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_2부-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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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결정요지 김경순 외 204명이 1950년 9월 26일부터 1950년 12월 말경까지 인민군 점령 시기 부역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울진경찰서와 특무대(CIC),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보충대 군인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신림 올시골, 후정리 부둘골 등 여러 곳에서 총살 및 생매 장의 방법으로 집단살해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김경순( 金 景 淳, 사건번호 다-485) 외 204명의 울진지역 주민들은 1950년 9월 26일부 터 1950년 12월 말경까지 울진경찰서와 특무대(CIC),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보충 대 군인에 의해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신림 올시골, 죽변면 후정리 부둘골 등 여러 곳 에서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집단총살당하거나 생매장되었다. 2.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본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50년 9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국군 제3사단 소속 전투부대 군인은 수복작전 초기 작전지역에서 일부 주 민들을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총살하였고,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특무대의 지시 하에 죽변지서 경찰로부터 같은 혐의로 인계받은 주민들을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군인이 후정리 부둘골로 끌고 가 집단총살하거나 생매장하는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또한 1950년 10월 말경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울진경찰 서 경찰이 각 지서로부터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인계받은 주민들을 신림 올시골로 끌고 가 집단살해하였고, 1950년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은 일부 주민들을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울진경찰서로 압송한다고 하면서 황보리 문둥이골로 끌고 가 집단살해하였다. 1950년 늦가을 무렵 사계리 나그네골에서도 하당지서 경찰이 같은 이유로 일부 주민들을 집단살해하였다. 3. 본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복작전 초기 국군에 의한 희생자 9명, 후정리 부 둘골 약 40명, 신림 올시골에서 250여 명, 후퇴기 지서 경찰에 의한 희생자 20여 명을 포 함하여 총 320여 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울진경찰서에서 입수 한 부역자 명부 (울진경찰서, 1962) 등의 자료에서 거론된 4,569명의 명단을 기초로 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23

2 제 2 권 진지역 8개 읍면 133개 마을에 대하여 현지조사를 한 결과, 이 중 희생자 205명과 희생추 정자 51명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4. 희생자 및 희생추정자로 확인된 256명 중에는 청장년 남성이 다수(94%)를 차지했지 만 여성과 어린이도 2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시기에 공적인 역할을 맡거나 특정 단체에 가입하는 등의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러한 부역혐의에 대한 판단은 부역자 처리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경의 임의 분류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5. 본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행위자는 울진경찰서와 특무대,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 와 보충대 군인이다. 특무대와 헌병대는 경찰이 검거 연행한 부역혐의자들을 즉결처형 의 형식으로 살해할 것을 지시한 주체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상부로부터 어떠한 명령 이나 지시를 받았는지, 서로 간에 어떠한 협력관계 속에서 주민들을 살해하였는지에 대 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6.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울진은 피난을 가지 못한 우익인사까지 도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복 직후부터 무장한 군경이 비무 장 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아무런 적법한 절차도 없이 살해한 행위는 명백한 위법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생명권과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더 구나 부역자 처리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경이 임의 분류에 따라 민간인을 살 해한 행위는 전시의 특수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당시의 실정법과 절 차법을 위반한 것으로서 반인륜적 야만행위였다. 7. 본 사건으로 유족들은 가족구성원의 상실과 가족 해체, 연좌제 등에 의해 이루 형언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으며, 지역민들 또한 씨족 또는 마을주민 간의 갈등과 반목으로 지역공동체가 무너지는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 령사업의 지원을 통해 유족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고 지역공동체 회복에 힘쓸 것과 제 적부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문서기록의 정정, 공식 역사기록에 진실규명된 내용의 등 재, 그리고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 실시 등을 할 것을 권고한다. 전 문 사 건 다-2319 외 6건,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신청인 김년월 외 6명 결정일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이유 기재와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신청요지 김년월 외 6명(중복신청 1)은 2005년 12월 5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 진실 화해 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한국전쟁 시기 경상북도 울진군 일대 에서 민간인들이 군경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자는 모두 14명이다. 신청서의 접수현황은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신청서 접수 현황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희생자(성별, 사건 당시 나이) 신청인과의 관계 김영홍 김경순( 金 景 淳, 남, 34세) 부친 비고 김년월 윤종연( 尹 宗 淵, 남, 26세) 남편 3-1 김년월 윤종연( 尹 宗 淵, 남, 26세) 남편 중복 신청 3-2 이규호 이종대( 李 鍾 大, 남, 22세) 부친 3-3 이능식 최현주( 崔 鉉 周, 남, 25세) 남편 3-4 이종복 이효세( 李 孝 世, 남, 32세) 부친 전화자 이윤세( 李 潤 世, 남, 27세) 시부 3-6 전갑중 전병세( 田 炳 世, 남, 27세) 종부 3-7 황기출 이준권( 李 準 權, 남, 25세) 남편 3-8 전학중 전병인( 田 炳 仁, 남, 33세) 부친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25

4 제 2 권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희생자(성별, 사건 당시 나이) 신청인과의 관계 3-9 황재운 황병극( 黃 炳 極, 남, 26세) 부친 비고 주문영 주성수( 朱 性 守, 남, 42세) 부친 남경탁 남로( 南, 남, 28세) 부친 남상욱 남재열( 南 載 烈, 남, 26세) 부친 최금조 전중락( 田 重 洛, 남, 21세) 시동생 신청인들은, 김경순 외 수백 명이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부역을 하였다는 혐의로 1950 년 수복 직후부터 1 4후퇴 전까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어떠한 적법절차도 없이 울진군 신림 올시골 외 여러 곳에서 집단총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사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국군이 울진을 수복하자 경찰이,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부역을 하였다는 이유로 주 민들을 각 지서에 연행하여 조사, 분류한 후 일부 주민들을 삐삐선으로 묶어 울진경찰서 로 이송하였다. 이종대 등 40여 명의 기성면 주민들은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어 경찰과 군 인들에 의해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 집단총살되었다. 2) 윤종연은 매화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가 2~3일 후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어 신 림 올시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3) 도정업( 搗 精 業 )에 종사하던 주성수는,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도정 일을 보았다는 이 유로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총살되었다. 4) 남재열과 남로는 수복 후 울진경찰서로 연행되어 경찰에 의해 신림 올시골로 끌려 가 총살되었고, 이 중 남재열의 시신은 수습하였다. 5) 전중락은 수복 후 향토방위대에 소속되어 보초업무를 보고 온 후 밤에 경찰에 연행 되었다. 이후 전중락은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그의 형이 부역한 후 도피했다는 이유로 형 을 대신하여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고 하였다. 나. 처리경과 신청인들이 접수한 7건 1) 중 4건은 울진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분류되어 ) 신청 건수는 7건이나 다-2711건의 경우 9명이 집단으로 신청하였고, 그 중 대표 신청인 김년월은 다-2319 건으로 중복 신청하였으므로 총 신청인은 14명이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년 1월 9일 조사개시되었고, 영남군경 사건으로 분류되어 조사개시 결정된 3건 또한 조사 과정에서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확인되어 2007년 9월 7일 이관받아 조사를 진 행하였다. 2. 조사의 근거와 목적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조제1항제3 호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에 포함된다고 보고 조사개시 결정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개과정, 가해주체 및 가해 명령계통, 희생규모 와 희생자의 신원 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3. 규명 과제 신청인들은, 1950년 10월 초순 수복 직후부터 1 4후퇴 전까지 경상북도 울진군 일원 에서 군인과 경찰이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실재 여부와 함께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다수의 주민 들이 어떠한 경위로 집단살해되었는가, 누가 어떠한 명령체계에 의해 적법한 절차를 거 치지 않고 이들을 불법적으로 집단살해하였는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4. 조사방법 가. 신청인 및 참고인 조사 1) 신청인 조사 신청인 조사는 2007년 4월 5일부터 2008년 3월 27일까지 진행하였다. 신청인 조사 현황 은 <표 2>와 같으며, 진술요지는 별첨자료의 <표 17>과 같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27

6 제 2 권 <표 2> 신청인 진술조서 작성 현황 연번 사건 번호 희생자 (신청인과의 관계, 사건 신청인 당시 나이) 진술일 진술장소 김영홍 김경순 (부, 34세)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실 , 2711 김년월 윤종연 (남편, 26세) 울진군 원남면사무소 이규호 이종대 (부, 22세) 대구 중구청 이능식 최현주 (남편, 25세) 울진군 근남면 신청인의 자택 이종복 이효세 (부, 32세)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실 전화자 이윤세 (시부, 27세)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실 전갑중 전병세 (부, 27세) 대구 중구청 황기출 이세권 (이준권) (남편, 25세) 울진군 원남면 사무소 전학중 전병인 (부, 33세) 대구 중구청 황재운 황병극 (부, 26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실 주문영 주성수 (부, 41세) 울진군청 남경탁 남로 (부, 28세) 울진군청 남상욱 남재열 (부, 26세) 울진군청 최금조 전중락 (시동생, 21세) 울진군청 본 사건 신청인의 진술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 수복 후 1950년 10월 중순부터 각 마을의 부역혐의자들이 지서로 연행되기 시작하 였다. 3) 대부분의 부역혐의자들은 각 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울진읍내에 거주하는 일부는 군인에 의해 연행되기도 하였다. 4) 2) 별첨자료 <표 17> 신청인 진술요지 참조. 3) 울진경찰서에서 생산한 경찰서 연혁 (1956)에도 신청인들의 부역혐의자 연행시기에 대한 진술을 뒷받침 해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50년 10월 6일 인민군 패잔병 1,000여 명이 울진시내를 재진입하여 10월 7일이 되어서야 경찰은 울진군을 완전히 치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역혐의자 연행은 10월 중순 부터 시작되었다. 4) 신청인 김영홍,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각 지서로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은 구금된 상태에서 약 4~5일간 조사를 받은 후에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어 다시 조사를 받고 구금되었다가 신림 올시골에서 집단총살되었 다. 시신 수습을 위해 현장에 간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신림 올시골에는 구덩이 와 물이 흐르는 골에 삐삐선에 묶여 총살된 사람들의 시신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5) 시신의 일부는 수습이 되었으나, 많은 수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2) 피해자 측 참고인 조사 신청된 사건을 중심으로 목격자, 미신청 유족 등을 대상으로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였 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다수의 참고인들이 신림 올시골 이외에 다른 집단희생지가 있다 는 진술을 하였고, 울진경찰서에서 부역자 명부 6) 등 사건과 직접 관련된 자료가 입수되 면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새로운 차원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울진군은 지 리적으로 태백산맥에 의해 내륙지방과 격리된 채 오늘날까지도 과거의 지역공동체가 유 지되고 있는 편이므로, 부역자 명부 (1962) 등에 거론된 희생자에 대한 현지 확인이 가 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2007년 11월 13일부터 2008년 1월 12일까지 현지에서 참고인 조사 를 실시하였다. 현지 참고인 조사는 10개 읍면 196개 마을 중 부역자 명부 에 희생자가 기재된 8개 읍 면 133개 마을에서 지자체의 협조와 마을 이장의 주선으로 사건 당시부터 마을에 살았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는데, 집단 희생지 미신청 희생자 신원 사건경위 목격 내 용 희생이유 등에 대한 진술을 청취하는 형태로 진행했다. 7) 참고인 조사현황은 <표 3> 과 같으며, 진술요지는 별첨자료 <표 18>과 같다. 5) 신청인 김년월, 진술조서( ). 6) 이 보고서 16-19쪽 참조. 7) 조사한 마을은 울진읍 27개 마을 증 20개, 근남면 20개 마을 중 20개, 원남면 16개 마을 중 4개, 기성면 24개 마을 중 24개, 북면 29개 마을 중 29개, 온정면 22개 마을 중 9개, 서면 12개 마을 중 12개, 죽변면 15개 마을 중 15개 마을 등이었다. 8개 읍면 중, 후포면과 평해읍은 부역자 명부 등에 희생자로 추정할 수 있는 처단, 처형, 송치 등 처벌내용이 기재된 사람이 없어 제외하였다. 그러나 참고인 조사결과 울진 남단으로 분류되는 후포면과 평해읍 그리고 기성면 주민 일부가 1950년 11월경에 후포 바닷가에서 수장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조사인력과 시간상의 제약으로 추가 보강조사를 하지 못했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29

8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사건번호, 개별 사건명 진술일 진술장소 희생자 1 이서촌 485, 신림 올시골 사건 영주시청 김경순 2 이태호 신림 올시골 사건 원남면 면사무소 삼산 1리 자택 진실화해 위원회 3 윤완규 신림 올시골 사건 남우현 신림 올시골 사건 윤영재 2319, 윤종묵 7 김봉규 8 주하영 수복초기작전 중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수복초기작전 중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후정리 부둘골 사건 원남면 면사 무소 원남면 면사 무소 원남면 면사 무소 진술 형태 진술 조서 황병기, 이호권, 이세권(이 1, 2 차 준권), 이효세, 이윤세, 이 진술 종대, 전병세, 전병인, 황병 조서, 극, 이능선, 한병희, 황문 통화 걸, 김만출, 이순세 보고서 윤종연 윤종연 윤종연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울진 군청 윤건택(윤성만), 김병훈 진술 조서 울진 군청 김병훈 울진군청 9 전선수 울진 군청 10 주정균 후정리 부둘골 사건 장인현 후정리 부둘골 사건 전하진 후정리 부둘골 사건 전찬업 후정리 부둘골 사건 장만호 <표 3> 피해자 측 참고인 진술조서 작성 현황 신림 올시골사건, 후정리 부둘골 사건 주성수, 주교영, 주학원, 주 원영의 부친 전중락, 남한택 전병찬, 전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 서 후정 2리 마을회관 전화숙 진술 조서 후정 2리 마을회관 진실화해 위원회 참전 유공자회 전화숙 진술 조서 통화 보고서 후정 1리 마을회관 남분남, 전치호 진술 조서 후정 1리 마을회관 남분남, 전치호 진술 조서 - 진술 조서 15 이봉수 후정3리 - 진술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사건번호, 개별 사건명 16 전운규 후정리 부둘골 사건 이봉식 죽변 후릿개 사건 주용숙 죽변 후릿개 사건 장익수 20 남병수 후정리 부둘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후정리 부둘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진술일 진술장소 희생자 주상오 신림 올시골 사건 자택 죽변 5리 자택 죽변 4리 마을회관 화성 4리 자택 화성 1리 마을회관 화성 1리 마을회관 호월 3리 마을회관 장원수, 남종철, 남형석, 남 우하, 남종옥 장원수, 남종철, 남형석, 남 우하, 남종옥 - 진술 형태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22 전홍로 신림 올시골 사건 호월 2리 자택 장원희, 주순희, 전구봉, 주 진술 유원, 전금옥, 주진웅, 전재 조서, 현, 전여현, 남옥동, 윤영 통화보 규, 윤정규, 박경석, 주학원 고서 23 김홍연 장일균 후정리 부둘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전인수 후정리 부둘골 사건 호월 1리 마을회관 진실화해 위원회 25 주두원 봉평리 자택 26 주선녀 신림 올시골 사건 남중익 신림 올시골 사건 박용선 전옥분 민복희 권순자 신림 올시골 사건 남익산 신림 올시골 사건 장명규, 전호석, 장의호, 장 철균, 김문일 진술 조서, 통화 보고서 호월 1리 마을회관 장명규, 전호석 진술 조서 정림 1리 마을회관 - 진술 조서 남중영, 남용헌, 문봉술, 남 진술 운종, 남흥용(남성용), 남봉 조서 수(남해수), 남재연 정림 1리 마을회관 남용헌(남왈수) 진술 조서 정림 2리 마을회관 정림 2리 마을회관 남로, 남재열, 남상기, 남창 호, 남구정, 남만년 남로, 남재열, 남상기, 남창 호, 남구정, 남만년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31

10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사건번호, 개별 사건명 30 윤성규 신림 올시골 사건 진술일 진술장소 희생자 정림 3리 마을회관 31 주상태 신림 올시골 사건 대흥리 자택 32 장상연 신림 올시골 사건 대흥리 자택 33 임병식 이호상 신림 올시골 사건 도치국 신림 올시골 사건 최소남 신림 올시골 사건 연지 2리 자택 연지 2리 자택 연지 3리 자택 연지 1리 자택 37 주지영 신림 올시골 사건 명도리 자택 38 권길웅 신림 올시골 사건 박인숙 신림 올시골 사건 온양 1리 마을회관 온양 1리 마을회관 40 노수명 신림 올시골 사건 명도리 자택 진술 형태 박산출, 주우영, 남갑영 진술 조서 박도명, 박도원, 권응삼, 양 재두 박도명, 박도원, 권응삼, 양 재두 -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이호선, 이석암, 임칠석, 김 진술 경순, 이근아, 장대현, 도치 조서 명, 주용덕, 이성재 도치명 이석암, 이근아 주명원 오해룡, 주성원, 박춘서, 이 해식 오해룡, 주성원, 박춘서, 이 해식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노복순, 오연옥, 남중상, 정 진술 동술(정주하), 정대술(정난 조서 하) 41 엄정섭 신림 올시골 사건 검성리 마을회관 심원식, 주인식 진술 조서 42 전병석 나곡리 자택 43 이규원 신림 올시골 사건 김득수 박영서 신림 올시골 사건 주인 2리 자택 주인 3리 자택 박익성 이재철, 전용섭, 전경수, 전 병호 진술 조서 진술 조서 김응용, 박억조, 박응용, 김 종대, 김규선, 심학수, 김영 석, 장하규, 장후길, 전병 진술 문, 전병권, 전상익, 임선 조서 호, 심경수, 심찬수, 남00 (전병문 처), 장기동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사건번호, 개별 사건명 45 장진복 신림 올시골 사건 상당리 자택 46 전종록 김활경 47 홍순준 장홍용 장인열 김석중 반원복 장인묵 남상순 김일석 신림 올시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진술일 진술장소 희생자 하당리 마을회관 하당리 마을회관 소곡 1리 마을회관 소곡 1리 마을회관 50 전은술 신림 올시골 사건 신림리 자택 51 남기욱 김형철 남두호 53 이종진 최삼석 김금자 후정리 부둘골 사건 고목 1리 자택 김치호 주무돈 주동락 후정리 부둘골 사건 박명래, 남필년, 엄영학 진술 형태 진술 조서 장팔석, 방성문, 방동석 진술 (성), 방성출, 최익재, 정영 조서 대, 최익남, 박병기 장팔석, 방성문, 방동석 진술 (성), 방성출, 최익재, 정영 조서 대, 최익남, 박병기 전병정, 권달용, 이상학 진술 조서 전병정, 권달용, 이상학 진술 조서 박순학, 홍종영, 정정갑, 최 진술 형석, 이광해, 노종영, 최원 조서 기, 최형일, 최원수 고목 2리 마을회관 전병찬 진술 조서 전화숙, 전병찬, 전 진술 조서 두천 1리 마을회관 전두만, 최완석 진술 조서 두천 2리 자택 고성 1리 마을회관 56 최원기 후정리 부둘골 사건 남재창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홍동표 후정리 부둘골 사건 장윤한 신림 올시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고성 1리 마을회관 이유도(사계리) 주교영, 주수원, 주부원, 주 치영 주교영, 주수원, 주부원, 주 치영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고성 2리 마을회관 전영로 진술 조서 고성 2리 마을회관 전영로 진술 조서 소곡 2리 자택 주성원, 주순원, 남왈수 진술 조서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33

12 제 2 권 연번 성명 60 주재락 관련사건번호, 개별 사건명 신림 올시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진술일 진술장소 희생자 방정만 장윤태 63 여계현 김봉학 64 사재철 남상형 안병삼 신림 올시골 사건 하원리 백골 사건 쌍전리 계곡 사건 소곡 2리 자택 광회 1리 자택 주성원, 주순원, 남왈수 전명칠, 김영식 진술 형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하원리 마을회관 박인주, 사봉록 진술 조서 광회 2리 자택 김덕문 최수동 신림 올시골 사건 방한기 68 김선도 윤성오 수복초기작전 중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삼근 1리 자택 김태화, 편인한(편종백 부 친) 남삼수, 문동모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삼근 2리 마을회관 문동모, 박흥식 진술 조서 행곡 4리 자택 노음 1리 개인 사무실 최종구 노음 2리 자택 69 노석기 신림 올시골 사건 주진석 이종길 신림 올시골 사건 구산 4리 자택 이석구, 남무호, 임중화, 전 진술 구현, 전복문, 남의석, 주우 조서 형 남용순, 윤정옥, 남 (남 용순의 자), 남덕중 노재극 진술 조서, 통화보 고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수곡 1리 마을회관 임명승 진술 조서 71 김병철 정명리 낙원다방 김병태 진술 조서 72 김성곤 신수규 기성리 자택 74 황병욱 정명 1리 마을회관 김유현 진술 조서 정명 2리 자택 한도학 황정도, 김병태, 안위교 진술 조서 진술 조서 75 이대권 황재규 방율리 마을회관 황재동, 최현주 진술 조서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이정로 76 황호석 박영호 77 최정영 78 김창영 79 안병욱 80 황윤갑 황춘곤 81 황두진 이순자 관련사건번호, 개별 사건명 수복초기작전 중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수복초기작전 중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 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 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 닷가 희생 사건 진술일 진술장소 희생자 사동 1리 마을회관 사동 3리 자택 진술 형태 이갑춘, 이순세, 황병해 진술 조서 김영동 진술 조서 산포 1리 마을회관 박원출 진술 조서 척산 1리 자택 소태 2리 마을회관 안병위, 안두원 진술 조서 황진원(황용수), 황진규, 황 진술 진수, 이영택, 김태원, 이병 조서 국, 이익래 금천 3리 마을회관 장규환 진술 조서 82 장덕진 갈면리 마을회관 장낙규, 황하일 진술 조서 83 전복수 황만희 84 윤병호 김세현 신림 올시골 사건 삼산 2리 자택 85 박봉학 후정리 부둘골 사건 전화 박병기 86 윤근춘 수복초기작전 중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노음3리 자택 87 주극중 후정리 부둘골 사건 죽변리 대동한약방 88 윤암중 진실화해 위원회 피해자 측 참고인들의 진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 매화 2리 마을회관 최동탁, 박봉실 진술 조서 윤억덕, 이능선, 이능만, 김 극동, 김창동, 김만출, 한성 진술 희, 김예동, 김명동(김만 조서 동), 김대현 전재식, 윤건택, 김병훈, 성 명 불상 2명 전화숙, 주진동, 성명 불상, 갓난아기 윤상헌 통화보 고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울진 수복 과정에서 국군 3사단 소속 헌병대, CIC(특무부대, Counter Intelligence Corps), 전투부대 등 군인들에 의해 부역혐의자들이 다수 집단살해되었다. 국군에 의해 근남면 노음리 매림동에서 노음3리 부역혐의자 5명이 집단총살되었고, CIC에 의해 덕천 8) 별첨자료 <표 18> 참고인 진술요지 참조.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35

14 제 2 권 백사장에서 신화리 전병찬 등 주민 2명, 헌병대에 의해 근남면 주민 2명 등이 총살되었 다. 1950년 10월 20일, 죽변에 주둔한 정보부대 및 전투부대 군인들이 죽변지서에 구금 된 부역혐의자들과 울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인계받은 부역혐의자들을 조사한 뒤, 그 가운 데 약 40명을 포승줄에 묶어 후정리 부둘골(현 동아아파트 사택 뒤)로 끌고 가 구덩이를 파고 집단살해하였다. 이 중 작은 구덩이에 묻힌 장명규 등 주민 7명은 생매장되었다. 1950년 10월 중순부터 울진경찰서가 수백 명의 부역혐의자를 각 지서로 연행하여 분류한 뒤, 10월 말경부터 11월까지 신림 올시골로 끌고 가 집단살해하였다. 1950년 10월 중순경, 죽변에 주둔한 국군이 인민군 패잔병 및 다른 지역 부역혐의자 50여 명을 3~4차례에 걸쳐 죽변 후릿개로 끌고 가 집단살해하였다.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사이 전선이 다시 불안해지자 각 지서별로 부역혐의자 처 형이 진행되었다. 1950년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은 유치장에 구금된 12명의 부역혐의 자를 울진경찰서로 이송한다는 이유로 포승줄에 묶어 끌고 가던 중 기성면 황보리 문둥 이골에서 집단살해하였다. 1950년 늦가을(11월 말경) 하당지서 경찰은 지서에 재차 연행되었거나 검거되어 있 던 부역혐의자 중 7~8명을 한밤중에 호명하여 북면 사계리 나그네골로 끌고 가 살해하 였으며, 기성지서 경찰은 지서에 자수하러 오던 중 검거된 척산리 안병위, 안두원을 포함 한 부역혐의자들을 후포항에서 배에 실어 바다에 수장시켰다. 1950년 10월 중순부터 경찰의 부역혐의자 연행, 검거과정에서 전치호를 포함한 주 민 3명이 마을 어귀 등에서 살해되었다. 서면 하원리 백골, 쌍전리 계곡, 부구 염전 공동묘지 골짜기 등 여러 곳에서 수복 후 민간인 살해 사건이 있었다. 3) 경찰 측 참고인 조사 울진경찰서에서 입수한 자료 및 참전경찰전우회에서 입수한 회원 명단에 기재된 당시 울진경찰서 소속 경찰 및 의용경찰 14명을 참고인 자격으로 2007년 9월부터 2008년 5월 까지 3차에 걸쳐 조사하였다. 이 참고인들에 대해서는 수복 후 부역혐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인지 여부, 사건경위 및 과정,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지휘와 명령체계 등을 중점적 으로 조사하였다. 조사현황은 <표 4>와 같고 진술요지는 별첨자료 <표 19>와 같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표 4> 경찰 측 참고인 진술조서 작성 현황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진술일 진술장소 진술형태 1 남 의용경찰 울진군청 진술조서 2 주 경비계 순경 울진군청 울진 다방 진술조서 진술조서 3 전 의용경찰 울진군청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통화보고서 4 이 수사계 순경 울진군청 울진군청 진술조서 진술조서 5 임 죽변지서 순경 울진군청 마을회관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진술조서 통화보고서 통화보고서 6 황 하당지서 순경 울진군청 진술조서 7 김 순경 울진군청 진술조서 8 이 순경 울진군청 진술조서 9 홍 사찰계 형사 죽변 복지회관 자택 진술조서 진술조서 10 임 죽변지서 순경 울진군청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통화보고서 통화보고서 11 전 의용경찰 울진군청 진술조서 12 박 사찰계 순경 원남면사무소 진술조서 13 이 온정지서 순경 후포면사무소 진술조서 14 황 광회, 죽변지서 순경 평해읍사무소 진술조서 경찰 측 참고인들의 진술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9) 참고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수복 직후 울진지역은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CIC 등이 활동하였는데, 죽변항에는 국군 제3사단 보충대 1개 대대 10) 200여 명이 10월 말경 9) 별첨자료 <표 19> 경찰 측 진술요지 참조. 10) 참고인 임, 진술; 국방부(2003) 발간 자료에는 1950년 8월 15일에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협조로 경상 북도 학도기간대 를 창설하였는데, 동년 9월 8일 동해지구경비사령부 제1경비대대로 재편되면서, 육군 정 원( 正 元 )부대로 불리기도 하였다. 10월 8일, 부산항에서 미군 상륙정(LST)을 타고 이틀 후 강원도 울진 죽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37

16 제 2 권 까지 주둔하였다. 또한 1 4후퇴 당시에는, 원의상 소령을 대장으로 한 강원도 계엄 민사 부와 1군단 사령부 및 헌병대대가 울진에 주둔하였다. 수복작전 과정에서 사복을 입은 CIC가 부역혐의자를 총살하였다. 죽변항 주둔 보충대 사령부가 있던 죽변국민학교에 연행된 100여 명의 부역혐의자 들은 죽변지서 사찰계 형사 홍 에 의해 조사 분류되었고, 이 중 일부는 석방되었다. 수복 직후,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부역혐의자 중 일부를 헌병대 및 CIC가 가끔씩 와서 인계해 갔다. 후정리 민가와 죽변지서, 그리고 죽변국민학교에 수감된 부역혐의자들은 경찰에 의 해 포승줄에 묶여 현역군인에게 인계된 뒤 트럭에 실려 후정리 부둘골로 끌려가 집단총 살되었고, 일부는 생매장되었다. 이 과정은 헌병대와 CIC의 지시에 의해 수행되었다. 수복 후 울진경찰서 및 각 지서는 부역혐의자 일제 검거 및 연행 조사를 한 달간 진 행하였고 각 지서에 검거된 부역혐의자들은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어 울진경찰서 사찰계 홍 과 전 등에 의해 조사 분류된 후 1950년 10월 말경부터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 집단살해되었다. 신림 올시골 사건은 울진경찰서 주도로 수행하였지만, 초기에는 부역혐의자 총살 및 구덩이를 파는 일 등 일부 과정에 국군이 개입하였다. 온정지서 권, 전 에 의해 연행, 조사 분류된 부역혐의자 30~40명 중 장규 환 등 10여 명은 온정면사무소에 구금된 후, 지서장의 명령에 따라 성 차석의 지휘 하에 울진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50년 11월 말경~12월 초 사이 하당지서 경찰은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부역혐의자 를 집단살해하였다. 1950년 10월경 죽변에 주둔한 보충대 군인들이 삼척 부근에서 체포한 인민군 패잔 병과 부역혐의자 20~30명을 죽변지서 맞은편 의용소방대 창고에 구금, 조사한 후 죽변 후릿개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집단총살하였다. 경찰 측 참고인 대부분은 CIC 및 헌병대, 죽변면에 주둔한 보충대 군인, 그리고 울진경 찰서가 수복 후 치안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부역혐의자 일제 검거 및 색출작업을 통하 변 항구에 상륙하여 당시 후퇴하던 북한군 패잔병 소탕 임무와 울진면 사무소 등 공공시설 경비업무를 맡 다가 북진 명령에 따라 삼척을 거쳐 강릉으로 이동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 국전쟁의 유격전사,2003, 93-95쪽 참조). 또한 수복 직후부터 10월 말경까지 죽변에 주둔한 부대는 육본직할 제3유격대대(후방치안과 부역자 색 출 임무 년 11월 24일부로 동해지구경비사령부 제1경비대대로 재편)였다 는 기록도 있다. (육군본 부, 병과별 부대역사, 1959, 16쪽 참조)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여 수많은 부역혐의자들을 후정리 부둘골과 신림 올시골 등 여러 곳에서 조직적으로 집 단살해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부역혐의자 검거, 연행, 유치장 경비 업무 등 일부 업무는 수행했으나 총살집행 등 직접적인 가해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나. 자료조사 1) 경찰자료 조사 2007년 8월 27일 경북 울진경찰서 소장자료 조사결과 울진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 과 직접 관련된 자료인 경찰서 연혁, 부역자 명부, 정보계, 부역자 명부, 보안과 등 의 자료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울진경찰서에 그 사본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여 2007년 10월 18일, 11월 16일 1, 2차에 걸쳐 사건관련 자료 일체를 입수하였다. 가) 경찰서 연혁 (울진경찰서 연혁사) 이 자료는 울진경찰서에서 1951년에서 1956년 사이에 작성한 경찰서 연혁사이다. 이 중 1956년 5월 30일에 강원도경찰국장에게 보고한 경찰10년사 편찬에 관한 건 은 울진 경찰서 창설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좌익토벌 과정과 전쟁 발발에서부터 수복 이후까지 경찰 활동에 대한 내용이 연도별, 사건별로 서술되어 있으며, 울진경찰서 각 계별 보고와 각 지서, 출장소별 보고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수복 후의 부역자 포섭에 관해서는 10만 군민( 郡 民 ) 중에서 부역자가 총 2,215명이고 성분이 악질인 도피자는 545명이며, 시국 불 인식자 259명을 송치하고 1,411명을 훈계 석방하였다 라고 기재하고 있다. 특히 사찰주 관( 査 察 主 管 ) 보고 항목에는 수복 후 부역자 처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사건 과 직접 관련된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국가보안법 피의자 검거상황을 표로 정리하여 수 록하고 있는데, 1950년(단기 4283)도 처단자는 278명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사진 1>은 경찰10년사 편찬에 관한 건 경찰서 연혁 에 사찰주관 보고 항목에 기재되어 있는 국 가보안법위반 피의자 검거 상황 이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39

18 제 2 권 <사진 1> 국가보안법위반 피의자 검거 상황 나) 부역자 명부 (정보계) 울진경찰서 정보계에서 작성한 이 명부(1962)는 관내 지서별 일반 및 부역 공무원별 로 성명, 연령, 본적주소, 현주소, 6 25 당시 인민위원회 등에서의 직책을 담은 부서, 체 포 여부(검거, 자수, 월북도피, 행방불명, 송치 처단, 송치 등), 처벌내용(훈계방면, 처단, 도피 등), 비고(가족 동거 여부) 등으로 항목을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다. 울진경찰서 측은 이 명부의 서두에 월북도피자 568명, 전출자 230명, 사망자 273명, 현 재 거주자 1,911명 등으로 분류한 총 2,991명의 명단을 싣고 있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 나 진실화해위원회의 검토 결과 이 명부에 이름이 기재된 부역자 수는 3,054명이었고 이 중 114명은 중복 기재되어 있어 실 기재자 수는 2,940명이었다. 다) 부역자 명부 (보안과) 울진경찰서 보안과에서 작성한 이 명부(1983년 전 생산 추정)는 1962년도 부역자 명 부 (정보계)를 1970년대 이후 신원기록편람 등재를 위해 재분류 정리한 기록으로 보인 다. 이 명부는 총 2,716명(총 2773명 중 57명 중복 기재)의 부역자 명단을 성명, 생년월일, 성별, 원적 본적 주소, 특이사항, 비고로 항목을 구분하여 가나다순으로 기재하고 있다. 위 2권의 부역자 명부를 비교 분석한 결과, 1,087명은 동일인이 중복 기재되어 있으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로 이 두 자료에 기재된 울진지역 부역자 총수는 4,569명이다. 11) 명부에 기재된 사람들을 지역별 성별 소속 단체별로 분류한 결과는 별첨 <표 5>, <표 6>, <표 7>과 같다. 라) 신원기록편람 울진경찰서에서 1981년에 작성한 이 자료에는 현존자 5명, 현시찰자 33명, 부재자 258 명, 처형자 8명, 간첩 3명, 납북귀환자 28명, 납북미귀환자 12명, 정보사범 25명 등 총 672 명의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여기서 현존자란 6 25 당시 부역사실이 있는 자로 이 문서 기록 당시 현존한 자 를 말하며, 현시찰자란 6 25 당시 민청, 남로당, 인민위원회 의용 군 입대자, 월북자 등으로 관보자, 요시찰인, 보안처분대상자 등 을 말한다. 또한 부재자 란 6 25 당시 행불자, 월북자, 납북 미귀환자, 조총련 활동으로 북송된 자, 복역 출소 후 행불자 를 말한다. 처형자는 특이사항 란에 6 25 남로당 처형 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 형자 명단은 별첨 <사진 2>와 같다. 마) 울진경찰서 발행 기타 자료 요시찰인(기록 제1, 2, 5호) 요시찰인 삭제(기록 제7, 8호) 좌익수 처형자 요시찰인 명부 납치자 명부 요시찰인 카드 색인부 월북, 행불, 북송, 납북자 현황 당시 울진경찰서 재직 경찰관 신분장, 23명. 2) 기타 자료 울진군청, 울진군지, 윤암중, 나의 삶과 상실의 아픔, 영도출판사, 이덕열, 1930년대 울진지역의 사회운동,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조성운, 일제하 울진농민조합의 결성과정 및 그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사, 육군본부, ) 두 자료의 총수를 부역자 명수로 산정하는 이유는 경찰서 자료조사결과 1980년도 초까지 한국전쟁 당시 행불자 및 요시찰 인물에 대한 부역자 확인 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부역자 명부 (보안과) 자료의 명단이 추가로 확인된 부역자 명단으로 판단된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41

20 제 2 권 국방부,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육군본부, 병과별 부대역사, 육군본부, 헌병사령부, 한국헌병사, 대건출판사,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사비평사, 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Ⅱ, 다. 현장조사 신청인과 참고인들의 안내에 따라 사건발생 현장 6곳을 조사하고 촬영하였다. 우선, 1950년 9월 26일, 수복작전 초기에 일어난 노음리 매림동 사건의 현장을 확인하 고 촬영하였다. 신청인들이 희생자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신림 올시골은 사건 목격자인 신청인 김년월을 대동하여 현장위치를 확인하고 당시 현장상황에 대해 상 세하게 조사하였으며, 사건발생 당시부터 신림리에 거주해왔던 주민 최용인과 함께 신림 게골을 포함하여 신림 작은판데기 등 희생지 5곳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후정1리 부둘골에서는 피해자들의 연행경로와 매장된 위치를 확인하였고, 죽변 후릿개 에서도 피해자들이 총살된 현장과 매장된 위치를 확인하고 촬영하였다. 문둥이골과 나그 네골에서도 사건현장 위치를 확인하고 유골 매장 추정 지점에 대한 확인 작업을 실시하 였다. 사건현장 조사 현황은 <표 8>과 같고 각 사건별 발생위치는 <그림 1>과 같다. 또한 현장조사결과 확인된 사건현장은 별첨자료 <사진 3>과 같다. 구분 사건명 조사일자 장소 및 조사내용 1 수복작전 초기 노음3리 사건 후정리 부둘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표 8> 사건현장 조사 현황 참고인 윤종묵, 김봉규 대동, 노음리 매림동 희생지 확인 및 촬영 후정1리 이장인 전운규 대동, 희생지인 후정리 부둘골 현장 확인 및 촬영 현장 목격자인 신청인 김년월, 참고인 이병달, 윤영재 대동, 희생자 연행경로 확인 및 신림 올시골 희생지 중 1곳인 게 골 촬영 참고인 최용인 대동, 신림 게골 3곳과 신림 작은판데기, 신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구분 사건명 조사일자 장소 및 조사내용 림 큰판데기 등 희생지 5곳 확인 및 사진촬영 4 죽변 후릿재 사건 국군 후퇴기 황보리 문 둥이골 사건 국군 후퇴기 사계리 나 그네골 사건 현장 목격자 이봉식 대동, 죽변 4리 후릿개 희생지 확인 및 촬영 황보2리 이장 정경중 대동, 황보리 문둥이골 희생지 확인 및 촬영 현장 목격자 주재락 대동, 사계리 나그네골 희생지 확인 및 촬영 <그림 1> 사건발생지 지도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후정리 부둘골 사건 죽변 후릿개 사건 신림 올시골 사건 수산리 사건 산포리 사건 노음3리 사건 노음1리 사건 사동리 사건 황보리 문둥이골 사건 후포 바닷가수장 사건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43

22 제 2 권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한국전쟁 전후 지역 상황 울진군은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태백산맥과 연결된 오지에 자리잡고 있어 지리적 사회경제적 환경이 열악한 지역이다. 12) 울진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 탓에 한 국전쟁 전 사회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당시 이 지역에 우익단체 로는 지역유지들로 구성된 국민회(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대한청년단이 마을별로 조직 되어 있었다. 13) 한국전쟁 전 울진의 좌익세력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 다. 이와 관련하여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6)을 보면 당시 울진 좌익세력의 뿌리와 규모, 특징에 대해 기록한 대목이 있다. 14) 당관내의 좌익발상의 종적을 검토하자면 먼저 왜정 하에 있었던 단기 4276년 5월 7일 소위 창유계( 創 由 契 ) 사건 15) 이라 (중략) 8 15해방이 되자 동사건에 관계자 중 우익으 로 발족한 8명을 제외한 자녀 80명은 그대로 동사건 정치범이라는 구실 하에 정치야욕의 충동을 받어 당시 인민공화국 연하던 국가기관에 맹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던 결과 끝끝내 좌경에 흐르고 말았음. 관내주민에는 전( 田 ), 주( 朱 ), 남( 南 ), 윤( 尹 ), 최( 崔 ), 장( 張 )의 각성 이 각각 세력을 다투어 씨족적인 암투를 계속하여 오다가 이 기회를 당하자 기선을 제( 制 ) 12) 울진군은 1963년 행정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기 전까지 강원도에 편제되어 있었으며 8개 면에 약 10 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사건 당시 강원도 울진군은 북으로 삼척, 서로는 봉화, 서남은 영양, 남으로는 영덕, 동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의 험한 준령을 끼고 있었다. 또한 교통이 불편한 산간 오지이며 군내 토지의 80%가 산으로 되어 있어 농토가 적은데다가 수산업은 영세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씨족 중심의 집성촌을 이루어 끈끈한 유대감으로 열악한 자연환경과 취약한 경제적 상황을 극복하고 있 던 지역이었다. 울진군청 울진군지. 13) 참고인 주, 진술조서( ); 참고인 이봉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 진술조서 ( ). 14) 일제강점기 울진의 사회운동에 관해서는 이덕열의 1930년대 울진지역의 사회운동 (1992)과 조성운의 일 제하 울진농민조합의 결성과정 및 그 활동 (1990)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5) 창유계 사건은, 1941~1943년에 걸쳐 농민조합 야학출신, 유생,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준향계, 후란계, 향도계, 독서회 등의 계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목표로 하면서 상해에 조직원을 파견하는 등의 활동 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102명이 검거되고 그 가운데 22명이 송치되어 16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 중 윤종수는 대구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해 옥사했는데, 후에 동생 윤종연은 부역혐의로 살해되었다.(사 건번호 다-2319, 2711)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하면서 국가기관과 정당사회단체에 물미다싶이 몰려들어 전기 충동자의 사주 아래 무궤도 식인 정치운동에 선구가 되었던 것임. 16) 이 자료의 사찰계 보고건 에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 검거상황 대목에는 1947 년부터 1949년까지의 남로당 관련 검거자 수가 191명이라고 나와 있고, 검거를 피한 뒤 도피자 지방혼합부대 에서 활동한 인원이 70여 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로 보아, 한국 전쟁 전 경찰에 파악된 울진지역의 좌익계 인사는 대략 26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같은 자료에 의하면 도피자 지방혼합부대 는 울진군 당책 이우정의 지휘하에 부대원 70여 명 이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지서를 습격하고 우익인사를 암살하는 등의 테러 유격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17) 이후 그들은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 과정에서 일부는 사살 또는 처형되었으며, 일부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검거되어 전쟁 직후 형무소 및 보 도연맹 집단희생 사건과 관련되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 울진지역 보도연맹원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 나. 인민군 점령기의 지역 상황 1950년 6월 25일 삼척 임원항에 인민군 3,000여 명이 상륙하여 울진경찰은 평해 후포지 서로 후퇴하였고 1950년 7월 11일에는 영덕군 병곡면으로 후퇴하면서, 울진지역은 인민 군이 완전 점령하게 되었다. 20) 인민군은 7월 11일경부터 울진에서 점령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21) 인민군은 7월 하순경부터 인민위원회 및 각종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우익인사 탄압, 의용군 모집 및 징 16)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1~1956). 17)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1~1956). 18) 이중 진실화해위원회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신청한 사건은 다-127, 다-3417, 다-3501, 다-6700, 다-7105, 다-7117 등이다. 그리고 전쟁 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된 사람 중 6명의 신원이 진실화해위원 회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19) 울진경찰서에서 작성한 경찰서 연혁 사찰계 보고건 의 국가보안법위반 피의자 검거사항 항목에 1948 년부터 1949년까지 남로당 가입 혐의 검거자가 19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로당 가입 혐의자가 반드시 보도연맹 가입자와 일치하지 않지만 이를 통해 울진지역의 보도연맹원 규모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신청한 다-127, 다-3417, 다-3501, 다-6700, 다-7105, 다-7117 사건 과 참고인 조사를 통해 죽변 후릿개와 후포 박골, 매화 전시골 등에서 보도연맹 관련으로 희생되었다고 확인된 사람은 총 39명이다. 이는 이미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한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과 울산 국민보도연맹사건, 그리고 보도연맹과 관련하여 진실규명 신청을 한 다른 지역 사건들의 희생자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20)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6). 21) 울진경찰서, 경찰 10년사 편찬에 관한 보고건 경찰서 연혁.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45

24 제 2 권 용, 인민군 탄약운반 및 도로보수 등의 부역활동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22) 군 면 리 별 인민위원회가 어떠한 과정으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 만, 울진경찰서 부역자 명부 에는 많은 경우 하나의 마을에 리 인민위원장이 2명 이상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시인민위원회가 먼저 구성 된 후 정식 선거절차를 거쳐 인 민위원회가 마을마다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마을에 따라 사정이 조금씩 다르지 만 리 단위 인민위원장은 반드시 좌익계 사상이나 이념을 가진 인물만이 선출된 것이 아 니고 구학문 등에 대한 학식이 있고 마을주민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던 사람이 선출되기 도 했으며, 23) 어떤 경우는 대한청년단장이었던 사람이 인민위원장을 한 경우도 있었 다. 24) 인민위원장 이외에 각종 위원회 및 부서원들은 지목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명단에 기재되거나 25) 자기도 모르게 명단에 올라 수복 이후에 부역혐의자로 연행되어 고초를 당 하기도 하였다. 26) 이와 관련하여 울진경찰서에서 작성한 부역자 명부 를 보면 인민군 점령시기에 울진군에 부역행위를 한 사람의 수는 총 4,569명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자의 건 타의건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인민군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27) 울진은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지역이 되면서 울진군수 등 대부분의 우익인사들은 피난 을 하지 못하였다. 피난하지 못한 울진군수 등 50여 명의 우익인사들은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28) 그 중 1명이 수복작전을 벌이던 국군에 의해 사망했으며 나머지는 국군 수복 후에 모두 석방되었다. 29) 22) 춘천지방법원강릉지원, 형공제153호 판결문(피고 김, 김 ), ) 신청인 김영홍, 진술조서( ); 참고인 이서촌, 진술조서( ); 참고인 남중익, 진술조서( ); 참고인 주상태, 진술조서( ); 참고인 장상연, 진술조서( ); 참고인 전찬업, 진술조서( ); 참고인 장윤태, 진술조서( ). 24) 참고인 이종진,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주두원, 진술조서 ( ); 참고인 김, 진술조서( ). 25) 신청인 주문영, 진술조서( ); 참고인 전선수, 진술조서( ); 참고인 박용선, 진술조서 ( ); 참고인 윤성규, 진술조서( ); 참고인 전병석, 진술조서( ). 26) 참고인 장윤한, 진술조서( ). 27) <표 5> 참조. 28) 참고인 주,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진술인 임 은 전직 경찰 관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어 내무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수복 후 풀려 나왔다. 29) 참고인 임 과 주 의 진술에 의하면, 주인3리 대한청년단장 민 가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중, 국 군이 들어오자 놀랐던지 동무들 하면서 만세를 불러 국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참고인 임, 진술조서 ( ); 참고인 주, 2차 진술조서( ); 참고인 홍, 1차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 수복과 1 4 후퇴시기까지의 지역 상황 1950년 9월 26일, 울진에 도착한 국군 3사단은 평해 및 울진 남쪽 8km 아래 지점인 근 남면 노음리 부근까지 진출하여 왕피천을 대치선으로 해서 인민군 5사단 27, 28대대 및 신병부대와 3일간 전투를 벌여 9월 28일 울진을 수복하였다. 30) 보병 제3사단에서 발행한 백골사단 역사 에 의하면 9월 29일, 국군 3사단 26연대 제3 대대는 죽변리에 주둔하다가 9월 30일에 삼척으로 북진, 이동하였다. 31) 그 후 울진에는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 소대규모 병력과 CIC, 그리고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1개 대대가 주둔하였다. 32) 헌병대는 울진군청 부근 전매소 자리에 주둔하여, 33) 죽변, 근남면, 서면 부근에 2~3명의 헌병을 배치하였다. 34) CIC는 울진읍내에 근거지를 두고 죽변 등지 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35)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1개 대대 200여 명은 죽변지서에 본부를 두고 10월 한 달간 죽변에 주둔하였다. 36) 울진경찰서 경찰들은 9월 28일 국군 제3사단과 함께 울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10월 6일 퇴각하던 인민군 3개 주력부대가 기습 방화하여 울진경찰청사가 불탔으므로 10월 7 일부터 삼척세무소 울진지서 청사를 임시청사로 차용하여 전시 직무를 수행하였다. 37) 그 후 울진경찰서 및 헌병대, CIC,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등은 약 한 달간 치안활 동을 수행하면서 부역혐의자들을 검거하였다. 38) 수복 초기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혐의가 있던 주민들은 경찰 및 CIC에게 검거, 연행되었고, 초기에 연행되지 않은 부역혐의가 있 던 주민들은 각 지서별로 지서나 면사무소 창고, 면 소재 국민학교에 자수하거나 연행되 어 3일에서 일주일간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자술서 및 서약서를 쓰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주민 중에는 마을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된 사람도 있었고, 39) 경찰과 군인의 30)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역사, 육군본부, 1980, 183쪽;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군사편찬연구소, 1971, 57-86쪽. 31)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 역사, 쪽;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군사편찬연구소, 1971, 57-86쪽. 32)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1~1956); 국방부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군사편찬연구소, 2003, 93-95쪽;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군사편찬연구소, 1971, 47쪽. 33)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34)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35)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36) 참고인 임,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임, 통화보고서( ). 37)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1~1956) 경찰 10년사 편찬에 관한 보고건 의 수복후의 전모 참조. 38)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2008, ). 39) 참고인 남재창, 진술조서( ); 참고인 주극중, 진술조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 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47

26 제 2 권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풀려나오거나 돈 등의 뇌물을 써서 풀려 나오기도 하였다고 한 다. 40) 한편 석방되지 못한 주민들은 지서 유치장 및 창고에 구금된 후 울진경찰서로 이송되 었고, 울진경찰서 사찰계 및 헌병대, CIC 등에 의해 재조사를 받고 난 후 극히 일부는 석 방되었으나 41) 대부분은 울진경찰서 유치장 등에 2~3일간 구금되었다가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 집단살해되었다. 한편 1950년 10월 15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불안해지자, 지서 경찰들이 부역혐 의자들을 임의로 살해하였다. 온정지서, 하당지서, 기성지서 경찰은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 사이 황보리 문둥이골 등 여러 곳에서 부역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집단살 해하였다. 37 선 이남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에 의해 37 선 이북에 위치한 북면지서, 하당 지서, 죽변지서의 일부 병력만 남겨 두고 37 선 이남에 위치한 울진경찰서로 후퇴하였 다. 42) 그러나 전선이 38 선으로 고착되자 인민군은 울진을 재점령하지 못했다. 2. 사건경위 가. 수복작전 초기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1950년 9월 26일~9월 28일 까지) 1950년 9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울진군 근남면 노음3리 주민 윤건택, 김병훈, 전재 식, 옹기 제조인, 신원불상의 남성, 노음1리 최종구, 수산리 김동옥, 산포리 박원출, 그리 고 기성면 사동리 김영동 등 9명이 국군 제3사단 22연대 소속 군인과 헌병대, 23연대 소 속 군인, CIC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경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노음3리 국군이 수복작전을 개시하던 첫날인 1950년 9월 26일, 제3사단 소속 22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오전에 수산리 방면으로 진출하여 왕피천을 건너 북쪽으로 인민군을 추격하였 40) 참고인 이서촌, 진술조서( ); 참고인 전선수, 진술조서( ); 참고인 남기욱, 진술조서 ( ); 참고인 남재창, 진술조서( );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윤 암중, 진술조서( ). 41)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42)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임, 면담조사서(2008, ); 참고인 임, 통화보고 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 그러나 수산리 북쪽 산에 위치한 인민군 5사단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다시 왕피천 건 너 남쪽으로 후퇴, 노음리 매림동 뒷산에 국군 3사단 소속 지원부대인 제11포병대대가 진 지를 구축하였다. 43) 참고인 윤성묵과 윤근춘의 진술에 의하면, 9월 26일 추석날 마을주민들이 제사를 지내 고 난 무렵에 국군이 노음3리 마을에 공포탄을 쏘면서 들어왔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방공 호에 피신하였으며 윤성묵을 포함한 윤씨 집안사람도 큰집 뒤에 있는 방공호에 피신하였 다. 44) 저녁 무렵 군인 3명이 윤성묵의 큰집으로 와서 윤성묵의 아버지 윤건택을 연행하 였다. 45) 윤건택은 큰아들이 국군에 입대하였는데, 인민군 점령시기 마을주민들의 권유로 3일간 리 인민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한편 군인들은 같은 마을주민 김병훈과 신원불상의 남성 1명을 연행하여 윤건택과 함 께 저녁 8시 매림동 636번지에서 사살하였다. 46) 이때 함께 끌려 간 곽금술은 사살 직전 구제되었는데, 그는 당시 마을의 대표적인 우익인사이자 2층 집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였 던 친형 곽금록의 도움으로 사살을 면하였다고 한다. 47) 또한 같은 날 밤 인근 다른 방공호에 피신해 있던 전재식과 성명미상의 옹기 제조인 등 2명도 군인에 의해 방공호에서 끌려 나왔다. 당시 옹기 제조인은 산에서 옹기 제조 일을 하다가 우연히 습득한 인민군 장교 군화를 신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국군은 옹기 제조인 을 인민군 장교로 오인하여 매림동 636번지 부근에서 사살했고, 전재식은 인민군 장교 를 숨겨주었다 라는 이유로 함께 같은 장소에서 사살되었다. 48) 2) 노음1리 참고인 방한기의 진술에 의하면, 9월 26일 정오경, 49) 노음1리로 들어온 22연대 소속 헌 병대 50) 가 추석 제사 후 술에 취해 있던 최종구를 우물가로 끌고 가 사살했다. 최종구는 43)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역사, 1980, 183쪽; 참고인 윤종묵, 통화보고서( );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군사편찬연구소, 1971, 47쪽, 57-67쪽, 쪽. 44) 참고인 윤근춘, 진술조서( ). 45) 참고인 윤종묵, 진술조서( ); 통화보고서( ). 46) 참고인 김봉규가 제출한 김병훈가의 족보에는 1950년 8월 15일 노음리 636번지에서 사망 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김병훈이 국군에게 살해된 장소는 노음리 매림동 636번지로 추정된다.(참고인 김봉규, 진술조서 ( ) 47) 참고인 윤종묵, 진술조서( ). 48) 참고인 윤근춘, 진술조서( ). 49) 추석날이라 희생자 최종구가 술에 취하면서 사단이 났다고 진술을 정정하였다. 참고인 방한기, 통화보고 서( ). 50)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역사, 1980, 쪽;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군사편찬연구소, 1971, 47쪽,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49

28 제 2 권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운영하던 포목점 상가가 그 기간 동안 여맹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된 적이 있어 국군의 수복 직후에도 여기에 인민군 깃발이 계속 걸려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참고인 방한기는 헌병들이 최종구를 사 살하고 가는 것을 목격한 뒤 사살된 최종구의 시신을 우물가에서 수습하였다고 한다. 51) 3) 수산리, 산포리 9월 26일 수산리, 산포리에서도 민간인 희생 사건이 있었다. 수산리, 산포리는 당시 국 군과 인민군의 교전지역인 왕피천 인근에 있었는데, 국군 제3사단 22연대 소속 군인과 CIC가 함께 마을에 들어왔다. 사복 차림의 CIC 대원들은 수산리 김동옥과 산포리 박원출 이 방공호나 가옥 등에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자신들의 눈에 띄자 사살하였다. 52) 4) 사동리 1950년 9월 27~28일경, 평해로 상륙하여 수복작전을 하던 국군 제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 53) 이 기성면 사동3리에 입성하여 주민들을 마을 앞 백사장에 소집한 뒤, 손을 들고 무릎을 꿇게 하였다. 이때 집 앞 방공호에 있다가 늦게 나온 15살 소년 김영동을 소집에 늦었다는 이유로 사살하였다. 54) 국군의 수복작전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 중 노음3리 사건은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혐의 가 있는 주민을 살해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제외한 다른 사건들은 수복작전 과정에서 오인이나 기타의 이유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들의 경위를 요약하면 <그림 2>와 같다 쪽, 쪽. 51) 참고인 방한기, 진술조서( ). 52) 참고인 임, 1, 2차 진술조서( , ); 참고인 김창영, 진술조서( ). 53)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군사편찬연구소, 1971, 47쪽, 57-67쪽, 쪽. 54) 참고인 최정영,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그림 2> 수복작전 초기 근남면, 기성면 희생 사건 지역 가해 주체 살해 근남면 노음3리 근남면 노음2리 근남면 수산리 근남면 산포리 국군 제3사단 22연대 소속 군인 국군 제3사단 22연대 소속 헌병 CIC CIC 노음리 636번지 부근 윤건택 등 5명 집 앞 우물가 최종구 수산리 마을 앞 김동옥 산포리 마을 앞 박원출 기성면 사동리 국군 제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 방공호 앞 김영동 나. 후정리 부둘골 55) 사건(1950년 10월 20일) 1950년 10월 20일, 울진면(현재 죽변면) 후정1리 부둘골에서 헌병대, CIC와 경찰에 의 해 부역혐의자 약 40명이 총살되거나 생매장되었음을 관련 유족들의 진술, 현장 목격자 의 증언, 죽변지서 경찰관의 증언, 울진경찰서 생산 자료, 제적부 및 호적의 사망기록 등 에 의거하여 확인하였다. 1950년 10월 8일부터 1950년 10월 19일까지 헌병대와 CIC 군인들은 우익단체와 이장 들이 제공한 명단을 근거로 부역혐의자들을 직접 연행, 검거하였다. 56) 이들은 근남면 행 곡리 남무호, 임중화, 전구현, 전복문, 이석구, 울진면 호월2리 장원수, 남종철, 후정1리 남 분남, 후정2리 전화숙, 호월1리 장명규, 전호석, 북면 하당리 박병기 등을 죽변지서, 죽변 55) 후정리 부둘골 사건현장은 후정1리와 죽변5리 경계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 동아건설 사택 건륭아파트 뒷산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후정1리 뒷당 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주로 후정리 부둘골 이라고 부르 고 있다. 참고인 남기욱,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 술조서( ). 56)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경찰 10년사 편찬에 관한 보고건 ; 참고인 임, 진술조서(2008,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51

30 제 2 권 국민학교, 후정1리 민가로 연행하였다. 57) CIC는 부역혐의자들을 연행 도중에 사살하기도 하였다. 참고인 남기욱의 증언에 의하 면, 이때 신화리 전병찬과 전 형제가 후정리 백사장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고 한 다. 58) 당시 죽변지서에 근무했던 참고인 임 의 진술에 의하면, 죽변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연행된 100여 명의 부역혐의자들은 죽변지서 사찰계 형사인 홍 과 육군 중위 계 급의 군인에 의해 조사, 분류된 뒤 일부는 석방되었고, 일부는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 라가 또다시 군인에게 인계되었다. 59) 또한 당시 울진경찰서 유치장 경비를 보았던 전 와 임 의 진술에 의하면, 헌병대와 CIC는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부역 혐의자들을 경찰로부터 인계받아서 연행했다고 한다. 60)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61) 무장한 보충대 군인들에게 인계된 부역혐의자들은 트 럭에 실려 후정리 부둘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CIC와 헌병대의 지시에 의해 죽변지서 경찰이 구금된 부역자들을 포승줄에 묶어 현역 군인들에게 인계하였고, 군인들이 인계받은 부역자들을 트럭에 싣고 총살하러 갔습니다. 62) 참고인 김형철은, 이 사건 생존자 전광석(북면 고목리, 2년간 도피 후 자수하여 1970년 사망)으로부터 군인들은 끌고 온 부역혐의자들을 구덩이 앞에 세운 뒤 두 줄로 서서 기 관총으로 사살하였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이 사실은 참고인 임 과 김홍연 의 진술에도 확인된다. 특히 당시 생매장된 전호석의 집안사람들과 함께 시신수습을 한 참고인 김홍연은, 죽변에 주둔한 군인들이 철수하고 난 후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 녀는 후정리 부둘골 향나무 아래 구덩이에 30여 명의 희생자들이 사살당한 채 묻혀 있는 57)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남병수, 진술조서 ( ); 참고인 전찬업,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현,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 연, 진술조서( ); 참고인 전인수,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현, 진술조서( ); 참고인 주극중, 진술조서( ); 참고인 박봉학, 통화보 고서( ); 참고인 전종록, 진술조서( ). 58) 참고인 남기욱, 진술조서( ). 59)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현, 통화보고서( ). 60)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61)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남병수, 진술조서( ); 참고인 전찬업, 진술조서 ( ); 참고인 장인현,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연,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인수,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현, 진술조서( ); 참고인 주극중, 진술조서( ); 참고인 박봉학,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전종록, 진술조 서( ). 희생자 모두가 제삿날이 음력 9월 9일, 즉 사건발생일이 10월 20일이다. 62) 참고인 임, 통화보고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것을 보았는데, 남편 장명규 등 7명은 작은 구덩이에서 생매장당한 채 묻혀 있었기 때문 에 총격사살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63) 남편의 시신을 보니 손에 철사가 묶였었는지 양손이 많이 상했더라고요. 그리고 옷에 피가 묻어 있지 않았어요. 다른 큰 구덩이에서 죽은 사람들의 옷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 는데 이 작은 구덩이에서 죽은 사람들의 옷에는 피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어요. 남편만이 아니라 모두 그랬어요. 총을 맞은 자국도 없었어요. 생매장을 당한 거지요. 희생자들의 시신은 나중에 군인들이 철수한 후 대부분 수습되었다고 한다. 64) 이 사건 에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장명규, 전호석 등 17명이다. 이 사건의 경위를 요약하면 <그림 3>과 같다. <그림 3> 후정리 부둘골 사건 연행 구금 조사분류 인계 지시 살해 울진면 호월1리 장명규,전호석 호월2리 장원수,남종철 후정1리 남분남 후정2리 전화숙 북면 하당리 박병기 등 울진경찰서 유치장 구금자 중 일부 헌병대, CIC 인계 후정1리 민가 죽변지서 죽변국민학교 죽변지서 경찰 홍 육군중위 일부 석방 미석방자 지 시 인 계 CIC 헌병대 죽변지서 경찰 장 소 희 생 규 모 집 행 후정리 부둘골 장명규 등 약 40명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CIC, 헌병대,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63) 참고인 김홍연,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64) 참고인 주하영, 진술조서( ); 참고인 주정균,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현, 진술조서 ( ); 참고인 전찬업,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남병 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연, 진술조서( ); 참고인 전인수, 진술조서( ); 참고인 주무돈, 진술조서( ); 참고인 최원기, 진술조서( ); 참고인 남재창, 진술 조서( ); 참고인 홍동표, 진술조서( ); 참고인 박봉학, 진술조서( ); 참고인 주극중, 진술조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53

32 제 2 권 다. 신림 올시골 65) 사건(1950년 10월 말~11월 중순)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중순 사이, 부역혐의자 수백 명이 울진경찰서 및 각 지서 경 찰에게 연행되어 울진경찰서 유치장 등에 구금되었다가 울진면(현 울진읍) 신림 올시골 에서 울진경찰서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관련 유족들의 진술, 현장 목격자 의 증언, 울진경찰서 경찰관의 증언, 울진경찰서 생산 자료, 제적부 및 호적의 사망기록 등에 의거하여 확인하였다. 1950년 10월 7일부터 군내 치안활동을 전개했던 울진경찰서는 각 지서별로 우익청년단 체(대한청년단)와 이장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주요 검거자 명단에 근거해 부역혐의자를 체포, 검거하였다. 66) 지서 경찰들은 마을주민들을 소집해놓고 부역혐의자를 지목하여 연 행하거나, 아예 마을 청 장년 남성을 모두 연행하기도 하였다. 67) 지서 경찰은 부역혐의자들을 연행 도중에 사살하기도 하였다. 후정1리 전치호, 나곡리 박익성, 행곡4리 남의석 등이 경찰의 검거를 피해 도망가려다 마을 부근에서 사살되었 다. 68) 경찰은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을 지서, 면사무소 창고, 국민학교 건물 등에 구금하였 다. 69) 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은 지서 사찰계 형사들로부터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활동 가담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고 A, B, C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70) 그 중 A, B 등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는데, 71) 이때 이송된 사람은 울진군 기성면 기성지서에서 65) 신림 올시골의 희생지 5곳은 행정구역 상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와 고성리 산 90번지 등 여러 곳에 위치하 고 있다. 대부분의 참고인들은 신림리 가는 방향의 올시골이라고 통칭하여 진술하고 있어 신림 올시골로 희생지의 명칭을 통일하였다. 올시골의 지명 유래는 고려시대에 고려장 터였던 연유로 오로시골( 五 老? 골) 로 불리다가 올시골 로 지명이 굳어져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교육위원회, 경상북도 지명 유래 총람, )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 신청인 주문영, 진술조서( ); 참고인 이태호,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67) 참고인 장만호, 진술조서( ); 참고인 주선녀,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연, 진술조서 ( ). 68) 참고인 전하진, 진술조서( ); 참고인 전찬업, 진술조서( ); 참고인 전병석, 진술조서 ( ); 참고인 최수동, 진술조서( ). 69) 참고인 황윤갑, 진술조서( );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 온정면 면 창고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노음초등학교 울진초등학교 - 참 고인 김홍연, 진술조서( ). 장일균은 당시 마을주민과 함께 모두 연행되어 울진읍 읍남리 남소 학교에서 조사를 받고 나왔다고 한다. 70) 참고인 전, 진술조서( ). 71)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신청인 이능식, 진술조서 (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40여 명, 근남면 근남지서에서 25명, 죽변지서에서 15명 정도 되었다. 72) 나머지 C급 부역 혐의자들은 3~7일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귀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참고인 이종진은, 전쟁 전 두천리 대한청년단 장을 한 전두만과 최완석이 경찰에 의해 조사를 받고 귀가한 후 구타 후유증으로 몇 달 만에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73) 또한 경찰의 강압적이고 가혹한 취조 때문에 취조과정 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참고인 윤암중은, 원남면 매화지서에서 조사를 받던 윤상헌 이 도피한 아들의 거처를 캐려고 하는 경찰의 조사에 못 견디어 2층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74) 면소재지 각 지서에서 울진경찰서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은 울진읍내 울진국민학교, 남소학교, 울진경찰서 유치장 등에 각각 분리 수감되었다. 75) 울진경찰서 사찰계와 더불어 CIC, 헌병대 군인들은 수감된 부역혐의자들을 재조사하였 다. 당시 울진경찰서 사찰계 내근 형사로 재직했던 홍 의 진술에 의하면, 부역혐의자 를 조사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사찰계 주임인 홍 76) 과 전 경사가 주도하였다고 한 다. 77) 사찰계 주임 홍 은 부역자 처리의 전반적인 지휘를 하였고, 전 경사가 부역 자 명단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78) 또한 울진경찰서 유치장 경비를 섰던 의용경찰 전, 전 의 진술에 의하면, 유치장에 구금된 부역혐의자 중 일부를 헌병대 및 CIC가 데리 고 가곤 하였으며, 이들을 재조사하거나 조사 후 살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79) 참고인 전 는 헌병대가 주둔한 전매소에서 행곡리 주우형이 부역혐의로 연행되었는데, 술에 취한 헌병이 오발한 것인지, 충동적으로 총을 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총격에 의해 사살 되었다고 한다. 80) 지서에서 이송되어 재조사를 받은 부역혐의자 중 극히 일부는 석방되 72) 참고인 윤영재,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73) 참고인 이종진, 진술조서( ). 74) 희생자 윤상헌의 아들인 윤철병은 전쟁 직후에 아들인 윤하중이 보도연맹 관련으로 후포 박골에서 살해 되어 인민군 점령시기에 강요에 의해 면 인민위원회에 직책을 맡게 되어 수복 후 도피를 하게 되었고, 이 로 인하여 희생자 윤상헌과 진술인 윤암중, 삼촌 윤석병, 어머니 남옥분 등이 매화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윤상헌이 구타 등의 강압적인 조사로 매화지서 2층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고 한다. 참고인 윤 암중, 진술조서( ). 75) 참고인 윤영재,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76)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홍 이 당시 울진경찰서 사찰계 주임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77) 전 는 홍 신분장 내용 중 경찰관 신원조사서에 조사자로 기재되어 있다. 78) 참고인 홍, 진술조서( ). 79)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80)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55

34 제 2 권 었지만, 대부분은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81) 당시 울진경찰서 경찰로 재직하였던 이 과 전 은 신림 올시골에서 부역혐의자 집단살해는 10월 말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진술하였다. 82) 또한 수복 후 울진경찰서 의용경 찰로 울진경찰서 유치장 경비를 섰던 남 의 진술에 의하면, 울진경찰로 이송되어 재 조사를 받고 유치장에 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은 2~3일간 구금이 된 후 어디론가 끌려갔 고, 처음에는 인원이 많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감소하였는데 모두 신림 올시골로 끌려 가 집단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83) 당시 울진경찰서 경찰로 근무했던 경찰 측 참고인 14명 중 12명이 울진경찰서 경찰들 이 신림 올시골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집단살해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84) 부역자 처형은 헌병대와 CIC의 지휘를 받아 사찰계가 한 일입니다. 85) 부역자를 연행, 조사, 분류하여 신림 올시골에서 즉결 처형한 것은 울진경찰서 관할의 일이었다. 86) 울진경찰서에 의해 내가 살고 있던 정림리 부역혐의자 10여 명을 포함하여 70~80여 명 이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 총살되었어요. 87) 신림 올시골에서 부역자들은 울진경찰서 서장의 지휘하에 임의처형된 것이지. 88) 참고인 주상오가 이 사건 생존자 전호준(호월3리 주민, 1990년대말경 사망)으로부터 들 은 바에 의하면, 당시 전호준은 부역혐의로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경찰이 한밤중에 신림 올시골로 구금자들을 끌고 가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하니 ( ) 81) 참고인 전 는 행곡1리 남병용, 전형무, 정봉준은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으나 행곡리 대한청년단장 전 용중, 근남면장 권상운 등의 마을사람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해서 석방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82)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83) 참고인 남, 진술조서( ). 84) 한편 일부 경찰 측 참고인과 피해자 측 참고인들은 초기 신림 올시골에서의 집단살해는 경찰만이 아니고 주둔한 군에 의해서도 이루어졌으며, 군인들이 동원되어 신림 올시골 구덩이를 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85)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임, 2차 진술조서( ). 86) 참고인 전, 진술조서( ). 87) 참고인 주, 진술조서( ). 88) 참고인 홍,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모두 무서워해서 도망치지 못하자 혼자 삐삐선을 풀고 도망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89) 신림 올시골에서 부역혐의자 살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참 고인 최원기와 윤영재의 진술에 의하면 밤마다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나곤 하였다고 한 다. 90) 그리고 1951년 경찰서 소속 공비토벌대에 참여했던 참고인 주상태는, 이 사건현장 에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 있던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죽은 부역혐의 자들은 손목이 묶인 채 절반은 사살되었고, 절반은 생매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당시 작전 을 함께 수행했던 경찰서 공비토벌대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다. 91) 신림 올시골에서 당시 부역혐의자들이 살해된 장소는 여러 곳임이 확인되는데, 진실화 해위원회의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건현장은 게골 92) 3곳과 신림 작은판데기, 신림 큰 판데기 등 모두 5곳이다. 93) 신청인 김년월은, 이듬해 4월경 남편의 시신을 찾으러 게골로 갔다가 목격했던 현장 상 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게골 1, 2 94) )는 지금처럼 나무가 울창하지 않은 민둥산이었어요. 올라가 보니 산등 성이 전체에 구덩이가 쫙 깔려 있었어요. 큰 구덩이도 있었고 작은 구덩이도 있었는데, 한 40여 개의 구덩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신들도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어 밟고 다닐 정도였어요. 신발과 옷도 널려져 있었어요. 내가 딛었던 구덩이에는 한 15명의 남녀가 묻혀 있었어요. 어떤 구덩이에는 여자들의 시신만 있었어요. 애기 업은 여자도 있었고 앉아 서 죽은 여자도 있었는데 그 시신은 아래만 흙으로 덮여 있었어요. 여자들이 죽은 구덩이는 대개 산등성이 위쪽에 있었고, 남자들이 죽은 구덩이는 산등성이 아래쪽 골에 있었어요. 3 월(음력)이 되니 시신들이 썩기 시작하여 남편의 시신을 찾을 때는 얼굴을 보고는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어 한참을 다니다가 옷을 보고 찾았어요. 남편은 작은 구덩이에서 다른 5~6 89) 참고인 주상오, 진술조서( ). 90) 참고인 최원기, 진술조서( ); 참고인 윤영재, 진술조서( ). 91) 참고인 주상태, 진술조서( ). 92) 많은 참고인들이 이곳을 기골, 귀골 게골 등으로 진술하였던 곳으로 현재 다락논이 있는 위쪽 골짜기 를 말한다. 확인 결과 이곳은 당시 민물게가 많아 게골 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신청인 남상 욱, 진술조서( ); 참고인 박인숙, 진술조서( ); 참고인 전은술, 진술조서( ); 참고인 남재창, 진술조서( ); 참고인 홍동표, 진술조서( ); 참고인 남, 진술 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93) 참고인 주하영, 진술조서( ); 참고인 이호상, 진술조서( ); 신청인 남상욱, 진술조서 ( ); 참고인 박인숙, 진술조서( ); 참고인 전은술, 진술조서( ); 참고인 남 재창, 진술조서( ); 참고인 홍동표, 진술조서( ); 참고인 남,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연, 진술조서( ); 출장보고서( ). 94) <사진 3> 참조.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57

36 제 2 권 명과 함께 양손이 묶인 채 총살된 채 대충 흙으로 덮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의 시신을 구덩이에서 끌어내려고 하니깐 시신의 손목을 묶고 있던 전화선 같은 까만 선이 다른 시신 들과 연결되어 있어 다른 시체들이 들썩이더라고요. 뭐(연장)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냥 그 자리에서 한참 울다가 왔지요. 95) 신림 올시골에서 살해된 주민들의 수를 정확하게 산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복작전 초기 사건과 후정리 부둘골 사건 등 군인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들이 울진경찰서에서 생 산한 2권의 부역자 명부 에 희생자로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점,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6)에 수복 후 시국을 불인식한 자 259명을 송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 당시 울진경찰서에 재직하였던 일부 경찰관들도 경찰자료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으면 정 확할 것이다 라고 진술한 점, 96) 그리고 당시 유족들이 시신수습현장에 대해 진술한 내용 등을 종합해보면 250여 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시신이 수습된 희생자는 신청인 남상욱의 아버지 남재열 등 24명뿐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신들은 수습되지 못했다. 참고인 이규원은 희생자 이재철의 친척이 신림 올 시골로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그곳을 지키고 있던 경찰에게 붙잡혀 죽도록 맞았다 라 고 진술하였다. 다른 참고인들도 당시 경찰이 신림 올시골을 지키고 있어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97). 다음해 봄이 되어서야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 있었 으나 시신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시신들이 부패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며, 옷이나 벨트, 치아 등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일부 유족들만 시신을 수 습하였다. 98) 참고인들은 이후 몇 년 동안 희생현장에 방치된 유골들을 목격한 적이 많았 다고 진술했다. 99) 신림 올시골 사건을 요약하면 <그림 4>와 같다. 95) 신청인 김년월, 진술조서( ). 96) 참고인 임 은 후정리 부둘골 등 국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경찰서 자료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 은 국군이 처형한 일이라 경찰서 명단에 없는 것이다 라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임, 2차 진술조서 ( ). 97) 참고인 이규원, 진술조서 ( ); 신청인 김년월, 진술조서( ); 신청인 남경탁, 진술조서 ( ); 참고인 장만호, 진술조서( ). 98) 참고인 남중익, 진술조서( ); 참고인 주선녀, 진술조서( ). 99) 참고인 주상오, 진술조서( ); 참고인 주상태, 진술조서( ); 참고인 노수명, 진술조서 (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그림 4> 신림 올시골 사건 연행 구금 조사분류 살해 과정 각 지서(9개) 울진경찰서 신림올시골 구금 면사무소 창고 면 소재 국민학교 구금 울진경찰서 울진면 소재 국민학교 장 소 신림 게골(3곳) 신림 작은판데기 신림 큰판데기 세 부 진 행 1차 조사분류 지서 사찰계 형사 2차 조사분류 사찰계 홍, 전 CIC, 헌병대 희 생 규 모 남재열 등 250여 명가량 C급 석방 A, B급 이송 석방 (극히 일부) 미 석방자 집 행 울진경찰서 군인(초기 개입) CIC, 헌병대, 울진경찰서 라.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1950년 11월 말~12월 초) 1) 황보리 문둥이골 사건 1950년 11월 26일, 기성면 황보리 문둥이골에서 황진원, 장규환 등 12명이 온정지서 경 찰들에게 집단사살되었음을 관련 유족들의 진술, 현장 목격자의 증언, 울진경찰서 경찰관 의 증언, 울진경찰서 생산 자료, 제적부 및 호적의 사망기록 등에 의거하여 확인하였다. 1950년 10월 중순부터 온정지서 경찰은 30~40명의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여 온정면 사무소에 구금하였다. 100) 당시 온정지서 경찰로 재직했던 참고인 이 는, 온정면사무 소 창고에 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을 온정지서 형사 권 과 보조 전 가 조사, 분류하 였다 라고 진술하였다. 101) 부역혐의자들은 이후 한 달간 온정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 중 황진원 등 12명은, 1950년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에 의해 밧줄에 묶여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 100)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01)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59

38 제 2 권 문둥이골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102) 한편 참고인 이 는 이날 울진경찰서의 명령에 의해 온정지서 경찰들이 온정지서 차석 성 의 지휘하에 금천리 장규환 등 10여 명을 울진경찰서로 압송하였다 라고 진 술하였다. 103) 장규환은 부역자 명부, 정보계 (1962)와 신원기록편람 (1981)에 처형자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인 황두진도 황보리 문둥이골에서 희생되었다고 진술하므로, 이때 압송된 장규환 등 10여 명 은 이 사건 희생자로 추정된다. 104) 참고인 황윤갑은 1950년 11월 26일 105) 온정지서 경찰에 의해 부친 황진원을 포함한 12 명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한 달 후 황보리 문둥이골에서 총살되었 다는 것을 알게 되어 구덩이에 묻혀 있는 시신을 수습했다고 진술하였다. 106) 황보리 문둥이골에서 살해된 12명의 시신은 대부분 수습되었고,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황진원, 황진규, 황진수, 이영택, 김태원, 이병국, 이익래, 장규환 등 8명이다. 107) 2)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1950년 11월 말경, 하당지서 경찰은 부역혐의자를 재검거 구금하였다. 108) 참고인 장 윤한은, 수복 직후와 늦가을 무렵 2차례에 걸쳐 하당지서에 부역혐의로 연행되어 죽도록 맞은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장윤한은 두 번째 연행되었을 때, 같은 마을에 살던 남왈 수가 좌익활동을 한 친척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함께 구금되었고, 어느 날 늦은 밤 지서 경찰이 남왈수를 포함하여 5~6명을 호명하여 데리고 나간 뒤 그들이 돌아오지 않 았다고 진술하고 있어서 이들 모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109) 또한 참고인 전종록과 장인열은 하당리 최익남과 소곡1리 이상학도 하당지서 경찰 소 에게 연행되었으며 그들은 소곡리 남왈수와 함께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총살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110) 102) 참고인 황윤갑, 진술조서( ); 참고인 황두진, 진술조서( ). 103)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04) 참고인 황두진, 진술조서( ). 105) 유족들은 음력 10월 17일(양력 11월 26일) 끌려가던 날을 제삿날로 정해 지내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 인 황윤갑, 진술조서( ); 참고인 황두진, 진술조서( ). 106) 참고인 황윤갑, 진술조서( ). 107) 참고인 황윤갑, 진술조서( ); 참고인 황두진,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 108)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홍, 진술조서( ). 109) 참고인 장윤한, 진술조서( ). 110) 참고인 전종록,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열,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한편 하당리 장흥룡과 소곡1리 주재락은 사건발생 다음해인 1951년에 사계리 나그네골 에서 여러 구의 유골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111) 조사결과, 1950년 11월 말경부터 12월 초에 하당리, 소곡리, 사계리 등 하당지서 관할 지역 주민 7~8명이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하당지서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으며 당시 희생 된 사람 가운데 소곡리 남왈수, 이상학, 하당리 최익남 등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3) 후포 바닷가 수장 사건 기성면 척산1리 안병위, 안두원 형제는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활동으로 수복 후 인근 산 으로 도피해 있던 중 자수를 하면 선처할 것이란 말을 전해 듣고 자수하러 가던 중 경찰 에 의해 검거되어 기성지서에 구금되었다. 112) 수복 후 기성지서 유치장에 부역혐의로 구 금된 주민들 중 일부는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지만 안병위, 안두원은 1950년 11월 말경 어느 날, 트럭에 실려 가 후포항에서 배에 실려 수장되었다고 한다. 113) 또한 참고인 이태 호는 후포 바닷가에서 수장된 주민들이 기성면 사람들만이 아니고 후포 평해의 사람들도 함께 수장되었다고 진술하였다.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을 요약하면 <그림 5>와 같다. <그림 5>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지서명 연행 구금 조사분류 살해 온정 지서 자수 검거 온정면사무소 창고 온정지서 권진묵, 전상호 선별 황보리 문둥이골 장규환 등 12명 하당 지서 검거 하당지서 유치장 하당지서 경찰 선별 사계리 나그네골 남왈수 등 7~8명 기성 지서 자수 검거 기성지서 유치장 기성지서 경찰 선별 후포 바닷가 수장 안두원, 안병위 후포, 평해면 울진경찰서 각 지서 경찰 111) 참고인 전종록, 진술조서( ); 참고인 장윤한, 진술조서( ). 112) 참고인 안병욱, 진술조서( ). 113) 참고인 안병욱, 진술조서( ); 참고인 이태호, 통화보고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61

40 제 2 권 마. 기타 희생 사건 1950년 10월경, 죽변에 주둔했던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군인이 인민군 패잔병과 삼 척 부근에서 연행한 부역혐의자 40~50여 명을 죽변지서 맞은편 의용소방대 창고에 구금 하여 3~4차례에 걸쳐 약 15명씩 죽변4리 바닷가 부근인 후릿개 114) 로 끌고 가 구덩이를 파고 집단총살하였다. 이 사실은 당시 죽변지서 경찰로 재직했던 임 과 사건현장을 직접 목격한 참고인 이봉식의 진술을 통해 확인되었다. 115) 이 외에도 참고인들은 현재 덕천 원자력발전소 아래 백사장, 서면 하원리 백골, 연지리 현내항 입구 골짜기, 서면 쌍전리 계곡 등에서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116) 사건과정이 확인된 죽변 후릿개 사건을 요약하면 <그림 6>과 같다. <그림 6> 기타(죽변 후릿개) 희생 사건 연행 구금 조사분류 살해 군인 인민군 패잔병 삼척 부역혐의자 의용소방대 건물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죽변 후릿개 3~4차례 50여 명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114) 참고인 이봉식, 진술조서( ). 죽변 후릿개라는 지명은 예전에 소를 잡던 곳이라는 의미로 이렇 게 붙여졌다고 한다. 115)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이봉식,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 참고인 주용숙, 진술조서( ); 참고인 전선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 형철, 진술조서( ). 116) 참고인 황, 진술조서( ); 참고인 장윤태,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 참고인 여계현,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바. 요약 각 사건들의 경위를 요약하면 <표 9>와 같다. <표 9> 각 사건개요 사건명 발생일 가해 주체 희생자 비고 노음3리 사건 국군 제3사단 1950년 9월 26일 22연대 소속 밤 군인 윤건택 등 5명 수복 초기작전 중 노음1리 사건 수산리, 산포리 사건 사동리 사건 국군 제3사단 22연 1950년 9월 26일 대 소속 최종구 정오경 헌병대 1950년 9월 26일 CIC 1950년 9월 27 일~28일경 국군 제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 김동옥 박원출 김영동 수복시기 후정리 부둘골 사건 1950년 10월 20일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CIC, 헌병대 죽변지서 경찰 장명규 등 약 40명 국군 후퇴 전 기타 신림 올시골 사 건 황보리 문둥이골 사건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후포 바닷가 수 장 사건 죽변 후릿개 사 건 1950년 10월 말 경~11월 하순 울진경찰서 CIC 헌병대 1950년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 1950년 11월 말~ 12월 초 하당지서 경찰 1950년 11월 말경 기성지서 경찰 1950년 10월 경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남재열 등 250 여 명가량 황진원 등 12명 7~8명 안두원, 안병위 인민군 패잔병, 민간인 부역혐 의자 50여 명 초기 살해 과정에 국군이 개입함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63

42 제 2 권 3. 사건 조사결과 가. 희생자의 신원과 특징, 희생규모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을 한 경우는 신청인 참고인 2명 이상의 진술을 통 하여 희생사실이 입증된 사람들은 희생자로 확인하였다. 2 울진경찰서에서 입수한 자료 부역자 명부 (정보계, 1962), 부역자 명부 (보안과, 1981년 이전), 신원기록편람 처형자 명단 (1981) 등 3가지 자료의 해당 항목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사람 중 부역관련 혐의로 재판받은 기록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희생자로 확인하였다. 구체적인 기준은 다음과 같다. 부역자 명부 (정보계, 1962) : 처벌내용 항목에 처단, 송치(처단), 송치, 송 치(사망) 으로 기재된 사람 부역자 명부 (보안과, 1981년 이전) : 처벌내용 항목에 처단, 처형, 송치, 송치 후 사망 으로 기재된 사람 신원기록편람 (1981) : 처형자 명부 에 기재된 사람 부역자 명부 (정보계, 1962), 부역자 명부 (보안과, 1981년 이전) : 처벌 항목에 사망 으로 기재된 자 중 참고인들이 희생자라고 진술한 경우 117) 3 참고인들이 희생사실을 진술하고 있고 이후 시신을 수습한 사실이 입증된 경우는 희생자로 확인하였다. 4 참고인들은 희생자라고 진술하고 있으나 앞의 자료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희생 추정자 로 분류하였다. 1) 희생자 신원 117) 부역자 명부 (정보계)에 사망 이 처벌항목 이 아닌 비고 란에 기재된 사람 3명이 참고인 진술에서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부역자명부 (보안과)에는 개인별 사망연도와 일자가 기재되어 있는 경우 와 연도 일자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사망 으로만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명부에 사망 으로 만 기재된 명단 중 부역자 명부 (정보계)에 처단, 송치(처단), 송치 로 기재된 사람이 다수 확인되 었다. 그래서 이 두 자료에 연도 일자를 기재하지 않고 사망으로만 기재되어 있는 사람 중 참고인들이 희생자라고 진술한 사람들은 희생자로 분류하였다. 또한 아래 <표 11> 106번 김규선, 119번 전병문, 191 번 남중상은 자료에서 특이하게 처벌항목 이 아닌 체포 여부 항목과 비고 란에 사망 으로 기재되어 있고, 참고인들이 희생자라고 진술하고 있어 희생자로 분류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이상의 방법에 의해 여러 경찰자료를 교차대조하고 진술내용과의 일치 여부 등을 확인 한 결과 울진지역에서 수복 후 부역혐의로 희생당한 것으로 최종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205명이다. 205명 중에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14명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나머지인 191명은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다. 118) 그리고 앞의 방법에 의해 확인한 결과 전체 희생 추정자는 51명이다. 신청인 중 확인된 희생자의 명단은 <표 10>과 같고, 미신청인 중 희생자로 확인된 사 람과 희생 추정자의 명단은 <표 11>과 같다. <표 10> 희생자 명단(신청인) 연번 희생자 이름 성별 지역 참고인 진술 김경순 ( 金 景 淳 ) 윤종연 119) ( 尹 宗 淵 ) 이종대 ( 李 鍾 大 ) 최현주 ( 崔 鉉 周 ) 이효세 ( 李 孝 世 ) 이윤세 ( 李 潤 世 ) 전병세 ( 田 炳 世 ) 이준권 120) ( 李 準 權 ) 전병인 ( 田 炳 仁 )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울진면 연지리 원남면 금매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방율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등 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처단 0 - 확인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0 - 확인 118) 이 중 남정규는 참고인들이 보도연맹 관련으로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울진경찰서 자료 중 신원조 사서에서 아군 수복 후 총살되었다 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참고인 조사에서 죽변에서 시신을 수습한 것으로 보아 후정리 부둘골에서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별첨 자료 <사진 4> 참조. 119) 윤종연은 아내 신청인 김년월이, 신림 올시골 사건현장에 시신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다른 시신들과 삐삐선으로 연결된 채 묶여 있어 수습하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인 김년월, 진술조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65

44 제 2 권 연번 희생자 이름 성별 지역 참고인 진술 황병극 ( 黃 炳 極 ) 주성수 ( 朱 性 守 ) 남로 ( 南 輅 ) 남재열 ( 南 載 烈 ) 전중락 ( 田 重 洛 ) 남 남 남 남 남 기성면 삼산리 원남면 기양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북면 고목리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등 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처단 0 - 확인 확인 0 송치 0 - 확인 0 송치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확인 경찰 및 법무부 기록은 부역자명부 (정보계), 부역자명부 (보안과), 신원기록편람, 1950년 10월 이후에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으로 재판을 받은 행형기록이다. <표 11> 희생자, 희생 추정자 명단(미신청인) 연번 성명 노재극 ( 盧 在 極 ) 윤정옥 ( 尹 貞 玉 ) 희생자 성 별 남 여 거주 지역 근남면 구산리 근남면 노음리 남 (갓난아기) - 근남면 노음리 4 남용순 남 근남면 노음리 5 최종구 남 근남면 노음리 6 남덕중 남 근남면 노음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사망 - 확인 0 사망 0 - 확인 확인 확인 0 0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0 - 추정 120) 정보계 부역자 명부에는 호적명이 아닌 예명 이세권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인 이태호, 진술조서( ). 121) 호적명은 윤성만이다. 참고인 윤종묵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7 윤건택 121) 남 근남면 노음리 8 김병훈 남 근남면 노음리 9 전재식 ( 全 在 植 ) 남 근남면 노음리 10 성명 불상 남 근남면 노음리 11 성명 불상 남 근남면 노음리 12 임명승 ( 林 明 承 ) 남 근남면 수곡리 13 김동옥 남 근남면 수산리 14 박산출 남 근남면 산포리 남무호 ( 南 武 鎬 ) 임중화 ( 林 重 華 ) 전구현 ( 田 九 鉉 ) 18 전복문122) ( 全 福 文 ) 전보중 ( 全 輔 重 ) 주라원 ( 朱 羅 源 ) 남 남 남 남 남 남 근남면 행곡리 근남면 행곡리 근남면 행곡리 근남면 행곡리 근남면 행곡리 근남면 행곡리 21 주우형 123) 남 근남면 행곡리 22 이석구 남 근남면 행곡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0 처단 - 확인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0 송치 후 사망 0 - 확인 0 처형 0 - 확인 0 사망 - 확인 0 처형 - - 확인 송치 - 확인 송치 - 확인 확인 추정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67

46 제 2 권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23 남의석 남 근남면 행곡리 24 황병오 ( 黃 炳 五 ) 남 기성면 다천리 25 황재동 남 기성면 방율리 이갑춘 ( 李 甲 春 ) 황병해 ( 黃 炳 海 ) 남 남 기성면 사동리 기성면 사동리 28 이순세 남 기성면 사동리 29 김영동 남 기성면 사동리 김명동 ( 金 明 東 ) 김예동 ( 金 禮 東 ) 이능선 ( 李 能 先 ) 이호권 ( 李 虎 權 ) 34 한병희124) ( 韓 秉 熙 ) 35 황병기 ( 黃 炳 琪 ) 남 남 남 여 남 남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기성면 삼산리 36 윤억덕 남 기성면 삼산리 37 이능만 남 기성면 삼산리 38 김창동 남 기성면 삼산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확인 처단 - 확인 0 - 추정 0 처단 사망 0 - 확인 0 처단 사망 - 확인 0 - 추정 0 0 수복작전 초기 근남 면, 기성면 희생 사건 확인 0 처형 - 확인 처단 처형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 - 확인 0 처단 - 확인 추정 0 - 추정 추정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39 김대현 남 기성면 삼산리 김병태 ( 金 炳 台 ) 김유현 ( 金 裕 鉉 ) 황재칠 ( 黃 載 七 ) 황정도 ( 黃 正 道 ) 남 남 남 남 기성면 정명리 기성면 정명리 기성면 정명리 기성면 정명리 44 안위교 여 기성면 정명리 45 안두원 남 기성면 척산리 46 안병위 남 기성면 척산리 심원식 ( 沈 元 植 ) 주인식 ( 朱 仁 植 ) 남한택 ( 南 漢 澤 ) 이유조 ( 李 有 造 ) 남 남 남 남 북면 검성리 북면 검성리 북면 고목리 북면 나곡리 51 박익성 남 북면 나곡리 황기영 ( 黃 箕 永 ) 황영옥 ( 黃 永 玉 ) 김형덕 ( 金 炯 德 ) 남 남 남 북면 덕구리 북면 덕구리 북면 두천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추정 0 처단 사망 - 확인 0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0 처단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사망 - 확인 0 - 추정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69

