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폭체험기 제목 집필자 피폭당시 연령 페이지 원폭에 두 딸을 잃고 후지이 마키에 22 1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시마자키 지로 14 5 나의 피폭체험기 다나카 쓰네마쓰 어머니에 대한 기억 가와구치 히로코 8 17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여름날에 있었던 일 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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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1 집필보조사업 피폭체험기 문집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

2 피폭체험기 제목 집필자 피폭당시 연령 페이지 원폭에 두 딸을 잃고 후지이 마키에 22 1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시마자키 지로 14 5 나의 피폭체험기 다나카 쓰네마쓰 어머니에 대한 기억 가와구치 히로코 8 17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여름날에 있었던 일 시모타케 지요코 정말 다행이었구나 미야치 도시오 평화에 대한 바람을 다음 세대에게 마에도이 도키오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처 후지에 교코 9 41 나는 지옥을 보았다 구와바라 기미코 17 49

3 원폭에 두 딸을 잃고 후지이 마키에 1

4 피폭 전의 상황 우리 식구들이 살고 있던 곳은 요코가와초 1 초메에 있던 요코카와다리에서 100 미터 정도 동쪽에 있는 강둑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남편(기요시)과 나, 3 살 난 장녀 (가즈코), 생후 반년 되는 둘째 딸 (기요미) 모두 4 식구였습니다. 피폭 전의 일 중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지하에 파둔 방공호로 숨곤 하였던 일입니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습니다. 피폭 상황 8 월 6 일 아침, 당시 남편에게는 소집영장이 나와 있었으므로 그날 남편은 회사를 쉬고 집에 있었습니다. 나와 아이들은 공습경보가 해제 되자 집 2 층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창문으로부터 뜨거운 불덩어리가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과 나는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내 발아래 쪽에서 큰아이가 엄마 나 여기 있어, 엄마 나 여기 있어 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즈코, 엄마가 구해 줄게, 조금만 참아 라고 했습니다만, 무너진 벽과 집안의 여러 가지 세간살이에 끼여서 목을 움직일 수 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위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키에 어디 있소, 어디 있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나는 뜨거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쪽에서 이미 불길이 솟았다. 이렇게 찾아도 도대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 이제 할 수 없소, 미안하구려 남편이 힘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예요, 여보 여기예요 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남편은 내가 있는 곳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둘째 아이를 안은 채 건물 더미에 깔렸었습니다만, 남편의 할 수 없다 이제 단념하라는 소리를 듣고 필사적으로 둘째 아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때에 손가락으로 코와 입을 막아버렸던 듯 아이가 숨을 쉴 수 없어 발버둥치며 괴로워하다가 꺄악 하고 울었습니다. 나는 그 목소리에 놀라 아이가 죽어요 라고 외쳤습니다. 그 목소리가 들렸던 지, 남편이 되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디야, 어디 있소 라고 하며 열심히 우리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찾은 남편이 작은 구멍을 뚫고 먼저 나를 구한 후 둘째 아이를 끌어내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다친 탓에 어지러워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으로 점점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도망치다가 나는 퍼뜩 여보, 가즈코는, 가즈코는 어디예요? 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가즈코는 숨이 끊어졌어. 이미 움직이질 않아. 어쩌겠소? 미안하오. 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가즈코야, 미안하다. 용서해 주렴, 엄마를 용서해 줘 라고 2

5 빌면서 걸었습니다. 남편은 한쪽 손으로 둘째를 안고, 또 한쪽 손으로는 나를 질질 끌면서 계속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기운을 내, 기운을, 조금만 참아 라고 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나는 눈앞이 점점 흐려져 남편을 따라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습니다. 우리 집은 사방에서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아마 흔적도 없이 타버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편도 양손에 나와 둘째를 안고 있었으니, 조금 가서는 쉬고, 조금 가서는 쉬고 하며 걸었습니다. 걸어가는 도중 머리가 마구 흐트러진 여자가 남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도와주세요. 우리 딸이 기둥에 깔려서 나올 수가 없어요. 살려주세요. 라며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우리 아내도 아이도 이런 상태이니 좀 봐 주시오 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재빨리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쉬다가 걷고 또 쉬다가 걷고 하여 신조에 있는 남편 친구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신조의 친구 집에서 신조의 친구 집에서 3 일 정도 신세를 졌습니다. 나는 피폭한 충격으로 젖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다쳐서 누워 있었으므로 남편이 젖을 얻어 먹이러 나가곤 했습니다. 나는 집채에 깔린 큰딸을 어쩌면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려 달라고 하던 큰딸을 두고 나만 살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 지는 것 같은 마음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조의 친구 집에 있는 사이, 화상을 입고 비틀거리며 줄지어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눈물이 멈추질 않아 아예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야마구치에 있는 친정에 3 일 정도 지나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남편과 둘째는 요코가와역에서 만원 기차를 타고, 우리 친정이 있는 야마구치현의 고구시라고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겨우겨우 도착해서 친정까지 걸어서 돌아갔습니다. 도중에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는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왜 이런 모습인가? 무슨 일이 있었나? 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모두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미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단지 눈물만 흘리며 그곳을 지나쳐 친정집에 겨우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는 큰아이를 살려 주지 못한 채 자기만 살아난 것이 미안해서 잠을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자살이라도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한 언니와 어머니가 옆에서 같이 잤습니다.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와 3

6 용서해 주렴. 이 엄마를 용서해 줘. 라고 외치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내가 야마구치에 있는 동안에 남편이 히로시마에 돌아가 장녀의 유골을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젖이 나오지 않아 어머니가 근처의 갓난아기가 있는 젊은 사람을 찾아가 젖을 얻어 먹여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는 다리를 다쳐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갓난아기도 있으니 천천히 몸조리한 후 돌아가라. 고 하셔서 1 년 가까이 친정에서 보냈습니다. 그때 다친 다리는 지금도 아픕니다. 둘째 아이의 죽음 야마구치에 갔다가 1 년이 채 못되어 히로시마로 돌아왔습니다. 요코카와의 원래 살던 집 가까이에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둘째아이를 목욕탕에 데리고 갔는데 어떤 남자가 둘째 아이를 보고 등이 조금 부은 것 같지 않으냐 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폭 때 등을 다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병원에서 진단한 결과 등의 척추뼈 4 개가 곪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야마구치에 있는 친정에서 딸을 키우게 되었습니다만, 몇 년쯤 지나 딸아이가 자라서 아빠, 엄마 라는 말을 하게 되자 히로시마에 데려와 입원시켰습니다. 치료비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친정어머니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마침내 치료비를 치를 수 없게 되어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1952 년에 끝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평화에 대한 생각 결코, 전쟁은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온 세계가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합니다. 4

7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시마자키 지로 5

8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8 월 6 일의 상황 나는 학도동원으로 당시 사이조에서 기차와 시전( 市 電 )을 갈아타고 1 시간 이상 걸려서 미나미칸온마치에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주) 히로시마기계제작소에 통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5 형제 중 4 번째로 형 1 명, 누나 2 명, 아래로 여동생이 있습니다. 형은 규슈의 군대에 가 있었습니다. 내가 2 중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제 2 중학교)의 2 학년 때부터 수업은 없어지고 여기저기의 공장을 돌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44 년 말경부터 미쓰비시의 간온공장으로 통근하게 되었습니다. 8 월 6 일 당일은 같은 학교 친구 4, 5 명과 공장으로 향하는 도중 피폭했습니다. 장소는 미나미칸온마치의 종합운동장 부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폭심지에서 약 4 킬로 떨어진 거리입니다. 만약 내가 다음 전철을 탔더라면 원폭투하 시각에 아이오이다리에서 즉사했을 것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느낌입니다. 피폭 순간은 등 뒤에 번쩍하는 빛을 받았습니다. 목이 뜨거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렬한 폭풍이 불고 난 뒤, 나는 뒤로 넘어져 기절했습니다. 기절한 후 5 분 정도 지나 눈을 떴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폭심지에서 4 킬로나 떨어져 있는데도 공장은 철골만 남고 지붕은 날아가 버린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동원된 공장이 B29 의 폭격을 당한 것이 아닐까? 아니, B29 의 폭격을 당한 것이 아니고 저것은 미나미마치에 있는 가스탱크가 폭발한 것이 아닐까라고 학우들 간에도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분명히 경계경보는 해제가 된 후였습니다. 8 시 15 분은 무경계 상태였습니다. 8 시 전에 공습경보가 한 번 울렸습니다만 경계경보로 바뀐 후 8 시 5 분 정도에 경보가 해제되었습니다. 해제 사이렌도 들었습니다. 그 후, 시내가 전부 불바다가 되었으니까 어쨌든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 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검은 비가 내리는 속을 동쪽으로 걸었습니다. 에바로 건너가, 요시지마, 센다에 겨우 도착한 후 히지야마 방면으로 가기 위해 미유키바시다리를 건넜습니다. 미유키바시다리를 건널 때, 많은 사람들이 내 바지를 잡아당겼습니다. 물 좀 주시오 물 좀 주시오 라고 하며. 나는 그저 사람들이 좀 많이 다쳤다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째서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화상을 입었는지 그때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학생, 물 좀 줘, 물 6

9 좀 줘, 다쳐서 너무 목이 마르다네 라고 하며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무서울 따름이었습니다. 나는 다행히도 피폭 시에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므로 그처럼 상처입은 많은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단지 여우에 홀린 것 같은 발걸음으로 그저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지야마산 아래를 지날 때,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몸이 새빨갛게 된 군인입니다. 그는 온몸의 피부가 벗겨져 밑으로 처져 있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었으나 그 모습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나를 보고 시체를 가리키며 이 사람들을 리어카에 실어서 날라야 하니까 학생, 발 쪽 좀 잡아 주게.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히지야마 산자락 부근은 폭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많은 사람이 시체를 나르는 것을 돕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군인은 며칠 못 살고 돌아가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밤중 몇 시인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겨우겨우 가이타역에 도착했습니다. 가이타에서 밤중에 한 번 사이조 방면으로 기차가 떠날 지도 모른다고 하는 정보가 있어, 1 시간 이상이나 기다렸다가 기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를 타고 사이조에 도착했지만 주위가 너무도 캄캄해서 누가 마중나왔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등화관제를 하던 시대라서 전기나 등불을 켜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냐, 정말 힘들었다고 하던데 라는 목소리만 들릴 뿐 누가 마중 나왔는 지 분간을 못 할 상황이었습니다. 7 일 이후의 상황 삼촌이 히지야마에서 일하시다가 피폭한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숙모와 함께 삼촌을 찾으러 히로시마로 갔습니다. 트럭을 타고 갔는지 어떻게 시내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우지나 근처에 수용되어 있을 것이라는 정보만을 가지고 7 일 새벽 무렵부터 나갔습니다. 나는 2 중에 3 년간 다닌 덕분에 시내의 지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숙모에게 길안내를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숙모와 같이 나갔던 것입니다. 우지나의 수용소에서 삼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는 우지나항에 가까운 창고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아!, 이 사람, 지금, 숨이 끊어졌군, 자 이걸 내놓읍시다. 라며 복도에 시체를 늘어 놓고 있었습니다. 또 한 군인이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머리쪽을 좀 들어주게. 라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서워서 도울 수 없었습니다. 2, 3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숨이 끊어진 사람들을 복도로 내 가는 것이었습니다. 20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처녀도 화상을 입어 검게 그을린 채 알몸으로 바닥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우지나에서 사이조까지 삼촌을 모시고 돌아왔습니다만, 3 일 후인 10 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집 가까이에 있는 화장터에서 태웠습니다. 나도 도왔습니다. 2 년 전에 돌아가신 숙모는 삼촌과 같이 산 세월이 9 년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7

