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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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4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 朝 鮮 琉 球 日 本 에 있어서 大 明 外 交 儀 禮 의 관점에서- 구와노 에이지( 桑 野 栄 治 ) 머리말 Ⅰ.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2. 명과 琉 球 의 관계 3. 명과 일본의 관계 Ⅱ. 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2. 임진왜란 이전의 望 闕 禮 1) 명 사신의 來 朝 와 冬 至 의 望 闕 禮 2) 國 忌 에 수반하는 朝 賀 禮 의 順 延 조치 3. 임진왜란기의 望 闕 禮 1)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2) 한성 還 都 후 南 別 宮 에서의 望 闕 禮 3) 전시하 의례 실시상의 문제점 4) 동아시아 세계의 조선과 명 4. 임진왜란 후의 望 闕 禮 1) 朝 賀 禮 의 정체 2) 宣 祖 즉위 40년째의 望 闕 禮 Ⅲ. 日 本 國 王 豊 臣 秀 吉 의 책봉의례 1. 일본국왕 책봉사의 復 命 報 告 2. 景 轍 玄 蘇 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 맺음말 머리말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제2분과회에서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임진왜란( 文 祿 慶 長 의 役 )에 관한 연구사 정리를 살펴보고 학계에 귀중한 성과를 제공하였다. 1) 동시 에 이들 성과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후 검토해야 할 과제에 어느 정도 견해차이가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일본의 경우 이후의 연구과제로서 1)조선 측 명측의 군량 공급 시스템 규명, 2)피로인의 실태와 송환 시스템 해명, 3)왜성 연구, 4)전쟁으로 인한 조선 1) 六 反 田 豊 / 田 代 和 生 吉 田 光 男 伊 藤 幸 司 橋 本 雄 米 谷 均 北 島 万 次,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 朴 晢 晄, <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 研 究 の 現 況 と 課 題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2005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報 告 書 ( 第 2 分 科 篇 ) ( 同 委 員 会 ))

2 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보고서에는 조선의 군량조달을 주제로 하 는 논고가 게재되어 있으며, 2) 한반도에서 군량 공급 시스템을 밝혀내는 일이 매우 중요 한 과제로 제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한국의 경우는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수행해야 할 공동연구 과제로서 1)임진왜 란과 동아시아 국제정세, 2)일본과 조선왕조의 수군 전력, 3)의병운동, 4)조선군의 병력 동원 체제, 5)임진왜란의 전투지역 조사, 6) 降 倭 被 擄 人 문화재 약탈, 7)임진왜란기의 점 령정책과 민중의 대응 생활상, 8)상호 간의 문화 전파를 제시하였다. 과제는 다양한 분 야에 걸쳐 있으며, 이 순서 역시 과제로 되어야 할 우선순위를 나타낸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측 위원의 보고서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을 비교한 논고가 실려 있으며, 3) 당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중요한 과제로 설정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제1기 보고서가 세간에서 널리 문제되던 2005년의 시점에서는 한일 양국의 연 구자 입장에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혹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 를 금후의 연구과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제1기에서 橋 本 雄 씨가 조선국왕사와 일본국왕 ( 室 町 殿 )의 외교의례에 주목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 이다. 4) 외교의례가 당사국의 도의적,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반영하는 실용의 거울이었 다 5) 면, 외교의례의 관점에서 임진왜란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을 조명하는 것도 가능해 질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 전기(대략 15~16세기에 해당)의 동아시아 국 제환경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2) 六 反 田 豊,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開 戦 初 期 における 朝 鮮 側 の 軍 糧 調 達 とその 輸 送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3) 鄭 求 福, < 壬 辰 倭 乱 の 歷 史 的 意 味 - 壬 辰 倭 乱 に 対 する 韓 日 両 國 の 歷 史 認 識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4) 橋 本 雄, < 朝 鮮 國 王 使 と 室 町 幕 府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5) 로날드 토비( 速 水 融 他 번역) 近 世 日 本 の 國 家 形 成 と 外 交 ( 創 文 社, 1990년 9월. 原 著 는 Ronald P.Toby.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hu.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 第 5 章 外 交 儀 禮 の 鏡 を 覗 く- 理 念 の 世 界 を 映 し 出 す 姿 見 > 138

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1 Ⅰ. 조선 전기 동아시아의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조선왕조(1392~1897)는 건국 후 즉시 명 태조 洪 武 帝 ( 朱 元 璋. 재위 1368~98년)를 정 점으로 하는 이른바 冊 封 体 制 6) 에 참가하고 의례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1401년( 太 宗 원년)에 恵 帝 建 文 帝 (재위 1398~1402)가 제3대 조선국왕 太 宗 (재위 1400~18)에게 誥 命 ( 辭 令 書 )과 金 印 을 하사하고 책봉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靖 難 의 變 ( 帝 位 를 둘러싼 내 란)을 거쳐서 옥좌에 올랐던 成 祖 永 楽 帝 (재위 1402~24년)도 역시 2년 뒤인 1403년에 다시 太 宗 을 조선국왕 으로 책봉하였다. 7) 제3대 永 樂 帝 는 洪 武 帝 의 대외정책을 계승하 도록 적극적인 조공 권유책을 취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에 노력하고 있었다 8) 이념상 조선국왕은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상의 華 夷 秩 序 에 편입되었던 것이 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에 처해 있던 조선국왕이 매년 正 朝 ( 元 旦 ) 聖 節 (명 황 제 생일) 千 秋 節 (명 황태자 생일) 외에 동지 때도 조공사절을 파견했던 것은 주지의 사 6)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국제관계의 특징을 표현하는. 책봉체제 에 관해서는 당장은 西 嶋 定 生 東 アジア 史 論 集 ( 第 3 卷 東 アジア 世 界 と 冊 封 體 制 ) ( 岩 波 書 店 ) < 第 1 部 3 冊 封 體 制 と 東 ア ジア 世 界 > 95~101 참조. 다만 이러한 정치구조에 대한 비판 재검토도 많다. 최근에는, 예를 들어 서 夫 馬 進, < 明 淸 中 國 による 對 朝 鮮 外 交 の 鏡 としての 對 ベトナム 外 交 - 冊 封 問 題 と 問 罪 の 師 を 中 心 に> ( 紀 平 英 作 編, グローバル 化 時 代 の 人 文 學 - 對 話 と 寬 容 の 知 を 求 めて( 下 ) 共 生 への 問 い 京 都 大 學 學 術 出 版 會 ) 238~244에 따르면, 安 南 에서 僞 勅 僞 年 號 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 明 은 安 南 의 朝 貢 을 계속 받아들였고, 또한 同 <1609 年, 日 本 の 琉 球 倂 合 以 降 における 中 国 朝 鮮 の 對 琉 球 外 交 - 東 アジア 四 國 における 冊 封, 通 信 そして 杜 絶 > ( 朝 鮮 硏 究 會 論 文 集 第 46 集, 2008 년 10월) 7~10에 따르면, 淸 代 의 책봉국은 朝 鮮 越 南 ( 安 南 ) 琉 球 의 3국뿐이었으며, 겨우 暹 羅 를 추가한 4 國 에 불과하다고 한다. 7) 末 松 保 和, 高 麗 朝 史 と 朝 鮮 朝 史 ( 末 松 保 和 朝 鮮 史 著 作 集 5) ( 吉 川 弘 文 館 )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対 明 関 係 > (초판은 京 城 帝 國 大 学 文 学 会 編, 史 学 論 叢 第 2 ( 岩 波 書 店 )) < 第 十 一 章 誥 命 印 章 の 獲 得 > 234~237. 李 鉉 淙 < 対 明 関 係 > ( 國 史 編 纂 委 員 会 編, 1974 한국사 9 (양반 관료국가의 성립) ( 同 委 員 会, 서울)) 331~332. 孫 承 喆,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교 린관계의 허와 실 ( 景 仁 文 化 社, 서울). 구판의 일본어 訳 은 鈴 木 信 昭 監 訳, 近 世 の 朝 鮮 と 日 本 - 交 隣 関 係 の 虚 と 実 ( 明 石 書 店 )) <제1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교린체제> 35~38 8) 佐 久 間 重 男, 日 明 関 係 史 の 研 究 ( 吉 川 弘 文 館 ) < 第 一 編 第 二 章 永 楽 帝 の 対 外 政 策 と 日 本 > 98~99 ; 檀 上 寛, < 明 初 の 海 禁 と 朝 貢 - 明 朝 専 制 支 配 の 理 解 に 寄 せて>( 森 正 夫 他 編, 明 清 時 代 史 の 基 本 問 題 ( 中 国 史 の 基 本 問 題 4)> ( 汲 古 書 院 )) 223 ; 同, < 初 期 明 帝 国 体 制 論 >( 杉 山 正 明 他, 岩 波 講 座 世 界 歴 史 11( 中 央 ユーラシアの 統 合 ) ( 岩 波 書 店 )) 318~321

4 5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실이다. 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1531년( 中 宗 26)에는 종래의 正 朝 使 를 폐지하고 冬 至 使 가 신설되었으며, 聖 節 使 千 秋 使 冬 至 使 를 명에 파견하는 1년 3공의 대명외교체제로 이행 하였다. 9) 이 1 年 3 貢 체제에 대하여 아직도 연구자들 사이에 오해가 있다. 예를 들면, 朴 成 柱 씨 는 冬 至 使 가 中 宗 26년부터 파견됐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16세기 후반부터 冬 至 使 가 추가되어 1 年 4 貢 이 규례화된 것 이라고 한다. 또 全 淳 東 씨는 正 朝 使 冬 至 使 聖 節 使 에 中 宗 26년(1531) 이후부터는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千 秋 使 도 함께 추가 되어 1 年 4 使 가 정례로 되었다 고 한다. 10) 그러나 양자 모두 잘못이다. 조선 초기의 遣 明 使 節 은 正 朝 聖 節 千 秋 使 의 1년 3공, 조선 중기인 中 宗 26년 이후는 聖 節 千 秋 冬 至 使 의 1년 3공이다. 이러한 오해가 생긴 까닭은 아마도 16세기 朝 明 関 係 의 실태에 접근 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니면 조선 후기의 사역원 역관인 金 指 南 金 慶 門 부자가 편찬한 通 文 館 志 (1720년 간행)에 國 初, 매년 파견하는 朝 京 使 에 冬 至 正 朝 聖 節 千 秋 의 四 使 가 있다 고 한 조문 11) 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 9) 1587년( 萬 暦 15)에 완성된 明 代 国 制 総 覧 인 萬 暦 大 明 会 典 ( 新 文 豊 出 版 公 司, 台 北 )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朝 鮮 國 条 에 永 樂 初 賜 印 誥 自 後 毎 歳 聖 節 正 旦 嘉 靖 十 年 (= 中 宗 26년), 外 夷 朝 正 旦 者 倶 改 冬 至 皇 太 子 千 秋 節, 皆 遣 使 奉 表 朝 賀, 貢 方 物, 其 餘 慶 慰 謝 恩 無 常 期 라고 되어 있으며, 中 宗 26년 3월에는 毎 歳 元 朝 ( 正 旦 )의 ( 朝 ) 貢 은 동지 전으로 옮겨 入 賀 하라 는 聖 旨 가 조선에 전달되었다( 中 宗 実 録 권70, 26년 3월 9일 甲 午 条. 사료 중의 안은 割 註, 이하 같음). 10) 朴 成 柱, <조선 초기 遣 明 使 節 에 대한 일고찰> 慶 州 史 学 第 19 輯 慶 州 ( 曺 圭 益 他 編, 연행록연구총서6(역사) ( 学 古 房, 서울)에 再 録 ) 153 ; 全 淳 東, <15세기 조선과 명의 문 물 교류-중국문물의 유입을 중심으로> 韓 国 史 研 究 会 編, 韓 国 史 의 国 際 環 境 과 民 族 文 化 ( 景 仁 文 化 社, 서울) 93. 그밖에 朴 元 熇, 明 初 朝 鮮 関 係 史 研 究 ( 一 潮 閣, 서울) <15세기 朝 鮮 과 明 의 關 係 > 294도 조선은 후일 中 宗 26년( 嘉 靖 10년, 1531)부터 冬 至 使 가 추가되어 1년 4사가 된다 고 하며, 16세기의 동아시아 세계를 그린 金 翰 奎,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중국적 세계질서의 붕괴> 鄭 杜 熙 他 編,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서울). 일본어 訳 은 金 文 子 監 訳, 壬 辰 戦 争 -16 世 紀 日 朝 中 の 国 際 戦 争 ( 明 石 書 店 ) 312도 역시 조선은 賀 正 使 와 聖 節 使 千 秋 使 등 1년 3사를 고집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冬 至 使 를 추가하여 1년 4공을 강행했다 고 서술했다. 한편, 조선시대의 조공 책봉관계를 정리한 権 善 弘, <조선시대 사대관계와 책봉체제> 韓 日 関 係 史 研 究 論 集 編 纂 委 員 会 編, 왜구 위사문제 와 한일관계(한일관계사연구논집4) ( 景 仁 文 化 社, 서울) 65에서 조선은 明 으로부터 1년 3~4공 이라는 유례없이 파격적 대우를 받았다 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11) 朝 鮮 史 編 修 委 員 会 編, 通 文 館 志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21)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 底 本 은 1888 년에 重 修 刊 行 된 서울 大 学 校 奎 章 閣 蔵 本 ) 권3, 事 大 上, 赴 京 使 行 条. 이 조문을 근거로, 예를 들어 서 全 海 宗, 韓 中 関 係 史 研 究 ( 一 潮 閣, 서울) < 清 代 韓 中 朝 貢 関 係 考 > 61에서는 李 朝 初 期 의 対 明 使 行 에는 冬 至 正 朝 聖 節 千 秋 의 四 行 이 定 期 的 이었다고 한다.

