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영의 공감의 정치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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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기영의 공감의 정치산책 안기영

2 소개글 공감의 정치산책 지금 우리는 극단의 갈등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념의 갈등, 지역의 갈등, 세대의 갈등 등 많은 갈등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갈등해결의 밝은 빛은 보이지 않습니 다. 이념은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지역갈등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패권중의에 불과합니다. 세대갈등은 서로에 대 한 이해 부족에 기인합니다. 이제 갈등 해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갈등과 이념은 결코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공감을 통한 상호 이해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인간, 권력,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책에서는 동서양의 고전읽기를 통해 함께 공감을 만들고 공감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함께 공감의 산책을 떠납시다. 동서양의 고전, 주요 문학작품 읽기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를 되돌아보고 바람직한 내일을 그려보는 것입니 다. 이념,지역, 세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공감이 만들어지길 소망합니다.

3 목차 1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6 2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2 3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19 4 서양과의 접촉 - 조선(하멜)과 일본(아담스)의 서로 다른 길(병자호란: 한명기) 29 5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관) 33 6 속환녀, 도망자 : 병자호란의 참상 - 한명기의 병자호란 38 7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병자호란) 42 8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46 9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공자 -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 최인호 유림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맹자의 조세정책 - 맹자(박경환) 性 善 說 의 논리와 四 端 - 맹자(박경환) 폐족의 멍에를 극복하고 실학을 완성 - 박석무(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다다) 노자의 정치 - 무위이치(노자-김원중) 상실의 시대 - 무라까미 하루끼 왕과 나 - 이덕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지도자 소서노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 하인라인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란드 러셀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노암 촘스키 최장집교수가 안철수를 떠난 이유 공감의 시대 - 제러미 리프킨 대통령과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쉽 차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틀란드 러셀 129

4 26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 조지 레이코프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 최장집 절반의 인민주권 - 샤츠슈나이더 햄릿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형 인간 돈키호테형 인간 오셀로 - 이유가 있어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 정의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초가집 정승 오리( 誤 里 ) 이원익 그는 누구인가? 맹자 - 왕자와 패자, 무항산 무항심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외딴방 - 신경숙 시장은 정의로운가 - 이정전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역사 - 강원택 소명으로서의 정치 - 막스 베버 정치의 발견 - 박상훈 나는 정치인이다 - 올로프 팔메(하수정) 그래도 정치는 덕으로 하는 것이다 - 논어 중국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정치의 황금시대 - 정관의 치 세종대왕과 당태종의 리더쉽의 공통점 인재를 어떻게 구해 쓸 것인가? - 책문(김태완 저) 여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 - 카이사르와 여자(로마인이야기, 시오노나나미) 실업대책은 복지로서 해결될 수 없다 -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총리 장관후보자는 말을 잘 해야 한다 - 세종처럼(박현모 저) 대선공약과 마키아벨리 - 군주론(마키아벨리) 278

5 51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념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 원효사상 연구(박태원 저) 법치와 경제성장 - 경제학(맨큐)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 - 만주족의 청제국(마크 엘리엇 지음, 이훈, 김선민 옮김) 뇌물은 누구나 비밀스럽게 주고받겠지만, 한밤중에 주고받은 것도 아침이면 드러난다(목민심서 율기6조 청심, 정약290 용) 55 사진 모음 56 이념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조정래, 태백산맥) 57 최소한의 상업, 화폐없는 세상 - 성호, 세상을 논하다(강명관) 58 이용후생 - 북학의(박제가) 59 정조대왕 치세어록(안대회) 60 창조적 계급 - 리처드 플로리다 61 아버지, 어머니 형이 서기관 승진했어요 62 속환녀, 정신대 - 역사의 교훈을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태백산맥, 조정래) 63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안도현 시 감상 64 박근혜 대통령과 창조경제4인방-빌 게이츠, 마크 저크버그, 카젠버그, 스티브 잡스 65 1월30일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날 66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에게 67 친환경농산물유통도 창조경제 영역 68 화냥년 - 역사소설 병자호란(유하령) 69 박근혜대통령의 경제혁신 3개년계획이란 무엇인가? 70 제2의 마우나리조트 참사를 막으려면 71 부산외대생 참사, 씨랜드 화재참사 72 3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창조경제 의 활로 - 이혜훈 최고위원 73 안기영의 최근 소식 그리운 황낙주 국회의장님

6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51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임용한 임용한) 거짓 농본주의 조선시대 사람들의 이상사회는 농본사회다. 농본사회의 적은 상공업이다. 심하게 말해서 상공업을 아예 없 애버리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아예 없앨 수가 없는 것이 문제다. 상공업도 농업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업은 어디까지나 해당지역에서 자체조달을 할 수 없는 삶에 꼭 필요한 물품 - 조선 사람들의 기준에서 삶에 꼭 필요한 물건이란 먹는 것, 입는 것, 약, 장례에 필요한 물자, 국가적 기 준에서는 국방이었다 - 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기가 막힌 조건이 하나 더 붙는 다.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상공업이 이윤을 남기거나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6

7 왜 그럴까? 상공업은 농업보다 쉽게 돈을 벌게 해준다. 상인이 돈을 벌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사회가 분화한다. 이건 사회정의에 어긋난다. 백성은 최대한 평등하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한다. 주변 사람 이 모두 가난하고 평등해야 의욕과 욕망도 없고, 고분고분하게 말도 잘 듣는다. 인간은 돈을 벌면 그 다음 권력을 추구한다. 자식을 공부시켜 지방 유지로 만들거나 과거에 도전해서 쓸데없이 경쟁률을 높이고 사 회를 험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회가 평안하고 안정적이 되려면 극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하고는 90퍼센 트 이상으 국민이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조선의 경제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주의적이다. 상업은 돈벌기가 쉽다, 불공평하다, 그러면 농업을 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이대며 상공업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주 정의롭고 설득력있 는 명분을 찾아냈다. 정직하게 땀을 흘리며 물자를 생산하는 농부는 100원을 버는데, 그 물품을 받아 여기 저기 옮겨주는 교활한 인간은 열 배, 백 배의 수익을 올린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사람들은 이익을 따라가 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농업보다 상업이 돈 벌기가 쉽다고 하면 모두가 농업을 버리고 상업 으로 갈 것이다. 농부가 줄어들면 식량생산은 줄어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굶어죽게 된다. 이 교활한 논리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눈으로 봐서는 맞는 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얼치기 지식인뿐 아니라 양 심적인 지식인, 학자들도 이 논리에 넘어갔다. 그만큼 현상적 진리의 힘은 무섭다. 그래서 박제가가 주장 하듯이 외국의 다른 세계를 보아야 한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기 세계에 갇혀 있으면 현상과 자기 경험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조선은 상공업을 증오하고 억제했다. 상공업을 아예 없앨 수는 없으므로 강력하게 국가의 통제 아래 두어 관리했다. 사회는 안정되었지만 국가와 국민은 가난해졌다. 도로, 다리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 도 없고, 기술을 개발하거나 좀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는 노력도 실종되었다. 박제가는 이 위장된 농본주의를 공격했다. 진짜 농본사회라고 한다면 농업생산성, 농업기술에 투자하고, 최소한 농업분야에서라도 독보적인 성취를 보여야 한다. 또한 상공업이 농업에 반드시 적대적인 것도 아 니다. 덴마크의 낙농업처럼 상공업이 발달해야 농작물의 판매수익도 좋아지고, 농부도 작물개발과 생산증 대에 더 노력하게 된다. 농업기구만 보아도 중국 양곡기는 1만석을 어렵지 않게 찧어내고, 중국 물레는 한 사람이 하루에 80근의 솜을 뽑는다. 그러나 조선물레는 솜을 하루에 4근 밖에 뽑아내지 못한다. 그 간단한 기구도 사용하지 않고 도리깨질과 타작으로 탈곡을 하니 여러 명이 하루 종일 일해도 10석 밖에 탈곡하지 못하고 쌀에는 돌과 모레가 섞인다. 한편 서양의 그리스나 동양의 중국,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수차를 사용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7

8 했지만, 우리나라는 조선후기까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농사기술도 발달하지 않아 파종하는 곡식은 중국보다 몇배나 많고, 수확하는 곡식은 몇 분의 일에불과하다. 중국의 농업환경이 우리보다 우수 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로 환경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토질과 기후 탓만 한다. 그러면서 농업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조차 않는다. 겨우 한다는 것이 노농에게 물어서 노하우를 찾아낸다는 정도다. 체계적인 연구와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수차, 베틀, 농기구조차 개량하려는 노력이 없어 농기구의 생산성이 중 구보다 10배 이상 뒤처지는 것이 수두룩하다. 과연 이것이 농본사회인가. 이 위선적인 농본정책 덕에 조선 의 농민들은 극빈의 삶을 영위한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백성은 모두 가 아침저녁 먹을 거리조차 없는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 중국의 백성들은 대개가 비단옷을 입고 담 요에서 잠을 자며, 침상이나 탁자를 구비해놓고 산다. 농사를 짓는 자조차도 옷을 벗지 않고 가죽신을 신 으며, 정강이에 전대를 차고 밭에서 소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 시골의 농부들은 한 해에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난 이래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그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기른다. 아이들은 열 살 전후가 될 때까지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벌거숭이로 다닌다. 대부분의 농서는 중국 것을 번역하거나 농부의 경험을 옮겨 적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마저도 제대로 수용 하지 않았다.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8

9 이익 - 늘 부지런하고 검소하려면 항상 가난하고 미천해야 한다?. 이익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대학자이자 실학자다. 그가 쓴 <성호사설>은 박제가와 정약용을 비롯해 18세기 젊고 진보적인, 혹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문제의식이 있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치고 읽고 나서 감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 책에서 이익은 부와 재물의 축적,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 사회와 백성을 가난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두보의 시에서 이르기를, 고귀한 것이 없으면 미천한 것도 슬프지 않고 부유한 자가 없으면 가난한 자도 자족할 것이다. ( 無 貴 賤 不 悲, 武 富 貧 亦 足 ) 라고 했다. 천하가 모두 미천하고 가난하다면 모든 사람이 부지 런하고 검소해질 것이다. (이익, 성호사설 10권 인사문, 백성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하려면) 이익의 논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인간이 행복하게 풍족하게 살려면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은 부유해지면 게을러지고, 사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늘 부지런하고 검소하려면 항상 가난하고 미천해야 한다. 물자가 항상 부족하고, 자신이 천하다 고 생각해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즉, 모두 가난하고 미천한 평등상태가 인간이 가장 부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방법이다. 이런 것을 두고 역설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이익은 사람이 농사에 힘쓰지 않게 만드는 여섯 가지 좀벌레로 종(노비), 과거, 벌열(권세가), 기교(기술), 승려, 게으름뱅이를 꼽았다. 장사꾼은 이 여섯 가지 좀벌레에서는 빠졌지만, 일곱 가지를 골랐다면 분명 들어갔을 것이다. 그나마 상업을 빼준 이유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은 약재나 필수품을 조달해주는 공 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인간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만드는 동인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만드는 동인은 재물욕, 이윤, 자기 삶을 좀더 윤택하 게 만들려는 욕망이다.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의 말처럼 검약은 이윤을 남기기 위한 행 동 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끊임없는 부의 축적과 성장을 추구한다. 하지만 농업사회에서 근로 의욕을 자 극하는 동인은 좀더 나은 삶, 이윤, 이익이 아니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너뿐 아니라 전 인류가 굶 어 죽을 수도 있다. 는 공포였다. 이런 관념으로 세상을 보니 욕망과 이윤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게 된다.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9

10 소비는 미덕이다. 박제가는 조선사회에 만연한 검약과 극빈이 인간을 춤추게 한다 는 정의를 한마디로 부정한다. 중국은 사실 사치로 망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검소한 데도 쇠퇴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많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학의 내편, 안장> 이 비수같은 한마디로 박제가는 수백 년을 석권해온 빈곤의 경제학을 통타했다. 있는 것을 절약해서 극 빈 상태로 살려고 하지 말고 생산력을 높여라 생산이 늘면 부가 축적되어 구매력일 늘어난다. 판매량과 이윤이 커지면, 기술이 발달해서 제품은 더욱 좋아지고 물자가 풍부해지니 물품 가격은 도리어 낮아진다.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여공이 없으므로 그릇이 삐똘어지든 말든 개의치 않으므로,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서 나라에 장인과 가마와 철공소가 없고, 기술도 없어졌다...., 그러니 사농공상 모두가 가난해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다(북학의, 내편, 안장) 이 우물 비유는 박제가의 글 중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이다. 이 비유를 통해 그는 소비가 미덕이며,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회의 악이며, 망국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 치품 생산도 옹호한다. 사치는 미덕이다. 사람들은 지금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 그 밖의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쓸모없는 물 건을 사용함으로써 쓸모 있는 물건을 통하게 하지 아니하면 쓸모 있는 물건도 일부 지역에만 존재하게 되 어 유통하지 못하고 한구석에서만 사용하게 되어 전체적으로는 모자라게 되기 쉽다. 즉 쓸모없는 것으로 쓸모 있는 것을 돕게 하는 것이다.(북학의, 내편, 안장) 사치품이란 기능적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쓸데 없는 물건이고,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서민의 분노와 위화 감만 더하는 위험한 물건이다. 현대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마 90퍼센트는 넘지 않을까. 그러나 박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10

11 제가는 이 쓸데없음 이 사실은 엄청난 쓸모 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유통과 부의 순환이 다. 이 주장은 경제사상뿐 아니라 지성사적 기준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제가의 지성이 현상적 진리 와 감성적 사회학 이란 차단막을 뚫고 사회 내면의 진리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기 때문 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도 사치는 부가 윗목에서 노는 것이고, 복지를 위한 세금이나 기부만이 아래쪽으로 순환 시키는 제도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통과 소비도 부의 분배에 세금이나 기분 못지 않 게 큰 기여를 한다. 같은 금액이라도 개인금고에서 정부나 자선단체의 금고로 갔다가 빈민에게 전달되는 돈보다 시장에서 사치품이든 무엇이든 유통구조 속에서 돌아다니는 돈이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한다. 어려운 경제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99퍼센트의 인간은 구세군의 자선냄비보다는 꽃, 보석, 비싼 옷, 인테리어에 훨씬 쉽게 지갑을 연다. 특히 부자의 지갑을 여는 데는 사치품처럼 좋은 것이 없다. 인간이 진 짜로 삶에 꼭 필요한 것만 적정량 구매하는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면 우리 주변의 상점과 직업의 90퍼센트 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박제가가 사치와 소비를 옹호했다고 해서, 부자들아, 마음껏 착취하고 마음껏 돈을 써라 라고 외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껏 도학자들이 가르쳐온 대로 인간의 기초적 욕망이 사회발전을 저지하고, 가난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악덕이 아니라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원동력임을 지적하려던 것뿐이다. 박제가의 생각은 21세기에나 적용할 수있는 이론이라고 평가한 학자들도 있지만, 사치와 욕망의 경제학을 긍정하고 인정하기란 21세기인 지금도 어렵다.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 임용한 11

12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안대회, 박 제가의 북학의) :59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 차지만 길어 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 바린다(시장과 우물) ) - 박제가, 북학의 연경의 아홉 개 성문 안팎으로 뻗은 수십 리 거리에는 관아와 아주 작은 골목을 빼놓고는 대체로 길을 끼 고 양옆으로 상점이 늘어서 있다. 시골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점포가 늘어서서 마치 옷에 가선을 두른 것과 같다. 상점은 제각기 점포 이름과 파는 물건 이름을 가로세로로 간판을 세워 걸어 두었으므로 금빛 글자가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큰길에는 따로 판잣집을 더 설치하여 붉게 칠해 놓았고, 곡목 입구나 문 앞에는 제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2