48 제 2 권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55 전두만 남 북면 두천리 56 최완석 남 북면 두천리 57 박명래 ( 朴 命 來 ) 남 북면 상당리 58 남필년 남 북면 상당리 59 엄영학 남 북면 상당리 어용수 ( 魚 龍 洙 ) 임선교 ( 林 善 敎 ) 주성원 ( 朱 聖 源 ) 주순원 ( 朱 舜 源 ) 남 남 남 남 북면 소곡리 북면 소곡리 북면 소곡리 북면 소곡리 64 전병정 남 북면 소곡리 65 이상학 남 북면 소곡리 66 권달용 남 북면 소곡리 67 남왈수 남 북면 소곡리 68 주태익 ( 朱 泰 益 ) 남 북면 신화리 69 전병찬 남 북면 신화리 70 전 남 북면 신화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확인 확인 0 사망 - 확인 0 - 추정 0 사망 0 -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0 사망 - 확인 0 사망 0 - 확인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처단 - 확인 확인 확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김규선 ( 金 圭 善 ) 김일만 ( 金 一 萬 ) 김종대 ( 金 鐘 大 ) 남의옥 ( 南 義 玉 ) 박억조 ( 朴 億 兆 ) 박익성 ( 朴 益 晟 ) 박익성 ( 朴 益 晟 ) 심학수 ( 沈 學 洙 ) 이보순 ( 李 輔 淳 ) 이봉문 ( 李 鳳 文 ) 이선교 ( 李 善 敎 ) 임성교 ( 林 成 敎 ) 전병권 ( 田 炳 權 ) 전병문 ( 田 炳 文 ) 전상익 ( 田 祥 益 ) 전용섭 ( 田 容 燮 ) 희생자 성 별 남 남 남 여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거주 지역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북면 주인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사망 -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0 -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0 사망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 확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71

50 제 2 권 연번 87 성명 이재철 ( 李 在 哲 ) 희생자 성 별 남 거주 지역 북면 주인리 88 전경수 남 북면 주인리 89 전병호 남 북면 주인리 90 김응용 남 북면 주인리 91 박응용 남 북면 주인리 92 김영석 남 북면 주인리 93 장하규 남 북면 주인리 94 장후길 남 북면 주인리 95 임선호 남 북면 주인리 96 장기동 남 북면 주인리 장팔석 ( 張 八 錫 ) 최익남 ( 崔 益 男 ) 최익재 ( 崔 益 載 ) 남 남 남 북면 하당리 북면 하당리 북면 하당리 100 방성문 남 북면 하당리 101 방동석 남 북면 하당리 102 방성출 남 북면 하당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처형 - 확인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추정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0 사망 - 확인 0 사망 - 확인 0 사망 - 확인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103 박병기 남 북면 하당리 104 정영대 남 북면 하당리 105 편인한 125) 남 서면 광회리 106 전명칠 남 서면 광회리 107 김영식 남 서면 광회리 108 김태화 남 서면 광회리 김금산 ( 金 琴 山 ) 김금석 ( 金 琴 石 ) 남 남 서면 삼근리 서면 삼근리 111 남삼수 126) 남 서면 삼근리 112 문동모 ( 文 東 模 ) 남 서면 삼근리 113 박흥식 남 서면 삼근리 장상렬 ( 張 相 烈 ) 박인주 ( 朴 仁 柱 ) 사재숙 ( 史 載 淑 ) 남 남 남 서면 전곡리 서면 하원리 서면 하원리 117 사종록 남 서면 하원리 118 장규환 ( 張 圭 煥 ) 남 온정면 금천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추정 0 사망 - 확인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처단 - 확인 처형 - 확인 0 처단 처형 - 확인 0 처단 - 확인 0 - 추정 처단 - 확인 0 처단 처형 - 확인 처단 처형 - 확인 0 - 추정 0 송치 처형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확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73

52 제 2 권 연번 성명 이영택 ( 李 榮 擇 ) 황진수 ( 黃 鎭 秀 ) 황택곤 ( 黃 宅 坤 ) 희생자 성 별 남 남 남 거주 지역 온정면 소태리 온정면 소태리 온정면 소태리 122 황진원 남 온정면 소태리 123 황진규 남 온정면 소태리 124 김태원 남 온정면 소태리 125 이병국 남 온정면 온정리 126 이익래 남 온정면 온정리 주부원 ( 朱 富 原 ) 주수원 ( 朱 水 源 ) 남 남 울진면 고성리 울진면 고성리 129 주교영 남 울진면 고성리 130 주치영 남 울진면 고성리 131 주중원 남 울진면 고성리 132 주귀원 남 울진면 고성리 133 주내원 남 울진면 고성리 134 주무영 남 울진면 고성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0 송치 0 0 처형 0 사건명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확인 여부 확인 확인 처형 - 확인 처형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황보리, 사계리, 후포 바닷가 희생 사건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0 송치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송치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 추정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 추정 0 - 추정 0 - 추정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135 전영로 남 울진면 고성리 136 주진동 ( 朱 鎭 東 ) 남 울진면 고성리 137 윤씨부인 여 울진면 고성리 138 갓난아이 - 울진면 고성리 권응삼 ( 權 應 三 ) 김호진 ( 金 鎬 鎭 ) 박도명 ( 朴 道 明 ) 박도원 ( 朴 道 源 ) 남 남 남 남 울진면 대흥리 울진면 대흥리 울진면 대흥리 울진면 대흥리 143 양재두 남 울진면 대흥리 남중상 ( 南 重 詳 ) 주명원 ( 朱 命 源 ) 남 남 울진면 명도리 울진면 명도리 146 노복순 남 울진면 명도리 147 노연옥 여 울진면 명도리 정동술 (정주하) 정대술 (정난하) 노종영 ( 盧 鐘 영) 남 남 남 울진면 명도리 울진면 명도리 울진면 신림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처단 처단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처단 - 확인 0 처단 처단 - 확인 확인 0 사망 - 확인 0 송치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 추정 0 - 추정 추정 0 - 추정 0 처단 0 -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75

54 제 2 권 연번 성명 박순학 ( 朴 順 學 ) 이광해 ( 李 光 海 ) 임남술 ( 林 南 述 ) 정정갑 ( 鄭 正 甲 ) 최문수 ( 崔 文 守 ) 최성권 ( 崔 聖 權 ) 최순명 ( 崔 順 明 ) 최원수 ( 崔 元 守 ) 최원철 ( 崔 元 喆 ) 최형석 ( 崔 亨 錫 ) 최형일 ( 崔 亨 一 ) 홍쌍용 ( 洪 雙 龍 ) 홍종영 ( 洪 鐘 榮 ) 희생자 성 별 남 남 여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거주 지역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울진면 신림리 164 최원기 남 울진면 신림리 165 도치명 ( 都 致 明 ) 남 울진면 연지리 166 이근하 127) 남 울진면 연지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처단 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처단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처형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처단 - 확인 처단 처단 -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처형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처형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처단 - 확인 0 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 - 확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이석암 ( 李 石 岩 ) 이호선 ( 李 鎬 善 ) 임칠석 ( 林 七 夕 ) 장대현 ( 張 大 鉉 ) 희생자 성 별 남 남 남 남 거주 지역 울진면 연지리 울진면 연지리 울진면 연지리 울진면 연지리 171 주용덕 남 울진면 연지리 172 이성재 남 울진면 연지리 박춘서 ( 朴 春 瑞 ) 오해룡 ( 吳 海 龍 ) 이해식 ( 李 海 植 ) 주성원 ( 朱 聖 源 ) 김상흠 ( 金 相 欽 ) 김인규 ( 金 仁 奎 ) 백사진 ( 白 士 鎭 ) 장봉근 ( 張 奉 根 ) 장영자 ( 張 英 子 ) 남갑영 ( 南 甲 英 )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여 남 울진면 온양리 울진면 온양리 울진면 온양리 울진면 온양리 울진면 읍내리 울진면 읍내리 울진면 읍내리 울진면 읍내리 울진면 읍내리 울진면 정림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처단 0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 확인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 추정 0 처단 0 - 확인 0 처단 - 확인 0 처단 0 - 확인 0 처단 0 - 확인 송치 - 확인 송치 - 확인 송치 - 확인 송치 - 확인 송치 - 확인 0 송치 사망 - 확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77

56 제 2 권 연번 성명 남경 ( 南 輕 ) 남구정 ( 南 龜 廷 ) 남만년 ( 南 萬 年 ) 남봉수 ( 南 鳳 壽 ) 남상권 ( 南 相 卷 ) 남상규 ( 南 相 奎 ) 남상섭 ( 南 相 燮 ) 남상연 ( 南 相 燕 ) 191 남용헌128) ( 南 容 憲 ) 남운종 ( 南 運 鐘 ) 남중영 ( 南 重 永 ) 남창호 ( 南 昌 鎬 ) 남천만 ( 南 千 萬 ) 희생자 성 별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거주 지역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196 남흥용 129) 남 울진면 정림리 문봉술 ( 文 鳳 述 ) 박산출 ( 朴 山 出 ) 남 남 울진면 정림리 울진면 정림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송치 사망 - 확인 0 사망 - 확인 0 송치 사망 - 확인 0 처단 사망 - 확인 처형 - 확인 송치 - 확인 처형 - 확인 송치 - 확인 0 송치 0 -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처형 - 확인 0 처단 - - 확인 0 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 사망 0 - 확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199 주우영130) ( 朱 宇 英 ) 희생자 성 별 남 거주 지역 울진면 정림리 200 남재연 남 울진면 정림리 201 남상기 남 울진면 정림리 김문일 ( 金 文 一 ) 김석로 ( 金 錫 魯 ) 204 남옥동131) ( 南 玉 童 ) 박경석 ( 朴 慶 錫 ) 안춘서 ( 安 春 瑞 ) 윤영규 ( 尹 榮 奎 ) 윤정규 ( 尹 政 奎 ) 장옥동 ( 張 玉 同 ) 장원희 ( 張 元 姬 ) 장의호 ( 張 義 鎬 ) 장철균 ( 張 鐵 均 ) 전구봉 ( 田 九 鳳 ) 전금옥 ( 田 金 玉 ) 남 남 여 남 남 남 남 여 여 남 남 남 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송치 처형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 추정 추정 0 송치(처단) - 확인 송치(처단) - 확인 0 송치(처단) 사망 0 -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처형 - 확인 송치(처단) - 확인 0 송치(처단) 처형 - 확인 0 송치(처단) 사망 - 확인 송치(처단) - 확인 0 송치(처단) 사망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처단) - 확인 0 송치(처단) - 확인 0 송치(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79

58 제 2 권 연번 성명 희생자 성 별 거주 지역 215 전여현 132) 남 울진면 호월리 전우봉 ( 田 于 鳳 ) 전중석 ( 田 中 錫 ) 전창수 ( 田 昌 秀 ) 정태석 ( 鄭 泰 錫 ) 주순희 ( 朱 順 姬 ) 주유근 ( 朱 裕 根 ) 주유원 ( 朱 有 源 ) 남 남 남 남 여 남 남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223 주진응 133) 남 울진면 호월리 주학원 ( 朱 學 源 ) 최종학 ( 崔 鐘 學 ) 남 남 울진면 호월리 울진면 호월리 226 장명규 남 울진면 호월리 227 전호석 남 울진면 호월리 228 전재현 남 울진면 호월리 문숙자 ( 文 淑 子 ) 장원수 ( 張 元 洙 ) 여 남 울진면 화성리 울진면 화성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0 송치(처단) 사망 - - 확인 송치(처단) - 확인 송치(처단) - 확인 송치(처단) - 확인 송치(처단) 사망 - 확인 0 송치(처단) 처형 0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송치(처단) 사망 - 확인 0 송치(처단)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처단) 처형 - - 확인 0 송치(처단) 사망 0 신림 올시골 사건 확인 0 송치(처단) - 확인 확인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추정 송치(사망) - 확인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231 성명 남종철 ( 南 鍾 哲 ) 희생자 성 별 남 거주 지역 울진면 화성리 232 남형석 남 울진면 화성리 233 남우하 남 울진면 화성리 234 남종옥 남 울진면 화성리 235 주진익 134) 남 울진면 봉평리 236 전치호 남 울진면 후정리 237 남분남 여 울진면 후정리 238 전화숙 여 울진면 후정리 239 이보호 남 원남면 기양리 240 장낙규 ( 張 洛 奎 ) 남 원남면 갈면리 241 윤상헌 남 원남면 금매리 242 남정규 남 원남면 금매리 참고인 진술 경찰 및 법무부 기록 근거 시신 수습 제적 등본 사건명 확인 여부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추정 0 - 추정 0 - 추정 추정 확인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처형 - 확인 처형 0 - 확인 확인 0 0 후정리 부둘골 사건 확인 122) 부역자 명부 에는 전보문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전복문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최수 동, 진술조서( ) 123) 참고인 전 통화면담 결과 헌병대에 의해 사살된 사람은 주우형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전, 통 화보고서( ). 124) 부역자 명부 에 한병희로 기재되어 있지만 참고인 조사결과 한성희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이태호, 진술 조서( ). 125) 부역자 명부 에 편종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편종백의 부친인 편인한이 희생된 것으 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여계현, 진술조서( ). 126) 부역자 명부 에 남산수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남삼수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사재철, 진술 조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81

60 제 2 권 2) 희생자의 특징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및 희생 추정자 256명의 성별 분포를 살펴보면, 남성이 236명이 고 여성이 20명으로 남성이 94%를 차지하고 있다.(<표 12>) 희생자의 연령은 명확히 확 인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이 청장년층인 것으로 보인다. 경찰자료에 나타난 161명의 부역 혐의자 신상기록을 보면 대부분 20대~50대였다. 그러나 참고인 김극중과 김년월 등은, 여성들이 어린아이까지 업고 살해된 현장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가 더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5) <표 12> 희생자 성별 분포 구분 남 여 계 수 비율 94% 6% 100% 그런데 희생자들은 특정한 마을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희생자 들의 거주지별 분포를 살펴보면 울진면 호월리, 정림리, 신림리, 고성리, 연지리와 근남면 127) 부역자 명부 에 이근하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이근아로 확인 되었다. 참고인 이호상, 진 술조서( ). 128) 남용헌의 호적명은 남왈수이다. 참고인 남중익, 진술조서( ). 129) 부역자 명부 에 남흥영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남흥용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남중익, 진술조서( ). 130) 부역자 명부 에 주수영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주우영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윤성규, 진술조서( ). 131) 부역자 명부 에 남옥장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남옥동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전홍로, 진술조서( ). 132) 부역자 명부 에 전여원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전여현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전홍로, 진술조서( ). 133) 부역자 명부 에 주진웅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참고인 조사결과 주진응으로 확인 되었다. 참고인 전홍로, 진술조서( ). 134) 주진익의 제적부를 확인한 결과 1950년 10월 2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35) 신청인 김년월은 신림 게골은 애기를 업고 있는 등의 여자들은 산등성이 위쪽에 위치한 여러 구덩이에 묻혔고 라고 증언하고 있고, 참고인 김극중은 후정리 부둘골에서 형수인 전화숙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고성리 윤씨부인과 갓난아이 등이 총살되어 있어 시신을 수습하게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참고인 김 선도는 남용순 윤정옥 부부와 슬하에 어린 갓난아이까지 함께 끌려가 총살되어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진 술하였다. 신청인 김년월, 진술조서( ); 참고인 주극중, 진술조서( ); 참고인 김선도,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의 노음리, 행곡리, 기성면의 삼산리, 북면의 주인리, 소곡리, 하당리 등 위의 6개 성씨 사 람들이 주로 거주하던 마을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표 13>) <표 13> 희생자의 거주지별 분포 근남면 구산리 노음리 수곡리 수산리 산포리 행곡리 기성면 다천리 방율리 사동리 삼산리 정명리 척산리 북면 검성리 고목리 나곡리 덕구리 두천리 상당리 소곡리 신화리 주인리 하당리 서면 광회리 삼근리 전곡리 하원리 온정면 금천리 소태리 온정리 울진면 고성리 대흥리 명도리 신림리 연지리 온양리 읍내리 정림리 호월리 화성리 봉평리 후정리 원남면 기양리 갈면리 금매리 평해면 0 계 )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에 해방 직후 전( 田 ), 주( 朱 ), 남( 南 ), 윤( 尹 ), 최( 崔 ), 장( 張 ) 의 각 성이 세력을 다투어 무궤도적인 정치운동에 선구가 되었다 라고 기술 137) 되어 있는 데, 여기에 거론된 6개 성씨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건 희생자들은 모두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희생 자 및 희생 추정자 256명 중 경찰자료 138) 에 이름이 나타나는 161명의 부역혐의에 대해 경찰 측에서 작성한 소속단체별 분포 현황은 <표 14>와 같다. 이 중 가장 많이 기재되어 있는 단체는 인민위원회였으며 민청, 내무서, 자위대, 농맹, 여맹 등도 기재되어 있었다. 136) 256명이라는 숫자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하여 희생자로 확인된 14명과 신청은 하지 않았으나 희생자로 확인된 191명, 그리고 희생추정자 으로 정리한 51명을 합한 수이다. 137)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6). 138) 부역자 명부 (정보계, 1962), 부역자 명부 (보안과, 1981년 이전), 신원기록편람 (1981).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83

62 제 2 권 경찰은 이들이 인민군 점령시기에 각종 단체에 가입한 것으로 파악하였고, 이는 수복 이 후 부역자 처리의 중요한 기준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근거 소속단체 부역자 명부 (정보계) 부역자 명부 (보안과) <표 14> 희생자 소속단체별 분포 내무서 농맹 당 민청 여맹 인민위 원회 자위대 기타 미상 합계 신원기록편람 5 5 계 위 자료 중 두 가지 이상의 자료에 기재된 희생자는 작성연도가 앞서는 자료를 대상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해 주체인 울진경찰서 측이 작성한 자료에 근거해 파악한 것이며, 부역자 분류 그리고 그 처리기준이 얼마나 공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부역혐의자 집단살해에 직 간접적으로 개입한 울진경찰서 경찰 로 재직했던 참고인들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참고인 이 는 부역혐의자를 죽이지 않으면 아군이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억울한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되지만 중요한 부 역활동을 한 사람들은 마땅히 처단해야 했다 라고 진술하였고, 139) 참고인 주 은 당 시는 80%가 좌익사상가였기 때문에 신림 올시골 등에서 죽은 사람들은 다 좌익사상가들 이라고 볼 수 있다 라고 진술 140) 했다. 이에 비해 나머지 대부분의 경찰 측 참고인들은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참고인 남 은 정작 죄가 많은 사람들은 피신하고 있다가 자수기간에 자수하여 살고, 죄가 별로 없 어서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억울한 사람들이 총살된 것이다 라고 진술하였 으며, 141) 참고인 박 도 잠시 피신해 있었으면 살 사람들이었다 고 진술하였다. 142) 또 한 참고인 전 는 부역혐의로 집단살해된 사람들 중 악질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 은 사람들이 애매하고 억울하게 죽었지요 라고 진술했으며, 143) 참고인 이 은 (인공 139)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40) 참고인 주, 진술조서( ). 141) 참고인 남, 진술조서( ). 142) 참고인 박, 진술조서( ). 143) 참고인 전,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치하) 3개월 동안 사람들이 (부역활동을) 했으면 얼마나 잘못을 했겠어요. 웬만하면 풀어 주고 해야지 데리고 가 처리를 하니깐 나중에 소리를 들은 것이지요. 라고 진술하였 다. 144) 참고인 홍 은 대한청년단 등의 우익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과장되게 죄를 부풀려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당시 서로 갈등이 많았지요. 라고 진술하였다. 145) 이러한 경찰 측 참고인들의 진술은 신청인 측 참고인들의 진술과도 일치하였다. 참고 인들은 자발적으로 부역활동을 한 사람들은 도피, 월북하였고, 146) 어쩔 수 없이 마을주민 들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민위원회 등 직책에 이름이 올랐 던 사람들이 주민 간의 사적 감정과 결합되어 살해된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다. 147) 그리고 정반대로 마을주민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과 우익인사의 태도에 의해 인민군 점령시기 에 공식적으로 부역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구제된 경우도 있었다. 148) 또한 좌익혐의나 부역혐의가 전혀 없는 민간인이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국군 의 소집명령에 늦었다는 이유, 인민군 장화를 신었다는 이유, 군 작전지역을 거닐었다는 이유, 가족이 부역을 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희생되었다. 그리고 참고인 진술에 의하면 희생자 중 다수가 전쟁 전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고 한다. 사건 당시 경찰로 재직했던 이 은 보도연맹원 명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울진경찰서가 수복 후에 수십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였다 라고 진술하였고, 149) 참고인 전 은 보도연맹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수복 후에 배에 실어서 수장하였다 라고 진술하였 다. 150) 희생자 전화숙, 전치호, 남왈수, 장팔석, 방성문, 방동석, 방성출, 최익재, 정영대, 144) 참고인 이, 1차 진술조서( ); 참고인 이, 2차 진술조서( ). 145) 참고인 홍, 2차 진술조서( ). 146)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6) 자료에 월북도피자로 기재된 인원은 545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147) 이러한 사례는 주인3리, 화성리의 경우인데, 전쟁 전 주인3리 마을 구장이었던 민 의 아들 민 는 대한청년단장을 하였는데, 인민군 점령시기 마을 청년들이 처가집으로 피신한 민 를 울진경찰서 내 무서에 감금하였다. 이후 국군이 울진지역을 수복하면서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50여 명의 우익인사 들은 모두 풀려 나왔으나 당시 민 는 놀라 동무들 하면서 인민군 만세 를 불러 국군에게 총살되었 다. 이에 민 의 아버지 민 이 앙심을 품고 수복 후 경찰에게 사건 관련인 뿐만 아니라 친인척 등 도 고자질해 많은 마을주민이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 또한 화성리 남형석이 전쟁 전 좌익계열 주민에 의 해 우익인사가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현장에 잠시 있었다는 이유로 수복 후 희생되었다. 참고인 김득수,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남병수, 진술조서( ). 148) 참고인 엄정섭, 진술조서( ); 참고인 전병석, 진술조서( ); 참고인 남기욱, 진술조서 ( ); 참고인 김형철, 진술조서( ); 참고인 전, 통화보고서( ). 149)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50) 참고인 전, 2차 진술조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85

64 제 2 권 최익남, 박병기, 주성원, 주순원, 황병기, 문동모, 남용순 등이 전쟁 전 보도연맹원이었거 나 전쟁 직후 보도연맹 관련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친인척으로 확인된다. 151) 즉 전쟁 직후에 보도연맹 집단총살을 피했던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인민군 점령시기에 인민위원회 등 각종 단체에 임명되었다가, 수복 후 그 중 일부는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고 남은 사람들은 부역혐의로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인민군 점령시기 지역사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부역혐의자들이 주로 희생되 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확인한바, 부역혐의를 받은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일제 강점기부터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던 집안이거나 항일독립운동가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던 마을에 집중되었으며 몇 개의 성씨 집안사람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152) 따라서 수복 후 군 경이 부역혐의자 분류 심사를 할 때 인민군 점령시기에 맡았던 공적인 역할이나 단체가입 여부만이 아니라 전 쟁 이전 독립운동이나 좌익활동을 했던 일가친척들과의 친소관계 여부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 153) 되며, 사적 감정에 의해 부역혐의가 과도하게 부풀려져 희생된 경우도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희생규모 이 사건의 희생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나 증언에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151) 참고인 이태호, 진술조서( ); 참고인 주정균, 진술조서( ); 참고인 전찬업, 진술조서 ( ); 참고인 남중익, 진술조서( ); 참고인 전종록, 진술조서( ); 참고인 장 윤한, 진술조서( ); 참고인 김덕문, 진술조서( ); 참고인 김선도, 진술조서( ). 152) 일제강점기 울진지역의 사회운동을 연구한 이덕열의 1930년대 울진지역의 사회운동 (영남대 석사학위 논문, 1992)과 조성운의 일제하 울진농민조합의 결성과정 및 그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7) 논 문과 진실화해위원회의 희생자 조사를 대조해보면 울진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았던 마을 대부분은 사회주 의 계열의 항일독립운동의 조직활동이 있었던 마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참고인 진술에서도 공통 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참고인 이태호는 기성면 삼산리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돌 아온 이승권의 영향으로 마을 청년 다수가 해방 후 각종 사회주의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들 대부분이 수 복 후에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결국 일제시기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마을 의 주요 성씨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지역의 각종 사회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들이 전쟁 발 발 이후 인민군 점령시기에 인공에 협력했기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씨족사회의 특 성상 이념과 무관하게 같은 마을공동체 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주변 친척의 권유로 각종 사회활동에 연루되었다가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대단히 높다. 153) 전쟁 전 리 대한청년단장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후퇴하지 못하고 인민군 점령시기 살기 위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인민위원장을 하였던 경우, 수복 후 조사를 받았지만 석방되는 사례가 있다. 대한청년단장이 인민위원장을 하였거나 그런 연유로 석방되어 확인된 마을은 북면 두천리, 울진면 봉평리, 화성1리 등의 마을에서 그러한 사례가 확인된다.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주두원, 진술조서 ( ); 참고인 이종진,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먼저 경찰서 연혁 수록자료 중 1956년도에 생산되어 강원도 경찰국장에게 보고한 경 찰 10년사 편찬에 관한 건 에서는 부역자 중 시국을 불인식한 자 259명을 송치 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 행형기록을 확인한 결과 부역혐의자들이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경우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259명 송치 란 곧 즉결처형 된 사람들의 수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부역자 명부 (정보계, 1962), 부역자 명부 (보안과, 1981년 이전), 신원기록편람 (1981) 등에서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161명이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확인된 희생 자 및 희생추정자의 규모는 256명(확인한 사람은 205명)이다. <표 15>는 기존 자료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확인된 희생규모이다. <표 15> 울진지역 부역혐의자 희생규모 연번 항 목 규 모 1 울진경찰서 부역자 명부 ( 년 이전) 신원기록편람 (1981) 161명 2 경찰서 연혁 경찰10년사 편찬에 관한 건 259명 3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자로 확인한 규모 ( )은 희생추정자를 합한 규모 205명 (256)명 그러나 수복작전 초기 사건과 후정리 부둘골 사건 등 국군에 의해 일어난 사건의 희생 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25명이 위 경찰자료를 통해 희생자로 확인된 161 명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유족 및 참고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신림 올시골에서만 250여 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울진경찰서 자료에 기재된 숫자를 이 사 건의 전체 희생규모로 보기 어렵다. 이 사건의 전체 희생규모는 수복작전 초기 국군에 의 한 희생자 9명, 후정리 부둘골 약 40명, 신림 올시골에서 250여 명, 후퇴기 지서 경찰에 의한 희생자 20여 명 등 총 320여 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나. 가해주체 및 가해의 지휘 명령체계 이 사건은 마을 단위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하여 가해주체 구성에 다소 편차가 있다. 154) 154) 신림 올시골 사건의 경우 울진경찰서 사찰계가, 후정리 부둘골 사건의 경우 CIC와 헌병대의 지휘 하에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87

66 제 2 권 그럼에도 이 사건은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 CIC, 울진경찰서(사찰계) 등 3자가 주도했으 며, 155) 대한청년단이나 마을 이장 등이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6) 가해주체를 크게 국군 경찰로 구분하면, 국군은 CIC와 국군 제3사단 헌병대, 죽변에 주둔한 보충병, 훈련병으로 구성된 제3사단 소속 보충대 157)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찰은 울진경찰서 사찰계와 지서 경찰 등이 주로 해당된다. 1) 울진경찰서(사찰계) 당시 울진경찰서에는 강원도 경찰국의 지휘하에 서장 박규철을 비롯하여 사찰계 등 총 6개 부서 158) 에 60여 명, 총 8개면 12개 지서에 60여 명, 특별지역 4개 지서에 각 20여 명 의 경찰병력이 추가 배치되어 총 190여 명 정도가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59) 당시 울진경찰서의 조직체계는 다음 <표 16>과 같다. <표 16> 사건 당시 울진경찰서 지휘체계 강원도경찰국 울진경찰서 경무계 보안계 사찰계 수사계 경비계 통신계 울진면 (죽변 지서) 북면 (하당 지서) 근남면 (오산 지서) 원남면 (매화 지서) 서면 (광회 지서) 평해/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 ( ) 안은 각 면에 추가로 있었던 지서명을 말함 군이 부역자 처형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155)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처형명령은 헌병대나 CIC 등 군 지휘자였을 것 이라는 경찰 측 증언은 당시 전시 계엄 하에서 각 지역 경찰이 군으로부터 부역자처리 지휘를 받았음을 의미하지만, 경 찰의 책임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진술이기도 하다. 156)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57) 울진경찰서, 경찰서연혁 (1956); 참고인 임, 전화면담보고( ). 임 은 당시 처형을 담당 했던 부대가 3사단 소속 보충대 1개 대대로 울진에 한달간 주둔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후정리 부둘골 사 건은 10월 20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158) 사찰계 외 경무계, 보안계, 수사계, 경비계, 통신계 등이 있었다. 당시 울진경찰서 소속 경찰인 홍, 이, 주 등의 증언에서 확인되었다. 159)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 (1956)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울진경찰서 본서에서는 사찰계가 주로 부역자 명단작성과 색출, 검거, 인계 등을 담당 하였다. 당시 사찰계에는 주임을 비롯하여 내근 및 외근자까지 총 15명 정도의 경찰이 있 었다. 당시 이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홍 주임, 전, 홍, 황, 전, 임, 전 등이다. 이들은 부락별로 역할을 분담하여 총 8개면 12개 지서에 있는 경찰과 의용경찰의 지원을 받아 부역자를 색출하여 본서로 검거해오는 업무를 수행했다. 160) 울진경찰서 경찰은, 신림 올시골 사건 등 수많은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집행하였다. 당 시 울진경찰서 경찰로 1960년대 이후 오랜 기간 울진경찰서 사찰계, 정보계 등에서 근무 하였던 황 은 울진경찰서가 치안국의 지시에 의해 부역혐의자들을 즉결처형한 것은 사실이다 라고 진술하였으며, 당시 울진경찰서 사찰계 형사로 근무했던 홍 은 울진 경찰서 박규철 서장은 강원도 경찰국장의 지시 하에 부역자 처리를 하였고, 서장의 지시 에 의해 사찰계 주임 홍 과 전 경사가 부역자 처리를 주도하였으며, 각 지서장도 울진경찰서장의 권한을 위임받아 임의처형 을 하기도 했다 고 진술하였다. 161) 따라서 울진경찰서 박규철 서장은 치안국(치안국장 김태선) 또는 강원도경찰국(경찰국 장 유근억)의 지휘 하에 162) 울진경찰서 사찰계와 지서 경찰을 동원하여 부역자 처리를 주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 CIC 앞의 사건 경위에서 나타나듯이 참고인 중 다수가 울진군 부역자처리 과정에 CIC가 개 입했다고 진술하였다. 먼저 당시 울진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홍 의 진술에 의하면, 울진 CIC 파견대장 김 상사 163) 휘하에 민간인 7~8명이 있었다 고 한다. 또한 참고인 윤암중은 동창인 이 164) 가 원남면 CIC 수사 파견대장으로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남기욱 160)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 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61) 참고인 홍, 진술조서( ). 162) 내무부치안국, 경찰 10년사,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임, 전화면담 보고( ). 위 참고인들로부터 김 가 울진에서 CIC로 활동하였다는 진술을 확보하여 김 의 병적 기록을 확인한바, 1953년 5월 20일에 입대와 동시에 육군본부 CIC로 배속되어 이후 정보학교를 수 료하고 육군 본부와 1군단 CIC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968년 10월 31일 만기로 예비역으로 편입하였 다. 김 는 2007년에 사망하였다. 위의 홍, 이, 임 등이 김 의 계급을 상사로 기억을 하는 것은 김 가 1953년 CIC로 입대 후 1968년 만기제대할 때까지 울진 및 동해안지역에서 활동을 하였고, 만기제대 때의 계급이 상사였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89

68 제 2 권 은 집안 할아버지뻘 되는 남상 165) 가 수복 후 울진에 CIC 파견대장으로 와서 덕을 보 았다 라고 진술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들의 신원을 확인한 결과, 김 는 사건발생시기인 1950년 10 월에는 군인의 신분이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병적기록에는 이후인 1953 년도 입대와 동시에 육군본부 CIC로 배속되었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건 당시 이 와 만찬가지로 민간인 신분으로 CIC 요원으로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 다. 166) 이 의 경우, 당시 김 휘하에서 민간인 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는 경찰 측 참고인들의 진술이 있으나 167) 병적자료 및 기타 자료를 통해 그 신원과 활동내용을 확인 할 수 없었고, 남상 의 신원도 역시 확인할 수 없었다. 참고인 홍 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주로 사복 차림으로 죽변에서 많이 활동하였 다고 한다. 168) 죽변 후정리 부둘골 사건은 CIC가 헌병과 함께 경찰을 지휘하여 부역자 처형까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죽변지서에 근무하였던 임 은 죽변지서에 CIC와 헌병이 와서 경찰에게 부역혐의자들을 묶으라고 지시하여 경찰들이 포승줄로 부역혐의자들을 묶어서 이들에게 인계하자 현역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가 총살 을 집행하였다 고 진술하였다. 169) 또한 CIC가 직접 부역혐의자를 연행하여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170) 그들은 인민군 복 장으로 위장하여, 도피한 부역자의 가족과 이미 사살된 좌익 가족들에 대한 사상조사 및 정보조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참고인 주두원 171) 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64) 참고인 윤암중, 진술조서( );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윤암중의 부친이 수복 후 부역혐의로 매화지서에 검거되어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어 즉결처형될 상황이었으나 당시 매화지 서 CIC수사 파견대장으로 온 진술인의 동창인 이 에 의해 석방되었다고 한다. 진술인은 부친이 풀려 나온 후에 친구인 이 가 CIC요원으로 원남면에 수사파견 대장으로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또 한 이 는 민간인 신분으로 방첩대(CIC)원 역할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현재 사망한 것으로 확 인되었다. 165) 참고인 남기욱, 진술조서( ). 남기욱은 울진에 CID 파견대장으로 집안 할아버지뻘이 되는 남 상 가 와서 덕을 많이 보았고, 계급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찰측 참고인 조사 결과 CID는 울진에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바, 당시 남상 는 CIC대원으로 판단된다. 또한 남상 의 신 원을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확인할 수가 없었다. 166)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1950년 청도군 CIC 파견대장이었던 이 의 진술에 의하면 당 시 청도군을 관할한 CIC 요원은 현역군인 5~6명과 민간인 신분의 문관 5~6명이 휘하에서 함께 활동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167) 참고인 홍, 진술조서( ); 참고인 임, 통화보고서( ). 168) 참고인 홍, 진술조서( ). 169) 참고인 임, 통화보고서( ). 170) 신화리 전병찬과 그의 동생 전 는 수복 후 CIC에 의해 후정리 백사장에서 총살되었다. (참고인 남기 욱, 진술조서(2007,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6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인민군 복장을 하고 M1 총을 찬 군인 7~8명이 저희 삼형제에게 와서 인민군인데 북으 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깐 그러면 총살시키겠다고 하면서 마을 앞 모래사장으로 끌고 갔어요. 다시 올라 가겠냐고 물어서 가지 않겠다고 하니깐 하늘로 총 을 3발을 쏘더라고요. 그러고 난 후 사실은 자신들이 인민군이 아니고 국군 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난 후에 마음을 잘 쓰면서 살라 고 하면서 방위군을 모집할 것이니 방위군에 가입 을 하라고 하고는 가더라고요. 172) 당시 울진지역에서 활동했던 CIC의 소속 및 상급의 지휘 명령 기관을 확인할 수는 없 었으나 당시 울진이 강원도에 속했으므로 강원지구 CIC 파견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 시 울진 CIC의 규모 또한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기성면 이평에서도 CIC가 주둔하여 도 피한 주요 부역자의 가족을 연행하여 조사한 것으로 보아 분대 규모의 조직들이 여러 지 역에 분포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73) 3) 헌병대 조사결과, 헌병대도 이 사건의 주요한 가해주체로 확인되었다. 울진지역에는 국군 제3사단이 북진할 무렵 소대 규모 정도의 헌병대가 울진읍 전매청 자리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174) 전쟁 당시 이들의 주 임무는 원래 치안 확보, 포로 후송, 독전, 주보급로 확보, 군기강 확립, 형무소 경비 등이었다. 175) 전쟁시기 울진지역에서 헌 병대는 CIC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지역 우익단체의 협조를 받아 부역자 명부 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76) 헌병대가 가해과정에 직접 개입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근남면 노음리 주민 최종수가 인민군 점령시기에 자신의 가옥을 여맹사무실로 사용 171) 참고인 주두원의 부친 주진석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172) 참고인 주두원, 진술조서( ). 집안에 일제시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한 어른의 영향으로 부친 주진석이 해방 후 인민위원회 무경부장을 지냈으며 전쟁 직후 보도연맹으로 죽변 후릿개에서 총살 되었다. 또한 주진석의 총살로 대한청년단장 등의 우익활동을 한 참고인의 삼촌들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 역활동을 하다 수복 후 도피를 하였다. 이 중 주진익은 수복 후 부역혐의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173) 참고인 이대권, 진술조서( ); 신청인 이능식, 진술조서( ). 이능식은 남편이 지서에 끌 려간 후 마을에 도피를 한 사람의 부인 두 명과 함께 밤에 군인에 의해 이평 심수마을로 끌려가 남편이 한 일에 대해 조사를 받고 다음날 함께 끌려간 부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이 CIC부대라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174) 참고인 주,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175) 헌병사령부, 한국헌병사, 1952, 30쪽. 176) 강효덕, 통화보고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91

70 제 2 권 했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177) 울진경찰서 유치장 경비를 섰던 전 의 진술에 의하면, 헌병대는 부역혐의자들을 연행 구금하기도 하였으며, 인민군 점령 당시 정치보위부나 자위대 등 주요 기관에 속 한 부역자들은 헌병대가 직접 조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헌병대가 직접 CIC와 함께 경찰 에 의해 연행 구금된 부역자들을 끌고 가서 조사도 하고 처리(총살)도 하였다 라고 한 다. 178) 죽변지서 순경으로 근무했던 임, 임 은, 죽변으로 파견된 헌병이 여관 및 개 인집에 묵으면서 죽변지서에 수시로 나와 부역자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이러저러한 지시 를 하였고, 죽변 후정리 부둘골 사건은 헌병대와 CIC가 당시 죽변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총살 지시를 하였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179) 수복 후 한 달간 이 지역에 헌 병이 주둔하는 동안 부역자 총살이 있었고, 그 이후 검거된 부역자는 춘천지방검찰청 강 릉지청으로 송치되어 처형되거나 처리되었다고 한다. 울진에 주둔한 헌병대의 규모와 소속, 신원 등을 공식자료를 통해 정확히 확인하지 못 했다. 그러나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역사 (1980),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4권, 국방부 군 사편찬연구소 (1971)의 기록과 경찰 측 참고인의 진술을 종합하면, 울진이 3사단 작전 지 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3사단 소속 직할 헌병대이거나 3사단 22연대, 23연대, 26연대 소속 헌병대일 것으로 판단된다. 180) 4) 가해 지휘 명령체계 이 사건에서 CIC와 헌병대는 울진경찰이 검거, 연행한 부역혐의자들을 즉결처형 과 임의처형 이라는 형식으로 살해할 것을 지시한 주체로 보인다. 다만 이 3자가 어떠한 지 시 명령 또는 상호 협조 관계하에서 부역혐의자 처리 를 수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시 계엄 상황에서 국군의 개입과 지시에 의해 경찰이 부역혐의자 처리를 주도하였다는 정황과 경찰 측 참고인의 진술이 있고, 181) 실제 후정리 부둘골 사건 177) 참고인 방한기, 진술조서( ). 178) 참고인 전, 진술조서( ). 179) 참고인 임, 진술조서( ). 180) 보병제3사단 백골사단역사 ; 참고인 임, 진술조서( ). 181) 참고인 이 은 부역자 처리는 울진경찰서 사찰계가 담당한 일로 헌병대와 CIC의 지휘를 받아 한 일 이다 라고 진술하였으며, 참고인 임, 임 은 후정리 부둘골은 헌병대와 CIC의 명령에 의해 경찰 이 부역혐의자들을 무장한 군인들에게 인계한 후 집단총살되었고, 신림 올시골은 경찰이 했지만 군이 개 입(지시)했다 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참고인 전 는 울진경찰서에 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이 가끔 CIC 에 의해 인계되었고, 신림 올시골은 울진경찰서가 했지만 초기 부역혐의자 집단처형에 당시 주둔한 군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에서 CIC와 헌병대가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국군이 울진지역에 주둔했던 1950년 10월 한 달간은 군, 특히 CIC의 지시에 따라 부역자 처리 업무가 수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울진경찰서가 치안국 혹은 강원도경찰국의 지시를 받아 독자적으로 부 역혐의자를 연행, 살해한 사례도 일부 발견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군이 지휘한 것으로 보이지만 상부의 일사불란한 명령 하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 가해의 적법성 여부와 책임소재 이 사건은 수복 후 군경에 의해 주민들이 부역혐의로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부역혐 의자에게는 법적으로 국방경비법 이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 등 을 적용하여 법원에서 재판을 거쳐 형벌이 집행되도록 하는 실체적 절차적 규정이 있었 다. 그러나 울진사건 관련 희생자들은 최소한의 절차조차 무시된 채 현지 군 경찰에 의 해 자의적으로 처형되었다. 서울 인근의 경우 이 시기에 군 검 경 합동수사본부가 설 치되어 부역자 불법처형을 감행한 경찰과 치안대를 체포하기도 했으나 울진에서는 무소 불위의 학살이 행해졌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해 신청인과 피해자 측 참고인들뿐만 아니라, 경찰 측 참고인 들도 적법한 절차 없이,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인 민군 점령시기 자발적으로 부역행위를 한 사람은 대부분 도피하거나 월북을 하였고, 소 극적으로 참여했거나 인공 측의 강요에 의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역행위를 한 사 람은 자신들의 죄가 무겁지 않다고 생각해 남아 있다가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도피 하여 1951년 1 4후퇴 이후에 검거된 부역혐의자들은 검찰에 송치된 이후 재판을 통해 실형을 받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적극 부역자가 살아남고, 소극 부역자들이 살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비록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을 이롭게 한 부역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당시 법적으 로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특별조치령 등 부역혐의자의 처벌에 적용될 수 있는 실체 적 절차적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전 상태에서 무저항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생명권과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며 어떠한 논 리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이다. 당시 경찰관으로 재직했던 참고인 들이 개입하였다 고 진술하였고, 참고인 전 은 수복 후 부역자 처형은 울진경찰서가 활동한 것은 사 실이지만 군이 개입한 것도 사실입니다. 3:2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부역혐의로 경찰서에 구금된 부 역혐의자들 중 정치보위부나 자위대 등 주요 기관에 속했던 사람들을 직접 조사하거나 처리(총살)하였 다 라고 진술하였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93

72 제 2 권 모두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일관되게 고백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국군 제3사단 군인과 CIC, 울진경찰서 경찰 등 가해행위자들을 관 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국가에게 책임이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라. 유족의 피해 본 사건의 관련 유족들은 억울하게 총살된 가족들에 대한 한과 빨갱이 집안이라는 사 회적 냉대와 손가락질 때문에 평생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유족들은 부모와 형제, 친척을 잃은 박탈감 속에서 정신적인 후유증을 겪었으며, 유족 가운데는 남편을 잃은 정 신적 충격과 이후 국군의 지속적인 핍박으로 자살을 시도한 여성도 있었다. 182) 유족들에게 가족의 상실, 특히 가장의 상실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은 매우 컸다. 유자 녀들은 얼굴도 보지 못했거나 기억나지 않는 부친의 상실로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 왔으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연좌제로 취직에 불이익을 당한 경우도 많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대물림하였다. 유족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는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유 지해온 마을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사회적인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과 집을 버리고 타지로 쫓겨간 경우가 많았으며, 고향마을에 남아 있는 유족들도 오랜 시간 동안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183) 유족들은 사망신고도 제대로 못 해 호적상 사망날짜도 대부분 다르게 기재되어 있으며 좌익처형자의 자식 또는 불순분자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다. 사회적 차 별과 냉대는 사회에 진출하는 데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유족들은 취직이나 승진, 해외 출국, 경찰관 등의 공무원 시험이나, 군대 보직 등에서 신원조회나 연좌제에 걸려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자신들의 처지를 세상에 하소연하지도 못하였다. 184) 182) 신청인 김영홍, 진술조서( ); 참고인 이서촌, 진술조서( ). 183) 신청인 김영홍, 진술조서( ); 참고인 이서촌, 진술조서( ); 참고인 전학중, 진술조서 ( ); 참고인 이호상, 진술조서( ); 참고인 이규원, 진술조서( ); 참고인 남 기욱, 진술조서( ); 참고인 김득수, 진술조서( ); 참고인 엄정섭, 진술조서( ); 참고인 장진복, 진술조서( ); 참고인 전종록, 진술조서( ). 184) 신청인 김영홍, 진술조서( ); 신청인 전갑중, 진술조서( ); 신청인 황재운, 진술조서 ( ); 참고인 윤영재,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익수, 진술조서( ); 참고인 주두 원, 진술조서( ); 참고인 최소남, 진술조서( ); 참고인 노수명, 진술조서( ); 참고인 전병석, 진술조서( ); 참고인 이규원, 진술조서( ); 참고인 남기욱, 진 술조서( ); 참고인 김형철,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이 사건에 가족구성원이 희생되었거나 월북 및 행방불명된 사람의 가족들은 이후 요 시찰 명부 에 등재되어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대상이 된 경우가 있었으며, 185) 이후 공안 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2차적인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186)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유족들의 공통된 요구는 무고하게 죽은 가족들 의 억울함이 규명되어 희생자들의 넋이라도 위로되었으면 하는 것 이었다. Ⅲ.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론 가. 김경순( 金 景 淳, 사건번호 다-485) 외 204명의 울진지역 주민들은 1950년 9월 26일 부터 1950년 12월 말경까지 울진경찰서와 특무대(CIC),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보 충대 군인에 의해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신림 올시골, 죽변면 후정리 부둘골 등 여러 곳에서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집단총살당하거나 생매장되었다. 나. 1950년 9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국군 제3사단 소속 전투부대 군인은 수복작전 초기 작전지역에서 일부 주민들을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총살하였고,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특무대의 지시하에 죽변지서 경찰로부터 같은 혐 의로 인계받은 주민들을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군인이 후정리 부둘골로 끌고 가 집 단총살 및 생매장의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또한 1950년 10월 말경부터 11월까지 여러 차 례에 걸쳐 울진경찰서 경찰이 각 지서로부터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인계받은 주민들을 신림 올시골로 끌고 가 집단살해하였고, 1950년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은 일부 주민들 을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울진경찰서로 압송한다고 하면서 황보리 문둥이골로 끌고 가 집단살해하였다. 1950년 늦가을 경 사계리 나그네골에서도 하당지서 경찰이 같은 이유로 일부 주민들을 집단살해하였다. 본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복작전 초기 국군에 의한 희생자 9명, 후정리 부둘 골 약 40명, 신림 올시골에서 250여 명, 후퇴기 지서 경찰에 의한 희생자 20여 명을 포함 185) 희생자 이종대의 아들 이규호는 1975년경 모교인 사동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시 매년 연말에 교육청 관리 과로 겉봉투에 人 袐 이라고 적혀 있는 1년간의 행적을 적시한 동향보고서를 보내는 것을 교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186) 참고인 주두원, 진술조서( ).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95

74 제 2 권 하여 총 320여 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울진경찰서에서 입수한 부역자 명부 (울진경찰서, 1962) 등의 자료에 거론된 4,569명의 명단을 기초로 울진지역 8개 읍면 133개 마을에 지자체의 협조를 얻어 현지조사를 한 결과, 이 중 희생자 205명과 희생추정자 51명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다. 본 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김경순( 金 景 淳 다-485), 윤종연( 尹 宗 淵 다 -2319, 2711), 이종대( 李 鍾 大 다-2711), 최현주( 崔 鉉 周 다-2711), 이효세( 李 孝 世 다 -2711), 이윤세( 李 潤 世 다-2711), 전병세( 田 炳 世 다-2711), 이준권( 李 準 權 다-2711), 전병인( 田 炳 仁 다-2711), 황병극( 黃 炳 極 다-2711), 주성수( 朱 性 守 다-8237), 남로( 南 輅 다-9036), 남재열( 南 載 烈 다-9037), 전중락( 田 重 洛 다-9430), 노재극( 盧 在 極 미신 청), 윤정옥( 尹 貞 玉 미신청), 남 (미신청), 남용순(미신청), 최종구(미신청), 윤건택(미 신청), 김병훈(미신청), 전재식( 全 在 植 미신청), 옹기 제작했던 청년, 신원불상, 임명승 ( 林 明 承 미신청), 김동옥(미신청), 박산출(미신청), 남무호( 南 武 鎬 미신청), 임중화( 林 重 華 미신청), 전구현( 田 九 鉉 미신청), 전복문( 全 福 文 미신청), 전보중( 全 輔 重 미신청), 주라원( 朱 羅 源 미신청), 주우형(미신청), 남의석(미신청), 황병오( 黃 炳 五 미신청), 이갑 춘( 李 甲 春 미신청), 황병해( 黃 炳 海 미신청), 김영동(미신청), 김명동( 金 明 東 미신청), 김예동( 金 禮 東 미신청), 이능선( 李 能 先 미신청), 이호권( 李 虎 權 미신청), 한병희( 韓 秉 熙 미신청), 황병기( 黃 炳 琪 미신청), 김병태( 金 炳 台 미신청), 김유현( 金 裕 鉉 미신청), 황재칠( 黃 載 七 미신청), 황정도( 黃 正 道 미신청), 심원식( 沈 元 植 미신청), 주인식( 朱 仁 植 미신청), 남한택( 南 漢 澤 미신청), 이유조( 李 有 造 미신청), 황기영( 黃 箕 永 미신청), 황영옥( 黃 永 玉 미신청), 김형덕( 金 泂 德 미신청), 전두만(미신청), 최완석(미신청), 박명 래( 朴 命 來 미신청), 엄영학(미신청), 어용수( 魚 龍 洙 미신청), 임선교( 林 善 敎 미신청), 주성원( 朱 聖 源 미신청), 주순원( 朱 舜 源 미신청), 주태익( 朱 泰 益 미신청), 전병찬(미신 청), 전 (미신청), 김규선( 金 圭 善 미신청), 김일만( 金 一 萬 미신청), 김종대( 金 鐘 大 미신청), 남의옥( 南 義 玉 미신청), 박억조( 朴 億 兆 미신청), 박익성( 朴 益 晟 미신청), 심 학수( 沈 學 洙 미신청), 이보순( 李 輔 淳 미신청), 이봉문( 李 鳳 文 미신청), 이선교( 李 善 敎 미신청), 임성교( 林 成 敎 미신청), 전병권( 田 炳 權 미신청), 전병문( 田 炳 文 미신청), 전상익( 田 祥 益 미신청), 전용섭( 田 容 燮 미신청), 이재철( 李 在 哲 미신청), 장팔석( 張 八 錫 미신청), 최익남( 崔 益 男 미신청), 최익재( 崔 益 載 미신청), 박병기(박병기 미신청), 편종한(미신청), 김금산( 金 琴 山 미신청), 김금석( 金 琴 石 미신청), 남삼수(미신청), 문동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모( 文 東 模 미신청), 장상렬( 張 相 烈 미신청), 박인주( 朴 仁 柱 미신청), 사재숙( 史 載 淑 미신청), 장규환( 張 圭 煥 미신청), 이영택( 李 榮 擇 미신청), 황진수( 黃 鎭 秀 미신청), 황 택곤( 黃 宅 坤 미신청), 황진원( 黃 鎭 元 미신청), 황진규( 黃 鎭 圭 미신청), 김태원(미신 청), 이병국( 李 秉 國 미신청), 이익래( 李 益 來 미신청), 주부원( 朱 富 原 미신청), 주수원 ( 朱 水 源 미신청), 주교영(미신청), 주중원(미신청), 전영로(미신청), 주진동( 朱 鎭 東 미신 청), 권응삼( 權 應 三 미신청), 김호진( 金 鎬 鎭 미신청), 박도명( 朴 道 明 미신청), 박도원 ( 朴 道 源 미신청), 양재두(미신청), 남중상( 南 重 詳 미신청), 주명원( 朱 命 源 미신청), 노 종영( 盧 鐘 영 미신청), 박순학( 朴 順 學 미신청), 李 光 海 (미신청), 임남술( 林 南 述 미신 청), 정정갑( 鄭 正 甲 미신청), 최문수( 崔 文 守 미신청), 최성권( 崔 聖 權 미신청), 최순명 ( 崔 順 明 미신청), 최원수( 崔 元 守 미신청), 최원철( 崔 元 喆 미신청), 최형석( 崔 亨 錫 미 신청), 최형일( 崔 亨 一 미신청), 홍쌍용( 洪 雙 龍 미신청), 홍종영( 洪 鐘 榮 미신청), 최원 기(미신청), 도치명( 都 致 明 미신청), 이근하(미신청), 이석암( 李 石 岩 미신청), 이호선( 李 鎬 善 미신청), 임칠석( 林 七 夕 미신청), 장대현( 張 大 鉉 미신청), 주용덕(미신청), 박춘 서( 朴 春 瑞 미신청), 오해룡( 吳 海 龍 미신청), 이해식( 李 海 植 미신청), 주성원( 朱 聖 源 미신청), 김상흠( 金 相 欽 미신청), 김인규( 金 仁 奎 미신청), 백사진( 白 士 鎭 미신청), 장 봉근( 張 奉 根 미신청), 장영자( 張 英 子 미신청), 남갑영( 南 甲 英 미신청), 남경( 南 輕 미 신청), 남구정( 南 龜 廷 미신청), 남만년( 南 萬 年 미신청), 남봉수( 南 鳳 壽 미신청), 남상 권( 南 相 卷 미신청), 남상규( 南 相 奎 미신청), 남상섭( 南 相 燮 미신청), 남상연( 南 相 燕 미신청), 남용헌( 南 容 憲 미신청), 남운종( 南 運 鐘 미신청), 남중영( 南 重 永 미신청), 남 창호( 南 昌 鎬 미신청), 남천만( 南 千 萬 미신청), 남흥용(미신청), 문봉술( 文 鳳 述 미신 청), 박산출( 朴 山 出 미신청), 주우영( 朱 宇 英 미신청), 김문일( 金 文 一 미신청), 김석로 ( 金 錫 魯 미신청), 남옥동( 南 玉 童 미신청), 박경석( 朴 慶 錫 미신청), 안춘서( 安 春 瑞 미 신청), 윤영규( 尹 榮 奎 미신청), 윤정규( 尹 政 奎 미신청), 장옥동( 張 玉 同 미신청), 장원 희( 張 元 姬 미신청), 장의호( 張 義 鎬 미신청), 장철균( 張 鐵 均 미신청), 전구봉( 田 九 鳳 미신청), 전금옥( 田 金 玉 미신청), 전여현(전여현 미신청), 전우봉( 田 于 鳳 미신청), 전 중석( 田 中 錫 미신청), 전창수( 田 昌 秀 미신청), 정태석( 鄭 泰 錫 미신청), 주순희( 朱 順 姬 미신청), 주유근( 朱 裕 根 미신청), 주유원( 朱 裕 源 미신청), 주진응(미신청), 주학원 ( 朱 學 源 미신청), 최종학( 崔 鐘 學 미신청), 장명규(미신청), 전호석(미신청), 문숙자( 文 淑 子 미신청), 장원수( 張 元 洙 미신청), 남종철( 南 鍾 哲 미신청), 전치호(미신청), 남분남 (미신청), 전화숙(미신청), 윤씨부인(미신청), 갓난아이(미신청), 이보호(미신청), 장낙규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97

76 제 2 권 ( 張 洛 奎 미신청), 윤상헌(미신청), 남정규(미신청) 등 205명이다. 라. 희생자 및 희생추정자로 확인된 256명 중에는 청장년 남성이 다수(94%)를 차지했 지만 여성과 어린이도 2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시기에 공적인 역할을 맡거나 특정단체에 가입하는 등의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러한 부역혐의에 대한 판단은 부역자 처리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경의 임의 분류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즉, 이 시기에는 과거 자발적으로 부역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도피 월북한 뒤였고, 이웃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인민군 점령시기에 특정한 직책을 맡 았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 단체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들이 남아 있다가 희생되 기도 하였다. 좌익혐의나 부역혐의가 전혀 없는 민간인이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국군의 소집 명령에 늦었다는 이유, 인민군 장화를 신었다는 이유, 군 작전지역을 거닐었 다는 이유, 가족이 부역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희생되었고 지역주민 사이의 갈등과 사적 보복감정 때문에 희생되기도 하였다. 희생자 중에는 전쟁 전부터의 좌익활동 혐의와 보 도연맹 가입 혐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도 상당수 차지했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항일독 립운동을 했거나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몇몇 마을의 몇 개 주요 성씨 집안 사람들이 희생자의 상당수를 차지했다는 특징도 있다. 마. 본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행위자는 울진경찰서와 특무대,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 와 보충대 군인이다. 특무대와 헌병대는 경찰이 검거 연행한 부역혐의자들을 즉결처형 의 형식으로 살해할 것을 지시한 주체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상부로부터 어떠한 명령 이나 지시를 받았는지, 서로 간에 어떠한 협력관계 속에서 주민들을 살해하였는지에 대 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울진은 피난을 가지 못한 우익인사까 지도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복 직후부터 무장한 군경이 비무 장 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아무런 적법한 절차도 없이 살해한 행위는 명백한 위법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생명권과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더 구나 부역자 처리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경이 임의 분류에 의해 민간인을 살 해하고 좌익혐의나 부역혐의가 전혀 없는 민간인까지도 살해한 행위는 전시의 특수한 상 황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당시의 실체법이나 절차법을 위반한 학살행위이자 인륜의 최소한의 가치조차 저버린 야만적 행위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2. 권고사항 1) 국가의 공식사과 한국전쟁기 수복과정에서 울진에 거주하고 있는 일부 주민들을 부역혐의가 있다는 이 유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불법적이고 무도한 행위에 대해 국가는 희생 자와 그 유족에게 사과하고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2) 위령사업의 지원 국가와 울진군 지방자치단체는 유가족 및 지역주민들이 그 동안의 억울한 희생에 대해 최소한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도록 위령사업을 성심껏 지원할 것을 권고한다. 3) 제적부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 문서기록의 정정 국가는 유족들이 원할 경우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 문서기록을 법적 절 차 등을 통하여 정정할 것을 권고한다. 4) 공식 역사기록의 등재 울진군지( 郡 誌 )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의 기록 그리고 국가의 각종 공식기록물에 진실 규명된 관련 내용을 수록할 것을 권고한다. 5) 인권교육의 강화 국가는 군 경 등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쟁 중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법률과 국제인도 법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전쟁이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가져온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 육 등을 통해 널리 알림으로써 국민의 평화의식을 제고할 것을 권고한다.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399

78 제 2 권 <별 첨> <표 5> 부역자 명부 기재인원의 지역별 분류 면/리 부역자 명부 (정보계) 부역자 명부 (보안과) 구산리 노음리 산포리 4 14 근남면 기성면 북면 수곡리 수산리 6 22 진복리 1 4 행곡리 근남면 총계 구산리 기성리 다천리 망양리 방율리 봉산리 사동리 삼산리 이평리 정명리 척산리 황보리 기성면 총계 검성리 고목리 나곡리 덕구리 45 3 덕천리 두천리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면/리 부역자 명부 (정보계) 부역자 명부 (보안과) 부구리 사계리 8 21 상당리 0 9 서면 온정면 소곡리 신화리 주인리 하당리 7 26 미상 2 0 북면 총계 광회리 삼근리 소광리 쌍전리 왕피리 25 4 전곡리 하원리 4 11 서면 총계 광품리 삼근리 덕산리 덕인리 본신리 9 선구리 소태리 온정리 19 8 외선미리 13 5 조금리 온정면 총계 울진면 고성리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01

80 제 2 권 면/리 부역자 명부 (정보계) 부역자 명부 (보안과) 대흥리 명도리 봉평리 신림리 연지리 온양리 읍남리 읍내리 정림리 호월리 죽변리 화성리 후정리 울진면 총계 갈면리 금매리 기양리 길곡리 원남면 평해면 덕신리 매화리 신흥리 오산리 원남면 합계 거일리 삼달리 오곡리 8 12 월송리 직산리 평해리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면/리 부역자 명부 (정보계) 부역자 명부 (보안과) 학곡리 금음리 1 6 삼율리 7 10 후포리 평해면 총계 미기재 6 4 기타 총계 2,940 2,716 <표 6> 명부기재 인원의 성별 분류 성별 자료 출처 남 여 미기재 합계 보안과 정보계 <표 7> 명부기재 인원의 소속단체별 분류 소속단체 내무서 농맹 당 민청 빨치 산 자료 출처 여성 동맹 인민 의용 군 인민 위원 회 자위 대 직장 동맹 학생 연맹 기타 미기 재 합계 정보계 보안과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03

82 제 2 권 연 번 사건 번호 신청인 희생자 (관계, 당시나이) 김영홍 김경순 (부, 34세) , 2711 주요 진술내용 10월 15경 마을주민 5~6명과 함께 군인에 의해 연행됨. 희생자의 부친의 사망으로 일시 석방된 후 10월 말경 울진경찰서로 자진출두 후 희생되었다고 함. 부친은 마을주민들의 권유에 의해 인민위원장을 하였다고 함. 10월 중순 경찰에 연행, 매화지서에서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어 신림 윤종연 올시골에서 희생되었다고 함. 김년월 (남편, 26세) 신림 올시골 현장 목격, 구덩이 40여 곳에 6~7명에서 15명이 매장 되어 총 400여 명이 넘게 희생되었다고 함 이규호 이종대 (부, 22세) 10월경에 경찰에 연행, 신림 올시골에서 희생되었다고 함. 70년도 교사 재직 시, 교육청에 겉봉투에 人 袐 이라고 적혀있는 동향 보고서가 매년 제출됨. 지서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10월 24일 기성지서 간 후 11월 3일 울진 이능식 최현주 서로 이송된 후 신림 올시골에서 희생되었다고 함. 11월 3일에 기성지서에서 울진서로 이송 현장 목격. (남편, 25세) 진술인이 도피한 사람의 부인 2명과 함께 이평에 주둔한 CIC에 의해 연행, 조사받고 풀려나옴 이종복 이효세 (부, 32세) 수복 후 부역혐의로 마을사람들과 함께 연행되어 희생되었다고 전해 들음 전화자 이윤세 시아버님이 마을사람들과 함께 경찰에 의해 기성지서로 연행, 울진경 (시부,2 7세) 찰서로 이송되었다고 시어머니에게 들음 전갑중 전병세 (부, 27세) <표 17> 신청인 진술요지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하게 된 계기로 부친의 희생사실을 전해 들음 황기출 이준권 (이세권) (부, 25세) 10월24일 밤에 경찰에 의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기성지서로 연행됨 전학중 전병인 (부, 33세) 황재운 황병극 (부, 26살) 수복 후에 기성지서 경찰에 의해 부친이 연행, 군인인지 경찰인지 확 실히 알 수 없었으나 울진경찰서로 이송되는 것을 먼발치에서 목격함. 음력 9월 14일 생일날에 들일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기성지서로 연행 됨. 울진경찰서로 이송된 후 면회를 함. 이후 신림 올시골에서 함께 갇힌 모든 사람들이 신림 올시골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희생자 번호 신청인 (관계, 당시나이) 주문영 주성수 (부, 41세) 남경탁 남로 (부, 28세) 남상욱 남재열 (부, 26세) 최금조 전중락 (시동생, 21세) 주요 진술내용 인민군 점령시기 정미기 징발로 도정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수복 후 총을 든 경찰 8명이 집을 포위하여 부친을 연행하였고, 매화지서에서 면회를 하였으나 4~5일 후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면회하지 못했다고 함. 이후 신림 올시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친이 거기서 죽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함. 전화면담을 통해 고성1리 희생자는 주교영, 주수원, 주부원, 주중원, 주귀원, 주내원, 주무영, 주치영 등이라고 하며 이 중 주교영, 주수원, 주부원, 주중원은 후정리 부둘골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함. 11월 6일 오후 6시경에 하당지서 최 사복형사에게 연행되는 것을 8촌 제수씨가 목격함. 울진서 의용경찰로 있던 마을사람에 의해 부친이 2~3일 수감 후 어 디론가 갔다는 말을 전해 들음. 신림 올시골로 시신을 수습하러 갔으나 구덩이에 시신들이 켜켜이 쌓 여 있어 찾지 못했다고 함. 10월 15일 새벽 6시에 경찰인지 군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민 군 점령시기 마을 반장을 하였다는 이유로 울진경찰서에 연행되어 신 림 올시골에서 총살되었다고 함. 부친의 시신이 구덩이 위쪽에 있어 수습할 수 있었음. 시동생은 방위대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방위대 소속 야경 순찰을 돌 고 온 후 새벽에 경찰에 의해 울진경찰서로 연행된 후 총살되었다고 함. 친형의 부역 후 도피한 연유로 희생되었다고 함. <표 18> 피해자 측 참고인 진술요지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1 이서촌 485 신림 올시골 사건 2 이태호 2711 신림 올시골1사건 울진경찰서에 수감된 남편이 군인에 의해 트럭 한 대에 실려가 총 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함. 남편이 연행된 후 군인들이 밤에 총을 들고 들어와서 동무 반갑습 네다. 인민군인데 바른 대로 말해 하면서 모진 고통을 주어 정신적 인 고통으로 자살을 하려 했다고 함. 집안 어른인 이세권(호적명 이준권), 이효세, 이윤세, 이종대 등과 같은 마을에 사는 전병세, 전병인, 황병극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죽었다고 함. 늦가을 밤에 경찰 3~4명에 의해 마을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05

84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3 윤완규 2319,2711 신림 올시골 사건 4 남우현 2319, 2711 신림 올시골 사건 5 윤영재 2319, 윤종묵 노음리 매림동 사건 7 김봉규 노음리 매림동 사건 8 주하영 8237 신림 올시골, 후정리 부둘골 사건 함. 2차 진술에서 사동리 이순세가 진술인의 집에 도피하였다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삼산1구에 보도연맹원이었던 황병기, 이호권, 삼산 2구에 한병희, 황문걸, 김만출 이능선 등이 경찰에 끌려가서 돌아오 지 못함. 윤종연이 무장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것을 목격함. 윤종연을 매화지서 순경들이 와서 연행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함. 금매리 사람 중 보도연맹으로 매화 전시골과 후포 부근에서 총살된 사람들이 있었음. 신림 올시골과 죽변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많은 민간인들을 총살 하 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음. 작은아버지인 윤종연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희생되었 다고 작은어머님과 할머니에게 전해 들음. 군인들이 기성지서에 구금된 사람들을 울진서로 연행하는 현장을 목격함. 기성지서로 면회를 간 이능식의 증언으로는 기성지서에 40여 명이 넘게 구금되었다고 전해 들음. 올시골에 사시는 친척인 이병달의 전언으로는 신림 올시골에서 7~ 800여 명의 민간인이 집단총살되었다고 함. 진술인의 부친이고 희생자의 형님인 국가유공자인 윤종수가 좌익계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정되기 전까지 좌익 집안이라고 해서 갖은 고 통을 받아왔음. 윤건택(호적명 윤성만)이 9월 27일 인민군 점령시기에 마을이장(인 민위원장)울 하였다는 이유로 근남면 노음리 매림동에 주둔하여 인 민군과 대치를 하고 있던 중에 군인에 의해 마을주민 5명(김병훈, 전재식 등)과 함께 총살되었다 함. 시신은 모두 수습함. 진술인의 5촌 당숙인 김병훈이 음력으로 8월 15일(양력 9월 26일) 저녁 8시 노음리 636번지(사망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호적에 정확 히 기재되어 있음.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주문영의 부친 주성수, 고성리 주원영 부친, 주교영, 호월리 삼촌인 주학원이 희생됨. 주교영은 죽변 등대(후정리 부둘골)에서 총살되어 시신을 수습하였 음. 인민군 점령시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수복 후 경찰에 의해 많 은 사람들이 죄 없이 신림 큰판테기라는 곳에서 죽었음. 9 전선수 9430 희생자 전중락의 형인 전정만이 전쟁 전 면서기 일을 보았는데 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후정리 해수욕장 사건 10 주정균 후정리 부둘골 사건 11 장인현 후정리 부둘골 사건 12 전하진 후정리 부둘골 사건 13 전찬업 후정리 부둘골 사건 14 장만호 신림 올시골, 후정리 부둘골 사건 15 이봉수 - 16 전운규 후정리 부둘골 사건 17 이봉식 죽변 후릿개 사건 민군 점령시기 면 일을 보았다가 도피를 하였다는 이유로 동생인 전중락이 아무런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경찰에 의해 대신 끌려가 총살되었음. 남한택도 전중락과 비슷한 시기에 행불이 됨. 국군 선발대인가 CIC에 의해 신화리 전병찬 등 2명이 총살됨. 신림 올시골과 죽변 등대 뒤, 그리고 후정리 동아아파트 뒤 골짜기 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 후정2리 여맹위원장 전화숙이 총살되어 후정리 부둘골에서 시신 수 습 함. 의용군 참여 후 귀가한 이유로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훈부대 군인에 의해 죽변지서로 연행된 후 풀려나옴. 함께 연행된 전화숙(후정2리 여맹위원장)은 이후 군인에 의해 후정 리 부둘골에서 총살됨. 전치호는 연행을 피해 도주하다 마을 앞 어귀에서 경찰에 의해 총 살됨. 남분남(후정1리 여맹위원장)은 저녁 무렵에 군인에 의해 연행되어 이후 후정리 부둘골(20~30여 명)에서 총살되어 시신을 수습함. 수복 후에 대대 규모의 군대가 후정리 및 죽변에 한 달 정도 주둔 함. 후정리 부둘골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총살한 주체가 군인임. 인민군 의용군에 강제로 입대하여 도망쳐 온 이유로 수복 후에 울 진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나옴. 수복 후에 호월 2리 마을사람들이 후정리 부둘골과 신림 올시골에 서 많이 총살되었음. 신림 올시골, 후정리 부둘골, 죽변 등대, 원자력발전소 부근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신림 올시골은 울진 경찰서가 총살한 것임. 피난을 하여 3사단 29중대 병기과 군속으로 입대하여 수복 후 3사 단과 함께 울진에 수복해 들어왔고 죽변항에 이틀간 머물다가 북진 하여 평양까지 갔다 옴. 수복 후에 후정리 부둘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마 을 어른에게 들었음. 수복 후에 마을 치안대와 군인에 의해 죽변 바닷가 근처 후릿개에 서 3~4차례에 걸쳐 15여 명씩 50여 명의 인민군 패잔병과 민간인 이 끌려와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총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함. 장인이 당시 죽변지서장 김영찬이었는데 부역혐의자들을 몰래 풀어 준 이유로 군인과 알력이 있어, 51년도에 경찰 토벌대 대장으로 발 령이 나서 퇴직하게 되었다고 함.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07

86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18 주용숙 죽변 후릿개 사건 19 장익수 20 남병수 후정리 부둘골, 신림 올시골 사건 후정리 부둘골, 신림 올시골 사건 21 주상오 신림 올시골 사건 22 전홍로 신림 올시골 사건 23 김홍연 장일균 후정리 부둘골, 신림 올시골 사건 죽변 등대 너머 후릿개에서 군인에 의해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이야 기를 들었음. 장원수와 남종철이 정훈부대인 군인에 의해 연행되어 10월 19일에 후정리 부둘골에서 총살되어 시신을 수습함. 남형석, 남우하, 남종옥은 늦가을 경찰에 연행되어 울진서에 구금이 된 후에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되었으나 시신이 많이 부패하여 수습 하지 못함. 그러나 화성1리에 인민위원장 장세은은 전쟁 전 한청단장을 하였는 데, 수복 후에 고초만 당하고 총살되지 않음. 장원수와 남종철은 CIC에 의해 체포되어 음력 9월 9일에 죽었고, 남형석과 남우하, 남종옥은 울진경찰서에 구금이 된 후에 올시골에 서 총살됨. 전쟁 전 좌우 갈등으로 우익인사가 매를 맞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장소에 우연히 있었던 남형석이 수복 후에 아무런 이유 없이 부역 혐의로 끌려가 죽었음. 10년 전 사망한 전호준에게 수복 후에 울진경찰서에 연행되어 울진 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한밤중에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던 중 삐삐선 을 풀고 도망 나왔다는 말을 직접 들음. 장원희, 주순희, 전구봉, 주유원, 전금옥, 주진웅, 전재현, 전여현, 남옥동, 윤영규, 윤정규 등 11명이 신림 올시골에서 경찰에 의해 총 살됨. 장원희, 주순희, 전구봉, 전금옥, 남옥동 등은 신림 올시골에서 시신 을 수습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수습하지 못함. 울진경찰서에 갓난아이 셋이 함께 구금이 되었는데, 모친들이 신림 올시골에 가기 전에 울진경찰서에서 갓난아이들을 돌려보내주었음. 10월 15일 남편인 장명규와 전호석이 군인들에게 연행된 후 죽변지 서에 구금이 되었다가 후정리 부둘골에서 군인에 의해 총살됨. 친정이 죽변이라 친정오빠가 밥을 가지고 죽변지서로 날랐는데 10 월 18일이 친정아버님의 제사를 지내고 밥을 가지고 갔더니 유치장 이 비었음. 후정리 부둘골에서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수습하러 가 보니 향나무 앞에 큰 구덩이에는 3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살되 어 묻혀 있었고, 맞은 편 구덩이를 파보니 남편을 포함해 7명의 장 정들이 묻혀 있었는데 양손에 묶여서 상처가 많이 났고 다른 곳에 는 총살된 흔적이 전혀 없이 모두 생매장됨. 수복 후 칼빈총을 든 경찰들이 마을에 와서 마을 장정들을 마을 앞 강변가로 모이게 한 후 마을사람들 대부분을 연행해 갔는데 당시 17살 된 진술인 장일균도 연행되어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하루 구금된 후 울진읍 남소학교에서 3일간 구금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24 전인수 후정리 부둘골 사건 25 주두원 - 26 주선녀 신림 올시골 사건 27 남중익 신림 올시골 사건 28 박용선 전옥분 민복희 권순자 신림 올시골 사건 29 남익산 신림 올시골 사건 30 윤성규 신림 올시골 사건 는데 이때 함께 잡혀간 장의호, 장철균, 김문일은 풀려나오지 못하 고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부친 전호석과 장명규가 군인에 의해 연행되어 10월 18일에 후정리 부둘골에서 사망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음. 부친 주진석은 전쟁 직후 죽변 후릿개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 이 되었고, 수복 후 삼촌 주진익은 희생됨. 수복 직후 진술인을 포함한 삼형제는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 한 군 인 7~8명이 집으로 와 인민군인데 북으로 가자고 하여 가지 않겠 다고 하자 그러면 총살을 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마을 앞 모래 사장으로 끌고 간 후 재차 북으로 가자고 권유, 가지 않겠다고 완강 히 버티자, 허공에 공포탄 3발을 쏘고 난 후 인민군이 아니고 국군 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마음을 잘 쓰면서 살라고 하면서 방위군에 입대하라고 하면서 갔다고 함. 진술인을 포함한 삼형제는 지서로 연행되어 조사는 받지 않았 으나 이후 경찰에 의해 비슷한 사상 심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함. 또한 사촌 조카들이 박정희 정권 때에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를 받는 등의 고통을 받았다고 함. 정림1리는 시아버님 남중영과 남용헌, 문봉술, 남운종, 남흥용(남성 용), 남봉수(남해수), 남재연 등 7명이 한날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남중영, 남용헌, 문봉술, 남운종씨는 신림 올시골에서 시신을 수습 함. 일제강점기 적농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4년 복역하였던 독립운 동가인 남왈수(호적명 남용헌)는 수복 후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 되 어 치아로 시신을 확인하여 수습함. 남로, 남재열, 남상기, 남창호, 남구정, 남만년 등 6명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되어 죽었음. 남재열, 남창호는 신림 올시골에서 시신을 수습함. 남로, 남재열, 남상기, 남창호, 남구정, 남만년 등 6명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박산출, 주우영, 남갑영 등 3명이 한날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울 진경찰서에 구금이 된 후에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주우영은 신림 올시골에서 시신을 수습함. 31 주상태 신림 올시골 사건 진술인의 장인 박도명을 비롯하여 박도원, 권응삼, 양재두 등 4명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총살됨. 권응삼, 양재두는 묘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함. 51년 공비토벌대 참여로 수많은 시신이 방치된 신림 올시골 현장을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09

88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32 장상연 신림 올시골 사건 33 임병식 - 34 이호상 신림 올시골 사건 35 도치국 신림 올시골 사건 36 최소남 신림 올시골 사건 37 주지영 신림 올시골 사건 38 권길웅 신린 올시골 사건 39 박인숙 신림 올시골 사건 40 노수명 신림 올시골 사건 41 엄정섭 신림 올시골 사건 목격하였고, 이 중 절반은 총살되고 나머지는 생매장되었다는 이야 기를 들었다고 함. 권응삼, 박도원, 박도명, 양재두 등 4명이 배운 사람으로서 인민군 점령시기 무슨 직책을 맡았다는 이유로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신 림 올시골에서 총살되었고 이 중 권응삼과 양재두씨는 시신을 수습 하여 모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함. 전직 경찰관이라는 연유로 인민군 점령시기 울진군 내무서원에 군 수 및 국회의원 등 50여 명의 우익인사와 함께 고문이나 조사 등은 전혀 받지 않았고 그저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모두 풀려나옴. 형님 이호선과 이석암, 임칠석, 김경순, 이근아, 장대현, 도치명, 주 용덕, 이성재 등 연지리 9명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 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주용덕은 신림 작은판데기(고성리 방향 큰나무 부근)에서 시신을 수 습함. 수복 후에 모집에 응해 호국군 교육을 받던 중 친형인 도치명이 울 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것을 목격함. 이후 형님을 보지 못했음. 수복 후에 이석암, 이근아가 인민군 점령시기에 일을 보았다는 이유 로 끌려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음. 부친 주명원이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게골에서 총살 되어 시신을 수습함. 오해룡, 주성원, 박춘서 이해식씨가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 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부친인 박춘서와 오해룡, 주성원, 이해식 등이 수복 후에 총살됨. 당시 경찰을 하였던 친척에 의하면 CIC에 의해 죽었다고 들음. 노복순과 노연옥, 남중상, 정동술(정주하), 정대술(정난하) 등이 수 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게골에서 죽음. 70년도 신림 확장공사 때 유골을 목격함. 마을 어른인 이호규에 의하면 심원식과 주인식이 사상 문제로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되었다고 함. 심원식, 주인식의 희생연유는 전쟁전 북면 우익의 거두인 주병학이 검성리 상가집에서 북면 좌익청년들에 의해 대창으로 살해되었을 때 상가집 안내를 한 연유로 수복 후 죽게 되었음. 수복 후 경찰이 와서 인민군 점령 당시 좌익활동에 관련이 있는 사 람 모두를 총살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당시 이장과 대한청년단장 이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하여 검성리 윗 마을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42 전병석 - 43 이규원 신림 올시골 사건 44 김득수 박영서 신림 올시골 45 장진복 신림 올시골 46 전종록 김활경 47 홍순준 장홍용 48 장인열 김석중 반원복 신림 올시골,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신림 올시골,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박익성이 인민군 점령시기 나곡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인지 군인인지는 모르나 도망치다가 총살이 되었음. 이재철, 전용섭, 전경수, 전병호 등이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이 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인민군 점령 당시 북면 내무서원을 한 형 이재호가 도피한 이유로 이재철이 경찰에 연행되어 죽게 됨. 신림 올시골로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또 는 군인)에게 잡혀 죽도록 맞았음. 우익인사들에 의해 집이 부서지고 가족들이 괴롭힘을 받기도 하였 음. 주인3리는 희생자가 많은 데 그 중 기억이 나는 사람들은 저희 형 님인 김응용, 박억조, 박응용, 김종대, 김규선, 심학수, 김영석, 장하 규, 장후길, 전병문, 전병권, 전상익, 임선호, 심경수, 심찬수, 전병 문의 처인 남씨, 장기(귀) 등 17명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끌려가 서 죽은 사람들임. 주인3리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되게 된 경위는 인민군 점령시기에 민 구장의 아들인 민 대한청년단장이 마을청년들에 의해 울진 내무서에 수감되었고, 수복 과정에서 국군의 오인으로 사살된 이유로 아들 수감에 관련된 마을주민들 다수가 희생됨. 인민군 점령당시 마을 인민위원장을 한 박명래와 민청위원장을 한 남필년, 자위대장을 한 엄영학씨가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죽었다고 함. 신림 올시골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러 갔으나 찾지 못 했음. 전쟁 전 상당리에서는 빨치산에 의해 마을 구장과 반장이 나무위에 매달려 칼에 찔려 죽은 일이 있었음. 장팔석, 방성문, 방동석, 방성출, 최익재, 정영대, 최익남, 박병기 등 8명이 수복 후 희생됨. 박병기는 죽변 봉개에서 수습함. 최익남은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희생됨. 장팔석, 방성문, 방동석, 방성출, 최익남, 최익재, 박병기, 정영대 등 8명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끌려가 죽은 사람들임. 최익남은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총살되었다고 그의 자녀들이 이야기 한 것을 들었음. 전병정은 군인, 권달용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희 생됨, 이상학은 하당지서 소 경찰에 의해 밤에 연행되어 소곡리 남왈 수와 함께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총살됨. 49 장인묵 신림 올시골, 전병정, 이상학, 권달용이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11

90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남상순 김일석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50 전은술 신림 올시골 사건 51 남기욱 후정리 해수욕장 사건 52 김형철 남두호 53 이종진 최삼석 김금자 후정리 부둘골, 후정리 해수욕장 사건 - 골 및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총살됨. 신림리 마을에서는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기억이 나는 사람들은 박 순학, 홍종영, 정정갑, 최형석, 이광해, 노종영, 최원기, 최형일, 최 원수 등 9명만 기억이 난다고 함. 모두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신 림 올시골에서 총살되었고 시신은 대부분 수습함. 신림 올시골라고 해도 사람들이 총살당한 곳은 세 군데로 알고 있 는데 한 곳은 다락논들이 있는 위쪽을 게골이라고 하고 화약고 있 는 골짜기와 화약고 너머 고성리 방향으로도 한 곳이 있음. 신화1리의 전병찬(북면 인민위원장)씨가 사복을 입은 군인 2~3명 에게 의해 연행되어 후정리 해수욕장 부근에서 총살되었고 끌려가 는 것을 직접 목격함. 진술인의 먼 친척인 남상 가 당시 CID의 대장으로 와서 덕을 보았 는데 사무실이 군청 맞은 편 수궁다방 2층에 있었고 이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CID라고 들어서 알게 되었음. 울진군 민청위원장을 한 전광석씨가 수복 후 죽변지서에 수감된 후 후정리 부둘골로 연행되던 중 도주하여 2년간 도피한 후 자수하여 1970년도까지 생존을 하였다고 함. 전광석 생전의 증언에 의하면 죽변지서에 수감된 많은 부역혐의자들을 군인이 두 줄로 세워 기관 총을 쏘아서 죽였음. 전화숙(전인식의 누이인)이 후정리 부둘골에서 총살이 되었고 신화1 리의 전병찬 등 형제가 덕천 백사장(후정리 해수욕장)에서 총살되었 음. 전두만(대한청년단장)과 최완석씨가 수복 후에 울진경찰서에 끌려가 매 맞고 집으로 돌아온 후 몇 달 지나 죽음. 54 김치호 사계리 이유도가 수복 후에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고 함. 55 주무돈 주동락 후정리 부둘골 사건 주교영과 주수원, 주부원, 주치영이 수복 후에 부역혐의로 희생되었 고 주교영은 후정리 부둘골에서 시신을 수습함. 56 최원기 후정리 부둘골 사건 주교영과 주수원, 주부원, 주치영이 수복 후에 부역혐의로 희생되었 고 주교영은 후정리 부둘골에서 시신을 수습함. 57 남재창 후정리 부둘골 사건 전영로가 후정리 부둘골에서 희생됨. 58 홍동표 후정리 부둘골 사건 전영로가 후정리 부둘골에서 희생됨. 59 장윤한 주성원과 주순원은 하당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울진서로 이감 된 신림 올시골, 후 신림 게골에서 총살됨.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늦가을 경 좌익활동을 한 친척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남왈수 가 하당지서로 연행 당시 함께 연행되어 수감이 되었는데 남왈수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60 주재락 함께 5~6명이 불려 나가 삐삐선으로 묶여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 으로 보아 아마 나그네골에서 총살이 되었을 거라고 함. 나그네골에서는 소곡리, 사계, 하당리 등 7~8명이 총살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함. 주성원과 주순원은 1차로 끌려가서 신림 올시골에서 죽었고 남왈수 신림 올시골, 가 1 4후퇴 전에 친척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죽음.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 진술인이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육탈된 희생자의 유골들을 직접 목 격함. 61 방정만 - 62 장윤태 63 여계현 김봉학 64 사재철 남상형 안병삼 전명칠은 군인, 마을 인민위원장을 한 김영식은 경찰에 의해 끌려가 서 죽었다고 함. 박인주와 사봉록씨가 인민군 점령시기 마을사람들이 시켜서 인민위 신림 올시골, 원장 및 면 분주소원 등을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끌려가서 기타(하원리 백골) 사 신림 올시골에서 죽었다고 함. 건 하원리 백골에서는 가해주체가 아군인지 인민군인지는 모르나 많은 민간인들이 총살되어 묻혔다는 이야기를 들음. 기타 사건 (쌍전리 계곡) - 김태화, 편인한(편종백의 부친)이 수복 후에 울진경찰서 경찰에 의 해 연행되어 죽었음. 울진경찰서 소속 형사 2명이 직접 연행해가는 것을 진술인이 직접 목격을 하였고, 쌍전리 부근의 계곡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것으 로 알고 있다고 함.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고 함. 수복 후에 좌익활동으로 인해 경찰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 들이 여럿이 있는데 기억이 나는 사람은 남삼수, 문동모라고 함. 65 김덕문 - 문동모, 박흥식이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돌아오지 않음. 66 최수동 이석구, 남무호, 임중화, 전구현, 전복문 등이 수복 후에 경찰에 의 해 연행되어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신림 올시골, 남의석이 수복 직후 경찰에 의해 마을 앞 강변 징검다리에서 총살 기타(헌병대 등)사건 이 됨. 주우형은 수복 후에 부역혐의로 헌병대에 끌려가 오발인지 총살인 지 모르나 죽었다고 함. 67 방한기 기타(헌병대) 사건 68 김선도 윤성오 - 인민군 점령시기 최종구씨의 집이 여맹사무실로 사용되어 깃발이 있는 것을 수복과정에서 현병이 보고 집 앞 우물가에서 살해함. 헌병을 직접 목격함. 남용순, 처 윤정옥, 갓난아이, 남덕중 등이 수복 후에 경찰에 끌려 가서 총살되었음. 시신은 수습함. 69 노석기 신림 올시골 사건 노재극이 인민군 점령시기 무슨 일을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 자수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13

92 제 2 권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70 주진석 이종길 신림 올시골 사건 임명승이 71 김병철 죽변(부둘골) 72 김성곤 - 73 신수규 - 74 황병욱 - 75 이대권 황재규 이정로 76 황호석 박영호 77 최정영 기타 사건 78 김창영 기타 사건 안병욱 기타(후포 수장) 사건 80 황윤갑 황보리 문둥이골 사건 를 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아 부친이 울진으로 가서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시체가 많아 찾지 못하고 돌아왔음. 인민군 점령시기 자위대원을 하였다는 이유로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끌려가 신림 올시골에서 죽었다고 함. 시신은 수습하지 못함. 김병태씨가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끌려가서 죽변 부근에서 총살이 되었음. 김유현의 부친 김병두는 항일독립 운동가였고, 본인은 일본으로 유 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음. 인민군 후퇴 시, 마을사람들과 도피를 하였으나 경찰자료에 처단 이라고 나왔으니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고 함. 한도학씨가 경찰에 의해 부역혐의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함. 마을 어른인 안용순씨의 말씀으로는 황정도, 김병태, 안위교가 수복 후에 경찰에 의해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함. 황재만이 아니고 그 형인 황재동이 최현주와 함께 도피함. 황재만은 마을에 살다가 죽음. 이평 심수마을에 CIC부대가 주둔을 한 것은 맞고, 마을 몇 사람이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음. 이갑춘, 이순세, 황병해씨가 수복 후 경찰에 의해 부역혐의로 끌려 간 후 돌아오지 않았음. 국군이 수복 과정에 마을에 들어와서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백사장 에 모이게 하였는데 이때 방공호에서 늦게 나온 김영동(당시 15살) 을 방공호 앞에서 총살함. 마을주민인 박원출이 국군이 주둔을 하고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국 군이 서라는 소리에 놀라 인민공화국 만세 를 부르니 국군이 그 자 리에서 총살함. 안병위와 안두원이 수복 후 도피해 있다가 기성지서에 자수를 하였 는데, 차에 실려 후포에서 배에 실려 수장됨. 부친인 황진원(호적명 황용수), 황진규, 황진수, 이영택, 김태원 등 5명이 온정지서에 연행이 된 후에 온정2리 이병국, 이익래와 함께 온정지서 경찰에 의해 기성면 황보리 문둥이골에서 총살되어 시신 을 수습함. 온정지서에 한 달 정도 구금이 된 후에 울진으로 끌려간 날에 제사 를 지내고 있는데 음력으로 10월 17일(양력 11월 26일)임. 자료에 나와 있는 황택곤, 황진옥은 처형으로 나와 있는데 잡혀서 처형된 것이 아니고 도피함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관련성 주요 진술내용 81 황두진 이순자 82 장덕진 - 83 전복수 황만희 84 윤병호 김세현 황보리 문둥이골 사건 장규환씨가 수복 후에 온정지서 경찰에 의해 끌려가 구금된 후에 구금된 사람들과 함께 밤에 끌려가 총살됨. - 신림 올시골 사건 삼산2리에서는 85 박봉학 후정리 부둘골 사건 86 윤근춘 노음리 매림동 사건 87 주극중 후정리 부둘골 사건 88 윤암중 - 장낙규는 매화지서에 끌려가서 죽고, 황하일은 한 달 후 나중에 끌 려가서 죽었음. 인민위원장을 한 최동탁과 박봉실이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을 하 였다는 이유로 매화지서에 끌려가서 죽었음. 윤억덕, 이능선, 이능만, 김극동, 김창동, 김만출, 한 성희, 김명동, 김예동, 김대현 등 10명이 수복 후 경찰에 의해 끌려 가서 총살됨. 하당리 희생자 박병기는 수복 직후 비행기 파편을 지고 오다가 죽 변 삼거리에서 연행되어 죽변지서에 수감된 후 후 정리 부둘골에서 총살되어 시신을 수습함. 시신은 모두 수습함. 음력 8. 15일 밤, 마을에 주둔한 국군에 의해 매형인 전재식, 옹기 제조인 총각, 윤건택, 김병훈, 그리고 신원불상의 사람 등 5명이 총 살되어 구덩이에 매장되었음. 음력 9. 9일 죽변에 주둔한 군인에 의해 형수인 전화숙과 고성리 주진동, 남분남, 어린이를 안고 죽은 부인 등 다수가 후정리 뒷당 부둘골에서 총살됨. 전쟁 직후 보도연맹 관련으로 친형인 윤하중이 후포에서 살해됨. 수복 후 부역혐의로 도피한 부친을 대신하여 조부와 삼촌, 모친과 함께 매화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조부 윤상헌이 심한 모욕 과 고문에 못 이겨 2층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였음. 조부의 사망 후 부친이 검거되어 울진서로 이송되었으나 원남면 CIC책임자로 나온 친구인 이 에 의해 석방됨. <표 19> 경찰 측 참고인 진술요지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주요 진술내용 1 남 의용경찰 수복직후 울진경찰서 의용경찰로 입문하여 외근 소속으로 경계근무나 보초 업 무를 봄. 울진경찰서 유치장 경비 업무 시, 같은 마을에 사는 남로, 남재열이 구금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2~3일간 구금 후 어디론가 갔는데 이후 신림 올시골(게 골)에서 총살되었다고 들음. 신림 올시골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사람들(부역혐의자)이 처리(총살)되었 다고 들었고, 처음에는 숫자가 많았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줄었다고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15

