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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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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INU 연구총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허 문 영 마 민 호

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인 쇄 2011년 12월 발 행 2011년 12월 발 행 처 통일연구원 발 행 인 통일연구원장 편 집 인 통일정책연구센터 등 록 제 호 ( ) 주 소 ( ) 서울시 강북구 한천로 1307(수유동) 통일연구원 전 화 (대표) (직통) (팩시밀리) 홈페이지 기획 디자인 두일디자인 ( ) 인 쇄 처 도서출판 오름 ( , 3) ISBN 가 격 10,000 c 통일연구원, 2011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간행물은 전국 대형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문의) 정부간행물판매센타: 매장: 사무실:

5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본 보고서에 수록된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당 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6 목 차 요약 ix Ⅰ. 서론 1 Ⅱ.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덩샤오핑체제의 개혁 개방과 도광양회 김일성체제의 인식과 대응전략: 비판적 수용과 김정일 후계 체제 구축 24 Ⅲ.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장쩌민 정부의 3개대표이론과 대국외교 김정일체제의 인식과 대응전략: 북한식 수용과 김정일체제 공고화 56 Ⅳ.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후진타오 정부의 G2 부상과 화평굴기 김정일체제의 인식과 대응전략: 중국활용전략과 김정은 후계체제 모색 105

7 KINU 연구총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Ⅴ. 평가와 전망 북한의 인식과 대응전략 평가: 지속과 변화 향후 북 중 관계 및 북한체제 전망 141 Ⅵ.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155 참고문헌 167 부록 177 최근 발간자료 안내 195

8 표 목차 <표 Ⅲ-1> 중국 개혁 개방 30년 일지 47 <표 Ⅲ-2> 한 중 수교 이후 북 중 군( 軍 ) 최고위급 상호 방문 현황 (1992~2009) 64 <표 Ⅲ-3> 1992년 이후 원수 차수 및 장령 진급 현황 70 <표 Ⅲ-4> 북한의 무역상대 국가별 비중 추이(1965~2000) 71 <표 Ⅳ-1> 세계 주요 국부펀드(SWF) 현황(2010년 9월 현재) 88 <표 Ⅳ-2> 중국경제패러다임의 변화 91 <표 Ⅳ-3> 중국의 국가전략 변화 96 <표 Ⅳ-4> 중국 대외연락부 간부 한반도 여론조사 103 <표 Ⅳ-5> 2000년 이후, 북 중 정상 상호방문일지 125

9 그림 목차 KINU 연구총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그림 Ⅲ-1> 한반도 공간구조의 변화 73 <그림 Ⅳ-1>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비중 추이 86 <그림 Ⅳ-2> 북한의 대중국 비중 추이 106 <그림 Ⅳ-3> 북한의 경제특구 현황(예정지 포함) 109 <그림 Ⅵ-1> 한반도 주변국 개입구도 159

10 부록 목차 부록 1.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연도별 북 중 고위인사교류 현황 중국-북한 정부 간 협정 수(2000~2010.8) 북한의 연도별 대중국 무역현황(1990~2009) 193

11 요 약 본 연구 목적은 1978년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 채택 이후 중국의 부 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정책을 시기별로 비교 분석한 후 향후 양국관계 정립방향과 북한체제 변화 가능성을 전망하는 데 있다. 중국 은 이제 G2 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과 양강체제를 형성하고 있으며 세 계질서 재편을 놓고 미국과 경쟁적 관계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유지하 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북 중 관계의 이중적 측면이나 한계성을 집중 분석함으로써, 북 중 관계의 변화에 따른 우리의 대응책과 대북 통일 정책을 수립하는데 유용한 기초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중국의 덩샤오핑 정부는 개혁 개방을 기본적인 국가발전전략으로 제시하고, 대외적으로는 도광양회를 중요한 노선으로 정하여 서구 국 가들과의 평화적 교류 속에서 중국의 경제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대내외 전략의 핵심은 시장경제 도입과 대미관계 개선이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추진과 1979년 미 중 수교로 표현되었다. 중국의 개혁 개방 등 시장경제개혁과 미 중 수교로 상징되는 도광양 회에 대해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부분적 수용을 기본으로 경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 제 내부결속이자 개방압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국의 부 상에 따른 정책변화에 대해 전면적 지지와 협력이 아니라 현안별 지지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북한과 중국은 이념갈등, 개혁 개방에 대한 입장 차이, 미 중 수교로 인한 비방전 등 일정 정도의 갈등과 반목을 경험했 다. 그러나 안보전략적 관점에서 북 중 관계는 여전히 견고한 협력체제 를 유지하였다. 근본적으로 북한은 중국의 부상 및 중국과 한 미 일 관 계 변화 등과 같은 동아시아 질서 변화 속에서 체제유지 및 김정일 후계 -ix-

12 체제 구축을 위해 중국의 대내외전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덩샤오핑에 이어 중국의 부국강병을 책임진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 혁 개방을 더욱 심화 발전시키는 대내외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이를 위한 국가발전전략으로서 3개대표론( 三 個 代 表 論 ) 을 통해 공산당의 역할 변화 및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대외전략으로서 수세적 성 격이 강한 덩샤오핑의 도광양회를 계승하면서도 신안보관에 입각하여 보다 능동적으로 국제정세에 대처하고 아시아의 대국으로서 세계적인 평화질서 창출을 주도하겠다는 유소작위( 有 所 作 爲 ) 전략 및 책임대국 론( 責 任 大 國 論 ) 을 표방했다. 이런 전략 속에서 중국은 더욱 적극적인 시장개혁과 경제교류 확대, 미국 및 서방세계와의 대등한 외교관계 개 선에 노력하면서 주변국들과의 다자주의적 지역협력체제를 주창한다. 이러한 중국의 다자주의전략에는 중화주의라는 중국적 가치관과 범아 시아적 세계관 이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크게 위기관리전략과 편승전략으로 나타난 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은 이념적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양국 친선관계 를 강화하려 했으나 중국이 한 중 수교를 선택하면서 북 중 관계는 1990년대 후반까지 심각한 경색국면을 맞이한다. 그 결과 북한의 외교 적 고립은 심화되고, 경제적 어려움 또한 더욱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은 이른바 김일성 유훈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 세습을 공고히 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면서 위기를 극복 하는 전략을 전개한다. 한편 김정일체제의 공고화 과정에서 북 중 관계는 전략적 지원과 협 력을 하는 관계로 전환되었다. 북한은 전략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 을 경우, 북 중 관계의 심각한 악화를 감수하면서도 국제사회에서 독자 적인 행보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념적 동질성이나 지정학적 안보 구도에서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북 중 관계의 특수성에 기 -x-

13 반하여 북한은 중국의 경제력을 활용하면서 체제생존을 모색한다. 이 처럼 북한은 국제적 고립의 심화 및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과 긴밀한 대화 채널을 복원하면서도 자위적 군사력 확보와 내부 결속강화, 개혁 개방정책의 거부 등 북한식 독자노선을 유지한다. 이는 전체적으로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가면서 어느 정도의 갈등과 마찰을 감수하는 비판적 편승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03년 공식출범한 후진타오체제는 지속적 국가발전을 통한 중국 부상을 지향하고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국가전략으로서 2003년 11월 화평굴기, 2004년 4월에는 화평발전론을 표명하였다. 이 는 덩샤오핑의 평화와 발전, 장쩌민의 신안보관 을 계승한 것이며, 대 국주의적 정서가 내포된 개념이었다. 서방과의 갈등과 마찰을 최소화 하면서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화평발전론 은 21세기 강대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기반한 후진타오체제의 대외관계전략은 세계 공동번영을 실현한다는 조화세계론을 내세움으로써 중국의 대외적 영향력 확대구상과 긴밀하 게 연계되어 있다. 아울러 이런 대외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진흥동북( 振 興 東 北 ) 정책으로서 중국과 북한, 러시아 접경지역의 대대 적 개발을 포함하고 있다. 북한은 화평발전 등 중국의 대내외전략 및 강대국으로의 부상이 세 계의 일극화를 견제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도모하는 데 기여한다 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중국의 부상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이 친서방적인 행보로 나아가고 북한의 안보 문제 를 방기할 경우, 북한은 완충지대적 특성을 부각시키면서 중국의 대내 외전략을 견제한다. 북한은 중국의 대국화에 따른 정치 경제적 예속 가능성을 경계하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책임회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 및 대외정책의 변화 이후 정권 세습에 -xi-

14 더욱 매진하고 북 미 관계 정상화를 압박하는 것도 중국의 부상이 북한 의 체제 안전에 미치는 양면성을 고려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위기 극복전략으로서 정권 세습을 선택해온 북한이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착 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지원과 협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 북한의 대응은 궁극적으로 중국의 대한반도 이해관계를 역이용하면서 정치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중국을 업고 나가는 전략 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도 계속된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갈등과 마찰 등 한반도 위기 조성을 통해 한편으로 는 북 미 대화 압박을 추구하면서 대중협력체제를 끌어내었고 정권보 위뿐만 아니라 경제적 실리를 추구한 것이다. 북한의 일련의 대중정책 들은 복잡한 동아시아 안보구도를 활용하려는 전략이며,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를 북 중 경제관계 확대를 통해 돌파하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 서 분석할 수 있다. 중국은 북한 변수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변국들과 군사적 충돌 및 긴장 고조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의 대내외전략의 성공 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동북아의 평화환경 조성이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북한의 핵개발을 강력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 러나 그것이 북한의 반발과 북 중 관계 악화를 초래하고 중국의 대국화 전략에도 도움이 안 됨을 경험했다. 중국에게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한 중 관계가 한 미 동맹관계를 대체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는 한 중 관계의 한계성에 기초한다. 즉 한 미 동맹, 미 일 동맹 등 동북아 안보 질서의 불확실성 때문에 북 중 동맹의 공고화를 선택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중국에게 있어 북한은 단기 미시적 면에서는 부담 인 동시에 장기 거시적인 면에서 전략적 활용자산 이 된다. 시기와 속도가 문제지만, 현재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나름대 로 개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조화세계 건설 -xii-

15 목적과도 부합한다. 중국 역시 북한의 경제발전이 중국의 국익과 부합 하며 동아시아 평화 조성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 중국은 자신들의 장기적인 전략과 북한의 전략적 이해에 부합하는 전 폭적인 대북 지원 흐름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특별히 동북 지역 개발을 중심으로 북 중 경제협력에 더욱 집중하는 것도 세계전략 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최근 북 중 경제교류 상황을 고려할 때, 실제 정책 추진에 있어서는 각자 국익을 고려한 사안별 협력과 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선택적 협력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그러나 북한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동맹국으로서 중국의 지원이 지속된다면 북한의 경제성장은 비약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조직력, 값싼 노동력, 중국의 기술과 자본이 결합한다면 북한의 생산성은 개발 도상국의 빠른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공고한 협력체제는 중국 차세대 지도자로 확정된 시진핑 부주석의 경우에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의 대북 지원과 경제교류가 북한의 개혁 개방을 지원 하며 북한의 경제적 토대 강화와 한반도의 경제적 통합에 유리한 방향 으로 추진되도록 유도하는 한국 정부의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 다. 특히 북한체제 변화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에 기반하여 분석 예측하면서 한반도 관리 프로그램을 보다 적극 적으로 수립하고 주변국들과 동조체제를 형성하는 등 전 방위적 대응 자세가 중요하다. 위기는 기회이며 지정학적 변화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계 기로 작용할 수 있다. 중국이 급부상하고 안보구도가 복잡해지는 상황 은 안보의 불확실성과 헤게모니의 도전 등으로 불안정한 동북아 구도 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지구적 차원(Global Approach)과 지역적 차원(Regional Approach), 남 북 관계 차원 -xiii-

16 (Local Approach) 등 3차원의 복합적 이해를 고려할 때 다자안보의 대화와 협력 가능성을 높이는 역설적 상황이 준비될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강대국뿐만 아니라 관계국들이 다자안보의 전략적 유용 성을 깨닫고 있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여전히 적대적인 북 미 관계가 존재하며 다자안보체제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해당사국들이 각자의 안보적 이해관계 계산에 따라 다 자안보협력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변화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 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한반도 주변국의 개입구도 및 동태적인 역관계를 분석, 예측, 대응하면서 한반도 평화 정착 및 중장기적 관점 에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고려한 지역경제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특히 한국과 북한, 중국이 상생할 수 있는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이미 2008년에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 계 로 격상된 한 중 관계와 현재의 북 중 경제협력체제를 고려한다면 북한을 매개로 한 중 경제협력을 보다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북한의 경제 안정과 개혁 개방 역량 강화는 무엇보다도 한반도 평화 안정 및 통일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 한 우리의 노력은 중국의 G2전략과 북한의 변화, 한국의 지속적인 경 제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추진되어야 한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남 북의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에 초석이 되어야 한다. -xiv-

17 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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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북한과 중국 관계는 전통적으로 순망치한( 脣 亡 齒 寒 )의 혈맹관계로 불려왔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김정은 후계체제로의 구축과 정 및 중국의 G2 부상 등 양국의 내 외 환경변화로 양국은 새로운 관계 를 모색 중이다. 특히 중국은 급속한 경제력 신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영향력 확장을 추구하면서 기존의 대외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이를 반 영하듯 오랜 동안 동북아 질서의 패권을 차지했던 미국조차 중국에 동 북아 지역의 헤게모니를 내주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1 일례로 구소련의 해체 이후 사실상 세계적 패권을 행사해온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에게 당신은 물주와 협상할 때 얼마나 세게 나갈 수 있느냐 고 물었다고 한다. 2 여기서 물주는 중 국을 의미하며, 이 일화는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50년대 소련으로부터 동유럽의 위 성국가 정도로 취급받고, 미국의 대륙공격을 두려워하던 중국이었음을 고려한다면 3 중국의 부상은 지금의 세계사를 특징짓는 현상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제 G2 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의 양강체제를 형성 하고 있으며 실제로 양국은 2008년 이후 정기적으로 경제대화 및 전략 적 협력, 세계 현안에 대한 정책적 조율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 지정학에 변환이 초래되었다는 분석에는 많은 연구자 1_ Immanuel Wallerstein, Northest Asia and the World-System, The Korean Journal of Defence Analysis (Fall 2007), p. 8. 2_ 신해혁명 100년 중국을 알자, 중앙일보, 2011년 1월 3일, < 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 &cloc=olink article default>. 3_ 1970년대 중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심알동 광적량 불칭패( 深 挖 洞 廣 積 糧 不 稱 覇 : 굴을 깊게 파고, 식량을 비축하며, 패권자라 칭하지 말라) 였다. 이같은 마오쩌둥( 毛 澤 東 )의 교시는 당시 미국과 소련 두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국 외교 의 생존전략이었다. Ⅰ Ⅱ Ⅲ Ⅳ Ⅴ Ⅵ 서론 3

20 들이 동의하고 있다. 4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동북아 질서의 변화를 주 도하는 중국의 대외전략 및 이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을 분석하고 향후 한반도의 평화정착 및 동북아 질서안정을 위한 우리 정부의 정책 적 시사점을 모색해 본다. 한 나라의 국가전략은 국가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기 본적인 수단을 의미한다. 5 중국은 최고지도자들마다 자신들의 국가발 전전략을 제시해왔다. 마오쩌둥 시기의 공산혁명사상( 共 産 革 命 思 想 ), 덩샤오핑 시기의 개혁 개방이론( 改 革 開 放 理 論 ), 장쩌민 시기의 3개 대표론( 三 个 代 表 論 ), 후진타오 시기의 과학적 발전관( 科 學 的 發 展 觀 ), 조화세계론( 和 諧 世 界 論 ) 이 등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국가 발전전략에 상응하는 국가의 대외전략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6 탈냉전기 이후 중국의 대외전략은 화평굴기, 도광양회, 유소작위 로 압축, 정리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전략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4_ 대표적으로 이수훈 박병인, 동북아 안보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인식, 동북아논총 (한국동북아 학회, 2011); 이철호, 동북아 지역질서의 복합화와 한국의 대응, (21 세기 정치학회 춘계국제학술대회, 2010). 물론 미 중 간 갈등이 오히려 심화될 것이 라는 분석도 존재하지만 상호 경제협력 및 전략적 협력이 지배적이라는 것이 일반적 인 분석이다. 5_ 전략이란 원래 군사용어로 전쟁의 총체적 차원에서 취하는 작전계획, 배치와 군사행 동을 가리키는 말로, 정치용어로 전략이란 두 정치세력의 투쟁에 있어서 전체국면에 관한 사상, 주장, 방침, 정책, 계획과 행동을 가리킨다. 사익현 저, 정제남 역, 신중국 외교이론과 원칙 (서울: 아세아문화사, 1995), p _ 중국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1949년 신중국 성립부터 1978년 개혁 개방 이전까지를 마오쩌둥의 시대로 보고 개혁 개방 이후 1997년 덩샤 오핑의 사망까지를 덩샤오핑의 시대로 보고 1997년부터 2002년까지를 장쩌민의 시 대로 보고, 2002년 이후 현재까지를 후진타오의 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장쩌민이 중국공산당 총서기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시기를 일방 적으로 덩샤오핑시대로 분류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특별히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의 대외전략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때 당의 총서기인 장쩌민 의 역할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지도자별 국가대외전략의 특징 을 분명히 하기 위해 1989년 이후부터 2002년까지를 장쩌민의 시대로 구분하여 분 석하고자 한다. 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1 정책철학에 공통적인 유기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세 가지 전략은 중국의 힘과 능력의 크기, 주변국과의 관계, 국내외 정세의 시 기별 특징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져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중국 경제력과 국력 신장 및 외교적 목표에 따라 대외전략 패 턴이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 수준에서 중국정부가 시대의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전략과 외교적 목표에 우선 순위를 두었는지는 구분이 가능하다. 개혁 개방 과 (동서)평화와 (남북)발전론 이라는 기치아래 경제발 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덩샤오핑의 국가대외전략의 기본은 도광양회 ( 韜 光 養 晦 ) 7 이다. 서구 강대국에 대항할 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추진 못한 중국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내 부적으로 국력을 발전시키려는 전략이었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중국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고 이는 서구세계 안에 중국위협론이 등장하게 만들었다. 이에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은 서구의 중국 위협론에 대처하면서 중국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대외적 위상 강화를 위해 유소작위( 有 所 作 爲 ) 와 신안보관( 新 安 保 觀 ) 을 국가대외 전략으로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7_ 1989년 9월 덩샤오핑이 중앙 책임자와의 대화에서 국가대외전략지침으로 제시한 24 자 방침의 일부이다. 냉정관찰( 冷 靜 觀 察 : 냉정하게 관찰하고), 참온각근( 站 穩 脚 筋 :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며), 침착응부( 沈 着 應 付 : 침착하게 대응하고), 도광양회( 韜 光 養 晦 : 때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능력을 노출하지 않고), 선우수졸( 善 于 守 拙 : 낮은 태도를 취하고), 결부당두( 決 不 當 頭 : 결코 우두머리로 나서지 않으며)로 중국 의 미래의 선택권을 최대화하자는 중국대외전략의 기본사상으로, 이 중 실제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고려하여 조용한 가운데 중국의 발전에 우선 목표를 둔다는 도광양 회 가 덩샤오핑의 대외관계전략을 대표한다. 어원은 삼국시대 유비가 조조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조조를 기만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에서 비롯된다. 조조 참모들이 유비를 조기에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을 때, 이를 알아차린 유비가 생존을 위해 자세 를 낮추어 조조와 참모들의 경계심을 풀었다. 이희옥, 중국의 국가대전략 연구 (서 울: 폴리테이아, 2007), p. 91. Ⅰ Ⅱ Ⅲ Ⅳ Ⅴ Ⅵ 서론 5

22 전략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국제사회에서 필요한 역할은 하며 대 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강대국 관계는 물론 주변국들과 의 협력관계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을 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제4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시대에는 화평굴기( 和 平 崛 起 ) 란 개념이 등장하였고 이는 화평발전( 和 平 發 展 ) 으로 전환되었다. 후진타오-원 자바오체제는 G2 로서 중국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 다. 2020년까지 중국의 GDP를 2000년의 4배 수준(4조 3000억 달러)으 로 증가시키고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7%로 유지하며 1인당 GDP를 3000달러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화평발전 에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강조하는 다자 주의( 多 者 主 義 ) 가 부각되었다. 원래 중국은 전통적으로 다자안보체제 가 중국의 국력신장과 독립성 유지에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인식하 면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 왔다. 8 그러나 2001년 상하이 협력기구 (SCO) 를 창설하면서 다자안보체제의 유용성을 깨닫고 적극적인 의사 를 표명하게 된다. 이런 전환은 중국의 오랜 전통적 사유의 변형으로서 조화세계론 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후진타오는 국내통합에 중점을 둔 과학적 발전관( 科 學 的 發 展 觀 ) 을 국가전략이념으로 채택하 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궁극적으로 부국강병을 실현해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의 국가발전전략 기조의 변화와 대외적 위상 변화에 따라 북 중 관계도 변화되었다. 북 중 관계에 대한 기존의 주된 관점은 이념의 공 유를 기초로 한 혈맹관계가 느슨해지고 국제환경 및 국가이익을 고려 한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 갈등하는 일반적 국가 간의 관계로 8_ 이단,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전략: 6자 회담을 중심으로, 한 국동북아논총, 제15권 2호 통권55집 (한국동북아학회, 2010),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3 점차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양국의 전략 경제적 이해의 차이 로 경협확대 및 북한의 중국에 대한 정치 군사적 의존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북 중 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의 대부분은 중국의 대외전략 속에서 대북정책을 조명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반면, 북한의 대중국 인식 및 대응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룸으로써 양국관계의 특성을 파 악하는데 한계를 보여주었다. 물론 북 중 관계의 지속과 변화를 평가하 는 것은 학술적 측면에서나, 현실 정책적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 연구주제이다. 북 중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양국 간의 관계는 우선 사회주의 국가이고 유사한 당-정 권력구도를 갖고 있다. 9 단 북한은 김일성 김 정일 부자의 권력이 절대화되어 있는 체제라는 점에서 수령제 사회주 의 로서 수령-당-정 권력구도를 갖고 있는 사회주의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정부와 북한내각은 서로 상이한 관점을 취할 수 있으나, 당은 하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나아가 북한은 수령과 중국 최고지 도자와의 친분적 관계 를 통해 양국관계를 조율해 왔다. 기존 연구는 이 점을 간과해 왔다. 둘째, 당 지도부와 당 차원에서의 양국관계에 대 한 전략적 신뢰는 상당히 높다. 북 중 관계가 단절될 때에도, 양국의 당 對 당 간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지 않았다. 셋째, 북 중 간 교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빈번하고 광역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9_ 중국공산당은 수평적으로 군부, 행정기관, 사법기관 등 모든 곳에 당의 영도권을 행 사하고, 수직적으로는 당에서부터 최소 지방단위까지 하나의 조직화가 이뤄져 있다. 모든 권한은 총서기/중앙정치국, 상무위원/중앙정치국위원/중앙군사위원회위원, 그 리고 중앙서기처를 통해서 행사된다. 중앙정치국이 당-정-국가체제에서 모든 주요 정책결정과정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기관이고, 이 기관의 활동을 실무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조직이 중앙서기처이다. Ⅰ Ⅱ Ⅲ Ⅳ Ⅴ Ⅵ 서론 7

24 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할 경우, 북 중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 기 어려우며 북한의 적극적인 대응전략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 간의 관계를 분석할 경우, 어떠한 점을 유념해 야 할 것인가? 우선 중국이 당-국가체제(Party-State System)의 통 치체제상의 특징을 갖는 국가라는 점이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이라는 국가를 이끌어 가며 국가의 모든 업무는 공산당과 중첩되어있으며 공 산당의 모든 지도를 받는다. 중국은 당과 정부를 분리하지 않는다( 黨 政 不 分 ), 공산당이 정부를 대신한다( 以 黨 貸 政 ) 는 통치 원칙을 지켜오 다가, 1978년 11기 3중전회 이후 이러한 당-정 구도에 대한 혁신을 단 행하여, 당정분리( 黨 政 分 開 ), 당정분공( 黨 政 分 工 )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정치를 지도( 以 黨 領 政 ) 하는 구도는 아직도 불변하고 있다. 10 다시 말해 중국공산당은 정책의 결정에 관한 책임을 지며, 정부는 집행과정을 책임지는 이중구도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 져 오고 있다. 대외관계 분야에 있어서도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당-국 가체제 의 정당외교 특징을 갖는다. 중국공산당의 정당외교 원칙은 독 립자주, 완전평등, 상호존중, 상호내정불간섭 등의 당 對 당 4원칙 을 견지하는 것이다. 11 중국공산당은 1982년 제12차 대표대회에서 덩 샤오핑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국가와의 정당관계 처리를 위한 4원칙( 中 國 共 産 黨 處 理 社 會 主 義 國 家 間 黨 際 關 係 的 四 霅 原 則 ) 을 정 10_ 사실 중국공산당이 일당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지난 30년간 지속된 높은 경제성장률이었다. 따라서 경제성장이 위축되면 연쇄적으로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 제와 연관되어 당의 정당성 및 정통성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경제대국으로서 중국 의 부상은 이런 국내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1_ 주재우, 중국의 대북정책 및 전략: 변화와 연속성의 정책적 함의, 통일부, 2010년 정책용역보고서 (통일부, 2010),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5 식으로 제기하였고, 이후 이 원칙은 당 헌장에 삽입되어 중국 대외관계 의 기본 원칙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12 실제로 1992년 제14차, 1997년 제15차, 그리고 2002년 제16차 대표대회에서 4원칙을 거듭 표 명하고 있다. 13 이런 맥락에서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 中 央 對 外 聯 絡 部 )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51년에 설립된 대외연락부의 목적은 중국공산당의 대외교류 발전과 대외관계의 개척 과 당의 대외연락 기능을 담당하기 위함이었다. 민간외교와 관련된 부 분을 관할하고, 당의 대외교류업무를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비록 이후 전방위 다자외교가 본격적으로 추진됨으로써 중앙대외연락부장 의 위상이 저하되었지만,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둘째, 중국의 대외전략은 전통적인 중화주의( 中 華 主 義 ) 입장에서 살 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의 뿌리가 깊은 나라로 세계질서를 바라보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 은 중심이며 이웃나라들은 주변이며, 오랑캐로 보는 상국( 上 國 )과 하국 ( 下 國 )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관계는 중화주의 로부터 출발한다. 19세기 후반 아편전쟁을 통해 중화주의에 상당한 상 처를 입었지만 기본적으로 대국으로서의 부상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버린 적은 없다. 신중국 건립 이후 중국은 잃어버린 100년 을 되찾고 과거 대국의 명성을 회복하는 것을 전제로 중국의 국가발전전략과 대 외관계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12_ 許 月 梅, 新 時 期 中 國 共 産 黨 政 黨 外 交 評 析, 襄 樊 學 院 學 報, 第 23 卷 第 3 期, 2002 年 5 月, p _ 198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제13차 대표대회에서는 당 對 당 4원칙을 각국의 다양 한 정당과의 관계에 확대 적용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논리로 적과의 교류는 잊지 말고, 새로운 친구는 더욱 광범위하게 교류하고, 중점을 부가하여 다방면으로 교류 ( 不 忘 敵 交, 廣 交 新 友, 突 出 重 點, 多 方 聯 系 ) 한다는 것이다. 姜 躍, 以 黨 際 關 係 推 動 國 家 關 係, 中 共 石 家 庄 市 委 黨 校 學 報, 第 10 卷 第 10 期, 2008 年, p. 27. Ⅰ Ⅱ Ⅲ Ⅳ Ⅴ Ⅵ 서론 9

26 셋째, 이 과정에서 중국은 기본적으로 통일전선전술( 統 一 戰 線 戰 術 ) 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전술은 마오쩌둥의 모순론( 矛 盾 論 ) 에서 출발하는데 주요모순( 主 要 矛 盾 ) 을 해결할 때는 부차모순( 副 次 矛 盾 ) 들과는 타협하고 연합한다는 것이다.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상황에 따 라 정치적 전략적 차원에서 정책과 노선의 변화를 합리화해야 한다. 주요모순이 해결되면 부차모순 중 가장 커다란 모순이 다시 주요모순 이 되어 우선적 해결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오쩌둥 시절 계급투쟁이 주요모순으로 규정되었을 때, 중국은 외부의 어떤 제국주의 세력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중국의 주요모순을 국민들의 경 제력 발전요구와 경제력 발전수준의 차이로 규정하게 되면서, 중국은 경제발전이라는 주요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외부 제국주의와 타협하 여 그들의 기술과 자본으로 중국의 현대화를 이루는 개혁 개방을 진행 하였다. 중국은 대외전략에서도 주요모순인 경제건설에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부차모순과는 연합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덩샤 오핑 이후에도 중국은 이러한 경제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평화롭고 안전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요모순인 경 제모순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부차모순인 다른 군사적 외교적 모순 에 적극적인 개입과 해결의 의지를 중국은 갖게 될 것이다. 본 연구는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전략을 시기별로 구분해서 비교 분석한 후, 향후 양국관계 정립 방향과 북한체제 변화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는 북 중 관계의 이중적 측면이나 한계성을 집중 분석함으로써, 북 중 관계의 변화에 따른 우리의 대응책 과 대북 통일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1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7 Ⅱ.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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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은 부국강병 을 통한 강대국건설이라는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목표를 여러 구호를 통해 제시해 왔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적 구호가 아니다.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다. 이는 국가발전과 대외관계의 전략으로 구체화되어 표출되고 있다. 덩샤오핑 은 개혁 개방을 기본적인 국가발전전략으로 제시하고, 대외적으로는 도광양회 를 중요한 노선으로 정하여 평화로운 가운데 중국의 경제발 전을 도모하였다. 북한 또한 시대변화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국가정책 을 수립하여 국익을 도모해 왔다. 중국의 개혁 개방 등 시장경제개혁과 미 중 수교로 상징되는 도광 양회 에 대해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전체적으로 부분적 수용이었 다. 북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제 내부의 단합이자 개방의 압력 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즉 부분적인 개혁 개방을 시도할지라도, 그것 이 조금이라도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에 위협이 된다면 단호히 거부한 다는 것이다. 북한에게 경제발전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미국의 군 사적 위협에 맞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경제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집착해온 핵개발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 다. 북한과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념갈등, 중국 개혁 개방에 대 한 입장 차이, 미 중 수교로 인한 비방전 등 일정 정도의 갈등과 반목은 있었지만 안보전략적 관점에서 북 중 관계는 여전히 견고한 협력체제 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는 우선 덩샤오핑의 국가발전전략과 대 외전략을 통한 중국의 부상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3

30 1. 덩샤오핑체제의 개혁 개방과 도광양회 가. 덩샤오핑의 국가발전전략: 개혁 개방( 改 革 開 放 ) 청말 중국의 지도자들은 국운 쇠퇴와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겪으면서 새로운 중국의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양무운동( 洋 務 運 動 ) 과 변법자강운동( 變 法 自 疆 運 動 ) 의 개혁적 근대화 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에 개혁적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혁명적 방법 인 신해혁명( 辛 亥 革 命 ) 과 공산혁명( 共 産 革 命 ) 을 시도하게 된다. 이 러한 개혁적 운동과 혁명적 시도들은 그 방법과 노선에서 차이가 있지 만 모두 부강한 중국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마오쩌둥 주도의 공산 혁명에 의해 1949년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일차적 과제는 부강 한 중국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지위를 회복시키 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중화민족의 궐기와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한 신중국의 건설 을 당면 과제로 선언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 로 급속한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부강한 사회주의 신중국 건설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과 대약진운동( 大 躍 進 運 動 ) 의 실패, 문화대혁명( 文 化 大 革 命 ) 의 발발로 인해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노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경제적 측면에서 부강한 중국 건설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자력갱생 ( 自 力 更 生 )의 노선에서 정치적 측면에서 개혁과 경제적 측면에서의 개 방을 내세운 대담한 노선전환을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놀라운 고도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부강한 국가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 하였다 년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1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1 한 개혁파들은 경제발전과 현대화 를 당시 중국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내걸고, 흑묘백묘( 黑 猫 白 猫 )론 과 실사구시( 實 事 求 是 ) 노선을 통해 시장경제의 도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정책을 한마 디로 요약한다면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 一 個 中 心 二 個 基 本 點 ) 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경제건설에 우선적인 중심을 두고 이를 위해 개혁 개방을 강력하게 추진하되 개혁 개방의 수위를 규정하는 이른바 4항 기본원칙을 제시함으로써, 개혁 개방과 시장경제 의 도입이 중국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기의 개혁 개방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산당 11 기 3중전회 이후 농촌에서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농촌은 건 국 후 토지개혁과 합작운동으로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으나, 그 후 경 제체제와 경제정책은 농촌의 발전에 오히려 적합하지 않았다. 주요 문 제로는 일대이공( 一 大 二 公 ) 15 의 원칙에 따른 인민공사의 폐해, 농민 의 생산의욕을 고려하지 못한 경영과 분배방식의 문제, 지나친 식량생 산의 강조로 인한 농업의 다양성 저해 등의 많은 문제점들이 대두되었 다. 1978년 이후 기존 농촌체제의 폐단에 대한 새로운 농업정책이 공표 되면서 큰 개혁이 단행되었다. 1983년 인민공사를 폐지하고 정부와 인 민공사의 직능을 분리시키고, 생산단위를 농가로 하는 농가생산청부 책임제( 農 家 生 産 請 負 責 任 制 ) 16 를 도입하고 농촌경제구조를 개혁하여 14_ 이태환, 중국의 국내정치와 대외정책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7), p _ 원래 일대이공 은 인민공사( 人 民 公 社 )체제의 기본 특징으로, 즉 대( 大 )는 인민공사 의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고 토지가 많아 대규모적인 생산과 건설이 행해지는 것을 말하고, 공( 公 )은 사회주의화 집단 소유화를 말한다. 이들 조치로 농촌에서는 인민공 사운동이 전개되어 농촌의 집단화를 통한 정사합일( 政 社 合 一 )체제가 확립되었다. 16_ 농업부문의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 농업 생산자들의 자주권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농가 또는 소집단 단위로 자신들의 책임 아래 할당된 생산책임을 다하고 나머지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5

