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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 3 권 ( 제 2 분과일본편 ) 2010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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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ⅲ 양국위원장공동인사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한일관계사쟁점분야에대하여한일양국학자들의공동 연구를통해학설및역사인식에대한공통점을도출하고, 차이점을파악하여상호이해 를심화시키는데에목적을두고발족했다. 제 1 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한일정상간합의로 2002 년 5 월부터 2005 년 3 월까 지활동하였던것에이어, 제 2 기위원회는 2007 년 6 월에발족해 2 년 6 개월간의활동을 거쳐공동보고서를제출하기에이르렀다. 제2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그동안 4개분과로나뉘어양국이합의한 24개의주제에대한심도있는연구를진행하였다. 제2기위원회는각분과별로 12~17차에걸친합동회의와 5차례의전체회의, 심포지엄등을통해서많은토론과정을거치면서진지한역사대화를나누었다. 그리고그내용을분과별로정리하여논문집의형태로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 회의공동연구보고서를내게되었다. 이공동연구보고서의간행을통해서이제한일양국의학자들은진지한역사대화의첫장을써나가기시작했다. 이공동연구보고서에는양국의연구자들이의견의일치를본내용과, 동시에양국연구자사이에서입장의차이가드러나는논문들도수록되어있다. 그렇다하더라도이공동연구보고서에수록된논문및논평들은역사의진실에접근해가려던노력의공통된표현임에틀림없다. 그리고우리의이노력에는자라나는후세들에게정확한역사와다양한역사이해의올바른방법을전해주고자하는공통의소망이담겨져있다.

4 ⅳ 이보고서에담겨진연구성과가결코만족스럽거나충분하다고생각하지는않는다. 그러나이보고서가양국의역사교과서집필에좋은참고가될수있기를우선기대한다. 그리고더나아가서이번의연구성과들은향후한일관계사연구에도적지않은보탬이될수있으리라고본다. 또한우리의이러한노력은한일양국이상호신뢰를바탕으로하여공동의번영을기약하는미래의학술공동체를만들어나가는데에밑거름이될것임을확신한다 년 11 월 28 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한국측위원장 조광 ( 趙珖 ) 일본측위원장 도리우미야스시 ( 鳥海靖 )

5 ⅴ 한국측위원장서문 한국과일본은지리적으로서로인접하여선사시대이래현대에이르기까지긴밀하게교류해온국가였다. 이교류의과정에서한일양국은서로의역사에서중첩되거나공유하고있는부분이나타났다. 상호역사에서공유된부분이있다는사실에서그해석의다양성이배태 ( 胚胎 ) 되어있다. 따라서역사적사건에대한해석이가지고있는건전한다양성에대해서는상호충분한인정과이해가있어야한다. 물론역사학의오랜전통은역사적사실에입각한해석만을존중하고있으므로해석에앞서사실에대한규명작업이먼저요청되기도한다. 그런데인접국의역사에서는비록전문적연구자의견해는아니라하더라도간혹공유 중첩된역사적사실의존재자체마저부인되거나왜곡설명되는경우가있기도했다. 이는역사적사실에대한해석의다양성을인정해야하는문제와는별개의사안으로생각되었다. 인접국의역사에서가지고있는이러한경향은국제평화와상호이해에걸림돌이되기도했다. 제2차세계대전직후설립된유네스코는이미 1947년부터각국의역사와지리교과서에기술된내용이국제이해를저해하는요소가되고있음을파악하고서상호협의를통해서이를수정 보완하고자하는노력을전개하기시작했다. 여러나라의학자와교육전문가들도이에뜻을같이하며기꺼이공동작업을수행해오고있다. 한일양국의경우에도일찍부터역사교과서와관련된문제가제기되어왔다. 1965년이래최근까지유네스코양국위원회를매개로하여이문제를검토하고자하는노력이수차례전개되기도했다. 또한 1983년이후한일문화교류기금과일한문화교류기금등에서는상호간의이해를심화시키기위한노력을전개하던과정에서역사문제에대한학술적연구를주관하기도했다. 특히 1982년이후한일간에역사문제가상호분쟁의차원으로까지전개되어나갔다. 이상황에서한일양국의여러학술단체와시민단체들은역사분쟁의해소를위해노력했고, 양국의양식있는인사들도분쟁의해소에관심을갖게되었다. 그간에전개된이와같은노력들은양국사이에전개된 역사분쟁 의해소를위한본격적노력의필요성을역설하는것이었다.

6 ⅵ 돌이켜보건대, 역사분쟁 은한일양국의우의와상호관계의발전을저해시키는요소로작용하고있었다. 따라서한일양국의정부도이 역사분쟁 의해소를위한본격적노력이필요하다는사실에인식을같이했다. 특히 2001년도에일본의특정출판사에서간행한중학교역사교과서의문제로인해한일양국간의역사분쟁은더욱심화되는경향마저나타나게되었다. 이러한상황을극복하고자노력하던양국정상들의합의에따라 2002년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공식으로발족하게되었다. 이위원회는양국의역사서술에서드러나는상호간의차이점가운데 19개의주제를선정하여이에대한공동연구를추진해갔다. 이는한일양국정부의공식적지원아래역사분쟁을해소하기위해조직된첫번째의연구위원회였다. 이위원회는 2005년에종료되어연구결과보고서를간행하였다. 그러나단기간에그쳐양국간의역사문제에대한충분한공동연구로서는부족했다. 그러므로양국의정상들은다시한일간의역사문제와관련된공동연구의지속에합의하게되었다. 이합의에따라서 2007년에제2기한일역사공동연구회가출범하여 2009년말까지공식적인활동을마무리지으며, 이제그공동연구결과를보고서의형태로간행하게되었다. 제2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공동연구작업과정에서도한일양국의연구위원들은역사적사실에대한해석상의다양성을인정하면서해당분야에관한자신의전문지식을충분히발휘하며좋은성과를내기위해노력해왔다. 그결과양국의역사학계에서축적해온연구성과에대한상호이해의폭을넓힐수있었다. 그리고한일간에이견이있었던일부문제에대해서연구위원들은공동인식을확보할수있었다. 일반적으로말하여, 역사대화는결코단시간의작업에그치는일이아니며지속적으로전개될때그실제적인효과가기대될수있다고한다. 또한역사대화는다방면에걸쳐다양한방법으로이어져야한다. 그리고역사대화는그결과를초등학교와중등학교교육현장에구체적으로적용하여양국국민상호간의이해에직접적으로기여하는데에일조해야한다. 또한역사대화는상호간의존중과신뢰가전제되고상대방의연구성과를경청하고자하는진지한자세가갖추어질때성공적인진행이가능하다고한다. 우리는이와같은사례를오늘날독일과프랑스의역사대화, 독일과폴란드의역사대화등에서충분히확인할수있다. 필자는이들이전개하고있던역사대화를목도하면서, 특히역사앞에서겸허하고자하는그들의성숙된자세에탄복했다.

7 ⅶ 그리고베트남과프랑스, 인도네시아와네덜란드, 말레이시아와영국간의역사대화과정에서그역사가가지고있던역동성에대한상호인정과과거의불행했던역사에대한진지한반성의장면에감명받은바있었다. 역사대화의구체적성과는이미현대사에관한독일과프랑스의공동역사교과서인 1945년이후유럽과세계 를통해서확인되기시작했고, 유럽의다른나라에서도그대화의성과가이어서나타나고있다. 공동역사교과서의간행은역사적사실에대한공동확인및확인된사실에대한공통의해석과평가가주류를이룰때비로소가능한일이다. 그들은장기간에걸친성실한역사대화를통해서이와같은일을성취할수있었다. 이러한여러사례를통해서생각해볼때, 21세기는역사분쟁의해소를위한역사대화의시대이며, 그대화의구체적성과를향유하며상호이해와우의를다져나가는시대라고생각한바있다. 이제한일양국의역사연구자들도대화의새로운역사를써나가기시작했다. 제2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위원들은역사대화라는시대적요구를감당해냈다. 우리가이룬대화의성과들은이공동보고서에결집되어공표되었다. 이공동보고서가역사연구자와중등학교역사교과서집필자그리고한일양국의우의와친선을소중히여길여러사람들에게조금이라도도움이될수있다면한일양국의연구자들은이를다행스럽게생각할것이다. 그리고우리의이작업은한일양국이역사대화를지속하는데에하나의밑돌을더하게되기를바란다 년 11 월 28 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한국측위원장조광 ( 趙珖 )

8 ⅷ 일본측위원장서문 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1년 10월 15일의일한정상회담의합의에의해 역사교과서문제와관련해서정확한역사사실과역사인식에관한상호이해를촉진할것 을목적으로설립되었다. 그리고 2002년 5월제1기연구위원회 ( 전체회의 ) 가개최되었고 2005년 3월의제6회전체회의로일단종료된후, 그연구성과로서 2005년 6월 1일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연구결과보고서가공간 ( 公刊 ) 되었다. 그사이인 2004년 12월 17일일한정상회담때양국수뇌간에역사공동연구를계속하기로합의되었다. 제2기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상기의합의에의거해서제1기위원회의공동연구성과를계승해 2007년 4월 27일양국위원장회담, 같은해 6월 23일의제1회전체회의를개최하면서시작되어 2009년 11월 28일의제5회전체회의에서가보고서를교환, 양국지원위원회에제출, 동보고서의공간 ( 公刊 )(2010년 3월예정 ) 으로종료되게되었다. 이자리에서역사공동연구를지원해주신일한양국의관계자분들에게깊은감사를표한다. 제2기위원회는제1기위원회의제1분과 ( 고대사 ), 제2분과 ( 중세근세사 ), 제3분과 ( 근현대사 ) 에새롭게교과서소그룹을더해 3개분과, 1개그룹으로구성되었고, 각분과, 그룹마다합계십수회에이르는연구회, 보고회를통해서양국의위원, 연구협력자가열정적으로그리고자유롭게토론을전개했다. 그성과는제2기일한역사공동연구보고서에집약되어있다. 두말할것없이역사에반드시 유일한올바른이해 가존재하는것은아니다. 하나의역사사상 ( 歷史事象 ) 에대해서국가, 지역, 민족, 여러집단, 그리고개인사이에도다양한이해, 해석, 평가가성립하는것은당연하다. 본공동연구에있어서는그러한역사사상에대해서공통의인식과정확한역사사실을명확하게함과동시에서로다른이해, 해석, 평가등에대해서도그차이점은차이점으로서서로인정하고그다른까닭을곰곰이검토하는것을통해충분히역사의상호이해를깊이하려는노력을거듭했다. 20세기말부터 21세기초에걸쳐서세계의많은국가와지역에서역사의상호이해를깊이하고혹은역사를재검토하는프로젝트가진행되고있다. 나자신, 1970년대후반

9 ⅸ 부터약 30년에걸쳐서그러한많은프로젝트에참가하여한국을비롯해미국, 유럽제국 ( 諸國 ), 중국, 동남아시아제국 ( 諸國 ) 등의전문가들과다양한의견을교환하였고때로는스스로상식이라고이해했었던역사의식을크게바꾸는새로운역사이해에눈을뜬경험도있다. 특히, 21세기초에본, 얄타, 블라디보스토크등에서열린유럽현대사교육회의에참석했을때, 1990년대의소련붕괴이후지금까지비공개였던많은귀중한 1차사료가발견 공개되어역사사실이잇달아밝혀지고동시에동유럽과구소련내의제국 ( 諸國 ) 에서근현대사의재검토를요구하는목소리가커지고있는현실에깊은인상을받았다. 그상세한내용을여기에서서술하지는않겠지만, 이회의를통해서역사에는서로다른다양한관점이있고, 때에따라서는그것이정치문제, 외교문제와연결되어예상밖의대립, 알력을만들어내는현실에직면하면서, 많은지식인들이특정역사관에입각하여 유일한올바른역사 를타자에게강요하지않고사실에입각해서가능한다각적으로역사를분석하고, 서로다른견해와의견에솔직히귀를기울이고, 서로영향을끼친다고하는상호작용 (interplay of views) 을존중하는그러한기본자세를엿볼수있었던것은나로서는감명깊은경험이었다. 이후, 일한역사공동연구를포함해서국제적인역사상호이해를목적으로한프로젝트가한층유효한발전을꾀하기위해서나자신다음과같은생각을가지고있다. 첫번째, 가능한일국사, 일민족사를넘는넓은관점에서국제관계 ( 교류 ) 사, 지역사, 비교사등을대담하게도입해야할것이다. 애초부터국가사, 민족사입장에선역사연구, 역사교육의중요성은부정하지않지만, 그것이지나치면역사연구, 역사교육에있어서배외주의적경향이생길지도모르고, 또그러한구조만으로는파악할수없는분야도결코적지않을것이다. 두번째, 국제관계를취할경우에외교, 전쟁, 정치등의분야에더하여사회, 문화, 생활과그교류등이라는 역사의인간적측면 에도충분히눈을돌려야만할것이다. 외교, 전쟁, 정치등의분야의중요성은논할필요도없지만, 그것이관계사의전부가아닌것은말할필요도없다. 세번째, 국제적인역사공동연구는이른바, 다원적중층적으로진행될필요성이있을것이다. 양국정부사이의합의에의한일한역사공동연구가큰의의를가졌다는것은설명할것도없지만, 그것만으로는양국역사연구의다양한분야에있어서의최근의학문적연구성과를흡수하는데충분하지못하다. 요즘, 일본국내에서중학교, 고등학교용으

10 ⅹ 로출판되고있는역사교과서는 40종류이상이되고, 그집필자는적어도 200명이상에달할것이다. 일본에서는공권력이특정의역사관을교과서집필자에게강제해서는안된다는것이사회적통념으로정착되어있다. 따라서다수의다양한역사이해를인식하는의미에서도본공동연구와동시병행적으로민간수준에서역사가, 역사교육가등이자유롭게의견을교환할수있는채널이가능한한많이만들어지는것이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일한양국이가능한한폭넓게역사사료를공개하고자유로운상호이용, 열람이가능한조건을정비해야만할것이다. 요즘일본에서는모든중학교역사교과서 ( 사회과의역사적분야 ) 의근현대사대외관계에관한기술에있어서, 한국어, 영어, 중국어역 ( 譯 ) 을외무성홈페이지를통해열람하는것이가능하다. 역사교육에서국제적인역사상호이해를진전시키기위해서는이러한시스템을적극적으로활용하는것이꼭필요할것이다. 어찌되었든이번제2기일한역사공동연구의성과가이후일한양국민, 특히차세대를짊어질젊은이들의역사상호이해를진전시키는데큰역할을할것을기대하고싶다 년 11 월 28 일 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일본측위원장도리우미야스시 ( 鳥海靖 )

11 ⅹⅰ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전체 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분과 위원

12 ⅹⅱ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일본측 연구위원 구와노에이지 ( 桑野栄治 ) 사에키고지 ( 佐伯弘次 ) 스카와히데노리 ( 須川英徳 ) 구루메대학문학부준교수규슈대학대학원인문과학연구원교수요코하마국립대학교육인간과학부교수 ( 는일본측제2분과간사 ) 연구협력자 모리히라마사히코 ( 森平雅彦 ) 규슈대학대학원인문과학연구원준교수 나카다미노루 ( 中田稔 ) 가나가와현립지가사키고등학교교사 아라키가즈노리 ( 荒木和憲 ) 문화청문화재부미술학예과문부과학기관 ( 技官 ) 나카노히토시 ( 中野等 ) 규슈대학대학원비교사회문화연구원교수 야마구치가요 ( 山口華代 ) 나가사키현립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학예원

13 ⅹⅲ 한국측 연구위원 손승철 ( 孫承喆 ) 이계황 ( 李啓煌 ) 한명기 ( 韓明基 ) 강원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교수 인하대학교문과대학일어일문학전공교수명지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교수 ( 는한국측제2분과간사 ) 공동연구원 김보한 ( 金普漢 ) 노영구 ( 盧永九 ) 이재범 ( 李在範 ) 한문종 ( 韓文鐘 ) 단국대학교교양학부조교수국방대학교국방관리대학원부교수경기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부교수전북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부교수

14 ⅹⅳ 제 3 권목차 양국위원장공동인사말한국측위원장서문일본측위원장서문제2분과위원명단전체보고서목차 머리말 1 활동보고 8 제1부논문편 17 사에키고지 14~15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19 구와노에이지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49 - 朝鮮 琉球 日本에있어서対明外交儀禮의관점에서- 스카와히데노리 17~18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07 -글로벌히스토리와의접속- 제 2 부좌담회토론문 141 제3부연구사편 179 모리히라마사히코 10세기 13세기전반麗日關係史의諸問題 181 -일본에서의연구성과를중심으로- 나카다미노루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03 아라키가즈노리 16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221 나카노히토시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37 야마구치가요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257 제4부사료해제집 275 사에키고지 스카와히데노리 구와노에이지편중세 근세일한관계사료해제집 277

15 ⅹⅴ 전체보고서목차 제 1 권 ( 제 1 분과편 ) 머리말 논문편조법종하마다고사쿠김태식모리기미유키 하마다고사쿠노태돈사카우에야스토시 모리기미유키 古代韓日關係의成立 - 彌生文化主體問題에대한檢討 - 古代日韓關係의成立 - 地域間의交流에서古代國家의關係로- 古代王權의成長과韓日關係 - 任那問題를包含하여- 古代王權의成長과日韓關係 -4~6세기- 古代東아시아國際秩序의再編과韓日關係 -7~9세기- 古代東아시아國際秩序의再編과日韓關係 -7~9세기- 좌담회토론문고대한일관계의성립고대왕권의성장과한일관계고대동아시아국제질서의재편과한일관계 연구활동기록

16 ⅹⅵ 연구후소감조법종하마다고사쿠김태식모리기미유키노태돈사카우에야스토시 제2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제1분과활동을정리하며공동연구를끝내고공동연구말미의단상공동연구를마친소감공동연구를마치고공동연구를마치고

17 ⅹⅶ 제 2 권 ( 제 2 분과한국편 ) 머리말활동기록 제1부논문편손승철이계황한명기 14~15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한일관계 - 왜구의구성문제를포함하여 - 한국과일본학계의임진왜란원인론에대하여 17~18 세기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 왜관문제를둘러싼대일인식을중심으로 - 제 2 부좌담회토론문 제3부연구사편이재범김보한한문종노영구 고려전기한일관계사연구현황한국내왜구연구의학술사적검토조선전기한일관계사연구의현황과과제 -2000년 ~2007년의연구성과를중심으로- 임진왜란의학설사적검토 제4부사료해제집편손승철 김강일 이상훈손승철 김강일이상훈 중 근세한일관계사료해제집해설 조선시대한일관계사료해제 임진왜란관련사료해제

18 ⅹⅷ 제 3 권 ( 제 2 분과일본편 ) 머리말활동보고 제1부논문편사에키고지구와노에이지스카와히데노리 14~15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 朝鮮 琉球 日本에있어서対明外交儀禮의관점에서- 17~18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글로벌히스토리와의접속- 제 2 부좌담회토론문 제3부연구사편모리히라마사히코나카다미노루아라키가즈노리나카노히토시야마구치가요 10세기 13세기전반麗日關係史의諸問題 -일본에서의연구성과를중심으로-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16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제4부사료해제집사에키고지 스카와히데노리 구와노에이지편중세 근세일한관계사료해제집

19 ⅹⅸ 제 4 권 ( 제 3 분과편 ) 한국측간행사일본측간행사제3분과공동연구활동보고 제 1 부한일근대국민국가의수립과정과상호관계 제 1 장주권과독립 주진오 하라다다마키 19세기말조선의자주와독립비평문 ( 하라다다마키 ), 집필자답변大韓國國制와제2차일한협약반대운동 -대한제국의국가로서의존재방식- 비평문 ( 주진오 ), 집필자답변 제 2 장권력과국민 조성윤 쓰키아시다쓰히코 개항초기서울지역민중의근대적국민의식형성과정과반일의식비평문 ( 하라다다마키 ), 집필자답변근대조선의국민국가창출과입헌군주제론비평문 ( 주진오 ), 집필자답변 제 2 부일제식민지기조선과일본의사회변동 제 1 장지배체제와이데올로기 류승렬 일제하조선통치세력의지배이데올로기조작과강제비평문 ( 아리마마나부 ), 집필자답변

20 ⅹⅹ 오카모토마키코 조선총독부관료의민족구성에관한기초적연구 - 민족문제와민족격차의내포 - 비평문 ( 류승렬 ), 집필자답변 제 2 장근대화 정태헌 야마다간토 식민지자본주의의실체와역사적성격비평문 ( 아리마마나부 ), 집필자답변식민지조선에서의근대화와일본어교육비평문 ( 류승렬 ), 집필자답변 제 3 장전시체제 정혜경 송출과정을중심으로본전시체제기조선인국외노무동원의 성격비평문 ( 아리마마나부 ), 집필자답변 아리마마나부 년대일본의문화표상속 朝鮮人 -영상사료를실마리로- 비평문 ( 류승렬 ), 집필자답변

21 ⅹⅹⅰ 제 5 권 ( 제 3 분과편 ) 한국측간행사일본측간행사제3분과공동연구활동보고 제 3 부 제 2 차세계대전이후한일관계의형성과변화 제 1 장경제 허영란 요시오카히데미 해방이후식민지법률의정리와탈식민화 - 구법령 정리사업과시장관계법령의개편을중심으로- 비평문 ( 오니시유타카 ), 집필자답변일한경제관계의신전개 -2000년대의구조변화를중심으로- 비평문 ( 이석우 ), 집필자답변 제 2 장외교 이석우 기미야다다시 연합국최고사령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그리고한일외교관계의구축비평문 ( 오니시유타카 ), 집필자답변일한국교정상화교섭에서의청구권문제재고비평문 ( 이석우 ), 집필자답변 제 3 장대중문화 이성환 야마나카지에 식민지의기억과일본대중문화의유입그리고한일관계비평문 ( 하루키이쿠미 ), 집필자답변 기껏해야만화 를통해서보이는일한사회는비평문 ( 이석우 ), 집필자답변

22 ⅹⅹⅱ 제 4 부사람의이동과여성 제 1 장사람의이동의한일상호비교 하종문일본본토거주조선인의생활과 동원 비평문 ( 오니시유타카 ) 오니시유타카 제국의형성 해체와주민관리 비평문 ( 하종문 ), 집필자답변 제 2 장여성의사회진출의한일상호비교 양현아 하루키이쿠미 식민지시기한국가족법을통해본가부장제의국가제도화와 관습 문제비평문 ( 하루키이쿠미 ) 근대일본과조선의良妻賢母主義비평문 ( 하종문 ), 집필자답변 자료집 근현대한일간조약일람

23 ⅹⅹⅲ 제 6 권 ( 교과서위원회편 ) 교과서위원회공동보고서발간에붙여교과서위원회공동연구활동보고 제1부이념 < 교과서와근대 근대성 > 정재정정진성야마우치마사유키 후루타히로시 한국과일본의역사교과서에그려진근대의肖像 - 15년전쟁 과 식민지조선 - 비평문 ( 야마우치마사유키 ), 집필자답변한일근대사서술의젠더편향성비교연구비평문 ( 나가시마히로키 ), 집필자답변근대일본의동아시아共通文化論의궤적 -아시아주의와세계사교과서- 비평문 ( 정재정 ) 제2부제도 편찬 < 교과서편찬제도의변천 > 이찬희야마무로겐토쿠 한일역사교과서편찬제도의변천비평문 ( 야마무로겐토쿠 ), 집필자답변교과서편찬으로본역사교육 -일본의국정교과서와전후검정교과서의경우- 비평문 ( 이찬희 ), 집필자답변 나가시마히로키朝鮮總督府學務局에의한역사교과서편찬과 國史 / 朝鮮史 교육 - 小田省吾로부터中村榮孝그리고申奭鎬로 - 비평문 ( 정진성 ), 집필자답변

24 ⅹⅹⅳ < 교과서문제의史的전개 > 신주백이데히로토 후쿠시마히로유키 이시다마사하루 한일역사교과서문제의사적전개 -1982년과 2001년도의전개양상을중심으로- 비평문 ( 나가시마히로키 ), 집필자답변전후일한의교과서문제를둘러싼교육정책 교육학의여러모습비평문 ( 신주백 ), 집필자답변

25 ⅹⅹⅴ 제 7 권 ( 교과서위원회편 ) 교과서위원회공동보고서발간에붙여교과서위원회공동연구활동보고 제3부기술 < 교과서에나타난전쟁 > 현명철오타히데하루 일본역사교과서에나타난전쟁관비평문 ( 야마무로겐토쿠 ) 전근대의일한관계와대외전쟁 - 朝鮮의役 의제문제- 비평문 ( 현명철 ), 집필자답변 < 교과서에나타난근대법질서와국가 > 김도형韓日歷史敎科書의 近代韓日關係와條約 서술비평문 ( 기무라간 ), 집필자답변 기무라간 일한양국의역사관과근대그리고근대적법질서 비평문 ( 김도형 ), 집필자답변 < 교과서에나타난현대 현대사 > 신주백한일중학교역사교과서에기술된현대 현대사서술의변화 (1945년 ~ 현재 ) 비평문 ( 시게무라도시미쓰 ) 시게무라도시미쓰 이이무라도모키 일한상호오리엔탈리즘의극복 - 현대사기술방식분석 - 비평문 ( 신주백 ), 집필자답변

26 ⅹⅹⅵ < 교과서에나타난민족 민족운동 > 연민수日本歷史敎科書의古代史서술체계와民族 天皇問題비평문 ( 기무라간 ), 집필자답변 이노우에나오키 한국 일본역사교과서의고대사기술 - 문제점과변천 - 비평문 ( 이찬희 ), 집필자답변

27 머리말 1 머리말 제 2 분과간사스카와히데노리 손승철 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제2기제2분과는 2007년 6월 23일, 도쿄에서개최된양국위원에의한전체회의로발족하여, 이후본분과에서는편집회의도포함하여 15회에걸친공동연구회를개최하였다. 개최지와보고내용등에대해서는다음절을참조하시길바란다. 1. 제 2 분과의구성 제 2 분과양국위원은다음과같다. 분과의발족부터보고서작성에이르기까지위원 의교체혹은중도참가는없었다. 위원 ( 일본측은히라가나순, 한국측은가나다순. 소속은 2009 년 11 월현재, 이하동일 ) 구와노에이지 ( 桑野栄治, 구루메대학문학부준교수 ) 사에키고지 ( 佐伯弘次, 규슈대학대학원인문과학연구원교수 ) 스카와히데노리 ( 須川英徳, 요코하마국립대학교육인간과학부교수 ) * 일본측제2분과간사손승철 ( 孫承喆, 강원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교수 ) * 한국측제2분과간사이계황 ( 李啓煌, 인하대학교문과대학일어일문학전공교수 ) 한명기 ( 韓明基, 명지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교수 )

28 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2. 제 2 분과가담당한시대 제 2 분과는중세 근세분야를담당하는것으로정했지만, 양국에서의시대구분의차이 를고려하여, 일본사에서는헤이안시대부터에도시대 ( 개항이전 ), 한국사에서는고려 조 선시대 ( 개항이전 ) 을대상시기로했다. 대략 10 세기부터 19 세기중반까지이다. 3. 연구의기본방침과주제 제2분과에서는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설치목적에비추어, 제1기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제2분과의공동연구를심화시키고, 더욱발전시킬것을전제로하여, 다음과같은사항을공동연구의기본방침으로정했다. 또일본측은일본에서의연구성과와현황을, 한국측은한국에서의연구성과와현황을주로취급함으로써, 양국에서의역사연구의기본적인입장과관심의차이를드러내는데에노력했다. 1 논의와검토대상은학술적인저작물 ( 논문, 저서 ) 로한다. 2 해당시기의두지역의관계에대해서공동연구를하는것을주안으로하고, 그를위한공동연구주제를설정한다. 3 양국간의학설 해석의차이가있다고생각되는분야에대해서양국에서의현황과연구사를공동으로조사 연구한다. 그를위해서필요한분야에대하여연구협력자 ( 공동연구원 ) 를의뢰한다. 4 공동조사 연구를통하여학설 역사인식에대해서공통점을이끌어냄과동시에차이점은차이점으로서정확하게파악함으로써상호이해와인식의심화를지향한다. 5 연구자 교과서집필자등양국의관계자들이연구와역사교과서집필과정에서이용가능한것을정리함으로써교과서문제로제기된갈등해소와일한양국민간의상호이해에기여할수있는것을목표로한다. 위의 2, 4의방침에따라쌍방의승인을거쳐각위원이담당하는연구주제를아래와같이정하였다.

29 머리말 3 제1주제:14~15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한일관계- 왜구의구성문제를포함하여- 담당자 : 사에키고지위원, 손승철위원 제2주제: 동아시아세계와임진왜란 ( 文禄 慶長の役 ) -국제관계와원인문제를포함하여- 담당자 : 구와노에이지위원, 이계황위원 제3주제:17~18 세기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통신사와왜관의의미를포함하여- 담당자 : 스카와히데노리위원, 한명기위원 위의 3, 4 의방침에따라쌍방의승인을거쳐, 아래의학설사정리를각연구협력자 ( 공동연구원 ) 에게의뢰했다. 연구협력자 ( 일본측 ) 모리히라마사히코 ( 森平雅彦, 규슈대학대학원인문과학연구원준교수 ) < 일본에서의고려시대일한관계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나카다미노루 ( 中田稔, 가나가와현립지가사키고등학교교사 ) <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아라키가즈노리 ( 荒木和憲, 문화청문화재부미술학예과문부과학기관 ( 技官 )) * 연구협력시에는일본학술진흥회특별연구원 < 일본에서의 16세기대일한관계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나카노히토시 ( 中野等, 규슈대학대학원비교사회문화연구원교수 ) < 일본에서의문록 경장의역 ( 임진왜란 ) 연구의학설사적검토 > 야마구치가요 ( 山口華代, 나가사키현립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학예원 ) < 일본에서의왜관 조선통신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공동연구원 ( 한국측 ) 김보한 ( 金普漢, 단국대학교교양학부조교수 ) < 한국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30 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노영구 ( 盧永九, 국방대학교국방관리대학원부교수 ) < 한국에서의임진왜란연구의학설사적검토 > 이재범 ( 李在範, 경기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부교수 ) < 한국에서의고려시대한일관계사의학설사적검토 > 한문종 ( 韓文鐘, 전북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부교수 ) < 한국에서의조선전기한일관계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4. 사료해제집의작성 위의연구방침 5 에따라양국에존재하는일한관계사의기본사료에대하여사료해제 집을작성하기로하였다. 일본측 < 중세 근세일한관계사료해제집 >( 須川英徳 佐伯弘次 桑野栄治 ) 한국측 < 한일관계사료해제집 ( 중 근세 )>( 손승철 김강일 ( 강원대학교고문서센터연구원 )) < 임진왜란관련사료해제집 >( 이상훈, 해군사관학교박물관 ) 5. 보고서의구성및내용 제1부에서는제1기의연구주제를심화하고, 현재의한일양국에서학설 해석의차가있다고생각되는세가지주제에대하여양국의기본적인역사에대한관심양상의차이에유의하면서, 각관점의차이와공통점을밝혀내고자노력했다. 그리고각주제에대한양국위원의견해를좌담회형식으로토론하고, 그내용을전부수록했다. 이내용들을개괄적으로정리하면, 다음과같다.

31 머리말 5 제 1 주제 : <14~15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일한관계 - 왜구의구성문제를포함하여 -> 사에키위원 : 동아시아해역세계라는공간적확장속에서일본, 중국 ( 원 명 ), 한반도 ( 고려 조선 ) 3자의관계로부터어떻게왜구가발생하고종식되어갔는가를논하고, 일한관계는동아시아속에갇히는것이아니라, 류큐 ( 琉球 ) 등을매개로동남아시아로도이어지는관계였다고서술하였다. 손승철위원 : 14~15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의상황을 삼강행실도 의왜구관련삽화와기사를중심으로살펴보면서, 1382년과 83년도에강원도영월에서의 가왜 ( 假倭 ) 사건 과 1470년, 80년대남해에서의 수적 ( 水賊 ) 사건 의기사를분석하여 왜구=고려 조선인설, 제주도해민설 의부당함을논했다. 제 2 주제 : < 동아시아세계와임진왜란 - 국제관계와원인문제를포함하여 -> 구와노위원 : 15 16세기동아시아각국의관계를명과조선, 명과류큐, 명과일본으로나누어서외교의례면에서비교 고찰하고, 똑같이명의책봉을받았다고하더라도그내실에는큰차이가있었다는것, 그리고문록 경장의역의담당자라고도할조선국왕선조와도요토미히데요시 ( 豊臣秀吉 ) 사이에는국왕책봉과대명의례 ( 對明儀禮 ) 가의미하는것은크게달랐다는것을밝혀냈다. 이계황위원 : < 한국과일본학계의임진왜란원인론 > 에대한주제로, 한국학계의견해는일본의연구를받아들이면서도도요토미정권내부의모순에초점을맞추는방향과히데요시개인의성향을강조하는방향으로나누어서분석했다. 반면, 일본학계의임진왜란원인에대한견해는패전전에는대부분이히데요시영웅관에입각하여모두 조선불복속론 으로정리했다. 그리고패전후의여러설들의특징은히데요시정권의모순과특질에서그원인을찾고있으며, 내부모순을해결하기위해임진왜란을일으켰다고분석했다.

32 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제 3 주제 : <17~18 세기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 통신사와왜관의의미를포함하여 -> 스카와위원 : 17~18세기동아시아세계에서의다국간관계를이해하기위해서종래에는중국에의한질서설정이중심축이었던것이, 16세기이후의해역세계의급속한유동화, 그리고또하나의축으로서일본의비중증대, 전란, 왕조교체를거친후의 쇄국, 제한무역에따른새로운질서화로변모한국제관계속에서의일한관계를고찰했다. 한명기위원 : 특히왜관문제와관련한대일인식을중심으로다루고, 17~18세기한일관계에서왜관과관련되어나타나는조선의대일정책과인식에대해서고찰했다. 조선은임진왜란직후의곤란한시대상황에떠밀려본의아니게왜관의재건을허용했지만, 이후 왜관문제 를처리하는과정에서는명 청과의외교관계와연동하여왜관문제를처리하고, 일본과의우호를유지하면서도국가의위엄과체면을지키기위해서고뇌에찬모색을거듭했다고설명했다. 한편, 좌담회에서는발표된주제논문에대한합동토론회를갖고, 그녹취록의전문을수록했다. 좌담회를통해서얻은몇가지성과를소개하면, 우선쟁점이되고있는왜구구성에관해서한일양국이일치된견해를제시했다. 즉 14세기 ~15세기왜구의주요한구성원은이키 ( 壱岐 ), 쓰시마 ( 対馬 ), 마쓰우라 ( 松浦 ) 지방의해민 ( 海民 ) 이라는견해가가장타당하다. 물론고려 조선의해민들이왜구를가장하여왜구가되는형태도있었지만, 그것이왜구의주류는아니라는것을사료상말할수있다 는것으로의견일치를보았다. 그리고임진왜란원인에관해서도보다구체적으로깊이다루었고, 왜관과통신사연구도동아시아전체의틀속에서조명해야하며, 한일관계사를보는시각을새로운방식으로해야할것이라는데에도의견의일치를보았다. 예를들면, 책봉체제에대해서도당시의일한쌍방의인식이크게달랐다는것이밝혀지고, 왜관과통신사를보는데에있어서도거시적이면서동시에미시적인관점이모두동원되어야한다는제안이있었다. 이러한제안은앞으로많은연구자들에게새로운연구의계기가될것으로기대한다. 제2부에서는연구사는고려시대일한관계, 왜구, 조선전기일한관계, 임진왜란을주제로이미발표된연구성과물 ( 논저및각종보고서 ) 를대상으로학설사적관점에서연구사를정리하고, 목록을작성하여첨부하였다. 특히연구사정리를통해서제1기에서는다

33 머리말 7 루지않았던 고려시대일한관계, 왜구의주체및구성원 에대한연구성과를추가하고, 임진왜란연구에대한학설사적검토, 그리고제1기에이어서 < 조선전기일한관계 > 에대한한국측연구성과를소개했다. 또일본측에서는일본에서의왜관 통신사연구의현황에대해서도보고했다. 제3부에서는 < 중근세일한관계사료해제집 > 을수록했다. 일본측에서는사에키위원이중심이되어작업을진행하여, 일본에서공간 ( 公刊 ) 된일한관계사사료에대해서목록 해제를작성했다. 한국측에서는손승철 김강일편으로조선시대한일관계사료 73종을, Ⅰ. 기년및편년사서, Ⅱ. 등록류 ( 謄録類 ), Ⅲ. 실학자문집, Ⅳ. 외교자료집, Ⅴ. 일본사행록 ( 日本使行録 ), Ⅵ. 포로 표류기록, Ⅶ. 문집류 Ⅷ. 기타사료집등으로분류하여 < 조선시대한일관계사료해제집 > 을작성하고, 이상훈편으로임진왜란관련사료 54종을 Ⅰ. 관찬사료, Ⅱ. 친필필사본류 ( 親筆筆寫本類 ), Ⅲ. 야담야사류, Ⅳ. 문집류, Ⅴ. 실기류 ( 實記類 ), Ⅵ. 문집속의일기류등으로분류하여 < 임진왜란관련사료해제집 > 에수록했다. 앞으로일한관계사연구에관심을가진사람들에게도움이될것을기대한다. 마지막으로무엇보다도공동연구를함에있어제2분과에서는상호이해하고, 신뢰하고, 존중하면서내실있는연구를진행시킬수있었다. 그것은공동연구에있어서자신들의견해만이옳고, 그것과일치하지않는견해는잘못이다, 혹은자신들은우월하고상대는열등하다고하는그릇된태도로써상대를대하는것이아니라, 동일한역사적사건이나대상을가지고어떠한이해와관점의차이가있는지, 그리고그차이는무엇에서유래하는것인지를같은역사학도로서스스로의역사이해와역사인식, 그리고역사연구의본연의모습을역사학적고찰의대상으로볼수있었기때문일것이라고생각한다. 역사학의시선은과거에만향해있는것이아니라, 현재의스스로에대해서도향해있어야하는것이라는것을감히강조하고싶다. 그리고제2분과의활동을사무국으로서뒷받침해준일한문화교류기금의아이사키코 ( 相沙希子 ) 씨,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정진아 ( 丁珍娥 ), 신유원 ( 申裕媛 ) 씨에게양국위원일동모두감사드린다.

34 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활동보고 제 1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7 년 6 월 23 일 ( 토 ) - 장소 : 동경, 뉴오타니호텔 회의내용 1. 연구주제에대하여검토 2. 향후분과활동의진행방법 ( 개최지가일본인경우에는일본측간사가사회진행을담당하고, 한국인경우에는한국측간사가사회진행을담당하였다.) 제 2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7 년 8 월 24 일 ( 금 )~26 일 ( 일 ) - 장소 : 제주도, 서귀포 KAL 호텔 회의내용 1. 연구주제및연구방침에대하여 2. 학설사및연구협력자에대한검토 3. 보고서구성에대하여 4. 향후분과활동의진행방법

35 활동보고 9 주요답사지 국립제주박물관 항몽삼별초유적지 추사김정희유배지 제주민속촌 제주민속박물관 제 3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7 년 10 월 12 일 ( 금 )~14 일 ( 일 ) - 장소 : 일본후쿠오카소라리아西鉄호텔 회의내용 1. 한일양국의중근세한일관계사료현황에대한발표 2. 일본측연구협력자 5인승인 3. 보고서구성에대하여 4. 향후분과활동의진행방법 주요답사지 나고야성( 名護屋城 ) 박물관 원구방루적( 元寇防塁跡 ) 후쿠오카시박물관 규슈국립박물관

36 1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제 4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7 년 11 월 24 일 ( 토 ) - 장소 : 서울롯데호텔 회의내용 1. 한국측공동연구자의승인 2. 연구보고서구성과내용에대한검토 3. 제2차전체회의제2분과공동연구진행사항보고내용에대한검토 4. 향후분과활동의일정및개최지검토 제 5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8년 1월 24일 ( 목 )~27일( 일 ) - 장소 : 오키나와현나하시, 오키나와현립박물관회의내용 1. 보고 1) 일본에서왜구연구의학술사적검토 ( 中田稔 ) 2) 왜구연구의학술사적검토 ( 金普漢 ) 2. 향후분과활동의일정및개최지검토 주요답사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수리성( 首里城 ) 나가구스쿠( 中城城 ) 오키나와현립평화기념자료관

37 활동보고 11 제 6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8 년 3 월 21 일 ( 금 )~23 일 ( 일 ) - 장소 : 대구에어포트호텔 회의내용 1. 보고 1) 16세기일조교류사연구의학술사적검토 ( 荒木和憲 ) 2) < 文祿 慶長의役 > 연구의학설사적검토 ( 中野等 ) 3) 조선전기한일관계사연구의학술사적검토 ( 韓文鐘 ) 2. 향후분과활동의일정및개최지검토 주요답사지 우록동김충선관련유적 해인사 제 7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8년 6월 7일 ( 토 ) - 장소 : 동경빌라폰테뉴호텔회의내용 1. 보고 1) 10~13세기전반에있어서의일려관계사의제문제 ( 森平雅彦 ) 2) 일본에서의왜관연구현황 ( 山口華代 ) 3) 고려전기한일관계사연구현황 ( 李在範 ) 2. 사료해제집의체재와내용에대하여

38 1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3. 향후분과활동의일정및개최지검토 주요답사지 요코하마개항자료관 가나가와현립역사박물관 제 8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8 년 8 월 22 일 ( 금 )~24 일 ( 일 ) - 장소 : 한국진주시진주박물관 회의내용 1. 보고 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 朝鮮 琉球 日本에있어서対明外交儀禮의관점에서-( 桑野栄治 ) 2) 임진왜란의학설사적검토-한국의연구를중심으로-( 盧永九 ) 3) 한국의임진왜란연구현황과한일의임진왜란원인론 ( 李啓煌 ) 2. 공동심포지엄운영방식에대하여 3. 향후분과활동의일정및개최지검토 주요답사지 김해해군사관학교박물관 제포왜관터 순천왜성터

39 활동보고 13 제 9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8 년 10 월 31 일 ( 금 )~11 월 2 일 ( 일 ) - 장소 : 마쓰야마에히메현민문화회관 회의내용 1. 보고 1) 14~15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 佐伯弘次 ) 2) 14~15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한일관계-왜구의구성문제를포함하여-( 孫承喆 ) 2. 공동심포지엄운영방식에대하여 3. 연구기간연장에대하여 4. 향후분과활동의일정및개최지검토 주요답사지 에히메현역사문화박물관 오즈성( 大洲城 ) 터 강항헌창비 마쓰야마성( 松山城 ) 제 10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8 년 11 월 29 일 ( 토 ) - 장소 : 한국서울롯데호텔 회의내용 1. 보고

40 1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1) 세기동아시아의세계와일한관계 ( 須川英德 ) 2) 세기동아시아의세계와일한관계 ( 韓明基 ) 2. 연구기간연장및향후일정에대한검토 제 11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9 년 2 월 20 일 ( 금 )~22 일 ( 일 ) - 장소 : 가고시마현가고시마시가고시마도큐호텔 회의내용 1. 보고 1) 중근세한일관계사료해제집 ( 佐伯弘次 ) 2) 중근세한일관계사료해제집 ( 孫承喆 ) 2. 좌담회및편집회의일정에대하여 주요답사지 琉球館터 심수관요 玉山神社 黎明館 尚古集成館 제 12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9 년 5 월 22 일 ( 금 )~24 일 ( 일 )

41 활동보고 15 - 장소 : 한국대전시유성호텔 회의내용 좌담회 주요답사지 국립전주박물관 금산사 제 13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9 년 8 월 18 일 ( 화 )~21 일 ( 금 ) - 장소 : 홋카이도삿포로시호텔크레스토삿포로 회의내용 편집회의 주요답사지 松前城 五稜郭 하코다테시립박물관 홋카이도개척기념관 제 14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9 년 11 월 23 일 ( 월 )

42 1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 장소 : 한국서울안국동한국측위원회사무국회의실 회의내용 간사간교열회의 제 15 차한일합동회의 회의일시및장소 - 일시 : 2009 년 11 월 28 일 ( 토 ) - 장소 : 한국서울소공동롯데호텔 회의내용 - 전체회의일정및가제본보고서점검 - 최종보고서제출일정합의 주요답사지 고궁박물관

43 제 1 부논문편 사에키고지 14~15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구와노에이지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 朝鮮 琉球 日本에있어서対明外交儀禮의관점에서- 스카와히데노리 17~18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글로벌히스토리와의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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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19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사에키고지 ( 佐伯弘次 ) 머리말 Ⅰ. 14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원 고려 일본 2. 日元무역의동향 Ⅱ. 14 세기의日麗관계 1. 전기왜구의활동 2. 고려의일본으로의사절파견과일본측대응 Ⅲ. 14 세기후반 ~15 세기초두의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 1. 명의성립과동아시아해역세계 2. 동아시아해역세계의확대와琉球의대두 Ⅳ. 15 세기의日朝관계와동아시아 1. 왜구에서통교자로 2. 중세日朝관계의특질과사절왕래 3. 동아시아속의應永의外寇 ( 己亥東征 ) 4. 日朝통교체제의정비와對馬 三浦 5. 교역품과環중국해세계맺음말 머리말 본고에부여된주제는 <14~15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日韓관계 ( 왜구구성문제를포함 )> 에대해, 일본사의입장에서논하는것이다. 14~15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를총체적으로논하는것은어렵다. 왜냐하면동아시아세계의중심인중국의경우 14세기후반에몽고민족국가인원으로부터한민족국가인명으로의왕조교체가있었고, 이전후로국제관계나교역관계에커다란변화가나타났기때문이다. 당연한일이지만주변의모든국가도이국제관계의변화에대응하지않을수없게되어, 각각의국가는왕조의교대나정치적통일, 군사적통일로향하여중국만이아니라近隣의국가와도새로운관계를구축하게된다. 본고에서는일본을관점으로하여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과日韓관계 ( 日麗관계 日

46 2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朝관계 ) 에대하여개괄적으로논하였다. 첫째 14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에대하여논한다. 14세기제3 4반기까지의동아시아해역세계의주요한구성국은원 고려 일본이었다. 이삼자의국제관계는 13세기중후기고려의몽고로의복속과일본에대한몽고습래 ( 元寇 ) 를큰계기로하여원 고려와일본은긴장된전쟁의시대를맞이하였다. 그러나일본과원은한편으로는대립하면서, 한편으로는활발한경제적 문화적교류가있었다. 두번째, 14세기의일본과고려의관계를논한다. 그주요주제중하나가이른바전기왜구의문제이다. 구성원의문제도포함한전기왜구를둘러싼제문제에대해당시의일본, 고려 조선, 중국등동아시아제국에있어서왜구에대한이해를중심으로검토하고자한다. 나아가왜구문제의발단이된고려와일본의교섭을고려사신의來日과일본측의대응의관점에서서술한다. 셋째, 명성립직후인 14세기후반~15세기초두의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에대해명의성립이동아시아해역세계에미친영향과교역관계의확대에대하여논한다. 넷째, 15세기의일조관계와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에대하여파악한다. 다양한요인에의해전기왜구가통교자로변질되는모습과중세日朝관계의시기구분과특질에대하여서술한다. 나아가日朝관계의커다란전환점인応永의外寇 ( 己亥東征 ) 에대해서동아시아와의관련에서파악하고, 그후의日朝관계의추이를통교체제의정비의관점에서서술한다. 마지막으로日朝간에교역된물품중동남아시아산물품에주목하여, 경제적인관계가동아시아라는스케일을초월하여전개되고, 그것이당시日朝관계에도크게반영되고있음을서술한다. Ⅰ. 14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원 고려 일본 13세기동아시아는몽고 ( 원 ) 의동향의커다란영향아래있었다. 몽고의공격을받은고려는수도를개성에서강화도로옮기고저항하였으나, 1259년에몽고에굴복하고臣属하게되었다. 고려는원의책봉을받고그번속국으로서원의영향을강하게받게되었다.

47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21 일본은 1274년과 81년에두차례에걸친원 고려의공격을받았으나모두결과적으로격퇴하였다. 그후에도원의일본招諭는계속되었지만일본은이것을받아들이지않았고, 1299년元使一山一寧의来日을끝으로일본招諭는없어졌으며, 일본과원의외교관계는성립하지않았다. 그러나일본과원의무역은文永의役후에도이루어졌고특히쿠빌라이사후활발해졌다. 원의해외원정은安南 참파 버마 타이등동남아시아에도이르렀고, 대부분의원정은실패하였지만많은국가가원에입공하는결과를초래하였다. 이에따라중국에서부터동남아시아 인도양을경유하여페르시아만에이르는해상루트가형성되었고세계통상권이형성되었다고한다. 1) 14세기대초기인 1305년, 몽고제국은지금까지격렬하게항쟁해온大元우루스파와反大元우루스파가화해하고동서화합의시대를맞이하게되었다. 2) 그러나이시대의원은빈번하게황제가바뀌고반란이나天災가일어나정치적으로안정되지못했다. 제3 대황제인武宗 (1307년즉위 ) 부터제10대인寧宗 (1332년즉위 ) 까지약 25년간 8명의황제가연이어즉위하고있다. 당시원의정치가얼마나불안정했는지를알수있다. 당시중국사회에서는불교의일파인백련교가확산되어그신자를중심으로반란이빈발하였다 ( 홍건의난 ). 이난은눈깜짝할사이에퍼져원의치세를위협하였다. 陳友諒 朱元璋 張士誠등의群雄이할거하였고원은이들을토벌할수없었다. 결국 1368년朱元璋에의해원은몽고고원으로물러나게된다. 같은무렵, 고려에서는元順帝의황후를낳은奇氏가세력을떨쳤으나이윽고恭愍王에의해배제되었다. 3) 공민왕은원으로부터자립을도모하고자하였으나왜구와홍건적의침입, 개혁의좌절등으로인하여순조롭지는않았다. 명건국후고려는명의책봉을받게되었다. 그러나공민왕은 1374년에암살되었고, 원 ( 북원 ) 과의관계도부활한다. 이러한가운데최영과이성계가대두했는데, 결국이성계가승리하여 1392년조선을건국한다. 일본에서는 1333년에鎌倉幕府가멸망하고建武정권이탄생하였으나오래지속되지는못했고, 긴남북조내란을맞이하기에이르렀다. 1336년에는京都에室町幕府가창설되어새로운武家政治가전개되었다. 1349년室町幕府에서내부항쟁이일어나내란으로 1) 西嶋定生, 1985 日本歴史の国際環境 ( 東京大学出版会 ) 2) 杉山正明, 1997 < 元 > 世界歴史大系中国史 3 ( 山川出版社 ) 3) 森平雅彦, 2008 < 高麗 >, 田中俊明編 朝鮮の歴史 ( 昭和堂 )

48 2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발전하였다 ( 観応의擾乱 ). 南朝도가세하여삼파전으로뒤얽힌항쟁이되어남북조의정치적혼란은정점에달하였다. 九州에서는足利直義의양자인足利直冬의세력이강성하였다. 4) 이시대동아시아와의관계의창구였던九州의정치정세는중요하다. 南朝는吉野에거점을두고있었으나정치 군사적으로는북조 = 室町幕府세력쪽이南朝를압도하고있었다. 그러나九州는예외로後醍醐천황의皇子인懐良親王이征西将軍으로써일부武家들의지지를얻고있었다. 1361년懐良親王은大宰府로들어가北朝세력을압도하였다. 그후室町幕府의九州探題가된今川了俊이九州로下向하여南朝세력을역으로압도하였고懐良親王등은大宰府에서筑後 肥後로도망갔다. 1375년今川了俊은少弐冬資를肥後国水島에서誘殺하여유력수호가인少弐氏의움직임을억누르는데성공했다. 今川了俊의우위는 1392년남북조합일이후에도계속되었다. 2. 日元무역의동향 1274년文永의役에의해원은일본의적국이되었다. 그러나 1277년에일본상선이원으로가서원으로부터무역을인정받고있었듯이, 日元무역 5) 은日宋무역을계승하는형태로이루어져양국의경제 문화면에서의교류는계속되었다. 이것은원이무역품에관세를부과하고, 국고수입으로써무역을장려하였던것에서도기인한다고생각된다 년 4월에五島에서난파한藤太郎入道忍恵의 唐船 은일본에서중국으로향하는日元무역선이었는데, 得宗 ( 北条氏의嫡流家 ) 과그관계자의짐을싣고있었던것을알수있다. 14세기가되면日元무역에특징적인형태가나타난다. 寺社造営料唐船이라고하는형태이다. 이것은종래造営料国과造営料所가설정되어造営이행해졌던大寺社의건설비용을변통해내기위해日元무역의이윤으로충당하게되었던것이다. 이무역에의한건설비용조달은이후의日明무역과日朝무역에도나타나기때문에그것들의선례형태라고평가할수도있다. 寺社造営料唐船은公許船이라고도하며, 파견할때조정과막부의허가가필요했다고한다. 6) 오늘날알려진가장오래된寺社造営料唐船의사례는 1306년귀국한相模 称名 4) 川添昭二, 1981 中世九州の政治と文化 ( 文献出版 ) ; 同 1994 九州の中世社会 ( 海鳥社 ) 5) 森克己, 1975 新訂日宋貿易の研究 ( 国書刊行会 ) ; 佐伯弘次, 2003 日本の中世 9 モンゴル襲来の衝撃 ( 中央公論新社 ) ; 榎本渉, 2007 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 - 九 一四世紀 - ( 吉川弘文館 )

49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23 寺造営料唐船이다. 称名寺는金沢北条氏의菩提寺이기도한律宗寺院이다. 이후 1315년경귀국한鎌倉 極楽寺造営料唐船, 1323년경의京都 東福寺造営料唐船, 1325년파견된鎌倉 建長寺造営料唐船 ( 建長寺船 ), 1328년혹은 1329년파견된鎌倉 関東大仏造営料唐船, 1333년무렵의摂津 住吉社造営料唐船, 1342년파견된京都 天龍寺造営料唐船 ( 天龍寺船 ), 1367년에계획되었던療病院造営料唐船등이알려져있다. 전체적으로는北条氏와足利氏, 九条家등당시권력자와관계가깊은寺社가많다. 鎌倉 室町두幕府가보호한禅宗寺院이많은것은당연한일이지만, 律宗寺院도많아律僧과日元무역이라고하는관점에서의연구도중요하다. 鎌倉時代는鎌倉과그주변의寺社가대부분이며남북조시대가되면京都의寺社가많아지는것도당연한결과였다. Ⅱ.14 세기의日麗관계 1. 전기왜구의활동 7) 전기왜구가활동한 1350년이전에도왜구의활동이있었다. 13세기전반에작은절정을맞이한왜구를초기왜구라고부른다. 14세기가되면원에대한왜구활동이행해졌다. 이것은元寇를계기로원측이일본상인에대하여박해하였고이에대한일본상인의자위적인폭력행위가해적단의발생 전개로이어졌다는설 8) 이있으나, 근년의연구 9) 에서는이러한일본인의 왜구 행위는원측의현지役人의일본상인의侵漁에대한폭동사건이며, 결코조직적 계획적인해적행위는아니었다는것이밝혀지고있다. 1323년 6월에왜가会元의漕船을群山島에서약탈하고, 楸子島를습격하여남녀노소를잡아간사건 10) 이발생했다. 漕船의습격과피로인의약탈은전기왜구의특징이기도하며, 전기왜구와관련된해적행위라고할수있다. 따라서 庚寅이래의왜구 는소수이지만 14세기전반부터이미발생하고있다는점을확인해두고싶다. 6) 森克己, ) 이하서술은佐伯弘次, < 日本侵攻以後の麗日関係 > 265~269 韓日文化交流基金 東北亜歴史財団編, 2009 モンゴルの高麗 日本侵攻と韓日関係 ( 景仁文化社 ) 를근거로하였다. 8) 森克己, 1975, 第 3 編 9) 榎本, 2007, 第 2 部第 1 章 10) 高麗史 世家, 忠粛王 10 年 (1323) 6 月丁亥, 同戊子条

50 2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1350년 2월, 왜가固城 竹林 巨済를습격하였다. 11) 合浦千戸崔禅등이이들과싸워 300여급을참획하였다. 왜구의침략, 여기에서시작된다 고 高麗史 에기록되어있듯이이사건이후왜구의활동이급격히활발해져한반도를빈번하게습격하게되었다. 倭賊祈穣法席 12) 倭賊防禦使 13) 라고하는어구가 高麗史 에종종보이듯이당초왜구는고려정부에서 왜적 으로부르고있었던듯하다. 이러한전기왜구에관해서는오랜연구사 14) 가있는데, 그활동에관해서는몇가지시기구분이되어있다. 田中健夫氏는크게 4시기로구분하였다. 15) 제1기는 1350년 2월이후의초기단계, 제2기는공민왕시대 (1352년 74년) 로왜구활동이본격화된시기, 제 3기는왜구활동의최전성기로신우왕 (1375년 88년) 대에극점에달한다. 제4기는왜구세력의감퇴기로, 고려공양왕시대부터조선太祖 定宗 太宗의시기에해당한다. 그커다란계기가되었던것이 1389년 2월고려군에의한對馬공격이었다고한다. 田村洋幸氏는크게초기 중기 종언기의 3기, 자세하게는 6기로시기구분하고있다. 16) 빈도가적은초기는 1350년 73년으로, 왜구에대한無策의시기인전반기 (1350년 62 년 ) 와적극적으로倭人招致策을세우고점차일본에禁賊을요청한후반기 (1364년 73 년 ) 로나눈다. 최전성기인중기는 1374년 89년이며, 왜구창궐기인전반기 (1374년 80 년 ) 와점차衰勢해가는후반기 (1381년 89년) 로나눈다. 왜구종언기는 1390년 1418년으로, 소규모의비조직적왜구와대선단왜구가혼재하는전반기 (1390년 1400년) 와소규모화되는후반기 (1401년 18년) 로나눈다. 양자의시기구분은상세한연대에대해서는상이하지만, 1350년이후점차증가하여신우왕시기에최전성기를맞이하고고려말부터조선초기에쇠퇴한다고하는흐름은공통된다. 일본에서의기존의통설 17) 은왜구의주요한목적이漕船 倉稟등의습격에의한식량의약탈과사람의약탈로여겨져왔다. 그근거지의중심은対馬 壱岐 松浦지방인 三島 지역이며, 발생의주요한원인은농업생산에의해서는島民의생계를유지할수없다 11) 高麗史 世家, 忠定王 2 年 2 月条. 12) 高麗史 世家, 忠定王 2 年 2 月壬寅条. 13) 高麗史 世家, 恭愍王 12 年 4 月己未条. 14) 前期倭寇에관한研究史는본보고서에수록된中田稔 < 日本における倭寇研究の学説史的検討 > 를참조하기바란다. 15) 田中健夫, 1961 倭寇と勘合貿易 ( 至文堂 ) 11~14 16) 田村洋幸, 1967 中世日朝貿易の研究 第 2 章 ( 三和書房 ) 17) 田中健夫, 1959 中世海外交渉史の研究 ( 東京大学出版会 ) ; 田中, 1961 등.

51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25 는 三島 의경제적사정이었다고한다. 게다가고려 조선측의외교정책과왜구회유정책 등에의해왜구는向化倭 ( 投化倭 ) 와使送倭人 興利倭人등으로변질해갔다고여겨졌다 년대후반일본에서는지금까지의왜구의이해를크게변화시키는연구가잇달 아나왔다. 田中健夫氏 18) 는대규모집단왜구의실체를검토하고, 대량의인원 선박 馬 匹의해상이동을고려하면왜구가일본인만의해적집단이라고하는생각은부자연스러 우며, 대규모왜구집단은일본과고려 조선양국인민과의연합에의하여성립했다고 하는설을제시하였다. 한편高橋公明氏 19) 는倭服을입고倭語를말하며각지를이동하는제주도의해민을 검토하던중에왜구에조선국내의상당한해상세력이관여하고있었고, 그기반부를제 주도의海民이담당하고있었다는설을제시하였다. 일본에있어서이두연구자의새로운견해는왜구연구에커다란영향을주었지만, 한편으로는다양한비판의대상이되기도하였다. 浜中昇氏 20) 는이러한田中健夫氏 高 橋公明氏의견해에비판을가하였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의엄청난왜구기사중 에고려백성이사칭하여왜적이되었다는것을보여주는사례는 2 건에지나지않으며, 倭人不過一二 라고하는 1446 년李順蒙의발언은뒷받침할사료가없다는점, 고려 조 선의禾尺 才人들이도적행위를저지른기사는많지만그들과왜인들과의연합을나타 내는사료가없다는점, 제주도등의海民을해적집단으로조직하려고한주체는조선 국내에는없었고, 한반도남부의海民이고려말기왜구로참가했다고하더라도개별적 인차원에그쳤다는점, 왜인 일본인에의한대규모왜구는가능하다는점등을지적하 고, 한반도남부의海民이개별적으로참가했을가능성은있지만, 왜구를구성한것은 기본적으로왜인혹은일본인이었다고하였다. 村井章介氏 21) 는禾尺 才人들이해적을위장했던일은있었으나그것은그들이왜적과 연합하여하나의집단이되어왜구행위를했다는것을나타내는것은아니라는점, 이순 몽의말은국가의役을피하고있는자가굉장히많아군대의수가부족해졌다는문맥 아래쓰여진것이며그대로신용할수없다는점을지적하여田中의주장을비판하였다. 18) 田中健夫, 1987 < 倭寇と東アジア通交圏 > 日本の社会史 1 ( 岩波書店 ) 19) 高橋公明, 1987 < 中世東アジア海域における海民と交流 - 済州島を中心に -> 名古屋大学文学部研究論集史学 33 ; 同, < 海域世界のなかの倭寇 - 朝鮮半島を中心に -> 勝俣鎮夫編, 2000 ものがたり日本列島に生きた人たち 4 文書と記録下 ( 岩波書店 ) 20) 浜中昇, 1996 < 高麗末期倭寇集団の民族構成 - 近年の倭寇研究に寄せて -> 歴史学研究 ) 村井章介, < 倭寇の他民族性をめぐって > 大隅和雄 村井章介編, 1997 中世後期における東アジアの国際関係 ( 山川出版社 )

52 2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李領氏 22) 는경인년의왜구는足利直冬의攻勢에당황한少弐頼尚이対馬의軍勢를동원하여병량미를구하러고려에침공해온것이라고하는새로운견해를제시하고, 왜구는해적으로한정해서는안되며오히려악당이라고하는보다넓은사회적계층이며, 대부분의왜구집단은공권력, 특히南朝측과강하게결탁되어있었던점, 田中健夫氏의禾尺 才人 = 倭寇論에관해서는대규모禾尺 才人이왜구와연합한것을입증할수있는사료는없다는점, 高橋公明氏의済州島人 = 倭寇論에관해서는제주도인이왜구라는것을보여주는사료는전무하다는점, 倭寇 = 高麗人主体論을말한이순몽에관해서는왜구에관한기사가傳聞에근거한것이며이순몽의인격 성향이 狂妄 이라고되어있어그발언도신용하기어렵다는점을지적했다. 이상세명의견해는田中氏 高橋氏의새로운견해를정면에서비판한것으로전기왜구의주체를일본인과고려 조선인의연합이나고려 조선인이라고하는이해는재검토해야한다고말할수있다. 오히려舊説인일본인주체설이재검토되고있다. 23) 단, 경인년의왜구 는少弐氏가파견한것이라고하는李領氏의견해에일본학계는부정적이다. 24) 고려 조선측의사료에는예를들어 三島倭寇爲我國患, 幾五十年 25) 과같이 三島 와 三島倭寇 의표현이보인다. 조선측은왜구의주체는이러한일본의 三島의왜구 로보고있다. 이 三島 는전술한것처럼壱岐 対馬 松浦지방이라는것이확실시되고있다. 26) 왜구의주체가누구였는가를규명하는일이어려운것은왜구측의명확한사료가남아있지않기때문이다. 또왜구에관한일본측사료도고려 조선측의사료에비하면근소하다. 그러나왜구에관한일본의국내사료와왜구에관한일본측사료 발언을고려 조선측이기록한것은존재한다. 예를들어서 1366년의고려사절의來日에대하여기록한 太平記 27) 에는왜구의원인을 40여년간本朝는크게혼란스러웠고외국도잠시도조용하지않았다 고하고, 本朝 ( 일본 ) 와외국 ( 원 고려 ) 이정치적혼란상황에있었던점에서찾고있다. 그리고일본에있어서는남북조의동란으로산적 해적이격증하여 결국이도적들일당이수천척의배를모아元朝 고려의해안가를습격하고, 明州 福 22) 李領, 1999 倭寇と日麗関係史 第 4 章 第 5 章 ( 東京大学出版会 ) 23) 橋本雄 米谷均, 2008 < 倭寇論のゆくえ > 桃木至朗編, 海域アジア史研究入門 ( 岩波書店 ) 24) 森茂暁, 2005 南朝全史 ( 講談社 ) ; 橋本 米谷, ) 定宗実録 元年 5 月乙酉条. 26) 田中, 1961, 14~15 27) 日本古典文学大系, 1962 太平記三 ( 岩波書店 ) 에의함.

53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27 州의재물을탈취하였다. 관청과寺院을불태우는동안元朝 三韓의관리와백성들은이 를막기힘들어서포구가까운나라수십개국에거주하는사람도없이황폐하게되었다 고왜구의활동을기록하고있다. 일본국내에서는왜구에관한보기드문기술이다. 이기술후에, 賊船이異国을犯奪하는것은모두四国九州의海賊들이저지르는일 이라고하여이시기의왜구의주체를 四国九州의海賊들 이라고한점도주목된다. 이때의사절이가져온征東行中書省牒 28) 에는왜구의주체를일본의 島嶼居民 이라고하였다. 1376년高麗使羅興儒의귀국시에室町幕府에서보낸서간형식의답서에도왜구의주체를 西辺海道頑民 이라고기록하고있다. 西辺海道 를西海道로해석하면九州의사람들이된다. 室町幕府측은九州의사람들을왜구의주체로보고있었다. 1395년 九州探題今川了俊은조선으로사신을보내 蒙諭禁賊之事, 罄力於一岐 対馬已久矣, 海中寇賊, 以舟為家, 従風便無着落之処, 今比于旧日, 賊輩十之八九減少焉 라고말하고있다. 29) 고려로부터왜구금압의요청을받아壱岐 対馬에힘을다했는데, 바다의왜적들은배로집을삼고, 바람이부는대로정착하여일정한곳이없었으나, 지금은옛날에비하여적의무리들이 8할 9할은감소했다 고언급하고있으며, 왜구들의거점을壱岐 対馬로보고있다. 1402년 8월, 제1차遣明使일행이明使를따라서일본으로귀국했다. 일행이兵庫에도착하여京都로들어가기전에足利義滿은薩摩守護島津伊久에게왜구금압을명하였다. 30) 足利義滿의재빠른왜구대책이주목되는데, 이사료에 鎮西辺賊船等, 連々令渡唐, 以便宜在所及狼藉 이라고하였다. 연이어唐에건너가난폭한짓을한 鎭西辺賊船 은다름아닌왜구이다. 室町幕府는당시왜구를九州지방의해적선으로보고있다. 1404년明永楽帝가일본국왕足利義満에게준勅書에는義満이 禁止壱岐 対馬 諸島之人, 不為海浜之害 한것을칭찬하고있다. 31) 이영락제칙서에는중국을습격한왜구를 壱岐 対馬 諸島之人 으로보고있다. 게다가 1406년의칙서에서도영락제는왜구를 対馬 壱岐等遠島海寇 로표현하고있다. 32) 동시기의 명실록 에서도 対馬 壱岐曁諸小島, 有盗潜伏, 時出寇掠 으로기록하고있다. 33) 이러한표현에서명측도왜구의근거 28) 中村栄孝, 1965 日鮮関係史の研究上 第 6 章 ( 吉川弘文館 ) 29) 太祖実録 4 年 7 月辛丑条. 30) < 旧記雑録 > 前編 23, 応永 9 年 8 月 16 日足利義満御判御教書 ( 鹿児島県史料旧記雑録前編 2 所収 ). 31) 善隣国宝記 巻中, 永楽 2 年 12 月初日永楽帝勅書 ( 田中健夫編, 1995 善隣国宝記 新訂続善隣国宝記 ( 集英社 )) 32) 善隣国宝記 巻中, 永楽 4 年正月 16 日永楽帝勅書 ( 同前 ).

54 2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지를壱岐 対馬 諸島와北部九州의島嶼部로인식하고있었음은분명하다. 이것은명과통교하며明帝에게왜구의수령을자주헌상한일본국왕足利義満측의인식을반영한것으로사료된다. 1434년明使가來日하였을때, 明使는 賊船 의정지와 賊船 에포획된 唐人 즉被虜明人의송환을요구하였다. 이에대하여将軍足利義教의브레인이었던醍醐寺의승려満済는 賊船의일은壱岐 対馬의사람들이주로하고있다 고하였다. 34) 왜구의주체는壱岐 対馬사람들이라고하는것이다. 신숙주의 海東諸国紀 35) 에는 200인에가까운일본인통교자를기록하고있다. 그중에는 安芸州海賊大将藤原朝臣村上備中守国重 伊予州鎌田関海賊大将源貞義 出雲州留関海賊大将藤原朝臣義忠 豊前州簑島海賊大将玉野井藤原朝臣邦吉 등등 海賊大将 을자칭하는영주의이름이산견된다. 그러나이들은모두偽使라는점이지적되고있어 36) 기사를그대로믿을수는없다. 한편 海賊首 賊首 라고기록된인물도산견된다. 이들을표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 表 1> 海東諸国紀 에나타난海賊首 人名 島名 浦名 記事 備考 護軍多羅而羅 対馬 仁位郡 賊首 平松家継 中枢平茂続 対馬 土寄 賊首早田의子 護軍阿馬豆 対馬 佐賀 海賊首宮内四郎의子 원래壱岐本居浦에산다 護軍井可文愁戒 対馬 加志 父賊首井大郎 護軍皮古仇羅 対馬 黒瀬 海賊首護軍藤茂家의子 護軍三甫郎大郎 壱岐 本居 賊首護軍藤永의継子 海東諸国紀 가성립한 1471년경은왜구가종식된시기에해당하기때문에賊首의아들로기록된것이일반적이다. 그들은対馬와壱岐바다의領主들이다. 그근거지는対馬에서는浅茅湾연안의포구들과宗氏의守護所소재지로日朝関係의거점 ( 佐賀 ) 에있으며, 壱岐에서는本居浦에한정된다. 이러한포구들이왜구를조직하는영주들의거 33) 明実録 永楽 4 年正月己酉 (18 日 ) 条. 34) 満済准后日記 永享 6 年 6 月 17 日条. 35) 田中健夫訳注, 1991 海東諸国紀 ( 岩波文庫, 岩波書店 ) 에의함. 36) 長節子, 2002a < 朝鮮前期朝日関係の虚像と実像 - 世祖王代瑞祥祝賀使を中心として -> 年報朝鮮学 8

55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29 점이며그수하에있는왜구들의거점과도중복되는것으로생각된다. 이상과같이전기왜구의주체는壱岐 対馬 松浦를중심으로하는北部九州島嶼部의海民과領主들이며, 특히壱岐 対馬의海民 領主가중심이라는것이일본 고려 조선 명등동아시아각국의공통된인식이었다. 이것이단순한국가레벨의표면적인인식이아니었다는것은실제로왜구금압과피로인송환에진력한今川了俊도같은인식을하고있던점에서알수있다. 중국에서활동했던전기왜구에관해서는元시대에대한사료는부족하지만 1358년 63년경왜구는매년연해의군현을습격하고있었다. 37) 元末의왜구에대해서는方国珍등群雄의반란과관련지어연구가이루어져왔다. 浙江沿海部를거점으로한方国珍은그수하에舟山列島등의海民이있었고, 그들이 島夷 즉왜구와결탁하여해적활동을하고있었다는점, 方国珍과張士誠의사망후그수하인 諸豪 는망명하여 島夷 와손을잡고중국연해에入寇한것등이지적되고있다. 38) 일본의왜구와중국연안부의해상세력과海民이직접결합할수있었는지, 혹은어떠한매개가있었던것인지는알수없다. 이러한왜구와중국연해부의해민의연합에의한중국연해로의入寇와고려로의습격이어떤관계가있는지금후검토되지않으면안된다. 왜구는동아시아전체에서활동했으며, 동아시아적스케일에서검토해야할시기에와있다. 2. 고려의일본으로의사절파견과일본측대응 39) 가. 金竜 金逸의来日 (1366 년 ) 倭寇의활발화라고하는상황에직면한고려는왜구금압을요청하는사자를일본에 파견하였다 년 9 월, 고려의사자金竜등이出雲에도착하였다. 40) 金有成의遣使이 37) 榎本渉, 2007 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 - 九 一四世紀 - ( 吉川弘文館 ) 177~180 38) 奥崎裕司, 1990 < 方国珍の乱と倭寇 >, 明代史研究会編 山根幸夫教授退休記念明代史論叢上 ( 汲古書院 ) ; 藤田明良, 1997 << 蘭秀山の乱 > と東アジアの海域世界 > 歴史学研究 698 ; 熊遠報, 1997 < 倭寇と明代の < 海禁 >- 中国学界の視点から > 中世後期における東アジアの国際関係 ; 檀上寛, < 方国珍海上勢力と元末明初の浙江沿海地域社会 > 京都女子大学東洋史研究室編, 2003 東アジア海洋域圏の史的研究 ( 京都女子大学 ) 39) 이하의서술은佐伯弘次, 2009, 270~274 를근거로했다. 40) 金竜 金逸의来日에관해서는青山公亮, 1955 日麗交渉史の研究 第 8 章 ( 明治大学 ) ; 中村栄孝, < 太平記 に見える高麗人の来朝 > 同, 1965 日鮮関係史の研究上 第 6 章 ( 吉川弘文館 ) ;

56 3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래실제로 70여년만의遣使이다. 일행은出雲에서方物을빼앗겼으나다음해 2월에上京하여天龍寺에서숙박하였다. 같은절에서의숙박은室町幕府의조처였다고생각된다. 그들보다약간늦게고려에서金逸이별도로도착하여같은天龍寺에숙박하였다. 당초京都에서는 蒙古및高麗使가牒状을가지고来朝하였다 는소문이퍼졌는데, 이후고려사자임이판명되었다. 金竜이지참한 牒状 ( 외교문서 ) 은室町幕府를거쳐조정에전달되었다. 蒙古襲来시의대응과같았다. 이일련의고려의외교문서는현존하고있다. 이에따르면元의征東行中書省 ( 고려왕이長官 ) 이일본국에대하여至正 10년 (1350) 이후일본의賊船다수가고려를습격하고, 관청을불태우며, 민중을괴롭히고있기때문에일본이海島에대하여엄중하게금압을가하도록의뢰한것이었다. 게다가 高麗史 世家恭愍王 15년 11월壬申條에의하면늦게파견된金逸의파견목적도 일본에가서해적금지를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에서이 첩장 에대한대응을협의하였을때室町幕府는高麗使일행을후하게환대하고奈良 大仏殿을관광시키기도하였다. 같은해 5월에는조정에서고려로 返牒 을하지않기로결정하였다. 이에대하여室町幕府가 返牒 을작성하고, 다양한선물을사절에게주었으며, 天龍寺승려를使者로파견하여일행을송환하였다. 이로써일본의외교를室町幕府가관할하는선례가만들어졌다. 왜구금압요구를위한고려의사자파견은일본에서는朝廷에서室町幕府로외교권이이동하는중요한전환을초래했던것이다. 나. 羅興儒의来日 (1375 년 ) 1375년 2월, 고려는羅興儒를通信使로일본에파견하였다. 41) 高麗史 列傳에의하면나흥유가일본에도착하자일본측은흥유를 첩자 로의심하여체포하였다. 高麗史 鄭夢周傳 에의할때정몽주가구금된곳은博多이며, 博多의主将 ( 九州探題인가 ) 이구금했다고기록하고있다. 고려출신승려良柔가나흥유를보고면죄해줄것을요청했다고한다. 岡本真, < 外交文書よりみた十四世紀後期高麗の対日本交渉 >( 佐藤信 藤田覚編, 2007 前近代の日本列島と朝鮮半島 ( 山川出版社 )) 등참조. 41) 羅興儒이후의遣使에대해서는주로青山, 1955 対外関係史編集委員会編, 1999 対外関係史総合年表 ( 吉川弘文館 ) 을참조했다.

57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31 高麗使者羅興儒以下, 同進物等, 被召上候由事, 去月六日御教書并同月十九日施行案如此, 早 ( 下之 ) 任被仰 旨, 用意人夫 伝馬 雑事以下, 致警固, 可致勘過之由候也, 仍執達如件 永和元年十二月九日 ( 宇野祐頼 ) 備前守判 赤穂郡寺社本所地頭御家人御中 42) 이문서는 1375년 12월 9일播磨守護赤松義村의守護代宇野祐頼가播磨国赤穂郡의寺社本所地頭御家人에대하여高麗使者羅興儒일행과그進物을京都에서몰수했기때문에人夫 伝馬 雑事를준비하여일행을경호하고, 무사히통과시키도록명한것이다. 去月六日御教書 라는것은 11월 6일자室町幕府의문서이며, 同月十九日施行案 은 11 월 19일자播磨守護赤松義村의施行状案을의미하는것이다. 즉 1375년 11월 12월경, 羅興儒일행은京都를향하여播磨国부근을통과하였다. 이러한室町幕府 - 守護의고려사자호송명령은연도의각국 각도에보내졌던것으로생각된다. 東寺領의莊園이었던播磨国矢野莊은이때 高麗人警固并人夫催促郡使両度引出物ㆍ雑事 로 400 文, 同人夫并警固粮物 로 150 文을지출하였다. 43) 이러한외국사절호송을위한인부 傳馬등의부담은沿道의장원영주나무사에게전가되었던것이다. 그후다음해 76년 5월 3일, 近衛道嗣앞으로公家의한사람이왜구금지를요구하는 高麗国牒状 을지참하였다. 44) 道嗣는국가의중대사이므로殿上定을행하도록제의하였다. 그후상세한상황은명확하지않으나, 羅興儒일행은 1376년 10월에귀국하였다. 이때室町幕府는승려良柔를사자로고려에파견하였다. 이때, 禅僧周佐가기록한私信형식의외교문서가 高麗史 신우전에인용되어있다. 여기에는 우리西海道九州는난신들이할거하고年貢을바치지않은것이 20년이상이된다. 西海道의우매한백성들이적의허점을노리고入寇하였다. 우리가한것이아니다. 이때문에조정에서장수를파견하여왜구들을토벌하고그땅에깊이들어가서서로싸우고있다. 바라건대九州를회복하면하늘에맹세코海寇를금지하겠다 는일본측의사정이기록되어있다. 왜구의근거지인九州의지배가달성되지않았기때문에왜구금압이가능하지않다는것이다. 당시室町幕府의사정이직접적으로나타나있다. 42) 東寺百合文書よ函 60, ( 相生市史編纂専門委員会編, 相生市史第 8 巻上 380 < 人夫役文書案 > 6 守護代宇野祐頼遵行状案, 380~381). 또본서의해석문은 羅興僧 이라고했으나, 羅興儒 로고쳤다. 43) 相生市史第 8 巻上 383 < 学衆方年貢等算用状并未進年貢等算用状 > 383~389 44) 愚管記 永和 2 年 5 月 3 日条

58 3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다. 安吉常의来日 (1377 년 ) 이해 8월에일본국은승려信弘을고려에파견하여왜구금압이쉽지않은사정을전하였다. 信弘은室町幕府가아니라九州探題今川了俊이파견한使僧이었음이밝혀졌다. 45) 了俊은다음해 6월信弘에게군사 69인을거느리고왜적을포획하도록하였다. 7 월에信弘은왜구와싸워배 1척을포획하고, 피로부녀 20여명을구출하였다. 11월에다시왜적과싸웠으나승리하지못하고결국귀국했다. 라. 鄭夢周의来日 (1377 년 ) 1377년 6월, 고려는安吉常 ( 吉祥이라고도함 ) 을일본에파견하여禁賊을요청했다. 高麗史 에는이때의國書의일부가인용되어있다. 安吉常은일본에서병사했다고한다. 東寺領播磨国矢野荘의 1377년年貢算用状에는 高麗人上洛人夫催促使雑事 125 文, 同人夫六人 馬二匹粮物 과 同下向時送夫催促使雑事 125 文이기록되어있다. 46) 나흥유때와마찬가지로播磨国沿道의荘園에서人夫 傳馬등이賦課되었던것이다. 이때는고려사절이상경할때와하향할때모두人夫 傳馬의재촉이있었고, 이에노력한것, 이러한재촉을播磨守護代가催促使를파견했고, 催促使의현지방문시에도矢野荘으로부터지출이있었음을알수있다. 이러한부과는播磨일국만이아니라고려사신이통과하는沿道諸國에는동일하게시행되었다고생각된다. 1377년 9월, 고려는정몽주를일본에파견하여禁賊을요청했다. 高麗史 정몽주전에의하면정몽주는博多에서 古今交隣의利害 를 極陳 하여主将 ( 今川了俊?) 을敬服시켰다고한다. 정몽주는일본에서지은 洪武丁巳奉使日本作十一首 를남기고있다. 47) 정몽주는다음해 78년 7월일본에서귀국했다. 九州探題今川了俊은周孟仁을使者로동행시켰고, 尹明등수백인의피로인을송환했으며, 三島 의왜구금압을약속했다. 45) 青山, ) 赤松俊秀編, 教王護国寺文書 第 2 巻, 577 号 < 播磨国矢野荘学衆方年貢等算用状 >( 平楽寺書店, 1961). 47) < 圃隠先生文集 > 巻一 ( 竹内理三 川添昭二編, 1984 大宰府 太宰府天満宮史料 巻十二, 349~351 ( 太宰府天満宮 )) 影印標点韓国文集叢刊 5 ( 景仁文化社 ) 와 1993 韓国歴代文集叢書 21 ( 景仁文化社 ) 에도収録.

59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33 78년 6월 2일에東寺領播磨国矢野荘에守護代로부터 高麗人送夫催促使雑事三ヶ度分 230 文과 同人夫食二人半 馬一匹 이부과된 48) 것은정몽주가京都에서귀국하는도중의일이라고생각된다. 安吉常의사절파견이래室町幕府보다도오히려博多의九州探題와의교섭이중요하게자리를잡았다는느낌이들고, 사절의송환도九州探題가시행하고있다. 高麗史 鄭夢周傳에의하면왜구가고려良家의자제를노예로삼는것을불쌍하게여겨, 피로인의몸값을지불하고귀국시키려고廷臣들에게서각출한자금을기초로원의被虜人이었던尹明을博多에파견하여피로인백여명의송환에성공했다고한다. 피로인송환이사절들의중요한사명이었음을말해주고있다. 49) 마. 李子庸 韓国柱의来日 (1378 년 ) 1378년 10월, 고려는李子庸 韓国柱두사람을일본에파견하여禁賊을요청하고, 今川了俊에게金銀酒器등을선물했다. 다음해 79년 5월韓国柱는귀국하였다. 大内義弘은朴居士에게군사 186인을거느리고韓国柱에게동행시켰다. 같은해 7월에는李子庸이귀국했다. 今川了俊은피로인 230여구를돌려보내고창등을헌상했다. 고려의교섭선은점점더西国의大名들에게이동했다. 바. 尹思忠의来日 (1379 년 ) 1379년윤5월, 고려는尹思忠을일본에파견하였다. 일본에서의활동과귀국한해등자세한것은명확하지않다. 이상과같이고려의왜구금압요청에응한것은외교권을장악하고있던室町幕府가아니라今川了俊과大内義弘이라는西国의유력大名들이었다. 室町幕府가아무런행동을하지않았던것은아니며, 예를들어서 1381년 8월 6일, 大隅守護今川了俊에대하여 당국의악당들이고려에건너가狼藉을일삼고있는데엄중히제지해야한다 고大隅 48) 相生市史第八巻上 403 < 学衆方年貢等算用状 > 407~411 49) 일본에서의被虜人送還에관해서는石原道博, 1956 < 倭寇と朝鮮人俘虜の送還問題 >( 一 )( 二 ) 朝鮮学報 9 10 ; 関周一, 2002 中世日朝海域史の研究 第 1 章 ( 吉川弘文館 ) 등을참조.