10 피폭 후의 생활 2 중에서의 수업이 재개된 것은 10 월 말인가 11 월에 들어섰을 즈음이었을까요. 간온의 원래 2 중이 있었던 장소에 오두막 같은 건물을 짓고, 문틈으로 눈발이 날아들며 난방도 없는 속에서 떨면서 수업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창문 유리도 없는 건물이었습니다. 간온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가이타에 있던 여학교 교사를 빌리거나 무너지지 않은 초등학교 등을 빌려서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으므로 수업을 받지 않으면 단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운 것도 참으며 수업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오두막 같은 학교지만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구 제도 중학교였기 때문에 5 학년으로 졸업했습니다. 그것이 1947 년의 일입니다. 졸업 후, 센다초에 있는 히로시마공업전문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자동차가 조금씩 세상에 보급되게 된 1950 년대, 자동차교습소를 세우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삽을 들고 코스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공업전문학교에서 취득한 단위를 살려 학과와 실기 교사가 되기 위한 자격을 땄습니다 년부터 시내에 있던 자동차교습소에 근무, 주임 교관을 맡았습니다 년에 나는 자동차교습소를 그만뒀습니다. 형님이 양로원 등을 경영하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형님 사업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형님은 의사회 회장까지 지낸 분이며 나는 그런 형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님하고 저하고 단 둘이서 경영을 도맡아왔는데 형님은 뇌의 혈관이 터져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너무 너무 한이 맺혀 3 일 낮 3 일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미야지마나 유키의 시설을 돌보러 돌아다닐 때도 장거리는 내가 운전해서 병원장인 형님을 태우고 돌아다니고는 하였습니다. 내가 운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형님을 도와 왔습니다. 형님은 학문의 외곬수이고 나는 스포츠맨, 둘이 하나가 되어 살아왔습니다. 형님이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취직과 결혼, 후유증에 대해서 아내와 결혼 한 지 50 주년 곧 금혼식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혼 때 자신이 피폭자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피폭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내에게만은 원폭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 당시 미쓰비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5 킬로나 떨어진 미나미칸온 끝쪽에서 약간 피해를 입었을 뿐 다치지도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다 고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별로 그런 일에는 개의치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약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의학지식도 있고 하여 자신이 피폭 2 세인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태어났을 때에는 조금은 걱정을 했습니다. 이상이 없는 지 아무도 모르게 확인했습니다. 후유증으로 걱정되었던 것은 피폭 후 10 년이 경과한 후 목 뒤에 큰 혹이 생겼을 8

11 때입니다. 악성이 아니고 양성인 신생물이라고 할까. 커다란 혹이 생겼습니다. 혹이 생긴 곳은 피폭 시에 뒤에서 빛이 발사되었을 때 정확히 빛이 닿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수술해서 혹을 때어냈습니다만 다시 10 년 후에 혹이 생긴 것입니다. 그로부터 요즘은 이제 혹은 생기지 않습니다. 혹이 생긴 것 이외에 피폭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증상은 이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빨리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 증상은 다릅니다. 나는 머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피폭자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은 피폭자는 어쨌든 피곤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취직했을 때 다른 사람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빨리 피곤해 하기 때문에 직장 상사로부터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모두들 이 정도의 일에는 피곤해 하지 않는데 왜 너는 이 정도의 일로 피곤해 하느냐, 게을러서 그렇지 않느냐? 라고 꾸중을 듣고는 했습니다. 피곤해 지기 쉽다는 것은 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리한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나의 생각 젊은 세대에게 원폭이나 평화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는 쪽도 어느 정도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폭이 떨어진 순간은 한순간에 건물이 무너졌고 한순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지 무서웠다, 힘들었다 물 좀 달라고 했었는데 주지 못 한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 다리 밑에까지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대로 도망쳤습니다. 라고만 해서는 듣는 사람들에게 잘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폭평화공원에는 자료관이 있습니다. 한번 가 보십시오. 평화의 나무가 있습니다. 라고만 해서는 원폭의 비참함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듣는 사람들쪽에서 보면 원폭은 그리 대단하게 생각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지난 번에 북해도에서 큰 회오리바람이 불어 많은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영상으로 보면 마치 원폭이 떨어지던 순간과 비슷했습니다. 정말 현실성을 띤 강렬한 영상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라도 그러한 영상을 보면 무엇인가를 느낄 것입니다 원폭도 그처럼 순간적으로 모든 건물들이 무너지고 불타, 20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재해로부터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원폭 투하 후 바로 마이니치신문, 아사히신문 등의 프로카메라맨들이 히로시마로 와서 그 참상을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종군기자로 몇 번이나 전쟁터에 다녀왔던 그들마저도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만큼 비참한 상황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비참함을 후세에 전해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전하는 자의 전달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2 중에 재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하급생을 원폭으로 잃었습니다. 또, 최근 세상을 떠난 동급생도 있습니다. 단 하나뿐이었던 형님도 돌아가시고 외톨이가 된 기분입니다. 현재 나는 몸이 불편해서 아내가 돌봐주고 9

12 있습니다. 앞으로 2 년은 더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1 주일에 1 번이라도, 2 주일에 1 번이라도, 어린 아이라도 좋고 초등학교생이라도 좋으니 마음껏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이야기를 한 후에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10

13 나의 피폭체험기 다나카 쓰네마쓰 11

14 당시의 생활 당시 나는 31 살, 고마치에 있던 주고쿠 배전 (주)(현 주고쿠 전력 (주))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아내인 미키에와 두 아이(장남 3 세, 장녀 7 개월)와 함께 오테마치에서 집을 빌려 살고 있었습니다. 주고쿠 배전에는 오노미치중학교를 졸업하고 1934 년 2 월에 자동차면허를 취득한 후 입사하였으므로 20 살이나 21 살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주고쿠 배전에서 근무하는 사이에 1937 년 9 월부터 1941 년 1 월, 1942 년 9 월부터 1943 년 11 월에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되어 소집과 복직을 되풀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년 3 월 말 경, 구레( 吳 )에 큰 공습이 있어 많은 함상기( 艦 上 機 )들이 마치 잠자리처럼 날아가는 것이 잘 보였습니다. 전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 파 두었던 것이지만 집 마루 밑에 방공호가 있어 공습 때마다 그리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둘 다 아직 3 살과 7 개월이 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방공호로 숨어도 한 아이를 보고 있으면 또 한 아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오래 못 갈 것 같아 아내와 두 아이를 후타미군 와다무라 무코에타(현 미요시시 무코에타마치)에 있는 아내의 친정으로 피난시킨 것이 3 월 말입니다. 당시는 때가 때인지라 가재도구는 모두 회사 창고에 맡기고 몸만 피난시켰습니다. 처자를 대피시킨 후, 나는 회사 창고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 월 초에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해서 아내가 피난 가있는 곳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내가 살고 있던 창고에 폭탄이 떨어져 모든 것이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갈아입을 옷도 없어져 버렸으므로 와다무라로 돌아가서 유카타(일본전통복)로 셔츠와 팬티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월요일 아침 첫 기차로 출근했습니다. 살 곳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회사 동료의 소개로 우시타초에 있는 집에 셋방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피폭할 때까지 생활했습니다. 피폭 시의 상황 당시는 경비소집이라고 해서 밤중에 공습경보가 내렸을 경우에는 시청의 명령으로 작업복을 입고 경비를 하러 나가야만 했습니다. 재향군인들이 분담해서 대처하는 것입니다만, 8 월 5 일 밤에도 공습경보가 내렸기 때문에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야나기바시다리의 경비에 나섰습니다. 경비를 나간 다음 날은 보통 8 시인 출근시간이 8 시 30 분으로 늦춰집니다만 6 일 아침에는 그런 전달이 없어서 나는 평상시와 같이 8 시에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근무시간까지 30 분이 남아있기에 지하에 있는 직원용 목욕탕에서 어젯밤 입었던 작업복을 빨래하고 있었던, 그때입니다. 바닥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쪽으로부터 불어 온 폭풍에 날려 뒷벽에 부딪혀 기절해 버렸습니다. 번쩍 눈앞이 빛났던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먼지 때문에 컴컴했습니다만 4 층인가 5 층 부근에 불길이 보였으므로 하여간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득 났습니다. 뽀얗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속을 12

15 기억을 되살려 손으로 더듬어 가며 아마 이 부근이 계단일 것이라고 생각해 걸어가니 무엇인가가 가로 놓여 있어 그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기도 하고 그런 상황 속에서 겨우 건물 근처에 있는 수위실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수위실에서는 전찻길이 보여 전찻길까지 나가니 전차가 철길에서 굴러 민가를 덮친 것을 보고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해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피난장소는 회사 남쪽에 있는 1 중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제 1 중학교)의 운동장이었습니다만, 나는 그것을 못 들었으므로 전찻길을 따라 북쪽을 향해 시라카미신사 앞을 오른쪽으로 돌아 다케야마치길을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도중, 현여( 縣 女,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제 1 고등여학교)학교의 담이 폭풍으로 말미암아 도로에 넘어져 있었으며 처녀인지 부인인지 모르겠으나 어떤 여자가 무너진 벽더미에 깔려 목만을 내놓은 채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나 자신도 피를 흘리며 등에는 유리파편이 박혀 피로 범벅이 된 상황이어서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습니다. 그 후 다케야강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 미유키바시다리를 향했습니다. 이름은 다케야강이라고 해도 작은 도랑 같은 것이어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고, 후쿠야의 지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도망치는 도중에는 나 외에 도망치는 사람을 보지 못 했습니다만 다케야강 건너 맞은 편의 집에서 큰일났다고 하며 집안 정리를 하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몇 시쯤이었던가 잘 모르겠으나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유키바시다리를 건너기 전에 군 트럭이 왔으므로 그것을 얻어 타고 우지나항에 가서 거기에서 배로 니노시마로 피난갔습니다. 니노시마에는 많은 부상자들이 피난 와 있어 온통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위생병은 있었습니다만 붕대만 감아 주었을 뿐 제대로 치료다운 치료는 받을 수도 없어 등에는 유리파편이 박힌 채였습니다. 마치 정신이 미쳐버린 것 같은 사람, 울부짖는 사람, 그것을 시끄럽다고 화내는 사람, 밤이 되어 사람들이 자고 있는 속을 뛰어다니는 사람, 그런 행동에 대해 화내는 사람 등 시끄러워서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6 일 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7 일 날 아침 대나무 통에 죽을 받아 매실 장아찌를 하나 넣어서 먹었습니다. 니노시마에서의 식사는 이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러다가는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군인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7 일날 아침에 배로 우지나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다행히도 트럭이 있었으므로 타고 있던 장교에게 어디에 갑니까? 라고 물으니 시청에 간다 는 것이었습니다. 시청까지 좀 태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타라 고 해서 시청 현관까지 태워다 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트럭에서 내렸습니다. 회사는 시청에서 약간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회사까지 걸어갔습니다. 회사에 도착하자 면식이 있는 직원 2 명이 접수를 맡고 있었으므로 지금부터 13