32 다품종의 농사를 짓게 하고 여러 가지 경영방식 및 향진기업의 발전을 장려하였으며, 농촌의 유통체제를 개선하여 농민에게 잉여생산물의 판 매를 허용하였다. 특히 농가생산청부책임제의 추진은 농민의 생산의욕 을 고취시켰으며, 이로써 장기간 침체되어오던 농촌경제는 엄청난 발 전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농촌체제개혁의 성공에 따라 도시경제체제 개혁이 전개되어 기업체제개혁과 동시에 국가계획 재정 금융 산업 무 역정책 등 각 방면에 관리체제가 개혁되었다. 개혁 이전 기업 관리의 주요문제는 계획경제로 인한 정부의 기업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기업의 자주권의 부재였으며 이로 인해 낮은 생산 의욕과 기업경영의 비효율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기업체제개혁은 기업 의 자주권을 확대하고, 경영청부책임제( 經 營 請 負 責 任 制 ) 를 도입하여 기업가와 노동자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정부의 지나친 계획기능을 완화하는 동시에 정부의 거시적인 경제조정 역할을 통해 기업의 활력 과 생산성을 높여갔다. 그 외 상업, 재정, 금융, 무역 등 기타 경제영역 을 개혁하면서 과거 지나친 계획경제체제로부터 탈피해 나갔으며, 외 국의 선진적 관리경험과 경제법칙을 존중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 립하는 역사적인 개혁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중국은 대외개방을 단행하였다. 대외개방은 마오쩌둥의 자 력갱생 전략을 전환하여 외국의 선진기술과 해외자본을 적극적으로 흡 수하고 국내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 사회주의 중국을 현대화하자는 것 이었다. 우선 1979년 말 외국으로부터 외채와 직접투자를 요구하고 국 제금융기구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시작했으며, 1979년 5기 전인대 제 2차 회의에서 중외합작경영기업법( 中 外 經 營 合 作 企 業 法 ) 을 공포해 파 잉여생산 부분에 대하여는 농가의 처분의 자주권을 가질 수 있는 생산방식을 말한 다. 이 제도의 도입으로 인민공사제도는 차츰 소멸되어 갔다. 1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3 격적인 중외합작기업을 탄생시키고 이어 중외합작기업과 외상독자경 업기업들을 설립했다. 화교의 고향이며 홍콩, 마카오, 대만과 인접한 광동성과 복건성에 성의 경제관리권한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 심천, 주해, 산두, 하문 네 곳을 경제특구( 經 濟 特 區 )로 지정하였다. 초 기의 개방으로 중국의 대외무역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였는데, 17 이어 1984년 연해의 상해, 천진, 대련 등 14개 항구도시를 개방하고 경제특 구에 대외경제 자주권을 확대하였다. 1985년 장강삼각주, 주강삼각주, 민동남삼각지구에 연해경제개방구( 沿 海 經 濟 開 放 區 )를 설치하였으며, 1986년 외국상인의 투자업무를 돕는 외국상인투자공작영도소조를 설 치하고 이어 국무원 외상투자장려규정( 外 商 投 資 獎 勵 規 定 )을 반포, 외 자도입사업을 법제화하여 투자환경을 개선하였다. 1988년에는 연해경 제개방구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여 기본적으로 경제특구와 연해개방도 시를 포함하는 연해경제개방구를 형성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해남도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1990년에는 상해의 포동경제구를 개발하고, 상 해, 심천, 천진에 보세구역을 설치, 외국상품에 대한 면세조치를 취했 다 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통해 전면적인 대외개방을 추진 하기로 결정하여 년 말까지 5개 경제특구, 33개 경제기술개발구, 12개 보세구, 11개 변경경제합작구( 邊 境 經 濟 合 作 區 )를 만들어 전방위 17_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간 무역액은 206.4억 달러에서 436.2억 달러로 연평균 16.1% 성장했으며, 외자이용협의 항목은 1,471개, 협의금액은 240억 달러, 외자이 용액은 144.4억 달러에 달했다. 18_ 1984년부터 1991년까지 8년간 무역액은 436.2억 달러에서 1,356.3억 달러로 연평 균 15.2% 성장했으며 체결된 외자협의 항목은 4.13만 개, 협의금액은 976.8억 달러, 외자이용액은 652.9억 달러에 달했다. 19_ 우선 연강개방( 沿 江 開 放 )으로 장강중하류의 6개 항구도시를 개방하고, 연변개방 ( 沿 邊 開 放 )으로 길림, 흑룡강, 내몽고 신강, 운남, 광서의 13개 변경도시를 개방하 고, 성정부 도시 개방으로 합비, 남창 등 중서부 18개 성정부 도시를 개방하였으며, 대련, 광주, 청도 등 많은 도시에 경제기술개발구를 설치하였다.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7

34 적인 개방구조를 형성했다. 20 이상의 경제특구, 경제개방구, 경제기술 개발구, 연해도시, 내륙도시의 개방결정은 큰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중 국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통해 계획경제체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은 적절하고 중요한 결정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1978년 11기 3중전회의 개혁 개방 결정 이래 1979년 5기 전인대 2차 회의 <정 부사업보고( 政 府 工 作 報 告 )>는 국가경제운용에 있어 계획을 중심으로 시장의 작용을 중시하는 경제체제를 수립할 것을 제안했으며,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는 경제체제개혁의 기본방향을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견지하는 전제 하에 시장조절의 보조작용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강조하 였다. 이후 1982년 중국공산당 12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덩샤오핑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有 中 國 特 色 的 社 會 主 義 ) 개념을 제시하면서 계획 경제를 주도하고 시장조절을 보조하는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국가의 지령성 계획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대신에 지도성 계획을 확대하였 으며, 지방의 계획관리권한과 기업의 생산경영자주권을 대폭 확대하는 등 전통적인 계획경제의 과감한 혁신을 추진하였다. 21 이어 1984년 12기 3중전회 이후 경제체제개혁은 농촌에서 도시로, 국부적인 실험에서 전면적인 전개로 확대되었으며, <중공중앙의 경제 체제개혁에 관한 결정( 中 共 中 央 關 於 經 濟 體 制 改 革 的 決 定 >에서 사회주 의 공유제의 기초 위에서 계획적 상품경제( 計 劃 的 商 品 經 濟 ) 22 를 실시 20_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무역액은 1,346.3억 달러에서 2,808.6억 달러로 연평균 20% 성장했으며 외자협의 항목은 21.7만 개, 협의 금액은 2,896,7억 달러, 외자이용 액은 1,495.1억 달러에 달했다. 陳 繼 安 胡 哲 峰, 鄧 小 平 之 魂 ( 北 京 : 中 共 中 央 黨 校 出 版 社, 1997), p _ 鄧 小 平, 中 國 共 産 黨 第 十 二 次 全 國 代 表 大 會 開 幕 辭 ( ), 鄧 小 平 文 選 第 三 卷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1993). 22_ 사회주의 상품경제이론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고 이를 1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5 할 것을 제기했다. 1987년 중국공산당 13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중 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면서 사회주 의 초급단계론( 社 會 主 義 初 級 段 階 論 )을 제시하였다. 23 사회주의 초급 단계를 벗어나기 위해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 一 個 中 心 兩 個 基 本 點 ) 의 기본노선을 견지하여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사회주의 초급 단계는 최소한 100년 이상 필요로 하는 긴 역사적 단계임을 강조하였 다. 또 계획과 시장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여 사회주의 계획적 상품경제체제는 마땅히 계획과 시장의 내재적 통일체제여야하 며 시장의 작용범위는 모두 전 사회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국가가 시 장을 조절하고 시장이 기업을 인도하는 경제운영체제를 건립해야 한다 고 결정했다. 나. 덩샤오핑의 국가대외전략: 도광양회( 韜 光 養 晦 ) 유소작위 ( 有 所 作 爲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덩샤오핑( 鄧 小 平 )의 개혁 개방정책의 목표 는 한마디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중국의 위상을 제고하여 궁극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을 성공적으로 추진 하기 위하여 대외적인 국가전략으로 평화와 발전( 和 平 與 發 展 ), 도광 양회( 韜 光 養 晦 ) 를 표방하였다. 24 확대시키기 위해서 사회주의 안에서도 상품생산과 교환을 통한 재화의 이동이 존재 하기 때문에 필요로 했던 새로운 발전이론이다. 23_ 사회주의 초급단계이론은 중국이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 야 하는 특정단계로 경제적 빈곤과 낙후에서 탈피하는 과정, 농업국에서 현대화된 공업국으로의 전환단계, 자연경제 또는 반 자연 상태에서 고도의 상품경제로 발전 해 가는 단계로 규정한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근거로 덩샤오핑은 서방 각국의 경 제발전, 노동인민 빈곤해소의 개선, 세계화로 인한 협력 등을 내세워 현대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해왔다고 인정하고, 이를 수용한 것이다.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9

36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의 외교정책의 기조는 개혁 개방의 성공적인 추진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국제주의와 애국주의로의 결합, 평 화외교정책의 수립, 반패권 반제국주의, 실사구시 등이었다. 25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덩샤오핑의 중국 대외전략의 목표는 1 반패 권주의에 의한 세계평화의 유지, 2 대만을 포함한 국가통일의 달성, 3 4대 현대화 사업 등이다. 이 3대 임무 중 핵심은 4개 현대화, 즉 경제건설임을 전제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의 중점은 평화적인 환경 을 조성하여 4개 현대화를 달성하는 것 이며 이것이 중국의 국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국가의 주권을 보존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국가의 경제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러 한 덩샤오핑 시기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은 국내 개혁 개방의 배경으 로서 국제정세가 탈냉전을 거쳐 과거의 낡은 구조가 변화하여 새로운 구조가 형성되는 과도기적 시기라는 기본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세계 구조 속에서 소련이 어떠한 위치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과 그로 인해 소련과 미국 등 양국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전략적 선택인 것이다. 특히 1960년대 말, 중 소 분쟁이 국경무역 충돌로까지 악화되면서 중국은 소련의 위협에 대한 대처로 미국과의 화해무드를 조성하게 되고, 1972년 닉슨 대통령 24_ 도광양회 는 빛을 감추어 밖에 드러내지 않도록 하여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 는 뜻으로 나관중( 羅 貫 中 )의 <삼국지연의( 三 國 志 演 義 )>에서 유비가 조조 의 식객 노릇을 하며 일부러 몸을 낮추어 조조로 하여금 경계심을 낮추게 하는 계략 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이는 신중국 성립 이후 지속되었던 마오쩌둥 시기에 중심이 되는 정책 사상, 심알동, 광적량, 불칭패( 深 挖 洞 廣 積 糧 不 稱 覇, 굴을 깊게 파고 식량을 비축하되 패권자라 칭하지 말라) 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정책으로 덩샤오 핑의 시대를 대표하는 대외전략이다. 25_ 鄧 小 平, 目 前 形 勢 與 任 務, 中 共 年 報 ( 臺 北 : 中 共 硏 究 雜 誌 社, 1980), pp. 7~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7 의 중국 방문에 이어 1979년 1월 미 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사후적으로 평가하자면, 훗날 중국의 거대한 부상을 가능하게 만든 경제개혁과 개 혁 개방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던 것이다. 1982년 8월 덩샤오핑은 비동맹외교전략으로 독립자주를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사상을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각국이 모두 비동맹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세계 평화에 보다 유리하며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 는 독립정책 추세에 발맞추어 중국 역시 독립자주외교전략을 추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덩샤오핑의 독립자주외교전략은 4불1전(4 不 1 全 ) 으 로 공식화된다. 불결맹( 不 結 盟 : 남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 불고립( 不 孤 立 : 고립되지 않는다), 불대항( 不 對 抗 : 남과 대결하지 않는다), 불 겨냥( 不 針 對 :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다), 전방위 외교활동 추진( 全 方 位 進 行 外 交 活 動 ) 이 그것이다. 덩샤오핑의 비동맹외교전략의 핵심은 중국이 비동맹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고, 이는 중국이 어떤 형식의 집 단정치에도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평화와 발전( 和 平 與 發 展 ) 은 1985년 덩샤오핑이 중국의 발전과 관 련한 국제정세를 언급하면서부터 제기되었다. 덩샤오핑은 현재 세계 적으로 진정 커다란 문제는 전 세계적인 전략문제로서, 하나는 평화문 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문제 혹은 발전이라 불리는 문제이다. 평화 문제는 동서문제이고 발전문제는 남북문제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27 이 처럼 덩샤오핑의 새로운 국가전략이념이 재정립되면서 중국은 자본주 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 게 된 것이다. 26_ 예쯔청 저, 이우재 역, 중국의 세계전략 (서울: 21세기 북스, 2005), pp. 82~83. 27_ 鄧 小 平, 和 平 和 發 展 是 當 代 世 界 的 兩 大 問 題, 鄧 小 平 文 選 ( 第 三 卷 )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1993), p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1

38 중국이 도광양회 와 같은 국가전략을 모색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1989년 6월 발발한 천안문사태에 대한 서구의 공세 때문이었다 년 중국의 천안문사태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은 중국 내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면서 중국에 대한 금수조치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덩샤 오핑은 서구 국가들의 중국견제에 대해 직접 맞서지 않고 유연하게 대 처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서구에 대항하지 않고 28 경제 발전에 전념하기 위해 이른바 도광양회 전략으로 나가게 되었다. 29 그러나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 내에는 서구의 중국에 대한 간섭과 압 력에 대해 반서구적인 정서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서구 국가들의 중국견제 강화는 중국만이 서구에 대응할 수 있 다는 반응적 민족주의 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서구적 감정의 여론이 등장하자 중국의 지도부는 부상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민족의식 을 통해 서구 국가들의 견제에 대응하고 국가통합을 강화할 필요가 있 었다. 중국지도부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수용하고 중국의 역량을 키워야 하지만, 미국의 중국견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이 천안문사태 이후 서구 의 중국에 대한 압박은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유소작위( 有 所 作 爲 ) 전략 의 대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덩샤오핑시대 후반에 대 28_ 실제 마오쩌둥시대도 도광양회 전략의 사례로 1950년 중 소 상호원조조약에서 중 국에 대한 소련의 부당한 대우(중국을 동유럽의 위성국가로 치부한 점, 미국의 공습 에 대비하여 소련이 후견인이 되어주는 대신 만주의 주요 항구와 철도 운영권을 요구한 점 등)에 대해, 그리고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주은래 총리가 미 국무장관 인 존 델레스(John F. Delles)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거절당한 일, 1970년대 미국이 대만에 대량의 무기를 매도하는 등의 굴욕적인 사건에도 묵묵히 견뎌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덩샤오핑 시기에도 1993년 공해상에서 중국선박이 미국 군함의 검문 을 받아 주권 침해의 논란이 되었으나 침묵한 사례가 있다. 29_ 이태환, 중국의 국내정치와 대외정책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7),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9 두된 유소작위 의 전략은 뒤를 이어 장쩌민에 이어지고 책임대국론, 화평발전 의 전략으로 연결되게 된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 의 국가전략의 핵심은 대미정책이라고 보았 다. 덩샤오핑은 현대화 건설 대신에 반미 반패권주의 투쟁을 외교정 책의 수위에 놓는 것은 중국의 전략적 이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30 한마디로 덩샤오핑의 국가전략이념은 서구 국가들을 중시하는 전략이었다. 31 그는 반미 대신 현대화 과업을 최우 선 목표로 한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인 대외전략으로 16자 방침 을 제시하였다. 덩샤오핑의 16자 방침은 신뢰를 증진( 增 加 信 任 ), 불화를 줄이고( 減 少 麻 煩 ), 협력을 증진( 發 展 合 作 ), 대립을 회피( 不 槁 對 抗 ) 하는 것을 말한다. 32 이는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를 발전적으로 추진하 겠다는 중국지도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신국제정치 수립을 목표로 하 였다. 이는 중국 자체의 전략적 이익과 아시아 및 세계 전역의 평화를 위하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1989년 미국 부시 대통 령과의 담화에서도 중 미 관계는 결국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 다 라고 표현하여 양국의 상호관계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33 특히 그는 대만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의 잦은 충돌에 대해 대만 문 제는 중 미 관계의 중요한 장애다. 일단 평화공존의 방법으로 대만 문 제를 해결하면 이 논쟁점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태평양 지역과 세계 30_ 鄧 小 平, 和 平 和 發 展 是 當 代 世 界 的 兩 大 問 題, 鄧 小 平 文 選 第 三 卷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1993), p _ 黃 東 升, 當 代 世 界 政 治 與 經 濟 ( 北 京 : 中 國 經 濟 出 版 社, 2006), p _ 人 民 日 報, 1995 年 10 月 26 日. 33_ 賈 國, 重 新 認 識 中 美 關 係, 梁 守 德 主 編, 國 際 政 治 新 論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2003), p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3

40 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좋은 일이다 라고 말했다. 34 그러나 덩샤오핑은 한편으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에 반대하여 미국이 오류를 범했을 때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도광양회 를 주요 정책기조로 설정하면서도 유소작위 의 전략을 동시에 구사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2. 김일성체제의 인식과 대응전략: 비판적 수용과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북한은 중국이 유일하게 군사동맹관계를 맺은 국가이다. 1961년 중 북 우호합작호조조약( 中 北 友 好 合 作 互 助 條 約 ) 이 체결된 이후로 중국 은 북한과 전통적인 혈맹관계를 유지해 왔다. 35 한때는 긴장관계를 형 성한 적도 있으나, 지금까지 동맹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다. 중국의 입장 에서 볼 때, 북한은 여전히 완충지대로서의 대미 억제력 확보, 한반도 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유지, 미 일 양국에 대한 협상력 제고, 미국의 대만개입 억제 등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존재이다. 36 비록 북 중 관 계가 소원해진 시절도 있었지만, 당 對 당 차원의 교류는 한번도 중단 된 적이 없었다. 34_ 陳 忠 經, 胸 襟 開 闊 放 䀶 世 界 : 硏 究 鄧 小 平 國 際 戰 略 思 想 的 初 步 体 會, pp. 22~ _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서는 조약 쌍방이 타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자동군사개입 (제2조), 조약 쌍방이 반대하는 국가, 집단과의 동맹체결 및 반대활동 참여의 금지 (제3조), 중대문제에 대한 상호협의(제4조) 등이 규정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종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서울: 중심, 2000), pp. 318~ _ 최근 중국내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핵개발 추진이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정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부담론(liability)이 제기되기도 하며, 반대로 아직도 전략적 이익이 된다는 북한 자산론(assets)도 존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논의로 International Crisis Group, Shade of Red: China s Debate over North Korea, Asia Report, No. 179 (2 November 2009),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1 한반도는 미 중 간 전략적 이해가 중첩(Intersection)되는 지역이다. 중국은 동맹관계에 기초한 자동군사개입 조항이 갖는 동맹의 연루 위 험성에 불구하고, 그것을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대신 전략적 모호성 (Ambiguity)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대북동맹관계에서 북한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미국과의 원치 않는 분쟁에 연루되는 상황이나, 이와 반대로 북한이 독자적으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중국의 세력권으 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동시에 방지해야 하는 딜레마적 상황에 봉착해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정책적 우선순 위를 조정해 왔다. 이는 북한체제의 급격한 변화, 한국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 미국 주도의 한반도 질서에 대한 반대를 내포하는 것이다. 37 가. 개혁 개방( 改 革 開 放 )에 대한 입장: 비판적 타협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노선에 대해 북한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 여주었다. 중국에서 개혁 개방노선을 결정한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 회( ~23)가 끝난 지 2일 만에 북한은 시장경제를 지향하기 시작한 중국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경제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지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서 이미 북한은 1980 년대 후반부터 생존외교에 주력해야 했다. 사실 북한은 1970년대에는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비동맹 국 가와의 관계 발전에 주력했고, 동시에 북한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서방 국가라면 대화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입장이었다. 38 그러나 1980년대 37_ 원동욱 김재관, 중국의 대북정책과 동맹의 딜레마: 천안함 사건을 중심으로, 현 대중국연구, 제12집 1호 (현대중국학회, 2010), p _ 김근식, 북한의 체제보전과 대외정책 변화: 진영외교에서 전방위 외교로, 국제정 치논총, Vol. 42, No. 4 (한국국제정치학회, 2002), pp. 156~157.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5

42 후반 세계정세가 급변하면서 체제보전을 위한 생존외교로 변모해야 했 다. 39 그리고 이런 상황이 북한으로 하여금 대외정책의 핵심으로서 체 제보전을 위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 며, 이후 미국을 상대로 핵담판을 벌이게 되는 배경이 된다. 중국의 대 내외적인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서 당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이었던 김정일은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안으로의 통 일단결 자력갱생을 더욱 강조해야 함을 주장했다. 김정일은 중국의 개 혁 개방노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였다. 오늘 조성된 정세는 우리들에게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할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느 나라도 남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며 도와주려고 하여도 도와줄 형편이 못 됩니다. 당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로 간부대열의 순 결성을 보장할 것, 수정주의와의 투쟁을 강화할 것, 둘째로 당규 율을 철저히 확립할 것, 셋째로 수령과 당중앙에 대한 충실성을 더욱 높일 것 등이 요구됩니다. 40 이러한 북한의 자세에 중국 또한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한 반대 입장 을 드러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조선로동당 제6 차 당대회( ) 이전부터 중국은 직접 북한을 지목한 것은 아니지 만 아버지로부터 아들로의 권력승계는 봉건시대의 잔재이며 후계자는 인민에 의해 선출돼야 한다 고 주장함으로써 비판 입장을 표출했다 _ 이런 상황을 반영한 대외전략의 기조는 자주 였다. 김일성, 주체의 혁명적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 1988년 9월), 김일성 저작 선집 10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pp. 112~ _ 김정일, 당의 전투력을 높여 사회주의 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책임일군 협의회에서 한 연설, 1979년 12월 25 일),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p _ 人 民 日 報, 1980 年 8 月 19 日. 2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3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과 북한의 후계체제정책이 충돌되는 가운데, 1982년 4월로 예정돼 있던 김일성의 중국 방문이 연기되자, 중국은 덩 샤오핑과 후야오방의 평양 방문(4.26~30)으로 북한을 달랬다. 덩샤오 핑과 후야오방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정식 초 청함으로써 김정일의 후계체제 구축을 비공식 승인했으며 북한의 요구 를 수용하였다. 김일성 또한 그동안 연기했던 중국 방문( ~ 26)을 진행했다. 그리고 김정일 또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의 초청으로 후계자의 지위 부여 이후 중국을 최초 방문( ~12)했다. 당시 중국은 북한의 중국식 개혁 개방노선 수용을 염두에 두고 김일성과 김 정일을 각각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나 중국 방문에서 돌아온 김정일 은 조선로동당 제6기 7차 전원회의( ~17)를 소집하고, 첫 중 국 방문 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을 맹렬하게 비난 했다. 42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지도부는 김정일의 태도와 북한의 입 장에 대해 개탄했으며, 43 김일성의 방중( )시 이러한 중국입장 을 전달했다. 이에 김일성은 김정일의 북경 방문을 재추진했고, 김정일 은 방중(1983.9)시 덩샤오핑의 말을 공손히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경험은 김정일의 마음 속에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게 됐 다. 이후 북한은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게 됐 다. 사회주의체제 유지와 개혁 개방정책의 병행 추진에 대한 내부토론 도 많이 가졌다. 그 결과 1984년 9월 6일 외국기업과의 합작을 규정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합영법 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북한은 중국의 경제개혁이 가져올 체제의 위기를 42_ 김정일은 중국이 최대의 목표로 하는 4개 현대화 계획도 자본주의의 길, 수정주의 노선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고 비난했다. 43_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pp. 106~107.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7

44 심각하게 우려하여 중국식 개혁 개방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특히 1989년 천안문사태는 시장경제로의 개혁이 주는 위협을 명백하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북한이 지금까지도 우리식 사회주의 를 주창하는 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구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개방이 결국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현상에 대한 강력한 대응 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개혁과 보조를 맞추 어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유인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것은 조 금이라도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진행되 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게 경제발전보다 우선순위 에 있는 것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정권의 보위이며, 경제난 속 에서도 끊임없이 추진해온 핵개발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천안문사태 직후인 1990년 1월 11일에 김정일은 우리식 사회주의 를 운영하는 조선은 구라파 나라들처럼 되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44 사회주의권의 개혁 개방에 대해 최근에 와서는 사대주의 병에 걸린 여러 나라 당들이 남이 개편 놀음을 벌리면서 압력을 가하자 거기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같이 개편 놀음을 벌리다가 녹아났습니다 라 며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게 된다. 45 한편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랭구운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북한과 중국과의 안보적 유대관계의 한계를 노출시키는 계기가 44_ 김정일, 당 사상 교양사업에 나서는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 김정일선집 10 (평 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7), p _ 이 외에도 체제의 위기가 개혁 개방 때문임을 분명히 했다. 많은 나라 당들이 교조 주의, 수정주의에 빠져 당건설을 잘하지 못함으로써 시련과 곡절을 겪어 왔으며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가장 악렬한 방법으로 수령의 권위와 위신을 헐뜯음으로써 당의 영광스러운 력사에 먹칠을 하고 이것은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가장 추악한 배신행위입니다, 주체의 당건설리론은 로동계급의 당건설에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지도적 지침이다, 김정일, 김정일선집 10, pp. 253~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5 되었다. 중국은 후야오방의 성명을 통해 중국은 어떤 테러리즘도 지지 하지 않는다 고 말해 북한을 간접 비난했다. 또한 북 중 경제 및 문화협 력조약 체결 30주년 기념일( )에 중국은 피로 맺어진 또는 전투적 인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양자관계가 소원해 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46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은 4개 현대화 계획(국 방, 과학기술, 농업, 공업)의 추진으로 북한을 적극 도울 수 없었기 때문 에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서둘러 인정함으로써 경제 군사적 지 원을 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 도광양회( 韜 光 養 晦 )에 대한 입장: 미 중 수교 비판 미 중 수교에 대해 북한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1979년 10 월 1일 중국 건국 30주년을 맞이하여 로동신문 사설을 통해 북한은 중국 혁명의 승리는 그 의의로 보아 소련의 위대한 10월 혁명의 다음 가는 큰 국제적 사변이었다 고 평가 절하했다. 그리고 양국관계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관계의 강화 나 발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 았다. 대신에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대회에서 다음과 같 이 비판했다. 사회주의 나라들과 블록 불가담 나라들, 모든 신흥세력 나라들 은 제국주의와 무원칙하게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회 주의 나라들과 블록 불가담 나라들이 제국주의 나라들과 국가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경제문화교류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과 원칙적 문제를 가지고 흥정해서는 안 되며 제국주의자들에게 혁명의 근본이익을 팔아먹어서는 안됩 46_ 정비젠 저, 이희옥 역, 중국 평화부상의 새로운 길 (서울: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7), pp. 16~17 재인용.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29

46 니다. 사회주의 나라들과 블록 불가담 나라들은 제국주의 나라 들과 국가관계를 좋게 가지기 위하여 반제적 입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나라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47 그러나 북한은 이보다 앞선 1978년 8월 12일 중국이 일본과 평화우 호조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김 일성은 1978년 10월 21일 일본잡지 세카이( 世 界 ) 지 편집국장과의 담 화에서 중 일 평화우호조약체결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이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 일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중 국에서 원료 같은 것을 사 갈 수 있게 된 것이 좋은 일이며 중국 은 일본에서 선진기술을 받아들여 나라의 민족경제를 더 빨리 발전시킬 수 있는 전망을 가지게 된 것이 좋은 일이다. 그것은 또한 아세아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아주 좋은 일이다. 우리는 일 본과 중국 사이에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보아 앞으로 아세아의 평화를 위하여 더 좋은 전망이 열려지지 않겠는가 하 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48 사실 김일성의 이런 발언은 북한경제에 일본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 이라는 확신 때문으로 보인다. 즉 당시에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될 경우 북한으로서는 한 미 일 공조를 균열시킬 수 있는 동시에 경제적 으로도 일본이 가진 기술, 자본, 시장은 북한 경제의 회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49 물론 미국의 반대 및 당시 일본의 친미 47_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 1980년 10월 10 일, 김일성 저작집 35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pp. 361~ _ 김일성, 일본 정리리론잡지 세까이 편집국장과 한 담화, 1978년 10월 21일, 김 일성 저작집 33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p _ 이성봉, 북한의 국내정세와 대외전략, 국제정치연구, Vol. 9, No. 1 (동아시아 3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7 친한정책과 북한 인민의 거부감 등으로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적대정책이 철회된다면 누구 와도 공존 협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사 실 북한의 외교안보정책은 시대의 흐름과 정세적 특징에 따라 어느 정 도의 수정이 있어왔으나, 생존과 체제 유지라는 기본적인 관점은 변하 지 않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 러시아 북한의 대륙 세력과 미국 일 본 한국의 해양 세력의 대립 구도를 전제하면서도 일본과의 우호적 관 계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지속적인 압력 역시 이런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자신에 대한 적대 정책을 철회하고 체제를 보장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공존 협력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평가가 가능하다. 50 그러나 북한은 현실적 으로 대외경제개방이 자칫 체제 내부의 위험성을 증폭시키는 가능성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개혁에 대해 공식적으로 강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러 나라 당들이 떠받들던 큰 나라가 오늘 현대 사회민주주의 의 진흙탕 속에 빠져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과 로골적으 로 공모결탁하면서 혁명을 배신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대주의를 국제정치학회, 2006), p _ 명문상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1992년 헌법의 17조는 다음과 같다. 자주, 평화, 친선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정책의 기본리념이며 대외활동원칙이다. 국가는 우리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든 나라들과 완전한 평등과 자주성, 상호존중과 내정불간섭, 호혜의 원칙에서 국가적 또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맺는다.(이하 생략) 이런 실리주의적 입장은 이후에도 원칙적으로 지속된다. 2001년 북 미 간 장관급 교차회담을 염두하면서 북한은 신년사설에서 자주성에 기초한 국제관계 발전의 새 시기를 주동적으로 열어 나가려는 것은 우리당의 일관된 입장 이며 자 주권을 존중하는 나라들이라면 어떤 나라든지 대외관계를 개선해나갈 것 이라고 천명한다. 고난의 행군에서 승리한 기세로 새 세기의 진격로를 열어 나가자, 로동 신문, 2001년 1월 1일.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1

