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2013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교육과정 은 요리사와 뮤지컬배우를 육성하는 전문직업교육에 있어 필수교양과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마련된 과정으로서 미술, 문학, 음악 3가지 부문에서 기초이론 현장학습 프로젝트수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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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요리사와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30명, 8주간의 문학수업,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30가지 관점의 습작!

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2013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교육과정 은 요리사와 뮤지컬배우를 육성하는 전문직업교육에 있어 필수교양과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마련된 과정으로서 미술, 문학, 음악 3가지 부문에서 기초이론 현장학습 프로젝트수행의 이해와 실천과정을 통해 인문적 예술적 소양을 체득화 할 수 있도록 합니다.

3 To France? To Frank! 나, 너, 그리고 우리 In New York, America R = VD 김수정 In Bordeaux, France Enttone 경규민 In Sicilia, Italy Grazia Amico 이은애 In Tokyo, Japan 偶 然 (우연) 윤보경 In New York, America Even now It s not too late 백진안 Journey Where am I? 김대권 어느 한 남자를 본 이야기 김동훈 인간미 박태민 그와 마주 앉았다. 이종현 나는... 나야! 이승민 내가 사는 세상은 희로애락( 喜 怒 愛 樂 ) 유성은 화단 이윤성 맥금동 이규선 ㅌㅡㄹㅏㅇㅜㅁㅏ 박주영 이곳은 어디인가 허정훈 서른여섯 살 김민수 씨 내 이름은 김민수 강우정 남성적인 차재원 부끄럼타는 채영은 분노하는 박수현 걱정하는 이규호 시간의 기억 Seoul, Seoul, Seoul 내 삶 속의 시간 김종욱 빨간 미소 김도희 7시 5분, 시간의 방을 찾아서 황성화 그녀와 그의 시간 국현호 이별일기 송보람 레알 서울-소설 쓰고 있네 정지호 다리이야기 양준석 火 (불화) 박진주 서울열차-어느 짧은 여행의 기록 김예슬 편지 김무늬

4 To France? In New York, America To Frank! R = VD 김수정 In Bordeaux, France Enttone 경규민 In Sicilia, Italy Grazia Amico 이은애 In Tokyo, Japan 偶 然 (우연) 윤보경 In New York, America Even now It s not too late 백진안 Journey Where am I? 김대권

5 In New York, America R = VD 김수정 크리스마스 날이면 나는 매번 세상에서 제일 큰 케이크 앞에 선 어린 아이처럼 설렌다. 11살 때 옆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께서 크리스 마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신 기억이 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간절하게 바라면 크리스마스 때 반드 시 그 사람이 자신을 만나러 온다고 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하지만 할머니의 표정만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가 창밖의 눈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 후 난 11살 때 크리스마스에 대 한 어떤 느낌 이 처음 만들어진 것 같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나 에게 주는 하얗고 설레는 느낌.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을 크리스마 스 날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 20 살이 된 지금도 그 느낌 은 여전하다. 내가 뉴욕대학교에 입학하고 벌써 두 달 하고 보름이나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뮤지컬 배우를 꿈꿔 오던 나는 어느 날 불현 듯 그림에 대한 관심이 생겨, 뉴욕대학교 디자인과에 진학을 결심했 다. 여름날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충동적이던 사건이라 하겠 다. 학교 정문을 지나 학관까지 이어진 큰 길. 5월의 붉은 장미가 화 려하게 곳곳에 피어있었다. 뉴욕이라는 큰 도시에 대한 환상 속에서 5월의 장미는 붉은 힘, 표현의 제약이 없던 나만의 작은 세계, 영감 을 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 내가 꿈꿨던 대학은 더 많은 지식과 흥미 로움을 주는 곳, 내가 갈 길의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며칠 전 회의가 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새로움이 주는 느낌이 다 했기 때문일까. 고민하던 나는 스스로 그 안에서 다시 새로움을 찾기로 했다.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해 보는 동아리활동. 게시판에 동아리 모집 공고가 난 날. 게시판을 쭉 훑어보다가 오른쪽 위 쯤, 오렌지색 포스터에서 시선이 멈췄다. 어 쿠스틱 기타동아리였다. 포스터 색깔은 맘에 썩 들지 않았지만 포근 한 느낌의 기타사진이 내 마음을 끌었다. 나는 그날 이후 어쿠스틱 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 날. 여자 선배에게 기타에 구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들 었다. 그리고 다음번엔 C코드를 쳤고, 그 다음번엔 D코드를 익혔다. 그렇게 하나씩. 내가 짚은 C코드와 G코드의 소리는 명확하지 않 았지만, 나는 기타의 몸통에서 울리는 진동이 좋았다. 나는 종종 동 아리 실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고작 4개의 코드밖에 칠 줄 몰랐지 만 나는 기타가 주는 편안함에 한창 취해 있었고, 물집 잡힌 손가락 마저 마음에 들었다. 철컥ㅡ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손끝을 보고 있던 시선은 동그 란 눈이 되어 문 쪽으로 향했다. 웬 남자가 서있었다. 어, 미안. 이 시간에 누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어. 그 남자는 사과후에 자연스럽게 등에 지고 있던 기타 가방을 문 옆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왔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난 프랭크야. 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동안 동아리활동을 못했지, 신입생이 들어온 건 엊그제 알았어. 아! 난 에이미야. 프랭크는 나에게 무슨 학과인지, 코드를 몇 개나 칠 줄 아는지, 그 0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09

6 리고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Hey Jude 를 좋아한 다고 대답했다. 프랭크는 자기도 비틀즈를 정말 좋아한다며 비틀즈 노래는 한 번씩 다 연주해봤다고 했다. 네가 알고 있는 코드로도 그 노래를 연주할 수 있어! 지금까지 코드 연습만 할 뿐 내가 알고 있는 코드로 노래를 연주 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싶었 다. 그럼 나한테 알려줄 수 있어? 프랭크는 흔쾌히 그러겠다며 문 옆에 세워둔 기타가방을 가져와 그 자리에서 Hey Jude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난 Hey Jude 를 노래까지 부르면서 연주할 수 있게 되 었다. 노래는 잘 못했지만 나는 내 첫 연주곡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이 친절한 프랭크에게 몇 차례 고맙다는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지 만, 부끄러움 비슷한 감정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친 적이 많았다. 나 는 더운 여름을 기타와 보냈고. 가끔 큰 나무 그늘 아래서 프랭크와 같이 기타를 치기도 했고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대 학에 들어와 많은 기대와 희망에 치이던 나는 어쿠스틱 기타 동아리 덕에 다시 대학생활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랭크와의 시간도 매번 새롭고 설랬다. 한여름에 만나는 크리스마스처럼. 1976년 12월 19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벌써 크리스마스 파티 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나무는 반짝거리는 전등 장식으로 치장되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다. 학교 전체는 크리스마스파 티를 알리는 포스터로 가득했다. 낮에는 예술학과의 전시회와 공연 등이 있고 8시부터는 체육관에서 파티가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크리스마스파티 하려나 보네! 프랭크였다. 깜짝이야-. 그러게 학교가 크리스마스 준비로 정신없는 것 같아. 프랭크, 어디 가? 수업 가고 있지. 너 파티 파트너 없으면 나랑 가자! 어어, 나 늦어 서 먼저 갈게! 프랭크는 시계를 보면서 점점 멀리 사라졌다. 나는 얼어붙은 것처 럼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프랭크와 크리스마스파티 라니! 그 날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와 옷장을 열었다. 한참을 찾았지만 파티에 입고 갈 옷이 마땅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입던 촌스러운 드레스 한 벌 뿐. 나는 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 에 없었다. 엄마는 기다리셨다는 듯 큰 종이가방을 내 침대에 올려 놓으셨다. 20살 어린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어서 입고 나와 봐. 종이가방엔 하얀 탑 원피스가 있었고 난 당장 옷을 입고 나와 엄 마 옆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프랭크와 파티에 갈 생각에 젖어 하루하루 남은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드디어 디데이다.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40분 정도. 이제 옷을 입고 준비를 끝내야 한다. 방에 올라가 서둘러 문을 연 순간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남동생이다. 아직 어린 남동생이 빨간 립스틱을 얼굴에 바르고 있었다. 내 하얀 탑 원피스까지 걸치고. 소 리를 지르며 달려들 뻔했지만 동생을 달래 옷부터 벗겨야 했다. 조 심스럽게 동생을 안아 올리려는 순간 동생은 품에서 쏙 빠져나와 도 망을 쳤다. 그러다가 원피스의 옷자락이 그만 기타에서 날카롭게 삐 져나와있던 기타 줄에 걸렸다. 그리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방에 올라와 상 황을 파악한 엄마는 동생을 혼내기 전 나부터 달래 주셨다. 우선 약 속 시간이 다 되가니 고등학교 때 입었던 드레스라도 입고 일단 프 1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1

7 랭크를 만나러 가라고 했다. 그저 울고 싶었지만 프랭크와의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나는 촌스러운 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하 지만 집 밖에 나온 내 발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도저히 이 꼴로 프 랭크 앞에 설 수는 없다. 하지만 날 기다릴 텐데. 약속 시간은 점 점 다가오고, 크리스마스파티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시간 5분전.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프랭크가 보였다. 순간 나는 방향을 틀어 작은 정원에 숨었다. 눈물을 흘려 퉁퉁 부은 얼굴로, 촌스러운 노란색 드레스까지 입은 나는 정말 꼴이 말이 아 니었다. 작은 정원의 나무 뒤에 숨은 채 나는 프랭크를 훔쳐볼 수밖 에 없었다.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눈을 맞으며 한참을 기다리 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 프랭크의 모습을 본 뒤에야 나는 몸을 움직여 작은 정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최악의 크리스마스 였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어쿠스틱 기타동아리에 며칠간 나가지 못했다. 프랭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했는데, 그저 숨어버리고만 싶 었다. 생각 끝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프랭크에게 직접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아 집으로 보냈다. 답장을 바라지는 않지만 프랭크가 내 미 안한 마음과 그곳에 갈수 없었던 이유를 알고 오해가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편지가 프랭크 집에 도착할 무렵 나는 어쿠스틱 기타동아리에 다 시 나갔다. 그런데 프랭크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 도 프랭크는 안 보였다. 물론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도 오지 않 았다. 나는 동아리 여자선배에게 프랭크에 대해 물어봤다. 그런데 이게 뭐람. 프랭크가 휴학을 하고 프랑스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또 한 번 멍해졌다. 거짓말이 아닐까. 소식 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니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내가 프랭크에게 보냈던 편지. 반송이 된 것이다. 나는 다음 날 다시 그 여자선배에게서 프랭크가 머물러 있는 주소 를 알게 되었다. 그리곤 편지를 다시 써서 프랭크가 홈스테이로 머 물고 있다는 프랑스의 어느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후 내가 할 수 있는 건 프랭크가 그 편지를 읽고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뿐. 11살 때 옆집 할머니가 들려주신 크리스마스의 이야기 처럼 간절하게 바라고 또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 까. 1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3