16 미요시에 있는 처가로 대피한다 라는 말을 하고 주소를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미야초, 핫초보리를 지나 우시다초에 있던 기숙사까지 걸어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8 일에 도사카역에서 기차를 타고 처자가 대피하고 있던 와다무라를 향했습니다. 아내가 걱정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렀습니다. 도중의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고헤이다리에 시체들이 많이 쌓여 있었던 것은 지금도 강렬하게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피폭 후 상황 와다무라에 도착했을 때는 등에는 아직 유리파편이 박힌 채였습니다. 매일 강에 가서 아내가 등을 씻어 주었습니다. 등에는 피가 콜타르처럼 굳어져 딱지 져 있었는데 아내가 바늘로 그 피덩어리를 때어내면 유리 파편이 함께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처럼 강에서 아내가 굳어진 피와 유리파편을 때어내는 나날이 1 주일, 10 일 정도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미 모두 때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남아있던 파편이 10 년도 넘은 어느 해인가에 곪아 사카이초에 있는 외과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빼냈습니다. 와다무라에 도착해서 잠시 지난 후, 유리파편을 전부 빼내고 이제 안심된다는 상황이 되기 전 일입니다만 우리 아버지가 오노미치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노미치에는 연락을 못 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 장례식을 어느 쪽에서 치를 것인지 의논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기뻐함과 동시에 대단히 놀라 마루에 걸터앉아 엽차만 드시고 바로 오노미치로 돌아갔습니다. 와다무라에서는 내장에 이상을 느끼지도 않고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며 3 주일 정도 쉬다가 8 월 말인가 9 월 초에 히로시마로 돌아가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직장에 복귀한 후, 밤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즈음이니 9 월 중순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혈을 해 본가가 있는 오노미치에 가서 요양을 했습니다. 하혈을 하니까 주위사람들도 의사도 이질일 지도 모르니 격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만 누나가 밤으로 밥을 지어 준 것을 먹고 나니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이상하지만 어쨌든 나는 밤밥을 먹고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노미치에서는 식사도 영양 있는 것으로 먹고 4, 5 일 요양하다가 건강해졌으므로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가 직장에 복귀했습니다. 종전 후의 생활 직장에 복귀했을 때는 살 곳을 잃은 직원들도 많아 회사 5 층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후에 밥해 주는 사람을 회사가 고용해 주었습니다. 일의 내용은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었으므로 총무부의 자재과에서 트럭으로 자재를 현 내 각지 발전소 등으로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14

17 1946 년에 식구들이 히로시마로 돌아와서 함께 살게 되었으며 회사 동료가 일이 끝난 후 건축자재를 사 와 에노키초에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에노키초에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30 년 동안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만, 먹을 것은 아내의 처가에서 쌀을 가져다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입을 것이나 이부자리는 회사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모도 타버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카타를 고쳐서 속옷을 만들기도 하고 오노미치에서 이부자리를 얻어 오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면서 하나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건강에 대해서 1947 년 7 월에 차녀가 태어났으나 역시 원폭의 영향이 걱정이었습니다. 아직 유치원밖에 안 되었을 때 코피가 나서 멈추지 않거나 다른 아이와 조금 다르거나 하면 원폭 때문이 아닌가 하고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 나 자신은 1956 년에 종양의 일종인 결핵종이 생겨 백혈구가 2000, 적을 때는 1000 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체중도 65 킬로이던 것이 8 킬로 정도 줄었습니다 년 7 월부터 1957 년 9 월까지의 1 년 3 개월 동안 하쓰카이치초(현 하쓰카이치시)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여 회사도 2 년간 쉬었습니다. 7 월 7 일, 정확히 칠석날에 입원한 것입니다만, 아침밥을 먹을 때 초등학교 2 학년이던 딸이 별님들은 오늘은 만나는 날인데 우린 아빠랑 헤어져야 하네 라고 해서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큰 병도 치르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십 몇 년 전인가부터 하혈을 하여 일본적십자사병원에서 피가 멈출 때까지 입원도 하고 지혈 주사를 맞거나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4 년 전에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으며 그때에 인정피폭자의 인정증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 현재 94 세가 됩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단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아내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이들도 나에게 효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감사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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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머니에 대한 기억 가와구치 히로코 17

20 8 월 6 일 이전의 상황 당시 우리 집은 가미텐마초에 있었으며 어머니, 오빠, 언니, 나 모두 네 식구였습니다. 아버지인 오모야 도시오는 1938 년에 중국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나는 어렸으므로 아버지의 얼굴은 사진으로 밖에 모릅니다. 집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아버지한테 신을 가져다 주지 않으니까 사진에서 못 나오시잖아요 라고 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시즈코는 혼자서 우리들을 기르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교육열이 대단하셔서 전시중이었지만 습자나 발레 등을 배우게 해 주었고 오빠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봤을 때에는 매일 아침 백일기도를 하시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아이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신문을 배달할 때는 오빠나 언니도 어머니를 도왔고, 나도 어렸지만 식구들의 뒤를 따라 걸어 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바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만, 같은 마을 내에는 삼촌 일가가, 가까운 히로세 모토마치에는 할아버지 일가가 살고 계셨고 또 당시는 근처가 모두 친척같이 지내고 있었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우리들을 돌보아 주고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그 즈음 많은 국민학교에서는 집단으로 시골에 아이들을 피난시키거나 연고지로 대피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덴마국민학교의 3 학년이었던 나도 같은 학교의 6 학년이었던 스미에언니와 함께 유키초에 있는 절로 집단피난을 가 있었습니다. 매주 어머니와 오빠 도시유키가 고구마 등을 가지고 면회하러 와 주었습니다만, 어린 우리들에게 있어서 부모 슬하를 떠나 있는 생활은 매우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죽더라도 부모와 자식 함께 죽자 라고 하므로 나도 이젠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하여 가미텐마초 집으로 함께 돌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대로 피난 갔던 곳에 남아있었더라면 어머니나 오빠도 면회하러 왔었을 테니까 모두 목숨을 건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8 월 6 일의 상황 8 월 6 일, 나는 학교가 쉬는 날이었으므로 친구와 근처에 놀러 나갔었습니다. 상공을 B29 가 비행기 구름을 그리면서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양손으로 눈과 귀를 막았습니다. 당시, 폭탄이 떨어지면, 눈과 귀를 막도록 훈련되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 섬광은 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때 내가 있었던 장소는 운좋게도 집 처마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벽에 가려져 상처도 입지 않았으며 뜨거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던 친구도 조금 머리를 다쳤을 뿐이어서 우리는 자기힘으로 집 틈 사이를 빠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8

21 집에 돌아가보니 피폭하여 다친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쌀배급을 받으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피폭했습니다.어머니는 바로 집 안에서 구급주머니만을 꺼내 나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주변을 보니 가옥이 무너지고 다리 난간도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 고이쪽으로 향했습니다. 도망치는 도중 새까맣게 타서 숯검둥이가 된 사람이 물 좀 주시오, 물 좀 주시오 라고 도움을 청해 왔었지만 그 때,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이름만이라도 물어 봐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고생 끝에 고이국민학교에 도착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맨발이었습니다. 무너진 건물더미 속을 다치지도 않고 용케도 맨발로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는 교실도 복도도 부상자로 가득 했습니다. 거기에서 어머니의 상처치료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손, 발, 등에 큰 화상을 입었고 얼굴에도 조금 화상을 입었으며 그리고 머리가 크게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치료라 해도 약만 조금 발라주었을 뿐이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약도 제대로 발라 주었는지 안 발랐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어머니와 함께 동네에서 지정되어 있던 오가와치마치의 피난장소로 향했습니다. 피난장소에 도착하니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져 가까이 떨어져 있던 양철판을 가져 와 비를 피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잠시 후에 오빠 도시유키가 왔습니다. 당시 오빠는 마쓰모토공업학교 2 학년생으로 우지나 앞바다에 있는 가나와도의 공장에 학도동원이 되어 거기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동원처로 향하던 중 미유키바시다리 부근에서 피폭했습니다만, 우리들 가족이 걱정이 되어서 동원처로는 가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히로시마전철의 본사가 있었던 부근은 양측이 불타고 있어서 지나갈 수 없었으므로 수도중학교 쪽으로 가서 모토야스강과 오타가와강을 배로 건넌 후 다리를 건너 점심 경에 겨우 간온마치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돌아 오는 도중에 유치원이 부서져서 건물에 깔린 사람이 도움을 청해 왔으나 살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빠는 한시라도 빨리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갈 길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니 집 바로 옆까지 불길이 다가오고 있어서 곧바로 방화용 양동이로 물을 길어 불길을 잡았다고 훗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우리들을 찾으러 오가와치마치로 와 무사히 식구들과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언니는 6 일날 아침에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 고 했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니를 야마나카고등여학교에 진학시킬 생각이었으므로 학교를 결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아침도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언니를 학교에 보냈습니다만 19

22 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7 일 이후의 상황 다음날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 언니를 찾으러 덴마국민학교로 갔습니다. 오빠는 당일 언니가 교장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 부근을 찾아보았다고 합니다만 학교 건물은 폭삭 주저앉아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 버려 불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오빠 나 셋은 2 일인가 3 일 동안 오가와치마치의 피난처에 있었습니다만 어머니가 언니를 걱정하니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의 어머니는 계속 자리에 누운 채였으며 상처치료라고는 고이 국민학교에서 약을 바른 것 단 한 번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운좋게 우리 집은 타지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의 이부자리를 꺼내다가 쓰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본 작은 어머니 오모야 스에코는 어떻게 된거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불을 내 주면서 왜 너희 어머니한테 이불을 안 덥혀 드리니? 라고 하며 화를 냈습니다. 오빠는 아직 공업학교 2 학년, 나도 국민학교 3 학년이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생, 초등학교생 나이였습니다. 아이들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어머니가 오셔서 어머니의 간병과 우리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작은어머니네는 작은아버지가 야마구치에 있는 부대에 소집되어 가 있었습니다만, 아내와 딸 노부에가 히로시마에 있다는 이유로 2 일 후에는 히로시마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작은아버지나 작은어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아이들만으로 도저히 우리는 살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얼굴에 입은 화상은 빨리 나아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만, 등에 입은 화상은 좀처럼 낫지 않았습니다. 등의 화상은 딱지가 져서 다 나았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껍질이 문드러지고는 하였습니다. 껍질 속에는 구더기가 가득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등에 구더기가 생겨 빽빽하게 붙어 있어 도저히 땔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모기장을 친 곳에서 자고 나와 오빠는 그 옆에서 자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구더기가 들끓어 나는 냄새에만 신경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많이 다쳤어도 아프다 든가 가렵다 든가 일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물도 마시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복숭아가 먹고 싶어 복숭아가 먹고 싶어 라고 했으므로 이구치까지 작은어머니가 복숭아를 사러 가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목이 말랐었던 것이겠지요. 9 월 4 일 아침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작은어머니께서 아이고 얘들아 너희 어머니 목숨이 이미 끊어져 있지 않니 라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어머니가 돌아가신 20