94 제 2 권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주요 진술내용 함. 신림 올시골 사건은 울진경찰서 단독으로 수행한 것인지 군의 명령에 의한 것 인지는 알지 못함. 부역혐의가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피신하여 이후 자수하여 살아났고, 죄가 별 로 없다고 판단해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연행되어 총살됨. 2 주 경비계 순경 수복 직후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경찰에 입문하여 51년도 전투경찰대에 차출되어 지리산, 상주 화북지역의 토벌활동을 함. 울진경찰서 단독으로 부역혐의자들을 검거 및 조사, 분류하여 총살함. 울진경찰서에 의해 신림 올시골에서 부역혐의자 70~80명이 총살됨. 정림리는 10여 명의 부역혐의자 모두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됨. 죽변 봉개, 북면 덕천, 후정리 아파트 골짜기 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 당시는 좌익이 80%여서 신림 올시골에서 총살된 사람들은 다 좌익사 상가들 임. 그러나 아무리 전시였지만 재판이나 절차 없이 즉결처형한 일은 잘못된 일이었고, 당시 경찰이 무리를 한 것임. 주 (2차) 경비계 순경 경비계 소속 외근 순경으로 하당, 상당지역에서 공비토벌을 함. 부친이 인민군 점령시기 우익인사로 내무서원에 군수 및 국회의원 등 80여 명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수복 후 모두 풀려나옴. 인민군 점령 당시 울진에 인민재판 및 우익인사가 처형된 일은 없었음. 신림 올시골에서 부역혐의자 즉결처형은 모두 울진경찰서가 주도한 일임. 마지막 진술에 6 25같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며, 죽은 사람이나 유족에게는 미안한 일이라고 함. 3 전 의용경찰 4 이 수사계 순경 수복 직후 의용경찰로 입문하여 51년도에 순경으로 발령받음. 수복 후 근남지서에 근무하여 근남면 부역혐의자 60여 명을 노음국민학교에 수감, 조사하여 분류된 15명의 부역혐의자와 검거한 부역혐의자 10여 명과 함 께 25명을 울진경찰서로 11월경에 이송함. 울진경찰서로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은 울진국민학교에서 수감하여 조사하였고 각 면단위 지서도 초등학교에서 구금하여 조사하였음. 울진경찰서로 압송된 행곡1리 전규현, 전복문, 임중화, 남무호 등 7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고, 압송된 25명 중 일부는 집으로 돌아옴. 부역자를 연행, 조사, 분류하여 즉결처형한 것은 울진경찰서 관할임. 그러나 수복 직후 울진경찰서 근무 당시, CIC들이 와서 유치장에 구금된 부역 혐의자들을 데리고 가곤 하였음. 신림 올시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단총살된 것과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신 림 올시골 구덩이를 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음. 희생된 부역혐의자들은 개중에는 악질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임. 당시 10년 차 수사과 외근 형사로 있었고 일반범죄만 다루는 수사과에 있어서 사상 문제를 다루는 사찰계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음. 부역혐의자 처형은 헌병대나 CIC의 지휘(명령)를 받아 사찰계가 한 일이라고 생각함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주요 진술내용 5 이 (2차) 임 (1차) 임 (2차) 임 (3차) 수사계 순경 죽변지서 순경 죽변지서 순경 죽변지서 순경 6 황 하당지서 순경 부역혐의자 처형은 1950년 10월 말경부터 시작됨. 인민군 점령시간 석 달 동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많이 나 쁘게 한 이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살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함. 울진서 사찰계원은 사찰주임 홍, 전, 홍, 전 등이 근무함. 사찰계 외근계원은 15명이었고 이들이 한청조직과 마을주민들에게 정보를 받 아 부역자 검거 및 연행을 하였다고 함. 울진에 CIC가 있었고, 파견대장이 김 상사였음. 1949년 경찰에 입문, 사건 당시 죽변지서에 근무함. 부역자 색출과 검거는 우익청년단과 이장의 도움으로 수복 직후 한 달간 진행 되었고 죽변지서 관할에서는 60여 명의 부역자를 색출함. 수복 후 울진에 3사단 소속 헌병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죽변국민학교에 3사단 예비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 죽변지서에 헌병대가 수시로 와서 부역자 관련 지시를 하였고, 전시 상황이라 군의 지시에 의해 경찰이 움직였을 것으로 보아 울진경찰서가 부역자 관련 조 사를 진행해서 헌병대로 명단을 올리면 헌병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함. 3사단 선발대(군 정보부대)가 먼저 울진에 들어와 현내 바닷가 골짜기 등에 사상과 관련한 일을 한 사람들을 많이 총살하였고, 사복을 입은 선발대가 인 민군인 척 가장을 하고 마을주민 김동욱에게 말을 건네자 인민군으로 오인하 여 인민군 만세 을 외치자 총살하였다고 함. 수복 후 죽변지서에 배치되어 근무하였고 죽변국민학교에 부역혐의자 100여 명이 수감되었고 당시 경비를 섰음. 죽변국민학교에 수감된 부역혐의자들 중 일부는 석방이 되고 나머지 인원은 3 사단 소속 방첩대가 총살을 지시하고 현역군인이 후정리 부둘골로 끌고 가 총 살을 시켰고, 일부 인원은 생매장 된 것은 사실임. 신림 올시골은 울진경찰서 주도로 부역혐의자를 집단처형한 것은 맞고 부역혐 의자 집단희생지가 여러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 그러나 신림 게골의 초기 총살은 군인이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연지리 현내 가는 골짜기에서도 부역혐의자들을 총살하였다고 함. 3사단 정보부대가 주둔을 한 곳은 현재 군 농협 자리에 주둔을 하였고 소령이 대장으로 있었음. 9월 26일 사복을 입은 국군 선발대가 마을에 들어와 마을주민 김동옥이 지나 가니 사복 군인이 동무 라고 부르니깐 이 사람이 인민군으로 착각하여 인민 군 만세 라고 외치자 그 자리에서 총살됨. 3사단 소속 보충대 1개 대대가 울진에 한 달간 주둔하였고 사령부는 죽변국민 학교에 있었음. 죽변초등학교와 후정리 민가, 그리고 죽변 지서에 구금된 부역자들 이 CIC와 헌병대의 지시에 의해 지서 경찰이 포승줄에 묶어 현역 군인에게 인계하여 트 럭에 실려 후정리 부둘골에서 총살되었다고 진술함. 전쟁 전후 하당지서 근무 당시 울진경찰서 서장은 박규철 경감임.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17

96 제 2 권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주요 진술내용 울진경찰서가 치안국의 지시에 의해 부역혐의자들을 즉결처형한 것은 사실임. 이후 사찰계 형사로 근무 당시(60년)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였고 2부는 위로 올리고 한 부는 본서에 보관하였으며 자술서 및 관련 자료는 모두 불태웠음. 당시 경찰이 절차나 재판 없이 부역혐의자를 즉결처형한 일에 대해서는 잘못 된 일이라고 생각함. 7 김 순경 8 이 순경 수복 후 후포와 온정지서(당시 지서장 황 )에 근무함. 당시 방첩대 대장이 김 상사(75세)였고, 대구에 살고 있다고 들음. 군과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임의 처형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평해 온 정지서 근무 당시 울진경찰서로 인계한 사람은 없으며, 연행된 부역혐의자들 은 강릉검찰청으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음. 수복 직후 경찰에 입문, 현재 울진 경우회 및 참전용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 음. 전쟁 전에도 장날에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형 등이 있었음. 수복 후에 돌아와서 국가정책 하에 울진경찰서 주도로 신림 올시골 등에서 보도연맹원 등 부역혐의자들을 즉결처형하였음. 9 홍 사찰계 형사 전쟁 전 사찰계 형사로 근무, 전쟁직전 울진경찰서 사찰계로 발령받아 근무함. 수복 후 울진군 군농협건물에 주둔한 강원도 계엄사령부 산하 민사부 원의상 소령 밑에 민간인 7~8명(울진군청, 강원도청 직원 등) 중 울진경찰서 대표로 파견되어 근무함. 전쟁 때 군을 장악한 조직이 민사부인데 일반 행정과 군 관계를 통합한 조직 임. 수복 후 부역자 처리는 계엄령 시기였으니 강원도 민사부 원의상 소령에 의해 전반적인 감독과 지시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신림 올시골에서의 부역 자 처형은 울진경찰서 서장의 지휘하에 임의 처형된 것이고, 본서만이 아니 고 지서별로도 지서장의 책임 하에 임의처형이 가능했음. 당시 부역혐의자들을 분류 조사한 주체는 울진경찰서 사찰주임 홍 과 전 경사였음. 헌병대는 수복 후 한 달간 전매소에 주둔을 하였고, 이후 사찰계가 사무실을 사용함. 호림부대가 있었는데 서북청년들과 일반사람들을 조직해서 만든 부대였음. 부역혐의자 집단희생지로 신림 올시골 이외에는 아는 곳이 없음. 수복 후 평창에 살던 형제 3명이 부역혐의로 죽은 사실을 전쟁 후에 알게 됨. 홍 (2차) 사찰계 형사 김 상사가 울진 CIC 파견대장으로 7~8명이 울진에서 정보활동을 하였 고, 이 는 그 밑에서 일하는 민간인 정보원이었고, 주로 죽변에서 활동을 많이 하였음. 울진의 부역자 처리는 각 지서에서 A, B 등급으로 분류된 부역혐의자를 울진 서로 이송하면 홍 사찰주임과 전 가 분류하여 명단을 작성하였고 결 정하여 처리(살해)하였음. 사찰계원은 사찰주임 홍, 전, 전, 임 등이 기억남. 사찰계 외근 형사 15명이 각 지서 경찰과 의용경찰을 동원하여 부역자를 검거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주요 진술내용 색출하였음. 한청조직과 마을 이장들에 의해 정보를 얻어 부역자를 색출하였는데, 이 과정 에서 대한청년단 및 우익인사들이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서는 죄를 과장하고 부풀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음. 10 임 죽변지서 순경 수복 후 죽변지서로 복귀하여 근무함. 수복 후 죽변초등학교에 정훈부 소속 화학대 1개 대대 200여 명이 주둔하였 고 이 부대가 후정리 부둘골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총살을 하였고 희생자 중 후 정2리 전화숙씨가 총살되었음. 정훈부 화학대는 군복과 무장은 하였으나 계급장이 없었던 부대였고 수복 후 인민군이 재차 침탈하여 시가전이 있었을 때 많은 수가 전사하였고 이 부대는 10월 말경에 떠남. 부역혐의자의 검거와 조사는 경찰이 하였고, 처형자들은 군인에게 넘겨 그들 이 총살함. 죽변지서 사찰계 형사인 홍 이 부역혐의자 조사 및 분류 작업을 하였고 부 역자 명단은 마을 이장들이 제공함. 죽변에 주둔한 군이 삼척에서 체포된 부역혐의자와 인민군 패잔병 20~30명 을 죽변지서 맞은편 의용소방대 창고에 감금, 조사한 후 등대 너머 후릿개에 서 처형함. 죽변 후릿개에서 총살된 인민군 패잔병과 부역혐의자들은 모두 군인이 조사하 였고 울진지역의 부역혐의자는 아님. 1950년 11월 말경에 37도선 아래로 후퇴하라는 명령으로 일부 경찰병력을 남 기고 울진경찰서로 후퇴하였음. 재 후퇴 시 경찰서장의 지시에 의해 지서별로 부역혐의자 총살이 있었고, 사 계리 나그네골에서 있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음. 신림 올시골 사건은 경찰이 했지만 군의 개입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함. 후정리 부둘골 집단 처형에 있어 경찰의 참여 여부에 대해서는 그것은 확답 을 못 드리겠습니다 라고 진술함. 임 (2차) 죽변지서 순경 수복 후 한달간 죽변 부근에 정훈부대인 화확대가 주둔하였음. CIC 파견대장인 김 상사가 사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군관계 정 보활동을 하였고, 그 밑에 민간인으로 이 가 함께 활동을 하였음. 사복을 입은 CIC 대원이 가끔 지서에 오곤 하였음. 죽변항에 미군 LST가 정박을 하고 간 적은 기억이 나지만 군인들을 싣고 왔 는지는 알지 못하고 학도병들이 죽변에 주둔하였는지에 대해서도 군 관련이라 모름. 11 전 의용경찰 수복 후 의용경찰로 울진경찰서 및 근남지서에 근무함. 울진경찰서 근무 시 총살이 결정된 부역혐의자는 유치장에 구금되었고 재조사 가 필요한 사람들은 울진국민학교에 수감하여 조사하였음. 유치장 경비 업무를 보았고 유치장에는 20~30명 정도가 수감되었고 대개 며 칠 지나 나가고 하는 등 유동인이 많았음. 헌병대 및 민사부 사령부 등이 전매소 및 군농협 자리에 무슨 상사라는 간판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19

98 제 2 권 연번 성명 당시 소속 주요 진술내용 을 걸어놓고 일을 보았음. 울진경찰서에 헌병대나 CIC 등이 와서 주요 부역혐의자들을 데리고 가서 조 사하고 처리(총살)도 하였음. 후정리 부둘골 사건은 군인이 구덩이를 파고 처형하였다고 함. 신림 올시골 처형은 10월 말부터 이루어졌으며 경찰이 주도를 한 것이지만 군 의 개입이 있었다고 보아야 함. 12 박 사찰계 순경 13 이 온정지서 순경 인사사령부에 수복 당시 사찰계 형사로 근무하였다고 나와 있지만 사찰계 형 사로 근무한 것이 아니고 신림파견대에서 보초업무만 보았고 부역자 검거나 조사 등의 업무는 전혀 관여하지 않음. 다부니재에서 전투 중 사망한 임 대공계 반장과 그 아래 경찰 5~6명이 검거 및 조사 작업을 주도한 사람임. 대공계 형사들과 CIC들이 와서 부역혐의자들을 검거함. 신림 올시골에서 많은 부역혐의자들이 집단총살된 사실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 고 있었고, 이 사람들이 잠시 피신해 있었으면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음. 수복 후 온정지서에서 근무함. 순찰과 경비 업무만 보았고, 부역자 색출은 사복형사 권 과 보조 전 등이 부역자 색출 및 조사 분류함. 온정면 사무소 창고에 부역혐의자 30~40명이 구금 조사를 받았고, 2달간 구 금한 후 10여 명을 울진경찰서 명령에 따라 압송을 하였음. 압송된 사람들 중 같은 마을에 살던 장규환이 압송되었음. 압송책임자는 온정지서 차석 성 이었음. 14 황 광회, 죽변 지서 순경 수복 후 광회지서 근무 주로 잔비 소탕만 하였고 부역자 색출 및 검거는 전혀 관여하지 않아 모름. 부역혐의자들의 처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사진 2> 신원기록편람 (처형자 명단)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21

100 제 2 권 <사진 3> 사건별 사건현장 노음리 매림동 사건현장 후정리 부둘골 사건현장 신림 올시골(게골1) 사건현장 신림 올시골(게골2) 사건현장 신림 올시골(게골3) 사건현장 죽변 후릿개 사건현장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0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신림 작은판테기 사건현장 신림 큰판데기 사건현장 황보리 문둥이골 사건현장 사계리 나그네골 사건현장 울진 부역혐의 희생 사건 423

102 제 2 권 <사진 4> 희생자 남 신원조사서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0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결정사안 한국전쟁 당시 9 28 수복 후부터 1952년 3월 사이 구례, 광양, 여수, 보성, 고흥, 곡성, 순천 지역에서 경찰과 경찰토벌대, 국군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자를 처벌하면서 일부 민간인을 부역자, 빨치산 협조자 또는 통비분자 라는 이유로 적법 절차 없이 사살하거 나 가옥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가. 전남 동부지역 주민 구공암 등 35명이 1950년 9월 말경부터 1952년 3월 사이 국군 과 경찰, 경찰토벌대에게 빨치산, 통비분자, 부역자 그리고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살 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구공암( 具 功 岩, 다-3890) 등 35명이다. 나. 본 사건의 가해자는 관할 경찰서장의 지휘 명령 감독 아래 부역혐의자 색출 활 동과 빨치산 토벌작전을 한 경찰과 경찰토벌대이다. 일부의 경우는 국군이 가해자이다. 다. 본 사건이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된 전시 수복 과정의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 발생했 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 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 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전 문 사 건 다-3890 외 26건,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신청인 황순남 외 24명 결정일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이유 기재와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25

104 제 2 권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신청서 접수와 처리과정 1) 황순남(다-3890호) 외 24명은 전라남도 동부지역(구례군, 광양시, 여수시, 보성군, 고흥 군, 곡성군, 순천시, 승주군) 및 경상남도 남해군 2) 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진실 규명을 신청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에 대해 광주 전남지역 군경 토벌작전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및 광주 전남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이상 )과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 ( , )으로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 건(1) 로 병합하여 조사하였다. 신청서 접수 상황은 <표 1>과 같다. 지역 연 번 구례 (3건) 접수 일자 황순남 黃 順 南 구자운 具 滋 雲 <표 1> 신청서 접수 상황 사건 관련 희생자 사건 번호 신청인 성명 성별 당시 신청인과 사건발생 당시 거주지 나이 관계 구공암 具 功 岩 구회석 具 會 石 남 24 남편 화순군 도곡면 도곡교 관사 남 37 부 구례군 구례읍 이하 불상 비고 동일 사건 김도중 金 渡 中 이찬희 李 贊 熙 남 29 처숙부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1)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은 한국전쟁 후 전라남도 동부지역(구례, 광양, 여수, 보성, 고흥, 곡성, 순천)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는 여순 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형무소희생 사건 이 포함되어 있다. 이 조사결과는 우선 조사가 완료된 26건이며 이후 여순 사건, 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사 건의 조사가 완료된 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사건을 모아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2) 로 계속 조 사할 예정이다. 2) 이 사건은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 거주하던 희생자들이 전라남도 여수시로 이송되어 희생된 것 이다. 사건번호 6280~6282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0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지역 연 번 광양 (3건) 여수 남해 (4건) 보성 (11건) 접수 일자 허정태 許 貞 泰 정영기 鄭 瑛 基 사건 관련 희생자 사건 번호 신청인 성명 성별 당시 신청인과 사건발생 당시 거주지 나이 관계 6280 최국진 崔 國 珍 채선녀 25. 蔡 善 女 김철용 金 喆 龍 정승기 丁 勝 基 정해욱 丁 海 旭 소화영 蘇 華 永 김용학 金 容 鶴 김기연 金 基 連 양회균 梁 會 均 박장석 朴 壯 錫 조 윤 趙 胤 황명숙 黃 明 淑 허장오 許 長 五 허옥선 許 玉 善 정태용 鄭 泰 容 정석기 鄭 鉐 基 최원오 崔 元 五 정용호 鄭 龍 浩 김춘덕 金 春 德 정재수 丁 在 洙 백옥임 白 玉 任 소진모 蘇 鎭 模 김용신 金 容 新 김순임 金 順 任 양재춘 梁 在 春 박기발 朴 基 發 조문옥 趙 文 玉 박해남 朴 海 南 박해성 朴 海 成 남 31 숙부 남 21 숙부 남 42 부 남 24 형 광양시 광양읍 세풍리 광양시 옥곡면 묵백리 남 26 부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남 21 시숙부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남 26 숙부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남 28 백부 여천군 율촌면 호산마을 여 34 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남 40 부 보성군 복내면 진봉리 남 19 형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여 18 매 보성군 회천면 천포리 남 26 부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남 48 부 보성군 미력면 초당리 남 35 부 보성군 미력면 초당리 남 24 시부 보성군 미력면 초당리 남 24 친척 보성군 미력면 초당리 비고 동일 사건 동일 사건 동일 사건 정해천 정종문 남 38 숙부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동일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27

106 제 2 권 지역 연 번 접수 일자 사건 관련 희생자 사건 번호 신청인 성명 성별 당시 신청인과 사건발생 당시 거주지 나이 관계 비고 丁 鍾 文 고흥 (1건) 곡성 (1건) 순천 승주 (3건) 丁 海 天 박연심 朴 蓮 心 최상수 崔 相 洙 이귀자 오경영 李 貴 子 吳 京 泳 김월심 金 月 心 허용식 許 龍 植 김용순 金 龍 順 이점임 李 点 任 정해은 丁 海 銀 여 28 숙모 남 7 사촌 정 남 3 사촌 박대홍 朴 大 洪 정재임 鄭 在 任 정의례 鄭 義 禮 최춘성 崔 春 成 이승식 李 升 植 오금길 吳 金 吉 정원기 丁 元 基 허장옥 許 長 玉 문근례 文 根 禮 이기호 李 起 晧 이기영 李 起 榮 남 57 부 여 21 올케 여 20 올케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남 46 부 보성군 복내면 동교리 남 22 부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남 35 부 곡성군 곡성읍 대평리 남 27 시숙부 승주군 승주읍 신전리 남 43 백부 여 42 백모 남 23 시숙 남 18 시숙 승주군 주암면 여각리 승주군 서면 판교리 사건 동일 사건 나. 신청요지 신청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수복 후 구례, 광양, 여수, 보성, 고흥, 곡성, 순천 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0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역에서 각 지역 경찰과 경찰토벌대가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자를 처벌하면서 민간인 중 일부를 부역자, 빨치산 협조자 또는 통비분자 라 하여 적법 절차 없이 사살하거나 가옥 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살해하였다. 이에 황순남 외 24명의 신청인은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진실규명과 국 가 차원의 사과,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위령탑 건립, 유족들이 입은 피해의 배상 등을 요 구하였다. 2. 조사의 근거와 목적 진실화해위원회는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 리 기본법 제2조제1항제3호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불법적으로 이루어 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에 포함된다고 보고 조사개시 결정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희생자의 수와 희생자의 신원, 희생이유, 사건배경, 군경의 작전상황, 가해주 체, 가해 지휘 명령체계 및 가해의 위법 여부 등을 밝히고자 하였다. 3. 규명 과제 가.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각 사건이 실재하였는지, 실재하였다면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 지, 희생자들은 누구였으며 왜 희생당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나. 가해혐의자로 거론된 국군과 경찰 및 경찰토벌대의 소속, 가해 당시 정황과 군경의 작전상황 등을 조사하여 사건이 군경의 작전수행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는지, 아 니면 현장의 지휘관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살해한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4. 조사방법 가. 신청인 조사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신청인 25명 3) 을 2007년 10월 7일부터 2008년 1월 23일까지 조사하였다. 3) 신청인 정영기(다-10833호, 다-10835호), 김용순(다-10403호, 다-10404호)은 각 2건 신청.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29

108 제 2 권 신청인 조사 상황은 <표 2>와 같다. <표 2> 신청인 조사 상황 지 역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와 신청인 관계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주요 진술내용 황순남 처 진실화해 위원회 빨치산 습격으로 산동지서장이 사망하 진술 자 빨치산 앞잡이란 이유로 토벌대에게 조서 남편 구공암과 시숙 구회석이 사살됨. 구 례 구자운 아들 구례군청 진술 빨치산 습격으로 산동지서장이 사망하 자 빨치산 앞잡이란 이유로 토벌대에게 조서 아버지 구회석과 숙부 구공암이 사살됨 김도중 조카사위 구례군청 진술 이찬희가 빨치산의 마을습격 사실을 신 고하지 않았다고 간전지서장 최낙순에 조서 게 사살되는 현장을 목격함 허정태 조카 광양읍 사무소 허장오, 허옥선이 수복 후 부역자라는 진술 누명을 쓰고 경찰에게 연행되던 중 4명 조서 이 함께 사살됨. 광 양 정영기 아들 동생 옥곡면 사무소 진술 조서 정태용이 소개된 마을에서 생활하던 중, 좌익이라고 밀고당해 옥곡지서에 불려 간 후 사살됨. 정석기가 소개된 마을에서 농사일을 마 치고 마을로 돌아오던 중, 토벌대에게 사살됨. 여 수 남 해 보 성 최국진 아들 채선녀 질부 김철용 조카 정승기 조카 남해군청 진술 조서 진실화해 위원회 율촌면 사무소 정해욱 아들 진실화해 위원회 소화영 아들 김용학 동생 진실화해 위원회 광주 광산구청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등 3명이 해군 에 부역혐의자로 체포되어 여수 돌산도 죽포리에서 사살됨. 정재수의 동생 정재우가 부역 후 행방 진술 불명되자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토벌대 조서 에게 정재수가 대살됨. 진술 백옥임이 토벌대의 소집에 나가지 않았 조서 다가 토벌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살됨. 진술 토벌대가 소진모에게 질문을 했는데 소 조서 진모가 더듬거리며 대답한다고 사살함. 진술 김용신이 찬탁활동 및 인공시절 부역혐 조서 의로 토벌대에게 사살됨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0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지 역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와 신청인 관계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주요 진술내용 김기연 동생 보성군청 진술 토벌대가 김순임을 연행하려다 거절하 조서 자 사살함 양회균 아들 진실화해 위원회 진술 조서 양재춘이 보성노동국교 교사로 재직 중, 소사를 부르기 위해 타종을 하였는데 이것이 반란군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 하여 토벌대가 사살함 박장석 아들 조 윤 아들 황명숙 자부 진실화해 위원회 진실화해 위원회 정해천 조카 진실화해 위원회 박연심 딸 최상수 아들 고 흥 이귀자 딸 곡 성 승 주 순 천 오경영 아들 김월심 질부 허용식 조카 김용순 제수 광주 광산구청 복내면 사무소 진실화해 위원회 광주 북구청 광양읍 사무소 승주읍 사무소 승주읍 사무소 박기발, 조문옥, 박해남, 박해성 등 4명 진술 이 경찰의 전신주경비 근무명령을 받고 조서 근무 중, 빨치산이 전신주를 절단하는 것을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빨치산과 한 진술 조서 통속이라는 이유로 보성서 토벌대에게 사살됨. 진덕골 주민들이 공비들과 내통한다고 진술 보성서 토벌대가 진덕골 가옥 전부를 조서 불태워 정종문 일가족이 소사됨. 진덕골 주민들이 공비들과 내통한다고 진술 보성서 토벌대가 진덕골 가옥 전부를 조서 불태워 소사시키고 박대홍을 사살함. 진술 최춘성이 기부금을 내지 않는다고 복내 조서 지서 의경에게 통비분자로 몰려 사살됨. 진술 경찰이 친척의 좌익활동을 조사할 것이 조서 있다면서 이승식을 연행하여 사살함. 진술 조서 오금길이 산 밑 외딴집에 거주하면서 군산서 경찰관을 숨겨주었는데, 곡성서 토벌대가 빨치산을 숨겨주었다 하여 타 살함. 진술 정원기가 쌍암지서장의 억압을 피해 피 조서 신하였다가 토벌대에게 사살됨. 허장옥, 문근례 부부가 주막집을 하면 진술 서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경찰이 조서 주막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죽임. 진술 조서 이기호가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고 경찰이 사살함. 이기영이 마을에 서 있다가 토벌대에게 사살됨.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31

110 제 2 권 나. 참고인 조사 1) 신청인 측 참고인 조사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신청인 측 참고인 28명을 2007년 10월 7일부터 2008년 1월 23일까지 조사하였다. 신청인 측 참고인 조사 상황은 <표 3>과 같다. <표 3> 신청인 측 참고인 조사 상황 지 역 구 례 광 양 여 수 남 해 연 번 참고인 4) 이경상 李 敬 相 (83세) 이재은 李 在 垠 (63세) 한인석 韓 仁 錫 (81세) 허중석 許 仲 錫 (80세) 백준기 白 俊 基 (75세) 반동철 潘 東 喆 (74세) 류상삼 柳 相 三 (83세) 김평배 金 平 培 (81세) 사건 관련성 이웃 주민 진술일 진술 장소 희생자 가족 이웃 주민 희생자 가족 이웃 주민 이웃 주민 이웃 주민 이웃 주민 진술 형태 구례군청 진술 조서 관련 사건 구례군청 진술 조서 3684 광양읍 사무소 광양읍 사무소 진실화해 위원회 진술 조서 진술 조서 진술 조서 남해군청 진술 조서 율촌면 사무소 진술 조서 주요 진술내용 빨치산이 지서를 습격하여 지서장 등이 사망 하자 경찰토벌대가 구씨 형제를 반란군의 앞 잡이란 이유로 사살함. 이찬희가 빨치산의 마을습격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간전지서장 최낙순에게 사살됨. 경찰이 빨치산습격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고 이찬희를 사살함 경찰이 부역자가 아닌 허장오, 허옥선을 무 선쟁이 고개에서 다른 2명과 함께 사살함 정태용이 아들의 부역사실 등으로 경찰에게 불려간 후 사살됨. 정태용이 아들의 입산 등으로 경찰에게 불려 간 후 사살됨. 정석기는 입산한 사람이라서 토벌대에게 사살됨.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이 남해군 선소리에 상륙한 해군에 부역혐의자로 검거되어 여수 돌산도 죽포리에서 사살됨 경찰이 부역한 동생을 찾아내라며 정재수를 폭행하다가 주민이 보는 앞에서 사살함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지 역 연 번 참고인 4) 사건 관련성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관련 사건 주요 진술내용 9 정성동 丁 成 東 (73세) 보 성 박요선 朴 瑤 仙 (80세) 김용한 金 容 漢 (84세) 이병육 李 柄 六 (94세) 임정묘 任 丁 卯 (79세) 하용태 河 容 台 (83세) 김외남 金 外 南 (82세) 최도준 崔 度 俊 (92세) 최학동 崔 鶴 東 (87세) 이웃 주민 이웃 주민 이웃 주민 이웃 주민 희생자 가족 이웃 주민 회천면 김용한 자가 회천면 자가 복내면 사무소 진술 조서 진술 조서 토벌작전 중이던 경찰이 모든 주민을 집합 시킨 후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백 옥임이 사망함. 진덕골에서 토벌대가 마을사람 모두를 불 에 태워 죽였다고 들었음. 김용신이 한국전쟁 이전 중학 재학 시 찬 탁을 하였다고 한국전쟁 이후 경찰에게 부 역혐의자로 몰려 사살됨. 정종문 일가족이 밤 사람에게 밥을 해주었 다고 토벌대가 집에 불을 질러 소사시킴. 토벌대 간부의 질문에 소진모가 말을 더듬거 진술 조서 6652 리자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더듬는 것이라며 사살함. 보성군청 진술 토벌대가 동네에서 빨치산과 교전 후 김순임 조서 5497 을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행하다가 사 살함. 진실화해 위원회 미력면 자가 미력면 자가 노동국민학교 교사인 양재춘이 반란군을 도 진술 조서 와주었다고 수복 후 경찰토벌대에게 문덕면 골짜기에서 사살됨. 진술 조서 박기발, 조문옥, 박해남, 박해성 등 4명이 경 찰의 지시로 전신주 경비를 서고 있던 중, 빨치산이 전신주를 절단하는 것을 발견하고 지서에 신고하였음에도, 경찰은 그 이튿날 근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마을주민들 이 보는 앞에서 이들을 사살함. 18 박금애 朴 今 愛 (74세) 이웃 주민 광산구청 진술 조서 공비들을 도와주었다고 토벌대가 이들이 사 는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 박대홍, 정재임, 정의례가 소사됨. 19 조장현 趙 璋 鉉 이웃 주민 복내면 사무소 진술 조서 2973 최춘성이 복내지서 의경에게 기부금을 내지 않았다고 통비분자로 몰려 집 앞 논에서 사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33

112 제 2 권 지 역 연 번 참고인 4) 사건 관련성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관련 사건 주요 진술내용 고 흥 곡 성 순 천 승 주 (74세) 최남순 崔 南 順 (74세) 희생자 가족 이정순 李 貞 順 (70세) 희생자 가족 이영식 李 令 植 (86세) 23 윤삼순 尹 三 順 (86세) 김순례 金 順 禮 (76세) 배채심 裵 彩 心 (81세) 박동실 朴 東 實 (74세) 희생자 가족 희생자 가족 이웃 주민 이황의 李 鎤 儀 (78세) 희생자 가족 이찬의 李 贊 儀 (74세) 진실화해 위원회 광주 북구청 승주읍 사무소 진실화해 위원회 승주읍 사무소 진술 조서 7569 살됨. 복내지서 의경 임종필과 윤기덕이 최춘성에 게 기부금을 요구했으나 이를 내지 않자 부 역을 했다고 마을 앞 논에서 사살함. 이승식이 친척 이계휴의 좌익활동을 조사한 다는 경찰에게 연행 된 후 그 이튿날 사살 됨. 이승식이 친척 이계휴의 좌익활동을 조사한 다는 고흥서 동강지서 주순경에게 연행 되었 다가 사살됨. 오금길이 군산서 소속 경찰관 4명을 숨겨주 진술 조서 7220 었는데 오히려 공비를 숨겨주었다며 토벌대 가 오금길을 타살함. 진술 조서 9955 진술 조서 9955 진술 조서 주막집을 운영하던 허장옥, 문근례 부부가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토벌대가 이들 을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소사시킨 현장 에 사건 직후 가서 보았음. 주막집을 운영하던 허장옥, 문근례 부부가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토벌대가 이들 을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소사시킴. 토벌대가 산사람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유흥 리 닭재 주막에 주인집 사람을 넣고 불을 질 러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 여순 사건 직후 이기호 일가족이 몰살되었 고, 수복 이후 이기호는 경찰검문에 붙잡혀 좌익이란 이유로 사살되고, 이기영은 정신장 애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사살됨. 2) 경찰 측 참고인 조사 전남 동부지역 민간희생 사건(1)은 9 28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색출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고, 사건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가해주체는 대부분 해당지역의 경찰과 경찰토벌대이다. 4) 참고인들의 나이는 진술한 해 기준이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이에 비군인참전사실확인 신청서 5) 를 토대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당시 경찰 토벌대원 29명을 참고인으로 선정하여 2007년 12월 3일부터 2008년 4월 5일 사이에 조사 하였다. 경찰 측 참고인 조사 상황은 <표 4>와 같다. <표 4> 경찰 측 참고인 조사 상황 연 번 성명 당시신분 진술형태 주요 진술내용 1 한 최 구례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녹화 산동지서장 문기열이 빨치산의 습격으로 사망한 뒤, 구씨 형제가 빨 치산의 앞잡이라는 이유로 토벌대가 사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 다.(3890호, 4533호) 최낙순 간전지서장이 중평마을의 젊은이가 빨치산 출몰사실을 신고하 지 않았다고 지서 부근에서 사살하였다.(3684호) 민간인을 죽이고 반란군이나 공비라고 보고하면 그만이었고, 친인척 의 좌익혐의 때문에 대살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권한은 없었으나) 토벌대는 실제로 즉결처분권을 행사했다. 2 이 구례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최낙순 간전지서장이 중평마을의 이찬희가 빨치산 출몰사실을 신고하 지 않았다고 지서 부근에서 사살하였다.(3684호) 3 이 구례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4 구정회 구례서 토벌대원 5 이 구례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6 이 구례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민간인을 가해한 이유는 공비에게 식사를 제공하거나 양식을 빼앗긴 경우, 심부름을 한 경우, 노역을 제공한 경우, 출몰사실 신고지연의 경우 등이다. 산동지서장 문기열이 빨치산의 습격으로 사망한 뒤, 구씨 형제가 빨 치산과 내통했다고 토벌대가 사살했다.(3890호, 4533호) 중평마을 작전을 최낙순 간전지서장과 함께 나갔는데, 최낙순이 중평 마을의 이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빨치산 출몰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고 지서 부근에서 사살하였다.(3684호) 최낙순 간전지서장이 중평마을의 이찬희가 빨치산 출몰사실을 신고하 지 않았다고 지서 부근에서 사살하였다.(3684호) 공비들에게 식사제공, 부역, 심부름 등을 하면 공비와 한통속으로 몰 아 죽였다. 7 이병연 서순종 장 서순종 - 묵백리 사람들이 소개되어 신금리에서 살았는데, 소개된 사 광양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람들이 농사일을 한 후 저녁에 내려오다가 토벌대에게 공비로 오인되 어 사살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10835호) 5) 국방부, 비군인참전사실확인 신청서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35

114 제 2 권 연 번 8 성명 당시신분 진술형태 주요 진술내용 서여열 서기홍 조방환 광양서 토벌대원 장 - 무선쟁이 고개에서 여러 번에 걸쳐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나 죽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은 모른다.(9274호) - 묵백리가 경찰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사람들이 묵백리에 가 서 농사일을 보다가 밤에 돌아오던 중 공비로 오인되어 사살된 사람 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모른다.(10835호) 진술조서 묵백리 등 소개된 마을사람들이 농사일을 보다가 밤에 돌아오던 중 공 비로 오인되어 사살된 사건이 비일비재하였다.(10835호) 9 안 광양서 무선쟁이 고개에서 여러 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9274호) 토벌대원 진술조서 정석기가 농사를 지으러 왔다 갔다 하다가 토벌대의 검문에 결려 죽 었다.(10835호) 10 이 보성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11 안 보성서 토벌대원 12 이 보성서 토벌대원 13 손공현 고흥서 사찰계 14 김 곡성서 토벌대장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보성서 토벌대원 임종필과 윤기덕이 기부금을 내지 않았다고 최춘성 을 사살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2973호) 전평균 율어지서장이 참여한 토벌작전에서 소진모인지는 모르지만 거 짓말을 하기 때문에 말을 더듬거리는 것이라며 사람을 죽인 적이 있 다.(6652호) 토벌대가 마을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빨치산과 한통속이 아니냐고 박 기발 등을 고문하다가 그들이 부인하자 총살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1454호, 1455호, 1456호) 봇재에서 주민들을 집안에 가두고 불에 태워 죽인 일이 있는데, 애매 한 사람을 죽이고 경찰서로 복귀해서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면 그만이었다.(7111호, 9475호) 토벌대가 마을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빨치산과 한통속이 아니냐고 박 기발 등을 고문하다가 그들이 부인하자 총살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1454호, 1455호, 1456호) 봇재에서 그 마을 전 가옥을 불 질러 주민들이 타 죽은 일이 있 다.(7111호, 9475호) 임종필, 윤기덕과 함께 근무하여 이들을 알고 있으며, 윤기덕은 공비 를 하다가 전향한 자로 별도로 행동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으나 당시 최춘성 사살과 같은 일이 있었다.(2973호) 좌익들의 친인척을 대신 조사하여 대살한 경우도 있었고 이에 대해 좌익이나 반란군이라고 기재하면 끝이었다. 신청사건 2808호6) 의 가해자는 곡성서 토벌대이다. 15 최봉규 토벌작전 시 작전지역의 마을에 박격포와 소총을 집중사격하여 공비 곡성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들에게 토벌대가 왔음을 알리고 나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16 신 만 주민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성명 당시신분 진술형태 주요 진술내용 17 강기원 조정현 곡성서 토벌대원 18 서운석 순천서 토벌대원 19 서형석 순천서 토벌대원 20 김용효 김재열 순천서 토벌대원 21 장지원 순천서 토벌대원 22 조 순천서 토벌대원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진술조서 녹화 민간인을 죽이고 반란군이나 공비라고 사후에 기록하면 끝이었다. 뱃고지 외딴집에서 오금길이 사망한 경위는 모르나 외딴집에 살다보 면 그리 죽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공비들이 민가에서 식량을 빼앗고 나서 치부책에 이를 기록했다. 공 비를 검거하여 치부책 명단의 사람들을 통비분자로 몰아 심하면 사살 까지 하였다. 민간인을 죽이고도 공비를 죽였다고 전과보고하면 그만이었다. 전쟁기간 중에도 불법임산물 단속이 심하였다. 민간인들을 죽이고도 공비를 죽였다고 전과보고하면 그만이었다. 민간인들을 죽이고도 공비를 죽였다고 전과보고하면 그만이었다. 전쟁기간 중에도 불법임산물 단속이 심하였다. 양민을 죽이고도 공비를 죽였다고 전과보고를 올리면 끝이었다. 공비를 검거하여 치부책 명단의 사람들을 통비분자로 몰아 심하면 사 살까지 하였다. 양민을 죽이고도 공비를 죽였다고 전과보고를 양면지 한 장으로 작성 하여 올리면 끝이었다. 온 동네사람이 다 아는 미친 사람을 공비로 오인하여 사살한 적이 있 었다. 경찰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시체 옆에 두고 사진을 찍고 나서 공비를 사살하였다고 하면 무사통과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였다.(10403호) 신평리 검문소에서는 수배된 사람을 검거하면 경찰서까지 보내지도 않고 그냥 죽이곤 하는 그런 일이 많았다.(10403호) 다. 자료조사 1) 경찰자료 조사 가) 사실조사서 순천경찰서가 1980년 생산한 자료로 1948년경부터 1955년경까지 순천시, 승주군 관내 부역자 등 6,163명의 주소, 성명, 생년월일, 직업, 성별, 활동사항을 열거하고, 1980년 기준 6) 조사 후 여순 사건으로 이관함.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37

116 제 2 권 현재동향을 기록한 3급 비밀문서이다. 수록된 사람들의 한국전쟁 당시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은 사건번호 다-10094호 정원기만 있다. 한편, 사건발생지역의 각 경찰서 소장 자료 조사를 하였으나 구례 여수 보성 곡성 경찰서에는 관련사건 자료가 없고, 광양 고흥경찰서에는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 자료는 없음을 확인하였다. 나) 전라남도 경찰전사 전남경찰청이 2002년 생산한 책자로 여순 사건 때부터 한국전쟁 후까지 전남 동부지역 의 토벌작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 군자료 조사 가) 대한민국해군사 (작전편) 해군본부가 생산한 것으로 한국전쟁 시기 해군의 작전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남 해안 수복작전 중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선소리 상륙작전 내용은 사건번호 다-6280 호~6282호(최원오, 정용호, 김춘덕)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 작전경과보고서 ( ~ ) 해군본부가 생산한 것으로 한국전쟁 기간 중 해군의 1일 부대이동경로, 작전상황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선소리 상륙작전이 있었던 1950년 9월 26일 에 적 사살 4명 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희생 사건(사건번 호 다-6280호~6282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7)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패잔병과 지방 빨치산 은 호남 지리산지구에서 유격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국군은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예하에 호남지구 전담 제11사단 등을 배속시켰다. 제11사단은 예하 3개 연대에 빨치산 토벌임무를 부여한 후 각각 전남(제20연대), 전북 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제13연대), 지리산 남부지구(제9연대)에 배치하는 한편, 배속한 5개 경비대대와 경찰 그 리고 청년방위대에게 주보급로 확보 및 경계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 ). 1951년 4월부터는 제8사단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5. 11.). 1951년 11월 말, 백야전투사령부(남원)를 설치하고 1952년 3월 중순까지 수도사단, 제8 사단, 서남지구 경비사령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하였는 데, 이 시기에 빨치산의 대부분이 격멸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토벌작전이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1952년 7월 13일~8월 4일 사이 제1사단이 호남지구에 투입되었고, 휴전 후에 도 박전투사령부,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등을 설치하여 1956년 12월 31일까지 토벌을 계 속하였다. 위와 같이 짧지 않은 기간에 전라남도 동부지역은 인근 지리산, 백운산, 백아산, 화학산 등을 중심으로 빨치산의 유격활동과 군경의 토벌작전이 반복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지역 민간인들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아울러 같은 기간 빨치산에 의한 식량 약탈, 민간인 납치, 시설 파괴 등이 적지 않았다. 군경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도 발생하였는데 주민 강제동원과 징발이 있었고, 부역자 또는 통비분자 처벌 등이 전남 동부지역에서 계속 발생하였다. 2. 사건경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희생 사건(1) 총 27건은 수복 직후 인 1950년 9월 말경 시작된 부역혐의자 색출 활동부터 빨치산 잔적 소탕기간인 1952년 3 월까지 사이에 국군과 해당 지역의 관할 경찰 및 경찰토벌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사 건경위는 다음과 같다. 가. 구례군 지역 1) 다-3890호, 다-4533호 희 생 자 : 구공암( 具 功 岩, 당시 24세, 화순 도곡국민학교 교사) 구회석( 具 會 石, 당시 37세, 광희여관 경영) 사건개요 1951년 11월 14일, 구회석, 구공암 형제가 구례군 산동면 소재 산동농협 창고 뒤편에서 구례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39

118 제 2 권 희생경위 가) 1951년 11월 13일, 구회석, 구공암 형제는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에서 제사를 지낸 후 시간이 늦어지자 치안이 불안한 좌사리에서 산동면사무소 소재지로 이동하여 평 소 구회석과 친분이 있던 산동지서장 문기열 8) 의 배려로 산동지서에서 유숙하였다. 9) 나) 그런데 그날 밤 빨치산이 산동지서를 습격하여 지서와 동네 가옥이 불타고 지서장 문기열 외 여러 명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10) 이때 구씨 형제는 지서 인근의 친척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이튿날인 11월 14일 구례경찰서 토벌대는 산동면사무 소 소재지를 수색하여 구씨 형제의 지서 유숙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이 빨치산과 내통하 였다고 산동지서로 연행하였다. 11) 다) 산동지서로 연행되어 가던 구씨 형제는 산동면 소재 산동농협 창고 뒤편에서 구례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12) 이 사건과 관련하여 참고인 이 (당시 구례경찰서 토벌대원)은, 산동지서장 문 기열이 빨치산의 습격으로 사망한 뒤 구씨 형제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토벌대가 그들을 사살했다 라고 진술하였다. 13) 또한 이 등 당시 구례경찰서 토벌대원들은 여순 사건 후와 한국전쟁 수복 후 토벌작전 시기의 상황을 공비 출몰을 신고하지 않은 경우, 반란군에게 밥을 해주거나 식 량을 빼앗긴 경우, 반란군의 심부름을 한 경우, 경비를 서라고 동원하여 할당한 전신주를 지키지 못한 경우, 친인척이 입산한 경우에는 반란군에게 동조했다는 등의 억지구실을 만들어 조사나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결처분을 한 후 반란군이나 공비사살이라고 보 8) 전라남도지방경찰청, 순직경찰관대장(문기열), 경무과-21584( ). 지서근무 중 공비가 공격하여 순직. 9) 이상 신청인 황순남, 진술조서( ); 신청인 구자운, 진술조서( ); 참고인 이경상, 진술조서 ( ). 이경상(당시 25살)은 사건발생 산동지서가 있던 산동면소재지에서 가구상을 하고 있었고 구 공암, 구회석 형제와 아는 사이였다. 그는 빨치산의 산동지서 습격사실과 피해상황, 구씨 형제의 희생경위 를 자세히 진술하였다. 10) 참고인 이경상,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 촬영). 이 은 자신이 산동면 출신이기 때문에 빨치산의 산동지서 습격사실과 문기열 지서장 의 희생사실을 잘 기억한다고 진술하였다. 11) 이상 신청인 황순남, 진술조서( ); 신청인 구자운, 진술조서( ); 참고인 이경상, 진술조서 (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이 은 사건의 경위와 피해자들의 직업 등을 정확히 진술하였으나, 피해자가 구씨 형제라고만 기억할 뿐 이름은 알지 못하였다. 12)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 원 한,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이경상, 진술조서( ). 13)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고하면 그만이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14) 라) 구씨 형제의 시신은 사건이 발생하고 여러 날 지난 뒤 가족이 수습하였다. 제 적부상 구공암, 구회석의 사망연도는 1961년이나 사망일은 3월 6일로 같고, 족보에는 실 제 사망일과 같은 1951년 11월 14일로 기록되어 있다. 2) 다-3684호 희 생 자 : 이찬희( 李 贊 熙, 당시 29세, 대한청년단 간전면 수평리 간부) 사건개요 1952년 1월 2일, 이찬희가 구례군 간전면 간전지서 옆 공터에서 간전지서장 최낙순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2년 1월 1일, 빨치산이 간전면 수평리 중평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한 후, 일부는 산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마을에 매복하여 경찰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주민들 을 감시하였다. 15) 나) 1월 2일, 간전지서 경찰들이 중평마을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중평마 을로 진입하는 길에 매복 중이던 빨치산의 기습으로 5, 6명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 발생하 였다. 16) 이에 간전지서장 최낙순 17) 은 중평마을주민 이찬희(대한청년단 간부)가 빨치산 습격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고 그를 간전지서로 연행하였다. 18) 다) 간전지서장 최낙순은 지서에서 빨치산 습격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것 과 빨치 산과 관련성, 그리고 제2국민역 소집에도 응하지 않은 것 19) 등을 이유로 이찬희를 고문 14)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 원 한 최, 진술조서( ), 한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이,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구정회, 진술조서( ). 15) 신청인 김도중, 진술조서( ); 참고인 한인석, 진술조서( ). 김도중(당시 구례중학교 2학 년)은 학교 옆 지서 부근에서 지서장 최낙순이 여러 사람 앞에서 이찬희를 사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김 도중은 이찬희와 같은 마을주민으로 나중에 이찬희의 조카와 결혼하였다. 16)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이, 진술조 서( ). 17) 전라남도지방경찰청, 최낙순의 이력서, 경무과-21577( ). 1952년 3월 26일 공비토벌기장 수여. 18)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이, 진술조 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이 과 이 은 최낙순 지서장 과 함께 중평마을 작전에 참가하였다. 19) 참고인 한인석 이재은, 진술조서( ). 한인석(당시 25세)은 간전면 젊은이들과 함께 제2국민역 소집령에 따라 순천 매산고등학교까지 갔다가 이틀 밤을 자고 귀향하였다. 이재은은 아버지 이찬희가 여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41

120 제 2 권 하다가 지서 옆 공터로 끌고 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20) 이 사건과 관련하여 참고인 이 (당시 구례경찰서 토벌대원)은, 중평마을 작 전을 최낙순 간전지서장과 함께 나갔는데, 최낙순이 중평마을의 이씨 성을 가진 젊은이 가 빨치산 출몰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아 지서 부근에서 사살하였다 라고 진술하였다. 21) 라) 이찬희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이찬희의 제적부에는 사망일이 실제 사 망일과 같게 기록되어 있다. 나. 광양시 지역 1) 다-9274호 희 생 자 : 허장오( 許 長 五, 당시 31세, 주물공장 직원), 허옥선( 許 玉 善, 당시 21 세, 광양 하포국민학교 교사) 사건개요 1950년 11월 13일, 허장오, 허옥선 형제가 광양읍 무선쟁이 고개에서 광양경찰 서 경찰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허장오, 허옥선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뒤 각각 주물공장 공장장과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허씨 형제는 인민군 점령기에는 피난을 가 지 못하고 고향인 광양군 광양읍 세풍리에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수 없는 사람이 허 장오, 허옥선의 집에 왔다 갔는데, 그 일을 빌미로 수복 후 마을사람이 경찰서에 허장오, 허옥선이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과 어울렸다고 밀고하였다. 22) 수시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 다녀오느라 제2국민역 소집에 응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인석은 이찬희와 같 은 마을사람으로 같은 대한청년단원이었고, 빽이 없으면 제2국민역 소집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 다. 20) 신청인 김도중,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 서 토벌대원 이 이, 진술조서(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한, 진술조서( ). 이 등 구례서 토벌대원들은 최낙 순 지서장의 이찬희 사살 사건을 자세히 진술하였다. 이강온은 희생자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만 기 억하였으나 이, 이, 이 는 이찬희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였다. 21)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22) 신청인 허정태, 진술조서( ); 참고인 허중석, 진술조서( ). 허중석(당시 24세)은 허장오, 허 옥선과 사촌 간으로 사건발생 당시 희생자 허장오의 집에 있다가 광양경찰서 경찰관들이 허장오 등을 조 사할 것이 있다며 광양경찰서로 연행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허중석은 허장오 등이 연행된 직후 허장오의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2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나) 1950년 11월 13일, 광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4, 5명이 마을로 와서 허장오와 허 옥선, 그리고 같은 마을 배도열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 등 총 4명을 조사할 일이 있으 니 경찰서까지 가자 고 연행하였다. 경찰은 이 4명을 연행하던 중 광양-순천간 무선쟁이 고개에서 모두 사살하였다. 23) 이 사건과 관련하여 참고인 장 과 안 (당시 광양경찰서 토벌대원)은, 당 시 토벌대원들이 무선쟁이 고개에서 여러 번에 걸쳐 사람들을 사살했으나 죽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은 모른다 라고 진술하였다. 24) 다) 허장오와 허옥선의 시신은 허장옥 등 가족이 수습하였다. 허장오와 허옥선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1958년 10월 3일로 실제 사망일과 다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제사일은 실제 사망일과 같았다. 2) 다-10833호, 다-10835호 희 생 자 : 정태용( 鄭 泰 容, 당시 42세, 농업), 정석기( 鄭 鉐 基, 당시 24세, 농업) 사건개요 1950년 12월 4일, 정태용이 광양군 옥곡면 옥곡지서 옆 골짜기에서 광양 경찰 서 경찰에게 사살되고, 1952년 1월 14일 정태용의 아들 정석기가 옥곡면 신금리에서 광양 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정태용은 여순 사건 전 아들 옥기, 석기, 현기, 진기 등 일가족과 함께 옥곡면 묵백리에 살면서 마을 1구 구장을 하고 있었다. 정태용의 첫째아들 정옥기는 여순 사건 진압군에게 사살되었고, 둘째아들 정석기는 인민군 점령기 분주소에서 활동하다가 수복 이 되자 피신하였다. 셋째아들 정현기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 희생 사건 때 경찰에게 사살되었으며, 넷째아들 정진기는 인민군 점령기 의용군으로 갔다가 도망가려 했다고 인민군에게 사살되었다. 25) 나) 정태용은 둘째아들 정석기의 피신사실 등을 이웃마을사람이 경찰에 밀고하여 집에서 약 150여 미터 떨어진 무선쟁이 고개에서 총소리가 나자 그곳으로 가서 허장오 등이 사살되어있는 것을 보고 네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23) 참고인 허중석, 진술조서( ). 24) 참고인 광양서 토벌대원 장, 진술조서( ); 참고인 광양서 토벌대원 안, 진술조서 ( ). 25) 이상 참고인 백준기, 전화통화보고서( ). 백준기(여순 사건 당시 광양중학교 2학년)는 정태용 가 족과 옆집에 살았기 때문에 그 집안의 사정을 잘 알고 그 집안사람들의 희생사실을 자세히 진술하였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43

122 였다. 27) 다) 한편 피신생활을 하던 아들 정석기는 수복 이후 원래 고향인 옥곡면 묵백리 제 2 권 1950년 12월 3일 옥곡지서의 명령을 받고 출두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1950년 12 월 4일 광양군 옥곡면 옥곡지서 옆 골짜기에서 광양경찰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26) 이와 관련하여 장 (당시 광양경찰서 토벌대원)은 경찰이 주민을 불러 친인척 의 좌익혐의를 조사하고 그 사람을 대신 처벌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라고 진술하 가 경찰에 의해 소개 28) 되자 신금리로 와서 살고 있었다. 1952년 1월 14일 저녁, 정석기는 묵백리에 가서 농사일을 하고 신금리로 돌아오다가 잠복 중이던 토벌대의 총격으로 묵백 리 사지목 앞 도로에서 사살되었다. 29) 이와 관련하여 장 과 서순종(당시 광양경찰서 토벌대원)은, 당시 묵백리가 경 찰에 의해 소개된 뒤 사람들이 묵백리에 가서 농사일을 하다가 밤에 돌아오던 중 공비로 오인되어 사살된 경우도 있었지만 사살된 사람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모른다 라고 진술 하였다. 30) 라) 정태용과 정석기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그들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 제 사망일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 여수시, 남해군 지역 1) 다-6280호, 다-6281호, 다-6282호 희 생 자 : 최원오( 崔 元 五, 당시 26세, 농업), 정용호( 鄭 龍 浩, 당시 21세, 농업), 김춘덕( 金 春 德, 당시 26세, 농업) 사건개요 1950년 9월 26일,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등 3명이 여수시 돌산도 죽포리에서 26) 신청인 정영기, 진술조서( ); 참고인 백준기, 진술조서( ); 참고인 반동철, 진술조서 ( ). 반동철(정석기의 학교 후배)은 정태용이 아들 정석기의 입산 사실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하 였으며 희생시기는 기억하지 못하였다. 27) 참고인 광양서 토벌대원 장, 진술조서( ). 28) 참고인 광양서 토벌대원 장, 진술조서( ); 안, 진술조서( ). 29) 신청인 정영기, 진술조서( ); 참고인 반동철, 진술조서( ); 참고인 광양서 토벌대원 안, 진술조서( ). 반동철은 정석기가 입산한 사람이라서 잠복근무 중인 경찰과 군인들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하였다. 묵백리 주민으로 당시 광양서 토벌대원이었던 안 은 정석기가 농사를 지으러 왔다 갔다 하다가 토벌대의 검문에 걸려 공비로 오인되어 죽었다고 하였다. 30) 참고인 광양서 토벌대원 장 서순종,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2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해군에 살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0년 9월 26일, 경남 남해군 고현면 선소리에 해군이 상륙 31) 하였다. 이에 인근마을 이어리 주민들이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으나 해군은 이어리가 빨갱이 마을 이라며 부역혐의자를 색출하였다. 그러자 마을주민 중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에게 남편을 잃은 사람이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등 3명을 부역자라고 지목하였다. 32) 나) 이에 해군은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등 3명을 다른 마을 부역혐의자들과 함 께 여수시 돌산도 죽포리로 끌고 가 1950년 9월 26일 살해하였다. 33) 다) 해군의 1950년 9월 26일 작전경과보고서 34) 에는 해본작명 갑제170호로 남 해군과 여수시를 확보하기 위하여 통제부 육전대 1개 대대를 남해군에 상륙시켜 동 지구 를 소탕한 후 여수시를 확보케 함, 적 사살 4명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해군사 (작전편) 35) 에는 진해방어대 1개 대대(송인명 중령 지휘) 가 1950년 9월 26일 경남 남해군 고현면 선소리에 상륙하였으나 적의 주력은 이미 하동 과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고 소수의 잔적만 남아 있었다. 남해 일대의 잔적을 소탕하고 350명의 민간인 협력자를 자수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문서에 기록된 작전 수행날짜와 수행내용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짜와 사건정 황이 일치한다. 그러나 작전경과보고서 에 기록된 적 사살 4명 이란 전과보고가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희생 사건과 연관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라) 희생자의 시신은 가족이 돌산도에 가서 수습코자 하였으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어 수습하지 못하였다. 제적부에는 3명 모두 한날( )에 사망한 31) 이때 상륙한 부대는 해군진해방어대(중령 송인명) 무등산호로 추정된다.( 대한민국해군사 (작전편), 남해 안 지대 진격전 ). 32) 신청인 최국진 채선녀 류상삼, 진술조서( ). 류상삼(당시 26세)은 최원오 등과 같은 마을사람으 로 사건 당시 국군 환영장에 나갔는데 그곳에서 최원오 등 3명이 지목되어 국군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목 격하였다. 남해경찰서 회신공문, 고현면 거주민의 여수 돌산도에서 국군에 의한 희생 사건 관련 관계기록 통보 (남해정보보안 호 ). 진실화해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남해경찰서가 주민들을 조사한 결과. 33) 신청인 최국진, 참고인 류상삼, 진술조서( ). 신청인 최국진(당시 6세)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들 은 이야기에 따르면, 해군이 이어리 옆 마을사람들도 체포하여 여수 돌산도 쪽으로 갔는데, 이를 본 옆 마 을사람들이 시신을 찾아왔다고 하여 최국진의 할아버지 등도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여수 돌산도에 갔 다 왔다고 한다. 34) 해군본부 회신공문, 일반보존기록물 확인결과통보 (보존과-2691호 ), 작전경과보고서 ( ~ ). 35) 해군본부 회신공문, 일반보존기록물 확인결과통보 (보존과-2691호 ), 대한민국해군사 (작 전편)의 남해안 지대 진격전.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45

124 제 2 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다-4776호 희 생 자 : 정재수( 丁 在 洙, 당시 28세, 농업) 사건개요 1950년 11월 23일, 정재수가 여수시 율촌면 호산마을에서 여수경찰서 율촌지 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0년 11월 23일 새벽, 부역혐의자 색출을 하던 율촌지서 토벌대 10여 명이 여수시 율촌면 호산마을에 소총을 난사하며 들어와 마을의 모든 주민을 당산나무 앞에 모이게 하였다. 36) 나) 토벌대는 소집한 주민 가운데 부역혐의로 도피한 정재우의 형 정재수를 붙잡 았다. 토벌대는 그에게 동생의 인민군 점령기 부역사실과 행방을 추궁하며 고문하였다. 정재수가 모른다고 부인하자 토벌대 인솔자는 토벌대원 7명에게 총을 겨누도록 지시한 뒤 계속 추궁하였다. 정재수가 계속 부인하자 토벌대 인솔자는 발사 를 명령했고 토벌대 원은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정재수를 사살하였다. 37) 다) 정재수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정재수의 제적일은 단기 4284년 11월 23 일로 기재되어 있어 실제 사망일과 1년의 차이가 있다. 라. 보성군 지역 1) 다-7517호 희 생 자 : 백옥임( 白 玉 任, 당시 34세, 주부) 사건개요 1950년 11월 1일, 백옥임이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자신의 집에서 보성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36) 신청인 정승기, 진술조서( ); 참고인 정성동 김평배, 진술조서( ). 정성동(당시 16세)은 정재수의 동생으로 경찰의 마을 진입과정과 함께 주민들 앞에서 정재수가 고문을 당하다가 사살되는 장 면을 목격하였다. 김평배(당시 24세)도 정성동과 같은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편, 정재수의 동생 정재우는 수복 당시에는 피신했다가 나중에 돌아와 부역자로 처벌받지 않고 군대에 다녀온 후 고향에 계속 거주하 였다. 37) 참고인 정성동 김평배,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2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희생경위 가) 산악지역인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는 1950년 가을 빨치산이 자주 출몰했다. 보성경찰서 토벌대는 거의 매일 낮 이 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이 마을주 민들이 빨치산에게 식사 등을 제공했는지를 조사하고 교육도 했다. 38) 나) 1950년 11월 1일 오전에도 보성경찰서 토벌대는 회천면 봉강리에 들어와 주 민 모두를 마을 앞에 소집했다. 그리고 주민 중 일부가 모이지 않자 토벌대는 가가호호 수색하며 총기를 난사했다. 이때 젖먹이 아이 때문에 자신의 집 안방에 있던 백옥임이 사 살되었다. 39) 이와 관련하여 이 (당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은, 빨치산 소탕 시 경찰의 집 합 명령에 불응하여 마을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이를 찾아내 죽이는 것은 아무 일도 아 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40) 다) 백옥임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그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제 사망일과 같게 기록되어 있다. 2) 다-6652호 희 생 자 : 소진모( 蘇 鎭 模, 당시 40세, 농업) 사건개요 1950년 11월 20일, 소진모가 보성군 복내면 진봉리 진척마을에서 보성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0년 11월 20일, 보성경찰서 토벌대가 보성군 복내면 진봉리에 와서 마을주 민들을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들을 위문하려고 소진모가 주도하여 마을주민들 이 계란을 모아 토벌대에게 제공하였다. 41) 나) 이때 토벌대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진모에게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물었 는데 소진모(선천적 언어장애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에 지휘관은 거짓말을 하기 38) 신청인 정해욱, 진술조서( ); 참고인 김용한 박요선, 진술조서( ). 김용한(당시 26세)과 박요선(당시 22세)은 백옥임과 같은 마을사람이고 박요선은 백옥임의 조카며느리이다. 이들은 사건발생 당일 마을의 정황을 목격하고 이를 자세히 진술하였다. 39) 참고인 김용한 박요선, 진술조서( ). 박요선은 사건 당시 백옥임이 총소리에 놀라 아이들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워 아이들은 살아남았다고 진술하였다. 40)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이, 녹화자료( 촬영). 41) 참고인 이병육, 진술조서( ).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47

126 제 2 권 때문에 더듬는 것이라며 마을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진모의 머리를 권총으로 쏘아 사살 하였다. 42)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 (당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은, 전평균 율어지서장이 참여한 토벌작전 시 소진모인지는 모르지만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말을 더듬거리는 것이 라며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43) 다) 이 광경을 목격한 같은 마을주민 고광수가 소진모를 껴안고 애통해하자 토벌 대는 고광수에게도 총을 쏘았고, 그는 며칠 후 사망하였다. 사건현장에 있었던 마을주민 이병육이 토벌대 중에 율어지서장(전평균)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을주민들은 이들이 보성 경찰서 토벌대임을 알게 되었다. 44) 라) 소진모와 고광수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다. 소진모의 제적부상 사망일 은 실제 사망일과 같게 기록되어 있다. 3) 다-9469호 희 생 자 : 김용신( 金 容 新, 당시 19세, 학생) 사건개요 1950년 11월 21일, 김용신이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보성경찰서 토벌대에 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한국전쟁 발발 전 김용신은 보성군 소재 보성중학교 재학시절 찬탁활동을 하 였다는 동료 학생의 밀고로 요시찰인이 되었다. 수복 이후 1950년 11월 21일 보성경찰서 토벌대가 회천면 봉강리에 와서 기관총을 난사한 후, 마을주민 김용신이 인민군 점령기 부역자라고 연행하여 마을 앞 논에서 사살하였다. 45) 나) 김용신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그의 사망일은 제적부에는 잘못 기록되 어 있으나 족보에는 실제 사망일과 같게 기록되어 있다. 42) 신청인 소화영, 진술소서( ); 참고인 이병육, 진술조서( ). 소화영(당시 15세)은 소진모 의 아들이고 이병육(당시 36세)은 소진모, 고광수와 같은 마을사람이다. 이들은 토벌대가 마을주민 모두를 소집한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사살되는 상황을 목격하였다. 43)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참고인 이, 진술조서( ). 44) 참고인 이병육, 진술조서( ). 이병육은 일제강점기 때 복내우체국에 근무하면서 율어지서장 전평 균을 알게 되었다. 45) 신청인 김용학, 진술조서( ); 참고인 김용한, 진술조서( ). 김용한(당시 26세)은 김종신 의 집안 형으로 김종신이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2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4) 다-5497호 희 생 자 : 김순임( 金 順 任, 당시 18세, 무직) 사건개요 1950년 12월 1일, 김순임이 보성군 회천면 천포리 갈마마을에서 보성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0년 12월 1일 오전, 보성군 회천면 천포리 갈마마을에서 빨치산과 교전을 마친 보성경찰서 토벌대가 주민 모두를 마을 앞 논으로 집합시켰다. 46) 당시 부산에서 생 활하던 김순임은 수복 후 고향인 이 마을에 와 있었다. 나) 경찰토벌대는 집안에 숨어 집결하지 않은 주민 박벌개와 전날 자신의 집에서 빨치산을 재워준 박유근을 끌어내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했다. 그 후 경찰토벌 대 2명이 김순임을 연행하여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김순임이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토벌대는 마을주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서 김순임을 사살 하였다. 47) 경찰토벌대가 김순임을 왜 연행하였는지는 밝히지 못하였다. 다) 김순임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으나 사망신고는 되어 있지 않았다. 5) 다-10447호 희 생 자 : 양재춘( 梁 在 春, 당시 26세, 보성 노동국민학교 훈도) 사건개요 게 사살된 사건. 1950년 12월 27일, 양재춘이 보성군 문덕면 양가락재 골짜기에서 보성경찰에 희생경위 가) 양재춘은 보성 노동국민학교 훈도 48) 로 재직 중이던 1950년 7월(일자미상) 학 교 소사를 부르기 위해서 학교 종을 쳤다. 이때 학교 인근에서 작전을 하던 보성경찰은 양재춘이 빨치산에게 도망가도록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그를 보성경찰서로 연행 구금 46) 신청인 김기연, 진술조서( ); 참고인 하용태 임정묘, 진술조서( ). 47) 신청인 김기연, 진술조서( ); 참고인 하용태 임정묘, 진술조서( ). 신청인 김기연(당시 13세)은 김순임의 동생이고, 참고인 하용태(당시 25세), 임정묘(당시 21세)는 김순임과 같은 마을사람으로 이들 모두는 당시 토벌대의 집합명령에 따라 마을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김순임이 연행되다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48) 교직자 재직증명 자료제출 (노동국민학교-3010호 ), 발령 해직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49

128 제 2 권 하였다. 구금되었던 양재춘은 인민군이 보성지역을 점령할 무렵 석방되었다. 49) 나) 수복 이후 양재춘은 보성경찰서로 다시 연행되어 1950년 12월 27일 보성군 문덕면 소재 양가락재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50) 보성경찰서 토벌대원 이 은, 토벌 대가 양가락재에서 13명 정도의 민간인을 사살하였다 라고 진술하였다. 51) 다) 양재춘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양재춘의 처 김외남은, 양재춘의 시신 을 수습할 때 양가락재에 득량면 송곡리 양씨 학생 등 15~16명 정도의 시신이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52) 양재춘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제 사망일과 같게 기록되어 있다. 6) 다-1454호, 다-1455호, 다-1456호 희 생 자 : 박기발( 朴 基 發, 당시 48세, 농업), 조문옥( 趙 文 玉, 당시 35세, 농업), 박해남( 朴 海 南, 당시 24세, 농업), 박해성( 朴 海 成, 당시 24세, 농업) 사건개요 1951년 1월 2일, 박기발, 조문옥, 박해남, 박해성 등 4명이 보성군 미력면 원초 당마을에서 보성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1년 1월 1일 밤, 박기발, 조문옥, 박해남, 박해성 등 4명은 보성경찰서 미력 지서의 지시로 보성군 미력면 원초당마을에서 전신주 경비 근무를 하였다. 이때 그들은 빨치산이 전신주를 절단하는 것을 발견하고 박기발이 이를 미력지서에 신고하였다. 신고 를 받은 미력지서 경찰은 잘린 전신주로 부터 500여m 떨어진 곳에서 총을 몇 발 쏘고 돌 아갔다. 53) 나) 다음날 보성경찰서 토벌대는 원초당마을주민 모두를 전신주가 절단된 현장 인근의 굴바기터널로 모이게 한 후, 박기발 등 4명에게 빨치산과 짜고 전신주를 절단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심한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박기발 등은 이를 극구 부인하였 49) 신청인 양회균, 진술조서( ); 참고인 김외남, 진술조서( ). 김외남(당시 24세)은 양재춘의 처로 남편이 학교 교사들과 회식 때 돼지 한 마리를 잡아먹었는데, 소사를 불러 그 값을 받으러 온 사람에 게 돈을 주려고 종을 쳤다고 하였다. 김외남은 양재춘이 희생되기 직전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 면회 를 하였으며, 경찰에게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50) 참고인 김외남, 진술조서( ). 양재춘의 처 김외남의 진술과 보성경찰서 토벌대원 이창식의 진술이 상호 관련성이 있는지 밝히지 못하였다. 51) 참고인 보성경찰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52) 참고인 김외남, 진술조서( ). 53) 신청인 박장석 조윤, 진술조서( ); 신청인 황명숙, 진술조서( ); 참고인 최학동 박삼 순,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29 다. 54) 다) 이에 토벌대장은 마을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4명을 굴바기터널 둔덕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위에서 사살하였다. 55)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 과 안 (당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은, 토벌대가 마 을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빨치산과 한통속이 아니냐고 박기발 등을 고문하다가 그들이 부 인하자 총살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라고 진술하였다. 56) 라) 박기발 등 4명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다. 그들의 제적부상 사망연도는 실제 사망연도와 차이가 있으나 사망일은 한날(음력 )로 기록되어 있다. 7) 다-7111호, 다-9475호 희 생 자 : 정종문( 丁 鍾 文, 당시 38세, 농업), 이점임( 李 点 任, 당시 28세, 주부), 정해은( 丁 海 銀, 당시 7세), 정 (호적 미기재, 당시 3세), 박대홍( 朴 大 洪, 당시 57세, 농 업), 정재임( 鄭 在 任, 당시 21세, 주부), 정의례( 鄭 義 禮, 당시 20세, 주부) 사건개요 1951년 1월 24일, 보성읍 봉산리 진덕골(봇재) 10여 가구 주민이 보성경찰서 토벌대에게 집안에 갇혀 소사( 燒 死 )된 사건. 희생경위 가) 보성읍 봉산리 진덕골 10여 가구의 주민들은 숯을 구워 생활하는 산골사람들 이었다. 1951년 1월 24일, 보성군 웅치면에 출현한 빨치산을 토벌하러 가던 보성경찰서 토벌대가 봉산리 진덕골을 수색하여 빨치산이 은거하고 있던 굴에서 숯을 발견하였다. 57) 나) 토벌대는 굴에서 숯이 나오자 봉산리 진덕골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했다고 54) 참고인 최학동 최도준, 진술조서( ). 최학동(당시 37세), 최도준(당시 36세)은 희생자들과 같은 마을사람으로 보성경찰서 토벌대가 마을주민 모두를 소집했을 때 현장에 나갔기 때문에 토벌대가 4명을 고문하고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55) 참고인 최학동 최도준, 진술조서( ). 56)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안, 진술조서 ( ), 녹화자료( 촬영). 57) 신청인 박연심, 진술조서( ), 전화통화보고서( ). 박연심(당시 13세)은 박대홍의 딸로 사 건발생 당일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보성역에 철도경찰로 근무하고 있던 오빠 박도현(정의례의 남편), 박 춘기(정재임의 남편)를 면회한 후 집으로 돌아오다가 마을 입구에서 자신의 아버지 박대홍이 사살되어 있 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아랫마을사람들에게 보성경찰서 토벌대가 자신의 아버지 박대홍을 사살하고 주 민들을 집안에 가두고 소사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도 위험하겠다는 생각을 하여 아랫마을 박금애 의 집에서 잔 뒤 다음날 사건현장에 가서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주민들의 뼈만 남아 있는 상황을 목격하 였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51

130 제 2 권 간주하고 10여 가구 주민들을 각각 자기 집에 가두고 불을 질러 소사시켰다. 58) 한편 박대 홍은 마을 입구에서 불을 지르고 나오던 토벌대가 소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 사 살되었다. 59)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 과 안 (당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은, 봇재(진덕 골)에서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한 것으로 간주하고 주민들을 집안에 가두어 불에 태워 죽인 일이 있는데, 당시에는 엉뚱한 사람을 죽였어도 경찰서로 복귀해서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60) 다) 사건발생 후 보성경찰서에서 인부를 보내 주민 모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을 뒷산에 묻었다. 61) 정종문 가족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제 사망일과 모두 다르게 기록되 어 있으나 사망연도는 같은 해로 되어 있고, 박대홍 가족의 사망신고는 되어 있지 않다. 진덕골 희생자 10여 가구 중 정종문과 박대홍 등 2가구만 사건 신청을 하였다. 전체 희생 인원은 밝히지 못하였다. 8) 다-2973호 희 생 자 : 최춘성( 崔 春 成, 당시 46세, 농업) 사건개요 1951년 2월 9일, 최춘성이 보성군 복내면 동교리 신촌마을에서 보성경찰서 토 벌대원 임종필과 윤기덕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보성군 복내면 동교리 주민 최춘성은 마을에서 좀 잘사는 축에 속했다. 그래 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 임종필과 윤기덕에게 기부금을 내라는 종용을 여러 차례 받았는 데,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62) 58) 신청인 정해천, 진술조서( ); 신청인 박연심, 진술조서( ), 전화통화보고서( ); 참 고인 박금애, 진술조서( ); 참고인 박요선, 진술조서( ). 박금애(당시 18세)는 진덕골 인근 삼산마을주민으로 사건발생 당일 박연심 모녀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준 뒤, 다음날 박연심 모녀와 함께 사건현장에 가서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주민들의 뼈만 남아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 박요선(당시 22세)은 진덕골 인근 봉강리 주민으로 진덕골의 정종문이 시당숙이다. 그 역시 사건발생 직 후 현장에 가서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주민들이 소사된 상황을 목격하였다. 59) 사건 신청인 박연심, 진술조서( ), 전화통화보고서( ). 60)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안, 진술조서 ( ), 녹화자료 ( 촬영). 61) 신청인 박연심, 전화통화보고서( ). 박연심은 보성경찰서에서 사람을 보내 주민들의 유골을 수습 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3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나) 이에 앙심을 품은 임종필과 윤기덕이 1951년 2월 9일 최춘성의 집으로 찾아 와 그를 마을 앞 논으로 끌어낸 후 부역자라면서 사살하였다. 63)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 (당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은, 임종필과 윤기덕과 함 께 근무하였는데, 이들이 복내면 동교리 최부자에게 기부금을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자 이에 앙심을 품고 공비로 몰아 죽인 것을 알고 있다 라고 진술하였다. 64) 또한 이 (당시 보성경찰서 토벌대원)은, 임종필, 윤기덕과 함께 근무하여 이 들을 알고 있으며, 윤기덕은 빨치산을 하다가 전향한 자로 동료들과 따로 행동하는 등 잘 어울리지 않았으나 당시 최춘성을 사살한 사건과 같은 일이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65) 다) 최춘성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그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제 사망일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마. 고흥군 지역 1) 다-7569호 희 생 자 : 이승식( 李 升 植, 당시 22세, 농업) 사건개요 1951년 4월 7일, 이승식이 고흥군 동강면 동강지서 부근에서 고흥경찰서 동강 지서 주순경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1년 2월경(일자 미상), 좌익활동을 하던 이승식의 사촌형 이계휴가 이승식의 모친에게 와서 밥을 얻어먹고 갔다. 그 후 이계휴가 검거되자, 1951년 4월 6일 동강지서 주순경이 이계휴 일로 조사할 것이 있다고 이승식을 집에서 동강지서로 연행하였다. 66) 나) 이승식은 연행된 다음날 아침 동강지서 부근에서 주순경에게 사살되었다. 67) 62) 신청인 최상수, 진술조서( ); 참고인 최남순, 진술조서( ). 최남순(당시 18세)은 최춘성 의 큰딸로 부친이 집에서 연행되어 사살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가해자로 지목한 임종필과 윤기덕이 같은 마을에 살던 토벌대원이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63) 참고인 최남순 조장현 진술조서( ); 조장현(당시 18세)은 최춘성과 같은 마을주민으로 자신과 동네사람들이 집안에 숨어서 임종필과 윤기덕이 최춘성을 사살하고 그냥 가버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64)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65)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66) 신청인 이귀자, 진술조서( ); 참고인 이정순 이영식, 진술조서( ). 이영식(당시 29세)은 이승식과 사촌 간으로 사건현장에 가서 이승식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이정순(당시 13세)은 이승식의 동생 으로 이승식이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67) 신청인 이귀자, 진술조서( ); 참고인 이정순 이영식, 진술조서( ). 이승식의 희생사실은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53

132 제 2 권 이와 관련하여 손공현(당시 고흥경찰서 사찰계 직원)은, 오래된 일이라서 이승식 사건이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좌익들의 친인척을 불러와 조사하고 대신 처벌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심지어는 대살한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68) 다) 이승식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그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제 사망일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바. 곡성군 지역 1) 다-7220호 희 생 자 : 오금길( 吳 金 吉, 당시 35세, 농업) 사건개요 1951년 6월 25일, 오금길이 곡성군 곡성읍 대평리 뱃고지에서 곡성경찰서 토 벌대에게 타살( 打 殺 )된 사건. 희생경위 가) 1951년 6월, 빨치산이 출몰하는 곡성군 곡성읍 대평리 산자락 외진 곳에 살고 있는 오금길의 집에 군산경찰서에 근무한다는 경찰관 4명이 찾아왔다. 그들의 정체와 그 들이 무슨 이유로 이 마을에 왔는지는 확인 69) 되지 않았으나 오금길의 가족은 이들을 숨 겨주었다. 70) 나) 이 일이 있은 직후 1951년 6월 21일, 곡성경찰은 오금길과 그의 처 윤삼순이 빨치산을 숨겨준 통비분자 라고 곡성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연행된 윤삼순은 곧바로 풀려 났으나, 오금길은 계속 구금된 채 빨치산과 내통한 통비분자 임을 자백하라고 폭행당했 다. 1951년 6월 25일, 오금길은 곡성읍 대평리 뱃고지(속칭 칩실)에서 곡성경찰서 토벌대 에게 돌로 타살되었다. 71) 이와 관련하여 조정현(당시 곡성경찰서 토벌대원)은, 당시 대평리 뱃고지에 외딴 집안 친척 송기삼이 알려주었다. 송기삼이 이영식에게 알려준 바에 따르면 주순경이 술에 취한 채 이승식 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계휴는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금 중 사살되었다.(이영식, 전화통화보고서, ). 68) 참고인 고흥경찰서 사찰계 직원 손공현, 진술조서( ). 69) 참고인 윤삼순, 진술조서( ). 윤삼순은 사건발생 2년 후, 당시 숨겨준 군산경찰서 경찰 1명이 찾 아와서 함께 곡성경찰서에 가서 우리를 도와준 사람인데 무슨 반란군과 내통하였다고 사람을 죽였느냐 라고 따진 사실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70) 참고인 윤삼순, 진술조서( ). 71) 참고인 윤삼순, 진술조서( ). 윤삼순이 사건현장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3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기와집이 있었던 것을 아는데 그 집 사람이 토벌대에게 타살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러나 외딴 집에 살다보면 그렇게 오해받아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 이같은 일은 아주 흔했다 라고 진술하였다. 72) 다) 오금길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였다. 그러나 그의 호적은 오곡면사무소가 빨 치산에게 전소되어 멸실되었으므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사. 순천시, 승주군 지역 1) 다-10094호 희 생 자 : 정원기( 丁 元 基, 당시 27세, 농업) 사건개요 1950년 12월 1일, 정원기 등 2명이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에서 순천경찰서 쌍 암지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가) 쌍암면 주민 정원기와 김동진은 빨치산을 도와준 통비분자 라고 쌍암지서장 임상기가 자신들을 계속 괴롭히자 1950년 11월경(일자 미상) 죽학리 대숫굴 죽림마을 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생활을 했다. 73) 나) 은신생활을 하던 두 사람은 1950년 12월 1일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대숫굴 마 을회관 앞에서 순천경찰서 쌍암지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74) 다) 순천경찰서가 작성한 사실조사서 에 정원기의 피살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는 그가 3-8항 (부역사실이 없거나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한 자)에 해당하는 자로 분류 되어 있다. 75) 라) 정원기와 김동진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다. 그들의 제적부상 사망일은 실제 사망일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72) 참고인 곡성서 토벌대 조정현, 진술조서( ). 73) 신청인 김월심, 진술조서( ). 김월심이 시어머니에게 전해 듣기로는 정원기는 밤 사람이 아니며, 쌍암지서장 임상기가 못살게 굴어 이를 피하고자 김동진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생활하다가 1950년 12월 1일 승구군 쌍암면 죽학리 대숫굴 회관(현 죽림마을) 앞에서 경찰토벌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하였다. 74) 신청인 김월심, 진술조서( );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75)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Ⅲ급비밀, 일 작성). 정원기는 2311호로 6 25 당시 공비로 활약타가 50년 12월 1일 사살된 자 이며, 분류 기준표는 3-8항 이다. 3-8항은 처형되었으나 부역사실이 없거나 부 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한 자 를 말한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55

134 제 2 권 2) 다-9955호 희 생 자 : 허장옥( 許 長 玉, 당시 43세, 주막집 경영), 문근례( 文 根 禮, 당시 42 세, 허장옥의 처) 사건개요 1950년 12월 8일, 허장옥, 문근례 부부가 승주군 쌍암면 유흥리 닭재 몬당(꼭 대기)에서 집안에 갇혀 곡성경찰서 토벌대에게 소사( 燒 死 )된 사건. 희생경위 가) 허장옥, 문근례 부부는 승주군과 곡성군 경계지점으로 깊은 산속인 승주군 쌍 암면 유흥리 닭재 몬당(고개 꼭대기)에서 주막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76) 나) 1950년 12월 8일, 닭재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하던 곡성경찰서 토벌대가 쌍 암면 유흥리 주민들이 빨치산에게 식사제공 등 도움을 주었다고 이 마을 3가구에 불을 질렀다. 이때 허장옥, 문근례 부부는 자신의 주막에 갇혀 소사되었다. 77) 다) 허장옥, 문근례의 시신은 김순례 등 일가친척이 수습하였다. 제적부에 기록된 사망연월일은 실제 사망일과 다르나 부부가 한날( )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3) 다-10403호, 다-10404호 희 생 자 : 이기호( 李 起 晧, 당시 23세, 목수), 이기영( 李 起 榮, 당시 18세, 무직) 사건개요 1951년 3월경 이기호가 승주군 서면 신평리 경찰검문소에서, 그의 동생 이기 영이 1952년 3월 8일 승주군 서면 판교리 제각에서 각각 순천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건. 희생경위 76) 신청인 허용식,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순례, 진술조서( ). 허용식(당시 10세)은 허장옥 의 조카로 사건발생 직후 현장에 가서 허장옥의 집이 전소된 것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있는 것 을 목격하였다. 김순례(당시 18세)는 허장옥의 제수로 허장옥의 아랫동네에 살았다. 그는 사건발생 직후 현장에 가서 허 장옥의 집 등 3가구가 전소되고 사람과 모든 것이 불에 탄 현장을 보았다. 또한 마을사람들이 곡성경찰서 토벌대가 그렇게 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77) 신청인 허용식,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순례, 진술조서( ); 참고인 박동실 배채심, 진술 조서( ). 박동실(당시 16세)과 배채심(당시 23세)은 쌍암면 죽학리 주민으로 닭재 몬당 사람들이 산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경찰토벌대가 승주읍 유흥리 소재 닭재 몬당 주막집을 불태워 사람 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3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가) 승주군 서면 판교리에서 이기호의 부 이군보와 모, 누이 이점례가 여 순 사건 반란군 가족으로 몰려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이 사살된 시기는 경찰이 주 민들에게 국민보도연맹 가입을 한참 권유할 무렵이었다. 당시 이기호는 목수 일을 하며 떠돌이로 지내고 있었는데 가족이 죽은 이유가 자신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78) 나) 몇 년 후 이기호는 인민군 점령기가 지난 1951년 3월경에야 고향으로 돌아오 다가 승주군 서면 신평리 경찰검문소에서 순천경찰서 토벌대에게 검거되었다. 검거현장 에서 토벌대는 이기호에게 좌익혐의를 자백하라고 고문을 하다가 사살하였다. 79) 이와 관련하여 조 (당시 순천경찰서 토벌대원)은 승주군 서면 신평리에 검문 소가 있었는데 수배 중인 자가 붙잡히면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고 그랬다. 그러나 그때 죽 은 사람들의 이름은 모르겠다 라고 진술하였다. 80) 다) 이기호의 동생 이기영은 정신장애자로 1952년 3월 8일 승주군 서면 판교리 이씨 제각 앞에 서 있다가 순천경찰서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81)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 (당시 순천경찰서 토벌대원)은 당시 토벌대가 온 동 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미친 사람 하나를 공비로 사살한 적이 있었다. 토벌대원들은 자 신이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시체 옆에 놓고 사진을 찍은 후 공비사살이라고 전과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82) 라) 이기호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러 갔으나 83) 경찰이 시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수습하지 못하였다. 가족들은 이기영의 시신은 수습하였다. 제적부에는 이기호, 이 기영의 사망일이 실제 사망일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78) 참고인 이황의 이찬의, 진술조서( ). 이황의(당시 22세)와 이찬의(14살)는 이기호의 삼촌으로 여순 사건 당시 이기호 가족의 희생사실과 수복 후 이기호의 희생사실을 자세히 진술하였으나 이기호가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79) 참고인 이황의 이찬의, 진술조서( ). 80) 참고인 순천서 토벌대원 참고인 조, 진술조서, 녹화자료( 촬영). 81) 참고인 이황의 이찬의, 진술조서( ). 이기영의 삼촌 이공의(이황의의 형)가 당시 마을 구장이었 는데, 이기영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지서에 가서 알아보니 이기영이 좌익에 가담하여 죽였다고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82) 참고인 순천서 토벌대원 조, 진술조서( ), 녹화자료( ). 83) 참고인 이황의 이찬의, 진술조서( ). 이기호의 희생사실은 마을 구장 김팔호가 이기호네 가족에 게 알려주었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57

136 제 2 권 3. 사건 조사결과 가. 희생자 수와 희생자 명단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희생자의 신원은 신청인이 제출한 신청서 내용을 제적부와 대조하여 확인하였고, 사망일자는 제적부와 족보, 신청인 및 참고인의 증언을 대조하여 확인하였다. 그리고 희생자는 신청인이나 참고인의 사건현장 목격 여부와 진술 의 일관성, 당시 각 경찰서에 근무했던 토벌대원들의 사건경위나 사건정황에 대해 진술 한 내용, 시신수습 여부, 관할 경찰서의 사살기록 등을 종합하여 특정하였다. 그러나 이 조사결과는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지역 전체 희생자 수는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희생자는 총 35명으 로 명단은 <표 5>와 같다. 지역 연 번 구례 (3명) 광양 (4명) 사건 번호 구공암 具 功 岩 구회석 具 會 石 이찬희 李 贊 熙 당시 희생자 성별 직업 나이 허장오 許 長 五 허옥선 許 玉 善 정태용 鄭 泰 容 정석기 鄭 鉐 基 <표 5> 희생자 명단(확인) 24 남 교사 황순남 黃 順 南 37 남 숙박업 구자운 具 滋 雲 29 남 한청 간부 신청인과 신청인 관계 김도중 金 渡 中 31 남 공업 허정태 許 貞 泰 21 남 교사 남편 부 희생 일자 가해 혐의자 구례서 토벌대 희생사실 판단근거 참고인 진술 시신수습 처숙부 구례경찰 숙부 광양경찰 42 남 농업 부 광양경찰 정영기 鄭 瑛 基 24 남 농업 형 광양서 토벌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3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지역 연 번 사건 번호 당시 희생자 성별 직업 나이 신청인과 신청인 관계 희생 일자 가해 혐의자 희생사실 판단근거 참고인 진술 시신수습 최원오 崔 元 五 26 남 농업 최국진 崔 國 珍 부 여수 남해 (4명) 보성 (17명 ) 정용호 鄭 龍 浩 김춘덕 金 春 德 정재수 丁 在 洙 백옥임 白 玉 任 소진모 蘇 鎭 模 김용신 金 容 新 김순임 金 順 任 양재춘 梁 在 春 박기발 朴 基 發 조문옥 趙 文 玉 박해남 朴 海 南 박해성 朴 海 成 정종문 丁 鍾 文 이점임 李 点 任 정해은 丁 海 銀 21 남 농업 채선녀 蔡 善 女 26 남 농업 김철용 金 喆 龍 28 남 농업 정승기 丁 勝 基 34 여 주부 정해욱 丁 海 旭 40 남 농업 소화영 蘇 華 永 19 남 학생 김용학 金 容 鶴 18 여 무직 김기연 金 基 連 26 남 교사 양회균 梁 會 均 48 남 농업 박장석 朴 壯 錫 35 남 농업 조 윤 趙 胤 시숙부 숙부 백부 해군 부패하여 수습불능 여수서 토벌대 모 보성서 토벌대 부 형 보성서 토벌대 보성서 토벌대 매 보성서 토벌대 부 부 부 24 남 농업 황명숙 시부 黃 明 淑 24 남 농업 친척 38 남 농업 숙부 정해천 28 여 주부 숙모 丁 海 天 7 남 무직 사촌 보성서 토벌대 보성서 토벌대 보성경찰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59