8 In Bordeaux, France Enttone 경규민 나는 어둠이 태양을 삼키고 칠흑 같은 하늘이 쏟는 비를 보는 것 이 좋다. 그 속에서 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 이 혼자 있기를 청했다. 보르도 지방은 아름다운 곳이다. 가론 강을 중심으로 번성한 농작물들의 흙내음이 일고 아침이면 기분 좋은 바 람이 부는 자연과 가까운 곳이다. 나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포도농 장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언젠가는 내가 맡아서 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아버 지는 대범함과 유연함을 갖고 계시고 어머니는 태양의 미소 같은 따 스함을 지니신 분이다. 그 밑에서 나는 자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 은 삶을 살아 왔다. 나는 젊고 즐기는 법을 알며 호탕하게 웃을 줄 안다. 그날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태양이 탄생의 빛을 쏘는 아침,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나니 고소한 향기가 코를 자극 했다. 그 향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잠은 잘 잤니? 네, 상쾌한 아침이네요. 어머니. 나는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소한 냄새의 정체는 크루아상과 버터였다. 아침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고 나는 살며시 의자를 빼서 식탁 앞에 앉았다. 오늘 기분이 참 좋아요. 아버지는 아직 주무시나요? 그이는 벌써 일어나서 농장에 나가 계셔. 네가 가서 아침 식사 하 시라고 모셔 오겠니? 알겠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자리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포도 농장에 가셔서 상태를 확인하시곤 하셨다. 3대째 내려오는 이 포도 농장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더욱 번창하였다. 우리는 이 포도를 가지고 와인을 만들었고 그 와인들은 세계로 수출될 정도로 좋은 와 인으로 이름나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걸어 포도농장에 도 착하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식사 준비가 되었어요.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고 옆에 서서 아버지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들아, 나는 이 포도가 주는 향긋한 내음이 정말 좋다. 이 농장 이 가진 이 풍경 또한 일품이 아닐 수 없구나. 아버지는 감상에 젖어 말씀하셨다. 그는 이 농장을 사랑했고 포도나무 역시 사랑에 보답하듯 풍성하 게 열렸다. 작물이 자라는 데는 풍토가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의 정성이란다. 우리 사는 것 또한 다를 것이 없지. 어떻게 하느 냐가 중요한 거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말씀은 항상 옳았고 나는 그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말은 깊이가 있고 진중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세요. 빨리 가요. 그래, 서둘러 가자꾸나. 그러고도 우리는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주위를 즐기며 걸었 다. 프랭크가 내일 돌아온다는 구나. 빵을 한 덩이 집어 내 접시에 주시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프 1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5

9 랭크는 지난달부터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청년이다. 그의 부 모님과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다. 그의 부모 님이 프랑스에 왔을 때 우연히 이 집에 머물게 된 것을 계기로 어른 들끼리 현재까지 편지를 주고 받아왔다. 잘 됐네요. 그가 있다가 없으니 심심했거든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달에 처음 봤지만 그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멋진 사내였고 생각이 깊었다. 가끔 수 심에 잠길 때도 있지만, 남들과는 다른 비범함이 보였다. 그는 새로 운 것을 받아들이는 걸 좋아했고 지금은 다른 지방을 여행중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막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지 왔는데 프랭크 씨 계십니까? 우편배달부였다. 프랭크는 내일 올 겁니다. 편지는 제가 받아 두죠. 편지를 받아 봉투를 보니 에이미라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였다. 에이미?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어차피 그는 내일 올 터였다. 나는 궁금증 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 내용은 나를 웃음 짓게 하는데 충분했다. 프랭크 그 친구를 어떻게 놀려줄까, 궁리를 해봐야겠어. 편지를 가방에 넣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학교로 향했다. 부족한 듯 어김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 창고 로 갔다. 와인을 마시면서 감상에 빠지는 것, 그것이 그가 현실을 잊 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왼손엔 와인 병이 오른손엔 언제 꺼 냈는지 모르지만, 프랭크에게 건네줄 편지 봉투가 들려있었다. 프랭크, 참 부러운 친구로구나. 그는 참 멋진 친구지. 한숨을 쉬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나도 결정을 해야겠어. 마음을 다 잡기 위해서 이 여자가 고민하 고 결정내린 것처럼. 호탕하게 한번 웃어버리고, 앙또네는 흐느적거리며 와인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때 이미 그의 손엔 편지 봉투는 없었다. 편지 봉투는 내일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는 와인 박스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앙또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정신이 반 쯤 나가 있었다. 시내 어느 술집에서나 그를 반겼고 그 역시 마다 하지 않았다. 행복 한 삶임에도 그에겐 결여된 부분이 있었다. 그의 호기심은 방대했지 만 그것을 채우기에 이곳은 너무나도 작았다. 하지만 포도 농장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하 지만 취한 날이면 감춰진 속마음이 드러났다. 그는 아직도 취기가 1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7

10 In Sicilia, Italy Grazia Amico 이은애 내 이름은 실바나이다. 나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Grazia Amico 라는 와인 바를 운영한다. 나는 와인을 사랑하며 친구라고 생 각한다. 그래서 바 이름을 Grazia Amico, 우아한 친구로 정했다. 평생 함께 할 친구이기에. AM 10:00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왔다. 눈 뜨자마자 내 발 은 와인부스로 향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 하루를 열어줄 와 인을 고른다. 하루 중 이 시간이 나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오늘은 달콤한 사과 맛이 나는 큐피드 모스카토 한잔. 음악을 틀어 놓고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조금 서둘렀다. 프랑스에서 새로운 와인이 오는 날. 출근길에는 꽃집에 들렀다. 본조르노, 소피! 본조르노, 실바나! 무슨 일이야? 꽃을 사러왔어. 오늘 나에게 어울리는 꽃을 추천해줘. 음. 오늘 기분이 어때? 설레. 오늘은 프랑스에서 와인이 오기로 했거든! 그럼 이 주황빛 장미는 어때? 꽃말이 설렘, 첫사랑의 고백이거 든. 좋아. 그럼 한 다발 포장해줘. 서둘러야 해. 빨리 가봐야 하거든. 새로 오는 와인과 함께 진열할 생각에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PM 4:30 짤랑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와인이 도착했다. 받자 마자 들뜬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와인 병들을 꺼내 와인부스로 가서 주황빛 장미와 함께 진열을 한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 해 와인 한잔을 따르고 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을 틀고 와인상자 정리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 빈 상자를 옮기려다 보니 안 에 웬 봉투 하나가 들어있다. 와인 설명서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 니 누군가의 편지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연애편지일까? 와인 을 기다리던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나뿐인데도 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뜯어 수줍게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갔다. 풋풋한 연애편지였다. 나도 15년 전 첫사랑에 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시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 는데. PM 5:30 짤랑 두 번째 문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첫 손님이다. 키가 180cm 정도로 아주 큰, 누가 봐도 미국계의 서양인이다. 쇄골 옆에는 타투 하나가 있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인상이다. Buonasera Benvenuto (좋은 저녁입니다. 어서 오세요.) Buonasera (좋은 저녁입니다.) 어떤 와인을 가져다 드릴까요?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하나 추천 받을 수 있을까요? 스칼라토 브라케토 다퀴가 좋을 거 같네요. 달콤하고 부드러우면 서 뒷맛은 포도향이 남아 좋을 거예요. 좋아요. 그럼 그걸로 한잔 주세요. 어디서 왔어요? 여행 중인가요? 미국에서 왔어요. 프랑스 여행 중 여기 와인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온 거죠. 기분 좋은데요? 오늘 첫 손님이고 기분까지 좋게 해주셨으니 와 인 한잔 선물할게요. 오늘 프랑스에서 새로 들어온 샤토 베르나도트 어때요? 달콤한 과일향이 있어 좋을 거 같네요. 잠시만 기다려요. 와인을 따라 그에게 가져가는 길에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1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9

11 도 이 풋풋한 연애이야기를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와인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편지 봉투 위에 쓰인 주소가 번지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손으로 문지르자 더 번져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그냥 놓는다. 이 와인이에요. 스칼라토보다는 드라이하죠. 베리 류의 과일 향과 오크향이 강하게 올라옵니다. 스파이시한 향신료 향, 뒤이어 은은한 바닐라향이 이어질 거예요. 아, 재미있는 얘기 하나 들려줄까요? 그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로 들어온 와인 상자에 편지 한 통이 있었는데 뜯어보니 글쎄 연애편지인 거예요, 한 소녀가 한 소년에게 쓴 편지였죠. 소녀가 소년에게라.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무슨 생각해요? 저도 좋아하던 소녀가 있었는데 여행 오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와서 문득 그녀가 떠올랐어요. 나도 이 편지를 읽으면서 첫사랑을 떠올렸는데... 나는 화려한 불빛으로 물든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이 편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은데 와인 때문에 봉투의 글자가 번져서 주소가 지워졌어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주소를 찾아서 보내야죠! 함께 찾아봐요! 나는 편지를 가져와 지워진 프랑스의 F 를 J 라고 생각해 J 로 다 시 적은 뒤 보여주었다. J? 제이로 시작하는 나라는 japan? japan! 오, japan! 내일 아침 바로 우체국으로 가야겠어요! 고마워요 덕 분에 이 편지를 주인에게 전해 줄 수 있게 됐네요! 우리는 전해 줄 수 있다는 기쁨에 와인 잔을 부딪쳤다. Japan이 아닌 France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추측대로 수취인 의 주소를 일본으로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In Tokyo, Japan 偶 然 (우연) 윤보경 1979년 12월 29일 목요일 りんりん りんりん (따르릉 따르르릉) もしもし(여보세요)? 긴자스시입니다. 안녕하세요. 마츠모토 씨 10분 뒤에 갈게요. 네, 항상 드시던 것 맞죠? 준비해 놓겠습니다. 친절하시네요. 좀 이따 뵐게요! 그녀는 매주 화요일 점심시간이면 마끼를 먹으러 온다. 메뉴는 항 상 새우튀김 마끼. 다이어트 중인지 마요네즈를 빼고 먹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전화 로 주문을 한다. 하얀 피부와 수줍은 미소, 그녀는 정말 아름답다. 여기는 일본 도쿄에 있는 스시 집. 내 이름은 마츠모토 료타다. 올해 스물네 살의 주방 막내로 가업을 잇기 위해 훈련 중이다. 어서 오세요, 리에 씨. 새우튀김 마끼 맞으시죠? 그녀가 왔다. 네, 맞아요. 포장해주세요. 계산을 한 그녀는 순식간에 떠나버렸다. 아쉽다. 언제쯤 그녀와 편히 대화라도 해볼까? 아니다, 얼굴이라도 본 게 어딘가! 벌써부터 다음 주 화요일이 기다려진다. 나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새벽 5시, 제일 먼저 주방 에 나와 밥을 안치고 주방을 간단히 정리한 후 신문과 함께 우편물 2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1

12 을 챙긴다. 얼마 전에 도로 명이 개정된 탓인지 요즘엔 잘못 오는 우 편물들이 많다. 우체국으로 반송하는 것도 일이다. 그러던 어느 이 른 아침, 우편함을 연 나는 어김없이 잘못 배달된 편지를 발견했다. 주소가 쓰인 부분에 얼룩이 생겨 잘 알아볼 수 없으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다 누군가 뜯어본 흔적이 있다. 호기심이 일어 나도 편지봉투 를 열어봤다. 그런데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쓰인 편지였다. 이게 뭐지? 나는 편지를 카운터에 그냥 던져놓았다. 이 편지는 뭐냐, 마츠모토야. 며칠 뒤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잘못 온 편지라고 말씀 드리려는 찰나 아버지께서 지나가시며 말씀하셨다. 리에 양이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다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거야! 이 편지를 이용해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겠구 나! 나의 가슴속에 설렘이 가득했다. 화요일이 더욱 기다려졌다. 오늘도 새우튀김 마끼 맞으시죠? 그리고 다음 화요일, 그녀가 왔다. 네, 오늘은 먹고 갈게요. 그녀가 말했다.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지금이 기회다 싶어 나는 바로 말을 건넸 다. 리에 씨는 영어를 공부하신다고요? 네 지금 1학년이에요. 편지를 보이며 내가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이 편지 좀 읽어봐 주시겠어요? 편지가 잘못 왔는데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요.하하 머쓱한 웃음을 짓자 리에 씨도 귀엽게 웃어 보였다. 저도 잘 못해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수업이 있어서요. 그녀는 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종이 에는 그녀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목요일 아침,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 낙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나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낮 1시, 그녀의 집 근처 다방에서 우리 둘은 마주하고 있다. 이 편지인가요? 그녀가 말했다. 리에는 편지봉투를 보고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바로 편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저도 아직 서툴러서요. 같이 천천히 해석해 봐요. 그녀는 정말 상냥했다. 그때 파티에 나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프랭크 상 그렇게 말없 이 떠날 줄 몰랐어. 우리는 점점 편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편지 속 소녀를 불쌍해했다. 남자가 말도 없이 떠나버린 걸까요? 어떡해. 여자가 너무 안쓰러 워요. 저는 절대 여자를 두고 떠나진 않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멘트다. 순간, 정적이 흐르 고 잠시 후 리에 씨가 웃어 보였다. 그럼 토요일에 다시 뵈요. 편지를 읽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우린 자연스럽게 다음 약 속을 잡았다. 편지로 인해 그녀와 둘이 만나 이렇게 대화까지 하다 니 너무나 행복하다.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고 편지도 순조롭게 해 석되고 있었다. 그러던 세 번째 만남.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지 못한 이유는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3