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3 로 생각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매년 명절 때마다 조공사절을 명나라로 파견했던 것만이 아니었 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經 國 大 典 (성종 16년, 1485)에는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節 에 殿 下 는 왕세자 이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올린다 고 명기되어 있으며, 12) 왕조정부의 儀 禮 書 인 國 朝 五 禮 儀 (성종 5년, 1474)에는 이 儀 註 ( 儀 禮 의 式 次 第 )를 嘉 禮 의 첫머리 에 수록하고 있다. 13) 조선 국왕은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節 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도 한성의 왕궁에서 명나라 황제를 遙 拜 하는 궁중의례( 望 闕 禮 라고 한다)를 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4) 이 궁중의례는 일찍이 명 태조 洪 武 帝 가 1369년( 洪 武 2)에 蕃 國 禮 로서 제정 했던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壽 節 에 望 闕 하며 축하를 드리는 의식 의 수용과 실천이다. 15) 이미 고려 恭 愍 王 (재위 1351~74)은 1372년 동지 때 명나라 관복인 冕 服 을 입고 이 요배 의례를 거행했으며, 백관과 함께 만세를 삼창하고 있다. 16) 望 闕 禮 의 의의는 일찍이 제9 12) 經 国 大 典 巻 3, 禮 典, 朝 儀 条 에 正 至 聖 節 千 秋 節, 殿 下 率 王 世 子 以 下, 行 望 闕 禮 라고 되 어 있다. 李 成 茂 씨는 이 朝 儀 条 를 근거로 조선은 사대의 표현으로 일년에 네 차례의 사신(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고 한다. 그러나 이 조문은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의 望 闕 禮 에 관한 규정이며, 朝 貢 使 節 에 관한 규정은 아니다. 同, 개정증보 조선의 사 회와 사상 ( 一 潮 閣, 서울) <제1부 제1장 朝 鮮 時 代 의 王 権 > (초판은 朝 鮮 時 代 史 学 会 編, 東 洋 三 国 의 王 権 과 官 僚 制 ( 国 学 資 料 院, 서울)) 28. 대체로 조선정부가 명나라에 冬 至 使 를 파 견하는 것은 중종 26년 이후의 일이며, 經 国 大 典 에는 冬 至 使 자체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13) 国 朝 五 禮 儀 巻 3, 嘉 禮, 正 至 及 聖 節 望 闕 行 禮 儀 条 및 皇 太 子 千 秋 節 望 宮 行 禮 儀 条 14) 李 範 稷, 韓 国 中 世 禮 思 想 研 究 - 五 禮 를 中 心 으로 ( 一 潮 閣, 서울) < 第 2 章 Ⅲ 世 宗 朝 五 禮 의 分 析 > 327~329 ; 桑 野 栄 治, < 朝 鮮 初 期 の 對 明 遥 拜 儀 禮 -その 概 念 の 成 立 過 程 を 中 心 に> 久 留 米 大 學 比 較 文 化 年 報 第 10 輯 ; 同, < 朝 鮮 世 祖 代 の 儀 禮 と 王 権 - 對 明 遥 拜 儀 禮 と 圜 丘 壇 祭 祀 を 中 心 に>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第 19 号 ; 同, < 朝 鮮 成 宗 代 の 儀 禮 と 外 交 - 經 國 大 典 成 立 期 の 對 明 遥 拝 儀 禮 > ( 同 第 20 号, 2003년 3월) ; 同, < 高 麗 末 期 の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對 明 遥 拜 儀 禮 の 創 出 > ( 同 第 21 号, 2004년 3 月 ). 이들 4편의 논문은 증보 수정된 후 桑 野 栄 治,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對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2001~ 2003 年 度 科 學 研 究 費 補 助 金 基 盤 研 究 (C)(2) 研 究 成 果 報 告 書, 2004년 2월)에 수록했다. 또한 桑 野 栄 治, < 正 朝 冬 至 の 宮 中 儀 禮 を 通 してみた15 世 紀 朝 鮮 の 儒 教 と 國 家 - 朝 鮮 燕 山 君 代 の 對 明 遥 拜 儀 禮 を 中 心 に>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第 34 集 ; 同,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對 明 遥 拜 儀 禮 -16 世 紀 前 半 の 朝 鮮 と 明 日 本 >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第 24 号 참조. 15) 明 集 禮 ( 景 印 文 淵 閣 四 庫 全 書 第 650 冊, 台 湾 商 務 印 書 館, 台 北, 1983년 6월, 수록) 巻 30, 賓 禮 1, 蕃 王 朝 賀,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寿 節 望 闕 賀 儀 条. 萬 曆 大 明 会 典 巻 58, 禮 部 16, 蕃 國 禮, 聖 節 正 旦 冬 至 蕃 國 望 闕 慶 祝 儀 条. 桑 野 栄 治, 전게 < 高 麗 末 期 の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76~79. 또 岩 井 茂 樹, < 明 代 禮 制 覇 権 主 義 と 東 アジアの 秩 序 > 東 洋 文 化 第 85 号 132~133 16) 冬 至, 王 具 冕 服, 率 百 官, 向 闕 拜 賀, 山 呼 萬 歳, 後 百 官 又 行 本 朝 賀 禮 ( 高 麗 史 권67, 禮 志 9, 嘉 禮,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寿 節 望 闕 賀 儀, 恭 愍 王 21년 11월 14일 丁 巳 条 ). 桑 野 栄 治, 전게 < 高 麗 末 期 の

6 5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대 조선국왕 성종(재위 1469~94)이 秘 書 役 인 承 政 院 에 이르기를, 내가 望 闕 禮 를 행할 때 몸은 비록 이곳 조선에 있지만, 몸소 朝 天 하는( 皇 帝 를 拜 謁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고 말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7) 원래 명절이 되면 蕃 王 인 조선 국왕이 몸소 황제가 기거하는 北 京 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拜 禮 를 해야 하지만 그렇 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득이 조선의 왕궁에서 紫 禁 城 에 거처하는 명 황제를 요배하는 것으로 그 책무를 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명과 琉 球 의 관계 이어서 조선과 마찬가지로 책봉체제 아래 있었던 琉 球 國 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洪 武 帝 는 당초 1372년( 洪 武 5)에 浦 添 을 거점으로 하는 中 山 王 察 度 (삿토, 재위 1350~95년) 가 일찍부터 入 貢 권고에 응했으므로(다만 中 山 王 의 冊 封 은 1404년 제2대 武 寧 ), 大 琉 球 國 의 朝 貢 은 不 時 (= 隨 時 )로 한다 고 우대했으나, 후일 琉 球 使 臣 이 福 建 省 에서 일으켰 던 살인사건을 이유로 1475년(성화 11년)에 憲 宗 成 化 帝 (재위 1464~87)는 琉 球 의 貢 期 (조공 빈도)를 2년 1공으로 제한했다. 18) 그 후 琉 球 국왕이 1년 1공의 주청을 거듭한 결 과 1507년( 正 徳 2)에 겨우 1년 1공의 貢 期 를 얻기는 했지만, 1522년( 嘉 靖 원년)에 다시 2년 1공을 하명받게 된다. 19) 조선의 1년 3공과 비교하면 그 대우의 격차가 현격하다. 20)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75~76. 17) 傳 于 承 政 院 曰, ( 中 略 ) 予 行 望 闕 禮 時, 身 雖 在 此, 豈 有 異 於 親 自 朝 天 乎, ( 後 略 ) ( 成 宗 実 録 권 284, 24년 11월 8일 己 亥 条 ).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成 宗 代 の 儀 禮 と 外 交 > ) 祖 訓, 大 琉 球 國 朝 貢 不 時, 王 子 及 陪 臣 之 子, 皆 入 太 學 (= 国 子 監 ) 讀 書, 禮 待 甚 厚, ( 中 略 ) 永 樂 以 來, 國 王 嗣 立, 皆 請 命 册 封, 後 惟 中 山 王 至, 中 山 王 世 稱 尚 氏, 諭 令 二 年 一 貢, 毎 船 百 人, 多 不 過 百 五 十 人, 貢 道 由 福 建 閩 縣, ( 後 略 ) ( 萬 曆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琉 球 國 条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四 章 明 代 の 琉 球 と 中 国 との 関 係 > 174~177 ; 邊 土 名 朝 有, 琉 球 の 朝 貢 貿 易 ( 校 倉 書 房 ) < 第 一 部 第 一 章 貢 期 の 制 定 > 23~24 ; 同 < 第 一 部 第 三 章 貢 期 の 制 限 > 64~66. 또 明 実 録 과 歴 代 寶 案 을 토대로 琉 球 의 朝 貢 頻 度 를 정리한 岡 本 弘 道, < 明 朝 における 朝 貢 国 琉 球 の 位 置 付 けとその 変 化 世 紀 を 中 心 に> 東 洋 史 研 究 第 57 巻 第 4 号, 4~6에 따르면, 1480년대 이후는 거의 2년에 1번의 朝 貢 으로 안정되었다. 19)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四 章 明 代 の 琉 球 と 中 国 との 関 係 > 178. 邊 土 名 朝 有, 전게서 < 第 一 部 第 三 章 貢 期 の 制 限 > 76. 뒷날 薩 摩 島 津 氏 에 의한 琉 球 侵 攻 직후의 貢 期 는 10년 1공이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夫 馬 進, 전게 <1609 年, 日 本 の 琉 球 併 合 以 降 における 中 国 朝 鮮 の 対 琉 球 外 交 > 18~22가 이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 村 井 章 介 씨는 明 史 外 國 伝 을 기초로 < 明 에 대한 諸 國 의 入 貢 表 >를 작성하고, 조공 횟수가 171회인 琉 球 가 제1위이며, 다른 나라보다 두드러지게 많은 조공횟수 였다고 한다( 同,

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5 또 1561년( 嘉 靖 40)에 冊 封 使 로 琉 球 에 갔던 郭 汝 霖 의 重 編 使 琉 球 録 에 따르면, 朝 鮮 과 安 南 (현재 베트남 북부)으로 파견되는 冊 封 使 가 대략 正 7 品 ( 副 使 는 従 7 品 )임에 비하여 琉 球 와 占 城 (참파, 현재 베트남 남부)의 경우는 従 7 品 ( 副 使 는 正 8 品 )이므로 琉 球 国 王 은 朝 鮮 国 王 보다 격하되어 취급받은 것이 된다. 21) 다만 이 조공 빈도는 어디까지나 원칙이며,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조공( 琉 球 에서는 進 貢 이라고 한다)사절 이외에 謝 恩 使 慶 賀 使 進 香 使 등 임시사절도 파견하고 있다. 22) 예를 들면, 歷 代 寶 案 에는 제1 尚 氏 王 統, 2대 尚 巴 志 (쇼하시, 재위 1422~39 년)가 1425년에 등극한 宣 宗 宣 徳 帝 (재위 1425~35)를 축하하면서, 신하 尚 巴 志 는 멀리 蕃 國 에 기거하면서 마음은 달려가 遥 賀 한다는 내용의 表 文 (황제 앞으로 보내는 외교문 서)을 보냈다. 23) 외교문서의 상투적인 문구이기는 하지만, 직접 紫 禁 城 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할 수 없는 蕃 王 尚 巴 志 의 심정은 望 闕 禮 를 올리는 조선 국왕 성종의 심정과 상통 한다. 海 から 見 た 戦 國 日 本 - 列 島 史 から 世 界 史 へ ( 筑 摩 書 房 ) 67). 村 井 씨가 작성한 入 貢 表 는 秋 山 謙 蔵 日 支 交 渉 史 研 究 ( 岩 波 書 店, 1939년 4월) < 本 論 第 六 篇 第 五 章 勘 合 貿 易 と 密 貿 易 > 552를 참 조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은 30회(10위), 일본은 19회(13위)이며, 高 良 倉 吉 씨 는 이 데이터를 기초로 明 朝 에 대하여 琉 球 는 아시아 최대의 조공무역국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 한다( 同, < 琉 球 の 形 成 と 東 シナ 海 世 界 > 大 石 直 正 他, 周 縁 から 見 た 中 世 日 本 ( 日 本 の 歴 史 14) ( 講 談 社 ) 193~194). 그러나 원칙상 2년 1 貢 의 琉 球 가 원칙상 1년 3 貢 인 조선의 朝 貢 회수를 이처럼 대폭적으로 상회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朝 鮮 王 朝 実 録 을 조사했던 朴 成 柱 씨에 따르면, 조선 초기( 太 祖 원~ 成 宗 25년 )에는 正 朝 使 102회( 兼 行 14회), 聖 節 使 96회 ( 兼 行 8회), 千 秋 使 61회( 兼 行 4회)의 데이터를 제시하였다. 통상의 조공사절로 한정해도 조선에서 明 으로 약 100년 동안 합계 259회가 파견되었으며, 기타의 임시사절, 예를 들면 謝 恩 使 의 파견 회수는 150회( 兼 行 15회)를 상회한다( 同, 전게 <조선 초기 遣 明 使 節 에 대한 일고찰> 153~156). 그런 까닭에 村 井 씨가 작성한 < 明 に 對 する 諸 國 の 入 貢 表 >는 당시의 실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21) 孫 薇, < 冊 封 朝 貢 について- 中 琉 の 冊 封 朝 貢 関 係 を 中 心 に> 法 政 大 学 沖 縄 文 化 研 究 所 編, 沖 縄 文 化 研 究 17, 57~58 ; 郭 汝 霖 ( 原 田 禹 雄 訳 注 ), 重 編 使 琉 球 録 ( 榕 樹 書 林 ) 下, 群 書 質 異, 使 職 要 務, 176. 원문은 ( 前 略 ) 按 我 朝 封 錫 藩 王 之 制, 如 按 南 朝 鮮, 則 遣 編 修 給 事 中 等 官 爲 使, 占 城 琉 球, 則 遣 給 事 中 行 人 等 官 爲 使, ( 後 略 ) ( 同, 293~294). 다만 金 龍 基, < 朝 鮮 初 期 의 対 明 朝 貢 関 係 考 > 釜 山 大 学 校 論 文 集 ( 人 文 社 会 科 学 篇 ) 제14집, 155에 따르면 조선 초 기에 파견된 明 使 는 正 5 品 부터 従 6 品 의 하급관리였으며, 75회의 明 使 중에서 48회는 宦 官 이었다. 22) 野 口 鐵 郎, 中 国 と 琉 球 ( 開 明 書 院 ) < 明 代 琉 中 往 来 表 > ; 赤 嶺 誠 紀, 大 航 海 時 代 の 琉 球 ( 沖 縄 타임스 社 ) < 進 貢 船 一 覧 表 > 참조. 23) ( 前 略 ) 臣 尚 巴 志, 恭 遇 聖 君 嗣 登 天 位, 遠 處 蕃 維, 心 馳 遙 賀, 仰 紫 宸 三 祝, 祈 聖 壽 以 齊 天, ( 後 略 ) ( 歷 代 寶 案 제1집, 巻 12, 表 奏 文, 洪 熙 원년 윤7월 17일자, 宣 徳 帝 宛 中 山 王 上 表 文 ). 텍스트로 는 沖 縄 県 立 圖 書 館 編, 歷 代 寶 案 校 訂 本 제1책 ( 沖 縄 県 教 育 委 員 会 )를 이용했다. 이 上 表 文 에 관해서는 高 良 倉 吉, 전게 < 琉 球 の 形 成 と 東 シナ 海 世 界 > 188에서 인용되었다.