13 각기 화표( 華 表 옛날 궁전이나 능 따위의 큰 건축물 앞에 아름답게 조각한 돌기둥)나 목궐 木 闕 을 세워 놓 았다. 점포 안에는 늘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인파와 같다. 또 동악묘 東 岳 廟 와 융복사 隆 福 寺 등지에서는 특별한 날을 정해 시장을 여는데 진기한 보물과 괴상한 물건들이 매우 많다. 사농공상중 상이 열의 셋의 비중 우리나라 사람들은 번화한 중국 시장을 처음 보고서는 오로지 말단의 이익만을 숭상한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무릇 상인은 사농공상 士 農 工 商 네 부류 백성의 하나이지만 그 하나가 나머지 세 부류 백성을 소통시키므로 열에 셋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입다면 그 나머지는 모조리 쓸모 없는 물건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쓸모없는 물건을 활용하여 쓸모있는 물건을 유통시키고 거래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쓸모있다는 물건은 대 부분 한곳에 묶여서 유통되지 않거나 그것만이 홀로 쓰여서 고갈되기 쉽다. 따라서 옛날의 성왕 聖 王 께서는 보석과 화폐 따위의 물건을 만들어 덜 긴요한 물건으로 더 긴요한 물건의 상대가 되도록 하셨고, 쓸모없는 물건으로 쓸모있는 물건을 사도록 하셨다. 게다가 배와 수레를 만드셔서 험준하고 외진 곳까지도 물건을 유통시키셨다. 그렇게 하고도 천 리 만 리 먼 곳에 물건이 이르지 못할까 봐 염려하셨다. 이렇듯이 백성들에게 폭넓게 베풀어 주셨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방이 수천 리라서 인구가 적지 않고 갖추어지지 않은 물산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과 물에서 얻어지는 이로운 물건을 전부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경제를 윤택하게 하는 도 道 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날마다 쓰는 물건과 할 일을 팽개쳐 둔 채 대책을 강구하지도 않는다. 그러고서 중국의 주택, 수레와 말, 색채와 비단이 화려한 것을 보고서는 대뜸 사치가 너무 심하다! 라고 말해 버 린다.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한 탓에 쇠퇴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물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는 것을 검소함이라고 일컫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진주를 캐는 집이 없고 시장에는 산호 珊 瑚 의 물건 값이 매겨져 있지 않다. 금이나 은을 가지고 점포에 들 어가서는 떡과 엿을 사먹지 못한다. 이런 우리 풍속이 정녕 검소함을 좋아하여 그렇겠는가? 단지 재물을 사용할 방법을 모르는 것에 불과하다. 재물을 사용할 방법을 모르기에 재물을 만들어 낼 방법을 모르고, 재물을 만들어 낼 방법을 모르기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 간다.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3

14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 차지만 길어 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 바린다. 재물은 비유하자면 우물이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 차지만 길어 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 바린 다. 마찬가지로 비단 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그 결과로 여성의 기술이 피 폐해졌다. 조잡한 그릇을 트집 잡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기교를 숭상하지 않기에 나라에는 공장 工 匠 과 도 공, 풀무장이가 할 일이 사라졌고, 그 결과 기술이 사라졌다. 나아가 농업은 황폐해져 농사짓는 방법이 형 편없고, 상업을 박대하므로 상업 자체가 실종되었다.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이 너나 할 것 없이 다 곤궁 하게 살기에 서로를 구제할 길이 없다. 나라 안에 보물이 있어도 강토 안에서는 용납되지 않으므로 다른 나라로 흘러간다. 남들은 날마다 부유해지건만 우리는 날마다 가난해지니 이것은 자연스러운 추세다. 지금 종각이 있는 종로 네 거리는 연달아 있는 시장 점포의 거리가 1리 里 가 채 안된다. 중국에서는 내가 거쳐 간 시골 마을의 점포가 대개 몇 리에 걸쳐 있었다. 또 거기에 운송되는 물건의 번성함과 품목의 다양 함이 모두 온 나라의 물건으로도 미치지 못한다. 점포 한 개가 우리나라보다 더 부유한 것이 아니라 물자 가 유통되느냐 유통되지 못하느냐에 따른 결과이다. 채 판서 蔡 判 書 -이름은 濟 恭 으로 연행 당시 진주사 陳 奏 使 의 부사 副 使 였다. -깨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종루 鐘 樓 의 북쪽 거리는 조금 비좁다. 길을 확장하여 거리를 나란하게 정비하고 시장 사람들이 제 각기 상호를 달고 영남산 면포 판매 남원산 부채와 종이 판매 강삼 江 蔘 나삼 羅 蔘 판매 라는 글자를 대서특필하여 써 붙여서 흥인문 興 仁 門 에서 숭례문 崇 禮 門 까지 제도를 완전히 바꾼다면 대단히 통 쾌하지 않겠는가? 중국은 우물이 아무리 커도 반드시 석판이나 나무판에 구멍을 뚫어 덮는데 입구를 작게 만들어 우물에 빠 지거나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도르래를 설치하고 두레박 두 개를 매달아 줄 하나는 왼편으로, 하나는 오른편으로 움직인다. 하나가 위로 올라가면 하나는 아래로 내려가게 만들었으니 보통 물을 푸는 것보다 곱절이나 많은 양을 푼다.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4

15 박제가 朴 齊 家 (1 750 ~1 80 5)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 北 學 派 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次 修, 在 先, 修 其, 호는 楚 亭, 정유 貞, 위항도인 葦 杭 道 人 이다. 승지 朴 枰 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778년 사은 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는데, 외국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 기술 을 향상시키고, 통상 무역을 통해 이용후생을 실현할 것을 역설했다. 정조의 庶 孼 許 通 정책에 따라 이덕 무,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기상이 컸고 성격은 굳고 곧았다. 시문은 첨신 尖 新 하며 활달했고, 필세 筆 勢 는 날카롭고 굳세었다. 학문은 개혁적이면서도 실용적이었는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에게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는 [정유집 貞 集 ], [북학의], [ 周 易 解 ] 등이 있다.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5

16 규장각과 검서관 규장각은 정부기관보다는 국왕의 필요에 의해 만든 왕실기관에 가까운 관서였다. 규장각은 국왕이 지은 저작이나 기록, 현판 등을 보존하기 위해 창설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있던 제도지만 조선에서는 채용하지 않다가 숙종이 창설했다. 숙종의 규장각은 규모도 작아서 종부시옆에 붙은 작은 건물에 불과했 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안쪽의 깊숙한 후원인 부용정을 내려다보는 창경궁에서도 제일 풍취 있 고, 아늑한 자리에 규장각을 새로 세웠다. 규장각에는 제학 종1,2품을 책임자로 하고 여러 문신 관료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겸직이었고, 규장각의 실무를 주관하는 관원은 검서관이었다. 검서관의 임무는 규장각에서 정리, 간행하는 문서와 책을 교정하고 필사하는 것이었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귀국한 다음 해인 1779년 3월27일,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마련하고 서얼 중에서 문예가 있 는 사람 4명을 임명했다. 선발된 사람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였다. 이덕무가39세, 박제가는 30 세, 유득공과 서이수는 31세였다. 박제가 연보 1750년 승지 박평( 朴 枰 )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767년 운명적, 역사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는 평생의 벗이자 백동수의 매부인 이덕무( 李 德 懋 )를 만나다.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6

17 1766년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인 이관상( 李 觀 祥 )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 역시 서녀였다. 이순신 장군의 집 안은 조선 최고의 무관 명문가였다. 이관상은 2품관까지 승진했고, 6번이나 절도사를 역임한 명망 있는 무 관이었다. 1777년, 정기 사은사의 사신단에유득공의 작은 아버지 유금이 선발되었다. 유금은 이덕무, 유득공, 박제 가, 이서구의 시를 청나라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서평을 받아 옴. 국내에서 는 공정한 평가도 명성도 기대하기도 힘드니, 외국인 학자에게서 평가를 받아보자는 것이었다. 유금은 이 조원에게 <한객건연집>의 서문을 받음. 1777년 박제가는 정조의 즉위를 기념해서 실시한 증광시에 급제(3등) 1778년 3월 동지사에 박제가와 이덕무를 정사 채제공( 蔡 濟 恭 )의 종사관과 서장관 심염조( 沁 念 租 )의 종사관 으로 임명하여 파견(3월17일). 첫 번째 사행. 1779년3월27일,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이라는 관직을 마련하고 서얼 중에서 문예가 있는 4명을 선발해서 임명했다. 선발된 사람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였다. 이덕무가39세, 박제가는 30세, 유득공과 서 이수는 31세였다. 1786년 검서관 사직서 제출 1789년 검서관으로 다시 복직 1790년 박제가, 열하에서 벌어진 건륭제( 乾 隆 帝 )의 팔순 잔치에 파견된 특별 사신단의 일행이 되어 두 번 째 로 중국에 갔다. 1790년, 박제가는 이 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세 번째 연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친구 이기원이 그와 함께 했다. 1792년 7월 <규장전운> 완성 후 사임. 부여현감 제수 1792년 9월20일, 부여현감으로부임한 지한 달도 되지 않아 향년 38세였던 박제가의 부인 이씨 사망 1792년 문체반정( 文 體 反 正 ) 사건이 발생. 문체반정은 조선사회의 고루함과 경직성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인데, 박제가, 박지원, 이덕무 등 북학파들이 당시에 유행하는 문체를 따르지 않고 고문의 문체, 또는 이해하기 쉬운 구어체의 저속한 문체를 사용했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1793년 1월, 정조는 박제가에게 반성문을 쓰라는 명령을 내린다. 1793년 5월 충청지역 기근, 어사 이조원이 박제가를 탄핵. 파면됨. 1794년 1월에 다시 검서관으로 복직. 1794년 2월 춘당대무과에서 장원. 정3품 오위장 발령. 1796년 영평현령. 1798년 정조가 전국에 구언령을 내리자 <북학의> 내용 중에서 농업부분을 정리한 <지소본북학의> 저술해 서 올렸다.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7

18 1800년 6월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사망 1801년 마지막( 네번째) 사행, 연행사 6월 귀국. 이번에는 유득공과 이희경이 동행했다. 정순왕후 고문 중단. 함경도 종성 유배판결. 1803년 2얼 정순왕후가 박제가으 석방을 명령. 그러나 석방되지 않음 1804년 밀고에 의해 석방되지 않은 것이 정순왕후의 귀에 들어가 의금부 당상관 즉시 파면하고 박제가 고 향으로 돌아옴. 1805년 4월25일, 박제가 향년 56세로 사망. 경기도 광주에 있는 엄현에 묻혔다. 우물은 물을 퍼내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말라버린다(안대회, 박제가의 북학의) 18

19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 연암 박지원(열 하일기, 김문수 편) :48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본받아야만 한다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 - 연암 박지원 7월15일 우리나라 선비들이 북경에 다녀온 이를 만나면 묻는 말이 있다. 자네 이번 길에 제일 장관이 무엇이었 나? 장관 몇 가지 골라 얘기 좀 해주게. 그들은 제각기 보고 느낀 것을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넓디 넓은 요동 천리 들판이 장관이었지. 구요동 백탑이 볼만하더군요. 계문( 薊 門 )의 냇물 낀 숲들이 장 관이었소이다. 노구교, 산해관 망해정, 각산사, 조가패루, 유리창, 동악묘, 북진묘...등 대답이 분분하 여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또 어떤 학식이 높은 선비는 도무지볼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내가 물었다. 어째 아무볼 게 없단 말이 오? 황제가 머리를 깍았고 장( 將 ), 상( 相 )과 대신 모든 관원이 머리를 깍았으며 선비와 서인( 庶 人 )까지 도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니 문장이 있고 박식해도 한 번 머리를 깍으면 곧 되놈이 되는 것이며 되놈이면 그게 짐승인데 우리가 그 짐승에게서 무얼 볼 것이 있단 말입니까? 또 다른 선비는 이렇게 말했다.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19

20 그 산천이 피비린내나는 고장으로 변했고 성인들이 끼친 자취가 묻혀버리자 언어조차 야만의 것을 따르 게 되었으니 무엇을 보겠습니까? 사실 10만 대군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산해관으로 쳐들어가 중 원( 中 原 )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관을 얘기할 수 있겠지요. 이런 말들은 <춘추>를 열심히 읽은 이들의 뜻이다. <춘추>는 중화( 中 華 )를 높이고 이족( 夷 族 )을 낮추어 보 는 사상으로 씌어진 글이다. 그러나 오랑캐의 문제는 오랑캐들에게만 국한 시킬 일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성곽과 건물 그리고 인민들이 예전처럼 있어 정덕( 正 德 ), 이용( 利 用 ), 후생( 厚 生 )의 도구도 예전과 다름없 다. 송나라 성리학의 대가들 즉, 주돈이( 朱 敦 頤 ), 장재( 張 載 ), 정호( 程 顥 ), 정이( 程 頤 ), 주희( 朱 熹 ) 등의 학 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한, 당, 송, 명의 좋은 법률과 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그러니 비록 저들은 오 랑캐일망정 중국이 자기네에게 이로워 길이 누려야 함을 알고 이를 빼앗아 원래 지녔던 것처럼 한다. 대개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 을 본받아야만 한다.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때 물론 중화를 어지럽힌 게 분해 숭배해야 할 중화의 진 실을 배격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가 끼친 법을 모두 배워 우 리나라의 유치한 문화와 풍속을 고쳐야 한다.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 굽기, 풀무질 등으로부터 공업, 상업 에 이르기까지도 배워야 한다.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백성을 이롭게 한 뒤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하게끔 하여 저들의 굳은 갑옷, 날카로운 무기에 매질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볼 만한 장관이 없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나 같은 보잘것 없는 선비가 한마 디 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 고 하겠다. 깨진 기와 조각은 사람들 이 다 버리는 것이지만 민가에서 담을 쌓을 때 그 높이가 어깨를 넘는다면 그것들을 둘씩 둘씩 포개여 뒤 집고 바로 놓고 하여 물결 무늬를 만들 수 있다. 또 넷을 모아 고리처럼, 넷을 등지게 해 엽전 모양으로 만 들면 구멍 난 곳이 영롱하고 안팎이 서로 어리어 저절로 좋은 무늬를 이룬다. 깨진 기와를 버리지 않고 이 렇게 쓰면 세상에 없는 무늬가 된다. 또 집집마다 뜰 앞에 벽돌을 깔지 못할 경우 여러 빛깔의 유리기와 조각과 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 꽃, 나무, 새, 짐승 등의 모양을 깔아 만들면 비 올 때 진구렁이 됨을 막을 수 있다. 그러니 부서진 것을 버리지 않고 천화의 도화( 陶 畵 )를 그려놓은 것이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것이지만 이를 아껴 밭에 내면 거름이며, 말똥을 줍는 삼태기가 늘 뒤를 따르게 된다. 이렇듯 기와 조각이나 똥 무더기가 모두 장관이니 구태여 성지( 城 池 ), 궁궐, 누대, 시포( 市 鋪 ), 사관( 寺 觀 ), 목축 저 광막한 원야( 原 野 )... 이런 것들만 장관은 아닌 것이다.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0

21 차제( 車 制 ) - 수레는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대개 수레는 땅 위를 굴러가게 만든 것이나 물 위를 다니는 배이기도 하고 굴러다니는 방이기도 하다. 나 라에, 백성들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례 周 禮 >에, 임금님의 부( 富 )를 물었을 때 수레게 많고 적은 것으로 대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다. 수레는 비단 싣고 타는 것만 이르는 것 이 아니다. 수레에는 융차( 戎 車 ), 역차( 役 車 ), 수차( 水 車 ), 포차( 砲 車 ) 등이 있고 또 숱한 제도가 있지만 갑 자기 그것을 다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고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내 일찍이 홍대용( 洪 大 容 ), 이광려( 李 匡 呂 )와 함께 수레 제도를 얘기할 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수레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해야만 한다. 궤도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두 바퀴 사이의 일정한 본을 어기지 않음이다. 그렇게 되면 수레가 천이고 만이고 간에 그 바퀴자리는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니 이른바 <중용> 등의 서책에 나오는 거동궤( 車 同 軌 )는 곧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두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1