23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도 오빠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깨져서 크게 다쳤는데도 용케 한 달 동안이나 살아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 부상자들을 트럭에 태워 교외로 피난시켰을 때도 어머니는 언니의 소식을 알 때까지는 절대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처럼 많이 다친 사람들 중 교외에서 치료를 받아 건강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언니가 걱정이 되어서 언니를 만나고 싶은 일심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그날 가족들이 고세이칸 터에 가서 화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슬프다는 감정도 없었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감정이 마비된 상태였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비가 내려 어머니의 유해는 좀처럼 잘 타지 않았습니다. 시내는, 건물이 모두 무너지고 전체가 불탄 황야가 되어버려 우리 집에서 히로시마역이나 니노시마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곳곳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강의 시체는 군인들이 끌어올려서 화장하고 있었습니다. 1 개월 이상이나 그대로 방치된 시체도 있었지만 우리는 태연하게 거기를 왔다갔다하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는 원폭이라고 하는 것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었으므로 남의 집 밭에서 뽑은 고구마나 땅속에 묻어 두었던 쌀 등 피폭한 먹을거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었습니다. 피폭후의 생활 우리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친척을 의지해 미도리이촌으로 가 친척집 헛간에서 지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먼저 가 계셨습니다.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할아버지, 오모에 도메키치와 할머니 마쓰노는 자택의 방에 있어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미도리이촌에 도착했을 때는 건강했던 할아버지도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어머니가 돌아가신 5 일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히로세 모토마치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삼촌 쇼소도 자택 현관에 있었다고 합니다만,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미도리이촌에서는 이제까지의 생활과 달라 황당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 년 정도 미도리이촌 학교에 다닌 후, 히로세로 돌아왔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집을 지을 땅을 마련하여 판잣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작은아버지 부부가 양부모가 되어 오빠와 나를 친자식처럼 길러 주셨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쓸쓸하다든가 그런 감정은 전혀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조금씩 부모가 그리워졌습니다. 자매처럼 자라던 사촌들이 초등학교부터 가정교사가 와서 공부를 시켜 주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조금 쓸쓸했습니다. 작은아버지 가족과는 내가 결혼할 때까지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가구 제조를 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경리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21

24 결혼, 병에 대해서 옛날에는 피폭자라는 것을 숨기는 사람이 많았으며 특히 여성은 결혼할 때 피폭자인 것을 숨기고 피폭자 건강수첩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만 나도 수첩교부가 시작된 후에도 한참 동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신청했습니다. 평소부터 결혼은 작은아버지 부부가 결정한 상대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봐서 결혼했습니다만 다행히 결혼상대는 내가 피폭자라는 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한 다음에는 태어나게 될 아기가 걱정이었습니다. 나는 갑상선 암입니다. 우리 오빠도 사촌 자매들도 암에 걸렸고 결혼해서 태어난 딸은 청신경종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역시 원폭이 원인이 되어 이런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라고 걱정했습니다. 평화에 대한 생각 아이들에게는 자주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또, 함께 평화기념 자료관에도 가고 원폭이 떨어졌을 때의 상황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하루하루의 생활에 쫓겨서 식구들 성묘도 제대로 못 갔습니다만 지금은 자주 가서 모두와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오고는 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더 효도해 드릴 수 있었는데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같은 나이 또래의 분을 보면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없었던 만큼 보살펴 드리고 싶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음에도 지금 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을 위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22

25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여름날에 있었던 일 시모타케 지요코 23

26 전시 중의 생활 나는 1921 년에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도노가촌 (후의 가케초, 현재의 아키 오타초)에서 태어났습니다 년인가 1942 년경부터 부모 슬하를 떠나 쓰쓰가촌 (현재의 아키 오타초)에 있던 엄격하기로 유명한 예의범절 선생님 댁에서 살면서 다도와 꽃꽂이, 그 밖의 예의범절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후의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후, 그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쓰쓰가촌의 교육장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내가 여러 가지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강사료를 주었기 때문에 수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노가촌 촌장님의 조카뻘이 되는 가와모토 히사시와 알게 되어 1944 년 5 월에 결혼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도노가촌의 동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혼 후에는 히로시마시 히지야마 혼마치의 쓰루미바시다리의 가까이에서 시부모님(시아버지:가메사부로, 시어머니:세키요)과 함께 넷이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시계방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만 한 마을에 같은 직종의 가게가 두 군데나 필요 없다고 하여 남편은 외지로 일하러 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전시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전업주부도 한 집에 2 명이나 필요 없다고 하여 여성도 일해야 하는 시대였으므로 나도 결혼한 다음 달부터 시아버지가 근무하던 가스미초의 육군무기창고에서 근무했습니다. 원폭투하 전 시집의 고향도 도노가촌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8 월 3 일부터 도노가촌에 다녀 올 예정이었습니다만, 그날 아침이 되어 갑자기 시어머니가 네가 먼저 다녀오너라.나는 추석 때 한 열흘 다녀올테니까 하셔서 내가 먼저 8 월 3 일부터 5 일까지 도노가촌의 친정에 가게 되었습니다. 쓰루미바시다리를 건너고 있자니 시어머니가 뒤쫓아와 상태가 좋은 양산을 내밀며 히로시마에 가지고 있으면 공습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친정에 맡겨두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께 안부 전하고. 약속한 날 (5 일)꼭 돌아 오너라 라고 하신 것이 시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이 차마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 했습니다. 친정에 가면 조금이라도 더 있다 오고 싶은 마음에 5 일 밤 마지막 버스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려 하니 승차거부를 당해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돌아가지 않은 것을 알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안 된다. 너희 시부모님께 미안하다 라며 엄격하게 꾸짖으며 시집에 내일은 반드시 지요코를 돌려보내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쳤습니다. 8 월 6 일부터 8 월 9 일 다음날 (8 월 6 일), 약속한 날을 넘겼으니 아침 일찍 출발하면 좋을 것을, 그날도 24

27 느긋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만약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 시 15 분이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빛이 번쩍했다는 느낌 후,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매우 큰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 후 히로시마시 라는 글자가 쓰인 찢어지기도 하고 타기도 한 종잇조각이 많이 날아왔으므로 이것은 분명히 히로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역시 히로시마에서 굉장한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하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히로시마로 바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도저히 여자나 아이들이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여 먼저 아버지가 히로시마 시내에 상황을 보러 걸어서 갔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살고 있던 히지야마 혼마치 집에 가보니 모든 것이 타버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불탄 자리에 무기고 기숙사에 있다고 하는 팻말이 있어서 아버지는 그리로 가서 남편과 시부모님들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큰 화상으로 괴로워하며 거의 숨이 넘어가게 생겼더랍니다. 아버지는 남편과 시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한 후, 히가시 하쿠시마초에 살던 삼촌 댁도 보러 갔다고 합니다. 삼촌 댁은 완전히 무너져 고이 근처에 피난 가 있었습니다. 학도동원으로 건물정리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사촌 여동생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쪽저쪽 돌아다니시고서 도노가촌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무기고 기숙사에 있다는 말을 아버지께 들은 나는 8 월 8 일 날 아침에 버스와 기차(가베선)를 갈아타고 히로시마 시내에 갔습니다. 도중의 가베역 앞 광장에는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부상자들이 많이 눕혀져 있었습니다. 베개 옆에는 통조림이 1 개 놓여 있을 뿐. 가족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이름을 불러 봅니다만 대답할 기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많은 부상자를 본 나는 가족들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습니다. 기차는 미타키역 근처에서 멈춘 채 승객들을 내리게 했습니다. 거기에서 매실 장아찌와 쌀 등 친정에서 받아 온 양식을 짊어지고 무기고 기숙사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주위가 불타서 허허벌판이 되어 버려 어느 쪽으로 가면 좋을지 모르겠고, 목표로 삼으려고 했던 건물도 눈에 띄지 않아 그저 그 주위를 돌아다녔습니다. 불이 타오르고 있어서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길을 묻기 위해 가까이 가 봤더니 시체를 태우는 불이었습니다. 다리 위 건 길 근처이건 논 가운데건 상관없이 여기저기에서 화장하고 있었습니다. 시체를 태우는 광경을 보아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감각이 마비되었던 것 같습니다. 9 일 밤중 3 시에 마침내 겨우 무기고 기숙사에 도착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었으나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아 시신이 아직 옆에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원폭이 떨어졌을 때, 밭에 나와 있어서 거의 전신에 화상을 입고 턱과 가슴이 타 없어져 버려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이었습니다. 시아버지에 의하면 그때까지 들리던 신음소리가 안 들려서 촛불을 켜 보았더니 숨이 끊어져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시아버지가 나무상자로 관을 짜 그 안에 시어머니를 모신 후 고구마밭에서 25

28 태웠습니다. 남편의 죽음 남편은 집 안에 있어서 화상도 전혀 입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부상도 없었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시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어머니를 살리러 밖으로 나왔었다고 합니다. 8 월 15 일 아침 5 시에 잠이 깼습니다. 남편이 아직 안 일어나도 되잖아 라고 했습니다만 시어머니의 7일제였기 때문에 경단이라도 만들어서 바치려고 생각하여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이 먹을 죽도 준비하고서 남편에게 밥 먹자고 깨우니 대답이 없었습니다. 좁은 방에 시아버지와 함께 자고 있었지만 시아버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남편은 숨이 끊어졌던 것입니다. 주검에 파리가 달라붙기 시작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화장하기 위해서 15 일에 죽었습니다만 14 일에 죽은 것으로 사망신고를 내고 그날 중으로 화장했습니다. 그때도 시아버지가 관을 짜 주셔서 남편을 화장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화장할 때 불을 붙인 것이 매우 괴로웠던 듯 이번에는 내게 불을 붙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까지 숨을 쉬고 있었던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는 것은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화장하여야 하니까 불을 붙이기는 했습니다만 불이 타기 시작하자 도저히 옆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해도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어서 돌아왔지만 여기저기서 시체를 태우고 있어서 아직 지면이 뜨거워 손바닥과 무릎, 다리 등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다음날 남편의 뼈를 주우러 갔을 때 바로 머리 위를 적기가 날고 있었는데도 경계경보가 울리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한참 동안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자해용 청산가리 무기고에서는 여자직원 전원에게 청산가리를 나눠 주었습니다. 미국 군인들에게 욕을 당하기라도 하면 창피한 일이므로 그때에는 이것을 먹으라고 해서 받아두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인간인 것 같아서 그 청산가리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관청에 사망신고를 내러 간 사이 청산가리를 입에 넣으려고 물까지 마셨습니다만 그때 시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나까지 죽어 있으면 시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내가 죽으면 안 된다, 나는 시아버지를 간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청산가리를 마시려고 하던 것을 그만뒀습니다. 나는 길었던 머리를 잘라 미안해요, 여보. 내가 함께 갈 수 없으니까 이건 내 마음이에요. 라고 하며 남편의 주검과 함께 태웠습니다. 시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청산가리를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노가촌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 청산가리를 소중히 가지고 있었더니, 보이는 데 26

29 그런 것이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남동생이 그것을 태워버렸습니다. 그 타는 냄새는 뭐라고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시아버지의 죽음 시아버지는 무기고에 있을 때에 피폭하여 등에 큰 화상 입었습니다. 그 때문에 잘 때도 언제나 엎드려서 잤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그 시아버지와 함께 도노가촌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8 월 25 일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직 24 살밖에 안 되었을 때였는데 시어머니, 남편, 시아버지까지 잇따라 잃고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책임을 지고 3 사람의 유골을 고향에 가지고 가서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차마 목숨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도노가촌으로 겨우 9 월 6 일이 되어서야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유골을 가지고 도노가촌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의 친척댁에서 장례식을 치러 주셨습니다. 그 시기의 나는 매우 여위어 있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으므로 형제들 모두가 지켜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친형제라는 것은 정말로 고마운 존재입니다. 식욕이 없어도 모두가 먹으면 덩달아 같이 먹고는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 두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에 억지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좋았던 것 같습니다. 도노가촌에 돌아오고나서도 몇 번인가 히로시마 시내에 아버지와 같이 다녀왔습니다만 어느 날 히로시마 시내에서 외국인 포로였던 사람에게 쫓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녀 매우 지쳐 있었고 또 마쿠라자키 태풍 후라서 길도 아닌 곳을 지나가야 할 때였습니다. 필사적으로 달려서 도망쳤습니다만 너무 무서웠고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재혼 저는 1957 년에 재혼했습니다. 아이가 3 명 있는 분이었는데 막내 사내아이가 2 살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아이를 길러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보니 너무나도 귀여워 자신은 이미 아이는 단념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아이들을 기르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건강 상태 지금까지, 건강 면에서 불안한 점은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를 뺄 때는 피가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근처 치과에 가면 먼저 내과의사 27