8 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그렇다면 조선 국왕이 매년 명절에 망궐례를 행했던 것처럼, 琉 球 국왕도 역시 같은 궁중의례를 올리고 있었을까? 史 料 의 제약으로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琉 球 왕권의 관점에서 일찍이 豊 見 山 和 之 씨는 왕은 紅 錦 衣 를 갖추고, 平 天 冠 을 쓰고, 一 僧 과 마주앉아 望 闕 의 禮 를 행한다 ( 朝 鮮 王 朝 実 録 1546년)라고 하듯이, 국왕은 승려와 함께 望 闕 의 禮 = 紫 禁 城 遥 拜 를 올리고 있다. 고 지적하였다. 24) 豊 見 山 씨가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았던 朝 鮮 王 朝 実 録 에 의하면, 中 宗 37년(1542) 琉 球 國 에 표착하여 4년간 생활했던 제주 표류민 朴 孫 등 12명으로부터 들은 琉 球 의 풍속으로, 확실히 琉 球 國 왕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제례용 平 天 冠 을 쓰고, 승려와 마주앉아 望 闕 의 禮 를 행한다 고 기록하고, 大 明 을 섬기기 때문에 이 예를 올리 는 것이다 고 해설하였다. 25) 豊 見 山 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実 録 의 기사는 계속해서 百 官 은 관직의 서열에 따라 뜰아래 나란히 서서 배례한다 고 기록하고, 표류했던 제주 도의 朴 孫 일행도 반열의 뒤에서 배례를 행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는 朴 孫 일행도 역시 琉 球 의 백관과 마찬가지로 명 황제의 신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늦 어도 16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琉 球 국왕이 蕃 王 으로서 조선의 望 闕 禮 와 유사한 궁중 의례를 首 里 城 안의 성스러운 광장 御 庭 (우나) 에서 거행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다만 제주 표류민이 首 里 城 에서 참가했던 望 闕 의 禮 의 경우, 그 계절에 관해서는 朝 鮮 王 朝 実 録 에 기록이 없다. 그런데 豊 見 山 씨는 薩 摩 藩 의 琉 球 침공(1609년) 이전의 古 琉 球 때 초하루와 보름마다 首 里 城 正 殿 앞에서 官 人 은 位 階 에 따라 정렬하여 중국 황 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례를 도입하고, 聖 節 (중국 황제의 생일)과 정월 초하루에 중 국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고 의례를 거행하였다 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26) 아마도 전자 는 매달 초하루의 朝 賀 儀 禮 이며, 후자가 聖 節 正 朝 (그리고 아마도 冬 至 )의 望 闕 禮 를 의 24) 豊 見 山 和 之, 琉 球 王 國 の 外 交 と 王 権 ( 吉 川 弘 文 館 )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 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 ( 前 略 ) 注 書 尹 潔 因 朴 孫 等 之 言, 記 琉 球 國 風 俗, 其 略 曰, ( 中 略 ) 國 王 所 御 之 殿, 高 五 層, 以 板 覆 之, 王 具 紅 錦 衣, 戴 平 天 冠, 與 一 僧 對 坐, 行 望 闕 禮 事 大 明, 故 爲 此 禮 云, 百 官 以 職 次, 分 班 拜 於 庭 下, 立 朴 孫 等 於 百 官 班 後, 令 一 時 拜 曰, 爾 國 亦 爲 大 明 臣, 不 可 不 拜 云 ( 明 宗 実 録 권3, 원년 2월 1 일 戊 子 条 ). 26) 豊 見 山 和 之, 전게서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234 ; 安 達 義 弘, < 琉 球 國 王 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 册 封 朝 貢 體 制 > 久 留 米 大 學 比 較 文 化 研 究 第 19 輯, 60~61도 이 聖 節 正 朝 의 王 朝 儀 禮 에 주목했다.

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7 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豊 見 山 씨가 근거로 했던 歷 代 寶 案 에 따르면, 일찍이 洪 武 帝 로부터 하사받은 관복이 심하게 손상되어 聖 節 正 朝 등의 행사에 지장이 생겼 다 고 한다. 27) 尚 巴 志 가 명나라 禮 部 앞으로 보낸 이 咨 文 은 1436년( 正 統 원년) 당시 琉 球 의 왕권의례의 실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禮 部 의 咨 文 에 주목했던 邊 土 名 朝 有 씨는 聖 節 正 朝 등의 행사 에 대하여, 이것은 洪 武 2년에 정해진 聖 節 正 旦 冬 至 蕃 國 望 闕 慶 祝 儀 ( 大 明 会 典 巻 58, 1006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 中 略 ) 琉 球 王 및 신하가 冠 帯 를 하사받은 洪 武 31년 이후부터는 관복을 갖춘 정식 의례가 행해졌던 것이다. 라고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28) 어느 것이든 단편적인 사료이기는 하지만, 뒷 날 18세기 전반에 성립한 琉 球 国 由 来 記 (1713년) 琉 球 国 舊 記 (1731년)가 보여주 듯이 薩 摩 藩 지배하의 근세 琉 球 에 있어서도 冬 至 元 旦 정월 15일의 王 府 儀 禮 는 3대 의 례로서 매우 중시되었으며, 중화황제가 사는 紫 禁 城 에 대한 요배의례를 강조하게 되었 다. 29) 이러한 王 府 儀 禮 에서는 외교문서 작성에 정교하여 儀 禮 에 익숙하던 職 能 集 團 閩 人 三 十 六 姓 이 관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30) 이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유구 국왕은 正 朝 聖 節 등 명절에는 帝 都 인 北 京 紫 禁 城 을 遥 拝 하는 의례, 즉 望 闕 禮 를 琉 球 나름으로 27) ( 前 略 ) 一 件, 朝 服 事, 洪 武 年 間, 欽 蒙 太 祖 高 皇 帝 給 賜 本 國 各 官 冠 笏 公 服 等 件, 欽 遵 奉 受 外, 今 照, 本 國 各 官 朝 服 已 經 多 年, 倶 以 朽 壞 無 存 及 不 能 裁 製, 凡 遇 聖 節 正 旦 等 事, 行 禮 未 便, 合 咨, 乞 爲 具 奏 給 賜 便 益, 咨 請 施 行, ( 後 略 ) ( 歴 代 寶 案 第 1 集, 巻 17, 國 王 咨 文, 正 統 원년 9월 24일자, 禮 部 宛 中 山 王 咨 文 ). 단, 朝 服 문제에 대하여 禮 部 는 직접 수선해서 사용하라고 회답했다( 同 書 第 1 集, 巻 4, 禮 部 咨 文, 正 統 2년 6월 6일자, 禮 部 宛 中 山 王 咨 文 ). 28) 邊 土 名 朝 有, 歴 代 寶 案 の 基 礎 的 研 究 ( 校 倉 書 房 ) < 禮 部 咨 文 > ) 琉 球 国 由 来 記 巻 1 ( 伊 波 普 猷 他 編, 琉 球 史 料 叢 書 第 1 ( 井 上 書 房 ) 수록), 王 城 之 公 事, 正 月 朝 拝 御 規 式 朝 拝, 및 11월 冬 至 条. 琉 球 国 舊 記 (전게 琉 球 史 料 叢 書 第 3 수록) 巻 3, 公 事, 正 月 朝 賀 南 殿 賀 禮, 및 11월 冬 至 条. 근세 琉 球 의 紫 禁 城 遥 拝 儀 禮 에 대해서는 豊 見 山 和 之, 전게서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236~241 ; 伊 從 勉, 琉 球 祭 祀 空 間 の 研 究 -カミとヒトの 環 境 学 ( 中 央 公 論 美 術 出 版 ) < 第 3 部 第 11 章 琉 球 王 権 の 場 所 - 首 里 城 正 殿 唐 破 風 の 誕 生 とその 改 修 について> 557~558 참조. 30) 久 米 村 의 福 建 系 화교집단이 琉 球 의 王 府 儀 禮 에 관여하고 있던 것에 대하여는, 예를 들면 真 栄 平 房 昭, < 対 外 関 係 における 華 僑 と 国 家 - 琉 球 の 閩 人 三 十 六 姓 をめぐって> 荒 野 泰 典 他 編, ア 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Ⅲ 海 上 の 道 )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259~260 참조. 또한 明 의 禮 部 가 제2 尚 氏 王 統 제7대 尚 寧 王 (재위 1589~1620년) 앞으로 보냈던 咨 文 에 ( 前 略 ) 竊 惟, 卑 國 僻 處 海 邦, 自 入 貢 受 封 之 後, 一 切 輔 導 禮 義, 悉 頼 原 賜 三 十 六 姓 之 裔, ( 後 略 ) 라는 구절이 보인다( 歴 代 寶 案 第 1 集, 巻 4, 禮 部 咨 文, 萬 暦 35년 12월 13일자, 琉 球 国 王 宛 禮 部 咨 文 ).

10 5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각색한 뒤에 올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명과 일본의 관계 한편 일본에서는 1402년( 建 文 4)에 室 町 幕 府 제3대 장군에서 물러난 足 利 義 満 (재직 1368~94)이 京 都 北 山 의 별장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建 文 帝 의 책봉을 수락하였 다. 이듬해 永 楽 帝 의 등극이 알려지자 義 満 은 遣 明 使 에게 日 本 國 王 臣 源 명의로 시작되 는 表 文 을 지참시켜서 명으로 보냈으며, 그 결과 1404년에 永 楽 帝 는 義 満 을 다시 日 本 國 王 으로 책봉하였고, 日 本 國 王 之 印 이라고 새겨진 金 印 을 하사하였다. 31) 이미 전년에 는 永 楽 帝 가 조선 국왕을 책봉했으므로, 이 해 1404년에 琉 球 국왕과 일본 국왕이 탄생 함으로써 조선 琉 球 일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중화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세계 시스템(실제로는 무역시스템) 32) 속으로 편입된 것이 된다. 이때 일본에는 永 楽 勘 合 100 통이 들어왔고, 이후 일본과 명 사이에는 이른바 勘 合 貿 易 이 시작된다. 勘 合 船 ( 遣 明 船 이라고도 한다)은 1547년까지 약 150년 동안 19회에 걸쳐 파견되었는데 실제로는 朝 貢 船 이다. 33) 명나라가 일본국왕인 室 町 殿 ( 室 町 幕 府 의 수장, 대개의 경우는 室 町 장군)에게 인정했던 조공 빈도는 10년 1공이었는데, 34) 勘 合 船 =조공사절의 파견 빈도와 거의 부합 31) 田 中 健 夫, 中 世 對 外 関 係 史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 第 一 部 第 二 章 冊 封 関 係 の 成 立 > 64~ 67 ; 同, 前 近 代 の 國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吉 川 弘 文 館 )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國 王 號 > 49~50 ; 鄭 樑 生, 明 日 関 係 史 の 研 究 ( 雄 山 閣 ) < 第 三 章 明 日 交 渉 > 146~149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二 章 永 楽 帝 の 対 外 政 策 と 日 本 > 109~113 및 < 終 論 明 清 からみた 東 ア ジアの 華 夷 秩 序 > 358~359 32) 坂 野 正 高, 近 代 中 国 政 治 外 交 史 -ヴァスコ ダ ガマから 五 四 運 動 まで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 第 三 章 朝 貢 関 係 - 叩 頭 問 題 > 76~83 ; 浜 下 武 志, 朝 貢 システムと 近 代 アジア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 第 一 部 Ⅰ 東 アジア 国 際 體 系 > 22 ; 村 井 章 介, 전게 海 から 見 た 戦 国 日 本 23 33) 田 中 健 夫, 전게 中 世 対 外 関 係 史 < 第 一 部 第 四 章 明 および 朝 鮮 との 通 交 貿 易 の 展 開 > 153~154 ; 同, 対 外 関 係 と 文 化 交 流 ( 思 文 閣 出 版 ) < 勘 合 符 勘 合 印 勘 合 貿 易 > 102. < 勘 合 貿 易 >의 선구적인 연구로 同, 倭 寇 と 勘 合 貿 易 ( 至 文 堂 )이 있다. 34) ( 前 略 ) 永 樂 初, 復 來 朝 貢, 賜 龜 紐 金 印 誥 命, 封 爲 日 本 國 王, ( 中 略 ) 給 勘 合 百 道, 始 令 十 年 一 貢, 貢 道 由 浙 江 寧 波 府, 毎 貢 正 副 使 等 毋 過 二 百 人, ( 後 略 ) ( 萬 曆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日 本 國 条 ). 다만 小 葉 田 淳 씨는 1511년( 正 徳 4)에 간행된 正 徳 大 明 会 典 ( 弘 治 会 典 ) 의 규정에 의문을 품고 10년 1공의 通 交 制 限 은 寶 徳 年 間 (1449~52년) 이후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또한 최근에 伊 川 健 二 씨는 이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고, 明 側 의 재정사정과 遣 明 使 節 에 의한 소금 밀매, 北 京 会 同 館 에서의 傷 害 事 件 을 배경으로 10년 1공의 制 定 時 期 를 1484년( 成 化 20)으로 단정 하는데, 明 憲 宗 実 録 과 勅 諭 에서 이 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설득력이

