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언양의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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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20세기 전반 彦 陽 의 小 農 社 會 이 영 훈 Working Paper Arp, 2015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Kwanak-ku, Seoul, , South Korea

2 20세기 전반 彦 陽 의 小 農 社 會 이영훈 - 목차 - Ⅰ. 머리말 Ⅱ. 토지와 인구 1. 언양면의 성립 2. 자연환경 3. 토지의 구성 4. 인구의 동태 5. 찾아온 일본인들 Ⅲ. 토지소유와 사회 1. 토지소유자의 분포 2. 토지소유자의 형태 3. 문중 Ⅳ. 소농과 지주 1. 경지 소유의 계층 분화 년의 소농경영 년대의 수리조직 4. 수리조합 반대운동과 부리보개량계 년대 유지의 확충 6. 소작쟁의와 농민조합운동 7. 소작정책 8. 소농사회의 안정화 Ⅴ.새로운 물결 년대의 언양장 2. 조잔한 상공업자들 3. 언양장의 성장 4. 신흥세력 Ⅵ. 가족, 신분, 친족 1. 가족의 성립 2. 가족의 확대 3. 가족 규모와 신분 4. 친족집단의 확산 Ⅶ. 맺음말 초록 경남 울주군 언양면의 토지대장과 호적에서 관찰되는 20세기 전반 토지소유와 농민 의 기본 형태는 자작농 체제였다. 산간부 도작지대라는 자연환경이 그 배경을 이루었 다. 통설적 이해와 달리 일제의 지배기에 언양면의 농가경제는 오히려 안정되었다. 대량의 인구가 일본으로 유출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언양장을 중심으로 시장경제 가 발전한 것도 다른 한편의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법제로서 가족의 성립과 가족 규모의 확대였다. 그에 따라 동성의 친족집단이 확산되었다. 가족결합의 강화와 친족집단의 확산은 양반과 상민 신분 간의 경제적 격차와 사회적 차별을 해 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0세기 전반 언양 소농사회는 근대적 전환과 유교적 전환 이 어울린 복선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주제어: 소농사회, 산간부 도작지대, 자작농체제, 근대적 전환, 유교적 전환, 복선의 전환 - 1 -

3 Ⅰ. 머리말 이 글은 논증하기보다는 素 描 하는 것이다. 대상은 20세기 전반의 慶 南 蔚 山 郡 彦 陽 面 이다. 20세기 전반이라 함은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곧 朝 鮮 王 朝 의 패망, 日 帝 의 통치, 일제 로부터의 해방, 大 韓 民 國 의 건국까지의 40년간이다. 그 사이 언양면이란 지역에서 전개된 사 회 경제의 변화를 눈에 띄는 대로 옮겨 그린 것이 이 글이다. 소묘하는 것, 굳이 논증하지 않 은 것이 地 域 史 연구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은 것은 그릴 수 없 다. 어느 한 곳을 너무 세밀하게 그려도 지역사가 아니다. 그저 편하게 눈에 띄는 전부를 그 리는 것이 지역사이다. 그려 놓고 보면 望 外 의 성취가 있음을 느낀다. 時 限 을 대한민국의 건 국까지 잡았기 때문에 곧이어 시행된 農 地 改 革 을 포함한 이후의 역사는 그림의 대상이 아니 다. 필요에 따라 소묘의 시한을 1950년대까지로 늘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후는 아무래도 나중에 그리게 될 그림의 몫이다. 망외의 성취라 했는데, 그에 대해 설명하겠다. 우선은 지배적 기억으로부터의 解 放 感 이다. 그 시대의 역사는 너무 정치화되어 있다. 조선인을 다스려 온 전통 왕조가 망하고, 異 民 族 이 지배하고, 그에 저항하는 民 族 運 動 이 일어나고, 격렬한 국제적 전쟁으로 막을 내린 시대이다. 그에 대한 집단기억으로서 역사가 정치화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기도 하다. 그 시대의 역 사는 獨 立 運 動 의 역사이다. 다른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턱도 없는 주장이 한 때를 풍미하기도 하였다. 그 政 治 史 는 저항과 협력의 틀에서 쓰였다. 經 濟 史 연구도 수탈인가 개발인가의 二 項 對 立 에 규정되었다. 農 村 社 會 史 의 서술에서는 小 作 爭 議 나 農 民 組 合 을 둘러싼 농민운동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벌어진 여러 사건을, 그것들을 둘러싼 자연과 문화의 환경까지 輕 重 을 가릴 것 없이 늘어놓으면, 이제껏 지배적으로 중요했던 것들이 의외로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음을 깨닫는다. 1932년 언양면 중심가의 약 400호에 電 氣 가 들어 왔다. 같은 해에 그 곳에서 赤 色 農 民 組 合 運 動 이 일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였을까. 농촌 주 민의 입장에선 전자가 훨씬 중요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껏 역사가의 눈에는 후자만 중요 하였다. 赤 色 農 組 를 주도한 사람은 日 警 에 체포되어 2년의 懲 役 刑 을 살았다. 이후 대한민국은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서 勳 章 을 수여하였다. 그런데 釀 造 場 을 경영하여 이룬 재산을 학 교 증축과 빈민 구제를 위해 희사한 어느 有 志 가 있었다. 누가 언양면의 발전을 위해 실질적 으로 기여하였던가. 후대의 역사가는 전자만을 기억하고 표창하지만, 지역 주민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을 많이 접하다 보면, 불현듯 역사라는 것이 많은 경우 후 대의 정치가와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 權 威 主 義 的 記 憶 에 다름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한 해 방감으로 그린 그 시대의 역사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자취를, 그들이 교 유한 이웃과 마을을, 결국 나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것을 두고 망외의 성취라 한 것이다. 다른 하나를 더 소개하면, 長 期 持 續 으로서 역사의 再 發 見 이다. 그 시대 농촌 주민의 삶에 있어서 열심히 노동하고 축적하여 가정경제의 자립을 이루고, 자녀를 건강하게 출산하여 양육 하고, 좋은 배필을 구하여 짝을 지워 주고, 조상 제사를 받들 후계자를 길러 家 系 를 계승시키 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이러한 가정경제의 단위는 소규모 가족의 농업, 곧 小 農 이었 다. 한국사에서 소농의 가정경제는 언제 성립하였을까. 나는 대개 17세기 이후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까지였을까. 소농이 여전히 人 口 의 다수를 점했던 1960년대까지였을 것이다. 이 글 의 대상이 되는 20세기 전반은 그 300년 이상 역사의 마지막 국면에 해당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관찰한 사건들의 상당 부분은 小 農 들의 所 有 와 勞 動, 다시 말해 - 2 -

4 그들의 가정경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또 이어져 갈 것이었다. 소농들이 남긴 삶의 자취는 그 자체로 장기지속의 역사이다. 20세기 전반, 일제 가 조선인을 지배한 그 시기를 나는 日 政 期 라고 부른다. 그 일정기에 소농들의 삶의 이야기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 점은 이 글의 소묘에서도 명확하다. 그렇 지만 그 변화가 재래의 전통을 부정하거나 억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변화는 전통 에 편승하여 슬그머니 인간 삶의 현장에 침투하였다. 그 점에서 전통은 오로지 낡은 것이라기 보다 새롭게 계승되고 창조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선별된 기억의 역사에서 이러한 장기지속은 관찰되지 않는다. 民 族 과 國 家 를 주 체로 하는 권위주의적 역사학에서 조선왕조 시대는 일정기와 끊어져 있고, 일정기는 대한민국 시대와 끊어져 있다. 끊어진 역사는 否 定 의 역사이다. 前 代 가 後 代 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 다. 반면 인간들의 적나한 삶의 자취를 그린 역사에서 前 後 시대는 연속하는 변화로서 또는 변화하는 연속으로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 이어진 역사는 肯 定 의 역사이다. 21세기 초 오늘에 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조선시대와 일정기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장기지속의 시간 감각으 로 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즐거움과 보람, 그것을 두고 망외의 성취라 한 것이다. 글의 제목을 彦 陽 의 小 農 社 會 라 한 것은 이러한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20세기 전반의 韓 國 史 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취지이다. 그 시대의 농촌은 소농을 지배적 구성원으로 했으며, 그 런 의미에서 소농사회였다. 소농은 가족의 안정적 생존을 추구하는 합리적 경영체이다. 가족 과 마찬가지로 소농은 성립, 확장, 해체의 과정을 밟는 有 機 體 이다. 그 과정을 일관하는 소농 의 행동원리는 가족의 안정적 생존에 맞추어져 있다. 그로 인해 소농은 利 潤 의 극대화보다 所 得 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소농경영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비용 개념은 일반적으로 성립해 있지 않다. 소농은 고립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 소농은 모자라는 耕 地 나 耕 牛 등의 생산수단을 농촌의 지배계층인 地 主 로부터 빌려야 한다. 소농은 그 대가로 地 代 를 지불한다. 소농과 지주의 토지 임대차 관계는 소농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축이다. 또한 소농은 농업생산과 가정경제의 영위에 필요한 공동노동, 수리, 營 林, 치안, 교육, 신앙 등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이웃과 협동해야 한다. 소농의 이웃과의 협동은 친족 또는 촌락을 비롯한 제반 단체의 결성과 운영으로 실현된 다. 소농사회는 개별 소농과 그를 둘러싼 各 樣 社 會 의 총합이다. 소농사회의 제반 양태는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문화환경, 시장환경, 정치환경에 민감하게 규정된다. 자연환경은 경지의 조성, 이용, 관리를 제약하는 자연적 諸 條 件 을 말한다. 평야지대 냐 산간지대냐의 입지조건을 비롯하여 물, 비료, 연료, 원료의 취득과 관련된 河 川 과 山 林 의 유무나 이용방식이 그와 관련된 요소들이다. 문화환경은 소농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신앙, 그 것들이 지시하는 사회적 성취의 기준을 말한다. 소농은 가족의 안정적 생존을 추구하지만, 문 화환경에 따라 그것은 一 族 의 번성, 職 業 의 계승, 身 分 의 향상과 같은 다양한 양태로 실현된 다. 소농들이 상호 협동하거나 단체를 결성하는 원리도 문화환경의 차이에 따라 한결 같지 않 다. 시장환경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는 지역 내 상업의 발전 수준, 지역 간의 교통사정, 특히 상업이 번창한 도시와의 거리가 중요하다. 大 都 市 와 貿 易 港 에 근접한 지역이라면 소농경영 역 시 쉽게 상업화하거나 공업화의 대열에 참가할 수 있다. 정치환경은 소농으로부터 지대와 조 세를 징수하는 地 主 와 國 家 와의 관계를 말한다. 지주와 국가의 역할이 소농사회의 유지와 발 전에 소극적인가 적극적인가, 약탈적인가 육성적인가에 따라 개별 또는 집단으로서 소농의 사 회적 행동은 크게 달라진다

5 년 나는 동료 연구자와 더불어 蔚 山 廣 域 市 蔚 州 郡 廳 과 彦 陽 邑 事 務 所 의 협조를 얻어 년대 언양면의 土 地 臺 帳 과 除 籍 簿 를 전산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 데이 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이미 몇 편의 창의적인 논문이 결혼과 가족을 주제로 작성되었다. 1) 이 글은 그 데이터베이스에 기초하고 있다. 그 외에 일정기의 신문, 관보, 읍지, 기타 문헌으로부 터 언양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몇 차례의 답사도 있었다. 언양면 은 조선왕조 시대 彦 陽 縣 의 邑 底 이다. 언양현의 지역에는 18 19세기의 量 案, 戶 籍, 籌 板 등 이 전하고 있다. 그 밖에 兩 班 家 에서 전하는 고문서가 있다. 언양면을 지역사 연구의 대상으 로 선택한 것은 20세기의 토지대장과 제적부에 비견될만한 선행 시대의 자료 여건이 양호하 기 때문이다. 이들 자료를 모두 활용하여 18 20세기에 걸친 언양 소농사회의 역사 전체를 복구하는 것은 장래의 연구과제로 미뤄져 있다. 이 글은 18 20세기 彦 陽 의 全 體 史 를 추구하 는 공동연구의 준비 작업에 해당한다. Ⅱ. 토지와 인구 1. 언양면의 성립 彦 陽 面 은 원래 조선왕조 경상도 언양현 上 北 面 과 中 北 面 이었다. 상북면과 중북면의 성립 시기와 그에 속한 里 에 관해서는 彦 陽 縣 戶 籍 (1711, 1777, 1825, 1863), 戶 口 總 數 (1789), 彦 陽 縣 邑 誌 (1871, 1894, 1899, 1916, 1919) 등을 참조할 수 있다. <표1>은 이들 문헌으로 부터의 정보를 종합한 것이다. 〇 面 北 面 <표1> 舊 上 北 面 中 北 面 과 新 彦 陽 面 의 所 屬 里 1711년 1777년 1789년 년 1894년 1910년 1914년 이후 〇 〇 里 邑 內 里 馬 屹 里 泉 所 里 大 谷 里 庫 下 里 茶 開 里 機 池 里 上 北 面 中 北 面 松 北 里 東 部 里 南 部 里 馬 屹 里 於 音 里 盤 松 里 泉 所 里 瓮 台 里 庫 下 里 茶 開 里 直 洞 里 松 北 里 北 部 里 南 部 里 於 音 里 盤 於 里 泉 所 里 大 谷 里 茶 介 里 直 洞 里 松 北 里 邑 內 里 ( 東 部 里 南 部 里 ) 於 音 里 盤 松 里 盤 湖 里 泉 所 里 盤 谷 里 茶 開 里 直 洞 里 松 北 里 東 部 里 南 部 里 於 音 里 盤 松 里 泉 所 里 盤 谷 里 茶 開 里 直 洞 里 松 北 里 東 部 里 南 部 里 於 音 里 盤 松 里 泉 所 里 釜 堤 里 大 谷 里 庫 下 里 茶 開 里 直 洞 里 松 臺 里 東 部 里 路 東 里 路 上 里 西 部 里 南 部 里 於 音 里 盤 松 里 泉 所 里 盤 湖 里 盤 谷 里 茶 開 里 台 洞 里 機 池 里 直 洞 里 南 洞 里 彦 陽 面 松 臺 里 東 部 里 西 部 里 南 部 里 於 音 里 盤 松 里 盤 泉 里 盤 淵 里 盤 谷 里 大 谷 里 茶 開 里 平 里 台 機 里 直 洞 里 1) 박기주 김성남, 한국인 초혼연령의 추이: 전시기를 중심으로, 경제사학 54, 박이택, 20세기 언양지역의 人 口 변천 언양읍 호적 자료의 분석-, 보건경제와 정책연구 19-3, 박이택, 20세기 언양지역의 가족구성의 변천 -언양읍 제적부와 재제부의 분석-, 大 東 文 化 硏 究 83, 박이택, 20세기 언양지역에서의 유년 人 口 의 가족형태 언양읍 제적부와 재제부의 분석-, 아세아연구 57-3, 박이택, 20세기 언양지역에서의 노년 人 口 의 가족형태 언양읍 제적부와 재제부의 분석-, 大 東 文 化 硏 究 87,

