臣은 자기 위치에 서 일어나 정청의 앞에 서서 듣다. 이윽고 여러 객에게 祿을 사하다. 각각 차이가 있다. 乙巳 조정에서 사인 등을 대접하다. 河內漢直贄을 신라 共食 者로 삼다. 錦織首久僧을 임나 共食者로 삼다. 辛亥 손님들은 예를 다하고 돌아가다(위의 책, 권22, 추고기 18년 동10월). 임나의 조 를 종래의 제왜 혹은 왜 왕권의 가야지배를 계승한 남가라 산출물(金 등)에 대한 공납수령권 혹은 명목상의 청구권에 따른 것으로 보았으나, 받아들 이기 어렵다. 92) 나행주, 임나의 조 의 실체와 의미 ꡔ일본역사연구ꡕ 27, 2008, 201~216쪽. 93) 박재용, 앞의 논문, 2014, 174쪽. 94) 金恩淑, 日本書紀 任那 기사의 기초적 검토 ꡔ한국사 시민강좌ꡕ 11, 일조각, 1992, 39쪽.

199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199 ④ 신라는 沙㖨部奈末北叱智를 보내고 임나는 習部大舍親智周智를 보내 함께 조공하다(위의 책, 권22, 추고기 19년 추8월). ⑤ 신라가 奈末 竹世士를 보내 불상을 바치다(위의 책, 권22, 추고기 24년 추7월). ⑥ 신라가 奈末 伊彌買를 보내 조공하다. 글을 올려 사행의 뜻을 주하다. 무릇 신 라가 표를 올린 것은 아마 이때부터인가(위의 책, 권22, 추고기 29년 시세). ⑦ 신라가 대사 奈末 智洗爾를 보내고 임나는 達率 奈末智를 보내 같이 내조하 다. 불상 일구 및 금탑과 아울러 사리를 바치다. 또 觀頂幡 1구, 작은 기 12 條를 바치다. 불산은 葛野의 秦寺에 모시다. 여타의 사리, 금탑, 觀頂幡 등 을 모두 四天王寺에 들이다. 이때 大唐의 학문승 惠齋, 惠光 및 醫師 惠日, 福因 들이 智洗爾를 따라오다. 惠日 등이 말하기를 唐國에 유학한 학자가 학업을 이루었으니, 부르시오. 또 大唐의 나라는 법식이 완비한 훌륭한 나라 이다. 항상 왕래하심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하다(위의 책, 권22, 추고기 31년 추7월). 사료 ①②③은 신라 使人 沙㖨部奈末竹世士 와 임나 使人 㖨部大舍首 智買 의 내조와 관련된 일련의 기사인데, 외교형식과 관련하여 이전과는 다 른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왜 왕권은 조정의 최상위 인물을 동원하여 신라와 임나 사인을 빈례 의 외교형식으로 대우하고 돌려보냈다.95) 이례적인 특별 한 환대인데, 일단 왜 왕권과 신라의 외교관계가 전 단계의 신라의 임나 침 범, 신라 원정 계획 논의, 신라 정벌 그리고 임나의 조 형식에서 벗어난 것임은 분명하다. 사료 ④⑤⑥⑦도 그 연장선에 있다. 신라가 처음으로 표를 올렸다든가, 불상 및 불교 관련 용구의 전달과 대당 학문승(惠齋ㆍ惠光)과 의사(惠日ㆍ 福因)의 도래 등이 눈에 띈다. 이후의 신라와 왜 왕권 양국 관계를 감안해 보면, 위의 신라에 대한 빈례 의 외교형식과 이 같이 처음으로 표를 올렸다 고 말한 것을 통해서는 양국 관계가 이전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바 우호적 인 관계 속에서의 전혀 다른 외교형식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내용을 보면, 신라ㆍ임나 사신이 왜국에 파견되어 후대 받는다거나, 왜국이 축자에 있는 신라ㆍ임나 사인을 부른다거나, 신라가 불교 관련품을 95) 추고기의 신라에 대한 빈례 의 외교형식과 관련한 근래의 논고로는 다음이 참고 된다. 나행주, 任那의 調 와 任那使 ꡔ日本硏究ꡕ 11, 2009, 214쪽.

200 200 지역과 역사 38호 진공한다거나, 신라가 처음으로 표를 올렸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이다. 종래 양국의 외교관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인데, 앞서 보이던 기씨 와 (난파)길사목련자 의 활동도 당분간 보이지 않는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신라 정벌 과 건임나 등을 빌미로 하여 군사를 파견한다거나 신라ㆍ임 나에 왜사를 보낼 필요가 없었던 시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와 왜 왕권 사이의 이 같은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추고기 31년 시세조에서는 신라 정벌 인식이 대두하는 등 다시 전반기의 서술 양상이 되풀이 되는 다소 의아한 상황이 전개된다. 즉 신라와 임나에 왜사를 보내니 양국이 조공을 바쳤는데, 왜사가 돌아오 기 전에 大德 境部臣雄摩侶 등 대장군과 小德 河邊臣禰受 등 부장군 등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정벌했고, 신라는 다시 堪遲大舍로 바꾸어 임나의 調使로 하여 貢上했으며, 반금 등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약속한 바와 다르고 또한 이 때문에 任那之事 는 안 될 것이다 라고 한다. 장군들만 이 처음으로 임나에 이르러 의논하여 신라를 습격하려고 하니 이에 신라국 왕이 복종을 청하여 허락했다고 한다. 같은 해 동11월조 길사반금 과 길사창하 는 신라에서 왜로 돌아가 대신 에게 신라가 놀라고 전사를 보내 양국의 조공을 올렸으나 수군을 보고 돌아 가고 조물만은 공상한다 라고 말했다. 이에 대신은 일찍 군사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반금 등이 신라로 건너갈 때 나루에 신라의 배를 마중하 는 배가 있으나 임나는 없음을 말하자 임나를 위해 배 한 척을 보탰다고 하 니 신라가 마중하는 배 두 척을 쓰는 것이 이때부터인가? 라고 말하고 있다. 추고 31년 시세조와 동년 동11월조는 상호 연동된 기사인데, 왜사의 신 라ㆍ임나 파견과 신라ㆍ임나 사신의 내조에 얽힌 설화담이 신라 정벌 과 맞 물려 서술되고 있다. 즉 임나를 백제에 붙이는 문제를 논의했다가 무산되고 성급한 신라 정벌 이 신라와 임나 사신의 내조를 가로막은 것을 알고 후회 했다는 것이다. 왜 왕권 내부의 대 신라 외교노선의 갈등으로 볼 여지도 있 으나,96) 관련 내용은 가필ㆍ윤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사의 사적 의미 는 왜 왕권의 양국에의 사신 파견과 동년 추7월조의 양국의 왜 왕권에의 내

201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01 조(대당 학문승과 의사 등)에 있다고 하겠다. 위와 유사한 기사로서 앞서 살펴본바 추고 8년 시세조 기사가 있다(C④). 신라의 임나 공격이 발단이 되어 출병한 점, 경부신 등이 원정군의 핵 심인 점, 신라ㆍ임나에 길사가 파견된 점, 그리고 신라가 복종하고 있는 점 등은 두 기사가 유사하다. 인명과 사건 전개과정이 흡사하기 때문에 두 기 사는 동일 가기류를 바탕으로 중복 서술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왜 왕권 의 신라 원정 계획 과 출병 은 대 신라 적대관에 입각한 후대 관념에 불과하 고, 임나의 조 는 후술할 복흥임나 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復興任那, 建任那 인식 ꡔ일본서기ꡕ의 신라 정벌 과 출병 의 전제가 되는 주요어인 복흥임나, 건 임나 인식은 신라의 남가라 병합(532) 전후하여 보인다. 그러나 본격적으 로 나오는 것은 임나일본부 활동 때와 임나 멸망(562) 이후이다. 가야 멸 망 이후의 최초의 기씨 인 기남마려숙녜 의 다리 출병 목적은 問新羅攻任 那之狀 한다고 하여 실제는 천황의 복흥임나 의 의지와 직결된다. 같은 해 의 新羅打滅任那官家, 흠명천황의 유조인 使於新羅 問任那滅由, 汝須打 新羅 封建任那 97)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기남마려숙녜 의 다리 사건을 전후하여 신라 사신이 자국의 임나 병합을 부끄러워하여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각각 河內國 更荒郡 鸕 鶿野邑과 攝津國 三嶋郡 埴廬의 선조가 되었다98)고 한다. 임나와 신라의 항쟁, 임나 멸망, 신라 정벌, 신라(임나)의 조 를 계기적으로 관련시킨 ꡔ일본서기ꡕ 신라ㆍ임나 관련 기사의 전형적인 서술 구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숭준대 기남마려숙녜 의 축자 출병 바로 두세 달 전에 천황은 朕思 欲建任那 라고 하니 군신은 可建任那官家 라고 답하고 있다.99) 기남마려숙 96) 97) 98) 99) 金鉉球, 앞의 책, 1985, 330~335쪽. 박재용, 앞의 논문, 2014, 177쪽.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3년 춘정월, 32년 춘3월ㆍ하4월.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3년 추7월ㆍ동11월 ꡔ일본서기ꡕ 권21, 숭준기 4년 추8월.

202 202 지역과 역사 38호 녜 의 축자 출병은 이를 위한 사전 조치로 추정된다. 비록 기남마려숙녜 가 임나에 직접 간 것이 아니라 축자에 출거한 것이지만, 건임나(관가) 를 전 제로 한 것인 동시에 왜사 길사금ㆍ길사목련자의 신라ㆍ임나 파견이 함께 행해진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부 규슈의 축자 출병의 성격을 달리 보면, 왜 왕권 내부의 문제로서 기 남마려숙녜 축자 출거 익년에 소아마자숙녜 가 동한직구 를 시켜 천황을 弑 하게 하고 역리를 축자장군에 보내 내란에 의해 외사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0) 고 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최상위 군신으로서 소아마자숙 녜 와 함께 왜 왕권의 내정에도 깊숙하게 개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축자 에 출병한 것은 왜 천황의 죽음을 전후하여 지방의 동요를 진정시키고자 했 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왕권의 내정과 연관 짓더라도 이와 함께 대외교섭의 통로인 축 자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길사금ㆍ길사목련자는 기남마려숙녜 와 함께 축자로 가서 신라와 임나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신 라ㆍ임나 사신이 왜국으로 올 때 축자에 임시로 머문 사례101)라든지, 축자 국은 원근의 나라가 내조하는 곳이고 왕복하는 관문이 되는 곳이다 102)라는 서술을 통해 방증할 수 있다. 따라서 기남마려숙녜 의 축자 출거는 건임나 (관가) 의 후속 조치이고, 래목황자 의 출병이 신라 정벌 에 있다면 임나 문 제 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남마려숙녜 등의 축자 출병의 성격과 관련하여, 왜 정권 내부의 위기 와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나의 조 를 실현하기 위한 征新羅將 軍 으로 간주하기도 하고,103) 백제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신라를 압박하는 수단(또한 백제와 분쟁 중인 고구려의 백제 침입을 견제)으로 활용했던 것 으로 보기도 한다.104) 전자는 임나의 조 사실성을 인정하고 실체가 없는 100) 101) 102) 103) 104) ꡔ일본서기ꡕ 권21, 숭준기 5년 11월. ꡔ일본서기ꡕ 권22, 추고기 18년 추7월. ꡔ일본서기ꡕ 권18, 선화기 원년 하5월. 鬼頭淸明, 앞의 책, 1976, 86~87쪽. 金鉉球, 앞의 책, 1985, 273~278쪽. 박찬흥, 앞의 논문, 2005, 135쪽. 이재

203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03 征新羅 를 상정한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고, 후자의 경우 축자 출 병을 곧바로 백제 지원과 관련된 직접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난 점이다. 비록 인식적이지만, 건임나 축자 출병 (신라 )임나에의 사신 파견 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축자 출병은 백제가 아니라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남마려숙녜 의 신라 출병과 축자 출거 등 대내외활동은 건임나 를 위해 신라 정벌 을 명분으로 한 왜 왕권의 임나 문제, 즉 신라로부터의 진조 의 성사와 직결된 대 신라 외교의 개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달솔 일라 를 소환하기 위해 기국조압승 과 함께 길비해부직우도 가 백제 에 파견된다. 두 사람은 왜 왕권의 대외관계 실무관인인데, 복흥임나 를 위 해 달솔 일라 를 귀국시키고자 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기씨 와 길비 씨 는 5세기 이후 왜 왕권의 신하로서 왜의 대 한반도 관계에 있어 크게 활 동했다. 이들은 전대부터 백제와 인적 교류가 깊었던 유력 씨족의 후예인 데, 이제는 소아씨의 관장 아래에 있으면서 임나 문제 를 매개로 외교 활동 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달솔 일라 의 소환 목적으로 천황이 주장한 복흥임나 는 가깝게는 흠명 때부터 강조한 인식일 뿐이다. 실제는 신라와의 임나 문제 에서 비롯 된바 당시 왜 왕권과 백제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백제왕이 달 솔 일라 의 귀국을 반대한 점, 달솔 일라 가 천황에게 백제에 죄를 물을 것과 백제의 축자 新造國 에 대비할 것을 조언한 점, 달솔 일라 가 함께 온 백제 사신에 죽임을 당한 후 다시 나타나 신라가 죽이지 않았다고 재차 강조한 점 등은 이를 잘 말해준다. 백제왕이 달솔 일라 의 귀국을 반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그가 백제에 죄를 물을 것을 주문한 것은 아마 복흥임나 에 협조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복흥임나 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신라와의 관 석, 앞의 논문, 2005, 173쪽.

204 204 지역과 역사 38호 계 개선에 있어서 백제가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말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신라와 대립하고 있었고, 수나라와의 교류관계가 빈번했 던 시기인데, 왜 왕권은 다원적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 지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달솔 일라 소환 사건의 초점을 복흥임나 가 아니라 백제의 축자에의 신조국 에 두고 백제의 신라 견제와 왜 왕권 내부의 갈등에 의한 백제와의 단절로 보기도 한다.105) 이 견해의 논거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 가 필요한데, 본고에서는 달솔 일라 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백제의 신조국 내용은 신빙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소환 목적이 복흥임나 임을 염두에 둔 다면 왜 왕권과 신라와의 관계에 보다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한다. 신조국 과 관련하여, 근래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반백제 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고 나아가 일라와 신라의 모종의 결탁까지 상정한 견 해106)가 있어 주목된다. 달솔 일라 소환 사건은 왜 왕권 차원에서 보면 국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이 많은데, 복흥임나 (신라 침공) 신 라ㆍ임나에의 사신 파견 과정을 통해 볼 때, 이 사건에는 일라와 신라와의 결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신라와의 관계가 개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복흥임나 를 목적으로 한 달솔 일라 소환 사건을 전후하여 왜 왕권은 임나지정(사), 복흥임나, 건임나 를 부쩍 강조하고 있고, 신라로부터의 4 읍의 진조와 신라( 임나)에의 파견도 이루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비록 건 임나 를 위해 신라( 임나) 파견 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임나 사자로 내정 된 판전이자왕 의 사례도 있다. 이 인물은 흠명기에 신라 사신으로 보내 임 나가 멸망한 까닭을 물은 坂田耳子郞君 107)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105) 金鉉球, 앞의 책, 1985, 145~153쪽. 이재석, 앞의 논문, 2005, 164~167쪽. 106) 朴珉慶, 6~7世紀 百濟의 對倭關係 硏究, 成均館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14, 131~132쪽. 107)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32년 춘3월.

205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05 마지막으로 (난파)길사목련자 의 (신라 )임나 파견의 경우도 형식적으 로는 대체로 복흥임나, 건임나 인식을 전제로 한 임나의 조 진조와 관련 이 깊다. 모두 네 차례 보이는데,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기사는 天皇以新羅未建任那 詔皇子與大臣曰 莫懶懈於任那之事 라고 당부하고, 이후 신라가 4읍의 조를 바치고 있다. 두 번째 기사는 달솔 일라 소환 목적인 복흥임나 를 말하고, 파견 1년 뒤에는 임나지정 을 거론 하고 있다. 세 번째 기사는 바로 직전에 천황은 건임나(관가) 를 말하고 있 다. 네 번째 기사는 신라와 임나의 상쟁, 임나 구원을 위한 신라 공격, 6 성의 복종 에 이어 보이는데, 新羅與任那相功 天皇欲救任那 한 까닭에 두 나라가 견사진조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추고기 31년 시세조의 길사반금 과 길사창하 의 신라ㆍ 임나 파견 기사가 주목된다. 여기서는 신라가 본래 내관가인 임나 를 쳐 복 종시켰는데, 왜는 신라 정벌 대신 두 국에 사자를 보내 임나의 일을 물었다 고 한다. 이에 신라는 임나는 이전대로 내관가 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 면서, 奈末 智洗遅와 임나인 達率 奈末遅에게 각각 길사반금 과 길사창하 를 돕게 했는데, 이로써 양국이 조를 바쳤다고 한다. 내관가 인식(地有天 皇), 신라 정벌, 진조 등 형식적으로는 위의 네 번째 기사와 상당히 유사 하다. 복흥임나, 건임나(관가) 인식은 앞선 계체ㆍ흠명대부터 계속해서 언급 되고 있다. 즉 계체대는 남가라 신라 병합을 전후해서 遣近江毛野臣使于安 羅 勅勧新羅更建南加羅㖨己呑 한바 있고, 흠명대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 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재위 기간 내내 복건임나 를 주장했음은 주지하는 바 와 같다. 이 같은 인식은 임나 용례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효덕기까지 지속 적으로 나오고 있다. 복흥임나 등의 주체와 관련하여, 흠명대를 기준으로 하여 왜 왕권ㆍ백제 성왕에서 신라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하지만,108) 동의하기 힘들다. 그 주체 108) 나행주, 앞의 논문, 2008, 183쪽.

206 206 지역과 역사 38호 는 일관되게 신라이고, 왜 왕권과 백제는 신라를 움직여 성사시킬 것만을 강조할 뿐이다. 다만 가야 멸망 이후는 왜 왕권의 신라 정벌 과 임나의 조 인식을 동반한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군사행동 ㆍ백제지원에서 사자 파견ㆍ일부 출병으로 보기도 하지만,109) 실제는 백 제의 간접적인 지원에서 사자 파견으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복흥임나 등을 전제로 한 신라 정벌 과 임나의 조 등 임나 문제는 560 년 전후 신라가 왜에 처음으로 견사110)한 이후 가야 멸망(562)에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같은 인식은 계체대와 흠명 대 초ㆍ중반에도 보이지만, 이는 남가라 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상당히 제한적이고 관념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임나 전체를 아우르는 인식은 가야 멸망 후부터 찾는 것이 타당하고, 그 실체로서 신라로부터 임나의 조 를 강 요하는 것으로서 표면화된다. 물론 여기에는 모두 기씨 관련 씨족들이 직 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결국 ꡔ일본서기ꡕ 기씨 관련 씨족 전체의 활동을 볼 때, 가야 멸망을 기 준으로 하면 전대는 임나 지배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에 대한 적대감 으로 기술하고 있고, 후대는 복흥임나, 건임나 및 신라정벌 인식을 바탕 으로 한 신라로부터의 임나의 조 의 헌공에 있다고 하겠다.111) 전자는 삼 한 전체의 내관가 인식과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반영된 것이라면, 후자는 이를 전제로 하면서도 임나의 조 를 성사시키기 위한 방도로서 언급한 것이 라고 하겠다. 모두 적대국인 신라 혹은 신라의 임나 지배를 관념적으로 전 제하면서, 임나의 조 를 현실적인 조건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신라 )임나에 파견된 기씨 와 (난파)길사목련자 기사를 살 펴보았다. 사신 파견 전에는 신라의 진조를 거부하거나 복흥임나, 건임나, 109) 나행주, 앞의 논문, 2008, 183~184쪽. 110) ꡔ일본서기ꡕ 권19, 흠명기 21년 추7월, 22년ㆍ시세. 111) 왜의 입장에서 볼 때 임나복흥 은 교역을 중심으로 한 임나의 기능 회복이라고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희진, 가야의 멸망과정과 任那調, 任那復興 의 의미 ꡔ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ꡕ, 혜안, 2001, 289~293쪽.

207 ꡔ 일본서기 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07 신라의임나침공 ( 상쟁 ), 신라정벌 등의당위성을강조하고있고, 사신파견이후에는대체로신라ㆍ임나로부터의진조가있었다. 특히인식적인측면에서 4읍의진조 와다다라등 5(6) 성의귀복은주목된다. 그러나 기씨 관련씨족이이미신라에병합된임나에갔다거나임나가단독으로진조했다는것은신빙하기어렵다. 기씨 관련씨족의활동은 복흥임나, 건임나 등을전제로한왜왕권의대신라인식을반영한다. 또한이것이 임나의조 로연결된다는점에서양국의교류관계에있어서사적의미가크다. 즉이문제의당사자는모두신라인데, 전자가왜왕권의대신라적대관에의한인식적ㆍ관념적서술이라면후자는이를전제로한현실적목표로서 신라 ( 의조 ) 문제로규정해도무방하다. 따라서관념적으로는후자가전자에의해규제되지만, 현실적으로는양자를분리해서접근하는것이타당하다. 맺음말 ꡔ일본서기ꡕ 민달 ~ 추고기의 기씨 및관련씨족의기사는이미멸망한가야즉 임나 와직접적인관계속에나온다. 기남마려숙녜, 기국조압승 및 ( 난파 ) 길사목련자 등이중심인물인데, 한두사례를제외하면이들인물만이 임나문제 와관련지어나온다. 이때의 임나문제 는지금까지도논란이이어지고있는 임나의조 를비롯하여 복흥임나, 건임나 인식을전제로한신라ㆍ임나에의사신파견과축자출병등을포괄한다. 기남마려숙녜 는흠명대 임나 의 다리 관련기사에보이지만신빙하기어렵고, 숭준대를중심으로활약한것으로보인다. 기국조압승 은 복흥임나 를위해소환한 달솔일라 사건에보이고, ( 난파 ) 길사목련자 는민달 ~ 추고대에고르게활동한 기씨 관련씨족으로서오로지 임나 에만파견된왜왕권의실무관료이다. 물론여기서의 임나 는신라를염두에둔 ꡔ일본서기ꡕ의전형적인천황사관에입각한표현형태이다.

208 208 지역과역사 38 호 민달기이전의 기씨 는기각숙녜 기소궁숙녜 기대 [ 생 ] 반숙녜로세대를달리하여나오지만, 동일씨족의계보로보기힘든설화적인가계기록으로보인다. 기각숙녜 는 무 [ 건 ] 내숙녜 의자로서임나와는전혀무관하게백제에서의활동을전하는데, 활동내용과시기는물론인물존재자체에신빙성이없다. 이하의기씨인물은목씨의후예이기때문에기년상으로는도왜한 목만치 를기준으로삼는것이타당하다. 목만치 는 기대 [ 생 ] 반숙녜 와동일인물이다. 그의부 기소궁숙녜 의활동은신라와의전쟁에서의영웅담으로일관하여믿기어려운데, 다만신라변경의가야의땅인 탁지 를차지한점은주목된다. 이는마치목만치의부인 목라근자 의신라ㆍ가야에서의영웅담과흡사하다. 기대반숙녜 는 기생반숙녜 와동일인물인데, 임나 를지배 ( 거점 ) 한다든가백제와의관계가여의치못하여귀국했다고말하는등동일한서술구조를가지고있다. 그러나이들 기씨 기록을통해볼때, 왜왕권의일원으로서활동한그자체로서는큰의미를가질수없다. 왜냐하면설화성여부는논외로하더라도, 관련내용은목씨후예씨족으로서선조 목씨 를 기씨 로바꾼것에불과하기때문이다. 다만민달대이전의이들 기씨 활동의의미를찾자면, 임나 를공통분모로하여이후의 기씨 관련씨족의활동과성격을이해하는데많은시사점을준다는점이다. 민달 ~ 추고기의 기씨 관련씨족의활동은어떤형태로든모두왜왕권의관장아래 임나 와의관계속에서만나오고있음은분명하다. 이같은경향성은그선조인흠명대백제목씨의전통을이은것임은물론 5세기이래한반도교섭과밀접한관련을가진 길비씨 및 난파 지역과의관계도깊었음을말해준다. 한편 기씨 관련씨족이외에임나에파견된사례로는 길사창하 와 판본길사장형 이보인다. 임나 관련기사가많이보이는시기의경우, 왜왕권과신라의교섭관계는어느때보다도활발했다. 비록 복흥임나, 건임나 인식을전제로하고있지만, 민달ㆍ숭준대까지양국은우호관계속에있었다. 그러나추고대전반기는 건임나 인식에이어 신라정벌 이상투적으로서술되어있다. 물론

209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09 후반기에 가면 신라에 대한 빈례 의 외교형식으로 양국 간의 우호관계가 보 이는데, 이때는 임나의 조 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말기에 가 면 다시 전반기의 신라 정벌 로 되돌아간다. 계체ㆍ흠명대 이후 본격화되는 복흥임나, 건임나 인식은 가야 멸망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계체대 후반기나 흠명대 초반기에도 이 같은 인 식이 보이는데, 남가라 등 남부가야 3국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임나 전체 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같은 인식이 임나의 조 를 포함하여 왜 왕권의 신라와의 관계 속에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흥임나, 건임나 인 식을 전제로 한 신라와 임나의 항쟁(침공), 신라 정벌, 출병, 임나의 조 가 항상 짝하여 나온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민달~추고기 기씨 관련 씨족의 활동은 ꡔ일본서기ꡕ의 이 같은 신라ㆍ임 나 인식 속에 나오는데, 신라ㆍ임나에의 사신 파견과 두 국의 견사진조 는 어느 정도 역사성을 담보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임나(의 조) 문제가 항상적이고 중요한 외교관계 설정의 기준이 되었던 것 으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라의 조 에 부수한 인 식에 불과했다. 기씨 관련 씨족의 임나 와의 관계의 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 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金恩淑, 日本書紀 任那 기사의 기초적 검토 ꡔ한국사 시민강좌ꡕ 11, 일조각,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ꡔ譯註 加耶史史料集成ꡕ 제1권(高麗以前篇), (財)駕洛國事蹟開發硏究院, 金鉉球, ꡔ大和政權の對外關係史硏究ꡕ, 吉川弘文館, 金鉉球, ꡔ任那日本府硏究-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ꡕ, 一潮閣, 김현구ㆍ박현숙ㆍ우재병ㆍ이재석, ꡔ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ꡕ, 일지사, 나행주, 임나의 조 의 실체와 의미 ꡔ일본역사연구ꡕ 27, 나행주, 任那의 調 와 任那使 ꡔ日本硏究ꡕ 11, 盧重國,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木劦(木)氏 세력을 중심으로- ꡔ大丘史學ꡕ 48,

210 210 지역과 역사 38호 朴珉慶, 6~7世紀 百濟의 對倭關係 硏究, 成均館大學校 博士學位論文, 박재용, ꡔ日本書紀ꡕ 편찬과 百濟系 史官 ꡔ百濟學報ꡕ 6, 박재용, 일본서기 의 任那 와 任那日本府, 그리고 任那의 調 ꡔ지역과 역사ꡕ 35, 박찬흥, 6세기 신라와 야마토 정권의 관계 ꡔ임나 문제와 한일관계ꡕ, 경인문화사, 백승옥, ꡔ日本書紀ꡕ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ꡔ한국민족문화ꡕ 51, 白承忠, 安羅의 移那斯ㆍ麻都에 대한 검토 ꡔ지역과 역사ꡕ 2, 백승충, 임나 4현 의 위치 비정 ꡔ역사와 경계ꡕ 85, 백승충, ꡔ일본서기ꡕ 木氏ㆍ紀氏 기사의 기초적 검토-신공~현종기를 중심으로- ꡔ한국민족문화ꡕ 54, 백승충, ꡔ일본서기ꡕ 계체ㆍ흠명기 백제 목씨 기사의 검토 ꡔ지역과 역사ꡕ 37, 서보경, 達率 日羅를 통해 본 倭系百濟官僚 ꡔ역사와 담론ꡕ 56, 연민수ㆍ김은숙ㆍ이근우ㆍ정효운ㆍ나행주ㆍ서보경ㆍ박재용 역주, ꡔ역주 일본서기 2ꡕ, 동북아역사재단, 尹星鎬, 新羅의 大加耶 복속 과정에 대한 재검토 ꡔ韓國史硏究ꡕ 155, 李根雨, ꡔ日本書紀ꡕ에 引用된 百濟三書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 學位論文, 李文基, 新羅의 大加耶 故地 支配에 대하여 ꡔ歷史敎育論集ꡕ 45, 이재석, 6세기 야마토 정권의 對韓政策 ꡔ임나 문제와 한일관계ꡕ, 경인문화사, 이희진, 가야의 멸망과정과 任那調, 任那復興 의 의미 ꡔ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ꡕ, 혜안, 加藤謙吉, ꡔ蘇我氏と大和王權ꡕ, 吉川弘文館, 鬼頭淸明, ꡔ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ꡕ, 校倉書房, 木下礼人, ꡔ日本書紀ꡕにみえる 百濟史料 の史料的價値について ꡔ日本書紀と 古代朝鮮ꡕ, 塙書房, 門脇禎二, 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百濟の木劦滿致と蘇我滿智- ꡔ日本のなかの朝 鮮文化ꡕ 12, 講談社, 門脇禎二, 蘇我氏の形成と朝鮮文化 ꡔ季刊 三千里ꡕ 7, 三千里社, 1976(秋). 山尾幸久, ꡔ古代の日朝關係ꡕ, 塙書房, 岸俊男, 紀氏に關する一考察 ꡔ日本古代政治史硏究ꡕ, 塙書房, 1966.

211 ꡔ일본서기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11 坂本太郞, 纂記と日本書紀 ꡔ史學雜誌ꡕ 56-7, 坂本太郞, ꡔ古事記と日本書紀ꡕ, 坂本太郞著作集 第二卷, 吉川弘文館, 坂本太郞 等 校注, ꡔ日本書紀(上)(下)ꡕ, 岩波書店, 坂本太郞ㆍ平野邦雄 監修, ꡔ日本古代氏族人名辭典ꡕ, 吉川弘文館,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212 212 지역과 역사 38호 Abstract Ki-Family and Imna in Bidatsu-Suiko Record of Nihonshoki Baek, Seung-Chung In the Nihonshoki Imna related articles, Keitai & Kinmei era is mainly active in the Baekje Mok-Familly forms the mainstream. And after the fall of the Gaya stands out activities related to the clan kingship in ancient Japan Ki-Familly. Bidatsu-Suiko era, the Ki-Familly of the relevant person, one of the offspring of a cross between ancient Japanese archipelago Mok(Hyeop), Man-Chi at the center of activities for the Silla (including Imna ). And it can be seen that followed the tradition of bargaining for Imna Mok-Familly of Baekje. There are Kinammaryesukrye (紀男麻呂宿禰), Kikuksoapseong (紀國造押勝) and Nanpakilsamokryeonja (難波吉士木蓮子), such as the central figure in the coming intensive Ki-Family related clans appearing in the Imna (a tax clearance) Bidatsu-Suiko era. Activities of Kinammaryesukrye are sending soldiers to Imna with respect to the Dari, the land of the Imna, Kinmei era. Tsukushi to Imna is also independent of the Sushun age is not sending soldiers. Kikuksoapseong case seems to call for a Illa(Dalsol) Imna revival. Nanpakilsamokryeonja who sent to Imna is the only practical officials dispatched by kingship in ancient Japan. If you look at the time a record associated with the Ki-Family, kingship in ancient Japan, Silla was a bargaining relationship with vigorous than ever. The two countries had friendly relations in the age of up to Bidatsu & sushun. But the

213 ꡔ 일본서기 ꡕ 민달 추고기의 紀氏 와 임나 213 era of the first half of Suiko seems to have attacked Silla, Imna revival, etc. following the recognition of the time. When in the second half, it seems the friendly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the form of foreign guests of the Silla alternatively. In this case, it means that Imna a tax clearance is going well. When the end, again, appears to attack Silla. Activities related to Ki-Family clan in Bidatsu-Suiko record of Nihonshoki are noted that the record of the Silla and Imna fight (attack), attack Silla, Imna a tax clearance, etc. subject to the recognition of the Imna revival always comes in pairs. Imna a tax clearance of sent envoys and tax by dispatching envoys to Silla and Imna, and the two countries will have a degree of historicity. However, problems between kingship in ancient Japan and Imna a tax clearance, Silla was only stuck to recognize Silla a tax clearanc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relationship of the clan Imna is associated with the Ki-Family s here. Keywords : Bidatsu-Suiko era, Ki-Family, Tsukushi, Imna revival, Imna a tax clearance

214

215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15 ꡔ지역과 역사ꡕ 38, , 215~268쪽韓ㆍ中ㆍ日 韓 中 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112)이 종 봉** 머리말 Ⅰ. 도량형의 통일과 척 1. 도량형의 통일과 관리 2. 척의 단위와 길이 Ⅱ. 부피의 단위와 용적 Ⅲ. 무게의 단위와 중량 맺음말 국문초록 한ㆍ중ㆍ일의 고대 도량형의 연구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고대는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의 시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중국 과 일본 고대는 자료를 통해 그 시기를 이해할 수 있다. 일본 고대는 도량형에 대해 唐의 律令[唐律疏議]을 수용하여 <大寶令>ㆍꡔ養老令ꡕ 등에서 정리하였지만, 한국 고대는 신 라ㆍ고구려의 율령과 백제의 不從律令 을 고려하면 관련 법령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 한ㆍ중ㆍ일 고대 척의 종류와 길이는 漢尺(약 23.1 ), 南朝尺, 唐大尺(29.7 ), 高句麗尺(35.6 ) 등이 사용되었다. 중국 고대 척은 한국과 일본 고대에 영향을 주었고, 한국 고대 척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셋째, 한ㆍ중ㆍ일 고대 부피의 단위는 合ㆍ升(刀)ㆍ斗ㆍ石(斛ㆍ碩ㆍ苫) 등이 사용 되었고, 한국 고대 단위 체계는 중국과 일본 고대와 달리 운영되었다. 중국 고대 1승의 용적은 약 200 ~600 등이었지만, 일본 고대 1승의 용적은 당대와 같은 약 600 등이 사용되었다. 한국 고대 1승의 용적은 신라의 경우 통일신라 때까지 약 0.2ℓ가 사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5A2A ). **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leejb@pusan.ac.kr).

216 216 지역과 역사 38호 용되었다. 넷째, 한ㆍ중ㆍ일 고대 무게의 단위는 銖ㆍ兩ㆍ斤 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지만, 중국 과 일본 고대는 兩 아래 錢 이란 단위가 사용된 것이 한국 고대와 차이가 있다. 한국 고 대 1근의 중량은 약 240g이었지만, 중국 고대 1근의 중량은 약 240g에서 640g 등이었 고, 일본 고대 1근의 중량은 唐代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주제어 : 唐律疏議, 大寶令, 漢尺, 唐大尺, 高句麗尺. 머리말 度量衡(度는 길이, 量은 부피, 衡은 중량)은 인류 역사의 더불어 존재하 였다. 오늘날은 미터법이란 단위로 全 世界가 공유하고 있지만, 전근대시기 에서는 개별 국가마다 고유한 단위들을 사용하였다. 한ㆍ중ㆍ일 동양 3국 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ㆍ중ㆍ일은 고유한 단위들을 사용하였지만, 도 량형의 단위들을 점차 공유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한ㆍ중ㆍ일의 고대 시기에도 서로 활발한 교류(역)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도량형은 더욱 유사한 측면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의 단위와 기원은 중국의 여러 자료에 부분 적인 내용들이 일찍부터 기록되어 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ꡔ漢 書ꡕ였다. 그중에서도 ꡔ漢書ꡕ 卷21上, 律曆志 第1上에 의하면 度者分寸尺 丈引也 所以度長短也 本起黃鐘之長 以子穀秬黍中者 一黍之廣度之 九十分 黃鐘之長 一爲一分 十分爲寸 十寸爲尺 十尺爲丈 十丈爲引 而五度審矣 量者 龠合升斗斛也 所以量多少也 本起於黃鐘之龠 用度數審其容 以子穀秬 黍中者千有二百實其龠 以井水準其槪 合龠爲合 十合爲升 十升爲斗 十斗爲 斛 而五量嘉矣 權者 銖兩斤鈞石也 所以稱物平施 知輕重也 本起於黃鐘 之重 一籥容千二百黍 重十二銖 兩之爲兩 二十四銖爲兩 十六兩爲斤 三十斤

217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17 爲鈞 四鈞爲石 忖爲十八 易十有八變之象也 石者大也 權之大者也 始於 銖 兩於兩 明於斤 均於鈞 終於石 物終石大也 四鈞爲石者 四時之象也 라고 제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척(길이)의 표준은 황종율관을 기준으로 10 분을 1寸, 10촌을 1尺, 1척을 1丈, 10장을 1引 으로 하였고, 부피의 단위는 龠, 홉(合), 10홉을 1升, 10승을 1斗, 10두를 1斛으로 하였고, 무게의 단위 는 銖ㆍ兩ㆍ斤ㆍ鈞ㆍ石의 다섯 단위로 하고 있다. 이러한 도량형의 단위 들은 이후 중국 고대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고대에서도 부분적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중국 고대 도량형은 여러 연구자에 의해 연구되었지만, 중국은 대표적으 로 吳洛과 丘光明이 몇 편의 단행본으로 정리하였고,1) 한국에서도 중국사 연구자인 崔德卿에 의해 중국 고대인 진ㆍ한대의 도량형을 연구하였고,2) 일본에서도 小泉袈裟勝에 의해 고대 도량형을 정리하였다.3) 한국 고대 도 량형은 초기에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연구되었는데,4) 이는 일본 고대 도량 형을 이해하기 위한 부분과 연계되어 있고, 1970ㆍ80년대 이후는 일본 연 구자도 있지만,5) 한국 연구자가 점차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6) 그 결과 몇 1) 吳承洛, ꡔ中國度量衡史ꡕ, 商務印書館,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 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ꡔ中國度量衡圖集ꡕ, 法仁文化社, 丘光明 編著, ꡔ中國歷代度量衡考ꡕ, 科學出版社, 丘光明, ꡔ中國古代度量衡ꡕ, 商務印書 館,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ꡔ中國科學技術史-度量衡卷ꡕ, 科學出版社, ) 崔德卿, 戰國ㆍ秦漢시대 度量衡制의 정치사적 의미와 그 변천 ꡔ釜大史學ꡕ 23, 1999 ; 秦漢시대 度量衡의 기준과 보급양상 ꡔ大丘史學ꡕ 58, 1999 ; 秦漢시 대 度量衡의 처벌규정과 삶의 강제 ꡔ중국사연구ꡕ 8, ) 小泉袈裟勝, ꡔものさしꡕ, 法政大學 出版局, 1977 ; ꡔ枡(ます)ꡕ, 法政大學 出版 局, 1980 ; ꡔ秤(はがり)ꡕ, 法政大學 出版局, ) 關野貞, 法隆寺金堂塔婆中門非再建論 ꡔ建築雜誌ꡕ 218, 1905 ; 高句麗の平 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ꡔ朝鮮の建築と藝術ꡕ, 東京 岩波書店, 米田美代 治, ꡔ朝鮮上代建築硏究ꡕ, 秋田屋, 申榮勳 譯, ꡔ韓國上代建築의 硏究ꡕ, 東 山文化社, 1976 등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5) 新井宏, ꡔまぼらしの古代尺-高句麗尺なかった-ꡕ, 吉川弘文館, ) 朴興秀, 韓國古代의 量田法과 量田尺에 관한 硏究 ꡔ한불연구ꡕ, 1974 ; 新羅

218 218 지역과 역사 38호 편의 단행본이 출판되었다.7) 일본 고대 도량형은 일본의 연구자를 중심으 로 연구되었는데, 小泉袈裟勝이 대표된다. 그는 일본의 도량형을 체계적으 로 정리를 하여 몇 권의 단행본에서 度ㆍ量ㆍ衡 등을 분야별로 정리하였고,8) 龜田隆之도 전조를 연구하면서 도량형의 글을 발표하였고,9) 宮本佐知子는 최근 고고학의 발굴 자료를 통한 도량형을 정리하였다.10) 앞의 연구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의 연구에서 중 국의 연구자는 중국 고대 도량형에 초점을 두어 연구하였고, 한국의 연구자 는 한국의 도량형을 이해하기 한국과 함께 비교되는 중국 고대 도량형을 검 토하였고, 일본의 연구자는 일본 고대 도량형을 이해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 국처럼 중국과 한국의 고대 도량형을 검토하였다. 이처럼 한ㆍ중ㆍ일 고대 度量衡의 연구는 개별 국가 단위로 연구되어 왔다. 현 단계에서 한ㆍ중ㆍ 일 고대 도량형의 연구를 개별 국가 단위로 연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동양 3국은 문화적 교류와 율령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 를 비교 연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 및 高麗 때의 量制度와 量尺에 관하여 ꡔ科學技術硏究ꡕ 5, 1977 ; ꡔ度量衡과 國樂論叢ꡕ, 朴興秀선생정년논총간행위원회, 李宇泰, 韓國古代의 尺度 ꡔ泰東古典硏究ꡕ 創刊號, 1984 ; 韓國古代의 量制 ꡔ泰東古典硏究ꡕ 10, 朴贊興, 高句麗尺에 대한 硏究 ꡔ史叢ꡕ 44, 李宗峯, 통일신라시대의 척 ꡔ한국중세사연구ꡕ 8, 2000 ; 韓國古代의 量制 ꡔ역사와 경계ꡕ 61, 2006 ; 韓 國 古代 度量衡制의 硏究現況과 課題 ꡔ역사와 세계ꡕ 42, 윤선태, 신라 하대 量制에 관한 일시론-雁鴨池 출토 量器를 중심으로 ꡔ신라문화ꡕ 17ㆍ18, 2000 ; 한국 고대의 척도와 그 변화-고구려척의 탄생과 관련하여 ꡔ國史館論 叢ꡕ 98, 盧重國, 百濟의 度量衡과 그 運用-척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ꡔ한 국고대사연구ꡕ 40, ) 국립부여박물관, ꡔ백제의 도량형ꡕ, 예맥출판사, 朴興秀, ꡔ韓ㆍ中度量衡 制度史ꡕ, 성균관대 출판부, 新井宏, 앞의 책, 유태용, ꡔ35.6의 고 구려자ꡕ, 서문문화사, 李宗峯. ꡔ韓國中世度量衡制硏究ꡕ, 혜안, ) 小泉袈裟勝, ꡔ度量衡の歷史ꡕ, 原書房, 1977과 앞의 주) 3번의 책. 9) 龜田隆之, 日本 古代における田租田積の硏究-度量衡制との關聯を通して- ꡔ 古代學ꡕ 4-3, 喜田貞吉博士紀念號, ) 宮本佐知子, さしㆍますㆍはかり ꡔ考古學による日本歷史-交易と交通ꡕ 9, 雄 山閣, 1997.

219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19 연구를 토대로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을 비교 검토하여 한ㆍ중ㆍ일 도량 형의 동질성과 이질성 등을 비교 검토하려고 한다. 다만 本考에서 고대는 한ㆍ중ㆍ일의 시기구분은 논외로 하고, 일단은 한국은 統一新羅, 중국은 唐, 일본은 奈良시기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Ⅰ. 도량형의 통일과 척 1. 도량형의 통일과 관리 먼저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한국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ꡔ삼국사기ꡕㆍꡔ역주 한국 고대금석문ꡕ 등에 도량형과 관련한 여 러 기록과11) 고고학적 자료들이 출토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어떤 형태이 던지 도량형을 제작하였고, 이를 통일하여 정비하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 를 위해 삼국의 시장의 설치 현황을 살펴보자. 신라는 소지왕 12년(490) 처음으로 京師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화를 통하게 하였다는12) 기록을 고 려할 때 5세기 후반 시장을 개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증왕 9년 (508)에 東市典,13) 효소왕 4년(695) 西市典과 南市典 등을14) 계속적으 로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이들은 각 시장을 감독하던 관부이다. 신라가 각 시장을 감독할 관부까지 설치되었다면 시장이 어느 정도 활성화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백제는 시장을 열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三斤王 2 년(478) 반란을 일으킨 燕信을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는 것과15) 의자 11) 삼국시대 척의 단위에 대한 서술은 다음의 논문이 참고 된다(이우태, 앞의 논문, 1984 ; 앞의 논문, 1993). 12) ꡔ三國史記ꡕ 권3, 신라본기3, 소지왕 12년 3월. 13) ꡔ三國史記ꡕ 권38, 잡지7, 직관 상. 14) ꡔ三國史記ꡕ 권38, 잡지7, 직관 상. 15) ꡔ三國史記ꡕ 권26, 백제본기4, 삼근왕 2년 춘.

220 220 지역과 역사 38호 왕 20년 시장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16) 백제도 웅진도성과 사비도성에 시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市部가 존 재하였는데,17) 이는 시장을 관리하던 부서로 생각한다.18) 고구려는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없지만, 신라와 백제의 시장의 설치를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따라서 삼국은 국가의 중심지에 시장을 개설하였고,19) 시 장에서 상품의 매매에 대한 관리도 필요하였을 것인데, 한국 고대의 東市典 과 市部 등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은 시장에서 교역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도량형기에 대한 감독과 관리도 함께 하였을 것이므로, 이 무렵의 어느 시점에 도량형을 통일하고 정비하였을 것이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정비하는 시기와 내용은 국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는 양전과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토대였 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는 頃畝制20)ㆍ段步制,21) 신라는 통일기에 結負制 등을 시행하였고,22) 고구려의 인두세ㆍ戶稅 수취와 백제의 食米支給 등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국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시기에 대해서는 관련 자 료의 부족으로 언제 이루어졌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신라는 문무왕 대 당의 문화 수용을 주목하여 量制를 새롭게 정비하였을 것으로 파악한 연 구가 있고,23) 고구려는 일본 고대 자료를 통해 중국의 경무제와 다른 段步 制가 소수림왕 3년 시행되었고,24) 백제는 척의 경우 한성백제기와 사비시 16) 17) 18) 19) 20) 21) 22) 23) 24) ꡔ三國史記ꡕ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 4월. ꡔ三國史記ꡕ 권40, 잡지9, 직관 하. 홍희유, ꡔ조선상업사ꡕ,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34쪽. 삼국 및 통일신라의 시장의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 된다(김창석, ꡔ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ꡕ, 일조각, 2004). ꡔ三國史記ꡕ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7년 4월. 박찬흥, 고구려의 段步制 ꡔ韓國史學報ꡕ 12, 2002, 45~47쪽 ; 고대 한국과 일본의 量田制 비교 고찰 ꡔ韓國史學報ꡕ 41, 2010, 20쪽. 이종봉, 앞의 책, 2001, 222쪽. 朴興秀, 앞의 책, 1980, 232~233쪽. 박찬흥, 앞의 논문, 2002.

221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21 기에 중국 남조와 교류하면서 남조척과 당대척 등이 사용되었다고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25) 신라는 문무왕 때 당의 量制를 수용하여 小升(0.2ℓ)에서 大升(0.6ℓ)으 로 바뀌었다고 하였는데, 통일신라 성덕왕 때 1승은 아직 0.2ℓ인 점을 고 려하면 양제가 당의 대양제로 바뀌어졌다고 할 수 없지만, 문무왕 때 견포 의 길이를 조정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척은 문무왕 때 漢尺에서 唐大尺으로 변동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구려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 만, 백제는 武寧王妃의 誌石 買地券에 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 爲明 不從律令 이란 기록이 주목된다.26) 지석은 石의 단위와 함께 토지를 매입하였는데, 율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는 이미 무 녕왕 때 토지의 매매와 관련한 법령, 즉 율령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 다. 중국과 일본 고대 율령에 기록되어 있는 도량형의 내용을 고려하면 백 제도 율령 내에 도량형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백제는 율 령에 기반하여 6세기 중반 支藥兒食米記 의 大升과 小升,27) 7세기 초반 佐官貸食記 의 甲ㆍ半 등의 양기 단위를 사용하였다.28) 백제는 이러한 목간 자료를 고려할 때 6세기 초반 무령왕 이전에 도량형을 정비하였을 것 으로 유추된다. 따라서 한국 고대 도량형은 뒤에 서술하는 중국과 일본 고 대의 통일과 정비를 고려하면 어느 시기에 통일과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중국의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는 춘추전국시기와 이후의 기록 과 유물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秦은 秦始皇이 6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도 도량형을 사용하였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진은 ꡔ商君 書ꡕ29)ㆍꡔ戰國策ꡕ30)ㆍꡔ史記ꡕ31) 등의 기록을 고려할 때 어느 시점에 도량 25) 盧重國, 앞의 논문, )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ꡕ 1, 武寧王妃誌石. 27) 홍승우, 佐左官貸食記에 나타난 百濟의 量制와 貨食制 ꡔ목간과 문자ꡕ 4, 2009, 38쪽. 28) 홍승우, 위의 논문, 43쪽. 29) ꡔ商君書ꡕ 算地篇. 聖人審權以操柄 審數以使民 數者臣主之術 而國之要也

222 222 지역과 역사 38호 형을 통일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예는 商鞅銅方升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32) 商鞅銅方升의 底部에 의하면 진시황 26년(기원전 221) 황제가 천하제후를 모두 겸병하여 통일을 하였고, 승상인 隗狀과 王綰에게 명하여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고대는 秦의 시 황제 26년에 도량형의 통일이 이루어졌다.33) 이후 漢代는 앞의 ꡔ漢書ꡕ 율력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도량형을 제 도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진의 도량형 통일을 제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 여 진다. 위진ㆍ남북조시기에는 도량형 통일을 어느 시기에 시도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도량형의 단위를 증대시킨 도량형기와34) 후대의 자료인 ꡔ隋書ꡕ 율력지에 梁陳依古. 齊以古升五升爲一斗,와35) 梁 陳依古稱. 齊以古稱一斤八兩爲一斤 등이 있고,36) 또 ꡔ左傳正義ꡕ에 魏齊 斗称於古二而爲一이란37) 등의 기록을 고려할 때, 梁과 陳은 옛 제도를 따 랐다면, 齊와 魏는 양과 형기의 단위를 약 2배 증대시켰음을 알 수 있다. 아 울러 척의 길이도 南朝尺의 길이가 漢尺보다 길어졌고, 북위에서 사용된 척 의 길이도 크게 길어진 점을 고려하면38) 척의 정비도 있었음을 유추할 수 30) ꡔ戰國策ꡕ 권5, 秦三 蔡澤見逐於趙. 夫商君爲孝公平權衡正度量調輕重 31) ꡔ史記ꡕ 권68, 商君列傳. 凡三十一縣 爲田開阡陌封疆而賦稅平 平斗桶權衡丈 尺 行之四年 公子虔復犯約 劓之 32) 國家計量總局, ꡔ中國古代度量衡圖集ꡕ, 1993, 44~45쪽. 丘光明 編著, ꡔ中國 歷代度量衡考ꡕ, 科學出版社, 1992, 140~141쪽. 左壁 ; 十八年(344) 齊率卿 大夫重來聘 冬十二月乙酉 大良造鞅 爰積十六尊五分尊壹爲升. 右壁 ; 臨. 炳相 對面 ; 重泉. 底部 ; 卄六年 皇帝盡幷兼天下諸侯 黔首大安 立號爲皇帝 乃詔丞 相狀錧 法度量則不壹歉疑者 皆明壹之. 右壁 ; 臨 33) 崔德卿, 앞의 논문, 1999, 24쪽. 34)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앞의 책, 1993, 50~ 60쪽과 344~346쪽에서 남북조시기에는 漢代보다 긴 척과 무거운 저울 추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丘光明 編著, 앞의 책, 1992, 58~69쪽 과 434~437쪽에도 서술되어 있다. 35) ꡔ隋書ꡕ 권16, 律曆 上 嘉量. 36) ꡔ隋書ꡕ 권16, 律曆 上 權衡. 37) ꡔ左傳正義ꡕ 권55. 十三經注疏, 2141쪽. 38) 丘光明 編著, 앞의 책, 1992, 69쪽의 三國 西晉 南北朝 尺度의 일람표 참조.

223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23 있다. 그런 점에서 위진ㆍ남북조시기에도 도량형의 정비는 이루어졌다. 隋代에는 ꡔ隋書ꡕ 律曆志에 의하면 尺은 九 後尺 實比晉前尺一尺二寸 八分一厘. 即開皇官尺及後周市尺 後周市尺, 比玉尺一尺九分三厘. 開皇官 尺, 即鐵尺, 一尺二寸 이라고 기록하고 있고,39) 量은 開皇以古斗三升爲一 升 大業初依復古斗 라 기록하고 있고,40) 衡은 開皇以古稱三斤爲一斤, 大 業中, 依複古秤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41) 즉 隋는 척을 開皇(581~600) 때 이전보다 길어진 1척 2촌으로 정리하였고, 量ㆍ衡器를 文帝 때인 開皇 년 간에 3배 정도 증대시켰다가 煬帝 때인 大業 년간에 이전의 제도로 환원하 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量ㆍ衡器가 煬帝 때 이전으로 환원하였다는 것은 唐代에 隋의 제도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상징성에 불과하 고, 실제로는 개황 때의 大量ㆍ衡制로 운용되었다. 특히 隋의 도량형의 통 일은 위진ㆍ남북조시기의 혼란을 통일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안전과 국가 운영에 필요한 조세의 수취를 위해 시급히 이루어져야만 했다. 隋는 도량형의 통일을 하였고, 이러한 도량형 통일은 이전인 秦의 도량형 통일에 버금가는 큰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秦의 도량형 통일이 1차 통일이었다면 隋는 2차 통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42) 당대는 ꡔ唐六典ꡕ에 凡度 以北方秬黍中者 一黍之廣爲分 十分爲寸 十寸 爲尺 一尺二寸爲大尺 十尺爲丈 凡量 十升爲斗 三斗爲大一斗 十斗爲斛 凡 權衡 三兩爲大兩 十六兩爲斤 內外官私實用大者 이라 기록하고 있다.43) 당은 도량형을 통일하였지만, 척은 수의 大尺을 계승하였고, 이는 量ㆍ衡制 도 동일하였다. 즉 당대는 수의 도량형의 통일을 계승한 것이 지나지 않지 만, 도량형기는 수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남아 있어서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중국 고대는 각 국가의 건국 이후 도량형 을 통일하고 정리하여 국가를 통치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39) 40) 41) 42) 43) ꡔ隋書ꡕ 권16, 律曆 上 審度. ꡔ隋書ꡕ 권16, 律曆 上 審度. ꡔ隋書ꡕ 권16, 律曆 上 審度. 丘光明, ꡔ中國度量衡ꡕ, 新華出版社, 1993, 103쪽. ꡔ唐六典ꡕ 권3, 金部郎中員外郞.

224 224 지역과 역사 38호 셋째, 일본 고대 도량형은 어느 시기에 통일과 정비가 이루어졌을까? 일 본 고대인 사서인 ꡔ일본서기ꡕㆍꡔ고사기ꡕ 등에는 척ㆍ촌ㆍ근 등의 부분적 인 용례만 기록하고 있고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ꡔ속일본기ꡕㆍꡔ부상약기ꡕ 등에 도량형을 정비하였다는 기 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 A) 始定斗升斤兩(ꡔ扶桑略記ꡕ 권4, 舒明 12年(640) 10月) B) 始頒度量于天下諸國((ꡔ續日本紀ꡕ 卷2, 文武天皇 大寶 2年 3月 乙亥) C) 始制 度量調庸義倉等類五條事 語具別格(ꡔ續日本紀ꡕ 卷6, 元明天皇 和銅 6年 2月 壬子) D) 頒下 新格幷權衡度量於天下諸國(ꡔ續日本紀ꡕ 卷6, 元明天皇 和銅 6年 夏 4月 戊申) E) 頒尺樣於諸國(ꡔ續日本紀ꡕ 卷8, 元正天皇 養老 4年 5月 癸酉) 자료 A)는 서명 12년(640)에 斗升과 斤兩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를 후 대의 기록으로 간주하여 부정할 수 있지만,44) 7세기 중반 일본 고대 국가 가 隋ㆍ唐의 도량형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45) 그런데 ꡔ일본서 기ꡕ에는 이에 관한 내용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 있지만, ꡔ일본서기ꡕ에 도량형의 단편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고 려하면 할 때 고구려 혹은 唐의 도량형을 수용하여 일정한 기준에 근거하여 도량형을 정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46) 일본 고대는 7세기 중반에 도량형 을 정비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을 유추하기는 어렵다. 자료 B)는 대보 2년(702) 천하의 여러 나라에 도량형을 반포하였다는 것이다. 일본 고대는 唐制에 따라 大寶令을 만들고, 이에 따라 대보 2년(702) 도량형을 새롭게 제정하여 여러 나라에 반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 C)는 和銅 6年(713) 2월에 비로소 度量ㆍ調庸ㆍ義倉 등의 5가지 일을 제정하였고, 내용은 別格 44) 龜田隆之, 앞의 논문, 1955, 121쪽. 45) 狩谷棭齋 冨谷至 校注, ꡔ本朝度量權衡考ꡕ, 平凡社, 1991, 102~103쪽. 46) 龜田隆之, 앞의 논문, 1955, 121쪽.

225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25 에 자세하게 갖추고 있다고 하고 있다. 자료 D)는 新格과 도량형을 여러 나 라에 반포하였다는 것이다. 자료 C)와 D)는 서로 연관을 가지는 내용으로 화동 6년 2월에 도량형을 제정한 것을 4월에 천하의 여러 나라에 반포한 것 이다. 화동 6년 도량형의 제정과 반포는 대보 2년 도량형을 반포한 이후 얼 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데, 이를 다시 제정과 반포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는 대보령의 도량형 정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비하는 차원 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다음의 자료 나 에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자 한다. 자료 E)는 養老 4년(720) 척의 견본을 제국에 내려 보냈다는 것 이다. 양노 4년 척의 견본을 제국에 보낸 것은 화동 6년 도량형을 정비하였 을 때 정한 尺, 즉 唐大尺을 보낸 것으로 유추된다. 척은 도량형의 기준이므 로 이를 통해 도량형의 통일을 확산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 고 대는 7세기 중반과 8세기 초에 도량형의 정비와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班田收授制와47) 段步制를 실시하였다.48) 이와 같이 일본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는 율령의 자료를 통해 구체적 으로 검토할 수 있는데, 다음의 자료를 살펴보자. 나 A) 令前租法 熟田五十代 租稻一束五把 以大方六尺爲步 步內得 米一升 此大 升也 二百五十步爲五十代 慶雲 三年(706)格云 准令以大方五尺爲步 步內 得米一升 此升稱減大升 三百六十步爲段者 今案 五十代令段步積一同(ꡔ政 事要略ꡕ 卷53, 交替雜事 雜田事) B) 凡度地量銀銅穀者 皆用大 此外官私悉用小者(ꡔ令義解ꡕ 卷10, 雜令 第30) C) 又雜令云 度地以五尺爲步 和銅 六年(713) 二月十九日格 其度地以六尺爲 步者 未知令格之赴 幷段積步改易之義 請具分釋 无使疑惑也 答幡云 令以 五尺爲步者 是高麗法用爲度地令便 而尺作長大 以二百五十步爲段者 亦是 47) ꡔ日本書紀ꡕ 권25, 孝德 2년 춘 정월. 其三曰 初造戶籍ㆍ計帳ㆍ班田收授之 法 若山谷阻險 地遠人稀之處 隨便量置 凡田長卅步 廣十二步爲段 十段爲町 段租稻二束二把 町租稻卄二束 48) 반전수수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는 현재 일본 학계에서 7세기 중반보다는 8세기 초에 시행된 것으로 이해하는 연구가 다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에 대해 논외 로 하고자 한다.

226 226 지역과 역사 38호 高麗術云之 卽以高麗五尺 准今尺大六尺相當 故格云 以六尺爲步者則是 令 五尺內積步 改名六尺 積步耳 其於之无所損益也 然則 時人念 令云五尺格 云六尺 卽依格文可加一尺者 此不然 唯令云五尺者 此今大六尺同覺示耳 (ꡔ令集解ꡕ 卷12, 田部) 자료 A)는 9세기 전반에 편찬된 ꡔ政事要略ꡕ으로 令前의 租法에 6척을 1보로 하였는데, 慶雲 三年(706)格에 대척 5尺을 1步를 삼았다는 것이다. 이는 경운 3년에 기준척을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자료 B)는 9세기 후반 의 ꡔ令義解ꡕ의 내용으로 일본 고대, 즉 대보율령(702년) 때 당의 제도를 도입하여 大尺과 小尺이 존재하였고, 대척은 땅과 銀ㆍ銅ㆍ穀 등의 부피를 재는데 사용하고, 이외에 소척은 官私에서 모두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대척과 소척은 각각 高句麗尺과 唐大尺을 말하는데, 대척(고구려척) 은 양전용으로, 소척(당대척)은 官私에서 사용하는 국가의 기준척이다. 일 본은 唐과 달리 소척인 唐大尺을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9) 자료 C)는 ꡔ令集解ꡕ의 내용인데, 雜令의 5척 1보와 和銅 六年(713)에 6尺 을 1步의 규정이 다르므로, 이를 분석하여 의혹 없이 구별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雜令의 5척 1보는 高麗法을 쓴 것인데, 땅의 측량을 편리 하기 위해 척을 장대하게 만든 것이고, 250보를 1단으로 한 것도 高麗術이 라고 하고 있다. 고려 5척은 지금의 大六尺에 상당하고, 和同 6년의 6척 1 보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는 화동 6년에 이르러 양전에도 小尺인 唐大尺 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즉 대보령의 대척과 소척을 분리하여 사용하던 것을 단일 척으로 통일하였음을 의미한다. 일본 고대는 640년에 처음으로 度量 衡을 정비하였고, 다만 度制의 경우 대보령에서 대척(고구려척: 양전척)과 소척(당대척: 관사 기준척)을 분리하였는데, 이를 다시 화동 6년에 당대척 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한ㆍ중ㆍ일 고대는 각각 도량형을 통일 정비하였고, 이를 어 떻게 관리하였는지를 살펴보자. 도량형은 항상 규정된 것만 사용된 것이 아 49) 윤선태, 앞의 논문, 2002, 45~47쪽.

227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27 니었고, 규정에 어긋난 도량형기가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이를 관리할 필요 가 있었다. 한ㆍ중ㆍ일 고대는 도량형을 관리할 나름의 규정을 만들었는데, 먼저 한국 고대 도량형의 처벌 규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다. 다 多婁王 2年 禁私作秤斗 在市執用有增感者決罪(ꡔ增補文獻備考ꡕ 권132, 형 고6 금제 잡금) 한국 고대의 자료인 ꡔ삼국사기ꡕㆍꡔ삼국유사ꡕ에는 도량형의 처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대의 자료인 ꡔ增補文獻備考ꡕ의 백제 다루 왕 2년(29)조에 기록되어 있다. 자료에 언급된 것처럼 사사로이 量ㆍ衡器 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고 불량 도량형기를 시장에서 사용하면 죄를 준다는 것이다. 위의 자료는 다루왕 2년의 기록이란 측면에서 신빙성에 의문을 가 질 수 있으나 백제도 도량형기를 제작하여 시장에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도 량형 관리란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백제 가 도량형 위반자에 대한 처벌 조항을 가지고 있었다면 신라와 고구려도 이 러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신라와 고구려도 백제처 럼 율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고대 도량형의 사용 위반자에 대 한 처벌 규정은 고대의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사례와50) 후술하는 중국 고대의 ꡔ秦簡ꡕ의 사례를 참고하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 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한편 중국 고대에도 도량형기를 불법적으로 만들어 사용하였을 때 죄를 주었다. 이는 ꡔ秦簡ꡕ에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는데, 斗의 부정은 1/2升 이 상이면 貲 一甲으로 처벌한다. 오차가 1/2 이하 1/3升까지는 貲一盾에 처 벌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51) 이러한 처벌 규정은 부피단위뿐만 아니라 무게 단위를 위반하였을 경우도 별도로 존재하였다.52) 진대에 도량형기의 처벌 50) 李宗峯, 앞의 책, 2001, 113~115쪽. 51) ꡔ秦簡ꡕ 효율, 114쪽. 52) 崔德卿, 앞의 논문, 2000, 7~17쪽.

228 228 지역과 역사 38호 규정이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은 도량형기가 널리 통용되었고, 이로 인해 불 법 도량형기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할 수 있다. 이러한 처벌 규정은 이후 율 령 속에 자리 잡았는데,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다. 라 A) 諸私作斛斗秤度不平 而在市執用者 笞五十 因有增減者 計所增減 準盜論 (ꡔ唐律疏議ꡕ 권26-21, 雜律) -疏議曰 依令 斛斗秤度等 所司每年量校 因署充用 其有私家自作 致有不平 而在市執用者 笞五十 因有增減贓重者 計所增減 準盜論(ꡔ唐律疏議ꡕꡕ 권 26-23, 雜律) B) 即用斛斗秤度出入官物而不平 令有增減者 坐贓論 入己者 以盜論 其在市用 斛斗秤度雖平 而不經官司印者 笞四十(ꡔ唐律疏議ꡕ 권26-21, 雜律) -疏議曰 即用斛斗秤度出入官物 增減不平 計所增減 坐贓論 入己者 以盜論 因其增減 得物入己 以盜論 除ㆍ免ㆍ倍贓依上例 其在市用斛斗秤度雖平 謂 校勘訖 而不經官司印者 笞四十(ꡔ唐律疏議ꡕ 권26-21, 雜律) 중국 고대는 도량형의 사용과 관련한 규정을 ꡔ당률소의ꡕ에 자세하게 기 록하고 있는데, 자료 A)는 私的으로 만든 도량형을 시장에서 사용하였을 때 笞 50인데, 그 증감의 정도에 따라 처벌을 하였고, 또 疏議에서는 사적 으로 제작하여 공평하지 않은 도량형기를 시장에서 사용하였을 때 태 50으 로 처벌하였고, 그 증감으로 장물의 죄가 무거우면 계산하여 죄를 논한다고 하고 있다. 자료 B)는 도량형을 공평하게 사용하지 않은 자와 자신에 이를 착복한 자에 대한 죄, 관사의 검인을 받지 않고 사용한 자에 대해 笞 40을 준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唐代는 도량형에 대해 철저하고 다양한 관리 규 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율령 국가인 일본 고대는 도량형에 대한 어떤 규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마 A) 凡官私權衡度量 每年二月詣大藏省平校(謂 凡諸司及庶人 用權衡度量者 詣 大藏省平校 然後用之 其諸國幷要用官者 司別給樣也 依律 雖平而不經官司

229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29 印者 笞卅 卽知平扌交日 官司題印 但唐令云 並印署然後聽用此令除印署文 故不可署 唯依律可印 卽與量函不同)不在京者 詣所在國司平校 然後聽用 (ꡔ令義解ꡕ 권9, 關市令) 위의 자료 A)에 의하면 일본 고대의 도량형은 매년 2월 大藏省에서 평교 하고, 경에 있지 아니한 자는 國司에 나아가 평교한 연후에 사용하는데, 율 에 따라 관사의 평교를 거치지 않고 사용하면 태 30에 해당하고, 당령에서 는 모두 印署한 연후에 사용하지만 영에서는 인서를 없앴다는 것이다. 일본 고대는 도량형의 사용에 대해 당의 율령을 수용하였지만, 개별적인 조문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량형의 관리 기구에 대해서는 당대의 ꡔ唐六典ꡕ과 ꡔ唐律疏議ꡕ 등에 다 양한 조문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살펴보자. 바 A) 以二物平市 謂秤以格 斗以槩(ꡔ唐六典ꡕ 권20, 太府寺) B) 疏議曰 依令 斛斗秤度等 所司每年量校 印署充用(ꡔ唐律疏議ꡕ 권26, 雜律) C) 校斛斗秤尺 依關市令 每年八月詣太府寺平校 不在京者 詣所在州縣官校 並 印署然後聽用(ꡔ唐律疏議ꡕ 권26, 잡률2 校斗秤不平) D) 凡官私斗秤度尺 每年八月詣寺校印署 無或差繆 然後聽用之(ꡔ唐律疏議ꡕ 권 20, 太府寺) E) 開元九年勅格 權衡度量並函脚 關市令 諸官私斗尺秤度 每年八月詣金部 太府寺平較 不在京者 詣所在州縣平較 並印署然後聽用(ꡔ唐會要ꡕ 권66, 太 府寺) 중국 고대의 도량형 관리는 관리관청에서부터 위반하였을 때 처벌 조항 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료 A)는 두 기물로 부피와 무게를 공평하 게 하는데, 저울은 格(저울걸이)을, 斗는 槪(평미래)를 사용한다는 것이고, 자료 BㆍCㆍDㆍE)는 당의 도량형은 太府寺ㆍ州縣 등이 각각 담당하고 있는데, 關市令에 의거 중앙은 매년 8월에 태부시에서 평교하고, 지방은 주 현에 평교한 연후에 사용토록 하고 있다. 자료 FㆍG)는 사적으로 만든 도 량형기를 시장에서 사용하였을 때 增減의 정도에 따라 처벌을 준다는 것이

230 230 지역과 역사 38호 다. 중국 고대의 唐代는 도량형의 관리와 관련한 다양한 규정을 가지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당대는 도량형의 관리 규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전은 어떠하였을까? 당의 율령은 현존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복원하였는데, 당의 개원령은 수 의 개황령의 편목과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53) 중국 고대인 隋代에도 개황 령을 고려할 때 도량형을 관리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일본 고대의 율령은 關市令의 조항이 있다. 일본의 율령은 당의 율령을 따랐다. ꡔ唐會要ꡕ에도 관시령이란 명칭이 나온다. 중국 고대는 도량형을 관리하는 율령(관시령)을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고대는 도량형을 어디서 어떻게 관리하였는지를 다음의 자료를 통 해 살펴볼 수 있다. 사 A) 凡官私權衡度量 每年二月詣大藏省平校 不在京者 詣所在國司平校 然後 聽用(ꡔ令義解ꡕ 권9, 關市令) B) 凡用稱者皆懸於格 用斛者皆以槩 粉麵則秤之(ꡔ令義解ꡕ 권9, 關市令) 위의 자료 A)에 의하면 일본 고대의 도량형은 매년 2월 大藏省에서 평교 하고, 경에 있지 아니한 자는 國司에 나아가 평교한 연후에 사용한다는 것 이다. 자료 B)는 저울은 격에 매달아 달고, 斛은 개(평미래)를 모두 사용한 다는 것이다. 일본 고대는 도량형을 관리하는 규정을 關市令의 조항에 수록 하고 있지만, 도량형을 관리하는 기관의 명칭에서 중국 당대와 차이가 있 다. 일본 고대도 중국의 당대처럼 도량형을 관리하는 기관이 존재하였고, 이는 도량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일본 고대에 율령을 중국의 율령을 수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일본 고대는 도량형의 관리와 처벌에 대한 부분이 서술되었지만 처벌 수위에 관한 내용이 중국 고 대와 조금 차이가 있다. 이는 관리와 처벌에 관한 내용을 중국 고대의 규정 53) 松丸道雄ㆍ池田溫 等編, ꡔ中國史ꡕ 2, 山川出版社, 1996, 286쪽.