13 아, 해석이 잘 안 되네요. 다음 목요일에 다시 뵈요. 제가 더 해석 해 볼게요. 아쉽게도 오늘은 지난번보다 빨리 헤어졌다. 해석이 잘 안되어 속 상한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아 걱정이다. 목요일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오후, 저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료타 씨, 저 알아냈어요! 이게 꿈인가? 아니다. 진짜 그녀다. 오늘이 목요일인가? 아니다, 오늘은 월요일. 천사 같은 그녀가 나에게 달려왔다. 황홀함에 잠시 아찔했지만 나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뭐라고요, 리에 씨? 해석했어요! 파티에 못 간 이유는 드레스 때문이었대요! 편지를 해석하기 위해 일부러 교수님까지 찾아가 여쭤보고는 바 로 나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사랑스런 그녀의 미소 덕에 온몸으로 행복감에 번져갔다. 나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덧 다섯 번째 만남, 편지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녀를 계속 볼 순 없을까? 마음이 조급해졌다가도 그저 지금의 행복에 만족해 야 하는 게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녀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20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설렘을 느끼지 못했어. 그런데 프랭크 너를 본 순간, 내 마음 속에 꽃이 피는 느낌이 들었 어.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되뇌었다. 네? 그녀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프랭크는 너무 바보 같아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 받고 있으 면서 알지 못하다니. 리에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도 바보 같아요. 오래 전부터 제 가슴 속에도 꽃이 가 득 피어 있었어요. 리에 상.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행복한 미소를 내보이며 수줍게 대답했다. 저도요, 료타 군 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기념으로 그 편지를 리에에게 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다. 료타 군, 저 오늘 남성용 유카타를 사려고 하는데 같이 골라줄래 요? 저한테 선물해주려고요?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유카 타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잠시 내 눈빛이 흔들린 것을 눈치 챘는 지 리에는 함께 쇼핑을 한 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며 나를 초대했다. 리에의 집에 도착해 그녀가 마실 것을 준비하는 동안 나 는 그녀의 방을 구경했다. 어, 이 편지. 나는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곧 방으로 들어온 리에는 밤마다 그 편지를 읽으며 나를 생각한다 고 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그녀를 내게 데려와 준, 행운의 편지 임이 분명한 편지 한 통. 그녀는 펜팔 친구에게 보낼 거라며 유카타 를 박스에 포장했고, 나는 배고프다며 리에를 재촉했다. 서둘러 상 자에 옷을 포장한 리에가 수신 란에 큰 글씨로 이름을 적었다. TO FRANK 2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5

14 In New York, America Even now It s not too late 백진안 December 19th, 1976 at 7pm 간만에 어머니와 단둘이 저녁시간을 가졌다. 창밖에는 눈이 소소 하게 내리고 있다. 거리는 다가올 크리스마스 준비로 꽤 환하게 빛 나고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던 중 어머니는 불쑥 봉투 하나를 건네었다. 크리스마스에 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준 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리 주는 것이라 했다. 뭐지? 뭐기에 준 비할 시간이 필요한 거지?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봉투를 열었다. 12월26일 15시25분 뉴욕JFK공항 파리 샤를드골국제공항 받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평소에 그렇 게 프랑스,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내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 같다. 너무 흥분된다.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너나 할 것 없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쫙 빼입고 파트너와 함께 파티를 즐기고 있다. 며칠 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에이미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는데 흔쾌히 승낙해 주어 깜짝 놀랐다. 뭐...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파 티가 열리는 체육관 한 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오지 않는다. 약속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나는 아직 프랑스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늘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나의 데이트 신청을 건성으로 들은 걸까. 에이미 에게는 꼭 알리고 떠나고 싶었는데.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 만 결국 나는 쓸쓸히 혼자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랑스에 도착했다. 보르도 지역의 한 포도농장을 운영하는 집에 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직접 와인도 만드는데, 프 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나 다른 유럽지방으로 수출도 한다. 룸메이 트, 그러니까, 집주인의 아들은 말이 정말 많다. 거기다 목소리도 크 고 시끄럽기까지 하다. 옛날부터 부모님들끼리는 아는 사이라지만 나는 이런 관계가 꽤나 어색하고 불편하다. 며칠이 지나서 룸메이트 는 껄껄대며 나에게 와서 등을 툭툭 치더니 짜식, 부럽다 임마! 라 며 뭔가 알고 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잠깐 나간 사이 편지 한 통이 왔는데, 그것을 자기가 받았다며 저녁을 먹은 후에 주겠다고 했다. 저런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내용을 읽어본 모양이 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편지를 받으러 룸메이트를 따라갔더니 편지가 없어졌단다. 가족이 아니면 내게 편지 쓸 사람도 없을 텐데, 누굴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니 나중에라도 찾으 면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1년간의 홈스테이를 끝낸 뒤에는 이탈리아로 자유여행을 갔다. 바 로 뉴욕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왕 온 유럽인데, 아 직 집으로 가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여행 중 시칠리아의 어 느 한적한 와인 바에 들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아 무도 없었다.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바텐더는 내가 첫 손님이라며 프랑스에서 들어왔다고 하는 특별한 와인을 내주었다. 내준 진한 검 붉은 색의 와인은 단맛이 꽤 강했고, 입안에서 향이 오래 남았다. 그 와인을 맛보게 된 건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이어 바텐더는 특별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게를 열기 전 오늘 들어온 와인박스를 열 어보았는데, 그 박스 안에 어떤 편지 하나가 껴들어 있었다고 했다. 신기해서 그 편지를 읽었는데, 어떤 소녀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신 의 사랑을 담아서 보낸 내용이라 했다. 일반적인 사랑고백이 담긴 2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7

15 편지였는데 왠지 편지를 읽으면서 그 소녀의 간절함과 용기가 느껴 진다고, 자신의 뜨거웠던 첫 사랑이 떠오른다며 꼭 편지의 주인공에 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투나 눈빛은 이미 편지의 주 인공이 된 듯 했다. 기나긴 유럽여행을 마치고 다시 뉴욕에 돌아왔다. 겨울의 뉴욕은 항상 춥다. 뉴욕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살던 집에서 멀리 떨 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한 것 말고는 특별한 일 없 이 평범한 날이 지나갔다. 아, 굳이 특별한 일을 들자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인과 펜팔이 되어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간간이 주고 받는 편지는 평범한 하루에 소소한 재미거리다. 오늘도 그 친구에게 서 편지가 왔다. 그런데 오늘은 편지가 아니라 소포가 왔다. 포장을 뜯어보니 파자마로 보이는 옷 한 벌이 들어있었다. 벚꽃이 그려진 파자마는 넉넉해서 잘 때 입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도 있 었다. 편지에서 이 옷이 유카타 라는 일본의 전통의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꽤나 좋은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 다. 그런데 이번에는 편지가 두 통이다. 이건 뭐지? 하고 편지를 보 았다. To Frank, 라고 적힌 것을 보면 나에게 보낸 것은 맞는데. From. Amy. 에이미?! 내가 알고 있는 그 에이미? 편지는 눅눅하고 꼬깃꼬깃하여 오래 된 것 같아 보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의자에 앉아 편지를 천천히 내 려 읽어갔다. 말투, 글씨체 모두 에이미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파 티. 이게 왜 이 상자에 들어 있던 건지, 왜 일본에서 온 건지, 왜 이제야 받게 된 건지, 수많은 의문이 끓어오르는 거품처럼 머릿속을 채워가고 있다. 그러던 중 번뜩 든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 거품을 잠 식시켰다. 에이미를 만나야해! 편지를 꽉 쥐고 즉시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택시는 아무리 노 력을 해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일단은 빨리 뛰는 것밖 엔, 정신없이 기억이 이끄는 곳으로 달리고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은 익숙하지 않다. 그저 기억만을 믿을 뿐이다. 가로수 들이 시야 뒤로 빠르게 넘어가고, 내 몸도, 심장마저 빨리 뛴다. 내 모든 것들이 빨리 뛰고 있다. 오래전 지나쳐버린,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쳐버린 시간들을 따라잡으려면 더욱더 빨리 뛰어야 한다. 옛날의 그 감정들이 숨과 함께 차오른다. 따라잡아야 한다. 이윽고 기억속의 그 집에 다다랐다. 뛰어와서인지 떨려서인지 모 르겠지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숨을 죽이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딩동. 고요 속에서 초인종 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 때, 누구세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있 다. 그녀도 꽤 놀란 것 같다. 머릿속이 하얗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 는다. 순간 손에 쥔 편지가 보였다. 아무 말 없이 편지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꼬 옥 안는다. 2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9

16 Journey Where am I? 김대권 기나긴 여행이었다. 에이미의 손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내게 우표를 붙여줄 때의 그 온기가 다시 한 번 전해졌다. 눈빛은 기다림에 지친 듯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 외침은 여전했다. 에이미! 프랭크를 붙잡아! 프랭크의 손끝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남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 에이미는 아무 말 없이 프랭크를 꼭 안았다. 그 후 두 심장은 가파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록 길고도 험한 여정을 겪어야 했지만 이 순간을 지켜보니 행복 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에이미에 의해 태어났으 니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나의 최종 임무이자 편지로서의 운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처음 프랭크 집에서 반송되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연 애편지 인생이 이렇게 기구한 것인지. 첫 행선지인 프랑스로 가는 길에는 함께 비행하던 각종 수화물과 편지들의 사연 때문에 시끄러 워서 잠 한숨 자질 못했다. 피곤을 무릅쓰고 도착한 곳은 포도농장. 까무잡잡한 한 사내가 아침부터 거칠게 나를 펼치더니 히죽히죽 웃 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였기에.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 한숨 자고 났더니 벌써 저녁이다. 밖에선 고양이가 암탉을 쫓는 소리가 들리고,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술 냄새를 풍기는 그 사내가 들어왔다. 진득한 손으로 나를 집더니 어 디론가 움직인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 그 냄새에 취해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고 보니 난 어느 포도주 상자 틈 에 끼어 있었다. 곧이어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프랭크 이 자식은 어 디서 무얼 하기에 모습을 안 비추는 건가? 나는 한탄했다. 건장한 사 내들이 포도주 상자를 트럭 위로 옮겼고, 나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보르도 지방의 벌판을 달렸다. 보르도 와인 병들이 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 시골 촌구석에서 연애편지의 인생은 흙과 함께 묻혀 버 렸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고 다행이다. 그 다음은 이탈리아였다. 로마공항, 레드와인들이 덥다고 난리다. 자칫 잘못하면 코르크 틈 사이로 끓어 넘치고 심하면 곰팡이까지 피 어 맛이 변한다고 성화다. 생각해 보면 와인은 마시는 이에게 최상 의 상태로 전해지는 게 역할이고, 연애편지란 기다리는 이에게 신속 하게 전달되는 게 임무다. 그런데 지금 난 여전히 이역만리에 있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까지 갈 모양이다. 팔레르모 공항에 도 착했다. 화물칸 검사대를 지나고 하루가 지난 오후 즈음에야 공항을 나선다. 그 이유인 즉은 배송원들이 시에스타(siesta)라는 낮잠을 자 기 때문이다. 한참 일할 시간에 낮잠이라니 별의 별 놈들이다. 그리 곤 또 어딘가에 도착했다. 박스 뚜껑이 열리고 누군가 나를 집어 들 었다. 조용한 재즈음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와인 바 같은데... 내 겉옷이 뜯겨나가는 소리에, 어떤 놈일까? 하고 올려다 봤더니 검은머리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가씨다. 그녀는 나를 조 용히 들여 보다가 와인 한 방울을 떨군다. 맙소사! 검붉은 액체가 내 몸에 스며든다. 그녀는 당황한 듯 손으로 문질러 보더니 잠시 후 나 에게 새 옷을 입혔다. Japan? Japanese? 미쳤군! 일본이라니! 머리 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그렇게 다시 한 번의 비행을 거쳐 일본의 축축하고 나무향이 번 지는 우편함에 이르렀다. 한 젊은 남자의 거친 손이 나를 끌어 당겼 3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1