6 자료: 彦 陽 邑 誌 (2001), 88, 136쪽. 조선왕조 시대에 오늘날과 이어지는 지방행정구역으로서 面 里 制 가 출현하는 것은 5 家 統 事 目 이 반포된 1675년 이후의 일이다. 군현마다 진행의 차이가 있어서 언양현에서는 1711년까 지 〇 面, 2) 北 面, 南 面 의 3개 면이 있었다. 언양현 6개면 - 上 北 面, 中 北 面, 下 北 面, 上 南 面, 中 南 面, 三 同 面 -의 성립은 1777년의 호적에서 최초로 확인되는데, 실제 성립 시기는 그보다 더 빨랐을 것이다. 1777년 상북면의 7개 리와 중북면의 4개 리는 큰 변화 없이 1894년까지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 일부 리가 없어지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했으며, 리의 명칭이 고정되지 않고 번갈아 바뀌기도 했다. 1894년 11개인 상북면과 하북면의 리는 1910년 16개 로 크게 늘었다 세기에 걸쳐 里 가 두 셋으로 나뉘는 分 里 현상이 널리 전개되었다. 예 컨대 인근 울산부 대현면, 청량면, 농소면, 유포면 4개 면에 속한 동리는 1699년의 63개에서 1801년의 114개로 증가하였다. 3) 초창기의 총독부는 리에 대한 행정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그 같은 역사적 추이를 계승하여 리의 수를 늘렸다. 1914년 이후 총독부는 전국의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그에 따라 기존의 317개 군이 220개 군으로, 4,336개 면이 2,522개 면으로, 6만 2,532개 리가 2만 7,595개 리 로 통폐합되었다. 그 결과 인구와 토지의 규모가 균일한, 그리고 상호 간의 경계가 명확히 그 어진 지방행정구역이 성립하였다. 언양 지방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구 언양군이 신 울산군 에 편입되었으며 4), 구 상북면과 중북면이 신 언양면으로 통합되었다. 아울러 구 16개 동리는 신 14개 동리로 통폐합되었으며, 리의 명칭도 일부 변경되었다. 그 과정에서 구 언양군 中 南 面 의 평리 일부, 구 울산군 斗 東 面 대곡동의 전부(후술), 동 천전동의 일부, 구 울산군 斗 西 面 구수동의 일부, 동 차동의 일부가 신 울산군 언양면에 편입되었다. 반면 구 언양현 중북면 반 곡리의 일부가 신 울산군 두동면으로 떼어졌다. 결과적으로 구 상북면과 중북면에 비해 신 언 양면의 영역은 확장되었다. 1914년 총독부가 측도한 地 形 圖 에서 언양면과 소속 14개 리의 경계를 확인하면 <지도1>의 점선과 같다. 이처럼 면과 리의 경계가 명확히 그어진 것은 1914년 지방행정구역 재편에 의 해서였다. 지도에는 각 리에 속한 크고 작은 聚 落 의 입지가 검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전 까지 리라 하면 인간의 집단적 주거로서 이러한 취락이나 그 몇 개의 집합을 가리켰다. 리에 소속한 경지, 하천, 임야나 그것을 포괄한 리의 고유한 영역이나 그것을 감싼 里 界 라는 개념 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다소 생소한 주장과 관련해서는 동부리와 대곡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도1>에서 보 듯이 동부리는 彦 陽 邑 城 (지도 상의 사각형)을 감싸고 있다. 곧 구 언양현의 官 衙 가 놓인 邑 底 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盤 淵 里 가 새롭 게 생겨날 때 동부리의 일부를 흡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5) 그런데 <지도1>에서 보듯이 반연 리와 동부리 사이에는 직동리, 반천리, 어음리가 가로 놓여 있다. 다시 말해 반연리가 생겨날 때 동부리의 일부를 흡수했다는 이야기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에서 <지도1> 의 원자료인 地 形 圖 를 자세히 살피면 반연리, 태기리, 대곡리의 접경부에 또 하나의 동부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구 언양현에서 동부리는 두 곳으로 나뉘었으며, 그 하나가 반연 2) 縣 內 面 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彦 陽 邑 誌 發 刊 推 進 委 員 會, 彦 陽 邑 誌, 2001, 88쪽. 3) 鄭 震 英, 조선후기 村 落 의 구조와 分 洞, 國 史 館 論 叢 47, 1993, 7쪽. 4) 彦 陽 縣, 蔚 山 府 가 彦 陽 郡, 蔚 山 郡 으로 된 것은 1894년의 甲 午 更 張 에 의해서이다. 5) 越 智 唯 七 編 纂, 新 舊 對 照 朝 鮮 全 道 府 郡 面 里 洞 名 稱 一 覽, 593쪽

7 리에 속하였다. 동부리를 주도한 언양현의 鄕 吏 들이 무언가의 필요에 따라 현의 동쪽에다 또 하나의 동부리를 설치한 것이다. 아마도 향리들의 契 房 村 이었을 터이다. 6) <지도1> 언양면의 환경 자료: 韓 國 近 世 五 萬 分 之 一 地 形 圖 어느 아버지 리가 다른 리를 건너뛰어 아들 리를 설치한 이 같은 현상은 군현 간에도 있었 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군현 간의 越 境 地 가 그것이다. 마치 날아가 앉은 모양새로 하여 飛 地 라 고도 하였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은 이 오랜 기원의 월경지를 최종적으로 해소하였 다. 7) 마찬가지로 이전까지는 면 또는 리의 경계는 불분명하거나 錯 綜 하였다. 중북면 大 谷 里 에 서 또 하나의 예를 찾을 수 있다. <표1>에서 보듯이 대곡리는 1711년 언양현 북면에 속하였 다. 1777년에는 상북면 옹태리로 소속과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1789년에는 고하리와 합쳐저 다시 대곡리로 되어 있었다. 이후 1831년까지 반곡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861년에도 마찬 가지였다. 1894년에는 고하리와 분리되었으며, 대곡리라는 옛 몇칭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1910년 대곡리와 고하리는 없어지고 반곡리가 복구되었는데, 저간의 사정이 매우 복잡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다시 생겨난 대곡리는 구 반곡리의 일부와 인근 울산군 두동면 대곡동을 구역으로 하였다. 다시 말해 1894년 이후 언젠가 언양군 중북면 대곡리는 울산군 두동면으로 이속되었다.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두동면이 생겨나는 것은 1908년의 일인 데, 8) 그 때 인접한 언양군 중북면의 대곡리가 할양되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1910년 언양군 중북면에는 대곡리와 고하리가 합해졌다고 보이는 반곡리가 존속하였다. 이러한 연유에서 6) 契 房 村 이란 鄕 吏 들이 사사로이 설치한 除 役 村 을 말한다. 거기서 수취하는 조세는 향리들의 소득이 되었다. 丁 若 鏞 著, 茶 山 硏 究 會 譯 註, 譯 註 牧 民 心 書 Ⅱ, 創 作 과 批 評 社, 227쪽 참조. 7) 정요근, GIS 기법의 활용을 통한 조선후기 越 境 地 의 복원, 歷 史 學 報 224, 2014, 158쪽. 8) 彦 陽 邑 誌 發 刊 推 進 委 員 會, 彦 陽 邑 誌, 95 96쪽

8 1900년대까지 울산군 두동면과 언양군 중북면이 경계는 애매하였다. 예컨대 1914년 지형도에 는 구 행정구역의 경계도 표시되어 있는데, 구 중북면의 경계는 신 대곡리의 일부를 포섭해 있었다. 1914년 총독부의 지방행정구역 재편은 군, 면, 동리의 人 口 와 토지 규모를 합리적으로 조정 하였을 뿐 아니라, 人 的 緣 故 와 開 發 順 序 에 따라 들쑥날쑥했던 군 간, 면 간의 경계를 바로 잡았다. 나아가 이전에는 없던 리 간의 경계를 그었다. 이로써 총독부는 인구와 토지를 포괄 한 지방행정의 기초 단위로서 면과 리를 창출하였다. 지방행정의 새로운 중심은 구래의 里 가 아니라 面 으로 바뀌었다. 면의 행정은 도로, 교량, 하천, 제방, 관개, 배수, 시장, 조림, 농사, 축산, 묘지, 위생, 소방 등에 두루 걸쳤다. 면의 행정을 책임지는 面 長 은 총독부의 관료로서 判 任 官 의 직위를 부여받았다. 면사무소를 구성한 면장과 面 書 記 는 구래의 2등 신분이었던 향 리를 위시한, 개항 이래 그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승시켜 온, 신흥 유력자로 충원되었다. 9) 그 렇게 면은 일제 하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彦 陽 面 이 인접 한 삼동면의 구수리를 포섭하여 오늘날의 彦 陽 邑 이 되는 것은 1973년이다. 2. 자연환경 <지도1>은 1914년의 지형도로부터 언양면의 공간을 채우는 林 野, 耕 地, 聚 落, 川 을 개략적 으로 발췌한 것이다. 면의 서북은 언양의 鎭 山 인 高 巘 山 (1,033m)이다. 그 옆은 馬 兵 山 (504m) 인데, 그 자락이 길게 뻗어 언양면의 중심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면의 서쪽 경계, 송대리 뒤편은 야트막한 花 藏 山 (285m)이다. 고헌산 너머는, 지도에는 없지만, 加 智 山 (1,241m)이 높 이 솟아 있다. 면의 동남은 神 佛 山 (1,208m)과 肝 月 山 (1,069m)이다. 고헌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은 오늘날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산맥을 구성하는 7대 名 山 중의 4개이다. 가지산과 고 헌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川 이 언양면의 남쪽 경계를 감싸고 흐르는데, 곧 南 川 이다. 남천 북 변의 사각형 표시는 彦 陽 邑 城 이다. 구 언양현의 東 軒, 軍 器 庫, 獄 舍, 客 舍, 養 士 齋 등의 官 衙 가 읍성 남문의 안쪽에 밀집하였다. 조선왕조가 망한 뒤 그 자리에 彦 陽 公 立 普 通 學 校 가 들어 섰다. 남문 바깥은 서부리와 남부리인데, 언양현의 향리와 상인들이 집주했던 곳이다. 다시 지도의 북쪽을 보면, 고헌산 계곡에서 세 줄기의 川 이 흘러내린다. 그것들이 조성한 최초의 취락과 경지가 언양면 서북의 다개리이다. 거기서 두 줄기의 천이 남쪽으로 흘러 직동 리 초입에서 합쳐지는데, 곧 坎 川 이다. 감천은 직동리와 어음리를 거쳐 남천과 합류한다. 그 사이 화장산에서 몇 줄기의 천이 흘러 감천과 합해진다. 이렇게 다개리에서 南 流 하는 천을 따 라 좌우에 폭 1 2km, 길이 8km 가량의 평야가 펼쳐 있다. 평야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다개 리, 평리, 직동리, 송대리, 서부리, 동부리, 남부리, 어음리가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다개리에서 동쪽으로 흐른 다른 한 줄기의 천은 마병산 자락의 반곡리를 거쳐 대곡리에 이 르러 북방의 두동면에서 발원한 長 川 과 합류하는데, 곧 盤 龜 川 이다. 반구천은 대곡리, 태기리, 반연리의 동쪽을 흘러 남천과 만난다. 여기서부터가 太 和 江 이다. 이 언저리는 지형에 구애되 어 천이 심한 曲 流 로 흐르나 물이 깊어 연못처럼 고요하였으며, 이에 曲 淵 이라 불렸다. 다개 리에서 출발한 천이 장천과 만나 반구천을 이루어 곡연에 이르기까지의 溪 間 에도 좁고 긴 경 지가 조성되었다. 태기리의 골짜기에서도 한 줄기의 천이 흘러 반구천과 합류하는데, 그 사이 에도 소규모 농지가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 남천이 어음리를 지나 반송리, 반천리, 반연리를 9) 金 翼 漢, 植 民 地 期 朝 鮮 における 地 方 支 配 體 制 の 構 築 過 程 と 農 村 社 會 變 動, 東 京 大 學 大 學 院 人 文 社 會 系 硏 究 科 博 士 學 位 論 文, 1996, 56 86쪽

