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백제사찰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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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3. 백제 사찰의 특징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84년(침류왕 1년)으로 인도의 승려인 마라난타가 진나라에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 들임으로써 이때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후 즉위 2년에는 한산에 불사를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머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한성과 웅진시기에 사찰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제 사찰의 대부분은 성왕( 년)의 사 비 천도를 전후에서부터 무왕( 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의 기간에 사비와 익산 지역에 건립되었다. 성왕에 이르러 불교가 활발하게 전개된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백제의 승려 겸익이 인도까지 가서 범본의 오부율을 가져와 72권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겸익의 계율을 중시한 교리를 실천한 것으로 법왕 때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렸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것은 백제불교의 계율 강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백제 불교가 이 때에 와서 범국민적인 계율의 생활화가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 겸익이 계율의 강화를 교리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면, 570년경에 강렬한 미륵신앙을 가지고 있던 慧思의 미륵신앙 이 수용되면서 미륵신앙은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미륵사상은 무왕대에 이르러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하 에 더욱 발전하여 백제 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2). 미륵신앙에 의한 3탑 3금당 삼원병렬식의 대규모 사찰 건립이 이 루어 졌는데 그것이 미륵사의 창건이다. 사비시대 사원은 중심축선을 설정한 다음 앞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건립하고, 금당과 강당 좌우측에 남-북으로 긴 승방이 있고 이 건물의 남측에 접하는 회랑이 둘러싸는 1탑 1금당식 가람배치이다. 그 대표적인 곳으 로 정림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금강사지. 군수리사지 등이 있다. 회랑 및 이에 접속된 동 서 승방의 배치는 중 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보이지 않는 독특한 모습이다3). 미륵사지에는 목탑 형태를 충실하게 번안한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동아시아 최초이며 최대의 크기이다. 정림사지 에도 규모는 미륵사지 석탑보다 작으나 균형있고 예술적인 5층 석탑이 건립되었다. 백제 사찰의 가람 형식을 각 건물의 기단 구조와 기단에 사용된 재료, 건축물의 배치에 따라 유형을 구분하기도 한 다. 건물의 기단은 건물의 위계에 따라 와적기단, 와적기단과 적석 혼합, 가구기단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 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강당 좌우에 확인되는 소형 건물지는 종루와 경루로 추정된다. 종루와 경루가 사찰 내에서 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은 중국 수대에서부터 확인되며, 종루와 경루가 회랑과 연결 배치되는 경우는 초당시 기 돈황 벽화에서 찾아지므로 중국에서 전수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종루와 경루가 강당 좌우에 일관되게 배치되 는 백제와는 차이가 있어 백제가 변형하여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6세기말 조성된 일본의 사천왕사와 비조사에도 강당 좌우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의 전수를 생각할 수 있다. 백제는 4세기 중엽 경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6세기 중엽부터 크게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일본 등의 주변국으 로 확산시켜 동아시아 문화발전에 커다란 동력을 제공한 다. 특히 사비 도읍기 백제 불교는 눈부신 발전상을 보이는 데, 그 중 미륵사지는 백제 불교 발전의 정점에 있는 사찰 유적이다. 미륵사지는 미륵성전으로 삼원식 가람이라는 특 그림 2. 고대 일본 사천왕사(좌) 비조사(우)의 종루와 경루 1) 이왕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OUV에 대한 종합고찰, ) 최연식, 백제 불교문화의 보고, 미륵사,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맥, 2010, p.97. 3) 김낙중, 일본 도성제의 구조 성격과 백제 도성제와의 비교, 백제 도성의제와 주변국 도성제의 비교연구,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15

16 유의 사찰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가람내의 목탑지와 현존하는 석탑은 동아시아 불교미술 발전의 실상을 대변하면서 백제후기 불교미술을 포함한 문화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산이다4). Ⅲ. 백제 사찰 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1. 정림사지 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1) 정림사지 입지 및 경관의 진정성 정림사지는 부소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구릉과 동쪽의 금성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구릉의 말단부 에 남향하여 위치한다. 정림사 주변 지형은 동 북쪽은 높아지고 서쪽으로는 낮아지며 백마강과 면하고 남쪽 으로는 완만하게 오르막 경사 구릉을 이루다 다시 낮아 져 백마강에 이른다. 사비 도성에 많은 사찰 중에서 정 림사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 다수 있었음에도 정림사지 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국가사찰로 서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사비 왕궁에서 바라 보기 좋은 남쪽 근거리에 있고 성내 민가들 보다는 높은 그림 3. 부여 정림사지 전경(남-북) 곳에 위치하고 있어 상징적인 장소이며 건축물로 추정 할 수 있다. 정림사지에는 백제 때 건립된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어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정리사지에 대한 학술 조사는 1942년부터 시작되어 2011년까지 꾸준하게 학술연구와 발굴 조사 등이 이루어져 왔다. 특히 5층 석탑이 위치함으로 써 석탑 주변의 유적이 잘 보존 될 수 있었다. 현재도 도심내에 정림사지가 위치하고 있지만 주변 경관을 잘 관리하 여 사지와 조화되도록 하고 있다. 정림사지는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백제 당시 생활면으로 정비되어 당시의 경관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5층 석탑은 백제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보다 간략화되고 균형미 있는 것으로 백제 건축기술 및 예술의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는 가치와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2) 정림사지의 진정성과 완전성 정림사지 탑은 낮고 좁은 단층기단 위에 건립된 방형의 5층탑으로 간략화된 형식 속에 균형 미를 가졌다. 이 석탑 은 방형 우주의 민흘림수법, 얇고 넓은 옥개석의 형태와 각 옥개에 보이는 반전, 목조건축의 두공을 변형시킨 옥개 4) 이남석, 백제역사유적지구의 OUV에 대한 종합고찰,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17 석 밑의 받침 등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과 마찬가지로 목조탑의 형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5). 한편 백제의 역사에 서는 슬픈 일이기는 하나, 정림사가 백제 때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금석문 자료가 정림사지 5층 석탑의 1층 탑신 에 660년 8월 15일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승전기공인 大唐平百濟國 이 새겨져 있다. 석탑의 부재 상황이나 형태 적인 면들을 보았을 때 백제 때 건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정성과 완전성을 모두 가지 고 있다고 본다. 3) 정림사의 문화교류 사비시대 백제왕들은 사찰을 건립하고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 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추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각종 불상과 보살 소조상들은 중국의 영녕 사 출토 소조상들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소조 상들이 현재는 부여 능산리사지와 익산 제석사지(폐기장) 등에서 출토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소조상들은 588년 비조사 건립에 파 견된 기술자들에 의해 일본에 전수되었을 것이다. 정림사는 중문-탑-금당-강당 남북 방향으로 놓여있는 1탑 1금 당 양식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사찰의 특징이다. 또한 기와로 기단을 만든 와적기단이 보인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일본에도 전수되어, 비조사(飛鳥寺 아스 카데라), 사천왕사(四天王寺 시텐노지), 법륭사(法隆寺 호류지) 등 백제계 사찰이 건립되었다6). 그림 4. 부여 정림사지 2. 미륵사지 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1) 미륵사지 입지 및 경관의 진정성 미륵사지는 뒤쪽인 북쪽에 높이 430m의 미륵산(당시 용화산)을 등지고, 미륵산에서 뻗어 내린 동 서쪽의 능선이 좌우를 겹겹이 감싸고 있으며 앞쪽인 남쪽은 넓 은 들과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다. 산을 배경으로 앞으 로 경관이 트인 넓은 들이 펼쳐진 곳에 사찰을 배치하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입지방법이 한반도에서는 백제 미륵사지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입지 방법은 그 후로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는 한국적 건축계획 방법으로 그림 5. 미륵사 입지와 주변경관(북-남) 5) 이왕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OUV에 대한 종합고찰, ) 정재윤, 고대 동아시아 속의 백제 문화와 그 가치,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17

