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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찬탈을 빗대어 비방한 김종직의 弔義帝文 을 史草에 삽입한 일과 연산군의 생모 尹氏의 廢妃에 찬동했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연산군에 의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이 戊 午士禍(1498)와 甲子士禍(1504)이다. 김굉필도 김종직의 黨與라 하여 무오사화 때 熙川 順天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했다.21) 그런데 이 吉再 金叔滋 金宗直으로 이어진 학문적 授受關係 속에서 小學 의 讀 習이 대단히 중시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우선 김숙자가 초년에 길재에게 小學 을 배웠다. 또 길재의 교육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을 가르치면서 童蒙 須知 幼學學說 正俗篇을 거쳐 小學 孝經 大學 論語 孟子 등으로 이어지는 讀書의 순서를 지키게 하였다.22) 김종직도 소학 을 학문의 기초서로서 제자들에게 讀習을 권면하였 고, 김굉필도 바로 그에게 소학 을 읽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金宏弼(1454~1504)이 처음으로 김종직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후 김종 직이 善山府使로 재직하고 있을 때 종종 그에게 가서 묻고 가르침을 받곤 하였다. 김굉 필도 27세 때까지는 당시의 학문풍조에 따라, 자신의 스승 같은 문장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김종직이 小學 을 주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이 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 권면하자, 그때 비로소 소학 을 읽고 큰 감 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나이 30이 될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없을 정도로 소학 을 애독했으며, 사람들이 어쩌다 時事에 관한 의견이라도 물을라치면 저같은 小學童者가 어찌 大義를 알겠습니까? 라는 말로 대답하였다고 한다.23) 그런데 27세 때부터 30세가 될 때까지의 2~3년간을 오로지 소학 에만 바친 그의 공부태도에는 특기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보통의 경우처럼 과거의 學禮講에 대비 해 단순히 글을 해석하고 외우는 記誦에 힘쓴 것이 아니라, 소학 의 내용을 행위의 준거로 삼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景賢錄 에 묘사된 그의 평 소 행적은, 다소 과장된 점은 있겠지만, 일거수일투족이 소학 의 化身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소학 을 이런 태도로 공부했던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時人譏之曰 慶尙先輩黨. 중종실록 13년 4월 정유( 다), 御夕講 參贊官趙光祖曰 且如李承建之事士林痛焉 承建在成宗朝 蒙國厚恩 至陞二品之位 而不爲小補於一時 徒做士林之禍 承建爲翰林時 嫉金宗直金 馹孫之徒之所爲 書于國史曰 南方之人 師譽弟子 弟子譽師 互相推許 自作ー黨云 金宗直初受業於吉 再 再即鄭夢周之門人也 宗直傳業淵源 固有自矣 在今稍知爲善者 受業於其門者也 其時善人 以類相 從 自然道同 互爲推薦固也 而承建書曰 互相吹噓 自作ー黨 所謂黨者 營身謀利 相與爲徒則曰黨 可 也 如金宗直之徒 公心協力 相與爲善而承建所書如此 痛矣. 21) 중종실록 13년 4월 정유( 다), 史臣曰 宏弼近世大儒也 平生處身學問 一以程朱爲法 潛 心聖學 所得甚高 一動ー靜 無或悖違 周旋中規 折旋中矩 初學於金宗直 宗直亦一時名儒 其學頗拘 於文章 宏弼心嫌焉 即棄而乃專意於聖學 廢朝時 林士洪以爲矯行而殺之. 22) 江湖先生實錄 行状. 23) 秋江集 권7, 雜著, 師友名行錄 (총간 16).

10 國史館論叢 第56輯 그의 親友인 鄭汝昌 南孝溫 등도 성균관유생 시절부터 小學契를 조직해 활동했다는 사실 이 그것을 증명한다. 小學契는 姜應貞 南孝溫( ) 鄭汝昌( ) 朴演 등이 성균관유생시절에 소학 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 보려는 목적으로 조직한 일종의 이념써 클이었다.24) 이 소학 실천모임 은 성종 9년 4월 宗親 李深源과 幼學 南孝溫이 癸酉靖 難의 정당성을 우회적으로 부인하는 상소를 올리자25) 훈척대신들에 의해 朋黨을 結成한 행위로 공격받았다.26) 세조의 왕위찬탈을 내심 불의로 여기고 있던 이들은 각각 세조조 의 공신을 쓰지 말 것과 昭陵(세조에 의해 사후 廢庶人된 端宗의 어머니 顯德王后)의 復 權을 주장했는데,27) 이것이 훈척대신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때문이었다. 훈척대신들 은 이들이 이미 성균관유생 시절부터 小學契라는 朋黨을 만들어 활동한 전력이 있으 며,28) 이심원이 상소에서 慶延과 姜應貞을 천거했는데, 남효온도 慶延을 추천한 것으로 보아 서로 짜고 올린 상소라고 반격하였다. 이 상소사건은 宗親과 일반사대부들의 結社 行爲를 엄중히 경고하고29) 이심원을 外方付處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는데,30) 두 사람의 상소와 조정에서 오고간 論難 속에서 이 結社에 참여 한 인물들에 관한 중요한 특징을 한 두 가지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남효온 등의 小學契활동이 당시의 國學生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었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대다수 유생들이 小學 을 어린이용 책 정도로 치부했던 것과는 달리 이 들은 소학 을 진지하게 尊信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이들이 상소에서 천거한 인물 들의 孝行이나 일반적 品行은 훈척대신들도 인정할 만큼 탁이한 것이었으며,31) 이 사건 24) 연산군일기 4년 8월 기묘( 나), 承政院啓 柳子光所啓姜應貞推考事 臣等以爲未便 應貞 退計三十年間 聚同志者 作小學契 以小學之道爲事 時人譏之曰夫子. 25) 성종실록 9년 4월 기해 병오(9-575 다, 579 가). 26) 위의 책, 9년 4월 병오(9-581 다), 士洪啓曰 此琉與深源上疏相同 深源薦慶延 姜應貞 孝溫亦薦慶 延 臣聞之 孝溫之徒 有如姜應貞 鄭如(汝)昌 朴演等 別爲一群 推應貞爲夫子 指扑演爲顔淵 常以行 小學之道爲名 相尚異論 此固弊風也 漢有黨錮 宋有洛黨 蜀黨 此輩不及於古 然足爲治世之累 漸不可 長 且以布衣而議國政之失 尤不可 傳曰今有求言之令 言雖不中 豈可問乎. 27) 위의 책, 9년 4월 을묘(9-586 가), 傳旨議政府曰 頃因雨土之變 下敎求言 幼學南孝溫請復昭陵 朱 溪副正深源請勿用世祖朝臣 是皆背理之論 孟浪之語 有乖予延訪求治之意 在廷左右 皆請論之 予亦 非之 然人主求言 而反罪言者 其於言路 恐有妨也 予姑置之 豈以是爲是而不問耶 其深體予意 曉諭 臣僚. 28) 위의 책, 9년 5월 무진(9-602 라), 御晝講 輊等曰 臣等比聞 朋黨成風 如士洪之黨果衆 又有 南孝溫者 結爲小學契 相爲朋黨 如此之徒 雖爲不義之事 上亦不之知矣. 29) 위의 책, 9년 5월 병자(9-606 가 다), 傳旨宗簿寺曰 日者 朱溪副正深源 結友無賴儒生 以名譽 相高 呼爲孔曾思孟 至私相囑托 語及朝政 深惟末流漸不可長 自今 敢有踵而蹈之者 其即擧劾 以杜 其漸. 30) 위의 책, 9년 9월 갑자(9-648 가). 31) 위의 책, 9년 4월 경자(9-577 다), 命召朱溪副正深源問曰 都承旨 林士洪啓曰 深源但讀 古書 而未得時措之宜 此誠愚忘人也 且曰 丁克仁 鄭汝昌 姜應貞 聖賢之徒也 汝昌 應貞 未知何等人

11 전에 대부분 그들의 탁이한 효행으로 표창을 받은 사람들이었다.32) 특히 林玉山(1432~ 1502)과 慶延의 효행은33) 바로 소학 善行篇에 나오는 행적들과 방불하다. 小學契에 참여한 사람들 중 상소에서 거론된 강응정 외에 김굉필 정여창 등도 나중에 그들의 뛰어 난 품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을 받았다.34) 이 점을 經明行修 라는 理想과 관련해서 말하 면, 이들은 行修 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또 자신이 그렇게 되려고 애쓴 사람들이었다 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들은 자기들이 천거한 인물들처럼 德行이 뛰어난 사람들이 임금 을 보필해야 治國의 實效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35) 이것은 그들이 行修 의 가치를 克仁 在文宗朝 以逸民 擧拜正言 但心志慷慨 稍異於人耳 夫豈聖賢之徒也 且曰 慶延是社稷之器 非 百里之才也 今乃除爲守令 聞之者莫不嗟恨 初臣聞延有文才 以爲李白以白衣入爲翰林 今延有才行 可 授成均館職 訓誨子弟 旣而特召 拜爲司宰主簿 見之則其才能未有異於人者 是皆深源大言也. 32) 李深源은 慶延 鄭汝昌 丁克仁 姜應貞을, 南孝溫은 慶延 林玉山 崔小河를 추천했는데, 이들은 대부 분 그 전에 孝行으로 표창되어 敍用되었다. 문종실록 원년 11월 갑자(6-459 가), 成均館薦生員丁克仁 李美 傳敎承政院曰 克仁等若依例用 之 則殊無獎勸之意 別例除授 以勸後來何如 僉曰 然 上將用之後 左副承旨姜孟卿於視事極毁美之所 行 上然之 只除克仁 爲廣興倉副丞 不用美也. 성종실록 원년 2월 병진(8-463 다), 忠淸道観察使金良璥馳啓 同縣人姜應貞 檢中樞姜毅 之子 母久病 應貞數月衣不解帶 終夜不寐 夕父病革 應貞焚香禱天 求以身代 取糞嘗之 以占差劇 及 父母歿 廬墓五年 不食酒果鹽菜. 위의 책, 2년 6월 갑자(8-585 라), 禮曹據全羅道觀察使啓本啓 南原人前直長林玉山孝於親 母 死 七日不食哀毁過禮 父又病臥四十日 林玉山侍藥 衣不解帶 呼泣嘗糞 焚香禱祀 求以身代 父病果 愈 及父死 喪祭盡其誠禮 鄕人稱之 請令吏兵曹 考存歿 隨才敍用 從之. 위의 책, 3년 4월 기묘(8-649 라), 禮曹啓 慶尙道洒川人幼學崔小河 其母久疾未愈 斷手指和藥以進 疾遂愈 孝誠可賞 請除職復戶 從之. 위의 책, 6년 2월 갑오(9-193 다), 朱溪副正深源上書 今我主上殿下 孝理ー國 屢頒明詔 旁求 遺逸 於是 洒川孝子崔小河 乃應徵召 拜爲典獄署參奉. 위의 책, 7년 5월 기사(9-345 가), 受常參 視事 右承旨任士洪 將禮曹啓目啓曰 淸州居前 訓導慶延 事親以孝 生養死葬 各盡誠敬 鄕黨稱慕 前此 令吏兵曹 隨才擢用 歲在癸卯 除南部參奉 以母喪未就 右人孝親之心 出於至誠 事亡事存 終始如一 鄕黨服其誠孝 至有感泣者 非止一鄕而已 一道感慕 以 至朝中 藉藉稱孝 其純孝之至 足勵偷風 非如一節之士 駭世驚俗之比 謹按大典獎勸條 孝友節義特異 者 賞職或賞物 尤異者 旌門復戶 今慶延 特加擢用 旌門復戶 以彰孝理. 위의 책, 7년 7월 임인(9-355 다), 慶延司宰主簿 慶延以有孝行俱超授. 33) 예종실록 원년 7월 기유(8-406 다), 南原人林玉山 敎導士綱子 以進士中武科 拜軍器直長丁父母 憂 行喪依家禮 寢苫枕塊 不梳頭洗面 不澣衣 不茹旨 不露齒 三年啜粥 所嘗知者 見或不知 爲玉山. 성종실록 7년 6월 계미(9-351 가). 34) 성종실록 21년 7월 병자(11-623) 위의 책, 21년 9월 을묘( 나). 위의 책, 25년 5월 정미( 다), 慶尚道觀察使李克均 擧隱逸之士以啓曰 生員金宏弼 專 精理學 操履居正 不曲爲求擧 命下吏曹. 연산군일기 원년 12월 정축(13-59 가), 擧慶尚道善山逸民鄭鐵堅 授軍資監主簿 陜川逸民金宏 弼 授北部主簿 宏弼識見宏博 志操貞固 深探性理之學 其於淸而不隘 和而不流 或庶幾焉. 위의 책, 2년 정월 갑신(13-62 가), 以權景禧爲漢城府右尹 金宏弼軍資監主簿 先是 慶尙道觀察使 李克均薦宏弼遺逸 命除參奉 至是以參奉秩卑 擢授參上職. 35) 성종실록 9년 4월 병오(9-579 가), 幼學南孝溫上疏曰 一. 謹用人 國家用人 有文武之科 有雜學之科 有承蔭之目 有吏任之目 科目之外 又有孝子順孫之捜訪 引見慶延 收用林玉山 崔小河 用

12 國史館論叢 第56輯 주로 정치적 효용으로 정당화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小學契 활동은 소학 을 眞實踐履하는 태도로 실천하려고 한 사람들이 비단 金 宏弼 개인이나 또는 吉再 金叔滋 金宗直으로 이어지는 특정한 私塾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한 세대 뒤의 인물들인 金湜( ) 趙光祖( ) 朴 薫( ) 등이 성균관 재학시절에 金宏弼의 학문태도를 전하려고 애썼고,36) 나중 에 李耔(1480~1533) 趙光祖 趙慶輔 趙廣輔 등이 道契라는 형태로 자주 모임을 갖고 유대 를 다졌던 것도 이와 동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37) 소학 의 독습이 제도화되고 수 단화된 상황하에서 그들은 본래의 정신에 충실한 방식으로 이 책을 공부하고자 하였다. 그 본래의 정신이란 어떠한 것인가? 보통은 道學 또는 道學主義라고 부르지만, 필자는 論語 의 憲問篇에 나오는 爲己之學 爲人之學 의 구분을 빌어 그들의 공부태도와 여 타의 사대부들의 공부태도의 차이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소학 은 小學 大學階梯說 또는 先涵養後致知說 에 입각해 초기 단계 의 공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임을 밝힌 바 있다. 이 아이디어를 공부를 하는 주체의 입장, 爲學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 바로 爲己之學 이다. 爲己之學은 구체 적으로 어떤 것이며, 爲人之學과 어떻게 다른지를 공자의 말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공부했는데, 요즘 사 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38) 즉 공자는 공부하는 사람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가지고 學者를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음을 지적했던 것인데, 朱熹는 다음과 같이 程伊川의 말을 이끌어 이 구절의 의미 人當矣 然臣竊觀 慶延居家 孝心純至 天感亦多 閨門斬斬 隣里穆穆 又心通性理之正 學有經濟 之才 國人皆百里之器期之 竟以尼山縣監歸任 臣恐延年老 退死之日已近 若遲六年 則奇器又加老矣. 36) 중종실록 5년 10월 계사( 다), 御朝講 始進講大學 成希顏曰 在祖宗朝 有名儒姜應 貞者 頗有學術 又有孝行 士類慕仰 聚而師之 其徒言有法 人或指爲姜夫子 筆之於書 譏笑之其徒恐犯 物議 皆散去 史臣曰 是時 生員金湜 趙光祖等 傳金宏弼之學 不放言 不脫冠帶 終日危坐 如對 賓客 有效之者 言頗詭異 成均館以爲 自稱四聖十哲 通於藝文館 承文院 校書館 欲致於罪 未果 故經 筵官力言之. 위의 책, 10년 6월 계해(15-84 라), 安塘啓曰 今考成均館薦擧 則如趙光祖 金湜 朴薫等 此固經明行 修之人而被薦焉 必合成均館堂上長官及二百生員之意然後 擧之 用此人 當與用文臣無異也 趙光祖又 有孝行 而此人等行高 本無加資 今若止授參奉 則雖至十年 無由振發 請陞爲宣務郞准主簿職 以觀其 所行 傳曰 可 史臣曰 三人同志 不汲汲於功利 有志聖賢之學 常讀小學 以飭其行 不爲浮議所掩 士林 頗愛重之 三人道同志合 而所造各異 氣質不同 光祖明正切直 湜通達周遍 薰德器夙成. 37) 陰崖集 권2, 答趙秀才(沆) (총간 다), 吾及孝直(趙光祖)與尊先子兄弟 義同兄弟 實 作道契 而孝直及我墳山在龍鄕 仲翼兄弟(趙慶輔 廣輔)田庄 亦在龍鄕 在京則無日不會 下鄕則與川獵 於斗巖. 38) 論語 憲問 第 14, 25, 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13 를 부연하고 마지막에 자기의 의견을 붙였다 程子가 말씀하셨다 爲己란 自我의 성숙 (得之於己)을 추구하는 것이다. 爲人이란 남 들로부터의 認定 을 추구하는 것이다. 程子가 말씀하셨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했으나, 결국은 세상을 改 善시키는 일(成物)에 이바지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들을 위해서 공부하지만, 그 귀 결은 自我의 喪失 (喪己)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所見은 이러하다 공부하는 사람의 用心에 따라 得失이 갈라지는 機 微에 관해 聖賢들이 논한 말씀은 한둘이 아니지만, 이처럼 정곡을 찌르면서도 중요한 말씀은 보지 못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변 별하고 날마다 반성한다면 적어도 趨向해야 할 바가 어딘지 몰라서 쩔쩔매는 딱한 사태 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39) 사실 宋代의 理學家들이 자신들의 학문을 漢唐儒學과 구별하고 原始儒學의 계승자로 자처했던 까닭, 오늘날에도 이들의 학문을 改新儒學 (Neo-confucianism)으로 불러 주는 까닭은 바로 그들의 爲己的 태도 때문인 것이다. 선초의 유학자들 중 이런 입장을 철저 히 견지했던 인물이, 비록 그 학문적 수준엔 한계가 있었으나(이 점은 후술하겠다), 김굉 필이었으며, 小學契 활동에서 보이듯 동일한 신념의 소유자들이 집단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성종대는 사상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대이다. 性理學을 관통하는 정신은 바로 爲己 에 있으며 그것이 올바른 路線이라는 확신은 김굉필 다음 세대인 기묘사림에 이르 러 더욱 뚜렷하게 표명되며,40) 이런 입장은 다시 明 宣代의 사림들로 이어진다. 세 번째 세대에 속하는 李滉에게서 우리는 비로소 爲己之學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전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다음은 그 중의 하나이다. 爲己之學이란,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가 道理이며 우리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德行이라고 믿고, 가까운 데서부터 착수해 나가되 自身의 理解(心得)를 통해서 몸 소 실천하는 것(窮行)을 목표로 삼는 공부이다. 爲人之學이란 心得과 躬行에 힘쓰는 대 39) 같은 구절에 대한 論語集註 의 註釋, 程子曰 爲己 欲得之於己也 爲人 欲見之於人也 程子曰 古之學者 爲己 其終至於成物 今之學者 爲人 其終至於喪己 愚按 聖賢論學者用心得失之際 其說多 矣 然未有如此言之切而要者 於此明辯而日省之 則庶乎其不昧於所從矣. 40) 중종실록 11년 10월 정묘( 다), 御夕講 檢討官趙光祖曰 人君當以道德爲本 如性理之書 與詩文異 於此當愼其好尙 上曰 人主好惡 下人趨向 若理學 非徒人主 下人皆當用力 而近無力於理 學之人 光祖曰 理學乃爲己之學 而非爲人之學也 今者多成宗朝舊相 豈無傳習之地乎. 위의 책, 12년 11월 임진( 나), 御夕講 講大學 柳雲臨文啓曰 此云 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居廬 是爲人也 大抵學者 力於爲己之事 治其心而盡其道 然後卒爲善人矣 小有一毫欲見知 於人 則其爲學也 是爲人也.