9 거쳐 곡연에 이르는 사이, 남천과 마병산 자락 사이에 비교적 넓은 경지가 펼쳐졌다. 이처럼 언양면은 溪 間 에서 發 源 한 川 水 를 용수원로 하는 山 間 部 稻 作 地 帶 의 전형을 이루었 다. 10) 언양면 곳곳에 川 水 나 地 下 湧 水 를 貯 留 한 못이 일찍부터 개발되었다. 다개리에 고헌산 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은 못이 있는데, 곧 茶 開 池 이다. 다개지는 1469년에 편찬된 慶 尙 道 續 撰 地 理 誌 에서부터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에 의하면 다개지의 관개면적은 근방에서 가장 큰 12결이었다. 동 지리지는 이외에 松 道 里 의 秋 成 堤 와 瓮 谷 里 機 堤 (틀못)의 존재도 전하고 있다. 관개면적은 각각 5결과 9결 17부라고 하였다. 송도리와 옹곡리는 오늘날의 송대리와 태 기리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 는 언양이 유서 깊은 산간부 도작지대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1910년대에 두 차례 편찬된 彦 陽 邑 誌 는 구 상북면과 중북면의 수리시설을 다음의 <표2>와 같이 열거하였다. <표2> 구 상북면과 중북면의 수리시설(1910년대) 貯 水 池 所 在 里 교동못( 橋 洞 堤 ) 반송리 上 北 面 황사못( 黃 沙 堤 ) 반송리 새못( 新 堤 ) 반호리 가막못( 釜 堤 ) 반연리 추성못( 秋 成 堤 ) 직동리 직동못( 直 洞 堤 ) 직동리 中 北 面 가고못( 加 古 堤 ) 직동리 기지못( 機 池 堤 ) 태기리 다개못( 茶 開 堤 ) 다개리 황검못( 黃 劍 堤 ) 평리 자료: 彦 陽 邑 誌 (2001), 58 61쪽. 비고: 1 斗 落 =200 坪. 蒙 利 面 積 ( 斗 落 ) 洑 盤 松 洑 大 廳 洑 沙 洑 浮 里 洑 於 音 洑 石 川 洑 古 羅 洑 吾 里 洑 大 谷 洑 所 在 里 반송리 반송리 반송리 서부리 어음리 다개리 다개리 반곡리 대곡리 蒙 利 面 積 ( 斗 落 ) , 貯 水 池 는 모두 10개이다. 그 가운데 경상도속찬지리지 가 언급한 3개의 못이 있다. 관개면 적은 도합 2,395.7두락이다. 洑 는 9개이며, 관개면적은 모두 4,237두락이다. 상북면의 5개 보 는 모두 남천을 수원으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 浮 里 洑 의 관개면적이 2,276.6두락으로서 압도 적으로 컸다. 부리보는 <지도1>에서 서부리 서쪽 끝 부분의 남천에서 引 入 된 것으로서 서부 리, 송대리, 동부리, 어음리를 적신 뒤 다시 남천으로 주입하였다. 부리보는 언양면 도작의 젓 줄을 이루었다. 반면 고헌산과 마병산 자락에 놓인 중북면의 주요 수리시설은 계간 천수를 담 은 6개의 저수지였으며, 보는 4개로서 그 규모는 모두 작았다. 1910년대 언양면의 수리시설은 이상의 저수지와 보만은 아니었다. 1912년 언양면에는 26개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10) 山 間 部 稻 作 地 帶 라는 용어는 히사마겐이치( 久 間 健 一 )가 全 北 의 농업경영을 平 野 部 稻 作 地 帶 와 山 間 部 稻 作 地 帶 로 구분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平 野 部 는 全 北 平 野 를 끼고 있는 전주, 익산, 옥구, 김제, 정읍, 부안, 고창을 말 하며, 山 間 部 는 무주, 장수, 진안, 남원, 임실, 순창을 말한다. 평야부와 산간부의 농업경영을 규정한 지리적 조건은 판이하였다. 평야부에서는 水 利 組 合 에 의해 개발된 대규모 貯 水 池 가 관개의 주요 형태를 이룬 반면, 산간부에서는 共 同 水 利 로서 전통적인 洑 에 의한 관개가 발달하였다. 稻 作 의 경우, 山 間 部 가 더 집약적인 土 地 利 用 과 높은 生 産 性 을 보였다. 久 間 健 一, 朝 鮮 農 業 經 營 地 帶 の 硏 究, 農 林 省 農 業 總 合 硏 究 所, 1950, 쪽 참조. 히사마는 경남의 농업경영에 대해서는 평양부와 산간부를 구분하지 않고 일괄하여 稻 作 地 帶 로 분류하였다. 나는 언양면의 농업경영에 관한 한, 히사마가 소개한 전라도 산간부의 농업경영을 규정한 지리적 조건이 그대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그의 산간부도작지대 라는 용어를 여기서 借 用 한다

10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다. 이상과 같은 자연환경에서 언양은 예부터 山 多 水 冽 또는 山 紫 水 明 한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소설가 吳 永 壽 ( )는 언양면 동부리 출생이다. 그는 그의 자전적 소설 三 湖 江 에서 그의 고향을 산이 깊고 물이 맑고 미나리로 널리 알려진 조그만 산간 촌읍 으로 회상하였 다. 11) 그는 평생 그가 어릴 적에 맛본 봄미나리의 향기로운 맛을 잊지 못하였다. 그의 고향에 대한 달콤한 기억에는 간월산 계곡에서 나는 엉개와 두릅, 남천에서의 川 獵, 가을의 과일 등 이 자리 잡았다. 오영수의 소설에서 20세기 초의 언양은 더 없이 깨끗하고 풍요로운 고장이 다. 그렇지만 20세기 초의 제반 자료로 들여다 본 언양의 사회경제적 실태는 그렇게 풍요롭지 만은 않았다. 20세기 초 언양의 경제, 사회, 문화를 가장 심각하게 제약한 것은 열악한 道 路 사정이었다. 사방의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풍족한 천수는 일찍부터 언양을 산간부 도작지대로 개발하였 지만, 조그만 降 雨 에도 사방으로의 통행을 가로 막는 天 然 의 장애이기도 하였다. 1911년의 조 사에 의하면 언양면에서 동으로 蔚 山 面 까지 20여 km에 고개가 둘이고 하천이 여섯이었다. 도 로는 대개 평탄하지만 橋 梁 이 전혀 없어서 하루아침의 비에도 며칠 간 교통이 두절되었다. 남 쪽으로 梁 山 까지 30km에는 고개가 둘, 하천이 열인데, 경부선의 勿 禁 驛 이 그 쪽에 있어서 비 교적 왕래가 잦지만, 이 역시 강우 시에는 교량이 없어 교통이 두절되었다. 북쪽으로 32km의 경북 慶 州 까지는 고개 하나에 하천이 다섯인데, 마찬가지였다. 서쪽으로 淸 道 까지 60km는 험 한 고개가 여섯, 하천이 다섯으로서 더욱 그러하였다. 12) 1904년 4월 13일 울산의 時 禮 에서 彦 陽 을 거쳐 曲 淵 까지 약 30km를 여행한 일본인 農 業 技 師 의 눈에 비친 주변의 풍광은 다음과 같았다. 山 嶽 이 매우 급하고 높다. 큰 고개가 있는데 경사가 심하고 도로가 좁아 馬 夫 가 말 등의 짐을 내리고 스스로 지고 넘는다. 고개 부근은 나 무가 조금 많지만, 언양 방면은 벌거숭이 산이다. 土 砂 가 무너져 河 流 를 메우지 않은 곳이 없 다. 잦은 수해로 경지가 감소하고 있다. 논은 溪 流 를 이용하여 관개한다. 토지의 이용은 한계 에 달하여 큰 고개의 마루까지 다락논으로 개간되었다. 언양에서 미나리가 무성하게 자라는 데, 읍내의 汚 水 가 모이는 곳이다. 경지는 결코 비옥하지 않으며, 언양 주변의 작은 마을 외에 는 볼만한 들판이 없다. 이 일행은 전날 4월 12일 密 陽 에서 時 禮 까지를 여행하였다. 높은 산 을 통과하는 도중의 谷 間 은 자갈로 메워져 도로인지 하류인지 경지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 었다. 密 陽 川 상류에는 밭에서 주워 모은 자갈로 두둑과 조그만 산을 이룬 것이 도처에 널렸 다. 그들은 노래하였다. 전해들은 저승의 江 도 눈앞의 자갈밭 한국의 들 13). 이렇게 20세기 초 언양은 오영수의 회상과 동떨어진, 궁벽하기 그지없는 산촌이었다. 사방 의 산은 헐벗었고, 내는 막혔다. 도로가 열악하여 조그만 비에도 교통이 끊어졌다. 주요 운반 수단은 사람의 등이었다. 잦은 수해는 경지를 갉았다. 오랜 전통의 산간부 도작지대로서 언양 면의 농업 개발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언양의 사회와 문화도 침체하였다. 1908년 皇 城 新 聞 은 언양에 대해 산이 많고 물이 차 가워 도읍의 번화한 모습이 없는데, 國 朝 수백 년 이래 위대한 인물로서 후세에 큰 이름을 남 긴 자가 없다 고 하였다. 14) 지적된 그대로 언양에는 근읍 경주나 밀양에서 보는 일류의 양반 씨족이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언양 출신으로 文 科 에 급제한 사람은 2명에 11) 오영수가 소설의 제목으로 칭한 三 湖 江 은 구수리 앞 남천을 가리키는데, 어디까지나 그의 창작이다. 12) 朝 鮮 總 督 府 農 商 工 部, 釜 山 方 面 商 工 業 調 査, 1911, 158쪽. 13) 傳 え 聞 く 賽 の 河 原 も 面 のあたり 石 礫 拾 う 韓 國 の 野 邊. 三 成 文 一 郞 有 働 良 夫, 韓 國 土 地 農 産 調 査 報 告 ( 慶 尙 道 全 羅 道 ), 1905, 附 錄 75 78쪽. 14) 皇 城 新 聞 1908년 9월 2일

11 불과하였다. 15) 더구나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舊 韓 末 에는 주변의 험준한 山 勢 로 인해 도적떼가 들끓었다. 1900년 9월에는 火 賊 100여 명이 雲 門 山 에서 내려와 일제히 放 砲 하며 各 里 에 들 어와 45호를 불태우고 15명의 부상자를 냈다. 양산 通 道 寺 에는 수백 명이 活 貧 黨 旗 를 걸고 屯 聚 하였다. 1905년 5월에는 화적 40여 명이 총검을 지니고 彦 陽 城 에 난입하였다. 그들은 관 아의 물건을 탈취한 다음, 邑 中 의 민가를 수색하여 佩 物 과 衣 服 을 빼앗았다. 16) 도적떼의 발호 는 1911년까지 끊어지지 않았으며, 언양의 경제를 위축시켰다. 3. 토지의 구성 총독부의 土 地 調 査 事 業 에서 언양면의 토지가 측량되고 소유자가 査 定 되는 것은 년의 일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지방행정의 기초로 활용되는 土 地 臺 帳 이 조제되었다. 언 양면 토지대장에 등록된 토지의 지목별 면적을 1912년부터 10년 간격으로 제시하면 <표3>과 같다. 토지대장과 별도로 조제된 林 野 臺 帳 상의 임야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표3> 彦 陽 面 土 地 의 내역( ) 단위: 坪 年 度 畓 田 垈 1,992,650 1,168, , (54.7) (32.1) (5.6) 社 寺 地 685 (0.0) 林 野 道 路 溝 渠 溜 池 河 川 堤 防 墳 墓 地 158, ,202 35, ,509 (4.3) (0.0) (0.0) (1.0) (0.0) (2.1) 雜 種 地 235 (0.0) 合 計 3,640,456 (100.0) ,027,623 (55.4) 1,154,041 (31.5) 202,906 (5.5) 868 (0.0) 158,485 (4.3) 1,426 (0.0) 1,202 (0.0) 36,211 (1.0) 1,239 (0.0) 77,752 (2.1) 914 (0.0) 3,662,667 (100.0) ,118,798 (57.8) 1,053,373 (28.7) 201,671 (5.5) 1,015 (0.0) 162,159 (4.4) 6,931 (0.2) 1,866 (0.1) 36,391 (1.0) 5,631 (0.2) 76,485 (2.1) 702 (0.0) 3,665,022 (100.0) ,243,893 (61.1) 910,508 (24.8) 203,717 (5.5) 1,145 (0.0) 171,729 (4.7) 14,565 (0.4) 2,101 (0.1) 38,722 (1.1) 8,223 (0.2) 1,047 (0.0) 75,946 (2.1) 1,695 (0.0) 3,673,291 (100.0) 2,209, , (60.0) (24.7) 자료: 彦 陽 面 土 地 臺 帳. 204,542 (5.5) 1,145 (0.0) 174,572 (4.7) 18,547 (0.5) 13,103 (0.4) 63,021 (1.7) 11,339 (0.3) 1,047 (0.0) 75,946 (2.1) 3,578 (0.1) 3,685,728 (100.0) 1912년 언양면의 토지는 총 364만여 평이다. 지목은 畓, 田, 垈, 社 寺 地, 林 野, 道 路, 溜 池, 溝 渠, 河 川, 堤 防, 墳 墓 地, 雜 種 地 로서 도합 12종이다. 畓 은 199만여 평(54,7%), 田 은 116만 여 평(32.1%)이다. 이렇게 언양면 농업의 중심은 畓 作 에 있었다. 그래서 앞서 산간부 도작지 대라 하였다. 답은 1942년까지 224만여 평(61.1%)으로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이후는 1952년 까지 220만여 평(60.0%)으로 다소 감소하였다. 이는 그 사이 溜 池 와 河 川 敷 地 가 증가하여 그 에 편입된 답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과 대조적으로 전의 면적은 1912년의 116만여 평 (32.1%)에서 1952년의 90만여 평(24.7%)으로 계속 감소하였다. 답작의 수익성이 높고 수리사 정이 개선됨에 따라 답으로 지목 변환하는 전이 많았기 때문이다. 도로나 하천부지에 편입되 는 전도 있었다. 垈 는 1912년 20만 5,000여 평(5.6%)에서 1932년까지 20만 1,000여 평 (5.5%)으로 조금 줄었는데, 道 路 편입이 주원인이다. 이후 1952년까지 20만 4,000여 평 (5.5%)으로 조금 늘지만, 1912년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같은 대지의 추이는 동기간 언양면의 人 口 가 정체하였음을 이야기한다. 社 寺 地 는 종교시설의 부지이다. 1912년에 3필지 685평이 있었는데, 대곡리에 2필지, 태기 15) 손숙경, 19세기 언양 鄕 班 社 會 의 새로운 구성원들과 그 성격 鄕 校 의 儒 案 과 구성원들의 層 位 - (원고본), ) 皇 城 新 聞 1900년 9월 1일, 1905년 5월 29일