231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31 을 수용한 점을 고려하면, 동일하여야 할 것이지만 수용 이후 일본의 특성 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ㆍ중ㆍ일 고대는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면 도 량형의 통일을 실시하였고, 도량형을 통해 대민지배의 도구로 삼았다. 중국 과 일본 고대의 도량형 관리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각각 담당하였지만, 한국 고대의 자료에는 명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ꡔ증보문헌비고ꡕ에 기 록된 백제의 기록을 고려할 때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도량형 사용 위 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중국ㆍ일본 고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처 벌의 수위에 있어서 양국 사이에 조금 차이가 있었고, 한국 고대도 增減者 에게 죄를 준다고 기록한 점으로 고려하면 처벌 규정이 존재하였다고 생각 된다. 2. 척의 단위와 길이 본 절에서는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의 통일과 정비를 기반으로 척의 단 위와 길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척의 단위에 대한 용례는 한국 중국과 일본의 고대 문헌 자료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 국 고대 척의 단위는 ꡔ삼국사기ꡕㆍꡔ삼국유사ꡕ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제 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寸ㆍ尺ㆍ丈ㆍ步ㆍ里와 仞ㆍ尋ㆍ常, 그 리고 端ㆍ疋ㆍ匹 등의 용례들이 단편적으로 많이 나타난다.54) 이러한 단 위들은 뒤의 중국 고대 문헌에서 기록된 단위들과 유사한데 점차 寸ㆍ尺ㆍ 步ㆍ丈 등을 중심으로 통용되었고, 匹과 端은 ꡔ당육전ꡕ에 기록된 것처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지만,55) 길이에 차이가 있었다. 중국 고대 척의 단위는 秦ㆍ漢代와 그 이전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척의 단위는 앞의 ꡔ한서ꡕ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分ㆍ寸ㆍ尺 54)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 된다(李宇泰, 앞의 논문, 1984). 55) ꡔ唐六典ꡕ 권20, 태부시조에 의하면 絹의 단위는 匹, 布의 단위는 端, 綿의 단위 는 屯, 絲의 단위는 絢, 麻의 단위는 綟 등의 단위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고대에서는 匹과 端은 길이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232 232 지역과 역사 38호 ㆍ丈ㆍ引 등이 사용되었고, 이후 이러한 단위는 중국 척의 기준으로 정착 하였다. 하지만 척의 단위는 秦ㆍ漢을 전후한 시기부터 이미 다양하게 나타 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ꡔ大戴禮記ꡕ에 布指知寸 布手知尺 舒肘知尋,56) ꡔ孔 叢子ꡕ에 擧足爲跬 倍跬爲步,57) ꡔ說文解字注ꡕ에도 周制 寸尺咫尋常仞諸 度量 皆以人之體爲法 58)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체를 기준 으로 寸ㆍ尺ㆍ咫ㆍ尋ㆍ常ㆍ仞ㆍ跬ㆍ步 등이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당대는 ꡔ舊唐書ꡕ에 凡度 十寸爲尺 一尺二寸爲大尺 十尺爲丈 이라 하였 고,59) ꡔ唐六典ꡕ에 凡度 一尺二寸爲大尺 十尺爲丈 이라는 기록을 통해60) 황종율관에 기준하여 漢代 척의 단위인 분ㆍ촌ㆍ척ㆍ장 의 단위로 정립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고대 척의 단위는 ꡔ일본서기ꡕ 대화 2년(646)에 길이의 단위인 丈 ㆍ尺ㆍ端ㆍ匹 등과 면적의 단위인 段(30보 12보)ㆍ町(10단) 등이 구체 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화개신 이전에는 丈ㆍ匹ㆍ寸ㆍ端ㆍ尺ㆍ尋ㆍ包 ㆍ常ㆍ束ㆍ屯 등의 여러 단위가 사용되어지다가,61) 이후에는 구체적인 단 위로 정리되었는데, 즉 ꡔ令義解ꡕ에 凡度 十分爲寸(謂度者分寸尺丈引也 所 以度長短也 分者 以北方秬黍中者一之廣爲分 秬者黑黍也) 十寸爲尺(一尺 二寸爲大尺一尺) 十尺爲丈 이란62) 기록에 근거하면 길이의 단위는 分-寸尺-丈 의 단위체계를 중심으로 정립되었다. 일본 고대 척의 단위도 한국과 중국의 고대 단위처럼 일본의 전통적인 단위들이 사용되다가, 점차 촌-척보-장 중심으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ㆍ중ㆍ일 고대 척의 단위는 어느 정도 통일성이 있었지만, 尺 ꡔ大戴禮記ꡕ, 主言. ꡔ孔叢子ꡕ, 小爾雅. ꡔ說文解字注ꡕ, 尺部. ꡔ舊唐書ꡕ 직관2, 尙書都省. ꡔ唐六典ꡕ 권3, 金部郎中員外郞. ꡔ日本書紀ꡕ에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아주 단순한 단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62) ꡔ令義解ꡕ 卷10, 雜令 第30. 56) 57) 58) 59) 60) 61)

233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33 과 步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尺과 步는 量田과 많은 연관을 가지 고 있는데, 1보=5척과 1보=6척 등이 사용되었다. 중국 고대 당은 大尺을 사용하면서 기존의 1보=6척에서 1보=5척으로 전환하였고,63) 일본은 令 前 1보=6척(고구려척)에서 大寶令 1보=5척(고구려척)ㆍ1보=6척(당대 척)으로, 和同格에 1보=6척(당대척)으로 통일하였고,64) 한국 고대 신 라는 1보=6척을 사용하였다.65) 즉 한ㆍ중ㆍ일 고대 척과 보의 관계는 당 의 율령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논한다면 당과 같이 1보=5척을 사용하여야 했지만, 한국과 일본 고대는 1보=6척 등을 운용하였던 점을 고려할 때 당 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한ㆍ중ㆍ일 고대 척의 길이를 살펴보자. 한국 고대의 척은 삼 국으로 분립되어 있었고, 중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각 국가마다 사용한 척 에 대한 연구가 너무 다양한데,66) 이를 정리하면 漢尺, 南朝尺, 唐代尺, 高 句麗尺, 古韓尺67)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척은 狩谷棭齋가 제 시한68) 견해를 수용하여 ꡔ令集解ꡕ를 통해 고구려척(동위척)이 사용되었다 고 이해한 연구,69) 漢의 영향을 받아 漢尺(22.44 )을 사용하였다고 보았 다.70) 신라의 척은 한척, 당대척, 고구려척(동위척) 등이 사용되었다고 연 구하였고, 백제는 고구려척(동위척), 한척, 남조척, 당대척 등이 사용되었 다고 하였다. 63) ꡔ唐六典ꡕ 권3, 金部郎中員外郞. 吳承洛, 앞의 책, 1937, 95쪽. 64) 윤선태, 한국 고대의 척도와 양제 ꡔ天下均平 度量衡ꡕ, 단국대 출판부, 2011, 182쪽. 65) 李宗峯, 앞의 책, 2001, 31~32쪽. 66) 이에 대한 연구사의 정리는 다음의 글이 참고 된다(盧重國, 앞의 논문, 이종봉, 앞의 논문, 2012). 67) 朴贊興, 앞의 논문, ) 狩谷棭齋 冨谷至 校注, 앞의 책, ) 關野貞, 앞의 논문, 리화선, 고구려 금강사와 그 터자리 구성에 대하여 ꡔ조선고고연구ꡕ, ) 米田美代治, 韓國上代에서의 建築計劃의 數學的一管見-數學의 應用發達과 尺 度에 대하여- ꡔ朝鮮上代建築硏究ꡕ, 秋田屋, 申榮勳 譯, ꡔ韓國上代建築 의 硏究ꡕ, 東山文化社, 李宇泰, 앞의 논문, 1984.

234 234 지역과 역사 38호 한국 고대 척의 길이를 검토하여 보자. 금석문의 기록과 남아있는 실물 자료, 최근에 출토된 척의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하면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 다. 斷石山 神仙寺 造像銘記 에는 仍於山巖下 創造伽藍 靈虛名神仙寺 作彌勒石像一區高三丈ㆍ 菩薩二區 明示微妙相相 에 의하면71) 산의 바위 아래에 가람을 창조하였는데, 靈虛로 이름을 神仙寺라 부르고, 높이 3丈 (=30尺)의 彌勒石像 1구와 菩薩像 2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륵석상 1구 는 높이가 3丈(=30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측정하면 단석산 신 선사의 석상을 조상할 때 1척의 길이를 유추할 수 있다. 필자는 작년에 대구 매일신문사의 도움으로 컴퓨터 3D로 높이를 측정하였는데, 전체 석벽의 높 이는 8.72 이고, 미륵석상은 6.62 였다.72) 1척은 의 길이를 가 지는데, 이는 한척보다 약간 짧지만, 다소간의 오차를 고려하면 단석산 신 선사 조상 때의 기준척은 한척임을 알 수 있다. 皇福寺 金銅舍利函記 에 의하면 神文王이 승하하자 神睦太后와 孝昭 大王이 삼층석탑을 건립하였고, 孝昭王 9년(700)에는 신목태후가 승하하 고, 또 聖德王 元年(702)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이 석탑 2층에 불사 리와 6寸의 순금제 彌陀像 1구를 안치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73) 명문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6寸의 순금제 미타상 1구를 안치하였다는 것인데, 출토 유물로는 14 의 금동여래입상과 12.2 의 금동여래좌상이 각각 1구 씩 출토되었다.74) 어느 유물이 사리함기의 기록 내용과 정확하게 부합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양 유물을 6寸의 기록과 비교하면 1척은 약 23.3 와 71)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2)ꡕ, 斷石山 神仙寺 造像銘記. 72) 이종봉, ꡔ신라경주 금척ꡕ, 매일신문사, 2015, 52쪽. 73)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3)ꡕ, 皇福寺 金銅舍利函記. 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 民 治定功成 天授三年(孝昭王 元年, 692)壬辰七月二日乘天 所以神睦太后 孝 照大王 奉爲宗廟聖靈 禪院伽藍 建立三層石塔 聖曆三年(孝昭王 9, 700)更子六 月日 神睦太后 遂以長辭 高昇淨國 大足二年(聖德王 元年, 702)壬寅七月卄七 日 孝照大王登霞 神龍二年(聖德王 5年, 706)丙午五月卅日 今主大王 佛舍利四 全金彌陀像六寸一軀 無垢淨光陀羅尼經一卷 安置石塔第二層 74) 李弘稙, 慶州南山東麓 三層石塔內發見品 ꡔ韓國古文化論考ꡕ, 을유문화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ꡕ 2, 1991, 101~103쪽.

235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임을 알 수 있다. 700년을 전후한 시기 불상 조상에 사용된 척은 漢 尺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75) 통일신라 말기의 자료인 海印寺 妙吉祥塔誌 에 海印寺妙吉祥塔記 崔 致遠撰 時乾寧二年(眞聖女王 9年 ; 895) 申月旣望記 大匠 僧蘭交 寧二卯 年相月雲陽臺吉祥塔記 石塔三層都高一丈三尺 란 기록도 주목된다.76) 탑지 의 자료는 해인사 일주문 앞 길상탑 안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도굴되었던 것을 1966년 탑지와 소탑 157기를 함께 압수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탑지의 내용은 신라 말 진성여왕 때 해인사 부근에서 치열한 전란 이 있었고, 전란에서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탑을 세웠다는 것이 다. 탑지에서 주목되는 점은 석탑 3층의 높이가 1丈(=10尺) 3尺, 즉 13尺이 라는 것이다. 탑을 세운 이후의 기록이라 길상탑의 높이는 어느 정도 신빙 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현재 상륜부 중의 윗부분이 부분적으로 파 손되어 완전하지 않지만, 문화재관리국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지대석(150 ), 기단부(930 ), 탑신부(1,660 ), 상륜부(555 ) 등의 전체 높이는 3,295 이다. 전체 3층 석탑 중 상륜부가 완전하지 않아 정확한 척을 계산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석탑의 높이만 계산하면 척은 약 이다. 윗부분이 파손된 것을 고려한다면 길상탑에 조성에 사용된 척은 보 다 길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탑의 비율을 고려할 때 석탑 의 전체 높이가 보다 50 정도 높았다고 상정한다면 신라 말기의 석탑조성에 사용된 척은 당대척이었다.77) 이러한 척은 앞의 7세기ㆍ8세기 초의 불상 조상에 사용한 漢尺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어느 시 기 이후부터 점차 당대척을 사용한 결과로 이와 같은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78) 이와 같이 한국 고대 척은 금석문과 실측을 통해 분석하면 기 존에 고구려척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과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 75) 76) 77) 78) 이종봉, 앞의 책, 2015, 54쪽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3)ꡕ, 海印寺 妙吉祥塔誌. 이종봉, 앞의 책, 2001, 72쪽. 이종봉, 앞의 책, 2015, 55~56쪽.

236 236 지역과 역사 38호 다. 한편 근래에는 실물 척이 많이 조사되었다. 경기도 하남시 二聖山城의 발 굴현장에서 발굴한 척이 주목된다. 二聖山城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6년부 터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연차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79) 이성산 성 7차 발굴 때 C지구 저수지 V층에서는 토기류ㆍ목재류 등이 많이 출토되 었는데, 토기류인 완형의 합은 제작수법으로 보아 7세기경으로 추측하고 있 고, 아울러 목재는 자, 명문목간, 자연목재 등이 출토되었다. 자의 형태는 단면이 납작한 장방형으로, 눈금은 다음의 사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측 면에 1촌 단위로 선각되어 있는데, 길이는 29.8 이므로, 당대척이다. 이는 7세기 신라와 다른 지역에 당대척의 전래뿐만 아니라 그 길이까지도 명확하 게 밝혀주었다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경기도 하남시 二聖山城의80) 발굴 조사에서 당대척 이 조사된 후 2000년 8차 조사 발굴 때 소위 고구려척 이 출토되면서 기존의 문헌적 연 구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81) 高句麗尺 은 二聖山 정상부 의 동남부의 발굴조사에서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C지구 城池에서 출토되었 다.82) 소위 高句麗尺 의 전체길이는 36.1 인데, 눈금은 끝에서 0.5 간 격을 두고 시작하고 있어 35.6 가 고구려척의 실제 길이가 되고, 高句麗 尺은 전체 세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구간은 5개의 寸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마디는 다시 5개의 分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 번째 구간도 첫째 구 간과 마찬가지로 5개의 寸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눈금으로 세분하여 표시하 지는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구간은 寸과 分과 같은 특별한 표시가 없다. 79) 한양대학교 박물관ㆍ하남시, ꡔ二聖山城-제7차발굴조사보고서-ꡕ, 명문인쇄, ) 二聖山城은 산성내의 건물지ㆍ저수지 등의 유구에서 신라의 유물만이 출토되 어, 산성은 6세기 신라가 한강유역에 영역을 확장하면서 새롭게 축성하였다는 견해도 있고(심광주, 二聖山城에 대한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반면 고구려의 남하과정에서 축조되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 근거로 고구려목간과 고구려척을 들고 있다(한양대학교 박물관ㆍ하남시, ꡔ二聖山城-제 8차발굴조사보고서-ꡕ, 학연문화사, 2000, 295~296쪽). 81) 한양대학교 박물관ㆍ하남시, 위의 조사보고서. 82) 유태용, 앞의 책, 2001.

237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37 따라서 二聖山城 출토 高句麗尺의 구조는 다섯 개의 分이 모여서 한 寸이 되고, 다섯 寸이 모여서 한 구간이 되며, 분이 새겨진 5촌과 그렇지 않은 5 촌, 전혀 표시가 없는 구간 등의 세 구간을 합하면 1尺이 된다고 하였다.83) 二聖山城 출토 소위 高句麗尺은 1尺이 10寸 이라는 규격을 가지는 척의 형태와 차이가 있다. 二聖山城 출토 高句麗尺의 1寸의 간격은 2.37 이고, 이를 10촌으로 계산하면 23.7 이고, 또 이를 1.5배하면 15寸으로 소위 高句麗尺 의 1尺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高句麗尺이 사용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84) 그런데 二聖山城에서 출토된 척은 촌과 분의 눈금이 있는 23.7 의 한척이다. 1척인 23.7 를 굳이 1.5배한 소위 고구 려척을 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二聖山城 출토 1尺 5寸의 자의 용도에 대 해서는 전통시대의 길이 단위인 肘 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肘는 2尺 또는 1尺 5寸의 길이를 말하는데, 肘의 길이가 고정적이지 않고 步와 연동되어 환산된 단위였기 때문에 肘를 4배하면 1步가 된다. 1尺 5寸의 척들은 步를 측정하기 위해 1肘의 길이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며, 二聖山城의 高句麗 尺도 그러한 용도로 제작된 자로 추정하기도 한다.85) 고구려는 한척을 사용하였다는 견해와 35.6 의 고구려척을 사용하였다 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고구려는 어느 시기까지 한척을 사용하였다고 이해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문제는 35.6 의 고구려척은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었던 다른 어떤 척의 길이보다 길다는 점 이다. 그렇다면 35.6 의 소위 고구려척 은 일반적인 척이 아닐 가능성이 많고,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 다.86) 당대척의 1.2배인 고구려척은 일본의 고대 자료에 7세기와 8세기초 에 양전을 위한 척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이성산성 출토 소위 고구려척 83) 兪泰勇,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고구려자에 대한 一考 ꡔ高句麗硏究ꡕ 20, ) 兪泰勇, 高句麗尺에 대한 文獻史料와 考古學的 遺物의 再檢討 ꡔ고구려발해 연구ꡕ, 2001 ; 앞의 책, ) 윤선태, 앞의 논문, 2002, 34~36쪽. 86) 이우태, 高句麗尺再論-高句麗尺과 高麗術의 관계를 중심으로- ꡔ동북아역사 논총ꡕ 17, 2007.

238 238 지역과 역사 38호 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척이라기보다는 고구려에서 양전을 위해 제작되었 을 가능성이 많다. 양전용 척인 소위 고구려척 은 일본에 양전척으로 사용 될 수 있었다. 백제는 부여 관북리와 쌍북리에서 출토된 尺이 주목된다. 관북리 출토 척 은 학계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재질은 대나무로 잔존 길이는 10 이고, 눈금의 간격이 2.5ㆍ2.4ㆍ2.6 여서 이를 평균하면 2.5 가 되므로 완형일 경우 중국의 남조척에 가까우므로 웅진 사비기 전반에는 남조척을 사용하였을 것이라 하였다.87) 쌍북리 출토 척은 역시 대나무로 복원된 길 이는 약 29 정도였다. 尺은 경질의 백제토기편, 목간 등과 함께 출토되었 는데, 발견된 척은 완형이 아니라 일부분만이 남아있었다. 쌍북리 출토 척 은 규모나 형태를 다른 나라의 척과 비교해 보면 장식이나 규격 면에서 매 우 빈약하고 격이 떨어진다. 이로 미루어볼 때 쌍북리 출토 척은 민간에서 제작하여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척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하는 데 단서가 되는 것이 부여 外里에서 출토된 方形塼이다. 이 유적은 모두 15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완형의 방형전은 42점이다. 방형전은 모두 8종류인데 크기는 28.0, 29.8 에 이른다. 전의 유물 표면에 나타난 봉황 이나 연꽃, 용, 流雲 등 주제 주위에 연주문이 돌아가는 점과 연화 양식 변 화에 따라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塼은 29 의 자를 사용하여 만든 것 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29 의 자는 唐大尺이다. 쌍북리의 자가 출토된 유적의 조성 시기는 唐代와 일치한다. 따라서 관북리와 쌍북리의 척은 각각 중국 남조척과88) 당대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89) 그중 남조척 87) 윤선태, ꡔ목간이 들려주는 백제이야기ꡕ, 주류성, 2007, 187~188쪽. 88) 백제의 중국 남조척의 수용은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었다(국립부여박 물관, 앞의 책, 2003, 26~33쪽. 노중국, 앞의 논문, 2005, 86~91쪽). 89) 이강승, 백제시대의 자에 대한 연구-부여 쌍북리유적출토 자를 중심으로- ꡔ한 국고고학보ꡕ 43, 2000, 290~212쪽에서 쌍북리 자의 현존의 길이는 이고 완형을 유지하고 있는 쪽을 기준으로 하여 첫 번째 눈금까지는 2.90 이고 그 다음 눈금까지의 간격은 1.45 내지 1.50 정도이다. 쌍북리에서 출토된 29 의 자는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39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39 이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백제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최근 경주시 인왕동유적의 우물 조사에서 목간의 출토가 주목된 다. 목간은 3등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쪽 면에 日房个 9자 정도의 묵서가 기록되어 있고, 다른 면에 눈금이 그어져 있는데, 열 번째 눈금은 길게 그어져 있어 자의 모양과 비슷하다. 현재의 잔존 길이는 24 이고, 각 눈금은 2.4 ~3.2 로 일정하지 않다. 본 유물은 자가 아닌 다른 용도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90) 유물 사진을 참고하면 촌과 분(1촌 =10분)이 일정하게 표시되어 있어 있다.91) 그런 점에서 본 목재 유물은 촌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자의 용도로도 볼 수 있 다. 그런 점에서 본 자는 국가에서 정치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민간에서 만 들어 사용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한국 고대 신라는 문헌적으로 한척과 당대척이 사용되었고, 경기도 하남 시 二聖山城에서 唐大尺(29.7 ) 과 소위 高句麗尺(35.6 ) 이 출토되었 고,92) 그리고 부여군 관북리와 쌍북리 유적에서 2002년과 1998년에 25.0 의 남조척과 29 의 당대척 이 출토되었다.93) 그런데 二聖山城의 소위 고 구려척 은 촌과 분이 표시된 부분은 23.7 의 漢尺이다. 이를 1.5배한 소위 高句麗尺 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작된 척, 양전용 척으로 이해하여 야 한다. 그러면 소위 고구려척의 기원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중국 고대 척은 어떤 길이를 가졌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先秦時代부 터 唐代까지의 용례를 통해 살펴보자. 먼저 중국 고대 척의 실물 자료는 이 미 많이 조사되었는데, 이를 통해 先秦時代의 척의 길이를 살펴볼 수 있다. 90) 최순조, 국립경주박물관 남측부지 유적출토 신명문자료-東宮衙銘호 및 辛番 (?)東宮洗宅銘 청동접시 ꡔ木簡과 文字ꡕ 10, 2013, 201쪽에서는 처음에 목간 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 산수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91) 국립경주박물관ㆍ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ꡔ경주 인왕동 왕경유적Ⅱ-국립경주 박물관 남측부지(2차) 발굴조사-ꡕ, 2014, 222~224쪽. 92) 유태용, 앞의 책, ) 이강승, 앞의 논문, 윤선태, 앞의 책, 2007.

240 240 지역과 역사 38호 <표 1> 先秦尺度一覽表94) 序號 編號 器名 時代 實長 (釐米) 一尺折合 (釐米數) 收藏單位 1 尺-1 牙尺 商 中國歷史博物館 2 尺-2 牙尺 商 上海博物館 3 尺-3 骨尺 商 尺-4 銅尺 戰國 南京大學歷史系文物室 5 尺-5 彩繪山獸紋骨尺 戰國 中國歷史博物館 6 尺-6 縷刻骨尺 戰國 中國歷史博物館 7 尺-7 花奔雲氣紋銅尺 戰國 中國歷史博物館 <표 2> 西漢尺度95) 實長 折合-尺長 (釐米) (釐米) 序號 尺名 1 黑漆木尺 年産西壯族自治區貴縣蜀泊 ꡔ考ꡕ 尺-9 灣一號西漢墓 2 竹尺 年甘肅省金塔縣漢代肩水金 ꡔ考ꡕ 尺-14 關遺址 3 飛鳥紋骨尺 ) 23 出土時間地点 1979年江蘇省邯江縣胡場西漢墓 備注 ꡔ考ꡕ 尺-16 4 木尺 年河北省張家口地區陽原縣 ꡔ文物ꡕ 1990年1期 西漢墓 5 錯金鐵尺 年河北省滿城縣陵山2號西漢 ꡔ考ꡕ 尺-12 墓 6 銅矩尺 長邊: 年陝西省子長縣出土 ꡔ陝西歷史博物館館 刊ꡕ 第3集, 1996年 94) 丘光明, 앞의 책, 1992, 11쪽 재인용. 95)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앞의 책, 2001, 199쪽 재인용. 다만 199쪽의 <표 11-1> 西漢尺度 사례 중에서 같은 유적지에서 출토된 여러 척은 선별하여 기록함. 96) 按其中一寸長2.3釐米推算.

241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41 <표 3> 新莽97) 序號 器名 實長(釐米) 折合-尺長(釐米) 器物來原 備注 1 銅丈 229.2(全長) 4.7(寬) 2.4(厚) 臺灣古宮博物院藏 ꡔ考ꡕ 尺-19 2 新莽 銅卡尺 9.964(主尺) 12.38(副尺) 中國歷史博物館藏 ꡔ考ꡕ 尺-20 3 新莽 銅卡尺 9.3(主尺) 11.55(副尺) 北京藝術博物館藏 ꡔ考ꡕ 尺-21 위의 출토 자료 목록 <표 1, 2, 3>을 통해 진ㆍ한대 1척의 길이를 유추할 수 있는데, 척의 길이는 약 23 의 전후에서 오차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연구자인 丘光明ㆍ邱隆ㆍ楊平 등은 西漢의 1척은 23.1 로,98) 新莽의 1 척도 23.1 로 추정하였고,99) 東漢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100) 좀 더 자세 하게 말하는 연구자는 漢은 王莽 때 제작된 升(깊이가 1尺)의 표준기에 의 하면 1척이 정도라고 한다. <표 4> 南北朝尺度101) 序號 時代 尺名 實長 折合每尺長 (釐米) (釐米數) 1 宋 骨尺 ꡔ傳世歷代古尺圖錄ꡕ 通22 ꡔ考ꡕ 尺-125 鏤刻鳥獸紋銅尺 ꡔ傳世歷代古尺圖錄ꡕ 通23 ꡔ考ꡕ 尺-126 資料來原 備注 2 梁 3 南朝 銅尺 中國歷史博物館 ꡔ考ꡕ 尺 南朝 鎏金銅尺 中國歷史博物館 ꡔ考ꡕ 尺 北魏 銅尺 中國歷史博物館 ꡔ考ꡕ 尺-131 위의 <표 4>에 의하면 남북조시대 척의 길이는 진한대의 척의 길이보다 다소 신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리하여 晉代(東晋ㆍ西晉)에 약 )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앞의 책, 2001, 202쪽 재인용. 98)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위의 책, 201쪽. 99)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위의 책, 205쪽. 100)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위의 책, 205쪽. 101)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위의 책, 284쪽.

242 242 지역과 역사 38호 전후로 伸長되었다. 남조의 1척은 24.7, 북위 전기의 1척은 25.6, 후 기는 29.6 로 증가되었다고 하였다.102) 북위 때 척의 길이가 많이 늘어났 다. 隋ㆍ唐대 척의 길이는 문헌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는데, ꡔ隋書ꡕ에 開 皇官尺 卽鐵尺一尺二寸 과 祖孝孫云 平陳后 廢周玉律 便用此鐵尺律 以一 尺二寸卽爲市尺 이라고 하였다.103) 개황 관척은 鐵尺의 1척 2촌이라고 하 였는데, 철척은 後(北)周鐵尺(약 24.6 )을 의미하므로, 수의 개황관척은 약 29.5 임을 알 수 있다. ꡔ구당서ꡕ에 凡度 十寸爲尺 一尺二寸爲大尺 十尺爲丈 이 하였고,104) ꡔ唐六典ꡕ에 凡度 一尺二寸爲大尺 十尺爲丈 이라 기록하고 있는데,105) 唐은 小尺과 小尺의 1尺 2寸인 大尺(29.7 )이 존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당은 소척을 音律의 保持, 天文觀測 등의 특수 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그 외 민간에서는 주로 唐大尺을 사용하였다. 당의 尺은 아래 <표 5>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박물관에 여러 유물이 보 존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그 길이를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척의 길이 는 문헌에서 검토한 것과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는 점에서 주목된다. <표 5> 唐代尺度一覽表106) 序號 尺名 1尺長 ( ) 1 雕花木尺 年 阿斯塔那44號 (1)圖135, (2)圖46 唐墓出土 新疆博物館 2 木尺 年 阿斯塔那191 (1)圖136, (2)圖47 號 唐墓出土 新疆博物館 3 木尺 年 阿斯塔那191 (1)圖137, (2)圖48 號 唐墓出土 吐魯番文管所 102) 103) 104) 105) 出土與傳世情況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위의 책, 286~297쪽. ꡔ隋書ꡕ 권16, 律曆 上 審度. ꡔ舊唐書ꡕ 직관2, 상서도성. ꡔ唐六典ꡕ 권3, 金部郎中員外郞. 著錄 館藏

243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鐵尺 年 長沙絲茅冲朱 (1)圖160, 缺照片(4), (13) 湖南省博物館 家花圓 唐墓出土 人物花卉銅尺 29.7 銘: 此尺大吉度作 發紋銅尺 29.7 鎏金刻花銅尺 30.1 (1)圖133, (2)圖 年 武漢何家壟唐 (1)圖168, (2)圖44 墓出土 古宮博物館 中國歷史博物館 1956年 西安市郭家탄 (1)圖140, (6)通三二,(13) 陝西省博物館 78호 唐墓出土 8 撥鏤牙尺 王國維 ꡔ記現存歷代尺 (1)圖162, (2)圖45, (7) 度ꡕ 上海博物館 9 錯銀鐵尺 30.6 殘長16.4厘米, 以12.24 (1)圖158, (2)圖54 厘米/4寸折算 古宮博物館 10 刻花銅尺 年 西安東郊韓森 (1)圖147, (2)圖53 寨出土 中國歷史博物館 한편 일본 고대 척은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가졌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를 살펴보자. 먼저 문헌 자료의 검토하면 앞서 인용한 나 의 AㆍBㆍC) 와 함께 다음의 자료가 참고 된다. 아 A) 凡度 十分爲寸 十寸爲尺 一尺二寸爲大尺一尺 十尺爲丈 凡度地量銀銅穀 者 皆用大 此外官私悉用小者(ꡔ令義解ꡕ 卷10, 雜令 第30) B) 古記云 問 田長三十步 廣十二步爲段 卽段積三百六十步 更改段積爲二百五 十步 重復改爲三百六十步 又雜令云 度地以五尺爲步 又和銅六年二月十九 日格 其度地以六尺爲步者未知令格之赴 幷段積步改易之義 請具分釋 无使 疑惑也 答 幡云 令以五尺爲步者是高麗法用爲度地令便 而尺作長大 以二百 五十步爲段者 亦是高麗術云之 卽以高麗五尺 准今尺大六尺相當 故格云以 六尺爲步者則是 令五尺內積步 改名六尺 積步耳 其於之无所損益也 然則 時人念 令云五尺 格云六尺 卽依格文可加一尺者 此不然 唯令云五尺者 此 今大六尺同覺示耳(ꡔ令集解ꡕ 卷12, 田部) 자료 A)는 ꡔ令義解ꡕ에 기록된 내용으로, 일본의 척도가 702년에 제정된 大寶律令 때 大尺과 小尺으로 구분하여 제도를 정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 106)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앞의 책, 2001, 321~322쪽에 있는 16-1 의 唐代 尺度 一覽表를 재인용 함.

244 244 지역과 역사 38호 다.107) 여기서 大尺(고구려척)은 尺(소척, 당대척)의 1.2배가 되고 있으 며, 대척은 땅을 측정하거나 부피를 측정할 때에 사용하고, 이외에 모든 관 청이나 일반 백성들은 小尺을 사용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일본 고대 대보 령 때 대척과 소척이 존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자료 B)는 ꡔ令集解ꡕ의 기록으로 713년 和銅格으로 반포하면서 大寶令 때에 5尺을 1步 로 했던 尺 度制를 다시 6尺 1步 로 바꾼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1步의 실제 면 적의 크기는 변함이 없으며, 大寶令의 5尺과 和銅格의 6尺은 같은 길이라 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에 기록된 문헌 자료를 정리하면 令前에는 양전척(고구려척)이, 702년 大寶令 때는 대척(고구려척; 양전척)ㆍ소척 (당대척; 기준척)이 존재하였고, 713년 和同格에는 양전척과 기준척으로 당대척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일본 고대에서는 고구려척 이란 존재를 이해할 수 있고, ꡔ令集解ꡕ의 기록에서는 고려법 ㆍ 고려술 과 함께 고려척(고구려척) 의 명칭과 길이를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高句 麗尺은 唐大尺(29.7 )보다 1.2배이므로, 高句麗尺은 35.6 가 되므로, 일본 고대는 唐代처럼 소위 고구려척 과 당대척을 이원적으로 사용하였음 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문헌 자료의 척의 길이와 함께 실물 자료는 어느 정도의 길이인지 를 살펴보자. 일본 정창원에는 아래 <표>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당대척의 길이인 紅牙撥鏤尺 을 비롯한 여러 척이 보존되어 있다. 정창원의 소장척은 척의 제작국이 어디인가는 이설이 있다.108) 따라서 일본의 고대 척은 고대 한국과 당의 尺 영향을 동시에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07) 윤선태, 앞의 논문, 2002 ; 앞의 논문, ) 正倉院 소장 척은 唐에서 제작하였다는 입장은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주 장하고 있는데, 이는 정창원 소장 척이 당대척과 실제 길이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丘光明 編著, 앞의 책, 1992, 87~89쪽. 奈良國立博物館, 正倉院 展, 便利堂, 1998, 26~27쪽). 그러나 정창원 소장 척에 나타난 문양과 통일신 라의 문양 비교를 통해 통일신라에서 제작한 것이라 하고 있다(崔在析, ꡔ正倉 院 소장품과 統一新羅ꡕ, 一志社, 1996, 566~587쪽).

245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45 <표 6> 日本正倉院所藏尺109) 1尺長 ( ) 序號 尺名 6 白牙尺 出土與傳世情況 著錄 29.5 ꡔ東瀛珠光ꡕ 卷1, 圖20甲(11) (1)圖172, (6)通二九 奈良正倉院 7 撥鏤綠牙尺 29.5 ꡔ東瀛珠光ꡕ 卷1, 圖19甲(11) (1)圖170, (7) 8 撥鏤紅牙尺 29.5 ꡔ東瀛珠光ꡕ 卷1, 圖18甲(11) (1)圖164, (7) 29.5 ꡔ東瀛珠光ꡕ 卷1, 圖20乙(11) (1)圖173, (7) 9 白牙尺 館藏 10 撥鏤紅牙尺 29.5 ꡔ東瀛珠光ꡕ 卷4, 圖224其二(1) (1)圖167, (7) 13 撥鏤紅牙尺 29.7 ꡔ東瀛珠光ꡕ 卷4, 圖224其一(1) (1)圖 撥鏤紅牙尺 29.9 ꡔ東瀛珠光ꡕ 卷4, 圖224其三 (1)圖 撥鏤紅牙尺 30.2 ꡔ東瀛珠光ꡕ 卷4, 圖18-乙(11) (1)圖 撥鏤綠牙尺 30.3 ꡔ東瀛珠光ꡕ 卷4, 圖19-乙(11) (1)圖 撥鏤紅牙尺 30.7 ꡔ東瀛珠光ꡕ 卷4, 圖224其四 (1)圖163 <표 7> 일본 출토 고대 척의 목록110) 遺跡明 所在地 年代 材質 단위수치 和田廢寺 奈良縣明日香村 7世紀 木(檜) 寸 轉用材 川合遺跡 靜岡縣南沼上 7世紀 木 寸 一尺以上のさし 太宰府 木 分と2.5分 平城宮跡-1 奈良縣奈良市 8世紀 木 分と1分 伊場遺跡 靜岡縣浜松市 8世紀 木 寸と5分 平城宮跡-2 奈良縣奈良市 747年頃 木 寸5分 平城宮跡-2 奈良縣奈良市 8世紀後半 木 2.95~3.1 1寸,5分,1分 稗田遺跡 奈良縣大和郡山市 8世紀後半 木 2.8~3.1 1寸と5分 平城宮跡-1 福岡縣太宰府市 8世紀初以前 刻み目 奈良縣奈良市 9世紀前半 木(廣 葉樹) 2.94 備考 一尺以上のさし 刻み目はは4.65 から4.3 新聞報道 1寸 그리고 위의 <표 7>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척은 당대척과 다소의 오차가 있는 유물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유사한 길이 109)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앞의 책, 2001, 321~322쪽에 있는 16-1 의 唐代 尺度 一覽表를 재인용 함. 110) 宮本佐知子, 앞의 논문, 1997, 214쪽 재인용.

246 246 지역과 역사 38호 를 가진 것이 많다. 8세기 일본 고대 척은 당대척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ㆍ중ㆍ일 고대 척은 중국 고대는 漢尺에서 唐 大尺으로 단계적 변화가 이루어졌고, 한국 고대는 중국 고대 척을 수용하면 서 척의 변화가 나타났고, 그리고 일본 고대는 고구려의 量田用 척인 소위 고구려척 과 당대척의 수용을 통해 척의 변화가 있었고, 당이 소척과 대척 을 사용한 것처럼 한때 대척(고구려척)과 소척(당대척)을 이원적으로 사용 하였다. 한국과 일본 고대 척은 동아시아의 교류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 다. 중국 고대에서 한척에서 당대척으로 변화는 문화적으로 큰 변동이다. 척은 수취와 교역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데, 척의 길이는 수취와 교역 에서 민의 생활에 고통과 함께 편리함을 동시에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Ⅱ. 부피의 단위와 용적 본 장에서는 한ㆍ중ㆍ일 고대 부피의 단위와 용적을 살펴보자. 먼저 한 국 고대 부피의 단위는 合ㆍ升[刀]ㆍ斗와 함께 斛ㆍ石ㆍ碩ㆍ苫 등이 사용 되었는데,111) 이러한 단위는 점차 合ㆍ升ㆍ斗ㆍ石 을 중심으로 제도화시 켰을 가능성이 많다.112) 이러한 부피의 단위들은 고구려는 戶稅의 수취, 백 제의 식미의 지급, 신라와 통일신라는 녹읍과 식읍 등의 수취에 적극 활용 되었다. 한국 고대 斗 이하의 단위체계는 10진법으로 운용되었는데, 두와 석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斗와 石의 관계는 ꡔ수서ꡕ에 의하면 稅布五匹 穀五石 遊人則三年一稅十 人共細布一匹 租戶一石 次七斗 下五斗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 111) 이우태, 앞의 논문, 1993 참조. 112) 盧重國, 앞의 논문, 2005, 83~86쪽에서 백제의 도량형 통일은 근초고왕대 이 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가 관철 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247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47 용이 주목된다.113) 고구려는 호세를 3등호에 기준하여 1석ㆍ7두ㆍ5두로 수취하였으므로,114) 이들의 관계를 고려하면 1석=10斗임을 유추할 수 있 다.115) 이러한 부피의 단위체계는 신라와 백제도 고구려처럼 1석=10두였 다고 이해하고 있다. 백제는 이러한 단위체계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만, 신라도 이러한 단위체계를 사용하였는지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통일신라시대의 자료가 주목된다. 자 米十斗失受 (後面 1行) 永忽(知㭆)受丑 二石上米十五斗七刀(後面 2行) 上米十七斗丑一石十斗 上米十三斗(後面 3行)( 正倉院 佐波里加盤附屬 新 羅文書 )116) 위의 자료 자 는 통일신라 8세기 전반 국가에서 작성된 문서인데, 이러 한 자료에 부피의 단위체계가 기록되어 있다면 부피의 단위체계에 대한 신 뢰성을 높일 수 있다. 1행에 米10斗,117) 2행에 上米가 15斗, 3행에 上 米가 17斗와 上米13斗로 나타나고 있다. 석의 단위와 함께 10斗, 13斗, 15斗, 17斗 등이 다양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正倉院 佐波里加盤 附屬 新羅文書 가 작성될 무렵에 1석은 17두 이상의 단위체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正倉 院 佐波里加盤 附屬 新羅文書는 파천촌에서 왕실내수용 및 제사용의 上米 와 大豆를 신라 왕실로 상납하였을 때 작성되었다는118) 점을 고려한다면 석과 두의 관계는 공적인 단위체계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통일신라 8세 113) ꡔ隋書ꡕ 권81, 列傳 東夷 高麗傳. 114) 김기흥, ꡔ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사회변동과 관련하여-ꡕ, 역사비평사, 1991, 67~70쪽. 115) 이우태, 앞의 논문, 1993, 15~16쪽. 116) 李基白, 앞의 책, 1987, 22~23쪽. 117) 1행에 米10斗 의 米 앞에 결락된 부분의 첫째 는 上 일 가능성이 많 다고 생각된다. 上米10斗 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8) 尹善泰, 正倉院 所藏 佐波里加盤文書 의 新考察 ꡔ國史館論叢ꡕ 74, 1997, 302~312쪽.

248 248 지역과 역사 38호 기 전반의 1석은 20두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통일신라 8세기 전반 양제 의 단위체계는 조선초기 ꡔ경국대전ꡕ에 1石=20斗의 단위체계가 사용된 점 을 고려한다면 1石=20斗도 사용되었다. 한편 한국 고대 부피의 단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일신라말기 崔致遠 이 撰한 崇福寺碑文과 고려시대 ꡔ拙藁千百ꡕ에 대한 명확한 검토가 필요하 다. 차 a) 其成九原 則雖云王土 且非公田 於是括以邇封 求之善價 益丘壟貳百結 酬稻 穀合二千苫 斞除一斗爲苫 十六斗爲斞(ꡔ韓國古代金石文(3)ꡕ, 崇福寺碑) b) 公幼穎隨朝請公 事大119)尉瀋王于京邸 遂通三國語 敍爲先王官屬而服事久 用其勞 賜田一百結(東俗 以五畝減百弓 爲結 斞除一斗爲苫 文昌侯云)120) 奴婢一十口 其勞賜 田一百結(ꡔ拙藁千百ꡕ 권2, 崔大監墓誌) 위의 자료 차 의 a)는 崔致遠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한국 고대 공전과 사전의 개념을 논하면서 자주 언급되었다. 문제는 비문의 내용에 200결을 값으로 치른 곡식이 모두 二千苫(섬)인데, 斞에서 1斗를 제한 것이 苫(섬) 이고, 16斗가 斞이다 고 해석한 것이다. 위의 자료 b)는 崔瀣의 ꡔ拙藁千百ꡕ 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최안도가 선왕(忠肅王)의 관속으로 복종하여 섬 기기를 오래하였는데 그 노고로 田 1백결과 노비 10구를 하사받았다는 것 이다. 토지 단위인 結을 설명하면서 고려 풍속에 五畝에서 百弓을 뺀 것을 結이라 하고, 斞에서 一斗를 제한 것을 苫이라 한다고 文昌侯가 말했다 고 하여 최치원이 말한 것을 인용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최치 원은 東俗 이란 표현을 쓰면서 結과 頃에 대한 면적을 비교하고 아울러 斞 에 一斗를 제하면 苫 이라 하였다. 물론 숭복사비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 119) 大 는 ꡔ東文選ꡕ 권123, 崔大監墓誌와 金龍善, 崔安道墓誌銘 ꡔ高麗墓誌銘 集成ꡕ,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93, 509~510쪽에는 太 로 기록하 고 있다. 120) ꡔ東文選ꡕ 권123, 崔大監墓誌 東俗 以五畝減百弓 爲結 斞除一斗爲苫 文昌侯 云 이라는 註의 내용이 없다.

249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49 창후의 자료에 대해서는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만,121) 부정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말기의 1석은 15두가 사용되었 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 부피의 단위체계는 1石=15斗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부피의 단위체계는 8세기 전반 正倉院 佐波里加盤附屬 新 羅文書의 1석=20두에서 9세기 후반의 崇福寺碑文의 1석=15두로 변화되 었는가, 아니면 두 단위체계가 함께 병용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전자 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122) 하지만 부피의 단위체계는 쉽게 변 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부피의 단위체계는 용적의 변화를 함 께 수반한다. 통일신라 8세기에서 9세기에는 부피의 단위체계를 변동시켜 야 할 필요가 없었다. 통일신라시대 부피의 단위체계는 1석=15두와 1석 =20두가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23) 앞에서 고구려 부피의 단위체계를 1석=10두가 사용되었음을 서술하였 는데, 신라는 이러한 부피의 단위체계를 사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통일신라시대 부피의 단위체계가 1석=15두와 20두가 병용되었던 점을 고 려할 때 1석=15두와 20두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고대 부피의 단위는 龠, 合, 升, 斗, 斛(石) 등의 용례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ꡔ說苑ꡕ에는 10약=1합, 10두=1석이라 하였고,124) ꡔ한서ꡕ에도 석 과 달리 斛의 단위가 기록되어 있다.125) 그러한 경향은 후대의 ꡔ수서ꡕ126) 121) 숭복사 비문의 세주의 내용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견해와 부정하는 견해로 나누 어지고 있다. 전자는 呂恩暎, 高麗時代의 量制-結負制 이해의 기초로서- ꡔ慶尙史學ꡕ 3, 1987, 3~4쪽. 李宗峯, 앞의 책, 2001, 129쪽. 尹善泰, 新羅 崇福寺碑 의 復元-結ㆍ苫의 細註와 관련하여- ꡔ佛敎美術ꡕ 16, 2000, 108~ 118쪽 등이다. 후자는 李丙燾, ꡔ韓國史-古代篇-ꡕ, 震檀學會, 1959, 649쪽 이다. 122) 尹善泰, 앞의 논문, 2000, 192~194쪽. 123) 李宗峯, 앞의 책, ) ꡔ說苑ꡕ 권80, 辨物篇. 千二百黍爲一龠 十龠爲一合 十合爲一升 十升爲一斗 十斗爲一石 125) ꡔ漢書ꡕ 권21, 律曆志1 上. 量者 龠合升斗斛也 所以量多少也 本起於黃鐘之龠

250 250 지역과 역사 38호 ㆍꡔ구ㆍ신당서ꡕ 율력지에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石은 중국의 漢代에 중량 의 단위로 기록되어 있다.127) 石이 제도적으로 용적의 단위로 사용된 것은 송대부터라고 하지만,128) 전국시대 魏의 文侯 때 李悝가 6백만경의 총수 확량이 속 180만석으로 증가되었다 고129) 하는 내용 중에 기록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 한대부터 용적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중국 고대 부피의 단위는 약, 합, 승, 두, 곡(석) 등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고, 이들의 관계는 10勺=1合, 10合=1升, 10升=1斗, 10斗=1斛이었고, 石은 斛과 함께 사 용되었다. 일본 고대 부피의 단위는 ꡔ日本書紀ꡕ 흠명 12년(551) 보리 종자 千石 (斛)을 百濟王에게 하사하였다 는130) 기록과 大化 2년(646)조에 1戶마다 庸米 5斗를 바친다 는131) 기록, ꡔ속일본기ꡕ 大寶 2년(702) 천하에 도량형 을 처음으로 반포하였다 는 기록 등을 고려할 때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음 을 엿볼 수 있다. ꡔ영의해ꡕ에 凡量十合爲升(謂以秬黍中者容一千二百爲籥 十籥爲合也 三升爲大升一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而五量嘉矣 이란 기록 과132) ꡔ養老令ꡕ 量十合爲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등의 기록133) 등을 고려 126) 127) 128) 129) 130) 131) 132) 133) 用度數審其容 以子穀秬黍中者千有二百實其龠 以井水準其槪 合龠爲合 十合 爲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而五量嘉矣 ꡔ隋書ꡕ 권16, 율력 상 嘉量. ꡔ漢書ꡕ 권21 上, 律曆 第 1上. 權者 銖兩斤鈞石也 所以稱物平施 知輕重也 本起於黃鐘之重 一籥容千二百黍 重十二銖 兩之爲兩 二十四銖爲兩 十六兩爲 斤 三十斤爲鈞 四鈞爲石 忖爲十八 易十有八變之象也 石者大也 權之大者 也 始於銖 兩於兩 明於斤 均於鈞 終於石 物終石大也 四鈞爲石者 四時之象也 ꡔ高麗圖經ꡕ 권40, 權量. 五卷之制 始於銖 兩於兩 明於斤 均於鈞 終於石 于 以權度物之重經 朴興秀, 앞의 논문, 小泉袈裟勝 編著, ꡔ圖解 單位の歷史辭典ꡕ, 柏書房, 1990, 85쪽. ꡔ漢書ꡕ 권24, 食貨 上. ꡔ日本書紀ꡕ 권19, 欽明 12年 3月. ꡔ日本書紀ꡕ 권25, 大化 2年 正月. ꡔ令義解ꡕ 권10, 잡령 제30. ꡔ養老令ꡕ, 잡령1.

251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51 할 때 일본 고대 부피의 단위체계는 唐과 비슷하였다. 이후 일본 고대 부피 는 和銅 6년(713) 2월 도량ㆍ조용ㆍ의창 등의 5조를 개정하여 이를 4월 에 반포하였지만, 단위체계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한ㆍ중ㆍ 일 부피의 단위는 중국과 일본 고대가 서로 유사한 측면이 많지만, 한국 고 대는 중국과 일본 고대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한중일 고대 1승의 용적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자. 한국 고 대 1승의 용적은 朴興秀에 의해 연구되었는데, 量制가 한나라 때나 혹은 그 이전에 도입되었다고 보았고, 삼국통일 이전에는 1승이 약 였다 가 삼국통일 이후 文武王의 유조에 따라 율령과 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쳤는 데, 즉 舊 3승= 新 1승으로 하는 大量制(약 )로 변화되었고 하였 다.134) 呂恩暎도 朴興秀의 견해를 수용하여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1승의 용 적은 약 199 였다고 보았고,135) 李宇泰도 삼국시대 1升의 용적은 200 였다가 나말여초기에 1石=15斗로 변화되면서 약 300 였다고 보았다.136) 이들의 연구도 朴興秀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1승의 용적에 대해 근거를 제 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李宗峯은 통일신라시대 聖德王 때 빈민구제곡으로 하루 3升을 지급 하였다는 것과137) 중국 漢代 빈민구제곡의 하루 지급량인 3升이 서로 비슷 한 점을 고려하여, 통일신라시대 1승 용적이 중국 한대처럼 약 200 정도 였다고 하였다.138) 그는 삼국시대 1승의 용적을 김해 양동고분군에서 출토 된 銅鼎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였다.139) 최근 이를 측정한 결과 1980 라 134) 135) 136) 137) 朴興秀, 앞의 논문, 1977 ; 앞의 책, 呂恩暎, 앞의 논문, 李宇泰, 앞의 논문, ꡔ三國史記ꡕ 권8, 新羅本紀8, 聖德王 6年 正月. 民多餓死 給粟人一日三升 ꡔ三國遺事ꡕ 권2, 聖德王. 丁未 正月初一一至七月三十日 救民給租 一口一日 三升爲式 終事而計三十萬五百碩也 138) 李宗峯, 앞의 책, ) 동의대학교 박물관, 김해 양동리 고분군 발굴조사(제3차) 약보고서, 임효택, 김해 양동리 고분군 조사와 성과 ꡔ김해 양동리 고분문화-동의대학 교 학술총서7ꡕ, 2000, 198~199쪽에 의하면 동정(높이: 17.5, 구경: 16.1 )

252 252 지역과 역사 38호 고 하였으므로,140) 1승은 200 정도이다. 삼국초기 1승의 용적은 漢代의 용적과 동일하였다.141) 따라서 신라 및 통일신라의 1승의 용적은 성덕왕 21년(722) 무렵까지 큰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윤선태는 신라 하대의 용적을 연구하였다.142)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에 四斗五刀(升) ㆍ 十石入甕 등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는데,143) 각각 의 체적은 약 16ℓ, 520.8ℓ 정도라고 하였고, 이를 통해 1승의 용적을 약 350 정도라고 유추하였다. 신라 하대 1승의 용적은 350 로 파악하였 고, 이러한 용적은 신라 중대의 1승 200 에서 큰 변화가 엿보인다고 하였 다. 이와 같은 기존의 연구를 종합하면 신라의 1승은 약 200 와 통일신라 말기 350 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부피의 제도에 대한 연구는 더욱 일천하다. 실제 고구려 의 부피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나마 백제의 부피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여러 유물이 출토되면서 이를 통해 해명하려는 연구 가 있다.144) 한성백제기의 부피의 경우, 공주 동곡리ㆍ남산리, 청주 봉명 동에서 출토된 솥모양토기[釜形土器]는 중국 西晉의 太康銘銅釜 와 유사하 고, 청주 신봉동에서 출토된 손잡이바리[把手附鉢]는 후한의 元初大司農銘 銅斗 와 비슷한 양기인데, 용적은 2,700~2,800 였다. 이는 1斗(말)의 용 적이라 하였다. 반면 웅진백제기ㆍ사비기의 양기는 출토 사례가 없어 분명 하게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145) 따라서 백제의 부피는 여러 형태로 유추는 가능하지만, 그 용적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고대 1승의 용적은 신라시대를 중심으로 연구하였고, 대체 140) 141) 142) 143) 144) 145) 에는 西口官鼎 容一斗 幷重十七斤七兩 七 이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容一斗 는 오늘날의 1斗(10승)이다. 盧重國, 앞의 논문, 2005, 93~94쪽. 李宗峯, 앞의 논문, 윤선태, 앞의 논문, 이에 대한 해석은 국립경주박물관, ꡔ文字로 본 新羅ꡕ, 세종문화사, 2002의 자 료를 참고하기 바람. 국립부여박물관, 앞의 책, 2003 ; 盧重國, 앞의 논문, 盧重國, 위의 논문.

253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53 적으로 1승의 용적은 약 200 정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1승의 용적은 어느 시기에 변화되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조금은 차이가 있다. 먼저 문무왕대에 신라가 신양제인 대양제로 변화된 근 거로 다음의 자료를 들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보자. 카 遺詔曰 其邊城鎭遏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並宜量廢 律令格式 有不便者 卽便改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ꡔ삼국사기ꡕ 권7, 신라본기 문무왕 21) 위의 자료 카 는 문무왕 21년의 遺詔로, 유조의 마지막에 기록된 것으 로, 변경의 성진을 막고 주현의 과세 중에서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폐 지하고, 율령격식도 불편한 것이 있다면 즉시 고치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 급한 것처럼 문무왕은 5년에 견포의 길이를 줄여서 수취하였는데, 이를 다 시 논의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율령은 이미 6세기 초에 반포되었는데, 7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대 적 상황의 변화가 있었으므로 다소 불편한 부분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무왕은 유조를 통해 시대에 맞지 않은 부분을 시정하고 싶은 의 지를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본 유조는 양제의 변동과 큰 관련성을 가진다 기보다는 수취문제 혹은 율령제의 운영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신라 1승의 용적은 성덕왕 때도 200 인 점을 고려한다면 신라 중대이후, 즉 신라 하대 혹은 고려 초에 변동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중국 고대 1승의 용적을 살펴보자. 상해박물관 소장 長陵銘 銅盉(높이; 26.8, 입구직경; 9.6, 복부직경; 18.9, 용적; 2,325 ) 에는 세 곳에 명문 이 새겨져 있는데, 전국시대에 새겨진 容一斗二益 과 진한대에 새겨진 長 陵一斗一升 이 있다. 이 기물의 용적은 1斗 2益을 지금의 1두 2승으로 환산 한다면 1승은 194 이다. 이 기물은 진한대에까지 내려와서 다시 비교 측 량을 거쳐 그 용적이 1두 1승이라고 각명되었는데, 1승은 211 으로 환산

254 254 지역과 역사 38호 하였다.146) 天津市武藝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前漢의 銅升 외면에는 上 林共府 初元三年受琅邪147) 容一升 重斤二兩 工師駿造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용기를 실측한 용적은 약 200 라고 하였다.148) 그리고 대만소장의 新王莽 銅嘉量 에는 크기가 다른 양기(斛ㆍ斗ㆍ升ㆍ合ㆍ籥)마다 각각의 명문이 있는데, 그중 승에 관한 기록으로 律嘉量升 方二村而圜其外 庣旁一 釐九豪 冥六百四十八分 深二寸五分 積萬六千二百分 容十合 이 새겨져 있 다. 嘉量 명문은 5量의 직경, 깊이, 밑면과 용적을 기록하고 있어 新 王莽의 도량형제도의 연구에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新 王莽 때의 1척의 길 이는 , 1승의 용적은 이라고 하였다.149) 이와 같 은 1승의 용적 약 200 는 남북조시대에 약간의 증대는 있었지만 隋ㆍ唐代 이전까지 지속되어졌다. 수ㆍ당대에는 즉 開皇以古斗三升爲一升 大業初 依復古斗 라150) 하거 나, 量 十合爲升 三升爲大升一升 이란151) 기록을 고려할 때 秦ㆍ漢代의 용적보다 3배가 큰 대용적이었다.152) 秦ㆍ漢代 1승을 200 로 계산한다 면 隋ㆍ唐의 1승은 약 600 라고 추정할 수 있다.153) 일본 고대 부피의 용적을 말해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고대 율령의 자료인 ꡔ영의해ꡕ에 의하면 凡量十合爲升(謂以秬黍中者容一千二百爲籥 十 籥爲合也 三升爲大升一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而五量嘉矣 이란154) 기록과 ꡔ養老雜令ꡕ 量 十合爲升 三升爲大升一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등의 기록이 146)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앞의 책, 1993, 382쪽. 147) 琅邪는 ꡔ漢書ꡕ 지리지의 주에 의하면 秦이 설치하였고 왕망은 塡夷라고 불렀 으며, 서주에 속한다 라고 했다. 현 山東省 諸城縣에 있다. 148)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앞의 책, 1993, 172쪽. 149)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위의 책, 186~187쪽. 150) ꡔ隋書ꡕ 志第11, 律曆 上 嘉量. 151) ꡔ養老令ꡕ 잡령1, 度量衡. 量十合爲升 三升爲大升一升 十升爲斗 十斗爲斛 152) ꡔ隋書ꡕ 권24, 食貨. 其度量 斗則三斗當今一斗 ꡔ唐六典ꡕ 권3, 金部 員外郞. 三斗爲大一斗 153) 丘光明, 앞의 책, 1993, 109쪽 ; 앞의 책, 1996, 144쪽. 154) ꡔ令義解ꡕ 권10, 잡령 제30.

255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55 있다.155) ꡔ영의해ꡕ의 대보령 과 ꡔ양노령ꡕ에서 3승을 1대승으로 삼은 것 은 隋ㆍ唐대의 용적 기록인 三升爲一大升 과 동일하다. 따라서 일본 고대 1승의 용적은 隋ㆍ唐의 대승 용적과 동일하다고 유추된다. 그리고 일본 고대 식량소비량의 통해서도 1승의 용적을 살펴볼 수 있다. 聖武天皇 天平勝宝元年(749)조에 五穀이 열매가 차지 않아 官人의 妻子가 굶주리므로, 文武官과 諸家司에게 사람마다 月에 六斗의 米를 배급하였다 고 한다.156) 이 경우 최소한 米를 지급하였을 것인데, 하루 2승에 해당한 다. 桓武天皇 延曆 8年(789)에 征東将軍이 상주한 보고 중에 征軍 27,470 인에 일일 식량으로 549斛이다 157)라고 한다. 斛은 石과 동일하므로 하루 소비량을 계산하면 2승이다. 즉 일본은 8세기 관료 및 군인에게 하루 2승의 식량을 지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본 고대의 하루 식량소비량 은 중국의 당대와 비슷한 양이었던 반면에 통일신라와는 차이가 있다. 이는 8세기 일본의 1승 용적은 중국 당대와 비슷한 약 600 이기 때문이다.158) 따라서 일본 고대 율령의 자료와 식량소비량을 통한 1승의 용적은 중국 고 대 수ㆍ당대와 동일하였다.159) 아래의 <표>는 최근 일본에서 출토된 양기의 사례들이다. 이를 통해 일본 고대 1승의 용적을 추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京升에160) 환 155) ꡔ養老令ꡕ 잡령 ) ꡔ続日本紀ꡕ 권十七, 天平勝宝 元年 正月 己巳. 比年頻遭亢陽 五穀不登 官人 妻子多有飢乏 於是 文武官及諸家司給米 人別月六斗 157) ꡔ続日本紀ꡕ 권39, 延暦 8年 六月 庚辰. 征東将軍奏 称胆沢之 地賊奴奥区 方 今大軍征討 剪除村邑 余党伏竄 殺畧人物 又子波 和我 僻在深奥 臣等遠欲薄 伐 粮運有艱 其従玉造塞 至衣川営四日 輜重受納二箇日 然則往還十日 従衣川 至子波地 行程仮令六日 輜重往還十四日 惣従玉造塞至子波地 往還廿四日程 廃 途中逢賊相戦 及妨雨不進之日不入程内 河陸両道輜重一万二千四百四人 一度所運糒六千二百十五斛 征軍二万七千四百七十人 一日所食五百四九斛 以 此支度 一度所運 僅支十一日 158) 小泉袈娑勝, 앞의 책, 1980, 148~163쪽. 159) 이종봉, 앞의 논문, 2006, 20~21쪽. 160) 阿部猛, ꡔ度量衡の事典ꡕ, 同成社, 2006, 42쪽에서 豊臣秀吉의 太閤檢地 때 정해진 升으로, 일본 근세초기 京都를 중심으로 유통된 상업용 升을 말한다.

256 256 지역과 역사 38호 산된 수치는 0.383승ㆍ0.388승ㆍ0.45승ㆍ0.47승 등으로 대략 4/10의 비 율이다. 京升의 4/10는 隋ㆍ唐代의 용적인 0.6ℓ보다 조금 큰 용적이지만,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 고대 출토 양기의 용적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따라서 발굴의 사례들을 좀 더 보완하면 앞의 문헌적 자료 와 비교 검토를 통해 일본 고대 출토 양기의 용적을 명확히 할 수 있으리라 고 생각된다. <표 8> 일본 고대 출토 양기(ます) 목록161) 遺跡名 소재지 년대 재질 용량 (立方 ) 京升換算値 제작방법 (升) 平城宮跡-4 奈良縣奈良市 7世紀後半 須惠器 平城宮跡-5 奈良縣奈良市 8世紀 木質 平城宮跡-6 奈良縣奈良市 8世紀 須惠器 平城宮跡-2 奈良縣奈良市 8世紀中頃 須惠器 秋田城跡 秋田縣秋田市 8世紀中頃 木質 墨書(1升1合) 組合せ(5) 墨書(9合3勺) 252 (0.45) 約 墨書(9合1夕) 刳貫 上荒屋遺跡 石川縣金澤市 8世紀後半 須惠器 墨書(4合9勺) 平城宮跡-7 奈良縣奈良市 8世紀後半 須惠器 平城宮跡-3 奈良縣奈良市 8世紀後半 須惠器 平城宮跡-2 奈良縣奈良市 9世紀後半 木質 비고 墨書(5合) 212 (0.47) 墨書(2合半) 組合せ (3-2) 한ㆍ중ㆍ일 고대 1승의 용적은 중국과 일본의 고대가 유사하고, 한국 고 대는 이들 용적보다 아주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고대 용적은 수ㆍ당대 의 용적을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국 고대 용적은 삼국 초 기에 중국 고대 용적을 수용하였지만, 수ㆍ당대의 용적과 동일하게 운용하 지 않았다. 161) 宮本佐知子, 앞의 논문, 1997, 214쪽 재인용.

257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57 Ⅲ. 무게의 단위와 중량 한ㆍ중ㆍ일 고대 무게의 단위와 중량에 대해서는 앞의 ꡔ漢書ꡕ에 銖ㆍ兩 ㆍ斤ㆍ鈞ㆍ石 의 5단위인데, 黍100粒의 무게는 銖이고, 24銖가 兩이고, 16兩이 1斤이고, 30斤이 鈞이고, 4鈞이 石 이라 하였다.162) 이와 같은 단 위는 漢代 이후 널리 사용되었다. 먼저 한ㆍ중ㆍ일 고대 무게의 단위에 대해 살펴보자. 한국 고대 무게의 단위는 일찍이 白南雲이 선언적으로 衡制는 고려시대 斤(=16兩), 兩(=10 錢), 錢(=10分), 分(=10釐)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163) 무게의 단위는 ꡔ삼국사기ꡕㆍꡔ삼국사기ꡕㆍꡔ금석문ꡕ 등의 자료에 斤ㆍ兩 을 중심 으로 기록되어 있고, 백제지역인 부여 가탑리와 구아리에서 출토된 一斤 銘 이 새겨진 석제 거푸집과 여러 점의 석추가 출토된 점을 고려할 때 斤ㆍ兩 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국 고대에서는 이러한 단위 외에 도 分ㆍ鋌ㆍ廷ㆍ方ㆍ斗ㆍ主 등도 사용되었다.164) 따라서 한국 고대 무 게의 단위는 斤ㆍ兩 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고, ꡔ漢書ꡕ의 기록을 고려할 때 1斤=16兩 이었다. 중국 고대 무게의 단위는 앞의 ꡔ漢書ꡕ에 기록된 것처럼 銖ㆍ兩ㆍ斤ㆍ鈞 ㆍ石 등이 존재하였고,165) 즉 24銖가 1兩이었다. 이러한 무게의 단위체계 는 漢代부터 근을 중심으로 계속 사용되었지만, 石은 주로 용적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무거운 무게의 단위로 斤이 많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대에는 銅錢인 開元通寶 의 중량이 2銖4累이므로, 개원통보 10개 의 중량을 1兩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兩 이하에 錢이 생겨 10錢을 1兩으로 162) ꡔ漢書ꡕ 권21 上, 律曆1 上. 權者 銖兩斤鈞石也 所以稱物平施 知輕重也 本起 於黃鐘之重 一龠容一千二百黍 重十二銖 兩之爲兩 二十四銖爲兩 十六兩爲斤 三十斤爲鈞 四鈞爲石 忖爲十八 易十有八變之象也 163) 白南雲, ꡔ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ꡕ, 개조사, 1937, 753쪽. 164) 李宗峯, 앞의 책, 2001, 187~194쪽. 165) ꡔ漢書ꡕ 권21 上, 律曆1 上.

258 258 지역과 역사 38호 하였다. 당대에는 兩 이하의 무게 단위에 兩-錢-分-厘 등의 십진법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형제의 단위체계는 兩 아래에 십진법(兩-錢-分-厘) 과 비십진법(兩-銖)으로 나누어졌다. 일본 고대 무게의 단위는 ꡔ日本書紀ꡕㆍꡔ續日本記ꡕ 등에 斤ㆍ兩 의 단위 가 기록되어 있고,166) 養老令 에 權衡 二十四銖爲兩(謂以秬黍中者 百黍 重爲銖卄四銖爲兩) 三兩爲大兩一兩 十六兩爲斤 이라고167) 기록되어 있다. 일본 고대 무게 단위는 근ㆍ량을 중심으로, 鋌과168) 銖ㆍ分 등의 단위도 함께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일본 고대도 당에서 사용된 開元通寶의 무게를 1匁으로 하여, 그 10枚의 무게를 량으로 하고, 1,000枚의 무게를 1 貫으로 하였다.169) 일본 고대는 당의 율령을 도입하면서 당의 도량형제도 함께 수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일본의 무게 단위는 唐의 제도가 도 입되기 전에 어떠하였는지를 좀더 穿鑿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한ㆍ중ㆍ일 고대 무게 단위의 중량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 자. 한국 고대 1근의 중량은 거의 연구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양기의 용적 과 마찬가지로 이를 밝힐 수 있는 기초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 은팔찌에 새겨진 庚子年二月多利作大 夫人分二百卅主耳 라는 명문과 銀製花形裝飾에 一百四十 이라는 명문이 기 록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170) 이를 통해 1근의 중량을 유추하였다. 盧 重國은 팔찌의 명문 가운데 主는 朱와 같은 음으로 무게의 단위인 銖를 말 한다. 따라서 팔찌의 중량은 230銖가 된다. 銀製花形裝飾의 경우 무게는 9,752g인데 이를 중국 南朝 1근의 무게로 환산해보면 약 140絫(루)가 되 고, 絫는 銖의 1/10의 무게에 해당하므로 一百四十 은 140루를 표기한 것 이라 하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제 팔찌 무게를 재어보면 g 166) ꡔ日本書紀ꡕ 권30, 持統 5년 7월. 是日 豫國司田中朝臣 法馬呂等獻宇和郡御 馬山白銀三斤八兩䤝一籠 167) ꡔ養老令ꡕ 中, 度量衡. 168) ꡔ日本書紀ꡕ 권24, 皇極 원년 4월. 仍賜良馬一匹ㆍ鐵卄鋌 169) 宮本佐知子, 앞의 논문, 1997, 220쪽. 170) 국립부여박물관, 앞의 책, 2003, 100쪽.

259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59 과 g이다. 이를 230수로 나누면 1수는 약 0.727g이 되고, 당시 환 산된 당시의 무게는 g과 g이 된다. 277g~279g은 南朝의 1근의 중량과 같으며, 또 一斤 銘 거푸집으로 주조된 銀 1근의 중량과 비슷 하다. 웅진백제기 1근의 중량은 이를 근거로 남조의 중량을 기준으로 사용 하였다고 밝혔다.171) 그런데 통일신라 8세기 때 聖德大王神宗銘에는 聖德大王神宗之銘 敬 捨銅一十二萬斤 欲鑄一丈鍾一口 立志未成 奄爲就世 大曆六年(惠恭王 7: 771) 歲次辛亥 十二月十四日銘 172)의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 라 8세기 단계의 1근의 중량을 유추할 수 있다. 종의 무게를 무엇에 근거하 여 추정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750kg으로 추정한 바 있고, 이를 통해 1근의 중량은 195g으로 추정하였다.173) 그런데 1997년 8월 11일 오후 2 시 국립 경주박물관 정원 종각에서 우리나라 저울 업체인 (주) 카스 가 聖 德大王神鐘을 측정하였는데, 종의 무게는 약 18,900kg이었다.174) 이를 통 한 1근은 약 158g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한국 고대 1근은 중국의 漢代 1근 의 중량과 비교해도 중량이 너무 가볍다. 금속은 주조 과정에서 크게는 30~40%의 오차가 발생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성덕대왕신종에 기록된 1근 의 중량은 중국 漢代와 비슷한 중량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고 하였다.175) 한국 고대인 통일신라 1근의 중량은 뒤에서 서술하는 중국 고대 隋ㆍ唐代 의 1근의 중량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고대 1근의 중량은 웅진백제기는 중국 남조의 단위 중량 을, 통일신라 8세기 때는 漢代의 중량을 사용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과 연 한국 고대 신라와 백제는 다른 무게 단위를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해서 171) 盧重國, 앞의 논문, 2005, 100~101쪽. 172)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3)ꡕ, 聖德大王神鐘. 173)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3)ꡕ, 385쪽의 주) 31번에서 이때의 1근은 당나라 때 사용된 大ㆍ小斤 가운데 小斤으로서 대략 195g으로 추산되고, 이는 현재 1근 (600g)의 1/3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174) 국립경주박물관, ꡔ국립경주박물관연보ꡕ 1997년도, 한기정판사, 1998, 34~36쪽. 175) 李宗峯, 앞의 책, 2001, 198~200쪽.

260 260 지역과 역사 38호 는 향후 자료의 보완을 통해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고려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중국 고대 무게 단위의 중량을 살펴보자. 중국 고대 1근의 중량은 이를 검토할 수 있는 자료도 많고, 그에 따라 연구도 상당히 심화되었다. 漢代의 자료인 1968년 河北省 滿城縣 陵山 2號 前漢墓에서 출토된 三鈞銘鐵權 의 경우 무게가 22,490g이다. 명문에 의거한 1근은 249.9g이다. 그리고 전한 시대 官累銘 銅權 에는176) 官累重斤十兩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유 물의 중량은 397g이다. 명문에 의거한 1근의 중량은 244.3g이다.177) 이외 에도 한대의 官累 의 權器는 1근의 무게가 대체로 248.2~248.5g으로 나 타난다.178) 따라서 漢代의 1斤은 약 248g 내외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漢代의 1근의 중량은 量ㆍ尺 제도와 마찬가지로 위진ㆍ남북조시기를 지 나면서 크게 증가되었다. 1974년 河南省 澠池驛 출토의 權衡의 중량은 1031g인데, 2斤權으로 보아 환산한 1斤의 무게는 515.5g이다. 이것은 新 莽시대의 근량(249g)의 약 2배에 해당한다. 이는 ꡔ左傳ꡕ 孔潁達疏의 魏齊 斗称於古二爲一 이라는 것과 기본적으로 부합된다고 파악하기도 하였다.179) 그러나 四川省博物館藏(重三斤十二兩銘)과 天津藝術博物館藏(太康四年二 月尙方造銅升 重四兩十二銖銘)을 참고한다면 위진ㆍ남북조시기 1근의 중 량은 각각 393g과 347g이다.180) 따라서 위진ㆍ남북조시기의 1근의 중량 은 漢代에 비해 약 140~200% 정도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隋ㆍ唐代는 ꡔ隋書ꡕ 율력지에 의하면 開皇以古斗三升爲一升 古稱三斤爲 一斤 으로 하였다는 기록과181) ꡔ唐律疏議ꡕ 권26에 의하면 秤權衡 以秬黍 中者 百黍之重爲銖 二十四銖爲兩 三兩爲大兩一兩 十六兩爲斤 으로 한다는 176) 官累 는 官府가 제작을 감독하고 반포한 표준 權器의 표시라고 생각된다. 177)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앞의 책, 1993, 314~315쪽. 178)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 金基協 譯, 위의 책, 316~317쪽. 179) 王云, 魏晉南北朝時期的度量衡 ꡔ中國古代度量衡論文集ꡕ, ) 丘光明 編著, 앞의 책, 1992, 434쪽. 181) ꡔ隋書ꡕ 권16, 율력 상 衡權.

261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61 기록이 있다.182) 즉 隋ㆍ唐의 1근의 중량은 수ㆍ당대의 이전시대, 즉 漢代 보다 3배가량 증가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앞에서 漢代 1근의 중량은 248g 정도라고 유추하였는데, 이의 3배는 600g을 훨씬 넘는다고 할 수 있 다. 그런데 수ㆍ당대 1근의 중량은 연구자마다 조금은 차이가 있는데, 丘光 明은 1斤을 661g 정도라고 하였고,183) 邱隆은 당대의 1근은 640g이라고 하였고,184) 胡戟은 당대 1근을 680g(1량 = 42.5g) 정도라고 추정하였다.185) 그러므로 隋ㆍ唐代 1근의 중량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600g 중ㆍ후 반 정도로 생각된다. 일본 고대 무게 단위의 중량은 정확하지 않지만, 고대 律令의 자료를 통 해 유추할 수 있는데, ꡔ令義解ꡕ에 權衡 二十四銖爲兩(謂 以秬黍重者百黍 重爲銖 卄四銖爲兩) 三兩爲大兩一兩 十六兩爲斤 의 것과186) ꡔ養老令ꡕ에 權衡 二十四銖爲兩 三兩爲大兩一兩 十六兩爲斤 의187) 기록이 참고 된다. ꡔ영의해ꡕ와 ꡔ양노령ꡕ의 내용은 중국 고대 ꡔ唐六典ꡕㆍꡔ唐律疏議ꡕ 등의 기 록과 거의 유사하다. ꡔ영의해ꡕ와 ꡔ양노령ꡕ의 1근의 중량은 기록의 내용이 중국 고대인 당대의 내용과 비슷한 점을 고려하면 중국 당대와 유사하였다 고 생각된다. 그런데 앞에서 일본 고대의 斗秤制는 ꡔ부상약기ꡕ에 서명 12 년(640)에 정했다고 하였다. 대보령의 1근의 중량은 이미 7세기 전반과 동 일하였고, ꡔ대보령ꡕ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정립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고대 1근의 중량은 당제를 수용한 점을 고려한다면 당의 1근과 유사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ㆍ중ㆍ일 고대 무게 단위는 兩ㆍ斤 중심으로 182) ꡔ唐律疏議ꡕ 권26, 雜律 校斛斗秤度不平. 이와 비슷한 기록은 ꡔ唐六典ꡕ 권3, 尙書戶部 凡權衡 以秬黍中者 百黍之重爲銖 二十四銖爲兩 三兩爲大兩 十六 兩爲斤 內外官私悉用大者 조에도 있다. 183) 丘光明, 唐代權衡總述, 앞의 책, 1992, 144~147쪽. 184) 邱隆, 唐宋時期的度量衡, ꡔ中國古代度量衡論文集ꡕ, 1990, 383~343쪽. 185) 胡戟, 唐代度量衡與畝里制度, ꡔ中國古代度量衡論文集ꡕ, 1990, 312~316쪽. 186) ꡔ令義解ꡕ 권10, 잡령 ) ꡔ養老雜令ꡕ 잡령1.