60 3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国의왜구금압을명하고있다. 50) 고려의왜구금압요구에막부로서도응하고자했던것이지만, 실제로현지에서금압을시행한것은守護大名과지역의영주들이었다. 今川了俊은많은피로인을고려 조선으로송환하고, 그대가로대장경을요구하기도하였다. 51) 고려사신이금전을가지고피로인의구입 송환을의도했던일에서상징되듯이피로인의송환은무역상의우대나무역그자체의확대라고하는이점이있었다. 이상에서와같이고려의빈번한외교노력은西国의유력大名을주목함에따라어느정도성과가있었다고생각된다. 1380년대후반이되면왜구는감소하는경향이된다. 또하나이시기에주목되는것은 三島 의하나인対馬島主宗氏의동향이다. 高麗史 에의하면 1368년 7월, 對馬島萬戶가고려에사신을보내고토산물을헌상하였다. 고려는윤9월에講究使를對馬에파견, 11월에는대마도萬戶崇宗慶이고려에사신을보내来朝했고, 고려는宗慶에게쌀천석을주었다. 당시의對馬宗氏는本宗家 ( 嫡流家 ) 와庶家인仁位宗氏가島主權을둘러싸고다투고있었는데, 崇宗慶 ( 宗宗慶 ) 은本宗家의宗経茂이며앞의대마도萬戶와도동일인일것이다. 대마도내뿐만아니라북부九州에서도少貳氏의유력家臣으로활동하고있던宗経茂는이무렵부터고려에사신을보내고려와통교관계를맺으려고하였다. 필시宗氏는對馬島근해에있는高麗使의호송에도관여했으리라생각된다. 고려에대한이와같은사신파견과고려에서의쌀지급은다음시대인조선시대에있어서宗氏와조선의관계와공통되는것이며, 對馬宗氏를핵으로 15세기전반에안정되는중세일조관계는 14세기후반인고려말기부터준비되고있었다고할수있다. Ⅲ.14 세기후반 15 세기초두의동아시아해역세계의동향 1. 명의성립과동아시아해역세계 1368 년중국에서는朱元璋 ( 洪武帝 ) 에의해명이건국되고, 元황제는몽고고원으로철 수하였다. 홍무제는즉위하자주변국가에使者를파견하여명에대한조공을요구하였 다. 주변나라들의대다수는여기에응하여조공사절을명에파견하였다. 홍무제는唐代 50) 禰寝文書, 永徳元年 8 月 6 日室町幕府御教書案, 南北朝遺文九州編 5 巻 5673 号 51) 川添昭二, 1996 対外関係の史的展開 第 5 章 ( 文献出版 )

61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35 에완성되었다는중국을종주국으로하는국제적화이질서의회복을도모하고자했던것이다. 52) 고려는 1369년에명의책봉을받았으나그후에도친명파와친원파의대립이계속되었으며, 결국친명파인이성계가고려를멸망시키고 1392년에조선을건국했다. 일본에서는명이九州南朝의중심인물인征西将軍懐良親王을일본국왕良懐로간주하여교섭상대로하였다. 53) 처음에良懐는明使를베어죽이는등日明관계는순조롭게진행되지못했다. 1372년에明使가大統暦을가지고良懐를일본국왕에책봉하기위하여来日했다. 그러나九州探題今川了俊때문에良懐는大宰府로쫓겨가고明使는良懐를책봉할수없었다. 이사절은今川了俊에의해博多에서京都의室町幕府로보내졌고, 일본의남북조내란을알게되어명정부에보고하였다. 그리하여명은비로소일본이한창남북조내란중임을인식한다. 그후에도日明교섭은계속되었지만 14세기에는명국내의사건도뒤얽혀명과일본의책봉관계는성립하지않았다. 이점에서일본은명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세계의이단아였으며, 日明관계가궤도에오른것은 1401년足利義満의遣使를기다려야했다. 명의국제질서회복정책은그나라의국왕이명에파견한사절에대해서만무역을인정하였고, 조공에대해서는회사를시행하는정책이었다. 이때문에명과주변국가와의무역은조공무역밖에인정되지않았다. 일본이나중에조공무역을시행하게된것은이러한국제적인배경이있었다. 주변제국이조공할때에는表文 ( 국왕의외교문서 ) 과명이수여한勘合의소지가의무였다. 반대로조공체제에어긋나지않으면상인들이조공선을타고들어와중국에서무역하는일도가능하였다. 또홍무제는 1371년이후元末에지역정권을만든張士誠과方国珍의잔당들이연해의海島에거처하면서연해주민이나왜구들과결합하여재기를도모하는것을억제하기위해 下海의禁 을실시하였다. 54) 이것은중국인민의해외도항과해상무역을금지하는것으로서海禁政策으로부르고있다. 왜구대책이기도한이海禁令은민간무역을금지하는것으로여러차례반복해서발포되었다. 제도적으로는 16세기후반에동남아시아방면에대한해금이완화될때까지지속되었다. 52) 西嶋, ) 초기의日明関係에대해서는田中健夫, 1975 中世対外関係史 ( 東京大学出版会 ) ; 鄭樑生, 1985 明 日関係史の研究 ( 雄山閣 ) ; 村井章介, 1988 アジアのなかの中世日本 ( 校倉書房 ) ; 佐久間重男, 1992 日明関係史の研究 ( 吉川弘文館 ) 등을참조. 54) 佐久間, 1992

62 3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명의건국후에도왜구는중국을습격하였다. 명은왜구에대한海防體制의강화를꾀하여 55) 연안지방에衛所를늘리거나왜구격퇴용선박을열심히건조하였다. 게다가方国珍 張士誠등의잔당이왜구와결탁하여寇를이루었기때문에浙江 福建의연해민이바다로들어가고기를잡는것을금지하거나, 島嶼部주민의이주정책도실시하였다. 해금령의연장에있는왜구대책이다. 1401년足利義満이명에조공함으로써日明관계는궤도에오르게되었다. 56) 義満은明帝로부터일본국왕에책봉되어동아시아세계속에자리매김하게된다. 제2차遣明船은永楽勘合을초래하였고, 감합을사용한감합무역이시작되었다. 1401년제1차견명선부터 1410년제8차견명선까지는거의足利義満의시대에해당하는데, 빈번한교류가있었다. 견명사가명에파견되고, 그귀국시에明使가동행하고, 明使가귀국할때다음견명사가파견되는매우긴밀한관계가계속되었다. 그러나義満의아들인義持는조공을거절했기때문에日明관계가단절되었다. 이일로인하여일본은永楽帝의노여움을사서日明관계는긴장상태가된다. 1433년제9차견명선이파견되면서日明관계는부활했지만, 그후일명관계는十年一貢이되었고, 결국細川氏 大内氏등의유력大名으로파견의주체가옮겨갔으며, 1547년제19차견명선으로감합무역은종지부를찍었다. 2. 동아시아해역세계의확대와琉球의대두 명대에들어서조공무역이중국과정식으로교류하는유일한수단이되자주변각국 은속속명에조공하였다. 고려 琉球등동아시아각국이외에도많은동남아시아제국 이조공하였다. 조공무역에는朝貢 - 回賜라고하는국가간의의례적인贈答뿐만아니라 공무역과상인들에의한사무역도포함되었기때문에중국에는동아시아에서부터동남아시아의물자가집적되었다. 그러나宋元시대와같이중국인海商이각국으로진출하여무역하는것은해금령에의해금지되었기때문에제도상으로는해외무역이가능하지않았다. 한편, 발전하는경제와그것을제한하고자하는해금정책의모순은새로운해상세력의등장을낳았다. 琉球의대두이다. 14세기후반琉球는北山 ( 山北 ) 中山 南山( 山南 ) 의 55) 奥崎, 1990 ; 佐久間 ) 日明貿易의추이에대해서는田中, 1961 ; 小葉田淳, 1968 中世日支通交貿易史の研究 ( 刀江書院 )( 初版은 1941 年 ) 등을참조.

63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37 세왕조가항쟁하는三山시대였다. 세왕조는각기명에조공하거나高麗 朝鮮과통교하였다. 三山중浦添에서首里로거점을옮긴中山 ( 尚氏 ) 이대두하였고, 1416년에北山을, 1429년에南山을멸망시키고琉球를통일했다. 57) 琉球는명으로부터책봉을받은관계로명을종주국으로받들었는데, 한편으로일본및조선과도관계를맺었다. 歴代宝案 에의하면팔렘방 자바 말라카 파타니 安南 순다등동남아시아제국과의교역도활발히이루어졌다. 58) 琉球의무역은중계무역이며, 琉球는동아시아와동남아시아를연결하는교역의중심지가되었다. 이것도명의해금정책의영향이다. 1380년대이후일본에는남만인 ( 동남아시아인 ) 이來航한흔적이남아있다. 이전인 1374년에는天竺의고승이京都에왔다. 日明貿易家楠葉西忍의아버지이다. 천축에대해서는인도 아라비아 자바 琉球등다양한해석이있다. 59) 15세기초엽이후琉球船의일본來航이활발해지고, 琉球국왕과일본국왕 ( 将軍足利氏 ) 사이에빈번한교류가있었던것을알수있다. 주고받은외교문서에서보면일본국왕과琉球국왕의사이에는느슨한상하관계가있었다. 60) 15세기중기에가까워지면琉球船의일본도항은감소하고오히려博多상인과堺상인등일본상인들의琉球渡海가빈번해진다. 琉球와조선사이를왕래한사절도대부분博多상인이맡게되며, 博多상인이偽琉球国王使를파견하는일도많았다. 61) 이상과같은琉球의교역활동과동남아시아제국의교역활동이활발해짐에따라동아시아해역세계는확대되었다. 이미동아시아라고하는범주에서는수용할수없게된다. 중세후기 (14~16세기) 의지역모델로서환일본해지역과환중국해지역이라는두개의지역개념이제시되고있다. 62) 환중국해지역에서지역교류의주체는琉球人이며, 동지나해 남지나해상에장대한교역루트를구축했다고여겨진다. 환일본해지역은환중국해지역에포섭되는지역으로생각되는데, 이시대의동아시아교류를상정한지역개념으 57) 高良倉吉, 1980 琉球の時代 ( 筑摩書房 ) ; 琉球新報社編, 1991 新琉球史古琉球編 ( 琉球新報社 ) ; 高良倉吉, 1993 琉球王国 ( 岩波書店 ) 등. 58) 秋山謙蔵, 日支交渉史研究 ( 岩波書店 ) ; 小葉田淳, 1968 中世南島通交貿易史の研究 ( 刀江書院 )( 初版은 1939 年 ) ; 東恩納寛惇, 1979 東恩納寛惇全集三黎明期の海外交通史 ( 第一書房 )( 初版은 1941 年 ) ; 高良, 1980 등. 59) 田中健夫, 1959 中世海外交渉史の研究 ( 東京大学出版会 ) 117~120 60) 佐伯弘次, 1994 < 室町前期の日琉関係と外交文書 > 九州史学 ) 橋本雄, 2005 中世日本の国際関係 ( 吉川弘文館 ) 62) 村井章介, 1988, 第一部 Ⅲ

64 3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로서는환중국해지역 ( 세계 ) 이라고하는개념이훨씬더실체에부합하는것이라고생각된다. 다만중국을중심으로보면명의화이질서가동아시아전체에서관철되고있는듯이보이지만, 주변국들의입장에서볼경우반드시화이질서가관철되고있지않은것은日明관계에잘나타나고있다. 주변국끼리의관계도복잡하며, 일본과琉球처럼상하관계가설정되는경우도있었다. 중국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세계를가령大中華세계로규정한다면, 주변국들도자국과주변지역사이에소중화세계가형성되고있었다. 이시기의동아시아세계를대중화와소중화세계및세계관이뒤얽히고, 당해국끼리의관계와상대국에대한인식도결코쌍방향은아니며, 더욱이경제적교류가大中華의틀을넘어서서밀접했던지역이라고생각해두고싶다. 63) Ⅳ. 15 세기의日朝관계와동아시아 1. 왜구에서통교자로 庚寅이래의왜구 는 1380 년대에감소하는경향이었지만, 1392 년의조선건국후에 도왜구의활동은활발하였고, 조선에있어서왜구문제는내정 외교상의중요문제였다. 조선에서는수군의강화, 연해축성과방위의강화, 봉화의정비등을꾀하여왜구를무 력으로토벌 격퇴하는정책을취하였다. 왜구에대한무단정책의선례는 1389 년고려에 의한對馬遠征 64) 이지만일본측에는사료가남아있지않다 년에는병선을건조하여연해방비를강화했기때문에적이접근할수가없었고, 주민은토착하게되었다고한다. 65) 1408 년에는각도의병선을 185 척증가하여모두 613 척이되었고, 수군의병력수를 55,000 명으로늘렸다. 또왜구수령에게귀순을권유하고귀순한자에게는토지 家財를급여하며, 아내를 얻어주는회유정책을시행하였다. 66) 그결과조선에투항하여귀화한일본인이잇달았 63) 佐伯弘次, 2007 < 日本から見た東アジア世界の変容 > 東アジアと日本 : 交流と変容統括ワークショップ報告書 ( 九州大学 21 世紀 COE プログラム ) 64) 高麗史 巻 116, 列伝 29 朴葳 ; 同 巻 137 列伝 50 辛禑附昌元年 2 月 ; 高麗史節要 巻 34 恭譲王元年 2 月 65) 田中, 1961

65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39 다. 이러한일본인은降倭 投化倭 向化倭이라고불렸다. 투화왜는고려시대말기부터보이는데, 조선시대에처음보이는것은 1396년이다. 같은해 12월왜선 60척이寧海丑山島에도착했고萬戶羅可温이투항을요청하였다. 67) 조선측은이를허가하여羅可温등의투항이결정되었다. 羅可温 ( 中尾 ) 은相田於中이나林温이라고부르기도했는데, 対馬의船越 土寄에거처를둔왜구의頭領早田左衛門太郎이다. 68) 羅可温은한번도망쳐서귀국했으나, 도망치지않은아들都時老 昆時羅 望沙門은조선에서 1397년 2월司正등의관직에임명하고의관을주었다. 동년 4월羅可温은다시병선 24척과 80명을거느리고조선으로와서투항을요청하였다. 그결과降倭羅可温은宣略将軍에임명되었다. 다음해 1398년 2월, 羅可温은林温으로개명하고宣略将軍行郎将에데리고온望沙門등도조선식이름으로개명하고관직을받았다. 이早田左衛門太郎의投降, 改名 受職은처음부터투항과武官職의수여가세트가되고있는점에서주목된다. 조선의수직정책이처음부터왜구대책의근간이기도했다는점을말해주고있다. 이전후에萬戶疚六도조선에투항하고있듯이對馬왜구세력의중심인물인早田左衛門太郎이투항한영향은컸던것으로생각된다. 투항왜가운데의사 대장장이등기능자에대해서조선은관직을주고우대하였다. 이들관직은실제의실무가없는影職이었다. 관직을받으면수직인이라고하는데이것이나중에수직인제도의원류가되었다. 이밖에조선은평화적인통교자에대해서는남부연안의어느항만에서든지자유로운무역을허가하거나근해에서의어업을허가하였다. 69) 우대를받은왜구와연해의영주들은使者로서조선에도항하는使送倭人, 무역을목적으로도항하는興利倭人등으로변질되어갔다. 이렇게조선의무단과회유정책은왜구대책이라는관점에서는성공하였고, 왜구들은급속하게평화적인통교자로변화하였다. 그러나이러한우대정책은조선측의경제적인부담을증대시켜정책의전환을다가오게하였다. 66) 田中, 1959 ; 田中, 1961 ; 中村栄孝, 1966 日本と朝鮮 ( 至文堂 ) 67) 羅可温의投降과受職에대해서는 太祖実録 5 年 12 月癸巳, 6 年正月丙辰, 2 月癸巳, 4 月癸未, 4 月己酉, 7 年 2 月甲午条등참조. 68) 田村, 1967 本論第 1 章 69) 田中, 1959 ; 中村, 1966

66 4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2. 중세日朝관계의특질과사절의왕래 田中健夫氏는중세의日朝관계를 4단계로분류하였다. 70) 제1기는 1392년 1419년이며, 왜구종식기를거쳐조선과의통교관계가단초를열고, 일본각지의통교자가통제없이조선으로건너갔던시기이다. 제2기는 1419년 1450년으로, 세종은평화외교에의한교린정책을견지하고癸亥約条 ( 嘉吉条約 ) 를비롯한다수의통교통제규정이정해지고, 對馬와조선과의관계가궤도에올랐던시기로본다. 제3기는 1450년 1510년으로통교의모든제도는전시대의뒤를이어완비되어갔지만무역이막다른상태에도달했던시기로본다. 제4기는 1510년 1592년으로삼포의난으로조선과對馬의관계는파국을맞이했으며, 그후對馬의노력에의해서서히회복되어갔지만, 文禄의役 ( 임진왜란 ) 으로모든관계가단절된시기이다. 중세日朝관계의특색은다원적인관계에있다. 그것은일본국왕대조선국왕의국가적인관계와함께조선국왕대일본인통교자의放射的인관계라는이중성이다. 전자는명의국제질서에따른관계인데, 日朝관계의주류는후자였다. 이것이동아시아세계속에서의日朝관계의이질성이며, 커다란특징이기도하다. 또일본국왕대조선인통교자라는관계는존재하지않으며, 日朝관계는일방향적인관계이기도하였다. 이것도日朝관계의특질중하나인데, 그배경에는왜구문제가존재하였다. 즉왜구문제의해결을위하여조선정부는다양한대책을강구하였고, 그러한왜구대책과수정정책이日朝통교제도의근간이되었기때문이다. 고려시대에이어서조선도일본에외교사절을여러번보냈다. 이에대하여일본도일본국왕사를여러차례조선에보냈다. 71) 1397년 11월에大内義弘이조선에使者를보내足利義満이島倭의금압을보고한것에대하여조선은回礼使朴惇之를일본으로파견하였다. 다음해박돈지는京都에가서足利義満에게 三島倭寇 의금압을요청했다. 1399년足利義満은박돈지가귀국할때使者를파견하여피로인백여명을송환하고대장경판등을요구하였다. 이후일본국왕足利氏와조선국왕간에외교관계가성립하고사절의왕래가계속된다. 당초足利義満은 日本国大相国 등의명칭으로통교했지만 1404년의使者는義満을 日本国王源道義 라고하였다. 義満이일본국왕에책봉된것은 70) 田中, ~167 71) 이하일본과조선의국가간의관계에대해서는中村, 1966 참조.

67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년영락제에의한책봉인데, 명의책봉이조선과의외교관계에도영향을주었음을알수있다. 이러한양국의국가적인관계는 15세기를중심으로활발하게전개되었다. 足利義満은 1399년부터사망하는 1408년까지총 12회의조선遣使를확인할수있다 ( 표2). 그기사중에는조선피로인을송환하거나왜구금압을보고한사례가많이보인다. 이것은직접적으로는조선측의왜구금압 피로인송환의뢰에응한것이지만, 그실상은對明관계에있어서왜구대책과매우비슷하다. 室町幕府가직접군대를파견하여왜구토벌과피로인을보호했다고생각되지는않지만, 義満은앞에서말한 1381년 8월 6일의왜구금압명령과마찬가지로室町幕府 - 守護체제하에서지방지배시스템인守護제도를통해이러한행위를실행에옮겼던것으로생각된다. < 表 2> 足利義満이朝鮮에보낸遣使 ( 朝鮮王朝実録 에서 ) 年月 名義 使節名 記事 日本国大将軍 被虜男女 100여명을発還 日本使僧 ( 日本国大相国 ) 日本国使 12 人 日本国使 20 余人 被虜人 130명을거느리고옴 日本 ( 日本国王源道義 ) 日本国王源道義 擒賊을보고함 日本国王使僧周棠 日本国王源道義 大蔵経을요청함 日本国王 日本国王 姦寇禁絶을보고함 日本国王使 日本国王源道義使人 草竊禁制를보고함 통신사박서생이일본에서귀국한직후인 1429년 12월, 조선국왕세종은 日本国, 其王薨, 不遣使訃告, 及即位, 又不遣使通好, 我国亦不必遣通信使也, 然在我交隣之礼, 不可不修, 故遣使致賻, 且賀即位, 彼宜報謝, 又不遣使, 反因求請, 乃遣宗金, 失礼之中, 又失礼焉 이라고측근에게말했다. 72) 日本国은왕이죽어도그죽음을조선에알리지않고, 왕이즉위하여도사신을보내우호를통하지않는다. 조선은반드시통신사를일본에파견할필요가없다. 그러나조선에는交隣의예가있어우호를통하지않으면안된다. 때문에 72) 世宗実録 11 年 12 月辛巳条.

68 4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일본에사신을파견하여供物을주고국왕의즉위를축하하였다. 일본국은은혜를갚아야하지만역시사신을파견하지않고, 오히려求請때문에宗金을보냈다. 매우심한결례이다 라고하였다. 세종의이말속에는일본과조선의상대국에대한외교적인인식의근본적인차이가드러나있다. 조선측이 交隣의예 를중시함에비하여일본측은 求請 즉문물의입수에비중을둔것이다. 이와같은일본의외교자세는일관되었으며, 對朝鮮외교만이아니라対明외교의기본도여기에있었다고생각된다. 조선국왕측의사절이通信 報聘 回禮등국가적인예에기초한사절파견이었음에비하여일본국왕측의사절은구청이주였으며, 그에관한한에서는등질의외교관계가아니었다. 3. 동아시아속의應永의外寇 ( 己亥東征 ) 전기왜구의종언을상징하는사건이기도하며, 중세日朝관계의제1기와제2기를구분하는것으로여겨지는것이 1419년의應永의外寇 ( 己亥東征 ) 이다. 73) 이사건은 1419년 5월왜구가한반도서해안을약탈하고명으로향했던것에서비롯되며, 6월 20일병선 227척 1 만 7천여명의조선군이왜구의근거지인對馬의浅茅湾일대를공격한사건이다. 조선군은 7월 3일에거제도로귀착하여전투는끝났다. 단기간의전투였지만對馬宗氏와조선의관계는일시단절되었고, 전후의관계복구교섭중에對馬의경상도귀속이문제가되었다. 이外寇는왜구의침체를가져왔는데일본국내에도커다란충격을주었다. 처음에将軍足利義持등의室町幕府관계자는조선이명과연합하여일본을공격했던것으로생각하고있었다. 당시의일기를보면, 京都에서는 大唐国 南蛮 高麗 등과 蒙古 가쳐들어왔다는소문이퍼졌다. 74) 몽고침략의기억이되살아나조정과막부는寺社에서異国降伏의기도를거행하였다. 일본국왕足利義持의오해는이듬해의회례사宋希璟의來日까지계속되었다. 足利義持가이사건을오해한이유가존재하였다. 그것은日明関係의악화이다 년入明한제6차遣明船을마지막으로足利義持는명에대한조공을단절하였다. 이에 73) 応永의外寇에관해서는三浦周行, 1922 日本史の研究一 ( 岩波書店 ) ; 中村栄孝, 1965 등을참조. 74) 看聞日記 応永 26 年 5 月 23 日, 6 月 25 日, 7 月 24 日条 ; 満済准后日記 同年 7 月 23 日条등.

69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43 대하여영락제는조공재개를강력히촉구하였고, 조공하지않을경우에는일본을공격할지도모른다고경고했다. 명의使者呂淵은 1418년에來日했는데, 사명을완수하지못하고귀국했으며, 다음해 1419년에영락제의국서를가지고다시來日하여 7월에兵庫에도착하였다. 이것이마침応永의外寇직후였다. 義持가명군이공격해온것으로이해했던것은이러한국제적인관계가존재했기때문이었다. 한편南蠻船의일본來航도계속되었다. 마침 1419년에는유구가일본에使船을보냈는데, 75) 동년 8월이전에南蠻船이薩摩에來航하고있었다. 76) 이러한南蠻船의빈번한來航이外寇의주체에관한풍문에南蠻이들어있는커다란이유일것이다. 이와같은명과일본의긴장된국제관계는조선측도파악하고있었다. 1417년에入明한조선사절은영락제가 일본국왕의무례한일을네가아는가 라고묻자, 日本国의일은알지못합니다만, 賊島의일은알고있습니다 라고대답했더니영락제가呂淵이지참할칙서를조선사절에게보여주었다. 또영락제는琉球사절이귀국할때 너희나라가일본국과서로친하니, 후일에일본을정벌하게되면너희나라가반드시먼저길을인도해야한다 고하였고, 琉球사절은황송해하며돌아갔다. 이러한견문을조선사절은귀국후국왕에게보고하고있다. 77) 이처럼명과일본의대립은조선 琉球에게도무관하지않으며동아시아諸國을휘말리게한것이었다. 또呂淵의來日은琉球를경유하였을가능성이있다. 이러한동아시아의동향과応永의外寇는결코무관하지않으며당시일본의위정자들은이것을연동하는것으로파악하고있었다. 4. 日朝통교체제의정비와対馬 三浦 조선의왜구회유정책은왜구의向化倭와통교자로의변화라는결과를낳았다. 그러나우대정책의결과조선측의부담이증대하였고, 점차일본인의통교를제한하게되었다. 통교통제책의실시이다. 78) 이에대해서는다양한경위가있는데, 일본인통교자에게圖書 ( 통교자의이름을새긴 75) 佐伯弘次, 1994 < 室町前期の日琉関係と外交文書 > 九州史学 ) 高柳光寿, 1932 < 応永年間に於ける南蛮船来航の文書について > 史学雑誌 43-8 ; 小葉田淳, 1968 中世南島通交貿易史の研究 ( 刀江書院 ) 77) 太宗実録 17 年 12 月辛丑条 78) 通交統制策에대해서는中村, 1966 을참조.

70 4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도장 ) 를지급하고, 서계 ( 외교문서 ) 에찍어서眞使의증거로삼는授圖書制가시행되었다. 1418년小早川浄存 ( 則平 ) 의사례가최초이다. 이후많은통교자에게도서를지급했으며, 통교통제의기축이되었다. 1419년경九州방면의통교자는九州探題渋川氏, 對馬통교자는島主宗氏의서계를지참한자만을접대하는것이정해졌다. 이것을서계에의한통제라고한다. 그후九州探題渋川氏의통제력이약화되면서서계발행권은지역의유력자에게분산되었다. 그후일본국왕사등일부예외를제외하고, 일본인통교자에게對馬宗氏가발행하는文引이라는渡航證明書의휴대가의무화되었다. 1426년에시작되었고, 1435년이후조직적으로운용된것으로여겨진다. 이로인하여日朝관계에있어서對馬宗氏의중요성이높아졌다. 宗氏는이것을守護所佐賀에서조선으로가는도항자에게발행하고수수료를징수하여자신의財源으로삼았다. 앞에서언급했듯이일본인의受職은왜구대책의일환으로向化倭에게급여하는것에서시작되었지만 1440년대가되면양상이변해간다. 일본국내에거주하는자에게도급여하게되었다. 79) 국내거주受職人은연 1회, 지급받은관복을입고조선으로가서그기회에무역도하였다. 결국관직의획득이통교권의획득이되기도하였던것이다. 受圖書人제도가보급되자통교자마다연간통교회수 ( 사선파견회수 ) 를정하게된다. 이것을歲遣船定約이라고부르고있다. 1440년小早川持平의예가처음으로보인다. 1443년의癸亥約條에서對馬宗氏는연간 50 船의세견선이인정되었다. 15세기후반에는이세견선정약이일반적이된다. 일본에서조선으로건너가는배에는興利船과使送船 ( 使船 ) 이있었다. 수도서인과세견선정약에관계된것은사송선이다. 흥리선은당초조선남해안의포소라면어디든지자유롭게도항하여교역할수있었으나, 태종초기에는富山浦 ( 釜山浦 ) 와薺浦두항구로한정되었다. 처음에는흥리선에대한포소였으나應永의外寇전후부터이규정을사송선에도적용하게되었다. 1426년早田左衛門太郎의요구로塩浦가추가되었고, 부산포 제포 염포의 3항이일본을위한무역항이되었다. 삼포의성립이다. 80) 삼포에는점차일본인이거주하게된다. 이것을恒居倭라고부르는데, 많을때는 3,000명에가까운항거왜가삼포에존재하였다. 그대다수는對馬島人이며그들에대해서는宗氏가収税하였 79) 松尾弘毅, 2003 < 中世日朝関係における後期受職人の性格 > 日本歴史 ) 三浦의성립과恒居倭에대해서는中村, 1965 一六章 ; 村井章介, 1993 中世倭人伝 ( 岩波書店 ) ; 関, 2002 第 3 章등을참조.

71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45 다. 이삼포항거왜의動靜이뒷날삼포왜란으로이어진다. 1443년조선과對馬宗氏간에癸亥約條가체결되었다. 여기서는島主세견선을 50 船으로하는것과島主의歳賜米豆를 200 石으로하는것이규정되었다. 세견선 50선은다른大名 領主 商人들의수에비하면압도적으로많으며, 더욱이세견선외에特送船이라는임시사선이인정되기도했지만, 이수로는家臣団까지돌볼수가없어서宗氏는 15세기후반에僞使의창출을조직적으로감행하게된다. 81) 이상과같이수도서인과수직인에의한조선통교가 15세기전반이후日朝관계의중심이되지만, 하나더주목해야할것은흥리왜인에의한교역이다. 흥리왜인은흥리왜선이라부르는선박으로조선에도항했던사람들이다. 흥리왜선의교역은지참한어염과조선의미곡을교환하는것이며, 초기를제외하고對馬가독점했던것이밝혀졌다. 82) 확실히흥리왜인은對馬연해의小領主나海民이었던것으로생각되는데, 對馬의중세문서에많이보이는 塩判 은 當局 ( 對馬 ) 고려( 조선 ) 의모든公事 83) 로부르고있으며, 對馬에서생산된소금과조선과의교역에관계된세금일것이다. 중세의對馬에는많은塩屋 塩竃가있으며, 소금생산에관한중세사료와 塩判 에관한문서가많이남아있는것으로보아 84) 개별적으로는작은규모의소금생산과교역이었지만, 총체적으로는상당한정도의양에이르렀던것은아닐까. 또한그중에는 육지 ( 九州 ) 고려( 조선 ) 의상업 ( 商 ) 귀국선 이라든가 對馬國与良郡내土寄三ヶ村에서고려 육지 ( 九州 ) 로일하러가는배 등의선박이종종보인다. 85) 이것은對馬의海村을거점으로조선과九州를왕래하는교역선이있었다는것을의미한다. 조선- 對馬 - 九州라고하는교역루트를왕래하듯이광역적활동을행한교역선도對馬에는존재하였다. 이러한교역선은수직인이나수도서인과같은확고한조선통교권을가진배가아니었기때문에 조선왕조실록 에는거의등장하지않지만, 중세에는이러한배가많이존재하여日朝교역의저변을지탱하고있었던것으로생각된다. 81) 長 2002a ; 長節子, 2002b 中世国境海域の倭と朝鮮 ( 吉川弘文館 ) ; 荒木和憲, 2007 中世対馬宗氏領国と朝鮮 ( 山川出版社 ) 82) 長 2002b, 第三 - 一. 83) 大山小田文書 26 号宗成職書下 ( 佐伯弘次 有川宜博, 2002 < 大山小田文書 > 九州史学 132) 84) 佐伯弘次, < 中世対馬海民の動向 > 秋道智彌編, 1998 海民の世界 ( 同文館 ) 85) 佐伯弘次, 2008 対馬と海峡の中世史 ( 山川出版社 )

72 4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5. 교역품과環중국해세계 일본에서조선으로수출하는물품에는국산품외에많은동남아시아산물자가포함되어있다는것은이미지적되고있다. 86) 즉蘇木 ( 丹木 ) 深黄 朱紅 硫黄 白礬 桂心 川芎 甘草 犀角 樟脳 朱砂 沈香 藿香 白檀 胡椒 肉豆蒄 水牛角 象牙등의染料 薬材 香料이다. 동남아시아방면, 당시南蛮으로불리던지역의물산이이처럼풍부하게조선으로들어간것은博多가무역의일대중심시장을이루고, 琉球를경유하거나또는직접이곳으로모였기때문 이라고한다. 87) 中世日朝무역의실태에대하여검토했던田村洋幸氏는九州探題휘하인平満景의조선무역에대하여 무역내용은香 藤 胡椒 檳榔등대부분이南海貿易品이며, 실로중계항으로서의博多를대표하는데상응하는것이었다 고하였다. 88) 게다가日朝무역품중의南海교역품은동남아시아부터서아시아지역의물품으로, 일본상인은어떠한형태로든이들南海諸国의상인내지그대행자와접촉하고있으며, 일본각지역의물자와이들각물자를교역하고있었다 고한다. 89) 또한 15세기전반을대표하는博多무역상인宗金의조선수출품을검토하면일본산공예품, 일본산광산물 동남아시아산약재 향료 염료, 중국산약재로분류되며, 특히유황 동과같은일본산광산물이중심이었다. 90) 동남아시아산물자로는犀角 鬱金 沈香 蘇木 甘草등이확인된다. 이처럼조선으로의헌상품과교역품중에동남아시아산물자가많이포함되어있는것은博多상인에한정된것이아니라당시일본인통교자에게공통된일반적인경향이었다. 이러한일본을중계로하는동남아시아산물자의조선수출의배경에는 14세기말이후琉球船 南蠻船의來航이있다. 이러한물자의존재가중세日朝무역의특색이라는것은日朝관계가환중국해세계속에서이루어지고있었던점을명료하게나타내고있다. 86) 中村, 1966, ) 中村, 1966, ) 田村, 1967, ) 同前, 445~ ) 佐伯弘次, 1999 < 室町期の博多商人宗金と東アジア > 史淵 136

73 14~15 세기동아시아의해역세계와일한관계 47 맺음말 마지막으로중세日朝관계와동아시아세계및환지나해지역과의관계를지적하고매듭짓고자한다. 14세기말에시작되어 15세기전반에확립된日朝관계는일본국왕대조선국왕이라는국가레벨의관계와, 조선국왕대일본인통교자라는이원적구조를유지하고있었다. 전자의관계는足利義滿시기에활발해졌는데, 원리적으로보면명의국제질서에포섭되는성격의것이었다. 따라서동아시아세계라는관점에서파악할수있다. 다만명의국제질서를강하게의식했던조선에비하여일본국왕측은어느정도이것을의식하였는지의심스러울정도로물품의구청에집착하였다. 이러한비쌍방향성이국가레벨의日朝관계의특색이다. 이에비하여후자의관계는성격을달리하고있다. 遣使 ( 受職人의경우는來朝 ) 獻上- 回賜라는구조는조선국왕과통교자사이의상하관계를전제로하고있으며, 왜구문제 ( 왜구회유정책 ) 를배경으로한특징적인외교관계였다. 이러한외교관계의배후에는일본국왕의 구청 행위와공통되는물품의획득과경제적이윤의추구가있었다. 이러한이중의통교관계아래, 흥리왜인으로서대마도인의활동이존재하였다. 이것은개별상업활동으로서는작고, 魚鹽과곡물의교환이라는식량의입수가주된목적이었으나, 그중에는조선-대마- 九州라는광범위한루트상에서상업활동을하는사람도존재하였다. 이들일본인통교자나흥리왜인의활동은명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통교체제의규제를받은것이아니며, 동아시아세계라는시각만으로는이해할수없는독자적인관계이다. 한편, 일본에서조선으로가져갔던물품중에는동남아시아산물자가대량으로포함되어있었다. 이것은동아시아교역권과동남아시아교역권이깊이결합한것을말해주고있다. 즉물품의유통이라는측면에서보면동아시아세계만의시각으로는불충분하며, 환중국해지역, 동 동남아시아교역권등보다광역의지역개념을설정할필요가있다. 田中健夫氏가설정했던중세日朝관계의제4기는 1510년의삼포왜란을계기로하지만, 이시기는 무역권의對馬집중 의시대로여겨지고있다. 91) 對馬宗氏에의한僞使가대량으로창출되기때문이다. 근년에발견된宗氏舊藏의圖書와木造印으로그실태가 91) 田中, 1959 第七.

74 4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보다구체적으로판명되었다. 92) 16세기의삼포왜란이후에는僞使통교체제라고도할만한교역시스템이정착되고있다. 근년의연구로 15세기에도, 특히중기이후日朝간에많은僞使가존재했다는사실이명확히밝혀졌다. 93) 15세기중반부터僞使의시대로들어가는것이다. 僞使창출의주체에대해서는명확한사료가적고, 견해가나뉘어진상황이다. 이위사의실태를어떻게인식할것인가로그시기의日朝관계의본연의인식이크게바뀌게된다. 해동제국기 는 15세기중기부터제3 4반기에걸친日朝관계의기초사료중하나이며, 이시기의일조관계의실태분석에많이이용되어왔다. 이사료에는 200여명의일본인통교자가수록되어있다. 그지역적분포는對馬 壹岐 九州를비롯하여서일본일대로확대되며, 가장동쪽의통교자는信濃善光寺승려이다. 따라서이사료는당시의일본과조선이서일본일대에널리분포하는통교자에의하여광범위하게교류하고있었던증거였으나, 일본인통교자를개별적으로검토한바많은僞使가포함되어있는것이명확해졌다. 94) 이들僞使창출의주체는對馬宗氏나博多상인등을예상할수있는데, 그것을전제로생각하면 해동제국기 의일본인통교자대부분은對馬 壹岐 松浦 博多등북부九州沿岸 島嶼지역으로한정된다. 당시의일조관계에서일본측의주된근거지는상당히한정된지역의사람들이었다고할수있다. 92) 田代和生 米谷均, 1995 < 宗家旧蔵 < 図書 > と木印 > 朝鮮学報 156 ; 米谷均, 1997 < 一六世紀日朝関係における偽使派遣の構造と実態 > 歴史学研究 697 ; 荒木和憲, 2007 中世対馬宗氏領国と朝鮮 第 2 部第 3 章 ( 山川出版社 ) 93) 長, 2002a ; 橋本, 2005 ; 伊藤幸司, < 日朝関係における偽使の時代 >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編, 2005 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第 2 分科篇 (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 ) 94) 長, 2002a ; 佐伯弘次 水野哲雄 三村講介 荒木和憲 岡松仁 岩成俊策 大塚俊司 松尾弘毅 八木直樹, 2006 < 海東諸国紀 日本人通交者の個別的検討 > 東アジアと日本 : 交流と変容 3 ( 九州大学 21 世紀 COE プログラム )

75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4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 朝鮮 琉球 日本에있어서大明外交儀禮의관점에서 - 구와노에이지 ( 桑野栄治 ) 머리말 Ⅰ. 조선전기의동아시아국제환경 1. 명과조선의관계 2. 명과琉球의관계 3. 명과일본의관계 Ⅱ. 조선宣祖代의의례와외교 1. 宣祖의책봉의례 2. 임진왜란이전의望闕禮 1) 명사신의來朝와冬至의望闕禮 2) 國忌에수반하는朝賀禮의順延조치 3. 임진왜란기의望闕禮 1) 한성탈환의皇恩에감사하는望闕禮 2) 한성還都후南別宮에서의望闕禮 3) 전시하의례실시상의문제점 4) 동아시아세계의조선과명 4. 임진왜란후의望闕禮 1) 朝賀禮의정체 2) 宣祖즉위 40 년째의望闕禮 Ⅲ. 日本國王 豊臣秀吉의책봉의례 1. 일본국왕책봉사의復命報告 2. 景轍玄蘇와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 맺음말 머리말 제1기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제2분과회에서한국과일본양쪽에서임진왜란 ( 文祿 慶長의役 ) 에관한연구사정리를살펴보고학계에귀중한성과를제공하였다. 1) 동시에이들성과에서는한국과일본에서이후검토해야할과제에어느정도견해차이가있다는점도드러났다. 일본의경우이후의연구과제로서 1) 조선측 명측의군량공급시스템규명, 2) 피로인의실태와송환시스템해명, 3) 왜성연구, 4) 전쟁으로인한조선 1) 六反田豊 / 田代和生 吉田光男 伊藤幸司 橋本雄 米谷均 北島万次, < 文禄 慶長の役 ( 壬辰倭乱 )> ; 朴晢晄, < 壬辰倭乱 ( 文禄 慶長の役 ) 研究の現況と課題 > ( 日韓歷史共同研究委員会編, 2005 日韓歷史共同研究報告書 ( 第 2 分科篇 ) ( 同委員会 ))

76 5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사회의변화, 5) 豊臣정권의전략적사고에관한연구, 그리고마지막으로 6) 동아시아국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관한재검토를든다. 물론이순서가과제로서의순서를의미하는것은아닐것이다. 다만일본측위원의보고서에는조선의군량조달을주제로하는논고가게재되어있으며, 2) 한반도에서군량공급시스템을밝혀내는일이매우중요한과제로제기되었다고생각하는것이자연스럽다. 한편한국의경우는이후한국과일본에서수행해야할공동연구과제로서 1) 임진왜란과동아시아국제정세, 2) 일본과조선왕조의수군전력, 3) 의병운동, 4) 조선군의병력동원체제, 5) 임진왜란의전투지역조사, 6) 降倭 被擄人 문화재약탈, 7) 임진왜란기의점령정책과민중의대응 생활상, 8) 상호간의문화전파를제시하였다. 과제는다양한분야에걸쳐있으며, 이순서역시과제로되어야할우선순위를나타낸것은아닐것이다. 한국측위원의보고서에는임진왜란에대한역사인식을비교한논고가실려있으며, 3) 당시임진왜란과동아시아의국제정세에관한문제가반드시중요한과제로설정되어있다고는할수없다. 하지만제1기보고서가세간에서널리문제되던 2005년의시점에서는한일양국의연구자입장에서임진왜란과동아시아의국제질서혹은동아시아의국제정세에관한문제를금후의연구과제로다루어야한다는점에서의견이일치했던것같다. 제1기에서橋本雄씨가조선국왕사와 일본국왕 ( 室町殿 ) 의외교의례에주목했던것도우연은아닐것이다. 4) 외교의례가 당사국의도의적, 정치적, 군사적관계를반영하는실용의거울이었다 5) 면, 외교의례의관점에서임진왜란기의동아시아국제환경을조명하는것도가능해질것이다. 그래서본고에서는먼저조선전기 ( 대략 15~16세기에해당 ) 의동아시아국제환경을개관해보고자한다. 2) 六反田豊, < 文禄 慶長の役 ( 壬辰倭乱 ) 開戦初期における朝鮮側の軍糧調達とその輸送 >( 日韓歷史共同研究委員会編, 전게보고서, 수록 ). 3) 鄭求福, < 壬辰倭乱の歷史的意味 - 壬辰倭乱に対する韓 日両國の歷史認識 > ( 日韓歷史共同研究委員会編, 전게보고서, 수록 ). 4) 橋本雄, < 朝鮮國王使と室町幕府 > ( 日韓歷史共同研究委員会編, 전게보고서, 수록 ). 5) 로날드토비 ( 速水融他번역 ) 近世日本の國家形成と外交 ( 創文社, 1990 년 9 월. 原著는 Ronald P.Toby.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hu.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 第 5 章外交儀禮の鏡を覗く - 理念の世界を映し出す姿見 > 138

77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51 Ⅰ. 조선전기동아시아의국제환경 1. 명과조선의관계 조선왕조 (1392~1897) 는건국후즉시명태조洪武帝 ( 朱元璋. 재위 1368~98년 ) 를정점으로하는이른바 冊封体制 6) 에참가하고의례적인관계를구축하였다. 1401년 ( 太宗원년 ) 에恵帝建文帝 ( 재위 1398~1402) 가제3대조선국왕太宗 ( 재위 1400~18) 에게誥命 ( 辭令書 ) 과金印을하사하고책봉했으며, 얼마지나지않아靖難의變 ( 帝位를둘러싼내란 ) 을거쳐서옥좌에올랐던成祖永楽帝 ( 재위 1402~24년 ) 도역시 2년뒤인 1403년에다시太宗을 조선국왕 으로책봉하였다. 7) 제3대永樂帝는洪武帝의대외정책을계승하도록적극적인조공권유책을취하고, 동아시아국제질서의재편에노력하고있었다 8) 이념상조선국왕은명황제를중심으로하는동심원상의 華夷秩序 에편입되었던것이다. 이와같은동아시아의국제환경에처해있던조선국왕이매년正朝 ( 元旦 ) 聖節( 명황제생일 ) 千秋節( 명황태자생일 ) 외에동지때도조공사절을파견했던것은주지의사 6) 전근대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국제관계의특징을표현하는. 책봉체제 에관해서는당장은 西嶋定生東アジア史論集 ( 第 3 卷東アジア世界と冊封體制 ) ( 岩波書店 ) < 第 1 部 3 冊封體制と東アジア世界 > 95~101 참조. 다만이러한정치구조에대한비판 재검토도많다. 최근에는, 예를들어서夫馬進, < 明淸中國による對朝鮮外交の鏡としての對ベトナム外交 - 冊封問題と 問罪の師 を中心に > ( 紀平英作編, グローバル化時代の人文學 - 對話と寬容の知を求めて ( 下 ) 共生への問い 京都大學學術出版會 ) 238~244 에따르면, 安南에서 僞勅 僞年號 를쓰고있다는사실을알면서도明은安南의朝貢을계속받아들였고, 또한同 <1609 年, 日本の琉球倂合以降における中国 朝鮮の對琉球外交 - 東アジア四國における冊封, 通信そして杜絶 > ( 朝鮮硏究會論文集 第 46 集, 2008 년 10 월 ) 7~10 에따르면, 淸代의책봉국은朝鮮 越南 ( 安南 ) 琉球의 3 국뿐이었으며, 겨우暹羅를추가한 4 國에불과하다고한다. 7) 末松保和, 高麗朝史と朝鮮朝史 (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 5) ( 吉川弘文館 ) < 麗末鮮初に於ける対明関係 > ( 초판은京城帝國大学文学会編, 史学論叢 第 2 ( 岩波書店 )) < 第十一章誥命印章の獲得 > 234~237. 李鉉淙 < 対明関係 > ( 國史編纂委員会編, 1974 한국사 9 ( 양반관료국가의성립 ) ( 同委員会, 서울 )) 331~332. 孫承喆, 조선시대한일관계사연구 - 교린관계의허와실 ( 景仁文化社, 서울 ). 구판의일본어訳은鈴木信昭監訳, 近世の朝鮮と日本 - 交隣関係の虚と実 ( 明石書店 )) < 제 1 장동아시아국제질서와교린체제 > 35~38 8) 佐久間重男, 日明関係史の研究 ( 吉川弘文館 ) < 第一編第二章永楽帝の対外政策と日本 > 98~99 ; 檀上寛, < 明初の海禁と朝貢 - 明朝専制支配の理解に寄せて >( 森正夫他編, 明清時代史の基本問題 ( 中国史の基本問題 4)> ( 汲古書院 )) 223 ; 同, < 初期明帝国体制論 >( 杉山正明他, 岩波講座世界歴史 11( 中央ユーラシアの統合 ) ( 岩波書店 )) 318~321

78 5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실이다. 다만엄밀하게말해서 1531년 ( 中宗 26) 에는종래의正朝使를폐지하고冬至使가신설되었으며, 聖節使 千秋使 冬至使를명에파견하는 1년 3공의대명외교체제로이행하였다. 9) 이 1 年 3 貢체제에대하여아직도연구자들사이에오해가있다. 예를들면, 朴成柱씨는冬至使가中宗 26년부터파견됐다는것을주장하면서도 16세기후반부터冬至使가추가되어 1 年 4 貢이규례화된것 이라고한다. 또全淳東씨는正朝使 冬至使 聖節使에 中宗 26년 (1531) 이후부터는황태자생일을축하하기위해보내는千秋使도함께추가되어 1 年 4 使 가정례로되었다 고한다. 10) 그러나양자모두잘못이다. 조선초기의遣明使節은正朝 聖節 千秋使의 1년 3공, 조선중기인中宗 26년이후는聖節 千秋 冬至使의 1년 3공이다. 이러한오해가생긴까닭은아마도 16세기朝明関係의실태에접근한실증적연구가부족하기때문이라고생각된다. 아니면조선후기의사역원역관인金指南 金慶門부자가편찬한 通文館志 (1720년간행 ) 에 國初, 매년파견하는朝京使에冬至 正朝 聖節 千秋의四使가있다 고한조문 11) 을무비판적으로받아들였던것으 9) 1587 년 ( 萬暦 15) 에완성된明代国制総覧인 萬暦大明会典 ( 新文豊出版公司, 台北 ) 巻 105, 禮部 63 朝貢 1 東南夷上朝鮮國条에 永樂初賜印 誥自後毎歳聖節 正旦 嘉靖十年 (= 中宗 26 년 ), 外夷朝正旦者倶改冬至 皇太子千秋節, 皆遣使奉表朝賀, 貢方物, 其餘慶慰 謝恩無常期 라고되어있으며, 中宗 26 년 3 월에는 毎歳元朝 ( 正旦 ) 의 ( 朝 ) 貢은동지전으로옮겨入賀하라 는聖旨가조선에전달되었다 ( 中宗実録 권 70, 26 년 3 월 9 일甲午条. 사료중의 안은割註, 이하같음 ). 10) 朴成柱, < 조선초기遣明使節에대한일고찰 > 慶州史学 第 19 輯慶州 ( 曺圭益他編, 연행록연구총서 6( 역사 ) ( 学古房, 서울 ) 에再録 ) 153 ; 全淳東, <15 세기조선과명의문물교류 - 중국문물의유입을중심으로 > 韓国史研究会編, 韓国史의国際環境과民族文化 ( 景仁文化社, 서울 ) 93. 그밖에朴元熇, 明初朝鮮関係史研究 ( 一潮閣, 서울 ) <15 세기朝鮮과明의關係 > 294 도 조선은후일中宗 26 년 ( 嘉靖 10 년, 1531) 부터冬至使가추가되어 1 년 4 사가된다 고하며, 16 세기의동아시아세계를그린金翰奎, < 임진왜란의국제적환경 - 중국적세계질서의붕괴 > 鄭杜熙他編, 임진왜란 - 동아시아삼국전쟁 ( 휴머니스트, 서울 ). 일본어訳은金文子監訳, 壬辰戦争 -16 世紀日 朝 中の国際戦争 ( 明石書店 ) 312 도역시 조선은賀正使와聖節使 千秋使등 1 년 3 사를고집했을뿐만아니라, 나중에는冬至使를추가하여 1 년 4 공을강행했다 고서술했다. 한편, 조선시대의조공 책봉관계를정리한権善弘, < 조선시대사대관계와책봉체제 > 韓日関係史研究論集編纂委員会編, 왜구 위사문제와한일관계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4) ( 景仁文化社, 서울 ) 65 에서조선은明으로부터 1 년 3~4 공이라는유례없이파격적대우를받았다 고애매하게표현했다. 11) 朝鮮史編修委員会編, 通文館志 ( 朝鮮史料叢刊第 21) ( 朝鮮総督府, 京城 ). 底本은 1888 년에重修刊行된서울大学校奎章閣蔵本 ) 권 3, 事大上, 赴京使行条. 이조문을근거로, 예를들어서全海宗, 韓中関係史研究 ( 一潮閣, 서울 ) < 清代韓中朝貢関係考 > 61 에서는 李朝初期의対明使行에는冬至 正朝 聖節 千秋의四行이定期的 이었다고한다.

7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53 로생각된다. 그런데조선에서는매년명절때마다조공사절을명나라로파견했던것만이아니었다. 조선왕조의기본법전인 經國大典 ( 성종 16년, 1485) 에는 正朝 冬至 聖節 千秋節에殿下는왕세자이하를거느리고望闕禮를올린다 고명기되어있으며, 12) 왕조정부의儀禮書인 國朝五禮儀 ( 성종 5년, 1474) 에는이儀註 ( 儀禮의式次第 ) 를嘉禮의첫머리에수록하고있다. 13) 조선국왕은正朝 冬至 聖節 千秋節에문무백관을거느리고왕도한성의왕궁에서명나라황제를遙拜하는궁중의례 ( 望闕禮라고한다 ) 를거행하고있었던것이다. 14) 이궁중의례는일찍이명태조洪武帝가 1369년 ( 洪武 2) 에 蕃國禮 로서제정했던 元正 冬至 上國聖壽節에望闕하며축하를드리는의식 의수용과실천이다. 15) 이미고려恭愍王 ( 재위 1351~74) 은 1372년동지때명나라관복인冕服을입고이요배의례를거행했으며, 백관과함께만세를삼창하고있다. 16) 望闕禮의의의는일찍이제9 12) 經国大典 巻 3, 禮典, 朝儀条에 正 至 聖節 千秋節, 殿下率王世子以下, 行望闕禮 라고되어있다. 李成茂씨는이 朝儀条 를근거로 조선은사대의표현으로일년에네차례의사신 ( 正朝 冬至 聖節 千秋 ) 을보내고조공을바쳤다 고한다. 그러나이조문은正朝 冬至 聖節 千秋의望闕禮에관한규정이며, 朝貢使節에관한규정은아니다. 同, 개정증보조선의사회와사상 ( 一潮閣, 서울 ) < 제 1 부제 1 장朝鮮時代의王権 > ( 초판은朝鮮時代史学会編, 東洋三国의王権과官僚制 ( 国学資料院, 서울 )) 28. 대체로조선정부가명나라에冬至使를파견하는것은중종 26 년이후의일이며, 經国大典 에는冬至使자체에관한규정이존재하지않는다. 13) 国朝五禮儀 巻 3, 嘉禮, 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条및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儀条 14) 李範稷, 韓国中世禮思想研究 - 五禮를中心으로 ( 一潮閣, 서울 ) < 第 2 章 Ⅲ 世宗朝 五禮 의分析 > 327~329 ; 桑野栄治, < 朝鮮初期の對明遥拜儀禮 - その概念の成立過程を中心に > 久留米大學比較文化年報 第 10 輯 ; 同, < 朝鮮世祖代の儀禮と王権 - 對明遥拜儀禮と圜丘壇祭祀を中心に > 久留米大學文學部紀要 ( 國際文化學科編 ) 第 19 号 ; 同, < 朝鮮成宗代の儀禮と外交 - 經國大典 成立期の對明遥拝儀禮 > ( 同 第 20 号, 2003 년 3 월 ) ; 同, < 高麗末期の儀禮と國際環境 - 對明遥拜儀禮の創出 > ( 同 第 21 号, 2004 년 3 月 ). 이들 4 편의논문은증보 수정된후桑野栄治, 高麗末期から李朝初期における對明外交儀禮の基礎的研究 (2001~ 2003 年度科學研究費補助金 基盤研究 (C)(2) 研究成果報告書, 2004 년 2 월 ) 에수록했다. 또한桑野栄治, < 正朝 冬至の宮中儀禮を通してみた 15 世紀朝鮮の儒教と國家 - 朝鮮燕山君代の對明遥拜儀禮を中心に > 朝鮮史研究会論文集 第 34 集 ; 同, < 朝鮮中宗代における對明遥拜儀禮 -16 世紀前半の朝鮮と明 日本 > 久留米大學文學部紀要 ( 國際文化學科編 ) 第 24 号참조. 15) 明集禮 ( 景印文淵閣四庫全書 第 650 冊, 台湾商務印書館, 台北, 1983 년 6 월, 수록 ) 巻 30, 賓禮 1, 蕃王朝賀, 元正冬至上國聖寿節望闕賀儀条. 萬曆大明会典 巻 58, 禮部 16, 蕃國禮, 聖節正旦冬至蕃國望闕慶祝儀条. 桑野栄治, 전게 < 高麗末期の儀禮と國際環境 > 76~79. 또岩井茂樹, < 明代禮制覇権主義と東アジアの秩序 > 東洋文化 第 85 号 132~133 16) 冬至, 王具冕服, 率百官, 向闕拜賀, 山呼萬歳, 後百官又行本朝賀禮 ( 高麗史 권 67, 禮志 9, 嘉禮, 元正冬至上國聖寿節望闕賀儀, 恭愍王 21 년 11 월 14 일丁巳条 ). 桑野栄治, 전게 < 高麗末期の

80 5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대조선국왕성종 ( 재위 1469~94) 이秘書役인承政院에이르기를, 내가望闕禮를행할때몸은비록이곳조선에있지만, 몸소朝天하는 ( 皇帝를拜謁하는 ) 것과마찬가지이다 라고말한것에서단적으로드러난다고할수있다. 17) 원래명절이되면 蕃王 인조선국왕이몸소황제가기거하는北京으로가서명나라황제에게拜禮를해야하지만그렇게할수도없는일이다. 그래서부득이조선의왕궁에서紫禁城에거처하는명황제를요배하는것으로그책무를부담하고있었던것이다. 2. 명과琉球의관계 이어서조선과마찬가지로책봉체제아래있었던琉球國의경우를보도록하자. 洪武帝는당초 1372년 ( 洪武 5) 에浦添을거점으로하는中山王察度 ( 삿토, 재위 1350~95년 ) 가일찍부터入貢권고에응했으므로 ( 다만中山王의冊封은 1404년제2대武寧 ), 大琉球國의朝貢은不時 (= 隨時 ) 로한다 고우대했으나, 후일琉球使臣이福建省에서일으켰던살인사건을이유로 1475년 ( 성화 11년 ) 에憲宗成化帝 ( 재위 1464~87) 는琉球의貢期 ( 조공빈도 ) 를 2년 1공으로제한했다. 18) 그후琉球국왕이 1년 1공의주청을거듭한결과 1507년 ( 正徳 2) 에겨우 1년 1공의貢期를얻기는했지만, 1522년 ( 嘉靖원년 ) 에다시 2년 1공을하명받게된다. 19) 조선의 1년 3공과비교하면그대우의격차가현격하다. 20) 儀禮と國際環境 > 75~76. 17) 傳于承政院曰, ( 中略 ) 予行望闕禮時, 身雖在此, 豈有異於親自朝天乎, ( 後略 ) ( 成宗実録 권 284, 24 년 11 월 8 일己亥条 ). 桑野栄治, 전게 < 朝鮮成宗代の儀禮と外交 > ) 祖訓, 大琉球國朝貢不時, 王子及陪臣之子, 皆入太學 (= 国子監 ) 讀書, 禮待甚厚, ( 中略 ) 永樂以來, 國王嗣立, 皆請命册封, 後惟中山王至, 中山王世稱尚氏, 諭令二年一貢, 毎船百人, 多不過百五十人, 貢道由福建閩縣, ( 後略 ) ( 萬曆大明会典 巻 105, 禮部 63, 朝貢 1, 東南夷上, 琉球國条 ). 佐久間重男, 전게서 < 第一編第四章明代の琉球と中国との関係 > 174~177 ; 邊土名朝有, 琉球の朝貢貿易 ( 校倉書房 ) < 第一部第一章貢期の制定 > 23~24 ; 同 < 第一部第三章貢期の制限 > 64~66. 또 明実録 과 歴代寶案 을토대로琉球의朝貢頻度를정리한岡本弘道, < 明朝における朝貢国琉球の位置付けとその変化 世紀を中心に > 東洋史研究 第 57 巻第 4 号, 4~6 에따르면, 1480 년대이후는거의 2 년에 1 번의朝貢으로안정되었다. 19) 佐久間重男, 전게서 < 第一編第四章明代の琉球と中国との関係 > 178. 邊土名朝有, 전게서 < 第一部第三章貢期の制限 > 76. 뒷날薩摩島津氏에의한琉球侵攻직후의貢期는 10 년 1 공이었다는것이통설이지만, 夫馬進, 전게 <1609 年, 日本の琉球併合以降における中国 朝鮮の対琉球外交 > 18~22 가이통설에이의를제기하고있어시사하는바가크다. 20) 村井章介씨는 明史 外國伝을기초로 < 明에대한諸國의入貢表 > 를작성하고, 조공횟수가 171 회인琉球가제 1 위이며, 다른나라보다두드러지게많은조공횟수 였다고한다 ( 同,

8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55 또 1561년 ( 嘉靖 40) 에冊封使로琉球에갔던郭汝霖의 重編使琉球録 에따르면, 朝鮮과安南 ( 현재베트남북부 ) 으로파견되는冊封使가대략正 7 品 ( 副使는従 7 品 ) 임에비하여琉球와占城 ( 참파, 현재베트남남부 ) 의경우는従 7 品 ( 副使는正 8 品 ) 이므로琉球国王은朝鮮国王보다격하되어취급받은것이된다. 21) 다만이조공빈도는어디까지나원칙이며, 조선왕조와마찬가지로정기적인조공 ( 琉球에서는進貢이라고한다 ) 사절이외에謝恩使 慶賀使 進香使등임시사절도파견하고있다. 22) 예를들면, 歷代寶案 에는제1 尚氏王統, 2대尚巴志 ( 쇼하시, 재위 1422~39 년 ) 가 1425년에등극한宣宗宣徳帝 ( 재위 1425~35) 를축하하면서, 신하尚巴志는멀리蕃國에기거하면서마음은달려가遥賀 한다는내용의表文 ( 황제앞으로보내는외교문서 ) 을보냈다. 23) 외교문서의상투적인문구이기는하지만, 직접紫禁城으로가서황제를알현할수없는 蕃王 尚巴志의심정은望闕禮를올리는조선국왕성종의심정과상통한다. 海から見た戦國日本 - 列島史から世界史へ ( 筑摩書房 ) 67). 村井씨가작성한入貢表는秋山謙蔵 日支交渉史研究 ( 岩波書店, 1939 년 4 월 ) < 本論第六篇第五章勘合貿易と密貿易 > 552 를참조한것으로생각되는데, 이표에따르면조선은 30 회 (10 위 ), 일본은 19 회 (13 위 ) 이며, 高良倉吉씨는이데이터를기초로 明朝에대하여琉球는아시아최대의조공무역국가라는사실을확인할수있었다 고한다 ( 同, < 琉球の形成と東シナ海世界 > 大石直正他, 周縁から見た中世日本 ( 日本の歴史 14) ( 講談社 ) 193~194). 그러나원칙상 2 년 1 貢의琉球가원칙상 1 년 3 貢인조선의朝貢회수를이처럼대폭적으로상회한다고생각하기는어렵다. 朝鮮王朝実録 을조사했던朴成柱씨에따르면, 조선초기 ( 太祖원 ~ 成宗 25 년 ) 에는正朝使 102 회 ( 兼行 14 회 ), 聖節使 96 회 ( 兼行 8 회 ), 千秋使 61 회 ( 兼行 4 회 ) 의데이터를제시하였다. 통상의조공사절로한정해도조선에서明으로약 100 년동안합계 259 회가파견되었으며, 기타의임시사절, 예를들면謝恩使의파견회수는 150 회 ( 兼行 15 회 ) 를상회한다 ( 同, 전게 < 조선초기遣明使節에대한일고찰 > 153~156). 그런까닭에村井씨가작성한 < 明に對する諸國の入貢表 > 는당시의실태를반영한것으로보기어렵다. 21) 孫薇, < 冊封 朝貢について - 中琉の冊封 朝貢関係を中心に > 法政大学沖縄文化研究所編, 沖縄文化研究 17, 57~58 ; 郭汝霖 ( 原田禹雄訳注 ), 重編使琉球録 ( 榕樹書林 ) 下, 群書質異, 使職要務, 176. 원문은 ( 前略 ) 按我朝封錫藩王之制, 如按南 朝鮮, 則遣編修 給事中等 官爲使, 占城 琉球, 則遣給事中 行人等官爲使, ( 後略 ) ( 同, 293~294). 다만金龍基, < 朝鮮初期의対明朝貢関係考 > 釜山大学校論文集 ( 人文 社会科学篇 ) 제 14 집, 155 에따르면조선초기에파견된明使는正 5 品부터従 6 品의하급관리였으며, 75 회의明使중에서 48 회는宦官이었다. 22) 野口鐵郎, 中国と琉球 ( 開明書院 ) < 明代琉中往来表 > ; 赤嶺誠紀, 大航海時代の琉球 ( 沖縄타임스社 ) < 進貢船一覧表 > 참조. 23) ( 前略 ) 臣尚巴志, 恭遇聖君嗣登天位, 遠處蕃維, 心馳遙賀, 仰紫宸三祝, 祈聖壽以齊天, ( 後略 ) ( 歷代寶案 제 1 집, 巻 12, 表奏文, 洪熙원년윤 7 월 17 일자, 宣徳帝宛中山王上表文 ). 텍스트로는沖縄県立圖書館編, 歷代寶案校訂本 제 1 책 ( 沖縄県教育委員会 ) 를이용했다. 이上表文에관해서는高良倉吉, 전게 < 琉球の形成と東シナ海世界 > 188 에서인용되었다.

82 5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그렇다면조선국왕이매년명절에망궐례를행했던것처럼, 琉球국왕도역시같은 궁중의례를올리고있었을까? 史料의제약으로단정하기는조심스럽지만, 琉球왕권의 관점에서일찍이豊見山和之씨는 왕은紅錦衣를갖추고, 平天冠을쓰고, 一僧과마주앉아望闕의禮를행한다 ( 朝鮮王朝実録 1546 년 ) 라고하듯이, 국왕은승려와함께 望闕의禮 = 紫禁城遥拜를올리고있다. 고지적하였다. 24) 豊見山씨가자기주장의근거로삼았던 朝鮮王朝実録 에의하면, 中宗 37 년 (1542) 琉球國에표착하여 4 년간생활했던제주표류민朴孫등 12 명으로부터 들은琉球의풍속으로, 확실히琉球國 왕은붉은비단옷을입고, 제례용平天冠을쓰고, 승려와마주앉아望闕의禮를행한다 고기록하고, 大明을섬기기때문에이예를올리 는것이다 고해설하였다. 25) 豊見山씨는언급하지않았지만, 実録의기사는계속해서 百官은관직의서열에따라뜰아래나란히서서배례한다 고기록하고, 표류했던제주 도의朴孫일행도반열의뒤에서배례를행했다고한다. 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는朴孫 일행도역시琉球의백관과마찬가지로명황제의신하에해당하기때문이다. 따라서늦 어도 16 세기중반무렵까지는琉球국왕이 蕃王 으로서조선의望闕禮와유사한궁중 의례를首里城안의성스러운광장 御庭 ( 우나 ) 에서거행하고있었다고보아도좋을것 이다. 다만제주표류민이首里城에서참가했던 望闕의禮 의경우, 그계절에관해서는 朝 鮮王朝実録 에기록이없다. 그런데豊見山씨는薩摩藩의琉球침공 (1609 년 ) 이전의古 琉球때 초하루와보름마다首里城正殿앞에서官人은位階에따라정렬하여중국황 제의장수를기원하는의례를도입하고, 聖節 ( 중국황제의생일 ) 과정월초하루에중 국에서하사한관복을입고의례를거행하였다 는것을지적하고있다. 26) 아마도전자 는매달초하루의朝賀儀禮이며, 후자가聖節 正朝 ( 그리고아마도冬至 ) 의望闕禮를의 24) 豊見山和之, 琉球王國の外交と王権 ( 吉川弘文館 ) <Ⅲ 第 1 章祭天儀禮と宗廟祭祀からみた琉球の王権儀禮 > ) ( 前略 ) 注書尹潔因朴孫等之言, 記琉球國風俗, 其略曰, ( 中略 ) 國王所御之殿, 高五層, 以板覆之, 王具紅錦衣, 戴平天冠, 與一僧對坐, 行望闕禮 事大明, 故爲此禮云, 百官以職次, 分班拜於庭下, 立朴孫等於百官班後, 令一時拜曰, 爾國亦爲大明臣, 不可不拜云 ( 明宗実録 권 3, 원년 2 월 1 일戊子条 ). 26) 豊見山和之, 전게서 <Ⅲ 第 1 章祭天儀禮と宗廟祭祀からみた琉球の王権儀禮 > 234 ; 安達義弘, < 琉球國王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册封 朝貢體制 > 久留米大學比較文化研究 第 19 輯, 60~61 도이聖節 正朝의王朝儀禮에주목했다.

83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57 미하는것으로생각할수있다. 豊見山씨가근거로했던 歷代寶案 에따르면, 일찍이洪武帝로부터하사받은관복이심하게손상되어 聖節 正朝등의행사에지장이생겼다 고한다. 27) 尚巴志가명나라禮部앞으로보낸이咨文은 1436년 ( 正統원년 ) 당시琉球의왕권의례의실시상황을보여주는것이라고할수있다. 그리고이에대한禮部의咨文에주목했던邊土名朝有씨는 聖節 正朝등의행사 에대하여, 이것은洪武 2 년에정해진 聖節正旦冬至蕃國望闕慶祝儀 ( 大明会典 巻 58, 1006 쪽 ) 을가리키는것이다. ( 中略 ) 琉球王및신하가冠帯를하사받은洪武 31 년이후부터는관복을갖춘정식의례가행해졌던것이다. 라고보다깊이있는해석을하고있다. 28) 어느것이든단편적인사료이기는하지만, 뒷날 18세기전반에성립한 琉球国由来記 (1713년 ) 琉球国舊記 (1731년 ) 가보여주듯이薩摩藩지배하의근세琉球에있어서도冬至 元旦 정월 15일의王府儀禮는 3대의례로서매우중시되었으며, 중화황제가사는紫禁城에대한요배의례를강조하게되었다. 29) 이러한王府儀禮에서는외교문서작성에정교하여儀禮에익숙하던職能集團 閩人三十六姓 이관여하고있었을것이다. 30) 이들을종합적으로판단하면, 유구국왕은正朝 聖節등명절에는帝都인北京紫禁城을遥拝하는의례, 즉望闕禮를琉球나름으로 27) ( 前略 ) 一件, 朝服事, 洪武年間, 欽蒙太祖高皇帝給賜本國各官冠 笏 公服等件, 欽遵奉受外, 今照, 本國各官朝服已經多年, 倶以朽壞無存及不能裁製, 凡遇聖節 正旦等事, 行禮未便, 合咨, 乞爲具奏給賜便益, 咨請施行, ( 後略 ) ( 歴代寶案 第 1 集, 巻 17, 國王咨文, 正統원년 9 월 24 일자, 禮部宛中山王咨文 ). 단, 朝服문제에대하여禮部는직접수선해서사용하라고회답했다 ( 同書第 1 集, 巻 4, 禮部咨文, 正統 2 년 6 월 6 일자, 禮部宛中山王咨文 ). 28) 邊土名朝有, 歴代寶案 の基礎的研究 ( 校倉書房 ) < 禮部咨文 > ) 琉球国由来記 巻 1 ( 伊波普猷他編, 琉球史料叢書 第 1 ( 井上書房 ) 수록 ), 王城之公事, 正月朝拝御規式 朝拝, 및 11 월冬至条. 琉球国舊記 ( 전게 琉球史料叢書 第 3 수록 ) 巻 3, 公事, 正月朝賀 南殿賀禮, 및 11 월冬至条. 근세琉球의紫禁城遥拝儀禮에대해서는豊見山和之, 전게서 Ⅲ 第 1 章祭天儀禮と宗廟祭祀からみた琉球の王権儀禮 > 236~241 ; 伊從勉, 琉球祭祀空間の研究 - カミとヒトの環境学 ( 中央公論美術出版 ) < 第 3 部第 11 章琉球王権の場所 - 首里城正殿唐破風の誕生とその改修について > 557~558 참조. 30) 久米村의福建系화교집단이琉球의王府儀禮에관여하고있던것에대하여는, 예를들면真栄平房昭, < 対外関係における華僑と国家 - 琉球の閩人三十六姓をめぐって > 荒野泰典他編,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Ⅲ 海上の道 ) ( 東京大学出版会 ) 259~260 참조. 또한明의禮部가제 2 尚氏王統제 7 대尚寧王 ( 재위 1589~1620 년 ) 앞으로보냈던咨文에 ( 前略 ) 竊惟, 卑國僻處海邦, 自入貢 受封之後, 一切輔導 禮義, 悉頼原賜三十六姓之裔, ( 後略 ) 라는구절이보인다 ( 歴代寶案 第 1 集, 巻 4, 禮部咨文, 萬暦 35 년 12 월 13 일자, 琉球国王宛禮部咨文 ).

84 5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각색한뒤에올렸던것으로추정할수있다. 3. 명과일본의관계 한편일본에서는 1402년 ( 建文 4) 에室町幕府제3대장군에서물러난足利義満 ( 재직 1368~94) 이京都北山의별장에서명나라사신을맞이하고建文帝의책봉을수락하였다. 이듬해永楽帝의등극이알려지자義満은遣明使에게 日本國王臣源 명의로시작되는表文을지참시켜서명으로보냈으며, 그결과 1404년에永楽帝는義満을다시 日本國王 으로책봉하였고, 日本國王之印 이라고새겨진金印을하사하였다. 31) 이미전년에는永楽帝가조선국왕을책봉했으므로, 이해 1404년에琉球국왕과일본국왕이탄생함으로써조선 琉球 일본은거의같은시기에중화제국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세계시스템 ( 실제로는무역시스템 ) 32) 속으로편입된것이된다. 이때일본에는永楽勘合 100 통이들어왔고, 이후일본과명사이에는이른바 勘合貿易 이시작된다. 勘合船 ( 遣明船이라고도한다 ) 은 1547년까지약 150년동안 19회에걸쳐파견되었는데실제로는朝貢船이다. 33) 명나라가일본국왕인室町殿 ( 室町幕府의수장, 대개의경우는室町장군 ) 에게인정했던조공빈도는 10년 1공이었는데, 34) 勘合船 = 조공사절의파견빈도와거의부합 31) 田中健夫, 中世對外関係史 ( 東京大學出版会 ) < 第一部第二章冊封関係の成立 > 64~ 67 ; 同, 前近代の國際交流と外交文書 ( 吉川弘文館 ) < 第二足利将軍と日本國王號 > 49~50 ; 鄭樑生, 明 日関係史の研究 ( 雄山閣 ) < 第三章明日交渉 > 146~149 ; 佐久間重男, 전게서 < 第一編第二章永楽帝の対外政策と日本 > 109~113 및 < 終論明 清からみた東アジアの華夷秩序 > 358~359 32) 坂野正高, 近代中国政治外交史 - ヴァスコ ダ ガマから五四運動まで ( 東京大学出版会 ) < 第三章朝貢関係 - 叩頭 問題 > 76~83 ; 浜下武志, 朝貢システムと近代アジア ( 東京大学出版会 ) < 第一部 Ⅰ 東アジア国際體系 > 22 ; 村井章介, 전게 海から見た戦国日本 23 33) 田中健夫, 전게 中世対外関係史 < 第一部第四章明および朝鮮との通交貿易の展開 > 153~154 ; 同, 対外関係と文化交流 ( 思文閣出版 ) < 勘合符 勘合印 勘合貿易 > 102. < 勘合貿易 > 의선구적인연구로同, 倭寇と勘合貿易 ( 至文堂 ) 이있다. 34) ( 前略 ) 永樂初, 復來朝貢, 賜龜紐金印 誥命, 封爲日本國王, ( 中略 ) 給勘合百道, 始令十年一貢, 貢道由浙江寧波府, 毎貢正 副使等毋過二百人, ( 後略 ) ( 萬曆大明会典 巻 105, 禮部 63 朝貢 1 東南夷上日本國条 ). 다만小葉田淳씨는 1511 년 ( 正徳 4) 에간행된 正徳大明会典 ( 弘治会典 ) 의규정에의문을품고 10 년 1 공의通交制限은寶徳年間 (1449~52 년 ) 이후에실시되었다고한다. 또한최근에伊川健二씨는이통설에반론을제기하고, 明側의재정사정과遣明使節에의한소금밀매, 北京会同館에서의傷害事件을배경으로 10 년 1 공의制定時期를 1484 년 ( 成化 20) 으로단정하는데, 明憲宗実録 과勅諭에서이점을입증할수는없다 고언급하기도했으며, 설득력이

85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59 한다. 물론 1년 3공의조선, 2년 1공의琉球와비교하면그대우의격차는부정할수없다.(< 表 1> 참조 ). 入貢할때정규의朝貢使節인지여부를준별하기위하여의무적으로지참해야하던勘合도事大의禮를충실히이행하는조선과琉球두나라는면제받았다. 35) 勘合은 1386년 ( 洪武 16) 에暹羅 ( 아유타야, 현재타이의일부 ) 에게지급한것이시작이며, 급부의대상이되었던것은日本 占城 爪哇 ( 자바섬북부 ) 満刺加( 말라카 ) 真臘 ( 캄보디아 ) 錫蘭山( 스리랑카 ) 등해상항로를이용하여중국에来航했던 15개국이었다. 36) 勘合급부의대상국이된暹羅 占城 爪哇의조공빈도가모두 3년 1공이지만, 일본의조공빈도는 10년 1공이라는점에서도일본의이질성을용이하게간파할수있다. 또한田中健夫씨에따르면, 1402년京都北山殿에서행해졌던책봉의례때는 高机를母屋앞에세우고그위에詔書를두고, 義満이먼저향을사르고, 이어서삼배, 그런다음에꿇어앉아서이것을삼가봤다 고한다. 37) 鄭樑生씨는 義満의이런태도는중화세계제국의일원으로편입된속국국왕의태도이외에아무런의미도없다 고간주하지만, 38) 室町殿과명황제의종속관계를시사하는명절의遙拜의례를거행한것인지지 떨어진다. 小葉田淳, 中世日支通交貿易史の研究 ( 刀江書院 ) < 第六章明の諸制度 > 321~322 ; 伊川健二, 大航海時代の東アジア - 日欧通交の歴史的前提 ( 吉川弘文館 ) < 第一部第二章諸国王使をめぐる通交制限 > 60~61 35) 鄭樑生, 전게서 < 第二章明の対外政策 > 62 ; 佐久間重男, 전게서 < 終論明 清からみた東アジアの華夷秩序 > 353 ; 閔徳基, 前近代東アジアのなかの韓日関係 ( 早稲田大学出版部 ). 증보판은同, 前近代동아시아세계의韓 日관계 ( 景仁文化社, 서울 ) < 第一部第二章朝鮮朝前期の 日本国王 観 - 敵禮 の面から > 84~85. 権善弘, 전게 < 조선시대사대관계와책봉체제 > 66. 다만勘合의現存例는없으며, 그使用制度 形状에관해서는伍躍, < 日明関係における 勘合 - とくにその形状について > 史林 第 84 巻第 1 号 ; 橋本雄, < 日明勘合再考 > 九州史学研究会編, 境界からみた内と外 ( 九州史学 創刊 50 周年記念論文集 下 ) ( 岩田書院 ) 등, 통설에대한재검토가진행중이다. 36) 洪武十六年, 始給暹羅國, 以後漸及諸國, ( 中略 ) 毎改元, 則更造換給, 計有勘合國分, 暹羅 日本 占城 爪哇 満刺加 真臘 蘇禄國東王 蘇禄國西王 蘇禄國峒王 柯支 浡泥 錫蘭山 古里 蘇門荅刺 古 麻刺 ( 萬暦大明会典 巻 108, 禮部 66, 朝貢通例, 勘合號簿条 ). 松浦章, < 萬暦四十五年暹羅国遣明使 - 明代朝貢形態の様相 > 夫馬進編, 増訂使琉球録解題及び研究 ( 榕樹書林 ) 183, ) 田中健夫, 전게 中世対外関係史 < 第一部第二章冊封関係の成立 > 65 ; 橋本雄, 前掲 < 朝鮮國王使と室町幕府 > 172~173. 醍醐寺座主満済 ( 만사이 ) 의日記 満済准后日記 ( 続群書類従 補遺 1, 続群書類従完成会, 1978 年 4 月수록 ) 永享 6 年 5 월 12 일조에 ( 前略 ) 高机於立母屋前, 其上被置唐書, 先御燒香, 次三拜, 以後跪テ唐書お御拜見候キ, ( 後略 ) 라고되어있다. 다만극히최근에는橋本雄, < 室町日本の對外観 - 室町殿の 内なるアジア を考える > 歴史評論 697 호가義満의受封儀禮는과연 明集禮 등명쪽의빈례규정대로집행되었는지여부에대하여재검토를시도하고있다.

86 6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금은알수없다. 게다가足利義満이죽은후家督을이은 4대장군義持 ( 재직 1394~ 1423년 ) 은 1411년에대명외교방침을전환하여책봉관계를단절했고, 6대장군義教 ( 재직 1429~41년 ) 가책봉관계의부활을원하여 1432년宣徳帝에게表文을보냈으며, 8대장군義政 ( 재직 1449~73년 ) 시대이후는명사신의来日이끊어지는등황제대室町殿의외교관계가그다지안정적인것은아니었다. 明황제가冊封使를파견하여誥命수여儀禮를거행했던形跡이있는것은義満 義持 義教 3명에불과하다. 39) 義満이하室町殿이국내에서 日本国王 을표방했던形跡도찾아볼수없으며, 日本国王 號는幕府가対明貿易을독점하기위하여 通交名義 로서기능하는데그쳤던것이다. 40) 대명무역의이권을둘러싼細川 大内두집안의쟁탈전은조공무역선의입관수속을두고다투었던寧波의난 (1523년, 이른바寧波爭貢事件 ) 을초래하였고, 41) 일명관계는이후 勘合貿易 을독점하고있던大内씨의멸망 (1551) 과함께단절된다. 16세기의室町정권하에서는조공무역시스템의본래의정치적의미는상실되고, 책봉체제와조공무역이별개의것으로전락해간것을상징한다. 42) 훗날 1581년에 日本国王 은対明通貢의중재를宣祖 ( 재위 1567~1608년 ) 에게요청했지만, 宣祖는 人臣에게私交없다 는논리로이를거부하고있다. 43) 그러면 1585년에公家社会의최고관직인関白에취임하여 唐 38) 鄭樑生, 전게서 < 第三章第二節明日國交の開始 > ) 田中健夫, 전게 前近代の国際交流と外交文書 < 第二足利将軍と日本國王号 > 51~59 에따르면, 1433 년 6 월에명은義教에대한책봉사를파견했지만, 義政이후의일본국왕에대하여책봉사가파견된흔적은없다. 또義政이후에는일본국내의내란을계기로朝鮮使節의来日도끊어졌다. 이점은中村栄孝, 日鮮関係史の研究 ( 上 ) ( 吉川弘文館 ) < 五室町時代の日鮮関係 > ) 田中健夫, 전게 前近代の国際交流と外交文書 < 第二足利将軍と日本国王号 > 44 ; 村井章介, < 易姓革命の思想と天皇制 > 永原慶二編, 講座前近代の天皇 ( 第 5 巻世界史のなかの天皇 ) ( 青木書店 ) 34 41) 寧波争貢事件에관해서는최근일본이라는조공국의入貢현장에초점을맞춘山崎岳, < 朝貢と海禁の論理と現実 - 明代中期の 奸細 宋素卿を題材として > 夫馬進編, 中国東アジア外交交流史の研究 ( 京都大学学術出版会 ) 가있다. 42) 尹誠翊, 명대왜구의연구 ( 景仁文化社, 서울 ) < 제 3 장嘉靖時期倭寇활동의증폭요인과활동의양상 > ) 松浦允任撰 ( 田中健夫 田代和生校訂 ), 朝鮮通交大紀 ( 名著出版 ) 巻 3, 萬松院公昭景 ( 宗義智 ), 朝鮮国王李昖奉復日本国王殿下 ( 萬暦 9 년 5 월일자 ), 116~119. 中村栄孝, 전게서 < 一八 右武衛殿 の朝鮮遣使 > 749~750 ; 閔徳基, < 室町幕府의対明朝貢仲裁요청과朝鮮의대응 > 日本歴史研究 창간호, 55. 다만田中健夫, 전게 前近代の国際交流と外交文書 < 第二足利将軍と日本国王号 > 80 에서는이 < 日本国王 > 을최후의室町将軍足利義昭 ( 재직 1568~73 년 ) 가아니라対馬에서창작한가공의국왕으로본다.

87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61 입국 (= 明정복 ) 을선언했던豊臣秀吉 44) 은명황제를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국제질서에포섭되고, 그리고황제를요배하는의례를올렸던것일까? 그전제로서秀吉은당시의명황제인神宗萬曆帝 ( 재위 1572~1620년 ) 의책봉을수락하지않으면안된다. 일찍이豊臣정권에의한외교구상의성격을검토했던藤木久志씨는 豊臣정권의대명외교의기축은어쨌든勘合 = 교역재개책에있다 고보고, 豊臣의天下一統을군사정복으로간주하는통설을근본적으로의심 하는입장을취하고있다. 45) 豊臣政権은 1589년정월시점에서島津씨를매개로明과의 勘合 부활을구상했고, 또한 1593년 5월에명과의강화교섭과정에서 勘合 의부활요구가나타나기때문이며, 게다가秀吉의 勘合 에대한이해에도문제가있다고한다. 46) 이미中村榮孝 北島万次두분이지적했던것처럼, 본래의 勘合 이조공 책봉관계를전제로함에도불구하고豊臣정권과명사이에는인식의차이가있었다. 47) 특히幕藩體制성립기에있어서琉球支配의구도를논한紙屋敦之씨는 豊臣政権의 1593 년 ( 文禄 2) 5 월의日明講和交渉에서 勘合, 그리고江戸幕府의 1610 년 ( 慶長 15) 의対明講和交渉에서 かんごう ( 감합 ) 은모두조공관계를전제로하지않는公貿易을바라던것으로생각해야한다. 고日明간의인식의차이를명쾌하게지적했다. 48) 勘合 에대한오해는豊臣政権뿐만 44) 岩沢愿彦, < 秀吉の唐入りに関する文書 > 日本歴史 第 163 号. 뒷날三鬼清一郎編, 豊臣政権の研究 ( 戦国大名論集 18) ( 吉川弘文館 ) 再録 ) ; 中村栄孝, 日鮮関係史の研究 ( 中 ) ( 吉川弘文館 ) < 三対外戦争における豊臣秀吉の目的 > 241~242 45) 藤木久志, 豊臣平和令と戦國社会 ( 東京大學出版会 ) < 第四章海の平和 = 海賊停止令 > 243. 이른바 勘合貿易振興説 과 対外領土拡張説 은진작부터임진왜란의동기를둘러싼논점이되었다. 예를들면, 三鬼清一郎, < 関白外交體制の特質をめぐって > 田中健夫編, 日本前近代の国家と対外関係 ( 吉川弘文館 ) 86 ; 同, < 朝鮮役研究の一齣 - 中村栄孝氏の業績をめぐって > 同編, 織豊政権期の政治構造 ( 吉川弘文館 ) 357~360 에그러한지적이있다. 46) 藤木久志, 전게서 < 第四章海の平和 = 海賊停止令 > 229~230, 239~244. 그리고村井章介, < 東アジア と近世 > 歴史學研究会 日本史研究会編, 日本史講座 ( 第 5 巻近世の形成 ) ( 東京大學出版会 ) 51~52 47)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文禄 慶長の役 > 177~178 ; 北島万次, 豊臣政権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 ( 校倉書房 ) < 第三章第二節日明講和の和議折衝 > 188~190 48) 紙屋敦之, 幕藩制国家の琉球支配 ( 校倉書房 ) < 第一部第一章琉球支配と幕藩体制 > 22. 島津씨에의한琉球侵攻직후인 1610 년에徳川政権은日明貿易부활의중개역을琉球에기대했지만실패했다 ( 同, 25~28). 또한同 < 対明政策と琉球支配 - 異国から 異国 へ > 加藤榮一他編, 幕藩制国家と異域 異国 ( 校倉書房 ) 265~268 참조.

88 6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아니었던것이다. 中村質씨도豊臣政権의 勘合 을 일본을중심으로하는국가관리의통교체제 이며, 현실에서는朱印船제도처럼국가관리의교역형태 로생각하고, 徳川정권기에정비되는朱印船무역의원류를豊臣정권기에서찾았다. 49) 원래 감합무역 이라는용어자체가조공무역이라는본질적인성격을애매하게만들고있다. 극히최근에는명정부내부의대일강화교섭을둘러싼논쟁을정리한中島楽章씨가동아시아세계에서는일본만이조공무역을허가받지못했기때문에어쩔수없이거병에이르렀다는화의추진파였던小西行長 柳川調信 宗義智 景轍玄蘇일행의말에주목하였다. 50) 1592년 5월의漢城함락후, 秀吉은後陽成天皇을北京으로옮기고秀吉자신은日明貿易의要港이었던寧波로居所를정하여동아시아통교관계를장악한다는구체적인 ( 또는공상적인 ) 구상을밝히고있으며, 51) 임진왜란의원인론 52) 을살피는데있어서흥미깊은지적이다. 과연豊臣秀吉은책봉절차와그의미를이해하고있었을까? 책봉체제로들어선경우명과어떠한의례적관계를구축할필요가있었는지아마도秀吉은이해하지못했던것으로생각된다. 1년 3공의조공빈도로명과조공 회사라는무역시스템에편입된조선과, 1547년의제19차勘合船을마지막으로 10년 1공의공기마저포기했던일본에서는 49) 中村質, < 東アジアと鎖国日本 - 唐船貿易を中心に > 加藤榮一他編, 전게서 幕藩制国家と異域 異国 수록, 341~342 50) 中島楽章, < 封倭と통공 年の寧波開貢問題をめぐって > 東洋史研究 제 66 권제 2 호, 132. 平行長通書于金應瑞, 欲見更事之人, 與之議事, 應瑞使李弘發入往, 則平調信 平義智 仙蘇 (= 景轍玄蘇 ) 竹溪 (= 竹溪宗逸 ) 等, 辟左右謂曰, 南蠻 琉球皆是外夷而奉貢, 稱臣於大明, 日本獨爲棄國, 未參其列, 前以此意請朝鮮, 欲達于大明而朝鮮牢不肯許, 不得已擧兵出來, ( 後略 ) ( 宣祖実録 권 57, 27 년 11 월 1 일을해조 ). 51)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76~77 ; 同, 전게서 < 三対外戦争における豊臣秀吉の目的 > 259~260, 283~284 ; 北島万次, 전게서 < 第二章豊臣政権の対外認識と東アジア > 95 ; 三鬼清一郎, < 豊臣秀吉の対外政策 > 韓国史論 22( 壬辰倭乱의再照明 ) ( 国史編纂委員会, 서울 ) 64~67 52) 壬辰倭乱연구의학설사는北島万次, 전게서 < 第一章豊臣政権の朝鮮侵略に関する学説史的検討 > 가상세하다. 또한임진왜란의원인 목적 동기에관한연구사는六反田豊他, 전게 < 文禄 慶長の役 ( 壬辰倭乱 )> (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編, 前掲報告書, 수록 ) 28~31 참조. 또한朴晢晄, 전게 < 壬辰倭乱 ( 文禄 慶長の役 ) 연구의현황과과제 > 399 에따르면, 한국측의연구자는원인에대하여체계적으로심도있는분석에이르지못하고있는것이실상 이라고한다. 최근朴秀哲, <15 16 세기일본의전국시대와도요토미정권 - 임진왜란 의재검토 > 歴史学会編, 전쟁과동북아의국제질서 ( 一潮閣, 서울 ) 207~223 에서는壬辰倭乱의원인론외에이른바豊臣平和令의문제점, 항복하면살려주고, 반항하면토벌한다 는秀吉의침공논리를재검토하고, 壬辰倭乱대신에 壬辰戦争 이라는호칭을제시하였다. 모두참조하기바란다.