12 리의 1필지이다. 대곡리 2필지의 소유자는 대곡리 와 김남곤 외 4인 이다. 태기리 1필지의 소유자는 태기리 이다. 리가 소유자임으로부터 사사지는 洞 祭 가 거행되는 城 隍 堂 의 부지로 짐작된다. 그런데 대곡리에서 사사지가 둘이고 소유자 명의가 각기 다른데, 그 이유를 알기 힘들다. 대곡리와 태기리를 제외한 다른 12개 리에서 사사지가 없는 이유도 알기 힘들다. 사 사지는 1918, 1931, 1937년에 1필지씩 증가하는데, 앞의 둘은 耶 蘇 敎 會 의 부지이다. 기존의 垈 地 에 교회가 건립되면서 지목이 사사지로 바뀌었다. 그런데 반천리 261번지에는 1911년부 터 야소교회가 있었지만 지목은 사사지가 아니라 垈 였다. 송대리 404번지에는 天 主 敎 會 가 1911년부터 있었는데, 부지가 696평이나 되었다. 그 역시 지목은 대였다. 토지행정에 있어서 지목을 사사지로 사정함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林 野 는 앞서 지적한대로 임야대장 상의 임야가 아니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될 즈음인 1917년부터 총독부는 林 野 調 査 事 業 을 벌였다. 그 결과 임야대장이 조제되었다. 그 대장에 <지도1>에서 보는 언양면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山 地 로서 임야가 등록되었다. 17) <표3>의 임야는 답, 전, 분묘지 등 다른 지목 사이에 介 在 한 것을 가리킨다. 1912년 그런 임야의 면적 은 15만 8,000여 평인데(4.3%), 1922년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증가하여 1952년까지 17만 4,000여 평(4.7%)이 되었다. 산지에 가깝게 개간된 田 의 경작이 포기되고 임야로 지목 변환한 경우도 있지만, 河 川 改 修 事 業 의 일환으로 堤 防 을 보강하기 위해 川 邊 의 전이 임야로 전환한 경우가 더 많았다. 반송리의 예를 보면 1928년부터 1945년까지 12필지 5,904평의 전이 임야로 지목 변환하였다. 산지에 접한 것은 3필지에 불과하고 나머지 9필지가 남천의 천변이다. 그 중의 6필지가 1928년에 임야로 일괄 전환하는데, 남천 改 修 工 事 의 일환이었다. 道 路 는 1912년에 1필지 811평(0.0%)에 불과하였다. 이후 1932년에 124필지 6,931평 (0.2%), 1952년에 300필지 18,547평(0.5%)으로 늘었다. 도로의 면적 비중은 전체 토지의 1% 도 되지 않지만 그것의 증가 속도는 여러 지목에서 가장 빠르다. 여기서 도로라 함은 대부분 언양면의 중심부로서 面 事 務 所 가 위치한 동부리, 서부리, 남부리 일대의 市 街 를 말한다. 이 일대가 구 언양현의 邑 底 로 성립, 발전하는 과정은 무계획적이었다. 오늘날처럼 읍내를 종횡 으로 가르는 여러 갈래의 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시가지 정비는 1919년이다. 그 때 16필지의 대지에서 얼마씩이 분할되어 도로로 바뀌었다. 읍성 남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대지 가 그 대상이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년에 있었다. 그 때 123필지의 田 과 垈 가 가 도로로 전환하였다. 뒤이어 1940년까지 도로는 277필지로 증가하였다. 도로의 확장에 따 른 시가지의 정비는 언양면이 근대적 지방도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대변하였다. 溝 渠 는 배수시설이다. 1912년에 2필지 1,202평에 불과했는데, 1927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1928년 서부리에서 8필지가 구거로 전환했으며, 1932년까지 11필지 1,866평으로 늘 었다. 生 活 下 水 의 배수를 위한 시설이었다. 이 역시 시가지의 정비와 함께 언양면이 근대적 지방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을 대변하였다. 뒤이어 구거가 대폭 증가하는 것은 1944년이다. 다 개리와 태기리에서 41필지가 구거로 변환하였다. 이는 수리시설이었다. 구거의 위치가 溜 池 의 아래여서 간선수로에 해당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溜 池 는 수리시설로서 저수지이다. 18) 언양면의 유지는 1912년에 26필지 35,203평(1.0%)인 데, 1932년까지 30필지 36,391평(1.0%)으로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전술한대로 언양면은 고 헌산에서 흘러내리는 천수와 남천을 수원으로 하는 산간부 도작지대로서 오래 전부터 곳곳에 17) 나와 공동연구자들은 아직 林 野 臺 帳 을 전산화하지 못하였다. 역시 장래의 과제이다. 18) 토지대장에서 溜 池 는 1917년까지 池 沼 와 溜 池 의 두 지목으로 구분되는데, 이후 유지로 통일되었다

13 천수나 지하용수를 담은 유지가 발달하였다. 개발은 20세기 초에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러한 생태환경에서 1930년대 말까지 언양면의 수리시설에는 볼만한 변화가 없었다. 유지가 대폭 확장되는 것은 일정기 最 末 인 1944년과 美 軍 政 期 인 1947년의 일이다. 그 결과 1952년 언양면의 유지는 113필지에 63,021평로 늘어나 있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겠다. 河 川 은 하천의 川 底 나 川 邊 으로서 하천구역을 말한다. 1912년에 하천은 반천리 187번지의 1필지 265평에 불과하였다. 앞서 소개한대로 산은 헐벗었고, 하천은 토사로 막혔으며, 잦은 수해는 경지를 침해하였다. 남천에 연한 여러 리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1907년 구 언양현 上 北 面 의 籌 板 에 의하면 도합 257 結 의 경지 가운데 9 結 정도가(3.6%) 川 反 浦 落 地 였다. 수해를 입어 하천으로 떨어진 토지를 말한다. 1결의 면적이 대략 6,000평 정도이니 무려 5만 평이 넘는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구래의 포락지를 토지대장 밖의 公 有 하천으로 돌렸다. 그래도 경지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거나 원 소유자의 소유권에 대한 주장이 완강하게 제기된 1필지의 토지가 하천을 지목으로 하여 토지대장에 등록되었다. 하천은 1920년에 6필지로 늘어나는데, 모두 기존의 경지를 분할하여 국유지로 매입한 뒤 하천으로 지목 변경한 것이다. 곧 河 川 改 修 事 業 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늘어 1952년에는 47필지 11,339평(0.3%)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30필지가 남천에 연한 서부리, 남부리, 어음리, 반송리, 반천리, 반연리에 속하였다. 하천개수와 더불어 남천의 堤 防 이 축설되는 것은 년이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언양면은 거의 매년 홍수에 따른 남천 범람의 피해를 입어 왔다. 어느 해 큰 홍수에는 남천이 서부리를 침입하여 오랫동안 물길을 남겼는데, 그로 인해 소똥섬이란 불린 섬이 생겨나기도 했다. 19) 1923년 9월 언양면은 蔚 山 郡 의 보조금과 面 民 의 出 捐 金 을 합한 1만 2,000여 원의 예산과 면민 1,600호로부터의 연인원 1만 3,000명의 出 役 으로 남천의 護 岸 공사에 착수하였 다. 이 때 언양읍성의 남쪽 벽이 石 材 의 공급을 위해 헐렸다. 1927년 3월 총연장 506 間 의 제 방이 준공되었다. 20) <표3>에서 1942년부터 나오는 제방 1,047평이 그것이다. 제방의 부지는 천변인 서부리의 9필지이다. 이들의 지목이 제방으로 일괄 변환하는 것은 1935년이다 년의 준공과 8년의 시차가 있는데, 그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墳 墓 地 는 1912년 7만 7,000여 평(2.1%)으로서 전, 답, 대, 임야 다음의 큰 비중인데, 1952 년까지 7만 5,000여 평(2.1%)으로 조금 줄었다. 분묘지의 일부가 전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이 다. 雜 種 地 는 1912년 4필지에 235평에 불과하였다. 2필지는 도로와 수로에 붙은 小 片 의 草 生 地 이고, 나머지 2필지는 이후 답지로 개간되었다. 전술한대로 유서 깊은 산간부 도작지대로서 언양면에서 개간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후 잡종지가 1952년까지 3,578평으로 증가하는 것 은 彦 陽 城 址 를 토지대장에 등록하면서 잡종지로 지정하고, 또 무언가 공용의 목적으로 11필지 를 잡종지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4. 인구의 동태 년대의 언양면 人 口 에 관해 알려진 정보는 <표4>와 같다. 1910년은 동년 5월 大 韓 帝 國 內 部 警 務 局 이 행한 民 籍 조사의 결과이다. 1925, 1930, 1935년은 1925년부터 5년 간격으로 실시된 총독부 國 勢 調 査 의 결과이다. 1944년은 총독부가 戰 時 動 員 을 위해 임시로 19) 울산대곡박물관, 언양읍성 마을과 사람들-, 2015, 66쪽. 20) 朝 鮮 日 報 1923년 9월 21일, 東 亞 日 報 1927년 6월 19일. 彦 陽 南 川 護 岸 工 事 紀 念 碑 에 의하면, 제방의 연장은 456간이고 총공사비는 2만 7,776원이었다. 동 기념비는 현재 언양읍사무소 경내에 서 있다. 彦 陽 邑 誌 發 刊 推 進 委 員 會, 彦 陽 邑 誌, 216쪽

14 행한 인구조사의 결과이다. 국세조사의 결과인 1925년 이후의 인구가 정확한 것임에 비해 1910년의 인구는 정확하지 않다. <표4> 彦 陽 面 의 人 口 ( ) 年 度 世 帶 男 女 人 口 世 帶 當 人 口 全 國 總 人 口 ,545 3,674 3,301 6, ,467, ,808 4,539 4,522 9, ,522, ,868 4,660 4,709 9, ,058, ,864 4,707 4,880 9, ,899, ,864 4,405 4,843 9, ,900,142 출처: 內 部 警 務 局, 民 籍 統 計 表 (1910). 朝 鮮 總 督 府 國 勢 調 査 結 果 報 告 (1925, 1930, 1935). 朝 鮮 總 督 府, 人 口 調 査 結 果 報 告 (1944). 김낙년 편,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 636쪽. 1910년 당시는 아직 구 상북면과 중북면의 시대이다. <표4>의 1910년 인구는 두 면의 조 사 결과를 합한 것이다. 전술한대로 1914년 언양면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인접한 두동면, 두서 면과 面 界 에 있어서 약간의 조정이 있었다. 그로 인해 1910년과 1925년의 면 영역에는 약간 의 어긋남이 있다. 이와 별도로 1910년의 조사는 인구에 관한 첫 조사인 만큼 여러 모로 不 備 하였다. 조사의 방식이나 행정력에서 1925년 이후의 국세조사에 미치지 못하였다. 1910년의 인구는 남자 3,674명, 여자 3,301명, 합 6,975명이다. 1925년의 인구는 남자 4,539명, 여자 4,522명, 합 9,061명이다. 15년간의 인구증가는 1.3배이다. 이 수치가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는 동기간 전국 인구의 증가비와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1910년 전국의 인 구가 얼마였는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추계가 있다. <표4>에 제시된 16,467,610은 2006년 金 洛 年 팀의 추계로서 가장 믿을만하다. 그에 의하면 년 조선의 인구는 1.19배 증가 하였다. 이 증가비에 준하여 언양면의 1925년 인구로부터 1910년 인구를 추계하면 7,642명이 된다. 1910년의 조사가 불완전했음은 世 帶 當 人 口 에서도 알 수 있다. 1910년 세대당 인구는 4.51 명으로서 1925년의 5.01명보다 0.5명이나 적다. 여자가 남자보다 373명이나 적듯이 특히 여 자의 조사가 불완전하였다. 15년간 세대의 규모에서 큰 변화가 없다고 가정한 다음, 1925년의 세대당 인구를 1910년의 세대 수 1,545에 곱하면 7,742명이 산출된다. 이 같은 추계로부터 1910년 언양면의 실제 인구는 7,700명 전후였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 년 언양면 인구는 9,061명에서 9,248명으로 1.02배 증가하였다. 동기간 전국의 인구는 1,952만여 명에서 2,590만여 명으로 1.33배 증가하였다. 전국적 추세에 비해 언양면의 인구가 크게 정체한 것은 대량의 인구가 유출하였기 때문이다. 언양면의 인구가 전 국과 동일하게 1.33배 증가했다면 1944년의 인구는 12,021명이 된다. 그러니까 년 대략 2,700여 명의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유출하였던 셈이다. 이 점은 일정기 언양면의 사회와 경제를 살핌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 는 언양면의 특별함이다. 언양면의 인구이동과 관련해서는 除 籍 簿 가 직접적인 기초 자료이다. 1909년 대한제국은 일 본식의 호적인 민적의 작성을 규정한 民 籍 法 을 공포하였다. 그에 따라 1910년까지 전국의 모 든 세대를 대상으로 민적이 작성되었다. 민적은 1922년에 공포된 朝 鮮 戶 籍 令 에 따라 호적으 로 개칭되었다. 이하 민적과 호적을 통칭하여 戶 籍 이라 부른다. 호적은 戶 主 의 사망이나 이사