22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마음대로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 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이 번, 천 리 길에 날마다 숱한 수레를 보았는데 앞 수레와 뒤 수레가 언제나 같은 자국을 따라서 갔다. 그렇 기 때문에 애쓰지 않고도 똑같이 되는 것을 일철( 一 轍 )이라 하고, 뒤에서 앞을 가리켜 전철( 前 轍 )이라 하는 것이다. 성 문턱에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 홈통이 이루어진 것은 <맹자 孟 子 >에서 이른 성문지궤 城 門 之 軌 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수레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바퀴들이 온전히 둥글지 못해 바큇자국이 한 틀에 들 수 없다. 그러니 수레가 없는 것이나 같다.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길이 험해 수레를 쓸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은 것이 아닌가. 만약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된다. 그럼에도 좁은 길, 험한 길만을 탓하고 있다. <중용>에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 서리 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수레가 어떤 먼 곳에도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에도 험한 잔도( 棧 道 ), 양장( 羊 腸 )처럼 위태한 길이 많다. 그러나 수레를 채찍하여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후미 진 먼 곳에도 장사치들이나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러 가는 벼슬아치들의 수레바퀴가 서로 잇대어 거의 자 기 집 뜰 앞을 지나는 것처럼 한다. 또 우렁차게 굉굉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대낮에도 늘 우레치듯 끊이 지 않는다. 중국에 물자가 풍부한데 그것이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수레를 이용한 결과이 다. 여기에서 비근한 예를 하나 든다면 우리 사행이 여러 번거로움을 없애버리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 가 올라타고, 우리의 짐을 싣고 바로 연경에 닿을텐데 무엇을 꺼려 그러지 않았단 말인가. 영남( 嶺 南 ) 아이들이 백하젓을 모르고, 관동( 關 東 )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 西 北 ) 사 람들은 감과 감자( 柑 子 )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한 푼을 하니 이렇게 귀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육진( 六 鎭 )의 마포와 고나서의 명주, 영남, 호남의 닥종이와 해서의 솜과 쇄, 충청 서해안의 생선, 소금 등은 모두 백성 살림살이에서 어 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될 물건들이며 충청도 보은과 청산의 대추나무 천 그루와 황해도 황주, 봉산의 배 나무 천 그루, 한산의 천 이랑 모시와 관동의 벌꿀 천 통은 모두 우리 일상생활에서 서로 바꾸어 써야 하 는 것이지만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은 들었음에도 실지로 보지를 못 했음은 또 어찌된 까닭인가. 그것은 오로지 멀리 운송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백성들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함은, 한마디로 나라 안에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 누가 어째서 수레가 다니지 못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사대부( 士 大 夫 )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2

23 면 그들은 평소에 글을 읽을 때 <주례>는 성인이 지으신 거야 하면서 윤인( 輪 人 ), 여인( 輿 人 ), 거인( 車 人 ), 주인( 人 )을 떠들어댔으나, 그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 등은 전혀 연구하지 않으니 그것은 그 저 글만 읽을 뿐 그로 인해 유익한 점은 하나도 없다. 황제가 수레를 창조하였으므로 헌원씨( 軒 轅 氏 )로 불린 뒤 백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공 교한 손을 거치게 됐고 좋은 제도의 통일도 이루게 되었다. 그러하니 연구의 정미롭고 행하기 간편함이 어 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는 진실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이 되고 나라의 경영에 큰 그릇이 아니겠는가. 밭에 물을 대는 용미차( 龍 尾 車 ), 용골차( 龍 骨 車 ), 옥형차( 玉 衡 車 ), 항승차( 恒 升 車 ) 등이 있고 불을 끄는 홍 흡( 虹 吸 ), 학음( 鶴 飮 ) 등의 제도가 있다. 전쟁에 쓰는 포차( 砲 車 ), 충차( 衝 車 ), 화차( 火 車 ) 등도 있다. 뜻있는 자가잘 연구해 그 제도들을 본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가난병도 얼마쯤은 나을 수 있겠다. 내 가본 불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 우리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할 생각이다. (일신수필) 말을 좋아하고 잘 먹일 줄 아는 자에게 목마행정을 맡겨야 한다. 우리나라의 가난은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되지 못한 까닭이다. 나라 안의 목장이라고 해야 탐라(제주)가 있을 따름인데 그곳 마들은 모두 원세조( 元 世 祖 )가 방목한 종자로 4,5백년을 두고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 았으니 비록 애초에는 용매( 龍 媒 : 준마), 악와( 神 馬 )와 같은 우수한 종자였을지라도, 마침내는 과하( 果 河 ), 관단( 款 段 :조랑말의 이름)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치이다. 이런 과하와 관단을 대궐 지키는 장 수들에게까지 내려주니 이런 느림뱅이 꼬마말을 타고 어찌 적진을 향해 달릴 것인가. 이것이 첫째로 한심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3

24 한 일이다. (중략) 중국에서는 매년 화창한 봄날 풀이 돋을 때 수놈 목에 방울을 달아 내놓아 흘레(교미)를 붙이면 수놈의 임 자는 그 대가로 닷 돈씩 받는다. 그리하여 말이나 노새가 준수한 수놈을 낳으면 또다시 닷돈을 받게 된다. 낳은 새끼가 신통치 못하거나 털빛이 좋지 못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때믄 그 아비되는 말은 반드시 거세 하여 나쁜 종자를 끊어버리는 동시에 종자를 부쩍 크게 하고 길들이기 쉽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는 목장을 감독하는 관리들이 이런 생각을 못하고 덮어놓고 토산 말로만 종자를 받기 때문에 낳으면 낳을 수록 종자는 자꾸만 작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놈들은 똥통이나 나뭇짐에도 견디지 못할 만큼 열덩 한 것이다. 그런 말이 어찌 군사에 이바지 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좋은 종자를 못받은 때문이다. 또 관직에 있는 자가 목망 무식하다 함은 무엇을 두고 이르는 말인가. 벼슬하는 우리 양반들은 허드렛일은 알려고도 않는 버릇들이 있다. 옛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누가 마부에게 말에게 콩을 좀 더 주자는 말 한마디 했다가 사람이 좀스럽다고 이조( 吏 曹 ) 좌랑에게 버림닫는 일까지 있었다. 요즘에도 어떤 학사가 말 을 사랑하고 말을 잘 고르는 실력이 백락( 伯 樂 : 말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주나라 사람)이나 다름없었는 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옛날에 양고기를 잘 굽는 기술이 있어 도위( 都 尉 ) 벼슬까지 올랐더더니만 요 즘 세상에는 말을 잘 다루는 학사가 다 있네 하고 비방했다는 얘기도 나돈다. 한 나라의 정책으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수치로 삼아 하인들의 손에만 맡겨두고 있으니 소위 감목 ( 監 牧 )임에도 목마에 대한 지식은 조금도 없다. 이는 능력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배우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래서 관원들이 목마에 무식하다는 질책이 나오는 것이다. <중략> 참으로 말을 좋아하고 잘 먹일 줄 아는 자를 얻어 목마 행정을 맡긴다면 비록 말 잘 치는 학사라는 놀림은 받을망정 태복( 太 僕 : 목축 담당 고관) 벼슬 감으로서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학유관록 8월14일)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4

25 근대를 일깨운 선각자 연암 박지원 박지원( 朴 趾 源, 1737~1805)은 18세기에 활동한 조선의 실학자이자 문필가로, 자는 중미( 中 美 ) 호는 연암( 燕 巖 )이다. 연암은 영조( 英 祖 ) 13년에 한성 선비 박사유의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양반가인 노론 집안의 반남박씨( 潘 南 朴 氏 )였지만 조부 박필균은 부사 벼슬까지 지낸 바 있으나 워낙 청렴해 재산을 모으지 못했 고, 아버지 박사유는 벼슬을 하지못해 집안이 가난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체계적인 공부를 못했던 연암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전주이씨 집안의 딸과 혼 인을 한 이후에야 그의 영민함과 재주를 알아본 장인 이보천의 지도로 본격적인 글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장인의 동생이자 처숙부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깊이 있는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으며, 처남 이재성과 함께 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관련된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연암은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1765년에 한 번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후 다시는 시 험에 뜻을 두지 않았다. 당쟁으로 얼국져 있던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세도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고래의 전통을 답습하는 유교 학문보다 이용후생( 利 用 厚 生 :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 넉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을 꾀하는 새로운 학문에 열중했으며, 입신양ㅇ명에는 별다른 뜻을 품지 않았다. 또한 정조가 외척을 등용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연암이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 았던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그는 선조의 부마였던 금양위 박미( 朴 彌 )의 5대손이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열세 살 연상인 홍대용을 비롯한 이덕무, 정철조 등과 교류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사상과 서학에 몰두했다. 그러나 풍요로운 정신세계와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했으면서도, 벼슬도 경제적 기반도 없었던 연암의 생 활은 언제나 궁핍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광주로 내려보내고 홀로 지내면서 그는 상황이 닿는 대로 격의 없이 살았다. 사흘간 밥을 굻는가 하면, 사흘 동안 술만 마시기도 했으며, 며칠간 책만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문사들이 찾아오면 시와 문장에 대해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현실의 모 순을 지적하고 사회 개혁을 논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먹을 것 없는 살림에 여종이 도망을 해버리자 행 랑아범이 남의 집 일을 해주고 얻어온 쌀로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손님 오면 차 끓이는 주전자에 밥을 지어 맨바닥에서 먹으면서도 몇 날 며칠간 담소를 즐기고 새로운 학문에 심취했다. 정조 등극 초기, 세도를 휘두르던 홍국영에게 벽파( 僻 派 :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를 무고하여비방한 당파) 로 몰리게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가족들과 함께 황해도 금천 연( 燕 巖 ) 골짜기로 이주했다. 그의 호는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서 연암은 양반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직접 농사를 지으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5

26 며 살았다. 홍국영이 실각하자 연암은 닷 한성으로 돌아왔다. 44세이던 1780년(정조4년), 삼종형인 영조의 부마 금성 위( 金 星 尉 ) 박명원( 朴 明 元 )이 청나라 건륭제 고종( 高 宗 )의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사절로 선발되었고, 박명원 의 권유로 그는 군관의 직함으로 사절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음력 5월25일에 한양을 떠난 사절단은 6월24일에 압록강을 건너 8월1일 북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제가 피서를 위해 열하의 별궁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일행은 서둘러 열하를 향해 길을 떠나 8월11일에 피서산장 의 궁문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황명에 따라 티베트 승려 판첸라마를 예방했다. 사신 일행은 8월15일 열하 를 떠나 20일에 북경에 돌아왔으며, 9월17일 그곳을 출발하여 10월27일에 한양에 도착했고, 이후 박지원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를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다. <열하일기>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연암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열하일기> 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과 문체로 인해 같은 사대부 계층에서도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다. 신진 사대부들에게는 호감을 산 반면, 기존의 사대부들에게는 극도의 반감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의 진보 적인 사상과 파격적인 문체는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기도 했지만, 얼마 후에는 이러한 실용 문체 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커져,문체반정( 文 體 反 正 ) 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연암은 1786년에 종9품에 해당하는 선공감 감역이라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연암학파 이덕무( 李 德 懋 ), 박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6

27 가( 朴 齊 家 ), 유득공( 柳 得 恭 ), 성해응( 成 海 應 ) 등과 연암의 제자인 이서구 등이 규장각에서 세력을 형성하 며 힘을 쓴 덕분이었다. 그 뒤로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제능령을 거쳐 한성부 판관을 역임한 후, 안의 현감, 면천 군수, 양양 부사를 지냈다. 그가 맡은 관직들은 거의 외직이었고 이권이 오가는 벼슬과는 거리 가 멀었으며, 중상주의를 추구했지만 평생 사대부는 물질로써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안된다 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 강직하고 청렴했다. 명예 또한 욕심 내지 않아, 안의에서 현감 의 임기를 마치고 한서응로 돌아와 있을 때, 그의 선정을 치하하기 위해 현민( 縣 民 )들이 송덕비( 頌 德 碑 )를 세우려 하자, 비문을 세운다면 내가 앞장서 그것을 깨버리고 주모자는 벌을 주도록 하겠다 며 강경하 게 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적이었던 정조가 죽고 순조( 純 祖 )가 즉위하면서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로 회귀하자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물러나 있다가 1805년(순조5년) 10월20일에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10년(순종4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 文 度 公 )의 시호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열하일기>, 작품으로는 허생전 민옹전 民 翁 傳 광문자전 廣 文 者 傳 양 반전 김신선전 金 神 仙 傳 역학대도전 易 學 大 盜 傳 봉산학자전 鳳 山 學 者 傳 등이 있으며, 그 의 저술은 모두 <연암집 燕 巖 集 >에 수록되어 있다. 연암의 사상과 문학 연암은 경직되고 고착화된 생각을 싫어하여 사대주의에 얽매인 형식주의와 보수 성향을 거부했으며 실용 적인 이용후생의 학문을 중시했다. 그의 실용주의적 성향은 북학사상을 주창하고 서학( 西 學 : 동학과 반대 되는 개념, 16세기 이후 조선에 전개된 서양의 학문과 종교, 좁은 의미로 천주교를 의미)을 적극적으로 연 구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조선의 정가와 사대부들은 청( 淸 )을 오랑캐로 취급하고 얕보는 풍조가 강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7

28 해 북벌론이 대두되고 있는 때였으나, 연암은 청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 다 명( 明 )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청은 당시 한족( 韓 族 )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한편 서양 문물까지 도입하여, 18세기 즈음에는 찬란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청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해 도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로워진다면 그들의 선진화된 문명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바 로 북학( 北 學 )사상이다. 그는 또한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특히 천문학에 대한 그의 지식과 사유는 중국 학자들도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연암의 사상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토지개혁법인 한전법 限 田 法 을 주장한 것이다. 한전법은 일종 의 토지소유상한제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소유를 금지하고 토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생산을 최대화 하여 보다 고른 분배를 실현하자는 방안이었다. 또한 반상에 따라 인간의 층위를 구분하는 데 반대했다.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계층 구분에 따 른 신분과 상관없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공법의 발달과 유통경제에 적응할 수있는 기업가적 인간을 바 람직한 인간상으로 보았다. 그 자신이 양반이었음에도 유득공, 이서구 등 서자 출신의 인재들과 어울리며 북학파를 이루어 이러한 생각을 실천했다. 이것이 바로 실사구시를 주창하는 실학사상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의 문학작품들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주조를 이루던 복고 풍조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 즉 법고창신( 法 古 創 新 : 옛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을 주장하고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 등에 있어 당대의 현실과 문학을 연결짓는 사실주의 를 주장했다. 그리고 문장이란 누구든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는 것을 가장 기본 적인 원칙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문학작품들은 적절한 비유와 속어적 표현 등을 활용하여 강한 풍자성 을 드러내고 있다. 붕괴되어 가고 있는 조선의 봉건의식과 양반계급의 허세를 꼬집은 양반전 과 허 생전 許 生 傳 호질 虎 叱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허생전 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점으로 제대로 간파한 수작으로 평가받 고 있다.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수레와 목축) - 연암 박지원(열하일기, 김문수 편) 28

29 서양과의 접촉 - 조선(하멜 하멜)과 일본(아담스 아담스)의 서로 다른 길(병자호란: 한 명기) :20 서양과의 접촉(하멜, 아담스)-조선과 일본의 다른 길 조선의 길 소현세자는 청어 끌려간 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북경에서는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 湯 若 望 )과 교유하고 서양의 문물과 과학기술의 조선도입을 타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조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벌을 통해 청에 대한 복수를 표방했던 효종대 이후에는 청에 대한 인식이 더 경직되었다. 경직된 분위기 아래서는 청과의 접촉이나, 청의 간섭을 야기할 수 있는 현안이 생기는 것 자체를 피하게 된다. 경직되고 소극적인 분위기 아래서는 대외인식 자체가 전반적으로 협소해질 수 밖에 없다. 1653년(효종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의 하멜(Hamel) 일행 36명이 표착해왔을 때 조선 정부가 취한 조처는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하멜 일행은 본래 1653년 6월 스페르베르(Sperwer) 호를 타고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 타이완을 경유 하여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는 길이었다. 이들은 같은 해 8월,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표착한다. <하멜표류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조정은 1654년 이들 36명의 진객 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금군 ( 禁 軍 )에 편입시켰다. 그들이 화포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청이 이들의 존재를 눈치챌까 서양과의 접촉 - 조선(하멜)과 일본(아담스)의 서로 다른 길(병자호란: 한명기) 29