8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63 정보수집이라는측면에서도큰격차가있었을것이다. 군사력을배경으로천하통일을완수한秀吉에게있어서萬曆帝의신하로서의례적관계를체결하고, 이를토대로명을중심으로하는조공무역시스템속으로포섭된다는발상은없었다는것이필자의견해이다. 동시에그것은임진왜란이발생한원인이기도할것이다. 그러면萬曆帝의신하는구체적으로어떠한의례적관계를구축하고있었던것일까? 그래서이하에서는秀吉과거의동시대에한반도를다스리고있던선조 ( 재위 1567~1608) 시대로시기를좁히고, 望闕禮라는대명외교의례의 場 을통하여 16세기후반의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한중관계의실상에다가가려한다. 물론임진왜란이라는전시하에있던王都漢城이주된고찰의무대가된다. 그런다음에임진왜란으로발생한秀吉의일본국왕책봉에관하여약간의고찰을추가하려한다. Ⅱ. 조선宣祖代의의례와외교 1. 宣祖의책봉의례 먼저선조의책봉의례의 場 을보아둘필요가있을것이다. 1567년 7월 3일, 宣祖는景福宮의正殿인勤政殿에서즉위하였다. 53) 당시 16세의宣祖는先代인明宗 ( 재위 1545~ 67년 ) 의직계가아닌徳興大院君 ( 中宗의 7남 ) 의 3남으로明宗妃仁順王后沈씨와대신들의합의에따라옥좌에오른傍系의조선국왕이다. 54) 그리고이듬해인선조원년 (1568) 2월 27일, 왕도한성에는책봉사姚臣 李慶일행이영접을받고입국하였다. 正使로서조선에파견되었던姚臣은中官, 즉宦官이다. 55) 宣祖의冊封모습은당일의실록기사에아래와같이나온다. 53) 宣祖修正実録 권 1, 즉위년 7 월 3 일병진조. 54) 震檀学会編, 李相佰著, 韓国史 ( 近世前期篇 ) ( 乙酉文化社 ) < 第二編第五章士禍 党争 > 567~568 ; 李泰鎮, 朝鮮儒教社会史論 ( 知識産業社, 서울 ). 일본어역은六反田豊訳, 朝鮮王朝社会と儒教 ( 法政大学出版局 ) <Ⅱ. 제 11 장壬辰倭乱에대한理解의몇가지문제 > ) 賜故朝鮮國王李峘 (= 明宗 ) 謚恭憲, 遣中官姚臣, 行人歐布稷吊祭, 封其侄署國事李昖 (= 宣祖 ) 爲朝鮮國王 ( 明穆宗実録 권 14, 隆慶원년 11 월 5 일병진조 ).

90 6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申時, 冊封天使上使姚臣 副使李慶到迎詔門, 百官皆以雨具迎詔勅, 至勤政殿, 殿庭亦濕, 及申時, 頒詔勅也, 雨即止, 上捧詔勅, 退至中門外而還入, 夕, 上以宴詣太平館, ( 宣祖実録 권 2, 원년 2 월 27 일정미조 ) 오후 4시무렵책봉사가迎詔門에도착하자조선의문무백관은비가내리는중에도공손히詔勅을맞이했고, 경복궁의勤政殿으로이동했다. 책봉사가詔勅을내릴무렵에는비도그쳤으며, 선조가詔勅을받들고中門에서퇴장했으며, 저녁무렵에는太平館에서책봉사를접대하는연회를베풀었다. 임진왜란이전의 宣祖実録 은단편적이긴하지만, 훗날鵝城府院君李山海가제술했던 萬曆 36년 6월 12일 자 宣宗大王穆陵誌 에따르면이때선조는穆宗隆慶帝 ( 재위 1566~72) 로부터 조선국왕 에책봉하는誥命외에金印 冕服을받았다. 56) 이해에선조가명을중심으로하는조공무역체제에정식으로편입됐다는것을의미한다. 실록기사에는생략되어있지만, 勤政殿에서冊封儀禮의클라이맥스는禮制上조선국왕이종친 문무백관과함께 萬歳 를삼창하는장면이다. 57) 만세삼창이라는이른바복속의례는正朝 冬至의대명요배의례에모두공통적이다. 58) 이점은유의해야할것이다. 어쨌든豊臣秀吉에게도이의례행위를요구했기때문이다 ( 후술 ). 사료속에보이는迎詔門 ( 迎恩門이라고도한다 ) 은中宗 32년 (1537) 정월에慕華館앞에신축하고편액도달았다. 59) 慕華館이란한성부敦義門 ( 서대문 ) 밖의盤松坊에있던명나라사신을위한영접시설이다. 60) 향연이베풀어진太平館은崇禮門안에있던명사신을위한숙박시설로서, 61) 모두中華를숭모하는조선의대명외교자세를가시화했던 56) ( 前略 ), 翌年 (= 宣祖元年 ) 春, 皇帝遣太監姚臣 李慶, 齎詔封爲朝鮮國王, 欽賜誥命 冕服 彩幣, ( 後略 ) ( 宣祖実録 권 221, 41 년 2 월조, 誌文 ). 57) ( 前略 ) 左通禮啓請山呼, 殿下拱手加額曰萬歳, 啓請山呼, 曰萬歳, 啓請再山呼, 曰萬萬歳, 王世子及宗親 文武百官同, ( 後略 ) ( 國朝五禮儀 권 3, 嘉禮, 迎詔書儀 ). 58) 桑野栄治, 전게 高麗末期から李朝初期における對明外交儀禮の基礎的研究 < 附録朝鮮初期望闕行禮儀註試釈 > 참조. 59) 中宗実録 권 83, 32 년정월 2 일임오조. 柳本藝 漢京識略 ( 순조 30 년, 1830) 권 1, 宮室, 慕華館条에 ( 前略 ) 館前, 舊有紅箭門, 中宗丙申 (= 中宗 31 년 ), 改立雙柱門, 蓋緑琉璃瓦, 扁曰迎詔門, 己亥 (= 중종 34 년 ), 華使薛廷寵以為詔勅殊名, 改扁曰迎恩門, ( 後略 ) 이라고되어있다. 텍스트로는 漢京識略 ( 第 2 版 ) (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会, 서울 ) 을이용했다. 60) 在敦義門外西北, 本慕華樓, 世宗十二年 (=1430), 改爲館 ( 新増東國輿地勝覧 [ 중종 26 년, 1531] 권 3, 漢城府, 宮室条, 慕華館 ). 在盤松坊東, 有迎恩門, 爲華使迎送之所 ( 大東地志 [ 高宗원년, 1864] 권 1, 漢城府, 宮室条, 慕華館 ). 61) 在崇禮門内, 待中朝使臣, 館後有樓 ( 新増東國輿地勝覧 권 3, 漢城府, 宮室条, 太平館 ). 在崇禮門内, 爲華使留館, ( 中略 ) 仁祖朝, 撤之, 構弘濟院 ( 大東地志 권 1, 漢城府, 宮室条, 太平館 ).

9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65 시설이라고할수있다. 책봉사를맞이한조선에서는그후 2월 28일에선조가주재하는翌日宴, 29일에경복궁의경회루관람후勤政殿에서열린향연, 30일에는정부고관이太平館에서책봉사를접대하고있다. 62) 이러한일련의의례는대명외교상정해진규칙이다. 명사신이체제중일때의접대의례에대하여는成宗 16년정월에시행된 經國大典 에 명조정의사신이왕도한성에도착하면下馬宴과翌日宴을베푼다 왕세자 종친부 의정부 육조또한차례로잔치를베푼다. 사신이帝都북경으로돌아갈때는餞宴을베푼다 고되어있으며, 63) 명사신이한성에도착한뒤에는원칙적으로下馬宴 翌日宴 餞宴순서로조선국왕이주재하는연회가베풀어졌다. 64) 이러한외교규칙으로보자면책봉사가귀국할때는餞宴이열려야하는셈이지만, 宣祖実録 에는책봉사의귀국에관한기록조차남아있지않다. 그런데 宣祖實錄 을편찬할때최초의 11년분을보완하는자료로활용된柳希春의 眉巌日記草 를대조해보면책봉사는 3월 1일에한강유람을즐기고있다. 65) 당시한성을방문했던명나라사신에게있어서한강유람은이를테면정평이나있는코스였다. 66) 그후 3일에太平館에서餞別을위한上馬宴이열렸고, 이튿날 3월 4일에선조는백관과함께慕華館迎詔門에서귀국길에오른책봉사를전송했다. 67) 이번의선조에대한책봉을감사하기위해右議政丁應斗와吏曹判書姜暹이謝恩使로명에파견된것은 3월하순의일이다. 68) 62) 行翌日宴, 上行酒於天使, 五爵而畢後還宮, 上於慶會樓, 請宴兩天使, 慶會樓觀光後, 勤政殿赴宴, < 宰樞宴于大平館 > ( 차례로 宣祖実録 권 2, 원년 2 월 28 일 29 일 30 일조 ). 63) 朝廷使臣, ( 中略 ) 致京, 設下馬宴 翌日宴 [ 王世子 宗親府 議政府 六曹亦以次設宴 ], 及還, 設餞宴 凡接待, 考儀軌行之, 倭 野人同 ( 經國大典 권 3, 禮典, 待使客条 ). 國朝五禮儀 권 5, 賓禮, 宴朝廷使臣儀条. 64) 후일 通文館志 권 4, 事大下, 入京宴享儀条에의하면, 명사신입경후에 5 회 ( 下馬宴 翌日宴 仁政殿請宴 回禮宴 別宴 ), 귀국할때 2 회 ( 上馬宴 餞宴 ), 합계 7 회의향연이명나라사신을위하여베풀어졌다. 또한李鉉淙, < 明使接待考 > 郷土서울 제 12 호, 141~ ) 天使二員遊觀漢江 ( 眉巌日記草 제 1 책, 무진 3 월 1 일 ). 텍스트는朝鮮史編修会編, 眉巌日記草 ( 朝鮮史料叢刊第 8) ( 朝鮮総督府, 京城, 저본은文化柳氏家소장본 ) 을이용했다. 66) 李相培, 2004 < 조선전기외국사신접대와明使의遊観연구 > 國史館論叢 제 104 집 ; 曺圭益他편, 연행록연구총서 7( 정치 경제 외교 ) ( 學古房, 서울 ) 에다시수록, 242~243 에의하면, 명나라사신의한양遊観地는한강, 사찰, 도성안의개인집, 성균관, 모화루, 남산의순서이다. 67) 以太平館上馬宴, 朝, 詣漢城府内依幕, ( 中略 ) 巳時, 百官隨駕至太平館近處, 館員除經筵番外入依幕, 盧君 (= 盧守慎 ) 及余之出入, ( 後略 ), 罷漏後, 以天使回程, 百官先詣慕華館, ( 中略 ) 巳時, 上與天使酬酢, 四爵禮畢, 両天使與上相別, 歩至迎詔門外, 與百官相揖而別, ( 後略 ) ( 차례로 眉巌日記草 제 1 책, 무진 3 월 3 일 4 일 ). 68) 是日, 謝恩使乃謝册封, 故丁應斗代為右相之任, 姜暹亦假吏判之銜 ( 眉巌日記草 제 1 책, 무진

92 6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상으로책봉사의한성체류는 1 주일정도에불과했지만, 선조의책봉의례는상술한 접대의례를포함하여謝恩使를파견하는것으로끝을맺는다. 2. 임진왜란이전의望闕禮 1) 명사신의來朝와冬至의望闕禮 선조대에望闕禮의시행을전하는최초의기록은선조 5 년 (1572) 11 월동지에보인 다. 이날의기록도柳希春의 眉巌日記草 를토대로작성한것이다. 69) 冬至, 罷漏天明, 上率群臣, 行望闕禮, 仍班, 又行兩大妃殿賀禮, 禮畢, 群臣退, 辰正, 上出坐殿上, 群臣入行賀禮, 禮畢, (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7 일기축조 ) 동짓날한성부안의야간통행금지를해제하는큰종이울린다 ( 罷漏. 5 更 3 点 ). 새벽녘 ( 天明 ) 에선조는여러신하를거느리고望闕禮를거행하였다. 조선국왕이문무백관과함께대명황제에게동지를축하하는대명요배의례이다. 이어서양대비전, 즉仁聖王后 ( 仁宗妃 ) 와仁順王后 ( 明宗妃 ) 에대하여동지를축하한다. 이런의례를끝내면신하들은일단대궐정전에서물러난다. 당일오전 8시무렵 ( 辰正 ) 이되면선조는다시正殿으로행차하고, 신하들이선조에게朝賀禮를올린다. 전자의望闕禮는명황제를축하대상으로하는대외적인궁중의례이며, 후자의朝賀禮는조선국왕을축하대상으로하는국내용궁중의례이다. 70) 望闕禮와朝賀禮가끝나면통상은대궐正殿에서会禮宴이열리지 3 월 21 일 ). 朝鮮官人이外交使節로서北京에파견될경우, 일반적으로 假銜 으로서임시로 1 品階를올리는일이관례였다. 金松姫 朝鮮初期堂上官兼職制研究 - 東班京官職과臨時職을중심으로 ( 漢陽大学校出版部, 서울, 1998 년 12 월 ) < 第 4 章 1 対明使臣과明使迎接官 > ) 眉巌日記草 第 7 冊, 壬申 11 월 7 일조 70) 國朝五禮儀 권 3, 嘉禮, 正至王世子百官朝賀儀 [ 誕日賀附 ] 条 ; 国朝五禮序禮 巻 2, 嘉禮, 排班圖, 勤政殿正至誕日朝賀之圖. 正朝 冬至의朝賀禮事例에대해서는桑野栄治, 전게 高麗末期から李朝初期における対明外交儀禮の基礎的研究 에서도다루었지만, 한국에서는韓亨周, < 朝鮮初期朝賀儀禮에대한考察 - 正至朝賀를중심으로 > 明知史論 第 13 輯 ( 서울 ) 외에姜制勲, < 조선초기朝会의식 > 朝鮮時代史学報 28 ( 서울 ) ; 同, < 朝鮮世祖代의朝会와王権 > 史叢 61 ( 서울 ) ; 同, < 조선성종대朝会儀式과朝会운영 > 韓国史学報 제 27 호 ( 서울 ) ; 同, < 조선초기朝儀의의례구조와상징 > 韓国史研究 137 ( 서울 ) 등조선초기로시기를좁혀서朝会儀禮전반의구조분석이진행되고있다. 하지만正朝

93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67 만, 71) 선조 6년이해의동짓날실록기사에는会禮宴에대한기록이없다. 正朝 冬至의会禮宴은중종대 (1506~44년) 에가뭄과이에따른흉년의여파로거행되지않는추세였다. 72) 사료의제약때문에판단하기어려운부분이지만, 아마도이해의동짓날에는会禮宴이열리지않았던것으로생각된다. 여기서유의해야할점은이때조선은한성에서명나라詔諭使節을맞아들였다는것이다. 명사신翰林院編修 ( 정7품 ) 韓世能 吏科左給事中 ( 종7품 ) 陳三謨일행은萬曆帝의등극을通達하는조칙을가지고 11월 1일한양에도착했다. 그날정오에慕華館으로행차한선조는문무백관을거느리고五拜三叩頭의배례로써명사신을환영했다. 73) 저녁무렵이되자선조는역시여러신하를거느리고太平館으로가서명사신을위문해야하는下馬宴을개최하고있다. 74) 이미책봉사영접의례의 場 에서본것처럼이러한일련의의례는대명외교상정해진규칙이다. 그리고이러한외교규칙에준거하여다음날은이른아침부터太平館에서翌日宴이열렸다. 그때선조는명사신이동짓날인 7일에望闕禮를거행하고나서귀국한다는사실을안다. 75) 이때문에조선정부에서는선조가동짓날望闕禮를명사신과함께같은장소에서거행해야하는지어떤지문제가되었으나, 柳希春은명사신과동석할필요는없다며이를부정했다. 76) 아울러서선조는명사신에게체재일정을연장하도록요청하고있다. 다음의실록기사가그것이다. 天使詣景福宮, 周覽慶會樓, 赴勤政殿之宴, 上以宗系改正 惡名申雪奏請使將遣事, 令通事告于 兩使, 答曰, 天子聖明, 今若奏請, 可得請矣, 上又請曰, 初七日發行云, 冬至節日行望闕禮而後發行日, 晩矣, 一日之間, 請留, 天使曰, 懇至, 當依許留, ( 後略 )(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4 일병술조 ) 冬至의朝賀禮가朝会儀禮의中軸을이루는 大朝会 이며, 그전제로서望闕禮가실시된것은말할필요도없을것이다. 71) 国朝五禮儀 巻 3, 嘉禮, 正至会儀条 ; 国朝五禮序禮 巻 2, 嘉禮, 排班圖, 勤政殿正至会百官之圖 72) 桑野栄治, 전게 < 朝鮮中宗代における對明遥拝儀禮 > ) 上以卯時爲迎詔, 而至午時, 天使韓世能 陳三謨奉詔勑, 而至慕華館, 上率百官, 行迎拜禮, 即五拜三叩頭也, 百官從下先行, ( 後略 ) (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1 일계미조 ) 74)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1 일계미조 75) 早朝, 上乃出, 率百官, 詣太平館, 設翌日宴, 行九爵, 上再行酒而止, 日暮雪止, 還宮, ( 中略 ) 天使以初七日冬至, 行望闕禮後, 發行云, 天使明日將謁聖 (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2 일갑신조 ). 76) 天使到成均館, ( 中略 ) 又衆議冬至望闕禮, 或疑上與天使同行一處, 希春以爲, 不當同處爲之云 (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3 일을유조 ).

94 6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날명사신은경복궁경회루를관람하고근정전연회에초대받았다. 그자리에서 선조는먼저 宗系를개정하여惡名을申雪하는奏請使, 즉宗系辨誣奏請使파견을타 진했는데, 명사신은 지금의萬曆帝는총명하여, 만일명에주청사를파견하면허가하 실것이다 라고회답했다. 중종 13 년에재연된한중간의일대외교분쟁인宗系辨誣문 제 77) 는선조대에들어서도여전히해결을보지못했으므로, 조선정부가명나라사신을 맞이하는것은외교교섭을직접진행시킬수있는절호의기회이기도했다. 그리하여 선조는한성체제예정기간을연장하고동짓날望闕禮를마친다음날귀국하는게어떻 겠냐고제안했는데, 명사신도이를받아들였다. 78) 선조가명사신을붙잡았던것은그 저외교적인발언이아니라宗系辨誣을둘러싼외교교섭에서시간을벌필요가있었기 때문이다. 결국명사韓世能은동지다음날 8 일에열린太平館에서의上馬宴, 9 일의慕 華館餞宴이라는공식행사를마치고선조와종실, 그리고문무백관이전송하는가운데 귀국길에올랐다. 79) 宗系辨誣문제는후일선조 22 년에해결을보지만, 그때宣祖가 中 朝의明은우리조선을内服 (= 帝居의域 ) 과마찬가지로본다 고말할만큼 80) 조선전기 의한중관계는긴밀하였다. 그리고조선과明의이처럼긴밀한관계때문에明은壬辰倭 乱에참전하게되는것이다. 81) 77) 大明会典 朝貢条에李仁任과太祖李成桂父子가 4 명의高麗国王을살해하고政権을奪取했다고기록되어있었던것이中宗 13 년에발각되었다. 이후조선정부는그를수정할것을요구하는使節을여러차례明에파견했다. 末松保和, 전게서 < 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関係 > 의 < 第十二章宗系弁誣の発端 > ; 桑野栄治, < 朝鮮版 正徳大明会典 の成立とその現存 - 朝鮮前期對明外交交渉との関連から > 朝鮮文化研究 (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研究室紀要 ) 제 5 호 ; 朴成柱, < 조선전기朝 明관계에서의宗系문제 > 慶州史学 第 22 輯 ( 慶州 ) ; 桑野栄治, < 朝鮮中宗代における宗系弁誣問題の再燃 > 久留米大學文學部紀要 ( 國際文化學科編 ) 제 25 호 ; 同, < 朝鮮中宗 20 年代の対明外交交渉 - 嘉靖会典 編纂の情報収集をめぐって > 東洋史研究 第 67 巻제 3 호 ; 同, < 朝鮮中宗 30 年代における対明外交交渉 - 宗系弁誣問題をめぐって > 久留米大学文学部紀要 제 26 호 78) 다만, 明使가동지의望闕禮를실시했던장소는불명이다. 동지전날의실록기사에는 政院啓曰, 明日, 天使望闕禮處, 時未定, 何以爲之, 取稟, 傳曰, 大臣 禮官命招議啓 (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6 일무자조 ) 라고하는데, 대신과禮官의협의결과에관해서는기록이없다. 79) 宣祖実録 권 6, 5 년 11 월 8 일 9 일조. 80) 傳曰, 我國宗系昭雪, 大明會典一冊, 則徑請頒給, 是我國莫大之慶, 而巻帙未成, 終有所未給, 中朝視我國無異内服, 而獨於會典以其載中國諸機, 不爲頒給, 是外夷之也, 尤爲未穩, ( 後略 ) ( 宣祖実録 권 23, 22 년 2 월 4 일신사조 ). 문제가된 萬暦大明会典 全帙은이해 11 월에萬暦帝가宣祖에게頒賜했다 ( 同書권 23, 22 년 11 월 22 일병인조 ). 81) 예를들면케네스 스워프 (Kenneth M. Swope) 씨는明과조선의관계를이 ( 明 ) 를보호하는입술 ( 朝鮮 ) 에비유하고, 冊封 朝貢体制의중요성을지적하였다. 同, < 순망치한 ( 脣亡歯寒 )- 명나라가참전할수밖에없었던이유 > ( 鄭杜熙他編, 前掲書 임진왜란, 수록 ) 342

95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69 그후선조대의望闕禮실시상황을정리한것이 표 2 이다. 일련번호 1부터 16까지는임진왜란이전, 17부터 34까지는임진왜란기, 35 이후는난후의상황을의미한다. 이하에서는선조대에특징적인正朝 冬至望闕禮의실시상황을임진왜란의국면에주목하면서추적하기로한다. 2) 國忌에수반하는朝賀禮의順延조치 임진왜란이전의경우 宣祖実録 에보이는한望闕禮실시상황은순조롭지않다. 기상광학적日變이라든가日食등의天譴思想, 82) 극한 강우등의기후조건, 83) 明宗妃인仁順王后의사망에수반하여正朝 동지의궁중의례는차츰중지하지않을수없었다 (< 표 2> ). 더군다나선조 10년 11월에는仁宗妃仁聖王后가경복궁에서사망했으며, 84) 그후 3년동안은國喪기간인탓에명절의궁중의례가정지되었다고판단된다. 물론임진왜란이전의왕조국가공식기록은대부분이전란으로소실되었으며, 그결과광해군 ( 재위 1608~23년 ) 때편찬된 宣祖実録 에는모두 61개월분 ( 약 5년간 ) 에이르는기록이빠져있다. 85) 때문에望闕禮를비롯하여궁중의례에관한기록이빠졌을가능성은충분히있다. 눈길을끄는것은선조 14년正朝望闕禮가약식인 権停禮 ( 權停例라고도한다 ) 로거행되었다는것이다. 다음날정월 2일이明宗妃인仁順王后의기일에해당하기때문이다. 그날의기록을보자. 82) 政院, 以日變 (= 前日, 흰무지개가태양을관통한다 는이상현상을관측 ) 請停元朝望闕禮及初九日文昭殿大祭, 上從之 ( 宣祖実録 권 7, 6 년 12 월 29 일을해조 ), 日有食之 ( 同書권 23, 22 년정월초하루기유조 ). 日變은중대한凶象이며, 日食또한위정자가덕이없는것으로간주하여廃朝 ( 輟朝 ) 되었다. 渡邊敏夫, 日本 朝鮮 中國日食月食寶典 ( 雄山閣出版 ) 280 ; 田村専之助, 李朝鮮気象学史研究 ( 東洋気象学史論叢 Ⅰ) ( 三島科学史研究所 ) 114~115 83) 左右相詣闕啓曰, 日候極寒, 自上冒曉擧動, 有妨保攝未安, 明日望闕禮請命停, 本朝賀禮幷爲權停, 上從之 ( 宣祖実録 권 8, 7 년 11 월기해 29 일 조 ), 以庭濕, 停望闕禮 ( 宣祖実録 권 18, 17 년정월 1 일기묘조 ). 84) 宣祖実録 권 11, 10 년 11 월 29 일신사조. 璿源系譜紀略 ( 震檀学会編, 韓国史 ( 年表 ) ( 乙酉文化社, 서울 ) 수록 ) 璿源世系, 仁宗妃. 85) 末松保和, < 宣祖実録解説 > 李朝実録 제 30 책 ( 學習院東洋文化研究所 ) 1 ; 申奭鎬 < 凡例 > 朝鮮王朝実録 제 21 책 ( 國史編纂委員会, 과천 ) 3~4

96 7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望闕禮權停, 以明日乃仁順王后忌辰, 今日行舞蹈盛禮未安, 或以爲退行爲當, 或以爲爲上國之 禮, 不可退行, 命大臣及正二品以上會議于闕庭, 定爲是日行之, 本國賀禮則退行於初三日, 永爲恒式, ( 宣祖実録 권 15, 14 년정월 1 일병인조 ) 仁順王后는 6년전인선조 8년정월 2일에창경궁通明殿에서사망했다. 86) 명절인正朝라고는해도王母의忌日에앞서가무음곡을즐기며성대한축하행사를거행할수는없다. 이때문에정부안에서는正朝望闕禮를연기해야한다는의견, 혹은 上國 (= 종주국명 ) 의예 를경솔하게연기하면안된다는의견으로갈라졌다. 그리하여선조는대신및정2품이상의고급관료에게궁궐뜰에서의논하도록하명했다. 그결과 上國의禮 인望闕禮는지금까지해온대로正朝에서거행하고, 본국조선의朝賀禮는정월 3일로연기하며, 이후오래도록恒式 ( 恒例 ) 으로하기로결정했다. 실제로이해정월 3일의실록기사에는 以權停禮行正朝賀, ( 宣祖実録 권 15, 14 년정월 3 일무진조 ) 라고되어있으며, 正朝를축하하는朝賀禮는仁順王后의기일다음날에権停禮로시행하고있다. 그후, 예를들어서 < 표 2> 11 14에서표시한대로선조 17년正朝와 21년正朝의朝賀禮는정월 3일에거행했으며, 87) 선조 14년正朝에서결정했던朝賀禮의順延이임진왜란이발발할때까지는거의정례화되었던것을알수있다. 번잡한의례를반복했던것은조선국왕뿐만은아니다. 일찍이黄仁宇씨는 朝廷의정치는복잡하기짝이없지만, 그요점은의례와人事의둘이다 라고갈파했는데, 尊卑의등급을體現하고, 국가체제를유지하고있는 의례의정치적중요성을환기하였다. 宣祖와같은시대를살았던萬暦帝는각종의례를숙지한군주로평가받지만, 나중에매월여러차례실시되는이른아침의조회도廃朝로서쉬는날이많아졌으며, 제사의례의측면에서도직접임석하는일없이관료를대리로파견하는등의례의간략화가진행되는것도지적되고있다. 88) 86) 宣祖実録 권 9, 8 년정월 2 일임인조. 璿源系譜紀略 璿源世系, 明宗妃. 87) 以權停禮行賀禮, 以初二日仁順王后國忌, 故退行正朝賀禮也 ( 宣祖実録 권 18, 17 년정월 3 일신사조 ), < 行正朝賀禮 > ( 동서권 22, 21 년정월 3 일정해조 ). 88) 黄仁宇 ( 稲畑耕一郎他訳 ), 萬暦十五年 - 一五八七 < 文明 > の悲劇 ( 東方書店 ) <Ⅰ 万暦帝 > 6~16

97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임진왜란기의望闕禮 1) 한성탈환의皇恩에감사하는望闕禮 宣祖 25 년 (1592)4 월 13 일 ( 日本暦 12 일 ), 小西行長 宗義智등의軍勢가釜山에상륙하 면서壬辰倭乱이발발했다. 조선왕조의공식기록에는일본군침공의기술로서 倭寇至, 先是, 日本賊酋平秀吉爲關白 ( 割註略 ) 并呑諸國, 殘暴日甚, 常以天朝不許朝貢爲憤, 嘗 遣僧玄蘇等乞假途犯遼, 我國以大義拒之甚峻, 賊遂傾國出師, 以玄蘇 平行長 平淸正 平義智等爲將, 大擧入寇, ( 後略 )( 宣祖実録 권 26, 25 년 4 월 13 일임인조 ) 라고적었으며, 宣祖実録 에는 豊臣秀吉이関白이되어국내를통일했음에도불구하고天朝明이조공을허락하지않는것에분개하였다 고되어있다. 작년정월에通信使黄允吉 副使金誠一 書状官許筬일행의귀국에수반하여日本回禮使로서正使柳川調信 副使景轍玄蘇가来朝했는데, 당시의対馬島主宗義智등에의한전쟁회피대책, 즉対明通貢을위한 假途入明 ( 假道入明 이라고도한다 ) 교섭이実録기사에도반영되어있다. 89) 주지하다시피나중에明軍은秀吉과함께博多聖福寺승려景轍玄蘇의首級에최고액의현상금을걸었고, 秀吉을 日本国王 에책봉할때는景轍玄蘇에게 日本国本光禅師 칭호를特賜하게된다. 90) 좌우간일본군침공이조선왕조에게는空前絶後의 倭寇 였음은말할필요도없다. 4월 29일에忠清道忠州의敗報에접하자宣祖는庶出의次子인光海君을王世子로冊立하고 ( 뒷날宣祖 25년 6월부터이듬해정월까지分朝 ), 조선정부에서는宣祖의 去邠論 ( 播遷論 ) 과諸臣의漢城 固守論 이대립하는와중에遼東 内附論 ( 逃亡論 ) 者이기도한宣祖는漢城탈출을결의하고다음날平壌으로향했다. 91) 임진왜란기에있어서望闕禮의실시상황을이전의상황과비교한경우, < 표 2> 에표시한대로그차이가확연하다. 선조 25년 4월부터전후 7년동안선조는正朝 동지 89) 中村栄孝, < 壬辰倭乱の発端と日本の 假道入明 交渉 > 朝鮮学報 제 70 집, 97~103 90) 長正統, < 景轍玄蘇について - 外交僧の出自と法系 > 朝鮮学報 제 29 집, 136~137 91) 宣祖修正実録 권 26, 25 년 4 월 29 일 그믐조. 孫鍾聲, < 壬辰倭乱時分朝에관한小考 > 渓村閔丙河教授停年紀念史学論叢 ( 刊行委員会, 서울 ) 294~296 ; 同, < 壬辰倭乱時対明外交 - 請兵外交를중심으로 > 国史館論叢 제 14 집 ( 果川 ) 172~174 ; 北島万次, < 壬辰倭乱期の朝鮮と日本 > 荒野泰典他編,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Ⅱ 外交と戦争 ) ( 東京大学出版会 ) 133~134 ; 同, 豊臣秀吉の朝鮮侵略 ( 吉川弘文館 ) 42~44

98 7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그리고聖節의望闕禮를거의매년충실하게시행하고있다 (< 표 2> 17~34). 이중에서 명절이아닌날에望闕禮를시행한사례가보인다. 다음의실록기사를보자. 寅時, 上幸淸溪館, 率百官 耆老 軍民, 御吉服行望闕禮, 以謝皇恩, 禮畢, 反素服還宮, 以克復京城告于宗廟 社稷 ( 宣祖実録 권 38, 26 년 5 월 2 일을묘조 ) 선조 26년 5월 2일오전 4시무렵에선조는清渓館으로행차하여문무백관 기로 군민을거느리고望闕禮를거행하였다 (< 表 2> 19). 선조 26년 3월부터선조는평안도肅川府에서남하하여永柔縣 ( 별호는清渓 ) 을行宮으로삼았으며, 92) 의례의무대가된清渓館은永柔縣읍내에있던객사이다. 93) 望闕禮를실시한이유는 皇恩, 즉대명황제의은혜에감사하기때문이다. 그은혜란 경성수복, 즉왕도한성의탈환을의미한다. 이해 4월중순에明의遊擊將軍沈惟敬과小西行長사이에서日明화의교섭이성립하자일본군은한성에서철수했다. 94) 일본측의생각으로는명과조선이항복을받아들이는전제조건으로한성에서철군했던것이지만, 95) 조선국왕의입장에서는황제가파견한명군덕분에한성이탈환된것이었다. 화의교섭을의문시하는明정부에서는 社稷 ( 국가 ) 를상실한 宣祖의책임을추궁하고, 경우에따라서는 国命을맡길만한 光海君에게譲位를권고하는王位交替論까지나온것도사실이다. 96) 경성수복 에대한시선은일본 조 92) 宣祖実録 권 36, 26 년 3 월 13 일무진조. 임진왜란의개전으로한성을포기했던선조가이듬해인선조 26 년에평안도의주에서한성으로돌아오기까지의족적은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190 ; 李烱錫, 壬辰戦亂史 - 文禄 慶長の役 ( 中巻 ) ( 東洋圖書出版 ) < 第二篇第八章第一節概況 > 166~167 참조. 93) 朝鮮後期地方地圖 평안도편상 ( 서울대학교규장각, 2002 년 12 월 ) <25. 永柔縣地圖 > 참조. 94)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174~175 ; 石原道博, 文禄 慶長の役 ( 塙書房 ) ~185 ; 李烱錫, 전게서 < 第二篇第八章第一節概況 > 153~154 ; 北島万次, 전게 < 壬辰倭乱期の朝鮮と日本 > 151 ; 金文子, < 豊臣政権期の日 明和議交渉と朝鮮 > お茶の水史学 第 37 号, 35~36 95) 中村栄孝, 전게서 < 三対外戦争における豊臣秀吉の目的 > 279~271 ; 中野等, 秀吉の軍令と大陸侵攻 ( 吉川弘文館 ) <Ⅲ 戦局の転換 > 184~186 96) 小野和子, 明季党社考 - 東林党と復社 ( 同朋舎出版 ) < 第二章第二節明日和平交渉をめぐる政争 > 122~123 ; 韓明基, 임진왜란과한중관계 ( 歴史批評社 ) < 제 1 부제 1 장명군참전과정치적영향 > 60~61 ; 同, < 임진왜란시기決戦여부를둘러싼朝明갈등 > 鄭玉子他, 조선시대문화사 ( 하 )- 시대정신과인간의대응 ( 一志社, 서울 ) 67. 明정부내부의강화문제를둘러싼정책결정과정은岡野昌子, < 秀吉の朝鮮侵略と中国 > 中山八郎教授頌寿記念明清史論叢 ( 燎原書店 ) 148~154 외에三木聰, < 万暦封倭考 ( 一 )- 万暦二十二年五月の < 封貢 > 中止をめぐって > 北海道大学文学研究科紀要 제 109 호 ; 同, < 万暦

9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73 선 明의동아시아 3 국에있어서각기입장을달리한다. 한성탈환의皇恩에감사하는望闕禮를실시하자고제안한사람은다름아닌宣祖이 며, 4 월하순에선조는승정원을통하여예조에그조치를하명하였다. 97) 이해정월에 李如松제독이이끄는명나라지원군에의하여평양탈환이성공했지만, 98) 그때謝恩使 파견이늦어진탓에兵部尚書石星에게비난을들었던일이있다. 그때문에선조는이 번에는신속히대응해야한다고판단했을것이다. 이에대하여禮曹는우선 5 월 1 일에 백관을거느리고초하루의哭禮를거행했으며, 다음날에望闕禮를실시하는것이좋겠 다고회답하였다. 99) 확실히조선국왕은즉시望闕禮를거행하여명에게감사해야하지 만, 禮曹는 宣靖陵의변, 즉宣陵 ( 성종과그繼妃貞顯王后의능 ) 과靖陵 ( 中宗의능 ) 이 일본군에게침탈당한사건 100) 에대한哭禮를우선해야한다고판단했던것이다. 조선시 대의형법으로도입된 大明律 刑律에따르면, 무릇모반이란도모하여社稷을위 태롭게하는것을말한다. 대역은도모하여宗廟 山陵및궁궐을훼손하는것을말한다 고되어있으며, 조선왕릉의도굴파괴는쿠데타에필적하는大罪로서陵遲 (8 토막으로 자름, 또는車裂 ) 한뒤에여러사람들에게보인다. 101) 게다가禮曹는望闕禮를거행할때 원래의의식에서춤과노래를삭제할것을선조에게요청하였다. 102) 宣靖陵의변 이라 封倭考 ( 二 )- 万暦二十四年五月の九卿 科道会議をめぐって > 同 제 113 호에상세하다. 97) 上敎政院曰, 京城收復, 即時似當率群臣, 行望闕禮謝皇恩, 而該曹似無處置議處, 且平壤收復, 不即謝恩, 天將累以爲言, 至於石尚書 (= 石星 ) 亦以爲非云, 今者謝恩使似當趁發, 並言于禮曹 ( 宣祖実録 권 37, 26 년 4 월 28 일임자조 ). 98) 1 개월뒤인宣祖 26 년 2 월에비변사는李如松을위하여顕彰碑를세우고生祠에제사를지낼것을건의했고, 나중에平壌에서는李如松과石星을함께제사지내는武烈祠가완성된다. 中村栄孝, < 朝鮮の慕明思想と大報壇 > 天理大学学報 제 78 집, 197 ; 桑野栄治, < 朝鮮後期における国家祭祀儀禮の変動 - 壬辰倭乱直後の朝鮮と明 > 久留米大学文学部紀要 제 23 호, 35~36 99) 禮曹啓曰, 望闕禮所當即時擧行, 而自上方遭罔極之變, 成服之前, 行禮未安, 初一日, 自上率百官, 行朔日哭禮, 自初二日行之 ( 宣祖実録 권 37, 26 년 4 월 28 일임자조 ). 100) 李烱錫, 전게서 < 第三篇第十一章第二節交渉の停頓 > 418~419. 壬辰倭乱뒤의日朝국교회복때이王陵盗掘사건의범인인도가중요한조건이된다. 이점에관해서는中村栄孝, 日鮮関係史の研究 ( 下 ) ( 吉川弘文館 ) < 三江戸時代の日鮮関係 > 264~266 ; 三宅英利, 近世日朝関係史の研究 ( 文献出版 ) < 第二篇第一章幕藩体制確立期の通信使 > 158~161 외에孫承喆, 전게서 < 제 3 장임란직후중화적교린체제의부활 > ; 李啓煌, 文祿 慶長の役と東アジア ( 臨川書店 ) < 第五章 和好 通好 関係の成立 > 242~247 참조. 101) 大明律 巻 18, 刑律, 盗賊, 謀反大逆条.. 물론이규정의연원은唐律까지소급한다. 花村美樹 < 高麗律 > 京城帝国大学法学会編, 朝鮮社会法制史研究 ( 論集第 9 冊 ) ( 岩波書店 ) 57. 朝鮮의陵遅刑에관해서는당장은앤더스 칼슨 (Anders Karlsson), < 千金の子は市に死せず 世紀朝鮮時代における死刑と梟首 > 冨谷至編, 東アジアの死刑 ( 京都大学出版会 ) 109~115 참조.

100 7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는국난을당하여화려한춤이어울리지않는다고판단했을것이다. 그러나望闕禮는 上國 을위한의례이므로춤과노래는당연한것이며, 다만사죄를드릴때에는五拜三叩頭의예로써대처한다고선조는결정을내렸다. 춤과노래는원래고대중국에서황제의은혜에대한더없는환희를나타냄과동시에, 황제에대한신하로서의복종을표현하는身體儀禮였다. 103) 선조는 5월 1일에문무백관을거느리고궁궐의뜰에모여서통곡했다. 104) 4월하순에 宣陵의변 을안이래선조는禮曹의진언에따라이처럼四拜가아닌会哭의례를이미세번이나지내고있었다. 105) 그런데그날중에禮曹는 宣陵의변 은참으로비통한일이라는종실順寧君李景倹의장계를이유로다음날예정되어있던望闕禮를중지하자고선조에게청원했다. 106) 이에대하여선조는望闕禮를올려사은하는것은 皇上을위한일 이라며일정을변경해서는안된다는강경한입장을보였다. 선조가들은바에의하면, 군주의은혜를중시하는중국에서는상중이라도사은해야할일이있으면궁궐밖에서상복을벗고의례를지낸다고한다. 그리하여禮曹가대신들과다시협의한결과선조의의향을존중하여다음날 5월 2일의望闕禮를예정대로거행하자는의견에찬성했다. 이때선조는望闕禮의구체적인거행방법을제시하고있다. 그구체적방법이란지금한성에있는노인 어린이와이곳에온사람들은모두문무백관행렬의끝에서고, 백관과마찬가지로拜禮와叩頭禮를올리게하는것이었다. 그렇게하면일반백성들도황제의은혜를알고크게감격할것이라고선조는생각하였다. 선조의의중을안禮曹는 曠世의盛典, 요컨대세상에둘도없는성대한儀禮라고칭송했고, 대신들또한이에 102) 禮曹啓曰, 初二日望闕禮儀註, 減去舞蹈一節, 上敎曰, 爲上國陳賀, 則似當有舞蹈之節, 只於陳謝, 則似當行五拜三叩頭之禮 ( 宣祖実録 권 37, 26 년 4 월 29 일계축조 ). 103) 渡邊信一郎, 天空の玉座 - 中國古代帝國の朝政と儀禮 ( 柏書房 ), 한국어판은문정희 임대희역, 天空의玉座 - 中國古代帝國의朝政과儀禮 ( 新書苑, 서울 ) 170~ ) 上率百官, 會哭于闕庭之内 ( 宣祖実録 권 38, 26 년 5 월 1 일갑인조 ) 105) 禮曹啓曰, 宣靖陵之變, 前日則變服擧哀, 行四拜禮矣, 群議拜禮未穩云, 自上率百官哭盡哀, 連三日朝哭, 内殿亦當如是, 上從之 ( 宣祖実録 권 37, 26 년 4 월 24 일무진조 ). 세번의會哭儀禮는同書권 37, 26 년 4 월 25 일 26 일 29 일조. 106) 禮曹啓曰, 即見順寧君景儉状啓, 宣陵之變尤極慘痛, 今日自上率百官哭臨, 明日望闕禮亦姑停, ( 中略 ) 上曰, 哭臨事, 更與大臣商確以啓, 謝恩一節, 則爲皇上事, 聞中朝之人, 則初喪如有謝恩之事, 脱衰於闕門外, 成禮而出云, 蓋以君恩爲重也, 謝恩漸晩, 予意雖哭臨, 明日謝恩似不可退, 禮曹啓曰, 更議于大臣, 則當初聞變, 已行三日哭禮, 今又哭臨似爲未穩云, 來初二日謝恩事, 請依上敎行之, 敎政院曰, 明日謝恩時, 此處老少及凡來此之人, 於百官班列後行退立, 使之同行拜禮叩頭, 則是率臣 民謝皇恩, 而臣民亦知皇恩感激之至, 此意預爲曉諭行禮, 禮曹回啓曰, 致謝皇恩, 一如上敎, 實是曠世盛典, 大臣之意亦如此, 上從之 ( 宣祖実録 권 38, 26 년 5 월 1 일갑인조 ).

10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75 동의하였다. 원래望闕禮의儀註에는일반백성의참석규정이없으므로이례적인조치라고할수있다. 아울러서비변사역시 경성수복 을 나라의큰경사 로간주하고, 모든신하가이를축하하는것은당연한일이라며선조의의향에동조하였다. 107) 선조는한성의백성들을위로해야하는데축하는불가하다며다짐을두고있다. 그러나최고행정관청인비변사의입장에서보자면 경성수복 은만백성의행복일뿐만아니라무엇보다宗廟와社稷 ( 왕실과국가 ) 의경사였다. 조선각지의백성들은오랫동안일본군인수중에들어있었으므로, 이미일본군으로부터한성을탈환한사실을여전히모르고있을것이다. 그러므로비변사는각지에사자를보내황제의은혜가조선에미치고, 또한宗廟 社稷이회복된일을알려야한다고제안했다. 또국왕이내일望闕禮를거행하여황은에감사하는뜻을밝힌뒤에우리신하들은여러관리와군민을이끌고궐문밖에서황은에감사드리겠다고하였다. 선조가비변사의이런제안을허가한것은말할필요도없다. 앞에서보았듯이선조는 5월 2일이른아침에백관 기로 군민을거느리고望闕禮를올렸으며, 그후종묘 사직에한성탈환을고했다. 108) 望闕禮가끝나면대개는같은正殿에서朝賀禮가개최된다. 그러나왕조국가에서 宣陵의변 은역시견디기어려운참사였으므로사헌부와사간원兩司는朝賀禮의중지를요청했고, 선조도이를받아들였다. 109) 나중에李山海가쓴 宣宗大王穆陵誌 도 ( 前略 ) 萬曆二十一年癸巳春, 提督協率軍兵, 大破平壤之賊, ( 中略 ) 夏, 聞官軍收復京都, 群臣請賀, 王曰, 可慰, 不可賀也, 但當率臣民行望闕禮, 以謝皇恩而已, ( 後略 )( 宣祖実録 권 221, 41 년 2 월조, 誌文 ) 107) 備邊司啓曰, 收復京城, 一國大慶, 群臣當爲陳賀, 自上以爲可慰, 而不可賀也, 京城恢復, 非徒億萬蒼生之幸, 其於宗社之慶, 爲如何哉, 而闕然不爲喜慶之擧乎, 且四方之人久陷賊藪, 必不知今日克復之事, 理宜遣使通諭, 使明知皇恩所及, 宗社重恢之意, 明日自上致謝皇恩之後, 臣等率群僚 軍民詣闕門外, 以謝聖恩, 上從之 ( 宣祖実録 권 38, 26 년 5 월 1 일갑인조 ). 108) 선조는평안도永柔를行宮으로삼고있었으므로여기서말하는 종묘 사직 은한성안의宗社가아니라永柔읍내의임시시설을이용했을것이다. 종묘 사직의신위 ( 위패 ) 는선조가한성을포기했던선조 25 년 4 월말에가지고나왔으며, 이해 26 년 8 월한성으로들여오게된다 ( 宣祖修正実録 권 26, 25 년 4 월그믐조. 宣祖実録 권 41, 26 년 8 월 20 일신축조 ). 그동안廟社의신위는선조 26 년 3 월상순에定州에서永柔로옮겼고, 江華에서옮긴세종의睟容 ( 초상 ) 과함께봉안되었다 ( 宣祖実録 권 36, 26 년 3 월 2 일 16 일조 ). 109) 兩司啓曰, 京城賊退, 皇恩罔極, 自上致謝之禮, 雖不可得已, 宣陵之變慘不忍言, 本朝賀禮在情禮未安, 雖今日所當并擧, 請命停行, 上從之 ( 宣祖実録 권 38, 26 년 5 월을묘 2 일 조 ).

102 7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라고한성탈환의황은에감사하도록선조가거행했던萬曆 21 년 ( 宣祖 26) 여름 5 월의 望闕禮에주목하고있다. 2) 한성환도후南別宮에서의望闕禮 宣祖 26년 10월 1일저녁무렵, 한성으로돌아온宣祖는貞陵洞에있던月山大君 ( 成宗의형 ) 의舊宅 ( 현재徳寿宮 ) 을行宮으로삼았다. 110) 宣祖는즉시慕華館으로나가서皇恩에감사하고, 폐허가된宗廟앞에서는百官을이끌고통곡하였다. 111) 약 2개월뒤의實錄기사에는 上께서동지望闕禮를南別宮에서행하다 라고되어있는데, 宣祖는南別宮 ( 현재웨스틴조선호텔 ) 에서冬至望闕禮를거행했다 (< 표 2> 20). 112) 南別宮이란漢城府南部会賢坊에있던조선왕조시대의별궁중하나이며, 임진왜란때는일본군총대장宇喜多秀家및明軍총지휘관李如松이차례로이곳에주둔했다. 113) 이어서이듬해선조 27년에는임진왜란이한창인중에도명절望闕禮가선조의주재로충실하게거행되고있다. 이하에서세가지사례를들어보자. 上在貞陵洞行宮, 王世子在公州, 上詣南別宮, 行望闕禮, ( 宣祖実録 권 47, 27 년정월 1 일경진조 ) 卯時, 上行望闕禮, ( 同書권 54, 27 년 8 월 17 일임술조 ) 行冬至望闕禮于時御所, 議政府進獻誕日禮物, 視平時草草, 王世子問安, ( 同書권 57, 27 년 11 월 11 일을유조 ) 110) 中村栄孝, 前掲書 < 二豊臣秀吉の外征 > 190. 宣祖의한성환도후약 1 개월동안의활동상황은李鉉淙, < 壬辰倭乱과서울 > 鄕土서울 제 18 호 ( 서울 ) 67~68 참조. 111) 上至慕華館, 謝皇恩行四拜禮, 至宗廟前, 易服, 率百官哭臨 ( 宣祖実録 권 43, 26 년 10 월 1 일신사조 ). 宗廟와社稷의神位는沈義謙 ( 明宗妃의祖父沈連源의손자 ) 댁에봉안되었고, 宗廟는뒷날光海君즉위년 (1608) 에재건되었다. 李賢珍, 조선후기종묘전례연구 ( 一志社, 서울 ) < 一조선전기종묘営建論과운영상의특징 > 53~55 112) 宣祖実録 권 44, 26 년 11 월 29 일기묘조. 113) 京城復, 天兵入城, 李提督館於小公主宅 後稱南別宮, ( 中略 ) 小公主宅亦倭將秀嘉所止, 故見遺, ( 後略 ) ( 懲毖録 西厓文集附懲毖録 成均館大学校大東文化研究院, 서울, 1958 년 9 월, 수록 巻 2, 癸巳 4 월 20 일조 ). 在會賢坊, 本小公主第, 宣祖壬辰, 倭將平秀家住此, 後李如松 楊鎬亦住于是, 仁祖朝, 太平館撤後, 以是宮爲華使留館 ( 大東地志 권 1, 漢城府, 宮室条, 南別宮 ). 이후조선의역대국왕은남별궁에서명 청의사신을접견하게된다. 한성의일본군주둔지에관해서는李鉉淙, 전게 < 壬辰倭乱과서울 > 43~44 참조.

103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77 모두간략한형태의기록이기는하지만, 이 3건의사례는차례로正朝 聖節, 그리고동지望闕禮의실시상황을전하고있다 (< 표 2> ). 선조는이해의正朝를정릉동의행궁에서맞이하고, 작년의동지와마찬가지로南別宮에서望闕禮를거행하였다. 이어서 8월 17일의거행기록에는 卯時 (= 오전 6시경 ) 에上께서望闕禮를행하다 라는기사뿐이지만, 그날은聖節이므로宣祖가이른아침부터백관을거느리고對明遙拜儀禮를행한것은의심의여지가없다. 마지막의 11월 11일실록기사에는 冬至望闕禮를時御所에서행하다 라고되어있고, 의례의무대가時御所였다는것을알려준다. 여기서말하는時御所란貞陵洞의行宮, 즉月山大君의옛저택으로보아도좋을것이다. 114) 그날은선조의생일 115) 이었으므로議政府는예물을진상했으나전시중인탓에보통때보다검소했다고한다. 그후임진왜란기에는 < 표 2> 에서보는것처럼, 선조는正朝 聖節 冬至望闕禮를매번충실하게시행하고있다. 다만선조 29년의聖節에는望闕禮를행했다는기록이없다. 나흘전에萬曆帝의嫡后 ( 隆慶帝의皇后陳氏 ) 가사망했다는訃告가조선에도착했기때문에 停朝 (= 輟朝. 조정의정무를쉬는일 ) 의조치를내리고있으며, 116) 이에수반하여聖節을축하하는望闕禮를부득이정지하게된것으로생각된다. 이예외를제외하면임진왜란이전의실시상황과는대조적이다. 단지왜란이전과이후는실록기사의잔존상황이다르다는이유만은아닐것이다. 왜란기에는명나라지원군이한반도에상주하고있으며, 아마도이대명요배의례를權停禮로간략하게끝내는것을꺼렸음이틀림없다. 다음으로선조 28년聖節의실록기사를살펴보도록하자. 上詣南別宮, 與天使行聖節望闕禮, 仍接見天使, ( 宣祖実録 권 66, 28 년 8 월 17 일정사조 ) 8월 17일의聖節때선조는南別宮에서 天使 와함께聖節望闕禮를거행하였다 (< 표 2> 25). 종전의기록과다른점은조선국왕이 天使 와대명요배의례를거행했다는것이다. 여기서말하는 天使 란豊臣秀吉을일본국왕에책봉하도록명에서파견된 封倭天使 李宗城을가리킨다. 이해 4월하순에宣祖는정사李宗城 부사楊方亨일행을慕華館에서맞이했고, 117) 이후南別宮에서종종회담이열렸다. 冊封日本正使李宗城은이 114) 在西部皇華坊, 本月山大君第, 宣祖癸巳 (= 선조 26 년 ), 自義州還都, 爲時御所, 光海主七年, 改號慶運宮, ( 後略 ) ( 大東地志 권 1, 漢城府, 宮室条, 明禮宮 ). 115) 璿源系譜紀略 璿源世系, 宣祖. 116) 仁聖皇太后 [ 皇帝母后也 ] 崩逝, 停朝 ( 宣祖実録 권 78, 29 년 8 월 13 일무신조 ).

104 7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듬해인宣祖 29년 4월에일본으로건너가지않았고, 부산의일본군진영에서도망하여귀국했다는것은잘알려진사실이다. 118) 선조대에명절과명사신의체재기간이겹쳤던것은선조 5년 11월동지이래로두번째이지만, 이번에는萬曆帝의聖節을명사신과함께축하했다는것에주목할수있다. 聖節望闕禮는대명관계를유지해가는데에있어중요한왕조국가의례이다. 특히이번은명사신이체제중이므로의례의절차와시각에관하여사전에충분히고려하고의례 자리 에임하도록사간원이선조에게조언하고있다. 119) 중앙정부가이번의명사신방문에신경을곤두세우고있음을엿볼수있다. 한가지더주목해야할것은南別宮이라는공간의이용이다. 임진왜란후南別宮에서는적어도 4회에걸쳐서望闕禮가거행되고있다 (< 표 2> ). 선조가行宮으로삼고있던貞陵洞에서거리가가깝다는지리적편리성에따른것으로생각된다. 또한명장李如松일행이한성을탈환한이래이南別宮은명, 더나아가서는 皇恩 을상징하는공간으로인식되고있었던것으로추측할수있다. 3) 전시하의례실시상의문제점 임진왜란이라는전시하에대명요배의례를거행하기에는여러가지문제점이따른다. 왕도한성은잿더미가되었으며, 그런속에서궁중의례를치르는경우에많은곤란이따랐을것은충분히상상할수있다. 예를들면, 선조 29년정월에司憲府는궐문의금령이엄격히지켜지지않기때문에관계자이외의자가멋대로출입하는것을문제삼았다. 이해에선조는正朝望闕禮를예정대로끝냈는데 (< 표 2> 27), 120) 그사흘뒤의일이었다. 특히正朝望闕禮때는각관청의하인이함부로출입하여매우소란스러웠던모양이며, 사헌부는당일의파수를파면할것과담당부서의조사를요청했고, 선조의재가를얻었다. 전란으로궁궐의正 117) 宣祖実録 권 62, 28 년 4 월 28 일경오조. 宣祖修正実録 권 29, 28 년 4 월조. 118) 李宗城이도망한사정은佐島顕子, < 日明講和交渉における朝鮮撤退問題 - 冊封正使の脱出をめぐって > 中村質編, 鎖國と國際関係 ( 吉川弘文館 ) 에자세하다. 또한李宗城이도망한후의封倭政策에대한明정부내부의반대론은, 小野和子, 전게서 < 第二章第二節明日和平交渉をめぐる政争 > 128~133 ; 三木聰, 전게 < 万暦封倭考 ( 二 )> 12~21 119) 司諫院啓曰, 聖節望闕禮, 乃莫大之禮, 況今天使來臨, 自上就彼行禮, 則節次早晩, 尤當詳審預講, 不可小有差違, ( 後略 ) 上答曰, 依啓, ( 後略 ) ( 宣祖実録 권 66, 28 년 8 월 19 일기미조 ). 120) < 上初行望闕禮 > ( 宣祖実録 권 71, 29 년정월 1 일무진조 ).

105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79 殿을사용할수없었던탓에궁중의례도時御所에서거행하지않을수없었으며, 그결과엄숙한분위기를유지할수없었음에틀림없다. 121) 선조 29년 12월하순에는司諫院이習儀 ( 의례의예행연습 ) 때의문제점을지적했다. 사간원에따르면, 전란후만사를다시시작하지않으면안되는형편인데, 처음부터완전무결을요구하는것은곤란하다. 특히望闕禮의習儀는왕조국가에있어서중요한행사이며, 예행연습장은주의깊게조사한다음에결정할필요가있다. 그런데당일의예행연습장은길가의더러운장소로설정되어차마눈뜨고보기어려운상황이었다고한다. 중요한의례를거행하기에는난잡하며, 司諫院은당해관청의당상관과色郎庁 (= 郎官. 정5품관의正郎과정6품관의佐郎 ) 을문초하도록요청했고, 선조의재가를얻었다. 122) 이듬해선조 30년正朝의실록기사는 望闕禮를행하다 라는기록이고작인데 (< 표 2> 30), 123) 황폐한한성안에서궁중의례의예행연습장을확보하는일이쉽지않았음을말해준다. 선조 30년 8월의聖節에도 宣祖実録 에는 上께서聖節의望闕禮를別殿에서행하다 라고기록하고있으며 (< 표 2> 31), 124) 기록상으로는望闕禮가별탈없이거행된것처럼보인다. 그런데이틀후司憲府의상소에따르면, 당일에트러블이발생하였다. 이해의聖節望闕禮는別殿에서거행되었다. 戰時중에선조는貞陵洞의行宮에기거했으며, 別殿은行宮안에있던전각중의하나였을것으로생각된다. 사헌부에따르면이번달 8월 17일의望闕禮때대명황제의권위의상징인 闕牌 ( 한자로 闕 이라는글자를새긴목패, 闕字牌라고도한다 ) 125) 가南別宮에서도착했는데, 갑자기악기소리가나서 121) 司憲府啓曰, 闕門之禁全不嚴肅, 常時雜人任意出入, 已爲寒心, 正朝望闕禮時, 尤不嚴禁, 各司下人闌入塡塞, 喧聒莫甚, 極爲駭愕, 其日外門守門將, 並命罷職, 兵曹不能檢勑, 亦爲非矣, 色郎廳亦命推考, 答曰, 依啓 ( 宣祖実録 권 71, 29 년정월 3 일경오조 ). 122) 司諫院正言洪慶臣來啓曰, 亂後庶事草創, 大小規摸固難責備, 至於望闕禮習儀, 莫重之事, 而行禮處所不可不審定, 而今日習儀乃設於路傍汚穢之地, 非但觀瞻未安, 其於大禮亦渉猥褻. 請該曹堂上 色郎廳, 並命推考, ( 中略 ) 答曰, 依啓 ( 宣祖実録 권 83, 29 년 12 월 21 일계미조 ). 123) 宣祖実録 권 84, 30 년정월 1 일임진조. 124) 曉, 王世子問安, 上行聖節望闕禮於別殿, 禮罷後, 王世子問安 ( 宣祖実録 권 91, 30 년 8 월 17 일을해조 ). 125) 朝鮮総督府編, 朝鮮古蹟圖譜 제 11 책 ( 朝鮮総督府, 1931 년 3 월. 名著出版, 1973 년 3 월復刻 ), 朝鮮時代, 客舎, 1580 의圖版 5092 < 開城府客舎太平館殿牌及闕牌 > 참조. 純祖 ( 재위 1800~34 년 ) 대에중국사신의접대의례를정리한 賓禮総覧 ( 東京大学総合圖書館阿川文庫소장 ) 권 2, 儀註, 勅使望闕禮条말미의割註에 敕使留館時, 若遇聖節 正朝, 則移設闕牌於西宴廳, 而都監堂上以下行禮如右, 若在途, 則行禮於站上闕牌前 이라고되어있으며, 開城의太平館처럼駅站上의客舎에도闕牌가있었다.

106 8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선조를놀라게했으며, 사정을하문하기에이르렀다. 이런경우는통상해당관청의관원이즉시명령을전달하고보고하지않으면안된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해당관청은아무런조사도하지않았다. 궁궐안을놀라게했던일은참으로유감스런일이었다. 그래서사헌부는이번에도色郎庁의수사를요청했고, 선조는재가를내려承旨 ( 承政院의정3품堂上官 ) 에게문초하도록하명했다. 126) 望闕禮가엄숙한의례공간속에서거행되었음을살필수있는사례이다. 또이사례에서추측할때, 명황제를상징하는 闕牌 가임진왜란기에는南別宮에보관되어있던것으로생각된다. 그렇다면역시한성안의南別宮은당시 皇恩 을상징하는공간으로인식되고있었음에틀림없다. 주지하다시피이미선조 29년 9월초에大坂城에서日明강화교섭이결렬되고, 이해宣祖 30년 8월초에는일본군이충청 전라 경상도로진출중이었는데, 127) 한성에서는엄숙하게대명요배의례가거행되고있었다는점에도주목해야할것이다. 4) 동아시아세계의조선과명 宣祖 31 년의正朝도역시선조는貞陵洞의行宮에서지냈다. 실록기사에는 上께서 세자및여러신하를거느리고望闕禮를행하다 라고되어있으며, 선조가예법대로왕 세자光海君및문무백관과함께正朝를축하했다는사실을전한다 (< 표 2> 33). 128) 이 해의동지때도선조는이른아침인丑時 ( 오전 2 시경 ) 부터別殿에서望闕禮를거행하고 있는데 (< 표 2> 33), 129) 8 월 17 일의聖節은望闕禮기록이빠졌다. 豊臣秀吉이京都의 伏見城에서사망한것은그직후의일이다. 왜란종식기에도正朝 동지望闕禮는충실하게거행되고있었으며, 기록형태그자 체는간략하지만, 오히려명에대한고마움이증폭되어있는듯이보인다. 여기서필자 가주목한것은이른바 丁應泰誣奏事件 을받고兵曹參知 ( 정 3 품당상관 ) 李廷亀가製述 126) 司憲府啓曰, ( 中略 ) 本月十七日望闕禮時, 闕牌自南別宮陪來, 不時鼓吹震天, 自上驚怪, 至於下問, 爲該曹者, 所當登時傳語以啓, 而專不致察, 使闕内震驚, 極爲未便, 請色郎廳推考, ( 中略 ) 上曰, 依啓, 承旨并推考 ( 宣祖実録 권 91, 30 년 8 월 19 일정축조 ). 127) 石原道博, 전게서 文禄 慶長の役 211~212.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212~215 ; 李烱錫, 전게서 < 第四篇第十二章第一節作戦第六年 (1597 年 )> 523 ; 北島万次, 전게 豊臣秀吉の朝鮮侵略 191~194 ; 中野等, 전게서 <Ⅴ. 慶長の再派兵 > 311~ ) 上在貞陵洞行宮, 上率世子及群臣, 行望闕禮, 王世子問安 ( 宣祖実録 권 96, 31 년정월 1 일정해조 ) 129) 丑時, 上行望闕禮於別殿 賀至日也 ( 宣祖実録 권 106, 31 년 11 월 25 일병오조 )

107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81 한奏文 ( 국왕명의로발급하는외교문서 ) 이다. 선조 31년 6월에명군총독邢玠의賛画 ( 幕僚 ) 였던丁應泰가蔚山공방전은패배이며軍務經理楊鎬 130) 는그사실을은폐했다고萬曆帝에게상주하였다. 丁應泰의상주문은조선이일본과결탁했으며, 또한楊鎬가조선에서축성한것은나중에화근이될것이라는내용을포함하고있었다. 131) 이때문에선조는자주명에사신을파견하여이사실을변명했으며, 이해 10월에는제3차陳奏使로正使우의정李恒福이하부사李廷亀 서장관黄汝一일행을明으로파견하였다. 이사건을해결로이끈李廷亀의奏文 132) 에는당시의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조선과명의구체적인관계를보여주는기술이있다. 奏文曰, 日者, 贊畫丁應泰, 以築城一事, 搆臣以不測之語, 臣驚惶痛迫, 已經具本哀籲去訖, 方 西望雪涕, 怵惕竢命, ( 中略 ) 小邦自先臣 (= 康獻王 ) 以來, 血心事上, 盡禮盡誠, 律用大明律, 曆用大 統曆, 服色 禮義無不慕尚, 而天使之來, 有迎詔儀, 陪臣之去, 有拜表禮, 正 至 聖節, 有望闕之 禮, 率皆虔心精白, 肅敬將事, 一如對越天威, 以至各樣文書 公私簡牘, 皆奉年號, 習爲恒式, ( 中略 ) [ 兵曹參知李廷龜之製也 ], ( 宣祖実録 권 105, 31 년 10 월 21 일계유조 ) 이奏文에서는먼저丁應泰가축성문제를날조하여宣祖를모함하려고했기때문에, 놀란선조는이외교문서를작성해서제출하고萬曆帝에게무고함을호소했다고한다. 신하인선조로서는명황제가거주하는서쪽을바라보며눈물을흘렸고, 삼가하명을기다릴수밖에없었다. 필자가주목하는것은 小邦, 즉조선이 先臣 태조李成桂이래참으로심혈을기울여서 上國 인명에게사대의예를다해왔음을언급한부분이다. 명에대한조선의사대관계는우선조선에서 (1) 율 ( 형법 ) 은 大明律 을운용하고, (2) 달 130) 이듬해宣祖 32 년 9 월에는邢玠를제사하는宣武祠가漢城안에완성되었고, 뒷날宣祖 37 년 7 월에는宣祖의뜻에따라楊鎬와함께제사지냈다. 中村栄孝, 전게 < 朝鮮の慕明思想と大報壇 > 198 ; 韓明基, 전게서 < 제 1 부제 1 장명군참전과정치적영향 > 82~84. 桑野栄治, 전게 < 朝鮮後期における国家祭祀儀禮の變動 > 37~39 131) 朝鮮 明 日本에있어서이사건의역사적의미는李啓煌, 전게서 < 第一章 丁応泰誣奏事件 と日 明将らの講和交渉 > 에상세하다. 132) 李廷亀유고집 月沙先生集 ( 影印標点韓國文集叢刊 69 ( 민족문화추진회, 1991 년 11 월, 수록 ). 底本은 1688 년대구에서목판으로重刊된原集과 1720 년에같은대구에서追刻된別集으로구성된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본 ) 권 21, 戊戌辨誣録, 丁主事 應泰 參論本國辨誣奏 戊戌冬 条는 < 朝鮮國王臣姓諱謹奏 > 라는글로시작하는조금긴문장의奏文이다. 다만 宣祖実録 에수록된奏文에서인용한부분만을한정해서보자면, 약간의문자의異同 삭제가있기는하지만글의내용에바뀐것은없다. 또한奏文의발급주체가조선국왕임에비하여呈文의발급주체는陪臣즉조선관료이다. 金暻緑, < 朝鮮後期事大文書의종류와성격 > 韓国文化 35 ( 서울 ). 후일曺圭益他編, 전게 연행록연구총서 6( 역사 ) 에再録 )

108 8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력은명에서하사한 大統曆 을채택하고있다. 복색 ( 의복과車馬등의색깔 ) 과의례 역시명의제도를숭상하며, (3) 명사신이방문하면迎詔儀가있고, (4) 조선국왕의신하 를황제의陪臣으로서사신을파견할때는拜表의례가제도화되어있다. 그리고 (5) 正 朝 冬至 聖節때가되면조선국왕은궁궐에서望闕禮를거행한다. 선조가이들의례를 경건하고결백한마음으로공손하게거행하는것은오로지천자인명황제의위광에보답하려는까닭이다. 덧붙여서조선에서는 (6) 각종행정문서는물론공사의편지에이르기까지모두명의연호를쓰는것이관습화되어있는것이다. 여기에는아무런과장도없으며, 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조선과명의국제관계가명쾌하게적혀있다. 먼저 (1) 에관해서는 經國大典 刑典첫머리의用律条에 大明律을쓴다 고규정하듯이조선에서는형법규범으로서 大明律 을준용하며, 이미太祖 4년 (1395) 2월에이두 ( 한자의음과훈을이용한한국어표기법 ) 로주해한 大明律直解 30 권이간행되었다. 133) (2) 大統曆 의경우고려공민왕 19년 ( 洪武 3, 1370) 5월에洪武帝가冕服과함께고려에보냈다. 134) 고려에서조선으로왕조가교체된뒤에도, 예를들어서洪武帝의뒤를이어建文帝가즉위하자이듬해인定宗원년 ( 建文원년, 1399) 의 大統曆 이조선으로왔고, 이후태종 4년 ( 永楽 2, 1404) 부터 大統曆 100부의하사가정례화된다. 135) 선조연간에는, 예를들어서선조 6년 ( 萬曆원년, 1573) 11월의 明実録 에 조선국에大統曆日 100부를주다 라고기록되어있고, 선조 36년 3월의실록기사에는 大統曆 100부를天朝에서보내오다 라는기록이보이며, 冬至使가귀국하는길에 大統曆 100부를들여오고있다. 136) 大明会典 에따르면萬暦연간당시는매년 11월 1일에이듬해의 大統暦 을백관에게給賜한다음에전국에공포하였고, 琉球 占城등의외국에게正統연간 (1436~49년) 이전에는朝貢때각기王暦 1 本과民暦 10 本을급여하였다. 현재항상급여하고있는것은朝鮮国뿐이며, 王暦 1 本과民暦 100 本 133) 經國大典 권 5, 刑典, 用律条. 朝鮮総督府中枢院調査課編, 校訂大明律直解 ( 조선총독부, 경성, 1936 년 11 월 ) 권말의花村美樹, < 大明律直解解説 > 11~13 134) 高麗史 권 42, 世家 42, 恭愍王 19 년 5 월 26 일갑인조 ; 同書권 72, 輿服志 1, 冠服, 祭服, 恭愍王 19 년 5 월조 ; 高麗史節要 권 29, 恭愍王 19 년 5 월조. 또 明実録 에 高麗使者成惟得等辭歸, 上以書諭其國王王顓 (= 恭愍王 ) 曰, ( 中略 ) 今賜王冠服 樂器 陪臣冠服及洪武三年大統暦 六經 四書 通鑑 漢書, 至可領也, ( 後略 ) ( 明太祖実録 권 46, 洪武 2 년 10 월임술 1 일 ) 라고보인다. 고려의책봉체제편입은末松保和, 전게서 < 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関係 > 의 < 第二章高麗と明の建國 > 138~140 ; 沈載錫, 高麗国王冊封研究 ( 慧眼, 서울 ) < 제 5 장고려와元의책봉관계 > 227~ ) 太祖実録 권 15, 7 년 12 월 22 일갑자조 ; 太宗実録 권 7, 4 년 3 월 27 일무신조. 136) 明神宗実録 권 19, 원년 11 월 25 일신축조 ; 宣祖実録 권 160, 36 년 3 월 8 일갑자조.

10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83 이다 라고하여 137) 조선이琉球 占城보다우대받았던충실한조공국이었음을말해주고있다. 蕃王 이중국황제를중심으로하는책봉체제에편입되면 正朔을받든다 ( 曆을나누어받고, 그정월초하루에따르는것 ) 는 반대급부 가있으며, 138) 天子에의한시간의지배를받아들이는것을의미하였다. 139) 이러한조선의대명외교자세는 (6) 의명의연호사용과도상통한다. 주지의사실이지만, 임진왜란과명청교체를거치면서조선사회에서는이른바 崇禎紀年 140) 을사용하는관습이퍼졌다. 인조 15년 (1637) 에공식문서에서명의연호를폐지하고청의正朔을받들었음에도불구하고, 祭禮때낭독하는祭文외에편지와墓誌에는대명제국최후의황제인毅宗崇禎帝 ( 재위 1627~44년 ) 의연호를즐겨사용하였다. 특히명나라최후의해가된 崇禎甲申 ( 인조 22년, 1644) 이중요한의의를가진다. 崇禎 이라는연호를사용하는崇禎紀年法은중화의明에假託하여 小中華 를自認하는小中華意識 141) 의상징이다. 대명외교의례에속하는 (3) 과 (4) 의迎詔儀및拜表儀는 國朝五禮儀 嘉禮에그儀註가수록되어있다. 142) 이중에明使迎接儀禮는이전왕조의紀傳體史書인 高麗史 禮志에도수록되어있으므로, 고려恭愍王과명洪武帝의책봉관계가시작된시기에명의예법을도입하여제정 운영하기에이르렀을것이다. 143) 그리고 (5) 가本章에서주목했던正朝 冬至 聖節의望闕禮이다. 李山海가쓴 宣宗大王穆陵誌 에서도선조의대명외교자세를다음과같이강조하고있다. ( 前略 ) 乃於戊申 (= 선조 41 년 ) 二月初一日, 薨於貞陵洞行宮之正寢, 壽五十七, 在位四十一年, 137) ( 前略 ) 凡毎歳進御覽月令暦 大統暦 七政躔度暦, 洪武年間, 以九月初一日進, 後以十一月初一日進, 當日以大統暦給賜百官, 頒行天下, ( 中略 ) 如琉球 占城等外國, 正統以前, 倶因朝貢, 毎國給與王暦一本 民暦十本, 今常給者惟朝鮮國, 王暦一本 民暦一百本, ( 後略 ) ( 萬暦大明会典 권 223, 欽天監条 ). 138) 藤田亮策, 朝鮮學論考 ( 藤田先生記念事業会 ) < 朝鮮の年號と紀年 > ) 大井剛 < 年號論 > ( 荒野泰典他編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Ⅴ. 自意識と相互理解 ) 東京大學出版会, 1983 년 1 월 ) ) 崇禎紀年法의용례는藤田亮策, 전게 < 朝鮮の年號と紀年 > 327~ ) 이른바小中華意識에관해서는한국의각왕조에초점을맞추어가면서華夷秩序와인식을서술한山内弘一, 朝鮮からみた華夷思想 ( 山川出版社 ) 가유익하다. 또河宇鳳, 조선시대한국인의일본인식 ( 慧眼, 서울 ). 일본어역은金両基監訳, 朝鮮王朝時代の世界観と日本認識 ( 明石書店 ) < 제 1 부제 2 장조선후기대외인식의구조와추이 > 참조. 142) 國朝五禮儀 권 3, 嘉禮, 迎詔書儀및拜表儀 拜箋附. 143) 高麗史 권 65, 禮志 7, 賓禮, 迎大明詔使儀条. 奥村周司 < 使節迎接禮より見た高麗の外交姿勢 - 十一, 二世紀における對中関係の一面 > ( 史観 제 110 책, 早稲田大學史學会, 1984 년 3 월 ) 30

110 8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王剛毅果斷, 恭儉慈仁, 誠孝出天, 英智過人, 迎詔拜表之儀, 聖節望闕之禮, 率皆虔心精白, 肅敬將事, 雖在顚沛流離之際, 未嘗少懈, ( 中略 ) 宮中得一珍味, 則必置之案上, 西望拜祝曰, 欲獻吾皇, 何可得也, 瞻戴之誠, 不啻如孝子之慕父母, 嘗語臣隣, 一則曰皇恩, 二則曰皇恩, 一念對越, 如在左右, ( 後略 )( 宣祖実録 권 221, 41 년 2 월조, 誌文 ) 誌文에서는선조의강직하고고결함과영특한지혜를칭송한뒤에, 선조가항상迎詔 拜表儀와望闕禮를경건하고엄숙하게거행했으며, 일찍이임진왜란당시유랑할때 ( 壬辰播遷 ) 에도태만하지않았다고한다. 앞에서본李廷亀의진주문과유사한표현이있음을알수있다. 임진왜란기에도正朝 冬至및聖節의望闕禮를성실하게거행하고있었다는것은우리도이미확인한사실이다. 이제한가지더주목해야할것은첫째도황제의은혜, 둘째도황제의은혜라면서항상 對越 ( 천지신명에게대답하는것 ) 하는것처럼선조가신하에게이야기했다는에피소드이다. 임진왜란을경험한조선국왕이 再造之恩 에감격하고, 마침내명청교체후에조선소중화의식이고양되는것은말할필요도없다. 144) 4. 임진왜란후의望闕禮 1) 朝賀禮의정체 임진왜란이후正朝 冬至望闕禮가충실하게거행되고있던반면에, 望闕禮가끝난 후개최되어야할朝賀禮는시행된흔적이거의없다. 그이유에관해서는다음에든선 조 35 년 (1602) 10 월의실록기사가명쾌하게대답해줄것이다. 144) 中村栄孝, 전게 < 朝鮮の慕明思想と大報壇 > ; 鄭玉子, 조선후기조선중화사상연구 ( 一志社, 서울 ) < 一 2. 대보단 ( 大報壇 ) 의창설 > ; 李泰鎮, < 조선후기対明義理論의변천 > 아시아문화 제 10 호 ( 春川 ) ; 桑野栄治 < 朝鮮小中華意識の形成と展開 - 大報壇祭祀の整備過程を中心に > 朴忠錫 渡邊浩編, 國家理念と對外認識 -17~19 世紀 ( 日韓共同研究叢書 3) ( 慶應義塾大學出版会 ). 한국어판은朴忠錫 渡邊浩編, 국가이념과대외인식 - 17~19 세기 ( 한일공동연구총서 3) ( 亜研出版部, 서울 ). < 再造之恩 > 의형성배경과顯彰사업의전개에관해서는韓明基, 전게서 < 제 1 부제 1 장명군참전과정치적영향 > 67~88 외에同, < 임진왜란과동아시아질서 > 韓日関係史研究論集編纂委員会編, 임진왜란과한일관계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5) ( 景仁文化社, 서울 ) 118~122 ; 同, < 再造之恩 과조선후기정치사 - 임진왜란 ~ 정조대시기를중심으로 > 大東文化研究 제 59 집 ( 서울 ) 에상세하다.

11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85 禮曹啓曰, 亂後庶事草創, 章服不備, 禮文所載本朝陳賀各禮, 一切廢而不行, 極爲未安, 如正至 誕日王世子百官朝賀儀, 王世子嬪朝賀儀, 正至會儀, 中宮正至誕日命婦朝賀儀, 中宮正至會命婦 儀, 中宮正至誕日王世子朝賀儀, 王世子嬪朝賀儀, 中宮正至誕日百官朝賀儀, 正至生辰百官賀王 世子儀, 朔望王世子百官朝賀等是也, 目今冕服新降, 東宮冕服及百官章服亦已製備, 前項各儀, 雖不得一一擧行, 其中不可廢之大禮, 則似當臨時稟裁講行, 敢啓, 傳曰, 允, ( 宣祖実録 권 155, 35 년 10 월 25 일계축조 ) 禮曹의上啓에의하면, 전란으로章服 ( 禮服 ) 을갖출수없고, 그때문에왕조정부의의례서, 즉 國朝五禮儀 에수록된각종하례는모두정지되고실제로거행되지않았다. 이실록기사에보이는 正至誕日王世子百官朝賀儀 란왕세자와백관이正朝 冬至를축하하는朝賀禮 ( 국왕의생일도이에준한다 ) 을가리키며, 正至會儀 는朝賀禮에이어서궁궐에서개최되는会禮宴을뜻한다. 145) 望闕禮는명황제를위하여, 朝賀禮는조선국왕을위하여명절을축하하는궁중의례이지만, 조선에서는임진왜란이라는비상시에朝賀禮보다望闕禮를우선시하고있었던것이다. 확실히이해의正朝의기록에의하면, 선조는이른아침부터백관을거느리고望闕禮를거행했고, 나중에중추부판사 ( 종1품 ) 李徳馨이인솔하는대신과 2품이상의고급관료가선조를問安했다고전하며 (< 표 2> 43), 146) 문무백관이모두모여朝賀禮를올린것은아니다. 그러나 壬辰播遷 때분실한선조의誥命과冕服은이제萬曆帝가다시하사하였고, 147) 왕세자의冕服과백관의예복도그럭저럭갖추었다. 그리하여 國朝五禮儀 에서정한賀禮를모두거행하는것은불가능하지만, 폐지할수없는大禮는임시로국왕의재가를얻어서시행하게되었다. 그러면이후에正朝 冬至朝賀禮가부활된것일까? 이해 11월동지의기록을살펴보기로하자. 卯時, 上行冬至望闕禮, 王世子問安, 百官以權停例不陳賀 前此, 有上敎故也, 只問安, 答曰, 知道, ( 宣祖実録 권 156, 35 년 11 월 10 일정묘조 ) 正朝와마찬가지로선조는우선萬曆帝가맞이한동지를축하하려고望闕禮를행했 다. 이어서光海君이선조에게문안을드리고, 문무백관역시문안드리는것에그치고 145) 國朝五禮儀 권 3, 嘉禮, 正至王世子百官朝賀儀 [ 誕日賀附 ] 조및正至會儀조. 146) 卯初, 上親臨率百官, 行正朝賀禮, 大臣 判中樞府事李德馨爲班首 及二品以上問安, 答曰, 知道 ( 宣祖実録 권 145, 35 년정월 1 일갑오조 ). 147) 聖節使趙挺等回自京師, 帝賜誥命 冕服 [ 壬辰播遷, 命 服莫守, 至是往請而補賜焉 ], 上親迎于郊外, 至闕内行四拜禮, 受中外賀, 加百官資, 頒敎于中外 ( 宣祖実録 권 146, 35 년 2 월 8 일신미조 ).

112 8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있다 (< 표 2> 45). 요컨대동지朝賀禮는약식의權停禮로끝내고, 國朝五禮儀 에서정한것처럼문무백관이조선국왕을위하여성대하게동지를축하하는일은없었다. 실록기사의割註에 이보다이전에국왕전하의명령이내렸기때문이다 라고설명하는것으로볼때, 선조는사전에동지朝賀禮를약식으로거행하도록지시했다고생각된다. 게다가명절에거행되는朝賀禮의간략화는그후에도상례화되었다. 훗날선조 38년 10월에우승지는 이번에국왕전하께서는다시탄신일과동지의朝賀禮를약식으로하도록왕명을내리셨다. 우리신하들의심정으로는만족할수없었다 고서두를떼고朝賀禮의부활을선조에게요청하게된다. 148) 원래조선에서는명절이되면백관들이모두의용을갖춘궁궐로나아가예물을올리고龍顔을우러르며, 신하로서의복종을표현하는舞踏禮와축하의말을올린다. 그럼에도불구하고선조는 10여년동안명절때마다權停禮를하명했다고한다. 임진왜란이후正朝 동지의朝賀禮가정체되어있던것은명백하다. 그리하여右承旨는이후부터왕세자가백관을거느리고朝賀禮를거행하도록선조에게요청했다. 물론대신들의생각도역시마찬가지였으며, 선조는 반드시약식으로제한하는것은아니다 라고회답했다. 그결과이해 11월동지때선조가望闕禮를끝마치자왕세자光海君은백관을거느리고朝賀禮를행하고있다 (< 표 2> 54). 149) 다만正朝 동지에왕세자가백관을거느리고朝賀禮를거행했던것은선조대에는이것이마지막이었다. 대체로당시는종묘와궁궐의개축및수선을우선했기때문에비좁은임시궁궐에서望闕禮와朝賀禮를거행하기에는무리였을것이다. 150) 148) 右承旨鄭穀以禮曹言啓曰, 今此誕日及冬至陳賀之禮, 又命權停, 群下之情不勝缺然, 凡遇節日, 百僚咸造明庭, 備其儀容, 修其禮物, 瞻望日表, 相與舞蹈, 而上壽稱賀者, 臣子之至情也, 十餘年來, 自上每下權停之敎, ( 中略 ) 兩日陳賀時, 親臨擧動, 雖不敢更爲啓達, 亦有權停例行禮之規, 自今以後, 遇節日, 容令王世子率百官行此禮, 則臣子享上之道, 庶幾少伸, 大臣之意亦然, 敢此仰稟, 傳曰, 不必 ( 宣祖実録 권 192, 38 년 10 월 22 일계해조 ). 149) 上行望闕禮, 王世子率百官, 行陳賀禮 ( 宣祖実録 권 193, 38 년 11 월 12 일임오조 ). 150) 辰時, 上御別殿, ( 中略 ) 柳永慶 (= 領議政兼經筵領事 ) 曰, 宗廟 宮闕不可不營建, 宜先料理可也, 朴弘老 (= 예조판서겸特進官 ) 曰, 自上接見天將之時及望闕禮時, 大内甚狹, 百官班行不成模樣, 西墻外有空地, 構一小室以爲御殿, 用於朝會時何如, 上曰, 可爲則爲之, ( 後略 ) ( 宣祖実録 권 193, 38 년 11 월 3 일계유조 ).

113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87 2) 宣祖즉위 40 년째의望闕禮 國朝五禮儀 에의하면조선국왕이명으로사절을파견하는경우, 외교문서인表 ( 千秋使의경우는箋 ) 를使節에게주고, 景福宮勤政殿의正門인勤政門까지使節을전송하는것으로되어있다. 이왕조국가의의례를 拜表儀 라고하며, 그의례공간, 즉문무백관및의장대의배치는正朝 冬至 聖節의望闕禮를행하는경우와거의같다. 151) 예를들면萬曆 29년 ( 선조 34) 10월에명에서萬曆帝가皇長子를황태자 ( 나중의光宗泰昌帝 ) 로책봉하자 152) 이듬해정월에조선정부는황태자책봉을축하하는進賀使를파견하며, 그때선조는몸소拜表儀를거행하였다. 153) 선조 35년 5월의실록기사에는 辰時 (= 오전 8시경 ) 에上께서千秋拜箋禮를행하다 라고기록되어있으며, 선조는명으로千秋使를파견할때이른아침부터拜箋儀를거행하고있다. 154) 선조에게는처음치르는拜箋儀이며, 시행방법을둘러싸고정부내부에서약간의혼란이일어난것도사실이다. 155) 이어서같은해 8월 11일에는千秋節을축하하는望宮禮를행했다. 156) 선조연간에는이기록이처음보이는데, 千秋望宮禮의시행기록이모두 2건임을확인할수있다 (< 표 2> 44 47). 그런데이로부터 4년뒤인선조 39년 4월에는특이한사례 2건이보인다. 이하에서그기록을열거해보자 (< 표 2> 56 57). 卯時, 行望闕禮, 千秋使洪慶臣 書状官李馨遠等赴京師, ( 宣祖実録 권 198, 39 년 4 월 26 일갑자조 ) 卯時, 行望闕禮, 聖節使李覮 書状官柳慶宗等赴京師, ( 같은책권 198, 39 년 4 월 29 일정묘조 ) 전자는千秋使로서예조참판洪慶臣일행이명에파견되었을당시의기록이며, 3 일 151) 國朝五禮儀 권 3, 嘉禮, 拜表儀 拜箋附. 또 國朝五禮序例 권 2, 嘉禮, 排班圖, 正至及聖節望闕行禮之圖, 참조. 152) 明神宗実録 권 364, 萬暦 29 년 10 월 15 일기묘조. 明光宗実録 권 1, 総書. 153) 上親臨, 行進賀拜表禮 ( 宣祖実録 권 145, 35 년정월 7 일경자조 ). 154) 宣祖実録 권 150, 35 년 5 월 1 일임술조. 155) 황제를상징하는 闕牌 에대하여황태자를상징하는 宮牌 가있을것은틀림없지만, 선조는보지못했으므로禮曹에그것을조사하라고명한기록이있다. 宣祖実録 권 150, 35 년 5 월 3 일갑자조. 156) 卯時, 上行千秋望宮禮 ( 宣祖実録 권 153, 35 년 8 월 11 일경자조 ).