14 國史館論叢 第56輯 신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고 관심을 바깥으로 돌려 地位와 名聲을 취하는 공부이다.41) 결국 爲己之學과 爲人之學의 차이는 공부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있다기보다 공부를 하 는 사람의 일차적 관심과 태도가 자신을 內面的으로 성숙시키는 데 있느냐 아니면 다 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있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즉 같은 經書를 공부해도 爲 己의 관심과 태도를 가지고 하느냐 爲人의 관심과 태도를 가지고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고42) 敎師와 學生이 전자의 관심과 태도에 입각해 가르치고 배 울 때 진정한 학문과 교육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교육학자들이 사용하는 언 어로 말한다면, 교육이 독자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활동이며, 그 목적은 外在的 價値 (extrinsic value)에 의해서가 아니라 内在的 價値(intrinsic value)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는 사고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출현은 사대부들의 현실 적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사대부는 治者層의 일원으로서 出仕를 통 한 정치참여 이외에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면서도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의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學者요 敎師로서의 삶의 방식이 관료요 정치가로 서의 삶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爲己之學의 출현이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爲己之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른 바 修己治人 또는 內聖外王으로 표현되는 儒學의 근본적 관심사 중의 하나인 정치적 責 務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분명해질 수 있다. 위 에서 소개한 程伊川의 爲己에 대한 해석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道學者들의 대답이 어 떠한 것일지를 예상하게 하는데, 그와 동일한 입장을 이황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 였다. 君子의 공부는 自我의 성숙을 돌볼 따름이다. 이른바 自我의 성숙을 돌보는 사람은, 張敬夫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면, 일부러 그러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 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깊은 산 울창한 나무숲 속에 피어 있는 난초 한 송이가 종일토록 향기를 발산하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이 향기가 됨 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난초의 모습은 자아의 성숙을 추구하는 군자의 모습과 방불하다.43) 41) 李子粹語 권1, 爲學(李瀷 撰, 增補退溪全書 5, 成大 대동문화연구원, 1978, p. 226), 爲己 之學 以道理爲吾人之所當知 德行爲吾人之所當行 近裏着工 期在心得而躬行者是也 爲人之學 則不 務心得躬行 而虛飾循外 以求名取譽者 是也(金富倫錄). 42) 위의 책, 권 2, 窮格( 增補退溪全書 5-258), 聖學不過四書 士之志學者 舍是書何以哉. 但今人非 不讀之 而只以決科爲業 於身心上了不關 陷溺旣久 難以啓發 若朱書 旣無其弊 而讀之 令人易以感 發興起 故積習旣久 然後回看四書 則聖賢之語 節節將有味 於身心上 方有受用處(拾遺). 43) 위의 책 권 1, 爲學( 增補退溪全書 5-228),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謂爲己者 即張敬夫所謂無所爲

15 - 49 李滉의 생각인즉, 爲己之學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변화 내지 개선시키는 방식 은 먼저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학문과 수양을 통해 성숙시킨 자신의 존재자체를 가 지고 마치 蘭草가 향기를 내뿜듯 다른 사람들을 感化 시킨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정치 론으로서는 어떤 약점과 한계를 갖고 있든, 儒家的 의미의 교육과 학문이 자신의 독자성 을 유지하면서 정치와 관련을 맺는 방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준다. 儒家들은 정치가 도모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전통적으로 安定된 經濟, 튼튼한 國 防, 爲政者에 대한 民의 信頼 라고 여겨 왔다.44) 그런데 앞의 두가지 과제를 달성하기 위 해 정치가 의존하는 수단은, 아무리 德治主義를 부르짖는 儒家라고 해도,45) 역시 法律 禁令의 制定이나 改廢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때의 法律 禁令은 언제나 위반행위에 대한 제재나 처벌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삶을 바깥에서 규제하거나 변화시키는 데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爲政者에 대한 民의 信頼 는 어떻게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대답은 역시 民生과 國防의 두가지 과제를 잘 해결함으로써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유가들이 교육 특히 學校敎育이 수행해야 할 책무라고 생각한 것은 養士 즉 信賴할 만한 爲政者를 養成하는 일 이었다. 그리고 정치와는 달리 교육이 이러 한 책무를 수행하는 방식은 언제나 사람의 內面(이것이 지적 이해든 도덕적 양심이든) 에 呼訴한다 는 특징을 갖는다. 달리 말해 교육은 자라나는 세대를 가능한한 훌륭한 됨 됨이의 소유자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정신적으로 성숙시킴으로써, 그 사회의 장래에 영 향을 미치는 활동인데, 李滉은 오직 爲己之學만이 이런 교육적 힘을 갖고 있음을 역설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爲己之學의 출현은 종래 科擧制에 종속되어 있던 교육에 독자 성을 부여했다는 점, 또 訓詁 記誦之學 의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웠던 經學이 교육적 힘 을 가진 진정한 학문으로 昇格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46) 하나의 歴史的 事件 으로 기록할 만하다. 이러한 전환의 싹이 조선조의 유교적 문물제도 정비가 일단락 되는 성종조에 나타난다는 것은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한 차원 깊은 단계로 진입했다는 증거이지만, 이 시기의 學問과 敎育의 自律性 에 대한 인식은 아직 불철저한 것이어서 여전히 정치적 방법에 의한 社會改革을 추구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 러한 개혁성향은 趙光祖와 같은 다음 세대의 인물들을 통해 급진적으로 분출되었다. 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一蘭艸 終日薰香 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義(記善錄). 44) 論語 Ⅻ-7,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曰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 何先? 曰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45) 위의 책 Ⅱ-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46) 李子粹語 권 1, 爲學(앞의 책 5-232), 學者先須收敛身心 以冷淡家計 作辛苦工夫 鑽硏咀嚼 久 久不輟 方始眞知其味之可悅 而得其力也 旣非擧子決科之利 又無學士斵窓之需 且今人爲學不困於訓 詁誦說則必眩於文詞繪總 其能俯首抑心於此 滌腸胃之葷血 味衆人之所不味者 寧有幾人(答黃仲擧).

16 國史館論叢 第56輯 2. 己卯年間의 士風刷新策과 그 挫折 연산군대의 학교교육은 성종대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躁進之風 에 시달리긴 했지만,47) 기본적으로 성종조의 교육정책을 답습하면서 10년 가까이 現状維持 는 한 편이었다. 무 엇보다 연산군 6년 館試의 응시자가 170여 명이었다는 것은, 설사 이들이 모두 居館修學 한 자들은 아니었다고 해도, 성균관교육이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증거한다.48) 그 러나 甲子士禍를 일으킨 재위 10년 무렵에 이르면서 국초부터 지속되어 온 科擧 敎育 禮俗政策의 基調를 무너뜨리는 여러 가지 失策을 범하면서 학교교육이 황폐화되고 士 風도 더욱 利祿을 좇는 양상을 나타냈다. 科擧政策의 경우, 열렬한 詩의 愛好家였던 연산군은 재위 10년말에 四韻律詩로 取士함 으로써 공공연하게 經學爲本 의 전통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조치를 취하였고,49) 계속 詞 章學을 두둔하고 詩 賦로 취사하는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經學을 급격히 쇠퇴시키는 결과 를 초래하였다.50) 學校政策에 관한 첫번째 실책은 크고 작은 행사에 빈번하게 학생을 動員 한 것이었다. 즉 임금이 행차할 때는 길가에 俯伏하여 迎送하도록 했고,51) 이어 조정의 朝會와 朝賀日 47) 연산군일기 3년 7월 무오(13-259), 且儒生冒求資級 横出仕路者 果多 國家亦用生員進士 入格 者爲參奉 此輩雖優於不學宰相子弟 一出仕路 遂廢其業 古法儒生四十始仕 今宜申明此法. 위의 책, 4년 5월 신축( 라), 傳曰 邇來學校陵夷 儒生懶於學問 爭事侈靡 爲師長者 亦不以 訓誨爲任 唯務寬裕 養成陵上之風 士習由此不美 興學節目議啓. 48) 위의 책, 6년 11월 신해( 다), 御經筵 同知事成俱曰 國家公選 惟科擧一事 今秋場擧子之數 館試則百七十餘人 漢城試則兩所各五百餘人 十月初二日終場 而初五日出榜 則二日之間 豈能一一科 次乎 請今後令試官 日短則以對策三十道 日長則五十道爲程式考試 何如 王曰 依所啓. 49) 위의 책, 10년 11월 기유( 다), 傳曰 人材不必以經術取 幸有中朝使臣能文者來 則不可以中 庸大學三綱領八條目 爲之酬唱也 必取能詩者 然後可以華國也 且能詩者 豈不知經術乎 故以此取之 於政院意 何如 因下御書曰 一等一人崔世節 二等一人鄭百朋等 三等二人俞汝霖 鄭紹宗 四等十五人 試律詩四韻以取士 幼小初學之輩 多與焉 時人譏之曰 聯句兒童榜 由是 士習愈毁 競棄實學 而事詩句 數年之間 經史ー廢 爭誦唐詩 鼓吹僥传科第. 50) 위의 책, 10년 12월 갑술( 다), 傳旨義(議)政府曰 文章出於性情 凡人性情純厚 則其發於詩文 也亦然 是故 觀人之著述 可以知其人之所蕴 大抵爲文章 必須格律和暢 詞意著題 乃爲佳作 至如應製 賦詠 尤當隨其命題 和暢其格律 使恊題意 若固執己見 苟違命題 則非徒病於文章 亦有乖於奉承君命 之意 晓諭詞臣 勿令如是. 위의 책, 11년 2월 신사( 다), 傳曰 宗朝社稷惠安殿親祭 國之大慶也 旣行大慶 合宜取人 擇 有才華儒生 別試取之. 위의 책, 11년 3월 정미( 나), 傳曰 取士時 其製述 與杜牧 白居易 李太白氣習相近者 取之. 위의 책, 11년 12월 임자(14-30 라), 傳于承旨姜渾曰 聞今來天使頗能文 其選能詩者 與相唱和 使 知我國人才之不乏 且文可以表情 與天使對製時 兼述我國事大之誠 以彰其美 其有佳製及或爲天使稱 美者當論賞. 51) 위의 책, 10년 7월 신축( 라), 傳曰 儒生等雖未達 亦欲事君 人君行幸時 不可各在其家 習與

17 에 궁궐에 모여 堵列하도록 명령하였다.52) 심지어는 임금이 타는 가마를 메는 일에까지 유생들을 동원하였다.53) 뿐만 아니라 유생들의 集會와 時政에 대해 批判하는 행위를 刑 事處罰했기 때문에54) 학교의 분위기는 대단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산군이 이 런 강압책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각종 행사에 執事로 일하거나 土木工事의 監督官으 로 일한 유생들에게는 반대급부로 加資가 베풀어 졌고,55) 연산군 12년부터는 아예 預務 官(또는 隸務官)이라 하여 刑曹 義禁府 漢城府 司憲府 掌隸院 등의 관청에 도합 24명 정 도를 祿俸없이 經歷만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근무시키는 제도를 만들었다.56) 그러나 이 性成 聖賢同歸 自今凡大小行幸時 成均館四學儒生 竝俯伏路傍 習見禮度 若或厭憚 罪及大司成 令禮 曹勘議節目以啓. 위의 책, 10년 8월 경신( 라), 王自西郊還 顧見祗迎儒生曰 無乃厭其泥濕 籍席而伏乎 承旨 李繼孟啓 無有矣 傳曰 祗迎儒生 皆書啓 自此以後 每於迎送 雖雨習泥濘 亦不得籍席. 52) 위의 책, 11년 10월 임신(14-25 나), 傳曰 成均館儒生 序于仁政門內 四學儒生 序于仁政門外 洞開 其門 使之通望 且令押班監察 糾察儒生 名載學籍者 每於衙日 雖雨雪 必詣闕庭 一如軍卒 故無肄業 之志 徒有苟進之心 士習大壊. 53) 위의 책, 12년 3월 을사(14-44 라), 傳曰 轎子擔侍儒生安義謙稱病 必憚侍衛也 拿致密威 廳囚鞫 擔轎 初以衝鐵衛補旅隊 次以儒生 次以文官 終以臺官 屈辱朝士如此. 위의 책, 12년 6월 병자(14-57 가), 傳曰 轎子擔侍文武臣及儒生 加數磨鍊. 54) 위의 책, 10년 12월 임오( 라), 且前日路傍人譏笑宰相及承命內官者治罪之法 申明若儒者二 人偶語於路傍者 決罪 三犯者竄逐 假稱儒生 遮面而行者 雖初犯決罪充軍 成均館及 四學 五部 大小各司 群聚遊談非議時事人有無 毎朔二度書啓 何如 都承旨政丞等啓 上敎允當. 위의 책, 11년 정월 임진( 다), 傳曰 國家設師長 俾敎誨儒生 儒生或有不滿其師 避不受業有 是慢師長也 慢師長是慢國法也 自今如有此等人 令師傅現告 決杖一百 遠方充軍 其師傅 或有屁護 不即告而後現者 竝決罪 刻板懸于成均館四學 使之知悉. 위의 책, 11년 12월 신해(14-30 다), 傳曰 儒生相聚遊談者 豈無其人 而ー不捕告 是必怠於 奉法而 然也 自今有儒名 不儒服者 罪之 王日益無道 恐儒生學古非今 故痛疾之. 위의 책, 12년 정월 계묘(14-36 가), 傳曰 群聚遊談 非議時事者 曾有禁法 但成均館四學 則別無禁 斷 赴學儒生 書名入啓後 不付學籍無賴之徒 使不得出入 令司憲府詳加檢察 或遣內官承旨 不意摘奸 如有所犯 當身及接人者 以棄毁制書律論断 官員杖一百 外方爲奴. 위의 책, 12년 2월 무오(14-38 라), 有人貼匿名書于鐘樓柱曰 弑君之道 於傳有之 嗟爾四良 從我義 兵 傳曰 此必儒生所爲 令成均館 窮捜以啓 又疑城基退標後掇家人 含怨而爲之 其令漢城府 抄 東西城基掇家者中 心行詭詐可疑儒生以啓. 위의 책, 12년 2월 무오(14-38 라), 傳曰 群聚遊談者 已令憲府捕捉 無一人捕告者 申明禁法 違者 重論. 위의 책, 12년 4월 갑자(14-48 다), 傳曰 前日行幸 儒生閔舜年 擧頭仰視 此有長吏不檢察也 其鞫 之 且舜年勿令赴學私自讀書. 위의 책, 12년 5월 기묘(14-50 다), 傳曰 大小員及儒生等 互相來往 非議時事 今後朝官依守令例 造栍入內 儒生姓名 亦開錄入內 執義掌令及監察一員 逐日詣闕 承命摘奸. 위의 책, 12년 8월 정미(14-62 나), 傳曰 各道生員進士文科鄉試 勿遣試官 令成均館員出題緘送 觀 察使監試 送試卷于禮曹 差試官科次 入格人移文其道 令赴會試 其入京日 守城門將照名 使不得濫入 且在外前銜朝士儒生 無所事而到京 尋訪親族 非議時事 甚不可 一皆禁断. 55) 위의 책, 11년 9월 경자(14-21), 命授大射禮執事儒生 各加ー資. 위의 책, 10년 12월 경인(14-33 라), 傳曰 瑞䓤臺監役百員 生員進士久未得志者 爭求其任侵漁軍人 比他滋酷 士風頹毁 至是尤甚. 위의 책, 12년 2월 병인(14-40 나), 傳曰 大射禮時執事儒生 各加 ー資.

18 國史館論叢 第56輯 러한 조치들은 奔競 이라는 청탁운동을 가열시킴으로써 강압책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학교교육을 위축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두번째 실책은 學官을 감축하고,57) 학교의 시설 을 철거하거나58) 다른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교육의 人的 物的 조건을 악화시킨 것이었 다.59) 이런 조치들은 두 차례에 걸친 士禍와 함께 사대부들로 하여금 교육과 학문의 가 치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고 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은 婚談에서 忌避對象이 될 정도였 다.60) 개국후 성종조까지 꾸준히 진척되어 온 禮俗政策도 연산군조에 들어와 큰 혼란을 겪 었다. 安順王后와 昭惠王后의 상을 치르면서 노정되기 시작한 연산군의 禮制에 대한 便 宜主義的이고 恣意的인 태도는 급기야 短喪令으로 발전해 그 동안 힘들여 이룩한 父母 三年喪의 원칙을 고려때의 百日喪보다 짧은 二十七日喪으로 후퇴시키고 말았다.61) 그러 나 이러한 전횡은 오랜 세월을 통해 양성되어 온 사대부와 민중의 효관념을 거스르는 것으로서 그의 다른 失政과 함께 反正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1506년 中宗反正이 성공하자, 이것들은 모두 개혁해야 할 弊政으로 지목되었다.62) 연 56) 위의 책, 12년 2월 무오(14-38 라), 問于政院曰 儒生等聚無賴之類 以讀書捷科爲事 不識朝章 雖得 科第 將焉用之 如此等輩 如刑官等司 差假官 俾識朝章 可也 雖帶此職 有志者亦可以取科第 權鈞等 啓 上敎允當 時廉恥旣喪 士習已陋 儒生輩聞之 喜贺奔競者頗多. 위의 책, 12년 5월 병오(14-53 라), 傳曰 儒生識事體心行淳謹者 刑曹 義禁府各六員 漢城府 司憲 府 掌隸院各四員擇差 竝以無祿官從仕 吏曹啓請 以預務官稱號 從之. 57) 위의 책, 12년 정월 병신(14-34 라), 傳曰 成均館司藝直講各一員 典籍六員 革除. 58) 위의 책, 12년 4월 계유(14-49 라), 傳曰 於破城臨見人家及東學 撤去. 59) 중종실록, 원년 10월 경술(14-85 나), 受朝參 御朝講 持平辛世瑚 又曰 學校風化之源 不 可不重 廢朝時 儒生等迎駕祗送 朝賀朝參 竝令隨班 又令擔轎 學者奔走無暇 其能鍊業乎 請先修葺 成均館以養儒生 且司圃署官員 當其署撤去時 移居于中學 豈無他處 而必於學宮乎 其時官員 不可不 懲 知事宋軼曰 廢主以成均館爲虎豹之園 故明倫堂東西齋 盡皆破毁 儒生無可寓之處 今雖欲急修補 軍人當靖國之日 盡令還家 故應上番有亦歸 以此未即修補耳 上曰 成均館其速修補 司圃署官員 竝令 推之. 60) 위의 책, 원년 12월 을축( 라), 御夕講 侍講官李世仁曰 上日三經筵 又御夜對 且命修成均館 遣承旨供給儒生 其崇儒重道之意至矣 但成宗朝 館學儒生甚多 其在學鍊業者 亦皆士大夫之子弟也 至廢朝 雖士大夫之家 不使子弟業儒 外方儒生則以其賦重 不志於學 其習今亦尙存 聚學讀書 專不如 古 在今培養之策 不可不至 四學儒生 令官員檢察 而外方儒生亦令上來使 之篤學可也. 위의 책, 2년 3월 임인( 가), 御朝講 大司憲閔祥安曰 今別試入格儒生 欲退赴式年 不入會 試 是欲熟讀經書 多得講畵 請勿退赴 知事宋軼曰 告狀退赴者 臣亦以爲未便 然今此講經 只二書也 待秋式年講之 則必多精熟 且在廢朝 儒生等專不務學 雖父子兄弟之間 以文學相戒 今許退赴 勸令學 問爲當 領事柳順汀曰 宋軼所啓 當矣 上曰 可. 위의 책, 3년 10월 갑술( 다), 御朝講 又曰 學校頹廢事 前日已啓 在廢朝 士林皆被禍 父兄敎子弟 戒以勿學 婚姻之家亦不取儒士 其習尙存 國學皆空 夫人材末可今日培養 而明日用之 請 依古例 或遣輪次堂上 或月講 或不時庭試 以示敦崇之意. 61) 박연호, 조선전기 士大夫禮의 변화양상 ( 청계사학 7, 1990) pp ) 중종실록 원년 10월 경오(14-91 가), 弘文館副提學李胤等上琉十三條 其正士習 略曰 頃