138 제 2 권 지역 연 번 고흥 (1명) 곡성 (1명) 순천 승주 (5명) 사건 번호 당시 희생자 성별 직업 나이 신청인과 신청인 관계 24 정 3 남 무직 사촌 박대홍 朴 大 洪 정재임 鄭 在 任 정의례 鄭 義 禮 최춘성 崔 春 成 이승식 오금길 李 升 植 吳 金 吉 정원기 丁 元 基 허장옥 許 長 玉 문근례 文 根 禮 이기호 李 起 晧 이기영 李 起 榮 57 남 농업 부 박연심 21 여 주부 올케 朴 蓮 心 20 여 주부 올케 46 남 농업 최상수 崔 相 洙 22 남 농업 이귀자 李 貴 子 35 남 농업 오경영 吳 京 泳 27 남 농업 김월심 金 月 心 43 남 주막집 백부 운영 허용식 許 龍 植 42 여 주부 백모 23 남 목수 김용순 金 龍 順 희생 일자 가해 혐의자 보성서 토벌대 부 보성서 토벌대 희생사실 판단근거 참고인 진술 시신수습 부 고흥경찰 부 곡성서 토벌대 시숙부 순천서 토벌대 곡성서 토벌대 시숙 월 경 순천서 토벌대 순천경찰 서 사살자명 부 수습차 갔으나 경찰이 시신위치 알려주지 않음 18 남 무직 시숙 각 희생자의 희생시기 및 경위를 정리하면 <표 6>과 같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3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표 6> 희생시기 및 경위 지역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 1950 하반기 희생시기 1951 상반기 1951 하반기 1952 상반기 희생경위 구례 광양 여수 남해 보성 구공암 지서가 습격받은 뒤 빨치산 앞잡이라는 이유 구회석 로 이찬희 허장오 5 허옥선 빨치산 습격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통비분자라 는 이유로 부역자라는 이유로 정태용 아들이 입산하였다는 이유로 정석기 토벌대의 총격으로 최원오 정용호 김춘덕 부역자라는 이유로 정재수 동생의 부역사실을 부인하였다는 이유로 백옥임 토벌대의 소집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진모 김용신 부역자라는 이유로 토벌대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는 이유 로 김순임 토벌대의 연행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양재춘 박기발 조문옥 박해남 20 박해성 21 정종문 22 이점임 정해은 학교소사를 부르기 위해 종을 친 것이 빨치산 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 하여 경찰의 지시로 전신주 경비를 서면서 목격한 빨치산 습격사실을 신고하자 빨치산과 한편이 라는 이유로 빨치산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24 정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61

140 제 2 권 지역 연 번 25 사건 번호 희생자 박대홍 1950 하반기 희생시기 1951 상반기 정재임 27 정의례 최춘성 1951 하반기 1952 상반기 희생경위 빨치산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기부금을 내지 않아 통비분자라는 이유로 고흥 이승식 좌익활동하던 사촌형의 문제로 조사받은 후 곡성 오금길 순천 승주 경찰이라는 사람을 숨겨 준 후 통비분자라는 이유로 정원기 통비분자로 몰려 숨어 있다 발각됨 허장옥 33 문근례 빨치산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이기호 좌익혐의로 수배 중 검문에 걸려 이기영 마을에 들어온 토벌대가 총을 난사하여 나. 가해주체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가해자는 관할 경찰서장의 지휘 명령 감독 84) 아래 부역혐의자 색출 활동과 빨치산 토벌작전을 한 경찰 및 경찰토벌대이다. 일부 사건 은 국군이 가해자이다. 희생자들은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말경 시작된 부역혐의자 색출 활동부터 빨치산 잔 적 소탕기간인 1952년 3월 사이에 국군과 전남 동부지역 7개 시군(구례, 광양, 여수, 보성, 고흥, 곡성, 순천) 지역의 관할 경찰 및 경찰토벌대에게 빨치산, 통비분자, 부역자 그리 고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무장 무저항 상태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된 것이 다. 당시 구례경찰서 토벌대원 85) 으로 산동지서, 중동출장소 등지에서 근무했던 이 (85 84)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참고인 보성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 토벌대원들은 기동대장(토벌대장)은 경비주임과 작전주임이 교대로 하였고, 서장이 지휘 명령했다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4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세), 한 (74세), 최 (76세) 등 참고인들은 다음과 같이 공통적으로 진술하였다. 민간인이 빨치산들의 억압에 의해 식사를 제공하고 식량 등을 약탈당한 후 그들의 아지 트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강제노역을 하고는 경찰토벌대의 가혹행위가 두려워 하산하지 못 하고 (산에서) 생활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다 보니, 나중에 붙잡힌 사람들은 좌익도 아니면 서 좌익으로 처형당하는 등 애먼 죽음이 많았다. 86) 친인척의 좌익혐의를 대신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87) 지서 등지에서 민간인을 죽이고 나서 그들이 반란군이나 좌익 등 통비분자였다고 사후 에 보고하면 그만이었다. 88) 당시에는 실제로는 경찰관뿐만 아니라 의경인 토벌대원들도 즉결처분을 하였다. 89) 공비들이 위협하여 심부름을 시키거나(장날 농구화, 양말 구입 등), 양식 같은 것을 가 져가면서 약탈해가는 것이 아니라 인민공화국에서 빌려가는 것 이라며 장부(치부책)에 적 어놓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경찰이 공비를 검거하거나 사살한 후 수집하게 되면 장부책에 이름이 적힌 주민들은 부역자로 처형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 90)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사건발생 당시 전남 동부지역 7개 시군 지역의 관할 경 찰 및 토벌대원으로 근무했던 참고인들은 전남 동부지역에서 경찰과 토벌대에 의한 민간 인 희생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다. 가해의 위법 여부와 책임소재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은 대부분 부역자 처벌과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85) 이강온 등의 토벌대 근무사실은 국방부 비군인참전사실확인 신청서 와 보훈처 참전군인수당지급 연명 부 및 참고인들의 진술로 확인하였다. 86)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 원 한,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최, 진술조서 ( ). 87)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 원 한,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88)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 원 한,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89)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한,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90)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63

142 제 2 권 국군과 경찰이 비무장 주민들을 살해하여 일어난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전시로 국 민의 권리가 충실히 보호되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비록 전시 상황이었다고 하나 국 민의 권리제한은 최소한의 범위에 그쳐야 한다 라는 헌법원칙 91) 이 아니더라도 국민의 생 명을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빼앗을 수 있는 법적 공백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자의건 타의건 부역을 하거나 빨치산에게 협력한 사람에게는 국방경비법 이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을 적용하여 재판을 거쳐 형벌이 집행되도 록 하는 실체적 절차적 규정이 있었으나 희생자들에게는 이 규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 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 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가 해자인 국군과 경찰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희생자들에 대해 신청인뿐만 아니라 경찰 측 참 고인들도 무고한 양민 이며, 애먼 죽음을 당한 사람들 92) 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희생자 들은 부역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게 살해된 경우가 많다. 실제 부역을 했다고 하더라 도, 무장한 군경이 법적 절차 없이 비교전 상태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 93) 한 것은 위법한 것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이 조사에서 개별 사건마다의 가해자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사건의 가해자가 경찰과 경찰토벌대이므로 그 1차적 지휘책임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귀속 된다. 하지만 전시 하 사회혼란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경찰과 우익세력들의 폭력행 사를 통제 예상하지 못한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 91) 제헌헌법 제28조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은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92)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원 이,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구례서 토벌대 원 한, 진술조서( ), 녹화자료( 촬영); 참고인 순천서 토벌대원 서운석, 진술조서, 녹 화자료( 촬영); 참고인 순천서 토벌대원 김용효, 진술조서( ); 참고인 순천서 토벌대원 김 재열, 진술조서( ); 참고인 순천서 토벌대원 김용효 김재열, 녹화자료( 촬영) 등. 93) 국내에서는 한국전쟁 기간 중 부역혐의나 적과 내통한 혐의만 있는 마을주민을 무차별 살해한 경찰 지휘 관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여 불법성을 확인한 판례가 있다.(대법원 형상 제115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4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Ⅲ.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론 가. 진실화해위원회는 전남 동부지역 주민 구공암 등 35명이 1950년 9월 말경부터 1952 년 3월 사이 국군과 경찰 및 경찰토벌대에게 빨치산, 통비분자, 부역자, 그리고 그 가 족이라는 이유로 사살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나. 이 기간 중에 경찰 및 경찰토벌대는 관할 경찰서장의 지휘 명령 감독 아래 부역 혐의자 색출 활동과 빨치산 토벌작전을 하면서(일부 사건은 국군), 뚜렷한 증거 없이 희 생자들을 빨치산, 통비분자, 부역자 등으로 몰아 살해하였다. 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구공암( 具 功 岩, 다 -3890), 구회석( 具 會 石, 다-4533), 이찬희( 李 贊 熙, 다-3684), 허장오( 許 長 五 ), 허옥선( 許 玉 善, 이상 다-9274), 정태용( 鄭 泰 容, 다-10833), 정석기( 鄭 鉐 基, 다-10835), 최원오( 崔 元 五, 다-6280), 정용호( 鄭 龍 浩, 다-6281), 김춘덕( 金 春 德, 다-6282), 정재수( 丁 在 洙, 다-4776), 백옥임( 白 玉 任, 다-7517), 소진모( 蘇 鎭 模, 다-6652), 김용신( 金 容 新, 다-9469), 김순임( 金 順 任, 다-5497), 양재춘( 梁 在 春, 다-10447), 박기발( 朴 基 發, 다-1454), 조문옥( 趙 文 玉, 다 -1455), 박해남( 朴 海 南 ), 박해성( 朴 海 成, 이상 다-1456), 정종문( 丁 鍾 文 ), 이점임( 李 点 任 ), 정해은( 丁 海 銀 ), 정 (호적미기재, 이상 다-7111), 박대홍( 朴 大 洪 ), 정재임( 鄭 在 任 ), 정 의례( 鄭 義 禮, 이상 다-9475), 최춘성( 崔 春 成, 다-2973), 이승식( 李 升 植, 다-7569), 오금길 ( 吳 金 吉, 다-7220), 정원기( 丁 元 基, 다-10094), 허장옥( 許 長 玉 ), 문근례( 文 根 禮, 이상 다 -9955), 이기호( 李 起 晧, 다-10403), 이기영( 李 起 榮, 다-10404) 등 35명이다. 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주민이었다. 또한 여성은 6명 이고, 10세 이하 어린이는 2명이다. 마.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었던 전시 수복 과정의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 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 절 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 465

144 제 2 권 2. 권고사항 가. 국가의 공식사과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 국가권력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희생자 의 유족을 비롯한 국민에게 공식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한다. 나. 위령시설 설치 등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진실규명이 된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의 희생자를 위령하는 사업을 할 것을 권고한다. 다. 호적(가족관계부) 기록정정 사망 신고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 가족이 원한다면 이를 정정할 것을 권고한다. 라. 인권교육의 강화 진실화해위원회는 군경과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쟁 중 민간인 보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국내법과 관련 국제법 교육을 의무화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 할 수 있도록 하는 인권교육을 할 것을 권고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4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결정사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 시에 해남군 주민들이 좌 익, 부역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 및 우익단원에게 살해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해남군 주민들이 좌 익, 부역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 및 우익단체원에게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되었 는데,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가. 본 사건은 시기적으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 지와 수복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주로 1946년 11월 11일 발생한 해남 추수봉 기와 관련된 사건이고, 후자는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처벌과 관련된 사건이다. 나.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된 166명 중 본 사건 희생자로 확인되는 희생자는 159명이다. 다. 희생자들은 비무장 주민들로 좌익활동이나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법적 절차 없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지서 등에 구금된 후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산이면 주산동 뻔 지, 마산면 노하리 붉은데기 등으로 끌려가 집단살해되었다. 2.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의 가해주체는 경찰과, 경찰의 지휘 명령 감독 아래 놓여 있던 의용경찰, 의용소방대 그리고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3.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해방 이후 좌우익 간 대립이 극심한 때이거나 수복 과정으로 혼란한 때였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 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하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생명권과 적법 절차에 따 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4.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여 처벌할 경우 합당한 이유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하나 사건의 가해주체인 경찰은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67

146 제 2 권 전 문 사 건 다-446외 135건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신청인 김연제 외 122명 결정일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이유 기재와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사건접수와 처리과정 김연제(다-446호) 외 122명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전라남도 해남군 일원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하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 건 )에 대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1)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에 대해 광주 전남지역 군 경 토벌작전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및 광주 전남지역 군 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이상 )과 부역혐의 민간 인 희생 사건 ( , )으로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조사하였다. 신청서 접수상황은 <표 1>과 같다. 1)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사건 수는 총 136건인데 다-5668호와 다-6084호는 같은 사건으로 중복 신청되 었고, 다-7538호 희생자 중 김일남, 문준용은 다-7809, 다-8427로 각각 중복 신청되어 실제 사건 수는 133 건이다. 한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발생된 사건으로 5건 다-462호(오종오), 다 -466호(오종대), 다-1289(강문복), 다-1297(나종현), 다-4248(문기재, 문경수, 문종신, 문종인) 이 신청되 었는바, 이 사건은 다른 남부지역(완도 진도 장흥 강진군) 사건 중에서 이 시기(해방 이후~1948년 8 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발생한 사건들과 함께 처리하기로 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4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표 1> 신청서 접수상황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사건 관련자(피해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 과 관계 김연제( 金 連 濟 ) 김귀남( 金 貴 男 ) 남 30세 부 김준섭( 金 俊 燮 ) 김택우( 金 澤 祐 ) 남 24세 부 이병무( 李 丙 武 ) 이형근( 李 亨 根 ) 남 33세 부 4 465(1) 오길록( 吳 吉 祿 ) 오경순( 吳 京 順 ) 여 19세 누나 이창준( 李 昌 準 ) 이병회( 李 炳 會 ) 남 37세 부 최봉순( 崔 奉 順 ) 양암국( 梁 岩 局 ) 남 29세 시숙 오화영( 吳 花 英 ) 오경록( 吳 警 祿 ) 남 30세 부 박영산( 朴 永 山 ) 박병길( 朴 炳 吉 ) 남 21세 부 박종호( 朴 鍾 浩 ) 남 17세 숙부 최봉순( 崔 奉 順 ) 양산옥( 梁 山 玉 ) 남 21세 남편 김기옥( 金 基 玉 ) 박나심( 朴 羅 心 ) 여 31세 모 박병승( 朴 棅 承 ) 박종철( 朴 鍾 哲 ) 남 33세 형 탁민우( 卓 敏 祐 ) 탁진채( 卓 眞 采 ) 남 29세 조부 탁옥진( 卓 玉 珍 ) 남 19세 종조부 오광례( 吳 光 禮 ) 오명탁( 吳 鳴 鐸 ) 남 31세 부 강병원( 姜 昞 遠 ) 강갑동( 姜 甲 同 ) 남 57세 부 오석연( 吳 錫 淵 ) 오 종( 吳 鍾 ) 남 37세 형 방형식( 方 亨 植 ) 방중이( 方 仲 伊 ) 남 47세 부 김앵심( 金 櫻 沁 ) 여 51세 모 방형식( 方 亨 植 ) 방상우( 方 相 祐 ) 남 28세 형 공하수( 孔 夏 洙 ) 공길종( 孔 吉 宗 ) 남 42세 부 김옥례( 金 玉 禮 ) 박종주( 朴 鍾 柱 ) 남 24세 시동생 김동환( 金 東 煥 ) 김일재( 金 日 在 ) 남 22세 백부 김성신( 金 盛 信 ) 남상익( 南 相 益 ) 김오진( 金 五 眞 ) 남 34세 부 김명규( 金 明 奎 ) 남 28세 숙부 남호걸( 南 豪 傑 ) 남 44세 조부 고중심( 高 仲 心 ) 여 34세 조모 비 고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69

148 제 2 권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사건 관련자(피해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 과 관계 나철홍( 羅 喆 洪 ) 나영석( 羅 永 石 ) 남 42세 부 오원평( 吳 元 平 ) 오유록( 吳 有 祿 ) 남 22세 형 고진택( 高 珍 澤 ) 고광용( 高 光 用 ) 남 44세 백부 고광채( 高 光 彩 ) 남 41세 백부 김대심( 金 大 心 ) 여 30세 백모 비 고 고 ( 高 ) 남 2세 종제 호적 미기재 고진택( 高 珍 澤 ) 고광철( 高 光 喆 ) 남 34세 부 오종식( 吳 鍾 殖 ) 오종란( 吳 鍾 蘭 ) 남 19세 동생 장병오( 張 炳 午 ) 장홍만( 張 洪 滿 ) 남 35세 숙부 장태순( 張 泰 順 ) 남 19세 숙부 (1) 오인록( 吳 仁 祿 ) 박정연( 朴 正 連 ) 여 30세 형수 최형완( 崔 炯 完 ) 최은상( 崔 殷 相 ) 남 40세 부 박종석( 朴 鍾 碩 ) 박양용( 朴 良 用 ) 남 49세 부 (1) 신귀선( 申 貴 先 ) 임사례( 任 四 禮 ) 여 40세 모 이백준( 李 伯 俊 ) 이광춘( 李 光 椿 ) 남 33세 부 임순례( 林 順 禮 ) 여 34세 모 정채금( 鄭 彩 今 ) 정부환( 鄭 富 煥 ) 남 33세 부 오송탁( 吳 宋 鐸 ) 오화탁( 吳 華 鐸 ) 남 25세 형 오주영( 吳 주영) 오완용( 吳 完 鏞 ) 남 17세 종조부 김선택( 金 先 澤 ) 김기복( 金 基 楅 ) 남 28세 부 김용철( 金 容 喆 ) 김 일( 金 日 ) 남 38세 부 김덕수( 金 德 洙 ) 남 29세 숙부 김순애( 金 順 愛 ) 김월봉( 金 月 奉 ) 남 33세 시부 한행복( 韓 幸 福 ) 한삼성( 韓 三 成 ) 남 52세 부 정인수( 鄭 仁 洙 ) 정천수( 鄭 千 洙 ) 남 19세 형 정인수( 鄭 仁 洙 ) 정재문( 鄭 在 文 ) 남 43세 부 서정봉( 徐 正 奉 ) 서여산( 徐 如 山 ) 남 28세 부 이한순( 李 漢 順 ) 이토성( 李 土 星 ) 남 48세 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4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사건 관련자(피해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 과 관계 박해규( 朴 海 圭 ) 박옥렬( 朴 玉 烈 ) 남 22세 형 정영욱( 鄭 榮 旭 ) 정인안( 鄭 仁 安 ) 남 25세 부 김성근( 金 成 根 ) 김철효( 金 哲 孝 ) 남 29세 부 윤화자( 尹 花 子 ) 정인석( 鄭 仁 石 ) 남 32세 시부 정승시( 鄭 承 市 ) 정인률( 鄭 仁 律 ) 남 30세 부 신문규( 申 文 圭 ) 신행균( 申 幸 均 ) 남 23세 형 (1) 이달연( 李 達 連 ) 박평금( 朴 平 今 ) 여 24세 모 박무남( 朴 武 男 ) 박선완( 朴 璿 浣 ) 남 31세 부 이정례( 李 正 禮 ) 박성대( 朴 成 大 ) 남 51세 시부 박종완( 朴 宗 完 ) 남 22세 시숙 한대순( 韓 大 順 ) 강재봉( 姜 在 韸 ) 남 41세 시부 윤대현( 尹 大 鉉 ) 윤인석( 尹 仁 錫 ) 남 39세 부 정영순( 鄭 永 順 ) 정병옥( 鄭 炳 鈺 ) 남 22세 숙부 정영순( 鄭 永 順 ) 정병호( 鄭 炳 鎬 ) 남 25세 부 민성욱( 閔 成 旭 ) 민경대( 閔 庚 大 ) 남 27세 숙부 이정균( 李 正 均 ) 이봉춘( 李 逢 春 ) 남 26세 형 민정배( 閔 廷 培 ) 민병화( 閔 丙 華 ) 남 27세 부 양동조( 梁 東 朝 ) 양윤수( 梁 允 洙 ) 남 24세 부 임향란( 林 香 蘭 ) 임유선( 林 有 先 ) 남 40세 부 박순례( 朴 順 禮 ) 박영록( 朴 永 錄 ) 남 26세 오빠 박문수( 朴 文 洙 ) 김천희( 金 天 喜 ) 남 39세 외조부 김만암( 金 萬 岩 ) 김정오( 金 正 五 ) 남 19세 형 박종현( 朴 鍾 炫 ) 박한옥( 朴 漢 玉 ) 남 24세 숙부 박창규( 朴 昌 圭 ) 남 21세 숙부 박종현( 朴 鍾 炫 ) 박연옥( 朴 演 玉 ) 남 19세 숙부 김망덕( 金 望 德 ) 여 48세 모 비 고 김옥모( 金 沃 模 ) 김병모( 金 昞 摸 ) 남 30세 형 김명금( 金 明 今 ) 여 29세 형수 김병모의 처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71

150 제 2 권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사건 관련자(피해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 과 관계 김영모( 金 泳 摸 ) 남 25세 형 김영숙( 金 英 淑 ) 여 19세 누나 박문철( 朴 文 哲 ) 박문탁( 朴 文 鐸 ) 남 23세 형 이원태( 李 源 泰 ) 이원빈( 李 源 彬 ) 남 24세 형 문수근( 文 水 根 ) 문철재( 文 哲 在 ) 남 50세 부 정기종( 丁 奇 鍾 ) 정수복( 丁 水 卜 ) 남 60세 증조부 송폰례( 宋 폰 禮 ) 여 51세 증조모 정래구( 丁 來 九 ) 남 30세 조부 정의례( 丁 義 禮 ) 여 19세 대고모 이한순( 李 漢 順 ) 민채홍( 閔 彩 泓 ) 남 25세 남편 민경서( 閔 庚 瑞 ) 민예기( 閔 禮 基 ) 남 40세 부 김일심( 金 日 心 ) 이성채( 李 成 采 ) 남 35세 시부 김향배( 金 香 培 ) 김향수( 金 香 洙 ) 남 23세 형 이병옥( 李 炳 玉 ) 이재식( 李 在 植 ) 남 49세 부 이해선( 李 海 善 ) 이성준( 李 成 俊 ) 남 27세 부 김은수( 金 殷 洙 ) 김진제( 金 鎭 濟 ) 남 65세 부 김은수( 金 殷 洙 ) 박영애( 朴 英 愛 ) 여 54세 모 김은수( 金 殷 洙 ) 진신촌( 陳 新 村 ) 여 77세 조모 방순진( 方 純 珍 ) 방윤경( 方 潤 卿 ) 남 49세 부 최문학( 崔 文 鶴 ) 최창윤( 崔 昌 允 ) 남 35세 백부 김상보( 金 相 烳 ) 김양수( 金 良 洙 ) 남 37세 부 김정웅( 金 正 雄 ) 임길생( 林 吉 生 ) 남 29세 외숙부 임성택( 林 聖 澤 ) 남 26세 외숙부 김정웅( 金 正 雄 ) 임월택( 林 月 澤 ) 남 25세 외숙부 윤춘예( 尹 春 禮 ) 윤흥하( 尹 興 夏 ) 남 24세 부 박종석( 朴 鍾 石 ) 박종복( 朴 鍾 楅 ) 남 31세 형 최형후( 崔 炯 厚 ) 최연석( 崔 連 石 ) 남 25세 숙부 김정행( 金 正 行 ) 김홍일( 金 洪 一 ) 남 42세 부 비 고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5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사건 관련자(피해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 과 관계 이정수( 李 正 洙 ) 이천리( 李 千 里 ) 남 42세 부 오향금( 吳 香 今 ) 오권탁( 吳 權 鐸 ) 남 36세 부 김경원( 金 景 源 ) 김진문( 金 鎭 汶 ) 남 38세 부 김진홍( 金 鎭 洪 ) 남 21세 숙부 이덕모( 李 德 模 ) 이동호( 李 桐 鎬 ) 남 27세 부 연태희( 延 泰 熙 ) 김인옥( 金 寅 玉 ) 남 20세 처남 오삼록( 吳 三 祿 ) 오금록( 吳 金 祿 ) 남 24세 형 김안식( 金 安 植 )) 최병임( 崔 炳 任 ) 여 25세 숙모 김신남( 金 辛 南 ) 남 2세 종제 비 고 오삼록( 吳 三 祿 ) 오금록( 吳 金 祿 ) 남 24세 형 다-5668과 중복 신청 오병옥( 吳 秉 玉 ) 오정록( 吳 丁 祿 ) 남 35세 부 정숙자( 鄭 淑 子 ) 정문순( 鄭 文 巡 ) 남 29세 부 최혜정( 崔 惠 貞 ) 최중규( 崔 重 圭 ) 남 42세 조부 박충원( 朴 忠 元 ) 박상원( 朴 相 源 ) 남 51세 부 박인환( 朴 仁 煥 ) 박동현( 朴 東 鉉 ) 남 25세 부 오야문( 吳 也 文 ) 여 28세 모 박순금( 朴 順 今 ) 김소만( 金 小 萬 ) 남 55세 시부 김경재( 金 敬 才 ) 김장욱( 金 章 郁 ) 남 29세 부 김장우( 金 章 右 ) 남 24세 숙부 이민식( 李 玟 植 ) 이동욱( 李 東 郁 ) 남 31세 부 이민식( 李 玟 植 ) 이동운( 李 東 云 ) 남 27세 숙부 이민식( 李 玟 植 ) 김은희( 金 銀 姬 ) 여 25세 숙모 김성관( 金 成 官 ) 김재근( 金 在 根 ) 남 59세 부 김일남( 金 一 男 ) 여 20세 누나 문준용( 文 俊 龍 ) 남 30세 매형 김성관( 金 成 官 ) 김시종( 金 時 鍾 ) 남 25세 형 김 동( 金 東 ) 김하태( 金 河 台 ) 남 46세 부 정문국( 鄭 文 局 ) 정문기( 鄭 文 基 ) 남 28세 형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73

152 제 2 권 연번 접수일자 사건 번호 신청인 사건 관련자(피해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 과 관계 비 고 문정자( 文 貞 子 ) 문준용( 文 俊 龍 ) 남 30세 부 다-7538과 중복 신청 박태식( 朴 泰 植 ) 박태운( 朴 泰 運 ) 남 29세 형 김덕준( 金 德 俊 ) 김봉현( 金 奉 玄 ) 남 23세 숙부 김근식( 金 槿 植 ) 김연우( 金 演 佑 ) 남 23세 숙부 김영래( 金 泳 來 ) 김준호( 金 俊 鎬 ) 남 38세 부 민홍순( 閔 洪 順 ) 민경남( 閔 庚 南 ) 남 29세 숙부 오성록( 吳 聖 祿 ) 오기록( 吳 琦 祿 ) 남 21세 형 박순안( 朴 順 安 ) 김갑수( 金 甲 洙 ) 남 27세 부 이병국( 李 炳 國 ) 최재임( 崔 在 任 ) 여 24세 모 장기태( 張 基 太 ) 장길선( 張 吉 璿 ) 남 24세 종형 박종표( 朴 鍾 杓 ) 김일남( 金 一 男 ) 여 20세 모 다-7538과 중복 신청 배기섭( 裵 基 燮 ) 배연출( 裵 連 出 ) 남 29세 형 박만수( 朴 萬 洙 ) 박종배( 朴 鍾 培 ) 남 28세 조부 김선재( 金 善 才 ) 김은태( 金 銀 台 ) 남 32세 조부 김정섭( 金 正 燮 ) 김상순( 金 相 順 ) 남 35세 부 이옥란( 李 玉 蘭 ) 박남용( 朴 南 用 ) 남 47세 시부 김유복( 金 有 腹 ) 김기순( 金 己 順 ) 남 38세 부 윤일랑( 尹 一 郞 ) 윤성하( 尹 成 夏 ) 남 30세 부 김현오( 金 鉉 五 ) 김만수( 金 萬 守 ) 남 40세 종조부 김황배( 金 荒 培 ) 남 22세 백부 이금석( 李 金 碩 ) 이철률( 李 哲 律 ) 남 27세 부 박홍렬( 朴 弘 烈 ) 박태길( 朴 泰 吉 ) 남 43세 부 오동혁( 吳 東 赫 ) 오은동( 吳 銀 東 ) 남 62세 조부 김구옥( 金 九 玉 ) 여 60세 조모 오용기( 吳 龍 基 ) 남 37세 부 오창기( 吳 昌 基 ) 남 31세 숙부 오철기( 吳 喆 基 ) 남 27세 숙부 오행임( 吳 行 任 ) 여 21세 고모 신수길( 申 秀 吉 ) 신주희( 申 周 熙 ) 남 34세 조부 김동희( 金 東 熙 ) 김상태( 金 相 泰 ) 남 25세 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5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나. 신청인의 주장 신청인 김연제(사건번호 : 다-446) 외 122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좌익활동을 하거나 해남추수봉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해남군 일원의 민간인 다수가 아무런 법적 절차 없 이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등지에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2) 수복 이후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민간인 다수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해남군 산이면 주산동 뻔지, 마산면 노하리 붉은데기, 송지면 치소리 쑥고개 등지에서 경찰 등에게 희생되었다. 2. 조사의 근거와 목적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조제1항제3 호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에 포함된다고 보고 조사개시 결정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희생 자 수와 희생자 신원, 희생이유, 사건배경과 가해주체, 가해의 지휘 명령체계 및 위법 여 부 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3. 규명 과제 가. 조사범위 해남유족회는 사건 희생자 수가 1,800여 명(보도연맹 및 나주경찰부대 사건 희생자 제 외)이라고 주장 2) 하고 있으나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한 사람은 166명에 불과하 여 양자의 차이가 크다. 따라서 신청된 사건으로 조사범위를 한정하되, 산이면 주산동 뻔지, 마산면 붉은데기, 화산면 나붓재 등과 같은 집단희생 사건과 계곡면 해주마을, 송지면 석수마을 등과 같이 한 마을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이유로 함께 희생된 사건은 신청하지 않은 경우에도 조사 2) 해남유족회가 2006년 제출한 한국전쟁 전후 해남군 관내 민간인 희생자 현황. 민간인 대량학살 현장과 피해인원.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75

154 제 2 권 범위에 포함하였다. 나. 사건의 구분 이 사건은 해남군 내 13개 읍 면 3) 에서 발생한 것인데, 시기적으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와 수복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1946년 11월 11일 발생한 해남추수봉기와 관련된 사건이고 후자는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처벌과 관련된 사건이다. 한편,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처벌은 지서별로 있었는데 희생규모와 처벌기준은 지서마 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에 시기를 먼저 한국전쟁 이전과 수복 이후로 구분하고, 수복 이후 사건은 다시 각 지서가 있었던 면별로 구분하여 조사하였다. 다. 규명 과제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각 사건의 실재 여부, 구체적인 희생경위를 규명하는 한편, 희생 자 수와 신원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가해혐의자로 거론된 경찰 및 우익단체의 소속 등을 밝히고, 수복작전 상황 등을 조사 하여 희생 사건이 수복작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는지, 아니면 현장의 지휘관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4. 조사방법 가. 신청인 참고인 조사 2007년 11월 26일부터 2008년 4월 18일까지 신청인 123명 중 114명과 신청인 측 참고 인 75명을 조사하였다. 또한 사건발생 당시 해남경찰서에서 근무했던 경찰 3명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하였다. 경찰 측 참고인에게서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 시기까지 해남군 상황,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처리기준, 희생자 수 등에 대한 진술을 청취하였다. 그 조사 상황은 <표 2>, <표 3>과 같다 3) 사건 당시 해남군은 13개 읍 면(해남읍, 계곡 산이 마산 옥천 삼산 현산 북평 송지 화산 황 산 문내 화원면)이었으며, 나중에 북일면이 북평면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5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표 2> 신청인 및 신청인 측 참고인 조사 상황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446 김귀남 김연제 아들 4세 전언(가족) 오순희 처 24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459 김택우 김준섭 아들 4세 전언(가족) 김해동 조카 12세 희생자 시신 목격 460 이형근 이병무 아들 신청인 사망 이철림 친척 18세 465(1) 오경순 오길록 동생 8세 희생경위 인지 오인록 친척 25세 619 이병회 이창준 아들 4세 전언(가족) 이병덕 친척 21세 621 양암국 최봉순 제수 17세 전언(가족 및 마을사람) 622 오경록 오화영 딸 4세 전언(가족) 오강부 주민 11세 당시 의용소방대원으로 근무하 여 희생경위 인지 및 사건현장에 서 이형근의 시신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지서에 구금되 어 있는 장면 목격 마산지서 경찰(남학준)을 통해 희생경위 인지 참고인 미확보 참고인의 부친도 같은 사건으로 희생되어 희생사실 인지 623 박병길 박영산 아들 지서에 구금되어 있는 장면 및 4세 전언(마을사람) 박종환 친척 20세 박종호 조카 시신 목격 625 양산옥 최봉순 처 17세 사건현장 목격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사실 김홍원 주민 12세 (직접 시신 수습) 인지 1023 박나심 김기옥 아들 신청서로 갈음 김은수 시동생 22세 전언(마을사람) 1074 박종철 박병승 동생 15세 사건현장 목격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장상혁 주민 20세 (직접 시신 수습) 인지 1075 탁진채 손자 출생 탁민우 전 전언((가족) 탁남미 아들 3세 1075 탁옥진 종손 조카 1078 오명탁 오광례 딸 4세 전언(가족) 서인진 주민 23세 전언(가족) 및 1960년경 신원조 회 시 확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1080 강갑동 강병원 아들 22세 전언(가족) 강인원 아들 25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1081 오 종 오석연 동생 22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사건현장 목격 서인진 주민 23세 인지 (직접 시신수습) 박동운 조카 4세 전언(가족 및 마을사람) 1082 방중이 방형식 아들 15세 희생경위 인지 김영옥 주민 20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77

156 제 2 권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김앵심 1083 방상우 동생 및 시신 목격 1288 공길종 공하수 아들 6세 전언(가족) 김해동 주민 12세 희생사실 인지 및 시신 목격 1291 박종주 김옥례 형수 신청서로 갈음 주민 15세 1292 김일재 김동환 조카 출생 전 전언(가족) 이규도 주민 16세 1293 김오진 김성신 부 6세 전언(가족) 1294 남호걸 남상익 손자 출생 고중심 전 1298 나영석 나철홍 아들 15세 1299 오유록 오원평 동생 11세 1303 고광채 고광용 김대심 고진택 고 조카 사촌 1304 고광철 아들 7세 인지 정양금 제수 15세 전언(가족) 이규도 주민 16세 정양금 주민 15세 전언(가족)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희생경위 인지 및 경찰에게 연행 되는 장면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경찰에게 연행 되는 장면 목격 전언(가족) 김옥심 며느리 17세 희생경위 인지 및 지서에 구금되 어 있는 장면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희생사실 인지 및 시신 목격 나인배 친척 20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서옥진 주민 24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주민 15세 1305 오종란 오종식 형 25세 전언(마을사람) 오종은 친척 13세 (1) 장홍만 장병오 조카 19세 장태순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참고인의 부친도 같은 사건으로 오강부 주민 11세 희생되어 희생사실 인지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서형태 주민 19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지서에 구금되어 참고인의 누나도 같은 사건으로 박정연 오인록 시동생 25세 오길록 친척 8세 있는 장면 목격 희생되어 희생사실 인지 1311 최은상 최형완 아들 15세 사건현장 목격 임향란 주민 3세 전언(가족)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5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직접 시신수습) 참 고 인 진술 근거 1485 박양용 박종석 아들 15세 시신 목격 참고인 미확보 1490 (1) 임사례 신귀선 아들 10세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참고인 미확보 1510 이광춘 이백준 아들 5세 전언(가족 및 임순례 마을사람) 이남기 친척 12세 1911 정부환 정채금 딸 3세 전언(가족) 정인수 친척 17세 2223 오화탁 오송탁 동생 14세 희생경위 인지 참고인 미확보 2224 오완용 오주영 종손 신청인 연락불능 오석연 주민 22세 2225 김기복 김선택 부 1세 전언(가족) 김기원 동생 18세 사건현장에서 이광춘의 시신 목 격 희생경위 인지 및 사건현장에서 정부환의 시신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사건현장에서 오완용의 시신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2227 김 일 김용철 아들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13세 시신 목격 김정근 주민 15세 김덕수 조카 인지 2229 김월봉 김순애 며느리 7세 전언(가족) 2230 한삼성 한행복 아들 13세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목격 정인수 주민 17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2231 정천수 동생 사건현장 목격 신청인이 직접 목격하였으며 다른 신청사건도 참고인 정인수 17세 2232 정재문 아들 (직접 시신수습) 으로 진술 2233 서여산 서정봉 아들 아들 전언(마을사람) 정인수 주민 17세 2350 이토성 이한순 아들 9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지서에 구금되어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주민 15세 있는 장면 목격 인지 2354 박옥렬 박해규 동생 13세 시신 목격 박삼택 친척 12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2671 정인안 정영욱 아들 7세 전언(가족) 강상금 형수 33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2672 김철효 김성근 아들 3세 전언(가족 및 마을사람) 정철례 처 24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2673 정인석 윤화자 며느리 8세 전언(가족) 강상금 친척 33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79

158 제 2 권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2674 정인률 정승시 아들 4세 전언(가족) 정승자 딸 11세 시신 목격 2675 신행균 신문규 동생 19세 시신 목격 김장준 주민 15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2676 (1) 박평금 이달연 아들 3세 전언(가족) 참고인 미확보 2678 박선완 박무남 아들 8세 전언(가족) 김경철 주민 16세 2679 박성대 이정례 며느리 같은 마을에 19세 거주하여 박종완 제수 희생경위 인지 주민 15세 2809 강재봉 한대순 며느리 13세 전언(가족) 강성암 조카 22세 2810 윤인석 윤대현 아들 14세 2811 정병옥 조카 출생 정영순 2812 정병호 딸 전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희생경위 인지 및 경찰에 연행되 는 장면 목격 사건현장 목격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박종남 주민 27세 (직접 시신수습) 인지 전언(가족 및 마을사람) 2813 민경대 민성욱 조카 5세 전언(친척 및 마을사람) 2980 이봉춘 이정균 동생 3세 전언(가족 및 마을사람) 2981 민병화 민정배 아들 5세 전언(가족 및 마을 사람) 정인수 주민 17세 민병목 친척 20세 3009 양윤수 양동조 아들 3세 전언(가족) 문경호 주민 26세 3069 임유선 임향란 딸 3세 전언(가족) 임행자 딸 11세 3070 박영록 박순례 여동생 13세 3196 김천희 박문수 외손자 출생 전 3239 김정오 김만암 동생 13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김순례 처 22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민병익 동생 19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및 시신 목격 지서에 구금된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박종현 친척 15세 장면과 시신 목격 인지 전언(가족 및 마을사람)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김충임 딸 15세 시신 목격 문경호 주민 26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김현국 주민 15세 사건현장에서 핏자국 목격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5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3240 박한옥 경찰에게 참고인의 형도 같은 사건으로 희 박창규 박종현 조카 15세 연행되는 장면과 김향배 주민 17세 생되어 희생경위 인지 및 박한 시신 목격 옥, 박창규, 박연옥의 시신 목격 3241 박연옥 3423 김명덕 김병모 김영숙 김옥모 김영모 김명금 아들 동생 동생 동생 시동생 17세 희생경위 인지 및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목격 김양모 친척 20세 전언(신청인 및 친척)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희생경위 인지 3459 박문탁 박문철 동생 10세 및 시신 목격 김만암 주민 13세 인지(사건 당일 참고인의 형도 경찰에게 사살됨) 3460 이원빈 이원태 동생 16세 시신 목격 주민 20세 당시 현장에서 사살되는 장면 직 접 목격 3612 문철재 문수근 아들 6세 전언(친척) 문경호 조카 26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정래구 손자 정수복 증손자 3664 정기종 송폰례 손자 정의례 재당질 출생 전 3826 민채홍 이한순 처 19세 3827 민예기 민경서 아들 출생 전. 전언(가족) 장인조 주민 12세 임낙균 주민 17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참고인의 부친도 같은 사건 으로 희생됨) 사건현장 목격 사건 현장에 희생자와 같이 있었 민면기 주민 23세 (직접 시신수습) 으며 참고인은 부상당함 전언(가족) 민경률 아들 11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3828 이성채 김일심 며느리 9세 전언(가족) 박정임 주민 24세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목격 3829 김향수 김향배 동생 17세 4047 이재식 이병옥 아들 8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및 시신 목격 박종현 주민 15세 이관식 사촌 22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참고인의 숙부들도 같은 사 건으로 희생됨)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및 시신 목격 4052 이성준 이해선 아들 6세 전언(가족) 이점수 동생 15세 지서에 구금되어 있는 장면 및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81

160 제 2 권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시신 등 목격 4250 김진제 4251 박영예 김은수 아들 전언(군 복무 중 휴가 나와서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및 시신 23세 김봉태 주민 31세 마을사람들에게 목격 4252 진신촌 손자 들었음) 4263 방윤경 방순진 아들 5세 전언(친척) 최봉우 처 31세 4601 최창윤 최문학 조카 6세 전언(가족) 최수동 친척 9세 5076 김양수 김상보 아들 병환으로 진술 불가 김봉태 주민 31세 경찰에 의해 월암고개로 끌려가 는 장면 목격 및 사건현장에서 시신수습 수복 이후 피난지에서 최창윤 목 격 및 경찰에게 사살되었다는 사 실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음 김양수가 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경찰에게 사살되는 장면 목격 5078 임길생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임성택 김정웅 조카 8살 전언(마을사람) 임봉식 주민 25세 인지(참고인의 형도 같은 사건으 로 희생됨) 5079 임월택 5080 윤흥하 윤춘예 부 신청서로 갈음 배순흠 처 23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박종남 주민 27세 5193 박종복 박종석 동생 9세 전언(가족) 이영남 주민 20세 5206 최연석 최형후 조카 5211 김홍일 김정행 아들 10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신청인의 사망으로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신청인의 아들(최환규) 최형재 친척 14세 인지 이 대신 진술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등 목격 정인수 주민 17세 5212 이천리 이정수 아들 8세 전언(가족) 김복윤 주민 20세 5213 오권탁 오향금 딸 3세 전언(가족) 오강부 아들 11세 시신 목격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서형태 주민 19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6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인지 진술 근거 5300 김진문 김경원 아들 3세 전언(가족) 김홍원 아들 12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김진홍 조카 조카 5340 이동호 이덕모 아들 4살 전언(가족) 이삼호 사촌 17세 5534 김인옥 연태희 매형 15세 전언(가족) 신문규 주민 19세 5668 오금록 오삼록 동생 5세 전언(가족) 임윤남 주민 22세 희생경위 인지 및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참고인의 형도 같은 사건으 로 희생됨) 경찰이 쏜 총소리를 들었으며, 시신 등 목격 6083 최병임 김안식 조카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3세 전언(가족) 정인수 주민 17세 김신남 사촌 인지 6084 오금록 오삼록 동생 5세 전언(마을사람) 임윤남 주민 22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6310 오정록 오병옥 아들 신청서로 갈음 서인진 주민 23세 6416 정문순 정숙자 딸 5세 전언(친척 및 마을사람) 주민 18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6524 최중규 최혜정 손녀 신청서로 갈음 최정순 딸 18세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등 목격 6534 박상원 박충원 아들 6세 전언(가족) 박재순 질부 29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6638 박동현 박인환 아들 3세 전언(가족) 오석연 주민 22세 오야문 박동수 동생 12세 시신 목격 사건 현장에서 희생자의 시신 목 격(참고인의 형도 같은 사건으로 희생됨) 6724 김소만 박순금 며느리 출생 전 전언(가족) 오주용 주민 18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6726 김장욱 김경재 아들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5세 전언(가족) 김장준 동생 15세 김장우 조카 를 인지하고 있으며 시신 목격 6988 이동욱 아들 지서에 구금되어 6989 이동운 이민식 10세 있는 장면 및 이준례 여동생 19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조카 시신 목격 6990 김은희 시누이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83

162 제 2 권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김재근 아들 7538 김일남 동생 김성관 문준용 처남 7539 김시종 동생 9세 우익단원에게 끌려가는 장면 및 시신 목격 주민 29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7565 김하태 김동 아들 15세 전언(가족) 7798 정문기 정문국 동생 14세 시신 목격 주민 16세 주민 18세 주민 16세 주민 18세 7809 문준용 문정자 딸 3세 전언(가족) 주민 29세 7817 박태운 박태식 동생 24세 지서에 구금되어 있는 장면 및 시신 목격 7908 김봉현 김덕준 숙부 신청서로 갈음 8000 김연우 김근식 조카 출생 전 8002 김준호 김영래 아들 7세 8010 민경남 민홍순 조카 18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사실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사실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윤정희 처 30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박동안 주민 17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김재례 여동생 19세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목격 전언(가족) 김연복 친척 13세 연행되는 장면 및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목격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채남두 조카 18세 사건현장 목격(직접 시신수습) 김연복 친척 13세 연행되는 장면 및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민경례 여동생 20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참고인의 숙부도 같은 사건으로 지서에 구금되어 8030 오기록 오성록 동생 14세 있는 장면 목격 장병오 주민 19세 희생되었으며 현장에서 오기록 의 시신 목격 8037 김갑수 박순안 딸 1세 전언(가족) 주민 20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6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사건번 호 피해자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8284 최재임 이병국 아들 3세 전언(가족) 이현배 시동생 18세 희생경위 인지 및 시신 목격 8287 장길선 장기태 사촌 12세 전언(가족) 김대욱 친척 14세 김영현 주민 29세 인지 8427 김일남 박종표 아들 1세 전언(가족) 김성관 동생 9세 시신 목격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9345 배연출 배기섭 동생 14세 9346 박종배 박만수 손자 출생 전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및 시신 목격 전언(마을사람) 배현모 친척 19세 종형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9347 김은태 김선재 손자 출생 전 전언(마을사람) 9348 김상순 김정섭 아들 3세 전언(가족) 9349 박남용 이옥란 며느리 13세 전언(가족) 박관봉 주민 24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하고 있으며 희생자들이 지 서에 구금되어 있는 장면 및 시 신 목격 9350 김기순 김유복 아들 출생 전 전언(가족) 9516 윤성하 윤일랑 아들 8세 시신 목격 양일순 처 29세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 및 시신 목격 9517 김만수 종손 조카 희생경위 인지 및 경찰에게 연행 출생 김현오 전 전언(가족) 김숙 14세 되는 장면과 오빠(김황배)의 시 김황배 조카 여동생 신 목격 9518 이철률 이금석 아들 3세 전언(가족) 이연엽 여동생 22세 박태길 박홍렬 아들 18세 오용기 오철기 오동혁 아들 희생경위 인지 및 경찰에게 연행 되는 장면 목격 사건현장 목격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윤정희 친척 30세 (직접 시신수습) 인지 오종식 친척 25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및 오용기를 직접 쏜 경찰 에게 들음 6세 전언(친척) 조카 오행임 오권기 친척 18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85

164 제 2 권 사건번 호 피해자 오창기 성명 피해자와 관계 신 청 인 당시 나이 피해자 당시 진술 근거 성명 와 관계 나이 참 고 인 진술 근거 인지 및 오용기, 오은동, 김구옥 의 시신 목격 오은동 김구옥 손자 오종은 친척 13세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신주희 신수길 손자 출생 전 전언(마을사람) 신관희 친척 21세 전언(마을사람) 김규현 내종 31세 김상태 김동희 아들 5세 전언(가족) 백중기 주민 18세 희생경위 인지 및 사건현장 목격 (직접 시신수습) 같은 마을에 거주하여 희생경위 인지 성명 (연령) 조 4) (80) <표 3> 경찰 측 참고인 조사 상황 주요 경력 진술일 장소 진술 형태 년 경찰 입문(순경) 년 해남경찰서 근무 ~1982년 해남경찰서 정보3계장 및 관내 지서장으로 근무 - 퇴직 후 해남경우회 사무국장 (15년 간) 해남읍 노인회 관 녹음 주요 진술내용 - 11월 추수봉기 상황(가담자에 대한 토벌작전) - 수복 후 부역자 처리과정(가해 주체 및 지휘 명령체계 등) - CIC, 505보안대의 역할 및 경 찰과의 관계 - 한국전쟁 후 부역자 관리 김 5) (83) 년 경찰 입문(순경) 년~한국전쟁 전까지 해남경찰서 근무 - 한국전쟁 시 입성부대로 차출 되어 장명규 서장 연락병으로 근무 ~1979년 해남경찰서 정보2계장 및 관내 지서장으로 근무 해남읍 노인회 관 이 6) 년 경찰 1기생으로 입문 해남읍 녹음 - 11월 추수봉기부터 한국전쟁까 지 해남 상황 - 해남 국민보도연맹사건 - 수복 이후 부역자 처리과정 (특히 주요 우익인사 및 우익 단체와 경찰과의 관계에 대해 진술) 녹음 - 해방 후 해남 상황(주요 좌익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6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성명 (연령) (83세) 주요 경력 진술일 장소 진술 형태 (순경) ~1955년 해남경찰서 근무 - 수복 직후 해남군 시국수습대책 회의 참석 및 부역자 처리지침 마련 음식점 주요 진술내용 사, 11월 해남추수봉기 등) - 한국전쟁 당시 경찰 후퇴 과정 - 수복 과정 - 부역자 처리과정(부역자 처리기 준, 지휘 보고체계, 처형규모 등) 나. 자료조사 1)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 현대사 (해남신문사, 2005) 1930년대 발생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 수립 및 해체과정, 1946 년 11월 추수봉기,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과 수복 이후 상황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그 시기에 활동했던 주요 인물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 세히 기술하고 있다. 2) 해남군사 (해남군, 1995)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해남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인민군 점령기 상황은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나,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처벌에 대 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3) 해남 근현대 신문자료 집성 Ⅰ (해남문화원, 2001) 1898년부터 1961년까지 전국의 모든 신문, 잡지에 실린 해남군 관련 기사를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추수봉기 사건 등 해남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 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다만, 한국전쟁 발생 시점부터 1951년까지의 기사는 수록되어 4) 조 은 사건 당시 해남경찰서에 근무하지 않았지만 1961년부터 해남경찰서에 근무하면서 정보3계장으 로 오랫동안 지냈고, 퇴직 이후 15년 동안 해남경우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사건 당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5) 김 은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해남경찰서에 근무하여 1946년 11월 추수봉기 사건, 1949년 2월 13일 발 생한 해남경찰서 피습 사건 등 주요 사건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6) 이 은 사건 당시 해남경찰서에 근무하였으며, 특히 수복 이후 부역자 처리지침을 마련하는 등 부역자 처리에 관한 업무를 직접 맡아 부역자 처리기준 지휘명령체계 사후보고 등에 대해 중요한 진술을 하였 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87

166 제 2 권 있지 않다. 4) 그 외 자료 해남경찰서, 경찰기본대장, 경찰연혁사, 상이/전몰경찰관(애국단체원) 대장 관련 유족회, 시민사회 단체의 자료 다. 현장조사 부역혐의자들이 구금되었던 산이면 초송리 공회당(현재 농협창고)과 송지면 산정리 농 협창고의 규모, 내부시설, 지서와 거리 등을 조사하였고, 당시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는 목격자의 진술을 청취하였다. 또한 산이면 대진리 주산동 뻔지, 송지면 산정리 산진목, 쑥고개, 어란리 선창가, 마산 면 노하리 붉은데기, 현산면 월송리 딱골재,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삼산면 신금리 방오리 산 방공호굴 등 집단희생장소를 조사하고 인근 주민과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던 목격자 의 진술을 청취하였다. 한편,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산이면 상공리, 계곡면 방춘리, 법곡리 월신마을을 방문하 여 사건 당시 마을에서 살았던 주민을 대상으로 마을 상황 등에 대해 진술을 청취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6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그림 1> 해남군 주요 집단희생장소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89

168 제 2 권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한국전쟁 이전 해남군 상황 7)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8일 해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민병승, 부위원장 천진옥 김정수)가 결성되었고, 이것은 10월 중순경에 해남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정수, 부위원장 천진문)로 전환되었다. 인민위원회는 김정수, 김창수, 오장록 등 일제강점기 때의 농민운 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하였는데, 미군정이 김정수는 군수로, 천진문은 경찰서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자치권을 행사하며 해남을 통치하였다. 아울러 해남농민위원회 (오장록, 윤인석, 임건호), 민주청년동맹 역시 농민운동가들이 조직하였는데, 미군정 추산에 의하면 해남농민위원회의 경우 회원 수가 5만여 명 8) 이 될 정도로 그 활동이 활발했다. 해남농민위원회는 소작료 불납 운동 과 토지 무상분배 운동 으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그 뿌리는 일제시대 전남운동협의회 와 혁명 적 농민운동 의 경험에서 온 것이었다. 결국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탄압에 맞선 농민위원 회 및 농민의 활동은 미군정 반대 시위, 그리고 1946년 11월 추수봉기로 이어졌다. 1945년 11월 해남에 실시된 미군정은 처음에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으나, 1946년 초 부터 인민위원회를 정책수행에 유해한 좌익집단 으로 규정하여 관련자들을 구속하고 해 남경찰을 친일파 출신으로 재조직하였으며, 그리하여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와 갈등이 표 면화되었다. 미군정이 자신이 군수에 임명했던 김정수를 정권을 찬탈하고 불법적으로 테러를 일삼 았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인민위원회 지도자 19명도 체포했다. 천진문 경찰서장과 그 휘 하의 경찰 38명을 축출하고 광주에서 파견되어온 특수경찰 38명으로 해남경찰을 재조직 했다. 인민위원회 출신 군수와 지도자들을 구속시키자 농민위원회 회원 등은 구속인사 석방 과 친일경찰 파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다시 넘기라 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농민들의 시위는 1946년 3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미군 정은 그때마다 경찰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들을 구속시킴으로써 결국 인민위원회는 완전 7) 해남군, 해남군사, 1995; 박영자,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 현대사, 해남신문사, 2005, 쪽; 광주일보, 현대사 현장 해남군 편, 1991, 6. 29, 7. 13, 7. 20, 8. 31자. 8)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6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와해되고 체포를 면한 인사들은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후 1946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해남추수봉기 라 일컬어지는 대규모 농민시위가 해남농민위원회의 지도로 해남군 일원에서 발생하여 다수의 지 출장소가 파괴되고 시 위대 및 경찰관이 사망하였다. 경찰이 충남부대 등 외부 경찰서의 지원으로 가담자 체포 에 나서자 많은 사람들이 두륜산, 달마산 등지로 입산하였고, 체포된 사람들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좌익 탄압과 우익성향 인사들의 입지 강화로 좌우익의 극단적인 대결구도가 형성 된 가운데 1948년 좌우익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찬반으로 갈리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과 독립촉성청년연맹 으로 각각 결집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곧 일제강점기 때의 농민운동가가 중심이 되어 해방 후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미 군정의 탄압을 받은 후 1946년 11월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이들 상당수는 국민보도 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 희생되었으며 죽음을 면한 사람들도 인민군 점령기 에 인민위원회 활동 등 부역행위를 한 뒤 1950년 10월 초순 수복과 함께 부역자로 처벌되 었다. 나. 한국전쟁 발발과 경찰 후퇴 1950년 7월 중순 경찰은 해남군 관내 국민보도연맹원 일제 소집령을 내려 연맹원을 해 남군청 9), 해남식량영단 창고 10) 에 구금하였다. 경찰은 문종식 11) 의 반대로 구금된 보도연 맹원을 일시적으로 풀어주기도 하였으나 재차 소집하여 약 50여 명을 사살 12) 하였다. 아 울러 산이 화산 송지 삼산면 등지에서 소집된 연맹원은 7월 16일 진도군 의신면 갈매 기섬에서 희생되었다 13). 7월 22일에 전 남북을 포함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 14) 되었고, 7월 23일 광주시 입 구의 산동교( 山 洞 橋 ) 군 경 방어선이 무너지자 전라남도와 전남지구편성관구사령부, 전 남경찰경비사령부는 순천,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후퇴 15) 하였다. 9) 해남군, 해남군사, 1995년, 555쪽. 10) 참고인 김 (한국전쟁 당시 해남경찰서 근무), 진술녹취내용( ). 11) 문종식은 일제강점기 때 경찰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민의원에 출마하였다. 그는 보복이 보복을 부른다 고 설득하여 보도연맹원의 희생을 막았다. 이 공로로 인공치하 해남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인민 군 퇴각 시 인민군에게 희생되었다.(해남군, 해남군사, 1995, 쪽). 12)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3쪽. 13) 박영자,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 현대사, 2005, 쪽. 14) 국방부, 韓 國 戰 爭 史 第 2 卷 ( 改 訂 版 ) 遲 延 作 戰 期 ( ~ ), 1979, 1002쪽.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91

170 제 2 권 같은 날 해남경찰은 공무원, 지역유지 및 그 가족 등 300여 명을 인솔하여 16) 해남군 송 지면 어란리 항구에서 선편을 이용 부산으로 후퇴 17) 하였다. 경찰이 후퇴하여 치안공백 상황이 되자 해남에서는 경찰서장을 자임하는 사람이 나타 나고 18) 해남군청과 해남경찰서에 인공기가 내걸렸다 19).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주민들은 인민군이 곧 올 것이라 여기고 피난 여부에 대해 우왕좌왕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움직 임 없이 대부분 주거지에 머물렀다. 7월 25일 해남읍에 인민군이 아닌 완도읍으로 후퇴 중이던 나주경찰부대가 도착하였 다. 나주경찰부대는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환영하였다는 이유 또는 좌익세력 척 결을 이유로 해남읍, 마산면, 현산면 등지에서 다수의 주민을 살상 20) 하였다. 다. 인민군 점령기 상황 7월 28, 29일 경 인민군은 해남읍을 점령한 후 해남군 북평면과 문내면으로 진출하여 도서( 島 嶼 )지방을 방어 중이던 전남서남부 경찰과 대치 21) 하다 8월 하순과 9월 중순 각각 진도와 완도를 점령 22) 하였다. 인민군이 해남군을 점령하자 군 인민위원회(위원장 윤웅, 부위원장 김창수, 문종식 23) ) 와 내무서(위원장 하 24) ) 및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이 구성되었고, 면별로도 인민위원 회가 구성되어 지방좌익 25) 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가족 등 경찰에 피해를 입은 사람 26) 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15) 국방부, 韓 國 戰 爭 史 第 2 卷 ( 改 訂 版 ) 遲 延 作 戰 期 ( ~ ), 1979, 768, 776쪽. 16) 장명규 서장이 入 城 부대에 차출되어 출동함에 따라 정종옥 경무주임이 인솔하였다.(참고인 김 진술녹 취내용, ) 17) 해남경찰서, 경찰기본대장 ; 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전남일보사, 408호; 참고인 이 (당시 해남경 찰서 수사과 근무), 진술녹취내용( ). 18) 참고인 윤주철 조중현, 진술조서( ), 3쪽; 박영자,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 현대사, 2005, 195쪽. 19) 박영자,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 현대사, 2005, 195쪽; 참고인 강상현, 진술조서( ); 신청 인 곽정례, 진술조서( ). 20) 진실화해위원회, 나주경찰부대 진실규명 결정서, )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22) 완도경찰서, 경무기본대장 ; 국방부, 한국전쟁사 第 2 卷 ( 改 訂 版 ) 遲 延 作 戰 期 ( ~ ), 1979, 951쪽. 23)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24) 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전남일보사, 408호. 25)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26)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7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인민위원회는 전쟁 발발 전의 군 면사무소 직원들을 소집하여 근무 27) 시켰고 무상몰 수 무상분배 등의 구호를 내걸고 토지개혁 28) 을 시도하였다. 한편 정치보위부와 군당은 면별로 우익인사를 검거하여 경찰 가족, 공무원, 반공연맹 위원, 대한청년단 간부 등을 구 금한 후 즉결처분하거나 10월 초순 퇴각 시 대량학살하였다. 29) 라. 수복 및 부역자 처리 9 28 서울수복 직후 해남경찰은 부산에서 여수를 거쳐 해남군 북평면 남창항에 10월 5일 도착한 후 6일 새벽에 해남읍을 수복 30) 하였다. 7일부터 해남군 관내 각 지서 수복작 전에 돌입한 경찰은 10월 23일 관내 13개 읍 면을 모두 수복하였다 31). 그러나 계곡면에 서는 흑석산 등에 은거한 지방좌익들이 자주 출몰하자 해남경찰은 진도와 완도경찰부대 의 지원을 받아 그 해 겨울까지 소탕작전 32) 을 계속하였다. 해남읍 수복 직후 경찰은 시국수습대책회의 를 개최하여 노동당 입당자 우익인사 살해자 지서 방화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부역자 처벌기준을 마련하였다. 33) 시국수습 대책회의에서 마련된 부역자 처벌기준은 해남경찰서장(경감 김판수)의 명에 따라 부역 자를 검거하여 죽일 때는 해남경찰서장의 승인을 얻으라 는 지시와 함께 전통으로 각 지 서에 하달되었다. 그러나 각 지서에서 해남경찰서장의 명령 없이 민간인 살상이 발생하 자 서장 승인 없이 처형을 금지한다 는 전통을 또다시 하달하였다 34). 경찰은 각 지서를 수복한 후 인민군 점령시기 인민위원회 가담자, 우익인사 살해자, 지 서방화자, 마을 구장, 국민보도연맹 가족 및 단순 가담자 35) 등을 검거하거나 자수하도록 하여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였다. 36) 27)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참고인 윤주철, 진술조서( ); 황산면, 황산면지, 2007, 108쪽. 28)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29)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전남일보사, 409호. 30) 해남경찰서, 경찰기본대장 ;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7쪽; 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전남일보사, 409호; 참고인 이, 진술녹취내용( ). 31) 해남경찰서, 경찰기본대장 ; 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전남일보사, 410호; 참고인 이, 진술녹취내 용( ). 32) 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전남일보사, 410호. 33) 해남군청 군수실에서 개최되었으며 해남군수 유수현, 해남군청 내무과장 안경호, 국회의원 송봉해, 대한독 립촉성국민회 해남지부장 김만제, 해남경찰서장(이 이 대신 참석)이 참석하였다.(참고인 이, 진술 녹취내용, ) 34) 참고인 이, 진술녹취내용( ). 35) 한국전쟁 중 인민군은 황산면에서 면 직원을 다시 불러 근무시켰고, 주민들에게 현물세를 할당하였으며, 강제로 교사들을 동원하여 각 마을에서 학생들에게 인공가와 행진가를 가르쳤다. 아울러 주민들을 시켜 방공호 설치작업을 하였다.(황산면, 황산면지, 2007.)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93

172 제 2 권 인민군 점령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인민군 퇴각 시 대부분 입산해버렸고, 부역자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부역했던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자발적인 부역자와 단순가담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나 구별 없이 처리하였다. 37) 해남경찰의 수복과정 및 부역자 처벌과정을 살펴보면 경찰은 해남읍을 수복한 뒤 부역 자 처리지침을 마련하였고 곧이어 각 면을 수복하였다. 각 지서를 수복한 경찰은 면 내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하거나 자수하도록 하여 지서와 농협창고 등에 수십 명씩 구금한 후 적법 절차 없이 희생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의 지시를 받은 의경, 의용소방대, 구국연 맹 등 우익단체 등도 개입하였다. 한편, 해남경찰은 각 지서가 서장의 승인 없이 부역자를 처벌하지 말라는 지시를 어기 고 자의적으로 부역혐의자를 처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상부인 전남도 경찰국에는 전투 중 사망 혹은 도망자 사살 등으로 보고하였다. 한편 부역자 처벌과 관 련하여 전남도경으로부터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38) 2. 사건경위 가. 한국전쟁 이전 희생 사건 1946년 11월 11일 화원면을 제외한 해남군 모든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해남 추수봉기 라고 일컬어지는 이 봉기는 미군정시기 일제강점기 때 시행됐던 쌀 공출제도의 부활과 인민위원회 탄압에 대한 반발, 그리고 대구 10월 사건의 전국적 확산 등이 복합적 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봉기가 해남군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가담자가 각 면마다 적 게는 500명 많이는 2,000여 명 39) 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전라남도 다른 지역보다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추수봉기로 각 지서가 습격당해 경찰서 및 지서 24군데 가 소실되고 경찰 10명과 우익인사 28명이 피살됐다. 40) 36) 참고인 이, 김, 조, 진술녹취내용( ). 37)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7쪽. 38) 1951년 3월 14일, 산이지서장 최기명은 산이면 관내 부역혐의자 20명을 살해하여 1951년 12월 12일, 사형 ( 私 刑 )금지법 위반 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최기명 판결문, 단기 4284년 형합 제19호) 이와 같은 최기 명의 위법행위를 참고인 이은곤, 김승남은 당시 알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이, 김, 진술녹취내용, ) 39) 해남군, 해남군사, 쪽. 40) 11월 11일, 해남군 지역에서 농기구를 휘두르는 농민들이 일제히 경찰지서를 공격해 54명의 농민들이 피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7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추수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제8관구 경찰청 소속 경찰 외에도 충남경찰국 소속 기동대 60명도 파견되었다. 각 지역에서 파견되어온 경찰들은 면별로 배치되어 마을마다 봉기 가담자들을 체포하였다. 41) 당시 송지지서에 근무했던 김민호의 진술에 따르면 송지지서 의 경우 곡식창고와 공장창고에 추수봉기 가담자 500여 명을 구금하였다고 한다. 42) 추수봉기 직후 박석만 해남경찰서장이 파면되고 박염선 경감이 부임하였으나 몇 개월 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주모자도 색출하지 못하자 이듬해인 1947년 2월경, 다시 장춘배 (전 山 聯 전남지부장) 경감으로 교체되었다. 장춘배 서장은 민완 형사들을 모아 폭동 특별수사반을 편성해 각 지서는 물론 인접 군 까지 파견하여 추수봉기 가담자들을 검거하였다. 그 결과 오장록, 조동선, 김인재 등 주요 주동자들이 검거되었고, 43) 적극 가담했던 사람들은 경찰에 체포되어 현장에서 사살되거 나 연행되어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등지에서 살해되었다. 한편 대대적인 검거령이 내려지자 주요 가담자들은 해남군 내 흑석산, 두륜산, 달마산 등지로 입산하였다. 그러던 중 여순 사건 후인 1949년 2월 13일, 이들 입산자들이 해남경 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 1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44) 이에 목포경찰서는 즉시 경찰대를 파견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였고 육해군은 공동작전으로 이들을 추적하여 해 남읍 남단에서 37명을 사살하였다. 45) 이 사건 이후 제8관구 경찰청은 토벌대를 구성하여 입산자 및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입산자 및 좌익세력 다수가 경찰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좌익세력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각 면으로 살되고, 61명 부상, 357명이 체포됐다. 경찰관은 10명이 피살되고 33명이 부상당했으며 11명이 실종됐다. 그리고 경찰서 및 지서 24군데가 소실됐다. 우익인사 28명도 피살됐는데 시위진압 후 치안군대는 수천의 군중으로부터 불과 장총 24정을 압수하는 데 그쳤다.(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 서각, 1986) 41) 화산면의 경우 소위 충남부대 라고 일컫는 충남경찰국 기동대 60여 명이 11월 14일 면소재지에 도착했는 데 그들의 행적에 대해 화산노인회 노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진 않았으나 많이 때렸다. 가가호호 방문해 죄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도방금으로 잡아갔다. 옥석을 구분하지 않고, 줄빰때리기 란 것이 있었는데 지서 앞에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인 뺨을 젊은 놈이 때 리게 하고 서로 그 짓을 하게 해서 나중에는 원성을 샀다. 물론 죽도록 맞은 사람도 생겨났었다. (해남 군, 해남군사, 1995, 551쪽) 42)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1쪽. 43)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3쪽; 1948년 4월경 경찰은 황산면 부곡리 아지트를 급습하여 오장록 이하 50 여 명의 관련자를 검거하였다.(호남신문, 일자의 제8관구 경찰청장 김병완 발표내용; 해남문화 원, 해남 근현대 신문자료 집성 1, 2001, 193쪽에서 재인용.) 44) 호남신문, 해남문화원, 해남 근현대 신문자료 집성Ⅰ, 2001, 192쪽에서 재인용. 45) 호남신문, 해남문화원, 해남 근현대 신문자료 집성Ⅰ, 2001, 192쪽에서 재인용.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95

174 제 2 권 돌아와 인민위원회, 분주소 등에서 활동하다가 수복 이후 일부는 부역자로 지목되어 처 벌되고 일부는 지리산 등지로 다시 입산하였다. 1) 계곡면 법곡리 월신마을 사건 계곡면 법곡리 월신마을은 사건 당시 60여 가구로 큰 마을에는 동복 오씨가, 작은 마을 에는 민씨가 주로 모여 살았다. 오용기는 해남 좌익세력의 주요인물로 일제 강점기 때부터 계곡면 성진국민학교 교사 를 하면서 월신마을에 야학을 세워 젊은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46) 해방 이후 마을 청년들 은 오용기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 특히 1946년 11월 11일 추수봉기 때는 오용기의 주동으로 마을사람 대부분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추수봉기 당시 상황에 대해 참고인 오 (당시 13세, 희생자 오 의 동생)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해방이 되자 젊은 사람들이 오용기씨를 따라다니며 활동했다. 특히 나의 형 오 은 목소리가 좋아 오용기씨 지시에 따라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인민군가를 가르쳤다. 1946년 11월 11일 추수봉기에는 오용기씨의 영향 아래 마을사람 대부분이 가담했는데, 그때 나의 형 오 과 친척인 오종오, 오종란도 가담했던 걸로 알고 있다. 추수봉기 당일 형들이 지 서에 불을 지르러 갔다가 실패하고 바지가 물에 젖은 채로 집에 돌아왔던 모습이 기억난 다. 47) 추수봉기 직후 주동자 오용기는 피신했으나 경찰이 마을에 와 오용기 일가족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사람 대부분을 지서로 끌고 가 조사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매만 맞고 나 왔으나 결국 추수봉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1947년에서 1950년 사이에 오용기 등 월신 마을 주민 10여 명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48) 다-10415호 오용기, 오은동, 김구옥 오용기(당시 37세, 계곡면 법곡리)는 추수봉기 이후 경찰의 수배를 받자 도망 다니다가 1949년 2월 15일 옥천면 대산리 어느 집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그 마을 대밭에서 사살되 46) 참고인 오, 진술조서( ). 47) 신청인 오, 진술조서( ). 48) 참고인 오, 진술조서( ); 참고인 오, 진술조서( , ); 참고인, 전화통 화 내용( ); 참고인 오, 진술조서( ); 참고인 오권기, 진술조서( ), 이들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월신마을에서 추수봉기 이후 오종오, 오종권, 오종대, 오종란, 오, 오, 오용기, 오은동 등이 경찰에게 사살되었고, 오창기, 오철기, 오행임 3명은 행방불명되었으며, 오순기는 한국전쟁 발발 직 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고, 수복 이후에는 김구옥 등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7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었다. 49) 오용기의 아버지 오은동(당시 62세)은 오용기가 희생되자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영 암군 서호면 장천리로 이사를 갔는데 한국전쟁 발발 전 늦은 봄 경 고향 월신마을에 다니 러 오던 중 계곡면 여수리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시신은 그곳 마을사람들이 수습하여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마을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50) 한편 오용기의 모 김구옥(당시 60세)은 영암에서 살던 중 수복 이후 집에서 계곡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계곡지서 옆 야산인 말삼정에서 사살되었다. 시신은 경찰이 그 자리 에 묻었는데 나중에 마을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51) 다-1305호 오종란 오종란(당시 19세, 계곡면 법곡리)은 해남추수봉기에 가담했으며, 봉기 직후 지서에 끌 려가 매를 맞고 나왔다. 그 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중, 좌익활동을 하던 유 52) 의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로 해남경찰서에 연행되어 1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49년 4월 10 일 해남읍과 옥천면 경계인 우슬재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15명의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 이 총을 들고 월신마을에 와서 마을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오종란, 오, 민 등 3명 을 연행해 갔으나 그 중 오종란만 희생되고 나머지 두 명은 풀려났다. 53) 오종란의 희생이 유를 신청인 오종식(당시 25세, 오종란의 형)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연행 당시 이들 3명이 좌익하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알려졌을 뿐, 죄목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의 처제 최또순(비신청) 54) 도 그의 큰오빠 그러니까 49) 신청인 오동혁, 진술조서( ); 참고인 오권기, 진술조서( ); 참고인 오, 진술조서 ( ), 오용기의 사촌동생인 오권기는 저희 부모님들이 오용기의 시신을 수습해 와서 마을 선산에 묻을 당시 시신을 직접 봤는데 가슴 쪽에 총상이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오 은 당시 경 찰이었던 김 이 경찰을 그만두고 계곡면 신성리에서 가게를 했는데 그때 김 으로부터 오용기를 자 신이 직접 사살했다는 말을 들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한편 오용기의 동생들인 오창기, 오철기, 오행임도 추 수봉기에 가담하였다가 도망 다니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50) 신청인 오동혁, 진술조서( ); 참고인 오권기, 진술조서( ); 참고인 오, 진술조서 ( ). 51) 신청인 오동혁, 진술조서( ); 참고인 오권기, 진술조서( ), 오권기는 숙모 김구옥의 시신을 이장할 때 직접 목격하였는데 총살당한 흔적이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52) 계곡면 신기리 출신으로 좌익활동을 하다 한국전쟁 전 경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참고인 오종식, 진술 조서, ) 53) 신청인 오종식, 진술조서( ); 참고인 오, 진술조서( ), 희생자와 친척인 오 (당시 13 세)은 오종란도 추수봉기에 가담하였으며 그 여파로 경찰에 연행되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라고 진술하 였다. 54) 최또순은 1949년 2월 13일, 해남경찰서 습격 사건에 가담 후 같은 날 제8관구 경찰청 공안과장이 지휘하 는 경찰부대에 삼산면 두륜봉에서 체포된 여자 유격대원 崔 又 順 (호남신문, 일자의 제8관구 경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97

176 제 2 권 나의 큰처남 최 의 심부름을 하다가 희생되었다. 최 은 오장록, 김정수, 임건호 등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의 심부름을 했다. 55) 2)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사건 추수봉기 가담자 및 좌익활동 혐의자 다수가 1949년 4월 중 이틀에 걸쳐 화산면 해창 리 나붓재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949년 2월 13일 입산자들에 의해 해남경찰서가 습 격당한 이후 제8관구 경찰청은 토벌대를 구성하여 입산자 및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좌 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하였는데, 해남읍, 현산 화산 삼산면 등에서 토벌 대에게 붙잡혀온 사람들이 집단희생되었다. 다-6524호 최중규 최중규(당시 42세, 현산면 학의리)는 일제강점기 때 문맹퇴치를 위해 마을주민들을 교 육했고 일제에 맞서 공출 등 수탈을 막아 현산면 일대에서는 유지이자 지도자로 덕망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추수봉기에 연루되어 목포형무소에서 3개월 정도 수감되었다가 1948년 4월경 출소하여 1년여 동안 숨어 지내다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던 1949년 4 월, 광주에서 온 군인 복장의 사람 56) 들이 현산면 사람들을 현산국민학교에 집합시킨 후 최중규 등 다섯 명을 연행하여 1949년 4월 12일 나붓재에서 사살하였다. 57) 다-8000호 김연우, 다-8002호 김준호 김연우(당시 23세, 화산면 관동리)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 에 와 있었고, 김연우의 숙부인 김준호(당시 38세, 화산면 관동리)는 국민학교를 졸업하 고 농사를 짓고 살고 있던 중, 두 사람 다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1949년 4월 12일 나붓재에서 사살되었다. 58) 찰청장 김병완 발표내용; 해남문화원, 해남 근현대 신문자료 집성 1, 2001, 193쪽에서 재인용.)이다. 55) 신청인 오종식, 진술조서( ), 신청인 오종식은 자신도 오용기의 동생 오형기의 심부름으로 인민신 문을 휴대하고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해남경찰서에서 29일 동안 구류를 살고 나왔다고 진술하였다. 56) 참고인 최정순(당시 18세, 최중규의 딸)은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광주 부근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라고 진술하고 있는바, 군인 복장의 사람들은 1949년 2월 13일 발생한 해남경찰서 습격 사건의 진압을 위해 파견된 제8관구 관할 경찰들로 판단된다. 57) 참고인 최정순, 진술조서( ), 참고인 최정순(당시 18세, 최중규의 딸)은 당시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 이 현산면 사람들을 현산국민학교에 집합시킬 때 현장에 있었는데, 학의리에서 부친과, 그리고 고 현리 사람 3명 등 다섯 명이 끌려갔다 라고 진술하였다. 한편 최정순은 부친이 구시리 장고개 근처에서 사 살되었다고 진술하였는데, 현장조사 결과 구시리 장고개 근처 와 나붓재 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동일 장 소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화산면 주민들은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로 기억하고 있고(현장조사결과, 첫 번째인 4월 11일 희생자들은 나붓재 에서 사살된 것이 맞지만 두 번째인 4월 12일 희생자들은 구시리 뒷 산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함), 현산면 주민들은 현산면 구시리 장고개 근처 라고 기억하고 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7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두 사람이 연행될 때의 상황에 대해 신청인 김영래(당시 7세, 김준호의 아들)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949년 봄 경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세 번 정도 들어와 마을사람들을 나이별로 줄을 세워 조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날, 그 사람들이 마을사람들을 시켜 우리 집 을 부수기 시작했다. 나는 무서워서 동생과 함께 마을 뒤 우물가에 숨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길 앞에서 아버지(김준호)와 사촌형 (김연우)이 수갑을 찬 채 잠시 마 을을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게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59) 이들의 희생이유와 관련하여 신청인 김영래(당시 7세, 김준호의 아들)는 추수봉기 당 시 경찰들이 가끔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사람들이 도망갔는데 부친(김준호)께서도 대밭으 로 피신을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라고 진술했으며, 60) 참고인 김연복(당시 13세, 김준호의 친척)은 김준호는 배운 것도 많고 마을유지였으며 농사일은 거의 하지 않고 선비처럼 지 냈다. 그리고 종종 나에게 비밀편지 심부름을 시켰는데 화산면 가좌리 김, 방축리 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그 사람들이 답장을 주면 가져와 다시 전해주었는데 아마 이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라고 진술하였다. 61) 나붓재에서는 추수봉기 가담자 및 좌익활동 혐의자 7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준호, 김연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붓재에 갔던 김연복(당시 13세, 김준호의 친 척)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 그 사람들(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에게 끌려간 사람들이 모두 나붓재에서 죽었다 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김준호, 김연우 두 사람이 끌려간 그날 나붓재에 갔는데 길 옆 소 나무 사이에 15명 정도가 죽어 있었으나 두 사람의 시신은 없었다. 그리고 2~3일 후 새벽 녘에 다시 갔는데 산중턱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를 따라 올라가봤더니 30여 명 이 죽어있었고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람들이 시신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그곳에서 김연우 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로 밑에도 30여 명이 죽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김준호의 시신 58) 신청인 김근식, 진술조서( ); 신청인 김영래, 진술조서( ); 참고인 김연복, 진술조서 ( ); 참고인 채남두, 진술조서( ), 참고인 김연복과 채남두는 사건현장인 해창리 나붓재에 가서 김연우와 김준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59) 신청인 김영래, 진술조서( ), 신청인 김영래는 사건 당시 7세 정도였지만 그 당시 상황을 비교적 뚜 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첫 번째로 마을에 들어와서 조사할 때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조사를 받았으며,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60) 신청인 김영래, 진술조서( ) 61) 참고인 김연복, 진술조서( ), 김연복(당시 13세)은 희생자 김준호와 먼 친척으로 사건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김준호의 집에 살면서 집안일을 거들었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499

178 제 2 권 을 발견했다. 김준호가 끌려갈 때 검은 조끼와 검은 고무신을 신고 가서 쉽게 발견했는데 시신을 뒤집어 보니 뒤쪽에서 총을 쐈는지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62) 3) 개별 사건 다-10546호 신주희 신주희(당시 34세, 북일면 만수리)는 국민학교 졸업 후 농사를 짓고 살던 중 같은 마을 에서 좌익활동을 하던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좌익사상을 갖게 되어 여순 사건 직후 삐라 사건 63) 으로 목포형무소에서 3개월 복역하였다. 그는 출소한 뒤, 1949년 4월 11일 경찰의 명령을 받고 좌일지서에 출두하였다가 우익청년단원에게 좌일지서 뒷산에서 살해되었 다. 64) 다-6989호 이동운 이동운(당시 27세, 화산면 관동리)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공립공업 전수학교 본과를 졸 업하고 전라남도 함평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후 고향 화산면 관동리에 내려와 좌익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추수폭동에 연루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서 3 개월 복역하였다. 65) 출소 후 이동운은 자신의 집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숨어 지내다 경찰 에 체포되었다. 화산지서에 구금되었던 이동운은 1949년 4월 23일 화산면 마명리 도살장 위에서 사살되었다. 66) 다-3009호 양윤수 양윤수(당시 24세, 북평면 평암리)가 살던 안평마을은 달마산 아래 있는데 좌익활동을 하다가 달마산에 입산한 김 과 67) 이 밤에 마을로 자주 내려와 마을 청년들을 포섭하였다. 양윤수는 자신의 집이 마을에서 떨어진 독립가옥이어서 가장 먼저 포섭되어 62) 참고인 김연복, 진술조서( ); 참고인 채남두, 진술조서( ), 한편, 채남두(당시 18세, 관동리 주민)는 김연복과 함께 해창리 나붓재에 가서 김준호와 김연우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화산면 관동리 김, 이, 정 등도 나붓재에서 사살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63) 참고인 김규현은 삐라 사건 의 내용은 모르고 사건명만 기억하고 있다.(참고인 김규현, 진술조서, ) 64) 신청인 신수길, 진술조서( ); 참고인 김규현, 진술조서( ); 참고인 신관희, 진술조서 ( ), 참고인 김규현(당시 31세, 신주희의 고종사촌)이 사건현장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현장 에는 여러 구의 시신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65) 참고인 이준례, 진술조서( ), 이준례(당시 19세, 이동운의 여동생)는 해남추수봉기 당시 지서가 불 탔는데 오빠(이동운)가 가담했던 걸로 알고 있다 고 진술하였다. 66) 신청인 이민식, 진술조서( ); 참고인 이준례, 진술조서( ). 67) 은 북평면 서홍리 사람으로 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이 사건 희생자인 (다- ) 의 조카로 좌익활동을 하다가 수복 이후 입산하였다.(참고인, 진술녹취내용,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7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좌익세력과 마을청년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68) 양윤수는 1949년 7월경, 친척 양 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북평면 남창지서에 구금 되었다. 양 은 1주일 만에 풀려났으나 양윤수는 1949년 9월 17일 현산면 배암골 골짜 기에서 사살되었다. 69) 당시 현산면 배암골 골짜기에서 북평면 각 마을의 좌익활동 혐의 자 여러 명이 희생되었는데 북평면 이진리 김 은 경찰이 칼로 목을 쳤으나 죽지 않고 살아왔다. 70) 다-3612호 문철재 문철재(당시 50세, 북평면 평암리)는 마을 구장을 하다가 1949년 11월경 경찰이 체포하 러 온다고 하자 달마산으로 피신했다. 문철재는 산에서 춥고 배가 고파 집으로 내려오다 북평면 영전리에서 야방꾼 71) 김 와 이 에게 붙잡혔다. 영전리 주재 경찰 신 에 게 넘겨진 문철재는 영전리 마을회관에서 신 의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72) 신 은 당 시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관 73) 이었다. 다-9350호 김기순 김기순(당시 38세, 송지면 갈두리)은 장작을 배로 싣고 목포에 내다 파는 장사를 하였 다. 74) 그는 한국전쟁 전 어느 날 갈두리 구장 박 이 송지지서로 가보라고 해서 출두했 다가, 3일 정도 지서에 구금된 후 1950년 5월 6일 송지면 마봉리 달마산 밑에서 경찰에 사살되었다. 75) 김유복(당시 출생 전, 김기순의 아들)은 현장에 시신을 수습하러 간 모친과 숙부가 부 68) 참고인 문경호, 진술조서( ). 양윤수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문경호(당시 26세)도 입산자들이 밤에 마을로 내려와 마을 청년들을 교육시킬 때 참석한 적이 있었다. 69) 신청인 양동조, 진술조서( ); 참고인 문경호, 진술조서( ). 70) 참고인 문경호, 진술조서( ). 71) 당시 경찰력이 일선 마을까지 미치지 못했던 상황에서 주민들끼리 자체적으로 순번을 정해 야간에 마을 경비를 서거나 순찰을 돌았는데 그들을 야방 또는 야방꾼 이라 불렀다. 야방의 주요 임무는 마을 치안유 지 외에도 신원미상자나 입산자를 지서에 신고하거나 직접 붙잡아 지서로 인계하는 것이었다.(신청인 문 경호, 진술조서, ). 72) 신청인 문수근, 진술조서( ); 참고인 문경호, 진술조서( ). 문경호(당시 26세, 문철재의 조카) 가 가족들과 함께 문철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73) 전라남도경찰청 인사기록카드 사본. 74) 신청인 김유복, 진술조서( ). 김유복(김기순의 유복자)은 사건 당시 태어나기 전이었으며, 이 사건 에 대해 어머니와 숙부에게 들었다. 75) 신청인 김유복, 진술조서( );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신청인 김유복(김기순의 아들)은 1975년 공무원 특채시험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탈락하여 경찰을 하고 있던 친척을 통해 그 사유를 알아보 니 부친(김기순)께서 좌익활동 혐의로 경찰에게 사살된 사건 때문이었다고 진술하였다. 한편 김기순의 희 생경위에 대해 참고인 박관봉(당시 24세, 갈두마을주민)은 당시 갈두마을에서 좌우익간 대립이 심했는데 그런 문제로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01

180 제 2 권 친을 포함하여 시신 5구가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고 진술하였다. 76) 다-1078호 오명탁 오명탁(당시 31세, 산이면 상공리)은 한국전쟁 전 어느 해 밤, 같은 마을 친구 집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경찰이 불시에 들이닥치자 놀라 도망쳤는데 마을 모퉁이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신청인 및 참고인들은 사건발생시기를 한국전쟁 전이라고만 알고 있다. 77) 사건 당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황을 잘 알고 있는 서인진(당시 20세, 상공 리 주민)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에는 경찰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불시에 야간순찰을 나오곤 했 다. 그날도 사람들이 모여 잡담하고 있다가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치니까 깜짝 놀라서 피하 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오명탁은 보도연맹원도 아니고 좌익에 가담한 일도 없는데 당시에 는 순사가 온다 하면 죄가 있든 없든 무조건 도망갔다. 78) 나. 수복 이후 희생 사건 1) 산이면 사건 가) 수복작전 중 희생 사건 1950년 10월 6일, 해남읍을 수복한 경찰은 수시로 산이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초송리에 와서 상황을 파악하였으나, 경찰이 지서를 완전히 장악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 은 1950년 10월 20일경이다. 경찰은 1950년 10월 20일, 대한청년단, 의용소방대와 함께 좌익활동이 드셌던 산이면 상공리 수복작전에 들어갔다. 경찰이 상공리에 들어오자 주민들은 죄가 있건 없건 우선 76) 신청인 김유복, 진술조서( ). 77) 신청인 오광례, 진술조서( ); 참고인 서인진, 진술녹취내용( ). 신청인 오광례(오명탁의 딸) 는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부친께서는 마을 앞 샘가에서 경찰의 총에 맞은 채 쓰러져 있었는데 그 자리 에 경찰 2명이 서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경찰에게 내 아들 살려내라고 소리치니까 경찰이 총으로 위협 하면서 가만히 안 있으며 다 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사건발생시기와 관 련하여 신청인 오광례는 할머니께 듣기로 내가 3~4살 정도였을 때 발생하였다고 하니까 1949년 아니면 1950년경으로 추정되며, 제사를 음력 3월 27일 지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지내온 날짜니 까 사망일자에 맞춰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진술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상 사건은 1949년 4월 26일 (음력 3월 28일)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78) 참고인 서인진, 진술녹취내용( ). 서인진(당시 20세, 상공리 주민)은 사건 당일 밤 총소리를 들었으 며, 그 다음날 오명탁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그는 한국전쟁 전후 상공리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 사건 외에도 수복 이후 상공리 부역 사건에 대해서도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8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피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인근 부동리 등지로 피신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본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했다. 이 과정에서 상공리 및 부동리 주민 여러 명이 경찰에 사살되었다. 당시 상 황에 대해 오원평(당시 11세, 희생자 오유록의 동생)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경찰이 (해남읍을) 수복하고 난 후 산이면 면소재지인 초송리에서 상공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총을 쏘면서 들어오니까 마을주민들이 무서워서 각자 도망쳤는데 경찰이 여기 저기서 총을 쏘아 주민들이 죽었다. 79) 다-1299호 오유록 오유록(당시 22세, 산이면 상공리)은 특별히 사회활동이나 좌익활동을 하지 않고 농사 만 짓고 살았다. 80) 그는 경찰의 상공리 수복작전 당일, 즉 1950년 10월 20일 집에 있던 중 총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 나가다 방죽 앞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81) 다-3239호 김정오 김정오(당시 19세, 산이면 부동리)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평범한 농사꾼이었는데 82) 경찰의 상공리 수복작전 당일(1950년 10월 20일) 같은 마을 김, 과 함께 부동 리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여기서 은 상공리 사람들을 쫓아온 경찰의 총에 맞 아 부상당하고, 김정오와 김 은 경찰에게 붙잡혀 부동리와 흑두리로 끌려 다녔다. 그 와중에 김정오는 달아나 흑두리 논에 숨었으나 다시 붙잡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83) 다-3459호 박문탁 박문탁(당시 23세, 산이면 부동리)도 별다른 사회활동 없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경찰의 상공리 수복작전 당일(1950년 10월 20일) 처가가 있는 금호도(산이면 금호리)에 79) 신청인 오원평, 진술조서( ). 80) 신청인 오원평, 진술조서( ). 오원평(당시 11세, 오유록의 동생)은 당시 형님(오유록)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특별한 사회활동 없이 농사만 짓고 살았다 고 진술하였다. 81) 신청인 오원평, 진술조서( ); 참고인 서옥진, 진술조서( ). 신청인 오원평(당시 11세, 오 유록의 동생)은 형(오유록)과 함께 집에 있는데 총소리가 들리자 형님이 갑자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총소리가 두세 발 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집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방죽 앞에서 총에 맞은 형님의 시신을 보았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서옥진(당시 24세)은 희생자 오유록과 같은 마을에 살 고 있어 당시 상황을 목격하였다. 82) 신청인 김만암, 진술조서( ). 김만암(당시 13세, 김정오의 동생)은 형님(김정오)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며 오로지 부모님 밑에서 농사만 짓고 살았다 고 진술하였다. 83) 신청인 김만암, 진술조서( ); 참고인 김현국, 진술조서( ). 신청인 김만암(당시 13세, 김 정오의 동생)은 저녁 무렵에 흑두리 청년들이 형님 시신을 나무 들것에 싣고 집으로 모셔왔는데 시신을 보니 어깨와 얼굴에 각각 총을 맞았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김현국(당시 15세)은 사건 당시 김정오 가 경찰에게 사살당한 흑두리 마을에 살고 있었으며, 김정오가 사살당한 장소에서 핏자국을 보았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03