30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7 년 정도 전 (2001 년)에는 난소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장에도 전이되어 장을 50 센티 정도 잘라내는 대기술이었습니다. 난소암은 낫기 어려운 병인데 그 위에 장에까지 전이되었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난소암에 걸렸을 때, 음식 맛이 쓰게 느껴졌었습니다만, 최근 또다시 쓰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므로 병원에 갔더니 장폐색이라는 진단을 받아 입원했습니다. 피폭해서 나는 원폭으로 직접 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파리가 손이나 다리, 등등, 몸 여기저기에 알을 낳아 피부 속에서 구더기가 가득 나왔습니다. 그때는 매우 아팠으며 마치 등에같은 큰 벌에 쏘인 것 같았습니다. 그 자국이 지금도 등에 가득해 나는 온천 같은 공동목욕탕에 가는 것이 싫습니다. 병원 선생님께도 등을 보이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십니다. 피폭한 탓이라고 대답하면 피폭 당시 등을 내놓고 있었느냐고 물으시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정말 귀중하고 전쟁 따위는 결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집 안에서도 다툼이 있으면 좋을 것 없으므로 다툼 없는 화목한 집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8

31 정말 다행이었구나 미야치 도시오 29

32 당시의 생활 나는 1917 년에 미쓰기군 나카노쇼촌 (현 오노미치시 인노시마 나카노쇼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나카노쇼 우체국에 근무하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습니다만 약간 밭농사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3 명의 누나 다음에 장남으로서 태어났으며 2 년 후에는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24 년에 여동생이 태어났으나 곧 죽고 그 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아버지와 나, 둘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년에 소집을 받아 제 5 사단 야포병 제 5 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분대장으로서 3 년간, 베트남이나 중국 각지를 전전했습니다. 퇴역 후에는 사촌형이 경영하는 마루카시 백화점 히카리지점에 근무했습니다 년에는 친할아버지가 경영하시는 미야지 강업의 히카리지점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일자리를 옮긴 이유는 본사가 있는 곳이 아버지가 계신 집에서 가까워 아버지 병시중을 들기에 좋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회사를 옮겼을 즈음에 결혼하여 1944 년 4 월에는 장남이 태어났습니다 년 4 월에 2 번째 소집명령을 받게 되자 이때 처자를 인노시마로 피난시켰습니다. 두 번 째 배속처도 야포병 제 5 연대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연대본부에서 병적계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력 부대는 일본 국내방위를 위해 각지로 파견되고 본부에 남아있는 군인은 얼마 안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병적계는 군대의 명부를 작성하거나 군대수첩을 배부하거나 하는 것 등이 주된 업무였기 때문에 군사연습도 없었습니다. 상관인 오카다 중사님은 진세키군 오바타케촌(현 진세키군 진세키 고겐초) 출신으로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방에 우리 2 명만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저에게 매우 잘해 주셨습니다 년 6 월에는 부대의 명칭이 중국군 관할구역 포병보충대 (중국 제 111 부대)로 변경되었습니다. 부대는 히로시마성의 서쪽에 있었으며 성의 호( 壕 )를 에워싸듯 2 층 짜리 병사가 4 5 개 동 정도 있었고 그곳에 4 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피폭 전의 상황 나는 제대 후에 전 근무처로 복귀할 생각이었습니다. 회사도 같을 생각이었던 듯 사장으로부터 중요한 사전회의가 있으니 히카리시로 좀 와 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편지가 부대로 왔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 근무처라고는 하지만 친척회사이기 때문에 그런 용무를 구실로 쉬는 것처럼 오해받는 것이 싫고 눈치가 보여서 외출 허가를 부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오카다 중사님이 아주 친절하게 걱정하지 마라, 허가를 받아 줄 테니까 안심해라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특별히 외출허가를 받을 수 있어 8 월 5 일 일요일은 히카리시에 가 있었습니다. 다음날인 8 월 6 일 월요일에는 아침 9 시에 히로시마역에 도착할 예정의 기차를 타고 부대에 돌아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30

33 8 월 6 일은 아침 4 시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히카리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원폭투하 시각인 8 시 15 분에 기차는 곧 이와쿠니역에 도착하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차가 달리는 굉음 때문에 밖의 소리는 대부분 들리지 않아 폭발음을 알아차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승객들이 히로시마 하늘에 애드벌룬 같은 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라고 하며 일제히 진행 방향 오른쪽 창문으로부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기차 내 방송도 없이 영문을 모른 채 기차는 그대로 계속 달리더니 갑자기 이쓰카이치역에서 멈춰 섰습니다. 앞에 가던 기차도 멈춰 있어 더 이상은 히로시마 방면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승객 전원은 하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나는 9 시에 히로시마역에 도착해 바로 부대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몰라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쓰카이치역 앞은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로 마치 밤처럼 캄캄했습니다. 겨우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한참 있으니 검은 연기가 사라지고 앞이 보이게 되자 가까이에 헌병대의 트럭이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부대에 돌아가고 싶으니 히로시마성까지 태워다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부탁하니 마침 무슨 임무를 막 마친 때였는지 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하사와 중사 2 명 이 타고 있었는데 외상도 없고 대단히 건강해 보였으니까 원폭피해를 직접 받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꼭 그때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피폭 후의 동네의 상황 이쓰카이치에서 히로시마까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정확하게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논 사이로 나있는 오솔길을 가로질러 온 것 같습니다. 그 길에는 피난민들이 물 흐르듯 피난을 가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시내에 들어가고나서는 전찻길을 달렸습니다. 모두가 피난해 버린 후였던가 시내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며 개나 고양이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히로시마성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었지만 아이오이다리 앞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아이오이다리에서부터 부대까지는 엎드리면 코 닿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차에서 내린 후 걸어가려고 했으나 도로가 불에 탄 탓에 뜨거워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군화에 각반도 감고 있었지만 1 미터도 앞으로 걸어갈 수 없어 아이오이다리 앞에서 멈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오이다리에서 50 센티 앞으로 가서 또 50 센티 되돌아오는 식으로 그것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1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갑자기 피부에 닿아 바늘처럼 꽂힐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검은색의 비 때문에 부근은 마치 기름을 뿌려 놓은 듯했습니다만 젖은 얼굴을 손으로 닦아 보아도 기름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허허벌판에는 비를 피할 곳도 없어 전신에 흠뻑 비를 맞은 채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비가 그치자 조금 전과는 달리 완전히 시원해져 가을이 온 것 같았습니다. 뜨거웠던 31

34 도로는 비에 식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대에 돌아가 보니 병사는 끔찍한 상태였습니다. 건물은 모두 부서져 무너지고 타버려서 잿더미가 되어 비에 씻겨 내려가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해져 있었습니다. 오카다 중사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빈사상태였습니다만 아직 숨이 남아 있었습니다. 화상으로 인해 인상이 바뀌어 버려 나는 그분이 오카다 중사라는 것을 못 알아봤습니다만 오카다 중사가 미야치, 너 정말 다행이었구나 라고 말을 걸어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헤어지고 나서 저녁에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오카다 중사는 어딘가로 옮겨져 이미 거기에는 안 계셨습니다. 그리고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8 월 6 일에 검은 비가 내린 직후, 요코카와강의 건너편 부근에서 제 2 총군사령부의 하타 슌로쿠 대장을 만났습니다. 옆에 있던 부관으로부터 하타 대장님이 물에 젖지 않도록 업고 덴마강을 건너라 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타대장님은 몸집이 작은 사람이어서 명령대로 업고 강을 건넜지만 무겁게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구원 활동 서연병장에는 원폭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90 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 군인들이 시체의 소각작업을 하였습니다. 어제는 250 명, 오늘은 300 명, 엄청난 수의 시체를 태웠습니다. 작업 중에 특히 인상에 남아있는 것은 히로시마성의 계단이 있던 곳에 미국 병사의 시체가 2 체 나동그라져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히로시마성에서 가까운 건물 안에 미군 포로가 갇혀 있었으므로 그 중의 2 명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8 월 6 일 당일은 먹을 것이 없어 나는 부하 30 명을 데리고 건빵을 배급받기 위해서 시청에 교섭하러 갔습니다. 예상에 어긋나게 시청 측과 말다툼이 일어나고 말아 건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은 할 수 없이 설탕을 끓인 물에 녹여서 마시고 공복을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8 월 7 일 이후에는 시외로부터의 구원대의 활동 덕분에 주먹밥과 건빵 배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8 월 말까지 구원활동은 계속되었습니다만 그동안 계속 노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8 월 31 일에 마침내 부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해산 때 군의 창고에 남았던 여러 가지 물자가 군인들에게 배급되었습니다. 나는 군복과 담요를 받았습니다. 농가출신자 중에는 군마를 받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9 월 1 일, 이토자키항에서 마중나온 배를 타고 인노시마로 돌아갔습니다. 병에 대해서 인노시마로 돌아온 지 약 2 개월 후, 밭에서 소변을 보는데 갈색 오줌이 1 말 정도 나와 놀랐습니다. 그 후에도 갈색 오줌이 계속 나왔으며 다음 해에는 위장장애가 생겨 32

35 입원했습니다. 그 후, 간도 나빠져 입원했습니다 년에는 방광암에 걸려 입원한 후 현재도 치료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 피폭자건강수첩은 1960 년 9 월에 취득했습니다. 취득하기 전에는 수첩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만 시청의 권유도 있고 하여 받기로 했습니다. 그 후 피폭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병에 걸렸을 때마다 수첩을 교부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후의 생활 전후에는 인노시마에서 작은 잡화점을 시작했습니다. 시골의 잡화점이니 식료품 판매를 비롯하여 쌀이나 보리를 찧어 주기도 하고 기름도 짜 주었으며 후에는 가전제품도 취급했습니다. 생활은 결코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며 아이들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년에 장녀가 태어났습니다만 모자가 함께 바로 죽고 말았습니다 년에 현재의 아내와 재혼, 차남, 삼남, 차녀가 태어났습니다.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몸이 약해 내가 피폭한 영향이 아닐까라고 걱정하였습니다. 아내는 둘째 딸에게 혼담에 지장이 있으니 피폭 2 세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피폭사한 상관에 대해서 전쟁이 그대로 계속되었더라면 일본은 아주 심각한 상태에 놓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많은 희생 위에 지금의 평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피폭을 모면하고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친절하게 외출 허가를 받아 준 오카다 중사님 덕분입니다. 8 월 6 일에 만났을 때 미야치, 정말 다행이었구나 라는 말을 해 주신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을 모르고 지내면서 항상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어떻게든 꼭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식들이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절마다 전화를 해서 마침내 오카다 중사님의 묘가 있는 곳을 찾아내 주었습니다 년에 가족 모두 함께 오카다 중사님의 묘를 찾았습니다. 묘를 방문하여 감사의 마음을 오카다중사에게 전하고 나니 그제야 가슴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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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평화에 대한 바람을 다음 세대에게 마에도이 도키오 35