114 8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후에는聖節使로서호조참판李覮일행이역시北京으로향했다. 157) 언뜻보아도알수있는것처럼千秋使와聖節使의北京파견에앞서서선조는어느경우든이른아침부터望闕禮를거행하였다. 조선의예와법에서조선국왕이望闕禮를거행하는것은正朝 冬至 聖節과千秋節 ( 엄밀하게는望宮禮라고한다 ) 이며, 조공사절을파견할때望闕禮를실시하는일은없다. 조선국왕으로서는이례적인행동이었다고볼수밖에없다. 선조 39 년은正朝와聖節에도통상대로望闕禮가거행되었으며, 158) 선조는이 1년동안모두 4 회의대명요배의례를거행한것이된다 (< 표 2> 55~58). 그러면선조는왜聖節使와千秋使파견에즈음하여望闕禮를거행했던것일까? 이해宣祖 39년은宣祖의즉위 40주년에해당하며, 정월 15일에는약식賀禮에이어서光海君과百官이각기賀箋을진상하고전국에恩赦令을頒布하였다. 159) 3월상순에는宣祖에게대망의嫡子 ( 永昌大君 ) 가탄생하였고, 160) 더군다나 4월중순에는明의皇太子에게第 1 子 ( 뒷날의熹宗天啓帝, 재위 1620~27년 ) 가탄생했다는詔勅을전달하는明使朱之蕃 ( 翰林院修撰, 従 6 品 ) 副使梁有年 ( 禮科左給事中, 従 7 品 ) 일행 161) 을한양에서맞이하고있으며, 조선국내외에서는경축무드가높아져있었던것이다. 太平館에서迎詔儀를무사히끝낸宣祖는 内服同様의대우에皇恩이망극하다 고하며明使의来朝에감사드리고, 小邦은皇恩으로인하여지금까지보전할수있었으니昊天이망극하다 고하며국가보전의 皇恩 에다시한번감사를드렸다. 162) 이미壬辰倭乱은종식되었고, 조선과일본의徳川정권과는通信使파견의가부를놓고논의중이던무렵이었다. 163) 조 157) 당시조선국왕명의의表 箋은朝鮮史編修会編, 事大文軌 ( 朝鮮史料叢刊第 7) ( 朝鮮総督府, 京城 ) (1935 년 3 월影印. 底本은서울大学校奎章閣蔵本 ) 巻 46, 萬暦 34 년 8 월 17 일자, 朝鮮国王表 ( 聖節賀表 ), 및萬暦 34 년 8 월 11 일자, 朝鮮国王箋 ( 千秋賀箋 ). 158) 宣祖実録 권 195, 39 년정월 1 일경오조, 同書권 202, 39 년 8 월 17 일계축조. 159) 午時, 以權停禮行賀禮, 王世子率百官, 進箋稱賀, 頒赦文于八道, ( 後略 ) ( 宣祖実録 권 195, 39 년정월 15 일갑신조 ). 160) 宣祖実録 권 197, 39 년 3 월 6 일갑술조. 이날, 領議政柳永慶은左副承旨를통해서永昌大君의탄생을축하하는賀禮의거행을건의하였다. 당시光海君에대한柳永慶의견제는具徳會, < 宣祖代후반 (1594~1608) 政治体制의재편과政局의動向 > 韓国史論 20 集 ( 서울大学校人文大学国史学科, 서울 ) 262~265 ; 韓明基, 광해군 - 탁월한외교정책을펼친군주 ( 歴史批評社, 서울 ) 75~77 161) 明神宗実録 권 416, 萬暦 33 년 12 월 15 일을묘조. 162) 辰時末, 上先到太平館, 入幕次, 兩使隨後入來, 上祗迎詔敕, 行宣詔禮畢, 上入幕次, ( 中略 ) 上詣天使前, 行拜禮後, 上曰, 皇孫誕生, 大人來臨, 視同内服, 皇恩罔極, 大人又許留詔, 尤極多謝, 天使曰, 帝命也, ( 中略 ) 上行茶禮畢, 上曰, 小邦蒙皇恩, 至今保全, 昊天罔極, ( 後略 ) ( 宣祖実録 권 198, 39 년 4 월 11 일기유조 ).

115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89 선왕조를둘러싼동아시아정세도변모했지만, 선조의萬暦帝에대한 皇恩 은흔들리지않았다. 더군다나明使의漢城체재중에전領議政李恒福등이明使에게光海君의王世子冊封을요청하는呈文 ( 陪臣의이름으로발급하는문서 ) 을제출하고萬暦帝에게上奏를의뢰하였다. 164) 光海君은壬辰倭乱발발직후王世子로冊立되었지만, 宣祖의嫡子가아닌庶子여서아직까지明으로부터정식으로朝鮮의王世子로승인받지못했기때문이다. 呈文을받은明使는王世子冊封의중요성을알면서도使臣이관여할수는없다고의뢰를거부하며呈文을돌려주었다. 165) 光海君의책봉문제가그에게 反明感情 을품을여지를제공했다는것은이미韓明基씨가지적하였다. 166) 아마도 4월하순에실시된千秋使와聖節使파견에따른望闕禮의배경에는光海君의冊封을기대하는정치적의미도있었음에틀림없다. 뒷날宣祖는冬至望闕禮도거행할예정이었지만, 몸상태가좋지않아서직전에중지하도록하명하였다 (< 表 2> 58). 선조는 望闕禮를시행할수없는일은매우유감 이라고그심정을承政院에말하였다. 167) 여기서상기되는것이成宗의발언이다. 이미언급한것처럼成宗은 내가望闕禮를행할때, 몸은여기조선에있지만친히황제를배알하는것과마찬가지이다 라고말한적이있다. 168) 짧은기록이기는하지만조선전기에있어서望闕禮의성격을단적으로보여주는것이라고생각한다. 조선국왕은매년冬至때는冬至使를, 명황제의생일에는聖節使를파견하는등명절때마다陪臣의자격으로조공사절을파견함으로써對明事大의예를극진하게올렸다. 그러나조선국왕이 163) 中村栄孝, 전게서 < 三江戸時代の日鮮関係 > 264 ; 三宅英利, 전게서 < 第二篇第一章幕藩体制確立期の通信使 > 155~ ) 宣祖実録 권 198, 39 년 4 월 14 일 16 일조 ; 事大文軌 권 46, 萬暦 34 년 4 월 16 일자, 朝鮮国原任議政府領議政李恒福等呈禮部 ( 請封世子事百官呈 ) 165) 右承旨宋駿以禮曹言啓曰, 昨日百官呈文于兩天使, 則答曰, 此乃重事, 伱國奏聞于天朝, 則禮部 禮科, 自當處置, 非出使之人所預知云, 呈文還出給矣, 傳曰, 知 ( 宣祖実録 권 198, 39 년 4 월 17 일을묘조 ). 166) 韓明基, 전게서 < 제 2 부제 1 장광해군초 중반조명사이의쟁점 > 187~195 ; 同, 전게 광해군 72~74 167) 行都承旨黄暹以本院意啓曰, 聖候愆和, 方在調攝之中, 冬至望闕禮, 若冒寒行之, 則必致添傷, 事勢如此, 決不可爲, 臣等方議請停, 今承下敎, 極爲允當, 本朝陳賀, 則八方既已進箋, 王世子 大臣率百官行禮, 自上雖不得親臨, 自有權停禮, 恐不可全然闕之, ( 中略 ) 傳曰, 望闕禮不得行之, 極爲未安, 而方患痰喘, 不得出外, 勢難行禮矣, 本朝陳賀, 則尤不必行之事, 權停爲可 ( 宣祖実録 권 205, 39 년 11 월 21 일병술조 ). 이미전국에서冬至를축하하는箋이漢城에도착했으며, 당일은宣祖가불참한채光海君과大臣이百官을거느리고朝賀禮를거행했던것으로생각된다. 168) 전게, 주 17) 의 成宗実録 권 284, 24 년 11 월 8 일기해조참조.

116 9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蕃王 으로서직접帝都북경으로가서명황제에게배례할수는없다. 그래서조선국왕은부득이그대체수단으로望闕禮를거행하는것이다. 조선국왕에게있어서望闕禮는天子를알현하는것과동등한國事행위였다고할수있다. 일찍이李成茂씨는조선국왕의정치권력의하나로서외교권에주목하고, 국왕이직접외국에가는일은없었으나 ( 望闕禮만은행했다 ), 외국사신은직접접견했다 고언급했던적이있다. 169) 그러나 望闕禮만은행했다 는서술은이儀禮의성격을과소평가한것이라고생각한다. 望闕禮란조선국왕이직접紫禁城의황제를알현하는것과동등한대명외교의례이며, 조선국내에서는이것을정치권력으로이용하고있었다고필자는생각한다. Ⅲ. 日本國王 豊臣秀吉의책봉의례 1. 일본국왕책봉사楊方亨의復命報告 일본국왕책봉사李宗城이釜山에서도망간 ( 宣祖 29년 4월 ) 후, 明정부에서는副使楊方亨을正使로, 遊撃沈惟敬을副使로승격시키기로결정하였다. 종래에책봉사를人選할때, 琉球国王에대하여는文臣을, 虜王 즉蠻族의왕에대하여는武官을파견하는것이관례였으며, 또한北京에서미리사자를파견한다는시간적인지연도고려한결과萬暦帝가兵部尚書石星의上奏를받고최종판단을내렸던것이다. 170) 외국은영구불변으로책봉체제속에가둬둘수있을것으로믿어의심치않았던황제 171) 에게도다분히문제가있었음이틀림없다. 한편豊臣秀吉은이들明使일행의来日을기다리고있었다. 이미文禄 4년 ( 宣祖 28, 1595) 5월하순에秀吉은小西行長 寺沢正成앞으로沈惟敬 169) 李成茂, 전게서 < 제 1 부제 1 장조선시대의왕권 > ) 明神宗実録 권 297, 萬暦 24 년 5 월 4 일경오조 ; 三木聰, 전게 < 万暦封倭考 ( 二 )> 23~25 ; 壬辰倭乱후명정부에서는해상항해의위험성및재정상의문제에華夷의구별이라는명분론까지뒤엉켜서福建에서琉球使者에게詔勅을내리고책봉하는領封論과, 琉球에武官 1 명을파견하여책봉하는頒封論이논의되었는데, 琉球쪽은 1601 년에종전대로文官을파견하도록요청해서萬暦帝의재가를얻었다. 이領封論과頒封論에대해서는金城正篤, 沖縄から中国をみる - 歴史論集 ( 沖縄타임즈社 ) < 第 Ⅲ 章 4 領封論 頒封論 - 冊封をめぐる議論 > 272~280 ; 上原兼善, 幕藩制形成期の琉球支配 ( 吉川弘文館 ) < 第二章豊臣政権の朝鮮出兵と琉球国 > 43~46 참조. 171) 岡野昌子, 전게 < 秀吉の朝鮮侵略と中国 > 154

117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91 에게제시할것을예상했던 3개조의 朝鮮差軍将에게說諭하는大明 朝鮮과日本和平의条目 을보냈다. 제1조는朝鮮의王子 1명을秀吉의 大名 으로등용하고朝鮮의 4 道를준다, 제2조는 15개소의일본쪽城塞 ( 이른바 倭城 ) 중에 10개소를파괴한다, 제3조는金印을사용한 勘合 을부활한다는것이었다. 이중에서제3조에는 大明皇帝, 朝鮮国과의和平을懇求하므로이를허락한다. 그러므로예의를갖추어詔書를내리고, 大明勅使가日本으로건너와야한다 고되어있다. 日明간에講和의성격해석에오해가생긴채로日本에서는明使를맞이할준비가진행되고있었던것이다. 172) 예수회年報에따르면, 慶長원년 ( 宣祖 29) 8월하순에사카이 ( 堺 ) 에서오사카로향하는冊封使의모습에대하여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는 사절일행은 8(9) 월 20 일에오사카에서 9 천 ( 小 ) 걸음인사카이에서평탄하고좋은길을따라출발했는데, 그길에는사카이의귀부인들이길을가는사절일행을구경할수있도록길양쪽에여러층으로된관람석을설치해두도록하였다. ( 中略 ) 이어서간격이너무벌어지지않도록正使의수행원들이두줄로열을지어행진하기시작했다. 또한그들의전방에는 10 本의진홍색과鮮黄色깃발이앞서갔다. 이들뒤쪽으로는文字板혹은판자에둥근글씨체로 ( 너를일본국왕에封한다라고 ) 크게쓴조항을운반하고있었다. 고보고하였다. 173) 江戸時代의朝鮮通信使를방불케하는광경이다. 이 太閤이중국사 절일행을알현했던경위 의앞부분에는 京都에서司祭아무개가太閤의중국사절일 행알현모습을보고했다 174) 고하므로, 어떤司祭의보고서를프로이스가다시정리한 다음에로마로보냈을것이다. 이책봉사일행의퍼레이드모습에주목했던山室恭子씨 는 참으로 明帝가秀吉을日本国王에책봉한다는취지를크게쓴판자 를높이쳐들고 행진하는모습이보이는것같다 고서술했다. 175) 다만라틴어서간집이텍스트인이보 172) 佐島顕子, < 壬辰倭乱講和の破綻をめぐって > 年報朝鮮学 제 4 호, 27~30 ; 中野等, 전게서 <Ⅳ 講和交渉の推移 > 278~ ) 松田毅一監訳, 十六 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第 Ⅰ 期第 2 卷 (1594 年 年 ) ( 同朋舎出版, 1987 년 9 월 ) <10 一五九六年 ( 九月十八日付, 都発信 ) 十二月二十八日付, 長崎発信, ルイス プロイスの年報補遺 > ( 家入敏光訳 ) 316~318. 또이화평교섭을예수회선교사의기록으로보완하면서再考했던 Arcadio Schwade S.J. < 朝鮮の役における日明和平交渉について - 主として外国史料による > キリシタン文化研究会編, キリシタン研究 제 11 집 ( 吉川弘文館 ) 321 참조. 174) 松田毅一監訳, 전게서 <10 一五九六年 ( 九月十八日付, 都発信 ) 十二月二十八日付, 長崎発信, ルイス フロイスの年報補遺 > 315~ ) 山室恭子, 黄金太閤 - 夢を演じた天下人 ( 中央公論社 ) 155 ; 金文子, < 이벤트로서의朝鮮通信使 - 豊臣政権期에파견된통신사를중심으로 > 日本歴史研究 제 22 집 ( 서울 ). 나중에曺圭益他編, 조선통신사사행록연구총서 12( 정치 선박 제도 종교 교육 식품 기

118 9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고서의 ( ) 안은訳者의補足語또는注에넣어야할短文 176) 이므로, 과연행렬뒷부분 의文字板에 封汝爲日本國王 이라고크게적혀있었는지, 요컨대이제부터秀吉이日本 国王에책봉된다는것이오사카의군중들에게공공연한사실이었는지에대해서는신중 을기해야할것이다. 秀吉을冊封하려는성대한儀仗과楽隊에둘러싸인明使일행이 오사카로향했다는것은프로이스의 證言 대로일테지만, 아마도秀吉은여전히책봉의 의미도 勘合 의의미도이해하지못했을것으로생각된다. 선조 29 년 9 월 2 일 ( 일본력 9 월 1 일 ), 명의일본국왕책봉사楊方亨과부사沈惟敬은 大坂城에서豊臣秀吉을접견하고萬曆帝가보낸일본국왕책봉의誥命 勅諭와일본국왕 의金印및冠服을하사했다. 이날의책봉의례에이어서다음날 3 일의향연도지체없이 끝냈으나秀吉이제시했던강화조건에관한회답은없었고, 이에일명강화교섭은파탄 이났다. 177) 강화교섭파탄의직접적인원인을둘러싸고다양한의견이 178) 있기는하지 만, 秀吉이명의책봉을받은것자체는지금으로서는문제되지않는다. 당시萬曆帝가 秀吉을일본국왕으로책봉했던誥命과책봉이유를기록한勅諭는大阪歷史博物館과宮 内廳書陵部에각기현존하며, 京都의妙法院에는秀吉에게하사했던기린문양의常服 ( 문무관이조정에입궐할때의평복 ) 을비롯하여冠服 22 점이전한다. 179) 그러면秀吉을일본국왕에임명하는책봉의례는어떻게거행되었을까? 선조 29 년 12 월상순의실록기사에따르면, 秀吉과접견할기회조차허락되지않은채귀국길에올 예 ) ( 学古房, 서울, 2008 년 4 월에再録 ) 64 도山室씨의이서술을답습한다. 176) 松田毅一監訳, 十六 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第 Ⅰ 期第 1 巻 (1588 年 年 ) ( 同朋舎出版 ) 凡例. 177) 石原道博, 전게 文禄 慶長の役 108~109 ;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201~ 203 ; 李烱錫, 전게서 < 第三篇第十一章第四節交渉の終局 > 500~504 ; 北島万次, 전게 豊臣秀吉の朝鮮侵略 179 ; 三鬼清一郎, 前掲 < 関白外交体制の特質をめぐって > 87 ; 鄭樑生前揭書 < 第五章第六節丁酉の役 > 541~ ) 예를들면명측사료에기초하여강화교섭의추이를서술한邊土名朝有씨는조선의大臣이와서賀禮할것을요구했음에도말단관리黄慎을파견했던것이秀吉을노하게했다고한다 ( 同, 전게서 < 第一部第四章明の冊封体制と文禄 慶長の役 > 150~151). 한편佐島顕子씨는조선측은豊臣政権에편입될意志는없었으며, 明역시秀吉의조선지배를용인하지않았던데서강화파탄의원인을구하며 ( 同, 전게 < 壬辰倭乱講和の破綻をめぐって > 36~37), 中野等씨는한반도에서완전히철수하는문제가강화파탄의주된요인으로본다 ( 同, 전게서 <Ⅳ. 講和交渉の推移 > 290~292). 179) 大庭脩, 古代中世における日中関係史の研究 ( 同朋舎出版 ) < 第十三章豊臣秀吉を日本國王に封ずる誥命 > ; 中村栄孝, < 豊臣秀吉の日本國王冊封に関する誥命 勅諭と金印について > 日本歴史 제 300 호, 116~119 ; 河上繁樹, < 豊臣秀吉の日本國王冊封に関する冠服について - 妙法院伝来の明代官服 > 學叢 ( 京都國立博物館 ) 제 20 호

11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93 랐던조선통신사黄慎 ( 敦寧府都正. 정3품당상관 ) 과부사朴弘長 ( 掌樂院正, 나중에上護軍. 정3품堂上官 ) 일행 180) 은책봉사가명나라兵部에상주했던稟帖 ( 하급관리가상급자앞으로보내는문서 ) 2통과秀吉의謝恩表 1통 ( 僞作 ) 을등사한다음에한성으로보내고있다. 181) 이가운데遊撃沈惟敬이兵部앞으로보낸稟帖을보도록하자. [ 沈遊擊兵部稟帖曰 ], 爲完報東封事, 閏八月十八日卑職 (= 沈惟敬 ) 等, 奉到欽鋪龍節 璽書等件, 秀吉擇以九月初二日, 迎於大坂受封, 卑職先往敎禮, 奉行惟謹, 至期, 迎請册使, 直至中堂, 頒以誥印 冠帶服等項, 率衆行五拜三叩頭禮, 件件頭項, 習華音, 呼萬歳, 望闕謝恩, 一一如儀, 禮畢, 開宴使臣及隨行各官, 是晩, 秀吉親詣卑職寓所, 稱謝, 次早, 謁謝楊正使, 饋以衣刀 甲馬, 各馬官亦饋刀幣, 極言感戴天恩不盡, 再三慰勞, ( 中略 ) 萬曆二十四年十月日, ( 宣祖実録 권 83, 29 년 12 월 7 일기사조 ) 이上奏文의제목은 東封을完報, 즉豊臣秀吉의일본국왕책봉을완료했다고보고한것이다. 이해윤8월 ( 일본력 8월 ) 18일에책봉사楊方亨과沈惟敬일행은군사권을천자로부터위임받았다는표시인龍節 ( 용장식이들어간旗印 ) 과璽書 ( 詔勅 ) 를휴대하고일본사카이항에도착했다. 秀吉은 9월 2일책봉사를오사카성에서맞이하고 受封, 즉책봉을받게된다. 다만의례절차가번잡하기때문에沈惟敬이사전에행례절차를가르쳐주었는데, 秀吉은그저지시하는대로공손히따랐다고한다. 중앙의어전으로안내받은책봉사는誥命과金印외에皮弁冠服 ( 본래朔望視朝 四夷朝貢때입는祭服의일종 ) 을하사했다. 이皮弁冠服은琉球国王과동등한郡王 ( 皇帝의孫 ) 의반열이지만, 예전 180) 通信使파견전야의使節의명칭을둘러싼조선정부내부의논의및沈惟敬의接判使였던黄慎과大丘府使朴弘長에대한実職敍授에대해서는三宅英利, 전게서 < 第一篇第二章通信使の初期形態 > 134~136 ; 孫鍾聲, < 강화회담의결렬과일본의재침 > 国史編纂委員会編, 한국사 29( 조선중기의외침과그대응 ) ( 同委員会, 果川 ) 105~107 ; 김대길, < 병신년 ( 丙申年, 1596) 통신사행 ( 通信使行 ) 에관한연구-황신 ( 黄慎 ) 의 일본왕환일기 ( 日本往還日記 ) 박홍장 ( 朴弘長 ) 의 동사록 ( 東槎録 ) 을중심으로 > 朴漢男他, 조선시대의정치와제도 ( 조선시대양반사회와문화 2) ( 集文堂, 서울 ) 117~122 참조. 181) 敦寧都正黃愼 上護軍朴弘長等, 將册使等兵部稟帖三道 秀吉謝表, 謄書上送 ( 宣祖実録 권 83, 29 년 12 월 7 일기사조 ). 日本國王臣豐臣秀吉, 誠惶誠恐, 稽首稽首 라는글로시작하는秀吉의謝恩表 ( 同書同條수록 ) 는일찍이源道義 ( 義満 ) 가成祖永楽帝에게보낸表文과동일한형식이므로, 石原道博씨는이것을沈惟敬에의한위작일것으로판단하였다 ( 同, 전게 文禄 慶長の役 114~115, 211). 日本往還日記 萬暦丙申 9 월초 8 일辛丑条에는 ( 前略 ) 楊天使曰, 伱休説, 天朝事已完, 我已頒敕賜印, 而謝恩表文, 至今討未得, ( 後略 ) 라고했다. 黄慎의 日本往還日記 는中村栄孝解題, < 萬暦丙申秋冬通信使一行日本往還日記 > 靑丘学叢 第 11 号 ( 京城, 国書刊行会, 1971 년 4 월復刻 ) 를이용했다. ママ

120 9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의室町将軍이朝鮮国王과동등하게親王 ( 皇子 ) 반열의九章冕服을받았던사실을감안하면秀吉은명백히격하된취급을받았다. 182) 秀吉은여러다이묘를거느리고五拜三叩頭의예를올렸으며, 의례의순서대로중국어로 만세 를부르고 望闕 하여은혜에감사를드렸다고한다. 이리하여豊臣秀吉을일본국왕으로책봉하는의례는아무런문제없이끝났고, 책봉사와수행원을연회장으로초대하였다. 조선국왕이明使를위하여행하는翌日宴에상당하는접대의례로보아도좋을것이다. 선조 29년 12월의실록기사는沈惟敬의稟帖에이어정사楊方亨이병부앞으로보낸掲帖 ( 하급기관이上級機関에제출한문서의일종 ) 을수록하고있으며, 9월 2일당일에역시秀吉이 궁궐을바라보며五拜三叩頭의예를행하다 라고기록했다. 183) 한편, 9월 2일당일에조선통신사黄慎일행은秀吉의기분을상하게했기때문에책봉의례 자리 에동석할수없었다. 그러나黄慎의일본기행 日本往還日記 에따르면關白秀吉이책봉을받았고, 또한萬暦帝의 陪臣 이된徳川家康이하 40명의다이묘들에게明의冠服과職帖이내려졌다는소식을黃慎은그다음날인 3일에전해들었다. 184) 또黄慎은 천조는이미사절을보내책봉하였다. 나는잠시이를참았다 는秀吉의말을 日本往還日記 에적었다. 185) 어찌됐든秀吉이책봉을수락했다는것은의심의여지가없다. 그러면, 실제로일본국왕책봉사楊方亨은이번임무를명정부에어떻게보고했던것일까? 秀吉이책봉을수락했다는정보는이해 11월중순, 이어서 12월하순에명정부에도착했다. 186) 그런데그사이에조선국왕의咨文을통해서加藤清正이이번겨울에 182) 豊見山和行, 前掲書 <Ⅰ 第 1 章明朝冊封関係からみた琉球王権と身分制 > 34~38 183) 天使兵部掲帖曰, 册封日本正使等官五軍營等掲衙門署都督僉事楊 (= 楊方亨 ) 等, 爲完報東封事, ( 中略 ) 倭將行長馳報秀吉, 擇於九月初二日, 奉迎册命於大坂地方受封, 職等初一日, 持節前往, 是日即抵大坂, 次日, 領受欽賜圭 (= 玉製의笏 ) 印 官服, 旋即佩執頂被, 望闕行五拜三叩頭禮, 承 奉誥命受封訖, 嗣至職等寓所, 再申感激天恩, 及慰勞職等渉歴勞頓等語, ( 中略 ) 萬暦二十四年九月初五日 ( 宣祖実録 권83, 29년 12월 7일기사조 ). ママ 184) 聞關伯已爲受封, 諸倭將四十人, 具冠帶受官云, ( 後略 ) ( 日本往還日記 萬暦병신 9월 3일 병신조 ) ママ 185) ( 前略 ) 關伯大怒曰, 天朝則既已遣使册封, 我姑忍耐, 而朝鮮則無禮至此, 今不可許和, ( 後略 ) ( 日本往還日記 萬暦병신 9 월 6 일기해조 ) ; 김대길, 전게 < 병신년 ( 丙申年, 1596) 통신사행 ( 通信使行 ) 에관한연구 > 131 ; 中野等, 전게서 <Ⅳ. 講和交渉の推移 > ) 兵部題, 董一元報, 關白已于九月初一日受封, 初九日, 册使回, 已到南戈崖 (= 名護屋 ), 報聞, 册封日本正使楊方亨題, 關白于九月初二日受封, 報聞 ( 차례로 明神宗実録 권 304, 萬暦 24 년 11 월 12 일갑진조, 同書권 305, 萬暦 24 년 12 월 29 일신묘조 ).

12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95 다시조선으로출병할지모른다는정보도입수하였다. 187) 그래서이번에는이듬해萬曆 25 년 ( 선조 30) 3 월에북경으로돌아온책봉사楊方亨의復命報告를보도록하자. 188) 册封日本正使楊方亨回京上疏, 直言封事顚末, 正欺罔以絶禍源, ( 中略 ) 閏八月十五日, 欽補諸物甫至, 行長馳奏秀吉, 即擇九月初二日, 于大坂受封, 惟敬先去敎禮, 封時, 委行五拜三叩頭禮, 呼萬歳, 次日, 至臣寓, 稱説感戴天恩, ( 後略 ) ( 明神宗実録 권 308, 萬曆 25 년 3 월己酉 19 일기유조 ) 楊方亨의보고에의하면, 책봉을받을때秀吉은沈惟敬이가르친대로五拜三叩頭의예를올리고 만세 를불렀다고한다. 앞에서보았던沈惟敬의稟帖및楊方亨의掲帖을아울러서생각하면, 책봉의례의행례절차중에秀吉이 望闕 했다는것도반드시허위보고는아닐것이다. 약간의윤색은있다해도이러한의례적절차는四夷의封王을은혜적를베푼것으로보는명측의논리로는지극히당연한일이며, 책봉사로파견된楊方亨역시은혜를베푼입장에서보고하지않을수없었을것이다. 뒷날청의谷應泰 (1620~1690) 가찬술한 明史紀事本末 에 平秀吉은 3일간목욕재계하고사절을맞이했으며, 책봉을받을때는五拜三叩頭와山呼 (= 만세를부르는일 ) 의예를행했다 189) 고되어있는것은楊方亨의復命報告를계승한것으로볼수있다. 그러나이날일명간의화의파탄으로총책임자兵部尚書石星은실각하여사형에처해졌고, 楊方亨도해임처분을받았다. 2. 景轍玄蘇와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 조선통신사黄慎일행이오사카성의책봉의례 자리 에직접참석하지않았다는사실 187) 薊遼總督孫鑛奏, 朝鮮國王咨文稱, 關白因朝鮮不遣王子致謝, 復欲興兵, 淸正等今冬過海, 大兵明年調進, 乞要先調浙兵, 駐箚要害, 以爲聲援, 章下兵部 ( 明神宗実録 권 305, 萬暦 24 년 12 월 4 일병인조 ). 188) 楊方亨의復命報告는邊土名朝有, 전게서 < 第一部第四章明の冊封体制と文禄 慶長の役 > pp 에전문이소개되었다. 189) 楊方亨 沈惟敬奉册如日本, 平秀吉斎沐浴三日, 迎郊節使, 受封, 五拜三叩頭 山呼禮, 禮畢, 款使者至備, ( 後略 ) ( 明史紀事本末 [ 전게 文淵閣四庫全書 제 364 책, 수록 ] 권 62, 援朝鮮, 神 宗萬暦 24 년 9 월조 ). 다만石原道博씨는 지나친각색일것 이라고판단한다 ( 同, 전게 文禄 慶長の役 109).

122 9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을상기하기바란다. 통신사일행은宣祖의国書조차건네지못한채책봉사와함께宣祖 29년 9월 9일오후에사카이항에서승선하여다음날釜山으로출발하였다. 190) 사실黄慎은귀국에앞서군관趙徳秀에게밀서를주어조선으로보냈으며, 趙徳秀는 11월에어전에서조선통신사 일행이모두명나라사신의행동과秀吉을책봉하는모습을보지못했습니다 라고보고하였다. 191) 黄慎은군관과역관을책봉의례가거행되는곳으로보내입회시키고싶다고명사신에게요청했지만, 명사신이그럴필요는없다며거절했다고한다. 물론이때 적의정세가급변했다 는밀서를받은조선정부에서는명에奏聞使를보내사정을급보하도록비변사가요청했고, 선조의재가를얻었다. 192) 1개월뒤인 12월하순에선조는겨우한성으로돌아온黄慎을別殿에서인견하고, 왕명을받들고이역땅일본을다녀온노고를위로했다. 당시의모습을실록기사에서살펴보도록하자. 申時, 上御別殿, 引見黄愼, 上曰, 爾以國事往來異域, 多苦勞, 愼曰, 奉使無状, 不能傳命, 臣罪 當萬死, 上曰, 此非奉使人之罪, 勿爲未安, 且其處賊情何如, 愼曰, ( 中略 ) 因令明日, 獨接天使, 翌 日兩天使行封, 關白立於庭上, 五拜三扣頭, 敬受賜衣, 其臣四十餘人皆受欽賜有差云, 臣以關白禁不入參, 故不得親見, 其間曲折未能詳知, 而因人傳聞亦難盡信, 上曰, 關白行禮, 何以爲之云乎, 愼曰, 以倭服受勑, 而拜禮則或云爲之, 或云不爲矣, ( 後略 ) ( 宣祖実録 권 83, 29 년 12 월 21 일계미조 ) 黄慎은조선통신사로일본에건너갔음에도불구하고직책을다하지못한일을사죄하였다. 그러나선조로서는일본의정세, 특히秀吉이과연명의책봉을받아들였는지여부가걱정스러웠던모양이었다. 그리고黄慎의회답은沈惟敬과楊方亨이兵部에보고했던내용과거의같았다. 요컨대 9월 2일에關白秀吉은책봉사앞에서공손하게五拜三叩頭의예를올린후冠服을받았으며, 40여명의다이묘들도각기위계에따라관복 190) 日本往還日記 萬暦병신 9 월 9 일 10 일조. 191) 巳初, 上引見黄愼軍官趙德秀 朴挺豪等于別殿, 上曰, 賊中所聞如何, 盡言之, 德秀曰, ( 中略 ) 九月初一日, 副使先往五沙蓋 (= 大坂 ), 關白不見, 上使午後始至, 期初二日相見封受云, 黄愼稟於天使衙 門, 請差軍官 譯官跟往受封之處, 以觀形勢云, 天使曰, 不必帶去云, 故一行之人, 皆未見天使擧動及關白受封節目, 上曰, 然則已行封王禮乎, 德秀曰, 臣不得目覩, 只所聞如此耳, ( 後略 ) ( 宣祖実録 권 82, 29 년 11 월 6 일무술조 ). 趙徳秀의경력은확실하지않으며, 나중에慶山県令 ( 종 5 품 ) 이된朴挺豪도직무태만으로파직되었다는사실이전할뿐이다.( 同書권 113, 32 년 5 월 6 일계축조 ). 192) 備邊司啓曰, 黄愼状啓已到, 賊情已變, 事勢至此, 唯當速具事情, 告急於天朝, 請出奏聞使, 令承政院文書磨練, ( 中略 ) 傳曰, 依啓 ( 宣祖実録 권 82, 29 년 11 월 6 일무술조 ).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219

123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97 을받았다는것을傳聞형태로보고하였다. 확실히秀吉이五拜三叩頭의禮를올렸다는것은沈惟敬과楊方亨도보고를끝냈다. 다만그 자리 가다다미를깐넓은방이아니라 庭上 이라고했던것은黄慎이조선왕궁의 殿庭 闕庭 을상상했기때문일것이다. 이때문에선조가秀吉의행례모습을구체적으로묻자오사카성에서접견을허락받지못했던黄慎은 倭服을입고칙서를받았는데, 拜禮했다고도하고拜禮하지않았다고도합니다 라고대답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黄慎은현장에없었다. 黄慎의復命報告는앞에서본楊方亨 沈惟敬의報告와비교하면약간애매한점이남는다. 이와같은사료상의제약은일본의경우도마찬가지이다. 일찍이中村栄孝씨는 이당시의사정은일본의문헌류에아주자세한사실을전하는기록도있지만강화교섭의진상을알기어려운데다가, 근세이래일본국왕책봉등에관해서왜곡된이해가더해져왔다. 고주의를환기시켰다. 193) 예를들면秀吉이日本国王에책봉된것을알자마자격노하며冕服을벗어던지고誥命을부셨다는頼山陽의 日本外史 (1827년 ) 는전형적인근세이래의오해일것이다. 194) 원래오사카성에서있었던秀吉의책봉의례를전하는동시대의일본쪽사료가적은데, 예를들면미부다카스케 ( 壬生孝亮, ) 의일기 孝亮宿禰記 ( 左大史孝亮記 ) 에서는秀吉이 唐人 ( 明使 ) 과대면하고, 緞子 冠服등많은進上品이있었다는풍문을전하는데불과하다. 195) 秀吉의책봉의례를전하는일본쪽사료로서필자는다음에제시하는景轍玄蘇의遺稿集 仙巣稿 ( 慶安 3년, 1650 간행, 国立国会圖書館鶚軒文庫소장 ) 에수록된柳川調信의肖像賛 196) 을주목하고싶다. 193)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202. 中村씨는別稿에서 이중요한외교상의의례가어떻게거행되었는지는일본의기록에서자세히알수없다 고지적한다. 同, 전게 < 豊臣秀吉の日本国王冊封に関する誥命 勅諭と金印について > ) 中村栄孝, 전게 < 豊臣秀吉の日本国王冊封に関する誥命 勅諭と金印について > 115~116 ; 石原道博, 전게 文禄 慶長の役 111~112 ; 李烱錫, 壬辰戦亂史 - 文禄 慶長の役 ( 下巻 ) ( 東洋圖書出版 ) < 第五篇第十八章第二節本戦役の特徴 > 329~ ) 文禄五年九月四日, 去朔日於大坂城, 太閤有御對面唐人, 唐人鈍子千端, 唐冠六十頭, 進上之由, 風聞 ( 左大史孝亮記 改定史籍集覧 第 25 冊, 近藤活版所, 1902 年 6 月, 所収 ) ; 中村栄孝, 前掲 < 豊臣秀吉の日本国王冊封に関する誥命 勅諭と金印について > 114 ; 河上繁樹, 전게 < 豊臣秀吉の日本国王冊封に関する冠服について > ) 국립국회도서관은이木版本 3 冊외에写本 仙巣稿 3 冊도架蔵하고있는데, 양자를열람한결과인용한부분에문자의차이는없었다. 이肖像賛은 1605 년에죽은柳川調信 ( 傑岑宗英居士 ) 을위하여기록한草案또는案文 ( 最終稿 ) 이며, 流芳院은그의菩提寺이다. 荒木和憲 <16 世紀末

124 9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 前略 ) 天將重奏天朝, 俾太閤封日本國王, 翌年甲午 (= 文禄 3 年 ), 差楊 沈二老爺, 爲册封之使, 太閤喜氣溢眉, 領金印著衣冠, 唱萬歳者三次, ( 中略 ) 慶長十年龍集乙巳蜡月之尾, ( 仙巣稿 巻下, 讃類, 碑銘并像賛, 流芳院殿傑岑宗英居士肖像賛并序 ) 慶長 10년 (1605) 12월말일자의이사료에따르면, 文禄 3년 ( 宣祖 27) 의시점에서明에서는秀吉의책봉이결정된후책봉사로서楊方亨과沈惟敬일행이오사카에도착하였다. 景轍玄蘇의회상에의하면, 太閤秀吉은기쁨에들떠서金印을拜領하고冠服을몸에걸쳤다. 그리고 만세 를삼창했다고한다. 景轍玄蘇는柳川調信과함께임진왜란직전부터전쟁회피대책과그후의日明강화교섭에분주했던禅僧이며, 誥命의내용도이미釜山의일본陣営에서訳読하고있었다. 197) 당시몇안되는 證言 중하나라고할수있다. 9월 2일의책봉의례모습을예수회年報에서는앞의 太閤이중국사절일행을알현했던경위 에다음과같이전하고있다. 중국국왕의親書에는 다시조선을침범하지말라 ( 不得再犯朝鮮 ) 는문구가있었다. 요컨대앞으로는高麗를침공하면안된다. 만일다시침공한다면이제너에게는두번다시이와같은威光이없을것이라고하였다. 이리하여일본인 ( 諸臣 ) 은마치중국의封建家臣과같은신분이되었던것이다. 이모든것 ( 謁見 ) 은일본식의례이며, 즉다다미방에앉아서진행되었다. 개회중에太閤과 正使 ( 楊方亨 ) 는대등했다. 출석자는 ( 徳川 ) 家康, ( 前田 ) 筑前 ( 利家 ), ( 上杉 ) 越後 ( 景勝 ), ( 宇喜多 ) 中納言 ( 秀家 ), ( 小早川 ) 金吾 ( 秀秋 ) 殿, 毛利 ( 輝元 ) 였는데, 그들은일본전토에서최대의国主들이었다. 盞 ( 사카즈키 ), 즉술을조금씩나누어마신후太閤은천천히栄誉로운書冊, 즉커다란황금書板 ( 金印 ) 을받아서머리위로들어올렸고, 그때冠冕도수령했으므로, 그것들을착용하기위하여別室로물러났다. 중국인들은別室에서나온 ( 太閤 ) 을비상한栄誉와존경심으로우러러보았으며, 그리고나서즉시향응을위한음식들을크고높은상에차려서날라왔다. 참으로성대한연회와비상한趣好로가득한儀式이었으므로많은 ( 使節들 ) 은식사보다는구경하기에바쁠정도였다. 연회가끝나자각자자기저택으로돌아갔다. 해가지자새로운국왕太閤은 遊撃 ( 沈惟敬 ) 을방문하러나갔고, 正使 ( 楊方亨 ) 도역시크게기뻐하며그곳으로갔는데, 그때太閤은그들을매우친절하게접대했으며, 모두가즐거운시간을보냈다. 인용이조금길었지만 1596 년 9 월 18 일자오사카발신의이書信은明 朝鮮 日本 3 국 이외의중립적입장에서적은기록이라고할수있다. 198) 당일秀吉이誥命의내용을즉 期対馬宗氏領国における柳川氏の台頭 > ( 九州史学研究会編, 전게 境界からみた内と外 所収 ) 172. 仙巣稿 의소재에대하여는伊藤幸司씨의教示를받았음을여기에附記하여감사를표한다. 197) 中村栄孝, 전게서 < 二豊臣秀吉の外征 > 199

125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99 시이해했는지여부에대해서는약간의문이남기는하지만, 金印과冠冕을拜領한 新国王 秀吉이楊方亨과沈惟敬의거처로가서직접謝意를표한부분은朝鮮 明의実録記事와모두부합한다. 日明간의책봉의례자체에문제는발생하지않았던것이다. 오히려프로이스의 證言 은사카이에서오사카까지의성대한儀仗, 이어서매우호화로운책봉의례, 그리고무엇보다도책봉을기뻐하는秀吉의태도를후세에잘전하고있다. 秀吉은이책봉의례로萬暦帝의신하가, 徳川家康이하諸大名은陪臣이된다는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책봉체제의의미를이해하지못했던것이다. 秀吉은宣祖 29년 9월에확실히萬暦帝의책봉을수락했다. 그런데원래明이秀吉의冊封을인정하는조건으로제시했던것은 1조선에서일본군의전면철수, 2책봉외에朝貢을요구하지않을것, 3다시조선에침공하지않는다는세가지였으며, 이들조건은 皇帝敕諭日本國王平秀吉 로시작하는秀吉에게보낸勅諭에도明記되어있다. 199) 이중에서 2의朝貢 = 勘合 의부활요구는화의추진파에의한日明강화교섭과정에서떠오른조건이었다. 그러나秀吉이 日本国王 에책봉되었음에도불구하고긴요한조공무역은불가능해졌다. 일본의요구는책봉이아니라영토의요구와조공무역에있다는明정부의경계심은이미책봉사李宗城의도망직후부터있었으며, 또한책봉여하와상관없이일본은공격을재개할것이라는견해도있었다. 200) 秀吉은이무렵에와서야겨우이번책봉의진의를눈치챘던것이아닐까? 秀吉에게있어서 日本国王 의책봉은전혀의미없는일이었으며, 秀吉이東夷의 蕃王 으로서中華帝国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세계시스템으로편입되는일은끝내없었다. 198) 松田毅一監訳, 전게서 <10 一五九六年 ( 九月十八日付, 都発信 ) 十二月二十八日付, 長崎発信, ルイス フロイスの年報補遺 > 319~320. 이일본식謁見儀禮의모습은간략하지만 Arcadio Schwade S.J., 前掲 < 朝鮮の役における日明和平交渉について > 321~322 에소개되었다. 199) 三木聰, 전게 < 万暦封倭考 ( 一 )> 47~48 및同 < 万暦封倭考 ( 二 )> 5. 三木聰씨가지적했던것처럼秀吉앞으로보낸勅諭에는 原約三事 로서 自今釜山倭衆, 盡數退回, 不敢復留一人, 既封之後, 不敢別求貢市, 以啓事端, 不敢再犯朝鮮, 以失鄰好 라고한다. ( 同, 전게 < 万暦封倭考 ( 一 )> p.94 의註 (18). 大庭脩, 전게서 < 第十三章豊臣秀吉を日本国王に封ずる誥命 > 245). 또책봉책의모순은佐島顕子, 전게 < 日明講和交渉における朝鮮撤退問題 > 109~110 에지적이있다. 200) 小野和子, 전게서 < 第二章第二節明日和平交渉をめぐる政争 > 129~130 ; 邊土名朝有, 전게서 < 第一部第四章明の冊封體制と文禄 慶長の役 > 140~147 ; 三木聰, 전게 < 万暦封倭考 ( 二 )> 15~16

126 10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맺음말 본고에서는먼저전반부에서조선전기 (15 16세기) 동아시아세계의국제환경에있어서明을주축으로조선 琉球 일본과의책봉관계및의례적관계를조망하였다. 이어서후반부에서는조선宣祖代에있어서책봉의례와對明외교의례 ( 望闕禮 ) 의실시상황을중심으로정리 분석하고, 이를바탕으로 日本国王 豊臣秀吉의책봉의례에대하여약간의고찰을더하였다. 그결과는아래와같다. 太祖洪武帝는즉위후즉시주변諸国에使者를파견하여朝貢을독촉함과아울러서 蕃国朝貢儀 외에 元正冬至上国聖寿節望闕賀儀 를정했다. 조선왕조에서는 3대국왕太宗이建文帝의뒤를이어永楽帝의책봉을수락했고, 太宗 3년 (1403) 에 朝鮮国王 으로승인을받았다. 책봉체제에편입된조선은이후매년正朝 聖節 千秋節에조공사절을파견하고, 中宗 26년 (1531) 이후에는正朝使를冬至使로바꾸어聖節使 千秋使 冬至使를파견하는 1 年 3 貢의외교체제로이행하였다. 뿐만아니라이 4 大명절에조선의왕궁에서는対明遥拜儀禮가거행되었다. 조선국왕이문무백관을거느리고王都漢城의왕궁에서明의황제를遥拜하는궁중의례이다. 조선국왕이직접紫禁城에参内하는것은불가능하기때문에望闕禮를거행하는것으로明황제와의군신관계를확인했던것이다. 琉球의경우, 洪武 5년 (1372) 에中山王察度가일찍부터入貢권고에응하여제2대武寧이永楽 2년 (1404) 에처음으로 琉球国王 으로책봉을받았다. 처음에는 大琉球国의朝貢은不時로한다 고하여통교제한이없었지만, 成化 11년 (1475) 에琉球使臣의살인사건을이유로貢期를 2 年 1 貢으로제한했고, 그후奏請을거듭하여正徳 2년 (1507) 에 1 年 1 貢의貢期를얻었는데, 嘉靖원년 (1522) 에다시 2 年 1 貢을하명받았다. 琉球에서対明遥拜儀禮를거행했던상황에대해서는사료의제약이크기는하지만, 琉球国王이首里城에서 望闕의禮 를행하고, 百官도정렬하여拜禮했다는기록이 16세기중반의 朝鮮王朝実録 에남아있다. 또한琉球의외교문서집 歴代寶案 에수록된 15세기전반의咨文에따르면, 聖節 正朝등名節에尚巴志는洪武帝에게서頒賜된冠服을입고宮中儀禮를거행했었다. 18세기전반에성립한 琉球国由来記 와 琉球国舊記 가시사하듯이薩摩藩지배하의근세琉球에서도冬至 元旦 正月 15일의王府儀禮는 3대儀禮로서가장중요시되고있었다. 어느것이나단편적인사료이지만, 琉球国王은일찍이洪武帝가제정했던 元正冬至上国聖寿節望闕賀儀, 즉望闕禮를琉球나름대로재해

127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101 석한뒤에시행했던것으로생각해도좋을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建文 4년 (1402) 에足利義満이京都에서明使를영접하고建文帝의책봉을수락하였다. 永楽원년 (1403) 義満은遣明使에게 日本国王臣源 명의의외교문서를가지고入明하도록했는데, 이듬해永楽 2년에義満은다시 日本国王 에책봉되었다. 京都에서거행된冊封儀禮때義満은세번절한뒤에무릎을꿇고공손하게詔書를받았다고하는데, 室町殿가明황제와의종속관계를시사하는명절의遥拜儀禮를시행했는지여부는정확하지않다. 이렇게해서 15세기초에朝鮮 琉球 日本의 国王 이거의같은시기에탄생하였다. 다만일본국왕의貢期는 10 年 1 貢이었으며, 동아시아 3국중에서는통교제한이가장엄격했다. 일본에게는의무였던勘合지참도조선과琉球는면제되었다. 게다가 15세기후반이후는明使의来日도끊어지고, 勘合貿易 이라는이름의朝貢貿易도 16세기후반에는단절되었다. 그러면, 唐入り (= 명나라정복계획 ) 를단행했던豊臣秀吉은중화제국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세계시스템 ( 실태는무역시스템 ) 속으로포섭되어, 神宗萬暦帝의신하로서의례적관계를구축할의지는있었던것일까? 그래서먼저전형적 ( 내지모범적 ) 인 蕃王 의사례로서秀吉과거의동시대에한반도를다스렸던宣祖의행동양식에주목하였다. 구체적으로는宣祖代의책봉의례, 그리고望闕禮라는対明외교의례의 場 을통하여 16세기후반의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朝中関係의실상을명확히하였다. 宣祖원년 (1568) 2월에宣祖는穆宗隆慶帝로부터 朝鮮国王 에책봉하는誥命과金印 冕服을받고, 明을중심으로하는조공무역체제에정식으로참가하였다. 国朝五禮儀 의규정에따라책봉의례의 場 에서宣祖는宗親 문무백관과함께 萬歳 를삼창했을것이다. 明使가한성에서머문기간은불과 1주일남짓했지만, 宣祖는 經国大典 의규정대로下馬宴 翌日宴 上馬宴순서로접대의례를베풀었고, 3월하순에謝恩使를파견함으로써책봉의례는완료되었다. 宣祖代의対明遥拜儀禮에관해서는편의상임진왜란이전, 전란기, 임진왜란이후의 3기로구분하여정리 분석하였다. 먼저宣祖가望闕禮를처음거행한것은宣祖 5년 11월冬至이다. 宣祖는역시 国朝五禮儀 의규정에따라群臣을거느리고大明皇帝를위하여冬至를축하했으며, 이어서群臣은宣祖를위하여朝賀禮를거행하여군신관계를확인하였다. 이때조선에서는萬暦帝의등극을전달하는明使를영접하고있으며, 또한宗系辨誣問題가미해결이었으므로明使의접대에는세심한주의를베풀었을것이다. 다만그후에는気象光学的日變이나日食등의天譴思想, 極寒 降雨등의기후조건외에先

128 10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代王妃의死去에수반하여正朝 冬至의궁중의례는차츰중지할수밖에없었다. 특히仁順王后 ( 明宗妃 ) 의忌辰이정월 2일이었기때문에正朝의궁중의례거행에지장이생겼지만, 上国의禮 인望闕禮는종전처럼正朝에실시하고, 조선국내의군신관계를확인하는朝賀禮는정월 3일로연기함으로써対明遥拜儀禮를우선하도록하였다. 임진왜란기의경우宣祖는正朝 冬至그리고聖節의望闕禮를거의매년처럼충실하게거행하였다. 주목해야하는것은宣祖 26년 5월 2일피난처였던평안도永柔県의清渓館에서望闕禮를실시했던일이다. 그목적은王都한성의탈환이라는 皇恩 ( 皇帝의恩義 ) 에감사하는것이었다. 당일은문무백관뿐만아니라일반백성들까지참가시켰으며, 조선의예법에없는이례적인왕조국가의의례이다. 다만왕릉도굴사건을이유로望闕禮의정지를요청하는宗室을배려하여朝賀禮의실시는보류하였다. 望闕禮는 皇上을위한것 이며, 무엇보다王都탈환은宗廟 社稷의경사였다. 그후宣祖는한성貞陵洞의行宮에서지냈으며, 南別宮이종종望闕禮의会場으로사용되었다. 宣祖 28년 8월의聖節에宣祖는그南別宮에서일본국왕책봉사李宗城 ( 나중에帰国도망 ) 과함께望闕禮를올렸다. 南別宮은明軍총지휘관의주둔지이기도하며, 明더나아가서 皇恩 을상징하는공간으로인식하고있었던것으로추측된다. 또한大明皇帝의권위의상징인 闕牌 도南別宮에보관되어있었음에틀림없다. 전란으로인하여왕궁의正殿을쓸수없었기때문에宮中儀禮를거행할때도곤란한일이따랐지만, 日明강화교섭의결렬 ( 宣祖 29년 9월 ) 뒤에도한성에서는명절때마다望闕禮가엄숙하게실시되었다. 왜란종식기에도正朝 冬至의望闕禮는충실하게거행되었으며, 기록형태는간략하지만오히려明에대한恩義가증폭되어있다. 필자가주목한것은소위 丁應泰誣奏事件 이있고나서李廷亀가宣祖 31년 10월에제술했던외교문서이다. 거기에는 (1) 大明律 의운용, (2) 大統暦 의채용, (3) 迎詔儀, (4) 拜表儀의제도화에더하여 (5) 正朝 冬至 聖節의望闕禮실시, (6) 조선사회에있어서明의연호사용이적혀있다. 여기에는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조선과明의국제관계가명쾌하게기록되어있다. 宣祖가迎詔 拜表儀와望闕禮를경건하고엄숙하게집행한것은李山海가쓴 宣宗大王穆陵誌 에도기록되어있으며, 또宣祖는가장먼저皇帝의恩義, 두번째도皇帝의恩義라고하며언제나신하에게이야기하였다. 조선국왕의 再造之恩 ( 国家再造의恩義 ) 은이윽고明清교체후에조선소중화의식으로고양되며, 18세기가되면왕궁昌徳宮의후원에洪武帝 萬暦帝 崇禎帝를제사지내는大報壇을설치하기에이른다. 임진왜란이종식된후, 백관이착용하는禮服의불비때문에朝賀禮실시가정체되었

129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103 지만望闕禮는거의충실하게실시되었다. 특히宣祖 39년 4월에는千秋使와聖節使를파견함에즈음하여宣祖는望闕禮를올렸다. 조선의禮와法에서조선국왕이望闕禮를지낼때는正朝 冬至 聖節과千秋節이며, 조공사절을파견할때望闕禮를거행하는일은없다. 조선국왕으로서는이례적인행동양식이다. 이해는宣祖즉위 40주년에해당하는데, 조선에서는嫡子인永昌大君이탄생하고明에서도皇太孫이태어나는등조선국내외에서경사가뒤를이었다. 그한편에서明은서자光海君을아직도왕세자로책봉하지않았으며, 대명관계가반드시원활한것은아니었지만宣祖의 皇恩 이흔들리지는않았다. 여기서떠오르는것이예전에成宗이 내가望闕禮를올릴때몸은여기조선에있지만, 몸소황제를拜謁하는것과마찬가지이다 라고한말이다. 望闕禮란조선국왕이직접紫禁城의皇帝앞에拜謁하는것과동등한対明외교의례이며, 조선국내에서는이것을정치권력으로이용했다고생각된다. 儀禮는정치와외교를가시화하는공간이다. 그러면豊臣秀吉은明과의외교의례의 場 에서어떤태도로임했던것일까? 유일한사례가宣祖 29년 9월 2일 ( 일본력 1일 ) 오사카성에서거행된책봉의례이다. 일본국왕책봉사楊方亨과부사沈惟敬이誥命 金印 冠服을進呈하자秀吉은諸大名을거느리고五拜三叩頭의禮를올렸고, 儀禮의순서에따라중국어로 만세 를외쳤으며, 望闕 하고謝恩했다. 의례의手順은번잡했기때문에沈惟敬이사전에行禮手順을가르쳐주었다고한다. 이렇게해서豊臣秀吉을일본국왕에책봉하는의례는아무런문제없이끝났고, 그뒤에는책봉사를접대하는향연이열렸다. 한편, 책봉사와동행하였던조선통신사黄慎일행은秀吉의알현을거부당하고冊封儀禮의 場 에입회하지않았는데, 그다음날秀吉의冊封수락을전해들었다. 黄慎의復命報告에따르면, 秀吉은책봉사앞에서공손하게五拜三叩頭의禮를올리고冠服을받았으며, 또한諸大名 40여명도각각위계에상응하는官服을받았다고한다. 萬暦帝가豊臣秀吉을일본국왕에봉했던誥命과책봉이유를기록한勅諭는오사카역사박물관과宮内庁書陵部에각기현존하며, 京都의妙法院에는秀吉에게頒賜했던常服을비롯해서冠服 22점이전래한다. 이같은물적증거와明 朝鮮의実録記事, 景轍玄蘇의遺稿集 仙巣稿, 그리고루이스 프로이스의예수회報告書등으로판단하건데, 秀吉이공손하게明帝의책봉을수락했던것은의심의여지가없다. 그런데秀吉이제시했던강화조건에대한회답은없었고日明강화교섭은파탄이났다. 원래朝貢의전제로서책봉이라는기본적인절차를밟아야하지만, 秀吉은 日本国王 에책봉되었음에도불구하고조공무역은허가되지않았다. 이리하여제2차조선침공이시작되고, 秀吉이東夷

130 10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의 蕃王 으로서中華帝国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세계시스템에편입되는일은끝내 없었던것이다. < 표 1> 明代東南諸國의貢期 國名 朝鮮 貢期 1 年 3 貢 日本 10 年 1 貢 琉球随時 2 年 1 貢 ( 一時 1 年 1 貢 ) 安南 ( 베트남북부 ) 真臘 ( 캄보디아 ) 暹羅 ( 타이의아유타야 ) 占城 ( 베트남남부 ) 爪哇 ( 자바북부 ) 3 年 1 貢 不定期 3 年 1 貢 3 年 1 貢 3 年 1 貢 * 萬暦大明会典 巻 105, 禮部 63 朝貢 1 東南夷上을참고로鄭樑生, 明 日関係史の研究 66 의표 < 諸国に対する貢期の規定 > 을일부수정함.

131 동아시아세계와文祿 慶長의役 105 年月日望闕禮朝賀禮특기사항 冬至. 명사신韓世能 陳三謨, 来朝 2 6 正 1 사흘전에望闕禮習儀기록있음 문안 2 품이상은四殿에문안 4 7 正 1 정지전년말에기상광학적인日變을관측 정지権停禮기후극한. 백관은동지문안만 6 8 正 1 정지문안玉堂은四殿에문안 7 9 正 1 정지전년정월 2 일, 仁順王后 ( 明宗妃 ) 사망 8 10 正 1 정지익일, 魂殿에서大祥祭 9 11 正 1 정지 작년 11 월하순, 仁聖王后 ( 仁宗妃 ) 사망 (3 년상 ). 단이해正朝기록없음 正 1 権停禮権停禮朝賀禮는 3 일에順延하여恒式이됨 正 1 정지権停禮闕庭습기. 朝賀禮는 3 일 聖節 ( 萬曆帝 ) 権停禮 正 1 朝賀禮는 3 일 正 1 정지日食 正 1 문안議政府 六曹동서반 2 품이신 政院 玉堂, 문안 全羅道観察使権慄, 冬至慰箋을封進 正 1 정지정지선조는義州에체제 정지한성탈환의황은에감사 ( 永柔清渓館에서 ) 한성南別宮에서 正 1 南別宮에서. 그후明將접견 時御所에서. 이날선조생일 正 1 時御所에서 明使李宗城과함께거행 ( 南別宮에서 ) 문안時御所에서. 議政府 2 품이상 政院, 문안 正 정지 - 仁聖王后 ( 萬曆帝의母 ) 사망 (8 13) 在京唐官에게設酌을명함 (10 25) 正 1 < 표 2> 宣祖代의望闕禮실시상황 別殿에서 別殿에서

132 10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正 1 왕세자 ( 光海君 ) 군신을거느리고行禮 別殿에서 正殿에서 이튿날선조는經理萬世徳의館所에서동지축하 正 1 왕세자도입궁, 行禮 南別宮에서 正 1 不受仁順王后기일목욕재계 問安대신및 2 품이상문안 正 1 問安대신및 2 품이상문안 千秋節 ( 후일泰昌帝 ) 権停禮 正 1 問安政院及및백관문안 千秋節 왕세자 백관을거느리고行禮 停止薬房, 望闕禮権停을청함 (11 18) 正 1 停止問安선조는貞陵洞행궁에체재, 병환 일주일전에 17 일望闕禮있음 (8 10) 正 1 別殿에서 왕세자, 백관을거느리고陳賀禮을행함 正 1 문안 3 公및 2 품이상문안 千秋使, 북경으로출발 聖節使, 북경으로출발 停止権停禮선조, 건강이안좋아외출불가 (11 21) 正 1 停止問安비로인하여대궐안뜰에물이참 正 1 停止問安 작년 10 월부터선조병환. 대신및동서반 2 품이상 六曹堂上, 문안 * 표의연월일은 宣祖実録 의해당연월일조에의함. 聖節과千秋節의경우는朝賀禮와会禮宴이거행되지않기때문에 - 로표시했다.

133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 글로벌히스토리와의접속 - 스카와히데노리 ( 須川英徳 ) Ⅰ. 시각의설정 Ⅱ. 유라시아에있어서동아시아세계의위치 Ⅲ 년대이후일본의역사연구에대한관심 Ⅳ. 17~18 세기동아시아세계의특수성 Ⅴ. 17~18 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의原像 Ⅵ. 17 세기일본을둘러싼대외관계의재편속에서의한일관계 Ⅶ. 17~18 세기동아시아에서의朝日무역 Ⅷ. 맺음말 Ⅰ. 시각의설정 본논문에부과된과제는위의제목그대로이며, 여기에부제를달아서 통신사와왜관의의의를포함하여 가붙어있다. 이과제는다음의몇가지로분해하여새롭게정리할수있을것이다. 주로일본의연구에기초하여, 1. 17~18세기의한일관계에대하여개괄한다. 2. 동아시아세계속에서한일관계란어떤것이었는지, 그위상과성격에관하여고찰한다. 3. 통신사와왜관의역사적인의미에대하여고찰한다. 이중에서 1과 3에관해서는한일관계사연구로서많은일본사연구자, 대외관계사연구자들의정밀하고방대한연구축적이있으며, 이에대하여문외한인본인이무언가실증적이며새로운지식을부가하는것은곤란한작업이다. 그리고개론적인정리라면

134 10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다시로가즈이 ( 田代和生 ) 와쓰루타게이 ( 鶴田啓 ) 등한일관계사연구자들의훌륭한개설서가있다. 여기에덧붙여서이미제1기의학설사정리보고및문헌목록에서 3번의통신사를다루고있으며, 제2기의학설사정리보고에서왜관에관한문헌목록을포함한보고가행해지고있다. 그러나 2번에관해서는현재진행중인연구영역임과동시에, 보고자가전문으로하는경제사연구의취급영역과일부이기는하지만중복될수있는부분이다. 그래서본논문에서는다음과같이서술을진행하고자한다. 먼저 117~18세기의국제환경에있어서동아시아지역의위상내지는특성이어떤것이었는가? 최근의일본에있어서역사연구, 특히글로벌히스토리 (Global history) 에대한관심동향에유의해가면서세계사적인공간속에서고찰해간다. 이것은한일관계도역시세계적인변화속에서존재했기때문이다. 또한종래두나라사이의관계사연구에서가장모자라는부분이기도할것이다. 이때 17~18세기를이해하기위하여필요한범위에서그이전및다른지역의사정도언급할것이다. 2이어서그와같은틀안에서한일관계가어떻게전개되었는가를고찰한다. 다만보고자가취급할수있는부분은한일관계사연구라는분야의방대한축적속에서는아주작은한부분이될것이며, 그와같은의미에서는밸런스를잃은것이될것이다. 1) 3그리고, 양국의정치적 문화적교류와정보유통의매체또는장소였던통신사와왜관에대하여도필요한범위에서언급할것이다. 관련된문헌목록은제1기, 제2기의학설사정리보고에서이미작성했기때문에본보고에서는취급하지않겠다. Ⅱ. 유라시아에있어서동아시아세계의위치 유라시아에는고대부터문명권이라고부를수있는몇몇세계가공존하고있었다. 이 1) 입수하기쉽고, 더구나읽기쉬운개설서로서 17~18 세기의쓰시마 ( 対馬 ) 를중심으로한한일관계에관해서는鶴田啓, 対馬からみた日朝関係 일본사리플렛 41 ( 山川出版社 ) 가잘정리하고있으며, 통신사, 왜관에서의교역, 한일간의상호인식등에관해서는三宅英利, 1993 近世アジアの日本と朝鮮半島 ( 朝日新聞社 ) 가있다. 또왜관에관해서는田代和生, 2002 倭館 ( 文春新書 ) 가상세하다. 에도 ( 江戸 ) 시대에있어서한일관계의槪說을원하는경우에는먼저이들서적을반드시참조해야한다. 그리고기본참고문헌도이들서적에소개되어있다.

135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09 슬람이흥륭하기시작한이후의아시아는크게보아서쪽에서부터건조한기후와이슬람교로특징지을수있으며, 아프리카북부와도연결되는서아시아지역, 인도의힌두교문화를기반으로하는남아시아지역, 고온다습하고많은섬과반도로이루어진해양적세계의동남아시아지역, 온난하며옛날부터중국문화의영향을강하게받음과동시에벼농사를전개해온동아시아지역, 그북부지역에서부터서부에걸쳐위치하는초원지역으로유목민이대부분을차지하는세계였던동북아시아에서중앙아시아에걸친내륙지역등으로구분할수있을것이다. 이렇게대략살펴보면유럽은유라시아대륙서쪽끝의기독교적세계로자리매김할수있을것이다. 이들여러지역은내륙의교통로로연결되었을뿐만아니라, 바닷길을통하여아라비아해에서인도양, 더나아가동남아시아에걸친인도양해역에주요한활동기반을갖고있던이슬람계와힌두계등의상인들에의하여연결되며, 그해상교통로의끝은서쪽으로는지중해, 동쪽은동아시아해역까지도뻗어있었다. 동아시아세계에서보자면동쪽은태평양, 북쪽은동시베리아의삼림지대로구획되지만동북부는半農半猟의여러민족이거주하며, 다른문명권으로향하는교통로는육로로는유목계의여러민족이거주하며중앙아시아로이어지는건조지대와서쪽및서북쪽으로전개된초원지대, 해로로는동남아시아지역또는말레이반도를돌아인도양해역으로연결되고있다. 이동아시아세계에서는중국이차지하는비중이문화적으로도매우크며, 주변의여러민족과여러국가에다양한영향을끼쳐왔다. 그리고중국과관련하여일본과한국에공통되는요소로서문자로는중국에서기원한한자의사용 2) 을, 사상과신앙은중국에서기원한유교와도교, 그리고북방에서전래된漢譯佛經의수용을예로들수있다. 이들요소뿐만아니라온대몬순이라는기후적공통성이유사이래중국長江중하류와교류하면서벼농사라는공통성도가져다주었다. 농업에있어서높은공통요소는농산물을주된재료로하는음식문화에서도쌀을주식으로, 여타의식품을부식으로여기는음식개념, 콩을원료로하는가공식품을풍부하게사용 ( 된장, 간장, 두부등 3) ) 하는등다 2) 중국주변의제민족이한자문화를받아들인결과로서한자를의식해가면서, 각각의언어와합쳐서고유문자를만들어낸사례는많지만, 西夏文字 契丹文字 女眞文字 ( 金代에만들어진것, 満州文字와는다름 ), 그리고베트남의추놈등은모두한자의字體를의식하면서자신의언어에맞도록고안한것이었는데, 왕조의멸망과함께사용하지않게되었다. 문자가사용되기시작한다음부터중단되는일없이현재까지사용하고있는문자는일본의仮名文字와한국의한글인데, 모두한자어휘에많이의존하고있음에주의해야한다.

136 11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양한면에서공통점을형성하고있다. 이것은일본열도에서국가형성이시작되는시기에있어서선진문화의섭취가중국에서기원한것이라해도, 한반도경유내지는한반도로부터의사람의이동과함께일본열도의기층문화에까지깊게뿌리를내렸다는것에기원하며, 그리하여이후의송 원시대에활발했던일본과중국의직접교통이주로寧波 ( 明州 ) 를비롯한長江하류유역의항구도시사이에맺어졌던것에서기인하는것이다. 여기서부언하자면, 동일한동아시아세계내지는유라시아의동쪽끝이라고해도몽고와여진 ( 및여진에서나온만주족 ) 은한자와유학을수용하지않았다. 오히려문자는위구르문자계통의문자를채택했고, 종교는티베트불교를신봉했다. 반대로지금의베트남북부에성립했던여러왕국 ( 남부에는인도문화의영향이강한占城 [ 참파 ] 이존재했다 ) 은한자와유학, 漢譯佛經을받아들였을뿐만아니라, 李朝베트남이래유학에기초한과거시험도실시했다는점에주목해야할것이다. 4) 문자의전파에서는기층적인생활문화의상이함뿐만아니라유력한지식인집단인종교지도자와그들이사용하는경전의문자가무엇이었는지도중요했을것이다. 그러나중국에대한일본과한국의차이점도크게존재했다. 일본열도에성립했던여러정권은중국과바다를사이에두고있다는지리적사정때문에정권의내부적요청이있을때는적극적으로중국과교섭을갖고외교 교역관계를성립시키지만, 필요성을인식하지않을때는무관심할수있다는, 일본쪽에서선택할수있는자유의폭이높았다. 또중국쪽에서도일본열도의정권에대하여적극적으로교섭을요구할필요성은희박했다. 이미구와노 ( 桑野 ) 의보고에서언급했던것처럼엄격한책봉체제를시행했던명대에조선이 1년 3공, 류큐 ( 琉球 ) 가 1년 1공또는 2년 1공이었던것에비하여일본은 10 년 1공이었을뿐만아니라책봉관계조차도계속적이지않았다. 뿐만아니라국가체제 3) 여기에는특히일본의경우, 불교승려가중국과왕래하면서가져온것도많다고본다. 일본에서는차, 饂飩 ( 찐만두 ) 등도역시승려를매개로중국에서전래된것이다. 4) 베트남사에관한개설서로는石井米雄 桜井弓躬雄편, 1999 東南アジア史 1( 新版世界各国史 5) ( 山川出版社 ) 를참고하였다. 베트남은李朝 (1010~1225), 陳朝 (1225~1400), 黎朝 (1428~1527, 1532~ 단후기는莫氏, 이어서鄭氏가담당하는허울뿐인국왕이었다. 17 세기의베트남은분열, 남부는阮氏의広南国이広南國王을칭했고, 참파 ( 占城 ) 를멸망시켜서자국령으로삼았지만淸은이름뿐인黎氏를안남국왕으로계속책봉했으며, 광남국왕을책봉하지않았다. 阮朝 (1802~1945) 모두국호를大越로정하고나서도중국왕조로부터는安南国王으로책봉되었는데 ( 阮朝성립후인 1803 년부터국호, 책봉왕호모두越南과越南国王이된다 ), 국내적으로는황제를칭하고, 독자적인연호를사용하고있던것으로알려졌다. 또한阮朝시대에도주변의여러왕국에대하여 독자적인小朝貢圏을형성하고 (217 페이지, 桜井弓躬雄집필부분 ), 캄보디아에는印綬를주고 3 년 1 공을명했다.

137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11 상최고권력자 = 국왕이라는책봉관계를성립시키기위한기본조건마저도천황을중화황제와동등하게취급하려는내부의이해와, 천축 ( 인도 ) 중심의세계관속에서중화를상대화한셈인불교가중세에진행된神佛習合과함께神国日本至上主義를주장하고있는등, 유교적교양을갖춘관료가아니라주자학등에도정통했던禪宗승려가외교실무에관여했던일본에서는반드시자명한이해사항은아니었다. 더구나武家政権이천황권력을능욕하고, 무가정권의최고권력자가일본에있어서사실상의최고권력자이면서도형식상으로는천황에게복종하는장군으로임명되고있다는사실은사태를더욱복잡하게만들었다. 5) 그러나천황을그구성원에포함하는교토 ( 京都 ) 정권과, 장군으로대표되는武家政權의관계는그소재지뿐만아니라기능과구성원리가다르고관할영역도다른두개의정권이며, 원래부터관제상의상하관계로는설명할수없는두개의왕권이일본열도에서상호의존해가면서병존하고있으며, 점차로후자가전자의관할영역을잠식하고, 전자가독자적으로결정할수있는영역이거의존재하지않게되는것이사실이다. 요컨대중국식관제로는바로번역하기가불가능한통치기구였다고말할수밖에없다. 이점은내부적으로는황제를칭하고독자적인연호를사용하면서도중국식관제로번역할수있으며, 대중국관계에서는국왕으로서책봉관계속에있었던베트남과고려초기의대응과도크게다르다. Ⅲ 년대이후일본의역사연구에대한관심 1980년대이후일본의연구경향으로서이른바웨스턴임팩트 (Western Impact) 이전의시기, 그중에서도대략 10세기이후에있어서아시아각지역의통합의형태와상호관계등산업화가진행되고있던구미와의접촉에서오는충격의크기와여기에계속되는사회와국가체제의격변으로감춰져버린, 그이전의각지역내의시스템과지역간의 5) 천황과장군의관계가상하관계로인식되는것은주자학적인대의명분론이일본의무사지식인에게침투되고, 러시아의접근에따라대외적인위기의식이높아져가던 18 세기말이후이며, 가마쿠라 ( 鎌倉 ) 막부의발족이래교토정권 ( 가마쿠라막부발족당시는천황이아니라그父系의천황경험자중 1 명이권력을장악하는院政이시행되고있었다 ) 과무가정권은기능과구성원리가다르고관할영역이다른두개의정권이며, 상호의존적인타원의두초점이라고할수도있는것이었다. 때문에천황과장군중어느쪽이위고아래인가하는물음자체가원래의미가없는것이다.

138 11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시스템에대한관심이높아지고있었다. 이와같은관심의형태는 2국사적인관계사연구의성과를더한결과로생겨난것은아니며, 역사를생각하는패러다임의전환이라고할수있는사태로인하여생겨난것이다. 6) 구체적으로는월러스틴이제시했던 세계시스템론 과어떻게마주할것인가하는의문속에서생긴동향이기도하다. 7) 세계시스템론 에따르면, 앞에서도언급했듯이고대부터몇몇문명권이제각기 세계경제 로서병존하고있었지만, 유럽인이주도한 16~17세기의대항해시대를거치면서유럽주도에의한 유럽세계경제 의형성과이에따른지구규모의교통과시장이성립했고, 그것이근대세계경제시스템의시작이라고한다. 처음에는주로동남아시아산향신료를구하기위한아시아도항과금은을구하려는신대륙도항이었지만, 차츰서유럽지역을중심으로신대륙과서아프리카, 그리고동유럽을연결하는교역시스템이확대되고, 변두리가된신대륙의은 사탕, 서아프리카로부터의노예, 半변두리가된동유럽의곡물을서유럽중심으로묶음으로써유럽으로의부의축적을가능하게했다. 결국세계시스템의중핵인서유럽과주변의종속지역 ( 半변두리, 변두리 ) 이라는세계적규모의자본주의적인분업과교역시스템의형성이다. 중핵도처음부터선진적이며중핵이었던것은아니며, 반변두리와변두리역시시장에대한세계경제의접근과진입의결과로서그와같은방향으로통치기구와경제가변용해갔다는것이다. 더군다나 18세기에는기호라든가생활스타일의변화와함께향신료에대한수요가감퇴하지만, 커피 차 사탕 면포등아시아와신대륙에서들어오는신상품교역이확대되고, 인도에서들어오는면포수입을저지하는수입대체화형태로영국의면직물업에서부터소위산업혁명이시작한다. 이확대되는영국의면화수요에대응하여아메리카합중국남부와이집트가면작지대로변모해간다. 다른한편, 중국산차에대한수요는수입대금으로서은을대신하여인도산아편을중국에판매한다. 그결과로서의아편전쟁과동아시아에있어서불평등조약 8) 체제의개시는동아시아지역또한 19세기후반에 6) 이하의기술에서一国史的인연구의의의를부정하려는것은아니다. 그러나상호연관적으로역사가전개되어간동아시아의경우, 개개의지역을포괄하고있던동아시아적인시스템을상정하고, 그속에서상호간의관계를모색하지않는한, 一国史的인역사전개의특성마저도충분히이해할수없다고생각하는것이다. 이것은단순히이념으로서의 화이질서 의존재만지적하면끝나는것이아니며, 보다구체적인사람과물건, 기술, 사상등다양한위상에서검증되어야할과제이다. 7) 임마누엘월러스틴, 川北稔역, 1981 近代世界システム Ⅰ Ⅱ ( 岩波書店 ). 原著는 1974 년. 역자인가와키타미노루의 머리말 이월러스틴의이론을매우알기쉽게정리하였다.

139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13 는근대세계시스템속에종속적으로포섭된것을의미한다. 이와같은월러스틴의 세계시스템론 은그때까지의유럽근대를기준점으로, 그곳에 서도출되는한나라의역사적발전단계론과각단계에있어서사회구성체를설정하고, 그것과의상위혹은근대화달성도를가지고그나라의역사발전의모습을추량한다는마르크스주의내지는그방법에따르는역사접근방법에대하여개발경제학과사회학의관점에서 A.G. 프랭크와 S. 아민등이제시한 중심부와종속적주변부 론, 저개발에대한개발 론의논의속에서탄생했고, 오늘날의자본주의적근대세계시스템이역사적으로어떻게성립되고전개되어왔는가하는문제설정방식이기도했던것이다. 그러나이해답에대하여도역시유럽중심주의라는비판은당연히예상되는것이지만, 그것뿐만아니라촉발되어부상해간논점이다양했다. 특히 16세기를유럽이패권을향해가는분수령이라고보는견해에대하여 16~17세기의아시아국가의역량과풍부함을보다높게보는논의가주목된다. 9) 가와키타미노루 ( 川北稔 ) 는 16세기이후의 대항해 로초래된 일체로서의세계 가 17세기후반이후의 상업혁명 으로유럽인이아시아등지의상품을대량소비하는형태 ( 생활혁명 ) 를성립시킨것이며, 세계의일체화 의첫단계는 아시아시대 였지만, 18세기후반이후이러한아시아상품의국산화, 요컨대유럽에있어서아시아상품의수입대체로서의산업혁명이진행되고, 그것이 유럽상품 이되어반대로아시아로유입하게되었다 고요약하며, 이두가지시대중에서결정적으로중요한것은유럽인의생활문화에아시아상품이대량으로들어오게된근세, 공업화이전의움직임이었다 고한다. 10) 또한기시모토미오 ( 岸本美緒 ) 에따르면, 유럽을모델로했던한나라의역사적발전론을비판하면서등장했던근대세계시스템론이다시유럽중심주의를비판하고있는새로운단계 11) 가오늘의역사연구이며, 새로운글로벌 히스토리와새로운시대구분을어떻게묘사할것인지모색중이다. 12) 8) 불평등조약의가장큰특징은공업상품의매입과현지상품의자유로운수매를목적으로하는자유무역체제 ( 저율의협정관세, 내지통상의자유 ) 와자국민보호를위한영사재판권, 무엇보다도최혜국대우에있는데, 이와같은불평등조약의기원은오래된것이아니라남경조약 (1842 년 ) 과미일수호통상조약 (1858 년 ) 을전후로하는시기에체결된영국과오스만투르크의통상조약 (1838 년, 발타 리만협약 ), 영국과타이의조약 (1855 년, 방콕조약 ) 이원형이다. 毛利健三, < イギリス資本主義と日本開國 > 石井寛治 関口尚志편, 1982 世界市場と幕末開港 ( 東京大学出版会 ) 9) 岸本美緒, < 時代区分論の現在 > 歴史学研究会編, 2002 歴史学における方法的転回元代歴史学の成果と課題 ( 青木書店 ) 84~85 10) 川北稔, < 輸入代替としての産業革命 > 懐徳堂記念会編, 2008 世界史を書き直す日本史を書き直す ( 和泉書店 ) 30 11) 岸本美緒, < 위논문 > 85

140 11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특히동아시아에관해서는 16세기전반에유럽인과접촉이발생하고있지만, 인도양해역과동남아시아해역에서일어난사태의진행과는달랐다. 그접촉으로유럽인이즉시해상교역의일정정도를장악하고, 교역거점을중심으로내륙으로진출하면서지역을지배하는형태로진전되지는않았고, 19세기중반에이르기까지는일본과중국의통치권력이요구하는대로허가된범위안에서, 때로는굴욕적인요구를감수하는통교자로서만족해야했다는점에주의해야한다. 이에비하여남아시아와동남아시아의여러지역에서는영국과네덜란드가교역거점을기점으로점차지배영역을확대하고, 19세기중반에는이미영역지배권력, 즉식민지통치권력으로전화하고있었다. 세계시스템론 에따르면이같은근대자본주의세계시스템에종속적으로포섭되었을때가그지역의 근대 의기점이되는것이지만, 동아시아의경우는접촉에서종속적포섭까지 3세기정도의시간차가존재하는것이된다. 13) 이와같은史実에주목한다면, 세계시스템 으로의통합 포섭의경위도반드시동일한과정을반복하는것은아니며, 당연한일이지만그지역에이미존재하고있던시스템에상응하는다른진입방법, 포섭방법이있을수있다는말이된다. 중남미의예를들자면, 잉카제국의멸망에서보듯이선주민의국가를스페인에서침입한소수의군대가철저히파괴한뒤에재물을탈취하고주민을노예화하는야만적인폭력을사용했지 12) 예를들면, 그시도의하나로 海域아시아사 라는새로운영역도개척되어있으며, 海域アジア史研究入門 ( 桃木至朗편, 2008 岩波書店 ) 총설에서 海域アジア史研究の 3 つの主戦場 으로 (1) 自国史 의쇄신과 対外関係史, 海上進出史 (2) 東洋史, 東西交渉史, 大航海時代史 의쇄신과海域史, (3) 근대사의쇄신과세계시스템 아시아교역권을들고있다 (4-8 쪽 ). 한편, 14 세기에몽고의유라시아통합을세계사적으로획기적인사건으로보는스기야마마사아키 ( 杉山正明 ) 의일련의연구 ( 예를들면일반용의새로운책으로 2008 モンゴル帝國と長いその後 ( 興亡の世界史 21) ( 講談社 )) 이있으며, 海進 에의한글로벌화의진전이라는논리에는陸上을향한시각과지식이크게결여되어있다 ( 同書, 105 쪽 ) 고비판한다. 13) 이타임랙을역사적으로어떻게자리매김하고, 무엇으로불러야하는가하는문제에대해서는永井和, 2007 < 東アジア史の 近世 問題 >, 夫馬進編 中國東アジア外交交流史の研究 ( 京都大学学術出版会 ) 가논점을잘정리하고있다. 또그는자신의견해로 1) 세계사의흐름을 多세계 단일세계 로파악하는 多세계론, 세계구조전환론 의입장에서 2) 세계구조전환의프로세스 를, 지역레벨에서의세계의일체화 유라시아규모에서의세계의일체화 지구규모에서의세계의일체화라는 3 단계로나누고, 3) 지구규모에서의세계의일체화 가시작되어 일체화된세계 가형성되기까지를넓은의미에서의근대로하고, 이것을 16 세기에서 20 세기초까지로하고, 4) 근대 를근세와좁은의미에서의근대로나누며, 5) 지역에따라차이가있어도아시아가서구보다우위에있었던 18 세기무렵까지의시기가근세, 6) 그러나근세의세계경제가단일의세계경제였는지에대하여는보류, 7) 따라서근세아시아에대한 근대세계시스템 에의한포섭론에관하여도보류한다고하였다.

141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15 만, 그로부터수십년의시간차를두고중국과일본으로건너온포르투갈인들은그와같은방법을쓸수도없었다. 결국단순히거리적인원근만의문제가아니라각지역에있어서독자적인사회형성정도와각지역이지역내시스템을어떻게구축해가고있었는지, 그리고각지역이외부와어떻게관계해갔는가에따라전혀다른과정을거쳤다는것은명백하다. 결과적으로 19세기후반의동아시아가 근대자본주의세계 로포섭된것은확실하지만, 그이전에서로어떤관계를형성했고각기어떠한사회를전개해갔는지, 그리고외부세계와어떤관계를맺고있었는지를해명하는일이중요해지는것이다. 한일양국간의관계사역시동아시아세계속의존재이며, 글로벌히스토리의일부인것이다. Ⅳ. 17~18 세기동아시아세계의특수성 그와같은관점에서동아시아세계에대하여관찰하기전에일본과한국의특수성에대하여고찰해보고자한다. 먼저우리는오늘날의주권국가인일본과대한민국이라는주권국가의틀을과거로소급시켜서전근대의양국관계를고찰하는경향이있다. 게다가그영역이 17세기초의시점과비교했을때, 한국의경우는분단이라는사정을제외하면조선왕조가지배했던영역과거의변화가없다. 그러나일본의경우 18세기말에에도막부가직접 간접으로통치영역으로삼고있던범위와비교했을때, 18세기말러시아와의관계에서에조치 ( 蝦夷地 ) 를幕領으로삼고, 다시막부말기의 1854년에체결한러시아와의조약으로홋카이도 ( 北海道 ) 와이른바북방4도를일본령으로삼고 ( 다만, 그북방인치시마열도 [ 千島列島 ] 와사할린 [ 樺太 ] 은확정적인것이아니었다 ), 메이지 ( 明治 ) 초에류큐를영토로편입함으로써이전시기에 일본 으로인식하고있던영역과는달리근대국가형성과정에서그때까지는경계적이었던지역을 일본 으로편입했다는점에서차이가있다. 그렇다고해도청일전쟁이후에획득했던타이완과한반도등의해외영토는제2차대전의패전과함께모두상실했으며, 그결과로서 18세기말과커다란변화가없는것처럼여기는경향이있다. 그때문에역사적으로형성되어온현재의 일본 과 한국 이자신의영역과그곳에서생활을영위하는사람들과함께마치유사이래면면히이어져온존재처럼착각하는

142 11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경향마저있다. 14) 더군다나다른지역과의교류를엄격히제한했던 쇄국 체제가오래존속했기때문에양국모두소수의이주자와선주민 ( 한국에는없지만 ) 을제외하면거의단일의에스니서티 (Ethnicity) 로성립된듯한민족구성을가진것으로생각하려는경향이있다 ( 하지만한국에서는제주도, 일본에서는오키나와가모두예전에는별개의국가를형성하고있었다는점, 그리고오늘날도의식의강약에차이는있지만 육지, 야마토 ( 大和 ) 로스스로의사이에미묘한구분선을긋고있다는것을부정하는것은아니다 ). 게다가균일한국민을만들어내는일에힘을쏟았던근대교육제도를고도로보급한결과지역차와지방차역시크지않다는사정까지겹친다. 그러나현대와과거의국가영역의중복성이높고, 여기서생기는현대의시선으로과거와현재의역사, 그중에서도國家史에대하여연속성을당연하고암묵적인전제로생각하려는경향이있다. 아니면그런생각이가능하도록굳게믿어버리는사정은매우특수한관계라고말하지않을수없다. 다소장황한이야기지만 17세기초엽의시점에서세계사적으로생각한다면, 남북아메리카에는북미선주민외에유럽에서의이민이시작되었을뿐이며, 중남미에존재했던잉카와아스텍등의선주민국가는스페인인에게멸망당한상태였다. 유럽에서도오늘날의영역과비교적유사한나라는프랑스뿐일것이다. 독일과이탈리아는지리적인명칭밖에없었고, 영국은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라는별개의국가였다. 발칸과이집트, 알제리등중동에서북아프리카까지가여전히오스만투르크제국의지배아래있었다. 그리고러시아는우크라이나지역으로진출하여이제막우랄산맥을넘으려던때였다. 인도내륙지방은이슬람을신봉하는무굴제국이통치하고있었다. 중국도만리장성이북은요동을제외하고여진족과몽고족의땅이었으며, 티베트와위그루는중국의영토가아니었다. 요컨대현대세계각국의국경을생각할때, 17세기초의국경과거의일치하는국가를발견할수있는지역은남북아메리카와아프리카에는존재하지않으며, 유럽에서도그원형이존재하는것에불과하다고이야기해도과언은아니며, 중국도오늘날과는크게달랐다는사실을상기하기바란다. 일본조차도류큐와홋카이도는아직 일본 이아니 14) 그러나완전히중복되는것은아니며, 이것은오키나와현에서 오키나와사 를취급하는고등학교용교재가 일본사 와는별개로독자적으로편집되어있는것을보아도명백할것이다. 또한 兩屬 하게된류큐를어떻게취급해야하는지, 메이지초기에는반드시일본령으로편입한다는방침이정해져있지않았다는것도지적해둔다. 근대에있어서홋카이도와류큐의취급에대해서는小熊英二, 1998 日本人 の境界 ( 新曜社 ) 제 1~3 장참조. 메이지초기에는개발과유지비용을이유로류큐포기와홋카이도매각을주장하는신문사설마저있었다.