1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9 한다. 물론 1년 3공의 조선, 2년 1공의 琉 球 와 비교하면 그 대우의 격차는 부정할 수 없 다.(< 表 1>참조). 入 貢 할 때 정규의 朝 貢 使 節 인지 여부를 준별하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지참해야 하던 勘 合 도 事 大 의 禮 를 충실히 이행하는 조선과 琉 球 두 나라는 면제받았 다. 35) 勘 合 은 1386년( 洪 武 16)에 暹 羅 (아유타야, 현재 타이의 일부)에게 지급한 것이 시 작이며, 급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日 本 占 城 爪 哇 (자바섬 북부) 満 刺 加 (말라카) 真 臘 (캄보디아) 錫 蘭 山 (스리랑카) 등 해상항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来 航 했던 15개국이었다. 36) 勘 合 급부의 대상국이 된 暹 羅 占 城 爪 哇 의 조공 빈도가 모두 3년 1공이지만, 일본의 조 공 빈도는 10년 1공이라는 점에서도 일본의 이질성을 용이하게 간파할 수 있다. 또한 田 中 健 夫 씨에 따르면, 1402년 京 都 北 山 殿 에서 행해졌던 책봉의례 때는 高 机 를 母 屋 앞에 세우고 그 위에 詔 書 를 두고, 義 満 이 먼저 향을 사르고, 이어서 삼배, 그런 다음에 꿇어앉아서 이것을 삼가봤다 고 한다. 37) 鄭 樑 生 씨는 義 満 의 이런 태도는 중화 세계 제국의 일원으로 편입된 속국 국왕의 태도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고 간주하 지만, 38) 室 町 殿 과 명 황제의 종속관계를 시사하는 명절의 遙 拜 의례를 거행한 것인지 지 떨어진다. 小 葉 田 淳, 中 世 日 支 通 交 貿 易 史 の 研 究 ( 刀 江 書 院 ) < 第 六 章 明 の 諸 制 度 > 321~322 ; 伊 川 健 二, 大 航 海 時 代 の 東 アジア- 日 欧 通 交 の 歴 史 的 前 提 ( 吉 川 弘 文 館 ) < 第 一 部 第 二 章 諸 国 王 使 をめぐる 通 交 制 限 > 60~61 35) 鄭 樑 生, 전게서 < 第 二 章 明 の 対 外 政 策 > 62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終 論 明 清 からみた 東 アジアの 華 夷 秩 序 > 353 ; 閔 徳 基, 前 近 代 東 アジアのなかの 韓 日 関 係 ( 早 稲 田 大 学 出 版 部 ). 증보판 은 同, 前 近 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 日 관계 ( 景 仁 文 化 社, 서울) < 第 一 部 第 二 章 朝 鮮 朝 前 期 の 日 本 国 王 観 - 敵 禮 の 面 から> 84~85. 権 善 弘, 전게 <조선시대 사대관계와 책봉체 제> 66. 다만 勘 合 의 現 存 例 는 없으며, 그 使 用 制 度 形 状 에 관해서는 伍 躍, < 日 明 関 係 における 勘 合 -とくにその 形 状 について> 史 林 第 84 巻 第 1 号 ; 橋 本 雄, < 日 明 勘 合 再 考 > 九 州 史 学 研 究 会 編, 境 界 からみた 内 と 外 ( 九 州 史 学 創 刊 50 周 年 記 念 論 文 集 下 ) ( 岩 田 書 院 ) 등, 통설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 중이다. 36) 洪 武 十 六 年, 始 給 暹 羅 國, 以 後 漸 及 諸 國, ( 中 略 ) 毎 改 元, 則 更 造 換 給, 計 有 勘 合 國 分, 暹 羅 日 本 占 城 爪 哇 満 刺 加 真 臘 蘇 禄 國 東 王 蘇 禄 國 西 王 蘇 禄 國 峒 王 柯 支 浡 泥 錫 蘭 山 古 里 蘇 門 荅 刺 古 麻 刺 ( 萬 暦 大 明 会 典 巻 108, 禮 部 66, 朝 貢 通 例, 勘 合 號 簿 条 ). 松 浦 章, < 萬 暦 四 十 五 年 暹 羅 国 遣 明 使 - 明 代 朝 貢 形 態 の 様 相 > 夫 馬 進 編, 増 訂 使 琉 球 録 解 題 及 び 研 究 ( 榕 樹 書 林 ) 183, ) 田 中 健 夫, 전게 中 世 対 外 関 係 史 < 第 一 部 第 二 章 冊 封 関 係 の 成 立 > 65 ; 橋 本 雄, 前 掲 < 朝 鮮 國 王 使 と 室 町 幕 府 > 172~173. 醍 醐 寺 座 主 満 済 (만사이)의 日 記 満 済 准 后 日 記 ( 続 群 書 類 従 補 遺 1, 続 群 書 類 従 完 成 会, 1978 年 4 月 수록) 永 享 6 年 5월 12일조에 ( 前 略 ) 高 机 於 立 母 屋 前, 其 上 被 置 唐 書, 先 御 燒 香, 次 三 拜, 以 後 跪 テ 唐 書 お 御 拜 見 候 キ, ( 後 略 ) 라고 되어 있다. 다만 극히 최근 에는 橋 本 雄, < 室 町 日 本 の 對 外 観 - 室 町 殿 の 内 なるアジア を 考 える> 歴 史 評 論 697 호가 義 満 의 受 封 儀 禮 는 과연 明 集 禮 등 명 쪽의 빈례 규정대로 집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재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12 6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금은 알 수 없다. 게다가 足 利 義 満 이 죽은 후 家 督 을 이은 4대 장군 義 持 (재직 1394~ 1423년)은 1411년에 대명외교 방침을 전환하여 책봉관계를 단절했고, 6대 장군 義 教 (재 직 1429~41년)가 책봉관계의 부활을 원하여 1432년 宣 徳 帝 에게 表 文 을 보냈으며, 8대 장군 義 政 (재직 1449~73년) 시대 이후는 명 사신의 来 日 이 끊어지는 등 황제 대 室 町 殿 의 외교관계가 그다지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明 황제가 冊 封 使 를 파견하여 誥 命 수여 儀 禮 를 거행했던 形 跡 이 있는 것은 義 満 義 持 義 教 3명에 불과하다. 39) 義 満 이하 室 町 殿 이 국내에서 日 本 国 王 을 표방했던 形 跡 도 찾아볼 수 없으며, 日 本 国 王 號 는 幕 府 가 対 明 貿 易 을 독점하기 위하여 通 交 名 義 로서 기능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40) 대명무역의 이권을 둘러싼 細 川 大 内 두 집안의 쟁탈전은 조공무역선의 입관수속을 두고 다투었던 寧 波 의 난(1523년, 이른바 寧 波 爭 貢 事 件 )을 초래하였고, 41) 일명관계는 이 후 勘 合 貿 易 을 독점하고 있던 大 内 씨의 멸망(1551)과 함께 단절된다. 16세기의 室 町 정 권하에서는 조공무역 시스템의 본래의 정치적 의미는 상실되고,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 별개의 것으로 전락해 간 것을 상징한다. 42) 훗날 1581년에 日 本 国 王 은 対 明 通 貢 의 중 재를 宣 祖 (재위 1567~1608년)에게 요청했지만, 宣 祖 는 人 臣 에게 私 交 없다 는 논리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43) 그러면 1585년에 公 家 社 会 의 최고 관직인 関 白 에 취임하여 唐 38) 鄭 樑 生, 전게서 < 第 三 章 第 二 節 明 日 國 交 の 開 始 > )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國 王 号 > 51~59에 따르 면, 1433년 6월에 명은 義 教 에 대한 책봉사를 파견했지만, 義 政 이후의 일본국왕에 대하여 책봉사 가 파견된 흔적은 없다. 또 義 政 이후에는 일본 국내의 내란을 계기로 朝 鮮 使 節 의 来 日 도 끊어졌 다. 이 점은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上 ) ( 吉 川 弘 文 館 ) < 五 室 町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国 王 号 > 44 ; 村 井 章 介, < 易 姓 革 命 の 思 想 と 天 皇 制 > 永 原 慶 二 編, 講 座 前 近 代 の 天 皇 ( 第 5 巻 世 界 史 のなかの 天 皇 ) ( 青 木 書 店 ) 34 41) 寧 波 争 貢 事 件 에 관해서는 최근 일본이라는 조공국의 入 貢 현장에 초점을 맞춘 山 崎 岳, < 朝 貢 と 海 禁 の 論 理 と 現 実 - 明 代 中 期 の 奸 細 宋 素 卿 を 題 材 として> 夫 馬 進 編, 中 国 東 ア ジア 外 交 交 流 史 の 研 究 ( 京 都 大 学 学 術 出 版 会 )가 있다. 42) 尹 誠 翊, 명대 왜구의 연구 ( 景 仁 文 化 社, 서울) <제3장 嘉 靖 時 期 倭 寇 활동의 증폭 요인과 활동의 양상> ) 松 浦 允 任 撰 ( 田 中 健 夫 田 代 和 生 校 訂 ), 朝 鮮 通 交 大 紀 ( 名 著 出 版 ) 巻 3, 萬 松 院 公 昭 景 ( 宗 義 智 ), 朝 鮮 国 王 李 昖 奉 復 日 本 国 王 殿 下 ( 萬 暦 9년 5월 일자), 116~119.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一 八 右 武 衛 殿 の 朝 鮮 遣 使 > 749~750 ; 閔 徳 基, < 室 町 幕 府 의 対 明 朝 貢 仲 裁 요청과 朝 鮮 의 대응> 日 本 歴 史 研 究 창간호, 55. 다만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国 王 号 > 80에서는 이 < 日 本 国 王 >을 최후의 室 町 将 軍 足 利 義 昭 (재직 1568~73년)가 아니라 対 馬 에서 창작한 가공의 국왕으로 본다.

1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1 입국(= 明 정복) 을 선언했던 豊 臣 秀 吉 44)은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에 포섭되고, 그리고 황제를 요배하는 의례를 올렸던 것일까? 그 전제로서 秀 吉 은 당시 의 명 황제인 神 宗 萬 曆 帝 (재위 1572~1620년)의 책봉을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 이 豊 臣 정권에 의한 외교 구상의 성격을 검토했던 藤 木 久 志 씨는 豊 臣 정권의 대명외 교의 기축은 어쨌든 勘 合 =교역 재개책에 있다 고 보고, 豊 臣 의 天 下 一 統 을 군사정복으 로 간주하는 통설을 근본적으로 의심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45) 豊 臣 政 権 은 1589년 정월 시점에서 島 津 씨를 매개로 明 과의 勘 合 부활을 구상했고, 또한 1593년 5월에 명 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勘 合 의 부활 요구가 나타나기 때문이며, 게다가 秀 吉 의 勘 合 에 대한 이해에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46) 이미 中 村 榮 孝 北 島 万 次 두 분이 지적했던 것 처럼, 본래의 勘 合 이 조공 책봉관계를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豊 臣 정권과 명 사이에 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47) 특히 幕 藩 體 制 성립기에 있어서 琉 球 支 配 의 구도를 논한 紙 屋 敦 之 씨는 豊 臣 政 権 의 1593년( 文 禄 2) 5월의 日 明 講 和 交 渉 에서 勘 合, 그리고 江 戸 幕 府 의 1610년( 慶 長 15)의 対 明 講 和 交 渉 에서 かんごう(감합) 은 모두 조공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公 貿 易 을 바라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 日 明 간의 인식의 차이를 명쾌하게 지적했다. 48) 勘 合 에 대한 오해는 豊 臣 政 権 뿐만 44) 岩 沢 愿 彦, < 秀 吉 の 唐 入 りに 関 する 文 書 > 日 本 歴 史 第 163 号. 뒷날 三 鬼 清 一 郎 編, 豊 臣 政 権 の 研 究 ( 戦 国 大 名 論 集 18) ( 吉 川 弘 文 館 ) 再 録 ) ;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中 ) ( 吉 川 弘 文 館 )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41~242 45) 藤 木 久 志, 豊 臣 平 和 令 と 戦 國 社 会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 第 四 章 海 の 平 和 = 海 賊 停 止 令 > 243. 이른바 勘 合 貿 易 振 興 説 과 対 外 領 土 拡 張 説 은 진작부터 임진왜란의 동기를 둘러싼 논점이 되었다. 예를 들면, 三 鬼 清 一 郎, < 関 白 外 交 體 制 の 特 質 をめぐって> 田 中 健 夫 編, 日 本 前 近 代 の 国 家 と 対 外 関 係 ( 吉 川 弘 文 館 ) 86 ; 同, < 朝 鮮 役 研 究 の 一 齣 - 中 村 栄 孝 氏 の 業 績 をめぐって> 同 編, 織 豊 政 権 期 の 政 治 構 造 ( 吉 川 弘 文 館 ) 357~360에 그러한 지적이 있다. 46) 藤 木 久 志, 전게서 < 第 四 章 海 の 平 和 = 海 賊 停 止 令 > 229~230, 239~244. 그리고 村 井 章 介, < 東 アジア と 近 世 > 歴 史 學 研 究 会 日 本 史 研 究 会 編, 日 本 史 講 座 ( 第 5 巻 近 世 の 形 成 )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51~52 47)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文 禄 慶 長 の 役 > 177~178 ; 北 島 万 次, 豊 臣 政 権 の 對 外 認 識 と 朝 鮮 侵 略 ( 校 倉 書 房 ) < 第 三 章 第 二 節 日 明 講 和 の 和 議 折 衝 > 188~190 48) 紙 屋 敦 之, 幕 藩 制 国 家 の 琉 球 支 配 ( 校 倉 書 房 ) < 第 一 部 第 一 章 琉 球 支 配 と 幕 藩 体 制 > 22. 島 津 씨에 의한 琉 球 侵 攻 직후인 1610년에 徳 川 政 権 은 日 明 貿 易 부활의 중개역을 琉 球 에 기대 했지만 실패했다 ( 同, 25~28). 또한 同 < 対 明 政 策 と 琉 球 支 配 - 異 国 から 異 国 へ> 加 藤 榮 一 他 編, 幕 藩 制 国 家 と 異 域 異 国 ( 校 倉 書 房 ) 265~268 참조.