19 산군 10년말에 四韻律詩로 試取한 과거는 罷榜되고63) 즉위경축 別試는 講經으로 치러졌 으며,64) 학교를 수리하고65) 교육과 학문을 진작시키자는 합의가 조정내에 형성되었다.66) 각종 행사에 동원된 유생들에게 반대급부로 제공한 加資도 취소되었다.67) 성종이 죽었을 때 心喪三年을 행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던 鄭誠謹 李自華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 고,68) 父母三年喪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관원들에 대한 탄핵과 함께 무너진 喪制를 회복 하기 위한 守喪儀節이 반포된 뒤,69) 곧이어 三年喪回復令이 내려졌다.70) 者 廉恥道喪 奔競成風 至於冠儒冠者 猶謀躁進 求爲監役 求爲隸務官 且於甲子冬 以律詩試士 其命 題之意 在於欲殲士類 有識者有所 忍製 應試之士 阿諂迎合 巧言邪說 鋪張敷衍 無所不至 以竊科 名 士林唾罵 羞與爲齒 況試藝之 已不依科場之例 請罷其榜廢其人 以正科目. 63) 위의 책, 원년 11월 경진(14-94 나), 曰 罷榜事 弘文館臺諫皆言之 其令六曹參判以上 曾經政丞 議政府府院君以上 漢城府堂上等 會議于賓廳 領議政柳洵 エ曹參判柳濱等議 甲子冬試士時 無科 擧之規 而有似殿試之例 其題廢主自出 而試官亦往來科次 初以爲非科擧也 況其作詩者過情 宜罷榜 傳曰 旣曰科擧 則罷榜勢難 其以作詩已甚者 抄罷何如 政丞等啓曰 上意如此 可謂不輕絕人也 然取 人不以法 非科擧之例 題意旣爲無道 而製詩之謝亦已甚 且抄罷爲難 莫如罷榜 傳曰 吾意雖如此 詢 模僉同 依所啓罷榜. 64) 위의 책, 원년 12월 신유( 가), 御朝講 正言朴巨鱗曰 儒生專尚詞華 不讀經書 別試則試 以詞章 式年則試以講經 雖例也 欲革此習 則雖別試亦可講經 上曰 僉議何如 柳洵曰 大凡儒生不喜 讀經 唯喜詞章 然一於詞章 則浮而無實 一於經書 則詞章亦無足觀 先王朝雖別試 或以講經或以詞章 近來別試 則專試詞章 儒生不喜讀經 其弊不貲 若救此弊 則雖別試姑試講經爲當 然終不可以此爲定 式也. 위의 책, 원년 12월 신유( 나), 傳于政院曰 且別試以講經取人 有前例歟 政院啓曰 雖 別試 或講四書三經 或講ー經一書者有前例. 위의 책, 원년 12월 갑자( 다), 傳曰 近來久廢講經 故別試亦可講經事 臺諫大臣言之又有前 例 故已下成命 而禮曹更啓稟 於政院意何如 政院啓曰 即位明年別試 則其規一依式年 而近來取人甚 輕 或試以律詩 故非唯不讀經 亦不讀史 只吟風詠月而已 今則宜講經試取 而禮曹必以天使臨近 若講 經則恐日迫 故啓稟耳 然天使之來 未可預料 而四書五經 不必俱講也 傳曰 其講經書各一試取. 65) 위의 책, 원년 12월 무신( 라), 禮曹請修理四學 允之 在廢朝 東學則入禁標內 中學則司圃署 移寓 西學 南學亦鞠爲茂草 至是 除治修整 遊學之士 稍稍來集. 위의 책, 원년 12월 기미( 라), 上御思政殿 講生員李深 大司成李玷 執經問難 領議政柳洵 曰 學校國家之元氣 人材皆由是出 人倫亦由是明 近來學校頹廢 人材不出 聞館舍破毁 儒生不能居館 今則日寒 修補爲難 請待日暖修葺 使之修業 上曰 董役修補 可也. 66) 위의 책, 원년 12월 병오( 가 다), 傳曰 前者 館閣堂上及他可當堂上 抄啓 輪次進成均館 毎 朔三旬 或講論或製述 勸課儒生 令大提學與禮曹堂上 議崇學節目以啓 遣承旨 視成均館修理 且饋儒生酒肴 因政院之啓也. 위의 책, 3년 정월 정묘( 다), 傳于持平金安國曰 昨日於經筵爾所言勸學條件 承旨及史官未 及聞知 其更言之 安國啓曰 昨日講書 至道有升降 政由革俗 臣乃曰 世道汚隆 由人君所尙如何耳 我 國自箕子受封以後 敷八條之敎 爲文明之敎 中國亦以爲文學之國 我祖宗亦培養人才 故文學之士 彬 彬輩出 及至廢朝 文士皆以無罪被誅 以此文士少矣 今可更立振作興起之方 傳曰 知道. 위의 책, 3년 10월 신미( 나), 御朝講 守紋曰 近來學校廢弛甚矣 祖宗朝則成均館與 四學儒生 常滿額數 輪次堂上時時試藝 其勸課之方至矣 今因廢朝之餘 國學儒生未滿額數 閭巷亦無 讀書之人 今亦依祖宗朝故事 使之勸課成就. 67) 위의 책, 5년 2월 신해( 가), 金壽童 成希顔 盧公弼 閔孝曾 李蓀 金應箕 申用漑 安潤德 韓世 桓等議曰 儒生執事加 祖宗朝所無之事 特一時濫政 其已除授者 亦宜追奪 傳曰 儒生加改正事 左議政處 竝問以啓 柳順汀議 儒生執事加 無前例 改正爲當 上曰 群議僉同其改正. 68) 위의 책, 원년 9월 을미(14-79 가).

20 國史館論叢 第56輯 그러나 成均館과 四學에는 士子들이 좀체 모여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의 가장 주된 원 인은 역시 士子들이 門蔭이나 成衆官, 각종 軍衛 등을 통하여 출세에 유리한 高地를 先 占하려는 경향이었고, 공부에 뜻을 두고 있는 士子들도 학교보다는 私的으로 과거준비 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71) 따라서 反政初부터 經國大典 의 階窮者准職 조항 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72) 개정의 방향은 敎授 忠義 忠贊 忠順 등 實行六品者로서 급제한 자들은 모두 分館시키자는 것이었으나,73) 그렇게 되면 科目出身 자가 非科目出身者보다 불리하게 되므로 불합리하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결국 40세가 되 어야 忠順衛에 入屬하거나 外敎授取才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한다 는 규정을 엄수하는 선 69) 위의 책, 2년 12월 병자(14-210가). 70) 위의 책, 2년 12월 신사( 나). 71) 위의 책, 3년 10월 병술( 다), 申鏛又曰 人才之不作 莫此時若也 在成宗朝 養育人材 多士輩 出 不幸廢主 誅竄殆盡 自此以後 士氣蕭索 不志於文學 先有媒進之心 此勸勵之不得其道也 近者令 武士試射 優等者輒賜賞物 武人以爲榮 爭相鍊習 如儒生之居館學者 亦不時點名 或製述或講經 其入 格者 或賜書册 以示勸勉 則彼必以君賜爲榮 多有興起之心矣 彥弼曰 成均館同知安琛以病不仕 尹金 孫亦無故不仕 請皆罷去 以參判中有文學德望者兼差 使之敎誨 知事申用漑曰 人才之不作 果如申鏛 所啓 曩時雖宰相之子 篤志學業 老而無成 乃始求官 今則不然 纔免襁褓 皆懷媒進之心 不業文學 雖 有志學者 率皆居家鍊業 不喜居館 爲今計者 莫若擇有物望者 以爲表率 如姜景敍 南袞 兼差同知 以 之訓誨 則儒生庶可興起 而樂爲赴學矣 於是而試才 或直赴 或賜書册 則人才何患不作乎 且四學官員 授職未久 輒遷他官 故不以久居爲計 不勤於敎導 今後四學敎授擇差 而久任者陞遷 何如 且曩時輪次 堂上 一月之內 二三次就成均館 或製述或講經今則廢 請申明擧行 非獨館也 四學亦依成均館例 令以 堂下官有文學者 輪次仕進 考其儒生之製述. 72) 위의 책, 2년 4월 기묘( 다), 御朝講 參贊官李世仁曰 向昔文科放榜時 新恩等皆着綠杉 其得着靑杉者盖寡 是儒生專意講習 而不有他岐之念故也 今則士風不古 皆有躁競之心 或屬忠順衛 或屬假官 謀得雜加 或至參上(六品以上官曰參上) 或至三四品 及登第後 銓曹依大典准職敍用 是長 其躁進之心 其大典准職之法 豈雜加云乎 領事柳洵曰 世仁之言當矣 古之儒者 篤志於學 故不 用他道而出 今之儒者反是 故國學無人 士習至此 正宜矯正 古者勿論參上 率皆分館 其務聚雜加 以 至資窮者 亦不必敍於東班准職 檢討官金乃文曰 儒生以忠順衛忠贊衛爲參上三品 以爲他日占爵之計 士習至於鄙陋 當別立科條 痛禁之 臣意以爲 如此輩率皆分館 或經ー二年乃敍 則此風庶乎少戢矣. 73) 위의 책, 2년 4월 신사( 나), 朴元宗議 今榜及第 吏曹因前規已除授 今若更改 則恐致紛擾 但近來儒生不就館學 好屬軍衛 濫取雜加 士習之汚 果如弘文館所啓 今後禁防勸學節目 令該曹磨鍊 施行爲當 柳順汀議 儒生自在縫掖 先有躁進之心 求爲散官職 以爲他日陞敍階梯 士習卑汚 果如弘文 館所啓 如敎授 忠義 忠贊 忠順實行六品者 竝皆分館何如 成希顏議 大典諸科條註 文科甲科階窮者 陞堂上官 乙科丙科階窮者 授准職 已准職者 陞堂上官 自立此法 韓堰以新及第 初授大司諫 乃其時 宰相韓明澮之姪也 且崔灝崔恒之子 申泂 叔舟之子 鄭敬祖 麟趾之子而李繼孫之壻 姜龜孫 希孟之子 宋遙年 姜希孟之婚家 而皆初授正 此非皆値窠闕而授 亦或有作闕而授者 其他臣所不能盡記 其後 李 孟文資窮中第 不得爲准職 此其孤寒無攀緣之勢者也 祖宗成憲 炳如日星 宜若萬世流行無碍 而隨勢 有無 或行或不行 臣之竊嘆有所矣 今適臣以無狀 在用人之地 無他才能 以裨寸效 願自今固守成宗成 憲 庶供職分之萬一 故當新及第授職時 一依大典擬望 不暇料人言至此也 近來士習果不美 屈指前日 未第而階多者 亦不可殫計 恐非今日始濫觴也 方令士習在所正當 正士習有道 違背祖宗成憲 以正士 習 豈其道乎 廢朝除拜猥濫 賢愚倒植科擧出身 非枉被重典 則即流配遐裔 其一歲累遷 其官顯揚於朝 者 皆子弟無識之流 因而陵轢善良 指笑文臣者有之 若龍飛御天少遲 則士類將芟盡無餘 只有無識之 類 爲高官大爵 置宗社於不救之地 必矣 言至於此 不覺太息 臣以此益願遵成宗重科目之意 固守成憲 於即位之初 上從元宗議.

21 으로 후퇴하고 말았다.74) 准職法에 손을 대지 않고 취할 수 있는 興學策은 대단히 제한된 것들이었다.75) 즉 수 리 중인 성균관의 공사를 빨리 마치도록 독려하고,76) 居館하는 寄齋生과 四學儒生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여 몇 명의 우등자들에게 進士會試에 直赴할 수 있는 특전을 베풀 고,77) 그 실행이 해이해진 勸課節目과 學令을 준수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78) 多少 의 誘引을 제공하고 法令의 고삐를 조이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교육을 책임맡고 있는 관원들을 문책하기도 하고,79) 직접 유생들에게 諭示를 내려 타이르기도 했지만,80) 이런 정도의 처방으로는 士習을 교정할 수 없으므로 朝士의 과거응시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81) 마침내 중종도 이 문제를 府院君 이상으로 하여금 再論議할 74) 위의 책, 2년 4월 기축( 다), 傳于吏曹禮曹曰 新及第等 依前例除職 近來 儒生不勤就學 好 屬軍衛 務得散加 爲他日陞敍階梯 私(士)習卑汚 一至於此 禁防勸學節目 磨鍊以啓 回啓曰 已行六 品以上實職者 竝皆分館 降授參外之職 而不由科目而進者 仕路無碍 則科第出身者反沈於下流 於用 人之體 顚倒實甚 不可施行 且業儒者 年滿四十 許屬忠順衛 已有著令 其依年限 入屬者則已矣 近年 以來 士習日卑 不無冒年入屬之弊 自今冒年之禁 申明糾察 如有犯者 雖經參上之職而登第 降屬四館 何如 從之. 위의 책, 4년 2월 무진(4-310 가), 傳曰 儒生爲忠順衛敎授事 前已立法禁断 今當擧行. 75) 위의 책, 2년 4월 경인( 라), 上命大臣等議學校之事 柳洵議 近來 學校空廢 師生依席不講 雖成均館亦然 況四學乎 嘗聞 空學不會之日亦多 學校本源之地 固不宜如是 依成均館例 令有名望文 臣 分旬輪次以仕 或試講或出題製述 以爲勸課之方 其敎授訓導 亦勿雜差 以專其任 何如 柳順汀議 四學敎授訓導 如得其人 不須別選文臣輪仕 上從順汀議. 위의 책, 3년 10월 벙술( 라), 傳于政院曰 安琛有病則改差 命召尹金孫 敎以勤仕 輪 次堂上 四學官員 久任及讀書堂優待 弘文館久任等事 竝依經筵所啓 又傳曰 欲令儒生樂赴館學 其道 安在 其不肯居館學者 罪其父兄 無父兄則停擧 以示懲戒 何如 雖不可如此 其議次罰以啓 政院回啓 曰 以儒生不肯就學 罪其父兄 似未穩 上若銳意於興學 則儒生自然興起矣. 76) 위의 책, 2년 10월 임신( 라), 傳于政院曰 成均館修理 已畢乎 宜督役速畢. 77) 위의 책, 2년 6월 갑술( 다), 命聚居館寄齋及四學儒生于成均館試製 取金大有等三人 大有直 赴進士覆試 而其試日雖不中格 特令收錄額內 餘皆只赴會試. 78) 위의 책, 2년 9월 갑자( 라), 傳曰 近來學校廢弛 爲儒者不勤受業 爲師者不勤敎誨 前立勸課 節目及館中學令 其申明擧行. 79) 위의 책, 3년 10월 갑술( 라), 傳曰 又興學之方 前者講究 節目靡不詳悉 而無餘薀 然 而頹廢之意 正言言之 是必奉行者無實故也 禮曹 成均館 四學官 竝推之. 80) 위의 책, 4년 3월 갑진( 라), 傳曰 以務學崇儉之意 諭于儒生 其辭曰 今之儒者反是 尋章 摘句 不究性理之學 好潔衣服 不察切己之病 徒以服飾之美 誇之於人 而身之不善 恬不知愧 幼而學 之 壯而欲行之也 奢侈之習 已成於初學之時 則後日措諸事業者 占可知矣 乘肥衣輕之禁 著在學令 而士習一至於此 豈徒爲國家之憂 抑亦爲學者之羞 此雖予表率之未至 良由敎養之失其道耳 凡在師長 之職者 體予至懷 導以義方 使知墻面之爲可羞 而縕袍之不足恥也 敦尙儉素 篤志力學 以淸風化之源 典翰金塘 於經筵 啓儒生奢侈之習 故有是敎. 81) 위의 책, 2년 11월 병진( 가), 御晝講 侍講官崔淑生曰 且士習不可不正 方今士習 甚汚 線得生員進士 輒懷爵祿之心 爭鳩冗資 以圖後日之計 一朝登第 即陞高秩 廉恥道喪一至於此 國家安能長久乎 今後與大臣議定 如此者勿許赴試 以正士習 淑生曰 儒生不居館不師受 濫占雜 資而横出 士習不美. 위의 책, 3년 2월 신사( 다), 御朝講 李長坤曰 前日成均館取人時 人才甚尠 登第者皆朝士 此無他 儒士畔入他技 士習不正故也 請自今 勿令朝士得赴別擧 則人皆勸勵 全才斯得矣.

22 國史館論叢 第56輯 것을 지시하였으나,82) 역시 外敎授 忠順衛 忠贊衛 族親衛의 경우 40세가 되어야 取才 및 入屬을 허락한다는 경국대전 및 大典續錄 의 규정을 엄수한다는 원칙을 재확인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83) 다만 40세 이전에 입속해서 資品을 쌓은 뒤 급제한 사람들의 승진은 다소 제약을 받게 되었다.84) 그러는 동안 士風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노정하기 시작하였다. 성종조에는 士子들의 躁進之風 이 주로 館 學의 虛疎化의 원인으로 개탄되고 논란되었지만, 연산군대를 거치 는 동안 士子들 뿐만 아니라 臺諫까지 加資를 노리고 각종 국가적 慶事의 禮執事로 차 출되기 위해 청탁을 벌이는 등 土大夫社會 전체가 利祿追求 에 휩쓸리고 있었다.85) 이런 풍조를 반영이라도 하듯 反正初의 士風은 갖가지 타락상을 顯出하였는데, 그것들을 대략 발생하고 논란된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책, 4년 2월 무진( 라), 御朝講 執義朴光榮曰 近來士習大壞 儒生居館者 爭爲忠順衛 司直 又求爲外方敎授 若或登第 則即授東班六品 以此爲後日媒進之計 且於道路 無一人挟册 皆欲借 馬騎之 此皆士習之不正也 若此者 雖登第 請勿授東班六品. 위의 책, 4년 4월 무진( 다), 諫院啓曰 今之士習 躁進成風 或除敎授 或屬忠順衛 忠贊衛 因 經司果 及登科第 則例授參上之職 由是士習益壞 居館無人 請自今以後 雜職司果及敎授 一切分館 傳曰 儒生雜職事 已有禁令 今可申明 餘不允. 82) 위의 책, 4년 4월 무진( 라), 憲府又啓曰 近來 士習不美 爭屬忠順衛 忠贊衛 敎授及至出身 以經六品 例授參上職 故人皆志於躁進 非四十以後入屬者 雖經司果敎授 請一切分館 大典內資窮者 准職 此謂東西班有踐歷者也 豈知弊至於此 雖資窮者 無踐歷之實 則降授例也 忠順衛 敎授 則四十歲 以上者許屬 已有前例 其餘忠義衛 忠贊衛 族親衛等 亦依忠順衛例 冒年六品者 登第後 請勿敍參上職 今之赴殿試者 資窮者多 宜速處置 傳曰 士習女樂等事 令府院君以上 議之 餘不允. 83) 위의 책, 4년 4월 경오( 가), 憲府又啓曰 尹龜禎等八人 以訓練院習讀官 兼屬忠順衛 習讀則 三十朔爲一資 忠順衛仕滿九十爲ー加 故以習讀 潛屬忠順衛 其用心不正 臣等所知止此 令兵曹盡摘改 正後 竝罷職 傳曰 問諸兵曹. 위의 책, 4년 4월 임인( 다), 金壽童 金銓議 大典云 外敎官試年四十以上者續錄云 儒 生年四十以上者 許屬忠順衛 忠贊衛 冒年入屬者 永停擧 受敎以爲 冒屬者雖經參上職而登第 降屬四 館 立法已詳 今宜申明糾察 族親衛 可依右例施行 但忠義衛則功臣子孫例屬 不可限年 若業儒而不專 於學 自少入屬 隨番出入 爲躁進之計者 雖實行六品 亦宜分館 且階窮者授准職 自有大典之法 今不可 別立他條 但該曹於除授時 視其踐歷多少 量宜除授爲當 又訓練院習讀官 兼屬忠順衛 竝用其仕 濫授加資 果甚不當 但因循爲例 授階者多 且經赦宥 今不可一一追論 竝罷其職 只改濫授之爲當 命竝 依議施行. 84) 위의 책, 7년 정월 정유 무술( 라), 正言張籍啓曰 臣入屬忠順衛 資至七品 除成均館博士 今拜 正言 就職未安 四啓不允 諫院又啓 雜資躁進者 前有物論 正言張籍亦不可在職命遞職 餘不允. 위의 책, 10년 윤 4월 계미(15-76 나) 御朝講 臺諫啓 尙衣正韓承亭 其初多聚雜資爲資窮 至登 科第 即拜三品 有躁進猥濫之弊 雖非承亨 豈無先進之可爲者乎 不允. 위의 책, 10년 5월 정해(15-77 나), 臺諫啓曰 韓承亨不可不遞 以救士習 請速遞之 傳曰 欲救士習 遞承亨宜矣 然聚雜資而爲正者爲可遞 則他人如此者 亦可遞乎. 위의 책, 11년 3월 무신( 라), 吏曹啓曰 寧越郡守李穀 平壤庶尹尹衡 皆以資窮 文科出身 若 依大典 敍以准職 則此輩當爲正矣 近者以正爲過 而降敍其職 例也 此人等事 何以爲之 當農時 挈家 而來 其弊極矣 請待秋而遞 傳曰 近以大典敍准職爲未便 而例爲降授 當依此例 設若可遞 亦當待秋. 85) 위의 책, 12년 6월 갑자( 라), 前此凡有慶 禮執事 雖臺諫 至於求差 欲得別加也 以臺諫甘於 引監察 識者非之 到今有辭之者 士習可知也.