262 262 지역과 역사 38호 사용되었지만, 무게 단위체계에 있어서는 중국 고대는 漢代의 24銖=1兩에 서 唐代부터 십진법(10錢=1兩)을 중심으로 사용하였고, 일본 고대도 唐의 영향을 받은 이후 아마도 십진법을 중심으로 사용하였고, 한국 고대는 명확 하게 정리할 수 없지만, 웅진백제기 主 의 기록을 고려할 때 삼국 통일기 이 전에는 漢代의 24銖=1兩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한국 고 대의 무게 단위를 일본 고대처럼 唐의 무게 단위를 도입하였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선별적으로 도입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ㆍ중ㆍ일 고대 1근의 중량은 중국과 일본 고대가 ꡔ唐律疏議ꡕ와 ꡔ令義解ꡕ에 기록된 내용을 고려할 때 서로 비슷하였을 것이고, 한국 고대는 이들 국가와 차이가 있었 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 고대 무게 단위의 중량을 일본 고대처럼 중국 고대 의 단위 중량을 도입하였지만, 신라는 통일신라 때까지 漢代의 중량을 사용 하였고, 백제는 웅진백제기 남조의 단위 중량을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맺음말 이상에서 한ㆍ중ㆍ일 고대 도량형을 검토하였는데, 이를 요약 정리하면 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한ㆍ중ㆍ일 고대는 도량형을 통일 정비하였는데, 한국 고대는 명확 하게 시기를 파악할 수 없지만, 중국 고대는 진시황 때부터 당대까지 계속 이루어졌고, 일본 고대도 ꡔ日本書紀ꡕ, ꡔ續日本記ꡕ과 ꡔ大寶令ꡕ 등의 자료를 통해 7세기 중반과 8세기 초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국 고대는 시장을 관리하는 동시전과 시부 등의 존재를 고려하면 이 무렵에 도량형의 통일 정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도량형의 관리 기구는 중국 고대는 太府寺시와 지방관이, 일본 고대는 대장성과 국사가 각각 담당하였고, 한국 고대는 동시전과 시부 등이 담당하였을 것으로 유추 된다. 도량형기의 불 법적 사용에 대해서는 중국 고대는 ꡔ唐律疏議ꡕ에 처벌 규정을 명확히 하고 있고, 일본 고대도 ꡔ令義解ꡕ에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만, 처벌 내용

263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63 에 있어서는 부분적인 차이가 있었다. 한국 고대는 후대의 자료인 ꡔ증보문 헌비고ꡕ의 백제 다루왕조에 처벌에 관한 자세한 규정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 無寧王妃의 誌石 買地券에 不從律令 이란 기록을 주목한다면 그러한 법령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한ㆍ중ㆍ일 고대 척의 단위는 ꡔ三國史記ꡕㆍꡔ三國遺事ꡕㆍꡔ大戴禮 記ꡕㆍꡔ孔叢子ꡕㆍꡔ說文解字注ꡕㆍꡔ日本書紀ꡕ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寸ㆍ 尺ㆍ丈ㆍ步ㆍ引ㆍ里ㆍ跬ㆍ仞ㆍ尋ㆍ常ㆍ端ㆍ疋ㆍ匹 등의 용례들이 사용 되다가, 점차 寸ㆍ尺ㆍ步ㆍ丈 등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척의 종류는 漢 尺, 南朝尺, 唐大尺, 高句麗尺 등이 사용되었다. 한국 고대의 신라와 통일 신라는 한척과 당대척, 고구려는 한척으로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이를 1.5 배한 양전용 척을 사용하였고, 백제는 한척ㆍ남조척ㆍ당대척을 사용하였 다. 중국 고대는 한척ㆍ남조척ㆍ당대척 등이 사용되었고, 일본 고대는 당 대척과 고구려척이 사용되었다. 중국 고대 척의 길이는 점차 길어졌는데, 이는 수취제도의 연관 때문이었다. 이러한 척은 한국과 일본 고대에 영향을 주어 척의 변동으로 나타났다. 셋째, 한ㆍ중ㆍ일 고대 부피의 단위는 合ㆍ升ㆍ斗ㆍ石(斛ㆍ碩ㆍ苫) 등 이 사용되었고, 다만 한국 고대는 刀(되)ㆍ苫(섬) 등의 단위들도 통용되었 다. 중국과 일본 고대 부피의 단위는 律令制 이후 동일하게 운용되었지만, 한국 고대의 신라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중국 고대 1승의 용적은 200 ~ 600 등이 사용되었지만, 일본 고대 1승의 용적은 중국 고대인 당대와 같 이 600 등이 사용되었다. 한국 고대 1승의 용적은 신라는 통일신라 때까 지 약 0.2ℓ가 사용되었다. 넷째, 한ㆍ중ㆍ일 고대 무게의 단위는 초기에 銖ㆍ兩ㆍ斤 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단위는 唐代에 화폐의 단위인 錢 이 兩 아래에 사용되 었는데, 일본 고대도 당대처럼 錢 이 무게 단위로 널리 사용되어 錢ㆍ兩ㆍ 斤 의 단위체계로 정착되었다. 이와 같은 단위체계는 한국 고대와 차이가 있 다. 그리고 한국 고대 1근의 중량은 약 240g이 사용되었지만, 중국 고대 1 근의 중량은 240g에서 약 640g으로 변동이 있었고, 반면 일본 고대 1근의

264 264 지역과 역사 38호 중량은 7세기 이후 중국 당대와 같은 약 640g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유추된 다. 중국과 일본 고대 1근의 중량과 한국 고대와 차이가 있었다. 즉 한ㆍ중ㆍ일 고대는 율령을 공통적으로 실시하였는데, 도량형은 중국 과 일본 고대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보이지만 비슷한 단위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한ㆍ중ㆍ일의 교류에 의한 영향이 다. 다만 본고는 척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동양 3국의 고대 토지의 면적인 頃畝制, 結負制, 段步制 등을 연계시켜 검토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ꡔ舊唐書ꡕ, ꡔ唐六典ꡕ, ꡔ唐律疏議ꡕ, ꡔ史記ꡕ, ꡔ三國史記ꡕ, ꡔ三國遺事ꡕ, ꡔ商君書ꡕ, ꡔ續日本紀ꡕ, ꡔ隋書ꡕ, ꡔ新唐書ꡕ, ꡔ養老雜令ꡕ, ꡔ譯註 韓國古代金石文(3)ꡕ, ꡔ令義解ꡕ, ꡔ日本書紀ꡕ, ꡔ戰國策ꡕ, ꡔ漢書ꡕ 국립경주박물관, ꡔ국립경주박물관연보ꡕ, 한기정판사, 국립부여박물관, ꡔ백제의 도량형ꡕ, 예맥출판사, 김창석, ꡔ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ꡕ, 일조각, 盧重國, 百濟의 度量衡과 그 運用-척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ꡔ한국고대사연구ꡕ 40, 朴贊興, 高句麗尺에 대한 硏究 ꡔ史叢ꡕ 44, 박찬흥, 고구려의 段步制 ꡔ韓國史學報ꡕ 12, 박찬흥, 고대 한국과 일본의 量田制 비교 고찰 ꡔ韓國史學報ꡕ 41, 朴興秀, 韓國古代의 量田法과 量田尺에 관한 硏究 ꡔ한불연구ꡕ, 朴興秀, 新羅 및 高麗 때의 量制度와 量尺에 관하여 ꡔ科學技術硏究ꡕ 5, 朴興秀, ꡔ韓ㆍ中度量衡制度史ꡕ, 성균관대 출판부, 白南雲, ꡔ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ꡕ, 改造社, 呂恩暎, 高麗時代의 量制-結負制 이해의 기초로서- ꡔ慶尙史學ꡕ 3, 유태용, ꡔ35.6의 고구려자ꡕ, 서문문화사, 윤선태, 신라 하대 量制에 관한 일시론-雁鴨池 출토 量器를 중심으로 ꡔ신라문화ꡕ 17ㆍ18, 윤선태, 한국 고대의 척도와 그 변화-고구려척의 탄생과 관련하여 ꡔ國史館論叢ꡕ

265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 李宇泰, 韓國古代의 尺度 ꡔ泰東古典硏究ꡕ 創刊號, 李宇泰, 韓國古代의 量制 ꡔ泰東古典硏究ꡕ 10, 이우태, 高句麗尺再論-高句麗尺과 高麗術의 관계를 중심으로- ꡔ동북아역사논총ꡕ 17, 李宗峯, 통일신라시대의 척 ꡔ한국중세사연구ꡕ 8, 李宗峯, ꡔ韓國中世度量衡制硏究ꡕ, 혜안, 李宗峯, 韓國古代의 量制 ꡔ역사와 경계ꡕ 61, 이종봉, 韓國 古代 度量衡制의 硏究現況과 課題 ꡔ역사와 세계ꡕ 42, 崔德卿, 戰國ㆍ秦漢시대 度量衡制의 정치사적 의미와 그 변천 ꡔ釜大史學ꡕ 23, 崔德卿, 秦漢시대 度量衡의 기준과 보급양상 ꡔ大丘史學ꡕ 58, 崔德卿, 秦漢시대 度量衡의 처벌규정과 삶의 강제 ꡔ중국사연구ꡕ 8, 홍승우, 佐左官貸食記에 나타난 百濟의 量制와 貨食制 ꡔ목간과 문자ꡕ 4, 홍희유, ꡔ조선상업사ꡕ,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關野貞, ꡔ朝鮮の建築と藝術ꡕ, 岩波書店, 丘光明, ꡔ中國古代度量衡ꡕ, 商務印書館, 1996 丘光明 編著, ꡔ中國歷代度量衡考ꡕ, 科學出版社, 丘光明ㆍ邱隆ㆍ楊平 著, ꡔ中國科學技術史-度量衡卷ꡕ, 科學出版社, 邱隆ㆍ丘光明ㆍ顧茂森ㆍ劉東瑞ㆍ巫鴻 共編(金基協 譯), ꡔ中國度量衡圖集ꡕ, 法仁 文化社, 龜田隆之, 日本 古代における田租田積の硏究-度量衡制との關聯を通して- ꡔ古代 學ꡕ 4-3, 喜田貞吉博士紀念號, 宮本佐知子, さしㆍますㆍはかり ꡔ考古學による日本歷史-交易と交通ꡕ 9, 雄山 閣, 米田美代治, ꡔ朝鮮上代建築硏究ꡕ, 秋田屋, 1944(申榮勳 譯, ꡔ韓國上代建築의 硏究ꡕ, 東山文化社, 1976). 小泉袈裟勝, ꡔものさしꡕ, 法政大學 出版局, 小泉袈裟勝, ꡔ枡(ます)ꡕ, 法政大學 出版局, 小泉袈裟勝, ꡔ秤(はがり)ꡕ, 法政大學 出版局, 松丸道雄ㆍ池田溫 等編, ꡔ中國史ꡕ 2, 山川出版社, 狩谷棭齋 冨谷至 校注, ꡔ本朝度量權衡考ꡕ, 平凡社, 新井宏, ꡔまぼらしの古代尺-高句麗尺なかった-ꡕ, 吉川弘文館, 1992.

266 266 지역과 역사 38호 阿部猛, ꡔ度量衡の事典ꡕ, 同成社, 吳承洛, ꡔ中國度量衡史ꡕ, 商務印書館,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267 韓ㆍ中ㆍ日 古代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267 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n System of Measurement in Ancient Korea, China and Japan Lee, Jong-Bong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comparatively on system of measurement in ancient Korea, China and Japan. First, when it comes to korea, noting is clearly known when measurement was united and organized. On the other hand, it can be demonstrated through historical sources in case of ancient china and Japan. Accepting part of measurement in a law of Tang[Tánglǜ shūyì(唐律疏議)], ancient Japan embodied it in the Taiho ryo (大寶令), Yōrō Code(養老令), etc. Ancient korea seems to have such a law, according to the law of Koguryo(高句麗) and Silla(新羅), and record like Do not follow the law ( 不從律令 ) in Baekje(百濟). Second, type and length of cheok(尺) in the ancient triple countries included a Hancheok(han chi, 漢尺, about 23.1 ), a Namjocheok(nan chao chi, 南朝尺) a Dangdaecheok(tang da chi, 唐大尺, 29.7 ), a Koguryocheok(高句麗尺, 35.6 ). The length of chinese cheok had an impact on the other two countries. Third, units of volume in the ancient triple involved Hop(合)ㆍSeung(升)(doe, 刀)ㆍDo(斗)ㆍSeok(石) (GokㆍSeokㆍSeom, 斛ㆍ碩ㆍ苫). The units in ancient korea were differently worked with the other two countries. The capacity of a Seung(升) in ancient China was 200 ~600. But it was 600 in ancient Japan, as it was in Tang(唐) dynasty. In case of ancient Korea, specially Silla, it was about 0.2ℓuntil unified Silla.

268 268 지역과역사 38 호 Fourth, SuㆍRyangㆍGeun ( 銖ㆍ兩ㆍ斤 ) were usually used as units of weight in the ancient triple. It was difference with ancient Korea that the unit Geon ( 錢 ) was used as lower unit than Ryang( 兩 ) in ancient China and Japan. The weight of a Geun was about 240g in ancient Korea and was about 240g~ 640g in ancient China. It was the same of Tang in ancient Japan. Keywords : Tánglǜ shūyì, Taiho ryo, Hancheok, Dangdaecheok, Koguryocheok

269 龜巖269~307쪽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69 ꡔ지역과 역사ꡕ 38, ,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188)우 정 임* 머리말 Ⅰ 李楨과 李滉의 交遊 Ⅱ 李楨이 編纂ㆍ刊行한 서적과 그 성격 1. 宋ㆍ元ㆍ明代의 道統을 밝힌 言行錄類 서적 2. 道學風의 詩文類 서적 3. 明代 朱子學者의 言行錄類 서적 4. 朝鮮의 道統을 밝힌 言行錄類 서적 5. 기타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는 이정이 간행한 서적 22종의 간행과정과 서적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 해 이정의 서적간행은 퇴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주자성리학의 道統 확립과정과 밀접하 게 연관된다는 것을 밝혔다. 퇴계의 도통 확립을 위한 노력은 서원 건립과 서적 간행으로 집약된다. 이정은 지방 관으로 재임하면서 서원을 건립하고 서적을 편찬할 때는 퇴계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였 다. 이정은 善山郡守 재임 시에 吉再의 사당에 들러서 제사를 받들고 허물어져가는 사 당을 새로 지으려 하였다. 이후에는 西岳精舍와 玉川精舍를 건립하여 성현을 봉사하였 다. 이정이 간행한 서적은 朱子의 도통인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행적과 학설 을 통해 道學의 요점과 그 계승을 밝힌 言行錄 類 서적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송대 도 학자들의 문장과 행실 속에서 도학의 면모를 재조명하고자 한 道學風의 詩文類 서적을 *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wooji1670@hanmail.net).

270 270 지역과 역사 38호 많이 간행하였다. 또한 퇴계가 명대의 순정성리학자로 평가하는 明儒의 저술을 간행하 여 명대 朱子學의 동향의 일단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주자를 중심으로 송ㆍ 원ㆍ명대까지 주자성리학자의 도통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ꡔ景賢錄ꡕ을 편찬ㆍ간행 하여 조선에서 주자성리학의 道統에서 김굉필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다. 주제어 : 李楨, 道統, 伊洛淵源錄, 景賢錄, 性理遺編 머리말 龜巖 李楨(1512~1571)은 16세기 사천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서부경 남지역 퇴계학맥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기에,1) 영남학파 내에서 그의 위 상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이정의 고향에 소재한 사천문화원 이 이정에 대한 연구를 촉발하였고, 그간의 연구과정을 통해 영남학파에서 이정이 차 지한 위상과 16세기 성리학 발달에 그가 기여한 역할이 상당부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정우락은 2013년에 지금까지 구암학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전망함으로써,2) 이정 연구가 한 층 심화될 수 있 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이정이 서적을 편찬하거나 간행 한 사업은 퇴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道統 확립을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음을 1) 黃渭周, 退溪와 龜巖의 往復書翰 ꡔ退溪學과 儒敎文化ꡕ 47, 2010, 310쪽. 2) 정우락은 그간의 이정 연구의 논점을 구암학의 핵심을 구명한 연구와 이황과 조식 사이에서 이정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 이정이 16세기 성리 학 진작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와 관련한 연구, 이정이 관련된 진주음부옥 사건에 대한 이해 문제에 대한 연구, 이정의 현실인식에 대한 문제를 다룬 연구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자세한 연구성과 정리는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정우락, 龜巖 李楨 연구의 반성적 모색 ꡔ退溪學과 儒敎文化ꡕ 52, 2013).

271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71 밝히고자 한다. 이정은 淸州와 慶州, 順天에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3종의 서적을 편찬하고 22종의 서적을 간행하였는데, 서적을 편찬하거나 간행할 때에는 대부분 퇴계와 왕복서한을 주고받으며 긴밀하게 의논을 하여 진행하 였다. 道統에 대한 논의는 1510년(중종 5)과 1514년(중종 9)에 정몽주를 문묘 종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1517년(중종 12) 9월에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되었는데,3) 이것은 도학의 계승자가 국가 적으로 공인되어 문묘에 종사된 것으로 도통론이 조선의 이념적 지향을 결 정하는 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으 로 평가할 수 있다.4) 특히 퇴계는 기묘사림에 의해 이미 계보화된 도통을 정암과 회재로 잇기 위해 金宏弼ㆍ鄭汝昌 양현의 신원과 추존 및 현양사업을 적극 도왔고, 동방 4현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함과 동시에 훈구세력에 대한 사림파의 정통성 을 강조하였다.5) 퇴계는 16세기 중엽에 도통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도통을 확립하기 위한 퇴계의 노력은 서원의 건립과 서적의 간행으로 집약 된다. 이러한 퇴계의 활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바로 구암 이 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정의 서적 간행활동에 대해서는 연구의 초기부터 이수건 등6)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었는데, 구체화한 것은 필자와 안현주에 의해서이다. 필 자는 2008년에 退溪와 그 門徒의 서적 간행활동을 검토하면서 이정이 간행 한 서적을 검토하였지만,7) 간행 서적의 성격을 단지 성리학 서적이었음을 3) ꡔ중종실록ꡕ 권29, 12년 9월 17일. 4) 김영두, 中宗代 文廟從祀 論議와 朝鮮 道統의 形成 ꡔ사학연구ꡕ 85, 2007, 40쪽. 5) 李樹健, 龜巖 李楨의 生涯와 學問 및 退南 과의 關係 ꡔ구암사상학술집ꡕ, 사천 문화원, 2005, 54쪽. 6) 李樹健, 龜巖 李楨의 家系와 生涯 및 退南 과의 關係 ꡔ龜巖 李楨 先生의 生涯 와 學問ꡕ 학술발표자료집, 사천문화원, 최영성, 龜巖 李楨의 學問과 朝鮮 儒學史上의 貢獻 ꡔ구암사상학술집ꡕ, 사천문화원, 2005.

272 272 지역과 역사 38호 밝히는 데 그쳤다. 이후 안현주는 2011년에 이정이 편찬하거나 간행한 서 적의 구체적인 간행상황을 검토하였다.8) 변동명은 이정이 順天府使로 재임 하면서 玉川精舍을 건립하고 성리학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한 것에 주목하 여 그가 16세기 중엽 성리학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밝혔다.9) 김정만은 이정은 퇴계와 더불어 程朱 道學書를 간행ㆍ보급하여 16세기 조선적 성리 학이 심화되는데 크게 공헌하였음을 밝혔다.10) 이들 연구로 이정이 간행한 서적의 간행내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간행 서적의 성격이나 그의 서적 간행이 16세기 道統의 확립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 하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1장에서 먼저 퇴계와 이정의 교유관계를 살펴보고 이들 의 교유 내용이 주로 서원 건립과 서적 간행활동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검토 할 것이다. 그리고 2장에서는 이정이 편찬하거나 간행한 서적 22종의 성격 을 분류하여 宋ㆍ元ㆍ明代의 道統을 밝힌 서적, 道學風의 詩文類 서적, 明 代 朱子學者의 언행록류 서적, 朝鮮의 道統을 밝힌 言行錄類 서적, 기타로 나누어 이들 서적의 구체적인 간행과정과 서적의 성격을 검토고자 한다. 이 를 통해 이정의 서적 간행활동은 주자성리학자의 계보를 드러내고 도학풍을 진작시키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밝히고, 그의 서적 간행이 조선에 서 주자성리학의 도통을 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살펴볼 것이다. 7) 우정임, 退溪 李滉과 그의 門徒들의 서적 간행과 書院의 기능 ꡔ지역과 역사ꡕ 22, ) 안현주, 龜巖 李楨의 圖書刊行에 관한 硏究 ꡔ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ꡕ 42-1, ) 변동명, 16세기 중엽 順天府使 李楨의 성리학 진흥 ꡔ남도문화연구ꡕ 28, ) 김정만은 李楨의 道學思想 연구에서 이정의 師承關係에 주목하여 그가 퇴계를 이어 도를 전수받은 도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정의 사상이 ꡔ中庸ꡕ과 ꡔ大學ꡕ에 기반한 誠敬 修養論을 실천하였다는 점을 검토하였다(김정 만, 龜巖 李楨의 道學思想 硏究,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273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73 Ⅰ. 李楨과 李滉의 交遊 李楨(1512~1571)은 李湛의 아들로 자는 剛而, 호는 龜巖, 본관은 泗川 이다. 이정의 위학자세와 생애 및 관직생활에는 20대에 스승으로 사사했던 宋麟壽(1499~1547)와 魚得江(1470~1550)의 감화와 영향이 컸다. 이정 은 1528년(중종 23) 17세의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534년 (중종 29) 23세에 사천에 유배 온 송인수를 찾아가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림에게 신망이 있었던 圭菴 송인수가 권신 金安老에게 배척을 받아 사천에 유배되자,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이정은 향리로 내려와 송인수의 문 인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어득강을 찾아가 그에게도 글을 배웠으며, 25세가 되던 1536년(중종 31)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11) 이정의 업적은 크게 서적의 편찬ㆍ간행 활동과 서원의 건립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은 16세기 도통 확립과정에서 퇴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진행 한 일이기도 하다.12) 이정은 26세인 1537년(중종 32)에 聖節使의 일원인 書狀官으로 明에 다 녀오면서 唐ㆍ宋ㆍ元의 古書에서 儒學에 관한 책을 대량 가져와 뒷날 성리 학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13) 이정이 관료 생활을 시작한 초기부터 서 적을 수입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서적 간행에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인 것 은 그가 書肆 설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魚得江을14) 스승으로 모셨던 것 11) 李樹健, 龜巖 李楨의 家系와 生涯 및 退南 과의 關係 ꡔ안동사학ꡕ 9ㆍ10, 2005, 313~314쪽에 李楨과 魚得江, 魚得江과 退溪, 李楨과 退溪의 교유내용을 설명 하고 있다. 12) 16세기 도통 확립과정에서 퇴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힘쓴 것은 서원을 지어서 도학의 계보를 잇는 우리나라 성현을 배향하는 작업과 남송 주희의 스승과 제자 를 중심으로 명대에 이르기까지 도통을 잇는 학자들의 저작을 간행하거나 주자 성리학자의 도통을 드러내 보이는 서적을 간행하는 일이었다. 13)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21~36쪽. 14) 우정임, 16세기 전반기 書肆의 설치 논의와 그 의미 ꡔ역사와 경계ꡕ 54, 2005 에서 어득강이 중종대에 서사를 설치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음을 밝혔다.

274 274 지역과 역사 38호 과도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정은 이후 榮川ㆍ善山ㆍ淸州ㆍ慶州ㆍ 順天에서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성리학 서적을 간행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퇴계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하였다. 이정이 퇴계(1501~1570)를 만난 시기는 32세인 1543년(중종 38)으 로, 퇴계가 성균관 司成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성묘를 왔을 때 도산에 있 는 山堂으로 찾아가 뵈었다고 한다. 이때 이정은 榮川郡守로 재임하던 때이 다. 이정은 퇴계에게 수서시를 보여주었고, 퇴계가 여기에 차운하여 시를 추가해 주었던 것으로 파악된다.15) ꡔ壽瑞詩ꡕ는 선생의 5대조 敎導公 李稵(1372~1461)가 세조대에 영의정 을 지낸 姜孟卿(1410~1461)으로부터 받은 축하시와 그 시에 차운한 여러 시를 후대에 이정이 모아서 편집한 시첩이다. ꡔ龜巖集ꡕ에 이정이 1542년 (중종 37)에 쓴 跋文16)이 실려 있어서 편찬과정을 잘 알 수 있다. 이정은 榮川郡守로 재임하던 1542년에 이 책을 간행하려고 발문을 지었다 년에는 永陽에 있던 李賢輔가 또 강맹경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고 서문을 지어 주었다.17) 퇴계 또한 이정이 편찬한 시집에 시를 더하여 붙이고 1563 년에는 발문을 써준 내용이 퇴계선생 문집에 전한다.18) 그렇다면 ꡔ壽瑞詩ꡕ 15) 이은식은 구암과 진주옥사 ꡔ구암사상학술집ꡕ, 사천문화원, 2005, 101쪽에서 퇴계가 이정 문중의 시첩인 壽瑞詩集의 발문을 써 준 것에 감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가 수서시에 발문을 써준 것은 이보다 20년 뒤인 1563년이다(ꡔ退溪先生文集ꡕ 권43, 跋, 泗水李氏壽瑞詩編跋). 16) 1457년(세조 3) 겨울에 이자가 86세의 나이로 강맹경의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강맹경이 그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것을 축하하며 시를 지어 주었 다. 그리고 3년 후인 1459년에 이자가 88세가 되자 임금으로부터 은 허리띠를 하사받고 朝散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그의 맏아들인 진사 彛倫 또한 효성이 지 극하였다. 이때에 진주목사 安知歸가 강맹경이 지은 시를 알게 되었고, 또 임금 이 이자에게 내린 은총을 영탄하며 이자의 자손이 효성이 지극한 것에 대한 은 총을 칭송하여 기리는 시를 지었다. 이에 여러 명이 진주목사를 따라 차운하여 시를 지어주었다(ꡔ龜巖集ꡕ 續集, 卷1, 敬書宣祖壽瑞詩卷後). 17) ꡔ聾巖集ꡕ 雜著, 卷3, 壽瑞詩序. 18) 이정이 1543년에 퇴계에게 수서시를 보여주었기에 퇴계가 여러 시의 뒤에 차운 하여 시를 써주었는데, 20년이 지난 1563년에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수서시에 퇴계의 시를 붙여서 보내오며 발문을 써달라고 하여 써주었다고 하였

275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75 는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던 1563년(명종 18)에 경주에서 처음 간행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19) 이정이 퇴계와 긴밀하게 교유한 사실은 ꡔ退溪集ꡕ에 잘 나타나 있다. ꡔ退 溪集ꡕ 권21에 28통, 권22에 24통, 續集 권4에 34통 등 모두 86통의 서한 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퇴계가 이정에게 보낸 답서이다.20) 黃渭周는 여기 에 더하여 필사본 ꡔ퇴계선생전서ꡕ, ꡔ퇴계선생전서유집ꡕ ꡔ퇴도선생집ꡕ 등 을 참고하여 퇴계가 이정에게 보낸 서한 약 140여 통을 확인하였다. 황위주 의 연구에 따르면, 전체 140통의 절반가량인 약 71통에 달하는 서한의 내용 이 주자학 관련 서적에 대한 정보 교환과 간행 보급 문제에 대한 협의이다. 또한 이정이 청주목사(20통), 경주부윤(57통), 순천부사(28통) 등 지방관 으로 있을 때 작성한 것이 약 105통으로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 다.21) 이 시기는 이정이 활발하게 서적을 편찬하거나 간행한 시기와 일치 한다. 이정이 서적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퇴계와 긴밀하게 협의한 내용은 2 장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적간행 외에 서원건립과 관련한 이정의 활동은 퇴계의 영향뿐 아니라 주세붕과의 만남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정이 주세붕을 만난 것은 퇴계를 처음 만난 때와 같은 해인 1543년(중종 38)이다. 이정이 榮川郡守로 재임하면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을 가서 뵙고 헤어지면서 시를 써서 드린 것이22) 첫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이루어진 주세 붕과의 교유는 이후 이정이 서원을 건립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정이 주세붕을 만난 몇 년 후인 1546년(명종 1) 9월에 善山郡守로 부임하여 吉再의 사당에 들러서 제사를 받들고 사당을 새로 지 으려고 하였으나 곧 임지를 떠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23) 통 19) 20) 21) 22) 다(ꡔ退溪先生文集ꡕ 권43, 跋, 泗水李氏壽瑞詩編跋).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 따르면, 이때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목활자본 1冊 이 현재 경기대학교 도서관에 소장(경기-K104571)되어 있다. 최영성, 앞의 논문, 黃渭周, 앞의 논문,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47쪽.

276 276 지역과 역사 38호 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정이 사당이나 서원을 건립하여 우리나라 유학자를 배향하는 일은 이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560년(명종 15) 9월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한 이후 1561년에 西岳精舍을 창건하고 薛聰, 金庾信, 崔致遠을 향사한 것이 그것 이다. 이정이 서악정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지역민의 비방에 직면하자 퇴 계는 이에 대해 걱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퇴계가 서악정사 부속 건물의 명칭을 지어주고, 배향할 인물도 편지로 이정과 의논하고 있는 것 을24) 통해서 이정의 서원 건립이 퇴계의 서원 보급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정이 순천부사로 재임할 때인 1565년(명종 20)에는 寒暄堂 金宏 弼과 梅溪 曺偉가 귀양 와서 지은 臨淸臺를 복원하여 비를 세우고 그 옆에 景賢堂을 지었으며, 玉川精舍를 건립하고 김굉필을 배향하였다.25) 이때도 역시 臨淸臺記 의 저자 시비와 원만한 처리 방법, 기문 오탈자의 교감과 판 각 시 유의사항, 경현당과 옥천정사의 건물 명칭과 편액 書寫 등의 문제를 모두 퇴계와 왕복서한을 통해 긴밀히 의논하였다.26) 또한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569년(선조 2)에 이정이 사천에 靜觀臺와 龜巖精舍를 짓고 초청하자 사천으로 이정을 방문하였다. 이때 퇴 계는 정관대를 大觀臺로, 구암정사를 대관대 서재로 개칭하도록 하고, 대관 대 서재의 부속 건물을 居敬齋ㆍ明義齋ㆍ不欺堂이라 명명하였다.27) 이와 같이 이정이 서적을 간행하고 서원을 건립하는 일은 퇴계와 여러 통 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긴밀하게 협조하여 진행하였으며, 그것은 곧 퇴계 가 도통 확립을 위해 진행한 일련의 작업과 관련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정몽주-김굉필의 문묘종사 논의는 조광조 세력의 학문적,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도통론을 원용하여 조선 도학의 정통을 새 23) 24) 25) 26) 27)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50쪽. 黃渭周, 앞의 논문, 2010, 335쪽.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134~136쪽. 黃渭周, 앞의 논문, 2010, 335쪽.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147쪽.

277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77 롭게 구상하려는 시도였다.28) 특히 퇴계는 기묘사림에 의해 이미 계보화된 도통을 정암과 회재로 잇기 위해 이정의 景賢錄 편간에 적극 협력하여 자료 를 보충하거나 수정, 보완해 주었는가 하면 경현당과 玉川精舍 건립에 조언 을 해 주거나 액자ㆍ재호를 써주는 등 金宏弼ㆍ鄭汝昌 양현의 신원과 추존 및 현양사업을 적극 도왔다. 또 정암과 회재의 行狀을 찬술함으로써 동방 4 현(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함과 동시에 훈구세력에 대한 사림파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앞으로 정계와 학 계를 주도할 사림의 도통을 확립함으로써 군신ㆍ조야를 막론하고 이의가 없게 한 조치였다.29) 퇴계는 명종대 서적 간행과 서원 건립에서 가장 중심에 있었던 스승이었 다고 할 수 있다. 명종대에는 중종대부터 명나라에서 유래한 양명학의 영향, 불교의 성행이 크나큰 문제로 제기되던 상황이었다. 또 사림들은 이러한 상 황에서 이전과는 다른 성리학을 모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퇴계는 남송말 의 상황에 주목하였다. 퇴계는 주자가 그의 문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소 통하여 도학의 전통을 만들어 나갔고 그것에 의해 주자학의 전파와 확산이 이루어졌음을 주목하였다.30) 퇴계는 중종 말년 경부터 주자학에 심취한 후 ꡔ朱子大全ꡕ을 이해하는데 주력하여, 초학자들이 쉽게 주자대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ꡔ朱子書節要ꡕ를 만들어 간행ㆍ보급에 앞장섰다. 1556년에 제자 黃俊良과 함께 간행하기 시 작하여 1562년에 星州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이 책은 1566년까지 海州ㆍ 平壤ㆍ定州 등지에서 간행되어 ꡔ朱子大全ꡕ은 명종대 성리학 이해의 중심 에 있었다. 퇴계는 ꡔ朱子書節要ꡕ를 편찬하여 ꡔ朱子大全ꡕ을 이해한 다음, 주자를 중 28) 김영두, 앞의 논문, 2007, 67쪽(김영두는 중종대 사림은 문묘종사를 추진하면 서 정몽주를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신하라고 하여 세조대의 사육신이나 연산 군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의 죽음과 연결시켜 새로이 해석하고, 거기에 도 학의 조종이라는 도통론적 표상을 더하여 새롭게 하였다고 이해한다). 29) 李樹健, 앞의 논문, 2005, 54쪽. 30) 정재훈, 退溪 李滉의 학문관과 정치사상 ꡔ역사문화논총ꡕ 2, 2006, 40쪽.

278 278 지역과 역사 38호 심으로 宋~明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도통을 정리하였다. 朱子와 朱門諸 子 이후의 명나라에 이르는 주자학파 儒者들의 계통을 정리하여 말년(63 세)인 1564년에 ꡔ宋季元明理學通錄ꡕ을 편찬하여 간행한 것이 그것이다. 이 책은 朱子와 朱門諸子 및 이후의 명나라 蔡虛齋(蔡淸), 鄒立齋(鄒智) 등에 이르는 주자학파 儒者들의 行狀, 傳記, 語錄 등을 간명하게 집록한 것 이다. 이정이 明의 주자학자의 계통을 정리하여 1562년에 ꡔ皇明理學名臣 言行錄ꡕ을 간행한 것 또한 퇴계가 의도한 宋~明에 이르는 도통 정리 작업 의 일환이다. Ⅱ. 李楨이 編纂 刊行한 서적과 그 성격31) 이정이 편찬한 서적은 모두 3종32)으로 ꡔ壽瑞詩ꡕ는 1563년 慶州府尹으 로 재임할 때 편찬하였고, ꡔ性理遺編ꡕ(ꡔ性理遺編補錄ꡕ 포함)은 1564년, ꡔ景 賢錄ꡕ은 1565년 順天府使로 재임하던 때에 편찬하였다. ꡔ壽瑞詩ꡕ는 이정 개인의 학문이나 사상을 검토할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정이 順天府使로 재임하던 때에 편찬한 ꡔ性理遺編ꡕ과 ꡔ景賢錄ꡕ은 그가 편찬한 서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적이다. 그리고 이정이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간행한 서적에 대해서는 鄭斗가 쓴 이정의 行狀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31) 우정임, 조선전기 性理書의 간행과 유통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2009, 150~159쪽에서 검토한 이정이 간행한 서적의 내용을 수정보완하여 작성하였다. 32) 안현주, 앞의 논문, 2011에서 이정이 편찬한 서적은 4종으로 파악하였으나, 필 자가 확인한 바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한 본(BA ) ꡔ皇明名臣言行 錄ꡕ은 이정이 편찬한 것이 아니라 楊廉이 편찬한 ꡔ皇明名臣言行錄ꡕ과 ꡔ皇明理 學臣言行錄ꡕ을 합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는 3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279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79 중종조에서 만든 성리서가 혹 우리 동방에서 간행한 것이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은 퇴계선생께 가서 함께 교정하려고 왕복하였고 서로 더불어 발문도 썼으니 책 이름은 孔子通紀ㆍ二程粹言ㆍ程氏遺書ㆍ(程氏)外書ㆍ伊洛淵源續錄ㆍ濂 洛風雅ㆍ擊壤集ㆍ延平答問ㆍ朱子詩集ㆍ范太史唐鑑ㆍ丘瓊山家禮儀節ㆍ薛文 淸讀書錄ㆍ胡敬齋居業錄ㆍ皇明名臣言行錄(理學錄이라 불리는 皇明理學名臣 言行錄 포함)ㆍ醫無閭先生集 등의 서적은 역임한 고을에서 반드시 간행한 것 들이다. 비록 산지에 있어도 성리서를 만약 보게 되면 경전의 뜻으로 보조주석 을 달았고 판본이 없는 책들은 방읍 수령들에게 권하여 반드시 간행하도록 한 다음에 그쳤다.33) 위의 행장을 보면 이정이 지방관으로 재임할 때 간행한 서적은 모두 15종 이다. 그가 서적을 간행할 때는 퇴계와 긴밀하게 의논하여 진행하였으며, 간행 서적의 성격은 성리서가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ꡔ醫 (無)閭先生集ꡕㆍꡔ孔子通紀ꡕㆍꡔ伊洛淵源錄(續錄)ꡕㆍꡔ二程粹言ꡕㆍꡔ皇明 名臣言行錄(皇明理學名臣言行錄 포함)ꡕㆍꡔ范太史唐鑑ꡕ의 6종은 이정이 쓴 ꡔ醫(無)閭先生集ꡕ의 발문에서 자신이 慶州府尹으로 있으면서 간행한 서 적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가 편찬한 ꡔ壽瑞詩ꡕㆍꡔ性理遺編ꡕ(ꡔ性理遺編補 錄ꡕ 포함)ㆍꡔ景賢錄ꡕ을 간행하였기에 그가 간행한 서적은 모두 18종이 된다. 그런데 이정이 지방관으로 재임한 시기와34)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에 수 록된 지방별 판본의 현황, 그리고 ꡔ退溪集ꡕ과 ꡔ龜巖集ꡕ을 참조하여 이정이 간행한 것으로 확인되는 서적의 간행사항을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이 모두 33) 李楨, ꡔ龜巖集ꡕ 권2, 行狀(鄭斗 謹狀). 中朝性理之書 或有未盡刊行於吾東者 亦與退溪往復訂定 相與跋之 如孔子通紀, 二程粹言, 程氏遺書外書, 伊洛淵源續 錄, 濂洛風雅, 擊壤集, 延平答問, 朱子詩集, 范太史唐鑑, 丘瓊山家禮儀節, 薛 文淸讀書錄, 胡敬齋居業錄, 皇明名臣言行錄, 理學錄, 醫無閭先生集等書 必入 梓於所歷州府 雖在散地 若見性理書可羽翼經傳 而無板本者 亦力勸傍邑守宰 必 使刊行而後已 34) 1541년(중종36) 1월~1546년 2월 ; 榮川郡守, 1546년(명종1년) 9월~1547년 9월 ; 善山郡守, 1552년(명종7) 10월~1556년(명종11) 1월 ; 淸州牧使, 1560 년(명종15) 9월~1563년(명종18) 1월 ; 慶州府尹, 1563년(명종18) 11월~ 1566년(명종21) 4월 ; 順天府使(李樹健, 앞의 논문, 2005와 ꡔ龜巖年譜ꡕ, 泗 川文化院, 2002를 참조하여 작성함).

280 280 지역과 역사 38호 22종이다. 이정이 淸州牧使로 재임한 동안 간행한 서적으로 파악된 서적은 ꡔ(伊川) 擊壤集ꡕ, ꡔ(薛文淸)讀書錄ꡕㆍꡔ朱子詩集ꡕㆍꡔ延平答問ꡕㆍꡔ(丘瓊山)家禮儀 節ꡕ 5종이다.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던 때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적으 로는 ꡔ醫無閭先生集ꡕㆍꡔ伊洛淵源錄ꡕ(ꡔ伊洛淵源續錄ꡕ 포함)ㆍꡔ二程粹言 (二程先生傳道粹言)ꡕㆍꡔ皇明名臣言行錄ꡕ(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 포함)ㆍ ꡔ(范太史)唐鑑(=大唐文鑑)ꡕㆍꡔ學庸章句指南ꡕㆍꡔ孔子通紀ꡕㆍꡔ壽瑞詩ꡕ 8종이다.35) 순천부사 재임 중에 간행한 서적은 ꡔ性理遺編ꡕ(ꡔ性理遺編補錄ꡕ 포함)ㆍꡔ程氏遺書ꡕㆍꡔ程氏外書ꡕㆍꡔ(胡敬齋)居業錄ꡕㆍꡔ(王柏)天地萬物 論ꡕㆍꡔ景賢錄ꡕㆍꡔ濂洛風雅ꡕㆍꡔ朱子年譜ꡕㆍꡔ朱子實記ꡕㆍꡔ啓蒙傳疑ꡕㆍ ꡔ三韓詩龜鑑ꡕ 등 11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ꡔ啓蒙傳疑ꡕㆍꡔ三韓詩龜鑑ꡕ 은 이정이 간행에 간여하였을 수는 있으나 정확한 간행사실을 확인할 수 없 어서 본고에서는 9종으로 이해하였다. 본고에서는 그가 간행한 사실이 확인되는 22종을 중심으로 서적의 간행 과정과 간행서적의 성격을 검토하고자 한다. 아래의 표에는 이정이 간행한 서적을 시대 순으로 배열하고, 간행지와 이정의 지방관 재임지,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에 수록여부 등을 표기하였다. 35) 1561년(명종 16)에 이정이 간행하면서 쓴 ꡔ醫(無)閭先生集ꡕ 跋文에 의하면, ꡔ孔子通紀ꡕㆍꡔ二程粹言ꡕㆍꡔ伊洛淵源錄ꡕㆍꡔ大唐文鑑ꡕㆍꡔ皇明名臣言行錄ꡕ 등의 서적을 당시의 경상도 관찰사 南宮忱에게 稟告한 후 간행했음을 알 수 있 다. 이때 간행할 서적의 선정과 교정 등 전반적 계획은 지방관이 교유인과 의논 하여 수행하였지만, 책판 판각이나 종이 마련 등 간행에 필요한 제반 경비는 관 찰사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지방 관아에서 서적을 간행할 때에는 해당 지방관 이 소속된 관찰사에게 재가를 받아 지방 관아의 물력을 바탕으로 서적을 간행하 였다(賀欽(明), ꡔ醫閭文集ꡕ, 嘉靖辛酉(명종16, 1561) 季冬 慶州府尹李楨跋. 今年春 都事趙侯希文 自洛抵慶 囑之以吾友許大輝曄之言曰 醫閭先生文集 凡 若干卷 惟楔梓廣布 是望須毋惜鐫刻費 楨聞其言而惑其意 則將是集及孔子通紀 ㆍ二程粹言ㆍ伊洛淵源錄ㆍ大唐文鑑ㆍ皇明名臣言行錄 等書 稟告于今方伯南 宮公忱 分屬大官而監督之 是集則晋陽牧伯金侯泓實董其役 不數月功己告完 ).

281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81 <표> 이정이 간행한 서적 종수 서적명 간행 년도 간행 당시 李楨의 官職 간행처 고사촬요 책판목록 수록 출 처 1 擊壤集 청주목사 ~ 淸州 2 (薛文淸)讀書錄 1553 청주목사 淸州 3 朱子詩集(朱文公先生感 1553 興詩) 청주목사 淸州 4 延平答問 1554 청주목사 淸州ㆍ順天 順天(선조 18) ꡔ退溪集ꡕ 권15 書 答許太輝 (改刊) 5 朱文公家禮儀節 1555 (=(丘瓊山)家禮儀節) 청주목사 淸州 6 醫無閭先生集 경주부윤 晋州 7 伊洛淵源錄 (伊洛淵源續錄 포함) 1562 경주부윤 南原(선조 1) ꡔ醫無閭先生集ꡕ 李楨 跋文 永川ㆍ南原 南原(선조 18) 8 二程粹言 (二程先生傳道粹言) 1562 경주부윤 陜川 陜川(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9 理學錄(=皇明理學名臣 1562 言行錄)36) 경주부윤 慶州 慶州(선조 18) 10 (范太史)唐鑑 (=大唐文鑑) 1562 경주부윤 密陽 密陽(선조 9飜)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11 學庸章句指南 1562 경주부윤 慶州 慶州(선조 18) ꡔ龜巖集ꡕ別集 권1, 學庸章句指 南跋 12 孔子通紀 1563 경주부윤 義城 義城(선조 1) ꡔ醫無閭先生集ꡕ 李楨 跋文 13 壽瑞詩 1563 경주부윤 慶州로 추정 14 性理遺編ㆍ補錄 1564 순천부사 順天 順天(선조 18) 이정이 편찬하여 간행 15 程氏遺書 1564 순천부사 順天 順天(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16 程氏外書 1564 순천부사 順天 順天(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胡敬齋)居業錄 17 (=ꡔ居業錄要語ꡕ) 1564 순천부사 順天 順天(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18 (魯齋 王柏)天地萬物論 1564 순천부사 順天 순천(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19 景賢錄 순천부사 順天 順天(선조 18) 順天 順天(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淸州(선조 1) ꡔ醫無閭先生集ꡕ 李楨 跋文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慶州(선조 1)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ꡔ龜巖集ꡕ 권2, 行狀(鄭斗 謹狀) 晋州(선조 18)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ꡔ龜巖集ꡕ 권2, 行狀(鄭斗 謹狀) 이정이 편찬하여 간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이정이 편찬하여 간행 20 濂洛風雅(詩) 1565 순천부사 21 朱子年譜 1565 순천부사 22 朱子實記 1566 순천부사 23 啓蒙傳疑 初刊하거나 경주부윤ㆍ 未刊으로 순천부사 추정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24 三韓詩龜鑑 1566 순천부사 안현주의 논문37) 참조 ꡔ退溪集ꡕ 권15 서 答柳仲郢書 光州 順天 光州(선조 18) 李滉, ꡔ退溪集ꡕ 권12, 書, 答柳 仁仲.

282 282 지역과 역사 38호 1. 宋ㆍ元ㆍ明代의 道統을 밝힌 言行錄類 서적 이정이 간행한 서적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먼저, 朱子의 도통인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행적과 학설을 통해 道學의 요점과 그 계승을 밝힌 言行錄 類 서적이 가장 많다. 言行錄 가운데 특히 道學者의 언행록이 주를 이루어 朱子의 도통인식이 중요하게 부각되어 조선에서 이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은 1554년(명종 9) 청주목사로 재임할 때 퇴계에게 발문을 받아 ꡔ延 平答問ꡕ을 간행하였다.38) 이후 퇴계는 1562년(명종 17)에 발문을 고쳐서 本州(淸州)의 관원에게 요청하여 몇 件을 改刊하게 하여 경주부윤으로 재 임하고 있는 이정에게 보내주었다.39) ꡔ延平答問ꡕ의 책판이 ꡔ고사촬요ꡕ 책 판목록 선조 1년판과 선조 18년판 順天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ꡔ고 사촬요ꡕ 책판목록 淸州條에는 누락이 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정이 순천부 사로 재임했던 명종 18년~명종 21년 사이에 순천에서도 개간하였을 것으 로 추정된다.40) 이 책은 朱子가 스승인 延平 李侗과 왕래하면서 학문을 논한 書札 등을 수록한 것이다. 1518년(중종 13) 11월에 金安國이 濂洛 諸儒의41) 全書 및 36) ꡔ皇明名臣言行錄(=言行錄)ꡕ과 ꡔ理學錄(=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은 합하여 간 행하였기에 한 종으로 파악하였다. 37) 안현주, 앞의 논문, 2011, 361쪽에서 고려대 만송문고와 일본국회도서관 上野 分館에 소장되어 있는 본에 嘉靖丙寅(1566)冬順天府重刊 이라는 간기가 있어 서 이정 이정이 순천부사로 재임하던 1566년에 順天府에서 간행한 것으로 이해 했으나 이정은 1566년 4월까지 재임하였고, 이정이 이 책을 간행하는 과정에 관 한 언급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정이 간행한 서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8) 李滉, ꡔ退溪集ꡕ 권43, 跋, 延平答問跋. 39) 李滉,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40) 이봉규는 ꡔ延平答問ꡕ을 이정이 1554년 청주에서, 1566년 순천에서 개각을 하 였다고 하였다(이봉규, ꡔ延平答問ꡕ 논의를 통해 본 退溪學의 지평-동아시아 유학사의 맥락과 연관하여- ꡔ동방학지ꡕ 144, 2008, 11쪽). 41) 濂은 濂溪의 周惇頤, 洛은 洛陽의 程顥ㆍ程頤 형제를 말하는 것이나, 關中의 張載, 閩中의 朱熹 등 宋代 理學者를 통틀어 濂洛 諸儒 또는 濂洛關閩의 학자 라고 한다.

283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83 다른 格言이나 至論을 수입할 때 ꡔ語孟或問ꡕㆍꡔ家禮儀節ꡕㆍꡔ傳道粹言ꡕㆍ ꡔ張子語錄ꡕㆍꡔ經學理窟ꡕㆍꡔ胡子知言ꡕㆍꡔ古表精粹ꡕ 등과 함께 이 책을 수 입하였다.42) 중종대에 김안국이 염락 제유의 글을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은 당시에 조선에서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중중대에 수입한 염락 제유의 글 가운데 명종대에 이르러 이정이 적극적으로 간행한 것은 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서적들이었다. 程子의 학문은 楊時로 전해지고 楊時의 학문은 羅從彦과 李侗을 통해 朱 子에게 전해졌기에, ꡔ延平答問ꡕ은 주자의 이학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서적이다. 퇴계는 이 책을 통해 주희가 道統과 心法을 전수하게 된 계기가 李侗에게 있었다고 그 의의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퇴계가 이정으로 하여금 이 책을 조선에서 간행하게 함으로써 조선 유학자들에게 주희의 사 상을 이해하는 데 깊이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주자학의 도통을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43) ꡔ延平答問ꡕ과 함께 이정이 간행한 대표적인 언행록류 서적으로 ꡔ伊洛淵 源錄ꡕ을 들 수 있다. 이 책이 간행되는 경위는 1562년(명종 17)에 이황이 쓴 跋文44)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이정이 ꡔ伊洛淵源錄ꡕ 을 간행할 때 ꡔ伊洛淵源續錄ꡕ과 ꡔ伊洛淵源錄新增ꡕ을 함께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정이 이 책을 간행할 때까지 ꡔ伊洛淵源續錄ꡕ과 ꡔ伊洛淵 源錄新增ꡕ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江陵 金添慶이 연경의 서점에서 구해 왔다고 한다. 이정은 1562년(명종 17)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스승인 퇴계 에게 이 책을 빌려 간행하려 하면서, 퇴계에게 책의 오류를 교정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퇴계가 교정한 것을 李楨이 ꡔ원록ꡕ과 ꡔ속록ꡕ을 통틀어 한 질 로 만들고 관찰사 南宮忱에게 부탁하여 여러 고을에 나누어 판을 새겨 간행 했다. 42) ꡔ중종실록ꡕ 권34, 13년 11월 22일. 43) 이봉규, 앞의 논문, 2008, 33~34쪽. 44) 李滉, ꡔ退溪集ꡕ 續集 권8, 伊洛淵源錄跋.

284 284 지역과 역사 38호 이때 간행한 것이 ꡔ攷事撮要ꡕ 선조 18년(1585)판 永川條에 수록되어 있 어서 이정이 간행을 주도하여 영천에서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南 原에는 ꡔ攷事撮要ꡕ 선조 1년(1567)판에 ꡔ淵源錄ꡕ이, ꡔ攷事撮要ꡕ 선조 18 년(1585)판에 ꡔ伊洛淵源後集ꡕ이 수록되어 있어서, 이정이 순천부사로 재 임 중이던 1564년에서 1568년 사이에 남원에서도 ꡔ伊洛淵源錄ꡕ을 추가로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ꡔ伊洛淵源錄ꡕ은45) 14권으로 구성되었으며, 朱子가 1173년에 편찬하여 周敦頤 이하 유학자 46인의 言行과 行蹟을 기재하고 師友授受 관계를 밝혀 道學의 연원과 그 계승을 밝힌 것이다. 朱子가 편찬한 ꡔ伊洛淵源錄ꡕ은 1515년(중종 10)에 간행하도록 전교하였기에,46) 이때 이미 간행되었을 것 으로 여겨지는데, 판본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ꡔ伊洛淵源續錄ꡕ은 明의 謝鐸이 朱子가 지은 元錄에서 빠져있는 사람들 의 기록을 보완하여 지은 것으로, ꡔ이락연원록ꡕ을 이어 朱子를 포함한 21 인의 언행과 사적을 모아 1480년에 自序를 붙여 6권으로 편찬하였다. 즉 朱子의 것을 계승하여 朱子로부터의 학문 연원을 기록한 책이다.47) 明의 楊廉은 1496년 주희의 저서에 다시 증입하여 ꡔ伊洛淵源錄新增ꡕ 14권을 만 들었다. 그리고 高貴亨이 1529년에 양렴과 사탁의 것을 합본하여 閔[福建 省]에서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에 수입되어 이정에 의해 1562년(명종 17)에 조선에서 간행되었다. 45) 이 책은 주자가 伊川과 洛陽에서 강학했던 스승 정호ㆍ정이 형제의 道統을 드러 내고 宋代 도학의 연원과 전승을 밝힌 저술이다(候外廬 외 저, 박완식 역, ꡔ송 명이학사ꡕ 2, 이론과 실천, 1995, 14쪽). 주희는 이 책에서 송대의 도학자 주돈 이[濂溪] 소옹[康節] 장재[橫渠] 정호[明道] 정이[伊川]를 비롯하여 양시[龜 山] 사량좌[上蔡] 游酢山 呂藍田 등의 程門四先生 그리고 范祖禹 呂希哲 胡 安國 등 그의 交遊 門弟들에 이르는 46인의 언행을 기록하여 伊川과 洛陽에서 강학했던 정명도 정이천 형제의 道統을 드러내고 宋代 도학의 연원과 전승을 밝혀 놓았다. 46) ꡔ중종실록ꡕ 권23, 10년 11월 4일. 47) 최경훈, 朝鮮前期 朱子 著述의 刊行에 관한 硏究 ꡔ書誌學硏究ꡕ 42, 2009, 461쪽.

285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85 퇴계가 지은 跋文을 보면, 李楨이 퇴계에게 이 책을 간행하도록 간청하였 고 퇴계가 교정뿐 아니라 전 과정을 기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퇴계는 도학의 연원과 계승을 먼저 ꡔ伊洛淵源錄ꡕ을 통해 주자의 스승 정호ㆍ정이 형제의 道統을 드러내고, 이어서 ꡔ伊洛淵源續錄ꡕ을 통해 주자 를 중심으로 朱子 이후의 宋代 도학의 연원과 전승을 밝혔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간행된 것은 결국 퇴계가 朱子를 중심으로 宋~明代 주자성리학의 도통이 확립된 모습을 조선의 학자들에게 드러내어 보여주고자 한 의도였음 을 알 수 있다. ꡔ皇明名臣言行錄ꡕ과 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은 이 책의 발문48)을 통해 1562년(명종 17)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함께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49) 퇴계의 서신을 보면, 李楨이 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의 발문을 지 어 퇴계에게 의견을 구하자 퇴계가 고칠 부분을 지적하고 있어50) 이 서적 의 간행에도 퇴계가 많은 조언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1585)판에는 慶州에 ꡔ皇明名臣言行錄ꡕ 이 수록되어 있어서 跋文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이정이 이 책을 慶州에서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慶州條에 ꡔ皇明理學名臣言 行錄ꡕ의 책판이 없지만, 이정이 이 두 책을 합본하여 간행하면서 서명을 ꡔ皇明名臣言行錄ꡕ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51) 48) 李楨, ꡔ龜巖集ꡕ 권1, 別集, 跋, 皇明理學名臣言行錄跋. 49) 안현주는 발문(皇明理學名臣言行錄跋) 가운데, 夫二錄之行 固不可以不合 而 旣出於一人之手 則又不可以離之 今者 謹依宋朝兩錄 幷刻于鷄林 而理學錄中所 載薛文淸, 吳康齋, 陳布衣, 羅修撰四人 曾入前錄 紀載重複 故亦倣邵康節, 呂 滎陽例 只書詳見於理學錄中云而去其文 從簡便也 부분을 근거로 ꡔ皇明理學 名臣言行錄ꡕ을 이정이 편찬한 서적으로 파악하였으나, 薛文淸, 吳康齋, 陳布 衣, 羅修撰 4명이 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에 수록되어 있기에 ꡔ皇明名臣言行錄ꡕ 과 합간하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ꡔ皇明名臣言行錄ꡕ에서 위 4명의 기록을 삭 제한 것일 뿐이므로, 편찬한 서적으로 보기보다는 두 책을 합하여 간행한 것이 라고 파악해야 한다(안현주, 앞의 논문, 2011, 345쪽). 50) 李滉,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51) 그 刊本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BA ) ꡔ皇明名臣言行錄ꡕ(ꡔ皇明理 學名臣言行錄ꡕ으로 구성된 9권 2책, ꡔ皇明名臣言行錄ꡕ 2권 1책, 합본 전체 11

286 286 지역과 역사 38호 ꡔ皇明名臣錄(=皇明名臣言行錄)ꡕ은 明의 楊廉(1447~1527)이 1498년 에 ꡔ송명신언행록ꡕ을 계승하여 明朝 名臣 55명의 行蹟과 言行을 기술한 책 이다. 양렴은 이후 1523년에 道學 이라는 기준으로 明朝의 理學名臣 15명 을 선별하여 그들의 생애와 행적, 언행을 기록하여 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 을 편찬하였다. 楊廉이 朱子가 宋朝의 名臣에 대해 편찬한 ꡔ송명신언행록ꡕ을 본떠 明朝 의 名臣에 대해 편찬한 이 두 서적은 朱子의 역사인식에 따른 名臣과 道學 者의 선정이 明朝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이 1562년 (명종 17)에 조선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16세기 중엽에는 言行錄 가운 데 특히 道學者의 언행록을 통한 朱子의 도통인식이 중요하게 부각되어 조 선에서 이해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정이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데에는 퇴계가 1651년(명종 16)부터 ꡔ宋季 元明理學通錄ꡕ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1564년(명종 19)에 편찬을 완료한 것 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퇴계는 불교와 도교 혹은 사공학파와의 경쟁 속 에서 도학을 세워나갔던 남송말 주자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퇴계는 중종과 명종 연간에 불교와 양명학의 도전 속에서 새롭게 성리학을 구성하여 도학 을 찾으려 했다.52) 그것이 ꡔ宋季元明理學通錄ꡕ53)의 편찬으로 나타났고, 이정이 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을 간행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ꡔ二程粹言(=二程先生傳道粹言)ꡕ은 송나라 楊時가 二程 선생의 논설에 권 3책)이 현전하고 있다. 52) 정재훈, 앞의 논문, 2006, 33쪽. 金恒洙, 16세기 士林의 性理學 理解-書籍의 刊行ㆍ編纂을 중심으로- ꡔ한국사론ꡕ 7, 1981, 173쪽. 53) 洪元植, 退溪 李滉의 ꡔ宋季元明理學通錄ꡕ에 대한 硏究-ꡔ宋元學案ꡕ과 비교를 중심으로- ꡔ동아인문학ꡕ 14, ꡔ宋季元明理學通錄ꡕ의 구성은 本集과 外 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본집은 朱子와 朱門諸子 및 元과 이후의 明初의 蔡 虛齋, 芻立齋 등에 이르는 주자학파 儒者 516명의 行狀, 傳記, 語錄 등을 간명 하게 집록하여 성리학의 도통을 정리했다. 외집은 陸九淵 등 비주자학자들을 실 었는데, 퇴계가 완성하지 못한 채 죽자 趙穆 등 그의 제자들이 미완성의 원고를 앞의 것과 合本하여 선조 8년(1575)에 安東에서 간행하였다.

287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87 서 선정한 精粹作을 南軒 張栻이 卷次로 정리하여 제명한 二程 선생의 語錄 이다. 1560년(명종 15)에 李楨, 尹玆, 宋寅 등이 퇴계에게 책을 내놓으면 서 간행을 위촉하였다. 그러나 刓缺이 많아서 퇴계가 이정과 더불어 교정한 다음, 다른 책과 함께 감사 南宮忱에게 간행을 청탁하였다. 그것을 인근 郡 과 더불어 分刻하여 1562년(명종 17)에 마쳤음을 퇴계가 지은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다.54)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 陜川條에 ꡔ傳導粹言ꡕ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던 1562년에 합천과 인근 군에서 分刻한 책판을 합천에서 보관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ꡔ程氏遺書ꡕ와 ꡔ程氏外傳ꡕ은 정호와 정이 형제의 語錄集이다. 二程의 전 저작물을 모은 ꡔ二程全書ꡕ 가운데 二程의 제자들이 기록한 이정의 語錄으 로 후에 주희가 종합하여 편집한 것이 ꡔ程氏遺書ꡕ이고, 역시 二程의 문인들 이 기록한 語錄으로 주희가 편집한 것이지만 조잡하게 모았거나 혹은 그 출 처를 살필 수 없는 것 은 ꡔ程氏外傳ꡕ으로 구성하였다고 한다.55) 이정이 ꡔ二 程全書ꡕ 가운데 이 두 서적만을 간행한 것 또한 16세기에 인물의 행적과 학 설을 통해 道學의 요점과 그 계승을 밝히려고 편찬한 言行錄類 서적이 중요 하게 여겨진 사정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면 서 南軒 張栻이 정리한 二程 선생의 語錄인 ꡔ二程粹言(=二程先生傳道粹 言)ꡕ을 간행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ꡔ程氏遺書ꡕ와 ꡔ程氏外傳ꡕ의 간행과정은 1564년(명종 19) 퇴계가 순천 부사로 재임 중이던 이정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편지 에, ꡔ居業錄ꡕㆍꡔ魯齋論(王柏의 天地萬物論)ꡕㆍꡔ(程氏)遺書分類ꡕㆍꡔ程 氏外書ꡕ 같은 것들은 모두 내게 없는 것이니 만일 인쇄해서 부쳐 준다면 그 보다 더 큰 행운이 없겠다 고 하였다.56)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 順天條에 ꡔ居業錄ꡕㆍꡔ魯齋論(王柏의 天地萬物論)ꡕㆍꡔ程氏遺書ꡕ(=程氏 54) 李滉, ꡔ退溪集ꡕ 권43, 跋, 傳道粹言跋. 千嘉靖庚申歲 吾友泗川李君剛而尹玆 東都 礪城尉宋公寅出是本 囑以刊行 顧其爲書頗多刓缺 李君不辱與滉往復校訂 乃竝與他書而請于監司南宮公忱 令與旁郡分刻焉 55)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현선 ꡔ二程全書ꡕ 해제 참조. 56) 李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288 288 지역과 역사 38호 遺書分類ㆍ程氏外書를 함께 지칭한 것으로 생각됨) 네 종의 서적이 모두 수록되어 있어서, 이정이 순천부사 재임 중에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57) ꡔ朱子實記ꡕ는 1565(명종 20)에 李湛58)이 퇴계에게 이 책을 간행하고 싶다고 하자, 퇴계는 順天府使 李楨에게 물어보고 도모해야겠다고 하였 다.59) 이후 1년 뒤에 柳希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李湛에게 빌려본 적이 있는데 요사이 光州에서 간행된 것이 그 판본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 였다.60) 이런 정황을 보면 퇴계의 주선으로 李湛이 갖고 있던 ꡔ朱子實記ꡕ 를 저본으로 당시 順天府使로 있던 李楨이 光州에서 1566년(명종 21)에 간 행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61)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에 光 州條에 수록되어 있는 ꡔ朱子實記ꡕ는 이정이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간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ꡔ朱子實記ꡕ는 明의 戴銑(미상~1507년)이 ꡔ朱子年譜ꡕ에 의거하여 朱熹 와 관계가 깊은 문헌을 증보한 책이다. ꡔ朱子實記ꡕ 12권 중 순수하게 연보 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3권이고, 다른 9권은 道統, 世系의 源流, 行狀, 本 傳, 宅廟祠院의 記, 門人錄, 褒典, 讚述, 紀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62) ꡔ朱子年譜ꡕ는 明의 葉公回가 孫叔拱ㆍ程思溫ㆍ葉華 등과 더불어 朱子 에 관한 ꡔ年譜ꡕ만이 아니라 ꡔ行狀ꡕ 및 주자에 관계된 글을 모은 책이다.63) 57) 안현주는 이 두 서적을 옥산서원 소장본과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을 통해 순천 에서 간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안현주, 앞의 논문, 2011, 359~360쪽). 58) 李仲久의 본명이다. 이 논문에 李湛이라는 인물이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명은 李 楨의 아버지고 또 한 명은 퇴계와 편지를 주고받은 李仲久의 본명이다. 두 사람 은 同名異人이다. 59) 李滉, ꡔ退溪集ꡕ 권11, 書, 答李仲久. 60) 李滉, ꡔ退溪集ꡕ 권12, 書, 答柳仁仲. 61)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는 성암고서박물관자료실(성암2-568)에 소장한 목판본 卷末識記에 隆慶辛未(1571)春李平叔咸亨以會葬自湖南來至溪上其歸也 請印是書付之半次其秋平叔足其所不足印寄于寒齋芙蓉山人喜而識之 라고 쓰 여 있는데, 이것이 1566년에 순천부사 이정이 광주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62)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남호의 ꡔ朱子實記ꡕ 해제 참조. 63)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남호의 ꡔ朱子年譜ꡕ 해제 참조.

289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89 퇴계가 1566년(명종 21) 柳希春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정이 주도하여 梁 山에서 이 책을 간행하고, 퇴계가 교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64)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梁山條에는 이 책판이 누락되었다.65) ꡔ朱子實記ꡕ는 ꡔ朱子年譜ꡕ 와 함께 주자 이후 주자가 어떻게 받들어졌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송대 도통의 계보에서 주자의 위상을 볼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정은 ꡔ延平答問ꡕ의 간행으로 주자가 道統과 心法을 전수하게 된 계기 가 李侗에게 있었음을 밝히고, 조선에서 주자학의 도통을 확립하는 시발점 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ꡔ伊洛淵源錄ꡕ을 간행하여 宋代 道統의 계보에서 주 자의 스승 정호ㆍ정이 형제의 위상을 드러내고, ꡔ伊洛淵源續錄ꡕ을 통해 주 자를 중심으로 朱子 이후의 宋代 도학의 연원과 전승을 밝혔다. 이어서 ꡔ皇 明名臣言行錄ꡕㆍꡔ皇明理學名臣言行錄ꡕ을 간행하여 朱子의 역사인식에 따 른 名臣과 道學者의 선정이 明朝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ꡔ二程粹言(=二程先生傳道粹言)ꡕㆍꡔ程氏遺書ꡕㆍꡔ程氏外傳ꡕㆍꡔ朱子實記ꡕ ㆍꡔ朱子年譜ꡕ를 간행하여 송대 도통의 계보에서 주자의 스승인 二程과 朱 子의 위상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2. 道學風의 詩文類 서적 이정은 송대 도학자들의 문장과 행실 속에서 道學의 면모를 재조명하고 자 한 도학자들의 詩文類 서적 또한 많이 간행하였다. 대표적인 도학풍의 시문류 서적으로 이정이 직접 편찬한 ꡔ性理遺編ꡕ과 ꡔ性理遺編補錄ꡕ을 들 64) 李滉, ꡔ退溪集ꡕ 권2, 書, 答柳仁仲. 年譜增廣之語 乃傳者誤也 只被李剛而將刊 是書於梁山 要滉校正一二過而已 李滉, ꡔ退溪集ꡕ 續集 권4, 書, 答李剛而(1565년). 頃者 義興人還 拜領辱答 審悉諭意 恨無報便 玆復伻人遠來 惠書及別紙諸諭 謹具奉承 新舊年譜二件 傳 疑一冊 亦已見到 欣荷欣荷 65)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 의하면 고려대 도서관(만송貴 )에 1566년 에 密陽府使李先生玉應印贈 이란 裏紙記가 있어서 이정이 양산에서 간행한 판 본을 밀양부사가 인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290 290 지역과 역사 38호 수 있다. ꡔ性理遺編ꡕ은 남송 때 熊節이 찬한 ꡔ性理群書ꡕ와 명나라 永樂帝 勅撰인 ꡔ性理大全ꡕ 중에서 주희, 장식, 정호, 정이, 진덕수, 주돈이, 장재, 소옹, 채침 등 송대 도학자들의 贊ㆍ銘ㆍ箴ㆍ詩ㆍ序ㆍ記ㆍ文ㆍ說ㆍ賦ㆍ 論ㆍ行實 등 시문을 비롯하여 각종 文體 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66) 그리고 周敦頤의 養心亭說과 朱子의 元享利貞說, 盡心說, 仁說과 仁說圖,67) 延平 의 行狀과 附錄으로 南軒說 등을 遺編의 補錄으로 엮으면서 跋文을 썼다. 이정이 편찬한 ꡔ性理遺編ꡕ은 ꡔ性理大全ꡕ을 요약하여 정리한 절요서라고 할 수 있다. ꡔ性理大全ꡕ은 16세기 중엽에 성리학의 이해가 ꡔ朱子大全ꡕ과 ꡔ朱子語類ꡕ 등 朱子의 저서를 학습하면서 주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이 전까지 조선전기 성리학 이해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책이다. ꡔ性理大全ꡕ은 金正國이 처음으로 중종 19년(1524)에 ꡔ性理節要ꡕ를 편찬하여 이해가 더 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68) 이정은 金正國이 ꡔ性理節要ꡕ에서 생략했던 詩文 부분만을 ꡔ性理群書ꡕ를 참조하여 ꡔ성리대전ꡕ보다 더 자세하게 실었다. 이정은 ꡔ성리대전ꡕ에는 축 약해서 실었던 ꡔ성리군서ꡕ에 수록된 詩文을 오히려 자세하게 싣고, ꡔ성리 대전ꡕ에 생략했던 行實을 추가하였다. 이것은 이정이 중종대 초반에 김정국 이 ꡔ성리절요ꡕ를 편찬하면서 당시의 道學의 분위기를 반영해 생략해버린 ꡔ성리대전ꡕ의 詩文 부분을 따로 떼어서 자세하게 편집함으로써 송대 도학 자들의 문장과 행실 속에서 도학의 면모를 재조명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 해할 수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ꡔ濂洛風雅ꡕ와 비슷하다. 한마디로 도학풍 66) 李楨, ꡔ龜巖集ꡕ 권1, 別集, 跋, 性理遺編補錄跋. 嘗讀性理羣書及大全書 竊有 拳拳欲學之心 而魯莽鈍劣 苦無記性 謹拈出兩書中贊, 銘, 箴, 詩, 序, 記, 文, 說, 賦, 論, 行實諸篇 彙爲一帙 蓋所以備遺忘而寓警省也 手之而不釋 口之而不 輟 咏歎淫泆 時或有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 而自不能已也 67)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126쪽에는 인설과 인설도가 이정선생의 저작 이라고 하였으나 본고에서는 주희의 저작이라 밝힌 최영성의 견해를 따른다(최 영성, 앞의 논문, 2005, 149쪽). 68) 우정임, 조선전기 ꡔ性理大全ꡕ의 이해과정 節要書의 編纂ㆍ刊行을 중심으로 ꡔ지역과 역사ꡕ 31, 2012에서 성리대전 절요서의 간행과 내용에 대해 참고할 수 있다.

291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91 의 수준 있는 문학작품을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69) 이정이 편찬한 ꡔ性理遺編ꡕ에서는 ꡔ性理群書ꡕ에는 실렸으나 ꡔ성리대전ꡕ 에서는 생략했던 行實 을 추가한 것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주돈이, 정호, 정 이, 장재, 소옹, 司馬光, 주희의 행실을 알 수 있는 行錄, 行狀, 墓誌銘, 年 譜 등을 실었다. 이것은 당시에 도통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인물의 행적과 학설을 통해 道學의 요점과 그 계승을 밝히려 한 도학자의 言行錄類 서적이 조선에서 수입되어 이해되고 있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하겠 다.70) 뿐만 아니라 補錄으로 周敦頤와 朱子, 張栻의 핵심 성리학설과 주자 의 스승인 延平 李侗의 行狀을 모아 엮음으로써, 그가 詩文을 중심으로 ꡔ性 理大全ꡕ을 절요한 것을 보완하였다. ꡔ性理遺編ꡕ은 李楨이 53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에 편찬한 책으로, 이정이 작성한 ꡔ性理遺編補錄ꡕ의 跋文71)이 있어 출간의 경위를 알 수 있 다. 이정의 발문에 따르면, 그가 순천부사로 재임할 때에 ꡔ性理遺編ꡕ과 ꡔ性 理遺編補錄ꡕ을 지었다. 그리고 전라도 관찰사 南宮沈의 재가를 받아 여러 고을에 각판에 드는 비용을 분담하게 하여 1564(명종 19) 겨울에 간행하였 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판이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에 전 라도 順天에 책판이 수록되어 있어서 順天에서 간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 다.72) 이정이 편찬한 ꡔ性理遺編ꡕ은 ꡔ性理大全ꡕ의 詩文類를 중심으로 편집하면 서 ꡔ性理群書ꡕ을 참고하여 내용을 보충하여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북송 4 69) 최영성, 앞의 논문, 2005, 174쪽. 70) 16세기에 조선에서 주자성리학의 도통이 확립되는 과정을 당시에 활발하게 수 입ㆍ간행되고 조선에서도 편찬된 언행록 류 서적의 내용을 검토한 우정임의 논 문을 참고할 수 있다(우정임, 言行錄 類 서적의 수입과 이해과정을 통해 본 16 세기 道統 정립과정 연구 ꡔ역사와 세계ꡕ 47, 2015). 71) 李楨, ꡔ龜巖集ꡕ 권1, 別集, 跋, 性理遺編補錄跋. 72)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 따르면, 이때 간행한 판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규장각, 6291), 10行15字로 판각되었고 1冊으로 구성되었다. 규장각에 소장한 ꡔ性理遺編ꡕ에는 ꡔ性理遺編補錄ꡕ을 포함하여 한 책으로 만들 어진 것으로 볼 때, 처음 간행할 때 원록과 보록을 합간하였음을 알 수 있다.