30 ( 禁 軍 )에 편입시켰다. 그들이 화포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청이 이들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청 사신이 올 때마다 하멜 일행을 거처에 연금시키거나 남한산성 등지로 이송했 다. 급기야 1655년 일행 가운데 두 사람이 청 사신의 행렬 가운데로 뛰어들어 나가사키 송환 을 호소하 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을 강진( 康 津 ) 등 전라도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린다. 하멜 등은 1666년(현종7년) 9월 조선을 탈출하여 나가사키로 갈 때까지 11년 동안 전라도 일원에 억류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풀을 뽑거나, 멍석을 쩌거나 새끼를 꼬는 등 허드렛일에 사역되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관련 기록들을 보면 하멜 일행은 화포와 조총 등을 만들거나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항해술을지니고 있었고, 동인도 회사의 활동을 비롯한 당시 유럽 세력의 동향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갖 고 있었다.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당시나가사키의 데지마( 出 島 )를 거점으로 벌어지고 있던 일본과 네덜란 드의 교섭 등 일본의 정세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렇게하지못했다. 더욱이 전라감영은 하멜 일행8명의 탈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조정 또한 1666년 11월에야 일 본 측의 지적을 받은 동래부사의 장계를 통해 그들의 탈출 사실을 인지하고 책임 소재를 구명하려고 시도 했다. 일본의 길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착하기 53년 전인 1600년, 리프데(Lifde)호라는 네덜란드 상선 한 척이 큐슈의 분고 ( 豊 後 ) 앞바다에 표착해 온 적이 있다. 본래 이름이 에라스무스 호였던 리프데호는 1598년 동방 무역을 우 해 로테르담에서 출항했던 5척의 선단 가운데 한척이었다. 당시 오사카에 머물면서 리프데 호의 표착 소식 을 보고받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 川 家 康 )는 직접 배를 보내 리프데 호의 승조원들을 불렀다. 이 때 이 에야스를 만난 사람이 영국인 출신의 항해장 윌리암 아담스(W. Adams1564~1620)였다. 포르투갈어 통역을 통해 이루어진 면담에서 이에야스는 아담스에게 네덜란드 선박의 도항 이유와 유럽의 정세에 대해 질문했 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선교사와 상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리프데 호의 표착을 계기로 프로테스탄트교가 일본에 소개되고 자신들의 무역 독점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이에야 스에게 네덜란드 선원들을 처형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아담스 등을 외교 자문역으로 임명하 는 등 우대했다. 특히 아담스는 이에야스를 수시로 면담할 t 있을 정도로 깊은 신임을 얻었다. 아담스 등은 영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을 알선하는가 하면 이에야스 앞에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국제정세를 설명 하기도 했다. 이에야스가 아담스를 총애했던 까닭은 그가 뛰어난 조선( 造 船 )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세계정세에 아주 밝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담스는 12세 때부터 런던 근처의 조선소에서 12년간 근무했 고, 드레이크 함대 소속의 함장으로서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도 참전했던 경력의소유자였다. 1605년, 아담스가 본국으로 귀환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이에야스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오늘날 서양과의 접촉 - 조선(하멜)과 일본(아담스)의 서로 다른 길(병자호란: 한명기) 30

31 요코스카( 橫 須 賀 ) 부근에 해당하는 미우라 三 浦 지역에 250석의 영지를 하사했다. 하실상 영주로 대접해준 것이다. 아담스도 후의에 감격하여 일본에 귀화했고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정착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가 리켜 미우라 안진 三 浦 針 이라 불렀다. 삼포에 영지를 지닌 항해사 라는 뜻이다. 이윽고 아담스는 120 톤 규모의 범선을 건조했는데 일본인들은 얼마 후 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게 된다. 이후 큐슈의 히 라토 平 戶 를 거쳐 나가사키의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의 상관이 들어선다. 리프데 호의 표착과 아담스 등과의 조우, 그리고 그들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통해 일본의 대외인식은 더 확대되고, 서양에 대한 면역력 은 한층 커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서세동점 西 勢 東 漸 이 본격화될 때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1666년 10월, 일본측은 하멜 일행의 처리와 관련하여 조선을 기만하려고 덤볐다. 그들은 하멜 일행이 조선 에 표류해 왔음에도 자신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 조선이 그들을 억류했던 것 등을 문제 삼으면서 아 란타 阿 蘭 陀 (네덜란드)는 일본의 속군 屬 郡 이며 그들은 공물을 갖고 일본으로 오는 길이었다 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사실네덜란드와 일본 관계의 실상은 조선이 하멜 일행에게 좀 더 유연하게 적극적으로 접근 하여 탐문했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도 처음 에는 하멜 일행을 금군에 편입시키는 등 나름대로 활동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조선은 하멜 일행의 존재와 그 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말미암아 혹시라도 청의 개입과 간섭을 부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청사가 올 때 마다 그들을 연금하다가 끝내는 전라도로 유배시켜 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멜 일행이 항해술, 화포술 등의 기예를 갖고 있었고, 당시의 세계정세에 밝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이 조선에 머물렀던 14년은 조 선의 당국자들이 바깥 세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매우 소중한 시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멜의 14 년 은 아담스의 20 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요건데 병자호란의 항복을 계기로 청 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이 굳어지면서 청은 물론, 청 이외의 타자 他 者 를 알려는 관심과 의지 또한 함께 시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조선의 충격과 피로감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뜻한다. 그 충격과 피로감에서 벗어나 청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청을 배워야 한다 박지원는 치자 治 者 는 백성과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배워야 한다.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국의 법제를 모조리 배워 우리의 고루하고 거친 풍습부터 바꿔야 한 다. 박지원이 보기에는 청이 오랑캐가 아니었다. 입만 열면 청을 치자고 외치면서도 현실에서는 수레조 차 변변히 사용하자 못한 채 낙후되어 있던 조선이야말로 진짜 오랑캐 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청을 배워야 한다 는 북학 北 學 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청을 정벌해야 한다 는 북벌 北 伐 이 등장한 뒤로부터 북학으로 전환하기 까지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그것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서양과의 접촉 - 조선(하멜)과 일본(아담스)의 서로 다른 길(병자호란: 한명기) 31

32 서양과의 접촉 - 조선(하멜)과 일본(아담스)의 서로 다른 길(병자호란: 한명기) 32

33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 관) :58 성호의 사회사상 벌열사회 ( 閥 閱 社 會 ) 조선사회가 신분사회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신분간의 구분이 엄격했던 것은 아니 었다. 천민은 일단 제외되지만 양인( 良 人 )이상이면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양반과 양인의 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에 양반을 무어라 규정해놓은 것도, 양인 은 과거를 칠 수 없다고 쥬정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중에서 서얼( 庶 孼 )을 차별하기 시작 하고, 양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상민이 차차 벼슬길에서 제외되면서 양반사족과 구분되고 말았 다. 성호는 그런 사정을 尙. 丘 潘 三 姓 란 글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성호는 벌열을 숭상하는 풍습 은 국초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풍속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 도 그렇게 인도했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한다. 이런 사례들은 대개 임진왜란 이전의 일이다. 성호는 족 성을 숭상하지 않음 不 尙 族 姓 에서 임진왜란 이후 집안배경을 고려하지 않던 사회분위기가 확연히 달라 졌다고 말한다. 中 古 이전에는 족성을 숭상하지 않았다. 각각 재능과 학문으로 출세하였기에 미천한 출신 중에도 현달한 사람이 있었다. 근래에는 대관( 臺 官 )들이 탄핵하고 공격하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문벌과 지체가 한미한 것 을 최상의 제목으로 삼을 뿐이고, 사람의 재증과 도덕성이 어떠한지는 따지지 않는다. 모를 일이다. 맑은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관) 33

34 조정의 빛나는 벼슬자리는 죄다 벌열가 자제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란 말인가?( 不 尙 族 姓 제12권 인사문) 다만 문벌만 보고 재능과 도덕성은 살피지 않으니, 이런 법은 빨리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열두사람(본인, 어머니, 처의 4조) 중에 조그만 흠이 있다해도, 어찌 문벌을 가지고 저 유능함을 덮어버릴 수 있단 말인 가?( 尙. 丘 潘 三 姓 제10권 인사문) 지금 우리나라 풍습은 종족의 부류를 구별하여 노비와 천민은 백세대가 지나도 영화를 누일 길이 없고, 높 은 벼슬아치집안 사람은바보천치도 무리를 지어 벼슬에 오르니, 아아, 아달픈 일이다.( 造 明 제3권 천지문) 서얼 ( 庶 孼 ), 똥구덩이 속의 사람들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문제 庶 孼 防 限 라는 글에서 李 袤 (이무 1600~1684)의 상소를 길에 인용한다. 상 소의 내용은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무는 서얼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며 자신을 성취 할 길을 열어주지 않고 차별하기에 서얼 중에는 과연 인격이 비뚤어진 사람이 많은데 이것이야말로 사람 을 똥구덩이에 밀어 넣고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격 이라 말한다. 서얼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양반 남성이 양민의 여성을 첩으로 취해 자식을 낳으면 서자( 庶 子 )가 된다. 만약 천민 여성을 취해 자식을 낳으 면 얼자( 子 )가 된다. 아울러 서얼이다. 조선시대 신분제도는 자식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규정해 놓았다. 선조, 인조때 개혁시도가 있었고, 정조의 경우 여러 차례 서얼 차별을 금지하려 했으나 차별은 끝 끝내 철폐되지 않았다. 악법은 한번 만들어지나면, 그 악법을 통해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는 이상 쉽게 철 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관) 34

35 서얼차별 문제를 보면 사대부 체제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알 수 있다. 서얼문제는 기본적으로 양반-남성 의 성욕문제에서 출발한다. 양반들은 정처( 正 妻 )에 대해서는 그 여성이 오직 자신에게만 성적으로 종속되 는 존재일 것을 요구했다. 그 요구는 사후에도 성적 종속성이 실천되기를 바랄 정도로 강했으니, 이른바 수절이란 남성의 성적 욕망이 만들어내고 여성에게 강요된 윤리다. 자신의 생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남성 은 여성에게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희생하여 성적 종속성을 천명할 것을 요구했으니 그것을 실천한 여성 이 다름아닌 열녀다. 양반- 남성은 일단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할 장치로서 정처를 확보하고, 첩( 妾 )을 제 도적으로 존치시킴으로써 잉여의 성욕을 풀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소유물인 노비 여성을 기생으 로 존치시켜 성욕을 충족했다. (기생을 차지하여 첩으로 삼기도 했다)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식은 사회에서 버림받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다. 이게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아비가 잉여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벌인 성행위가 천대받는 인간을 쏟아내다니, 그 자식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매매되는 사람들 - 노비 성호는 노비제가 폐지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사회를 완전히 재구성할 혁명이 아니고서는 불가 능한 일이었다. 성호의 개혁안은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백성에게 노비의 매매를 금하자 禁 民 賣 奴 (제12권 인사문)에서 그는 노비법을 없애지 못한다면 매매를 허락하지 말자고 말한다. 매매가 금 지되면 첫째, 노비가 남아도는 집안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노비를 부려먹는 데도 한계가 있을테니 노비도 한가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둘째, 노비의 매매를 금하면 백성을 노비로 속여 팔아먹는 일이 사라 진다. 즉, 새로운 노비의 공급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셋째, 노비를 매매하더라도 일정한 기간만 부리도록 하고 자손까지 노비로 삼지 않게 된다. 이 방법은 결국 노비를 없앨 것이다. 이것이 성호의 생각이었다. 성호는 黨 長 과 里 長 (제12권 인사문)에서 조선이란 나라가 허약한 것도 노비 때문이고, 백성이 가난한 것도 노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노비가 된 사람이 무슨 흥이 나서 농사를 열심히 짓겠는가. 노비가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관) 35

36 사회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일이 무어 있겠는가. 노비가 우들거리는 사회는 저주받은 사 회이고 발전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여성을 길들이는 방법 노비에 대해서 한없는 동정을 표했던 성호. 그렇다면 그는 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부 인에게는 바깥 일이 없다 夫 人 無 外 事 (제13권 인사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는 안에서 자리를 바로잡고, 남자는 밖에서 자리를 바로잡는다. 남녀가 자기 자리를 잡는 것이 천지 의 대의이다. 사가( 私 家 )의 도는 나라 정치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부인에게는 바깥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부 인의 처지임에도 바깥 일에 간섭을 하면 반드시 집안이 망한다. 하물며 나라의 일이겠는가( 夫 人 無 外 事 제13권 인사문) 성호는 또 여성에게는 공부를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글을 읽고 뜻을 풀이하는 것은 남자의 일이다. 부인을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 때에 맞추어 준비해야 할 물건을 준비하고,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 아야 한다. 어느 겨를에 책을 읽을 수 있겟는가. 나는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고 예의에 대해 말하는 부인을 많이 보았으나, 그들이 그것을 꼭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고 도리리 폐해만 한없이 많았다. 우리나라 풍속은 중국과 같지 않다. 무릇 문자의 공부란 힘을 쏟지 않으면 불가능한 법이다. 애당초 부인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 小 學 ]과 [ 內 訓 ] 등의 책도 모두 남자의 임무에 속한다. 부인은 조용히 궁리하며 그 책 에 실린 말을 알아듣고 일에 따라 실천하거나 가르침을 받을 뿐이다. 규방의 부인이 만약 누에치고 길쌈하 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책을 집어든다면 이 어찌 옳은 일이랴?( 婦 女 之 敎 제16권 인사문) 이런 성호니 여성의 수절은 당연히 찬미의 대상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 東 國 美 俗 (제15권 인사문)에서 중국도 따라오지 못할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은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키고 개가하지 않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관) 36

37 는 것 인바, 그것은 국법이 개가한 자손의 자손에게는 청직( 淸 職 )의 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서얼의 차별에 대해 분노하던 성호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리 생각이 트이고 진보적인 성호라 할 지라도 그가 조선의 남자였던 이상 남성 중심주의에서 한 차도 벗어나지 않았던 사정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성호의 사회사상 - 벌열사회, 노비제도판, 서얼제도 비판, 여성관(강명관) 37

38 속환녀, 도망자 : 병자호란의 참상 - 한명기의 병자호란 :34 속환녀, 도망자 병자호란의 참상- 한명기의 병자호란 병자호란의 참상을 다시 배우자 최근에 한명기의 병자호란을 읽으면서 병자호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새삼 깨달았다. 역 사가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서 선조들의 주변정세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문제점과 참혹했던 실상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병자호란을 배우면서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릅을 꿇고 항복했고 많은 조선인들 이 청에 끌려갔다는 정도로만 배웠다. 정치인의 무능이 어떻게 비극을 초래하는가 속환녀, 도망자 : 병자호란의 참상 - 한명기의 병자호란 38

39 정치인의 무능이 어떻게 비극을 초래하는가 병자호란은 정치지도자가 무능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조와 조정이 주변 정세를 알지 못했고 잘못 대응함으로써 참혹한 결과를 빚었다. 명이 무너지고 청이 새롭게 중원을 장악하 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내정치의 무능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임 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운 것에 대한 보은이라는 명분에 집착하다 전쟁을 초래하였다. 전쟁을 위한 병 력, 군수지원, 훈련, 지휘관의 능력 등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는 백성들은 생각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강화도로 도망갈 궁리만 했다. 청은 인조의 생각을 알고 있었고 명에서 귀순해왔던 공유덕, 경중명 등 수군 경험이 풍부한 장군들을 가지고 있 었으며 조선은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도 못가보고 남한산성에 갇히게 되었 다. 1 월30 일 태양도 빛을 잃었다 홍타이지는 진시( 辰 時 오전7시~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을 울리며 삼전도를 향해 한간 을 건넜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 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인 배천의식을 마치고 홍타 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 三 拜 九 叩 頭 禮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다)를 행했다. 홍타이지가 신시( 申 時 오후3시~5시) 무렵 자리를 뜬 뒤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 앉아 그들의 지시를 기다렸다가 해질 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고가 내려졌다.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 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청군에 잡혀있던 수많은 포로들은 인조를 향해 울면서 절규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는 백성들의 절류를 뒤로 한 채 도성으로 향했고 밤 10시 무렵에야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인조의 생애에서 가 장 길고도 처참했던 하루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에 끌려갔나 전쟁이 끝난 뒤, 최명길은 명나라 도독 진홍범( 陳 洪 範 )에게 보낸 자문( 咨 文 )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명으로 추정했다. 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다. 조선이 청의 침략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을 명 측에 강조하기 위해 피로인의 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나만갑이 <병자록>에 서 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가는 것이 하루종일 지속되었다 거나 뒤 시기 심양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사람 이라고 서술했던 사실 을 고려하면 피로인의 숫자가 50만명은 아닐지라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개연성은 높아 보인다. 청은 어 떤 배경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피로인들을 끌고갔을까? 청은 일찍이 후금 시절 이전부터 부족한 인력과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피로인들을 획득하는데 골몰했다. 1630년대까지 많이 추산해도 150만이 채 안 되 속환녀, 도망자 : 병자호란의 참상 - 한명기의 병자호란 39