23 - 57 儒生의 복장인 儒冠과 靑衿團領을 착용하지 않고86)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말을 타 고 다니는 행위87) 儒生들이 學校에 가지 않고 절간에 올라가 놀다가 器物을 강탈하거나 승려들과 싸 움을 벌이는 행위88) 寄齋生이 庶孼과 주먹다짐을 벌인 사례89) 國學生으로서 남의 물건을 훔치다 잡혀 두들겨 맞고 訟事를 벌인 사건90) 家屋破壞 및 脅迫, 有夫女를 상대로 한 性犯罪91) 科場에서의 騷擾 및 試官을 모욕하는 행위92) 86) 위의 책, 8년 11월 무신( 다), 傳曰 人生十有五年 自天子之元子衆子 與凡民之俊秀皆入大學 故有自世子王子至於宗親 皆謁先聖 因受業 予在潛邸 依禮謁先聖 因受業 感發之心至矣 冠儒冠衣靑 衿行禮 豈不美乎 近來學校頹廢 其可申明 令自王子始 使下人效之. 87) 위의 책, 4년 11월 갑술( 다), 傳曰 李思鈞所啓儒生奢侈事 令父兄宰相 敦勸而率之. 위의 책, 4년 11월 을해( 다), 傳曰 古者上自王宮國都 下及間巷 卿大夫元士之子 與凡民之 俊秀 莫不入學 敎以禮譲 此治化所以隆興也 近日卿大夫子弟 席父兄之勢 競相奢侈 乘肥衣輕 服美于 人 年纔及冠 辄媒仕進 未聞就學讀書 以古人修己治人之道爲志者 國家深慮此弊 敦勸之方不爲不至 而未肯率敎 卿大夫之家如此 況其下乎 此豈特君上之憂 抑爲父兄者之羞也 苟公卿大夫深體予懷 倡率 於上 則庶人之家 安有不化者乎 自今訓子弟 皆令入學受業 崇儉素之風 革躁進之習 以禮義廉恥自勵 變化氣質 大有成就 使儒生有所觀感焉. 위의 책, 9년 12월 갑진(15-48 가), 御朝講 領事鄭光弼曰 學校頹廢 其振作之方 不可不講究 但未 知施何策而能作興也 上曰 儒生不可以法令治之 予意以爲 當擇立賢師長 又責其父兄 在家則父兄敎之 在學則師長敎之 以勸誘引進 則庶幾自然成就 今之儒者 非徒行不如古 至於衣服 亦變其舊制 不着靑 衿團領 而道路之行 與庶人無異 雖不能一一推治 而罪其父兄師長 則士習亦庶幾變矣. 88) 위의 책, 4년 12월 계사( 라), 傳曰 四學成均館儒生等 不就學 登山作弊 其長官不檢之故也 四學及成均館官員推考 傳曰 近來儒生等勤學之方 靡不盡擧 而怠於就學 外則山寺京則閭里 驕 横侵奪 不顧國家之令典 此父兄之不嚴敎 師長亦不檢擧之所致也 自今以後 雖或奪細碎之物 依律科罪 常時館及學中 禮曹不時遣郞官點檢 累次闕到者 罪其父兄 停擧當身 不使儒生橫行中外 勉就庠序事 使禮曹磨鍊節目以啓. 89) 위의 책, 10년 2월 병신(15-56 라), 且成均館寄齋儒生 至於與庶孼相闘 近來敎訓儒生 上敎非不至 而爲長官者不檢擧 請推其日仕進堂上及正錄官員等 四學儒生亦有往者 四學長官 請竝推之. 90) 위의 책, 10년 윤 4월 기묘(15-73 다), 大司憲權敏手等上疏曰 學校所以明人倫考德行也古云 公卿大夫元士之適子與國之貴遊子弟 無不與焉 比視而興其賢者能者 鱑其不敬 撻其怠慢 所以 居之者 無異處 官之者無異術 取之者無異路 此朱熹所謂 士有定志而無他慕 惟其懼德業之不修 不慮爵祿之未 至也 今也 自旣冠以上 爲父兄者因循屬託 媒得仕版 千蹊百徑 累資聚級 一朝偶捷科第 驟得美仕 而 皓首窮經者 反不及焉 人誰欲捨其捷徑 而勤久館學 以取朝薺暮鹽之苦哉 由是學校日卑 師道不立 敎 訓不明 近者大學生偸取鴨子 被歐於人 靑衿持牒 出入訟府 甚可羞惡 良由學校與科擧 歧而爲二 公卿 大夫貴遊之子弟 不肯在學 而浮妄無賴之徒 間仄其間 以至於此也. 91) 위의 책, 10년 9월 무자( 다), 仍傳曰 聞京外儒生驕橫 破毁人家 或於試場 論宰相臺諫是非 者頗多 此豈細故也 不特此也 假託儒生 恐嚇人物 至於盜賊民財 奸犯民妻 朝廷不計後日之漸 徒稱 狂童所誤 以至于今 予意以謂 無乃酿成儒生之弊風耶. 92) 위의 책, 7년 9월 정유( 가), 臺諫論前事 又啓曰 近來 科擧之法不嚴 江原道鄕試 其道 擧子 防其賓貢來赴者 試官禁止 其擧子等 䦨出場外 亂投石塊 試官避入房中 復排門還入 場中而製述 忠淸道擧子 亦歐入門官. 위의 책, 10년 9월 무자( 다), 傳曰 全羅道淳昌郡鄕會 進士取試日 南原人吳夢禮 吳夢義等

24 國史館論叢 第56輯 先進 및 師長에 대한 無禮93) 이처럼 개탄과 논란의 대상이 된 현상들은 대단히 다양했지만, 그 핵심은 士子들이 올바르게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조정 의 대응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것은 한편으로 단속의 고삐를 조이고 다른 한편으로 就學者에게 誘引을 제공 하는 것이었다. 전자에 해당하는 조치는 먼저 學官의 불성실을 문책하고,94) 시시로 유생의 출석상황을 점검했으며,95) 四館에게 다시 儒生들을 檢察하는 임무를 부여하고,96) 또 예조로 하여금 士習을 바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勸學節目을 마련 하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97) 후자에 해당하는 조치는 二品以上의 문학적 교양이 있는 宰相 세 사람을 輪次堂上으로 삼아 차례로 成均館에 가 유생들을 課試하도록 하고,98) 庭 試를 설행하여 우등자에게 直赴나 給分 등의 특전을 준다든가,99) 幸學하여 유생들에게 謂 光州儒生 以賓貢不當赴 首倡作亂 試官拘鎻 擅自解出 至爲頑惡 令下去敬差官李蘋推考. 위의 책, 10년 9월 갑진( 라), 慶尚道觀察使洪淑狀啓曰 右道宜寧生員進士鄕試鄕 會赴擧儒 生百餘人 於試取前一日 突入棘圍門 揚臂極目試官至 醴泉擧子二十餘人 以相避來赴 豈盡相避 必是 其郡守文敬仝爲試官 故知情率來云云 又於試官坐處 奪取都目錄名册 下庭列立詈罵 又奪醴泉擧子四 祖單子 燒之於東軒庭中而去 傳于政院曰 今觀儒生之事 甚爲駭愕 如此作惡之儒生 窮推首唱之人 以 治其罪 則自可變也 脅從罔治 可也. 위의 책, 10년 10월 갑인( 가), 慶尙道慶州武科鄕試試取時 擧人盧應世者 與其徒 五十餘人 以宋濂爲賓貢 毆打作亂 試官不能禁止 未得試取 觀察使啓聞 即下憲府 命前去兼執義金協推之. 93) 위의 책, 11년 5월 무자( 라), 御朝講 講禮記 上擧君子 如欲化民成俗 其必由學之語而敎曰 近來風俗不古 學校頹廢 作成人材之道 固在上轉移如何耳 然非學校 何以哉 予深恐作成之未盡其道 也 在上之人 鼓舞振作之得其道耳 用漑曰 今也士習不正 或有媒進之心 此不能正心故也 合於師長者 不得已用於治事之地 其餘任師長者 僅能訓誨 而其名望輕 故儒生皆輕之 今之成均館長 官 可以誨人者 有幾人耶 是故 儒生先有輕慢之心 道遇長官 亦不下馬 弊至於此 救之甚難 須別其衣 冠 違者不齒於士類 則庶乎可矣. 94) 위의 책, 4년 11월 무진( 나), 金孫曰 臣聞 四學敎養人才風化之源也 古則雖老大儒生 皆挟 册而赴 陞補然後入大學 今則學雖未成 年苟稍長 則不赴學堂 幸有赴者 亦皆畏軍役者也 人才何由而 出乎 許硡曰 古者敎官 以文臣爲之 今則徒以取才選補 皆庸陋無立志之人 以此學校之事尤爲懈怠也 成均館本原之地 養育人材之所也 今聞同知成均館事孫澍 下批後一不仕進 臣曾欲啓之而未敢耳. 위의 책, 4년 11월 무진( 라), 傳曰 四學及成均館儒生不勤居業事 問於該司 又令檢擧 孫澍 不仕成均館事及功臣子弟年幼者受祿事 令法司察之. 95) 위의 책, 4년 2월 경인( 가), 遣內官及注書于成均館 點名儒生. 96) 위의 책, 4년 11월 무진( 가), 政院啓曰 成均館及四學儒生 非徒不居館學 不挟册美衣服 着 貂皮耳掩 騎馬而行 或着白衣革鞋 有同市井之人 見先生幷肩而行 又於東堂專不錄名 士習不美 古時 四館頻頻ー會 以糾儒生之過 今則四館不會以糾正 故儒生無檢束之意. 傳曰 依所啓 四館及該司檢擧 可也. 97) 위의 책, 5년 정월 을축( 라), 命禮曹立勸學節目 時學校頹廢 士習日偸 故上以律繩之. 98) 위의 책, 5년 2월 정유( 다), 上命二品以上宰相之有文學者 名爲輪次堂上 一朔之內分上中下 三旬 輪詣成均館 課試諸生 以爲恒式. 99) 위의 책, 5년 2월 무자( 다), 命聚儒生于勤政殿 庭試以楊雄論 幼學孫洙居首 命直赴殿試. 위의 책, 5년 6월 무술( 다), 分遣內言及史官于成均館四學 取儒生名簿 計圓點(館學儒生 毎 日朝暮 署名官簿 以課居學勤怠 名曰圓點也) 以十三點以上者 許赴庭試.

25 음식을 하사하고 또 學田을 加給하는 것들이었다.100) 그러나 선초부터 傳家의 寶刀처럼 써 온 이 진부한 방법들은 잠시 반짝 하는 효과는 있었을지언정 지속적인 효과는 발휘하지 못했다. 別試가 있을 때 錄名者의 수효는 2,000 을 헤아렸고101) 취학유생의 수효도 館 學을 합쳐 800명을 초과했지만,102) 그런 誘引이 없어지면 금방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지곤 했다. 四學의 경우 적을 때는 취학자수 가 10 15명 수준으로 떨어졌고,103) 成均館 四學을 합쳐 보통 200명 정도였던 것 같 다.104) 흉년이라도 들면 給食者數나 給食의 量을 줄여야 했으므로 사정은 더 나빠졌 다.105) 그렇다고 해서 別試나 庭試를 무한정 설행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別試 의 잦은 설행은 요행합격의 기회를 그만큼 조장시키는 셈이 되고, 庭試로 直赴나 給分의 특전을 받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式年試의 選拔定員을 잠식하여, 오히려 진득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106) 결국 國初 이래 위의 책, 6년 10월 기축( 다), 廷試 成均館四學儒生鄭承周等入格 給分有差. 100) 위의 책, 6년 2월 경신( 가), 上親祭于文廟 因御明倫堂 横經問難 仍賜學田百結. 위의 책, 12년 윤 12월 기축( 가), 御晝講 講小學 知事張順孫曰 幸學之日(去秋謁聖 後 賜成均館田百結) 賜學田百結 乃福泉寺所屬也 上恩至重 可萬世永賴也 然無可使耕作者 殊無特 賜之意 福泉寺奴婢耕種此田者 多居傍近之地 此奴婢推刷賜給 則可萬世蒙澤矣 上曰 雖有田地 果無 耕種之人 則是棄之也 其寺奴婢 推刷量給 可也. 101) 위의 책, 6년 2월 경진( 라), 禮曹判書申用漑 將視學時禮貌未便者十條啓稟 七曰 成 均館內庭隘窄 而錄名儒生今幾二千 恐於內庭未得盡入 量人入參 其餘於外庭供饋 何如. 102) 위의 책, 5년 정월 갑신( 나), 命史官五員 分遣于成均館及四學 點視儒生 時就學者 八百 餘人. 위의 책, 5년 정월 병술( 다), 御朝講 侍讀官金淨曰 視點儒生 欲其勤就學也 外方之儒聞之 則爭相奔走 僥倖書名者皆與焉 殊與本意乖違 請以到記 考其圓點 限數許赴 參贊官金世弼曰 依成 宗朝例 急取到記而來 考其圓點 限數許赴甚當 方外儒生 爭相奔走 上疏請赴 士風不美也 傳曰 點 閱儒生 所以勸使就學也 更考到記 有五點以上 許赴庭試 今後例考國(圓)點. 103) 위의 책, 6년 6월 임인( 가), 御朝講 特進官柳崇祖曰 且近日 儒生多赴館學 此必 興起而然也 儒生元額二百 今則餘額甚多 臣不獲已作粥餉之 司憲府聞之 推本館掌務 臣甚未安 守 紋曰 柳崇祖之言 非也 臣初聞其儒生多赴館學 齋舍不足 故命加設齋 臣等意 祖宗朝以來 設齋已久 猶不患齋舍不足 臣等摘奸四學 則儒生或十餘人 或八九人赴學而已 臣等問其由於掌務官 則曰四學 自有分司員 館堂上只檢其勤慢而已 臣等以 大司成摠治儒生 時方推問 崇祖遽敢論啓 謀免己罪 甚 非矣. 위의 책, 9년 12월 경인(15-45 다), 御朝講 同知事李玷曰 聞四學儒生不肯聚會ー學僅存十五 六人 宜使該曹申明興學之方 光弼曰 聞大司成李鐵均之死 家無買棺之資 未得趂時 殯斂云 鐵均久 爲儒生之宗匠 而死不得斂殯 於聞見未安 然非經筵官 故臣未得啓其恩數. 104) 위의 책, 11년 5월 기유( 라), 分遣內官及史官于成均館四學 計儒生時到者 凡二百餘人 命 於來初二日庭試. 105) 위의 책, 6년 10월 무인( 라), 命權罷宗學及文武臣試射 減四學儒生及讀書堂供饋 以年凶省 經費也. 위의 책, 11년 5월 을사( 나), 舍人金瑛以三公意啓曰 大典所載 四學儒生各ー百而一時饋餉 近減五十 今又半減 其饋待儒生 不可如是其薄 若不得已減省 則寧減搞生之數 不減其所饋 可也 傳 曰 當初戶曹減省之時 若知此意 則當令毋減也 今學校之事 甚爲頹廢 養育人材 雖不可以飮食而率之 然其體貌不宜如是 不可減儒生之數 又不可減其所饋也.

26 國史館論叢 第56輯 當路者들이 암묵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 즉 굳이 學校敎育에 많은 投資를 하지 않고도 科擧制를 통해 바라는 바 人才 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파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시험만 가지고 유생들의 趨向을 변화시키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 다른 무엇보다 敎育 이 先行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교육이라는 활동 자체가 성공하기 위해서 만족시켜야 할 內的 條件들 에 관심을 전환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 시기에 이르면 實學 또는 心學 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의 논의에서 자주 등장한다.107) 그리고 이때의 實學이란 진정한 학문 이란 뜻이며 心學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또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행실을 닦는 공부 를 의미하며108) 바로 性理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기 106) 위의 책, 5년 2월 임진( 다), 御朝講 侍講官安處誠曰 獎勸儒生 自古有法 然講經製述 不過 本等分數 今庭試入格本等 或三中三下 而給分至於七分五分 臣以爲太過 且一式年之間 直赴殿試頻 數 而於殿試額內 充此直赴人 其於窮年勤讀會講者 豈不有妨 上曰 孫洙前後 庭試皆居首 直赴殿試 可也 三下入格者 已給五分 三中入格者 直赴會試 而聞其人已中館試 故給七分 今可只於本等 加給 一分. 107) 위의 책, 11년 5월 을사( 라), 御夕講 侍講官金硡曰 學校乃風化之源 而士習不美 名 爲講經及第者 只誦訓詁而已 不能深探旨意 究其治亂興亡之所由 爲詞章者 亦不事心學 如是則人材 何從而出乎 典經李若氷曰 硡之所啓甚剴切 其中學校用人等事 尤爲重大 而用人之 本在於學 校 學校人材之藪 風化之源 興學校然後 可得人材也 近者儒士 專不赴學 假使赴學 亦無師友琢磨之 益矣 凡師友云者 必相規以義 相勉以善 可也 今世之人 若稍解文字 則便以科舉爲心 欲得心學之士 其可得乎. 위의 책, 11년 5월 경술( 라), 有寧曰 必欲作成人才 當尋究作成之原也 上曰 人材必由學校 而出 師長賢則 可能政誨 但若不尚實學 而徒事浮文 則不可謂之學校也 有寧曰 今歲講經與選者甚 少 良由不務實學也 近年屢爲別試 皆不講經 故徒尙風雲月露之文 不務實學 今雖爲庭試 然在平時 使儒士篤志於實學也. 위의 책, 11년 5월 경술( 다), 傳于政府禮曹曰 學校風化之源 人君所當先務 予以否德 即位 以後 務欲右文興化 講究詳盡 或親幸成均館 講學取人 或殿講或庭試 以勸勵人材 且令銓曹 擇師長 務久任 至解六部之長 俾專敎誨 又使大臣輪往 或講或製 時遣侍從 饋儒生酒饌 且試製述 欲激振人 材 非不至矣 然本館堂上 不勤於仕 輪次堂上 亦不數往 儒風漸頹 士習日偸 此由予暗昧 不知鼓舞 振作之方 雖日與大臣 講論興學之方 徒歸於文具 頓不見效 詎勝恨哉 予欲聞鼓舞振作之道 未知何 爲而可也 予聞曩有言者曰 由吏蔭出仕路者 勿許赴科擧 此言似可救弊 然竟難舉行 予意 大臣先遣 子弟就學 務敦經學 凡入仕路者 非成均四學之儒 勿許登仕版 則自然就學者多也 擇師長務敦心學 不好浮華之文 如有德行可取者 時令館學抄啓 銓曹量才敍用 以勸人材似可 予聞 成均館四學儒生 廩供及窓戶塗排 甚虛疎 此雖小事 有司所當檢察 近者戶曹減四學儒生之廩 甚爲不可 予雖欲數幸講 學 而屢行祀禮 似亦非輕 大臣屢往講論 則儒者亦自務業 且外方政授訓導 銓曹不擇遣 亦甚不可. 위의 책, 11년 6월 임자( 가), 御夜對 講高麗史 講至崔怡納米三百石 修國學 上曰 以 崔怡之凶人 而尙以興爲事 今則以一國亦反不能修擧學政 可乎 然不可使儒生 徒聚學宮 當以明心學 爲務 參贊官尹世豪曰 儒風近不如古 此無他 師道不明故也 上曰 近者 議勸學之事 皆以節目科條爲 言 予則以爲此皆末節也 士習之不美 皆不事心學之致也 爲師長者 若以心學導其儒生 而以此爲常 則士習自然丕變矣 柳灌曰 凡人須於爲儒時 務尙心學 心其所守 然後長可以有用矣. 위의 책, 11년 12월 을해( 나), 弘文館副提學韓效元等 論治國要道 以正學 知人 安民三者 爲綱而獻之 其一曰心學. 108) 위의 책, 8년 11월 무진( 라), 敎成均館曰 國家養育人材 以備他日之用也 學校風化之原 非 徒習口耳之學 須習孝悌忠信廉恥節義 然後士習乃正 近來士習不古 儒生不會于館學 横行閭里 他日

