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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古 下 宋 鎭 禹 傳 記 독립을 향한 執 念 Volume One: The Will To National Liberation - A Portait of Mr. Chinwoo Song

2 刊 行 辭 금년은 古 下 宋 鎭 禹 선생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은 中 央 學 校 校 長 으로서 3 1운동을 주도하였고 東 亞 日 報 를 짊어지고 우리 民 族 史 上 가장 어두웠던 日 帝 36년간 이 겨레를 지켰으며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닦은 民 族 史 의 巨 人 이시다. 선생이 해방후 비극적인 암살로 마감한 쉰 다섯 해의 짧은 생애는 역사의 어둠속을 헤치면서 獨 立 에의 긴 旅 路 를 줄달음쳐온 國 權 회복의 一 生 이었다. 선생은 이 민족에게 실로 모든 것을 바 치고 갔다. 古 下 宋 鎭 禹 선생의 위대한 업적과 사상을 뚜렷이 나타내기 위하여 마침 創 立 70주년을 맞은 東 亞 日 報 社 는 그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古 下 선생 탄신 100주년 추모행사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소에 선생을 따르고 모시던 분들이 말씀하는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함과 동 시에 古 下 선생에 관한 3권의 책을 펴냄으로써 이 위대한 선각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를 갖게 되었다. 첫째는 古 下 선생의 傳 記 이다. 古 下 선생의 전기는 1965년에 본사에서 출간한 바 있으나 수집했 던 자료가 해방후에 불에 타고 6 25사변에 망실된 상황에서 당시 생존자들의 구술과 새로 입수된 자료를 토대로 펴낸 것이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후 古 下 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좀더 자료를 수집하여 보완하고 애매한 곳을 명확히 하며 문장을 가급적 쉽게 한글로 풀어씀으로써 1965년판 의 2배 가까이 증보한 新 刊 을 내게 되었다. 둘째는 古 下 선생의 文 集 이다. 혹독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 하고 글로 발표하는 일이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古 下 선생과 같은 민족지도자로부터 간 단한 안부편지를 받는 것조차 주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古 下 선생이 남기신 글은 많지 아니하 다. 그러나 그동안 꾸준히 일제시대의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하신 글들을 수집해 본 결과 일찍이는 1915년 學 之 光 이라는 동경 유학생들의 기관지에 실린 < 思 想 改 革 論 >에서부터 앙케트에 대한 응답이나 간단한 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편수의 논문을 발굴해 낼 수 있었다. 古 下 文 集 은 이같 은 각종 논문 이외에 古 下 선생과 대담한 기록이나 후일 다른 분들이 선생에 관하여 집필한 人 物 評 과 逸 話 기타 관련자료도 힘닿는대로 수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셋째로는 < 古 下 宋 鎭 禹 評 傳 : 민족민주주의의 언론인 정치가의 생애>이다. 이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 현대정치사를 연구하여 人 物 評 傳 을 저술해온 金 學 俊 교수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와 연구결과 를 토대로 집필한 評 傳 이다. 이 세권의 책은 古 下 선생이 독립항쟁과 민주건국의 민족사에 남기신 지대한 공적과 심오한 사 상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문헌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아니하여 선생의 탄신 일세기를 기념 하여 발간하게 된 것이다. 아무쪼록 이같은 귀중한 문헌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혼란한 이때에 널리 읽혀지기를 바라 고 현명한 독자 여러분의 기탄없는 비판을 기대한다. 1990년 5월 東 亞 日 報 社 長 金 炳 琯 - 2 -

3 차 례 刊 行 辭 古 下 宋 鎭 禹 先 生 傳 을 내면서 序 序 金 炳 琯 高 在 旭 金 俊 淵 高 在 旭 책머리에 : 묘비명( 墓 碑 銘 )을 통해본 일대기 1. 한문비석(정인보 글짓고 쓰다) 2. 한글비석(이희승 번역) 3. 고하 동상 병풍석에 새겨진 일대기( 一 代 記 ) 제1장 사상( 思 想 )의 형성( 形 成 ) 1. 금가지 소년 2. 스승 기삼연( 奇 參 衍 )의 가르침 3. 신학문의 배움터로 4. 인촌( 仁 村 )과의 친교 5. 동경유학의 큰 뜻 6. 이국( 異 國 )의 학창 7. 망국의 한 8. 유학생 친목회와 잡지 학지광( 學 之 光 ) 제2장 3 1 운동과 중앙학교 1. 중앙학교( 中 央 學 校 )의 중흥 2. 피끓는 청년 교육자 3. 내일을 위한 기초학생조직 운동의 책원본부( 策 源 本 部 ) 5. 동경 2 8 선언 전후 6. 천도교와 기독교 등의 합류 7. 아! 기미년 3월 1일 제3장 옥중( 獄 中 )에서 1. 조서( 調 書 )를 중심으로 2. 예심결정서( 豫 審 決 定 書 )를 중심으로 3. 신문보도를 중심으로 4. 판결문을 중심으로 제4장 동아일보를 짊어지고( 上 ) 1. 옥중에서 들은 동아일보 창간 2. 동아일보 사장취임 3. 민립대학( 民 立 大 學 )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전후 4. 육혈포 협박사건과 언론압박탄핵 민중운동 - 3 -

4 5. 조그만 시련 6. 범태평양회의 참석 7. 명논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8. 동아일보 2차 정간과 옥고 9. 신간회( 新 幹 會 )와 고하 제5장 동아일보를 짊어지고( 下 ) 1. 타고르의 시 2. 이충무공 유적보존운동 3. 브나로드 운동 4. 만보산 사건( 萬 寶 山 事 件 )과 소위 만주사변 5. 신동아( 新 東 亞 ) 지와 신가정( 新 家 庭 ) 지 6. 새 한글맞춤법의 보급과 신사참배 거부문제 7. 일장기 표지( 日 章 旗 標 識 ) 말소사건 제6장 일제의 최후발악 1. 중일전쟁 2. 동아일보 강제폐간 3. 봄을 기다리며 4. 일축한 정권이양 교섭 제7장 해방된 조국 1. 아아, 8월 15일 2. 고하와 몽양 3. 국민대회 준비회와 한국민주당의 결성 4. 미군정과 동아일보 복간 5. 고하와 우남( 雩 南 ) 6. 고하와 임정( 臨 政 ) 7. 운명( 殞 命 )-최초의 정치암살 年 譜 - 4 -

5 古 下 宋 鎭 禹 傳 記 를 내면서 10년의 시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말이 있는데 古 下 선생께서 적 아닌 적에게 그 생애 를 마친 지가 어언 20주년이 지났다. 조선은 宋 鎭 禹 씨의 불행한 별세로 말미암아 큰 손실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독립을 하루 빨리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오히려 독립하기 위하여는 좀 더 많은 시련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흉행자들은 조선독립을 지연시키는 것 외에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고하 장례식에서 한 조사( 弔 詞 )의 한 토막이다. 고하선생이 세상을 떠나게 되신 후 선생을 추모하고 선생을 아끼는 선배 동지 후배까지 힘을 합 쳐서 하루빨리 그 어려울 때마다 현명한 길을 밝혀주시던 선생의 기록을 엮어서 선생을 알고자 하는 인사에게 알려주고자 하였는데 이제야 겨우 그 결과를 보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는 동 시에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여 이 전기를 읽을 분의 참고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이다. 선생 별세 당시는 신탁통치 문제로 국내는 반탁( 反 託 ) 찬탁( 贊 託 )으로 혼란을 극한 때이었고 혹 한 氷 下 20도의 추위에 고인의 유해를 선생의 필생의 동지이신 仁 村 과 街 人 두 선생이 현지를 답 사하고 결정한 망우리 장지에 장사한지 두달 후인 1946년 3월 古 下 先 生 遺 蹟 顯 彰 會 가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와 韓 民 黨, 그리고 그밖의 유지들의 합석회의에서 결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顯 彰 會 위원 은 두 단체에 소속한 분들 외에도 많은 인사가 참가하였다. 이러한 회합에서 결정한 일을 추진하 려면 무엇보다도 비용의 갹출과 추진하는 인사가 언제나 앞을 서게 된다. 정세가 지극히 혼란하고 어떠한 사태가 언제 벌어질는지 모르는 험악한 시기였다. 현창회는 망우리 묘지에 우선 표적을 하기 위하여 위당 정인보( 爲 堂 鄭 寅 普 ) 선생의 문( 文 )과 서( 書 )를 겸한 수고를 빌어 작은 碑 石 이나마 표적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곧 전기( 傳 記 )를 편찬하기로 되어서 편찬위원으로는 김준연( 金 俊 淵 ) 장택상( 張 澤 相 ) 정인 보( 鄭 寅 普 ) 설의식( 薛 義 植 ) 유홍( 柳 鴻 ) 김용완( 金 容 完 ) 강병순( 姜 柄 順 ) 고재욱( 高 在 旭 ) 등 외에도 많은 인사가 선정되었다. 편찬사업은 곧 착수되어서 김준연 고재욱이 실제 담당간사로서 일을 보게 되 었다. 전기를 편찬하는 것은 글을 잘 쓰는 것으로만도 될 수 없을 것이며 전기로서 역사적 또는 사회적 가치와 또 전기 인물의 사실적인 표현과 그리고 독자를 위하여는 문학적인 흥미도 겸비되 어야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맨 먼저 부딪친 난관이 집필자를 선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가지로 논의한 결과 첫째, 전기 인물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리고 문학적 소양이 많 고 또 김좌진 장군전( 金 佐 鎭 將 軍 傳 ) 을 쓴 일이 있고, 일부 인사들의 반대로 우남( 雩 南 李 承 晩 ) 전( 傳 )을 쓰고도 출판을 하지 못하였지마는 그러한 실적이 있는 시인 서정주( 徐 廷 柱 )씨에게 기록 을 위촉 담당시켰던 것이다. 1947년 봄의 일이었다. 고하선생의 생애가 원래 비밀을 생명과 같이 알아야 하는 일제시대의 민족지도자였던 관계로 실재한 기록을 찾기에는 극난의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동아일보 지상에 사소한 일이라도 고하선 생께 관계된 것이면 협조 통보를 바라는 광고를 내고 하여 각계 인사들로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귀중한 증거물이 모여 왔다. 그러나 체계있는 전기 기록을 꾸미기에는 너무도 단편적인 것이었다. 필자 서정주씨는 편찬회의 뜻한 바를 존중히 하여 당시 생존하여 계신 여러 인사에게 구술을 받기 시작하였다. 소란한 신탁통치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 美 蘇 共 同 委 員 會 )를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좌우의 대립은 더욱 심하여지고 그리고 1년 이상을 끌어오던 이 회의가 분열되고 공산진영과 민 주진영이 분명해지면서 국내에는 10 1 대구 폭동사건 등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험악한 정세로 인 하여 국민전체가 한동안 어리둥절하고 지냈다. 1948년 역사적 5 10 선거가 실시되고 남한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그리고 여 순반란사건 이 진정된 후에 이 전기 편찬의 일은 실질적으로 착수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불행중의 불행한 - 5 -

6 사태가 돌발하였으니 그것은 그동안 모여진 증빙물을 보관하고 있던 東 亞 日 報 발행소( 舊 京 城 日 報 社 )가 공산분자의 방화로 모든 시설이 소실되면서 선생에 대한 기록도 오유가 되었던 일이다. 이 방화는 東 亞 日 報 를 없애어 5 10선거를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고하선생 관계의 기록으로는 故 차상찬( 車 相 讚 )씨댁에서 개벽( 開 闢 ) 지 등에 게재된 선생의 글과 기록을 정성껏 모아서 한묶 음 보내온 것과 필화사건으로 옥중에서 고생하실 때 인촌선생에게 보낸 친필 서한, 그리고 그밖 에 모아진 선생의 시축( 詩 軸 ), 사진 등 허다한 기록을 소실하게 되어 전기편찬은 일대 암초에 걸 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다시금 소년시절 이래 동지였던 인촌( 仁 村 )선생을 비롯하여 고하선생이 동아일 보사 사장이 되신 이래 24, 25년간을 한결같이 친교가 있고 또 박학강기( 博 學 强 記 )로 유명한 정인 보( 鄭 寅 普 )씨외, 김병로( 金 炳 魯 ) 백관수( 白 寬 洙 ) 노병권( 盧 秉 權 ) 현상윤( 玄 相 允 ) 김준연( 金 俊 淵 ) 장택상 ( 張 澤 相 ) 현준호( 玄 俊 鎬 ) 김동원( 金 東 元 ) 서상일( 徐 相 日 ) 구자옥( 具 滋 玉 ) 설의식( 薛 義 植 )씨 등 고하선생 을 알고 친교가 있던 인사라면 누구를 물론하고 찾아가서 직접 그분들이 보고 들은 바 선생의 일 생에 겪으신 여러 가지 경우의 기억을 구술받아 모아놓은 것이 완전한 것은 되지 못하나마 선생 의 편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노트에 기록되어 이의 정리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또 봉착한 것이 편찬의 경비 갹출이었다. 선생을 흠모하는 고광표( 高 光 表 ) 김상만( 金 相 万 ) 김상형( 金 尙 衡 ) 김승태( 金 昇 泰 ) 등 몇 인사의 찬조를 비롯하여 그밖의 여러분의 도움으로 노트 를 정리하기 시작한지 얼마후인 1950년 6 25 동란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서로 동서, 어디로 갔는 지 알 길이 없었고 1 4 재후퇴 후 한참만에 집필자 徐 씨가 전주에 피난하여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집필을 요청하였으나 徐 씨는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타격인지 그의 건강은 집필을 할 수 있는 형편에 있지 않았고 1953년 수복 후에도 그의 건강은 쉽게 회복을 못보았기 때문에 부득이 집필 자를 달리 구하여야 하게끔 되었다. 그동안 부산 피난시 얼마를 제하고는 매년 기일이면 추념식 ( 追 念 式 )을 유지( 有 志 )들이 거행하는데 그때마다 전기 편찬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인에게는 물론 일반 국민에게나 추모식 회합 인사들에게 죄스러움을 금하기 어려웠다. 여러가지 곡절을 거쳐서 전 집필자인 徐 씨에게서 노트와 그동안 일부 집필한 원고를 인계받게 되자 그 다음에는 소설가 이무영( 李 無 影 )씨에게 그 수고를 위촉하였다. 1956년의 일이었다. 이무영이 담당한지 2년후 일단 원고는 탈고를 보았고 그 원고를 후일 다시 선정된 전기편찬위 원들, 즉 최두선( 崔 斗 善 ) 김준연( 金 俊 淵 ) 장택상( 張 澤 相 ) 주요한( 朱 耀 翰 ) 유홍( 柳 鴻 ) 김용완( 金 容 完 ) 등 제씨와 필자도 그중 한 사람으로서 원고의 회람 수정 등으로 근 2년을 경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유족의 의견을 참고하고 또다시 검토하여 선생의 유덕에 흠이 적게 가도록 노력하여 본 것 이 이 기록이니 독자의 넓은 이해를 바라 마지않는다. 역사학자로서 위당( 爲 堂 )은 선생을 평하여 그 지조( 志 操 ), 도량( 度 量 ), 판단력( 判 斷 力 ), 식견( 識 見 ), 통솔력( 統 率 力 )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보면 이충무공 이래의 처음 인물이며 그후 언제나 이런 위재( 偉 材 )를 우리나라가 가질 것인가 하고 선생을 추모하곤 하였다. 선생께서 가신지 20주년이 지나서 오히려 더욱 선생의 존재가 아쉽고 한스럽기만한 그 위대한 자취를 다 기록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일이며 더욱이 일제 36년간 국내에서 산 기록 그대로이신 그 흔적을 수록하기에도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후일 남북이 통일되면 좋은 자료가 더 많이 모아질 것일 확신하거니와 더욱 토막토막이기는 하 나마 우선 이 정도로 선생의 편모를 국민에게 전하려 하며 오직 불안스럽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1965년 12월 古 下 先 生 傳 記 編 纂 委 員 高 在 旭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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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序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에 고하 송진우( 古 下 宋 鎭 禹 ) 선생은 56세를 일기로 불의의 참변에 의하여 급서하셨다. 해방된지 5개월도 채 못되어서였던 것이다. 교육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일언이폐지( 一 言 以 蔽 之 )해서 민족지도자로서의 선생은 앙지유고( 仰 之 愈 高 ) 찬지유견( 讚 之 愈 堅 )이라고나 할까,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나는 생각 하고 있다. 독자가 선생의 전기를 상독( 詳 讀 ) 음미하여 보면 이런 점이 자연히 해득( 解 得 )될 줄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장황하게 서문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것을 피하고 다만 지식인들이 전기를 일독하 여 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1965년 9월 3일 金 俊 淵 識 - 8 -