40 던 만주족이 1억5천만 가까운 명의 한족들을 상대하려 할 때 인구부족은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조선에서 사로잡은 피로인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하는 무역상품 이 되었다. 청으로 끌 려간 피로인들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은 속환( 贖 還 )이 거의 유일했다. 속환이란 청 측 주인에게 몸값을 치 르고 피로인들을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 피로인들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인간 시장 이 서게 되었고, 몸 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피로인들은 상품 이 되었다. 贖 還 女, 歸 還 女 性 졸지에 청군 장수의 첩으로 전락하여 심양에 도착한 여성 피로인들에게는 뜻밖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 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군 장수의 만주족 본처들이 자행했던 투기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본처들 가운데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조선에서 온 여성 피로인들을 참혹하게 학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 여인들 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는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도있었다. 이 같은 사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 었다. 1637년 4월, 홍타이지는 도르곤 등 신료들을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공개했다. 조선에서 데려온 여성 들에게 계속 그런 짓을 자행하는 본처들이 있을 경우, 남편이 죽었을 때 순사( 殉 死 )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홍타이지까지 직접 나서서 본처들의 투기와 악행을 근절하라고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여성 피로인 들에게 닥쳤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보통 환향녀( 還 鄕 女 ) 로 불렀던 것으로 알고 있 지만 <인조실록>을 비롯한 당시 기록 어디에도 환향녀 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사대부 집안의 부 녀자들은 오랑캐에 실절( 失 節 )한 여자 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 일부 신료들은 속 환되어 온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 며 이혼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출가했던 딸 이 속환녀 가 되어 돌아온 친정 부모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최명길은 속환녀의 이혼을 섣불 리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혼을 허락할 경우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가 되 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실절했다 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고 강조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 속환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 피로( 被 擄 ) 로 말미암은 슬픔과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속환녀, 도망자 : 병자호란의 참상 - 한명기의 병자호란 40

41 로 말미암은 슬픔과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도망자, 주회인 주회인들은 심양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또 어렵사리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고통과 불안 속에서 마음을 졸일 수 밖에 없었다. 탈출과정에서 청 측 관원들에게 붙잡히거나 굻어 죽을 가능성이 높았고, 조선 귀환 이후에는 자신들을 쇄환하려는 조선관원들의 체포를 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선 도 망이나 속환을 통해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도망자들은 낮에는 산 속 등지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을 이용하여 이동했다. 당장 이동하는 도중에 굶어 죽을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다. 또 산 속에서 맹수를 만나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렵사리 심양부터 진강( 鎭 江 오늘날의 단둥)에 이르는 만주지역을 통과하더라도, 압록강변에 이르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변방의 관리들이 청의 힐 책을 우려하여 주회인들의 도강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입국이 좌절된 주회인들 가운데 강물에 뛰어 들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1642년 2월, 정언 하진( 河 )은 창성과 삭주 등 압록강 줄 기의 위아래에 백골들이 널려 있고, 그 사실을 보고 들은 사람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들이 없 다 며 참혹한 실상을 증언한 바 있다. 주회인들 가운데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도중에 붙잡히거나, 조선으 로의 입국이 좌절되어 도로 심양 등지로 귀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같은 주회인들에게는 가혹한 처벌 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양장계 瀋 陽 狀 啓 >에 보면 탈출에 실패하여 도로 심양으로 귀환했던 조선 피로인 들이 발뒤꿈치를 잘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피로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 이었다.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생령들의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전쟁을 다시 성찰해야 할 필 요성을 새삼 절감한다. 속환녀, 도망자 : 병자호란의 참상 - 한명기의 병자호란 41

42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병자호란) :43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한명기-병자호란) 임진왜란 후의 격동하는 동아시아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는 더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가 명에 도전하 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참전으로 쇠망의 기미가 더 뚜렷해진다. 노대국 명은 계속 수세로 내몰린 다. 위기에 처한 명은 조선을 이용하여 만주를 견제하려는 以 夷 制 夷 策 을 구사한다. 임진왜란 때문에 망 해가던 조선을 다시 살렸다 는 은혜 를 내세워 만주와의 싸움에 조선을 계속 끌여들이려 했다. 명을 위해 만주와 싸울 것인가? 만주가 뜨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중립 을 지킬 것인가? 양단의 선택 앞에서 조선은 분열되었다. 1626년의 인조반정은 전자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망해가 던 명 을 선택한 직후인 1627년 만주는 조선을 침략했다. 丁 卯 胡 亂 이었다.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 은 만주와 형제관계 를 맺어 위기를 봉합한다.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병자호란) 42

43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명과 만주, 두 나라 모두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황제의 나 라 명도 잘 섬기고 형의 나라 만주와도 잘 지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명과 만주가 계속 싸웠기 때문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끼어 있는 조선은 결국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정묘 호란 이후 명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고 더욱 강해진 만주는 조선으로부터 명과 똑같은 대접을 받고 싶 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1636년, 만주는 마침내 제국 이 되기로 결심한다. 나라 이름도 대청 大 淸 으로 바꾸었다. 이윽고 조선이 명을 의식하여 자신을 제국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자 다시 침략했다. 병자호란이 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은 척화파와 주화파간의 논쟁이 격렬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조선은 청 의 침략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병력의 수, 군사들의 훈련 상태와 전투 경험, 군량 등 군수 지 원 역량, 지휘관의 작전 능력과 책임감 등 전챙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가운데 어느 것 하나 청보다 나은 점 이 없었다. 거기에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명 또한 조선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당쟁으로 국론은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병자호란) 43

44 분열(동림당과 엄당)되어 있었으며, 청군의 침략에 수시로 유린되면서 자국을 지키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 다. 서로 싸우던 강국 사이에 끼인 채 자위 능력마저 없던 조선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내정과 외교 앙면에 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그렇지 못했다. 잃어버린 1 0 년 정묘호란을 겪은 1627년부터 병자호란을 다시 겪는 1636년까지는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결과적 으로 잃어버린 10년 이 되고 말았다. 왕권 보위 에만 골몰하며 안팎의 대국을 볼 줄 몰랐던 인조, 과거 정권의 실정을 한껏 성토했지만 집권 이후 권력과 부에 취해 버렸던 반정공신들, 명분과 의리를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것을 지킬 대안은 제시핳지 못했던 언관들, 이들 집권층의 한계와 아집, 불협화음 속에서 내정과 외교는 임기응변과 즉흥적인 미봉책으로 점철되었다. 준비없이 맞이한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인조는 오랑캐 추장 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수많 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쳤다. 포로로 잡혀 끌려간 백성도 수십만이었다. 끌려가는 도중 죽고, 굶어죽고, 맞 아죽었다.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발뒤꿈치를 잘리기도 했다. 수많은 여성 포로들이 청군의 첩으로 전락했 다. 첩이 된 여성들 중에는 청군 본처로부터 끓는 물세례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몸값을 치르고 돌아왔던 여성 포로들은 고국에서 다시 버림받았다.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병자호란) 44

45 병자호란은 G2시대의 비망록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바탕으로 정치, 군사적으로도 미국에 버금가는 존재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G2)은 한 반도와 동아시의 미래를 좌우할 태풍의 눈이다. 일본은 보수화와 군국주의 부활로 가고 있다. 센카쿠 열도 ( 尖 閣 列 島 ) 댜오이다오( 釣 魚 島 )의 영유권을 놓고 벌이고 있는 양국 간의 첨예한 갈등은 동아시아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 래 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시대의 비망록 이다. 무능한 지도자가 얼마나 나라를 망치고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병자호란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다. G2시대 병자호란을 다시 읽자 (한명기 병자호란) 45

46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07 성호, 세상을 논하다 星 湖 와 성호사설 星 湖 李 瀷 (1681~1763)의 집안은 驪 州 李 氏 로 조선후기의 알아주는 명문가다. 이익의 집안이 명문가로 도약 한 것은 그의 증조부대부터다. 고조부 李 友 仁 은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에서 이상홍, 이상의, 이 상관, 이상신 등 네 사람이 청요직( 淸 要 職 )에 올랐고, 특히 李 尙 毅 는 요직을 두루 거쳐 좌찬성까지 지냈다. 이익은 바로 이상의의 증손자다.이후 이익의 가문은 남인 명문가로 부상하며 정국의 중심에 선다. 하지만 가문의 聲 譽 는 이익의 대와 와서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당쟁 때문이었다. 이익의 집안은 속종 초기에 벌어 진 남인, 서인 사이의 치열한 당쟁에서 남인이 실각하면서 관계에서 배제되기 시작한다. 성호의 아버지 李 夏 鎭 은 1680년 2월 自 黨 의 허목과 윤휴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주 목사로 좌천된다. 이어 3월에 남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46

47 인이 정계에서 축출되는 정변( 庚 申 大 黜 陟, 1680)이 일어나자 이하진은 파직되고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 다가 그곳에서 숨진다(1682). 성호는 아버지의 유배지 운산에서 태어났다.(1681)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 권을 잡자, 성호의 가문은 과거의 성예를 잃고 말았다. 성호는 중형( 仲 兄 ) 이잠( 李 潛 )에게서 글을 배웠다. 벼슬을 하고자 하여 25세때(1705) 증광시에 응시했지만, 회시( 會 試 )에서 이름을 등록하는 절차인 녹명( 錄 名 )에 문제가 있다하여 시험을 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 이 성호가 과거를 포기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그 이듬해인 1706년에 일어났다. 1706년9월17일 이잠은 성균관 집사의 신분으로 동궁(뒤의 경종)을 보호할 것, 그리고 남인을 축출하고 노론을 조정에 불러들인 갑술옥사를 이면에서 조정한 김춘택( 金 春 澤 ) 등을 죽일 것을 요 청하였다. 노론정권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이잠은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한다. 이잠의 죽음 이후 성호는 과거를 단념한다. 그의 집안 역시 그 이후 과거를 통한 출세와는 관계가 없었다. 아들 이맹휴( 李 孟 休 )는 1742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이잠의 조카라는 꼬리표 때문에 출세는 불가능하였고 1751년에 죽고 말았다. 그 의 집안이 눈에 뜨이는 벼슬을 한 것은 정조때 채제공( 蔡 濟 恭 )을 영수로 한 일부 남인이 정계의 한 축을 담당할 때 이가환( 李 家 煥 )이 등용된 것이 유일하다 하겠다.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47

48 사대부로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성호가 파고든 것은 학문이었다. 그는 1727년 자기 집안의 선산과 농토 가 있는 경기도 안산 첨성리에 정착하였다. 성호는 이곳에서 1763년 세상을 뜰때까지 36년 동안 오직 학문 에 침잠하였다. 그렇게 일구어낸 성호의 학문은 참으로 넓고 깊었다. 문학, 성리학, 예학, 경학, 경세학, 자연과학 등 당시 학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에 걸친 깊은 연찬( 硏 鑽 )의 결과로서 그의 학문 은 정말 장관이라 할 것이다. 성호의 학문은 무엇보다 자신의 가문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중 이익 을 필두로 하여 이맹휴, 이용휴, 이병휴, 이가환, 이삼환은 모두 18세기 문인학자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 한 가문이 이렇게 많은 문인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한 것도 드문 일이다. 그것은 이익이라는 학문적 거목의 영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학문은 집안의 이가환과 안정복, 권철신 등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최종적 으로는 정약용에게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성호사설 ( 星 湖 僿 說 ) 성호사설이란 책을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한문으로 쓰인데다가 모두 3007편이란 방대한 분량 때문이 다. 이 3007편의 글은 천지문( 天 地 門 ), 만물문( 萬 物 門 ), 인사문( 人 事 門 ), 경사문( 經 史 門 ), 시문문( 詩 文 門 ) 다 섯 부분으로 나뉜다. 글이 다루고 있는 제재와 주제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분류만 이루어졌을 뿐 각 편이 일정한 체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즉 [성호사설]의 글 전체가 특정한 주제를 놓고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제자 안정복은 중복되는 것을 가려내고 보다 중요한 1332편을 추려 [성호사설유선]으로 편집했다. 성호사설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학문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저작이다. 그는유학자로서 조 선후기의 사회모순을 직시했던 사람이고, 한편으로 양반이 원래 의지했던 유학(성리학)이란 원칙에 따라 충실히 작동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성호의 생명존중사상 생명존중사상은 성호의 사유에서도 당연히 중추를 이룬다. 다음은 고기 먹는 일 食 肉 이란 글의 일부 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동류다. 다만 초목은 지각이 없어 혈육을 가진 동물과 구별되기에 그것 을 취하여 살아갈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날짐승, 길질승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의 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일하다. 어떻게 차마 해칠 수가 있단 말인가? 동물 중에서 사람을 해치는 동물은 이치상 마땅히 잡아 죽일 수 있다. 또 가축들은 우리 사람에 의해 길러지니, 사람에게 그 몸을 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산에서, 물에서 절로 나고 절로 자란 것들이 모두 사냥과 고기잡이의 대 상이 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따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48

49 라서 당연히 사람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에 정자( 程 子 )는 이렇게 답했다. 좋다. 이는 사람 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를 위해 생겨났다는 말이냐? 정자의 변론이 또한 분명하다. (고기 먹는일 食 肉 제12권 인사문) 성호는 무조건적인 근본주의자는 아니어서 노인의 봉양, 제사, 손님 접대, 병의 치료에 고기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육식은 군자로서 부득이한 일인 만큼 부윽이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 부로 살생을 자행하거나 기탄없이 욕심만을 채우려 한다면 그 결과는 약자의 살을 강자가 뜯어먹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호사설의 생명사상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나에게 만물이 갖추어져 있다 萬 物 備 我 를 읽어보자. 맹자께서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하였다. 이것은 인의 본바탕이 지극히 큼을 형용한 말이 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四 海 와 八 荒, 길짐승, 날짐승과 풀, 나무 등은 모두 다 물 物 인데,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보아 자신에게 귀속시킨다. 이런 까닭에 저 수많은 백성도 모두 나 의 백성이고, 저 오랑캐들도 모두 나의 오랑캐이며, 길짐승, 날짐승과 풀, 나무도 모두 나의 길짐승, 날짐 승과 풀, 나무인 것이다. 나 란 존재는 物 의 상대다. 비록 저와 내가 서로 모습은 다르지만, 내가 저들 을 나의 바깥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 껴안아 그것들에 대해 각각 적절하게 처우하는 방도가 있다면, 곧 만물이 내 마음 안에 갖추어져 빠지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성호가 기대고 있는 만물비아는 맹자 盡 心 章 에 나오는 구절이다. 만물이 모두 나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다 는 것은 세상 만물, 곧 수많은 백성, 오랑캐, 금수, 초목이 비록 나와 유 類 가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성질 이 다를지언정, 모두 나와 구별되지 않는, 또 차별되지 않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 역시 그것들과의 연관 속에 있는 존재이며, 그 연관이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물과 인간, 미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사물과 인간, 미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사물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는 것, 그것들의 생명 의지와 존재 이유를 존중 하는 것이 바로 萬 物 備 我 의 사유다. 자신과 만물이 동등한 존재임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다른 존재 에 미루어나간다면 서 恕 와 인 仁 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그보다 더 크나큰 것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49

50 나는 생명사상이 유가의, 그리고 성호 사상으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산과 강을 마구 허물고 파내고 있다. 그것들의 존재 이유, 그것들 속에 깃든 생명은 돌아볼 필요가 없는 타자에 불과 한 것이다. 이러니, 어디 인간의 생명인들 생명으로 보이겠는가? 성호의 생명사상을 되씹어볼 이유가 여기 에 있다. 성호의 토지제도 - 영원히 팔 수 없는 땅( 永 業 田 ) 대부분이 소작농인 실정 성호의 시대에 토지(농지)는 일부에 의해 과점( 寡 占 )되어 있었고, 그 일 부란 다름 아닌 귀족화한 양반이었다. 농민 중 자작농은 일부에 불과했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50