15 에 따라 戶 가 폐지되면 戶 籍 簿 에서 除 籍 되어 별도의 장부로 編 綴 되는데, 이를 제적부라 하였 다. 1910년대 이래의 언양면 제적부는 현재 언양읍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 제적부를 자세 히 살피면, 초창기 호적 행정의 불실로 인해 년의 제적부가 망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나와 공동연구자들은 이 제적부를 전산화하였다. 이 장부가 제공하는 인구이동에 관한 정보는 풍부하다. 인구이동은 리, 면, 군, 도 간의 國 內 移 動 과 일본, 만주로 향한 國 外 移 動 으로 나뉜다.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여기 서의 과제가 아니다. 국내이동과 달리 국외로 이동한 호는 제적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국 외로 이동한 상태에서 가족 성원에 사망, 출생, 결혼 등과 인구변동이 발생할 경우, 그 사실은 국외의 행정기관으로부터 언양면에 통보되어 호적에 반영되었다. 여기서는 일본으로 渡 航 한 뒤 인구변동을 맞아 호적에 반영된 경우를 간략히 소개한다. <표5> 彦 陽 面 日 本 移 住 者 의 人 口 變 動 事 由 別, 居 住 地 別 分 布 ( ) 移 住 地 出 生 死 亡 婚 姻 자료: 彦 陽 面 除 籍 簿. 轉 入, 轉 出, 寄 留 計 移 住 地 出 生 死 亡 婚 姻 轉 入, 轉 出, 寄 留 岡 山 県 三 重 県 京 都 府 石 川 県 高 知 県 神 奈 川 県 廣 島 県 新 瀉 県 群 馬 県 岩 手 県 宮 城 県 愛 媛 県 岐 阜 県 愛 知 県 埼 玉 県 熊 本 県 吉 敷 郡 1 1 茨 城 県 5 5 奈 良 県 滋 賀 県 大 分 県 長 崎 県 大 阪 府 長 野 県 德 島 県 靜 岡 県 島 根 県 静 岡 県 東 京 都 鳥 取 県 東 北 県 佐 賀 県 鹿 児 島 県 千 葉 県 兵 庫 県 靑 森 県 福 岡 県 秋 田 県 福 島 県 香 川 県 福 井 県 和 歌 山 県 富 山 県 樺 太 北 海 道 栃 木 県 山 口 県 未 詳 5 5 山 梨 県 計 1, ,483 計 <표5>는 1911년 1977년 언양면을 본적으로 하는 일본 이주자의 인구변동 사유별, 거주지 별 분포이다. 1977년까지 인구변동이 이어진 것은 1945년의 해방 후에도 일본에 체류한 이른 바 在 日 僑 胞 들이 그 때까지 인구변동을 신고해 왔기 때문이다. 동 67년간 일본에서 출생한 사람은 1,979명, 사망한 사람은 455명, 혼인한 사람은 36명, 일본 내에서 전입, 전출, 寄 留 한 사람은 13명으로서 도합 2,483명이다. 이 가운데 출생했다가 사망하는 등, 중복된 경우를 제 외하면 실제 인구는 2,276명이다. 언양면 호적에서 관련 호는 892호이다. 戶 當 인구변동은 2.55명이다. 출생의 경우 부모 2명이 일본에 거주했음이 확실하다. 이를 고려하면 대개

16 명 전후의 소규모 세대가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들이 호적 상 892호의 구 성원 전부는 아니다. 일본으로 이주한 소규모 세대는 호 구성원의 전부일 수도 있고 일부일 수도 있다. 대개 戶 主 를 비롯한 호의 구성원 전부가 도항하는 경우는 드물고, 호주의 장남 또 는 차남 가족과 같은, 호를 구성하는 소규모 세대가 도항하였다. 따라서 彦 陽 面 民 으로서 일본 으로의 이주자는 정확히 말해 892호가 아니라 그 일부인 892세대였다. <표5>에서 보듯이 이 들의 이주지는 일본 내의 49개 府 縣 으로서 거의 전국적 범위에 걸쳤다. 이주가 가장 많았던 곳은 아이치( 愛 知 )현, 오사카( 大 阪 )부, 후쿠오카( 福 岡 )현, 효고( 兵 庫 )현, 야마구치( 山 口 )현의 순 서이다. 892세대의 도항 시기가 언제인지는 <그림1>과 같은 일본 내 출생자의 연도별 분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출생자는 1916년의 2명인데, 1925년 이후 가속적으로 증가하여 1943 년에 최고 204명에 다다랐다. 이후 1944년 192명, 1945년 110명으로 감소한 것은 美 國 의 일 본 空 襲 이 심해짐에 따라 이주자가 줄고 귀환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아 대 거 철수하여 1946년에는 17명에 불과하였다. 언양면민의 일본 이주가 집중된 것은 1935년 이 후이다. 1945년까지의 출생자 가운데 년의 출생자가 78%로서 대부분을 차지하였 다. <그림1> 彦 陽 面 民 의 渡 日 年 度 자료: 彦 陽 面 除 籍 簿. 언양면의 전 인구에서 일본 이주자의 비중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호적에 인 구변동이 신고된 세대 이외에 다른 이주자가 있었다. 單 身 으로 이주했다가 귀환한 경우가 있 다. 세대가 이주했으나 인구변동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호적의 내용에 아무런 변 동이 없으며, 이에 호적만으로는 그들의 이주 여부를 알 수 없다. 또한 이주가 명확한 892세 대라 해도 그 귀환 시기를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1945년 8월까지 일본에 머문 세대가 많지만, 그 전에 귀환한 세대도 있다. 이 같은 이유에서 특정 시기 언양의 전 인구에서 이주 자의 비중이 얼마인지를 추산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이주가 명확한 892세대 모두가 1944년 말까지 일본에 체류했다고 가정한다. 그들이 이주하지 않았다면, 1944년 말 언양면의 세대 총 수는 <표4>의 1,864세대와 892세대를 합한 2,756세대가 된다. 이에 일본으로 이주한 892세 대는 그것의 32.4%를 점한다. 이외에 호적만으로 알 수 없는 이주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 점 까지 고려하면 일정기 언양면민의 거의 4 5할이 일본으로 장기간 또는 단기간 이주했다고

17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경남, 경북, 전남에서, 특히 연안 지방에서, 일정기에 대량의 人 口 가 일본으로 도항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주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도는 경북인데, 1940년 현재 도내 총인구의 17%가 일본으로 넘어가 있었다. 경남에서는 11%였다. 21) 언양면 과 가까운 울산군 府 內 面 達 里 를 대상으로 한 1935년의 조사에 의하면, 주민 637명 가운데 121명이 일본에 거주하는 중이었다 년에 결혼한 달리의 처녀 22명 가운데 6명이 일본행 결혼이었다. 22) 일본에 이주한 울산 청년이 고향의 처녀를 배우자로 구하였기 때문이 다. 이 같은 이주의 물결은 이후 더욱 급해졌다. 밀항자도 적지 않았다. 1937년 7월 언양의 김봉해는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강제 송환되었다. 23) 언양면은 일본으로의 관문인 釜 山 港 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한 지리환경에서 언양면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일본 이주자를 배출하 였다. 언양면은 일정기 다른 지역이 직면했던 人 口 壓 力 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에 따른 正 의 효과는 뒤이어 살피는 언양 소농사회의 경제적 동태에서 뚜렷하게 관찰된다. 5. 찾아온 일본인들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반면, 훨씬 적은 수이지만 언양으로 오는 일본인이 있었다. 벌써 1904년에 최초의 일본인이 언양에 들어왔다. 동년 4월 이곳을 지나간 일본인 농업기사 는 언양에 日 本 藥 局 이란 깃발을 내건 邦 人 이 있다고 하였다. 24) 1911년 이후 언양면에 거 주한 일본인에 관해서는 현재 언양읍사무소에 소장 중인 在 彦 陽 日 本 人 除 戶 簿 라는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총독부는 1911년 본적지를 떠나 다른 지역에 숙박하거나 거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宿 泊 및 居 住 規 則 을 발포하였다. 그에 따라 2개월 이상 동일 郡 內 에 거주하는 사 람은 자신과 동반하는 가족에 관해 성명, 본적, 직업, 생년월일, 거주지주소, 轉 入 日, 前 住 所 를 거주지의 행정관청에 신고해야 했다. 그 결과 居 住 者 登 錄 簿 가 만들어졌다. 조선인과 일본 인의 등록부는 따로 만들어졌다. 戶 主 는 가족의 출생, 사망 등의 변화가 생기면 이를 신고해 야 했으며, 그에 따라 등록부가 수정되었다. 거주자의 호 전체가 전출 등의 사유로 등록부에 서 말소될 경우, 그 호는 除 戶 簿 에 순서대로 編 綴 되었다. 25) 재언양일본인제호부 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동 제호부는 언양면에 거주하다 떠난 모든 일본인을 다 싣고 있지는 않다. 慶 尙 南 道 統 計 年 報 에 의하면 1925년 언양면에 거주한 일본인은 25호에 73명이다. 26) 그런데 제호부를 통해 확인되는 1925년의 일본인은 9호에 불과하다. 모든 일본인이 거주규칙 에 따른 신고의 의무 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1913년 이래 彦 陽 公 立 普 通 學 校 와 27) 彦 陽 尋 常 小 學 校 에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부임하였다. 朝 鮮 總 督 府 及 附 屬 官 署 職 員 錄 에 의하면 그 수는 1941년까지 총 29명에 달하였다. 평균 재직기간은 3년이었다. 그런데 제호부에서는 1918년까지 재직한 2명만 보일 뿐이고, 이후 재직한 27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에 巡 査 들의 轉 出 入 은 비교적 충실하게 기 21) 外 村 大, 在 日 朝 鮮 人 社 會 の 歷 史 的 硏 究, 綠 蔭 書 房, 2004, 58쪽. 22) 강정택 지음ㆍ박동성 옮김ㆍ이문웅 엮음 식민지 조선의 농업사회와 농업경제, YBM-sisa, 2008, 쪽. 23) 東 亞 日 報 1937년 7월 15일. 24) 三 成 文 一 郞 有 働 良 夫, 韓 國 土 地 農 産 調 査 報 告 ( 慶 尙 道 全 羅 道 ) 附 錄 78쪽. 25) 細 谷 定, 日 鮮 對 照 朝 鮮 民 籍 要 覽, 1915, 쪽. 26) 朝 鮮 總 督 府 慶 尙 南 道 統 計 年 報 第 五 編 1925년, 8쪽. 27) 1938년 彦 山 尋 常 小 學 校 로 개명

18 록되었다. 1918년 이후 일부 신분의 일본인에게 거주 신고의 의무는 면제된 듯이 보이는데, 자세한 사정은 추후 연구의 과제이다. 대조적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거주규칙 의 시행과 등록부 및 제호부의 관리는 비교적 충실했다고 보인다. 제호부의 기록은 무언가의 사유로 1942년에 중단되었다. 제호부에 의하면 1911년 말 언양면의 일본인은 17호이다. 1913년 말에는 20호로서 피크를 이루었다. 이후 조금씩 줄어 1925년 말에는 9호이다. 이 호수는 1934년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1936년에는 5호로 더욱 줄었다. 28) 이처럼 일정기에 걸쳐 언양면의 인구에서 일본인 의 비중은 보잘 것 없었다. 제호부에 등록되지 않은 일본인이 있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산간부 농업지대인 언양면에 다수의 일본인이 들어올 유인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몇 년간 꽤나 많은 일본인들이 언양면을 찾았다 년 모두 58호의 일본인이 전입하 였다. 마지막 전입자는 1936년이다 년 총 110호가 언양에 들어왔는데, 그 절반 이상이 년에 들어왔다. 1915년 이후 언양에 들어오는 일본인의 수는 뚝 떨어졌다 년에 전입한 58호는 언양면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 중의 20호가 6개월 이내 에, 17호가 1년 이내에, 11호가 3년 이내에 다른 곳으로 전출하였다. 3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10호이다. 58호의 직업을 보면 우선 敎 員, 巡 査, 官 吏 와 雇 員, 郵 便 所 職 員 등이 18호이다. 이들은 교원, 관리, 순사의 4호를 제외하고 대개 1년 이내의 단기 체류에 그쳤다. 다음은 雜 貨, 菓 子, 木 炭, 藥 등을 판매한 상인이 16호이다. 이들 역시 4호를 제외하고 대개 2년 내에 언양을 떠났다. 그 다음은 飮 食 店, 代 書 業, 木 手 를 비롯한 서비스업이 11명이다. 이 중에 2년 이상 체류한 사람은 2호이다. 나머지는 鑛 業 및 土 木 業 4호, 農 業 4호, 無 職 4호인데, 대개 마찬가지로 단기 체류자들이었다. 일정 초기에 언양에 들어온 다수의 일본인은 관공리를 제외한다면, 일본의 새로운 영토인 조선에서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분주하게 옮겨 다닌 상인과 서비스업자들이었다. 그들 의 대부분은 일본사회에서 하층민이었다. 단기간의 탐색 끝에 소수의 사람만 남고, 대부분은 실망한 나머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음식점에는 藝 妓 者 1명이 고용되기도 했다. 언양의 사회 와 경제는 그녀가 머물기에 적당치 않았다. 그녀는 6개월 뒤 울산면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건 너간 최초의 조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조선을 찾아온 일본인들 역시 정착 과정에서 큰 기 대와 빈약한 정보로 이리저리 유동하였다. 그런 가운데 소수의 일본인이 언양면에 장기 정착하였다. 10년 이상 언양면에 거주한 일본 인은 모두 8명이다. <표6>은 제호부와 토지대장으로 확인되는 그들의 관한 정보이다. 연번 7 桑 原 眞 行 의 거주 기간은 9년 10개월이지만, 후술하듯이 중요한 인물이어서 표에 실었다. <표6> 日 政 期 彦 陽 面 에 定 着 한 日 本 人 성명 (생년) 刈 屋 益 槌 (1876) 原 岡 伴 次 郎 (1889) 吉 岡 順 作 (1879) 伊 藤 辰 造 (1882) 직업 주소 전입년월 전출년월 거주기간 잡화 겸 숙박 동거 가족 토지(연도) 동부리 년 4개월 2 137평(1912), 968평(1927) 제과업 남부리 년 9개월 4 329평(1912), 33,153평(1934) 잡화상 동부리 년 7개월 4 84평(1915), 101평(1929) 상업 동부리 년 1개월 2 789평(1933), 1,300평(1944) 28) 재언양일본인제호부 에 등록된 일본인 호주는 총 110명이다. 그 가운데 15명의 경우, 除 戶 日 이, 즉 언양 면을 떠난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除 戶 簿 에의 編 綴 순서가 除 戶 의 순서이므로 전후 인물의 제호일로 부터 그 시기를 추론함에 큰 어려움은 없다