182 제 2 권 다녀오던 중 총소리가 나자 부동리 뒷산 언덕에 숨어 있다 경찰에 발각되어 사살되었 다. 84) 한편, 산이면 금호리, 금송리, 송천리에서도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다-3460호 이원빈 이원빈(당시 24세, 산이면 금호리)은 1950년 10월 하순경, 경찰의 금호도 수복작전 때 금호리 들에서 풀을 베던 중 총소리에 놀라 산으로 도망가다 경찰의 집중사격으로 희생 되었다. 85) 당시 상황을 목격한 (당시 20세, 마을사람)은 경찰이 상공리에서 배를 타고 금 호도로 들어오자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마을 앞 금성산으로 도망갔는데 경 찰이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했으며, 그 와중에 이원빈이 총 7발을 맞았다. 나중에 보니 그는 산중턱의 우물가에 쓰러져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86) 다-1080호 강갑동 강갑동(당시 57세, 산이면 금송리)은 별다른 사회활동 없이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았는데 경찰이 산이면 금송리에 진입하던 당일(950년 10월 20일) 친목계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 을 나서다 집 앞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87) 다-3826호 민채홍 민채홍(당시 25세, 산이면 송천리)은 경찰이 산이면 상공리에 들어가기 전 산이면 송천 리에 진입하던 날(1950년 10월 17일) 밤, 같은 마을 민면기, 민, 김, 김, 김, 김 등 7~8명과 함께 김 의 사랑방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해남읍 에서 산이면을 수복하기 위해 온 경찰이 김 의 사랑방에 총을 난사하여 민채홍은 현 84) 신청인 박문철, 진술조서( ); 참고인 김만암, 진술조서( ). 신청인 박문철(당시 10세, 박 문탁의 동생)은 형님(박문탁)의 처가가 있는 금호도에 형님과 함께 자신과 동생(박태문)과 같이 갔다 오 는 도중 총소리가 나자 형님이 자신과 동생은 먼저 가라고 해서 화를 면했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김만암(당시 13세)은 사건 당일 자신의 형(김정오)도 경찰에게 사살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똑똑히 기억 하고 있다 고 진술하였다. 85) 신청인 이원태, 진술조서( ); 참고인 장상혁, 진술조서( ). 신청인 이원태(당시 19세, 이원 빈의 동생)는 사건발생시기를 1952년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참고인 (당시 20세)은 수복 당시 경찰들이 금호리에 들어와 마을사람들을 저수지 둑에 모이게 했을 때 그 장소에 자신도 있었으며 경찰들 이 금성산으로 도망가는 마을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 이원빈이 금성산으로 도망가다가 총에 맞았다 고 진술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볼 때, 참고인 의 진술이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86) 참고인, 진술조서( ). 87) 신청인 강병원, 진술조서( ); 참고인 강인원, 진술조서( ). 참고인 강인원(당시 25세, 강갑동 의 아들)은 부친(강갑동)의 시신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복부에 총을 맞아 구멍이 나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8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장에서 즉사하고, 민면기, 민, 김, 김 등은 부상을 입었다. 88) 경찰이 왜 총을 쏘았는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는 못했으나 목격자들이 총을 쏜 사람이라고 지명한 89) 김 은 당시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다. 90) 나) 1차 희생 사건 1950년 10월 하순, 경찰은 산이면을 수복한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지서장, 면장, 대한 청년회장 등이 참여한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부역혐의자들의 자수를 권유하는 한편 수시로 각 마을에 가서 부역혐의자를 잡아들였다. 91)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 들은 초송리 지서 옆 창고에 구금되어 부역 여부에 대해 조사를 받고 일부는 풀려났으나 대부분은 진산리 뻔지,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 숲, 두목마을 뒷산 등지에서 살해되었다. 92) 당시 부역혐의로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었다 풀려난 서형태(당시 19세, 마을사람)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수복이 되고 나서 산이지서에서 출두하라고 해서 나갔더니 창고에다 가두었다. 창고 3 군데에 사람들을 나누어서 가두었는데 내가 갇힌 창고에는 한 50명 정도 있었다. 같이 구금 된 사람들 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상공리의 오, 오, 고, 오경순, 오인록의 형수 (박정연), 그리고 덕호리의, 형제 등이다. 경찰은 구금된 사람들을 지서로 데려가 서 조사하거나 창고에서 부역한 사실을 불라 며 몽둥이로 때렸는데 그러다 밤에 이름이 호 명되면 그날부로 바로 죽음을 당했다. 93) 다-625호 양산옥 양산옥(당시 21세, 산이면 상공리)은 목포 동강중학교 학생이었는데 전쟁이 나서 집에 와 있었다. 양산옥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후퇴하던 인민군을 따라 강진까지 갔다 고향으 로 돌아와 자수하였다. 그 후 그는 산이지서 옆 창고에 약 5일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 월 11일 진산리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94) 88) 신청인 이한순, 진술조서( ); 참고인 민면기, 진술조서( ). 참고인 민면기(당시 23세)는 당시 사건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자신도 팔에 총을 맞고 부상당했다. 89) 참고인 민면기, 진술조서( ). 90) 전남경찰청 인사기록카드 사본. 91) 참고인 서인진, 진술녹취내용( ). 92) 참고인 서형태, 진술조서( ). 93) 참고인 서형태, 진술조서( ). 94) 신청인 최봉순,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원, 진술조서( ). 김홍원(당시 12살, 상공리 주민)은 당시 산이서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하교길에 사람들이 진산리 뻔지에서 시신을 구루마에 싣고 오는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05

184 제 2 권 다-1292호 김일재 김일재(당시 22세, 산이면 대진리)는 평범한 농사꾼으로 인민군 점령기에 같은 마을 김 오진의 강압에 못 이겨 좌익모임에 가입한 후 몇 번 학습을 했는데, 수복 이후 경찰에 연 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진산리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95) 다-7817호 박태운 박태운(당시 29세, 산이면 금송리)은 일제시대 때 경성측량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세무 서에 다니다 그만두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추수봉기에 연루되어 보도연맹 에 가입했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해남군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 려갔으나 사살 직전 살아나왔다 96). 인민군 점령기에는 산이면 분주소장을 했다. 수복 이 후 박태운은 1950년 11월 11일 진산리 뻔지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97) 다-1081호 오종 오종(당시 37세, 산이면 상공리)은 산이면 보통학교 안에 있던 연송소 에서 교육을 받 았으며, 1945년 봄 일본에 군속을 갔다가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와 오경탁의 집에서 머 슴살이를 하였다. 오종은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 었다가, 1950월 11월 11일 초송리 앞산에서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98) 오종의 시신을 수습 하면서 사건현장을 목격한 신청인 오석연(당시 22살, 오종의 동생)은 사건 현장에 15구 정도의 시신이 포박당한 채 칼에 찔려 죽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99) 다-6638호 박동현 오야문 박동현(당시 25세, 산이면 상공리)은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집되어 일본 해군에서 근무 하다가 해방 직후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그는 정식으로 학교에 다닌 적은 없으나 오홍탁, 오임탁 등이 세운 사설 야학에 다녔다. 그는 수복 이후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혐 의로 산이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초송리 앞산에서 칼에 찔려 살해되 것을 목격하였는바, 그는 11월 11일 진산리 뻔지에서 상공리의 양산옥, 진 등 16명이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양산옥은 산이면 상공리에서 화원면 별암리로 이사가 수복 이후인 1951년 1월 8일 화원 면 수동리 앞바다에서 경찰에 의해 수장된 양암국(다-621)의 동생이다. 95) 신청인 김동환, 진술조서( ); 참고인 정양금, 진술조서( ). 신청인 김동환(김일재의 조카)은 부친께 들은 바로는 당시 진산리 뻔지에서 30여 명이 백부(김일재)와 함께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96)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 현대사 에 갈매기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산이면 금송리의 박태운, 금호리의 박상배, 갈매기바, 내장리 사람 등 총 4명으로 되어 있다. 97) 참고인 윤정희, 진술조서( ). 참고인 윤정희(당시 30세, 박태운의 처)는 가족들과 함께 사건현장에 가서 남편(박태운)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98) 신청인 오석연, 진술조서( ); 참고인 서인진 박동운, 공동진술조서( ). 99) 신청인 오석연,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8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었다. 100) 한편 박동현의 처 오야문(당시 28세, 산이면 상공리)은 남편이 희생된 후 집에서 경찰 에게 상공리 뒷산으로 끌려가 사살되었다. 101) 다-2224호 오완용 오완용(당시 17세, 산이면 상공리)은 정식으로 학교에 다닌 적은 없으나 오홍탁, 오임 탁 등이 세운 사설 야학에 다녔다. 그는 수복 이후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혐의로 산이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초송리 앞산에서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102) 다-10203호 박태길 박태길(당시 43세, 산이면 금송리)은 일제강점기 때 밀주 때문에 감옥생활을 하다가 해 방 이후 풀려나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는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경 산이면 두목마을 뒷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03) 신청인 박홍렬(당시 18세, 박태길의 아들)은 어느 날 집에 있는데 셋째삼촌이 오셔서 저 에게 갈 곳이 있다고 하면서 데려갔는데 바로 부친께서 사살당한 현장이었다. 당시 현장 에는 부친의 시신만 있었는데 주변에 핏자국이 많은 걸로 보아 여러 사람이 죽은 걸로 보 였다 고 진술하였다. 다-5300호 김진홍 김진홍(당시 21세, 산이면 상공리)은 목포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전쟁이 나자 고향으 로 와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활동을 했는데, 그 일로 수복 이후 자수하여 초송리 창고에 약 10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3일 진산리 뻔지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04) 100) 신청인 박인환, 진술조서( ); 참고인 박동수, 진술조서( ); 참고인 오석연, 진술조서 ( ). 신청인 박인환(당시 3세, 박동현의 아들)은 할아버지 등 가족들에게 들은 바로 부친께서는 진산리 뻔지에서 죽었다 고 진술하였으나, 오석연(당시 22세, 희생자 오종의 동생)은 사건 다음날 매형 (박삼규)과 함께 형님(오종)의 시신을 수습하러 사건현장(초송리 앞산)에 갔는데 그곳에서 우리 마을(상 공리) 사람 중 형님 외에 오완용, 오, 박동현의 시신을 보았으며 총 15구의 시신이 있었다 고 진술하 였다. 한편, 현장조사 결과 초송리 앞산 과 진산리 뻔지 는 불과 500m 이내에 있어 대부분의 유족들이 이를 구분하지 않고 진산리 뻔지 로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01) 신청인 박인환, 진술조서( ); 참고인 박동수, 진술조서( ). 신청인 박인환(오야문의 아들)은 현재 선산에 부친과 모친의 합장묘가 있으며, 모친의 제사를 부친의 제삿날인 음력 10월 3일 함께 지내 고 있다 고 진술하였다. 102) 참고인 박동수, 진술조서( ); 참고인 오석연, 진술조서( ). 오석연(당시 22세)은 당시 사건 현장인 초송리 앞산에 형님(오종)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오완용의 시신을 보았다 고 진술하였다. 103) 신청인 박홍렬, 진술조서( ); 참고인 윤정희, 진술조서( ). 참고인 윤정희(당시 30세, 친척)는 박태길은 나의 남편(박태운)과 8촌간인데, 남편이 인민군 점령기에 산이면 분주소장을 할 때, 박태길도 무슨 직책을 맡았는지 잘 모르지만 약간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고 진술하였다. 104) 참고인 김홍원, 진술조서(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07

186 제 2 권 한편 해남군 대한청년단장 홍광표 105) 는 수복 이후 각 면으로 돌아다니며 부역혐의자들 을 사사로이 살해했다. 산이면에서는 1950년 11월 14일, 장태순, 김기복, 오정록, 오기록 등 4명이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숲에서 홍광표가 이끄는 대한청년단에게 살해되었다. 106) 다-1309호 장태순 장태순(당시 19세, 산이면 상공리)은 목포상업학교에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 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수복 이후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었다 가 1950년 11월 14일 홍광표가 이끄는 대한청년단에게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숲에서 살해 되었다. 107) 다-2225호 김기복 김기복(당시 28세, 산이면 금송리)은 추수폭동 가담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목 포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하여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김기복은 인민군 점령 시기 산이면 면서기를 하였는데, 수복 이후 경찰에게 체포되어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었 다가 1950년 11월 14일 홍광표가 이끄는 대한청년단에게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숲에서 살 해되었다. 108) 다-6310호 오정록 오정록(당시 35세, 산이면 상공리)은 인민군 점령기에는 무슨 직책으로 어떤 활동을 했 는지 알 수 없으나,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었다 가 1950년 11월 14일 홍광표가 이끄는 대한청년단에게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숲에서 살해 되었다. 109) 105) 홍광표는 해방 직후 해남건준, 해남치안대 와 함께 해남을 이끌었던 해남결의친목계 라는 청년조직에 서 활동(전남일보, 현대사 재조명 해남 건준과 청년활동, 1991년 6월 29일자)하였고, 해남군 獨 促 청년 연맹 부위원장(해남군, 해남군사, 1995, 543쪽)을 하였다. 수복 후에는 해남군 대한청년단장, 제5대 국 회의원을 역임(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408호, 전남일보사)하였다. 106) 참고인 서인진 박동운, 공동진술조서( ). 서인진(당시 23세, 상공리 주민)은 당시 해남 대한청 년단을 이끌었던 홍광표가 그의 사돈 오경술이 산이지서에 자수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구명하기 위해 산이지서에 왔다가 그곳에 구금되어 있던 장태순 등 4명을 데리고 가 죽였다 고 진술하였다. 107) 신청인 장병오, 진술조서( ); 참고인 서인진 박동운, 공동진술조서( ); 참고인 서형태, 진술조서( ). 참고인 서형태(당시 19세)는 당시 초송리 창고에 장태순, 오정록과 함께 구금되어 있었다. 108) 신청인 김선택, 진술조서( ); 참고인 김기원, 진술조서( ). 참고인 김기원(당시 18세, 김 기복의 동생)은 마을사람 3명과 함께 현장에 가서 김기복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나의 형님(김기복) 외에 3구의 시신이 있었으나 우리 마을사람들이 아니어서 누구인지 모르겠다 고 진술하였다. 109) 신청인 장병오, 진술조서( ); 참고인 서인진 박동운, 공동진술조서( ); 참고인 서형태, 진술조서( ). 참고인 서형태(당시 19세)는 당시 초송리 창고에 장태순, 오정록과 함께 구금되어 있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8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8030호 오기록 오기록(당시 21세, 산이면 상공리)은 산이서국민학교 교사로 인민군 점령기에 같은 학 교 교사 오경술과 함께 해남읍 내무서에서 활동했다. 오기록과 오경술은 수복 이후 초송 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오경술은 홍광표와 친척이었던 덕분에 풀려났다. 오기록은 1950 년 11월 14일 홍광표가 이끄는 대한청년단에게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숲에서 살해되었 다. 110) 또한 경찰에 연행된 뒤 지서에 구금되지 않고 바로 희생된 경우도 있다. 다-8037호 김갑수 김갑수 111) (당시 27세, 산이면 금호리)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인민군 점령기에 마을 자위대장을 했는데,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0월 24일 산이면 산두리 바닷가에서 사살되었다. 112) 다-1074호 박종철 박종철(당시 33세, 산이면 금호리)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사촌형 박종주 113) 를 따라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이 되어 고향인 산이면 금호리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수복 이후 자수하여 초송리 창고에서 조사를 받고 나왔으나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관 김 114) 에게 다시 연행되어 1950년 11월 10일 산이면 백동리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115) 그 외에 희생장소와 시기, 생사 여부가 불명인 경우도 있다. 다-1293호 김오진 김오진(당시 34세, 산이면 대진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대진리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 면서 젊은 사람들을 부역에 가담시켰는데,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초두리 저수지 110) 신청인 오성록, 진술조서( ); 참고인 서인진 박동운, 공동진술조서( ). 신청인 오성록 (당시 14세, 오기록의 동생)은 형님(오기록)과 같이 희생당한 3명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저희 형님의 시 신만 수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난 후에 형님의 유골이라도 찾기 위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현 장에 가서 코챙이로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유골을 발견하지 못하고 형님이 경찰에게 끌려갈 때 신었던 것으로 보이는 농구화 한 짝을 발견했다 고 진술하였다. 111) 원래 이름은 박복수였으나 모친이 재가해서 김갑수로 개명되었다.(신청인 박순안, 진술조서, ). 112) 신청인 박순안, 진술조서( ); 참고인, 진술조서( ). (당시 20세, 금호리 주민)은 박복수(김갑수의 개명 전 이름)는 인민군 점령기에 리 자위대장을 하면서 자신이 머슴살이를 했던 집 소 를 잡아서 인민군에 제공하는 등 약간의 피해를 주었다 고 진술하였다. 113) 박종주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학생운동 경력으로 1990년에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114) 사건 당시 산이지서 경찰이었다.(전남경찰청 인사기록카드 사본) 115) 신청인 박병승, 진술조서( ); 참고인 장상혁, 진술조서( ). 참고인 장상혁(당시 20세)은 수복 이후 금호리에서는 강, 김, 장, 박, 주, 박, 김, 장 (이상 비신청) 등 10 여 명이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09

188 제 2 권 에서 사살되었다. 116) 당시 초두리 저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진술하고 있 으나, 117) 그들의 신원이나 희생된 때는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였다. 다-2809호 강재봉 강재봉(당시 41세, 산이면 금송리)은 추수봉기에 연루되어 목포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 하였고 그 일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 사건 때는 피신하 였다가 인민군 점령기에 산이면 인민위원장을 했다. 수복 이후 경찰에게 체포되어 해남 경찰서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118) 다-465(1)호 오경순, 다-1310(1) 박정연 오경순(당시 19세, 산이면 상공리)과 박정연(당시 30세, 산이면 상공리)은 각각 남편과 오빠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수복 이후 1950년 10월경, 두 사람은 밭을 매고 있던 중 경찰이 지나가자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였냐 고 항의하였는데 경찰은 두 사람을 연행하여 초송리 창고에 구금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곳에서 희생되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119) 다-2223호 오화탁 오화탁(당시 25세, 산이면 대진리)은 일제강점기 때 광주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이 후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살다 인민군 점령기에 산이면 내무서에서 활동하였다. 오 화탁은 수복 이후 도망 다니다 1951년 여름경 산이지서에 자수하여 2~3개월가량 구금되 었다가 해남경찰서로 인계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120) 다) 2차 희생 사건 수복 이후 1950년 11월까지 산이면 부역혐의자 처벌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러 나 계곡지서와 마산지서 지서장으로 있으면서 부역혐의자를 사사롭게 처벌하였던 최기 116) 신청인 김성신, 진술조서( ); 참고인 정양금, 진술조서( ). 참고인 정양금(당시 17살)의 시 숙(김일재)도 인민군 점령기에 김오진의 강요에 의해 부역행위를 하다가 1950년 11월 11일 진산리 뻔지 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17) 신청인 김성신, 진술조서( ); 참고인 정양금, 진술조서( ). 신청인 김성신(당시 6세, 김오 진의 아들)은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의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들었다. 한편, 해남유족회에서 제출한 자료 에도 수복 이후 초두리 저수지에서 3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18) 참고인 강성암, 전화통화내용( ). 참고인 강성암(당시 22세, 강재봉의 사촌동생)은 당시 해남경찰 서에 구금되었던 사람들이 삼산면 원진리 근처에서 희생당했다는 말을 듣고 강재봉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혹시나 하고 가봤으나 시신이 너무 많아 찾는 것을 포기하였다 고 진술하였다. 119) 신청인 오길록, 진술조서( ); 신청인 오인록, 진술조서( , ); 참고인 서형태, 진술 조서( ). 참고인 서형태는 당시 오경순, 박정연과 함께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어 있었다. 120) 신청인 오송탁, 진술조서( ). 신청인 오송탁(당시 14세, 오화탁의 동생)은 당시 소문에 의하면 해남경찰서에 구금된 사람들이 화산면 해창리 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8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명이 1951년 2월 말경 산이지서장으로 부임하여 산이면 부역혐의자 다수가 1951년 3월 14일 산이면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살해되었다. 최기명에 의한 일명 주산동 뻔지 사건 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1차 부역자 처벌과정 중 혐의가 없어 풀려난 사람들이다. 최기명은 인민군 점령기에 자신의 본처가 좌익에게 희 생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21) 당시 이 사건은 대 통령에게 보고될 정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122) 이 사건으로 최기명은 징역 7년형 을 선고받았다. 123) 한편 이 사건의 희생자 수는 최기명에 대한 판결문과 대통령에게 보고된 검찰사무보 고에 관한 건 에는 2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목격자들은 24~28명이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고 있다. 124) 다-459호 김택우 김택우(당시 24세, 산이면 대진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같은 마을 윤 과 함께 인민위 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수복 이후 윤 은 피신하고 김택우는 경찰에게 붙잡혀 산이지서 에 구금되었다가 1951년 3월 14일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125) 다-622호 오경록 오경록(당시 30세, 산이면 상공리)은 한국전쟁 발발 전 산이면사무소에 근무하다 인민 군 점령기에도 면서기 일을 보았다. 그는 수복 이후 목포 고모 댁으로 피신을 갔다가 산 이면에서 다시 근무하라는 연락을 받고 돌아와 근무하던 중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1년 3 월 14일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126) 다-1288호 공길종 121) 참고인 서인진, 진술녹취내용( ). 122) 법무부장관 보고 검찰사무보고에 관한 건. 123) 최기명 판결문, 단기 4284년 형합 제19호. 124) 참고인 김해동, 진술조서( ); 신청인 공하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원, 진술조서 ( ) 125) 신청인 김준섭, 진술조서( ); 참고인 김해동, 진술조서( ). 참고인 김해동(당시 12살, 김택 우의 조카)은 당시 산이서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건 당일 새벽 무렵에 주산동 뻔지에서 총소리 가 요란하게 나는 것을 들었으며, 하굣길에 사람들이 구루마에 시체를 싣고 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집에 돌아와서 주산동 뻔지에서 수습해온 숙부의 시신을 보았다. 126) 신청인 오화영, 진술조서( ); 참고인 서형태, 진술조서( ). 서형태(당시 19세, 상공리 주민) 는 인민군 점령기에 상공리의 오계록이 산이면 인민위원장을 했으며, 장홍만, 김진문, 오경록 등이 면 서 기를 했는데 이들이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오히려 보호하거나 구명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 이들은 모두 풀려났는데 최기명이 산이지서장으로 오면서 장홍만, 김진문, 오경록 세 명이 다시 연행되 어 주산동 뻔지에서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11

190 제 2 권 공길종(당시 42세, 산이면 대진리)은 마을에서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51년 3 월 13일 경찰에게 연행되어 그 다음날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127) 다-1309호 장홍만 장홍만(당시 35세, 산이면 상공리)은 한국전쟁 발발 전 산이면사무소에 근무하였는데 인민군 점령기에도 인민위원회 사람들의 강요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수복 이후 별 탈 없이 계속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중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1년 3월 14일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128) 다-5193호 박종복 박종복(당시 31세, 산이면 금송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연행되었다가 풀려났으나, 최기명이 산이지서장으로 온 후 다시 연행 되어 1951년 3월 14일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129) 다-5213호 오권탁 오권탁(당시 36세, 산이면 상공리)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상공리 이장을 했으 며, 인민군 점령기에는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자고 강요하였지만 이들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는 수복 이후인 1951년 3월경 의용소방대원들에게 연행되어 산이지서 에 구금되었다가, 1951년 3월 14일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되었다. 130) 다-5300호 김진문 김진문(당시 38세, 산이면 상공리)은 강진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공직에 입문해 산이면 사무소에 오랫동안 근무한 후 인민군 점령기에는 인민위원회 사람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면 서기장을 했다. 김진문은 수복 이후 자수하여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으나 주민 들이 탄원서를 제출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김진문은 최기명이 산이지서장으로 온 후 다 127) 신청인 공하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해동, 진술조서( ). 김해동(당시 12세, 대진리 주 민)은 자신의 숙부(김택우)도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에 당시 희생자가 누구누구인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128) 신청인 장병오,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원, 진술조서( ). 김홍원(당시 12세, 상공리 주 민)은 자신의 부친(김진문)도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그는 상공리에서 자신의 부친 외에도 장홍만, 오 경록 등 세 명이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129) 신청인 박종석, 진술조서( ); 참고인 오점기 이영남, 진술조서( ). 이영남(당시 20세, 금송 리 주민)은 인민군 점령기에 금송리 방축마을에서 박 가 인민위원장을 했고, 박종복은 반장 정도 했 는데 수복 이후 산이지서장인 최기명이 자신의 친매형인 박 는 살려주고 박종복은 죽였다 고 진술하 였다. 130) 신청인 오향금, 진술조서( ); 참고인 오강부, 진술조서( ). 오강부(당시 11세, 오권탁의 아들)는 부친(오권탁)의 시신을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이 수습해 와서 보았는데 머리에 총을 맞았다. 상 공리에서 부친 외에도 장홍만, 김진문, 오경록이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시 체포되어 지서에 이틀 정도 구금된 후, 1951년 3월 14일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사살 되었다. 131) 2) 송지면 사건 1950년 10월경, 경찰은 송지면 산정지서를 수복하고 주민들을 산정국민학교에 모이게 한 후 부역혐의자에게 자수를 권유하였다. 132) 이에 따라 인민군 점령시기 자의든 타의든 부역을 했던 주민 대부분이 자수를 했는데, 일부는 자진 출두하고 일부는 연행되어 산정 지서 옆 5곳의 창고에 분산 구금되었다. 133) 아버지가 창고에 구금되어 밥을 날랐던 신청인 이한순(당시 9세)은 산정리에 있는 창 고에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수십 명이 가득 구금된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아버지에 게 밥과 담배를 3일간 갖다 주었는데 사람이 워낙 많이 구금되어 있어 제대로 전달되었 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고 진술하였다. 134) 당시 5곳의 창고에 구금된 부역혐의자 400여 명은 대부분 산정리 산진목, 어불도 앞바 다, 치소리 쑥고개, 해원리 연골 골짜기 등지에서 집단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135) 국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희생된 강성칠(당시 10살, 마을사람)은 당시 송지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지서에서 산진목이 가깝다보니 주로 산진목에서 죽였는데 여기서는 거의 매일 죽이다 시피 했다. 산진목의 큰 구덩, 작은 구덩 부근에 묘가 수도 없이 깔려 있었는데 시신을 찾아 간 사람은 찾아가고 못 찾아간 사람은 거기다 묘를 썼다. 그러다 총알이 아깝다고 사람들을 어란리 앞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켰는데 그때 산정리 사람 중 하나가 같이 죽자고 덤벼 배 가 뒤집어질 뻔하자 이제는 배로는 안 되겠다 싶어 쑥고개와 해원리 골짜기로 끌고 가 죽 였다. 아무튼 골짜기마다 데려가 죽였다. 136) 131) 신청인 김경원,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원, 진술조서( ). 132) 당시 해남군 국회의원 윤영선은 산정국민학교에 모인 사람들에게 서울이 수복되었다. 인공 때 부역한 사람은 모두 자수하면 정상이 참작되어 용서된다 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참고인 박종환, 진술조서, ). 133) 참고인 박종환, 진술조서( ). 134) 신청인 이한순, 진술조서( ). 135) 참고인 강성칠, 진술녹취내용( ). 강성칠(당시 10세, 석수마을주민)의 부친(강부천)도 보도연맹 사건으로 진도군 갈매기섬에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136) 참고인, 진술녹취내용(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13

192 제 2 권 가) 산정리 석수마을 사건 석수마을은 원래 제주 고씨 집성촌이었으나 면소재지와 가깝다 보니 경제적인 이유로 타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총 35가구에 13성씨가 모여 살았다. 137)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는데 이것이 인민군 점령기에 이 마을주민 다수가 인민위원 회에 동조했던 배경 138) 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러 성씨가 모여 살다 보니 여타의 집성촌과 달리 주민 간에 유대감이 부족하여 수복 이후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 생하였다. 당시 석수마을 상황에 대해 참고인 (당시 15세, 석수마을주민)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 마을이 여기저기서 몰려온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집성촌이 안 되고 가난하게 살 았다. 인공이 되자 마을 지도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여유 있는 사람들 물건을 이북 처럼 공동으로 나누어 쓰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주민들이 인민군에게 동조했던 주 원인이 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자기 것을 누가 내놓으려고 하겠는가. (중략) 수복이 되고 부역자를 처벌한다고 하니까 다른 집성촌은 피가 물보다 진하다 는 말이 있듯 이 허물이 있어도 가급적 덮어주고 감싸주는데 여기 석수마을은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139) 인민군 점령시기 석수마을에는 좌익세력에 의한 희생은 없었으나 인민군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낮에는 일상생활을 하다 밤이면 동원되어 방공호를 파고 인민군가를 배우는 정 도의 활동을 했다고 한다. 140) 그러나 수복 이후 비교적 가구 수가 적은 석수마을에서 1 5~22명 141) 이나 되는 사람들이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다-1303호 고광용 김대심 고 고광채, 다-1304호 고광철 고광용(당시 44세, 송지면 석수리)은 인민군 점령시기 석수마을 구장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여유 있는 사람들이 재산을 이북처럼 공동으로 나누어 쓰자 고 주민들을 선동했 다. 수복 이후 고광용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지서 옆 창고에 구금되자 그의 처 김대심(당 시 30세, 송지면 석수리)은 아들 고 (당시 2세, 호적 미기재)을 업고 경찰에게 항의하 137) 참고인, 진술녹취내용( ). (당시 15세, 석수마을주민)는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석 수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석수마을 사건에 대해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38) 참고인, 공동진술녹취내용( ). 139) 참고인, 진술녹취내용( ). 140) 참고인, 진술녹취내용( ); 참고인, 진술조서( ). 141) 참고인 은 희생자가 최소 15명이라 했다.(참고인, 진술녹취내용, ). 신청인 고진택 은 22명이라 했다.(신청인 고진택,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가 함께 구금되었다. 결국 이 세 사람은 1950년 11월 9일 산정리 산진목에서 사살되었 다. 142) 고광용의 동생 고광채(당시 41세, 송지면 석수리), 고광철(당시 34세, 송지면 석수리)은 형을 따라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 그 후 고 광채는 1950년 11월 16일 산정리 산진목에서, 고광철은 1950년 11월 13일 해원리 연골 골 짜기에서 각각 사살되었다. 143) 다-2679호 박성대 박종완 박성대(당시 51세, 송지면 석수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송지면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 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 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44) 박성대의 아들 박종완(당시 22세, 송지면 석수리)은 여수에서 학교를 다니다 중도에 포 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경찰에 체포되어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일 산정리 산진목에서 사살되었다. 145) 당시 산진목의 사건현장을 목격한 이정례(당시 19세, 박종완의 제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때 현장에 가보니 박종완의 손과 발은 포박되어 웅크린 채 등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 다. 거기에는 손과 발이 포박된 시신이 첩첩히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이미 썩어가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아기를 업은 여자의 시신도 있었다. 146) 다-623호 박병길 박종호 박병길(당시 21세, 송지면 석수리)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농민집회의 연사로 나가는 등 의 활동을 했다. 박병길은 수복 이후 자수하여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1일 치소리 쑥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박병길의 동생 박종호(당시 17세, 송지면 석수리)는 목포상업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142) 신청인 고진택, 진술조서( , ); 참고인, 공동진술녹취내용( ). 고 광용 김대심의 제사는 고광용의 아들(고진석)이 지내고 있으며, 고광채는 그의 딸(고진덕)이, 고광철은 신청인 고진택이 각각 지내고 있다. 143) 신청인 고진택, 진술조서( , ); 참고인, 공동진술녹취내용( ). 144) 신청인 이정례, 진술조서( ); 참고인, 진술조서( ). 145) 신청인 이정례, 진술조서( ); 참고인, 진술조서( ). 146) 신청인 이정례, 진술조서( ), 신청인 이정례(당시 19세)가 현장을 목격할 당시에는 박성대의 둘째 아들(박동현)과 결혼하기 전이었으나 같은 석수리에 살고 있어서 시아버지(박성대)와 시숙(박종완)을 알 고 있었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15

194 제 2 권 발발하여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수복 이후 자수하여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경찰에 의해 수장되었다. 147) 다-1291호 박종주 박종주(당시 24세, 송지면 군곡리 148) )는 목포사범학교를 다니다 한국전쟁 중 고향에 내 려와 있었는데, 재학 중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7일 산정리 산진목에서 사살되었다. 149) 다-1294호 남호걸 고중심 남호걸(당시 44세, 송지면 석수리)은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3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산정리 산진목에서 사살되었다. 150) 고중심(당시 34세, 송지면 석수리)은 남편 남호걸이 경찰에게 희생되자 그 충격으로 정 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51) 고중심은 경찰에게 직접 희생된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의 희생자로 볼 수 없다. 다-2350호 이토성 이토성(당시 48세, 송지면 석수리)은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구금 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52) 나) 송호리 갈두마을 사건 수복 이후 송호리 갈두마을주민 6명 153) 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약 1주일 147) 신청인 박영산,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환, 진술조서( ). 신청인 박영산(당시 4살, 박병길 의 아들)은 박성대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여 그의 친척들이 여러모로 영향을 받아 활동하였는데 수복 이후 박성대, 박종완(이상 다-2679), 박병길, 박종호(이상 다-623) 박종주(다-1291), 주일식(박병길의 매형, 비신청) 등 8명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148) 박종주는 송지면 군곡리에 살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송지면 산정리 석수마을로 이사하였다.(참고인 박영 산, 전화통화내용, ). 149) 참고인 박영산, 진술조서( ). 150) 신청인 남상익, 참고인 김옥심, 진술조서( ). 참고인 김옥심(13세, 희생자 남호걸의 며느리)은 사 건 당시 시집오기 전이었는데, 같은 석수리에 살고 있어 시어머니 될 사람(고중심)이 산정지서에 도시락 을 싸가지고 다니다가 하루는 지서에서 도시락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151) 신청인 남상익, 참고인 김옥심, 진술조서( ). 152) 신청인 이한순, 진술조서( ); 참고인, 공동진술녹취내용( ). 신청인 이한 순(당시 9세, 이토성의 아들)은 이토성이 산정지서 옆 창고에 구금되어 있을 때 3일 동안 밥과 담배를 갖 다 주었다. 한편 강평수(당시 15세, 석수리 주민)는 이토성이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어불도 앞 바다에 수장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153) 박종배(다-9346), 김은태(다-9347), 김상순(다-9348), 박남용(다-9349), 박, 김 (이상 비신청) 등이 다.(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또한 갈두마 을에서는 한국전쟁 전 좌익혐의로 2명 154) 이 사살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갈두마을은 15가 구 정도였다. 이들 6명이 희생된 이유에 대해 참고인 박관봉(당시 24살, 갈두마을주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완도 노화도 출신인 민재라는 사람이 인공시절 해남 진도 완도 좌익세력의 총사령 관 격이었다. 그가 6 25가 나기 전 입산하여 피해 다니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송지면에 와 서 여러 우익인사들을 죽였다. 그 중 우리 마을의 박 과 그의 작은마누라도 희생되었다. 원래 박 은 민재와 잘 알던 좌익이었는데 나중에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수복이 되자 박 의 본처와 그의 형 박 이 이 여섯 사람을 손가락질해서 경찰이 잡아가 죽인 걸로 알고 있다. 155) 그러나 희생자들은 모두 평범한 농사꾼으로 인민군 점령기에 특별히 무슨 직책을 맡았 거나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 마을이 좌우익으로 나누어진 분위기에서 친구의 권 유로 무슨 회의에 몇 번 참석했다가 좌익으로 몰렸다고 한다. 156) 다-9346호 박종배 박종배(당시 28세, 송지면 송호리)는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가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약 1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57) 다-9347호 김은태 김은태(당시 32세, 송지면 송호리)는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았으며 인민군 점령기에는 친 구의 권유로 회의에 몇 번 참석을 했다. 그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 에 약 1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 다. 158) 신청인 김선재(김은태의 손자)는 막내 조부인 김완수(김은태의 동생)가 여순 사건 154) 사살된 사람은 김기순(다-9350), 김 (비신청)이다.(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155)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156) 신청인 김선재, 진술조서( ). 김선재(김은태의 손자)는 갈두마을에서 여섯 집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157) 신청인 박만수, 진술조서( );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박관봉(당시 24세, 갈두마을주 민)은 갈두마을 사건 전반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각 사건의 참고인으로 진술하였다. 한편 박관봉의 형 박관수(비신청)도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는데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 수십 명 이 어불도 앞바다로 끌려가 수장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158) 신청인 김선재, 진술조서( );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17

196 제 2 권 당시 14연대에 근무하다가 고향으로 도망오던 도중 북평면 근처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 는데, 이 일로 인해 조부께서 좌익으로 몰린 것 같다 고 진술하였다. 159) 다-9348호 김상순 김상순(당시 35세, 송지면 송호리)은 사건 당시 본부인과 살지 않고 작은부인 과 함께 통호리에 따로 살고 있었으며 농사도 짓지 않고 한량 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는 수복 이 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약 1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 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60) 다-9349호 박남용 박남용(당시 47세, 송지면 송호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 편에 서서 활동을 하다가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약 1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61) 한편 수복 이후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십 명이 수장되었는데 당시 선원으로 희 생자들을 배로 실어 날랐던 김기동이 생전에 희생자 가족들에게 한 말에 따르면 경찰이 수십 명을 배에 싣고 어불도 앞바다로 가서 줄로 묶고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고 하 였다. 162) 유족들은 김기동의 말에 따라 근처 해상을 뒤졌지만 한 구의 시신도 발견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혼을 건지는 의식(초혼제)을 통해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 163) 다) 군곡리 방처마을 사건 군곡리 방처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90가구 정도가 살던 마을이었다. 수복 이후 이 마을 주민 50명 정도가 부역혐의로 산정창고에 구금되었고 그 중 약 40명이 희생되었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에 대해 참고인 (당시 17세, 희생자 의 아들)는 인민군 점령시기 방처마을에서 좌익세력들이 일제시기 부면장을 했던 김 의 모친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 일 때문에 희생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고 진 술하였다. 164) 159) 신청인 김선재,진술조서( ). 160) 신청인 김정섭, 진술조서( );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김상순의 희생이유에 대해서 신 청인 김정섭(당시 3세, 김상순의 아들)은 작은 어머니께서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마을사람 누군가가 작은 어머님을 취하려고 부친을 밀고하였다 고 진술하였다. 161) 신청인 이옥란, 진술조서( );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162)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163) 참고인 박관봉, 진술조서( ). 164) 참고인,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또한 인민군 점령기에 방처마을 출신들이 인민위원회, 분주소 등에서 두드러지게 활동 한 것도 그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당시 17세, 희생자 의 아들)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방처마을 출신 중 박 는 한국전쟁 전에 좌익활동을 하여 형무소에 갔다 온 후 인민 군 점령기에는 동생 박, 박 과 함께 활동했다. 수복 후 박 은 월북하고 박 은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정 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인민군 점령기에는 고향에 내려 와 송지면 분주소에서 활동하였는데 수복 이후 지리산으로 입산하려고 가다가 나주시 다도 면에서 병사했다. 이 과 이 도 인민군 점령기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수복 이후 군곡국민학교 교실 마루바닥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이 은 현장에서 사살되 고 이 은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165) 다-1911호 정부환 정부환(당시 33세, 송지면 군곡리)의 가까운 친척인 정 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 다가 인민군 점령기에 고향에 내려와 송지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로 인해 정부환을 포함하여 집안사람 다수가 그의 영향을 받아 활동하였다. 정부환은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치소리 쑥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66) 다-2233호 서여산 서여산(당시 28세, 송지면 군곡리)은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농민이었다. 그는 수복 이 후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농협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1일 치소리 쑥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67) 다-2231호 정천수, 다-2232호 정재문 정천수(당시 19세, 송지면 군곡리)와 정천수의 아버지 정재문(당시 43세, 송지면 군곡 리)도 친척인 정 의 영향으로 인해 수복 이후 자수하여 산정리 창고에 10여 일 정도 구금되었다. 정천수는 1950년 11월 11일 치소리 쑥고개에서, 정재문은 1950년 11월 13일 해원리 연골에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168) 신청인 정인수(당시 17세, 정재문의 아들)는 그의 형 정천수가 쑥고개로 끌려가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65)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166) 신청인 정채금,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3.27, 4.14). 참고인 정인수(당시 17세, 방처마을주민)는 자신의 부친(정재문)과 형(정천수)도 수복 이후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67) 신청인 서정봉,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3.27, 4.14). 168) 신청인 정인수, 진술조서(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19

198 제 2 권 당시 저는 학생연맹 소속이어서 교대로 산정지서에서 보초를 섰는데, 사건 당일 보초근 무가 끝나고 부친(정재문)과 형님(정천수)이 구금되어 있는 창고에 갔을 때, 경찰들이 형님 을 포함해 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리면서 큰 트럭에 차곡차곡 싣고 있 었다. 그리고 쑥고개 방면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집으로 와서 어머니와 외숙과 함께 쑥고개로 갔다. 그곳에 가보니 30여 명이 칼에 찔린 채 죽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 여자가 2 명 있었고, 우리 마을사람으로는 형님 외에도 정부환, 서여산, 서, 황, 최, 서, 김 등의 시신이 있었다. 형님은 가슴 쪽에 12군데가 찔린 채 죽어 있었다. 169) 다-2229호 김월봉 김월봉(당시 33세, 송지면 군곡리)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을 갔다가 해방 이후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지서에 구금되었다 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170) 다-2230호 한삼성 한삼성(당시 52세, 송지면 군곡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방처마을 구장을 하였다. 그는 수복 이후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지서에 약 5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171) 신청인 한행복(당시 13세, 한삼성의 아 들)은 경찰이 지서에 구금된 사람들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 수장하였는데, 그 중 1명이 살아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려주어 알게 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172) 다-5211호 김홍일 김홍일(당시 42세, 송지면 군곡리)은 수복 이후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지서에 5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173) 신 청인 김정행(당시 10세, 김홍일의 아들)은 부친께서 지서에 구금되었을 때 모친께서 매 일 밥을 해서 갖다 주었는데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집에 와보니 어머니께서 산정 169) 신청인 정인수, 진술조서( ). 정인수는 사건발생 당일인 1950년 11월 13일 해원리 연골에서 부친 (정재문)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였는데 그곳에서 방처마을사람 중 정병호(다-2811), 김, 박 (이상 비신청)의 시신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했다. 170) 신청인 김순애,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3.27, 4.14). 171) 신청인 한행복,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3.27, 4.14). 172) 신청인 한행복, 진술조서( ). 그러나 한행복은 살아 돌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 다고 진술하였다. 173) 신청인 김정행,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는 방처마을에서 김월봉(다-2229), 한삼성(다-2230), 김홍일(다-5211), 김 (비신청) 등 4명이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장 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지서에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하면서 부엌에서 울고 계셨다 고 진술하였다. 174) 다-2811호 정병옥, 다-2812호 정병호 정병옥(당시 22세, 송지면 군곡리)은 의용군에 강제징집되어 인민군을 따라 목포로 갔 으나 귀가조치되었다. 그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귀가하던 중 화원면 연월리 선창에서 해 남경찰서로 연행된 후 현재까지 생사불명이다. 175) 정병옥의 형인 정병호(당시 25세, 송지면 군곡리)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 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3일 해원리 연골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76) 다-6083호 최병임 김신남 최병임(당시 25세, 송지면 군곡리)은 남편 김병태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는데 수복 이후 송지지서 경찰에게 연행된 후 알 수 없는 곳에서 희생되었다. 177) 참고인 김재 식(당시 8세, 최병임의 조카)은 숙모(최병임)는 숙부(김병태)가 죽고 난 후 몇 달 뒤에 집 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었는데 경찰이 밥을 해오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연행되자마자 바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고 진술하였다. 178) 최병임의 아들 김신남(당시 2세)은 최병임이 연행될 때 등에 업혀 같이 끌려갔다가, 최 병임이 희생되고 난 후 송지지서에서 연락이 와서 할머니가 데리고 왔으나 시름시름 앓 다가 몇 년 뒤에 사망하였다. 179) 김신남은 경찰에게 직접 희생된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 의 희생자로 볼 수 없다. 라) 미야리 강남마을 사건 수복 이후 강남마을의 주민 5명 180) 이 경찰에게 부역혐의로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주 로 정씨이다. 정씨들의 희생에 대해 참고인 강상금(당시 33세, 희생자 정인석의 처)은 남 174) 신청인 김정행, 진술조서( ). 175) 신청인 정영순,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정인수(당시 17세, 정병옥의 친 척)는 정병옥이 해남경찰서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당시 서울에서 형사를 하던 최 라는 사람의 동생 (이름 모름)이 알려주어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 집안사람과 동서지간이었는데 돈만 좀 주면 정병옥을 빼낼 수 있다고 저희 할머니에게 말을 했는데 결국은 그러지 못했다 고 진술하였다. 176) 신청인 정영순, 진술조서( ); 정인수, 진술조서( , 3.27, 4.14). 참고인 정인수는 사건현장에 부친(정재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정병호의 시신을 목격했다. 177) 신청인 김안식,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재식, 진술조서 ( ). 178) 참고인 김재식, 진술조서( ). 179) 신청인 김안식, 진술조서( ); 참고인 정인수, 진술조서( ). 180) 정인률(다-2674), 정인안(다-2671), 김철효(다-2672), 정인석(다-2673), 김 (비신청) 등이다.(신청인 정 영욱, 진술조서, ; 참고인 강상금, 진술조서, 외 다수)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21

200 제 2 권 편 정인석의 사촌동생 정인률의 외가가 완도인데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사상을 가진 정인 률의 외가 사람들이 이곳 강남마을로 와 살면서 젊은 사람들을 부추겨 활동했다. 그 때문 에 희생이 많았다 고 진술하였다. 181) 다-2674호 정인률 정인률(당시 30세, 송지면 미야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정확히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밝 혀지지 않고 있으나 좌익활동을 하던 외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복 이후 논에서 일하고 있다가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5일 산정리 산지목에서 사살되었다. 182) 다-2671호 정인안 정인안(당시 25세, 송지면 미야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강남마을 구장을 하였다. 그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산정리 산지목에서 사살되었다. 183) 다-2672호 김철효 김철효(당시 29세, 송지면 미야리)는 장사 때문에 목포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수복 이후 목포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치소리 쑥고개에서 사살되었다. 184) 다-2673호 정인석 정인석(당시 32세, 송지면 미야리)은 미야리 사람이나 1951년 3월경에는 처가가 있는 송지면 해원리에 가서 살았다. 그런데 송지면 어룡도 출신의 가 몇 사람과 함께 정 인석을 해원리 집에서 산정지서로 연행해 갔는데, 정인석은 1951년 3월 11일 산정리 산진 목에서 혼자 사살되었다. 185) 마) 다른 마을 사건 송지면 내 다른 마을에서도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다수가 희생되었는바, 특히 대죽리, 소죽리 등에서 희생자가 많았다. 186) 181) 참고인 강상금, 진술조서( ). 182) 신청인 정승시, 진술조서( ); 참고인 정승자, 진술조서( ); 참고인 강상금, 진술조서 ( ). 참고인 정승자(당시 11살, 정인률의 딸)는 기억나는 것은 부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가족들이 울었던 장면뿐이며 주로 모친이 살아 계실 때 들려주었던 내용을 진술하였다. 183) 신청인 정영욱, 진술조서( ); 참고인 강상금, 진술조서( ). 신청인 정영욱(당시 7세, 정인 안의 아들)은 당시 사건현장인 산진목에 가족들과 함께 가서 부친의 시신을 직접 목격하였다. 184) 신청인 김성근, 진술조서( ); 참고인 정철례, 진술조서( ). 참고인 정철례(당시 24세, 김철 효의 처)는 사건현장인 치소리 쑥고개에 가족들과 함께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185) 신청인 윤화자, 진술조서( ); 참고인 강상금, 진술조서( ). 강상금(당시 33세, 정인석의 처) 은 사건현장인 산정리 산진목에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2676(1)호 박평금 박평금(당시 24세, 송지면 소죽리)은 남편 이치형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 사건 으로 진도 갈매기섬에 끌려가 희생되었는데, 그 일 때문에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3일 산정리 산진목에서 사살되었다. 187) 신청인 이달연(당시 2세, 박평금의 아들)은 집안 어른들께 들은 바로는 어머니(박평금)께서는 아버지가 보도연맹으로 경찰 에게 희생당하자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 다. 188) 다-1490(1)호 임사례 임사례(당시 40세, 송지면 월송리 189) )는 남편 신관석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화산면 해창리에서 사살되었는데, 그 일 때문에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월송지서 옆 막걸리 공장 지하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6일 월송리 딱골재에서 사 살되었다. 190) 당시 모친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딱골재에 갔었던 신귀선 (당시 10세, 임사례의 아들)은 당시 그곳에는 3~4명씩 새끼줄에 묶여 여기저기 총살된 채 쓰러져 있었으며 20여 구의 시신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191) 다-2678호 박선완 박선완(당시 31세, 송지면 마봉리)은 한국전쟁 발발 전 면사무소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인민군 점령기에 방공호 파는 일에 강제동원되었는데,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어란리 앞바다에 수장되었 다. 192) 다-9518호 이철률 이철률(당시 27세, 강진군 강진읍 거주)은 북평면 용일리 출신으로 해남농업실수학교 를 졸업한 후 강진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같은 마을 친구 박 가 취직을 부탁하 자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 거절하였다. 이후 박 는 이철률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 었고, 강진군 병영지서 경찰이 되어 이철률을 좌익으로 몰았다. 이철률은 박 때문에 186) 참고인 김경철, 진술조서( ). 187) 신청인 이달연, 진술조서( ). 188) 신청인 이달연, 진술조서( ). 189) 월송리는 사건발생 당시에는 송지면이었으나 현재는 현산면에 속한다. 190) 신청인 신귀선, 진술조서( ). 191) 신청인 신귀선, 전화통화내용( ). 192) 신청인 박무남, 진술조서( ); 참고인 김경철, 진술조서( ). 참고인 김경철(당시 16세, 마봉 리 주민)은 수복 이후 마봉리에서 박선완 외에 박봉칠, 장재인, 주이곤, 이부조(이상 비신청) 등 10여 명 이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23

202 제 2 권 자주 경찰에게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북평명 용일리로 피난했 다가 수복 직전 강진세무서로 복귀했다. 이철률은 수복 이후 해남경찰서에 구금되어 조 사를 받고 송지지서로 이송된 후 1951년 2월 27일 월송리 딱골재에서 사살되었다. 193) 참고인 이연엽(당시 22세, 이철률의 여동생)은 당시 부친이 딱골재에 가서 오빠의 시 신을 수습했는데, 사건현장에 많은 시신이 있었다는 말을 부친으로부터 들었다 고 진술하 였다. 194) 3) 마산면 사건 수복 이후 마산면에서도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이 마산면 면소재지인 화내 리의 지서 유치장과 소방대 차고에 구금되었다. 당시 향토방위대에 근무했던 이병덕(당 시 21세)은 구금된 사람은 대략 40~50여 명으로 분류해서 죽일 사람은 죽이고 일부는 풀어줬으나 대부분 희생됐다 고 진술하였다. 195) 희생장소는 주로 두드럭재와 붉은데기이 다. 가) 두드럭재 사건 1950년 11월 7일경, 화내리 두드럭재에서 마산지서에 구금 중이던 부역혐의자 20여 명 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196) 당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현장을 목격했던 민경률 (당시 11세, 민예기의 아들)은 두드럭재에 큰아버지와 마을사람들과 함께 갔는데 많은 시신이 있었으며 모두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197) 다-1510호 이광춘 임순례 이광춘(당시 33세, 마산면 산막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마산면 분주소에서 활동하였다. 수복 이후 이광춘은 처 임순례와 함께 목포를 거쳐 처가인 해남군 산이면 금송리로 피신 해 있던 중 마산지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지서에 구금되었다. 이광춘은 1950년 11월 7일 화내리 두드럭재에서, 그의 처 임순례(당시 34세)는 1950년 11월 12일 붉은데기에서 사살 되었다. 198) 193) 신청인 이금석, 진술조서( ); 참고인 이연엽, 진술조서( ). 참고인 이연엽(당시 22세, 이 철률의 여동생)은 사건 당시 경찰 최판종과 결혼하여 강진에서 살고 있던 중 오빠(이철률)가 강진세무서 에서 해남경찰서 경찰에 의해 트럭에 실려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194) 참고인 이연엽, 진술조서( ). 195)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196) 신청인 이백준, 진술조서( ). 신청인 이백준(당시 5세, 희생자 이광춘 임순례의 아들)은 이 사실 을 부친(이광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두드럭재에 갔었던 할아버지에게 들었다. 197) 참고인 민경률, 진술조서( ). 198) 신청인 이백준, 진술조서( );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신청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3827호 민예기 민예기(당시 40세, 마산면 외호리)는 계곡면 법곡리 출신이나 1946년경 자신의 형 민인 기를 따라 마산면 외호리로 이사 가서 살았다. 민예기는 한국전쟁 발발 전 특별한 사회활 동 없이 농사와 목수 일을 하면서 마을에서 좀 떨어진 독립가옥에서 살았는데 좌익활동 을 하던 이 이 쌀 3가마를 맡겨두었다. 민예기는 수복 이후 이것이 이유가 되어 마산 지서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귀가하였으나, 다시 경찰의 명령을 받고 출두하여 약 1 주일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7일 화내리 두드럭재에서 사살되었다. 199) 다-8287호 장길선 장길선(당시 24세, 마산면 상등리)은 수복 이후 경찰의 권유로 마을사람들과 함께 자수 하여 마산지서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7일 같은 마을사람 2명 200) 과 함께 두드럭재 에서 사살되었다. 201) 인민군 점령기에 상등리의 민 는 마산면 민청위원장으로, 같은 마을 유 은 상등 리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수복 이후 유 의 일가족 다수가 경 찰에게 희생되었다. 202) 나) 붉은데기 사건 두드럭재 사건 후 노하리 붉은데기에서도 11월 12일(37명)과 16일(4명) 두 번에 걸쳐 부역혐의자가 살해되었다. 203) 11월 12일 사건은 소위 홍광표 부대 고 일컬어지던 대한청년단이 주도했다. 인민군 점 령기에 해남 대한청년단장 홍광표의 사촌누나의 아들 두 명(이, 이 )이 산막리 이 목동에서 주민들과의 감정대립으로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수복 이후 홍광표는 이에 대 이백준(당시 5세, 희생자 이광춘 임순례의 아들)은 이광춘, 임순례가 마산지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 함 께 있었다. 199) 신청인 민경서, 진술조서( ); 참고인 민경률, 진술조서( ). 참고인 민경률(당시 11세, 민예 기의 아들)은 부친(민예기)이 마산지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 매일 밥을 갖다주었고, 사건현장인 두드럭재 에 가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200) 장길선과 같이 희생된 사람은 유성동, 민기태이다.(참고인 김대욱 김영현, 공동진술조서, ) 201) 참고인 김대욱 김영현, 공동진술조서( ). 김대욱과 김영현은 모두 마산면 상등리 주민으로 나주 경찰부대 사건 으로 가족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한국전쟁 전후 상등리 주민 희생에 대해 자세히 진술하 였다. 202) 유 (유 의 부친)과 유 (이상 비신청)은 1950년 11월 12일 붉은데기에서, 유 의 모친(비신청) 은 산막리 산에서, 유 (유 의 동생, 비신청)은 해남읍 용머리에서 알 수 없는 시기에 경찰에게 희 생되었다.(참고인 김대욱 김영현, 공동진술조서, ) 203)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25

204 제 2 권 한 보복으로 자신이 이끌던 대한청년단을 대동하고 마산면에 들어가 붉은데기 사건을 주 도했다. 이 사건으로 산막리 이목동 원주 이씨 다수가 희생되었다. 204) 당시 학도호국단원으로 지서에서 보초를 서다 상황을 목격한 이형진(당시 16, 7세, 마 을사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 지서와 격납고에 사람들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대한유격대 원 5~6명이 핫바지를 입고 칼을 들고 지서로 들어와서 향방(향토방위대)도 다 보내버리고 저녁에는 불을 못 밝히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지서에) 와 보니 지서와 격납고(소방대 차 고)가 비어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밥을 가지고 왔다가 이곳이 비어 있으니까 아이고, 아이 고 하였다. 그리고 구금되었던 사람들이 붉은데기에서 죽었다는 말이 들리자 모두 그리로 몰려갔다. 대한청년단 사람들은 그 후 산이면으로 갔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205) 붉은데기에서는 마산면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산이면 진산리 사람들도 몇 명 희생되 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산이면 진산리 사람들이 마산면 대한청년단장을 했던 박 을 죽였는데 이 일에 관계된 산이면 진산리 사람들이 붉은데기로 끌려와 희생된 것이다. 206) 사건현장에 작은아버지 이병대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참고인 이남기(당시 12세, 이병 대의 조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숙부(이병대)께서 붉은데기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부친과 함께 사건현장에 가서 시신 의 상태를 보니 사람들을 모두 엎드리게 해서 칼로 목을 쑤셔 죽인 것 같았다. 얼핏 눈에 띄는 사람으로 우리 마을(산막리) 사람 중 이, 이 임, 임순례가 있었고, 애호리 이병 회씨가 보였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말로는 37명이 죽었다고 했다. 207) 다-460호 이형근 이형근(당시 33세, 마산면 송석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특별한 직책을 맡지는 않았으나 인민군 편에 서서 야경을 섰는데,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마산지서에 구금되었다 가 1950년 11월 12일 붉은데기에서 살해되었다. 208) 204) 희생자는 이광춘(다-1510), 이, 이, 이, 이, 이 (이상 비신청) 등이다.(참고인 이병 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205)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206)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207)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208) 참고인 이철림, 진술조서( ). 이철림(당시 18세, 이형근의 친척)은 당시 의용소방대원으로 마산지 서에 근무하였는데 홍광표 부대 사람들이 지서에 구금된 사람들을 밤 11시경 붉은데기로 끌고 가는 것 을 목격하였으며, 사건현장에서 이형근의 시신을 보았다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619호 이병회 이병회(당시 37세, 마산면 애호리)는 동생 이병연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진도 갈매기섬 에서 희생되자 인민군 점령기에 갈매기섬에 가서 동생의 시신을 수습해 왔다. 그는 그때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마산분주소에 붙잡혀 있던 경찰 남 209) 에게 동생의 죽음을 거 칠게 항의하였다. 아울러 이병회는 인민군 점령기에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이라 하여 애 호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다. 그는 수복 이후 남 에게 항의하였던 것과 애호리 인민위 원장을 했던 것 때문에 마산지서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다시 소환되어 1950년 11월 12일 붉은데기에서 살해되었다. 210) 다-2810호 윤인석 윤인석(당시 39세, 마산면 장촌리)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마을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사 건(박 희생)과 인민군 점령기에 이에 대한 보복 사건(박, 박 희생)에 연루되 어, 수복 이후인 10월 말경 집에서 남 등 경찰 2명에게 연행되어 마산지서에 구금되 었다. 그는 1950년 11월 16일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사람 3명과 함께 붉은데기에서 사 살되었다. 211) 다-5080호 윤흥하 윤흥하(당시 24세, 마산면 장촌리)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특별히 사회활동을 하지 않 고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수복 이후 마산지서에 약 10일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6 일 붉은데기에서 사살되었다. 212) 다) 개별 사건 다-8284호 최재임 최재임(당시 24세, 마산면 맹진리)은 1950년 10월 16일 집 앞 논에서 경찰에게 사살되 209) 전남경찰청 인사기록카드 사본. 210) 신청인 이창준, 진술조서( ); 참고인 이병덕, 진술조서( ). 참고인 이병덕(당시 21세, 이병 회의 친척)은 한국전쟁 전에 마산면 의용소방대에 근무할 때 마산지서에 근무했던 남 과 친분이 있 었는데 수복 이후 어느 날 남 이 자신을 찾아와서 인민군 점령기에 이병연이 자신에게 항의를 했다고 하면서 이병연을 아느냐고 물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고 진술하였다. 211) 신청인 윤대현,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남, 진술조서( ). 신청인 윤대현(당시 14세, 윤인 석의 아들)은 가족들과 함께 현장에 갔는데 부친과 장촌리의 윤흥하 등 4구의 시신이 있었다 고 진술하 였다. 212) 참고인 배순흠,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남, 진술조서( ). 박종남(당시 27세, 남계마을주 민)은 수복 이후 남계마을의 윤 하, 윤 (이상 비신청)은 1950년 11월 12일, 윤 (비신청)과 윤흥 하(다-5080)는 11월 16일, 붉은데기에서 각각 살해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27

206 제 2 권 었다. 213) 최재임의 희생경위에 대해 참고인 이현배(당시 18세, 최재임의 시동생)는 수복 이 되고 인민군이 후퇴할 때 인공시절에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마을 앞) 맹진교를 못 쓰게 만들고 떠난 일이 있었다. 1950년 10월 16일,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자 마 을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피신했다. 그 무렵 경찰이 트럭을 타고 마을로 오다가 무너진 맹 진교 앞에 멈춘 후 산으로 피신하는 마을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그때 미처 산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던 최재임은 총소리에 놀라 딸 이정예를 업고 인근 논으로 숨었 다. 이에 경찰이 총을 쏘아 최재임은 가슴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딸 이정예 (현재 생존)는 어깨를 다쳤다 고 진술하였다. 214) 4) 계곡면 사건 계곡면은 해남군에서 가장 늦게 수복되었다. 다른 면은 대부분 1950년 10월 20일경 수 복되었으나 계곡면은 인민군 낙오병과 해남 완도 지역에서 경찰을 피해 도망 나온 좌익 세력들이 계곡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성진리 흑석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1950년 겨울 까지 경찰과 계속 대치하였다. 215) 수복 이후에도 좌익세력들은 세 차례나 계곡지서를 습 격하였다. 216) 낮에는 경찰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밤에는 좌익세력이 득세하는 인민공화국 217) 의 상 황이 계속되자 경찰은 좌익세력의 활동이 의심되는 마을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주민들 의 좌익세력과 내통 여부를 조사한 후 이들을 사살하였다. 한편 자수하거나 체포당한 부 역혐의자들은 주로 월암고개와 무이리 오리골에서 살해되었다. 가) 방춘리 사건 계곡면 방춘리는 순천 김씨 집성촌으로 넓은 농토가 있어 이 마을주민들은 한국전쟁 무렵까지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살았다. 방춘리 젊은이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본 유학 등으로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정수와 김창수 는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 수립을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방춘리는 한국전쟁 전 해남 213) 신청인 이병국, 진술조서( ); 참고인 이현배, 진술조서( ). 참고인 이현배(당시 19세, 최재 임의 시동생)은 맹진리에서 한국전쟁 이전에 이, 이, 이, 이, 김 (이상 비신청) 등 5명 이 경찰에게 희생되었고, 수복 이후에는 최재임(다-8284) 혼자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214) 참고인 이현배, 진술조서( ). 215)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8쪽. 216)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8쪽. 217)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8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의 모스크바 로 불렸다. 방춘리는 한국전쟁 당시 100호에 이르는 마을이었는데, 수복 이후 경찰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었고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입산 후 행방불명되거나 토벌대 에게 희생되었으며 남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부역혐의로 희생되었다. 수복 이후 방춘 리 상황에 대해 김봉태(당시 31세, 방춘리 주민)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수복이 되고 경찰이 들어온다고 소문이 나자 인공시절 부역자들이 마을사람들에게 피 하라고 하면서 우익인사 집 3채에 불을 지르고 입산했는데 그 다음날 경찰이 들어와서 마 을 전체를 불 질렀다. 나의 형 김응태가 당시 마을 구장을 하고 있었는데 구장의 입장에서 이를 말리자 바로 그 자리에서 경찰이 사살해버렸다. 집들이 불타버리자 마을사람들은 거 처할 곳이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에게 죽은 사람이 여러 명 된다. 또 몇 명은 계곡지서로 연행되어 무이리 골짜기 등지에서 죽었다. 그 즈음에 (방춘리 사람) 20여 명이 경찰에게 죽었다. 218) 김은수 가족의 몰살 사건은 방춘리의 당시 상황과 가족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은수의 둘째형 김진문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진도 갈매기섬에서 희생되었고, 큰형 김중수는 인민군 점령기에 계곡면 분주소장을 한 후 수복 당시 입산 사망하였으며, 그 여파로 수복 이후 김은수의 할머니, 부모, 큰형수도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다-1023호 박나심, 다-4250호 김진제, 다-4251호 박영애, 다-4252호 진신촌 김은수의 할머니 진신촌(당시 77세, 계곡면 방춘리)은 1950년 11월 9일경 경찰이 방춘 리 마을에 불을 질러 집이 타버리자 닭장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다가, 1951년 1월 7일 마 을에 들어온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219) 김은수의 아버지 김진제(당시 65세, 계곡면 방춘리)는 1950년 11월경 해남경찰서로 연 행되었다. 그 몇 달 뒤인 1951년 5월경 김진제의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해남경찰서의 연 락을 받고 마을사람 김대근(현재 사망)이 해남읍 우슬재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시신수 습 당시 김진제의 시신에 총상이나 자상( 刺 傷 )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경찰이 그를 고문하 여 죽자 우슬재에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220) 김은수의 어머니 박영애(당시 54세, 계곡면 방춘리)는 남편 김진제와 함께 연행되었다 218)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219) 신청인 김은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당시 31세, 방춘 리 주민)는 진신촌이 경찰에게 사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220) 신청인 김은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29

208 제 2 권 가 1951년 3월경 풀려났지만, 그 후 다시 계곡지서에 연행되어 1951년 4월 30일 옥천면 팔산리 부근 밭에서 살해되었다. 221) 김은수의 큰형수 박나심(당시 31세, 계곡면 방춘리)은 수복 당시 피신한 친정에서 계곡 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알 수 없는 곳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박나심과 함께 계곡지서에 구금 중이던 사람들이 무이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기에 박나심도 그곳에서 희생된 것으 로 신청인과 참고인은 생각하고 있다. 222) 당시 박나심은 임신 중이었는데 계곡지서에 구 금되었을 때 당시 국군에 입대해 있던 시동생 김은수가 보낸 군사우편을 경찰에게 보여 주었으나 결국 희생되었다고 한다. 223) 신청인 김은수(당시 21세, 김진제의 아들)는 1952년 5월경 휴가 224) 를 나와서 가족 모두 가 희생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2003년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도 너무 한 것이 아니오. 75살이 넘은 할머니가 무슨 부역을 했다고 총으로 쏴 죽인단 말이오. (중략) 뭔 죄를 그리 크게 졌는지 모르지만 대여섯 식구를 한꺼번에 몰살시키 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도 대한민국 경찰이라는 것들이 말이오. 225) 다-5076호 김양수 김양수 226) (당시 37세, 계곡면 반계리)는 원래 방춘리에 살다가 한국전쟁 전 이웃의 반 계마을로 이사를 갔다. 김양수는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방춘 리 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1951년 1월 7일 사살되었다. 227) 나) 장소리 해주마을 사건 계곡면 장소리 해주마을은 당시 10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수복 이후 해주마을 주민 10명 228) 이 1950년 12월 6일 성진리 월암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해주마을은 221) 신청인 김은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222) 신청인 김은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223) 신청인 김은수, 진술조서( ); 인터넷 신문 시민의 소리 ( ) 김은수는 1950년 7월 10일 순천 10연대에 입대하여 북진 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무공훈장을 받았다. 225) 인터넷 신문 시민의 소리 ( ) 사건 신청서에는 신청인 김상보의 모친 정채묘가 희생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김상보는 부친 김양수가 희생되었는데 신청서에 잘못 기재되었다고 진술하였다.(신청인 김상보, 진술조서, ). 227)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는 경찰이 김양수를 마을 뒤로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 하였다. 228) 신행균(다-2675), 임길생, 임성택(이상, 다-5078)), 임월택(다-5079), 김인옥(다-5534), 김장욱, 김장우(이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집집마다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희생된 사람 중 김 만 인민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고 나 머지는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이들의 희생이유에 대해 김장준(당시 15세, 희생자 김장 욱 장우의 동생)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구장을 했던 장소리 신 이 인민군 점령기에는 큰아들 신 과 함께 내무서원들을 피해 해주마을로 와서 처남 조 의 집에 굴을 파고 은신하여 있었다. 그런 데 신 의 가족 중 누군가 신 부자의 거처를 알려주어 내무서원이 그들을 잡으러 왔 다. 이에 신 은 피하고 아들 신 과 처남 조, 그리고 조 의 부인 등 3명만 붙 잡혔다. 그런 후 이웃 당산리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장소리로 몰려와 신 부자를 신고하 지 않았다고 장소리 사람들을 조 의 집 앞으로 모이게 한 후 주민들을 때리고 신 등 3명을 당산리 쪽으로 끌고 가다 죽여 장소리 사람들에게 묻으라고 했다. 인민위원회 사 람들의 명령을 받은 장소리 사람들은 이를 다시 해주마을사람들에게 시켜 해주 사람들이 그 3명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런데 수복이 되자 신 이 해주마을사람들이 아들과 처남 내외를 죽였다 고 경찰에 신고하여 결국 그때 매장에 참여했던 해주마을 10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다. 229) 한편 또 다른 목격자인 신문규(당시 19세, 신행균의 동생)와 임봉식(당시 25세, 마을사 람)은 (인민군 점령기에) 신 등 3명을 처형하기 위해 인민재판이 열렸는데 지방유격 대원들이 강요해서 해주마을주민 10명이 참관했다. 수복 이후 신 이 인민재판에 참관 했던 사람들을 밀고해서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230) 다-2675호 신행균, 다-5078호 임길생 임성택, 다-5079호 임월택, 다-5534호 김인 옥, 다-6726호 김장욱 김장우 신행균(당시 23세), 임길생(당시 29세), 임성택(당시 26세), 임월택(당시 25세), 김인옥 (당시 20세), 김장욱(당시 29세), 김장우(당시 24세, 이상 계곡면 장소리)는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이들 모두는 인민군 점령기에 신 등 3명이 인민위 원회 사람들에게 희생된 사건에 연루되어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그리고 계곡 지서에 일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2월 6일 성진리 월암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 상 다-6726), 신 (비신청), 임 (비신청), 김 (비신청) 등이다. 이 중에서 임길생 성택 월택과 김장욱 김장우는 각각 친형제간이다.(신청인 신문규, 진술조서, 외 다수). 229) 참고인 김장준, 진술조서( ). 230) 참고인 신문규, 진술조서( ). 해주마을 사건 경위에 대해 김장준(당시 15세)과 신문규(당시 19세) 간에 약간 진술의 차이가 있는데 현재로서 누구의 진술이 더 정확한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두 참고인의 진술을 종합해볼 때, 해주마을 사건은 인민군 점령기에 신 등 3명이 인민위원회 사람들에게 희생된 사건과 연관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31

210 제 2 권 되었다. 231) 다) 성진리 사건 인민군 점령기에 방 이 성진리의 인민위원장을 하면서 방씨들이 주도적으로 활동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수복 이후 성진리 방씨 다수가 희생되었다. 232) 다-1082호 방중이 김앵심, 다-1083 방상우 방중이(당시 47세, 계곡면 성진리)와 그의 아들 방상우(당시 28세, 계곡면 성진리)는 수 복 이후 마을 뒷산으로 도망 다니다 경찰에 잡혀 계곡지서 옆 소방대 차고에 구금되었다. 방상우는 1950년 11월경, 방중이는 1951년 1월 10일 월암고개에서 각각 사살되었다. 233) 또한 방중이의 처 김앵심(당시 51세, 계곡면 성진리)은 아들(방상우)과 남편(방중이)이 경찰에게 사살된 후인 1951년 3월 10일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234) 한편 참고인 김영옥(당시 20세, 성진리 주민)은 김앵심은 수복 이후 성진리 뒷산으로 도 망가다가 경찰에게 사살되었는데 사살된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 진술하였다. 235) 다-4263호 방윤경 방윤경(당시 49세, 계곡면 성진리)은 한국전쟁 직전 잡화상을 하면서 국회의원 출마자 민 에게 물건을 대주었으나 민 이 낙선하여 돈 대신 밭 7마지기를 받았다. 그런데 민 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에게 희생되었다. 수복 이후 피난 갔다가 돌아 온 민 의 친척들은 방윤경이 민 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고 모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방 윤경은 경찰에게 연행되어 계곡지서에서 약 20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1년 1월 10일 월 암고개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7명과 함께 사살되었다. 236) 231) 신청인 신문규, 진술조서( ); 신청인 김정웅, 진술조서( ); 신청인 임봉식, 진술조서 ( ); 신청인 연태희, 진술조서( ); 신청인 김경재, 진술조서( ); 참고인 신문규, 진 술조서( ); 참고인 김장준, 진술조서( ). 232) 참고인 김영옥, 진술녹취내용( ). 233) 신청인 방형식, 진술조서( ); 참고인 김영옥, 진술녹취내용( ). 신청인 방형식(당시 15세, 방중이의 아들)은 부친(방중이)이 소방대 차고에 약 한 달간 구금되어 있을 때 주먹밥을 만들어 갖다주 었는데 그때 신성리 사람인 방윤경(다-4263)도 부친과 함께 구금되어 있던 것을 목격하였다. 234) 신청인 방형식, 진술조서( ). 신청인 방형식(당시 15세, 김앵심의 아들)은 현재 모친의 제사를 모 친께서 경찰에게 잡혀간 날을 기준으로 해서 음력 2월 3일(양력 1951년 3월 10일) 지내고 있다고 진술하 였다. 235) 참고인 김영옥, 진술녹취내용( ). 236) 신청인 방순진, 진술조서( ); 참고인 최봉우, 진술조서( ). 참고인 최봉우(당시 32세, 방윤 경의 처)는 방윤경이 계곡지서에 구금되었다가 다른 7명과 함께 월암고개 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1485호 박양용 박양용(당시 49세, 계곡면 성진리)의 조카 박종남이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가 여순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전쟁 발발 전 행방불명되었다. 수복 이후 경찰은 박종남의 행방을 물으면서 박양용과 형 내외, 그리고 동생 박명용을 계곡지서로 연행하였다. 박양 용의 형수는 고문으로 팔이 부러진 채 젖먹이 아들과 계곡지서장 관사 담장 옆 굴에 구금 되었고, 나머지 식구들은 지서 옆 창고에 약 2~3일간 구금되었다. 박양용과 그의 형(비 신청) 그리고 동생 박명용(비신청)은 1950년 11월 15일 월암고개에서, 박양용의 형수(비 신청)는 같은 날 월암마을 앞 공동묘지에서 사살되었다. 237) 라) 개별 사건 다-9345호 배연출 배연출(당시 29세, 계곡면 가학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마을 어른들의 추천으로 어쩔 수 없이 인민위원장을 했다. 수복 이후 배연출은 김 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 1명과 함 께 계곡지서에 구금되었다. 그 후 김 은 풀려나고 배연출은 1950년 11월 15일 월암고 개에서 사살되었다. 238) 다-5212호 이천리 이천리(당시 42세, 계곡면 장소리)는 옥천면 팔산리에서 살다 한국전쟁 발발 2년 전 계 곡면 장소리로 이사 와 목공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이 주민들 을 마을회관에 모아놓고 인민위원장 지명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천리가 마을에서 유일 하게 신문을 볼 정도로 학식이 있어서 마을사람들 추천으로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천리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0월 13일 무이리 오리골 에서 사살되었다. 239) 리서 뒤 따라 갔는데 얼마 후 월암고개 쪽에서 총소리가 9번 울리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237) 신청인 박종석, 진술조서( ). 신청인 박종석(당시 15세, 박양용의 아들)은 부친 등이 계곡지서에 구금되어있던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사촌형수님은 젖먹이 아들과 함께 계곡지서장 관사 담장 옆 돌로 만 든 굴에 구금되어 있었고, 아버지와 백부, 숙부께서는 지서 옆 창고에 구금되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238) 신청인 배기섭, 진술조서( ); 참고인 배현모, 진술조서( ). 배현모(당시 19세, 배연출의 친 척)은 배연출은 경찰이 자수하라고 해서 자수하여 계곡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중, 야산에 있던 빨치산들 이 계곡지서를 습격하자 바로 그 다음날 월암리 고개로 끌고 가 사살했다 고 주장하였다. 239) 신청인 이정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복윤, 진술조서( ). 신청인 이정수(당시 8세, 이천 리의 아들)는 어느 날 백모님과 어머님이 부친을 면회 갔는데 부친께서 자신이 곧 무이리 오리골에서 죽 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김복윤(당시 20세, 장소리 주민)은 이천 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장소리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0월 13일 무이리 오리골에서 사살되었고, 같은 날 인민군 점령기에 반동분자 색출에 앞장섰던 마을 청년 8명이 계곡면 장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33

212 제 2 권 다-5668, 6084호 240) 오금록 오금록(당시 24세, 계곡면 여수리)은 1950년 10월 16일, 경찰이 마을로 들어온다는 소 문이 나자 경찰이 오면 다 죽는다. 그러니 피신하라 는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야 경을 설 때 하던 것처럼 죽창을 들고 마고리 쪽으로 피신했다. 오금록은 마고리 산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서 경찰이 난사한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241) 다-6724호 김소만 김소만(당시 55세, 계곡면 가학리)은 수복 이후 완도부대 242) 가 계곡면 가학리에 주둔하 면서 공비 토벌을 하고 있을 때, 마을주민들과 함께 야경단을 구성하여 매일 토벌대에게 음식 등을 날라다주었다. 1950년 12월 19일, 김소만은 박 과 같은 조가 되어 음식 등 을 지고 토벌대를 따라가던 중 목포에서 해병대를 모집한다 는 소문을 어디선가 듣고 박 에게 목포에서 인민군을 모집한다 고 잘못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토벌대가 김소만 을 중대본부로 끌고 가서 사살하였다. 243) 김소만은 소위 일자무식으로 농사만 짓고 사는 순박한 사람으로 좌익활동이나 부역을 한 적은 없었다고 참고인 오주용(당시 18세, 마을 사람)은 진술하였다. 244) 5) 현산면 사건 현산면에서는 1950년 11월경 딱골재, 배암골, 두모리 바닷가, 일평교 위 산기슭 등지에 서 주로 일평리, 구산리 주민이 경찰에게 희생되었고, 1951년 1월경에는 주로 화산면 장 고개와 딱골재에서 고현리, 공북리 주민이 희생되었다. 245) 소리 연계재에서 이미 진주한 강진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240) 신청인 오삼록이 중복 신청함. 241) 신청인 오삼록, 진술조서( ); 참고인 이성자, 진술조서( ); 참고인 임윤남, 진술조서 ( ). 임윤남(당시 22세, 여수리 주민)은 사건 당일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죽창을 들고 여수리 뒷산으로 피신을 갔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지은 죄도 없고 해서 마을사람들의 만류를 뿌리 치고 마을로 내려오다가 경찰을 만났는데 경찰 중에 평소 안면이 있었던 김 이 자신을 알아보고 빨 리 죽창을 버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 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마고리 쪽에서 총소리가 몇 번 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한편 그날 오금록 외에 같은 여수리 사람 김 (비신청)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고리 사람 1명도 희생되었다.(참고인 임윤남, 진술조서, ). 242) 수복 이후 완도 부역자들이 계곡면 산으로 도망왔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완도경찰서에서 인원을 차 출하여 토벌대를 구성하였다.(해남군, 해남군사, 1995, 588쪽) 243) 신청인 박순금, 진술조서( ); 참고인 오주용, 진술조서( ). 244) 참고인 오주용, 진술조서( ). 245) 참고인 임낙균 정형진, 공동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가) 1차 희생 사건 수복이 되어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이 현산면 면소재지인 일평리 현산지서 옆 창고 2~3곳에 구금되었다가 희생되었다. 이점수(당시 15세, 목격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수복 이후 현산지서 옆 창고 2~3곳에 (잡혀 온) 사람들이 꽉 차 있었는데 그 사람들 중 2~3백 명 정도가 죽었을 것이다. 딱골재와 배암골 외에 일평교 다리 위 산기슭에서도 2~3 회에 걸쳐 죽였는데 언젠가 40명을 죽이는 현장은 내가 직접 목격했다. 두모리 바닷가에서 는 30명 정도가 수장되었다고 들었다. 246) 다-1075호 탁진채 탁옥진 탁진채(당시 29세, 현산면 구산리)와 탁옥진(당시 19세, 현산면 구산리)은 완도군 소안 면 비자리에 살다 한국전쟁 전 구산리 방두마을로 이사를 와 소규모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협조하였고 마을사람들에게 쌀 등을 지 원받았다. 수복 이후 경찰이 마을 청년들을 소집한 뒤 탁진채와 탁옥진을 포함하여 16~ 18명(여자 2~3명 포함)을 연행했으며, 그 이틀 후인 1950년 11월 5일 이들을 월송리 딱 골재에서 살해하였다. 247) 다-4601호 최창윤 최창윤(당시 35세, 목포시 거주)은 원래 완도가 고향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목포에 살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동생 최창래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경찰에게 희생되자, 최창윤은 인민군 점령기에는 고향에 가서 동생을 죽인 놈이 누구냐 고 하면서 인민군 편에 서서 활동하였다. 수복이 되자 최창윤은 해남군 옥천면을 거쳐 목포로 피난을 가다 현산면에 서 송지지서 경찰에게 붙잡혀 1950년 11월경 송지-현산 간 배암골에서 살해되었다. 248) 다-4052호 이성준 이성준(당시 27세, 현산면 일평리)은 해방 이후부터 계속 마을 구장을 했는데 인민군 246) 참고인 이점수, 진술조서(( ). 247) 신청인 탁민우, 진술조서( ); 참고인 탁남미, 진술조서( ). 참고인 탁남미(당시 3세, 탁진 채의 아들)는 1960년경에 공군에 입대하여 항공관제 특기를 받고 신원조회를 받을 때, 부친과 숙부가 경 찰에게 희생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해남경찰서 자료조사 결과 그의 신원조회에 활용되었을 부 역자 처형명부, 신원기록편람 등 이 사건 관련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248) 신청인 최문학, 진술조서( ); 참고인 최수동, 진술조서( ). 참고인 최수동(당시 9세, 친척) 의 가족도 완도군 대신리에 살다가 수복 이후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로 피난을 갔는데 최수동은 거기서 최창윤을 잠시 만났다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35

214 제 2 권 점령기에도 마을사람들의 추대로 어쩔 수 없이 인민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오히려 좌익들에게 고초를 겪었다. 그는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현산지 서에 약 15일 구금되었다가 마을사람들과 소방대장의 탄원으로 석방되었으나 평소 그를 시기해온 같은 마을사람의 밀고로 다시 연행되어 1950년 11월 15일 현산면 일평리 농협 창고 인근 소나무밭에서 사살되었다. 249) 사건을 목격한 이점수(당시 15세, 이성준의 동 생)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박옥중이 6 25 전에 행방불명되었다가 인민군이 내려오자 마을에 나타나 현산면 분주 소장을 했다. 인민군 점령시기 우리 마을에서 윤 등 우익인사 세 명이 좌익들에게 희생당 한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수복 이후 우리 마을에서 4명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는데 이 사 람들이 죽을 만큼 활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나의 형 이성준도 인민위원장을 했지만 전혀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아 오히려 그 사람들(좌익)에게 자주 맞았다. 250) 다-9517호 김만수 김황배 김만수(당시 40세, 현산면 공북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앞장서서 활동을 하다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7일 두모리 바닷가에서 조카 김황배, 같은 마을 이성채와 함께 수장되었다. 251) 김황배(당시 22세, 현산면 공북리)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현산국민학교 252) 에 다니고 있 었으며 학생회장을 했다. 그는 수복 이후 숙부 김만수와 함께 경찰에게 연행되어 일평리 창고에 약 10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7일 두모리 바다에 수장되었다. 시신은 한참 지난 후 송지면 어란리 해안가에서 가족들이 수습하였다. 253) 김만수와 김황배의 희생이유에 대해 김숙(당시 14세, 김황배의 여동생)은 숙부 김만수 는 인공시절에 활동했으며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우리 부친께 이북에서는 땅을 공평하 249) 신청인 이해선, 진술조서( ); 참고인 이점수, 진술조서( ). 참고인 이점수(당시 15세, 이성 준의 동생)는 사건 당시 학생연맹 소속으로 교대로 현산지서 보초를 서는 임무를 수행했다. 250) 참고인 이점수, 진술조서( ). 251) 참고인 정금임,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숙, 진술조서( ). 참고인 정금임(당시 14세, 김만수 의 질부)은 이 사건에 대해 시집와서 시아버지로부터 들었다. 252) 당시에는 중학교를 겸한 학교였다.(참고인 김숙, 진술조서, ). 253) 참고인 정금임,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숙, 진술조서( ). 김황배의 희생경위에 대해 김숙 (당시 14세, 김황배의 여동생)은 고모 한 분이 결혼하여 화산면 무학리에 사셨는데 그분의 시숙이 경찰 이었다. 그래서 수복 이후 고모가 경찰인 시숙에게 조카인 김항배를 좀 데려와서 보호해달라고 요청을 하여 고모의 시숙이 화산지서 경찰들을 대동하고 오빠(김황배)를 데리러 왔는데 아버지께서는 경찰들이 오빠를 잡으러 온 줄 알고 내주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틀 후에 현산지서 경찰이 들이닥쳐 오빠를 연행해 갔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게 나누어 쓴다고 집안의 땅을 내놓으라고 한 적도 있었다. 오빠 김황배는 특별히 활동한 적이 없었으나 경찰이 들이닥쳐 오빠를 연행해 갔다 고 진술하였다. 254) 다-3828호 이성채 이성채(당시 35세, 현산면 공북리)는 수복 이후 같은 마을 김만수, 김황배 등 3명과 함 께 경찰에게 연행되어 일평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7일 두모리 바다에 수장 되었다. 255) 두모리 바다에서는 30여 명이 수장되었는데 256) 후에 두모리 주민들에게 당시 상황을 전해 들은 박정임(당시 24세, 마을사람)은 경찰이 사람들을 배에 싣고 바다로 가자 끌려 가던 사람들이 울부짖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개구리 울음소리 같이 들렸다. 그곳에서 살 아온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이 현산면 고현리 윤 이다 고 진술하였 다. 257) 나) 2차 희생 사건 1950년 11월의 1차 희생 사건 때 누락되었거나 무혐의로 풀려났던 사람들을 경찰이 다 시 불러들여 1951년 1월 화산면 장고개와 딱골재 등지에서 살해하였다. 다-2354호 박옥렬 박옥렬(당시 22세, 현산면 황산리)은 한국전쟁 전 마을 구장을 하면서 좌익분자 한 명 이 마을 계곡에 숨어 있는 것을 경찰에게 신고하였다. 그는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인민군 점령기에는 어쩔 수 없이 야경도 서고 울력도 나갔다. 박옥렬은 수복 이후 경찰의 부역자 자수 권유에 따라 자수하여 몇 차례 조사를 받고 풀려나서 다시 마을 구장 일을 보았다. 그러던 중 그는 1951년 3월 27일, 경찰이 다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여 현산지서로 출두 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258) 신청인 박해규(당시 14세, 박옥렬의 동생)는 박옥렬과 같이 끌 려간 안 가 현산면 고담리 성매산 방공호까지 끌려갔다가 누군가 힘을 써서 살아왔는 데 박옥렬도 그곳에 끌려가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 진술하였다. 259) 다-3664호 정래구 정수복 송폰례 정의례 254) 참고인 김숙, 진술조서( ). 255) 신청인 김일심, 진술조서( ); 참고인 박정임, 진술조서( ). 256) 참고인 이점수, 진술조서(( ). 257) 참고인 박정임, 진술조서( ). 258) 신청인 박해규, 진술조서( ); 참고인 박삼택, 진술조서( ). 259) 신청인 박해규, 진술조서(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37

216 제 2 권 정래구(당시 30세, 현산면 공북리)는 1951년 3월경 부역혐의로 현산지서에 연행되어, 1951년 3월 8일 화산면 장고개에서 옆 마을 고현리 사람들과 함께 사살되었다. 260) 정수복(당시 60세, 정래구의 부)은 아들 정래구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1951년 3 월 15일 경찰에 연행되어 알 수 없는 곳에서 희생되었으며 261) 시신은 정수복의 형제들이 수습하였다. 262) 송폰례(당시 51세, 정래구의 모)와 정의례(당시 19세, 정래구의 여동생)는 인민군 점령 기에 인민군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경찰에게 끌려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263) 다-3423호 김병모 김망덕 김영숙 김명금 김병모(당시 30세, 현산면 안평리)는 완도군 소안면 이월리에 살다가 1948년 가족들과 함께 현산면 안평리 탑동부락으로 이사하였다. 이 마을에서 김병모와 그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지인이라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인민군 점령기에는 김병모의 동생인 김영 모가 현산면 분주소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반대상황이 되었다. 수복이 되자 마을사람 김 천웅의 밀고로 김병모는 어머니 김망덕(당시 48세, 현산면 안평리), 여동생 김영숙(당시 19세, 현산면 안평리)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되어 지서 옆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1년 3 월 9일 화산면 장고개에서 모두 사살되었다. 264) 김병모의 처인 김명금(당시 29세, 현산면 안평리)은 가족이 희생된 후 2주 정도 있다가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1년 3월 22일 마을 뒷산에서 사살되었다. 265) 260) 신청인 정기종,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조, 진술조서( ); 참고인 임낙균 정형진, 공동진 술조서( ). 임낙균(당시 18세, 고현리 주민)은 동네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현산지서 주임인 장 이 40~50명을 줄로 묶어서 장고개 쪽으로 데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 중에서 공북리의 정래구 (다-3664), 고현리 임 의 모친, 임, 임, 최 (이상 비신청) 등을 기억하였다. 261) 신청인 정기종,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조, 진술조서( ); 참고인 임낙균 정형진, 공동진 술조서( ). 정형진(당시 3세, 정수복의 손자)은 현재 할아버지(정수복)의 묘는 선산에 있으며 제 사를 음력 2월 7일 지내고 있는데 어디서 희생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 진술하였다. 262) 신청인 정기종, 진술조서( ). 시신을 수습한 정수복의 형제들이 모두 사망하여 어디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다. 263) 신청인 정기종, 진술조서( ); 참고인 장인조, 진술조서( ); 참고인 임낙균 정형진, 공동진 술조서( ). 현재 송폰례의 제사는 남편 정수복 제삿날에 합동으로 지내고 있다.(참고인 정형진 진 술내용) 264) 신청인 김옥모, 진술조서( ); 참고인 김양모, 전화통화내용( ). 신청인 김옥모(당시 15세) 는 사건 당시 가족들이 모두 죽고 아버지와 저, 그리고 여동생만 남아 있었는데 아버지도 경찰에 불려 다니느라 이들의 시신을 수습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당시 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장고 개에서 사살되었다는 말이 돌아서 그날 장고개에서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 고 진술하였다. 또한 김옥모는 전쟁이 끝나고 김옥모의 남은 가족들이 고향인 완도군 소안면으로 다시 이사하였는데 김진병 간첩 사건 당시 완도경찰서 형사 문주식이 찾아와서 형들과 식구들이 어떻게 죽었냐고 물어봤다 고 진술 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6) 화산면 사건 수복 이후 화산면 부역혐의자들은 화산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방축리 화산지서 또는 해 창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주로 해창리 나붓재에서 희생되었다. 나붓재에서는 한번에 1 0~15명씩 여러 차례 희생되었고, 266) 구시리 뒷산, 정머리 뒷산, 마명리 임천골 등지에서 도 희생되었다. 가) 화산면 평호리 송평마을 사건 화산면 송평리 평호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58가구로 수복 이후 박창규 등 13명 267) 이 희 생되었다. 부역혐의자들은 경찰에게 연행되어 해창리 창고에 20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6일경 268) 해창리 나붓재에서 살해되었다. 269) 다-3240호 박창규 박한옥, 다-3241 박연옥 박창규(당시 21세, 화산면 평호리)는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대를 다 니다가 전쟁이 나자 고향에 내려와 있으면서 인민군 점령기에 평호리 인민위원장을 하였 다. 박창규와 형제간인 박한옥(당시 24세, 화산면 평호리), 박연옥(당시 19세, 화산면 평호 리)도 인민군 편에 서서 교육도 받고 야경을 서는 등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수복 이후 마을사람 10명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되어 해창리 창고에 20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6일경 해창리 나붓재에서 살해되었다. 270) 이들의 희생이유에 대해 신청인 박종현(당시 15세, 박창규 한옥 연옥의 조카)은 아 버지 박금옥이 전직 경찰이다 보니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세력들이 우리 집 소도 빼앗아 가고 집안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특히 이 세 분 숙부들이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 서 이것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좌익 편에 섰다가 희생되었을 것이다 고 진술하였 265) 신청인 김옥모, 진술조서( ); 참고인 김양모, 전화통화내용( ). 한편, 김영모는 수복 이후 지리산에 입산했다가 1951년 4월경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266) 참고인 김정근, 진술조서( ). 267) 박창규, 박한옥(이상 다-3240), 박연옥(다-3241), 박영록(다-3070), 김향수(다-3829), 박, 최, 김, 김, 김, 박 (이상 비신청) 등이다.(신청인 박종현, 진술조서, 등) 268) 사건발생일에 대해 사건 신청인 박종현은 11월 5일 경, 김향배는 11월 6일, 박순례는 11월 7일이라 진술 하였으나, 사건현장에 가서 직접 시신을 수습한 김향배의 진술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69) 신청인 박종현, 진술조서( ); 신청인 박순례, 진술조서( ); 신청인 김향배, 진술조서 ( ). 270) 신청인 박종현, 진술조서( ); 참고인 김향배, 진술조서( ); 참고인 박순례, 진술조서 ( ). 참고인 김향배(당시 17세, 희생자 김향수의 동생)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13명의 시신을 수습 해 왔는데 시신의 온 몸에 칼 자국이 나 있었으며 입 부근에 흙이 묻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39