9 序 고하 송진우( 古 下 宋 鎭 禹 )선생과는 나는 유다른 인연이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대선배로 선생의 지도를 받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상사로 그분을 모셨다. 선생의 덕망이나 금도( 襟 度 )에 대해서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거니와 세계 대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역사의 진운에 대한 예리한 선견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 不 許 )하였다. 선생은 인촌 김성수( 仁 村 金 性 洙 ) 선생과 더불어 형영상반( 形 影 相 伴 )하여 뜻을 조국의 광복에 두고 일신의 안위를 초개같이 여기면서 암담한 속에서도 희망을 제시하여 곤고( 困 苦 )에 처해서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이를 감내하였다. 선생이 동아일보를 이끌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시종일관 항쟁하고 민중의 각성을 외친 것도 조 국광복을 위한 일념의 발로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생애 55년은 일직선의 강직 그것이었다. 불의와의 타협을 몰랐고, 동요를 몰 랐고, 더구나 굴종( 屈 從 )이란 선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휘였다. 실로 선생이야말로 우리 민족 의 암흑기에 민중과 더불어 있으면서 낙망, 좌절이 일세를 휩쓰는 가운데서도 앞날을 똑바로 내 다보고 군계일학( 群 鷄 一 鶴 )같이 특립( 特 立 )하여 항시 조국광복의 등불을 밝힌 선각자였다. 세태가 어지럽고 인심이 날로 각박하여 방향타를 잃은 일엽주를 방불케 하는 작금에 있어서는 더욱 선생의 풍모를 연상케 되고 그 적확한 선견과 청탁을 병탄( 倂 呑 )하는 고사지풍( 高 士 之 風 )이 아쉬울 뿐이다. 만약 선생이 지각없는 흉한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고 절세의 경륜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의 진로도 달라졌고, 오늘의 현실도 다르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선생이 가신지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전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도 그 동안의 모진 세파의 탓이라 하더라도 만시지탄( 晩 時 之 歎 )이 없지 않다. 후세에 깊이 전승되어 귀감이 되기를 바라 마 지않는 바이다. 1965년 9월 5일 後 學 高 在 旭 識 - 9 -

10 앞머리에: 墓 碑 銘 을 통해 본 一 代 記 1. 고하 송진우( 古 下 宋 鎭 禹 )가 간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고하는 1945년 12월 30일 자객의 흉 탄에 쓰러진 뒤, 서울 교외 망우리 뒷산 산정에 자리잡은 5백여평의 남향 유택( 南 向 幽 宅 )에 고이 잠들었다. 묘소에는 고하의 친우 위당 정인보( 爲 堂 鄭 寅 普 )가 글짓고 글씨 쓴 한문 비석이 1946년 10월에 세워졌다. 이 비문은 고하의 인간과 업적 - 교육자로서의 고하, 언론인으로서의 고하, 항 일투사로서의 고하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고하의 일대기( 一 代 記 )이다. 2. 고하를 창황중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신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 동지와 후배들이 고하 송진 우선생 천장추진위원회( 遷 葬 推 進 委 員 會 ; 위원장 崔 斗 善 )를 구성하고 각계의 성의를 모아 1966년 11월 11일 서울 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 43-2번지 지향산 기슭에 천장하고 1967년 10월 20일 위당 정인보( 爲 堂 鄭 寅 普 )의 한문비석을 한글로 번역한 국문비석을 추가하여 건립 제막하다 년 9월 23일 고하의 유덕을 기리는 각계 유지들이 고하 송진우선생 동상건립 위원회(명 예위원장 尹 潽 善 : 위원장 兪 鎭 午 )를 조직하고 각계 각층의 성의에 힘입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능동 소재 어린이 대공원에 고하 동상을 건립하여 제막하다. 4. 고하의 신정동 유택이 부근의 신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정숙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해쳐짐에 따라 유가족과 동지 및 후배 여러분의 발의에 의하여 고하 송진우선생 천묘장의위원회( 遷 墓 葬 儀 委 員 會 ; 위원장 尹 潽 善 )를 구성하고 국가보훈처 및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서울특별시 동작동 소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옮겨 모시기로 결정하다. 이에 따라 고하의 98회 탄신일에 약 일주 앞 선 1988년 5월 3일 천묘장의( 遷 墓 葬 儀 )의 의식을 거행하다 년 5월 3일 동작동 국립묘지로 천장시 위당 정인보의 글과 글씨로 지어서 망우리에 건 립하였던 한문비석과 양천구 신정동으로 제1차 천장시에 번역하여 건립된 한글비석은 그 크기가 국립묘지 규정에 어긋나서 함께 옮겨모시지 못하고 경기도 성남시 남서울공원묘지 안의 고하의 유가족 묘지에 따로 옮겨 세웠다. 고하가 생존한 최근세 50여년간은 한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혼돈과 파란이 중첩한 시 대로서 고하의 생애는 이 거칠은 물결에 따라서 파문을 그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하의 다사다난한 생애를 알자면 우선 고하의 생존한 50여년간의 혼돈과 파란, 그리고 위기에 처했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고하의 일생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인간과 업적 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앞머리에 국한문 비문과 동상에 새겨진 일대기 를 서론삼아 여기에 소개한다

11 1. 古 下 先 生 宋 君 之 碑 友 人 東 萊 鄭 寅 普. 撰 文 書 丹 幷 篆 額. 世 亂 之 久. 士 患 不 自 樹. 卽 矜 於 節. 又 鮮 克 以 幹 猷 濟. 其 兼 而 具 者. 以 普 朋 游. 有 古 下 宋 君. 君 諱 鎭 禹. 生 湖 南 之 潭 陽. 甲 午 難 時 五 歲 矣. 旣 而 鄕 先 輩 多 糾 義. 雖 敗. 風 烈 貤 被 林 丘. 故 君 志 嚮 夙 兆. 父 壎. 文 儒 才. 君 幾 淬 其 良. 會. 昌 平 高 氏. 延 師 敎 婿 英 吉 利 語. 君 亦 從 受 焉. 高 氏 婿. 卽 金 君 性 洙. 二 人 深 相 得. 同 學 日 本. 歸. 同 辦 中 央 學 校. 又 同 立 東 亞 日 報. 其 他 大 小. 無 不 偕. 校 與 報. 最 聞. 又 最 勞 君. 君 間 投 獄 者 再. 金 君 輒 代 爲 長. 以 侯 君. 君 所 治 法 科. 然 尤 留 心 經 世 方 略. 喜 談 史 感 慨. 己 未 獨 立 宣 言 之 役. 君 在 中 央 校 已 三 年. 前 年 歐 戰 息. 民 族 自 決 議 起. 遠 近 竊 竊 相 咨 報. 皆 以 中 央 校 爲 歸. 而 校 有 特 室 待 直 夜. 君 所 處 也. 金 君 與 玄 君 相 允 恒 在. 謂 戰 端 末 自 晳 人. 其 波 及 吾 者 淺. 然 旣 已 言 自 決. 乘 今 而 動. 卽 徒 死. 猶 階 後. 而 域 內 方 重 足. 多 以 自 於 外 便. 君 力 主 自 內. 卒 皆 同 於 君 顧. 事 祕. 無 所 得 衆. 君 介 玄 君. 展 轉 以 通 天 道 敎. 中 斷 且 連. 而 君 所 敎. 擧 拒 腕. 旣 旦 諸 校 氣 類 密 布. 先 是. 遊 學 生 在 江 戶 者. 謀 欲 發. 至 是. 潛 來 求 鉛 活 字. 亦 因 玄 君. 以 達 君. 則 冬 一 月 也. 二 月. 李 公 昇 薰. 至 自 定 州. 會 金 君 所. 君 告 以 故. 曰. 諾. 老 夫 今 行 矣. 數 日 復 至. 則 出 囊 倒 寫. 皆 私 印 也. 曰. 京 以 北 牧 師 長 老 著 者. 盡 是 皆 許 吾 矣. 李 公 因 自 往 見 天 道 敎 主. 促 之 合. 佛 敎 亦 應. 其 資 齎 南 北. 多 由 金 君. 聯 絡 諸 敎. 又 多 由 玄 君. 至 策 應 滬 江 戶 北 美. 部 署 學 生. 皆 君 總 之. 三 月 一 日. 宣 言 書 發. 署 名 者 被 執. 君 任 後 事. 後 五 日 逮. 在 獄 凡 三 年. 出 未 幾. 長 東 亞 日 報. 君 開 爽. 而 內 善 綜 理. 報 始 絀 於 用. 君 治 之 久. 能 長 財. 間 推 李 公 代. 李 公 去. 又 爲 長. 其 接 衆. 汎 敬 盡 歡. 遇 可 否. 輒 嶽 嶽. 用 是 多 忤. 然 己 未 以 後. 其 秉 大 義 以 言 亢 宗 者. 君 實 爲 之 雄. 報 與 日 法 吏 氷 炭. 記 者 數 繫. 君 嘗 爭 諸 警 務 局. 至 夜 分 歸. 則 一 子 暴 疾. 不 時 治 殤 矣. 普 始 與 君 汎 汎. 君 之 以 汎 太 平 洋 會 議 赴 布 哇 也. 一 別 於 京 驛. 丙 寅 大 喪. 君 有 密 畫. 緣 友 某 以 及 普. 事 未 就. 然 義 同 夷 險. 由 是. 交 漸 密. 是 歲. 西 人 某. 寄 書 報. 激 吾 人 以 繼 厲. 君 促 使 揭. 日 人 惡 之. 報 停. 旋 解. 而 君 坐 罰. 作 踰 年 然 後 已. 久 之. 或 電 傳 滿 洲 萬 寶 山 田 主. 殺 韓 佃 戶. 盡 矣. 有 報 受 而 張 諸 紙. 衆 大 譁. 爭 聚 擊 華 賈. 君 歎 曰. 誰 爲 此 間. 今 若 是. 是 代 仇 相 殘 也 亟 質 言 而 播 布 之. 且 慰 遺 華 人. 信 至. 果 日 軍 僞 爲 之. 李 忠 武 後 孫 貧. 邱 壟 幾 不 守. 君 集 衆 助. 返 其 券. 益 置 祭 田. 建 顯 忠 祠. 凡 以 報 功 作 民. 而 志 士 俠 烈 孤 嫠 之 養. 與 夫 遠 逮 久 繫. 通 問 訊. 資 衣 必 曲 爲 措 注. 日 人 任 韓 事 者. 前 後 五 六 輩. 君 以 爭 而 熟. 皆 重 君 能. 欲 賄 之. 百 方 無 所 撓. 酒 後 絮 言. 時 自 譽. 知 者. 不 謂 過 也. 自 中 日 戰 開. 熛 延 英 美. 淫 威 益 逞. 報 廢. 君 拘 且 二 旬. 往 時 同 志. 或 冒 然 爲 仇 役. 而 君 委 它 避 汚. 終 乃 引 被 自 覆. 不 見 人. 日 降 前 數 日. 日 總 督 以 下. 得 報 慌 懼. 密 邀 君. 委 以 治 安. 君 辭. 謂 所 知 曰. 吾 事 當 自 吾. 焉 有 受 敵 委. 以 爲 治 者 哉. 降 問 至. 世 事 驟 張. 君 臥 如 故. 踰 月 起. 欲 召 集 國 民 大 會. 尋 推 主 民 主 黨. 搘 拄 重 慶 臨 時 政 府. 旣 而. 雩 南 李 公 自 美 至. 白 凡 金 公 自 重 慶 至. 識 益 明. 而 忌 者 磨 牙 環 起. 十 二 月 二 十 八 日 壬 申. 報 美 英 中 蘇 限 年 管 韓 之 議. 癸 酉. 君 謁 金 公. 謀 擧 國 民 而 拒 之. 甲 戌 未 明. 君 方 寢. 特 拳 銃 者 入. 被 數 丸 氣 絶. 年 僅 五 十 六. 配. 柳 氏. 無 子. 以 兄 子 英 洙. 爲 嗣. 君 長 中 人 豐 白. 少 須 眉. 目 長 垂 末 蹙 於 眳. 若 細 而 顧 眄 有 威. 弱 歲 涉 難. 中 間 世 故 轉 謬. 一 持 樂 觀. 謂 敵 亡 可 立 俟. 金 君 嘗 戱 謂 普. 勿 信 古 下 言. 立 俟 者. 今 何 如. 而 君 在 報 社 所 論 載 中 國 現 狀 與 世 界 前 途. 歷 二 十 年 而 無 不 合. 其 長 識 如 此. 君 人 才 也. 方 因 於 跼 蹐. 而 猶 以 所 守. 馭 其 猷. 乃 漆 齒 初 駾. 駸 駸 雲 蒸 龍 變 之 會. 而 蚴 蟉 遽 折. 嗚 呼. 殄 瘁 之 詩. 周 人 己 云. 然 其 時. 又 未 必 如 今 也. 恫 夫. 沒 五 日. 金 君 會 同 人. 葬 之 楊 洲 忘 憂 里. 銘 曰. 朝 之 言. 立 吾 秪. 夕 之 言. 歫 非 類. 笑 敖 不 踰. 酣 號 爰 在. 歷 之 累 紀. 載 之 萬 變. 握 臂 憤 山 憤 海 爲 顫. 苟 非 結 乎 至 衷. 曷 以 貞 夫 始 終. 哀 吾 道 之 蹇 連. 忍 使 君 爲 文 中 之 人. 檀 君 紀 元 四 千 二 百 七 十 九 年 十 月 日 建. 2. 고하( 古 下 )선생 송군( 宋 君 )의 비( 碑 )