143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17 었다. 인종 언어 풍속 종교등을함께하는집단이하나의국가를형성하려고한, 혹은해야한다고생각하게된것은 19세기이후의현상인것이다. 또한그렇게설정된국경이라는틀속에서국가는한층더문화적인동질화를추진하고, 더나아가그기원을소급시켜서근대국민국가이전부터의언어적 문화적 혈연적공통성과 고유의민족성 을 역사적으로증명 하고, 더욱이공적으로교육함으로써 국민 을만들어내고있다. 주지하는바와같이, 명확하게구획된영토를가짐과동시에소속된인간에게배타적인관계를갖고있는것이근대국가이다. 또한그자체가외교의주체이며, 그상위의권력이존재하지않는주권국가라는개념이성립한것은 1648년에체결된베스트팔렌조약이후부터이며, 그이전에는주권국가가존재할수없었다. 또문화적 언어적으로도동질화된국민들로형성되는국가, 즉 Nation state( 국민국가 ) 라는개념이발명되는것은절대왕정기의프랑스이며, 프랑스혁명과그확대에따라국민국가라는개념역시수출되었고, 20세기로들어설무렵에는국민국가라는개념이널리수용되기에이르렀다. 동아시아세계에있어서도그와같은의미에서의주권국가가출현하는것은 19세기중엽이후에들어서서구미와동아시아각국상호간의조약체제가성립한뒤의일이며, 15) 국민국가라는개념역시그뒤를쫓듯이수용되어갔다는것을잊어서는안된다. 요컨대일정한규모의인종적 (ethnic) 인집단이존재하고, 그들의거주영역이국민국가로발전하여국경이결정된것은아니며, 통치자에의하여먼저국경이그어지고, 그내부에서다수파인종집단의언어 문화가지배적인언어 문화로채택되며, 그것이공교육과행정의회로를통하여정착하고 국민 이형성되는것이다. 여기서동아시아세계에대하여논하기전에, 16~17세기동아시아세계와는다른정치권력의형태에대하여이슬람지역사연구자인하네다마사시 ( 羽田正 ) 의논의를소개하고자한다. 인도양해역세계에서는다양한상인집단의무역활동을통제하고지배하려는정치권력이존재하지않았으며, 내륙에거점을둔강대한정치권력은반드시해안지역까지이르지않았다. 16) 더구나 인도양해역연안과동남아시아의왕권은영역보다먼저사람을지배하려고 했으며, 광역적인정치권력은지연 혈연 직업 인종 종교등다양한요소를제각기만들면서형성된다양한인간집단을크게포용하고집단간의이해를조정해가면서통치했다고한다. 강대한제국아래에는지방 도시 길드 부족 종파등의 15) 엄밀하게는조선과류큐에대한책봉관계가완전히소멸한청일전쟁이후일것이다. 16) 羽田正, 2007 東インド会社とアジアの海 ( 興亡の世界史 15) ( 講談社 ) 39~40

144 11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정치적주체가다소의독립성을가지고중층적으로존재하고있으며, 주권국가의형식을취하지않는지배였기때문에무굴제국사람, 사파비제국사람이라는개념은존재하지않았다. 그리고 정치권력이영역이아닌사람을지배하려고한이상, 인적인의미에서의 안 과 바깥 의구별은없었다. 17) 요컨대영역을정하는것과함께그곳에거주하는다양한사람들을동등한臣民의반열에집어넣으며, 소속된인종과종파등의상위개념으로서 인을설정하여통치하는지배가아니며, 또한신민이영역밖으로나가는것과영역밖에서신민이아닌자가들어오는것을모두엄격하게규제대상으로하는정치권력도아니었다는것이다. 그런까닭에 17세기초의동인도무역을목적으로인도양해역으로진출했던프랑스, 네덜란드등의동인도회사는현지정권에게모종의공헌을할것으로기대되어파격적으로후한대접 ( 무역거점이되는상관과요새의건설허가등 ) 을받을수있었다고한다. 왕권과정치권력은왕국에풍부한상품이들어와서교역이활발해지고, 왕의궁정이관세등으로윤택해진다면, 무역을행하는주체가누구든, 어느곳출신이든큰문제가되지않았던것이다. 18) 이와같은하네다의주장에따른다면, 다양한인종과종교 종파를내부에품고통치한다는것은근대국민국가와는상이한 제국, 즉오스만제국등의모습이떠오르지만, 전근대국가로서는오히려그와같은지배형태가일반적이었다. 더욱이한가지더주목할만한것은인도양해역과동남아시아의정치권력은영역지배보다인간집단의지배를중시했다는지적일것이다. 이것은해양으로열린지역의지배라는사정으로설명할수있다고생각한다. 즉광대한해양으로열려있는지역에서는대체로영역적인지배가불가능한해양에대하여육상의통치권력이어떤지배권을주장한다는것은무의미했기때문이다. 그런주장보다는해상교역등으로바다저편에서부를가져올수있는인간집단을그출신에구애받지않고수용해서보호하고, 재화의거래에대한관세와入港稅등을거둔다거나, 그들이가져오는재화를내륙지역과거래하여이익을올리는방식이합리적이기때문이다. 19) 따라서그들의귀속의식은인종과종파에기초를둔것이며, 그들이거주하는제국에의거하는것은아니었다. 또한복수의원격지에거점을가져야원 17) 羽田正, 위책 356~357 18) 羽田正, 위책 ) 단, 해양에인접하여성립한정치권력이항상그렇다고볼수는없다. 예를들면중계무역으로일어선류큐가 17 세기에들어서점차중국무역의이익이감소하자통치체제의개편을단행하면서토지지배, 즉영역지배로통치의중심을옮겼다는점을지적해둔다.

145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19 양항해에따른해상교역이가능했기때문에그와같은집단을하나의거점이있는장소를기준으로구분하는것은별다른의미가없다. 이처럼바다로열린비영역지배적정치권력의형태는송 원무렵까지는그와유사한지배방식을동아시아해역에서도찾아볼수있었다. 예를들면, 중국연안각지에新羅坊을건설하고해상교역을담당했던장보고등신라인들의활동이가능해졌던이유는, 첫째는당시중국의통치권력이사람의소속을엄격하게따지는영역지배에그다지치중하지않았다는점을생각할수있으며, 838년을마지막으로遣唐使가중단된이래중국왕조와는정식으로국교를갖지않은일본승려들이중국을왕래할수있었던것도이러한이유때문이다. 송 원시대에일본은중국황제의책봉관계속에들어있지는않았지만, 승려와상인과상품의왕래에는지장이없었던것이다. 그런점에서매우흥미있는사실은중국연안도시에남아있는무슬림상인들의족적이다. 20) 당나라때는무슬림상인들이중국으로건너가서거주하게되었으며, 広州 泉州 福州 海南島등지에는아라비아와페르시아어碑文이허다하게남아있다. 비문중에서도가장오래된것이 9세기, 일부는송대, 대부분이원대의비문이다. 또한각지에는清真寺라고부르는이슬람건축양식의사원도건설되었고, 広州 泉州 福州 海南島등지에는무슬림의거주구역인蕃坊과그들을통솔하는蕃長이존재했으며, 중국정권또한이들을용인하고있었다. 그런데원나라말년의혼란을피하기위하여일부사람들이동남아시아로피난하였고, 이에더하여명태조가海禁을시행하여해상교역을금지함으로써해상교역이경제기반이었던그들은커다란타격을받았다. 게다가원대에는무슬림이몽골에버금가는특권적인지위에있었던탓에漢族의배척을받았으며, 점차한족과통혼하거나한족의성을쓰고, 마침내는이슬람신앙도버리고 16세기말에는한족에게동화되어갔다고한다. 요컨대당대부터내항하기시작했던무슬림상인들은중국연안의여러도시에거주구역을마련했으며, 이런일은송 원대까지계속되었지만명대의해금을계기로무슬림의집단으로서는소멸해버렸던것이다. 교역을목적으로해외에서찾아왔던사람들이현지정권으로부터교역거점의건설과거주를허락받는상황은계절풍을이용하던그당시의원양항해라는기술적인조건에따라규정되는것이기도했지만, 반드시그런이유만은아니다. 정권이가진대외관계에대한관리방식과대외질서의식에도영향을받았을것이다. 그와같은사례를한반도와 20) 중국의무슬림에대해서는陳達生, 1993 < 中國沿海地域のイスラム > アジアから考える 2 地域システム ( 東京大学出版会 )

146 12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일본열도에서찾는다면, 고려시대에송나라상인들이開城에거주했던것을들수있고, 그들의내항과체류에대하여엄격한제한이있었던모습은찾아볼수없다. 또몽고와의관계에서고려와원사이의왕래는해로 육로모두거의자유로운무역, 자유로운왕래가가능한시대였다. 명이성립한이후에도고려에서육로로중국에왕래하는사람의흐름이당장에바뀐것은아니며, 사절이라는명목으로다수의상인들이중국으로들어갔다. 그것이일변하여상업목적의육로왕래가통제대상이된것은이성계일파가정권을장악하고나서의일이다. 21) 한일관계에서는 14세기중엽부터격화된왜구에대하여당시일본의중앙정권은충분한통제방법을갖지못했다. 그러나조선정부의강온양면책이왜구를진정시키는데성공했다. 조선전기에는薺浦를비롯하여왜인들의체재를허락한장소가있었고, 한성에도사절로서상경을허락받은왜인과여진인을위한체류시설이존재했다. 왜인의조선도항에는조선정부가허락한자로한정하는제한이있었지만도항주체는다양했으며, 일본열도의중앙정권의통제가미치지는못했다. 일본에서도가마쿠라 ( 鎌倉 ) 무로마치 ( 室町 ) 시대에는중국상인들이하카타 ( 博多 ) 거주를허락받았으며, 16세기중엽부터일본으로건너오기시작했던포르투갈을비롯한유럽인들은禁敎와이른바 쇄국 이실시되기까지는사쓰마 ( 薩摩 ) 나가사키( 長崎 ) 히라도( 平戶 ) 등그들을우대해주는영주의항구에기항했고, 영주역시무역이익을원하여그들의내항을환영했으며, 나중에는영주들이기독교로개종한사실을예로들어도좋을것이다. 쇄국 후에도나가사키에는네덜란드인과중국인거주지역이인정되고있었다. 그러나자유의정도라는점을고려하면, 왜구대책으로거류가허락된三浦의왜인들은조선쪽의감시와행동의제한이있었고, 임진왜란후다시새롭게인정된초량왜관에서도역시마찬가지였다. 또 쇄국 이후의네덜란드인이데지마 ( 出島 ) 에격리된일은유명한데, 당초에는나가사키에서는일본인가정에체류하는것이허락되던중국인도중국에서일본으로도항하는것이반대로일본으로부터의무역액과도항선적수에상한이설정된이후부터밀무역방지를목적으로 1685년이후에는도진마치 ( 唐人町 ) 로거주가제한되었다. 요컨대크게보자면중국에서는명대에, 한국에서는조선시대부터, 일본에서는에도시대에각정권이자신의통치영역에대한사람의출입을엄격하게관리 통제함과아울러서, 체류하는외국인에대해서도다양하게행동의제한을가하는정책을채용하는방향으로크게변화해갔다는것이다. 이것은인도양과동남아시아의경우와는크게다른 21) 須川英徳, < 高麗後期における商業政策の性格 > 朝鮮文化研究 4

147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21 점이다. 17~18세기의한일관계 는이와같은동아시아, 그중에서도명에서시작하여조선, 일본의순서로채택했던海禁또는쇄국이라는 3국에공통된입출국에대한관리 통제정책과그것을가능하게하는중앙권력의출현을바탕으로전개되었던것이다. 따라서먼저동아시아에있어서왜그와같이국가에의한사람의출입을관리 통제하게되었는지알아볼필요가있다. 그러나시기에따른변화를생각할때, 명은 16세기말엽에는해금을해제하였고, 명청교대뒤의청또한南明정권과타이완에근거지를둔정씨에대한대항때문에 遷海令 을내려해역과의차단을단행했지만, 17세기말정씨가항복한뒤에는이금지를풀었으며, 명이허락하지않았던일본에대한직접도항까지도허가하고있다. 한편, 일본의경우해외도항과외국선내항에대하여중앙정권이통제를가했던것은 15세기에서 16세기중반까지遣明船의경우와히데요시정권이후의해외도항선 ( 朱印船 ) 이며, 거꾸로외국에서내항해온경우에대하여내항 체재지지정과船籍數지정등을시작한것은에도시대에들어서의일이다. 그것도처음부터체계적인법령이발포된것이아니라禁敎를축으로하여서서히통제가가해졌으며, 그결과의누적이 18세기말엽에는 祖法 으로의식화되었던것이다. 일본과중국의이와같은사정을보는한, 각정권을둘러싼국내외의사정이다르기때문에도항과내항에대한제한의강약이나제한대상도역시달랐다고볼수있다. 이에비하여한국의경우는고려말에처음에는해로를이용하던명에대한조공이육로로지정된이래해로를이용한대중국통교는완전히끊어지고말았으며, 육로를이용한통교도조공사절이이용하는것이외에는허락하지않았다. 이와같은사정은명청교체후에도변하지않았다는점에특징이있다. 일본과한국의관계도 15세기에는쓰시마뿐만아니라교토에도사절이파견되었지만이후는쓰시마까지였다. 에도시대에는빈번하지는않았지만정권중심지까지사절을파견했지만민간인에의한일본지역과의교역은절대로허락하지않았으며, 쓰시마에서초량왜관으로반입된상품이공무역내지는사무역으로거래되었다. 거꾸로일본에서보낸사절은전기에는 일본국왕사 뿐만아니라각종사절이한성까지상경했지만, 임진왜란후에는원칙적으로상경을허락하지않았고쓰시마에서부산까지였다. 또에도막부의장군이국서를보내도그것을전달하는 일본국왕사 는조선에보내지않는관계이며, 비대칭적인관계였다고할수있다. 요컨대한국의경우일본 중국어느쪽과도다르게공식사절이일본으로가는것이

148 12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외의해외도항은전부금지하는것으로시종일관했으며, 또한내항이인정되었던경우는류큐와일본에서오는사절뿐이었다. 또육로의경우전기에는여진과중국, 후기에는중국과통교할뿐이었으며, 타지역과의통교관계는같은시기의일본과중국에비하여상당히제한적인것이었다. 이와같은일 한 중국의대외관계에대한정책의차이는동아시아에있어서국제질서라는틀이먼저있고, 이틀에서설명할수있는것이아니며, 오히려각각의중앙권력과지방사회의이해와예측이교차하는속에서상대국의요구가자국에게국내적으로나대외관계상좋다고판단되면요구를받아들이지만, 그렇지않으면수용가능한범위에서타협하고, 때로는자기만의논리를주장하거나아니면거절하든지무시하는국제 국내관계속에서구축되고, 명시적또는암묵중에상호이해된관계가거듭축적된결과이다. 여기서한나라의역사와지역사내지글로벌히스토리는아무런모순도없는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외교는상호간에주고받는외교서한과의례에대하여쌍방의호칭이나문서의형식이중요한문제였다는것은주지의사실이지만, 그럴때존중되어야하는것이禮制였다. 후마스스무 ( 夫馬進 ) 은명청과조선간에발생했던외교사안 4건을사례로외교에있어서 禮 와, 그것을위배한벌로서의 問罪 의관계를논하고, 禮 의질서이기도한화이질서의실제에대하여언급하고있다. 외교에있어서 禮 와 問罪 사이에는국내법인律에서드러나는것처럼구체적이고명확한위반사례와여기에대응하는벌칙규정이없으며, 무엇이禮에어긋난것인지를결정하는것은중국측의자의에맡겨져있을뿐만아니라, 상대국 ( 즉조선 ) 이 수치스런 마음에서스스로이를깨달아야하며, 또한 책봉 을외교카드로이용함으로써원래는전혀별개인문제를 禮 와관계있는것으로바꿔치기하여조선에대한통제를가능하게했다는것이다. 그리고 明清중국의동아시아외교에있어서조선에대한외교야말로禮에의한통제가가장성공했던사례 이며, 동일한조공국, 책봉국이었던베트남에대해서조차禮에의한통제는거의성공하지못했다고평하고, 조선에대해서만기능했던이유를 조선스스로가적극적으로禮의내면화를추진했고, 明朝의책봉아래있으면서, 이로써明이주도하는禮에의한세계질서의형성에스스로참가할수있다는기쁨을음미하기에이르렀기때문 이며, 明朝가주변의책봉국, 그중에서도조선에대한외교에서사용된 禮 는그것이 問罪 와不卽不離하게기능함으로써 복종 의自発性을훌륭하게환기할수있었기때문 이라고논했다. 22) 이와는반대로, 中華를중심으로하는禮에의한세계질서를인

149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23 정하지않는 17~18 세기의일본에대해서는책봉이나禮를외교카드로쓸수없었고, 상 호의実利에기초하는관계가진행되었던것이며, 에도막부와조선왕조의관계역시禮 는외교의례의격식이라는차원을넘지않았다. Ⅴ.17~18 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의原像 통치영역으로사람이출입하는것을제한 관리하려는정책은명대의중국에기본형태가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명초의중국은엄격한해금정책을시행했다. 즉일반인민의자의적인해외도항을엄금하고, 동시에해외로부터외교사절이외의내항을받아들이지않기로했던것이다. 또한외교사절을파견하는자격도제한하여명황제로부터책봉을받은현지首長의조공사절만을원했다. 원래는별도로존재했던 海禁 과 冊封 朝貢 이하나가되었던것이다. 어째서명초에이와같은시스템을채택한것인지에대하여우에다마코토 ( 上田信 ) 는 명왕조의그랜드디자인 이라고부르면서다음과같이설명한다. 23) 명이전의元은은을축으로하여유라시아전역을포섭하는교역매카니즘을만들려고했으나이에필요한은이충분히공급되지못했다. 이때문에위구르상인과무슬림상인들은물자의유통과은의순환속도향상을꾀하고, 원은은과연결된鈔의발행으로은부족을보충하려고했다. 그러나은의절대량의부족에더하여기후의한랭화가발생하여교역매카니즘자체가붕괴되기시작했으며, 경제는혼란에빠졌다. 더군다나張士誠일행의반란세력이연해지역과대운하유역을점령했기때문에장강하류유역에서북부지역으로곡물을수송하는경제동맥이정지되고원의지배는사실상화북지역으로축소되고말았다. 마침내내륙에서흥기한반란세력의하나인朱元璋이張士誠을비롯한다른할거세력을물리치고, 이미중국지배의의욕을상실한원조정이大都를포기함으로써大都마저주원장의지배아래들어갔다. 그리고우에다의말에따르면, 원말의정치경제과정을경험했던주원장이만들려고했던제국은 화폐경제메커니즘의부조화를전제로하여디자인된 24) 것이라고한다. 22) 夫馬進 < 明清中国の対朝鮮外交における 禮 と 問罪 > 夫馬進編, 2007 中国東アジア外交交流史の研究 ( 京都大学学術出版会 ) 347~348 23) 上田信, 2005 海と帝國明清時代 ( 中國の歴史 09) ( 講談社 ) 66~73, 90~91

150 12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즉국내적으로는교역에서은을사용하지않고인민으로부터세금을징수하는것이아니라직접생산물과노동력을징발하며, 대외적으로는지배영역의외부로부터화폐경제가제국을침식하는것을우려하여외국과의교역을민간인에게위탁하지않고제국이직접관리하는방법을채택했다는것이다. 이것이구체적으로는 1371년에개시되는海禁이며, 方国珍의잔당과蘭秀山의난등원말명초의반란세력에가담했던자들, 즉해안가에거주하면서해운에종사하던자들을군에귀속시킴과동시에그들이바다로나가는것을일체금지했던것이다. 이와동시에그때까지민간교역으로동남아시아에서수입하고있던물자의조달수단으로적극적으로주변여러지역에조공을요구했다고한다. 또동남아시아여러지역의, 예를들면베트남남부의占城 ( 참파 ), 타이의아유타이왕국등은고려, 陳朝베트남의경우와는달리중국과직접접촉하고있던것은아니지만, 각각의국내사정에따라조공하는것이정권에유리한것으로판단하여 2년 1공, 3년 1공등의무역권을확보하고적극적으로조공사절을파견했던것이다. 25) 그결과그때까지널리동아시아 동남아시아해역에서항구도시국가에거점을두고무국적으로중계무역에종사하고있던무슬림상인들은동남아시아지역에서바다에면해있으면서도그배후지인내륙마저도영역적으로지배하는국가가조직했던조공사절단에참가하지않는한대명교역에서소외되어간다. 게다가이미보았듯이, 중국본토에거주하는무슬림상인들도명의해금정책을계기로동아시아 동남아시아해역에서분리되어어쩔수없이철수하고점차동화 흡수되어간다. 이것은 15세기의류큐가동남아시아와중국대륙 일본열도 한반도의중계무역으로번영을누렸던배경이기도하다. 그러나명의海禁도 16세기로들어설무렵에는福建과広東의중국밀무역상인들이禁制를어기고동남아시아로도항함으로써뿌리부터무너져간다. 1513년에는포르투갈인이중국에처음으로내항하여동남아시아 중국의밀무역에참가하였다. 이동남아시아 중국을연결하는밀무역의성행에더하여 1530년대부터는일본의은산출이급증하였고, 그은은조선을경유하여 26) 다시일본 중국의밀무역을통해서도수출되고, 포르 24) 上田信, 앞책 91 25) 上田信, 앞책 103~105 26) 中宗 38 년 (1543) 에완성, 시행된 大典後続録 刑典, 禁制에는赴京人, 즉北京으로가는사절단의수행원이은 철등을몰래반입하거나사적으로짐을위탁하고교역하는것을금지하는조항과, 倭銀의매입, 倭人과의밀무역을금지하는조항이새로추가되었다. 중국으로부터는고급견직물 약재등이수입된모양인데, 端川에서산출하는은뿐만아니라이무렵에대량으로들어오게된倭銀또한대중국무역에이용되었다는것을쉽게추측할수있다. 그리고함경도端川의

151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25 투갈인역시일본 중국무역에점점참여해간다. 1543년일본에와서鐵砲를전해주었던포르투갈인두명이중국밀무역상두목인王直 27) 의배에타고있었다는사실도최근에는널리알려지게되었다. 명의해금정책이계속되었음에도불구하고일본산은이라는새로운요소가동아시아해역의교역을급속히활성화시킴과동시에, 일본과중국에거점을둔중국상인을중심으로하는밀무역을급격히팽창시켰다. 한편, 일본의 10 년 1공을허락했던명에대한조공사절은 1547~1549년에파견된策彦周良일행을마지막으로단절되었으며, 조선과의교역은大内氏처럼특별히허가된경우를제외하면거의쓰시마가독점했을뿐만아니라, 일본으로부터일방통행적으로교역사절을파견하는형태가되어있었다. 그리고면포등을구입하려고대량으로흘러들어오기시작했던倭銀에대하여조선정부는그대책에고심하고있었다. 왜냐하면, 왜인들에게지급되는쌀 콩 목면등은상품으로서집하된것이아니라税貢으로징수된품목이며, 왜인들의요구가증대했다고해서손쉽게공급량을늘릴수있는것은아니었기때문이다. 결국 16세기중반의일본은수출상품이되는은을가지고있으면서도수출창구와수단이극단적으로제한되어있었던셈이다. 그와같이모순된상황을배경으로많은일본인들이중국인밀무역상집단에가담했고, 이를단속하려는명의관헌과투쟁했으며, 주로중국연안을, 일부는조선연안을습격하기도했던것이후기왜구이다. 또한급속하게상품경제가성장하고, 재정에있어서은의사용이확대되어가고있던명에게도은은어차피필요한물자이며, 바다를사이에두고수요와공급이존재하면서도껍질만남은海禁의벽이그것을짓누르고있는상태였다. 이후기왜구에대하여명은무력에의한진압뿐만아니라, 1567년에는일본을제외한동남아시아각지로의중국선도항및교역금지를해제하고, 동남아시아선박이福建의漳州로입항하는것을인정했다. 이것은조공과이에수반하는공사무역만이무역수단이었던지금까지의해금정책을크게바꾸는것이었다. 책봉 조공관계에구속되지않는교역을互市시스템이라고부른다. 일본과중국의직접교역은인정되지않았지만, 동남아시아각지에서일본선박과중국선박이교역하는것까지도금지할수는없었으며, 일본 銀은燕山君때발견되어채굴이개시된듯하며 ( 燕山君日記 燕山君 10 년윤 4 월을축조, 1504 년 ), 中宗 3 년 (1508) 에는 端川郡多産銀, 郡民竊取, 転売通事, 通事以此多賚赴京 ( 中宗実録 中宗 3 년 11 월경자조 ) 이라고하여사절단의역관들이銀을반출하여중국산물품구입에충당했음을알수있다. 27) 王直은이미포르투갈인의표착에앞서 1541 년에히라도에내항했고, 領主인마쓰라다카노부 ( 松浦隆信 ) 의환영을받으며거점을마련했다. 上田, 앞책 249~250

152 12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으로가는직접도항도완전히끊어진것은아니었다. 또한 1557년부터마카오거주를허락받은포르투갈인들은일본산은과중국생사의교역을중요한수입원으로삼았다. 17~18세기의한일관계를생각하는한편, 그전제가되는 16세기후반의상황은다음과같은것이었다. 한편에서는중국황제를정점으로하는책봉관계질서가존재하고, 그외교관계에기초하여사절왕래에수반하는교역이존재하였다. 한일관계는국왕상호간의통신이라는관계만이아니라, 상호의교린이라는틀안에서마치황제가국왕들에대하여정기적인조공과교역을허가하는것처럼쓰시마를비롯하여서일본각지에서조선으로파견하는사절과교역을개별적으로허가하는형식이었다. 그러나다른한편에서는조공이라는외교관계에구속받지않는민간교역역시일본 중국 동남아시아해역을연결하며 16세기후반에출현했던것이다. 이루트는胡椒등의향신료와蘇木등의염료를비롯한동남아시아산상품, 생사와견직물, 도자기등중국산상품, 아울러서일본산은이라는각지의상품을취급하는해상교역루트였기때문에, 바다로의진출이엄금되었고더욱이육상교통만으로중국과연결되어있던한반도를당장에끌어들인것은아니었다. 그러나일본산은의증산이전인 16세기초이미端川에서은광이발견되었던조선에서는중국산견직물을비롯한사치품과약품수입의대가인은에대한욕구가높았으며, 여기에 1530년대부터는대마도를경유하여새롭게일본산은이추가적으로유입되기시작했던것이다. 28) 요컨대중국인 일본인밀무역상에의한해상루트와병행하여, 한반도를거쳐서한중일을연결하는육상루트역시조금앞서서열려있었던것이다. 한반도는해상루트의주인공이기도한후기왜구의습격에시달리기도했으므로전혀무관했던것은아니다. 반대로일본의입장에서보자면, 대중국무역루트가해상루트와쓰시마 한반도를경유하는육상루트의 2개가형성되었던셈이된다. 그러나조선왕조의기본방침은이처럼비등해가는동아시아해역의움직임을무시하고굳이관계를맺지않으려고하는것이었다. 원에게복속된이래밖으로부터의, 그리고위로부터의상업화에노출되었고, 대토지를지배하며대외교역에참가할수있는한줌의사람들에게는유리해도, 그부담이대다수의생산자를무겁게짓누르고있는사태에비판적인사람들이세웠던신왕조가조선왕조였다. 그리고앞에서말한 명왕조의그랜드디자인 과마찬가지로자유로운상업활동을부정하고, 利權在上 이라는개념이상징하는바의현물과노동력징수로신왕조의재정 경제시스템이구축 29) 되어있었던 28) 조선에서의은산출에관해서는주 25 참조. 29) 須川英徳, < 朝鮮初期の經濟構想 > 東洋史硏究 58-4

153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27 것이다. 상업적인부에대하여도근본인농업을버리는것으로보고부정적인감각이침투해있었다. 물론상업에대하여부정적인감각뿐만아니라, 국내적으로는 1470년대에남부에출현하기시작한지방시장을둘러싸고, 상업은무턱대고부정해야하는것이아니며백성이有無相通하는방도로서근본인농업을돕는행위로보는견해 ( 以末補本 論 ) 도 16세기에접어들무렵부터출현했다. 30) 그러나대외교역에서는왕실과국가기관이필요로하는고급사치품과약재등의물자는중국에파견된외교사절단을통해서입수하고, 왜인이원하는쌀 콩 목면등의물자는조세와공물로징수한것을국가에서왜인에게지급하는조선왕조의대외교역의기본시스템까지변화했던것은아니었다. Ⅵ. 17 세기일본을둘러싼대외관계재편속에서의한일관계 히데요시의죽음으로일본군은한반도에서완전히철수했지만그것은전투가끝났을뿐이며, 일본과조선, 명사이에즉시평화가찾아온것을의미하는것은아니다. 일본과조선, 명사이의평화회복은도쿠가와이에야스 ( 徳川家康 ) 에의한신정권의과제로남겨졌다. 그문제를언급하기전에갓출발한도쿠가와정권이대외관계에관하여어떠한기본방침을가졌는지보기로하자. 도쿠가와의기본방침은동남아시아와의교역과유럽인의내항에대하여이를환영하고확대하려는방침을취하고있었다. 포르투갈에이어서새로입항한에스파니아, 네덜란드, 영국도역시내항과교역을허락하였다. 기독교 ( 카톨릭 ) 에대하여히데요시는 1587 년에선교사추방을명했지만, 중국산생사 견직물등을가지고들어와있던포르투갈인과의무역을포기할수없는사정때문에완화하였고, 교회당재건, 포교묵인으로방침을바꾸고있었다. 에도막부도그런방침을계승했지만, 기독교금지방침을드러낸것은 1612년부터이다. 31) 그러나외국선박의내항과일본인의해외도항, 그리고도항한일본인의해외거주와귀국이허락되는상황에서는마닐라를거점으로하는선교사의입국과포교를위한서적류의반입도용이했으며, 완전한禁敎는어려웠다. 일본인의해외도항에 30) 박평식, 1999 조선전기상업사연구 ( 지식산업사 ) 제 5 장 31) 1612 년에교토의교회당을파괴하고, 1614 년에는저명한일본인신자와선교사들을추방했다. 가장활발하게활동하고있던것은예수회였는데, 추방이후의잠입선교사는에스파냐의지원으로마닐라에거점을갖고있던프란시스코회였다. 森克己 沼田次郎편, 1978 対外関係史 ( 体系日本史叢書 5) ( 山川出版社 ) 135~139

154 12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대해서도히데요시정권과마찬가지로朱印状에의한허가제를계속하였다. 이가운데 1614년히라도에동인도회사상관을열었던영국인은중국과직접무역에참가할수없었고, 일본에서무엇보다수요가컸던중국산생사를충분히확보하지못했으며, 거래를확대하지못한채 1623년에일본을떠났다. 마닐라에거점을둔에스파냐인은대일무역에열중하지는않았으며, 오히려朱印船이마닐라에서중국선박이가져오는생사를사모으기위하여, 멕시코무역에방해가되고, 더욱이선교사잠입의근거지이기도했으므로 1624년필리핀총독이파견했던사절이접수를거절당하고국교는단절되었다. 32) 이에비하여네덜란드인은 1600년에처음도착했지만, 그것이즉시계속적인무역의개시를의미한것은아니며, 1609년히라도에상관을개설하고부터계속적인무역이개시된다. 네덜란드인은몰루카등동남아시아산향신료와인도산면포의교역에추가하여 1624년에는타이완에근거지를확보함으로써중국산생사 견직물과일본산은 구리무역을조직하고, 동아시아와동남아시아물품의중계무역으로큰이익을얻었다. 33) 요컨대이미본바와같이 16세기중반부터주요거래상품인중국산생사 34) 견직물, 일본산은, 동남아시아의향신료, 게다가인도산면포등아시아각지의상품을상대국의수요에부응하여산지국에서확보하고, 그것을중계무역하는네트워크를구축할수있었는지여부가중요했다. 여전히중국으로의직접도항이인정되지않았던일본의朱印船이베트남, 타이, 필리핀등의동남아시아각지에서거래했던것도그와같은상품이었고, 일본선박이도항하는동남아시아각지에는일본인들이거주하는일본인마을 ( 日本町 ) 이들어섰다. 그러나해외로도항했던것은상거래를목적으로하는사람들과선원뿐만아니라, 전란의종결과함께일터와갈곳을잃어버린병사출신들도많았으며, 柬埔寨 ( 캄보디아 ), 마닐라등지에서오는외교문서에는일본인의난폭과소동을호소하는것도있다. 수입생사에대해서는 1604년부터포르투갈선박이들여온중국산생사에대하여교토 나가사키 사카이 ( 堺 ) 의유력상인들에게구입단체를결성토록하고, 그대표 ( 이토왓푸도시요리 ; 糸割符年寄 ) 와포르투갈인사이에구입가격을교섭시켜서가격의일원화를 32) 森克己 沼田次郎편, 앞책 ) 森克己 沼田次郎편, 앞책 142~144 34) 네덜란드인은중국과의직접거래가불가능했기때문에당초에는타이완에서입수한중국산생사를일본으로들여왔지만, 데지마로옮긴무렵부터는베트남산, 벵갈산生絲를일본으로들여왔다. 또 18 세기에는생사가제 1 위의상품이아니었으며, 그대신인도산목면과비단등의직물무역, 자바산사탕이중요한상품이되었다. 森克己 沼田次郎편, 앞책 162~163

155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29 꾀하는방식을도입했다. 이가격에납득할수없으면재고를남기는것도가능했지만, 구입하는쪽이조직되어있었으므로결국은이가격에매각하게되었다. 이것은구입가격의인하와그때까지공인되어있던예수회선교사의무역개입을배제하려는목적이었다고한다. 이구입방식은중국산견직물과縫糸, 비중국산생사, 중국선박과네덜란드선박이가져오는생사, 견직물에도확대되어간다. 35) 어찌됐든동남아시아와의교역과유럽선박의내항에관해서는통교자체가문제로되는것이아니라, 그에수반하여발생하는기독교의유입과세력확대가점차로문제시된다는점, 수입품중중요품목인생사의수입가격상승방지대책이마련되게되었다는두가지를지적해둔다. 그러나조선및명과의관계회복은평탄하지않았다. 이문제에대해서는아라노야스노리 ( 荒野泰典 ) 가일본쪽의사정을다음과같이정리하고있다. 36) 도쿠가와는 1599년五大老의筆頭로서소요시토시 ( 宗義智 ) 와그의가신야나가와시게노부 ( 柳川調信 ) 에게조선과의강화교섭을명했는데, 그때도쿠가와는강화교섭이결렬될경우에재출병도불사한다는강경자세를보였다는점, 그리고피로인송환에는협력하지만이에야스쪽에서먼저국서를보내려고하지는않았다는점을지적하고, 실상은참패였지만그들은패배를인정하지않으려했기때문이라고했다. 그이유로서아라노는 그들군사정권의담당자에게있어서는武威야말로지배를정당화하는근본이며, 전쟁에서의패배를시인하는것은자신의지배의정당성이뿌리부터흔들리는것을의미하였기때문 37) 이라고설명한다. 조선과의평화회복교섭과그교섭의이면에서쓰시마가행했던이에야스의국서위조와그것과짝을맞추기위한국서개찬등에관해서는다시로가즈이 ( 田代和生 ) 의뛰어난연구 38) 가있으므로여기서는언급하지않겠다. 쓰시마에게있어서무역의재개는사활문제이며, 더욱이조선쪽에도급속하게힘을뻗쳐왔던만주족에대한경계심과, 일본이끌고간피로인의조기귀국등의사정때문에, 이에야스의국서와犯陵賊의진위등에의문을품는목소리도있었지만, 1607년일본에회답겸쇄환사를파견하고국교를회복시켰다. 쓰시마에대하여도 1609년에己酉約条를체결하고, 쓰시마에서파견하는사절 35) 森克己 沼田次郎편, 앞책 133~135 36) 荒野泰典, 1988 近世日本と東アジア ( 東京大学出版会 ) 제 1 장大君外交体制の成立. 본장은 1981 講座日本近世史 2 ( 有斐閣 ) 에서처음출판된것. 37) 森克己 沼田次郎편, 앞책 ) 田代和生, 1983 書き替えられた国書 ( 中公新書 )

156 13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선박에관한규정을전했다. 그러나이에앞서명과의통교를목적으로 仮道路, 修貢大明 하겠다는희망은받아들여지지않았다. 명과의관계에대하여이에야스는조선을통해서, 아니면류큐를통해서국교회복과무역재개의방도를구했지만모두원하는결과를얻을수없었다. 그래서이에야스의허가를얻어서감행된시마즈 ( 島津氏 ) 의류큐정복 (1609) 이일단락된 1610년말에측근인혼다마사즈미 ( 本多正純 ) 에게명하여명의복건총독앞으로보내는서한을중국상인周性如에게위탁하여보내게하고, 일본에서명으로무역선을파견하는허가증인勘合符의발행을원했다. 이미 1608년에는 唐船 이시마즈령에기항하고있었으며, 1910년에는일본에왔던명나라사람이이에야스의알현을허락받은일도있었다. 외교상으로는일본과명사이에정식으로평화회복절차가취해진것이아니었으며, 명에서일본으로의도항금지가해제된것도아니었다. 그러나이를테면점진적인해결책으로명선박이일본에내항하게된것을알수있다. 그와같은사정을배경으로명과의직접무역재개를희망하는서신이이에야스의지시로발송되었던것이다. 복건총독앞으로보낸이서신에대한명의회답은없으며, 중국측에는이서한이남아있지않다. 39) 그러나중국선박의내항이점차로증가하여네덜란드인의기록에의하면 1631년에는 70~80척이었다고한다. 40) 1610년에는중국선박의내항이나가사키로제한되었지만, 1616년에는사쓰마기항도다시허가되었다. 41) 그러나 1635년에는역시나가사키로입항이제한되었고, 이후이것이계속된다. 이에야스는명과의직접무역재개를희망했지만, 결국명과국교를갖지않고내항한중국선박과의무역만행하기로했던것이다. 명과의국교회복과무역재개의단념에관하여, 로널드토비는 2대장군히데타다 ( 秀忠 ) 가명중심의국제시스템에참가하는것은막부의정당화를방해하는것으로서, 명과의국교회복 감합무역을, 명으로부터의타진을각하시키면서까지단념했다 고설명하고있다. 또이와같은대명외교는대조선외교에서야나가와사건이해결된뒤에장군의외교상호칭을 日本國大君 으로정하고, 대조선외교문서에일본연호를명기하는것으 39) Ronard. P. Toby, 2008 鎖国 という外交 ( 日本の歴史 9) ( 小学館 ) 45~46 40) 山脇悌二郎, 1964 長崎の唐人貿易 ( 吉川弘文館 ) 8~9 41) 사쓰마로의來航은중국상인의출항지와의관계를생각할수있다. 즉복건 타이완등중국남부지역에서출항한경우는오키나와제도를따라항해하여규슈 ( 九州 ) 남부에도착하고, 寧波등중부지역에서출항한경우는대양을횡단하여규슈북부로직행했음이예상된다. 중세의중일통교에관한연구이지만, 橋本雄, 2007 < 中世の国際交易と博多 > 前近代の日本列島と朝鮮半島 ( 山川出版社 ) 가 14 세기후반부터 15 세기의南島路와大洋路의구분사용을고찰하고있으며, 참고가된다.

157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31 로 동아시아의국제공간을형성해갔던중국형세계질서로부터의이탈을꾀했던 것과마찬가지로 일본형화이의식 이 대군외교 의기본구상이었다고한다. 42) 로널드토비만이아니라, 1635년부터대조선외교문서에서일본연호를사용한것과 대군 칭호를사용한것에대하여, 중국을중심으로하는동아시아국제질서에서의이탈과네덜란드 류큐 조선을일본의하위에두는일본형화이의식의성립을아울러서논의하는것이지만, 43) 이에대하여이케우치빈 ( 池内敏 ) 은 17세기전반기에왕래했던安南国, 暹邏国 ( 시암 ), 柬埔寨 ( 캄보디아 ) 와의외교문서를검토하고, 干支와나란히베트남과타이의독자적인연호가사용되고있으며, 국왕 칭호를포함하여다양한칭호를사용하고있었다는점에서 상호간에 국왕 칭호로행하는외교가適禮라고하는관념보다도민족적자각 ( 중국으로부터의자립의식 ) 을간직한여러민족이각기스스로의호칭과연호 國字를쓰면서행하는통교를적례로하는관념을읽을수있다 44) 고평했다. 더욱이 1715년부터시행된正徳新令에따라중국인상인에게내항허가증으로발급하게된信牌에일본연호가적혀있는점 45) 이청조에서문제가되고, 그전말을중국상인이일본측에전한기록에, 중국측의논의로서외국연호를사용하는것이외국을따르는것이라는당시의상식과, 그럼에도불구하고외국에는각기다른연호가있는법이므로외국에서보내는문서에그나라연호가있어도어떤의미에서는당연한일이라는견해가있었다고소개되었다. 그러나이사건에관해서마쓰우라아키라 ( 松浦章 ) 가검토한청조측의사료는약간다른사정을전하고있다. 청조에서는信牌의수수를둘러싸고관청에대하여소송이발생하고, 浙江海関에신패를보관해버렸으며, 중국의승인이나가사키에서무역불가능한사태가발생하고, 그때문에鑄錢재료인구리의수입이정지된것이문제가되었다. 그것이일본연호가적힌信牌의수수를둘러싼무역단절에기인한다는것은명백하며, 관료들의논의에서는연호문제에추가하여중국측에서발행한도항허가서만으로충분하지않았다는것인지여부가문제되었다. 이에대하여강희제의판단은신패에적힌 42) Ronard. P. Toby, 앞책 104~105 43) 藤井譲治, 1994 < 一七世紀の日本 > 岩波講座日本通史 12 ( 岩波書店 ) 44) 池内敏, 2006 大君外交と 武威 ( 名古屋大学出版会 ) 62~67 45) 이시기의외교는유학자인아라이하쿠세키 ( 新井白石 ) 에의하여그때까지의관례가여러가지로변경되었다. 예를들면조선과의국서에사용하는將軍이란칭호를日本国王으로, 류큐国司를中山王으로고쳤다. 무엇보다도将軍에게쓰던천황과동격이란문자를천황보다낮추고三公諸王보다위로정하는등개정했으나, 8 대장군요시무네 ( 吉宗 ) 가원래대로되돌렸다. 紙屋敦之, 1997 大君外交と東アジア ( 吉川弘文館 ) 제 1 부제 2 장, 48~50

158 13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일본연호는상인이사용하는부호같은것이므로문제시할필요가없고, 중국측의허 가서라고해도예부가발행하는것과같은외교문서정도는아니다, 그러니까그런일을 문제삼으면상인들은무역을할수없게되므로문제삼지말라는것이었다. 46) 즉일본 연호에대하여그것을연호로간주하지않고상인이사용하는기호와유사한것으로취급함으로써중화질서에는저촉되지않도록문제를회피시켰던것이다. 아울러서이케우치는 명조중국을중심으로한국제질서가붕괴하고, 청조중국을중심으로하는새로운국제질서가정착되기까지의사이에동아시아세계에는다양한변동이계속되었고, 주변제국의입장에서는그러한변동속에서자신을새로운세계의어느곳에다시자리매김을해야할지모색이이어졌다. 여기에는종전의관행인 국왕 상호간의외교야말로敵禮로보는견해외에, 민족적자각에근거하여스스로의외교칭호 연호 国字를사용하면서적례외교를모색하고있다. 이러한정세하에서 왕 이란글자는일개지방권력을지칭하는용어로서의미를가지기때문에기피되었다 47) 고결론지었다. 大君 칭호의채택과일본연호의사용은중국중심의국제질서와는일정한거리를둔외교자세의표현이지만, 외교브레인이었던禪僧들이公家外交이래의대중국대등의식과중국황제를중심으로주변국왕의위치를정하는국제관행의존재를전제로하여, 무로마치시대에조선으로보내는국서에과감히 왕 자를적지않고 일본국源某 라고쓴것과는다르다고했다 ( 거꾸로조선에서보낸국서에는 일본국왕전하 라고명기되어있다 ). 이시기의 大君 칭호채용을가지고조선을하위에두는의식의표현으로보는것은문서에서의용법 서식상 대군 이조선측보다우위라고할만한형식을취하지않았으므로곤란하며, 대등한위치에서의관계를지향했던것으로보는것이적당하다고평했다. 더욱이 대군 칭호는 大樹源君 의약칭으로서, 막부의로주 ( 老 中 ) 들이고른것이라고추정하고, 대군 칭호에의한외교는주종제에뿌리를둔武家外交의색채를띤것이라고했다. 이케우치의 민족적자각 이라는표현에는의문이있지만,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불교상의天竺이라는전통적세계상과는다른, 각양각색의국가, 다양한인종과언어 문화의존재를외교의장에서체감해갔던막부당국자들에게예전의명이요구했을만한화이질서를전제로하는책봉관계와외교관계는크게상대화되어있다고보아도좋을것이다. 48) 46) 松浦章, 2007 江戸時代唐船による日中文化交流 ( 思文閣 ) 111~117 47) 松浦章, 위책 71 48) 상술한것처럼대외관계의입장에서설명하는것에대하여, 1615 년에막부가정한 禁中並公家諸法度 를계기로무가정권의수장으로서명백히책봉된일본국왕과전통적인일본국왕 = 천황이라

159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33 칭호를둘러싼논의는여기까지하고싶다. 의식속에서일본의외교당사자에게조선을낮게보는감각이존재했다하더라도, 거꾸로조선측당사자에게도일본을깔보는의식이존재했다하더라도, 실제의외교나서식에서는막부장군과조선국왕을대등하게, 국서교환을포함하여양국이대등한외교를행하고있었다는점, 또한편에서외교형식상으로대등한관계를구축하기어렵다고볼수있는중국과의사이에는책봉을비롯하여국서교환을포함한정식외교관계의수립과이를전제로한일본의무역선파견은결국포기했다는점, 그리고중국선박내항에의한무역뿐인관계가선택된점을확인했다면충분할것이다. 또그와같은일본의대응에대하여, 중국측역시信牌에일본연호를기입한문제를둘러싼대응에서엿볼수있듯이대일무역의필요성과의관계에서굳이문제화시키지않는방향으로대응했다는점에도유의해야할것이다. Ⅶ. 17~18 세기동아시아에서의朝日무역 중국에일본의무역선파견이불가능했던점, 그리고기독교금지를보다철저하게할목적에서 49) 1635년에일본인의해외도항과귀국을전면적으로금지하고, 더욱이 1639년에포르투갈선의내항을금지한이후일본의해외무역은중국선박과네덜란드선박 (1641년에네덜란드상관을히라도에서나가사키의데지마로이전 ), 그리고쓰시마의대조선무역으로거의제한되었다. 여기에서거의라는것은류큐를경유하는대중국무역과아이누와의교역이있기때문이지만, 논의의편의상여기에서는언급하지않겠다. 그러나이와같은일본의대외무역창구의제한은 17세기쓰시마의조선무역의성격을크게변화시켰다. 그것은중세의조일무역에서는쓰시마가살아가는데필요한식료와새로운옷감인목면수입이주축이었지만, 근세무역에서는생사와은무역이주축이되고, 그것이쓰시마의대조선무역에도영향을주었다. 는두개의계보가일체화되어, 천황과장군을함께의미하는일본국왕으로의미를새롭게부여했다고보는견해도있다. 紙屋敦之, 大君外交と東アジア 제 1 부제 2 장. 大君 칭호의채택과함께琉球国中山王은시마즈씨에의하여왕보다격하된칭호인 琉球国司 에임명되었다. 49) 山本博文, 1995 鎖国と海禁の時代 ( 校倉書房 ) 에서는무역통제라는이유를명확히부정하고, 시마바라의난 ( 島原の乱 ) 진압에이은포르투갈인추방 (1639 년 ), 무역재개를희망하는사신의처형 (1640 年 ) 과그에대한보복조치를예상한외국선경비체제와海防을위한国絵図작성등을일련의 鎖国 을향한과정으로설명하고있다 ( 同書, Ⅰ 鎖国令 이란무엇인가 ).

160 13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쓰시마 조선무역 50) 은 15세기이래의례적인물품증답인 進上, 回賜, 그리고公營의무역인 公貿易, 특정의허가를받은사람들이행하는사영의 私貿易 으로나뉘며근세에도마찬가지였다. 쓰시마의進上은후추, 명반, 단목등동남아시아산물품이포함되었고, 15세기에는동남아시아산물품이 80~90퍼센트를차지했다고한다. 이러한물품은류큐를경유, 나중에는나가사키경유로입수된상품이다. 그외에 17세기초의물품에는칠이나금속을이용한상자, 거울, 병풍등일본산공예품이들어오게되었지만, 이에대한조선의回賜는인삼, 호피, 虎肉, 개, 명주, 모시, 마, 밤, 대추등동식물에서부터직물, 일용품에이르기까지多種多用인동시에모두조선국내에서조달된것이었고변화하지않았다. 공무역에서는구리, 주석, 단목, 水牛角등조선에서산출되지않는국가기관의필수품을公木 ( 木棉 ) 을대가로하여공정가격으로수매하는방식이며, 그후일본의상품이구리와은으로대체되거나公木이쌀로대체되었다. 이러한무역에비하여사무역에는정품 정액제가없고, 가격이나분량은한달에 6번개최되는開市에서, 참가를허가받은자들에의해부산의왜관에서행해진교역이다. 17 세기초에어떤상품이거래되었는지는불분명하다. 단편적인기록에서각종직물이거래된것같지만, 조선측의기록에서는京商으로하여금青布, 絲, 紬, 氈등을왜관에보내주어야한다는의견, 혹은京商이동래에가려고하지않았기때문에각관청이가지고있는중국산물품을모두동래로보내야한다는지시등이있으며, 사무역거래에서도일본측은중국산생사, 견직물등을요구했던것같다. 51) 그러나 17세기전반에는 50) 쓰시마 조선무역에관해서는田代和生, 1981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研究 ( 創文社 ) 에의함. 51) 중국산생사 견직물을조선측이어떻게입수했을까? 기본적으로는清으로가는정기사행에수행원으로상인들이따라가며, 그들이입수한것으로볼수있는데, 구체적으로어떤경로로東萊의倭銀이北京으로흘러들어갔는지, 현시점에서는추적할수없다. 요컨대대마도가생사를입수할수있었던한국내의루트가해명되지않은것이다. 銀의유통은동래상인의사무역에따른것이었는데, 사무역이라고해도사인이마음대로참가할수있는것은아니다. 동래상인의실태는동래부역관과군교, 邑吏들이며, 관료조직의말단을구성하는사람들이었다. 그들은일본이요구하는상품의조달과정에서한성의貢人契및市廛과연결을갖고있었으며, 유입된倭銀이직접시중에방출되는것이아니라대개절반은관청의공적인구매자금으로관리, 운영되고, 일부가물자조달등으로시중에방출되며, 17 세기후반에는그방출부분이秤量貨幣로사용되고있었다고추측할수있다. 예를들어서国用綿紬를납입하고있던綿紬廛은중국에서생사를입수하여이를이용해서견직물을직조하고, 이것을중국에보내는進献用方物로서済用監에납입하는일을 18 세기말까지행했음을확인할수있는데 ( 万機要覧 財用編 5, 方物各種措備, 綿紬, 各色綿紬, 前以白絲貿来織造矣, 正宗乙卯 (1795) 以我国絲所織綿紬 ), 倭銀유입이정지된 18 세기말의시점에서국산생사로변경했다. 그들역시어떤형태로든倭銀의분배와유통에관여했다는것은확실하며, 20 세기초의시점에서도廛의공유재산으

161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35 만주족의발흥과함께불안정화하고, 명과후금의전쟁터로변해가고있던遼東의정세때문에중국과의육로교역이폐쇄되었고, 그결과쓰시마가기대할정도의중국산물자가동래로들어오지않았던것이다. 중국산생사와일본산은의대량거래가가능했던것은명청교체후인 17세기후반이었다. 52) 이러한조일간의주요거래품목의변화는일본에서본조일무역이 16세기까지조선상품인면포나쌀등을요구하는무역에서중국산생사를요구하는중계무역으로변화한것을의미하는것이며, 중일무역의성쇠와조일무역의성쇠가밀접한관계를가지게된것을의미하고있다. 淸은동남연안에거점을갖고해외무역을경제기반으로하는반청세력정씨집단의경제기반을빼앗으려는목적으로 1656년에海禁令, 1661년에는遷界令을내려복건, 광동등의주민과정씨세력의제휴를차단하려고했다. 이해금과천계령이폐지되고해외도항이합법화된것이정씨항복이후인 1684년이지만, 그것과아울러에도막부는예상되는중국선내항의격증에대응하여일본으로來航하는선박수를 70척, 무역액은 1 년간 6000 貫정도로제한하고, 생사에대해서도한때폐지되었던이토왓푸 ( 糸割符 ) 상인을부흥시켰다 ( 貞享令 ). 53) 이것은은수출을억제함과동시에경쟁입찰로결정되어있던수입가격의상승이국내물가를상승시키는것을방지하기위함이었다. 그때까지중국에대한은수출은 1648년부터 1672년까지 25년간의연평균수출액이 7757 貫 988 匁이고, 1673년에서 1684년까지 12년간의연평균수출액은 5952 貫 044 匁이었다. 청의해금이나천계령에도불구하고타이완에근거지를둔정씨세력뿐만아니라, 정씨세력권밖인복건등지의왕이보낸선박도來航하여대일무역은계속되었다. 그러나, 거꾸로천계령이폐지된후막부의은수출제한으로인하여 1685년에서 1697년까지 13년간은연평균 228 貫 699 匁으로까지격감했다. 54) 중국제수입품은 17세기후반부터은을대신하여구리가鑄錢재료로서대량으로수요되기에이르렀으며, 1696년에는 694만근에달 로서倭銀을보유했다는것을알수있다. 52) 生糸와교환되는은의흐름에대하여, 李哲成, 2000 朝鮮後期対清貿易史研究 ( 国学資料院 ) 에서는 17 세기후반조선에서북경으로가는역관들이官銀을대출받고, 이것을중국에서生糸로바꾸며, 이生糸를倭館에판매하고銀을입수하여官銀을상환한다 (65 쪽 ) 고서술했다. 큰줄거리는대체로그와같다고생각되지만, 상도중에한성상인, 동래상인이어떻게관여하는지, 또는어떻게시중에은이유출되는지, 원금이되는官銀의축적과정은어떠한지등등구체적인과정은그다지명확하지않다. 앞으로의연구과제일것이다. 53) 나가사키무역과貞享令을비롯한에도막부의대중국무역정책에관해서는山脇悌二郎, 1964 長崎の唐人貿易 ( 吉川弘文館 ) 에의함. 54) 이상의은수출에관한숫자는앞의 対外関係史 171 에의함.

162 13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했다. 이에대하여중국국내에서의구리채굴은 1727년에雲南에서연간삼백수십만근이채굴되었지만그래도필요한동전재료는부족했으며 18세기의주요한수입품은구리였다. 55) 이에비하여 1684년부터 1710년까지쓰시마의조선에대한연평균은수출액은 1685 관남짓이었고, 56) 17세기말에서 18세기에는일본의주요한은수출경로가막부직할지이며제한이엄격한나가사키에서쓰시마경유로변화한것을알수있다. 또한이시기에는중국산생사의수입에있어서도 1688년에는중국, 네덜란드선박의합계가 99,860근인것에비하여, 쓰시마의수입은 102,119근이며나가사키를상회하고있었다. 가격면에서도일단조선을경유하면서도쓰시마번이직접교토시장에수송 매각하기때문에중국으로부터직접나가사키로들어오는생사가이토왓푸상인, 나가사키本상인, 각번의상인의손을거쳐서교토로들어오는것보다오히려염가였다고한다. 다시로가즈이 ( 田代和生 ) 에따르면, 100근당나가사키의이토왓푸상인의구입가격이 1688 년에은으로 2 貫 728 匁인것에비하여, 쓰시마의수입가격은 2 貫 496 匁, 1711년에 5개지역糸割符 4 貫 030 匁에대하여쓰시마 3 貫 610 匁이었다. 57) 요컨대 17세기의조일무역은나가사키에서中日의생사 은무역의성쇠와밀접하게관계되어있으며, 일본과중국의중계무역이라는성격도가지고있었다. 여기서 17~18세기의일본이모방 도입해야하는선진문물은무엇이었을까를잠시생각해보고자한다. 국가형성기의일본열도에대하여한반도의백제, 그리고고구려는선진문물의제공원임과동시에선진제도의국가였다. 율령국가체제의형성에통일신라 55) 이상의구리무역에관한숫자는앞의 対外関係史 173~174 쪽에의함. 56) 田代和生, 앞책 ) 田代和生, 앞책, 283. 다시로는언급하지않았지만, 이시기의이토왓푸상인의구입가격은일본국내의물가대책으로 납입금 이라고부르는일종의관세가포함된가격이며, 예를들어서緞子 ( 돋을무늬로짠비단 ) 1 本이교토에서 360 匁인경우, 나가사키부교 ( 長崎奉行 ) 가원가를 100 匁 (1 匁 =3.75g, 이것이중국상인에게사는구입가격 ) 이라고판정했다면 24 할의납입금을내고, 입찰상인에게 340 匁에매각하는것이며, 입찰과열에따른가격상승을억제하고, 또한수입가격을억제할수있다고한다. 이차액 240 匁이나가사키町人에대한분배금, 나가사키会所의운전자금을비롯하여구리무역의운전자금등으로사용되었다. 그리고 1712 년의正徳新令부터는생사에대한납입금이폐지되고, 막부에대한運上金도폐지되었다. 다른물품에대해서는옷감 7 할, 薬種 10 할등평균 9 할 7 푼 5 리를唐船貨物에서징수하고있었다. 山脇, 앞책 55~61, 149~150.. 쓰시마에서들어오는생사가나가사키의생사보다약간염가였던것은수송비용과상인의이익분배의결과뿐만아니라, 이처럼나가사키에서수입품의가격이형성되는상황과도관련이있다. 쓰시마번은교토부근에서의시장가격과나가사키에서의구매가격을정보로서입수하고, 이를바탕으로조선측과가격을교섭했던것으로생각된다.

163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37 로부터들여오는지식이불가결이었던것은말할것도없다. 그러나동아시아에있어서중심적인문명국가였던중국과의직접통교가확대됨과동시에일본의위정자에게한반도국가의문화적, 정치적중요성은후퇴해갔다. 중국과의관계는일본과송, 일본과원, 일본과명의교역기간을통하여 唐物 에대한동경과그것을소유하고누릴수있는것이직접특권적인지위를증명하는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후반에는유럽인과의접촉을통하여중국과는다른문화의존재를앎과동시에신기한유럽산물건에눈길을빼앗긴것도사실이다. 또한지금까지알려진적이없던류큐보다더남쪽의해역세계, 필리핀, 베트남등에대한정보는비약적으로확대되었을것이다. 무력으로일본통일을달성한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중국은더이상무력으로정복해야할문명의대국으로보이지는않았을것이다. 에도시대로들어와서책봉을전제로하는중국과일본의국교회복은이미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고도로발달한중국산수공업제품, 서적에대한수요는여전히뿌리깊은것이었다. 그러나수공업생산과농업생산기술은 17~18세기의일본에서급속히향상되고, 수입에의존하였던생사나설탕등도점차국산화되어갔다. 한편나가사키를네덜란드에대한창구로열고있던일본에서기독교에관한내용은엄격하게금지되고있었지만, 18세기에는한역본의수입, 더욱이네덜란드어원본의수입이허용됨에따라실용적인의학과本草學을시작으로수입과번역의학문인蘭學이생겨나고, 게다가 19세기에는지리서와군사학서적등까지수입 번역하게되었으며, 유럽의여러국가들이동남아시아를식민지로만들었다는정보도입수하였다. 18세기말이후일본지식인의눈으로본문명의중심은중국에서유럽으로위치를바꾸어갔다. 한편, 한국과의관계에서는근세유학, 특히관학화된유학이被虜人으로서일본에머물렀던조선의관리姜沆에게연원을두고있으며, 또한강항의학문은이퇴계의학통에속함과동시에강항으로부터후지와라세이카 ( 藤原惺窩 ), 하야시라잔 ( 林羅山 ) 에게계승되었기때문에그때까지는臨濟宗五山僧의兼學이었던유학이이무렵에이르러서정통화되고, 유학이유학으로서학습되기시작했다고할수있다. 또한무사의治者道德으로서유학은무사층에게보급되어간다. 그러나조선의경우와는대조적으로관리등용시험인科擧를받아들이지않았으며, 主君과家臣의 家同士 의御恩과奉公관계에따라구축되어있던근세일본사회에서유학은어디까지나敎訓내지교양이었으며, 朱子家禮 에서말하는유교식장례와제례, 의례는수용되지않았으며, 그기반이기도한가족제도에도영향을미치지는않았다.

164 13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와같은일본에온통신사일행에대하여일본의文人들이다양한교류를원하고, 그墨跡을얻어서지금전하고있는것은주지의사실이다. 여기서굳이부언할필요는없을것이다. 이와는반대로일본인이쓴것도조선으로가져갔다. 明和원년 (1764) 에來日했던통신사일행중에正使書記였던成大中, 副使書記였던元重擧는일본문인들에게서받은書畵를조선에전하고있으며, 그들과교류가있던실학자李德馨역시元重擧일행을통하여일본에관한지식을수집했을뿐아니라일본의풍류와文雅를높이평가했고, 일본을夷狄으로간주하고그문물을무시하려는조선의풍조를한탄했다. 58) 또한조선에서간행된刊本에대한관심에대해서, 柳成龍의 懲毖錄 처럼文祿 慶長의役 ( 임진왜란 ) 을조선쪽에서기술한서적에대하여일본쪽에서는軍記物로서의관심때문이었는지, 조선쪽의군사기밀에관한내용이기록되어있음에도불구하고왜관을통해서입수했던모양인데, 17세기말에는한문본그대로간행되었다. 59) 에도시대에있어서조선책의수입과간행에대해서는이후의연구과제일것이다. 반대로李瀷에따르면, 조선에전해지지않은中国典籍으로서 性理字義, 三韻通考 는일본에서전해졌고, 조선에서亡失된 李相国集 이일본에서전래되어復刊되었다고한다. 60) 통신사나왜관을통한한일의문화적교류는조선에서일본으로문물이전해졌다는문맥으로논의되는것이대부분이며, 그와반대의경우에대해서는그다지명확하지않지만, 이것은李徳懋이지적했듯이당시의조선에존재했던일본에대한멸시감각이, 반대로일본에존재했던외국에대한호기심이라는필터가오늘날에도미치고있기때문은아닐까? Ⅷ. 맺음말 17~18세기의한일관계를동아시아속에서생각하는단서로서본고에서는근래일본에서정해진규칙인글로벌히스토리라는접근방법을이용했다. 이것은동아시아에있 58) 李元植, 1997 朝鮮通信使の研究 ( 思文閣 ) 556~558 59) 末松保和, < 歴史家としての西厓柳成龍 > 朝鮮学報 110 에의하면 1642 년에 懲毖録 의일부가포함된 軍門謄録, 기타柳成龍의저작이포함된刊本 16 권이간행되었는데, 일부인 懲毖録 은일본에서 1688 년에가이바라에키켄 ( 貝原益軒 ) 이서문을붙이고 異称日本伝 으로절반정도가 1693 년에간행되었고, 1695 년에는 2 권짜리로全文이교토에서간행되었다. 60) 李元植, 위책 555

165 17~18 세기의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139 어서교역과국가간의관계를하나의시스템의변천으로생각해보려는것이다. 그래서더욱두가지접근이필요하였다. 하나는중국중심의책봉 조공과교역을일체화했던, 明初에성립했던政經一體의틀이며, 또하나는책봉 조공과교역과는별도로성립하는互市關係이다. 일본은전자의틀속에서는이단아, 문제아라고도할만한존재였고, 거꾸로한국은그책봉질서를내면화한우등생으로행동하려했다. 그러나 16세기중반부터동아시아 동남아시아해역에서상업이활성화되는와중에일본은은산출국으로서상업활성화의한動因을제공하였고, 유럽인과동남아시아각지역및중국과의새로운경제 외교관계를성립시켰다. 그렇게열린대외관계를전제로하면서, 1630년대에는기독교금지를목적으로일본인의해외도항을금지시킴과동시에교역상대국을제한했다. 그때선택된막부장군의대외호칭이 大君 이었다. 중국은 16세기중반에는政經一體의교역시스템을사실상포기했고, 명에이어집권한청나라역시일본과의관계에서는책봉관계가없는교역만의관계를승인했다. 한일관계도역시중화황제에의한일본국왕의책봉을전제로하지않는, 그러나양국이대등한교린관계로변해간다. 한국은원복속기에위로부터, 밖으로부터의상업화에대항하는형태로명과마찬가지의폐쇄된국내경제체제를구축하고, 일본 중국과의대외교역에대해서도官에의한장악이라는틀을마지막까지크게무너뜨리지는않았다. 그러나조선내부에서상업의활성화는왕조의물자조달방식을변경시켰고, 17세기중반에는동래-서울-북경을연결하는半官半民的인상인들에의하여대일중계무역의물류루트가성립되었다고생각된다. 일본의중요수출상품인은은 17세기후반에는한국에대해서도중국산생사의대가로서대량으로수출되기에이르지만, 17세기말에는먼저나가사키에서의수출이엄격하게제한되고, 18세기에들어서는쓰시마에서의수출도제한된다. 그래서일본의수출품은구리가주축으로자리잡게된다. 중요수입품이었던생사는점차일본에서국산화가진행되어수입상품으로서의위치를잃었다. 한편, 한국에서수입하는또하나의중요한수입품인인삼역시 18세기중반에는국산화가진행되었기때문에조일무역자체가 18세기후반에는크게쇠퇴하였다. 경제적인관계가축소되어가는한편에서, 일본을방문한통신사일행은태평한속에서유학적교양이확산되던일본의문인들에게환영받았다. 또한조선인행렬이나조선인을묘사한名所圖絵등도작성되었다. 이것은조선의文雅에대한평가도하면서, 일

166 14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본사회가가지고있던異国사람들이나異国의풍속에대한강한호기심으로설명할수 있을것이다.

167 제 2 부좌담회토론문

168

169 좌담회토론문 143 < 제 1 주제 > 14~15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한일관계 - 왜구의구성문제를포함하여 - 손승철 : 그럼시작할까요? 일정에따라서저희 2분과의모든발표가끝났기때문에오늘은좌담회를하도록하겠습니다. 오늘먼저진행방식에대해서말씀을드리면지난번에합의한대로그동안발표된주제에관해서종합적으로정리하는차원에서토론회를진행하도록하겠습니다. 3개의대주제를발표했는데, 주제당대략 1시간이내대략 50분정도하고 10분쉬고, 50분하고 10분쉬고그런식으로해서합쳐서 3시간정도해서오전중으로끝냈으면좋겠습니다. 그리고끝으로향후일정에대해서간단히협의하도록하겠습니다. 우선토론방식인데세주제를시대순으로진행하면어떨까싶은데, 여러분의생각은어떠신지요? 예, 그러면첫번째주제입니다. 우선발표자께서그동안발표한내용에대해서보충사항이있으면간단하게보충을해주시고, 그리고보충사항이끝나면질의 응답하는시간으로그렇게하겠습니다. 우리가지난번에도발표를했고토론을했기때문에가능하면지난번에토론된범위내에서다시확인하는정도, 그렇게진행했으면좋겠다는생각이듭니다. 먼저첫번째주제는 <14~15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한일관계-왜구의구성문제를포함하여-> 입니다. 이주제에관해서는연구사로서일본측에서는나카다미노루 ( 中田稔 ) 선생, 한국측에서는김보한선생이발표를했고주제발표는일본에서는사에키고지 ( 佐伯弘次 ) 선생님께서, 그리고한국에서는제가발표했습니다. 그래서먼저사에키선생께서혹시보충내용이있으시면말씀해주시고, 그리고제가또보충내용이있으면말하고, 그리고토론을들어가도록하겠습니다. 사에키 ( 佐伯 ) : 그러면저부터, 사에키입니다. 저는세가지를간단하게보충설명하겠습 니다. 제주제는 <14~15 세기동아시아해역세계와일한관계 > 인데, 우선첫째로

170 14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전제가되는국제관계, 이것은중국을중심으로한이른바동아시아세계라는것이이시대의일한관계의전제가된다는것이중요합니다. 그러면이시대 14~15세기의일한관계를동아시아, 중국중심의동아시아세계속에서모든것을이해할수있는가하면, 그렇지않은점이있다는것이일한관계의특징이라고생각합니다. 그것은이왜구의문제가큰원인이되는데, 특히 15세기에독자적인일한 한일의국제관계가형성된다는점입니다. 두번째는이번의하나의큰주제인왜구의구성원의문제입니다. 이에대해서는나카다선생님, 김보한선생님이연구사를정리해주셨습니다. 그도그러한것을전제로하면서제나름대로논문그리고사료를본결과, 일본에서의오래된견해, 즉전후의다나카다케오 ( 田中健夫 ) 선생님, 나카무라히데타카 ( 中村栄孝 ) 선생님의전기왜구의견해, 즉그주요한구성원은역시이키 ( 壱岐 ), 쓰시마 ( 対馬 ), 마쓰우라 ( 松浦 ) 지방의해민들이라는이해가가장옳은것같다고생각했습니다. 물론한국의당시의해민들이왜구를가장하여왜구가되는형태도있었습니다만, 그것이왜구의주류는아니라는것은사료상말할수있을것으로생각합니다. 또한가지왜구를파악하는데에서중요한점은왜구의실태를조금더자료에입각해서생각해야한다는것과왜구와중국과의관계도매우중요하지않나하는것을생각하고있습니다. 정말로일본국내에서왜구를보는시점과동아시아세계에서크게왜구를보는시점이둘다필요하다고통감하고있습니다. 마지막으로세번째로말씀드리고싶은것은동아시아라는틀을넘은굉장히큰흐름이있다는점입니다. 14세기말~15세기가되면일본그리고조선에류큐나동남아시아의배가잇따라들어옵니다. 그러한흐름을전제로하여일본에서조선으로통행하는사람들이동남아시아산물자, 예를들면후추같은것을들여오는것이특징입니다. 따라서물품의흐름으로서는상당히널리동남아시아에까지미치는환지나해세계속에서일한관계를파악하는것이필요하게되는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감사합니다. 제경우는특별히보충이라기보다도저는제주제발표논문의주요내용에대해서말씀드리겠습니다. 왜구의창궐이 1350년, 그리고 1370년대에있었는데, 그왜구의창궐이일본내부의정치적인변동과깊은관련이있다는것을먼저말씀을드렸습니다. 그리고또하나는종래에왜구의구성에관해서 고려인,

171 좌담회토론문 145 조선인이포함되어있었다 는설과그리고 제주도해민설 에대한견해가있었습니다. 그것에대해서고려 조선인설의소위 가왜사건 은 1382년과 83년도에강원도영월에서의 가왜사건 을근거로하고있다는점에있어서타당성이좀결여됐다는것과그리고또하나 제주도해민설 은사료가대략 1470년, 80년대의 수적사건 에관련된사료이기때문에, 전기왜구그러니까 1350년에서 1450년대를훨씬벗어나고있다는점에서타당성이결여된주장이라는것을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현재제가왜구의약탈행태를분석하면서 삼강행실도 라는사료를분석을했는데 삼강행실도 의그림을그린사람이안견이라고하는사실을확인을했습니다. 지난번발표때는추측만했었습니다만, 광해군시대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라는사료가또나옵니다. 그사료의찬집의뢰를보면 삼강행실도 의그림은안견이그렸다는기록이있습니다. 그래서안견이그린것이확인이됐고, 그리고 삼강행실도 의무기들에대한분석을하고있는데, 지난번에스카와선생님이주신일본무기에관련된책을통해서 삼강행실도 에등장하는무기가중세일본무사들이사용했던무기와일치한다는것을확인을했습니다. 그내용을나중에보충해서논문을완성하도록하겠습니다. 이상첫번째주제에관해서사에키선생님과제가보충설명을했습니다. 먼저연구사그다음에발표내용, 오늘의보충설명을포함해서추가로질의응답을자유롭게해주시면되겠습니다. 이계황 : 그럼제가먼저하겠습니다, 이계황입니다. 사에키선생님발표와그내용을잘읽어서여러가지로도움이됐습니다. 선생님의논문내용중에 14세기, 15세기는한반도에나타나는왜구의중심주체는 3도이다 라는것을확인했습니다. 15세기중엽으로부터약간변화가보여서무역의중심은류큐와일본의관계가중심이되고있습니다. 이에따라서류큐와일본과의관계에서일본의위사파견도대단히중요한관점으로이해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일본과류큐의관계가상하관계로이루어져있다 라고하는부분도잘이해를했습니다. 이와같은과정에서 일률적인책봉체제라는부분으로부터일본과제국 ( 諸國 ), 중국을제외한제국과의관계가소중화의관계에있다 라고하는것도이해를했습니다. 이부분은이제까지책봉체제에의한동아시아세계, 그에의한전개로파악하고있는부분에서대단히다른, 아주새로운이론으로판단할수

172 14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있을것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이제까지의책봉체제론조공체제론에대한상대화의작업을진행하신점에대해서경의를표합니다. 이부분에대해서저도국제관계를설명하는데있어서는기본적으로는이부분에대한동의를합니다. 단, 이러한소중화개념을사용해서역사를서술할때어떠한장점이있는지이문제에대해서는아직까지정확하게서술되어있지는않은것같습니다. 그리고이소중화개념을써서이논문에서완벽하게구사했다고는보이지않습니다. 이자리에서사실이문제에대한답변을완벽하게구할수있을지는모르겠습니다만, 혹시현재생각하고계시는부분중에서기존의역사서술과는달리이소중화개념을써서역사를서술할경우달라지는면이어떤점인지그부분을조금더구체적으로설명을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사에키 : 예, 질문과지적감사합니다. 제가기본적으로생각하고있는것은중국을중심으로한동아시아세계라는것이책봉체제론의관점에서지적되고있는데, 그것이일원적인것인가하는점에서한가지의문을갖고있습니다. 그이야기는중국에서이동아시아세계를보았을경우에는책봉체제혹은화이질서라는것이이세계를망라하여지배하고있는것처럼보이지만, 역으로주변국가들이이세계를보았을경우에는그렇지않은것이아닐까하는의문을갖고있기때문입니다. 저는일본사가전문이기때문에일본에서동아시아세계를본다는관점에서보고있지만, 일본에서보았을겨우실은명, 중국을중심으로한화이질서, 책봉체제가그다지관철되고있지않다는이미지를갖고있습니다. 그렇다고말할수있는이유는 1401년일본은아시카가요시미쓰 ( 足利義満 ) 에의해명의책봉체제로들어가게되지만, 약 10년후에는일본은중국에조공을하지않게되고, 20년이상책봉체제에들어가지않는시기가있었고, 명의책봉체제가구석구석까지관철되지않고있는것이일본에서보았을경우의동아시아세계의특징이아닌가하는것이하나입니다. 이것은일본을중심으로한견해이기때문에그기본적인견해, 좌표축을류큐 조선 베트남등으로옮겨서거기에서동아시아세계를보아도또다른세계가보이는것이아닐까하고생각하고있습니다. 또한가지는소중화라는것에대해서입니다. 일본만이아니라베트남같은곳에서도중국의미니중화세계를만들어내려고했었다는지적이있기때문에, 단순히

173 좌담회토론문 147 중국을중심으로한중화세계, 일원적인중화세계만이아니라, 주변국가들도비슷한작은그러한시스템을만들고자한움직임은있을것이라고생각합니다. 단, 그주변국가들이만들고자한, 소중화라고일단은부르고있지만, 이세계와중국을중심으로한중화세계가같은질의것인가하면, 그렇지도않은점이있습니다. 중국을중심으로한이른바중화세계는조공과책봉이라는명료한관계에의해서성립되고있지만, 예를들면일본과류큐의관계는그다지명확하지않습니다. 외교문서의형식적인상하관계는지적할수있지만, 조공과책봉이라는명확한형태를취하고있지않다는것이중국의중화세계와질적으로다른점으로, 그것을소중화라고불러야할지말지의문제도있을것으로생각합니다. 이에대해서는앞으로도또생각해보고자합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한선생님. 한명기 : 예. 아까이계황선생님도말씀하셨지만, 사에키선생님의발표를통해서 15세기왜구문제에대한보다명확한사실이확인되었다고생각합니다. 그래서저는그런큰문제보다는이시기의한중일 3국의무역관계와관련해서궁금한것을조금여쭈어보고싶습니다. 사에키선생님의발표를보면, 1401년에아시카가요시미쓰 ( 足利義滿 ) 가책봉을받은이후 1547년에 19차견명선을통해서감합무역에종지부를찍었다고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중간의견명선이라는게다수의우여곡절을겪었는데그와중에나중에무역은결국호소카와 ( 細川 ) 씨와오우치 ( 大内 ) 씨의파견주체로옮겨가면서무역이변한것으로알고있습니다. 제가궁금한것은 1523년에있었던 영파의난 이라고있잖습니까? 영파의난 에서 영파 는나중에구와노선생님의발표와도관련이있습니다만, 히데요시가명을정복한이후에자신이영파에거주하겠다는것이나옵니다. 그래서이것은선생님이앞으로완고를하실때좀보충해주십사하는부탁일수도있고지금상황에질문일수도있습니다만, 영파의난 이라고하는것이일본과명관계, 그리고더궁극적으로는조선하고의관계에어떤임팩트를주었는지그문제에대한말씀을일단듣고싶습니다. 보충으로말씀드리면 영파의난 이있었음에도불구하고명이일본하고의견명선무역을계속한이유가어떤것이었는지그런것이우선궁금합니다. 이상입니다.

174 14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사에키 : 예, 이번저의주제는 14~15세기의문제로, 16세기에들어가는 영파의난 에대해서는거의언급하지않았습니다. 질문이나왔기때문에간단히답하겠습니다. 이 영파의난 이라고하는것은말이지요, 일본의견명선이중국의영파에서소란을일으킨사건입니다. 이것은일본에서의일명감합무역의주도권을둘러싼분쟁이라는것이원인입니다. 앞서한명기선생님도호소카와씨, 오우치씨가파견을하게된다고말씀하셨는데, 바로그시대, 호소카와씨와오우치씨가일명감합무역의주도권을둘러싸고다투고, 게다가호소카와선 ( 船 ), 오우치선이동시에영파에도착해버린것이직접적인원인이됩니다. 호소카와선대오우치선의항쟁, 다툼이현지에서의소란으로확대되고그결과로서 영파의난 이일어납니다. 그결과일명관계는단절되게됩니다. 그러나일본측에는감합무역을계속하고자하는강한욕구가있고, 명으로서도조공을촉구하는일이있었기때문에최종적으로는관계가수복되어, 다음견명선이파견되게됩니다. 그것이예를들면일한관계등에어떠한영향을주었는가하는문제가되는데, 이난이일어난후에일명관계가좀처럼회복되지못하는상황이있었던것입니다. 그때에일본으로서는조선국왕을중개로하여일명관계를호전시키고자노력을하고있습니다. 그렇게되면, 이난이라는것은동아시아전체에영향을끼치고있는것이되는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고맙습니다. 지난번발표때보다더심도있는토론인것같습니다. 더심각해 지면곤란할것같으니, 첫번째주제에대해서선생님들이생각하시는것을듣고 싶습니다. 구와노 ( 桑野 ) : 손선생님의발표는매우흥미롭게생각했습니다. 특히그 삼강행실도 의왜구관련기록을해설 소개하신것말입니다만, 실은일본쪽에서는 1991년에규슈산업대학의오사세쓰코 ( 長節子 ) 선생님이공개강연형식으로발표하셔서, < 조선과의교류-중근세를중심으로 > 라는공개강연을나중에책으로정리하셨습니다. 그안에 2페이지뿐이지만, ( 자료를내보이며 ) 이러한형식으로그림을소개하면서간단히언급하신적이있습니다. 제가조금마음에걸리는것은, 이 삼강행실도 에쓰여있는전부 9건의기록인데, 이것을역사적인사실로서받아들여도좋을까하는, 즉조금은픽션이, 이야

175 좌담회토론문 149 기적인요소가포함되어있는것은아닐까하고조금그부분이마음에걸립니다. 즉 고려사절요 혹은훗날의 조선왕조실록 과상당히비교해보지않으면, 여기까지는사실과합치하지만, 여기부터나머지는의심스럽다든가말이지요. 전부부정할생각은없지만, 어디까지나이 삼강행실도 라는것이역사서라기보다도교화서 ( 敎化書 ) 같은역할을당시에는하고있었다고생각합니다. 그렇기때문에이기록의내용을우리가정말로있었던사실이라고전부받아들여도될것인가하는그러한의문이한가지있습니다. 또한가지있습니다. 나중에 오륜행실도 라는것이조선왕조의후기에편찬되는데, 그것을보면 9건중 3건, 최씨의이야기인데, 최씨가화를내며욕을퍼붓는이야기와그리고열부 ( 烈婦 ) 가강에뛰어든다는이야기와, 세번째가임씨가다리를잘렸다는이야기가나중의후세조선왕조후기에 오륜행실도 에는남습니다. 왜이세가지가남고나머지 6건은배제되었는지, 나중에라도괜찮습니다만, 만약알고계신다면왜이 3건이남은것인지하는점을좀. 시대가조금벗어나기는합니다만, 조선전기부터조선후기로시대는조금차이가나지만, 후에왜이세가지가남게되는것인지를조금의문스럽게생각하고있습니다. 손승철 : 3가지질문을하셨는데제가오사세쓰코선생님이쓰신것은소개하는정도의내용인데, 제가오늘처음봤습니다. 여기에서는그림에대한설명이있다는것을확인해두고, 나중에돌아가서꼼꼼하게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두번째가이 삼강행실도 라는것이당시백성들을교화하기위해서만들어진텍스트적인성격을가진책이기때문에역사사실에서교육용으로조금바꾸어진것이아니냐, 역사사실로서의가치를얼마큼인정할수있느냐하는질문이었는데, 저도그런생각을했기때문에먼저발표할때하나하나사건에관해서사실확인하기위해서 고려사절요 를확인을했습니다. 그런데 9건에관련된내용이 고려사절요 에다실려있습니다. 그리고동시에 고려사절요 에는구체적으로내용까지도기록되어있기때문에사실자체로서는의심할사항은아닙니다. 그러나그것이얼마큼과장이되었냐하는것은조금더검토를해볼필요는있겠다는생각을하고있습니다. 그리고세번째질문입니다만, 조선시대에는전부 5건의 행실도 를발행을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일처음한것이이 삼강행실도 이고그다음에, 속삼강행

176 15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실도 이륜행실도, 그다음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그다음에 오륜행실도 이렇게 5개를했는데, 지금제가요즘에그 5가지에등장하는일본관련 행실도 를정리하고있는데, 저도똑같은그런의문을갖고있습니다. 왜어느책에는이내용이들어가고어느책에는안들어가고. 그런데기본적으로삼강과오륜이다르기때문에삼강에는충, 효, 절이고, 오륜은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등으로뭔가그런관계에서편집상에차이가있지않나그런생각을하고있습니다. 그런데그점에관해서는좀더확인을해서다음번에공동연구보고서에쓸때는그부분까지언급하도록그렇게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중요한지적을해주셔서. 스카와 ( 須川 ) : 마지막으로한가지질문하게해주십시오. 손선생님의보고가운데고려말기에이미왜인이거주하고있었다고, 남쪽에말이지요, 그런점을지적하셨습니다. 고려사 였던가 고려사절요 였던가기록을거론하시면서말씀하셨습니다. 왜그시기에특히왜구가날뛰고있던시기에고려정부가왜왜인이그런곳에거주하고있는것을인정하고있었을까, 혹은고려정부의국토의식이라고할까영토의식이라는것이어떠한것이었나? 아마북방쪽으로가면여진사람들도상당히있을법한지역이분명있을것입니다. 그렇게때문에고려가자신들의그국가를복수의민족집단에걸친제국이라는의식을갖고있어서, 그렇기때문에왜인이남쪽에슬쩍들어와살고있거나하는것도허용했던것일까? 여러가지생각해봅니다만, 저로써는도무지답이나오지않습니다. 꼭가르쳐주시길바랍니다. 손승철 : 대단히어려운질문입니다. 최근에그부분에관해서는도쿄대학의무라이쇼스케 ( 村井章介 ) 선생이그지역에서살면서활동하고있는사람들을 마지널맨 (marginal man), 소위말해서 경계인 이라고하는그런학설을제기를했고, 그것이지금은상당히통용이되는것으로알고있습니다. 저도거기에대해서구체적으로연구를하지못했습니다만, 제가생각하기에는적어도 14~15세기의영토의식, 국경의식이런것은지금하고는상당히다르지않았는가, 그래서필요에따라서생활거주공간이상당히좀포괄적으로상당히폭넓게분포되어있지않았을까그런생각을하고있습니다. 대개예를들어보면제주도라든지거제도라든지남해안일부섬에사실은왜인들의주거흔적도간혹발견되기도합니다. 그러나그왜인들의주거, 거주흔적이일시적인것인지아니면조금더장기적인것인지그런것은조금

177 좌담회토론문 151 더분석할필요가있겠지만, 아마그시기는왜구들이동아시아해역을여기저기약탈했던시기였기때문에그것이장기적인거주지로서의의미보다는일종의어떤거점으로서, 그때그때약탈의거점으로서이용된것이아닐까저는그정도로만생각하고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되셨습니까? 다른질문이없으시면제가마무리멘트를하면서일단첫번째주제를끝내도록하겠습니다. 제1주제에서는 <14세기~15세기의동아시아해역세계와한일관계 >, 특히아시겠지만왜구의구성문제가역사적쟁점사항이었습니다. 우리가그동안공동연구의결과, 하나의성과라고한다면왜구구성문제에관해서는상당히근접된의견을가졌던것이아닌가생각됩니다. 그러니까이제종래의 고려인, 조선인이왜구에포함이되었고또제주도해민도왜구에포함시키는학설이있었지만, 그것이왜구의구성의주류가될수는없다 라는것이확인되었습니다. 물론조금더연구를해야되겠지만, 왜구와관련해서연구사정리나주제논문을통해서그정도의성과를공동으로표출했다는것은나름대로의의가있었던것이아닌가생각합니다. 그리고또새로운연구테마로동아시아의책봉체제에관련해서좀더각국의입장에서세밀한검토가필요하다든지또소중화에대한내용의규명이라든지또일명결과있어서의감합무역내지는일명관계에조일관계가활용이된다든지이런것들은새로운연구테마로서앞으로지속적으로연구되어야할주제가아닐까, 이런성과도있었다, 이렇게자평을하고싶습니다. 대강이정도로제의견을말씀드립니다. 혹시첨가하실내용이있으시면. 그러면제1주제에대한좌담회를일단마치겠습니다.