51 고, 70퍼센트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그들은 소작료로 소출의 절반을 지 주에게 바쳐야 했다. 궁핍해진 농민은 지주에게 토지를 팔았다. 지주의 거대한 땅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토지를 잃은 농민은 소작농이 되어 지주를 위해 일하거나, 자기 자신을 노비로 팔거나, 유민이 되거나, 도둑이 되었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으면 길에서, 들판에서 시체가 되 었다. 농민이 토지를 떠나는 것은 곧 사대부체제의 위기였다. 당연히 토 지의 분배를 주제로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대책을 내놓았다. 한전론 ( 限 田 論 ) 유력한 대책 중 하나가 한전론 이었다.곧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상한 선으로 정하고 그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박지원 ( 朴 趾 源 1737~1805)의 [한민명전의 限 民 名 田 議 ]는 한전론에 관한 대표적 인 논문이다. 성호는 한민명전 限 民 名 田 에서 한전론을 검토한다. 그 는 이 글에서 한 漢 의 동중서 董 仲 舒 에서 원 元 의 정개부( 鄭 介 夫 )에 이르는 한전론의 역사를 간단히 개괄하고 한전론의 골자를 소개한다. 한전론은 모든 농민에게 일정한 면적의 전지를 일정한 기간 동안 지급하고 그 기 간 중에 불어난 토지는 형제, 자질 子 姪, 인척에게 강제로 분배하는 제도 다. 만약 상한선을 넘어 토지를 보유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경 우 관에서 몰수하여 가난한 자에게 그 땅을 팔고, 땅 값의 반은 국가가 차지하며, 반은 지주에게 지급한다.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성호는 이 주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51

52 차지하며, 반은 지주에게 지급한다.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성호는 이 주 장을 반박한다. 즉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경우 권력이 강해지기 마련 이고 권력이 강해지면 법을 무시할 수 있다. 가난한 백성에게 팔겠다고 하지만, 나눠줄 것이 아니면 가난한 자가 어떻게 땅을 사겠는가? 또 토 지의 소유자가 이미 고장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 토 지를 사려고 들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형제, 자질에게 나누어준다고 하자. 그러나 이를 형식적으로 나누어줄 뿐이라면, 어떻게 그 불법을 따질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한전론은 실행될 수가 없다고 성호는 말한다. 토지 공개념 - 균전론 ( 均 田 論 ) 성호는 자신이 일찍이 均 田 論 균전론 을 지어 균전을 주장했다고 말한 다. 균전이란 무엇인가? 성호가 말하는 균전론은 [곽우록 藿 憂 錄 ]에 실린 균전론을 말한다. 그는 곽우록의 균전론을 바탕으로 다시 성호사설에서 균전을 쓴다. 먼전 성호사설의 균전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균전의 첫머리에서 성호는 왕도정치가 경계를 지향하지 않으면 구차할 뿐이 다. 라고 말한다. 경계 는 토지의 경계선을 정해 토지를 나누는 것 이다. 그것은 곧 토지의 공평한 분배 를 의미한다. 이어지는 빈부 가 균등하지 않고 강약의 형세가 다르다면 어떻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 릴 수 있겠는가? 라는 문장은, 백성 개개인의 부와 힘이 균등한 형태로 존재해야 국가의 운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의미다. 수긍할 수 있는 말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52

53 이다. 하지만 성호는 토지의 균등한 소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 한다. 왜냐? 이 사람의 토지를 빼앗아 저 사람에게 줄 수가 업는 법이니, 그것은 각자 자기가 점유한 토지를 자기의 소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토지의 균등한 분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성호는 말한다. 토지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무릇 천하의 전지 田 地 는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 백성들이 각각 그 전 지를 자기 이름으로 차지 하고 있는 것은 왕의 땅을 한 때 강제로 점유하 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원래 본 주인이 아닌 것이다. 비유컨대 아 버지의 살림살이 도구를 여러 자식들이 나누어 차지한다고 하자. 어떤 자식은 많이 차지하고 어떤 자식은 적게 차지하겠지만, 아버지가 골고루 나누어 가지라고 명한다면 많이 차지한 아들이 감히 그냥 뻗대며 차지하 고 있지 못하는 법이다. ( 均 田 /제7권 인사문) 모든 땅이 왕의 것이란 생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토지 공개념이다. 토 지의 사유란 남의 땅을 한때 강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찌 땅만 그렇 겠는가. 인가의 삶 역시 장마 뒤 숲 속에 피었다가 사그라지는 버섯과 다 를 바 없다. 잠시 세상에 머무르고 떠날 인간이 자연 을 소유한다는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53

54 것은 실없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토지는 원척적으로 사 유할 수없는 것이다. 이 탁월한 발상을 현실에 적용하려 한 사람이 있었 다. 성호가 인용하는 왕망( 王 莽 BC45~AD23)이다. 왕망은 천하의 전지를 왕전 王 田 이라 했으니, 토지는 사유되는 물건이 아님을 선언하고 부자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 균전론의 핵심 곽우록에서 성호의 균전론의 핵심은 이렇다. 먼저 한 가족이 평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재산을 계산해서 그것에 맞추어 일정한 토지를 1호 戶 의 영업전( 永 業 田 )으로 삼는다. 영업전은 영구히 농사를 지어먹을 수 있는 전지 田 地 란 뜻이다. 이렇게 법을 정하여 실행하되 법을 시행할 즈음 땅을 많이 가진 자에게서 땅을 빼앗지 않고 땅을 못 가진 자에게도 영업전보다 더 주지 않는다. 땅을 많이 가져서 팔고자 하는 사람은 영업 전을 제외하고는 허락한다. 토지의 매매를 자유롭게 하되, 오직 그 매매 에 영업전이 포함되어 있는지만 철저히 살핀다. 만약 영업전이 포함되었 다면 그 땅을 사는 자도 처벌하고 파는 자도 처벌한다. 이렇게 영원히 팔 지 못하는 토지가 있으면 결국 토지의 소유는 균등해진다. 왜냐? 파는 자는 항상 빈민이다. 부자들은 빈민의 땅을 사들여 토지를 넓힌다. 그런 데 빈민이 땅을 팔지 못하게 하면 부자들은 땅을 넓힐 수가 없게 된다. 빈민의 토지는 근검에 의해 조금 늘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부자들의 넓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54

55 빈민의 토지는 근검에 의해 조금 늘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부자들의 넓 은 땅은 상속을 통해 쪼개진다. 이렇게 되면 결국 모든인민이 균등한 토 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균전론의 대략이다.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성호는 한민명전 에서 자신이 균전론을 저술했지만 천천히 오랜 시 간 실행한 뒤라야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그 계획을 저지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그 계획 을 저지하는 자가 나올 것이니 시행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라고 말하 고 있다. 그 역시 실현이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던 것이다. 다만, 사람 들이 혹 균전론을 지녀 바꾸지 않는다면, 반드시 도움이 되는 방도일 것 이다 라 말했다.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음은 후대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 다. 개혁의 아이디어를 실천할 정치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성호사설 - 강명관, 성호 세상을 논하다 55

56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 유림(최인호) :34 성선설과 사단칠정 논쟁 퇴계 이황 1. 맹자의 네 가지 善 의 단서( ( 四 端 )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56

57 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不 忍 人 之 心 )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에게는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 不 忍 人 之 政 )를 하였다.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 는 정치를 실천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쉬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이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문득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 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 고, 마을 사람과 친구들로부터 어린 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어린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惻 隱 之 心 )이 없다면 사 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羞 惡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 辭 讓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是 非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惻 隱 之 心 羞 惡 之 心 辭 讓 之 心 是 非 之 心 仁 義 禮 智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 仁 )의 단서( 端 )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 義 )의 단서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 禮 )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 智 )의 단서이다. 사람이 네 가지 단서( 四 端 )를 가지고 있는 것 은 그가 사지( 四 肢 )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네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는데도 자신은 선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고, 자기의 군주는 선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의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무릇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네가지 단서를 모두 확대시켜 가득 차게 할 줄 알면 마치 불이 타오르기 시작 하고 샘이 쏟아나기 시작하는 것과 같아 진다. 진실로 그것을확대시켜 가득 차게 할 수 있으면 천하라도 보존할 수 있고, 만일 확대시켜 가득 차게 하지 않으면 부모조차도 부양 할 수 없다. <해설> 맹자는 여기에서 유명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 孺 子 入 井 ) 譬 喩 를 통해 자신의 근본사상인 성선 론( 性 善 論 )을 주장하고 있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선한 본성과 그것에 근거한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맹자는 위에서 든 사건에서처럼 어떤 사람이든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 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어린아이를 구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해득실을 계산한 결과 나온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맹자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타고나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57

58 면서부터 서한 본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즉 사람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는 선한 본성이 특정한 상황을 경험할 때 순간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선한 마음은 선한 본성이 드러난 단서이자 싹이 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싹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기 르는 노력이다. 작게는 자신의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에서부터 천하는 잘 다스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성패는 바로 이러한 싹을 키우는 노력 여부에 달려 있다. 孟 子 曰, 人 皆 有 不 忍 人 之 心. 先 王 有 不 忍 人 之 心, 斯 有 不 忍 人 之 政 矣. 以 不 忍 人 之 心, 行 不 忍 人 之 政, 治 天 下 可 運 於 掌 上. 所 以 謂 人 皆 有 不 忍 人 之 心 者, 今 人 乍 見 孺 子 將 入 於 井, 皆 有 惕 惻 隱 之 心. 非 所 以 交 於 孺 子 之 父 母 也, 非 所 以 要 譽 於 鄕 黨 朋 友 也, 非 惡 其 聲 而 然 也. 由 是 觀 之, 無 惻 隱 之 心, 非 人 也, 無 羞 惡 之 心, 非 人 也, 無 辭 讓 之 心, 非 人 也, 無 是 非 之 心, 非 人 也, 惻 隱 之 心, 仁 之 端 也, 羞 惡 之 心, 義 之 端 也, 辭 讓 之 心, 禮 之 端 也, 是 非 之 心, 智 之 端 也. 人 之 有 是 四 端 也, 猶 其 有 四 體 也. 有 是 四 端 而 自 謂 不 能 者, 自 賊 者 也, 謂 其 君 不 能 者, 賊 其 君 者 也. 凡 有 四 端 於 我 者, 知 皆 擴 而 充 之 矣, 若 火 之 始 然, 泉 之 始 達. 苟 能 充 之, 足 以 保 四 海, 苟 不 充 之, 不 足 以 事 父 母. 惕 : 두려워서 조심함 2. 사단칠정론 1 朱 子 의 사단칠정론 주자의 성즉리( 性 卽 理 )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 性 善 說 ) 로 직결되는 것이다. 주자가 理 의 선재( 先 在 ) 를 주장하고, 이를 형이상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성선설에 따른 도덕과 윤리를 사상의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주자는 맹자의 사단설에 주목하고 있었다. 주자는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의 근거로 예시하고 있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 비지심은 情 이고,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인, 의, 예, 지는 性 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자는 性 과 情 의 관계를 발( 發 )과 미발( 未 發 ), 즉 체( 體 )와 용( 用 )의 관계로 보고 있었다. 인간이 보고, 듣 고, 느낄 수 이쓴 것은 모두 情 때문이며, 이러한 감정이 발현된 것은 性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情 의 총칭을 七 情 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七 情 이란 원래 예기( 禮 記 ) 에 나오는 인간이 가진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하는데, 이는 기쁨( 喜 ), 분노( 怒 ), 슬픔( 愛 ), 두려움( 懼 ), 좋아함( 愛 ), 미워함( 惡 ), 욕망( 慾 ) 등 인간 감정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칠정은 다만 일곱 가지로 한정한 인간의 심리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진 감정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자는 맹자가 주장한 사단을 이의 발현( 理 之 發 ) 으로, 七 情 은 기의 발현( 氣 之 發 ) 으로 설명하고 양 자를 구분해놓고 있는데, 사단은 理 의 발현이므로 항상 선하지만 칠정은 이치에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58

59 수도 있으므로 不 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자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마음의 미발( 未 發 )을 性 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 촉된 상태, 즉 마음의 이발( 已 發 )을 情 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의 기의 발현이 다 ( 四 端 是 理 之 發 七 情 是 氣 之 發 )라고 정의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자가 성선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맹자의 사단과 [예기( 禮 記 )]의 [예운]에 나오는 칠정을 끌어들여 소위 四 端 七 情 의 이론적 설명을 理 氣 論 으로 풀어 설명한 것은 유교를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고 인간 의 심성문제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었으니, 주자는 이처럼 수평적으로 송대의 성리학을 총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공자의 인사상과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함으로써 수직적으로도 유가사상을 총망라하 였으니, 주자야말로 유교에 있어 직선, 평면, 공간에 있어서의 기준이 되는 점, 즉 좌표를 설정한 최고의 집대성자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주자는 四 端 七 情 論 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었 는데 사단칠정론이 특히 우리나라 성리학에 있어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하게 된 것은 이처럼 퇴계와 고봉 간에 오간 4년 동안의 치열한 논쟁 때문이었던 것이다. 2 퇴계의 사단칠정론의 수정 정지운( 鄭 之 雲 : 1509~1561)의 천명도설( 天 命 圖 說 )은 결국 天 則 理 也 라는 주자의 철학을 도형으로 형상 화시킨 것이다. 四 端 은 理 에서 나오고 七 情 은 氣 에서 나온다 ( 四 端 發 於 理 七 情 發 於 氣 ) 퇴계는 이는 지나치게 단순명료하여 잘못하면 큰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명제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정정하여 발표하였다. 사단은 理 의 드러남이요, 칠정은 氣 의 드러남이다. ( 四 端 理 之 發 七 情 氣 之 發 ) 理 와 氣 가 서로 호발( 互 發 )하는 근원이 된다는 내용상의 의미는 같다. 그러나 퇴계는 도덕적 이상이 드러 나서 이발( 理 發 )이 되고, 욕망이나 감정이 드러나서 기발( 氣 發 )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규정하였던 것 이다. 천지간에 理 가 있고 氣 가 따른다. 理 가 있으면 곧 氣 가 조짐하고 氣 가 있으면 곧 理 가 따른다. ( 有 理 便 有 氣 朕 焉 有 氣 便 有 理 從 焉 ) 그러고 나서 퇴계는 이 난해한 명제를 다음과 같은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 다. 理 는 기의 장수( 帥 )가 되고, 氣 는 졸도( 卒 )가 되어 천지에 공을 이룬다. 퇴계의 비유는 理 는 기를 부리는 장수요, 기는 이를 따르는 졸병이기 때문에 理 가 기를 주재하고 기는 理 에 순종한다 는 뜻이었던 것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59

60 이다. 따라서 理 는 그 자체로는 선할 수 밖에 없으며, 기는 이의 부림을 받음으로써 이의 주재( 主 宰 )에 따 라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니, 사람은 마땅히 경( 敬 )을 중심으로 수양으로 氣 를 다스리고 理 를 궁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고봉 기대승 3 高 峯 奇 大 升 의 반론 고봉은 모든 현상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찌 형이상학적인 이가 형이하학적인 기의 현상세계 에 스스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리와 기는 퇴계가 생각하듯 장수와 졸병의 종속관계나 혹은 병행관계가 아니라 포함관계( 因 說 )이므로 이분화될 수 없음을 문제제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퇴계의 四 端 은 리의 드러남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 라는 명제가 옳다면 사단은 기없는 리 가 되어 이는 죽은 물건( 死 物 )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모순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고봉은 주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하고 있었다. 일찍이 주자는 [ 朱 熹 集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 다. 理 와 氣 는 결단코 두 개의 物 이다. 다만 사물 위에서 보면 그 둘은 나누어지지 않은 채 각각 한 곳에 있다.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60