38 피폭 전의 생활 1945 년 당시 저는 어머니(히사요 씨)와 누나 둘과 함께 구스노키쵸 1 초메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미사사 국민학교 고등과 1 학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학생이라도 공장 같은 곳에 동원되어 작업에 종사하였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같은 반 친구 40 명과 함께 미사사 혼마치 3 쵸메에 있는 닛산 자동차 주식회사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즈에 누나는 저금국에, 쓰루에 누나는 육군 피복지창에 다녔습니다. 8 월 6 일 그날 아침에도 저는 동원처인 닛산 자동차 회사에 있었습니다. 함께 동원된 친구들은 각자 공장 안에 분산되어 작업하고 있었고 저는 사무실에 있으면서 공장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부품을 나르는 등의 잡일을 했습니다. 그때도 공장에서 부품으로 쓰는 나사를 가져오라는 연락이 와서 두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나와 건물 안쪽에 있는 공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팍! 하고 가스 버너 불꽃 같은 파르스름한 빛으로 에워싸이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계경보가 해제되어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는데 순간적으로 폭격을 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순간 아! 이젠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들고 보니 지면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자 점점 안개가 걷히듯이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살아 있다 고 그때 느꼈습니다. 저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가스통 위에 떨어졌는지 손이 벗겨지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피폭 당시의 제 모습은 머리는 빡빡 깎고 목이 둥근 반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심한 화상을 입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바로 자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함께 동원된 친구들 모습도 보이지 않고 가족들이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걷다 보니 커다란 공장 문이 쓰러져있었고 거기에 세 사람이 깔려 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협력해서 구해주고 모두 도망가자!, 도망가자 라고 하면서 공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피폭 후의 모습 거리는 모두 파괴되어 건물 쓰레기투성이라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작은 불씨들 때문에 연기가 났고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거의 다 화상을 입고 있었고 아이를 안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파괴된 쓰레기나 목재 더미 위를 걸어갈 때 튀어나온 못이 신발 밑창을 뚫고 들어와 발을 찔렀으나 그 당시에는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발밑 파편 더미 속에서 사람 살려 라는 신음이 가냘프게 들려왔지만 그림 속 지옥과 같은 상황 속에서 저 자신도 반미치광이가 되어있었기 36

39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저버리고 무조건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집에 도착해보니 집은 완전히 파괴되어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가 있었을 텐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12 살밖에 되지 않은 저는 난 이제 외톨이가 되었다. 라는 생각에 갑자기 불안해졌고 이젠 끝이다. 라는 생각에 망연자실 한동안 무너진 집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불길이 오니까 빨리 도망가거라 라고 하는 바람에 겨우 도망칠 결심을 했습니다. 미리 가족들이 정해놓은 교외에 있는 피난장소를 향해 걸어가다가 같은 공장에 동원되었던 친구인 나카무라 군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는 미타키마치에 사는 친척 집으로 피난하는 중이었고 같이 가자 고 말해주었습니다. 미타키마치는 산 쪽으로 있어서 피해가 작았는지 유리창이 깨진 정도였습니다. 친척 아주머니가 아이고 살아와서 얼마나 다행이냐 며 주먹밥을 주셨는데 식욕이 없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한숨을 돌려서 그런지 온몸이 아프기 시작해서 자기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옷으로 감싸이지 않은 피부는 모두 화상을 입었고 여기저기에 커다란 물집이 생겨서 출렁, 출렁 물이 파도칠 정도로 커져 있었습니다. 모자도 안 쓰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에도 화상을 입었는지 지끈지끈 아팠습니다. 신체의 삼 분의 일 이상을 데이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점심 전이었던 것 같은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화끈거리던 몸이 시원하기에 잠시 비를 맞았습니다.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니 기름같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방사능이 들어있는 검은 비 였습니다. 그 후에 피난장소였던 야스무라(현재의 히로시마시 아사미나미구)에 있는 학교로 가려고 나카무라 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화끈거리고 견딜 수가 없어서 도롯가에 있는 밭에서 오이를 따서 오이즙을 상처에 바르면서 걸어갔습니다. 겨우 학교에 도착해보니 거기에는 구호소가 개설되어있었고 다친 사람들이 빽빽하게 지면에 나란히 뉘여져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진찰을 받았는데 치료라고는 식용유를 환부에 발라줄 뿐이었습니다. 학교에는 피해자들이 넘쳐나서 다시 다른 피난 장소가 할당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쓰루에 누나를 만났습니다. 집에서 피폭한 누나는 머리를 다쳤는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겨우 가족을 만난 저는 휴, 혼자가 아니었다 는 생각에 안심되었습니다. 누나한테서 어머니도 무사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로 갔습니다. 집 마루에서 피폭한 어머니는 다리에는 푹 파인 상처가 있었고 얼굴에는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그 후에 저금국에서 근무하다가 피폭한 가즈에 누나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야스무라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젠 전쟁하러 가지 않아도 되겠다 는 안심감에 휩싸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야스무라에서 2 주일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의 고향인 타카타군 고노무라(현재의 아키타카타시)에 사는 친척 37

40 집으로 피난했습니다. 제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주변 사람들은 얼마 못 살겠다 고 했다고 합니다. 시골에는 의사가 출장식으로 와주었기 때문에 짐수레에 실려서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화상용 흰색 약을 발라줘서 치료다운 치료를 처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받고 싶어도 화상이 심해 옷을 벗을 수가 없어서 가위로 잘랐습니다. 열이 펄펄 끓고 화장실에도 못 가서 다른 사람이 안아서 일을 봐야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없이 막내이고 유일한 아들인 제 간호를 열심히 해주셨습니다. 뜨겁지, 뜨겁지 하면서 밤새 잠도 못 주무시면서 부채질하신 것을 잊지 못합니다. 화상이 아물 무렵에 코피가 자주 터졌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아 의사에게 주사로 지혈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점차 회복되어 그 지역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는 저같이 피폭한 후 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학교에서 전학 온 학생이 세 명 정도 있었습니다. 9 월경에 저는 히로시마의 모습이 궁금해서 혼자 버스를 타고 히로시마 시내로 향했습니다. 옛날 집 근처에서는 이웃에 살던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고 있어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비를 피할 정도의 천막집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제가 피폭한 닛산 자동차 회사에 갔다가 우연히 공장장님과 만나서 무사했느냐? 라는 말씀과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피폭한 어느 여직원은 눈이 튀어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직전까지 같은 사무실에 있었던 저는 다시 한번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같은 공장에 동원되었던 40 명 되는 친구들은 그날 이후 만나지 못해서 아직도 소식을 모릅니다. 생활 재건 2, 3 년 후에 시골에서는 취직할 곳이 없어서 히로시마 시내로 다시 생활 거점을 옮겼습니다. 학력이 없어서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신문 배달을 하거나 건축현장에서 일하거나 닥치는 대로 뭐든지 했습니다. 23 살 때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상대에게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아서 피폭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집사람은 다 알면서도 결혼을 승낙해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신문 등에서 피폭자의 후유증에 대해서 자주 보도되었지만 일절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27 살 때 장남이 태어났고 같은 해 매형의 소개로 토요 공업(현재 마쓰다)에 취직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직장을 자주 옮겼는데 매형이 참고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준데다가 저도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일했습니다. 건강에 대한 불안 함께 야근하는 동료들과 이야기하다가 아이오이바시 다리에서 피폭했다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폭심지 아래라서 이야기를 듣고 아주 놀랐습니다. 그 38

41 사람에게는 ABCC(원폭 상해 조사 위원회)에서 신체 조사를 하라는 의뢰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하고는 같은 피폭자로서 서로 걱정되는 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가 일시적으로 다시 직장에 복귀하긴 했지만 50 살 때 사망했습니다. 저도 항상 건강이 불안하고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저는 그 후 55 살까지 근무한 후 퇴직했습니다. 평화에 대한 바람 제가 이번에 피폭 체험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한 까닭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체력도 떨어지고 해서 더 늦기 전에 제 체험을 젊은 세대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옛날과 같이 강제적으로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64 년 전에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1 세대 앞사람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이해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제가 체험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핵무기 폐지를 위해 젊은 세대들이 평화 운동을 추진해주었으면 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당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부디 핵무기가 폐지된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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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처 후지에 교코 41

44 피폭 전의 상황 그 당시 저는 우지나 국민학교 4 학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41 세이셨는데 육군 선박 사령부에 소속되어있었기 때문에 1 년 내내 군용선을 타고 외지에 나가 계셔서 우지나마치(현재의 히로시마시 미나미구)에 있는 집에는 반년에 한 번 정도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는 31 세이셨고 조산부를 하셨는데 시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환자가 있어서 피난을 못하셨답니다. 1 년 5 개월 된 여동생과 80 세이신 친할머니도 집에 있었습니다. 또, 한반도에서 조선소를 경영하고 계신 큰아버지가 아들을 일본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해서 큰집 사촌도 우리 집에 와 있었습니다. 학생 피신에 대한 기억 1945 년 4 월경에 우지나 국민학교에서는 3 학년부터 6 학년까지 히로시마현 북쪽에 있는 미요시쵸, 사쿠기손, 후노손(현재의 미요시시)으로 나누어서 학생 피신을 시켰는데 저는 미요시쵸의 죠준지 절로 가게 되었습니다. 절에서 먹는 식사는 거의 콩이었습니다. 밥은 콩에 쌀이 조금 붙어있는 정도였고 간식도 콩이었습니다. 어느 날 절집 중학생 아들에게 들려 보낼 도시락용 주먹밥이 없어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피난 온 학생들이 전부 절의 본당으로 모집되었고 누구냐, 가져간 자는 자백하거라 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절 근처에 도모에바시라는 커다란 다리가 있었는데 그 옆으로 신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어서 버찌가 많이 열렸습니다. 상급생들은 그 나무에 올라가서 버찌를 따 먹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상급생들이 부르더니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바깥쪽으로 세워놓고는 망을 보라고 했습니다. 마침 그때 아저씨가 고함을 치면서 오시더니 내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위를 향해서 모두 내려오지 못해! 라고 소리쳐서 상급생들도 내려왔습니다. 팔을 붙잡혀 울고 있는 저에게 아저씨가 어느 집 아이냐 고 물으시기에 제가 죠준지입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좋아 하시더니 팔을 놔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이 나무 아래에는 양파라든지 여러 가지 심어놨다. 그걸 밟아버리면 못 먹게 되지 않느냐. 절대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인제 그만 울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그 아저씨가 찐 고구마와 같은 먹을 것을 우리에게 갖다 주셨습니다. 무서웠지만 아주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배가 고파서 버찌를 따 먹고 있었다고 가엽게 생각하셨나 봅니다. 피신처로 가끔 아이들 부모님께서 과자를 보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자들이 우리에게까지 배급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콩을 볶아서 엿에 섞은 콩엿을 보내주셨지만 전부 선생님께 몰수당했습니다. 상급생 이야기로는 모두 선생님께서 먹었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이가 생겨서 고생했습니다. 신문지를 펼쳐놓고 그 위에서 참빗으로 머리카락을 빗습니다. 피를 빨아서 꺼멓게 된 이가 떨어지면 모두가 똑똑 눌러서 죽였습니다. 입고 있던 옷은 절 옆에 볕이 잘 드는 곳에 펼쳐서 말렸습니다. 42