178 15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 제 2 주제 > 동아시아세계와임진왜란 - 국제관계와원인문제를포함하여 - 손승철 : 두번째주제에관한좌담회를시작하겠습니다. 두번째주제는 < 동아시아세계와임진왜란-국제관계와원인문제를포함하여-> 였습니다. 이주제에관해서연구사를한국에서는노영구, 일본에서는나카노 ( 中野 ) 선생이연구사발표를해주었고, 주제발표에관해서는구와노 ( 桑野 ) 선생님과이계황선생님께서발표를해주셨습니다. 그럼먼저주제발표에관련된보충사항을두분위원선생님들로부터간단하게듣고토론을하겠습니다. 이계황 : 제가먼저하겠습니다. 저는사실임진왜란에관련된한일의임진왜란원인론에대해서연구했습니다. 원래저는임진왜란에대한이야기를전개해서책을쓴적이있습니다. 문제는사실임진왜란이 도요토미정권론 과대단히밀접한관계를가지고있고, 그런의미에서도요토미정권에대해서도대단히관심을갖고있습니다. 임진왜란관계에대해서여러가지를조사하면서가장크게느꼈던점은임진왜란에대한서술은상당히많습니다만, 그러나임진왜란원인에대해서는사실정확하게무엇이다하는부분에대한연구가정확하게되어있지는않습니다. 특히한국의경우에는임진왜란원인론에대해서정확한이해가대단히적은것처럼, 짧은것처럼느껴집니다. 한국의학계에서도대부분임진왜란의원인론에대해서는일본학계학설들을인용하고있는경우가많습니다. 여러분도아시다시피한국에서의일본사연구는대단히적습니다. 그래서임진왜란의원인론에대한연구를좀더정확하게분석하는것이중요하다고생각했습니다. 특히일본에서의여러가지임진왜란원인에대한연구가어떠한입장에서무엇을지향하고있는가라는측면에대한이해는대단히중요하다고봅니다. 일본의경우에도사실은임진왜란원인론에대한이야기는 1980년대를끝으로거의전개되지않는상황입니다. 특히임진왜란원인론에대한정리도이전단계에서연구된부분에대한문제를병렬적으로서술하고그에대한지향점이라든가하는부분에대해서는서술하지않고있습니다. 그래

179 좌담회토론문 153 서저는사실임진왜란이어떠한의미를갖고그와같은문제를어떻게생각할까에대한관심을갖고, 그에따라서임진왜란원인론을분석하였습니다. 그런과정에서일본에서보통소개되고있는두가지학설, 여러가지학설이있습니다만, 두가지학설은좀더시정되어야한다고생각하고있습니다. 이와같이원인론을분석하는이유는이원인론을정확히분석함으로써임진왜란에대한정확한이해에도움이되고자하는목적을가지고있습니다. 특히임진왜란은한국과일본의문제가아니라동아시아전체에걸치는문제로서동아시아사적인시점이필요하다고느끼고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좀더원인을정확하게이해하는것은대단히중요하다고보입니다. 이문제는앞으로의저의연구성과, 연구방향과도관련이있습니다. 그래서저는그와같은문제를분석을했고그결과만족할만한부분은없지만나름대로의성과를얻었다고생각합니다. 아직까지임진왜란원인에대한자신의견해는없습니다만, 어느정도의방향성은얻었다고생각합니다. 그래서앞으로이와같은문제를좀더깊이추구하도록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감사합니다. 구와노선생님. 구와노 : 저는작년 8월 23일에진주에서중간보고를했습니다. 그때의결론에해당하는것이실은작년 12월하순에뉴오타니에서열린심포지엄의보고입니다. 그때에보고한내용이실은결론이되어있습니다. 당초작년 8월시점에서는맺음말은 분로쿠 게이초의역 ( 文禄 慶長の役, 임진왜란 ) 이후에명, 조선, 류큐, 일본이어떠한방향으로나아가는가하는것을전망할생각이었습니다. 그때에는메모정도로, 명의경우에는이 분로쿠 게이초의역 으로명군은원군을파견했기때문에그로써재정파탄이일어나서마침내명청교체가일어난다, 이명청교체를화이변태 ( 華夷變態 ) 라고도말하고있습니다. 조선의경우에는그후에전후 10년이지났을쯤에는정묘 병자호란으로후금, 훗날의청군의침략으로인해나중에조선에서는소중화의식이높아지는그러한방향을걷게됩니다. 류큐는이것도전후, 분로쿠 게이초의역 이후인데, 사쓰마 ( 薩摩 ) 번이류큐에침략하게되어, 결국류큐는청과일본양쪽에굴복하는형태가되어, 류큐국왕은

180 15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류큐사절로서에도로올라간다, 사은사 ( 謝恩使 ) 나경하사 ( 慶賀使 ) 라고하는데, 그러한일종의속국취급을받게됩니다. 일본의경우에는그후도쿠가와 ( 徳川 ) 막부가명과국교회복을하려고하지만, 그것은좌절되게됩니다. 그러나무역은이른바 4개의창구 라하여, 예를들면사쓰마를사이에두고류큐와무역을한다, 나가사키 ( 長崎 ) 를중개로하여네덜란드방면의무역, 그리고쓰시마를사이에두고조선과의무역이라는식으로, 명과의국교회복에는실패하지만, 동아시아와의무역이전부없어졌다는것은아닙니다. 또한가지는마쓰마에 ( 松前 ) 를사이에둔아이누와의무역이있습니다. 한반도의경우에는 조선소중화의식 이높아져가고, 일본의경우에는이른바 일본형화이질서 의방향으로나아가는그러한전망을쓸생각이었지만, 조금이야기가길어질것같아서그만두었습니다. 그부분에대한것은실은 10년정도전에 반도와열도의국가들 ( 半島と列島のくにぐに ) 이라는대학생대상의텍스트를쓴적이있는데, 거기에도언급했었기때문에더이상같은것은언급하지않아도되지않을까생각해서, 이번의맺음말에서는전망이라기보다는내용을요약하는것으로결론을대신하기로했습니다. 이번의보충에대해서는 1년전의원고에빨간글씨로덧붙여쓴것을일단지금의시점에서는최종판이되지않을까하고생각하고있습니다. 크게변경한부분은없습니다. 구성도거의그대로이고, 조금보충설명을덧붙인곳이새로워진부분입니다. 단, 제1절부분에서는 < 조선전기의동아시아국제환경 > 이라는것으로명과조선과의관계, 명과류큐와의관계, 명과일본과의관계를개관하고있는데, 그관계를 명대에있어서의동남제국의공기 ( 貢期 ) 로써, 조선의경우에는 1년 3공, 일본의경우에는 10년 1공, 류큐의경우에는 2년 1공이라는식으로일람표를싣기로했습니다. 조선, 일본, 류큐만이아니라이표에실었습니다만, 안남 ( 베트남북부 ), 캄보디아, 그리고시암 ( 타이의아유타야 ), 참파 ( 베트남남부 ), 조와 ( 자바섬의북부 ) 라고동남아시아쪽은 3년 1공이대부분이라는것을한눈에알수있도록표를넣었습니다. 그렇게하면, 이 8개국중에서는조선이발군의조공국이라는것을알수있고, 역으로일본은 10년에 1회이기때문에얼마나일본이명으로부터는평가받지못하고있었는지, 문제는실은왜구에있는것인데, 10년에 1회로된다고쓰여있기때

181 좌담회토론문 155 문에, 시각적으로표를넣는것이알기쉽지않을까하고생각하고있습니다. 제쪽에서오히려이계황선생님, 그리고한명기선생님께묻고싶은질문이있었기때문에, 그것을이 A4 종이 2장으로정리해보았습니다. 저는국제관계라고할까요, 국제관계는실은의례인데, 국제관계를중심으로하여, 이계황선생님이원인론을중심으로논술을한다는분담의형태가되었기때문에, 제논문에서는원인론에대해서는그다지언급하지않으려고했었습니다. 여기에계신이계황선생님자신의견해, 혹은그리고한명기선생님의견해가조금궁금해서, 이기회에말씀을듣고싶다고생각했습니다. 이것을전부읽으면시간이걸리기때문에요점만읽으면, 전남대학교사학과의박수철씨가최근에쓴논문속에서주장하고있는것은 공명설과영토확장설이라는것은실제로는별개의것이아니다. 현재로서는공명설은무시되고영토확장설만이통설적인위치를차지하고있지만, 실은이두가지는동전의양면의관계에있다. 영토확장설을명확하게지적한사료는존재하지않지만, 공명설에관련된자료는많이존재한다. 영토확장설의지향이라고하는것은구체적인사료로서나타날때에공명이라는이름으로표출되게된다 는것입니다. 따라서박수철선생의의견으로는임진왜란의원인은구조적인차원의공명이라고결론을내리고계신데, 이견해에관해서이계황선생님은어떻게생각해고계신지묻고싶습니다. 이계황 : 공명설의기본적인발상은사실히데요시의공명설이라는부분이기초가되고있습니다. 영토확장설이라는부분에는정확한것은없습니다만, 당시의자기영지확대의욕이라는부분에는관련되어있습니다. 다시말하면하나는공명설은히데요시의공명설이고, 그당시영토확장설이라고하는부분과관련될경우에는전국다이묘 ( 戰國大名 ) 적경향의지속이라는측면을이야기하고있는부분이있지요. 전국다이묘의공명이라고하는부분에대한이야기는이부분은단지이시대의특징은아닙니다. 근세이래로전쟁을통해서공명을얻고그에의해서자기영지를확대한다고하는부분은기본적인선이라고보입니다. 소위군충장 ( 軍忠狀 ) 이라는것이항상그와같은것을나타낸다고도보이지요. 그런의미에서보면이시기의이문제를임진왜란의원인을다루는데있어서이시대의특징을잡아서무엇이라고설명을할때이문제가적당한것인가라는측면이있다고보입니다. 결과적으로전국 ( 戰國 ) 권력으로부터근세권력으로의진화과정속에임진왜란을위치시킬수밖

182 15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에없다고보입니다. 뿐만아니라공명설을나타낸다하더라도이당시의모든대명이전쟁을해서영토를확장하겠다고하는의견을갖고있는것같지는않습니다. 따라서이와같은문제가히데요시의공명설이라는부분과영토확장설이라는부분은차원을달리한다고보입니다. 오히려영토확장설이라는것은천하관의변화라고하는부분이훨씬더유리하다고보이는부분이있습니다. 이문제는결론차원에서봤을때도요토미정권이전단계에서의천하관의변화라는측면과관련이되겠지요. 뿐만아니라이문제는뒤의문제와도관련되지만일본을중심으로하는화이질서에대한문제이기도합니다. 따라서박수철선생의이주장을받아들이기에는사실은사료의문제, 사료비판의문제뿐만아니라양자의관계성에대한차원의문제가좀더고려되어야한다고보입니다. 이상입니다. 구와노 : 감사합니다. 제가이박수철씨의논문을읽게된것은실은이성무선생님, 이태진선생님, 이헌창선생님의공저인 류성룡과임진왜란 이라는저술때문입니다. 여기에계신한명기선생님이좌담회에참여하셨고, 그때에한명기선생님은히데요시가임진왜란을도발한원인에관해서발언하셔서공부가되었습니다. 그가운데에서는경제사적인관점에서중국과의감합무역을재개하려고한차원에서의도발과관련하여, 1523년의 영파의난 으로전국시대의다이묘처럼상당한이익의원천이사라졌기때문에무력을동원해서라도그것을재개하고자할의사가강했다고. 특히한명기선생님이주목하신것은히데요시가왜영파에간다고이야기했는가, 그것은역시영파라는지역이일명무역의상징성이었다는점에주목하시고계십니다. 그렇다고하면결국박수철선생의경우에는감합무역설이라는것을배제하시고생각하고계신것같지만, 한명기선생님은결국최종적으로는박수철선생과는대립하는것과같은의견이되는것인지요? 한명기 : 예, 구와노선생님이말씀하신것처럼제가집담회에서박수철씨의논문을소개한것은그야말로거기에계신분들이대체로일본내의임진왜란의원인에대해서잘모르고계셨기때문에한국측의문헌을소개하는차원에서소개한것이고. 박수철선생님의견해에대해서는이미이계황선생님께서비판을하셨습니다. 그래서구와노선생님의질문에제의견을말씀드리면, 저는기본적으로는역시

183 좌담회토론문 157 영토확장설이한국측의기록으로볼때중요하지않을까이렇게생각합니다. 임진왜란이일어난직후에조선의국왕이었던선조와명나라참모유황상 ( 劉黃裳 ) 이라는사람사이에논란이벌어집니다. 거기에따르면선조는조선이임진왜란을당하게된이유를일본이추구했던가도입명을거부했기때문에조선이대신명의침략을당했다이렇게말하고있습니다. 그러자명나라장수는화를내면서 일본이명나라를침략하려면왜굳이조선으로오느냐, 동남연해의강남지방을통해서올라오는것이더빠를텐데, 조선이명때문에왜란을당했다는것은어불성설이다, 그런말을하지말아라 이렇게면박을주고있습니다. 과거왜구시절의경험을통해서명나라로가는길을잘알고있었던일본이굳이조선을침략하여, 가도입명이라고하는슬로건을내걸었지만, 이미 1592년 8월이후로는고니시유키나가 ( 小西行長 ) 가평양에머물면서명으로들어가는것이좌절되었다고생각이됩니다. 그래서가도입명이라는말자체를조선이받아들일리가만무하다는것을일본이모를리가없었다고생각합니다. 만약그것을알면서도감행했다면조선의역량을대단히낮게평가하는것이거나, 아니면대단히무모한것이거나이둘중의하나라고생각이됩니다. 그래서제의견은영토확장과관련해서이것을받아들이면서도과연일본이명의영토를노렸다고한다면, 조선보다는중국의강남지방에상륙해서영파를거쳐서북상하는것이당시로서는현실적이아니었을까이렇게생각합니다. 따라서가도입명이라는것은어디까지나슬로건이었고, 그것을통해서결국지향은있었다고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임진왜란이라고하는것은조선영토를노리기위한영토확장설의연장선상에있지않았나, 제개인적으로는이렇게생각합니다. 제의견은일단이렇습니다. 이계황 : 보충설명을해도될까요? 사실임진왜란의원인론과임진왜란의목적이무엇인가에대한문제는분리되어야함에도불구하고이제까지원인과목적이동일한상태에서판단되고있는것이현실입니다. 따라서전기보고서에도임진왜란의원인 목적이라고하는부분이항목이나옵니다. 기본적인상태에서영토확장설이라고한다면그원인은어디에있는가하는문제가가장중요한요인으로판단되어야겠지요. 그러니까그냥영토확장설이라는것자체가중요한것이아니라그원인은어디에있는가하는문제가기본적으로임진왜란의원인이될것이라고판단하고있

184 15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는것입니다. 따라서외국을침략한다는것이명이됐든조선이됐든관계가없었다고보입니다. 따라서히데요시의최종목적이명에있었다든가조선에있었다든가하는것은그이후의이야기입니다. 따라서우리들이원인론을분석할때도요토미정권의내부문제를정확하게확인하는것은대단히중요한작업이라고생각됩니다. 그것도초기의문제와중기의문제, 다시말하면초기에언급된부분과실제침입할때의정치상황내지는여러가지변화상을아주세밀하게판단하지않으면안되리라보입니다. 그런의미에서임진왜란원인에대한문제는조금더추구되어야할부분이라고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임진왜란의원인론에관해서이야기를했습니다만, 좀늦어진것같은데공명심이냐영토확장이냐, 어떤결론은나지는않지만상당히원인론이규명이좀되어가는듯한느낌을받았습니다. 다른분질문있으시면해주십시오. 이계황 : 제가질문하겠습니다. 구와노선생님의임진왜란원인에대한언급이있었기때문에이문제에대한약간의보충설명내지는질문을하겠습니다. 대명외교의기조가감합무역체제에있고그부분에대한학설을밝힐때 후지키설 ( 藤木說 ) 을인용하고있습니다. 히데요시가명중심의감합무역체제에대한이해가대단히부족했고그에따라서임진왜란이발생했다고말씀하셨습니다. 후지키설 에있어서의히데요시의조선이해는대단히부족하다고생각하고있지만, 기본적으로이문제와관련해서후지키선생님이설명하고있는것은 조선은총무사령 ( 惣無事令 ) 의대상 이라는입장을취하고있습니다. 따라서대명외교는감합무역으로이해했는지는별도로치더라도조선과의관계의의미는후지키선생은달리보고있지요. 후지키선생은이문제를외교관계의중층성으로표현하고있습니다. 후지키설 에서감합무역의근거로서제시한것은류큐에전달한문서를가지고증명합니다. 따라서임진왜란의원인이감합무역의부활이라고하는부분에서는논리적으로는모순이발생한다고생각합니다. 즉대명무역에있어서의감합무역의부활이라고하는측면과그다음에총무사령에있어서의기본적인선에서는통일전략의위치로서의조선의위치, 통일전략의연장으로서의조선의위치라고하는부분은분명히

185 좌담회토론문 159 있지요. 따라서이문제를감합무역설이라고하는부분으로서임진왜란의원인으로서바로직접적으로연결시키기에는논리적모순이있지않나생각합니다. 물론이것은구와노선생님의문제가아니라후지키선생님의문제라고생각하고있습니다. 후지키선생도사실은감합무역설로이야기하고있습니다. 따라서우리들은이문제에대한논리적인검토가더욱더필요하지않나하는것이저의생각입니다. 이에대해서구와노선생님의견있으시면말씀해주시기바랍니다. 구와노 : 제가감합무역설을전면적으로밀고있는것은아닙니다. 단지역시원인론에대해서이제까지감합무역부활설이라든가혹은공명설이라든가영토확장설이라든가여러가지로논의가분출되고있습니다만, 역시한가지만을말하는것은아닐것이라고생각하고있습니다. 최근에읽은책입니다만, 정두희선생외편의 임진왜란, 부제가 < 동아시아삼국전쟁 > 이라하여 2007년책입니다만, 최근일본에서도이것이 1년지나서번역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실은책제목이조금바뀌어서 임진전쟁 으로굳이제목을바꾸었습니다. 그가운데에서제논문에서소개는지금현재는하지않았지만, 윌리엄부트 (Willem J. Boot) 라는네덜란드라이덴대학의선생님이재미있는것을썼는데, < 조선정벌기 의속의임진왜란 > 이라는논문속에히데요시의동기에관해서언급하고계십니다. 그선생님의논문에따르면최초의계획이있었고, 그것이실현이어렵다는것을알게되었을때에히데요시가제2, 제3의계획을착상하거나혹은승인하거나했다고. 그히데요시의계획이라는것은중국이향수하고있는중심권력의지위를일본의것으로한다고. 제2의계획은조공관계및감합무역의부활과히데요시의일본국왕책봉을필요로하는상황을다시만들어내고자하는시도, 결국이것도실패하여정유재란이라고할까요, 최종적으로는제3의계획으로서조선영토의할양을노리고재출병한다는것이됩니다. 그러므로히데요시는아마도처음에여러가지계획이있었고, 단순히생각하면영토확장설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잇따라실패하면서, 그것을수정해가는것이됩니다. 그것은복수 ( 複數 ) 의생각이있었고, 이제이것은무리다, 그렇다면이것으로가자 는식으로해나갔다고, 그러한가능성도있는것이아닐까하고. 그렇다면감합무역설도없는것은아니다라는말이됩니다만. 이것이다 하고하나로좁힐필

186 16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요는없는것같은생각이듭니다. 스카와 : 그러면앞서이름이나온 류성룡과임진왜란, 그임진왜란의원인에대해서저도약간생각한적이있습니다. 감합무역부활설이라는것이있는것은알고있었지만, 당시만약감합무역이부활했다고하여, 이미구와노선생님께서아까말씀하신것처럼, 일본은 10년 1공이어서, 전혀이익이없습니다. 그래서이미 1590년대를생각하면포르투갈인이중국산생사를가지고일본에끊임없이들어오고있습니다. 혹은중국인도밀무역이기는하지만, 일본에많이오고있습니다. 그러므로단순히무역으로중국상품을입수하겠다는경제적인동기만으로설명하려는것은상당히무리가있을것이라고, 그렇기때문에영토의확장이거나, 혹은중국이점유하고있는동아시아지역에서의우월한지위, 이에대한조선이라는것으로봐야할필요가있는것이아닐까하고생각하고있습니다. 아까도한선생님이말씀하셨던직접중국의수도쪽을바다로부터공격하는것이빠르지않았겠느냐는논의입니다. 실은저도임진왜란에관련된이야기를했을때에그러한질문이한국의토론자로부터나왔습니다. 제가대답한것은당시의일본의조선 ( 造船 ) 및해운기술로생각하면, 수만명의군대를바다너머로보낸다는것은매우어려운일이아닌가입니다. 일본과한국, 게다가쓰시마를경유해서라면짧은거리를셔틀로몇번이고왔다가갔다가하는것이므로상당한세력의군대를보내는것도가능하겠지만, 중국의영파까지수만명의군대를보내게되면, 상당한수의군선이필요하게됩니다. 그것은당시의일본수군의능력으로보아우선불가능할것이기때문에직접중국의수도를공격하는것이아니라하기쉬울것같은육로경유라는길을택한것이아닐까라고답변을한기억이있습니다. 제가이임진란의원인문제에관련하여이야기할수있는것은이정도입니다. 구와노 : 그렇기때문에그러한의미에서역시길을빌린다는것은맞는말이지요. 선박의능력이있어서, 때문에영파까지는너무긴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쓰시마를경유해서조선에가지않으면중국까지는갈수없다는그러한현실적인배의능력에서보면, 가도입명이라는것은그렇게하지않을수없었다고할까, 굳이정당화하는것은아니지만, 배의기술적인문제도있는것이아닐까하고생각합니다.

187 좌담회토론문 161 이계황 : 그러니까목표로서의명을기록한문서는많지요. 많은데, 그많다고하는부분이진실을이야기하는가, 다른부분을이야기하는가의부분이지요. 내부문제에의해서전쟁이필요하다고치면그것이명이됐든조선이됐든관계가없는것이지요. 명에대한목표를가지고있었다는부분에대한의미를과대평가할필요는없다는것입니다. 한명기 : 제가질문이하나있는데, 일본에서천자문이읽히기시작한게언제부터인가요? 구와노 : 백제로부터왕인박사가 라는전설이있습니다. 한명기 : 그러면임진왜란이전부터천자문이일본에서도상당히읽혔었겠지요. 제일상식적인이야기가뭐냐하면천자문에보면가도멸괵 ( 假途滅虢 ) 이라는말이있습니다. 중국고전에서괵나라에게길을빌려달라고했다가괵나라가빌려주니까괵나라가망했어요. 그것이가도멸괵입니다. 가도입명이나가도멸괵이나논리적으로는똑같다고봅니다. 아마제생각에는조선사람들이가도입명이라는말에알레르기반응을보였듯이일본전쟁지휘부도가도입명이야기에맞춰이것이씨도안먹힐것이라는것은분명히알고있었을것이지요. 가도입명은길자체를빌린다는명분에서는분명맞지만그것이과연명분이상의것이었겠느냐, 그부분에대해서는역시명자체로넘어가는것은결과적으로무리였고 1592년 8월부터는일본의의도가역시조선영토쪽으로줄어든것이아니냐, 저는그게더합리적이지않았나하고생각합니다. 손승철 : 제가한가지만, 주로원인문제를지금이야기를듣고있는데, 구와노선생님발표는국제관계를망궐례를통해서파악했다는게대단히새로운연구방식이아니었나이렇게생각합니다. 그런데이제하나여쭙고싶은것은임진왜란직전, 그리고임진왜란당시, 그다음에임진왜란후에망궐례에어떤차이점이있는지여쭤보고싶고, 또하나는최근에수정해서보내신빨간글씨부분을보면히데요시가책봉사를일본에불러들였는데히데요시의책봉에대한진심이무엇이었는가에대한내용이그뒤에선명하게밝혀지지않은것같아서, 그두가지만간단하게설명

188 16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을부탁드립니다. 구와노 : 우선말이지요, 임진왜란이전과임진왜란중, 그리고임진왜란이후의망궐례의특징이랄까변화가있는가하는점입니다만, 임진왜란이전에대해서는실은조금어려운점이있습니다. 선조실록 자체가기록이누락되어있습니다. 단, 누락되어있는가운데에서도적어도 < 표 2> 에실었습니다만, 대체로정기적으로는하고있습니다. 이것은기록상에남아있는현존사료만으로도이만큼은있었다는말이됩니다. 임진왜란중에는이것이특히한성을탈환할쯤부터상당히자주, 이제까지이상으로열심히망궐례를하게됩니다. 재조의은 ( 再造의恩 ) 이라는것을강조하게되어갑니다. 임진왜란후가되면더욱그렇게됩니다. 본래는이망궐례라는것은중국황제의생일, 그리고황태자의생일, 설, 그리고동지, 이렇게 4번하게되어있습니다. 그런데그것이본래의규정입니다만, 예를들면선조 39년 4월에는천추사 ( 千秋使 ), 즉중국황태자의생일을축하하는사절을북경에파견할때에이망궐례를행하고있습니다. 사료로말하면 56번째가됩니다. 그리고같은해게다가같은달인 3일후 4월 29일에는성절사 ( 聖節使 ) 를북경으로파견하는데, 그때에도망궐례를하고있습니다. 예외적인것이지만, 이것은본래의규정에는없는것이며, 그러므로명에대한, 황제에대한은의 ( 恩義 ) 라는것이점점증폭된결과가아닐까생각하고있습니다. 그래서제가본래왜이문제를다룰생각을갖게되었는가하는점입니다만, 조선왕조후기의이른바소중화의식이라는것의원형을파헤져보고싶다는마음이있었습니다. 조선왕조후기가되면조선국왕은명의최초의황제인홍무제, 그리고임진왜란때에원군을파견한만력제, 그리고명의최후의황제숭정제, 이세명을기리는의례를창덕궁뒤에대보단이라는시설을만들어서그곳에서합니다. 그러한발상이어디에서오는것일까? 갑자기조선후기가되어서명의황제를기린다고할경우에무언가역시모델이있었다고생각합니다. 그것이저는실은망궐례라는의식이아닌가하고생각했습니다. 이것을계속해왔기때문에자연히훗날의조선왕조후기에도 분로쿠 게이초의역 의기억이있고, 게다가명이멸망하고청이등장하면, 그러한아시아의움직임속에서우리가실은중화 ( 中華 ) 가된것이라는그러한점에서조선중화의식이높아집니다만, 그원형이어디인지를더듬어가면이러한의례를하고있었기때문에조선왕조후기의대보단의제사로이어지는것이

189 좌담회토론문 163 아닌가하고, 그러한가설과같은것이있어, 이문제를다루겠다고한것입니다. 또한가지질문이실은어려운것입니다만, 책봉사를왜히데요시가받아들였는가하는점인데, 아마도히데요시는책봉이라는것을잘알지못했기때문에, 책봉사의의미도알지못했던것이아닐까? 책봉된다는것은명의황제의신하로들어간다는그러한시스템을알지못했던것이아닐까? 분로쿠 게이초의역 직전에는조선으로부터통신사가옵니다. 그것도슬쩍바꾸어서오고있지만, 그는그를복속사절이라고생각했습니다. 강화조건이정리된시점에서책봉사가일본에오고, 히데요시앞에오는데, 어쩌면히데요시는예전의조선사절을복속사절이라고착각했던것처럼, 명으로부터의사절도복속사절이라고착각했던것이아닐까생각합니다. 그렇기때문에기뻐하며가운을입거나기뻐하며모자를쓰거나어쩔줄몰라하는것을보면, 역시책봉의의미를잘모르고있었기때문이아닐까생각하는것입니다. 단, 히데요시가책봉사를어떻게받아들였는가하는기록이어느정도남아있는가이것이문제이기때문에, 어디까지나저의상상의범위를넘지않는그러한약점은있습니다만, 그렇게되면역시정식적인기록이외에훗날에남는전기물 ( 戰記物 ) 이나그러한가운데서찾아내는방법밖에다른수단은없을것이라고생각합니다. 단, 그렇게해도그것은어디까지나군기물 ( 軍記物 ) 이어서역사와는다르기때문에, 좀처럼히데요시가무엇을정말로생각하고있었는가하는것은조금어려울것같은생각이듭니다. 손승철 : 네, 잘알았습니다. 시간이꽤됐습니다. 지금 11시반인데마무리를해야되겠습니다. 두번째주제의관심사가임진왜란전후의국제관계, 그것이원인문제였는데, 기존의연구사를정리했고, 두분위원님들의발표를통해서명확한결론을낼수는없겠지만, 원인문제에대해서상당히심도있게이번에다룬것이아닌가이렇게생각이됩니다. 특히망궐례라든지히데요시의책봉문제를통해서당시의국제관계, 국제인식이어땠는가하는것도부수적으로검토가되었고또원인문제에관해서단순하게가도입명이라든지또공명심, 영토확장, 감합무역이런것들이상당히심도있게다루어지지않았나하는생각이듭니다. 아마계속공동연구가진전이된다면다음에는이런문제가더심도있게다루어지지않을까, 그런기대를하면서두번째주제의좌담회를마치도록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90 16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 제 3 주제 > 17~18 세기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 - 통신사와왜관의의미를포함하여 - 손승철 : 마지막 3번째주제좌담회를시작하겠습니다. 제3주제는 <17~18세기동아시아세계와한일관계-통신사와왜관의의미를포함하여-> 였습니다. 이주제에관해서는일본측에서만왜관연구사를야마구치씨가발표를했고주제발표에관해서는스카와선생님과한명기선생님이해주셨습니다. 그러면먼저스카와선생님과한명기선생님의보충설명을듣고, 그리고간단한좌담회를하겠습니다. 스카와 : 시간문제가있기때문에짧게하겠습니다. 일본에서의 17~18세기동아시아해역, 그곳에서의일한관계의연구라는것입니다만, 지금까지그러한분야를연구해온사람들은기본적으로일본사연구자였다고생각합니다. 70년대정도까지의일본의대외관계이미지라는것은기본적으로는에도시대는쇄국을하고있었다, 그러나나가사키에서는무역도이루어지고있었다는것같은이미지였다고요약할수있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 80년대에들어오면예를들면다시로가즈이 ( 田代和生 ) 선생님의쓰시마 조선의무역연구라든가혹은아라노 ( 荒野 ) 씨의 4개의창구 론이라든가여러가지연구가새롭게제시되게되어, 단순한쇄국이미지에서일본은제한적인대외관계를확실하게갖고있었다고하여, 거기에서해금이라는말이사용되게되었습니다. 그런데이번에는 90년대후반에들어가면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이제시한글로벌히스토리라고할까, 유통면에서의지구적인규모의교역, 그러한분야, 연구동향에영향을받아서, 혹은그것을받아들여서특히 16세기중반부터의은, 이것이주목되게됩니다. 그것이급속한상업의활성화를동아시아에가져와서, 그것이 17 세기말정도가되면다시또안정적으로되게된다는것이최근의논되어있는것입니다. 단, 저는원래경제사를하는사람으로이번의그주제가원래제가하고있는것에서상당히벗어나있는점이있었기때문에연구하는데에상당히고생했습니

191 좌담회토론문 165 다만, 역시일본에서의연구라는것은아무래도경제관계혹은대외무역관계, 그부분의연구가매우많지않나, 그런이미지를갖게되었습니다. 그런데그에반해서실제 17~18세기의일한관계라는것을생각해보면, 조금다른각도가필요한것이아닐까하고생각하고있습니다. 이미사에키선생님의보고에서도지적이나온부분인데, 중국을중심으로하고있는동심원적인화이질서라는종래의도식, 이것은오랫동안그러한것이라고받아들여져왔지만, 그러나그러한단순한것이아니라제각기자국중심으로그나름대로의화이질서적인의식, 상하 위상관계를그리고있었던것이아닌가하는것을생각하게되었습니다. 특히일본의경우에는예를들면중국의예부, 조선에서의예조에해당하는외교의례를담당하는관청이에도막부에는존재하지않습니다. 그렇다고한다면당시의일본은그외교라는것을어떻게이해하고있었을까? 또그막부의중추가안고있었던국제관계, 질서의식이라는것은대체어떤것이었을까? 그리고막부가직접관계를갖고있는것은실은네덜란드인뿐입니다. 중국과는정식적인국교가없지만, 나가사키에오는중국인과무역을행하고, 게다가이무역의막부의대리인과같은형태로무역을담당하거나혹은외교라고할까실무적인부분이지만, 그것을담당하고있었던것은당통사 ( 唐通詞 ) 라는세습적인관리입니다. 재미있는것은그들은실은중국인출신입니다. 4개의창구 라는말로말씀드리자면, 마쓰마에, 아이누, 이것은마쓰마에번에완전히맡겨버린다, 조선과의관계는기본적으로는쓰시마가담당한다, 류큐와의관계는기본적으로는사쓰마가담당한다는것입니다. 그렇게되면직접막부의지위가있는나가사키부교 ( 長崎奉行 ) 와같은관리가지시를내리거나혹은도중에중개하는사람이들어가는데, 관계를여러가지로갖거나혹은직접쇼군 ( 將軍 ) 이있는곳에인사하러오는것은실은네덜란드인뿐입니다. 네덜란드인을막부같은누대 ( 累代 ) 의신하라고보고있었습니다. 그와같은막부의외교, 혹은국제관계의양상이라는것은예를들면조선왕조가생각하고있는것같은외교의모습이나중국왕조가생각하고있는것같은외교의모습과는상당히이질적인것이아니었나하는점을깨달았습니다. 그러한것을조금추가점의하나로서말하고싶습니다. 또한가지그후에조금공부하고알게된것인데, 17~18세기, 특히크리스트교를금지하거나외국인과의사이에서태어난아이, 특히서양인과의사이에서태어난어린이를루손으로추방하는것을 17세기초에행합니다. 17세기라는시기가그

192 16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러한가운데막부의위광 ( 威光 ) 이라고할까, 그지배하에있는, 지배에종속된사람들이라는것으로일본인같은것을형성하는시기였던가하는생각이좀들었습니다. 이것은한국쪽에서보면, 17세기초의울산호적에서본관이흑룡강이라든가大元혹은降倭와같이출신이다른것으로보이는사람들을찾아볼수있습니다. 그런데그후인 17세기말, 18세기의호적에는그러한사람들은없습니다. 또임진왜란의기억이라는것이남아있는가운데부산의왜관에는여자가절대관계되어서는안된다고하였습니다. 물론안에있는것은쓰시마로부터온남자들뿐이며, 또조선여성이그남자들과무언가관련이있었을경우에는사형에처해진다고했습니다. 그런데, 그이전의예를들면삼포에왜관이있었던시대에는그렇게까지엄격했을까하는것은좀의문스럽게생각합니다. 역시한국에서도 17세기경에한국 조선인이랄까한국인이랄까, 단순한에스닉한, 예를들면하는말이나복장이아니라, 어떤공통의식과같은것이형성되어가는것이아닐까하는생각이좀들었습니다. 이것이두번째입니다만, 두번째의이야기는아직전혀실증적으로말할수있는것이아니고, 앞으로생각해보고싶은과제라고할수있는부분입니다. 제추가적인이야기는이상입니다. 손승철 : 감사합니다. 한선생님. 한명기 : 저도주제는스카와위원님과똑같습니다만, 기존에이미 17, 18세기문제에대해서는일본과한국에서한일관계사연구자들에의한많은연구가있습니다. 왜관과통신사를축으로하는기존의연구들이굉장히많고그것은대체로한일관계, 조일관계를축으로해서왜관과통신사의발생부터전개, 종료과정까지상당히상세한설명이이미이루어져있습니다. 그래서저는그같은기존의연구성과에의지해서논지를전개시키지만그것과전혀다른새로운성과를더하기는어려운상태에있습니다. 그래서기존의연구자들이그다지깊은관심과노력을기울이지않았던다른측면에서왜관과통신사문제에접근해보고자합니다. 그것은구체적으로말하면조선이처해있던지정학적인조건에좀더주목을기울여서 17세기대륙에서의명 청교체가조선의대일관계에미친영향을고찰하는것입니다. 좀더구체적으로는 17세기에있어서대륙의명 청교체가조선의왜관대책그리고통신사문제에대한대응에서어떤구체적

193 좌담회토론문 167 인영향을미쳤는지를살펴보고자합니다. 임진왜란을거치면서조선은일본관계를펼쳐나가면서명 청과의관계를특히고려하지않을수없었습니다. 잘아시는것처럼일본에대한적개심이대단히높았음에도불구하고 1609년에국교를재개하고광해군정권이유화적인대일정책을썼던것에서명백히드러난다고볼수있습니다. 저는그런대일적개심이완화되고심지어는역전되는상황과관련해서조선에서의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을일단주목하고자합니다. 최근에확인한자료에따르면 1619년까지도조선에서는대일적개심이대여진, 대청적개심보다는훨씬높은것으로나와있습니다. 그런데확실한것은인조반정, 정묘호란을계기로해서대일적개심은상당부분밑으로사라지고청에대한적개심이표면에드러나는것을확인할수있었습니다. 그래서일단우선은이두전쟁호란을계기로해서대청적개심과대일적개심이역전된다는측면을좀더구체적으로검토하려는계획을가지고있습니다. 특히병자호란을계기로해서는대일적개심은상당부분저류로돌아가고대청적개심이사회전반에퍼져가면서그것이북벌이라든가그런청에대한대항정책으로이어지는것을또한확인할수있었습니다. 그런구체적인측면을당시의주요한인물들의문집이라든가그발언을통해확인하는측면을보충하고싶습니다. 그런데조선의대청관계가어느정도안정된시기가되는 18세기이후에가면역시대일적개심과대일관계의중요성을다시생각하자는논의가다시표면으로떠오르는것을알수있습니다. 장차보완하고좀더구체적으로설명을드리자면이른바북학이라는것이등장할때대일인식혹은그것과맞물린대왜관정책, 대통신사에대한대응은어떤방식으로변화하는지또그것이어떻게연동되어있는지그것을좀더살펴볼생각입니다. 그리고기존의연구에서별로관심을기울이지않았던조선의왜관에대한인식, 정책이것을연결시켜서대일정책과대청정책그리고대일인식과대청인식이서로상호밀접하게연동되어있다고하는일종의가설을한번세워볼까생각하고있습니다. 이러한작업을통해서 17 18세기동아시아 3국관계가서로상호밀접하게연동되어있다고하는측면을다시한번환기시키려는의도가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손승철 : 고맙습니다. 두분선생님의보충설명이있었습니다. 다른선생님들께서두

194 16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분선생님들께질문을해주시기바랍니다. 사에키 : 한가지괜찮겠습니까? 한명기선생님께질문하겠습니다. 한명기선생님의보고는한일관계를동아시아전체에서파악하고자하는매우폭넓은시점에서파악하셔서상당히많은공부가되었습니다. 특히조선의일본에대한정책혹은왜관에대한정책이, 조선의대청관계와매우밀접한관계가있다는설명을해주셔서, 큰공부가되었습니다. 그러한큰관점에서왜관을자리매김하는것은성공하셨다고생각하지만, 또한가지, 이왜관그자체를매우미시적, 작은관점에서바라보는방법도있을것으로생각합니다. 예를들면왜관에서는일본인통사 ( 通詞 ), 통역과조선인통역이실제로외교라든가무역을실질적으로움직이고있는측면도있는것이아닐까하는것입니다. 그러한미시적인부분을어떻게의미를부여할수있는가하는것에대한생각을듣고싶습니다. 한명기 : 사에키선생님말씀감사합니다. 말씀하신것처럼왜관이라고하는것이조선의대일정책에서일선창구역할을했고, 또조선에거주하는일본인들을통제하고규제하는장소로서의의미에대해서는저도동의를하고있습니다. 그런데역시시간이지나면인간의생활이라는것이정부차원에서규제하고통제하는장소이기도하지만, 필연적으로는그지역의주민들끼리접촉하고서로의연결이이어지는장소로서의기능도역시쭉계속되었다고생각합니다. 하나추가하고싶은것은역시조선은실질적으로는왜관의존재를사실은탐탁지않게여겼던것은그뒤의시기까지똑같았던것같습니다. 왜냐하면왜란의기억이라는것이상당히오래갔기때문에그왜란의기억에도불구하고안팎의여러가지악재때문에어쩔수없이왜관을유지해야된다고하는생각만은 20세기까지변함이없지않았나저는이렇게생각하고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계황 : 사실은스카와선생님의발표를듣고글로벌히스토리의관점에서여러가지를배웠습니다. 또한우리들이보통보면지나치기쉬운여러가지문제점도대단히유용했습니다. 대단히공부가되었습니다. 우리들이임진왜란이후의한일관계를이야기할때일본사의입장에서설명하는법, 보통일본에서이야기하는방법에대한문제를생각할때, 대외관을생각할때,

195 좌담회토론문 169 일본형화이의식 아사오나오히로 ( 朝尾直弘 ) 선생의 1960년대작품입니다만, 이로부터소위 일본형화이질서, 아라노야스노리 ( 荒野泰典 ) 선생의관점으로의이동, 그로부터 쇄국문제론 에대응하는또하나의 4개의창구론 을보통이야기합니다. 아사오선생이이와같은문제를제기하는방법은사실은일본국내를통치할수있는능력, 소위무위 ( 武威 ) 라고하는개념과무관 ( 武官 ) 이라는개념을동시에사용해서이문제는사실내향원리, 일본인에대한논리로서의제기였습니다. 이것이어떠한형태로인지 일본형화이질서 로전환되는부분이아라노야스노리선생의관점입니다. 아사오나오히로선생과아라노야스노리선생의기본적인공통점은명과대치하는일본, 즉명과일본의대등이라고하는부분을기본적인부분으로생각하고있습니다. 그런구조속에서일본과조선의관계는일본이우월한지위를가지고있다고하는부분을일단은바탕으로하고있습니다. 그와같은부분에서화이질서론으로넘어가면결과적으로일본과조선의위치는일본이우위의입장이라는부분을표명하고있습니다. 질서라고하는말은사실은실질적이고현실적인부분이어서상호규정성에대한문제라고생각합니다. 그와같은위치에서 4개창구론 을주장합니다. 조선의경우도사실은소중화의식의입장을표명하고있는것도사실입니다. 예를들면임진왜란후의국교재개수단에서쓰시마는기미 ( 羈縻 ) 의위치에서있습니다. 따라서사에키선생님이주장하신소중화의식은대단히중요한부분으로좀더검토되어야될부분이라고생각합니다. 그러나실제로일본과조선은대등외교로판단할수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4개창구론 이병렬적으로서술될경우소위명과일본의대등성, 조선과일본의관계에서의일본의우위성을바탕으로서술되고있는것을인정할수밖에없습니다. 그런의미에서일본과의대등외교라는부분을충분히생각한다면 4개의창구론 의서술방법은조금더신중을기하지않으면안됩니다. 일본형화이의식 의입장에서일본이조선보다우위에서있다고하는부분은그이전단계에서도이미있었던것이고통신사의위치를조공사라고위치짓는부분에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조선을대등외교를전개하면서도조공사로위치시키는부분은일본내부의문제일본적국내요인에서찾아내리라보입니다. 그런의미에서일본국내에서조공사로위치짓는내부의어떠한부분에관련되어있는가다시말하면국

196 17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내적요인은무엇으로볼수있겠는가하는부분이궁금해집니다. 그부분에대해서 가르쳐주시기바랍니다. 스카와 : 적절한답변을할수있을지잘모르겠는부분입니다만, 막부의일반에대한설명이라고할까, 일반에대한이야기의태도는역시 공의 ( 公儀 ) 의위광이바다저편인국 ( 隣國 ) 까지미치고있다 는사고방식인것입니다. 그런데실제의여러외교의장면에서는대등하게하고있고, 그뿐아니라오히려 18세기초에아라이하쿠세키 ( 新井白石 ) 가지적한것처럼사절등에대한대우가과분하다는의견도있습니다. 또, 일본막부는각종연락편지를로주 ( 老中 ) 의명의로써서, 한국측의예조참판앞으로보냈습니다. 로주라고하는직위는조선으로말하면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필적하는관직이기때문에의정앞으로보내는것이옳지않은가하는것입니다. 즉조선과명의외교관계에서도예를들면조선측의예조가중국명의예부에보낼때에는그보다아래직위의사람에게보내는것이예의입니다. 그런데역으로일본의경우에는위의입장의사람이아래의입장의사람에게보내서대등한관계가된다고말하니, 이것은이상한말이지요. 오히려행해지고있는실제의외교수속은동아시아적인상식내에서, 유교적인감각의상식내에서는일본이격이내려가게됩니다. 또쇼군의칭호를대군 ( 大君 ) 이라고규정했다고, 이것은 대수원군 ( 大樹源君 ) 의줄임말이라는식으로이야기들하지만, 실은대군이라는것이조선에서는국왕의왕자인정적 ( 正嫡 ) 왕자의칭호입니다. 그것을전혀몰랐다고할지어떨지, 이것도좀의심쩍은부분입니다. 그렇기때문에일본이하고있는것이국내에서는어찌된일인지조선통신사는조공사절이라는식으로설명하고있거나그러한의식을가지고있었을지도모르지만, 동아시아의다른외교관습에비추어보면, 일본은오히려조선보다도하나아래에서조선과통교하고있다고하는, 매우모순된일이일어나고있습니다. 그러한것도몽땅포함하고서, 우선은대등할것이라고하는것입니다. 류큐에대해서는전혀다르기때문에, 실제로복속시키고있었던류큐에대해서는다른취급을하고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조선에대해서아래라는듯이말하면서, 실제는대등, 혹은아래의대우에서일본은조선과국교를맺고있었다는것이사실이아닐까하고생각합니다.

197 좌담회토론문 171 손승철 : 점점더이야기가어려워지는데마무리차원에서저는한가지만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의논문스카와선생님이발표하실때도말씀드렸고, 이번에보충설명에도그렇습니다만, 기본적으로전체적으로스카와선생님논문속에서말씀하시는통신사와왜관의역사적의미를부여한다면한마디로어떻게하면좋은지, 왜냐하면그래야이결론이맺어질것같은데, 그부분에대한설명이안되어있는것같아서그렇습니다. 스카와 : 가장곤란한부분입니다, 그것이. 그럼간단하게. 통신사라고해도처음에온것은통신사가아니라회답겸쇄환사 ( 回答兼刷還使 ) 이지요. 그것도포함해서생각하다고해도, 일본으로사절단을보낸다, 이것은역시아주중요한일이라고생각합니다. 즉임진왜란이라는경험을하고, 일본이라는것은어떤나라일까, 제대로확인해야한다, 조선측에는그러한목적이있었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일본측은또다른의도를가지고있어서, 아까이야기에도나온바와같이마치조선이일본에복속되어있어조공사절을보내온것이라는식으로받아들인면이있었던것입니다. 그런데또그것과는별개의차원으로조선의유학, 이에대한일본의유학자들의관심도높은것이었습니다. 그렇게때문에일본의유학자들이통신사로서온사람들과특히그서기 ( 書記 ) 라든가여러가지형태로문필을담당하는사람들이왔는데, 그들과한시문을교환하거나혹은그들인그린그림에시를붙이거나하는일을왕성하게하고있습니다. 오늘날통신사가숙박했던절등에도여러통신사가남긴글등이남아있습니다. 때문에당시의조선정부의정치적인의도혹은일본의에도막부의정치적인의도와는또별개의차원에서학문과문화를서로전하거나혹은다른물건에대해서호기심과관심을가지고생각해보는매우좋은기회였지않았나생각합니다. 나머지는문화적인것으로왜관에대해서생각해보면, 왜관이라고하면그냥그곳에서의무역, 한일 일한에서의무역만이주목되지만, 실은거기에서여러가지서적도샀을것입니다. 어떠한형태로입수했는지는알수없지만, 예를들면류성룡의 징비록, 그런것이 100년도지나지않은시점에서일본에들어옵니다. 그것은당시의이른바조선의군사기밀에속하는것이잔뜩쓰여있었기때문에본래는유출해서는안되는것이었겠지만, 역시왜관을통해서일본으로들어가서일본에서인쇄되어많은사람들이보게됩니다. 그러한측면도있었다는것을이야기해두

198 17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고싶습니다. 손승철 : 혹시말이지요, 막부에서통신사를조공사라고본사람, 그러견해를갖은사람 들이있었다면그런사람들은왜관의존재를어떻게봤을까요? 구와노 : 니혼진마치 ( 日本人町, 일본인마을 ). 손승철 : 같은시기에동남아시아에니혼진마치가있었잖아요. 그러것들과어떻게다르 게인식을했는지. 스카와 : 다를겁니다, 아마. 이것은다시로선생님이쓴것인데, 왜관에일본으로부터쓰시마사절이갑니다. 그러면동래 ( 東萊 ) 의객관 ( 客館 ) 인가요, 그곳에서전패 ( 殿牌 ) 에대한의례를합니다. 그것은마치쓰시마로부터의조공사절이라는형식이되는것입니다. 그런데그것이막부안에서도조금문제가된것같은데, 그러나그것은쓰시마마음대로하는것이었고, 막부의위광과는관계가없다는견해를갖고있습니다. 그러므로어느통일적인그의례의질서라는것이막부의중심부에확실하게예 ( 禮 ) 의질서가존재해서, 그에따라여러가지외교가확실하게순위가매겨져서이루어졌다기보다는그때그때의관계에따랐습니다. 그렇기때문에아까말씀드렸던것과같은조선을아래로보고있는것처럼생각하면서실은외교의의례적으로는일본이더아래가되어있는것과같은모순된일이아무렇지도않게이루어지고있다고생각합니다. 이계황 : 그부분에대해서저도대외관계형성과정이라는부분의요즘논문을썼는데, 아직발표를안했습니다만, 임진왜란이후의동아시아세계라고하는부분을파악할때소위책봉체제라든가조공체제라든가조공사등의이런문제보다는훨씬현실적인외교, 이익을중심으로하는외교로전환되어있다는부분이중요하고, 그문제가임진왜란이가지고있는커다란의의이고, 그에의해서동아시아세계는변형이되었다고판단을내리고, 그에의해서막부의세계를설명하는것이좀더낫지않겠는가라는생각을생각하였습니다.

199 좌담회토론문 173 손승철 : 저는그래서그런경우에조선과일본의외교의정체성을얘기한다면조선왕조는사실외교정책이어떤틀이정형화되어있잖아요? 그런데일본은그렇지않은것같아요. 필요하면실리를주장하고또필요하면거짓말을얘기하고그게병존한단말이지요. 그래서굉장히혼란스러워요. 그러니까어떻게보면모순이고어떻게보면현실성이고. 그래서그것을정의하기가굉장히어려운데, 그런걸좀명확히해주면조일관계의외교의그것이드러날수있을것같은데그부분이항상판단이서지않는것이지요. 스카와 : 그래서실은후마 ( 夫馬 ) 선생님인가요? 그분의연구에서나오는데요, 청조가책봉하고있는나라가몇개있는가, 류큐와조선과베트남이었던가, 그것뿐이었습니다. 3개입니다. 구와노 : 또하나, 시암이. 스카와 : 아, 시암. 그런데그시기에시암은전혀유교적질서같은것과는관계없는나라였고, 베트남은베트남대로자신의나라에서는황제라고해서, 대월국 ( 大越國 ) 말이지요, 독자의연호같은것도사용하기도했습니다. 류큐로말하자면사쓰마의공격이후일본에종속되는형국이됩니다. 그러므로청은그러한것을알고있으면서우선책봉의나라로계산하고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오히려책봉체제라는것을확실하게개념화하고, 도식화하여그가운데자신들을위치시켜서이처럼행동해야한다고하는가이드라인을확실하게만들고있었던것은아마조선뿐이아니었을까? 그밖에제각각마음대로하고있다고. 이른바아까부터나온화이질서라고해도상당히허구위에성립되어있다. 단, 외교의장에서는서로그러한것을국제법은아니지만, 일단은룰로서는존중하겠다. 단, 그에구속력이있는지어떤지는별개라는것이아닐까하는생각을좀하고있습니다. 구와노 : 지금의그후마선생님의논문은지금제가증보판의주석 5번에서인용하고있습니다만, 2페이지아래에주석 5번에 <1609년일본의류큐병합이후에있어서의중국 조선의대류큐외교 (1609 年日本の琉球併合以降における中国 朝鮮の対琉球外交 )> 라는논문입니다. 동아시아 4국에있어서의책봉 통신그리고두절 이라는부

200 17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제목까지붙어있어매우자극적인논문입니다. 후마선생님에따르면청대의책봉국이라는것은조선, 베트남, 류큐 3개국뿐이었고, 기껏해야겨우시암을더해서 4 개국에지나지않는다고말하고계셔서, 이것은매우귀중한의견이아닌가하고생각합니다. 그러므로조금더거슬러올라가서, 제경우에는, 명대인데, 조선왕조의전반기의책봉체제라는것도역시수상하지않은가하고, 상당히허구적인부분이있어서중국쪽에서는, 명쪽에서는그렇게생각하고있을뿐이었고, 현실은어떠했는가를보면또다른문제가되는것이아닌가하고생각합니다. 그리고한가지한명기선생님께질문하고싶습니다만, 이것도간단한것인데, 한명기선생님은논문속에서하나도야마 ( 富山 ) 대학의스즈키노부아키 ( 鈴木信昭 ) 선생님의논문을인용하셔서 < 이조인조기를둘러싼대외관계 ( 李朝仁祖期をとりまく対外関係 )>, 부제가 대명 대청 대일정책과관련하여 ( 対明 対淸 対日政策をめぐって ) 라는논문이있습니다. 그결론부분에서스즈키선생님에따르면인조시대의대일관계는당시가장중요한과제가아니라, 항상대명, 대청관계의연장선상에서결정되었던것이라는것을우선하나지적하시고계십니다. 단, 스즈키선생님의경우에는왜관무역에대해서는앞으로의과제라고본인이말하고있습니다. 그렇다고한다면연구사상에서생각해보면, 이번의한명기선생님의논문은스즈키선생님이하지못한부분을계승한것같은형태가되는것인지요? 한명기 : 그것을조금만더구체적으로말씀해주십시오. 구와노 : 앞으로의전망으로서왜관무역에대한것도생각하고싶다고맺고계시니, 연 구사흐름으로말하면어떻게되는것인가하는생각이들어서. 한명기 : 스즈키교수논문은제가인용차원에서본것이고스즈키선생말씀하고는조금다른차원의이야기를생각하고있습니다. 제가갖고있는생각은왜란이후의대일관계라는것이아까말씀드린것처럼상당히적개심으로점철되어있었는데, 인조반정, 정묘호란그런것자체가조선내부의문제일뿐만아니라중국하고의관계보다큰문제였기때문에, 사실상왜란이후부터 17세기초반까지조선에가해진대륙으로부터의외적압력은대단히컸다는점을우선염두에두고있습니다. 따라

201 좌담회토론문 175 서조선의 1 차적과제는대륙으로부터의외압에대처하는문제가제일컸고, 그것 이대일관계는거기에부수되어있는문제였다고생각합니다. 구와노 : 감사합니다. 스카와 : 아마정치적으로는중국과의관계가가장중요하고, 일본과의관계는어쨌든공격만해오지않으면된다는정도로그다지큰문제가아니었다고생각합니다. 단, 경제적으로보면조금다른측면이발생하는데, 예를들면중국이 ( 조선에 ) 팔지않는여러가지남방산 ( 南方産 ) 물자, 예를들면소뿔말이지요, 물소의뿔, 이것은활의재료가됩니다. 이것은무기의재료이기때문에중국측이수출을인정하지않는다. 대신에왜관의쓰시마사람이조선으로가지고들어온다. 그래서그때문에우각계 ( 牛角契 ) 라는것이생겨나고있습니다. 혹은동 ( 銅 ), 17세기, 1678년부터숙종대에대량으로동전상평통보의주조를시작합니다만, 그재료가되는동은실은왜동 ( 倭銅 ) 입니다. 18세기말이되면국내에서도동이나오는데, 갑산동산 ( 甲山銅山 ) 말이지요. 그때까지조선에서는동전의재료가되는것이실은왜동이라고. 그렇기때문에정치적인관계에서보면그런것은없애버리고싶다고생각하면서도실은역시당시의조선정부가필요로하는여러가지물자의중요한공급원이기도하다고할수있는것이아닐까요? 한명기 : 구와노선생님의질문중에경제적측면교역이있었는데그것을빠뜨렸습니다. 말씀드리고싶은것은스카와선생님이말씀하신것에거의동의를하고요. 하나의예를들어드리면조선은사실상 17세중반까지는명, 청, 일본, 거기에미시적으로는철산앞바다에있던가도, 이 4군데에대한경제적관계가연동되어있었기때문에이것이무역관계가중요하지않다는말씀은아니라는사실을상기시켜드리고싶습니다. 손승철 : 시간이많이경과했습니다. 그래서어느정도이야기가정리가된것같은데오늘이사실은 2분과공식적인공동연구회의는오늘이마지막입니다. 그래서지난 2년간의공동연구활동에대해서위원님들나름대로생각이있으시면, 말씀안하셔도됩니다만, 한마디씩말씀하시면서좌담회및공동연구를마무리할까그렇게생

202 17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각하고있습니다. 특별히앉은순서대로말씀하시면제가총정리하고마치도록하 겠습니다. 구와노 : 이번에는 < 동아시아세계와분로쿠 게이초의역 > 이라는주제하에활동을계속해왔습니다만, 제경우에는이제까지실은일조관계라기보다도조중관계쪽에관심이있었는데, 이번에는조금더확장해서명과류큐와의관계혹은명과일본과의관계로조금더폭을넓혀서생각함으로써제자신으로서도매우많이공부가되었다고생각합니다. 특히조선왕조의위치를생각할경우에류큐라는것이매우중요하고큰역할을하고있었다는것을알았습니다. 한마디로할수없지만, 예를들면연행사라고할까요? 조선에서중국으로사절을파견하는것과마찬가지로역시류큐도사절을파견하고있습니다. 명으로부터는책봉사가온다는것도, 역시조선도그렇고, 류큐도그렇기때문에조선과류큐를살펴보면조금더동아시아속의조선왕조의위치를알수있게되지않을까하고지금생각하고있습니다. 스카와 : 이공동연구를통해서역시한국과일본이역사에대하여어떠한관심을갖는지, 그차이를보다구체적으로느낄수있었습니다. 또각각의연구사를정리하는가운데어떠한것이양국의역사학계에서주제로삼아졌는가, 혹은왜그러한것에관심을가지는것인가를약간알수있게된것같다는생각이듭니다. 그를바탕으로생각해보면, 일본의연구는일본의연구로어떤의미에서는일본을중심으로사물을보는경향이상당히있다고, 이것은역으로한국의경우도그럴것으로생각합니다만, 그러한것을이번에서로상대화하면서서로의견해의차이를깨닫고또한이해하여그사이에논의할수있는길을열수있었다고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에키 : 이번에일본의많은연구자, 그리고한국의많은연구자들의연구보고를들었습니다. 일본의연구자들로부터는다른장르, 시대, 그리고주제의이야기를들었습니다만, 매우폭넓은지식을얻을수있었습니다. 또한국의선생님들의연구보고를많이들음으로해서, 사료의차이, 이것은당연한것이지만, 역사를보는시각의차이를알게되어서, 그러한의미에서매우큰공부가되었습니다. 그러한넓은지식과시각, 다른방법을앞으로제자신의좁은연구속에활용해나가고싶다고생각하고있습니다. 정말로감사합니다.

203 좌담회토론문 177 이계황 : 구와노선생님이나스카와선생님, 사에키선생님이말씀하신부분들이사실모두입니다. 그에덧붙여서말한다면선생님들을만나서여러가지즐거운추억이라든가또는고명하신의견이라든가이런것을들어서대단히기뻤습니다. 그리고또한가지문제는어떻든간에우리들이동아시아라고하는부분에대해서동일성또는그와같은동일한추구점등을공감하게되어서앞으로학문적인교류도하고싶고, 그러기를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명기 : 저도모두들말씀하신것처럼이역사대화가대단히유익하고즐거운경험이었다고생각합니다. 그리고이공동연구위원회의출발은다른계기를통해서이루어졌지만학문적으로이야기할수있었다는것은굉장히중요한기회였다고생각합니다. 앞으로생각은왜구, 임진왜란, 왜관, 통신사와같은기본적인쟁점에대해서확실한입장정립도중요하지만, 앞으로는이런문제들을모두포괄하는차원에서한중일 3국의역사상을구체적으로종합적으로그려낼때가되지않았는가, 그래서그것과관련해서동아시아 3국의구체적이고역동적인관계그리고그것과맞물려있는관계인식에대한연구를함께해서귀납하는것이필요하지않을까이런생각을했고요. 좀더구체적으로말씀드리면이제는책봉체제라는틀을넘어서는새로운구조나틀을찾아내기위한노력을고민을기울여야될시기가되지않았나생각합니다. 손승철 : 고맙습니다. 저희 2분과에주어진주제가중 근세한일관계사분야의공동연구였습니다. 특히쟁점주제인왜구라든지, 임진왜란, 통신사, 왜관, 이런것을중심으로해서아주포괄적으로그동안공동연구가되었다고생각합니다. 그래서쟁점주제뿐만아니라폭넓게연구사정리를했고, 또주제발표논문을했고, 무엇보다도사료해제집을냈다는것은앞으로이분야연구에커다란기여를하지않을까생각합니다. 나름대로몇가지성과를이야기한다면우선중점이되고있는왜구구성에관해서한일양측에서상당히근접된의견이, 견해가제시가됐고, 그리고임진왜란원인에관해서도보다구체적으로심도있게다루어졌고, 또왜관과통신사문제도동아시아전체의틀속에서조명을해보자, 그리고무엇보다도이제한일관계사를보는시각을새로운방식으로해가야되지않나, 예를들어책봉체제에대한인식같은것에대한새로운방법, 또왜관이나통신사를보는데도거시적이고미시적인

204 17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관점이다동원되어야겠다는제안들이있었습니다. 이러한제안들은앞으로보고서가발표되면많은연구자들에게새로운연구계기가마련되지않을까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저희 2분과에서는그동안기본적으로서로상대측을상호이해하고또신뢰하고존중하면서연구가정말심도있는연구가진행되었고, 그리고그러한연구활동을통해서우정도싹트지않았나이렇게생각합니다. 그래서어쩌면앞으로계속될한일역사대화의하나의공동연구모델이되지않을까, 이런기대를하면서현재진행되고있는한일역사갈등해소에하나의계기가되었으면좋겠다, 이런바람을공유하면서그동안의연구를모두마치도록하겠습니다. 그동안고생많이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끝 )

205 제 3 부연구사편 모리히라마사히코 10세기 ~13세기전반麗日關係史의諸問題 나카다미노루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아라키가즈노리 16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나카노히토시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야마구치가요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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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關係史의諸問題 - 일본에서의연구성과를중심으로 - 모리히라마사히코 ( 森平雅彦 ) Ⅰ. 전반적상황 Ⅴ. 통교기록의감소와그실태 : 12세기 Ⅱ. 신라상인과신라해적의실체 : 9세기 Ⅵ. 進奉貿易과초기왜구 : 13세기전반 Ⅲ. 초기 냉랭한 관계 : 10세기 11세기전반 Ⅶ. 과제와전망 Ⅳ. 교역의성황과九州在地社會 고려왕권 : 11 세기후반 Ⅰ. 전반적상황 일본에서의麗日関係史에관한연구는明治期로거슬러올라가는긴역사를가지고있다. 그러나고대나조선시대의한일관계사연구와비교하면그다지활발하지않다. 그중에서도元 高麗軍의日本侵略 ( 朝鮮史上의甲戌 辛巳의役, 1) 日本史上의文永 弘安의役이나前期倭寇로장식된 13세기후반이후에비하여본고가대상으로하는 13세기전반이전에대해서는극히적은상태이다. 게다가그대부분은일본사분야의연구자에의한업적이며, 한국사분야의연구자에의한성과는일부에불과하다. 그때문에대일관계가당시의고려사회에있어서어떠한역사적의의를가졌는가하는점에대해서는많은부분이해명되지않거나검토되지못했으며, 그점은麗日関係史를체계적으로이해하는데커다란장애가되고있다. 또일본사분야에서의연구에관해서도專論이적 1) 년의對日戰役 ( 대일전쟁 ) 에관한한국사에서의호칭에대해서한일양국의학계에서는정해놓은용어가없는것으로생각되는데, 필자는 고려사 권 31, 忠烈王世家 20 년 (1294) 正月癸酉의 甲戌辛巳兩年之役 이라고하는기재에근거한용어를사용하고있다 [ 森平 2009].

208 18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고, 단편적인논급이나개설적인서술에그치는경우, 혹은일본의대외교섭사를日宋関係중심으로논하는가운데부수적으로취급되는경우가대부분이다. 이처럼연구가양적으로도질적으로도부족한이유로는다른시대에비해현저한국가적사건이적고사료도부족하기때문에좀처럼주목받기어려운점, 또현재는일본에서고려사연구자가적은점등을들수있겠다. 하지만한국의역사학계에서도麗日関係史, 특히 13세기전반이전의연구는가장저조한연구분야중하나이다. 다만 1990년대이후일본의대외관계사연구에서一国史観의극복이지향되고海域史 海域交流史의시각이깊어짐에따라麗日関係史연구에도새로운기운이생겨나고있다. 그리고이에자극받아한국에서도새로운업적이나오고있으며, 근년에는일본의일본사연구자측에서도해외의성과를적극적으로흡수하게되었다. 또이러한硏鑽을뒷받침해주는착실한기초작업으로서다양한여러가지자료집 [ 石井 川越 1996 ; 対外関係史総合年表編集委員会 1999 ; 張 2004 ; 武田 2005 ; 김기섭외 2005 ; 金 2006] 이韓日에서잇따라간행된점도크게중시해야한다. 특히対外関係史総合年表編集委員会 [1999], 張東翼 [2004], 김기섭등 [2005] 의작업은한국사연구자에대하여일본사료의적극적이용의길을열었다는점에서획기적인의미가있다. 이하본고에서는일본어로발표된성과를중심으로 10세기 13세기전반의麗日関係史에관한연구상황과논점의소재를확인하고자한다. 다만반드시專論이아닌저술의단편적이거나개설적인언급이검토대상의대부분을차지하는관계상, 시계열에따라연구동향을정리하는것에적극적인의미는별로없다. 그래서주요한논점마다연구상황을개관하는형태를취하고있다. 그리고본문에기록한연구업적의간행년은모두최근에수록된문헌에근거하고있다. 初出年과크게다르고, 연구의시간적흐름을이해하는데혼란을초래할지도모르지만, 初出후에대폭개정되어최종원고를참조해야하는것도적지않아서편의상이러한방식으로통일하였다. 初出정보에대해서는말미의문헌일람을적절히참조하기바란다. Ⅱ. 신라상인과신라해적의실체 : 9 세기 麗日관계의역사적성격을찾는데에는그전제중의하나로 9 세기에있어서신라상

209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83 인과신라해적의실체에관한논의를회고해볼필요가있다. 주지하다시피, 8세기에신라와일본의외교관계가냉각화로바뀌게됨에따라 9세기에는신라상인이大宰府등西日本의연안지역을찾아오게된다. 청해진 ( 현 한국전라남도완도 ) 과赤山 ( 현 중국산동성石島 ) 을거점으로당-신라-일본간의해상교통에커다란영향력을미친張保皐 ( 張寳高 弓福 ) 는그대표적인인물이다. 이러한신라상인의출신이나실체에대하여연구초기단계에서森克己 [1975b ; 2009h] 는신라중앙의혼란을틈타세력을쌓은지방관이나호족의무역선이라고하였다. 그러나그후연구가진전됨에따라그들은신라국내의세력이라기보다는당시의사회혼란속에서당으로유출내지진출해간사람들이주된담당자였다고설명하게된다 [ 石井 1988 ; 山崎 2001b 등 ]. 단그활동은신라국내의경제와도연결되어있었고 [ 山崎 2001b], 한반도서남부해민세력과의관계도주의하게된다 [ 李炳魯 1993 ; 李成市 1997]. 신라의域內세력과域外세력의관계를어떻게이해할것인가는금후더욱연구해야할과제일것이다. 적어도麗日関係의역사적전제라는관점에서는비록조역이었다고해도주로신라국내에생활기반을둔사람들이대일무역에얼마나관여하였는가하는점은중요하다. 또한山崎雅稔 [2001a] 가당시의羅日貿易을 清海鎮 - 鴻臚館貿易 으로규정하고, 교역의성립요건으로唐사회와연결된장보고라는한개인의특수성에주목하고있다. 張保皐가신라왕권과대립하여 841년에살해되자혼란의파급을경계한일본정부는大宰府鴻臚館을무대로하는무역에서신라인을배제하였고, 이를대신해서당상인이진출해온다. 그리하여신라상인은새로운판로를개척하거나경우에따라해적으로변신했다고생각하게되지만 [ 山崎 2001b], 生田滋 [1991] 는이무렵山陰이나北陸에모습을나타낸신라상인에대하여鴻臚館무역에서배제된신라상인의활동으로파악하였다. 다만唐상인으로불리는자들중에는在唐신라인이포함되어있으며, 일본측에서도그사실은인식하고있었기때문에배제대상은어디까지나본국의신라상인이었다고볼수있다 [ 山崎 2001a; 渡邊 2003; 榎本 2007b]. 그러나전술하였듯이張保皐휘하에있어서신라국내의상업세력의실체가아직불분명한상황에서는蒲生京子 [1979] 가선구적인張保皐연구에서제기하였듯이張保皐와그후의해상세력의계보관계가반드시명료하지않다는신중한자세도존중해야한다. 또榎本渉 [2007b] 은신라상인의소멸에대하여고려의탄생에따른집권화의영향을지적하지만, 고려초기의 비집권적 인정치상황으로보아바로동의할수는없다. 9세기에일본연안을습격했던신라해적에대해서, 일찍이森克己 [1975ab; 2009a] 는

210 18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지방정치의혼란을틈탄신라의지방관이나 不逞新羅人 의활동등개괄적으로설명하였다. 그러나대국적으로는지방사회의혼란에기인한다고해도시기적인양상변화에주목할필요가있다. 9세기초에対馬나小近嶋를위협했던신라해적은張保皐등장의배경이되기도했던신라의기근이나치안악화에기인하는것으로보여지는한편 [ 生田 1991], 張保皐살해후비교적이른시기의해적사건은鴻臚館무역에서배제된신라상인 [ 生田 1991; 山崎 2001b] 이나권력의통제로부터벗어난군소세력 [ 渡邊 2003] 의동향을고려할필요가있다. 게다가 9세기말의해적사건에대해서는신라왕권이관여하였을가능성을부정할수없다는견해도있고 [ 濱田 2002], 生田滋 [1991] 는신라정부가스스로 해적의대두목 이되었다고평가한다. 그러나石井正敏 [2001] 은관계사료를조사하고이를부정했으며, 신라정부의가렴주구에견딜수없게되었던민중의활동으로본다. 또山内晋次 [2003b] 는石井의사료해석에의문을제기하면서신라왕권을해적의주체로보는견해에도부정적인입장을보이고, 당시대두했던지방호족의관여를추측하였다. 지방호족의대외활동에대해서는후삼국의주인공인王建이나甄萱뿐만아니라, 진주지방의王逢規가 10세기초에対中통교를실시한사례도있다. 일본에있어서신라상인, 신라해적의활동이신라말 고려초의호족과어떠한관계를가지는가는아직해결되지않았으나, 후술하듯이초기麗日통교의성격을파악하는데매우중요한의미를갖는다. Ⅲ. 초기의 냉랭한 관계 : 10 세기 11 세기전반 10세기초, 건국후얼마되지않아高麗와後百済는활발한대외통교를전개했는데, 이때의대일교섭에대해서는青山公亮 [1955a] 과中村栄孝 [1965] 의선구적인연구가있다. 두연구자는고려의對日遣使를 937년과 939년 2회로보았으나, 지금은 940년에도행해진것으로보고있다 [ 石上 1982 ; 森克己 2009h]. 이들대일통교는후백제나고려의 조공 제의를일본측이거절함으로써좌절되었고, 그후정부차원의정상적인통교관계는결국성립하지않았다. 종래이것은平安시대일본외교의폐쇄성을나타내는것으로여겨져왔으나, 石上英一 [1982] 은그것이주변세계에대한무지 무관심에기인하는것이라기보다한반도의혼란 동요가국내에파급

211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85 되는것을막기위한의도적인고립정책이었다고파악하였다. 당시일본의외교대응을공문서의授受라는관점에서분석한渡邊誠 [2007] 도일본측이주변국의접근에대하여무시 묵살하지않고알아서대응 ( 문서의회신 ) 하고있었다는것을강조하였다. 石上說은일본측의환심을살수있는 조공 이라는통교자의자세에도불구하고일본이통교를거절하였던것에서도補强되지만, 이에대하여南基鶴 [2003] 은 조공 이라는사료표현이일본측의조작에의한것이며, 실제로는일본의입장과저촉되는고려측의대국의식이나타나있었던것은아닐까라고추측하였다. 한편, 당시일본이고려를신라의후계국으로인식하고신라와의외교마찰과해적피해의경험에서일어난 敵國 의식을고려로돌리고있었던것도사실이다. 森公章 [2008] 은일본이고려와의관계형성에신중한태도를보였던배경으로 9세기후반이후의한반도사회의혼란에더하여신라해적의영향을지적한다. 과거의기억과동시대의정세에대한인식이복합적으로일본의외교대응을규정하고있었다는것이다. 그래서이러한관념과현실의복합작용을어떻게풀이할것인가가일본측의외교대응을이해하는데관건이된다. 예를들어石井正敏 [2000] 은 997년의고려牒狀에대한의구심으로가득했던일본측의대응, 그리고고려해적誤報사건에대하여검토하고적국의식의영향을인정하면서도당시한반도를습격하였다고추정되는일본해적의행위에대하여고려측이보복할지도모른다는현실적인염려가있었을가능성을지적하였다. 또이사건에대하여渡邊誠 [2007] 은당시거란에게책봉을받은고려로서는일본에우호관계를구하는의미가희박하며, 해적문제에대해서고압적인태도로나왔기때문이아닐까라고도추측하였다. 그리고일본이통교를거절할때문서의不備나자국의존엄등이유를앞세운것은상대로부터모멸받지않겠다는의식, 즉자국의약체에대한심리적불안과그것을간파당하지않으려는허세이며, 적국의식이란그러한심리와표리를이루는현상으로파악한다. 다만 997년의고려첩장사건을둘러싼국제상황에대해서, 당시고려와거란은형식상의종속관계에도불구하고여전히대립국면에있었다고보는것이적절할것이다. 고려정부가이시점에서대일교섭을시도하였던것이라면관계악화는바람직하지않았을것이며, 거란대책을염두에두면서연계를모색하였을가능성까지생각해볼수있다. 문서에나타난고려측의대국의식을일본측이자신에대한모욕으로받아들였다고해도 [ 南 2003] 문서에는정중함을뜻하는書簡형식인啓를채택하였을가능성도있으므로 [ 森平 2009] 꼭일본에대한우위의식을단순히과시하였다고만할수는없다.

212 18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또上川通夫 [2007] 는이시기의일본천태종에있어서일본우위의식을분석하고, 일본측이呉越의천태종부흥의실질적공헌자인고려가아니라, 송의천태종에구애된것에주목하였다. 그리고고려에대한정치적대항심등으로인해고려를묵살했던불교삼국사상과, 여기에근거한불교적세계인식-인도를사정거리에포함하여고려를묵살하면서중국을상대로하는-이형성되었다고한다. 972년에는고려의남원부 김해부에서의遣使記録이일본측에남아있는데, 이것을지방관의행위 [ 石井 1987] 로보는것이꼭합당한것은아니다. 당시고려에서는지방관파견이시작되지않았고, 해당지역을실효지배한호족의자주적통교일가능성이있다 [ 森平 2008]. 이에관하여일찍이호족의대외활동과의연속성이주목된다. 확증은없지만, 중앙정부의변경통제가약했던당시지방호족이독자적으로대외활동을행할의욕과이것을가능하게하는환경이아직도남아있었을가능성이있다. 따라서고려가후삼국을통일한후한반도의지방세력에의한자주적인대외활동이거의눈에띄지않게되었다면, 그것은중앙정부의통제라기보다그들이바라던이익이고려정부의통치하에서또다른형태로실현되고있었을가능성을생각해볼필요가있다. 그러므로일찍이호족의대외통교가일정한범위에서이루어졌다면, 그들은거기에무엇을원하였던것인가, 그리고초기의고려정부가주최한대외통교가국내사회에무엇을초래하였는지가중요해진다. 담당자는불분명하지만, 당시고려와일본사이에서교역이계속되고있었던것은고려의물품을조달하기위해九州로향했던高麗国交易使의존재를통해서도지적할수있다 [ 石上 1982 ; 森克己 2009h]. 전술한 997년의고려첩장을둘러싼논의중에도양국을왕래하는상인의모습이엿보인다. 또 摂津勝尾寺縁起 에는正暦元年 (990) 에 百済国皇后 의위탁으로관음상을봉납한宋海商周文徳 楊仁紹의일화를볼수있다. 이것이사실이라면宋商을매개로한麗日通交가 10세기에이루어진것이된다. 그러나原美和子 [2002] 에의하면이설화에보이는宋商은실재인물이지만, 설화자체는勧進興行과주변주민과의마찰을수습하는방편으로長谷寺의観音霊験譚 - 異域에서온仏像이霊力을발휘함-을기초로, 13세기중반무렵창출된픽션이라고한다. 그렇다면이설화를 10세기의麗日通交의실례로들수없게된다. 다만고려등異域의珍寳를宋商이가져왔다는모티브가실제의역사상황을배경으로하고있을가능성을반드시배제할수없을것이다. 11세기초에九州를습격한刀伊 ( 女眞海賊 ) 사건은양국관계의일대전환기로인식된

213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87 다. 고려수군의일본인포로구출과송환과정에대해서는池内宏 [1934 ; 1979] 과森克己 [2009h] 의논고가있다. 또근년石井正敏 [2006] 은여진의포로가되었던일본인여성의공술기록에근거하여고려병선의구조를분석하였다. 이사건의역사적의의에대하여森克己 [1975ab ; 2008 ; 2009gh] 는고려측의정중한대응이일본의대고려자세의유연화를가져왔고, 그후왕성한표류민송환과通商의계기가되었다고한다. 그러나村井章介 [1996] 는이사건을둘러싼일본측의고려군사력에대한관심에주목하고고려에대하여여전히갖고있는의구심, 적국 신라와연결짓는인식, 平安귀족의국제감각의퇴영성과폐쇄성을다시강조하고있다. 石井正敏 [2000] 도일본에있어서고려에대한경계심은刀伊사건후에도변화하지않으며, 중앙 지방을불문한귀족층의기본적인인식이었다고서술하였다. 그러한의미에서刀伊사건을둘러싼양국의교섭이표면상우호적으로처리되었음에도불구하고정부간의공식적인외교관계로발전하지않았던점이오히려중요할것이다 [ 森公章 2008]. 또고려측의우호자세도거란과의항쟁을배경으로하는방편이었을가능성이있다 [ 南 2003]. 단, 山内晋次 [2003a] 가지적한것처럼일본측의우위의식과경계감은사라지지않았지만, 신라에대한경우처럼극단적인적대시나분쟁사항은생기지않았던점이특징이라고할수있다. Ⅳ. 교역의성황과九州在地社會 고려왕권 :11 세기후반 고려사료에서일본에서오는통교자는 11세기후반에들어서갑자기顯在化되고 [ 青山 1955b] 12세기에들어서면다시급속하게자취를감춘다. 이에대하여일본 송 고려의무역관계를선구적으로연구한森克己 [1975ac ; 2008 ; 2009abcdfg] 는성장한일본상인이당시에는자력으로중국에도항하는데는기술적으로곤란하였기때문에우선고려로진출한것으로보았다. 이것은 12세기에들어중국사료에서 일본 상인의도래를확인할수있게되는것을염두에두고있다. 고려에도항한일본측통교자의출신에대해서는이시기, 大宰府의무역관리체제가와해되어荘園을무대로日宋간밀무역이이루어지게되었다는自說을전제로, 九州의荘園관계자나大宰府 博多의상인이해외무역에진출한것이며 [ 森克己 1975abc ; 2008 ; 2009cdfg], 2) 그들개개의통교자에의한 2) 다만森克己 2008 의단계에서는麗日무역의주체로서九州의지방관리에대해서도언급하고있다.

214 18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사적인물품헌상 ( 私献 ) 의형식을통해무역이이루어졌던것으로파악한다 [ 森克己 1975b]. 그리고일본측이고려산물품과동시에송에서도래한생산품의간접수입을중시하였다는데에주목하여 [ 森克己 2008 ; 2009e] 송의비단이고려를경유하여일본으로건너오고, 일본의수은 螺鈿 유황등이고려에서송으로들어가, 일본의수은이송에서고려로들어왔다는물류의삼국연쇄관계를지적하였다 [ 森克己 2008 ; 2009g]. 그러나森의견해에대해서는의문도제기되고있다. 우선장원내밀무역설에대해서는 11세기단계에서는大宰府의무역관리가기능하고있었다는지적이있다 [ 山内 2003c]. 장원의대외교역주체로서의역량에대해서는견해가나뉘어지는데, 적어도독자적으로해외에진출하는능력에대해서는신중하게평가할필요가있다. 또당시의日宋무역은송의海商이주도하고있었고, 그때문에 12세기이후의중국사료에 일본 상인이등장하는것은역학관계의변화를보여주는것으로서주목되었으나, 榎本渉 [2007a] 은이 일본 상인의실체는宋商이며, 宋商이日宋무역을주도하는상황은 12세기에도변하지않았다고하였다. 그렇다면 11세기의麗日통교를 12세기의日宋무역의전단계로단순히자리매김할수는없게된다. 일본측이고려무역에중국산물품의간접수입을기대하였다는점도, 판명된몇안되는사례로부터상황을과대평가하지않도록주의해야한다. 稲葉岩吉 [1934] 이지적한차나약재를비롯한재래의고려물산이전해졌을가능성도더욱세밀하게살펴야할것이다. 한편, 일본측수출품에대하여三浦圭一 [1993] 은고급공예품의존재에주목하여, 조공형식을취한교역이大宰府체제의일환으로추진되었다고하였다. 그리고생산장소도大宰府와그주변에서찾아내고, 그것이고려미술에미친영향도지적하였다. 무역형식에대해서는일본측의 私献 이라는점을드는것만으로는교역의정치적의미가간과된다는山内晋次 [2003d] 의비판이있다. 山内는당시의일본 동남아시아 고려의상황을대비시키면서정치권력과국제무역의관계에주목하였다. 거기에서정치권력에의한무역항 ( 禮成港 博多등 ) 과상인에대한관리 통제, 貢進형식을취하는물품거래가권력측의자기중심적인세계관이나대외자세를장식하여뒷받침하고있었던것, 또한상인의정치 외교상의역할 ( 문서 정보의전달, 사절의탑재, 주문품의조달, 국가의례의참가 ) 등교역활동에부수되는정치적측면을지적하였다. 山内의논의의전제중하나로서奥村周司 [1979 ; 1982] 가지적한 八関会적질서 가있다. 고려의국가적제례인팔관회의国王朝賀儀禮에는宋商 女真 耽羅등異域사람들이참가하고, 고려왕을중심으로하는왕권질서가표현되었는데, 11세기후반에는그자

215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89 리에일본의통교자가참가한케이스도있으며, 奥村은고려의입장에서는일본도이러한정치질서에포섭되는존재였다고지적하였다. 또奥村 [1985] 은고려文宗때일본에의사를초청했던사건을검토하고일본에대한고려의대국의식이외교문서의형식 내용에나타나있다고하였다. 그리고이대일통교가실패함에따라일본과의관계가재인식되고, 이후에성립한팔관회의儀注에는일본이조하례의참가자로등록되지않았을가능성을지적하였다. 奥村의연구는고려사연구의입장에서대일관계의역사적의의를파악했던몇안되는논고로서귀중하다. 틀림없이고려는군주를천자 황제에견주는등자존의자세가한국역대왕조중에서도두드러졌던존재였다. 그러나盧明鎬 [1997 ; 1999] 에의하면, 그세계관은복수의천하의병존을상정하는 다원적천하관 이주류였다고한다. 그렇다면자국을天子国 皇帝国에견주는자존의식이바로일본에대한우월의식으로연결된다고할수는없게된다. 적어도개별통교자에대한자세가그배경에있는정권 민족전체에대한인식까지반영된다고할수는없다 [ 森平 2007]. 위에서서술한의사초청사건에대해서는田島公 [1991] 이전말을소개하고있으며, 그때의大江匡房의답서起草에대해서는文學史의입장에서小峯和明 [2006a] 이논하고있다. 또일본측이문서형식을갖추지않았다는이유로의사초청을거절한것에대해서는일찍이青山公亮 [1955a] 이 철저한불간섭주의 라고평했듯이일본외교의폐쇄성과경직성을보여주는것으로파악했으나, 전술한바와같이渡邊誠 [2007] 은표면상 형식상의거절이유에지나지않는것으로보고있다. 어찌됐든여기서중시해야할것은교역을통한왕래의盛況과국가간의정상적인외교관계의부재라는두개의국면이병존했다는점일것이다 [ 森公章 2008]. 田村洋幸 [1993] 은일본통교자는조선시대의서계와같은書狀을휴대했다고추측했는데, 이점은일본측통교주체와통교형태에관한중요한문제이다. 통교주체에대하여山内晋次 [2003a] 는対馬 壱岐나九州북부지역의在庁官人層 ( 재지호족출신으로관아의무역관리기구에종사하면서스스로도무역에관여 ) 이나府官 在廳官人과연결된상인을상정하고있는데, 그중에서주목되는것이宋商의존재이다. 日宋무역에서는이것을주도한漢人海商의활동이鴻臚館을무대로하는 물가 ( 둔치 ) 무역에서博多등일본측현지에거점을마련하고장기체재하는 住蕃 무역으로발전했다는것으로알려져있는데, 上記의의사초청사건에서도양국을중개하는王則貞이라는 일본 상인이등장한다. 이인물은太宰府観世音寺의十一面観音像墨書銘에 府老 로이

216 19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름을남긴王則宗의일족으로생각되며 [ 門田見 1985], 중국계일족이토착화하여大宰府나그주변의권력기구에침투하여대외무역에종사하던양상을보여주는것이라고생각된다 [ 亀井 1995 ; 山內 2003a]. 이와같은중국계상인이麗日무역에도진출하고있었던것이다. 그중요성은일찍이田村洋幸 [1993] 도언급했지만, 原美和子 [1999 ; 2006] 는일본에거점을가진漢人海商이日宋貿易과동시에麗日交易에도진출했던것으로보고있다. 일찍이森克己 [2009e] 는日宋貿易과麗宋貿易을담당한宋商은별개로전문화하고있었다고분석하였으나, 原은기회가있으면商圈을확대해가는해상의움직임과그것을가능하게하는네트워크가존재하였다고보고있다. 또한義天版高麗仏典의일본수입을宋商이중개한점에주목하여, 仏典과같은귀중품의수입이나외교문서의전달과같은특수한국면에서는宋商이우위의정보수집 전달능력과네트워크를가지고있었다고해서무역활동의계층성을지적하였다. 麗日通交의경로에대해서山内晋次 [2003a] 는무역의성행과동시에관청을통해표류민의송환이활발하게행해진것에주목하여, 大宰府 - 対馬라인이창구가되어金州로의송환이이루어졌고, 고려에서는金州의東南海船兵都部署에의해중앙으로전해진점을지적하였다. 이東南海船兵都部署는 12세기에는慶尙道按察使로개편되었는데, 對日창구의기능은여기에계승되었던것으로여겨진다 [ 近藤 2009]. 금후에는일본과의교역이나외교절충에있어金州나東南海船兵都部署 ( 경상도안찰사 ) 의장소적성격에대해서, 최근활발하게전개되고있는세계각지의港市論의성과를참고하고, 또조선전기의삼포형성의前史라는점을의식하면서본격적으로검토할필요가있다. 그런데표류민송환이나교역을둘러싼麗日간의주요한접점으로부각되는것이바로對馬島이다. 山內 [2003a] 도對馬와고려사이에서빈번하고밀접한인적교류가이루어졌다는것에주의하고있는데, 일본측사료에는당시고려와교역한자는오로지對馬島人이었다는기록도있다. 그리고佐伯弘次 [1990] 는麗日貿易의주요한담당자로서對馬에주목하여현지물산을중심으로하는교역형태를지적하고있으며, 小峯和明 [2006b] 은당시對馬의은채굴에고려인부가관여하였을가능성도고려하고있다. 이것은앞에서서술한고려에대한고급공예품의수출이라는도식과는다른내용이지만, 田村洋幸 [1993] 은博多지역의상인은고급 2차제품, 쓰시마사람들이해산물등현지의 1차생산품을수출한다는지역성과도연결되는계층구조를상정하고있다. 전술한原美和子의논의를받아들인다면, 전자에대해서는국제적인네트워크를지닌宋商과그이

217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91 외의상업종사자의차이를생각해볼필요도있다. 불교교류에대해서는의천의續藏經을중심으로하는고려불전이일본으로건너온것이주목되며, 大屋德城 [1988ab] 의기초적인조사가있다. 麗日관계사에서의논점으로는森克己 [2008; 2009g] 도선구적으로언급하고있지만, 그역사적의의에대해서堀池春峯 [1980] 은대륙불교의새로운識見을얻어敎學의진전을도모하려는일본불교의동향과관련된국제적인관점을제시하고있다. 上川通夫 [2007] 는이것을심화시켜서院政期에있어서遼佛敎의참조에토대를둔眞言密敎중시정책에연결되는것이라고지적하였다. 더나아가橫內裕人 [2008a] 은續藏經將來사업의담당자를상세히분석하고, 南都系密敎와新華嚴의전개와관련하여攝關家중심의日宋불교교류와다른대외파이프를원하는院權力의의도를지적하였다. 그리고그것이海商 大宰府를매개로한물건만의교류이며, 鎌倉불교의顯密体制성립의伏流水가된다고하였다. 3) 또두연구자의연구를토대로한保立道久 [2004] 는院政期종교이데올로기의국제적성격을보다거시적인관점에서고찰하고, 續藏経의奉請이攝關정치기의대외관계가院權力을중심으로재편되는과정-금의발흥에수반한동아시아국제질서의재편속에서平安京과大宰府를보다직접적으로통괄하는체제가구축됨-에서생겨난현상이며, 平氏정권의등장과그후의동란으로연결되는역사적전제의하나라고하였다. 위에서서술한불교교류는院權力이나宋商등주로사회의상위계층에주도된동향이지만, 稻葉岩吉 [1934] 이소개한 法華靈驗傳 의東傳說話 -거제도의供辯에서倭僧이양도받아博多崇福寺로가져옴-처럼대한해협연안지역의지역적인움직임도간과해서는안된다. 한편, 고려에서상인등이來日하는움직임은사료적으로는극히미약하다. 이에관련해서森克己 [1975b] 는고려의중앙집권적관료국가기구아래에서는지방관이그지위를이용하여무역에투자하거나자립한지방권력이독자적으로무역활동을할여지는없는점, 화폐경제가발달하지않았기때문에민간상인이해외로나설수있는단계가아니라는점, 송 일본 大食에서빈번하게선박이來航하기때문에고려의민간상인이필요하지않았다는점등을들고있다. 이에대하여한국사연구측에서는麗宋무역에있어서고려상인의활약을언급하기도했지만, 이러한통설은李鎭漢 [2005] 과榎本涉 [2007a] 에의하여재검토할필요가생겼다. 다만조선시대에비하여고려의중앙집권도는낮고, 3) 또한일본중세불교의성립과동아시아국제환경의관계성에관한연구동향에대해서는 [ 橫內, 2008b] 를참조.