18 자리 잡게 되었다7). 미륵사지가 위치한 미륵산 남쪽 지역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고 농촌 마을 형태로 경관이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미륵사가 창건 되던 백제 당시 지형과 큰 차이가 없다. 특히 미륵사가 위치했던 지역은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 된 발굴조사에서 백제 때 미륵사 외곽 배수로가 현재 미륵사지 동 서쪽 경계와 일치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 서 미륵사지와 주변의 자연경관들은 1400여년 전 백제 미륵사가 창건 되었던 당시와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2) 미륵사지의 진정성 미륵사는 7세기 백제가 건립했던 사찰로 불교사상, 건축기술, 불교예술 등 모든 것이 총 집결된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이다. 현재의 미륵사지는 문헌 기록과 발굴 등을 통해 백제 때 창건했던 본래의 장소이며 창건 당시 건립했던 건축물의 하부구조와 일부 건축물이 온전하게 보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1) 창건 이야기가 있는 사찰 미륵사 창건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 사이에 이성간 사랑과 결혼, 그리고 불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 하고 국력을 신장하려는 무왕의 정치적 의지가 담겨 있다. 6세기말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백제와 신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추진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서동요와 서동설화로 전한다. 왕이 된 무왕(서동)과 왕비(선화공주)가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 가던 중 용화산 아래 커다란 못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한 인연을 통해, 못을 메우고 미륵삼존을 모시는 전 탑 낭무를 세 곳에 두고 미륵사를 창건 하였다고 하는 연기설화가 삼국유사 무왕조8)에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부터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삼국유사 연기설 화에서 3탑 3금당을 창건하였다는 내용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기록은 미륵사지의 진정성을 보강하는 자료로서 의미를 갖는다. (2) 미륵사지 석탑 사리 봉안기 사리봉안기는 1998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하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 중 2009년 석탑 1층 심주에서 발견된 사리장 엄구의 하나이다.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 건하고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과 중생들의 불도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목적 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그림 6. 미륵사지 석탑 금제 사리봉안기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 에도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의 창건 내용과 사리봉안기 의 내용이 조금 다르지만, 미륵사 창건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미륵사의 실체적 진실을 문헌으로 확인 7) 이왕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OUV에 대한 종합고찰, ) 삼국유사 무왕조 殿塔廊 Œ三所創 18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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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석탑을, 중원에는 목탑을 두어 3탑 3금당을 이루고, 승방은 동 서원 북쪽과 강당 북쪽에 3개소가 있다. 발굴결과 3탑 3금당 3원 병렬식가람이 확인된 것은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된 전탑낭무삼소창(殿塔廊딕三所創) 이란 기록이 실제로 입증되고 있으므로, 미륵사 창건연기 설화도 미륵사의 진 정성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세계유일의 3탑3 금당에 의한 3원 병렬식 가람배치는 아직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최 초의 예이며 백제만의 독창적 조영활동13) 이라 할 수 있다. 3) 미륵사지의 완전성14) 미륵사 가람의 규모는 동서 폭(건물기단외벽 간)이 m이 그림 7. 백제 미륵사 3탑 3금당 가람 고 남 회랑 남단에서 강당 기단 북변까지 148.2m이며, 탑에서 중문까지의 건물 중심거리는 금당까지의 중심거리와 같이 각각 약 31.2m이었다. 또 중원의 동 서 회랑 기단 중심거리는 66.36m, 동 서원의 동 서 회랑 중심선간의 거 리는 48 ~49m, 금당에서 강당 중심간 거리는 71.6m이며, 동 서 승방의 기단 외벽간의 거리는 172m이었다. 이렇게 하여 가람의 전체 동서 폭과 남북 길이의 비는 3/2이 되어 동서 폭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의 정점 한계 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 평면 계획은 한국의 역대 사찰 중에서 그 어느 것보다 완벽하게 기하학적 균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미륵사의 가람배치 계획은 건물과 가람 규모 등이 기하학적인 유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미륵사지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사찰건축의 완벽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나아가 백제인들의 탁월한 문화적 역량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4) 미륵사의 문화교류 (1) 건축 문화의 수용과 창의적인 기술의 주변국으로 전수 백제 사찰 건축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전래되었을 것이다. 건축 문화의 전래 이후 궁궐 등을 비롯하여 부여 왕흥사 익산 미륵사 같은 사찰을 건립한 기록이 있으나 남아 있는 것은 석탑뿐이다. 현존하는 백제의 건축물로 국보 제11 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있다. 미륵사 석탑은 목조탑의 형식을 보존한 거대한 탑 으로 동 서원(동 북쪽의 일부가 6층까지 남아 있던 국보 제11호 석탑은 보수정비를 위해 해체되었고, 동원 9층 석 탑은 1992년 제 위치에 복원 되었다)에 각 1개씩 있었다. 서원의 국보 제11호 석탑은 본래 9층으로 추정되는데, 낮은 이중기단 위에 1층은 초석, 고막이돌, 하방석, 창방, 평 방, 포벽석, 문비, 기둥의 민흘림 등 많은 석재로 결구하여 각면 3칸의 목탑 형식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탑 1 층의 중앙부에는 십자형 통로가 있어 안으로 통하게 되었고, 그 중앙에는 방형의 찰주가 있다. 각 층의 기둥은 아래 13) 중국 둔황 석굴사원 벽화 가운데 당대(唐代)에 조성된 <미륵경변상도>가운데 미륵사지와 비슷한 배치 구조를 가진 사원을 그린 그림들 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성당(盛唐705~780)때 조성된 제148굴 남벽과 중당(中唐781~847)때 조성된 제231굴 북벽, 만당(晩唐 848~906)때 제 85굴 서정에만 이러한 형식의 변상도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배병선, 미륵사의 배치와 건축유구를 통해 본 백제 조영기술, 백제 불교문화의 보고, 미륵사,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맥, 2010, p ) 이왕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OUV에 대한 종합고찰,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21 가 넓고 위가 좁아지는 민흘림 기법이 보인다. 미륵사지 석탑 의 건립 형태와 기술 등은 후대에 신라로 전해져 한국의 독자 적인 석탑 중심의 탑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미륵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의 창건은 신라 및 일본에도 영 향을 주었다. 황룡사는 진흥왕 553년에 시작하여 570년 1차 창 건과 이후 금당의 중건 등을 거쳐, 선덕여왕 645년에 목탑이 완공된 신라 최고의 가람이었다.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 을 건립하기 위해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15) 신라 기술 자 200여명과 함께 3년여에 걸쳐 공사를 진행 645년에 완성하 였는데 미륵사 중원 목탑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륵사의 독특한 가람배치는 일본의 야마다데라(山田寺)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야마다데라는 1탑 1금당의 배치를 보이 지만 강당이 금당과 탑을 둘러싼 회랑의 외곽에 배치되었고, 금당 앞에 석등이 있다는 점에서 미륵사의 중원과 흡사하다. 야마다데라 금당지 및 목탑지 축기부의 판축토나 금당지의 가 구기단 등도 미륵사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어 사찰의 건립 그림 8.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16). (2) 미륵사지 출토 유물을 통한 주변국과의 문화 교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 과정에서 발견된 금동제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는 동체가 2개로 분리되 는 동아시아에서 유래가 없는 유일한 것으로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정교하고 세련된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 공예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납유리편과 와당 등은 일본의 아스카 나라시 대 유적에서 유사한 형태로 출토되고 있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552년이지만 최초의 절인 아스카지(飛鳥寺)를 지을 때 백제에서는 588년에 승려 6명 과 조사공(造寺工), 와박사(瓦博士), 화사(畵師) 등 6명의 전문가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무왕대 일본서기에 보면 백 제의 승려들이 일본에 파견되고, 또한 사신 등 교류가 되고 있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당시 백제 최대의 사찰이며 백 제의 모든 문화적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미륵사의 각종 불교문화와 기술들이 전수 되었을 것이다. 5) 미륵사 경관의 완전성 백제시대 미륵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기록과 건축물 등의 자료는 없다. 단편적이기는 하나 삼국유사 무왕 조에 기록된 전탑낭무삼소창(殿塔廊 Œ三所創) 이라는 기록과 조선시대의 문헌 자료들이 있지만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거나 일부만 발췌하여 미륵사의 완전한 실체를 파악 할 수 없다. 미륵사지에는 백제 때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탑의 동쪽과 북쪽의 일부가 6층까지 남아 있는 국보 제11호 석탑이 있다. 15) 三國遺事, 권4 塔像 黃龍寺九層木塔條.. 16) 정재윤, 고대 동아시아 속의 백제 문화와 그 가치,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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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따라서 고구려의 8각 탑은 간다라의 영향이 보다 직접적으로 미치고 있던 남북조시대의 북중국 지역의 나라를 통 해 전달되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독특한 건축문화와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57년 조성된 안악 3호분, 408년 명 문이 있는 덕흥리고분 벽화와 16국시기( 년)의 유적인 甘肅겛 酒泉 丁家匣 5호묘의 벽화가 서로 많이 닮아 있 는 점도 이러한 문화적 흐름을 반영한다. 