14 6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 아니었던 것이다. 中 村 質 씨도 豊 臣 政 権 의 勘 合 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관리 의 통교체제 이며, 현실에서는 朱 印 船 제도처럼 국가관리의 교역형태 로 생각하고, 徳 川 정권기에 정비되는 朱 印 船 무역의 원류를 豊 臣 정권기에서 찾았다. 49) 원래 감합무 역 이라는 용어 자체가 조공무역이라는 본질적인 성격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극히 최 근에는 명 정부 내부의 대일 강화교섭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한 中 島 楽 章 씨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일본만이 조공무역을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병에 이르렀 다는 화의추진파였던 小 西 行 長 柳 川 調 信 宗 義 智 景 轍 玄 蘇 일행의 말에 주목하였다. 50) 1592년 5월의 漢 城 함락 후, 秀 吉 은 後 陽 成 天 皇 을 北 京 으로 옮기고 秀 吉 자신은 日 明 貿 易 의 要 港 이었던 寧 波 로 居 所 를 정하여 동아시아 통교관계를 장악한다는 구체적인( 또는 공상적인) 구상을 밝히고 있으며, 51) 임진왜란의 원인론 52) 을 살피는데 있어서 흥미 깊은 지적이다. 과연 豊 臣 秀 吉 은 책봉 절차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책봉체제로 들어선 경우 명과 어떠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마도 秀 吉 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 으로 생각된다. 1년 3공의 조공 빈도로 명과 조공 회사라는 무역 시스템에 편입된 조선 과, 1547년의 제19차 勘 合 船 을 마지막으로 10년 1공의 공기마저 포기했던 일본에서는 49) 中 村 質, < 東 アジアと 鎖 国 日 本 - 唐 船 貿 易 を 中 心 に> 加 藤 榮 一 他 編, 전게서 幕 藩 制 国 家 と 異 域 異 国 수록, 341~342 50) 中 島 楽 章, < 封 倭 と통공-1594 年 の 寧 波 開 貢 問 題 をめぐって> 東 洋 史 研 究 제66권 제2호, 132. 平 行 長 通 書 于 金 應 瑞, 欲 見 更 事 之 人, 與 之 議 事, 應 瑞 使 李 弘 發 入 往, 則 平 調 信 平 義 智 仙 蘇 (= 景 轍 玄 蘇 ) 竹 溪 (= 竹 溪 宗 逸 ) 等, 辟 左 右 謂 曰, 南 蠻 琉 球 皆 是 外 夷 而 奉 貢, 稱 臣 於 大 明, 日 本 獨 爲 棄 國, 未 參 其 列, 前 以 此 意 請 朝 鮮, 欲 達 于 大 明 而 朝 鮮 牢 不 肯 許, 不 得 已 擧 兵 出 來,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57, 27년 11월 1일 을해조). 51)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76~77 ; 同, 전게서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59~260, 283~284 ; 北 島 万 次, 전게서 < 第 二 章 豊 臣 政 権 の 対 外 認 識 と 東 アジア> 95 ; 三 鬼 清 一 郎, < 豊 臣 秀 吉 の 対 外 政 策 > 韓 国 史 論 22( 壬 辰 倭 乱 의 再 照 明 ) ( 国 史 編 纂 委 員 会, 서울) 64~67 52) 壬 辰 倭 乱 연구의 학설사는 北 島 万 次, 전게서 < 第 一 章 豊 臣 政 権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 学 説 史 的 検 討 > 가 상세하다. 또한 임진왜란의 원인 목적 동기에 관한 연구사는 六 反 田 豊 他, 전게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 日 韓 歴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前 掲 報 告 書, 수록) 28~31 참조. 또한 朴 晢 晄, 전게 <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연구의 현황과 과제> 399에 따르면, 한국 측의 연구자는 원인에 대하 여 체계적으로 심도 있는 분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 이라고 한다. 최근 朴 秀 哲,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임진왜란 의 재검토> 歴 史 学 会 編,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 一 潮 閣, 서울) 207~223에서는 壬 辰 倭 乱 의 원인론 외에 이른바 豊 臣 平 和 令 의 문제점, 항복하면 살려주고, 반항하면 토벌한다 는 秀 吉 의 침공논리를 재검토하고, 壬 辰 倭 乱 대신에 壬 辰 戦 争 이라는 호칭을 제시하였다. 모두 참조하기 바란다.

1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3 정보수집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격차가 있었을 것이다. 군사력을 배경으로 천하통일을 완수한 秀 吉 에게 있어서 萬 曆 帝 의 신하로서 의례적 관계를 체결하고, 이를 토대로 명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 시스템 속으로 포섭된다는 발상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 이다. 동시에 그것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萬 曆 帝 의 신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하에서는 秀 吉 과 거의 동시대에 한반도를 다스리고 있던 선조(재위 1567~1608) 시대로 시기를 좁히고, 望 闕 禮 라는 대명 외교의례의 場 을 통하여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한중 관계의 실상에 다가가려 한다. 물론 임진왜란이라는 전시 하에 있던 王 都 漢 城 이 주된 고 찰의 무대가 된다. 그런 다음에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秀 吉 의 일본국왕 책봉에 관하여 약 간의 고찰을 추가하려 한다. Ⅱ.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먼저 선조의 책봉의례의 場 을 보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567년 7월 3일, 宣 祖 는 景 福 宮 의 正 殿 인 勤 政 殿 에서 즉위하였다. 53) 당시 16세의 宣 祖 는 先 代 인 明 宗 (재위 1545~ 67년)의 직계가 아닌 徳 興 大 院 君 ( 中 宗 의 7남)의 3남으로 明 宗 妃 仁 順 王 后 沈 씨와 대신 들의 합의에 따라 옥좌에 오른 傍 系 의 조선국왕이다. 54) 그리고 이듬해인 선조 원년 (1568) 2월 27일, 왕도 한성에는 책봉사 姚 臣 李 慶 일행이 영접을 받고 입국하였다. 正 使 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姚 臣 은 中 官, 즉 宦 官 이다. 55) 宣 祖 의 冊 封 모습은 당일의 실록 기사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53) 宣 祖 修 正 実 録 권1, 즉위년 7월 3일 병진조. 54) 震 檀 学 会 編, 李 相 佰 著, 韓 国 史 ( 近 世 前 期 篇 ) ( 乙 酉 文 化 社 ) < 第 二 編 第 五 章 士 禍 党 争 > 567~568 ; 李 泰 鎮, 朝 鮮 儒 教 社 会 史 論 ( 知 識 産 業 社, 서울). 일본어 역은 六 反 田 豊 訳, 朝 鮮 王 朝 社 会 と 儒 教 ( 法 政 大 学 出 版 局 ) <Ⅱ. 제11장 壬 辰 倭 乱 에 대한 理 解 의 몇 가지 문제> ) 賜 故 朝 鮮 國 王 李 峘 (= 明 宗 ) 謚 恭 憲, 遣 中 官 姚 臣, 行 人 歐 布 稷 吊 祭, 封 其 侄 署 國 事 李 昖 (= 宣 祖 ) 爲 朝 鮮 國 王 ( 明 穆 宗 実 録 권14, 隆 慶 원년 11월 5일 병진조).

16 6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申 時, 冊 封 天 使 上 使 姚 臣 副 使 李 慶 到 迎 詔 門, 百 官 皆 以 雨 具 迎 詔 勅, 至 勤 政 殿, 殿 庭 亦 濕, 及 申 時, 頒 詔 勅 也, 雨 即 止, 上 捧 詔 勅, 退 至 中 門 外 而 還 入, 夕, 上 以 宴 詣 太 平 館, ( 宣 祖 実 録 권2, 원년 2월 27일 정미조) 오후 4시 무렵 책봉사가 迎 詔 門 에 도착하자 조선의 문무백관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공손히 詔 勅 을 맞이했고, 경복궁의 勤 政 殿 으로 이동했다. 책봉사가 詔 勅 을 내릴 무렵에 는 비도 그쳤으며, 선조가 詔 勅 을 받들고 中 門 에서 퇴장했으며, 저녁 무렵에는 太 平 館 에 서 책봉사를 접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宣 祖 実 録 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훗날 鵝 城 府 院 君 李 山 海 가 제술했던 萬 曆 36년 6월 12일 자 宣 宗 大 王 穆 陵 誌 에 따르면 이때 선조는 穆 宗 隆 慶 帝 (재위 1566~72)로부터 조선 국왕 에 책봉하는 誥 命 외에 金 印 冕 服 을 받았다. 56) 이 해에 선조가 명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체제에 정식으로 편입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록 기사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勤 政 殿 에서 冊 封 儀 禮 의 클라이맥스는 禮 制 上 조선 국왕이 종친 문무백관과 함께 萬 歳 를 삼창하는 장면 이다. 57) 만세삼창이라는 이른바 복속의례는 正 朝 冬 至 의 대명 요배의례에 모두 공통적 이다. 58) 이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豊 臣 秀 吉 에게도 이 의례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후술). 사료 속에 보이는 迎 詔 門 ( 迎 恩 門 이라고도 한다)은 中 宗 32년(1537) 정월에 慕 華 館 앞 에 신축하고 편액도 달았다. 59) 慕 華 館 이란 한성부 敦 義 門 (서대문) 밖의 盤 松 坊 에 있던 명나라 사신을 위한 영접시설이다. 60) 향연이 베풀어진 太 平 館 은 崇 禮 門 안에 있던 명 사 신을 위한 숙박시설로서, 61) 모두 中 華 를 숭모하는 조선의 대명 외교자세를 가시화했던 56) ( 前 略 ), 翌 年 (= 宣 祖 元 年 ) 春, 皇 帝 遣 太 監 姚 臣 李 慶, 齎 詔 封 爲 朝 鮮 國 王, 欽 賜 誥 命 冕 服 彩 幣,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221, 41년 2월조, 誌 文 ). 57) ( 前 略 ) 左 通 禮 啓 請 山 呼, 殿 下 拱 手 加 額 曰 萬 歳, 啓 請 山 呼, 曰 萬 歳, 啓 請 再 山 呼, 曰 萬 萬 歳, 王 世 子 及 宗 親 文 武 百 官 同, ( 後 略 ) (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迎 詔 書 儀 ). 58) 桑 野 栄 治, 전게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對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 附 録 朝 鮮 初 期 望 闕 行 禮 儀 註 試 釈 > 참조. 59) 中 宗 実 録 권83, 32년 정월 2일 임오조. 柳 本 藝 漢 京 識 略 (순조 30년, 1830) 권1, 宮 室, 慕 華 館 条 에 ( 前 略 ) 館 前, 舊 有 紅 箭 門, 中 宗 丙 申 (= 中 宗 31년), 改 立 雙 柱 門, 蓋 緑 琉 璃 瓦, 扁 曰 迎 詔 門, 己 亥 (=중종 34년), 華 使 薛 廷 寵 以 為 詔 勅 殊 名, 改 扁 曰 迎 恩 門, ( 後 略 ) 이라고 되어 있다. 텍스트 로는 漢 京 識 略 ( 第 2 版 ) (서울 特 別 市 史 編 纂 委 員 会, 서울)을 이용했다. 60) 在 敦 義 門 外 西 北, 本 慕 華 樓, 世 宗 十 二 年 (=1430), 改 爲 館 ( 新 増 東 國 輿 地 勝 覧 [중종 26년, 1531] 권3, 漢 城 府, 宮 室 条, 慕 華 館 ). 在 盤 松 坊 東, 有 迎 恩 門, 爲 華 使 迎 送 之 所 ( 大 東 地 志 [ 高 宗 원년, 1864]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慕 華 館 ). 61) 在 崇 禮 門 内, 待 中 朝 使 臣, 館 後 有 樓 ( 新 増 東 國 輿 地 勝 覧 권3, 漢 城 府, 宮 室 条, 太 平 館 ). 在 崇 禮 門 内, 爲 華 使 留 館, ( 中 略 ) 仁 祖 朝, 撤 之, 構 弘 濟 院 ( 大 東 地 志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太 平 館 ).