218 제 2 권 다. 271) 다-3070 박영록 박영록(당시 26세, 화산면 평호리)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가끔 어선을 타고 멀리 고기 잡이를 다녀오곤 했다. 그는 수복 이후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을 대신해 경찰에게 연행 되자 스스로 화산지서에 출두하여 해창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6일경 해창 리 나붓재에서 살해되었다. 272) 다-3829호 김향수 김향수(당시 23세, 화산면 평호리)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으며 집에 농토가 별로 없어 주로 남의 어선을 타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수복 이후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해 창리 창고에 일주일 이상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6일경 해창리 나붓재에서 살해되었 다. 273) 신청인 김향배(당시 17세, 김향수의 동생)는 박창규가 서울대학교 법대에 다니다 6 25때 고향에 내려와 인공시절 인민위원장을 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이끌었다. 이로 말미 암아 많은 청년들이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274) 나) 개별 사건 다-2227 김일 김덕수 김일(당시 38세, 화산면 월호리)은 마을유지로 오랫동안 구장을 했던 관계로 인민군 점 령기에 월호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다. 수복 이후 경찰의 출두명령을 받고 화산지서에 출 두하여 유치장에 2~3일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9일 해창리 나붓재에서 사살되었 다. 275) 김덕수(당시 29세, 화산면 월호리)는 친형 김일이 희생되고 난 후 화산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1년 4월 2일 같은 장소에서 사살되었다. 276) 271) 신청인 박종현, 진술조서( ). 272) 신청인 김향배, 진술조서( ); 신청인 박순례,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현, 진술조서 ( ). 신청인 박순례(당시 13세, 희생자 박영록의 여동생)는 경찰이 오빠(박영록)를 연행하기 위해 집에 왔다가 오빠가 없자 대신 어머니와 나를 화산지서로 연행하였는데 얼마 후 오빠가 스스로 출두하 니까 어머니와 나를 풀어주었다 고 진술하였다. 273) 신청인 김향배, 진술조서( ); 신청인 박순례,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현, 진술조서 ( ). 274) 신청인 김향배, 진술조서( ). 275) 신청인 김용철, 진술조서( ); 참고인 김정근, 진술조서( ). 신청인 김용철(당시 13세, 김일 의 아들)은 일꾼들을 시켜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왔는데 시신에 총탄자국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1311 최은상 최은상(당시 40세, 화산면 송산리)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구장 등 여러 활동을 하였던 관계로 인민군 점령기에는 화산면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수복 이후 화산지서에 자 수하여 약 3일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0일 구금자 20~30여 명과 함께 해창리 나 붓재에서 살해되었다. 277) 신청인 최형완(당시 15세, 최은상의 아들)은 할머니가 화산지서에 구금되었던 사람들 이 모두 나붓재에서 처형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나붓재로 가서 경찰의 위협을 무릅쓰고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왔는데, 당시 그곳에는 20~30명의 시신이 있었 다고 한다. 부친의 시신을 보니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등에는 죽창으로 찔린 자국이 12군데 나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278) 다-3069 임유선 임유선(당시 40세, 화산면 송산리)은 학식이 있는 마을유지러. 인민군 점령기에 화산면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수복 이듬해인 1951년 4월경 경찰에게 연행되어 화산지서에 2~3일 구금되었다가 1951년 4월 4일 화산면 마명리 검더굴에서 10명과 함께 사살되었다. 279) 다-4047 이재식 이재식(당시 49세, 화산면 송산리)은 화산면 제2대 면장( ~ )을 지냈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피난가지 못하고 탄동마을 집 지하에 호를 파고 숨어 살았다. 수복 이후 경찰이 면장을 지낸 이재식이 인민군 점령시기에 살아남은 것은 인민군에게 협조했기 때문일 것 이라 여기고 연행하였다. 연행된 이재식은 화산지서 경찰 박 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살해되어 구 시장터 인근 도살장 하천에 버려졌다. 280) 276) 신청인 김용철, 진술조서( ); 참고인 김정근, 진술조서( ). 신청인 김용철은 인민군 점령 기에 화산면 월호리 호동마을에서는 전 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수복 이후 행방불명되었고, 수복 이후 월호리 호동마을에서 박 의 형, 강 의 형, 정 등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277) 신청인 최형완, 진술조서( ); 참고인 오인록, 진술조서( ). 참고인 오인록(당시 26세, 산 이면 상공리 주민)이 최은상이 처가가 있는 산이면 상공리에 자주 와서 오장록, 오홍탁, 오임탁, 오상록 등과 교류하는 모습을 봤다 고 진술하는 것으로 보아 최은상이 한국전쟁 이전부터 좌익활동을 했던 것으 로 추정된다. 278) 신청인 최형완, 진술조서( ). 279) 신청인 임향란, 진술조서( ); 참고인 임행자, 전화통화내용( ). 참고인 임행자(당시 11세, 임유선의 딸)는 수복 이후 송산리 주천마을에서 임유선, 최은상(다-1311), 박 (비신청) 등 3명이 경찰 에게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280) 신청인 이병옥, 진술조서( ); 참고인 이관식, 진술조서( ). 참고인 이관식(당시 22세, 이재 식의 사촌동생)은 시신을 수습하여 집으로 모셨을 때 보니 총탄 흔적은 없었고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41

220 제 2 권 참고인 이관식(당시 22세, 이재식의 사촌동생)은 인공시절 인민위원장을 했던 김 이 탄동리에 진을 치고 활동했으며, 경찰이 탄동리를 수복시키면서 김 등 인민위원 회 사람을 일망타진했는데 면장까지 했던 이재식이 인공시절 탄동리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연행해 갔다 고 진술하였다. 281) 다-6988 이동욱, 다-6990 김은희 이동욱(당시 31세, 화산면 관동리)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고 살면서 전쟁 당 시 마을 구장을 했다. 이동욱은 수복 이후 같은 마을 김남신의 밀고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화산면 마명리 장터의 원두막 막사에 약 10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8일 석정 리 검더굴 도랑에서 사살되었다. 282) 이동욱의 제수 김은희(당시 25세, 화산면 관동리)는 수복 이후 두 살배기 아들 이범식 을 데리고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장을 한 친정아버지 김학이를 따라 옥천면 팔산리를 거쳐 목포시 고모댁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김은희는 같은 마을 김정조 및 경찰 2명에 의 해 화산지서로 연행되어 1950년 11월 12일 정머리 뒷산에서 사살되었다. 283) 이들의 희생이유에 대해 신청인 이민식(당시 10세, 이동욱의 아들)은 첫째숙부 이동운 이 좌익활동을 하다 추수폭동에 연루되어 경찰에게 희생되었고, 막내숙부 이동술도 좌익 활동을 하다가 수복 이후 지리산으로 입산했으며, 첫째숙모 김은희의 친정아버지인 김학 이가 해방 이후 좌익활동을 주도하다가 인공시절 인민위원장을 했다. 이런 연유로 이동 욱과 김은희가 희생된 것으로 추측한다 고 진술하였다. 284) 다-5206 최연석 최연석(당시 25세, 화산면 송산리)은 해남농업실수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에 와 있었다. 수복 이후 과거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화산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5일 현산면 구시리 뒷산에서 사살되었다. 285) 7) 해남읍, 북평면, 삼산면, 옥천면, 화원면 사건 281) 참고인 이관식, 진술조서( ). 282) 신청인 이민식, 진술조서( ); 참고인 이준례, 진술조서( ). 283) 신청인 이민식, 진술조서( ); 참고인 이준례, 진술조서( ). 참고인 이준례(당시 19세, 김은희 의 시누이)는 사건 당시 남편이 목포경찰서 경찰이었는데 수복 이후 어느 날 올케(김은희)가 목포 우리 집으로 피신을 와 이틀 동안 지내다가 다시 목포시 대성동에 있는 자신의 고모댁으로 간다고 갔으며, 그 리고 얼마 후 김 가 경찰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올케의 행방을 물었다 고 진술하였다. 284) 신청인 이민식, 진술조서( ). 285) 신청인 최환규, 진술조서( ); 참고인 최형재, 진술조서( ). 참고인 최형재(당시 14세, 최연 석의 친척)는 당시 화산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최연석이 경찰에게 연행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가) 해남읍 사건 해남읍에서는 인민군 점령기에 군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이전 군 면사무소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인민위원회에)안 들어오면 엄벌에 처하겠다 는 인민 위원회의 엄포에 따라 거의 전원이 소집되어 군 면사무소에 근무하였다. 286) 수복 이후 이들 중 상당수는 부역자로 분류되어 희생되었다. 따라서 해남읍에서는 수복 이후 해남군 내 다른 지역보다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특히 해남읍 구교리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287) 해남군 유족회는 해남읍 주민 혹은 해남경찰서로 연행되어온 각 면의 주민들이 삼산면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 마산면 상 등리 골짜기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학살되었다 고 주장하고 있다. 288) 해남읍에서 신청된 사건은 총 4건으로 관련 희생자들은 모두 삼산면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 굴에서 희생되었다. 이곳에서는 1950년 11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8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289) 그들은 대부분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해남경찰서에 구금되었 던 사람들이다.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갔던 참고인 김순례(당시 22세, 희생자 이봉춘의 처)는 남편의 시신은 방오리산 방공호 굴 안에 온몸이 칼에 찔린 채로 있었다. 그곳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있었으며 목이 잘려나간 시신도 있었다. 굴 안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 었다 고 진술하였다. 290) 다-2813 민경대 민경대(당시 27세, 해남읍 백야리)는 형 민경석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 사건으 로 진도 갈매기섬에서 희생되었다. 이런 이유로 수복 이후 해남경찰서로 연행되어 1950 년 11월 10일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굴에서 살해되었다. 291) 다-8010 민경남 민경남(당시 29세, 해남읍 거주)은 마산면 상등리 출신으로 해남읍에서 양복점을 운영 하고 있었다. 민경남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세력들이 마을유지이자 교회 일을 하고 있 286) 해남군, 해남군사, 1995, 556쪽. 287) 참고인 김대욱 김영현, 공동진술조서( ). 288) 해남유족회 제출자료, 민간인 대량학살 현장과 피해인원. 289) 참고인 민병익, 진술조서( ). 참고인 민병익(당시 19세, 희생자 민병화의 동생)은 당시 해남읍 방 위대원으로 입산자 토벌임무를 수행하여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290) 참고인 김순례, 진술조서( ). 291) 신청인 민성욱, 진술조서( ); 참고인 민병목, 진술조서( ), 참고인 민병익, 진술조서 (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43

222 제 2 권 던 큰 형 민경월과 가족을 몰살시키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마산면 분주소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이유로 민경남은 수복 이후 해남경찰서에 출두하였다가 1950년 11월 10일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굴에서 살해되었다. 292) 다-2980 이봉춘 이봉춘(당시 26세, 해남읍 백야리)은 수복 이후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해남경찰서 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1일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굴에서 희생되었다. 293) 참고인 김순례(당시 22세, 이봉춘의 처)는 어느 날 집에서 방아를 찧고 있을 때 경찰 이 들이닥쳐 저에게 인민군들에게 밥을 해주었냐고 묻길래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잠자고 있던 남편 이봉춘을 다짜고짜 데리고 나갔다 고 진술하였다. 294) 다-2981 민병화 민병화(당시 27세, 해남읍 백야리)는 한국전쟁 발발 전 구장을 했던 연유로 인민군 점 령기에 인민위원회 서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수복 당시 마을에서 같은 마을사람 윤임 배, 민병섭, 김병곤, 떠돌이 장사꾼 등과 술을 마시다가 경찰에게 연행되어 해남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해남경찰서 유치장에 약 1달 정도 구금되어 있으면서 대한청년단을 이끌던 홍광표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윤, 민, 떠돌이 장사꾼은 풀려났다. 그러나 민병화는 1950년 11월 11일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굴에서 살해되었다. 295) 당시 해남읍 방위대원으로 입산자들 토벌임무를 수행했던 민병익(당시 19세, 민병화의 동생)은 인공시절 인민위원장을 했던 윤 는 풀려나고 서기에 불과한 형 민병화만 희 생된 것은 특별한 기준 없이 개인적 감정이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고 진술하였다. 296) 292) 신청인 민홍순, 진술조서( ); 참고인 민경례, 진술조서( ). 한편, 참고인 민경례(당시 20세, 민경남의 여동생)은 막내오빠(민경남)가 해남읍에서 양복점을 할 때 해남경찰서 경찰이던 박 의 동 생을 보조로 데리고 있으면서 경찰들 옷을 맞춰주기도 했고, 인민군이 내려올 때 박 을 마산면 상등 리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수복 이후 박 이 막내오빠를 해남경찰서로 나오라고 해서 안심하고 나갔는데 그날 바로 죽여버렸다. 막내오빠가 죽자 박 이 해남읍에 있는 막내오빠 집을 가로챘다 고 진술하였다. 293) 신청인 이정균,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순례,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순례(당시 27세, 이봉 춘의 처)는 남편(이봉춘)이 해남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면회를 갔으나 직접 만나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경찰서 건물 창문가에 서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으며, 남편이 희생되자 사건현장인 신금 리 방오리산 방공호굴에 가서 남편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였다. 294) 신청인 이정균, 진술조서( ); 참고인 김순례, 진술조서( ). 295) 신청인 민정배, 진술조서( ); 참고인 민병익, 진술조서( ). 참고인 민병익(당시 19세, 희 생자 민병화의 동생)은 사건 당시 현장에 가서 그의 형(민병화)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296) 참고인 민병익,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나) 북평면 사건 북평면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930년대 전 남운동협의회 사건 의 주동자인 김홍배, 오문현이 북평면 출신이다. 북평면은 1946년 11 월 11일 추수봉기 때 화산면과 함께 가장 격렬하게 봉기가 일어나 남창과 좌일 두 군데 지서가 전소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시위군중은 해남군 면 중에서 가장 많은 1,800여 명 이었다. 297) 추수봉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인근 달마산에 입산하였다가 경찰의 토벌작전 때 희생 되거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갈매기섬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수 복 이후 북평면 부역혐의자 중 다수가 남창리 붉은잔등, 월송리 좌일지서 뒷산 등지에서 희생되었는데 내동리에서는 30~40여 명이 희생되었다. 298) 박동안(당시 17세, 내동리 주 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내동리에서는) 6 25가 나자마자 김, 오 두 사람이 경찰에 의해 무인도로 끌려 가 죽었다. 그리고 수복 이후에는 한 30~40명이 경찰에게 죽었을 것이다. 기억나는 사람으 로는 김, 김, 최, 최, 이, 최 3형제, 강, 최, 최, 최, 김, 백, 유, 박해동 해진 재동 동식 4형제, 마 등이 다. 299) 다-3196 김천희 김천희(당시 39세, 북평면 평암리)는 한국전쟁 발발 전 구장을 했기 때문에 인민군 점 령기에도 마을 일을 보았다. 그는 수복 이후 경찰이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남창지서 에 자수하여 3일 정도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1950년 10월 26일 남창리 붉은잔등 굴 속에서 같이 끌려온 수십 명과 함께 사살되었다. 300) 다-5340 이동호 이동호(당시 27세, 북평면 용일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수복 297) 박영자, 이데올로기에 갇힌 근 현대사, 2005, 해남신문사, 95쪽. 298) 참고인 박동안, 진술조서( ). 299) 참고인 박동안, 진술조서( ). 참고인 박동안(당시 17세, 내동리 주민)의 형인 박해동 해진 재 동 동식이 수복 이후 경찰에게 희생되었으나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하지 않았다. 진실규명신 청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박동안은 지금까지 이 상처를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는데 굳이 다시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고 진술하였다. 300) 신청인 박문수, 진술조서( ); 참고인 문경호, 진술조서( ). 참고인 문경호(당시 26살, 평암 리 주민)는 김천희는 평암리 인민위원장을 했던 김 과 같이 죽었으며 시신은 마을사람들이 수습해 왔으나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고 진술하였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45

224 제 2 권 이후 마을 청년 7~8명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되어 며칠간 구금되었다가 1950년 10월 31 일, 월송리 좌일장터 인근 새노재 다리 밑에서 같이 연행된 마을사람들과 함께 사살되었 다. 301) 다-446 김귀남 김귀남(당시 30세, 북평면 남창리)은 방앗간을 운영했으며, 인민군 점령기에 특별한 활 동을 한 적은 없었다. 수복 이후 그의 사촌형 김 이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활동을 하여 온 집안이 좌익으로 몰려 경찰의 시달림을 받고 있던 중, 1950년 11월 6일 밤 집에서 경 찰에게 연행되어 이진리 야산에서 사촌 2명 302) 과 함께 사살되었다. 303) 다-1298 나영석 나영석(당시 42세, 북평면 서홍리)은 수복 이후인 1950년 11월 28일 옥천면 영춘리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나영석의 첫째동생 나종완은 일제강점기 때 평양 의사강습소를 나 와 인민군 점령기에 해남 인민병원장을 하다가 수복 이후 아들 나기홍(일명 나길포, 비신 청)과 함께 입산했고, 둘째동생 나종현은 1948년 4월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사살되었으 며, 막내동생 나종규는 추수봉기에 가담한 후 5년 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 다가 1949년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 때 행방불명되었다. 이런 집안 사정 때문에 나영석은 자주 지서에 붙들려가 고문을 당했고, 수복 이후 옥천 면 영춘리에 갔다가 우연히 해남경찰서 경찰 장 과 마주치게 되었다. 경찰 장 은 나종완과 나기홍을 어디에 숨겼냐고 나영석을 추궁하다가 그 자리에서 그를 사살했 다. 304) 다-7908 김봉현 김봉현(당시 23세, 북평면 내동리)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였다. 수복 이후 논에서 벼 를 베고 있다가 경찰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305) 참고인 김재례(당시 19세, 김봉 현의 여동생)는 당시 내동리에서 30~40명이 경찰에 끌려가 좌일지서 뒤 오십이재에서 희생되었던 것으로 보아 김봉현도 그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고 진술하였다. 306) 301) 신청인 이덕모, 진술조서( ); 참고인 이삼호, 진술조서( ). 참고인 이삼호(당시 17세, 이동 호의 사촌동생)는 당시 사건현장에 가서 이동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302) 김종원, 김종복(이상 비신청)이다.(신청인 김연제, 진술조서, ). 303) 신청인 김연제, 진술조서( ); 참고인 오순희, 진술조서( ). 참고인 오순희(당시 24세, 김귀 남의 처)는 당시 사건현장에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304) 신청인 나철홍, 진술조서( ). 305) 참고인 김재례, 전화통화내용( ). 참고인 김재례(당시 19세, 김봉현의 여동생)는 오빠인 김봉현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다가 경찰에게 연행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306) 참고인 김재례, 전화통화내용( ). 참고인 김재례는 당시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에 어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 삼산면 사건 삼산면에서는 4건이 신청되었는바, 4건 다 주민 간 갈등 때문에 한 가족의 대부분이 희 생된 사건이다. 다-7538 김재근 김일남 문준용 307), 다-7539 김시종 김재근(당시 59세, 해남읍 안동리)은 한국전쟁 전 삼산면 창리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돈 을 번 뒤 이웃마을인 안동리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간 김재근은 그곳에서 집성촌을 형성 하고 있는 씨들과 자주 대립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삼산면 창리에서 살았던 이 (당시 28세, 창리 주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재근은 창리에서 고물상을 하다가 돈을 좀 벌었다. 그래서 농토가 많은 이웃 안동리 에 땅을 좀 사서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안동리가 씨 집성촌인데 그 집안사 람들이 일제 때부터 관계에 많이 진출하여 위세가 대단했다. 그 사람들이 김재근을 외지인 이라고 무시하자 워낙 괄괄한 성격에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던 김재근이 그들과 잦은 대립 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재근이 둘째딸 김일남을 에게 시집보내 관계를 좀 풀 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의 친형 가 당시 군청 무슨 과장도 하고 해서 관 쪽에 서 힘깨나 쓰는 양반이었다. 그러다가 인공이 되니까 김재근이 어떤 직책을 맡은 것도 아닌 데 씨들을 좀 무시했던 모양이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너희들도 너무 잘난 체하지 마라 뭐 그런 정도였을 것이다. 308) 김재근은 수복 이후 안동리 씨들에게 좌익으로 몰려 1950년 10월 28일 씨들의 사주를 받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안동리 망령골에서 총격 사살되었다. 309) 당시 상황에 대해 신청인 김성관(당시 9세, 김재근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사건 당일 집에서 자고 있는데 밤 10시경 우익청년단 단장인지 부단장인지 하던 가 단원 2명을 대동하고 방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총으로 부친을 겨누면서 나와 이 새끼 야 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버선을 신으시던 부친을 보면 서 죽을 놈이 버선을 신어서 뭐해 하면서 강제로 끌어내 끌고 갔다. 나와 가족들은 겁이 나서 옆집에 피신해 있었다. 얼마 후 안동리 망령골 쪽에서 총소리가 2발씩 두 번 울렸다. 른들이 없어 오빠(김봉현)의 시신을 찾아볼 상황이 아니었다 고 진술하였다. 307) 다-7538호 희생자 중 김일남, 문준용은 다-7809호, 다-8427호로 각각 중복 신청되었다. 308) 참고인 이, 진술조서( ). 309) 신청인 김성관,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표,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47

226 제 2 권 나중에서야 그 총소리가 바로 저희 부친과 작은누님을 사살한 그 총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310) 김재근의 둘째딸 김일남(당시 20세, 해남읍 안동리)은 씨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기 원했던 김재근의 희망에 따라 당시 해남군 양정과장이며 우익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의 친동생 와 결혼하였다. 김일남은 씨 집안의 비밀스러운 일을 친정아버 지 김재근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 311) 로 씨들의 사주를 받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1950년 10월 28일 친정아버지와 함께 안동리 망령골에서 사살되었다. 312) 김재근의 아들 김시종(당시 25세, 해남읍 안동리)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한국전쟁 이 발발하여 고향 집에 와 있었다. 김시종은 수복 이후 해남읍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우익단체원들에게 잡혀 해남읍 금강굴에서 살해되었다. 김시종이 사망한 후 15일이 지나 그의 처가 사건현장에 갔으나 시신은 찾지 못하고 김시종이 입고 있던 옷만 수습했다. 313) 김재근의 큰사위 문준용(당시 30세, 삼산면 신흥리)은 수복 이후 1950년 11월 11일 삼 산면 창리 남산뫼 중턱에서 40~50명과 함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그러나 가해자 및 희 생이유에 대해 김성관(당시 9세, 문준용의 처남)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고, 314) 문정자(당시 3세, 문준용의 딸)는 모친께 들은 바로는 부친(문준용)께서 는 장인(김재근)이 우익청년단원들에게 죽자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처가에 갔다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붙잡혀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315) 한편, 이보헌(당시 28세, 창리 주민)은 문준용은 담동리에 살았는데 그의 백부가 신흥리에서 여관을 하면서 좌익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진술하였다. 316) 310) 신청인 김성관, 진술조서( ). 311) 한편 박종표(당시 1세, 희생자 김일남의 아들)는 가 당시 해남군청 양정과장을 하면서 한 달에 두 번씩 부정한 방법으로 양곡을 빼돌렸는데 김일남이 시집와서 같이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가 그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 조카인 를 시켜 죽였다 고 진술하였다.(신청인 박종표, 진 술조서, ) 312) 신청인 김성관, 진술조서( ); 참고인 박종표,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 김일남이 사살된 시점에 대해 김성관과 박종표의 진술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성관 (당시 9세, 김일남의 동생)은 망령골에서 총소리가 2발씩 두 번 연달아 들렸으며, 사건현장에 두 분의 시 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던 점으로 보아 부친(김재근)과 누나(김일남)가 함께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 고 진 술하였으나, 박종표(당시 1세, 김일남의 아들)는 부친에게 들은 바로는 사건 당일 저녁 망령골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모친(김일남)께서 우리 아버지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끌려갔다는데 우리 아버지가 죽는 가 보다 하고 말했으며, 그러고 나서 약 30분 후에 우익청년단원들이 들이닥쳐 모친을 끌고 가서 친정아 버지(김재근)가 사살된 바로 그 장소에서 사살하였다. 고 진술하였다. 313) 신청인 김성관,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314) 신청인 김성관, 진술조서( ). 315) 신청인 문정자,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김재근 일가를 살해한 우익단원들의 정확한 소속은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우익 단원들이 경찰의 지휘 명령 아래 부역혐의자 처벌에 앞장섰다는 것은 여러 진술 317) 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이들은 김재근과 김일남을 살해할 때 총을 사용했는데, 당시에는 개 인이 사적으로 총을 소지했던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반면 수복작전 및 입산자 토벌임무 를 수행할 때 경찰의 수가 모자라 그 보충병력으로 동원된 의용경찰, 의용소방대, 우익단 원 등에게 총이 지급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또한 김재근과 김일남이 사살된 장소가 수 복 이후 해남읍 및 삼산면 부역혐의자들이 주로 살해되었던 안동리 망령골 318) 이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이 사건의 가해자인 우익단원들은 경찰의 지휘 명령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라) 옥천면 사건 다-6534 박상원 박상원(옥천면 용동리)은 한국전쟁 당시 친구와 함께 옥천면 백오리에서 정미소를 운 영하였다. 박상원은 1951년 4월 14일 정미소에서 일하던 중 옥천지서 경찰에게 다른 사람 으로 오인되어 연행된 후, 그날 저녁 만대산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319) 박상원의 희생이유에 대해 박충원(당시 7세, 박상원의 아들)은 박상원은 마을에서 박 상기라고 불렸는데 같은 마을에 박상귀라는 사람이 있었다. 박상귀는 인공시절 주도적으 로 좌익활동을 하다 수복 이후 마을 뒷산에 숨어 지냈다. 1951년 4월 14일, 경찰이 마을에 와서 박상귀의 행방을 묻자 마을사람들이 박상기(박상원)로 잘못 알아듣고 박상원의 소 재를 알려주었다. 이에 경찰은 백오리 정미소에서 일하고 있던 박상원을 연행하여 그날 저녁 무렵에 만대산 꼴짜기로 데려가 사살했다 고 진술하였다. 320) 한편, 박상귀는 여기저 기 도망 다니다 동네 야산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321) 다-9516 윤성하 윤성하(당시 30세, 옥천면 용동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심부름 정도의 단순한 부역 322) 을 316) 참고인 이, 진술조서( ). 317) 참고인 이 (당시 해남경찰서 수사과 근무), 조 (해남경찰서 정보3계장 및 관내 여러 지서장 역임), 김 (당시 해남경찰서 근무) 진술녹취내용( ). 318) 수복 이후 안동리 망령골에서 부역혐의자 40~5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해남유족회 제출 자료 등) 319) 신청인 박충원, 진술조서( ); 참고인 박재순, 진술조서( ). 참고인 박재순(당시 29세, 친척) 은 마을 텃밭에 박상원의 시신이 놓여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320) 신청인 박충원, 진술조서( ); 참고인 박재순 진술조서( ). 321) 신청인 박충원, 진술조서( ).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49

228 제 2 권 했다. 수복 이후 주변 사람들이 자수를 권유하자 그는 1950년 10월 27일 해남경찰서에 자 수했다가 바로 그날 해남읍 우슬재에서 사살되었다. 323) 마) 화원면 사건 수복 이후 화원면 매월리 부동마을주민 5명 324) 이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사살 되었다. 인민군 점령시기 화원면 매월리 상황에 대해 백 (당시 18세, 마을사람)는 다 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인공시절에 바로 옆 마을인 월래마을에 인민군 초소가 있었다. 인민군은 그곳에 상주하 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인민군가도 가르쳐주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오게 해서 방공호도 파 게 하고 그랬다. 그리고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들어와 젊은 사람들에게 재 산을 똑같이 나누어줄 테니 협조하라는 식으로 꼬드겼다. 325) 다-7565호 김하태 김하태(당시 46세, 화원면 매월리)는 인민군 점령기에 화원면 인민위원장을 했다. 그는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화원지서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0월 29일 화원면 신덕리 안골 오른쪽 산중턱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326) 다-7798호 정문기 정문기(당시 28세, 화원면 매월리)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되었다가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8일 화원면 신덕리 안골 오른쪽 산중턱에서 사살되었다. 327) 다-6416호 정문순 정문순(당시 29세, 화원면 매월리)은 인민군 점령기에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았으나 방 공호를 파는 등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51년 2월 4일 부동마을에 들어온 화원지서 경찰에 게 김상태, 김 등 4명과 함께 연행되어 수동마을에서 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328) 322) 참고인 양일순, 진술조서( ). 323) 신청인 윤일랑, 진술조서( ); 참고인 양일순, 진술조서( ). 324) 김하태(다-7565), 정문기(다-7798), 정문순(다-6416), 김상태(다-10548), 김 (비신청) 등이다.(참고인, 진술조서, ) 325) 참고인 백중기, 진술조서( ). 326) 신청인 김동, 진술조서( ); 참고인 백,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327) 신청인 정문국, 진술조서( ); 참고인 백,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10548호 김상태 김상태(당시 25세, 화원면 매월리)도 정문순, 김 등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1년 2월 4일 수동마을에서 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 골짜기에서 사살되었 다. 329) 김상태는 인민군 점령기에 화원면 인민위원장을 하다가 수복 이후 경찰에게 희생 된 김하태(다-7565)의 친동생이다. 한편, 수복 이후 화원면 부역혐의자 중 일부는 경찰에 의해 수동리 앞바다에 수장되었 다. 다-621호 양암국 양암국(당시 29세, 화원면 별암리)은 산이면 상공리에 살다가 전쟁 전 화원면 별암리로 이사를 왔다. 1951년 1월 8일, 마을사람 몇 명과 함께 화원지서에서 출두하였다가 그날 바로 화원면 수동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330) 신청인 최봉순(당시 16세, 양암국의 제수)은 수동리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경 찰이 수동리 선창가에서 7~8명을 목선에 싣고 바다로 나갔으며, 그 사람들 중에서 시숙 (양암국)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고 진술하였다. 331) 3. 사건 조사결과 가. 희생자 명단 이 사건 희생자에 대한 판단근거는 다음과 같다. 328) 신청인 정숙자, 진술조서( ); 신청인 김동희, 진술조서( ). 329) 신청인 정숙자, 진술조서( ); 신청인 김동희, 진술조서( ); 참고인 백, 진술조서 (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이 (당시 17세, 부동마을주민)은 막 시집오니 까 김하태가 신덕리 안골 오른쪽 골짜기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어 시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으며, 그 후 얼마 있다가 정문기가 김하태와 같은 장소에서 경찰에게 죽었고, 그 다음해에 정문순, 김상태, 김 가 수동마을에서 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희생되었다 고 진술하였다. 330) 신청인 최봉순, 진술조서( ). 신청인 최봉순(당시 16세, 양암국의 제수)은 당시 산이면 상공리에 거주 하고 있었다. 그의 남편이자 양암국의 동생인 양산옥(다-625호)도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산이지서 경찰에 게 사살되었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양암국과 양산옥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진술하였다. 331) 신청인 최봉순, 진술조서( ). 신청인 최봉순(당시 16세, 양암국의 제수)은 수복 이후 어느 날 화원 면 별암리에 살던 동서(양암국의 처)가 상공리로 자신을 찾아와서 남편(양암국)이 화원지서에서 출두하 라고 해서 마을사람 몇 사람과 출두하였는데 지서에 가보니 남편이 없다고 하면서 혹시 이곳에 왔는지 물어보길래 이 난리통에 왜 여기에 왔겠냐고 말하자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수동리 사람들로부터 경찰이 수동리 선창가에서 7~8명을 목선에 싣고 바다로 나갔으며 그 사람들 중에 시숙(양암국)도 있었 다는 말을 들었다 고 진술했다. 한편 양암국의 처는 남편이 희생되고 난 후 현재까지 소식이 끊긴 상태 이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51

230 제 2 권 신청인 및 참고인 조사를 통해 살해된 일시 장소 경위가 구체적으로 파악된 사람 들 중 시신을 수습한 경우, 혹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더라도 사건현장에 시신이 있는 것 을 확인했던 경우 희생자로 특정하였다. 한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더라도 경찰에게 연행된 사실이 확인되고 지서 등에 구금되었다가 생사불명인 상태인 경우에도 희생된 것으로 추정 하여 희생자에 포함하였 다. 그 결과 진실규명신청한 166명 중 이 사건 희생자로 확인 추정되는 희생자는 159명이 다. 나머지 7명 중 고중심(다-1294), 김신남(다-6083) 2명은 경찰에게 직접 희생당한 것이 아니고 병사한 것이므로 진실규명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명규(다-1293) 332) 는 다-1293(1)로, 김영모(다-3423) 333) 는 다-3423(1)로, 오창기, 오철기, 오행임(이상 다 ) 334) 은 다-10415(1)로 각각 사건을 분리하여 계속 조사하기로 하였다. 희생자(확인 추정) 명단은 <표 4>와 같다. 연 번 산이면 사건 번호 오명탁 ( 吳 鳴 鐸 ) 민채홍 ( 閔 彩 泓 )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마을 앞 불시검문 중 남 31세 상공리 (추정) 샘가 사살됨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표 4> 희생자(확인 추정) 명단 마을 수복과정에서 남 25세 송천리 김재호 집 사살됨 판단 결과 확인 부상자 생존 확인 332) 신청인(김성신)의 주장에 따르면 숙부인 김명규(당시 28세, 광주시 거주)는 한국전쟁 당시 광주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세금을 거둬서 군인들을 먹여 살렸다는 이유로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모르지만 아무 튼 올라가면서 죽였다 고 한다. 그러나 신청인의 진술만으로는 희생시기와 가해주체가 명확하지 않은바, 계속 조사하기로 하였다. 333) 신청인(김옥모) 및 참고인(김양모) 진술조사 결과, 김영모(당시 25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사건으로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려갔다가 생존해 돌아와서 인민군 점령기에 현산면 분주소에서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인민군이 후퇴할 때 지리산으로 입산했다가 1951년 4월 23일 토벌대에 사살된 것으로 밝혀 졌는바, 국군 토벌작전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에 포함하여 계속 조사하기로 하였다. 334) 신청인(오동혁) 및 참고인(오권기, 오종식) 진술조사 결과 오창기, 오철기, 오행임은 추수봉기에 가담했 다가 도망 다녔으며, 지금까지 생사불명인 상태이다. 한편 이들과 사촌인 오권기는 이들이 월북했을 가 능성을 염두에 두고 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북측에서 보내온 명단에 이들이 없었다 고 진술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3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번호 오유록 ( 吳 有 祿 ) 김정오 ( 金 正 五 ) 박문탁 ( 朴 文 鐸 ) 강갑동 ( 姜 甲 同 ) 이원빈 ( 李 源 彬 ) 김갑수 ( 金 甲 洙 ) 박종철 ( 朴 鍾 哲 ) 양산옥 ( 梁 山 玉 ) 김일재 ( 金 日 在 ) 박태운 ( 朴 泰 運 ) 오 종 ( 吳 鍾 ) 박동현 ( 朴 東 鉉 ) 오완용 ( 吳 完 鏞 ) 박태길 ( 朴 泰 吉 ) 김진홍 ( 金 鎭 洪 ) 장태순 ( 張 泰 順 ) 김기복 ( 金 基 楅 ) 오정록 ( 吳 丁 祿 ) 오기록 ( 吳 琦 祿 ) 김오진 ( 金 五 眞 )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마을 방죽 수복과정에서 남 22세 상공리 앞 사살됨 수복과정에서 남 19세 부동리 흑두리 논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사살됨 부동리 수복과정에서 남 23세 부동리 뒷산 사살됨 수복과정에서 남 57세 금송리 집 앞 금호리 남 24세 금호리 수복 당시 금성산 산두리 남 27세 금호리 바닷가 백동마을 남 33세 금호리 골짜기 진산리 남 21세 상공리 뻔지 진산리 남 22세 대진리 뻔지 진산리 남 29세 금송리 뻔지 초송리 남 37세 상공리 앞산 초송리 남 25세 상공리 앞산 초송리 남 17세 상공리 앞산 남 43세 금송리 두목마을 뒷산 진산리 남 21세 상공리 뻔지 금송리 남 19세 상공리 국도변 남 28세 금송리 금송리 국도변 금송리 남 35세 상공리 국도변 금송리 남 21세 상공리 국도변 초두리 남 34세 대진리 수복 이후 저수지 사살됨 수복과정에서 사살됨 부역혐의 (리 자위대장) 판단 결과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면 분주소장)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신발 부역혐의 수습 확인 연행된 부역혐의 후 행불 추정 강재봉 남 41세 금송리 수복 이후 생사불명 부역혐의 연행된 추정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53

232 제 2 권 연 번 사건 번호 (1) (1) 판단근거 당시 당시 희생자 성별 나이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판단 시신 참고인 결과 수습 진술 기타 ( 姜 在 韸 ) (면 인민위원장) 후 행불 오경순 보도연맹 여 19세 상공리 수복 이후 불상지 ( 吳 京 順 ) 희생자 유족 구금된 후 행불 추정 박정연 ( 朴 正 連 ) 오야문 ( 吳 也 文 ) 오화탁 ( 吳 華 鐸 ) 김택우 여 30세 상공리 수복 이후 불상지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구금된 후 행불 추정 여 28세 상공리 수복 이후 마을 뒷산 부역자 가족(처) 확인 남 25세 대진리 수복 이후 생사불명 부역혐의 연행된 후 행불 추정 ( 金 澤 祐 ) 남 24세 대진리 주산동 뻔지 오경록 ( 吳 警 祿 ) 남 30세 상공리 주산동 뻔지 공길종 ( 孔 吉 宗 ) 남 42세 대진리 주산동 뻔지 장홍만 ( 張 洪 滿 ) 남 35세 상공리 주산동 뻔지 박종복 ( 朴 鍾 楅 ) 남 31세 금송리 주산동 뻔지 오권탁 ( 吳 權 鐸 ) 남 36세 상공리 주산동 뻔지 김진문 ( 金 鎭 汶 ) 남 38세 상공리 주산동 뻔지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판결문 확인 판결문 확인 부역혐의 판결문 확인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부역자 가족(부)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판결문 확인 판결문 확인 판결문 확인 판결문 확인 연 번 송지면 사건 번호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김기순 ( 金 己 順 ) 남 38세 갈두리 마봉리 달마산 밑 박종완 ( 朴 宗 完 ) 남 22세 석수리 산정리 산진목 (1)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박평금 ( 朴 平 今 ) 여 24세 소죽리 산정리 산진목 정인률 ( 鄭 仁 律 ) 남 30세 미야리 산정리 산진목 박종주 ( 朴 鍾 柱 ) 남 34세 방처리 산정리 산진목 고광용 ( 高 光 用 ) 남 44세 석수리 산정리 산진목 판단 결과 좌익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처) 신청인 목격 확인 부역혐의 확인 재학 중 학생운동 확인 부역혐의 확인 김대심 여 30세 석수리 산정리 부역자 확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3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판단근거 연 사건 당시 당시 희생자 성별 번 번호 나이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판단 시신 참고인 결과 수습 진술 기타 ( 金 大 心 ) 산진목 가족(처) 고 ( 高 ) 남 2세 석수리 산정리 부역자 확인 산진목 가족(아들) 정인안 산정리 남 25세 미야리 부역혐의 확인 ( 鄭 仁 安 ) 산진목 박병길 ( 朴 炳 吉 ) 정부환 ( 鄭 富 煥 ) 서여산 ( 徐 如 山 ) 정천수 ( 鄭 千 洙 ) 김철효 ( 金 哲 孝 ) 박성대 ( 朴 成 大 ) 박종호 ( 朴 鍾 浩 ) 남호걸 ( 南 豪 傑 ) 이토성 ( 李 土 星 ) 박종배 ( 朴 鍾 培 ) 김은태 ( 金 銀 台 ) 김상순 ( 金 相 順 ) 박남용 ( 朴 南 用 ) 김월봉 ( 金 月 奉 ) 한삼성 ( 韓 三 成 ) 김홍일 ( 金 洪 一 ) 박선완 ( 朴 璿 浣 ) 고광철 ( 高 光 喆 ) 치소리 남 21세 석수리 쑥고개 치소리 남 33세 방처리 쑥고개 치소리 남 28세 방처리 쑥고개 치소리 남 19세 방처리 쑥고개 치소리 남 29세 미야리 쑥고개 어불도 남 51세 석수리 앞바다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수장) 어불도 남 17세 석수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산정리 남 44세 석수리 산진목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48세 석수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28세 갈두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32세 갈두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35세 갈두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47세 갈두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33세 방처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52세 방처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42세 방처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어불도 남 31세 마봉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해원리 남 34세 석수리 연골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초혼식 치름 추정 부역혐의 확인 정병호 남 25세 방처리 해원리 부역혐의 확인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55

234 제 2 권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 판단근거 당시 당시 성별 나이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판단 시신 참고인 결과 수습 진술 기타 ( 鄭 炳 鎬 ) 연골 해원리 남 43세 방처리 연골 부역혐의 확인 정재문 ( 鄭 在 文 ) 고광채 ( 高 光 彩 ) (1) 임사례 ( 任 四 禮 ) 이철률 ( 李 哲 律 ) 산정리 남 41세 석수리 산진목 월송리 여 40세 월송리 딱골재 남 27세 강진군 강진읍 월송리 딱골재 정인석 ( 鄭 仁 石 ) 남 32세 미야리 산정리 산진목 정병옥 ( 鄭 炳 鈺 ) 최병임 ( 崔 炳 任 ) 부역혐의 확인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처) 신청인 목격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남 22세 방처리 수복 이후 생사불명 의용군 징집 연행된 후 행불 추정 여 25세 방처리 수복 이후 생사불명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처) 연행된 후 행불 추정 연 번 마산면 사건 번호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판단 결과 최재임 ( 崔 在 任 ) 여 24세 맹진리 집 앞 논 불명 확인 이광춘 ( 李 光 椿 ) 남 33세 산막리 화내리 부역혐의 두드럭재 (면 분주소장) 확인 민예기 ( 閔 禮 基 ) 남 40세 외호리 화내리 부역혐의 두드럭재 확인 장길선 ( 張 吉 璿 ) 남 24세 상등리 화내리 부역혐의 두드럭재 확인 이형근 ( 李 亨 根 ) 이병회 ( 李 炳 會 ) 임순례 ( 林 順 禮 ) 윤인석 ( 尹 仁 錫 ) 윤흥하 ( 尹 興 夏 ) 노하리 남 33세 송석리 부역혐의 확인 붉은데기 노하리 부역혐의 남 37세 외호리 붉은데기 (리 인민위원장) 노하리 부역자 여 34세 산막리 붉은데기 가족(처) 확인 확인 남 노하리 39세 장촌리 부역혐의 붉은데기 확인 남 노하리 24세 장촌리 부역혐의 붉은데기 확인 계곡면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3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오용기 ( 吳 龍 基 ) 남 37세 법곡리 옥천면 대산리 오은동 ( 吳 銀 東 )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추수봉기 주동자 남 62세 법곡리 월경 계곡면 여수리 오종란 ( 吳 鍾 蘭 ) 남 19세 법곡리 해남읍 우슬재 이천리 무이리 남 42세 장소리 ( 李 千 里 ) 오리골 오금록 ( 吳 金 祿 ) 박양용 ( 朴 良 用 ) 배연출 ( 裵 連 出 ) 방상우 ( 方 相 祐 ) 남 24세 여수리 마고리 산 입구 남 49세 성진리 성진리 월암고개 판단 결과 확인 좌익 가족(부) 확인 좌익활동 혐의 확인 부역혐의 (리 인민위원장) 수복과정에서 사살됨 여순사건 가담자 가족(숙부) 성진리 부역혐의 남 29세 가학리 월암고개 (리 인민위원장) 확인 확인 신청인 목격 확인 확인 성진리 남 28세 성진리 월경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신행균 ( 申 幸 均 ) 남 23세 장소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임길생 ( 林 吉 生 ) 남 29세 장소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임성택 ( 林 聖 澤 ) 남 26세 장소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임월택 ( 林 月 澤 ) 남 25세 장소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김인옥 ( 金 寅 玉 ) 성진리 남 20세 장소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김장욱 ( 金 章 郁 ) 남 29세 장소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김장우 ( 金 章 右 ) 남 24세 장소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김소만 남 55세 가학리 가학리 말실수 확인 ( 金 小 萬 ) 진신촌 ( 陳 新 村 ) 여 77세 방춘리 방춘리 마을 김양수 (김양수) 남 37세 반계리 방춘리 뒷산 부역자 가족(조모) 확인 부역혐의 확인 방중이 ( 方 仲 伊 ) 남 47세 성진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방윤경 ( 方 潤 卿 ) 남 49세 성진리 성진리 부역혐의 확인 월암고개 박영애 여 54세 방춘리 옥천면 부역자 확인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57

236 제 2 권 연 번 사건 번호 김진제 ( 金 鎭 濟 ) 박나심 ( 朴 羅 心 ) 김앵심 ( 金 櫻 沁 ) 김구옥 ( 金 九 玉 )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 朴 英 愛 ) 팔산리 밭 가족(모) 남 65세 방춘리 월경 해남경찰 서 여 31세 방춘리 수복 이후 무이리 골짜기 성진리 여 51세 성진리 수복 이후 뒷산 성진리 여 60세 법곡리 수복 이후 말삼정 부역자 가족(부) 부역자 가족(처) 부역자 가족(처) 판단 결과 확인 구금된 후 행불 추정 추정 좌익 가족(모) 확인 현산면 최중규 ( 崔 重 圭 ) 남 42세 학의리 해창리 나붓재 탁진채 ( 卓 眞 采 ) 남 29세 구산리 월송리 딱골재 탁옥진 ( 卓 玉 珍 ) 남 19세 구산리 월송리 딱골재 추수봉기 가담 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김만수 ( 金 萬 守 ) 남 40세 공북리 두모리 바닷가 부역혐의 (수장) 김황배 ( 金 荒 培 ) 남 22세 공북리 두모리 바닷가 초혼식 치름 추정 부역혐의 확인 이성채 ( 李 成 采 ) 남 35세 공북리 두모리 바닷가 부역혐의 (수장) 이성준 ( 李 成 俊 ) 최창윤 ( 崔 昌 允 ) 일평리 부역혐의 남 27세 일평리 소나무 밭 (리 인민위원장) 남 35세 목포시 거주 월송리 월경 배암골 정래구 ( 丁 來 九 ) 남 30세 공북리 화산면 장고개 김병모 ( 金 昞 摸 ) 남 30세 안평리 화산면 장고개 김망덕 ( 金 望 德 ) 여 48세 안평리 화산면 장고개 김영숙 ( 金 英 淑 ) 여 19세 안평리 화산면 장고개 초혼식 치름 추정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구금된 부역혐의 후 행불 추정 부역자 구금된 가족(모) 후 행불 추정 부역자 구금된 가족(동생) 후 행불 추정 정수복 남 60세 공북리 불상지 아들 시신수습 확인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3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번호 ( 丁 水 卜 ) 김명금 ( 金 明 今 )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여 29세 안평리 마을 뒷산 부역자 가족(처) 박옥렬 ( 朴 玉 烈 ) 남 22세 황산리 고담리 성매산 송폰례 ( 宋 폰 禮 ) 정의례 ( 丁 義 禮 ) 판단 결과 연행된 후 행불 추정 부역혐의 출두 후 행불 추정 여 51세 공북리 수복 이후 생사불명 부역혐의 연행된 후 행불 추정 여 19세 공북리 수복 이후 생사불명 부역혐의 연행된 후 행불 추정 화산면 김준호 ( 金 俊 鎬 ) 남 38세 관동리 해창리 나붓재 김연우 ( 金 演 佑 ) 남 23세 관동리 해창리 나붓재 이동운 ( 李 東 云 ) 남 27세 관동리 마명리 도살장 최연석 ( 崔 連 石 ) 남 25세 송산리 구시리 뒷산 박창규 ( 朴 昌 圭 ) 남 21세 평호리 해창리 나붓재 박한옥 ( 朴 漢 玉 ) 남 24세 평호리 해창리 나붓재 박연옥 ( 朴 演 玉 ) 남 19세 평호리 해창리 나붓재 박영록 ( 朴 永 錄 ) 남 26세 평호리 해창리 나붓재 김향수 ( 金 香 洙 ) 남 23세 평호리 해창리 나붓재 이동욱 ( 李 東 郁 ) 남 31세 관동리 석정리 검더굴 최은상 ( 崔 殷 相 ) 김은희 ( 金 銀 姬 ) 김 일 ( 金 日 ) 남 40세 송산리 해창리 나붓재 여 25세 관동리 정머리 뒷산 남 38세 월호리 해창리 나붓재 김덕수 ( 金 德 洙 ) 남 29세 월호리 해창리 나붓재 추수봉기 가담혐의 추수봉기 가담혐의 추수봉기 가담혐의 확인 확인 확인 재학 중 학생운동 주동 확인 부역혐의 (리 인민위원장)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확인 좌익 가족(처) 확인 부역혐의 (리 인민위원장) 확인 부역혐의 확인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59

238 제 2 권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임유선 ( 林 有 先 ) 남 40세 송산리 마명리 검더굴 이재식 ( 李 在 植 ) 해남읍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회) 판단 결과 확인 남 49세 송산리 수복 이후 화산지서 부역혐의 확인 민경대 ( 閔 庚 大 ) 민경남 ( 閔 庚 南 ) 이봉춘 ( 李 逢 春 ) 민병화 ( 閔 丙 華 ) 신금리 보도연맹 희생자 남 27세 백야리 방오리산 유족(동생) 신금리 부역혐의 남 29세 백야리 방오리산 (면 분주소) 확인 확인 신금리 남 26세 백야리 부역혐의 확인 방오리산 신금리 부역혐의 남 27세 백야리 확인 방오리산 (면 인민위원회) 북평면 연 번 사건 번호 신주희 ( 申 周 熙 ) 양윤수 ( 梁 允 洙 ) 문철재 ( 文 哲 在 ) 김천희 ( 金 天 喜 ) 이동호 ( 李 桐 鎬 ) 김귀남 ( 金 貴 男 ) 나영석 ( 羅 永 石 )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좌일지서 남 34세 만수리 뒷산 배암골 골 남 24세 평암리 짜기 영전리 마 남 50세 평암리 월경 을회관 남창리 붉 남 39세 평암리 은잔등 남 27세 북평면 용일리 월송리 새 노재 남 30세 남창리 이진리 야 산 남 42세 서홍리 옥천면 영 춘리 판단 결과 좌익혐의 확인 좌익혐의 확인 좌익혐의 확인 부역혐의 (리 인민위원회) 확인 부역혐의 (인민위원회) 확인 부역자 가족 (사촌) 확인 좌익 가족(형) 확인 김봉현 ( 金 奉 玄 ) 남 23세 내동리 월경 행방불명 부역혐의 연행 된 후 추정 행불 삼산면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3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번호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판단 결과 김재근 ( 金 在 根 ) 김일남 ( 金 一 男 ) 문준용 ( 文 俊 龍 ) 김시종 ( 金 時 鍾 ) 남 59세 안동리 안동리 망 령골 여 20세 안동리 안동리 망 령골 남 30세 신흥리 창리 남산 뫼 남 25세 안동리 수복 이후 해남읍 금 강굴 개인감정 확인 개인감정 확인 부역혐의 확인 개인감정 희생자 옷 수습 추정 옥천면 윤성하 ( 尹 成 夏 ) 박상원 ( 朴 相 源 ) 남 30세 용동리 해남읍 우 슬재 남 51세 용동리 만대산 골 짜기 부역혐의 확인 좌익활동한 사 람으로 오인 확인 연 번 화원면 사건 번호 희생자 성별 당시 나이 김하태 ( 金 河 台 ) 남 46세 매월리 신덕리 안골 정문기 ( 鄭 文 基 ) 남 28세 매월리 신덕리 안골 정문순 ( 鄭 文 巡 ) 남 29세 매월리 수동고개 골짜기 판단근거 당시 주소 희생일시 희생장소 희생경위 시신 참고인 수습 진술 기타 판단 결과 부역혐의 (면 인민위원장) 확인 부역혐의 확인 부역혐의 확인 김상태 ( 金 相 泰 ) 남 25세 매월리 수동고개 골짜기 부역혐의 확인 양암국 ( 梁 岩 局 ) 남 29세 별암리 수동리 앞바다 부역혐의 (수장) 추정 나. 희생자 수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61

240 제 2 권 해남지역에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전체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 악하기는 어려웠다. 사건발생기간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한국 전쟁 전후까지로 상당히 길고, 여러 가지 사건이 중첩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경찰서 등 관련 기관에 전체 희생자 수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붓재, 주산동 뻔지, 붉은데기, 쑥고개 등에서 일어난 집단희생 사건은 희생자 수를 대략 확인하였다. 한편 사건 당시 해남경찰서에 근무하면서 부역자 처리기준 등을 만들었던 경찰 출신 참고인 이 은 한국전쟁 중 해남군 관내 희생자는 좌우익 모두 합쳐 700여 명 정도 고 진술하였다. 335) 그러나 부역자 처벌이 지서별로 해남경찰서장 명령 없이 행해진 뒤 보고 가 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 숫자가 정확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해남군 유족회 336) 는 해남군 관내에서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1,86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 또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 사결과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표 5>는 해남유족회 주장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비교한 것이다. <표 5> 해남유족회 주장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해남읍 우슬재 유족회 주장 장 소 인 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120여 명 한국전쟁 이전 좌익혐의자 다수 희생337), 정확한 인원 파악하지 못함. 산이면 주산동 뻔지 150여 명 24~28명 희생338), 주산동 뻔지 외 진산리 뻔지, 초송리 앞산, 두목마을 뒷산 등지에서도 다수 희생. 339) 산이면 초두리 저수지 30여 명 집단희생사실을 확인했으나,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지 못함. 340)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200여 명 한국전쟁 이전 60~70명341), 수복 이후 한 번에 10~15명씩 여 러 차례 희생. 342) 화산면 해창리 마을 뒷산 500여 명 해창리 마을 뒷산이 어디인지 확인하지 못함. 화산면 장고개 50여 명 수복 이후 현산면 주민 다수 희생, 정확한 인원 파악하지 못 함. 343) 335) 참고인 이 (당시 해남경찰서 수사과 근무), 진술녹취내용( ). 수복 후 통계를 내보니 해남군 관내 한국전쟁 희생자는 700여 명(좌우익 포함) 정도였다. 336) 2002년 결성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4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유족회 주장 장 소 인 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마산면 노하리 붉은데기 48명 두 차례에 걸쳐 40여 명 희생, 두드럭재에서도 20여 명 희생. 344) 마산면 장성리 골짜기 50여 명 인원미상 희생 확인. 계곡면 월암고개 150여 명 여러 차례에 걸쳐 다수 희생 확인, 정확한 인원은 파악하지 못 함. 345) 계곡면 방춘리 주민 200여 명 20여 명 희생. 346) 계곡면 용로리 새터 30여 명 파악하지 못함. 다만 지서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무이리 오리 계곡면 신성리 지서 뒤 50여 명 골에서 다수 희생. 347) 송지면 산정리 산진목 30여 명 수복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수 희생. 348) 송지면 치소리 쑥고개 30여 명 30여 명 희생, 배암골, 해원리 연골, 어불도 해상(수장) 등지에서 도 다수 희생. 349) 북일면 좌일 잔등 20여 명 좌일지서 뒤쪽에서 다수 희생. 350) 북일면 오심이재 50여 명 현산면 공북리 주민 100여 명 다수 희생, 새노재 다리밑, 남창리 붉은잔등 등지에서도 다수 희 생. 351) 삼산면 남산뫼 50여 명 40~50명 희생. 353) 공북마을 총 40여 가구 중 호당 평균 2~3명 희생되었다는 진술 이 있음. 352) 18곳 1,860여 명 337) 신청인 오종식, 진술조서( ). 338) 참고인 김해동, 진술조서( ); 신청인 공하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홍원, 진술조서 ( ). 339) 신청인 최봉순, 진술조서( ); 신청인 오석연, 진술조서( ); 신청인 박인환, 진술조서 ( ); 신청인 박홍력, 진술조서( ); 그 외 다수 신청인, 참고인 진술조서. 340) 신청인 김성신, 진술조서( ). 341) 참고인 김연복, 진술조서( ); 참고인 채남두, 진술조서( ) 3쪽. 342) 신청인 최형완, 진술조서( ); 참고인 김정근, 진술조서( ) 3쪽. 343) 참고인 임낙진 정형진, 공동진술조서( ); 신청인 김옥모, 진술조서( ). 344) 참고인 이병덕 이남기 이형진, 공동진술녹취내용( ); 그 외 다수 신청인, 참고인 진술조서. 345) 신청인 방형식, 진술조서( ); 참고인 최봉우, 진술조서( ); 신청인 박종석, 진술조서 ( ). 346)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347) 신청인 이정수, 진술조서( ); 참고인 김봉태, 진술조서( ). 348) 신청인 고진택, 진술조서( ); 참고인 강평수 강성칠, 공동진술녹취내용( ); 그 외 다수 신청인, 참고인 진술조서. 349) 참고인 강평수 강성칠, 공동진술녹취내용( ); 신청인 정인수, 진술조서( ); 그 외 다수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63

242 제 2 권 다. 가해주체 이 사건의 가해행위자는 경찰과, 경찰의 지휘 명령 감독 아래 놓여 있던 의용경찰, 의용소방대,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이다. 경찰은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이 주 가해행위자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제8관구 경찰 청 소속 경찰로 구성된 토벌대 354) 도 가해에 가담했다. 수복 이후에는 해남경찰서에서 의용경찰을 모집한 뒤 각 지서에 배치하여 의용소방대 와 함께 경찰 보조 인력으로 활용하였으므로 이들도 가해에 가담했다. 355) 한편,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살해과정에는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원들도 가담하였는데 이들도 경찰의 지휘 또는 감독 아래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찰관으로 근무했던 참고인들은 수복 이후 각 지서마다 경찰이 5~8명 정도 있었으며 구국연맹, 대한청년단, 의용경찰, 의용소방대 등이 경찰의 지시를 받고 활동했다 고 진술하였다. 356) 라. 가해의 위법 여부와 책임소재 이 사건은 경찰, 우익단원들이 비무장 주민들을 좌익활동이나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 로 살해한 것이다. 사건발생 당시는 해방 이후 좌우익간 대립이 극심한 시기였고 전시였 으므로 국민의 권리가 충실히 보호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최소에 그쳐야 한다는 헌법 원칙 357) 이 아니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빼앗아도 되는 법적 공백상태는 아니었다. 신청인, 참고인 진술조서. 350) 참고인 박동안, 진술조서( ). 351) 신청인 이덕모, 진술조서( ); 참고인 이삼호, 진술조서( ). 352) 참고인 장인조, 진술조서( ). 353) 신청인 김성관, 전화통화내용( ). 354) 해남경찰서 피습 사건 이후 제8관구 경찰청은 토벌대를 구성하여 입산자 및 지하에서 활동하 고 있는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가 희생되었다.(호남신문, 해남문화원, 해남 근현대 신문자료 집성Ⅰ, 2001, 192쪽에서 재인용) 355) 참고인 이 (당시 해남경찰서 수사과 근무), 진술녹취내용( ). 356) 참고인 이 (당시 해남경찰서 수사과 근무), 조 (해남경찰서 정보3계장 및 관내 여러 지서장 역임), 김 (당시 해남경찰서 근무) 진술녹취내용( ). 357) 제헌헌법 제28조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은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4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특히 부역자혐의자에게는 국방경비법 이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 령 등을 적용하여 재판을 거쳐 형을 집행하도록 법적으로 실체적 절차적 규정이 있었으 나, 이 사건 희생자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 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가해자인 경찰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 다. 경찰은 상당수 희생자들이 자신의 부역활동을 뉘우치고 자진 출두하거나 자수를 했 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불법 살해하였다. 이 사건에서는 개별 사건의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가해행위 자가 경찰관이거나, 경찰의 지휘 명령 감독 아래 있는 의용경찰, 우익단원들이었으므 로 그에 대한 1차적 책임은 관할경찰서장에게 귀속된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 사건이 발 생한 때가 전시 사회혼란기이기는 하나, 경찰이나 그 지휘 명령 감독 아래 있는 조직 구성원들이 공권력을 오 남용하거나 불필요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통제 예방하지 못한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Ⅲ.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론 가. 진실화해위원회는 전라남도 해남군 주민 김귀남(다-446) 등 159명이 1948년 8월 15 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경찰 및 우익단체원에게 좌익, 부역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나. 본 사건 희생자로 확인 추정되는 사람은 김귀남( 金 貴 男, 다-446), 김택우( 金 澤 祐, 다-459), 이형근( 李 亨 根, 다-460), 오경순 吳 京 順, 다-465(1), 이병회( 李 炳 會, 다-619), 양암국( 梁 岩 局, 다-621), 오경록( 吳 警 祿, 다-622), 박병길( 朴 炳 吉 ), 박종호( 朴 鍾 浩, 이상 다 -623), 양산옥( 梁 山 玉, 다-625), 박나심( 朴 羅 心, 다-1023), 박종철( 朴 鍾 哲, 다-1074), 탁진 채( 卓 眞 采 ), 탁옥진( 卓 玉 珍, 이상 다-1075), 오명탁( 吳 鳴 鐸, 다-1078), 강갑동( 姜 甲 同, 다 -1080), 오 종( 吳 鍾, 다-1081), 방중이( 方 仲 伊 ), 김앵심( 金 櫻 沁, 이상 다-1082), 방상우 ( 方 相 祐, 다-1083), 공길종( 孔 吉 宗, 다-1288), 박종주( 朴 鍾 柱, 다-1291), 김일재( 金 日 在, 다 -1292), 김오진( 金 五 眞, 다-1293), 남호걸( 南 豪 傑, 다-1294), 나영석( 羅 永 石, 다-1298), 오 유록( 吳 有 祿, 다-1299), 고광용( 高 光 用 ), 고광채( 高 光 彩 ), 김대심( 金 大 心 ), 고 (호적 미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65

244 제 2 권 기재, 이상 다-1303), 고광철( 高 光 喆, 다1304), 오종란( 吳 鍾 蘭, 다-1305), 장홍만( 張 洪 滿 ), 장태순( 張 泰 順, 이상 다-1309), 박정연 朴 正 連, 다-1310(1), 최은상( 崔 殷 相, 다-1311), 박양용( 朴 良 用, 다-1485), 임사례 任 四 禮, 다-1490(1), 이광춘( 李 光 椿 ), 임순례( 林 順 禮, 이상 다-1510), 정부환( 鄭 富 煥, 다-1911), 오화탁( 吳 華 鐸, 다-2223), 오완용( 吳 完 鏞, 다 -2224), 김기복( 金 基 楅, 다-2225), 김 일( 金 日 ), 김덕수( 金 德 洙, 이상 다-2227), 김월봉 ( 金 月 奉, 다2229), 한삼성( 韓 三 成, 다-2230), 정천수( 鄭 千 洙, 다-2231), 정재문( 鄭 在 文, 다 -2232), 서여산( 徐 如 山, 다-2233), 이토성( 李 土 星, 다-2350), 박옥렬( 朴 玉 烈, 다-2354), 정 인안( 鄭 仁 安, 다-2671), 김철효( 金 哲 孝, 다-2672), 정인석( 鄭 仁 石, 다-2673), 정인률( 鄭 仁 律, 다-2674), 신행균( 申 幸 均, 다-2675), 박평금 朴 平 今, 다-2676(1), 박선완( 朴 璿 浣, 다 -2678), 박성대( 朴 成 大 ), 박종완( 朴 宗 完, 다-2679), 강재봉( 姜 在 韸, 다2809), 윤인석( 尹 仁 錫, 다-2810), 정병옥( 鄭 炳 鈺, 다-2811), 정병호( 鄭 炳 鎬, 다-2812), 민경대( 閔 庚 大, 다 -2813), 이봉춘( 李 逢 春, 다-2980), 민병화( 閔 丙 華, 다-2981), 양윤수( 梁 允 洙, 다-3009), 임 유선( 林 有 先, 다-3069), 박영록( 朴 永 錄, 다-3070), 김천희( 金 天 喜, 다-3196), 김정오( 金 正 五, 다-3239), 박한옥( 朴 漢 玉 ), 박창규( 朴 昌 圭, 이상 다-3240), 박연옥( 朴 演 玉, 다-3241), 김망덕( 金 望 德 ), 김병모( 金 昞 摸 ), 김명금( 金 明 今 ), 김영숙( 金 英 淑, 이상 다-3423), 박문탁 ( 朴 文 鐸, 다-3459), 이원빈( 李 源 彬, 다-3460), 문철재( 文 哲 在, 다-3612), 정수복( 丁 水 卜 ), 송폰례( 宋 폰 禮 ), 정래구( 丁 來 구), 정의례( 丁 義 禮, 이상 다-3664), 민채홍( 閔 彩 泓, 다-3826), 민예기( 閔 禮 基, 다-3827), 이성채( 李 成 采, 다-3828), 김향수( 金 香 洙, 다-3829), 이재식( 李 在 植, 다-4047), 이성준( 李 成 俊, 다-4052), 김진제( 金 鎭 濟, 다-4250), 박영애( 朴 英 愛, 다 -4251), 진신촌( 陳 新 村, 다-4252), 방윤경( 方 潤 卿, 다-4263), 최창윤( 崔 昌 允, 다-4601), 김 양수( 金 良 洙, 다-5076), 임길생( 林 吉 生 ), 임성택( 林 聖 澤, 이상 다-5078), 임월택( 林 月 澤, 다 -5079), 윤흥하( 尹 興 夏, 다-5080), 박종복( 朴 鍾 楅, 다-5193), 최연석( 崔 連 石, 다-5206), 김 홍일( 金 洪 一, 다-5211), 이천리( 李 千 里, 다-5212), 오권탁( 吳 權 鐸, 다-5213), 김진문( 金 鎭 汶 ), 김진홍( 金 鎭 洪, 이상 다-5300), 이동호( 李 桐 鎬, 다-5340), 김인옥( 金 寅 玉, 다-5534), 오금록( 吳 金 祿, 다-5668, 6084), 최병임( 崔 炳 任, 다-6083), 오정록( 吳 丁 祿, 다-6310), 정문 순( 鄭 文 巡, 다-6416), 최중규( 崔 重 圭, 다-6524), 박상원( 朴 相 源, 다-6534), 박동현( 朴 東 鉉 ), 오야문( 吳 也 文, 이상 다-6638), 김소만( 金 小 萬, 다-6724), 김장욱( 金 章 郁 ), 김장우( 金 章 右, 이상 다-6726), 이동욱( 李 東 郁, 다-6988), 이동운( 李 東 云, 다-6989), 김은희( 金 銀 姬, 다 -6990), 김재근( 金 在 根, 다-7538), 김일남( 金 一 男, 다-7538, 8427), 문준용( 文 俊 龍, 다 -7538, 7809), 김시종( 金 時 鍾, 다-7539), 김하태( 金 河 台, 다-7565), 정문기( 鄭 文 基, 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4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7798), 박태운( 朴 泰 運, 다-7817), 김봉현( 金 奉 玄, 다-7908), 김연우( 金 演 佑, 다-8000), 김 준호( 金 俊 鎬, 다-8002), 민경남( 閔 庚 南, 다-8010), 오기록( 吳 琦 祿, 다-8030), 김갑수( 金 甲 洙, 다-8037), 최재임( 崔 在 任, 다-8284), 장길선( 張 吉 璿, 다-8287), 배연출( 裵 連 出, 다 -9345), 박종배( 朴 鍾 培, 다-9346), 김은태( 金 銀 台, 다-9347), 김상순( 金 相 順, 다-9348), 박 남용( 朴 南 用, 다-9349), 김기순( 金 己 順, 다-9350), 윤성하( 尹 成 夏, 다-9516), 김만수( 金 萬 守 ), 김황배( 金 荒 培, 이상 다-9517), 이철률( 李 哲 律, 다-9518), 박태길( 朴 泰 吉, 다-10203), 오은동( 吳 銀 東 ), 김구옥( 金 九 玉 ), 오용기( 吳 龍 基, 이상 다-10415), 신주희( 申 周 熙, 다 ), 김상태( 金 相 泰, 다-10548) 등 159명이다. 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었다. 이 가운데 여 성은 22명이고, 10세 이하 어린이는 1명이다. 라. 사건발생 당시가 해방 이후 좌우익간 대립이 극심한 때 또는 전시 수복과정의 혼란 한 때였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 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 고 적법 절차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2. 권고사항 가. 국가의 공식사과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 국가권력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희생자 의 유족을 비롯한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한다. 나. 위령시설 설치 등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진실규명이 된 본 사건의 희생자를 위령하는 사업을 할 것을 권고한다. 다. 가족관계등록부 기록 정정 행방불명 등으로 사망신고를 하지 못하였거나, 사망신고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 유가족 이 원한다면 이를 정정할 것을 권고한다. 해남군 민간인 희생 사건 567

246 제 2 권 라. 인권교육의 강화 진실화해위원회는 군 경찰과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쟁 중 민간인 보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국내법과 관련 국제법 교육을 의무화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4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결정사안 한국전쟁 당시 9 28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16일경 평택경찰서의 지휘 아래에 있던 청북지서와 치안대에 의해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의 주민들이 집단희생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최영화 외 5명을 포함하여 최소 15명 이상의 평택 청북면 주민들이 9 28수복 후인 1950년 10월 16일경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평택경찰서 청북지서와 그 지휘를 받는 치안 대에 의해 청북지서 뒷산에서 집단총살당하였다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초순경 청북면에서 인민군 점령기 리( 里 ) 인민위원회 활동 등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최영화 등 20여 명이 치안대에 의해 삼계리 염전창고와 지 서로 끌려갔다. 이들은 6일 내지 15일 동안 고문을 당하였으며, 1950년 10월 16일 새벽 현 곡리 청북지서 뒷산으로 끌려가 산 너머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이들의 희생사실 은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알려졌으나 희생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수습하지 못했다. 사건 후 현장 부근에 살던 주민들은 암매장되었던 시신의 일부를 목격하기도 하였다. 3. 본 사건 희생자는 최소 15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최영화( 崔 榮 和, 다-5725) 등 6명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었음이 확인되었 다. 그리고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평택경찰서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과 치안대였다. 4. 전시 계엄 아래서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시기였다 하더라도, 경찰과 그의 지 휘 감독을 받았던 치안대가 단지 부역을 했다는 혐의만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헌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다. 전 문 사 건 다-5725,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신청인 최승일 결정일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69

248 제 2 권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이유 기재와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사건접수와 처리과정 최승일이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에서 부역혐의로 민간인이 집단희생된 사건 1) (이하 평 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원회)에 진실규명신청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2007년 1월 9일 조사개 시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 신청서의 접수상황은 <표 1>과 같다. 연번 접수일 사건 번호 최승일 <표 1> 신청서 접수상황 신청인 희생자 사건 당시 주소 최영화(신청인의 부, 남, 당시 51세)외 20여 명 청북면 삼계리 363 나. 신청인의 주장 신청인은 1950년 10월 초순경 평택 청북면 삼계리 주민 20여 명이 인민군 점령기에 부 역을 했다는 혐의만으로 경찰과 우익단체에게 연행되어 삼계리 소금창고에 감금되어 있 다가 10월 16일 청북지서 뒷산에서 집단살해당하였다고 주장하며 진실규명을 요구하였 다. 1) 이 사건은 청북면 12개 리 중 현곡리, 삼계리, 토진리, 어연리, 율북리, 백봉리 등 6개 리에서 발생했음이 확인되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4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2. 조사의 근거와 목적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조제1항제3 호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에 포함된다고 보고 조사개시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의 신원과 희생자 수, 희생과정, 가해과정, 지휘계통 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3. 규명 과제 부역혐의자에 대한 집단살해는 적법한 절차 없이 은밀하게 행해진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사건의 실재 여부 확인과 함께 희생원인, 희생과정, 희생자 신원과 희생자 수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가해과정과 책임주체를 규명하기 위해, 신청인들이 이 사건의 가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치안대의 활동, 경찰의 치안활동, 계엄사령부 등 가해 지휘계통을 밝히고자 했다. 4. 조사방법 가. 신청인 조사 2007년 1월 18일과 2008년 6월 7일 신청인을 조사하였다. <표 2> 신청인 조사 상황 연 번 사건 번호 신청인 희생자와 의 관계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주요 진술내용 최승일 ( 崔 承 日 ) 최영화의 아들 위원회 진술 조서 최영화 등 주민 20여 명이 삼계리 염 전창고로 연행당한 후 총살당했음. 나. 참고인 조사 2007년 6월 13일부터 2008년 5월 20일까지 4명의 피해 관련 참고인을 조사하였다.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71

250 제 2 권 <표 3> 참고인(피해 관련) 조사 상황 연 번 성명 사건 관련성 서정섭 ( 徐 廷 燮 ) 강석호 ( 姜 錫 浩 ) 강옥자 ( 姜 玉 子 ) 진술일 유족 진술 장소 삼덕초등 학교 진술 형태 진술 녹취 유족 위원회 진술 조서 유족 정정오 유족 청 담 동 사무실 참고인의 집 진술 녹취 면담 보고 주요 진술 내용 최영화는 인민군 점령 시 삼계리의 반장이 었으며 이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 음. 강봉열은 허선봉이 당신은 피할 이유가 없 다 고 했던 말만 믿고 나왔다가 희생되었던 것임. 최영화의 딸도 진술인과 함께 희생자들이 구금된 곳으로 밥을 날랐음. 어연리에서는 9 28수복 후 44명이 끌려 가서 4명이 살해당했음. 한편, 2007년 6월 13일부터 2008년 5월 22일까지 군 경 및 목격 참고인 11명을 조사 하였다. 연 번 대상 사건 관련성 1 김종철 ( 金 鍾 哲 ) 진술일 진술 장소 삼계리 주민 희정 슈퍼 2 강신호 삼계리 주민 참고인의 집 정 ( 鄭 ) 유 ( 柳 ) 이 ( 李 ) 임 ( 林 ) 경찰관 경찰관 경찰관 경찰관 김 경찰관 <표 4> 참고인(군 경 및 목격자) 조사 상황 참고인의 집 참고인의 집 영등포내 다방 참고인의 집 참고인의 집 진술 형태 진술 녹취 진술 조서 진술 녹취 전화 통화 진술 녹취 진술 녹취 진술 녹취 주요 진술 내용 전쟁 전 구장을 맡았던 홍 2) 이 인민군 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음. 경찰이 희생자들을 잡으려고 밤중에 돌아다 니던 모습을 목격했음. 진술인이 지리산토벌대에서 복귀했을 때, 평택경찰서에 갇혀 있던 부역혐의자는 없었 음. 수복하면서 해병대가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고 들었음. 평택경찰서 관할 내 보도연맹원을 사살하고 후퇴했다는 말을 들었음. 9 28수복 후 경찰은 되돌아가는 피난민을 막는 역할을 했음. 무법천지라 빨갱이라고 잡혀간 사람은 거의 총살시켰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5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대상 사건 관련성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주요 진술 내용 8 신 현곡리 주민 청북 노인정 면담 보고 삼계리 강봉열 등은 빨갱이 짓을 해서 살해 당한 것임. 9 김완수 삼계리 주민 삼 계 리 노인정 10 정찬조 어연리 주민 참고인의 집 11 최대영 현곡리 주민 참고인사 무실 면담 보고 진술 녹취 진술 녹취 삼계2리에서 5~6명이 희생되었는데 모두 한 집안사람으로 알고 있음. 청북지서로 잡혀간 주민들이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음. 청북지서 뒷산 골짜기에서 총소리를 들었는 데 지금 그 골짜기에는 공장이 들어서 있 음. 다. 자료조사 국가기록원, 경기도경찰청, 평택경찰서 등이 소장하고 있는 문서 자료를 조사하였다. 국가기록원에서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으나 사건 전후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 를 입수하였다. 1) 국가기록원 자료 허 신분장 이 문서는 청북면 토진리 허 의 구속, 재판, 수형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허 은 인 민군 점령기 청북면 내무서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때문에 1952년 4월 22일 징역 5년형 을 선고받았다. 이 문서를 통해 당시 청북면과 포승면 상황을 알 수 있다. 서울지방법원 수원지원, 약식명령 (1952년 6월 30일) 이 문서는 청북면 치안대장이었던 최 ( 崔 )이 1950년 11월 8일경부터 1952년 4 월 21일까지 허가 없이 칼빈소총의 대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벌금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2) 대부분의 참고인은 홍남식으로 부르고 있었다. 홍 ( 洪 )은 제적등본에 기재된 이름인데, 참고인 최 대영이 석 의 한자표기인 錫 까지 기억하고 있었고, 대부분 참고인이 기억하는 그 아들의 이름이 일치하 므로 이하 홍 으로 표기한다. 참고인 강옥자 강신호에 따르면 희생자 강봉열도 대한청년단장이라는 이유로 인민군 점령 직후 인민군 측에 끌려갔었다. 강옥자는 인민군이 아버지를 잡아갔데요. 그래가지고 갔다가 얼마나 두드려 패고 살림은 다 내다가 압수해 놓고 보리쌀 두되, 쌀 서되만 남겨놓고 다 압수를 했 어요. 라고 진술하였다.(참고인 강옥자 진술녹취록, , 2쪽)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73

252 제 2 권 기록한 것이다. 2) 경기도 경찰청 자료 평택경찰서, 직원명부(성적순) 월례보고의 건, 평택경찰서, 직원명부보고의 건, 라. 현장조사 신청인 조사와 함께 사건현장을 방문하여 사건 당시 희생자들이 각각 감금된 곳, 피살 장소로 끌려간 길, 피살장소를 확인하였다. 현장조사내용은 사진과 그림으로 정리하여 문 서 말미에 첨부 자료로 수록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한국전쟁 전의 지역 상황 평택군 청북면 삼계2리는 50여 가구로 구성된 마을인데 남양 홍씨, 수성 최씨가 많이 살았다. 광복 후 수성 최씨였던 최영화는 일제의 신한공사로부터 넘어온 땅의 공출을 놓 고 남양 홍씨였던 홍 ( 洪 )과 갈등이 있었는데, 전쟁 직전까지 이와 관련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3) 한편 전쟁 전 청북면에서도 좌우익의 활동이 있었으나 이들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있 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연리 박 가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한 것으로 알 려져 있으며, 현곡리 최 이 대동청년단장으로서 우익활동의 중심이었음이 진술과 자 료에서 확인된다. 4)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평택에서도 전쟁 전에 좌익인사들이 경찰서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5) 이후 그들은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 3)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2쪽.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홍 이 청북면에서 염전, 담배, 차표 판 매 사업을 하는 큰 부자였다고 진술하였다. 4) 참고인 서정섭, 진술녹취록( ) 5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2쪽; (대한민국)건국 청년운동사 (1989), 1381쪽. 대동청년단 청북면단부 단장 최 외에 부단장 안병욱, 조직부장 최승군, 감 찰부장 나기환, 선전부장 이민선 등이 확인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5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가 인민군 점령 직전에 살해당했다. 6) 나. 인민군의 평택 점령 인민군이 평택을 점령하자 이 지역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평택에서 인민위 원회를 주도한 인물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했던 일본 유학 지식인들이 었는데, 인민위원회는 평택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청년동맹과 여성동맹을 만들고 치안유 지, 적산 관리, 친일파 숙청 등의 활동을 하였다. 7) 청북면에서도 어연리의 박 등 일부 주민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8) 이 시기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인민재판 등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 으나, 서울에서 피난온 우익인사들이 청북면 내무서원 등에게 잡혀간 후 행방불명된 사 건이 진술과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9) 인민군 점령기에 청북면 주민들이 인민위원회로부터 입은 가장 큰 피해는 의용군 징집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7월 20일경에는 인민군 환영대회가 청북국민학교에서 열 렸다. 이때 의용군 징집도 있었는데, 의용군 징집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일부 젊은 이들은 호기심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0) 주 ( 朱 ), 최승길, 최승옥 등 청북면의 5) 참고인 김, 진술녹취록( ) 6쪽. 6) 평택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던 참고인 이, 임, 김 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 당시 보도연맹이라고 있었지요. 좌익 요시찰인들, 그 사람들을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다 일단 가입 을 시켰는데 발발하고 경찰이고 모두 후퇴할 적에 평택 관할에서 보도연맹을 전부 사살하고 남하 했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중략) 아마 지서 관할마다 그게 다 있었을 거예요. 보도연맹 관리하는 곳이 각 지서마다 다 있어요. 경찰서 전체로 하면 군 전체이니까 많은 인원이 되겠지요. 그랬는데 어디로 집결 시켜서 어디서 처형했는지는 몰라요.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 ) 2-4쪽.) 그런데 보도연맹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면 책임자, 무슨 청년 뭐 이런 거. 무슨 책임자들만 경찰에서 조사대상, 사찰대상이었어요. (중략) 어느 지서고 다 그랬어요. 그 사람들이 드나들고 가족같이 지냈었 는데. 그런데 6 25 터지면서 문제가 생긴 거지. (참고인 임, 진술녹취록( ) 4쪽.) 보도연맹원에 대해서 처단하라는 소리는 있었지만 나는 모르지. (참고인 김, 진술녹취록( ) 3쪽.) 7) 평택시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 상권 (2001). 8)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9쪽; 참고인 김종철, 진술녹취록( ) 3쪽; 참고인 정찬조, 진 술녹취록( ) 4쪽. 참고인들 진술에 따르면 청북면 인민위원장은 어연리 박 였으며, 어연리에 서는 차홍석(차주석의 동생)이 리( 里 ) 인민위원장이었다. 홍 은 9 28수복 후 치안대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9) 참고인 김종철은 사촌형이 서울에서 피난왔다가 인민군에게 잡혀갔는데 그 후 행방을 모른다고 진술하였 다. 허 신분장 에서는 서울 용산경찰서 소속 순경 이경준이 허 등에 의해 끌려가 생사불명되었 음이 확인된다. 10) 참고인 최승일, 진술조서( ) 9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2쪽. 참고인 최대영은 형 최재영이 매를 많이 맞았으며 그 상태로 의용군에 끌려갔다고 진술하였다.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75

254 제 2 권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많이 끌려갔는데, 이 중 일부는 탈출하거나 반공포로로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 와 대부분 한국군으로 다시 입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함께 징집되었으 나 돌아오지 못한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다. 11) 참고인 최대용의 진술에 따 르면, 의용군을 다녀온 주민들은 부역혐의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으나 생명까지 위 협받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12) 다. 9 28수복과 경찰 치안 활동 9 28수복 후 1950년 10월 5일 평택경찰서가 공식 복귀했다. 13) 미군폭격으로 경찰서 건물이 무너졌으므로 복귀한 평택경찰서는 평택군 평택읍내 병원과 양곡창고 건물을 이 용하였다. 14) 복귀한 경찰관들은 치안대를 지휘하여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하였으며, 이들 을 양곡창고에 가두었다. 15)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은 계엄 군인들에 의해 분류되었고, 일 부는 송치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대다수는 현지에서 곧바로 총살당했다.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총살했던 상황에 대해 평택경찰서 사찰계 경찰관이었던 김 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무법천지여서 빨갱이라고 잡힌 사람들은 거의 총살시켰지. 끌고 갈 수도 없고 석방시킬 수도 없어서 죽였다고 그래. 16) 11)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청북면에서 최재영 최승옥 최승길 최승일 서정섭 최한구 이근수 이 근도 주 등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여러 가지 사연 끝에 의용군에서 돌아 온 청년들은 대부분 국군 으로 다시 입대하였다. 이들 중 주 는 9 28수복 이후 치안대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일부 참고인들은 주 가 사건 당시 국군 특무대원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 의 군 인사기록에서 1953년 7 월에 입대한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사건 당시 주 가 군인으로서 치안활동을 하였다는 진술은 사실 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12)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7쪽. 최대영에 따르면, 의용군에서 돌아온 사촌 최승옥은 마을 이 발사로서 쉬쉬하기는 했으나 곤란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3) 내무부치안국, 경찰10년사, 1958년, 560쪽. 경감 김원일은 1950년 10월 5일 평택경찰서장으로 인사발령 을 받았다. 14) 참고인 정, 진술녹취록( ) 5쪽. 15) 참고인 임, 진술녹취록( ) 5-6쪽; 참고인 김창문, 진술녹취록( ) 2쪽. 참고인 임 은 계엄 군인들이 평택읍내 양곡창고에서 잡혀온 부역혐의자들을 심사했다고 진술하였다. 16) 참고인 김, 진술녹취록( ) 6쪽. 이외에도 평택경찰서 통신계 경찰관이었던 이 은 경찰의 공식 복귀 전 치안대에 의해 총살당한 사람이 많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로 보아 평택경찰서 로 잡혀간 부역혐의자들 상당수가 희생당했음이 확인되나 이들이 총살당한 장소와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 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5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2. 사건 경위 가. 희생자 연행과정 청북면에서 9 28수복 후 인민군 점령기 부역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최영화 등 20여 명 이 치안대에게 잡혀 청북지서로 끌려가게 되었다. 노부모 때문에 피난을 못했던 최영화는 전쟁 전부터 구장(현 이장) 일을 했다는 이유로 인민군 점령기에 리( 里 ) 인민위원회 반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9 28수복 직 후인 1950년 10월 1일경 치안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17) 대한청년단원이었던 강봉열은 9 28수복 후 대한청년단에 복귀하였으며 전쟁 전부터 했던 강습소 교육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의 위험을 느끼고 방 공호에 피신했다. 18) 피신해 지내던 어느 날, 허선봉(홍 집 머슴)이 당신은 피해 있 을 이유가 없다 고 한 말만 믿고 나왔다가 1950년 10월 7일 연행되었다. 19) 서병철, 서정 수, 강인배도 최영화, 강봉열과 함께 끌려갔다. 20) 인민군 점령기 내무서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진 현곡리 정씨(김철연 집 머슴)는 9 28 수복 직후 치안대에게 연행당할 위험에 처하자 청북국민학교 우물 옆 찔레나무 숲에 숨 어 있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0월 10일경 치안대에게 발각되어 청북지서로 끌려갔다. 21) 청북면 인민위원장 박 어연리 백남후 현곡리 용화 작은아버지의 구체적 희생경 위는 참고인들의 진술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청북지서로 연행되었다고 판단된다. 17)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4쪽. 18) 참고인 강석호, 진술조서( ) 4쪽. 인민군 점령기 청북면 내무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대한청 년단원 출신 강봉열은 국군 수복 직후 부역혐의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참고인 신 는 강봉열 등이 좌익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하였으며, 참고인 강석호는 강 봉열이 최영화와 친해서 함께 끌려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상을 종합할 때, 강봉열은 치안대에 의해 인 민위원회 반장 최영화와 함께 부역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나, 뒤늦게 이를 알고 피신한 것으로 판단된다. 19) 참고인 강석호, 진술조서( ) 4쪽. 20) 이들이 최영화와 함께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진술 외에 다른 목격 진술이 없어 어떻게 연행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21)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4쪽.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77

256 제 2 권 나. 감금 치안대에 의해 연행된 최영화, 강봉열 등 청북면 주민들은 삼계리 염전창고 22) 와 청북 지서 유치장에 6일 내지 15일 동안 갇혀 있었다. 이들은 청북지서와 마을 창고를 오가면 서 고문을 당했다. 이때 이들의 이송에는 발안 등 외부지역에서 온 치안대원들과 청북면 치안대원 주 가 참여하였다. 23) 참고인 강석호(강봉열의 아들)는 창고에 갇혀 있던 강봉열을 면회하면서 당시 창고 안 에 양수펌프가 많이 쌓여 있던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24) 최영화의 딸 최승분( 崔 承 分 ), 강 봉열의 딸 강옥자( 姜 玉 子 )는 창고와 청북지서로 밥을 나른 적이 있다고 한다. 25) 한편, 현곡리 주민 최대영은 청북지서에 감금된 주민들이 매를 많이 맞았으며 밥도 하 루에 한 공기밖에 먹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26) 다. 집단살해와 암매장 1950년 10월 16일 새벽, 최영화 강봉열 서병철 서정수 강인배 정씨 등 20여 명이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밧줄에 묶여 현곡리 청북지서 뒷산으로 끌려가 산 너머 골짜기 27) 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28) 총살된 시체는 암매장되었는데, 희생자 최영화의 유족들은 덮여 있던 흙을 파헤친 후 엉켜있던 시신 속에서 희생자를 찾았다고 한다. 29) 청북지서 뒷산 부근에 살던 참고인 최 대영은 사건 후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밧줄에 묶인 채 암매장되었던 시신의 일부를 목격하 기도 하였다. 최대영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22)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삼덕창고는 사건 당시 배수펌프 등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이후 삼덕국민학교가 되 었다. 23)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1쪽. 참고인 최대영은 당시 청북면에서 활동한 외지 치안대원들은 평택군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었다고 진술하였다. 24) 참고인 강석호, 진술조서( ) 5쪽. 강석호에 따르면, 전쟁 후 삼덕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교 실 한구석에는 부친 강봉열이 갇혀 있을 당시 보았던 양수펌프가 많이 쌓여 있었다. 이를 보고 강석호는 교실이 부친이 감금되어 있던 창고였음을 알게 되었다. 25) 참고인 강석호, 진술조서( ) 4쪽; 참고인 강옥자, 진술녹취록( ) 3쪽. 26)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4쪽. 27) 지금의 현곡산업단지 옆 골짜기로서 희생자 유골이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28)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4-8쪽; 참고인 정찬조, 진술녹취록( ) 3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5쪽. 친인척들에 의해 수습된 최영화의 시신은 총상을 당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29)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8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5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내무서원 정씨가) 끌려간 지 한 일주일이나 되었을까, 지금은 저기 공단이 된 곳으로 새벽에 끌고 갔대요. 밧줄로 묶어가지고. 새벽에 끌고 갔는데 한참 있다가 그 쪽에서 총 소 리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거 인민군들이 또 와가지고 싸움 붙었나 보다 했어요. 나중에 소문으로 들으니 여기 지서에 있던 사람들을 다 쏴 죽였다는 거예요. (중략) 초입 에 아버지 산소가 있었는데, 내가 무서워서 산소도 못 다닌 사람이에요. 나무를 하러 갔다 오면, 아휴! 거기 시체가 반은 묶인 채 퉁그러져 나오고 그랬는데. 30) 라. 시신수습 유족들은 밥을 나르던 가족들과 청북지서에서 심부름을 하던 현곡리 주민 최상래에 의 해 최영화, 강봉열 등의 희생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봉열의 밥을 나르던 딸 강옥자는 치 안대 주 로부터 갇혀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론가 갔다, 이제는 그만 와라 는 말을 들었다. 31) 희생자 최영화의 시신은 사건 다음날인 1950년 10월 17일 청북지서의 급사 최상래의 안내를 받아 그 가족들이 수습하였다. 32) 최상래는 사건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었는데 현장 에 청북지서 경찰이 있었다고 최영화 가족에게 말했다. 33) 강봉열, 서병철 등 그 외 희생 자들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다. 34) 마. 요약 9 28수복 후인 1950년 10월 초순경 청북면에서 인민군 점령기 리( 里 ) 인민위원회, 내 무서, 교육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최영화, 강봉열, 서병철, 서정수, 강인배, 정씨 등 20여 명이 치안대에 의해 삼계리 염전창고와 지서로 끌려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6일 내지 15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외부지역에서 온 치안대원들과 마을 출신 치안대원들에게 고문을 당 했다. 이들의 밥은 그 가족들이 날랐는데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희생자들이 고문당 한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1950년 10월 16일 새벽, 현곡리 청북지서 뒷산으로 30)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4-5쪽. 31) 참고인 강옥자, 진술녹취록( ) 3쪽; 참고인 강신호, 진술조서( ) 6쪽. 32) 참고인 강신호, 진술조서( ) 3쪽;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7쪽. 33)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9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6쪽. 참고인 최대영은 최상래가 지서 일을 하지는 않았으나 지서에 자주 들르는 사람으로 당시 사건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진술하였다. 34) 참고인 강석호, 진술조서( ) 3-4쪽.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79