본 발표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8각 탑이 있는 고구려 사원의 배치를 북중국에서 살펴보고 1탑 3 금당식의 고구려사지와 백제 군수리사지, 2차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정릉사지와 백제 미륵사지 배치를 비교 검토해 보 려 한다. Ⅱ. 고구려사지의 검토 1탑 3금당으로 추정, 혹은 확인된 곳은 원오리사지, 토성리사지,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청암리사지이며 8각 탑지 가 있는 곳은 토성리사지,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청암리사지이다. 이 중 상오리사지는 8각 기단 내부에 사각 구조가 있어 8각 기단부 위에 방형탑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토성리사지는 4세기 후반, 정릉사지는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 경 인 5세기, 상오리사지는 5세기 후반, 청암리사지 는 금강사가 창건된 498년인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편년되고 있어 조성 순서대로 서술하려 한다. 1. 토성리사지 토성리 절터는 8각 탑지, 탑지 서쪽과 북쪽의 건물터 일부, 동남쪽에 벽돌을 깐 원형시설이 발굴되었는데 평면 구성이 고구려자를 사용, 8각 탑지, 건물배치, 물받이 시설, 기와 등 에서 다른 고구려사지와 유사한 점을 들어 고구려 시대의 유 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4세기 말 인 394년으로 편년하고 있다1).(그림 1) 2. 정릉사지 1974년 평양 동명왕릉과 인접한 정릉사지가 발굴되었는데 1976년에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寺, 衆僧, 陵寺, 定겓이라는 명문이 있는 와편이 나와 5세기 초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 긴 후 조성한 정릉사의 유적으로 추정하였다. 동명왕릉 앞 210m 거리에 돌을 팔각으로 쌓은 제 1호 건물지인 탑지가 있 그림 1. 토성리사지 1) 남일룡, 황해북도 봉산군 토성리 고구려 절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기, pp.8-9. 김정기, 고구려 정릉사지 및 토성리사지 발굴보고 개요와 고찰, 불교미술 10호(동국대박물관, 1991)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한 중 일 고대사지 비교연구(1)-목탑지편 (2009), pp 이강근, 高句麗 八角形建物址에 대한 연구 선사와, 고대 23(2005), p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27 고 이어서 그 좌우에 제 2호 서금당, 제 3호 동금당 건 물지가 있으며 4호 중문지, 5호 중금당, 7호 종루지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 북쪽으로 8호 강당지, 9호 강당 동쪽 건물지, 9호 북쪽의 10호 건물지 등이 발굴 되었다. 탑지는 전면적으로 2m 깊이의 돌기초를 두었으며 위에 주춧돌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8각의 너비는 20.4m이며 각 변의 길이는 기본부분이 약 7.3m, 윤곽 부분이 약 8.4m이다. 8각 기초 주위에 폭 60cm로 돌을 깔고 안으로 폭 80cm는 돌을 깔지 않았다. 나머지는 그림 2. 정릉사지 내부는 전면적으로 돌을 깔았다. 동, 서, 남, 북 면의 중앙에는 남, 북은 1.3m, 동, 서는 2m씩 돌을 쌓지 않았는데 이는 통로로 생각된다. 이는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에 있는 금강사지의 탑터 기초 시설과 거의 같은데 좀 더 심하게 파괴되었다 한다. 절터는 8각 탑의 기본부분을 기준으로 하여 비례구성수법으로 평면을 구성하였고 기준척이 고구려자이며 8각 탑 터의 기준크기는 50자이다. 건축군의 동서에 놓인 2개의 회랑과 동서 건축군은 정릉사지의 특징인데 이에 대해 한인 호은 정릉사지가 427년 평양 천도와 함께 조성되면서 당시 건설 중이던 안악궁의 배치를 모방한 것으로 보았다. 허철준은 터 남쪽에서 두 개의 문화층이 확인된다는 점, 단위자 분석을 통해 두 가지 자가 사용되었다는 점, 동서 회랑이 서로 평행이 아니라는 구조적 모순, 제작 시기가 다른 여러 종류의 기와가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들을 들어 정릉사지는 두 단계를 거쳐 건설된 것으로 추정했다. 리인동은 비대칭적인 정릉사의 1탑 3금당식 배치는 1탑 3금당 배치형식의 중기 단계 모습이며 회랑은 정릉사의 절 모습이 갖추어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 의 것이라 추정하였다2).(그림 2) 3. 상오리사지 안악궁전 서남쪽, 청암리토성 동남쪽 2km에 위치한 상오리사지는 1939년에 발굴 조사되었는데 전답지였 던 지표에서 50cm 아래 한 변이 약 8m인 8각 기단지 가 드러났다. 기단 밖으로 80cm 폭으로 강자갈을 깔았 고 내부에는 8각 면으로부터 약 3.6m 되는 지점에 切 石을 둘러 세워 조성된 동서 약 24.2m, 남북 21.8m 방 형 구획이 있었다. 동, 북쪽의 절석과 8각 면 사이에는 자갈이 깔려져 있는 곳이 있으나 초석은 발견되지 않 았다. 그림 3. 상오리사지 2) 김일성종합대학편,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 pp 한인호, 정릉사 건축의 평면 구성 에 대하여 력사과학, 김동현, 고구려의 정릉사지 전통문화, (1983.8), pp 허철준, 정릉사의 평면 복원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고찰 력사과학, , pp 김정기(1991), 앞의 논문, pp 리인동, 정릉사중심건축군총평면고찰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124호(2002.3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2009), pp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27

28 각 면의 남, 북쪽 중앙에 자갈이 깔리지 않은 곳이 있는데 일부에 平石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계단이 있던 곳이 라 생각된다. 8각 기단지의 동, 서쪽 약 4m 떨어진 곳에 동서 약 12.6m, 남북 약 25.8m 정도의 남북으로 긴 건물지가 있는데 주위에 약 50cm의 平石이 열지어 깔려 있었다. 서쪽 건물지의 보존 상태가 더 좋아 평석열에 절석이 세로로 세워져 있는 것이 점점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건물지 주위에는 2m 정도의 간격으로 방형 기둥 형태의 臺石이 땅 속 에 박혀 있었다. 8각 건물지와 동, 서 건물지 사이에는 길이 약 70cm, 폭 약 40cm 정도의 평석이 깔려 있는 길이 있었 다. 이상 상오리사지는 중앙의 8각 건물지와 좌, 우 건물지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남, 북으로 긴 동, 서 건물지는 중앙 건물지와 매우 근접되어 있다. 이는 다른 사례로 보아 8각 탑지와 동, 서 금당으로 파악되었는데 이후 8각 탑지의 북 쪽, 남쪽, 동, 서 건물지 주변 지역의 조사가 기대되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20 여종의 고구려 와당으로 보아 고구려 절터임이 분명하므로 청암리사지와 동일한 가람배치로 추정하였다3).(그림 3) 4. 청암리사지 1938년에는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고고학적 층위조사 없 이 약 한 달간 평양 청암리 토성 안 <청암리사지>에 대한 발굴이 있었다. 小泉顯夫와 米田米代治에 의해 조사된 이곳은 궁전 터로 서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寺'자가 찍힌 와편, 불상 광배의 일부로 보이는 금동 비천상 파편 등이 출토되어 절터로 추정되었다. 팔각 형의 건축지를 중심으로 북, 동, 서 세 곳에 방형 건축지가 있고 남 쪽으로 문자리가 확인되어 팔각형의 탑을 중심으로 하는 1탑 3금 당식의 가람임이 밝혀졌다. 이 중 팔각 탑 터의 상태가 가장 양호한데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 여 팔각형으로 깎은 후 주위에 석재를 둘러 기단으로 삼았다. 기단 한 변 길이는 평균 9.5m이며4) 주위에는 할석을 깔고 이어 폭 0.7m 의 玉石으로 포장하여 물받이 기능을 하고 있다. 남쪽과 서쪽의 중 앙에는 계단 유구가 있고 옥석 포장 보도가 남문과 서쪽 건물지로 연결된다. 동쪽과 북쪽도 파괴되었지만 같은 유구가 확인된다. 동, 서쪽 건물은 탑을 향해 세워져 있다. 기단 상부는 원형을 잃고 있 그림 4. 청암리사지 으며 초석 등은 남아 있지 않다. 동금당은 정면 약 32m, 측면 9.2m의 대형 건물터이며 북금당은 정면 12m 규모이다. 북금당 북쪽으로 몇 개의 건 3) 齋藤忠, 平壤大同郡굟原面上五里高句麗建築址の調査, 考古學雜誌 30권 1호(1940.1)과 飛鳥時代 寺院の 原流として 高句麗 寺院の 一型式, 日本古代遺蹟硏究 -論考編(東京;吉川弘文館, 1976), pp 齋藤忠著 孫大俊譯, 古代韓國文化와 日本 (원광대학교출 판국, 1981)pp 김성우, 高句麗 佛寺計劃의 變遷-上五里寺址를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9( ), pp 이 강근(2005), 앞의 논문, pp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2009), 앞의 책, pp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구려문화 (평양;사회과학출판사, 1975), pp.77-78에서는 정팔각형으로 서술되어 있다. 28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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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三國志 권 49 吳書 4 괢繇傳과 後漢書, 권 73 陶謙傳에 후한 헌제 初平연간( 년)에 丹陽人 씕融이 크게 浮圖祠(寺)를 일 으켰는데 銅으로 사람을 만들어 금칠을 하고 비단 옷을 입혔다. 위 로 銅(金)盤 9층을 두고 아래로 이층의 누각을 두었으며 주위에 閣 道(堂閣)을 두었는데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고14) 한다. 씕 融의 부도사는 9개의 청동 반이 올려진 2층 불탑을 중심으로 회랑 이 둘러져 있고 안에는 금칠한 銅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강당과 같 이 3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 욕불회와 독경 의식을 하였 다고 한다15). 상륜이 있는 불탑이면서도 내부에 불상을 모시고 있고 불교 의 례를 하고 있어 불전과 강당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초 그림 5. 중국 서한 명당 추정 예제건축지, 西漢 기 불탑의 사당적인 성격이 확 인되는 부분이다. 씕融의 부도 사에 묘사된 閣道는 魏 明帝 靑 龍3년(235년)의 기록을 참조해 볼 때16) 탑 주위를 둘러싼 회랑 이며 이러한 부도사의 배치는 실재로 중국 예제 건축인 명당 그림 6. 중국 四川겛 昇렌 화상전 불탑, 東漢 17) 의 배치와(그림 5) 닮아 있다. 한편 四川겛 昇렌 東漢代 화상전에 보이는 누각도는(그림 6) 상륜과 보주의 표현으로 보아 불탑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18). 이는 중국에서 찾아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塔像으로 역시 높지 않다. 씕融의 부도사 누각도 이와 유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 초기 불탑은 중국 전통 목조 건축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에서의 불탑 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고 출발하고 있다. 4세기 이후 중국은 불교 전래가 본격화되고 많은 대, 소승의 경전들이 번역되면서 격의 불교적인 수준을 벗어났으 며 불교가 국가에 의해 장려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佛事에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특히 아육 왕경이 번역과 유포에 따라 아육왕탑과 사리 신앙이 고조된다. 이러한 불교의 질적, 양적 확산에 힘입어 아육왕탑이 등장하고 4세기 말기부터 불탑의 고층화라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며 東晋 興寧연간(364)에 哀帝가 건립한 瓦官寺 에서는 강당, 불전, 탑, 대문 그리고 승방 등의 다양한 부속 건물을 갖춘 모습으로 정비되기 시작한다19). 14) 김성우, 극동지역의 불탑형의 시원 대한건축학회학술발표논문집, ( ), p.40. 