1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5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책봉사를 맞이한 조선에서는 그 후 2월 28일에 선조가 주재하는 翌 日 宴, 29일에 경복 궁의 경회루 관람 후 勤 政 殿 에서 열린 향연, 30일에는 정부 고관이 太 平 館 에서 책봉사를 접대하고 있다. 62) 이러한 일련의 의례는 대명외교상 정해진 규칙이다. 명 사신이 체제 중일 때의 접대의례에 대하여는 成 宗 16년 정월에 시행된 經 國 大 典 에 명 조정의 사신이 왕도 한성에 도착하면 下 馬 宴 과 翌 日 宴 을 베푼다 왕세자 종친부 의정부 육조 또한 차례로 잔치를 베푼다. 사신이 帝 都 북경으로 돌아갈 때는 餞 宴 을 베푼다 고 되어 있으며, 63) 명 사신이 한성에 도착한 뒤에는 원칙적으로 下 馬 宴 翌 日 宴 餞 宴 순서로 조선 국왕이 주재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64) 이러한 외교 규칙으로 보자면 책봉사가 귀 국할 때는 餞 宴 이 열려야 하는 셈이지만, 宣 祖 実 録 에는 책봉사의 귀국에 관한 기록 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宣 祖 實 錄 을 편찬할 때 최초의 11년분을 보완하는 자 료로 활용된 柳 希 春 의 眉 巌 日 記 草 를 대조해 보면 책봉사는 3월 1일에 한강유람을 즐기고 있다. 65) 당시 한성을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에게 있어서 한강 유람은 이를테면 정 평이 나있는 코스였다. 66) 그 후 3일에 太 平 館 에서 餞 別 을 위한 上 馬 宴 이 열렸고, 이튿날 3월 4일에 선조는 백관과 함께 慕 華 館 迎 詔 門 에서 귀국길에 오른 책봉사를 전송했다. 67) 이번의 선조에 대한 책봉을 감사하기 위해 右 議 政 丁 應 斗 와 吏 曹 判 書 姜 暹 이 謝 恩 使 로 명에 파견된 것은 3월 하순의 일이다. 68) 62) 行 翌 日 宴, 上 行 酒 於 天 使, 五 爵 而 畢 後 還 宮, 上 於 慶 會 樓, 請 宴 兩 天 使, 慶 會 樓 觀 光 後, 勤 政 殿 赴 宴, < 宰 樞 宴 于 大 平 館 > (차례로 宣 祖 実 録 권2, 원년 2월 28일 29일 30일조). 63) 朝 廷 使 臣, ( 中 略 ) 致 京, 設 下 馬 宴 翌 日 宴 [ 王 世 子 宗 親 府 議 政 府 六 曹 亦 以 次 設 宴 ], 及 還, 設 餞 宴 凡 接 待, 考 儀 軌 行 之, 倭 野 人 同 ( 經 國 大 典 권3, 禮 典, 待 使 客 条 ). 國 朝 五 禮 儀 권5, 賓 禮, 宴 朝 廷 使 臣 儀 条. 64) 후일 通 文 館 志 권4, 事 大 下, 入 京 宴 享 儀 条 에 의하면, 명 사신 입경 후에 5회( 下 馬 宴 翌 日 宴 仁 政 殿 請 宴 回 禮 宴 別 宴 ), 귀국할 때 2회( 上 馬 宴 餞 宴 ), 합계 7회의 향연이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베풀어졌다. 또한 李 鉉 淙, < 明 使 接 待 考 > 郷 土 서울 제12호, 141~ ) 天 使 二 員 遊 觀 漢 江 (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3월 1일). 텍스트는 朝 鮮 史 編 修 会 編, 眉 巌 日 記 草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8)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저본은 文 化 柳 氏 家 소장본)을 이용했다. 66) 李 相 培, 2004 <조선전기 외국사신 접대와 明 使 의 遊 観 연구> 國 史 館 論 叢 제104집 ; 曺 圭 益 他 편, 연행록연구총서7(정치 경제 외교) ( 學 古 房, 서울)에 다시 수록, 242~243에 의하 면, 명나라 사신의 한양 遊 観 地 는 한강, 사찰, 도성 안의 개인집, 성균관, 모화루, 남산의 순서이다. 67) 以 太 平 館 上 馬 宴, 朝, 詣 漢 城 府 内 依 幕, ( 中 略 ) 巳 時, 百 官 隨 駕 至 太 平 館 近 處, 館 員 除 經 筵 番 外 入 依 幕, 盧 君 (= 盧 守 慎 ) 及 余 之 出 入, ( 後 略 ), 罷 漏 後, 以 天 使 回 程, 百 官 先 詣 慕 華 館, ( 中 略 ) 巳 時, 上 與 天 使 酬 酢, 四 爵 禮 畢, 両 天 使 與 上 相 別, 歩 至 迎 詔 門 外, 與 百 官 相 揖 而 別, ( 後 略 ) (차례로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3월 3일 4일). 68) 是 日, 謝 恩 使 乃 謝 册 封, 故 丁 應 斗 代 為 右 相 之 任, 姜 暹 亦 假 吏 判 之 銜 (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18 6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상으로 책봉사의 한성 체류는 1주일 정도에 불과했지만, 선조의 책봉의례는 상술한 접대의례를 포함하여 謝 恩 使 를 파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2. 임진왜란 이전의 望 闕 禮 1) 명 사신의 來 朝 와 冬 至 의 望 闕 禮 선조 대에 望 闕 禮 의 시행을 전하는 최초의 기록은 선조 5년(1572) 11월 동지에 보인 다. 이 날의 기록도 柳 希 春 의 眉 巌 日 記 草 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69) 冬 至, 罷 漏 天 明, 上 率 群 臣, 行 望 闕 禮, 仍 班, 又 行 兩 大 妃 殿 賀 禮, 禮 畢, 群 臣 退, 辰 正, 上 出 坐 殿 上, 群 臣 入 行 賀 禮, 禮 畢,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7일 기축조) 동짓날 한성부 안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큰 종이 울린다( 罷 漏. 5 更 3 点 ). 새벽녘 ( 天 明 )에 선조는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조선 국왕이 문무백관과 함께 대명황제에게 동지를 축하하는 대명 요배의례이다. 이어서 양 대비전, 즉 仁 聖 王 后 ( 仁 宗 妃 )와 仁 順 王 后 ( 明 宗 妃 )에 대하여 동지를 축하한다. 이런 의례를 끝내면 신하들은 일단 대궐 정전에서 물러난다. 당일 오전 8시 무렵( 辰 正 )이 되면 선조는 다시 正 殿 으로 행차하고, 신하들이 선조에게 朝 賀 禮 를 올린다. 전자의 望 闕 禮 는 명 황제를 축하 대상으 로 하는 대외적인 궁중의례이며, 후자의 朝 賀 禮 는 조선 국왕을 축하 대상으로 하는 국내 용 궁중의례이다. 70) 望 闕 禮 와 朝 賀 禮 가 끝나면 통상은 대궐 正 殿 에서 会 禮 宴 이 열리지 3월 21일). 朝 鮮 官 人 이 外 交 使 節 로서 北 京 에 파견될 경우, 일반적으로 假 銜 으로서 임시로 1 品 階 를 올리는 일이 관례였다. 金 松 姫 朝 鮮 初 期 堂 上 官 兼 職 制 研 究 - 東 班 京 官 職 과 臨 時 職 을 중심 으로 ( 漢 陽 大 学 校 出 版 部, 서울, 1998년 12월) < 第 4 章 1 対 明 使 臣 과 明 使 迎 接 官 > ) 眉 巌 日 記 草 第 7 冊, 壬 申 11월 7일조 70)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正 至 王 世 子 百 官 朝 賀 儀 [ 誕 日 賀 附 ] 条 ; 国 朝 五 禮 序 禮 巻 2, 嘉 禮, 排 班 圖, 勤 政 殿 正 至 誕 日 朝 賀 之 圖. 正 朝 冬 至 의 朝 賀 禮 事 例 에 대해서는 桑 野 栄 治, 전게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対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에서도 다루었지만, 한국에서는 韓 亨 周, < 朝 鮮 初 期 朝 賀 儀 禮 에 대한 考 察 - 正 至 朝 賀 를 중심으로> 明 知 史 論 第 13 輯 (서울) 외에 姜 制 勲, <조선 초기 朝 会 의식> 朝 鮮 時 代 史 学 報 28 (서울) ; 同, < 朝 鮮 世 祖 代 의 朝 会 와 王 権 > 史 叢 61 (서울) ; 同, <조선 성종대 朝 会 儀 式 과 朝 会 운영> 韓 国 史 学 報 제27호 (서울) ; 同, <조선 초기 朝 儀 의 의례구조와 상징> 韓 国 史 研 究 137 (서울) 등 조선 초기로 시기를 좁혀서 朝 会 儀 禮 전반의 구조분석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正 朝

1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7 만, 71) 선조 6년 이 해의 동짓날 실록 기사에는 会 禮 宴 에 대한 기록이 없다. 正 朝 冬 至 의 会 禮 宴 은 중종대(1506~44년)에 가뭄과 이에 따른 흉년의 여파로 거행되지 않는 추세였 다. 72) 사료의 제약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아마도 이 해의 동짓날에는 会 禮 宴 이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때 조선은 한성에서 명나라 詔 諭 使 節 을 맞아들였다는 것 이다. 명 사신 翰 林 院 編 修 (정7품) 韓 世 能 吏 科 左 給 事 中 (종7품) 陳 三 謨 일행은 萬 曆 帝 의 등극을 通 達 하는 조칙을 가지고 11월 1일 한양에 도착했다. 그날 정오에 慕 華 館 으로 행 차한 선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五 拜 三 叩 頭 의 배례로써 명 사신을 환영했다. 73) 저녁 무렵이 되자 선조는 역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太 平 館 으로 가서 명 사신을 위문해야 하는 下 馬 宴 을 개최하고 있다. 74) 이미 책봉사 영접의례의 場 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일 련의 의례는 대명외교상 정해진 규칙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 규칙에 준거하여 다음 날 은 이른 아침부터 太 平 館 에서 翌 日 宴 이 열렸다. 그때 선조는 명 사신이 동짓날인 7일에 望 闕 禮 를 거행하고 나서 귀국한다는 사실을 안다. 75) 이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가 동짓날 望 闕 禮 를 명 사신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거행해야 하는지 어떤지 문제가 되었으 나, 柳 希 春 은 명 사신과 동석할 필요는 없다며 이를 부정했다. 76) 아울러서 선조는 명 사신에게 체재 일정을 연장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다음의 실록 기사가 그것이다. 天 使 詣 景 福 宮, 周 覽 慶 會 樓, 赴 勤 政 殿 之 宴, 上 以 宗 系 改 正 惡 名 申 雪 奏 請 使 將 遣 事, 令 通 事 告 于 兩 使, 答 曰, 天 子 聖 明, 今 若 奏 請, 可 得 請 矣, 上 又 請 曰, 初 七 日 發 行 云, 冬 至 節 日 行 望 闕 禮 而 後 發 行 日, 晩 矣, 一 日 之 間, 請 留, 天 使 曰, 懇 至, 當 依 許 留,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4일 병술조) 冬 至 의 朝 賀 禮 가 朝 会 儀 禮 의 中 軸 을 이루는 大 朝 会 이며, 그 전제로서 望 闕 禮 가 실시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71) 国 朝 五 禮 儀 巻 3, 嘉 禮, 正 至 会 儀 条 ; 国 朝 五 禮 序 禮 巻 2, 嘉 禮, 排 班 圖, 勤 政 殿 正 至 会 百 官 之 圖 72)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對 明 遥 拝 儀 禮 > ) 上 以 卯 時 爲 迎 詔, 而 至 午 時, 天 使 韓 世 能 陳 三 謨 奉 詔 勑, 而 至 慕 華 館, 上 率 百 官, 行 迎 拜 禮, 即 五 拜 三 叩 頭 也, 百 官 從 下 先 行,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1일 계미조) 74)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1일 계미조 75) 早 朝, 上 乃 出, 率 百 官, 詣 太 平 館, 設 翌 日 宴, 行 九 爵, 上 再 行 酒 而 止, 日 暮 雪 止, 還 宮, ( 中 略 ) 天 使 以 初 七 日 冬 至, 行 望 闕 禮 後, 發 行 云, 天 使 明 日 將 謁 聖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2일 갑신조). 76) 天 使 到 成 均 館, ( 中 略 ) 又 衆 議 冬 至 望 闕 禮, 或 疑 上 與 天 使 同 行 一 處, 希 春 以 爲, 不 當 同 處 爲 之 云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3일 을유조).