48 반대하고 주체를 세우는 것은 더욱 사활적인 문제로 나서고 있 습니다. 51 급박한 체제 위기 상황에서 최대의 안전은 정권 보위였고 그것은 곧 국내적으로는 김정일 후계체제의 공고화를 의미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체제안전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중국의 개혁 개방 등 시장경제개혁과 미 중 수교로 상징되는 도광양회 에 대해 북한 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부분적 수용을 기본으로 경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제 내부의 단합이자 개방의 압력 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국의 부상에 따른 정책변화에 대해 전면적인 지지와 협력이 아니라 현안별 지지 입장을 명료하게 전개했 다. 이는 순응적 편승이 아니라 갈등적 편승전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이후 북한의 대중국정책의 기본적인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 다. 52 중국의 개혁 개방 움직임을 활용하여 북한이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것도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 의 정권 보장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설정했기 때문인 것이다. 북한과 같은 폐쇄적인 정치구조에서 최고 권력을 놓고 엘리트들 간의 갈등과 경쟁이 발생할 경우,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어 체제 자체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내부로부터의 붕괴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방 지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중국의 변신 에 대해 일방적인 반대나 수용 이 아니라 김정일 후계체제에 유리하게 작용하는가를 기준으로 대응했 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후에 더욱 현실화된 중국의 부상과 51_ 김정일, 주체의 당건설리론은 로동계급의 당건설에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지도적 지침이다, 김정일선집 10, p _ 이상숙, 북 미 관계 개선 이후 북한의 대중정책: 미 중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북 한학 연구(구 안보연구)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2008) 참조. 3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9 한 미 일 관계 변화 등과 같은 동아시아 질서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 의 절대명제는 정치체제의 안정이며 이를 위한 후계체제의 구축이었다. 만약 후계자 문제를 통해 엘리트 내부의 갈등이 노골화된다면 이는 북 한정치뿐만 아니라 체제 자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이런 국내외적인 상황에서 북한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을 지상명제로 판단했던 것이며, 이는 주변의 상황이 강제했던 측면도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1960년대 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한 주체사상 및 북한의 고유한 정치문화가 중국 에 대한 북한의 틀을 근본적으로 규정했다고 판단해야 한다. 다. 소결: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북 중 관계는 흔히 순치( 脣 齒 )의 관계 로 불린다. 양국관계의 기초는 이미 건국 이전인 항일투쟁 시기부터 지도부 간의 혈맹적 동지애를 바 탕으로 형성되었다. 양국관계는 특히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 협력과 지원을 통해 공고화되었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양국의 이념적 유대는 서로를 공동운명체로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관계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형제적 우의의 이면에는 뿌 리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은 각자의 국내정치와 주변정세 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양상의 갈등으로 표출되곤 했다. 북 중 양국 간 애증관계 의 근본 원인은 대외적으로는 세계관과 정 책의 차이는 물론 안보환경의 변화에 대한 각자의 대응방식 등의 차이 에서 비롯된 마찰의 결과였다. 또한 그것은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하 고 개입을 추구하려는 측과 그로부터 주권을 수호하고 정치적 자주성 을 유지하려는 측 간 갈등의 소산이기도 했다. 특히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국 중국의 내정간섭은 정권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국가안보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3

50 차원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면서도 정권안보 차원에서는 중국을 시종 불신과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53 사실 김일성 의 유일지배체제 확립과정도 북한 권력층 내 중국과 소련세력의 매개 자 역할을 하던 친중파 및 친소파 숙청과 동일한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56년 8월 연안파 등의 거사는 김일성의 경계심을 극도로 자극했고, 그것은 결국 친중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으로 귀결되 었다. 이후로도 김일성은 중국 측에 도주했던 배신자들 의 송환을 요청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동지들을 反 혁명세력 으로 다룰 수는 없다고 하면서 송환을 거부했고, 이에 분노한 김일성은 북한 내 중국군의 철군을 요구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문화혁명 과정에서 북한은 홍위병들에 의해 수정주의 국가 로 매도당했고 김일 성은 광범한 反 김일성 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년대 중 미 관계정상화와 이후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은 양국 간 불신 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사회주의 경제재건을 위한 위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하면서, 김일성의 혁명전쟁 계획에 동조 할 수 없다고 주장으로써 54 북한의 배신감을 한층 강화시켰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불신과 견제의식은 김정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할 목적으로 1970년대부터 권력층 내 중국 연고자들을 전부 조사하여 지방으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53_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 (서울: 도서출판 선인, 2007), p _ Chen Jian, Limits of the Lips and Teeth Alliance: An Historical Review of Chinese-North Korean Relations, Uneasy Allies: Fifty Years of China- North Korea Relations, Asia Program Special Report (September 2003), pp. 6~8. 3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1 그러면서도 그는 체제보위전략으로서 중국이 지닌 경제력과 외교력을 최대한 활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특히 중국도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대외부문의 일꾼들에게 중국을 이용하되 속 을 주지 말라 고 하면서 중국의 지원과 협력이 북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할 것 을 주문했다. 즉 중국에 대해 저자세를 취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대북지원이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 함 을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55 이처럼 종파사건, 소련에 대한 인식 차이, 베트남 지원문제, 문화대 혁명 시기의 이념갈등, 중국 개혁 개방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일정 정도의 갈등과 반목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에게 북한은 완충지 대로서 전략적 가치가 여전히 높았으며 북한 역시 중국과의 혈맹관계 가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실질적으로 양국 간 혈맹관계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북 중 관계는 여전 히 견고한 협력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북한의 후계체제 구축과정도 중국의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 김정일은 1973년 9월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당조직 비서 겸 조직지 도부장, 선전담당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어 북한의 명실공히 제2인자가 되었다. 1974년 2월 13일 당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 서 김정일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대외적으로는 당과 인민의 지 도자로 발표되었다. 56 인사권, 감찰권, 사상 사업을 한손에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당중앙 으로 호칭되었다. 김정일은 유일 55_ 채규철 외, 양제츠 방북의 배경과 북 중 관계 전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내부보 고서, ), p _ 김정일은 1974년 김일성 생일을 맞이하여, 중앙인민위원회 정령 제460호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탄생일인 4월 15일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제정함에 대하 여 를 발표하였다.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5

52 사상체계의 내면화를 위해, 유일사상 10대원칙을 전 사회에 강제시키 는 작업을 전개했다. 유일사상 10대원칙은 전문과 10개 62개항으로 구 성돼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의 항목이다. 모든 사업을 수령님의 유일적 령도체제에 의거하여 조직 진 행하며, 정책적 문제들은 수령님의 교시와 당중앙의 결론에 의해서만 처리하는 강한 혁명적 질서와 규율을 세워야한다(9 조 2항). 개별적 간부들이 아랫단위의 당, 정권기관 및 근로단체의 조 직적인 회의를 자의대로 소집하거나 회의에서 자의대로 결론 하며 조직적인 승인없이 당의 구호를 마음대로 떼거나 만들 어 붙이며, 당중앙의 승인없이 사회적 운동을 위한 조직을 내 오는 것과 같은 일체 비조직적인 현상들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9조 5항). 전당과 온 사회에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수령님께 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수하기 위하여 수령님의 령도 밑에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확고히 세 워야 한다(10조 1항).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제와 어긋나는 사소한 현상과 요소에 대해서도 묵과하지 말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10 조 3항). 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과 후대들도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모시고 수령님께 충성다하며,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에 끝없 이 충실하도록 하여야 한다(10조 4항). 당중앙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 하여야 한다(10조 5항). 북한에서 10대원칙은 주민들의 실생활을 규정하는 헌법 위의 상위 규범이다. 이 원칙은 개인의 사적활동을 규제함은 물론이요, 모든 국가 정책에서도 우선한다. 김정일의 직접 지시 없이는 정책변경이 발생될 수 없다. 10대원칙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각 조항의 모호성 때문이다. 김일성이 유일적 영도체계를 달성했다고 볼 경우, 김정일은 10대원칙 3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3 을 통해 유일적 지도체제를 확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체사상의 해석권을 완전히 독점함으로써, 김일성을 제외하고 어떠한 권위도, 어 떠한 해석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 10~14일 개최된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 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공식적인 제2인자 자리를 굳혔다. 1982년 3월에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 을 체계화하였 다. 1983년 6월에는 후야오방( 胡 耀 邦 ) 총서기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 덩샤오핑( 鄧 小 平 ) 등과 접견하고 베이징( 北 京 )과 상하이( 上 海 ) 등지를 시찰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치체제의 상 대적 개방성이 존재한다. 덩샤오핑, 자오쯔양 등 개혁파가 등장할 수 있었던 정치문화가 저변에 구축되어 있었다. 57 이후 중국은 개혁 개방 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틀 속에서 끊임없는 이론적 검토와 실천적 검 증을 통해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사상 과 유일지도체제로 인해 개혁 개방적 성향의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는 기회가 1960년대 후반부터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북한 김일성의 주 체사상은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 서의 자위를 강조하는데, 이는 마오쩌둥의 주장처럼 계급투쟁, 정치우 선 및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중 소 분쟁에서 독자노선을 주장한 정치 57_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기 전부터 계파 간의 대립이 있었으며, 이런 계 파 대립의 전통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과도기 총노선을 둘러싼 덩쯔후 이와 마오쩌둥의 논쟁, 1959년 대약진운동과 관련한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대립, 1962년부터 문화대혁명 발발까지 실용주의정책 지속여부를 둘러싼 류사오치와 마 오쩌둥의 논쟁, 문혁 이후 4인방과 개혁파 간의 대립 등이 마오쩌둥 사망 이후 개혁파 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송봉선, 중국을 통해 북한을 보다 (서울: 시대정신, 2011), pp. 66~67.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7

54 이념이다. 여기에 김정일은 유일사상 10대원칙을 덧붙여 수령의 유일 사상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오직 수령 김일성만이 모든 것을 생각 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반대가 존재할 수 없는 체제를 만들었다. 김정일은 1982년 3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주체사상을 심화 발전시키고, 1980년대 속도창조운동, 숨은 영웅들 의 모범을 따라 배우는 운동, 전당의 주체사상화, 준법기풍 앙양, 8 3 인민소비품 생산운동 (1984) 등을 주도함으로써 개혁 개방노선이 아닌 자력갱생노선으로 더욱 치달았다. 그리고 사회정치적 생명체 론 (1986)과 우리식 사회주의 (1991)를 발표하면서 폐쇄적 집체체제와 후계자로서의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년 1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제7기 제3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우 리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는 구라파 자본주의 나라들과 여러 분야에 서 기술 교류와 경제합작을 발전시켜야 하며, 북한과 아직 외교관계가 없는 자본주의 나라들과도 경제관계를 발전시켜야 할 것 을 강조했다. 이 교시의 구체적 실행형태가 바로 1984년 9월에 제정된 합영법 이었 다. 북한은 합영법 제정을 계기로 대외개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 지만, 체제수호를 바탕으로 한 경제정책 때문에 조총련계 자본을 제외 하고는 서구의 자본유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실패했다. 1991년 북한은 합영법 실패를 경험삼아 나진-선봉 지역을 자유경 제무역지대(Free Economic Trade Zone)로 선포했다. 북한은 구사회 주의 국가와의 관계유지와 더불어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 하고, 이들 나라의 자본을 북한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 다. 북한은 외국인 투자의 법적 근거조항을 사회주의 개정헌법에 신설 58_ 이주철, 김정일의 생각읽기 (서울: 지식공작소, 2000), pp. 4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5 하고, 각종 외자유치 관련 법규 및 시행규정을 제정 개정하여 법적 투 자환경을 개선하려 시도했으나, 외국인의 투자 부진으로 이 또한 실패 했다. Ⅰ Ⅱ Ⅲ Ⅳ Ⅴ Ⅵ 덩샤오핑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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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Ⅲ.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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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덩샤오핑에 이어 중국의 부국강병을 책임진 장쩌민은 59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을 더욱 심화 발전시키는 시대적 사명과 개혁 개방 성과와 함께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로 발생한 천안문사태를 수습하고 나아가 중국의 대외적인 지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을 갖고 출 발하였다. 장쩌민은 국가발전전략으로 3개대표론( 三 個 代 表 論 ) 을, 대 외전략은 유소작위( 有 所 作 爲 ) 와 책임대국론( 責 任 大 國 論 ) 을 표방하 였다. 이는 중국에서 이제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전위정당으로서 의 성격을 벗어나 중국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정정당으로의 전환했으며, 대외전략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수세적으로 내실을 다지는 도광양회 의 연장선 위에서 능동적으로 국제정세에 대처하겠 다는 책임 대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비록 천안문 사태로 인해 미국과의 굴곡은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시장개 혁과 경제교류 확대, 미국 및 서방세계와의 외교관계 개선에 노력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중국과의 이념적 동질성을 강조 하면서 양국 간의 친선관계를 확대시키려 했으나, 중국이 한 중 수교를 선택하면서 사실상 북 중 관계는 1990년대 후반까지 경색국면을 맞이 한다. 그 결과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심화되었으며, 경제적 어려움 또 한 더욱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은 이른바 김일성의 유훈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의 권력 세습을 공고히 하고 북한 사회주의체제 를 고수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전략을 전개한다. 김정일체제의 공고 화 과정에서 북 중 관계는 점차 혈맹관계 또는 순치관계에서 사안에 59_ 1989년부터 2002년까지를 장쩌민의 시대로 구분하더라도 1997년 덩샤오핑의 사망 까지의 장쩌민 집권 전반기는 덩샤오핑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작용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3

60 따라 전략적 지원과 협력을 하는 관계로 전환되었다. 북한은 중국과의 전략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행 태를 걷게 된다. 1. 장쩌민 정부의 3개대표이론과 대국외교 가. 국가발전전략: 3개대표이론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이어 제2의 혁명이라 불리는 덩샤오핑의 개 혁 개방이 진행되면서 발생한 제도변혁, 가치관의 동요, 불완전한 개혁 조치, 인플레이션, 부패 등으로 인해 중국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1989년 일단의 지식인과 학생들에 의해 개혁 개방 과정에서의 나타난 폐해들의 개선을 요구하다가 종국에는 민주와 자 유, 정치체제개혁까지 요구했던 천안문사태가 발발하게 된다. 경제적 으로는 행정적 조절수단도 경제적 조절수단도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중국경제는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중 하나를 선택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천안문사태가 가라앉았으며, 장쩌민은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공산당의 총서기직을 맡 게 된다. 구조적으로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노선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고 더욱 심화시키며 개혁 개방 과정에서 약화된 사회주의 정신 문명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갖고 출발하였다.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를 통해 중국이 살 수 있는 길은 개혁 개방에 있음과, 이를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실시해야 함을 역설하 면서 계획경제가 사회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는 것처럼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며, 사회주의에 도 시장이 있다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발전을 위한 기초적 선언을 하였 4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1 다. 1992년 10월 장쩌민은 14대에서 <개혁 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발걸 음을 빠르게 하여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업의 더 큰 승리를 쟁취하자 ( 加 快 改 革 開 放 和 現 代 化 建 設 步 伐 奪 取 有 中 國 特 色 的 社 會 主 義 事 業 的 更 大 勝 利 )>는 보고를 통해 개혁 개방 14년간의 경험을 총괄하고 발전을 가속화할 것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건립하자는 결정을 내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는 바로 시장으로 하여금 사회주의 국가의 거시 적 조절 하에 자원배치에 대한 기초적인 작용을 하게 하는 것임을 지적 했다. 1992년 수정 통과된 중국공산당 당장에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건립을 명문화하였다. 이어 1993년 8기 전인대 1차 회의에서 통과된 수정헌법에도 중국경제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해있다는 것과 사회 주의 시장경제를 실시해야 함을 삽입하였다. 1993년 11월에는 14기 3 중전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건립에 있어 몇 가지 문제에 관 한 중공중앙의 결정( 中 共 中 央 關 於 建 立 社 會 主 義 市 場 經 濟 體 制 若 干 問 題 的 決 定 )>을 통해 개혁의 전체적인 청사진을 그리고, 경제체제개혁도 전면적인 추진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었다. 또 농산물 배 급제를 전면 폐지하면서 곡물가격의 완전 자유화가 실시되어 농촌경제 도 시장경제와 마찬가지로 시장가격을 통한 경제관리가 가능해졌다. 또한 시장경제에서 개체경제와 사영기업의 역할이 확대되고 기존의 국 영기업을 국유기업으로 고치는 헌법수정을 통해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추진하는 국유기업에 대한 민영화 개혁과 다양한 소유형태의 경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년 동안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현대화시키는 총설계사였던 덩샤 오핑이 1997년 사망하면서 명실상부한 중국의 당정군의 최고실권자가 60_ 김승채, 정치경제개혁의 30년 (서울: 교양사회, 2009), p. 25.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5

62 된 장쩌민은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 이론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을 21세 기를 향해 전면적으로 밀고 나가자( 高 擧 鄧 小 平 理 論 偉 大 旗 幟 把 建 設 有 中 國 特 色 社 會 主 義 事 業 全 面 推 向 二 十 一 世 紀 )>는 보고를 통해 덩샤오핑 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 개혁 개방의 책임자로서의 야심찬 계획을 선 보였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바로 사회주의 조건 하에서 시장경제체 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발 전시키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1997년 중국은 비공유제 경 제가 중국 사회주의 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는 것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비공유경제에 자본, 기술 등 생산요소를 수익분배에 적 극 포함시켜 경제체제 개혁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장쩌민의 국가발전전략은 3개대표론( 三 個 代 表 論 ) 으로 종합되는 데 국내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여 중국공산당은 생존을 위해 1 선진생산 력의 발전요구, 2 선진문화의 전진방향, 3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이익 을 대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당이 광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공산당이 노동자와 농민 의 전위정당으로서의 성격을 벗어나 광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 정정당으로서의 성격전환을 의미하는 엄청난 전략적 변화이다. 이는 개혁 개방으로 중국사회의 중요 세력으로 성장한 자본가 및 지식인을 기존 인민의 개념에 포함하여 당이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체 인민을 대표한다는 엄청난 정책적 전환으로, 새로운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선 장쩌민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현실적 선택 이며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이다. 이런 맥락에서 15기 6중전회에서 장쩌 민은 마르크스주의를 교조적으로 해석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장쩌민 의 3개대표이론은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의 4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3 장정에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함께 중국 국가건설이념으로 채택되었다. 2000년부터는 중국 내부의 장기적이고 안정적 발전을 위하여 대외 지향적인 성장과 함께 내수 지향적인 성장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고 판단, 서부 지역 개발( 西 部 大 開 發 )에 착수하였다. 2001년 중국지도 표Ⅲ-1 중국 개혁 개방 30년 일지 1978년 12월 덩샤오핑 개혁 개방 선언 1980년 8월 선전, 주하이 경제특구 지정 10월 산터우, 샤먼 경제특구 지정 1984년 4월 상하이 등 동남부 14개 연안도시 개방 1988년 4월 하이난 성 경제특구 지정 1989년 6월 1992년 1~2월 10월 텐안먼사태로 자오즈양 총서기 실각 장쩌민 당 총서기로 취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당 14차 전국대표대회, 사회주의 시장경제 공식화 1997년 2월 덩샤오핑 사망 2001년 12월 2002년 11월 2004년 3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3개대표론 당장 삽입 후진타오 당 총서기 취임 사유재산권 보호조항 헌법에 삽입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 사임 2005년 6월 상하이 푸둥신구 종합개혁시험구 지정 2006년 4월 텐진 빈하이신구 종합개혁시험구 지정 2007년 3월 물권법 통과 10월 12월 후진타오의 과학 발전관 당장 삽입 우한, 창사 일대 2곳 환경경제특구 지정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7

64 부는 장쩌민과 주룽지를 중심으로 시장화 수준을 높이는 체제 내적인 개혁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통한 국제 시장에의 편입 및 세계 화를 추진하는 체제 외적인 개혁에 노력하였다. 이후 중국경제는 국제 무역기구 가입으로 인한 세계 질서 속 편입의 흐름 속에서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적인 위상과 권위를 갖추어 나가게 된다. 나. 대외관계전략: 유소작위와 책임대국론 장쩌민 시기의 대외관계전략의 기조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정책을 심화시켜 사회주의 현대화를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대내외 환경조성을 목표로 하면서도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수세적으로 내실을 다지는 도광양회 를 넘어서 능동적으로 국제정세 에 대처하는 유소작위 전략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중국이 서구의 중국위협론과 화평연변에 대응하여 필요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 는 대국의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전략이다. 1990년 제7기 제3차 전인대에서 리펑 총리는 정부공작보고를 통해 향후 국제관계에서의 전략 목표는 지속적으로 평화와 발전에 유리한 방향을 조성하면서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를 견지하고 세계평화를 수호 하며 장기간의 세계평화 환경을 쟁취할 임을 밝혔다. 이러한 국가발전 목표를 전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92년 중국은 외교정책의 기저로 국가 간의 자주독립, 평화공존 5원칙, 제3세계 국가와의 단결과 협력, 그리고 적극적인 대외개방과 반패권 등을 제시했다. 중국 개혁 개방을 통한 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의 기반 위 에서만 비로소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쩌민의 대외관계전략은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전략의 연 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4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5 그러나 그간 개혁 개방의 성과로 중국의 경제대국화에 대한 서구의 중국위협론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중국은 이중적인 대응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중국의 경제는 발전도상국가 수준으로 많은 취약성을 지 니고 있어 군사대국화, 중국위협론 등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러면서도 대내적으로 중국은 누가 뭐래도 21세기는 중화민족과 중화문 명의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강성대국임을 역설하고 있다. 61 그러므로 장쩌민시대 중국의 대외관계전략은 신국제질서구도 의 전환 속에서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전략의 연장선 위에서 성공적인 중국의 현대화를 건설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평화적인 국제환경을 조성 하겠다는 유소작위 전략이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년 중국 공산당 1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는 21세기를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중국이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은 평화와 발전이 시대적 주제가 되고 있고 세계구조는 다극화추세로 가고 있으며, 개혁 개방으 로 중국은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선진국들과의 경제적 과학기술적 격 차는 크기 때문에 상당기간 전면적인 개혁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함 으로써만 21세기에 부강한 나라로 등장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 서도 세계에는 아직도 냉전적 사고가 존재하며 패권주의 강권주의가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으며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낡은 국제경제질 서는 아직도 발전도상국가들의 이익을 해치고 있고 일부 강대국들이 인권을 빙자해 내정간섭을 꾀하고 있어, 중국은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일에 적극 나설 것이며, 독립자주외교노선을 견 지하며 국가 간의 갈등은 무력보다 협상으로 풀어갈 것임을 천명했다. 61_ 人 民 日 報, 1999 年 9 月 16 日. 62_ 장공자, 21세기 중국의 국가전략과 한반도 정책, 한국동북아논총, 제24집 (한국 동북아학회, 2009), p. 54.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49

66 도광양회 가 중국의 목소리를 낮추는 가운데 중국의 발전을 추구한 다는 소극적인 국가전략이라면 유소작위 는 중국의 역할과 민족의식 고취를 반영하는 적극적인 국가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지도 부는 유소작위 를 통해 중국이 서구에 대해 할 말은 하고 대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 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중화주의의 부활로 볼 수 있다. 63 중국의 부상과 관련하여 중국위협론이 국제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무렵이다. 1992년 세계은행에서 구매력을 기준으로 중국 의 경제 규모가 미국의 45%에 달한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에서는 중국 국내총생산을 중국이 발표한 공식 통계 의 4배로 평가했다. 1992년 이후 중국위협론은 국제사회에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등장해 중국을 압박하여 왔다. 64 현대사에서 중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수행해 왔고 이는 중국의 패권추구 의지와 연계되어 주변 국들이 중국을 경계해 온 배경이 되었다. 65 중국은 국방비가 서구 국가 63_ 개혁 개방을 위한 외국인의 투자와 국제적 신용을 높이기 위한 제스쳐를 보이면서 중국은 유소작위 의 원칙을 지켜나갔다. 1979년 폴포트 정권을 몰아내기 위하여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중국의 국경을 도발한 월남에 대한 응징을 위해 월남을 공격 하였다. 李 忠 志 王 麗 等 主 編, 中 華 人 民 共 和 國 四 十 年 史 略 ( 瀋 陽 : 遼 寧 敎 育 出 版 社, 1990). 64_ 1차 중국위협론은 1992~1993년에 제기되었다. 먼로(Ross Munro)가 깨어나고 있는 거룡, 아시아의 진정한 위협은 중국에서 온다 는 책을 통해 중국이 경제성장, 정치적 영향력의 상승, 군사적 팽창으로 인해 아시아의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2차 중국위협론은 타이완 해협위기가 발생한 1995~1996년에 나타났다. 3차 중국 위협론은 1998~1999년에 나타났다. 미국은 코커스보고서 를 통해 중국이 미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4차 중국위협론은 2002년 미국 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 에서 우리의 군사력은 잠재적인 적들이 미국의 힘을 능가 하거나 대등해지려는 군사력 증강을 억제시킬 정도의 충분한 힘 이 필요하다고 강 조하면서 등장하였다. 이희옥, 중국의 국가대전략연구 (서울: 폴리테이아, 2007), pp. 76~77. 65_ 1949년 국가 수립 이후 중국은 안보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고 국익이 침해될 때에는 군사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 5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7 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해명을 지속적으로 해왔으나, 중국위협 론의 확산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국은 적극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1993년 책임대국론 을 국제사회에 설파하기 시작 했다. 중국은 자신들의 부상이 국제사회에 위협이 아닌 평화에의 기여 라는 측면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였다. 중국이 강조하는 강대국의 책임 은 국제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고 타국의 주권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서구적 민주주의 가치관을 통해 타국의 주권과 내정에 간섭하는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66 중국의 책임대국론은 중국이 대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안전과 발전에 기여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서 구에 대응할 수 있는 아시아의 대국이라는 자존심과 중화의식이 내포 된 이념이다. 즉 중국은 책임대국론을 통해 아시아를 대변하는 국가로 서의 중국의 가치관을 주장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국은 책임대국이 라는 이미지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의 공감을 얻어내어 협력관계를 증 진시키고자 하였다. 책임대국대론은 장쩌민 시기 신안보관이 등장하면 서부터 핵심적인 전략이념으로 강조되었다. 중국정부는 1996년에 신안보관을 처음으로 정책으로 제정하였으며, 1997년 3월 ARF 신뢰구축조치 회의에서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하였 이 발발하였을 때 중국 동북지역의 안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여한 바 있다. 이후 인도, 러시아, 베트남과 국경문제를 두고 군사적 충돌을 치룬 바 있다. 1960년 대 중 소 분쟁 이후 중국은 강대국들의 전면적인 핵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핵개발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후에도 중국은 여러 형태로 군사력을 행사해 왔다. 남사군도의 군사기지 건설, 지속적인 핵실험, 대만총통 선거시 대만에 대한 군사적 시위 등은 중국의 군사력 과시의 사례이다. 이원봉, 21세기 중국의 안보전략과 군 사력, 아태연구, 제9권 (경희대학교 아태지역연구원, 2002), pp. 88~92. 66_ 덩샤오핑은 서구 국가들이 명목적으로 어느 한 국가의 인권과 사회제도가 불합리 하고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국권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라고 언급하 였다. 중국은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어떠한 국가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黃 東 升, 當 代 世 界 政 治 與 經 濟 ( 北 京 : 中 國 經 濟 出 版 社, 2006), p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1

68 다. 이후 신안보관은 국제관계의 수행과 안보 유지에 대한 중국의 공식 적 입장을 대표하게 되었다. 67 장쩌민은 1999년 3월 26일 스위스에서 개최된 군축협상회의에서 중국의 신안보관을 설명한 바 있다. 그 내용 은 상호신뢰, 상호이익, 평등, 협력 으로 축약할 수 있다. 상호신뢰는 신안보관의 기초이며, 상호이익은 신안보관의 목적이고, 평등은 신안 보관의 보장이며, 협력은 신안보관을 달성하는 방식이다. 68 신안보관 에서는 공동발전, 내정불간섭과 주권존중이 이전보다 더욱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주권에 대한 서구의 간섭을 배제 하고자 하는 의지이며, 더 나아가 중국은 아시아의 책임대국으로서 아 시아 국가들을 존중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협력과 의무를 다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안보관이 등장한 이후 장쩌민은 제시된 원칙 중 공동번영을 거듭 강조해 왔는데, 이는 중국이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주변국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또한 비전 통적 안보를 강조함으로써 지역협력을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를 중시하 였다. 중국의 신안보관은 덩샤오핑의 평화와 발전 의 연장이며 더 나아 가 중국이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추구하며 국제적 역할을 강화 하려는 유소작위 이념의 적극적인 실현으로 볼 수 있다. 장쩌민의 신안 보관은 덩샤오핑의 국가전략이념에 비해 새로운 측면이 발견된다. 우 선 보다 적극적인 중국의 역할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와 평화와 발전 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이라면 장쩌민 의 유소작위 와 신안보관 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다양한 역할을 강조 한 적극적인 개념이다. 덩샤오핑은 주로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 67_ 류동원, 중국의 다자안보협력에 대한 인식과 실천: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중심 으로, 국제정치논총, 제44집 4호 (국제정치학회, 2004), p _ 倪 建 民 陳 子 舜, 中 國 國 際 戰 略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2003),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9 했지만 신안보관은 서구 국가들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의 양자관계를 통한 동반자관계의 확대만이 아니라 다자주의적 지역협력을 통한 국가 발전을 적극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주변 국가들과의 공정 하고 균형적인 공동발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쩌민의 신안보관 의 의의는 다자주의 69 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다자주의에 대해 무관심하 거나 비판적이었다. 냉전 시기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행동을 제약 하는 국가 간의 동맹이나 다자주의와 같은 제도보다는 전략상의 자유 를 추구하는 양자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오히려 중국의 국익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중국은 국가의 주권과 국익에 관련된 문제 는 이해당사국 간에 협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주권불간섭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자주의를 경시하고 양자관계를 중시해온 전통 은 과거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공동지배에 의해 피해를 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강대국을 불신하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다자협의체는 강대국의 의견이나 입장 이 반영되는 장소로 인식해 왔다. 70 그러나 냉전종식 이후 주변국 중시 의 신안보관 등장 이후 중국은 주변국들에 대한 협력관계를 중시하는 국가전략을 지향하면서 다자주의에의 참여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 다. 중국이 제시하는 주변 국가의 정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주변 국가와 동반자관계를 정립하고( 以 隣 爲 伴 ), 주변 국가와의 우 호관례를 유지하며( 脇 隣 爲 善 ), 선린( 睦 隣 ) 부린( 富 隣 ) 안린( 安 隣 )의 방 69_ Avery Goldstein, The Diplomatic Face of China s Grand Strategy; A Rising Power s Emerging Choice, The China Quaterly, No. 168 (December 2001), pp. 835~ _ 황병무 외, 동아시아안보공동체 (서울: 나남출판사, 2005), p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3

70 침 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 주변국 정책을 좀 더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 가겠다는 목적과 의도를 담고 있다. 중국의 다자주의전략은 신안보관 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 전략이다. 중국은 주변국들과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즉 주변국들과의 동반자관계를 통한 관계개선, 다 자협력기구를 통한 관계개선이 그것이다. 신안보관에서 강조하는 주변 국정책은 주변국들과의 지역협력을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전략이 핵심 이며 이는 국가목표를 달성하기에 더 효율적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중 국은 1994년 아세안지역포럼(ARF)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96년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전신인 상하이-5(Shanghai-Five) 를 성공 적으로 출범시켰다. 이런 계기를 통하여, 중국은 일련의 다자포럼인 ASEAN+3, ASEAN+1, 중-아프리카 포럼 등을 주도적으로 창설해 나가며 다자협력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다자주의전략에는 중국적 가치관과 범아시아적 세계 관 이 내포되어 있다. 71 중국의 다자주의는 주변국들과의 협력관계를 주창한 20세기 초 손문의 범아시아적 세계관 과 비교된다. 20세기 초 중국의 범아시아적 세계관은 서구에 침입에 저항하는 중국 중심적 중 화주의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었다. 당시에 중국은 중국만이 서구에 대 항할 수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중심국이었다고 인식하면서 서구의 침입에 대응해 아시아 국가들과 협력해야함을 주장하였다. 중국의 다 자주의전략은 대외적인 명분상으로는 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주 71_ 1990년대 초 이후 서구의 중국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중국 내에는 반서구 감정이 확대되면서 민족주의 성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1996년에 중국은 아 니라고 말할 수 있다( 中 國 可 以 說 不 ) 라는 책자가 발간되어 중국인들의 민족주의 를 확산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宋 强 等, 中 國 可 以 說 不 ( 北 京 : 中 華 工 商 聯 合 出 版 社, 1996) 참조. 5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1 변국들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점이 20세기 초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현재 중국은 대외적으로 과거와 같이 전통적 중화주의 관점에서 아시아 주변국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범아시아 적 세계관 에 입각한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력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하 고 있다. 전통적 중화주의와 현대판 중화주의는 등장 배경과 관념상 차이가 있지만 중국이 아시아의 중심국 역할을 하는 대국이라는 점을 강조하 고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점도 있다. 중국은 아시아의 대국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아시아의 중심국이며 서 구 국가들의 부당한 압력을 타파하겠다는 의지는 과거와 다를 바가 없 다. 중국의 책임대국론을 바탕으로 한 다자주의전략에는 현대화된 중 화주의적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년 장쩌민 주석은 7 1 담화 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100년간 중국 인민의 모든 노력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실현 하고 민족 굴욕의 역사를 끝내기 위한 것이다. 이 역사적 과업을 우리 는 이루었다. 20세기 중엽에서 21세기 중엽까지 중국 인민은 조국의 부강, 인민의 부유함과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해야 한다 고 밝혔 다. 2002년 11월 제16차 전당대회 보고의 중심단어는 중화민족의 위대 한 부흥 이었다. 73 이날 회의에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 수차례 에 걸쳐 강조되었고, 2003년에는 보아오포럼에서 쩡비젠( 鄭 必 堅 )의 72_ 중국은 동아시아지역의 ARF, APEC, ASEAN+3과 같은 다자 간 지역협력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고,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시에 중국은 아시아의 국가들에 대해 경제지원을 한 바 있으며, 2003년 이후 등장한 2차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6자회담을 통해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이를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 책임대국의 사례라 할 수 있다. 73_ 이희옥, 중국의 국가대전략연구, p. 72.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5