17 다. 옆으로 보이는 수족관에선 물고기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시퍼렇게 날이 선 칼 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는 데 말이다. 몸이 떨려오려던 순간, 그는 나를 던져 버렸다. 다행히 책상 위다. 며칠 뒤 그는 아리따운 여성에 게 나를 보이며 뻔히 보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업 이 있다며 급히 나가 버렸다. 한 순간에 차인 것일까. 하지만 이틀 후 나는 그에게 품었던 연민을 거두었다.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 와 뽀뽀를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라면 모를까, 기분이 좋지 않 다.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들은 내가 품고 있는 내용을 해 석한다는 핑계로 잦은 만남을 가졌고, 둘이 만날 때면 꼭 나를 데리 고 다니며 귀찮게 했다. 결국 그는 오래 전부터 제 가슴 속에도 꽃 이 가득 피어 있었어요. 라는 오글오글 거리는 멘트로 그녀의 마음 을 빼앗았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 내게도 기쁜 일이었지만 정작 프랭크에게 에이미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해 아쉽고 허탈했다. 하지만 내게 기회는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유카타 라 는 얇은 일본 전통복과 함께 포장되었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이름 이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소리를 들었다. 상자 속 어둠에서 나는 생각했다. 프랭크의 집, 다시 에이미의 집,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즐겼던 와인의 취기, 이어진 일본으 로의 여행, 그리고 다시 떠나게 된 희망의 여정. 이제는 프랭크가, 그리고 에이미가 나를 반겨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결코 놓을 수 없다. 내가 사는 세상은 희로애락( 喜 怒 愛 樂 ) 유성은 화단 이윤성 맥금동 이규선 ㅌㅡㄹㅏㅇㅜㅁㅏ 박주영 이곳은 어디인가 허정훈 3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18 희로애락( 喜 怒 愛 樂 ) 유성은 1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행복을 느꼈던 곳과 가장 슬피 울었던 곳은 같다. 그곳에서 나는 짙은 어둠속의 작은 씨앗이었고, 그곳에서 가 장 치열하게 생명을 이어가고자 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곳이며, 그렇게 아프도록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했던 곳.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다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그를 아 주 많이 사랑한다. 그는 나와 그녀를 이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의 입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더욱 모질게 우리를 공격했고, 나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너무 아파했다. 완성되지 않은 내 마음이 짙은 어둠속에서 크게 요동쳤다. 내 가슴께 있는 따듯한 무엇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나의 존재가 그와 그녀에게 큰 두려 움이 된 것일까. 그는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진심을 말하 고 있었다. 그는 나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다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이다. 그와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목소리를 듣고자했다. 차 가운 무언가가 나를 쓸었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2 나는 빛을 알지 못했다. 항상 어둠속에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어 둠인지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복으로 빛과 어둠을 구분했 다. 대부분의 나날들이 어둠이었지만, 그 날은 따스한 햇볕이 느껴 지는 날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 남자도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세상에서 가 장 사랑하는 그녀를 보던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음 지었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는 미안함과 사랑이 들어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와 그녀는 언제나 함께했고, 나도 언제나 그들과 함께했다. 그는 나에게 노래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때는 내 가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행복으로 그의 사랑 을 느낄 뿐이었다. 어서 나에게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 력이 생기길 바라며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사랑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 다.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달콤했고, 나는 그의 노랫소리가 항상 흥 겨워 손발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깜짝 깜짝 놀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가 보기 좋았 다. 그녀가 계속 웃기를 바랐고, 시도 때도 없이 손발을 꼬물거렸 다. 밝고 활동적이었던 그녀는 나와 함께한 후로 피로를 자주 느꼈 고, 게으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거짓말도 했다. 내가 딸기 를 먹고 싶어 한다며 늦은 밤에 그를 고생시키기도 했다. 날이 갈수 록 그녀의 어리광은 늘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 며 그녀의 어리광을 닮아갔다. 3 그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느꼈던 나는,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 했다. 이제는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들의 두 눈을 마주보고 싶었다. 이제 이 어둠속에서 나가고 싶어 졌다. 나는 탈출을 시도했다. 출구를 향해 단단해진 내 머리를 내밀 어 나갈 생각이었다. 출구를 찾아 몸을 뒤척였고, 깜깜한 어둠속에 3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5

19 서 오직 내 감각에 의존한 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격렬 한 움직임에 크게 놀란 듯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많이 고통 스러워했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를 너무나 보 고 싶었고, 그녀에게 나를 보이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가 그녀의 손 을 꽉 잡아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서 나오라고 힘을 보태주었다. 그녀는 아파하면서도 나의 탈출을 응원했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 이 나의 탈출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들을 만날 생각에 나는 너 무 설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벅찬 감동을 그들과 나누기위 해 나는 좀 더 힘을 냈다. 그리고 드디어 감당할 수 없게 빛나는 세 상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에필로그 모든 사람은 부모의 사랑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뱃속에서 생을 시 작한다. 태아가 된 생명은 약 10개월을 여자의 뱃속에서 자라난다. 이때 여자의 뱃속에서 보내는 10개월은 한 사람이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한 평생의 감정을 축약해서 느끼게 된다. 곧 자궁이란 공간은 인생을 PREVIEW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우리는 누구나 이곳에서 인 생의 희로( 喜 怒 )애락( 哀 樂 )을 경험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수 십 년의 인생을 살아야할 우리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 아닐까? 이 공 간에서의 경험을 출생 시 기억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화단 이윤성 주위보다 높게 올라간 빌라의 주차장 한 구석엔 1평 남짓한 화단 이 외로이 방치되어 있다. 콘크리트 건물에 가려 햇빛도 잘 들지 않 는 그곳은 고물상 아저씨의 쉼터이자, 중 고등학생들의 비밀 장소 이기도 하다. 누구 하나 돌보지도, 관심 가져주지도 않는 그 화단에 핀 꽃 한 송이. 그곳이 버려진 공터가 아니라 화단임을 증명하듯 수 줍게 피어난 꽃 한 송이가 자칫 무채색으로 지워질 뻔한 누군가의 아름다운 추억을 선명하게 되살려내는 듯하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대문이 따로 있는데도 괜히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복덕방을 통해 서 집으로 들어간다. 한 번이라도 더 할아버지 얼굴을 보기 위해서 다. 집에 들어서면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곧장 달려가는 곳은 대문 옆 계단. 내가 올라가기엔 너무 높지만 그 계단을 힘겹게 오르면 숨 겨진 보물처럼 옥상 위 빨간 앵두나무가 나를 반기고 토마토, 호박, 고추, 상추가 널려있다. 따 먹을까, 말까. 아까운 마음에 고민하다 결국 앵두를 한주먹 따먹는다. 마당 끝에서 나를 반기는 강아지와 토끼에게 눈도장 찍듯 사료와 당근을 던져주고 나서야 비로소 방으 로 들어간다. 할아버지! 나 할아버지 옆에서 숙제해도 돼? 그래봐야 가방만 내려놓았을 뿐 나는 바로 복덕방으로 향한다. 그 3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7

20 안에는 푹신푹신한 소파에 빵빵한 에어컨까지 더운 여름 날 숙제하 기 가장 좋은 장소다. 딸랑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람 들이 들어온다. 전세, 월세, 복비 어린 나이로는 알 수 없던 이야 기들을 나눈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가서는 한참을 돌아오 지 않는다. 숙제를 옆에 펼쳐 놓은 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소파 위를 뒹굴면서 할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밤이 되면 김 사장님, 최 사장님, 전 의원님. 내 눈엔 그냥 다 아 저씨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장님들이 할아버지 복덕방으로 모여들고 술자리가 시작된다. 그 틈에 끼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다 심부름을 하는 게 고작이지만 하루 중 할아버지 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거기다 내가 좋 아하는 자장면과 음식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벌건 얼굴로 어린 내 게도 술잔을 권하는 아저씨, 용돈을 쥐어주며 노래시키는 할아버지 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주인공이 된 듯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 다. 자던 내 침대가 있던 자리가 저 화단쯤이 되려나. 24년 동안 같은 동 네에 살았지만 오늘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무작정 길을 걷는 다. 허름했던 집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커다란 아파트, 빌라들만 가 득하다. 어릴 적 뛰어 다니던 골목길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사라지 고, 아이들마저 보이지 않는다. 화단에 핀 꽃 한 송이만이 내게 공감 하듯 활짝 웃는다. 분명 그때 그 자리인데 모든 형태는 사라지고 남 은 건 기억뿐이다. 할아버지 가서 자자! 온몸이 붉게 물든 할아버지를 모시고 방으로 들어간다. 숙제는 다했니?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그래. 나는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는다. 꼼짝 못하는 건 나나 할아버지나 똑같다. 침대에 누워 할아버지의 팔베개 에 머리를 대고 만지작만지작 할아버지 팔을 만지면 하지 말라고 하 시면서도 절대 팔을 빼지 않으신다.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잠드는 이 시간. 할아버지의 술 냄새까지 포근하게 느껴지는 그 시간이 너 무 좋았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그 집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 자리 엔 빌라가, 할아버지의 복덕방은 주차장이 됐다. 할아버지와 누워 3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9

21 맥금동 이규선 이곳은 맥금동 종점이다. 맥금동이란 이름은 중간에 매흙이 많은 후미진 곳이어서 맥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 길은 더 이 상 차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역이고, 왼쪽에는 시냇물이, 길 오른쪽에는 무슨 일이라도 다 감추어 줄 듯 갈대가 무성하고, 그 뒤로는 산이 있다. 이 길은 가로등이 없어 별빛과 달빛에 의지해 걸 어야 하는 깜깜한 길. 부부가 유모차를 밀며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걷는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전화벨이 울 린다. 통화하는 목소리, 그 여자다. 여보세요? 아 진짜요? 금방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검은 그림자가 내 옆을 급히 지나간다. 남은 어둠 속에서 반짝 작은 불이 일더니 붉은 불꽃이 허공에 떠 서 움직인다. 그 뒤로 코끝에 전해지는 담배 냄새. 아기의 울음소리 에 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그래, 알았어. 이놈, 담배가 몸에 안 좋은지는 어떻게 알고 우는 거야. 너까지 길에서 담배 핀다고 아빠 쫓아내면 흡연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고. 남자의 희미한 그림자가 시냇가 쪽으로 내려가서 쪼그려 앉는다. 아마도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 겠지. 내가 저 기분 잘 알지. 물을 바라보면서 피는 담배. 캬~ 나 도 가서 한 대 피우고 싶네. 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전에 일어난 일들 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토요일 저녁, 아울렛에는 손님이 많았다. 나는 한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있다. 한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저기, 학생! 저 마네킹이 입은 바지 좀 줘 봐.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이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30.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매장은 바지 사이즈가 28까지만 나와서 요. 손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고는 그럼 28로 줘 봐.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기세다. 옆 매장의 주영이 오빠가 다가온다. 눈짓으로 오늘은 또 어떤 진 상이야? 한다. 몰라요. 허리 30인데 자꾸 28 입어본다고 갖고 들어갔어요. 주영이 오빠는 진심으로 짜증나는 표정으로 아, 오늘 왜 이렇게 진상이 많냐? 한다. 그러게요. 대화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바지를 입는 데 실패한 여자가 오히 려 내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아우! 옷을 왜 이리 작게 만들어. 돈 벌기 싫은가? 학생 저 티셔 츠도 좀 줘 봐. 나는 기분 나쁜 표정을 애써 참으며 손님 저기 앞쪽으로 가시면 있구요, 티셔츠는 착용이 불가능 합니다. 그러자 손님이 화가 난 표 정으로 뒤돌아 말한다. 왜 안 돼? 참, 어이없네. 내가 훔쳐가기라도 할까 봐? 지금 나 도 둑 취급하는 거야? 표정은 왜 그래? 똑바로 해! 짜증나게 하지 말 고!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윽고 잠시 자릴 비웠던 여자의 남편이 나타나 무슨 일이야? 4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1