27 교육에 관한 논의에서 이들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결국 교육이 인간의 마음 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며, 어떤 공부든 人格을 陶冶하는데 이바지 할 수 있어야 그 교 육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는 인식이 새로와짐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거론된 구체적인 문제는 師儒의 자질에 관한 것이었다.109) 훌륭한 敎師를 확보하는 일 은, 물론 중종 당시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敎職과 行政 職이 분리되어 있지 않던 조선시대의 관료체계에서 학교교육이 늘 안고 있던 문제였지 만, 이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전기에도 사대부들이 가장 선망하는 관청은 經筵과 史官을 겸임하는 弘文館이었고, 그 다음이 承政院 臺諫 등이었다. 자연히 이들 관청에 우수한 관료들이 우선적으로 기용 되었고, 師長이나 學官에 충원되는 사람은 名分과는 달리 弘文館이나 臺諫에 충원되는 사람들에 비해 學識과 名望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 해 同知事와 같은 兼官과 輪次堂上制를 만들었지만, 兼職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實職에 비해 책임감을 덜 느끼게 마련이었다.110) 따라서 학식과 덕망에서 최고수준의 인물을 館 官이나 敎官에 임명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이 흥학책을 논의할 때마다 등장하지만, 人 事를 담당하는 吏曹의 눈에 學官職은 다른 治事之職에 비해 閑職으로 비쳐졌고111) 弘文 館 臺諫에 闕員이 생겼을 때는 學官職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옮겨 쓸 수밖에 없다는 입장 이었다.112) 이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우수한 師儒감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 師儒錄이라 는 후보자 명부113)에 기재되는 인원수를 대폭 늘려 작성해 두는 것이었다. 중종조에 이 작업은 두 번 행해졌다. 즉 중종 9년에 大臣들을 시켜 성균관을 책임질 만한 인물 28명 雖登仕版 將焉用彼 卿等勿徒講口耳之學 務崇心正行修之學 以爲經濟多士之盛也. 109) 위의 책, 5년 정월 기묘( 나), 御朝講 持平金湜曰 前學 權健 安琛爲成均同知時 儒生 樂爲之就學 其後金敬祖爲之 學者不肯赴學 今亦以金俊孫爲同知 則儒生怠弛 無以作成矣 上曰 師表之任 銓曹必擇人而注擬 金俊孫以閑官 可爲成均同知 餘亦不允. 위의 책, 11년 5월 무자( 라). 110) 위의 책, 6년 7월 기사( 라), 成均館生員朴世榮等上疏 請留大司成柳崇祖 傳曰 同知事兼官 也 大司成實官也 病不即愈 則不可久曠其任 故命遞之 今爾等上疏請留 於師弟之間 甚美事也 其令 勿遞. 111) 위의 책, 9년 3월 정묘(15-8 나), 御夕講 講宋鑑 至多所自得之說 尹殷輔曰 不自得於己 則猶無益 也 古云 未讀是書 猶是人 旣讚是書 猶是人 此非心得故也 金絿曰 爲學之道 莫如自得 孟子曰 君子 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 學而不得於己 則將何用哉 講至許謙屏跡山中 學者翕然從之 金絿曰 許謙 以匹夫唱學 學者景從如此 況人君至誠好學 則四方之儒 莫不樂趨矣 近者儒生不樂就於館學 其所以 樂就之方 在於上好學之誠實與擇任師儒 又時時特遣中使 命饋師生 以示好學之誠 則儒生庶幾樂趨矣 上曰 以不得賢師 故儒不樂就 而吏曹以館爲閑地 率以見贬人 與老病者差之 豈其可乎. 112) 위의 책, 5년 8월 무술( 가), 成希顏曰 師儒未易多得 在成宗朝 姜景敍爲殷栗縣監 以師儒 可當 入補館員 今六寺七監官員 有可當者 審擇充差 可也 上曰 師儒前亦擇差 然弘文館臺諫 不可 人人而任之 雖在師儒 不得已移任 他餘職任 則不須以師儒任之也. 113) 성종실록 24년 10월 을해( 라), 崇祖又啓曰 國家有弘文錄有師儒錄 必擇人以處之 況輔 養世子 尤可愼擇也 而獨侍講院無錄.

28 國史館論叢 第56輯 을 추천하도록 한 것이 처음이고,114) 다시 11년에 議政府 吏曹 禮曹 成均館의 堂上들을 시켜 京 外와 堂上 堂下를 가리지 않고 대상을 확대해 41명을 선발한 것이 두번째였 다.115) 그러나 중종초의 교육정책은 아직 확고한 노선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 은 대체로 經學을 중시하는 편이었지만,116) 신료들은 文學的 표현능력을 중시하는 측과 經學的 조예를 중시하는 측으로 의견이 갈렸고, 따라서 師儒감을 선정하는 기준도 經學 과 詞章 두 가지였다. 한쪽에서는 漢城試 壯元의 제술이 校生만도 못하다고 하여, 성균 관의 學官을 經學에 능한 사람으로만 임명할 것이 아니라 文學에 능한 사람과 교대로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고,117) 다른 쪽에서는 經學에 관한 조예가 師儒의 가장 중요한 자질임을 강조하고118) 科擧의 講經 평가자를 아예 師長으로 固定시켜 士子들로 하여금 학교공부를 放棄하지 못하게 만들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던 것이다.119) 따라서 이 114) 중종실록 9년 11월 갑술(15-42 다), 又傳曰 敎養人材 爲國先務 陵夷成習 近日爲甚 師表可當 人員 擇差久任 專委責成. 위의 책, 9년 12월 기유(15-49 다), 領議政柳洵等議擇師儒可當者 以金安國 尹倬 李荇 洪彥弼 金 淨 蘇世譲 李純良 裵益臣 金鏐 趙有亨 朴壕 陳埴 李偉 李得全 郭遂寧 金可遠 安中孫 崔灝 任繼重 黃瑋 崔命昌 金揚震 柳溥 成雲 申鏛 金希壽 趙邦彥 申奉全等二十八人啓曰 師儒不可專主經學 故 以詞章之人 兼抄矣 又僉啓曰 南袞以戶曹判書兼成均同知 戶曹不可一日不仕 而成均館之仕 亦不 可久廢 皆是重任 似不可兼 爲此而遞六卿 亦似未便 傳曰 學校頹廢事 近日多有言者 戶曹判書則 多有可當者 合於師儒如南袞者 固不易得 故欲專委責成 以見效也 且使人人皆知重學校 而遞六卿 之意 則是亦勸學之一端也. 115) 위의 책, 11년 6월 신해( 라), 傳曰 凡師儒可當者 勿論京外堂上堂下官 令政府 吏 禮曹 成 均館堂上 同議選擇 館學之官 勿差祭執事及久任陞遷事 責在銓曹 幼學圓點之法 亦可立也. 위의 책, 11년 6월 기사( 가), 議政府 吏曹 禮曹 成均館同議 揀擇師儒可當人員丁壽岗 金淨以啓. 116) 위의 책, 6년 3월 무오( 라), 傳于政院曰 經術本也 詞章末也 今世之士 皆趨於末 不究其本 其於横經問難之後 分三所 講經以取士. 위의 책, 8년 2월 병진( 나), 命別試初試入格儒生 講經後許赴殿試 初禮曹不欲講書而上以 經術爲重 故特命講書. 117) 위의 책, 4년 9월 임인( 라), 御朝講 大司諫李世仁曰 臣觀 漢城試壯元試卷皆拙惡與校生之 作無異 其壯元之製如此 況其下者乎 分析章句 敎訓儒生 柳崇祖足矣 製述科次 使儒生增長性理之 文 則崇祖短矣 司成以下 以長於製述者交差 已立其法 南袞學問深邃 文章淵源 甚合師長 請申明司 成以下交差之法 上不答. 118) 위의 책, 6년 7월 정미( 가), 臺諫啓前事 又啓曰 司成文敬仝 但知詩賦 不諳經學 凡職任當 隨其器而用之 況司成亞於大司成 其任甚重 敬仝不合師儒 請以師儒可當者 換差 上卽 令換差 餘皆 不允. 119) 위의 책, 9년 10월 갑인(15-38 나), 大司諫崔淑生等上疏 條陳十二事 其一 學校賢才所出 風化所 關 近來學者不務師授 爭抄訓詁 以圖記誦 僥倖得第 人皆效之 至於窮鄕僻學 雖昧宗指 若能口誦 謂熟其業 一概取之 但較生熟 毋論精粗 以此悠悠之輩便謂 科擧之學 安坐可能 不必從師 厭居學宮 傲視師長 人自爲學 各立私議 摘埴冥行 勢將失道 奈何不救 宜抄選師儒 俾專其任 待以悠久 數遣 內臣 講考儒業 仍賜酒果 以示褒賞 至於講經取士之時 亦令上項師儘主之 其所言 合於平日所講者 則取之 不合則黜之 自然人爭事師 學歸于一 切不可屢行庭試 使之奔波希恩 爭慕捷徑 以開倖門 亦 不可數設別試 使之爭事模寫 棄本就末 以長浮競之習. 위의 책, 9년 11월 계유(15-41 다), 上引見政府 府院君 六卿 承旨李沆 將諫院上疏 進讀第一條 學校之事 府院君宋軼曰 近來 儒生不肯居館 不着團領 如此之習 不可不革 然待儒生 不可待以法制

29 때 만들어진 師儒錄은 兩側의 요구를 다 수용한 절충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따라서 양측 으로부터 다 불만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120) 이런 가운데 중종 10년 2월 全羅道 樂 安郡에서 아들이 親母와 骨肉을 살해한 綱常事件이 발생하였다. 士大夫層이 타락한 士風 을 쇄신하여 率先垂範하지 못함으로써 庶民層의 紀綱도 解弛一路를 걷고 있다는 증좌였 다. 이제 士大夫集團은 그들이 自任해 온 庶民敎化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 의 子弟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중종 12년 무렵부터 金安國 趙光祖를 위시한 이른바 己卯士林 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종 11년까지 士習을 바로잡기 위해서 동원한 방법은 주로 誘引과 强制 에 의존하는 것이었다.121) 이것은 유생들을 학교로 모으는 흥학책으로서는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 으나, 그들의 趨向 자체를 변화시킬 힘은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중종 5년말에 국학생들 은 당시의 흥학책을 庭試라는 利祿 과 圆點이라는 强制 에 의존하는 것이며, 輪次堂上制 도 유생들의 競爭心理를 이용해 浮華한 詞章 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이들의 대안은 悌梯忠信의 실천 으로 이어지는 道學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鄕擧里選制를 모방한 薦擧制를 科擧制와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22) 당시 성균관에는 爲宰相者 先敎其子弟 使居于館 則外方之儒亦庶幾效之矣 左議政鄭光弼曰 以師長爲試官取士之說 終必有弊 或有執拗之人 偏執所見 則豈無其私乎 庭試事 雖或試之 賞以書册則可也 不可立爲恒規 也 右議政金應箕曰 師得賢 則儒者皆當取法 成宗朝師儒可當之人 久任於四學 陞秩右敍 今可依此 例 專其敎誨 上曰 大抵治國無如人才 養育人才 莫如學校 此事侍從 毫諫毎言之 而亦無所施 今可 更議 刑曹判書姜渾曰 輪次堂上之設 所以勸獎也 只課製述 而不爲講論 自今三旬內二旬講論 俾論 義理之源孝悌之道 使之感激 何如. 120) 위의 책, 11년 6월 신미( 가), 臺諫啓前事 又啓曰 師儒非徒訓誨句讀之學而已 當爲儒生之 表率 其見抄者 未知其優 其未見抄者 亦未知其劣 政府及禮曹 成均館 同議抄擇 而不奉上欲興學校 之意 請更精抄 皆不允. 위의 책, 12년 정월 을미( 가), 御朝講 柳雲曰 我國以事大之邦 文藝勸獎之事 當從 祖宗朝 爲之可也 雖然華國文章 非吟詠彫琢之謂也 經術乃其本也 月課已令立法矣 自今而後 不可 專尙詞華之習也 頃者 使讀書堂員所製 皆令繕寫入內 其所製之詞 不過吟風詠月之作 非人主所尚也 上曰 經學爲本 詞章末也 然我國事大之邦 接天使交隣國 詞華不可頓廢也 同知事南袞曰 自古 無眞儒 漢武以雄才大略 表章六經 而只得ー董子 唐太宗時 房杜諸人 僅成相業 宋時果多眞儒 乃私 淑諸人 非人主作成而致之也 詞章乃末事 而眞儒有數 讀書堂乃世宗朝所設 而又賜書籍 藏修遊息 隨人才大小以作成 一時人材 蔚然可觀 皆以詞學爲尙 由詞學可至於聖學也 我國非徒事大 至於交隣 詞華爲重 不可不勸礪也. 121) 위의 책, 5년 정월 을축( 라), 命禮曹立勸學節目 時學校頹廢 士習日偸 故上以律繩之. 122) 위의 책, 5년 12월 신축( 다), 成均館生員李敬等 上便宜十條 四曰 新學校 殿下軫念 學校之不明 士習之不美 揀置師儒 又設輪次堂上 分旬迭坐 即舜命契之意也 然輪次之任 唯務品較 詞章 以長浮靡孟浪之風 未見誘掖敎誨 以篤孝悌忠信之行 是以晉隋綺麗之習 導諸生而不以契之所 以事舜者 待殿下也 程子曰 學校禮義相先之地 而月使之爭殊非敎養之道 輪次之無補於興學明敎 審 矣 況州縣之學 號爲訓導者 類皆庸劣之輩 安知爲師之道而敎之哉 爲學生者 率多避役之徒 未嘗講

30 國史館論叢 第56輯 金湜 趙光祖가 주동이 되어 金宏弼이 모범을 보여 준 학문 즉 소학 실천으로 특징지 워지는 爲己之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 바,123) 위의 상소는 유생사회의 이런 분위기 를 반영한 것이었다. 위의 상소를 이유있다고 인정한 중종은 성균관으로 하여금 經明行修者를 천거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들을 敍用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124) 중종 10년 2월, 全羅道 樂安 郡에 사는 李莫同이란 자가 親母와 同生 姪女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125) 이 사건으 로 인해 庶民敎化에 대한 관심과 그 주체인 士大夫集團의 責務가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 서, 성균관은 이 해 6월에 趙光祖 金湜 朴薫 세 사람을 經明行修之士로 조정에 천거하였 다. 이들은 모두 敍用되었으며, 특히 앞의 두 사람은 중종 12년 무렵부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己卯士禍까지의 여러 개혁을 주도하였다. 보통 천거된 사람을 敍用할 경우 從九品 參奉에 제수하는 것이 이전까지의 관례였으 나, 너무 微官末職이어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고 하여 이들에게는 특별히 從 六品 宣務郞의 품계에 主簿職이 제수되었다.126) 首選인 趙光祖(1482~1519)는 造紙署 主 究一書 例讀初卷 以備監司之考問 雖有粗志文辭者 恥與此輩爲伍 其設學立敎之意 安在 且科擧之 設 已失三代鄕擧里選之法 而降及後世 轉爲躁進謀利之其 雕鏤文字者 惟以射策決科爲事 括誦章句 者 競以試講備問爲務 利源一開 末流難回 學校不明 士習之不美尙何怪哉 先儒許衡曰 上之人 不以 人材待天下之士 今殿下不盡敎導之方 務開利祿之門 拘之以圓點 誘之以庭試 許衡之言 殿下當之矣 伏願殿下留心吾道 鋭志儒術 命輪次 必以舜之命契敷敎 而勿以考科詞章 則士皆知浮靡孟浪之可恥 而考悌忠信之是尚矣 除州縣敎授訓導 必用百司薦擧之人 如有敎誨異效 必加獎勸 超秩授官 則學校 何患不明 士習何患不美哉 至於科目之擧 雖不可遽革 略倣鄕擧里選之法 別立薦擧一條 與科目竝行 則人皆勵實行去浮華 而將見賢能在職百僚師師. 123) 위의 책, 5년 10월 계사( 다), 御朝講 始進講大學 成希顔曰 在祖宗朝 有名儒姜應貞 者 頗有學術 又有孝行 士類慕仰 聚而師之 其徒言有法 人或指爲姜夫子 筆之於書 譏笑之 其徒恐 犯物議皆散去 史臣曰 是時 生員金湜 趙光祖等 傳金宏弼之學 不放言 不脫冠带 終日危坐 如 對賓客 有效之者 言頗詭異 成均館以爲 自稱四聖十哲 通於藝文館 承文院 校書館 欲致於罪 未果 故經筵官力言之. 위의 책, 5년 11월 정묘( 라), 御思政殿 講師儒及儒生等 成均館司成金安國 講論語通 司藝 金允溫講詳通 進士趙光祖 講中庸略 講罷 命賜安國允溫 各馬裝一部 史臣曰 國家自戊午史禍之後 士林殲盡 經學掃地 反正之後 學者稍稍興起 光祖少時受學於金宏弼 以硏窮性理 振起斯文 爲己任 學者推爲士林領首. 위의 책, 12년 5월 병신( 라), 宗室李昌壽 卒 史臣曰 天性穎敏 嘗慕金宏弼之學 且力學詩 章 搢紳之士 相與切磋講劘 不幸早死 士林惜之. 124) 위의 책, 5년 정월 갑신( 나), 傳曰 大學館儒生 通經史識治體 才堪任用者 其薦擧之. 위의 책, 6년 4월 경진( 다), 命成均館所薦儒生趙光祖 金錫弘 黃澤. 위의 책, 6년 4월 임오( 라), 御夕講 司經黄汝憲曰 上命擧可用儒生 成均館擧生員趙光祖 金錫弘 黃澤等 此數人者 皆無學問操行 恐未副聖上誠求之意 趙光祖方有志於學 猶可用矣 然廢學從 仕 亦非其所願. 125) 위의 책, 10년 2월 계묘(15-59 나). 126) 위의 책, 10년 6월 계해(15-84 라), 安塘啓曰 今考成均館薦擧 則如趙光祖 金湜 朴薰等 此固經明 行修之人而被薦焉 必合成均館堂上長官及二百生員之意然後 擧之 用此人 當與用文臣無異也 趙光 祖又有孝行 而此人等行高 本無加資 今若止授參奉 則雖至十年 無由振發 請陞爲宣務郞 准主簿職