258 제 2 권 끌려가 산 너머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이들의 희생사실은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알려졌으나 최영화의 시신 외에 수습하 지 못했다. 총살현장을 목격한 최상래에 따르면 사건현장에 청북지서 경찰이 있었다. 사 건 후 현장 부근에 살던 주민들은 암매장되었던 시신의 일부를 목격하기도 하였다. 3. 사건 조사결과 가. 희생자 신원과 희생자 수 희생자 신원은 진술인 3명 이상의 진술 일치 여부, 10월 16일 사망 내용이 기재된 제 적등본과 희생사실 정황의 일치 여부, 사건 당시 현장 목격자가 1명이라도 있는 경우 등 을 종합하여 확인하였다. 그러나 1~2명의 참고인이 희생사실에 대해 진술은 하였으나, 목격자가 없거나 다른 입증자료가 없는 경우는 희생 추정 으로 정리하였다. 1) 희생자 명단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어연리에서는 박 백남후가 희생되었으며, 35) 현곡리에 서는 정씨 용화 작은아버지가 희생되었다. 삼계리에서는 최영화 강봉열 서병철 서 정수 강인배가 희생되었다. 최영화의 제적사항에는 1950년 (음력) 9월 6일(양력 10월 16일) 사망, 백남후는 1950 년 10월 5일 사망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사결과 평택 청북면에서 희생사실이 확인된 희생자와 추정된 희생자의 신원을 표로 정리하면 <표 5>, <표 6>과 같다. <표 5> 확인된 희생자 명단 연 번 1 희생자 당시 나이 최영화 ( 崔 榮 和 ) 성 별 주소 51세 남 청북면 삼계리 363 희생 시기 희생지 청북지서 뒷산 확인 근거 최승일, 서정섭, 김종철, 강신호, 강옥자, 신 진술. 제적등본 35) 참고인 정찬조, 진술녹취록( ) 3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8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5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희생자 당시 나이 성 별 주소 2 강봉열 35세 남 청북면 삼계리 서병철 45세 남 청북면 삼계리 서정수 ( 徐 廷 秀 ) 강인배 ( 姜 仁 培 ) 20대 남 청북면 삼계리 대 남 청북면 삼계리 6 백남후 남 청북면 어연리 97 희생 시기 희생지 청북지서 뒷산 청북지서 뒷산 청북지서 뒷산 청북지서 뒷산 청북지서 뒷산 확인 근거 서정섭, 김종철, 강신호, 강옥자 신 진술 서정섭, 김종철, 최승일 신 진술 서정섭, 김종철, 강신호 신 진술 서정섭, 김종철, 강신호 신 진술 정찬조, 정정오 진술. 제적등본 <표 6> 희생 추정자 명단 연번 희생자 당시나이 성별 주소 희생시기 희생지 추정 근거 1 박 ( 朴 ) 47세 남 청북면 어연리 청북지서뒷산 정찬조, 최대영 진술 2 정씨 남 청북면 현곡리 청북지서뒷산 최대영 진술 3 4 용화 작은아버지 홍 ( 洪 ) 남 청북면 현곡리 확인 안 됨 최대영 진술 40세 남 청북면 삼계리 확인 안 됨 서정섭, 최대영 진술. 2) 희생자 특성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기 면( 面 ) 리( 里 ) 인민위원회 간부들 또는 이들에게 협조적이 었던 주민들이었음이 확인된다. 진술들에 따르면, 어연리의 박 는 청북면 인민위원장 이었으며, 현곡리의 정씨는 청북면 내무서원이었다. 36) 삼계리에서는 최영화가 반장이었 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전부터 강습소 교사로서 활동하던 강봉열과 서병철 서정수 강 인배는 반장 최영화를 도왔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37) 36)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2쪽. 37) 참고인 서정섭, 진술녹취록( ) 5쪽; 참고인 강석호, 진술조서( ) 2쪽. 참고인 강석호는 강봉열이 경기도 화성군 고령리에서도 교육활동을 하여 제자들이 많았으며, 삼덕국민학교 교사들 중에도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81

260 제 2 권 9 28수복 후 청북면에서 부역혐의로 희생된 주민들은 대부분 전쟁 전부터 농사를 생 업으로 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쟁 전에는 마을 대표(구장, 반장) 혹은 보도연맹 원이었으며, 강봉열의 경우처럼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했던 우익인사도 있었다. 38) 결국, 대부분의 희생자는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간부 및 그들에게 협력했던 주 민들이었는데, 이들은 전쟁 전부터 해왔던 마을 대표 일을 하거나 생업을 계속하던 평범 한 농민들이었다. 3) 희생자 수 당시 사건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희생 추정자를 포함하여 삼계리 주민 5명, 현 곡리 2명, 어연리 2명 등 9명이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어연리 2명이 더 희생당했으며, 율 북리 토진리 백봉리에서도 같은 사건의 희생자가 있다는 사실이 신청인과 참고인 진 술에서 확인된다. 39) 신청인 최승일은 당시 사건으로 2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으 며, 참고인 최대영은 15명이 끌려가 총살당했다고 진술하였다. 40) 이상을 종합할 때, 이 사건의 희생자는 최소 15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나. 가해주체 1) 가해자 41) 신원 9 28수복 직후, 희생자들을 연행한 자들은 주로 청북면 치안대와 발안 등에서 지원 나 온 치안대였다. 42) 당시 청북면 치안대를 총괄한 자는 대한청년단 청북면단부 단장이었던 강봉열의 제자들이 많았다고 진술하였다. 38) 참고인들 진술에 따르면, 최영화와 홍 은 구장 또는 반장이었으며, 강봉열은 강습소에서 교사로 활동 하였다. 한편, 홍 은 보도연맹원이었으며, 강봉열은 대한청년단원이기도 했다. 참고인 강옥자는 강봉열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대한청년단 (삼계리) 단장이었어요. 그래 청년들을 교회 운동장에서 훈련시키더라고요. 그리고 맨날 우리 아버지가 김구 선생님, 이준 열사 이런 분 사진을 집에다 붙여놓고, 그 당시에 김구씨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날 신문을 보시더니 막 우시더라고요. 시골에는 신문이 이튿날에 오잖아요. (강옥자, 진술녹취록, , 4쪽). 39) 참고인 서병철, 전화통화( ) 2쪽; 참고인 정정오, 면담보고( ) 2쪽; 신청인 최승일, 2차 진술조서( ) 1쪽. 40)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5쪽. 참고인 최대영은 15명이 청북지서 뒷산으로 끌려갔다고 진술 하였다. 41) 이 보고서의 가해자 는 집단희생 사건의 가해 책임이 발생되는 행위의 실행자 및 교사자로서, 희생자의 감시 연행 감금 총살 은폐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를 말한다. 부역혐의 희생 사건에 있어서 당 시 가해자의 대부분은 경찰과 치안대 조직에 속해 있었다. 42)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7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11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6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최 이었다. 43) 이들은 청북면 유지였던 홍 의 후원을 받았으며, 44) 신원을 알 수 없 는 외지 치안대원 외에 주, 최 ( 崔 ) 등이 이 지역 치안대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총살에 참여한 자들은 경찰과 치안대원으로 추정되는데, 치안대 원 최 외에 이들의 구체적인 신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건 당시 평택지서에는 경사 이 ( 李 ), 순경 조 ( 趙 ) 이 ( 李 ) 김 ( 金 )이 근무했을 것으 로 추정된다. 45) 참고인들은 사건 당시 청북면의 경찰과 치안대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삼계리에서는 홍 주 김 정 정 ( 鄭 )이 경찰의 부역혐의 자 색출과 연행활동에 협조하였다. 46) 치안대 주 가 진짜 빨갱이였는데, 오히려 국군 수복 후 치안대 활동의 중심이 되 었다. 47) 치안대원 주 는 강옥자가 밥을 전해주기 위해 면회를 가면 이제 그만 와라 고 했 다. 48) 당시 치안대를 총 책임진 사람이 대한청년단 최 이었으며, 그의 아들 최 이 청북지서 뒷산 총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고 있다. 49) 총살 당시 현장에 경찰도 있었다는 말을 최상래(최영화의 희생장소를 알려 줌)로부 터 들었다. 50) 당시 청북지서 경찰관으로 김씨가 있었다. 51) 이상을 종합할 때, 현장에서 직접 총살을 집행한 주체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나, 부 43) 참고인 서정섭, 진술녹취록( ) 5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12쪽. 서울지방법원 수원지원, 약식명령 ( ). 최 은 1950년 11월 8일 이등중사 이종철의 칼빈 총 대검을 1952년 4월 21일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10만원의 벌금형을 받기도 하였다. 44)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9쪽; 신청인 최승일, 2차 진술조서( ) 3쪽. 신청인 최승일 은 홍 이 인민위원회에서 부역을 한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치안대에 돈을 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45) 평택경찰서, 직원명부보고의 건 ( , ). 46) 참고인 서정섭, 진술녹취록( ) 6쪽. 47) 참고인 김종철, 진술녹취록( ) 3쪽. 신청인 최승일은 주 가 이송하던 부역혐의자들을 감시하 면서 때리는 모습을 가족들이 목격했다고 진술하였으며, 참고인 서정섭 강석호 최대영도 주 가 치 안대에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48) 참고인 강신호, 진술녹취록( ) 6쪽. 49)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5쪽. 50)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8쪽; 참고인 최대영, 진술녹취록( ) 5쪽. 참고인들 진술에 따르면, 최상래는 청북지서에 드나들면서 심부름을 하던 현곡리 주민으로 당시 사건을 목격할 수 있는 처 지에 있었고 실제 사건현장을 목격한 주민이다. 51)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9쪽.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83

262 제 2 권 역혐의자를 연행 고문 살해한 주체는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과 치안대였음은 분명하다 고 판단된다. 2) 가해 지휘계통 치안대 활동은 비상시 향토방위령 에 근거하고 있다. 52) 이에 따르면, 치안대장은 관 할 경찰서장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치안대원은 경찰이 허가한 무기를 휴대하도록 되어 있 다. 따라서 이들이 관할 경찰서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청북면의 치안대 역시 청북지서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사건 당시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 생존자와 치안대 생존자가 없어 관련 내용에 대한 진술 청취가 불가능했으며, 관련 자료 역시 평택경찰서 등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즉, 가해주체 측의 진술과 자료에 의해 당시 청북지서와 치안대의 직접적인 지휘 감독 관계를 입증하 지 못하였지만, 조사결과 신청인 및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당시 청북지서의 치안대에 대 한 지휘 감독 관계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참고인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청북면에서 활동한 치안대원들이 청북지서를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53) 밤에 경찰들이 부역혐의자를 잡기 위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54) 사건 당시 총살현장에 경찰이 함께 있었다. 55) 지서 단위에서도 무기관리체계가 있었다. 56) 당시 평택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던 임, 김 은 부역혐의자 색출에서의 치안대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 사람들(치안대)이 정보를 파악해서 명단 작성까지 했나봐. 경찰이 들어오니까 물론 52) 비상시 향토방위령 (1950년 7월 22일 선포)은 1각 부락을 기본단위로 자위대를 조직할 것(제5조), 2자 위대원은 부락의 대한청년단원 또는 대한청년단 리동단장이 지정한 자 중에서 대장이 선정할 것(제6조), 3자위대 대장, 부대장은 대한청년단원 중 도지사가 임명할 것(제7조), 4정보수집, 방위, 방범을 임무로 하며(제8조), 5관할구역 내의 부역자 체포 후 24시간 내 경찰관서에 인도해야 하며 관으로부터 소지를 허 한 무기를 휴대할 것(제10조, 제11조), 7자위대장은 관할경찰관서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제12조)고 규정 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참고인들은 대한민국 경찰의 치안활동을 보조하는 민간단체 일반을 치안대 고 지칭하였다. 그리고 이 치안대 의 조직단위 구성 임무 성격 활동 지휘감독 등이 비상시 향토방 위령 의 자위대 와 일치한다. 또한 이러한 조직이 치안대 로 불린 사실은 서울고등법원 형재 항제11호 판 결문( ), 대법원 판결문 제4287형상18호( ), 대법원 판결문 제4288형상9호( ) 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치안대 는 비상시 향토방위령 의 자위대 에 대한 통칭으로 판단된다. 53) 참고인 강옥자, 진술녹취록( ) 9쪽. 54) 참고인 강신호, 진술조서( ) 5쪽. 55)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9쪽. 56)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 ) 7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6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경찰한테 명단을 넘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들이 어떤 사람이 부역을 많이 했는지 어 떻게 알아요. 57) 치안대는 경찰들 보조야. (부역자들) 감시도 해주고. 치안대는 내지( 內 地 ) 사람들이니깐 동네를 잘 알고 그랬지. 경찰서에서 심부름 시키고 사찰계에서 빨갱이들 시찰하고 잡는 거 도와주고. 대한청년단 같은 거 있잖아. 58) 이상을 종합하면, 청북지서의 치안대에 대한 지휘 감독 관계의 구체적 입증자료 부족 에도 불구하고, 증언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바 치안대가 경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므로 청북면의 치안대는 청북지서의 지휘 감독을 받았을 것으 로 판단된다. 평택경찰서장은 청북지서나 치안대의 부역혐의자 살해계획을 미리 알고 있 었으면서 묵인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청북지서 또는 평택경찰서장이 경찰 혹은 치안대에 게 총살지시를 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3) 가해 고의성과 위법성 유무 가) 가해의 고의성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1인공치하 잔류자는 모두 조사, 2조사 후 3등급 분류, 3부역자 의법 조치, 4부역자 엄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1950년 10월 13 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59) 위의 방침을 살펴보면, 이승만 정부가 정부 피 난 이후 잔류자 모두를 잠재적인 부역혐의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역자 의법 조치 를 위해 만든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하 특별조치령) 은 포고 당시부터 극형이 남발될 위험이 많았던 법령으로 비판을 받았다. 결국 부역자 엄벌 의 사회적 분위기는 경찰과 치안대에 의한 불법감금과 불법처형을 일반화시킬 개연성을 높였다고 판단된다. 희생을 당한 20여 명의 청북면 주민들도 9 28 국군 수복 직후 1950년 10월 1일경부터 57) 참고인 임, 진술녹취록( ) 10쪽. 58) 참고인 김, 진술녹취록( ) 3-4쪽. 59) 3단계로 구별-이 정훈국장 부역자처단방침 천명 (동아일보, ) (전략) 이제 군의 방침을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적성부구의 잔류자로서 끝까지 지조를 굴치 않고 지하 에 잠복하여 애국운동을 계속한 자는 이를 조사하여 표창할 것이며 지하운동은 못하였더라도 지하에 잠 복하여 끝까지 놈들에 협력 않은 자는 무조건 원상으로 복귀시킬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위협에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 본의 아닌 협력을 한 자는 협조동기 또는 정도를 물적 심적으로 엄격히 조사하여 본의 아 닌 협조이었음이 판명될 때는 원상으로 복귀시킬 것입니다. 셋째, 전선에서 혹은 후방에서 실질적으로 역 도들에 적극협력한 자 또는 자기면죄 등으로 무고한 자 등은 의법 엄중처단될 것입니다.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85

264 제 2 권 인민군 점령기 인민위원회 간부를 지냈던가 아니면 그에게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부역 혐의를 받고 연행당했다. 그 후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부역혐의에 대한 소명의 기회나 재 판의 절차도 없이 10월 16일경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청북지서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결국 청북지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는 1경찰에 의해 치안이 회복된 상황에서, 2부역 혐의자를 고문 조사한 후, 3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하는 일의 위법성을 알고 있으 면서도, 4총살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5부역혐의자들을 집단살해 하였다. 이는 우발적 행위로 볼 수 없다. 나) 사건 당시의 법적 상황과 위법성의 확인 희생자들의 특성에서 확인한 것처럼 희생자들은 대부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었 다. 이들은 비록 인민위원회 간부 등 부역했을 것으로 의심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구체적 혐의 없이 치안대에게 연행되어 구타 고문을 당하는 가혹한 환경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부역자처리 관련 법률인 특별조치령 에 의하여 재판절차를 거쳤어야 했으 나 이 조차도 없이 집단총살을 당한 것이다. 따라서 경찰과 경찰의 지휘를 받는 치안대가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행위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인 생명권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국가는 폭력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일차적 의무이다. 그런데도 국가권력 기구인 평택경찰서 청북지서가 이를 보조하는 치안대 등의 민간치안조직을 지휘하여 부 역혐의자들을 강제연행하고 불법구금 고문을 한 사실, 그 후 청북지서 뒷산으로 끌고 가 비밀리에 집단살해한 사실은 반인권적 반인륜적 국가범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당시가 전쟁 중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었다고 하나, 정부 또한 경 찰과 치안대 등이 저지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다. 사건 후 유족 피해 신청인에 따르면, 최영화의 부친 최경도( 崔 敬 道 )는 아들이 연행되어 고문당하는 장면 을 직접 목격한 후 실신하여 1950년 10월 7일 사망하였으며, 조모 강씨도 울화병으로 1950년 12월 28일 사망하였고, 처 방창인도 울화병으로 1951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60) 최 영화의 아들 최승일은 1952년 군에 입대하였으나 같은 부대 정보과에 끌려가 전기고문 등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제대 후에는 대한조선공사에 취직하였으나 몇 개월 지나지 않 아 해고된 일도 있었다. 그리고 본적지 희생자 명의의 집터와 토지들도 타인 명의로 이전 60)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1쪽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6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되었으나 부역자 집안이라는 억압 분위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한 다. 61) 라. 요약 9 28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16일경 평택 청북면에서 살해된 주민들은 부역혐의자들 이었다. 청북면에서 희생이 확인된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를 받았던 최영화 외 5명이다. 이들 외에도 박 외 2명이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희생 규모는 최소 15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조사결과, 현장에서 직접 총살을 집행한 가해자 신원과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 및 치안 대의 지휘 감독 관계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나, 부역혐의자를 연행 고문 살해 한 주체가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과 치안대였음이 분명하며, 치안대가 경찰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진술 내용의 일관성으로 보아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과 그의 지휘 감독을 받는 치안대가 이 사건의 가해주체였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평택경찰서장은 이 사건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묵인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청북지서 또는 평택경찰서장이 경찰 혹 은 치안대에게 총살 지시를 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희생자들이 비록 부역혐의를 받고 있었으나 재판절차 없이 총살한 행위는 반인권적 국 가범죄에 해당한다. 사건 당시가 비록 전시 계엄 하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시기였다 하더라도, 경찰과 그의 지휘 감독을 받았던 치안대가 단지 부역을 했다는 혐의만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다. 사건 후 후유증으로 사망한 유족들도 있었다. 최영화의 부친 최경도( 崔 敬 道 ), 조모 강 씨, 처 방창인이 울화병으로 사건 직후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연좌제 피해와 재산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61) 신청인 최승일, 진술조서( ) 10쪽.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87

266 제 2 권 Ⅲ.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론 가. 최영화 외 5명을 포함하여 최소 15명 이상의 평택 청북면 주민들이 9 28수복 후 인 1950년 10월 16일경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평택경찰서 청북지서와 그 지휘를 받는 치 안대에 의해 청북지서 뒷산에서 집단총살당하였다. 나. 9 28수복 후인 1950년 10월 초순경 청북면에서 인민군 점령기 리( 里 ) 인민위원회 활동 등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최영화 등 20여 명이 치안대에 의해 삼계리 염전창고와 지 서로 끌려갔다. 이들은 6일 내지 15일 동안 고문을 당하였으며, 1950년 10월 16일 새벽 현 곡리 청북지서 뒷산으로 끌려가 산 너머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이들의 희생사실 은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알려졌으나 희생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수습하지 못했다. 사건 후 현장 부근에 살던 주민들은 암매장되었던 시신의 일부를 목격하기도 하였다. 다. 본 사건 희생자는 최소 15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최영화 ( 崔 榮 和, 다-5725), 강봉열, 서병철, 서정수( 徐 廷 秀 ), 강인배( 姜 仁 培 ), 백남후(이상 미신청) 등 6명이다. 라. 희생자 대부분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평택경찰서 청북지서 소속 경찰관과 치안대였다. 마. 전시 계엄 하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시기였다 하더라도, 경찰과 그의 지휘 감 독을 받았던 치안대가 단지 부역을 했다는 혐의만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다. 2. 권고사항 가. 국가의 공식사과 한국전쟁 중 평택 청북면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이 경찰과 산하조직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살해된 것에 대해 국가는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사과하고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6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나. 위령사업의 지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유가족 및 지역주민들이 위령사업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 할 것을 권고한다. 다. 제적부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 문서기록의 정정 국가는 유족들이 원할 경우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 문서기록을 법적 절 차 등을 통하여 정정할 것을 권고한다. 라. 평화인권 교육의 강화 국가는 경찰 등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쟁 중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법률과 국제인도법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전쟁이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가져온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육 등을 통해 널리 알림으로써 국민의 평화의식을 제고할 것을 권고한다.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89

268 제 2 권 [별첨 사진자료] <사진 1> 삼계리 염전창고가 있었던 삼덕초교 <사진 2> 청북지서가 있었던 청북파출소 <사진 3> 청북지서 뒷산 골짜기 희생 추정지 (오른쪽에 현곡산업단지가 있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6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별첨 그림자료] <그림 1> 청북면 사건발생위치도 평택 청북면 부역혐의 희생 사건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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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결정사안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한 시기 군 경의 지원을 받은 강화향토방위특 공대 가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에서 최소 139명 이상의 민간인을 부역혐의자 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윤기항( 尹 基 恒 다-27) 등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39명을 포함한 430여 명 이상의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들이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점령 시기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한 시 기에 강화향토방위특공대 에 의해 특공대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면 지서 등으로 연행 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갑곶나루, 옥림리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온수리 사슬재, 선원 대문고개,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등지로 끌려가 집단학살된 사실이 확인 되었다. 이와 같은 민간인 집단학살은 강화군의 12개면에서 조직적으로 벌어졌는데, 이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 가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점령 시기의 부역자는 물론, 부역혐의자 와 그들의 가족이 북한 재점령 시 북한에 협력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본 사건 희생자의 특징을 살펴보면, 신원이 확인된 139명 중 부역혐의자 가족이 83 명으로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피신귀향자가 9명으로 6.4%, 부역혐의로 이미 사 법상 처벌을 받은 특사령 출소자도 8명으로 전체의 5.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여성이 42명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10대 미만도 14명으로 전체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삼산면(석모도)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희생 사건의 경우는 남녀노소를 가 리지 않고 17가족 53명이 살해되었다. 3. 신청사건 중에서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김덕임( 金 德 任 다-225)등 47명이 다. 신청하지 않았으나 강화 사건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안용호( 安 用 浩 ) 등 92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593

272 제 2 권 명이다. 4.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의 가해주체는 강화향토방위특 공대 (대장 최 )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경기도경찰국장 한경록의 부역자 처리와 관련 된 지침에 따라 1951년 1 4후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화경찰서장 김병구와 청년방위 군 강화지대장 송정헌으로부터 가해 관련 지시와 함께 무기를 지원받았고, 그들의 묵 인 방조 하에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또한 강화특공대는 1951년 1 4 후퇴 이후에는 서 해안지역에서 첩보전 등 비정규전을 수행하고 있던 한국군과 미군으로부터 무기 등을 지 원받고 그들의 묵인 방조 하에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당시 서해안지역에서는 적정( 敵 情 ) 및 각종 전술정보 수집, 피난민 심문 등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한 국군과 미군의 정보 첩보부대가 경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강화특공대 등 우익치안대에 무기와 식량, 군복 등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서해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 국군은 물론 미8군도 강화특공대에 의해 자행되고 있던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 인지했 으면서도 묵인 또는 방조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한국군과 미군이 강화 민간인 집단학살에 직접 관여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5. 강화향토방위특공대 의 민간인 살해행위는 전시에 군경이 후퇴한 치안공백 상태에 서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명백한 위법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바뀌는 상황이라고 하여 강화향토방위특공대 에게 무기 등을 제공함으 로써 준군사조직으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민간인 살해를 지시하거나 묵인 방조한 군 경의 행위는 사형금지법( 私 刑 禁 止 法 )과 국방경비법( 國 防 警 備 法 ) 등에 어긋나 며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이다. 6.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직접적인 지휘책임은 관할 경찰과 군에 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전시 사회혼란기에 군경과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폭력행사를 통제 감독하지 못 한 국가에 귀속된다. 전 문 사 건 다-27 외 25건,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신청인 윤석만 외 25명 결정일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7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이유 기재와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신청접수와 처리과정 신청인 윤석만 외 52명은 2005년 12월 5일부터 2006년 11월 30일 사이에 진실 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한국전쟁 시기 경기도 강화군 내 강화면, 하점면, 양사면, 선원면, 내가면, 길상면, 삼산면, 서도면, 교동면 등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 단희생 사건의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5월 30일 윤석만(사건번호 다-27) 외 30명의 신청사건에 대 해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으로 조사개시 결정하였다. 여기에 2006년 10월 24일 신청인 전종국(사건번호 다-4552) 외 2명의 사건을 1차 병합하고, 2007년 1월 30일 신청인 김의 용(사건번호 다-6946) 외 18명의 사건을 2차 병합하였다. 그리고 2007년 12월 26일 최태 육(사건번호 다-2719)이 신청한 1명의 사건을 미군 사건으로 이관하였다. 따라서 신청사 건 수는 총 52건이 되었다. 그러나 조사과정 중 가해주체가 구별됨에 따라 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에서 발생한 26명의 신청사건을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으로, 교동도에 서 발생한 26명의 신청사건을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으로 각각 분리하였 다. 1)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사건과 관련된 신청서 접수 상황은 <표 1>과 같다. 1) 황해도 출신 우익치안대인 교동해병특공대 가 교동도 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다. 따라서 교동도지역 사건을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으로 분리하였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595

274 제 2 권 <표 1> 신청서 접수 상황 연번 접수일 사건번호 신청인 희생자(이름, 성별, 출생년도) 신청인과의 관계 윤석만 윤기항( 尹 基 恒, 남, 1917년생) 부 안학섭 안익섭( 安 益 燮, 남, 1925년생) 남동생 서영선 김덕임( 金 德 任, 여, 1914년생) 모 서영선 서화석( 徐 和 錫, 남, 1950년생) 남동생 서영선 구씨 ( 久 氏, 여, 1875년생) 조모 황인선 황철익( 黃 哲 益, 남, 1923년생 부 조광호 조진숙( 趙 鎭 淑, 남, 1931년생) 부 정영춘 정영진( 鄭 榮 振, 남, 1924년생) 부 서영선 최진국( 崔 鎭 國, 남, 1917년생)부부 이웃 서영선 오천용( 吳 千 龍, 남, 1914년)가족 이웃 이진항 민태식( 閔 泰 植, 남, 1902년생) 장인 고문자 최정순( 崔 正 順, 여, 1917년생) 모 유희종 유석근( 劉 石 根, 남, 1894년생) 부 서대원 서영석( 徐 永 錫, 남, 1927년생) 부 최태육 김태인 이웃 서영선 윤기항 이웃 서영선 윤기태 이웃 서영선 전동학( 全 東 學, 남, 1903년생) 이웃 전종국 전동실( 田 東 實, 남, 1923년생) 부 김의용 김영순( 金 濚 淳, 남, 1911년생) 부 유제행( 柳 濟 行, 남, 1911년생) 부 김정선( 金 貞 善, 여, 1922년생) 모 유수정 유정애( 柳 貞 愛, 여, 1942년생) 누나 유형근( 柳 亨 根, 남, 1948년생) 남동생 유정옥( 柳 貞 玉, 여, 1950년생) 여동생 김용령( 金 龍 怜, 여, 미상) 조모 박옥희 박인오( 朴 仁 五, 남, 1924년생) 오빠 박상덕 박윤원( 朴 允 遠, 남, 1896년생) 부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7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번 접수일 사건번호 신청인 희생자(이름, 성별, 출생년도) 신청인과의 관계 (대표 박상진) 고기선 고영례( 高 永 禮, 여, 1906년생) 박인순( 朴 仁 順, 여, 1933년생) 박상준( 朴 商 俊, 남, 1947년생) 윤원병( 尹 元 柄, 여, 1914년생) 고경애( 高 敬 愛, 여,1932년생) 고종선( 高 鐘 善, 남, 1936년생) 고구선( 高 求 善, 남, 1941년생) 고원순( 高 元 順, 여, 1950년생) 고영우( 高 榮 佑, 남, 1927년생) 모 여동생 남동생 모 누나 형 남동생 여동생 작은숙부 박상덕 박진원( 朴 震 遠, 남, 1910년생) 부 노영조 노성극( 盧 星 極, 남, 1896년생) 조부 조씨( 趙 氏, 여, 1895년생) 조모 송경숙 한씨( 韓 氏 여, 미상) 정용덕( 鄭 容 德, 남, 1930년생) 김영인( 金 英 仁, 여, 1920년생) 정용덕의 자(미상) 안귀상 안보명( 安 甫 命, 남, 1904년생) 부 이상국 이윤봉( 李 允 奉, 남, 1907년생) 부 시조모 시부 시모 시동생 이정희 이동식( 李 東 植, 남, 불명) 조부 이영업( 李 永 澲, 남, 1907년) 부 나. 신청인의 주장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하여 최소 600여 명에서 1,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강화도, 석모 도, 교동도 지역에서 강화치안대 및 강화향토방위특공대 (이하 강화특공대), 대한청년단 과 청년방위군, 경찰, 미군첩보부대(KLO), 타이거여단 등에 의해 인공 통치 시기 2) 부역 2) 여기서 인공 통치 시기 라 함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9 28수복 전까지 북한정 권이 남한지역을 점령한 시기를 말한다. 당시 북한정권은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를 남한의 각 도, 군, 읍, 면, 리에 조직하였는데, 자의든 타의든 인민위원으로 참여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597

276 제 2 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집단희생되었다고 신청인들은 주장하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 명을 신청하였다. 강화 유족들은 2000년 7월부터 현재까지 국방부, 강화경찰서, 국민권익위원회(전 국민 고충처리위원회), 강화군청, 인천지방경찰청, 행자부, 법무부 등에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진상규명 과 명예회복에 관한 청원서 를 여러 차례 제출한 바 있다. 이들의 탄원으로 의 정부경찰서는 2000년 9월 19일에 전( 前 ) 강화특공대 대장 최 에 대한 수사를 하였으 며, 강화경찰서는 2001년 3월 19일과 4월 3일에 전 강화특공대 감찰대원 박 과 김 에 대한 수사를 하였다. 강화경찰서는 수사결과 2001년 4월 6일에 구체적인 수사는 정부 차원에서 고도의 법률정책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사안으로 내사종결한다 는 민원사건 결과통지서 를 서영선 등 유족들에게 보냈다. 강화 유족들이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강화도의 옥계 갯벌 300명, 철산리 300명, 온수리 160명, 강화경찰서 10여 명, 석모도의 매음리 해안 150명, 교동도 100여 명 등 총 1,020명 이고 본 조사의 대상 지역이 아닌 교동도를 제외하면 900여 명에 달한다. 2. 조사의 필요성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은 집단학살로 인하여 1951년에 이미 사회문제가 되었다. 법무 부장관이 강화 민간인 학살에 대한 검찰사무보고에 관한 건 을 1951년 8월 30일에 국무 총리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으며 3), 미군도 강화 민간인 학살 관련자에 대한 재판이 열릴 것이라는 합동주간분석보고서(JOINT WEEKA) 2 를 1951년 8월 21일 주한미군과 미극 동군사령부, 워싱턴사령부에 보고한 적이 있었다. 4)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강화특 공대 사건 인천지청에 이송 학살자들은 사설단체가 아닌 미군 소속 유격대 을지타이거 여단(을지병단) 이라는 제목으로 223명의 부역자와 가족을 학살한 강화도 을지병단 5) 사 로 희생당하였다. 3) 피고인 김 등은 해병특공대에 재임 중 금년 1년 1월 상순경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각 파견대에 지 시하여 부역자 및 전 가족을 처단케 하고, 그 결과 강화도 교동도의 도민 212명을 부역자라고 하여 총살하 였음. 해병특공대는 사설단체입니다. 법무부장관, 검찰사무보고에 관한 건 ( ). 4) The Ganghwa-island Lynch case will begin soon on the docket of the Taegu Public Court presided by judge Cho Chang Hi. The accused are being prosecuted on the charges of forming a private party and shooting about 200 peoples to death on the island of Ganghwa over a period of several months. NARA, RG 319, 합동주간분석보고서(JOINT WEEKA) 2, 1951, Box 61, No Gun Ri Research Document ~ , 국사편찬위원회 수집분. 5) 을지병단은 강화자치유격대, 홍현치안대, 평산치안대, 연백치안대, 해병특공대 등 우익치안대들로 구성되 었다. 대구 경북 지방병무청, 한국전쟁기 8240부대 연표와 8240부대원 명단 (1961)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7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건이 대구 육군본부 법무감실과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조사가 이루어지다가 지난 해 12월 15일 김 외 7명이 인천검찰지청으로 이송되었다 고 보도한 바 있다. 6) 대구지방검찰청은 강화특공대 대장 최 외 5명을 1951년 7월 5일 살인죄 로 구속하 고 김 외 2명을 같은 달 6일 살인죄로 구속하여 조사한 후, 김 외 6명을 같은 달 25일 대구지방법원에 살인죄로 기소하였으나 최 외 1명에 대해서는 기소중지처분을 하였다. 7) 최 외 1명을 제외한 위 피고인들에 대한 사건은 대구지방법원에 구속 기소 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강화특공대 하점지대 부대장 이 에 대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 사건과 함께 대구지방법원에서 그 관할권이 있는 서울지 방법원 인천지원으로 같은 해 12월 23일 이송되었고 그 후 이들은 인천지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8) 그러나 살인죄 로 구속된 강화특공대 대장 최 건은 기소중지됨에 따라, 강 화 민간인 학살 사건 은 교동사건 가해자 일부만 처벌을 받은 채 유야무야 끝났다. 그러나 강화도와 교동도 등에서는 위 재판이 종결된 이후에도 UN직할 유격대 및 첩보 관계기관에 의해 불법감금, 체포, 강간, 살인 등의 사건 이 계속 발생하였고 그 도를 더하 여 갔다. 국회에서는 신익희 의장 명의로 강화도 및 교동도에 국군파견에 관한 건의 이 송의 건 을 1952년 2월 21일 총무처로 보냈으며,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마련되지 않자 강화도 및 교동도에 국군파견 건의에 대한 처리전말에 관한 건 9) 을 같은 해 11월 14일 다시 총무처로 보내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이 건을 보고함과 동시에 국방부장관에게 조 속하게 처리할 것을 아래와 같이 요청한 바 있다. 지난 2월 23일자 국의( 國 議 ) 제622호로 건의한 제기의 건에 관하여 (중략) 그 실정에 있어서는 추호의 개선도 없음은 물론 UN직할 유격대 및 첩보기관 수는 증가하는 일로이니 근황에는 무려 50여 개 기관이 협소한 강화도에 난립되어 있어 재해에 신음하는 원주민은 6) 신문에는 이송된 날짜, 이송기관이 사실과 다르게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 조선일보( ) 7) 참고인 최, 진술조서( ). 최 은 1951년 6월 20일경 백두산으로 침투하라는 명령이 을지병 단에게 떨어져 연대장 직권으로 병단을 해산하였기 때문에 대구 육본 감찰실 황 중령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보민회 회장 유경근이 부산으로 이승만, 윤재근, 장택상, 신성모 를 찾아가 구명활동을 한 결과 사흘 만에 풀려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단원 황 은 양민을 학살하였 다는 이유로 최 이 구속되었다고 들었다. 참고인 황, 진술조서( ). 8) 당시 피고인들에게 1952년 4월 30일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서울지검 인천 지청, 형사사건부 제3-1권 권행번호 1862 (1951);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형공 제660호 형제 1862호 판결문 (1951); 참고인 이 진술조서 ( ); 서울지검 인천지청, 형사사건부 제3-1권 권행번호 1320 (1951). 9) 총무처, 강화도 및 교동도에 국군파견 건의에 대한 처리 전말에 관한 건 ( ); 총무처, 강화도 및 교동도에 국군파견에 관한 건의 이송의 건 (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599

278 제 2 권 부식물, 연료, 침구의 일부 등을 자진 제공하는 데도 불구하고 불법 감금 체포를 남발을 위 시하여 강간 살인 등 비인도적인 만행을 자행하여 양민의 생명 재산을 위협 탈취하는 사건 이 계속 일어나니 (중략) 조속히 UN군 사령부와 긴급 연락을 취하여 여하한 만행을 엄 단케 하는 동시에 훈련된 정규 국군을 배치하여 강화주민들로 하여금 생업에 전념케 요청 하나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이미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의 불법성에 대 해 한국의 국회, 정부, 언론과 미국의 관련기관들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간 강화 유족들 의 여러 차례에 걸친 진상규명 요청이 있었고, 희생자 수 등 사건의 규모 등을 종합적으 로 고려하여,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3. 조사 근거와 규명 과제 가. 조사 근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신청사건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조제1항 제3호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에 포함된다고 결정하여 조사개시를 하였다. 나. 규명 과제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하여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경위와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신원, 그리고 희생자 수를 밝히고자 하였 다. 신청인들은 강화치안대 및 강화특공대 등의 우익치안대와 군경이 부역혐의자와 그들 의 가족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학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청인 주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정확한 가해주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사건 가해자의 소속과 지휘 명령 계통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가해주체가 경찰, 한국군, 그리고 미8군과 어 떤 지휘 협조 관계에 있었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4. 조사방법 가. 신청인과 참고인 조사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7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1) 신청인 조사 2006년 6월 19일부터 2007년 12월 31일까지 신청사건 26건을 대상으로 1 2차 조사를 하였다. 10) <표 2> 신청인 조사 상황 연 번 사건 지역 강 화 면 신청인 (사건번호) 윤석만 (다-27) 서영선 (다-2657) 서영선 (다-2658) 정영춘 (다-307) 이진항 (다-310) 서영선 (다-225) 서영선 (다-226) 유수정 (다-9816)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읍사무소 진술조서 강화읍사무소 진술조서 강화읍사무소 진술조서 1차 진실화해위원회 2차 진실화해위원회 3차 진실화해위원회 각 진술조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인천시청 신청인 조사 내용 윤기항이 강화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사망 다-27 중복 신청 다-27 중복 신청 1950년 1 4후퇴 전후 연행된 정영진의 시신을 강화경찰 서 유치장에서 수습함 민태식은 아들 때문에 1951년 1월 경 월곶지서로 끌려갔 다고 함 1950년 12월 말경 서유석이 곡물검사소에 있는 어머니 김 덕임을 보았다고 함 1951년 1월경 강화특공대원 송아무개가 1살 된 서화석을 어머니에게 데려다준다며 강화경찰서로 데려간 후 행방불 명 됨 1951년 2월 초순경 집 마당에 김정선 등 5명의 가족 시신 이 가마니에 덮여 있었음 10) 사건번호 다-9997은 신청인 박상진이 5명을 대표하여 신청한 사건으로 관련자 5명에 대한 신청인 조사를 하였다. 사건번호 다-2657과 사건번호 다-2658은 사건번호 다-27(신청인 윤석만)과 중복 신청된 사건임을 확인하였고, 사건번호 다-6946은 사건번호 다-6946(신청인 김의용)과 중복 신청된 사건임을 확인하였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01

280 제 2 권 연 번 사건 지역 신청인 (사건번호)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진술조서 신청인 조사 내용 희생 당일 특수부대가 강화를 휩쓸고 다녔다는 소문을 들 었음 9 10 서영선 (다-308)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서영선 (다-309) 특공대원 김 으로부터 양조장에 갇혀 있다 죽은 사람은 최진국 부부, 오천영 부부와 며느리들, 윤기항이었다고 들음 11 선 원 면 이상국 (다-10545) 인천시청 진술조서 이윤봉은 1950년 9 28 수복 후 선원면 대한청년단원(단 장 김 ) 7~8명에 의해 선원지서로 끌려간 후 사망 이 은 1950년 9 28수복 후 구속, 마산형무소에서 1952년 1월 6일 병사 하 점 면 유희종 (다-480) 황인선 (다-305) 1차 진실화해위원회 2차 인천시청 각 진술조서 강화읍사무소 진술조서 1951년 1월 5일 유석근이 카빈총을 든 경찰관 1명과 나간 지 30분 후 2발의 총소리가 났으며, 다음날 유석근의 시 신을 수습 강화특공대에 잡혀간 아버지 황철익이 학살당하였다고 고 모 황봉림과 조부가 전언. 14 안학섭 (다-224)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동생 안익섭과 8촌 안기섭, 동리사람 황철익이 찬우물고개 로 끌려가 살해되었다고 전해 들음. 15 이정희 (다-10648) 수서동자택 진술조서 1950년 11월 19일(음력) 면특공대가 이영업을 철산리 바닷 가에서 살해했다고 전해 들음. 조부 이동식은 고문으로 사망 양 사 면 김의용 (다-6946) 최태육 (다-2717) 강화군청 진술조서 김영순은 1951년 1월 16일 특공대 감찰대원인 장 에 의해 철산포구에서 살해됨(근처에 살고 있던 서 목격) 다-6946 중복 신청 18 전종국 (다-4552)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신청인의 부 전동실은 1950년 음력 11월경 양사지서에 구 금된 후 행불 19 길 상 면 안귀상 (다-9998) 길상면사무소 진술조서 1951년 1월 경 치안대원들에게 끌려간 아버지 안보명의 시 신을 사슬재에서 수습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8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지역 신청인 (사건번호) 조광호 (다-306) 서영선 (다-2752)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읍사무소 진술조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딸전미옥) 신청인 조사 내용 조진숙은 강화특공대에 체포되어 온수리 사슬재로 끌려가 살해됨 당시 전동학이 사슬재에서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들음 내 가 면 삼 산 면 서 도 면 서대원 (다-1966) 서영선 (다-227) 박상덕 (다-9997) 고기선 (다-9997) 송경숙 (다-9997) 노영조 (다-9997) 이옥순 (다-9997) 고문자 (다-344) 박옥희 (다-9963)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1차 차 삼산면매음2리노인회관 각 진술조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인천시청 진술조서 삼산면매음2리노인회관 진술조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조서 부산자택 진술조서 인천시청 진술조서 서영석은 1950년 10월 31일경 내가지서에 들렸다 몽둥이 를 맞고 사망 1951년 1월 18일경 할머니 구씨가 두 명의 특공대원에게 잡혀갔고, 이후 5촌 친척아저씨가 구씨의 시신을 외포리 소리고개에서 수습 아버지(박윤원), 어머니(고영례)와 누이 박인순, 아기 박상 준이 치안대원들에 의해 살해됨. 이때 희생자 중 일부는 시신을 수습했지만 바다로 떠내려간 시신들은 수습하지 못 함 1950년 음력 12월 19일 군인이 학살 동네 어른들이 그들을 찌투 찌투( G-2)라고 불렀던 것이 생각남 윤원병, 고종선, 고구선, 고원순, 고영우의 시신은 수습했으 나 고경애와 조모 조씨의 시신은 물에 휩쓸려가 찾지 못함 인공 통치 시에 시부 정용덕 등이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바닷가로 끌려가 총살당함 아버지 노성극 등 매음리 사람 20여 명이 1950년 음력 12월 20일경 어류정 개학뿌리로 끌려가 총살당함 1950년 음력 섣달 18일경 밤 시아버지 박진원이 치안대에 끌려간 후 사망. 동네사람들과 함께 갯벌로 가보았지만 시 체들이 다 쓸려나가 하나도 없었음 어머니 최정순과 3개월 된 남동생은 아버지의 좌익혐의로 인해 학살당함 가해자는 방첩대(CIC)로 확신함 1950년 초겨울로 오빠 박인오는 고 의 사주로 서도지 서에서 고문으로 죽었다고 함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03

282 제 2 권 2) 참고인 조사 신청사건과 직 간접으로 관련된 참고인 76명을 조사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사건 현장의 목격자인 강화특공대원과 소년단원 등을 참고인 자격으로 집중 조사하였다. 다음 <표 3>은 피해자 측 참고인 조사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표 4>는 특공대 측 참고인 조 사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표 3> 피해자 측 참고인 조사 상황 연 번 1 사건 지역 참고인 전 용정리 전문자 사건 당시 관련성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군청 녹취록 피해자 측 참고인 조사내용 1951년 1월 창리 건너편 갑곶지서(선원면 신정리 소재) 에서 사람들을 붙잡아다 죽인다는 이야기 들음. 나중에 특공대가 죽인 것을 알았음 2 유 대산리 소년단 목격자 강 3 화 김 국화리 전문자 면 4 류 관청리 전문자 자택 녹취록 자택 녹취록 자택 진술조서 유제행은 1951년 1 4후퇴 직후 돌모루포구로 들어오 다 특공대에게 체포되어 강화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 는데 특공대가 총을 난사하였으나 생존하였지만 돌아온 특공대에게 가족들까지 다시 살해됨 설날 이후 친정에 다니러 왔던 김 는 목격자인 부 모로부터 유제행이 먼저 살해된 후 모 김정선과 외조모 김용영, 동생 유정애, 유형근, 유정옥 등 5명이 살해되 었다고 들었음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밥을 해줬다고 유수정(본명 : 류 춘근)의 어머니, 친조모, 누나, 동생 둘이 특공대의 총 에 맞아서 죽었는데 유수정과 형 유상근은 이웃의 친척 집에 놀러가 화를 면했다는 말을 들었음 5 고 인화리 전문자 위원회 적대사건 신청인 진술조서 1950년 음력 8월 19일경 후퇴하던 북한 내무서원 등에 게 살해되어, 부패해서 알 수가 없는 아버지의 시신을 바지를 보고 찾아왔다고 함 6 선 원 면 이 창리 목격자 강화군청 진술조서 손발이 뒤로 묶인 채 머리는 피와 모래투성이로 퉁퉁 부어 있는 이윤봉의 시신을 이 의 부, 희생자의 형 이윤근, 사촌 이순복 등 집안사람들이 선원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수습하여 옴 7 하 점 면 고 6 25참전유공 자회 위원회 인천남구지회장, 진술조서 51년 3월 친구 이 과 양사면 북성리 소재 4863부 대에 지원. 그 부대에는 소위 2명과 대위 김동석이 있 었고 첩보부대인지는 나중에 앎. 4863부대는 1사단 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8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사건 당시 관련성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피해자 측 참고인 조사내용 목격자 속으로 당시 특무대, 첩보대로 불렸음. 1지대는 강화면 에 있었고 철산리, 북성리, 하점면에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음 8 고 9 양 사 면 삼거리 미신청 유족 오 친척 전문자 10 이 친척 전문자 위원회 진술조서 하점면 삼거리 인민위원장을 지낸 부친 고해희가 11월 말경 체포되어 연행되었음. 1950년 12월 28일경 사망 소식을 들음 전동실이 인공 통치에서 의용군에 끌려갔는데 내가 무 슨 죄가 있냐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디론가 끌려가 돌 통화보고서 아오지 않았음 전동실이 의용군에 나갔다 왔는데 당시 잘못되었다는 통화보고서 말을 들었음 11 안 온수리 사슬재 생존자 강화읍사무 사슬재 방공호로 끌려갔으나 희생 직전 총알이 빗발치 소 는 언덕 아래로 도망하여 생존함 진술조서 길 상 온수리 사슬재 12 서 면 목격자 13 고 온수리 사슬재 목격자 길상면 사무소 진술조서 강서구청 진술조서 길상면 장훙리 소재 누나 집으로 피신한 조진숙을 51년 1월 6일 특공대원 김 등 2명이 연행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함 길상면 장흥리 사슬재 시신 중 아기를 안은 이용덕(당 시 남로당원으로 의사)의 부인이 있었다는 소문도 들었 음 14 내 가 면 서 관청리 고천리 유족 위원회 진술조서 경찰 공백기에 치안대원들에 의해 서영선의 모친 김덕 임, 동생 서화석이 끌려가서 희생되었는데 시신은 수습 하지 못하였고 작은어머니 구씨 역시 치안대를 만나서 총살당함 15 삼 산 면 16 노 박상진 매음리 소년단원 목격자 매음리 소년대장 목격자 위원회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사건 3~4일 후 박상진, 부 박홍원, 박상득 셋이서 어 류정으로 가보니 시신 10여 구가 있었음 1950년 음력 12월 18일 오후 3시경 살해된 첫 날로 어 류정(썰물이 되면 떨어진 섬)에서 살해됨. 19일은 개학 뿌리(밀물이 되면 모래지)에서 살해됨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05

284 제 2 권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사건 당시 관련성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피해자 측 참고인 조사내용 17 노 매음리 목격자 매음리 노인회관 진술조서 남편 고영우가 감형령으로 출소했다가 1950년 음력12 월 20일경 개학뿌리에서 살해됨 18 서 도 면 김 주문리 목격자 1950년 9 28수복 이후 서도(주문리 소재)지서로 불려 갔는데 얼마 뒤 시신을 가져가라고 해서 삼촌과 함께 통화보고서 김 이 지서로 가 시신을 찾아 가까운 곳에 묻었음 <표 4>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 상황 연 번 1 사건 지역 참고인 김 2 송 사건 당시 관련성 강 3 화 최 강화특공대 대장 면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경찰서 경찰관, 전( 前 )강화군 참 강화군청 전경찰유공자회 진술조서 회장 일민주의청년단 통신부장, 위원회 강화치안대 통신 진술조서 부장 의정부시청 진술조서 녹취록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경인군검경합동수사본부 조사관으로 1달 동안 파견되 어, 2,600여 건의 강화 부역자관련 서류를 검토하였음. 그 서류는 강화의 대한청년단, 치안대, 각 지서 수사과 나 정보과에서 보낸 서류들임 1950년 10월 18일경 강화경찰이 복귀하자 그동안 작성 한 부역자 조서, 무기, 기물 등과 감금했던 몇 백 명의 부역자들을 강화경찰에게 인계함 청년방위군지대장 송정헌은 우익청년들에게 빨갱이를 잡아들이라 고 지시. 비밀청년단체의 명칭을 강화특공 대 로 정하였음 4 한 강화특공대 통신부장 인천시청 진술조서 이북에서 강화로 넘어온 사람들을 죽인다며 갑곶리 삼 바시(배를 대는 곳)로 데리고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 마도 바다에 수장됐을 것이라고 함 삼산 후퇴 전인데 강화경찰서로 김인칙 소령 등 3명이 와서 대장에게 G-2가 쓰여 있는 헝겊을 주며 응할 사 람에게 주라고 하였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8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5 황 사건 당시 관련성 직할소년단 감찰 차장, 전( 前 ) 강화청소 년유격대 회장 6 황 대산리소년단 7 최 을지병단 대원 8 김 월곶리소년단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군청 진술조서 위원회 진술조서 9 안 관청리소년단 통화보고서 10 고 직할소년단 11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돌모루전투는 전투라 할 수 없는데 민간인들이 배에서 내려 여기저기로 달아나다가 전투 없이 잡혔음 자신의 국민학교 담임선생님도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되 어 돌아오다가 잡혀서 죽었음 길상면 온수리는 적법 절차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음 1951년 1 4후퇴 이후 군 면단위의 특공대 지시에 의 해 소년단이 조직되어 자신이 대산리소년단 대장을 맡 았음. 강화면 관청리(알미) 거주 안영호와 이화여대 재학 중 이었던 딸 등을 포함한 200여 명의 좌익인사들 중 몇 몇이 끌려 나가 발로 밟히고 구타를 당하여, 몇몇 사람 들은 다음날 사망하였음 인천시청 1951년 1월 19일을 전후하여 화도면특공대 대장 윤 이 매음리 주민 40여 명이 죽었다고 하여 삼산에 왔 위원회 는데, 다시 50여 명을 잡아놓고 있어 윤 은 석모리 각 진술조서 에 주둔한 강화특공대 최 에게 확실치도 않은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 고 하여 살려주었다고 함. 당시 가 해자는 특공대 낙오병이라는 말을 들었음 위원회 특공대원들이 동네에 나가 악질분자를 체포해왔고, 처 진술조서 형하는 것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많이 죽였음 통화보고서 소년단은 통행인을 검문하고, 해안경비도 서고, 좌익혐 의가 있는 사람의 집안도 감시하고 그들이 발견되면 군 인이나 특공대에게 알려주고, 부역한 사람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담당하였음 소년단은 1950년 1 4후퇴 전에 향토방위와 좌익척결 통화보고서 을 목적으로 조직된 것임 남 남산리소년단 년 음력 10월경 조직된 남산소년단은 월북 등 좌 익혐의가 있는 집안을 감시하고 발견되면 특공대에 알 통화보고서 려주는 일을 함 12 유 월곶리소년단 주로 1951년 1 4후퇴 후 특공대가 주축이 되어 인민 군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척결하여 많은 주 통화보고서 민들이 좌익으로 몰려 죽은 줄로 알고 있음. 13 박 월곶리소년단 많은 주민들이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고 알고 있음 통화보고서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07

286 제 2 권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사건 당시 관련성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14 현 국화리소년단 위원회 진술조서 1951년 1 4후퇴 전후 대한청년단 관계자가 집으로 와 아버지가 2차 반동분자리스트에 기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1차 대상은 이미 총살했다고 하여 아버지 혼자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몇 달 후 돌아옴 15 선 원 면 문 선원면소년단 위원회 진술조서 인공 통치 시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특공대원들에 의해 유지수, 구하서, 구용서, 허지수(선원면 연리), 양효성 (선원면 냉정리) 등 40~50여 명이 끌려감. 참고인의 10촌 인척인 문원기도 가족들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희생됨 16 이 강화특공대 하점지대 부대장 강화군청 진술조서 1951년 1 4후퇴 이후 이북에서 하점면으로 들어오던 지방 좌익 60여 명을 잡아 강화경찰서 본대로 보냈음 17 황 하점면소년단 김포시청 진술조서 1950년 9 28수복 후 피난 갔다 돌아오니 8촌 형 황 철익, 사촌 황, 안, 안학섭, 안기섭, 안상섭 등 이 부근리치안대장 이 에게 잡혀 경찰서로 넘겨졌 다는 소식 들었음 이 은 자기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부근리치안 대장과 이장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가락질로 많 은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함 18 하 정 신봉리소년단 점 면 19 안 신봉리소년단 20 전 이강리소년단 강화군청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1950년 음력 11월경 각 면단위 소년단이 조직되어 부 역혐의자와 지방좌익들을 색출하는 일을 했고 그 와중 에 많은 동네사람이 특공대에게 잡혀 희생을 당함 소년단원 2~3명이 특공대원들을 따라 월곶인지 옥림 으로 부역혐의자를 잡으러 갔는데, 당시 연행된 사람들 은 강화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갑곶에서 살해되었다고 함. 1950년 말경 하점면 이강리 소년대장 유 이 소년단 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하여 아무 생각 없이 가입하였음 21 이 하점면소년단 개조 5명으로 편성하여 망월 해안을 순찰하였음. 당시 통화보고서 부역혐의자로 경상도 사람 박씨가 잡혔던 기억이 남 22 홍 장정리소년단 통화보고서 인공 통치에서 동네주민 거의 모두가 부역으로 차출되 었는데 9 28수복 후 우익이 주체가 되어 부역혐의자 들을 색출하여 적극 가담자 다수를 잡아갔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8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23 사건 지역 참고인 사건 당시 관련성 김 송해면소년단 24 김 송해면소년단 송 25 해 면 김 송해면소년단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군청 진술조서 위원회 진술조서 통화보고서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황운영은 부역혐의로 치안대에게 잡혀 송해면 당산리 마을 앞 도로에서 50여 명의 소년단원들로부터 발로 차이고 구타당하여 절명. 당일 인근 야산에서 딸 1명을 제외하고 황운영의 가족들은 전부 총살당하였음 1950년 9 28수복 후 특공대가 소년단의 정보를 받아 송해면 오류천에 살던 월북한 함 과 김 의 모친 을 끌고 가는 것과 도망가지 못한 숭뢰리 구일회 등을 잡아가는 것을 목격함 지방좌익으로 2명은 생포되고 3~4명은 살해되었는데 생포된 사람 중 1명은 이창재의 부친으로 총상으로 인 해 그 뒤 사망하였고 1명은 강화면 거주 성명불상자였 음 26 이 송해면소년단 년 1월 10일경 송해면 당산포구에서 9명을 잡았는 데 그 중 1명은 송해면 지서에서 나머지 8명은 양오리 통화보고서 야산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음 27 김 송해면소년단 당시 강화경찰서 유치장에서 좌익혐의로 100여 명이 통화보고서 총살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음 28 구 송해면소년단 인공 통치 시 인민군에게 동조했거나 부역을 했다는 이 통화보고서 유로 동네사람들이 특공대에게 잡혀가 살해됨 29 계 강화특공대 인화리 파견대장 위원회 진술조서 김 양사면소년단 강화군청 양 진술조서 사 31 면 한 양사면소년단 통화보고서 32 한 북성리소년단 월곶리 거주 4촌 형이 리인민위원장을 지내다 월북하 였는데 1951년 1 4후퇴 직전 월곶리파견대장 전 에 의해 형수가 총살된 것을 알게 되었음 강화특공대가 삼산으로 후퇴했을 당시 최석출(철산리 인민위원원장)의 부인이 삼산 친정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특공대가 본부로 그녀를 끌고 와 똥을 싸도록 구 타함. 최석출의 2살짜리 아기와 최석출의 처형이 함께 살해되었다고 들었음 인민군에게 동조하거나 부역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거나 죽음을 당하였음. 1951년 1 4후퇴 후 강화특공대가 부역혐의가 있는 사 람들이나 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각 부락마다 소년단 통화보고서 을 조직하여 경비 및 신고하는 일을 시킴 33 한 북성리소년단 년 9 28수복 후 강화도 전체 및 양사면에서 우 통화보고서 익특공대가 빨갱이 집안을 찾아다니며 잡아가곤 하였음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09

288 제 2 권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사건 당시 관련성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34 나 교산리소년단 양사면 교산리소년단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많은 동네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등 살해된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 통화보고서 음 35 안 강화특공대 초지 나루 파견대장 36 윤 길상면소년단 37 길 김 길상면소년단 상 면 강화군청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던 즈음 영정도 부근에 정박해 있던 510해병대 함대로 끌려감. 당시 해군들이 함대의 전대 위에 안 를 세워놓고 뒤에서 사격, 바다로 떨 어졌지만 살아나 다시 끌려 올라옴 1951년 1 4후퇴 후 온수리 주씨, 배상호의 부를 소년 단원들이 특공대에 신고했는데 양조장 지하실로 끌려간 뒤 부근 야산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음 치안대장(특공대) 김 은 좌익세력이나 좌익 집안을 색출하고 다녔는데 당시 빨갱이로 몰린 사람이나 가족 통화보고서 들이 많이 살해됨 38 황 길상면소년단 길상면에서도 특공대가 빨갱이 집안을 찾아다니면서 잡 통화보고서 아갔는데, 법과 절차도 없는 보복전 양상을 보임 39 김 길상면소년단 특공대장 김 이 주축이 되어 빨갱이 사상을 가진 사람이나 가족들을 색출하러 다녔고 많은 가족들이 잡 통화보고서 혀가 살해된 것으로 앎 40 이 길상면소년단 소년단이 정보를 주면 특공대가 그 집을 찾아가 일가족 통화보고서 을 죽여버린 것으로 알고 있음 41 김 내가면소년단 내 42 가 한 내가면소년단 면 강화군청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내가면 고촌3리 사람인 유 는 사람을 죽인 지독한 사람임. 그가 말하면 소년단원들도 슬슬 기고 도망을 다녔음 특공대원들은 좌익들을 색출해서 매질을 하곤 했는데 이 의 부인과 자녀들을 지서로 끌고 와 이 의 행방을 물으며 때린 기억이 남 43 박 황청리소년단 소년단은 강화특공대 한 의 지시에 의해 지역 빨갱 이 및 그 집안 색출, 부역한 집안을 찾아 특공대에 알 통화보고서 려주는 역할과 경비 역할을 함 44 양 도 면 방 양도면소년단 강화군청 진술조서 등에다 적색 글씨로 죄명을 붙인 최천수, 김종해와 그 가족들을 도장리 장하부락 휴게소 사거리에서 몽둥이로 때리면서 구타하였음. 두 사람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는 데 특공대가 양도면 하일리 소재 하일 해변가에서 총으 로 살해한 것으로 알고 있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8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사건 당시 관련성 45 김 능내리소년단 46 신 인산리소년단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군청 진술조서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치안대에게 정보를 주면 빨갱이나 부역혐의가 있는 집 을 특공대가 찾아가 그 사람을 찾아 고문하거나 죽이는 행위를 한 것으로 알고 있음 특공대 대장 이 의 지휘 하에 있던 양도면 소년단 은 지방 빨갱이 안순과 김윤복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 통화보고서 려줌 47 안 도장리소년단 년 1월 초순경 양도면 도장리에서 양도 특공대장 이 (낙오군인)에게 빨갱이로 몰려 개성에서 월남해 통화보고서 온 최영선과 권석진이 총살당함 48 신 인산리소년단 년 1 4후퇴 경 지방 빨갱이라는 이유로 안 의 아버지 안순이 양도면 소재 건평 해안가에서 치안대에 통화보고서 의해 총살당하였으며 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음 49 이 조산리소년단 통화보고서 50 변 조산리소년단 통화보고서 1951년 1 4후퇴 즈음 김종해, 최천수, 한승호가 양도 특공대(대장 이, 감찰부장 윤, 훈련부장 차 )에게 잡혀가 양도면 소재 번지불상의 장소에서 지방 빨갱이라는 이유로 총살됨 양도면소년단원은 특공대장 이 의 지시로 인민군에 동조했거나 부역을 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특공대에게 알려주거나 경비를 서는 일을 했음. 당시 최천수, 김종 해의 소재를 특공대에게 알려주어 2명이 연행되어 문 초를 받은 후 불상의 장소에서 살해되었는데 그 가족들 의 행방은 모름 51 전 양도면소년단 동네사람 안순, 김철영 등이 빨갱이 혐의를 받고 특공 통화보고서 대에게 손이 묶인 채 끌려간 후 총살당하였음 52 한 신현리소년단 53 구 넙성리소년단 불 은 면 54 박 덕성리소년단 강화군청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위원회 진술조서 소년단 30여 명이 김요백이 인공 통치 시 내무서장을 하였다고 하여 때려죽인 일도 있었음 소년단이 결성된 2~3개월 후에, 좌익 측에서 주로 활 동한 김요백을 특공대원과 소년단이 넙성리 그의 집으 로 쳐들어가 몽둥이로 때려죽인 적도 있었음 리인민위원장이었던 김요백(배)이 자기 집에 몰래 숨어 들었다가 소년단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가 특공대에게 잡혀 창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아 넙성리 신성초등학교 (현재) 부근에서 죽음을 당함 55 이 덕성리소년단 통화보고서 불은면에 살았던 리인민위원장 박화순과 여러 동네 지 방 빨갱이가 특공대(대장 구 )에게 불은면 소재 금 융조합창고로 끌려가 고문 후 살해됨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11

290 제 2 권 연 번 사건 지역 참고인 화 도 면 삼 산 면 사건 당시 관련성 한 화도면소년단 윤 화도면소년단 58 계 삼산면소년단 조사일 장소 조사방법 강화군청 진술조서 강화군청 진술조서 석모리 자택 진술조서 특공대 측 참고인 조사내용 상방리 이 은 화도면의 좌익으로 특공대장 윤 과 친구 사이로 이념은 달랐지만 서로 피해를 입히지 않았음 날짜는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화도면 특공대 부대 장이었던 윤 이 최 의 지시로 삼산면 어류정(인 천에서 교동으로 배가 다니던 선창가)에 잡혀 있던 37 명을 풀어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함 1950년 9 28수복 후인 10월 중순 경 김진형(처형자 명부)은 그의 아버지가 보도연맹에 가입한 문서가 나왔 다 하여 치안대에 의해 죽어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음 나. 자료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경찰청(본청, 서울, 인천), 경찰서(강화, 인천남부, 인천중부),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통일부 북한자료실, 북한대학원대학교 등에서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과 관련된 경찰수사기록, 판결문, 전사( 戰 史 ), 신문, 논문 및 문헌자료 등을 입 수하여 분석 검토하였다. 특히, 국방부의 6 25 비군인 참전사실신청서 11) 중 강화지 역과 관련된 1,000여 건을 입수하여 사건 조사에 직접 활용하였다. 1) 1차 자료 가) 국방부 입수 자료 육군본부 병적관리과, 장교 자력표 (1951) 해군 인사단, 장교 자력표 (1951) 한국전쟁 해군사료, 작전경과보고 제1권 ( ~ ) 국방부 인사관리팀, 6 25 참전사실 확인서 (1999~2006) 11) 2000년 10월 1일부터 시행된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제2조 제2호 라목(제6922호, ) 6 25전 쟁에 참전 (병역의무 없이 참전한 소년지원병을 포함한다) 에 의거 국방부에 관련 서류를 제출한 후 참 전유공자로서 요건을 확인받아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사람들이다. 강화군의 경우도 2,500여 명의 참전수당 수령자가 있으며 참전과 관련한 가짜 논란으로 국회, 국방부를 비롯한 각 관련기관에 청원이 제기된 바 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9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나) 국가기록원 입수 자료 (1) 형사사건부 및 판결문 계엄사령부법무부, 군집 제809호 군집행지휘서, 중앙계엄고등군법회의 (1950) 대구지방검찰청, 분류번호 822 형사사건부 제19-6 권행번호 2624 (1951) 대구지방검찰청, 분류번호 822 형사사건부 제19-6 권행번호 2625 (1951)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청, 형사사건부 제3-1권 권행번호 1862 (1951)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형공 제660호 형제 1862호 판결문 (1951)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청, 형사사건부 제3-1권 권행번호 1320 (1951) 계엄사령부법무부, 군집 제736호 군집행지휘서, 중앙계엄고등군법회의 (1951) 계엄사령관 육군소장 정일권, 계엄군법회의 명령 제216호 (1951) (2) 강화 사건 관련 문서 사회부장관, 서해안각도서피난민 및 원주민 소개에 관한 건 ( ) 사회부장관, 강화도에 피난민수용소 설치에 관한 건 ( ) 법무부장관, 검찰사무보고에 관한 건 ( ) 총무처, 강화도 및 교동도에 국군파견에 관한 건의 이송의 건 ( ) 총무처, 강화도 및 교동도에 국군파견 건의에 대한 처리전말에 관한 건 ( ) 공보처, 월북자명단 (1951) 대구 경북지방병무청, 한국전쟁기 8240부대 편성표와 8240부대원 명단 (1961) 다) 경찰청 및 경찰서 입수 자료 서울지방경찰청, 사령부 2-1 (1950) 경기지방경찰청, 경기경찰서 인사기록 카드 (1951) 강화경찰서, 저4283~4289 인사사령부 (1956) 강화경찰서, 경찰연혁사 (1961) 강화경찰서, 대공인적위해분자 자료수정통계 ( ) 강화경찰서, 탄원사건 수사결과보고 ( ) 라) 미군자료 NARA, RG338, 경기도팀의 강화군시찰보고서, UNCACK 민사처,1951,Box 17. NARA, RG 319, JOINT WEEKA 주간합동분석보고서2, Box 61.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13

292 제 2 권 ED EVANHOE, DARK MOON; Eighth Army Special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1995)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KLO/TLO 문서집(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50.1~51.2), 자료총서 28, 마) 신문기사 자유신문( ) 조선일보( , ) 국제신문( ) 조선인민군( ) 로동신문( ) 동아일보( ) 국방일보 전자신문( ) 2) 참고 자료 및 문헌 경남지구계엄민사부, 군수사실무개요 (1952), 강화군 총무과, 강화군직원이력서철(퇴직자 분) (1966) 홍해양, 회고록 고도의 개가-24인의 결사대 (연도 미상)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1976) 국군보안사령부, 대공 30년사 (1978)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4, 5 (1983) 강화사편찬위원회, 증보 강화사 (1988) 군사연구실, 한국전쟁과 유격전, 육군본부 (1994) 최강문, 강화 특공대원의 고백-학살배후에 경찰이 있었다 월간 말 ( ) 정용욱, 한국전쟁 시 미군 방첩대 조직 및 운영, 군사연구총서 제1집 (2001) 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 (200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2003) 김영택, 한국전쟁기 강화의 수난과 민간인 학살 ( 2003)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위원회, Killing in no man's land (2004) 김동석, 김동석 이사람, 아트컴. (2005)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전투사 38도선초기전투(서부전선 편), 국방부. (1985)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9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함명수, 바다로 세계로,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7) 성균관대학교동아시아 학술원, 한국전쟁 시 부역자처벌과정과 그 사례, 진실화해 위원회 연구용역보고서 (2007) 한인섭, 한국전쟁과 형사법-부역자 처벌 및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중 심으로, 법학 제41권 2호, 서울대학교 (2000) 다. 현지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신청인 참고인과 함께 희생자들의 희생 전 집결장소, 희생된 장소를 사건발생 순서대로 찾아가 사건관련 사실을 확인하였 다. 이 사건의 주요 집단희생지는 아래 <그림 1>과 같다. <그림 1>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지 검은 점( )은 대표적인 집단희생지인 강화경찰서, 갑곶나루터, 옥개 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인화포구, 초지포구, 외포리, 사슬재, 대문고개, 어류정(개학뿌리)을 표시한 것이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15

294 제 2 권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한국전쟁 발발과 인민군의 강화 점령 강화군은 지정학적으로 북위 38도선에 근접해 있고 외부와 고립된 섬이라는 특성 때문 에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체제변동과 피난민 이동이 극심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때문에 강화도는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이 되었다. 12)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에는 우익청년단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강화에서 우익청 년단은 1948년에 본격적으로 조직되었다. 여순 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난립하던 우익청년단이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됨에 따라, 대한청년단 강화지부(단장 이중 섭, 부단장 윤성근과 유흥수)가 1948년 12월 21일경 결성되었다. 13) 한편 준군사조직인 강 화 호국군 제111연대 2대대 8중대가 1948년 11월경 결성되었는데, 14) 이듬해인 1949년 3 월 대한청년단원들을 중심으로 청년방위군 강화지대(지대장 송정헌)로 재편되었다. 15) 또 12) 1951년 8월 15일 당시 강화군의 인구는 102,366명이며 강화면,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화도면, 양도면, 하 점면, 내가면, 양사면, 송해면, 교동면, 서도면 등 13개면이 있었다. 강화군은 1906년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재편되었다. 동경 126'15 북위 37'45상에 위치하고 있는 강화군은 38선이 통과하 는 황해도 연백군과 경기도 개풍군과는 1.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한국전쟁 전에는 인천, 서울, 개성, 연백을 잇는 해상 상의 중요한 지정학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휴전이 된 현재는 북방 한계선(NLL)이 연백 개풍군과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13) 한국전쟁 전후 우익청년단의 활동과 경찰과의 관계-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진실 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연구용역 보고서(2007년). 97쪽, 169쪽. 해방 이후 난립하던 우익청년단체들은 1947 년 대동청년단으로 통합되어 건군과 건국운동을 펼쳤는데, 1948년 여순 사건을 빌미로 이승만의 지시 하 에 대한청년단을 결성하여 양분되어 있는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한다. 이승만 정권은 대한청년단을 반공으 로 무장한 전위대로서 정권의 유지, 확장에 이용하였다. 이 단체는 후에 청년방위군, 국민방위군, 자위대로 이어지는 조직의 근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과 보조기관으로 민간인 학살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14) 호국군은 중대본부를 신문리에 두고 중대장 유창준, 부관 박근영, 소대장 유종열 조성실 양규환 이상 룡 등과 사병 180명(강화, 송해, 선원면 장정)으로 구성하고, 장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사병은 인천소재 제2대대 본부 교육대에서 소정의 군사교육을 받고 복무하였다. 호국군은 1948년 11월 30일 공포된 국군 조직법 제 12조 및 제13조에 근거하여 호국군 병력은 정규군의 현역 병력에 준하는 조직으로 설치되었다. 호국군 편성은 시 군 구 등 행정단위로 현역부대에 준하여 중대, 대대를 편성하였다.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88, 653쪽. 15) 청년방위군은 1949년 3월 19일 최초의 예비군 조직인 호국군을 폐지하고 대한청년단을 근간으로 하여 창 설한 준군사조직이다. 50년 5월 5일 육본직할로 중앙과 각 지방에 방위사단 19개가 설치되었고, 대원은 만 22세 이상 35세 이하 대청원, 민보단원, 호국단원 등 20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강화 청년방위군은 보병 2 사단 제3연대 제2지대로 지대장 송정헌, 제1편대장 유창준, 제2편대장 김철, 제3편대장 최실로 조직되었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9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한 1949년 9월 강화경찰서장 16) 엄태섭은 좌익인사의 전향을 적극 독려하면서 국민보도 연맹을 조직하였는데 각 지서에 면 지부를 설치하고 경찰서 구내에 본부를 두어 보도연 맹원들을 지휘, 감독하였다. 17) 이렇게 강화에서 우익청년단 및 각종 우익조직들이 정비 되고 좌익전향자 조직이 결성되던 무렵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1950년 6월 26일 정오부터 피난민들이 연백, 옹진지역에서 강화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 작했다. 월곶포에 집결해 있던 연백, 백천경찰과 강화경찰은 당일로 인천 소재 경기도경 찰국으로 후퇴하였다. 18) 6월 27일 오전 인민군 전초부대는 월곶리 맞은편 개풍군 영정포 에 집결하였다가 한강을 건너 김포 문수산을 거쳐 오후 6시경 강화면을 점령하였다. 6월 28일 인민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 14연대(연대장 한태숙 대좌)는 강화를 경유하여 김포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19) 당시 강화군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민군 1개 중 대가 길상면에 본부를 두고 짧은 기간 주둔하였다. 인민군 일부 병력과 내무서원들은 지 방토착 좌익세력과 함께 군, 면, 리 단위에서 인민위원회, 자위대, 조국보위연맹, 판정위 원, 민청, 농민조합 등 예하조직 등을 구성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방공 호를 파고 18세 이상의 청장년들을 의용군으로 차출하였다. 20) 한편 강화군 초대군수 홍 재용, 강화 유지 홍종화, 강화경찰서장 초대서장 김추성 등이 연행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으며, 다수의 우익인사들도 강화산업창고에 구금되어 있었다. 21) 이러한 상황에 서 우익청년단은 북한 인민정권에 대항하는 반공지하단체를 결성하였다. 반탁학생운동에 앞장섰던 송 와 곽 이 중심이 된 일민주의청년동지회 22) 를 비롯하여 민주청년반 다. 군사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718쪽. 16) 1대 서장은 경감 김추성으로 재임기간은 ~ 이다. 강화경찰 연혁사에는 김추성은 1950년 9월 28일자로 초대 민선 치안책임자로 지방 청년들을 인솔하여 혼란한 치안을 유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 다. 김추성은 인공 통치 시 지하반공단체인 민주청년반공돌격대 를 조직한 바 있다. 2대 서장 경위 한천수 는 함북 출신으로 재임기간은 ~ 이며 후에 연안서장으로 전보되었다. 3대 서장 경감 엄 태섭은 평북 출신으로 재임기간은 ~ 이며 후퇴 시 책임을 물어 1950년 9월 5일자로 해직 되었다. 강화경찰서, 경찰연혁사 (1961). 17) 강화사편찬위원회, 증보 강화사, 강화문화원, 1988, 306쪽. 강화보도연맹은 1949년 9월 20일부터 지방지 부조직에 착수했다. 지방지부의 조직원칙은 기본적으로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건설한다는 것 이었다. 지방지부는 각 도마다 도 연맹 시ㆍ군 연맹 읍ㆍ면지부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강화군은 인 민군이 1950년 6월 27일 강화로 들어옴에 따라,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할 만한 시간 이 없었다. 18)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서부전선 편, 국방부, 1985, 260쪽; 군사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쪽. 19)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서부전선 편, 국방부, 1985, 223쪽. 20) 강화사편찬위원회, 증보 강화사, 강화문화원, 1988, 쪽. 21) 참고인 송, 진술조서( ). 22) 곽 과 송 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민주의 이념을 주창하면서 1. 동지규합, 2. 무기입수, 3. 괴뢰군의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17

296 제 2 권 공돌격대(대장 김추성, 1대 강화경찰서장), 대한지하결사대(대장 송두희, 부대장 송정헌 대한청년단장 청년방위군지대장), 대한정의단(대장 최, 부대장 조성실 호국군 중 위) 23) 등이 당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지하단체였다. 나. 강화 수복과 우익치안대의 부역혐의자 체포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강화의 남 북한 출신 내무서원과 좌익성 향의 인사 등 1,000여 명은 1950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 사이에 북쪽 양사면 인하리포 구와 철산포구 등을 통해 후퇴하였다. 24) 당시 후퇴하던 내무서원 등은 9월 28일경 반공 활동을 했던 청장년 26명을 인화리 강령뫼 산기슭 해변가 구덩이에 강제로 쓸어 넣고 집 단살해하였다. 25) 그들이 후퇴하자 숨어 있던 우익청년단은 1950년 10월 3일 강화치안대를 결성하고 각 면마다 부역혐의자 수백 명을 임의로 연행하여 강화경찰서, 지서, 면사무소, 가마니창고 등지로 연행 구금하였다. 당시 강화치안대는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 월곶국민학 교에 주둔 중인 해병대사령부 26) 를 찾아가 강화 주둔을 2~3차례 요청하였지만, 주둔 계 획이 없었던 해병대사령부는 강화치안대에게 소총과 수류탄 등의 무기를 주었다. 27) 당시 인천 외항 장봉도 일대에는 해군 PC 701함을 기함으로 소해정 동태조사, 4. 괴뢰군의 후퇴를 기다리며 적구의 일망타진, 5. 적색분자의 악행과 동태조사 등의 활동목적을 정하고 1950년 7월 2일 조직하였다. 당시 우익인사를 납치하는 등 괴롭힌 자, 저녁에 독서회 등 조직활동 을 했던 자 등을 조사하여 명부도 작성하였다고 한다. 참고인 송, 진술조서( ). 23) 전 대한정의단 단장 최 은 동단의 활동기간을 1950년 8월 20일부터 11월 5일까지로 진술하고 있어, 9 28수복 후까지도 경찰의 치안활동에 협조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최, 강화경찰서 민원처리결과보 고 ( ); 참고인 최, 진술조서( ). 24)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년, 349쪽; 공보처 발행, 월북자명부 (1951)에는 강화면 121명, 송해면 54명, 양사면 54명, 선원면 68명, 하점면 64명, 불은면 84명, 길상면 53명, 화도면 52명, 양도 면 113명, 내가면 69명, 교상면(교동면) 189명, 삼산면 22명, 서도면 없음으로 943명이 월북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25) 공보처, 피학살자 명부 (1956년). 당시 좌익에게 학살당한 사람이 총 31명으로 인화리 인애성에서 학살당 한 사람이 26명이고 장소가 불분명한 사람이 4명, 불은면에서 1명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화사 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715쪽. 강화사에서는 위 사건을 중외산 사건으로, 73명이 희생되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6) 해병육전대 후신으로 이후 해병대 1사단으로 되었다. 27) 군사편찬연구소, 해군의 황해도 피난민 구출작전과 구호활동, 한국전쟁사 5권, 쪽. 해군 등 군 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은 사례는 강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전남 완도의 경우도 50년 7 월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청년방위대 간부였던 신형균 등 44명이 청산향토방위결사대 를 창설 후 해 군 514함정 516함정 901함정 등과 경찰로부터 총기 실탄 수류탄을 받아 무장하였다. 또한 1 4후퇴 이후 에도 강화군 국회의원 윤 이 장봉도 앞바다에 있는 해군함대로부터 무기를 받아 강화특공대에게 준 사실도 있다.; 참고인 송, 진술조서( ); 참고인 윤,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9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501등 여러 함정들이 서해안을 봉쇄하고 있었는데, 28) 1950년 9 28수복 직전 장봉도 앞 바다에 정박해 있던 해군 510함정은 직접 부역자 처벌에 관여하기도 했다. 29) 1950년 10월 10일 강화경찰서장 김병구와 경찰 선발대가 강화로 복귀하였고 같은 달 15일 연백, 개풍, 개성 경찰 일부와 강화경찰서 본대가 강화로 복귀하였다. 30) 한편, 대한민국정부는 9 28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4일 경인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김창룡, 이하 경인합수부) 를 국일관에 설치하였다. 31) 경인지구계엄사령관 이준 식의 지휘 하에 32) 경인합수부는 부역행위자의 조사 처단업무를 주로 관장했는데, 시경, 치안국, CIC, 검찰 등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33) 10월경부터 부역혐의자를 본격적으로 검거 하기 시작하였다. 34) 강화경찰서도 경인합수부로 경찰관을 파견하여 강화치안대, 대한청 년단, 지서 등에서 취합한 강화부역혐의자 관련 서류 2,600건을 분류하고 검토하는 작업 에 직접 관여하였다. 당시 이 서류는 A 급은 총살, B 급은 경기도경찰국으로 이송 후 재 판, C 급은 훈방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2,600건 중 A 급은 200건, B 급은 400건, C 급 은 2,000건이었다고 한다. 35) 또한, 수복과 동시에 강화군은 청장년을 중심으로 육군본부직할 국민방위국 산하에 청 28)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강화문화원, 1976년, 쪽. 29) 참고인 안, 진술조서( ). 안 는 인천 영종도 부근의 살섬(장봉도)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 곳으로 피난 나와 있던 김 (후에 길상면 면특공대 감찰차장)이 안 를 장봉도 부근에 정박해 있던 510해병대 함대에게 형과 동생의 부역혐의를 문제 삼아 고발하여 연행되었다고 한다. 해군들은 안 를 함대 전대 위에 세워놓고 총을 쏘았는데 죽지 않고 바다로 떨어졌다고 한다. 해군들은 안 를 물속에서 끌어올린 후 살려주는 대신 강화로 들어가 인민군의 소재를 파악해서 알려달라 고 하였다. 30) 참고인 송, 진술조서( ). 31) 중앙일보, 민족의 증언 4, 1983, 139쪽. 32)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선포지역은 전라남도, 전라북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 이었다 에 이르러서는 계엄선포의 범위는 남한 전역 으로 확장되었다. 그에 따라 계엄선 포지역 내에서는 군법회의로 일차적 관할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백윤철, 한국의 계엄사에 관한 연구, 군 사 제66호(2008.4). 33) 동아일보( ). 34) 환도 후 잔류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에 따라 부역 자 처단 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부역자란 적 치하에서 자진하여, 혹은 위협과 강제에 못 이겨 역도에게 협력한 자 를 말한다. 당시 자수한 자와 검거된 자를 포함하여 당국에 의해 인지된 부역 자의 총수는 최종적으로 550,91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가운데 검거자는 153,825명이고, 자수자는 397,090명이었다.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란 1년지, 1951, 76쪽. 35) 강화경찰서 순경 김 는 1950년 10월 말경 강화 부역자 관련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경인군검경합동수 사본부 로 파견을 나갔는데, 당시 강화군의 부역혐의자 관련 서류는 2,500~2,600건이었다고 한다. 김 는 부역자를 A, B, C급으로 분리하여 진술하였지만 여타 지역의 경우는 갑, 을, 병으로 분리하기도 하였 다. 당시 경인합수부 책임자였던 성명불상의 소령은 부역 관련 서류를 검토하는 김 에게 소설을 읽느 냐. 견출지에 붙어 있는 사건내용을 보고 악질은 총살시키면 되는 것이지 라며 질책하였다고 한다. 참고인 김, 진술조서(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19

298 제 2 권 년방위군 3개 연대 36) 를 편성하였는데, 각 면에 중대를 두고 장정 훈육과 방위 결속에 주 력하는 한편, 향토방위와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면단위 소년단을 조직하였다. 37) 이 소년 단은 1 4후퇴 후 강화특공대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도민증을 재발급함으로 써 자체 치안유지와 주민통제에 주력하였는데 도민증은 좌익 또는 부역혐의자 및 그 가 족에게는 발급하지 않았다. 38) 2. 사건경위 가. 9 28수복 후 희생 사건 강화치안대는 1950년 7월 22일 공포된 대통령 긴급명령 제9호인 비상시향토방위령 에 따라 1950년 9 28수복 직후인 10월 3일 조직되었다. 강화치안대(대장 홍재승, 부대장 곽 최 )는 면 단위까지 조직되었는데 그 수 가 대략 1,000여 명이었다. 각 면의 치안대장은 우익청년단체에서 추천하면 치안대장이 승인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면별로는 내가면 김, 하점면 이, 길상면 전, 화도면 윤, 양도면 송 등이 면치안대장으로 추천되었는데, 면대한청년단장이 주로 면치안대장을 겸임하였다. 39) 강화치안대는 수사대를 별도로 설치하여 부역혐의자 수백 명을 임의 연행 구금하고 그들을 심문하였다. 당시 부역혐의자 수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고향으로 피난 나와 있 던 낙오 경찰인 중부경찰서 수사계 경위 전 40), 서대문경찰서 정보과 순경 윤 41), 36) 국무회의 보고자료-청년방위대단지대배치도 (1951). 강화도는 보병 2사단 제3연대 제2지대이다. 37) 강화특공대 월곶소년단인 김 의 진술에 따르면, 1950년 10월경 관청리 소재 공설운동장에 50~60여 명 이 수시로 모여 챙이 없는 삼각형모자(미군모자 모양)를 쓰고 우리는 대한청년 호국군 이라는 노래를 수 없이 부르며 총검술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인 김, 진술조서( ). 38) 김영미, 해방이후 주민등록제도의 변천과 그 성격: 한국주민등록증의 역사적 연원, 한국사연구 (2007). 도민증은 1950년 10월 20일 각 동회, 면사무소에서 교부하였다. 이것의 발급 목적은 선량한 시민(도민)의 신분 보장과 적의 잠입 을 방지하고 제5열을 철저히 소탕 하는 데 있었다. 사상 불량자에 대해서는 시 도민증을 발급하지 않아 남한주민을 간첩과 양민으로 구분함으로써, 발급의 의미 자체가 사상 심사였던 셈이다.; 참고인 이상국, 진술조서( ). 39) 참고인 최, 진술조서( ). 40) 전 은 강화특공대 월곶리파견대장 전 의 형이라고 한다. 이탈자 명부에는 전 ( 全 )이 기재되 어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이탈자 임명관계, 1950년 인사사령부 2-1 (6 25) (1951년). 41) 서울지방경찰청, 이탈자 임명관계, 1950년 인사사령부 2-1 (6 25) (1951년); 참고인 황 진술조서 ( ). 이탈자 명부에 윤 이 기록되어 있으며 50년 9월 30일자로 사찰계 순경으로 다시 임명되었 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9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소속불명의 김 등 10여 명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9 28수복 후 소속 경찰서로 원대 복귀한 다음 낙오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부역혐의자 수사를 무리하게 추 진하였다. 42) 1950년 10월 10일 강화치안대는 강화경찰이 복귀하자 자신들이 임의연행 구금하였던 부역혐의자들과 관련 조서를 무기 등과 함께 경찰에게 인계하였다. 43) 당시 강화치안대가 잡아왔던 700~800명의 부역혐의자들은 강화산업조합창고뿐만 아니라 강 화경찰서 무도장과 유치장, 동문(현재는 관청리) 안의 가마니창고 등에도 구금되어 있었 다. 구금자들은 인계될 당시 심한 고문으로 초주검 상태 여서 의사 김인필과 김한식의 치료를 받아야만 할 정도였다. 44) 강화경찰서는 1950년 11월 말까지도 강화치안대의 협조 를 받아 부역혐의자 검거를 계속하였다. 45) 검거된 부역혐의자들은 인천형무소로 송치되 거나 마산 또는 대구로 이송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계엄사령부 법무부에 의해 사형 또는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지만 46) 또 다른 일부는 이송 도중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 다. 47) 1) 강화면 참고인 고 (하점면 주민)은 인공 통치 시 명신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전력 때문 에 경찰이 강화로 복귀하기 전인 1950년 10월 초순경 치안대원 3~4명에게 끌려가 강화 산업창고 48) 에 구금된 적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고 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창고 안 42) 최, 강화경찰서 민원처리결과보고 ( ). 43) 참고인 송, 진술조서( ). 44)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최, 진술조서 ( ). 45) 최강문, 강화 특공대원의 고백-학살배후에 경찰이 있었다, 월간 말 ( 월호). 46) 계엄사령부 법무부, 군집행지휘서 ( ), 국가가록원. 한국전쟁 중 북한정권의 인민위원으로 무기 징역을 받은 후 감형 출옥한 삼산면 김 (43세)과 송해면 이 (35세) 외에 양도면의 오 (20세) 강 (36세), 삼산면의 고 (26세) 김 (21세) 고 (38세) 남 (19세) 고 (46세) 박 (30세), 송해면의 전 (27세), 화도면 주 (59세), 선원면 우 (32) 유 (27), 강화면의 안 (37) 전 (26)등은 단기 4284(1951)년 12월 19일 계엄군법회의 명령 제216호에 의해 인천소년형무소에서 2달 만에 사형이 확정되어, 단기 4284(1951)년 2월 21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외에도 부역혐의로 무기형을 받고 마산 형무소 등에서 병사한 이 과 1953년 형이 확정된 이후 1995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안 의 경우도 있다. 47)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한, 진술조서( ); NARA, RG 338, UN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 (UNCACK), 1951, Box 17, 국사편찬위원회소장. 인천에서 출발했던 S.S.Southwind호가 오전 8시에 부산 3번 부두에 도착했음. 탑승자는 아래와 같음. 피난민 1,942 명, 국립철도경찰 1,439명, 국립경찰 110명, 국립경찰 가족 111명 정치범 605명, 합계 4,207명. 공성정과 김 조흥(인천형무소 민간경비원)이 감독. 죄수들의 신체상태는 비참했음. 인천에서 떠나기 전 10명의 죄수(정 치범들)가 죽었음. 그리고 부산으로 오는 동안 추가로 13명이 죽었음. 하선하는 동안 4명이 더 죽었음. 남 은 사람 중에 118명이 들것에 실려 이동되었음. 사망원인은 영양부족과 추위 때문임. 48)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사 (1976), 539쪽. 강화산업조합은 1922년 일반가정에서 부업으로 생산하던 직물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21