22 라며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억울하다는 듯, 아니 쟤가 나를 도둑놈 취급하잖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지만 오늘도 잘못 걸렸구나! 라고 생각하 며 말했다. 아니, 그게요. 규칙상 착용이 불가능해요. 제가 손님을 도둑으로 취 그녀는 내 말을 끊더니 나의 왼쪽 뼘을 힘껏 때렸다. 그 소리에 매 장 사람들의 눈은 내게 집중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번엔 욕을 하기 시작했다. 옷 파는 일 따위 하는 주제에 어디 나한테 기어올라? 손님은 왕 이다. 이런 서비스 정신도 몰라? 서비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 지, 원.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매니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무슨 일이세요? 여자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아니 지금 이 학 생이 저를 도둑 취급을 하네요. 참 어이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직원이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다시 교육 을 시키겠습니다. 매니저는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사과를 한다. 매니저님 그게 아니 매니저는 억울한 마음에 상황을 설명하려는 내 말을 끊으며, 그 만 하고. 어서 다시 사과 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흐르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여자 앞을 벗어나서야 고개를 들 고 원망하듯 여자를 한 번 더 바라본 뒤 창고로 들어갔다. 옷을 갈 아입고 유니폼을 집어 던지다시피 한 뒤 매장을 나와 직원 휴게소로 향했다. 담배를 한 대를 태우면 나아질까 했는데 전혀 마음이 가라 앉지 않는다. 혹시 남자가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오른쪽 갈대밭쪽으로 바짝 붙 어 갈대와 하나가 된 듯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다 왔다, 싶은 순간 아기가 울음을 터트린다. 나의 신경세포는 주위의 모든 소리를 감지 하듯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 나 남자가 듣지는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에 귀를 기울인다. 때마침 멀리 차 한 대가 지나간 덕분에 남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하 다. 똑딱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살그머니 아기의 입을 막은 손을 뗐다. 아기는 더 이상 울지 않 았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과 함께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나는 무의식 적으로 아기 코에 손을 대보았다. 제발 울어줘 순간, 남자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 혼자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여편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무슨 일이 생겼나? 내 머리 속은 하얘졌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 빨리 아기를 가방 속에 넣고 갈대밭으로 몸을 숨겼다. 직원 휴게소를 막 나서는데 아까 그 부부가 깔깔대며 내 앞을 지 나간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부부는 쇼 핑을 마친 듯 택시를 잡더니 유모차를 접어 싣는다. 나도 바로 뒤의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저 앞의 택시를 따라가 주세요.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린다. 매니저의 문자다. 미안해. 그런 손님은 그렇게 하는 게 제일 빨라. 이제 그만 나와 도 될 거 같은데.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면서 또 한 번 울음이 터졌다. 택시 4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3

23 기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를 달랜다. 아저씨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내가 피해자거든요? 욕도 먹고 맞기까지 했는데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자 택시기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스스 로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넋두리를 한다. 원래 세상이란 게 다 이 모양이지.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으니 이렇게 살아야지 그때 앞의 택시가 멈췄다. 아가씨 차 세울까? 네. 감사했어요. 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가 든 가방을 메고 온 몸이 땀에 젖은 상태로 숨 가쁘게 맥금동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 저만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 여자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숨기고 입을 틀 어막았다. 그녀가 내 앞을 지날 때쯤 갑자기 가방 무게가 느껴지면 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내 손을 입에 물고 간신히 울음 을 참으며 여자의 검은 그림자가 깊은 어둠 속에 파묻혔을 때 나는 길 위로 올라와 다시 향해서 걸었다. ㅌㅡㄹㅏㅇㅜㅁㅏ 박주영 번쩍 번쩍! 시끌벅적! 갈 때 마다 놀이공원의 이미지는 항상 같다. 누구와 함께 가든 나는 항상 긴장되고 무서웠다. 그런데 가족도 아 닌 남자와 단둘이 놀이공원이라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청룡열차를 타자고 한다. 순간 나는 옛날 기억이 떠올 랐다. 내 나이 7살. 처음으로 아빠 엄마 손을 잡고 놀러 갔던 놀이공원은 아찔할 정도로 새로운 풍경이었다. 말들이 히히힝 소리를 낼 것처럼 허공을 떠다니고, 뱀인지 지렁이인지 기다란 물체가 빠르게 돌아다 니는가 하면 풍선과 그네들이 공중에서 뺑그르르 돌고 있었기에 가 슴이 두근거렸다. 마냥 놀러 다니기 좋아할 나이.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는 말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엄마 아빠 손을 이끌었다. 멀리 서 봐도 예뻤지만 가까이서는 더 예뻤다.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가고 싶어 할 때 요정할머니가 나타나 옷과 구두, 마차를 만들어준 것처 럼 내 눈 앞에도 호박마차가 있었다. 너무 신기해 한참을 만져보다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었는지 아빠가 내 머 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시 후 아빠는 나에게 건너편의 뱀처럼 기다란 놀이기구를 가리 키며 타자고 하셨고 난 멋도 모르고 네! 하고 웃으며 달려갔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청룡 열차였다. 뱀이라고 하 4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5

24 기엔 너무 큰 뱀이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열두 개의 칸에서는 알싸 한 쇠 냄새가 났고 차가웠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 높이가 하늘 에 닿아있는 듯 높이 솟아있었다. 자리가 넉넉해 아빠 무릎에 앉았 는데 아빠는 날 꼭 끌어안았고 옆에는 엄마가 앉았다.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보니 혼자 탄 사람도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사람들은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 소리는 나에게 긴장감을 더 주었다. 덜컹덜컹 열차 레일 소리도 흥미로운 것 같으 면서 무서웠다. 열차가 갑자기 빨라졌다. 나는 겁을 먹고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걸 알았는지 아빠가 나를 더 꽉 안아주 셨고 엄마도 내 손을 잡아주셨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속 도가 빨라지는 순간 어느새 눈을 감았고, 끝까지 눈을 뜰 수가 없었 다. 급기야 눈물도 났는데 속도가 느려지면서 처음 출발할 때 들었 던 레일 소리가 들려 와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속이 메스 꺼웠다. 열차에서 내리자 아빠는 나를 업었다. 출구 쪽에 가서는 아 빠 등에서 내려 구토를 한 기억도 난다. 나는 그 이후로 놀이공원의 열차들을 타지 못 한다. 내 안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야! 너, 너무 우울해 보여. 내가 진짜 친한 오빠 있거든. 진짜 괜 찮은 사람이야, 한번이라도 만나봐. 너 그러다 진짜 우울증 걸리겠 다. 사랑에 상처받은 뒤 사람을 피하던 내게 친구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로운 사랑이 무섭고 두려웠지만 친구의 말대로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지금 내 옆에는 그 사람이 서 있다. 그 오빠, 완전 숙맥이야, 너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니까 너무 그러 지 말고 알았지? 친구의 말대로 그는 긴장한 듯 보였고 말수가 적었다. 나는 이 정 적을 깨고 싶고 해서 말을 건넸다. 뭐 불편한 거라도 있으세요? 편하게 말하셔도 되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떨려서요, 그리고 또 정적,,, 그렇게 조용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번호 교환을 하였다. 집 방향이 비슷해 걸으면서 그를 힐끔힐끔 보 았다. 우리 집 앞까지 바래다 준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첫 느낌은 좋았다. 무언가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휴대폰 이 울려 메시지를 보았다. -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에 놀이공원 어 떠세요? 놀이공원. 나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생각났다. 그래도 이제는 깨 야겠다는 생각에 승낙하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만나기 직전 까지도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싶지만 또 두려 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놀이공원에, 그리고 청룡열차 앞에 서 있다. 그의 제안에 갈등하고 있다. 청룡열차 이야기 나오기 전까지만 해 도 놀이공원의 떠들썩함으로 잊을 수 있었는데. 사실 놀이공원에 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줄은 몰랐다. 나의 이런 환한 모습을 그는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색함도 사그라지고, 웃으면서 대화도 하고 전보다는 활기찬 점심식사로 그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느낌 을 받았다. 과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방금 전까지의 그 기억들이 떠올라 더욱 표정이 굳어지고 경 직되었다. 그때 친구의 말이 또 생각났다. 오빠는 먼저 막 제안하고 그러는 거 진짜 못하거든? 만약에 제안 하고 먼저 말 걸고 하면 무조건 잘 반응해주고 알았지? 그를 보았다. 역시 상처받은 얼굴로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생각 해보면 그가 나에게 제안했던 적은 놀이공원 가자는 것 하나 뿐이었 4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7

25 다. 청룡열차를 보았다. 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에겐 너무나 크 고 무섭다. 청룡열차의 얼굴이 비웃는 듯 나를 보는 것만 같다. 청룡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밑에서 바라보는데 레일소리까지 더해져 나 를 압도해왔다. 아, 싫으시면 괜찮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볼까요? 그는 분명 상처 받았다. 그의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에 휩 싸였다. 이 트라우마를 깨고 싶다.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다. 입 밖 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한 마디의 말을 잡고 있다. 어떡하지? 커다란 트라우마가 나를 옥죄었지만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아, 아니요! 탈게요! 같이 타요, 우리!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도 미소 지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가까운 스킨십은 처음이다. 그의 손이 따뜻 하다. 줄을 서는 동안 내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이게 나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의 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떨림이 참 좋았다. 드디어 우리 차례. 눈을 질끈 감고 열차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데 그가 내손을 또 잡아주었다. 열차의 의자 는 차가웠지만 그의 온기로 인해 따뜻해져갔다. 심호흡을 하고 그를 보았다. 무언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출 발이다. 나의 새로운 사랑도 함께. 이곳은 어디인가 허정훈 세상은 좁고 또 넓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나에 겐 좁게 느껴진 것 같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지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잘못이 잘못인지 모르고 살다보니 어느 덧 나는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내가 있는 이곳 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 인 듯하다. 좁고 캄캄한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얼음 잔처럼 차가운 공기 뿐이다. 소리 또한 들리는 것 하나 없으며 귓가에 들리는 것은 옷과 몸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나에게 삶의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으며 끝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내가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달콤한 꿈을 꾸는 것이다. 이곳에선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없으나 창틀 사이 로 보이는 작은 빛의 색깔로 가늠 해본다. 지금 보이는 것은 시뻘 건 붉은 빛이다. 이것이 저물어가는 태양의 빛인지, 떠오르는 태양 의 빛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게는 저물어가는 태양의 빛으로 보 일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게슴츠레 한 눈이 감긴다. 코는 먼지만 들이 마시고 가슴속은 답답하다. 저무는 태양의 빛이 나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빛 속에 이끌린 채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 서 있는 이 공간은 마치 동화 속 같다. 아니 어쩌면 동화 속 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풍경을 보니 어렸을 적 잠결에 어머니가 들 려주신 전래 동화 이야기가 떠오른다. 넓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 쳐져 있고 뒤편에는 싱그러운 풀밭과 나무들이 마음속 깊이 정화시 4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9