292 292 지역과 역사 38호 현(주돈이ㆍ장재ㆍ정호ㆍ정이)으로부터 남송의 주자로 이어지는 송조 성 리학의 도통을 보여주는 학자들의 성리학풍의 시문류의 글을 수록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行實編을 추가하여 송대 성리학자의 行錄, 行狀, 墓誌銘, 年 譜 등을 실었는데, 행실편은 이정이 인물의 행적과 언행을 통해 道學의 요 점과 그 계승을 밝히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에 조선에서 성리학의 도통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도학자의 言行錄이 강조되던 분위기에 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책은 16세기 중반에 조선에서 성리학풍 을 진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북송에서 주자에 이르기까지 송조 성리학자의 도통을 보여주는 역할도 하였다. ꡔ(伊川)擊壤集ꡕ은 宋代 성리학자 邵雍(1011~1077)이 스스로 펴낸 시 집으로 그의 작품에는 哲學詩가 많은데 ꡔ伊川擊壤集ꡕ이라고도 부른다. 이 정이 이 책을 간행한 것은 그가 ꡔ性理遺編ꡕ을 간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ꡔ(伊川)擊壤集ꡕ은 鄭斗가 쓴 이정의 행장에 이정이 간행한 서적으로 소개하였으나, 그 구체적인 간행 사정에 대해 ꡔ退溪集ꡕ과 ꡔ龜巖 集ꡕ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년 淸州條 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李楨이 청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에 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ꡔ朱子詩集ꡕ은 이정이 청주목사로 재임한 1553년(명종 8)에 간행한 것으 로 생각된다. 이 해에 퇴계가 이정에게 새로 간행한 晦菴의 여러 시를 보내 준 것에 감사 편지를 보내는데,73) 여기에서 퇴계는 感興詩의 蔡註(覺軒 蔡 模 註解)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으며, 棹歌의 註解(懼齋 陳普가 註한 棹歌 註)는 근간에 처음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73) 李滉,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蒙寄示新刊晦菴諸詩 極荷愛厚 不敢忘 感 興詩蔡註 曾所未覩 棹歌註解 近方聞有之 渴欲得見 今合爲一冊 忽墮塵几 如見 古人接緖言於千載之上 感幸尤深 滉前所以欲添入雲谷城南諸詠者 以雲谷只取 十二首 而遺二十六詠 爲未備 又濯淸乃城南二十詠之一 取一而遺十九亦可惜 故 敢白而未及於事爲 可恨耳 恐君欲見其詩 故錄呈 幸領覽何如 滉比來殊無意謂 惟多見所未見書 抱此還山 足以遣老 豈非孤陋暮景之大幸 但恨未得深契如公者 日相從而歌詠切磋耳 未涯會奉 惟爲時千萬加重 不宣

293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93 주자의 여러 시를 주해한 시집임 알 수 있다. 이때 간행한 ꡔ朱子詩集ꡕ은 규 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하고 있는 ꡔ文公朱先生感興詩ꡕ와 같은 책으로 보 인다.74) ꡔ朱子詩集ꡕ은 1553년~1555년에 걸쳐 여러 차례 청주에서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淸州條에는 오히려 누락되어 있고, 오히려 慶州條에 실려 있다. 沈慶昊의 연구에 따르면, 주자의 감흥시는 조 선시대에 세종연간에 更子字로 간행된 채모 주의 ꡔ齋居感興註解ꡕ가 있다. 그 뒤 1553년 청주목사 이정이 경자자본을 저본으로 齋居感興을 간행하면 서 주자의 다른 여러 시들과 元의 陳普의 武夷櫂歌註를 합본하여 목판으로 인쇄하였고, 이듬해에는 역시 이정이 퇴계 이황의 가르침에 따라 이미 간행 한 판본의 일부 편차를 개정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다시 그 다음해에 는 武夷櫂歌의 申靈川 手書을 저본으로 그 부분을 改正하여 신판을 간행하 였다. 이정이 청주에서 개간한 세 종류의 목판본은 文公朱先生感興詩 라는 권두제로 되어 있다.75) 조선조의 도학파 문인들은 스스로 주자의 시를 읽 어 간이하고 성실한 마음을 함양시키고자 하였기에,76) 이정이 주자의 시집 을 간행하려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이정이 간행한 주자의 시집은 16세기에 도학파 시인에게 지침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정이 ꡔ性理遺編ꡕ을 간행한 것 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ꡔ濂洛風雅ꡕ는 이정이 1565년(명종 20)에 印本을 퇴계에게 보냈는데, 이 에 퇴계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인데 얻어서 매우 다행이라고 답장을 보내 고 있다.77) 이 책은 ꡔ眉巖日記ꡕ에서도 1570년(선조 3)에 순천부사 金選이 74) 그러나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 따르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淸州에 서 간행된 것으로 목판본 두 종이 전하는데, 1553년에 金忠甲이 쓴 발문과 1554년에 李楨이 쓴 발문이 함께 실린 목판본( J868)과 1555에 李楨이 쓴 발문이 실린 목판본( C346m)이 그것이다. 75) 沈慶昊, 朱子 ꡔ齋居感興詩ꡕ와 ꡔ武夷櫂歌ꡕ의 조선판본 ꡔ서지학보ꡕ 14, 1994, 6쪽. 76) 沈慶昊, 위의 논문, 4쪽. 77) 李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294 294 지역과 역사 38호 인쇄본을 유희춘에게 보내는 기록이 있고,78)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 년판 順天條에도 ꡔ濂洛風雅詩ꡕ가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1565년 에 李楨이 順天府使 재임 중에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79) ꡔ濂洛風雅ꡕ는 元의 金履祥이 濂溪의 周敦頤와 洛陽의 程顥ㆍ程頤 학파 에 속하는 학자 48인의 시를 國風과 雅에 준하여 모아 역은 것으로, 송대 성리학자들의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송대 理學詩를 전문적으로 편 집, 서술한 책이지만, 또한 그들의 宗法性的인 도통관이 뚜렷이 반영된 책 이다.80) 이정이 주자의 시집과 ꡔ濂洛風雅ꡕㆍꡔ(伊川)擊壤集ꡕ을 간행한 것은 1564 년에 ꡔ性理遺編ꡕ을 편찬하여 송대 도학자들의 문장과 행실 속에서 도학의 면모를 재조명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明代 朱子學者의 言行錄類 서적 이정은 퇴계가 명대의 순정성리학자로 평가하는 賀欽ㆍ薛瑄ㆍ胡居仁ㆍ 潘府ㆍ楊廉ㆍ胡謐 등 明儒의 저술을 간행하여 명대 朱子學의 동향의 일단 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주자성리학자의 계보를 명대까지 이어 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해당하는 서적으로, ꡔ(薛文淸)讀書錄ꡕㆍꡔ醫無 閭先生集ꡕㆍꡔ(胡敬齋)居業錄ꡕ 등을 들 수 있다. ꡔ(薛文淸)讀書錄ꡕ은 躬行을 중히 여기는 명의 程朱學者인 薛瑄이 독서 하고 사색한 것을 모아 엮은 讀書錄인데, 朱子의 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책이다.81) 퇴계 등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당시 명나라에 양명학이 성하고 성리학이 위축되는 상황을 우려하였는데, 薛瑄은 순정성리학자로 많이 평 78) 柳希春, ꡔ眉巖日記ꡕ 庚午(1570년) 12월 29일. 79) 이 책은 1565년 순천부에서 간행했음을 기록한 刊記가 실린 간본이 계명대 동 산도서관(812.1-김이상여), 조선대 중앙도서관( ㄱ719ㅇ), 영남대 도 서관(古南821.4-염락풍ㅁ) 등에 소장되어 있음을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서 확인할 수 있다. 80) 候外廬 외 저, 박완식 역, ꡔ송명이학사ꡕ 2, 이론과 실천, ) 李東熙, 明初朱子學과 朝鮮前期의 朱子學 ꡔ東西文化ꡕ 20, 1988, 8쪽.

295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95 가한 인물이다. ꡔ(薛文淸)讀書錄ꡕ은 1553년(명종 8)에 퇴계가 이정에게 이 책의 刊本이 貴府에 있다는 것을 洪應吉에게서 들었다며 간본을 요청하자, 이정이 보내 왔다. 이에 퇴계는 ꡔ困知錄ꡕ이나 ꡔ傳習錄ꡕ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유 익한 책이라고 하면서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82) 퇴계는 명대 양명학자의 저서와 비교하면서 순정성리학자 薛瑄의 ꡔ(薛文淸)讀書錄ꡕ을 중요하게 여 겼음을 알 수 있다. 1553년은 이정이 淸州牧使로 재임하고 있을 때이므로 이 책은 청주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淸州條에서 누락된 것을 알 수 있다. ꡔ醫(無)閭先生集ꡕ은 명나라 성리학자 賀欽(1437~1510)의 言行錄과 詩文을 엮은 것이다. 이 문집은 후학 鄭曉가 參定하고 唐順之가 重校하여 嘉靖年間에 간행한 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다. 賀欽은 薛瑄과 함께 명 대의 순정성리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었으며, 이정이 이 책을 간행한 것은 ꡔ(薛文淸)讀書錄ꡕ을 간행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ꡔ퇴계집ꡕ에는 이정이 ꡔ醫(無)閭先生集ꡕ의 발문을 써서 퇴계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퇴계가 간결하고 온당하여 전할 만한 것이라고 한 답장을 볼 수 있다.83) 이를 통해 이정이 서적을 간행하는 과정에 퇴계의 조언을 많이 받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 晋州條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진주에서 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ꡔ孔子通紀ꡕ는 명대의 학자관료 潘府가 편찬한 공자에 대한 기록물이다. 이 책은 弘治ㆍ嘉靖 연간 명대 주자학의 동향의 일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544년(중종 39)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묘 배향 인물이 다르다는 것을 논하면서, 이 책에는 諸賢들을 從祀한 사적을 자세하게 논했 으므로 절실히 필요하다며 중국에서 무역하거나 간행하기를 청하였다.84) 그렇다면 이 책은 중종대에 문묘배향 인물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면서 중요 82) 李滉,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83) 李滉,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84) ꡔ중종실록ꡕ 권102, 39년 4월 4일.

296 296 지역과 역사 38호 하게 참고했던 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16세기 도통 확립과정에서 문묘에 배향할 인물을 선정하는 데 기준이 되었던 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ꡔ孔子通紀ꡕ는 간행과정을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정이 쓴 ꡔ醫閭文集ꡕ 의 발문에서 경주부윤 재임 시에 ꡔ孔子通紀ꡕ를 간행하였다고 언급하고 있 으며, 또한 그 책판이 ꡔ고사촬요ꡕ 선조 18년판 경상도 義城條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재임한 1563년(명종 18)경 경 상도 관찰사의 관할 지역인 의성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85) ꡔ(胡敬齋)居業錄ꡕ은 明代의 주자학자인 敬齋 胡居仁(1434~1484)의 講學語錄이다. 이 책은 敬齋의 문인이자 사위였던 余祐에 의해 1504년(弘 治 15년)에 編錄 刊行되었다. 호거인은 인품이 단정하고 근실하며 학문이 독실한 것이 薛瑄과 비슷하며 이 책은 설선의 ꡔ讀書錄ꡕ과 나란히 道學의 正 宗이 되는 책으로 후대의 주자학자들에게 크게 존중되었다고 한다.86) ꡔ(胡 敬齋)居業錄ꡕ은 퇴계가 이정에게 ꡔ程氏遺書ꡕ 인쇄를 부탁할 때 함께 부탁 한 것으로 보아, 이정이 순천부사로 재임할 때인 1564년(명종 19)경에 간 행한 것으로 생각된다.87) 4. 朝鮮의 道統을 밝힌 言行錄類 서적 이정이 편찬하여 간행한 서적으로 주목되는 서적 가운데 하나가 ꡔ景賢錄ꡕ 이다. 이 책은 寒暄堂 金宏弼(1454~1504)과 梅溪 曺偉(1454~1503)의 85) 한국고전적목록종합시스템 에 따르면 성암고서박물관자료실에 소장한 목판본 (성암2-563)에는 1562년 이정이 쓴 발문과 1563년에 許曄의 刊記가 수록되어 있어 정확하게는 1563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86)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연승 ꡔ胡敬齋先生居業錄ꡕ 해제, 노관범 ꡔ居業錄要語ꡕ 해제 참조. 87)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을 보면, 1507년 明의 張吉이 쓴 서문과 1564년에 李楨이 쓴 발문을 실은 ꡔ居業錄要語ꡕ(胡居仁의 同鄕의 학자인 張吉이 요약한 것)을 계명대 동산도서관( 호거인ㄱ), 전남대 도서관(3A2-거63ㅎ, 3A2 거63ㅎ)에 소장하고 있기에 이정이 순천에서 간행한 것은 ꡔ居業錄要語ꡕ 로 생각된다.

297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97 사적88)을 모아 李楨이 편찬하여 간행한 책이다. 1563년에 順天府使(1563 년 11월~1566년 4월)로 부임한 李楨은 먼저, 한훤당과 매계가 귀양살이 할 때 놀며 쉬던 곳인 臨淸臺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1564년에 그 옛 터에 대를 수축하고 堂을 만들어 景賢堂이라 하여 한훤 선생의 도를 추모하고, 閣을 계단 아래에 세워 매계의 글을 비석에 새겼다. 그리고 1565년에는 경 현당의 오른쪽에 玉川精舍를 세웠다. 이정이 옥천정사를 세우는 과정이 기 대승이 쓴 建院文 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89) 그리고 한훤당 선생의 家範과 行狀을 얻어서 ꡔ景賢錄ꡕ을 처음 편찬하였 으나, 이후 이황의 의견에 따라 대폭 수정하였다. 그 두 사람이 편찬한 내 용, 즉 龜巖定本 과 退溪定本 을 합쳐 1565년 순천에서 간행한 책이 順天 刊本 ꡔ景賢錄ꡕ이다.90) 1565년(명종 20년) 12월, 이정은 퇴계정본 과 구 암정본 의 일부분을 섞어 새로운 ꡔ경현록ꡕ을 간행하였다. 순천간본 ꡔ경현 록ꡕ은, 김굉필에 관한 내용은 퇴계정본 을 조위에 관한 내용은 구암정본 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되었다. ꡔ경현록ꡕ 上卷은 이황이 보낸 원고, 즉 퇴계정 본 을 그 내용뿐만 아니라 글씨까지 그대로 版刻하였다. 이황은 이정이 보내 온 구암정본 의 모든 내용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 상권에 해당하 는 내용만 다시 편찬하여 순천으로 보냈다. 퇴계정본 은 ꡔ경현록ꡕ의 상권에 해당하는 내용만 담고 있다. 김훈식은 퇴계정본이 구암정본과 가장 크게 다 른 점이 이정이 수록했던 家範 을 소략하게 넣은 것으로 이해했다. 그 이유 는 김굉필을 조위와 같은 순천의 鄕先生의 차원을 넘는 존재로 부각시키고 도학자 로 추숭하는 데에 가범 이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 고 이해했다.91) 결국, 1565년(명종 20)에 이정이 간행한 순천간본 의 상권 88) 寒暄堂은 1498년(燕山君 4) 戊午史禍 때 金宗直 일파로 몰려 熙川에 유배되었 다가 順天으로 移配되었다가 사사되었다. 梅溪도 戊午史禍 때 金宗直의 詩稿를 修撰하였다는 罪名으로 義州에 流配되었다가 順天에 移配되어 그곳에서 죽었 다. 89)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2002, 136~137쪽. 90) 김훈식, 順天刊本 ꡔ景賢錄ꡕ의 편찬과 내용 ꡔ역사와 경계ꡕ 86, ) 김훈식, 위의 논문, 16~20쪽(김훈식은 김굉필이 지은 家範에는 家治를 보여주

298 298 지역과 역사 38호 은 퇴계정본 으로, 하권은 구암정본 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진 셈이다.92) ꡔ景賢錄ꡕ의 편찬과정을 보면, 1565년(명종 20)에 順天府使로 재임 중에 이정은 寒喧堂 金宏弼의 家範ㆍ行狀ㆍ議得 등을 엮어 草本을 인쇄하여 퇴 계에게 보내 문의하였다. 이것을 龜巖定本 이라 하겠다. 퇴계는 이것을 보 고 내용이 소략하다며 한훤당의 손자인 義興縣監 金立과 외증손인 鄭崑壽 가 가지고 있던 한훤당의 자료를 더 구하여 다시 한 본을 써서 보낼 테니 인 쇄를 미루라고 하였다.93) 그리고 이어서 보낸 편지에서는 그간에 구한 자 료를 바탕으로 편찬을 하는 과정에서 이정이 간행에 넣은 家範 을 빼는 것 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94) 이후 퇴계가 1566년(명종 21년)에 鄭崑壽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경현록 의 간행과정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 전에 인쇄해 온 景賢錄(이정이 처음 간행해서 퇴계에게 보낸 구암정본 으 로 판단됨) 은 너무 소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한훤당의 외증손 정곤수)이 기록한 것에다 世系ㆍ事實ㆍ詩文 및 義興(의흥현감 金立)이 보낸 것과 이곳에 서 일찍이 얻어 두었던 것을 서로 참작하여 합해 엮었습니다. 또 성균관에서 종 사를 요청한 상소문은 번거로운 것 같아 부득이 조금 재량을 가하여 책 끝에 싣 고 順天(순천부사 李剛而)에게 부쳐 보내 다시 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근래 龜巖의 편지를 받아 보니 거의 일을 마쳤다고 하니 머지않아 배포될 것으로 생 각합니다. 이제는 얻은 것이 있더라도 추가로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니 한스러 워한들 어찌하겠습니까?95) 위 기록을 보면, 이정이 간행하여 퇴계에게 보낸 것(龜巖定本) 이외에 정 곤수가 보낸 기록 및 世系ㆍ詩文ㆍ事實과 金立이 보낸 기록과 퇴계가 모아 92) 93) 94) 95) 는 내용에 家禮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노비 사역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었고, 이 것은 퇴계가 도학자로서 김굉필상을 정립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최소 한의 정보만 남기고 이 부분을 생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김훈식, 위의 논문, 6~8쪽. 李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李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李滉, ꡔ退溪集ꡕ 권34, 書, 答鄭汝仁(崐壽).

299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299 둔 내용을 참작하여 퇴계가 새로 엮어서(退溪定本) 이정에게 보내어 간행하 게 하였다.96) 그런데 1566년에는 이미 간행을 마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ꡔ 景賢錄ꡕ은 1565년에 이미 간행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완성된 順天刊本 ꡔ景賢錄ꡕ이며,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 順天條에 수 록된 ꡔ景賢錄ꡕ이라 하겠다. 이정이 ꡔ景賢錄ꡕ을 편찬하여 간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16 세기 중반에 조선에서 주자성리학의 도통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김굉필을 순 천의 鄕先生의 차원을 넘는 존재로 부각시키고 도학자 로 추숭하는 퇴계의 의도가 잘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정은 ꡔ景賢錄ꡕ을 편찬함으로 써 16세기에 조선의 주자성리학자의 도통에서 김굉필의 위치를 굳건히 하 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5. 기타 이정이 퇴계와 긴밀하게 의논하여 간행한 서적들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학풍의 시문류 서적과 도통을 밝힌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도 이정이 독자적으로 간행한 것으로 보이는 서적으로 ꡔ(丘瓊山)家禮儀節ꡕ, ꡔ(范太史)唐鑑ꡕ, ꡔ學庸章句指南ꡕ, ꡔ天地萬物論(=魯齋論)ꡕ을 더 들 수 있 다. 이들 서적은 이정이 여러 서적을 간행하면서 간행의 필요를 느끼고 간 행하였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이들 서적의 특징을 언급하기에는 일관된 서적 의 성격을 찾기 곤란하여 간단한 간행 사항을 언급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ꡔ(丘瓊山)家禮儀節ꡕ은 명대의 유학자 丘濬이 편집한 책으로 ꡔ朱子家禮ꡕ 에 儀節을 모아 주석을 붙인 책이다. ꡔ文公家禮儀節ꡕ이라는 서명으로 전한 다. 이 책에는 ꡔ朱子家禮ꡕ를 시행하는 절차와 그 때 착용하는 복장에 대한 그림 등이 첨부되어 있다. 鄭斗가 지은 이정의 行狀에 李楨이 간행한 책이 라고 소개하고는 있지만, ꡔ퇴계집ꡕ과 ꡔ구암집ꡕ에서 구체적인 간행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 의하면, 이 책은 고 96) 김훈식, 앞의 논문, 2013, 16~20쪽.

300 300 지역과 역사 38호 려대학교 도서관(만송貴 , 4)에 1555년 金忠甲의 跋文과 淸州에 서 간행한 刊記가 적혀 있어서 이정이 청주목사로 재임하던 1555년(명종 10)에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97) 퇴계는 艮齋 李德弘이 喪禮에 쓰는 首絰에 대해 물어온데 대해 丘濬이 저술한 ꡔ家禮儀節ꡕ은 알지 못하니 의심하지 말고 두 개의 다리로 된 것을 사용하라고 조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98) 儀禮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을 갖지 않은 것 같다. 퇴계는 16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사림으로 많은 학자들 과 예의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자신이 완성된 예서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황 의 대체적인 경향은 ꡔ朱子家禮ꡕ만을 따르고 丘濬의 ꡔ家禮儀節ꡕ은 별로 따 르지 않았다고 한다.99) 그렇다면, ꡔ(丘瓊山)家禮儀節ꡕ의 간행은 이정이 독자적으로 간행한 서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ꡔ(范太史)唐鑑ꡕ은 이정이 쓴 ꡔ醫(無)閭先生集ꡕ의 跋文에 경주부윤 재임 시에 간행한 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퇴계의 편지에 1562년(명종 17) 책의 발문을 써달라는 이정의 요청을 퇴계가 사양하는 내용이 실려 있 어100) 이때 간행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9 년 飜刻本 密陽條에 이 책이 수록되어 있어 1562년(명종 17) 密陽에서 간 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현주는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만송 貴207B)의 경주부윤 이정의 간기를 바탕으로 경주부에서 간행하였다고 추 정하였는데,101) 임란전 책판으로 ꡔ고사촬요ꡕ에 밀양에 책판이 수록되어 있 는 것으로 보아 이정이 간행을 주간하였지만 책판은 밀양에서 판각하였다고 97) 이 책은 김안국이 1518년 북경에서 구입하였는데, 명나라 大儒 丘濬이 刪定한 것으로 文義가 빠지고 소략한 것을 보완하여 구비하였으니 곧 ꡔ朱子家禮ꡕ의 羽翼이므로 인쇄 반포하여 사람들이 강론하여 행하도록 하자고 하였다(ꡔ중종실 록ꡕ 권34, 13년 11월 22일). 이 책은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에 따르면 을 해자 금속활자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b )하고 있어서 김안국이 수입한 1518년(중종 13) 이후 중종 연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98) 李滉, ꡔ退溪集ꡕ 권36, 書, 答李宏仲. 99) 金恒洙, 16세기 士林의 禮意識과 禮書編纂 ꡔ同大論叢ꡕ 22, 1992, 630~635쪽. 100) 李滉, ꡔ退溪集ꡕ 권21, 書, 答李剛而. 101) 안현주, 앞의 논문, 2011, 357쪽.

301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301 이해할 수 있겠다. ꡔ(范太史)唐鑑ꡕ은 편년체 사서로서 북송의 范祖禹가 1086년 撰하고 呂 祖謙이 註를 한 唐의 事蹟記이다. 唐王朝 300년간 흥망성쇠의 자취를 皇帝 別로 게재하고 편마다 군신 사이의 대응에 대한 범조우 자신의 論評ㆍ論斷 을 덧붙여 국가통치의 특징을 논술하였다. 대담한 史評이나 論斷ㆍ事實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식견을 엿볼 수 있어 史評類의 대표작으로 전해진다. ꡔ學庸章句指南ꡕ은 이정이 직접 쓴 발문에서 1562년(명종 17)에 목사 金 泓에게서 鑄本을 얻어서 鷄林에서 판각했다고 기록하였다.102) 이 책은 ꡔ고 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 慶州條에 실린 ꡔ庸學指南ꡕ과 동일한 서적이 므로, 이정이 경주부윤 재임 시에 간행한 서적임을 알 수 있다. ꡔ學庸章句指南ꡕ은 1권(大學通旨)ㆍ2권(中庸章句評說)ㆍ3권(中庸章次 連續說)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학과 중용의 章句 만을 뽑아 엮은 책으로 明 의 胡謐이 編한 책인데, 明儒의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석서라고 할 수 있다. ꡔ天地萬物論(=魯齋論)ꡕ은 이정이 1564년(명종 19) 순천부사로 재임할 때 ꡔ程氏遺書(分類)ㆍ外傳ꡕ과 함께 간행하였다.103) 이것은 ꡔ고사촬요ꡕ 책판목록 선조 18년판 順天條에 실린 ꡔ天地調和論ꡕ과 동일한 책이다. 宋代 魯齋 王柏104)이 찬한 것이다. ꡔ啓蒙傳疑ꡕ는105) 주자의 ꡔ易學啓蒙ꡕ에 대한 퇴계의 의견을 적은 글이 102) 李楨, ꡔ龜巖集ꡕ 권1, 別集, 跋, 學庸章句指南跋. 103) 李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104) ꡔ성호사설ꡕ 권18, 經史門, 王魯齋. 王魯齋柏은 宋의 大儒이다. 그의 조부 師 愈는 楊龜山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뒤에 朱ㆍ張ㆍ呂 세 선생과 사귀었고, 아버 지 澣도 朱呂와 교유했다. 노재는 何文定基에게서 배웠고, 문정은 黃勉齋에게 배워서 伊洛의 嫡傳이 되었고, 뒤에 金仁山履祥도 노재에게 배웠고 許白雲謙 은 인산에게 배웠으니 지금까지 正脈으로 일컬어진다 105) 이황은 ꡔ啓蒙傳疑ꡕ를 편찬하여 朱子의 ꡔ易學啓蒙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 혔다. 퇴계가 ꡔ啓蒙傳疑ꡕ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元의 胡一桂가 朱子의 ꡔ易學 啓蒙ꡕ을 註解한 책인 ꡔ啓蒙翼傳ꡕ이 1570년에 星州에서 간행되자 이를 구하여 보았고, 明의 韓邦奇가 朱子의 ꡔ易學啓蒙ꡕ을 주해한 ꡔ啓蒙意見ꡕ도 구하여 보 았다(李滉, ꡔ退溪集ꡕ 續集 권35, 書, 答柳而見). 그런데, 1562년에 ꡔ啓蒙傳 疑ꡕ를 李楨에게 보낸 뒤 鄭士誠 등 제자들과 함께 개정한 내용을(李滉, ꡔ退溪

302 302 지역과 역사 38호 다. 퇴계는 1560년(명종 15) 盧守愼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차례나 이 책의 초고를 바꾸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106) 그런데 1565년 (명종 20)에 이정이 신구 ꡔ朱子年譜ꡕ 2건과 ꡔ啓蒙傳疑ꡕ 1책을 퇴계에게 보내 교정을 부탁하고 있어서107) 이때 初刊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 러나 1569년(선조 2)에도 아직 완성본을 이정에게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 을 보면108) 이때까지 교정을 거듭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ꡔ三韓 詩龜鑑ꡕ은 嘉靖丙寅(1566)冬順天府重刊 이라는 간기가 있어서 이정이 순 천부사로 재임하던 1566년에 順天府에서 간행한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은 있으나, 이정은 4월까지 재임하였고 이정이 이 책을 간행하는 과정에 관한 언급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정이 간행한 서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맺음말 본고는 이정이 16세기 중엽 15년간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간행한 서적 22종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이정이 서적을 간행한 것은 퇴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주자성리학의 道統 확립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밝혔다. 퇴계의 도통 확립을 위한 노력은 서원 건립과 서적 간행으로 집약 된다. 이정은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서원을 건립하고 서적을 편찬할 때는 퇴 계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행하여 퇴계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였 다. 이정이 사당이나 서원을 건립하여 성현을 배향하는 일은 1546년(명종 1) 9월에 善山郡守로 부임하여 吉再의 사당에 들러서 제사를 받들고 허물어져 集ꡕ 권35, 書, 答鄭子明) 여러 차례 보충하였는데 1569년에도 아직 완성본을 李楨에게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후에도 계몽전의 편찬이 완료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정이 간행하지는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06) 李滉, ꡔ退溪集ꡕ 권10, 書, 答盧伊齋. 107) 李滉, ꡔ退溪集ꡕ 속집 권4, 書, 答李剛而. 108) 李滉, ꡔ退溪集ꡕ 권22, 書, 答李剛而.

303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303 가는 사당을 새로 지으려고 시도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560년(명종 15) 9월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1561년에 西岳精舍을 창건하고 薛聰, 金庾信, 崔致遠을 향사하였다. 순천부사로 부임한 뒤 1565년에는 臨淸臺를 복원하여 비를 세우고, 그 옆에 景賢堂을 지었으며, 경현당의 오른쪽에 玉 川精舍를 건립하고 金宏弼을 배향하였다. 이후 1569년(선조 2)에 이정이 사천에 靜觀臺와 龜巖精舍를 지었다. 이정은 서원을 건립하고 배향할 인물을 정하는 문제와 서원의 건물 명칭 을 정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퇴계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퇴계의 뜻을 적극 수용하였다. 특히 순천부사 재임 시에 옥천정사를 건립하여 김굉필을 배향 하고, 경현록을 편찬하여 김굉필을 추숭하였다. 이것은 퇴계가 주자성리학 의 도통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김굉필을 순천의 鄕先生의 차원을 넘는 존재 로 부각시키고 도학자 로 추숭하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즉, 이정이 옥 천정사를 건립하여 김굉필을 배향하고, 김굉필의 도학적 면모를 드러내어 ꡔ景賢錄ꡕ을 편찬한 것은 조선의 道統에서 김굉필의 위치를 굳건히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정은 淸州와 慶州, 順天에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3종의 서적을 편찬하고 22종의 서적을 간행하였는데, 서적을 편찬하거나 간행할 때에는 대부분 퇴계와 왕복서한을 주고받으며 긴밀하게 의논을 하여 진행하였다. 퇴계는 이정이 청주목사(20통), 경주부윤(57통), 순천부사(28통) 등 지방 관으로 있을 때 약 105통 70% 이상의 편지를 보냈다. 이 시기는 이정이 활 발하게 서적을 편찬하거나 간행한 시기와 일치한다. 퇴계가 이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이정이 서적을 간행한 과정을 살펴 보면, 간행할 서적을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교정을 통해 최종본이 완성되기 까지 당대 최고 학자인 퇴계의 검증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퇴계는 간 행할 서적에 跋文을 써서 간행 경위와 간행의 필요성을 명시하였고, 편찬 방침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거나 간행에 부족한 자료를 보충해 주기도 하였 다. 이정이 간행한 서적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먼저, 朱子의 도통인식에 대한

304 304 지역과 역사 38호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행적과 학설을 통해 道學의 요점과 그 계승을 밝힌 言行錄類 서적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송대 도학자들의 문장과 행실 속에서 도학의 면모를 재조명하고자 한 도학자들의 道學風의 詩文類 서적을 많이 간행하였다. 또한 퇴계가 명대의 순정성리학자로 평가하는 賀欽ㆍ薛瑄ㆍ胡 居仁ㆍ潘府ㆍ楊廉ㆍ胡謐 등 明儒의 저술을 간행하여 명대 朱子學의 동향 의 일단을 알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명대까지 주자성리학자의 계보를 이어서 이해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ꡔ景賢錄ꡕ을 편찬ㆍ간행하여 조선에서 주자성리학의 道統을 확립하는데 김굉필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다. 즉, 이정이 편찬하거나 간행한 22종의 서적은 조선에서 도통인식이 확립 되어 가는 과정에서 宋元明代의 주자성리학자의 도통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서적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간행한 서적은 16세기에 조선의 주 자성리학자의 도통확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도통에서 김굉필의 위치를 굳 건히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ꡔ龜巖集ꡕ, ꡔ眉巖日記ꡕ, ꡔ성호사설ꡕ, ꡔ청장관전서ꡕ, ꡔ退溪集ꡕ ꡔ龜巖年譜ꡕ, 泗川文化院, 김영두, 中宗代 文廟從祀 論議와 朝鮮 道統의 形成 ꡔ사학연구ꡕ 85, 김정만, 龜巖 李楨의 道學思想 硏究,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金恒洙, 16세기 士林의 性理學 理解-書籍의 刊行ㆍ編纂을 중심으로- ꡔ한국사론ꡕ 7, 金恒洙, 16세기 士林의 禮意識과 禮書編纂 ꡔ同大論叢ꡕ 22, 김훈식, 順天刊本 ꡔ景賢錄ꡕ의 편찬과 내용 ꡔ역사와 경계ꡕ 86, 변동명, 16세기 중엽 順天府使 李楨의 성리학 진흥 ꡔ남도문화연구ꡕ 28, 沈慶昊, 朱子 ꡔ齋居感興詩ꡕ와 ꡔ武夷櫂歌ꡕ의 조선판본 ꡔ서지학보ꡕ 14, 안현주, 龜巖 李楨의 圖書刊行에 관한 硏究 ꡔ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ꡕ 42-1, 우정임, 조선전기 性理書의 간행과 유통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05 龜巖 李楨의 서적편찬과 간행이 道統 확립에 미친 영향 305 우정임, 조선전기 ꡔ性理大全ꡕ의 이해과정 節要書의 編纂ㆍ刊行을 중심으로 ꡔ지역과 역사ꡕ 31, 우정임, 言行錄 類 서적의 수입과 이해과정을 통해 본 16세기 道統 정립과정 연구 ꡔ역사와 세계ꡕ 47, 李東熙, 明初朱子學과 朝鮮前期의 朱子學 ꡔ東西文化ꡕ 20, 이봉규, ꡔ延平答問ꡕ 논의를 통해 본 退溪學의 지평-동아시아 유학사의 맥락과 연관 하여- ꡔ동방학지ꡕ 144, 李樹健, 龜巖 李楨의 生涯와 學問 및 退南 과의 關係 ꡔ구암사상학술집ꡕ, 사천문화 원, 이은식, 구암과 진주옥사 ꡔ구암사상학술집ꡕ, 사천문화원, 정우락, 龜巖 李楨 연구의 반성적 모색 ꡔ退溪學과 儒敎文化ꡕ 52, 정재훈, 退溪 李滉의 학문관과 정치사상 ꡔ역사문화논총ꡕ 2, 최경훈, 朝鮮前期 朱子 著述의 刊行에 관한 硏究 ꡔ書誌學硏究ꡕ 42, 최영성, 龜巖 李楨의 學問과 朝鮮儒學史上의 貢獻 ꡔ구암사상학술집ꡕ, 사천문화원, 洪元植, 退溪 李滉의 ꡔ宋季元明理學通錄ꡕ에 대한 硏究-ꡔ宋元學案ꡕ과 비교를 중심 으로- ꡔ동아인문학ꡕ 14, 黃渭周, 退溪와 龜巖의 往復書翰 ꡔ退溪學과 儒敎文化ꡕ 47, 候外廬 외 저, 박완식 역, ꡔ송명이학사ꡕ 2, 이론과 실천,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306 306 지역과 역사 38호 Abstract The Effects of Compilation and Publication of Guam(龜巖) Lee Jeong(李楨) on Establishing Confucian Orthodoxy(道統) Woo, Joung-Im This article studies publishing process of 22 works issued by Lee Jeong and their character, through which finds that his publishing process intertwine with the process for establishing confucian orthodoxy of Zhu Xi s Neo-Confucianism (朱子性理學) mainly based on Toegye(退溪). Efforts to establish confucian orthodoxy of Toegye have converged into building Seowon(書院) and publication. Holding local official, Lee Jeong actively accepted Toegye s opinion when he built Seowon and published books. He would construct a shrine dedicated to Gil Jae(吉再) during his term of local office. Since then, he had built Seoakjeongsa(西岳精舍), Okcheonjeongsa(玉川精舍), Guamjeongsa(龜巖精舍). There were the most Eonhaengroklike(言行錄類) among books published by Lee Jeong, which, based on Zhu Xi s perception of confucian orthodoxy, reveal point of confucian study of ethics(道學) and its accession through one s achievements and thoughts. And he published books of poetry and prose(詩文類) à la confucian study of ethics(道學風) and works of confucian of Ming dynasty(明 儒) reputed to theoretical Neo-Confucian(純正性理學者). This established confucian orthodoxy in Song(宋)ㆍYuan(元)ㆍMing dynasty with Zhu Xi as the central figure. And he solidified Kim Goengpil(金宏弼) s place in confucian orthodoxy of

307 龜巖李楨의서적편찬과간행이道統확립에미친영향 307 Joseon( 朝鮮 ) by compiling and publishing Kyunghyunrok(ꡔ 景賢錄 ꡕ). Keywords : Lee Jeong, Confucian Orthodoxy, Yiluo yuanyuanlu, Kyunghyunrok, Seongriyup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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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ꡔ지역과 역사ꡕ 38, , 309~345쪽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都中 洪在昇, 朴時奭, 李塤의 사례 109)김 동 철** 머리말 Ⅰ. 도중의 가계와 혼인 관계 Ⅱ. 도중의 무역 활동 1. 종가문서와 ꡔ동래부상고안ꡕ의 도중 명단 2. 도중의 활동 Ⅲ. 도중의 무임직 경력과 활동 1. 무임직 경력 2. 도중 출신의 무임직 활동 Ⅳ. 도중 출신의 耆英會 활동 맺음말 국문초록 17~19세기에 왜관은 동래에만 존재하였다. 일본과의 무역은 왜관의 개시무역[사무 역]이 중심이었다. 이 개시무역을 담당한 조선 측 상인이 동래상인 이다. 개시무역을 맡은 동래상인은 인원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 인원 내의 동래상인을 흔히 都中(도중상 고) 이라고 불렀다. 개시무역에는 정원 외의 소상인도 점차 참여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동래상인의 핵심은 도중이었다. 도중의 활동은 조선 측 자료보다는 일본 측 자료, 즉 대마도 종가문서에서 보다 구체 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마도 종가문서에는 도중의 본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도 중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종가문서와 조선 측 자료를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종 * 이 논문은 2015년도 부산대학교 인문사회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한일관계사학회ㆍ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공동 워크샵( )에서 발표한 왜관과 동래상인 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history@pusan.ac.kr).

310 310 지역과 역사 38호 가문서에 보이는 도중의 본명을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까지 종가문서에 보이는 도중 가운데 본명이 확인된 것은 4명뿐이다. 본고는 종가문서에 보이는 도중 3명의 본명을 새로 확인하였다. 그들이 1864년 도 중인 홍재승, 박시석, 이훈이다. 19세기 후반의 도중에서 동래상인의 전형을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미 개시무역이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개항 전의 동 래상인이 개항 후까지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3명의 도 중을 사례로 상업 활동, 무임직 활동, 지역유지 활동을 통하여, 19세기 후반 동래상인 의 실체를 살펴보았다. 주제어 : 東萊商人, 都中, 倭館, 武任, 耆英會 머리말 17~19세기에 왜관은 동래에만 존재하였다. 왜관은 한일관계사와 부산 지역사를 연결하는 결절점[매듭]이다. 왜관과 관계맺기를 한 대표적인 부산 사람으로는 소통사와 동래상인을 들 수 있다. 소통사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 로는 朴琪淙을 들 수 있다. 박기종을 비롯한 소통사 출신들은 자신들의 선 조를 기리는 비석을 1906년 세웠다. 박기종은 부산근대사의 대표단수였 다.1) 왜관 개시무역[사무역]을 담당한 조선 측 상인이 동래상인이다. 동래상 인은 인원수가 정해져 있었다. 인원수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인원 내의 상인을 흔히 都中 이라고 불렀다. 도중은 상고도중 이라는 상인조직과 도중상고 라는 무역상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관 개시무역에 1) 김동철, 17~19세기 동래부 소통사의 편제와 대일활동 ꡔ지역과 역사ꡕ 17, 2005 ; 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와 부산의 역관 건물 ꡔ항도부산ꡕ 16, 현문수ㆍ 김동철, 지역사 인물 콘텐츠 개발을 위한 연구-박기종 사례를 중심으로- ꡔ기록 학연구ꡕ 36, 2013.

311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11 는 도중뿐만 아니라 소상인, 잡상인도 참여하였다. 최근의 연구는 이런 새 로운 변화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2) 그러나 동래상인의 실체를 파악하는 가장 핵심 키워드는 역시 도중이다. 도중은 대일무역, 특히 무역상인 연구의 핵심 주제이다. 도중에 대해서는 田代和生,3) 정성일,4) 김동철5)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정성일은 對馬島 宗 家文書의 분석을 통해 1864년 도중 사례나,6) 1833년과 1846년의 도중 鄭 子範[자범은 字, 본명 미상] 사례 연구로,7) 도중 연구의 수준을 한단계 끌 어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市廛商人의 도중 연구에 비하면,8) 동래상인 의 도중 연구는 아직은 미미한 상태이다. 대마도 종가문서에는 도중의 본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조선 측 자료에 는 종가문서와 같은 상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에, 도중의 실 체를 알기 위해서는 종가문서와 조선 측 자료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 하다. 종가문서에 나오는 도중의 본명을 찾는 단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김 2) 정성일, ꡔ조선후기 대일무역ꡕ, 신서원, 양흥숙, 조선후기 東萊 지역과 지 역민 동향-倭館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동철, 18 세기 중엽 이후 대일무역의 변화와 절목의 제정 ꡔ동양한문학연구ꡕ 33, ) 田代和生, 幕末期日朝私貿易と倭館貿易商人-輸入四品目の取引を中心に-, 速 水融 외, ꡔ德川社會からの展望ꡕ, 同文館出版, 1989 ; ꡔ日朝交易と對馬藩ꡕ, 創 文社, )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상고도중의 규모와 활동(1844~49) ꡔ한 일관계사연구ꡕ 8, 1998 ; 앞의 책, )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 상인의 구성과 활동 ꡔ역사와 세계ꡕ 46, ) 정성일, 宗家文書와 倭館-1864년 每日記로 본 왜관과 한일관계- ꡔ대마도의 宗 家文書ꡕ(2013년 부경대 대마도연구센터 주최 학술세미나 자료집, ). 7)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의 주역, 동래상인 정자범(鄭子範)-1833년과 1846 년의 사례- ꡔ동아시아 상인 열전ꡕ(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ㆍ명청사학회 주최 국 제학술회의 자료집, 2015a) ; 동래상인 정자범(鄭子範)의 대일무역 활동-1833 년과 1846년의 사례- ꡔ민족문화연구ꡕ 69, 2015b. 8) 고동환, ꡔ조선시대 시전상업 연구ꡕ, 지식산업사, 2013 ;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 성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편, ꡔ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ꡕ, 두산동아, 김병하, 都中에 관한 연구-開城 縇紬廛과 海州 縇緗廛을 중심으로- ꡔ경영사학ꡕ 8, 1993.

312 312 지역과 역사 38호 동철이 朴昌壽, 崔周翰, 黃道源을, 정성일이 宋光洛의 본명을 밝힌 것에 불 과하다. 정성일의 최근 연구 성과에 힘입어 종가문서에 보이는 도중상고 가운데, 특히 1864년 개시무역에서 활동한 聖範洪千摠, 亨哉朴書房, 華伯李知敎 세 사람의 도중에 주목하였다. 이들을 洪在昇, 朴時奭, 李塤으로 상정하였 다. 세 사람의 字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세 사람 모두 1871년 ꡔ동래부상고 안ꡕ에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9) 19세기 후반의 도중을 동래상인의 전형을 보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왜관 개시무역이 쇠퇴하던 시기에 활동하던 상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통해 19세기 후반 동래 상인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후 동래상인의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까지 도중 집안의 가계를 통해 개항 후까지의 활동을 아는 것은 崔周翰 집 안 한 사례뿐이다.10) 19세기 후반의 도중은 개항 후 왜관이 단절된 후에도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세 사람 도중의 상업활 동, 무임직 활동, 개항 후 지역 원로 有志 로서의 활동을 통해,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Ⅰ. 도중의 가계와 혼인 관계 도중의 실체, 거주지, 사회적 지위 등을 알기 위해서는 도중의 가계나 인 적 관계를 파악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본관이 남양인 홍재승은 아직까지 가 계나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朴 時奭과 李塤의 두 사례만 살펴보려고 한다. 9) 김동철, ꡔ東萊府商賈案ꡕ을 통해서 본 19세기 후반의 동래상인-ꡔ東萊武任先生 案ꡕ과의 비교- ꡔ한일관계사연구ꡕ 창간호, 1993a. 자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표 3> 참조. 단 이훈의 자는 華伯이 아니고 和伯이다. 그러나 洪在昇, 朴時奭과의 관계 등 여러 변수를 통해 華伯/和伯을 동일한 인물로 보고 李塤 이란 가정 위에 서 논지를 전개한다. 10) 김동철, 앞의 논문, 2014, 252~254쪽.

313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13 첫째, 朴時奭의 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박시석은 아들 朴仁瑛을 통해 고찰할 수 있다. ꡔ東萊郡誌ꡕ(文錡周, 1937)를 보면, 박인영은 본관이 밀성 이고 박시석의 아들이며, 1879년(고종 16, 기묘)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11) 그리고 朴仁瑛의 先齋인 永慕齋는 華村에 있었다.12) 동래의 기영계 명단을 보면, 박인영은 자는 明允이며, 임자년(1852, 철종 3)생으로, 1917년 4월 기영계에 가입하였다.13) 그런데 ꡔ崇禎紀元後五己卯式 司馬榜目ꡕ을 보면, 박인영은 1879년(고종 16, 기묘) 식년시[진사]에 합격하였다. 자는 명윤이 고, 경술년(1850, 철종 1)생이며, 본관과 거주지는 밀양이며, 전력은 幼學 이다. 아버지 박시석도 유학이다.14) 두 자료에서 박인영의 생년이 차이를 보이지만, 양자는 동일인이 틀림없 다. 박인영은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박진사 로 통칭되었다. 朴苾彩(1842~ 1925년)는 1918년 8월 前성균진사 밀성 朴仁瑛의 병환 때문에, 그를 대신 해서 順興 김진사의 제문을 지은 적이 있다. 이때 박인영을 石臺 박진사 라 고 칭하였다.15) 또한 진사 朴明允(박인영)은 동래의 저명한 성씨다(萊州 之著姓也). 늙어서 草德山 아래 터를 잡으니, 그 선영의 아래다 16)라고 하 였다. 박인영은 노년인 1918년 당시에는 동래군 동래면 석대동에 거주한 것 같다. 동래상인 출신인 박시석의 선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 아들 박인영은 상인으로 세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훈의 가계와 혼인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훈의 본관은 碧珍 이다. 벽진이씨 족보에서는 아직 이훈 가계를 찾지 못하였다. 박필채의 ꡔ秋 湖遺稿ꡕ에는 이훈의 딸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이훈 딸의 혼인 11) 文錡周, ꡔ동래군지ꡕ, 1937, 司馬. 12) 文錡周, 위의 책, 廟社壇齋. 13) 추월영 엮음, ꡔ동래기영회 150년사ꡕ, 동래기영회, 1996, 132쪽. 기영계(회), ꡔ기영계안ꡕ 참조. 14)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참조. 15) 朴苾彩 지음, 정경주 번역, ꡔ국역 秋湖遺稿ꡕ(하), 부산시사편찬위원회, 2002, 326쪽, 祭順興金進士文 代石臺朴進士作. 16) 정경주 번역, 위의 책, 250쪽, 省楸稧序 (을묘 월).

314 314 지역과 역사 38호 관계를 통해, 사돈 집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훈의 사돈인 朴時準은 장관청 초관, 교련청 기지구기수초관, 수첩청 백총을 역임한 동래부 무임이 었다.17) 그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朴贊瑛, 차남은 朴滿瑛이다. 장남 박찬영이 이훈의 딸과 결혼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朴鎭友, 딸 은 吳日煥(본관 해주)의 처다. 차남 朴滿瑛은 郭瑞鳳(본관 현풍)의 딸과 결 혼했는데, 부인이 일찍 죽었다. 다시 이택인(본관 전주)의 딸과 결혼하여 1 남(朴鎭晟)을 두었다. 박만영은 1901년(광무 5, 신축)에 중추원 의관이 되 었다. 아들 박진성은 1904년(광무 8, 갑진)에 농상공부 주사로서 議官이 되었다.18) 박시준 집안은 이훈, 곽서봉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곽서봉은 장관 청 중군, 천총, 별군관청 행수, 府廳선생[상급 향리]을 역임한 동래지역의 대표적인 이임ㆍ무임이다.19) 곽서봉과 이훈은 사돈의 사돈 관계이다. 그 런데 양자 관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래 <표 2>에서 보는 것처럼, 둘다 1874~1875년에 동래부 상고로 활동한 점이다. 다음으로 이훈 아들의 혼인 관계를 살펴보자. 초대 부산항 감리를 역임한 이헌영의 ꡔ釜署集略ꡕ에는 이훈 아들의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長木浦別將 具延壽가 그 妹夫인 邑校 李塤의 아들을 이끌고 보러 왔다.20) 具延壽와 李塤의 아들이 또한 보러 왔다. 李塤 山訟의 일로 부사에게 글을 부탁했다.21) 長木浦別將 具然壽가 와서 통제사의 서신을 전하였다.22) 17) 손숙경ㆍ이훈상, ꡔ조선후기 동래의 武廳先生案과 武任 총람ꡕ, 동아대학교 석당 학술원 한국학연구소, 쪽. 이하 ꡔ무임 총람ꡕ으로 약칭. 18) 정경주 번역, 앞의 책, 2002, 366~368쪽, 박의관만영선비숙부인정씨묘갈명 병서. 19) 손숙경ㆍ이훈상, 앞의 책, 2009, 41쪽. 20) ꡔ釜署集略ꡕ 갑신(1884) 1월 18일(ꡔ敬窩集略ꡕ(중), 288쪽). 21) ꡔ釜署集略ꡕ 갑신(1884) 1월 19일(ꡔ敬窩集略ꡕ(중), 288쪽). 22) ꡔ釜署集略ꡕ 갑신(1884) 5월 8일(ꡔ敬窩集略ꡕ(중), 312쪽).

315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15 本邑 先達 具澤龍이 보러 왔다. 곧 長木別將 具延壽의 부친이다.23) 위의 사료 나 邑校 李塤 來見 24)이라 한 것처럼, 이훈은 1884년 당 시 邑校였다. 구연수와 이훈의 아들이 이훈의 山訟 문제 때문에 동래부사 趙秉弼(1883.7~1885.6)에게 부탁할 목적으로, 감리 이헌영을 찾아온 것 이다. 위의 사료 한자 표기가 다른 具延壽와 具然壽( ~ )는 동일인이다. 그는 1884년 당시 거제부 관할 7鎭의 하나인 장목포진 별장이 었다. 아버지는 동래에 사는 선달 구택룡(1837~1914, 본관 창원)이다. 구 연수의 매부가 이훈의 아들이다. 즉 이훈 아들과 구택룡 딸이 결혼한 것이 다. 이훈과 구택룡은 사돈간이다. 구택룡은 부청선생[상급 향리]을 역임하 였다.25) 1908년 4월 기영계에 입회하였다. 그는 1910년 私立東萊東明學 校 4대, 1912년 7대 교장에 취임하였다.26) 구택룡-구연수의 직계는 具鳳 祥-具赫鎭-具澤龍-具然壽-具鎔書이다.27) 그러면 구연수의 매부, 즉 이훈의 아들은 누구인가? ꡔ碧珍李氏大同譜ꡕ 등을 참고했으나, 李塤 집안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ꡔ창원구씨대동보ꡕ 를 보면 구택룡과 부인 밀양 박씨(朴淇源의 딸)는 3남 2녀를 두었다. 즉 具 然壽(具在壽), 具在浩, 具在瑀, 장녀(남편 李永悳), 차녀(남편 文禎鎬)이 23) 24) 25) 26) 27) ꡔ釜署集略ꡕ 갑신(1884) 5월 25일(ꡔ敬窩集略ꡕ(중), 314쪽). ꡔ釜署集略ꡕ 갑신(1884) 2월 17일(ꡔ敬窩集略ꡕ(중), 296쪽). 손숙경ㆍ이훈상, 앞의 책, 2009, 44쪽. 추월영 엮음, 앞의 책, 1996, 86쪽. 구연수의 아들 具鎔書(1899~1977)는 초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였다. 구용 서의 어머니 사카이 와키는 원예육종학자인 우장춘의 이모다. 그녀는 우범선의 아내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의 동생이다. 즉 구연수와 우범선은 동서 관계로, 구용서와 우장춘은 이종사촌이다(이영래, ꡔ우장춘의 마코토ꡕ, HNCOM(에치엔 컴), 2013, 223쪽). 한편 ꡔ昌原具氏世譜ꡕ에 의하면 구연수은 초명이고, 본명은 具在壽다. 구용서는 一名이며, 본명은 具鎔玉이다. 구용서는 宋鍾憲(宋秉畯의 아들)의 딸 宋智惠子와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창원구씨세보소, ꡔ창원구 씨세보ꡕ 1권, 회상사, 1981, 767쪽). 구택룡은 숙부 具碩鎭 계로 출계하였다 (ꡔ창원구씨세보ꡕ 1권, 210~212쪽).

316 316 지역과 역사 38호 다. 구택룡의 첫째 사위 李永悳이 바로 이훈의 아들이다. 그리고 李珪, 李 珍, 李環 세 명이 이훈의 손자이다.28) 그런데 지금까지는 李環의 아버지는 李應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응덕은 1911년 8월 동명학교 6대 교장에 취 임하였다.29) 만약 ꡔ창원구씨대동보ꡕ의 이영덕과 이환, ꡔ동래기영회 150년사ꡕ의 이응 덕과 이환의 부자 관계가 각각 사실이고, 이환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영덕 과 이응덕은 동일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李塤(1832~1921), 李應 悳(1863~?), 李珪(1881~?), 李珍(1888~?)은 각각 1891년, 1924년, 1940년, 1951년에 기영계(기영회)에 입회하였다.30) 이훈 본인과 손자 이규, 이진 은 입회했는데, 아들 이영덕이 입회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다. 따라서 이환의 부친 이영덕과 이응덕을 동일 인물로 보고 싶다. Ⅱ. 도중의 무역 활동 왜관의 개시무역[사무역]을 담당하는 주체는 都中(도중상고)이다. 小田 幾五郞은 ꡔ草梁話集ꡕ(1796년)에서 都仲은 이전에는 다수 사람들이 있었 으며, 서울과 그 외 松都에서도 (동래로) 내려 왔다. 근래에는 무역이 쇠퇴 함에 따라 4~5명으로 되었다. 게다가 都仲 살림이 온전하지 못하여, 東萊 내의 職役을 맡는 사람도 있다 라고 하였다.31) 도중의 지역과 인원수가 바 뀌고, 동래부의 職役者가 도중이 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28) ꡔ昌原具氏世譜ꡕ 1권, 212쪽. 29) 추월영 엮음, 앞의 책, 1996, 87쪽. 김승, 한말ㆍ일제하 동래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ꡔ지역과 역사ꡕ 6, 2000, 81쪽. 30) 추월영 엮음, 위의 책, 130~135쪽. 31) 小田幾五郞, ꡔ草梁話集ꡕ. 田代和生, 앞의 논문, 1989, 316쪽 ; 앞의 책, 2007, 222쪽. 정성일, 앞의 논문, 1998, 79쪽 ; 앞의 책, 2000, 154쪽.

317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종가문서와 ꡔ동래부상고안ꡕ의 도중 명단 최근 정성일은 1817년부터 1865년까지의 개시무역에 참여한 도중의 명 단과 왜관 출입 인원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였다.32) 그리고 1864년 도중은 따로 정리한 바가 있다. 그리고 9월 28일 개시에 華伯李知敎 가 처 음 참여한 것을 밝힌 바 있다.33) 종가문서에 보이는 도중의 활동을 한국 측 자료와 비교하기 위해, 정성일의 연구 성과 일부를 발췌한 것이 <표 1>이다. <표 1> 도중의 명단과 왜관 출입 인원수( 년) 연도 수록 기간 인원 수 년 7 子範 鄭先達 ~5월 8 子範 字/姓+호칭 ~12월 4+α 子範 ~5월 4+α 子範 ~12월 7 子五(伍) 子伍 년 년 ~7월 4+α 子五 仁現 宜汝 致秀 玉汝 黃書房 聖愚 玉汝 聖愚 允章 永緝 聖範 聖範 聖範 聖範 子雄 子權 敬受 吳書房 允章 允章 允章 允章 亨哉 禹瑞 子儀 亨哉 禹瑞 子儀 致伯 永汝 朴書房 金把摠 鄭千摠 朴知發 子伍 致秀 亨哉 聖範 禹瑞 聖希 子儀 仲直 鄭書房 尹千摠 朴書房 洪千摠 金把摠 李把摠 鄭千摠 致秀 亨哉 禹瑞 聖希 朴書房 李把摠 * 출전: 정성일, 앞의 논문, 2015a, 139~140쪽 <표 1>에서 발췌 인용. 1864년의 도중에는 <표 1>의 8명 외에 華伯李知敎 도 참여하였다. 그런 데 동래기영회 회원 명단인 ꡔ기영계안ꡕ에는 洪在昇(자 聖範), 朴時奭(자 亨哉), 李塤(자 和伯)이 수록되어 있다. 홍재승과 박시석은 자와 성이 일치 한다. 이훈은 字의 한자가 다르다. 세 사람은 동래부에서 작성한 ꡔ동래부상 고안ꡕ(1871~1875년)에 商賈 로 등재되어 있다. 필자는 1993년 이 상고안 을 분석하면서, 이 상고를 왜관에서 사무역을 담당하는 동래상고로 본 바가 32) 정성일, 앞의 논문, 2015a, 139~140쪽 <표 1>. 33) 정성일, 앞의 논문, 2013, 70쪽 <표 26>.

318 318 지역과 역사 38호 있다.34)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상고가 모두 都中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홍재승, 박시석, 이훈이 도중인 것으로 보아, 도중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 사람을 중심으로 관련 상인까지 포함하여,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상인 을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도중상고 현황[부분 정리] 신미(1871) 11월 商賈案 원안수 8명 갑술(1874) 12월 商賈廛人案 상고 전인 17 3 을해(1875) 9월 商賈案 을해(1875) 9월 廛人案 27 8 洪在昇 朴時奭 李塤 鄭孝根 (12월,박시석 代) 郭瑞鳳 金漢明 黃元瓚 * 은 原案. 는 원안에서 除案. 는 제안 후 復案. 는 삭제된 자 대신 추가. * 출전: 김동철, 앞의 논문, 1993a, 128~129쪽 <표 4>에서 발췌 인용. 1871년 것의 정식 명칭은 ꡔ辛未十一月 日 商賈案ꡕ이다. 등재 순서는 洪在昇 朴時奭 林克秀 尹致商 李在淵 李塤 鄭志浹 朴時奭 이 다. 박시석 이름 밑에는 除案[삭제]하고, 대신 鄭孝根이 신미(1871년) 12 월 差任된 것이 부기되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박시석의 이름이 다 시 등재된 것으로 보아, 박시석은 다시 복귀한 것 같다. 도중이 된 시기(<표 1> 참조)와 나이(<표 3> 참조) 순서는 聖範-亨哉-華伯 이다. ꡔ동래부상고 안ꡕ에 洪在昇 朴時奭 李塤 으로 등록된 순서와 일치한다. <표 1>을 보 면 홍재승과 박시석 두 사람은 1862~1863년에, 홍재승과 박시석, 이훈 세 34) 김동철, 앞의 논문, 1993a.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상인에 대해서는 이 논문 을 참조 바람.

319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19 사람은 1864년에 같이 도중으로 개시무역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세 사람 이 1871년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것이다. 2. 도중의 활동 1) 도중의 인원수 19세기 후반에 동래상인 도중의 수는 대체로 4~9명 정도이다. 왜관 개 시무역에 참여한 도중은 해마다 10명을 넘지 않았으며, 9명이 정원이라는 기록도 있다.35) 개시무역에 참여한 도중의 수는 매번 동일한 것은 아니다. 1864년에도 적을 때는 2명, 많을 때는 9명이었다.36) 그런데 都中トハ東萊府中ニ八人罷在,37) 都中ト申者ハ東萊ニ八人 有之 38)라 한 것처럼, 동래부에 도중이 8명이 있었다고 보는 인식이 있었 다. 朴琪淙의 사위 尹相殷의 회고담을 근거로, 동래부 소통사 출신 박기종 이 어려서부터 동래의 八商賈 를 드나들며 일본인과 자주 접촉하여 일본어 와 상업을 배워 익혔다는 주장도 있다.39) 이 팔상고 를 도중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40) 도중을 의미하는 팔상고 가 하나의 관용어를 쓰인 것은 현재로서는 확인 되지 않는다. 그런데 <표 2>에서도 1871년 ꡔ동래부상고안ꡕ 원안의 정원은 8명이다. 이것은 도중의 정원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표 2>에서 1874년, 1875년에 인원수가 2배 이상 증가한 것은 기존 35) 36) 37) 38) 39) 40) 정성일, 앞의 논문, 2015a, 167쪽 ; 앞의 논문, 2015b, 96쪽. 정성일, 위의 논문, 2015a, 141쪽 ; 위의 논문, 2015b, 96쪽. ꡔ朝鮮事務書ꡕ 1874년 5월(ꡔ朝鮮外交事務書ꡕ 8, 성진문화사, 1978, 770쪽). ꡔ朝鮮事務書ꡕ 1874년 4월 30일(ꡔ朝鮮外交事務書ꡕ 8, 603쪽). 조기준, ꡔ韓國企業家史ꡕ, 박영사, 1974(재판), 89~90쪽. 藤永壯, 開港後の 會社 設立問題をめぐって-朴琪淙と汽船業ㆍ鐵道業-(上) ꡔ朝鮮學報ꡕ 140, 1991, 78쪽. 박원표는 훈도 밑에는 별차가 있었고, 별차 밑 에는 八상고가 있었는데, 쉽게 말하면 八都中 이라고 하였다(박원표, ꡔ향토부산ꡕ, 태화출판사, 1967, 14~15쪽). 박원표가 언급한 것은 사실과는 다르지만, 도중 을 8명으로는 보고 있다.

320 320 지역과 역사 38호 의 왜관 개시무역(3일, 8일)의 관행이 변한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 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다음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료 > 都中이라는 자가 동래에 8인이 있어서 宗氏 私貿易에 관계하여 入館하였는데, 상업이 도태되어 壅塞 중에 (崔)在守 한 사람에게 속박되어 입 관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입관하여 商賣하는 것을 허락받고 지난 17일 朴亨 哉, 李聖希라는 두 사람이 입관하여 상인댁에 갔다. (중략) 출관할 때 약간의 물품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그후 다른 도중도 입관한 날까지 합계 3번 갔다 41) <사료 > 도중이 왜관에 들어가는 일이 근년에는 중지되었다. 4월 17일 朴 亨哉, 李聖希라는 두 사람이 왜관에 들어가서, 상인 宮田伊兵衛 집에 갔다. 館 商 5~6명도 초대되었다. 두 사람의 말에 의하면 최근 2~3년 입관하지 못했다 고 한다. 이번에 신임 부사가 내려온 후, 종전대로 왜관에 들어가 商賣하는 것 을 면허받고, 금일 두 사람이 왜관에 간 것이다. 향후 널리 쌍방이 통상을 할 때, 특히 舊例의 3, 8일에 개시할 필요없이, 어느 날이라도 入館할 수 있게 되 었다. 당일에도 약간의 물품을 사서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에도 2~3번 정도 입관하였다 42) 위 사료에서 언급된, 1874년 4월 17일 왜관에 들어간 朴亨哉와 李聖希 는 <표 1>의 1864~1865년 亨哉 朴書房 [朴時奭]과 聖希 李把摠 과 동일 인이다. 상업이 쇠퇴한 데다가 小通事 崔在守가 왜관 무역을 장악하고 있 어, 도중은 2~3년간 왜관 출입을 하지 못하였다. 동래부사 朴齊寬(1874.2~ )이 부임한 후 도중제도를 다시 부활시켰는데, 종전의 3일과 8일 개시무역 제도는 폐지하고 언제든지 입관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43) 1872년 5월 일본 외무성의 왜관 代官을 포함한 대마도인들의 퇴거 조치, 외교관례 위반에 따른 동래부의 거부 의사 등에 따라 왜관 개시무역은 중지 되었다. 이것이 박시석 등이 도중 활동을 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41) ꡔ朝鮮事務書ꡕ 1874년 4월 30일(ꡔ朝鮮外交事務書ꡕ 8, 603쪽). 42) ꡔ朝鮮事務書ꡕ 1874년 5월(ꡔ朝鮮外交事務書ꡕ 8, 770~771쪽). 43) 김의환, ꡔ조선대일교섭사연구ꡕ, 통문관, 1966, 286~287쪽 ; ꡔ조선근대 대일 관계사연구ꡕ, 경인문화사, 1974, 286~287쪽.

321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21 것이다. 박시석[형재]과 이성희[자]는 1874년 2~4월에 도중의 자격을 부 여받고, 1874년 4월 다시 도중으로 왜관에 들어간 것이다. 2) 1864년 개시와 무역품 <표 1>을 보면 洪在昇[자 聖範]은 1855~1864년, 朴時奭[자 亨哉]은 1862~1865년 도중으로 활동했다. 한편 李塤[和伯/華伯]은 1864년 9월 28일 처음 도중으로 개시에 참여하였다. 10월 23일 개시에는 李聖希가 처 음 개시에 참여하였다. 이때 聖希李把摠 都中新參出入之事 를 알리는 覺 書를 박시석이 物貨所에 제출하였다.44) 1864년 왜관 개시의 경우에는 1년 동안 모두 12차례 열렸다. 즉 1월 28 일, 2월 28일, 3월 13일, 5월 25일, 6월 25일, 7월 12일, 9월 28일, 10월 22일, 11월 8일, 25일, 12월 21일, 26일에 개시가 열렸다. 11월과 12월은 각각 두 번씩, 4월과 8월은 한 번도 안 열렸다. 12회 가운데 원래 개시일인 3일과 8일에 열린 것은 5번, 다른 날에 열린 것은 7번이다.45) 1월 28일 왜 관에서 첫 개시가 열렸다. 이날 도중이 가지고 가서 판 소가죽(牛皮)은 1,101매인데, 박시석의 것은 141매였다.46) 박시석은 초시가 열리기 전인 1월 20일 왜관에 들어가서, 대마도 大砲方에서 구입할 牛馬骨 문제로 別二 代官을 만났다.47) 소와 말의 뼈, 닭 뼈 등 동물 뼈는 농업용 비료를 만드는 곳으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48) 3월 13일 개시에는 도중 7명이 입관하였다. 박시석, 홍재승도 입관하였다. 개시에 들어온 품목은 尾人蔘 500근/92근, 牛皮 700매였다. 우피 700매는 禹瑞 김파총이 들여온 것이다.49) 44) ꡔ(一代官)每日記ꡕ 1864년 10월 22일. 정성일, 앞의 논문, 2013, 70~71쪽. 본 고에서 ꡔ每日記ꡕ를 인용할 수 있는 것은 정성일 선생님의 도움 때문이다. 지면 을 빌어 감사드린다. 45) 정성일, 왜관 개시 때 제공된 일본요리 기록의 비교(1705년, 1864년) ꡔ한일 관계사연구ꡕ 52, 2015c, 231~233쪽. 46) 정성일, 앞의 논문, 2013, 70쪽. 47) ꡔ(一代官)每日記ꡕ 1864년 1월 20일. 48) 정성일, 앞의 논문, 2013, 72쪽.

322 322 지역과 역사 38호 5월 25일에는 別開市가 열렸다. 이날 도중 6인이 별시에 참여하였다. 牛 皮 1,375매, 牛角爪 30俵[가마니], 犬皮 320매, 紫根 100근, 牛馬骨 144 俵, 鷄骨 13俵이었다. 도중 6명 가운데는 박시석도 포함되어 있다. 박시석 은 이날 代官에게 色扇 2자루와 油尾扇 5자루를 선물하였다.50) 10월 2일 에는 왜관 調役과 代官이 박시석의 牛馬骨을 상담하기 위해 出館하였다. 11월 25일 별개시에는 도중 8명이 참가하였다. 이날 수출품은 마른해삼 50掛, 牛角과 牛皮, 尾人蔘, 牛馬骨이었다. 마른해삼 50괘는 홍재승이 들 여 보낸 것이다. 12월 21일 별개시는 1864년 마지막 개시였다. 도중 8명이 참가하였다. 박시석과 홍재승도 참가하였다. 별개시에는 黃芩 158掛, 牛角 爪 16가마니, 尾人蔘 1,075근/100근, 遠志 25가마니, 五味子 380근, 山棗 紅 38근, 紫根 200근, 鬱金 30근, 蘆眼石 300근, 牛馬骨 80가마니가 들어 갔다. 물품을 보낸 것은 商人中[상고도중]과 개별 도중[도중상고]로 구분되 었다. 박시석은 牛馬骨 80가마니를 들여 보냈다.51) 5월 25일 박시석이 대관에게 부채를 선물한 것처럼, 도중과 왜관 代官들 사이에는 선물 교환이 있었다. 왜관 측에서는 이를 音物 이라 한다. 1864년 12월 26일 박시석, 홍재승, 김우서, 윤치수는 선물 5가지를 보냈다. 곶감 1 접, 대구 2마리, 팥 1자루, 호두 1자루, 생밤 1자루가 그것이다. 연말연시 선물[歲儀]이라고 생각한다.52) 이상에서 본 것처럼, 1864년의 경우, 왜관의 개시[별개시 포함]무역을 통해 수출된 물품은 牛皮, 犬皮, 마른해삼[煎海鼠, 乾蔘], 黃芩, 牛角爪, 牛 馬骨, 鷄骨, 紫根, 遠志, 厚朴, 五味子, 鬱金, 蘆眼石, 尾人蔘, 山棗紅, 龍 摠 등이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수출품인 소가죽, 牛角爪, 황금, 마른해삼의 4품목 외에 다양한 물품이 수출되었다. 49) 정성일, 위의 논문, 70쪽. 50) ꡔ(一代官)每日記ꡕ 1864년 5월 25일. 정성일, 위의 논문, 70ㆍ49쪽. 51) 정성일, 위의 논문, 71~72쪽. 9월 28일 일기에 厚朴이 거래된 것으로 나와 있 다. 52) 정성일, 위의 논문, 49~50쪽.

323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23 3) 대구 藥令市 연계와 潛商 활동 왜관 개시무역에서 수출입 물품은 1740~50년대를 기점으로 변하였다. 특히 1760년대 이후 수출품은 인삼과 백사ㆍ비단에서 약재[黃芩]와 마른 해삼으로, 수입품은 은에서 구리로 변하였다.53) 19세기에는 소가죽, 우각 조, 황금, 마른해삼이 수출품 4품목으로 정착되었다.54) 수입품은 구리 외 에 黃連ㆍ陳皮ㆍ靑皮ㆍ鐵物[鍮鑞] 등이 중요하였다.55) 마른해삼은 통영 지역과 유통권을 형성하고 있었다.56) 1850년대에 館商(왜관상인) 尹庸權 은 수입한 鍮鑞을 대구에 가서 팔려고 했다.57) 19세기 전반에 도중 朴昌 壽, 崔周翰, 鄭子範[자범은 字]은 우피, 우각조, 인삼, 황금 등 수출품 확보 를 위해서 전주, 대구, 서울 등을 무대로 상업활동을 하였다.58) 이처럼 도중들은 국내 시장과의 연계 속에서 왜관 개시무역을 하였다. 1864년의 수출품 가운데는 특히 약재가 많은 것이 주목된다. 1864년에도 도중 子伍 鄭書房 은 大丘市와의 연계 속에서 黃芩 등 약재를 무역하였 다.59) 이 대구시는 바로 대구 藥令市를 가리킨다.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서는 봄과 가을, 1년에 2번 약령시가 열렸다. 왜관 개시와의 약령시와의 유 통권을 2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경상도 청도 幼學 成佑文이 인삼을 사기당한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 자. 성우문은 1841년 2월 인삼 14근을 사서 동래에 가서 팔았다. 2근은 80 냥을 받고 팔고, 나머지 인삼은 싸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 龜浦에 서 동래에 사는 趙安之, 양산에 사는 李君一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을 會計 53) 森晉一郞, 近世後期對馬藩日朝貿易の展開-安永年間の私貿易を中心として- ꡔ史學ꡕ 56-3, 1986, 145쪽. 54) 田代和生, 앞의 논문, 1989 ; 앞의 책, ) 김동철, 19세기 우피무역과 동래상인 ꡔ한국문화연구ꡕ 6, 1993b, 422쪽. 56) 김동철,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ꡔ민족문화ꡕ 21, 1998, 73쪽. 57) 김동철, 앞의 논문, 2014, 251~252쪽. 58) 정성일, 앞의 논문, 2015a, 149~151ㆍ167쪽 ; 앞의 논문, 2015b, 105~108ㆍ 136쪽. 59) ꡔ(一代官)每日記ꡕ 1864년 2월 5일.

324 324 지역과 역사 38호 所 差人이라고 소개하였다. 이들은 왜관 훈도가 좋은 인삼을 구하는 중인 데, 자신들이 居間으로 팔아 주겠다고 유인하였다. 성우문은 두 사람을 따 라 東萊 西門 밖으로 갔다. 두 사람은 精舍에 들어가자고 하면서, 자신들 집 인데, 인삼과 돈은 樻中에 두고 자물쇠를 가지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성우 문이 그 말을 믿고 封置한 후 저녁밥을 사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물쇠는 부서지고 인삼과 돈은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그 精舍는 동래부 黃玉汝 집 이었다. 그는 스스로 窩主가 되어 집을 빌려주고 사람을 현혹시켰다. 趙安 之, 李君一, 金光佑는 모두 그 당이었다. 성우문은 그들에게 이끌려 대구 약 령시까지 갔다. 黃玉汝는 趙安之와 한 통속이었으므로, 대구 中營將(겸 討 捕使)은 窩主 黃玉汝와 趙安之를 즉시 잡아 들여 조사한 후에 순영에 보고 하도록 지시하였다.60) 이처럼 황옥여와 조안지는 성우문을 유인하여 인삼 7근과 돈 8貫을 탈취 하였다. 대구 감영에서는 두 사람을 체포하여 조사하였다. 그런데 조안지의 진술은 성우문의 진술과 달랐다. 조안지는 청도 朴龜海에게서 50여 냥을 받 을 것이 있었다. 박구해가 인삼을 팔러 오자, 빚을 받기 위해 그 인삼을 잡 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우문이 정소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 다. 박해구를 조사한 결과, 그는 조안지에게 부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 로 인삼 7근은 조안지에게 지급하고, 黃玉汝와 趙安之를 대구감영에 잡아 올리는 일도 취소되었다.61) 위에서 본 것처럼, 黃玉汝와 趙安之는 무죄로 협의에서 벗어났다. 성우문 이 인삼과 돈을 사기당한 이 사건의 진위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사건에 서 주목되는 것은 조안지가 동래부 회계소 차인이며, 황옥여가 窩主 이고, 訓導가 좋은 인삼을 구하며, 대구 약령시와 관계되어 대구 中 營에서 조사를 지시한 점이다. 그런데 <표 1>을 보면 1849년 도중 7명, 1850년 도중 8명 가운데 玉汝 黃書房 이 있다. 玉汝 黃書房은 1849년(헌종 15) 10월 23일 도중에 처음 60) ꡔ刑房來報關錄ꡕ 임인(1842) 3월 7일(ꡔ各司謄錄ꡕ 13, 569~570쪽). 61) ꡔ刑房來報關錄ꡕ 임인(1842) 4월 17일(ꡔ各司謄錄ꡕ 13, 571~572쪽).

325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25 참여하였다.62) 인삼 사기 사건과 관련된 와주 黃玉汝도 동래에 살고 있었 다. 이 黃玉汝 의 玉汝 가 이름이 아니고 字라면,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일 가 능성이 크다. 물론 동일 인물이라도 사건은 도중이 되기 전의 일이다. 당시 왜관의 인삼무역이 대구 약령시와 연계망을 형성하고 있은 것은 틀림없다. 이는 다음 잠상 활동에서 잘 알 수 있다. 둘째, 대구감영 武任의 潛商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왜관 개시에서 잠 상하는 폐단이 증가하자 1842년 1월 무렵, 경상감영에서는 동래부에 잠상 을 엄금하는 공문을 보냈다. 왜관 부근 마을[倭舘傍近之里]의 무뢰배[頑濫 之類]가 법을 어기고 潛商하는 폐단이 성행하여, 대구 藥令市에서 매매가 성행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동래부에서는 官隸를 대구 약령시에 보내어 잠 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관예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구부 서문 밖에 사는 韓把摠[韓殷周]이 倭黃連 5근, 李聖達의 差人 김 아무개가 倭紅紬 2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은밀한 곳에 물건을 숨겨두 고, 潛賣 물품이니, 돈을 가지고 사가라고 했다. 그래서 동래부 관예가 10 냥을 선금으로 준 후, 잠상을 체포하고 장물을 압수하였다. 잠상들은 잠물 이 압수된 후에는 관예에게 뇌물을 쓰면서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倭黃連 5근과 倭紅紬 2필은 물품 수량은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잠상한 죄는 용 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일본 물품은 그들이 轉買한 것이며,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동래부는 대구부에 공문을 보내어 韓파총, 金 아무개 두 사람을 압송할 것을 요청하였다.63) 대구부는 동래부의 공문에 따라 韓殷周[韓把摠]와 김아무개를 체포하였 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성달의 차인은 김아무개가 아니고, 박아무개였다. 한은주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840년(헌종 6, 경자) 10월 약령시 때, 그의 생질이 대구부 醫生이었다. 이성달의 차인 박아무개가 倭黃連 6근을 사기 를 청하여 買入한 후, 官用에 조달하고 5근이 남았다. 1842년(헌종 8) 2월 약령시에서 박아무개에게 지급한 후 時價에 따라 발매하도록 한 것이다. 박 62) 정성일, 앞의 책, 2000, 163쪽. 63) ꡔ刑房來報關錄ꡕ 임인(1842) 2월 18일(ꡔ各司謄錄ꡕ 13, 569쪽).