20 6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날 명 사신은 경복궁 경회루를 관람하고 근정전 연회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선조는 먼저 宗 系 를 개정하여 惡 名 을 申 雪 하는 奏 請 使, 즉 宗 系 辨 誣 奏 請 使 파견을 타 진했는데, 명 사신은 지금의 萬 曆 帝 는 총명하여, 만일 명에 주청사를 파견하면 허가하 실 것이다 라고 회답했다. 중종 13년에 재연된 한중 간의 일대 외교분쟁인 宗 系 辨 誣 문 제 77) 는 선조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해결을 보지 못했으므로, 조선 정부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은 외교 교섭을 직접 진행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조는 한성 체제 예정기간을 연장하고 동짓날 望 闕 禮 를 마친 다음날 귀국하는 게 어떻 겠냐고 제안했는데, 명 사신도 이를 받아들였다. 78) 선조가 명 사신을 붙잡았던 것은 그 저 외교적인 발언이 아니라 宗 系 辨 誣 을 둘러싼 외교 교섭에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명사 韓 世 能 은 동지 다음날 8일에 열린 太 平 館 에서의 上 馬 宴, 9일의 慕 華 館 餞 宴 이라는 공식행사를 마치고 선조와 종실, 그리고 문무백관이 전송하는 가운데 귀국길에 올랐다. 79) 宗 系 辨 誣 문제는 후일 선조 22년에 해결을 보지만, 그때 宣 祖 가 中 朝 의 明 은 우리 조선을 内 服 (= 帝 居 의 域 )과 마찬가지로 본다 고 말할 만큼 80) 조선 전기 의 한중관계는 긴밀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明 의 이처럼 긴밀한 관계 때문에 明 은 壬 辰 倭 乱 에 참전하게 되는 것이다. 81) 77) 大 明 会 典 朝 貢 条 에 李 仁 任 과 太 祖 李 成 桂 父 子 가 4명의 高 麗 国 王 을 살해하고 政 権 을 奪 取 했 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中 宗 13년에 발각되었다. 이후 조선정부는 그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 는 使 節 을 여러 차례 明 에 파견했다. 末 松 保 和, 전게서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對 明 関 係 >의 < 第 十 二 章 宗 系 弁 誣 の 発 端 > ; 桑 野 栄 治, < 朝 鮮 版 正 徳 大 明 会 典 の 成 立 とその 現 存 - 朝 鮮 前 期 對 明 外 交 交 渉 との 関 連 から> 朝 鮮 文 化 研 究 ( 東 京 大 學 文 學 部 朝 鮮 文 化 研 究 室 紀 要 ) 제5호 ; 朴 成 柱, <조선전기 朝 明 관계에서의 宗 系 문제> 慶 州 史 学 第 22 輯 ( 慶 州 ) ; 桑 野 栄 治,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宗 系 弁 誣 問 題 の 再 燃 >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제25호 ; 同, < 朝 鮮 中 宗 20 年 代 の 対 明 外 交 交 渉 - 嘉 靖 会 典 編 纂 の 情 報 収 集 をめぐって> 東 洋 史 研 究 第 67 巻 제3호 ; 同, < 朝 鮮 中 宗 30 年 代 における 対 明 外 交 交 渉 - 宗 系 弁 誣 問 題 をめぐって> 久 留 米 大 学 文 学 部 紀 要 제26호 78) 다만, 明 使 가 동지의 望 闕 禮 를 실시했던 장소는 불명이다. 동지 전날의 실록 기사에는 政 院 啓 曰, 明 日, 天 使 望 闕 禮 處, 時 未 定, 何 以 爲 之, 取 稟, 傳 曰, 大 臣 禮 官 命 招 議 啓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6일 무자조)라고 하는데, 대신과 禮 官 의 협의 결과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79)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8일 9일조. 80) 傳 曰, 我 國 宗 系 昭 雪, 大 明 會 典 一 冊, 則 徑 請 頒 給, 是 我 國 莫 大 之 慶, 而 巻 帙 未 成, 終 有 所 未 給, 中 朝 視 我 國 無 異 内 服, 而 獨 於 會 典 以 其 載 中 國 諸 機, 不 爲 頒 給, 是 外 夷 之 也, 尤 爲 未 穩,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23, 22년 2월 4일 신사조). 문제가 된 萬 暦 大 明 会 典 全 帙 은 이 해 11월에 萬 暦 帝 가 宣 祖 에게 頒 賜 했다( 同 書 권23, 22년 11월 22일 병인조). 81) 예를 들면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씨는 明 과 조선의 관계를 이( 明 )를 보호하는 입술( 朝 鮮 )에 비유하고, 冊 封 朝 貢 体 制 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同, <순망치한( 脣 亡 歯 寒 )-명나라가 참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鄭 杜 熙 他 編, 前 掲 書 임진왜란, 수록) 342

2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9 그 후 선조대의 望 闕 禮 실시 상황을 정리한 것이 표 2 이다. 일련번호 1부터 16까 지는 임진왜란 이전, 17부터 34까지는 임진왜란기, 35 이후는 난후의 상황을 의미한다. 이하에서는 선조대에 특징적인 正 朝 冬 至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임진왜란의 국면에 주 목하면서 추적하기로 한다. 2) 國 忌 에 수반하는 朝 賀 禮 의 順 延 조치 임진왜란 이전의 경우 宣 祖 実 録 에 보이는 한 望 闕 禮 실시 상황은 순조롭지 않다. 기상광학적 日 變 이라든가 日 食 등의 天 譴 思 想, 82) 극한 강우 등의 기후조건, 83) 明 宗 妃 인 仁 順 王 后 의 사망에 수반하여 正 朝 동지의 궁중의례는 차츰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 2> ). 더군다나 선조 10년 11월에는 仁 宗 妃 仁 聖 王 后 가 경복궁에서 사망했으며, 84) 그 후 3년 동안은 國 喪 기간인 탓에 명절의 궁중의례가 정지되었다고 판 단된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의 왕조국가 공식기록은 대부분이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결과 광해군(재위 1608~23년) 때 편찬된 宣 祖 実 録 에는 모두 61개월분(약 5년간) 에 이르는 기록이 빠져 있다. 85) 때문에 望 闕 禮 를 비롯하여 궁중의례에 관한 기록이 빠졌 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선조 14년 正 朝 望 闕 禮 가 약식인 権 停 禮 ( 權 停 例 라고도 한다)로 거 행되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정월 2일이 明 宗 妃 인 仁 順 王 后 의 기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록을 보자. 82) 政 院, 以 日 變 (= 前 日,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한다 는 이상 현상을 관측) 請 停 元 朝 望 闕 禮 及 初 九 日 文 昭 殿 大 祭,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7, 6년 12월 29일 을해조), 日 有 食 之 ( 同 書 권23, 22년 정월 초하루 기유조). 日 變 은 중대한 凶 象 이며, 日 食 또한 위정자가 덕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廃 朝 ( 輟 朝 )되었다. 渡 邊 敏 夫, 日 本 朝 鮮 中 國 日 食 月 食 寶 典 ( 雄 山 閣 出 版 ) 280 ; 田 村 専 之 助, 李 朝 鮮 気 象 学 史 研 究 ( 東 洋 気 象 学 史 論 叢 Ⅰ) ( 三 島 科 学 史 研 究 所 ) 114~115 83) 左 右 相 詣 闕 啓 曰, 日 候 極 寒, 自 上 冒 曉 擧 動, 有 妨 保 攝 未 安, 明 日 望 闕 禮 請 命 停, 本 朝 賀 禮 幷 爲 權 停,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8, 7년 11월 기해 29일 조), 以 庭 濕, 停 望 闕 禮 ( 宣 祖 実 録 권18, 17년 정월 1일 기묘조). 84) 宣 祖 実 録 권11, 10년 11월 29일 신사조. 璿 源 系 譜 紀 略 ( 震 檀 学 会 編, 韓 国 史 ( 年 表 ) ( 乙 酉 文 化 社, 서울) 수록) 璿 源 世 系, 仁 宗 妃. 85) 末 松 保 和, < 宣 祖 実 録 解 説 > 李 朝 実 録 제30책 ( 學 習 院 東 洋 文 化 研 究 所 ) 1 ; 申 奭 鎬 < 凡 例 > 朝 鮮 王 朝 実 録 제21책 ( 國 史 編 纂 委 員 会, 과천) 3~4

22 7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望 闕 禮 權 停, 以 明 日 乃 仁 順 王 后 忌 辰, 今 日 行 舞 蹈 盛 禮 未 安, 或 以 爲 退 行 爲 當, 或 以 爲 爲 上 國 之 禮, 不 可 退 行, 命 大 臣 及 正 二 品 以 上 會 議 于 闕 庭, 定 爲 是 日 行 之, 本 國 賀 禮 則 退 行 於 初 三 日, 永 爲 恒 式, ( 宣 祖 実 録 권15, 14년 정월 1일 병인조) 仁 順 王 后 는 6년 전인 선조 8년 정월 2일에 창경궁 通 明 殿 에서 사망했다. 86) 명절인 正 朝 라고는 해도 王 母 의 忌 日 에 앞서 가무음곡을 즐기며 성대한 축하행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정부 안에서는 正 朝 望 闕 禮 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 혹은 上 國 (=종주 국 명)의 예 를 경솔하게 연기하면 안 된다는 의견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선조는 대신 및 정2품 이상의 고급관료에게 궁궐 뜰에서 의논하도록 하명했다. 그 결과 上 國 의 禮 인 望 闕 禮 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正 朝 에서 거행하고, 본국 조선의 朝 賀 禮 는 정월 3일로 연기하며, 이후 오래도록 恒 式 ( 恒 例 )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이 해 정월 3일의 실 록 기사에는 以 權 停 禮 行 正 朝 賀, ( 宣 祖 実 録 권15, 14년 정월 3일 무진조) 라고 되어 있으며, 正 朝 를 축하하는 朝 賀 禮 는 仁 順 王 后 의 기일 다음날에 権 停 禮 로 시행 하고 있다. 그 후, 예를 들어서 <표 2> 11 14에서 표시한 대로 선조 17년 正 朝 와 21년 正 朝 의 朝 賀 禮 는 정월 3일에 거행했으며, 87) 선조 14년 正 朝 에서 결정했던 朝 賀 禮 의 順 延 이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는 거의 정례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번잡한 의례를 반복했던 것은 조선국왕 뿐만은 아니다. 일찍이 黄 仁 宇 씨는 朝 廷 의 정치는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그 요점은 의례와 人 事 의 둘이다 라고 갈파했는데, 尊 卑 의 등급을 體 現 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의례의 정치적 중요성을 환기하였 다. 宣 祖 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萬 暦 帝 는 각종 의례를 숙지한 군주로 평가받지만, 나중 에 매월 여러 차례 실시되는 이른 아침의 조회도 廃 朝 로서 쉬는 날이 많아졌으며, 제사 의례의 측면에서도 직접 임석하는 일 없이 관료를 대리로 파견하는 등 의례의 간략화가 진행되는 것도 지적되고 있다. 88) 86) 宣 祖 実 録 권9, 8년 정월 2일 임인조. 璿 源 系 譜 紀 略 璿 源 世 系, 明 宗 妃. 87) 以 權 停 禮 行 賀 禮, 以 初 二 日 仁 順 王 后 國 忌, 故 退 行 正 朝 賀 禮 也 ( 宣 祖 実 録 권18, 17년 정월 3일 신사조), < 行 正 朝 賀 禮 > (동서 권22, 21년 정월 3일 정해조). 88) 黄 仁 宇 ( 稲 畑 耕 一 郎 他 訳 ), 萬 暦 十 五 年 - 一 五 八 七 < 文 明 >の 悲 劇 ( 東 方 書 店 ) <Ⅰ 万 暦 帝 > 6~16

2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임진왜란기의 望 闕 禮 1)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宣 祖 25년(1592)4월 13일( 日 本 暦 12일), 小 西 行 長 宗 義 智 등의 軍 勢 가 釜 山 에 상륙하 면서 壬 辰 倭 乱 이 발발했다. 조선왕조의 공식기록에는 일본군 침공의 기술로서 倭 寇 至, 先 是, 日 本 賊 酋 平 秀 吉 爲 關 白 ( 割 註 略 ) 并 呑 諸 國, 殘 暴 日 甚, 常 以 天 朝 不 許 朝 貢 爲 憤, 嘗 遣 僧 玄 蘇 等 乞 假 途 犯 遼, 我 國 以 大 義 拒 之 甚 峻, 賊 遂 傾 國 出 師, 以 玄 蘇 平 行 長 平 淸 正 平 義 智 等 爲 將, 大 擧 入 寇,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26, 25년 4월 13일 임인조) 라고 적었으며, 宣 祖 実 録 에는 豊 臣 秀 吉 이 関 白 이 되어 국내를 통일했음에도 불구 하고 天 朝 明 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분개하였다 고 되어 있다. 작년 정월에 通 信 使 黄 允 吉 副 使 金 誠 一 書 状 官 許 筬 일행의 귀국에 수반하여 日 本 回 禮 使 로서 正 使 柳 川 調 信 副 使 景 轍 玄 蘇 가 来 朝 했는데, 당시의 対 馬 島 主 宗 義 智 등에 의한 전쟁 회피 대책, 즉 対 明 通 貢 을 위한 假 途 入 明 ( 假 道 入 明 이라고도 한다)교섭이 実 録 기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89) 주지하다시피 나중에 明 軍 은 秀 吉 과 함께 博 多 聖 福 寺 승려 景 轍 玄 蘇 의 首 級 에 최고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秀 吉 을 日 本 国 王 에 책봉할 때는 景 轍 玄 蘇 에게 日 本 国 本 光 禅 師 칭호를 特 賜 하게 된다. 90) 좌우간 일본군 침공이 조선왕조에게는 空 前 絶 後 의 倭 寇 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4월 29일에 忠 清 道 忠 州 의 敗 報 에 접하자 宣 祖 는 庶 出 의 次 子 인 光 海 君 을 王 世 子 로 冊 立 하고(뒷날 宣 祖 25년 6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分 朝 ), 조 선정부에서는 宣 祖 의 去 邠 論 ( 播 遷 論 )과 諸 臣 의 漢 城 固 守 論 이 대립하는 와중에 遼 東 内 附 論 ( 逃 亡 論 ) 者 이기도 한 宣 祖 는 漢 城 탈출을 결의하고 다음날 平 壌 으로 향했다. 91) 임진왜란기에 있어서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이전의 상황과 비교한 경우, <표 2>에 표시한대로 그 차이가 확연하다. 선조 25년 4월부터 전후 7년 동안 선조는 正 朝 동지 89) 中 村 栄 孝, < 壬 辰 倭 乱 の 発 端 と 日 本 の 假 道 入 明 交 渉 > 朝 鮮 学 報 제70집, 97~103 90) 長 正 統, < 景 轍 玄 蘇 について- 外 交 僧 の 出 自 と 法 系 > 朝 鮮 学 報 제29집, 136~137 91) 宣 祖 修 正 実 録 권26, 25년 4월 29일 그믐조. 孫 鍾 聲, < 壬 辰 倭 乱 時 分 朝 에 관한 小 考 > 渓 村 閔 丙 河 教 授 停 年 紀 念 史 学 論 叢 ( 刊 行 委 員 会, 서울) 294~296 ; 同, < 壬 辰 倭 乱 時 対 明 外 交 - 請 兵 外 交 를 중심으로> 国 史 館 論 叢 제14집 ( 果 川 ) 172~174 ; 北 島 万 次, < 壬 辰 倭 乱 期 の 朝 鮮 と 日 本 > 荒 野 泰 典 他 編,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Ⅱ 外 交 と 戦 争 )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133~134 ; 同,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吉 川 弘 文 館 ) 42~44