남철규, 중국탑파의 초기형식에 관한 연구 (전 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p ) 陳壽, 三國志 吳書 4, 권 ) 魏書 권114 釋老志(塚本善괾 譯註, 魏書釋老志, 平凡社, 2008년, pp ). 法苑珠林 권40 舍利篇 感應걧(남철규, 앞 석사학위 논문, 2002년, p.53에서 재인용)에서 위나라 명제가 옛 도읍지에 궁궐을 지으니 궁의 서쪽에 있는 불탑이 너무 높아서 궁내가 보일 수 있으므로 헐어버리려고 하자 한 외국 승려가 사리의 신비로운 현상을 보여주자 마음을 고쳐 옮겨 짓게 하였는데 탑 주위에 백간의 회랑 을 둘렀다 함. 17)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西漢괋制建築遺址, 文物出版社, 2003년, p.198의 도면163. 김성우, 앞 논문(1983년), p ) 謝志成, 四川漢代畵像삷上的佛塔 四川文物, (1987.4), pp 傅熹年主編, 中國古代建築史 二卷(中國建築工業出版社, 2001), p.178의 도 ) 강병희(2012.8), 앞의 논문, pp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31 한편 佛殿은 東晋시기에 커다란 장육상이 조성되기 시작하고 경배되었으 며20) 그를 위해 커다란 불전도 조성되었다21). 이후 남북조시기에 이르러 국가 재원으로 대규모의 불상과 불전 조성이 이어지고 後秦 弘始8년(406) 이후 鳩 摩갥什에 의해 장안에서 법화경이 번역되어 '佛身常住겘滅'과 造像, 造塔 등 의 공양이 큰 공덕이 있음이 강조되자 불보살상의 공경, 불전의 건립과 대규 모화가 다투어 이루어졌다22). 기록에 의하면 불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이 시기의 불상 설치가 7불, 3불, 1 불 2보살 제자상 등으로 확대된 점과 王卽佛 사상 아래 불상과 황제를 동일시 하는 경향도 불전의 규모를 키우고 궁전의 법식을 불전에 적용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조시기의 사찰 배치는 초기에는 중심 건축인 불탑 을 중심으로 불전, 강당, 승방 등이 갖추어지나23) 점차 불전이 커지는 등 불전 에 대한 인식이 중시되고 舍궀을 사찰로 많이 조성하게 됨으로써 위치나 공간 그림 7. 북위 운강석굴 탑주 의 부족으로 탑을 건립하지 않거나 작은 규모의 높은 탑을 조성하게 되는 등, 불탑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이로써 東晉에서 보이는 堂塔 병립의 사찰 배치는 남북조시대 후기에 이르면 불전 이 중심을 이루는 사찰 배치로 변화하게 된다. 5-6세기 남북조시대는 서역을 통해 전래된 간다라 탑의 영향으로 목조 누각형 다층탑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적 인 중층누각식 고층 탑의 모습이 시작된 것이다. 작리부도로 알려진 카니슈카 대탑을 비롯한 간다라, 서역의 거대한 다층탑과 전통 목조 중층누각탑 형식이 결합하여 고층화, 각층 탑신의 상부가 곡선형 尖拱이나 梯形으로 표현되는 감실과 불상장식, 그리스와 페르시아 풍 기둥장식 등의 외래적 요소가 나타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였다24).(그 림 7) 이 시기 북중국에서 불탑을 중심으로 중문, 금당, 강당이 갖추어진 사찰이 찾아진다. 熙平 원년(516)에 孝明帝의 어머니인 괈太后 胡氏에 의해 조성된 永寧寺이다25). 불탑과 사원 관련 기록은 아래와 같다. 사찰의 경내에 높이 90장이 되는 나무 탑 한 기가 있다. 위로 금찰이 있어 다시 10장을 더하면 높이가 1천척이 된 다...생략...금찰 위에는 황금 寶甁이 있는데 25斛을 담을 수 있다. 보병 아래로는 30층의 승로금반을 두었는데 그 주 위로 금탁을 걸어 늘어뜨리고 다시 철 쇠고리를 금찰로부터 네 길로 매어 탑 사각에 이르게 하였다...생략...부도 북 쪽에 불전이 하나 있는데 모양이 태극전 같았다...생략...승방과 누관이 1천여 칸이나 되었다...생략... 사원의 담장은 20) 高僧傳 권5 釋道安傳에 도안이 檀溪寺를 건립할 때 겲州 자사가 銅 만근을 보내와 장육존상을 주조하였는데 그 후 前秦의 부견왕이 사 신을 보내 여러 양식의 불상을 보내 매 講會때마다 극진히 공경하였다 한다. 21) 高僧傳 권5 竺法曠傳에 東晋 興寧 연간에( ) 사문 竺道隣이 무량수상을 만드니 고승 竺法曠이 커다란 불전을 세웠다고 한다. 22) 建康實걧 권17 引用 塔寺記 에 南朝 초기에 이미 7불을 공양하기 위하여 佛殿을 세우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法苑珠林 권 13 敬佛篇 觀佛部 感應걧에 양무제가 527년 同泰寺를 세웠는데 사찰 내에 큰 불전 6 곳, 작은 불전과 堂이 10여 곳이었으며 532년에 또 瑞像殿을 지었는데 동태사에 갈 때마다 매번 강연을 듣고 각 불전에 예불하며 순례하여 瑞像殿에는 황혼녘에 이르렀다고 한다. 23) 괢建華, 하북성 발견 4-6세기 불교조상과 관련 지역 불교조상원류 해외미술사, 연구자 초청강연 및 제 1회 문화유산연구소 산하 연구 회 학술대회 발표문과 도판( ) 24) 강병희(2012.8), 앞의 논문, pp ) 魏書 권114 釋老志(塚本善괾 譯註(2008), 앞의 책, pp ) 肅宗熙平中 於城內太社西 起永寧寺 괈太后親겢百寮 表基굤刹 佛圖 九層 高四十餘丈 熙平元年 기사는 양현지찬 임동석 역주, 낙양가람기 (동서문화사, 2009), p.82.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31

32 모두 짧은 서까래로 하고 그 위에 기와를 덮어 지금의 궁궐 담장과 같다. 사면에는 각 하나씩의 문이 있으며 남문은 삼중으로 세 개의 각도로 통하게 되어 있다26).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사원의 중심부에 거대한 9층의 목탑이 있고 그 뒤로 태극전과 같은 불전이 있으며 이 둘을 둘러 싼 회랑이 있는데 회랑 각 4면에는 문이 하나씩 있고 회랑 밖에 승방과 누관 일천 여 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4, 5세기의 고구려사지와 6세기 초의 영녕사 가람배치와의 관계이다. 중국의 가람배치는 탑을 중앙에 두고 회랑을 두른 탑 중심 사찰이 3세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탑은 금당, 강당의 공간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3세기의 세월 동안 불탑에서 금당으로의 기능적, 공간적 분화와 정착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3세기와 6세기 사이에 위치하는 고구려의 1탑 3금당식은 동북아시아 가람배치의 계속된 발전의 한 단계였을 수도 있다27). 북위의 태조는 天興元年(398) 산서성 대동 부근의 坪城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오급부도, 기사굴산 및 수미산전, 강당, 선방, 사문좌 등이 있 는 사찰을 조성하였는데28) 이는 4세기 초에 불탑을 중심으로 2금당과 강 당이 있는 가람배치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29). 한편 4세기 말에서 5세기 말에 조성된 고구려 가람들은 3금당 배치라 하지만 청암리사지를 제외하면 동, 서금당은 탑과의 거리가 좁고 남북 으로 길며 건물지가 확인된 토성리사지, 정릉사지의 북금당은 탑과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심지어 정릉사지는 회랑으로 분리되어 있다30). 이를 위의 사례에 비추어본다면 고구려의 3금당을 2금당으로 보 고 이것이 청암리사지의 5세기 말에 이르러 3금당 형식으로 정착 발전 그림 8. 村田治걏의 사합방과 초기가람 배치생성도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31). 2금당의 기원은 궁궐의 동, 서당 제도에서 기원을 찾고 있으며32) 3금 당은 중국의 사합원에서 생성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33).(그림 8) 26) 양현지찬 임동석 역주(2009), 앞의 책, pp 中有九層浮圖一所 架木爲之 擧高九十丈 上有金刹 復高十丈 合去地一千尺...생략... 刹上有金寶甁 容二十五斛 寶甁下有承걠金盤三十重 周뽺皆垂金鐸 復有鐵롿四道 引刹向浮圖四角...생략...浮圖겗有佛殿一所 形如太極 殿...생략...僧房樓觀一千餘間...생략...寺院墻皆施短椽 以瓦復之 겭今宮墻也 四面各開一門 南門三重 通三閣道...생략... 27) 김성우, 三金堂 形式의 起源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5호(1988.2), pp ) 魏書 권114 釋老志(塚本善괾 譯註(2008), 앞의 책, pp 天興元年下詔曰 夫佛法之興 其걐遠矣 濟益之功 冥及存沒 神沒遺軌 信可依憑 其쥫有司 於京城建飾容範 修整官舍 곹信向之徒 有所居止 是歲 始作五級佛圖 耆끱答 山及須彌山殿 加以繪飾 別構講堂禪堂及沙 門座 莫겘嚴具焉. 29) 村田治걏, 中國建築史叢考 佛寺佛塔篇 (中央公걩美術出版, 1989), p.7에서 이 기사를 다루면서 2 개의 불전이지만 4세기에 탑, 불전, 강당의 가람배치가 있어 6세기의 가람 배치와 연결됨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같은 책 p.27에서 탑 후방에 두 불전을 두는 것으로 언급 하고 있다. 김성우(1988.2), 앞의 논문, p.177에서는 탑을 향한 동, 서의 2 금당으로 보고 있다. 30) 리인동(2002.3기), 앞의 논문에서는 정릉사지의 회랑이 후대에 이루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경우에도 원래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그런 구획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31) 김성우(1988.2), 앞의 논문, p 한편 이 논문은 토성리사지 자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자료가 포함되었을 경우 필자의 의 견이 달라질 수 있다고도 생각되나 여전히 유효하다. 32) 김성우(1988.2), 앞의 논문, pp 에서 중국 삼국시대( ) 魏나라 문제( 년)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을 때 동한의 옛 궁전 터 위에 새로 궁전을 지으면서 태극전 좌, 우에 동당과 서당을 따로 지어 일상의 조칙이나 정무 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 제도 는 3세기에 시작된 이래 육조시대에 널리 통용되다가 수, 당대 와서 사라진다고 한다. 33) 村田治걏(1989), 앞의 책, pp.20-42와 p.27의 삽도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33 2. 고구려 8각 불탑과 3금당식 가람배치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준 前秦의 뒤를 이어 세워진 겗겆(397 혹은 년) 시기 에 중국에서 8각 탑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코쵸에서 酒川에 이르 는 지역에서 발견된 봉헌 小塔으로 현재 14기가 남아 있으며 이들 중 6기에는 5세기 전반의 조성 연대가 새겨져 있다. 형태는 2층 기단에 인도 탑과 같은 伏鉢식 탑신, 그리고 여러 층이 원추형을 이룬 상륜과 寶珠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2충 기단의 상단이 원형인데 반하여 하단은 8 각이며 대부분 각 면에 8괘가 새겨져 있다. 복발형 탑신에 조성된 8개의 감실에는 8불 이 표현되어 있다.(그림 9) 미륵보살을 제외한 7불의 명칭은 북량의 法衆이 번역한 大方等多갥尼經 과 동진의 帛尸梨蜜갥가 번역한 佛說灌頂經 등의 잡밀경전의 과 거 7불과 이름이 동일하다34). 7불과 미륵보살도 하단 卦에 맞추어 배치되었는데 제 1불을 震괘에(동쪽이며 봄), 제 7불을 坎괘에(북쪽이며 겨울), 미륵불을 艮괘(동북쪽이며 초 봄) 위에 두어 과거 그림 9. 중국 겗겆 程 段兒小石塔 현재 미래의 시간적 순환과 현재가 미래불을 기다 리는 암흑기임을 상징하고 있다.(그림 10) 북량 소탑들의 하층기단에 새겨진 8괘는 8種의 기 본적인 자연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8가지 자연물 의 순환적인 생성 배치를 보여 주는 문왕의 8괘방위 도를 따르고 있는데 이는 주역 說卦傳 에 기술된 것으로 한나라 때 유행하였다35). 8괘가 새겨진 하층 기단에는 8명의 天神이 함께 새 겨져 있는데 의습은 인도, 간다라, 서역 양식이며36) 손 그림 10. 중국 겗겆 高善穆塔 굺本 에 들고 있는 것은 북량에서 曇無讖이 421년에 번역 한 열반경 의 8천신의 것과 도상적으로 일치한다37). 천신들의 인물 표현은 주역 설괘전의 내용을 반영한 4남 4녀의 연령별 모습이 각 면에 반영되어 있다38).(그림 11) 이처럼 여러 곳에서 중요하게 8각의 평면을 채택하고 있으며 불사 리 대신 2층 기단에 경문을 새긴 법 사리탑으로 신자들이 선관을 닦는 선승들에게 시주한 것이다39). 8각은 한나라 장묘건축, 화상석, 무덤, 하늘과 조상에 제사지내는 제천건축과 명당건축에서부터 나타나 이후 계승 되고 있는데 이는 우주가 음양오행에 의해 조화롭게 운행되며 이러한 이치가 인간과 지상에 함께 적용된다고 보아 천문을 통해 보는 하늘의 운행 규범을 상징화한 점에서 비롯된다. 즉 8은 천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4) 殷光明, 겗凉石塔分期試걩 敦煌硏究 ( 1997(b)), p ) 괅木由次걏, 漢易硏究 (明德出版社, 1963), pp ) 殷光明(2000), 앞의 책, pp ) 殷光明, 試걩겗凉石塔基座像與神王, 敦煌硏究 50(1996), pp ) 殷光明, 敦煌市博物館藏三件겗凉石塔, 文物 426(1991), pp ; 殷光明, 美國克林富갿藝術博物館所藏겗凉石塔及有關問題 文物 (1997(a)), p.491과 ) 殷光明(1997(b)), 앞의 논문, p.53과 84쪽 ; 굃玉珉, 中國早期佛塔溯源, 故宮學術季刊 6卷3期(國立故宮博物院, 1989), pp ; 殷光明, 겗凉石塔硏究 (覺風佛敎藝術文化基金會, 2000), pp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33