12 우인( 友 人 ) 정인보( 鄭 寅 普 ), 글 짓고 글씨 쓰다 세상 어지러움이 오래이면 선비는 스스로가 뜻을 세워 가지 못할까 근심을 하거니와 혹 절조를 자랑할 수는 있어도 지략과 포부를 갖춘 이는 드문데, 그 절조와 포부를 겸해 갖춘 이로 내 친구 중에 고하( 古 下 ) 송군( 宋 君 )이 있다. 군의 휘( 諱 )는 진우( 鎭 禹 )로 호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갑오( 甲 午 =1894) 동학난리 때에는 다섯살 이었다. 그때 많은 동향 선배들이 의병을 일으키니, 비록 싸움에는 패했으나, 그 의열( 義 烈 )이 산 천에 덮였으므로 군의 뜻하고 향하던 바는 이리하여 일찍부터 싹텄다. 아버지 훈( 壎 )은 글하던 선비였으므로 군은 그 장점을 이어받아 힘을 쓰던 중에 마침 창평( 昌 平 ) 고을 고씨( 高 氏 )가 스승을 청하여 그 사위에게 영어를 가르치니 군도 또한 좇아 배웠다. 고씨 의 사위는 곧 김성수( 金 性 洙 )군이었다. 두 사람은 깊이 서로 친하여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와서 같이 중앙학교( 中 央 學 校 )를 세우고 또 같이 동아일보사( 東 亞 日 報 社 )를 설립했으며, 그밖에도 크고 작고간에 같이 일하지 않은 것이 없었 으나, 그 중에도 학교와 신문이 가장 이름난 것이었고 또한 군이 가장 힘을 들인 것이었다. 군은 그 동안 감옥에 들어가기 두 번, 그때마다 김성수군이 곧 대신 사장이 되어서 군이 옥에서 나오 기를 기다렸다. 군이 배우기는 법과( 法 科 )였지만 더욱 경세( 經 世 )의 방략( 方 略 )에 유의하고 역사를 담론하며 비 분 강개하기를 좋아했다. 기미( 己 未 =1919) 독립선언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지 이미 3년, 전해에 구주대전( 歐 洲 大 戰 )이 끝나고 민족자결의 논의가 일어나니 원근에서 은밀히 서로 연락을 하되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이 되었다. 학교에는 숙직하는 방이 있어 군의 거처하는 곳이었고, 김성수군과 현상윤( 玄 相 允 )군이 항상 여 기에 모였다. 이들이 서로 말하기를 전쟁은 백인( 白 人 )에게서 일어났으므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 향은 적겠지만 이미 자결 이라고 하였으니 이 기회를 타고 일어나면 헛되이 그대로 죽더라도 후 일을 위한 길은 열린다 고 했다. 이때 국내는 꼼짝도 못할 형편이라 국외에서부터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중의( 衆 議 )였으 나, 군은 국내부터 일으킬 것을 역설하여 마침내 모두 군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다. 비밀 운동이라 대중을 끌어들일 길이 없었으므로 군은 현상윤군을 중간에 넣어 여러 고비를 겪 어서 천도교와 기맥을 통하게 되고, 그것도 중단이 되었다가는 다시 연결이 되곤 하였다. 군은 동 지들을 분발케 하여 각 학교에 동지들이 많이 들어박히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먼저 동경 유학생들이 일어나기를 꾀하여, 이에 은밀히 사람을 서울로 보내어 연활자( 鉛 活 字 )를 구하니, 이 때에도 현상윤군을 통하여 군이 이것을 알게 되었다. 때는 1월이었다. 2월에 이승훈( 李 昇 薰 )공이 정주( 定 州 )에서 올라와 김성수군 댁에 모였다. 군이 거사계획을 알리 니, 이승훈공은, 좋소. 내가 곧 돌아갔다가 오리다 하고 수일 후에 다시 와서 주머니를 털어 놓으 니 모두 도장이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울 이북의 목사 장로 중 저명한 자는 모두 나에게 거사 에 가담할 것을 승낙하였다 고 하였다. 이승훈공은 곧 천도교주를 찾아가서 운동의 합동을 촉구하 고 불교계 역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남북으로 연락하는 비용은 대개 김성수군이 대었고, 여러 교파와의 연락은 현상윤군이 맡 았고, 상해, 동경, 북미와 연락하는 일, 학생들의 부서( 部 署 )를 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송군 이 총책임을 졌다. 3월 1일 선언서가 발표되고, 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은 모조리 붙들렸다. 군은 뒷일을 맡기로 되 었으나, 5일 만에 붙들리어 옥에 있기 무릇 3년이었다. 옥에서 나오자 얼마 되지 않아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군은 개방적이고 호탕하지마는 안으로

13 행정에서 능하여, 신문사가 그 초창기에는 재정이 군색했으나 군이 오래 일을 보면서 넉넉하게 되었다. 잠시 이승훈공을 사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이공이 사면하면서 다시 사장이 되었다. 군은 여러 사람을 대할 때 누구나 공경하고 마음껏 즐겁게 하였지만, 가부를 결정할 일을 당하 면 곧 굳세게 주장을 하므로, 이로 인해서 남과 거슬리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기미( 己 未 ) 이후로 대의( 大 義 )를 잡고 언론으로써 겨레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 중에는 군이 실로 제 一 인자였다. 신문과 일경( 日 警 )과는 빙탄( 氷 炭 )처럼 서로 용납이 되지 않아 기자들이 자주 붙들리어 갔다. 한 번은 군이 경무국( 警 務 局 )에 가서 밤늦게까지 다투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외아들이 급환에 걸려 불시에 그만 아들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나와 군과는 처음엔 범범한 사이로서, 군이 범태평양회의( 汎 太 平 洋 會 議 )로 하와이로 떠날 때 서 울역에서 한번 전송한 일이 있었는데 병인( 丙 寅 =1926)년 순종황제 국상( 國 喪 )때 군이 비밀 계획을 세워가지고 어느 친구를 통하여 나에게 의논하여 왔다.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결과가 평온 했건 험악했건 정의( 情 義 )는 마찬가지여서 이때로부터 점점 친교가 두터워졌다. 그 해에 서양인 모( 某 )가 신문에 기고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계속 힘 쓸 것을 열렬히 권고해 왔 다. 군은 재촉하여 그것을 게재케 하니 일인( 日 人 )이 미워하게 되어 신문은 정간이 되고 곧 해제 되었으나 군은 그로 인해 벌을 받아 해를 넘긴 후에야 풀려 나왔다. 얼마 후 어떤 통신이 만주 만보산( 萬 寶 山 )에서 중국인 지주가 한인( 韓 人 ) 소작인을 모조리 학살 했다고 전하니, 이 통신을 받아 이것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어서, 이에 민중이 크게 소동을 일 으켜 다투어 화상( 華 商 )들을 습격했다. 군은 탄식하면서 누가 이런 이간을 하였는가. 이것은 원수 를 딴 곳에 두고 공연히 상잔( 相 殘 )하는 짓이다 하고 급히 실정을 밝히는 글을 신문에 싣는 동시 에, 화상들을 찾아서 위문도 하였다. 그 뒤 자세한 소식에 의하여 이 사건은 일군( 日 軍 )이 일부러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충무공의 후손이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위토까지도 수호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군은 널리 기부를 거둬서 그 문권( 文 券 )을 도로 찾고 제전( 祭 田 )을 더 장만케 하고 현충사( 顯 忠 祠 )까지 세웠 으니, 무릇 선열의 공에 보답함으로써 민심을 진작하기 위함이었다. 애국열사 유가족의 부양이라 든가, 혹은 먼 곳에서 붙들려 왔거나 감옥살이 오래 하는 동지들에게는 면회를 하고 의복 음식을 차입하는 등, 자상하게 뒤를 돌보기도 했다. 일인( 日 人 )으로 한국일을 맡았던 총독이 전후 5, 6명,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서로 알게 되 었는데, 그들은 군을 중히 여겨 매수를 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도 여기에 휘어넘어가는 일이 없 었다. 술 먹은 뒤에는 말이 많고 가끔 자기 자랑도 나오곤 하였지만, 군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중일전쟁( 中 日 戰 爭 )이 벌어져서 불꽃이 영( 英 ) 미( 美 )국까지 번진 뒤에는 일본의 행패가 더욱 심 하여지더니 마침내 신문이 폐간되고 군도 구속되어 20여일을 옥에 갇혔다. 이때 동지 중에는 불 근신하게도 적을 위해 일을 하는 자도 나타났으나, 군은 딴청으로 더러운 것을 피하다 못해 이불 을 뒤집어쓰고는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일인이 항복하기 수일전, 일제 총독과 그 부하들이 항복 소식에 접하자 황급히 군을 몰래 청하 여 치안을 위임하니, 군은 이를 거절하고 친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은 마땅히 우리가 할 것이 지 어찌 적의 위탁을 받아 다스릴 수 있겠느냐 고 했다. 일본 항복의 소식이 들어오자 세상일이 모두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군은 전과같이 일체 모 르는 체 하다가 1개월만에 국민대회 소집을 계획하고, 이어 민주당( 民 主 黨 )의 당수로 추대되어 중 경( 重 慶 ) 임시정부( 臨 時 政 府 )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미구에 우남 이승만( 李 承 晩 )공이 미국에서 오 고 백범 김 구( 白 凡 金 九 )공이 중경에서 들어 왔다. 군의 주장이 더욱 분명해지자 그를 꺼려하던 자들이 이를 갈고 사방에서 일어났다

14 12월 28일 임신( 壬 申 )에 미( 美 ) 영( 英 ) 중( 中 ) 소( 蘇 )는 한국을 몇해 기한부로 신탁통치( 信 託 統 治 ) 한다는 보도가 들어왔다. 29일 계유( 癸 酉 )에 김 구공을 찾아 거국적인 거부의 방법을 의논하고 돌 아온 다음날 30일 갑술( 甲 戌 ) 새벽, 군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권총을 갖고 들어온 자들에게 서 몇 방의 총탄을 받고 숨이 끊어졌다. 이 때 나이 겨우 56이었다. 부인은 유씨( 柳 氏 ).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영수( 英 洙 )를 후사( 後 嗣 )로 삼았다. 군의 키는 보통이나, 얼굴이 크고 희며, 수염과 눈썹이 적었고, 눈이 길고 끝이 처져 눈꺼풀이 쭈그러졌고, 눈이 가느다란 것 같으나 주위를 둘러 볼 때에는 위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난리를 겪고 중간에는 세상일이 비뚤어지고 잘못 되었으나 항상 낙관을 갖고, 적의 망하는 것은 서서도 기다릴 수 있다 고 했다. 언젠가 김성수군이 나에게, 고하의 말을 믿지 마시 오. 서서 기다릴 수 있다 하더니 지금 이꼴이 무엇이오 하고, 농담을 한 일도 있었지만, 군이 신문 에 중국의 현상과 세계의 전도를 논한 것이 20년을 지나서도 맞지 않는 것이 없은즉, 그 식견의 탁월함이 이와 같았다. 군은 인재였다. 곤란에 빠져있을 때에도 그 지킬 것을 지켜 그 포부를 밀어왔다. 섬 오랑캐가 비로소 놀라 도망가고 이제부터 될듯 될듯이 구름이 일고 용( 龍 )이 조화를 일으키려는 그 때에 한 번 뜻을 펴 보려다가 갑자기 꺾이었으니, 어허, 나라가 장차 곤궁해 지겠다( 邦 國 殄 瘁 )-< 詩 經 大 雅 瞻 仰 > 라는 시는 주( 周 )나라 사람이 이미 지었다지만, 그때는 아직 반드시 지금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허 슬프다. 군이 돌아간지 닷새만에 김성수군이 동지를 모아 양주 망우리( 楊 州 忘 憂 里 )에 장사를 지냈다. 명( 銘 ) - 아침의 말로 내 근본을 세우고, 저녁의 말로 비류( 非 類 )를 막았도다. 웃고 떠들어도 한 계를 넘지 않고, 취해 소리쳐도 그대로 있었도다. 지나기 여러 십년, 만가지 변화를 겪었도다. 팔 을 걷고 분해 일어나면, 산과 바다도 떨었도다. 깊은 마음 속에 맺힌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처음 부터 끝까지 이처럼 곧을 수 있었으랴. 우리의 길이 비색한 것을 슬퍼하나, 차마 그대를 글 속의 인물로 만들고 말 수야 있으랴. 단군 기원( 檀 君 紀 元 ) 4279년( 丙 戌 =1946) 10월 일 세움. 3. 고하 동상 병풍석에 새겨진 일대기 1910년 나라를 잃은 이래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던 35년간 국내 적진속에서 이 겨레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우시던 대표적 민족지도자이며 광복 전후 공산당의 정체를 미리 간파하고 그들의 흉 계를 봉쇄하여 오늘날 민주적 삶의 기초를 닦아주신 고하 송진우( 古 下 宋 鎭 禹 )선생,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요 정치가요 교육자로서 지용( 智 勇 )이 겸전했던 그 위대한 일생( : 담양출생)은 겨레를 위한 독립쟁취의 혈투이었으며 투옥과 박해와 유혹과 모함의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손문( 孫 文 )이 제창한 3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 여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겨레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신봉하였으며 백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민생주의를 추구하였고 이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문화적 독립을 위한 민문 ( 民 文 )주의를 구국과 독립의 사상적 기초로 삼아 투쟁하였습니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일본 명치대학( 明 治 大 學 )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16년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인재양성에 힘쓰고 널리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일깨우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차대전 말기에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됨을 계기로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때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각종단( 各 宗 團 )과 학생 기타 국내 세력간의 제휴를 이룩하 고 일본 중국 및 구미( 歐 美 )에서 활동하던 지사들을 연결하여 민족대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3 1 운 동을 일으킴으로써 망국 10년만에 회천대업( 回 天 大 業 )의 민족항쟁을 주도하였습니다. 선생은 이