26 켜 주는듯 한 느낌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들뜬 나는 숨이 찰 때 까지 뛰었다. 깊숙이 들이 마시는 숨은 시원한 박하사탕이 코와 목 을 매워주는 느낌이다. 나는 그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 뜬 구름 역시 달콤 한 솜사탕처럼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누웠을까? 저 멀리서 다급하 게 날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와 함께 가주세 요. 나는 꿈속 인지도 모른 채 그를 보고는 흔쾌히 허락했다. 누군 가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멀리 하려고만 했고, 나는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었 다. 동화 속의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마운지 나를 붙잡고는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외 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 그는 나를 방으로 안내해준 뒤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 방안에는 다 죽어가는 병든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입을 열어 내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부탁이 뭔가요? 노인이 말하기를 초식동물의 간이 필요 합니다. 도와주세요. 나는 곰곰이 생각한 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온다는 인사 를 하고 나왔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니 주위에는 동물들이 하 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작은 것부터 큰 것 까지 초식동물, 육식동물 할 것 없이 눈앞에서 뛰어다녔다. 그중 나는 가장 앞에 있 던 토끼를 잽싸게 잡았다. 토끼를 잡는 순간 내 귓가에 살려 주세 요. 저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별 주부전 이 떠올랐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그 자리에 토끼를 있는 힘 껏 던졌다. 그 자리에서 토끼는 죽었고 나는 죽은 토끼의 간을 빼낸 뒤 마을로 돌아갔다. 방문을 열었을 땐 아무것도 없었으며 나무 책 상위에는 편지 한 장 뿐 이였다. 두 번 다신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라. 책상 위에 있던 글을 읽고 마침표를 읽 을 쯤에 등가에 식은 땀 이 나며 감았던 눈이 떠졌다. 꿈은 너무나 생생했으며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 같았다. 이런 생각 도 잠시 칠흑 같은 어두운 공간속에 새하얀 빛이 들어왔고 그사이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게 하얀 포대를 씌워주었다. 쉬고 있던 숨은 점점 더 조여 왔으며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렇게 어디론가 또 다른 어디론가 가고 있었나 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커다란 돌을 옮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길을 갔던 나는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었다. 멈춰선 곳은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내 앞을 가리는 포대는 숨통을 더더욱 조여 왔다. 나는 손발 하나 움직 일 힘이 없었으며 무릎이 땅에 닿을 쯤에 떠 있던 눈이 또다시 감겨 왔다. 꿈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감긴 눈앞에 맴도는 것은 나무 책상위에 있던 글귀 뿐 그 이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꿈 속에 갇힌 채 두 번 다시 깨어날 수 없었다. 5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1

27 시간의 기억 내 삶 속의 시간 김종욱 빨간 미소 김도희 7시 5분, 시간의 방을 찾아서 황성화 그녀와 그의 시간 국현호 이별일기 송보람

28 내 삶 속의 시간 김종욱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여 인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 할 수 있다. 건강한 음식을 위해서는 신선한 재 료들을 사용하고 균형 잡힌 영양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면 시간과 음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근 실습의 기억을 떠올리 며 고민해 본다. 요리를 배우는 학생이다 보니 실습수업을 위해서 항상 주방 가까 이에 있게 된다. 하지만 이론적인 내용을 배울 때면 우리는 저 멀리 떠나 있었다. 세월을 뛰어넘어 대륙을 횡단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 들었다.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오늘은 유럽으로 향했다. 사 이프러스 방풍림 사이의 좁은 토지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은 과일과 채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고 로마시대 때부터 생산되어온 와인 과 치즈는 숙성되어 향과 풍미가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들어지고 보존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재료와 우리의 재료를 적절히 조합하여 오늘 실습이 진행 된다. 이제 재료 분배하고 실습 시작하겠습니다. 쉐프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는 고대로마 시대에서 다시 한국의 주 0 방으로 돌아왔고 다들 서둘러 Pissaladiere와 baked potato실습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들을 준비한다. 금일 만들게 되는 피살라디에르 0 (Pissaladiere)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가정 식 피자로 이태리의 영향 을 받아 만들어졌고, Baked potato는 감자를 껍질째 씻어 오븐에 구운 서양 감자요리이다. 어떻게 보면 패스트푸드와 비슷하지만 재 료와 조리, 그리고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구분된다. 프렌치 음식의 특징인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은 자극적이고 건강에 해로운 패스트푸드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피자, 햄버거, 치킨과 같은 간단히 조리되는 패스트푸드는 바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식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생겨났다. 조리시간 또한 줄이기 위해서 재료를 미리 익혀두고 살짝 볶거나 튀 기는 방법을 이용한다. 패스트푸드에 사용 되는 정제된 소금, 설탕, 버터, 화학조미료, 오일 등은 음식의 칼로리를 높이고 건강한 영양 소 흡수를 방해한다. 뿐만 아니라 고지혈증, 고혈압, 뇌졸중 등의 각 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건강을 위협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만 들어진 패스트푸드가 건강과 함께 다시 시간을 빼앗아 가는 부적절 한 결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피살라디에르의 레시피는 건강, 영양, 그리고 맛을 고려하였다. 무엇보다 정직한 요리를 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 기 위해 건강한 조리법과 신선한 식재료에 대한 고민을 했다. 영양 이 듬뿍 들어가 있는 재료를 이용하고 기름과 나트륨 사용을 줄이고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내는 것이 포인트이다. 조리법을 살펴보면 도 우와 양파 잼은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파프리카와, 올리브를 그 위에 흩뿌린다. 고단백의 닭 가슴살은 두들겨 펴고 우유에 재워 질감을 부드럽게 만든 후 담아낸다. 엔초비 필레는 소금 간을 대신 하고 신선한 모짜렐라 치즈를 마지막에 얹어서 오븐에 굽는다. 요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음식이 가장 맛있을 때의 온도를 유지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맛있게 조리된 음식이라도 식으면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식 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 전달하기 위해서 따뜻한 음식의 온기는 가장 기본적으로 유지 되어 있어야 한다. 피살라디에르와 베이크 포테이 토 모두 따뜻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또, 그 릇을 데워두고 오븐에서 나오자마자 빠르게 프리젠테이션을 끝내면 5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5

29 충분히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 조절만으로는 날씨 가 추운 러시아에서 음식의 온기를 유지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19 세기 중반 프랑스 요리사 유르반 듀보아는 러시아에서 음식을 따뜻 하게 유지하는 것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시의 왕들의 요리 사 마리 앙투와 카렘의 영향으로 당시 프랑스 전통음식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져 있었고 완성된 요리는 한 번에 테이블에 올려서 준비되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서 음식을 뜨겁게 내놓아도 짧은 시 간 내에 금방 식었다. 유르반 듀보아는 대안으로 러시아식의 한 접 시씩 음식을 내놓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도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코스요리는 음식의 온도조절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맛의 상승작용을 이루어 낸다. 전채요리, 수프, 식전 빵은 메인 음식 에 앞서 입맛을 돋워 요리를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돕고 디저트와 음료는 요리의 무거운 느낌을 덜어주고 코스의 마무리를 해준다. 그 래서 메뉴 간 맛의 미묘한 조화나 상성도 조리에 고려가 된다. 쉐프가 계획하는 것에 따라 요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리 는 즐겁다. 이렇게 음식을 만듦에 있어서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 지 않게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시간을 계획 하는 것도 닮아있다. 하나의 요리를 마치면서 테이스팅을 하고 또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한 계획을 하는 것, 그것이 내 삶 속의 시간 계 획이자 내 요리 속의 시간 계획이다. 요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만드 는 과정의 시간처럼, 삶에 대해 고민하고 배우며 만들어 가는 과정 이 내가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빨간 미소 김도희 피곤에 절은 몸은 움직일 줄 모르고, 왼쪽 귀 바짝 놓아 둔 핸드폰 에선 알람이 울려댄다. 잔뜩 구긴 표정으로 몸마저 바짝 구긴다. 추 적추적 비가 오는 지 여느 때 보다 밖이 어둡다. 대충 알람을 끈 뒤 다시 선잠에 든다. 얼마 쯤 지났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오금 이 저려 벌떡 일어났다. 헉 하고 시간을 보니 6시 51분. 서두르지 않 으면 늦는다. 찬물이 뒤통수를 아리게 때린다. 15분엔 나가야 해. 덜 마른 머리, 구겨진 블라우스, 묵직한 가방을 들쳐 매고 뛴다. 도로 건너에서 버스가 오고, 눈앞에서 한 대를 보낸다. 터벅터벅 걸 어 정류장에 다다라서야 비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습한 공기에 구 불구불 말려가는 머리, 축축하게 젖어가는 블라우스, 지친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 최악이다. 야속한 택시는 오지 않고 겨우 탄 버스는 이미 만원이다. 비를 머금은 우산들이 다리를 적신다. 기다렸다가 택시를 탈 걸... 머릿속엔 온통 후회와 짜증이다. 역에 내려 막 들어오는 열차를 타려 뛴다. 다행히 열차는 탔지만,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음에 두통 이 밀려온다. 찬물로 씻어서 그런가. 기분 나쁘게 아파오는 두통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출근해서도 두통은 계속됐다. 자료들은 눈앞에서만 맴돌 뿐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상사는 갈구고, 어린것들은 싸가지가 없다. 결국 5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7

30 한바탕 화를 내고 말았다. 저녁 반찬거리로 날 씹겠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둘러 퇴근한다. 열차는 발 디딜 곳 없이 꽉 차있다. 멍하니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보니 내릴 역이다. 엄청난 인파에 밀려 내리다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바꾼 지 얼마 안됐는데! 휴대폰을 주워준 남자에게 괜히 짜증을 낸다. 빼앗듯 받아들고는 깨져버린 액정에 대고 욕지기를 한다. 집 앞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아침에 급히 나오느라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 져두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킨다. 진짜 개 같은 하루였다.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어제 보던 드 라마를 틀었다. 10분 쯤 보았을까. 투박한 손이 내 숨통을 조인다. 무언가에 목이 깊게 찔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머리채를 잡혀 맥없이 던져졌다. 이 새끼. 그 미친놈 아니야... 바닥엔 피가 흥건했다. 나는 놈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재수 없어... 그 표정... 내 얼굴에 날카로운 무엇을 대더니 히죽 웃는다. 예쁘게 해줄게... 이 개자식. 스토커 짓을 하고 있을 줄 알았어. 정신이 흐려진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개 같은 하루.. 끝까지 개 같네... 그렇게 내 시간은 멈추었다. 6시 25분. 벽 너머 들리는 알람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8개월 하 고도 23일 째 같은 시간에 같은 알람이다. 이젠 길거리에서도 그 알 람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곤두선다. 알람이 길게 이어지더니 끊겼다. 기척이 없다. 새벽까지 잠도 안자더니 지각이군. 옆집여자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퇴근 후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 지 드라마를 본다. 요새는 미국 드라마를 보는 모양이다. 재잘대는 소리에 잠을 못자 새벽 4시까지 글을 쓰다 겨우 잠들었다. 글이나 마저 쓰자.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켜 간이 책상을 잡아끈다. 6시 33분. 노트북을 켜 어제 쓰다 만 글을 쓰기 시작한다. 6시 51분. 늦었네. 다급한 발소리, 곧이어 물소리가 들린다. 7시 18분. 여자가 집을 나선다. 이제야 고요하다. 나는 글을 쓴다.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프리랜서다. 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소설, 광고, 시나리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마감을 맞추는 것에 도가 텄다. 이것저것 엉킨 일들 때문에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 썼고 시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지금은 A사 신제품 휴 대폰 광고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다 오후 3시 5분, 늦은 점심을 먹 으려 집을 나섰다. 어? 그 미친놈이네. 앞 건물에 사는, 옆집여자가 미친놈이라 부르는 남자가 1층을 서 성이고 있었다. 저 남자와 옆집여자는 이틀에 하루 꼴로 싸운다. 아 니, 싸웠다기보다 남자가 일방적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여자는 항상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앞 건물에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그만 엿보랬지! 개 같은 놈! 너 신고했어. 이 개자식 아! 더러운 새끼! 칵 퉤!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면 커튼을 살짝 걷어 구경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앞집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 상한 게 틀림없다. 3시 33분. 근처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6시 5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9