34 일, 월이 1년에 12번 만나 12월 을 이루며 달의 차고 이지러짐에 따라 1달이 이루어지며 목성의 12 년 주기에 따라 12간지가 이루어 진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하 그림 11. 盛唐 148굴 남벽 미륵경변불사도 늘의 중심 영역에는 북두칠성이 있고 이 별이 계절에 따라 원을 돌면서 그 자루가 일정한 별자리를 향할 때마다 4계절, 8절기(입춘 춘분 입하 하 지 입추 추분 입동 동지, 24절기로 변화되고 그에 따라 8가지 속성으로 하늘의 기가 바뀌며 이에 8가지 방향의 바람이 분다고 이해했다40). 자연의 변화가 천문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주역 은 고대 자연 철학과 사회정치 철학의 집대성으로 복희씨가 天, 地, 자연을 관찰하여 8괘를 그렸고 重卦하 여 64괘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춘 하 추 동의 四時, 동 서 남 북 중의 五方, 금 목 수 화 토의 五궋과 인 간 천지 만물과의 관계를 부호화한 것이다. 한나라 때는 천문학적인 지식과 자연의 순환을 연결시켜 계절의 변화 를 주역 의 卦象으로 설명하려는 이른바 卦氣易學이 유행하였는데 易象과 겤로 우주의 원리와 자연의 변화를 연결 하여 해석하려는 象겤易學 이론의 하나이다. 8괘가 천문과 결합되는 지점이다. 이상 북량 소탑은 형태와 양식에서 인도, 서역과 중국적인 요소가 결합되었고 사상적으로 소승과 대승이 섞여져 있는 과도기적이고 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고구려 8각탑은 이러한 북량 탑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가람배치에서 천문학적인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했 을 수도 있다. 1탑 3금당식의 고구려 가람배치가 천문사상과 관련있다는 주장은 1940년 米田美代治씨에 의해 발표 되었다41). 그는 한나라의 천문사상이 궁실건축에 응용되었고 이에 영향받은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史記 天官書에 나 온다고 기술한 五星座의 배치가 청암리사지에 반영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그러한 연관성이 찾아 지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42). 40) 강병희, 조선의 하늘제사(祭天)건축-대한제국기 원구단을 중심으로,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대원사, 2005), pp ) 米田美代治著 신영훈역, 韓國上代建築의 硏究 (동산문화사, 1976). 42) 김성우(1988.2), 앞의 논문, pp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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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Ⅱ. 황룡사지 목탑에 보이는 백제 건축기술 1. 목탑 기초시설을 중심으로 본 백제 기술의 영향 황룡사지 목탑지는 발굴되기 전 이미 약 137cm 높이의 상단 위에 초석의 상부가 모두 노출되어 정면과 측면이 각 각 7間씩임을 알 수 있었고, 초석도 비교적 원위치를 잘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목탑 기단부의 발굴 자 료를 분석한 결과 목탑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적어도 2번의 큰 중창을 겪는 동안 기단규모, 평면 형식 등이 변화 하였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에 따라 남아 있는 상부구조 또한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5).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 가운데 백제 아비지가 창건한 목탑 가운데 남은 부분은 판축으로 조성한 기단토 뿐이 며 초석을 제외한 현재 남아 있는 기단 석재의 대부분은 통일신라 때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 기 황룡사 목탑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목탑지의 기초시설을 확인할 수 있는 토층 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검토 할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6) 목탑지의 토층조사는 남북과 동서방향 모두 4 개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중 A토층 시굴구는 목탑지 남북중앙축선으로 건물지의 중심토층이라 할 수 있어 목탑지 하부구조를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굴구이다. 토층의 내용은 초석 상면으로부터 건물 내부쪽은 79cm까지 흑색부식토와 황갈색점토 로 되었으며 이들 하부는 자갈층과 적갈색점토가 섞인 토석층으로 자갈은 수평으로 비교적 고르게 깔렸고 그 수평 자갈층 사이사이에 적갈색점토가 채워져 있었다. 그림 1. 황룡사 목탑지 A토층 초석의 두께는 일정치 않았으나 적심석을 넣은 것도 있고 넣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토층단면으로 보면 일단 자갈 층이 이루어진 다음 되파기하여 그곳에 초석을 고정하기 위해 적심석을 넣은 후 초석을 고정시킨 것으로 보였다. 일 부에서는 부식토가 초석 밑바닥에까지 들어가 있는 경우가 있어 후대의 보수가 이루어진 초석도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초석 상면으로부터 깊이 373cm까지 자갈과 적갈색점토층이 계속되었는데 자갈층은 모두 20여 층에 달한다. 이외에 나머지 B, C, D 토층시굴구를 통해 목탑이 세워질 대지를 동서 32.42m, 남북 30.6m로 굴토하여 자갈을 고 르게 깔고 적갈색점토를 넣어 깊은 곳은 초석 상면 높이에서 373cm, 얕은 곳은 287cm로 기단토를 만들고, 초석이 자리잡을 위치는 다시 되파기하여 적심석을 놓고 그 위에 초석을 고정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기초시설을 굴광기초로 이해하고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 황룡사지 목탑의 기초시설은 백제의 건축기술과 관련하여 이해되기도 한다7). 5) 배병선, 2012,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연구, 황룡사 복원연구포럼. 6)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4, 皇龍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 Ⅰ. 7) 한욱, 2009, 6~8世紀 百濟 新갥建築의 基礎部 比較硏究-寺刹遺蹟을中心으로-, 문화재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39 백제의 경우 목탑의 기단토 축조기법은 크게 지상성토, 굴광판축, 그리고 지상삭토로 나누어 볼 수 있다8). 이중 당 시 백제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기법이 굴광판축이다. 백제 목탑의 경우 판축재료는 흙을 중심으로 다져 조성한 토성판축형이 주류를 이룬다. 그 중 용정리사지는 기단 토를 축조할 때 특정한 층(철분층)을 경계로 상, 중, 하의 3개 부분으로 크게 구분되도록 판축하였다. 미륵사지는 이 와 유사하나 지하부터 지상까지 축조된 기단토가 판축시 동일한 두께와 성분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 는 제석사지 목탑지에서도 확인된다. 이와는 달리 황룡사지 목탑지의 경우에는 흙과 강돌을 혼용하여 판축하는 토석혼축형 방식이라고 이해하였다. 이 그림 2. 용정리사지 목탑기초(한욱, 2009) 에 대하여 미륵사지와 유사한 조건의 대지에서 미륵사지와 달리 판축에 강돌이 사용된 것을 기단 내부의 배수를 고 려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더불어 미륵사지 목탑지의 기단을 판축한 기법이 하층에서 할석을 사용하고 있어 황룡사의 것과 유사하다고 하는데, 외관상으로 볼 때 비슷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9). 그러나 건물의 하중이라는 문제를 고려할 때, 기둥으로부터 礎石에 전달된 하중을 정면으로 받는 부분에 있어서는 구조가 다르다는 점 역시 인 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륵사지 목탑지의 기단토는 기단추정 상면에서 지하 약 3.5m까지 灰黃色의 腐蝕岩系 沙質土와 赤黃色의 粘質土 를 3-5cm 두께로 한층 한층씩 다져 올린 정식의 판축층을 이루었고, 그 밑에서는 크기 약 20-25cm, 두께 15-20cm되 는 碎石을 층을 이루어 깔아 흙과 같이 다졌는데, 그 길이는 약 2m정도로 추정된다. 이 판축의 築基는 기단 경계선에 서 약 1.5m이상 외부로 돌출하여 범위를 잡고 안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반면 황룡사 목탑지의 기단토는 기단 상면에서 0.7m까지는 黑色 腐蝕土와 黃褐色 粘土로 되었고, 그 밑으로 약 2.5m까지는 대체로 크기 15-25cm정도의 냇돌을 촘촘히 깔고 그 사이에 점토와 자갈을 채워 깔았다. 한 층의 두께는 약 20-25cm 정도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냇돌층의 판축은 초석 및 적심석 바로 밑까지 채워졌다. 이렇게 황룡사의 구층목탑에서 냇돌을 이용하여 판축층을 이루는 것은 미륵사지 목탑지의 土成판축 밑에 쇄석층 의 築基法과 같은 것으로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석의 힘받는 부분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 황룡사지 목탑을 미륵사지의 목탑지가 아닌 석탑지와 비교하면 조금 더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미륵사 7) 한욱, 2009, 6~8世紀 百濟 新갥建築의 基礎部 比較硏究-寺刹遺蹟을 中心으로-, 문화재 ) 정자영, 탁경백, 2007, 한국 고대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관한 고찰 -백제사지를 중심으로-, 문화재 40. 9) 조원창, 2008, 백제 목탑지 편년과 축기부 구축기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7-4.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39