326 326 지역과 역사 38호 아무개의 진술에 의하면, 황련과 홍주 등은 동래 사람에게서 구입한 것이었 다. 황련은 다시 韓殷周에게 轉賣하였다. 처음 황련과 홍주를 판 사람은 아 직도 동래부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은주는 당시 대구감영의 紙所監官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구부에서는 한은주를 잡아 보내기가 어려우므로, 이성달 차인[박아무개]만 잡아 보낸다고 하였다.64) 황련은 19세기의 중요한 수입품이다. 왜관을 통해 수입된 왜황련이 대구 약령시에서 매매되고 있었다. 차인이 단독으로 동래에서 황련을 구입한 것 인지, 아니면 물주 이성달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황련 을 약령시에서 산 韓殷周는 대구감영의 무임[파총]이고,65) 그의 생질은 약 령시 때 醫生인 점이 주목된다. 1840년 10월 약령시에서 산 왜황련을 보관 하고 있다가, 1842년 2월 약령시 때 다시 판 것이다. 황련의 시가 상승을 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련의 유통과 관련하여 동래 상인-대구 상인[물 주와 차인]-대구 무임과 醫生 등의 연계망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생 각한다. Ⅲ. 도중의 무임직 경력과 활동 1. 무임직 경력 대마도 종가문서에는 亨哉朴書房 이나 聖範洪千摠 처럼, 여러 형태의 도 중 호칭이 보인다. 즉 字+姓+呼稱 의 순서이다. 즉 도중의 본명을 적지 않고, 字나 호칭을 적는 것이 관행이었다. 정성일이 정리한 도중 명단에 보 64) ꡔ刑房來報關錄ꡕ 임인(1842) 2월 22일(ꡔ各司謄錄ꡕ 13, 569~570쪽). 65) 경복궁 중건 때 願納錢 낸 사람의 포상자 명단에 1만 냥을 낸 大邱 前僉使 韓殷 周 가 있다(ꡔ龍湖閒錄ꡕ, 고종 3(1866) 10월 1일). 그 후 軍物 修繕 때 의연금 을 낸 공으로 수령 최우선 후보가 되어, 사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환으로 부 임하지 못하였다(ꡔ승정원일기ꡕ, 고종 7년(1870) 3월 2일, 6월 5일). 전첨사 한 은주의 경제력을 알 수 있다. 파총을 역임한 한은주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고 본다.

327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27 면, 同知, 僉知/書房, 先達/五衛將/主簿/知發, 知敎/別將, 行首, 兵房, 把 摠, 百摠, 千摠, 中軍 등 다양한 호칭이 보인다. 知發은 1863년 永汝朴知發, 知敎는 1864년 華伯李知敎 뿐이다.66) 知 發, 知敎는 흔히 쓰는 호칭은 아니므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別將, 行首, 兵房, 把摠, 百摠, 千摠, 中軍 은 武廳의 武任 호칭으로, 동래부 무임의 호 칭과 일치한다. 동래부 최고 무임직인 中軍을 호칭으로 쓴 도중은 1848년 五元朴中軍 과 1849년 聖愚朴中軍 의 두 명뿐이다. 전자는 朴昌壽로 밝혀 졌으나, 후자는 아직 본명을 알 수 없다. 1864년 도중으로 활동한 8~9명 가운데 亨哉朴書房, 聖範洪千摠, 華 伯李知敎 세 사람의 무임 경력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자, 본관, 생년 월일은 동래기영회 소장의 고문서 ꡔ耆英稧案ꡕ을 참고하였다.67) <표 3> 도중의 동래부 무임 경력 實名 字 宗家文書 도중 호칭 본관 생년월일 종가문서 도중 활동 시기 기영계(동래기영회) 가입 將官廳 中軍 千摠 把摠 哨官 作隊廳 別將 百摠 別軍官廳 行首 兵房 軍器監官 別軍官 帶率軍官 敎鍊廳 旗知彀旗手哨官 洪在昇 聖範 聖範洪千摠 南陽 ~ 朴時奭 亨哉 亨哉朴書房 密陽 ~ 李塤 和伯 華伯李知敎 碧珍 (鄭孝根) 殷若 慶州 ) 도중 朴永汝는 1863년 10월에 病死하였다(정성일, 앞의 논문, 2015a, 140쪽). 67) 추월영 엮음, 앞의 책, 1996, 129~130쪽. 단 이 책에는 洪在昇 자는 누락되어 있다.

328 328 지역과 역사 38호 別騎衛廳 守堞廳 執事廳 運韜堂 府廳 敎鍊官 別將 百摠 正 領 領下 別將 百摠 執事 行首執事 旗知彀官 旗牌官 府廳先生 (洪載昇) * 는 역임한 무임을 표기한 것이다. 무임직은 손숙경ㆍ이훈상, ꡔ무임 총람ꡕ을 참고하였다. 단 정효근은 1864년 종가문서에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鄭孝根은 <표 2>를 보면 ꡔ동래부상고안ꡕ에서 박시석 대신 추가된 사람이 다. 이들 간의 상관성을 살펴보기 위해 추가하였다. 홍재승의 무임 경력에 서 千摠은 보이지 않는다. 김동철과 정성일에 의해 본명이 확인된 도중 黃 道源, 宋光洛, 崔周翰, 朴昌壽의 경우, 종가문서의 호칭과 동래부 무임의 경력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특히 박창수는 종가문서에서 1830년에는 朴別將, 1848년에는 朴中軍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런 호칭의 변화도 일 치한다.68) 군사 요충지인 동래부에는 여러 무청이 존재하였다. 중군청, 장관청, 군 관청, 교련청, 수성청(수첩청), 별기위청, 별무사청, 도훈도청의 8청이 기 본이었다. 동래지역 군대의 실제 지휘관이라 할 中軍은 동래 지역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약 220년간 23개 성씨에 175명의 중군이 확인되고 있다.69) <표 3>을 보면 도중 3명은 모두 중군을 역임하였다. ꡔ將官廳 先生案ꡕ에는 중군을 역임한 175명 가운데, 박시석(135)-홍재승(138)-이훈(156)의 순 68) 김동철, 앞의 논문, 2014, 237~238쪽. 69) 민선희, 조선후기 동래의 향반사회와 무청-조선후기 향반사회의 지배구조와 사 회이동 문제에 대한 일시론- ꡔ역사학보ꡕ 139, 1993, 102~122쪽. 손숙경, 조선후기 동래 지역 무임집단의 조직과 운영 ꡔ사회와 역사ꡕ 74, 2007, 259~ 265쪽.

329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29 서로 기재되어 있다.70) 그런데 도중은 홍재승-박시석-이훈의 순서로 활동 했다. 무임 경력 등 동래부 내에서의 위상이 도중이 되는데 유리하게 작용 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부사 김석(1859.1~1859.6)이 쓴 ꡔ萊府日記ꡕ에는 1859년(철종 10, 기미) 당시 鄕武作廳 時任 人員秩 이 수록되어 있다. 향청ㆍ무청ㆍ작청 3 청의 시임[현재] 직책과 명단이다. 李塤은 知彀官, 金漢明은 親兵衛別將, 黃元瓚은 守城別將이었다.71) <표 3>을 보면 운도당의 직임에도 기지구관 이 있지만, 李塤이 교련청의 旗知彀旗手哨官 을 역임했으므로, 1859년 당 시 맡은 지구관은 교련청의 旗知彀官인 것 같다. 김한명은 1874, 1875년 에, 황원찬은 1875년에 동래상고로 활동하였다(<표 2> 참조). 한편 1880년(고종 17) 10월 28일에 서울에서 武科 殿試가 있었다. 과거 시험에 직접 참가하도록 지시를 받은 492명 가운데 46명이 이유 없이 응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당 지역의 감영ㆍ병영ㆍ수영에 關文을 보내서, 이 유를 알아본 다음 보고하도록 하였다. 46명 중에는 경상좌수영 別砲手 崔景 昊, 동래 別騎衛 洪在昇, 별기위 金瑢畦도 포함되어 있었다.72) <표 3>의 무임 경력 등과 비교해 보아, 武科에 가지 않은 동래 별기위 홍재승 은 도중 洪在昇[聖範]이 틀림없다. 비록 무과에 가지는 않았지만, 도중 홍재승이 개 항 이후에 무과를 시도한 점이 주목된다. 8도제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후기 지방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1895년 5월에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공포하였다. 337개 군을 23부 아래에 分屬시켰다. 23부에는 동래부도 포함 되었다. 종전의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부가 되면서, 동래부사도 동래관찰사 70) 손숙경ㆍ이훈상, 앞의 책, 2009(영인 부분), 8쪽. 괄호 안의 번호는 175명 가 운데 몇 번째인가를 가리킨다. 71) 김석 지음, 정경주 역, ꡔ국역 萊府日記ꡕ, 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95, 83~85쪽. 72) ꡔ승정원일기ꡕ, 고종 17년(1880) 12월 16일 ; 고종 18년 4월 8일. 金瑢畦(1825~?) 는 장관청 천총, 작대청 별장, 수첩청 별장과 부청선생[상급 향리]을 역임하였 다. 별기위청 무임직을 역임한 경력은 확인할 수 없다. 1883년 5월에 기영계에 입회하였다.

330 330 지역과 역사 38호 가 되었다.73) 1895년 7월에는 각종 營鎭의 폐지 등 군사제도를 전면 개혁 하였다. 동래는 獨鎭 이므로 다양한 武廳과 이를 기반으로 武任들이 하나의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獨鎭이 해체되면서 武 廳도 해체되었다. 군사제도, 지방제도의 개혁은 무임층과 이서층의 존립기 반은 물론 사회질서나 인적 연계망(network)의 해체로 이어졌다.74) 1895년 8월경에는 ꡔ中軍秩名簿ꡕ가 작성되었다. 동래관찰사가 새로 중군 을 임명할 목적으로 종전의 중군 명부인 ꡔ중군선생안ꡕ에서 가려 뽑은 명단 이다. 李雨慶-姜渭俊-(3명 누락)-李雨成-(12명 누락, 朴時奭 포함)-洪在 昇-(5명 누락)-鄭漢榮-辛明錄-(1명 누락)-金啓黙-金瑢珪-(1명 누락)-金 漢明-李學玖-李載熲-金仁珪-秋斗甲 의 순서로 13명이 수록되어 있다. 마 지막 2명은 ꡔ중군선생안ꡕ에는 등재되지 않았다.75) ꡔ중군선생안ꡕ에는 이재 경 다음에 秋斗永-金元珪-李晦周-李塤 등 25명이 추가되어 있다 년 무과 전시에 응시했던 金瑢畦, 홍재승, 商賈 출신 金漢明도 수록되어 있 다. 홍재승, 박시석, 이훈 세 사람의 도중은 물론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곽서봉, 정효근, 김한명 등 동래상고가 중군을 비롯한 상급 무임직을 역임 하였다.76) 2. 도중 출신의 무임직 활동 1) 동래읍성 改修役 담당 18~19세기에 동래읍성은 4차례에 걸쳐 개축과 수리를 하였다. 1731년 (영조 7) 크게 개축한 이후 1859년(철종 10), 1870년(고종 7), 1892년(고 종 29)에 읍성을 수리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각각 ꡔ동래부축성등록ꡕ, ꡔ성역급각공해중수기ꡕ, ꡔ내부일기ꡕ, ꡔ공문일록ꡕ 등 자료가 남아 있다.77) 73) 이훈상, 1895년 전후 동래의 행정 문서들과 그 특성 ꡔ항도부산ꡕ 26, ) 이훈상, 갑오경장기 지방제도와 군사제도의 개혁 그리고 지역 사회의 대응-동 래 관찰부 문서들에 기초한 사례 연구- ꡔ영남학ꡕ 20, 2011, 319~325쪽. 75) 이훈상, 위의 논문, 341쪽. 76) 김동철, 앞의 논문, 1993a, 136~138쪽.

331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31 이들 자료에는 축성역과 관련하여 그 업무를 맡은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59년(철종 10) 축성역이다. 1859년 5월 10일 작성된 城役時 牌將及各樣雜費 所入下記 를 보면, 읍성을 전체 7구역으로 나누고 각각 3 명의 감독관을 두었다. 이 가운데 동래상고 출신자와 관련이 있는 부분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4> 1859년 동래읍성 축성역 패장 구분 구역 都牌將 1牌將 2牌將 수성백총 어유소 2所 西門-暗門 행수군관 이의철 친병위군관 金漢明 5소 人生門-曲城 천총 어정우 별기위백총 鄭孝根 유성창 6소 曲城-東門 수성별장 黃元瓚 기구관 정한봉 초관 김성복 * 출전: ꡔ국역 萊府日記ꡕ, 62~64쪽. 한자로 표기된 인명이 동래상고 출신임. <표 2>에서 정리한 것처럼, 鄭孝根은 1871년( 추가), 1874년, 1875년의 ꡔ동래부상고안ꡕ, 金漢明은 1874년, 1875년의 ꡔ동래부상고안ꡕ, 黃元瓚은 1874년, 1875년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되었다. 정효근은 5소 1 패장, 김한명은 2소 1패장, 황원찬은 6소 도패장을 담당하였다. 현존하는 ꡔ동래부상고안ꡕ은 1871~1875년분이다. 따라서 1859년 당시 세 사람이 동래상고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축성역에서 감독관을 맡은 무임들과 동 래상고와의 관련성 부분만 강조하여 두고 싶다. 둘째, 1870년(고종 7) 축성역이다. 동래부사 鄭顯德(1867.6~1874.1) 때인 1869년 동헌을 비롯한 관청 건물을 수리하였다. 다음해 1870년 12월 부터 동래읍성 수축에 들어갔다. 축성역은 都監董과 都責應都監을 지휘자 로 하여 동문, 서문, 暗門, 북문, 人生門, 남문의 6개 門樓를 수리하는 일 과, 제1雉부터 제30雉까지 30개 雉城을 나누어 수리하는 일로 진행되었 다.78) 辛未(1871)正月十五日 六門甕城雉城監役 抄記 (이하 抄記 로 77) 윤용출,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ꡔ지역과 역사ꡕ 21, ) 윤용출, 위의 논문, 200쪽 ; ꡔ城役及各公廨重修記ꡕ 해제 ꡔ항도부산ꡕ 24,

332 332 지역과 역사 38호 약칭)는 都監董과 都責應都監, 책응도감 이하, 各門ㆍ甕城ㆍ雉城別 都監 ㆍ監官ㆍ色吏ㆍ牌將의 名單이다. 동래지역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 다. 都監董은 前오위장 洪祐人, 都責應都監은 좌수 文秉喜, 책응도감은 郭 瑞鳳이 맡았다.79) 곽서봉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874년, 1875년의 ꡔ동래 부상고안ꡕ에 등재되었으며, 도중 李塤의 사돈의 사돈 이었다. 抄記 의 <三十雉城監役秩>을 보면 제28치성의 감역은 監官 李塤, 牌將 李重植, 色吏 李學玖이다. 즉 도중 출신인 이훈이 제28치성의 감관을 맡았 다. 그리고 監董各人姓名成冊 은 감영에 보고하기 위하여 抄記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인데, 이 성책을 보면 西暗門甕城及五雉城 의 別看役은 前萬 戶 朴采正, 監董은 閒良 李雨成, 監官은 閒良 洪在昇이다. 홍재승은 1817 년, 이우성은 1816년생이다. 둘다 閒良 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재승은 1871년 당시 64세이다. 도중 출신인 홍재승이 감관을 맡고 있었다. 셋째, 1892년(고종 29) 축성역이다. 동래부사 李鎬性(1891.7~1893.6) 때인 1892년 2월 13일부터 4월 16일까지 읍성을 고치는 성역을 하였다. 2 월 12일 성역 開基祭가 열렸다. 축성역을 맡은 監官과 牌將의 직임과 이름 이 정리되어 있다. 行首執事 이훈은 北門樓 감관을 맡았다.80) 행수집사는 <표 3>을 보면 운도당의 수임직이므로, 이훈이 이 무임을 역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후 축성의 감동역을 맡은 사람의 명단을 수정해서 경상감 영에 보고하였다. 명단은 成冊抄 에 정리되어 있다. 명단을 보면 北門樓의 別監董은 出身 李德水, 감관은 출신 具澤龍, 閒良 李塤이다.81) 선후 시기 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돈 관계를 맺은 이훈과 구택룡이 같은 감관을 맡고 있었다. 축성역을 마친 후 도감동인 전 오위장 李東杓 등에 대한 포상이 있 었다. 看役을 맡은 구택룡과 이훈도 상을 받았다.82) 79) 80) 81) 82) 2008, 306쪽. 윤용출, 위의 논문, 2008, 307쪽. ꡔ公文日錄ꡕ 임진(1892, 고종 29) 2월(ꡔ各司謄錄ꡕ 17, 532쪽). ꡔ公文日錄ꡕ 임진(1892, 고종 29) 4월(ꡔ各司謄錄ꡕ 17, 539쪽). ꡔ公文日錄ꡕ 임진(1892, 고종 29) 7월 6일 巡甘(ꡔ各司謄錄ꡕ 17, 542쪽). ꡔ禮 房色來報關錄ꡕ 동년 7월 4일 巡甘 城役請賞各人蒙允事關文 (ꡔ各司謄錄ꡕ 13,

333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33 종가문서에 보이는 도중 가운데 이미 본명이 확인된 黃道源과 崔周翰은 도중 활동에서 물러난 후, 최주한은 1851년 초량왜관의 서관 중대청과 1854년 동관 館守倭家 수리공사 때 監役將校를 맡았다. 황도원은 1858년 동관 개시대청과 서관 서대청 수리공사의 감역[看役]장교를 맡았다.83) 이 와 유사한 형태로 도중 홍재승이나 이훈도 동래읍성 축성역 때 감독을 맡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도중 출신이기보다는 중군 등 최고 무임 출신 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 宋公壇 등의 수리역과 제사 담당 송공단은 송상현, 정발, 윤흥신 등 임진왜란 때 동래지역 전투에서 순절 한 사람을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송공단 담장이 무너지고 碑面 글씨가 마모 되어서, 監色을 정하여 수리하도록 하였다. 1892년(고종 29, 임진)은 임진 왜란 5回甲[300년]되는 의미있는 해다. 監官은 中軍 鄭孝根, 色吏는 부이 방 尹昌鎰, 공방색 李琪瓚이었다.84) 4월 14일은 송공단 入祭日이다. 鄕廳 ㆍ武廳ㆍ作廳의 3廳에서 제례를 주관하였다. 初獻官은 座首 幼學 朴栓海, 아헌관은 中軍 折衝 鄭孝根, 삼헌관은 行首軍官 가선 辛明錄, 祭色은 宋泰 俊이 맡았다.85) 滴翠亭은 동래읍성의 西將臺다. 중건한 기와가 세월이 오 래되어 무너질 지경이었다. 1892년 동래읍성 수리를 마칠 즈음에 이를 보 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적취정 기와가 깨어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그 이 유를 몰라 神變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제관을 별도로 정하여 산신에게 경 건하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 제관으로 중군 鄭孝根이 임명되었다.86) 박시석을 대신하여 1871년의 ꡔ동래부상고안ꡕ에 등재된 정효근이 중군으 로서 송공단 수리의 감관을 담당하거나, 관련 제사에서 제관으로 활동하였다. 83) 84) 85) 86) 533쪽). 김동철, 앞의 논문, 2014, 241~243쪽. ꡔ公文日錄ꡕ 임진(1892, 고종 29) 2월(ꡔ各司謄錄ꡕ 17, 532쪽). ꡔ公文日錄ꡕ 임진(1892, 고종 29) 4월(ꡔ各司謄錄ꡕ 17, 537쪽). ꡔ公文日錄ꡕ 임진(1892, 고종 29) 4월(ꡔ各司謄錄ꡕ 17, 536~537쪽).

334 334 지역과 역사 38호 3) 1895년 군진 재물조사 1895년 군사제도, 지방제도 개혁으로 무임과 이서들은 그 존립기반마저 무너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여 새로운 엘리트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1895년(고종 32) 8월 8일 제정 된 巡檢採用規則 에 따라, 동래부에서는 9월 10일 순검을 선발하였다. 순 검은 吏胥와 將校 두 집단에서만 선발하였다.87) 1895년 8월에 만든 ꡔ읍내 면 각동동장 성명성책ꡕ은 면장과 23개 동장의 이름이다.88) 면장 辛明錄과 13개 동장이 무임이나 이서 출신이다. 14명 가운데 辛明錄(읍내면장), 金 元珪(安民洞長), 白載昊(新樂洞長), 宋商宗(安樂洞長), 李在[載]穎(富嘉 洞長), 尹益重(槐井洞長)의 6명은 중군 경력자다. 무임이나 이서 경력은 없 지만 梵魚洞長이 된 崔定洵은 도중 崔周翰의 손자로, 1875년의 ꡔ東萊府廛 人案ꡕ에 등재된 자다.89) 한편 1895년 8월 4일 작성된 ꡔ營各鎭堡各樣錢穀什物査實監色抄ꡕ는 수 영, 부산진, 다대진, 영도진, 금정진 등 동래 관내에 있는 수영과 모든 군진 을 대상으로, 전곡과 什物[각종 비품]을 조사한 감색 명단이다.90) 이를 정 리하면 <표 5>와 같다. <표 5> 1895년 동래 관내 營鎭의 財物 조사자 營鎭 水營 釜山鎭 多大鎭 影島鎭 金井鎭 監官 秋斗甲 (中軍) 鄭漢榮 (行首執事) 姜璋會 (千摠) 李塤 (親兵衛別將) 金仁淑 (旗鼓官) 李義賢(首戶長) 秋秉壽 宋尙弼 文喜潞 朴圭先 兪致殷 李存昱(代 文亨潞) 宋太奎 鄭鍾綸 朴興祚 色吏 李義謙 * 출전: 이훈상, 앞의 논문, 2011, 380~381쪽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임. 87) 88) 89) 90) 이훈상, 앞의 논문, 2011, 343쪽. 이훈상, 위의 논문, 370~371쪽 활자본 사료 참조. 崔定洵에 대해서는 김동철, 앞의 논문, 2014, 253~254쪽 참조. 이훈상, 앞의 논문, 2011, 351~352쪽.

335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35 재물조사를 담당한 조사자[감관, 색리]는 동래의 무임, 이서들이다. 감관 은 무임이, 실무는 이서가 맡았다. 수영의 재물조사는 중군이 감관을 맡고, 색리도 다른 軍鎭보다 1명 많다. 감관들은 군진의 位格에 상응하여 선정되 었다.91) 영도진의 조사는 친병위 별장인 李塤이 감관이었다. 동래지역의 각종 읍지에 정리된 武廳 가운데 親兵衛廳은 1868년 ꡔ동래부사례ꡕ에만 보 이고, 1899년 ꡔ동래부사례ꡕ에는 보이지 않는다. 친병은 지방관이 직접 거 느리는 직속군이다. 친병위청은 일시 존재했다가 중도에 폐지된 것으로 보 인다.92) 도중 출신인 이훈이 1895년 영도진 재물조사의 책임자를 맡은 점 이 주목된다. Ⅳ. 도중 출신의 耆英會 활동 <표 3>에서 정리한 것처럼, 홍재승과 박시석은 1876년 3월에, 이훈은 1891년 9월에 기영계(기영회)에 가입하였다. 이들 도중 외에도 ꡔ동래부상 고안ꡕ에 등재된 다수의 동래상인도 가입하였다. 이들이 개항 이후에 참가한 사회적 활동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국채보상운동과 東萊府國債補償一心會 설립에 관한 활동이다 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일본의 借款 공세가 본격화되었다. 그 후 1907년 2월 대구를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부산 지역에 서는 釜山港商務會가 斷煙同盟을 결성하였으며, 安舜克, 吳仁奎, 林枝春, 玄景振 등 30여 명이 의연금을 내었다.93) 동래지역에서는 1907년(광무 11) 3월 東萊府國債補償一心會 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국채 1,300만원 보상을 목적으로 기부금 모집, 독려를 위한 거리 연설, 모금장소 설치 등 활 91) 이훈상, 위의 논문, 350~352쪽. 92) 민선희, 앞의 논문, 1993, 103~104쪽. 93) ꡔ대한매일신보ꡕ, 박용숙ㆍ김동철, 개항기의 부산 ꡔ부산시사ꡕ 1, 1989, 917~918쪽. 김승, 앞의 논문, 2000, 79~82쪽.

336 336 지역과 역사 38호 동을 계획하였다. 발기인은 文秉喜, 金紋柱, 宋商宗, 崔崙河, 吳悳根, 李 相肵, 尹轍炳, 秋斗永, 鄭漢楨, 文泰演, 李塤, 金鎭永, 辛明錄, 金元淑 14명 이다.94) 14명에 李塤도 포함되어 있다. 이훈, 송상종, 최윤하, 이상흔, 추 두영, 정한정, 신명록 7명은 기영계(기영회) 회원이다.95) 도중 출신 이훈 과 동래상고 출신 최윤하가 포함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96) 둘째, 수면노소신사총회와 耆英會學校 설립 활동이다. 1907년(광무 11) 1월 동래부 首面(읍내면)의 老少(老小) 紳士들은 총회를 개최하여 학교 설 립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 내용은 首面老小(老少)紳士總會完議 에 잘 나 타나 있다. 기영회 회원이 중심이었다. 주요 내용은 (고등)학교는 前 守 城廳에 둔다. 교명은 耆英會學校 라 한다. 田畓 1,200두락을 학교에 넘겨 교육 자본으로 삼는다. 기영회가 校主가 되어 학교경비를 주관한 다. 기영회 내에 學務會를 두어 校務를 수시로 감독한다. 개양학교가 폐지된 후 그 학생을 수용하여 함께 교육한다 등이다. 이 완의에는 104명의 이름이 적힌 首席會員座目 이 있다.97) 朴時奭(1825년생), 宋商宗(1828년), 具德龍(1830년), 金尙禧(1830년), 趙在禧(1831년), 崔崙河(1828년), 李奇馥(1832년), 安光洙(1831년), 李 塤(1932년), 愼宗禧(1832년) 등 104명이다. 도중 출신 박시석이 1번째인 점이 주목된다. 아마 최고령이기 때문인 듯하다. 도중 출신 이훈은 9번째다. 이훈의 아들 이응덕, 이훈의 사돈 구택룡, 이훈의 사돈 박시준의 아들 朴滿 瑛, 도중 최주한의 손자이며 동래상인 출신인 崔定洵도 104명에 포함되어 있다. 104명에는 기영계(동래기영회) 회원이 망라되어 있다. 한편 1908년 94) ꡔ황성신문ꡕ, (음 1907년 1월 27일). ꡔ대한매일신보ꡕ, 김승, 위의 논문, 73~79쪽.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인명 표기에는 약간 차 이가 있다. 박용숙ㆍ김동철, 위의 글, 898~899쪽의 인명 표기를 수정하였다. 95) 김승, 위의 논문, 77쪽. 96) 김동철, 앞의 논문, 1993a, 134~140쪽. 최윤하는 1875년의 ꡔ동래부상고안ꡕ 에 등재되었다. 97) 추월영 엮음, 앞의 책, 1996, 173~185쪽. 박용숙ㆍ김동철, 앞의 글, 1989, 908~911쪽. 김승, 앞의 논문, 2000, 83~87쪽.

337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37 6월에는 동래부수면사립노동야학교 가 설립되었다. 구택룡은 학교 설립에 찬동하여 후원금 10환을 기부하였다.98) 무임집단과 향리집단의 노령 연령 집단들이 1846년 기영계라는 친목단 체를 형성하였다. 양자가 서로 협조 체제를 구축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더 욱 돈독해졌다. 이들은 한말에 근대식 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던 것이다.99) 셋째, 私立東萊東明學校 설립 활동이다. 1907년 12월 동래 首面[읍내 면]에 사는 宋商宗(嘉善), 朴苾彩(전 박사) 등 13명이 동래부윤 서리에게 낸 청원서를 보면, 開揚學校(1899년 설립)와 三樂學校(1906년 설립)를 합 하여 東明學校 를 설립할 것을 청원하므로 이를 인가해 달라고 요청하였 다.100) 首面老小(老少)紳士總會完議 (1907.1)에서는 耆英會學校가 개양학교 를 흡수한다고 하였는데, 이 청원서에는 개양학교와 삼락학교를 통합하여 동명학교를 만든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락학교와 기영회학교의 관계가 문제 가 된다. 양자가 같은 학교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시기적 선후가 있는지 여 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동명학교가 설립된 이후에도 기영회학교 라는 교명을 쓰고 있은 것 같다. 1910년(융희 4) 5월 동래부윤은 舊邑東明學校 에 訓令을 보냈다. 학교를 東明 으로 승인했는데도 耆英 이란 교명을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耆英會學校 扁額을 즉시 철거하여 동래부로 보내고 東明學校 현판을 걸고, 그 시행 내용을 즉시 보고하도록 하였다.101) 즉 기 영회학교에서 동명학교로 교명이 바뀐 것이다.102) 그런데 1908년 사립학 교령, 1911년 사립학교규칙, 1915년 개정사립학교규칙 등에 따라 여러 차 98) ꡔ대한매일신보ꡕ, 박용숙ㆍ김동철, 위의 글, 917~918쪽. 99) 이훈상, 지역사, 지역사의 특성, 그리고 지역사회의 정체성 만들기 ꡔ영남학ꡕ 16, 2009, 438쪽. 100)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사립동래동명학교편-ꡕ, 부산대 한국문화연구소, 1993, 31~38쪽. 김석희, 한말 동래부 사립동명학교의 설립과 운영 ꡔ한국문화연구ꡕ 4, ) ꡔ各面洞訓令存案ꡕ 융희 4년(1910) 5월 19일 起案(ꡔ各司謄錄ꡕ 50, 66~67쪽). 102) 동명학교는 首面私立東明學校, 首面東明學校, 面立東明學校, 面立東萊府首面 東明學校, 東萊府首面東明學校, 東萊東明學校 등 다양한 교명으로 불리었다.

338 338 지역과 역사 38호 례 설립인가를 다시 받았다. 동명학교는 1916년 10월 5일 사립동래고등보 통학교 가 되었다.103) 이 학교 설립을 주도한 것은 기영회다. 도중 출신 李塤도 사립동래동명학 교는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학교 설립과 관련한 이훈의 활동을 시기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년 3월 30일: 기영회 소유 논 1,200두락과 돈 486圜을 사립동명학교 의 기본재산과 적립금으로 출자함을 증명하는 증명서. 기영회 회장 宋商宗 과 회원 李塤, 朴苾彩, 李相昕, 秋斗定, 金元淑, 鄭道容, 朴圭錫 8명.104) 1910년 1월 29일: 동래온천을 지금부터 20년 이상 기한으로 本校에 貸付 하는 것을 대구재무감독국장에게 청원하는 청원서. 사립동래동명학교 設立 者 李塤, 設立者 具澤龍, 교장 李光昱, 감독 金秉圭 4명.105) ꡔ사립동래동명학교학칙ꡕ의 학교연혁 을 보면, 학교 확장안에 따라 1912 년 10월에 교사 신축공사를 착수하였다. 기영회원 李塤, 秋斗定, 趙正麟, 李相昕, 具澤龍이 監董을 맡았다.106) 이훈의 아들 이응덕은 1911~1912년에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기영회가 중심이 되어 1914년 6월 기숙사 건축을 위해 기부금을 모집하는 일을 실시 하였을 때, 李應悳(동래군 동래면 복천동)은 사립동래동명학교 확장위원 대표 역할을 하였다.107) 손자 李環은 동명학교 졸업 후, 1914~1915년 임 시교원(수학 담당), 1916년 교원(수학)이었다.108) 1919년 3ㆍ1운동 때는 교사로서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였다. 동래지역 최초의 청년단체인 동래구 락부에서 1921년 무렵 활동하였다.109) 이훈 집안은 李塤(설립자) 李應 悳(교장) 李環(교사)의 3대에 걸쳐, 그리고 사돈 具澤龍(설립자, 교장)도 103) 104) 105) 106) 107) 108) 109) 박용숙ㆍ김동철, 앞의 글, 1989, 917~918쪽.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ꡕ, 115~116쪽.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ꡕ, 141~142쪽.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ꡕ, 597쪽.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ꡕ, 363~364쪽.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ꡕ, 356ㆍ473ㆍ571쪽. 김승, 앞의 논문, 2000, 88쪽.

339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39 사립동래동명학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훈은 1909년에는 五衛將 으로 직책을 쓰고 있었다.110) 홍재승(1817 년생)은 1880년 무과 응시 관련 활동 이후에는 다른 활동을 확인하지 못하 였다. 박시석(1825년생)은 1907년 수면노소신사총회 때 82세 고령으로 명 단의 1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훈(1832년생)은 80세 때인 1912년 에도 동명학교 신축공사에 관여하였다. 李塤은 1921년 89세로 사망하였다. 박필채는 蓬萊의 大老가 壽와 康寧 누리더니, 훌쩍 仙鶴이 되어 遼陽으로 돌아갔네. 보배로운 나무와 난초 바야흐로 무성하니, 積善한 집안 남은 慶 事 두텁고도 길겠네 111)라는 輓詞를 지었다. 이훈을 동래지역의 大老 라고 칭하였다. 이처럼 박시석과 이훈은 동래지역 大老[元老]로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동래지역 사회에서의 두 사람의 위상과 평가는 ꡔ東萊郡誌ꡕ (文錡周, 1937) 老職 조에 朴時奭(通政), 李塤(通政) 으로 수록된 것이 잘 보여주고 있다. 맺음말 본고는 대마도 종가문서에 보이는 聖範洪千摠, 亨哉朴書房, 華伯李知敎 라는 세 명의 都中에 대한 사례 연구다. 그 본명을 확인하는 작업 위에서 이 들의 무역활동과 사회활동을 살펴보았다. 3명의 도중은 ꡔ동래부상고안ꡕ ( )에 등재된 洪在昇, 朴時奭, 李塤과 동일 인물로 보았다. 洪在昇(1817~?)은 1855~1864/1871년, 朴時奭(1825~?)은 1862~ 1865/1871~1875년, 李塤(1832~1921)은 1864/1871~1875년에 동래 상인으로 활동하였다. 홍재승과 박시석은 30~50대, 이훈은 30~40대에 110) 민선희 외, ꡔ조선후기 동래 지역사회의 엘리트와 천주교 수용자들 그리고 이에 관한 고문서ꡕ, 부산교회사연구소, 1995, 260쪽. 111) ꡔ국역 추호유고ꡕ(상), 479쪽, 이통정 화백을 위한 만사, 신유 동짓달(挽李通 政和伯 辛酉至月).

340 340 지역과 역사 38호 상인활동을 하였다. 이 외 시기에 상인활동을 한 것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 다. 그들은 동래상인이지만, 직업이 상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래부 武 任이 더 중요한 직업이었다고 본다. 특히 세 사람 모두, 동래부 최고 무임직 인 中軍을 역임하였다. 물론 그들이 도중일 때의 무임직이 중군이라는 것은 아니다. 중군이었으면 중군 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홍재승만 천총이란 무임 호칭을 쓰고, 박시석과 이훈은 쓰지 않았다. 기존 연구에서 이미 본명 이 밝혀진 도중 黃道源, 朴昌壽, 崔周翰도 중군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박창 수는 종가문서에서 朴中軍 으로 불리었다. 박창수는 작대청 별장 장관청 중군으로 무임직이 바뀜에 따라, 종가문서에도 박별장(1830년) 박중군 (1848년)으로 바뀌었다. ꡔ동래부상고안ꡕ에는 홍재승, 박시석, 이훈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어, 이 들의 무역활동의 내용을 알 수 없다. 세 사람이 모두 활동한 1864년의 무역 품은 소가죽(牛皮), 소뿔과 발톱(牛角爪), 마른해삼(乾海蔘), 黃芩 외에 한 약재가 많았다. 무역품은 도중이 공동으로 거래한 것도 있고, 도중이 개별 로 한 것도 있다. 홍재승은 마른해삼, 박시석은 소와 말 뼈(牛馬骨)를 개별 로 수출하기도 했다. 약재 수출입이 증가하면서, 왜관 개시와 대구 藥令市 의 연계망이 강화되었다. 무임을 겸하고 있는 도중은 상업활동뿐만 아니라 무임직 활동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읍성역을 비롯한 각종 공사에서의 감독 활동이다. 도중 崔周 翰은 1851년과 1854년 왜관 수리공사, 도중 黃道源은 1858년 왜관 수리공 사 때 監役將校를 맡았다. 도중 홍재승과 이훈은 1870년 동래읍성 축성역 때, 이훈은 1892년 동래읍성 축성역 때 감관을 맡았다. 1895년 지방제도, 군사제도 개혁으로 동래지역 이서와 무임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동래 獨鎭 이 해체되면서 각종 武廳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 도 하였다. 營鎭 해체에 즈음하여 영진의 재물조사를 할 때 이훈은 영도진 조사의 책임을 맡았다. 동래지역의 이서집단과 무임집단의 퇴임자를 중심으로 1846년 耆英稧 (耆英會)라는 노년 연령집단 이 형성되었다. 동질ㆍ이질적인 두 집단이 만

341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41 나 새로운 집단의 정체성을 창출하였다.112) 본명이 밝혀진 도중 7명은 모 두 50대에 가입하였다. 기영회는 본인은 물론 遺子遺孫에 의해 아들, 손자 들도 가입하였다. 이훈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동질 집단의 혼인 관계 등을 통해 연계망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기영회는 동 래지역의 대표적인 元老 有志 집단이었다. 이들은 도중과 상급 무임이란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토대로 地域 有志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근대 변혁기를 대응해 나갔다. 동래지역의 국채 보상운동 전개나 근대학교 설립은 그 대표적인 대응이다. 특히 李塤-李應悳 (李永悳)-李環의 3대가 사립동명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單線的인 움직임을 보인 것은 아니다. 도중 홍재승 본인은 무과를 통해, 도중 박시석의 아들은 진사시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홍재승의 가계는 미상이지만, 적어도 박시석과 이훈의 아들은 도중(상인)을 계승하지 않은 것 같다. 초량왜관의 종말과 함께 도중이란 무 역상인도 종말을 고한 것인가? 중세 왜관의 도중은 개항 후 개항장 객주로 전환된 사례는 정말 없는 것인가? 아니면 발굴하지 못한 것인가? 개항 후 도중 집안의 행방을 찾는 힘든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동래상인과 개항장 객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ꡔ各面洞訓令存案ꡕ(ꡔ各司謄錄ꡕ 50), ꡔ公文日錄ꡕ(ꡔ各司謄錄ꡕ 17), ꡔ대한매일신보ꡕ, ꡔ동래군지ꡕ(문기주, 1937), ꡔ(一代官)每日記ꡕ, ꡔ부산근대학교관계자료집-사립동래 동명학교편-ꡕ(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3), ꡔ釜署集略ꡕ(이헌영), ꡔ승정원일 기ꡕ, ꡔ朝鮮事務書ꡕ, ꡔ昌原具氏世譜ꡕ(회상사, 1981), ꡔ草梁話集ꡕ(小田幾五郞, 1796), ꡔ刑房來報關錄ꡕ(ꡔ各司謄錄ꡕ 13) 112) 손숙경, ꡔ한말 식민지기 동래 지역의 노년 연령집단 기영회와 이들의 문서Ⅰꡕ, 동아대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2014.

342 342 지역과 역사 38호 고동환,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ꡔ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ꡕ, 두산동아, 고동환, ꡔ조선시대 시전상업 연구ꡕ, 지식산업사, 김동철, ꡔ東萊府商賈案ꡕ을 통해서 본 19세기 후반의 동래상인-ꡔ東萊武任先生案ꡕ 과의 비교- ꡔ한일관계사연구ꡕ 창간호, 김동철, 19세기 우피무역과 동래상인 ꡔ한국문화연구ꡕ 6, 김동철,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ꡔ민족문화ꡕ 21, 김동철, 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와 부산의 역관 건물 ꡔ항도부산ꡕ 16, 김동철, 17~19세기 동래부 소통사의 편제와 대일활동 ꡔ지역과 역사ꡕ 17, 김동철, 18세기 중엽 이후 대일무역의 변화와 절목의 제정 ꡔ동양한문학연구ꡕ 33,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 상인의 구성과 활동 ꡔ역사와 세계ꡕ 46, 김병하, 都中에 관한 연구-開城 縇紬廛과 海州 縇緗廛을 중심으로- ꡔ경영사학ꡕ 8, 김석희, 한말 동래부 사립동명학교의 설립과 운영 ꡔ한국문화연구ꡕ 4, 김 승, 한말ㆍ일제하 동래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ꡔ지역과 역사ꡕ 6, 김의환, ꡔ조선대일교섭사연구ꡕ, 통문관, 김의환, ꡔ조선근대 대일관계사연구ꡕ, 경인문화사, 민선희, 조선후기 동래의 향반사회와 무청-조선후기 향반사회의 지배구조와 사회이 동 문제에 대한 일시론- ꡔ역사학보ꡕ 139, 민선희 외, ꡔ조선후기 동래 지역사회의 엘리트와 천주교 수용자들 그리고 이에 관한 고문서ꡕ, 부산교회사연구소, 박용숙ㆍ김동철, 개항기의 부산 ꡔ부산시사ꡕ 1, 부산시, 박원표, ꡔ향토부산ꡕ, 태화출판사, 손숙경, 조선후기 동래 지역 무임집단의 조직과 운영 ꡔ사회와 역사ꡕ 74, 손숙경, ꡔ한말 식민지기 동래 지역의 노년 연령집단 기영회와 이들의 문서Ⅰꡕ, 동아 대학교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손숙경ㆍ이훈상, ꡔ조선후기 동래의 武廳先生案과 武任 총람ꡕ, 동아대학교 석당학술 원 한국학연구소, 양흥숙, 조선후기 東萊 지역과 지역민 동향-倭館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윤용출,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ꡔ지역과 역사ꡕ 21, 윤용출, ꡔ城役及各公廨重修記ꡕ 해제 ꡔ항도부산ꡕ 24, 이영래, ꡔ우장춘의 마코토ꡕ, HNCOM(에치엔컴), 2013.

343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343 이훈상, 지역사, 지역사의 특성, 그리고 지역사회의 정체성 만들기 ꡔ영남학ꡕ 16, 이훈상, 1895년 전후 동래의 행정 문서들과 그 특성 ꡔ항도부산ꡕ 26, 이훈상, 갑오경장기 지방제도와 군사제도의 개혁 그리고 지역 사회의 대응-동래 관 찰부 문서들에 기초한 사례 연구- ꡔ영남학ꡕ 20, 정경주 번역, ꡔ국역 萊府日記ꡕ, 부산시사편찬위원회, 정경주 번역, ꡔ국역 秋湖遺稿ꡕ, 부산시사편찬위원회,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상고도중의 규모와 활동(1844~49) ꡔ한일관 계사연구ꡕ 8, 정성일, ꡔ조선후기 대일무역ꡕ, 신서원, 정성일, 宗家文書와 倭館-1864년 每日記로 본 왜관과 한일관계- ꡔ대마도의 宗家 文書ꡕ(2013년 부경대 대마도연구센터 주최 학술세미나 자료집),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의 주역, 동래상인 정자범(鄭子範)-1833년과 1846년의 사례- ꡔ동아시아 상인 열전ꡕ(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ㆍ명청사학회 주최 국 제학술회의 자료집), 정성일, 동래상인 정자범(鄭子範)의 대일무역 활동-1833년과 1846년의 사례- ꡔ민족문화연구ꡕ 69, 정성일, 왜관 개시 때 제공된 일본요리 기록의 비교(1705년, 1864년) ꡔ한일관계 사연구ꡕ 52, 조기준, ꡔ한국기업가사ꡕ(재판), 박영사, 추월영 엮음, ꡔ동래기영회 150년사ꡕ, 동래기영회, 현문수ㆍ김동철, 지역사 인물 콘텐츠 개발을 위한 연구-박기종 사례를 중심으로- ꡔ기록학연구ꡕ 36, 藤永壯, 開港後の 會社 設立問題をめぐって-朴琪淙と汽船業ㆍ鐵道業-(上) ꡔ朝 鮮學報ꡕ 140, 森晉一郞, 近世後期對馬藩日朝貿易の展開-安永年間の私貿易を中心として- ꡔ史 學ꡕ 56-3, 田代和生, 幕末期日朝私貿易と倭館貿易商人-輸入四品目の取引を中心に-, 速水 融 외, ꡔ德川社會からの展望ꡕ, 同文館出版, 田代和生, ꡔ日朝交易と對馬藩ꡕ, 創文社,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344 344 지역과 역사 38호 Abstract The Existence and Activities of Dongnae Merchants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Three Cases of Dojung: Hong Jaeseung, Park Siseok, and Yi Hun Kim, Dong-Chul Between the 17th and 19th century, Waegwan existed only in Dongnae. Gaeshi trade (private trade) in Waegwan was the center of trade with Japan and a Joseon merchant who was in charge of gaeshi trade was called Dongnae merchant. There was a fixed number of Dongnae merchants who were in charge of gaeshi trade. These Dongnae merchants within the fixed number were often called dojung(都中) or dojungsanggo. There was a trend toward supernumerary petty merchants gradually participating in gaeshi trade. And yet, dojung played the key role among Dongnae merchants. The activities of dojung can be found in greater details not in records from Joseon but in records from Japan, that is, in the Tsushima head family documents. However, the real names of dojung are not recorded in the Tsushima head family documents. In order to identify the dojung, it is necessary to compare the contents in the Tsushima head family documents with that in Joseon records. Identifying the real names of dojung found in the Tsushima head family documents is not an easy task. Out of all the dojung mentioned in the Tsushima head family documents, there are only four cases for which real names have been confirmed so far. This paper newly confirmed the real names for three dojung recorded in the Tsushima head family documents. They are Hong Jaeseung, Park Siseok, and Yi

345 19 세기후반동래상인의존재와활동 345 Hun who were dojung in There are limitations to grasping the archetype of Dongnae merchant from dojung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because gaeshi trade was already in decline. Nevertheless, these three cases of dojung are important since they show what kind of activities Dongnae merchants were involved in from pre-open port to post-open port era. Thus, this paper examined the true nature of Dongnae merchants in the late 19th century through these three dojung and their activities in commerce and as muim(military position) and local influentials. Keywords : Dongnae Merchant, Dojung, Waegwan, Muim, Giyeong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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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47 ꡔ지1897년 역과 역사 ꡕ 38, , 347~389쪽 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113)최 성 환** 머리말 Ⅰ. 智島郡 設郡과 吳宖黙의 ꡔ尋眞錄ꡕ 1. 智島郡 設郡 과정 2. 吳宖黙의 부임과 ꡔ尋眞錄ꡕ Ⅱ. 1897년 島嶼巡行 노정과 浦口 Ⅲ. ꡔ尋眞錄ꡕ에 담긴 섬 지역 향촌사회정보 1. 섬 마을 서재와 교육환경 2. 섬 지역 식자층 인물정보와 詩文 3. 섬 마을의 개황과 풍세 4. 섬 지역 문화유적과 전승설화 맺음말 국문초록 한국의 경우 과거 섬 문화상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담은 기록은 매우 드물다. 그런 면에서 이글의 분석 대상인 ꡔ尋眞錄ꡕ은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ꡔ尋眞錄ꡕ은 1896년 設郡 된 智島郡의 初代郡守였던 吳宖黙이 남긴 것으로, 1897년 島嶼巡行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본고는 이 기록의 분석과 현장답사를 통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연구를 시도 한 것이다. 첫째, 智島郡 設郡 과정과 ꡔ尋眞錄ꡕ 저술 배경을 살폈다. 둘째, 1897년 島 嶼巡行 노정과 그 안에 담긴 浦口 기록를 분석하였다. 셋째, 당대 섬 지역 향촌사회정보 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였다. 연구 성과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된다. 첫 번째 성과는 섬 지역 浦口네트워 *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 A00007). **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lovesum@mokpo.ac.kr).

348 348 지역과 역사 38호 크 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그 공간적 기능 변화를 살폈다는 점이다. 순행노정 분석을 통해 섬과 섬을 연결하는 포구네트워크 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압해도 사례를 통해 포 구의 공간적 특징과 기능변화 양상을 살폈다. 두 번째 성과는 ꡔ尋眞錄ꡕ에 담긴 섬 지역 향촌사회정보를 유형별로 분석하여 사료적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섬 마을 서재와 교 육환경의 문제, 섬 지역 식자층의 존재와 지적수준, 섬 지역 개황과 경관지리, 문화 유적과 설화 등에 대한 원천 정보로서 이 기록이 지닌 특별함을 분석하였다. 주제어 : 島嶼巡行, ꡔ尋眞錄ꡕ, 智島郡, 吳宖黙, 浦口 머리말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고, 수많은 섬을 보유한 국가이다. 그러나 역대로 섬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했다. 행정구역이 독립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각 종 관찬 기록에 포함되는 섬에 대한 정보 역시 소략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 에 문헌자료를 근거로 섬 문화상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기가 어렵 다는 점이 도서해양문화 연구자들이 겪는 공통된 애로사항이다. 그런 면에서 본고에서 분석대상으로 삼은 ꡔ尋眞錄ꡕ1)의 의미는 특별하 다. 이 책은 初代 智島郡守를 지낸 吳宖黙이 남긴 것으로 1897년 서남해 도 서지역을 순행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이때는 조선 말기이자 목포가 通商港으로 開港(1897년 10월 1일)되기 직전에 해당된 다. 때문에 목포 개항 전 서남해 도서지역의 상황과 세부적인 지역 정보가 담겨있다. 吳宖黙의 智島 관련 기록 중 널리 알려진 것은 정무일기 성격인 1) ꡔ尋眞錄ꡕ 시문 사이사이에 기록된 일정별 견문 내용들은 ꡔ智島郡叢瑣錄ꡕ에도 포 함되어 있다. 본고는 순행기록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별도의 단행본인 ꡔ尋眞錄ꡕ 을 독립적인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 자료의 소장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 각이고, 간행년도는 1897년이다. 한문 필사본 1책 7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349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49 ꡔ智島郡叢瑣錄ꡕ이다. 이 자료는 이미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논의된 바 있 다.2) 주로 지도군 設郡 직후 도서지역 지배체제와 행정ㆍ교육 분야에 초점 을 맞춰 연구가 진행되었다. 기록을 남긴 인물이 초대군수였기 때문에 기존 의 연구에서는 섬에 대한 통치 상황을 분석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반면 吳宖黙의 島嶼巡行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다. 국내 의 경우 섬은 물론 지방 관료의 순행에 대한 연구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3) 그러한 상황이다 보니 도서지역의 순행과 관련된 연구는 그 사례를 찾기 어 려운 실정이다. 吳宖黙이 남긴 島嶼巡行에 대한 기록은 뱃길, 섬사람들과 의 교류, 섬 문화 양상 등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된 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고의 연구목적은 吳宖黙의 ꡔ尋眞錄ꡕ을 분석하여 그 기록이 지닌 사료적 가치와 당대 섬마을에 대한 향촌사회정보를 추출해 내 는 데 두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 집중하였다. 첫째, 지도군 設郡 과정과 吳宖黙 지도군수가 ꡔ尋眞錄ꡕ을 남긴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둘째, 島嶼巡 行 노정을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포구기록을 검토하는 것이다. 셋째, ꡔ尋 眞錄ꡕ에 담긴 세부적인 향촌사회정보를 분석하는 것이다. 연구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 순행기록에 담긴 도서 지역의 주요현장, 이용했던 포구, 관련 유 적지 등을 답사하였고, 현지 주민들과 면담을 통해 옛 기록과 현황을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2) 대표성과는 다음과 같다. 송양섭, 1896년 智島郡 創設과 西南海 島嶼 支配構造 의 再編 : 吳宖默의 ꡔ智島郡叢瑣錄ꡕ을 중심으로 ꡔ한국사학보ꡕ 26, 김경 옥, <智島郡叢瑣錄>을 통해 본 19세기 서남해 도서지역의 위상변화 ꡔ역사학연 구ꡕ 29, 박수정, 조선후기 수령 吳宖黙의 교육행정 활동 분석 ꡔ敎育行 政學硏究ꡕ 26, ) 김경숙의 16세기 전라도 관찰사의 순행길 (ꡔ지방사와 지방문화ꡕ 13-2, 2010) 이 거의 유일한 연구이며, 이외는 임금의 순행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350 350 지역과 역사 38호 Ⅰ. 智島郡 設郡과 吳宖黙의 ꡔ尋眞錄ꡕ 1. 智島郡 設郡 과정 조선시대에 섬은 오랫동안 육지에 부속된 변방의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 다. 현 신안군의 도서들은 羅州群島로 인식되거나 무안ㆍ영광 등 연해의 군 에 속한 부속도서 개념으로 행정구역에 편제되어 왔다. 그러한 흐름 속에 섬으로 구성된 별도의 군을 설치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智島郡 設 郡 과정에 대한 내용은 ꡔ智島郡叢瑣錄ꡕ을 분석한 송양섭(2007), 김경옥 (2007)의 선행연구에서 다룬바 있다.4) 본고에서는 논지 전개를 위한 배경 분석 차원에서 그 대략적 흐름을 서술하고자 한다. 섬으로 이루어진 郡을 설치하는 문제는 조선 영조 대부터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729년(영조 5) 8월 좌의정 李台佐가 나주제도의 設 邑을 주장하면서 올린 상소가 논의의 출발이었고,5) 1731년(영조 7) 5월 부교리 黃晸이 올린 邑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한편으로는 섬 백성들을 수습하는 방도를 삼고, 한편으로는 海防을 관할 하게 하자는 상소를 올려 그 논의가 한층 깊어졌다.6)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황정의 상소는 별도의 섬으로 구성된 군을 설 치해야 하는 필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관련 내용은 ꡔ비변사등록ꡕ에 상세히 남아 있다. 크게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해역 방어의 중요성, 둘째 국가 재정 관리차원에서 육지관리가 섬의 현황을 파악 하기 어렸다는 점, 셋째, 반역자들이 역모를 꾀할 가능성, 넷째 조운선의 관 리, 다섯째 王化가 고루 미치게 하는 것 등이다.7) 조선시대 섬 공간이 지닌 4) 5) 6) 7) 주 2)의 논문 참조. ꡔ영조실록ꡕ 권23, 5년 8월 29일. ꡔ영조실록ꡕ 권29, 7년 5월 2일. 신안군ㆍ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ꡔ비변사등록-신안군관계기사자료집ꡕ, 1998, 43~47쪽.

351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51 지리적 중요성과 사회경제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도 불구하고 섬만의 독립된 군을 설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책적으로 시행된 것은 조선말기인 1896년에 이르러서였다. 1896년 2월 3일 칙령 제 13호로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 沿海諸島에 郡을 설치하는 건 이 고종의 재 가를 받아 반포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때 지도군(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등에 속한 섬으로 구성)과 함께 완도군(영암, 강진, 해남, 장흥 등에 속한 섬으로 구성), 돌산군(흥양, 낙안, 순천, 광양 등에 속한 섬으로 구성) 3군이 새롭게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설치되었다. 섬으로 이루어진 郡을 창설한 목적에 대해 초대 지도군수 吳宖黙은 ꡔ智 島郡叢瑣錄ꡕ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3개 군의 신설은 특별이 섬과 육지를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보살피겠다는 지 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바다 가운데 여러 섬을 陸地郡에 부속시켜 육지 로 바다를 관할하게 하면 절제에 어려움이 있고 섬사람들이 陸郡에 왕래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고 육군 관속들이 매번 海島에 이를 때면 越海債를 받 아가고 멸시하며 토색질을 자행하여 점점 도민들을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 르렀다. 그래서 전주ㆍ나주ㆍ남원 관내 연해 각 군 소속 여러 섬의 結戶를 조 사하고 군청을 설치하여 섬에서 섬을 도맡아 다스리게 하는 것이 진실로 시정에 맞는다 할 것이다.8) 吳宖黙은 지도군의 設郡이 섬과 육지를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보살피겠 다는 지극한 뜻 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목적은 섬 주민들에게 배포한 규약에도 강조되어 있다.9) 정부입장에서는 실질적인 목적으로 섬 주민 보 호, 재원관리, 조세 수운로 관리 등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 다. 시대적 상황 상 무엇보다 외세의 침입에 따라 도서 변방에 대한 관리 강 화차원과 재정확보의 목적이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 吳宖黙이 중앙에 올 려 보낸 여러 문서에는 일본인들이 자행한 서남해 도서연안지역에 대한 불 8) 김정섭ㆍ김형만 역, ꡔ智島郡叢瑣錄ꡕ, 신안문화원, 2008, 46쪽, 1896년 2월 6일 기록. 이하 각주는 ꡔ智島郡叢瑣錄ꡕ으로 약칭함. 9) ꡔ智島郡叢瑣錄ꡕ, 84~97쪽, 41조 규약의 서문과 내용 참조.

352 352 지역과 역사 38호 법적인 측량과 침탈에 관한 보고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10) 吳宖黙은 부임 직후 지도군 관내에 편제된 도서들을 교리를 보내 현황을 파악하였다. 편의상 상중하로 구분하였다. 해당 주요도서를 정리하면 <표 1> 과 같다.11) <표 1> 1896년 지도군 設郡 당시 부속도서 구분 부속 도서 中道秩島 水島, 荏子島, 在遠島, 鮑作島, 於義島, 老鹿島, 台耳島, 沙玉島, 後甑島, 前甑島, 羽田島, 屛風島, 蟬島, 炭島, 古耳島, 佳蘭島 등 慈恩島, 岩泰島, 八禽島, 箕佐島, 安昌島, 者羅島, 朴只島, 半月島, 玉島, 長山島, 下道秩島 馬津島, 上苔島, 下苔島, 荷衣島, 飛禽島, 水雉島, 沙雉島, 都草島, 牛耳島, 黑山 島, 可佳島, 紅衣島, 苔沙島 등 上道秩島 蔓芝島, 鵲島, 大洛月島, 小洛月島, 松茸島, 鞍馬島, 大角島, 小角島, 石蔓島, 蝟 島, 式島, 飛雁島, 古群山島, 夜味島, 旺登島 등. 군 치소가 있는 지도를 중심에 놓고 그 일대를 中道秩島, 그 아래 지역을 下道秩島, 지도를 기준으로 북쪽 현재 영광군과 군산시에 속해있는 섬을 上 道秩島라 칭하였다. 지금도 신안군 주민들이 윗섬 ㆍ 아래섬 등으로 통칭하 는 습성이 남아 있는데, 吳宖黙의 이러한 구분법과 그 맥락이 유사하다. 이후 지도군 관할 도서에 대한 관리체계를 확충하기 위해 98개 島嶼 19 곳과 무인도의 형편과 풍토에 대해 조사하고, 섬의 거리와 크기를 헤아려 疆界를 16개면으로 나누었다.12) 이로써 지도군 관리의 기본편제가 갖추어 졌다. 관할 도서와 당시 호구수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1896년 지도군 관할 도서 16개면 현황 구분 부속도서 및 호구수(戶, 官戶) 智島 智島(호 574, 관호 271), 松島(호 19, 관호 2), 水島(호 19, 관호 4) 荏子 荏子(호 405, 관호 399), 在元(호 19, 관호 1), 大鹿(호 5), 小鹿(호 3, 관호 1), 台耳(호 2), 무인도 葛屈島, 扶南, 許沙, 飛雉, 笠帽, 大角, 小角 10) ꡔ智島郡叢瑣錄ꡕ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11)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6월 23일. 12)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8월 28일. 도서수 3 19

353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53 洛月 大洛月(호 63, 관호 23), 小洛月(호 62, 관호 14), 鞍馬(호 109, 관호 32), 石蔓(호 23, 관호 5), 松耳(호 37, 관호 9), 角耳(호 7, 관호 2), 扵義(호 42, 관호 12), 蔓芝(호 9, 관호 2), 包作(호 12, 관호 1), 鵲島(호 2, 관호 1), 壬 丙(호 1), 무인도 角氏 13 沙玉 沙玉(호 83, 관호 26), 前甑(호 63, 관호 30), 後甑(호 113, 관호 39호), 羽 田(호 30, 관호 8) 4 蟬島 蟬島(호 162, 관호 45), 古耳(호 44, 관호 12), 唐沙(호 22, 관호 8), 梅花 (호 71, 관호 18), 屛風(호 46, 관호 15), 炭島(호 16, 관호 5) 6 蝟島 蝟島(호 126, 관호 71), 致島(호 60, 관호 37), 大猪項(호 107, 관호 82), 食 島(호 33, 관호 29), 旺登(호 12), 하왕등(호 7) 6 古群山 古群山(호 208, 관호 152), 飛鴈(호 98, 관호 45), 夜味(호 70, 관호 45) 3 押海(호 306), 小智(호 10), 外雁(호 1, 관호 225), 佳蘭(호 51, 관호 20), 押海 達里(호 27), 外達(호 2), 長佐(호 1), 治下(호 5, 관호 26), 訥島(호 17, 관 호 19), 許沙(호 7, 관호 7), 羅佛(호 23, 관호 4) 12 者羅(호 41), 老郞(호 2, 관호 38), 朴只(호 11, 관호 13), 半月(호 38, 관호 24), 玉島(호 32, 관호 27) 5 荷衣(호 413), 如屹(호 7), 旕梅(호 15), 介島(호 3), 長佐(호 2), 門丙 (호 荷衣 2), 長丙(호 5, 관 155), 下台(호 91, 관호 70), 箕島(호 3), 上台(호 102, 관 호 92), 무인도 新島 14 箕佐 箕佐(호 269), 新蔬(호 10), 牛墨(호 6), 沙致(호 7, 관호 288) 4 安昌 安昌(호 221, 관호 151) 1 巖泰(호 518), 佳島(호 10), 梧島(호 1), 秋葉(호 7, 관호 355), 무인도 草蘭, 巖泰 麻田 8 者羅 長山 長山(호 243), 莫今(호 9), 馬津(호 2), 白也(호 10, 관호 151), 무인도 大也 5 黑山 黑山(호 421), 長島(호 10, 관호 145), 牛耳(호 113), 別峙(호 2, 관호 104) 4 慈恩(호 296), 沐池(호 8), 分楮(호 2, 관호 150), 台沙(호 35, 관 호15), 紅 衣(호 17, 관호 9), 可佳(호 40, 관호 20), 무인도 上斗, 下斗 10 慈恩 총 105개의 유인도와 12개의 무인도가 관할구역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지도군의 행정편제는 현재 신안군이 14개 읍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당시에는 현재 신안군에 속하는 비 금ㆍ도초가 진도군에, 팔금이 완도군에 속해 있었다는 점과 현 무안군에 속 하는 탄도, 영광군ㆍ부안군에 해당하는 낙월, 위도, 고군산, 목포에 속하는 눌도ㆍ허사ㆍ장좌ㆍ달리ㆍ외달 등이 지도군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이다. 이 중 비금ㆍ도초는 이듬해인 1897년 3월 7일 칙령 제14호에 의거 지도군으 로 편입되었다. 이 넓은 권역과 수많은 섬 가운데 智島가 새로운 행정구역의 중심으로 선

354 354 지역과 역사 38호 정된 것은 지도의 지리적 장점이 중요한 원인이 된 것 같다. 지도는 섬이지 만 외부와의 소통이 활발한 지역이었고, 海路의 측면에서 중요한 거점이었 다. 지도 서남쪽에 있는 允郞浦 는 서남해의 섬과 한양으로 오가는 배를 연 결하는 포구로 기능하였다. 윤랑포를 중심으로 남해와 서해로 올라가는 가 는 뱃길이 열려 있음은 물론 내륙과의 왕래도 활발했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내륙 지역인 무안과 영광 지역에 인접해 있다. 무안 해제를 거쳐 지도에 오 는 경우는 해제와 마주하고 있는 糠山津 을 이용하여 수시 왕래가 가능했 다.13) 이외 북쪽 봉리 참도나루를 이용하면 영광지역으로 배로 타고 곧바 로 이동이 가능하다. 이렇듯 지도는 섬이지만 남쪽의 신안군 다도해와 영광 ㆍ무안 등과 바로 연결되는 지리적 장점이 있었고, 뱃길이 한양까지 연결되 어 있었다. 때문에 현 신안군, 영광군, 부안군에 이르는 넓은 해역의 섬을 관장하기 위한 군 치소로 적합한 장소이다. 지도에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도 새로운 관청을 설치하는 데 유 리한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지리적 요충지인 지도에는 이미 1682년에 智 島鎭이 설치되었고,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14) 새롭게 형성 된 지도군 치 소는 지도진의 관아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현재의 지도읍 사무소가 있는 자 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이 새로운 군의 치소로 지도가 선정된 배경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吳宖黙의 부임과 ꡔ尋眞錄ꡕ 초대 지도군수로 부임한 인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吳宖默 (1834~1906)15)이었다. 吳宖黙은 조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 다. 고령의 나이에도 지속적으로 관직을 제수 받았다. 지도군이 신설되어 초대 군수를 지명하는 과정에서도 경험과 인품 면에서 가장 적임자라는 평 13) ꡔ智島郡叢瑣錄ꡕ에 그러한 교통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14) ꡔ智島郡邑誌ꡕ, 1908, 建置沿革. 15) 1991년에 간행된 ꡔ해주오씨대동보ꡕ에 의하면 1834년 12월 7일에 태어나 1906 년 12월 7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355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55 가를 받았다. 정작 본인은 나이와 건강을 이유로 지도군수 직을 사양했으 나, 고종의 요청으로 초대군수로 부임하게 된다.16) 이때 나이는 환갑이 넘 은 64세였다. 吳宖黙은 시문에 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조선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문학단체인 七松亭詩社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저서로는 ꡔ輿載撮要ꡕㆍꡔ茝園集ꡕㆍꡔ旌善叢瑣錄ꡕㆍꡔ慈 仁叢瑣錄ꡕㆍꡔ咸安叢瑣錄ꡕㆍꡔ固城叢瑣錄ꡕㆍꡔ智島叢瑣錄ꡕㆍꡔ麗水叢瑣錄ꡕ 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1894년에 저술한 지리서 ꡔ輿載撮要ꡕ이 다. 전국 읍지를 모아 요약한 것으로 당시의 지방행정단위, 관원수와 재임 기간, 面과 戶의 수, 結數, 특산품 등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도를 곁들여 한국과 세계의 지리를 다루고 있어, 개화기 지리 교과서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집필경험과 성향 때문인지 吳宖黙은 부 임하는 지역마다 자신의 정무일기인 총쇄록 을 남겼다. 각 총쇄록에는 재임 시절 견문 내용과 관할 마을에 대한 세부적인 다양한 정보들이 꼼꼼하게 기 록되어 있다. 吳宖黙은 오랫동안 관직생활을 한 전형적인 보수 관료의 성향이 있는 인 물이었다. 그의 기록에서 시대에 대한 개혁의지나 위기감 같은 것을 찾아보 기 쉽지 않다. 그러나 관료로서의 소임에 충실했고, 섬사람들을 대하는 태 도가 진솔했다. 관료로서의 그의 자세는 부임지인 지도로 향하는 노정에서 부터 나타난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도까지 가는 길을 육로가 아닌 해로를 택했다. 한강에서 배를 타고 강화를 거쳐 서해연안을 건너와 지도에 들어왔다. 섬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니는 불편함을 먼저 겪어보기 위 함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지 않았던 인물이었 다.17) 더구나 당시는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라 뱃길은 더욱 삼가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섬에서 섬을 다스리라는 임금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對 揚할 길을 생각해 오던 차에, 우선 백성들이 살아가는 질고를 미루어 짐작 16) ꡔ智島郡叢瑣錄ꡕ 서두에 그러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17)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5월 6일.

356 356 지역과 역사 38호 해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저 섬사람들이 물길을 왕래하는 괴로움과 즐거움 이 과연 어떠한가를 내가 몸소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고 생각하고, 스 스로 뱃길을 택했다.18) 서남해를 뱃길로 내려오면서 그가 겪었던 항로와 인근 도서지역 상황에 대한 견문 내용들이 ꡔ智島郡叢瑣錄ꡕ에 기록되어 있 다. 이는 조선후기 서남해 연안항로의 뱃길이 어떤 경로로 이용되고 있었는 지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가 주요 경로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서울에서 강화까지 한강을 통한 이동경로이다. 土亭 玄湖 西江 廉倉項 楊川邑 杏州 金浦界 燮谷 甘巖 高陽 界 水莫 通津界 助江 江華 한강에서 강화까지 5~6백 리를 수 時刻 만에 곧장 와서 정박하였다고 기 록하고 있다.19) 다시 강화에서 배를 타고 본격적인 지도 부임여정을 떠났 다. 江華 甲串津 孫乭項 인천항 남매도 南陽 燕興 八味島 앞바다 風島 泰安 黃金山界 馬梁津 廣如海 官章項 鏡海 舒川界 三島 安眠島 洪 州 元山浦 龍島 外安島 舒川 烟島 馬梁鎭 群山島 飛雁島 芝花島 蝟島 上旺登 下旺登島 茂長界 竹島 靈光界 鞍馬島 石蔓島 법성진 七山島 함평계 各氏島 水島界 智島 允郞浦20) 5월 9일에 출발하여 5월 15일에 도착하였다. 한강에서 8일에 출발하였으 니, 꼬박 7일 동안 배를 탄 셈이다. 출발부터 비가 내려 습기가 매우 심하고 또 벼룩 때문에 고생을 하여 잠을 설쳤다고 그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21) 섬 유배인들도 나주나 영광 쪽까지는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일부 18) 19) 20) 21) ꡔ智島郡叢瑣錄ꡕ, ꡔ智島郡叢瑣錄ꡕ, ꡔ智島郡叢瑣錄ꡕ,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1896년 1896년 1896년 5월 5월 5월 5월 6일. 8일. 9일부터 15일까지 기록을 토대로 정리함. 9일.

357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57 러 해로를 택한 吳宖黙의 관료로서 임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吳 宖黙의 이러한 성향과 기록 정신은 지도군수 시절 관할 도서를 직접 순행하 고, 그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ꡔ尋眞錄ꡕ이다. 지도군 재임시절 작성한 巡行錄이자 섬 주민들의 권학교재로 만든 저작이다. 순행에 오른 중요한 목적은 勸農ㆍ 興學ㆍ察瘼 세 가지 측면에서 郡 경내 형편을 살피는 것이었다.22) 이 중 ꡔ尋眞錄ꡕ의 기록은 특히 興學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스로 처음 창설된 郡을 맡게 되었기에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은 오로지 학문을 일으키는 興 學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23)고 밝히고 있다. 吳宖黙이 생각한 興學 의 필요 성에는 당시 관료나 사족들이 가지고 있는 섬 문화상에 대한 인식이 반영이 되어 있다. ꡔ智島郡叢瑣錄ꡕ에는 교화가 絶海 가운데 있으니 민속이 어리석 고 완고하여 단지 옛 섬의 구식에만 익숙하다. 거나 비뚤어지고 어긋난 풍 속과 어리석은 습속이 육지와는 매우 다르다. 는 표현이 남아 있다.24) 즉,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투철한 관료였던 그에게 섬사람들은 적극적인 교화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興學 은 순행기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吳宖黙 초대군수가 가장 역점을 주는 분야였다. 吳宖黙은 지도군 신설과 함께 1郡1校의 원칙에 따라 智島鄕校를 설립하였다. 지도향교의 건립은 분산되어 있던 섬사람들의 지 적교류를 활성화 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도향교가 건립된 1896년은 이미 향교가 지닌 국가교육기관으로의 기능은 거의 소멸한 시점 이었다. 그러나 吳宖黙은 향교 안에 각 섬에 흩어진 지식인들이 모여서 시 회를 열고 학문을 논할 수 있는 養士齋를 건립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 를 토대로 교육을 장려하는 풍토가 조성되기를 기대하였고, 그러한 노력 덕 분에 짧은 재직기간 중에 양사재의 완공을 볼 수 있었다.25) 물론 이러한 정 22) 吳宖黙 저, 김형만 역, ꡔ國譯 尋眞錄ꡕ, 신안문화원, 2014, 61쪽. 이하 ꡔ尋眞錄ꡕ 으로 약칭함. 23) ꡔ尋眞錄ꡕ, 47쪽. 24)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5월 16일. 25) ꡔ智島郡叢瑣錄ꡕ, 1897년 5월 16일.

358 358 지역과 역사 38호 책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학기구를 공적인 교육체제 속으로 편입시 키려는 당시 학부와 관찰부의 정책에 부응하는 측면26)이 있지만 吳宖黙 개 인의 성향과 목적의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吳宖黙은 순행 중에 가는 곳마다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서재의 학동들을 만나 격려하였다. 白紙 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질이 있는 섬 주민들을 치하 했다. 방문한 지역의 학도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우수한 사람을 뽑아 백지 로 시상하였다.27)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바쁜 순회 일정 속에서 일일이 말로서 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 지역민들이 살펴 보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ꡔ尋眞錄ꡕ을 만들었다.28) 吳宖黙은 이 기록이 행여 바닷가를 유람하면서 그 흥을 시로 기록한 일종 의 유람기로 오해 받지는 않을지 염려했다. 그 때문인지 이 기록을 남긴 사 유가 서문과 발문 등에 특히 강조되어 있다. ꡔ尋眞錄ꡕ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교육과 興學 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깊은 뜻에 대해서 는 저자 스스로 서문에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오늘에 있어 마땅히 가야할 길,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오 로지 興學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 헤아려 보건대, 가만히 앉아 서 구한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에 여러 섬들을 巡視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일이 곧 이른바 眞으로 들어가는 門路이다. 29) 이것이 吳宖黙이 순행을 하고, ꡔ尋眞錄ꡕ을 지은 이유이다. ꡔ尋眞錄ꡕ에는 관내 도서를 순행하면서 날짜별로 보고 들은 내용과 지역의 서재를 방문하 여 지역유림들과 함께 시문을 지은 내용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각 서재에 보내는 고시문, 심진록 서문, 날짜별 견문내용과 시문, 26) 정순우, 구한말 도서지방의 교육환경과 수령의 興學활동 ꡔ嶺南學ꡕ 20, 2011, 289쪽. 27) ꡔ尋眞錄ꡕ 64쪽 외 여러 곳에 백지를 시상한 내용이 남아 있다. 28) ꡔ智島郡叢瑣錄ꡕ, 1897년 4월 29일. 29) ꡔ尋眞錄ꡕ, 49쪽.