45 8 월 6 일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마침 1 주일 전에 아버지가 외지에서 돌아오셨기 때문에 갑자기 저도 집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8 월 5 일에는 피신처로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기차표가 없어서 6 일로 연장했습니다. 8 월 6 일 아침에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히로시마역까지 저를 배웅하러 오셨습니다. 이웃 할머니가 미요시로 피신해 있는 손자를 만나러 가신다고 하셔서 저와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게이비센을 타고 진행 방향인 미요시 방향을 등지고 앉아있었는데 첫 번째 터널로 들어가기 직전에 낙하산 3 개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기차는 터널로 들어갔고 그 순간 폭탄이 공중에서 터져버렸습니다. 굉장한 충격이 일어났고 귀에 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앉아 있어서 괜찮았지만 서 있는 사람들은 어른이라도 뒤로 넘어졌습니다. 돌멩이로 막아놓은 것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터널에서 나가보니까 원폭 구름이 아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함께 있던 할머니하고 야, 굉장하다. 하면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이라서 히로시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미요시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께서 히로시마는 전멸되었다고 라디오에서 하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인지도 잘 모른 체 낮에는 풀을 뽑기 위해 학교로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피폭한 사람들을 태운 트럭이 히로시마에서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심하게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트럭에서 줄줄이 내려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을 데어 볼에 벗겨진 피부가 덜렁거려서 그것을 손으로 받치고 있는 사람. 유방이 전부 찢겨버린 여자. 대나무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지팡이 대신 의지하며 비틀비틀 걷는 사람. 그 광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무섭다기보다는 그저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가족들의 피폭 상황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사흘 정도 지나서 히로시마에 있는 가족한테서 절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8 월 12 일인가 13 일경에 근처에 사는 노부라는 6 학년 남학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로 돌아갔습니다. 히로시마역에는 아버지가 마중을 나와계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히지야마 산 옆 길을 따라서 집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가족들의 소식과 앞으로 70 년은 나무나 풀이 나지 않는다 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전신을 천으로 말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는데 상처에서 구더기가 나기 때문에 천을 말아놓았던 것 같습니다. 여동생도 온 얼굴을 다 데어서 까맣게 되어있었습니다. 손발도 화상이 심해서 역시 천을 말아놓았습니다. 어린 동생은 어머니의 모습이 무서워서 계속 울었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어머니와 동생은 엔코바시 정거장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43

46 있었다고 합니다. 떨어지기 1 시간 전쯤에 경계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방공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이웃 아주머니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방공 모자를 빌려 드렸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원폭 빛을 그대로 다 쐬었습니다. 동생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있었기 때문에 왼손과 왼발과 얼굴을 데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일단 등에서 내려서 피난 도중에 여기저기에 있는 방화용 물에 동생을 담가 가면서 도망쳐서 히로시마역 뒤편에 있는 히가시 연병장으로 피난했다고 합니다. 할머니께서는 집에서 피폭하셨습니다. 집은 불타지 않았지만, 건물은 상당히 손상을 입었습니다. 아버지와 사촌은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서 꼬박 이틀 동안 시내를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찾았을 때 어머니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화상으로 온몸이 퉁퉁 부어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8 월 6 일에 마침 아버지가 외지에서 보내주신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외출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다 타버리고 겨우 조금 남은 옷자락을 동생 손에 증거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묶어놓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사촌이 찾아갔을 때 만 한 살(1 년 5 개월)된 동생이 사촌을 알아보고 오빠- 하고 불렀답니다. 그리고 동생 손에 묶인 천을 보고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난 틀렸으니까 아이만 데리고 가세요. 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두 사람을 손수레에 태워서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는 8 월 15 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은 아버지가 낡은 나무를 주워다 뚜껑 없는 관을 짜서 집 뒤에 있는 공터에 가서 화장했습니다.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시체를 태웠기 때문에 그 냄새가 전부 집 안으로 들어와서 지독한 냄새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할머니께 말씀드린 어머니, 커다란 감자가 먹고 싶네요. 였습니다. 전쟁 중에는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옷이나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시골로 가지고 가서 감자와 같은 식량과 교환했습니다. 어머니는 물물 교환으로 손에 넣은 감자 중에서도 아마 제일 작은 것만 먹었을 겁니다. 작은 감자는 떫어서 지금은 도저히 못 먹습니다. 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등불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행사에는 매년 참가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감자도 삶아서 바칩니다. 지금도 커다란 감자를 보면 어머니께 먹여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마을 모습 우지나 국민학교 위쪽 둑을 꽤 넓은 범위까지 화장터로 사용했습니다. 주위에 양철 판을 세워 간단하게 벽을 만들고 시체를 태웠습니다. 양철 판에는 시체의 머리 위치에다가 구멍을 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시체를 태우고 있는 옆을 지나 바다로 44

47 물놀이하러 다녔습니다. 그래서 앗, 지금 머리가 탄다. 라고 생각하거나, 인골도 많이 밟고 지나다녔습니다. 제가 6 학년이 될 때까지 그 일대가 화장터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생활이 계속됐지만, 그때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동생의 상황 어머니와 함께 피폭한 여동생은 살아났습니다. 그때 동생과 같이 어린 나이에 살아남는 것은 기적이라고들 했습니다. 동생은 사람들에게서 회복되어서 다행이구나, 살아나서 얼마나 다행이니 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동생 발목에는 심한 켈로이드 흔적이 남았고 발도 변형되어버렸습니다.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항상 일본식 나막신인 게타를 신고 지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게타를 신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았지만,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를 하게 되면 게타를 신을 수가 없어서 곤란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군인용 양말을 두 켤레 겹쳐서 신발 대신 신고 나갔습니다. 발이 흉측하다고 아이들이 심하게 동생을 놀려댔습니다. 그 당시에는 원폭병이 전염된다는 소문이 나서 동생을 손가락질하면서 손가락이 썪는다 고 하거나 가까이서 보면 옮는다 고 하는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을 맞은 후 세월이 흘러 동생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어서도 구경거리 취급을 당했고 멀리서 일부러 구경하러 오는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그래도 동생은 나와 할머니께 사람들이 그런 취급을 한다는 투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자기 처지를 호소하지도 못하고 그저 할머니, 난 살아있으니까 다행인 거지요? 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계속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이런 흉터가 있어도 살아있어서 다행인 거다 라고 생각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최근에 동생 수기를 봤습니다. 그 수기 안에 그때는 살아있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의 수술을 15 살 정도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고등학교 여름 방학 때 기다리던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언제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된다며 무척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동생의 발은 구두를 신을 만큼 고쳐지지는 않았습니다. 배와 엉덩이 살을 이식해서 발의 변형을 고치려고 했지만 이식한 피부가 검게 변색해버리고 새끼발가락이 3 센티 정도 어긋난 상태는 그대로였습니다. 수술 전에 운동화를 신을 수 있게 될 거야 라고 하던 동생은 65 년이 지난 지금도 신발을 정상적으로 신지 못합니다. 새끼발가락이 스쳐서 아프기 때문에 운동화에 구멍을 뚫고 신었지만, 그렇게 하면 대신 구멍을 뚫은 곳이 스쳐서 상처가 났습니다. 동생 발은 피가 나지 않는 날이 없을 45

48 정도였습니다. 피가 묻으면 사람들이 더럽게 생각한다며 치약 가루를 피가 묻은 곳에 발랐습니다. 동생이 원폭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라다 도민 선생님을 알게 되었는데 뭐든지 상담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하라다 선생님과 상담해서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일본인 목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때는 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이 가난했습니다. 동생은 고등학교 선생님께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아서 열심히 일했고 20 살 때 겨우 편도 여비를 모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목사님 댁에서 신세를 지면서 세탁소에서 일해서 생활비를 벌었답니다. 참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지금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아마 자기는 평범하게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다행히 미국에서 일본인과 결혼해서 아이를 3 명이나 낳았습니다. 오사카에서 생긴 일 동생이 발을 수술하고 1 주일 정도 지났을 때 저는 오사카에 있는 친구에게 놀러 갔습니다. 동생이 이젠 몸 상태도 안정되었으니까 언니, 갔다 와도 돼 라고 했습니다. 준급열차로 가서 저녁때 도착했는데 친구 집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서 물어봤습니다. 젊은 경찰관이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1 시간 가까이 저를 따라다니며 찾아주었습니다. 겨우 친구 집을 찾았기에 정말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했더니 경찰관이 처음으로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히로시마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 사람은 움찔 한발 물러서면서 그 히로시마란 말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네 라고 대답했더니 난 히로시마 여자는 께름칙한데. 원자폭탄 맞은 히로시마 여자는 하며 제가 무슨 병균이라도 옮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저 자신은 피폭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동생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사카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네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가엾으니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후 절대로 히로시마 사람이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양복점에서 생긴 일 제가 십수 년 전 양복점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동생 이름을 말하면서 언니이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요. 왜요. 아시나요? 고 했더니 그 사람은 후루에라는 곳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거기까지 동생 소문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일이나 오사카에서 생긴일,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서 저는 동생이 46

49 미국에 간다는 것을 찬성했습니다. 놀리고 색안경 쓰고 바라보는 일본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곳에 가고 싶어한다면 그것이 동생에게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에 대한 바람 피폭자들의 진짜 아픔은 역시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손가락도 자기가 베여봐야 어느 정도 아픈지 아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베이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로 전달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전쟁은 가슴 속 깊이 난 상처입니다. 외부의 상처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상처가 남고 몇십 년이 지나도 그 상처가 욱신욱신 쑤십니다. 동생은 전쟁 이야기, 원자폭탄 이야기를 아주 싫어했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 어릴 때부터 반드시 어디론가 슬쩍 사라졌습니다. 미국에 가서는 항상 짙은 색 스타킹을 신어서 상처를 감추고 원폭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전쟁은 정말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47

50 48

51 나는 지옥을 보았다 구와바라 기미코 49

52 피폭 전의 상황 저는 그 당시 17 살이었고 히로시마시 미사사 혼마치 3 쵸메(현재의 니시구)에서 어머니, 언니와 셋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오빠가 세 명 있었지만, 큰오빠는 결혼해서 따로 나가 살았고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는 소집령을 받아서 야마구치현에 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히로시마 중앙 방송국 서무과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은 가미나가레카와쵸(현재의 나카구 노보리쵸)에 있었고 주변에 있는 건물들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집들이 철거되어 넓은 터가 생긴 상태였습니다. 방송국은 군과 관련된 방송도 많았기 때문에 창문을 보강해서 공습을 대비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8 월 6 일 그날 아침에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어 집을 바로 나서지 못하고 출근이 늦어졌습니다. 경보가 해제되어 방송국에 도착한 것은 8 시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평소와 같이 직장 사람들과 함께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담당인 국장실로 들어갔는데 안마당 쪽에서 B29 가 날아간다 라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궁금해서 창문 근처로 가려고 하는 순간, 창 밖이 번쩍 빛났습니다. 그것은 성냥을 마찰시켜서 불을 붙인 순간의 빛을 더욱 크고 강하게 한 것 같은 시뻘건 섬광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양손으로 눈과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폭탄이 떨어지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암흑 속에서 붕 하고 무중력 상태같이 되어서 뿌지직 뿌지직 몸 안이 아프다고 할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생겨서 저는 여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폭풍으로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이 제 얼굴과 왼팔에 꽂혀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왼 볼에는 지금도 유리 파편이 들어있습니다. 잠시 가만히 있었더니 복도 쪽에서 모깃소리 같은 사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방 안은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복도를 향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다가 어떤 남자의 등에 부딪쳤습니다. 아, 이 사람을 따라서 도망가면 되겠다, 난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 사람의 벨트를 꼭 붙잡고 뒤를 따라가서 겨우 출구 근처까지 갔습니다. 출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고 힘을 합쳐 무거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은 새벽 정도의 밝기였고 하늘에서는 폭풍으로 날아오른 쓰레기가 툭, 툭 떨어졌습니다.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시커먼 얼굴에 머리는 거꾸로 서 있고 피투성인데다 옷도 찢어져 있어서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누군지도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방송국을 겨냥해서 폭탄을 떨어트렸기 때문에 심하게 폭격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추고쿠 신문사 빌딩에 있던 방송국의 가입과 분실로 가기 위해서 같은 서무과 여직원 2, 3 명과 함께 방송국 마당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방송국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50