31 簿를 제수받았다.127) 그는 두 달 뒤에 실시된 別試文科에 합격하여 正六品인 成均館典籍 으로 승진하였고,128) 곧 從五品인 弘文館校理를 거쳐 從三品인 典翰으로 超敘되었다.129) 그리고 다시 중종 12년말에 正三品 職인 副提學에 오름으로써 出身한 지 30개월 만에 堂上官에 오르는 未曾有의 超高速 승진을 하였다.130) 6개월 후인 중종 13년 7월에 그는 從二品 嘉善大夫로 승진하면서 成均館同知事를 겸임하였다.131) 金湜(1482~1520)도 중종 12년 從六品인 廣興倉 主簿를 제수받고132) 금방 正六品인 刑曹佐郞으로 승진하였다.133) 이들은 성균관생원 시절부터 爲己之學 을 실천하고 확산시켜야 한다는 공통의 신념으 로 뭉쳐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조정에 士風改革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들은 단순히 士子들을 학교에 끌어 모으는 것, 학생의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진정한 공부 를 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經學 以觀其所行 傳曰 可 史臣曰 三人同志 下汲汲於功利 有志聖賢之學 常讀小學以飭其行 不爲浮議所 掩 士林頗愛重之 三人道同志合 而所造各異 氣質不同 光祖明正切直湜通達周遍 薰德器夙成. 127) 위의 책, 10년 6월 계해(15-85 나), 以尹殷輔 爲承政院同副承旨 李荇爲司諫院大司諫 金乃文爲司 諫 趙光祖爲造紙署司紙 史臣曰 光祖少時 好學不倦 立志高遠 好古憤世 不事科擧之文 父兄宗 族 至以違俗取謗責之 及長 遊意性理之學 行己發言 動遵禮法 一時儒士 莫不愛慕而從遊 早失父 奉 養偏母 及母沒 喪葬祭祀 必誠必信 一依朱文公家禮 妻子在京 未嘗一入城中 成均館薦有學行者 光 祖首應其選. 128) 위의 책, 10년 8월 병자( 나), 文科殿試 取幼學張玉 司紙趙光祖等十五人. 위의 책, 10년 8월 계미( 라), 以金安國爲禮曹參議 趙邦彥爲掌樂院正 趙光祖爲成均館典籍. 129) 위의 책, 12년 7월 임인( 라), 吏曹判書南袞於政廳啓曰 趙光祖理學出衆 而踐履篤實 由是 前日以生員即拜六品之職 而爲諸輩所推服久矣 故出身未幾 拜副校理 猶以爲未滿於其人也 但以資 級不足 故雖有四品之闕 例不得超敍 此人不計資級 而有闕則擬望於四品 何如 傳曰 趙光祖 其爲人 物 果如所啓 而自儒生時 稱爲賢者 故擢敍六品 而登第後 久在侍從之列 大抵 善類之人 當擢拔不 次 資級雖不足 擢拜爲典翰 何如 袞回啓曰 上敎至當 館員次次遷敍 而不計光祖資級擬望 何如 上 曰 斟酌注擬 可也. 130) 위의 책, 12년 윤 12월 갑신( 라), 史臣曰 光祖自少檢飭淸修 大有重名 初以操行被薦爲司紙 未幾 擢科第二人 累歷淸要 至是除是職(弘文館直提學 : 필자) 盖出身未三十朔 人謂古今所無也 依 附日衆 上亦倚重 爲人議論淸高 臧否人物 慨然以矯世變俗爲己任 公卿以下皆畏敬 或有謹避如讐者. 위의 책, 13년 정월 을묘( 나), 光祖遂爲副提學 爲人性剛直明達 好賢樂善 通經術有孝弟之 行 知名當世釋褐纔四年 而爲堂上官 盖士林之望也. 131) 위의 책, 13년 7월 무신( 가), 政院以吏曹意啓曰 趙光祖事 副提學果是重任 不可遞也 且成 均同知 非如大司成逐日常仕 間日以仕 亦可敎誨也 雖兼之可也 以金安國爲工曹判書 趙光祖兼 同知成均館事(陞嘉善). 132) 위의 책, 12년 4월 신축( 나), 以曺彥亨爲司憲府持平 以金湜爲廣興倉主簿 湜生員也 以明 經行修被薦 初授是職 史臣曰 湜篤好學問 事親以誠 行己甚潔 士類多重之 與趙光祖 金淨 朴薰 鄭 浣友善 而光祖頗敬重之 仰慕其名 欲見知 出其門者甚衆 金淨以爲有王佐之才然 爲人峭直 局量褊 隘 喜言人過 一聞其短 則不復取其餘 不可任以大事者也. 133) 위의 책, 12년 6월 계축( 라), 刑曹正郞李純 以堂上意啓曰 曹佐郞金湜 以行修進 病不仕已 久 本曹事繁務劇 不可一日曠職 請遞 史臣曰 湜爲生員久矣 不樂進取 大臣以經明行修薦之 擢除廣 興主簿 能革宿弊 同僚厭之 及拜佐郞 正郞崔沆 成希周 趙希宗皆麤陋 不知士事者也 責其不私謁堂 上 不飮罰杯 不行古風 使離行避位 以示外之之意 判書李惟淸又謂 南行不可爲詳覆司 改授他郞 盖 忌之也 移病才過旬日 刑曹難於殿最 謂不可居上者 以見惡於一司也 謂不可居下者 恐有物議也 託於 事務 請遞 玉堂欲令湜進講庸 學 性理大全 有不樂者 中止不請.

32 國史館論叢 第56輯 에 조예가 있고 興學의 功이 있는 師長으로 중종 7년에 大司成으로 죽은 柳崇祖를 꼽고 있었는데,134) 이들은 그가 학교를 충실하게 한 功을 인정하면서도135) 그의 학문이 治身 之學이 아닌 章句之學이라고 비판하고 鄭夢周 金宏弼이 모범을 보인 道學으로서의 性理 學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136) 그리고 己卯士林은 性理學이 바로 爲己之學이며 타 락한 士風의 뿌리는 爲人之學의 추구에 있다는 확신,137) 性理學으로 入門하는 가장 좋은 공부는 소학 의 실천적 습득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學風을 성리학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소학 교육과 學禮講을 강화해야 한다는 제안 은 이미 反正初에 柳雲 崔淑生 등에 의해 거론된 바 있었다.138) 이에 예조로 하여금 四 學儒生들의 소학 독습을 강제하는 節目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139) 구체적 인 진흥방안을 제시해 추진해 나가는 노력은 없었다. 또 이후 기묘사림이 활약하기까지 간헐적으로 소학 공부의 의의와 중요성을 云謂하는 朝臣들이 있긴 했지만,140) 역시 134) 위의 책, 7년 2월 무인( 가), 史臣曰 崇祖素稱明經 及長國學誨人不倦 及上視學 橫經問難 還宮翌日 進大學箴 上甚嘉之 特陞嘉善 爲黃海監司 未之任 經筵將講易學啓蒙 以崇祖通曉 請留之 未進講 病卒 世以博學推之 然其學非心得 行事或昧大體. 135) 위의 책, 12년 2월 병인( 가), 御夕講 侍讀官趙光祖曰 臣見柳崇祖 雖曰有學術 其爲 人粗薄 不知儒者之事 其時請增置齋舍 其所招集雖多 徒費國廩而已 若其他日可爲輔相者 則雖止十 餘人 亦可矣 上曰 柳崇祖爲大司成時 果云儒生多集 然徒務聚集 可乎 須以可用者養育 不可只務多 集之名耳. 136) 위의 책, 12년 2월 경신( 나), 御不時經筵 司經奇遵曰 治亂皆由於學術 今聖上以 道學爲心 孜孜求治 眞吾民之福也 前朝鄭夢周 理學爲吾東方之宗主 我朝金宗直(金宏弼?) 亦其人也 聞二人之 風者 至今思慕 近柳崇祖之學 乃章句之學 非治身之學也 上必以道學治國 則下之人風行草偃 士習風 俗 必自然而變矣. 137) 위의 책, 11년 10월 정묘( 라), 御夕講 檢討官趙光祖曰 人君當以道德爲本 如性理之書 與 詩文異 於此當愼其好尚 上曰 人主好惡 下人趨向 若理學 非徒人主 下人皆當用力 而近無力於理學 之人 光祖曰 理學乃爲己之學 而非爲人之學也 今者 多成宗朝舊相 豈無傳習之地乎 朱子進講于光 宗 値其機會而斥偽學 今之學者皆爲人之學 而不知爲己之學 若自上崇尙示其所好 則下之人自樂爲 之 豈無爲理學者乎 上曰 理學 不可以法令勸之 在上示以崇尙之意 則必有好者矣. 138) 위의 책, 4년 6월 신미( 가), 御朝講 持平柳雲曰 今方右文興化 不時庭試 朔望試藝 其養育 之意至矣 然儒生欲取科第 爭尙浮華之文 不事性理之學 請令四學儒生 皆讀小學 以輪次官試講 通者 給分 則人皆激勵矣 大司諫崔淑生曰 方今士習不美 爭事末藝 不務性理之學 至於四書五經 皆抄記誦 便易者而讀之 宜令儒生讀小學 因爲月講 或爲殿講 其議論通理者獎之 則自然務本 不之他技. 위의 책, 4년 6월 임신( 나), 御朝講 正言孔瑞麟曰 國家於生員進士會試 必講家禮 小學者 欲敦孝悌崇經術 以爲勸課之道也 而試講之官專不奉法 一榜不通有纔一人 殊無勸懲之意. 139) 위의 책, 4년 6월 정해( 라), 禮曹啓曰 弘文館 藝文館官員 依祖宗朝例 館閣堂上 五日一次 聚會講書 又令四學儒生讀小學勸獎節目磨鍊事 已承傳矣 然祖宗朝故事 時未得考 藝文館官員 職帶 兼春秋 掌記時事 恐無讀書之瑕 館閣堂上 皆六曹治事宰相也 若五日一次講論 十日一次成均館輪次 考課 則本司治事之日少 弘文館官員不通 則必議罰 恐事體未穩 請申明大典弘文館一朔一次講書三次 製述之法 四學儒生讀小學節目 當磨鍊以啓 傳曰 依啓. 140) 위의 책, 9년 12월 갑진(15-48 다), 高荊山曰 今之學者 果皆不務其本 而徒拘於詞章之末古者 人 生八歲 則入小學 至十五 然後入大學 學之有序 而行之有本 故其成才也易 而皆爲有用之學矣 今亦 依古者小學大學之法而敎之 則庶乎其反古之道矣. 위의 책, 11년 정월 정유( 다), 御宣政殿 講儒生等書 講訖 上命大臣等論難 右參贊南袞曰

33 당위론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었다. 이들과는 달리 기묘사림은 소학 의 실천적 독습을 장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중종 11년말에 金安國 奇遵 등은 사람들이 소학 을 공부하려 들다가도 경박한 무리들로부터 비웃음을 살까 두려 워 읽지 않는다 고 지적하고 사실상 없어진 四部學堂의 童蒙學을 육성시킬 것을 건의하 였다.141) 중종은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童蒙學을 위한 遞兒를 더 주고142) 소학 교 육을 진흥시키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傳敎를 예조에 내렸다. 古代 小學의 교육방법은 灑掃 應對 進退의 예절과 愛親 敬長 隆師 親友의 도리를 가르쳐 放心을 거두고 德性을 涵養하는 큰 根本을 세우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교 육이 발라 이미 根本이 두텁기 때문에, 선비들은 덕성이 돈후하고 민중은 行實에 흥기되어 풍속이 순박하고 인재가 많았다. 지금 학교가 쇠퇴하고 풍속이 날로 야박해져 지방에는 孝悌를 숭상하는 풍속이 없 고, 조정에는 德義를 닦고 학문이 순수한 선비가 적은 것은 小學의 교육방법을 폐 하고 강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朱子가 저술한 小學 은 修身의 큰 방법이 모두 그 속에 들어 있고, 規模나 節目 이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없어 가르치고 배우는 데 준거가 되며 日常의 人倫에 절 실하고 敎學의 본령이 된다. 家禮 또한 齊家하고 풍속의 모범을 제시하는 절실 한 책이기 때문에 이 둘을 생원 진사시의 覆試에서 테스트하도록 한 것인데 有司와 師長의 태만으로 小學 의 道理가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小學 은 이미 숭상하지 않는 풍속이므로 公私間에 소장한 것도 적을테니 시급 히 인출, 널리 반포하여 교육과 과거에 있어 우선하도록 하라. 또 학습을 권장하고 朱子曰三代以下 小學不明 遂作小學 以敎於後世 我國科擧 只講四書三經 而不講小學 雖於生員進 士會試講之 然徒爲文具 近者儒生不學小學 而昧事親敬長之義 此豈儒者之道乎 臣言ᅵ似迂闊 然心中 所懷 不可不啓 判尹尹珣曰 講經不講小學 故儒生皆只讀初卷 不務精通 今後東堂會講 亦令講之 則 士風庶乎變而歸正矣 兵曹判書申用漑曰 今年則不可遽爲也 今後若令 如是則可也 知中樞府事李玷 曰 前日柳崇祖爲大司成時 凡下齋儒生入學者 皆講小學 亦此意也 上不應. 141) 위의 책, 11년 11월 신사( 가), 御朝講 參贊官金安國曰 古人云 小學之書 愛之如父母 敬之 如神明 收放心養德性無大於此 今若令里巷學宮中外皆知崇尙 則自然敎化大興 而小學之道明於一世 矣 司經奇遵曰 孝悌百行之源 自天子至於庶人 皆以是爲先 而人君則尤重 三代以上 崇學校尙 孝悌 人生八歲入小學 十五入大學 導之以孝悌修己治人之道 故人才多出 而風化美矣 近日間有欲學 小學者 浮薄之輩爭相非笑 故反諱而不講 大抵人才自少時培養 以爲他日之用 國家初設童蒙學 其意 在此 而今則不見 所當申明 安國曰童蒙學乃是根本 至爲有益 其學自祖宗朝設立 今之爲訓導者 雖只 四人 而遞兒薄祿輪遞受之 誰能力於敎誨乎 西班無用之人 食祿者尚多 移其遞兒 加給勸之 則庶可勉 力矣 大司憲金璫曰 人生八歲入小學 十五入大學 自有次第 今則纔免總艸 皆習詩賦而專不用力於小 學 以科擧爲重 何暇治心爲孝悌乎 今者 四學儒生 亦使之常學小學 而時或殿講 或命官講之 則庶幾 知所向 而讀小學之人必多矣. 142) 위의 책, 11년 11월 계미( 라), 敎禮曹曰 童蒙學之設 切於開蒙 有補敎學 加給遞兒 興學節 目 磨鍊以啓.

34 國史館論叢 第56輯 생원 진사시의 覆試 때의 講을 엄격하게 하도록 지시하는 절목을 완벽하게 마련하 여 시행하라.143) 그런데 이 傳敎의 골자는 소학 을 동몽교육의 기본교재로 삼고 學禮講을 통해 그 독습 여부를 확인한다는 선초의 小學先講의 원칙 을 재천명한 것에 불과했고, 구체적인 진흥방안이라 해야 書册을 다시 인쇄하여 널리 배포한다는 정도였다. 書册의 재간행은 7 개월 뒤인 중종 12년 6월에 弘文館이 소학 을 유생들의 필독서로서 뿐만 아니라 일 반서민과 부녀자들의 교화서로 쓸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할 것을 건의함으로써144) 다시 1년이나 지나서야 이른바 飜譯小學 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書册의 보급이란 측면 에서도 대략 1년 8개월 동안은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小學 붐 은 서울보다 지방 특히 영남에서 먼저 일어났다. 즉 소학 교육의 강화를 역설했던 金安 國이 중종 12년 3월에 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면서 그야말로 정력적으로 소학 을 권 장하는 데 힘썼고,145) 그에 상응하는 성공을 거두었다.146) 그 소문이 서울에 전해지면서 143) 위의 책, 11년 11월 계미( 라), 敎禮曹曰 予以凉薄 托于臣民之上 德雖愧於往昔 未嘗 不盡心於培本興化之道 期欲使性理本末之學 大行于世 以無負君師之責 而學校頹弛 風俗日漓 鄕無 敦尙孝悌之習 朝寡德義粹學之士 良由古昔小學之敎廢而不講 大本不立 蒙養之道未盡其方耳 念自秦 火之後 先王設敎大小次第節目 未能考究 賴宋子朱子著爲小學之書 修身大法 該在其中 規模節目 亦 無不備 使千萬世爲師者 有所據而敎之 爲學者有所放而習焉 切於人倫日用 而爲敎學之本領者 莫重 此書 而朱子所編家禮一書 亦切於齊家範俗之道 故國家於生員進士覆試 令講兩書 以示崇重之意 俾 學者無不講習 以成就其德行 法典之設 非不美也 而有司慢於奉行 試講之際 視爲汎常 謾不嚴明 處 學校任師長之責者 亦不以蒙養培根爲意 徒區區於記誦詞章之間 小學之道 殆將泯滅 予甚慮焉 小學 之書 旣爲時習所不尙 公私藏儲 亦必稀少 其速廣行印頒 使京外學校 以至鄕閭村巷 無不得以學習 師長之誨後進 父兄之訓子弟 朝廷之取選試 率以是爲急 敎而學 學而行 習與性成 化隨敎興 則風浴 何患不正 人材何患不美 其體予至意 曉諭中外 使小學之書 公私廣布 崇勸學習節目及生員進士覆試 申明嚴講節目 皆詳盡磨鍊施行. 144) 위의 책, 12년 6월 신미( 라), 弘文館啓曰 近者 道學不明 敎化陵夷 閨門之內 䙝慢顚 紊 無所不至 本旣如是 其末可知 夫婦妬悖 父子反目 兄弟相殘者 比比有之 風俗之壊 莫甚此時 盖 有由矣 聖上沈潛心學 懋厚人倫 旣命撰續三綱行實 又命印頒小學 欲廣頒中外 意甚盛也 然三綱行實 所載 率皆遭變故艱危之際 孤特激越之行 非日用動靜常行之道 固不可人人而責之 小學之書 乃切於 日用 而閭巷庶民及婦人之目不知書者 難以讀習矣 乞於群書內 最切日用者 如小學如列女傳如女誡 女則之類 譯以諺字 仍令印頒中外 俾上自宮掖 以及朝廷卿士之家 下達于委巷小民 無不周知而講習 之 使一國之家皆正 則乖氣熄天和應 而人人有親上死長之用矣 然有本焉 其敎之之則 在聖上躬行心 得之餘 伏惟聖上潛心雖 傳于政院曰 弘文館所啓之意至當 其令該曹 磨鍊施行. 145) 위의 책, 12년 3월 경인( 나), 慶尚道觀察使金安國拜辭 史臣曰 安國性本聰敏 勤於庶務 一 心殉國 其在嶺南 尤重於敎化 令儒生先講小學 諄諄誘掖 如見稍知向方者 則必引置左右 慇懃導誨 士皆樂焉 修旌閭頹廢者 治祭壇蕪穢者 印頒呂氏鄕約 以勸鄕里 求忠臣孝子之後 優而禮之 綜核庶事 明辨獄訟 夜以達朝 不知疲倦 守令畏慑 不敢肆行 又薦盧㻶 安瑀等 十數人 爲朝家用 以振士習. 위의 책, 12년 9월 갑술( 가), 慶尙道觀察使金安國馳啓 殿最守令 居中者十四人 居下者四 人 訓導居中者三十四人 居下者二十人 史臣曰 安國慷慨 欲有爲於世 盡心奉職 勸學勉敎 以振起風 化爲己任 士或有知向方 民或有知廉恥者 又曰 時諸道觀察使殿最 不以實 備數而已 安國至是畢巡殿 最以聞 士林稱其黜陟嚴明 而宰相多不悅之. 그의 문집인 慕齋集 권1에는 勸(또는 勸示)~學徒(또는 學者) 라는 제목이 붙은 七言絕句