72 화평굴기론( 和 平 堀 起 論 ) 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장쩌민의 전략 은 후진타오에 이어져 2004년부터는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 4세대 지도부가 화평굴기 와 함께 화평발전 을 기치로 국제무대 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화해 가고 있다. 2. 김정일체제의 인식과 대응전략: 북한식 수용과 김정일체제 공고화 가. 개혁 개방과 3개대표론에 대한 입장: 북한식 수용 19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은 경제회복을 위해 대서방 무역관계 확 대 또는 합영 합작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91 년 11월 경제부문 관리들에게 서방과의 경제관계 확장을 촉구했다. 이 어 동년 12월 28일 나선-선봉 지역에 대한 자유경제무역지대 선포가 나오게 되었다. 74 세계 사회주의 시장이 없어진 상황에서 변화된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대담하게 진출해 대외무역에서 전환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75 이같은 북한의 정책방향은 중국의 개혁 개방노선에 부응하는 방향 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북한과 중국 사이의 발전 노선에 대한 차이가 줄어들었고, 외교분야에서도 북한이 기존 사회주 의권 및 비동맹중심외교에서 대서방 외교중시로 전환하면서 양국 간의 74_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결정 제74호 참조. 75_ 김일성, 변화된 환경에 맞게 대외무역을 발전시킬 데 대하여, 1991년 11월, 김일 성 저작집 43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pp. 23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3 견해 차이가 줄어들게 되었다. 76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북 중 관계는 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동인은 주로 중국의 입장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천안문사태 이후의 국제적 고립과 안보 위험에서 탈피하기 위해 적극 적인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것은 대북관계에서도 새로운 시각 을 요구했던 것이다. 특히 중국은 1991년 양국 간 교역 형태로서 구상 무역을 포기하고 경화결제를 요구했다. 이는 중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사회주의 형제국 가 간의 교역이 종식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에도 중국은 북한과 물물교역이나 외상거래를 중단하고 현금결제를 요 구했다. 가뭄과 홍수로 인한 북한의 대규모 기아사태에도 불구하고 대 북지원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런 행태들은 북한지도부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양국관계는 19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의 방중과 1992년 4월 양상쿤 국가주석의 방북에서 보는 것처럼 전통적인 우의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치적 관계에서 커 다란 변화의 흐름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컨대 중국의 한반도정책 변화는 북한의 대중 불신을 결정적으로 강화하는 계기였다. 북한 권력층에서는 중국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한 중 수교가 북한의 안보와 경제, 체제생존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와 고립감이 팽배해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조선전쟁이 다시 일어나 는 경우 6 25 때처럼 중국의 물심양면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 다 거나 중국은 이제 우리의 후방이 아니라 적진 이라는 인식이 광범 하게 확산되었던 것이다. 77 중국의 배신에 분노한 북한은 의도적으로 76_ 이종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p _ 현성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 p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7

74 대만과의 경제 문화적 관계발전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중 국을 자극했으며, 78 중국은 황장엽의 망명을 허용함으로써 북한을 좌 절시켰다. 요컨대 북 중 관계의 역사에서 1990년대는 이른바 암흑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중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책수단 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경제와 안보문제에서 중국은 북한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이에 북한은 양국관계의 불협화음이 지속 되는 동안 내면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해왔다. 1990년대 이후, 로동 신문의 사설은 여전히 북 중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90년 9월 한 소 수교 당시 구소련을 강렬하게 비난했던 것과는 달리 1992년 한 중 수교 이후 중국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비난은 자제했다. 1993년 7월 북한은 여전히 중국과의 관계를 피로써 맺어진 전통적인 우호관계로 규정하였고, 중국이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북한에 대해 협력과 지원 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79 또한 1995년 10월 북한은 조 중 친선은 영원불멸이다, 조 중 친선을 대를 이어 강화 발전시켜 나 가는 것은 우리당과 공화국 정부의 일관한 입장이며 확고한 의지 라고 강조했다 년 7월 조 중 우호조약 기념 로동신문 사설에서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를 강조하며 국제무대에서 중화인 민공화국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 고 언급하였다. 북 중 간 관계가 복원된 2001년 1월에 김정일은 중국을 재차 방문하 78_ Chen Jian, Limits of the Lips and Teeth Alliance: An Historical Review of Chinese-North Korean Relations, p _ 김예경,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대응전략, 국제정치논총, 제47집 2호 (국제정치 학회, 2007), p _ 로동신문, 1993년 7월 10일, 1995년 10월 25일 참조. 5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5 여, 상하이 푸둥지구의 산업시설과 외자유치 실태, 증권시장 운영상황 등을 시찰했다. 2001년 9월에는 장쩌민 주석이 한 중 수교 이후 중국지 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여기에서 장쩌민은 전통을 계 승하고 미래를 향하며, 선린우호 속에서 협력을 강화한다( 繼 承 傳 統 面 向 未 來 睦 隣 友 好 加 强 合 作 ) 는 81 북 중 관계의 기본준칙인 이른바 16 자 방침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을 설명하고, 북 한 측에 중국식 모델을 권고했으나, 김정일은 중국식 개혁 개방정책이 높은 성과를 얻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식 사회주의정책을 펼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몰린 고립적 지위를 타파하기 위한 목 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활용해왔다. 때로는 고슴도치(Porcupine)전략 을 구사하기도 했고, 개혁 개방과 관련해서는 예기치 않은 물건과의 미세한 접촉에도 움찔해서 껍데기 안으로 숨어버리는 달팽이(Snail)전 략을 선보이기도 했다. 82 그러나 대중국정책과 관련해서는 일관된 입 장을 견지하였다. 북한은 이미 중국이 미국의 단일패권에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극으로 성장하고 있고, 미국과 패권경쟁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중국의 부상은 북한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의 부상은 지리적으로 인접국인 북한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고, 자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중 국의 부상은 자국에 대한 영향력의 확장을 의미하며 중국의 체제개혁 은 북한의 체제변화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 83 후자의 측면이 81_ 人 民 日 報, 2001 年 9 月 3 日. 82_ 이에 대해서는 Gavan McCormack, Target North Korea: Pushing North Korea to the Brink of Nuclear Catastrophe (New York: Nation Books, 2004), pp. 7~8. 83_ 김예경,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대응전략, p. 80.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59

76 부각되는 시기에 북한은 사회주의개혁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개량주 의 비판과 북한 인민의 주체성 강조에 주력한다. 이는 체제위기의식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대응은 역시 우리식 사회주의 의 공고화 와 내적 단결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비록 중국의 정치 경제적 개혁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을지라도 노동자 농민의 전위정당을 표방하 던 중국공산당이 개혁 개방 과정에서 중국사회의 주요세력으로 등장 한 자본가 및 지식인과의 협조를 강조하는 3개대표론 을 겨냥한 것으 로 해석할 수 있다.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는 개량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이 계급 협조 를 주장하면서 혁명운동발전에 커다란 해독을 끼치었다. 오늘날 사회주의 배신자들도 자본주의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제국주의자들의 원조 와 협력 에 기대를 걸면서 자본주의 복귀 소동을 벌리고 있다. 84 사회주의 변질과 붕괴과정은 현대 수정주의가 대두하여 수령 과 혁명선배들을 헐뜯고 로동계급의 혁명사상을 왜곡 변질시키 면서 시작되였습니다. 사회주의는 현대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자기궤도에서 탈선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으며 사회 주의 력사적 업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말살한 사회주의 배 신자들의 개혁, 개편 정책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85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없애야 한다. 침략과 략탈은 제국주의의 본성이며 국제정세가 아무리 변하여도 제국주의자 들의 지배적 야망은 달라질 수 없다. 제국의 원조 에 기대를 거 는 것보다 어리석고 위험한 것은 없다. 제국주의자들의 원조 는 84_ 김정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김정일 선집 13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p _ 김정일, 혁명선배를 존대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이다, 김정일 선 집 1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7 하나를 주고 열, 백을 빼앗아 가기 위한 략탈과 예속의 올가미 이다. 혁명하는 당과 인민은 제국주의에 대하여 환상을 가졌던 나라와 민족들이 당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똑똑히 보고 철저히 극복해야 한다. 제국주의자들이 세계의 일체화 라는 흐름을 꾸며낸 것은 전세계를 서방식 자유세계 로 만들며 모든 민족을 저들에게 예속시키고 동화시키자는데 목적이 있다. 86 그러나 설사 중국의 가속화되는 정치 경제적 개혁이 북한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북한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저지하기 위한 전략을 선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그럴 능력도 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중국의 개혁 개방과 체제개혁에 대해 북한은 중국의 요구에 대해 일부는 수용하면서 안보와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 일반 적인 편승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응적 편승전략이라기 보다는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가면서 일정 정도 갈등과 마찰을 감수하 는 갈등적 편승전략을 일관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 장에서 언급 한 것처럼, 체제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합치하는 영역에서 현안별 지지를 주된 대중정책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념적 동질성이나 지정학적 안보 구도에서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과 중국이 비록 관계의 소원과 단절 및 심각한 마찰을 빚을지라도 동맹을 파기하거나 무력 분쟁 같은 수준으로 비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나. 한 중 수교에 대한 입장: 반발과 대미 직접협상으로의 전환 이미 개혁 개방노선을 본격화한 중국은 88서울올림픽 에 참가하여 대한관계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이후 경제무역관계를 꾸준히 확대함 86_ 김정일,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구할 데 대하여, 김정일 선집 1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p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1

78 으로써 북한의 소외의식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1992년 8월 24일 체결된 한 중 수교는 북 중 간의 피로써 맺어진 혈맹관계를 사실상 종식시키는 사건으로서, 그것은 북한에게는 실로 충격 그 자체 였다. 중국의 대외 인식의 변화와 중 소 관계정상화, 동구 사회주의권 과 소련의 해체 등 탈냉전의 흐름 속에 체결된 한 중 수교는 북 중 동맹 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 중 수 교는 북한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 통보의 성격이 강했기 87 때 문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한 중 수교는 안보동맹으로서 북한을 희생시키는 것이었고, 중국 외교정책의 제1목표가 개혁 개방 이후 대내경제 건설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임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에 앞서 1991년 5월 리펑 총리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연형묵 총리와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한 중 관 계 진전에 따라 남한이 UN에 가입한다면 중국이 이를 반대하기 어렵 기 때문에, 남한이 단독 가입을 시도한다면 북한도 가입을 결정할 것으 로 요구한 것이다. 북한은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깨닫고 동시 가입을 결정한다. 88 그 해 김일성은 10일간 중국을 방문, 덩샤오핑과의 면담에서 북한이 미국과 수교할 때까지 남한과의 수교를 유보해 달라 고 요청했으며, 덩샤오핑 역시 더이상 북한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 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중국의 신안보관 및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한 중 수교가 필요했고 결국 중국은 북한의 중국 설득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해 1992년 한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한 것이다 _ 당시 회담의 분위기는 錢 其 琛, 外 交 十 記 ( 北 京 : 世 界 知 識 出 版 社, 2003), pp. 157~ _ 錢 其 琛, 外 交 十 記 ( 北 京 : 世 界 知 識 出 版 社, 2003), p _ 이상숙, 북 미 관계 개선 이후 북한의 대중정책: 미 중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9 이후 중국은 양상쿤( 楊 尙 昆 ) 국가주석을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사절 로 보내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이어 7월 15일 장쩌민( 江 澤 民 ) 총서기 는 첸치천( 錢 其 深 ) 외교부장을 중국 공군전용기를 통해 평양으로 보내 한국과의 수교결정 입장을 전달케 했다. 김일성은 장쩌민의 구두 메시 지를 듣고 첸치천 외교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중국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또 평등한 입장에서 자 신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 속 중국과의 우호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일체 의 어려움을 극복, 계속해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또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갈 것이다. 90 그러나 이런 정치적 수사와 달리 북한은 이를 1961년 체결한 북 중 동맹관계를 정지시키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한 중 수교 발표 직후 김정일은 최고간부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러시아와의 관계도 기대할 수 없고, 앞으로는 중국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적 원자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과 제조과정에 있는 물질적 원자탄과 로동3호 미사일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91 김일성 부자의 만류에도 중국이 한 중 수교를 단행한 것은 북한 전체 를 쇼크 상태에 이르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당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오랜 전우였던 김일성이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앓아누울 지경으로 충격이 컸었다 고 증언했다. 북한 90_ 첸지천 저, 유상철 역, 열가지 외교 이야기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4), p Ⅰ Ⅱ Ⅲ Ⅳ Ⅴ Ⅵ 91_ 제신, 등판주도하적 중공내정외교, 1993년 6월호.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3

80 내부에서는 중국이 김일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일성은 중국을 혈맹국으로 생각하면서도 항 상 경계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인 핵개발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완 표Ⅲ-2 한 중 수교 이후 북 중 군( 軍 ) 최고위급 상호 방문 현황 (1992~2009) 시기 방북 방중 월, 치하오텐( 遲 浩 田 ) 국방부장 (후진타오 정치국 상무위원 수행) 월, 최광 총참모장 월, 치하오텐 국방부장 월, 궈보슝 슝광콰이( 熊 光 楷 ) 부총참모장(장쩌민 국가주석 수행) 8월, 쉬차이허우( 徐 才 厚 ) 총정치국 주임 월, 김일철 인민무력상(김영남 초고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수행) 5월,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총참모장(김정일 국방위원장 수행) 1월, 김영춘 총참모장(김정일 국방 위원장 수행) 4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4월, 김영춘 총참모장(김정일 국방 위원장 수행) 7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월, 차오강촨( 曹 刚 川 ) 국방부장 월, 량광례( 梁 光 烈 ) 국방부장 2010 궈뵤슝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장유사 선양군구사령관 7월,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12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 장(신병치료차 베이징 군 병원 입원) 중국 2회 출처: 김태호, 최근 북 중 관계 변화의 실체와 아국의 대비 방향 ; 송봉선, 중국을 통해 북한을 보다, p. 159 재인용. 6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1 전히 단절할 수도 없었다. 92 비록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양측 군사지 도자 간의 접촉과 교류는 변함없이 이뤄져 기존 동맹관계는 유지되었다. 이후 1992년 9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중국을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 배신자 라고 비판했다. 93 나아가 1994년 11월 김정일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을 간접적이지만 강력하게 비난했다.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추악한 배신행위를 변호하려고 하고 있다. 사 회주의 배신자들이 자본주의를 복귀하고 실업과 빈궁을 경쟁의 욕과 노동 강도를 높이기 위한 압력수단으로 보면서 사회주의 가 마련한 모든 인민적 시책들을 없애버리는 것도,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서방 자본주의 나라들의 원조 협력에 기대를 걸면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아부 굴종하고 있는 것도 사람에 대 한 반동적인 부르조아적 관점과 관련돼 있다. 94 실제로 1997년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김정일은 당시 중국 대사 완융상( 萬 永 祥 )에게 한 중 수교에 대한 직설적 불만을 드러낸 것 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중국과 남조선의 수교는 중국공산당이 결정 한 일로, 조선의 의견은 0.001%도 반영되지 않았으며, 나의 의견도 반 영되지 않았다 고 비판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6년이 지난 시점 에서도 북한이 중국의 한 중 수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이후 북한 외교정책의 변화와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중 국의 이익은 변할 수 있으며 혈맹으로 중국의 역할에 회의를 할 수밖에 92_ 송봉선, 중국을 통해 북한을 보다 (서울: 시대정신, 2011), p _ 조선중앙통신, 1992년 9월 27일. 94_ 김정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김정일선집 13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pp. 456~469; 로동신문, 1994년 11월 1일.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5

82 없었던 것이다. 즉 중국에 강한 불신감을 가지게 된 북한으로서는 중국 의 대북정책에 부응하지 않고 더욱 독자적인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독자적인 판단으로 핵위기를 연출한 것이나 중국이 압력과 제재를 가한다고 해서 이를 수용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은 전통적으로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왔고 핵무기 개발 역시 탈냉전 시기부터 시도해온 전략이었다. 95 사회주의권이 해 체되고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여전한 속에서 북한은 효과적으로 안보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나선 것이다. 더구나 한 중 수교로 인한 북 중 관계의 냉각은 북한에게 대외적인 고립감을 심화시켰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은 1993년 NPT를 탈퇴하 고 1994년 4월에 정전협정 폐기 성명을 발표하고 96 이어서 군사분계선 의 무단 침범, 판문점 군사정전위 중국 측 대표단 철수 요구 등 정전협 상 무력화를 통해 중국과 상관없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평화 보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97 이처럼 북한 핵위기 95_ 중국이 북핵문제를 최초로 인지한 것은 1991년 8월로 알려진다. 북한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김용순과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 주양( 朱 良 )은 정기적으로 비밀협 의를 진행해왔다. 이 때 김용순이 조선을 영구 분단하려는 서방 측의 음모를 쳐부 수기 위해서, 우리당은 핵을 보유하기로 했다 는 사실을 주양에게 알렸다. 이때부터 중국지도자들은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김일성 정권의 안정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 을 용인할 수 없다 는 입장을 설명하고, 핵개발 대안으로 최신 무기의 원조와 군사 기술 지원방안을 고려했다. 중월, 중조공산당적비밀회의, 쟁명, 1991년 8월호, pp. 12~13. 96_ 로동신문, 1994년 4월 29일. 97_ 핵무기에 관한 한 중국은 일관된 반대 입장을 펼쳐왔다. 2006년 10월에 북한이 첫 핵실험을 했을 때 중국은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조치(결의 1718호)에 찬성했다. 2009년 5월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강행했을 때에도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1874호)에도 찬성했다. 증국의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반대 이유는 책임대국 론의 일관성과 지역안보 균형을 위협함으로써 중국의 안보를 취약하게 만든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은 여전히 북한과의 무역 및 투자를 증대하고 있다. 또한 역설적으로 중국은 북한 핵위기를 통해 명실공히 6자회담을 6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3 는 중국이라는 혈맹에 대한 상실감 속에서 미국의 강경한 대북정책 및 정치 경제적 압박에 대응하고 북 미 간 평화협정을 강제하려는 전략이 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끝없는 긴장 분위기 조성을 통해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19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북 중 관계의 냉각 속에서 대미관계 개선을 통해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 함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냄으로써(The Tactic of Crisis-Causing) 국제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협상에서의 의제선 택권을 장악하며 양보를 이끌어내는 유명한 전략이 되었다. 다. 소결론: 김정일체제 공고화에의 노력 (1) 위기관리전략 한 중 수교를 계기로 북 중 관계는 질적으로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 었다. 이것은 한국변수가 북 중 관계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변수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북 중 관계는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에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중국은 국제사 회의 규범을 준수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북한은 새로운 자구책을 마련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특히 북한은 한 중 수교가 북 일 수교와 북 미 수교와 무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교차승 인을 반대하는 미국과 일본에 대해 수교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 하였다. 98 여기에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 중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 다. 동시에 중국에서 제3세대 지도자 집단으로서의 권력이양이 마무리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98_ 이종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p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7

84 되면서 중국 해방투쟁과 한국전쟁에서 고락을 함께 한 혁명세대가 퇴 장하게 되고, 양국관계는 한층 어려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1992년 중국의 건국 43주년을 맞아 전통적인 조 중 친선관계를 지속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은 쌍방 인민들의 염원 이라고 강조했고, 이임하 는 주북한 중국대사를 만나 김일성이 조 중 친선은 항구하며 피와 생 명으로 맺어진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친선은 그 어떤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고 99 언급했으나 북 중 간 교류는 전례 없이 줄어들었고, 정부 내 최고위급 방문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북한은 국내외에서 전개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김정일로의 후계체 제를 서두르게 된다. 사실 김정일의 권력승계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 어 왔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는 외교권을, 그리고 1980년 후반에 이르 면 군사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소련 에서 군부 쿠데타가 실패한 4개월 후인 1991년 12월 24일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년 4월 9일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에 공식 취임함으로써, 명실공히 김일성의 권력을 완벽하게 이양받았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은 인민군의 장악과정과 거의 일치한다. 김정일 은 1980년 제6차 당대회를 통해 당 중앙군사위원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2년에 와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방 99_ 통일원, 북한동향, 1993년 8월, p _ 김일성은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중대정치지도원 대회 에서 당중앙위원회 제6 기 제1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 동지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고 밝히고, 그 이유에 대해 내가 이제 팔십고령이므로, 최고사령관으로서 밤을 지새 우며 전군을 지휘하고 통솔하기 곤란하다 고 설명했다. 또한 전체 인민군 장병들 이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나의 명령과 같이 여기고,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해 야 한다 고 주장했다. 김일성, 일군들은 당과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 여 충실히 일하여야 한다, 1991년 9월 19일, 김일성 저작집 43권 (평양: 조선로 동당출판사, 1996),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5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즉 1992년 헌법에서 신설된 국방위원회 는 조선인민군뿐만 아니라 국가안전보위부도 함께 지휘 통제하도록 개편하여, 사실상 모든 군권과 정보기관을 자신의 권력으로 단일화시 켰다. 김정일이 군권을 가장 늦게 이양받은 데는 김일성의 건재도 있었 지만, 항일빨치산 원로들도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101 그러나 1989년 부터 1991년 사이의 동구와 소련공산권 국가들의 갑작스런 정세변화 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군권을 김정일에게 이관시켜주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 1990년대 초반 김일성이 국방위원회를 강화시킨 이유는 대외적 위 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일련의 붕괴사태와 1991년 걸프전, 그리고 1992년 핵사찰문제가 불거지자 군부에 대한 확 고한 지배 및 통제가 요구되었다. 대내적 요인에는 1990년 9월 5일부터 개최되기 시작한 남 북 고위급회담과 1991년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 이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선언, 그리고 북한의 경제위기 등이 맞물려 후계구도를 완결하되, 김일성 그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체제유지 의 가장 큰 물리력인 군권의 이양을 통해 북한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 려는 의도에 기인했다. 김일성은 형식상 국가주석의 지위만으로도 남 북 대화와 외교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 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역사적인 남 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의 돌연한 사망은 김정일시대의 도래를 앞당겼다. 101_ 한때 김정일은 오극렬을 통해 군계통을 개혁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오극렬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의 개입으로부터 군 지휘권을 약화시키는 일련의 조치들을 없 애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군관들이 군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사회주 의 국가들의 전통적 방식을 고집한 김일성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오진우의 강력한 반대가 있어서, 결국 오극렬이 물러나는 선에서 이 일은 무마되었 으나, 여하튼 김정일의 군권장악과정에서 원로들의 견제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호 혜일, 북한요지경 (서울: 맑은소리, 2006), pp. 248~250.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69

86 표Ⅲ 년 이후 원수 차수 및 장령 진급 현황 장령 이상 진급 현황 일자 계기 원수 차수 대장 상장 중장 소장 계 인민군 창건 60돌 휴전 40돌 당 창건 50돌 김정일 생일 55돌 김일성 생일 85돌 김일성 생일 86돌 정권 창건 50돌 김일성 생일 87돌 당창건 55돌 김일성 생일 89돌 김일성 생일 90돌 정전협정체결 50돌 김일성 생일 92돌 김일성 생일 93돌 김일성 생일 94돌 김일성 생일 95돌 계 ,050 1,365 출처: 통일부, 주간북한동향 김정일은 1992년과 1997년에 대규모 군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년은 군을 장악하기 위한 과정에서, 1997년은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한 국방위원장 재추대를 위한 선심성 인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승진인사를 통해, 김정일은 확고하게 군을 장악해 나갔다. 7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7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후계체제 안정화 단계로 유훈통치를 시 작했다. 1995년 10월 4일 혁명의 붉은기를 높이 들고 억세게 전진해 나가자 에서 붉은기사상운동을 전개했다. 붉은기는 영생불멸의 주체 사상 이며, 붉은기 아래서 김일성이 북한의 공산주의를 발전시켰다 고 강조하였다. 102 또한 동년 1월 9일 로동신문 편집국 논설에 의하 면, 붉은기사상은 붉은기를 변함없이 지키고 주체의 혁명위업을 최후 까지 완성시키려는 완고한 혁명정신이며, 붉은기철학이란 주체혁명철 학, 마음의 단결철학, 신념의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는 혁명철학 이라고 설명했다. 103 이 기간 동안 김정일은 일반 주민들에 대한 김일성의 명 망을 이용하여, 어려운 경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수호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북핵문제의 교착상태로 인해 북한과 미 일 관계는 악화되었고,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지원도 감소되었다. 특히 북 일 관계의 악화로 인해 북한의 대일 무역액의 일부가 대중 무역으로 전환 표Ⅲ-4 북한의 무역상대 국가별 비중 추이(1965~2000) (단위: %) 중국 러시아 일본 남한 기타 합계 _ 로동신문, 1996년 1월 1일. 103_ 로동신문, 1996년 1월 9일.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1

88 되기도 하였다. 한편 무역과 관련해서도 우리식 사회주의 의 영향력에 대한 강조도 계속되었다. 중국의 시장경제개혁을 의식한 맥락 속에서 체제유지를 위한 무역관을 설파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무역수지 악화로 경제난이 더욱 심화되는 현실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무역방법을 허용하면 사회주 의를 침식시키는 엄중한 후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러 단위 들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제가끔 자본가들과 거래하고 외 화를 벌어 망탕 쓰게 하면 제국주의자들이 바라는 대로 개혁, 개방 이 되고 나라의 경제가 자유화 자본주의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품을 다른 나라에 내다 파는 것도 한곬으로 하고 다른 나라에서 사오는 것도 한곬으로 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야 합니다. 대외경제 거래를 우리식으로 확대 발전시켜나가 야 합니다. 104 (2) 편승전략 중국의 부상을 배경으로 김정일체제가 공고화되고 북 중 관계는 점 차 혈맹관계 또는 순치관계에서 사안에 따라 전략적 지원과 협력을 하 는 관계로 전환되었다. 북한은 중국과의 전략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하 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북 한은 중국과 중대사안에 대한 사전통보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2000년대 북한이 국제적인 고립 심화 상황에서도 사전협의하거나 통 보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2002년 9월 신의주 행정특구의 설 치나, 2006년 7월 대포동 2호 발사에 대해 북한은 중국과 사전협의가 104_ 김정일, 당의 무역제일주의 방침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몇가지 문제, 김정일 선집 1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9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 중국은 핵과 미사일 문제에서 견해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북한은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완강한 거부태도를 갖고 있으며, 북핵문제 등 해결과정에서도 중국의 태도에 만족하는 입 장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그렇 다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변화는 지정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 을까? 1990년대를 전후하여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사실상 미국 을 세계유일의 패권국가로 만들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남한의 경제력 과 상호협력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일본은 북한에 접근하는 등 탈냉전 기 공간구조는 또다시 급변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 경제력의 쇠퇴와 일본 경제력의 회복, 중국과 러시아의 갈등관계 청산 등은 동북아 국제관계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Ⅲ-1 한반도 공간구조의 변화 소련 미국 중국 소련 중국 중국 러 북한 북한 시 북한 남한 남한 아 남한 일본 일본 일본 미국 미국 미국 미국 러시아 중국 북한 남한 일본 제1차 냉전기 데탕트기 탈 냉전기 신 냉전기(?) 출처: 권오국, 지정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남 북한의 생존전략(1945~2000), (성균 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0) 참조.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3

90 북한은 공간구조가 변화될 때마다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해 왔다. 냉 전기 동안에는 편승을 통한 국가의 건설에 매진했고, 미 중 데탕트시절 에는 국가의 발전노선을 재정립하거나 또는 확정하였다. 그러나 남한 의 외부지향형 발전전략과 북한의 자립형 경제발전전략은 탈냉전기에 와서는 극명하게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다. 자립형 전략의 한계가 분명 하게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공간구조의 변화는 남 북한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강대국의 전략에 따라 변화돼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요인들이 이러한 구조변화를 불러왔는가. 냉전시절 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따른 정치적 요인이 변화의 추동력을 담보 했다. 그러나 3각 동맹기시절, 중국과 소련은 영토분쟁과 이념논쟁을 전개함으로써 분열되고 말았다. 탈냉전기에는 경제 문화적 요소가 무 엇보다 중요해졌다. 지정학에서 지경학, 그리고 지문화 또는 지평화의 형태로 공간구조를 변화시키는 동인이 바뀐 것이다. 북 중 관계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 북한은 가장 중요한 이웃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이 중국의 국 익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안보적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취 약한 존재라는 점 때문이다. 중국지도자들은 특히 중단기적 측면에서 북한의 붕괴가 중국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그들에게 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북한체제가 어느 순간 격변의 소용돌이 속 에서 통제불능의 상태에 처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북한이 적대적인 세 력에 의해 장악되는 상황이야말로 악몽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 중 수교 이래 소원해졌던 북 중 관계는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면서 점차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위기와 식량난 극복을 위해 중국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북한의 입장과 김정일 정권의 붕괴가 자국에 미칠 부작용을 우려한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7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1 가 합치된 결과였다. 중국도 양국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 다. 1995년 10월 6일 장쩌민 총서기는 조선로동당 창립 50주년을 기념 하기 위해 주중 북한대사관을 찾아 앞으로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더 라도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은 변함없이 중 조 우호합작관계를 유지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105 또한 중국 은 1996년 5월 북한의 홍성남 총리가 방문했을 당시, 경제기술협력협 정 을 체결하도록 유도했다. 이 협정에는 향후 5년간 원조를 보장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후속조치로 중국은 대북 교역에 있어 우호가격 시스템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106 중국은 대북 교역에서 구상무역 방 식을 부활시키고 북한과 차관협정 및 무상원조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1996년 한 해 동안 50만 톤의 식량과 150만 톤의 석탄, 130만 톤의 석유를 제공하는 등 북한에 대해 본격적인 경제지원에 나섰던 것이 다. 107 북 중 관계는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홍성 남 내각총리 등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주석 등 고위지도 자들과 면담한 이후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108 이 시기는 1998 년 한 중 양국이 기존의 선린우호관계를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킨 직후였다. 이러한 관계회복은 김정일 위원장의 대중국 인식에도 변화 를 가져왔고, 2000년 5월 29일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정부의 초청 105_ 人 民 日 報, 1995 年 10 月 7 日. 106_ Young-hoon Lee, Trends in Sino-North Korean Trade and Its Impact on the North Korean Economy (Seoul: Bank of Korea, 2005), p _ 현성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 p _ 그러나 한 중 수교 이후 그동안 양국 간에 전통적으로 이뤄져 왔던 최고위 수뇌의 교환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5

92 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는 남 북 정상회담을 보름 정도 앞두고 있 었고, 김정일체제가 출범한 지 17년 만에 이루어진 첫 해외방문이었다. 이후 2000년 10월 츠하오티엔 중국 국방장관을 대표로 하는 군사 대표 단이 한국전쟁 참전 5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2000년대 초반 나타난 북 중 간 협력관계 강화는 남 북 정상회담에 따른 한반도 긴장 완화와 병행되었다. 이후 2001년 김정일의 방중으로 양국관계는 새로운 회복 기를 맞이했으며, 2001년 9월 장쩌민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으로 양국 관계가 다시 정상화돼 갔다. 이런 일련의 정상 외교들은 양국 간의 전 통적인 우호협력관계가 완전히 복원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09 북한이 그동안의 충격에서 벗어나 한 중 수교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된 상황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인 식 때문이었다. 중국 역시 북한과의 관계 악화가 對 한반도 영향력 확대 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북한체제의 고립이 역내 불안 정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국 간 외교관계 정상화가 곧 혈맹관계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양국은 더이상 공유해야 할 이념적 목표나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으며, 지도부 간의 개인적 친분이 나 유대관계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중국은 과거와 달 리 철저히 국익을 기준으로 북한을 대했고, 그것은 제1차 북핵위기 발 생 당시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이처럼 약화된 북 중 간의 안보적 경제적 관계는 북한의 안보불안과 위기의식 을 극대화했고 그것은 다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압박 속에서 북한이 109_ 그 중에서도 2001년 9월 장쩌민 주석이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 진 것은 북 중 관계를 회복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7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3 핵개발 등 자위적 군사력 확보와 대내 결속력 강화, 개혁 개방정책의 거부 등 체제보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전략에 매달리게 하는 배경 이 되었다. 110 그러나 이후 전개된 사태를 보면, 일시적으로 심각한 갈등과 마찰을 빚더라도 중국과 북한은 여전히 혈맹임을 내외적으로 과시하면서 북한 과의 협력체제를 공고히 하게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중국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북한의 완충 지대로서의 효용성과 전략적 가치가 북한의 경제난, 핵무기 개발, 대남관계 등의 부담 등에서 오는 부담보다 더 크 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더구나 중국의 대외전략의 관점에서 도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 변화 역시 양가적인 의미로 분석할 수 있다. 중국은 경제적 능력을 토대로 동북아 역내에서 미국의 일방적 독주를 허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도권을 강화하면서도 중국위협론 에 대한 미국 및 서방의 부정적인 인식을 완화시키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또다 른 한편으로 미국의 미사일방어망(NMD) 추진과 미 일 동맹의 강화 등 일련의 움직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안보적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의 대북한 협력 강화는, 물론 한편으로는 북한의 추가 도발 을 억제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한 미 동맹 강화를 견제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111 한편 신안보관에 기반한 다자안보에 대해 북한은 비판적 거리를 유 지하면서도 소극적인 공조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북한은 1988년 남한의 동북아 평화협의회 112 의 제안에 대해 북한 고 110_ 현성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 p _ 하상식, 중국의 대한반도 전략적 이해관계, 전략연구, 제51호 (한국전략문제연 구소, 2011) 참조. 112_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UN 총회연설에서 한반도 문제해결 동북아 평화질서 구축 태평양 시대 개발 로 요약되는 중장기 외교비전을 담은 <동북아 6개국 평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7