218 19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지방사회의자율성이상대적으로높았기때문에적어도森이지적한첫번째요인은고 려상인의미미한존재감을설명하는이유로서반드시합당하지는않을것이다. Ⅴ. 통교기록의감소와그실태 : 12 세기 12세기에들어서면麗日간의통교를보여주는사료가급감한다. 靑山公亮 [1955b] 은이러한관계기사의繁閑은사실의유무자체를의미하는것은아니지만경향성을반영한다고평가한다. 일본측의요인에대하여森克己 [1975ac ; 2009acfg] 는일본상인이고려의정치혼란에따른위험을피해기술적으로가능해진對宋진출로전환한것으로보았다. 田村洋幸 [1993] 도고려안팎의동요를들었다. 또한森克己 [1975ad] 는원래고려무역이박리임을들고있으며, 三浦圭一 [1993] 도日宋貿易의발전에따른이윤밸런스의변화를지적하였다. 고려측요인에대해서도쌍방의경제격차를염려한고려정부가무역을축소했다는견해가있다 [ 田村 1967]. 이러한견해에대하여李領 [1999a] 은고려의대송무역은지속되고있었다는사실에서고려국내의 혼란 이대일무역쇠퇴의직접적인요인이될수없다고하였다. 그리고당시여진의대두로인하여북방의정세가불안해지던중, 1093년일본 송양국의수상한배가王都근해에출현한사건 ( 李領은日遼貿易船으로추정 ) 을계기로일본商客의상경이금지되었으며, 더구나 1079년의의사초청교섭의차질에따라대일관계의중요성이떨어진것도영향을끼쳐서일본의來航者에대해서는金州에서응접하는데그치는소극적인방침으로전환되었을것이라고추측하였다. 그결과무역부진때문에일본으로부터의來航수도감소하였겠지만, 변경에서발생한일이기때문에사료가남기어려운점을고려해야하며, 사료상의상황이반드시실태그대로라고할수는없다고하였다. 그리고당시麗日通交를증명할자료로서한국의불탑안에서고려시대유물과함께내장된南洋産조개와 11 12세기일본의瓦當문양에보이는고려의영향을들고있다. 李領의견해에대하여濱中昇 [2000] 은고려국내의혼란이麗日貿易쇠퇴의직접적인원인이되지않는점에동의하면서도, 李領이제시한고고학자료에대해서는반드시해당시기의麗日貿易의물증으로단정할수는없다고지적하고, 통설을뒤집기에는논증이부족하다고하였다. 또橋本雄 [2002] 도접촉장소가金州에한정된것이기록의감소

219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93 에관계되는가하는의문을제기하였다. 실제로 11세기에일본의來航者에관한정보는종종金州에서중앙정부로보내는보고형식으로기록되고있다. 또한 일본 상객의상경이금지되었다는明證도없다. 李領은당시麗日通交가두절되지않았다는점을논하는일환으로한반도와耽羅가日宋통교의항로에있어서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으며, 4) 麗日통교의사실이그배경에있다고하였다. 이에대하여濱中昇 [2000] 이나橋本雄 [2002] 은관계사료의독해에대하여의문을제기하였다. 또관련하여榎本涉 [2008] 은일본승려의渡宋記錄에보이는고려관계기사에주목하여오로지표류 海難의장소로이미지되고있는것을지적하였다. 이처럼前代에비하여규모가축소되었다는인상은여전히불식되지않지만, 李領이지적하였듯이그것은어디까지나남겨진기록에서얻은느낌에불과하다는점은역시주의할필요가있다. 12세기후반의源平抗爭중에藤原親光이對馬에서고려로망명했다는일화가있는데, 川添昭二 [1988] 는 11세기이래계속된對馬와고려의밀접한관계가배경에있다고파악하였다. 13세기전반의사료에는한반도남해안에서쓰시마인이고려정부의통제의틀밖에서활동하고있었음을보여주는기록도있다. 정부기록에남기어려운지방 민간차원의통교는그이전부터계속되어왔을지도모른다. 적어도 12 세기중반 ( 고려毅宗朝 ) 단계에서일본의통교자는여전히고려왕권의자존의식을만족시키는來貢者로서존재하였고, 이점은후술할進奉貿易의문제와관련하여李領 [1999b] 도주목하고있다. 5) 또高橋昌明 [2007] 은이러한교류를통해平淸盛의福原別莊조영에고려의도성설계가영향을끼쳤을가능성도추측한다. Ⅵ. 進奉貿易과초기왜구 : 13 세기전반 13세기전반에는일본통교자의고려에대한 進奉 이고려의문서사료속에서확인되는한편, 이른바초기왜구가발생하여麗日간에교섭이이루어지고있다. 이시기의 倭 라는해적에대하여아직까지成語 역사적개념으로굳어진단계가아니라는이유로 14세기이후의 왜구 와동일범주에포함되지않는다는견해도있지만 [ 田中 1982], 4) 日宋교통에서의탐라의위치에대해서는森克己 [2009f] 가선구적으로논하고있다. 5) 그러므로이무렵성립한것으로간주되는팔관회의儀注에서조하례의참석자로서일본이언급되지않은이유가다시문제가될것이다.

220 19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성격적인연속성에주목하여 初發期의왜구 로파악할수있다는村井章介 [1988] 의견해가정착되고있다. 進奉 에대해서靑山公亮 [1955b] 은사실상조공과다름없으며, 일본의고려통교전반에걸친형식으로파악하였다. 6) 그리고 13세기에는고려가통교를환영하지않고교역을축소하는자세를보였기때문에왜구가발생했다고하였다 [ 靑山 1955c]. 한편森克己 [1975d] 는鎌倉幕府가자유로운민간무역을허락한결과, 前代이래의私獻貿易이계승되었고, 그가운데對馬에의하여이루어진무역이 進奉 이라고하였다. 그리고고려에서일본상인이철수하는것과교대로왜구가등장했던점에주목한다. 그요인에대하여森은고려의정세불안속에서무장상인이등장한결과라거나 [ 森 2008], 단순히고려의혼란에편승했다고서술한경우도있지만 [ 森 2009cg], 구체적으로는일본 고려양국정부의통제력이이완되던중, 12세기초壹岐에서나타난해적행위 ( 高麗仏典을가져오던商船이습격받음 ) 의흐름이 12세기중반이후고려로향했다고설명하고 (1152년淸原是包事件, 13세기의왜구 ), 그주체로서莊官武士에주목하였다 [ 森 1975c]. 그리고고려는對馬를왜구의발원지로보고금압을요구하면서일본과는우호관계를바랐던것이표류선송환사례를통해서엿볼수있다고하였다 [ 森 1975d]. 田村洋幸 [1967] 은麗日간의경제적격차로인하여 11세기말부터麗日貿易이쇠퇴했지만, 大宰府관리를비롯한지방호족은중앙과의대립을무릅쓰고무역확대를希求했다고하였다. 그리고그들이고려와교섭하는계기가되었던것이松浦나對馬의土豪가생활의필요를위해일으켰던왜구사건이며, 고려는大宰小貳武藤氏와교섭하여일본측의여러세력을억누르고, 武藤氏와는歲遣船에의한進奉형식으로교역하면서이것을되도록억제하는방향으로조정했던것으로파악하였다. 이는일본의고려수출품이고급품중심이었던것에비해서왜구의약탈품이미곡등生活財라는이해를근거로상인과왜구는표리일체가아니라계층적 지역적인차이가있다는田村 [1993] 의지적과연결된다 [ 田村 1993]. 다만田村자신이지적하였듯이교역주체자체에계층성이있었다면對馬 壹岐 松浦등지에서는고려에있어서생활재의교역과약탈행위가표리관계에있었을가능성을예상할수있다. 나아가川添昭二 [1975; 1996] 는초기왜구에대한일본측권력의대응에대하여논급하고, 1226년에御家人武藤資賴가大宰少貳로취임하여鎌倉幕府의외교 무역에대한관여가시작되었던것, 그것이가능했던배경에는조정에서도왜구로인한대외적위기 6) 田中健夫 [1975] 도마찬가지이다.

221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95 의식이있었던것, 1245~46년경武藤氏의의향을받은被官宗氏가對馬로들어가서토호阿比留씨를토벌했다는것은왜구금압과도관련이있다는것등을지적했다. 그리고 1263년에고려를방문한일본의 진봉 선은武藤氏의歲遣船이며, 1227년의왜구금압교섭을계기로武藤氏가고려와맺은 修好互市 가시발점이라는것, 그러나그교역은고려의낮은생산력과상업의미발달, 그리고왜구에대한경계감으로인하여고려측에서는억제하거나거절하려는경향이강했다는점등을논하고있다. 大山喬平 [1984] 도大宰府를장악했던武藤氏가進奉船으로고려와修好互市를행했다고파악했는데, 조정의허가를얻지않고수행된왜구대책은막부의외교 무역권의장악의지를나타내는것이라고평가했다. 또한佐伯弘次 [1992] 는초기왜구의주체를對馬나松浦의영주 민중으로파악하고, 京人이日宋貿易에대한악영향을염려하면서麗日貿易에대해서는아무런언급이없었던것에대하여, 武藤씨가고려의왜구금압요청에적극적으로대응하여고려무역을추진했다는차이에주목했다. 한편, 李領 [1999] 은일본측의 진봉 은사적인상업행위가아니라항상적이고準公的인관계이며그직접적인주체는對馬였다고파악했다. 그리고고려내부에서의진봉의례정비과정을검토하고, 또 11세기말까지는고려와對馬사이에準公的인관계로서의 진봉 은발견하기어렵다고하며 12세기毅宗代에시발점을찾았다. 또 禮制 라고도하는그제도화된관계에는大宰府도관여했을것이며, 나아가大宰府를관리하는平氏정권이나후대의鎌倉幕府도배후에서용인하고있었던것이아닐까하고추측하였다. 李領의학설에대하여濱中昇 [2000] 은고려내부의 進奉儀禮 에관한이해, 또일본측의주체가 進奉 을공적인관계로인식하고있었는지에대하여의문을제기하였다. 橋本雄 [2002] 도李領의설에대하여논증부족이라고하면서오히려비정례 부정기적인 진봉 혹은 진봉 의틀속에서벗어난 互市 의존재를중시해야한다고서술하였다. 진봉 에대해서는또한山內晋次 [2003a] 가 11세기이래의관계를배경으로이무렵對馬島司와고려사이에서탄생했던특수한통교관계라는견해를제시하였다. 그것은조공으로서의의미를포함하며, 고려측에서는對馬에대하여耽羅와동일한外臣으로서의지위를부여했을것으로보고있다. 그외에田中健夫 [1961] 는초기왜구의발생배경으로몽고침공에쫓긴고려측의통교거부를들었다. 또한溝川晃司 [2003] 는 13세기초에는對馬와玄海灘타지역사이에서고려에대한 진봉 을둘러싼대립이있었고, 덧붙여일본측에非禮가있어교역이두절되었기때문에이것을사활문제로하는對馬가왜구를일으켰고그불만을해결하기위

222 19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해武藤氏가 진봉 재개를요청했다고본다. 7) 이상과같이 진봉 을둘러싼문제는관계된일본측주체, 前代무역과의연속성, 제도 관례로서의성격을어떻게파악하는가에따라견해가나뉘어진다. 근년에는주체를對馬로보는경향이강하며, 大宰府의관여또는認知를추측하는견해도있는데, 이들은개별사건에서살필수있는상황을일반화한논의라고할수있다. 원래 進奉 이란 아래 에서 위 에대한進獻을뜻하는일반적인용어이며, 당시는중국에서도통용하고있었다. 麗日관계에관한용어로서는 13세기에만확인되기때문에얼핏이시기에특유한현상으로생각할수도있다. 그러나이들용례는모두고려의외교문서속에나타나는데비하여, 12세기이전일본의물품 헌상 에관한사료는 2차적인편찬기록밖에없으며, 동시대의 1차사료내지이에준하는사료가남아있지않다. 그래서현시점에서는 진봉 이라는용어가 12세기이전의조공형식을취한麗日貿易에서도널리사용되었던일반적인術語이며, 주체의범위나형식내용이시기마다변천하였을가능성도예상해두어야한다. 또한당시麗日貿易의형태를 進奉 으로한정해도좋은가하는橋本의지적도제도의틀만으로는파악하기어려운통교의실태파악을위한제언으로경청할만한것이다. 한편, 초기왜구에대해서는上記와같이대다수의경우 진봉 문제와관련해서언급했는데, 비교적사료가많은개별사건을중심으로논하는경우관심이對馬에집중되는경향도있다. 그러나壹岐 松浦등九州북부지역사회에널리그럴만한소지가있었던점, 사회의유동화라는사태는같은시기에한반도남해안지역에서도일어났다는점 ( 해적의존재, 소위 南賊 의봉기, 유민의발생 ) 을고려하여, 麗日양쪽에서대한해협연안지역사회의불안정화라는거시적인관점에서전체상을파악할필요가있을것이다. 또한개별사료의보다더정밀한분석이필요하다. 특히韓日쌍방의문헌에錄文형태로남아있는고려의외교문서가주목되는데, 그전문을세밀하게해석하는기초작업은부족하다. 大宰府에왜구금압을요청했던 1227년의고려전라도안찰사의牒을분석한近藤剛 [2008] 의작업은드문성과중하나이다. 여기서는문서사료의상세한독해를토대로고려가大宰府에대하여직접교섭했던이유는왜구의주체가對馬의관민일체라고판단했기때문이며, 또한고려측에서는이때두번에걸쳐사자를파견했다고지적한다. 8) 7) 이외에초기왜구를언급한논고로는 [ 杉浦 1964] 가있다. 8) 그밖의문서사료에관해서는五島靑方문서중왜구관계사료를소개한 [ 長沼 1976], 초기왜구

223 10 세기 ~13 세기전반麗日関係史의諸問題 197 Ⅶ. 과제와전망 10세기 13세기전반의麗日關係史에관한연구는절대적인사료부족으로인해앞으로극적인발전을기대하기어려운실정일것이다. 그러나얼마안되는사료조차치밀하고전면적으로해석되지않고있는것이적지않게존재한다. 그것은특히일본측에남아있는사료에서현저하다. 또한가지마음에걸리는것은일본사 한국사라는연구분야의구분이당연한전제인듯한학계의현상을배경으로일본사연구자의고려사에대한이해, 한국사연구자의일본사에관한이해에아무래도불충분한점이눈에띄는것이다. 麗日關係史자체를연구대상으로삼을때는이러한한계는사료독해능력의레벨부터개선되는것이바람직하다. 다행히이러한 벽 을넘어서려는기운은韓日쌍방에서차츰싹트고있다. 그것이달성되고난뒤에비로소한반도와일본열도의전체적인역사상황속에서麗日關係의事象을보다구체적으로자리매김할수있을것이다. 게다가근년의연구를통하여명확해진것은동방유라시아규모의시야의중요성이다. 앞에서麗日關係는당시일본의대외관계를日宋관계중심으로논하는가운데부수적으로취급되는경우가많다고비판했는데, 그것이문제시되는것은이러한상황이麗日關係史에대한낮은관심과이해도에결부되는경우이다. 麗日關係를본격적으로추구하려면오히려宋, 高麗, 日本, 契丹, 女眞, 몽고, 西夏, 동남아시아제국등여러민족 여러국가로구성되는당시동방유라시아의전반적인동향에주의하며그중에서麗日關係를상대적으로평가할필요가있다. 또한편, 현대적인감각에서 일본 이나 한국 이라는국가 민족의구분과반드시들어맞지않는, 그당시경계지대의지역사회의상황에더욱더철저하게구애될필요가있을것이다 ( 예를들어항구도시, 대한해협연안지역, 海商이나종교자네트워크 / 커뮤니티에대한착안 ). 개인적인견해로麗日通交의사료부족은韓日모두중앙 지배층의기록에서는밝히기어려운, 이러한부분의중요성을역으로강하게시사하고있으며, 그해명이麗日간의교역과해적사건의본질이해에연결되는것으로생각한다. 문제와의관련성을추측할수있는紙背문서를예로든 [ 田島 2001] 도있다.

224 19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참고문헌 初出시의제목이다른것과복수의初出논문을하나로合編한것도있지만모두原題는생략 했다. 日本語 青山公亮, 1955 日麗交渉史の研究 ( 明治大学文学部 ) 青山公亮, 1955a < 高麗よりの来牒に対する日本政府の態度 > 青山 1955/ 初出 1934 台湾教育 昭和 9 年 1 月號青山公亮, 1955b < 通商関係の一班 > 青山 1955/ 初出 1925 白鳥博士還暦記念東洋史論叢 ( 岩波書店 ) 青山公亮, 1955c < 高宗朝及び元宗朝に於ける彼我の葛藤 > 青山 1955/ 初出 1927 史学雑誌 38-4 生田滋, 1991 < 新羅の海賊 > 日本海と出雲世界 - 海と列島文化 2 ( 小学館 ) 池内宏, 1934 刀伊の入寇及び元寇 ( 岩波講座日本歴史 ) ( 岩波書店 ) 池内宏, 1979 < 刀伊の賊 - 日本海に於ける海賊の横行 > 同著 満鮮史研究 中世 1 吉川弘文館 ( 復刻版 ) / 初版 1933 岡書院 / 初出 1926 史林 10-4 石井正敏, 1987 < 日本と高麗 > 日本ア一トセンタ一編 海外視点日本歴史 5 平安文化の開花 ぎょう せい 石井正敏, 1988 < 九世紀の日本 唐 新羅三国間貿易について > 歴史と地理 394 石井正敏, 2000 < 日本 高麗関係に関する一考察 - 長徳 3 年 (997) の高麗来襲説をめぐって >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編 アジア史における法と国家 ( 中央大学出版部 ) 石井正敏, 2001 < 寛平六年の遣唐使計画と新羅の海賊 > アジア遊学 26 石井正敏, 2006 < 小右記 所載 < 内蔵石女等申文 > にみえる高麗の兵船について > 朝鮮学報 198 石井正敏 川越泰博 ( 編 ), 1996 増補改訂日中 日朝関係研究文献目録 ( 国書刊行会 ) 石上英一, 1982 < 日本古代 10 世紀の外交 > 井上光貞他編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7- 東アジア世界の変貌 ( 学生社 ) 稲葉岩吉, 1934 日麗関係 ( 岩波講座日本歴史 ) ( 岩波書店 ) 榎本渉, 2007a < 宋代の < 日本商人 > の再検討 > 同著 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 -9~14 世紀 ( 吉川弘文館 ) / 初出 2001 史学雑誌 榎本渉, 2007b < 新羅海商と唐海商 > 佐藤信 藤田覺編 前近代の日本列島と朝鮮半島 ( 山川出版社 ) 榎本涉, 2008 < 日宋 日元交通における高麗 - 佛敎史料を素材として > 中世港灣都市遺跡の立地 環境に關する日韓比較硏究 平成 15~19 年度科學硏究費補助金硏究成果報告書 ( 特定領域硏究 特別硏究促進費 ) 村井章介 大屋徳城, 1988a < 寧樂佛敎と高麗朝の佛敎 > 同著 佛敎史の諸問題 ( 大屋徳城著作選集 6) 国書刊行会 / 初出 1939 宗敎硏究 102 大屋徳城, 1988b 高麗続蔵雕造攷 ( 大屋徳城著作選集 7) 国書刊行会 ( 復刻 )/ 初版 1937 年 : 便利堂 大山喬平, 1984 < 中世の日本と東アジア > 歷史學硏究會 日本史硏究會編 講座日本史 3- 中世 1 ( 東京大学出版会 ) 奥村周司, 1979 < 高麗における八関会的秩序と国際環境 > 朝鮮史研究会論文集 16 奥村周司, 1982 < 高麗の外交姿勢と国家意識 -< 仲冬八関会儀 > および < 迎北朝詔使儀 > を中心と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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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03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나카다미노루 ( 中田稔 ) 머리말 Ⅰ. 戦前의연구 1. 黎明期의연구 ~20 년대의연구 년대이후의연구 Ⅱ. 戦後의연구 년대까지의연구 년대이후의연구맺음말 머리말 본보고는일본과한국에서인식이다른史實중왜구에관한日韓의대화에도움이되기위해, 일본측에있어서왜구에대한시선과연구성과및논쟁에대하여근대이후현재에이르기까지를通觀하는것이다. 일본에서의논쟁을검토하는것이본보고의주제이므로, 섭렵하고검토하는논저는근대이후일본에서발표된일본어논저로한다. 주지하는바와같이왜구는이른바전기왜구 ( 혹은 14 15세기까지의왜구 ) 와후기왜구 (16세기의왜구 ) 로크게구분되는데, 본공동연구의취지및연구협력자들과의분담관계로, 본보고에서취급하는대상은주로전기왜구에관한연구로한정한다. 왜구는다양한문제와관심 ( 예를들어戰前에는해적사, 戰後에는대외관계사혹은일한관계사, 근년에는해역아시아사 ) 에따라취급되어왔기때문에어디까지의연구논저를왜구에관한것으로취급하면좋을지에대해서는애매한부분이있다. 특히일한관계사나해역사와의경계선은매우애매하다는점을미리양해를구한다. 다음으로연구사의시기구분이다. 일본에있어서왜구연구는이미 1세기를넘는축적이있으며, 중세후기의대외관계사전체로틀을넓히면그연구사를취급한논고만도열손가락으로다셀수없다. 보고자는그중 [ 秋山謙藏 1939] [ 田中健夫 1959] [ 田村洋幸

230 20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1992] [ 關周一 1994a] [ 同 1994b] [ 楠木武 2000] [ 橋本雄 2003] [ 荒木和憲 2007] [ 關周一 2008] [ 橋本 米谷 2008] 을검토하였다. 그결과戰前에대해서는새로운사료의활용이나영인본의간행에의한사료의보급을계기로연구가진보해온점을근거로 黎明期 1910~20년대 1930년대이후 의세시기로구분하였다. 戰後에대해서는 1980년대즉, 냉전구조붕괴전후를계기로 해역아시아사 라는새로운틀이등장했으므로, 이를경계로전후로구분하는것이온당하다고생각하여 1970년대까지 와 1980년대이후 로구분하였다. 서술에있어서는현재일한양국간에견해의차이가인정되는논점, 특히왜구의주원인및왜구의주체문제를인식하면서, 일본측의연구상황의추이를써내려가고자한다. Ⅰ. 戰前의연구 戰前의왜구연구는두가지의제약아래이루어졌다. 첫째는당시대일본제국이구미열강을따라가면서아시아지역에영토를확장해간다는시대풍조의영향이었다. 田中健夫는戰後 14년을지난시점에서도왜구는 그활동을빛나는일본인대륙발전사의한페이지라도되는것처럼생각하는것이보통 ( 밑줄은인용자 ) [ 田中健夫 1959] 이라고하였다. 戰前의왜구연구는 왜구의활동을일본인의해외발전의구현으로보는지향성 이있었던 [ 關周一 1994b] 것이다. 각논고를참조하면왜구의활동을일본의국위선양의본보기로찬양하는경향이있었던점은부정할수없을것이다. 둘째는일본국내에왜구의활동을기록한사료가적다는연구상의제약이었다. 전기왜구에관하여말하자면, 상세한정보는고려 조선왕조측의사료에있기때문에한반도를식민지화하는과정에서새로운사료를이용할수있게되고나서야비로소연구가진전되었다. 그러한제약은있었지만, 좁은식견으로한정해서볼때戰前에도연구자는사료와진지하게마주보고실증적으로왜구를포함한대외관계를규명하고자했다고말할수있다. 1. 黎明期의연구 근대일본의왜구연구는해외로발전하는일본의해적을추급하려는동기에서海賊

231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05 史연구의일환으로시작된것같다. 이러한톤은일청전쟁 일러전쟁을거쳐南樺太 關東州그리고대한제국을식민지화하는등영토를확장하고있던당시일본의시대풍조에서온것이었다. 먼저菅沼貞風은저서 大日本商業史 중의 < 海賊大將軍及 ばはん船 > 이라는章속에서해적들과무역의관계를논했다. 여기서조선과무역했던해적들로서근세이래참조해왔던신숙주의 海東諸國紀 에수록된인물을들고있는점이주목되지만, 그밖의참고사료중에는 南海治亂記 처럼신빙성에의문이드는것도있다 [ 菅沼貞風 1892]. 다음으로星野恒은奈良時代이후의해적을논하고, 그중에서조선에대한 침략은그나라의역사 ( 東國通鑑 ) 에는고려忠定王 2년 2월에시작되었다고한다. 그글에 왜구의흥기는이것이시작이다 ( 倭寇之興始此 ) 라고되어있으며 라고서술하여, 왜구의활동이이해 (1350) 에시작된것으로언급했고, 그이전의침략행위는신라시대에시작되었다는인식도보이고있으며, 왜구와해적을구별하고있다 [ 星野恒 1894]. 또한久米邦武는奈良時代이래의海賊들에대해서언급하였고 [ 久米邦武 1911], 渡辺世祐는毛利家의사료를이용한海賊史연구를저술했다 [ 渡辺世祐 1911]. 해적연구로서奈良時代부터자세히설명하고있는것이黎明期연구의특징이며, 그중에서왜구는명과조선에서의한정적인명칭으로사용하게된것같다. 한반도측의사료가부족한것이연구상의큰제약이었던것은 應永의外寇 에대하여林泰輔가 단순히조선인의來寇 로추론하고있던 [ 林泰輔 1897] 데에반하여 몽고, 조선인의연합군 이라고한논고도있어 [ 中野礼四郎 1897~98]), 그실태가아직해명되지않았다는점에서도명확하다 ~20 년대의연구 20세기에들어대한제국의보호국화, 나아가식민지화로의움직임과병행하여왜구연구는본격화된다. 1909년에간행된 高麗史 3책이활용되기시작했으며, 게다가 朝鮮王朝實錄 이열람가능하게됨으로써한반도를침략한왜구연구는급속히진전되었다. 三浦周行에의해 老松堂日本行錄, 慶尙道地理志 의해제가만들어진의미도크다. 이때왜구에관한수많은논고를발표한것은後藤秀穗 ( 肅堂 ) 이다. 後藤는왜구연구

232 20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에서중국 한반도사료의가치를제일로삼고신라시대까지거슬러올라가서검토했으며, 고려고종 10년 (1223) 의 倭寇金州 이후 13세기전반에왜구가 거의완전한형식을갖추고세상에출현 했던일을언급했다 [ 後藤秀穗 1914]. 현재우리들이 초기왜구 등으로이해하는왜구에대한언급이다. 이어서 明實錄 을기초로嘉靖의왜구에관해서검토하고, 중국인이중심이라는것에대해서도이미언급하고있다 [ 後藤秀穗 1915a]. 이러한실증성의반면, 왜구에는 植民性이결여되었다는일본인의결점 이보이지않는다고했고, 이것을예찬한後藤는전형적인戰前型연구자라고할수있다 [ 後藤秀穗 1915b][ 同 1919]. 한편後藤은왜구의풍속에대해서도고찰했는데 [ 後藤秀穗 1928], 여기서는 16세기의왜구가중심이었다. 이시점에서는 전기왜구 후기왜구 의구별이아직은이루어지지않았던것이다. 한반도의왜구에대한본격적인연구의효시로는瀬野馬熊과三浦周行을들고싶다. 三浦는한반도측사료, 특히 조선왕조실록 을이용하여應永의外寇에대한이해에관해서그때까지의잘못을바로잡았다 [ 三浦周行 1916] [ 同 1926]. 그리고조선측이왜구의근거지로보고있던 세섬 ( 三島 ) 및기타지역의해적과조선왕조측의대일통교책의변화를추급하였다. 三浦의이논고는 < 조선의 왜구 > 라는논문제목에서알수있듯이순수하게조선왕조사료를바탕으로구성되어있기때문에, 내용은지금 전기왜구 로인식되는왜구에한정되어있다. 구체적으로는三島를비롯한왜구의근거지, 조선왕조측의왜구방어책, 대일무역, 수도서, 문인, 개항장으로서의삼포, 孤草島에서의조업, 계해약조가있고, 戰後에서부터근년에이르는중세후기일한관계사의주요주제가거의포함되어있는점이주목된다 [ 三浦周行 1917]. 瀬野馬熊도 조선왕조실록 을기초로조선왕조초기의왜구회유책및대책으로서의수군정비에대하여정리했다 [ 瀬野馬熊 1915]. 두사람의연구는 조선왕조실록 등을기초로실증적으로행해졌으며, 전후의이연구에있는것과같은왜구에대한깊은고찰은좀처럼보이지않는점이특기할만하다. 또한瀬野가 嘉靖이후중국의왜구는또다른별개의문제이다 라고서술하고있는것도유의하고싶다. 앞에서後藤의 ( 嘉靖의倭寇는중국인이중심이었다 ) 는언급과합쳐서생각해보면, 전기왜구 와 후기왜구 가질적으로다르다는것에대한자각이복수의연구자사이에서고착되고있었음을알수있다. 더욱이後藤이지적했던 13 세기의왜구중, 中村榮孝는文永 弘安의역사이의왜구에대하여 [ 中村榮孝 1926], 高麗史 를이용해서日麗關係를분석했던青山公亮은주로 13세기전반의왜구에대하여

233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07 언급하고있는 [ 青山公亮 1921] [ 青山公亮 1927] 점도지적해두고싶다. 한편, 왜구를지휘하는주체는征西將軍府라고하는藤田明의견해 [ 藤田明 1915] 는이 후오랫동안왜구의주체에관한정설이되었다 년대이후의연구 1930년대에접어들면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의 朝鮮王朝實錄 영인간행과아울러서조선사편수회가간행한 < 朝鮮史料叢刊 > 안에 海東諸國紀, 保閑齋集 이들어갔고, 또 老松堂日本行錄 도校註를붙여서公刊되었다. 이러한기본사료의보급을바탕으로日朝통교질서에관한연구성과를차례로발표했던中村榮孝, 무역사의小葉田淳과森克己등戰後까지활약하는연구자도등장한다. 왜구에관한논문도 昭和이후비약적으로증가 [ 田中健夫 1959] 했다. 이시기를대표하는왜구연구자는秋山謙藏이다. 특히 支那人왜구 는嘉靖이후왜구의대부분이중국인 무뢰배 였다는것을서술하고 후기왜구 로명명했으며, 南北朝에서부터室町초기에걸쳐한반도와중국연안을침략했던 전기왜구 와구별을명확히한것은이후왜구의시기구분에서정설이되었다 [ 秋山謙藏 1934]. 秋山은日中關係를광범위하게고찰하고있는데, 왜구와서일본각지역에서조선으로의통교에대한논고에서는그시야가왜구에의한사람의약탈및피로인의송환 매매문제에도미치고있음을알수있다 [ 秋山謙藏 1932]. 피로인문제는戰後의연구자에의하여점차주목을받아간다. 秋山의倭寇觀은 歷史學硏究 에게재된단문 倭寇 로집약되는데, 왜구를 抗日 과같은의미로파악하고있는점등당시日中關係의영향을강하게받고있다는것을부정할수없다 [ 秋山謙藏 1935]. 이후에쓴秋山의논저는점점더그러한경향을강화시켰다 [ 秋山謙藏 1939]. 海賊연구는지금까지海賊 = 海軍, 또는海賊 = 倭寇라는통속적인이해에서이루어져왔지만, 長沼賢海의연구는이것을一新했다. 長沼는서일본여러지역의해상세력에관하여각각의근본사료에의거해서그내부구조를해명하려고했다. 그의논고중에서松浦黨 [ 長沼賢海 1933] [ 同 1935] 과壱岐 [ 長沼賢海 1936] 의논고는왜구집단내부로부터의고찰이라고할수있다. 또有馬成甫는당시까지널리퍼져있던왜구의주체가村上水軍이라는설을부정했다 [ 有馬成甫 1934].

234 20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들에대하여中村榮孝는 해동제국기 와 조선왕조실록 을기초로논고를집중적으로발표했으며 [ 中村榮孝 1928, 1931a, 1931b, 1931c, , 1932a 1932b, 1932c], 왜구를극복해가면서일본열도측의제세력과의통교체제를구축해가는조선왕조측의움직임을실증적으로해명, 집대성하였다 [ 中村榮孝 1935]. 中村의연구는三浦周行이 < 조선의 왜구 > 에서다루었던, 왜구에서부터日朝통교질서확립까지하나하나의논점을실증적이고도치밀하게해명한것으로평가할수있으며, 戰後의중세후기일한관계사연구의토대가되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사회경제사로부터의제기도있었다. 무역사의森克己는對元 高麗관계에서활약했던왜구를武裝商人團으로규정했다. 즉元寇후元朝관리의압력에대항하기위해평화적인무역이아닌무력을갖춘强行的무역이필수가되었고, 이것이왜구로의도화선이되었다는견해이다 [ 森克己 1934]. 한편稲葉岩吉는왜구를조장한직접적인원인으로서고려군정의폐퇴를들었고, 그遠因을田制의문란에서찾았다. 이와유사한견해는戰後의田中健夫와田村洋幸등에게이어졌다 [ 稲葉岩吉 1935]. 이시기에는그밖에도많은논저가있지만일본의본격적인영토확장이라는시대상황을맞아왜구를해외에서勇躍하는것으로찬미하는논조가현저했다. 이들을일일이거론하는것은생략하겠다. Ⅱ. 戰後의연구 戰前의연구와戰後의연구에는불연속면과연속면이있다. 불연속면이란말할필요도없이일본의패전으로인한가치관의전환이다. 왜구를일본의대륙진출의상징으로파악하는것과같은자세가사라졌을뿐만아니라, 田中健夫에의하면대외관계사연구그자체가침체되었다고한다. 戰後의연구자는田中健夫 田村洋幸 長節子등으로결코많다고는할수없지만, 의욕적이며계속적으로연구성과를발표하였다. 한편中村榮孝 森克己 小葉田渟 靑山公亮등戰前연구자의연구성과를비판적으로계승함으로써日麗 日朝관계의실증적인연구가계속심화하였던것을연속면으로평가하고싶다. 왜구에대한시선이戰前과는크게다르지만, 연구가실증적으로계속되는한도에있어서戰前과戰後의연구가두절되어있는것은아니다. 1980년대부터戰後국제사회의냉전구조가변화하고, 글로벌화 보더레스 (borderless) 화

235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09 가세계적으로진행되자대외관계사연구에서는海域史라는새로운틀이제시되고, 많 은연구자들이관여하게된이래연구는장족의진보를이루고있다. 왜구연구도기본적 으로는그틀속에서행해지고있다고해도좋을것이다 년대까지의연구 戰前부터의연구자로는中村榮孝 青山公亮 森克己 石原道博 小葉田淳등이있다. 中村榮孝는왜구의근거지와對馬에관하여실제답사에기초하여고찰하였고 [ 中村榮孝 1949], 青山公亮는고려辛禑王이후의왜구와대일외교를논하였다 [ 青山公亮 1951]. 戰後부터 후기왜구 연구에종사해온石原道博는왜구에의한俘虜 (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 에관한사실을명확히하였다 [ 石原道博 1956]. 戰後왜구를포함하여대외관계사에관한연구성과를장기간에걸쳐계속적으로발표한사람은田中健夫이다. 田中은우선戰前부터의왜구연구를개관한다음 전기왜구 에대한견해를정리했다. 田中에의하면, 조선측에서 庚寅以來 위협이되었던왜구의목적은쌀 콩이나노비의획득이며, 고려측의폐퇴가왜구의침략을조장했다는稲葉岩吉의견해를답습했다. 그본질에대해서는森克己의 武裝商人團 설과는다소다르게海賊的성격으로이행하고있었다는것을언급했다. 즉田中은조선측이근거지로생각하고있던 三島 에대하여 對馬 壹岐 松浦 라고한다음, 이윽고瀨戶內해적에대해서도주목할것을언급하였고, 구성요원은 무장상인단 과 海賊群 이라고했으며, 海賊群 을경제적으로곤궁한 細民群 과 ( 松浦黨등 ) 상습적해적성격을가진 海賊衆 으로나누어이해하였다 [ 田中健夫 1950a]. 그리고조선왕조가들어서자조선측의해안방비책의충실, 일본에대한왜구금압요청, 왜구에대한회유로인하여왜구가다양하게변질된점을지적했던 [ 田中健夫 1950b] 것이다. 田中은이를기초로 전기왜구 에대하여논했다 [ 田中健夫 1959]. 다만여기서유의해야할것은森克己가對高麗 元關係史에서 무장상인단 설을주장했고, 고려말왜구의활발화에대한구체적인논증을하지않은것에비해, 田中健夫는고려말부터조선초기인 14 15세기의왜구에초점을두는등 무장상인단 설을둘러싼논점이반드시일치하는것은아니라고생각되는점이다. 동시기에무역사의관점에서日麗, 日朝關係에몰두하고있던것은田村洋幸이다. 田村은왜구의활동시기를구분했고, 그중에서고려말과조선초기의왜구의활동을

236 21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구별한다음, 조선초기의왜구의특징을왕대별로분석했는데, 이논고의서문에서 世宗實錄 28년 (1446) 10월壬戌條에보이는判中枢院事李順蒙의上書 ( 이하, < 李順蒙上書 >) 를들어고려말의왜구에대해서 麗末의왜구는일본인이주체가아니라오히려 10인중에서 8 9명까지는조선인이었던것으로인식되고있었다 고하였고, 구체적으로는 禾尺 才人이라고부르는조선천민층이었음이명백 하다는자극적인문제를제기하였다. 게다가田村은고려말의왜구에서는변질된셈인조선초기의왜구는일본인이라고하였다. 고려말의왜구에관하여 < 李順蒙上書 > 에주목한점은이후의 왜구 = 고려 조선인주체설 로연결되는견해였지만 [ 田村洋幸 1961], 이것이곧바로논쟁이되지는않았다. 田村은다시조선초기倭魁의계보를명확히함으로써조선초기왜구의실태에다가섰다 [ 田村洋幸 1962]. 마찬가지문제에대한관심으로는有光友學도日朝간을왕래하는무역상인이라는관점에서 해동제국기 와 조선왕조실록 에등장하는인물을분석하고있다 [ 有光友學 1970]. 게다가田村洋幸은전술한 무장상인단 설에관하여고려시대의왜구는 무장상인단 이라는사료가보이지않는다고하였다 [ 田村洋幸 1967]. 田村의연구는對馬, 北九州, 南九州각각에초점을둔대외관계사연구로평가되기도하였고 [ 田中健夫 1975], 對馬宗氏에초점을둔長節子의연구, 博多에초점을둔川添昭二의연구등과함께구체적인지역사회또는호족의입장에서본대외교섭사라는성질을가지고있었다. 田村자신은대외관계사연구와국내상업경제사의관련성이필요하며, 각지역호족의정치적과정과무역을연결하는노력이학계의방향성이될것이라고하였다 [ 田村洋幸 1992]. 왜구의주체론에대해서는稻村賢敷가征西將軍府설에서진일보하였다. 稻村은征西府와왜구의 친근한태도 를지적하고, 征西府의지배아래있었던松浦 菊池두세력이행했던조직적이고계속적인侵寇로파악하였다 [ 稻村賢敷 1957]. 田村洋幸도저명한倭魁인早田氏와同姓의호족이 北松浦郡相浦今福歲宮의社司 ( 신사의神職 ) 에있었던점, 게다가松浦党이전체적인연맹규약을작성했던해가각각田村이말하는왜구활동의계기가되고있다는점을서술하였고, 松浦党이무엇때문에盟約을교환하지않으면안되었을까하는사정 을다루고있다. 즉고려말기부터의왜구와松浦党의관계는부정할수없는것이다 [ 田村洋幸 1967]. 戰前의秋山謙藏이언급한왜구피로인문제에대해서는石原道博이조선인이나중국인俘虜의문제를논하였다 [ 石原道博 1956]. 有井智德은한중관계, 즉명과조선의관계를고찰하는데왜구에의한중국인피로인의송환을검토고찰하였다 [ 有井智德 1985].

237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11 현재의상황에서생각하면지금까지중세사연구는일국사 (National History) 적인발상에서진행되었다. 田村洋幸의왜구주체론을보더라도일본인인가조선인인가라는擇一을벗어나지않았다. 대외관계사에있어서는세계사의측면에서西嶋定生의책봉체제론 ( 종주국인중국황제와번속국인주변제국수장사이의군신질서에의거한국제관계 ) 이제시되었는데, 이것도 隨唐 -주변제국 간의국제질서를귀납한것이라든가, 특정국가간의모든관계에만주목하고있다는등의비판이있었다. 세계 와 지역 을국가의집합체로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 村井章介 1988]. 그러나長節子와川添昭二등에의하여지역으로부터의대외관계사가준비되어있었던것은국가와국가의관계만이아니라국가와지역혹은지역과지역의관계를분석하는, 즉대외관계를다원적으로분석할준비가되어있었던것이며, 이분야에서는 1980년대부터연구의빠른전개에대비하는준비가이미정비되어있었다고할수있다 년대이후의연구 1970년대후반이후, 網野善彦의 日本論 으로대표되는사회사에대한주목을배경으로한내셔널히스토리를비판하는조류가일어났다. 왜구및대외관계사연구는이에가장민감하게반응하였다. 그조류는 1980년塚本學의제언 [ 塚本學 1980] 으로시작되었다. 塚本는일본은단일민족국가라는인식은물론, 동아시아에서의지역개념에대해서도중국민족 조선민족 일본민족등으로부터성립된다는견해를비판했으며, 예를들어 15~16세기의五島열도와제주도, 舟山열도를포괄하는왜구세계를상정하거나, 일본해연안여러지역 을상정할것을제시하였다. 이것을받아들인綱野는당시일본열도의여러지역사회및그교류에주목한연구를들고, 일본을지역사라는시각으로부터다원적으로해석할필요성을언급하였다 [ 網野善彦 1982]. 많은연구자가등장하게된것도이무렵부터이다. 1977년에발족한田中健夫씨를중심으로하는 대외관계사연구회, 그다음해에시작된 李朝實錄을읽는모임 에서는村井章介 關周一등많은연구자가대두하였고, 關西에서는그이름도 해역아시아사연구회 인모임이출범하였다. 해역아시아사 라는명칭은이제는시민권을얻었다. 그러한가운데에서왜구연구의족적을검토해보겠다.

238 21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網野와塚本의제언이전부터田中健夫는 국경에구속되지않는 통교관계의연구를주장하였다. 田中은 1982년에간행한 倭寇 - 海の歷史 - 에서 전기왜구 와 후기왜구 의이질성에주목하고, 전자를 14 15세기의왜구, 후자를 16세기의왜구 라고했으며, 그서문에서는 보다넓은시야에서, 국경에구속되지않는바다를중심으로한역사관 을표방했다 [ 田中健夫 1982]. 또이책에서田中은왜구의구성에대하여이미田村가지적한 < 李順蒙上書 > 를들어, 구성원에는고려의천민이참가하고있었다는것을언급하고있다. 국경에구속되지않는 지역의구체적인모습을제시한것은村井章介였다. 村井은중세일본의국가자체를다원적으로파악한다음에, 일본의주변지역을각각어느정도자립한 環日本海지역, 環동지나해지역 으로파악하는 연구를진행시키기위한가설 을제시했다 [ 村井章介 1985]. 村井의제기는內海에초점을맞춘현재의 해역아시아사 라는시각에연결되는것으로서그후다수의연구성과를낳았으며, 대외관계사는그러한모든지역과국가의관계를해명하는방향으로전개되었다 ([ 關周一 1994a] 및 [ 橋本雄 2003] 에연구사정리 ). 일본열도및주변제지역과조선왕조의교류사연구에서는엄청난僞使의존재가밝혀지게되어연구는새로운단계에들어섰다고할수있다 [ 荒木和憲 2007][ 橋本 米谷 2008][ 關周一 2008]. 왜구의구성문제에대해서는거의같은시기에발표된 2개의논고가논의를불러일으켰다. 우선田中健夫는 세기의왜구 에대해서, 1350년이후습격회수와규모가급격하게증가한이시기의왜구를일본인만의해적집단으로생각하기에는무리가있다고한다음, 재차 < 李順蒙上書 > 를예로들어 왜구의주체는왜인복장을한고려인이며일본인은 10~20% 에지나지않았다 고서술하였다 ( 왜구 = 고려 조선인주체설 ). 더나아가田中은 高麗史節要 의禾尺 才人에관한기술을들어, 고려측의저변민중및일개농민을왜구의주력으로상정하고, 이것을보강하는논거로서고려의토지제도와신분질서의혼란을거론하고있다 [ 田中健夫 1987]. 같은해에高橋公明는水賊 ( 조선인해적 ), 구체적으로는제주도의해민에대한 朝鮮王朝實錄 의기사에착목하여그들이왜인과밀접한교류가있었다는것을주장하였고, 이러한제주도해민의존재를전제로 전라도-같은- 北九州 라는교류루트의존재를검토할필요성을제기하였다. 왜구와의관련에대해서도제주도에대량의말이있었다는것에착목하여이제주도와연관될가능성을제기했다 [ 高橋公明 1987]. 田村洋幸도종래의견해를진척시켜, 고려시대왜구발생의원인으로일본측의사회경제적혼란외에고려측의토지제도 신분질서의

239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213 혼란이나군제의이완을들어왜구창궐의배경은고려민중의왜구지지에있다고하였다 [ 田村洋幸 1990]. 村井章介는海域史의입장에서이들에대하여큰관심을보이고 [ 村井章介 1988], 자신의가설로제시했던 환동지나해지역 의일례로서경상도의삼포에서부터對馬 壹岐를거쳐博多에이르는지역에서활동하던왜인을 마지널맨 (marginal man, 경계인 ) 으로부르고, 그들의생활장소인 왜 와 일본 을구별하였다 [ 村井章介 1993]. 나아가村井은 ( 옛날에는後藤秀穗 靑山公亮이언급하였고, 中村榮孝가왜구로서의존재를인정했으며, 田村洋幸도 왜구의초기형태 로평가했다 ) 1223년부터 1227년의왜구에관하여 14세기이후의왜구와의공통성에주목하여 初發期의왜구 로명명하고, 承久의亂 으로인한일본국내의혼란과의연관성을지적했다 [ 村井章介 1988]. 佐伯弘次도해적과왜구에대하여정리하는중에 12세기중기부터 13세기전반으로시기를넓혀서 초기왜구 로부르고, 나아가해적과왜구의연구를분리시키지않고통일적으로이해할것을제창하였다 [ 佐伯弘次 1992]. 왜구 = 고려 조선인주체설 에대하여浜中昇는한국사연구자의입장에서반론을제기하였다. 우선田中가사료적근거로삼은 < 李順蒙上書 > 를검토하고고려인이왜구로위장했던것은사실이지만, 倭人不過一二 는고려인의위장이많았던것을말하기위한과장으로보는것이자연스러우며, 고려의토지제도혼란은 高麗史 編者의입장에서견해를말한것에지나지않고 ( 따라서반드시혼란스러웠다고볼수도없으며 ), 농민이희생이되어왜구에참가했다고볼수는없다고하였다. 高橋의지적에대해서도제주도의해민을조직할수있는주체를조선국내에서는찾아내기어렵고, 高麗史 에등장하는대규모왜구집단의선박 인원 마필모두가과장되어있으며, 왜구는일본인만의해적집단 이라는생각이반드시부자연스러운것은아니라고하였다. 村井가말한 倭 와 일본 에대해서도뉘앙스의차이는있지만실태는동일하다고하였다 [ 浜中昇 1996]. 나아가浜中는 禾尺 才人 에관하여조선측사료로되돌아가고찰하고있다 [ 浜中昇 1997]. 村井章介도 < 李順蒙上書 > 의해석에대해서는도가지나쳤음을지적하고田中健夫의해석에대해서신중한자세를취했다 [ 村井章介 1997]. 한편李領은전기왜구를 13세기의왜구, 왜구의공백기, 庚寅年이후의왜구 라는 3 期로시기를구분하고, 初發期의왜구 인 13세기의왜구 를상세하게검토하여그성격을분명히하였다. 그리고 왜구의공백기 에있어서異國警固 海賊警固를수행하고있던少弐氏와그의被官宗氏의역할에주목하여, 庚寅年 (1350) 의왜구는북부九州에

240 21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서足利直冬의공세에압도된少弐頼尚의고려침공이발단이라는것을주장하였고, 그이후의연속된대규모왜구는서일본의惡黨이南朝쪽의수군으로동원되었던것과밀접하게관련되었다고했다. 특히왜구와악당의전법이유사하다는점을언급하는등일본측사료를깊이있게파고들어간검토가눈에띈다. 또한李領은田中의 왜구 = 고려 조선인주체설 을비판하고왜구는일본인만의집단이라고하였다 [ 李領 1999]. 이영의설은田中등에대한반론뿐만아니라戰前부터의왜구주체론의계보상에도위치하며 ( 이영처럼少貳氏에게주목했던견해가없었던것은아니다 [ 齋藤滿 1990], 나아가일본측사료를깊이분석하면서왜구의구성문제를밝혀내려는한국측의연구성과의선구이기도하였다 ( 본위원회의김보한보고 < 한국내왜구연구의학술적검토 > 참조 ). 李領의저서는큰반향을불러일으켰다. 浜中昇는少弐氏나南朝쪽이戰費조달을위해주도했다는견해나惡黨과의관련에대하여평가 지지했지만 [ 浜中昇 2000], 關周一는여기에의문을나타냈고 [ 關周一 2000], 橋本雄는長節子의對馬宗氏에관한연구의축적 [ 長節子 1987] 을전제로생각하면, 庚寅年 (1350) 少弐氏의고려침공에대해서곧바로찬성하기는어렵다고하였다 ( 兵糧을요구한침략행위라는점은찬성 )[ 橋本雄 2000]. 왜구의주체에대해서橋本은동시기의중국정세나해역세계의상황도시야에넣어서검토할것을제기하였고 [ 橋本雄 2002], 關은李領의學說史정리및宗氏와고려의관계에대한이해, 나아가李領이왜구피로인에대하여언급하지않는것등에의문을나타내고있다 [ 關周一 2000]. 浜中昇은일본인만의집단이라는점에서는같은의견이면서도논증과정에대해서는몇가지의문점을나타내고있다 [ 浜中昇 2000]. 또森茂暁는막부의휘하에있던少貳氏의세력이라면, 막부는少貳氏에게명하여어떤조치를강구하였을터인데아무것도할수없었다는점에서생각할때왜구활동에종사했던세력은 少貳氏의지령에반드시굴하지않고, 임기응변으로그때그때의지배적인세력에가담하는, 자연발생적인성격이강하며, 보다더광범위한지역의해상무장세력 이라고하였다 [ 森茂暁 2005]. 海津一朗도다시해역세계로의주목을주장하고惡黨과海賊의동시대적인배경을근거로삼으면서이해해야한다고했다. 즉惡黨도海賊도왜구도국가의통제구역이近畿 ~중부지방까지밖에미치지않았던이시대에존재했던자율적집단이며, 그들에게국가의통제가가해졌을때표면에떠오른다는공통점을갖는다는것이다 [ 海津一朗 2004]. 이들의주장에따르면왜구는해역에서의자율적집단이라고보아야할것인가? 한편李領의연구는종래왜구의침공횟수가문제되었는데, 왜구의피해와시기를지도상의점으로표시하여왜구집단의일련의행동으로추측한점을평가받았다 [ 橋本 米谷

241 일본에서의왜구연구의학설사적검토 ]. 이러한일련의논쟁의한편에서국경으로파악되지않는지역 해역에초점을두고, 日朝多元關係 [ 關周一 2008] 의확립에수반하는통교자로변질되고있던왜구와, 왜구의활동에따른교류를분석하는것이 1990년대이후일본에서는연구의주류가되었다. 우선關周一은왜구가창궐하는 14세기후반부터후기왜구의시기에해당하는 16세기후반까지의 한반도 ( 특히남해안의삼포나도서 )~ 對馬 ~ 壹岐 ~ 五島列島 ~ 九州북부 ( 주로博多 )~ 山陰지역등의범위 를대상으로사람 물건 정보의이동또는전파에주목하는접근법으로지역 해역의구체상을그려나갔다. 왜구그자체보다왜구피로인의경우와본국으로의송환체제를검토했던것이다 [ 關周一 2002]. 한편韓文鐘이조선왕조로부터의수직왜인을조사하자 [ 韓文鐘 1995], 松尾弘毅는壹岐의藤九郞과壹岐의松浦党에주목하여, 그들의조선에대한통교를조사한 [ 松尾弘毅 1999][ 同 2002] 것을계기로五島열도나肥前松浦의조선통교자를분석하였다 [ 松尾弘毅 2004][ 同 2006]. 松尾의관심의초점은왜구에서조선통교자로변질된이른바향화왜인에있었다고할수있다 [ 松尾弘毅 2007]. 아울러서荒木和憲은왜구의주체중하나였던對馬를宗氏의領國으로파악하고, 그지배체제와日朝通交의변천을분석하였다 [ 荒木和憲 2007]. 이들의교류사적인연구와는한획을긋고, 독자적으로 ( 후기왜구까지도포함하여 ) 왜구연구를행했던사람이太田弘毅이다. 田村洋幸과田中健夫, 浜中昇등이위장한고려인에관하여왜구논의를하고있었던것에비하여, 太田은 가짜조선인이되어조선인으로위장했던 왜구에조명을비추고있다 [ 太田弘毅 2002]. 한편秦野裕介는 高麗史 와 朝鮮王朝實錄 에등장하는 왜 와 일본 의용법에주목하여 일본, 일본인 이란室町幕府나征西将軍府를가리키는말이며, 왜 는당시, 즉明代의조공시스템에서탈락한자에게붙인라벨이라고하였다. 당연히여기서의 일본 과현재존재하는국민국가로서의일본은크게다르다. 秦野는도대체 일본, 일본인 이란무엇인가를논의할필요성이있다고호소하고있다 [ 秦野裕介 2002]. 맺음말 100 여년에이르는왜구에관한연구사의윤곽을走馬看山식으로회고하였다. 현재 日韓양국간의의논의초점은왜구의주체및구성원에관한것이다. 지금까지의변변치

242 21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않은정리를기초로약간의감상을서술하며매듭짓고자한다. 1970년대까지는왜구의구성원이 일본인 인가 한국인 인가를현재의국경선을기준으로생각했다. 그러나가령왜구의주체가 일본인 이라해도그것은지리적개념으로서의일본열도출신자라는표현이정확하며, 일본사에있어서중세후기의 일본 국가와의관련을분석하는것은간단치않다. 내란이많았고, 국가의형태가전후의시기에비하여애매했던일본열도중세사의문제이니만큼오늘날의국민국가의틀에서벗어나일본열도의중세사회혹은일본열도의주변지역, 또는일본열도와한반도해역에있어서왜구집단의실태를규명하는연구시각이요구될것이다. < 李順蒙上書 > 와 禾尺 才人 을둘러싼문제도이처럼사료가적고, 게다가 < 李順蒙上書 > 는조선왕조가건국되고 50년이지난후의사료이므로이것을근거로 왜구 = 고려 조선인주체설 을주장하는것은역시무리가있다. 전기왜구 의주된원인은일본열도측에있다고생각하는것이자연스럽지만, 대규모왜구에대해서는그것을가능하게하는다른세력의관여가있었음이틀림없다. < 李順蒙上書 > 에도명확하듯이해역의생활자혹은한반도측의인물이위장왜구로서일정한역할을담당하고있었던것은사실일것이다. 더군다나왜구가조류가복잡한한반도서해안을북상하거나, 한반도의내륙깊숙히침투하고있는것을볼때현지사정에밝은한반도측의누군가의관여가없었다고는생각할수없다. 또太田弘毅가지적했듯이 조선인을가장한 왜구의존재를가능하게하기위해서는역시村井章介가제시한것처럼상호의사소통이가능한해역세계의존재가전제가될것이다. 이처럼왜구의실태는단순한것이아니며, 그해명은오늘날의국경을일단벗어나서지역 해역과그당시국가와의관계를다각적으로검토하지않으면안된다. 그때는일본사뿐만아니라한국사와중국사의성과도받아들이고, 또한日中韓연구자들의합동답사 합동사료조사와같은기회를늘리는것이연구의진전을위해불가결하다는것은말할나위도없을것이다. [ 付記 ] 끝으로본보고서를작성할때, 특히戰前의연구논저수집에있어九州大學韓國學센터에근무하는 ( 본보고작성당시 ) 原智弘씨에게많은협력을받았음을밝히고, 이자리를빌려감사의말씀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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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22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松尾弘毅, 2007 < 朝鮮前期における向化倭人 > 史淵 第 144 号荒木和憲, 2007 中世対馬宗氏領国と朝鮮 ( 山川出版社 )

247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아라키가즈노리 ( 荒木和憲 ) 머리말 Ⅰ. 倭變과약조 Ⅱ. 三浦의난후의僞使와對馬宗氏 1. 僞使의발견 (1950~1980 년대전반 ) 2. 僞使연구의진전 (1980 년대후반 ~2000 년대 ) Ⅲ. 日朝무역과동지나海域의변용 Ⅳ. 사료와사료연구 1. 조선사료 2. 일본사료 3. 외교문서맺음말 머리말 필자에게주어진과제는 16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적검토 이다. 우선 16세기일조교류사 를어떠한시간의폭으로이해할것인가에대하여, 일조교류의근간을뒤흔든사건인 三浦의난 (1510년) 과 文祿 慶長의役 ( 임진왜란, 1592~98) 을그시기및종기라고하는것에異論은없을것이다. 따라서본고에서는삼포의난 (1510년) 부터文祿의役 (1592년) 까지의일조교류사를대상으로한연구에관하여학설적으로검토한다. 다만文祿의役직전의僞日本國王使에의한일조교섭과관련된연구에대해서본고에서는기본적으로취급하지않는것으로하겠다. 그러면종래의 16세기일조교류사연구에대해서 (1) < 倭變과약조 > (2) < 三浦의난이후僞使와對馬宗氏 > (3) < 日朝무역과동지나海域의변용 > (4) < 사료와사료연구 >

248 22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상네항목으로나누어정리 검토하고, 약간의私見을넣어가면서, 앞으로의과제에 대해서도제시하고자한다. Ⅰ. 倭變과약조 삼포의난 (1510년) 및壬申約條 (1512년) 에대해서포괄적으로검토한것은 [ 中村 b] 이다. 삼포의난이후의강화교섭의경과를명확하게한다음에임신약조의條文을복원하고, 이것을 16세기교린체제의기본약조로평가하였다. 또임신약조는 對馬의文引制를원래대로인정하여통교검찰의기초로 삼고있으며, 쓰시마도주는이를거점으로특수권익의부활을도모하고, 여전히교린체제를바탕으로그지위를존속하고회복강화해가는것이가능했다 고한뒤, 日本國王使혹은大內殿 小二殿등처우가유리한送使를이용하여선단의준비나무역품의조달등을행하고, 새로운정세에적응한통교체제를형성하고있었다 는견해를제시했다. 16세기에있어서통교관계변용의원인의하나로임신약조가평가된것이다. 삼포의난 임신약조에대하여설명한것으로는우선삼포의난발생요인을 15세기후반부터 16세기초기에걸친조선왕조의광물 ( 금 동 ) 수입제한에서찾았던 [ 長 1997] [ 荒木 2003], 발생당시에서울東平館에체재하고있던일본인통교자의동향에주목했던 [ 村井 1995b] 가있다. 또임신약조로인하여항만도시삼포가소멸한뒤의浦所에대해서는留館倭人과조선인의교류와알력을지적한 [ 村井 b 1999] [ 長 1993] [ 崔 2003], 부산포의재개항연대를 1521년으로보는정설을부정하고 1517년설을제시한 [ 長 2006] 이있다. 蛇梁의변 (1544년 ) 발생이후 < 絶倭論 > 의대두및丁未約條 (1547년 ) 의체결에이르기까지의경과를명확히한것은 [ 中村 1969b] 이다. 정미약조에따른薺浦의폐항에대해서는 [ 崔 2003] 이왜인의근거지가되었던加德島와관련시켜서논하고있다. 임신 정미약조에서는많은深處倭名義통교권이정지되었는데, 그구체적인명의에대해서는 임신약조가성립한당초로되돌아가深處倭圖書의접대가거부된것을復元的으로考定하는일은사료적으로도저히불가능하다 [ 中村 1969b] 고여겨져왔다. 그런데사료의면밀한분석을통하여이것을해명한것이 [ 長 2007] 인데, 對馬宗氏의통교권부활공작을보다구체적으로이해할수있게되었다. 정미약조성립이후對馬宗氏는해적 ( 후

249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223 기왜구 ) 정보를적극적으로제공하여조선측의환심을사면서통교권부활교섭을추진했는데, 이에대해서는해적정보의제공을검토한 [ 森 1951] [ 高橋 1989], 丁未約條 (1547 년 ) 부터達梁倭變 (1555년) 丁巳約條(1557년) 에이르기까지의경과를명확히한 [ 中村 1969b], 僞日本國王使에의한통교권부활교섭을검토한 [ 田代 米谷 1995] [ 米谷 1997a] 이있다. 16세기의기본적인약조는壬申 丁未 丁巳의세약조인데, 임신 정미약조와정사약조는성질을달리한다. 임신 정미약조는 倭變 ( 삼포의난 사량왜변 ) 후對日斷交및강화과정에서도입된통교제한강화책이지만, 정사약조는對馬宗氏가가져온해적정보의신빙성이達梁倭變 ( 후기왜구에의한습격사건 ) 의발생으로증명된사실을받아들여서도입된통교제한완화책이다. 게다가정사약조는조문이밝혀지지않았으며, 歲遣船 5척이부활된것을겨우알수있는데불과하다 [ 佐伯 2004]. 과연정사년 (1557년) 의협정을임신 정미약조와병렬적으로 약조 로보아도될것인가 ([ 中村 1969b] 는 그성립연대에서이것을정사약조로통칭하고있다 고한다 ) 예를들어 1523년에도임신약조의세견선규정이 25척에서 30척으로개정되었는데, 이때의협정을 약조 라고부르지는않으며, 임신약조의부분개정으로간주하고있다. 따라서정사년의협정은정미약조의부분개정의범위를벗어나지않았을가능성이있기때문에, 일단은 16세기의기본약조를임신 정미약조로간주할수있을것이다. 對馬 -조선간의협정은너무많아서일일이셀수없지만, 이중어떤것을 약조 로부를것인가하는근본적인문제 ( 사료용어와연구개념 ) 를고려해야한다. 또임신 정미약조라고하면어찌됐든통교권의축소에주목하는경향이있지만, 한반도남해안지역에서일본인의생산 유통활동및조선인과의교류를어디까지규제할수있었는지도중요한문제이며더욱더검토가필요하다. Ⅱ. 삼포의난후의僞使와對馬宗氏 1. 僞使의발견 (1950~1980 년대전반 ) 전후얼마지나지않아중세日朝무역에관하여개설한 [ 黑田 1948] 은 15 세기전반의 쓰시마도주문인제도의확립을僞使발생의계기로간주하고, 告身과圖書는점차對 馬로집약되고, 受職 受圖書人이지닌무역상의특권은告身과圖書의소재에따라점점

250 22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쓰시마인의손으로옮겨가고, 그렇지않은자도연고를청하여宗氏와종속관계를맺었으며, 실질적으로圖書를사용하고, 告身의은혜를입은자는모두宗氏의일족이거나그家臣, 아니면對馬에거주하는상인이되었으며, 무역의이익은모두對馬一島가독점하기에이르렀다 고지적했다. 이것은 16세기후반對馬의기록인 < 朝鮮送使國次之書契覺 >( 이하 < 書契覺 >) 을염두에둔지적으로보인다. 논증이불충분하기는하지만, 현재의연구동향에비추어생각하면, 15세기전반使國次 16세기후반에걸친對馬宗氏의僞使파견체제의존재를간파한탁월한견해라고할수있다. 계속해서 [ 田中 1954] 는 < 書契覺 > 의기재내용을본격적으로분석하여宗義調가 무역권의對馬집중 의중심인물이며, 對馬에집중된무역권이知行대상이되어宗氏 - 家臣간에순환하고있었다는것 ( 무역권의이동 ) 을지적했다. 그러나 무역권의對馬집중 의요인을삼포의난이후조선왕조의통교제한강화와동지나해역의변용에서구하고있어, [ 黑田 1948] 과의견해에중대한차이가있다. 즉 무역권의對馬집중 의시기를 15세기전반으로볼것인가 [ 黑田 1948], 16세기초기로볼것인가 [ 田中 1954] 하는문제이다. 결과론적으로말하면이견해의차이가오랫동안인식되지않았기때문에그후의연구에있어서는통교사절의진위판정은개별적으로될수밖에없었고, 전체적인관점에서이루어진적은없었다고할수있다. 이문제를강하게의식하게된것은극히최근의일에지나지않는다 ( 후술 ). 그러면僞使를검출한연구에대해서정리해두고자한다. 日本國王使 巨酋使 16세기후반의 右武衛殿使 를장군足利義昭의명의를이용한織田信長의使送으로간주하여, 信長의적극적인대외지향의연장선상에서豊臣秀吉의대륙침공을평가했던기존의설을비판하고, 右武衛殿使 는渋川氏명의의使送이라는것을지적한것이 [ 中村 1959] 이다. 이를바탕으로 對馬에서통교권의취득을위해가공의인물을상정하고, 右武衛殿을가탁하여사자를보냈을지도모른다는의심을품게한다 고하며僞巨酋使의존재를시사하는한편, 일본국왕의添書가있는것을생각하면당시일본국왕으로서조선과통교하고있던足利義昭의소개장도지참했던것으로판단된다 고하고있어, 이시기의일본국왕사를眞使로간주하고있는것처럼이해된다. 그러나 [ 中村 1969b] 에서는對馬의사료인 < 宗左衛門大夫覺書 > 의검토에근거하여 1511년의일본국왕사를 對馬에서준비하여왕래했던것 으로간주하고, 그후의국왕사에대해서도동일한이해를

251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225 보이고있다. 諸酋使 15 16세기筑前宗像氏의조선통교를논한 [ 小島 1965] 는 16세기 宗像氏助 명의의통교에대해서 < 書契覺 > 의분석을기초로 ( 합계 11회의통교는- 筆者注 ) 모두氏助의도장을사용하여그명의에의한통교무역선이宗氏의손에의해파견되고있다 고하면서도이것을 對馬宗氏에의존하는정도의강하고새로운방식의조선과의통교무역전개 로보고, 이통교무역의주체가바로大宮司氏貞이라고추단하는데문제가없다 고하였다. 여기서는실재하는 氏貞 과통교명의인 氏助 와의차이는문제삼지않았다. 한편肥前의 田平源兼 명의의통교를검토한 [ 長 1977] 은 < 書契覺 > 등의분석에기초하여 源兼은가공의인물이며, 對馬에서과거田平氏의조선통교실적에주목하여가공으로만들어낸명의 라는것을지적했다. 통교명의와실재하는人名의상이로僞使를판단한최초의연구로서주목된다. 지금까지개별적으로본것처럼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연구에서 무역권의對馬집중 론이라는위사연구의맹아가보이고있는데, 그근거가되었던 < 書契覺 > 에실린통교명의의이해를둘러싸고對馬단독의위사통교로보는견해및본래의통교명의인과의협동에근거한통교로보는견해가병존하고있다. 또 위사 라는용어 개념을처음으로사용한것은 [ 田村 1972] 로파악되는데, 그분석대상은 14세기말~15세기전반의위사이기때문에 1970년대까지의연구사에있어서는 15세기전반~16세기후반의위사가 위사 로불린적은없었다는점도지적해둔다. 2. 僞使연구의진전 (1980 년대후반 ~2000 년대 ) 1980 년대에 환지나해지역 론 [ 村井 1985] 에기초를둔연구가활성화되어, 무역권 의對馬집중 이전의 (15 세기 ~16 세기초두 ) 다양한통교가주목을받게되었다. 그가 운데위사의존재가부각되기에이르렀다. 위사를검출한연구를정리하고자한다. 日本國王使 [ 村井 1993a] 은삼포의난이후의일본국왕사를분석하고이것을宗氏에의한위사로

252 22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판단했다. 그때까지는삼포의난후의일본국왕사의진위를둘러싼견해에동요가있었지만 [ 中村 b], 여기에이르러서명확하게위사로보게되었던것이다. 또 [ 村井 1987] 은 15세기후반의琉球國王使와夷千島王使를 위사 로간주하고, 이것을 倭人海商 이무역이윤을획득하려고했던위장공작으로파악하고있으며, [ 村井 1993a] 의전제가된논고이다. 또한 [ 田代 米谷 1995] 에서宗家舊藏의위조 德有隣 印이소개됨으로써僞國王使의존재는더욱확실해졌다. 그리고僞國王使의발생요인을 明應의정변 (1492년) 으로인한장군권력의분열에서찾은것이 [ 橋本 1998] 이며, 僞國王使의파견에필수인 牙符 ( 상아로만든通交資格證明札 ) 가西國大名 ( 大內氏 大友氏 毛利氏 ) 휘하에보관되고있으며, 宗氏는그들에게서牙符를차용하여僞國王使를파견했던것이명확해졌다. 더구나對馬宗氏가深處倭名義통교권의부활교섭을위하여僞國王使를이용하고있었다는점을지적한 [ 米谷 1997a], 僞國王使의正使를맡는동시에국서위조에도관여했던禪僧에대하여논한 [ 伊藤 1999a 1999b 2002b], 豊臣政權아래에서위조국서의원본을조사했던 [ 伊藤 2002c] 도있다. 巨酋使삼포의난이후巨酋使레벨의위사를망라해서검토한연구는없지만, 15세기단계의거추사거의모두가위사라는 [ 橋本 1997] 의지적을인용하면, 그대부분이위사였던것으로판단된다. 아울러서 [ 米谷 1997a 1998b] 은渋川氏명의의위사로조선에도항했던승려天荊의사행록분석을토대로위사의활동실태를명확히하고있다. 諸酋使삼포의난이후의諸酋使레벨, 즉深處倭의통교사절의진위를둘러싸고 [ 長 1982] 이 < 書契覺 > 에보이는壹岐의 牧山正 명의의통교권익의운용에대하여검토하고, 宗氏 塩津留氏와牧山氏사이에임대계약이존재했던것을명확히했다. 이에따라통교명의인이전혀관여하지않은제삼자 ( 宗氏 ) 에의한위사통교외에, 통교명의인 ( 牧山氏 ) 과대리인 ( 宗氏 塩津留氏 ) 의계약에기초한위사통교가존재했던것이밝혀졌다. 후자의케이스를어디까지보편화할수있는가는사료적제약으로인하여판단하기어렵지만, [ 小島 1965] 와같은해석도성립할여지가남아있다. 그후 [ 佐伯 1994] 은宗像氏명의의통교사절을위사로간주했고, [ 增田 1990] [ 關

253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 은島津氏 宇久氏명의의통교사절을眞使로보았다. 이처럼진위판정에는여전히동요가보이지만, [ 田代 米谷 1995] 에서宗家舊藏의圖書 木印이소개되어, 對馬宗氏가深處倭통교권을이용하고있었음을알려주는중대한물적증거가되었다. 또 [ 米谷 1997a] 은宗氏가僞國王使를이용하여深處倭명의통교권을입수했다는점을분명히했다. 나아가 15세기를대상으로하는연구에서巨酋使및세조대의瑞祥祝賀使 宗貞國請使 ( 합계 82 使 ) 의거의대부분이위사로판단되는등 [ 橋本 1997] [ 長 2002b], 통교사절의진위판정이엄밀해진가운데 1450년대이후의深處倭명의의통교사절대부분이위사였다는점도분명해졌다 [ 長 2002b c] [ 佐伯외 2006]. 일찍이 [ 黑田 1971] 은 < 書契覺 > 에기재된통교명의가 海東諸國紀 (1471년 ) 에기재된통교명의를계승한것임을지적했는데, 선행명의 후계명의모두가對馬에서이용하고있었던것이된다. 1) 이처럼 무역권의對馬집중 의시기가 1450년대까지거슬러올라가는것이확실해졌고, 그러한상황이倭變과약조 ( 삼포의난 사량왜변과임신 정미약조 ) 에의한영향을받으면서도 16세기말까지지속됐던것으로이해되었다. 예를들면 [ 松尾 2004] 가宇久氏명의의통교사절이眞使에서僞使로轉化했다고지적했듯이, 그때까지眞使로간주되던통교사절도僞使로판정되기에이르렀다. 또한위사연구의심화속에서단순한통교사절의개별적인진위판정만으로는불충분하게되었다. 위사연구를포함한중세일조교류사상의재구축, 혹은위사연구의동아시아통교권레벨로의전개가요구되고있으며 [ 伊藤 2005][ 橋本 2005], 전자에대해서는 15~16세기의 무역권의對馬집중 의발생과전개를宗氏領國의실상과관련지어설명한 [ 荒木 2007] 이있다. 3. 僞使의개념 여기서 위사 라고하는용어 개념에대하여확인해두고자한다. 처음으로 위사 라는용어를사용한것으로보이는 [ 田村 1972] 은그개념을 무역의이익을위해개인적으로통교를허가받은對馬 壹岐등의중소토호와대호족의명의를속이고通商에종사했던상인단 으로규정한다. 이것은 14세기말~15세기전반의위사에적용한개념규 1) 黑田省三씨는 1940 년대의단계에이미문인제도의도입이宗氏에의한위사파견의계기인점을지적하고있다 [ 黑田 1948]. 黑田씨가명확한언급은하지않았지만 海東諸國紀 에기재된통교명의와 < 書契覺 > 에기재된통교명의가모두宗氏에의해이용되고있었던것을상정하고있었던것은아닐까.

254 22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정이며, 17세기초기에이르기까지의對馬宗氏가관여하는형태의위사까지포괄할수있는것은아니다. [ 橋本 2005] 은 어떤인간 ( 실재하지않는가공의인물이라도좋다 ) 의명의를사칭해서제3자가외교사절을꾸며내고, 외국과통교하여무역이윤을획득하는현상 존재 라고하며, 무역이윤의획득이라는목적을강조한다. 물론위사의대부분은이설명으로충분하지만, 예를들어 16세기말~17세기초의僞國王使처럼외교교섭에비중을둔위사까지포괄할수는없다. [ 伊藤 2005] 은통교사절의유형화를시도하여 Ⅰ 眞使, Ⅱ 眞使便乘型, Ⅲ 請負通交型, Ⅳ 名義借通交型, Ⅴ 名義讓渡通交型, Ⅵ 通交名義詐稱型, Ⅶ 有力者名義詐稱型, Ⅷ 架空名義詐稱型 Ⅸ 架空國家詐稱型 의 9가지유형을제시했으며, 이중 Ⅴ~Ⅸ형이위사에해당하는것으로보았다. 다만 Ⅲ Ⅳ형은진위를판정하기어려운그레이존 (gray zone) 이며, 통교명의인과통교사절의직접적인계약관계유무를실증하는것은사료적제약으로인하여곤란하다. 이처럼 위사 의개념화에는어려움이따를수밖에없지만, 종래의연구사에있어서위사의판정기준으로는 (1) 제삼자가통교명의인의양해없이파견한통교사절 (2) 비록통교명의인의양해가있어도통교제도의이념에반하여파견된통교사절로크게구분할수있을것이다. (1) 은일본측의위사파견주체및통교명의인측의관점, (2) 는조선왕조측의관점에서본위사이다. (2) 의구체적인예로는牧山氏명의의통교를들수있다. 牧山氏명의의통교권에관해서는宗氏 塩津留氏와牧山氏사이에임대계약이맺어져있기때문에 (1) 의요건은충족하지않지만, 통교명의인의관하에소속되지않는제삼자 2) 에게통교권이대여되는사태는조선왕조가설정한통교제도의이념에반하는것이기때문에위사로판정되는것으로생각된다. (1), (2) 모두 위사 로개념을규정해버리면그만이겠지만, (2) 에대해서는 위사 라는용어의뉘앙스에적합하지않다는느낌도부정할수없다. 위사 의이해에관한연구자간에미묘한차이가발생한것은이부분에서기인하는것이아닐까? 어쨌든 위사 라는용어 개념의사용및해석에대 2) 조선왕조가설정한서계제도 수도서제도 세견선제도는불특정다수의일본인들이개별적으로쇄도하여통교해오는것을제한하고, 그들을특정소수의통교명의인의통교사절이라는형태로來航시키고자하는것이다. 예를들어쓰시마도주세견선 ( 宗氏명의에의한연간 50 회의통교 ) 의대부분에대해서는宗氏家臣이실질적인통교주체가되고있으나, 이것은도주세견선제도의도입에임하여조선왕조가미리예상했던사태이기때문에이들을위사로간주할수는없다. 즉, 통교명의인이管下의사람들에게통교권의행사를대행시키는것은조선왕조에게있어서는문제가되지않는것이다. 그러나 관하에소속되지않은제삼자 가통교권의행사를대행하는것은상정외의사태라고생각할수있다.

255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229 해서는신중을요한다. 16세기에는거주지를사칭하고조선의관직을받은對馬의受職人이다수보인다 [ 荒木 2007]. 주지하는바와같이수직제도에있어서는수직인본인의조선도항이의무이기때문에통교사절의형태를취하지않은 僞受職人 을 위사 로표현할수는없다. 따라서이들을포괄적으로 僞裝通交 로부르고, 그안의유형으로서 위사 와 僞受職人 을자리매김할수있을것이다. Ⅲ. 日朝무역과동지나해역의변용 16세기의日朝무역에서특징적인事象은일본은의수출이며, 灰吹法의전래, 石見銀山의생산확대, 일본은의해외수출, 한반도의은유통등을논한 [ 小葉田 1932a] [ 村井 1996] [ 大西 2002] [ 秋田 2007] 이있다. 그밖에금 동 향료 면포 매의수출입에관하여설명한 [ 小葉田 1932a b][ 關 1992] [ 金 1997] [ 田中 1977] 이있다. 무역상인론으로는博多의豪商島井宗室을논한 [ 田中 ], 對馬府中町人 ( 古 60인 新 60인 ) 의계보관계를명확히밝힌 [ 田代 1981], 對馬무역상인의대부분이地侍層이라는것을지적한 [ 荒木 2005] 가있다. 또禪僧의사행록을근거로무역의구체적인양상을밝힌 [ 米谷 1998a] 도있다. 日朝무역사연구는 15세기에집중되고, 16세기를대상으로한것은드물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 의일본관계기사가 16세기가되면격감한다는사료적제약에의한것이다. 따라서 16세기日朝무역사연구를진전시키기위해서는사료의博搜와철저한분석및방법론의구축이필수적이다. 후자에대해서는 15세기와 17세기의비교검토도생각할수있지만, 16세기에특유한문제로서후기왜구의영향을고려할필요가있다. 16세기의日朝교류와후기왜구의관계를논한것으로특히주목되는것이 [ 高橋 1989] 이며, 조선무역권의對馬로의집중은확실히對馬의이익을증대시켰고, 對馬 경상도남해안사이해역의배타성을높였 지만, 고립이심화되고, 활동이그해역으로봉쇄 되었으며, 明人海商에의해활성화되었던해상교통의변동에대해서도對馬는적극적으로관여할수없었고, 오히려적대적으로될수밖에없었다 고한다. 또 [ 米谷 2003] 은 왜구세력의활동으로수세에처한對馬는조선교역에있어서자기의권익을사수하기위하여그폐쇄성을더욱강화하게되었다 거나, 博多 - 對馬 -조선라인은왜구

256 23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적세계로부터애써차단하고고립화를심화시켰다 고지적한다. 이처럼 무역권의對馬집중 은 16세기중엽동지나해역의변용과관련지어논했고, 對馬는기득권익을고집해폐쇄성 배타성을굳혔다는부정적인평가가이루어지고있다. 그러나 무역권의對馬집중 이 1450년대부터시작된것이라면, 그것은 16세기중엽의동지나해역의변용과는직접적인인과관계를갖지않는것이되어버린다. 다만 [ 高橋 1989] 의 ( 安藝大願寺僧尊海의조선도항은- 筆者注 ) 對馬島밖에서독자적으로사절을파견하는것이얼마나곤란했는가를보여주는동시에, 통상의조선무역이선박운행을포함하여거의對馬島民에의해운영되었다는것도보여주고있다. 물건과는달리사람 선박의이동에관해서對馬는폐쇄적으로되었던것이다 는지적은중요하다. 어디까지나통교무역의창구가對馬로한정되어日朝간에있어서사람 물건 정보의이동이제약을받는다는것이며, 對馬의사회가동지나해역으로부터완전히고립되어있었던셈은아닌것이다. 이러한對馬 - 博多라인의폐쇄성 타성을생각하는데, 일본중세상인의 배타적영업권 ( 나와바리 ) 론 [ 櫻井 1996] 이참고가되겠다. 무역권의對馬집중 은宗氏領國의정치상황과밀접하게관계되는것이지만 [ 荒木 2007], 對馬상인및博多상인의배타적영업권과도무관하지는않을것이다. 14세기후반부터 15세기전반에걸쳐宗氏보다앞서무역상인들이위사통교를행하고있었다는점 [ 田村 1972] 에서이단계에서이미상인사회의레벨에서는 위사통교권의집적 ( 무역권의집중 )= 조선무역업의배타화 가진행되고있었던것은아닐까? 그리고 1440년대이후, 宗氏가심처왜명의통교권의집적을계획하여문인제도를수단으로써상인사회에축적된위사통교권을자기체제안으로흡수한것으로 무역권의대마집중 이발생하였다고보는것이가능하지않을까? 어쨌든얼마간의배타적영업권이병존하였고, 항만도시博多나對馬府中이이들을결부시킨접점인동시에필터로써도기능하였으며, 그밖의영업권으로부터사람 물건 정보의유입을선택적으로수용 배제하고있었다고볼수있겠다. 어디까지나추측의영역을벗어나지는못하지만, 무역권의對馬집중 에따른對馬 - 博多라인의폐쇄성 배타성의평가에대해서는일본중세상인의상업관행까지고려할필요가있다. 또한日朝교류의고립성 폐쇄성론의배경에는조선왕조의관리무역 ( 공무역 사무역 ) 을폐쇄적으로간주하고, 동지나해의자유무역 ( 밀무역 ) 을개방적으로보는도식이내재하고있다. 이도식에있어서는동지나해역의자유무역의개방성을강조하면할수록, 조선왕조의관리무역은구태의연하고폐쇄적이라는부정적인평가가내려지게된다. 그러나

257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231 국가의관리무역이상당한빈도로계속적으로이루어져왔다는것에대한의의를재평가해야할것이다. 시대 지역을달리하는연구이지만해상과국가와의관계를논한 [ 山內 2003] [ 榎本 2007] 에의하면해상에있어서국가의관리무역은안전성 확실성이라는측면에있어서일정한메리트가있었다고한다. 이처럼다른시대 지역의무역실상을참고하면서 3) 16세기日朝간의관리무역을단순하게동지나해역의자유무역과의대립이라는도식으로파악한종래의평가를재검토하고, 총체적인동아시아의무역네트워크속에서양자를구조적으로평가할필요가있다. Ⅳ. 사료와사료연구 1. 조선사료 조선측의기본사료는말할필요도없이 조선왕조실록 ( 중종 인종 명종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 이지만, 16세기의일본관계기사는 15세기와비교하여극히간략하게되어있다 [ 孫 2002]. 게다가 무역권의對馬집중 에수반하여조선에서입수한일본정보는對馬를경유한것이대부분이며, 위사의파견은물론다양한국면에있어서宗氏는정보를조작하고있었다 [ 森 1951] [ 米谷 1997b]. 따라서 조선왕조실록 의일본관계기사는질과양모두한계가있으며, 그밖의기록류 ( 眉巖日記草등 ) 편찬사료( 攷事撮要등 ) 문집사료를유효하게활용하지않으면안된다. 이중에서문집사료에대해서는한국에서 韓國歷代文集叢書 韓國文集叢刊 이간행되어이용이용이해졌지만, 아직도유효한활용이가능하지않은것이실상이다. 다만문집사료에보이는한시문의응수를논한 [ 村井 1995a], 동경대학사료편찬소소장 < 일본관계조선사료 >( 문집사료의발췌록 ) 를소개한 [ 米谷 1998b], 한국문집총간 에서일본관계사료를추출한 [ 須田 2007][ 佐伯 2008] 이있다. 3) 日朝무역사연구와타분야의무역사연구에서는때때로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 의개념이다르기때문에비교검토시에주의를요한다.

258 23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2. 일본사료 16세기日朝교류를보여주는일본사료는 15세기보다도풍부하다. 이것은조선측사료의모습과는대조적이며, 조선사료와일본사료를조합하여상호보정하는작업이필수적이다. 우선對馬사료에대해서는 1 宗家文書 ( 혹은對馬藩사료 ) 2 宗氏家臣의家文書, 3 禪僧관계사료로나눌수있다. 宗家文書중에는古文書 [ 武田 1926] [ 佐伯 2000], 古文書集 (< 大永享祿之比御狀幷書狀跡付 >[ 田中 1976], < 諸家引着 >[ 西村 1984]), 古記錄 (< 宗左衛門大夫覺書 >, < 朝鮮送使國次之書契覺 >[ 田中 1955][ 中村 1969a]), 宗家判物寫 ( 長崎縣史 사료편 1), 근세편찬물 ( 朝鮮通交大紀 [ 田中 田代 1978], 分類紀事大綱 등 ) 이있다. 宗氏家臣의家文書에대해서는대부분이宗家判物寫에수록되어있는데, 현존하는원문서도많다. 이들에대해서는東京大學史料編纂所 長崎縣立長崎圖書館이사진판을제작 공개하고있다 ( 후자는長崎歷史文化博物館架藏 ). 未飜刻혹은宗家判物寫의미수록사료도적지않다. 禪僧사료로는天荊의사행록인 < 右武衛殿朝鮮渡海雜藁 >[ 田中 1915] 및 < 朝鮮國往還日記 >, 景轍玄蘇의유고집 仙巢稿, 規伯玄方의저작 家康公命和睦朝鮮對馬送使約條幷對馬私記 [ 田代 李 2000] 가있다. 이어서對馬이외의일본사료중중요한것으로는 < 尊海渡海日記 >( 廣島縣史 중세자료편 3, [ 中村 1963]), < 島井文書 >( 福岡縣史 近世史料編福岡藩町方 1), < 大友文書 >( 增補訂正編年大友史料 ), < 由比文書 >( 西國武士團關係史料集 14), 善隣國寶紀 [ 田中 1995], 異國出契, 武家諸法式 등이있다. 또한호피 표피등의조선산물품 (< 唐物 >) 의유통상황을추적하고자한다면상당히광범위한사료를博搜해야할것이다. 3. 외교문서 외교문서 ( 서계 문인 ) 의양식론 형태론적검토를시도한것으로서 [ 伊藤 2002c] [ 米谷 2002a 2002b] 이있으며, 料紙 서체 문언등다각적인관점에서검토가되어있고, 특히

259 16 세기日朝交流史연구의학설사적검토 233 외교문서의진위판정에중요한의의를가지고있다. 또외교문서에날인된圖書 ( 證明印 ) 에대해서는宗家舊藏의圖書및木印 ( 木製僞造印 ) 을소개한 [ 田代 米谷 1995] 가있다. 16세기日朝교류는 무역권의對馬집중 속에서이루어졌기때문에일본사료속에보이는對馬사료의비중이매우크다. 對馬사료중에도未飜刻사료 ( 宗家物寫 家文書 禪僧사료 ) 가많이있기때문에이들의활자화작업과여러사본과의對校작업등기본적인작업이필수이며, 이러한작업에근거로조선사료와비교검토하지않으면안된다. 맺음말 지금까지 16세기일조교류사연구의학설사적검토를시도해보았다. 마지막으로전체적인과제를제시해두고자한다. 15세기일조교류사연구에있어서는 조선왕조실록 의일본관계기사가풍부하지만, 일본사료는단편적이며점수도적다는사료의편재성이있다. 한편 16세기일조교류사연구에있어서는 조선왕조실록 의일본관계기사가질 양모두적으며, 일본사료, 특히對馬사료가다수잔존하고있다는편재성이있다. 즉 15세기일조교류사상은조선사료에대한의존도가높고, 16세기일조교류사의像은對馬사료에대한의존도가높기때문에 15세기와 16세기는일조교류사의像에격차가생길수도있다. 이러한격차가실상을반영한것인지, 그렇지않으면사료의편재성에幻惑된것에불과한것인지를정확하게판단하는것이중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일본사료 ( 對馬사료 ) 조선사료의博搜와비교검토가필수요건이된다. 그러한기초작업과함께방법론을단련하는것으로 16세기일조교류사와 15세기일조교류사의연속성 비연속성을명확히해야하며, 또 16 세기일조교류사와 17세기전반일조교류사의연속성 비연속성도검토할필요가있다.