15 운동을 계속 확대하고 뒷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나 곧 구속되어 옥고를 겪었습니다. 출옥후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동아일보를 이끌고 이를 항일독립운동의 발판으로 삼아 이 민족에게 씌워진 멍에를 가로멘 채 독립을 위한 줄기찬 항쟁을 선도하였습니다. 기미 독립선 언 이후 7년만에 순종( 純 宗 )이 돌아가심을 계기로 6 10 만세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고 그로부터 10년후에 다시 베르린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한 마라톤 선수 손기정( 孫 基 禎 )의 가슴에 달린 일 장기를 지운 채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킨 것 등은 끊임없는 독립투쟁의 일 예( 一 例 )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우민정책( 愚 民 政 策 )을 쓰려 하자 선생은 여러 해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고 민립대학 건설의 추진, 문맹 퇴치운동의 전개, 여성지위 향상, 반상타파( 班 常 打 破 ), 지방색 해소( 解 消 ), 스포츠 보급, 유능한 기능인 및 우량 어린이를 찾아서 표 창하는 등 우수한 민족 역량의 배양에 힘썼으며 일제가 백성의 재산을 뺏고 민족자본의 집성( 集 成 )을 방해하자 선생은 물산장려운동을 일으키고 당시 범람했던 일제 물건의 배척운동을 추진하 며 빈곤타파와 농공병행( 農 公 倂 行 ) 등 국력배양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일제가 문화말살 정책으로 언어 문화 및 유적 등을 없애려 하자 선생은 새로 연구된 한글맞춤법을 널리 보급하고 신문학을 장려하며 조선의 노래 등을 제정하여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주력함으로써 문화민족의 긍지를 높이는 한편 단군 세종대왕 및 충무공을 모시는 삼성사( 三 聖 祠 )의 건립운동을 펴고 이 충 무공 유적보존 운동을 일으켜 아산 현충사( 牙 山 顯 忠 祠 )와 한산도 전적( 閑 山 島 戰 蹟 )을 중수( 重 修 ) 하고 권 률( 權 慄 ) 장군의 기공사( 紀 功 祠 )를 중건하는 등 민족의 얼을 고취하였습니다. 또한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으로 이민 혼혈 및 창씨를 강요할 기미를 보이자 선생은 이에 결연히 대항하여 남북 만주 및 중국에서 활약하는 독립군에게는 군자금을, 외지에 흩어진 이산동포들에게는 위문금을 모아 보내고 애국열사들의 유가족을 부양하거나 옥고를 치루는 동지들을 자상하게 뒷바라지 하기 가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한중이간책( 韓 中 離 間 策 )으로서 만보산사 건( 萬 寶 山 事 件 )을 일으켰을 때 선생은 저들의 저의를 미리 알아채고 그 허위 조작임을 폭로하여 국내 화교와 수십만 재만주동포( 在 滿 洲 同 胞 )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케 했고, 이를 계기로 한중 양민족의 우호와 임시정부의 유지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뒷날 한국독립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선 생은 밖으로는 하와이 등지에서 열린 범태평양 민족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여 각국의 유력인사와 끊임없이 접촉하고 국제 친선에 힘쓰는 동시에 안으로는 미국 카나다 등에서 온 선교사들의 종교 및 교육사업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서 신사참배 지시에 불응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 하여 구미 제국과의 우의를 두텁게 하였습니다. 선생의 일생은 자나깨나 민족보전과 독립달성 바 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외동포들은 선생이 이끄는 동아일보를 형태없는 정부로 믿고 의 지했으며 선생을 우리 민족의 등불로 믿고 따랐습니다. 패망을 앞둔 일제가 제1차로 선생에게 여러 번 통치권을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광복을 맞자 국내외 국민의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모체로 삼 았고 해외망명인사들이 귀국하자 환국지사후원회를 결성하여 힘껏 뒷바라지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시대 초기부터 국내에 침투해 온 공산주의의 실상을 간파하고 꾸준히 젊은이들을 올 바로 계도( 啓 導 )해 온 선생은 해방후의 혼란을 틈 타 공산당의 적화야욕이 노골화되자 범민족진영 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그 대표로서 수석총무에 취임하였으며 신탁통치안이 전해지 자 반탁운동을 위한 대책 강구에 분망하던 중 1945년 12월 30일 반민족적 무리의 흉탄에 그 고 매( 高 邁 )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생은 제1회 범태평양 민족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후 귀국선상( 歸 國 船 上 )에서 집필하신 <세계 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명논설에서 당시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운명을 정확히 예언한 바 있 습니다. 선생은 역사의 진운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과 탁월한 식견을 갖춘 분으로서 민족불멸 일제 필망 독립필지의 확고한 신념, 굳은 지조, 웅대한 포부와 경세방략( 經 世 方 略 ), 비범한 통솔력, 불굴

16 의 투지와 넘치는 패기로 일본 제국주의 및 공산주의와 싸우며 암흑시기에 국내에 우뚝서서 이 민족을 수호한 독야청청( 獨 也 靑 靑 )의 기상이었습니다. 어느 사가( 史 家 )는 말하기를 임진왜란 때에 는 무력하나마 정부가 있었지만 일제 침략중에는 그나마도 없는 때에 선생이 이 겨레에게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고 이끌어 왔으니 그 공적은 충무공 이후의 위업( 偉 業 )이라고 찬양한 바 있습니다.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되 자기 한몸이나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남에게는 항상 공경하는 자 세로 마음껏 즐겁게 대하였으나 다른 한편 중인( 衆 人 )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말없이 심사숙고한 뒤에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내세웠습니다. 인품이 호탕하고 개 방적일 뿐만 아니라 감흥이 일면 붓을 들어 능란한 솜씨로 한시( 漢 詩 )를 짓곤 하였습니다. 선생이 하와이에 가시는 선상에서 얻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南 北 東 西 不 見 洲 (사방을 바라보아도 뭍은 안보이는데) 連 天 水 色 閑 行 舟 (하늘과 맞닿은 물빛속에 뱃길만 한가롭네) 安 將 眼 下 太 平 洋 (언젠가 눈아래 태평양 물로) 滌 盡 人 間 萬 古 愁 (만고에 쌓인 인간의 근심을 씻어내볼까) 이제 선생이 가신지 38년만에 그 거룩한 항일독립과 애국 반공의 유지를 후세에 전하여 길이 민족의 사표( 師 表 )로 삼고자 이곳에 뜻을 모아 동상을 세웁니다. 1983년 7월 古 下 宋 鎭 禹 先 生 銅 像 建 立 委 員 會

17 제1장 사상( 思 想 )의 형성( 形 成 ) 1. 금가지 소년 고하가 태어나던 무렵의 국내정국은 이른바 태평 10년의 후반에 속한다.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은 누적된 세도정치의 폐해를 일소하고 폐쇄된 이 나라의 문호 를 개방하여 서구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려는 실력행사였다. 그러나 종주권 유지에 연연한 청( 淸 국)의 개입과 일제의 간계로 개화의 꿈은 무산되었으니 세칭 3일천하가 그것이다. 이때에 이른바 한성조약( 漢 城 條 約 )이 체결됨으로써 격돌 직전에 있던 청일양국은 철병하기에 이르니 우선 전쟁의 위기만은 모면하게 되었다. 민비( 閔 妃 )를 정점으로 한 사대당( 事 大 黨 )은 정적 대원군( 大 院 君 )마저 임오군란( 壬 午 軍 亂 ) 당시 청군에 납치되어 부재중이었으므로 더 한층 가렴주구( 苛 斂 誅 求 )에 혈안이 되었다. 탐관오리의 토색과 수탈은 날로 더욱 심화하여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곳곳에서 소요나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조정은 이를 못본척 못들은 척하여 근본문제를 시정하려 하지 아니했다. 한편 한성조약에 의거해서 청일양국의 군대가 물러가자 호시탐탐 남하의 기회만 엿보고 있던 러시아( 露 西 亞 )는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자기 세력 부식에 혈안이 되었으니 이나라 판도는 이른바 3국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일단 물러간 일제는 침략의 기회를 노리며 독이빨을 갈고, 총리( 總 理 )로 부임한 청국의 원세개( 袁 世 凱 )는 기고만장하여 간섭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국운은 시시각각 으로 암운( 暗 雲 )에 싸여가기만 했다. 이처럼 태풍전야의 고요가 깃든 시기에 험난한 국운을 앞두고 고하는 태어났다. 고하( 古 下 ) 송진우( 宋 鎭 禹 )는 1890 年 ( 庚 寅 高 宗 27 年 ) 5월 8일 전남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全 南 潭 陽 郡 古 之 面 巽 谷 里 )[현 金 城 面 帶 谷 里 소노실]에서 아버지 훈( 壎 ), 어머니 양씨( 梁 氏 )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큰 형 진표( 鎭 杓 ), 둘째 형 종( 鍾 ), 셋째 형 진동( 鎭 彤 ) 세 분과 누님 한 분[뒤에 全 州 李 氏 에게 出 嫁 ], 아래로 누이동생 셋[ 長 妹 는 南 陽 洪 氏 에게, 次 妹 는 全 州 李 氏 에게, 三 妹 는 蔚 山 金 氏 에게 각각 出 嫁 ],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아명( 兒 名 )은 옥윤( 玉 潤 ), 애칭( 愛 稱 )을 금가지 라 하였다. 금가지라는 이름은 태몽에서 나왔다. 양씨부인이 금빛나는 가지를 채소밭에서 한아름을 따는 꿈을 꾼지 얼마 되지 않아 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어머니는 금가지가 빨리 자라서 금과 같이 찬란하게 이 세상을 비춰주는 날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래서 금가지의 성장은 온 집안의 즐거움이었다. 고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여덟 남매와 번다한 친척에게 지극한 우애와 의리를 지켰으나 내 가족, 내 친척이라고 해서 분별없이 후대할 줄은 몰랐다. 형제 친척간에 경제적으로 도운 일은 적 었지만, 조국 광복에 목숨바친 혁명지사의 유가족을 부양한다거나, 곤궁한 학자의 생계 보조나 연 구비 제공은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이처럼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 싸운 애국지사의 일이라면 힘닿는 데까지 괴롭고 번거로움을 가리지 아니하고 보살폈다. 인간으로서, 친구로서, 사회인으로서, 동지로서, 애국자로서 모든 면에서 꿋꿋하고 슬기롭고 명 쾌했던 고하의 일생은 이미 유소년시대의 생활환경이 그 시발점이었다. 말하자면 5대가 동거하는 대가족 생활에서 평화스러운 인격과 호쾌한 인간성이 배태되었던 것이다. 고하를 아는 사람은 그를 가리켜 고집장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의 고집은 커서 신념 으로 변하 고, 신념이 명하는 바는 생사를 무릅쓰고 실천에 옮겼다. 고하가 예닐곱살 때의 일이었다. 형수가 형의 저고리를 마르다가, 도련님, 내 나중에 이걸루 괴단 주머니 하나 만들어 줄께요 하고 말하자 이를 듣기가 무섭게 그것을 당장에 만들어 내라고 졸랐다

18 아이, 도련님두 누가 지금 해준댔나. 형님 저고리 다 해놓구서 만들어준댔지 그러나 어린 금가지는 바느질 그릇을 잡아 나꾸고 저고리 감을 밀어 치우며 졸라대는데, 마침 형 이 나타났다. 옥윤아, 너 훌떡 벗구서 저 눈더미 속에 가서 한 번 딩굴구 오면 지금 해주지 하고 형이 그의 떼를 무마하느라고 한마디 했다. 이 말에 옥윤은 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옷을 훌 훌 벗고 눈더미 속에 가서 딩굴었다. 응 인제 주머니 해 주어야지 형수는 할 수 없이 주머니를 먼저 지어 주고야 저고리를 말랐다. 이런 고집이 장성해서는 의( 義 ) 아닌 일은 행하지 아니한다는 고집으로 변했다. 송씨 집안에서는 조상을 받드는 일이 어느 누구 가문보다도 철저했을 뿐 아니라 가장 경건한 일의 하나였다. 옥윤아, 너는 일찍 자지 제사를 드리는 날이면 어른들은 으례히 어린 옥윤을 일찍 재우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제사 지낼 테야 하고, 금가지는 자지 않고 기다리다 졸음이 오면 찬 물로 세수를 하고 제사시간을 기다렸다. 넌 아직 어리니까 제사를 안 지내도 괜찮다. 이 다음 다 크거든 지내라 괜찮아. 안 졸려, 여봐 내가 어디 졸린 사람같아? 어른들이 그가 잘 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금가지는 얼굴을 어른들 앞에 내어밀면서 끝까지 버티었 다. 갖가지 음식이 있고 각색 과일이 진설되니까 그랬던지는 몰라도 제사를 지내는 날이 내게는 가장 기뻤던 날이야 고하는 후일 집안 아이들에게 이러한 회고담을 한 일이 있다. 금가지는 장난이 심해서 추워지면 언제나 손등이 텄었다. 그 장난 중에서도 자치기 니 사방치 기, 도둑잡기, 연날리기 등의 놀이보다 아이들을 모아놓고는 제사놀이를 하는 것을 가장 즐겼 다. 금가지는 으례 제주( 祭 主 )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 우리 금가지는 세상이 아주 변하더라두 조상은 잘 받들 거야 어머니 양씨는 금가지를 이렇게 추켜올렸다. 금가지는 별로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싸움하는 자리에 가면 신바람이 나서 부채질하기를 좋아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저고리를 훌떡 벗어서 그것이 깃폭인 양 뒤흔들면서 부채질하기를 좋아했다. 싸워라, 싸워라 하고, 심술궂은 장난을 즐겼다. 고하가 태어나던 1890년은 표면적으로 평온한 듯했으나 이씨 조선( 李 氏 朝 鮮 )의 국운이 날로 기 울어져가던 때였다. 평화로운 송씨집 대문 밖으로 한발자국만 내디디어도 나라 안은 벌집 쑤신 듯 소란하기만 했다. 5백년의 연륜을 가진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는 권력쟁탈을 위한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적폐가 누 적되어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 갔다. 갑신정변 이래 무풍 10년을 누려온 친청사대( 親 淸 事 大 )의 족벌세도( 族 閥 勢 道 )는 그 절정에 달하 였다. 상하관료의 토색은 제도화하여 뇌물의 다과( 多 寡 )에 따라 대소관직( 大 小 官 職 )이 주어지고, 아무리 흉악범일지라도 뇌물로써 그 죄를 면하는 등 국정의 문란함은 이를 데 없었다. 원래 호남지방은 풍요한 곡창이어서 어느 지방보다도 국민생활이 부유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 부임하는 수령( 守 令 ), 방백( 方 伯 ) 또는 그 관속들은 봉의 지방으로 생각하고 토색으로 재 물을 모으는 동시에 이를 상납하여 더 좋은 관직을 얻기에 혈안이 되었다