53 되었습니다. 주위의 건물들이 모두 파괴되었고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추고쿠 신문사 5, 6 층에 있던 분실 창문에서도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송국에서 가까운 슛케이엔으로 피난하기로 했습니다. 불길은 다가오는데 무너진 집에 깔린 사람들이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저는 자신도 필사적으로 도망치기에 바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슛케이엔에는 많은 사람이 피난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슛케이엔 안에 있는 연못에 걸려있는 다리를 건너서 교바시가와 강둑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슛케이엔 안에 있는 나무들이 불타면서 우리가 있는 둑으로 서서히 불길이 다가오더니 결국은 강변에 있던 커다란 소나무까지 큰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강 안으로 뛰어들어가 가슴까지 물에 담그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는 오스가쵸가 불타기 시작해서 그 재들이 계속 떨어져 내렸습니다. 저쪽과 이쪽에서 다가오는 불길이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저녁때까지 강 속을 들락날락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강둑을 향해 도망쳐와서 주변에는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군대가 있어서 그런지 군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모자를 쓰고 있던 곳만 접시처럼 동그랗게 머리카락이 남아있었고, 그 외에는 전신을 데어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기를 안고 가만히 서 있던 아기 엄마는 상반신은 너덜너덜하고 아기는 이미 죽어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데이고 다친 사람들이 물 좀 주세요, 물 좀 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물을 주면 안 돼! 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하게 화상을 입고 참을 수가 없었는지 강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뛰어든 사람은 대부분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떠내려갔습니다. 상류 쪽에서도 사람들이 자꾸 떠내려와서 강물 전체가 시체로 뒤덮였습니다. 우리가 강물 속에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옆으로 흘러내려 와서 우리는 시체를 손으로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밀어 보냈습니다. 그때는 필사적이라서 무서운 줄도 몰랐습니다. 지옥 그림보다도 더 비참한 광경을 저는 제 눈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불길이 드세서 이동도 하지 못하고 우리는 온종일 슛케이엔 강둑에 발이 묶여있었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에 방송국 국원들을 찾는 구조용 배가 왔습니다. 국원들은 강 동쪽에 있는 히가시 연병장 구호소에 가게 되었고 작은 배로 건너편 육지까지 태워다 줬습니다. 저는 집에 혼자 있는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구호소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료 한 사람이 시내로 들어간다니, 무슨 소리냐 며 극구 말렸습니다. 집이 있던 미사사 혼마치는 히로시마시에서 서쪽으로 있기 때문에 집으로 가려면 불타고 있는 시내를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모두 완강히 반대하기에 저는 할 수 없이 같이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틈을 보아 슬쩍 다른 사람들과 떨어졌습니다. 제가 없는 것을 알아차린 동료들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51

54 미안해요. 하면서 혼자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동료들과 헤어져서 저는 교바시가와에 걸려있는 토키와바시 다리까지 갔습니다. 다리의 서쪽에 있는 하쿠시마 방면으로부터 부상자들이 줄을 지어 건너왔지만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리를 건너려는 철도원 2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요코가와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기에 저는 저 좀 데려다 주세요. 라고 부탁했지만 우리도 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아가씨를 어떻게 데리고 가요? 그냥 구호소에나 가요 라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불타는 거리를 4, 5 미터정도 떨어진 곳에서 몰래 뒤를 쫓아가면서 그들이 돌아보면 멈췄다가 움직이면 다시 따라갔습니다. 제가 계속 따라가니까 그들도 나중엔 우리가 가는 길로만 따라오시오 라면서 위험한 장소를 지나갈 때는 신호를 보내줬습니다. 우리는 불을 피하면서 체신병원 옆을 지나 미사사바시 다리에 도착했습니다. 다리 위에는 양쪽으로 부상당한 군인들이 죽 앉아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2 부대 사람들이었는지, 모두 신음을 내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리를 건너 철도 선로로 갔고 그 선로를 따라 걸어서 요코가와역에 도착했습니다. 철도원 사람들 하고는 여기에서 헤어졌는데 헤어질 때는 조심해서 가시오 라고 해준 말이 생각납니다. 어머니와의 재회 혼자가 된 저는 미사사에 있는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주변은 벌써 어둑어둑해졌지만 길 양쪽으로는 계속 불타고 있었고 훨훨 크게 타오르는 곳에서는 뛰어서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우리 집은 요코가와에서 미사사를 지나 북쪽으로 빠지는 도로변에 있었습니다.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은 불타버리고 없었지만, 근처 길가에서 어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살아계신 것이 너무나 반가워서 저는 뛰어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함께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집 안 2 층 경대 앞에 앉아계셨답니다. 2 층 방은 안쪽으로 무너져버렸지만, 어머니가 계신 곳은 구석이라서 다행히 떨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계단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밖에서 사닥다리를 걸쳐줘서 내려오셨답니다. 집은 오전 중에는 무너진 그대로였는데 불이 점점 옮겨붙어서 오후에 불타버렸답니다. 어머니는 집이 불타기 전에 어떻게든 이불만이라도 건지려고 밖으로 던졌는데 피난 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서 둘러쓰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또, 마당을 방공호처럼 파서 옷이나 귀중품을 파묻었는데 집이 불이 나니까 거기도 불탔답니다. 어머니는 집 앞 하천물을 쉬지 않고 양동이로 퍼다가 불을 끄고 바로 파냈지만, 안에 든 물건들이 대부분 타버렸습니다. 이웃 사람이 어머니에게 미타키로 피난 가자고 얘기했지만, 저와 언니가 걱정되어 집이 불타는 동안은 도로 반대편에 있는 밭으로 52

55 몸을 피해 계속 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날 밤은 모녀 둘이 밭에서 잤습니다. 집 앞 도로는 밤새도록 피난 가는 사람들이나 구원하러 가는 사람들이 오갔고, 우리는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밤중에 구원대 사람에게서 주먹밥을 받아서 어머니와 함께 먹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날이 밝았습니다. 언니를 찾아서 7 일도 사람들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지만, 언니 에미코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언니가 걱정되어 어떻게 된 거지? 죽었나? 하면서 우셨습니다. 저는 그런 엄마를 볼 수가 없어서 그 다음 날인 8 일에 근처에 살던 언니 친구와 함께 언니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때 저는 또 지옥을 보았습니다. 언니는 시모나칸쵸(현재의 나카구 후쿠로마치)에 있는 히로시마 중앙 전화국에 다녔습니다. 저는 요코가와에서 도카이치마치(현재의 나카구 도카이치마치 1 초메)를 지나 전차길 옆을 걸어갔습니다. 불탄 자리는 아직 아무런 정리도 되지 않았지만, 전찻길 도로와 같은 넓은 길은 겨우 걸어갈 정도는 되었습니다. 길거리는 시체로 넘쳐났고 조심하지 않으면 밟을 것 같았습니다. 데라마치(현재의 나카구)쪽에서는 말이 한 마리 둥글둥글하게 크게 부풀어서 죽어있었습니다. 도카이치마치 근처에서는 몸이 새카맣게 탄 사람이 양손을 벌린 채 서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봤더니 그 사람은 선 채 죽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저기에 있는 방화수 물통에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담근 채 포개져 죽어있었습니다. 도로변은 시체로 가득 찼고 개중에는 아직 숨이 남아서 신음을 내는 사람이나 물, 물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멀쩡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 옷은 타버리고 몸은 데어서 부풀러 올라 시커먼 인형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에 언니가 쓰러져 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시체를 넘고 아이오이바시 다리를 건너 가미야쵸(현재의 나카구)까지 가보았지만, 그 이상은 더 갈 수가 없어서 우리는 미사사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니도 살아있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이 터진 지 1 주일 후에 언니가 혼자 돌아왔습니다. 언니는 전화국에서 폭탄을 맞고 많이 다쳤는데 일단 히지야마 산으로 도망쳤다가 그 후에 아키군 가이타이치쵸(현재의 가이타쵸)로 옮겨져서 구호소에 수용되었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1 주일 정도 지내다가 히로시마 시내에 구원 나가는 트럭이 있다는 소릴 듣고 나도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중병인을 태울 수 없다고 거절당했지만, 어떡하던 가야겠다고 결심한 언니는 틈을 타서 트럭 뒤편에 올라타서 도카이치마치까지 그 트럭을 타고 왔답니다. 도카이치부터는 걸어왔다고 하는 언니는 옷이 너덜너덜하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신발도 좌우 다른 것을 신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불타버렸기 때문에 언니를 어머니의 친구 집 방구석에서 쉬게 했더니 그대로 53

56 잠들어버린 후 생사를 헤맸습니다. 언니의 간호 언니의 등에는 온통 유리가 박혀있었고 팔뚝을 크게 베어서 석류처럼 찢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바늘로 언니 등에서 유리 파편을 빼냈는데 상처에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방구석을 빌려준 아주머니댁 딸도 폭탄으로 죽었는데 우리는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 불탄 집터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큰오빠가 와서 타다남은 나무를 모아서 비를 피할 정도의 판잣집을 세워줘서 거기로 가서 언니의 간호를 계속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언니는 구호소에 다닐 수도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바르는 약을 조금 얻어 발랐을 뿐, 치료다운 치료도 하지 못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죄다 빠지고, 피를 토하고, 이젠 끝이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산에 가서 어성초 잎을 따와서 생것을 달여서 차 대신 언니와 나에게 마시게 하셨습니다. 생 어성초 차는 비린내가 났지만, 어머니는 몸에서 독을 빼내주는 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이 효험이 있었는지 언니는 3 개월 동안 누워지냈지만, 그 후 차츰 기력을 회복해서 직장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빠진 머리가 자랄 때까지는 머리를 스커프나 모자로 감췄습니다. 몸에는 상처 자국이 남아서 항상 반팔 옷은 입지 못했고 지금도 찢어졌었던 팔에 난 상처는 패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생활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나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대로 일본은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고 믿어왔고 방송국에 다녔어도 이긴다는 말들만 했지 패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가사키에도 똑같은 폭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 이런 폭탄이 떨어진다면 전쟁은 끝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송국은 가미나가레카와쵸에 있는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서 아키군 후추쵸에 있는 토요 공업 주식회사 안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니를 간호해야 했고 토요 공업은 멀어서 기차로 다녀야 하는데다가 그 당시에는 진주군이 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여자에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서 방송국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1 년 정도 근무하다가 은사님의 소개로 또 다른 회사에 잠시 근무한 후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8 월 6 일과 8 일에 히로시마 시내를 걸어 다녔지만, 원자폭탄 피폭으로 인한 커다란 병에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병이 언제 발병될지 모른다고는 하나 저는 병이 두렵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병이 나면 그때 일입니다. 그것보다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언제나 생각합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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