61 ( 所 謂 理 與 氣 決 是 二 物 但 在 物 上 看 則 二 物 渾 淪 不 可 分 開 各 在 一 處 ) 주자는 자신의 語 類 에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결정 짓고 있다. 리가 있으면 반드시 기가 있으니, 분리해서 논할 수 없다. 모든 것이 理 이고, 모든 것이 기이다. 어떤 것이 리가 아닌 것이 없으며, 기가 아닌 것이 있겠는가.( 在 是 理 必 有 是 氣 不 可 分 說 都 是 理 是 氣 那 箇 不 是 理 那 箇 不 是 氣 ) 그리고 주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理 와 氣 는 분리된 적이 없다( 理 未 嘗 離 乎 氣 ) 고봉은 주자의 이러한 학설을 통해 퇴계의 理 는 氣 의 장수가 되고, 기는 이의 졸도가 된다 는 퇴계의 理 氣 二 元 論 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이처럼 퇴계와 고봉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사칠논변 은 명종 14년(1559년)부터 시작되어 명종 17년(1562 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퇴계의 나이 59세때부터 62세 때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논쟁은 고봉으로 부터 3회의 편지와 퇴계로부터 3회, 도합 6회의 논쟁으로 꼬박 4년간이나 전개되었던 것이다. 朱 子 를 신봉 하는 같은 성리학자이면서도 퇴계와 고봉, 두 사람 사이에 4년간이나 전개되었으며, 후세의 이른바 주리론 ( 主 理 論 )과 주기론( 主 氣 論 )의 사상적 대립을 이끌어낸 발단이 되었고, 퇴계의 理 氣 二 元 論 과 율곡의 理 氣 一 元 論 을 탄생시킨 분수령이 됨으로써 한국철학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는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이 다. 4 퇴계의 재수정 퇴계가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이 수정하였던 四 端 은 理 의 드러남이요, 七 情 은 氣 의 드러남이다 (사단리지발 칠정기지발)란 명제를 또 다시 다음과 같이 재수정하였다. 四 端 은 理 가 드러나자 氣 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 七 情 은 氣 가 드러나자 理 가 그 위에 올라타는 것이 다.( 四 端 理 發 而 氣 隨 之 七 情 氣 發 而 리 乘 之 ) 마침내 제3의 명제를 결정지은 퇴계의 理 氣 論 을 보면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理 와 氣 를 전과 같이 둘로 확실하게 나눈 것이 아니라 서로 따르고( 隨 ) 올라탔음( 乘 )이라는 비유를 통해 理 와 氣 가 동시동 소( 同 時 同 所 )임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의 理 氣 互 發 說 에 고봉의 理 氣 兼 發 說 을 포함하여 수용하였던 것이다. 理 와 氣 를 말을 타고 가는 사람 으로 비유하여 자신의 理 를 말을 부리는 사람으로, 氣 는 말로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61

62 비유하고 있다. 퇴계가 자신의 理 氣 二 元 論 을 말을 탄 사람은 理 로 말은 氣 에 비유한 것은 어디까지나 理 는 貴 하고 氣 는 賤 하게 보는 理 優 位 說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릴 때 말이 순조롭게 의지에 순응하여 달리는 경우는 理 에 氣 가 순응하는것이며,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며 말 스스로의 의지로 달릴 때 에는 氣 가 理 에 불응하는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理 로써 七 情, 즉 인간의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인 것이다. 퇴계에 있어서 理 氣 論 은 주자가 말하였던 만물이 갖고 있던 원리 이기보다는 칠정을 극복하고 사단을 확충하면 하늘과 내가 다름이 없는 천아무간( 天 我 無 間 ) 의 성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양론과 일치하 고 있음인 것이다. 5 고봉의 절충안 스승께서 말씀하신 사단은 이가 드러나자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나자 이가 그 위 에 올라탄 것이다( 四 端 理 發 而 氣 隨 之 七 情 氣 發 而 理 乘 之 ) 란 두 구절은 또한 매우 정밀합니다. 그러나 저의 못난 생각으로는 이 두가지 뜻은 칠정에는 理 와 氣 가 다 있지만 四 端 에는 오직 이발( 理 發 ) 의 측면만 강조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大 升 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으면 합니다. 情 이 발할 때에는 理 가 동하매 기가 함께 가고 혹은 기가 감( 感 )함에 理 가 탄다( 情 之 發 也 或 理 動 而 氣 俱 或 氣 感 而 理 乘 ) 그러나 고봉의 이러한 折 衷 案 은 퇴계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퇴계 역시 이 치열한 논쟁에 대해 서 이제 그만 끝내고 싶은 厭 症 을 느낀 것처럼 보인다. 의리를 분석하여 밝히는 일은 본래 더없이 정밀하 고 해박해야만 하는데도 학문을 충실하게 하는데는 조금도 도움되는 것이 없고 다만 부질없는 다툼으로 고귀한 학문의 중요한 금기를 범하는 것이 될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4년여에 걸 친 두 사람의 논쟁을 그만 그치자는 내용의 절구 한 수를 지어 고봉에게 보낸다. 짐을 싣는 두 사람 경중을 다투지만 생각하니 높고 낮음 같아져버렸네 이쪽을 누르고 저쪽으로 돌리자면 짐의 무게 언제나 공평해질까 하하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62

63 6 율곡의 理 氣 一 元 論 퇴계의 이기이원론에 대해서 율곡은 퇴계의 병통은 오로지 理 氣 互 發 에 있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 라고 평가하고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율곡의 비판은 퇴계가 주장하였던 말의 몸은 문제의 대상에서 제외되 고 오직 사람과 말의 의지만을 집약시킨 수양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어쨌든 문밖의 목적지로 달리는 것은 사람의 의지도 아니고 말의 의지도 아닌 말의 몸, 그 자체이므로 사람의 의지인 理 와 말의 의지인 氣 로 이 분화시키는 것은 명칭과 이치를 모두 잃어버려 학설이 될 수 없음 ( 各 理 俱 失 不 成 說 話 矣 )이라고 주장 하였던 것이다. 7 퇴계에 대한 중국 일본의 평가 중국 근대사상가인 양계초( 梁 啓 招 )가 퇴계를 孔 夫 子 와 같은 칭호인 李 夫 子 로 표현함으로써 퇴계를 유학의 완성자로 성인의 반열에 올렸던 것은 격물치지의 학구정신었다. 퇴계의 유학은 일본으로 건너가 제2의 王 仁 이라고 불리울 만큼 일본 정신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일본근세유학의 개조였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퇴계가 발문을 붙여서 간행한 [연평문답]을 열독하였 고, 일본 근세 유학을 열었던 야마사키안사이는 퇴계를 주자의 直 弟 子 조선의 제일 이라고 불렀 다. 성선설과 사단칠정논쟁-유림(최인호) 63

64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 하다(최인호 유림) :12 (칭기스 칸) 耶 律 楚 材 - 최인호 유림 興 一 利 不 若 除 一 害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 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지 못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64

65 역사상 가장 강력하였던 몽골제국의 세조 쿠빌라이의 뛰어난 정치고문가였던 야율초재는 때문에 인류사상 최고의 정치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요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대대로 금나라를 섬겼으나 몽고군이 요나 라를 점령하자 칭기스 칸에게 항복한 인물로 군정과 민정을 분리하여 군관이 민중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 고 세제를 정비하여 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던 대정치가였던 것이다. 야율초재는 연경이 몽고군의 손에 들어갔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명성을 들어왔던 칭키스칸이 간곡히 불러 등용했던 사람이었다. 천성이 총명하고 충직하여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권세와 이익에 굴하지 않았 다. 아버지 칭키스칸과 오고다이칸 2대에 걸쳐 재상으로 봉직하였는데, 오고다이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 위에 오르자 야율초재에게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하려 한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라 이에 야율초재가 대답했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지 못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야율초재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면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는 결론을 피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 興 一 利 不 若 除 一 害 )는 정치철학이 탄생된 것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야율초재의 정치관을 나타내는 말로 조광조가 시행하였던 정치개혁과 반대되는 이론이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썩어빠진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은 제도를 창출해내었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대정치가 야율초재의 개혁 방법은 무엇을 하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는 무위의 개혁이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조광조의 개혁은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유림 2권 p.273~274)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65

66 징키스 칸과 야율초재 징키스 칸과 야율초재 (인터넷에서 퍼옴) 나폴레옹은 115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정복했다. 그보다 한 세기 뒤의 히틀러는 219만 평방킬로미터를 지 배했다. 이 두 사람의 정복 면적을 합한 것보다 더 넓은 땅을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대왕이 지배했다. 그 리고 이 세 사람이 차지했던 땅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넓은 777만평방 킬로미터를 차지한 사람이 징키스 칸이다. 징키스 칸의 생애에 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고 다양한 해석과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대부분의 모습은 잔인한 정복자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문화재를 파괴한 미개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징키스 칸의 행동은 적에게 어떠한 동정도 베풀지 않는 초원의 엄격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재의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글에서는 징키스칸과 그의 참모이자 몽골제국을 단순한 유목국가를 벗어나 중국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만든 개혁자 야율초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징키스 칸 생애(1155?~ ) 몽고고원의 광활한 초원은 예부터 여러 유목민족들 사이의 생활 터전이자 전쟁의 장소였고 이 지역에서 분출되어 나온 기마 집단은 아시아와 유럽 각지로 흘러 들어갔다. 초원의 지배자는 수시로 바뀌었고 민족 적, 언어적 구분은 점점 엷어지게 되었다. 1160년대 초 몽고국가의 붕괴로 몽고족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몰락을 가져왔고, 분열과 분쟁이 몽고부족들 사이에 만연하였다. 당시 고원은 서른 개 정도의 유목부족으 로 구성되어 있고 다섯 개의 주요 세력권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은 금나라가 차지하고 있었고 농경문화를 토대로 살아온 이들은 유목세력을 북방으로 몰아넣고 분열시켜 교류하게 함으로 유목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66

67 세력의 이동성을 그들 내부로 한정 시켰다. 징키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한때 몽골의 지도자이자 짧은 동안이나마 몽골 전체를 다스린 적이 있었 던 카불칸의 손자로 메르키트 족의 아내였던 헤엘룬을 납치해서 징키스칸 즉, 테무친을 낳는다. 태어났을 때 왼손에 핏덩이를 쥐고 태어나 최고의 쇠로 만든 아이 라는 테무친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테무친 이 8살이 되자 신부를 구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에게 살해를 당한다. 예수게이의 죽음 후 몽골부의 사람들은 테무친의 가족들을 버리고 테무친은 가장이 되어 포로가 되기도 하고 여러 동지들을 만나며 성 장한다. 1206년 내륙아시아 여러 민족의 칸으로 선출 되어 대몽골 제국을 만들고 북방 산림부족( 山 林 附 族 ) 평정으로 징키스 칸의 대외 원정이 시작된다. 서하를 직접 침공하고 1209년 조공을 바치게 하고 몽골 제국 을 성립하기 전에 멸망시킨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 西 遼 )로 망명하여 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 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병합하였다(1218). 또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패자( 覇 者 ) 호레즘국 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 西 征 )을 시작한다(1219). 오트랄 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 別 軍 )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고(1220) 다시 캅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 아 제공( 諸 公 )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 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 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 (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 匠 人 )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 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 汗 國 )을 이룩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 이에게 주기로 하였다. 1226년 호레즘 원정에서 귀환한 징키스칸은 서하에 대한 공격들 재개하여 서하를 명망 시키고 하남성의 개 봉( 開 封 )으로 남천한 금에 대한 공격에 나서려 할 즈음 낙마에서 입은 내상으로 인해 1227년 8월 18일 자신 이 세운 주둔지에서 죽었다. 남편으로서의 징키스칸 징키스칸의 아내 보르테는 메르키트족 에게 잡혀가 칠게르의 아내가 됐다가 9~10개월 만에 돌아와 바로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67

68 큰아들 조치를 낳았다. 조치가 징키스칸의 아들인지, 칠게르의 아들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적의 첩실이 되 어 능욕 당하고 돌아온 보르테를 소외하지 않았고 곧 태어난 아들에게 몽골족에게 손님처럼 찾아온 아이 라 하여 조치(나그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징키스칸 에게는 5명의 황후가 있었지만 정황후( 正 皇 后 )는 항상 보르테였고, 보르테가 낳은 4아들중의 3남 오고타이는 몽골의 칸이 된다. 전쟁터 속의 징기스칸 징기스칸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전선에 나가 야영을 하면 사병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자기 짐은 직접 메고 다녔다. 적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은 군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으며, 병 없이 오래 산다고 하여 장춘진인( 長 春 眞 人 )이라 불리던 중국의 도학자 구처기( 丘 處 機 )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비사막 북쪽의 황량한 몽골 야생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아왔다. 나는 꾸미기를 싫어하고 단순 한 것을 좋아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입은 옷은 소치기나 말치기와 똑같은 누더기였고, 내가 먹는 음 식도 그들과 똑같다. 전쟁이 나면 나는 항상 앞에서 싸웠다. 그 결과 천하 육방의 모든 세상이 나의 통치 에 복속하고 있다. 나는 백성들을 갓 태어난 내 아이들처럼 돌보고, 병사들을 내 형제같이 사랑한다....( 省 略 ) 또한, 부하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지휘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타이만큼 용맹한 사람은 없 어. 그만큼 힘이 쎈 사람은 아주 드물지. 하지만 그는 자기가 오랜 행군에도 지치지 않고, 갈증과 허기를 잘 느끼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높은 자리를 맡 길 수가 없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아랫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하며 천호장( 千 戶 長 )에 서민출신을 많이 등용했다. 원수는 철저히 갚는다. 징기스칸은 부친을 살해한 타타르족을 1202년에 점령하여 멸망시키고 전후처리 회의에서 타타르는 옛부 터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을 죽여 왔다. 고 말하고, 타타르인들을 수레바퀴에 대어보고 바퀴보 다 키가 큰자는 모두 죽여라. 완전히 절멸될 때까지 모두 죽여라. 남은 자들을 노예로 삼아라. 라고 하여 타타르족은 멸족 되었다. 또한 1204년 메르키트족을 멸망시키고 임금 토크토아의 아들들이 도망가자 1205년 명장 수베테이를 불러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68

69 도망한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정복지에 몽골의 전통과 문화를 강요하지 말라. 징키스칸은 유목민족의 신앙인 샤머니즘을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복지 백성들에게 그들이 믿던 신앙을 계속 믿도록 허용하고 장려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요에서의 불교장려다. 나이만 왕자 출신의 황제 쿠출룩이 기독교를 강요하고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은 서요인들에 대해 기 존의 종료를 믿도록 하였다. 또한 외국을 점령하면 일반적으로 현지 관료들을 행정관으로 임명, 그들에 의한 자치를 허용하여 질서 유 지와 조공 수행을 담당하게 했다. 이는 점령지 백성에 대해 몽골의 명령에 대한 철저한 복종, 몽골인 지방 관리관 다루가치에 대한 존중에 대한 요구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다루가치가 거느리고 있는 몽골군을 동원하여 비 협력자 또는 반란음모 혐의자와 그 가족, 친척, 인척과 주민들을 공개적으로 대량 학살하고 가산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보복이 이루어 졌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아는 것이 늘고 현명해진다. 당시 몽골의 인구는 100만에서 200만 정도로 적었고 교육기관도 없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인재가 없었다. 부족국가를 만들고 통일국가를 세운 뒤 세계정복에 나서자, 새로 생겨난 문제들을 처리해 나갈 행정, 문화 분야의 인재가 필요 했고 거란인 옐루아하이, 옐루투와 형제와 나이만의 재상 타타통가, 중국의 선비관료 야율초재를 등용했다. 징키스칸이 서하에서 사냥을 하다가 혼자 있는 아이를 데려다 양자로 삼고, 차간(Tsagan)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감주( 甘 酒 )를 공격할 때 데려갔다. 차간의 아버지는 감주방위를 맡은 서하의 장수로 몽골군에게 항복을 하려했지만 서하군 장병들이 그를 붙잡아 군법에 따라 처형했다. 감주가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징기스 칸이 저항을 계속한 도시에 대한 처리 관례에 따라 모든 주민을 죽 이고 재산을 약탈한 뒤, 집과 시설을 모두 불태워 다시는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하라. 고 지시했다. 그러 나 차간이 항전의 책임은 나라에 있지, 주민들에게는 없다며 말하자 너는 아직 어리지만 생각이 올곧다. 아버지에 대한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니, 가상하다. 네말대로 하겠다. 라고 하여 명령을 취소하고 차간 부친의 처형을 주도한 장교 36명만 처형했다. 후에 차간은 징키스 칸 천호대의 지휘관이 된다.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69

70 야율초재(1189 ~ 1243) 興 一 利 不 若 除 一 害 ( 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 몽골 제국의 2대 칸인 오고타이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자 야율초재에게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하려 한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라." 이에 야율초재가 대답했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 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지 못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면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 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의미 이다. 정복자를 문명화시킨 절세의 문신 ( 文 臣 ) 야율초재( 耶 律 楚 材 : 1189~1243)의 가문은 본래 여진족의 나라 금( 金 )에 멸망한 거란족의 요( 遼 )나라 황족 후예면서도, 대 학자였던 아버지 야율이( 耶 律 履 )는 금나라 조정에서 재상까지 지냈다. 그 역시 17세에 금 나라에 출사하여 칭기즈칸의 군대에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 北 京 )이 함락되었던 25세 때까지 금나라 조 정의 벼슬살이를 했다. 청년기에 접어들 무렵 이미 그는 천문, 지리, 율력, 유학, 산술을 비롯하여 불교와 도교 그리고 의학, 점복 등에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악기연주에도 뛰어났다. 그리고 한어( 漢 語 :중국어)와 거란어는 물론이고 여진어, 몽골어에도 두루 정통했다. 금나라 조정이 몽골군의 기세에 쫓겨 남쪽으로 밀려나 수도를 변경( 京 : 지금의 카이펑, 開 封 )으로 옮겼을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70