359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59 심진록 발문 네 가지로 되어 있다. 고시문과 서문은 吳宖黙이 직접 지은 것 이다. 책의 말미에 첨부된 발문은 순행에 함께 참여하고, 여러 시문을 남긴 星西 金寅吉과 聞喜 金聲鐸이 작성하였다. ꡔ尋眞錄ꡕ을 완성한 후 1897년 端午日에 각 서재에 보내는 고시문을 작 성하였다. 고시문을 통해 각 서재에서 ꡔ尋眞錄ꡕ이 널리 활용되기를 바라는 점을 적었다. 그는 ꡔ尋眞錄ꡕ이 후학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자극하는 계기 가 되고, ꡔ尋眞錄ꡕ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훗날 훌륭한 학자로 발전하는 이 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을 지녔다. 그런데 이 원문을 필사할 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보다 여러 곳에 골고루 배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 다. 고시문에는 다만 잔글씨 쓰는데 능한 사람을 널리 구하지 못하여 온 고 을에 고루 배포하지 못하고 이번에 들려 보았던 몇몇 서재에만 보내 줄 수 밖에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다. 고 기록되어 있다.30) ꡔ智島郡叢瑣錄ꡕ 1897 년 5월 5일 기록에는 尋眞錄은 그 사이에 잔글씨에 능한 사람에게 잘못을 바로 잡아 다시 고쳐 베끼도록 부탁하여 16책을 얻고, 전번에 경유해온 각 처 지도, 임자, 후증, 전증, 우전, 사옥, 압해, 고이, 선도의 각 서재에 나누 어주어, 후진을 권장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하며, 告示文을 지어 책자 에 붙여놓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재임 당시에는 ꡔ尋眞錄ꡕ을 필사하여 16 부를 만들어 배포했음을 알 수 있다. Ⅱ. 1897년 島嶼巡行 노정과 浦口 吳宖黙이 지도군수로 임명된 후 실제 지도에 도착한 시기는 1896년 5월 15일이고, 여수군수로 임명되어 지도를 떠난 시기는 1897년 5월 19일이다. 吳宖黙은 약 1년간의 재임기간 중 두 차례 관할 섬 지역에 대한 순행에 나 섰다. 巡行 은 일반적으로 관리가 관할지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행위를 30) ꡔ尋眞錄ꡕ, 48쪽.

360 360 지역과 역사 38호 말한다. 吳宖黙 자신도 巡行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31) 순행은 지도군수 재임기간 말미에 해당하는 1897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부임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순행이 실현 된 것은 초기에는 지 도군 행정에 필요한 각가지 지침을 만드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부임 직 후에는 상부에서 하달되는 여러 訓令들을 토대로 신설된 군의 각종 시책들 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향촌사회 유지를 위해 지도군의 관리들과 주민들이 지켜야 할 모범 규범을 만들었다. 규약 41조와 향약 17조가 대표적이다.32) 규약 41조에는 관속들에 대한 규제 조치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 섬 주민들 이 겪는 폐단을 억제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규약을 섬 주민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행정을 보좌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마을 대표들을 선발하여 운영하는 방안도 모색했다. 섬마다 頭民과 任掌이라 부르는 임원을 구성하고, 이에 대한 별도세칙을 마련하기도 하였 다. 鄕會와 里會를 운영하도록 권장하고, 마을 임원의 선발과 임기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주민들에게 적용시키도록 하였다.33) 이러한 시책들을 어느 정도 완성시킨 후에 순행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時務十餘行의 草案 을 작성하여 이르는 곳의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보여주기 위하여 구비하 였다. 는 기록도 남아 있다.34) 순행은 사전 예고 없이 진행되었다. 먼저 巡省한다는 소리가 들리게 되 면 민간에 폐를 끼칠 염려 가 있어 당일 아침 조용하게 鄕長 金炳秀에게 배 한척을 준비하게 하여 진행하였다.35) 물론 순행 과정에서는 군수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미리 환영을 나온 사람들도 생겼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수십 명의 어른과 아이가 하얗게 산머리에 서 있었다. 36) 31) 32) 33) 34) 35) ꡔ尋眞錄ꡕ, 61쪽.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6월 2일. 김경옥, 앞의 논문, 2007, 214~215쪽 참조. ꡔ尋眞錄ꡕ, 60쪽. ꡔ尋眞錄ꡕ, 49쪽.

361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61 劍洞峴에 이르니 남자 어른과 아이 수십 인이 길 왼편에 벌려 서서 절을 하 였다. 37) 1차 순행은 4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간이었고, 주요 코스는 군 치소가 있는 지도와 인접한 임자도와 증도 일대였다. 가마꾼을 제외하고 총 10명의 인원이 함께 했다. 함께 한 인사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아들 吳翼善, 石樵 金聲鐸, 石醒 金寅吉, 鄕士 睡山 安炳亮, 錦坡 趙炳鎬, 隨陪 金炳晟, 通引 趙允基, 官奴 千德, 房子 應元, 使令 崔晩逸.38) 이들 중 오익선, 김석탁, 김인길, 안병량, 조병호 5인은 作詩를 하는 吟客 이었으며, 나머지는 지도군수의 순행을 보좌하는 인원이었다. 1차 순행의 주요 노정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 吳宖黙의 지도군 島嶼巡行 1차 노정(1897년 4월 7일 10일) 일정 주요 순행 지역 4월 07일 지도 일엽정 임자도 대변정 나루 임자도 鎭村 4월 08일 임자도 鳥三里 二黑岩 多順今里 후증도 津串 후증도 防築洞 후증도 大村 4월 09일 전증도 劍洞峴 大棗洞 長庫洞 羽田마을 德鼎里 大棗洞 4월 10일 大棗洞 4월 11일 登仙洞 후증도 曲島 廣巖店 사옥도 堂頭津 사옥도 堂山 사옥도 堂村 사옥도 猫洞 사옥도 灘洞 사옥도 塔仙浦 지도 吳宖黙은 지도 관아가 위치한 곳의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 임자도로 이동 했다. 보통 지도에서 임자도로 갈 때는 임자도와 인접한 점암 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39) 吳宖黙은 지도관아 인근에서 바로 배를 타 36) 37) 38) 39) ꡔ尋眞錄ꡕ, 64쪽. ꡔ尋眞錄ꡕ, 74쪽. ꡔ尋眞錄ꡕ, 51쪽. 현재도 점암 에서 임자도와 지도를 연결하는 선박이 운행 중이다.

362 362 지역과 역사 38호 고 송도, 사옥도의 탑선, 지도 윤랑포를 지나치며 임자도로 들어가는 노정 을 선택했다. 임자도로 가는 과정에서 주변 섬들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로를 택한 것 같다. 4월 7일 첫날에는 옛 임자도의 관아를 살펴보고, 오위장 이돈영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임자도의 관아는 이 미 폐쇄되어 이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첫날인 7일에는 관아의 옛터를 살 피고 임자도의 관원 및 士人들을 만나 작시하는 것으로 일과를 보냈다. 둘째 날인 8일에는 임자도의 鳥三里, 二黑岩, 多順今里를 순행하였다. 임자도 수군진이 있었던 진촌을 중심으로 섬의 남쪽 해안가 마을 순행하고, 남쪽 부두에서 배를 타고 다시 후증도로 이동했다. 오늘날 하나로 합쳐진 증도는 당시에는 전증도와 후증도로 구분되었다. 吳宖黙은 임자도에서 후 증도로 이동했다. 임자도에서 배를 탄 곳의 이름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순금리에서 삼십리를 가서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라고만 기록 되어 있다. 현재 용난굴이 있는 이흑암리 맨 아래쪽 해안가 일대로 추정된 다. 후증도로 넘어간 나루터는 津串이었다. 방축동과 대촌마을을 순행하고, 마을 서당인 홍현재에 들렸다. 셋째 날인 9일에는 증도(전증도)의 검동현, 대초동, 장고동, 우전마을, 덕정리를 순행했다. 낙영재, 향양재 등 서당을 방문해 격려하였으며, 지역 명소들을 방문한 후 大棗洞으로 돌아와 유숙했다. 넷째 날인 10일에는 비가 오고 날이 좋지 못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학도들 을 격려하고 작시하였다. 다섯째 날인 11일에는 후증도 곡도, 광암점을 지 나 사옥도 당두진으로 건너갔다. 이후 당산, 당촌, 묘동, 탄동, 탑선포를 순 행한 후 지도로 돌아왔다. 지도에서 윤랑포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배를 이 용하여 관아로 다시 이동하였다. 2차 순행은 같은 달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6일간이었고, 주요 코스는 압해도 일대였다. 참여한 인원은 1차 순행 때와 같았다.40) 순행노정을 정 리하면 <표 4>와 같다. 40) ꡔ尋眞錄ꡕ, 156쪽.

363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63 <표 4> 吳宖黙의 지도군 島嶼巡行 2차 노정(1897년 4월 24일 29일) 일정 4월 24일 주요 순행 지역 押海島 宋孔村-木浦 物成浦-押海島 盜浦-長甘村 4월 25일 압해도 上津-伏龍洞 4월 26일 압해도 伏龍洞 4월 27일 압해도 上津-古耳島 院庫只-古將村-蛛津 4월 28일 蟬島 蛛津-蛛洞 4월 29일 蟬島 蛛津-지도 會山-樓洞-五龍洞-劍山-관아 2차 순행은 압해도를 중심으로 지도군의 남쪽에 있는 여러 섬을 살피는 경로였다. 24일 지도 관아 인근 앞바다에서 배에 올랐다. 바람이 강하게 불 어 압해도 宋孔村 앞 포구에 배를 대고 배를 부리는 격꾼을 더 고용한 후 開港을 준비 중인 木浦에 잠시 들려 형세를 살폈다. 이후 달리도로 가려했 으나 역풍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고, 押海島 盜浦에 이르러 長甘村으로 들어 갔다. 25일에는 군수를 찾아온 주민들의 訟事를 판결해주고, 가란도 앞바다 를 지나 날이 저물 무렵 압해 上津에 이르렀다. 伏龍洞 문학인 金永複의 집 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26일에는 비가 내려 길을 나서지 못했다. 27일 다시 상진으로 가서 배를 타고 고이도로 들어갔다. 古耳島 院庫只를 통해 古將村으로 들어갔으며, 마을 서당인 必成齋를 살폈다. 28일에는 蟬島 蛛 津에 도착하였다. 섬의 士人과 訓長 學徒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蛛洞으로 들어가 會英齋에 여장을 풀었다. 29일 다시 주진에서 배를 띄웠다. 당초 梅 花 屛風 두 섬을 살필 목적이었으나 바람과 물때가 좋지 않아 사공이 난색 을 표하자 지도 會山을 통해 군치소로 복귀하였다. 2차 순행 때는 바람 등 사정 때문에 당초 목표했던 달리도ㆍ병풍도ㆍ매 화도 등은 들리지 못했다. 吳宖黙은 생각건대 이번 순시가 오로지 觀風 察 俗에서 비롯되어서 백성들 앞에 다가가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볼 계획이었 으나, 바닷길에 어려움도 많은데다가 바람을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되니 마치 觀物客과 서로 비슷하여 심히 탄식할만한 일이다. 는 표현을 남 기기도 하였다.41) 순행을 다녀보니 교통으로 인한 섬 주민의 불편함을 몸

364 364 지역과 역사 38호 소 체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날씨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吳宖黙은 두 차례의 순행을 통해 지도 를 제외하고 임자도ㆍ후증도ㆍ증도ㆍ사옥도ㆍ압해도ㆍ목포ㆍ고이도ㆍ선 도 총 8군데 지역을 시찰했다. 11일간의 일정 중에 이틀은 날씨로 이동하지 못했다. 당시 교통사정을 감안하면 꽤 많은 지역을 순행한 것이다. 두 차례 순행 과정을 통해 이동한 경로를 지도에 표시하면 <그림 1>42)과 같다. <그림 1>은 당시 서남해 도서지역에 섬과 섬을 연결하는 浦口43)가 촘촘 하게 발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吳宖黙은 주로 섬의 외곽에 형성된 포구를 이동하는 방식으로 도서 순행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루트는 다도해를 연결 하는 일종의 포구네트워크 라 할 수 있다. 吳宖黙의 기록에는 지도와 인근 도서지역을 연결하는 뱃길에 대한 세부 정보가 상세하다. 옛 포구에 관한 기록은 섬 문화와 섬사람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 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섬사람들의 교통수단과 관련해서는 고광민의 연 구(2006)가 거의 유일한 사례일 정도로 연구 성과가 부족하다.44) 그만큼 섬 지역 포구와 관련된 기록이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41) ꡔ尋眞錄ꡕ, 164쪽. 42) 신안문화원에서 발간한 ꡔ國譯 尋眞錄ꡕ(2014)의 부록으로 첨부된 자료를 인용 하였다. 신안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들과 함께 이 그림의 노정을 토대로 답사하 였다. 43) 浦 와 津 을 구분하는 것은 명확치 않다. 국내의 浦 는 물류이동을 포함하는 개 념이고, 津 은 사람이 건너다니는 것이 주목적인 곳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본 고에서는 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포구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44) 고광민, 나룻배와 나루터 이삭줍기 紀行 ꡔ島嶼文化ꡕ 28, 이 글은 智島 와 그 부속도서의 나룻배에 관한 견문과 소견을 紀行文으로 밝힌 것이다.

365 1897 년智島郡守吳宖黙의島嶼巡行과 ꡔ 尋眞錄 ꡕ 에담긴島嶼地域향촌사회정보 365 < 그림 1> 1897 년吳宖黙의서남해도서순행경로

366 366 지역과 역사 38호 때문에 吳宖黙의 순행기록은 119년 전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는 원천자료로서 가치를 지녔다. 吳宖黙의 순행기록에 등장하는 주요 포구를 정리하면 <표 5>와 같다. <표 5> 吳宖黙의 순행 노정에서 확인되는 포구 명칭 지역 지도 주요 포구명 允郞浦 會山津 사옥도 塔仙浦 元達浦 堂頭津 地勝津 임자도 廣巖浦 拂吉浦 菟裘浦 牧島浦 沙工津 후증도 津串浦 廣岩浦 胸沙浦 증도 飛鴈浦 압해도 盜浦 宋孔浦 上津 揷津 牧津 고이도 靑石浦 梧里浦 선도 蛛津 목포 物成浦 吳宖黙이 순행한 시기는 1897년 4월부터 5월 사이로 목포 개항(1897년 10월 1일) 직전시기에 해당된다. 목포가 개항 된 이후에는 汽船이 보급되고 주변 다도해가 목포를 기점으로 새로운 해상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갔다.45) 吳宖黙의 기록은 목포 개항이전 섬사람들의 생활권을 유추하게 하는 자료이 다. 또한 지금은 소멸되었지만 과거 섬과 섬을 연결하는 포구네트워크를 추 적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포구 문제만 가지고도 별도의 논고가 필요할 것 으로 판단된다. 다만 본고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 관심을 두고 대표적인 사례 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옛 포구의 기능과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 다. 둘째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포구의 기록이 지닌 가치에 대한 것이다. 먼저 포구의 변화양상과 관련해서는 2011년 신안군청 소재지가 된 압해 도의 사례를 살피고자 한다. 순행기록에는 압해도와 관련된 5개의 포구 이 름이 남아 있다. 실제로 순행 중 이용한 포구는 宋孔浦ㆍ盜浦ㆍ上津 세 곳 45) 다음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최성환, 개항 초기 목포항의 일본인과 해상네트 워크 ꡔ한국학연구ꡕ 26, 2012.

367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67 이다. 宋孔浦 는 현재의 압해도 송공리 송공항이다. 吳宖黙은 2차 순행을 위해 지도에서 출발한 후 격꾼을 고용하기 위해 송공포에 정박했다. 송공포 는 압해도의 外海 쪽으로 연결되는 중심포구였고, 吳宖黙이 지도에서 압해 도를 돌아 목포로 갈 때 경유지로 활용되었다. 盜浦 는 吳宖黙이 목포에 잠 시 들렸다가 다시 압해도로 이동할 때 처음 닿았던 포구이다. 이곳에서 長 甘村(현 압해읍 장감리)으로 들어갔다. 현지 조사과정에서 만난 장감리 마 을 주민들은 도포 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대신 바다를 통해 마 을에 들어오기 위해는 텃굴 이라고 부르는 곳에 배를 대었다고 한다.46) 이 일대가 도포 라고 불리던 포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낚시터 선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吳宖黙은 장감리에서 복룡마을로 이동할 때도 육로를 택하지 않고 포구에서 포구로 이동했다. 上津 이라는 곳에 이르러 복룡마을로 들어갔다. 고이도로 연결되는 중간 거점 포구였다. 吳宖黙은 상 <그림 2> 吳宖黙이 순행 중 이용한 압해도 포구 위치 46) 2015년 4월 24일 장감리노인회관 조사, 이은심(1940년생) 외 인터뷰.

368 368 지역과 역사 38호 진 을 이용하여 복룡마을을 살핀 후에 水路로 20리 떨어진 古耳島로 들어 갔다.47) 이 세 곳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에 표시하면 <그림 2>48)와 같다. 吳宖黙이 순행 중 이용했던 세 포구는 압해도 사람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압해도 포구 공간의 과거 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면 <표 6>과 같다. <표 6> 吳宖黙이 순행 중 이용한 압해도 포구의 과거와 현재 포구 1897년 吳宖黙 이용 상황 2016년 2월 현재 상황 특징 지도에서 출항하여 첫 번째 정 신항 개발, 암태도와 연결하는 宋孔浦 다도해와 연결 거점 박 새천년대교 건설 중 盜浦 목포항에서 압해도로 진입시 목포대교 건설로 포구기능 소 목포와 연결 거점 이용 멸, 낚시배 부두 上津 압해도 장감리에 복룡마을로 무안 망운과 연결되는 김대중 무안 내륙과 연결 거점 이동, 고이도로 이동시 이용 대교 건설, 낚시배 부두 세 포구의 현재 모습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두 지역에 이미 연륙교가 설치되었고, 나머지 한곳인 송공포에도 암태도와 연결되는 대교 건립이 한 창이라는 점이다. 吳宖黙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이 공간들은 소 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제는 연륙교 건설로 그 기능이 빠 르게 소멸 혹은 변화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도포 의 경우는 목포와 압해도를 오가는 철선 부두로 사용되다가 2009년 11월 목포와 압해도 신장리가 연결되는 압해대교 개통으로 그 기능이 소멸 되고 현재는 낚시배 부두로 활용되고 있다. 상진 은 복룡마을을 드나드는 포구인데, 이곳에 무안군 망운과 압해도 복룡마을을 연결하는 김대중 대교 가 건설되어 2008년 5월 개통되었다. 다리가 놓아졌지만 포구의 흔적은 그 대로 남아 있다. 현 주민들은 배가 닫는 곳을 나루가시49) 라 부른다. 현재 47) ꡔ尋眞錄ꡕ, 184쪽. 48) 네이버 지도를 활용해 위치를 표시하였다. 49) 섬 주민들이 나룻배를 칭하는 이러한 명칭에 대해 고광민은 나가시 는 나루질 값이 의 준말을 뜻한다고 분석하였다. 고광민, 앞의 논문, 2006, 299쪽.

369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69 는 낚시배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바로 앞에 효지도가 있고, 내륙인 무안 군 망운면과 마주하고 있다. 압해도에 압해대교와 김대중대교가 개통되면서 송공포 가 압해도와 다도해의 여러 섬(자은ㆍ암태ㆍ팔금ㆍ안좌 등)을 연 결하는 거점공간으로 기능이 강화되었다. 1897년 목포가 개항된 이후에는 목포항이 다도해 관문으로서 기능했는데, 현재는 압해도 송공항이 일정부분 의 역할을 분담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2018년 개통예정인 새천년대교 (압해도와 암태도 연결)가 완성되면 이곳 역시 포구적 기능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압해도 세 포구의 과거와 현재 비교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시사점은 공간 의 활용성이다. 비록 배를 이용한 소통의 기능이 이제는 다리로 변화되었지 만, 공간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활용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吳宖黙의 순행기록 중 포구관련 내용에서 두 번째로 검토할 수 있는 부분 은 사라진 옛 포구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이다. 당시 군청 소재지였던 지도 를 예로 들어보겠다. 지도의 경우에는 允郞浦 와 會山津 이 주목된다. 특히 윤랑포 는 앞장에서 서술한 것처럼 지도가 군청소재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 이 된 뱃길의 중요한 목이었다. 과거에 남쪽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배가 머 물던 곳 이다.50) 1896년 吳宖黙이 한양에서부터 배를 타고 지도에 부임할 때 이곳을 통해 입도하였다.51) 바닷길을 통해 지도로 오는 경우 대부분 이 포구를 이용했다. 윤랑포는 조선시대 조운선이 경유했던 곳이기도 하다.52) 팔금도 등 현 신안의 섬 지역에서 영광이나 군산 쪽으로 가기위해서는 먼 바다를 돌아가는 것 보다는 임자도와 지도 사이 섬을 경유하여 고군산 열도 해역으로 항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뱃길이었는데 이때 윤랑포가 거점으로 활 용되었다. 吳宖黙이 순행 중 사옥도 塔仙浦에서 이동시 배를 빌려온 곳도 윤랑포였다.53) 이곳에는 항시 주변 섬을 연결하는 나룻배들이 존재했음을 50) 신안문화원, ꡔ新安郡地名誌ꡕ, 2002, 28쪽. 51)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5월 15일. 52) 최성환, 頭流壇 을 통해 본 金平默의 智島 유배생활 : 그 소통과 영향 ꡔ민족 문화논총ꡕ 56, 2014, 462쪽. 53) ꡔ尋眞錄ꡕ, 123쪽.

370 370 지역과 역사 38호 알 수 있다. 윤랑포 자리에는 현재 지도 조선소가 조성되어 있다.54) 조선소 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해상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지조건이라는 점을 의미 한다. 119년 전 초대군수가 배를 타고 들어 온 장소에 지금은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건립되어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회산진 의 경우는 吳宖黙이 남쪽의 섬을 순행하고 선도에서 지도로 들어 올 때 사용했던 포구이다. 지도는 1975년 무안군 해제와 연륙 된 이후 내륙 쪽의 지형변화가 많아 이 일대 옛 포구의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吳 宖黙의 기록을 통해 과거의 뱃길과 포구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회산진의 경우 현장 답사를 통해 이 일대가 지도와 선도 지역 섬을 연결하는 포구였 음을 증명하는 유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산진이 있었던 해변가에 조성된 한 묘소의 상석에 會山 船艙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비록 지금은 포구 로 이용되고 있지 않지만 과거에 이 일대가 활발하게 배가 오가는 자리였음 이 확인되었다.55) 吳宖黙의 기록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다. <그림 3> 會山 船倉 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회산진 인근 묘석 54) 현 (주)신안중공업,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2002 일대에 해당된다. 55) 현재( ) 지도읍 선도로 가는 배는 지도읍과 연륙된 지도읍 송도 선창 에서 왕래하고 있다.

371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71 이렇듯 어떤 기록에서도 찾기 힘든 옛 포구에 대한 단서로서 吳宖黙의 기 록은 가치가 있다. 섬은 아니지만 목포와 관련 된 포구 기록도 매우 희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2차 순행 시 잠시 들렸던 목포와 관련된 내용에 物成浦 라는 이름이 등장한다.56) 목포를 시찰하기 위해 도착한 곳이 물성포 였다. 육지에 내리니 여기부터 부두가 시작되는 곳 이라 기록하고 있다. 물성포 는 吳宖黙의 기록을 통해 처음 확인되는 지명으로 開港 직전의 목포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는 포구 이름이다. 일본인들이 1930년에 발간한 ꡔ木浦府史ꡕ 에는 개항당시 목포 상황에 대해 항구에는 기선이 매어 있기는 하나 정박하 는 배는 한 척도 없을 뿐 아니라 거룻배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는 식의 표현이 담겨있다.57)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되기 전에는 항구적 기 능이 거의 없었다는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吳宖黙의 1897년 4월 24일 기록에 등장하는 물성포 라는 포구 이름은 일본인의 그러한 왜곡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역사적으로 목포는 연안과 도서들을 대상으로 물자 수송과 문물교류가 이루어지는 漕運路로서 기능해 왔다. 영 산강을 통하는 조운선이 목포 해로를 따라 북상하였다. ꡔ世宗實錄地理志ꡕ 에는 下道의 漕運이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고 표현하고 있다.58) 또한 개항되기 전부터 목포에 많은 세곡이 집결ㆍ운송되고 있었다. 목포는 湖南지방의 田稅ㆍ大同米를 賃船上納 하는 곳이었다. ꡔ全羅道關草ꡕ에 남 아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근거가 될 수 있다. 木浦로 운반해 둔 쌀을 賃船에 싣고 서울로 수송하라 하여 監官 李興基ㆍ金 世泓에게 운반을 명해 1886년 輪船未納條를 수대로 出給했다는 報告.59) 개항이전 ꡔ全羅道關草ꡕ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는데, 호 남 인근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곡들이 목포로 옮겨져서 이곳에서 서울 등 56) 57) 58) 59) ꡔ智島郡叢瑣錄ꡕ, 1897년 4월 24일. 김정섭 역, ꡔ목포부사ꡕ, 목포문화원, 2011, 68쪽. ꡔ世宗實錄地理志ꡕ 전라도, 爲木浦入于海, 下道遭運由此達于京 ꡔ全羅道關草ꡕ, 1887년 5월 29일 完營에서 議政府로 보낸 문서.

372 372 지역과 역사 38호 타 지역으로 운송되는 상황이었다.60) 조운선의 거점으로서 목포의 기능이 개항 직전까지 유지 되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吳宖黙이 언급한 물성포 라는 이름이 목포가 지닌 개항이전 포구로서 기능을 함축하 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吳宖黙이 남긴 포구에 대한 기록은 도서해양문화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吳宖黙의 순행이 비록 좁은 지역에 한 정되어 있지만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현장기록이라는 측면에서 후학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원천자료로서 가치를 지녔다. Ⅲ. ꡔ尋眞錄ꡕ에 담긴 섬 지역 향촌사회정보 ꡔ尋眞錄ꡕ에는 순행 중에 견문한 내용과 지역의 풍토에 대한 정보가 다양 하게 수록되어 있다. 尋眞錄序에 지나가며 들르는 곳에 따라 그 形勝ㆍ風 土ㆍ戶口ㆍ物産을 깊이 찾아 구하고 널리 캐어 모으다 61)는 표현이 담겨 있어 당대 지역 정보에 대한 세심한 기록을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ꡔ尋眞錄ꡕ의 내용 중 당대 도서지역 향촌사회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정 보의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지역 교육환경에 대한 정보. 둘째, 향촌사회 활동 인물에 대한 정보와 관련 詩文. 셋째, 도서지역 각 마 을의 개황과 풍세. 넷째, 섬 지역 문화유적과 전승설화. 이와 관련 된 대표 적인 사례 분석을 통해 ꡔ尋眞錄ꡕ이 지닌 사료적 가치를 살피고자 한다. 1. 섬 마을 서재와 교육환경 먼저 섬마을의 교육환경과 관련된 부분이다. ꡔ尋眞錄ꡕ에는 도서 지역에 운영되고 있는 서재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다. 거의 모든 마을에 마을 주민 60) ꡔ全羅道關草ꡕ, 1888년 6월 6일 完營에서 議政府로 보낸 문서. 61) ꡔ尋眞錄ꡕ, 49쪽.

373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73 들의 교육을 위한 서재가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ꡔ尋眞錄ꡕ에 언급 된 서재 이름을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표 7> ꡔ尋眞錄ꡕ에 기록된 서재 명칭 소재지 훈장 학도 虹見齋 後甑島 大村 李鍊庠 李文燁 등 수십여 인 樂英齋 甑島 大棗洞 趙日元 남자어른과 아이 수십인 向陽齋 羽田島 羽田 朴炳文 朴永奎 등 십여인 志成齋 沙玉 堂山 黃東源 수십인 松舘 押海島 伏龍洞 朴德弘 金應春, 金成七 등 수십 인 必成齋 古耳島 古將村 金碩義 金敦伯, 牟化文, 朴昌雲 등 會英齋 蟬島 蛛洞 金濟,朴鼎載 金仁祐, 金基奉 朴鍾述 등 수십인 <표 7>은 두 차례의 순행 과정에서 방문한 지역의 각 마을 서재이다. 훈 장의 이름과 대표적인 학도의 이름, 숫자 등이 소개되어 있다. 홍현재의 경 우는 月溪 李之馨이 건립하고, 蒼窩 金一淵이 훈장을 지냈다는 상세한 내력 과 함께 이름의 유래도 밝히고 있다. 齋를 세울 때 무지개의 상서로움이 나 타났다 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라 한다.62) 吳宖黙이 방문했을 때 齋가 아주 넓고 시원했으며, 내부에는 原韻을 두어 詩文 板에 새겨 걸고, 또 여러 名勝 의 和詩를 걸어 붙여 놓은 것이 수십 판이나 있었다.63) 대부분 서재에 詩板 이 걸려 있었고, 모양새가 제법 좋은 편이었다. 특히 선도에서 들린 會英齋 의 경우 대나무 숲이 사방을 두르고 지대가 높고 밝아 吳宖黙에게 매우 인 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다.64) 각 섬마을마다 존재했던 이러한 서재 양상은 앞장에서 밝힌 吳宖黙의 興 學 목적과는 상당히 대치되는 면모이다. 흔히 섬 지역은 교육에 대한 시설 들이 부재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ꡔ尋眞錄ꡕ의 내용을 통 62) ꡔ尋眞錄ꡕ, 67쪽. 63) 위의 주와 같음. 64) ꡔ尋眞錄ꡕ, 193쪽.

374 374 지역과 역사 38호 해서 당시 섬 지역에서도 나름대로 향촌교육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륙 출신 관료의 생각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吳宖黙의 기록은 조 선후기 연안 도서지역의 교육활동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 로 평가되고 있다.65) 섬 지역의 교육문제를 언급할 때는 자주 언급되는 것 이 유배인의 영향이다. 정약전, 최익현, 김평묵 같은 인사들이 섬에 유배 와 서 서당을 열어 지역민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유배인이 오는 섬들은 제한 적이었다. 현 신안군의 경우는 지도ㆍ임자도ㆍ흑산도 정도였다. 吳宖黙의 자료는 유배인의 영향 외에도 일반적으로 섬 지역에서도 서당을 통한 유교 적 교육풍토와 환경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하의도가 고향인 김대중 전 대 통령의 경우도 하의도 공립보통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대리마을에 운영되고 있던 서당인 鳳覽齊를 다녔다.66) 이러한 상황은 吳宖黙이 지도군수로 부임했던 시기의 일시적 현상이 아 니라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吳宖黙 기록 외에 서재와 관련된 정보가 담긴 자료로 1908년 발간된 ꡔ智島郡邑誌ꡕ와 1926년 발간된 ꡔ全羅南道誌ꡕ가 있 다. 특히 ꡔ智島郡邑誌ꡕ에는 吳宖黙이 순행하지 못했던 지역의 서재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다. 총 39곳의 서재 이름과 간략한 내력이 수록되어 있다.67) <표 7>에 나오는 서재들이 대부분 1908년 기록에도 남아 있다. 또한 1926 년 ꡔ全羅南道誌ꡕ가 발간 된 시기는 이미 근대식 학교가 섬 지역에도 개설된 이후 시점이다. 그러나 이 책에도 여전히 섬 지역의 몇몇 서재 이름이 남아 있다. 이때는 지도군이 무안군으로 통합된 이후인데, 현 신안군 지역과 관 련 된 서재로 悅樂齋(지도), 勿老齋(지도), 志成齋(사옥도), 永慕齋(증도), 虹見齋(증도)가 소개 되어 있다.68) 이 중 志成齋와 虹見齋는 吳宖黙이 순 행 중 직접 방문했던 곳이다. 吳宖黙의 ꡔ尋眞錄ꡕ에 나오는 여정을 찾아다니는 답사과정에서 만난 섬 65) 66) 67) 68) 정순우, 앞의 논문, 2011, 291쪽. 2009년 4월 24일 김대중 전 대통령 하의도 방문행사 중 회고내용. ꡔ智島郡邑誌ꡕ, 지도향교 등에 원본이 전해 오고 있다. 羅壽佑, ꡔ全羅南道誌ꡕ, 1926.

375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75 원로들 중에는 옛 서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꽤 있었다. 증도 장고리 이문규(1930년생) 옹은 본인이 직접 대초리의 낙영재를 다녔다고 증언하였고, 대촌의 홍현재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었다. 우전마을 조성육 노인회장은 향양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의 안내로 증도에 있었던 옛 서 재 터를 답사할 수 있었다. 현재는 모두 빈터만 남아 있고 건물은 철거 된 상태였다.69) 吳宖黙의 기록과 섬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섬 지역에도 서재 를 통한 교육이 각 마을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대 시기까지도 유지되어 왔었음을 알 수 있다. 2. 섬 지역 식자층 인물정보와 詩文 ꡔ尋眞錄ꡕ에는 각 지역마다 존재했던 당대 섬마을 식자층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 吳宖黙은 이들과의 교류를 즐겨했다. 일반적으로 도서지역하면 학문적인 수준이 낮고 지식층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편견이 있다. ꡔ尋眞 錄ꡕ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모는 이 시기 섬사람들의 지적흐름을 살펴보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ꡔ尋眞錄ꡕ에는 총 200명의 섬사람들 이름이 등장한다. 지역에서 공무를 맡아 하는 향원도 있고, 서당의 훈장과 학도, 그리고 각 마 을의 士人들의 이름이 실려 있다. 119년 전 현 신안군 도서지역에 어떤 사 람들이 살고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이다. 적어도 당시 지도군 군민 200명의 이름이 ꡔ尋眞錄ꡕ을 통해 확인되는 것 자체가 큰 가치를 지닌다. 吳宖黙의 순행 목적에는 지역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피기 위함도 포 함되어 있었다. 人物을 상고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것이 근심거리였다. 이에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험한 길을 나서게 된 것도 대개 그 뜻이 여기에 있 었던 것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70) 그는 순행하면서 학식과 인품을 지닌 여 러 지역 인사들을 만나 교류하였다.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에 대한 느낌을 ꡔ尋眞錄ꡕ에 남겨놓았다. 이는 섬사람들의 지적전통과 교양 수준을 가늠할 69) 2014년 12월 26일 증도 답사. 70) ꡔ尋眞錄ꡕ, 106쪽.

376 376 지역과 역사 38호 수 있는 자료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표 8>과 같다. <표 8> ꡔ尋眞錄ꡕ에 소개된 섬마을 식자층 이름 관련 내용 任德敏 임자도 廣産, 文華로 온 섬사람 중 가장 뛰어나다. 姜義淳 임자도 鎭村, 일찍이 老成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吳權彬 임자도 三頭里, 文士이다. 後甑, 나이가 80에 가까운데 지난 날 문학으로 명성을 떨친 선비로, 문재가 뛰어나다 李之馨 고 하여 그 때문에 關報에 오른 사람이다. 한 번 만나보고 싶던 차에 이처럼 만나 이 야기를 나누니 매우 기쁘다. 前甑 登仙山, 마주대하여 이틀 동안 터놓고 이야기하며 그 人品을 보니 그 氣宇는 高 鄭基源 潔하고 그 儀度는 端飭하며 그 經史는 淹博하고 그 語黙은 簡重하더라. 號를 松庵으 로 삼았다. 安栽希 사옥도 灘洞, 일찌기 한 번 만나본 사이로 翹楚之士. 金永複 押海 伏龍洞, 단아한 文學人이다. 吳宖黙이 임자도 섬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평가한 임덕민 은 訥軒 任 行宰을 칭한다. 김평묵이 1881년부터 1884년까지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문인이었다. 훗날 임자도 화산마을 화산단에 배향되었을 정도로 지역민 들에게 존경받는 인사였다. 흥미로운 점은 吳宖黙이 순행 중 직접 만나본 인사들에게 지역의 興學 을 위한 직책을 맡기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吳宖黙은 1897년 4월 11일 前 甑島의 登仙山 아래에서 鄭基源을 만났다. 이틀 동안 그와 교류하면서 人品 과 학식에 감탄하게 되었고, 지도 본청으로 돌아온 후 4월 15일에 정기원을 都訓長으로 임명하였다.71) 섬마을인 지도군 지역의 향촌 인사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자료로는 비교 적 근자에 주목받기 시작한 ꡔ頭流壇實記ꡕ가 있다.72) 지도에서 유배 생활했 던 김평묵을 향사하기 위해 지역민들이 두류단 조성하는 과정과 제를 지내 는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71) ꡔ尋眞錄ꡕ, 131쪽. 72) 지도향교 소장. 신안문화원에서 국역본(2011)을 발간 한 바 있다.

377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77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頭流壇靑襟案諸員 에는 관련 유림 185명의 명단 이 간략한 인적사항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이 명단이 작성된 시기는 1916 년이다. ꡔ尋眞錄ꡕ에 수록된 인사들의 이름과 頭流壇靑襟案諸員 에 나오 는 인물들은 당시 도서지역 인사들의 학맥과 활동내력을 추적할 수 있는 자 료적 가치를 지녔다. 지역 인사들에 정보와 더불어 ꡔ尋眞錄ꡕ이 지닌 차별화 된 가치는 섬사람 들이 지은 時文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ꡔ尋眞錄ꡕ에는 吳宖黙의 순행 중 현장에서 운을 띄워 작시한 시문 총 45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40편은 吳宖黙의 글이고, 대다수는 순행에 동행했던 인사들과 지역주민들 의 글이다. 吳宖黙이 興學 을 권하기 위해 동행한 인사들이 탐방한 마을과 관련된 시를 지은 것이 많고, 일부는 순행 중에 만난 섬마을 지식인들이 吳 宖黙에게 운을 띄워 작시를 요구한 경우도 있다. 또한 실제 순행과정에서 섬 마을 학도들은 吳宖黙 군수에게 자신들이 지은 시를 비평해달라는 요청 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럴 때 마다 吳宖黙은 詩의 優劣을 가려, 白紙 로 시상 하였다.73) ꡔ尋眞錄ꡕ에 시문이 수록되어 있는 인물의 수는 총 106명이다. 시문의 내 용들은 탐방한 마을의 풍속과 지리적인 특징이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교육 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탐미하면서 지은 시들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의 서재 이름과 興學 을 위한 제언들이 시문 속에 녹아 있다. 평범한 섬마을 주민들의 시문이 수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 자료이며, 당시 섬사람들의 정서와 지적수준 이 엿보이는 구체적인 사례이다. 3. 섬 마을의 개황과 풍세 ꡔ尋眞錄ꡕ에는 서남해 도서지역 각 마을의 세부 상황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다. 吳宖黙은 ꡔ輿載撮要ꡕ를 집필할 만큼 지리분야에 대한 전문 식견 73) ꡔ尋眞錄ꡕ, 64쪽.

378 378 지역과 역사 38호 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ꡔ尋眞錄ꡕ의 서술에도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 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이 지역에 대한 과거 정보를 얻기 위해 기초적으 로 참조하는 자료는 당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이다. 그런데 섬은 행정구역 에 대한 편제 변화도 심하고, 독립적으로 엮어진 자료가 드물어 관련 정보 를 얻는 것이 쉽지 않다. 섬의 이름과 인구 수 정도만 명기되어 있으면 그나 마 다행인 일이다. 그런 측면에 吳宖黙의 기록은 과거의 상황, 마을의 원형, 지리적인 정보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구체적인 예로 임자도 진리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鎭 관아 앞에는 여염집이 백여 호쯤 되어 보이고, 서쪽으로는 大屯山 오른쪽 에 大搏山 왼쪽에 葛巨幕이 있고, 북쪽에는 廣巖浦 掛吉浦 菟裘浦 台耳島가 있 고, 동쪽으로는 沙工津 서쪽으로는 牧島浦가 있는데 모두 물고기와 소금이 풍 성하게 나오는 곳이다. 북으로는 大小洛月과 접해있고 남으로는 後甑과 이웃하 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끌어안고 있다. 또 동서 二部를 두고 열 여섯개 洞으 로 나뉘어 오백 戶에 가깝다. 鵂巖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바로 江을 두르고 있는 것이 모두 산이라서 섬들 이 물 가운데 떠 있는 줄 모르겠다. 또 大搏과 葛巨幕 두 산으로 말하면 靑烏經 에 이른바 雙帆體格인데 그곳 사람들이 배가는 모습인 行舟形이라 하는 것이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이다. 산꼭대기에 이르니 서북쪽으로 멀리 통해 있어 하늘 과 땅의 끝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 鵂峰이 있고 그 아래 수십 호 되는 마을이 있어 물어보니 廣産이라 하는데 여기가 任德敏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한 다.74) 임자도의 섬마을에 대해 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은 본적이 없다. 주변의 산세와 포구, 물산, 인구, 중심인물 등에 대한 내용이 고르게 남아 있다. 현 신안군의 군청소재지인 압해도에 대한 기록도 상세하다. 압해도 복룡동의 1897년 4월 26일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곳 伏龍洞엔 두 마을이 있는데, 西北을 향하여 局을 열어 선인이 笏을 짚 고 있다는 仙人拄笏格이다. 丁ㆍ金 두 姓이 주로 살고, 남쪽에 笏山이 있고, 동 74) ꡔ尋眞錄ꡕ, 55쪽.

379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79 쪽에 後嶺이 있고, 서쪽으로 五里에 錦城山 아래 押海縣 옛터가 있다. 옛터에 서 북쪽으로 三里 쯤에 鷹峰山城이 있고, 서쪽으로 삼십 리 되는 곳이 宋孔山 으로 위에 山城이 있으며, 동남쪽으로 鍤津, 동쪽으로 牧津, 서쪽으로 宋孔浦 가 있다. 대개 이 섬이 咸平 太白山에서 떨어져 나와 蟬島가 되고 바다를 건너 서 笏山이 된 것이다. 또 鶴洞에는 姜씨와 朴씨, 鳥川에 金ㆍ高, 大伐里에 文 ㆍ金ㆍ朴, 水落洞에 姜ㆍ金, 宋孔里에 李ㆍ金ㆍ朴, 佛梅里에 姜ㆍ李, 古寺洞 에 姜ㆍ崔, 新基에 曺ㆍ張, 苔島에 朴ㆍ趙, 長甘里에 李ㆍ千, 新庄村에 李, 龍井里에 金씨 姓이 주로 어울려 산다고 한다. 또 이 섬에는 24개 마을이 있고 人家는 400여 호이다.75) 풍수와 산맥, 포구, 거주하고 있는 주요 성씨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어 있 다. 섬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기 위한 원천자료로서 이보다 충실하게 기록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吳宖黙의 기록 정신이 빛나는 대목이다. 또한, 자신의 책무에 충실하고자 했던 관리로서의 소양이 느껴진다. 그는 읍내 호구는 몇인지, 섬의 크고 작음, 백성들의 가난하고 풍요로움, 길의 거리가 멀고 가까움, 산천 포구와 들의 풍토 또한 자세히 알아야 爲政에 보 탬이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76) 또한 吳宖黙은 순행도중에 마을의 지세를 상세히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주변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 지리적인 특징을 파 악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후증도 대촌 마을의 지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점심밥을 먹고 난 후 여러 사람과 뒤 언덕에 올랐는데 주산은 竹山으로, 서 남으로 향하여 장막을 열고, 산에 의지하고 바다와 마주하여 좌우에 砂格이 있 어 蓮花浮水라 할 만하다. 한 섬 안에 다섯 洞이 있는데 동쪽은 曲山, 서쪽에는 劍山, 또 津串浦 廣岩浦 胸沙浦가 있어, 모두 물고기와 소금이 풍성하게 나오 는 곳이다. 동으로는 沙玉, 남으로는 前甑 서남으로는 慈恩이 모두 경계를 접하 고 있다. 吳宖黙이 남긴 섬 지형에 대한 묘사는 섬의 원형에 대한 고증자료로서도 75) ꡔ尋眞錄ꡕ, 174쪽. 76) ꡔ智島郡叢瑣錄ꡕ, 1896년 6월 2일.

380 380 지역과 역사 38호 가치가 있다. 섬 지역은 간척으로 인한 지형변화가 심한 곳이다. 지금은 하 나로 된 섬이 과거에는 여러 개의 섬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지역이 대부분이 다. 예를 들면 증도가 그렇다. 당시 증도는 전증도와 후증도가 별개의 섬이 었다. 그런데 후증도에서 전증도로 이동할 때 배를 이용하지 않았다. 썰물 때에 노두(돌 징검다리)를 통해서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길을 나서 십 리를 가니 路臺에 이르렀다. 潮水가 밀려 나간 모래밭은 돌무더기, 돌 징검 다리를 모두 드러내고 십여 리를 이어 뻗쳐있는데, 남쪽으로 닿은 곳이 前 甑島와 경계를 이룬다. 고 기록되어 있다.77) 또한 우전도가 이미 연륙되어 라는 기록78)이 있어 지금의 우전마을이 원래는 우전도라는 별개의 섬이었 고, 오횡묵 순행시 이미 연륙된 상태였음이 확인된다. 이렇듯 吳宖黙의 순행기록은 섬 지형의 원형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순행 한 마을의 지리적 특징에 대한 오횡묵의 기록을 토대로 지금의 지형과 비교 분석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4. 섬 지역 문화유적과 전승설화 ꡔ尋眞錄ꡕ에는 당대 섬별 명소와 유적, 관련 설화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 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유적, 변해버린 지형에 대한 묘사가 옛 흔적을 찾 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임자도를 순행하면서 기록한 조선시대 임자진의 모습이다. 1895년 수군진이 폐진 된 직후 상황이었지만 당시의 흔적에 대한 묘사를 통해 옛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임자진에 대 한 기록은 조선후기(1872년)에 제작된 지도79)가 남아 있지만, 현재의 임 자도 주변 형세가 과거와 너무 많이 변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디가 정확하게 임자진의 본영이 있던 곳인지 조차 검증되지 못한 상태이다. 吳宖黙이 남긴 기록과 비교해서 옛터의 형세를 추정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래와 같은 77) ꡔ尋眞錄ꡕ, 174쪽. 78) ꡔ尋眞錄ꡕ, 81쪽. 79) 규장각소장 1872년 지방지도, 영광임자진지도.

381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81 기록이 남아 있다. 荏子島 待變亭 나루에 다다르니 水路로 오십 리 길이다.(중략) 길 왼쪽에는 鎭이 있을 당시의 遺愛碑가 서 있는데 어떤 것은 鐵碑 어떤 것은 石碑이다. 1리 를 가서 荏子鎭 관아에 들렸다. 관아는 남쪽으로 향하고 修政軒 雙栢堂이라 扁 額이 걸려있고 또 약간의 詩를 판에 새겨 걸어 놓았는데, 한번 鎭이 폐해진 후 부터 쓸고 닦지 않아 오직 뜰 앞에 한 그루 소나무와 한 쌍의 잣나무, 후원에 푸 른 대숲과 푸른 소나무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황폐한 樓臺위에서 興亡盛衰를 懷古하게 한다. 임자진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대는 곳의 이름은 待變亭 나루였다. 지금의 임자도 진리 선착장 일대로 추정된다. 그 주변에 임자진과 관련 된 여러 종 류의 遺愛碑가 있었다. 이 비들은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배를 정박하는 곳으로부터 1리 정도 거리에 임자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修政軒 雙栢 堂이라는 당호도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최근 목포시에서 옛 木浦鎭 터를 역 사공원화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객사건물을 복원하였는데, 객사의 옛 이름 을 찾지 못해 임의로 木浦之館 이라는 이름의 편액을 달게 된 점을 감안하 면 吳宖黙의 이러한 기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80) 또한 官衙 뒤 主山인 童山이라 하는 곳에 오르니 앞에 鵂巖이 있는데 모 양이 매우 기이하며 큰 소나무 몇 백 그루가 무성하고 푸르다. 는 기록이 있 어 吳宖黙이 묘사한 지형을 바탕으로 옛 임자진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 다. 그동안 임자도를 수차례 답사했지만 지역 주민들도 대략 임자진의 위치 가 현 임자면사무소 인근이라는 정도로 인식할 뿐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구 전은 명확치 않은 상황이다. 현장에 성벽 같은 이렇다 할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吳宖黙의 기록과 비교 해 볼 때 현 임자면 진리노인회관 일대가 임자 진이 있었던 장소로 추정된다. 바로 인근에 童山 으로 언급된 작은 언덕이 있고, 소나무 군락 사이에 부엉이 모양을 하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吳宖 黙이 鵂巖 으로 칭한 바위로 추정된다. 80) 목포진은 현재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었고, 2015년 1월 2일 객사에 木浦之館 이 라는 편액을 걸고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382 382 지역과 역사 38호 지역의 명물에 대한 사례는 증도의 吳中巖 과 해당화 명사십리 에 대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신안군 증도는 현재 슬로우시티로 각광 받고 있는 곳이 다. 그러나 오중암 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吳中巖 에 대해서 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吳中巖은 마을 서쪽 2리 되는 곳에 기이한 형태의 오래 된 바위로 바닷가 벼 랑 물이 돌아 흐르는 곳에 있는데, 그 위에는 삼십 인 가량이 앉을 수 있는 너럭 바위가 6~7층으로 되어있고 높이는 6~7장丈쯤 된다. 이곳 주민들이 늘 이곳 에서 낚시를 하며, 또 落照의 빼어난 경관이 있고, 위로는 큰 소나무 밭이 5~6 리에 걸쳐 있어 한 아름 가까운 소나무도 매우 많다고 한다. 이곳을 이 섬의 第 一形勝處로 이곳 사람들은 꼽는다.81) 당시 섬사람들이 第一形勝處로 손꼽는다는 오중암 은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오징어 모양을 한 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 증도 엘로라도 리조트 유람선 시설이 있는 곳의 해안가 바위이다. 현지에는 오중암 내력과 관련 된 어떠한 설명도 적혀져 있지 않다. <그림 4> 증도 第一形勝處로 언급된 오중암 의 현재 모습 81) ꡔ尋眞錄ꡕ, 85쪽.

383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83 또한 증도 순행시 우전 해수욕장의 자랑인 해당화 풍경을 보고 그 아름다 움을 칭송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吳宖黙이 우전마을에 간다고 하니 유독 따 라 나서겠다고 하는 섬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마침 해당화가 한창일 때라서 겸사겸사 이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82) 해당화가 핀 명사십리의 풍 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해당화를 보니 이제 한창 성하게 피어 明沙十里 넓은 곳을 온통 덮고 있었 다. 이리저리 눈이 가는 데로 둘러보아도 아득하게 넓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이때 실바람이 불어와 그 향기가 코끝에 풍겨 왔다. 옛말에 해당화는 향기가 없 다고 하였는데 매우 괴이쩍었다.83) 해당화는 현재 신안군의 郡花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에는 섬마을 곳곳에 해당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사라진 옛 명성이 吳宖黙의 기록을 통해 입증되고 있 다. 오중암 과 해당화 명사십리 에 대한 기록은 현대적으로 섬마을 관광자 원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활용가치가 높다. ꡔ尋眞錄ꡕ에는 옛 설화와 관련해서도 여러 지역에서 직접 전해들은 이야 기가 그대로 옮겨져 있어 주목된다. 압해도의 송장군 과 관련된 설화가 대 표적인 사례이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宋孔村 앞 포구에 배를 대었다. 잠시 머물고 있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 기를, 저기 언덕에 있는 바위 구멍이 곧 신라 宋將軍 太라는 사람이 태어난 구 멍이라서 宋孔巖이라 하는데, 그 구멍이 깊고 넓다고 하였다. 비록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또 하나의 古跡을 시골 사람으로부터 얻어 들었다.84) 현재 압해도 송장군 설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유형의 이야기 전해온다. 吳宖黙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은 119년 전에 당시 섬 주민들에게 직접 들은 82) ꡔ尋眞錄ꡕ, 81쪽. 83) 위의 주와 같음. 84) ꡔ尋眞錄ꡕ, 158쪽.

384 384 지역과 역사 38호 내용이기 때문에 설화의 원형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섬 지역은 아니지만 목포 유달산 노적봉 설화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노 적봉 설화의 원형에 해당되는 자료이다. 노적봉은 이충무공의 호국전설이 담겨져 있는 뜻 깊은 장소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이 봉우리에 이엉 을 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露積처럼 보이게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 노적봉과 관련 된 잃어버린 스토리가 吳宖黙의 순행기록 을 통해 확인된다. 吳宖黙은 1897년 4월 24일 압해도 순행 과정에서 잠시 목포에 들렸다. 이 때 들었던 노적봉에 대한 내력이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위에 老人巖이 있고 가운데에는 露積巖이 있다. 아래에는 賊岩이 있다. 사 람들이 말하기를 노인이 적으로부터 노적을 지키고 있는 형상이라 한다. 목포 원로들 사이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노적봉의 의미를 격하시키 기 위해 노인암으로 불렀다 는 구전이 전해져 온다. 그런데 이는 와전 된 것 이다. 노인암 에 대한 기록은 일제 강점기 이전자료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본 연구자가 노인암 의 정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872년 제작된 무 안현목포진지도 때문이었다. 이 지도는 木浦鎭과 주변 형세를 추상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인데, 노적봉 과 노인암 이 별개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도에 표기되어 있을 정도면 당시 이미 지역 명소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 가 된다. 그러나 이 지도 상으로는 노인암 의 위치나 의미를 확인하기 어려 웠다. 그런데 吳宖黙의 기록을 보고서 비로소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 다. 노인암 은 노적봉을 지키고 있는 노인의 형상을 한 바위이다.85) 吳宖黙 의 기록은 노적봉 설화의 원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단순히 노적 봉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훔치려는 도적과 지키는 노인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렇듯 吳宖黙의 기록은 도서해안 지역 전승설화의 원형적 85) 노인암 은 지금도 유달산 등구 계단 바로 위에 현존하고 있다. 노적봉을 바라보 는 허리가 굽은 노인형상이다. 현재는 노인암이 아닌 쥐바위(일명 복바위) 로 불리고 있다. 도적암 의 위치는 현 시민의 종 바로 뒤편 바위군상을 지칭한다. 멀리서 보면 도적들이 숨어서 뭔가를 염탐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385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85 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ꡔ尋眞錄ꡕ에는 섬 문화의 상징인 노두에 대한 내용, 왕건의 해 상활동과 연관 있는 고이도 산성유적 등 당대 문화유적과 설화와 관련된 다 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吳宖黙이 직접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섬과 향촌사회에 대한 정보로서 차별화 된 가치를 지녔다. 맺음말 지도군은 섬에서 섬을 다스리고, 섬사람들이 받는 차별을 없애기 위한 목적 으로 1896년 設郡 되었다. 초대군수로 부임한 吳宖黙은 관료로서 소 임에 충실한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섬 주민들의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 다. 그가 남긴 ꡔ尋眞錄ꡕ은 일종의 巡行錄 이자, 주민들의 興學 을 권장하는 교재로 만든 것이다. 본고에서는 ꡔ尋眞錄ꡕ의 내용 분석과 현장 답사 결과를 토대로 그 특징과 섬 문화연구 자료로서 지닌 사료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연구 성과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리된다. 첫 번째는 포구네트워크 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그 공간적 기능 변화를 살핀 점이다. 吳宖黙은 두 차례 순행 중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지도 외 8곳의 섬을 이동하면서 여러 마을을 시찰하였다. 그러한 노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섬과 섬, 마을과 마을 을 연결하는 포구네트워크 가 촘촘하게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吳宖黙 의 순행기록은 과거 섬 지역의 뱃길 실태와 포구를 이용한 교류 상황에 대 한 중요한 단서로서 가치를 지녔다. 또한 과거 119년 전의 주요포구가 현재 는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는 변화상 비교의 토대가 된다. 압해 도의 대표 포구 세 곳을 사례로 검토했다. 과거 소통의 중심지로 발달했던 포구 공간에 현재는 내륙과 외해 도서를 연결하는 대교가 조성되어 있다는 특징이 나타났다. 비록 배를 이용한 소통의 기능이 이제는 다리로 대체되고 있지만 공간이 차지하는 중요성에는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는 섬 지역의 향촌사회정보를 토대로 사료적 가치를 분석한 것이

386 386 지역과 역사 38호 다. 크게 4가지 유형별 특징을 살폈다. 첫째, 지역 교육환경의 실태를 파악 할 수 있는 사례로 섬 마을 서재에 대한 정보를 분석했다. 이를 통해 섬 지 역에서도 서재 운영을 통해 나름대로 향촌교육시스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 음을 확인했다. 둘째, 도서지역에서 거주하고 활동했던 식자층에 대한 구체 적인 정보를 살폈다. 직접 만난 지역인물들의 이름과 성향이 구체적으로 서 술되어 있고, 興學 을 위해 지역민들과 함께 만든 시문들이 담겨있다. 이는 吳宖黙과 섬 주민들의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당시 섬사람들의 지적 수준과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섬 지역 각 마을의 개황과 풍세에 대 한 기록이 지닌 중요성을 살폈다. 이는 풍수지리에 식견이 높았던 吳宖黙의 기록정신이 만들어 낸 특별한 가치이다. 섬의 경관과 지리, 인문환경에 대 한 가장 상세한 기초정보로 활용이 가능하다. 넷째, 섬 지역 문화유적과 설 화에 대한 부분이다. 당시 견문 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어 이미 그 흔적을 살 필 수 없는 유적과 구전 설화의 원형에 대한 기록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 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吳宖黙의 ꡔ尋眞錄ꡕ은 섬사람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興學 의지가 만든 결 과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내용 속에는 섬 공간이 지닌 소통의 문화상이 담겨있다. 포구를 통한 소통의 네트워크가 존재함을 확인했고, 섬 마을 서 재 운영에 대한 양상과 향촌 지식인의 존재 등을 통해 섬의 인문환경이 지 닌 특징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고광민, 나룻배와 나루터 이삭줍기 紀行 ꡔ島嶼文化ꡕ 28, 금성윤, 吳宖黙(1834~?)을 통해서 본 수령 군현통치의 과정과 전략 - 善政 목민관 의 모델과 관련하여- ꡔ朝鮮時代史學報ꡕ 53, 김경옥, <智島郡叢瑣錄>을 통해 본 19세기 서남해 도서지역의 위상변화 ꡔ역사학연 구ꡕ 29, 박수정, 조선후기 수령 吳宖黙의 교육행정 활동 분석 ꡔ敎育行政學硏究ꡕ 26, 2008.

387 1897년 智島郡守 吳宖黙의 島嶼巡行과 ꡔ尋眞錄ꡕ에 담긴 島嶼地域 향촌사회정보 387 송양섭, 1896년 智島郡 創設과 西南海 島嶼 支配構造의 再編 : 吳宖默의 智島郡叢 瑣錄을 중심으로 ꡔ한국사학보ꡕ 26, 정순우, 역사철학 : 구한말 도서지방의 교육환경과 수령의 興學 활동 ꡔ嶺南學ꡕ 20, 최성환, 頭流壇 을 통해 본 金平默의 智島 유배생활 : 그 소통과 영향 ꡔ민족문화논 총ꡕ 56, 최성환, 개항 초기 목포항의 일본인과 해상네트워크 ꡔ한국학연구ꡕ 26,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388 388 지역과 역사 38호 Abstract The 1989 Island Inspection by Jido Island(智島) Senior Provincial Official(郡守) Oh Hoing-muk(吳宖黙) and the Rural Social Information of the Island in the Record Simjinrok(尋眞錄) Choi, Sung-Hwan Throughout the history of Korea, it is rare to find records containing comprehensive information on the culture of an island. In this regard, the subject of this study Simjinrok(尋眞錄) deserves much attention. Simjinrok was written by Oh Hoing-muk(吳宖黙) who was the first senior provincial official(郡守) of the newly established Jido-gun province (智島郡) in 1896 and based on his inspection of the island in This study attempts to study three aspects through analyses of the record and on-site investigations. First, the study examins the process of Jido-gun being newly established and the background of the writing of Simjinrok. Second, the study analyzes the inspection route in of the island and the record on the port in the book. Third, this study analyzes the information on the region s rural society at the time. The result of the study is summarized in two aspects. First, the study found the lead on the port network of the island region and examined the change of its spatial functions. Through the analysis of the inspection route in the island, the study confirms the existence of the port network connecting islands, and through the case of the island Aphaedo, this study examins the spatial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the port functions. Second, by analyzing the information on the rural society of the island in

389 1897 년智島郡守吳宖黙의島嶼巡行과 ꡔ 尋眞錄 ꡕ 에담긴島嶼地域향촌사회정보 389 Simjinrok, this study confirms its value as historical materials. This study analyzes the uniqueness of the record Simjinrok which serves as the source of the information: the island s library and issues of educational environment, the existence of the literate stratum in the island and the intellectual level, the overall condition of the island, landscape and geography, and cultural relics and fables. Keywords : Island Inspection, Simjinrok, Jido-gun, Oh Hoing-Muk, 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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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391 ꡔ지역과 역사ꡕ진남포의 38, , 391~428쪽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86)이 가 연* 머리말 Ⅰ. 진남포의 개항과 일본인들 1. 진남포의 개항 2. 진남포의 일본인 사회 형성 Ⅱ. 도미타 기사쿠의 자본축적 과정 1. 광산업을 통한 초기 자본축적 2. 농업으로의 사업 확장 3. 도미타합자회사와 삼화은행의 설립 Ⅲ. 도미타 기사쿠의 조선인식 맺음말 국문초록 상업자본가, 군인, 관료, 교원, 지주, 하층 노동자, 무직자 등 다종다양한 형태로 존 재한 재조일본인 가운데, 상업자본가들은 일찍부터 조선의 상품가치성에 주목하였다. 이들에게 미개척지 조선은 기회의 땅으로서 성공을 보장하는 곳이었다. 일본의 한국지 배체제는 상업자본가의 진출을 통해서 그 물적 토대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였다. 그중에서도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라는 상업자본가는 진남포의 지역적 특수 성 을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해간 대표적인 식민자였다. 진남포는 부산, 원산, 인천보다 훨씬 늦은 1897년 목포와 함께 개항된 곳이다. 대동강 하류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 했던 이곳은, 개항 전에는 일본인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곳이었지만, 개항 이후에 는 개발이 기대되는 곳이었기에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도미타 또한 맨손으로 인천으로 도항하여 진남포 개항 이후 이 지역으로 이주한 인물이었다. 그는 진남포에 거점을 두 *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diet43@hanmail.net).

392 392 지역과 역사 38호 고 본격적으로 광산업에 종사하면서 농업, 금융업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진남포의 대표적 식민자였던 도미타는 겉으로는 차별 과 편견 을 가지지 않은 조선의 개발자 이자 공로자, 선량한 식민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그의 조선ㆍ조선인에 대한 인 식 속에는, 애써 숨기고자 했지만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특권의식과 조선인에 대 한 우월의식이 내재해 있었다. 주제어 : 재조일본인, 식민자, 진남포, 富田儀作, 은율장연광산 머리말 지금까지 한국 역사학계에서 재조일본인에 관한 연구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지배와 저항 의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역사학계의 큰 줄기에 따라 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그 간극에 자리 잡고 있는 재조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일본 인ㆍ일본인사회는 식민권력과 식민정책 등 일본 제국주의의 성격 그 내용 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된다. 실제 일본의 조선 통치가 정치ㆍ군사적인 지배만으로 불가능한 것이 었음은 많은 연구들이 증명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를 위해 만들어낸 여러 정책을 식민지의 변방에까지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 실행의 주체가 반드시 필요했고, 재조일본인들은 식민권력의 대리자가 되어 그 역할을 충실히 이 행했다. 재조일본인들의 이러한 성격을 가지무라 히데키는 침략의 선봉 이 라고 규정하였고 다카사키 소지는 풀뿌리 침략, 풀뿌리 식민지 지배 라고 말하였다.1) 이들은 가끔 일제 나 조선총독부와 같은 거대 권력의 식민정책 1) 가지무라 히데키는 조선 식민자들에 서민들 또한 관료 이상으로 강렬한 국가주의 논리로 무장한 냉혹한 에고이스트, 차별과 가해의 실행자, 즉 침략의 선봉 이라고 규정하였다(梶村秀樹, 植民地と日本人(1974) ꡔ梶村秀樹著作集 第一卷-朝鮮

393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393 에 불만을 품고 서로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했지만(가령 제국 의 정책들이 자신의 이익에 반할 때), 조선인의 입장에서 재조일본인들은 바로 눈앞에서 차별 과 멸시 의 현실을 실감하게 하는 식민지 지배자이자 식민권력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각 지역에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 라 조선ㆍ조선인들의 삶을 변화시켜 왔으며, 식민지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재조일본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조망하는 것은 식민 권력과 식민정책의 다양성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식민지기 조선인들의 삶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도 가능하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조일 본인의 구체적인 사례연구, 특히 시기별, 지역별, 계층별 특성에 대한 분석 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의 축적을 통해 식민지기 권력의 작동 구조를 면밀히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재조일본인들은 상업자본가, 군인, 관료, 교원, 지주뿐만 아니라 하층 노 동자, 무직자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중에서도 상업자본가들은 일 찍부터 상품가치성에 주목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상품의 반입과 미곡, 자원 등의 일본유출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높은 수익률은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미개척지 였던 조선은 이들에게 있어 기회의 땅으로서 성 공을 보장하는 곳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체제는 이 상업자본가의 진출을 통해서 그 물적 토대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2) 초기 상업자 본가들은 주로 개항장에 자리를 잡고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자본축적 과정에는 개항장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어느 정도 작용하 였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진남포라고 하는 개항장의 지 역적 특수성 을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해간 상업자본가 도미타 기사쿠[富田 史と日本人ꡕ, 明石書店, 1992). 이러한 가지무라의 문제의식은 다카사키 소지에 게 계승되었다. 다카사키는 일본의 조선침략이 군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름 모를 사람들의 풀뿌리 침략, 풀뿌리 식민지 지배 를 통해 진 행ㆍ유지되었다고 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을 풀뿌리 식민자 라 명명하고 있다(다카사키 소지 저, 이규수 역, ꡔ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ꡕ, 역사비평사, 2006). 2) 이규수, 후지이 간타로의 인천진출과 한국경영 ꡔ개항장 인천과 제조일본인ꡕ, 보고사, 2015, 156쪽.

394 394 지역과 역사 38호 儀作]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실체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진남포는 부산, 원산, 인천보다 훨씬 늦은 1897년 목포와 함께 개항되었 다. 대동강 하류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이곳은 일본인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기에 개항 당시 거주자 수가 3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거류지가 설정되자, 개항 다음해에 150여 명으로 늘었고 이후에도 일 본인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런데 진남포의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바로 이곳으로 도항한 자들보다 대부분 조선의 다른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 다가 진남포 개항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부표 2> 참 고). 이는 진남포의 개항이 늦은 점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부산이나 인천 등의 개항장에서 지점원 또는 상업에 종사하다가 신 개척지에서의 이권을 노리고 이주한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 이주자들 가운데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거류민단이나 상업회의소 등의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지역 사회를 주도하는 인물도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도미타 기사쿠였다. 도미 타는 맨손으로 인천으로 도항하여 진남포 개항 이후 이 지역으로 이주한 인 물로서, 진남포의 지역적 특수성을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이하에서는 우선 도미타 성공의 배경이 된 진남포의 지역적 특수성과 일 본인 사회를 분석한 후, 도미타의 사례분석을 통해 그의 자본축적이 지역적 특수성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도미타의 조선ㆍ 조선인에 대한 시선의 분석을 통해 식민권력의 한 축이었던 재조일본인들의 조선ㆍ조선인에 대한 인식을 드러낼 것이다. Ⅰ. 진남포의 개항과 일본인들 1. 진남포의 개항 진남포가 위치한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전통적으로 양계지역으로 설정 되어 삼남지방과의 교류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세가 치수와 방어비

395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395 용으로 지역 내에서 이용된다는 점에서 상업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가능성 을 가지고 있었고 청과의 무역 또한 활발하여 장래 상업의 발전이 기대되던 곳이었다.3) 그중에서도 진남포는 대동강 입구에서 약 20리 정도 거슬러 올 라간 곳에 있는 하천 항만으로, 서선지방 제일의 양항이라고 일컬어진 곳이 었다. 개항 전에는 三和縣에 속한 甑南浦라고도 불렸으며, 인구라고는 어업 에 종사하는 조선인들이 점재해 있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 발발하자 진남포는 일본군의 상륙지점이 되었고 일본 함대의 정박지 및 일본 군대의 병참기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평양과 진남포 사이에 경편 군용 철도를 부설하고 군수품을 수송하였다. 이 때문에 진남포에는 군인ㆍ군속 은 물론 그들에게 군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어용상인 등이 쇄도하였고, 하역과 운반을 위한 인부도 증가하여 인구가 일시 늘어나게 되 었다.4) 이들은 대부분 그때까지 한성이나 인천에 거주하면서 소개료를 업 으로 삼는 자, 잡화상 실패자나 일정한 영업을 하지 않는 자, 또는 전혀 상 업 활동의 경험이 없는 자 들로서, 이른바 일확천금만을 쫒는 모험상인 이 라 불리던 이들이었다.5)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 갔고, 다시 진남포가 주목을 받은 것은 1897년 개항 이후였다. 1897년 개항 후 진남포에는 각국 거류지회, 세관, 일본과 청의 영사관 등 이 개설되었고 이듬해에는 日本居留民總代役場이 설치되었다. 한국 정부는 삼화군청을 진남포로 옮겨 개항장 단속을 하게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은 재차 군사 요충지가 되었고 군용선의 정박지, 물산의 집산 지로서 지보를 점하였다. 또한 어용상인의 이주, 토목건축공사의 성행 등이 이어져 시가지의 기초가 이때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다.6) 3) 김동희, 진남포의 개항과정과 무역구조의 변화(1897~1910) ꡔ역사연구ꡕ 26, 2014, 109쪽. 4) 前田力 編著, ꡔ鎭南浦府史ꡕ, 鎭南浦府史 發行所, 1926, 19~20쪽. 5) 다카사키 소지 저, 이규수 역, 앞의 책, 2006, 61쪽. 6) 田中市之助, ꡔ全鮮商工會議所發達史-13. 鎭南浦ꡕ, 釜山日報社, 1936, 1쪽.

396 396 지역과 역사 38호 2. 진남포의 일본인 사회 형성 진남포에는 일본 전관거류지가 아닌 각국 거류지가 개설되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 및 외국인 인구가 모두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897년 개항 당시 32명에 불과하던 일본인 인구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꾸 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1904년에는 1,789명, 1905년에는 3,000여 명으로 급증하고 있다(<표 1> 참조). <표 1> 진남포의 인구변화(개항이후 1910년대) 연도 일본인 戶數 조선인 외국인 합계 일본인 人口 조선인 외국인 합계

397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기사쿠 [ 富田儀作 ] 의자본축적과조선인식 * 출전 : ꡔ조선총독부통계연보ꡕ 각년 ( 비고 : 외국인은대부분중국인 ) 러일전쟁이끝난후, 전쟁특수를노리고진남포로이주해온일본인들이다른지방으로가거나혹은일본으로귀국함으로서진남포의일본인인구는다소감소하지만, 1908년부터다시증가세로돌아선다. 그이유는, 진남포의수출입화물이조금씩이지만계속해서증가추세에있었고 1908년을전후하여평남선과진남포축항등의사업계획이수립, 착수되어발전이예상되었기때문이다. 진남포는부산이나인천과같이개항직후부터인구와무역액이급격히증가한곳은아니었다. 여기에는개항무렵항만설비가완전하지못했다는점과운수교통이불편했던점을가장큰이유로들수있을것이다. 실제로개항다음해인 1898년진남포의수이출은 8만 6천여엔, 수이입은 4만 5천여엔으로합계 13만여엔에지나지않았다 (< 표 2> 참조 ). 그러나이후도시의발전과배후지와의경제관계가밀접해짐에따라무역액이점증하여 10년후인 1908년에는수이출 198만엔, 수이입 360만엔, 합계 5백4 만엔으로 38배나증가하게된다. 이러한진남포의무역량은전조선각개항장중부산과인천에이어세번째로많은것이었다. 이렇게무역량이증가한데는러일전쟁특수의영향이컸던것도있지만, 전쟁후무역량증가는인구증가의원인과거의같다고볼수있다. 즉, 1910년 10월평양과진남

398 398 지역과 역사 38호 포 간 평남선 개통7)은 평양 및 조선 간선과의 연락을 가능하게 하였고, 황 해도 방면에서의 농산물 증가, 광업 채굴의 증대 등으로 진남포항을 이용하 는 일이 많아졌다.8) 1915년 5월에는 진남포 개항 이후부터의 숙원 사업이 던 근대적 항만시설이 완비되어 해륙 연락의 완성은 물론, 신속한 화물 취 급, 시간 단축, 부대비용의 경감 등을 불러 일으켜 무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 다. <표 2>를 보면, 1915년의 무역액은 750만 엔이었으나, 축항 설비가 완 비된 후인 1916년 무역액은 1,200만 엔으로 1.8배 정도 급증한다. 진남포 무역액의 증가에는 교통 운수기관의 정비뿐만 아니라, 1915년 10월 진남포 에 설치된 久原제련소와 1918년 겸이포에 三菱제철소 건설이 큰 역할을 하 였다. 이후 이 지역에는 제분회사, 피혁제조소, 조면회사 등의 창업이 이어 졌고, 진남포 무역업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新井新藏, 齋藤久太郞, 馬場嘉 藏, 加藤平太郞9) 등 소유의 각 정미공장도 규모를 확장하였다. 또 평양무 연탄회사의 채굴 개시와 더불어 평양 부근에는 1919년 이후 電興회사, 제 당회사, 병기제조소 등 대규모의 공장이 생겨났다. 이러한 무역액의 증가는 7) ꡔ朝鮮總督府官報ꡕ, ) 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210~211쪽. 9) 新井新藏은 오사카 출신으로 오사카의 무역상 木谷伊助상점에 입사하여 1989년 인천지점으로 발령받았다. 木谷상점이 조선의 각 지점을 정리하려 할 때 단독으 로 무역업에 나선 그는, 1900년 진남포로 이주하여 미곡의 수이출에 종사했다. 齋藤久太郞은 나가사키현 출신이다. 처음에는 청일전쟁의 통역으로 종군하였다가 1896년 인천으로 도항하여 이듬해 평양에 잡화상점을 운영하였다. 1902년 진남 포로 이동한 그는 이듬해 조선 제일 의 정미소를 일으켰으며, 인천, 경성, 평양 등 에도 정미공장을 설치했다. 또한 金千代주조장을 설립하여 조선 최고의 다액 납 세자가 되었다. 1904년에는 동생 齋藤進도 진남포로 이주하여 잡화상을 단독 개 점하였다. 馬場嘉藏은 도쿠시마현 출신으로, 1904년 진남포로 도항하여 정미업에 종사하였 고 민단의원,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 도평의원을 지냈다. 加藤平太郞은 나가사키현 출신으로,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진남포로 와서 동향 인 齋藤久太郞과 함께 정미업에 종사하였다. 1918년 齋藤으로부터 독립하여 합 자회사 加藤정미소를 만들고 인천에도 공장을 설립하였다. 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442~455쪽. ꡔ在韓人士名鑑ꡕ, 1905, 126~134쪽. ꡔ朝鮮功勞者名鑑ꡕ, 1935.