40 지 서원의 석탑지는 최근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639년에 조영되었음을 밝혀졌다. 이 미륵사지의 석탑지는 동원과 서원 모두 토석혼축형으로 조영되었는데, 그 조성된 시기의 정황으로 본다면 645년에 만들어진 황 룡사지 목탑은 이들 석탑지의 기초방식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백제의 造塔技術, 특히 彌겇寺의 조성 기술의 영향과 관련하여 황룡사지의 목탑지를 이해한 연구는 미륵 사지를 조사할 때부터 있어 왔다. 이 설의 전제는 기본적으로 創建곐代에 있어서는 황룡사가 앞서지만, 황룡사는 구 층목탑을 조성함으로써 巨刹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미륵사지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가람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10). 이는 이후 미륵사지 서원의 석탑지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결과적으로 합당 한 견해였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황룡사지 목탑지에 끼친 백제의 굴광기초기법의 영 향을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황룡사 중건 기 중심 건축물들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 왔다11). 이에 의 하면 황룡사지에 있어서 각 건물지의 기초를 살펴보면 목탑, 중 금당, 서금당에서만 온통기초인 굴광기초가 사용되었으며, 그 밖의 건물에서는 독립적석기초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굴광기초는 백제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신 그림 3. 황룡사지 건물별 기초유형(한욱, 2009) 라지역에서는 황룡사와 분황사 등 일부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 다. 반대로 독립적석기초는 백제지역에서 사용된 사례가 없다 고 한다. 따라서 원래 백제와 신라의 기초축조방법이 서로 달랐으며 황룡사의 목탑과 중금당, 서금당에 사용된 굴광 기초는 굴광기초가 주로 사용된 백제로부터의 영향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창건가람기의 황룡사지에서 확인된 유구의 대부분은 독립기초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굴광기초가 확인 되는 주요 건축물은 구층목탑, 중건금당 그리고 2차 서금당지 등 중건가람기에 기존의 건축물을 대신하여 중건된 것 들이다. 따라서 황룡사 중건가람의 주요 건축물에 새롭게 적용된 굴광판축기초공법은 동일한 기초가 주로 사용되고 있는 백제로 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견해는 이전에도 있었다. 목탑의 築基부분과 조영방식에 있어서 유사점이 확인되는 서건물지 2차 건물, 즉 西堂의 경우도 백제의 기법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기도 하였다12). 나아가 이와는 달리 당시 阿非知가 목탑의 조영과정에서 담당했던 역할에 대해서도 한정하여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13). 즉 신라 에서 이미 목탑의 조영계획을 가지고 조영을 시도하였으나, 중층목조건축을 조성할 수 있는 기술력이 부족하여 기 단축조만을 한 후 더 이상 공정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비지가 초빙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 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황룡사의 목탑조성과정에서 아비지가 담당하였던 부분은 塔身을 九層높이까지 올리는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목탑을 조성하는 작업의 주요 구성 부분을 基壇築造과 塔身造營 그리고 蓋瓦 부분이라고 한다면, 아비지가 담당한 것은 신라가 이미 진행하였던 築基부분 위에 塔身을 조영하였던 것으로 보는 10) 張慶浩, 1991, 百濟寺刹建築, 예경산업사. 11) 한욱, 2009, 6~8世紀 百濟 新갥建築의 基礎部 比較硏究-寺刹遺蹟을 中心으로-, 문화재 ) 張慶浩, 1988, 百濟 寺刹建築에 관한 硏究, 홍익대박사학위논문; 1991, 百濟寺刹建築, 藝耕産業社. 13) 梁正錫, 2004, 皇龍寺 九層木塔의 造成에 대한 比較史的 檢討, 先史와 古代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41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통해 아비지는 백제의 조영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였을 것이다. 한 편 刹柱本記 에 아비지가 大匠으로 나오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전반적인 造塔의 계획과 공사과정을 관리하는 일만 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築基作業이나 기와 제작 등의 기본적인 기술은 신라의 것을 사용하 고, 문제가 되는 곳만을 아비지가 지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2. 목탑 심초석을 중심으로 본 백제 기술의 영향 이러한 기단토를 중심으로 한 논의와는 별개로 목탑 심초석과 관련하여 백제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 었다14).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는 사리의 봉안은 주로 심초석과 관련하여 다루어져 왔으며 심초석의 설치 위치를 건축적 기술의 발전과 관련하여 이해하여 왔다15). 이에 따르면 심초석의 위치를 중심으로 목탑은 크게 지하식 반지하식 지상식으로 시기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치 변화는 사리용기나 장엄구의 매납이라고 하는 불 교이념의 변화라고 하기보다 탑의 건축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즉 초기에는 건축기술이 취약하 여 심주를 안정된 상태에서 세우고 또 이를 유지하기 위한 보강법을 강구하면서 동시에 기단토 안에 견고히 고정시 키고자 하였으나 심주 하부 부식에 따른 공동화(空洞化) 등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고 진보된 기술의 도입이 이루어지 면서 심주를 묻는 위치가 점차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는 것이다16). 백제 사원의 경우도 이러한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데, 목탑에서 심초는 안치 위치에 따라 지하식, 반지하식, 지상 식 심초로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7). 이를 바탕으로 지하식 심초는 군수리(심초 상면기준 지하1.8m), 능산리(지 하1.1m), 왕흥사지(지하0.5m)에서 확인되고, 금강사지(지하0~0.66m)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반지하식 심초는 서복사지(0m)로 이해하고, 지상식 심초는 기단상면에 심초가 놓인 제석사지(지상 약2m)와 목탑지 정중앙에 서 심초 및 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미륵사지(추정 지상1.3m)가 동일 형식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 를 시간으로 환원하여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의 목탑 조영시기인 6세기중반까지 심초석이 지하에 안치 되다가 서복사지의 과도기를 거쳐 제석사지 목탑 조영시기인 7세기 전반기에 지상식으로 고착화된 것으로 보았다. 신라 황룡사지 목탑지(지상 약1.4m) 기단 상면 정중앙에 위치한 심초석도 이러한 백제 사원의 변화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공통된 방향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정리하면 심초의 안치위치가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 (A.D.567) 왕흥사지(A.D.577) 금강사지 서복사지 용정 리사지 미륵사지(A.D.600~640), 제석사지(A.D.~639), 황룡 사지(A.D.645)로 높이에 있어서 점진적인 변화를 하고 있다. 더불어 심초 안치 위치 뿐 만 아니라 심초 또한 군수리, 능산 리, 왕흥사지, 전천왕사지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규모에서 는 큰 차이가 없으나 제석사지나 황룡사지에 가면 크기, 두께 모두 거대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림 4. 심초 안치 위치도(정자영, 2008) 14) 정자영, 탁경백, 2007, 한국 고대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관한 고찰 -백제사지를 중심으로-, 문화재 ) 조은경, 2009, 미륵사지 서탑축조의 구조원리에 관한 기초연구-6~7세기 전반 목탑과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문화재 ) 小堀榮三, 1989, 幻の塔を求めて西東, 丸善株式會社出版サ一ビスセンタ一; 조은경, 2009, 위의 논문, 재인용. 17) 정자영, 2008, 백제의 심초 및 사리봉안, 문화재 41-1를 중심으로 정리.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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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장육존상을 포함한 19구의 존상을 모시기 위해 대좌 등의 시설이 되어 있어 중건가람의 중심으로 이해된다. 황룡사의 경우 新宮단계와 창건단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창건가람의 금당이 조성되어 있던 시기 그 좌우에는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 건물은 중건 금당이 조성되기 이전까지는 회 랑을 중심으로 각기 구분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장육존상의 봉안에 따른 중건가람이 조영되는 과 정에서 각 건물을 병렬적으로 나누어주던 회랑이 폐기되면서, 중앙의 금당은 확대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 서 의 건물은 9칸에서 7칸으로 축소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보고서의 서금당지 발굴도면을 보면, 단랑구조인 원서회랑이 남쪽에서 20칸째의 주칸이 좁은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서쪽으로 익랑이 연결되고 있다. 또한 같은 위치에서 중금당으로 이어지는 적심석이 발견되는데 결국 원 서회랑이 중금당과 서금당 사이 공간을 나누고 동시에 연결하고 있다. 이것은 원 서회랑지의 존속기간과 회랑 내곽 의 중심공간 사용에 대한 새로운 논점을 던져주는 것이다19). 그림 5. 원 서회랑과 익랑 부분 평면도(양정석, 2001) 중금당지와 동서금당지 사이에 있었던 원 동서회랑지는 기존 견해에서는 창건가람의 유구로 설명하고, 세금당과 목탑이 조영된 시점에서는 훼철되어 황룡사 회랑 내곽의 중심 경내에는 원 동서회랑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금당지의 기초구조부의 층위와 판축범위를 서로 비교해보면 중금당지와 서금당지 사이에 있는 원 서회랑의 유구는 창건가람의 것만이 아니라 두 금당이 존속되는 어떤 시점까지 계속 사용되어 온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20). 19) 양정석, 2001, 앞의 글, 김숙경, 2012, 황룡사 가람배치 재검토, 황룡사 복원연구포럼. 20) 김숙경, 2012, 앞의 글.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43

44 이러한 배치와 구도는 세 금당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훨씬 오랜 기간을 지속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금당의 서쪽 판축 범위를 살펴보면 익랑의 적심석이 판축기초 위에 얹어져 있기 때문 에 중금당이 중건되고 난 후 서회랑의 익랑이 건축된 것이기 때문 이다. 결국 신라시대의 황룡사가 흔히 말하는 3금당 1탑 가람배치 라 는 형식 이전에 백제 미륵사지와 같은 3원 으로 지속된 기간이 명 그림 6. 황룡사 1차 가람 추정도(김정기, 1984) 백히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건가람의 중건 금당이 조성되 면서 회랑이 사라지고 동 서 건물이 축소되는 것을 新갥式 三金 堂의 출현 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림 7. 가람배치 변찬(안)(김숙경, 2012) 그 보다는 창건가람의 내곽이 原 東西回걉에 의해 분리된 3棟의 建物이 존재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창건가람에서 회랑으로 구분된 三院에 각각 金堂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회랑으 로 구분된 삼원을 가람배치에 수용한 것이 확인되는 사지는 아직 신라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백제지역으로 시야를 넓혀 보면 6세기 중반으로 이해되는 夫餘 軍守里廢寺址를 들 수 있다21). 조사개요에 따르면 中央基壇이라 표현된 금당지는 9칸의 건물지로 동서90척(27.27m), 남북 60척(18.18m)의 方形 基壇이 남아 있다고 한다22). 더불어 금당의 서쪽으로 85척(25.75m)의 거리에 건물지가 확인되고 이 건물지와 금당지 와의 사이에 회랑지로 보이는 화강석재가 남북으로 배열되어 각 건물을 구분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회랑으로 생 각되는 유구 밖에서 금당과 유사한 건물지가 발견된 것을 토대로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군수리폐사지는 一塔三金堂 의 배치로 이해되었다23). 즉 미륵사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회랑으로 院을 구분하는 방식과 유사한 인식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는 비록 기단축조방식에 차이가 있고 회랑으로 나뉘어진 3동의 건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 21) 양정석, 2001, 앞의 글. 22) 石田茂作, 1936, 夫餘軍守里廢寺址發掘調査槪要, 昭和十一年古蹟調査報告. 