19 이처럼 관료의 학정에 시달리어 온 순박한 농민들은 참다 못해 울분이 폭발하니 1894년( 甲 午 ) 에 전북 고부( 古 阜 )에서 봉기한 것이 세칭 동학란( 東 學 亂 )이다. 본시 동학교( 東 學 敎 )는 보국안민( 輔 國 安 民 ), 제세창생( 濟 世 蒼 生 )을 그 교리로 하였으나 국정이 문 란하고 외세의 침략 기운이 농후해지자 보국안민 외세배척의 결의와 신념으로 뭉쳐서 때가 오기 만을 기다렸다. 이럴 지음 고부군수 조병갑( 趙 秉 甲 )의 잔학무도한 학정에 격분한 농민들은 이곳 동학접주( 東 學 接 主 ) 전봉준( 全 琫 準 - 일명 綠 豆 將 軍 )을 중심으로 분연히 궐기한 것이다. 갑오년 1월 10일의 일 이다. 군아문( 郡 衙 門 )은 일순에 수라장이 되었고 군수 조병갑만은 담을 넘어 도주했으나 약탈의 원흉들은 추상같은 징치( 懲 治 )를 받아야 했다. 전봉준은 약 10일동안 관아에 머무르면서 악정을 깨끗이 징벌하고 자진하여 철수 해산했다. 이른바 제1차 동학란이다. 전봉준 등이 물러가자 다시 들어온 관헌들은 주민을 적대시하고 닥치는대로 감금하고 구타하고 처형하는 등 보복적 횡포를 일삼았다. 무고한 양민들이 무더기로 곤욕에 시달리고 있음을 본 전봉준을 위시한 동학도들은 결연히 일 어났으니 곧 제2차 동학란이다. 1894년 3월 25일 보국안민, 척양, 척왜( 斥 洋, 斥 倭 )의 기치를 높이 들고 궐기하니 울분이 폭발 한 수많은 농민군이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고부를 치고, 금구( 金 溝 ), 부안( 扶 安 ), 정읍( 井 邑 ) 등 전북 일대가 차례로 격파되니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리하여 4월 26일에는 전주성( 全 州 城 )마저 함락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패정권은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힘이 있을 수 없어 겨우 생각해낸 것이 청국 원세개에게 애걸하여 청군을 불러오 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의 동학군은 서정쇄신과 외세배척이 주목적이었는데 청병설을 전해듣자 이리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결과임을 깨닫고 자진하여 철수했다. 동학군의 진압 요청을 받고 출동한 청군이 아산만으로 상륙하자 지금까지 구실만 있으면 침략 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본은 이 기회를 잡아 자기나라 군대를 진주시켰던 것이다. 일제는 10년동안 준비한 무력으로 청군과 일전할 계획아래 급거 인천만으로 상륙하여 일부 군 대는 궁궐을 점령하고 다른 일부는 청군을 공격하며 남하했다. 원래 청군은 그들 허세만 믿고 종 주국의 권위에만 도취되어 있다가 불의에 일군의 공격을 받자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패주하기 에 바빴다. 불과 2개월만에 한반도에서 청군은 그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한편 궁궐에 침입한 일군은 왕실재물과 각종 무기며 마필까지도 약탈하고 국왕을 위협하여 친 일내각( 親 日 內 閣 )을 구성하는 한편 수탈( 收 奪 )조약을 강요하여 체결시키기에 바빴다. 일제의 만행과 조정의 허약함을 보다 못한 동학군은 삼남( 三 南 )의 전군을 총동원하여 항일구국 체( 抗 日 救 國 體 )를 결성하고 불법침입해 온 일제를 격퇴하기로 한 것이다. 이해( 甲 午 ) 9월 18일 재기한 동학군은 10만이 넘었으며 충청도를 진원( 震 源 )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약간의 화승총( 火 繩 銃 )과 죽창, 곤봉,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동학군이었지만 그 기세만은 충천했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석권하고 승승장구로 북진하는 동학군은 공주성( 公 州 城 ) 결전에 임하게 되었 다.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군과 관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처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개전 7일간 의 일진일퇴 끝에 우금티( 牛 今 峙 )고지는 450차의 쟁탈전을 겪었고 골짜기는 시산혈하( 屍 山 血 河 )로 물들었다. 열세한 동학군은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피눈물을 머금고 쫓겨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적하 는 일군에 쫓기어 순창( 淳 昌 )까지 갔으나 재기의 꿈도 사라진채 전봉준( 全 琫 準 ), 김개남( 金 開 南 ),

20 손화중( 孫 華 仲 ) 등 동학군의 지휘자들은 부하와 지방민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철천의 한을 품고 참 형효수( 斬 刑 梟 首 )되었다. 한편 청군을 공격하던 일군은 승세를 몰아 청국본토인 금주반도( 金 州 半 島 ), 산동반도( 山 東 半 島 ) 까지 추적하였다. 이때 미국의 조정으로 강화조약(세칭 馬 關 條 約 )이 성립되었으니 낙조( 落 照 )를 눈 앞에 둔 청국은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받아야 했다. 한반도에서 청국세력을 밀어낸 일제는 기고만장하여 친일내각에게 제도를 개혁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조정은 마지못해 계급타파( 階 級 打 破 ), 과부의 재혼자유( 再 婚 自 由 ) 등 11개항의 개혁을 발 표하였으니 이른바 갑오경장( 甲 午 更 張 )이다. 마관조약 체결을 위하여 청국대표로 건너온 이홍장을 혹은 저격하기도 하고 혹은 위협공갈로 요동반도( 遼 東 半 島 )까지 영유( 領 有 )하게 된 일제를 보자 로, 불, 독( 露, 佛, 獨 ) 3국은 좌시하지만은 아니했다. 이들 세 강국은 요동반도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하니 압력에 못견디어 일제는 이를 청국에 반환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는 즉각 우리 왕조에 반영되었다. 그동안 친일내각에 거세되어 지하에 잠복 해 있던 반일세력( 閔 氏 一 黨 )이 재기하게 되어서 친로배일( 親 露 排 日 ) 주의를 표방하고 김홍집( 金 弘 集 ) 내각을 몰아내고는 친로정부를 수립하니 이것이 박정양( 朴 定 陽 ) 내각이다. 반일친로세력인 민씨 일당이 집권하게 되자 청일전쟁까지 치르면서 한반도 침략에 혈안이 되었 던 일제가 그대로 있을 리 만무했다. 1895년( 乙 未 ) 8월 19일 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三 浦 梧 樓 )의 총지휘로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 安 達 論 藏 )가 인솔하는 일인건달의 무리 50여명은 국왕이 거처하는 경복궁으로 난입했다. 이 를 제지하는 연대장 홍계훈( 洪 啓 薰 ), 궁내대신 이경직( 李 耕 稙 ) 및 수명의 병졸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민비가 거처하는 옥호루( 玉 壺 樓 )로 침입하여 민비를 시해한 후 유해는 향원지 뒤 숲 속에서 석유를 뿌려 소각했다. 한편 다른 한패거리의 낭인들은 국왕의 처소인 건청궁( 乾 淸 宮 )으로 난입하여 국왕( 高 宗 )을 협박 하여 민비를 폐위한다는 승락을 받아가지고 날이 밝자 삼삼오오 궁궐을 빠져나갔다. 이리하여 배일세력은 물러났고 친일세력인 김홍집내각이 다시 등장했다. 이와 같이 되어 국왕( 高 宗 )은 다음해인 1896년( 丙 申 ) 2월 11일 왕세자와 더불어 정동 러시아 공 사관으로 탈출하여 거처를 옮겼다. 이른바 국왕의 아관파천( 俄 館 播 遷 )이다. 아뭏든 국모시해의 비보가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술렁대기 시작했고 통분을 금치못하 는 백성들은 혹은 의병을 일으키고, 혹은 친일세력을 매도하는 등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했 다. 나이 어린 금가지는 세상이야 어찌되든 연이나 날리고, 팽이나 돌리고, 제사놀이나 하면 그만이 었다. 그러나 그가 여섯살 나던 해, 즉 1895( 乙 未 )년 8월 20일, 민비가 일본 공사( 日 本 公 使 ) 미우 라( 三 浦 梧 樓 )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시해되었다는 소문이 번지자 방방곡곡에서 백성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왜놈들이 국모를 죽였대 이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금가지는 아무나 붙들고 물었다. 왜놈, 왜놈이 왜 우리 국모를 죽였어? 어째서 왜놈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남의 나라 국모를 죽이도록 내버려 두었어? 예닐곱의 어린 아이로서는 당돌한 질문이었다. 응? 어머니 얘기해 줘 한번 말을 꺼내면 끝장을 내는 것이 천성인 것은 주머니 사건 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한번 알고자 한 것은 며칠이 걸리든 몇달이 걸리든 알고 나야만 직성이 풀리는 금가지였다. 우리나라가 약하니까 왜놈들이 막 들어왔지

21 어머니 양씨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답이 미쳐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치마 끈을 잡고, 어째서 나라가 약해졌어? 또, 들어왔으면 들어왔지 국모는 왜 죽이느냐 말이야 정말 어린애답지 않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어린 금가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아 니하기로 서로 눈짓을 했다. 더욱이 금가지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감수성이 예민할 뿐더러 그 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되새기고 또 되뇌이고 해서, 순진한 성격에 어떤 뜻밖의 영향이라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아가, 지금 이야기해도 넌 못알아 들어. 다음에 크면 다 얘기해 주지 달래기도 하고, 아주 속일 수도 없어서 왜놈과 민비가 싸우다가 그랬다고 얼버무려 보려고도 했 지만, 고집장이 금가지는 막무가내였다. 밥도 안 먹고 졸라대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어른들은 미우 라가 민비를 죽이게 된 경위를 대강 이야기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미우라가 민비를 해치게 된 원인을 들으면 금가지가 물러설 줄 알았으나 이번에는, 그럼 왜 그 나쁜 놈을 그대로 살려 주어? 잡아다가 죽이면 되잖아? 끝이 없는 질문이었다. 하나를 얘기해 주면 그 다음을 물었고, 그것을 알고는 또 딴 것을 묻는 다. 금가지는 이 사건에 관한 질문을 3년을 두고서 심심하면 끄집어내었다. 그때만 해도 정치는 혼란과 격변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어느 파에 속하여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경향 방방곡곡에 밀탐( 密 探 )꾼이 흩어져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던 시 대였던 만큼, 어른들은 혹시 금가지가 무슨 소리를 하여 남의 의심을 받을까, 적이 근심이 되기도 했다. 아가, 너 그런 얘기 아무한테나 하면 큰일난다 이렇게 타이르면 금가지는 한술 더 뜨기도 했다. 왜 어때? 그럼 입가지구 말도 못할까? 그깐 놈들은 모두 죽여야 해 금가지는 서슬이 시퍼렇게 달려들었다. 집안은 항상 금가지로 인하여 조심스럽기만 했다. 혹시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금가지를 끌고서 슬며시 자리를 피하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어서 내보내 기도 했다. 특히 봇짐 장수가 들어오면 금가지를 얼신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당시 서울의 각 정파 에서는 전국에 남녀 봇짐 장수를 풀어서 소문을 수집하기도 하고, 다른 파 사람들의 동정을 살피 기도 했던 것이다. 2. 스승 기삼연( 奇 參 衍 )의 가르침 국왕( 高 宗 )이 아관에 파천해 있는 동안 러시아는 우리 삼림의 벌채권( 伐 採 權 ), 어업권( 漁 業 權 ), 채광권( 採 鑛 權 ), 심지어는 국토의 조차( 租 借 ) 등등 국가민족자원을 탐식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국왕이 망명과 다름없는 처지에서 이처럼 국가자원을 모조리 방매( 放 賣 )함은 매국 ( 賣 國 )과 다를 바가 없고 뜻있는 국민들은 이에 통분함을 금치 못했다. 갑신정변 당시 망명했던 서재필( 徐 載 弼 )이 10여년만에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했고, 독립협회 를 조직했으며, 서대문밖 영은문( 迎 恩 門 ) 자리에 독립문( 獨 立 門 )을 세우는 등 격동속에서도 신문명 의 밀물은 거세게 들어왔고, 국권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집권자는 이를 처리 소화하기는 커녕 정권유지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국왕이 아관에 파천한지 1년이 넘자 그로서도 무한정 외국공관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고, 서재필 등 우국지사들의 권유도 세찼으므로 1897년( 丁 酉 ) 2월 20일, 파천한지 1년 10일만에 경운 궁( 慶 運 宮 - 現 德 壽 宮 )으로 돌아왔다. 또한 독립협회의 청원을 받아들여서 이해 10월 12일 황제 즉위식( 皇 帝 卽 位 式 )을 환구단( 圜 邱 壇 - 지금 조선호텔 후원)에서 거행하는 동시에 국호를 대한( 大