94 립책동, 대북 고립압살책동, 외세의존적 정체를 드러낸 망발 등 원색 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한편으 로는 비정부 동북아 다자안보협의체와 아태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 는 정부 및 민간 차원의 안보 대화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특히 1995년 비정부 차원의 다자안보협력회의인 아 태안보협력회의(Council for Security Cooperation in the Asia- Pacific, 이하 CSCAP)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2000년에는 제7 차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이하 ARF) 회의 에서 2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113 이는 다자안보협력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북한조차 아시아에서 다자 협력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고립을 초래한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여진다. 물론 북한의 일관된 입장은 다자안보체제에 회의적이었으며 무용론을 주창했다. 쌍무적 신뢰조성이 없는 지역다자안보 논의는 사 실상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논의에서 미국을 배 제할 것을 주창했다. 114 물론 CSCAP, ARF 참여 등에 대해 비록 다자안보협력에 대한 인식 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비약이지만,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북 미 협상에 집착하는 양자주의의 변화 조짐이 나타난다는 것 화협의회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수훈 박병인, 동북아 안보질서의 변화 와 북한의 인식, 동북아논총, 제58권 (한국동북아학회, 2011), pp. 81~ _ 2004년 현재 ARF에는 23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ARF회원국 구성을 보면 ASEAN 10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ASEAN 대화상대국 10개국(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호 주, 캐나다, 뉴질랜드, 인도, EU의장국)+기타 3개국(몽골, 파푸아뉴기니, 북한)으로 되어 있다. 114_ 특히 2004년 4월 2일과 2005년 4월 13일 로동신문 에서 이런 입장을 명료하게 표명했다. 7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5 이다. 이런 가능성은 다자 간 체제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던 중국의 대외전략 변화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2007년에 북한은 동북아 다자안 보협력을 논하는 실무그룹인 동북아 평화 안보체제 실무그룹 의 설치 에 동의하고 논의 구조에 참여하면서 전향적 가능성을 표출하기 시작 했다. Ⅰ Ⅱ Ⅲ Ⅳ Ⅴ Ⅵ 장쩌민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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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Ⅳ.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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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2년 10월의 중국공산당 제16차 당대회( 全 大 會 )에서 이루어진 중 국공산당 지도체제의 개편으로 3세대를 중심으로 한 장쩌민체제가 막 을 내리고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4세대의 집단지도체제가 확립되었 다. 2003년 3월 개최된 중국의 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에서는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정부지도자 에 대한 인선이 4세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제 후진타오체제는 공식적으로 당과 정부를 주도하게 되었다 년 천안문사태와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가 초래한 심각 한 체제위기에서 벗어나 중국은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회복하면서 장쩌민 체제는 덩샤오핑시대의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도광양회 의 대외정책 에서 벗어나 점차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국제사회에 참여하고 나름대 로 역할을 확대하는 유소작위( 有 所 作 爲 ) 와 화평굴기( 和 平 崛 起 ) 의 대 외정책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116 장쩌민 후기의 이런 대외정책 변 화는 1990년대 이후 고도성장의 실현, 경제발전과 성공의 산물로 확산 되기 시작한 중국사회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중화민족주의 정서를 반영 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지도부의 세대교체도 대외전략의 변화에 한몫했다. 중국은 2002 년 11월 제16차 전국대표대회와 2003년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를 통해 장쩌민으로부터 후진타오에게 최고통수권자의 지위계승을 완 료했다. 2004년 9월 제16차 4중전회를 통해서는 장쩌민이 정치일선에 서 완전 퇴진했다. 이로써 제3세대 지도부에서 제4세대 지도부로의 정 115_ 박두복,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우리의 통일외교전략, 특별정책연구과제 (서 울: 외교안보연구원, 2003), pp. 1~2. 116_ 정비젠 저, 이희옥 역, 중국 평화부상의 새로운 길, pp. 16~17.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3

100 치적 계승을 마무리했다. 비약적 경제발전시대를 대표하는 제4세대 지 도부는 덩샤오핑과 장쩌민이 대표하는 제2세대와 제3세대 지도부와 비 교할 때, 국제사회의 참여에 대하여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화평굴기론 을 내세우면서 강대국 중국의 의무와 권리를 수행하고,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 공동번영을 실현하기 위해 대국외교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년 제17차 중국공산당 대회를 앞두고 진행되었던 일선 교육기 관의 수장 및 당서기 변동 과정에서 해외 유학파가 국내파들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 중국의 화평발전의 목적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비록 공산당원이기는 했지만 유학파들은 서양의 교육과 문화 를 체험했기 때문에 보다 유연한 개방전략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내파 보다 친서방적인 성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의 개혁 개방으로 인해 중국 인민들의 정서도 상당 수준 이상으로 서방에 호의적인 의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화평발전과 인적 배경 속에서 중국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양국 입장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감당코자 했다. 북핵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 의 지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시키고 미국과 의 관계도 개선을 계속하려는 의도를 중국은 가졌다. 118 이에 대한 북한의 전략은 전체적으로 중국활용론 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중국의 간섭과 정치적 영향력을 철저히 견제하면서도 중국의 117_ 서진영, 21세기 중국외교정책 (서울: 폴리테이아, 2006), pp. 348~ _ 신상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시각 변화와 북 중 관계: 중국은 북한을 미국의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는 완충지대 로 인식, 북한, 이달의 초점 (북한연구소, 2005),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1 경제력과 외교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대중전략은 중국의 대한반도 이해관계를 체제보위를 위해 역이용하는 방법으로서 구체화되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이 중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국의 대외전략 및 안보적 이해와 일치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보 문제와 관련한 일시적인 중국과의 갈등과 마찰조차 실리적인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중국의 화평발 전에 기본적인 동의를 보내고 보조를 맞추면서도 그것이 친서방적인 행보로 나아가고 북한의 안보 문제를 방기할 수 있을 경우 북한은 독자 적인 행보를 통해 갈등적 편승전략을 구사해온 것이다. 1. 후진타오 정부의 G2 부상과 화평굴기 가. 국가발전전략: 과학적 발전관과 중국의 G2 부상 중국은 개혁 개방노선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1978년 이후, 30년 만에 중국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결과 GDP 규모가 1978년 세계 10위에서 2010년에는 미국에 이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를 기록하였다. 119 GDP 비중을 보면 중국은 1980년 1.7%에서 2009년 8%를 차지하는 막대한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1979년부터 2009년까지 GDP 연평균 증가율은 9.9%에 달한다. 중국은 외자기업에 의한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단기간에 비약적 발전을 실 현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변신하였는데, 2008년 수출 1조 4,285억 달 119_ 중국의 경제규모는 1978년 세계 10위에서 1980년 8위, 2000년 6위, 2007년 4위, 2008년 3위에서 2010년 2위로 부상하였다. 2010년 중국의 경제규모는 5조 4,000 억 달러로 5조 1,650억 달러인 일본을 추월하였다. 정상은, 중국의 중장기 경제성 장 전략 및 전망, 이장규 외, 중국의 부상에 따른 한국의 국가전략 연구 (대외경 제정책연구원, 2010), p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5

102 러, 수입 1조 1,331억 달러, 총 2조 5,616억 달러로 GDP 대비 59%를 차지하여 세계 수출 순위 1위국으로 부상했다. 이 중 외자기업이 수출 의 55.3%, 수입의 54.7%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IT 등 첨단제품은 전체의 70% 이상을 외자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1979년부터 2009년까 지 연평균 증가율은 수출 15.8%, 수입 13.5%에 달한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은 덩샤오핑( 鄧 小 平 )이 지난 1987년 밝힌 3 단계 경제발전전략( 三 步 走 戰 略 ) 120 의 큰 틀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우 그림Ⅳ-1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비중 추이 출처: 정상은, 중국의 중장기 경제성장전략 및 전망, p _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 에서 덩샤오핑( 鄧 小 平 )의 개혁파들은 대규모 대중적 계급투쟁 의 종결을 선언함 으로써 계급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마오쩌둥( 毛 澤 東 )시대의 노선과의 결별 을 명확히 하고 4개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새 시대의 총체적 과업으로 규정했다. 덩샤오핑은 당시 1단계로 300달 러의 1인당 국민소득을 20세기 말까지 4배로 끌어올려 원바오 수준을 이룩하고, 2단계로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까지 국민소득을 다시 2배로 끌어올려 중 진국에 진입하며, 3단계로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목표 를 제시했으며, 100년이 지날 때까지 이러한 체제목표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장 기 경제목표를 제시했다. 8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3 선 1단계 원바오( 溫 飽 )는 기본 의식주를 해결하는 단계를, 2단계 샤오 캉( 小 康 )은 의식주가 해결된 중등생활 이상의 복지사회를, 3단계 다퉁 ( 大 同 )은 말 그대로 태평성대를 뜻한다. 이러한 개혁 개방 과정의 3단 계 발전전략 가운데 첫 단계인 원바오는 1980년대 말 완료했으며, 2002 년 11월 열린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는 정치보고 를 통해 지속적인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정책 추진으로 중국이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중국의 제4세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후진타오체제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국력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의 미 래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중국의 신지도부는 장래 20년의 기간을 중화민족의 중흥을 도모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의 시기라고 보았다. 121 신지도부는 이 기간 동안 경제건설에 총 매진하여 전면적 소강사회 ( 小 康 社 會 ) 를 건설하고 국제적 위상도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하였 다 년은 덩샤오핑이 기대한 것처럼 일인당 국민소득이 약 3,000달러에 이르며 중국의 국민총생산이 미국을 앞지르는 시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123 중국은 전 세계 10위권 국부펀드 중에서 4개의 펀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규모 면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121_ 江 澤 民, 全 面 建 設 小 康 社 會, 開 創 中 國 特 色 社 會 主 義 事 業 新 局 面, 中 國 共 産 黨 第 十 六 次 全 國 代 表 大 會 文 件 匯 編 (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2002), p _ 중국의 신지도부가 제시한 전면적 소강사회 는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의 3단계 발 전전략에 기초한 것이다. 1단계는 먹고 사는 문제( 溫 飽 ) 해결, 2단계는 소강사회 건설, 3단계는 중진국 수준으로 간다는 목표를 말한다. 중국의 신지도부는 중국은 이미 소강사회를 건설했지만 현 단계는 아직 낮은 수준으로 전면적이지 못하고 불균형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20년간 발전을 통해 좀 더 완전한 소강사회 를 건설하겠다는 중국지도부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조영남,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 정치 (서울: 나남출판사, 2006), p _ 이코노미스트 2006년 보고서는 2017년에 중국의 실질구매력 기준 GDP가 미국을 앞지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7

104 표Ⅳ-1 세계 주요 국부펀드(SWF) 현황(2010년 9월 현재) (단위: 억 달러) 순위 국가 펀드 자산규모 1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아부다비투자청(ADIA) 6270억 2 노르웨이 글로벌연금펀드(GPF) 4710억 3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통화청(SAMA) foreign holdings 4150억 4 중국 외환관리국(SAFE) 투자회사 3471억(추정치) 5 중국 중국투자공사 3320억 6 싱가포르 싱가포르정부투자회사 2480억 7 중국(홍콩) 홍콩통화정 인베스트먼트 프트폴리오 2280억 8 쿠웨이트 쿠웨이트투자청 2030억 9 중국 국가 사회보장연금 펀드 1470억 10 러시아 국가 복지기금펀드(석유 안정화 펀드포함) 1425억 출처: 국부펀드연구소, 한국투자공사(KIC) 후진타오체제는 중국의 경제발전전략을 대폭적으로 조정하여 지금 까지의 개혁 개방 기간 내에 중요한 경제원칙이었던 경제건설 중심( 以 經 濟 建 設 爲 中 心 )의 선부론( 先 富 論 )에서 사람을 본위로( 以 人 爲 本 )하는 공부론( 共 富 論 )으로 전환하는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사회이론을 주장 하고 있다. 후진타오는 2003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완비에 관한 결 정을 통해 조화로운 사회건설의 기초를 밝혔으며, 2006년 16기 6중전 회에서 <조화사회 건설의 몇 가지 중대 문제에 관한 결정>을 통해 조 화사회이론을 자신의 경제발전전략으로 내세웠다. 이는 중국경제의 성 장 동력을 지금까지의 수출주도형에서 내수중심형으로 전환하는 과학 적 발전과 연결되며, 아울러 지금까지의 외자기업에 의한 수출주도형 8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5 불균형 경제성장전략에서 중국기업에 의한 수출과 내수 병존의 균형 성장전략으로의 현실적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고도성장의 부작용을 치유하면서 질적 발전과 글로벌화의 진전을 이루기 위한 경제운용 방 침이다. 후진타오 2기 지도부는 경제 관련 용어 사용에 있어서 성장( 成 長 ) 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발전( 發 展 ) 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 주즈신( 朱 之 鑫 )이 사회의 성숙과 문제점 해결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성장 이라는 용어 대신 발전 을 사용한다 고 한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새로운 지도부가 향후 경제발전의 슬로건으로 제시한 우호우쾌( 又 好 又 快 ) 는 양질의 빠 른 발전을 의미한다. 호( 好 ) 를 쾌( 快 ) 의 앞에 둔 것은 양적인 성장보 다는 과학적 발전관에 입각한 질적인 발전을 우선하겠다는 의지의 표 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후진타오체제의 국가전략은 미국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선진국들과 전략적 대화를 강화하고, 주변국 들과도 실리에 입각한 협력관계를 강화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후진타오체제의 국가발전전략의 방향은 대내적으 로는 과학적 발전관을 통한 화해사회의 달성이며, 대외적으로는 화평 발전과 화해세계를 통한 중국의 대국으로의 부상으로 집약된다. 후진타오체제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속 적인 경제발전이다. 중국의 국가목표인 경제발전은 경제적인 측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 니고 있다. 124 후진타오체제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공산당 통치의 정당 성을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125 다른 하 124_ 葉 自 成, 中 國 實 行 大 國 外 交 戰 略 勢 在 必 行 - 關 于 中 國 外 交 戰 略 的 幾 点 思 考, 世 界 經 濟 與 政 治, 2000, pp. 5~ _ 汝 信 陸 學 藝, 2003: 中 國 社 會 形 勢 分 析 與 豫 測 ( 北 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89

106 나는 대만문제 해결을 통한 중국의 통일이다. 대만문제는 최고의 국가 목표인 통일과 관련되며 중국의 가장 중요한 안보문제이기도 하다. 대 만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중국의 안보전략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 보전략적인 측면에서 중국은 대만이 독립할 경우 미국의 전략적 교두 보가 될 것으로 보고 있고, 반대로 중국이 대만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 한다면 중국이 동중국해는 물론 태평양 지역에서의 해상 방위 범위를 보다 확장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는 소수민족문제 해결을 통해 중국의 통합을 강화하는 것이 다. 중국은 민족과 문화를 달리하는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 이다. 중국의 한족은 소수민족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를 지배하는 국가이다. 126 그동안 중국정부는 소수민족 지역의 분리주의 에 대해 대내외적인 여러 방안들을 통해 견제해 왔다. 국내적으로는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우대정책과 동시에 감시와 통제를 통해 분리주 의를 견제해 왔다. 장쩌민체제 이후 중국지도부는 소수민족의 분리주 의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 키는 작업을 추진해 왔다. 신장에 대한 서북공정, 티베트에 대한 서남 공정, 만주지역에 대한 동북공정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27 중국의 국가발전전략을 정리하면 중국은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화 세계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부국강병전략을 꾸준히 추진해오고 있 2003), p _ 중국은 절대 다수의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155개 의 민족 자치지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5개의 자치구, 30개의 자치주, 120개의 자치 현(및 기 또는 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치지역이 차지하는 면적은 646만 9천 5백 평방킬로미터에 달하여 전 중국 면적의 64.3%를 차지한다. 127_ 중국 소수민족문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외교적 대응에 대해서는 이동률, 소수민족 의 분리주의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대응, 국가전략, 제10권 3호 (세종연구소, 2004) 참조. 9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7 표Ⅳ-2 중국경제패러다임의 변화 마오쩌둥 평균주의 자력갱생 대약진운동 일대이공 덩샤오핑 선부론( 先 富 論 ) 개혁 개방 연해개발 무역, 외자 도입 장쩌민 선부론 연장 개혁 개방 심화 서부대개발 후진타오 공부론( 共 富 論 ) 과학적 발전 균형개발 발전의 폐해 교정 무역, 내수 외자 선별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아편전쟁을 통해 실추된 중화세계 의 체면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100년을 되찾겠다는 심정으로 쇠퇴해가 는 중화민국을 공산혁명을 통해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마오쩌둥의 국가발전전략은 계급투쟁을 통해 모두가 평등한 진정한 사 회주의 국가를 건설을 목표로 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력갱생의 원칙에 의해 국내적인 역량과 공산권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의 현실을 직시한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현대 화를 위해 과감한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우선 경제발전의 준비가 된 연해지역을 먼저 발전시키고, 이 발전 동력으로 국가경제를 견인하 고자 하였으며, 개방을 통해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실사구 시, 실용주의 전략을 실시하였다. 덩샤오핑의 영향 아래 집권한 장쩌 민은 개혁 개방을 더욱 심화하고 개혁 개방 과정에 노출된 중국경제의 폐해를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아울러 그 과정에서 새롭게 떠 오른 세력들을 흡수하기 위하여 3개대표론을 전략으로 사용하였다. 이 어 후진타오는 개혁 개방의 지속적인 추진과 함께 지금까지의 성장위 주의 경제발전을 보완하여 모두가 함께 경제적 성장의 성과를 누리는 공부론을 통한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세계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1

108 나. 후진타오의 대외관계전략: 화평발전, 조화세계 후진타오체제의 대외관계전략은 중국의 종합국력의 증강을 통한 국 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구상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이러한 대외 정책 기조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이 취하고 있는 대외인식과 대외 전략의 연장선에 있으며, 여전히 평화, 발전, 합작을 기치로 독립자주 의 평화외교정책을 추진하고 세계 각국과의 우호협력을 적극 도모한 다 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28 후진타오체제의 대외관계전략에서 나타 나는 특징은 후진타오가 대내정책 전반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성장과 분배, 통제와 자율 등에 대한 균형과 조정 을 통해 사회발전을 이루려는 의지가 직간접적으로 대외전략에 반영되고 있다 는 것이다. 후진타오체제는 국내적으로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사회 안 정, 그리고 민족주의적 단결을 통해 공산주의 통치를 유지하고, 대외적 으로는 국제사회의 상호의존과 협력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국 의 주권을 수호하고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제고해 간다는 소위 책임 있는 대국을 향한 전략적 선택을 하고 있다 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는 강화된 중국의 힘을 배경으로 적극적으 로 국제사회에 관여한다는 화평굴기 라는 국가대외관계전략을 표명하 였다. 화평굴기의 3대 보장은 인력자원 확보, 조화로운 사회 환경, 국 방 건설 이다. 막강한 국방력은 화평굴기 외교와 조국통일의 필수전제 라는 입장이다. 130 그러나 후진타오는 화평굴기전략이 미국을 비롯한 128_ 中 華 人 民 共 和 國 外 交 部 政 策 硏 究 室, 中 國 外 交 (2004 年 版 ) ( 北 京 : 世 界 知 識 出 版 社, 2004) 참조. 129_ 김태효, 중국변수와 한미동맹의 미래, 정책연구시리즈 2003~4 (서울: 외교안 보연구원, 2003), p _ 원자바오가 밝힌 평화굴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의 평화적 대두 를 추진하기 위해 중국은 자체를 발전, 강화시키는 세계평화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9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9 주변국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 하여 공식적으로 화평발전( 和 平 發 展 ) 으로 국가전략이념의 표현을 바꾸었다. 2004년 화평굴기 대신 화평발 전( 和 平 發 展 ) 개념이 중국지도자들의 발언을 통해 국제사회에 등장하 였다. 2004년 4월 26일 쩡칭홍 국가부주석이 유네스코 제 60차 회의에 서 중국은 평화발전의 길을 걸어간다 라고 밝힌 바 있고, 같은 해 2004 년 7월 후진타오 총서기는 정치국 제15차 집체 학습에서 화평굴기론을 화평발전론으로 수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131 화평발전( 和 平 發 展 )의 전 략은 굴기( 崛 起 ) 라는 용어 대신 평화적인 발전( 發 展 ) 을 강조함으로 써 중국의 부상이 패권추구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대외적으 로 천명하고 중국위협론을 불식시키고자 노력하는 후진타오체제의 의 지이다. 이런 화평발전론은 개혁 개방을 통해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체제안 정을 도모하려는 후진타오 정권의 전략의 산물이다. 즉 체제의 정통성 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환경 조성이 필요하며, 이런 맥락에서 미국 등 서방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대외전략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화평발전으로의 수사학적 전환 역시 미국과 서방 측을 다분히 의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중국의 외교정책의 제1목표가 지속적인 경제발전이라면, 이 야 하며 동시에 세계평화를 보존한다. 2 중국의 대두는 중국 자신의 힘과 독립적 이며 자립적인 각고의 노력에 의존한다. 동시에 광대한 시장, 풍부한 인적자원과 자본 및 체제의 혁신에 의존한다. 3 중국의 대두는 세계 다른 지역의 지원 없이 달성할 수 없다. 중국인민은 개방정책을 유지하며 평등과 호혜의 기초 위에서 모든 우호 국가들과 경제와 무역 교류를 발전시켜야 한다. 4 중국의 대두는 어느 국가 를 가로막거나 위협을 주지 않을 것이며 결코 제3국의 희생 위에 달성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강대국이 된 후에도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원봉, 중국의 국가전략이념과 대외관계, 정치 정부연구, 제11권 1호 (한국정치정보학회, 2008), p _ 人 民 網, 2004 年 4 月 25 日.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3

110 런 맥락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중국의 부상을 위한 필수적인 조 건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의 분쟁은 북한과 군사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에게 치명적인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국의 1, 2, 3위 교역 대상국인 미국, 일본, 한국과 정상적인 교역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경제성장이 위축되면 지난 30년 동안 10%대의 경제성장에 기반해 정당성을 확보해온 중국공산당의 정통성도 위기에 빠질 수 있다. 132 더구나 만에 하나 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의 한반도 장악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북한이라는 미국과의 완충 지역 역시 상실된다. 중국의 화평발전론의 관점에서 주한미군 문제 역시 현상 유지 상태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주한미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중국이 현상타파 세력으로 비쳐지거나 미국의 패권에 도전 하는 국가로 비쳐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재무장을 견제하고 한반도의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실리적인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133 중국의 화평굴기론, 화평발전론이 지속되는 가운데 과학적 발전관 ( 科 學 發 展 觀 )과 조화세계론( 和 諧 世 界 論 )이 대외관계전략으로 적용되 고 있다. 과학적 발전관은 중국이 처한 사회 경제적 문제점에 대처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한 국가 및 공산당의 정책이며 국가전략 이다. 과학적 발전관은 이전 시대의 성장에 최우선을 두는 정책과는 132_ 하상식, 중국의 대한반도 전략적 이해관계, 전략연구, 제51호 (한국전략문제연 구소, 2011), pp. 110~ _ 이태환, 한 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평가와 전망, 세종정책연구, 제6권 2호 (세종연구소, 2010),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1 다른 국가전략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성장일변도 보다는 비약적 경제발전 과정에서 양산된 사회 경제적 문제점을 해결 하고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표명하는 국가전략 방향이다. 134 후진타 오는 조화사회의 개념을 대외관계 운영개념에 적용한 조화세계론을 통 해 대외적으로 대립과 갈등보다는 협력과 안정을 추구하는 것을 대외 관계의 최우선으로 하고자 하였다. 조화세계 란 제16기 6중전회에서 강조한 조화사회 의 통치이념이 대외정책에 반영된 것으로, 후진타오 ( 胡 錦 濤 ) 주석은 2005년 9월 UN 60주년 정상회의에서 세계정세가 기 회와 도전이 혼재한 상황에서 인류사회의 발전, 영구적 평화와 공동번 영을 위해 조화세계는 필요한 것이다 라며 조화세계를 처음 주장하였 고, 2005년 12월 중국의 평화발전의 길 이라는 외교백서를 발간하여 조화세계의 건설은 평화적 발전을 추구하는 중국의 핵심적 목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135 조화세계론의 핵심내용은 2005년 9월 UN 60주년 정상회의 연설에 집약되어 있다. 첫째, 다자주의를 견지하고 공동안보를 실현을 실현하 며,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상호신뢰, 호혜 및 협력에 기초한 신안보관 을 통해 다자안보협력체를 수립하고 평화적 방식으로 협상을 통해 국 제분쟁을 해결한다. 둘째, 상호협력과 공동번영을 실현하고 개방적이 고 공평한 다자무역체제를 수립하며, 선진국은 개도국에 시장 개방, 기 술이전 및 경제원조를 강화한다. 셋째, 포용정신을 견지하여 조화세계 를 공동 건설한다. 경제제도와 발전방식의 차이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문명 간의 대화와 교류를 강화함으로써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촉진한 다. 136 조화세계론 역시 G2로 급부상한 중국이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 134_ 정동근, 후진타오와 화해사회 (서울: 동아시아출판사, 2007), p Ⅰ Ⅱ Ⅲ Ⅳ Ⅴ Ⅵ 135_ 國 務 院 新 聞 辦 公 室, 中 國 的 和 平 發 展 道 路, 2005 年 12 日.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5

112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2006년 10월 16기 6중전회에서 중국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사 회의 단결과 화목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침의 하나로 평화발전 견지와 양호한 외부환경 조성을 제시하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국제환경, 선린 우호적인 주변 환경, 평등과 호혜적 협력환경, 상호 신뢰하고 협력하는 안전한 환경을 적극 쟁취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조화사회의 개념을 대외관계에까지 확장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후진타오의 통치이념의 보편화를 기하는 한편 중국위협론에 따른 대외 관계의 경색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2007년 10 월 15일 개최된 중국공산당 1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마르크스레닌 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3개대표론에 이어 과학적 발전관 이 공산당 당장에 삽입되었다. 137 중국의 대외관계전략을 정리하면, 우선 중국의 대외관계전략의 기본 표Ⅳ-3 중국의 국가전략 변화 마오쩌둥 덩샤오핑 국가발전전략 대외관계전략 중점 자력갱생 (모택동사상) 개혁 개방, 평화와 발전(덩샤오핑이론) 양대진영론, 3세계론 도광양회 계급투쟁 중시 경제발전 중시 장쩌민 3개대표론 유소작위, 책임대국론 공산당 체질 개선 후진타오 과학적 발전관 화평굴기, 조화세계 국내안정과 지속적 발전 중화민족주의 강조 136_ 努 力 建 設 和 平 共 同 繁 榮 的 和 谐 世 界, 人 民 日 報, 2005 年 9 月 15 日. 137_ 胡 錦 濤, 高 擧 中 國 特 色 社 會 主 義 偉 大 旗 幟, 人 民 日 報, 2007 年 10 月 26 日. 9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3 은 중화사상에서 출발한 부국강병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역할 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울러 각 시대마다, 최고지도자마다 통일전선전 술에 입각하여 국내외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주요모순을 해결하 기 위한 대외관계전략들을 사용하였다. 건국 초 마오쩌둥은 국내적으 로 경제적 낙후와 정치적인 불안, 국제적으로 동서냉전과 미 소 강대국 의 틈바구니에서 대외관계보다는 국내의 공산혁명의 완성을 통한 국가 형성(State-Building)에 전념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마 오쩌둥은 미 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중간지대론과 제3세계론 전략을 통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이 어 덩샤오핑은 중국 제2의 혁명이라 불리는 개혁 개방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평화와 발전을 시대적 과제로 규정하고 도광양회 전략 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안정적 환경 조성에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공정 하고 합리적인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와 국제경제질서를 수립해야 한다 는 점을 강조해 왔다. 1989년 천안문사태와 공산권국가 붕괴 이후 심화 된 대내외적 곤경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계산이 담겨 있었다. 즉 중 국은 대내적으로 개혁 개방을 지속하고 대외적으로 서방세계의 집요 한 화평연변에 대응한다는 차원에서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제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특히 중국은 냉전적 사고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일부 국가의 패권주의 성향이 국제사회의 최대 장애임을 역설하 는 한편, 국제질서의 다극화와 국제관계의 민주와 중국식 평화공존을 의미하는 구동존이( 求 同 存 異 ) 를 강조하여 왔다. 중국의 이러한 신국 제질서관은 덩샤오핑과 장쩌민을 거쳐 후진타오체제에 이르기까지 여 전히 대외관계전략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장쩌민체제에 이르러는 개 혁 개방의 일차적 성공의 결과를 바탕으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수 세적으로 내실을 다지는 도광양회 보다 능동적으로 적극성을 보이는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7

114 유소작위 의 전략을 사용하여 국제무대에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담당 하는 대국굴기와 신안보관의 전략을 추진해 왔다. 후진타오시대는 장 쩌민의 대국굴기전략을 연장, 심화시켜 대내외적 역량을 강화를 도모 하되 국제사회에서 대립과 마찰을 최소화하는 화평굴기 전략을 추진 해오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대외전략은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정에 서 자국의 지위와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21세기 강대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포하고 있으며, 특히 후진타오체제의 대외관계전략은 사회주의 화해사회를 향한 종합국력의 증강과 대외적 영향력 확대구상 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하겠다. 138 이런 대외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진흥동북( 振 興 東 北 ) 정책 이다. 진흥동북정책은 후진타오 등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가 개혁 개 방정책 실시 이후 계속 악화되어가는 지역불균형을 바로잡고, 창( 長 )강 과 주( 珠 )강 삼각주와 환발해만 지역에 이어 제4대 성장축으로 동북지 역을 발전시키고자 2004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36호 문건 에 나타난 내용은 외국자본의 국유기업 재조직에의 참여, 외국자본의 중점 업종과 기업에의 참여, 외국자본의 제3차 산업에의 참여, 지역경 제협력 강화, 양호한 발전환경 조성 등이며, 북한을 포함하여 러시아 등 동북지역과 맞닿은 접경 국가들과의 교류활성화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_ 문흥호, 중국의 대외전략: 동북아 및 한반도정책을 중심으로, 한국과 국제정치, 제21권 1호 통권48호 봄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2005), pp. 89~ _ 36호 문건은 2005년 6월 30일에 중국 중앙정부의 실무부서인 국무원 판공청( 國 務 院 辦 公 廳 ) 명의로 발표되었다. 조선일보, 2006년 3월 13일, 프레시안, 2006 년 4월 4일; 중국정부의 최고 수준의 문건인 중공중앙, 국무원 명의가 아닌 다소 급이 낮은 문건이다. 이 문건의 정식명칭은 국무원 판공청, 동북 노공업기지 대외 개방의 진일보 확대를 촉진할 것에 관한 실시의견( 國 務 院 辦 公 廳 關 於 促 進 東 北 老 工 業 基 地 進 一 步 擴 大 對 外 開 放 的 實 施 意 見 ) 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문건이 2004년부터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진흥동북 ( 振 興 東 北 等 老 工 業 基 地 )정 9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5 진흥동북정책은 달려 나가기( 走 出 去 ) 전략을 실시하여 주변 국가와 함께 에너지, 원자재, 광산 자원의 협력 개발을 한층 강화한다는 내용 을 담고 있다. 140 주동적으로 지역경제협력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국제 시장을 개척하여 상품, 기술과 노동력의 수출을 추동한다. 동북지 역이 주변 국가와 함께 국제무역, 투자, 과학기술, 여행 등 다양한 협력 의 무대를 마련하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는 것이다. 특히 이 문건의 24조는 북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24조에는 북한의 도로 항구 지역일체화 건설을 촉진하도록 역외합작 프로젝트 를 실시하고, 국가는 대외원조를 실시할 때 동북지역 변경통상도시의 교통 항구 비행장 등 기초시설 건설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고 명시했 다. 중국 국무원이 북한의 사회간접자본투자 프로젝트와 관련해 공식 문건을 작성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보고서 내용을 보면 중 국은 지린 랴오닝( 遼 寧 ) 헤이룽장( 黑 龍 江 ) 등 동북지방과 북한을 한데 묶는 개발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141 실제로 이후 중국이 동북공정 과 지하자원 확보를 겨냥하여 북한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경제의 대북한 책의 세부영역 문건 중 하나라는 점이다. 주장환, 중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구상: 36호 문건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현안진단 27호 (새로운 코리아구상을 위한 연구원, 2006), pp. 2~4; 이 문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한을 속국화하거나 동북 4성으로 만들려는 음모론 등이 제기되었지만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객관적 으로 검증되지도 않았다. 이 문건은 동북지역 진흥을 위한 대외개방과 외자유치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외국자본의 동북3성 유입이 최대 목표이기 때문이다. 즉 36호 문건은 중국의 순차적 개발계획의 일환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움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40_ 주장환, 중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구상: 36호 문건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p. 3.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그동안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들여오는 받 아 들이기 전략을 실행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는 중국 기업의 해외진출 을 적극적으로 촉구하는 달려 나가기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141_ 조선일보, 2006년 3월 13일.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99