260 23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참고문헌 秋田洋一郎, 2007 < 一六世紀石見銀山と灰吹法伝達者慶寿禅門 >( ヒストリア 207) 荒木和憲, 2003 < 中世後期における対馬宗氏の特送船 >( 九州史学 135, 荒木 2007) 荒木和憲, 2005 < 中世対馬の朝鮮貿易と領国経済 >(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5, 荒木 2007) 荒木和憲, 2007 中世対馬宗氏領国と朝鮮 ( 山川出版社 ) 伊藤幸司, 1999a < 中世後期の臨済宗幻住派と対外交流 >( 史学雑誌 108-4, 伊藤 2002a) 伊藤幸司, 1999b < 一五 一六世紀の日明 日朝交渉と夢窓派華蔵門派 >( 朝鮮学報 171, 伊藤 2002a) 伊藤幸司, 2002a 中世日本の外交と禅宗 ( 吉川弘文館 ) 伊藤幸司, 2002b < 中世後期における対馬宗氏の外交僧 >( 年報朝鮮学 8) 伊藤幸司, 2002c < 現存史料からみた日朝外交文書 書契 >( 九州史学 132) 伊藤幸司, 2005 < 日朝関係における偽使の時代 >( 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第二分科 ) 榎本渉, 2007 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 ( 吉川弘文館 ) 大西信行, 2002 <16 世紀朝鮮半島における倭銀の流通とその条件 > ( 石見銀山歴史文献調査団編, 石見銀山 ( 研究論文篇 ) ( 思文閣出版 )) 長節子, 1982 < 十六世紀対馬の朝鮮通交独占体制の一考察 >( 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学退官記念朝鮮史論文集 ( 開明書院 ) 長 1987) 長節子, 1987 中世日朝関係と対馬 ( 吉川弘文館 ) 長節子, 1993 < 興利倭船の研究 >( 朝鮮学報 146, 長 2002) 長節子, 1997 < 一五世紀後半の日朝貿易の形態 >( 中村質編, 鎖国と国際関係 ( 吉川弘文館 )) 長節子, 2002 中世国境海域の倭と朝鮮 ( 吉川弘文館 ) 長節子, 2006 < 壬申約条後の釜山浦再開港時期について > ( 李泰勳과의共著論文 < 朝鮮前期の浦所に関する考察 > 第 2 章, 九州産業大学国際文化学部紀要 34) 長節子, 2007 < 壬申 丁未約条接待停止深処倭に関する考察 >( 年報朝鮮学 10) 長正統, 1963 < 景轍玄蘇について >( 朝鮮学報 29) 長正統, 1968 < 朝鮮送使国次之書契覚 の史料的性格 >( 朝鮮学報 33) 韓文鍾, 2006 <14~16 世紀の三浦地域と日本 >( 森川哲雄 佐伯弘次編 内陸圏 海域圏交流ネットワークとイスラム ( 櫂歌書房 )) 金永徽, 1997 朝日綿布貿易と綿業の展開 ( 渓水社 ) 金光哲, 2001 < 対馬の偽使 日本国王使 >( 東アジア研究 33) 黒田省三, 1971 < 中世対馬の知行形態と朝鮮貿易権 >( 国士舘大学人文学部紀要 3) 桑野栄治, 2007 < 朝鮮中宗代における対明遙拜儀礼 >( 久留米大学文学部紀要 国際文化学科編 24) 小島鉦作, 1965 < 筑前宗像氏の海外通交貿易に関する考察 >( 成蹊大学政治経済論叢 15-3) 小葉田淳, 1932a < 中世後半期における日鮮金銀貿易の研究 >( 史学雑誌 43-6, 小葉田 1976) 小葉田淳, 1932b < 中世における日鮮銅貿易の研究 >( 社会経済史学 2-6, 小葉田 1976) 小葉田淳, 1976 金銀貿易史の研究 ( 法政大学出版局 ) 崔相振, 2003 << 三浦の乱 > 以降, 三浦から釜山浦に一元化される過程 >( 韓国言語文化研究 5) 佐伯弘次, 1994 < 中世後期の宗像氏と朝鮮 >( 川添昭二 網野善彦編, 中世の海人と東アジア ( 海鳥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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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37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나카노히토시 ( 中野等 ) 머리말 Ⅰ. 근세전기일본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위치설정 Ⅱ. 근세후기일본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위치설정 Ⅲ. 근대일본의성립과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Ⅳ. 패전이후 80 년대에이르는연구동향 Ⅴ. 관심의다양화와문제점 머리말 이른바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이라고부르는전쟁에대하여어떤명칭을부여할것인가하는논의자체가이미 学説 史를이룬다고할수도있다. 동시대의사료에는 唐入り 大明へ御道座 라는표현이보이지만, 근세초기에는堀正意의 朝鮮征伐記 로대표되듯이 唐入り 는 朝鮮征伐 이라는표현으로바뀌어가는듯하다. 그밖에 朝鮮陣 高麗陣 征韓 이라는표현도많이사용된다. 어찌됐든 征明 등의표현처럼중국의존재를전제로하기보다 朝鮮 高麗 등을씌워서전쟁을호칭하는일이일반화되었다. 근대로들어서서한반도가식민지화되어가는과정에서 朝鮮征伐 이나 征韓 등의표현을피하고 文祿의役 및 慶長의役 이라는표현이사용되었으며, 이를합쳐서 文祿 慶長의役 이라는명칭이정착한다. 물론이러한표현은일본의 ( 내지일본에서본 ) 입장이며, 한국에서는일반적으로 壬辰倭亂 과 丁酉再亂, 중국에서는 抗倭援朝 万曆朝鮮役 또는 万曆日本役 이라는표현이일반적이다. 그후 60년대로들어서면일본의한반도에대한파병이 侵略 행위라는의식이강해지게되며, 일본에서는 朝鮮侵略 이라는호칭을자주사용하게된다. 한편, 일본은물론원래부터한국 중국의풍부한연구축적을바탕으로전쟁이라는호칭에대해서도다시

264 23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생각해야한다는제안이일어나게되었다. 예를들면貫井正之씨는豊臣秀吉의대외적인정복의도전반을검토하고책이름에 海外侵略 이라는문구를채택했으며 ( 豊臣政権의海外侵略과朝鮮義兵研究 青木書店 1996), 中野는파병의목적이어디까지나明나라정복에있었다고하면서 大陸侵攻 으로불러야한다고주장한다 ( 물론 大陸 에는한반도도포함된다. 秀吉의軍令과大陸侵攻 吉川弘文館 2006). 또李啓煌씨도전쟁의명칭에대하여구체적으로언급하지는않았지만, 이전쟁이동아시아전지역과관계되는 國際的戰争 으로자리매김하고있다 ( 文祿 慶長の役と東アジア, 臨川書店 1997). 말할필요도없이명칭에대한재고는이전쟁의 一國史的이해 를다시파악하려는흐름과도관련되어있다. 즉이전쟁을새롭게 동아시아삼국전쟁 이라는관점에서재검토하려는국제학술회의는전쟁의명칭을 壬辰戰爭 으로하는것이좋겠다고제안했다 ( 鄭杜熙 李璟珣편저 壬辰戰爭, 여기서는金文子監譯 小幡倫裕譯일본어판을이용. 明石書店 2008). 이처럼최근에는일본 한국 중국에공통적인명칭을생각해내야한다는논의도있는모양이지만, 전쟁의명칭이역사의식의반영인이상그것도결코용이한일은아닐것이다. 부질없는혼란을피하는의미에서여기서는그와같은현상인식을언급하는것으로그치고, 전쟁의명칭에대하여는 2005년 11월에간행된 日韓歷史共同研究報告書 第 2 分科篇 ( 이하 共同報告書 로약칭함 ) 에따라일단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이라는용어를채택하겠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学説史에대해서는 共同報告書 에서이미주제별로매우상세하게정리되어있다. 그러므로여기서는그성과를토대로하여, 다소잡박하지만時系列的인관심에서부터검토하려고한다. Ⅰ. 근세전기일본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위치설정 먼저앞에서말한 共同報告書 에서도충분한논의가이루어지지않은근세일본 ( 江戶時代 ) 의학설사에대해서전후기로나누어간단히정리해두겠다. 이와같은관심

265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39 은이미先學들에의하여일정한정리가시도되었다. 예를들면三鬼清一郎씨에게는 < 江戸時代에있어서朝鮮役의평가에대하여 >( 歷史評論 373호 1981) 가있으며, 北島万次씨는 豊臣政権의對外認識과朝鮮侵略 ( 校倉書房 1990) 제1장 豊臣政権의朝鮮侵略에관한學說史的檢討 의제1절과같은연구를시도했다. 여기서도그러한연구성과를학습하면서논술을계속하고자한다. 근세일본에있어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을어떻게인식하고있었는가를생각할때먼저문제가될수있는것은豊臣秀吉의傳記類, 즉각종 < 太閤記 > 일것이다. 근세일본에있어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기억과기록이라는관점에서생각하면, 직접이든간접이든먼저이전쟁을실제로체험한세대와그이후의세대로구분해서생각할수있을것이다. 예를들어서 < 宇都宮高麗戰歸陣物語 > 와 < 梨羽紹幽物語 > 등은실제로종군했던경험을기록한것으로서史料로서도중요하지만, 학설사의정리라는이글의작업과는어울리지않기때문에이러한覺書類에대해서는배제하기로한다. 다양한히데요시의傳記중에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정리한기록을남기고있는것은 < 信長公記 > 로알려진太田牛一의 < 豊國大明神臨時御祭禮記錄 > 및小瀬甫庵의 < 太閤記 > 일것이다. 太田牛一에게는히데요시의傳記로서 < 大かうさまくんきのうち > 가알려져있는데, < 豊國大明神臨時御祭禮記錄 > 은그續編이라는성격을갖는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하여 < 大かうさまくんきのうち > 에서종합적인기술을한것도아니지만, < 豊國大明神臨時御祭禮記錄 > 을언급하며거듭되는전쟁에서일본은한번도패하지않았다며히데요시의공적을찬양하고있다. 이어서寛永 3년 (1626) 에성립한것으로보이는小瀬甫庵의 < 太閤記 >( 이하甫庵 < 太閤記 >) 는 凡例 에서 秀吉公의일도善을善으로, 悪을悪으로이를기록한다 고적은것처럼秀吉의事績을노골적으로찬양하는것만은아니다. 그본질은당시발흥하던儒学思想에기초한史論書라고할수있으며, 반드시史実의穿鑿을목적으로한것은아니다. 오히려인용한古記錄은간소화 평이화되고, 더욱이고문서에이르러서는儒学的입장등으로인하여改竄되고창작되었다고볼수있는것마저있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과관련해서보자면 1전후두차례있었던晋州城전투를 合體 시켜서서술하고, 2 慶長 2년의巨濟島 ( 唐島 ) 전투를文祿 2년에있었던것으로하고, 3 慶長 2년의蔚山전투를文祿 3년으로했다는점을지적할수있으며, 결과적으로 文祿의役 과 慶長의役 의구별이불분명하게되어있다. 이러한점에대하여최근의柳澤昌紀씨의연구성과 (< 信長公記と信長記, 太閤

266 24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記 >, 堀新編 信長公記を読む 수록吉川弘文館 2009) 에따르면, 甫庵 < 太閤記 > 는太田牛一의 < 豊国大明神臨時御祭礼記錄 > 과같은史観을답습한것이며, 이른바牛一太田이묘사했던 < 見取圖 > 를체계적 疑似실증적으로편찬한것이라고한다. 이처럼 史料 로서는치명적인문제를품고있으면서도, 甫庵 < 太閤記 > 이전의秀吉傳記本과비교하여압도적으로높은완성도와체계성을가지며, 서술스타일도대체로편년체형식을취한다. 내용적으로도史実을명쾌하게재단 통제하는일종의구체적인교훈서로받아들일수있는것이된다. 그결과마치가장신뢰할수있는秀吉傳 ( 秀吉의正傳 ) 인듯한위치가설정되며, 동시대는물론후세에이르러서도압도적인영향력을보이게된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으로한정했을때, 甫庵 < 太閤記 > 와견줄수있는위치를차지하는저술은堀正意의 朝鮮征伐記 이다. 이책의성립에관해서는종래中村栄孝씨가주장한寛永中期說이유력하지만, 최근에위렘부트씨는慶長말년에서元和초에성립했을지도모른다는주장을제기했다 (< 朝鮮征伐記 에묘사된전쟁-전후어떤일본유학자의시선으로본秀吉 ->, 鄭杜煕 李璟珣편저 壬辰戰争 수록 ). 그내용은表題에서명백하듯이朝鮮出兵을중심으로한秀吉의傳記이며, 또한朝鮮出兵을대상으로한軍記物로생각할수도있다. 인상적인특징으로많은삽화와히라가나 ( 平仮名 ) 가섞인문장을들수있으며, 한자에는토를달아놓았다. 따라서정말로유학자의저작인지의심스럽기도하지만, 이점에대해서위렘부트씨는, 본래의텍스트는한자와가타카나 ( 片仮名 ) 를섞어서쓴문장이며, 堀正意에게는출판할의도가없었던것으로추측하고있다. 그문제는어찌됐든 朝鮮征伐記 는朝鮮出兵를다룬가장오래된저작이며, 對戰國특히중국쪽의동향에상세하고본격적인내용을담고있다. 이점에관해서는萬曆 34년 ( 慶長 11, 1606) 중국에서간행된 兩朝平攘錄 을활용한점을들수있다. 강화교섭과 慶長의役 에관해서도상세하게서술했으며, 이점을유야무야넘어간甫庵 < 太閤記 > 적인서술은여기서는부정했다. 다만전쟁본래의목적이었던 大明國정벌 은아무런설명도없이 朝鮮征伐 로轉化되었으며, 이점에관해서는앞으로자세히검증할필요가있을것으로생각된다. 시기가약간내려가면薩摩島津家의 征韓錄 을들수있다. 征韓錄 은藩主島津綱久의명으로万治연간부터家老島津久通가総裁가되어편찬한것이다. 관계된고문서 고기록의수록은물론, 편찬할때는실제로종군했던家中의古老에게질문서를돌리기도했으며,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의기억과기록이라는관점에서보아도주목할만한성과이다. 島津久通는跋文에서 近代吾祖從朝鮮征伐, 振威武於異域, 立功業尓

267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41 邦家, 而令名遍四海 라고했는데, 주로島津義弘및久通의祖父가되는島津圖書頭忠長등의武功顕彰에치중하고있다. 거의동시기의藩主家顕彰이라는점에서공통되는것이筑前黒田家의 黒田家譜 이다. 寛文 11년 (1671) 藩命을받은貝原益軒이 黒田家譜 를편찬하기시작하여延寶 6년에 黒田家譜 1 2권이만들어졌으며, 다시天和원년에개정이행해졌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은권지6에서권지8에이른다. 그내용은조선에있어서藩祖如水 長政의顕彰에주안점이있다. 기술속에서 朝鮮 을 征伐 한다는표현이나오기는하지만, 益軒도전쟁자체에는회의적인입장을취하고있으며, 전쟁이가진의미에대해서도판단보류라고할만한태도를보인다. 즉이들家譜편찬 藩祖顕彰에있어서말로는 朝鮮征伐 이라는표현을채택하고있기는하지만, 열성적인서술은원래부터대상인물의顕彰에있으며, 朝鮮征伐 에대한언설을적극적으로정의하려는태도는느낄수없다. 朝鮮征伐 史観이근세일본에서정착되는것을생각하면오히려山鹿素行의저작을잊을수없다. 延寶원년 (1673) 에성립한 武家事紀 는그이름대로武家의実事를정리한서적인데, 일본에서처음으로역사연구에고문서를광범위하게활용한저술로알려져있다. 그실증성 합리성을뒷받침해주는것이 古案 으로불리는文書集이다. 여기에는織田 豊臣 神君 今川 武田 北条 長尾 ( 上杉 ) 毛利기타여러家文書가수록되어있는데, 豊臣家古案 ( 下 ) 권31은사실상 朝鮮出兵関係史料集 이다. 한편素行은日本中朝主義 ( 日本中華主義 ) 를제창하면서일본이야말로 万邦에서가장뛰어난나라 라고했다. 거기서는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의総括도 秀吉, 만년에이르러조선을정벌했다. 그勇胆, 고금에뛰어나다. 무릇조선이本朝의属国藩屛이라는사실은그옛날神功皇后가三韓을정벌한때부터의일이며, 그러한것은대대로舊記에명백하다. ( 中略 ) 따라서秀吉이조선정벌을시행한것이고, 秀吉의薨逝로말미암아그공적이불완전하다해도本朝의武威를異域에떨친일은神功皇后이후秀吉의治世에있었다. 라는이야기가된다. 日本中朝主義라는이름아래조선을일본의속국으로위치시킴으로써 朝鮮 과 征伐 사이에자리잡고있던위화감을일거에해소한것이라고할수있다. 다음으로京都의醫師松下見林이 異稱日本傳 이라는책을편찬한다. 先哲談叢続編 에따르면, 見林은매년사람을나가사키로보내외국서적을사오게하고직접이책을읽었으며, 또子弟들에게도이를읽도록했다. 따라서보관하는책이이것저것합쳐서거의 10만권이나되었으며, 잘알지못하는사람이라도책빌리기를청하는자가있으면親疎를묻지않고오로지그가원하는바대로따랐을뿐이다. 절대로아끼고인

268 24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색한빛이없었다 고한다. 元祿戊辰 ( 원년 1688) 9월己亥에쓴自序에따르면, 異稱日本傳 의 異稱 이란 諸異邦之人稱之之語也 라는의미임을알수있다. 요컨대 異稱日本傳 은일찍이異邦人이 日本 을어떻게기록했을까하는관심에따라서정리한서적이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해서는중국의 皇明実記, 両朝平攘錄, 図書編 과조선의 懲毖錄 등을참고하여관계사료를엮었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의의의에대하여주체적으로논한성격의책은아니지만, 이전쟁과관련된해외사료가망라되었다는점에서그의미는매우클것이다. 異稱日本傳 에서도채택한 懲毖錄 은元祿 8 년일본에서간행되기에이르렀다. 이책에는福岡藩유학자貝原益軒이서문을썼는데, 서문에서 傳曰, 用兵有五, 曰義兵, 曰應兵, 曰貪兵, 曰驕兵, 曰忿兵, 五之中, 義兵与應兵, 君子之所用也, 傳又曰, 國雖大, 好戰則必亡天下, 雖安, 亡戰則必危, 好与亡二者, 可以不戒守哉, 曩昔, 豊臣氏之伐朝鮮也, 可謂貪兵兼驕与忿, 不 可為義兵 이라고했다. 益軒은전쟁을義兵, 應兵, 貪兵, 驕兵, 忿兵의 5 종류로나눈뒤에秀吉의朝鮮派兵을貪兵 驕兵 忿兵이라고했으며, 義兵으로자리매김하지않고명확하게부정적인입장을취하고있다. 그리고 懲毖錄 의저자柳成龍은일본의침략때宣祖밑에서左議政겸兵曹判書를지낸인물로서그후에실각하지만평양수복후에領議政으로부활하며, 京畿 黄海 平安 咸鏡道體察使를겸직했다. 懲毖錄 은그와같은정부고관의입장에서이전쟁을전반적으로논한것이며, 집필목적은 내가그것을懲하여후일의재난을경계 함에있었다. 조선왕조는국가기밀의유출을우려하여 懲毖錄 의일본출판을꺼렸지만이후에도유출이근절되지는않았다. 일본에서는 懲毖錄 을얻음으로써조선쪽과관련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의記述이종합적이며세부적인것이되어갔다. 근세중기가되자正徳度通信使의응접을담당했던新井白石과근세국가의자립을 희망했던荻生徂徠등이각각의저술에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하여논하고 있지만, 지면관계도있으므로여기서는깊이다루지않기로하겠다. Ⅱ. 근세후기일본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위치설정 18 세기후반에이문제와관련하여영향력있는論陣을폈던인물은本居宣長이다. 宣 長의역사연구는 古事記傳 으로상징되는고대사연구가중심이기는한데, 거의같 은시기의저작으로安永 6 년 (1777) 12 월에成稿하고寛政 2 년에간행된 馭戎慨言

269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43 이있다. 이書名은중국과조선을서쪽의야만족인 戎 으로간주하고, 이들에게万国을다스리는天照大御神의生国인우리나라가 본보기를보인다, 즉統御해야한다는입장에서비롯된것이다. 따라서그내용은日本中心主義와尊内外卑에입각하여중국 조선과의외교교섭의역사를慷慨하는것으로되어있다. 2권 4책의구성인데,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은下之巻下전편에걸쳐있어서그비중이매우높다. 両朝平攘錄 懲毖錄 등중국과조선의史籍도근거로삼고있지만, 전쟁의전과정을자세히관찰했다기보다는강화교섭과정과외교문서의文言등을상세히논하는일에역점을두고있다. 그런의미에서저술목적이国学的正名論을밝히는일에있었다는것은명백하다. 또이전쟁이별다른성과도없이秀吉의죽음으로종결된까닭은秀吉이자신의위세에의지하여전쟁을시작했고, 神功皇后의神助를얻으려하지않았던점에원인이있으며, 무고한조선민중을함부로살육한것도神功皇后의神意에위배되는일이었다는주장을전개하고있어서주목된다. 요컨대지금까지는神功皇后의 三韓征伐 에대해서秀吉의조선파병의先駆가되는것으로보고양자의관계를順接的으로설명해왔는데, 이책에서는秀吉의外征을아득한神功皇后의外征에미치지못하는것으로論断하고있다. 馭戎慨言 에대해서는앞에서본 異稱日本傳 의요약문처럼좋지않다는평가를내리기도했지만, 한편에서宣長의의학의스승인武川幸順은감명을받고당시의摂政九条尚実에게헌상할것을시도하여漢学者들사이에서도커다란반향을불러일으켰다. 약간앞시기의일이되는데, 大国隆正은정통国学의学統을논하려했던 学統弁論 ( 安政 4, 1857년 9월序 ) 속에서本居宣長을평하여, 이인물의篤学은古今에유례가없으며, テニオハ ( 譯註 ; 弖爾乎波, 옛날조사 조동사 접미사 용언의어미등에붙여그의미를명확히하던말의총칭. 한문을훈독할때한자의네구석에 テ ニ オ ハ 를붙였던것에서비롯함 ) 의三転을발명하여 詞의玉緒 를撰한것은語学의開祖라고할수있다. 馭戎慨言 에서護国의마음가짐을드러내고, 玉鉾百首 에서우리의学意를언급한것등은他人이미치지못한다. 고하였다. 19세기에들어서면宣長이죽은뒤의문하생인伴信友가일본및중국 조선 蝦夷 琉球등의異国 異域과의교류사를国学의입장에서논하며 中外經緯傳 을저술한다. 中外經緯傳 은고대日朝関係, 儒佛의일본전래, 義經北方傳説, 為朝渡琉傳説, 日琉交渉史, 朝鮮出兵, 琉球征伐등의항목으로이루어진전체 6부의구성이며, 권2 중간에 文化 3년 12월伴信友稿 라는말이보인다. 本編에朝鮮出兵의경위를간단하게서술했는데, 오히려중요한것은 中外經緯傳草稿第四 부터 同草稿第六 까지의부분일

270 24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것이다. 즉 征戎遺文類第一 부터 同第三 에해당한다. 征戎 이라는표현은스승인宣長의 馭戎 을답습한것일까? 어찌됐든 征戎遺文類 는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古文書集의체제를이룬다. 수록된사료는甫庵의 < 太閤記 > 등을出典으로한것도있는데, 그중에는諸藩의가문에전래하는문서들도다수인용하고있으며, 앞으로사료수집과정을복원하는작업이필요할것이다. 經世家로알려진佐藤信淵은같은고향 ( 出羽秋田 ) 의国学者平田篤胤과관계를형성해가는속에서 日本書紀 古事記 등의고전에기초하여독자적인국가관을형성한다. 이글에서의관심에서보자면 宇内混同秘策 에서대륙침공을논하고있는데, 出雲松江과長州의萩에서부터한반도의東海岸을經略하고, 博多에서부터는한반도남해안을공략해야한다는具體案까지제시하고있다. 伴信友 佐藤信淵등과동시대인文化 文政期에는頼山陽이 日本外史 중에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을대대적으로취급하게된다. 山陽은広島藩의유학자집안에서태어났고国学의영향을받기도했다는데, 다시陽明学者인大塩平八郎과친교가있었다. 그의역사사상은 名分과時勢의 2원론적입장 으로평가하는것처럼유학적사상요소인 名分 을기축으로하면서 時勢 라는비유학적사상요소를편입하여역사인식을전개하려고했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서술은 < 太閤記 >, 朝鮮征伐記, 朝鮮軍記, 朝鮮物語, 清正記, 懲毖錄 등내외의軍記物語를소재로하여한문으로꾸민것이다. 다만엄밀한고증의성과가아니기때문에지금의시각에서보자면내용상많은오류를범하고있음을알수있다. 따라서역사서술이라기보다는일종의문학작품으로평가할수도있을것이다. 織田家의部将이던무렵부터秀吉은信長을위하여 韓및明에대한공격을요청 했는데, 그후 豊臣씨의치세에이르러明의백성이혹은와서투항하는자가있으며, 明主朱翊鈞 ( 神祖 萬曆帝 ) 이失政을하고, 武備를갖추지않았음을듣고더욱이를엿보려고생각했다 고한다. 日本外史 자체는인물중심의기술인데,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서도加藤清正과小西行長의대립을특히강조하고있다. 예를들면 行長은清正을시기했다. 清正은三成에게미움을받았고, 行長은이를즐겼다. 서로가상대를헐뜯었다 고하여石田三成을끌어들임으로써清正과行長의대립을 세키가하라전투 ( 関ヶ原合戰 ) 의伏線에자리매김하는구성을이루고있다. 時勢 라는개념에근거하여역사의흐름을보려고했던것이라고할수있다. 弘化원년에川越藩에서学問所博喩堂蔵版으로 日本外史 가출판되었고, 다시嘉永원년에는頼家에서교정을추가한책이大坂에서출판되었다. 川越本 頼氏本

271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45 모두환영을받고출판을거듭했으며, 諸藩의藩校에서교과서로채용했고, 明治이후에도몇종류의판본이출판되었다. 日本外史 는幕末에서明治에걸쳐많은독자를가진 歴史書 라고할수있다. 따라서후세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 史実 이해는물론역사서술에도매우큰영향을끼쳤다. 山陽의 日本外史 와함께幕末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을이해하는데근본적인영향을끼쳤던것은후기水戸学의学統이다. 그중에서도대표적인저작은天保 2년 (1831) 에간행된水戸彰考館편수총재川口長孺의 征韓偉略 전5권이다. 간행할당시에書肆 ( 大坂 河内屋茂兵衛, 江戸 北島順四郎, 江戸 西宮弥兵衛 ) 가게재했던 広告文 은당시의사회가이저작의위치를어떻게설정하려했는지를엿보는단서가될수도있다는생각에서아래에인용해둔다. 豊太閤의조선정벌은우리일본의武威를외국에떨친盛挙로서国史를편수하는자가考究하지않으면안될일이다. 漢土 朝鮮의書, 日本諸家의秘冊을인용하여추호의私感도더하지않았으며, 年月 地理를推考하고, 사실의경과 功의実否를考正했다. 조선정벌의実錄이다. 간단히요약한기사지만, 여기에적었듯이 征韓偉略 은室町단계의日朝関係를약술한뒤에 明史, 両朝平攘錄, 懲毖錄, 朝鮮征伐記, 太閤記, 豊臣秀吉譜, 歴代鎮西要略, 黒田家記, 鍋島家記 등당시로서는 正統 으로생각되는史籍 軍記類를명시적으로인용하면서天正 14년부터慶長 3년에이르기까지의외교 전쟁상황을한문으로정리한책이다. 그결과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하여매우권위있는저술로다루어지게되는데, 예를들어文政연간에편찬하기시작한薩摩藩의 舊記雑錄 에서도관련부분을인용하게된다. 川口長孺의 征韓偉略 이나오고머지않아역시水戸彰考館의青山延光이 征韓雑志 을정리하였다 ( 天保 10, 1839년의序가있으며, 이무렵에성립된것으로추정된다 ). 이책은다양한서적에서 朝鮮出兵 과관련된에피소드를발췌하여정리한것이다. 翁物語, 砕玉話, 常山紀談, 津田家譜 등과그밖에朝鮮의승병장으로유명한惟政의 四溟堂集 등을出典으로하고있으며, 자료적으로는 征韓偉略 과중복을피하고있다. 巻末의識語에는 當時豊公自謂吾将平定韓明, 奉天子駕于西土, 又謂以我之智, 行我之兵, 如利刀破竹大水崩沙, 何国不兦, 以是言之, 明人畏我如虎, 朝鮮畏我如虎者不亦宜乎, 嗟乎使豊公永年, 則其必平定韓 明帰我版図矣, 雖其不得遂志, 然威霊遠被万方讋服者, 其功固不可誣也 라고되어있으며, 神州武威之震于万国 한秀吉이도중에

272 24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죽지않았다면朝鮮 ( 韓 ) 과中国 ( 明 ) 을그판도에편입했을것이라고서술하고있다. 이들두사람의공통점은秀吉의外征을 偉績 으로찬양하는태도이다. 후기水戸学은 治教一致 를취지로하고있으며, 藩政의실상과현실의제문제에대한높은관심을특징으로한다. 여기서부터대외적위기의식이싹트고攘夷思想의源流가되어가지만, 이와같은思潮속에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하여비상하게높은평가를내리게된다. 거기에는徳川體制를옹호하기위하여秀吉을비난한다는논리구성은인정되지않는다. 그후에도水戸藩에서는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참가했던大名家에대하여事績調査를실시했던모양이다. 예를들면日向飫肥藩의伊東家에관한 征韓偉勲錄 의 序 에 이 1 巻은天保 11년水府가 ( 伊東 ) 祐相公에게御内命했고, 아울러서落合敬助兼賡 安井仲平朝衡에게분부하여御家来기타諸書속에서征韓에관한사실만을抜粋考証해서편찬한서적의副本이다 라는대목을볼수있다. 이와같은調査의반영인지会沢安 ( 正志斎 ) 의 退食間話 에서는 豊太閤이朝鮮을정벌하고威를해외에떨쳤다 고하며, 藤田東湖의 弘道館述義 에서는 豊太閤의雄才大略또한海内外를압도했다 고언급했고, 그후의水戸学관계의저작에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언급이散見되기에이른다. Ⅲ. 근대일본의성립과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日露戰争이한창이던 1905년에史学会가간행했던 弘安文祿征戰偉績 등으로상징되듯이전쟁전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연구가국위선양의일익을담당했으며, 또한현실문제로서 한국병합 과아시아침략에깊이관여했다는측면은부정할수없다. 근대일본의성립기에 征韓論 으로상징되는것처럼朝鮮半島를일본의침략대상으로간주하는이데올로기가대두한다.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자리매김이이러한움직임과상관이있을것이라는추정은용이하게할수있지만, 이단계에있어서의専論도확인할수없다. 따라서유감스럽지만明治전반기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이어떤위치를부여받고있었는지는이후의연구를기다릴수밖에없다. 좁은식견에서말하자면, 근대일본에있어서본격적인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연구는한반도를둘러싼日清간의대립을배경으로시작되었고, 발전해갔다. 1893년 ( 明

273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47 治 26) 에간행된木下真弘의저서 豊太閤征外新史 ( 青山堂간행 ) 는그효시로생각되는저술이다. 본서는권1 起源 으로시작하여 壬辰紀 부터 戊戌紀 에이르며, 제16권의 後紀 로구성할계획이었다. 말할필요도없이 壬辰 은文祿원년, 戊戌 은慶長 3년에해당하므로전후 7년에걸친전쟁전반을대상으로했다는것을알수있다. 그러나결과적으로간행된것은 壬辰紀 뿐이었으므로계획은文祿원년만으로중단된모양이다. 明治期의간행이기는하지만한문체로기록했으며, 典拠한사료는일본사료에그치지않고중국 조선의典籍에도이른다. 다양한해외사료를망라한점은 豊太閤征外新史 의중요한특징이되어있다. 宮地正人이校注한 維新舊幕比較論 ( 岩波文庫, 1993년 ) 의저자로알려진木下真弘은肥後国菊池郡에서출생했고, 私塾古耕舎를개설했으며, 熊本藩의時習館에서訓導로일했던인물이다. 나중에教部省에서근무했고, 太政官 内務省등을거쳐서 1879년 ( 明治 12) 부터는修史館 ( 종래의修史局이조직을개편한것 ) 에서근무했다. 절친한사이였던竹添進一郎이弁理公使로서조선에부임하게되자外務一等属의자격으로서울에왔다. 木下는甲申事變과관련되어일본으로귀환하기까지대략 2년동안서울에서지냈다. 豊太閤征外新史 의간행은그로부터 10년쯤뒤의일이지만,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대한관심은조선에머물던시절에싹텄을가능성이높다. 이책은 前関白太政大臣豊臣秀吉欲征明, 先遣兵入朝鮮 이라는제목으로시작하며, 書名에서도명백하듯이주된교전국은조선이아니라어디까지나明国이라는인식에기초한역사서술이었다. 다음으로, 木下真弘의가르침을받은松本重愛이이듬해에 豊太閤征韓秘錄 제1집을간행한다 ( 成歓社, 1894년 ). 이책은이른바기초사료집이며, 제1집에는 < 朝鮮征伐記 >( 堀正意저술부분 ), < 吉野日記 >, < 南大門合戰記 >( 天野源右衛門記 ), < 征西日記 > 등 4편이수록되어있다. 이들외의여러사료도제2집이후에계속적으로간행할예정이었다. 이책역시계획상으로는중단된모양인데, 제2집이후는확인할수없다. 그일은어찌됐든이책을간행했던의도는머리말에명백하다. 즉 우리나라는예전부터遠征의師를배출한것이단지세번뿐 이라고하고, 後陽成天皇의治世에이르러豊臣太閤秀吉이明国을정벌하려고大軍을発하여朝鮮및明軍을撃破했으며, 이것이세번째이다. 그리하여太閤征韓의役이야말로사실은朝鮮을征伐하려던뜻이아니며, 조선에서길을빌려장차支那 400여州를공격하고, 이어서欧羅巴마저併呑하여우리의武威를萬邦에크게떨치려는大希望에서비롯한것이었다 고한다. 欧羅巴併呑운운한것은시국에영합하는발언이지만, 征韓 이라고하면서전쟁의목적은어디까지나明

274 24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공략에있었다는것을확인할수있다. 앞에서언급한木下의저술과도공통적인자세이다. 그리고이시기에사료집간행을기도했던배경에대해서松本重愛은 지금이야말로東洋이다사다난한때이며, 日清韓 3국과중대한관계가있는이역사는우리가보편적으로알고자하는바이지만, 古来로이일을기록한것이대개杜撰粗笨하여그사실을오해할뿐만아니라, 확실한材料를얻는것이매우곤란하다 는인식을보여주고있으며, 今日에이르러서이역사를연구하는데에材料로제공하고, 아울러서이위대한사업을널리世人에게알림으로써志気養成에一助하기를바랄뿐 이라고한다. 굳이설명할필요는없다고보며, 덧붙여서이책의緒言은 明治 27년 9월 17일平壌大捷의소식을접하고 쓴것이었다. 이처럼근대일본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연구의효시는위와같이日清의대립이라는현실을앞에두고전개되었음을알수있다. 이런사실이상징하듯이, 昭和전쟁전기에이르는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연구는현실의정치 외교문제와깊은관계를갖게된다. 따라서많은연구성과는당시의역사인식과세계관을전제로서술된것이며, 지금의시각으로보자면문제가될만한점도많다. 이러한상관성에대해서는앞으로의연구에서충분히검증되어야하겠지만, 이시기에행해졌던池内宏씨와中村栄孝씨의 실증 적인연구는지금도여전히유익하다. 그밖에도伴三千雄씨에의한성곽연구, 전후로이어지는黒田省三씨의연구, 파병목적을勘合貿易의부활에서구하는논의를부정했던田保橋潔씨의지적 (< 壬辰役雑考 ( 제1회 )>, 青丘学叢 제14호 1933) 등이있다. 동일한 青丘学叢 을중심으로한반도에있어서기독교의전개를논했던山口正之씨의연구는일찍부터조선인被擄人에게도주목하고있다. 그리고対馬宗家文書의現状에비추어볼때, 豊臣政権에관한宗家文書를소개했던武田勝蔵씨의연구를잊을수는없을것이다 (< 伯爵宗家所蔵豊公文書と朝鮮陣 > 史学 제4권제3호 1925 < 宗家文書の中より > 史学 제5권제3호 1926 < 宗家文書より ( 二 )>, 史学 제5권제4호, 1926년 ). 또한蘇峰徳富猪一郎씨의 近世日本国民史豊臣氏時代朝鮮役 과参謀本部에서편찬한 日本戦史朝鮮役 은사료비판등에여전히많은문제를남기고있으며, 전쟁에대한망라적파악과구체적사실의析出이라는점에서지금도다른연구를압도하는점이있다. 매우난폭하기는하지만戦前 戦中期에진행되었던일련의연구는국가주의적인경향과 실증주의적 인경향을두축으로하면서진행되었다고생각할수있다. 또한각론적인연구에있어서도개괄적이긴하지만현재로이어지는문제점의제시도상당히이루어져있는것으로느껴진다.

275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49 예를들어서三鬼清一郎씨는朝鮮史編修官의이력을가진中村栄孝씨의연구가조선총독부의修史事業과교육행정이불가분의형태로진행되었던점에대하여충분히고려해야한다고지적했다 (< 朝鮮役研究の一齣 - 中村栄孝の業績をめぐって-, 三鬼清一郎編 織豊期の政治構造 吉川弘文館 2000). Ⅳ. 패전이후 80 년대에이르는연구동향 패전후에는종전의실증연구를계승하여전후역사학의조류속에서새로운관점이도입된다. 전형적인경우의하나는 1954년에岩波新書로간행되었던鈴木良一씨의 豊臣秀吉 일것이다. 즉그책의후기에는다음과같이서술되어있다. 다소길지만인용해둔다. 다소나마위로되는것은조선민족의역사에한페이지를추가할수있었다는것이다. 침략자의자손이며, 침략자자신이었던우리가조선민족의고통을알수는없다. 단지침략의역사를쓸수있을뿐이며, 또한써야한다고생각한다. 그것을쓰는일이실제로는침략으로우리자신을타락시키고, 그리하여이제거꾸로독립을상실하고상처받은우리에게있어서구원이며, 일본역사가의엄숙하고도즐거운의무라고생각한다. 鈴木의글은다시 文禄慶長의役 에관한연구는있어도침략과저항의역사를찾아내지못했던것은슬프지만, 진정으로그런역사를써보겠다고결심할수있었던것은나에게있어서예상치못했던기쁨이다. 라고이어진다. 전쟁전의연구성과를 文禄慶長의役 연구 로일괄하면서, 그연구에서 침략과저항 이라는관점이빠져있던점을예리하게지적하고있다. 실제로이책에서는많은페이지를할애하여 조선침략 과정을상술하고있으며, 조선왕조와明軍의내부를분석한기술도있다. 1953년에제기되었던安良城盛昭씨의문제제기에서발단이된 太閤検地論争, 그리고幕藩制의 구조적특질 이논의되는속에서 조선침략 을豊臣政権論 統一政権論의핵심으로파악하는연구가진행되기에이른다. 60년대의연구동향을간단히살펴보면, 예를들어서朝尾直弘씨는豊臣政権의구조적인모순으로 대륙출병 이필연적이었다고언급했으며, 佐々木潤之介씨는豊臣政権의전체적인정치과정이 조선침략 과밀접한연관이있다고의의를부여하고있다. 또山口啓二씨는豊臣政権이전국을통치하는封建

276 25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国家権力으로존재했던것을가장큰구조적특질로들고, 스스로의권력을유지하기위하여諸大名에대한 끊임없는軍役 의부과가불가피하며, 전쟁상태를전제로하는 끊임없는軍役 이통일전쟁종료후해외침략으로방향을돌리는것도필연적인동향이라고설명했다. 山口씨는幕藩権力에있어서편성원리의본질을知行 軍役関係에서구하지만, 이점에대해서는三鬼清一郎씨가 < 朝鮮役에있어서軍役體系에관하여 >( 史學雜誌 75편 2호 1966) 에서豊臣 徳川사이의격차를찾아내는佐々木씨의 軍役論 을부정하고, 朝鮮役 을계기로통일적이며봉건적인軍役體系가영주계급전체를포섭하면서달성되었다고했다. 日本近世史 연구가幕藩制구조론및여기에연결되는国家論이라는조류에서규정되었기때문에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에대한연구도불가피하게幕藩制구조론과国家論의구조분석에중점을두게되었다. 여기서논의되었던것은추상적인軍役體系로서의 조선침략 이며, 연구가반드시鈴木가의도했던방향으로만진행되었던것은아니라고할수있다. 이어지는 1970년대에는일본의대륙침략을당시의국제관계속에서포착하고아시아사적 세계사적인위치설정을시도하려는연구동향이시작된다. 60년대로이어지는山口啓二씨 佐々木潤之介씨 朝尾直弘씨 三鬼清一郎씨등의연구가規定的인데, 여기에더하여旗田巍씨와石原道博씨등의동양사연구자, 전쟁전부터계속되는中村栄孝씨, 그리고중세일본의대외관계사, 특히対馬를의식한日朝관계분석에진력했던田中健夫씨 ( 中世海外交渉史の研究 東京大学出版会 1959 中世対外関係史 東京大学出版会 1975) 등의労作은지대한역할을하고있다. 1975년小学館版 日本의역사 시리즈로서藤木久志씨가 織田 豊臣政権 을저술했다. 서유럽식민제국의진출도추가해서격동하는동아시아세계속의민중들에게종교분쟁과통일권력, 통일과침략은무엇이었던가하는의문아래이通史가서술되었고, 조선침략이가진심각한실태를다면적으로그려내고있다. 그해에동일시리즈로간행한朝尾直弘씨의 鎖国 은元和期이후를대상으로하는저술인데근세일본을동아시아속에서자리매김하고 日本型華夷秩序 의성립을논했다는점에서이후의연구에도매우큰영향을주었다. 또 1976년에는內藤雋輔씨의 文禄 慶長의役에있어서被擄人研究 가간행되었다 ( 東京大学出版会 1976). 内藤씨는 序 에서 豊臣秀吉의文祿 ( 壬辰 ) 慶長( 丁酉 ) 의役의본질과그영향에대하여는이미많은論考가있지만, 그러나정치와외교 군사등에관한문제이외에이전쟁이양국민중에게준최대의고뇌는전쟁으로인한생활의파괴였다고생각할수있다 고관심의소재를언급하고조

277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51 선인 일본인被擄者의여러가지실상을그려냈다. 동시에豊後国臼杵安養寺의종군승려慶念의일기를소개하면서연구의새로운지평을개척했다. 다시歴史学研究会는 1977년도대회의테마로서 민족과국가 를제시하고, 綜合部会에서北島万次씨는 < 秀吉의朝鮮侵略과幕藩制国家의成立 >, 矢沢康祐씨는 < 壬辰倭乱 과朝鮮 > 을발표했다. 北島씨가발표한논문의기조는內藤씨의저작등을토대로조선민족에게압박을가했던침략전쟁을통해서일본의봉건영주제는히에라르키 (Hierarchie; 신분제도 ) 를고착시키고, 궁극적으로는일본민중에대한지배체제를강화했다고했으며, 한편矢沢씨는 壬辰倭乱 기를통하여조선사회의구조적변화, 신분적질서의변동이크게진전된것을논하고, 壬辰倭乱 의경험이 18세기이후자립사상의형성에큰역할을했다고한다. 70년대후반에시작되는이들연구는일찍이鈴木良一이주장했던 침략과저항의역사 에근접하는것이며, 동시에전쟁자체를주제로하는다음연구단계를향한이행을준비하는것이되었다. 또한이시기는倭城研究会등이한반도남쪽에남아있는일본식성곽의답사등을진행했고, 그성과는 79년에보고서 倭城 Ⅰ 로공표하여오늘날활발한 倭城 연구의효시가된다. 현지답사가그다지용이하지는않았기때문에유적과유물로부터전쟁의실태에접근하는고고학적수단은패전후부득이중단되어있던형편이었으며, 그런의미에서도보고서 倭城 Ⅰ 이研究史에서차지하는위치는매우크다고하겠다. 한반도에축성된일본식성곽, 이른바 倭城 에대하여는전쟁이전에小田省吾씨와伴三千雄씨등이이미일정한 성과 를올리고있었다. 이와같은전쟁이전의연구상황과문제점에대하여는福島克彦의 < 戦前의倭城研究에대하여 >( 城郭談話会編集 발행 倭城研究 창간호 1997) 에수록되어있다. 전후에는 1961 년에부산대학교내韓日文化研究所가정리한 慶南의倭城趾 등이알려져있는데, 일본쪽에서는보고서 倭城 Ⅰ 이후왕성한연구를보기에이른다. 그후의주된연구성과만을예로들면, 1985 년에佐賀県教育委員会가 文禄 慶長의役城跡圖集 을정리하고, 城郭談話会에편집 발행한 倭城研究 가창간호부터제 5 호에이르렀으며 (1997~2002 년 ), 최근에는白峰旬의 豊臣의城 徳川의城 - 戦争 政治와城郭 -( 校倉書房 2003) 과黒田慶一편 韓国의倭城과壬辰倭乱 ( 岩田書院 2004) 등이간행되었다. 또한 1998 년神戸大学文学部가 韓国慶尚南道倭城趾調査報告 를내고, 高瀬哲郎씨등을비롯한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의계속적인연구도있다. 80년대로접어들면北島万次씨가 朝鮮日々記 高麗日記 - 秀吉の朝鮮侵略とその歴史的告発 - 을公刊한다 ( そしえて 1982). 書名에있는 朝鮮日々記 란内藤雋輔씨가소개한慶念의일기, 高麗日記 는肥前의田尻鑑種이남겼던제1차침략때의기록이다.

278 25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이런書名에서명백하듯이北島씨의저작은전쟁과정그자체를문서 기록에의하여충실하게기술하려고했던것이다. 또한副題를보아도알수있듯이일찍이鈴木良一씨가제창했던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연구에있어서제3축을명확하게의식했던저술로자리매김할수있다. 돌이켜보면 60년대 70년대의연구로政権論 幕藩制構造論을형성하면서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은불가결의구성요소가되고그의미를어떻게부여해야하는지를모색해왔지만, 전쟁자체에관한역사서술이그다지풍부한편은아니었다. 예를들면구판岩波講座 日本歴史近世 1 ( 岩波書店 1963) 에수록된朝尾直弘씨의 豊臣政権論 은그후의연구동향에지대한영향을준好論이지만, 실제로그의글에서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에관한언급은거의없다. 이시기의연구상황을상징하듯이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이라는팩트가빠진채豊臣政権論이정립되었던셈이다. 조선사연구분야에서의병과조선민중에게스포트라이트를맞춘연구가왕성하게진행되었던것과, 중국사의岡野昌子씨가전쟁의승패와진입경로의고증, 지휘관의동향등이아닌일반병사와민중의관점에서구체적으로이전쟁을다루려고했던것등과대조적이었다고할수있을것이다. 藤木久志씨의말을빌리면,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은오랫동안 豊臣政権論의부속물과같은위치 였다고할수있다. 아울러서 80년대후반에는朝尾直弘씨의 天下一統 ( 體系日本の歴史 8 小学館 1988) 이간행된다. 75년의 鎖国 에선행하는시기를대상으로하지만, 여기서 日本型華夷秩序 를지탱하는것으로서 武威 의존재를지적하고, 秀吉의대외강경노선도 武威 의발로로서위치를설정하게된다. 어찌됐든内藤씨와北島씨에의한전쟁사서술로전후의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연구에는새로운국면이열렸다고할수있다. 그리고모든의미에서대륙침략의기반이되었던九州를대상으로森山恒雄씨의 豊臣氏九州蔵入地研究 도정리되었으며 ( 吉川弘文館 1983), 또한藤木久志씨는 豊臣平和令과戦国社会 속에서豊臣政権에있어서동아시아외교의重層性을지적하고, 그전제가되었던조선침략의위치설정을시도하고있다 ( 東京大学出版会 1985). 여기서藤木씨는秀吉이明과南蠻을대등한교역국으로삼는한편, 조선과류큐, 더나아가대만 필리핀 ( 小琉球 ) 을국내의大名에준하는 惣無事令 의대상, 요컨대복속국으로자리매김했다고하며, 豊臣秀吉의외교가이원적 중층적으로전개되었다고주장했다. 일찍이대륙침략의의도를둘러싸고勘合貿易부활설과영토확장설이양자택일적으로주장되던시절이있었다. 원래현상은그러한단락적인태도를허용하지않지만, 藤木씨의지적은이러한폐쇄감을타파하는단서를제공했다

279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53 고볼수도있다. 폭넓은동아시아사의관점에서전쟁의의의를새롭게밝히려는上垣內憲一씨의通史 공허한출병秀吉의文禄 慶長의役 도 1989년에저술되었다 ( 福武書店 1989). 80년대에진행된豊臣政権연구의자극적인성과가연이어하나의책으로간행되었다는점에서 1990년은획기적인해였다. 즉高木昭作씨의 日本近世国家史研究 ( 岩波書店 ), 山本博文씨의 幕藩制의成立과近世国制, 北島万次씨의 豊臣政権의対外認識과朝鮮侵略 ( 모두校倉書房 ) 등이다. 高木씨의저술은대륙침략을정면에둔것은아니지만, 이것과밀접하게관계되는 惣無事令 과이른바 身分統制令, 근세적군단편성의실상을논하고, 山本 北島두분의저술은豊臣政権아래의島津씨領国의실상에접근한것이었다. Ⅴ. 관심의다양화와문제점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연구는이미政権論의 부속물 이아니다. 특히 90년대이후는北島万次씨의작업에끌려가는형태로관심도다양화하고, 전쟁의추이는물론병참보급, 강화교섭, 倭城, 降倭 義兵 被擄등조선사회에관한다양한문제등전쟁이가진각양각색의측면에대하여실증적인연구가진행되었다. 共同報告書 에수록된학설사정리및문헌목록이웅변적으로말해주는그대로이다. 共同報告書 간행이후특필할만한연구로는太田秀春씨의 朝鮮의役과日朝城郭史研究 ( 清文堂 2005) 와津野倫明씨에의한일련의연구를들지않을수없다 (< 文禄 慶長の役におけゐ毛利吉成の動向 >, 高知大学 人文科学研究 9호 2002 < 慶長の役におけゐ長宗我部元親の動向 >, 黒田慶一編 韓国の倭城と壬辰倭乱 수록 2004 < 慶長の役におけゐ黒田長政の動向 >, 海南史学 < 慶長の役におけゐ鍋島氏の動向 >, 織豊期研究 < 朝鮮出兵におけろ鍋島直茂の一時歸國について >, 高知大学 人文科学研究 13호 2006 등 ). 전자는한일간에전개되는성곽의식과일본의軍勢와조선사회의교류라는지금까지없었던참신한측면에서전쟁을고찰하려던것이었다. 연구수단으로서도조선쪽사료의적극적인활용이주목되는데, 村井章介씨의 < 朝鮮史料에서본 倭城 >( 東洋史研究 ) 등과함께後学의연구스타일에도지대한영향을끼치게될것이다. 한편, 津野씨에대하여는 慶長의役 ( 丁酉再乱 ) 에관하여매우상세한史実을명확히했던점

280 25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을크게평가할수있다. 文禄의役 과비교할때연구가별로없었던 慶長의役 에관한연구는朝鮮日々記研究会編 朝鮮日々記를읽는다, 진종승려가본秀吉의朝鮮侵略 ( 法蔵館 2000) 으로한층더풍부해졌지만, 여기에津野씨의실증적인연구가더해짐으로써보다충실해져가고있다. 이밖에도曽根勇二씨는豊臣家奉行人의동향에주목하면서 文禄 慶長의役 ( 壬辰倭乱 ) 과관련된토픽을취급하고 ( 近世国家の形成と戦争体制 校倉書房 2004), 中野는秀吉의朱印状을 定点 적으로분석하는방법으로豊臣政権에의한전략의체계화를시도하고있다 ( 秀吉の軍令と大陸侵攻 ). 최신연구로서거론할만한것은많지만지면관계상일단위의연구를예로드는것으로그치겠다. 共同報告書 에서는 今後의研究課題 로여섯가지논점을제시했다. 현재이들과제가여전히기대되는연구과제라는사실은말할것도없지만, 각각의논점이반드시동일한차원은아니다. 1에서 4의과제는전쟁자체에관련된것이며, 5는전략, 6은오히려정치로서의넓은의미의 戦争 과관계된다고할수있다. 拙著에서도언급했지만, 사견으로는먼저이들의의식적인구별이이루어져야할것으로생각된다. 그러한전제를토대로, 예를들어서 6 동아시아의国際秩序 에관하여부언하자면, 전투의종식과전쟁의종결을동일한차원에서논하는문제점을지적할수있다. 그런의미에서李啓煌씨의 文禄 慶長의役과동아시아 는전투종결후의국제관계를상세하게논했던매우귀중한업적이라고할수있다. 여기서배우는한편, 中野는 文禄 慶長의役 ( 戦争の日本史 16 吉川弘文館 2008) 을정리했으므로상세한내용은그책에양보하고싶다. 또한 共同報告書 < 今後의研究課題 > 에서언급하지않았던논점으로류큐와조선의관계를지적하고싶다. 예를들면 1998년에간행된邊土名朝有씨의 琉球의朝貢貿易 ( 校倉書房 ) 에는 明実録 등중국측사료에기초한전쟁 강화교섭의추이를서술한논고가수록되어있으며, 계승해야할중요한논점이라고할수있다. * 会議報告후에明石書店에서鄭杜煕 李璟珣편저 壬辰戰争 의일본어판 ( 金文子監訳 小幡倫裕訳 ) 이간행되었다. 어떤의미에서 文祿 慶長의役 ( 壬辰倭亂 ) 에관한연구의현재의도달점을보여주는것이라고할수있다. 본서에수록된위렘 부트씨의논고에대해서는개별적으로접촉했는데분량이많은이유도있고, 전반적인論究는다른기회로미루겠다.

281 文祿 慶長의役연구의학설사적검토 255 참고문헌 근세의著作에대해서는史籍集覧과日本思想大系등의叢書類에수록되어있는것을 참고하기바란다. 근대이후의연구성과에대하여본문에서기본데이터를예로들고 있기때문에이하의리스트는단행본을중심으로한다. 木下真弘, 1893 豊太閤征外新史 ( 青山堂 ) 松本愛重, 1894 豊太閤征韓秘錄 ( 成歓社 ) 史学会編, 1905 弘安文祿征戰偉績 ( 富山房 ) 池内宏, 1914 文祿 慶長の役 正編第 1( 南満州鉄道株式会社 ) 徳富猪一郎, 1921~1922 近世日本国民史朝鮮役 ( 民友社 ) 参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朝鮮役 ( 偕行社 ) 池内宏, 1936 文祿 慶長の役 別編第 1 ( 東洋文庫 ) 中村栄孝, 1939 文祿慶長の役 ( 大日本戰史 3) ( 三教書院 ) 鈴木良一, 1954 豊臣秀吉 ( 岩波新書, 岩波書店 ) 石原道博, 1964 文祿慶長の役 ( 塙書房 ) 日本思想史研究会編, 1965 日本における歴史思想の展開 ( 吉川弘文館 ) 中村栄孝, 1969 日鮮関係史の研究 中 ( 吉川弘文館 ) 山口啓二, 1974 幕藩制成立史の研究 ( 校倉書房 ) 内藤雋輔, 1976 文祿 慶長の役における被虜人の研究 ( 東京大学出版会 ) 三鬼清一郎, 1981 < 小宮山楓軒と朝鮮役 > 茨城県史研究 40 三鬼清一郎, 1981 < 江戸時代における朝鮮役の評価について > 歴史評論 373 北島万次, 1982 朝鮮日々記 高麗日記 ( そしえて ) 森山恒雄, 1983 豊臣氏九州蔵入地の研究 ( 吉川弘文館 ) 藤木久志, 1985 豊臣平和令と戰国社会 ( 東京大学出版会 ) 鄭樑生, 1985 明 日関係史の研究 ( 雄山閣 ) 北島万次, 1990 豊臣政権の対外認識と朝鮮侵略 ( 校倉書房 ) 山本博文, 1990 幕藩制の成立と近世の国制 ( 校倉書房 ) 崔官, 1994 文祿 慶長の役 ( 講談社メチエ ) 李啓煌, 1997 文祿 慶長の役と東アジア ( 臨川書店 ) 邊土名朝有, 1998 琉球の朝貢貿易 ( 校倉書房 ) 中野等, 1999 豊臣政権の対外侵略と太閤検地 ( 校倉書房 ) 朝鮮日日記研究会編, 2000 朝鮮日日記を読む真宗僧が見た秀吉の朝鮮侵略 ( 法蔵館 ) 黒田慶一編, 2004 韓国の倭城と壬辰倭亂 ( 岩田書院 ) 太田秀春, 2005 朝鮮の役と日朝城郭史の研究 ( 清文堂 ) 中野等, 2006 秀吉の軍令と大陸侵攻 ( 吉川弘文館 )

282 25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中野等, 2008 文祿 慶長의役 ( 戰争の日本史 16 ( 吉川弘文館 ) 太田秀春, 2008 近代の古蹟空間と日朝関係 ( 清文堂 ) 鄭杜煕 李璟珣編著, 2008 壬辰戰争 ( 金文子監訳 小幡倫裕訳, 明石書店 )

283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257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야마구치가요 ( 山口華代 ) Ⅰ. 머리말 Ⅱ. 제 2 차세계대전이전의왜관연구 Ⅲ. 중세왜관의연구 Ⅳ. 근세왜관의연구 1. 근세초기의왜관- 絶影島倭館에서豆毛浦倭館으로- 2. 草梁倭館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일본의왜관연구 라는부여된과제에대하여주로일본에서보고 발표된연구를중심으로, 전쟁전부터현재에이르기까지왜관연구의동향을정리해보고자한다. 倭館이란좁은의미로는 15세기초부터 19세기에걸쳐한반도에설치된일본인사절을위한접대시설 ( 客館 ) 이지만, 넓은의미로는객관을포함하여그주변에퍼져있는일본인을위한거주구역을가리킨다. 그시작은 15세기초에조선의수도인한양에존재했던시설로서, 외국에서온외교사절을접대하기위한客館이었다. 당시한양에는중국사신을위한太平館, 북방의女眞에게는北平館, 그리고일본사절을위한東平館이있었다. 이東平館의통칭이倭館이며, 일본인使送이상경했을때머무는장소였다 [ 小田省吾 1929 中村栄孝 1964 田代和生 1981, 2002]. 일본인의客館이설치된배경에는고려왕조말부터한반도에피해를가져다준倭寇금압이라는정치적인측면이있었다. 왜구대책에고심하던조선정부는다양한방책으로왜구에서평화적인통교자로의전환을꾀했는데, 그중하나가왜인을정식사절로인정하는것이었다. 사절에게는조선과무역할수있는기회가주어졌기때문이다. 조선정부는연이어건너오는왜인이한반도의항구에자유롭게입항하고있던상황을

284 25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통제하기위하여入港場을제한했다. 使送船등선박의정박지를한반도남부연해지역인富山浦와乃而浦 ( 薺浦 ) 두곳으로한정했다. 나중에는전술한두곳에추가하여鹽浦가入港場으로정해졌으며, 이들세곳을일본인통교자가寄港하는浦所로정했다 ( 三浦制 ). 이浦所의개설과동시에倭館도설치된것으로생각되고있다. 1510년의三浦倭亂으로浦所倭館은폐쇄되었는데, 對馬宗氏의교섭으로통교관계가부활하자薺浦만을개항했으며, 얼마후釜山浦가개항장으로지정되었다. 그런데 1544 년 ( 甲辰 ) 蛇梁津倭變으로다시통교가단절되었고, 이때薺浦가폐지되고釜山浦한곳으로한정하게된다. 日朝関係는文禄 慶長の役 ( 壬辰倭乱 ) 으로일시단절되기는하지만, 전후에는다시倭館이설치되어일본통교자를받아들이는체제를취했다. 처음에豆毛浦에倭館이설치되지만, 부지가협소하여선박의출입에도자유롭지못한지형이었기때문에對馬藩에서이전을요망했다. 조선과장기간에걸쳐이전교섭이진행되지만, 1678년에는이전예정지로草梁項이선정되었고, 이후對朝鮮通交의유일한거점으로서幕末까지對馬藩관계자의거주가계속되었다. 明治維新을맞이하자 1872년 ( 明治 5) 에外務省이신속하게倭館을管轄下에두었고, 이에倭館의역사는종말을맞이했다. 상술한것과같은변천을가진倭館이지만, 對馬宗家文書에는 7~8할정도가 和館 으로표현하고있는데, 나머지 2할은 倭館 이란사용례를확인할수있다 [ 田代和生 1997]. 일본을倭라고부르는것은고대중국에서유래하며, 조선도중국을따라서 倭 자를사용하는데 ( 倭人, 倭寇등 ), 倭 가멸시의뜻을가지고있기때문에일본에서는自國을표현할때이글자를피하고발음이같은 和 자를쓴것으로생각된다. 그러나本稿에서는倭館이朝鮮政府에의하여설치되었다는역사적배경에비추어 倭館 이란호칭을사용하고자한다 ( 현재일본사연구의통일적견해를나타내는指標로생각되는 國史大辞典 ( 吉川弘文館 ) 에는 倭館 ( 집필자 田代和生 ) 으로항목을만들었다 ). 장기간에걸쳐서존재했던倭館은당연한일이지만시대에따라서존재모습이일정하지않았으며, 수많은연구논문이제시되어있다. 그것을망라적으로논하는것은어렵지만, 시대에따라대표적인논문을기초로연구동향을살피고자한다.

285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259 Ⅱ. 제 2 차세계대전이전의왜관연구 제2차세계대전이전의연구는倭館그자체를대상으로한연구는적으며, 전근대日朝関係史의변천을이야기하는중에서부분적으로언급되는것이많다. 그이유로서사용가능한사료의제한과대외관계사연구의빈약한축적등의요인을들수있을것이다. 그중에서도武田勝蔵은조선측사료만이아니라對馬宗家文書를이용하여중세의三浦에대하여그변천과역사적배경을밝혔다 [ 武田勝蔵 1922]. 이시기의왜관연구의특징중하나로전근대에존재했던倭館을일본인거류지로발전했던근대도시釜山의前史로서자리매김하고있는점을꼽을수있다. 그단서라고할수있는高橋章之介는自著 宗家と朝鮮 에서전근대日朝関係史를저술할때對馬宗氏가이룩한공적을다시평가하는속에서倭館을다루고있다 [ 高橋章之介 1920]. 구체적으로는중세의三浦倭館에서부터근세의釜山倭館, 그리고明治維新후에倭館부지및건물이처분되기에이르기까지의과정을정리한것이다. 그리고이책에는豆毛浦에서草梁으로이전할때의그림으로추정되는 1678년 ( 延宝 6) 年紀를가진倭館竣工圖가딸려있으며, 후세의연구에서도활용되어유익하다. 구釜山民團議員이조직한釜山甲寅會역시釜山前史로서日朝通交史를정리한것이다 [ 釜山甲寅會 1921]. 중세의 三浦和館 에서부터 釜山和館 에이르기까지를다루는데, 근세釜山倭館에비중을두고기술하고있다. 館守 裁判 ( 외교담당자 ) 通詞 등倭館役人과倭館이전교섭을다룬 < 移館事考 >, 관내에서의禁制를다룬 < 和館制札 >, 관내에서의여성문제와이를단속하는約条에관한 < 交奸約條 > 등뒷날연구대상이된사안의다수가제시되어있다. 그리고釜山주변의명승유적에대해서도언급하고있다. 이시기에倭館자체에관심을가지고연구대상으로삼았던것은小田省吾이다 [ 小田省吾 1925, 1929]. 小田은조선총독부편집과장으로재직할때부터日朝関係자료의수집과倭館舊蹟의현지조사, 幕末이래釜山에거주하고있던古老들의이야기를듣고수집한성과를적극적으로연구와결부시켰다. 개항이후에草梁倭館을중심으로급속한발전을이룩한부산지역에전근대의유산인倭館의역사적경관을드러내는일은어렵지만倭館研究의중요성을말하고있다. 이밖에문헌자료를이용한기초적연구도진행되고있으며, 근세草梁倭館에있던 設門 은倭館의일부가아니라일본인단속을위하여조선이설치했던것이라고하며 [ 武田勝蔵 1922] 오류를지적하고있다 [ 小田省吾 1925].

286 26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Ⅲ. 중세왜관의연구 제2차세계대전후에는그때까지대외관계사연구의축적을바탕으로日朝関係를양국간의관계로한정하지않고동아시아사속에서파악하려는움직임속에서사료에입각한실증적인연구가다수발표되었다. 중세왜관에대해서는조선정부가지정한入港地였던富山浦 乃而浦 塩浦등이른바三浦의설치와도시적발전속에서언급된다. 中村栄孝는해당시기의日朝関係는 14세기중엽부터한반도연안지역에피해를준倭寇대책을위하여일본인에의한통교체제가구축되어가는과정을서술했다 [ 中村栄孝 1964]. 일본의정식使者로인정한자 ( 客倭 使送倭人 ) 및소금이나어물등조선주민들과교역에종사하는자 ( 商倭 興利倭人 ) 등이등장했다. 또倭館주변에는다수의倭人이건너와서생활을영위하게되었고 ( 恒居倭人 ), 倭人居留地 로서의성격이강해져갔다. 村井章介는동아시아국경을초월하여활동하는중세倭人의모습을 마지널맨 이라는개념으로새롭게파악했다. 중세의三浦에대해서는항만도시로발전하는모습을포착했다. 특히 海東諸國紀 에남아있는그림에현지답사를통해서알게된三浦주변의경관과지리적상황을합쳐서왜인거류지가설정된지리상의공통점을지적하였다 [ 村井章介 1993]. Ⅳ. 근세왜관의연구 1. 근세초기의왜관 - 絶影島倭館에서豆毛浦倭館으로 - 豊臣秀吉이일으킨文禄慶長의役은그때까지이어져오던日朝関係를근본적으로바꾸었다. 우선원칙적으로일본인의상경이금지되고, 釜山浦가유일한入港場이된다. 小田省吾는文禄慶長의役이종결된직후, 아직까지日朝関係가불안정하던시기에釜山浦건너편의絶影島 ( 通称, 牧ノ島 ) 에임시倭館이설치되었던사실을밝혀냈다 [ 小田省吾 1929]. 하지만어디까지나임시倭館이었으므로장차일본과의통교가본격화하는

287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261 것을고려하면使節접대소로서의기능을다하기에는불충분했던모양이며, 1607년에는豆毛浦에倭館이설치되었다. 1609년의己酉約条에의하여본격적으로조선과對馬사이의통교관계가회복되자徳川정권에의한안정된日朝関係도이에호응하여豆毛浦倭館은日朝貿易의거점으로서번영해간다. 豆毛浦倭館주위는처음에는木柵이었지만나중에돌담을쌓는등조선인과일본인사이에명확한경계선이그어짐으로써양국인의혼재를막는방책이취해졌다. 그러나豆毛浦倭館은부지가좁고, 항구가멀리까지얕은데다가바람이강해서寄港地로서의조건을갖춘땅이라고보기는힘든지역이었다. 이런이유로인하여對馬藩은조선정부에대하여倭館地이전을요청하고, 대략 20년에이르는교섭과정을거쳐서 1687년에草梁項으로이전하는데성공했다 ( 倭館移轉問題 에대하여는후술 ). 덧붙여서對馬藩에서는성립연대의新舊에따라豆毛浦倭館을 古館, 나중에이전한草梁倭館을 新館 으로부르며구별하고있다 ( 松浦允任 朝鮮通交大紀 등 ). 2. 草梁倭館 1678년에이전한草梁倭館에대해서는방대한문헌자료가남아있으므로, 다양한테마및분야에걸친연구를들수있다. 長正統은근세의日朝関係를잔존하는 記録 의측면에서새롭게파악했다 [ 長正統 1968]. 長에의하면, 일본은조선에비하여기록체제가늦게정립되었지만, 17세기후반부터 19세기중기에일본측의기록이비약적으로증대하는것을지적하고, 이시기를日朝関係에있어서 기록의시대 로이름지었다. 長의연구는對馬藩宗家文書群에있는왜관관계기록을토대로한것인데, 기록증대의요인으로외교교섭현장에서무력을배경으로했던힘의외교시대는끝나고, 先例에기초한고도의논리성이필요하게되어기록의중요성이증폭되었던점을지적하고있다. 1 草梁倭館의개요 草梁倭館은대체로동서 400칸, 남북 250칸으로대략 10만평넓이의공간이며, 관내에中山 ( 龍頭山 ) 이있고, 그서쪽은外交의場이며 ( 西館 ), 동쪽은거주구역및경제활동의

288 262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場이라고하듯이구역에따른기능분화가보인다. 400~500명의일본인들이거주했으며, 그구성원도武士뿐만아니라상인 職人 의사등다양한계층의사람들이있었고, 城下町처럼번화함을보였다. 또對馬府中에있는西山寺의末寺인東向寺 ( 臨済宗 ) 도있고, 供養寺로서의기능뿐만아니라조선에서보내는書契를검사하는등의일에종사했다 [ 田代和生 2002]. 金義煥은중세부터근세, 그리고근대까지포함해서倭館의변천을通時的으로정리했다 [ 金義煥 1977]. 근대의釜山개항이후에왜관이일본専管地가되어가는과정을세심하게조사하고 19세기에조선각지에설치된日本専管地의사례로평가하고있듯이근대까지분석한왜관연구는특징적이다. 그밖에日朝貿易에있어서거점으로서의倭館의상업적역할에착안하여倭館에관한日朝쌍방의職官구성과그역할을밝혔다 [ 金義煥 1983a]. 또한倭館에서행해지는무역형태에대하여개관하고, 아울러서중국과의국경지대에서이루어지고있던對中國무역과비교검토할필요성을주장하고있다 [ 金義煥 1988]. 田代和生은근세日朝関係史연구중에서도늦게시작된日朝交易에착안하여對馬宗家文書를분석대상으로하면서, 무역액과거래품등경제사적측면에서의실태를연구했다 [ 田代和生 1981]. 그연구에따르면, 당시의日朝交易은일본과조선양국간에그치는것이아니라중국과동남아시아등을포함하는広域的인경제권을상정할수있는것이며, 그속에서倭館의중요성에대하여재차언급하고있다. 왜관연구로는日朝交易史연구와관련하여주로근세釜山倭館을대상으로하고있다. 그때까지의연구에서는倭館을총체적으로만파악해왔는데, 田代는倭館을구성하는건조물의명칭과역할등내부구조를명확히밝힘으로써외교의場이었던西館과경제활동의場으로서의東館이라고성격을규정했다. 倭館의구성원에대해서는長正統이對馬宗家文書의왜관관계기록 ( 國立國會圖書館소장 ) 을기초로倭館의役人의구성과직무분담, 기타역대館守와裁判의人名, 재임기간을밝혀서왜관연구의기초자료가되었다 [ 長正統 1968]. 그밖에조선측사료도취급하여日朝양국의職官구성에대하여고찰한 [ 金義煥 1983a] 것도있다. 그중에서도 [ 田代和生 1981] 에서는對馬藩의倭館役員人事에대하여藩의對朝鮮무역정책과의연관성을지적하는등독자적인견해를밝히고있다.

289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倭館移轉問題 倭館이전문제에대하여는戦前부터이미小田省吾가論究하고있다 [ 小田省吾 1929]. 小田은중세까지조선측사정에따라倭館의설치장소가결정되었던종래의입장과는달리對馬藩의요청으로이전이실현된사실로비추어보아그이해에는조선쪽자료뿐만아니라対馬측사료와대조하여검토하는것이필요하다는점을주장했다. 倭館의이전문제를다룬 [ 尹裕淑 2003] 은집요하게이전을요구하는對馬藩과이에대하여수동적인조선이라는동일한구도로묘사되어왔던지금까지의연구를비판하고, 그극복의필요성을주장한다. 尹裕淑에따르면, 20년이나계속된이전요구의내용이동일한것은아니며, 1660년대후반부터전환을맞이했던점을지적한다. 구체적으로는조선으로건너가는창구의변경과大船越開鑿등對馬영내에있어서對朝鮮통교시설의정비와관련성이있음을示唆한다. 또對馬藩은幕府의양해를얻음으로써移館을 幕命 으로까지격상시키는정치공작이행해졌음을명백히밝혔다. 草梁으로移館한뒤에는倭館을둘러싸고양국이통제강화를시도했던사실로보아 日朝通交의재정비 로평가했다. 근세의 抜荷 ( 밀무역 ) 분석을시도했던荒野泰典은倭館이전의배경에伊藤小左衛門에의한무기밀수사건이있었다고한다. 1677년 ( 寛文 7년 ) 博多町人인伊藤小左衛門이금제품이던鳥銃 硫黄 鎧 槍등의무기를조선과밀거래했던것이발각되었다. 이처럼대규모의밀무역사건이발각됨으로써幕府및對馬藩에있어서밀무역대책이문제시되었으며, 보다통제를강화하기위해서도倭館의이전이필요했다고한다 [ 荒野泰典 1992]. 3 倭館管理問題 草梁倭館은東莱府의釜山鎮에서도거리가떨어진장소에설치되었으며, 그주변을돌담으로두르고안에있던조선인민가를밖으로강제이주시키는등조선정부측은倭館에거주하는일본인을격리하는정책을취했다. 金東哲은豆毛浦 草梁項에 200년가까이倭館이설치되어있던점에서, 그것이초래하는주변지역에대한영향과특질에대하여論究했다 [ 金東哲 2001b]. 草梁倭館의정비와함께倭館근처에는客舎, 宴大庁등조선측의출장기관이세워지고, 倭館의일상적

290 264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인관리를행했다. 특히東莱府관할아래의하급관리인 小通事 에대해서도언급하고, 그들대부분은草梁에거주하는자이며, 밀무역과교역의알선등으로축재를거듭하는등倭館과그주변의조선주민은깊은관계가있다고했다. 일본인이倭館에서살아가는데필요한일상의생활물자 ( 야채 생선등 ) 확보는倭館주변지역에거주하는조선인들에게의존하고있었다. 倭館의내부에는조선인관리등한정된자들만이출입할수있었지만, 한편으로倭館밖인門前에는매일같이시장이열려서일본인과조선인이접촉하는기회가생겼다. 양국간의접촉이때로는범죄 사건으로연결되고, 점차日朝양국사이에서문제가되는경우도있었다. 이와같은倭館을둘러싼양국간의문제에대하여, 조선왕조에의한倭館의관리라는시각에서이해하려는일련의연구가있다. 尹裕淑은倭館의통제라는관점에서約条와禁制등법적인측면에서의연구를발표하고있다. 조선이왜관에거주하는일본인에대하여 1683년에제시한癸亥約条에대하여검토하고, 밀무역 ( 潜商 ) 과규정된구역을벗어난일본인의배회와집단시위행위 ( 闌出 또는 欄出 로쓰기도한다 ) 를엄하게단속하는조선측자세를밝혔다 [ 尹裕淑 1997]. 倭館의交奸問題 ( 일본인남성과조선인여성과의売買春 ) 에대해서는제임스루이스가先行研究를다시검토했다. 종래의연구에서는日朝양국간의문화와윤리관의차이로설명하는경우가많았지만, 처분의엄벌화가취해진역사적배경에는정보유출의방지라는조선정부의정치적대책이있었다고한다 [ 제임스루이스 1997]. 交奸問題에대해서는尹裕淑도언급하고있으며, 절도등과관련하여체결된약조를분석한다. 이에의하면, 조선측은당초관련자전부를死罪에처하는厳罰主義를취하지만, 현실에부응하지못하는점때문에자세한규정을마련함과동시에단계적인처벌을결정한다는방침의전환이있었음을지적했다 [ 尹裕淑 1998]. 또한 [ 尹裕淑 1999] 에서는倭館의유지관리라는관점에서지금까지자세히분석하지못했던倭館건축물의造営 수리문제를들고있다. 조선전기에倭館이설치된이후기본적으로관내의건조물造営 수리비용및인부는조선측이부담하는데, 이같은사실에서倭館의관리가통교업무의하나로자리잡고있었다고한다. 鶴田啓은草梁倭館을出島 唐人屋敷 横浜居留地등의다른외국인거류지와의비교를통해서그특징을밝히고있다. 그에따르면, 근세의 鎖國 체제아래서예외적인무역의場으로서는공통적이지만, 倭館은상업활동만이아니라외교가수반된通交者를위한시설이라는점을강조하고있다 [ 鶴田啓 2006].

291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倭館으로보는文化史 문화사적인측면에서는近世倭館에설치된釜山窯에대한연구가있다. 倭館에서구운茶碗등의도자기는切形이나型紙등의手本을토대로만들어졌다는점에서 御本茶碗 이라고부르며, 江戸時代부터매우귀하게여기고있었다. 釜山窯에대해서는浅川伯教가정리형태로소개하고있다 [ 浅川伯教 1930]. 이를이어서泉澄一은對馬宗家文書의문헌자료에남아있는도자기注文控등을분석하고, 지금까지의釜山窯연구를문헌사적인측면에서보완했다 [ 泉澄一 1986]. 御本茶碗의焼成에는對馬藩이크게관여하고있었다는점, 또한그대부분이조선각지의흙을이용했고, 大名이나유력자의상세한주문에응하여도자기가제작되었다는것을밝혔다. 田代和生은근세倭館에관한사료를기초로倭館과관련을맺고살아가는사람들의다양한모습을묘사했으며, 日朝양국의문화가교차하는장소로서의새로운倭館像을장소로점에서주목된다 [ 田代和生 2002]. 食文化에대해서는朝鮮通信使의接待料理연구로축적된성과를토대로, 倭館에서먹었던요리라든가日朝양국인의기호가다르다는것등을밝혔다 [ 田代和生 1996]. 医学史 博物学史분야에서는享保年間에 8 代将軍徳川吉宗이명했던조선의동식물조사에대한연구가있다. 吉宗의命으로對馬藩은倭館을거점으로조선전토를대상으로한동식물및약재조사에착수하게되는데, 倭館에출입할수있는조선역관의협력없이는완수할수없었다. 이조사의배경에는本草学에조예가깊었던吉宗의인삼국산화라는희망이있었음을밝히고있다 [ 田代和生 1999, 2002]. 그밖에草梁倭館에있어서일본인의服飾에대하여언급한 [ 鄭銀志 2007] 도있다. 이것은倭館에서의례에참가할때의복장을문헌자료와倭館을묘사한그림자료등을토대로분석한것이다. 문헌자료의검토를통해본국對馬에서는倹約令으로인하여비단옷착용이금지되었음에도불구하고倭館안에서朝鮮役人과접촉하는자에대해서는금령이적용되지않았음을밝히고있어서흥미롭다. 새로운연구동향으로서建築史学的인접근을통한왜관연구를들수있다. 夫学柱에의한일련의연구는倭館에관한기록에보이는 < 指圖 >( 조감도 ) 와絵画史料를기초로近世倭館의建造物群을복원했다 [ 夫学柱 a 2000b , 市川真光 2004]. 그결과는컴퓨터그래픽을이용한 3차원화상으로공개되었으며, 직접적으로시각에호

292 266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소하는復元圖가당시의倭館및주변지역의경관을널리일반에게도알리는유효한 수단이라는점을다시한번확인할수있었다 [ 京都文化博物館등 2001]. 5 倭館関係資料 [ 長正統 1968] 이지적했듯이, 17세기후반부터 19세기에걸쳐일본측 ( 對馬藩 ) 의기록이증대한다. 그주된것이對馬藩宗家文書인데, 어느시기까지그이용은극히일부에한정되어있었으며, 연구의공평성이라는관점에서는매우불충분했다. 이런까닭에연구자에의한적극적인사료소개가행해지고, 점차연구환경의개선이시도되고있다. 金義煥은大韓民國國史編纂委員會에소장되어있는對馬島宗家文書 和館事考 을소개했다 [ 金義煥 1983b]. 和館事考 은三浦의설치부터草梁倭館이전및공사과정, 倭館에설치된制札, 조선인의禁制등倭館을둘러싼각종문제를정리한것이다. 安彦勘吾는對馬藩의朝鮮語通詞인小田幾五郎 ( 宝暦 4년 [1754]~ 天保 2년 [1831]) 가정리한 草梁話集 을소개했다 [ 安彦勘吾 1989]. 이것은朝鮮語通詞로서草梁倭館에체재했을때의견문을모은것인데, 倭館내외의건물과항만시설의상황, 倭館의관리운영과관련된朝鮮役人, 倭館주변지역의지리적정보등에이르기까지상세한정보가기재되어있다. 무엇보다도공적기록에남아있지않은生活者의시각에서기술되어있다는점에서귀중하다. 최근의근세왜관관계사료를둘러싼커다란움직임으로對馬藩宗家文書중왜관관계사료의마이크로필름화를들수있다 ( 田代和生감수 對馬宗家文書第 Ⅲ 期倭館館守日記 裁判記録 ゆまに書房全 120롤 2004~2006년 ). 國立國會圖書館에소장되어있는對馬宗家文書중에서왜관을총괄하는館守의日記인 < 館守日記 > 와외교교섭을담당했던裁判의기록 (< 裁判記録 >) 이마이크로화대상이되어있다. 이들對馬藩에서작성되고倭館에보관되어있던文書群은廃藩置県뒤에倭館을접수했던外務省으로이관되었고, 그후國立國會圖書館에収蔵되기에이르렀던것으로왜관연구의基幹資料라고할수있다. 2009년에는 < 對馬宗家倭館関係資料 >( 指定件数 1593점 ) 으로國重要文化財로지정되어역사자료로서의가치가널리알려지게되었다. 어찌됐든전체가 10만점이넘는다는宗家文書에대해서는이후에도왜관을연구하는基幹資料의하나가될것이틀림없으며, 史料集과마이크로필름혹은디지털기술의응용등으로활용의利便性이향상되는것이왜관연구의촉진에연결될것으로생각된다.

293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267 다음으로倭館의絵画資料에대해서언급하고자한다. 회화자료에서는문헌자료에서얻을수없는많은정보를읽을수있다. 1980년대이후각지에서개최된박물관등의전시로귀중한자료가다수존재한다는것을소개했으며, 그중에서도倭館의그림은韓日양국에남아있다는것을알게되었다. 이미소개했지만, 村井章介가 海東諸國紀 의付圖와現地調査를통하여알게된지형등의정보를연결함으로써中世倭館과三浦의모습, 그곳에서의생활상을복원했듯이 [ 村井章介 1993], 倭館의실상을규명하는데유효한자료이다. 近世의草梁倭館에대해서는崔相振이 < 東莱府使接倭使圖 >( 韓國國立中央博物館蔵 ) 을토대로본격적인고찰을하고있다 [ 崔相振 2006]. 분석자료는東莱府使가일본사절을향응접대하기위하여倭館으로향하는모습을그린것이며, 絵圖의내용구성과건조물의설치연대등에서경관연대의상한과하한을탐색한것이다. 다만崔相振도지적하듯이회화자료는어느정도의시간적인폭을가지고묘사하는경우가많으며, 연대를정확히특정하는데한계성이있다는것도염두에두지않으면안된다. 마지막으로필자가근무하고있는長崎県立對馬歷史民俗資料館이소장하는宗家文庫사료중에서이미圖録등에게재한것이기는하지만倭館絵圖 2점을소개하려한다 [ 長崎県立對馬歷史民俗資料館 1997]. 圖 1 < 草梁之絵圖 >(98cm 64cm ) 는 17세기에豆毛浦倭館에서移館을모색하던무렵에그린매우간단한草梁項부근의그림이다. 龍頭山을중심으로倭館예정지가붉은선으로둘러쳐져있는데, 그선안팎으로는조선민중이거주하는가옥도묘사되어있음을알수있다. 圖 2의 < 倭館絵圖 >(163.0cm 261.4cm ) 는마찬가지로草梁倭館을묘사한그림이며, 왜관부지의치수뿐만아니라倭館내부의건물이름및배치가적혀있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일본에있어서왜관에관한연구를戦前과戦後라는두개의시기로크게나누어정리했다. 마지막으로앞으로의연구과제에대하여필자의전문분야인근세왜관을중심으로서술하겠다. 첫째는, 근세왜관의실태해명을보다심도있게하는일이다. 日朝関係史연구의진전으로倭館이맡았던역할에대해서는많은실증적연구가축적되었고, 또한對馬宗家

294 268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文書의館守日記 裁判日記등의왜관관계자료가公刊됨으로써연구환경의정비도착실히진행되고있다. 이와같은종래의문헌자료를토대로한연구에더하여絵画資料라든가 CG를활용한경관복원으로보다풍부한倭館像이제시되어있다. 그러나앞에서소개한對馬歷史民俗資料館소장의倭館絵圖처럼그림자료는문헌자료에의한뒷받침이나다른그림자료와의비교검토가이루어지지않은자료도있으며, 앞으로의실증적인연구축적이기대되는분야이다. 또한, 日朝양국에있어서 倭館認識 의문제가있다. 倭館을어떻게인식하는가는입장의차이가크게작용했다. 조선측에있어서왜관은어디까지나일본에서오는使節을위한客館이라는기본적인성격을保持하고있지만, 그한편에서일본에서는倭館을 朝鮮屋敷 내지는 日本館 으로도표현하는것처럼對馬藩屋敷의연장으로파악하는경향도있다. 그와같은倭館인식에의거하면, 예를들어서 17세기후반에對馬藩에서나온왜관이전요구는같은시기에시행되었던城下町 府中의도시정비 ( 藩主가거주하는桟原屋敷의설치, 새로운거리구획등 ) 와연동된것으로생각할수도있다. 倭館의관리운영상황을보면, 주요한건물과항만시설등의건축 수축에대해서는조선측비용을부담하는등客館으로서의성격을의연히확인할수있지만, 交奸問題처럼세세한사안을검증하면倭館소속을둘러싼心性차원에서의인식차이가존재했던것으로생각된다. 마지막으로전근대국제질서를둘러싼문제를들수있다. 18세기이후, 조선에서는 小中華, 일본에서는 日本型華夷意識 으로日朝양국모두자국중심주의적인경향을강화해간다는것이유력한학설이다. 그런와중에倭館은기본적으로중세이래客館으로서의기능을계속유지하면서, 對馬에서파견된使節은조선측국제질서에부합하는외교의례를거행하고있었다. 倭館이라는무대장치가수행했던역할을재검토하는것도필요할것이다.

295 < 圖 1> 草梁之絵圖 日本에있어서왜관연구의동향 269

296 270 제 2 기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 3 권 < 圖 2> 倭館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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