19 増 崎 政 市 (1881) 森 谷 久 吉 (1871) 桑 原 真 幸 (1875) 山 崎 虎 吉 (1873) 中 道 祐 次 (1888) 농업 동부리 년 6개월 6 자료: 在 彦 陽 日 本 人 除 戶 簿, 彦 陽 面 土 地 臺 帳. 517평(1926), 6,065평(1936), 4,905(1944) 농업 동부리 년 10개월 2 209평(1911), 209평(1940) 농업 서부리 년 10개월 5 상업 남부리 년 2 순사 동부리 년 3개월 9 4,865평(1917), 15,447평(1922), 276평(1944) 213평(1911), 4,950평(1926), 696평(1935) 이 가운데 언양면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가리야( 刈 屋 益 槌 )이다. 1876년 생으로서 야마 구치( 山 口 )현 출신이다. 1911년 7월, 35세의 가리야는 5살 아래의 부인을 대동하고 언양면 동 부리에 들어와 雜 貨 商 과 宿 泊 業 을 차렸다. 1916년에는 야마구치 출신의, 그와 同 姓 의 인물이 그에 집에 1년간 寄 寓 하였다. 직업은 농업인데, 정착에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923년에 는 가리야의 어머니가 합류하였다. 그렇게 가리야의 정착 의지는 확고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언양 생활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잡화상과 숙박업 경영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 다. 1912년 그의 토지재산은 대지 137평에 불과했는데, 1927년까지 田 1필지 787평을 마련 했을 뿐이다. 1927년 10월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彦 陽 場 이 열린 어느 날, 上 南 面 의 金 敬 道 (34세)가 가리야의 상점 앞에 숯을 팔았다. 김경도는 가리야의 처에게 성냥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녀는 돈을 주지 않으면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가리야와 김경도 사이에 말다 툼과 격투가 벌어졌다. 가리야가 김경도의 국부를 찼으며, 그로 인해 김경도는 며칠 뒤 사망 하였다. 이 사건은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커다란 사회적, 민족적 이슈로 떠올랐다. 가리야는 체포되었으며, 1928월 1월 첫 공판이 열렸다. 29) 재판의 결과는 알 수 없으나, 그저 放 免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호부에 의하면, 가리야가 그의 妻 와 母 를 데리 고 언양을 떠나는 것은 1935년 10월의 일이다. 그 사이 일정 기간 刑 務 所 에서 복역했다고 보 인다. 어디로 떠났는지는 제호부에 나타나 있지 않다. 토지대장에서 그의 주소는 1929년에 울 산면으로, 1934년에는 야마구치현으로 바뀌었다. 이로 미루건대 가리야의 처와 모는 1929년 에 언양면을 떠나 울산면으로 이주하였으며, 가리야의 出 所 를 기다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 보인다. 가리야보다 5개월 늦게 언양 남부리에 들어온 하라오카( 原 岡 伴 次 郞 )는 제과점을 차렸다. 1889년 생으로 오이타( 大 分 )현 출신이다. 그의 제과점 경영은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1912년 329평에 불과한 그의 토지재산은 1934년까지 33,153평으로 불어났다. 1934년 그는 언양면에 서 개인지주로서는 제2의, 재지지주로는 제1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성공하 는 사이 그는 언양에서 1남 3녀를 출생하였다. 그의 이름이 紙 上 에 보도되는 것은 彦 陽 水 利 組 合 의 결성과 관련해서이다. 그의 꾸준한 노력으로 수리조합의 결성이 가시화하는 것은 1930년 11월이다. 경상남도는 언양수리조합의 설립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이후 2년간 언양면 주민의 수리조합 반대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포함하여 활발하게 벌어졌다. 결국 1932년 언양수리조합의 계획은 취소되었다. 30) 그 대신 浮 里 洑 契 가 토지개량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 다. 이 사건이 영향을 미쳤는지, 하라오카는 1935년 11월 언양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동년 4 월에는 그의 처가 사망하였다. 하라오카가 언양을 떠난 데에는 처의 죽음이 더 큰 계기였을지 29) 東 亞 日 報 1927년 10월 25일, 29일. 中 外 日 報 1927년 12월 27, 30일, 1928년 1월 21일. 30) 언양수리조합의 추진과 반대 운동에 관해서는 東 亞 日 報 1930년 11월 14일, 1932년 5월 27일, 9월 7일 기사, 朝 鮮 總 督 府 官 報 1931년 3월 31일 彙 報 를 참조

20 모르겠다. 부산으로 옮겨간 후에도 하라오카는 언양면에 있는 그의 토지를 그대로 소유하였 다. 그가 토지의 대부분을 처분하는 것은 1944년이다. 그리고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보인다. 하라오카에 뒤이어 년에 언양에 들어온 잡화상 요시오카( 吉 岡 順 作 )과 상인 이토 오( 伊 藤 辰 造 )는 토지재산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보아 경제적으로 그리 성공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에 비해 농민으로 들어온 마수자키( 增 崎 政 市 )와 구와하라( 桑 原 眞 行 )의 언양 이주는 하라오카만큼은 아니지만 성공적이었다. 마수자키의 토지는 1926년의 517평에서 1936년의 6,065평으로 늘었다. 구와하라의 토지는 1917년의 4,865평에서 1932년에 15,447평으로 늘었 다. 구와하라는 1873년 생으로 미야자키현 출신이다. 원래 직업은 경찰로서 년에 울산경찰서의 警 部 ( 署 長 )를 지냈다. 31) 이후 충남 論 山 郡 江 景 警 察 署 로 전보되었다. 구와하라 가 가족 5명을 대동하고 언양면에 들어오는 것은 1921년이다. 아마도 경찰 생활을 그만 두고 언양에의 정착을 결심한 모양이다. 1931년 그는 거주를 중남면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1940년 사망한 듯하다. 1941년 이후 그의 토지재산의 명의는 모두 그의 처 구와하라 타키로 변경되었다. 1945년 12월까지도 언양면에 소재한 구와하라 타키의 토지는 14,273평의 큰 규 모였다. 중남면 일대에 분포한 구와하라 家 의 토지는 더욱 많았을 것이다. 구와하라는 언양에 장기 정착하다가 인생을 마친 드문 사례를 이루었다. 解 放 이후, 일본인으로서는 敗 戰 이후, 구와하라 家 는 그 모든 재산을 남겨둔 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구와하라 이외에 전직 경 찰로서 나카미치( 中 道 祐 次 )가 언양에 12년 이상을 정착하였는데, 그는 1942년 부산으로 떠났 다. 그는 언양면에서 조금의 토지도 소유하지 않았는데, 생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외에 장기 정착자가 두 명 더 있는데, 언급을 약한다. 이들 장기 정착한 일본인과 토착 조선인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기록이 부족하다. 두 집단의 경계에는 갈등과 협력의 혼재하였다. 가리야( 刈 屋 ) 사건이나 수리 조합 사건에서 보듯이 두 집단은 갈등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그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 자들이 상투적으로 언급하는 민족적 갈등 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가리야 사건을 두고 당시에도 그것이 민족 차별의 사건인지, 아니면 민간에서 흔하게 벌어지 는 일개 쟁투에 불과한지를 둘러싼 의견의 대립이 있었다. 수리조합 사건은 총독부의 산업정 책이 일방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총독부는 민간의 요구를 대안으로 선택하 는 융통성을 보여 주었다. 내가 언양을 처음 찾은 것은 대학원생 시절인 1982년이다. 나는 上 北 面 陵 山 里 의 鄭 寅 泰 翁 을 방문하였다. 鄭 翁 이 소장한 彦 陽 縣 戶 籍 을 열람하기 위해서였다. 용무가 끝난 뒤 정옹은 일 정기 상북면에서 살았던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일본인 支 署 主 任 은 매우 규칙적으로 마을을 巡 視 하였다. 그가 허리에 찬 칼이 다리와 부딪히는 소리만으로도 마을 사 람들은 시각을 알 정도였다. 어느 날 마을에서 앞뒷집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앞집에서 보 리를 너무 많이 먹고 배가 터져 죽은 소를 屠 殺 했는데, 이를 뒷집이 密 屠 殺 로 고발한 것이다. 그 일본인 순사는 앞뒷집을 불러 놓고 관에 신고하지 않고 소를 도살한 것도 잘못이지만 이웃 의 허물을 관에 고발한 사람은 더욱 큰 잘못이라고 꾸짖은 다음, 술자리를 베풀고 양자를 화 해시켰다.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어느 일본인 校 長 이 있었는데, 아이가 병으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조문을 갔더니 교장 부부는 전혀 슬픈 표정을 짓지 않고 손님들을 정 중하게 맞았다. 왜 일본인은 슬퍼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긴 몇 사람이 밤중에 교 장의 官 舍 를 찾아가 몰래 엿보니, 교장 부부가 서로 붙들고 울고 있었다. 32) 일본인은 절대 남 31) 朝 鮮 總 督 府 及 附 屬 官 署 職 員 錄 년판. 32) 이 가운데 일본인 순사 이야기는 韓 國 市 場 經 濟 와 民 主 主 義 의 歷 史 的 特 質 ( 韓 國 開 發 硏 究 院, 2000)의