22 韓 )이라 칭하고 연호도 광무( 光 武 )를 사용하게 되었다. 고하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가 네살 나던 때부터이다. 그로부터 열네살까지 10년간 주 로 한학( 漢 學 )을 공부했다. 그는 첫째라기보다는 끈기있고 근면했다. 고하에게 한문의 초보를 가르친 이는 이웃마을에 살던 여문심( 呂 文 心 )이었고, 일곱살부터는 성 리학자( 性 理 學 者 )이며 애국자인 기삼연( 奇 參 衍 )에게서 글을 배웠다. 기삼연은 저명한 성리학자 노 사 기정진( 蘆 沙 奇 正 鎭 )의 친족으로서 1895년 8월 국모시해사건( 國 母 弑 害 事 件 )이 일어나고, 이듬 해 1월부터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호남창의회맹소( 湖 南 倡 義 會 盟 所 )를 조직하고, 스스로 그 대장이 되어 항일전쟁을 지휘했던 의사이다. 그는 이러한 관계로 일인에게 쫓기어 다니는 몸이었으므로 이리 저리 피해다니다가 송씨 댁에 기식( 寄 食 )하는 몸이 되면서 잠시 고하를 가르쳤으나 그가 고하에게 미친 영향은 참으로 컸다. 즉 고하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 것이다. 고하는 네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일곱살 때에는 이미 한시를 지었다. 低 尾 噴 白 水 (꼬리를 나지막하게 하고는 흰 물을 쏟고) 擧 頭 撐 靑 天 (머리를 들고는 푸른 하늘을 괸다) 이 시는 기( 奇 )선생이 장난에 골몰하여 글읽기를 등한히 하는 옥윤을 불러다가 마을 앞에 놓여 있는 물레방아를 두고 시를 지어 보라고 일렀을 때 지은 <물방아>다. 당시 남도에 흔히 있던 재 래식 물방아를 읊은 것이다. 기 선생은, 분( 噴 )자를 사( 瀉 )자로 고쳐라 이르고는, 한편으로 불과 일곱살 먹은 옥윤의 뛰어난 시재( 詩 才 )와 높은 기상에 내심 크게 놀랐다. 여덟살 무렵에는 같은 물방아를 두고 지은 시에 이런 것이 있다. 欲 知 滄 海 量 (창해의 물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고자) 斗 送 小 溪 水 (작은 시냇물을 말로 되어 보내누나) 역시 표현이 웅대하고 기상이 호방함을 엿볼 수 있다. 고하에게 처음으로 애국 정열을 심은 이는 그의 아버지와 스승 기삼연이었다. 소아( 小 我 )를 버리고 대아( 大 我 )에 살라 이 말은 아버지 훈( 壎 )의 교훈이다. 대의( 大 義 )에 살고 대아( 大 我 )를 위하여 죽는다는 후일의 그의 인생관은 그의 타고난 천성이기 도 했지만, 스승 기삼연과 아버지의 교훈으로 인하여 더욱 굳어졌다. 옥윤아, 너는 저 고비산( 古 比 山 )처럼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란 남아답게 죽을 줄 알아야 한다 스승 기삼연은 고비산을 가리키며 늘 이렇게 말하였다. 고하( 古 下 )라는 아호도 기삼연이 지어 주었다. 고비산 아래에서 낳았고, 고비산 같이 꿋꿋하게 살라고 지어 준 것이었다. 고하는 스승에게서, 사나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나라를 사랑하여야 하는가를 배웠 다. 고하의 일생 경륜은 이 기삼연 스승에게서 얻은 것이 많았다. 진환( 陳 桓 )이 임금을 죽이자 공자께서도 목욕하시고 그를 칠 것을 청하셨으니, 역륜( 斁 倫 )의 변 에는 이웃나라에서도 오히려 그렇거늘 하물며 내 나라 국모의 원수일까보냐. 국민된 자 마땅히 몸을 바쳐 원수를 갚을 때다 ( 伏 以 陳 桓 弑 君 孔 子 沐 浴 請 對 斁 倫 之 變 在 隣 國 猶 再 矧 兮 母 后 之 讐 是 臣 子 嘗 膽 之 秋 ) 이것은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논고열읍문>( 論 告 列 邑 文 )이라는 격문( 檄 文 )의 일부이지

23 마는, 그는 손곡리( 巽 谷 里 )로 들어앉은 뒤에도, 아, 주욕( 主 辱 )의 날에 죽지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니 이 못난 것이 오늘도 못죽고 살아 있구 나. 아, 이 못난 인간이 오늘 하루를 또 살았구나 국민된 자의 도리를 지키지 못함이 분해.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이로되, 죽을 만큼 변변치 도 못한 인간으로 태어났어 아침상을 받을 때나 자리에 들 때에는 으례 이렇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는 기삼연, 갑자기 술 을 찾아 마시고는 울분에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는 기삼연이었다. 글을 가르치다가도 불현듯 나라 일에 생각이 마칠 때면 근심이 충천하여 어지러워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옥윤아, 그만 책을 덮어라. 사람이란 배우는 것만을 능사로 삼아서도 안돼 공부함은 목적이 있는 법이야. 목적 없는 공부는 아무런 값어치도 없어. 이 목적이란 사람의 도리를 하는 데 있 어. 사람의 사람된 도리는 의리를 지켜야 해. 부모님께 대한 의리, 동기에 대한 의리, 친구에 대 한 의리, 스승에 대한 의리, 나라에 대한 의리 --, 이 많은 의리 중에서 가장 큰 의리가 나라에 대한 의리야. 너 봐라. 왜놈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국모를 저희 마음대로 죽였어도 끽소리 하는 사람이 없잖아? 요새는 왜놈들의 세력이 커지니까, 이제는 또 아라사 놈들이 궁중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지 않나. 아라사의 앞잡이 이범진( 李 範 晋 )이 아라사 공사에게 붙어 다니더니 수병( 手 兵 ) 백명을 궁 안에 넣어 상감과 세자를 저희 공관으로 모셔가지 않았어? 이제는 또 아 라사 마음대로 내각을 만들어 놓는구나. 이완용( 李 完 用 )이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이기에 간에 가서 붙고, 쓸개에 가서 붙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놈이야 이번에는 또 아라사 앞 잡이로 총리가 되었으니. 이놈이 나중에는 꼭 나라를 팔아먹을 놈이야 하고, 한탄하는가 하면 시를 짓다 말고 벌떡 일어나, 옥윤아, 이리 따라 오너라. 바람이나 쐬러 가자 하고, 동구바깥 큰 느티나무를 지나 산기슭으로 옥윤을 끌고 가서는 멀리 서울 쪽을 가리키며, 옥윤아 봐라. 저 서울 쪽 하늘이 벌겋지? 왜 그런지 넌 모르지? 이 나라 젊은이들의 핏빛이 하 늘에도 서린거야. 지금 서울에서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바로잡자고 피를 흘리고 있어. 너의 피도 붉겠지? 하고 말하기도 했다. 옥윤은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를 몰랐지만 기삼연은 자기의 뜻이 이 홍 안 소년의 마음에 그대로 비치는 것에 만족하였을 것이다. 기삼연의 한마디 한마디는 고하도 모르는 사이에 한자루의 예리한 칼로 그의 가슴속에서 달구 어져서 벼리어지고 갈아졌다. 고하 일생의 경륜의 터전은 이때 이곳에서 마련되었다고 해도 지나 친 말은 아니다.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짐승만도 못해. 네가 글을 읽고 쓰고 배우고 하는 것도 오직 너 를 나라에 바치고 나라를 이룩하기 위함이야. 아무리 글을 많이 배우고 읽었다 하더라도 그 글 을 잘못 쓴다면 글을 배우지 아니함만 못하고, 도리어 제 몸을 욕되게 하는 수가 있어. 그러기 에 너는 배워야 하고, 배우되 그에 그치지 않고 배운 보람을 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 리( 性 理 )의 원리를 깨우쳐야 하느니라 기선생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을 되풀이했다. 어린 옥윤은 처음에는 스승의 성리학설이 무슨 소린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 우쳐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옥윤아. 알아듣겠느냐. 이( 理 )라는 것은 하나 됨을 기약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하나가 되는 법 이야. 다만 모두 다른 곳마다 도기( 道 器 )의 분별만 잘 한다면 이( 理 )의 하나 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은 없어. 그러기에 글하는 자 평생의 박문약례( 博 文 約 禮 )가 다 분수상( 分 殊 上 )의 공부요, 이일 처( 理 一 處 )에 이르고 보면 일이관지( 一 以 貫 之 ) 한마디로써 다 이루어지니 역( 易 )의 괘효단상( 卦 爻

24 彖 象 )이 모두 이 분수상( 分 殊 上 )이야기요, 이일처( 理 一 處 )에 이르고 나면 태극생양의( 太 極 生 兩 儀 ) 한마디로 되는 것이야. 그것을 뒷사람들이 몰라서 반드시 분수로 이( 理 )를 박아서 유무( 有 無 )의 극한( 極 限 )에 도망하였어 ( 理 也 者 不 期 一 而 自 無 不 一 也. 但 能 於 萬 殊 處 截 斷 得 道 器 分 明 則 理 之 不 一 非 斷 憂 也. 是 以 學 者 平 生 博 文 約 禮 皆 是 分 殊 上 工 夫. 而 至 於 理 一 處 一 以 貫 之. 一 句 巳 是 多. 是 以 卦 爻 彖 象 皆 是 分 殊 上 說 話. 乃 至 後 世 人 之 誠 慮 益 下. 而 後 賢 爲 人 之 意 敎 緊 必 得 分 殊 明 而 理 自 一 則 盖 遯 乎 有 無 限 極 矣.) 봐라 옥윤아. 마치 손 하나를 쥐었다 폈다, 엎었다 뒤집었다 하는 것과 같이, 또한 몸뚱이 하나 로 가고, 멎고 앉고, 눕는 것과 같이, 손은 오무리거나 펴거나 손은 하나 뿐이오, 뒤집든 엎든 손은 하나 뿐이지 둘은 아니지 않느냐. 몸뚱이도 역시 가거나, 멎거나, 앉거나, 눕거나 그 몸은 하나 뿐이지. 그와 마찬가지로 이일( 理 一 )이란 것도 분수( 分 殊 ) 밖의 것은 아니야 이리하여 고하는 네살부터 열네살까지 10년 동안에 유학의 경전을 비롯하여 서화담( 徐 花 潭 ), 이 퇴계( 李 退 溪 ), 이율곡( 李 栗 谷 ) 등 이조 거유( 巨 儒 )들의 학문을 차례차례로 공부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명과 영향을 받은 것은 기노사( 奇 蘆 沙 )의 성리학설( 性 理 學 說 )이었다. 만약에 우리의 처지가 태평성대였다면 나는 학자가 되었을지 몰라. 그 중에서도 성리학에 몰두 하게 되었을 거야. 나는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 그러나 국내 국외의 모든 정세가 나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게 했었어 뒷날 고하는 이렇게 술회한 일이 있다. 만약 기 선생이 의병대장이 되어 나설만큼 극진한 애국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역시 학문에 만족하였을지 몰라 하고, 고하는 기삼연을 홀로 추억했다. 그러므로 고하가 애국애족을 일생의 구호로서 삼은 것도 스승 기삼연의 민족관( 民 族 觀 )에서 출발한 것이며, 또한 그의 국가관( 國 家 觀 )에 터잡은 것이었다. 3. 신학문의 배움터로 고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처참한 운명을 보면서 자랐다. 이와같은 격동 속에서 고하는 열네살 되던 계묘( 癸 卯 )년(1903 光 武 7 年 )까지 한학을 배웠다. 열네 살 때에는 숙부 육( 堉 )( 號. 守 山 )에게서 수학( 數 學 )을 배우기도 했다. 고하가 열다섯 되던 해에는 노일전쟁( 露 日 戰 爭 )이 일어났다. 영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자, 1902년 1월, 영일공수동맹( 英 日 攻 守 同 盟 )을 체결하니 이에 힘을 얻은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대로 선전포고( 對 露 宣 戰 布 告 )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선전포고와 동시에 여순항( 旅 順 港 )을 봉쇄하여 황해함대( 黃 海 艦 隊 )를 격파하고 다음날 에는 인천항에 정박중인 2척의 러시아 함정을 무찌르고 인천으로 상륙했다. 일본군은 간발의 여 유도 주지 않고 북진하니 청일전쟁에 이어 또다시 이 나라는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히게 되었다. 승승장구 북진을 계속한 일본군은 이듬해(1905) 1월에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여순( 旅 順 ) 을 함락하였고, 이어 3월 10일에는 봉천( 奉 天 )을 점령했다.(일본은 이 날을 육군기념일로 정함) 이 로써 극동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의 육군 주력은 섬멸된 것이다. 이어 5월 27일 최대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여 발틱함대를 동양해역에 돌려 최후 일전을 감행했 으나 이른바 일본해 해전( 日 本 海 海 戰 )에서 섬멸됨으로서 노일전쟁은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났 다.(일본은 이 날을 해군기념일로 정함). 혁명전야의 러시아나, 미약한 국력의 일본은 전쟁을 더 계속할 기력이 없었다. 이때 미국의 중 재로 1905년 9월 5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이른바 프오츠마스 조약이다. 그런데 이 조약 제1조에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 한다고 규정한 것은 한국을 일

25 본의 마음대로 처리하겠다는 명문( 明 文 )인 것이다. 일제는 이와같은 노일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간발의 여유도 없이 한국침략의 독수( 毒 手 )를 뻗어왔 다. 특명전권대사 이등박문( 伊 騰 博 文 )은 이해(1905) 11월 9일 당당한 기세로 서울에 와서 그들이 이미 마련한 조약을 체결하도록 위협과 회유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일주일동안 소름끼칠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국왕과 일부 애국각료( 愛 國 閣 僚 )들은 끝까 지 반대하였으나 이완용( 李 完 用 - 學 部 大 臣 )을 위시한 이근택( 李 根 澤 - 軍 部 大 臣 ), 이지용( 李 址 鎔 - 內 部 大 臣 ), 박제순( 朴 齊 純 - 外 部 大 臣 ), 권중현( 權 重 顯 - 農 商 工 部 大 臣 ) 등은 책임을 국왕 고종황제 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니 을사 망국조약( 亡 國 條 約 )은 이처럼 어이없이 맺어진 것이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일명 五 條 約 )이 조인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민심은 극도로 혼란했다. 비분강개한 애국지사 중에는 혹은 순절( 殉 節 )로, 혹은 망명으로, 혹은 의병을 일으켜서 일제에 항 거하였으나 국권을 회복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했다. 이와같은 혼란과 격동을 앞두고 고하는 당시 조혼( 早 婚 )의 관습을 따라 부인 유씨( 柳 氏 )와 결혼했다. 고하는 유씨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얻었 으나 그 딸을 세살 때 잃었고, 그로부터 20년후 부평결연( 浮 萍 結 緣 )으로 한 아들을 얻었으나 그마 저도 세살이 못되어 잃었다. 뒤늦게 사백( 舍 伯 )의 아들 영수( 英 洙 )를 양자로 맞아 후사를 잇고 있 다. 자녀를 낳았으나 길러본 일이 거의 없다시피한 고하였으므로 가정인으로서는 정말 쓸쓸한 일생 이었다. 그러나 그는 퍽 냉정할 것 같으면서도 훈훈한 인정이 있었으니 동료나 아랫사람이 자녀 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진심으로 축복을 보냈다. 낳는게 제일이 아니야. 잘 키워서 잘 가르쳐야지 하고, 고하는 축하금을 보내는 일도 잊지 아니하였다. 소박한 가장차원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던 대신, 고하는 보다 더 큰 사랑속에서 그의 전생애를 살았다. 고하가 혈육이 없었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민족에게는 도리어 득이었다 할까. 고하가 일생을 두고 아내와 금슬좋은 부부로 사생활에 몰두하지 못한 것은 아내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인 유씨는 고하의 삶의 반려( 伴 侶 )로서 부덕이나 인물이 빠지는 여성 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고하는 가정을 깨뜨리고 부인과 따로 지내야만 했던가. 소년시절의 고하는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깊고 생각이 의젓한 장자( 長 者 )적 성격 의 소유자였다. 이런 성격이 그로 하여금 정치에 몰두하게 했고 그 개인보다는 민족의 행복을 위 해서, 그 가정보다는 국가의 안위에 생의 목표를 두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나이에 달콤한 신 혼 생활 속에 젖어있을 때 그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왔으니 웅지( 雄 志 )를 펼칠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고하가 열여섯살 되던 해, 즉 결혼한 다음해가 바로 보호국( 保 護 國 )으로 전락하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슬픈 해였다. 고하는 이때 장성( 長 城 ) 백양사( 白 羊 寺 )로 들어가 다시 한학을 닦고 있었다. 이때의 스승 김직부( 金 直 夫 )도, 그 당시 학자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국가의 존망에 무관심 한 선비는 아니었던 만큼 이 수도생활은 고하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잠기게 했고 경륜을 쌓게 하 여 인생의 새 출발을 약속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노 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데오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노일강화회의( 露 日 講 和 會 議 )가 열리어 한국내에 있어서의 일본의 특수 지위를 인정한다 는 등의 조문이 성립되 고, 대한제국의 주권은 강화회의 때 대한제국의 참석도 없이 대한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일본의 통감부( 統 監 府 )가 설치되어 처음에는 하세가와( 長 谷 川 好 道 )가 통감 대리( 統 監 代 理 )로 되었다. 그 이듬해 이또오( 伊 藤 博 文 )가 정식으로 통감으로 부임해 왔다. 이무렵 고하는 일년 반에 걸친 백양사의 수도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서울을 다