116 경제적 영향력도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142 중국은 2007년을 기점으로 축적된 외화를 사용해 국외기업을 인수하는 조우 추치( 走 出 去 ) 전략을 강화하고 있는데 대북 투자 확대 역시 조우추치 전략의 일환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은 지난 2003년 이후 길림성 상무청과 통화강철집단의 무산철 광 개발, 최대 광물자원 수출입회사인 오광그룹의 용등탄광 개발, 북 중 해상석유 공동개발 협정 체결 등 지하자원개발 투자에 주력하고 있 다. 2007년 이후부터는 나진항만 합작구역 공동개발과 같은 사회간접 자본(SOC) 공동개발투자나 현지시장개발형, 수산자원 생산제휴형 투 자 등으로 투자형태를 다양화시키고 있다. 143 양국 간 지리적 인접성, 북한의 대중국 경제개발정책 실시, 중국체제 전환에 대한 성공적 경험, 중국의 조우추치 전략과 중국기업의 새 수익 창출 기회 제공 등을 투자유인 요소로 보기 때문에 앞으로 동북3성의 대북한 인프라 사용권 취득을 위한 투자와 지하자원 확보를 위한 투자 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또 제조업과 유통업에 초점을 맞춘 현지시장개발형 투자도 늘어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제 도적으로 북 중 경제관계는 중국의 중앙정부, 동북3성 지방정부, 기업 등 상이한 층위의 주체들의 상이한 목표와 전략 등이 복잡하게 얽혀 142_ 정의준, 동북아 경제이슈: 최근 중국의 대북투자 동향 분석, 산은조사월보, 제 616호 (한국산업은행, 2007) 참조. 143_ 그러나 북한의 각종법제 미비, 시장경제의 미성숙, 현금지불능력 부족, 외환교환의 규제, 정책의 투명성 결여, 대량의 밀수품 유입 등을 투자 제한요인으로 인해 대부 분의 투자는 자원개발을 위한 인프라 투자가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에 대 한 투자가 아직까지 투자에 대한 보상으로 개발권을 취득하거나 사용권을 획득하 는 등의 보상무역과 합작투자 위주로 진행되고 있으며 광물 등 자원분야에 집중적 으로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대해서는 주장환, 중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구상: 36호 문건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정의준, 동북아 경제이슈: 최근 중국의 대북투자 동향 분석, 참조. 10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7 있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북핵을 억제하고 지역 의 안정을 추구하는 지원정책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중국 동북3성 지방정부는 지방경제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변경 무역 확대와 연계한 인프라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의 민간기업은 철저 한 상업적 수익을 목적으로 지하자원개발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기 때 문이다. 144 후진타오체제의 대동북아 한반도전략은 다음과 같다. 후진타오체제 출범 이후 중국은 북핵문제 해결, 러시아와의 전략적 제휴, 동북지역 경제부흥의 필요가 등장하며, 미주와 유럽연합에 이어 동북아를 제3의 지각판(Lithosphere Plate)으로 간주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전략적 관 심을 투사하며, 위험분산전략(Hedging Strategy)을 동북아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아안보정책 목표는 첫째, 제로섬게임을 피 하고자 한다. 둘째, 지역 내에서 갈등과 모순을 피하면서 상호 신뢰를 추구한다. 셋째, 경제무역, 에너지, 투자 등의 영역에서 협력을 강화한 다. 넷째, 냉전의 잔재인 군비 확산, 역사 인식, 영토 분쟁 등을 합리적 으로 해결하면서 동북아의 경쟁력을 높인다. 다섯째, 북한 핵문제를 일 방적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처리한다. 여섯째, 비전통적 안보 영역을 강 화하는 데 있어 전면적으로 협력한다. 일곱째, 동북아 지역협력을 강화 하는 데 있다. 145 중국의 대한반도정책기조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 북한체제의 붕괴방 지,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 남 북 관계 개선과 평화 통일 지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중국은 한반도 평화와 144_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핵과 북 중 경제관계 전망, KIEP 오늘의 세계경제, Vol. 7, NO. 22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7). 145_ 이희옥, 중국의 국가대전략 연구, p. 99 재인용.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1

118 안정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146 중국은 한반도 불안정이 자국 불안정뿐만 아니라 미국 또는 일본과 긴장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이해를 갖는다. 중국은 과거 임진왜란과 청 일 전쟁 그리고 6 25 전쟁에 개입하여 해양세력을 견제 한 바 있다. 중국은 북핵문제의 성격을 미국과 북한과의 전략적 이해와 안보이익 의 대립, 한국과 일본의 동맹이익과 자국이익 간의 모순적 선택, 중국 과 러시아의 지역책임과 지연( 地 緣 )이익에서 찾아 왔다. 147 따라서 중 국은 북핵문제 해결을 한반도 비핵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북한 의 합리적 안보 우려 해소라는 틀에서 작동시키고 있다. 중국은 기본적 으로 미국의 대북 군사위협과 체제붕괴 압력 때문에 북한이 핵카드를 사용한다고 보고, 북한체제에 대한 안전보장이 북한 핵문제의 우선적 인 해결 방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48 중국이 체제 안전보장에 기초 한 비핵화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북한의 체제위기는 중국의 위기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2 북한의 체제붕괴 는 북한의 난민을 양산시키고, 이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동해서 부담 이 될 수 있다. 3 북한의 체제붕괴는 한반도 전체에서 미국에 우호적 인 정권이 수립됨을 의미한다. 4 중국혁명과 한국전쟁에서 피를 나눈 혈맹에 기초한 전통적 의리관을 강조해온 중국은 북핵문제로 야기된 상황을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해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년 6월 6일 중국 베이징대에서 중국 내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 146_ 문대근, 한반도 통일과 중국 (서울: 늘품 플러스, 2009), p _ 이희옥, 중국의 국가대전략 연구, p. 155 재인용. 148_ 위의 책, p. 156 재인용. 149_ 한겨레, 2003년 4월 29일; 위의 책, pp. 156~157 재인용. 10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9 들이 대거 참석한 비공개 정세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북한의 2차 핵 실험과 향후 전망이었다. 발표자 대부분이 북한옹호론을 강하게 개진 한 것으로 알려진다. 150 쭤다페이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은 미국은 북한을 제재하는 데 중국을 앞장세워 악역을 맡기고, 궁극적으론 조선 에 친미정권을 세우려 할 것 이라며 북한제재론을 펴는 우파들이 있 는데 이는 미국의 계책에 빠져드는 것 이라고 비판하였다. 장홍량 중앙 민족대한 교수는 조선의 형제가 핵무기를 소유하는 것이 중국에 좋았 표Ⅳ-4 중국 대외연락부 간부 한반도 여론조사 질문사항 답변결과 비고 북한은 중국에 중요한 나라라고 생각하는가 예 75%, 아니오 27% 북 중은 아직도 혈맹관계인가 예 38%, 아니오 62% 한반도 통일은 중국에 도움이 되는가 예 44%, 아니오 56% 미국, 중국이 대만 문제로 충돌 시 북한은 중국 편인가 예 65%, 아니오 35% 북한의 핵실험은 중국에 유리한가 예 50.4%, 아니오 48.7% 미국이 이라크와 같은 한반도에서의 전쟁도발을 일으킬 것인가 예 50.8%, 아니오 49.2% 6자회담이 성공할 것인가 예 41%, 아니오 59% 북한 정권은 장기화할 것인가 예 66%, 아니오 34% 북한 세습 정권이 계속 유지될 것인가 예 41.8%, 아니오 58.2% 중국의 대북외교는 맞는가 예 50.5%, 아니오 49.5% 6 25 전쟁이 재발하면 중국은 참전할 것인가 예 26.4%, 아니오 73.6% 북 미 국교수립이 되면 중국에 위협이 되는가 예 64%, 아니오 36% 150_ 중앙일보, 2010년 5월 7일.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3

120 으면 좋았지 나쁜 일만은 아니다 고 했다. 사회자인 쉬량 베이징 외국 어대 교수는 북의 핵실험이 중국에 위해라고 과대 왜곡 선전하는 주 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고 발표했다. 그의 요약 내용은 북 제재 반대, 수교 60주년을 기해 북 중 관계 더욱 강화, 북에 대한 어떠 한 타격도 불허, 북한정권의 붕괴 불원 등의 요결이 들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내용에는 북한이 서방의 패권에 맞서 핵무장 국가가 되는 것 이 오히려 중국에 유리하고 동북아의 안정성을 증강시키는 데도 도움 이 될 수 있다 라는 말로 종료했다. 이같이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북한 의 핵무장에 대해 6 25 전쟁 당시 북 중 관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항미 같은 말만 부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51 그러나 조호길 교수 같은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과 중국 관계가 가까워 보이지만 공식적 채널 외에 인적 네트워크가 안 만들어졌다.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 북한이 중국에 배신감을 느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북한주민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은 1996~1997년 중국이 보인 냉담함에 크게 실망했다. 당시 지린성에는 대풍이 들었다. 근데 미국(50 만 톤)보다 적은 40만 톤을 지원했다. 그것도 식용 아닌 사료용 으로. 당시 북한은 몹시 분노했다. 152 그러나 중국은 2차 북핵위기와 제2차 핵실험과 같이 북한의 행태가 자국의 국익을 현저히 침해할 때 설득과 강제력을 동원했다. 중국은 국익과 국제사회의 입장에 반하는 북한의 행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동맹적인 측면에서는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 때와 같이 북 중 혈맹의 모습을 보이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 151_ 송봉선, 중국을 통해 북한을 보다 (서울: 시대정신, 2011), pp. 56~ _ 위의 책,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1 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견지하고 있다. 153 핵문제에서 중국의 단기목표는 북한 비핵화이지만, 더 중요한 장기 목표는 안정된 친중정권 고착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중국 은 북핵문제가 근본적으로 북 미 양자 간 풀어야 할 현안이기 때문에 중국의 역할은 제한적이라고 판단한다. 중국은 북핵문제의 근본적 해 결보다는 6자회담을 통해 안보불안을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중국은 중국식 개혁 개방 모델의 북한 이식이라는 보다 근원적이 고 장기적인 전략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은 북한체제의 안정과 친중체제의 정착을 노리고 있다. 중국에게 있어 북한은 단기 미시적 면에서는 부담 인 동시에 장기 거시적인 면에서 전략적 활용자 산 이다 김정일체제의 인식과 대응전략: 중국활용전략과 김정은 후계체제 모색 가. 개혁 개방과 과학적 발전관에 대한 입장: 중국 업고 나가기 북 중 간 관계가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북한의 대중 경제협력 역시 급속히 확대되었다. 2004년 4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 이후 북 중 간의 경제관계가 단순한 교류의 차원을 넘어 제 도적 협력을 모색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당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경제협력을 논하는 과정에서 중국정부는 중국기 업이 북한과 다양한 형태의 호혜협력을 행할 것을 적극 장려한다는 입 153_ 위의 책, p _ 위의 책, p. 60.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5

122 그림Ⅳ-2 북한의 대중국 비중 추이 155 (단위: 백만 달러) 장을 표명했다 년 10월 후진타오 주석은 북한을 방문하면서 양국관계가 삼신 ( 三 新 : 새로운 시기, 새로운 정체, 새로운 수준) 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 다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새로운 시기와 새로운 정세는 대내외적 상황 변화에서 새로운 북 중 관계가 다방면에 걸쳐 상호의존이 심화되는 관 계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157 이러한 북 중 관계의 발전은 2001년 이후 북한의 적극적인 대중관계 강화 노력이 중국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 가시화된 것으로 평가할 수 155_ 이종운, 북 중 접경지역 중국업체의 대북 거래관행 분석, KIEP 오늘의 세계경 제, Vol. 9, No. 27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9), p _ 신상진, 후진타오 집권 초기 중국의 대북정책 결정요인 분석,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1호 (북한연구학회, 2006), p _ 이희옥, 중국의 대북한정책 변화와 함의: 동북4성론을 포함하여, 현대중국연 구, 제8집 1호 (현대중국학회, 2006), pp. 8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3 있다. 한편 2001년 이후 미국의 강경한 대외정책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마찰을 가져왔다. 따라서 이 시기의 북 중 간 협력 강화는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2005년 후반기부터 북한의 위폐 및 인권 문제를 중심으로 대북 압박 이 가속화되면서 중국의 개방지역을 둘러본 김정일 위원장의 행보는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를 북 중 경제관계 확대를 통해 돌파하려는 의지 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의 최대 교역상대국은 중국이나, 남한 역시 두 번째 교역상대국 이며, 북한 대외거래의 20~30%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은 남한과의 각종 교역에서 상당한 규모의 현금수입을 얻고 있으나, 이 수입은 고스 란히 중국과의 대외무역에서 적자를 보존하는 데 사용되는 실정이다. 과거 일본인 납치문제로 불거진 북 일 교역의 중단은 남 북 교역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남 북 교역이 중단될 경우, 북 중 무역이 활성화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다시 말해 남 북 교역의 중단 및 감소는 북 중 무역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연쇄효과, 즉 남 북 교역 중단 남한으로부터의 경화수입 감소 대 중 결제수단의 부족 대중 수입능력 약화 북 중 무역 정체 타국 가로의 거래이전 애로 전체교역 침체 의 악순환을 걸을 수 있기 때 문이다. 158 이에 따라 중국은 2008년 2월 21일자로 중국 변경무역의 70% 이상이 거래되는 단동지역의 대북 무역을 위안화로 결제하기 시 작했다. 159 이는 중국경제영향권으로의 편입을 염두에 둔 조치로 볼 158_ 이석, 대북 경제제재의 효과: 남 북 교역 북 중 무역으로 대체가능한가, KDI 북한경제리뷰, 5월호 (한국개발연구원, 2010), pp. 4~7. 159_ 북 중 무역은 중국의 기준에 따르면 일반무역, 변경무역, 무상원조, 가공무역, 보세무역, 기타 등 6가지 형태로 구분되나, 제일 큰 비중은 변경무역 과 보세무 역 이다. 변경무역은 호시무역 과 변경소액무역 으로 나눠지는데, 호시무역은 변경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7

124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주체의 고립경제체제를 걸어왔던 북한에게는 오히려 체 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다. 2009년 북 중 수 교 60주년을 맞아 이루어진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10.4~6) 당시, 중국 은 경제원조에 관한 교환문서, 경제기술협조협정, 소프트웨어산 업분야 교류협조 양해문, 중국 관광단체의 조선관광 실현에 관한 양 해문 등 일련의 주요한 합의에 서명한 바 있다. 160 중국은 국제사회의 제제국면 속에서도 양국 간의 관계가 건재함을 내외적으로 과시하는 동시에 북한의 경제협력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 주었다. 북 중 관계의 강화는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데 제한적이나마 기여 할 것이다. 중국이 동북3성 개발을 위해 북한의 대외개방 확대와 안정 적 환경을 희망하고 있고, 북한도 2012년 강성대국 실현을 위해 중국과 의 경협을 희망하고 있는 바, 향후 북 중 경협은 활성화될 전망이다. 다만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국면을 고려하면, 중국의 중앙정부가 적극 적으로 나서기보다 6자회담과 연계한 신중한 접근을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북한도 신의주, 나진-선봉 등 북 중 접경지역을 중 심으로 한 경협의 활성화에만 관심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북 중 협력 강화는 북한의 전면적인 변화나 개혁 개방정책의 수행에는 제한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된다. 북 중 관계의 강화는 6자회담 의 동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겠지만, 북핵문제의 해결을 지연하는 측 면도 내재해 있다. 상기 도표에서 보듯, 2010년 현재 운영되고 있는 특구는 개성공단이 지역 주민들이 생활용품을 거래하는 무역을 의미하고, 변경소액무역은 권한을 부 여받은 기업이 세관을 통해 거래하는 것을 일컫는다. 160_ 연합뉴스, 2009년 10월 5일. 10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5 그림Ⅳ-3 북한의 경제특구 현황(예정지 포함) 161 유일하다. 금강산관광지구도 2008년 박왕자 씨 피격 이후 중단되었다. 최근 북한이 검토하고 있는 평양, 남포, 원산, 함흥, 김책, 청진특구 등 은 각 지역의 자원과 지리적 이점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선정한 것으 로 보이나 북한체제가 완전한 개혁 개방의 길로 가지 않고, 핵폐기를 전제로 한 북 미 대화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2011년 북 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6자회담의 재개에 찬 성하여, 국제사회 일각에서 제기된 6자회담 무용론을 견제하면서 대화 재개에 관한 논의를 유지시키고자 하였다. 북한은 1980년대 이후, 경제 개혁과 관련해 일보전진, 이보후퇴라는 사이클을 반복해 오고 있다. 즉 부분적인 개혁과 개방이 시도되기는 하나, 여기서 발생되는 부작용이 161_ 한국일보, 2010년 3월 8일.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09

126 다시 계획경제적 통제의 강화를 초래하곤 하였다. 한편 중국의 화평발전에 입각한 대국외교의 추진 과정에서 북한과의 마찰도 발생했다. 북 중 양국 간의 불신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응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더욱 적극적으 로 추동하기 위해 무엇보다 역내 질서의 안정을 원했던 데 비해, 체제 내외로부터의 절박한 위협에 직면했던 북한으로서는 경제적 위기 극복 못지않게 비록 위기를 감수하더라도 핵개발이라는 강경책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동맹국으로서 서로에 대한 기대감의 차이와 비타협적인 태도였다. 양국은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면서 서로 상반된 요구만을 강요했던 것이다. 중국은 폐쇄정책 을 고수한 채 핵개발을 통해 국제적 긴장을 야기하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었고, 북한 역시 형제적 우의를 외면한 채 강대국 중심주의 논리만 을 앞세워 자신을 압박하는 중국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 갈등은 사실 제2차 북핵위기 발생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북한 이 미국과의 직접대화만을 고집함으로써 협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 자, 중국은 2003년 2월 말 기술적인 이유를 들면서 대북 원유 파이프 라인을 3일간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 중국은 북한에 핵문제로 인해 전쟁이 야기되더라도 중국은 북한을 지원할 명분이 없다 고 경고 했다. 그러자 북한은 중국의 처사에 반발하여 예정된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공식 방북 일정을 무기한 연기시켰는데, 이것은 중국의 대미 편향적 태도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불만의 표시였던 것으로 관 측되었다. 162 북한은 중국이 미국에 굴종하여 대북 압박과 제재의 선봉 장 역할을 다하면서 6자회담을 대미관계 개선 및 국제적 위상 강화 수 162_ You Ji, Understanding China s North Korea s Policy, China Brief, Vol. Ⅳ, Issue 5 (March 2004),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7 단으로 활용하는데 대해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양국 간의 갈등은 2006년 1월 김정일-후진타오 간의 회담에서도 나 타났다. 이 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북한이 6자회담 복귀조건으로서 제시했던 금융제재 해제 요구를 포기할 것을 권고했으며, 이에 김정일 위원장은 만일 미국의 금융제재가 지속된다면 북한은 붕괴될 수도 있 을 것 이라고 답변했던 것이다. 163 그런데 이 답변의 행간에는 당시 북 중 관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김정일 위원장은 별다른 경제원조도 없이 금융제재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북 한의 6자회담 복귀만을 종용하는 중국 측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회담 기간 중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 강상춘이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체포된 사건은 그에게는 실로 모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후진타오 주석의 권고 를 받아들 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이에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은 2006년 7월 초 방북 한 미국 측 인사에게 중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있다 고 하면서 중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 라고 164 말했던 데서도 단 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또한 지난 2007년 10월 남 북 정상선언 제4항 을 둘러싼 논쟁은 명백히 북한 측에 의한 중국배제 움직임으로 해석되 고 있다. 즉 이 선언 은 종전선언의 주체를 굳이 3자 또는 4자 라고 명기함으로써, 만일 3자 일 경우 한 중 양국 중 어느 국가가 배제될 것인지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 163_ North Korea could collapse if U.S. sanctions continue (11 February 2006). < (검색일: ). 164_ 중국 믿을 수 없다, 중앙일보, 2006년 7월 18일.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1

128 은 우리가 대상이 아닌데 3자, 4자라는 표현을 썼겠느냐? 라고 반문 함으로써 한국이 배제 대상일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면서, 3자 또는 4자 라고 선언문에 넣자는 제안은 먼저 북측에서 나온 것 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북한의 중국배제 의도를 확인했던 것이다. 165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그 동안 중국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말해주는 동시에 중국의 對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속내 를 굳이 감추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러한 불신은 단기간 내에 해소될 수 없다는 점에서, 양국관계는 앞으로도 현재 이상 의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향후 국제정세 변화 등 적절한 계기에 의해 그나마 양국을 잇는 최소한의 이해의 기반마저 침해받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불신과 의심은 교호적으로 증폭되어 결 국 관계재정립의 기폭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이와 같이 뿌리 깊은 대중 불신에도 불구하고 체제보위와 경 제발전을 위해 중국의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핵문제로 인한 국제적 고립의 심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을 업고 나가는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한다. 166 이는 곧 중국의 간섭과 정치적 영향력을 철저히 견제하면서도 중국의 경제 력과 외교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대중전략은 중국 의 대한반도 이해관계를 체제보위를 위해 역이용하는 방법으로서 구체 165_ 당시 남 북 정상회담 행사에 동행했던 김근식 교수 역시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배제하는데 관심이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 고 주장함으로써 북한의 고의 적인 중국배제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3자 또는 4자 표현은 북이 제안, 조선일보, 2007년 10월 6일. 북한의 그러한 태도에 대해 중국외교부는 중국 은 한반도 정전협정의 주요 서명국으로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에 관한 문제에 당연히 중요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 이라고 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China s role in Korean issue cannot be neglected (10 October 2007). < (검색일: ). 166_ 연합뉴스, 2006년 11월 7일. 11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9 화되고 있다. 즉 중국은 김정일체제의 붕괴가 북한의 소멸과 한반도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김정일 정권의 몰락을 방지 하고자 할 것이며, 따라서 미국의 전면적인 대북 압박을 무력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략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167 북한의 대중전략은 이와 같이 첫째, 체제보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둘째, 국제무대에서는 중국을 등에 업고 자신 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셋째, 경제분야에서 중국과 각방으로 협력한다 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특히 체제보위를 위해 중국을 이용한다는 전략은 경제분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기본적인 대 북정책은 북한경제를 회생시켜 체제붕괴를 방지하면서도 자국의 경제 적 실리를 도모하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대북 경제지원을 통 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장차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고자 한 다. 현재 북한의 경제상황은 중국의 지원과 협력이 중단될 경우 더이상 체제의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대중 의존도가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적극적인 간섭보다 점진적 단 계적인 정책수단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하며, 168 이를 위해 벌써 여러 차례 개혁 개방정책을 수용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 중국식 개혁 개방정책을 그대로 받 아들이기보다 점진적이며 부분적인 변화를 추구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의 지속적인 경제지원과 투자유치에 초점을 맞추는, 즉 덜 모험적이고 더 실리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북한은 이와 같이 경제관계에서는 중국을 활용하는 전략을 추구하면서도 이것이 대중 의존도 확대로 이 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다. 북한이 중국의 거듭되는 경고와 167_ 현성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 p Ⅰ Ⅱ Ⅲ Ⅳ Ⅴ Ⅵ 168_ 위의 책, pp. 3, 348.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3

130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을 감행하는 것 자체가 중 국의 영향력 행사에 대한 견제심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이 그토록 핵무기에 집착하고 있는 다른 이유도 중국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화평발전( 和 平 發 展 )에 대한 입장: 갈등적 편승전략 북한은 탈냉전 이후부터 중국과 전면적인 협력 지지관계 대신 갈등 적 편승전략을 통한 현안별 지지정책을 펼쳐오고 있다. 즉 중국과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독자적인 행보를 기꺼이 선택해 온 것이다. 169 중국의 화평발전에 대한 태도에서도 유사한 행태를 볼 수 있다. 즉 화평발전에 기본적인 동의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그것이 친서방적인 행보로 나아가고 북한의 안보 문제를 방기할 수 있을 경우 북한의 완충지대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미국 및 서방의 위협을 경고하고 북 중 관계의 전략적 이해관계의 일치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2006년 북 미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조 짐이 나타나자, 중국은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비공식 6자회 담을 추진케 하고, 6월 28일 원자바오 총리는 중국을 방문한 하워드 호주 총리와의 회담 때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공개 천명했다. 170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일본의 군사 력 증강, 미 일 동맹 강화, 북 미 및 북 일 관계 악화를 초래하고 북핵 6자회담 재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등 한반도 및 동북아정세를 169_ 김예경,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대응전략, p _ 연합뉴스, 2006년 6월 28일. 11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31 악화시킬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대포동 2호를 포함해 7발의 단 중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171 북한은 7월 6일 미사일 발 사를 자위적 국방력 강화 를 위해 북한군대가 정상적으로 진행한 군사 훈련의 일환 이라고 규정하고, 주권국가로서의 합법적 권리이며, 애당 초 그 어떤 국제법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고 172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 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미국과 일본이 진행하는 미사일 발사는 합법적이고 우리가 자 기를 지키기 위해 진행하는 미사일 발사 훈련은 비법적이라는 것은 날강도적인 논리 미국의 승인만 받으면 미사일을 쏘든 핵실험을 하든 묵인하고 유엔에 상정조차 되지 않는 것이 오늘 의 현실 약육강식의 법칙이 난무하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오 직 힘이 있어야 정의를 수호할 수 있게 돼 있다. 지나온 역사 와 오늘의 현실은 오직 자기의 강력한 힘이 있어야 민족의 존엄 과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상이 변한다고 하여 우리의 원칙도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면 그것은 개꿈(일 뿐이다). 173 이러한 북한의 입장은 중국지도부로 하여금 김정일에 대한 부정과 불쾌한 인식을 갖게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기존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고 보고, 북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분명히 전달할 필요성을 갖게 됐다. 중국지도부는 설득과 보상의 정책으로는 북한의 벼랑끝전 술을 중단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인민대 학 스인홍( 石 殷 弘 ) 교수는 중국은 북한의 행동을 크게 못마땅해 할 171_ 중앙일보, 2006년 7월 5일. 172_ 조선중앙통신, 2006년 7월 6일. 173_ 조선중앙통신, 2006년 7월 16일.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5

132 것 이며 중국이 앞으로 비교적 강경한 조치를 내놓아 북한에 압박을 가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 주장했다. 174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사일 발사(7.4)에 이어 핵실험을 예고 (10.3 외무성 성명)한 후,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 (10.9)했으며 직후에 다음과 같은 성명를 발표했다. 미국이 반공화국 고립 압살 책동이 극한점을 넘어서 최악의 상황을 몰아오고 있는 제반 정세 하에서 우리는 더이상 사태 발전을 수수방관할 수 없게 됐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조선반 도에서 우리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로 이어지는 비핵화가 아니라 조 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선반도 그 주변에서 모든 핵위협 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비핵화(이다) 175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후, 중국 외교부는 2시간 20분 만에 성명을 통해 북한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핵실 험을 했다 고 비판했다. 제멋대로라는 표현은 중국정부가 매우 큰 충격 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176 후진타오 주석을 정점으로 한 당 정치국 상 무위원은 제16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6중전회) 기간에 임시 긴급 회의를 소집, 중앙외사영도소조(소장 후진타오)와 외교부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하고 이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 신속 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유엔제재 이행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대북 제재 결의안(1718호)이 통과된 뒤, 유엔주재 중국대사 왕광야( 王 光 亞 )는 한반도 비핵화 실현 촉진, 한반도 및 동북 174_ 연합뉴스, 2006년 7월 6일. 175_ 조선중앙통신, 2006년 10월 3일. 176_ 이계란, 탈냉전기 중국의 대한반도정책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박 사학위논문, 2007),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33 아 지역 평화 안정 수호라는 대세에 따라 중국 측은 안보리가 마련한 단호하고 적절한 반응에 찬성했다 고 중국 입장을 설명했다. 류젠차오 ( 劉 建 超 ) 대변인은 10월 19일 유엔 회원국은 1718 결의 이행에서 의 무와 책임을 담당해야 하며 결의안 이행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국제 사회는 북한에서 핵실험은 잘못된 선택이며, 국제사회로부터 반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명기해야 한다. 북한은 반드시 국제사회의 호소에 긍정적 반응을 보여야 하며, 빠른 시일 내에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한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은 유엔의 각종 결의안을 성실히 이 행할 것이며, 1718 결의안을 엄격히 준수할 것 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 속에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엄중한 문책 과 제재의 동참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우려 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반대했다. 177 북한은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 때와 마찬가지로 핵 실험을 감행했다. 미사일은 미국의 국경일을 겨냥해서 발사한 양상이 고, 핵실험은 중국의 국경일(10.10)을 겨냥해 강행(10.9)한 양상이다. 더욱이 이 때 중국은 16기 6중전회를 개최(10.8~10)하여 후진타오의 집권이념을 논의하고 있던 시기였다. 홍콩 시사주간지 亞 洲 週 刊 은 김정일이 중국 경축행사에 악의에 찬 선물 을 보냈다고 평가했다. 핵실 험 실시계획을 러시아에는 2시간 전에 통보한 반면, 중국에는 불과 20 분 전에 알려주었다는 점도 북한이 중국을 특수관계에 있는 혈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78 이후 중국지도부는 북한을 맹방이 아니라 중국의 국익을 저해하는 트러블메이커로 인식하게 됐 고, 무조건식으로 북한을 감싸주는 정책을 더이상 채택하지 않게 됐 177_ 人 民 日 報, 2006 年 10 月 10 日. Ⅰ Ⅱ Ⅲ Ⅳ Ⅴ Ⅵ 178_ 김예경,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대응전략, pp. 79~87.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7

134 다. 179 한편 북한은 핵보유국이 된 이후 자신들이 세계의 최강국의 대열에 올라섰으며, 미국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180 중국 또한 북한이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이 됨에 따라 과거처럼 중국에 안 보를 맡기면서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181 그렇다면 북한은 왜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실험을 강행 한 것일까? 또한 미사일 발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북한의 대중전략은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도 2006년의 6자회담이 9 19 공동선언문의 발 표 등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금융제재를 취했던 경색국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상황에 서 중국은 북한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북한과 공동 대응을 취한 것 이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 부분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대포동 미사일 실험 직전에 중국은 미국과 위폐, 돈세탁, 마약, 테러 등과 관련된 국제범죄에 공동대처하기로 양해각서를 맺었다. 아울러 2006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 과정에서 약속받았던 50억 달 러 규모의 자금 지원이 집행되지 않은 상황도 중국에 대한 실망과 불신 을 더욱 심화시켜주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179_ 신상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시각 변화와 북 중 관계: 중국은 북한을 미국의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는 완충지대 로 인식, p _ 김봉호, 선군으로 위력 떨치는 강국 (평양: 평양출판사, 2005), p _ 핵무기가 탄생한 이래 국제관계에서 핵보유국가에는 군사력을 발동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국은 북한을 쉽게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가령 핵무기 를 갖지 못한 이라크나 유고 연방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미국이 공격을 감행했지만 핵을 보유한 국가에는 공격을 자제해 왔다는 사실도 북한 핵개발의 주요 동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沈 丁 立, 朝 鮮 試 驗 核 武 器 之 考 慮, 靑 年 參 考, 2006 年 9 月 5 日. 11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35 한편 다자안보협력체 및 공평한 다자무역체제를 수립한다는 조화세 계에 대해 북한은 소극적인 공조를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안 보관의 다자질서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1995년 비정부 차원의 다자안보협력회의인 CSCAP, 2000년에는 제7차 ARF 회의에 서 2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기는 했지만 북한은 일관되게 다자안보체 제에 회의적이었으며 무용론을 주창했다. 182 그러나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전개된 2005년 9 19 공동성명과 2007 년 2 13 합의 조치를 통해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을 논하는 실무그룹인 동북아 평화 안보체제 실무그룹 의 설치에 동의하고 동북아 다자안보 논의구조에 참여하게 된다. 점차 전향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에 북 중 협력이 보다 견고하게 전개되면서 중 국의 대외전략과 어느 정도는 보조를 같이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실무그룹에 참여했다고 해서 다자안보협 력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비약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주의, 특히 북 미 간 양자협상에 대한 북한의 강 경한 주창을 고려한다면, 다소의 변화 조짐이 나타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북한이 미국에 의한 대북적대정책의 종식과 대미관계 정상 화에 절대적인 집착을 견지하고 있지만 다자안보체제의 효과에 대한 전략적 평가에 따라 입장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은 다자 간 체제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던 중국이 2000년대에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축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한 것 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82_ 이에 대해서는 이수훈 박병인, 동북아 안보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인식, 참조.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19