23) 秦弘燮, 1971, 百濟寺院의 伽걄制度, 百濟硏究 2; 安承周, 1985, 百濟寺址의 硏究-公州 扶餘地域을 中心으로, 百濟文化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45 만, 배치형태에서만 보면 중건금당이 조성되기 이전의 황룡사 가람과 유사한 양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이래 백제를 통한 남조계 문화의 유입이라든가24), 백제 興輪寺와 신라 興輪寺와의 관계25) 등을 비교해 볼 때 백제를 통해 이러한 형태의 가람배치와 관련된 불교사상이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중건 금당이 조영되기 이전 황룡사 창건기의 가람배치를 일단 백제의 군수리사지 및 미륵사지와 유사한 三院式 三金堂 의 배치형태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는 6세기 중엽 백제 사찰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삼원식 배치구조가 신라 황룡사 창건기에 활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8. 부여 군수리폐사지 평면도 그림 9. 익산 미륵사지 평면도 24) 辛鐘遠, 1992, 6세기 新갥佛敎의 南朝的 性格, 新갥初期佛敎史硏究. 25) 盧重國, 2000, 新갥와 百濟의 交涉과 交流-6,7세기를 중심으로, 新갥文化 17 18합.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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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그림 1. 영녕사지 위치도 그림 2. 정림사지 위치도 위 낙양성을 상징하는 국가대사였다. 한편 宣武帝가 경명 연간( ) 건립하여 景明寺라는 이름이 붙은 경명사는 매년 4월 8일 황제가 주도하고 낙양성민 거의가 참여하는 대형 불교의례인 낙양성 궋像祭에서 낙양성 내 1천여 불상 이 모여 행상의 시발지가 되는 중요 사찰이었다. 경명사는 북위 낙양성의 정남문인 宣陽門 밖 1리, 즉 선양문에서 대 략 500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御道 동쪽에 위치한 대형 사찰로서 한 坊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북위에 서는 어도 서쪽에 위치한 내성의 영녕사와 어도 동쪽에 위치한 외곽성의 경명사가 국가대사로서 기능하고 있어, 도 성의 중축선인 어도와 사찰의 등급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겳에서는 건강성에 700여 大寺가5) 陳에서는 300여 大寺가 있었는데, 두 왕조에서 황제가 주도하고 건강성의 사부 대중이 대거 참여하는 무차대회 등의 대형 불교의례가 거행된 사찰은 同泰寺와 長干寺6) 및 大莊嚴寺였으며7) 불교계 를 통어하는 (大)僧正이 거주하는 관사로서의 성격을 가진 사찰은 光궀寺였다(그림 3 참조)8). 광택사는 천감6년(507) 楊州丹陽郡눕겓縣 東夏里 三橋에 있던 양 무제의 고거에 건립되었으며9), 보통2년(521) 9월 5) 梁記云, 東臺西府相繼八十餘年, 都邑大寺七百餘所, 僧尼講衆常有萬人, 討걩內典共遵聖業, 孜孜無倦各壓世榮也. 破邪걩 권下, T52, No.2109, p.487中.; 右陳世五主, 合三十四年, 寺有一千二百三十二所, 國家新寺一十七所, 百官造者六十八所, 郭內大寺三百餘所. 辯正 걩 卷3, T52, No.2110, p.503下. 6) 동태사와 장간사에는 양 무제의 무차대회가 수차례 거행되었다. 무차대회와 여기서 행해진 강경의 성황에 대해서는 蘇鉉淑, 皇權과 佛 敎儀禮: 겗魏 궋像과 겳의 無遮大會 中國古中世史硏究, 29, 2013, 2, pp ) 무제는 永定 2년 5월, 大莊嚴寺에 행행하여 사신하고 10월에는 그곳에서 금광명경 을 發題하였다. 또한 12월에는 다시 대장엄사에 행행 하여 무애대회를 열고 승여와 법물을 시주했다( 陳書 권2 本紀 2 高祖 下, pp.37-38). 또한 진 무제는 4월 8일 장엄사에 승려들을 모아 놓고 불의를 토론케 했다( 續高僧傳 권24 慧乘傳, T50, No.2060, p.633中). 8) 續高僧傳 권5 法雲傳, T50, No.2060, pp.464下-465上; 帝(진의 선제)又下쥫榮慰, 以瑗爲國之僧正, 令住光宅. 苦辭以任, 쥫特許之. 續高僧傳 권21 曇瑗傳, T50, No.2060, p.690上. 9) 廣弘明集 권16에 실린 沈約의<光宅寺刹下銘幷序>에 의하면 천감6년 광무제가 이곳에 행행하여 찰을 세웠다고 한다(T52, No.2103, p.212下). 그러나 建康實걧 은 東都記 를 인용해 이 사찰이 양 무제 등극 후 사택을 사찰로 했다는 기록을 싣고 있다. 諏訪義純은 이를 토대로 동태사의 예와 마찬가지로 광택사의 건립은 6년여에 걸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천감 초년에 시작하여 천감6년 탑이 건립됨 으로써 창건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諏訪義純, 中國南朝佛敎史の硏究, 京都: 法藏館, 1997, p.150). 50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51 23일 시작하여10) 대통 원년(527) 3월 6일 완성된 동태사는11) 건강성 內城에 건립되었다. 당시 북위 낙영성의 영녕사 와 비교되었던 동태사는 사찰의 재난이 양 멸망의 징조로 인식될 만큼 정치적 성격이 강한 양 최대의 國家大寺로 서12) 궁성인 臺城의 북쪽, 刑獄을 관장하던 大理署 자리에 건립되었다. 이는 동시기 혹은 隋唐代 寺院과는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刑獄이 아닌 佛法과 자비심에 의해 세상을 통치하겠다는 황제보살 무제의 대승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 영된 것이었다13). 유송 때 건립된 대장엄사는 진 무제 때 황제의 무차대회와 사신 등이 거행되는 국가대사로서 기능 했는데, 도성의 정남문인 선양문 밖, 어도 서쪽에 위치한 太社의 서쪽 에 위치하고 있다14). 이처럼 남조 건강성에서 는 국가대사의 도성 내 입지에서 어떤 규칙이나 통일성을 찾기 어렵다. 581년 선양 형식으로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를 건국한 문제는 북주 장안성이 오래되고 공간이 협소한 데다 식수에 염분 성분이 강해 이듬해 6월, 신도 조영의 조서를 내린다. 신도 대흥성은 바로 그해 외곽성의 울타리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완성되었으며, 이듬해 문제가 정식으로 천도했다15). 불교를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 만큼 궁성, 황 성 110여 곳의 사찰이 건립되었는데16) 도성에서 가장 등급이 높았던 사찰은 세 곳이다. 禪定寺와 大禪定寺 그리고 大 興善寺로서 모두 대흥성의 한 坊의 면적을 차지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17) 선정사와 대선정사는 죽은 황후와 황제를 추복하기 위한 공덕사찰의 성격이 강했으며 정치적 성격이 강한 국가대사는 대흥선사이다. 그림 3. 건강성 내 주요사찰 분포도 그림 4. 수 대흥성의 대흥선사 위치(3번 지점) 10) 곎代三寶紀 권3, T49, No p.45上. 11) 普通八年, 造同泰寺成. 樓閣殿臺, 房걉綺飾, 陵雲九級, 壯麗魏永寧, 開大通門, 對同泰寺, 因號大通, 元年三月괯日, 駕每親臨, 幸寺괋 懺. 곎代三寶紀 권11, T49, No.2034, p.99下. 12) 衍未敗前, 災其同泰寺, 衍祖父墓前石麟一旦亡失, 識者咸知其將滅也. 魏書 권98 島夷 蕭衍, pp ) 蘇鉉淑, 겳 武帝와 同泰寺 佛敎學報, 54, 2010, pp ) 盧海鳴, 괯朝都城, 南京: 南京出版社, 2002, p ) 신도 조영에 대해서는 隋書 권1 高祖紀 참조. 16) 唐겱京城坊考 112곳, 겱京新記 120곳 등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120개가 되지 않는 110여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대 대흥성 불사의 수량에 대한 기록 검토와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괢興成, 大業七年隋煬帝廢大興城佛寺硏究 中國곎史地理論, 叢 27卷제4輯, 2012년 10월에 자세하다. 17) 宿白, 試걩唐代長安佛敎寺院的等級問題 文物, 2009년 제1기, pp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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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그림 16. 중대통2년 석가여래제존입상 광배(부분) 그림 17. 부여 능산리사지 그림 18. 돈황석굴 성당기 제148굴 남벽 <미륵변상도>의 사찰 그림 19 돈황석굴 중당기 제231굴 북벽 <미륵변상도>의 사찰 그림 20. 돈황석굴 만당기 제85굴 西頂 <미륵변상도>의 사찰 60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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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그림 26. 關中創立戒壇圖經 의 附圖 북위 思遠佛寺 遺址와 영녕사지 등에서 낭방은 확인되지 않았다84). 그런데 동위 북제 도성인 업성의 조팽성사지 에서 낭방식 건축이 발견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사지 동남원락의 大殿 양쪽에 원락 주변의 회랑과 이어지는 낭방식 건축의 기초를 발굴했다고 한다85). 조팽성사지의 낭방식 건축은 지금까지 발굴된 중국의 사찰 유지 가운데서 가장 이른 것이다. 현재 정식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백제 사지의 회랑 북단 건물지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4. 四周式 회랑의 不在 최근 발굴 성과를 통해 볼 때, 일반적으로 백제 사지는 사방에 담장이나 회랑을 두르거나 익랑 등을 통해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자 하는 경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정림사지, 제석 사지 등 모두 사방을 에두르는 四周의 회랑을 보기 어렵다. 미륵사지의 경우 다른 백제 사지와 달리 강당 좌우의 익 랑이 동서 회랑과 연결되었지만 중문 좌우의 남회랑지는 동서 회랑지와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반면 중국은 전통적으로 궁묘와 사찰은 물론 주거건축까지 사방을 울타리나 회랑으로 둘러싸는 폐쇄식 공간, 즉 四合院식 구조가 특징이다.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되어 河南 偃師 二里頭의 商代 궁전유지(그림 27)와 陝西 岐山 鳳雛 의 서주 宮廟 유지(그림 28)까지 소급되어 일반적인 궁전건축과 종묘건축의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사찰 건축 역시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기록상의 四周걉딕 이나 周쿾牆뽺 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하 며86) 영녕사의 사방을 둘러싼 담과 조팽성사지 동원락과 서원락의 四周회랑 등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關 中創立戒壇圖經 附圖나 돈황벽화에서 보듯 중국 사찰은 사방이 막힌 폐쇄적인 하나의 원락을 공간의 기본 단위로 하고 있으며 때문에 사찰의 확대는 원락의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공간적 특징 때문에 돈황벽화의 중국 사 찰에서는 원락 사방의 모서리에 세워지는 角걹건축을 흔하게 볼 수 있다. 84) 大同市博物館, 大同겗魏方山思遠佛寺遺址發掘報告, 文物 2007년 제4기;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겗魏洛陽永寧寺1979~1994年考古發掘報告, 겗京: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 86) 法苑珠林 권39, T53, No.2122, p.598上; 集神州三寶感通걧 권1 瓜州城東古基 조, T52, No.2106, p.407下. 64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65 그림 27. 河南 偃師 二里頭의 商代 궁전유지 그림 28. 陝西 岐山 鳳雛의 서주 宮廟 유지 5. 목탑의 조영과 사리 봉안 639년의 절대 연대를 가진 미륵사지 서석탑과 그보다 시기가 늦은 것으로 추정되는 同寺의 동석탑 그리고 정림사 지 석탑 이외에 현재 발굴된 백제의 탑은 모두 목탑이다. 발굴된 주요 목탑지로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567), 왕흥 사지(577), 제석사지(639년 이전) 등이 있으며 발굴된 석탑지로는 미륵사지 서석탑지가 있다. 