26 녀 돌아온 아버지 훈은 아들을 붙들고, 나라는 이미 기울어졌어 하고 비분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정치를 잘못한 죄도 있지만 왜인들의 신학문 이 크게 우리를 압도한 것이야. 왜인들은 일찍부터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모든 무기를 장만하고 제도를 고쳤으므로 놀랄만한 강국이 된 거야. 우리는 꿈을 꾸고 있었지. 우물안 개구리처럼 바깥 세상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 다는 것을 통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알려는 생각조차도 가져 본 적이 없어. 그러는 동안에 왜 인들은 서양 문명을 끌어들이고 배우고 하여 산업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깨우쳤으니 우리가 그 놈들을 따라갈 수가 있겠느냐. 이 얼마나 통분한 노릇이냐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는 않아. 우리만 굳게 뭉쳐서 노력한다면 당파싸움만 아니하고 일심협력 하여 신문명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민족이 백년 할 것을 2, 30년 안에 회복할 수 있어 이제 남은 길은 하루라도 빨리 일인들이 배운 그 이상의 신학문 을 배워서 학문으로나 산업으 로나 우리가 앞서서 그들을 이기는 길 뿐이야. 배우는 일 -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어. 무엇보다 도 영어를 먼저 배워야 해 훈은 아들에게 타이르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 훈은 과거를 보려고 여러해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망국의 조짐은 날로 다가오는데 국정 은 혼미와 격동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와같은 나라꼴에 실망과 격분을 느낀 그는 서울생활 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우선 신학문을 배워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학 교 설립을 주동하였다. 그는 적으나마 사재( 私 財 )를 기울여서 경비의 일부를 담당하고 학교를 설 립했다. 그리고 신학문 배우기를 실현하고 극심한 반대를 하는 촌 노인들을 설득하여 학교에 나 오게 권고하기를 일삼았다. 이것이 바로 담양학교( 潭 陽 學 校 )이다. 이때 창평( 昌 平 )(현재 潭 陽 郡 昌 平 面 )에는 이미 신학문 수업을 위한 학교가 세워져 있었다. 이 학교는 영학숙( 英 學 塾 )으로 그 설립자는 전 동아일보사장( 東 亞 日 報 社 長 ) 고재욱( 高 在 旭 )의 조부 고 정주( 高 鼎 柱 )였다. 신학문 을 배워야만 나라를 구하고 겨레가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침통한 말씀을 듣고난 고하 는 며칠동안 울에 갇힌 사자처럼 집근처를 배회했다. 울적함을 풀 길이 없어 산으로 들로 혹은 물가로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너무도 높고 튼튼했다. 아버지. 저는 다시 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난 아버지 훈은 어머니의 지나친 자애 때문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이 오해 는 곧 풀렸다. 절에 보내는 대신 저를 창평으로 보내 주세요. 창평에는 여러 친구들이 모여서 신학문을 배운 다는데 좋아, 네 뜻이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라 아버지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튿날 고하는 창평을 향해 떠났다. 고하의 나이 열일곱살 때의 일이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은 이 무렵의 고하에게 크나큰 굴욕감과 반항심을 가져다 주었다. 이 조약 이 조국 운명의 마지막임을 깨달을만한 나이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아버지 훈의 교훈과 스승 기 삼연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고하는 남달리 투철한 조국관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열혈소년 고하를 울린 것은 황성신문( 皇 城 新 聞 )에 주필 장지연( 張 志 淵 )이 쓴 <시일야방 성대곡( 是 日 也 放 聲 大 哭 )>이라는 사설이었다. 그리고 보호조약이 맺어질 때의 시종무관장( 侍 從 武 官 長 ) 충정공 민영환( 忠 正 公 閔 泳 煥 )이 비통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사건은 더욱 소년의 가슴속을 아프게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고하의 입에서 신문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27 정치를 하자면 신문이 따라야지 날카로운 필봉을 어찌 칼로써 당하겠소? 총으로 당하겠소? 글은 만인을 웃기고 울리고 죽이고 살릴 수 있지 고하는 신문사설들을 오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말끝마다 황성신문과 장지연의 사설을 끄집 어 내었고 신문의 존재와 위력을 동경하는 소년이 되었다. 4. 인촌( 仁 村 金 性 洙 )과의 친교 고하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그 이듬해에 창평( 昌 平 ) 영학숙( 英 學 塾 )에서 신학문의 연마를 시작하 였다. 고정주( 高 鼎 柱 )가 세운 이 학숙에는 그의 아들 광준( 光 駿 )과 사위 김성수( 金 性 洙 )를 비롯하여 이 지방 원근의 청소년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숙장( 塾 長 ) 이표( 李 瀌 )는 영어에 통할 뿐 아니라 한 문에도 능하여 신구학문을 도맡아 가르쳤다. 고하는 사귀기 힘든 소년이었다. 천성이 내성적이어서 친구를 사귀려들지 않았다. 하루는 인촌 ( 仁 村 ) 김성수가 초립동이 고하와 허교( 許 交 )를 제의했다. 진우( 鎭 禹 ), 우리 인제 허교하고 지내세 허교만 하면 무엇하겠소. 심교( 心 交 )를 터야지. 그러니 심교가 터질 때까지는 그럴 것 없지 않소 고하의 무뚝뚝하고 뜻깊은 대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니 했 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고하가 인촌을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 다. 알고 보니 고집이 셀 뿐, 인정있고 의리있는 인물이었다. 그런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저녁이었다. 달이 무척 밝은, 무더운 남도의 여름밤이었다. 고하는 그날 밤 비로소 인촌에게 마음의 깊은 곳을 이야기했다. 자넨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 같나? 이렇게 남의 손에서만 놀다가 아주 나라가 없어지지 않겠 나? 고하는 처음으로 인촌에게 정치 이야기를 건넸다. 내 눈에도 그렇게 밖에는 보이지 않네. 그러나 할 수 있나? 생각만 그러했지 그럼 자넨 보고만 있을 텐가? 보고만 있지 않으면 우리 나이에 무엇을 한단 말인가? 아니야, 오직 한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공부야 공부. 하루 바삐 신학문을 닦아서 왜놈들 보다 앞서야지, 그 도리 밖에 나도 같은 생각일세 난 자네 같은 친구를 만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네. 우리 손을 잡고 공부를 하세 밤이 깊도록 고하와 인촌의 이야기의 샘이 끝날 줄을 몰랐다. 그로부터 고하는 창평 영학숙에 서 공부보다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큰 과업으로 삼았다. 공부가 끝나면 나무 그늘이나 혹은 달밤에 학도들을 모아 놓고, 그의 어렸을 때의 스승 기삼연( 奇 參 衍 )의 이야기로부터 화제를 이끌었다. 기삼연 선생은 나의 가슴에 굵다란 장작을 넣어 주고 거기다 불을 붙여 놓은 셈이야. 선생은 학자이시면서도 의병을 일으키시어 자진 대장이 되어서 왜놈을 무찌른 어른이었지 이런 이야기에서부터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민비시해사건의 경위 등 이야기는 꼬리를 물었다

28 남의 나라 놈들이 내 나라 궁중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내 나라 국모를 시해해도 우리는 가만 히 있어야 하니, 이것이 얼마나 비통할 노릇인가? 원수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갚아야 해 이렇게 말하는 고하는 흥분하여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가 비분강개만 해서 쓸 데 있는가? 공부를 하세, 공부를 하고, 인촌은 옆에서 고하를 달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하 평생을 통한 비분강개는, 그의 소년 시대부터의 것이었다. 고하는 영학숙에 들어간지 3개월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영학숙에서 맺어진 인촌과의 우정은 그의 가슴깊이 새겨졌다. 고하는 열여덟되던 정미( 丁 未 )년(1907 隆 熙 元 年 ) 봄 우정을 잊을 길 없어 부안( 扶 安 ) 줄포( 茁 浦 ) 로 인촌을 찾았다. 그곳에는 인촌이 없었다. 마침 인촌은 처가의 묘소지기 집과 창평읍 등지를 전 전하다가 마침 이른 봄부터 경치좋기로 이름난 변산( 邊 山 )의 내소사( 來 蘇 寺 )로 공부하러 떠난 뒤 였다. 고하는 인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갈 셈이었다. 고하는 줄포에서 다시 내소사로 인촌 을 찾았다. 진우, 참 잘 왔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이 사람과 자네 이야길 했었지. 자 인사를 하게나. 이 사람이 내가 늘 이야기하던 송진우이고, 이사람이 백관수( 白 寬 洙 )야 인촌이 인사시킨 소년은 바로 근촌( 芹 村 ) 백관수였다. 이때 근촌이 열 아홉, 고하가 열 여덟, 인 촌이 열 일곱으로 각기 한살 차의 자치 동갑 이었다. 셋은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다. 따로이 선생 을 모시지 아니하고, 그들은 전에 배운 한학과 영어를 공부하고 혹은 토론도 하며 마음이 울적할 때면 산에 오르기도 하고, 냇가에 내려가는 것으로 큰 즐거움을 삼았다. 차츰 기울어져 수평선 저 넘어 가라앉는 석양의 붉은 해는 대한제국의 운명과 같았다. 을미사 변( 乙 未 事 變 ), 을사조약( 乙 巳 條 約 ) 등, 잇달아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기울어져가는 조선조의 마지 막 몸부림이오, 고별의 조종( 弔 鐘 )이었다. 오늘날 변산팔경( 邊 山 八 景 )으로 불리는 내변산( 內 邊 山 )의 절경, 청련암 외에도 개암사( 開 巖 寺 ), 실상사( 實 相 寺 ), 월명암( 月 明 庵 ) 등 변산 4대 절이 울창한 숲속에 조화되어 더 한층 절승을 이룬 다. 특히 월명암의 낙조( 落 照 )는 낙산사( 洛 山 寺 )의 일출( 日 出 )과 대조를 이루는 변산팔경중의 으뜸 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널려있는 황해로 떨어지는 낙조는 기관( 奇 觀 )이 아닐 수 없다. 실상사( 實 相 寺 ) 남쪽에 높이 40여척의 직소폭포( 直 沼 暴 布 )가 있다. 고하는 가끔 폭포 밑의 바위 에 앉아 이런 못난 인간들이 살아서 무엇하느냐 고 자학과 한탄을 금치 못했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 뒤치락 밤이 새도록 전전반측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고 고하는 누었다가도 가슴에 치미는 울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뛰쳐나가면 산마 루를 오르내리다 날이 새야만 돌아왔다. 내소사( 來 蘇 寺 ) 청련암( 靑 蓮 庵 )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하, 인촌, 근촌 세 소년의 귀에도 헤이그 밀사( 海 牙 密 使 ) 중의 한분인 이준( 李 儁 )열사의 분사( 憤 死 ) 사건이 전해졌다. 1907년( 光 武 11, 丁 未 ) 2월 화란( 和 蘭 )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 가 열리게 되 었다. 이해 4월 고종황제는 이상설( 李 相 卨 ), 이준( 李 儁 )에게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호소하는 친서 와 신임장을 주어 은밀히 평화회의에 파견했다. 이상설과 이준은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화란으로 갈때 주로 한국공사관( 駐 露 韓 國 公 使 舘 )의 이위 종( 李 瑋 鍾 )과 합류하여 세사람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6월 25일이었다. 그러나 간악한 일제는 우 리 대표단의 참석을 방해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준은 투숙하고 있는 여관에서 단식 ( 斷 食 ) 자결하였다. 우리 대표들의 애절한 소망이 묵살됨을 본 화란 신문인들은 국제협회( 國 際 協 會 )에 나가 연설할