71 때, 그는 따라가지 않고 불교에 귀의했다. 칭기즈칸 3년인 1218년 연경을 장악한 칭기즈칸이 천하의 인재 를 구하고자 물어보니 사람들은 모두 야율초재를 지목했다. 야율초재를 처음 만난자리에서 징기스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대대로 원수였다.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그대의 원한을 씻어주겠다. 그건 지난 일입니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 역시도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어떻게 군주를 원수로 삼겠습니까. 이후 칭기즈칸은 그를 긴 수염 이라는 뜻인 오도살합리 라고 부르며 비치그치(Bichighchi, 書 記 )에 임명되었고,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한 번은 활 솜씨가 뛰어나 칭기즈칸의 총애를 받는 상팔근 이라는 서하출신 장군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교만하게 말했다. 지금은 무력을 사용할 때입니다. 야율초재 같은 약해빠진 유생이 전쟁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아무짝에 쓸모없는 사람을 대 칸께서는 너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야율초재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응수했다. 활을 잘 쏘려면 먼저 기술자가 훌륭하게 활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마치 천하를 얻는데 활 만드는 기술자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는 말 같군요. 더군다나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칭기즈칸은 후계자로 지목한 셋째아들 오고타이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게 주신 선 물이다. 너 역시 앞으로 나랏일과 군사작전에 대한 것은 모두 그와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해라. 라고 했 다고 한다. 힘의 패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의 문신 ( 文 臣 )의) 역할 징기즈 칸이 사후 유언에는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2대 칸에 올라야 하는데 넷째 아들인 톨레이(예종)가 당 분간 국정을 대리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를 재촉하여 다음 칸을 결정할 수 있게 몽골 최고부족회의인 쿠릴타이 를 되도록 빨리 열게 하고 회의를 연지 40일이 넘도록 결말을 보지 못하자 야율초재는 톨레 이를 찾아가 천문과 점복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이번 기일이 지나면 더 이상 길일은 없 다 며 엄포를 놓았다. 이때 몽골귀족들이 믿는 미신을 교묘하게 이용했는데 톨레이는 대리를 끝내고 오 고타이의 등극 날짜가 정해질 수 있었다. 이어서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의 형인 차가타이에게 찾아가 형이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71

72 지만 군신관계에서는 신하인 만큼 동생의 즉위식에서 무릎을 꿇고 엄정한 예의를 갖추어 줄 것을 요구했 다. 후계구도가 확실해지자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중원정벌에 나서게 되었고, 일단 남송과 연합하여 간신히 명 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금나라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몽골의 정예병과 남송의 군대 가 함께 공격을 하여도 전쟁은 3년 동안 계속 되었다. 1234년 수도 변경이 함락되고 기어이 금나라가 멸망 하자 몽골의 장군인 속불대가 끝까지 저항한 금나라의 도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사람들을 모두 도살하자고 건의했다. 칭기즈칸 이래 몽골군은 정복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리 항복한 성들은 살려주지만 끝까지 저항 한 모든 도시는 철저히 파괴 하는 게 관습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건의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이 땅을 얻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리며 전쟁을 치른 목적이 무엇입니까. 토지와 백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백성을 모두 죽여 버리면 이 땅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더구나 변경은 한 나라의 수도입니다. 진기한 문물과 솜씨 좋은 기술자들이 이곳에 다 모여 있습니다. 만약 도시를 파괴하고 그들을 다 죽여 버리면 칸께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고타이 칸은 성에 진입하여 금나라의 황족만을 잡아 죽일 뿐, 백성과 물건엔 손대지 못하게 하며 이후부 터 점령지에서 관례대로 해오던 파괴행위와 대살육의 풍조가 사라지게 되었다. 오고타이 칸의 사후 야율 초재는 유학자로서 행정, 세제 등을 중원 식으로 바꾸려 노력했지만, 몽고의 지배층과 마찰을 빚게 되어 그 영향력이 축소되고 관직에서 쫓겨나 권력에서 소외된 채, 종실 왕공들이 득세한 토리가나( 脫 列 哥 那 - 太 宗 妃 ) 칭제 시대에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유교화와 중원화를 통해 제국건설 정벌과 통일은 많은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전쟁과 학살, 문 명파괴와 그 혼란을 이기고 하나의 정치체재로 단일화시키기 때문에 시대의 관점에 따라 많은 해석이 따 른다. 징키스칸에 대한 많은 일화와 평가는 주로 지배를 받아 피해가 컸던 러시아나 회교진영의 종교지식인들과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72

73 소련등인데, 이들은 약탈과 파괴를 즐기던 색한 이나 문명을 파괴한 미개한 악마 라는 표현까지 쓴 다. 그리고 긍정적인 평가로는 군사문제나 전쟁문제를 연구하는 병법 전문가들로 독특한 전략가와 정복자 라고 평가를 한다. 그리고 한 나라를 만든 왕의 옆에는 항상 슬기롭거나 지혜로운 충직한 신하들이 있다. 비록 야율초재는 공 식적인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인재를 보는 안목이 탁월한 징키스칸과 그의 아들 오고타이에 겐 책사이자 스승이었다. 야율초재가 몽골국의 안정을 위해 내새웠던 유교화( 儒 敎 化 )와 중원화( 中 元 化 )는 원 세종 쿠빌라이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칫하면 한순간의 북방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를 중국역사와 더 나 아가 세계사에도 몽골민족의 이름을 올리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야율초재-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최인호 유림) 73

74 공자 -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 최인호 유림 :00 공자 -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최인호 유림) 喪 家 之 狗 의 신세 공자가 또 다시 위나라를 찾아 갔을 때는 노나라의 애공 6년(BC 489년) 공자의 나이 63세였다. 56세에 시작 된 주유천하가 이미 8년째에 접어든 종반기의 무렵이었다. 공자는 물론 제자들도 모두 지쳐 있었다. 스승 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제자들은 극도의 불만을 표출하기시작했다.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입국했을 무렵 부터는 각자 자생하여 자구책을 모색할 때였다. 공자 -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 최인호 유림 74

75 당시 위나라는 공자를 우대하였던 영공은 이미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원래는 태자 괴외가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이 법도였으나 아버지의 음탕한 부인인 남자를 죽이는 것을 실패 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 돌아오려는 것을 무력으로 막았던 사람이 출공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아버지 괴 외를 무력으로 제지한 출공 밑에서 벼슬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인을 추구하겠 다는 뜻을 밝힌다.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이에 제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특히직선적인 성격의 자로는 스승의 이런 태도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 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에게 물었던 자공과는 달리 정공법으로 묻는다. 만일 위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부탁하신다면 선생님은 무엇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나 같으면 반드시 명분 먼저 바로잡겠다 이 말을 듣자 자로가 대답했다. 아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느닷없는 자로의 탄식에 의아해진 공자가 다시 물었다. 그것 때문이라 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이 세상일에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계시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만 생각하신다는 뜻이겠지요. 도대체 이름 같은 것을 바로잡아서 어찌하시 겠다는 것입니까? 자로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 명의 순간에도 고리타분하게 만사의 이름부터 바로잡겠다는 스승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단순한 자로는 순간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여 말한다. 자로 너까지 이러할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사물의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언어의도리가 맞 지 않는 법이다. 언어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하는 바의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을 죄과에 알맞게 줄 수가 없게 된다. 형벌이 죄과에 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안심하고 놓을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군자란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하고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서 군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명분이 다. 명분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공자 -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 최인호 유림 75

76 공자가 자로에게 말하였던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必 也 正 名 乎 ) 라는 정치철학에서 비롯된 정명주 의( 正 名 主 義 ) 는 공자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철학이다. 이는 자로의 불평처럼 얼핏 보면 우원한 공론( 空 論 )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자기에게 주어진 명칭이나 명분에 꼭 맞는 올바른 상태에 있 다는 것은 질서의 극치를 뜻하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이란 칭호에 딱 맞는 행동을 하고, 신하는 신하란 이 름에 딱 들어맞는 행동을 하며, 백성은 백성이란 이름답게, 관청이나 학교는 자신의 명분에 딱 들어맞는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 국가는 원칙에충실하게 다스려지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제나 라의 경공에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라는 대답과 일맥상통하는 철학이었던 것이다. 各 自 圖 生 자로는 스승의 대답을 통해 임금답지 못한 출공이 다스리고 있는 위나라에서는 절대로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스승의 결단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각자 뿔뿔이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하 였다. 이미 수년 전 노나라에 초빙되어 스승의 곁을 떠난 염구처럼 제자들은 분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다. 우선 외교에 뛰어난 자공은 노나라의 초빙으로 사신으로 등용되며, 자로는 위나라의 작은 마을의 읍재 ( 邑 宰 )가 된다. 공자 - 정치에서 명분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 - 최인호 유림 76

77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12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77

78 조선시대 임금의 총애를 받다 비운의 운명을 산 두 사람. 趙 光 祖 와 丁 若 鏞. 조광조 ( 趙 光 祖 )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정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 알성시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로 임명됨으로써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불과 4년만에 일찍이 전제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 조광조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조광조는 경연( 經 筵 )을 통해 중종에게 수년간 경서를 강론하고 임금에게 갖출 덕에 대해 유세를 계속해왔 다. 이 경연은 중종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한편, 정사도 의논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이 자리는 이미 조광조의 독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가 경연에서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다 른 사람은 말을 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날에도 조광조의 일파 인 양팽손, 기준, 박세희, 최산두 등이 계속 발언을 독점하여 어떤 때는 경연이 하루종일 계속되어 같이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78

79 있던 신하들은 물론 중종까지도 괴로움을 참지 못해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 일파는 기성 관리들을 깔보아 비록 상사일지라도 결례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최인호, 유림 1권) 정약용 ( 丁 若 鏞 )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다산에 대한 임금의 보살핌과 관심이 날로 깊어져 밤이 깊어서야 끝날 때가 많아지자,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기하고 나섰다. 친구 홍시보( 洪 時 보)가 충고했다. 자네 좀 조심하 게, 우리 청지기에 옥당의 아전이 된자 가 있는데0 그자가 야밤에 정공의 야대( 夜 對 )가 끝나지 않으면옥 당에서 아전을 보내 엿보느라 걱정되어 잠을 자지 못합니다. 라고 했네. 자네는 그런 걸 감당하겠나. 이렇게 해서 자주 임금의 칭찬을 받고, 학문이 깊어질 수록 시기하는 사람도 늘고 그를 해치려는 무리들이 패거리를 지어 비방하기 시작했다. 진사과에 합격했던 시절만 해도 가깝게 지내던 목만중, 이기경, 홍낙안 등도 공격의 칼을 갈았다. 이기경은 한 때는 함께 어울려 과거공부도 하고, 천주교서적도 함께 읽었다. 일 찍이 진사과에 합격하고 다산과 같은 과거에 합격한 동방( 同 榜 )친구. 모두가 그를 외면할 때에도 다산만은 친구란 한번 친구 삼았던 것 자체를 놓아서는 안된다 며 가까이 지냈고, 이기경이 상소로 유배가자 집 안을 도와주고 해배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가까이 지냈건만, 이기경은 끝내 우정을 저버리고 천주교에 관계된 사람을 싸잡아 진산사건(윤지충 사건) 을 계기로 사당( 邪 黨 )이라고 공격했다.(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79

80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80

81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달콤한 꿀임과 동시에 독이다. 따라서 절제와 겸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 야 한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 조광조와 정약용 81

82 맹자의 조세정책 - 맹자(박경환 박경환) :13 1. 맹자의 조세정책 적절한 세금이 필요하다. 백규( 白 圭 )가 물었다. 나는 20분의1의 세율을 적용해 세금을 거두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그대의 방법은 오랑캐 나라인 맥( 貊 )의 방법입니다. 만가구나 되는 나라에서 한 사람이 질그릇을 굽는다면 되겠습니까? 맹자의 조세정책 - 맹자(박경환) 82

83 백규가 대답했다. 안됩니다. 그릇이 쓰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맹자가 말했다. 오랑캐 나라인 맥에는 오곡이 자라지 않고 오직 기장만 자랍니다. 또 성곽과 주택, 종묘 와 제사와 관련된 예법이 없고, 제후들이 서로 예물을 보내고 접대하는 일도 없으며, 관직과 관리들도 많 지 않기 때문에 20분의1의 세금을 받아도 충분합니다. 지금 중국에 살면서 인륜을 버리고 관리를 없애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질그릇의 생산량이 적어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관리가 없어서 야 되겠습니까? 堯 舜 이 시행했던 십분의 일 세금보다 적게 하려는 것은 큰 오랑캐나 작은 오랑캐이고, 요 순이 시행했던 방법보다 무겁게 하려는 것은 큰 걸( 桀 )이나 작은 걸( 桀 )입니다. 해설: 각종의 의식이나 제도와 같이 국가의 통치행위와 관련된 문화적 요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자 하 12-10) 맹자의 조세정책 - 맹자(박경환) 83

84 적절한 과세 정책이 필요하다. 맹자가 말했다.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에는 직물을 거두는 것과 곡물을 거두는 것, 그리고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 있다. 군자는 세 가지 중 한가지만을 적용하고 나머지 두 가지는 완화해준다. 그 중 두 가지를 동시에 적용하면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일이 있고, 그 중의 세 가지를 동시에 적용하면 부모와 자식이 흩어지게 된다. (진심 하 14-27) 2. 백성은 사직이나 군주보다 귀하다 맹자의 조세정책 - 맹자(박경환) 84

85 맹자가 말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하찮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꾼 다. 이미 살진 희생을 마련하고 제물로 바친 곡식이 정결하며 때에 맞게 제사를 지냈는데도 가무이 들거나 물난리가 나면 사직의 신을 바꾼다. 民 爲 貴 社 稷 次 之, 君 爲 輕 (진심 하 14-14) 해설: 백성은 군주의 소유물이고 통치란 곧 백성을 압박하고 수탈하는 것이라고 보던 전국시대의 일반적 인 상황에서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진보적인 견해 라고 할 수 있다. 3. 정치의 세 가지 중요한 것 맹자가 말했다. 어질고 현능한 사람을 신임하지 않으면 나라가 텅비게 된다. 예의와 의리가 없으면 상하의 관계가 어지 러워지게 된다.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재정이 부족하게 된다. (진심 하 14-12) 맹자의 조세정책 - 맹자(박경환) 85

86 性 善 說 의 논리와 四 端 - 맹자(박경환 박경환) :56 1. 性 善 說 의 논리와 四 端 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不 忍 人 之 心 )을 가지고 있다. (중략) 孟 子 曰, 人 皆 有 不 忍 之 心 )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이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문득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을 본 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 분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고, 마음 사람과 친구들로부터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 며, 어린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惻 隱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羞 惡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 辭 讓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是 非 之 心 )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 仁 )의 단서( 端 )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 義 )의 단서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 禮 )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 智 )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네가지 단서( 四 端 )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네가지를 가지고 있는데도 자신은 선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고, 자기 性 善 說 의 논리와 四 端 - 맹자(박경환) 86

87 의 군주는 선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무릇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네가 지 단서를 모두 확대시켜 가득 차게 할 줄 알면 마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샘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 과 같다. 진실로 그것을 확대시켜 가득 차게 할 수 있으면 천하라도 보존할 수 있고, 만일 확대시켜 가득 차게 하지 않으면 부모조차도 부양할 수 없다. 惻 隱 之 心 - 仁 羞 惡 之 心 - 義 辭 讓 之 心 - 禮 是 非 之 心 - 智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이해득실을 계산한 결과 나온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 위이다. 따라서 맹자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타고나면서부터 선한 본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즉 사 람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는 선한 본성이 특정한 상황을 경험할 때 순간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선한 마음은 선한 본성이 드러나는 단서이자 싹이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 한 것은 그러한 싹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기르는 노력이다. (공손추 상 3-6) 性 善 說 의 논리와 四 端 - 맹자(박경환)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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