31 45분. 옆집 여자가 퇴근했는지 인기척이 들린다. 6시 54분. 다시 시 작된 소음. 책에 집중 할 수 없다. 7시 6분. 우당탕 하는 엎어지는 소 리가 난다.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나보다. 중얼중얼. 남자목소리가 들린다. 애인은 없던 것 같았는데. 7시 12분. 낄낄낄. 남자 웃음소리 가 들린다. 왠지 모를 소름이 끼쳤다. 그 후 누군가 나갔다. 뭔가 심 상치 않았다. 드라마의 소음은 계속됐지만 평소였으면 자지러지게 웃던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까 마주친 앞집 남자의 웃음이 계속 떠올랐다. 기분 탓이겠지. 일찍 자자.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신경은 온통 저 벽 너머에 있었다. 뭔가에 이끌리듯 문을 나섰다. 뭐하고 있는 거지? 어느새 옆집 문 앞이다. 내 오지랖이 이렇게 넓었나? 신고를 먼저 할까? 아냐. 아무 일 없 을 수도 있어. 확인만 하자. 볼륨 좀 줄여달라고 부탁하는 척 해보 자. 똑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다. 두어 번 더 노크해 봤지만 대답 은 여전히 없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커튼을 젖혀 그 놈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 놈 은 창문에 바짝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히죽 웃으며 말하는 시늉을 한다. - 내가 죽였어. 미친놈! 당장에 뛰어가 옆집 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 살았을까?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얼굴 을 보자마자 헛구역질을 해댔다. 여자의 얼굴은 피 범벅으로 붉었고 양쪽 입 꼬리는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우당탕 하고 엎어지는 소리에 이상함을 느꼈고, 남자 웃음소리 에 아,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나가서 확인해 봤다고 하셨죠? 예. 몇 시였죠? 7시 22분. 저희 집 현관문 앞 시계를 확인하고 나섰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이미 여자는 죽어있었고. 그 다음에 신고 를 하셨고요. 예 놈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고,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 나 는 중요 참고인으로서 며칠을 진술에 응해야했다. 갓난쟁이일 때 버려졌는데, 길에서 자랐다나봐. 어릴 때부터 구 걸하러 다니면서 많이 맞았대. 생긴 게 험하다고. 트라우마가 생겼겠지. 정신적으로도 병들어가고. 한마디로 미쳐 갔던 거지. 그러던 차에 이 여자가 재수 없게 먹잇감이 된 거고. 놈은 정신병 진단을 받아 감형되었지만, 출소 후 정신병원에 입원 되어 평생을 보호관찰 받게 되었다. 보도된 뉴스에 의해 세상은 떠 들썩해졌고, 일명 빨간 미소 살인 사건 으로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나는 그 끔찍했던 여자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옆집은 살인사건의 여파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고, 고요했다. 하지만 매일 새벽 6시 25분. 내 귀에는 옆집여자의 알람소리가 맴돈다. 에필로그 시간에 집착하는 사람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결국은 추리소설이 되었지만 옆집여자를 분단위로 꿰뚫고 있는 남자가 부각되기를 바 랐다. 이 소설 속에 시간의 집착, 이웃 간의 소통, 외모 지상주의의 폐해, 부정적 사고방식 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지독히도 운이 없던 여자는 사실 운이 없던 것이 아니라 그저 보통의 일상을 부정적인 6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1

32 사고방식으로 대하다 보니, 운이 없게 된 것이다. 늦잠을 자거나 만 원 버스를 타는 일은 흔하다. 그런 일을 하나하나 투덜대고 부정적 으로 생각하다 보면 끝없이 운이 나쁘다 생각 될 뿐이다. 여자의 하 루를 읽으면서 더럽게 운이 없는 여자군. 보다는 좀 더 마음에 여유 를 가지고 생활해야겠구나. 하고 느꼈으면 한다. 여자가 죽고 난 후로 알람은 울리지 않았지만 남자의 귀에는 알람 소리가 맴돈다. 유난히 시간에 집착했던 남자는 어느새 옆집여자의 삶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자로 인해 아침을 시작하던 그 소리를 쉽게 잊지 못 할 것이다. 또 새벽 6시 25분의 옆집 여자 역시 잊지 못 할 것이다. 7시 5분, 시간의 방을 찾아서 황성화 미안하구나, 이 방은 네가 찾는 방이 아닌 것 같구나. 이 말을 들은 지 이번으로 13번째다. 나는 내 앞에 닫힌 문을 바 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복도에서 계속 찾아다니던 13개의 방은 내가 찾는 방이 아니었다. 아마 이 복도엔 13개보다 더 많은 방 이 있겠지. 각양각색의 색깔과 무늬가 다른 문들 앞에서 이 방이 내 가 찾는 방이 맞는지는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모른다. 13번째라니... 어쩌면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발끝에서부터 밀려왔다. 아 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직 방이 많이 남았잖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제 어디부터 갈까? 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어 끝 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많은 방 중에 내가 찾는 방 하나 없을까. 다시 마음을 다잡는 그 순간이었다. 얘 ! 누가 나의 팔을 툭툭 치며 말한다. 옆을 돌아보니 노란색 가방을 맨 소녀가 나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쳐다보고 있다. 나는 소녀가 입은 초록색 옷이 꼭 키 작은 소나무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 고 서로를 얼마나 쳐다봤을까. 소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건다. 너... 어떤 방을 찾고 있지?! 어떻게 알아? 나, 네가 찾는 방을 알고 있다!? 어...저...정말? 정말이야? 나 따라와. 6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3

33 소녀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도 않은 채 복도 끝으로 달린다. 정말 소녀는 내가 찾고 있는 방이 무슨 방인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 는 걸까? 고민할 틈도 없이 내 몸은 소녀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길 게 늘어진 방들을 지나, 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 한 끝에 도착한 곳은 회오리 문양에 금색의 반짝거리는 것들로 이루 어진 아주 멋진 문이었다. 문 밖에서도 시끌시끌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이 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게 분명하다. 내 옆에 있는 소녀는 내가 문 앞에서 주춤거리고 서성이자 참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왜 안 들어가? 여기가 맞아? 응! 들어가자! 얼른. 문을 열어 방에 들어가니 보이는 건 나와 같은 또래인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전부다. 이 아이들도 나와 같은 방을 찾고 있었던 거 구나.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이 생긴다. 일단, 이 방이 7시 5분이 맞는지 물어봐야 한다. 나에게 이 방을 알려준 소나무 소녀를 찾아 봤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그때, 한 아 이가 물었다. 너도 뽀로로 좋아해? 나는 에디가 제일 좋아!!! 너는? 뽀로로? 뽀로로라고? 여기 몇 시야? 여기 6시 45분! 뽀로로 시작할 시간이잖아! 아 이걸로 14번째. 뽀로로라니. 난 지금 뽀로로보다 더 중요한 걸 만 나야 한단 말이야. 원망스런 눈빛으로 이 아이를 쳐다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말없이 6시 45분을 닫고 나왔다. 아까 나를 괴롭게 했 던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닫힌 6시 45분 앞에 앉아 가방 에서 지도를 꺼내 지금까지 갔던 방을 엑스자로 표시했다. 지금 몇 개가 열려있는 문인지. 알 턱이 없었다. 무작정 내 앞을 지나가 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지금 열려있는 문이 몇 개인지 아시나요? 그건. 아마 3층에 이머아저씨가 알고 계실거야. 3층으로 가 보렴 3층에는 [시간의 문 안내데스크]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문 이 눈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가 이머 아저 씨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어디선가 이머 아저씨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했던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신문읽기에 집중하고 있는 아저씨의 옆으로 가서 계속해서 서있었다. 내가 옆에 서있는데도 나 는 보이지도 않으신지 신문을 이리저리 눈앞에서 올렸다 내렸다 반 복하고 계셨다. 아저씨!!!...누...누구여? 제가 지금 찾는 시간이 있는데 지금 열려져있는 방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잠시만 기다려봐라 네. 아저씨는 자신의 시간이 방해된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간절하게 보였는지 안 보이는 눈을 신문에서 지도로 바 꾸셨다. 열려있는 방을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나는 옆에서 내가 대신 지도를 보면 안 되냐는 말이 턱 끝까지 나왔 지만 괜히 이머아저씨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 주 오랜 기다림 끝에 아저씨는 지금 열려있는 시간의 문은 3개라고 하시며 각각의 위치를 쪽지에 적어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보셨 다. 근데 꼬마야 몇 시를 찾고 있니? 6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5

34 7시 5분이요. 어... 그 시간은 아마 없을 거다. 네? 왜요? 그 시간은 찾는 사람이 없어. 아무도 없을 거다. 누구 만날 사람 이 있는 거니? 네... 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사실 열려있는 방이 몇 시 인지는 나도 몰라. 허허. 아저씨는 나의 침울한 얼굴에 미안하셨는지 금세 말을 바꾸며 말 하셨다. 아저씨! 꼭 있을 거예요. 꼭 만날 거예요. 만나야 돼요. 그래. 행운을 빌마. 나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웃는다. 아마 그건 아저씨 생각이 달라 요. 전 찾을 거예요. 라는 확신의 웃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저씨 가 써 주신 3개의 쪽지를 손에 꼭 쥐며 그려본다. 보고 싶은 얼굴 을 사실 내가 지금까지 찾아다닌 14개의 방에는 정말 재미있고 행복 한 시간이 있었다. 오전 8시 30분 방. 아침에 일어나 누군가와 함께 아침을 먹으려 준비하는 시간. 이 시간의 방에는 따사로운 햇살의 따스함과 편안함이 있다. 오전 9시 30분 방. 같이 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꽃과 나무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시간. 이 방에서 나 는 꽃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오후 2시 40분 방. 집 앞 놀이터에서 시소를 태워주고 그네를 밀어주던 시간. 여긴 기쁨과 즐 거움이 있었다. 이렇게나 좋은 방들을 내가 어찌 선택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 어느 방도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7시 5분 방 만큼은 분명 아닐 거다. 확신 한다. 7시 5분이 되면 항상 내 귓가에 들려오 던 너를 사랑해 란 한마디. 나는 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다시 느끼고 싶어. 다시 만나고 싶어. 그리고 한 발자국 그 곳을 향 해 나아간다. 나에게 특별한 시간. 7시 5분 시간의 방을 향해. 나는 지금 마지막 문 앞이다. 결국 3개의 쪽지 중에 한 개만 남았 다. 마지막 시간의 방 문 앞에서 이젠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이 문을 살펴본다. 이 문은 지금까지의 문과는 다르 다. 화려한 문양도 시선을 끄는 색채도 없이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허름한 나무로 이루어진 문이다. 그래. 문이 어떻게 생겼든 나에게 는 큰 의미가 없다. 이 문을 열었을 때 이 안에 내가 그토록 기다렸 던 사람만 있어주면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요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희미한 불빛 속 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한 사람.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사람. 7시 5분이 되면 나에게 사 랑한다고 말해주었던, 항상 그 시간에 날 기다리겠다고 약속한 엄 마. 엄마? 그래.... 사랑해. 우리 아들 엄마를 꽉 안아본다. 내가 조금 힘이 셌다면 좋았을 텐데 더 가 득 엄마를 안고 싶다. 내 등을 토닥거려주시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든다. 그래. 이 체온이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거야. 14개의 화려하 고 즐겁고 행복했던 방보다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작지만 살아있음 을 느낄 수 있는 이 방이 좋다. 계속해서 눈꺼풀이 감긴다. 이머 아 저씨를 떠올린다. 마음속으로 얘기 해본다. 아저씨. 제가 말했죠. 제 말이 맞죠? 감기는 눈꺼풀위로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영화필름 처럼 왔다 갔다 한다. 6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7

35 남자는 지금 막 잠에서 깼다. 내가 꿈을 꾼 건가. 라고 작은 소리 로 읊조린다. 잠에서 일어난 자리 옆엔 남자의 엄마처럼 보이는 여 자의 사진이 있다. 남자는 사진을 들어 손으로 쓱쓱 문지른다. 그리 고 말한다. 엄마. 내 꿈속에 엄마가 나왔다. 나는 어린아이 모습으로 엄마를 찾았어. 내가 만난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꼭 안아 주더라. 보고 싶어. 왜 살아계실 때 얘기하지 못했을까. 어머니... 사 랑해요. 사진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의 시간은 7시 5분에 멈춰있었다. 그녀와 그의 시간 국현호 2AM. 한밤중에 정적을 깨고 남자의 방에서 요란한 전화벨이 울 린다. 뒤척이던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다. 수 신자를 확인하지 못한 그는 잠결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다. 누구..야. 상대방은 말이 없다. 뭐야, 이 시간에 그는 더 이상 대꾸하기도 귀찮다. 그는 전화기에 귀를 댄 채로 잠 에 빠진다. 2AM.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휴대폰을 들고 거실 벽에 기댄 채 몇 시간째 서 있다.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어지러웠 다. 입술은 말랐다. 서성이던 그녀는 결국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의 옛 연인이었던 그가 전화를 받았다. 잠결이었던지 남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누구...야. 자는구나. 여자는 혼자 마음 속으로 말할 뿐이었다. 새벽 2시,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던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도저히 그가 잊힐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를 하고 나니 그를 지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6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9