29 것을 주선해 줌으로써 세계 언론인들을 상대로 이위종은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는 제목으로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호소했다. 아무튼 이 사건을 전해들은 고하는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크 나큰 절망속에서 역으로 크나큰 희망을 얻었다. 헤이그 밀사 이야기를 듣던 순간은 암흑 천지가 삽시간에 확 밝아진 것 같았어. 헤이그에서 이 준 선생이 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큰 희망을 가졌어. 이제는 우리나라도 바로잡힐 때 가 있을 거다 하고 후일 고하는 집안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배워야지 언제나 고하의 흥분을 쓰다듬어 주는 인촌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만은 인촌의 이러한 말도 고하의 불붙는 가슴을 식혀 줄 수가 없었다. 으으응 -- 맹수의 신음소리와 같은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조금만 더 흥분이 된다면 몇사람을 그대 로 둘 것 같지가 않았다. 냉철하고 이지적인 인촌도 참다못해 고하의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근 촌도 울었다. 헤이그밀사사건이 있은지 한달도 채 못되어 통감 이등박문( 伊 藤 博 文 )은 이 밀사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이완용( 李 完 用 ), 송병준( 宋 秉 畯 ) 등 주구들을 앞장세워 고종황제의 퇴위를 강요했다. 1907년 7월 18일 아침부터 어전회의( 御 前 會 議 )를 열고 황제의 선위( 禪 位 )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이에 불응하자 이날 밤을 새워가면서 공갈과 협박을 멈추지 아니했다. 기진맥진한 고종황 제는 견디다 못하여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케 한다 는 조칙을 승낙했다. 고종황제의 이 조칙은 양위( 讓 位 )가 아닌 섭정( 攝 政 )이었으나 이들은 양위한 것으로 날조하여 20일 양위식을 거행하게 했다. 고종황제께서는 왜놈 손에 양위하셨어 고하는 비탄한 나머지 땅을 치고 울었다. 5. 동경유학( 東 京 留 學 )의 큰 뜻 고하, 인촌, 근촌 등 세 젊은이의 청련암 시절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실로 뜻깊은 시기였 다. 그저 공부나 하고, 담론이나 하고, 경치나 구경하고 혹은 비분강개나 하며 나날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이 청련암 시절이야말로 고하에게는 장차 그 포부를 실천함에 있어서 맷돌의 한짝과도 같은 지기지우( 知 己 之 友 ) 인촌과의 우정을 두텁게 했으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의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동안 정국의 격동은 거세기만 했다. 고종이 양위한지 사흘 뒤에는 이른바 정미조약( 丁 未 條 約 ) 이라 불리는 제3차 한일협약( 韓 日 協 約 )이 체결되어 일제의 내정간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게 된 것이다. 통감 이등은 사실상 이땅의 통치자로 군림하였고 7월 말에는 나라의 간성인 군대마저 해 산하게 되니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왜놈을 물리쳐라, 매국노를 잡아 죽여라 비분에 찬 군대의 대부분은 의병이 되었고, 이인영( 李 麟 榮 ), 허위( 許 蔿 ), 홍범도( 洪 範 圖 ), 차도선 ( 車 道 善 ) 등이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5년간이나 왜병과 싸웠다. 전라도 일대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고창, 정읍, 장성 등지에 의병이 일어나서 왜병과 대결하 였다. 차츰 전투가 변산방면으로 확대될 기미가 있자 인촌의 신변을 걱정한 본가로부터 속히 하

30 산하라는 전갈이 왔다. 세 젊은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근촌은 기회를 보아 서울로 가자는 것이었 고, 인촌은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야 한다고 했으나 고하는 일본 유학을 주장했다. 어째 하필 일본 유학인가? 하고, 근촌은 걱정스러운 듯이 고하에게 물었다. 적을 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는 이치에서이지.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생각해서 앞을 질러야 하지 않겠는가 고하는 인촌과 근촌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생각을 해 보게. 우리는 정말 어리석었네. 이불속에서 활개치듯이 앉아서만 큰 소리를 했지. 우리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우물안 개구리처럼 들어앉아서 무엇을 알겠는가. 산에서 내려가세.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들리는 소문에 비분강개하여 보았자 나라가 다시 서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자, 용기를 내세, 용기를. 인제 적의 심장을 파고 들어가세 고하의 일본 유학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고하는 인촌과 근촌의 결심을 들을 것 없이 이튿 날 아침 짐을 꾸렸다.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서 셋이 같이 행동하자는 인촌의 제의를 받고 고하는 먼저 손곡리 본가로 돌아왔다. 고하가 떠나자 인촌과 근촌도 산에서 내려왔다. 신학문에 이해가 깊은 아버지 훈은 일어를 배우려는 아들 고하의 의견에 동의했다. 고하는 우 선 당시 담양학교의 일어교사 위계후( 魏 啓 厚 )를 찾아 제일단계의 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날 아버지 훈은 고하를 불러 놓고, 일어를 배우자면 서울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물었다. 고하는 더욱 용기를 얻었다. 서울 유학의 계획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서울에 가면 한성교원양성소( 漢 城 敎 員 養 成 所 )라는 곳이 있어. 거기가서 입학을 하도록 해라 아버지 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쾌락하고 유학 방법까지 자세하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고하는 여 비와 식량을 가지고 서울유학의 길을 떠났다. 고하는 먼저 줄포로 인촌을 찾았다. 인촌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갈 계획이었다. 이 무렵 고하와 인촌의 일본 유학을 재촉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군산( 群 山 )의 금 호학교( 錦 湖 學 校 )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승리( 韓 承 履 )의 민권사상( 民 權 思 想 )이었다. 한승리의 강 연에서 인촌은 처음으로 민권 이란 말을 들었다. 한마디로 백성은 임금의 정치를 비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오직 임금만을 위 하여 백성이 살고, 임금의 정치는 어떠한 잘못이 있어도 비판은 커녕 입밖에 내어서도 죄가 된다 고만 배워온 인촌은, 이 민권 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당시의 사정을 인촌은 이렇게 회고한다. 1907년 봄 흥덕( 興 德 )의 우편주사( 郵 便 主 事 )가 군산( 群 山 )으로 가는 길에 줄포( 茁 浦 )에 들렸어. 당시는 우편주사만 해도 새문명의 일꾼이었거던. 나는 그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다 고 했지. 그 는 군산에 가면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으니 가보라 는 거야. 그래 조부님께 말씀을 올렸더 니 의외에도 수월하게 승낙을 해 주셔서, 군산 궁말병원을 찾아갔더니, 예수를 믿으라, 예수를 믿으면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다 는 거야. 그래서 그만 돌아와 버리고 말았지. 예수 때문에 영 어를 못배우고 돌아왔지만 그래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간절했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참에 하 루는 후포( 後 浦 )에서 강연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만, 군산 금호학교( 錦 湖 學 校 ) 설립자인 한승리 ( 韓 承 履 )의 강연이 아니야? 한승리는 대한협회( 大 韓 協 會 ) 파견원의 자격으로 강연을 하는데 민 권사상에 관한 강연이었어. 깊은 감명을 받고, 밤에 그를 여관으로 찾아가서 영어를 배우고 싶 다니까 군산 자기 학교로 오라는 거야. 내가 떠나기로 하자 근촌도 집에서 허락이 나서 동행을 했어. 한승리는 낮에는 물리와 수학, 밤에는 영어를 가르쳤는데 우리는 밤과 낮으로 다녔어. 한

31 반년쯤 배웠지 인촌은 다시 소년 시절의 먼 기억을 더듬었다. 그 뒤에 줄포에서 다시 고하를 만났어. 우리가 유학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해야. 우 리가 다시 군산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땐데 하루는 홍명희( 洪 命 憙 )의 엄친 홍범식( 洪 範 植 ) 이란 분이 내 객주( 客 主 )집을 찾아 오셨어. 아마 집에 들렀다가 말씀을 듣고 찾은 모양이야. 그 때 그는 금산( 錦 山 )군수로 부임하던 길이었는데, 그때 데리고 온 소년이 바로 홍명희였어. 홍명 희는 벌써 일본 동경 대성중학교( 大 成 中 學 校 ) 유학생이어서 일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어. 이때 마침 고하가 줄포에 들렀다가 군산으로 나를 찾았기에 둘은 일본 유학을 결행한 거야. 그때 내 선친은 줄포에 영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시작한 때이지만 일본가는 데는 반대였어 인촌은 금호학교에서 깎으라는 상투도 깎지 않았다. 이튿날 사전승낙도 얻어야 했지만 상투를 깎으면 일본 가는 계획이 탄로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 인촌은 군산 보통학교 선생인 박일병( 朴 逸 秉 )에게서 일어를 배웠다. 하루는 박선생을 이끌고 줄포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 어른들께 일본 유학을 허락하도록 조언을 해 달라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역시 실패했다. 때마침 군산학교 일인교장이 집을 찾아 주었다. 일인 교장의 권고도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유학을 결심한 인촌이 이처럼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마침 고하가 군산으로 왔다. 고하는 서 울 유학을 간다고 집을 떠나서는 실은 일본유학의 길을 준비했던 것이다. 인촌이 고하를 보자 일 본유학을 제의하거나 권유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본유학길로 떠날 준비를 서둘기로 했다. 한승리에게 부탁하여 도항증 ( 渡 航 證 )의 발부 절차를 밟는 한편 인촌은 머리를 깎고(고하는 이어 그뒤에 깎았다), 흥덕( 興 德 )의 근촌에게도 두사람의 결심을 알렸다. 그러나 근촌은 부모님의 승낙을 얻지 못하여 동행하지 못했다. 머리를 깎고 모든 준비를 갖추 었고 부산행 배표를 샀다. 떠나려는 찰나 줄포 인촌댁으로부터 심부름꾼이 뒤좇아 편지를 가지고 왔다. 어머니 급환이니 곧 집으로 돌아오라는 사연이었다. 인촌은 일본행을 일단 연기하기로 하고 줄포로 향하려 했다. 거짓말이야, 그대로 떠나세 고하의 말에 인촌이 심부름꾼을 다구치니 거짓이었음을 실토받았다. 심부름꾼을 여관에서 하루 묵어가게 한 다음 고하와 인촌은 함께 연락선을 탔다. 내소사에서 일본 유학의 계획을 갖고 하산한지 만1년만의 일이었다. 고하와 인촌이 일본으로 떠난 후 근촌은 집안 어른들의 걱정이 두려워 고하와 인촌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듬해 북간도( 北 間 島 ) 등지를 돌아왔다. 고하와 인촌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 왔을 때 근촌은 법률전수학교( 法 律 專 修 學 校 ) 학생이었다. 고하가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을 때엔 고하집 가산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때였다. 갑오동학란 후 일본군에 쫓기어 산중으로 패산( 敗 散 )한 일부 동학군은 삼삼오오 패를 지어 화적떼로 변했다. 이들은 지방의 부호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강탈하기도 하고, 조상의 산소를 파내어 놓고 막대한 금품을 요구하는 유골흥정을 하기도 했다. 요즘의 어린이 유괴사건과 흡사한 것이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수백석 추수를 하던 고하의 가정에도 몇차례 이와 같은 사건을 당함으로써 이때부터 가산이 기울게 된 것이다. 6. 이국( 異 國 )의 학창( 學 窓 ) 고하가 일본 동경 유학의 길에 오른 것은 1908년 ( 戊 申 隆 熙 2 年 ), 열아홉 되던 해 10월이었다

32 고하는 흰 두루마기, 인촌은 꽃자주빛 두루마기를 걸쳤고 군산에서 산 아동모( 兒 童 帽 )를 쓰고, 왜병의 고물 편상화( 編 上 靴 )를 신었다. 두 젊은이의 볼품은 실로 가관이었다. 한편 줄포에서는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돌아와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심부름꾼 혼자서 인촌 이 머리깎고 찍은 사진과 일본유학의 길에 오른다는 편지만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돈과 옷 을 장만하여 다시 사람을 군산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하와 인촌을 실은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도망가듯 어른들 모르게 떠나온 젊은이들의 길이어서 떳떳치도 못하려니와 돈도 넉넉치 못했 다. 그러나 부푼 가슴을 안고 먼 길을 떠나는 두 젊은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 다. 큰 배도 처음 타보았거니와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군산항을 떠난 화륜선( 火 輪 船 ) 시라까와마루( 白 川 丸 )는 다도해를 지나 부산을 거쳐 현해탄을 건 넜다. 낯선 이국 땅 시모노세끼 ( 下 關 )에 상륙하였다. 흰 두루마기의 고하와 꽃자주빛 두루마기의 인촌은 여러 사람의 구경감이었다. 더욱이 고하는 구경거리였다. 유난히 흰 두루마기가 뭇사람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말은 통하지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두 젊은이는 일본 군인 하나를 만나 필담( 筆 談 )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이쪽에서 동경하시착( 東 京 何 時 着 ) 이라고 써 보이자, 그는 명일 2시반 동경착( 明 日 二 時 半 東 京 着 ) 이라고 쓰는 것이 아닌 가. 둘이는 그 일본 군인의 주선으로 승차권을 샀다. 이처럼 승차권만은 필담으로 살 수 있었지만, 허기를 극복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일어는 조금 배웠다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벤또(도시락) 라고 소리치며 다니는 것이 필시 밥인 듯하 였다. 고하와 인촌은 그것을 사기로 했다. 고하는 귀에 들리는 대로 별똥 하고 일인 장사꾼을 불렀다. 그러자 그도 별똥 하고 도시락을 내밀었다. 일어( 日 語 )의 첫 실험이 요, 첫 실패였다. 이리하여 일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고하와 인촌은 하룻 밤 이틀 낮만에 최후 목적지인 동 경에 기차편으로 도착했다. 동경 역전에는 인력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손님을 끌었다. 지리를 모르는 둘이서는 인력거를 타기로 했다. 인촌은 군산에서 소위 일본 시바이 ( 演 劇 )를 본 일이 있어서, 인력거나 인력거 타는 방법 정도 는 알고 있었으나 고하는 처음 보고 처음 타보는 생소한 것이었다. 고하는 발을 놓는 발판에 올 라 앉았다. 발판에 앉으니 인력거꾼이 끌 수가 없다. 인력거꾼이 손짓을 하며 올라타라고 타일러 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일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력거꾼은 상 2등, 하 1등( 上 二 等 下 一 等 이라고 써 보였다. 아마도 인력거꾼의 뜻은, 상 2등의 상( 上 =좌석)은 2등이라 싸고, 하( 下 =발 판)는 1등이라 비싸니 싼 윗자리에 앉으라는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고하는 하 1등 에 탄다고 고집 을 부렸다. 1등 손님이지 2등 손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후일 인촌은 두고두고 웃으며 이 때의 이야기를 했다. 고하와 인촌은 동경에 단 한 사람의 친지도 있을 수 없었다. 목표는 오직 군산의 인촌을 찾아 온 일이 있는 벽초 홍명희( 碧 初 洪 命 憙 )의 하숙이었다. 벽초는 대성중학교( 大 成 中 學 校 ) 학생이었 다. 벽초의 하숙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벽초의 안내로 동경 시가를 구경했다. 조국의 현실은 너 무도 초라한데 비해 일본의 건설상은 괄목할만 했다. 선진 문명을 받아들인 것은 불과 20년밖에 안되는데 일본과의 국력의 차는 너무도 크게 비쳤다. 고하와 인촌은 벽초의 권유대로 정칙영어학교( 正 則 英 語 學 校 )에 입학했다. 새 학문의 첫 관문이었다. 삼각형이니 정방형( 正 方 形 )이니 모두 처음 듣는 낱말들이어서 무척 어렵게만 느꼈으나 곧 익숙해질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은 영어였다. 고하는 영어뿐만 아니라 일어 때문에도 무척 고생을 했다. 일어는 개인교수까지 받아야만 했다. 고하는 인촌과 함께 정칙영어학교( 正 則 英 語 學 校 )에서 중학교 입학 준비과정을 마치고,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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