24 7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그리고 聖 節 의 望 闕 禮 를 거의 매년 충실하게 시행하고 있다(<표 2> 17~34). 이 중에서 명절이 아닌 날에 望 闕 禮 를 시행한 사례가 보인다. 다음의 실록 기사를 보자. 寅 時, 上 幸 淸 溪 館, 率 百 官 耆 老 軍 民, 御 吉 服 行 望 闕 禮, 以 謝 皇 恩, 禮 畢, 反 素 服 還 宮, 以 克 復 京 城 告 于 宗 廟 社 稷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2일 을묘조) 선조 26년 5월 2일 오전 4시 무렵에 선조는 清 渓 館 으로 행차하여 문무백관 기로 군 민을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表 2> 19). 선조 26년 3월부터 선조는 평안도 肅 川 府 에서 남하하여 永 柔 縣 (별호는 清 渓 )을 行 宮 으로 삼았으며, 92) 의례의 무대가 된 清 渓 館 은 永 柔 縣 읍내에 있던 객사이다. 93) 望 闕 禮 를 실시한 이유는 皇 恩, 즉 대명황제의 은 혜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 은혜란 경성 수복, 즉 왕도 한성의 탈환을 의미한다. 이해 4월 중순에 明 의 遊 擊 將 軍 沈 惟 敬 과 小 西 行 長 사이에서 日 明 화의교섭이 성립하자 일본 군은 한성에서 철수했다. 94) 일본 측의 생각으로는 명과 조선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으로 한성에서 철군했던 것이지만, 95) 조선 국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명군 덕분에 한성이 탈환된 것이었다. 화의교섭을 의문시하는 明 정부에서는 社 稷 (국가)를 상실한 宣 祖 의 책임을 추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国 命 을 맡길만한 光 海 君 에게 譲 位 를 권고하는 王 位 交 替 論 까지 나온 것도 사실이다. 96) 경성 수복 에 대한 시선은 일본 조 92) 宣 祖 実 録 권36, 26년 3월 13일 무진조. 임진왜란의 개전으로 한성을 포기했던 선조가 이듬해 인 선조 26년에 평안도 의주에서 한성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족적은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90 ; 李 烱 錫, 壬 辰 戦 亂 史 - 文 禄 慶 長 の 役 ( 中 巻 ) ( 東 洋 圖 書 出 版 ) < 第 二 篇 第 八 章 第 一 節 概 況 > 166~167 참조. 93) 朝 鮮 後 期 地 方 地 圖 평안도편 상(서울대학교규장각, 2002년 12월) <25. 永 柔 縣 地 圖 > 참조. 94)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74~175 ; 石 原 道 博, 文 禄 慶 長 の 役 ( 塙 書 房 ) ~185 ; 李 烱 錫, 전게서 < 第 二 篇 第 八 章 第 一 節 概 況 > 153~154 ; 北 島 万 次, 전게 < 壬 辰 倭 乱 期 の 朝 鮮 と 日 本 > 151 ; 金 文 子, < 豊 臣 政 権 期 の 日 明 和 議 交 渉 と 朝 鮮 > お 茶 の 水 史 学 第 37 号, 35~36 95)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79~271 ; 中 野 等, 秀 吉 の 軍 令 と 大 陸 侵 攻 ( 吉 川 弘 文 館 ) <Ⅲ 戦 局 の 転 換 > 184~186 96) 小 野 和 子, 明 季 党 社 考 - 東 林 党 と 復 社 ( 同 朋 舎 出 版 ) < 第 二 章 第 二 節 明 日 和 平 交 渉 をめ ぐる 政 争 > 122~123 ; 韓 明 基,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 歴 史 批 評 社 ) <제1부 제1장 명군 참전과 정치적 영향> 60~61 ; 同, <임진왜란 시기 決 戦 여부를 둘러싼 朝 明 갈등> 鄭 玉 子 他, 조선시대 문화사(하)-시대정신과 인간의 대응 ( 一 志 社, 서울) 67. 明 정부 내부의 강 화문제를 둘러싼 정책결정 과정은 岡 野 昌 子, <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 中 国 > 中 山 八 郎 教 授 頌 寿 記 念 明 清 史 論 叢 ( 燎 原 書 店 ) 148~154 외에 三 木 聰, < 万 暦 封 倭 考 ( 一 )- 万 暦 二 十 二 年 五 月 の < 封 貢 > 中 止 をめぐって> 北 海 道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제109호 ; 同, < 万 暦

2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73 선 明 의 동아시아 3국에 있어서 각기 입장을 달리한다.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를 실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宣 祖 이 며, 4월 하순에 선조는 승정원을 통하여 예조에 그 조치를 하명하였다. 97) 이 해 정월에 李 如 松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지원군에 의하여 평양 탈환이 성공했지만, 98) 그때 謝 恩 使 파견이 늦어진 탓에 兵 部 尚 書 石 星 에게 비난을 들었던 일이 있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이 번에는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禮 曹 는 우선 5월 1일에 백관을 거느리고 초하루의 哭 禮 를 거행했으며, 다음날에 望 闕 禮 를 실시하는 것이 좋겠 다고 회답하였다. 99) 확실히 조선 국왕은 즉시 望 闕 禮 를 거행하여 명에게 감사해야 하지 만, 禮 曹 는 宣 靖 陵 의 변, 즉 宣 陵 (성종과 그 繼 妃 貞 顯 王 后 의 능)과 靖 陵 ( 中 宗 의 능)이 일본군에게 침탈당한 사건 100) 에 대한 哭 禮 를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시 대의 형법으로 도입된 大 明 律 刑 律 에 따르면, 무릇 모반이란 도모하여 社 稷 을 위 태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역은 도모하여 宗 廟 山 陵 및 궁궐을 훼손하는 것을 말한다 고 되어 있으며, 조선 왕릉의 도굴 파괴는 쿠데타에 필적하는 大 罪 로서 陵 遲 (8토막으로 자름, 또는 車 裂 )한 뒤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 101) 게다가 禮 曹 는 望 闕 禮 를 거행할 때 원래의 의식에서 춤과 노래를 삭제할 것을 선조에게 요청하였다. 102) 宣 靖 陵 의 변 이라 封 倭 考 ( 二 )- 万 暦 二 十 四 年 五 月 の 九 卿 科 道 会 議 をめぐって> 同 제113호에 상세하다. 97) 上 敎 政 院 曰, 京 城 收 復, 即 時 似 當 率 群 臣, 行 望 闕 禮 謝 皇 恩, 而 該 曹 似 無 處 置 議 處, 且 平 壤 收 復, 不 即 謝 恩, 天 將 累 以 爲 言, 至 於 石 尚 書 (= 石 星 ) 亦 以 爲 非 云, 今 者 謝 恩 使 似 當 趁 發, 並 言 于 禮 曹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8일 임자조). 98) 1개월 뒤인 宣 祖 26년 2월에 비변사는 李 如 松 을 위하여 顕 彰 碑 를 세우고 生 祠 에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나중에 平 壌 에서는 李 如 松 과 石 星 을 함께 제사지내는 武 烈 祠 가 완성된다. 中 村 栄 孝, < 朝 鮮 の 慕 明 思 想 と 大 報 壇 > 天 理 大 学 学 報 제78집, 197 ; 桑 野 栄 治, < 朝 鮮 後 期 における 国 家 祭 祀 儀 禮 の 変 動 - 壬 辰 倭 乱 直 後 の 朝 鮮 と 明 > 久 留 米 大 学 文 学 部 紀 要 제23호, 35~36 99) 禮 曹 啓 曰, 望 闕 禮 所 當 即 時 擧 行, 而 自 上 方 遭 罔 極 之 變, 成 服 之 前, 行 禮 未 安, 初 一 日, 自 上 率 百 官, 行 朔 日 哭 禮, 自 初 二 日 行 之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8일 임자조). 100) 李 烱 錫, 전게서 < 第 三 篇 第 十 一 章 第 二 節 交 渉 の 停 頓 > 418~419. 壬 辰 倭 乱 뒤의 日 朝 국교회 복 때 이 王 陵 盗 掘 사건의 범인 인도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점에 관해서는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下 ) ( 吉 川 弘 文 館 ) < 三 江 戸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264~266 ; 三 宅 英 利, 近 世 日 朝 関 係 史 の 研 究 ( 文 献 出 版 ) < 第 二 篇 第 一 章 幕 藩 体 制 確 立 期 の 通 信 使 > 158~161 외 에 孫 承 喆, 전게서 <제3장 임란 직후 중화적 교린체제의 부활> ; 李 啓 煌, 文 祿 慶 長 の 役 と 東 アジア ( 臨 川 書 店 ) < 第 五 章 和 好 通 好 関 係 の 成 立 > 242~247 참조. 101) 大 明 律 巻 18, 刑 律, 盗 賊, 謀 反 大 逆 条.. 물론 이 규정의 연원은 唐 律 까지 소급한다. 花 村 美 樹 < 高 麗 律 > 京 城 帝 国 大 学 法 学 会 編, 朝 鮮 社 会 法 制 史 研 究 ( 論 集 第 9 冊 ) ( 岩 波 書 店 ) 57. 朝 鮮 의 陵 遅 刑 에 관해서는 당장은 앤더스 칼슨(Anders Karlsson), < 千 金 の 子 は 市 に 死 せず 世 紀 朝 鮮 時 代 における 死 刑 と 梟 首 > 冨 谷 至 編, 東 アジアの 死 刑 ( 京 都 大 学 出 版 会 ) 109~115 참조.

26 7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는 국난을 당하여 화려한 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望 闕 禮 는 上 國 을 위한 의례이므로 춤과 노래는 당연한 것이며, 다만 사죄를 드릴 때에는 五 拜 三 叩 頭 의 예로써 대처한다고 선조는 결정을 내렸다. 춤과 노래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황제 의 은혜에 대한 더없는 환희를 나타냄과 동시에, 황제에 대한 신하로서의 복종을 표현하 는 身 體 儀 禮 였다. 103) 선조는 5월 1일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의 뜰에 모여서 통곡했다. 104) 4월 하순에 宣 陵 의 변 을 안 이래 선조는 禮 曹 의 진언에 따라 이처럼 四 拜 가 아닌 会 哭 의례를 이 미 세 번이나 지내고 있었다. 105) 그런데 그날 중에 禮 曹 는 宣 陵 의 변 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라는 종실 順 寧 君 李 景 倹 의 장계를 이유로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望 闕 禮 를 중지하 자고 선조에게 청원했다. 106) 이에 대하여 선조는 望 闕 禮 를 올려 사은하는 것은 皇 上 을 위한 일 이라며 일정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선조가 들은 바에 의하면, 군주의 은혜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상중이라도 사은해야 할 일이 있으면 궁궐 밖에서 상복을 벗고 의례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하여 禮 曹 가 대신들과 다시 협의한 결과 선조의 의향을 존중하여 다음날 5월 2일의 望 闕 禮 를 예정대로 거행하자는 의견에 찬성 했다. 이때 선조는 望 闕 禮 의 구체적인 거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구체적 방법이란 지금 한성에 있는 노인 어린이와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문무백관 행렬의 끝에 서고, 백관과 마찬가지로 拜 禮 와 叩 頭 禮 를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일반 백성들도 황제의 은혜를 알고 크게 감격할 것이라고 선조는 생각하였다. 선조의 의중을 안 禮 曹 는 曠 世 의 盛 典, 요컨대 세상에 둘도 없는 성대한 儀 禮 라고 칭송했고, 대신들 또한 이에 102) 禮 曹 啓 曰, 初 二 日 望 闕 禮 儀 註, 減 去 舞 蹈 一 節, 上 敎 曰, 爲 上 國 陳 賀, 則 似 當 有 舞 蹈 之 節, 只 於 陳 謝, 則 似 當 行 五 拜 三 叩 頭 之 禮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9일 계축조). 103) 渡 邊 信 一 郎, 天 空 の 玉 座 - 中 國 古 代 帝 國 の 朝 政 と 儀 禮 ( 柏 書 房 ), 한국어판은 문정희 임대희 역, 天 空 의 玉 座 - 中 國 古 代 帝 國 의 朝 政 과 儀 禮 ( 新 書 苑, 서울) 170~ ) 上 率 百 官, 會 哭 于 闕 庭 之 内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105) 禮 曹 啓 曰, 宣 靖 陵 之 變, 前 日 則 變 服 擧 哀, 行 四 拜 禮 矣, 群 議 拜 禮 未 穩 云, 自 上 率 百 官 哭 盡 哀, 連 三 日 朝 哭, 内 殿 亦 當 如 是,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4일 무진조). 세 번의 會 哭 儀 禮 는 同 書 권37, 26년 4월 25일 26일 29일조. 106) 禮 曹 啓 曰, 即 見 順 寧 君 景 儉 状 啓, 宣 陵 之 變 尤 極 慘 痛, 今 日 自 上 率 百 官 哭 臨, 明 日 望 闕 禮 亦 姑 停, ( 中 略 ) 上 曰, 哭 臨 事, 更 與 大 臣 商 確 以 啓, 謝 恩 一 節, 則 爲 皇 上 事, 聞 中 朝 之 人, 則 初 喪 如 有 謝 恩 之 事, 脱 衰 於 闕 門 外, 成 禮 而 出 云, 蓋 以 君 恩 爲 重 也, 謝 恩 漸 晩, 予 意 雖 哭 臨, 明 日 謝 恩 似 不 可 退, 禮 曹 啓 曰, 更 議 于 大 臣, 則 當 初 聞 變, 已 行 三 日 哭 禮, 今 又 哭 臨 似 爲 未 穩 云, 來 初 二 日 謝 恩 事, 請 依 上 敎 行 之, 敎 政 院 曰, 明 日 謝 恩 時, 此 處 老 少 及 凡 來 此 之 人, 於 百 官 班 列 後 行 退 立, 使 之 同 行 拜 禮 叩 頭, 則 是 率 臣 民 謝 皇 恩, 而 臣 民 亦 知 皇 恩 感 激 之 至, 此 意 預 爲 曉 諭 行 禮, 禮 曹 回 啓 曰, 致 謝 皇 恩, 一 如 上 敎, 實 是 曠 世 盛 典, 大 臣 之 意 亦 如 此,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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