21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후 25년 뒤 나는 언양읍사무소에서 在 彦 陽 日 本 人 除 戶 簿 를 열람하였다. 그리고선 정인태 옹이 들려준 일본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언양에 체류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갈등과 쟁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뢰와 조정의 관계도 성립했으며, 그를 통해 일본의 이질적인 생활문화가 슬그머니 조선인의 사회로 스며들 기도 하였다. Ⅲ. 토지소유와 사회 1. 토지소유자의 분포 <표7>은 1912년과 1945년의 토지소유자의 거주지별 분포이다. 토지는 전 12개 지목 가운 데 畓, 田, 垈, 林 野, 溜 池 만을 뽑았다. 동리인 은 토지가 소재한 그 동리에 거주한 소유자를, 타리인 은 언양면 내 다른 리에 거주한 소유자를 말한다. 이 두 부류는 自 作 農 내지 在 地 地 主 의 토지이다. 타면인 은 울산군 내 다른 면에 거주한 소유자, 타군인 은 경상남도 내 다른 군이나 釜 山 府 에 거주한 소유자, 타도인 은 경남 이외의 다른 도나 京 城 府 에 거주하는 소유 자를 말한다. 일본 은 주소가 일본으로 기재된 소유자이다. 타면인, 타군인, 타도인, 일 본 은 토지의 경작이 불가능한, 그래서 지대를 수취하는 不 在 地 主 의 토지이다. 1912년 각각의 소유지 비중을 보면, 동리인 이 57.2%, 타리인 이 15.6%로서 自 作 地 내지 在 地 地 主 地 가 72.8%의 큰 비중을 점하였다. 대조적으로 부재지주로서 타면인 은 16.0%, 타 군인 은 8.3%, 타도인 은 1.8%, 일본 은 1.1%로서 도합 27.2%이다. 전체 畓 가운데 자작지 내지 재지지주지의 비중은 62.1%, 부재지주지의 비중은 37.9%이다. 부재지주의 토지는 상대 적으로 田 보다 답에 집중되었다. 어쨌든 언양면의 농업에서는 자작지 내지 재지지주지가 지배 적이었다. 전술한대로 언양면은 산간부 농업지대로서 대규모 地 主 制 가 발달할 만큼 평야가 넓 거나 개발의 여지가 큰 곳이 아니었다. <표7> 彦 陽 面 土 地 所 有 者 의 居 住 地 別 分 布 (1912, 1945) 단위: 평 1912년 1945년 畓 田 垈 林 野 溜 池 合 計 畓 田 垈 林 野 溜 池 合 計 同 里 人 892,617 (44.8) 812,467 (69.5) 185,142 (90.0) 113,651 (71.9) 33,307 (94.6) 2,037,184 (57.2) 941,163 (42.2) 608,636 (67.1) 169,302 (82.7) 121,701 (69.9) 42,890 (84.3) 1,883,692 (52.8) 他 里 人 345,136 (17.3) 181,305 (15.5) 11,010 (5.4) 17,329 (11.0) 518 (1.5) 555,298 (15.6) 524,058 (23.5) 134,283 (14.8) 15,092 (7.4) 18,270 (10.5) 4,039 (7.9) 695,742 (19.5) 他 面 人 419,139 (21.0) 129,642 (11.1) 6,482 (3.2) 13,944 (8.8) 159 (0.5) 569,366 (16.0) 384,910 (17.3) 106,991 (11.8) 13,129 (6.4 20,647 (11.9 1,802 (3.5) 527,479 (14.8) 他 郡 人 264,584 (13.3) 28,466 (2.4) 1,755 (0.9) 335 (1.0) 295,140 (8.3) 230,537 (10.3) 28,063 (3.1) 4,779 (2.3 1,133 (2.2) 264,512 (7.4) 他 道 人 35,626 (1.8) 14,459 (1.2) 1,227 (0.6) 13,171 (8.3) 884 (2.5) 65,367 (1.8) 98,685 (4.4) 23,626 (2.6) 2,234 (1.1 13,567 (7.8) 994 (2.0) 139,106 (3.9) 日 本 35,548 (1.8) 1,846 (0.2) 37,394 (1.1) 49,866 (2.2) 6,128 (0.7) 64 (0.0) 56,058 (1.6) 合 計 1,992,650 (100.0) 1,168,185 (100.0) 자료: 彦 陽 面 土 地 臺 帳. 205,616 (100.0) 158,095 (100.0) 35,203 (100.0) 3,559,749 (100.0) 2,229,219 (100.0) 907,727 (100.0) 204,600 (100.0) 174,185 (100.0) 50,858 (100.0) 3,566,589 (100.0) 70쪽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22 그럼에도 1912년에 37,394평을 소유한 일본 의 부재지주가 있는데, 東 京 에 본사를 둔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이다. 구 언양현의 상북면과 중북면 일대에는 조선왕조의 官 屯, 驛 屯, 別 砲 屯, 禁 衛 營 屯, 雇 馬 屯 과 같은 둔토가 많이 있었다. 이들 토지는 大 韓 帝 國 期 에 이르러 皇 室 有 인 驛 屯 土 로 통합, 관리되었다. 1912년의 토지대장에 의하면 그 면적은 도합 33만 3,400평이다. 황실은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될 때 역둔토의 일부를 現 物 出 資 하였다. 언양면에 東 拓 의 社 有 地 37,394평이 생긴 것은 그 때의 일이다. 33) 언양면과 같은 山 間 部 에 일본인이 농업경영을 목적으로 진입할 유인은 없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언양면에 들어온 일본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언양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가 난한 상공인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1912년 토지대장에서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은 6명인데, 모두 대지로서 다 합해도 821평에 불과하였다. 언양면에서 최대 지주는 梁 山 郡 의 通 道 寺 였다. 1912년 통도사는 52,002평을 소유하였다. 이상과 같은 토지소유자의 거주지별 분포는 일정기 에 걸쳐 크게 변하지 않았다. <표7>에서 보듯이 1945년에도 동리인 과 타리인 의 소유지 비 중은 72.3%로서 1912년과 거의 같다. 부재지주지의 비중에도 차이가 없는 가운데 타면인 과 타군인 의 소유지가 줄고, 타도인 과 일본 의 소유지가 약간 증가하였을 뿐이다. 2. 토지소유자의 형태 <표7>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바는 林 野 나 溜 池 와 같은, 一 見 公 共 性 이 강한 토지가 타리 인 과 타면인, 심지어 타군인 과 타도인 의 소유지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1910년대 언양면 사회의 조직적 특질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시사를 던진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토지소 유자의 존재형태를 몇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각각의 소유지 비중을 구했는데, <표8>이 그것이 다. 소유자의 존재형태는 個 人, 共 同, 里, 國 公 有, 公 共 機 關, 宗 敎 機 關, 會 社 로 구분 되었다. 개인 은 토지소유자가 自 然 人 1명인 토지이다. 공동 은 자연인 2명 이상의 共 有 를 말한다. 리 는 리가 소유자인 토지이다. 국공유 는 面, 郡, 道, 國 의 소유지이다. 공공기관 은 鄕 校 와 學 校 의, 종교기관 은 사원, 야소교회, 천주교회의, 회사 는 동척을 비롯한 각종 회사, 조합, 협회의 소유지를 말한다. <표8> 彦 陽 面 土 地 所 有 者 의 存 在 形 態 別 分 布 단위: 坪 畓 田 垈 林 野 溜 池 合 計 畓 田 垈 林 野 溜 池 合 計 個 人 1,671,938 (83.9) 1,108,968 (94.9) 194,223 (94.5) 137,147 (86.7) 4,181 (11.9) 3,116,457 (87.5) 2,033,909 (91.2) 862,262 (95.0) 191,299 (93.5) 135,658 (77.9) 19,421 (38.2) 3,242,549 (90.9) 共 同 3,332 (0.2) 5,667 (0.5) 891 (0.4) 1,002 (0.6) 27,544 (78.2) 38,436 (1.1) 85,128 (3.8) 38,317 (4.2) 5,724 (2.8) 14,854 (8.5) 415 (0.8) 144,438 (4.0) 里 3,748 (0.2) 1,338 (0.1) 99 (0.0) 5,516 (3.5) 25 (0.1) 10,726 (0.3) 533 (0.0) 103 (0.0) 269 (0.2) 25 (0.0) 930 (0.0) 國 公 有 220,526 (11.1) 49,176 (4.2) 8,910 (4.3) 14,430 (9.1) 3,453 (9.8) 296,495 (8.3) 6,583 (0.3) 2,426 (0.3) 1,987 (1.0) 10,128 (5.8) 30,997 (60.9) 52,121 (1.5) 公 共 機 關 4,002 (0.2) 1,190 (0.1) 525 (0.3) 5,717 (0.2) 4,571 (0.2) 1,823 (0.2) 3,603 (1.8) 13,276 (7.6) 23,273 (0.7) 宗 敎 機 關 52,855 (2.7) 968 (0.5) 53,823 (1.5) 60,750 (2.7) 1,221 (0.1) 995 (0.5) 62,966 (1.8) 33) 나머지 29만여 평의 역둔토는 이후 황실유에서 국유로 바뀌었다. 국유지는 연고소작인에게 저수준의 定 額 地 代 付 로 대여되었다가 1923년 이후 그들에게 불하되었다. 이에 <표7>에서는 29만여 평의 국유지를 타도인 의 부재지주로 간주하지 않고 동리인 으로 분류하였다. 사실상 연고소작인의 자작지와 같기 때문이다

23 會 社 36,249 (1.8) 1,846 (0.2) 38,095 (1.1) 37,745 (1.7) 1,575 (0.2) 992 (0.5) 40,312 (1.1) 合 計 1,992,650 (100.0) 1,168,185 (100.0) 자료: 彦 陽 面 土 地 臺 帳. 205,616 (100.0) 158,095 (100.0) 35,203 (100.0) 3,559,749 (100.0) 2,229,219 (100.0) 907,727 (100.0) 204,600 (100.0) 174,185 (100.0) 50,858 (100.0) 3,566,589 (100.0) 1912년의 지배적 소유자는 개인 이었다. 전 토지에서 87.5%의 압도적 비중이다. 그에 비해 2명 이상의 자연인에 의한 공동 은 1.1%, 리 는 0.3%에 불과하다. 개인 의 압도적 비중은 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여기서 임야는 山 地 가 아니라 다른 지목에 개재한 樹 木 을 말한다. 오늘날의 상식에서 그런 임야는 防 風, 防 水, 護 岸, 景 觀 을 위한 공공재인 경 우가 많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임야 15만 8,000여 평 가운데 13만 7,000여 평, 86.7%가 개인 이다. 반면 리, 곧 리의 소유는 3.5%에 불과하다. 수리시설인 溜 池 의 공공성은 임야보다 더 크다. 1912년 유지는 도합 26필지에 35,203평이 다. 그 가운데 면적 1,000평 미만의 소규모 유지는 17필지이다. 그 가운데 16필지는 개인 으 로 자연인 16명의 소유이다. 나머지 1필지는 리 이다. 소규모 유지를 소유한 16명의 거주지 를 살피면, 우선 경북 慶 州 郡 과 慶 山 郡, 울산군 下 廂 面 과 下 北 面 에 거주하는 부재지주가 4명 이다. 그 다음 타리인 이 4명이다. 동리인 은 8명이다. 이처럼 타지인이 소규모 유지의 절반 을 소유하였음에서 타지인의 유지 개발과 용익에 대한 현지 주민의 간섭이나 제약은 없었다고 보인다. 소규모 유지는 전답과도 같이 자유롭게 개발, 매매, 증여, 상속되는 개인적 재산이었 다. 반면 대규모 유지의 사정은 다르다. 1,000평 이상의 유지는 모두 9필지, 30,997평이다. 가 장 큰 유지는 면적이 7,203평이나 했는데, <표2>에서 소개한 반연리의 가막못이다. 1912년의 토지조사사업에서 대규모 유지 9필지 가운데 2필지는 국유로, 7필지는 4 9명의 공동명의로 소유권이 사정되었다. 예컨대 가막못의 소유자는 김상복 외 6인 이다. 이처럼 규모가 큰 유지 는 개인이 아니라 부근 주민의 공동 개발, 관리, 용익 하에 있었다.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에 임 하여 공동명의로 소유권을 신고했으며, 臨 時 土 地 調 査 局 의 査 定 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 공동명 의의 인물들이 과연 주민이나 리를 대표하는 자격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대규모 유지 가운데 3필지는 直 洞 里 에 있는데, 각기 査 定 의 결과가 다르다. 1개는 국유로 사정되었다. 소 유권 신고에 공동으로 대응할 水 利 組 織 이 없었던 것이다. 2개는 공동 으로 사정되었는데, 공 동명의의 대표가 다르다. 다시 말해 수리조직은 개별 유지를 단위로 결성되었으며, 복수의 유 지를 포괄하는 리 단위의 수리조직은 없었다고 보인다. 대규모 유지의 수리조직과 관련하여 가막못의 소유권을 취득한 김상복 외 6인 의 대표자 김상복에 대해 살핀다. 제적부에서 그의 주소는 반연리 96번지로서 곧 현지 주민이다. 1839년 에 출생하여 1919년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金 寧 으로서 후술하겠지만 양반 신분이 아니다. 1912년 사정 당시에는 73세의 노인으로서 57세 된 처와 살았다. 그의 아들 김성문은 1864년 생으로 1898년 그의 처와 함께 반연리 104번지로 分 家 하였다. 김상복의 처는 김성문의 어머 니가 아니다. 김상복과 김성문의 家 計 는 엄격히 구분되지 않았다. 1918년 김성문은 처와 함께 아버지 김상복의 호에 전입하였다. 아들이 성년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분가하는 것은 조선시대 의 관행이었다. 일정기에 새로운 호적제가 시행되자 당초 별개로 조사, 신고되었던 아버지의 호와 아들의 호가 이후 어느 시기에 하나로 합치는 경우가 많았다. 김상복, 김성문 부자의 合 戶 도 그러한 경우이다. 토지대장에서 김상복 개인의 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아들 김성 문이 畓 2필지 357평, 田 5필지 1,208평, 垈 1필지 114평을 소유하였다. 김성문은 아들이 없

24 이 1929년에 사망하였다. 이 같은 家 族 史 로 보건대 김상복, 김성문 부자를 반연리를 대표한 班 家 나 富 民 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반연리에는 가막못 이외에 김상복 외 6인 을 공동명의자로 하는 모두 10필지의 전, 답, 대 1,198평이 있었다. 이 공동명의의 토지는 반연리의 소유이거나 김상복이 속한 금녕 김 문중의 소유가 아니었다. 바로 다음해인 1913년에 10필지의 소유권이 반연리의 최만룡에게 일괄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매매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가막못의 소유권을 취득한 김상복 외 6인 이 반연리의 里 中 이나 金 寧 金 氏 문중을 대표하는 자격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막못은 반연리의 재산이 아니었다. 김상복 등이 10필지의 공동명의지 를 매각할 때 가막못을 함께 처분할 수는 없었다. 경남도장관이 임시토지조사국의 사정 결과 에 不 服 하여 소유권 분쟁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6필지 대규모 유지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이다. 이상으로 미루건대 김상복 외 6인 은 토지조사사업을 호기로 삼아 그들이 관리해 온 수리 시설이나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취득함에 성공한 私 組 織 이었다고 보인다. 그들 의 기회주의적 행동은 토지에 대해서는 성공했지만 저수지에서는 실패하였다. 1918년 임시토 지조사국의 紛 爭 地 審 査 委 員 會 는 언양면의 7필지 대규모 유지가 모두 국유라는 裁 決 을 내렸 다. 이 같은 조치는 1910년대 총독부의 水 利 政 策 에 떠밀린 것으로 정치적이었다. 그렇긴 하지 만, 유지를 둘러싼 기존의 수리조직이 강고한 단체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했다면 총 독부가 소유권을 강제로 취소함에 따른 저항이나 비용이 상당하였을 터인데, 그에 관한 어떠 한 보고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규모 저수지를 둘러싼 전통 수리조직은 존재하긴 했지만 그리 강고한 것은 아니었고, 더욱이 리 그 자체는 아니었다. 수리에 연고가 있는 하층 농민들 이 필요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임의적인 조직이었다고 보인다. 다음, 국공유 는 29만여 평인데, 그 비중은 개인 다음으로 큰 8.3%이다. 그 대부분은 앞 서 설명한 구 언양현 시대에 이곳에 분포한 각종 屯 土 가 총독부의 국유지로 접수된 것이다. 다음, 공공기관 은 鄕 校 와 普 通 學 校 의 토지로서 5,717평, 0.2%이다. 그 중의 1필지 234평은 1913년 3월에 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彦 陽 公 立 普 通 學 校 의 부지이다. 나머지는 彦 陽 鄕 校 의 재 산이다. 총독부는 전국의 郡 에 분포한 향교의 재산을 郡 守 의 관리 하에 두었으며, 토지조사사 업에서는 향교를 일종의 法 人 으로 간주하여 향교의 토지를 향교 명의로 등록하였다. 향교 재 산의 수입은 대부분 지방관에 의해 공립보통학교의 경비에 충당되었다. 34) 언양공립보통학교의 설립과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종교기관 은 通 道 寺, 石 南 寺, 天 主 敎 會, 耶 蘇 敎 會 등 종 교기관의 부지와 전답을 말한다. 종교기관 이 5만여 평이나 된 것은 전술한대로 언양면 최대 의 지주가 통도사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회사 는 앞서 소개한 동척의 社 有 地 를 말한다. 이 같은 1912년의 토지소유자 형태는 1945년까지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였다. 첫째, 개 인 이 311만여 평에서 324만여 평으로 조금 증가하였다. 상대적 비중도 87.5%에서 90.9%로 증가하였다. 이는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이 끝낸 뒤 1923년부터 29만여 평의 국유 전답을 緣 故 小 作 農 에게 불하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유지 비중이 8.3%에서 1.5%로 크게 줄었다. 둘째, 그럼에도 국유 溜 池 의 면적이 3,453평에서 30,997평으로 크게 증가한 것은, 조금 전에 설명한대로, 1918년 1,000평 이상의 7개 유지를 민유에서 국유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에 따 라 공동 의 유지가 크게 줄었다. 셋째, 1918년 이후 유지의 증가는 개인 의 유지가 주를 이 루었다. 1912년 4,181평이던 개인 유지는 1945년 19,421평이 되었다. 그 자세한 사정은 나 34) 朝 鮮 總 督 府 臨 時 土 地 調 査 局, 朝 鮮 土 地 調 査 事 業 報 告 書, 1918, p