300 제 2 권 에는 30~40명 정도가 구금되어 있었는데, 성명불상의 사망자 2명, 인사불성자 2명, 고문 을 견디다 못해 나중에 우물에 빠져 죽은 자살자 1명 등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주로 인공 통치 시 인민위원회 관련자로 고 은 구금 당시 18살밖 에 되지 않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풀려나왔다고 한다. 49) 참고인 최 에 따르면, 1950년 10월 10일 강화경찰서장 김병구를 위시한 전투경찰이 선발대로 돌아왔는데, 그들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강화치안대에 의해 연행되어와 경찰 서 마당에 둘러앉아 있던 200여 명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일부를 앞으로 나오 게 하여 발로 짓밟았다고 한다. 최 은 이렇게 구타당한 사람 중 일부는 다음날 사망하 였으나 사망자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다만 현장에 있던 구금자 중에서 강화면 관청리 주민 안용호와 그의 딸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고 진술하였다. 50) 한편 다른 참고 인의 증언에 의하면 안용호는 당시에는 풀려나왔다가 1951년 1월 초에 용정리 고리나무 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해되었다고 한다. 51) 2) 선원면 선원면의 이윤봉은 아들 이 52) 의 부역혐의 때문에 1950년 10월 8일경 치안대원 김 53) 등 7~8명에게 연행되었는데, 그 뒤 선원면지서에 갇혀 있다가 1950년 10월 10일 경 희생되었다. 이윤봉의 시신은 이윤봉의 아들 이윤근, 10촌 이춘산, 사촌 이순복이 선원 지서 뒷산 방공호(대문고개와 동일 장소)에서 찾아 수습하였다. 54) 수습 당시 이윤봉의 시 신은 손이 뒤로 결박된 상태였고 이마에는 찍힌 상처가 있었으며 피와 모래로 뒤범벅된 채 흙으로 살짝 덮여 있었다고 한다. 55) 의 판매알선과 원사구입을 알선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그 조합이 물건 등을 보관하던 창고다. 49) 참고인 고, 진술조서( ). 당시 창고 앞에 치안대원 이 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고 한다. 고 은 인민학교 교사를 한 것과 군당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으라고 하여 교육받은 것밖에 없다 고 하여 풀려나왔다고 한다. 50) 참고인 최, 진술조서( ). 51)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안용호의 희생사실은 1979년 3월 7일자 강화경찰서 대공인적위해 분자 자료 수정통계보고-처형자명부 에서도 확인된다. 52) 이 은 중앙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제32조(이적죄) 위반으로 50년 12월 19일 무기징역 을 받고, 1950년 12월 30일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 1952년 1월 7일 병사한 것이 확인된다. 유족들 은 부역자 가족으로 분류되어 도민증을 발급받을 수 없어 마산형무소로 가지 못해 이 의 시신을 수습 하지 못하였다. 53) 신청인 이상국, 진술조서( ). 이윤봉을 끌고 갔던 김 는 선원면 창리치안대장으로 대한청년단 리 단장을 겸임하였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치안대 사무실을 한청사무실로 불렀다. 또한 김 는 1951년 1 4후퇴 후 강화특공대로 편입되었다. 54) 신청인 이상국,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0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3) 내가면 고향이 내가면인 서영석은 인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전쟁 발발 후 가족들과 고향 으로 피난을 왔다. 서영석의 아버지 서 은 인공 통치 시 내가면 리인민위원장을 하다 가, 1950년 9월 말경 서영석의 작은아버지 서 와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 10월 말경 서영석은 아버지 서 과 작은아버지 서 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내가지서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오전 10시경 서영석의 5촌 서정만은 서영석이 죽었 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지서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56) 사건 당시 내가지서 주임은 경 사 전 이었다. 57) 4) 서도면 서도면 볼음도의 박인오는 인공 통치 시 면사무소에서 일을 했다는 이유로 1950년 초 겨울 주문리 소재 서도지서로 불려가 2~3일간 고문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박 인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서도지서 58) 에서 코에 고춧가루물을 붓고, 기절하면 머리를 다시 물속에 반복해서 처넣어 아무래도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 고 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다 고 한 적이 있었다. 박인오는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다시 서도지서 로 불려갔는데 그 다음날 가족에게 박인오가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 고 박인오의 삼촌과 매형 김 이 서도지서로 갔고, 서도지서 지하실에서 가마니로 덮 여 있는 박인오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까운 논두렁 부근에 매장하였다. 수습 당시 박인오 의 시신은 눈이 튀어나온 상태였다고 한다. 59) 신청인 박옥희는 삼촌으로부터 박인오는 55) 신청인 이상국, 진술조서( ). 56) 신청인 서대원, 진술조서( ); 참고인 서, 진술조서( ). 57)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 에 따르면, 전 이 백이석의 후임으로 내가지서주 임으로 발령 난 사실은 알고 있지만, 당시의 내가지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강화경찰서, 자 4283~4289 인사사령부 (1956). 1950년 6월 6일에 보고된 1950년 강화경찰서 직원명부 에는 지서주임 경사 전 ( 全 ), 순경 강 ( 姜 ) 순경 라 ( 羅 )등이 내가지서 주재경찰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58) 경기도경찰국-연혁사 ( ). 서도지서는 서도면 주문리 823-2번지 소재하였는데, 서도지서 주임에는 경사 조, 순경 장 이 지 한 구 이 이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볼 음리와 아차리에는 출장소가 있었다. 따라서 신청인의 진술내용 중 주문도리 지서는 서도지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서도면은 주문도, 아차도, 볼음도, 말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1905년 강화군에 부속되면서 면사무소가 아차도리에 설치되었는데 1936년에 주문도리로 이전하였다. 1962년 군 조례에 의거 볼음출장 소가 설치되었다. 59) 참고인 김, 진술조서(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23

302 제 2 권 치안대장 고 60) 가 사주하여 서도지서 경찰관의 고문으로 죽었다 고 전해 들었다고 진 술하였다. 61) 사건 당시 서도지서 주임은 조 이었다. 나. 1 4후퇴 전 후 희생 사건 강화에 주둔하고 있던 UN군 소속 터키군 부대가 1951년 1월 1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김포 방면으로 철수를 하였고, 62) 1951년 1월 2일에는 강화경찰들이 강화경찰서로 집결하 여 충남 서산으로 철수하였다. 63) 한편 황해도 피난민 62,082명(1951년 1월 말 현재)이 해 군의 서해안 철수작전에 따라 해군함정으로 수송되어 강화로 들어오고 있었다. 64) 피난민 들은 강화와 인접한 개풍, 개성, 연백, 옹진군의 원주민들로 우익치안대와 그들의 가족이 었다. 65) 피난민들은 주로 강화면, 송해면, 양사면에 집결하였다. 특히 양사면은 개풍군과 폭 3km의 한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향으로 곧 돌아갈 것으로 생각한 개풍군 주민 들이 다수 들어왔다. 1951년 1월 초순경까지도 매일 40~50명의 피난민이 강화로 들어오 고 있었는데, 66) 9 28수복 후 부역혐의로 인한 처벌을 피해 피신했던 강화군 사람들도 돌모루포구와 철산포구를 통해 이들과 함께 강화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은 1 4후퇴 전후의 이 같은 치안부재의 혼란한 상황에서 잔류 했던 우익청년들이 강화경찰서를 그들의 근거지를 옮기고, 준군사조직으로서의 조직체계 60) 참고인들은 고 를 서도면장으로 진술하였는데 고 가 4대 서도면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1951년 6월 16일부터 1956년 4월 17일까지로, 사건이 발생한 시기인 1950년 10월~11월에는 대한청년단장으로 치안 대장을 맡고 있었던 때이다. 61) 신청인 박옥희, 진술조서( ). 62) 1 4후퇴를 전후하여 강화에 주둔하고 있던 터키군이 다수의 사람들을 살해하는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다수의 증언이 있었지만 이 조사에서는 다루지 못했다. 참고인 이상국, 진술조서( ); 참고인 최, 진술조서( ); 참고인 송, 진술조서( ); 참고인 최상구, 진술조서( ). 63) 1950년 12월 4일 중국군이 한국전에 개입한다는 소식에 강화군 내 일반 공무원 및 학교직원 행정기관 민 간인들은 군 내무과장 유진국의 인솔 하에 1950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길상면 초지리를 출발하여 육 로로 남하하였다. 또 청년방위군 등 일반민 5,000여 명도 국회의원 윤재근의 주선으로 선박 13척과 미군정 상륙정 LST로 내가면 외포리에서 인천, 군산, 부산을 경유하여 제주도로 갔다. 강화사편찬위원회, 강화 사, 강화문화원, 1988, ) 당시 38선을 경계로 하여 경기도 개풍군, 황해도 연백군과 재령군, 벽성군, 평산군 일부는 38선 이남지역 이었다. 또한 개풍군은 강화군으로부터 짧게는 1.8km의 지척거리에 있는 동일생활권 지역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위 지역은 북한지역으로 편입되었다. 65) 참고인 유, 진술조서( ). 66) 사회부장관, 강화도에 피난민수용소 설치에 관한 건 ( ), 국가기록원. 강화면은 원주민 8,550명인 데 피난민이 3,800명으로 본도 내의 피난민은 개성시 원주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기타는 개풍군 과 연백군의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송해면은 원주민수 6,000명인데 피난민수 3,000명이고 양사면은 원 주민수가 6,500명인데 피난민수 4,000명이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0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를 갖춘 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아래의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은 강화경찰이 복귀 하는 1951년 3월 말까지 12개면에서 매우 조직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부역혐의가 경미하여 9 28수복 직후의 부역자 검거나 처벌과정에 서는 제외되었던 사람들과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리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수감되 었던 사람들 중 1950년 12월 28일 대통령령(제426호)으로 감형령 67) 이 공포 시행되면서 출소하여 강화로 귀향하던 주민들이었다. 또한 9 28수복으로 국군과 경찰이 강화지역에 진주하자 인공 통치 아래서 자의든 타의든 부역을 한 사람들로 처벌을 받을까 염려하여 한강과 임진강 하구를 경계로 인접해 있는 당시 38선 이남지역이었던 강화 북쪽의 경기 도 개풍군과 황해도 연백군으로 피신했다가 강화로 돌아온 주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강화특공대 대장 최 이 2000년 의 정부경찰서 수사과정에서 경기도 경찰청 후퇴 시 인민군에 동조했던 사람들을 귀가시켰 는데 강화도에도 100여 명이 인민군가를 부르며 들어와 경비대에서 인민군으로 알고 총 을 쏴 60여 명을 사살한 적이 있었다 고 진술한 사건을 들 수 있다. 68) 또한 1951년 1월 17일 인민군의 재점령에 따라 삼산면으로 후퇴하던 강화특공대가 강화경찰서와 삼산면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에서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을 학살한 사건을 들 수 있다. <표 5> 사건경위 조사 대조표 사건지역 신청인(사건번호) 피해자 측 참고인 특공대 측 참고인 강화도 강화면 윤석만(다-27) 정영춘(다-307) 서영선(다-226) 서 김, 송, 최, 한, 황, 최, 김, 안, 고, 남, 유, 박, 현 67) 특사령은 비상사태하의 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의 재감자 중 다음 3가지에 해당하는 자는 석방할 것을 명령했다. 1. 언도형 10년 이하의 기결수는 특사 절차를 취함, 2. 검사의 구형 10년 이하에 해 당해도 공소 취소할 것, 3. 구속 중에 있는 피의자로서 10년 이하의 구형으로 기소될 만한 사건에 대하여 는 공소권 무로 결정할 것. 1, 2, 3에 대한 특사조치는 본월 23일부터 동월 31일까지 해당자 전부를 석방할 것으로 되어 있다. 목포, 장흥, 순천지청장, 특사령 공포실시에 관한 건 ( ), 국가기록원. 68) 최, 의정부경찰서 수사결과보고 ( ). 최 은 위 사건이 강화특공대가 벌인 사건이 아닌 제3 의 무장세력이 있는 것처럼 경비대라고 진술하였으나, 군경이 후퇴할 당시 강화도에 남은 유일한 무장세 력은 강화특공대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강화도 전역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은 본인과 관련이 없다고 하였 다.; 중앙일보( ). 민간유격대 관련 기사에서 최 은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철곶으로 건너 오는 지방 공산당원 105명을 생포해 악질공산당원 60여 명을 식량문제도 있고 해서 처치해버렸습니다 라 고 증언한 적이 있었다.; 참고인 최, 진술조서( ). 그러나 최 은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에서 중앙일보 기사내용은 기자가 자기 멋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25

304 제 2 권 사건지역 신청인(사건번호) 피해자 측 참고인 특공대 측 참고인 서영선(다-225) 서 서영선(다-308) 서영선(다-309) 이진항(다-310) 유수정(다-9816) 전 유, 김, 류 선원면 이상국(다-10545) 이 문 하점면 안학섭(다-224) 황인선(다-305) 유희종(다-480) 안 이, 황, 정, 안, 전, 이, 홍 송해면 신청사건 없음 황, 김, 김, 김, 이, 김, 구 양사면 전종국(다-4552) 이정희(다-10648) 김의용(다-6946) 이, 오 김 계, 김, 한, 한, 한, 나 길상면 조광호(다-306) 서영선 (전미옥)(다-2752) 안귀상(다-9998) 서, 고 서, 고 안, 윤, 김, 황완옥, 김, 이 내가면 양도면 서영선(다-227) 서대원(다-1966) 신청사건 없음 서 서 김, 한, 박 방, 김, 신, 안, 신, 이, 변, 전 불은면 신청사건 없음 한, 구, 박, 이 화도면 신청사건 없음 한, 윤 석모도 삼산면 박상덕(다-9997) 고기선(다-9997) 박광덕(다-9997) 박상진, 노, 노 계, 윤, 김, 황, 윤, 정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0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사건지역 신청인(사건번호) 피해자 측 참고인 특공대 측 참고인 노영조(다-9997) 송경숙(다-9997) 고문자(다-344) 주문도 서도면 박옥희(다-9963) 김 그런데 이 사건의 신청인들은 당시 희생자들이 강화특공대에 의해 연행 또는 구금되었 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후 그들의 학살과정이나 학살장소에 대해서는 모른 채 행방불명되었다고 진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표 5>와 같이 피해자 측 진술내 용과 특공대 측 진술내용을 면별로 대조하여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였다. 지역의 특성상 희생자 측의 신청이나 진술은 드문 반면, 가해 측의 진술이 사건의 경위와 희생자 신원 파악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경위와 희생자 신원 확인도 특공대 측의 진술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사건발생장소와 시점, 희생자 신원 등에서 양 측 진술이 일치된 경우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1) 강화면 69) 당시 강화면에는 강화특공대의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월곶파견대의 본거지인 월곶지 서가 있었으며, 갑곶나루와 옥개갯벌도 인접해 있었다. 따라서 강화경찰서가 위치하고 있 는 관청리, 월곶지서 관할인 월곶리와 용정리, 인접지역인 국화리, 갑곶리 뿐만 아니라 인 접한 선원면, 불은면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갑곶나루와 옥개갯벌로 끌려와 살해 된 경우가 많았다. 먼저, 강화면의 양조장 70) 곡물검사소 71) 구금자들이 1951년 1월 초순 집단희생된 사건 이 발생했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69) 1973년 7월 1일 강화면은 면에서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0년 9월 1일로 강화읍은 신문리, 관청리, 국화리, 남산리, 갑곳리, 용정리, 옥림리, 월곳리, 대산리 등 26개의 리로 나뉘어졌다. 1992년 9월 15일 군 조례에 의거, 송해면 신당리 일부가 대산리로 편입되었다. 강화읍은 강화군의 중심지로 도시 형태의 주민밀집지 역이며 강화경찰서, 강화군청 등 각종 민생관련 기관이 집결되어 있었다. 70) 강화군 내의 대표적인 양조장으로는 강화면 신문리 소재 강화양조주식회사와 내가면 오상리 소재 이화양 조주식회사가 있다. 또한 길상면 온수리에는 금풍양조주식회사가 있는데, 이들 양조장들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들이 연행 구금되었던 장소이다. 71) 공식명칭은 농림부 농산물검사소 강화출장소 로 강화면 관청리 145번지에 소재한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27

306 제 2 권 강화특공대 감찰대원 김 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2월 18일경 경찰서에서 200m 떨어진 양조장 건물에 임시본부를 마련한 김 등 우익청년들은 경찰로부터 소총 몇 자루와 야간통행증을 발급받은 뒤,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한밤중에 나오는 부역자들을 경찰서 정문 앞에서 다시 붙잡아 바닷가에서 처치 하였다. 김 은 당시 양조장에 감 금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60여 명으로 남산 절 밑에 사는 오씨네 부부와 며느리들, 양조장 옆에 사는 최진국씨 부부, 차부 옆에 사는 윤기항씨 등이 있었으며, 여자들도 20여 명이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72) 또한 강화특공대 통신부장 한 도 곡물검사소 창고에 5명 이상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고 진술하였다. 73) 김 은 당시 양조장과 곡물검사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이북으로 간 사람들의 가족과 부역을 했다가 피난 못 간 남자들로 밤에 기동대가 나가서 잡아온 사람들 이었는데, 그냥 두면 또 지랄할 것 이라 판단해서 살해했으며, 가족들이 자수하라고 하여 자수한 부역자까지 모두 처형했다 고 증언하였 다. <사진 1> 곡물검사소(농림부 농산물검사소 강화출장소) 전경 농림부 농산물검사소 강화출장소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김 등 우익치안대원들은 강화양조장 이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자 야간에 대 본부를 비밀리에 곡물검사소로 이동하였다. (출처: 강화사, 1976, 486쪽) 72) 김, 강화경찰서 수사결과보고서 ( ); 최강문, 강화특공대원의 고백-학살 배후에 경찰이 있었 다, 월간 말 (1999.7월호); 참고인 최, 진술조서( ). 73) 참고인 한, 진술조서( ). 한 은 당시 강화곡물검사소 소장 한 의 아들이다. 한 는 인민군 환영대회를 나갔던 것이 문제가 되어, 9 28수복 직후 인천으로 송치되었다가, 1950년 11월경 군 사재판에서 불기소처분을 받아 1 4후퇴 직전 집으로 돌아왔다. 1 4후퇴를 전후하여 강화특공대 고문 역 할을 맡았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0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한편 신청인 서영선의 진술에 따르면, 서영선의 어머니 김덕임은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뒤 행방불명된 서영선의 아버지 서 74) 의 행방과 관련하여 1950년 10월 초순경 치안대 사무실로 두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1950년 12월 초순경 복면을 쓴 남 자 2명에게 다시 연행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덕임은 서영선의 막내동생 서화석(당시 1세) 을 업은 채 끌려갔는데, 끌려간 그날 저녁 남자 1명이 서화석만 집으로 다시 데리고 왔다. 며칠 후 서영선의 동생 서유석(당시 8세)은 곡물검사소 근처에서 놀다가 곡물검사소 안 에서 유석아, 유석아 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곡물검사소 창가로 갔더니 안 에 있던 어머니가 내가면 고천리 할머니댁으로 가라 고 하였다고 한다. 75) 서영선의 남매는 이후 어머니의 소식을 알지 못한 채 한 달 정도 지냈는데, 1951년 1월 2일경 특공대원 송아무개가 서영선의 집으로 갑자기 찾아와 너희들끼리 막내동생을 키 울 수 없으니 막내는 어머니에게 데려다주자 고 하여 그 다음날 서영선은 서화석을 업고 그 특공대원을 따라 강화경찰서 정문 앞까지 가 아기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76) 그 후 서영 선 남매는 어머니도 막내동생도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는데, 참고인 진술과 정황을 종합 해볼 때 김덕임과 서화석은 곡물검사소 구금 이후 1월 초순경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강화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사람들이 집단살해되었는데, 이 사건의 경 위는 다음과 같다. 1951년 1월 17일 24시 만조시간에 맞춰 갑곶 당산 건너편 김포 방면에 서 인민군(대대장 박승달)이 박격포 등을 쏘며 3척의 배로 강화로 침입하려고 하자, 77) 강 화특공대는 1951년 1월 18일 오전 2시경 약 15분간 이에 대응하다가 실탄이 떨어져 인화 리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인화리로 후퇴했던 강화특공대는 당산에 인민군 2개 소대만 들 74) 강화군 총무과, 강화군직원이력서철(퇴직자 분) (1966). 이 자료에는 서 가 좌익사상을 포지하고 월 북함 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인 송 진술조서 ( ). 일민주의청년단 통신부장, 후에 강화치 안대 통신부장이었던 송 는 강화경찰서 사찰계 형사 박 가 서 를 잡아넣으려고 준비를 다해놓 았는데 전쟁이 터져 못 잡아서 너무나 분통이 터진다 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75) 신청인 서영선, 진술조서( ); 강화역사연구회 통화보고서 ( ). 2004년 7월 초순곡물검사 소 뒷집에 살고 있던 유 ( 劉, 1935년생, 현재 사망)를 만났는데, 당시 유 는 곡물검사소에 갇혀 있던 김덕임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한 (당시 곡물검사소 소장 아들)의 연락처도 알려주었다고 한다. 76) 참고인 송, 진술조서( ). 강화치안대 통신부장이었던 송 는 1953년부터 1983년까지 고아원 을 운영하였는데, 서영선과 동생이 1953년경 자신이 운영하던 고아원에 왔었다고 한다. 당시 서영선의 모 와 동생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강화특공대원들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고 한 다.; 신청인 서영선, 진술조서( , , ); 참고인 서, 진술조서( ). 77) 북한신문 조선인민군 ( 일자). 강화도 해방전투 제하의 기사에는 박승달 구분대 전투원들은 1951년 1월 17일 24시 만조시간이 되자 3척의 배로 1000m의 거리를 가진 건너편 만수산 비탈의 강기슭을 향하여 은밀히 출발하였다. (중략) 다음날인 1월 18일 12시 제2차 도하를 승리적으로 수행 (중략) 중대장 최광영은 제1소대를 강화서 정면으로 공격하게 하고 제2소대를 좌측 산에 제3소대를 우측 산에 배 치하여 동일 하오 3시 강화시를 비롯한 동도의 10개면을 완전히 해방하였다 고 보도하고 있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29

308 제 2 권 어온 것을 알고, 오후 1시경 강화경찰서로 돌아왔다. 78) 당시 참고인 황 (특공대 직할 소년단)은 자신이 강화특공대와 함께 강화경찰서로 돌아왔을 때 강화경찰서 유치장에 갇 혀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79) 당시 윤기항은 1950년 9 28수복 후 부역혐의로 인천형무소에 구속되었다가 12월 말경 출소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익청년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는 양조장에 구금되었 다가 강화경찰서로 이송되었다. 80) 당시 윤기항의 가족들은 강화경찰서로 이송된 윤기항 에게 10여 일간 밥을 날랐다. 1951년 1월 18일 새벽 4시경에 강화경찰서 쪽에서 5분 정도 총소리가 났으며, 그날 오후 가족들은 윤기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가족들은 강화경 찰서 유치장에서 피범벅이 된 윤기항의 시신을 수습하여 국화리에 안장하였다. 81) 정영진도 1950년 9 28수복 후 종적을 감추었다가 1951년 1월 초순경 강화로 돌아온 직후 강화특공대에게 연행되어 강화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 후 가족들은 정영진이 강화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줄로만 알고 있다가 1951년 1월 18일경 정영진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정영진의 아버지와 유지수는 강화경찰서로 갔으나 시신이 얼굴 형 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어 옷을 보고 신원을 확인하여 선원면 고개에 가 매장하였다. 82) 또한 신청인 이상국은 선원면 주민 고 이 1951년 1월 초순경 친척의 부역혐의 때문 에 강화경찰서 유치장에 연행 구금되어 있었는데 후퇴하던 특공대가 총을 난사하여 유 치장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자신은 시신더미 아래 깔렸다가 살아났다는 말을 전 해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83) 또한 1951년 1월 초순경 불은면 주민 김요경도 월곶(또는 철 산리)으로 들어오다 강화특공대에게 잡혀와 유치장에 있었다. 참고인 한 (당시 강화 경찰서 통신업무 담당)은 유치장에 갔다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를 본 적이 있다고 진술 했는데 이후 김요경의 행방도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김요경 역시 다른 구금자들과 함 께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84) 한편 유제행도 돌모루포구에서 강화경찰서로 연행되어 구금되어 있었는데, 1951년 1월 78) 홍, 회고록 고도의 개가-24인의 결사대, 94쪽. 79) 참고인 황, 진술조서( ). 80) 최강문, 강화 특공대원의 고백-학살 배후에 경찰이 있었다, 월간 말, ( 월호). 81) 신청인 윤석만, 진술조서( ). 82) 신청인 정영춘, 진술조서( ). 83) 신청인 이상국, 진술조서( ). 84) 참고인 한, 진술조서( ). 김요경의 부인 고 이 남편 대신 곡물검사소로 붙잡혀와 특공대원 들에게 밥을 해주고 있었다. 김요경은 1951년 2월 2일 제적등본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0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18일 강화특공대가 삼산으로 후퇴하면서 난사한 총에 다리만 맞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는 1951년 2월 3일경 삼산으로 후퇴했다가 강화로 다시 돌아온 특공대에 의해 사살되 었다. 다음은 유제행의 희생사실에 대해 그의 6촌 유 이 증언한 것이다. 85) 6촌이 9 28 수복 직전 개풍으로 나갔다가 개풍군 영정포에서 다른 사람들과 목선 2대 를 타고 대산리 돌모루로 밤에 돌아왔어. 그런데 특공대원(낙오군인 김상사)들이 수류탄을 던지니까 목선을 탄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 체포된 거야. 특공대원들은 체포된 사람들을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는데 인민군이 들어오자 급하게 후퇴해야 되니까 막 그냥 총을 난사를 한 거야. 그러니까 거기서 산 사람은 살고 돌아간 양반은 돌아가시고. 그런데 우리 육촌은 거기서 살았단 말이에요. 이 양반은 다리에 총을 맞아서 죽지는 않고 부상당해서 살았어. 살아남은 양반들은 다 집으로 후송되었는데 이번에는 인민군이 후퇴하게 되었어. 그러니 여기 특공대가 다시 들어왔잖아. (다시 들어온 특공대원들이) 우리 작은삼촌 유봉철과 큰아 버지를 불러 6촌을 데려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두 분이 들것에 6촌을 실어 국화리 뒷산 방공호에 들여다 놓으니까 그 사람들이 쏴 죽인 거지. <사진 2> 신청인 유수정의 가족 5명 유해 2006년 9월 18일 묘지 이장 중 나온 유골과 유품들이다. 오른쪽 사진은 신청인의 동생 유정애(1942 년생)와 유형근(1948년생)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아기고무신과 어머니 김정선과 할머니 김용령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고무신들을 찍은 것이다. 또 다른 유품으로는 일본소화( 昭 和 ) 동전과 할머니나 어머니 것으로 보이는 은가락지 2개가 나왔다.(신청인 유수정 제공) 유제행이 사살당한 직후인 1951년 2월 5일경 유제행의 두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 85) 참고인 유, 진술조서( ). 당시 유 은 송해면소년단원으로 당시 돌모루포구 상황에 대해서 는 대산리소년단원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31

310 제 2 권 5명(김용령, 김정선, 유정애, 유형근, 유정옥)도 자신의 집 마당에서 특공대원에게 모두 사살되었다. 86) 참고인 이 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이 의 부모가 그들의 옆집에 살 면서 이 상황을 목격했는데 할머니(김용령)가 외손녀(유정옥, 당시 1세)를 업고 있으면 서 애만이라도 살려달라 고 애원하였지만 특공대원들이 총을 쏘아 총알이 아기의 등을 관통하고 할머니까지 죽었다 는 말을 부모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한다. 87) 다음으로 강화면 월곶리 용정리에서도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발생하였다. 월곶리파견대장으로 임명된 강화특공대 전 은 1951년 1월 3일 월곶지서에 사무실 을 두고 40~50여 명의 소년들을 모아 소년단을 조직하였다. 소년단은 해안경비, 통행인 검문뿐만 아니라 피신한 부역혐의자의 가족들을 감시하다가 관련자가 발견되면 곧바로 파견대장 전 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부역혐의자와 가족 100여 명이 특공대에게 연행 되어 월곶지서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소년단 일부는 무기를 소지한 채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하였다. 88) 1951년 1월 12일경 민태식(용정리 주민)은 큰아들 민 이 보도연맹원이었다는 이유 로 정체 모를 사람들 에 의해 용정리 자택에서 월곶지서로 끌려갔다가 실종되었다. 민태 식의 사위 이진항은 민태식이 끌려간 다음날 소식을 듣고 월곶지서로 갔으나 민태식을 만날 수 없었고 대신 지서 인근 주민들이 월곶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은 오늘 새 벽 4시경 갑곶으로 끌려 나갔다 고 하는 말을 전해 들었다. 89) 그 무렵 안용호, 안종서, 한중례, 안종진, 송순이와 안수범 등 용정리 주민이 갑곶나루 와 인접해 있는 용정리 고리나무재에서 살해되었다. 90) 당시 강화특공대 인하리파견대장 계 에 의하면, 그의 사촌형수가 남편(월곶리 인민위원장)이 피신했다는 이유로 월곶 리파견대장 전 의 지시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91) 소년단원 유 의 진술에 따 르면, 그의 친척인 김국진, 황창순, 김용환이 월곶리 선창가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 은 친척들이 살해된 다음날 월곶 선창가로 가보았더니, 김용환의 시신이 물에 쓸려 나 가지 않고 성에로 꽉 찬 월곶 뱃터에 얼어붙어 있었다고 하였다. 92) 86) 신청인 유수정, 진술조서( ). 87) 참고인 이, 녹취록( ). 88) 참고인 유, 진술조서( );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안, 진술조서 ( ); 참고인 남, 진술조서( ). 89) 신청인 이진항, 진술조서( ). 90)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안종욱의 가족 중 안 만 생존하였으며, 송순이의 가족 중 4남은 학살현장에서 생존하였다. 91) 참고인 계, 진술조서( ). 92) 참고인 유,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또한 참고인 전 (용정리 주민)는 1950년 12월 말경 특사령으로 출소하여 용정리 집 으로 돌아오던 길에 인천형무소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갑곶지서에서 붙잡아 살해한다 고 전해주던 11살가량의 소녀 덕분에 피신하여 생존하였다. 93) 다음은 전 의 증언내용 이다. 저는 의용군에 차출되었다가 도망쳤으나 10월경에 용정리치안대장 황혁주가 경찰에게 고발하여 강화경찰서 유치장과 무도장에 다른 300여 명과 함께 구금되었습니다. 그리고 인 천소년형무소로 보내졌죠. 거기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은 적은 없었고 12월 말경 서류재판 을 받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초지나루를 건너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 어 나루 근처 소년단사무실(치안대사무실)에서 밤을 지낸 후, 아침에 해안도로를 따라 선원 면 연리 용진진 근처로 가다가 11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아저씨 인 천에서 오세요? 저도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요 라고 하면서 창리 건너 갑곶지서에서 사람들 을 붙잡아 다 죽이니까 그곳으로 가지마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길로 처가가 있는 인산리로 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대한청년단원들이 갑곶나루에서 기다렸다가 인천 에서 특사령을 받고 출소한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94) 이상의 강화면 사건경위로부터, 1950년 12월 중순경 양조장과 곡물검사소로 연행 구 금되었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1951년 1월 7~8일경 갑곶나루 및 옥개갯벌에서 강 화특공대에게 살해된 사실과 인민군의 강화 침입에 따라 삼산으로 급하게 후퇴하던 강화 특공대에 의해 1951년 1월 18일 새벽 4시경 강화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부역혐의자 들이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월곶리, 용정리의 보도연맹원 가족과 인공치하 시 부역혐의자 가족 등이 강화특공대 월곶파견대(대장 전 )에 의해 월곶지서에 구금되었 다가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하여 월곶선창가 등지에서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2) 선원면 95) 사건발생 당시 선원면에는 면특공대(대장 이 )와 15~19세의 청소년 50여 명으로 구성된 소년단(대장 문 )이 있었다. 또한 선원면 창리에는 대한청년단장 김 가 리 특공대장을 맡고 있었다. 96) 93) 참고인 전, 진술조서( ); 참고인 황, 진술조서( ). 황 은 자신의 국민학교 담 임선생님도 인천에서 특사령으로 출소하여 돌아오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94) 참고인 전, 녹취록( ). 95) 선원면은 금월리, 연리, 지산리, 신정리, 창리, 선행리, 냉정리 등 7개리로 구성되어 있고 강화군 교통의 요 충지로서 철종임금이 애용했다는 찬우물 약수터(강화읍에서 전등사 방향 2km)가 있다. 96) 참고인 문, 진술조서(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33

312 제 2 권 1951년 1월 2일경 선원면 주민 20여 명은 대한청년단원들에 의해 선원면 창리 공회당 으로 소집된 뒤, 같은 날 가마니창고(갑곶리 소재)로 끌려가 구금되었다. 당시 가마니창 고에 구금되었다가 빠져나온 박 의 증언에 의하면, 가마니창고 2개 동에는 선원면 주 민 이외에도 불은면을 포함한 인근지역의 주민 200여 명이 끌려와 빽빽하게 들어 차 있 었다고 한다. 끌려갔던 선원면 주민들은 대부분 그날 저녁 대한청년단 창리 단장 김 의 도움으로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임창준의 부는 창고에 남아 있다가 희생되었다. 신청인 이상국은 그때 창고에 남아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희생되었다 고 진술했는데, 이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고 있다. 97) 또한 1951년 1월 초순경 선원면 소년대장 문 에 따르면, 문 의 10촌 문원기가 가 족이 월북하였다 하여 빨갱이로 몰려 살해된 사실이 있었으며 유지수, 구하서, 구용서, 허 지수, 양효성 등 주민 40~50여 명이 집과 마을 부근 야산에 숨어 있다가 특공대에 의해 잡혀 손이 뒤로 묶인 채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당시 특공대는 총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당일 끌려간 주민들은 선원지서 뒷산에서 총살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98) 참고인 이 도 같은 시기에 선원면 주민 고충영이 특공대에게 오랏줄에 묶여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고충영의 어머니 정 도 친척 김 의 모, 전 의 처 등과 함께 부역혐의자 가족이라 하여 이봉춘의 집 나뭇광(창리치 안대 사무실)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행방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참고인 이 은 자신의 아버지 이 이 그 무렵 창리치안대장 김 의 지시로 친구 김, 한 와 함께 선원면 대문고개에서 시신을 수습한 적이 있었는데, 수습 당시 시신들은 철사로 묶인 채 총살된 상태였다고 진술하였다. 99) 이상의 선원면 사건경위로부터, 1951년 1월 초순부터 중순 사이에 피신한 부역혐의자 또는 그 가족들이 강화특공대 선원면특공대에 의해 가마니창고(갑곶리 소재)와 대문고개 (냉정리 소재) 등지로 끌려가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3) 하점면 100) 하점면은 강화군 인민위원장이었던 황 101) 의 출신지역이기도 하고, 강화군의 모스 97) 신청인 이상국,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98) 참고인 문, 진술조서( ). 99)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신청인 이상국, 진술조서( ). 100) 하점면은 1983년 1월 10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해 양오리가 송해면에 편입되면서 신봉리, 장정리, 부근리, 삼거리, 신삼리, 망월리, 창후리, 이강리 8개리로 확정, 현재에 이름. 서해안 방어의 전초기지로 해안선 4km에 걸쳐 군작전 요충지 8개소가 자리하고 있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크바 라고 불릴 정도로 인공 통치 시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따라서 1 4후퇴 이전부터 강화경찰서 하점지서(주임, 경사 황 ) 102) 에 편재된 치안대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경 찰에 의한 가해사실도 다른 면과 달리 곳곳에서 확인된다. 경찰이 1 4후퇴를 하자 하점 치안대(부근리 이, 장정리 나, 삼거리 이 등)는 강화특공대 하점지대(대장 이, 부대장 이, 대원 고 )로 편입되었는데, 강화특공대 하점지대는 하점지서 에 사무실을 두고 소년단을 조직하고 경찰처럼 행세하였다. 이 소년단은 12세에서 20세 까지의 소년 50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03) 1950년 12월 28일 하점면 장정리 주민 유석근은 아들 유 104) 의 부역혐의로 장정리 치안대장 나 의 협조를 받은 하점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나간 뒤 자신의 집 인근 과 수원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신청인 유희종의 진술에 의하면, 평소 장정리치안대장 나 과 함께 마을 순찰을 자주 돌던 하점지서 순경이 1950년 12월 28일경 105) 미군 군복을 입고 칼빈총을 든 채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유 의 행방을 조사하겠다며 아버지 유석 근을 데리고 나갔다. 유석근이 경찰과 나간 지 약 10~15분 후에 2발의 총소리가 났는데 다음날 가족들은 집 근처 과수원에서 가슴에 총상을 입은 유석근의 시신을 발견하였으며 아들 유석태와 이웃사람 몇몇이 시신을 수습하여 인근에 가매장하였다고 한다. 106) 다음으로 황 과 하점국민학교 동창으로 인공 통치 시 하점면 삼거리 인민위원장이 었던 고해희는 1950년 9월 20일경 개풍으로 피신하였다가 1950년 11월 말경 철산리를 통 해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강화특공대에게 연행되어 하점지서에 구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 달 뒤인 1950년 12월 28일경에 살해되었다. 참고인 고 (고해희의 아들)에 따 르면, 고해희는 고문으로 죽을 지경이 되자 강화특공대가 지서 밖에 버려 동사( 凍 死 )했다 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 소식은 시신을 수습한 친척 고규영이 알려주었다고 한다. 107) 그 101)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02) 강화경찰서, 자 4283~4289 인사사령부 (1956). 1 4후퇴 하점지서 주임경사 황 은 1951년 4월 30일 규율문란으로 견책을 받았다. 견책이유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103) 서울지검 인천지청, 형사사건부 제3-1권 권행번호 1320 (1951). 황 과 고 은 1951년 5월 9일 국 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되었으나 기소유예된 바 있다. 104) 유 은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으로 마산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복막염으로 출소하였다. 105) 국민방위군을 포함한 5,000여 명이 LST로 강화군 외포리에서 제주도로 후퇴하던 날 발생한 사건이라고 다시 진술하였다. 106) 신청인 유희종, 진술조서( , ). 당시 장정리 주민 상호 아버지(성명미상)도 치안대장 나 에게 끌려 가 구타를 당한 뒤 자살하였다고 한다. 107) 참고인 고, 진술조서( ). 당일은 국민방위군에 나가는 사람들이 외포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까지 경찰은 후퇴하지 않았다. 그 즈음 고 (고해희의 8촌)의 부인 등 부역혐의자 부인들은 남편의 부역혐의로 삼거리치안대장 이 에게 연행되어 성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35

314 제 2 권 리고 고해희의 이웃주민 한효석도 인공 통치 시 부역혐의로 피신했다가 1 4후퇴를 전후 하여 강화로 돌아오다가 강화특공대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압송되는 도중 행방불명되 었는데, 그 역시 당시 상황으로 보아 살해된 것으로 판단된다. 108) 당시 안 등 하점면소년단원들은 9 28수복 후 피신했던 조주봉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1951년 1월 초 김포 친정에 다녀오던 조주봉의 처가 갑곶나루에서 특공대에게 잡혀서 살해된 소식을 들었다. 109) 또한 1951년 1월 3일경 황철익, 안익섭, 안기섭 등이 특사령을 받고 출소하여 하점면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화특공대 하점지대에게 찬우물고개(대문고개 인근에 위치함)로 끌 려가 살해되었다. 110) 다음은 황철익의 희생사실과 관련한 신청인 황인선(황철익의 아들) 의 증언내용이다. 111) 저의 아버지 황철익은 인공 시절 방공호를 파는 부역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9 28수복 후에 치안대장 이 이 아버지를 고발하여 구속되었다가 1950년 12월 말경 특사령으로 출 소했어요. 그런데 석방된 후 다시 이 의 고발로 강화특공대 하점지대장 이 에게 붙 잡힌 후 학살되셨다고 고모 황봉림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당시 저의 할아버지께서 대문고개 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셨는데 시신수습 당시 대문고개 여기저기에는 가마자루로 덮 어놓은 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할아버지의 7촌 조카 황 도 아버지와 함께 대문고개로 끌려갔으나 뇌물을 썼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1951년 2월 9일경 1대 하점면장 김현식 112) 이 강화특공대 하점지대에게 연행되어 부근 산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참고인 이 ( 李 桂 容, 강화특공대 하점지대 부대장)은 김현식 살해사건과 관련하여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 판을 받았다. 이 사건의 판결문에는 이 은 강화 향토방위특공대 하점 부대장으로 재 임 중 서기 1951년 2월 9일 오후 5시경 경기도 강화경찰서 하점지서에서 약 500미터 상거 108) 참고인 고, 진술조서( ); 참고인 고, 진술조서( ). 당시 고 의 식구들은 삼 거리치안대에게 집을 빼앗겨 한효석의 집에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효석의 희생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 한다. 109) 참고인 안, 진술조서( ). 110) 참고인 황, 진술조서( ); 참고인 안, 진술조서( ). 하점면 주민 안익섭, 안기섭, 안상섭, 안, 안학섭, 황철익, 황 등은 인공 통치 시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9 28수복 직후 하점치 안대장 이 에게 고발당하여 구속되었다. 111) 신청인 황인선, 진술조서 ( ). 112) 군사편찬위원회, 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160쪽. 1대 하점면장 김현식의 재임기간은 ~ 이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한 후산 방공호에서 전기 특공대 하점대장 이 의 지시에 의하여 적에게 제보하였다는 김현식을 총살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113) 그러나 이 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갑곶 당산으로 인민군이 들어온다 하여 인화리로 후퇴하였는데, 그날 오후 다시 돌아와 보니 김현식 등 30여 명이 인공기를 달고 있었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중략) 그래서 하점지대장 이 이 김현식을 산 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고 진술하였다. 또한 이 은 하점면 부근리치안대장 이 이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고 덧붙였다. 114) 한편 강화소년단원 황 과 정 은 강화특공대와 함께 삼산으로 후퇴하였다가 1951 년 2월경 하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김현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115) 정 은 당시 1대 하점면장 김현식이 인공 시기 인민군들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고 하면서, 김현식 외에도 몇몇 주민들이 특공대에게 잡혀가 살해되었는데 정 확한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진술하였다. 116) 이상의 하점면 사건경위로부터,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하여 하점면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각 리의 치안대장(이장이 겸임)의 협조를 받은 하점지서 경찰관 또는 강화특 공대 하점지대에 의해 하점지서로 연행된 뒤 고문사하거나 하점면 뒷산 또는 찬우물고개 등에서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4) 송해면 117) 송해면에는 1951년 1월 3일경 강화특공대 돌모루파견대(이, 후임 이 )가 파견 나와 있었으며, 대산리소년단 등 약 100여 명의 소년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118) 그런데 송해면에서 있었던 돌모루포구 사건은 강화특공대가 대표적인 전과로 내세우 는 당산 전투와 돌모루포구 전투 중 하나로 그 전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13) 서울지검 인천지청, 형사사건부 제3-1권 권행번호 1320 (1951). 114)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이 은 서북청년단 감찰부장, 대동청년단 감찰부장, 대한청년단 감찰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115) 참고인 황, 진술조서( ). 사건 당시 황 은 하점지대장 이 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116) 참고인 정, 진술조서( ). 117) 서해안 방어의 전초기지로서 해안선 길이가 4.2km이며 5개리가 현재는 민통선 북방에 위치한 최전방 지역이다. 1983년 2월 15일 하점면 양오리가 송해면에 편입되어 현재 솔정리, 신당리, 하도리, 양오리, 상도리, 숭뢰리, 당산리 등 7개 법정리로 구성되었다. 1992년 신당리 일부가 강화읍 대산리로 편입됨에 따라 참고인들은 사건 지역명을 서로 달리 증언하고 있지만 사실상 동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 된다. 118) 참고인 김, 진술조서(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37

316 제 2 권 1951년 1월 7일 경 돌모루파견대는 강화도 건너편 해안에서 내무서원(그 중 인민군 여러 명 포함)과 월북자를 실은 배가 들어올 것이다 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강화면, 하점 면, 양사면 등 인근지역의 소년단을 동원하여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배에서 내리 는 사람들 중 총을 쏘아 그 자리에서 3~4명이 희생되었고 다수는 포로로 잡았다고 하였 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2003)에는 1951년 1월 5일 특공대는 개풍군 일대에 내무서원 22명과 인민위원회 요원 50여 명이 강화로 돌아오기 위해 도강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돌모루선창가 일대에 대원들을 배 치하고 기습해 그들의 대다수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강화사 편찬위원회 편 강화사 (1976)는 1월 7일 밤 11시 30분에 (중략) 약 5분간의 교전에 서 보잘것없는 장비를 한 특공대원들에 의해 괴뢰군 289명이 머리에 손을 얹고 생포 당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119) 그러나 참고인들은 당시 사건과 관련하여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또 다른 증언 하고 있다. 1 사건현장에 있었던 황 (대산리 소년대장)은 돌모루포구로 들어오는 목선에 탄 사람들은 70여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강화 사람들로 군인인지 내무서원인지 몇 명 의 인솔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특공대원들이 총을 쏘아 파란색 줄무늬 군복바지를 입은 사람 등 몇 명이 배에서 내려오다 총을 맞고 쓰러진 것이 기억이 납니다. 특공대 이 이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새끼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배에서 손을 들 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소년단원들이 손을 뒤로 하여 새끼줄로 묶었습니다. 그날 체포된 사람들은 돌모루 빈 집에 가두어놓고 소년단이 지켰는데, 다음날 파견되었던 특공대원 들이 강화경찰서로 연행하여갔습니다 라고 하였다. 120) 2 참고인 황 (강화특공대 직할소년단)은 돌모루 전투는 배에서 내린 민간인들이 이리저리로 튀어나가는 것을 잡았을 뿐으로 전투라고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는 또한 돌모루포구에서 강화경찰서로 끌려온 50~60여 명의 사람들은 월북했던 강화 사람들로 장터에서 조리돌림당한 후 죽었다 고 진술하였다. 121) 송해면소년단원 유 과 하점면소 년단원 유희종도 동일한 진술을 하였다. 122) 119) 강화사 (1976년), 35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2003년), 32쪽. 120) 참고인 황, 진술조서( ). 121) 참고인 황, 진술조서( ); 참고인 고, 진술조서( ). 122) 신청인 유희종, 진술조서( , ); 참고인 유, 진술조서( ); 참고인 고, 진술 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3 또한 김 (강화특공대 감찰대원)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복 당시 북으로 도망 을 갔다가 돌모루포구로 다시 들어오던 부역혐의자 40여 명을 옥개갯벌에서 처형하였다 고 증언하고 있다. 123) 4 참고인 한 (강화특공대 통신부장)도 특공대원들이 개새끼들 이라고 막 욕을 해 대며 이북에서 강화로 넘어온 사람들을 죽이러 갑곶리 삼바시(배를 대는 곳)로 데리고 간다 고 하였으며 그들은 바다에 수장됐을 것이다 고 진술하였다. 124) 5 한편 참고인 최 (강화특공대 대장)은 돌모루, 철산리포구로 돌아오는 강화군 월 북자들을 생포하여 육군 특무대 소속 김인칙에게 넘겼다. 강화특공대가 넘긴 포로들은 강화읍 신문리 소재 일반주택에서 특무대원 김인칙이 조사를 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육 군본부로 데리고 갔다 125) 고 진술하였다. 위의 기록과 진술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돌모루포구로 들어왔던 사람들은 국방부 군사편 찬연구소나 강화사편찬위원회의 기록과는 달리 배에서 내려 도망가려다가 잡힌 비무장 민간 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부역혐의 때문에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개풍 등으로 피신했다가 1951년 1월경 황해도 피난민들과 함께 고향인 강화로 돌아오던 민간인들로 판단 된다. 이들 중에는 인공 통치 시 인민위원으로 부역한 사람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위의 진술로부터는 그들 다수가 정규 인민군이거나 내무서원이라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소년단 황 의 진술과 같이 당시 개풍군 풍덕 쪽에서 적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경찰서에서 특공대원 4명이 나와 돌모루파견대 2명을 포함한 6명이 M1, 칼빈으로 무장 을 했으며 40~50명의 소년단원들이 있었다고 하나, 배에 탄 정예 내무서원 22명을 포함한 70여 명을 5분간의 전투로 생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판단된다. 또한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개풍으로 피신하였다가 1951년 1월경 강화로 돌아온 송 해면 주민 김근식과 이진태의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강화특공대에게 잡혀 강화경찰서로 123) 김, 강화경찰서 수사결과보고서 ( );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월곶리소년단원 김 은 음력 섣달 그믐날 밤 개풍 영정포에서 대산리 돌모루로 들어오던 사람 70여 명을 잡아 새끼줄 로 묶어 대산리 빈집에 가두었다가 월곶리파출소로 데리고 와 한나절 취조한 뒤 그날 오후로 강화경찰 서로 보냈다고 진술하였다. 124) 참고인 한, 진술조서( ); 참고인 최, 진술조서( ); 최, 강화경찰서 민원처리 결과보고 ( ). 125) 참고인 최, 진술조서( ); 최, 강화경찰서 민원처리결과보고 ( ). 최 은 생포 한 포로 중에는 북한군과 민간인이 섞여 있었다고 하는데 송해면소년단원 유 은 돌모루포구로 들어 왔던 사람들은 인민군이 아닌 민간인이었다고 하였다. 그들 중 내무서원이 2~3명도 타고 있었는지는 분 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하점면 소년대장 황 은 내무서원이 1~2명 있었다고 하였다. 황 은 강화 주민이라고 하였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39

318 제 2 권 이송되었다가 돌모루포구에서 연행되어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강화 장판에서 1951년 1월 7일경 조리돌림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 당시 강화특공대에게 잡힌 이명준은 총상으로 인 해 사망하였다. 126) 따라서 당시 돌모루포구로 들어오던 사람들은 인민군이거나 내무서원 이 아닌 9 28수복 후 부역혐의 등으로 피신하였던 강화 민간인들로 판단된다. 또 송해면에서 있었던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는, 1951년 1월 초순경 강화특공대와 소년 단원 50여 명이 송해면 주민 황운영을 부역혐의로 잡아 송해면 당산리 마을 앞에서 죽 여라 고 소리치며 발로 차고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다. 사건 직후 황운영의 처와 자녀도 딸 1명을 제외하고 인근 야산에서 모두 총살되었다. 127) 또한 송해면 오류천에 살던 함 과 김 의 처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숭뢰리 구일회를 소년단에게 정보를 얻은 강화 특공대가 연행하였는데 구일회는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128) 이상의 송해면 사건경위로부터,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하여 70여 명의 민간인이 돌모 루포구로 들어오다가 강화특공대에 의해 체포되어 한국군 특무대로부터 조사를 받은 적 이 있었으며, 그들은 강화장판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갑곶나루 등지로 끌려가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송해면소년단의 신고로 연행된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이 강화 특공대에 의해 송해면 소재 당산리 마을 앞에서 집단 린치를 당하여 사망하거나, 인근 야 산으로 끌려가 살해된 사실도 확인되었다. 5) 양사면 129) 양사면에는 1951년 1월 3일 경 강화특공대 철산포구파견대(대장 홍 )와 인화포구파 견대(대장 계 )가 나와 있었다. 또한 양사면에는 강화특공대의 지시에 따라 면특공대 (대장 김수현, 감찰부장 장 )와 각 리에서 차출된 300여 명의 소년단(대장 김 )이 조직되어 있었다. 130) 당시 철산포구로 파견 나온 강화특공대 부대장 홍 은 양사지서 건물에 파견대본부를 정한 후, 인적자원의 확보 및 해안지대 경비를 위해 각 부락에 거 126)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27)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28)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29) 양사면은 철산리, 덕하리, 교산리, 북성리, 인화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1950년 6 25사변으로 면사무소 를 철산리에서 덕하리로 이전하였으며 4년 뒤 현 위치인 교산리로 옮겼다. 양사면은 강화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바다 건너 개풍군과 직선거리로 1.8km 떨어져 있어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경기도 개풍 군과는 사실상 같은 생활권이었다. 따라서 9 28수복 직후 인화리포구와 철산포구를 통하여 개풍으로 피 신하였던 부역혐의자들은 1 4 후퇴 후 양사면을 거쳐 귀향하였다. 130) 참고인 김, 진술조서( ). 당시 양사면특공대는 양사지서를 사무실로 사용했고 소년단은 선 창가에 있는 최영민의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당시 강화특공대가 보유했던 무기는 청년방위대와 경 찰이 주고 간 것 이라고 하였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주하는 만 55세 미만의 전 부락민을 소집 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부역혐의가 있는 양사면 주민(성명불상자)을 연행한 뒤 1명을 본보기로 총살하였다. 131) 또한 인하리에는 강화특 공대 계 이 파견 나와 본부를 인화지서에 두고 관할구역인 교산리, 인화리의 각 이장 과 반장을 만나 식사와 정보제공, 돈대 132) 의 경비를 부탁 하였으며 월북 및 부역자 가족 들을 지서로 수시로 불러 가족의 행방을 조사 하였다. 133) <사진 3> 집단 희생지 양사면 철산리 해안가 북한이 바라다 보이는 양사면 철산리 해안. 전쟁이 나면서 개풍, 연백지역으로 북한군, 피난민, 월 북자, 납북자와 수많은 UN군 소속 첩보대원들이 이곳을 넘나들었다. 1951년 1월 7일 밤 피신귀향자들이 양사면 철산포구에서 집단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철산포구 파견대장으로 나가 있던 홍 의 증언과 양사면 소년대장 김 의 진술로부터 확인되었다. 참고인 김 은 이 사건으로 16명이 희생되었다고 했는 데, 홍 은 회고록에서 28명이 희생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월북했던 민간인 16명이 밤에 배로 들어오는데, 소년단원들은 겁이 나서 배에 탄 사람 들을 무조건 때려잡아 16명을 다 죽였다. 사람들을 죽일 때 장 (양사면특공대 감찰대장) 은 총을 쏘았고 나머지는 몽둥이를 사용하였다. 134) 131) 홍, 회고록 고도의 개가-24인의 결사대, 69쪽. 132)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 塼 )으로 쌓아올려 망루( 望 樓 )와 포루( 砲 樓 )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 직한 누대( 樓 臺 ). 133) 참고인 계, 진술조서( ). 계 은 인화리 인민위원장의 아들 김 을 살려주면서 대신 부 역자 가족들을 감시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134)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양사면 소년대장 김 은 강화에서 수백 명씩 적군이 들어와 전투 한 적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41

320 제 2 권 1월 6일 밤 월북자 2명을 생포하여 정보를 (중략) 토대로 1월 7일 밤 11시 30분 철 산포구로 들어오는 배를 포획하였는데 손들고 내려오는 적들을 면 대원과 소년대원들이 마 구 찍고 때려 순식간에 갯벌은 시체와 피로 뒤덮였다. 선내에 남은 자 2명만을 겨우 보호하 여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뿐 침공했던 28명의 적들은 모두 사살 또는 타살되었다. 사망자 를 조사하니 모두가 강화 출신 월북자들로서 한때는 호형호제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으며 무기를 버리고 항복의 의사를 표시한 적이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감과 죄책감과 아 무리 사상을 달리한 적일망정 동향에서 같이 자라나 서로 지면이 있던 사이이고 보면 한편 으로 동정심이 간다. 135) 한편 1950년 겨울 양사면 주민 이영업은 남로당 양사면 총책이었던 동생 이 때문 에 강화치안대 김 에 의해 양사지서로 연행되어 이웃주민 이삼봉, 김태연과 함께 구 금되었다. 신청인 이정희(이영업의 딸)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이영업은 이삼봉과 함께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정희는 이삼봉의 딸과 함께 아버지에게 15일간 밥을 나르고 있었 는데 자신의 외삼촌으로부터 아버지 이영업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양 사면 소년대장 김 역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고모부 이영업이 김태연과 양사파출소 로 잡혀와 구금되어 있었는데 면 감찰대장 장 이 이들을 철산포구에서 총살하였다 고 진술하였다. 당시 이삼봉도 살해당하였다. 이영업이 사망한 얼마 후 이영업의 아버지 이 동식도 치안대원 조, 조, 조 등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1951년 8월에 고 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36) 또한 1951년 1월 3일경 양사면 주민 김영순은 특사령으로 석방되어 집에 돌아와 신병 치료 중이던 중 강화특공대원에게 연행되었다. 김영순은 철산리 소재 최영의 곳간에 김 수만 등 10여 명과 1주일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희생되었다. 신청인 김의용(김영순의 아 들)에 따르면, 최영의 곳간 근처에 살고 있던 서영득이 1월 16일경 자신의 집으로 와 특 공대 감찰대원 장 이 철산포구에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창문을 통해 보았다 고 전하였다고 한다. 137) 양사면 주민 전동실도 인공 통치 시 의용군으로 차출되었는데 9 28수복이 되자 처벌 135) 홍, 회고록 고도의 개가-24인의 결사대, 69-85쪽. 홍해양의 본명은 홍 으로 1950년 12월 초순 보병 제7사단사령부 일등상사로 평남 덕천까지 북진하였다가 중국군의 반격으로 부대가 포위되면서 소 속을 잃고 고향인 강화도로 돌아온 낙오군인이다. 송 의 진술에 따르면 강화 초대군수 홍재용과 집안 관계였으며, 부잣집 외아들로 그림을 잘 그리고 글도 잘 썼다고 한다. 참고인 송 진술조서 ( ). 136) 신청인 이정희, 진술조서( ). 2003년 경 강화에서 이삼봉의 딸을 만나 이삼봉도 당시 희생된 시 실을 들었다고 한다. 137) 신청인 김의용,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2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을 받을까 두려워 황해도 연백으로 피신하였다가 귀향했다. 당시 전동실은 의용군에 차 출된 것이 별다른 죄가 되겠냐며 고향에 돌아와도 별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강화로 귀향했다고 한다. 138) 그러나 1951년 1월 초순 강화로 돌아온 전동실은 양사지서로 연 행 구금되었다. 전동실이 연행된 직후 전동실의 처가 양사지서로 면회를 갔으나 전동실 이 강화경찰서로 이송되었다고 하여 그곳까지 찾아갔지만 전동실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전동실과 같이 양사지서에 감금되었던 지인이 가족을 찾아와 특공대가 전 동실을 정월 보름날에 양사지서에서 데리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며, 그날 죽은 것 같 으니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라 고 전해주었다. 139) 참고인 김 (양사면 소년대장)에 따르면, 양사면 주민인 최석출의 처가 특공대를 피 해 친정인 삼산으로 가 있었는데 1951년 1월 18일 삼산으로 후퇴하였던 강화특공대가 이 사실을 알고 최석출의 처를 연행하였다고 한다. 특공대원들은 그녀를 똥을 싸도록 구타 하여 살해하였고 그의 아이(당시 2세)와 최석출의 처남도 살해하였다. 140) 또한 참고인 김 은, 소년단사무실로 사용했던 최영민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동조하거나 부역하였다는 이유로 잡혀와 있다가 철산포구에서 살해되었는데 철산포구 앞바다에 여 성동맹원이었던 임산부의 시신이 떠 있는 것도 보았다 고 진술하였다. 141) 이상의 양사면 사건경위로부터, 개풍 등으로 피신하였다가 철산포구를 통해 강화로 귀 향하던 민간인 대다수가 1951년 1월 6일경 강화특공대에게 살해된 사실과 1951년 1월 3 일부터 중순에 걸쳐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양사면특공대에게 연행되어 최영민의 집 또는 최영의 집 곳간에 구금되었다가, 철산포구에서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6) 길상면 142) 길상면치안대(대장 김, 부대장 주, 감찰부장 김 )는 1950년 9 28수복 직후 부터 길상지서와 양조장에 사무실을 두고 경찰에 협조하다가, 1951년 1월 경찰이 후퇴하 138) 신청인 전종국, 진술조서 ( ). 당시 연백은 남한지역이었는데, 당시 연백에서 뱃일을 하던 이종 사촌 최 이 전한 내용이다. 139) 신청인 전종국,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오, 진술조서 ( ). 140)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41)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한, 진술조서( ); 참고인 한, 진술조서 ( ); 참고인 한, 진술조서( ). 142) 길상면은 온수리, 선두리, 동검리, 초지리, 장흥리, 길직리 등 6개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1914년 정두동, 정 하동(현 양도면 도장리, 길정리)을 양도면에 편입하고 경기도 부천군 동검도를 합병하여 길상면이라 칭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길상면사무소가 멸실되었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43

322 제 2 권 자 강화특공대로 편입되었다. 편입 당시 50~60명의 소년들로 길상면소년단(대장 김 )이 조직되었다. 143) 당시 길상면특공대는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하고 다녔는데, 144) 감찰 부장인 김 은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 마을사람들을 금풍양조장과 면사무소 부속건물 인 지하실로 끌고 가 구타하고 여성들의 경우는 성폭행을 하기도 하였다. 145) 한편 안 를 비롯한 강화특공대원 1~2명과 교대로 길상면소년단 3~4명이 나와 초 지를 통과하여 북쪽 방향으로 가는 배들을 검문하거나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때문 에 초지포구는 김포 대명리포구에서 출발한 배가 강화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포구 로, 146) 당시 인천에서 강화로 돌아오던 길상면, 화도면, 하점면, 양사면 출신의 특사령자 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다가 강화특공대에게 연행되었다. 1950년 12월 말경 특사령으로 출소한 조진숙은 강화특공대가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길상면 장흥리의 외가로 피신하였는데 그곳까지 쫓아 온 감찰부장 김 등 2명에 게 1951년 1월 6일경 연행되었다. 147) 다음날 특공대에게 끌려갔던 사람들이 사슬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고인 서 (조진숙의 조카)은 외조모와 함께 사슬재로 갔다. 당시 서 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사슬재 방공호 안에는 사망한 지 며칠 지난 듯한 50 여 구의 시신들이 포개져 있었다. 148) 시신들은 대부분 남성의 시신이었고 아기를 업은 여 성의 시신도 한 구 있었는데 149) 이 시신은 장훙리에 거주했던 남로당원인 의사 이용덕의 부인 윤옥희와 그의 아들 이경덕(당시 4세)의 시신이었다고 한다. 150) 서 은 포개져 있 는 시신 중에서 조진숙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사슬재를 내려오다가 고개 들머리에서 머 리가 깨지고 가슴에 총상을 입은 조진숙의 시신을 발견하여 수습하였다. 특사령 출소자 안보명도 사슬재에서 살해되었다. 신청인 안귀상(안보명의 아들)에 의 하면, 사건 당시 길 옆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안귀상의 형이 안보명과 여러 사람들이 양 손이 뒤로 묶인 채 치안대원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다음날 치안대 감찰 부장 김 이 안보명이 사슬재에서 죽었다 며 안보명의 사촌형에게 전하였다. 안보명의 143) 참고인 김, 진술조서( ); 국방부, 신, 참전사실확인신청서 ( ). 144)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45) 참고인 윤, 진술조서( ); 참고인 황,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 146) 참고인 안, 진술조서( ). 147) 참고인 서, 진술조서( ). 사슬재 희생 사건 목격자로 길상면에서는 서, 김, 김선수 등 약 10여 명이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다. 148) 참고인 서, 진술조서( ). 서 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 중 150여 구로 진술하였다. 149) 참고인 서, 진술조서( ); 신청인 조광호, 진술조서( ). 150) 참고인 고,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2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처와 처남, 사촌형이 사슬재에서 총알이 관자놀이를 관통한 안보명의 시신을 수습하였 다. 151) <사진 4> 집단희생지 길상면 온수리 사슬재 길상면 온수리 사슬재에서는 길상면 온수리 지서와 우체국, 양조장에 감금되어 있던 부역 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살해된 곳이다. 특사령 출소자 안 과 안상섭은 1951년 1월 3일경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상면 초 지포구에서 길상면특공대에게 연행되어 우체국에 구금되었다. 그들은 그날 저녁 다른 구 금자들과 함께 사슬재로 끌려가, 특공대원들이 쏜 총에 안상섭은 사망하였고 안 은 현장에서 도망쳐 나와 생존하였다. 152) 다음은 이 사건의 생존자 안 의 증언내용이다. 1951년 1월 3일경 저와 안상섭이 길상면 초지포구에 도착하자 미리 와서 기다린 듯한 10대 후반 소년 4명과 30대 후반 남자 1명에게 연행되었습니다. 우리는 길상면 우체국으로 이동하여 구금되었는데 그때가 오후였습니다. 같이 구금된 사람 가운데 화도면 사람들은 국회의원 윤재근이 빼내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1시가 되자 특공대원들이 남은 구금자들을 끌어내 사슬재로 끌고 갔습니다. 그때 안상섭은 구금자 중 다리가 부러진 여성 1명을 업은 채 끌려갔는데, 저는 안상섭에게 상섭이, 네가 업고 있는 여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라도 도망쳐서 살자 고 말을 했고 안상섭도 알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특공대원들은 151) 신청인 안귀상, 진술조서( ). 5년 전 한 할머니가 찾아와 남편이 죽은 곳이라도 알고 싶다 고 하 면서, 남편의 부역혐의로 김 에게 끌려가 여자로서 말 못 할 수모를 당하였다 며 흐느껴 울었다고 하였다. 152) 참고인 황, 진술조서( ); 참고인 안, 진술조서( ); 신청인 안학섭, 진술조서 (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45

324 제 2 권 안상섭을 포함한 구금자들을 사슬재 방공호에 들어가게 한 후 총을 쏘아 학살하였습니다. 특공대원이 끌려온 순서대로 방공호에 들어가라고 머리를 치면 사람들은 순서대로 방공호 로 들어갔고 일정 수의 사람이 방공호에 들어가면 특공대원이 총으로 학살하였습니다. 제 차례가 오자 특공대원이 저의 머리를 쳤는데, 그때 저도 모르게 그래, 이 새끼들아 라고 소 리치면서 방공호를 뛰어넘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특 공대원들도 들었는지 총질을 계속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총격을 피해 남의 집 헛간에 숨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3일 동안 숨어 있다가 친척 집으로 도망가 생존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참고인 고 은 길상면 온수리 이장이던 강 가 전동학이 특공대에게 잡혀 가던 중 살해되어 그의 시신이 논 옆 수로에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고 진술하였다. 153) 당 시 전동학의 사위 등 가족들은 사슬재에서 치아를 보고 시신 한 구를 찾았으나, 확인해보 니 그 시신이 전동학의 시신이 아니어서 근처 야산에 매장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가족들은 전동학의 처 유오목이 영감탱이 북으로나 넘어가서 자기나 살지 남아 있는 가 족을 살린다고 산속으로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사슬재에서 죽었다 는 말을 하는 것을 자 주 들었다고 한다. 154) 또한 길상면소년단 윤 은 소년단원들이 강화특공대에게 온수리 주씨와 배상호의 아버지 소재를 신고하여, 그 두 사람이 특공대원에 의해 길상면 양조장으로 연행 구금 되었다가 사슬재로 추정되는 부근 야산으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길 상면에서는 1 4후퇴 후에 사건이 주로 발생했는데 당시 잡혀간 100여 명 중 사슬재에 서 20여 명, 신사터 부근에서 3~4명이 희생된 사실을 알고 있다 고 하였다. 155) 이상의 길상면 사건경위로부터, 1951년 1월 3일경 길상면 초지포구를 경유하여 인천에서 강화로 귀향하던 길상면, 화도면, 하점면, 양사면의 특사령 출소자들이 길상면특공대에게 연행되어 우체국과 양조장 등에 구금되었다가 온수리 사슬재와 신사터 등으로 끌려가 살해 된 사실과 길상면에 거주하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이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7) 내가면 156) 1951년 1월경 내가면에는 면특공대(대장 김, 157) 감찰부장 유 158) )와 150여 명 153) 참고인 고, 진술조서( ). 154) 참고인 전미숙, 진술조서( ); 참고인 서, 진술조서( ). 155) 참고인 윤, 진술조서( ). 156) 내가면은 고천리, 오상리, 외포리, 황청리, 구하리 등 5개리로 구성되어 있고, 강화읍에서 18.6km 떨어진 곳으로 동쪽은 고려산과 혈구산으로 둘러싸인 산간지역이며 서쪽은 평야지역으로 해안과 연접. 본 면의 서남쪽에 위치한 외포항은 교동, 삼산, 서도의 입 출항지로서 여객선과 화물선이 운항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25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의 소년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면특공대본부는 내가지서에 있었고 소년단사무실은 내가 면 면소재지인 고천리의 윤철상 집에 있었다. 159) 신청인 서영선의 진술에 의하면, 1951년 1월 중순경 인민군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에 강화면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자 서영선 등 5남매도 할머니 구씨( 久 氏, 제적등본 기재)가 있는 내가면 큰집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큰어머니가 남동생 서유석 외에는 맡기를 거 절하자, 할머니 구씨와 함께 세 자매는 강화로 돌아오기 위해 고비고개를 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특공대원들이 고비고개에서 검문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특공대원이 할머 니를 끌고 갔고 서영선 네 자매는 내가지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다음날 내가면 마을주민 이 구씨 할머니의 시신이 마을 어귀에 있다고 알려주어, 서영선의 5촌이 시신을 수습하여 밭에 가매장하였다. 160) 이와 관련하여 참고인 김 (내가면 소년단원)도 당시 구씨 할머 니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내가지서로 끌려간 서영선의 진술에 따르면, 내가지서 유치장에는 20~30명의 아 저씨, 아주머니들이 무릎을 꿇린 채 갇혀 있었는데, 당일 저녁 구금자들과 함께 서영선 자매는 내가지서에서 30여 분 떨어진 외포리 선착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서 영선 자매는 배표 파는 정 의 아버지 도움으로 특공대원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빠져나 와 다음날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외포리 선착장에 끌려갔던 다른 구금자들의 행방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1) 다만 고비고개에서 살해된 구씨의 제 사일이 1월 17일이므로 내가지서에 구금되었던 사람들이 외포리로 끌려간 날은 강화특공 대가 석모도로 급히 후퇴하던 1951년 1월 18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정황상 내가지서에 구 금되었던 20~30명은 이날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참고인 김 는, 면특공대원들이 내가면 주민 조광진을 바닥빨갱이라며 구타하 면서 끌고 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으며 집으로 돌아온 후 병사했다고 진술하였다. 162) 또한 특공대원들이 이 의 행방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내가면 주민 이 의 처와 자녀 157) 김 은 1956년 8월 16일부터 1959년 3월 20일까지 2대 내가면장을 역임하였다. 군사찬편찬위원회, 강 화사, 강화군, 2003, 158쪽. 158) 내가면소년단원 김 에 의하면, 내가면특공대 감찰부장 유 가 내가면 주민 함 를 죽이려고 방 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어 살아났다고 함 가 말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신청인 박상덕도 1957 년경 유 가 삼산으로 건너가서 57명을 죽였다며 자랑했다 며 유 의 10촌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신청인 박상덕, 진술조서( , 6.15). 159)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60) 신청인 서영선, 진술조서( , , ); 참고인 서, 진술조서( ). 161) 신청인 서영선, 진술조서( ). 162) 참고인 김, 진술조서(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47

326 제 2 권 들을 내가지서로 끌고 가 구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며, 소년단원 한 은 그들이 살 해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매를 맞아 불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163) 이상의 내가면 사건경위로부터, 부역혐의자 및 가족 등이 1951년 1월 18일 전후 내가면 특공대에게 연행되어 고천고개 등에서 살해되거나 또는 내가지서에 구금되었다가 외포 리포구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8) 양도면 164) 1951년 1월 초순경 양도면에는 면특공대(대장 이 )와 소년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165) 특공대는 총으로 무장하였고, 소년단은 각목, 죽창, 갈구리 등으로 무장하였다. 166) 소년단 은 권석진 등 부역혐의자 집을 감시하기도 하고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면특공대본부인 양도지서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167) 최천수, 김종해, 한승호 등 주민들은 소년단원들이 강화특공대에게 소재를 알려줘 도장 리 사거리로 연행된 뒤, 적색글씨를 등에 붙인 채 조리돌림을 당한 후 몽둥이 등으로 타 살( 打 殺 )되었다. 또한 인산리에서도 안순 168) 과 김윤복, 김철영 등이 손이 묶인 채 끌려가 양도면 하일리와 건평리 해안가에서 총살당하였다. 169) 능내리에서도 정찬식, 염정길, 김 호경, 김진택 등이 밤에 끌려 나가 집 근처에서 총살당하였으며, 170) 도장리에서도 권석 진 171) 과 개성에서 피난 온 최영선이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하는 것을 소년단원 안 가 목격하였다고 한다. 172) 163) 참고인 김, 진술조서( ); 참고인 한, 진술조서( ). 164) 양도면은 1914년 읍면으로 개편할 때 상도면( 上 道 面 )의 길정( 吉 亭 ), 도장( 道 場 ), 조산( 造 山 ), 능내( 陵 內 ), 하일( 霞 逸 ) 5개리에, 위량면( 位 良 面 )의 건평( 乾 坪 ), 삼흥( 三 興 ), 인산( 仁 山 ) 3개리를 합쳐 면을 만들고, 면 명은 양( 良 )과 도( 道 )를 인용, 양도면이라 칭하였다. 165) 참고인 전, 진술조서( ). 166)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67) 참고인 방, 진술조서( ). 168)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형공 제470호 (1948). 안순 등 4~5명은 1947년 5월 하순경 해당 경찰서장의 허 가 없이 미소공위에 제출할 토지개혁에 관한 진정서 작성과 농민조합개편, 농지공동경작들을 토론한 이 유로 포고 재2호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으나, 1948년 9월 28일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청의 공소취하 로 기각 결정된 바 있다. 169) 참고인 신, 진술조서( ); 참고인 신, 진술조서( ); 참고인 전, 진술조서 ( ); 참고인 방, 진술조서( ); 참고인 이, 진술조서( ); 참고인 변, 진술조서( ). 170)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71) 1923~1925 요징집자 명부 (1952) 이 명부는 양도면사무소가 보관하고 있던 명부로 이 명부에는 권 이 월북자로 기재되어 있으나 공보처 월북자 명단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172) 참고인 안, 진술조서( ). 강화특공대 양도면 도장리소년대원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27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이상의 양도면 사건경위로부터, 1951년 1월 초순경 능내리, 인산리, 도장리 등에서 부 역혐의자 및 가족들이 양도면특공대에 의해 건평리와 하일리 해변가로 끌려가 살해된 사 실이 확인되었다. 9) 불은면 173) 불은면에는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은 없다. 그 러나 참고인들의 진술을 통해 당시 불은면에도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에 대한 집단살해 사건이 여러 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51년 1월 초순경 불은면에는 면특공대(대장 강 )와 신현리를 비롯한 12개리에서 조직된 250~350명의 소년단이 있었다. 174) 소년단은 특공대의 지시에 따라 1조당 3~4명 씩 조를 짜서 부역혐의자를 감금한 면사무소, 지서, 조합창고의 보초를 섰다. 175) 또한, 자 기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로 가서 특공대에서 지정해주는 집을 야간에 염탐하다가 특이 한 동향이 파악되면 불은지서 특공대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소년단원에 대 한 규율은 엄격하였는데, 소년단원들도 만약 이러한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총 살을 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176) 1951년 1월경 박화순(덕성리인민위원장) 등 덕성리 주민들이 부역했다는 이유로 불은 면 금융조합창고로 끌려가 고문당한 후 살해되었다. 177) 당시 부역혐의자 가족들은 20여 평 규모의 조합창고에서 감금되어 몽둥이 등으로 구타당하다가 살해되었는데 면사무소 뒷산에 그 시신들이 묻혀 있다고 한다. 178) 또한 9 28수복 후 행방불명되었던 김요백(넙성리인민위원장)은 1951년 1월경 집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되었는데 특공대원과 소년단 30여 명에게 창으로 찔리고 몽둥이로 맞아 살해되었다고 한다. 179) 이상의 불은면 사건경위로부터, 불은면에서도 양도면과 같이 다수의 주민이 부역혐의 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월 중순경 금융조합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두운리 뒷산으로 173) 1914년 3월 인정면과 불은면을 통합하여 불은면이라 칭하고 면사무소는 고능리에 두었다. 두운리, 고능 리, 오두리, 넙성리, 신현리, 덕성리, 삼동암리, 삼성리 등 8개 법정리가 있다. 174) 참고인 박, 진술조서( ). 175) 참고인 구, 진술조서( ). 176) 참고인 한, 진술조서( ). 177) 참고인 이, 진술조서( ) 178) 참고인 한, 진술조서( ) 179) 참고인 박, 진술조서( ); 참고인 구, 진술조서( ); 참고인 한, 진술조서 ( )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49

328 제 2 권 끌려가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10) 화도면 180)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하여 화도면에는 면특공대(대장 윤 ) 181) 와 소년단 150여 명 이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화도면에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 다. 182) 단지, 참고인 한 (화도면 소년단원)의 진술에서 좌익성향의 김 이 9 28수 복 후 개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족의 생사를 염려하여 1 4후퇴 시 화도로 왔었고 가족 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윤 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돌아간 것만 확인하였다. 그런 데 화도면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좌익성향의 김 과 우익성향의 윤 (면특공 대장)이 서로 사상은 달랐지만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듣고 존중한 때 문이라는 것이다. 183) 이상의 화도면 사건경위로부터, 북한 재침 시 부역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강화특공대가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일은 강화군의 다른 면에서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1) 삼산면 184) 삼산면특공대(대장 김, 전 대한청년단장 및 전 강화치안대장)는 후퇴하는 경찰로 부터 10여 정의 총을 받아 무장하고 있었으며, 그 하부에 150~200여 명 규모의 소년단 (대장 계 )을 두고 있었다. 한편 인민군이 강화 본도로 침입하자 강화특공대 대원과 소년단 500여 명은 1951년 1 월 18일 삼산면(석모도)으로 후퇴하여 왔는데, 185) 당시 강화특공대는 본대는 석모리에 180) 화도면은 내리, 상방리, 문산리, 덕포리, 사기리, 동막리, 흥왕리, 여차리, 장화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1706 년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의 간척사업으로 강화도에 연육 되었고 1937년 면 명 하도면( 下 道 面 )을 화도면( 華 道 面 )으로 개칭되었다. 181) 참고인 윤, 진술조서( ). 윤 은 특공대 조직과 관련하여 형 윤재근과 상의하였다. 윤 은 청년방위군 출신이다. 182) 참고인 한, 진술조서( ). 화도면에도 1 4후퇴 당시 피신하였던 부역혐의자들이 화도면 해 안으로 들어오다 면특공대에게 연행되어 길화검문소에 구금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이들의 행방에 대해 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183) 참고인 윤, 진술조서( ). 현재 그 가족들은 화도면에 거주하고 있다 184) 석모도는 삼산면 석모리, 상리, 하리, 석포리, 매음리, 서검리, 미법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면이 바다 로 둘러싸인 섬이다. 강화군 6대산 중 하나인 해명산을 비롯하여 낙가산, 상봉산이 위치하고 있어 삼산면 으로 호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29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본부를 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삼산면의 각 리로 흩어져 1951년 1월 31일까지 머물렀다. 이 중 강화특공대 병기부장 임, 내가면 감찰부장 유, 내가면소년단원들은 각각 10여 명씩 매음리의 사랑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186) 1951년 1월 25일 오전 8시경 매음리 치안대장 고 는 소년단원들에게 고, 고, 고, 이, 박, 박, 이, 고, 차, 고, 고 가족 등을 매 음리 소재 간이학교(현재 해명초등학교)로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187) 이에 따라 소년단원 허 은 위의 주민 중 고영우의 집에 들러 이 지시를 전했는데, 이에 고영우와 고영우의 어머니 조씨가 따라 나갔다. 조씨는 노 (고영우의 처)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노 는 동생 노 (매음리 소년대장)가 이전에 몇 차례 들려 치안대원들이 매형을 부르 면 따라가지 말고 장롱 속에라도 숨어 있어라. 치안대원들은 회의 때마다 사람 죽이는 이 야기만 하더라 며 주의를 준 적이 있으므로 따라 나서지 않았다. 그날 오후 노 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찾아 마을로 내려갔다가 간이학교 쪽으로 올라 가고 있는 마을주민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맨발 상태였고 그 뒤에는 소년단원 고 과 고 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 대열 속에 고영우와 어머니 조씨는 보이지 않았다. 188) 참고인 노 (매음리 소년대장)의 진술에 따르면, 그날 간이학교에 소집된 사람들은 당일 오후 3시경 썰물로 고립된 어류정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189) 또한 신청인 박상덕에 의하면, 당시 매음리 치안대원 고 가 고경애가 물속에서 제일 오래 살더라 고 말한 적이 있었으며, 또한 유 의 10촌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아래 고비 사는 유 가 삼산에 건너가서 57명을 죽였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더니 20일도 못 되어서 죽었다. 못된 짓을 하면 오래 못 산다 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190) 당시 유 (내가면특공대 감찰부장)와 함께 삼산으로 피난을 갔던 김 (내가면 소년단)도 유 가 빨갱이 가족을 죽였는데,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죽이기 아깝다 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191) 한편 매음리 주민들이 1차로 살해된 1951년 1월 25일 저녁 신청인 고기선의 집으로 누 런 군복을 입고 총을 멘 두 사람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 사랑방 192) 에 기거하던 185) 참고인 황, 진술조서( ). 186) 참고인 노, 진술조서( ). 187) 참고인 박상진, 진술조서( , 4.12.). 188) 참고인 노, 진술조서( ). 189) 참고인 노, 진술조서( ). 190) 참고인 박상덕, 진술조서( ). 191) 참고인 김, 진술조서( , 13.).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51

330 제 2 권 특공대원들이었다. 당시 고기선의 어머니 윤원병은 간이학교 창고로 소집되어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특공대원들은 고기선에게 너의 어머니(윤원병)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했지만 보는 눈이 있어 어쩔 수 없어 죽였다 고 말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193) 그 다음날인 1951년 1월 26일 오전 어류정(개학뿌리)에서 또 다시 총소리가 났다. 그 직후인 오전 10시경 매음리 치안대원 남 과 김 이 피가 채 마르지 않은 군복을 입 은 특공대원과 함께 박홍원의 집으로 와 박홍원(박상진의 아버지)을 끌고 방개산 쪽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당시 방개산으로 끌려간 박홍원이 죽일 테면 죽여라. 누가 나를 죽 이려고 하는지 알고나 죽자 라고 소리치자 군복을 입은 특공대원이 자기는 홍 상사 라 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박홍원에게 당신은 재산 때문에 싸움이 나 끌려온 것 같 다 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하였다. 박홍원은 집으로 돌아오던 중 매음리 치안대 고 등 에게 다시 붙잡혀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한 후 동리 밖으로 던져졌다고 한다. 194) 신청인 박상진, 박상덕과 참고인 노, 노 의 진술에 따르면, 신청사건 희생자 20 명 외에도 당시 매음리 주민 34명이 더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윤원병, 고경애, 고종선, 고구선, 고원순 등이 고 의 부역혐의로 살해되었는데 친척 인 김유태와 고태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어류정(개학뿌리)에 묻었다. 또 최정순과 고의선은 고 의 부역혐의로, 조씨(1901년생), 고윤선, 고금선, 고증선은 고 의 부역 혐의로 살해되었다. 당시 조씨는 인내 해명산에서 죽여달라 고 하여 그녀는 그곳에서 살 해되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류정에서 살해되었다. 195) 박윤원, 고영례, 박인순, 박상준은 의용군에 입대한 박 의 부역혐의로 살해되었다. 당시 박윤원의 시신은 박홍원이 수습하였는데 시신수습 당시 박윤원은 밖으로 나와 있는 창자를 양손으로 감싸안은 채로 죽어 있었다고 한다. 196) 박 의 작은아버지 고영우와 고영우의 어머니 조씨(생년월일 미기재)도 살해되었다. 고영우의 시신은 장인이 수습하 여 개학뿌리 산에 매장하였지만 조씨의 시신은 떠내려가 수습하지 못하였다. 또한 박진 원도 매음리 사람들을 배로 건네준 것이 문제가 되어 1월 25일 밤에 끌려가 살해되었 192) 참고인 노, 진술조서( ). 193) 신청인 고기선, 진술조서( ). 또 한 사람의 특공대원이 저 아이들도 처치해야 되지 않느냐 고 하니까 또 다른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194) 참고인 박상진, 진술조서( , 4.12.). 매음리소년단원인 박상진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박홍원을 끌고 갔던 홍 상사는 1951년 1월 31일 강화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인 내가면 삼양고등학교 전투와 강화면 국화리 진고개 전투(송해면 나갈 때)를 지휘했던 사람이라고 하였다. 195) 참고인 노, 진술조서( ). 196) 신청인 박상덕, 진술조서( , 6.15.)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31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다. 197) 또한 노성극과 처 조씨(1895년생)도 아들 노 와 노 의 부역혐의 때문에 살해되 었다. 노성극의 큰아들 노 는 부모와 함께 끌려갔으나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노성극 부부의 시신은 사위가 수습하여 산에 임시매장을 하였는데 이장 시 목격한 바에 의하면 시신의 눈과 입 부위에 총격으로 생긴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198) 정용덕의 모 한씨, 처 김영인, 정용덕의 자(당시 2세)도 정용덕의 부역혐의로 1월 26일 살해되었다. 당시 정용덕의 아들 정기성(당시 5세)은 어머니 김영인이 도망가라고 떠밀어 현장에서 생존하였다. 살해된 정용덕의 가족 시신은 정기성의 고모가 수습하여 외포리 인접 선산에 묻었다. 199) 이외에도 강풍신과 고태제, 정씨, 고봉수, 김정운, 고덕일, 배소지, 고귀제, 고우제, 고창수, 고영주, 조씨(1899년생), 김형순, 고정자, 조범구, 조범구의 처, 조 근원, 박순신 200), 차순례, 한옥순, 박인순, 박부원, 박상림, 주성로, 고춘선, 양씨, 고영희의 아기가 가족이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으며, 형의 부역혐의 때문에 이명수와 김 양순이 살해되었다. 고혜순은 여맹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201) 박상진과 박홍원, 박상득, 양증원 등은 사건이 발생한 3~4일 후 어류정으로 가 떠내려 가지 않은 시신 10여 구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신은 바다로 떠내려가 수습하 지 못하였다. 202) 한편 석모리에서도 9 28수복 후 성명불상의 여성이 인공 통치 시 여성동맹에 가입하 였다고 대한청년단원에게 끌려가 성고문을 당한 다음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 보도연맹에 가입한 아버지의 문서가 나왔다 하여 김진형이 강화치안대에게 연행된 후 고 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203) 이상의 삼산면 사건경위로부터, 인민군의 강화 침입으로 삼산으로 후퇴했던 강화특공 대 부대장 홍 등 특공대원들이 매음리 치안대장 고 등의 협조를 받아 1951년 1 월 25일부터 26일까지 양일에 걸쳐 매음리 주민 53명을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 유로 어류정(개학뿌리)에서 살해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204) 197) 신청인 박광준, 진술조서( ). 198) 신청인 노영조, 진술조서( ); 참고인 노, 진술조서( ). 199) 신청인 송경숙, 진술조서( ) 200) 참고인 계, 진술조서( ). 박순신의 손녀 박 만 생존하여 계 의 5촌이 키웠다. 201) 참고인 박상진, 진술조서( , 4.12); 참고인 노, 진술조서( ); 신청인 박상덕, 진술조서 ( , 6.15). 202) 신청인 박상덕, 진술조서( , 6.15). 203) 참고인 계, 진술조서( ). 계 은 대한청년단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훈련장에서 위 사건을 보았다고 한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53

332 제 2 권 다. 소결 1951년 1 4후퇴를 전후한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의 경위 를 가해지역, 가해주체, 연행 구금 희생장소를 중심으로 종합 정리하면 <표 6>과 같 다. <표 6>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경위 면 가해주체 연행 구금 희생장소 강화도 주문도 강화치안대 강화경찰서, 선원지서, 내가지서, 서도지서 연행 희생 강화면 강화특공대 본대 월곶포구파견대 양조장 곡물검사소 연행 강화경찰서 구금 갑곶나루 옥개갯벌, 강 화경찰서 유치장, 국화리 희생 월곶지서 구금 월곶나루터, 용정리 고리나뭇재 희생 선원면 선원면특공대 선원면공회당 소집, 선원지서 구금 가마니창고, 대문고개 희생 하점면 하점지대 하점지서 구금 찬우물고개, 장정리과수원, 하점면뒷산 희생 송해면 돌모루포구파견대 돌모루포구 연행 강화경찰서 구금 육군본부 특무대 조사 갑곶나루 희생 양사면 철산포구파견대, 인화리파견대, 양사면특공대 양사지서, 최영의 곳간 구금 철산포구 희생 길상면 길상면특공대 초지나루 연행 길상면우체국 구금 사슬재, 신사터 희생 내가면 내가면특공대 고비고개 연행 희생, 내가지서 구금 외포리 희생 불은면 불은면특공대 두운리조합창고 구금 두운리 뒷산 희생 양도면 양도면특공대 양도지서 구금 하일리 건평리 해안가 희생 삼산면 강화특공대 본대, 삼산면특공대 매음2리 간이학교 창고 구금 어류정(개학뿌리) 희생. 석모리 희생 204) 화도면특공대 대장 윤 이 매음리 주민 40여 명이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 1월 26일을 전후하여 삼산으 로 갔는데, 50여 명을 다시 잡아놓고 있어 확실치도 않은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 며 특공대 대장 최 에게 진정하여 살려준 사실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최, 진술조서( )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33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비상시향토방위령 에 따라 1950년 10월 3일 강화의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조직된 강화치안대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임의로 연행 구금한 후 고문하였으며 일부는 살해하였다. 1950년 10월 10일에 강화경찰이 복귀하자, 강화치안대는 강화경찰서 와 강화산업창고에 구금하였던 부역혐의자들(700~1,000명)을 강화경찰에게 넘겼다. 구 금되었던 부역혐의자들 일부는 재판을 받고 인천형무소로 송치되었으며 일부는 이송 도 중 행방불명되었다. 또한 1951년 1 4후퇴로 군경이 후퇴하자 재편된 강화특공대는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민간인들을 본격적으로 연행 구금하였다. 강화특공대는 민간인들을 부 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면지서로 연행하고 구 금 고문한 뒤 갑곶나루, 옥림리 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온수리 사슬재, 대문고개, 매음리 어류정 갯가 등지로 끌고 가서 살해하였다. 이와 같이 강화 민간인 희 생 사건은 강화경찰이 복귀하는 1951년 3월 말까지 강화특공대 본대가 있었던 강화면을 중심으로 12개면에서 동시에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당시 희생된 사람들은 부역혐의가 있 는 성인 남성은 물론 부역혐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10세 미만의 어린이, 여성, 70세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3. 사건 조사결과 가. 희생자 신원, 희생자 수 특징 1) 희생자 신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피해자 측 진술에서 47명 205), 특공대 측 진술에서 92명(전부 미신청사건), 도합 139명의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었다. 특히 139명 중 70명의 희생자 신 원은 당시 가해 측에 속해 있었으나 동시에 가족 중 피해자가 있는 소년단원들의 진술로 부터 확인된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처럼 피해자 측과 특공대 측의 증언에서 신원이 확인된 139명의 희생자에 대해, 시신을 수습했는지, 제사일이 언제인지, 한국전쟁 당시 사망사실이 제적 등본 상에서 확인되는지, 유족 목격자 전문자 등 참고인의 증언이 당시의 객관적 상황 205) 26건의 신청사건 관련 희생자 50명 중 3명은 중복에 따른 희생자이고, 2명은 생존이 확인되었으며, 2명은 추가로 확인된 희생자이다. 이 중 생존자 2명은 사건번호-308의 희생자로 최진국( 崔 鎭 國 )과 김용녀( 金 龍 女 ) 부부이다. 이부부는 1951년 이후에도 자녀들을 출생한 것으로 제적등본 상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신청사건 희생자는 모두 47명으로 이 중 27명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655

334 제 2 권 과 일치하는지 등을 고려하여, 희생 확인 또는 희생 추정 으로 구분하였다. <그림 2> 강화군 대공인적위해분자 명부 중 처형자명부 그런데 신원이 확인된 139명 중 안용호, 김현식, 김양순, 안순, 고봉수, 김진형, 고영주, 구씨, 윤원병, 최정순 등 10명의 이름이 위 강화군 6 25 당시 처형자명부 (<그림 2>)에 서 확인되었다. 이 명부는 1979년 3월 7일자 강화경찰서가 경기도 지사에게 보고한 대공 인적위해분자 자료 수정통계보고 206) 에 포함된 내용의 일부로, 강화군 처형자 57명의 이 름이 기재되어 있다. 207) 그러나 57명이 무엇 때문에 처형되었는지, 누가 처형했는지에 대 해서는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이 명부는 1978년 중앙정보부가 당시 경찰 군 등 유관기관으로부터 자료를 접수하여 편집한 6 25 당시 처형자 명단 (중앙정보부)을 원 206) 1979년 3월 7일자 특수보고통제로 강화경찰서가 경기도 지사에게 보고한 대공 인적 위해분자 자료 수정 통계보고 이다. 이 보고에는 1. 통계 1부 (해당항목 가. 요시삭제자 및 중지자수 17명, 나. 관보 삭제 및 중지자수 1,522명, 마 당시 처형자수 57명, 사. 월북도피 행불자수 1,848명 계 3,444명이 기록)와 2. 대상별 명단 1부 (요시찰인 1,522명 명단, 6 25 당시 처형자수 57명 명단)가 첨부되어 있다. 207) 1980년의 경찰 전산자료(경찰청 보안국)는 구체적인 처형장소에 대한 분류도 하고 있는데 경기도의 경우 강화 고천, 수원형무소 2곳을 기재하고 있다. 여기서 고천은 내가면 고천리를 지칭하는 듯하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도연맹원 학살의혹 사건 (2006)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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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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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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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À°È°µ¿Áö 은 국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역사와 체험의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국립경찰박물관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박물관은 역사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환영 환송의 장 등 다섯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어 경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찰의 업무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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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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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끝없는,, 끝나지 끝나지 않는 않는 즐거움 끝없는 얼음벌판 인제빙어축제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 지류와 내린천의 관문인 소양호, 눈 덮인 내설악의 환상적인 경관을 배경으로 은빛 빙어를 주제로 펼쳐 지는 축제가 있다. 바로 인제빙어축제이다. 인제빙어축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 민국 대표축제이다. 10회 축제기간 동안 방문객 100만 명 돌파(2007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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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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