36 5개월 전, 그녀는 달콤한 꿈의 기억 속에 젖어 있었다. 어둠이 짙 은 새벽이 되면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김없 이 2시가 되었고, 카페에는 분위기있는 재즈 음악이 울렸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전화를 기다렸다. 그와 그녀는 3년 전 HCS라는 조그마한 라이브 카페에서 처음 만 났다. 까페는 한때 많은 사람들로 붐빈 곳이었지만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잊혀져 가는 곳이 되었다. 그녀는 이 카페에서 노래 를 부른다. 갈색 빛이 연하게 도는 긴 헤어스타일에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큰 눈을 가졌다. 커다란 눈이 얼굴 가장자리로 이어져 슬며 시 웃을 때, 그 매력적인 모습을 본다면 누구든 그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하얀 피부는 어둠 짙은 밤에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그녀는 낮고 허스키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할 때면 카 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르는 것 같지만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공허한 눈빛에는 지친 새벽의 초연함이 묻어 있 다. 기쁨도 슬픔도 노래에 흘려 보냈다. 눈을 감고 음악에 취했다. 그녀가 음악과 함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는 위스키 한 잔을 홀짝 거렸다. 술을 몇 잔을 더 시키고 취기가 올라올 무렵 그는 문득 그녀 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고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두 사람의 눈 맞춤이 둘의 만남으 로 이어졌다. 서로를 더욱 가까이서 마주보는 사이가 되었다. 사랑 에 빠진 이후로도 그녀는 항상 그를 위해 노래하고 그는 그녀를 바 라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활동시간은 달랐다. 남자는 낮에 일을 하지만 여자 는 밤에 일을 했다. 둘은 휴식시간을 쪼개서 데이트를 지속하였다. 그녀는 낮에 잠을 줄이고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 기 위해 잔업을 순식간에 끝내 버리곤 했다. 육체적으로 힘은 들었 지만 서로를 생각하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이제 그를 위한 노래가 되고 그는 그런 그녀가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둘의 만 남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점점 금이 가게 되었다. 남자는 끝없는 잔 업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녀의 사랑 노래는 시들어만 갔다. 서로 사 랑을 이어나갈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회사에 다른 여성에게 관심이 돌아갔다. 헤어짐은 자연스럽게 진행 되었다. 어떤 불안한 예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음을 여자는 직감했다. 몇 달이 지났다. 오래된 카페는 사람들에게 잊혀 갔고 그녀를 찾 는 사람들도 점점 줄었다. 더 이상 손님이 없어지자 가게는 문을 닫았 다. 그는 일을 하고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카페를 찾았는데 갈 곳을 잃었다. 그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던 새벽 두 시에 흘러나오던 그녀의 노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를 잊기 시 작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카페가 문을 닫아서라 기보다 이미 서로에게 지쳐있었는지 모른다. 새벽에 눈을 감을 수 없 는 사람들의 삶은 금세 피로했고, 사랑 역시 피로를 안고 시작했다. 2AM. 그의 하루의 마지막은 더 이상 카페가 아니다. 그는 이제 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던 시간, 이제 그에게는 그녀 도 노래도 없었다. 그녀 역시 새벽 두 시에 찾아오던 그가 없다. 그 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추억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전화를 걸어 그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부르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났다. 더 이상 새벽에 울리는 의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2AM. 남자는 거리를 배회한다. 심신이 지친 그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 잔 걸치고 싶었다. 마땅한 곳을 찾았다. 집에 가기는 싫다. 그에게 집은 무덤과 같다. 하루의 끝을 고하고 죽어 지내는 곳. 길을 걷다 보니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로 <써니>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그는 빨리 카페에 들어가 한 잔 걸치고 싶다. 발걸음을 재촉했 7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1

37 다. 문 밖으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감미로운 여자의 목소리, 언젠가 들어봤던 익숙한 음성. 그는 그녀가 이곳에서 노래하고 있음을 곧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술잔을 들고 노래를 들이켰다. 노 래가 중반에 이르고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현재 만 나고 있는 여자는 게 눈 감추듯 잊었다. 그녀도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내 눈을 돌렸다. 추억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때를 후회하며 그녀의 시선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는 그녀가 모든 노래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노래 잘 들었어. 여전하네? 그래,,, 난 가봐야겠어. 피곤해서 말이야. 시간되면 나중에 밥 같이 먹을래? 그래, 나중에. 그녀가 헤어지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자신을 쉽게 잊었 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또 모든 것이 지쳐있었다. 매일 같이 부르는 노래도 그를 다시 받아들일 여력도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을 추억하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새벽 2시의 기 억이 되살아났고 시간은 멈추었다. 남자는 추억에 젖어 있다. 그녀 는 그와 함께한 순간을 생각했다. 아주 잠깐의 사랑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고 미련조차 식었다. 추억은 기억이 되어 사라졌고 새벽 2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그녀와 그의 기억은 2시에 머물렀다 사라지고 멍한 기억만이 남았다. 그 둘에게 흘러가던 시간은 이제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친 몸은 시간을 따라 가기에 바빴고 멈춰설 순간을 주지 않았다. 2AM, 새벽은 사랑을 서서히 부식시켰 고, 결국 녹이 쓸어 버렸다. 새벽 2시, 그와 그녀의 주변에는 녹빛만 이 감돈다. 이별일기 송보람 우리가 만난 지 1826일째 되는 날.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부드럽게 내리쬐는 딱 적당한 햇살과 살랑 살랑 불어와 내 몸을 휘감는 적당한 바람, 거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 들, 길가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마저 적당한, 내가 좋아하 는 모든 것이 딱 적당한 날이었다. 왠지 좋은 일이 일어 날 것만 같 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시야에 그 이가 들 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의 마음과 같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연애 초반을 떠올리며 한강으로 가 자전거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오랜만 에 느끼는 평화로운 기분이다. 최근에 들어 사소한 것에도 자주 다 투던 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았다면 분명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랑스러운 연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혼 자 흐뭇한 생각에 빠져있는 나에게 다가와 그는 손바닥만한 상자하 나를 내밀었다. 나는 그 상자를 받아들고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 안에는 노을이 번진 눈부신 한강처럼 반짝거리는 목걸이가 주인을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해질 무렵의 한강은 너무 로맨틱했다. 마 치 우리처럼. 역시 오늘 같은 날에는 싸울 리가 없었다. 우리는 대학시절 자주 가던 학교 앞의 조그만 선술집을 마지막 데 이트 코스로 정했다. 그와 나는 마주 앉아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여 기까진 좋았다. 분명히.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그의 폰이 울렸 7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3

38 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폰을 엎어 놓았다. 왜 전화를 받지 않냐 는 나의 질문에 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화라고 둘러댔다. 여자 의 촉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무 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 그의 폰을 뺏어 들었다. 내가 그의 폰을 보 는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조그만 화면에 뜨는 한 문장. 자기야 왜 전화 안 받아?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2년 전과 같은 데자뷰 현상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는 오해라며 절대 아 니라고 되려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여자가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여자가 누구며 언제부터였으며 이따위 것들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 제는 끝이라는 말을 내뱉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도 나를 따라 나왔지만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 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바람이라니. 어떻게 또 다시 바람이라니. 요즘 들어 자주 다투게 되면서 이제는 그만해야하나 라고 생각도 했 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운수 좋은 날도 아니고 왠지 오늘따 라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하더라니, 5년째 기념일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 기대어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별 흥미가 없어 TV를 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 창고로 갔다. 빈 박스를 꺼내와 침대 옆 책상으로 향했다. 난 그와의 기억들이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 그에게 선물 받은 시계, 내가 좋아한다고 사준 가수의 앨범, 자기가 감명 깊게 읽었다고 선물해준 책, 그와 찍은 사진, 그가 준 편지, 그 와 함께 보았던 영화표들. 너무 많아 다 정리할 수가 없었다. 온통 그와의 추억들이 깃든 물건들이었다. 새삼스레 5년 동안 그와 함께 공유한 것들이 많다고 느껴져 괜히 슬퍼졌다. 나는 정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침대에 그냥 누워버렸다. 5일째. 마치 내 마음처럼 흐트러진 내 방을 보며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정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나 힘들었다. 그의 기억들이 가득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집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앞이 뿌 옇게 번졌다. 어떻게 우리가 함께한 그 오랜 시간들을 한 번에 망쳐 버리는 짓을 할 수 있었는지 화가 났다. 내 손에 잡힌 그와 내가 환 히 웃고 있는 사진이 담긴 액자를 던져버렸다. 헤어진 다음 날. 늦은 아침,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떴다. 부 스스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전원 을 켜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부재중 전화 4통, 메시지 3건. 모두 그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나는 아주 홀가분한 이 기분을 망 치고 싶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휴대폰을 놓아 두었다. 오랜만에 홀로 맞는 주말이다. 간단하게 밥을 먹을까 생각 했는데 배는 그닥 고프지 않았다. 나는 거실로 나가 쇼파에 늘어지 7일째. 일주일째다. 아주 홀가분하다. 오늘 그와의 추억들을 모두 다 정 리했다. 5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듯하다. 그동안 그에게서 연 락도 왔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의 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제 새출발을 다짐했다. 15일째.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다들 나에게 잘했다고 난리들이다. 2 년 전에 알아봤어야 했다느니, 그럴 줄 알았다느니, 내가 훨씬 아까 7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5

39 웠다느니, 친구들의 위로 아닌 말들을 들으며 괜찮다 마음을 다졌지 만 괜시리 기분이 씁쓸해졌다. 헤어진 지 한 달째. 괜찮을 줄 알았다. 괜찮다고 느꼈다. 하지만 문득 불쑥 튀어나오 는 그의 생각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하루 종일 들은 날도 있었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 끝없이 걷 기도 했다. 기분을 전환하려 친구들도 자주 만났고, 일부러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노래들이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모두 다 내 이야기 같은 건지. 왜 온통 그와 함께한 곳들뿐인지 헤어지고 나니 새삼스레 느껴졌다. 5년이란 시간을 한 달 안에 정리하기는 힘 들다. 그냥 이 슬픔을 즐겨보기로 했다. 헤어진 지 두 달째.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다보니 몸이 말썽이다. 밤만 되면 열이 나고 몸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픈 날이 늘어갔다. 이럴 때면 그가 더욱 더 생각났다. 어떡하면 좋을까. 헤어진 지 세 달째. 그를 보았다. 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를 마주 한 그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면 어쩌지. 혹 시나 날 보고 다가오면 어쩌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냥 지나칠 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쯤 한 여자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난 바로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걸었다. 걷고 또 걸었 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 내린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다. 집에 가서 두터운 옷을 꺼내야겠다. 나, 너, 그리고 우리 어느 한 남자를 본 이야기 김동훈 인간미 박태민 그와 마주 앉았다. 이종현 나는... 나야! 이승민 7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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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시 민 문서번호 어르신복지과-1198 주무관 재가복지팀장 어르신복지과장 복지정책관 복지건강실장 결재일자 2013.1.18. 공개여부 방침번호 대시민공개 협 조 2013년 재가노인지원센터 운영 지원 계획 2013. 01. 복지건강실 (어르신복지과)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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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2 3 4 5 6 또한 같은 탈북자가 소유하고 있던 이라고 할수 있는 또 한장의 사진도 테루꼬양이라고 보고있다. 二宮喜一 (니노미야 요시가즈). 1938 년 1 월 15 일생. 신장 156~7 센치. 체중 52 키로. 몸은 여윈형이고 얼굴은 긴형. 1962 년 9 월경 도꾜도 시나가와구에서 실종. 당시 24 세. 직업 회사원. 밤에는 전문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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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련(華以戀) 141001.hwp 年 花 下 理 芳 盟 段 流 無 限 情 惜 別 沈 頭 兒 膝 夜 深 雲 約 三 십년을 꽃 아래서 아름다운 맹세 지키니 한 가닥 풍류는 끝없는 정이어라. 그대의 무릎에 누워 애틋하게 이별하니 밤은 깊어 구름과 빗속에서 삼생을 기약하네. * 들어가는 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아이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불 옆에 앉아 있다. 얼음장 같은 날씨에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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