25 중에 살피겠다. 넷째, 공동 의 답이 크게 증가하였다. 2명 이상의 자연인이 공동으로 답을 소 유하는 것은 1912년에 3,748평, 0.2%에 불과했는데, 1945년까지 85,128평, 3.8%로 꽤나 크 게 증가하였다. 이는 1912년만 해도 낯선 共 有 의 관행이나 제도가 일정기에 걸쳐 조금씩 보 급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12년 朝 鮮 民 事 令 의 공포와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는 근대적 소유 권의 개념과 법제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심화하였으며, 이에 필요에 따라 토지를 공동명의로 등기하는 민간의 관행을 확산시켰다. 다섯째, 리 의 소유지가 10,726평에서 930평으로 크게 줄었다. 이는 1930년 리 소유지를 모두 면 소유지로 강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리에 어떤 보상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리는 토지나 기타 재산을 소유할 단체 로서 그 法 人 格 이 인정되지 않았다. 총독부 지방행정의 중심은 면이었다. 여섯째, 공공기관 의 임야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는데, 이는 국공유 임야를 1924, 1932년에 걸쳐 蔚 山 郡 學 校 費 로 이전한 결과이다. 그 외에 종교기관 과 회사 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1912년 당시 회사 는 동척의 사유지가 유일하였다. 동척의 사유지는 1912년의 37,394평에서 1945년의 35,018평으로 조금 줄었다. 그 사이 동척 이외에 彦 陽 金 融 組 合, 中 南 土 地 改 良 組 合, 三 重 産 業 合 名 會 社, 한신 不 動 産 株 式 會 社, 梁 山 自 動 車 株 式 會 社, 慶 南 自 動 車 株 式 會 社, 煙 草 小 賣 人 協 會 등이 생겨났다. 그로 인해 회사 는 1912년에 비해 2,000여 평 증가하였다. 이 증가한 회사 는 주로 업무용 대지였다. 3. 문중 이상과 같이 1912년 언양면의 토지소유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은 개인적 소유였다. 共 有 또는 總 有 에 기초한 인간들의 신뢰 협력관계로서 共 同 體 나 結 社 는 토지대장에서 거의 존재 하지 않았다. 향교, 학교, 사원, 교회, 동척과 같은 조직체가 소수 있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관 변 단체이거나 일정 초기에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다. 언양면 주민을 성원으로 하는 전통적 단 체로서 예컨대 書 堂 을 운영하는 學 契, 洑 를 운영하는 洑 契, 영림을 위한 松 契, 친족 간의 제 사와 부조를 위한 族 契, 동리의 질서와 공공기능을 위한 洞 契 등이 토지의 소유자로 토지대장 에 등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계들이 얼마나 조직되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일부 조직되어 있었겠지만, 공유재산을 마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정도로 제반 단체의 결성과 활동이 활발했다면,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맞아 공유재산을 공동 의 형태로 등록하였을 터이 다. 임야나 유지와 같은 공공성이 큰 토지에서도 개인적 소유가 많았다. 1,000평 이상의 대규모 유지를 둘러싸고서는 수리조직이 있긴 했지만, 그리 강고한 단체는 아니었다. 리 역시 그 단 체성이 취약하였다. 19세기까지 동리는 취락, 경지, 산림, 하천의 구조적 결합이 아니었다. 전 통적으로 리는 주민의 聚 落 을 가리켰으며, 몇 가지 계기로 소규모 재산을 보유했으나 그 규모 나 기능은 보잘 것 없었다. 총독부는 지방행정제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경계와 공간 을 지닌 리를 창출하였지만, 리의 法 人 格 을 인정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리가 보유해 온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을 지방행정의 새로운 중심인 面 의 소유로 이전하였다. 토지대장이 전하는 1910년대 언양면 사회의 조직적 특질이 과연 위와 같았는지 여부는 좀 더 신중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언양에서도 다른 지방에서처럼 男 系 親 族 集 團 이 발달하였다. 그들은 조상제사와 상호부조를 위해 門 中 이나 族 契 를 결성하였다. 문중이나 족계의 공유지는 어느 자연인, 곧 宗 孫 의 소유였으며 그렇게 토지대장에 등록되었다. 토지대장에서 문중이나 족계가 관찰되지 않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문중이나 족계의 결성을 중심으로 한 언양의

26 사회조직은 의외로 강고하였을 수 있다. 이하 이 같은 대안적 해석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구 언양현에서 인근 密 陽 이나 慶 州 에서처럼 사회적 위세가 높은, 일류 신분의 양반 친족은 발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鄕 班 이라 불리는 낮은 위세의 양반 친족은 존재하였으며, 상호 경 쟁적으로 발전하였다. 孫 淑 景 에 의하면 구 언양현을 대표하는 양반 가문은 여덟이었는데, 상 남면 鳴 村 의 慶 州 金 氏, 하북면 池 內 의 東 萊 鄭 氏, 상남면 吉 川 의 慶 州 李 氏 와 密 陽 朴 氏, 삼동면 荷 岑 의 靈 山 辛 氏, 하북면 稜 山 의 晉 州 姜 氏, 상북면 泉 所 의 延 安 宋 氏, 중북면 盤 谷 의 安 東 權 氏 이다. 이 가운데 상북면의 연안 송씨와 중북면의 안동 권씨는 지금 분석 중인 언 양면의 범위에 속한다. 8대 성씨 가운데 가장 강세한 것은 삼동면의 신씨와 중북면의 권씨였 다. 남천을 경계로 권씨는 북쪽에, 신씨는 남쪽에 있다 하여 北 權 南 辛 이라고도 했다. 권씨와 신씨의 黨 色 은 老 論 이며, 나머지 6대 성씨는 南 人 이었다. 이들 언양의 8대 성씨는 조선후기에 科 擧 급제자를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약 14,600명에 달하는 文 科 급제자 중 언양인은 2명에 불과하였다. 8대 성씨는 生 員 과 進 士 도 거의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과거보다는 배타적인 통혼권을 유지하거나 鄕 校, 書 院, 祠 宇 의 조직을 독점하고 祭 禮 를 주도하는 것으로 그들의 신분적 지위를 고수하였다. 손숙경에 의 하면 이들 8대 성씨 밑에는 보다 낮은 위세의 8개 성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보 다 낮은 위세의 집단이 있었다. 이들 하위 향반의 일부는 원래 鄕 吏 였는데, 19세기 어느 시기 에 향교의 儒 案 에 子 弟 의 이름을 등록함에 성공함으로써 향반 신분으로 진입하였다. 구 언양 현에서 생원과 진사는 이들 하위의 향반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이처럼 구 언양현에는 약 20개 에 달하는 향반 신분의 친족집단이 성립해 있었다. 35) 언양의 鄕 班 社 會 는 어느 정도 강고한 조직을 이루었을까. 다른 지방의 양반 친족을 살피면, 그 중심이 되는 종가에는 조상 전래의 墓 位 전답과 齋 舍 가 있어서 제사의 비용과 기물을 뒷 받침하였다. 친족집단은 종가를 중심으로 한 제사조직으로서 門 中 또는 宗 中 이라고 하였다. 또한 문중은 크고 작은, 구성원의 범위를 달리하는 복수의 족계를 운영하였다. 족계는 성원의 갹출로 조성된 공유 契 畓 을 보유했으며, 그로부터의 소출로써 성원에 대한 각종 부조, 賓 客 접대, 기타 공동비용을 지출하였다. 토지조사사업에 임하여 임시토지조사국은 이 같은 문중의 재산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宗 中 財 産 은 祖 宗 의 유산, 宗 中 일동의 갹출 및 종중 特 志 家 의 기부 등에 의하며, 이 재산으로써 영원히 조종의 제사를 행할 목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인해 門 長 有 司 등 개인의 소유가 아님은 물론이며, 이 종중재산은 量 案, 기타 官 公 簿 에는 무슨무슨 宗 中, 무슨무슨 門 位 등의 명의 로 등재되어 있음이 보통이지만, 때로 宗 孫 혹은 문장 유사 등의 개인명의로 등록된 것도 있 고, 그렇지만 종손 혹은 문장 유사 등은 종중에서 위임 받지 않은 한 단독 의사로써 종중재산 을 처분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문장 혹은 종손이 자의로 이를 타인에 매도 하여 同 派 문중 간에 공유권의 관한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36) 이에 임시토지조사국은 문중 및 기타 단체가 소유하는 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침을 설 정하였다. 宗 中 기타 단체명으로 신고되는 것에 대해서는 民 事 令 기타 법령에 의해 法 人 자 격을 구비하는가 여부를 조사하여, 법인자격을 갖지 않은 것은 그 성질에 따라 個 人 名 義 혹은 共 有 名 義 로 신고하게 하고, 관계자 전원의 공유로 신고된 것을 제외하면, 申 告 書 의 地 主 名 좌 측에 괄호를 하여 宗 中 財 産 혹은 무슨 學 校 財 産 등으로 附 記 해 둘 것. 37) 이처럼 문중은 35) 손숙경, 19세기 언양 鄕 班 社 會 의 새로운 구성원들과 그 성격 鄕 校 의 儒 案 과 구성원들의 層 位 - (원고본), ) 朝 鮮 總 督 府 臨 時 土 地 調 査 局, 朝 鮮 土 地 調 査 事 業 報 告 書, p

27 스스로를 법인으로 등기하여 그 이름으로 재산을 등록하든가, 그런 까다로운 수속을 밟을 필 요 없이 공동소유자 전원의 이름을 등록하든가, 특정 자연인을 신고자로 한 다음 괄호 속에 종중재산 을 부기해 받을 수 있었다. 1912년 언양면의 토지대장에서 법인으로 등기된 문중의 존재나 개인명의에 이어 괄호 속에 문중재산 을 부기한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2 3명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누구 외 몇 명의 형식으로 표기한 경우가 있다. 토지대장은 실무 행정을 위한 장부로서 이런 편의적 형식 을 취하였지만, 법원에 비치된 토지대장의 원본에는 공동명의자 이름 전부가 열기되었을 것이 다. 이 부류의 토지가 앞서 소개한 공동 의 소유지로서 도합 38,486평이다. 이 가운데 전, 답, 대의 세 지목에 한하여 공동 의 소유지를 살피면 모두 35필지이다. 그 가운데 공동명의자의 姓 이 다르거나, 주소가 타면인, 타군인, 타도인 의 부재지주이거나, 얼마 있지 않아 타인에 소유권을 이전한 경우는 종중재산으로 볼 수 없다. 이것들을 제외한, 동성의 공유자가 1959년까지 장기간 소유한 토지를 추리면 7필지이다. 그 가운데 2필지는 반 송리에 거주한 송종서 외 12인 이 소유한 대곡리 890번지의 대 642평과 891번지의 전 1,565 평이다. 이 두 필지는 언양 8대 성씨의 하나인 연안 송씨의 종중재산임이 확실하다. 송종서는 소유지가 15,590평에 달하는 지주적 존재로서 송씨 문중의 중심 인물이다. 반면 반곡리에 거 주한 권씨 일족는 한때 北 權 南 辛 의 위세를 누렸지만, 문중을 유지함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 다. 평리에 거주한 권만술 외 4인 과 권태운 외 4인 이 각각 993평과 679평의 전을 등록하 였는데, 권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권만술은 1929년 이후 재산의 일부 를 처분한 다음, 장남 이하 전 가솔을 이끌고 일본 나고야( 名 古 屋 )로 건너갔으며 거기서 영구 정착하였다. 권태운은 개인 재산이 308평에 불과한 빈농이다. 연안 송씨처럼 문중재산임이 확 실해 보이는 경우는 반천리에 거주한 英 陽 千 氏 일족이다. 천치봉 외 4인 은 반천리에 대 85 평과 전 1,565평을 공동소유하였다. 천치봉은 4,395평을 소유한 부농이며, 그의 동생 천치정 도 2,790평의 건실한 중농이다. 영양 천씨는 향반사회에 끼이지 못한 신분이지만, 篤 農 과 친 족 결합의 강화를 통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있었다. 그 외에 1필지의 공동소유지가 있으나 64평의 자투리에 불과하여 논할 바가 못 된다. 이 외에도 언양면에는 다수의 성씨 집단이 있었다. 어음리, 태기리, 반천리에 거주한 慶 州 金 氏 가 있었다. 송대리에는 향리 가문의 海 州 吳 氏 가 있었다. 이들은 토지조사사업을 맞아 조 상 전래의 묘위전이나 계답을 공동명의로 등록하지 않았다. 종손이 그의 개인명의로 등록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토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토지대장만으로 알기 힘들다. 종손이 그의 개인명의로 등록한 묘위전은 종중의 공유재산이었던가, 아니면 종 손의 개인소유였던가. 위와 같이 토지조사사업 당시 공유지를 공동명의로 등록하는 제도는 알 려져 있었으며, 민간은 필요에 따라 그 제도를 활용하고 있었다. 그 점을 전제하면, 종손이 개 인명의로 등록한 묘위전은 그의 개인적 소유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앞서 잠시 소개하였 듯이 토지조사사업 이후 공동명의의 토지가 늘어갔다. 문중재산을 공동명의로 등록하는 관행 도 일정기를 거쳐 확산되었다고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중재산은 양반 신분의 친족집단이라 해서 어디에나 있지는 않았으며, 있 다 해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35년 善 生 永 助 의 조사에 의하면 울산군 三 同 面 荷 岑 里 의 신씨 동족부락에는 답 5두락의 문중재산이 있었다. 동 芚 基 里 의 신씨 동족부락에는 13두 락의 문중재산이 있었다. 전술한 북권남신의 그 신씨이다. 반면 울산군 農 所 面 松 亭 里 의 박씨 부락에는 문중재산이 없었다. 인근 밀양군 밀양면 校 洞 里 의 손씨 부락, 밀양군 山 外 面 竹 東 里 37) 朝 鮮 總 督 府 臨 時 土 地 調 査 局, 朝 鮮 土 地 調 査 事 業 報 告 書,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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