399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399 더 많은 일본인들을 진남포로 끌어 들였고, 인구 증가 추세는 1919년 3.1운 동이 있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표 2> 진남포 개항 이후 연도별 무역액(개항 1910년대) 단위 : 엔 연도 *출전 : 鎭南浦稅關調査係, 수이출 수이입 51,333 8,289 86,471 45, , , , , , , , ,699 1,097, ,709 1,151,257 2,413,187 1,361,959 3,200,999 1,216,602 2,959,431 2,104,246 3,904,823 1,978,744 3,057,586 2,075,979 3,215,383 2,565,937 1,994,174 2,830,038 2,257,205 3,232,244 2,891,712 4,283,571 3,024,231 3,959,390 2,358,792 4,987,048 2,545,216 8,232,221 3,844,185 10,488,835 8,574,812 25,846,957 20,977,206 25,603,506 21,006,149 24,327,728 17,513,477 ꡔ鎭南浦稅關沿革史ꡕ, 1922, 18~19쪽 합계 59, , , , ,256 1,549,649 2,023,563 3,564,444 4,562,958 4,176,033 6,009,069 5,036,330 5,291,362 4,560,111 5,087,143 6,123,977 7,307,802 6,318,182 7,532,264 12,076,406 19,063,647 46,824,163 46,609,653 41,841,205 진남포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어떤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을까. 개항 다음 해인 1898년 진남포의 일본인은 잡화(11명), 목수(4명), 무역(3명), 과자 상(2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10) 이후 일본인 인구가 대거 늘어나면서 그 들이 종사하는 직종은 다양해졌다. <표 3>은 병합 직전 진남포 거류 일본인 의 직종과 종사자를 조사한 것으로, 이를 보면, 대공 87명, 석공 41명으로 기능을 가진 건축 종사자들이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는 잡화점과 요리집, 10) 다카사키 소지 저, 이규수 역, 앞의 책, 2006, 78쪽.

400 400 지역과 역사 38호 과자점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 건축 종사자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은 아직 도시가 발전 단계에 있음을 가늠하게 한다. 실제로 진남포는 다른 개항장보다 늦게 개항한 것도 있지만, 개항 이후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기 에 도시 자체의 발전은 다소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 기와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 비로소 도시계획이 수립되고 항만 설비와 배 면 교통 문제 해결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기능공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수가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남포의 일본인 직종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예기와 작부들이다. 이는 일본거류지만의 독특한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개항 직후 거류지에는 가족은 일본에 두고 단신으로 거주하 는 남성들이 많았고 이 남성들의 수에 비례해서 예작부들이 많이 도항해 왔 다. 특히 러일전쟁 시기 진남포 마산리에는 유곽이 만들어졌고, 진남포의 예ㆍ창기와 작부들은 대부분 이때 정착한 자들이었다.11) <표 3> 진남포 일본인거류지 내 주요 영업별 조사(1910년 병합 직전) 잡화(97) 예기ㆍ작부(87) 대공(87) 석공(41) 요리집(29) 과자점(28) 미용업(13) 청부 (12) 어업(11) 이발(11) 여인숙(10) 음식점(10) 행상(9) 미장이(9) 양철(8) 노점(7) 전당 포(7) 약재상(7) 회조점(7) 무역업(6) 제재업(6) 오복점(5) 장유양조(5) 정미(5) 정육점 (5) 목욕탕(4) 고물(4) 세탁(4) 청과물(4) 두부집(4) 주조(3) 艀船(3) 은행(3) 이 외, 제 화 재봉 임대업 표구 사진 화약 등에 종사 *출전 : 鎭南浦新報社, ꡔ鎭南浦案內記ꡕ, 1910, 67~68쪽. *( )는 종사자 수. 지금까지 진남포의 개항과 인구 변화, 무역액의 추이, 거류지 내 주요 직 업 등에 관해 살펴보면서 진남포 거류 일본인의 특징을 간략하게 알아보았 다. 그러면 진남포 개항 초기 정착한 일본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갔을까. 개항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진남포로 진출하고 있고, 걔 중에는 맨손으로 진출하여 대자본가가 된 사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 물이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이다. 다음 장에서는 도미타 기사쿠가 진남 11) 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47쪽.

401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01 포에 진출하여 정착하기까지의 과정과 어떤 식으로 자본을 축적해 나갔는지 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도미타는 자본축적 과정에서 굉장히 활발한 공적ㆍ 사회적 활동을 하였는데, 이 활동들을 통해 그가 식민지 조선ㆍ조선인에 대 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도미타의 조선인식이 수많은 재조일본인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진남포의 오늘을 이룩한 은인 12)이라 칭송 받았던 도미타라면, 진남포를 대 표하는 재조일본인의 한 사례로 분석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도미타 기사쿠의 자본축적 과정 1. 광산업을 통한 초기 자본축적 도미타는 1858년 효고 현[兵庫縣] 가와베 군[川邊郡] 나카타니 촌[中谷 村]의 촌장[庄屋]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형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양조업을 하였지만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는 청소년기부터 힘들게 성장 하였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16세부터 기와 만들기, 광산 노동, 대리교 사 등을 전전했던 그는 측량기술을 배워 토지대장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토지대장을 작성한 인연으로 도미타는 가모 군[蒲生郡] 구마노[熊野]에서 갈탄을 채굴하였고, 소규모의 콜타르 제조공장도 세웠다. 게다가 석회석을 채굴하여 석회로 만들어 水田의 비료로 공급했다. 뿐만 아니라 잉어 양식을 시험 삼아 해보기도 했는데, 조선으로 건너간 후 광업에 종사한 것과 잉어 양어 등의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때의 경험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13) 그러나 사업 경험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도미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꺼려 12) 菊地謙讓, ꡔ朝鮮諸國記ꡕ, 1925, 259쪽. 13) 富田精一, ꡔ富田儀作傳ꡕ, 1936, 25~37쪽.

402 402 지역과 역사 38호 하던 대만행을 택했다. 1897년 1월 오사카 고니시와[小西和] 상점의 대만 지배인이 되어 대만으로 향한 그는 기륭[基隆]에서 장뇌를 제조하지만 대만 번인의 습격으로 좌절하였고, 우뭇가사리를 채취하였으나 채취량 부족으로 빚만 남긴 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가다랑어포 제조를 시도했지만 이것도 설비시설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899년 4월경 쌀을 수출하면 서 그동안의 손실을 조금 회복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대만으로 떠난 지 3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14) 당시 도미타가 소속되어 있던 오사카 고니시와 상점은 1890년부터 조선 한성과 인천에 지점을 두고 있었는데, 한성지점을 정리하기 위하여 도미타 를 다시 한성지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도미타는 일본에 돌아간 지 4개월 만인 1899년 8월 말 한국으로 도항하였다.15) 한성지점을 정리한 후 1900년 도미타는 진남포로 거점을 옮긴다. 진남포로 간 것은 일찍부터 관 심을 가지고 있던 광산업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진남포에는 도미타 외에도 광산 개발과 부속 사업을 위해 몰려든 일본인들이 많았다. 예를 들 어, 西崎鶴太郞는 1905년 진남포로 와서 1924년 미쓰비시광업에 권리를 넘겨줄 때까지 재령철산을 채굴ㆍ경영하였고, 中村精七郞는 인천에서 선박 업에 종사하던 중 러일전쟁 발발로 군 수송을 담당,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진 남포에서 광물을 수송하였다. 그리고 재령과 안악의 철광을 운영하였고 철 공소도 경영하였다.16) 14) 富田精一, 위의 책, 53~76쪽. 15) ꡔ朝鮮功勞者銘鑑ꡕ, 1935, 486쪽. 16) 西崎鶴太郞는 도미타 기사쿠, 川添種一郞와 함께 진남포 3대 거두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효고현 출신으로 1905년 11월 조선으로 건너와서 재령철산 채굴 경 영을 시작했다. 진남포상업회의소 평의원, 회두, 진남포 번영회라고 할 수 있는 行之會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도평의원 등의 공직에도 있었고, 진남포전기회사, 진남포수산회사, 진남포 창고회사 등 수많은 회사의 사장 또는 중역으로 이름을 올렸다. 中村精七郞 또한 효고현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선박을 이용해 군수품 을 보급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재령 안악의 철광, 평양광업소의 무연탄 수송, 철 공소 경영 등 다방면에서 관업과 관련된 일을 하였다(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445ㆍ448쪽).

403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03 도미타는 도항 전부터 광산업이 장래 유망할 것임을 예상하고 지점을 정 리하자마자 바로 조선 내 광산 탐색을 시작했다. 우선 1899년 12월부터 한 달간 진남포, 재령, 은율, 장연 등지의 광업지대를 방문하여 광질과 채굴량, 인부공급, 운반ㆍ수송 등 제반 사항에 관한 자세한 조사를 마친 후 다량의 철광석이 채굴되는 황해도 은율, 장연 광산의 채굴권 획득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광업권은 한국 궁내부가 가지고 있었고, 채굴은 일본인의 명의 로는 허가되지 않았기에 조선인 한석진과 공동사업으로 하기로 하고, 자본 은 도미타가, 명의는 한석진으로 하여 1900년 5월 은율, 장연 두 군데의 채 굴허가를 신청, 허가를 받았다.17) 은율, 장연광산의 위치는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과 북부면에 걸쳐 있었다. 이곳은 진남포에서 40 정도 떨어진 곳 에 위치한 곳으로서, 은율, 장연의 명칭은 다르지만 실은 두 산이 하나의 개 천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거의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하다. 광산을 경 영할 무렵 광산 부근의 호구는 3호에 불과했지만, 1910년 무렵 호구수는 80호, 재주하는 인부 및 그 가족은 모두 600명 이상이 되었다.18) 채굴한 철광석을 배로 옮기고 일본으로까지 보내기 위해서 도미타는 거점을 반드시 진남포에 두어야만 했다. 도미타는 광산 채굴 허가를 받은 다음해인 1901년, 向山茂兵衛, 江南哲 夫, 田阪誠之助와 함께 출자하여 남산합자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은 17)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94쪽. 18) 鎭南浦新報社, ꡔ鎭南浦案內記ꡕ, 1910, 125쪽. 1929년 조사 은율장연광산의 인부수와 임금은 다음과 같다. 작업별 갱내 인원 갱부 채광부 운반 기계 공작 시추 잡부 최고 임금(엔) 최저 갱외 합계 530 *출전 : 德野眞士, ꡔ黃海道鑛業狀況ꡕ, 朝鮮鑛業會, 1930, 40쪽. 평균

404 404 지역과 역사 38호 율광산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금산포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광 석 운반용 선박 수십 척을 건조하였으며, 광산에서 해안까지 경편궤도를 설 치하고 0.7톤 화차를 이용하여 금산포 저장소로 운반하였다. 그리고 靑洋島 부근의 토지 수십 정보를 매수하여 적재를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잔교를 만 들고, 대형 선박을 이용하여 광석을 운반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1902년 당시 철광석을 공급하고 있던 야하타[八幡]제철소의 광석 매상 중지로 회사 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해 4월 다시 제철소가 광석을 요구하자 도 미타는 바로 은율광산을 부활시켜 채굴을 시작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 쟁의 발발과 함께 채굴 작업은 또 다시 중단되었다가 전후 다시 채굴이 개 시되었다. 1906년 11월 궁내부는 이곳을 조사하여 궁내부 직영으로 하고 도미타의 채굴을 중지시켰으나, 산업 관련 용무로 종종 이토 히로부미 조선 통감과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을 방문했던 도미타는, 소네의 도움으로 은율, 장연의 광구를 일본 농상공부 소관으로 옮기고 통감부를 경유해서 허가를 받는 것으로 했다.19) 그 후 도미타의 은율광산은 계속해서 일본 야하타 제 철소에 원료를 공급했다. 이는 일본의 원료공급지라는 식민지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도미타는 이후 광물 운반이라는 명목으로 진남포 해안을 점점 더 매축하 고 잔교를 증설했으며, 운하의 개착을 시도했다. 또 시장을 열어 일용품의 수급 관계를 편리하게 했고,20) 종업원의 주거지를 건축하는 등 적극적 경 영 방침을 채택하였다.21) 조선인 인부를 위해 한식 가옥을 신축하고 그 부 근에 일본어 및 농업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22) <표 4>는 1927~ 29년까지 은율광산 판매고이다. 1927년 황해도의 철광 채굴고 329,948톤 중 은율광산은 59,938톤으로, 17%를 차지한다.23) 19)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104~105ㆍ153~154쪽. 20) 1912년 4월 16일 도미타는 주식회사 물산시장(자본금 5만 엔, 三和町)을 만들 어 가축의 매매와 일반 시장 경영을 하였다(鎭南浦商業會議所, ꡔ鎭南浦ꡕ, 1921, 40쪽). 21) 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343쪽. 22) 鎭南浦新報社, 앞의 책, 1910, 129쪽.

405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05 <표 4> 은율광산 판매고 연도 채굴고(톤) 수량(톤) ,938 55, ,572 62, ,119 61,187 *출전 : 德野眞士, ꡔ黃海道鑛業狀況ꡕ, 朝鮮鑛業會, 1930, 40쪽 판매고 가액(엔) 316, , ,586 진남포 개항 초기에는 개인 자본가들이 소자본으로 광산업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병합 이후 평안도, 황해도의 광산지역에 거대 자본을 가진 일본 의 대기업들이 진출하면서 개인이 운영하던 광업소 등은 합병되거나 폐업하 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런 와중에도 도미타는 은율장연광산 뿐만 아니라 조 선 내 여러 광산의 이권 개발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으로 평안북도 선천과 의주 일대의 금광 이권 개발 사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총독부가 보유하고 있던 금광으로 면적이 40 방리나 되는 곳이었으며, 구한국시대부터 1920년대 말까지 출원자가 약 300명에 이르고 있었다. 광맥과 광질에 있어서도 조선 굴지의 황금의 보고 라고 알려져 있어, 이곳의 채굴권만 획득한다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출원자들 사이의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 그러던 중 1928년 7월 무렵 총독부에서는 출원자들을 하나의 단체로 엮어 주식회사를 조직하 도록 하고 거기에 광업권을 허가하기로 결정하였다.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고 막대한 이익이 기대되는 이 사업을 한 개인 또는 단체에만 일임한다면, 그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 주식회사는 구한국시대부 터 출원한 자들을 발기인으로 하고 주식은 발기인들이 인수하며, 일반 공모 는 하지 않았다. 또한 총독부로서는 일본인들만 광산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조선의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조선인 측이 총 주식의 2/3, 일본인 측이 1/3을 가지도록 했다. 이런 주식회사 설립의 대표로 추대된 사 람이 일본인 측에서는 도미타 기사쿠, 조선인 측에서는 박영효였다.24) 23) 德野眞士, ꡔ黃海道鑛業狀況ꡕ, 朝鮮鑛業會, 1930, 9쪽. 24) ꡔ東亞日報ꡕ (5), 宣川國鑛經營次주식회사를 조직.

406 406 지역과 역사 38호 1929년 8월 27일, 이 두 사람 외 30여 명이 발기인이 되어 자본금 12만 엔의 의주금광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창립 이후 1년이 지나도록 株 金모집에 적극적이지 않아 총독부로부터 회사 성립조차 의심을 받았다. 이 런 상황에서 일본의 대재벌이 의주금광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25) 특히 미쓰이[三井]는 平井熊三郞라는 일본인을 내세워 조선인의 주식을 사들이 기 시작하여 총 6천 주 중 2,700여 주를 매수할 정도였다. 문제는 도미타의 사후에 일어났다. 도미타는 1930년 7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1931년 무렵 미쓰이의 공격적인 주식 매수로 회사가 힘들어 지자, 조선인 측에서 회사 창립 당시부터 회사에 부정이 있었고, 몇몇 일본인 중역이 전횡을 휘둘렀다 는 불만이 제기되었다. 이에 주주 측에서는 이 회사의 부정을 조사하기 위 해 장기식, 이희적 외 2명의 조사위원을 뽑아 조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회 사 창립당시 유령주식 100여 주가 있었던 것이 발각되었고, 창립 당시 중역 도미타 기사쿠의 배임에 관한 사실과 또 회사 회계에 부정이 있었던 사실 등이 드러났다. 이외에 회사 창립 이전인 1929년 5월 27일부터 9월 3일까 지 의주광산주식회사 창립사무소 대표자 박영효의 명의로 도미타가 식산은 행에서 4회에 나누어 5만1,330엔을 꺼내 이용하였다는 점이 밝혀졌다.26) 도미타는 사망 직전까지 조선 광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목적은 조선의 개발이라는 명목을 등에 업은 자본의 축 적에 있었으며, 도미타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한 방법을 이 용해서라도 자신의 자본을 축적해갔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러일전쟁이 한 창일 때 도미타는 용강군 온천 개발에 뛰어들어 온천여관을 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은 그 권리를 가질 수 없었기에 그 지역에 주둔하던 일 25) ꡔ東亞日報ꡕ (2), 義州金鑛을 中心으로 日本資閥大活躍. 26) ꡔ東亞日報ꡕ (2), 義州國鑛 문제의 유래. 창립총회 당시 주식 불입금과 불입금에 대한 이자 등 합하여 12만 401엔 90전 이 거래 은행인 식산은행에 예금되어야 하는데, 총회 당일 27일에 9만 2209엔 60전 밖에 없었다(회사 장부에는 있는 것처럼 기재). 즉 창립비로 2,962엔 31 전을 소비하였기에, 현금잔고로 11만 7439엔 93전이 있어야 했다. 2만 5,229 엔 93전이 사라져 버렸는데, 불입하지 않은 주식을 발행한 것이라 한다.

407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07 본군과 손을 잡고 온정 온천지역에 일본군 제2사단 점령지 라는 팻말을 세 워 온천을 운영했다.27) 이는 그의 식민자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한 예 이다. 2. 농업으로의 사업 확장 도항 초기 누구보다도 먼저 광산업에 발을 내딛어 자본을 축적한 도미타 는 이 자본을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시도하였다. 특히 농축산업에 많은 관 심이 있었던 도미타는 진남포부 마산리에 본 농장, 광산이 있던 은율군 금 산포에 지부 농장을 두고 농축산업에 뛰어들었다.28) 이 농장에서 도미타는 묘종 육성, 특용작물 및 원예작물 시험재배, 양잠, 농기구 대여 등 농축산업 에 관련된 여러 일을 시도하였다. 농장을 경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러 일전쟁이었다. 도미타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은율광산 경영을 잠시 중단해야 만 했는데, 대신 전쟁 특수를 노려 일본 군대에 인부를 공급하고 식량, 특히 채소류를 조달하는 일을 시작한다. 전쟁 중에 신선한 채소류를 구하는 일은 힘들었고 더구나 그때까지 채소류는 청국인들이 독점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 에 가격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또한 전쟁의 영향으로 조선 북부지방 뿐 만 아니라 만주 방면에서도 채소가격의 앙등이 심하였다. 이에 도미타는 채 소를 속성 재배하여 군대에 신선하고 저렴하게 공급하면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렇게 후방에서 일본 군인들을 원조하는 일이 국가를 위한 일 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의 재조일본인들은 자신 들의 어떤 행위들, 그것이 사익 추구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국가 를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도미타는 1905년 봄, 진남포 한두리에 대지 3만 평을 매입하여 채소밭을 일구고 온실 속성 재배 방식을 구상하여 채소를 재배하였다. 일본에서 농부 27)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124쪽. 28) 처음에는 삼화농원 및 삼화목장이라고 부르다가 농장 설비를 다 갖춘 후 도미타 농장이라 개칭하였다.

408 408 지역과 역사 38호 를 8명을 이주시켜 농사에 종사하도록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 가축 사육 도 부업으로 하기 시작했다. 1906년 7월, 오사카에 있던 가족들을 모두 진 남포로 이주하게 한 그는 진남포에서 뼈를 묻을 각오 를 하고 자신의 영역 을 넓혀갔다. 이 사업은 성적이 굉장히 좋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채소 수요가 현저하게 줄어 재배 또한 줄여야 했다. 이후 전쟁 전부터 조금씩 해 오고 있던 과수재배로 본격 전환했다.29) 도미타는 1903년 자신의 고향인 효고현 가와베군에서 사과묘목을 이입 하여 시험 삼아 재배해 보았는데, 색깔도 잘 나오고 맛 또한 좋았다. 이에 그는 진남포 이주 일본인들에게 사과재배를 권하였고, 그중에서 原田鐵 策30)라는 사람이 마산리에 약 1,500평 정도의 소규모 과수원에서 사과 재 배를 하였다. 도미타 또한 러일전쟁이 끝난 후 쓸모가 없게 된 채소밭에 사 과 묘목을 심었다. 당시 도미타 농장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월등히 면적 이 넓었다. 보통 1~2정보 정도였는데, 도미타는 무려 8정보 반을 사과농장 으로 하고 있었다. 맛도 좋고 수확량도 많았던 진남포의 사과는 곧 주요 무 역품 및 특산품이 되었다. 따라서 진남포 내는 물론이고 외곽인 용강군, 강 서군에도 사과농장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진남포에서는 1923년 6월 진 남포과물동업조합을 만들어 사과, 배, 복숭아 및 포도의 생산, 검수, 판매를 담당하였는데, 사과 수확량이 가장 많았던 도미타가 조합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진남포과물동업조합이 1924년 9월부터 12월까지 총검사 수량 은 사과 53,830상자, 배 544상자, 복숭아 6상자 등으로 사과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조선 내지는 물론 일본, 만주, 중국 등지로 수이출되었다.31) 도미타가 진남포의 초기 사과 재배를 주도하기는 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 의 전횡은 심해졌다. 급기야 조합이 가지고 있던 과일 검사권을 조합원의 동의도 얻지 않고 독단으로 道에 넘겨 버려 사과 재배 농가의 반발을 사게 29)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114~117쪽. 30) 原田鐵策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대동강운하취급소를 설립하여 경영에 뛰어들 었고, 진남포에서 原田상회를 창설하였으며 주로 과수 농사에 집중했다. 민회의 장, 민장, 민단의장,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 등을 역임했다. 31) 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308쪽.

409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09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9년 12월, 진남포 부내와 용강지방에 있는 과수재배업자 약 600명으 로 조직된 진남포과물동업조합32) 평의원 조선인 12명, 일본인 12명이 24 일 진남포부 三和町에 있는 과실주식회사에 모여 총사직을 결의하고 1930년 1월 15일에 당시 조합장이던 도미타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어 진남 포 지역 약 800여 명의 과수업자들은 과물동업자대회를 개최하고 조합장의 독단적 행동을 규탄하였다. 그 이유는, 원래 진남포에서 생산하는 과일 전 부를 진남포과물동업조합에서 검사한 후 관외로 반출하였는데, 1929년 7월 갑자기 평안남도령으로 과물검사규정이 제정ㆍ발포된 것에 있었다. 종래 검사를 행사하고 있던 조합에는 어떠한 말도 없이 사과검사소를 진남포부에 설치하고 검사권을 직접 道에서 행사하며, 그에 따른 검사 수수료도 道의 수입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진남포과물동업조합은 하루아침에 검사권과 수 수료를 상실하게 되었고 조합의 운영이 곤란해졌다. 또한 道의 검사규칙이 너무 까다롭고 비현실적이어서 종전보다 생산품의 2/3 이상 폐품을 내게 되 고, 검사를 진남포부와 용강군에서만 시행하였기에 그 지역 과수업자가 받 는 손해가 컸다. 그런데 과일 검사권이 道로 옮겨가게 된 이유가 도미타의 독단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도미타에 대한 조합원들의 탄원이 끊이지 않았 다고 한다.33) 이후 계속되는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진남포의 과일 검사 권과 수수료는 평안남도에서 가지게 되었다. 이런 도미타의 행동은 재조일 본인들 사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는 것이 면 언제든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식민권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입장을 대변 32) 1920년 진남포의 과수원 경영자들이 모여 임의로 과실동업조합을 조직하고 병 충해 예방, 생산 과일의 품질 향상 등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3년 6월 조선중요물산동업조합령이 발포되자, 진남포부 및 용강군 내의 동업자들은 진 남포과물동업조합 을 조직하고 평안남도는 매년 1,500엔의 보조를 하였다. 도미 타는 과실동업조합 시기부터 1930년 과일 검사권 소동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 서 이 조직의 조합장을 하고 있었다(前田力 編著, 위의 책, 269쪽). 33) ꡔ東亞日報ꡕ (3), 檢果制와 組合長에憤慨 ; (3), 南浦 果樹業者大會 檢果權回收運動.

410 410 지역과 역사 38호 해 주기도 했다. 그는 여러 사업에 종사하면서도 토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광산과 농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도미타는 간척사업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으 로 토지를 집적하게 된다. 금산포에서는 광산 채굴업을 겸하여 황무지를 매 입하여 밭을 만들고 간석지를 불하받아 수전으로 개간했다. 이렇게 개간한 땅이 금산포에서만 100만 평을 넘는다. 이 외 安川敬一郞와 함께 공동사업 으로 간석지를 매립, 개간하여 약 240만 평을 수전지로 만들었다.34) 도미 타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소작제 농장 경영을 시행하면서 식민지 대지주로 변신해 갔다. 소작제 농장 경영을 통한 미곡의 일본 유출과 판매는 당시 총 독부의 시책과 어우러져 높은 수익을 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곡은 광물 과 더불어 진남포의 주요 수이출품 중의 하나였다. <표 5> 1897년 개항에서 1910년 병합까지 진남포의 주요 수출품 순위표 (단위 : %) 연도 1위 1897 米 米 米 米 米 米 대두 대두 米 米 米 米 34.4 대두 대두 소두 대두 대두 대두 사금 米 대두 대두 소맥 대두 2위 위 소맥 7.6 소두 4.4 대두 26.1 소맥 6.0 우피 2.2 소맥 8.0 米 12.4 사금 11.4 소맥 14.6 철동광 8.4 대두 17.3 석탄 위 5위 조 2.1 소두 1.5 기장(黍) 2.1 대맥 1.1 우피 1.7 소맥 1.0 소두 3.3 조ㆍ기장 2.3 소맥 2.1 철광 1.6 소두 2.7 우피 1.3 우피 3.8 석탄 2.5 소맥 8.4 우피 4.3 철동광 2.6 우피 1.2 소맥 3.8 금광 2.2 철광 12.2 석탄 11.0 금광 13.3 소두 6.7 *출전 : 이헌창, 한국개항장의 상품유통과 시장권-한국개항기에서의 시장구조의 변동을 초래 한 일차적 요인 ꡔ경제사학ꡕ 9권 1호, 경제사학회, 156쪽 <표 11> 재인용. *비고 : 1905~6년 대두가 1위를 차지한 것은 그 전 해의 대가뭄으로 인해 쌀 생산량이 감소했 기 때문. 그의 토지에 대한 집착은 진남포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 예로, 전남 고흥 군 포두면의 해창만 간척사업을 들 수 있다. 해창만은 주위 약 6리, 면적 약 34)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197~201쪽.

411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만 평으로 패류의 번식과 어류의 서식에 적당하며 조수 간만의 차도 균 일하여 지방 주민 2천여 호 1만여 명이 이곳에서 어패류 채집으로 삶을 꾸 려가고 있었다. 또한 매립하기 좋은 자연적 조건도 갖추고 있어 조선총독부 는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간척하여 농토로 만들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도미타는 간척사업계획으로 1926년 5월 대부 인가를 받고 측 량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공사 착수를 하지 않았고 지방민들은 어패류 채집은 물론 양식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창만 주민 약 1,000 여 명은 공사착수기한 경과를 구실로 도미타의 대부 인가 권리 상실과 석화 양식조합을 설치하고자 1926년 6월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곳은 석화 양식에 적합한 지역으로서 한해 120만 엔의 생산액이 예상되는 천혜 의 보고였다. 진정위원들은 같은 해 8월 13일 제1차 탄원서를 시작으로 제4 차 탄원서까지 제출하고 27년에는 전남도청까지 가서 항의 하였으나 여전 히 어떠한 처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도미타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매 립공사는 포기하고 대신 조개류 양식을 목적으로 경쟁출원 하였다. 당시 이 문제에 관해 언론에서는 조선 전래의 寶庫를 일시에 어떠한 상관도 없는 한 개인에게 탈취를 당하게 되었으며, 이는 1만여 주민의 생활문제일 뿐만 아 니라 지방 발전에 막대한 영향이 있는 것이라 하며 비판하고 있다.35) 이 문 제는 1930년 3월 주민들에게 석화양식권이 주어지고 석화양식조합이 설 치36)되면서 끝이 났지만, 멀리 전남의 굴 양식업에까지 진출하려는 도미타 의 식민자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도미타합자회사와 삼화은행의 설립 도미타는 자신의 회사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16년 11월 15일 도미타합자회사 를 설립하였다. 이는 농업, 철광채굴운반청부업, 목축업, 도기제조업, 어업 등 당시 도미타가 관여하고 있던 모든 업종을 종합적으로 35) ꡔ東亞日報ꡕ (3), 海倉灣牡蠣養殖을 一個日人이 貸附願. 36) ꡔ東亞日報ꡕ (5), 日本人과 競願中이던 海倉灣은 住民에 貸付.

412 412 지역과 역사 38호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도미타의 기반이었던 광산을 효율 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사장은 도미타가 맡았고 그 외 사 원은 가족으로 충당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50만 엔이었는데, 합자회사를 준비하던 단계였던 1915년 8월, 종래의 자본금 5만 엔을 50만 엔으로 증자 한 것이었다. 본점은 진남포부 三和町 61번지에 두었다.37) 합자회사의 설립에 앞서 도미타는 은행을 설립하였다. 진남포에는 1903 년 3월 제일은행 진남포 출장소가 처음 진출한 이후, 1917년 6월 조선식산 은행 진남포지점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은행들은 일반적 으로 일본인 대상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지역에서는 지역 일본인 소상공 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은행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도미타는 1916년 9월 진남포부 삼화정 89번지에 자본금 30만 엔(제1회 불입액 7만 5천 엔) 의 서민은행 삼화은행 설립 인가를 총독부에 요청했다. 설립의 목적은 일 반은행 업무 수행은 물론 소산업자에게 산업자금을 융통하는 한편 근검저축 을 장려할 소금융기관의 설립이었다.38)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미타 개인의 사업을 위한 원활한 금융자원의 조달과 부동산 획득이 주목적이었다고 생각 된다. 같은 해 10월 25일 총독부의 허가가 나왔고 11월 4일 총독부는 도청 및 진남포 부청을 경유하여 도미타에게 영업 허가서를 교부하였다.39) 삼화은행의 설립에는 安川敬一郞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도미타는 1915 년 제1차세계대전으로 철 가격이 앙등하고 있을 때, 中和郡에서 광대한 철 산을 발견했다. 그는 이 철산의 채굴권을 규슈제강회사의 安川에게 넘기고 10만 엔의 대금을 받았는데, 그 중 3만 엔은 광산 관계자들에게 배분하고 나머지 7만 엔을 은행 창립 자본으로 했다. 당시 조선의 은행법에 의하면 은 행설립 자본금은 최소 50만 엔이고 그 1/4인 12만 5천 엔을 불입해야 했지 만, 도미타는 7만 엔을 불입하면서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40) 삼화은행 37) 38) 39) 40) 中村資良 編, ꡔ朝鮮銀行會社要錄ꡕ, 東洋經濟新報社, 1921, 98쪽. 中村資良 編, 위의 책, 15~16쪽. ꡔ每日新報ꡕ (2), 삼화은행허가 ; (2), 삼화은행 영업허가.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348~351쪽.

413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13 의 발기인은 <표 6>과 같다. <표 6> 삼화은행의 발기인 및 주주 이름 주식(단위:株) 기타 富田儀作 5,000 사장 富田精一 250 儀作의 장남 富田徹三 250 儀作의 조카ㆍ사위 富田泰三 100 儀作의 조카 富田(塚野)季三 100 儀作의 조카 井田作太郞 100 藤本元次郞 100 野田良二 100 *참고 : ꡔ三和銀行 營業報告書ꡕ(홍성찬, 일제하 평양지역 일본인의 은행설립과 경영 ꡔ연세경 제연구ꡕ 3-2, 1996, 383쪽 재인용) ; 富田精一, ꡔ富田儀作傳ꡕ, 1936, 455~457쪽 삼화은행은 해를 거듭하면서 기사쿠의 아내를 비롯하여 차남, 삼남, 장녀 등이 대주주로 참여하는 등 가족경영의 성격이 짙었다. 그의 은행 설립은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입금 7만 엔 정도 의 가족경영 은행이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도미타가 그만큼 많은 특 혜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화은행은 1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특수를 배경으로 순조롭게 성장해갔 으나 머지않아 1920년, 전 세계적인 공황으로 큰 타격을 맞았다. 당시 진남 포의 주 무역대상이던 미곡과 生絲 등의 가격이 폭락했고 도산하는 기업도 늘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남포의 일본 상인을 대상으로 한 이출입 무역금융에 치중하고 있던 삼화은행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삼 화은행은 1920년 3월에 설립된 평양은행41)과 합병하는 문제가 대두되었 고, 1921년 9월 드디어 삼화은행과 평양은행의 합병이 성립되었다. 이후 41) 평양은행은 1920년 3월 13일 평양부 대화정 14번지에 설립되었다. 자본금은 170만 엔이었고, 불입금은 42만 5천 엔이었다. 사장은 橫山直槌, 취체역은 富 田儀作, 大橋恒藏, 宮川五郞三郞, 伊藤佐七, 李鎭泰, 지배인 松崎久, 감사역 山 根政治, 櫻井秀之助, 李孝健이었다. 평양은행은 설립 당초부터 삼화은행과의 합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中村資良 編, 앞의 책, 1921, 19~20쪽).

414 414 지역과 역사 38호 그해 10월 1일 이름을 대동은행(자본금 200만 엔)으로 변경하여 영업을 개 시하였고 삼화은행은 대동은행 진남포지점으로 개칭되었다.42) 그리고 도미 타는 대동은행의 최대주주가 되었다.43) 그러나 영업기반이 일본인사회에 한정되어 있었고, 여전히 공황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대동은행도 그리 오 래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5년 4월 조선상업은행이 창립되어 대동은행을 흡수하게 된다. 위의 사업 외에도 도미타는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 대표적 인 것이 삼화고려자기회사 의 설립이었다. 도미타는 조선의 고미술, 특히 고 려자기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러일전쟁 당시부터 고려자기 원산 지 조사에 착수하여 1908년에 황해도 옹진 지방에 고려자기 유적이 있음을 발견하고 바로 이것을 매수했다. 그리고 교토[京都]에서 도공을 불러 제조 연구에 착수하였으나 고려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재연해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병합이 되었고,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소개로 1911년 3월, 규슈에 서 기사를 초빙하여 설비를 완성하고 같은 해 7월부터 三和高麗燒 제조를 개시했다. 처음 공장은 도미타의 농장이 있던 한두리에 있었으나 1920년에 억양기리로 옮겼다. 주로 고려청자를 모방한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조선의 전통 을 살려 도자기 사업의 개량 진보를 위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조선총독 부로부터 2,000엔의 보조금을 받았고, 평안남도에서는 매년 사업비로 700 엔을 보조하였다.44) 사업이 어느 정도 수익을 내자 이번에는 경성에도 한 양고려자기 공장을 설립하여 고려자기를 생산하였다.45) 도미타는 1912년부터 三和編이라고 하여 千日草로 만든 바구니도 만들 어 판매했다. 삼화 짜기라고도 하는 이것은 고려자기와 함께 진남포의 특산 물이었다.46) 1917년부터는 통영의 유력 자본가 山口精와 함께 전 조선 소 42) ꡔ東亞日報ꡕ (2). 43) 1923년판 ꡔ朝鮮銀行會社要錄ꡕ에 따르면, 대동은행은 총 주식 수 40000주, 주 주 수는 327명이었다. 그중에서 도미타는 사장인 橫山直槌의 4330주보다 더 많 은 6620주를 가짐으로써 대동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44) 前田力 編著, 앞의 책, 1926, 275쪽. 45) ꡔ釜山日報ꡕ (4-2 경성판), 篤行の名高き朝鮮事業家富田翁.

415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15 공업 조사에 착수하여 1922년까지 조선 전체 13도의 주요 도읍을 시찰하였 고, 그러던 중 1918년 11월 통영에서 山口의 도움으로 통영칠공주식회사 를 창립하였다.47) 또한 경성 남대문의 이왕가 직속의 조선미술품제작소 를 인수받아 1922년 8월부터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21년에는 조선미술공 예관 을 세워 그가 수집한 공예 미술품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했다.48) <표 7>은 조선총독부에서 진남포의 특산물의 종류와 생산량 및 가액을 조 사한 것인데, 이 특산물의 대부분은 도미타가 관여하고 있는 사업에서 생산 된 것이었다. <표 7> 진남포 특산품의 판매처, 종류, 총수량 및 가액(1924년) 품명 생산수량 또는 가액 三和高麗燒 10,000円 三和編 8,000円 220,000石 백미 8,000,000円 사과 581,400貫 맥분 387,466袋 1,496,860円 판매처 조선 내 각지 및 일본 조선 내 각지 및 일본 적요 제조자 일본인 제조자 일본인 주로 일본으로 이출 생산자 일본인, 조선인 107,200 일본 147,200 외국 재배자 일본인, 조선인 그외 조선과 진남포부 내에서 소비 대부분 조선 내, 일부는 일본 및 중국 만주제분회사 분공장 *출전 : 朝鮮總督府, ꡔ市街地の商圈ꡕ, 1925, 321쪽 위와 같이 도미타의 경제활동과 자본축적은 진남포를 넘어 전 조선을 대 상으로 하고 있었다. 확실히 조선 산업개발의 선구자 49)라는 수식어가 부 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활동으로 도미타는 오랫동안 진남포상업회의소 에서 회원ㆍ회두, 특별평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산 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외 주식회사 진남포물산시장 사장, 조선수산조합 평안남도 총대, 진남포전기주식회사 감사역ㆍ이사, 진남포기 46) 47) 48) 49) 鎭南浦通信社, 앞의 책, 1933, 53쪽. ꡔ朝鮮總督府施政25周年記念表彰者名鑑ꡕ, 1935, 1026쪽.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281~284쪽. 富田精一, 위의 책, 下村海南의 서문.

416 416 지역과 역사 38호 선주식회사 사장, 진남포생우이출주식회사 사장, 진남포 산업조합장 등 지 역 내 수많은 회사의 사장 또는 상담역, 이사로 취임하였다.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치ㆍ사회활동도 활발히 하여 여러 관변단체의 장 을 맡았다. 1910년에는 진남포거류민단 의원에 당선되어 1914년까지 취임 하였고, 1914년에는 진남포부협의원, 1920년에는 평안남도평의원에 임명 되었다. 1924년에는 내선융화를 철저히 실행 하기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 유 지들로 결성된 친일단체인 동민회의 상담역이 되었으며, 1926년에는 전 총 독부 고관과 일찍이 조선에 진출한 유력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서 설립된 중앙조선협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여러 방면에 걸친 다양한 활동으로 일본으로부터 그는 1912년 조선 최초로 勅定藍綏褒章을 받았으 며, 1915년에는 훈6등 瑞寶章을 수여 받았고 사후에는 종5위로 추승 되었 다(<부표 1> 참고). 개항에서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한국으로 진출한 수많은 일본인 자본 가들은 각종 상업 활동에 종사하면서 점차 식민지 대지주 혹은 대자본가로 성장해 나갔다. 도미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선에서 조금이라도 이익 을 낼 수 있는 사업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관심을 가졌고 경영을 시도하 였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개항과 통감부 설치, 그리고 1910년의 병합으로 이들은 조선에서 군사적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마음 껏 이윤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진남포는 다른 개항장보다 늦게 개항되었 기에 도미타가 경성에서 진남포로 거점을 옮길 무렵에는 일본인들의 진출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진남포는 배후에 대규모의 광물자원을 품고 있었고 안 주평야, 평양평야, 재령평야 등에서 나는 미곡은 조선 전체에서도 손에 꼽 힐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다. 따라서 대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진남포는 무 역항으로서 장래 무한한 발전이 기대되던 곳이었다. 이 미개척지 에서 도미 타는 광산업뿐만 아니라 농축산업과 금융업, 도자기 제작에 이르기까지 여 러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본을 축적하였고, 이에 동반하여 진남포 는 철저히 일본의 원료 공급지가 되었다.

417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17 Ⅲ. 도미타 기사쿠의 조선인식 가지무라 히데키는 재조일본인들을 굉장히 강렬한 국가주의자이며, 국 가 의 논리로 무장하여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가해를 실행한 자들이라고 하 였다.50)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늘리는데 급급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를 위함 일 임을 언제든 강조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위 발양을 자기의 이익으로 보는 재조일본인의 의식은 점점 강해지는 것과 동시에 모든 수단을 이용한 사리 추구를 국가를 위해서라고 합리화하는 야비함도 점점 깊어졌다.51) 도 미타의 경우에도 러일전쟁 당시 비록 광산을 일시 중지해야 했지만 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는 정신으로 불탔 으며 전시 후원을 위한 일 을 하기 위해 軍夫공급 사업과 군에 채소류를 납품하여 자본을 축적하였다.52) 도미타와 같이 일확천금 을 노리고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자본가들은 국가 를 등에 업고 거리낌 없이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본을 축적했다. 이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물적 토대를 제공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재조일본인들의 수많은 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서 이러한 침략의 첨병 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재조일본인은 조 선인에 대해 차별감을 가지지 않았으며, 조선인들을 가엾이 여겨 최대한 은 혜를 베풀려 했고, 문명화되지 않은 채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있는 조선인 들을 개화 시켰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즉 이들은 일본제국의 식민 자로서 피식민지민에 대한 우월의식을 드러내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ㆍ 합리화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이 직접 일반 조선인들과 교류하면서 어떤 관계를 형성해간 일은 찾기 힘들다. 조선인은 단지 교화의 대상이자 통치의 대상이었을 뿐 동등한 입장에 선 파트너는 될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은 도미 50) 梶村秀樹, 앞의 논문, 1974, 194쪽. 51) 梶村秀樹, 위의 논문, 209쪽. 52)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107쪽.

418 418 지역과 역사 38호 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병합을 전후한 시기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폭도 라고 규정 하였다. 그는 의병전쟁을 모두 排日의 기세를 틈타 부화뇌동하고 激越不逞 한 무리 가 각지에서 봉기하여 폭동화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남포 에 이 폭도 들이 들이닥칠 것을 우려하여 철포에 실탄을 장전하고 죽음까지 각오하였다.53) 1919년의 3.1운동에 대한 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3.1 운동 또한 排日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선동하여 폭동 을 일으키는 폭도 들의 소요사건 정도로 축소하여 인식하고 있었다.54) 그런데 이 사건들을 수습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도미타의 전기에 의하면, 전조선이 폭도 들의 습격으로 불안해하고 있지만 진남포의 조선인들은 도미타를 친 부모처럼 흠모 하고 있었고, 진짜 조선인의 편 이며 은인 이라고 여기고 있 었다. 때문에 폭도 들의 선동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 는데, 이 일은 도미타의 德化 에 감동한 진남포의 조선인들이 스스로 만든 규제라고 하고 있다. 즉 도미타의 시혜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조건적인 감동 과 복종 을 강조하고 있다. 도미타의 조선ㆍ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교육사업에서 더욱더 잘 드러났 다. 도미타의 광산업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1909년, 그는 갱부의 자 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도미타는 조선인 갱부들을 기질이 거칠고, 한가할 때는 도박을 하는 불량한 사람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러한 갱부들의 풍기 문란 을 교화하려면, 그 자식들을 모아 선량한 사상으 로 교육시켜 가정을 바꾸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 가 富國黌였다.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富國黌에서는 주로 일본어 를 가르쳤고 학생들이 일어를 쓰게 되면서 점점 그 부모들도 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수신 강화 교육으로 인해 조선인 아동의 도덕적 관념도 점차 향상되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가정에까지 미쳐 부락민의 기풍이 저절 로 개선되었다고 하고 있다.55) 도미타는 조선의 아이들에게 저축을 강조하 53) 富田精一, 위의 책, 185~186쪽. 54) 富田精一, 위의 책, 377쪽.

419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19 였는데, 그 이유는 조선 사회에는 놀고먹는 악습이 심각하며, 장래를 생각 하는 관념이 매우 결핍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인은 양반을 숭배하고 놀고먹는 사람을 존중하는 풍습 이 있으므로 이러한 악습 을 모두 개선하고 근로의 숭고함을 알게 해야 하며, 저금의 귀중함을 가르 치고 싶다 고 하였다.56) 일제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병합을 전후하여 일선동 조론, 문명화, 동화주의를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식민지 통치와 이윤획득 을 위한 식민지 체제 개편의 필요성을 문명화 에 대한 사명으로 정당화하였 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발전적 측면은 왜곡되었고 조선은 미개발의 열등지 역 내지는 야만 으로 정의되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인 도미타는 문 명 의 입장에서 비문명 적인 조선인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57) 이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는 논리 중 하나인 문명화론 과 잇닿아 있는 것이었다. 한편 1919년 3.1운동 이후 그때까지 통치기조였던 무단정치 에서 문화 정치 로 정책기조를 전환한 총독부에서는 조선인 회유를 통해 지배의 안정 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내선융화 를 강조하여 동화정책 을 계승하는 것이었고, 친일세력의 육성과 이용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실행 할 여러 관변단체가 많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1924년 3월 설립된 동민회였다. 도미타는 동민회 설립 당초부터 이사를 역임했다. 동 민회 창립 취지 를 보면, 구주 열강들의 극동지역 침입을 막고 이 지역의 영 원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조선이 서로 융화 하고 결합을 견고 히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58) 진남포 굴지의 자본가이자 공공사업가로서 장래 농촌을 구성할 자격이 있는 선량한 청년의 양성, 근검저축의 기풍 함 양, 농사개량 사상 환기, 내선인의 융화, 위생 풍기의 개선 59)을 도모한 도 55) 富田精一, 위의 책, 203~204쪽. 56) 富田精一, 위의 책, 212쪽. 57) 장성우, 1910년대 일제의 지배논리와 지식인층의 인식-일선동조론과 문명화론 을 중심으로 ꡔ한국사론ꡕ 46, 2001, 199쪽. 58) 同民會, ꡔ同民夏季大學名士講演集ꡕ, 1926.

420 420 지역과 역사 38호 미타는 동민회의 이사로 추천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한편 1924년 11월에는 조선물산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이 단체는 반관단체로서 조선의 물산을 일본에 소개하고 판매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총 독부의 원조를 받아 일본과 외국에 조선사정 및 산업소개를 하며, 조선 내 에서 생산자 또는 취급업자와 소비지의 수요자와의 사이에서 영리 행위가 아니라 거래를 중개 알선하여 판로를 개척하고 거래를 촉진을 하는 것이 이 단체의 목적이었다. 단체의 사업을 보면, 우선 오사카에 조선물산진열소를 설치하여 조선의 산업 상황을 소개하는 것과 함께 조선 내 영업자의 위탁을 받아 저렴한 취급수수료로 즉매하였다. 도미타는 조선 내에서의 경제적 활 동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생산해내는 물산, 특히 그가 관여하고 있는 쌀, 고려자기, 사과 등 여러 회사에서 생산하는 물산의 일본 판로 확장에 적극적 으로 참여했다. 그는 조선물산협회가 설립되기 전부터 개인경영으로 1923년 5월 오사카에 조선물산판매소를 설립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그의 오사카 판매소에 대해 시기적절하다는 호평을 하였고, 보조금을 내어 조선 물산협회를 설립하도록 한 것이었다.60) 당시 다수의 일본인 식민자들은 국 가에 자신의 의지할 바를 구하였는데,61) 도미타 또한 조선에서 생산한 상 품들의 판로 확장을 모국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은 역으 로, 조선은 단지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 미개척지인 동시에 그의 모국 일본 에 싼값에 원료를 공급할 수 있는 원료공급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시 켜 준다. 59) 富田精一, 앞의 책, 1936, 372쪽. 60) 富田精一, 위의 책, 384~386쪽. 61) 윤건차, 식민지 일본인의 정신구조 ꡔ제국과 식민지의 주변인ꡕ, 보고사, 2013, 65쪽.

421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기사쿠 [ 富田儀作 ] 의자본축적과조선인식 421 맺음말 1858년효고현에서태어나진남포가개항한지 3년후인 1900년을전후로진남포에진출한도미타는 1930년 8월경성에서사망하기까지진남포의대자본가로활동하였다. 이과정에서도미타는 식민자 로서의성격을일관되게유지하였다. 도미타는진남포의지역적특수성을이용하여자신의사업을확장시켰다. 즉진남포가위치한평안남도와그부근의황해도는조선에서가장많은광산을보유한곳이었다. 그렇기에처음부터광산업에주목하고조선으로온도미타에게진남포는최적의거점이었을것이다. 그는광산업으로초기자본을축적한후러일전쟁이끝난후에는농작물, 특히진남포의특산물이된사과재배에적극적으로나섰다. 또한금산포와진남포부근의대규모간척사업을진행하면서소작제농장경영을시행하여식민지대지주로변신해갔다. 그리고이런사업들을총괄하기위해도미타합자화사를설립한그는, 금융업에도진출하여삼화은행을창설하였다. 이런도미타의사업들은조선총독부라고하는식민권력과유착관계가없었다면불가능한일이었을것이다. 그가하는모든일은, 그것이지극히개인적인이익을추구한것이었다고해도, 국가적사업 으로도치되었다. 그러나그가조선을바라보는시선은시종일관 멸시 와 차별 의시선이었고시혜적이었다. 조선과조선인들을교화의대상으로밖에보지않는그에게진정한의미의 내선융화 와그것의궁극적목적인 동화 는처음부터불가능한일이었다. 이는도미타뿐만아니라당시재조일본인대부분이가지고있는조선에대한인식이었다. 그들이애써숨기고자했지만곳곳에서노골적으로드러난특권의식과조선인에대한우월의식은식민지에서그들을지탱해주는정신적기제였다. 즉도미타는그스스로가식민권력으로서, 전형적인 식민자 의모습을하고있었다. 이상에서진남포의대표적유력자본가도미타기사쿠의자본축적과정과그의조선인식에대해살펴보았다. 그러나그의자본축적과정을더면

422 422 지역과 역사 38호 밀하게 분석하려면 그의 인적망 형성과 사회활동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본고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다. 특히 도미타는 진남포에서의 성 공을 바탕으로 조선 전 지역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각 지역의 유 력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연구과제로 남겨두 고 싶다. 참고문헌 ꡔ東亞日報ꡕ, ꡔ每日新報ꡕ, ꡔ釜山日報ꡕ ꡔ朝鮮總督府官報ꡕ, ꡔ朝鮮總督府統計年報ꡕ 菊地謙讓, ꡔ朝鮮諸國記ꡕ, 德野眞士, ꡔ黃海道鑛業狀況ꡕ, 朝鮮鑛業會, 同民會, ꡔ同民夏季大學名士講演集ꡕ, 富田精一, ꡔ富田儀作傳ꡕ, ꡔ在韓人士名鑑ꡕ, 前田力 編著, ꡔ鎭南浦府史ꡕ, 鎭南浦府史 發行所, 田中市之助, ꡔ全鮮商工會議所發達史-13. 鎭南浦ꡕ, 釜山日報社, ꡔ朝鮮功勞者名鑑ꡕ, 朝鮮總督府, ꡔ市街地の商圈ꡕ, ꡔ朝鮮總督府施政25周年記念表彰者名鑑ꡕ, 中村資良 編, ꡔ朝鮮銀行會社要錄ꡕ, 東洋經濟新報社, ꡔ鎭南浦稅關沿革史ꡕ, 鎭南浦新報社, ꡔ鎭南浦案內記ꡕ, 鎭南浦通信社, ꡔ鎭南浦ꡕ, 김동희, 진남포의 개항과정과 무역구조의 변화(1897~1910) ꡔ역사연구ꡕ 26, 다카사키 소지 저, 이규수 역, ꡔ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ꡕ, 역사비평사, 도미타 세이이치 저, 우정미 역, ꡔ식민지 조선의 이주일본인과 지역사회-진남포의 도 미타 기사쿠ꡕ, 국학자료원, 윤건차, 식민지 일본인의 정신구조 ꡔ제국과 식민지의 주변인ꡕ, 보고사, 이규수, 후지이 간타로의 인천진출과 한국경영 ꡔ개항장 인천과 제조일본인ꡕ, 보고

423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기사쿠 [ 富田儀作 ] 의자본축적과조선인식 423 사, 장성우, 1910년대일제의지배논리와지식인층의인식- 일선동조론과문명화론을중심으로 ꡔ한국사론 ꡕ 46, 홍성찬, 일제하평양지역일본인의은행설립과경영 ꡔ연세경제연구ꡕ 3-2,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424 424 지역과 역사 38호 <부표 1> 도미타의 주요 이력 주요 활동 내용 *1858년 兵庫縣 출생 *1899년 조선으로 도항 *1900년 황해도 은율광산 채굴권 획득 *1904년 진남포로 완전 이주 *1908년 조선농회 지회장 *1910년 진남포거류민단 의원 당선(~1914), 진남포번영회(行之會) 회장 *1910년 진남포상업회의소 의원 *1912년 주식회사 진남포물산시장 사장, 진 남포전기주식회사 이사, 勅定藍綬褒章 *1913년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1915년) *1914년 진남포부협의원, 진남포학교조합 의원 *1915년 훈6등 瑞寶章 추서 *1916년 도미타합자회사, 주식회사 삼화은행 설립 *1917년 조선광업회 창립이사 평의원, 진남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1918년 동양축산흥업회사 이사, 통영칠공주식회사 사장, 조선수산수출주식회사 이사 *1920년 금산포우편소 소장, 동아잠사주식회사 사장, 진남포기선주식회사 사장, 평안남도평 의원 *1921년 조선잠사회 창립 부회두, 조선산림회 창립 부회장,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 원, 대동은행 이사, 경성에 조선 고미술공예품 진열관 설립, 조선축산협회 창립 상 담역, 경성현물취인시장 상담역 *1922년 경성사립치과의학교 설립,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 설립 *1923년 조선수산회 평의원, 오사카에 조선물산진열관 설치 *1924년 정6위 서위, 진남포과물동업조합 창립 조합장, 동민회 이사, 조선물산협회장 *1925년 경성흥산주식회사 이사, 진남포생우이출주식회사 사장 *1926년 평안남도 특별평의원, 중앙조선협회 평의원, 조선과물동업조합연합회 회장, 조선공 업회 상담역, 조선물산주식회사 사장 *1927년 조선무연탄주식회사 이사 *1928년 의주금광주식회사 창립발기인 총대 *1929년 진남포산업조합장, 의주금광주식회사 이사 *1930년 경성중앙물산주식회사 사장 *1930년 8월 경성에서 사망 *출전 : 富田精一, ꡔ富田儀作傳ꡕ, 1936, 589~596쪽.

425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25 <부표 2> 진남포 유력 일본인 상업가의 출신지와 업종 이름 출신지 도항 및 조선 내 이동 井出田榮市 나가사키현 진남포(1898) 原田鐵策 청일전쟁 종군기자 ( 1894) 평양 오이타현 (1895) 진남포 (1897) 中村精七郞 나가사키현 인천(1903) 진남포(1904) 富田儀作 효고현 인천(1899) 진남포(1900) 西崎鶴太郞 효고현 진남포(1905) 濱田儀平 오사카시 인천 진남포 주업종 비고 賣藥, 잡화상 광산업, 수산업 1895년 대동강운하취급소 창설, 진남 포에서 原田상회 창설, 민장, 민단의 장,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 해운운송업, 1903년 인천 木村組 직원, 진남포로 광업, 이동 후 1905년 中村組 창업 상품판매 광업, 금융업, 농림업, 목축업 광업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 재령철산 채굴경영, 진남포상업회의 소 회두 광업, 무역업 거류민회 의원 原口秀吉 후쿠오카현 인천(1891) 진남포(1898) 미곡상 거류민회 의원 上田鶴松 야마구치현 인천(1893) 진남포(1898) 무역업 五百井長상점 인천지점원으로 도항, 진남포 개항이후 진남포지점의 지배 인. 거류민회 의원 野村傳吉 (도항연도 불명) 진남포(1898) 회조업 거류민회 의원, 商話會 의원 효고현 松浦常太郞 도야마현 진남포(1896) 增田松太郞 히로시마현 인천(1888) 진남포(1898) 夷石多左衛 門 부산(1887) 인천 (1902) 진남포 (1903) 시가현 五島榮藏 야마구치현 寺本安太郞 효고현 靑木健三郞 나가사키현 청일전쟁 때 제1감시대 제4소대장으 賣藥, 잡화, 로 진남포에 상륙하여 내지로 들어감, 여관, 전역 후 바로 진남포로 도항, 진남포 토목청부업 거류민회장, 거류민회의장 잡화상, 거류민회 의원 위탁매매업 무역업 - 인천 진남포 진남포상업회의소평의원, 민단의원 (1898) 토목청부업 부산(1894) 인천 평양 진남포 인천(1893) 진남포(1898) 잡화 회조업 처음 慶田組 직원으로 인천에 와서 오 사카상선회사 지점에 잠시 근무, 진남 포에서 靑木組를 열어 회조업에 종사

426 426 지역과 역사 38호 인천(1890) 진남 新居歡次郞 도쿠시마현 포(1896) 인천 진남포(1902) 新井新藏 오사카시 鈴木種一 야마구치현 무역업, 수산업 한국어에 능함, 민단의장, 진남포상업 회의소 평의원 인천 진남포(1898) 정미업, 무역업 처음 오사카 무역상 木谷伊助상점의 인천 지점원으로 도항, 진남포에서 독 자적으로 무역업에 종사, 거류민회 의 원 부산(1904) 진남포(1905) 수이입품 민단의원,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 부 도매업 협의원 정미업 민단의원, 진남포상업회의소 회두, 도 평의원 청일전쟁 통역으로 종군 인천(1896) 齋藤久太郞 나가사키현 평양(1897) 진 남포(1902) 정미업 장춘과 대련에 제분공장 등 만주 지역 에 18개의 회사에 관여 加藤平太郞 나가사키현 진남포(1904) 정미업 동향인 齋藤久太郞과 함께 정미업에 종사, 1918년 독립하여 加藤정미소 설립, 인천에까지 진출 상업 조선상공회사 사장, 진남포상업회의 소 회두 馬場嘉藏 도쿠시마현 진남포(1904) 川添種一郞 효고현 진남포(1920) *출전 : 위 표는 前田力 編著, ꡔ鎭南浦府史ꡕ(1926, 442~455쪽)와 ꡔ在韓人士名鑑ꡕ(1905, 126~ 134쪽), ꡔ朝鮮功勞者名鑑ꡕ(1935), ꡔ鎭南浦案內記ꡕ(1910, 74~83쪽)를 참고로 작성되 었음. *여러 업종을 겸영하는 사람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만 표기하였음.

427 진남포의 식민자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자본축적과 조선인식 427 Abstract The Capital Accumulation and the Perception of Korea of Tomita Kisaku[富田儀作] as Colonizer in Jinnampo Lee, Ga-Yeon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existed in various forms, for example commercial capitalists, soldiers, bureaucrats, teachers, the lower class workers and the unemployed. Among them, the commercial capitalists focused on the commercial value of Korea. The Colonial Korea had been a for them Undeveloped land that was the place to guarantee as the land of opportunity for a success. Japan dominated regime in Korea was enough to say that the physical foundation has been completed through the advancement of commercial capitalists. For example, Tomita Kisaku[富田儀作] who was a commercial capitalists in Jinnampo[진남포] that he was using the regional peculiarities of there. And he accumulated capital and became a typical colonizer. Jinnampo was open a port in 1897, much later than Wonsan, Busan, Incheon. However, in front of the open this port, the Japanese Settlers in Korea had just not much attention. But, in the subsequent open a port, the Japanese Settlers have been gathered because the development was expected. Tomita also came with bare hands to Incheon in korea, and since the opening of Jinnampo, he emigrated here. At first, He was based in Jinnampo, earnest engaged in mining. And by extension, he extended of the many fields in business to agriculture, financial industry, etc. Tomita was a typical colonizer of Jinnampo. To ostensibly, he didn t have a discrimination and a prejudice and

428 428 지역과역사 38 호 he saw himself as the Korean developer, contributor, and a good colonizer. However, some of the perception of his Korea- Korean, he wanted to hide, but, a privilege consciousness that appeared blatant in everywhere, and superiority consciousness of Koreans had been internalized. Keywords :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Colonizer, Jinnampo, Tomita Kisaku, Mine in Eunyul-Jangyeon

429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29 ꡔ지역과 역사ꡕ 38, , 429~447쪽 조선후기 연구동향 조선후기 朝 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국내 연구동향을 중심으로 62)심 민 정* 머리말 Ⅰ. 교린체제와 조일사신 Ⅱ. 조선 측 사신 Ⅲ. 일본 측 사신 맺음말 머리말 한 시대의 외교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서 使臣 은 그 나라의 외교정책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상징성을 지닌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親善, 交易, 講和, 정세 탐색 등 각종 목적과 역할에 따라 사신의 명칭 또한 다양하게 존재했던 상황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특 히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전기부터 왜구 문제 등으로 사신의 왕래가 잦았던 조일관계에서 사신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양국의 외교문제 해 결, 정세 탐색, 자국의 명분과 실리를 위한 각종 규정 및 정책 마련 등이 모 두 사신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이들을 통해 조일 외교가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조일 간의 교린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주제로 使臣 에 주목했다. * 신라대학교 역사교육과 초빙조교수(sleeping100@hanmail.net).

430 430 지역과 역사 38호 조선 후기에 조선 측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로는 國王使에 해당하는 回答兼刷還使, 通信使, 그 외 對馬島와의 관계 및 외교 현안, 교역 등을 목 적으로 파견한 譯官使인 問慰行이 대표적이다. 반면 일본 측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사신은 훨씬 더 다양했는데, 대마도 혹은 막부와 관련한 외교 문제 를 주목적으로 파견되었던 差倭, 주로 무역에 비중이 높았던 特送船ㆍ歲遣 船 등의 年例送使, 그리고 受職人 등이 존재했다. 이 중 외교적 성격이 강했 던 차왜 같은 경우는 그 임무와 역할에 따라 명칭을 더 세분화하여 파견했 다는 점에서 사신 의 다양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큰 의미를 지니는 사신의 왕래가 조선 후기 부산 지역 을 통해 이 루어졌다. 왜관의 지리적 위치는 절영도, 두모포, 초량 등으로 이전을 거듭 했지만 부산 이라는 지역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대일 외교의 부산이 중심 지역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조일 양국의 사신 왕래 에 대한 연구 동향을 확인하고자 한다. 양국의 사신1)은 그 명칭만큼이나 다양한 임무와 형태로 왕래하였으나 사 신이 가지는 중요성에 비하면 다소 늦게 연구를 시작한 편이다. 게다가 국 내에서보다 일본에서 연구가 먼저 확산된 경향이 있다. 현재는 일본으로 다 소 편중되었던 연구 경향이 상호 균등한 양상으로 변화하였지만 사신의 종 별에 따라 일부 사신에 대한 연구에만 치중된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사신 이 통신사 이다. 통신사에 대한 연구 성과는 상당 기간 동안 일본인들 위주 로 축적되어 왔다.2) 하지만 현재는 그런 격차가 많이 완화되어 양국이 고르 게 연구를 축적하고 있는 상황이다.3) 또한 통신사에 대한 연구 성과의 급증 1) 조선과 일본 양국의 사신에 대해 전반적으로 개괄한 논고로, 하우봉, 조선후기 한일관계에 대한 재검토-사절 왕래를 중심으로 ꡔ제26회 동양학술회의 강연초ꡕ,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홍성덕, 17세기 조ㆍ일외교사행 연구, 전북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조선후기 한일외교체제와 대마도의 역할 ꡔ동북아 역사논총ꡕ 41, 한문종, 조선시대 대일사행과 對馬島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1, 2014 가 있다. 2) 손승철은 2002년 연구( 조선시대 통신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ꡔ한일관계사연구ꡕ 16, 2002)에서 한국의 통신사 연구는 61편인 반면 일본의 연구는 10배 이상이나 된다고 한 바 있다.

431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31 으로 인해 통신사 연구 현황 에 대해 다양한 논고들이 발표되고 정리되었 다.4) 그래서 본고에서는 기존에 연구 현황이 잘 정리되어온 통신사 이외의 조일 사신 연구 동향을 분석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교린체제와 조일사신 인데, 이 부분에서는 조선과 일본 사신 왕래가 교린체제 라는 외교 관계에서 어떻 게 인식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 후기 대일 교린질서를 어떤 특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던 연구들을 소개한다. 두 번째로 통신사, 문위행 등 조선 측 사절과 관련한 연구 성과들을 되짚어 본다. 물론 여기에 서는 통신사보다 문위행에 초점을 맞추어 확인하겠다. 세 번째는 일본 측 사신에 관한 연구인데, 차왜, 연례송사, 수직인 등 다양한 형태로 내도하였 던 일본 사신들에 대한 연구를 정리해 본다. 통신사 연구를 제외하기 때문에 기타 사신들에 대한 성과는 소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소략하지만 다양한 연구들을 최대한 소개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전개하겠다. Ⅰ. 교린체제와 조일사신 사신을 파견하는데 있어 그 임무나 목적은 매우 다양하여 명칭이 일률적 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조선 후기 일본의 경우는 막부에서 파견하는 3) 岩方久彦은 2015년 9월 학술발표에서 박사논문만 놓고 보면 한국의 연구가 일본 연구를 양적으로 역전했다고 하였다(岩方久彦, 통신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 멸시 와 선린 사이에서- ꡔ해방70년 공동학술심포지엄 한일역사연구의 쟁점 발 표자료집ꡕ, , 94쪽). 4) 통신사에 대한 국내 연구가 증가하면서 여러 차례 연구사가 정리되었다. 통신사 연구사를 정리한 것으로는, 손승철, 조선시대 통신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ꡔ한일 관계사연구ꡕ 16, 한태문, 통신사 사행문학 연구의 회고와 전망 ꡔ국제어 문ꡕ 27, 장순순, 통신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ꡔ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ꡕ,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岩方久彦, 앞의 논문, 등이 있 다.

432 432 지역과 역사 38호 국왕사절이 사라지게 되고 대마도가 막부를 대신하는 단일 주체가 되어 사 신을 파견하면서 무역이나 求請 등을 목적으로 왕래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사신에게서 외교적 성격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 신 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외교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 질 서나 체제 속에 사신을 자리매김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흔히 조선시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교린관계 로 정의되어 왔다. 교린 관계의 시작에서는 明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관계 가 선행하였다. 명이 중 심이 되어 형성된 교린체제에서 조선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대등하고 호혜적 인 관계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공식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교린체제 속에서 각 개별 국가들은 대체로 자국 중심의 교린체제 를 운영하였다.5) 이는 손 승철, 민덕기 등의 연구에서처럼 조선 전기 다원적 교린체제 하에서 대등 교린 과 기미교린 이 공존6)하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정다함은 교린체제 에 대해 재고하면서 교린은 원전 상으로는 호혜적ㆍ 이상적 관계를 의미하지만, 실제 교린에는 문화적인 위계질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항상 조선을 위에 두고 여진과 대마도, 막부는 조선의 선 진문화를 전수 받는 수혜자로 설정했고, 조선의 문명을 일본보다 앞선 것으 로 당연시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있었다7)고 하였다. 즉 조선을 중심으로 한 소중화체제, 자국 중심의 교린체제 를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5) 심민정, 조선후기 일본사신 왕래와 접대양상, 부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7~8쪽. 6) 일본에 대한 교린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민덕기는 교린은 대등관계인 적례적 교린 와 상하관계인 기미권 교린 으로 구분하였고(민덕기, ꡔ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韓ㆍ日관계ꡕ, 경인문화사, 2007), 손승철은 대등관계의 교린 과 기미관계의 교 린 으로 구분하였다.(손승철, ꡔ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ꡕ, 지성의 샘, 1994 ; ꡔ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ꡕ, 경인문화사, 2006) 하지만 여 기에서 적례를 행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책봉국이라는 상황이 전제된다는 것 이지 적례를 행한다고 해서 대등한 관계로 동일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상하관계의 교린은 기미교린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7) 정다함, 事大 와 交隣 과 小中華 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ꡔ韓國史學報ꡕ 42, 2011, 302~304쪽.

433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33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신,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온 사신에 대한 접대례나 제도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각종 통신사 사행 기록들에서 조선의 문화적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문장과 글씨, 그림에 능한 구성원을 차출한다든지, 일본 사신이 客舍에서 행하는 肅拜禮 같은 경 우는 단 아래에서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자국 중심의 교린체제 를 조선만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또 한 막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류큐 사신들에게 에도노보리를 강요했고, 통 신사에 대해서도 쇼군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도래하는 조공 사절로 인식하 게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자국 중심 교린체제 를 운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신은 존재만으로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기본적으로 외교적 특성을 지니게 되며, 이런 측면 때문에 양국 간의 대표적인 사절인 통신사 는 다음의 <표 1>에서처럼 조선 후기 교린체제기를 시기 구분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표 1>에서는 하우봉을 제외하고는 교린체제기를 시기 구분하는데 모두 통신사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우봉은 문위행을 추가하여 조선 후기 교린 체제기를 구분 하는데 조금 더 다채로운 시각을 제공하였지만 모두 조선 측 사신만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조선후기 조ㆍ일 교린관계의 변화나 특성을 도출할 때 조선 측의 사신만 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일본 측 사신도 함께 기준으로 작용해야 한다. 양국 사신의 교류와 교섭 과정 속에서 외교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본 논고는 이런 기본 인식 속에서 조선과 일본 양국 사신에 대한 연구 동향을 확인하여, 기존에 편중되어 있던 사신에 대한 연구가 고르게 확산될 수 있 는 기초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이를 통해 사신 연구 균형이 이 루어진다면 조선후기 교린체제를 객관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이다.

434 434 지역과 역사 38호 <표 1> 조선 시대 교린체제 시기구분 시기 孫承喆8) 三宅英利9) 李元淳10) 河宇鳳11) 한태문12) 조선전기 ( ) 1460 中華的 交隣體制 1443 무로마치막부에 파견된 통신사 임란직후 ( ) 中華的 1617 交隣體制의 復活 1635 도요토미정권에 파견된 통신사 1607 국교재개기 (회답겸쇄환사) 교린관계 교린관계 회복 단계 교린체제 회복 교섭기 ( ) 모색기 ( ) 조선후기 ( ) 脫中華의 交隣體制 이후 개변기(1711 통신사행) 국교안정 후기 (1719, 1748, 1763 통신사행) 1748 交隣體制의 變質과 崩壞 교린체제 확립기 국교안정 전기 (1636, 1643, 1655, 1682 통신사행) 通信使ㆍ問尉行 이원교류의 단계 ( ) 교린체제의 확립 및 교린체체 안정기 ( ) 안정기 쇠퇴기 (1811 사행) 교린체제 와해기 問尉行 일원교류의 쇠퇴기 단계( ) ( ) * 심민정, 조선후기 일본사신 왕래와 접대양상, 부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3~4쪽, <표 1>에 한태문의 연구 성과를 부기함. 8) 손승철, 앞의 책, 1994 ; 앞의 책, ) 三宅英利 저, 손승철 옮김, ꡔ근세 한일관계 연구ꡕ, 이론과 실천, ) 이원순, 조선후기(에도시대) 한ㆍ일교류의 위상 ꡔ조선시대사논총ꡕ, 느티나 무, ) 하우봉, 앞의 논문, ) 한태문, 朝鮮後期 通信使 使行文學의 特徵과 文學史的 意義 ꡔ동양한문학연 구ꡕ 10, 1996.

435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35 Ⅱ. 조선 측 사신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도해한 조선 측 사신은 국왕사에 해당하는 통신사 (회답겸쇄환사 포함)와 역관사행인 문위행이 있었다. 통신사에 대한 연구는 현재 역사, 문학, 지리,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히 진행되었으며, 손 승철, 장순순, 한태문, 岩方久彦 등에 의해 연구사 정리도 이루어졌다. 때문 에 재차 다루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되어 본장에서는 문위행에 대한 연구 동향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이루어진 문위행 연구는 洪性德이 선구적이다. 홍성덕은 여러 차례에 걸쳐 문위행에 대해 전반적으로 개관했는데,13) 문위행의 기원, 구 성과 도항절차, 임무 등을 정리하였다. 이에 의하면 문위행의 기원은 조선 전기 경차관으로, 지역적으로 대마도에 파견되었으며, 주로 問慰의 임무를 가졌고, 예조참의 앞으로 된 서계와 별폭을 지참하고 파견된다14) 하였다. 그러면서 최초의 문위행은 1632년 파견된 한상과 최의길로 파악하였다. 문 위행은 당상관 1인, 당하관 1인 외 수행군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원수 는 최저 45명에서 최고 154명에 달했다.15) 관수왜 성립 이후 문위행 파견 절하는 간략하게 정리하면, 관수왜의 보고 및 요청 차왜 도래 문위행 파견 순으로 진행되었고,16) 주된 임무는 문위, 통신사행절목 강정, 왜정 정탐, 약조 및 외교 업무, 무역 등이었다.17) 뒤이어 진행된 문위행 도항인원 분석에 관한 연구에서는 대마도와 조선 측 기록에서 문위행 인원 기록이 달리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 접근했는데, 13) 홍성덕, 조선후기 문위행에 대하여 ꡔ한국학보ꡕ 59, 1989 ; 앞의 박사학위논 문, 1998 ; 조선후기 대일외교사절 문위행의 도항인원 분석 ꡔ한일관계사연구ꡕ 11, 1999 ; 조선후기 대일외교사절 문위행 연구 ꡔ국사관논총ꡕ 93, ) 홍성덕, 위의 논문, 1989, 118~128쪽. 15) 홍성덕, 위의 논문, 128~134쪽. 16) 홍성덕, 위의 논문, 134~138쪽. 17) 홍성덕, 위의 논문, 138~155쪽.