35 기묘사림들을 크게 고무시켰고, 이들은 무엇보다도 經筵에서의 소학 進講을 추진했 다.147) 임금으로 하여금 經筵에서 소학 을 읽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 을까? 그것은 무오 갑자사화 이래 소학 에 딱지처럼 따라다니는 禍胎之書 라는 이미지와 관계가 있었다.148) 중종 11년 6월부터 다시 강화된 圓點法 덕분에149) 同王 12년 중반에 居館하는 生員 進士의 수효는 100명을 넘어섰고 寄齋生도 定員인 50명을 거의 채우고 있 었다.150) 임금의 傳敎에 따라 大司成 柳雲은 四學과 成均館에서 소학 을 가르치고 권 장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士子들이 소학 을 끼고 돌아다니는 등 다소 진작의 기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居館하고 있는 유생들은 대부분 鄕曲寒生들이었다고 한다. 정작 모범을 보여야 마땅한 조정의 훈척대신들은 자제들을 官學에 보내지도 않고 소학 교육에도 열의를 보이지 않는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151) 京華子弟의 父兄의 대 나 七言律詩가 다수 실려 있는데, 모두 김안국이 管內의 鄕校들을 순방하면서 그 고을의 士子와 校生들에게 小學 독습을 권장한 시들이다. 고을의 수효는 67곳에 이른다(김항수, 16세기 士林의 성리학 이해 한국사론 7, 서울대, 1981, p. 138 및 총간 20-8~14 참조). 146) 중종실록 13년 4월 무술( 가), 御晝講 侍講官尹殷弼曰 小學關於名敎 漢明帝時 期門 羽林之士 悉令通孝經章句 近日學小學者少 皆廢講習 金安國爲慶尙監司時 使之家家戶戶 皆讀小學 故其道之人 皆樂於學此書也. 147) 위의 책, 12년 9월 병술( 가), 御晝講 趙光祖臨文曰 世宗朝 專用心於小學之道 故册 亦頒於中外 近來非徒人不誦之 册亦絕焉 至於有志之士 亦以躬行爲嫌 大司成柳雲 方力敎誨小學 故館中四學以及閭巷 靡然從之 慶尙道觀察使金安國 亦使一道之儒 誦習焉 今自上断然讀之 士林聞 之 鼓舞振作 致理之方 庶得其正矣. 148) 위의 책, 12년 8월 신해( 나), 又曰 小學之書 人倫日用之事具備 而誘掖勸進之道 無踰于此 書 近來習俗偷薄 專不讀之 間有學之者 父兄皆以爲禍胎而沮之 非不知小學之爲美而必止之者 恐不 得見容於世也 今之宰相 一經廢朝之後 皆懷姑息之心 敎子弟必曰 勿爲忤俗之事 氣象日至於渙散 而 不復振矣 自近年以來 士習稍稍興起 而若有師表之人 出於其間 極盡誘掖之方 則豈不美哉 大 抵讀書之法 不可徒事文字之上 而當潛心體得 對越上帝 可也 俗儒徒爲口耳之學 而不能潛心體認 故 登第之後 漠然不知義理之何如 而與本不識者無異 則書自書我自我矣. 위의 책, 12년 8월 경오( 다), 御朝講 檢討官奇遵曰 士習之誤 莫甚於今日 館學童蒙 學 誰有知大學小學者乎 此由敎化不明 而不使之學故也 臣少時亦不知小學之爲何物 此無他 戊午年 以後 金馹孫諸儒 相繼就死 士林之禍 至爲慘酷 故爲父兄者 敎子弟只以謀利祿 而不敎爲學之本 風 俗士習之毁 已極矣 若有挟小學大學者 人莫不指笑 以爲此人學孔孟之學 行程朱之行者也. 149) 위의 책, 11년 6월 임술( 다), 議政府啓曰 京外幼學圆點二百者 許赴鄕漢城試 成均館寄齋 四學儒生等圓點數 則逐月報禮曹 校生圓點數 則各其守令 每月報觀察使置簿 赴擧時 京中則 禮曹 考置簿數錄名 外方則考陳省及監司置簿圓點數許赴 如有狼濫計數官吏 則當推考重論 從之. 150) 위의 책, 12년 7월 신축( 가), 上曰 今日 成均館官員 亦入左右 館是養育之地 治國之 本皆 出於此 其養育之方 不知其何如爲也 特進官李玷曰(玷時爲成均同知) 生員進士居館者 不下百人 而 寄齋亦滿額 近以暑熱 未能讀專經通讀 庸學已訖 將始論孟矣 玷曰 外方生員進士 今多居館 學 校之事稍可興也. 151) 위의 책, 12년 11월 정해( 다), 御晝講 典經李希閔曰 柳雲爲大司成 四學之士皆講小 學 慶尚道觀察使金安國勸小學 閭巷之童靡不興作 一道且然 在上行之不難矣 今之爲宰相者 未聞以 此敎 其子弟也 法之不行 自巨室始也 參赞官李耔曰 今聞成均館 士大夫子弟專不聚學 而充額者皆 遠方寒士 欲試訓導才者也 名雖學校 實則闕如也 庸謹曰 士大夫之家 皆敎婦人以此書 立根本 則風

36 國史館論叢 第56輯 표격인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소학 의 흥기는 사실상 기 대하기 어려운 일이다.152) 훈척대신들의 이런 태도는, 소학 공부를 爲己之學의 기초 로 강조했던 初期士林이 義理 문제에 대한 엄격성으로 말미암아 戊午士禍를 당했기 때 문에, 소학 의 독습이 자신들의 子弟를 그와 비슷한 운명으로 이끌고 갈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학 에 대한 이런 인식은 비단 훈척대신들 뿐만 아니라 전사대부 사회에 광범하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153) 기묘사림이 經筵에서의 소학 進講을 추진하여 실현시킨 것은 바로 소학 에 대한 이런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한 것이었다.154) 경연에서의 진강, 成均館과 四學에서의 勸課, 영남지방의 향교들을 통한 독습 장려 등 의 방식으로 추진되던 소학 교육은 중종 12년말 경상도 密陽에서 아들이 親父를 살 해한 사건이 발생한 지 일년 후에 발각된 것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155) 중종은 이 俗從而正矣. 152) 위의 책, 12년 11월 임진( 나), 御夕講 講大學 上曰 今之宰相子弟 皆不聚于學宮予聞 之 甚爲未便焉 大抵敎化 須自宰相先爲之導率 可也. 위의 책, 12년 윤 12월 임진( 다), 御朝講 上曰 師友之道 今不如古焉 學校節目 則已 詳且盡矣 然學校之事 非節目可能爲也 宰相子弟 不肯聚成均館 風敎當自上而下也 金淨曰 節目雖不 可不爲而亦不可以此而興學校也 雖有圓點之法 而不過爲科擧之具 是乃拘束也 其製述之事 亦皆學文 藝之末而已 非所以正其趨向也 今爲學校節目 不爲不詳盡 而亦非古者學校之制 且師長須任能服人心 者 然後遊學之士 樂於就學 今方外多有有志之士 而不樂於就學 若學校規模美矣 則豈不于于洋洋而 樂聚乎 上曰 師長 前則擇任矣 今則文臣無處置者 必歸成均館 雖擇任亦數遞 擇任而且不數遞 則可 矣. 153) 위의 책, 12년 8월 경오( 다), 御朝講 掌令鄭順朋曰 風俗士習之誤 莫甚於近日 每爲講究 而其變之之方 則敎化爲大 近來廣頒續三綱行實 又將印頒小學 然無有學之者 閭閻老儒庶孼及士大 夫子弟年長者 則不可學也 若年少髫稚之徒 則當不分貴賤而使敎之(言敎小學也) 士家子弟先爲利祿 之心 宰相子弟 有年未滿二十而入仕者 多矣 臣意以爲 若累擧不中而求官者則已矣 年少幼學之徒 棄學問求官者 不許赴擧 則其欲赴擧者 必解官而赴擧 此亦可爲之事也 上曰 年少入仕 固非美事 然 不可立法而禁之 銓曹於用人之際 若知此意而爲之 則庶乎其可矣 檢討官奇遵曰 士習之誤 莫甚於今 日 館學童蒙學 誰有知大學小學者乎 此由敎化不明 而不使之學故也 臣少時亦不知爲何物 此無他 戊午年以後 金馹孫諸儒 相繼就死 士林之禍 至爲慘酷 故爲父兄者 敎子弟只以謀利祿 而不敎爲學 之本 風俗士習之毀 已極矣 若有挟小學大學者 人莫不指笑 以爲此人學孔孟之學 行程朱之行者也. 154) 위의 책, 12년 8월 임신( 라), 御夕講 檢討官奇遵曰 今聖上孜孜學術 銳意治理之道 而當世 之士 不知趨向之方 須自上正其學術之事 使之親其親長其長 培養氣質 陶鑄德性 以立其基 則他日之 治化可期矣 今之儒者 其日用所爲 不過留心於科目之事 徒爲記誦詞章 而修己治人者盖寡 言之可爲 傷心 先以小學立其根本之道 在聖上躬行心得之如何耳 司中皆欲於經筵進講小學 在聖上敦本之方 不 害兼輔 而持敬之方 尤關係矣 聖上先自以禮法體認於心 以率其下 則擧一國之人 觀感激勵 成均四學 以至家塾黨庠 一朝可爲也 古者欲讀小學 而俗人以行孔孟之道譏之 故間有留心於古人之學者 在家爲 之 不能讀於稠人之中 近日以來 上之所尙至此 故年少之輩爭挟小學 遍於閭巷 以此觀之 人主好尙有 關係焉. 155) 위의 책, 12년 12월 갑인( 라), 慶尙道觀察使金安國馳啓曰 密陽府豊角縣居百姓朴君孝 去 丙子年十二月二十四日 白晝閭閻之中 其父頭顱亂打 碎骨殺害 反恣凶言 天地間綱常大變 所不忍聞 也 其同生及切隣 勸農等 捕捉還放 使苟免天誅 其時府使宋壽已死 不得推考 本府留鄕所 勸農 里 正 捕盜官 三公兄等 已令推考矣.

37 사건을 백성을 올바르게 교화하지 못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자책한 뒤, 八道의 관찰 사들에게 더욱 興學에 힘쓰도록 당부하고, 소학 을 급히 印頒하고 女戒 女則 등의 책 들도 우선적으로 撰集하도록 지시했다.156) 그 결과 7개월 뒤인 중종 13년 7월에 소 학 1,300 권이 간행되어 朝官과 宗親에게 배포되었다.157) 또 국방을 담당하는 武官들의 敎養을 위해 소학 을 읽히자는 건의도 받아들여졌다.158) 이 시기 소학 의 실천적 독습운동은 궁극적으로 士大夫敎養 자체를 性理學的인 것 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159) 따라서 이제는 사대부가 추구해야 할 敎養이 文學 대 經 學의 문제가 아니라 文學 대 性理學으로 설정되었고, 經學爲本 의 논리를 넘어 성리학 의 보편적 가치 가 주장되었다.160) 또 성리학은 마음을 다스려서 그것을 행위로 표현하 고자 하는 학문 이기 때문에 공부할 때 요구되는 자세나 몸가짐도 문학과 다르다고 주장 되었다.161) 性理書의 보급이라는 측면에서는 近思錄 의 간행이 이루어지고,162)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김안국이 중종 13년말에 語孟或問 家禮儀節 傳道粹言 張子 語錄 經學理窟 延平問答 胡子知言 등의 서적들을 구입해 옴으로써 성리학 연구를 깊이있게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163) 임금은 경연에서 156) 위의 책, 12년 12월 기사( 다), 傳于政院曰 以子弑父之變 此由敎化不行而然也 以責己之意 下傳旨于政府 以諭八道觀察使 務興學校 且小學急令印頒 女戒 女則等書 亦令爲先撰集 御晝講 特進官李惟淸曰 三綱行實 旣已頒賜 小學亦須速印頒布 以敎爲可. 157) 위의 책, 13년 7월 기해( 가), 政院僉議啓曰 上敎至當 但今方廣頒小學 以此册頒送于 各鎭 各浦 使武士學之何如 傳曰 可 印小學一千三百件 遍賜朝官 而又擇可學宗親 幷賜之. 158) 위의 책, 13년 4월 무술( 가), 御晝講 侍講官尹殷弼曰 如武班之人 雖試弓馬 不習講學 所爲鹵莽 類皆麤率 若遣邊方 則徒殺傷人耳 了無慈祥愷悌者 武班之稍有可者 已擇而定訓下矣 當 使敎以小學 或講於科擧 則庶有可觀也 上曰 此書皆謂小兒之所讀 非長者所讀 讀者則恐人指笑之. 위의 책, 13년 7월 갑자( 가), 禮曹啓曰 各鎭堡權管軍官等 捍禁之暇 又令學文 實是美意 而四書 小學 將鑑博議 武經孫子 吳子陣書等册印出 分送平安 咸鏡道何如 傳曰 可. 159) 위의 책, 12년 8월 계유( 나), 傳曰 近來風俗偷薄 士習不正 朝廷上下 所當軫念 良由學校 之政不修 故敎化陵夷風俗頹敗 如是也 當先講究學校之法 國家典章節目 無不詳盡 但敎之之方 豈 皆得宜 詞章雖不可偏廢 不若理學之爲大 今輪次堂上 只取製述 不勉講經學 以孝悌忠信爲主 故儒 者不知向方 徒區區於應擧之才 不修心學 由是而登仕版 士習豈爲正乎 予欲勸勉於小學大學之道 卿 等輪次講學之時 講劘義理 敎以向方 令四學輪次官 皆如是八道監司外方鄕校亦如是 使童蒙訓誨之 師 多列閭巷 自童稚講事 以此升於學館事 議啓. 160) 위의 책, 12년 11월 경진( 나), 御夜對 孫洙曰 理學與詞章 一而異名者也 人心惟危 道 心惟微 惟精惟一允執厥中者 理學之大宗也 元首明哉 股肱良哉 南風之溫兮 可以解吾 民之醞兮者 詞章之祖也 此理學之發爲詞章者也 庸謹曰 詞章固發於理學 然詞章則學之或有不能者焉 理學則未 有學之而不能者也. 161) 위의 책, 13년 정월 무오( 다), 御夜對 參赞官趙光祖曰 且看書者 吟風詠月 則或可偃 臥而觀之 或不正坐而見之 若看得理學 則非正其衣冠 則不可 必須先正冠带 兀然端坐而看得也. 162) 위의 책, 13년 7월 계해( 나), 御朝講 希壽曰 近者頒布小學 使人人皆得以講習 誠美事 也 且近思錄 亦儒者之所當討論 而閭閻之間甚罕 儒者未得見矣 須依頒布小學之例 命印可也 上曰 所言是也 可印頒中外. 163) 위의 책, 13년 11월 무오( 다), 工曹判書金安國啓曰 臣到北京 自念 聖上留心性理之學 大 夫士亦知向方 思得濂洛諸儒全書及他格言至論 以資講習 而留帝都之未久 未得廣求博捜 只以所得

38 國史館論叢 第56輯 소학 에 이어 성리대전 을 읽을 것을 원했으며,164) 김안국을 全羅道觀察使로 임명 하여 경상도에서의 교화활동을 호남에도 확산시키겠다는 의욕을 보였다.165) 그 결과 서울의 학교들에서도 중종 13년에서 14년의 기묘사화에 이르는 사이에 소 학 을 독습하려는 열기가 크게 일어났다.166) 조광조가 중종 13년 4월과 7월의 경연석상 에서 한 다음의 두 발언은, 다소 과장된 감은 있지만, 성균관의 학풍과 유생들의 소 학 에 대한 태도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저는 庚午年에 生員試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들어갔는데, 그때 居館하는 儒生들은 옷을 벗어 맨몸을 드러낸 채 나와서 누워 있곤 했습니다. 만약 혼자 冠帶를 하고 앉아 있으 면 다들 웃었고, 소학 을 읽고 싶어도 사람 많은 데서는 꺼내지 못하고 册箱子 속에 숨겨 두었다가 이따금 꺼내 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늘 聖人이 가르치신 平常의 道가 어 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가! 라는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8 9年이 지난 지금 習俗이 그때 와 크게 달라져 賤한 奴僕도 다 三年喪을 지키려 하고, 요즘엔 未婚의 士子들 중에 總 角을 하는 사람이 있어 父兄들이 말리기도 한다는데 이들은 다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 이지 師友의 권유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167) 성균관에 들어가서 보니 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소학 을 끼고 있었으며, 읽는 자가 또한 많아서 전에 소위 괴 탄하다 했던 것을 지금은 常例로 여겨 읽지 않는 자를 父兄이 나무랍니다.168) 上進 所謂語孟或問者 朱子所作 與庸學或問 同時編次 然而庸學或問則已來我國 而此帙尙不來 故 購求 須廣印 或置弘文館 或頒士大夫 則人可得以見語孟之蘊奥矣 所謂家禮儀節者 皇朝大儒丘濬所 删定也 文義之脫略 補而備之 乃朱子家禮之羽翼也 亦印頒而使 人講行爲當 所謂傳道粹言者 乃編 集兩程先生所言之書也 所謂張子語錄 經i理窟 延平問答 胡子知言等書 皆濂洛諸賢之所著也 皆要切 於聖學 故敢進 所謂古表精粹者 乃類選古今人所製表也 我國事大之邦 而文臣及儒士等 皆不習表文 前日大臣建議 請印表箋之書 而我國所存 但宋元播芳 而他無可法之書 毎令赴京行次購來 而通事等 不盡心求之 故不得購來 臣有心廣求 得此本而來 請多印廣頒 使文士者 有所考閱 上嘉之 命賜酒. 164) 위의 책, 14년 5월 계묘( 라), 傳于政院曰 今講小學 幾畢 當講性理大全 宜講於淸朝 心淸 氣定之時 且性理大全可講人員 擇啓可也. 165) 위의 책, 14년 5월 신해( 다), 政院啓曰 全羅道觀察使金安國 精於性理大全 今以講官見選 請留之 上曰 安國果合用京職 前按嶺南 已有治效 予不忘其底績 亦欲使興化於全羅耳. 166) 위의 책, 13년 4월 을유( 나), 御夕講 金淨曰 近來聞 閭巷市井之人 亦皆如昔日異 如 孝行善道 無不樂爲焉 至於士類 小子之輩 欲遵小學 自上若不悉此機會 而益盡聖學 以明好惡之分 則豈患治之不如古也. 167) 위의 책, 13년 3월 갑자( 나), 光祖曰 臣於庚午年中生員 上成均館 其時居館儒生 皆赤脫出 臥 若獨加冠帶而坐 則人皆笑之 欲讀小學書 而不得出稠人之中 潛於箱篋 間見之 常自以爲 聖人平 常之道 一至此哉 于今八九年間 習俗大異於其時 如賤隸之人 皆欲服父母三年之喪 近日有小子之輩 至爲總角之制 父兄或有禁止者 此人等皆欲自爲也 非有師友爲之導率也. 168) 위의 책, 13년 7월 갑자( 다), 御夕講 參赞官趙光祖曰 凡敎化 不可一朝而亟行 欲速 則急迫而不達 今方稍知向方 然不可卒變也 夫所謂人倫 大綱則五倫 而此外又有無窮之理 以此上下 交修 則豈復有不治之事乎 由此而朝廷自正 百姓獲安矣 君以治之 師以敎之 古之道也 所以敎之者 非必諄諄然人人而敎之也 自上示以趨向 觀瞻感化 薰陶漸染 皆從於善 是猶敎之也 我國向者 以小 學爲怪誕之學而不讀 近日臣歸成均館見之 入學者皆挟小學 讀者亦多 前所謂怪誕者 今以爲常 不讀 者則父兄非之 皆其源則自上能示好惡之正 故如是也 人心皆善 則夫豈有不化者乎.