136 다. 소결: 김정일체제 강화와 김정은 후계체제 모색 북 중 관계는 1차 북핵실험( )과 2차 북핵실험( )으 로 갈등-냉각-회복하는 수순을 반복했다. 2006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와 핵실험 이후 소원화 경향을 보이던 북 중 관계는 2007년 2월의 2 13 합의와 2007년 3월 김정일의 중국 대사관 방문 등으로 회복세를 타게 된다 년 6월 17~19일까지 제5세대 지도부 핵심인 시진핑 국 가부주석이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공식 방문했다. 시진핑은 중 조 우의는 양국의 전세대 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만들어 배양한 것 이고, 양국 인민의 피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며 신세기로 진입한 것 이라고 천명했다. 김정일은 이에 대해 북 중 우의는 혁명세대가 우리 에게 남겨준 보배로운 유산이다 고 화답하고, 양국관계 개선을 모색했 다. 2009년에는 북 중 수교 60주년을 맞이해 북 중 우호의 해 를 선포 하고, 김영일 총리가 3월 방중하여, 양국관계 증진을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2차 핵실험 감행으로 다시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는 중국 후진타오 정부가 추진해 왔던 대북 전략적 협력관계 구축 노력이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은 천즈리 전인대 부위원장의 방북을 전격 취소하고, 주중 북한대사를 불러 강력히 경고 했다. 시진핑 국가부주석도 북한이 더이상 사태를 악화해서는 안 된 다 고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이후 중국이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 의안 1874호에 찬성함으로써 북 중 관계는 최고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은 자국의 유엔차원의 대북 제재 참여만으로는 북 핵폐기가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북 중 관계만 악화시킬 뿐, 중국의 183_ 국가정보원, 북한 중국 관계 (서울: 국가정보원, 2007). 일반적으로 북 중 관계는 6자회담의 전개 방향에 따라 재정립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2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37 전략적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대북 협력 확대를 제 시하였다. 10월 원자바오 총리의 답방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을 통 해 양국은 교착상태에 있던 양국관계를 개선하고, 6자회담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를 모색했다. 184 이런 양국의 노력 속에서 최근 북 중 관계는 더욱 포괄적인 협력관계 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천안함 사건( )과 연평도 포격사건 그 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두 차례 방중(5월, 8월)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010년 천안함 사건에서 유엔안보리와 의장성 명 채택 과정에서 공격주체 명시 거부, 연평도 사건에서는 양측의 냉 정, 자제 요청, 이어서 김정은 후계체제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통해 양국 간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북 중 간에 마찰과 갈등도 드러났다. 천안함 조 사결과 발표(5.20)를 전후하여 한국과 미국의 대북 압박이 강화되자, 북한은 대중관계 강화를 통해 이에 대응하고 경제난을 해소하려는 전 략적 선택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5.3~7)을 통해 중국의 정치외교 경제적 지원을 모색했다. 이때 후진타오 주석은 덕담의 환영사를 마친 뒤, 5개 분야 협력을 건의하고 싶다며 김정일 위원장을 압박했다. 특히 주목할 사항은 전략적 의사소통 강화 이다. 1950년대 이래 상호내정 불간섭 등 평화공존 5원칙을 대외정책 기본방침으로 지속해 온 중국이 184_ 원자바오( 溫 家 寶 ) 중국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사전 준비했던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개발 사업에 대한 합의 문서 체결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북한이 6자회담 복귀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데 따른 불만이 반영 된 것 같다 며 대신 중국은 2천 100만 달러 상당의 식량 무상원조만을 실시하기로 했다 고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회담에서 북 미 회담 결과를 보고 6자회담을 포함한 다자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 고 대미관계 개선이 6자회담의 전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중국 측은 종전 태도와 변화가 없다 고 판단하고 사전에 준 비한 사업 합의 체결을 일단 중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朝 日 新 聞, 2009 年 10 月 17 日.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1

138 금기를 깨고 북한의 내정과 외교상 중대한 문제는 미리 알려줄 것과 당 국가 통치경험을 소통하자고 요구한 것은 매우 강한 요구이기 때문 이다. 또한 원자바오 총리는 과거 북한의 입장을 고려해 사용하지 않던 개혁 개방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은 예정보다 하루 먼저 귀국한 후, 핵융합반응에 성공했다고 주장(5.12)하였다. 북 한은 원자폭탄뿐만 아니라 수소폭탄도 개발했으니 알아서 대응하라고 중국과 국제사회에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제4차 방중(2006.1)이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 발사(7.5)와 1차 핵실험(10.9) 을 단행한 것을 연상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의 대북 압박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띠 자, 중국은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7.9)을 중재한 후, 천안함국면 전환 및 출구전략으로서의 6자회담 조기재개를 위해 북한과 협력을 강화했 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초청하여 북한의 정권안보와 중국 의 국가안보를 함께 확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핵문제에 대 한 국제적 압력을 극복하고,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의 경제지원을 받아내며, 무엇보다도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2007.8) 을 겪은 후,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 강화와 더불어 김정은 후계체제 구 축을 진지하게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한은 중국의 지지 하에 44년 만에 열리는 당대표자회를 통해 후계구도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 다. 중국 또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통해 동북아 안정 확보 및 대북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고, 창지투 개발과 나선지대 개발을 연계 함으로써 중국의 동북3성 발전계획을 더욱 강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 었다. 그 결과 김정일 위원장의 2차례 방중을 통해 양국은 전통 우호관계 의 확대, 대를 이은 발전 등을 강조하며 경제 및 정치외교를 넘어 안 12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39 보 분야에까지 긴밀한 협력을 확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정은 후 계체제의 안착을 통한 북한체제의 안정유지와 천안함 사건 이후 강화 되고 있는 한 미 동맹에 대한 북한과 중국의 공동대응이 전략적으로 수렴된 결과로 평가된다. 185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진행된 한 미 동맹 강화는 북한과 중국의 교류를 정치 군사 경제 모든 차원에서 증대시켰 다. 중국은 한반도 안정적 관리차원에서, 북한은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 착을 통한 대내외적 위기극복차원에서, 상호 간의 협력과 지원이 절실 한 상황이었다. 향후에도 당분간 이같은 양국 협력기조는 지속될 전망 이다.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착은 북한의 붕괴 방지와 안정 유지라는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북한도 3대 세습의 연착륙을 위해 중국에 의 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6 한편 북한은 1990년대 초반부터 핵카드를 가지고 미국과의 거래를 지속적으로 시도해 왔고, 이 점이 중국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2007년 2 13 합의 이후, 북한의 김계관이 미국을 방문해 미국 내 외교전문가들 과의 대화를 가진 바 있는데, 여기서 김계관은 미국에게 중국을 견제하 려면 북한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 다고 한다. 187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동북아 정책 성패의 관건적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에서 보듯 북한의 돌발사태에 의한 한반도정세의 불안정성과 불확 실성에 적극 대응하고자 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후인 2010년 6월 24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 중 조약이 북 중 관계의 발전, 그리고 한반 185_ 통일연구원, 통일환경 및 남북한관계 전망: 2010~2011 (서울: 통일연구원, 2010), pp. 62~ _ 위의 책, p _ 지오 찬성 저, 김태완 역, 중국의 외교정책 (서울: 오름, 2001), p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3

140 도 평화와 안정에 적극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고 하여 수정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북 중 관계는 갈등과 변화의 와중에도 일정한 이익균형을 추 구하는 지속성을 보여왔다. 왜냐하면 첫째, 중국이 개혁 개방정책을 추 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일당체제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 둘 째, 북한에게 중국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지지와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라는 점, 셋째, 북 중 양국이 여전히 한 미 일 3국에 대한 불신과 안보이익을 공유하고 있는 점, 넷째, 북한이 식량, 원유 등 전략물자를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88 그러므로 북한 입장에서는 최대 맹방국인 중국의 부상이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위협을 완충시키는 효과를 최대한 누리고 자 한다. 비록 북한이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예속을 경계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는 체제의 위협 및 붕괴 방지라는 절대 명제에 비추어 보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실제로 중국이 화평발전의 전략 속에서 해외 진출 및 협력 확대전략을 주창하고 2004년부터 북한을 포함하여 러시 아 등 동북지역과 맞닿은 접경 국가들과의 교류활성화를 추진하기 시 작한 진흥동북( 振 興 東 北 等 老 工 業 基 地 ) 정책, 이와 관련하여 2005년 공 개된 36호 문건 등 일련의 전면적인 경제대국화 움직임과 관련해서도 북한은 중국의 부상이 세계의 일극화를 견제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전 을 도모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등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주었다. 189 한편 김정일은 1983년 당 중앙위 비서 신분으로 처음 중국을 방문한 188_ 이희옥, 북 중 관계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 (서울: 세종연구소, 2008), p _ 로동신문, 2005년 10월 31일, 2005년 11월 2일, 2006년 7월 11일자 사설 등이 대표적이다. 12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41 이래, 2011년 5월까지 모두 8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지난 2000년 남 북 정상회담 개최 직전에도 김정일 위원장은 베이징 표Ⅳ 년 이후, 북 중 정상 상호방문일지 일자 방북자 방중자 비고 2000년 5월 29~31일 2001년 1월 15일~20일 2001년 9월 2004년 4월 19~21일 2005년 10월 28~30일 2006년 1월 10일~18일 2009년 10월 4~6일 2010년 5월 3~7일 2010년 8월 26~30일 2011년 5월 20~27일 - -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 원자바오 중국 총리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쩌민 중국은 개혁 개방으로 국력이 증대, 덩샤오핑노선이 옳았다. (방중 후 1차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개발사업 본격화) 상하이 천지개벽 (7 1 경제관리 개선조치 시행) - 북 중 관계 16자방침 전달 김정일 국방위원장 - 김정일 국방위원장 -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6자회담에 참가, 회담진전에 노력 (민족경제협력위 신설) 대북 20억 달러 지원 약속설 (6자회담 협력과 4개 발전방향) 약동하는 중국의 현실은 깊은 인상 (북 중 경제협력 강화, 그러나 대포동 미사일 발사 및 제1차 핵실험) 경제기술 협력협정 체결 (6자회담 복귀의사 표명) 양국 고위층 상호 왕래 지속 내정, 외교 등에 대해 전략적 소통 강화, 대규모 원조 요청 김일성의 동북3성 혁명유적지 방문, 창춘에서 후진타오와 정상회담 (경제교류 및 후계자) 후진타오 국가주석 및 원자바오 총리와 정상회담 6자회담 복귀 문제, 창지투 개발과 나선연동계획 협의와 식량원조 요구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5

142 을 방문해 중국지도부와 협의한 바 있다. 190 한국전쟁 발발 15일 전 김일성은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에게 대남 무력공격계획을 사전에 통보했고, 1991년 남 북 불가침합의서를 체결하기 전에도 중국을 방문 하여 덩샤오핑에게 남 북 관계 진전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남 북 간 접촉 등에 대해 북한은 사전에 통보하지 않는 경향이 점차 늘고 있다. 2011년 북 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북 중 우의를 굳게 지 키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결코 변치 않는 방침으로 삼고 있다 며 중 국은 북한과 더불어 양국관계를 발전시켜나가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 번영을 유지 촉진해나가고자 한다 고 지적하고, 이를 위해 고위층 교 류 강화, 당 국가 관리 경험 교류, 상호 이익이 되는 협력 확대, 문화 교 육 체육 교류 심화, 국제 및 지역정세와 중대 문제에 있어서 소통 협조 강화 등 5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후진타오 주석께서 양국과 양당 사이의 관계 발전을 위해 한 제안에 완전히 동의 한다 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북 중 간 정치적 경제적 협력체제는 북한 입장에서 중국의 외교정책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김정일 정권이 붕괴될 경우 중국 입장에서는 기존 정권 노선에 반대 하는 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즉 친중 일변도의 동맹관계가 청산 되고 친미 혹은 친남한 정부로 성격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91 물론 북한에서 친중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현 지배자에 의해 경제체제 190_ 신상진, 핵위기 발생이전 북한의 대외관계 개선정책과 중국의 대응, 인문사회과 학논문집, 제20집 (광운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03) 참조. 191_ 이태환, 한 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평가와 전망, 세종정책연구, 제6권 2호 (세종연구소, 2010), pp. 11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43 만 바뀌는 것은 중국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현재 북한지도부의 의도대로 김정은에게 정권이 넘 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국가 붕괴를 의미하며, 결국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통일된 한국의 의도는 중국의 책임대국화 성공 여부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변수가 된 다. 더구나 지금보다 북한의 경제적 위기가 심각한 상황으로 몰릴 경우 그것은 심각한 식량부족과 에너지난의 심화를 의미하며, 결국 난민 유 입 등 중국의 경제적 부담을 크게 높일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김정일 위원장 및 북한지도부의 중국 협력 강화는 바로 이런 중국지도부의 우려에 기반한 이해관계의 일치를 분명히 인 식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북한 입장에서 지정학적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원을 기반으로 한 대중협력체제는 체제보위 를 위해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향한 유리한 카드라고 볼 수 있다. 북한체제의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중국과 북한의 관 계강화는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을 감소시킴으로써 김정일 정권 및 김정 은 후계구도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전면 적으로 지속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북 중 관계 강화를 통해 북한의 후견 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북한체제의 경제적 군사안보적 생존에도 기 여할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효과에 대한 일정한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최근 전개되고 있는 북 중 경제관계 변화 추이를 분석하면 다음 과 같은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192 첫째, 북 중 경제관계도 과거와는 달리 북핵문제 해결의 진전 상황에 크게 영향받고 있다. 즉 1993년 북 192_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핵과 북 중 경제관계 전망, KIEP 오늘의 세계경제, Vol. 7, No. 22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7), pp. 12~13. Ⅰ Ⅱ Ⅲ Ⅳ Ⅴ Ⅵ 후진타오시대, 중국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27

144 한의 NPT 탈퇴로 촉발되었던 1차 북핵위기 당시 북 중 무역은 전년 대비 29.2%의 증가를 보여 북핵문제 악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적인 대북한 경제제재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했고,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의 전반적인 경제관계가 급격히 냉각하게 되었다. 당시 북 중 교역은 중국 의 대북 경제제재로 인해 성장률이 2~3개월 사이에 거의 0%로 떨어 지고, 대북 투자도 전무해지는 등 전반적인 경제관계가 북핵의 진전 상황 여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6자회담에서 북 핵 관련 2 13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대북 경제교류와 투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북 중 경제관계가 과거와 달리 북핵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 것은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전략 적 안보이익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반대로 북핵문제 해결이 진전될 때 북 중 경제관계가 급격히 증대되는 것은 두 나라의 혈맹적 유대관계가 아직까지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으 로 볼 수 있다. 128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45 Ⅴ.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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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1. 북한의 인식과 대응전략 평가: 지속과 변화 중국이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한 이후 북 중 관계는 국가전략의 목표 차이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92년 한 중 수교는 중국의 대한반도정책 조정과 관련하여 북 중 관계의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평가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미 국과의 외교적 군사적 경쟁에서 주변지역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중 요했고, 따라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도 아울러 높아졌다. 북 중 간 여 러 마찰요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이익에 대한 고려가 북 중 관계가 복원되도록 했던 것이다. 건국 이후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은 국제질서의 변화에 맞추어 부국강 병을 추진해 왔고 이를 정당화하고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국가 전략이념들을 제시하고 실천해 왔다. 덩샤오핑에 의해 제기된 개혁 개 방론 과 평화와 발전론 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시장경제 도입과 서구 국가들과의 교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국가전략이었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사태 이후 서구 국가들의 중국견제와 봉쇄에 대응하기 위해 덩샤오핑은 다시 도광양회 와 유소작위 라는 새로운 국 가전략이념을 창출하였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는 서구의 압력에 대 한 유연한 대응전략이며 유소작위 는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민족주의 정서를 반영하는 이념이었다. 1990년대 이후 현대적 의미로 새롭게 각 색된 중화민족주의의 등장은 유소작위 의 개념, 즉 현실적인 실천방향 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정치 경제적 개혁 개방에 대해 북한은 일정 수준 보 조를 맞추면서도 무엇보다도 체제 내부의 단합과 개방 압력 최소화에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31

148 우선순위를 두었다. 북한에게 절대명제는 경제발전보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경제난 속에서 도 끊임없이 집착해온 핵개발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북 한과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념갈등, 중국 개혁 개방에 대한 입장 차이, 미 중 수교로 인한 비방전 등 일정 정도의 갈등과 반목은 있었지 만 안보전략적 관점에서 북 중 관계는 여전히 견고한 협력체제를 유지 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제력 급부상과 군사력 증강은 중국위협론을 불러왔고, 이 에 대응하여 중국은 책임대국론을 주장하였다. 중국위협론이 등장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의 부상에 따르는 현대판 중화민족주의에 대 한 서구 국가들의 경계로 볼 수 있다. 장쩌민체제는 서구는 물론 주변 국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그리고 중국의 평화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 1996년에 신안보관 을 선보였다. 장쩌민체제에서 제기된 신안보관의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는 주변국들과의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것이 며, 이는 주로 지역다자협력체로 나타났다. 이런 중국의 부상에 대해 북한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과 의 이념적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양국 간의 친선관계를 확대시키려 했 으나, 중국이 한 중 수교를 선택하면서 사실상 북 중 관계는 1990년대 후반까지 경색국면을 맞이한다. 그 결과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심화되 며 경제적 어려움 또한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나 비록 일정 정도의 갈 등과 반목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중국과 긴밀한 대화 채널을 복원하면 서 김정일체제의 공고화에 기반해 북 중 협력 및 개혁 개방에 대한 비 판적 수용 속에서 나름대로 체제생존전략을 추구했다. 2003년 공식적으로 출범한 후진타오체제는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통 한 중국의 부상을 지향하고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국가전 13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49 략으로 2003년 11월 화평굴기, 2004년 4월에는 화평발전론을 표명하였 다. 이는 덩샤오핑의 평화와 발전, 장쩌민의 신안보관 을 계승한 것이 며, 대국주의적 정서가 내포된 개념이었다. 화평굴기의 굴기 는 중국의 부상과 중국이 아시아의 대국임을 국제사회에 다시 확인하려는 후진타 오체제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현대판 중화주의라 고 볼 수 있다. 화평굴기론 다음에 등장한 화평발전론은 이념상 화평굴 기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굴기 라는 표현 대신 발전 이라는 표현으 로 중국이 평화지향적임을 강조하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중국의 부상이 세계의 일극화를 견제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 전을 도모하는데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안보와 관련 하여 전략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독자적이고 대립적인 행보를 나타내어 갈등적 편승전략을 통해 현안별 지지 입장을 취할 것 임을 분명히 했다. 핵무기 개발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한 갈등과 마찰이 대표적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완충지대적 특성을 부각시켜 대중협력체 제를 끌어내어 체제보위뿐만 아니라 경제적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평 가할 수 있다. 기존의 북 중 동맹관계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의존관계임에도 불구 하고 상당한 대등성을 유지해 왔다. 북한의 전략선호에 있어 가장 경향 성이 높은 전략은 편승(Bandwagoning Strategy)이다. 한 국가가 편 승전략을 선택하는 목적은 강한 국가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으나, 강대국이 조성해 놓은 유리한 국제적인 상황을 이용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북한은 중국과의 동맹관계를 적절히 활용함으로 써 체제유지를 도모하고 있다. 중국에게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한 중 관계가 한 미 동맹관계를 대 체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는 한계성에 기초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33

150 한국과의 전면적 협력관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하더라도 중 국이 한국에 있어서 미국의 특수한 지위를 대체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기본전제 위에서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평 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오바마 행정부의 국제협력주의노선에 부응하여 미국과의 상 호전략적 협력관계를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동북아의 평화환경 조성이 중국의 국가적 이익에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믿 고 있다. 그러나 2010년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 일 분쟁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확산되는 상황이 상징하듯이, 동북아의 안보질서는 협력적 요소와 갈등적 요소가 혼재되어 언제든지 역내 정세가 불안정 해질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193 더구나 북한과의 관계회복 및 협력 강 화를 전개한 시기적인 배경도 1990년대 후반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미 일 동맹 및 미국의 TMD 등 안보 불안의 증가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북 중 동맹이 공고화된 것이다. 실제로 2009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는 북 중 수교 70 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양국관계를 대대손손 이어가자 며 혈맹적 양국관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다. 또한 북한의 핵실험 및 장거리 미 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식량 제공 등 대북지원정책을 펼치기도 하였 다. 이에 대해 미국과 한국 등의 불만이 제기되었지만 인도주의적 차 원일 뿐이라며 불만을 일축하면서 국제적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이후 북 중 협력관계는 중국의 국방부장, 길림성 성장( 省 長 ) 등의 방북과 북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두 차례의 방중 등으로 더욱 긴밀해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_ 이수훈 박병인, 동북아 안보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인식, pp. 85~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51 이러한 중국의 부상은 북한에게도 다면적이고 양가적인 인식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의 경제적 대국화가 북한의 경제난 극복에 유리 하게 작용할 수 있는 동시에 정치적 예속화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안보의 측면에서도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력전이가 북한 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안보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이 부상하면서 북한과의 동맹관계에 대한 책임회피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고, 기존 동맹관계를 깬 새로운 형식의 관계형성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와 동맹관념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중국 4세대 지도부의 등장에도 기인하는 바가 크다. 유연한 개방전략과 친서방적인 성향이 강한 유학파의 득세는 북 중 간 협력관계를 약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이익추구 과정 에서 북한과의 전통적 혈맹적 동맹관계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도 체제 수호를 위해 핵을 포 기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구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이미 수출입 시장의 타격과 에너지 위기를 겪는 상황에 서 중국의 경화결제의 요구는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배가시켰 다. 그 과정에서 북한과 한국의 국력은 더욱 심각한 격차로 벌어지게 되었고, 북한 입장에서 미국의 적대정책 또한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런 다면적인 위협 속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국 가 안보와 정권 보위를 위한 결정적인 도구라고 인식한 것이다. 즉 북 한 입장에서는 전통적 동맹의 확고한 지지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력전이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조선압살정책 을 의미하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지속된다고 판단하는 상황에서 핵 무기 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4 주지하듯이 핵카드는 북한의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35

152 가장 중요한 외교전략이자 정치 군사 경제적 가치를 가진 무기이다. 아울러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정권 세습과 체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것이다. 한편 정권 세습의 위기는 곧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권력 세습을 둘러싼 엘리트 내부의 경쟁과 갈등은 체제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북한 의 대외전략은 김일성 사망 이후 우리식 사회주의 의 정당화와 내부 단결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동아시아 질서 및 안보 구도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과 수위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탈냉전 이후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일관된 성격이라기보다는 갈등과 협력이 착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 문에 1990년대 이후 미 중 관계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틀 속에서 불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외교안보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원 에서도 갈등이 주기적으로 표면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인권, 민주화, 종교의 자유문제를 포함하여 위안화 재평가, 지적 재산권 보호, 무역 불균형 같은 다양한 영역의 갈등과 대립이 잠재되어 있다.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협력적인 관계 속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갈등과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 국면에 따라 북한의 대중정책 및 전략도 달라질 것이다 년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북한은 대중 협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2007년 중국 대사관을 방문했던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1년 만인 2008년 3월에 다시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했 194_ 북한 외무성 담화, 2009년 1월 13일. 195_ 등거리 외교의 관점에서 북한의 대중정책을 분석한 글은 이상숙, 북 미 관계 개선 이후 북한의 대중정책: 미 중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참조. 13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53 다. 196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출발행사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한 고위층이 대거 참석하여 성대한 환영행사를 벌이 며 북 중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이후에도 양국의 고위층은 6자회담 및 중국 올림픽 개최, 티베트사태,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서방의 비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고, 북한은 하나의 중국 이라는 중국의 조치를 지지한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과 미국 서방과 의 관계에 따라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은 동맹과 현안별 지지정책이 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을 통해 미국을 견제하는 이이제이( 以 夷 制 夷 ) 전 략도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은 물론 기본적으로 편승전략이다. 그러나 북한의 편승전략은 다분히 갈등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 한 갈등적 편승전략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안별 지지와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북한은 중국의 대북정책에 부응하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 에 의해 핵협상을 진행해 왔다. 북한의 권력 엘리트들은 전통적으로 자주의식이 강하고, 한 중 수교 등의 경험을 통해 중국에게 강한 불신 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어떠한 제재와 압력을 가한다고 해도 북한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적다. 197 이는 동아시아의 안보 구 도를 인식하고 있는 중국이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정하고 북한의 고유한 입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경험과도 맞물려 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내보였 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2006년 7월 5일 북 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북한에 대한 중국의 강경 조치들이 오히려 Ⅰ Ⅱ Ⅲ Ⅳ Ⅴ 196_ 人 民 日 報, 2008 年 3 月 2 日. 197_ 김예경,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대응전략: 편승전략과 동맹, 유화 그리고 현안별 지지정책, 국제정치논총, 제47집 2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7), pp. 90~91. Ⅵ 평가와 전망 137

154 북한의 핵실험 강행 등 북 중 관계 악화로 이어진 경험과도 밀접하다. 실제로 2006년 10월의 핵실험 이후에도 중국은 5만 9천 톤 가량의 원 유를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정책이 급격 히 달라질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북 중 간 특수관계의 유지는 아직까지 중국에 전략적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중국이 북 한을 강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중국에 대한 북한의 경계만을 자초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대북정책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배 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부상 및 대국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미국과의 지나친 협력자세를 나타낼 경우 북한은 아예 대화의 틀을 깨고 긴장 고조의 분위기를 형성할 것이다. 6자회담과 같은 대화의 장을 벗어나 한반도 주변에 위기를 조성하거나 미 중 간의 협력을 손상시킬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냉각될 경우 북한은 아예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경우에도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고 거리를 두면 서 갈등을 생산해 내겠지만, 198 중국의 경우 동북아 안보질서에서 자신 들의 입지 약화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02년 10월 제2차 북핵위기 발생 당시 중국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을 성사시키면서 주도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북 중 관계의 회복 및 협력관계 강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중국의 정책변화는 후진타오체제의 등장과 더불어 중국 의 대외정책 일반의 방향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이 이처럼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냉각관계를 회복하고 북한과의 198_ 이상숙, 북 미 관계 개선 이후 북한의 대중정책: 미 중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pp. 45~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55 협력관계를 복원했기 때문인 것이다. 199 만약 1990년대 중반까지 북 중 관계가 냉각되어 있었다면 중국 중심의 중재적 역할은 불가능했을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이 6자회담 테이블에 다시 앉게 된 것은 2003년 10월 중국의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 원장과 면담한 이후였다. 그렇다면 북 중 관계의 연속성과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북 중 관계의 연속성은 당우위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정부 對 정부 간의 관계에서는 다소 마찰적 요소가 있더라도, 당 對 당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는 피를 나눈 혈맹의 관계, 그리고 사회 주의체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나, 혁명원로 세대가 급격 하게 퇴조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그 연결고리는 점차 엷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가능성은 적다고 볼 것이다. 1999년부터 2009년 11월 22일까지 중국의 국방부장관의 평양 방문 을 포함하여 양국 간 고위급 회담은 총 262차례 개최되었으며, 이 중 평양에서 진행된 회담은 총 146회이며, 북경, 중경과 몇 개 성을 포함한 중국에서 개최된 것은 113차례에 달한다. 연평균 26회 이상 고위급 회 담이 개최된 것이다. 200 최근 중국의 몇몇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차기 지도자로 낙인 받으면 첫 공식 해외 방문국이 북한이었다. 즉 이들이 중국공산당의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하면서 차기지도자로 공식화되는 순간 첫 공식 해외 방문국은 북한이 되는 것이다. 중국 차세대 최고지 도자로 알려진 시진핑은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한 2003년 북한을 공식 방문했으며, 후진타오 역시 차기지도자로 낙인 받은 1993년 평양을 방 199_ 위의 글, p. 50. Ⅰ Ⅱ Ⅲ Ⅳ Ⅴ Ⅵ 200_ 주재우, 중국의 대북정책 및 전략: 변화와 연속성의 정책적 함의, p. 7. 평가와 전망 139

156 문한 적이 있다. 한편 오늘날 북 중 관계는 과거와 다른 차별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 데, 그것은 정상적인 국가 對 국가의 관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 차원의 교류가 든든한 버팀목을 형성하고는 있으나 중국이 G2 국가 로 부상하고 있고, 세계의 책임대국으로 성장하려면 비정상적 관계는 해소되어야 한다. 또한 중국 국민들 역시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를 더이 상 선호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에서 중국의 일방적 대북 지원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이 중국식 개혁 개 방을 따르든 아니면 베트남식 모델을 따르든 간에, 생존하려면 어떠한 형태로든 개혁 개방이 불가피하다. 시기와 속도가 문제가 되겠지만, 현재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전향적이고 개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조화세 계 건설의 목적과도 부합한다. 중국은 북한이라는 변수가 동아시아에 서 주변국들과 군사적 충돌 및 긴장 고조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자신들의 장기적인 전략과 북한의 전략적 이해에 부합하는 전폭적인 대북 지원 흐름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이 북한을 핵무기 보유국으로 묵인하는 듯한 상황에서 유엔의 대 북 제재 카드에도 불구하고 양국관계의 발전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동맹국으로서 중국의 지원이 지속된다면 북 한의 경제성장은 비약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조직력, 값싼 노동력, 중국의 기술과 자본이 결합한다면 북한의 생산성은 개발도상국의 빠른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_ 김주삼, 북 중 수교 61주년 평가와 한국의 외교적 대응 방안: 2012년 동북아 정세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제15권 제4호 통권57집 (한국동북아학회, 2010년), pp. 18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57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 중 경제협력의 급격한 증가가 북한의 개혁 개 방 유도와 한반도 통일경제 구축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소지도 있 다. 북한이 전면적인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대북 지원과 교류확대는 북한으로 하여금 개혁의 필요성과 시 급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이 과연 장기적으로 북한 경제에 긍정적 인 효과를 미칠지도 미지수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대북 지원과 경제교 류가 북한의 개혁 개방을 지원하며 북한의 경제적 토대 강화와 한반도 의 경제적 통합에 유리한 방향으로 추진되도록 유도하는 한국정부의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2. 향후 북 중 관계 및 북한체제 전망 가. 북 중 관계 전망 중국은 2만 2천km의 육로와 1만 8천km의 해로 국경을 통해 각각 15개국, 6개국과 접경을 마주하고 있다. 게다가 주변국 중에는 러시아, 일본, 인도 그리고 전략적 인접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 등 세계적 강대 국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중국은 그 어느 국가보다도 주변국과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며, 주변지역 정세변화 에 민감하다. 북 중 관계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북 중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다. 이것은 북핵문제 해결에 어려움 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북 중 관계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경우다. 더이상 북한이 중국의 전략적 방벽이 아니게 될 뿐만 아니라 중국부담론의 강화와 대북 지원의 최소한으로의 제한을 가져올 수 있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41

158 다. 셋째, 북 중 관계가 현재의 불투명한 관계를 모호하게 지속하면서, 북한은 북한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다양한 국제변수를 활용하여 갈등 과 협력을 반복하는 경우다. 현재로서는 북한과 중국 간 정치 경제적 협력관계가 당분간은 더욱 공고화될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0월 중국은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 이후에 대북 지원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북 중 간 정치 경제 군사적 협 력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2009년 북 중 수교 60주년을 맞아 중국 국무원 총리를 비롯하여 국방부장, 길림성 성장 등 중국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은 북 중 관계에 대단히 적극적 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 이는 핵보유 공식 선언 이후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완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2012년은 고( 古 ) 김일성 탄생 100주년, 김정일 70회 생일을 맞이하는 해이다. 때 문에 북한으로서는 강성대국 건설을 가시화하면서 내외적으로 체제의 정당성 및 국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단독으로는 국제적으로 강성대국을 건설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 다. 때문에 북한에게는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 는 중국의 경제적 대국화의 요구와도 부합되는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세계수출 규모 1위, 세계경제 GDP 2위, 외환보유고 1위 로 급부상한 중국은 2020년까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진흥동북 ( 振 興 東 北 等 老 工 業 基 地 ) 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 다. 후진타오 등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가 적극 추진하는 개혁 개방정 책으로서 진흥동북 정책의 대상지역은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랴오닝( 遼 寧 )과 지린( 吉 林 )성을 포함하고 있어 북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동북지역의 접경지역인 러시아와 북한은 에너지, 원 자재, 광산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이 영역에 집중하는 14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59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북한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면서 이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이 러한 내외적인 발전전략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북한은 압록강과 두만 강을 연결하는 지역에 대한 중국 교량 건설과 풍부한 북한의 광물 자원 의 중국으로의 수출, 나진-선봉 지역의 경제자유특구 건설, 중국 훈춘 지역에 대한 동북아 물류 기지 건설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즉 강성대국 건설에 필수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개방적인 자세로 전환 하고 있는 것이다. 202 이렇게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자본과 기술, 노동력의 결합에 기반하여 북 중 간 경제협력은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위 해서는 북 중 간 협력에 기반한 동북아 지역의 안정적인 분위기가 필수 적인 중국의 발전전략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 가 일치되고 동북아 지역에서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동맹국가라는 점에 서, 21세기 강대국(Great Power)으로 발전하려는 중국에게 북한은 상 당 기간 동안 필수적인 지지세력인 것이다. 북한에 대한 지원과 북한의 행동을 통해 일본을 제어하고 미국의 위상을 저울질 하면서 중국의 세 계전략 목표를 안정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 북한 입장에서도 최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북한 고위관료들의 지속적인 중국 방문, 학계 인사들의 중국 학술대회 참가, 국제경제협력 등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10년 김정일 위원장의 두 차례 중국 방문 역시 정치안정과 후계체계구도 등 복합적 202_ 대외정책 전반에서도 개방 움직임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2009년 김정일 생일에 미국인의 북한 방문 허가, EU 국가들과 외국인의 북한 방문 허용 등이 이를 상징한다. 203_ 이런 일련의 정세 변화 속에서 한국의 외교적 대응 방안을 검토한 논문으로는 다음 의 논문을 보라. 위의 글 참조.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43