436 436 지역과 역사 38호 실제 도항 인원과 규정된 인원의 기록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 다. 또한 1693년 이후 문위행 접대 인원의 축소는 악화된 재정과 빈번한 밀 무역의 발생 중에 왜관 이건이 종결되면서 대마도 측이 요구한 것으로 정리 하였다.18) 이렇게 기본적인 토대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일본19) 외에 타 연구자들의 접근은 거의 없었으나 최근 10여 년 사이에 국내 연구 자들에 의해 문위행에 대한 재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채연은 문위행의 성립과정과 개념 에 대해 재고찰20)하였는데, 기존에 일본 측과 국내 연구에서 문위행, 문위역관(사), 도해역관(사) 등으로 복 잡하게 통칭되던 것에 대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일본 측에서 통칭되는 역관사 라는 명칭은 직책만이 강조된 것으로, 조선이 굳이 문위 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위 라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것으로 조선과 일본(대마도) 의 상하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자국 중심의 교린질서를 추구하고 있 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문위 라는 용어가 필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이 문위 를 목적으로 역관을 파견하였을 때 3품 이하의 관리를 차출하였으므로 使 라는 명칭이 아닌 官 이라는 명칭이 맞으며, 사절과 사 행이라는 용어 또한 엄밀한 구별이 필요한 용어이므로 문위관 이나 문위행 이 정확한 표현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상의 개념을 정립했을 때 문위행의 시초는 홍성덕이 제시했던 1632년 사행이 아닌 1629년 12월 파견된 형언 길ㆍ최의길 일행으로 보았다. 문위행이 왜학역관이라는 측면에서 역관이라는 신분에 주목한 연구들도 나왔는데, 김두헌은 문위행 참여 역관의 가계와 혼인 양상21)을, 이상규는 18) 홍성덕, 앞의 논문, ) 田代和生, 渡海譯官使の密貿易-對馬藩 潛商議論の背景- ꡔ朝鮮學報ꡕ 150, 仲尾宏, 朝鮮渡海使と對馬藩 ꡔ爪生ꡕ 17, ) 유채연, 조선후기 問慰行 명칭과 성립과정에 대한 재고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2, 2015, 183~219쪽. 21) 김두헌, 조선후기 통신사행 및 문위행 참여 역관의 가계와 혼인 ꡔ동북아역사

437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세기 왜학역관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문위행의 활동을 언급22)하였다. 이 렇게 문위행의 활동을 복합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최근에는 기존에 문위 행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행에 대한 접근도 시도되고 있다. 이상규는 ꡔ증 정교린지ꡕ 등의 조선 측 외교규정집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존에 문 위행으로 포함하지 않았던 1629, 1631, 1635년 역관 사행을 문위행의 범 주로 파악하였다. 동시에 이 시기(인조대 전반) 조일 간의 관계에서 무역, 특히 公木 지급문제와 외교 현안 해결이라는 측면과 한중일 삼국의 대외관 계에서 문위행이 필요하게 된 이유 및 활동을 바라보았다.23) 여기에 후속 하여 최근에는 왜학역관 제도 개편과 연계되어 있는 1640, 1651년의 문위 행에 접근하여 조일외교관계를 고찰24)하기도 했다. 윤유숙 또한 에도까지 다녀왔다는 이유로 문위행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 았던 1635년 洪喜男 일행의 성격을 재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막부 측의 재정 원조에 주목하여 19세기 문위행을 확인하는 동시에 간접적으로 막부 측의 외교적 인식을 파악하려 하였다.25) 池內敏 또한 막부가 문위행에 관 심을 보이고 있었던 사례로 외교의례상 막부의 권위를 강조하려 했다든지, 문서를 통해 막부 측에 문위행 관련 보고를 하고 있음을 언급하였다.26) 문위행 관련 연구는 기존에 이루어져 있던 기초 연구의 토대 위에서 현재 다양한 인식과 접근으로 연구가 확대되고 있다. 동일하게 외교 업무를 띠는 사행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에 비해 연구 성과가 저조했는데, 최근의 고무 적인 연구 경향으로 활기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며 앞으로의 연구 확산이 기대된다. 논총ꡕ 41, )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 이상규, 仁祖代 전반 問慰行 연구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5, ) 이상규, 17세기 중반 문위행을 통해 본 대일외교의 내용과 성격-1640ㆍ1651 년 문위행을 중심으로 ꡔ조선시대사학보ꡕ 75, ) 윤유숙, 조선후기 問慰行에 관한 再考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0, ) 池內敏, 譯官使 考, 한일관계사학회 월례발표회,

438 438 지역과 역사 38호 Ⅲ. 일본 측 사신 조선 전기 교린외교 정책은 다원적 교린 을 기조로 하였다. 특히 지역에 다양하게 존재했던 세력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 류큐, 야인 등 대상이 다수였음은 물론이고, 日本國王使 외에도 巨酋, 對馬島人, 受職ㆍ受圖書人 등 다양한 사신이 존재27)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교 린의 대상이 일본으로 일원화 되었으며, 조선으로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대 마도가 단일 주체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 일본 사신을 포괄적으로 고찰할 때에는 대마도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홍성덕은 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논고를 통해 조선 후기 일본 사신 을 전반적으로 살폈는데, 일본국왕사뿐 아니라 별차왜, 연례송사 등의 기 원, 구성원, 임무 등을 세밀히 정리28)하여 기초적 토대 연구를 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마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선후기 한일외교체제와 대마 도의 역할 29)을 고찰한 바 있다. 또한 한문종도 조선 전기 일본사신과 대 마도의 관계를 살피던 연구를 확대하여 최근 조선 전 시기의 대일사행에서 27) 조선 전기 일본 사신에 대한 국내 초기 연구는 이현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대 표 논고로는, 이현종, 朝鮮 初期 向化倭人考 ꡔ歷史敎育ꡕ 4, 1959 ; 朝鮮初 期 倭人接待考 ꡔ史學硏究ꡕ 3, 4, 5, 1959 ; 朝鮮 初期 서울에 온 倭野人에 對하여 ꡔ향토서울ꡕ 10, 1960 등이 있다. 이후 한문종에 의해 조선 전기 대마 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사신이 전반적으로 고찰되었다. 대표 논고로, 한문종, 朝 鮮前期의 對馬島敬差官 ꡔ전북사학ꡕ 15, 1992 ; 朝鮮前期의 受圖書倭人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 1996 ; 조선전기 日本國王使의 朝鮮通交 ꡔ한일관계사 연구ꡕ 21, 2004 ; ꡔ조선전기 향화ㆍ수직 왜인 연구ꡕ, 국학자료원, 2005 ; ꡔ海 東諸國紀ꡕ의 倭人接待規定과 朝日關係 : 三浦에서의 접대규정을 중심으로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4, 2009 ; 조선전기 倭使의 宴享接待와 女樂 ꡔ한일관계 사연구ꡕ 36, 2010 등이 있다. 28) 홍성덕, 17세기 별차왜의 來渡와 對日關係 ꡔ전북사학ꡕ 15, 1992 ; 앞의 박 사학위논문, 1998 ; 朝鮮後期 日本國王使 검토 ꡔ한일관계사연구ꡕ 6, 1996 ; 조선후기 한일외교사행 인식과 정례화 ꡔ일본사상ꡕ 7, ) 홍성덕, 앞의 논문, 2013.

439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39 대마도가 갖는 의의를 정리30)하였다. 이상의 연구들은 일본 사신의 기본 정보를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변화된 외교질서에 입각하여 사신들의 외교적 성격을 주로 분석한 공통점이 있다. 사신의 외교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접대 ㆍ의례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전기 일본 사신의 접대에 관해서는 처음에 교린국 사신의 位次에 대해 접근한 方琪喆의 연구31)가 있었고, 15세기 賓 禮를 살피면서 일본사신의 접빈례를 확인한 이화영의 논고32)가 있었다. 하 지만 두 연구 모두 16세기 중ㆍ후반기 접대례는 살피지 않아 접대의 전반적 인 양상을 확인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체류 기간 및 인원, 선박 수 등 전반 적인 접대 규정과 연향에서 女樂의 역할 등을 살핀 한문종의 연구33)가 나 와 조선 전기의 일본 사신 접대가 훨씬 선명해 졌다.34) 조선 후기 일본사신 접대 부분은 홍성덕,35) 민덕기,36) 이현종37)이 논고 에서 일부분을 할애하여 규정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이 외에 일본 사신 에 대한 접대와 의례를 통해 외교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 것으로 심민정의 논고들38)이 있다. 일본사신에 대한 접대 규정 변화 과정을 살피면서 조선 시대 대외관계 변화를 접목시켜 외교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는데, 접대 의례의 양상을 그림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박화진도 최근 막말ㆍ명치초기 초량왜관 의례양상에 대한 30) 한문종, 앞의 논문, ) 方琪喆, 조선초기 교린국 사신의 위차-조ㆍ일관계를 중심으로- ꡔ사학연구ꡕ 79, ) 이화영, 15세기 조선과 교린국의 빈례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 한문종, 앞의 논문, 2009 ; 앞의 논문, ) 심민정, 앞의 박사학위논문, 2015, 6쪽. 35) 홍성덕, 앞의 박사학위논문, ) 민덕기, 앞의 책, ) 이현종, 己酉約條成立始末과 歲遣船數 ꡔ港都釜山ꡕ 4, ) 심민정, 조선후기 日本使臣 접대절차와 양상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0, 2015 ; 앞의 박사학위논문, 2015 ; 조선 후기 일본사신 접대를 통해 본 朝日관계-差 倭제도와 접대규정 변화를 중심으로- ꡔ역사와경계ꡕ 96, 2015b.

440 440 지역과 역사 38호 고찰 39)을 통해 조선 측 행렬이 아닌 일본사신의 행렬을 면밀히 확인한 바 있다. 접대 관련 연구에서 활용된 대표적인 자료는 동래부사접왜사도 이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 때문에 문화적인 부분으로 접근하여 동 래부사접왜사도 그림 자체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졌는데, 신남민, 김동철, 이성훈 등의 연구40)가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림의 제작시기는 1813 년 이후로, 제작자는 정선과 변박의 화풍을 가진 작자미상의 동래화원으로 정리되었다. 이 외에 동래부사접왜사도를 활용해 동래지역 악공, 기녀 등의 공연활동을 연구한 오진호41)와 조경아,42) 관원의 복식을 연구한 劉頌玉ㆍ 朴錦珠의 연구,43) 접대 음식을 고찰한 심민정의 연구44) 등도 있다. 또한 조 선 측의 접대가 아닌, 일본 사신들이 준비하였던 일본 음식에 대해서 정리한 정성일의 논고45)도 최근 나와서 양국 음식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한편 일본 사신들에게 조선 측이 지급하였던 回賜品, 開市를 통해 전개되 었던 공무역 등 교역의 측면에서 일본 사신과의 접촉을 살피는 시각도 존재 했다. 1990~2000년대까지 주로 정성일46)과 김동철47) 등에 의해 이루어 39) 박화진, 막말ㆍ명치초기 초량왜관 의례양상에 대한 고찰 ꡔ동북아문화연구ꡕ 43, ) 신남민, 동래부사접왜사도병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김동철, 동래부사접왜사도의 기초적 연구 ꡔ역사와세계ꡕ 37, 이성훈, 국 립중앙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의 두 점의 동래부사접왜사도 연구 ꡔ동래 부사 忠과 信의 목민관ꡕ, 부산박물관, ) 오진호, 조선후기 동래부의 악공, 기생의 공연활동 연구-18~19세기 사료를 중심으로 ꡔ한국음악문화연구ꡕ 1, ) 조경아, 조선시대 일본 사신의 춤 향유 ꡔ무용역사기록학ꡕ 37, ) 劉頌玉ㆍ朴錦珠, 동래부사접왜사도병에 나타난 지방관아의 복식 ꡔ인문과학ꡕ 22, ) 심민정, 18세기 왜관에서의 倭使 접대음식 준비와 양상 ꡔ역사와경계ꡕ 66, ) 정성일, 倭館 開市 때 제공된 日本料理 기록의 비교(1705년, 1864년) ꡔ한일 관계사연구ꡕ 52, ) 정성일, 19세기 초 조선산 栽培蔘의 대일수출교섭-禮單蔘을 중심으로- ꡔ국사 관논총ꡕ 43, 1993 ; 1861~62년 대마번의 밀무역 처리과정 ꡔ한일관계사연

441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41 진 대일교역 관련 연구들은 교역 물품뿐만 아니라 조선 측 상인, 사신들과 대마도인들의 접촉이라는 측면에서 조일교류 뿐 아니라 부산과 대마도의 교 류까지 복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였다. 근년에는 ꡔ倭人求請 謄錄ꡕ 번역 작업으로 인해 다양한 무역 물품을 소재로 한 연구들이 진행되 고 있다. 현재까지 매,48) 말,49) 皮物,50) 倭鏡51) 등이 교역되는 양상이 고 찰되었다. 특히 이 교역 과정에서 차왜나 연례송사 등 일본 사신들이 직ㆍ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신 활동 반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역과 관련한 일련의 연구들은 조일관계나 교류라는 시각에서 접근한 것들이고, 일본사신 자체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 이 남는다. 게다가 무역 외에 앞서 제시한 일본 사신 관련 연구들은 조선 후 기 일본 사신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일본사신 이라는 단일 소재로 묶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본 사신은 크게 외교적 성격이 강하며 비정기적으로 내도한 差倭와 교역의 목적이 강하며 정기적으로 파견 되었던 年例送使로 구분된다. 이중 차왜에 관해서는 국내 연구 성과가 일부 축적되고 있다. 차왜에 대한 기초 연구는 홍성덕의 十七世紀 別差倭의 渡來와 朝日關係 52) 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서 홍성덕은 조선후기 별차왜의 기원, 명칭, 성 립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는데, 차왜 중 조선에서 외교사절로 인정받 47) 48) 49) 50) 51) 52) 구ꡕ 2, 1994 ;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산고도중의 규모와 활동(1844~ 1849) ꡔ한일관계사연구ꡕ 8, 1998 ; 조선의 銅錢과 일본의 銀貨-화폐의 유통 을 통해 본 15~17세기 한일관계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0, 2004 ; 19세기 대일 공무역 결제수단의 변경과 금납화-1841년의 사례를 중심으로 ꡔ한일관계사연 구ꡕ 45, 김동철, 19세기 牛皮貿易과 東萊商人 ꡔ한국문화연구ꡕ 6, 1993 ; 조선후기 왜관 開市貿易과 被執蔘 ꡔ한국민족문화ꡕ 13, 1999 ; 앞의 논문, 김경미, 17~18세기 對日 외교ㆍ교역과 매 ꡔ역사와세계ꡕ 34, 이승민, 조선후기 對馬島와의 매 교역과 그 의미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5, 이승민, 조선후기 對馬島와의 말 교역과 그 의미 ꡔ사학연구ꡕ 107, 하여주, 조선후기 대일관계 속의 皮物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9, 권주영, 조선시대 倭鏡의 유입과 배경 ꡔ미술사학연구ꡕ 283ㆍ284, 홍성덕, 十七世紀 別差倭의 渡來와 朝日關係 ꡔ전북사학ꡕ 15, 1992.

442 442 지역과 역사 38호 게 된 임시 외교사절을 별차왜 로 규정하였으며, 1635년 12월 柳川調興 사 건의 종결로 도래한 平智友를 최초의 별차왜로 보았다. 그리고 1636년 8월 통신사호행을 위해 건너온 平成春ㆍ藤智繩 일행은 최초의 접위관 접대를 받은 별차왜라 하였다.53) 한편 심민정 또한 홍성덕과 마찬가지로 차왜 중 조선에서 인정을 받아 연례 등의 공식 접대를 받았던 정식외교사절을 별차 왜로 정의하였으나 홍성덕과 달리 최초의 접위관 접대를 받은 별차왜는 1636년 2월 통신사청래차왜로 도래한 橘成供부터 보았다.54) 또한 기유약 조 전후-겸대제 실시 이후-초량왜관 이전 후 각 시기별로 차왜의 명칭과 범 주가 달라진다고 하였다.55) 차왜는 종류만 해도 27종이며, 조선 후기에 파견된 別差倭는 총 696회나 도래하였다.56) 이 때문에 개별 차왜들을 모두 고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 다. 그래서 일부 차왜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훈은 대마도 표 류민 송환을 살피는 과정에서 漂差倭 의 형성과 접대에 대해 살폈으며,57) 이혜진은 裁判差倭를,58) 윤유숙은 비정례 차왜를 고찰59)하였다. 또 박화 진은 일본에서의 통신사 접대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통신사행 관련 차왜 에 대해 언급60)하기도 했다. 이 외에 심민정은 일본사신 접대라는 측면의 기존 연구 연장선상에서 차왜에 대한 접대를 살폈다.61) 53) 홍성덕, 위의 논문, 103~112쪽. 54) 심민정, 앞의 논문, 2015b, 282~285쪽. 55) 심민정, 두모포왜관시기 差倭 接待例 변화와 정비-ꡔ接倭式例ꡕ 분석을 중심으 로 ꡔ동북아문화연구ꡕ 46, 2016, 21~22쪽. 56) 홍성덕, 앞의 논문, ) 이훈, 朝鮮後期 대마도의 漂流民送還과 對日관계 ꡔ국사관논총ꡕ 26, ) 이혜진, 17세기 후반 朝日外交에서의 裁判差倭 성립과 조선의 외교적 대응 ꡔ한일관계사연구ꡕ 8, ) 윤유숙, 근세 朝日통교와 非定例 差倭의 조선도해 ꡔ사총ꡕ 70, ) 박화진ㆍ김병두, ꡔ에도 공간 속의 통신사ꡕ, 한울, ) 심민정, 앞의 논문, 2015b ; 앞의 논문, 2016.

443 조선후기朝ㆍ日使臣연구현황과전망 443 맺음말 이상조선후기일본과조선사이에왕래하며국가의대외정책을몸소활동으로보여준양국의사신에대한연구현황을정리해보았다. 이에통신사행을제외한양국사신관련연구의전반적인양상을종합하고향후전망을제시하는것으로맺음말을대신하도록하겠다. 첫째, 조선후기양국사신에대한국내연구는전체적으로홍성덕에의해그기초토대연구가이루어졌다. 문위행의기원, 구성, 임무는물론이고, 일본사신인별차왜또한기원, 구성, 임무, 접대에이르기까지정리한공로가매우크다. 하지만한편으로는이상의논고들이주로국내사료, 규정집들을중심으로정리된탓에일본측자료, 규정이아닌실제사례를접했을때그차이에서오는연구의충돌이있었던것도사실이다. 때문에양국의다양한자료활용, 사례집이나그림자료등을복합적으로고려하여연구확산의동기를부여할수있는분위기가조성되어야한다. 두번째, 일본사신중차왜에대한연구는일정부분개별연구가진행되었지만, 연례송사는단독주제로연구된적이없다. 즉개시등의조일무역이나부산과대마도의교류를연구하는과정에서가담자내지는동조자로연구된경향이크다는점이다. 물론연례송사가무역의측면에더강하게작용하기는했지만외교사행임은틀림없다. 특히접대제도정비라는측면에서볼때차왜는연례송사보다후에형성된사행이므로연례송사의접대규정을점차차왜에맞게적용시켜나가고있다. 때문에연례송사의단독연구, 연례송사의외교적성격에대한연구가보충되어야할필요성이있다. 마지막으로양국사신에대한초기연구이후정체기를거친후최근들어재검토, 재고등관련연구들이활기를띠기시작했다는점이다. 사행의개념이나성격등기초적인부분의재검토뿐만아니라연구미분야에대한검토까지다양하게연구가확대ㆍ재생산되고있는점은상당히고무적이다. 이런경향이연구공백분야로확산된다면앞으로통신사에편중된연

444 444 지역과 역사 38호 구의 불균형을 해소시켜 조일 양국의 입장이 균등하게 반영된 교린체제 개 념 및 성격 정립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참고문헌 권주영, 조선시대 倭鏡의 유입과 배경 ꡔ미술사학연구ꡕ 283ㆍ284, 김경미, 17~18세기 對日 외교ㆍ교역과 매 ꡔ역사와세계ꡕ 34, 김동철, 19세기 牛皮貿易과 東萊商人 ꡔ한국문화연구ꡕ 6,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開市貿易과 被執蔘 ꡔ한국민족문화ꡕ 13, 김동철, 동래부사접왜사도의 기초적 연구 ꡔ역사와세계ꡕ 37,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 상인의 구성과 활동 ꡔ역사와 세계ꡕ 46, 김두헌, 조선후기 통신사행 및 문위행 참여 역관의 가계와 혼인 ꡔ동북아역사논총ꡕ 41, 劉頌玉ㆍ朴錦珠, 동래부사접왜사도병에 나타난 지방관아의 복식 ꡔ인문과학ꡕ 22, 민덕기, ꡔ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韓ㆍ日관계ꡕ, 경인문화사, 박화진, 막말ㆍ명치초기 초량왜관 의례양상에 대한 고찰 ꡔ동북아문화연구ꡕ 43, 박화진ㆍ김병두, ꡔ에도 공간 속의 통신사ꡕ, 한울, 方琪喆, 조선초기 교린국 사신의 위차-조ㆍ일관계를 중심으로- ꡔ사학연구ꡕ 79, 三宅英利 저, 손승철 옮김, ꡔ근세 한일관계 연구ꡕ, 이론과 실천, 손승철, ꡔ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ꡕ, 지성의 샘, 손승철, 조선시대 통신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ꡔ한일관계사연구ꡕ 16, 신남민, 동래부사접왜사도병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심민정, 18세기 왜관에서의 倭使 접대음식 준비와 양상 ꡔ역사와경계ꡕ 66, 심민정, 조선후기 日本使臣 접대절차와 양상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0, 2015a. 심민정, 조선후기 일본사신 왕래와 접대양상, 부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심민정, 조선 후기 일본사신 접대를 통해 본 朝日관계-差倭제도와 접대규정 변화를 중심으로- ꡔ역사와경계ꡕ 96, 2015b. 심민정, 두모포왜관시기 差倭 接待例 변화와 정비-ꡔ接倭式例ꡕ 분석을 중심으로 ꡔ동북아문화연구ꡕ 46, 2016.

445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45 岩方久彦, 통신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 멸시 와 선린 사이에서- ꡔ해방70년 공동학술심포지엄 한일역사연구의 쟁점 발표자료집ꡕ, 오진호, 조선후기 동래부의 악공, 기생의 공연활동 연구-18~19세기 사료를 중심으 로 ꡔ한국음악문화연구ꡕ 1, 유채연, 조선후기 問慰行 명칭과 성립과정에 대한 재고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2, 윤유숙, 근세 朝日통교와 非定例 差倭의 조선도해 ꡔ사총ꡕ 70, 윤유숙, 조선후기 問慰行에 관한 再考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0,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이상규, 仁祖代 전반 問慰行 연구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5, 이상규, 17세기 중반 문위행을 통해 본 대일외교의 내용과 성격-1640ㆍ1651년 문 위행을 중심으로 ꡔ조선시대사학보ꡕ 75, 이성훈,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의 두 점의 동래부사접왜사도 연구 ꡔ동래부사 忠과 信의 목민관ꡕ, 부산박물관, 이승민, 조선후기 對馬島와의 말 교역과 그 의미 ꡔ사학연구ꡕ 107, 이승민, 조선후기 對馬島와의 매 교역과 그 의미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5, 이원순, 조선후기(에도시대) 한ㆍ일교류의 위상 ꡔ조선시대사논총ꡕ, 느티나무, 이현종, 朝鮮 初期 向化倭人考 ꡔ歷史敎育ꡕ 4, 이현종, 朝鮮初期 倭人接待考 ꡔ史學硏究ꡕ 3, 4, 5, 이현종, 朝鮮 初期 서울에 온 倭野人에 對하여 ꡔ향토서울ꡕ 10, 이현종, 己酉約條成立始末과 歲遣船數 ꡔ港都釜山ꡕ 4, 이혜진, 17세기 후반 朝日外交에서의 裁判差倭 성립과 조선의 외교적 대응 ꡔ한일 관계사연구ꡕ 8, 이화영, 15세기 조선과 교린국의 빈례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이 훈, 朝鮮後期 대마도의 漂流民送還과 對日관계 ꡔ국사관논총ꡕ 26, 장순순, 통신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ꡔ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ꡕ, 한일역사공동연 구위원회, 田代和生, 渡海譯官使の密貿易-對馬藩 潛商議論の背景- ꡔ朝鮮學報ꡕ 150, 정다함, 事大 와 交隣 과 小中華 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ꡔ韓國史學報ꡕ 42, 정성일, 19세기 초 조선산 栽培蔘의 대일수출교섭-禮單蔘을 중심으로- ꡔ국사관논 총ꡕ 43, 정성일, 1861~62년 대마번의 밀무역 처리과정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 1994.

446 446 지역과 역사 38호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산고도중의 규모와 활동(1844~1849) ꡔ한일 관계사연구ꡕ 8, 정성일, 조선의 銅錢과 일본의 銀貨-화폐의 유통을 통해 본 15~17세기 한일관계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0, 정성일, 19세기 대일공무역 결제수단의 변경과 금납화-1841년의 사례를 중심으로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5, 정성일, 倭館 開市 때 제공된 日本料理 기록의 비교(1705년, 1864년) ꡔ한일관계 사연구ꡕ 52, 조경아, 조선시대 일본 사신의 춤 향유 ꡔ무용역사기록학ꡕ 37, 池內敏, 譯官使 考, 한일관계사학회 월례발표회, 하여주, 조선후기 대일관계 속의 皮物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9, 하우봉, 조선후기 한일관계에 대한 재검토-사절 왕래를 중심으로, ꡔ제26회 동양학 술회의 강연초ꡕ,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한문종, 朝鮮前期의 對馬島敬差官 ꡔ전북사학ꡕ 15, 한문종, 朝鮮前期의 受圖書倭人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 한문종, 조선전기 日本國王使의 朝鮮通交 ꡔ한일관계사연구ꡕ 21, 한문종, ꡔ조선전기 향화ㆍ수직 왜인 연구ꡕ, 국학자료원, 한문종, ꡔ海東諸國紀ꡕ의 倭人接待規定과 朝日關係 : 三浦에서의 접대규정을 중심 으로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4, 한문종, 조선전기 倭使의 宴享接待와 女樂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6, 한문종, 조선시대 대일사행과 對馬島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1, 한태문, 朝鮮後期 通信使 使行文學의 特徵과 文學史的 意義 ꡔ동양한문학연구ꡕ 10, 한태문, 통신사 사행문학 연구의 회고와 전망 ꡔ국제어문ꡕ 27, 홍성덕, 조선후기 문위행에 대하여 ꡔ한국학보ꡕ 59, 홍성덕, 17세기 별차왜의 來渡와 對日關係 ꡔ전북사학ꡕ 15, 홍성덕, 朝鮮後期 日本國王使 검토 ꡔ한일관계사연구ꡕ 6, 홍성덕, 17세기 조ㆍ일외교사행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홍성덕, 조선후기 대일외교사절 문위행의 도항인원 분석 ꡔ한일관계사연구ꡕ 11, 홍성덕, 조선후기 대일외교사절 문위행 연구 ꡔ국사관논총ꡕ 93, 홍성덕, 조선후기 한일외교사행 인식과 정례화 ꡔ일본사상ꡕ 7, 홍성덕, 조선후기 한일외교체제와 대마도의 역할 ꡔ동북아역사논총ꡕ 41, 2013.

447 조선후기 朝ㆍ日使臣 연구 현황과 전망 447 仲尾宏, 朝鮮渡海使と對馬藩 ꡔ爪生ꡕ 17,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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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449 ꡔ지역과 역사ꡕ 38, , 449~462쪽 조선시대 서평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장동표 지음, ꡔ조선시대 영남 재지사족 연구ꡕ, 태학사, )김 훈 식* Ⅰ. 저자의 연구 과정 장동표 교수는 초기에는 조선후기 지방재정 문제를 주로 연구하였으나 지금은 조선시기 향촌사회사 연구 및 韓ㆍ中 양국의 향촌사회사 비교 연구 에 관심을 두고 있다. 초기의 지방재정 문제에 관한 연구 성과는 ꡔ朝鮮後期 地方財政硏究ꡕ(國學資料院, 1999)라는 저서로 출판되었다. 그 이후 장 교 수의 관심이 향촌사회사로 넘어간 연결고리로는 19세기 말 咸安地方 財政 運營에서의 鄕會와 逋欠 (ꡔ국사관논총ꡕ 68, 1996)이라는 글이 눈에 띈다. 19세기 함안의 재정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함안 향회의 기능을 주목한 글이다. 같은 해에 19세기말 咸安鄕會의 기능과 성격 (ꡔ지역과 역사ꡕ 2, 1996)이라는 글도 함께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장 교수는 향촌사회사에 대 해 얼마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장 교수가 향촌사회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본격적인 계기는 아마 1994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5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改稱)의 박 병련 교수, 정순우 교수 등이 주관한 영남우도 지역의 고문서 조사가 아닐 까 싶다. 이 조사는 강좌나 기호 지역과는 다른 특색을 나타내는 영남 江右, *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교수(histhoon@inje.ac.kr).

450 450 지역과 역사 38호 江岸 지역 사족들에 관한 기초 조사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이 지역에 분포한 사족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들이 지역의 지배적인 가문으 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살피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성과는 박ㆍ정 교수 이외에 강대민, 손병욱, 장동표, 조강희 교수 등을 저자로 하는 ꡔ남명학파 와 영남우도의 사림ꡕ(예문서원, 2004)으로 출판되었다. 장 교수는 이 책에 고성 지역 재지사족의 형성과 발전, 조선 중기 청도 지역 향촌지배구조 의 성립과 변동, 함안 지역 향촌지배체제와 재지사족층 등 3편의 글을 실었다. 이 글들은 그 이전에 이미 학술지에 개별 논문으로도 실렸다 년에는 청도, 1999년에는 함안, 2000년에는 고성 지역의 재지사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장 교수가 밀양 지역의 재지 사족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는 그 가 밀양대학교(2006년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로 통합)에 재직하면서 마련 되었을 것이다. 지방대학에 근무하는 한국사 연구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근 무하는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장 교수 역시 그런 관심을 가졌 을 것이고, 그 관심은 이전의 재지사족에 대한 연구와 아주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전후 밀양 재지사족의 동향 (2005)을 시작으로 해서 예림서원 건립 중수와 김종직 추숭 활동 (2007), 17세기 영남지역 재지 사족의 동향과 향촌사회 밀양 재지사족 李而楨을 중심으로 (2008), 17세 기 초반 밀양 재지사족 孫起陽의 향촌활동 (2009), 17세기 밀양 재지사 족 朴壽春의 향촌활동과 도통인식 (2012) 등의 논문이 그렇게 집필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조선시기 칠원현의 연혁변천과 향촌사회 (2006), 조선 후기 창녕지역의 향안 중수와 재지사족 (2011) 등의 글도 함께 집필되었다. ꡔ조선시대 영남 재지사족 연구ꡕ는 위의 논문들을 그 제목과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묶은 책이다. 본서의 제1부는 영남의 남부 지역에 위치 한 함안, 칠원, 고성, 창녕, 청도 등 다섯 개 지역의 재지사족의 형성과 발전 에 대하여 살피고 있다. 칠원현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각 지역의 유력 사족가문의 가계를 분석하였다. 2부에서는 밀양지역 한 곳을 집중해서 조선 중기의 향촌사회 변화와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451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451 대표적 재지사족이라 할 수 있는 손기양, 박수춘, 이이정의 사례를 심층적 으로 살펴보면서 재지사족의 존재양상을 살폈다. 조선후기 밀양 表忠祠의 연혁과 祠宇 이건 분쟁 (2000)은 향촌사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밀 양의 역사를 살피는 글이기에 함께 실었다. 보론으로 조선시기 在地士族과 명청대 紳士에 대한 비교 고찰 (2003)이라는 글을 실었다. 향촌지배층으로 재지사족과 紳士의 존재와 그 성격을 상호 비교하면서 전근대 한중 양국의 향촌사회사의 공통성과 차별성을 간략하게나마 전망하고 있다. 장 교수의 저서에 대해서는 이미 정진영 교수가 조선시대 영남 재지사 족의 연구 성과와 새로운 전망 (ꡔ지방사와 지방문화 18(2), 2015)이라는 서평을 썼다. 정 교수는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연구를 대표하는 연구자이니 그가 쓴 서평은 필자의 서평보다 훨씬 더 깊이가 있다. 그리고 그 서평에는 장 교수 저서의 목차가 전부 소개되어 있으니 여기서 다시 소개하지는 않는 다. Ⅱ. 재지사족지배체제 에 대한 이해 정 교수의 서평과는 다른 내용을 써야한다는 부담에 저자의 책 내용을 집 필 순서에 따라 정리해보았다. 나름대로의 추측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 다면 다행이겠다. 실린 글들이 발표된 시기를 일일이 나열한 까닭은 저자의 관심이 어떻게 흘러 이 책으로 모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저자의 연구가 향촌사회사 연구에서 차지하는 연구 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해서이다. 이미 여러 연구사 정리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한국사학계에서 향촌사회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80년대이다. 1990년대에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향촌사회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인식의 틀이 확립되었다. 그 틀 가운데 하나가 이 책에 서도 사용되는 재지사족 지배체제 라는 개념이다. 재지사족 지배체제 의 성 립과 내용, 그리고 그 해체에 대한 설명은 이미 1990년대에 그 기본적인 내

452 452 지역과역사 38 호 용이정립되었으며, 현재까지도크게바뀌지않았다. 그이후향촌사회사연구는새로운내용을덧붙이기보다는구체적인지역사례를검토하는작업이대부분이다. 저자의연구역시그이전까지의향촌사회사연구에서주목하지않았던지역, 즉영남남중부지역의사례를살폈다는점에가장큰의미를부여할수있을것이다. 따라서저자의연구내용을구체적으로살피기전에그가이해하고있는기왕의향촌사회사연구성과를간단하게소개할필요가있다. 그가지역사례연구를통해도출한일반적인결론이기왕의연구성과를크게벗어나지는않기때문이다. 이하의글은이책의서장 영남재지사족연구의방향과내용 에서그대로옮겨왔다. 재지사족은고려말향촌에서상경종사하였다가조선초기이래주로사림파세력들이낙향하여재지적기반을확보하면서성장한존재이다. 이들은향촌사회에서주로중소지주로서의경제적기반과사족으로서의신분적배경을가졌다. 15세기후반이후점차향촌사회에서향리들을배척하고, 대체로 16세기중후반경부터그들중심의향촌지배기구들을설립해나간다. 16세기후반 17세기에들어서면서점차세력화를통하여이들중심의지배체제를만들어나가게된것이다. 이시기부터시작하여조선후기에이르기까지향촌사회는재지사족중심의향촌지배질서가확립된 재지사족지배체제 였다고할수있다. 향촌에서재지사족중심의지배질서가확립된것은조선중기였다. 이들재지사족세력은사화가끝나가는시점의 16세기중반이후사람파세력이중앙정치권력을장악해나가는것과맥락을같이하면서향촌사회지배질서의중심세력으로자리잡아가기시작하였다. 재지사족계층은임진왜란과병자호란을경과하면서자신들이중심이된사족지배체제를더욱본격적으로굳혀나가고있었다. 영남의향촌재지사족은다양한매개에의하여이들중심의향촌지배질서를구축하고있었다. 이들은적어도 17세기단계에서는꾸준하게향안을작성하였고향회를통해결속을다졌다. 향사당에서향사례와향음주례를

453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453 실시하였으며, 이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서 누정을 짓고,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을 위해 유향소와 사직단을 건립하였으며, 유교이념과 배치되는 음사의 배척과 관련하여 성황단 치폐를 논의하였다. 재지사족은 사승관계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학맥을 형성하게 된 다. 다른 지역 출신의 사족들은 기존 사족들과 학맥과 혼맥 등의 유대관계 를 통해 향안에 등재되면서 같은 재지사족으로 동질화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향촌사회를 운영해 온 주도세력의 재편도 일정하게 이루어져 나갔 다. 재지사족의 임란 의병활동 경력은 17세기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재지사 족으로서 향촌 내 지위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였다. 저자의 연구 역시 이상과 같은 향촌사회사 이해의 틀을 바꿀 수 있는 그 런 내용을 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연구된 개별 사례를 일 반화한 결론도 위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영남 남중부 지역의 고을 사 례를 통해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미 정 교수 의 서평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창녕 향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연구사적 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 교수의 평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 다. 저자는 특정 시기 창녕향안에서 급증하는 입록자들 대부분이 당해 향안의 작 성 시기에 생존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중수 당시 향원들 의 父/祖였다. 이전 시기의 향안에 입록되지 못한 인물들이 사후에 추록된 셈이 었다. 따라서 향안 입록 인물의 급증 현상이 반드시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직결 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거둔 의미 있는 큰 성과의 하나이다. 향촌사회사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는 향안의 내용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저자의 연구가 기왕의 연구 성과를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다음과 같 은 두 가지 점은 특별히 주목해도 좋을 것 같다. 하나는 밀양지역의 재지사 족 개인에 대한 분석이며, 또 하나는 이 영남 남중부 지역의 재지사족지배

454 454 지역과역사 38 호 체제와의병활동과의연관성이다. 이두가지내용을중심으로서평의책임을감당하고자한다. Ⅲ. 재지사족개인연구와가문연구 최근의향촌사회사연구는 재지사족지배체제 의성립, 내용, 변화에관한고을단위의사례연구가대부분이다. 연구자들은개별사례연구를통해향촌사회사이해의새로운틀을모색하지만만족할만한성과를거두지는못하고있다. 저자의작업도이러한고을단위사례연구의범주에속한다. 하지만밀양이라는한지역에대한지속적인관심은기왕의연구와는다른성과를얻었다. 향촌사회사의관점에서이루어진개인연구가그것이다. 저자자신의말을통해밀양지역재지사족개인연구의의의와그결과를들어보자. 제2부의 3장부터 5장까지는밀양의대표적인사족이라할수있는손기양, 박수춘, 이이정 3인을중심으로영남남부재지사족의존재양태를분석하였다. 사실그동안재지사족세력이향촌사회에서자리잡는과정과이들이주도적으로참여한향촌지배기구등에대한분석은많이이루어졌다. 그러나향내에서재지사족들이어떻게존재하였는지에대한개별적인연구는아직미흡한편이다. 개별인물의향촌활동에대한미시적분석은조선중기향촌사회사를보다밀도있게그려내는작업의하나가되며, 당시향촌지식인의성격을밝히는데일정한의미를지닌다. 필자가분석한이들재지사족들의공통된특징은의병활동, 전쟁후향촌사회복구의주도, 정구를중심으로한사승연원관계, 향례의정립노력, 향약시행노력, 향회활동등을적극적으로전개하였다는점이다.(29 쪽 ) 기왕의향촌사회사연구에서재지사족은집단적인존재로취급되었다. 한고을의재지사족전체혹은한가문단위의설명이이루어졌을뿐재지사족개인을중심으로향촌사회사를연구한성과는없었다. 한고을에재지

455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455 사족 지배체제가 성립하고 변화할 때 그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 들 개별 인물의 활동을 통해 재지사족 지배체제의 내용을 살핀다면 이제까 지의 연구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세밀한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점 에서 밀양 지역 사족 개인에 대한 연구는 향촌사회사 연구의 새로운 분야를 모색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16,17세기 각 고을의 재지사족 지배체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 들은 그 이후 문중 형성의 구심점이 되는 派祖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파조 는 아니라 해도 문중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顯祖임에는 틀림없다. 따라 서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유력 가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인물들에 대 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밀양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그런 인물들은 있었 고, 밀양에도 앞서 든 세 명 이외에도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예컨대 청도의 朴河淡이나 金大有, 밀양의 申季誠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이들을 재지사족 지배체제의 성립과 발전이라는 시각에서 살필 수 있다면 향촌사회사 연구의 성과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그런데 한 가문의 파조 혹은 현조에 대한 기 왕의 접근방법에는 아주 큰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저자의 연구 역시 그 문 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조선시대 친족제도의 변화와 관련된 문제이다. 조선시대 친족제도의 변화는 이미 상식화된 사실이다. 앞서 든 ꡔ남명학 파와 영남우도의 사림ꡕ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6세기의 경우에도 지역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문중은 형성되기 어려웠고 또한 부계친 중심의 문중 의식도 희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는 혈연적 공동체를 이루는 이성친 집단 이 지방지배세력의 실체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6세기 후반은 문중 형성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데, 이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조선 후기 문중 형성의 구심점이 되는 파조 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 다.(16~17쪽) 위의 글에서 지적하듯이, 조선전기의 각 고을을 지배하는 재지사족은 이 성친 집단 이었다. 이 이성친 집단 을 族黨이라고 부르는 연구자도 있다. 고 을의 재지사족이 동성친 집단, 즉 문중으로 결집하게 된 시기는 각 지역마

456 456 지역과 역사 38호 다 서로 달랐다. 그러나 대체로 17세기를 과도기로 해서 18세기 이후에는 문중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시기에 재지세력을 포함한 지배층 전체의 혈연적 결합이 족 당에서 문중으로 바뀐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제도사 연구 이외의 연구 분야에서는 그 상식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의 내용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7세기 초반 밀양 재지사족 손기양의 향촌활동 이라는 글에 <密陽孫氏 竹 院派 孫起陽家 世系圖>(표 3-1, 300쪽)라는 표가 있다. 그 표는 손기양의 9대조부터 조부까지는 單系로 표시하고 父親代부터는 형제를 모두 포함한 도표이다. 손기양의 후대는 그의 曾孫代까지 그렸다. 그리고 그 인물들 가 운데서 향안에 입록된 인물들을 표시하여 밀양손씨 가문이 밀양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저자가 의도한 바처럼 이 표를 통해 밀양손씨 죽원파 문중의 위세를 읽어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표를 통해 손 기양의 족적 기반을 알 수는 없다. 손기양은 후대에 죽원파, 혹은 聱漢公派라고 불리는 문중의 파조이다. 따 라서 오한공파는 손기양 사후 몇 대를 지나서 형성된 동성친 집단 으로, 손 기양 당시에는 아애 존재하지 않았다. 오한공파라는 문중을 이해하기 위해 서는 손기양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17세기 초반 손기양의 활동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한공파라는 문중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손기 양이 밀양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배경은 다양하겠지만 그의 족적 기반 역 시 그 가운데 하나였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족적 기반의 구체적 모습 은 족당일까, 문중일까? 鄕案에 入錄되는 조건이 三鄕이었다는 사실만 떠 올려도 그 대답은 명확하다. 손기양의 外祖와 妻父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다면 손기양의 족적 기반은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손기양의 족적 기반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그림은 표 3-1과 같은 세계도가 아니라 八祖圖와 같 은 형태의 도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사위나 孫壻를 통해 맺어 진 혈연적 유대 역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혈연적 유대는 外派圖라는 이름의 도표로 그려진다.

457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457 세계도만으로 한 인물의 족적 기반을 설명하는 방식은 손기양 한 사람에 대한 설명에만 그치지 않는다. 박수춘과 이이정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이 다. 나아가 개별 인물에 대한 설명에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 문의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함안의 함안조씨 가계도>(표 1-7, 63쪽) 를 비롯해서 이 책에 실린 모든 가계도는 철저하게 부계친 계보로 그려져 있다. 가계도를 그리지 않은 경우에도 설명은 마찬가지이다. 창녕 지역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창녕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창녕성씨 貞節公派라는 문 중이 있다. 창녕 향안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거성대족이었다. 이 문중 에 대한 설명은 여말선초의 인물인 정절공 成思濟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의 성씨 후손들로 이어진다. 그 결과 마치 이때부터 정절공파라는 문중이 있었 던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정절공파라는 문중이 생긴 것은 조선후기이며, 그 문중이 생기면서 성사제 이후의 부계친 계보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조선 전기에 이 성사제 이후의 부계친 계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 계보에 속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족적 기반에서 과연 부계친 계보가 얼마만큼 중요했을까? 창녕성씨 구성원 개개인 가운데는 부계친보 다 이성친이 더 중요한 인물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또 창녕 향안에 창 녕성씨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해서 처음부터 창녕성씨 문중의 위세가 다른 문중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확실한 사실은 창녕의 재지사족 가운데는 창녕성씨가 많았다는 것뿐이다. 창녕성씨를 하나 의 집단으로 취급할 수 있는 시기는 18세기 이후, 혹은 아무리 빨라도 17세 기 이후의 일이 아닐까? 저자의 시각이 부계친에만 집중되면서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각 고을 단위의 재지사족지배체제를 넘어서는 地域圈 에 대한 이해가 부실해 진다는 점이다. 한 고을에 세거하는 집안일지라도 혼인을 통해 다른 고을의 재지사족들과 결합하게 된다. 재지사족의 婚班은 족적인 기반을 이룰 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기반으로도 작용한다. 저자 역시 곳곳에서 개별 인물의 혼 인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다. 그러나 모두 단편적인 언급에 그칠 뿐 혼인을

458 458 지역과역사 38 호 통한지역권의전망에까지이르지는못한다. 많은인물들에대한검토는사실상어렵겠지만중요한인물들의혼반이나마세밀하게검토한다면혼인을통해형성된재지사족의지역권이보일수도있다. 이책에서다루고있는지역만하더라도밀양ㆍ청도ㆍ창녕과함안ㆍ고성ㆍ칠원지역권으로크게구분할수있지않을까조심스럽게추측해본다. Ⅳ. 재지사족지배체제의변화와의병활동 정교수의서평에서도이책이조선중기를중점적으로다루면서도재지사족지배체제의변화를강조하고있다는사실을주목하였다. 그러나그연구결과의의의에대해서는부정적이었다. 정교수의서평을요약하면다음과같다. 성씨와가문간의부침은끊임없이있었다. 이같은변화는향안의성격변화나향촌사회의질적인변화와는거리가아주먼것이었다. 이를변화라고한다면, 그것은임란후향촌사회지배층내부의부침이라는아주한정된의미로서만쓰여야할것이다. 필자역시정교수의의견에전적으로동의한다. 그러면서여기서다시이문제를거론하는이유는저자가강조하는의병활동에대해좀더논의해보기위해서이다. 저자는각고을의향안에수록된인물들의성관을분석하여그고을의유력가문을밝히고있다. 그런방법으로제시된각고을의임란이후유력가문은공통적으로의병활동에공을많이세운가계라고하였다. 이책에서몇군데서술을그대로옮겨보면다음과같다. 조선후기함안사회를주도하였던가문은특히의병활동의여부와밀접하게관련되었던것으로보인다. 함안의유력한재지사족으로알려진함안조씨,

459 조선시대재지사족연구의현황과과제 459 재령이씨, 순흥안씨, 밀양박씨등의가문은 특히임란당시의병활동으로공을많이세운가계라는공통점이확인된다.(75~76 쪽 ) 대체로 17세기단계의청도지역향촌사회는이전의김ㆍ박ㆍ이씨가문등에의하여주도된것과달리의흥예씨가문을비롯한손ㆍ최ㆍ곽ㆍ원씨가문도주도적가문으로점차부상하였다. 그리고청도의병운동에참여하였던밀양박씨를비롯한김해김씨, 고성이씨, 의흥예씨가문등의사족들이향안에대거등장하였다. 특히의병운동을주도한가문의사족이압도적으로많이등재되어있는데, 이들가문이 17세기후반이후청도향촌사회를사실상주도한가문이었다.(206 쪽 ) 임란을전후한한재지사족의변화를가장극명하게드러내는연구는밀양지역의연구이다. 16세기까지밀양사회를주도한가문은밀양박씨, 밀성손씨, 광주안씨, 여주이씨등이었다. 그러나임진왜란을밀양향촌사회를주도하는가문이변하고있는데, 그배경에는의병활동이있었다고했다. 그리고그사실을일반화하여다음과같은설명도덧붙이고있다. 향안입록의계기와기준도임란을전후로하여일부바뀐것으로보인다. 조선초기이래의경우는문벌과인품중심이었다. 그러나임진왜란을경과하면서입록의동기가획기적으로변화하였다. 무엇보다임란과정의의병활동여부가향안중수과정과입록자명단에서보듯이중요한요인으로등장하게된것을확인할수있다.(228 쪽 ) 위의구절은밀양지역의사례에바탕을둔설명이지만다른지역에까지일반화해도별문제가없어보인다. 저자의책에서이렇게많은부분을직접인용한이유는이내용이저자가가장강조하고싶었던부분이라고생각해서이다. 사실저자가다루고있는지역은임란당시격전지로서의병활동이매우활발하게전개된곳이었다. 따라서이지역의재지사족지배체제와의병활동사이에밀접한연관이있는것은당연하다. 문제는이지역주도가문의성쇠와의병활동의연관성에대한설명이어딘가미흡하다는점이다. 다음과같은두가지의문에대한

460 460 지역과역사 38 호 해답을찾는노력이함께이루어져야더욱설득력있는설명이될수있지않을까싶다. 첫째는의병활동과주도가문의성쇠사이에어떤인과관계가있는가라는물음이다. 이물음은그속에또여러가지물음을포함한다. 의병활동이과연임란이후특정가문의성쇠를결정하는결정적인원인이었을까? 그렇다면임란이전에는지역사회에튼튼한기반이없었으나의병활동을통해그지역의주도가문으로부상한가문이있었는가? 만약있었다면그가문은어떤기반위에서의병활동을할수있었는가? 그가문의구성원한두명이의병에가담하였다는사실만으로그가문이주도가문으로성장할수있었을까? 이러한여러가지의문은임란때의병활동에참여한인물들은임란이전부터유력한가문의구성원들이었을것이라는추측에근거한다. 임란이전부터유력한가문의구성원들이의병활동에대거참여하였고, 임란이후에도그가문은유력한가문으로존재하였던것은아닐까? 의병활동과주도가문의성쇠사이의인과관계에의문을품는또다른이유는의병활동에참여하지않은가문의존재때문이다. 저자의책속에는임란이전에지역의유력한가문이었으나의병활동에참여하지않았던가문도여럿눈에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들은임란이후에도여전히그지역의주도적인가문으로향안에입록이되고있다. 청도지역의김해김씨를예로들면, 그들가운데의병활동과관련이있는인물이없음에도불구하고임란이후가문의성쇠에큰변화가없었다. 거꾸로밀양의광주김씨가문은임란때공을세운집안임에도불구하고밀양의향안에오르지못하고있다. 의병활동이각지역을주도하는가문의변화를초래한유일한원인은아니기때문이다. 저자역시의병활동이유일한원인이라고생각하지는않았을것이다. 그러나이책에서의병활동은유일한원인은아니라고하더라도가장중요한원인인것처럼보인다. 다른요소들에대한설명이거의이루어지지않았기때문이다. ꡔ남명학파와영남우도의사림ꡕ 이라는책에서는이지역향촌사회의변화, 즉주도가문의성쇠를결정짓는중요한요소로서북인의정치적

461 조선시대 재지사족 연구의 현황과 과제 461 부침을 들고 있다. 의병활동이든 북인의 정치적 부침이든 어떤 한 가지 원 인에 의해 주도 가문의 성쇠가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 은 각 지역마다 서로 달랐을 것이다. 각 지역 주도 가문의 성쇠에 영향을 미 치는 여러 원인들을 꼼꼼히 살피는 노력이 있어야만 지역 사례를 연구하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두 번째는 이 책에 서술된 모든 인물들의 의병활동이 사실인가 기억인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사료 비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조선후기에 문중이 성립된 이후 각 문중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 다. 그 가운데는 기억을 만드는 작업까지 포함되었다. 조상의 사후 상당한 시기가 흐른 이후에 편찬한 문집을 비롯한 實紀類 저술, 각 가문의 世譜, 각 고을의 地方誌 등에 실린 내용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이다. 각 문중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드러내어 문중의 지위를 높이려고 할 때 상 투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만약 그 조상이 조선왕조 개창을 전후한 시기의 인물이라면 고려에 충성을 다한 節義人으로 높인다. 흔히 거론하는 두문동72현 이라는 인물들이 그런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기억이다. 또 이 시대의 인물들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정몽주나 길재 등과의 인연을 강조한 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들의 문중이 절의라는 가치를 공유했다는 점을 강 조하기 위해서이다. 절의라는 가치는 이후 생육신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조상의 생존 시기가 절의와 연결시키기에는 조금 늦다면 도학자와의 인연을 강조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조상도 사림파 의 일원이었다는 기억을 만 들어낸다. 그 다음 시기의 조상들을 顯彰하는 가장 일반적인 내용이 의병활 동이다. 그 결과 각 지역에는 의병활동에 참여한 무수한 선비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ꡔ화왕산동고록ꡕ이 다. 저자는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집 자료 등에서 의병활동 참여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문집의 기록이 ꡔ화왕산 동고록ꡕ을 근거로 한 내용일 때 그 확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료 비판의 문제는 의병활동에 관한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의 연구 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지사족 개인에 관한 연구였다. 밀양

462 462 지역과역사 38 호 의재지사족인손기양, 박수춘, 이이정에대한연구를통해밀양의사족지배체제를살피려는시도는높이평가할수있다. 그러나그연구에사용된자료들에대해서얼마만큼의사료비판이이루어졌는지는확인할수없다. 가장기본적인자료인문집의경우모두 19세기와 20세기에그후손들에의해간행되었다. 그책속에는손기양등이직접남긴기록도있지만그못지않게많은후대의기록들이함께포함되어있다. 이들의문집은사실과기억이함께뒤섞인자료이기때문에이둘을구별하는작업이먼저이루어졌어야한다. 이러한사정은비단이세사람에게만해당되는일이아니다. 저자의책속에등장하는수많은사람들에관한기록들이대부분사실과기억이뒤섞인자료들이다. 이둘을구별하는작업이연구의출발점이되어야한다는점은누구나동의할수있을것이다. 향촌사회사연구에그다지식견이없는필자의서평이니부족한점이많을수밖에없을것이다. 저자의연구성과는제대로드러내지못하면서오히려여러가지의문과과제만나열한글이되어버렸다. 사실여기서거론했던문제점들은대부분저자의연구에만해당되는사항이아니다. 어떤분야의조선시대사연구자들도제대로해결하지못한내용들이다. 필자역시그런문제의식만가질뿐구체적인연구속에서문제점을해결할수있는능력은없다. 장교수의저서발간을축하하면서, 그서평을기회로모든연구자들이함께고민해야할문제점을드러내보았을뿐이다. 저자와의개인적인친분을내세워넓은아량을기대한다.

463 휘보 463 휘보 (2015 년 10 월 31 일 ~2016 년 4 월 30 일 ) Ⅰ. 연구소인적현황 1. 임원구성 (2016 년 4월 30일현재 ) 소장 : 이정수 ( 동서대교수 ) 연구실장 : 김현라 ( 부산대강사 ) 기획실장 : 하유식 ( 부산대강사 ) 사무국장 : 김량훈 ( 부산대강사 ) 출판국장 : 김경미 ( 부산대강사 ) 감사 : 남재우 ( 창원대교수 ) 최연주 ( 동의대교수 ) 2. 연구원 (119 명, 2016 년 4 월 30 일현재 ) Ⅱ. 연구소주요활동 1. 연구발표회 * 제90회월례연구발표회 (2015년 11월 6일, 부경역사연구소 ) 고대사연구부 : 변진주조마국의형성과변천 ( 발표 : 안홍좌 / 창원대, 토론 : 백승옥 / 부경대 ) 중세 1 연구부 : 고대성산산성목간과고려목간의형태비교 ( 발표 : 한정훈 / 부산대, 토론 : 양석진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

464 464 지역과역사 38 호 * 제91회월례연구발표회 (2016년 3월 25일, 부경역사연구소 ) 중세 2 연구부 : 구암이정의서적편찬과간행이 16세기도통확립에미친영향 ( 발표 : 우정임 / 경북대영남문화연구원, 토론 : 박상현 / 부산대 ) 근현대연구부 : 당진삼화 2리의농촌새마을운동과그귀결 ( 발표 : 이창섭 / 부산대, 토론 : 성강현 / 동천고 )

465 휘보 465 부경역사연구소편집위원회규정 제1조 ( 목적 ) 이규정은부경역사연구소편집위원회의조직과운영에관한제반사항을결정하는데그목적이있다. 제2조 ( 구성 ) 편집위원회의구성목적과조직은다음과같다. 1) 편집위원회는학회지의심사및편집업무를담당하기위해구성된다. 2) 편집위원회는 10명내외로한다. 3) 편집위원에는편집위원장을둔다. 4) 각편집위원의임기는 2년이며연임할수있다. 5) 편집위원장 : 편집위원회에서호선하여소장이위촉한다. 편집위원회의회의를주재한다. 학회지의편집과간행에관련된제반사항을총괄한다. 6) 편집위원 : 본연구소의각분과에서학문적역량이뛰어나다고인정하여추천한이를연구위원회의심의를거쳐소장이위촉하되, 박사학위를소지하고대학의전임교원이거나이와동등한자격을갖추어야한다. 제3조 ( 활동 ) 편집위원회의심의 의결사항은다음과같다. 1) 본연구소에서간행하는 ꡔ지역과역사ꡕ( 이하 학회지 라약칭 ) 의편집 2) 학회지에게재할논문의기획과심사 1 투고문에대한 1차심사 2 투고문에대한 2차심사를맡을심사위원의위촉 3 2차심사를거친투고문의게재여부확정 3) 학회지에게재할연구동향, 자료소개, 지역인물소개, 서평등의기획과심사 4) 기타필요한사업

466 466 지역과역사 38 호 제4조 ( 회의 ) 편집위원회의회의절차와방식은다음과같다. 1) 연 4회정기적으로개최함을원칙으로한다 ( 필요시수시로개최가가능하다 ). 2) 개회선언, 위원장인사, 전회회의록낭독, 업무보고 ( 논문신청상황, 편집기획및기타연구회활동상황 ), 토의사항, 폐회선언순으로회의를진행한다. 3) 편집위원회의회의록을작성하여보관한다. 제5조 ( 의결 ) 편집위원회는편집위원이과반수이상참석할시성립하고, 참석인원의과반수이상으로의결한다. 유, 무선통신수단을이용한회의도같은효력을발휘한다. 제 6 조 ( 기타 ) 본규정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관례에따른다. 제7조 ( 부칙 ) 이규정은 2016년 4월 1일부터시행된다. 제정 : 1995년 7월 1일제1차개정 : 1999년 2월 15일제2차개정 : 2002년 4월 1일제3차개정 : 2002년 12월 1일제4차개정 : 2005년 12월 1일제5차개정 : 2006년 1월 1일제6차개정 : 2011년 4월 1일제7차개정 : 2012년 4월 1일제8차개정 : 2016년 4월 1일

467 휘보 467 ꡔ 지역과역사 ꡕ 간행및심사규정 제1조 ( 목적 ) 이규정은부경역사연구소에서발간하는 ꡔ지역과역사ꡕ( 이하 학회지 라약칭 ) 의간행및심사에관한제반사항을결정하는데그목적이있다. 제2조 ( 간기및매수 ) 1) 학회지는매년 4월 30일과 10월 31일총 2회발간한다. 2) 학회지는매호 300쪽내외의분량으로간행한다. 단, 특집호는예외로한다. 제3조 ( 투고 ) 1) 연구소의연구원및회원은학회지에논문을투고할수있다. 2) 논문을게재하고자하는자는투고문 ( 지면 ) 을간행 2개월전에편집위원회에제출해야한다. 3) 투고문은학회지의 원고작성원칙 을따라야한다. 4) 다음과같은글을학회지에투고할수있다. 1 연구논문 2 비평논문, 논단, 연구동향및학술정보, 지역인물소개 3 서평 4 기타학술및학회활동에관한글 5) 논문을게재하고자하는자에게일정한심사료와게재료를요구할수있다. 6) 논문의매수초과시추가조판료를요구할수있으며, 논문의분량은 200자원고지 180매로제한한다. 다만심사위원이초과게재가필요하다고인정할때는예외로한다.

468 468 지역과역사 38 호 제4조 ( 심사목적과방법 ) 1) 학회지의적정수준을유지하기위해투고문은두차례의심사를거친다. 단, 비평논문, 논단, 연구동향및학술정보, 지역인물소개, 서평, 기타학술및학회활동에관한글은예외일수있다. 2) 투고문에대한 1차심사는편집위원회에서담당한다. 3) 1차심사를거친논문은별도로위촉된심사위원에의해 2차심사를받는다. 4) 편집위원회는 2차심사결과를받고편집회의를열어재심사와게재여부를결정한다. 5) 편집위원회는재심사대상으로판정된논문을투고자에게보내수정하게하고, 수정된논문을다시심사위원에게보내재심사를받도록한다. 단, 동일논문의재심사는 1회에한한다. 6) 학회지에게재하는논문은심사에서통과된투고문에한정한다. 7) 논문의심사과정에관한구체적상황은대외비로한다. 제5조 ( 심사위원 ) 1) 투고문의 2차심사를위해심사위원을위촉한다. 2) 심사위원은해당분야의전문연구자로편집위원회에서위촉한다. 단, 필요한경우편집위원도심사위원이될수있다. 3) 심사위원은 3인으로한다. 4) 심사위원은투고문의내용및수준에대해심사서양식에따라심사하고, 심사결과를지정된기간이내에편집위원회에제출해야한다. 5) 심사위원은편집위원회의요청에따라재심할수있다. 6) 심사위원의위촉은대외비로한다. 제6조 ( 심사기준 ) 1) 편집위원회는다음의항목에대해심사한다. 1 논문의분량및투고규정적합성여부

469 휘보 469 2) 심사위원은다음의항목에대해심사한다. 1 논문제목의적절성 2 논문의형식및체제의적절성 3 논지의일관성및명료성 4 논문의학술적가치및독창성 5 표현과용어및개념의정확성 6 인용자료및참고문헌활용의적절성 3) 심사위원은수정없이게재 (A), 수정후게재 (B), 수정후재심사 (C), 게재불가 (D) 의 4등급으로심사결과를판정한다. 게재불가로판정한경우에는별도로그사유를명시한다. 제7조 ( 논문게재판정 ) 편집위원회는심사위원의심사결과를종합하여다음과같이논문의게재여부를판정 처리한다. 심사위원 1 심사위원 2 심사위원 3 최종판정 1 A A A 게재 2 A A B 게재 3 A A C 수정후게재 4 A B B 수정후게재 5 B B B 수정후게재 6 A A D 수정후게재 7 A B D 수정후재심사 8 A B C 수정후게재 9 A C C 수정후재심사 10 B B C 수정후재심사 11 B C C 수정후재심사 12 A C D 수정후재심사 13 A D D 게재불가 14 B B D 수정후재심사 15 B C D 게재불가 16 B D D 게재불가 17 C C C 게재불가 18 C C D 게재불가

470 470 지역과역사 38 호 19 C D D 게재불가 20 D D D 게재불가 * 수정후재심사의경우, C 판정의경우는기존의심사위원에게수정후재심사를받고, D 판정을받은건은심사위원을교체하여재심사한다. ** 재심의결과가심사위원한명이라도 C 판정을내리는경우는 게재불가 로처리한다. 제8조 ( 심사결과통보 ) 1) 논문의심사결과는투고자를제외하고외부에공개하지않는다. 2) 편집위원회는논문투고자에게심사결과를통보한다. 3) 게재가결정된논문투고자는편집위원회의수정또는보완요구를존중해야한다. 제9조 ( 이의신청과처리방법 ) 1) 학회지에논문을투고한자는심사와논문게재여부에관해이의를신청할수있다. 2) 본연구소의이의신청서양식에따라신청서를작성하여편집위원회에보내야한다. 3) 심사결과가통보된날로부터 2주일이내에이의를신청해야한다. 제10조 ( 저작권 ) 학회지에게재된모든글은부경역사연구소에그저작권이있다. 제 11 조 ( 기타 ) 본규정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관례에따른다. 제 12 조 ( 부칙 ) 이규정은 2016 년 4 월 1 일부터시행된다. 제정 : 1997년 3월 21일제1차개정 : 1999년 2월 15일

471 휘보 471 제2차개정 : 2002년 4월 1일제3차개정 : 2003년 6월 1일제4차개정 : 2005년 12월 1일제5차개정 : 2006년 1월 1일제6차개정 : 2011년 4월 1일제7차개정 : 2012년 4월 1일제8차개정 : 2016년 4월 1일

472 472 지역과역사 38 호 부경역사연구소연구윤리규정 제1조 ( 목적 ) 본규정은부경역사연구소의 ꡔ지역과역사 ꡕ에게재한연구성과의연구부정행위에대한취급규정을정하는데목적이있다. 제2조 ( 정의 ) 연구부정행위란 ꡔ지역과역사ꡕ 에게재된연구성과가위조, 변조, 표절, 중복게재, 부당한논문저자표시등에해당되는경우를말한다. 1. 위조및변조는연구자료를근거없이저자의임의대로작성하는경우 2. 표절은다른사람의연구성과를적절한출처를명시하지않고사용하는경우 3. 중복게재는자신의기존연구성과를그대로게재하는경우 4. 부당한논문저자표시는연구성과에공헌한사람에게정단한이유없이논문저자자격을부여하지않거나, 반대로연구성과에전혀기여하지않은사람에게예우등을이유로논문저자자격을부여하는행위 5. 기타역사학계에서통용되는범위를벗어난행위 제3조 ( 접수 ) ꡔ지역과역사ꡕ 발간후연구부정행위로판단되는연구성과에대한제보는본연구소와편집위원회로할수있다. 제보된안건은편집위원회가접수한다. 제4조 ( 제보자보호 ) 1. 제보자란부정행위를확인한사실또는관련증거를본연구소에알린자를말한다. 2. 제보자는다양한방법으로제보가가능하며, 실명제보를원칙으로한다. 만약부득이한이유로익명제보를한경우편집위원회에서사실여부를확인하여처리방침을결정한다. 3. 제보자의신원은절대공개하지않으며, 만약편집위원회가이를위반

473 휘보 473 하였을때는제보자가입은무상 유상의피해를보상해야한다. 4. 제보내용이허위이거나사전에허위임을알면서제보한경우제보자를보호할책임은없다. 제5조 ( 판정절차 ) 1. 편집위원회는접수된안건에대해해당분야전공자 3인이상의심사위원을선정하여조사위원회를구성한다. 2. 조사위원회는제보내용에따라연구부정행위의종류및내용을구체적으로밝혀야한다. 3. 조사위원회는부정행위의내용을해당연구자에게보내, 사실여부를확인한다. 4. 조사위원회는검토결과를 60일이내편집위원회로회송하여야한다. 5. 조사위원회의결정내용을토대로편집위원회는부정행위에대한최종심의를하여공개여부와공개수준을결정한다. 제6조 ( 담당조직및책임자 ) 연구부정행위에대한조사총괄은편집위원회가선정하는조사위원회가담당하고, 그내부에서책임자를선정한다. 제7조 ( 부정행위자에대한질의 ) 1. 조사위원회는심의결과연구부정행위가있다고결정한경우, 이내용을해당연구자에게질의서를보낸다. 2. 해당연구자는질의서를수령한후 15일이내에조사위원회에답변서를제출해야한다. 그렇지못할경우질의서내용을모두인정하는것으로판단한다. 제8조 ( 부정행위자징계 ) 1. 편집위원회는이와관련한내용을회의록은물론연구소홈페이지, 다음호 ꡔ지역과역사ꡕ 에공개한다.

474 474 지역과역사 38 호 2. 편집위원회는부정행위자가투고한웹상의논문을삭제한다. 3. 해당부정행위자는향후 10년간 ꡔ지역과역사ꡕ 에투고할수없도록한다. 제 9 조 ( 시행 ) 이규정 ( 지침 ) 은발령한날로부터시행한다. 제 10 조 ( 기타 ) 본규정이외의사항에대해서는일반적인관례에따른다. 제정 : 2007 년 3 월 20 일

475 휘보 475 ꡔ 지역과역사 ꡕ 원고작성원칙 부경역사연구소에서간행하는 ꡔ지역과역사ꡕ 에논문을게재하고자할때는다음의원고작성원칙을지켜주시기바랍니다. 1. 논문의분량은본문, 목차, 그림, 도표, 국문초록, 국문주제어, 영문초록, 영문주제어, 참고문헌을포함하여 200 자원고지 150 매를원칙으로한다. 원고매수가 200 자원고지 200 매를넘을경우, 원고지 5매당 5,000 원을저자가부담한다. 2. 논문의체제는, 논문제목- 필자명 ( 각주 : 소속 ( 주소 ))-차례 -국문초록- 국문주제어-본문-참고문헌- 영문초록- 영문주제어로한다. 3. 논문은아래와같은방식으로작성한다. 1) 논문은한국어로작성함을원칙으로한다. 한자와한글이동음일경우한자와한글을병기하지않는다. 2) 공동집필의경우에는제1저자와공동저자, 교신저자등의구분을명확히한다. 3) 논문의구성은제목, 목차, 본문순으로하고, 장과절및항의배열은 Ⅰ 1 1) (1) 1 ᄀ a 순서로한다. 단목차에는장과절만표시한다. 4) 머리말과맺음말에는기호를붙이지않는다. 5) 논문에는국문과영문초록을첨부한다. 초록의분량은 200 자원고지 3~4 매이내로제한하며, 국문과영문주제어는각 5단어로한다. 6) 제목, 본문, 인용문, 각주의형식은 글문서프로그램의기본형식에따라다음과같이규정한다. (1) 글꼴은신명조, 1줄 70칸, 줄간격 180% 를기본으로한다. 단인용문과주석은줄간격 150% 이다.

476 476 지역과역사 38 호 (2) 글자크기와문단정렬방식 1 본문 : 글자크기 10, 들여쓰기 2 2 인용문 : 글자크기 9, 왼쪽 2, 들여쓰기 2 3 각주 : 글자크기 9, 내어쓰기 (shift tap 사용 ) 4 < 표 1> < 그림 1> 제목 : 글자크기 10, 중간정렬 8) 각주의처리는다음과같은예시의형식으로통일한다. (1) 논문명과저서명의기호는모두겹낫표를사용하고, 각주맨끝에는마침표를찍는다. (2) 논저인용 1 저서 : 번호 ) 저자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 서양서의경우 : 저자명, 저서명, 출판지역 :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논문 : 번호 ) 저자명, 논문명 ꡔ학술지명ꡕ 권 호, 발행연도, 0~00 쪽. 번호 ) 저자명, 논문명, 편자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 서양서의경우 : 저자명, 논문명, 학술지명, 출판지역 :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학위논문 : 저자명, 논문명, 수여기관학위구분, 학위수여년도, 0~00쪽. 2 동일저자의책이나논문이등이두번이상인용될때바로위에서인용된것인경우번호 ) 저자명, 위의책 ( 위의논문, 위의박사학위논문 ( 서양서의경우 : Ibid.)), 0~00쪽. 바로위에서인용된것이아닌경우번호 ) 저자명, 앞의책 ( 앞의논문, 앞의박사학위논문 ( 서양서의경우 : Op. cit.)), 출판년도, 0~00쪽. 3 번호 ) 주 00) 참조.

477 ④ 주석을 붙일 때 번호) 저자명, 논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0 00쪽. 주석내용. ⑤ 인용논고가 여러 편일 때(동일 저자는 ;로 연결) 번호) 저자명, 논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 논 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명, 논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⑥ 번역서일 경우 번호) 저자명, 역자명, ꡔ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3) 사료 인용 : 원문 혹은 국역문을 그대로 인용할 때는 를 사용 한다. 원문내용 에는 띄어쓰기만 하고 다른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다. ① 번호) ꡔ三國史記ꡕ 권4, 新羅本紀 4, 法興王 11년 9월조. ② 번호) ꡔ高麗史ꡕ 권1, 太祖 5년 11월조.(혹은 11월 辛巳.) 번호) ꡔ高麗史ꡕ 권111, 列傳 24, 洪彦博傳. ③ 번호) ꡔ太祖實錄ꡕ 권1, 원년 8월 庚戌. 原文 번호) ꡔ太祖實錄ꡕ 권13, 7년 3월 辛亥. 국역 번호) ꡔ太祖實錄ꡕ 권13, 7년 3월 辛亥. 국역(原文) ④ 번호)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天皇 23년 3월조. ⑤ 번호) ꡔ釜山日報ꡕ (면)단, 기사제목. 제정 : 1999년 2월 15일 제1차 개정 : 2002년 4월 1일 제2차 개정 : 2004년 9월 24일 제3차 개정 : 2006년 1월 1일 제4차 개정 : 2011년 3월 17일 제5차 개정 : 2016년 4월 1일

478 부경역사연구소 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는우리터전의역사를올바르게연구하고그성과를대중과함께함으로써우리역사와지역문화의발전에기여하고민족사에대한자긍심을높이는데튼튼한밑거름이되고자합니다. 연구소활동안내 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는 1994년출범이후 ꡔ시민을위한가야사ꡕ 와 ꡔ시민을위한부산의역사ꡕ, ꡔ한국사와한국인ꡕ( 전근대 근현대편 ), ꡔ10세기인물열전ꡕ 등대중교양서를발간하는한편그외에도다음과같은활동을하고있습니다. 1. 연구발표회 ( 연 4회 ) 2. 학술심포지엄 ( 연 1회 ) 3. 초청강연회 ( 연 2회 ) 4. 역사기행 ( 연 4회 ) 5. 공동연구와학습 6. 회지 ꡔ지역과역사ꡕ 발간 7. 기타 연구원회원가입안내 1. 연구원연구원은연구소의연구활동및사업에참여하는사람들로소정의절차를거쳐가입할수있습니다. 자격은한국사를전공하는대학원재학이상의전문연구자와중등학교교원이상입니다. 2. 특별회원 1) 후원회원 : 본연구소의사업에관심을가진분은누구나가입이가능하며, 그권리는연구소가발간하는각종자료의구독과행사에있어특별대우를받습니다. 연회비는 5 만원이상입니다. 2) 일반회원 : 본연구소의사업에관심을가진분이면누구나환영하며연회비는 2 만원입니다. 일반회원에게는연구소가발간하는자료의구독및각종행사의참여시우선권을드립니다. 주소 : ( ) 부산광역시금정구장전 3동 번지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전화 : (051) 팩시밀리 : (051) homepage : * pkh6401@hanmail.net 온라인번호 : 부산은행 ( 사 ) 부경역사연구소농협 ( 사 ) 부경역사연구소

479 제 38 호 편집위원이윤상 ( 창원대학교 ) 최윤오 ( 연세대학교 ) 홍영기 ( 순천대학교 ) 권오영 ( 서울대학교 ) 채웅석 ( 가톨릭대학교 ) 한기문 ( 경북대학교 ) 홍순권 ( 동아대학교 ) 백승충 ( 부산대학교 ) 장지연 ( 대전대학교 ) 김경남 ( 경북대학교 ) 발행인이정수편집인백승충발행일 2016년 4월 30일펴낸곳도서출판선인 (02) 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 부산광역시금정구장전3동 (2층 ) (051) FAX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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