39 - 73 변한 것은 서울의 士風만이 아니었다. 鄕校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지방 儒生들의 전 반적인 교양수준은 문제가 많았지만,169) 적어도 金安國이 監司로서 興學에 힘썼던 영남 의 士風 만큼은 상당한 개선을 보였다.170) 중종 13년 4월의 夕講에서 奇遵은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앞서 金安國이 慶尚道觀察使가 되었을 때 小學 으로 사람들을 興起시켜 그 趨向을 바르게 했더니, 그 道의 사람 중에 科擧 공부 외에 즐거운 공부가 있는데 왜 章句를 표 절하여 利祿을 얻는 수단으로 삼겠는가!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한 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는 반드시 웃사람이 지향하는 것을 아랫사람 들이 메아리처럼 응하여 성립하는 법이니, 安國이 교체되어 돌아올 때, 文字를 조금 아 는 私奴 하나는 자신이 깨달은 소학 의 道를 글로 적어 安國에게 바쳤다고 합니 다.171) 성균관의 학풍도 성리학을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172) 실록 기록자는 당시의 공부풍토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때 조광조의 명망이 가장 중하여 사모하고 본받는 이가 더욱 많았다. 연소한 무리들 이 소학 의 도리를 말하며, 행동거지도 법도에 맞게 하려고 힘쓰고, 농담도 하지 않 았다. 文官 및 선비들도 읽는 것은 근사록 소학 대학 논어 등의 책 뿐 이요 文藝의 학문은 힘쓰지 않아서 文章과 學術은 성종조보다 훨씬 쇠퇴하였다.173) 169) 위의 책, 12년 4월 신유( 나), 御朝講 執義李成仝曰 大抵窮村僻巷之中 全無敎誨之人 故雖 士族子弟 無一人知孝經小學者 良家之子 不過爲刀筆吏胥之事 及其所學 可堪其任 則曰我能是也 以 此自畵 而不知尊尊敬長之道. 170) 위의 책, 13년 정월 갑인( 다), 聞慶尚道監司致意於敎化 勤誨小學 聳動觀瞻 有志之人 爭 慕效之 不可使人人而仍任也 一年之間 治化何能洽然 必久於其任 然後有成效矣 上曰 敎化朝廷之所 當先務也 然外方監司 必勉力爲之 然後敎化行矣 安國仍任(時金安國爲慶尚道觀察使) 便否 已問于 大臣 而時未決耳. 위의 책, 13년 4월 무술( 가), 御晝講 侍講官尹殷弼曰 小學關於名敎 漢明帝時 期門羽林之 士 悉令通孝經章句 近日學小學者少 皆廢講習 金安國爲慶尚監司時 使之家家戶戶 皆讀小學 故其道 之人 皆樂於學此書也. 171) 위의 책, 13년 4월 계사( 라), 御夕講 侍讀官奇遵曰 近者 上方留意學術 在下之人 亦 有興起者 往者金安國爲慶尙道觀察使 以小學一書 興起一道之人 使之正其趨向 道內之人或云 科業 之外 別有可樂之地 何必尋章摘句 爲利祿之資也 大抵一時好尙 上之所向 下必嚮應 安國遞來時 有 一私奴 粗識文字 心存小學之道 乃爲書上於安國 光明義理 出於天性 非庸常之人 所知矣. 172) 위의 책, 14년 6월 갑신( 가), 御朝講 上曰 近聞 自金湜爲大司成之後 儒生多聚于學 然湜ー人 何能獨當他餘未差之官 亦可擇授 申鏛曰 小儒口讀之學 下官敎之 其義理精微之蕴 則金 湜 尹倬可誨之矣 金世弼亦合於同知之任. 173) 위의 책, 13년 8월 무자( 가), 時光祖最名重 慕效者益衆 年少之輩 談小學之道 至於動作容

40 國史館論叢 第56輯 젊은 儒士들의 학풍이 이런 방향으로 흐르자, 과거도 이에 맞추어 변화해야 한다는 요 구가 생겨났다. 후술한 賢良科의 시행이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지만, 현량과 와 거의 같은 시기에 치러진 式年文科174)의 會講에서도 이와 같은 추세에 발맞추어 試 官들이 평가기준을 달리 설정하기 시작했다.175) 즉 훈고의 暗誦보다 義理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종래의 방식으로 시험에 대비한 유생들이 苦杯를 마시거 나 아예 응시를 하지 않았다.176) 그 결과 회강을 통과한 擧子의 수가 합격정원에 미달하 는 28인 밖에 되지 않았는데, 武科보다 적게 뽑을 수는 없다 하여 會講을 통과하지 못했 어도 점수를 받은 사람까지 합쳐 29인을 선발하였다.177) 그러나 조광조는 士子들이 趨向 할 바가 어디인지는 깨달은 듯하니 훌륭한 師儒만 있다면 크게 교육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을 피력하였다.178) 사실 이 시기에는 士大夫敎養이 지향해야 할 방향 이 성리학이라는 데는 상당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편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르칠 만한 師儒감이 극히 희소하고,179) 설사 있더라도 제도와 관행이 그런 사람의 등용을 가 止 務欲中度 不爲戯謔之事 挟性理之書者 雖有名無實 而指以爲道學之人 故文官及儒士所讀 近思 錄 小學 大學 論語等書而已 不事文藝之學 而文章學術則視成宗朝大衰矣. 174) 위의 책, 13년 9월 정미( 나), 文科館漢城試 試畢出榜 一所試官李淸 以謂所取多非其人 深 以爲憾 二所試官尹自任意謂 善取人 不遺才 頗有喜色 館試試官李若氷亦謂 所選之外 復無遺才矣 且曰 金絿(絿亦爲試官)識鑑如神 眞權衡人物之器也. 175) 위의 책, 14년 3월 무신( 나), 御朝講 上臨文曰 此言立大學三舍之法 近來學校之政 盡心修 擧 而去式年講經之數 只三十七人 而今年反不充其額 何與 尤當致念者也 領事申用漑曰 前此儒生等 徒誦口讀 至講經時 例許爲通 今以謂不可 皆欲尋繹蘊奥 而反廢讀書 是謂兩失 其間雖有能誦者 嫌 於只治句讀 不講而自退者多矣 且以製述爲不可尙 專不着力 而亦不業於經術 如此則終必有弊 將無 以救之 上曰 經學爲本 雖別試 亦可講經而取之 不然則不無僥倖之弊 而經學又幾乎絕矣. 176) 위의 책, 14년 4월 기사( 나), 御夕講 參贊官柳庸謹曰 今式年取人 不滿常額 恐上以謂由士 類之不學而然也 古則徒取詁 故以記誦爲貴 近則以記誦爲恥 爲試官者 亦取稍解義理者 故所謂慣於 記誦者 皆不與選 恐上之以士類爲不學而然也 上曰 今試之不滿常額者 於經筵聞之 皆以爲不勤學業 而然也 果其志向善 則不可徒取記誦 然不可不勸學也 光祖曰今之士志趣不汚 亦不區區於科業記誦 故似不勤讀 大臣疑不治學 臣亦每恨今之士不勤學業 夫旣知向方 又能勤讀 則猶所謂虎而翼者也 今 若有師儒 則必就而學矣 庸謹曰 夫圓點之法 徒爲拘迫耳 其中可人 所以徒學訓詁爲無益 而不肯赴學 其下此者 則恥其所爲之不善 而不敢赴學也 光祖曰 近者 有志之士 果或有過越之事 不善之徒 從以 尤之曰 好議論訪訕 是大不可 自上有所提撕瞥覺 可也. 177) 위의 책, 14년 3월 병오( 가), 臺諫啓曰 科擧講經 載在大典 欲令儒者務本也 今之講者 只 二十八人 不足於三十三人之數 此近古所無 近來士習浮薄 不務經術 故如此 若以此只定坐次 則製 述亦必廢矣 本末竝棄 有乖於大典之意 今旣不充額數 以此第其製述 使有得失 則本末兼備 而合於 大典本意 但其數則當與大臣 議而定之 傳曰 科擧事 當議于大臣 鄭光弼 參議朴壕議 啓曰 前此會試入格者 不必講經製述俱全者得與焉 只以講經分數得參者 亦有之 且於初試 亦取三場 製述 非專廢詞章也 設科之初 以文科之數 多於武科者 所以重文科也 今若復有取舍 則厥數反不及 於武科 此亦不可也 三年一大比 須多取之 傳曰 大臣之意皆然 試日亦迫 可依啓爲之. 위의 책, 14년 3월 계축( 라), 出文科殿試榜 取朴紹等二十九人. 178) 위의 책, 14년 4월 기사( 나). 179) 위의 책, 12년 11월 임진( 나), 御夕講 講大學 光祖曰 近來有志之士 稍稍興起 而無

41 로막는다는 것이 조정의 고민거리였다. 爲己之學으로서의 성리학을 가르칠 師儒는 성실 성 이외에180) 師表로서의 德望과 學識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181) 이때 學識이 란 훈고학적 박식이 아니다. 그것은 經典이 가르치고 있는 微妙한 義理를 드러내고 古 今의 구체적인 행적들의 是非를 토론할 수 있는 능력 을 의미하는 것이다.182) 爲己之學 에 뜻을 둔 사람들은, 敎師와 學生 그리고 학생과 학생이 이런 종류의 지적 교류를 핵심 으로 하는 학문적 유대를 형성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성립하고 全人的 成 長의 경험을 맛볼 수 있다고 믿었다. 학문을 매개로 성립하는 이러한 유대를 그들은 師 友之道 라고 표현했는데,183) 훗날 初期書院의 확산과 學派의 형성은 바로 道學者들이 중 시했던 이 師友之道의 구체적 실현양태였다.184) 아무튼 기묘년간에 위의 師儒問題를 부 분적으로나마 해결해 준 것은 賢良科였으니, 현량과를 통해 기묘사림 중에서 성리학에 가장 조예가 있다고 평가받던 金湜이185) 중종 14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司成으로 승진 宗師之人 有志者若踰閑之馬 各以所見爲學 故學問不正矣. 180) 위의 책, 12년 윤 12월 임진( 나), 憲府啓曰 方有寧爲同知成均館事 所任至重 而歸故鄕久 不返 曠廢職事 請遞之 傳曰 方有寧 以師長之人 久曠其職 可遞之. 181) 위의 책, 14년 6월 신미( 가), 召對經筵官 上曰 圓點之法 欲學生聚學耳 然不可以法律驅之 若有賢師長 則自多就學 今則大司成擇而任之矣 說經慶世仁曰 儒生所以欽慕者 以有學而女有德也 徒能文者 不足設也 雖有德行 不能知學 則亦必不就 今大司成具此二者 人故樂就侍講官李淸曰 今之 儒者 大變於舊 雖曰 不勤於讓書 用心則丕變矣 聖上能盡誠於敎育之方 則安知不有大賢君子 出於其 間乎. 182) 위의 책, 12년 12월 임인( 가), 御思政殿 親講儒生 唯知中樞府事安閏德 李점發問 皆不過 訓詁之末 而無一人發其微意 討論古今是非者. 183) 위의 책, 11년 5월 을사( 라), 御夕講 典經李若氷曰 硡之所啓甚剴切 其中學校用人等 事 尤爲重大 而用人之本在於學校 學校人材之藪 風化之源 興學校然後 可得人材也 近者儒士 專不 赴學 假使赴學 亦無師友琢磨之益矣 凡師友云者 必相規以義 相勉以善 可也 今世之人 若稍解文字 則便以科擧爲心 欲得心學之士 其可得乎. 위의 책, 12년 2월 을축( 라), 御夜對 侍讀官趙光祖曰 自廢朝以後 師友之道頓廢 間有或就 師或取友 則指以爲禍胎 夫師友之道存 然後人倫得以明矣 人君亦以一時最賢者爲師 其次者爲友 以 尊禮待之 可也 後世師友之人 豈能易得 雖有其人 狃於俗習 故未能盡其師友之道也. 위의 책, 12년 8월 을축( 라), 御朝講 大司諫文瑾曰 今之儒者 其所欲不出於謀利之事 而父兄所敎 皆姑息苟且之道 故聚于學宮 相師相友者 蔑乎無聞 間有留心於爲己之學 曰師曰弟子云 爾 則人皆聚笑矣 且於國學 師表之人 亦未易得也 臣聞 祖宗朝金鈞 金末 尹祥 皆達理之儒 以 敎育人才爲己任 出入學宮 講論聖賢之學 爲一時之師表 故學爲己之學者 亦多有焉 今之處皐比之位 者 皆句讀之人 其氣局又從而庸雜 則其何能表率以正 陶鑄一世之人才也. 위의 책, 12년 윤 12월 기유( 라), 御晝講 檢討官李若氷曰 師友之道至重 今世不知其重 徒 講口耳之學 不取質於師友也 前在廢朝昏亂之時 其一時爲師爲友者 皆構爲門徒之說 咸被酷禍 士林 之所目睹也 自此 士氣萎이 不樂爲師弟之道 近來稍稍興起爲士者 或有取正於師友者 誹訪之徒 毀訕 百端 爲父兄者亦止之 幸有群處而琢磨者 必謂六聖從事官也. 184) 정만조, 조선 서원의 성립과정 ( 한국사론 8, 국사편찬위원회, 1980) pp 의 師友之 道의 확립 및 김항수, 16세기 士林의 성리학 이해 : 書籍의 刊行. 編纂을 중심으로 ( 한국사 론 7, 서울대, 1981) pp 의 학파의 형성 참조. 185) 중종실록 12년 7월 신축( 가), 忠曰 臣近日在讀書堂 欲讀理學 而吾東方理學不傳久矣 無所於學 今之知理學者 唯戶曹佐郞金湜而已 湜非粗知者 臣與賜暇同僚(朴世熹 尹衡) 欲讀性理大

42 國史館論叢 第56輯 하고 곧이어 大司成에 오름으로써186) 士大夫敎養을 性理學化 하려는 운동은 더 큰 추진 력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15세기말까지 초기사림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사대부들만이 독습하던 소 학 은 중종 12년 14년에 이르는 짧은 동안 기묘사림의 노력으로 사회적으로 확산되 어 士風을 한때나마 反轉시킬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187) 이 시기에 소학 의 실천적 독습운동을 주도했던 기묘사림은 성종대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京華子弟들의 躁進之風 과 그로부터 파생된 士風의 타락을 극복하고 진정한 土大夫像 을 확립하는 길을 지배층 의 自己革新에서 찾았으며, 그 방법은 士大夫敎養을 재형성하는 일, 구체적으로 말해 爲 人之學으로부터 爲己之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소학 의 실천적 독습을 통해 이런 改宗 의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士子들로 하여금 소학 의 가치를 깨닫게 하려고 腐心했다. 그러한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가? 자신들의 체험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오로지 훌륭한 人格 을 대면함으로써, 그들이 示範하는 바 를 이해하고 닮으려 애쓸 때 오는 것이었다. 節目科條 로 표현되는 外的 强制와 誘引은 이 점에 관한 한 무력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는 敎師가 아니라 정치가였기 때문에, 그들 역시 제도적 정책적 수단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 수단들은 김안국의 鄕校巡歷이나 經筵에서의 소학 進講을 제외하고는 딱히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년간에 높아진 소학 의 聲價를 成功 이 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성공은 다분히 유생들의 羡望의 的이었던 趙光祖 金湜 등의 눈 부신 정치적 부상과 인기에 의존한 것이었고188) 그 점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全 而難於解讀 欲啓請賜暇金湜 與同僚學之 而國法非文臣 無賜暇之例 故臣有其志 而終不果.. 186) 다음의 자료들은 金湜을 大司成으로 앉히려는 己卯士林의 열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위의 책, 14년 5월 갑오( 라). 위의 책, 14년 5월 계묘( 라), 御晝講 說經安處諴曰 頃者金湜爲司成時 學者以爲當及 此時爲學 多欲聚學未久以湜合爲經筵官 遷爲直提學 學者聞而還散 湜未仕在家時 學者多有聚學 或 有買家於其隣而居之 此正如四方歸之 學舍不能容之語也 不可以號令聚散之 又不得以圓點拘之 今 有志之士 或有不屑科舉者 豈見拘於圓點之法哉 今若以金湜爲師長 則儒者自爾就學 雖不設圆點之 法 亦自聚矣. 위의 책, 14년 5월 기미( 라), 塘曰 今副提學金湜 未爲登科之時 士林皆欲爲大司成 如宋時之孫復之也 適爲登科爲司成 趙光祖又爲同知 儒生皆欲往聚 未幾湜爲副提學 光祖爲大司憲 不得數往 諸生甚失望. 위의 책, 14년 5월 기미( 가). 187) 위의 책, 14년 4월 정해( 가), 御晝講 講小學 上曰 小學非獨小子學之 雖大人亦可讀也 左 右曰 今人皆知此書之可學 至於市利之人 解文字者 皆樂誦習 外方亦皆讀之矣 凡敎化之事 自上先 之 則不令而行矣. 188) 위의 책, 14년 7월 갑오( 나), 御不時召對 希閔曰 近來陶甄一時之功 皆光祖之力也 典經金明胤曰 我國家士習頹靡不振者 已久 賴光祖特起於衆人之中 以身救之 故士習今大變矣 自任 曰光祖之功甚大 如金淨者 亦特立而危難不避者 然先用光祖 然後次用淨矣 明胤曰 金宗直 金宏弼等 皆有志於世 終不能有爲而死 今光祖奮發於世 使頹靡之俗振起 是宏弼等之所不能 而光祖乃行之 其

43 - 77 기묘사림은 小學 의 실천적 독습을 권장함으로써 士大夫敎養을 爲己之學으로 定向 시키려 했을 뿐만 아니라, 科擧制에 德行 위주로 인재를 선발 등용하는 賢良科를 도입함 으로써 爲己之學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려고 하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선초 講製是非의 결말은 文科初試의 初場을 疑 義로 치르고 會試의 初場을 講經으로 치르는 것으로 귀착 되었다. 이 귀결은 사실상 製述論의 승리였을 뿐만 아니라 文學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 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三場189) 中 中場의 시험과목 자체가 賦 頌 表 箋 등 詞章이었고, 初場에서 四書三經에 대한 理解를 테스트하게 되어 있었지만 기대하는 수준의 經學的 素養을 擧子들에게 習得시키는 데 거의 실패했기 때문이다.190) 初場의 시험방식은 우선 擧子들이 經書의 全文을 熟讀하지 않고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대목만 발췌해서 읽는 경 향을 막지 못했다.191) 初試의 疑 義는 특히 문장력에 의해 좌우되는 정도가 컸고, 會試의 講經은 기본적으로 암송의 정도를 평가하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試官이 경학에 대 해 조예가 깊지 않고 평가의 객관성만을 견지하려고 할 때 이런 경향은 더욱 조장되기 마련이었다. 중종대에 과거제의 개혁 필요성을 논의하는 중에 우리나라의 과거는 詩 賦 로써 사람을 취하기 때문에 대개 尋章摘句를 일삼는다 거나192) 우리나라에서는 學術이라 고 하면 文學을 가리키고, 과거에서도 먼저 頌 表로써 사람을 뽑는다 는 발언은193) 모두 문학적 소양이 급제에 關鍵이 됨을 지적한 것이다. 入仕後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에 있어 功不亦大乎. 위의 책, 14년 6월 병자( 가), 殿最學官 中下考者居多 是時金湜爲大司成 凡殿最一聽儒生 毀譽 由是 成均館 四學官員畏憚 莫敢檢攝 士習日趨驕惰 凌忽師長 徒整飭衣冠 律繩步趨 而無恭遜 禮順之容 有唐突矯激之習 其爲學 無博究篤實之功 有飭外沽名之心 識者憂之. 189) 終場의 對策은 詞章을 테스트하는 시험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역시 文章力이 요구되는 시험이었 으며, 殿試의 경우는 석차를 결정할 뿐 당락에는 영향이 없는 시험이다. 190) 중종실록 9년 10월 갑인(15-38 나), 大司諫崔淑生等上疏 條陳十二事 其一 學校賢才所出 風 化所關 近來學者不務師授 爭抄訓詁 以圆記誦 僥倖得第 人皆效之 至於窮鄕僻學 雖昧宗指 若能口 誦 謂熟其業 一槪取之 但較生熟 毋論精粗 以此悠悠之輩便謂 科擧之學 安坐可能 不必從師 厭居 學宮 傲視師長 人自爲學 各立私議 摘埴冥行 勢將失道 奈何不救. 191) 위의 책, 7년 10월 무오( 라), 元和又曰 今儒生不好學 雖四書三經 皆抄抹而讀之 至於史記 亦茫然不知. 위의 책, 13년 6월 임오( 나), 訓練院命正金守敦上疏 其一曰 新科目 今科擧之法 俱 講四書三經夫四書 固聖賢爲學之門戶 不可廢也 至於五經 則中朝之士 亦各治一經矣 以有限之力 兼 治四書三經 精之則不及爲力 不精則多而無用 臣聞擧子等 於初試入格之後 歷抄章句之短 而易讀者 讀之 先儒註疏 爻抹過半 四書三經 粗治於五六朔之內 及其試也 僅對一二訓詁 則謂之粗通 而終以 製述取高第 夫章句詁訓 尙不盡讀 況義理哉 我國之經學 可謂苟矣 故多而無用 人所共患也. 192) 위의 책, 12년 정월 신축( 라), 御夜對 參贊官尹世豪曰 我國設科擧 以詩賦取人 率以章句 爲事 無性理之學 以此學校不明. 193) 위의 책, 13년 3월 정미( 다), 御晝講 司諫孔瑞麟曰 我國之學 以文華詞藝 謂之學術 似與古人所謂學術異也 於取人之際 以頌表取之 殿試則須以對策 於策 可見其人之所學是故 古者大 庭之對 必以策 前年別試 亦以詞章取人 於是知名當世之人 不多登第 故人多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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