160 인 문제들이 연루되어 있지만, 특히 중국의 창지투 개발계획에 따른 경제협력 문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북 중 간 협력은 국제관계 특성상 위기를 경험할 수도 있으며 지엽적인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북 중 간에도 긍정적인 우호협력관계 이외에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과거 혈맹의 전통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것 으로 보인다. 즉 북한의 지정학적 특성인 안보적 완충지대론(Buffer- Zone School) 을 부각시켜 북 중의 군사관계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선군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는 북한 입장에서는 유사시 군사개입 조항이 있는 조 중 우호렵력조약의 유지를 대단히 강 조할 것이다. 204 중국 입장에서도 중국의 부상이 미국 및 서방세계에 여전히 중국위협론으로 비쳐지고 있는 이상, 기존의 순망치한 의 관점 속에서 중국의 동북지역 안정 및 미국의 대중포위전략을 견제하는 전 통적 안보관을 급격히 수정하기는 힘들다. 이처럼 북한은 중국과의 관 계에 있어 군( 軍 ) 對 군( 軍 ) 관계를 우선순위에 놓고 혈명의 전통이 내재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 복원하고자 할 것이다. 이런 북 중 관계 는 비록 양국의 외교관계가 갈등국면에 빠질지라도 급격한 변화를 겪 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양국 간 군사관계는 실질적인 군사협력보다는 친선우호관계 차원의 교류와 국익을 고려한 공식적인 관계로 점차 변 화할 것이다. 205 특히 최근 북 중 간 경제교류 상황을 고려할 때, 실제 정책 추진에 있어서는 각자 국익을 고려한 사안별 협력과 갈등이 복합 적으로 작용하는 선택적 협력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즉 일반 204_ 전병곤, 왕자루이 방북을 계기로 본 북한과 중국의 당 정 군 관계, (Online Series Co 09-19, ). 205_ 위의 글 참조. 14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61 국가 간 관계로 완전히 전이하지는 않은 채 사회주의 전통관계가 내재 해 있는 과도기적 특성을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고한 협력체제는 중국 차세대 지도자로 확정된 시진핑 부 주석의 경우에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0년 10월에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제60주년 행사에 참석해 항미원조( 抗 美 援 朝 )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이라면서 미국에 저항해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전쟁이었다고 주창하면서 역사적인 혈맹관계를 강조했다. 206 그 해 7월 초에 중국은 북한 인사들을 초청해 예년에는 없는 조 중 우호 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 제49주년 행사를 가진 바 있다. 더구나 후 진타오를 비롯한 현재의 중국의 지도부는 북한의 차기지도부를 공식 적으로 초청하여 3대 세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중 국의 태도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교류는 지속하면서 안보적인 측면에서 는 북 중 혈맹의 불변이라는 전략을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평도 포격 사건과 천안함 침몰 사건의 와중에서도 중국은 김정일 위원장을 국빈으로 초대해 혈맹 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과정과 결과에 어떤 지정학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가?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설이 한때 유포된 적이 있다. 207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입장은 한반도가 미국과 일본 등 해양세력과의 완충역할을 수행하고, 중국에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충족되었을 경우에 한하는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중국과 미 일 세력 간의 대치를 21세기의 전략구도로 상정하고 있다면 중국이 한반 도의 통일, 특히 한국 주도의 통일을 순순히 지지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Ⅰ Ⅱ Ⅲ Ⅳ Ⅴ 206_ 한겨레, 2010년 10월 27일. 207_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張 連 瑰, 朝 鮮 半 島 統 一 與 中 國, 當 代 亞 太 ( 北 京 : 中 國 社 會 科 學 院 亞 太 硏 究 所, 2004) 참조. Ⅵ 평가와 전망 145

162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국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상에서 북한에 대한 우월적 지위 를 유지하고 한국과의 전면적인 관계개선을 추진함으로써 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제고에 노력하는, 분할 지배(Divide & Rule)의 유형을 답습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중국은 장기적으로 주한미군의 재배치와 성격변화 등 동북아에서의 미군의 역할 변화와 한 미 동맹의 장래, 동북아에서의 다자안보체제 형성의 추이 등을 주시하겠지만 한 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통일보다는 일단 북한이라는 최 소한의 전략적 여지 를 남겨두고자 하는 유혹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 이다. 208 이처럼 북 중 경제협력의 심화 배경에는 상호전략적 이해관계가 전 제돼 있다. 중국의 대한반도정책기조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급격한 세 력변화가 없는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방지해야 하고, 그 수단은 경제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 시켜 나가는 것이다. 물론 중국은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의 개혁 개방 을 유도하고, 핵무기 개발 의도를 약화시킴으로써 동북아의 안정을 모 색하려는 전략도 아울러 갖고 있다. 북한으로서도 미국을 위시한 자유 세계의 경제제재 조치에 맞서려면 중국의 정치 경제적인 도움이 절실 히 필요하다. 경제개발을 실천에 옮길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중국의 직접적 도움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 증대가 가져올 후폭풍이다. 북한 경제의 대중 의존도 심화는 어떠한 형태로든 남 북 경협의 약화를 불러 올 가능성이 있다. 209 또한 중국 위안화 경제권으로의 편입이 가속화 208_ 소치형, 북한의 급변사태와 중국의 개입유형, 중국연구, 제20집 (건국대 중국 문제연구소, 2001),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63 됨으로써, 이른바 일부에서 제기한 동북4성론의 성립 가능성을 완전하 게 부정하기도 어렵다. 210 북 중 경제협력 활성화와 북한의 대중 의존 도 심화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혹자는 동반성장의 하나로 보는 반면, 일부는 동북4성의 전초로 간주한다. 북 중이 상호 시너지효과를 가져온다는 시각과 중국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 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정치 경제적 상황 악 화에도 불구하고, 남 북한 간 세력균형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 며, 세력균형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내외적 자생력을 확보하도록 지원 할 필요성을 갖고 있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이 초래한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 1718호 ( )와 추가결의 1874호( )가 추진 중인 상황에서 과 거처럼 북한을 드러내놓고 지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중국도 국제사 회의 책임있는 국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북 중 간의 행태를 검토해 볼 때, 몇 가지 특징적 현상들이 나타 나는데, 첫째, 안보이익이 경제이익보다 크며, 둘째, 장기적 이익이 당 면한 이익보다 중요하고, 셋째, 잠재적 이익이 현실적 이익보다 크며, 209_ 그러나 북 중 경제협력관계의 진전이 남 북 경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입장도 있다. 아울러 중국예속론은 북 중 경협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함으로 써, 우리 정부로 하여금 남 북 경협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주문한다 고 주장 한다. 조동호 이상근, 북한경제 중국예속론의 비판적 고찰, 국제지역연구, 제 12권 제3호 통권46호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2008); 또한 동북4성론은 잘못 된 해석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희옥, 중국의 대북한정책 변화와 함의: 동북4성론 을 포함하여, 현대중국연구, 제8집 1호 (현대중국학회, 2006); 양문수, 북한경 제의 대중국 의존문제 소고, 북한경제논총, 제12호 (북한경제포럼, 2006) 등을 참조. 210_ 중국예속론에는 남성욱, 중국자본 대북투자 급증의 함의와 전망, 통일문제연구, 제18권 1호 (평화문제연구소, 2006); 임현진, 북-중 경제협력 강화는 도전이자 기회, 신동아, 6월호 (동아일보사, 2006); 대한상공회의소, 북한 지하자원 공동 개발전략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2007); 김영근, 중국의 대북투자 동향과 정책 적 시사점, 통일경제, 여름호 (현대경제연구원, 2008) 등을 참조.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47

164 넷째, 전체적 측면에서의 이익이 지엽적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점이 다. 211 요약하자면 그 어떤 혈맹보다 자국의 안위가 중요하며, 하나의 중국 이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는 기존의 정책처럼 경제발전의 우위 를 인정할 수 있으나, 하나의 중국 이 위협받는 상황 하에서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은 포기 할 수 없되, 자국의 분열을 용인하는 그 어떠한 움직임도 결코 용납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다면, 중국의 비약적인 부상이 예상되는 지금 한 중 관계, 북 중 관계에 대한 보다 치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중국이 얼마나 빠르게 부상할지, 이에 미국이 어떻게 대응할지가 안보 구도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아울러 중국의 부상이 후진타오가 주창한 조화세계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 뿌리가 되는 화이 질서관 에 내재한 상반된 가능성, 즉 공존과 평등인가 아니면 중화민족 주의인가 중에서 어느 경향이 더욱 부각되느냐도 중요한 변수이다. 나. 북한체제 전망 제1차 북한 핵실험( ) 이후 UN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이 채택된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2008.8)이 발생하자, 김정 일정권의 붕괴 가능성과 북한체제의 장래에 대한 논의가 또다시 지속 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첫째, 2004년 5월 29일 공개된 미국 국방부 보고서다. 중국 국방력 에 대한 연례보고서(Annual Report on the Military Power of the 211_ 김철, 북한-중국 경제무역 합작현황 분석, 북한경제리뷰, 5월호 (한국개발연구 원, 2008),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65 People and Republic of China) 에서 미 국방부는 중국이 중국으로 의 난민유입을 막는 능력 제고와 더불어 북한 김정일 정권 붕괴에 대비 하여 국경에 군을 배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둘째, 2006년 2월 발표된 미 CSIS 보고서다. 동 보고서는 북한의 필연적 붕괴 가능성 을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다. 북한 붕괴 가능성의 원인으로서는 급속한 경제력 쇠퇴와 지도력 상실, 광범위한 기아, 군사 쿠데타, 미국의 군사적 압박, 오판에 의한 전쟁도발 등이 예시되고 있다. 셋째, 2006년 7월 5일 북한이 대포동 2호 등 7발의 미사일을 발사한 이후 UN안보리 결의안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중국이 제재조항을 반대 한 것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212 중국은 이 미 북한지도부의 붕괴와 국가 통제력의 부재는 곧바로 200만 명 이상 의 난민이 중국 동북부로 유입되는 사태를 초래하여 중국 사회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비무장 군인들을 투입하여 난민 유출을 막는 동시에 친중정권을 수립할 준비를 마친 것 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미 중 간에는 이미 김정일 정권 이후 북한에 친중 정권이 등장하여 완충지대로 지속되는 것에 대해 합의가 이뤄졌 다는 주장도 있다. 213 넷째, 2007년 1월 발표된 통일연구원 연구결과다. 214 북한체제의 내구력평가 라는 보고서는 김정일 정권이 2009~2011년 사이에 붕괴 할 가능성에 대해 전망하고 있다. 2006년 8월 통일부 하나원에 수용되 어 있는 314명의 북한이탈주민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새터민들의 약 40%가 예상한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 있는 북한의 전직 Ⅰ Ⅱ Ⅲ Ⅳ Ⅴ 212_ 세계일보, 2006년 7월 18일. 213_ 중앙일보, 2006년 7월 27일. Ⅵ 214_ 전현준 허문영 김병로 배진수, 북한체제의 내구력평가 (서울: 통일연구원, 2006). 평가와 전망 149

166 고위탈북자들은 현재 상황이 지속될 경우, 김정일 정권이 5~10년 동 안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리고 주변 모든 국가들이 대북 제재에 동참하여 밀봉 을 할 경우에도, 북한체제 내에 변화의 맹 아가 약간 싹틀 뿐이지, 김정일 정권과 북한식 사회주의체제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체제를 붕괴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 로 평가하였다. 다섯째, 김정일 건강과 연계해서 북한의 안정성을 전망하는 견해들 이 있다. 2006년 2월 중국의 6개 연구기관들의 공통적 주장으로서, 북한 체제의 안정성은 김정일 건강에 달려있는데, 현재 김정일은 비록 노인 성질환은 있으나 대체로 건강하다는 설이다. 2006년 1월 김정일 방중시 후진타오와의 만찬 석상에 김정철이 동행하였으나, 누구인지 중국 측은 묻지 않았고, 북한 측도 설명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전문가들은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10월 제2차 남 북 정상회담에 나타난 김정일 위원 장의 행태를 분석한 미국 연방정부출연기관인 해군분석센터(CNA) 코 퍼레이션의 켄 고스 해외지도자연구팀 팀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 서 김정일의 건강이 좋지 않아 향후 5년 내 격변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215 이같은 견해에는 러시아 출신의 북한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전 호주국립대 교수) 216 와 탈북자인 김승철 북한개혁방송 대 표 217 등이 동조하고 있다. 여섯째, 2008년 1월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와 미국 평화연구소 (USIP)가 공동연구 발표한 연구결과이다. 다루기 힘든 이웃 감시하 215_ 동아일보, 2007년 10월 15일자 인터뷰. 216_ 프리존뉴스, 2007년 6월 20일자 인터뷰. 217_ 프리존뉴스, 2008년 2월 4일자 인터뷰. 150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67 기(Keeping an Eye on an Unruly Neighbor) 라는 보고서는 현재 북한이 불안정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될 경우, 중국의 최대관심사는 북한 난민 유입저지가 될 것으로 보았다. 또한 북한이 급속하게 와해될 경우, 중국은 중국군을 투입하여 북한이 보유한 것으 로 알려진 핵무기와 핵물질을 우선적으로 확보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 다. 218 일곱째, 2008년 3월에 정리된 주변 4개국의 평가이다. 219 여기에는 한반도 문제를 직접 다루는 각국의 관리들 및 국책연구기관 그리고 민 간 전문가들의 견해가 포함된다. 통일연구원은 2008년 1월부터 2월 사 이에 미 일 중 러 주변 4개국에 연구진을 파견하여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과 김정일 정권의 장래에 대한 현지의 견해를 청취한 바 있다. 특 히 북한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과 관련해서, 미국은 급변사태 가능성을, 일본은 김정일 정권 향방의 불투명을 지적하고 있으나, 중국은 향후 3~5년 이내 정권붕괴 가능성이 낮음을 강조하고, 러시아는 북한의 경 제난이 악화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덟째, 2010년 2월 16일 미국 외교잡지 Foreign Policy의 전망이 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정권 붕괴와 남 북 통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으나, 미국정부는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인 [작전계획 5029] 외에 는 아무런 대책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작전계획 5029도 핵무기 확보, 공공안전 유지, 인도적 지원 등에 해당하는 단기 긴급대응 내용 에 불과함을 지적했다. 이후 미국은 최근 키 리졸브 한 미 연합훈련에 218_ Bonnie Glaser Scott Snyder John Park, Keeping an Eye on an Unruly Neighbor, USIP working paper (3 January 2008). 219_ 통일연구원, 특별기획, 미 일 중 러 국제학술회의 결과 종합보고서 (서울: 통일 연구원, 2008).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51

168 서 유사시 북한이 보유한 핵 화학무기 등을 제거하는 임무를 가진 특수 부대를 참가시켰고, 2010년 여름에는 중국 측에 북한 급변사태 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 측의 거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작계 5029는 김정일의 급변 사망, 권력투쟁과 쿠데타, 주민소요와 봉기, 대 량탈북, 내부 위기를 밖으로 돌리기 위한 무력도발 등의 상황을 상정한 대비계획이다. 아홉째, 2010년 2월 미국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커트 캠벨은 모든 의학적 정보를 종합할 때, 북한 김정일의 남은 수명은 3년 정도로 생각 한다 고 언급했다. 그는 탈북자 출신 3명, 정치인 2~3명, 캐슬린 스티 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한 비공개 간담회에서 북한정세와 후계 문제 등에 대해 한국 내 의견을 청취했는데, 자신의 예측 근거는 자세 히 설명하지 않았으나 이와 같이 주장했다. 열째, 2010년 3월 15일 안보전문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ICG)은 북한에서 당장 급변사태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당과 군부 엘리 트들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북한지도부 내의 갑작스러운 균열이 불가 능한 것은 아니다 고 전망했다. 220 ICG는 엄격한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 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국제적 제재와 잘못된 정책 선택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북한의 불안정, 쿠데타나 심 지어 정권 붕괴는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는 외부에서 관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현재 북한 당국이 관리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발생하면 정권의 생존도 위협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열한 번째, 2011년 9월 중순 러시아 국책연구기관인 세계경제 국제 관계연구소(IMEMO) 가 2020년대 후반 남 북한이 실질적 통일단계에 220_ 조선일보, 2010년 3월 7일. 152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69 들어설 것으로 전망한 특별보고서를 발간했다. 221 주요 내용은 북한의 붕괴 추세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퇴진 이후 방향성 상실 위기에 처한 군부 실세들이 개방파(해외 정 재계와 연결되어 있 는 군부 일부세력을 포함한 관료집단) 와 수구파(군부 보안집단) 로 나 눠져 주도권을 다툼에 있어 전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국제 사회가 통제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돼 무장해제와 현대화 작업을 추진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 결과 북한경제는 점차 남한경제에 흡수될 것이고,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김일성체제 지지자들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 무너지는 것은 아니나, 무너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도 안이한 판단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그 리고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따른 점진 단계적 통일을 준비하는 것과 더불어 급변사태 대비에 대해서도 소홀함이 없어야 함을 시사한다. 222 아무튼 북한의 미래와 관련, 내부에 의한 변화와 외부에 변화로 구분 해 볼 수 있다. 갑작스런 내부 붕괴는 권력진공상태를 조성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한반도 관리프로그램은 유엔을 비롯한 관련국들의 동조 아래 수립할 필요가 있다. 외부에 의한 변화를 위해서는 정부 간 공식 대화채널인 한 중 전략대화를 내실화하고, 그 의제를 다양화시킬 필요 가 있다. 여기에는 탈북자 문제, 동북아 비핵화를 비롯한 주한미군 진 주 문제 등 폭넓은 대화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장기적 차원에서 민 관 차원의 다양한 대화채널을 내실화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이 전략적 모 호성을 추구할 경우에 대비한 전략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21_ A. Dynkin, Strategic Global Forecast 2030 (Moscow, IMEMO, 2011); 세계 경제 국제관계연구소(IMEMO)는 보고서에서 5페이지를 할애해 한국: 변환 및 통 일 시나리오 를 예측했다. 조선일보, 2011년 11월 4일. 222_ 허문영 외, 평화번영정책 추진성과와 향후과제 (서울: 통일연구원, 2007), pp. 168~169. Ⅰ Ⅱ Ⅲ Ⅳ Ⅴ Ⅵ 평가와 전망 153

170

171 Ⅵ.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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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중국의 미래연구는 한국의 안보와 번영 및 먼 장래의 통일을 위한 국가전략 수립을 위해 필수적이며, 나아가 일정기간을 두고 정기적으 로 연구될 가치가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도 그러하지만 동북아 문제의 중심에는 중국의 부상이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국 이었을 뿐 아니라, 1978년 개혁 개방을 본격화한 이후 급속한 경제성 장을 이룩하면서 동아시아의 중심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자국의 전략적 요충인 동북지방과 미 일의 대중 포위망에 핵 심적 고리가 되고 있는 한반도의 독특한 역사적 지정학적 위상에 유의 하고 있다. 때문에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및 정책은 중 국의 동북아 내지 세계질서에 대한 인식과 전략적인 목표와 밀접한 관 련을 갖고 있다. 오늘날 북 중 관계는 과거 조공 책봉체계와 일면 유사 한 면이 있다. 중국은 자국을 종주국 또는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수직적 관계인 화이질서를 유지해 온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조공 책봉을 수단으로 하는 화이질서는 결국 현대적 의미의 세계전략인 동시에 지역정책이 며,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지역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인식상의 요 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223 역사적으로 중국이 약화되었을 때, 오히려 아시아에서 혼란이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유럽과는 반대로 공식적으로 는 불평등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평등한 중국중심의 국제질서를 유지 해온 경험이 있다. 224 이처럼 대중화 경제권으로 확대되는 중국의 위상은 동아시아 내지 223_ 이동률, 중국의 주변지역 외교전략 및 목표, 중국연구, 제38권 (한국외대 중국 문제연구소, 2006), p _ 이러한 주장은 David Kang, Getting Asia Wrong, International Security (Spring 2003), pp. 57~85 참조. Ⅰ Ⅱ Ⅲ Ⅳ Ⅴ Ⅵ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157

174 아태 지역에서도 이미 그 질서의 윤곽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언명에도 불구하고, 2003년 이후 지속적 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보여 온 중국은 이미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G2 로 부상했다. 중국은 2009년 수출 규모 세계 1위로 올라섰으며, 2009년 상반기 GDP에서 일본을 밀어내고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중국은 지속 적인 경제발전과 강대국화를 위해 주변지역의 안정과 평화가 필요하 다. 2010년 1월, 13억의 중국과 약 7억의 아세안(ASEAN: Association of Southest Asian Nations)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의 발효로 중국 은 이제 동북아 경제협력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과 ASEAN의 협 력체제의 발전 역시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우호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25 그렇다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대중전략은 중국 의 성장이 한국의 안보에 위협인가 아닌가, 혹은 어떤 관계가 바람직 한가에 대한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 미 동맹관계와 남 북 관계 및 한국의 대북한전략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 는 냉전의 지정학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최후의 섬이다. 남 북한의 지정학적 코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가지 차원의 복합적 이해가 선 행돼야 한다. 지구적 차원(Global Approach)과 지역적 차원(Regional Approach), 그리고 남 북 관계 차원(Local Approach)이 그것이다. 남 북한 주변에는 세계 유일의 패권국가인 미국을 위시하여, 지역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이 포진해 있고, 이들 국가 간의 이해 관계가 중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틈바구니에서 남한과 북한은 국 가의 생존과 국가이익의 수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왔다. 225_ 김주삼, 북 중 수교 61주년 평가와 한국의 외교적 대응 방안: 2012년 동북아 정세 변화를 중심으로, pp. 17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75 그림Ⅵ-1 한반도 주변국 개입구도 중 (지구적차원) 대륙세력 러 북 남 갈등/협력관계 지원관계 미래 연결선 분단선 일 (지구적차원) 해양세력 미 위의 그림은 냉전기 남 북한을 에워싼 주변 4강의 기본 대립구도를 뜻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지구적 차원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여 기에 중국과 일본이 합세하여 지역적 차원의 해양세력 對 대륙세력의 소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남 북한은 이중적 포위를 벗어날 자체의 동력 을 갖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군사적으로 대치 중이다. 226 중국과 일본 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한 부분을 이루나, 과거의 침략 기억 때문에 완전한 화해까지는 여전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반면 러시아와 미국은 서양세력으로 한때 격렬한 대립관계를 형성했으나, 냉전이 붕 괴된 현재는 과거와는 다른 관계정립을 시도 중이다. 만약 남 북한을 중심으로 미 중의 이해가 상호연결되고, 일 러의 이해가 상호교차될 때, 226_ 남 북한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약소국으로 규정하고 이를 분석하려는 연구들은 꾸 준히 전개돼 왔다. 그러나 이들 논의는 지정학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힘의 배분상태로 보아 한반도는 약소국이다 고 하 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Ⅰ Ⅱ Ⅲ Ⅳ Ⅴ Ⅵ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159

176 한반도는 갈등의 중심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위기는 기회이며, 지정학적 변화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미국과 구소련이 주도했던 적대적인 양극 체제의 질서가 해체되고 중국이 급부상하여 안보구도가 복잡해지고 있 는 상황은 안보의 불확실성과 헤게모니의 도전 등으로 불안정한 동북 아 구도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나 타난 북한의 핵개발, 중국의 급부상 등 동북아의 새로운 불안요인 등장 은 다자안보의 대화와 협력 가능성을 높이는 역설적인 상황을 마련하 고 있다. 심지어 다자안보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 왔던 미국 역시 오바마 정부에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표출하고 있다. 227 본 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략적 유용성을 깨달은 중국도 다자안보체제 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적대적인 북 미 관계가 존재하며 다자안보체제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고려해야겠 지만, 이해관계 당사자국들이 각자의 안보적 이해관계 계산에 따라 다 자안보협력에 대해 우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것은 지금의 국제관계가 적대적인 제로섬관계가 아니라 는 것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지속과 장기화는 안보적 고려로부터 자 율성을 획득하여 외교정책의 목표를 바꿀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향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안보구도는 미국이 중국에 비해 상대적인 국력의 우위를 보이면서 중국과 일본이 경합하고,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상황이다. 중국의 남 북한 정책은 중국의 안보에서 가장 핵심적인 국가인 미국과의 관계, 구체적 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상대적 힘과 능력, 미국과 중국의 관계 양상(우 227_ 최강, 오바마 정부의 안보정책과 한 미 동맹: 4년 주기 국방검토보고서(QDR)를 중심으로, 주요국제문제분석 (서울: 외교안보연구원, 2010),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77 호적, 적대적)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상당 부분은 중국, 북한, 남한 각 각의 상대적 힘과 의도, 남 북한 대미관계 양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안보구도의 불확실성 속에서 중국에게 북한과의 동맹 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228 그러나 탈냉전 이후 특히 양국의 국제관계적 성격은 국제질서의 변 화에 따라 자국실리 위주의 전략적 협력관계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한반도 주변국들의 권력 분포 및 전략관계에 따라 대단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동북아 지역안정을 위해 서는 역내 주요 강대국들의 적극적인 대화와 교섭이 요구된다. 6자회 담 의장국으로서 주도적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과 한 미 일 3국이 북핵문제를 포함하여 동북아 안보질서의 성격을 바꾸겠다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현상 타파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북한의 전향적 인 인식과 대응이 요구된다. 물론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과 개혁을 통해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지 않 는다면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북아 역내 안정은 요원할 뿐만 아니라 북 한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229 한국의 대중국전략은 무엇보다 동요하지 않는 한 미 동맹의 초석 위 에 구축되어야 한다. 한 미 군사동맹은 한반도의 전쟁방지와 평화체제 구축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은 물론 한반도 이외 지역, 특히 아시아 228_ 사실 이런 상황은 동북아 안보구도에 연루된 모든 국가들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 역시 미국의 힘이 중국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고 미국과 중국이 불안정 한 힘의 균형을 유지할 때이다. 이 경우 안일한 편승전략은 역효과로 연결될 수 있다. 2020년의 동북아에서 미 중 일 삼각구도 형성을 전망한 보고서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동북아시대위원회, 중장기 동북아 안부구상-타개와 조성 (동북아시대 위원회, 2006) 참조. 229_ 이수훈 박병인, 동북아 안보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인식, pp. 70~71. Ⅰ Ⅱ Ⅲ Ⅳ Ⅴ Ⅵ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161

178 와 태평양 지역에서의 초국가적 안보쟁점들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활동 을 빈번하게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아시아 협력체제 구축을 위해 한국정부가 미국 못지않게 최우선순위로 관심을 가질 국가는 단연 중국이다. 역사적으 로 중국은 한국과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해왔을 뿐만 아니라 2010년 현재 에도 미국과 일본, EU와의 모든 무역량을 합친 교역량보다 수배나 높 게 나타나고 있다. 2010년 1월 기준으로 한국의 국제무역 흑자총액 409 억 달러 중 대중 흑자액이 308억 달러로 약 3/4를 차지한다. 중국 거주 한국인, 한국 거주 중국인 등 인적 교류 측면에서도 가장 활발하며, 그 수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중국에게도 한국은 미국, 일본에 이은 제3의 수출국이며 교역국이다. 230 중국도 중국위협론을 제거하기 위해서 강대국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경제발전을 모색할 것이다. 때문에 지리상 인접 국가이자 인적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미래 잠재역량이 가장 높은 강대국으로서 중국에 대한 다각적인 외교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지속적인 교류 확대로 2008년에 전략적협력동반자관계 로 격상되었다.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는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지역 및 국제협력 분 야의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의미한다. 231 아울러 다자외교 의 채널을 보다 견고하게 구축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우방국 과의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들, 즉 중국, 인도, 브 라질,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각적인 대외관계의 폭을 확대하고 지 230_ 외교통상부, 주요 경제통상 통계 (외교통상부 통상기획홍보과, 2010) 참조. 231_ 이태환, 한 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평가와 전망, 세종정책연구, 제6권 2호 (세종연구소, 2010), p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79 속적인 교류를 추진해야 한다. 한편 남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남 북한 경제협력 및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한국정부가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슈가 중국에 대한 북한경제의 의존도 심화이다. 즉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도 심화를 남 북 경제관계로 대처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북경 협정책 시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32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재 북한경제의 대중 의존도는 만성적인 성격 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2005년을 기점으로 교역량의 비율이 52.6%를 넘어 급속한 증가 추세에 있다. 더구나 북한의 산업생산은 중국에서 원자재와 에너지, 설비와 부품을 공급해야만 돌아가는 만성적인 의존구 조로 고착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 시장에서 거래되 는 공산품의 중국산 비중은 70%인 것으로 파악된다. 233 KIEP가 탈북 자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시장에서 판매되는 원자재와 설비 중 중국산의 비중이 80% 이상이라는 답변이 전체의 51%를 차지했다. 그만큼 중국의 경제가 북한의 산업생산 및 경제생활의 기반을 장악하 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향후 북핵문제가 원만하게 타결될 경우, 중국정 부는 핵포기에 따른 보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 개발전 략까지 고려하여 비교적 큰 폭의 대북 개발사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 으며, 그럴 경우 북한경제의 대중 의존도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 다 _ 최근 동북지역 개발을 비롯하여 대북한 중국 투자개발에 대해서도 지나친 의심이 나 혹은 낙관 모두 피해야 한다. 실증적인 자세로 냉정하게 분석하여 효과적인 대 응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장과 원자재 공급기지 확보를 위한 개별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한 국제사회 현실에서 우리정부의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평가와 대안이 중요하다. 233_ 탈북자를 통한 북한경제 변화 상황 조사, 한국은행, 2007년. Ⅰ Ⅱ Ⅲ Ⅳ Ⅴ Ⅵ 234_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핵과 북 중 경제관계 전망, pp. 11~14.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163

180 북한의 산업개발이 중국 중심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향후 남 북 산업 표준화를 비롯한 남 북 경협사업 추진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 내 유망한 투자 대상들에 대한 개발권이 중국 측으로 넘어감으로 써 한반도 전체를 고려한 개발정책 수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북 중 경제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우리 는 기본적으로 중국에 대한 북한의 경제적 의존을 점진적으로 남 북 경제관계로 대처하고 중국의 대북 지원과 경제교류가 북한의 개혁 개 방을 지원하며 한반도의 경제적 통합에 유리한 방향으로 추진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통행 통신 통관제도 개선을 통해 중국보다 경쟁력 있 는 경협 인프라를 구축하고 남 북한 간 산업협력을 확대하여, 북한의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장 중국 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북 중 접경지대 개발사업의 경우, 우리정부 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북 중 간 협력사업이 아닌 남 북 중 3각 협력 을 통한 사업으로 추진되도록 해야 한다. 21세기의 외교관계가 이미 이념을 초월한 실리주의노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자원이 풍부한 가 장 가까운 동일 민족과의 역내 교류에 적극적이지 않는 것은 시대착오 적이다. 북한이 경공업 부문의 집중적인 육성을 추진한다면 한국과의 경제 교류는 한민족의 공존 공생이라는 역사적 흐름과도 부합한다. 물론 한국과 북한, 중국이 상생적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협력체제 를 구축하는 노력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고려한 중장기적 관점에서 가 장 중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을 매개로 한국과 중국의 경제협력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한 중 양국은 북한의 무역을 증진시 키고 북한이 열악한 경제환경을 극복하고 개혁 개방을 추진하도록 역 량을 지원해야 한다. 북한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은 동아시아 지역의 안 보 질서뿐만 아니라 지역경제협력체제에도 큰 도움이 된다. 물론 동아 164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81 시아 지역의 경제통합 과정에서 동북3성(랴오닝, 지린, 헤이릉장)과 한 반도 경제권의 통합이 가시화될 경우, 중국의 G2전략과 한국의 지속적 인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Ⅰ Ⅱ Ⅲ Ⅳ Ⅴ Ⅵ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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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한국일보. 로동신문. 조선중앙통신. 人 民 網. 人 民 日 報. 176 중국의 부상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193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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