한편 정림사지에는 탑 안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상 잔편들이 발견되어 현재의 석탑 이전에 목탑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목탑 내부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상들은 구아리사지, 제석사지 폐기장 등 백제 사지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역시 영녕사를 비롯한 북위 사지와 동위 북제의 조팽성사 지 등의 탑지 부근에서 소조상들이 출토되었다. 과거 정림사지 소조상은 북조와의 친연성이 강조되었으나 최근 남 조 건강성의 사지에서 소조상편이 발견되고 그 제작기법이 백제와 유사한 면이 지적되어 남조와의 관련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87). 나아가 현재까지 발굴된 북조의 탑은 촭土 心實體가 있는 土木結合式 구조인데 비해 백제탑은 목 제 찰주를 세우는 방식이다. 때문에 비록 남조의 목탑 발굴 사례는 없지만 純木構方式 인 남조 건축의 특징88) 그리 87) 굃炳鎬, 扶餘 定林寺址 出土 塑造像의 製作時期와 系統, 美術資料 74, ) 傅熹年 主編, 中國古代建築史 第2卷, 겗京: 中國建築工業出版社, 2001, p.180.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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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Ⅱ. 일본 사지의 가람배치와 축조기법 1. 일본 사지의 가람배치 1) 飛鳥寺4) 일본 최초의 사원으로 蘇我馬子의 씨사이면서 법사사(승사)에 해당된다. 남향으로 전체적인 가람배치는 1탑3금 당식으로 이루어졌다(그림 1).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 서 북면에 금당이 위치하고 있다. 목탑의 남쪽으로는 중문 이 배치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에 회랑이 둘러싸여 있다. 중금당의 북회랑 너머로는 강당이 독립적으로 배치 되어 있다. 2) 四天王寺5) 593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에서부터 중문 - 목탑 - 금당 - 강당이 배치된 1탑1금당식이다(그림 2). 중 문 좌우로는 남회랑이 시설되어 있으며 이의 북쪽으로 동 서 북 회랑이 조성되어 있다. 목탑의 평면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豊浦寺, 겭草伽걄, 中宮寺, 奧山廢寺, 平群寺 등이 사천왕사식 가람배치를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그림 1. 비조사지 가람배치 그림 2. 사천왕사지 가람배치 4) ① 淺野淸, 1958, 飛鳥寺の建築 佛敎藝術 33號. ② 大橋一章, 1976, 飛鳥寺の創立に關する問題 佛敎藝術 107號. ③ 손량구, 1989, 아스카사의 고구려적 성격 조선고고연구 3호. 5) 森郁夫, 1993, 瓦と古代寺院, 굢川選書. 6) 岡本東三, 2002, 古代寺院の成立と展開, 山川出版社, 37쪽.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71

72 그림 3. 법륭사 약초가람 유구 그림 4. 법륭사 서원가람 배치 3) 法隆寺 창건가람인 약초가람(그림 3)7)은 607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목탑, 금당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었 다. 재건가람의 축조와 관련하여 유구의 형적은 불량한 편이다. 670년 큰 화재로 인해 법륭사는 완전 소실되었고 이후 서원가람이 재건되었다. 서원가람은 금당이 동쪽, 5층탑이 서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동 서회랑 북단에서 종루와 경장이 확인되었다(그림 4). 북회랑 중앙부에는 강당이 조성 되어 있다. 몽전을 중심으로 한 동원가람은 天平 10년(738년)경에 조성되었다. 4) 法起寺 606년 성덕태자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가람배치는 법륭사 서원가람 및 법 륜사와는 반대로 탑을 동쪽에 금당을 서쪽에 배치하고 있다. 당탑의 중간 이남 지역에는 중문이 자리하고 있고 이의 북쪽으로는 강당이 위치하고 있다. 중문 과 강당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그림 5)8). 5) 山田寺9) 그림 5. 법기사 가람배치 산전사는 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발원으로 641년 착공되었으나 그의 자결로 말미암아 685년에 이르러서야 불상 의 개안법요식이 거행되었다. 가람배치는 중문 - 목탑 - 석등 - 금당 - 강당 등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7) 森郁夫, 1993, 瓦と古代寺院, 48쪽 도 12. 8) 森郁夫, 1993, 瓦と古代寺院, 76쪽 도 28. 9) 이에 대해선 다음의 책자를 참조하였다. ① 古典保存會編, 1928, 上宮聖德法王帝說. ② 갏子裕之, 1977, 山田寺跡(갘良縣) 佛敎藝術 116號. ③ 갘良國立文化財硏究所 飛鳥資料館, 平成 9年, 山田寺. 72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73 그림 6. 산전사지 가람배치 그림 7. 회외사지 가람배치 그림 8. 길비지사지(백제대사) 가람배치 복원도 (그림 6). 강당은 북회랑 너머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목탑과 금당 사이에는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산전사식의 가람배치를 보이는 것으로는 7세기 후반의 橘寺가 있다. 6) 檜뮠寺10) 회외사는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사찰로 가람의 중심부에 탑, 남쪽에 금당, 북쪽에 강당, 그리고 탑 정면으로 서 문이 자리하고 있다(그림 7)11). 현재 탑지에는 平安時代 후반에 세워진 1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목탑지 심초석은 화강암제로 사천주 초석 상면으로부터 약 80cm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강당지는 평적식의 와적 기단으로 조성되었으며 금당지는 이중기단으로 이루어졌다. 7) 吉備池寺址(百濟大寺)12) 현 갘良縣 櫻井市 吉備에 있는 吉備池寺址를 백제대사로 이해하고 있다. 법륭사 서원가람에서와 같이 금당이 동 쪽, 목탑이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중문은 남회랑 두 곳에 시설되어 있다. 강당은 북회랑 너머에 독립적으로 배치되 어 있고 강당 북쪽으로는 세장한 승방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되어 있다(그림 8)13). 백제대사는 舒明天皇 11년(639년)에 건립된 일본 최초의 국영사찰로 목탑은 9층으로 복원되었고 황룡사 9층 목탑 보다 약간 작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10) 飛鳥資料館, 1983, 渡걐人の寺-檜뮠寺と坂田寺-. 11) 飛鳥資料館, 1983, 渡걐人の寺-檜뮠寺と坂田寺-, 17쪽. 12) 이와 관련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를 참조하였다. ① 갏子裕 千田稔, 평성12년2월, 飛鳥 藤原京の謎を掘る, 文英堂, 73~78쪽. ② 朝日新聞社, 2002, 갘良文化財硏究所創立50周年記念 飛鳥 藤原京展, 52~56쪽. ③ 岡本東三, 2002, 古代寺院の成立と展開, 山川出版社, 44~52쪽. ④ 갘良文化財硏究所, 2003, 吉備池廢寺發掘調査報告-百濟大寺跡の調査-. 13) 갘良文化財硏究所, 2003, 吉備池廢寺發掘調査報告-百濟大寺跡の調査-, 168쪽 Fig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73

74 2. 일본 고대 사지의 축조기법 1) 다양한 기단건축 구조상으로는 단층기단 및 이중기단이 조성되었고 재료상으로는 와적기단, 할석기단, 가구기단 등이 축조되었다. 특히, 와적기단의 경우 백제와 달리 금당지14) 및 목탑지15)에서도 쉽게 살필 수 있다. 近江國衙의 이중 와적기단이나 伊丹廢寺 금당지의 혼축 와적기단 등은 백제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단 형식이다. (1) 단층기단 ① 비조사 중금당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결구된 가구기단이다(그림 9)16). 기단의 전면으로는 할석으로 조영된 낙수받이가 시설되 어 있다. 5층목탑지의 기단 형식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② 산전사 금당지 기단 서면에서의 지대석과 그 상면의 받침턱으로 보아 가구기단(그림 10)17)으로 추정된다. 기단 주변으로는 약 1.6m의 너비로 편평한 판석(犬走)이 깔려 있다. 축기부를 굴광하고 판축토로 축토하였다. ③ 회외사 강당지 평기와편을 이용한 평적식의 와적기단으로 조성되었다(그림 11)18). 일부에는 할석이 보수되어 있다. 평면 와열은 1열이다. 그림 9. 비조사 중금당지 및 목탑지 기단 구성도 그림 10. 산전사 금당지 가구기단 그림 11. 회외사 강당지 평적식 와적기단 14) 大鳳寺, 上淀廢寺, 高麗寺 등에서 볼 수 있다. 15) 高麗寺, 겗白川廢寺, 田떬廢寺 西塔, T)原廢寺, 上淀廢寺 中塔 등에서 평적식의 와적기단을 확인할 수 있다. 16) フランソウ ベルチエ, 1974, 飛鳥寺問題の再吟味 佛敎藝術 96號, 63쪽. 17) 갘良國立文化財硏究所 飛鳥資料館, 平成 9年, 山田寺, 21쪽. 18) 飛鳥資料館, 1983, 渡걐人の寺-檜뮠寺と坂田寺-, 2쪽 사진 하. 74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75 ④ 숭복사 미륵당 동편기단 합장식의 와적기단을 살필 수 있다. 와적 아래에는 1매의 지대석이 놓여 있고 그 위로 합장형의 기와편이 와적되 어 있다(그림 12)19). 군수리사지 금당지의 완형 암키와 대신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 ⑤ 횡견폐사 중건기단 수직횡렬식의 와적기단으로 조성되었다(그림 13)20). 다른 형식과 달리 완형의 암키와를 사용하였다. 백제와 비교 해 유적수가 많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림 12. 숭복사 미륵당 합장식 와적기단 그림 13. 횡견폐사 중건기단 수직횡렬식 와적기단 (2) 이중기단 ① 비조사 동 서원 금당지 하층은 장대석, 상층은 할석으로 조성되었다(그림 14)21). 하층기단 상면에는 적심석이 배치되어 있다. 하층기단 외 곽으로는 낙수받이가 시설되어 있다. 기단의 재료로 보아 왕흥사지 목탑지와 친연성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② 법륭사 당탑지 하층은 면석과 갑석, 상층은 지대석, 면석, 갑석 등으로 결구된 이중기단이다(그림 15)22). 하층기단의 면석은 단면 형을 보이고 있어 형으로 치석된 백제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그림 14. 비조사 동 서원 금당지 이중기단 그림 15. 법륭사 5층목탑 이중기단 19) 田떬征夫, 1995, 瓦積基壇と渡걐系氏族 季刊考古學 第60號, 74쪽 D. 20) 田떬征夫, 1995, 瓦積基壇と渡걐系氏族 季刊考古學 第60號, 74쪽 C. 21) フランソウ ベルチエ, 1974, 飛鳥寺問題の再吟味-その本尊を中心として 佛敎藝術 96號, 每日新聞社, 63쪽 2<上>. 22) 필자사진.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75

76 ③ 회외사 금당지 하층은 협축, 상층은 멸실되었다(그림 16)23). 축기부를 정지하고 판축공법으로 기단토를 조성하였다. 하층기단 상 면은 석재로 부석되어 있다. ④ 대봉사 금당지 하층은 할석, 상층은 평적식의 와적기단으로 조성하였다(그림 17)24). 평면 와열은 1열이다. 그림 16. 회외사 금당지 이중기단 그림 17. 대봉사 금당지 이중기단 2) 목탑 심초석의 위치 변화 목탑 심초석은 비조사(그림 18)25), 사천왕사, 법륭사, 회외사, 산전사 등의 사원에서는 기단토 아래인 지하에 위치 하고 있고26) 백제대사(그림 19)27)는 기단토 상면에 축조되어 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심초석이 이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심초석이 지하에 시설된 경우 이를 옮기기 위한 사도가 마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18. 비조사 목탑지 복원 심초석, 출토유물 그림 19. 백제대사 목탑 심초석(공양석) 탈취공 23) 飛鳥資料館, 1983, 渡걐人の寺-檜 寺と坂田寺-, 3쪽 사진 상. 24) 田떬征夫, 1995, 瓦積基壇と渡걐系氏族 季刊考古學 第60號, 74쪽(下). 25) 朝日新聞社, 2002, 갘良文化財硏究所創立50周年記念 飛鳥 藤原京展, 26쪽 최하단 좌측. 26) 이는 중궁사, 법륜사, 귤사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7) 갘良文化財硏究所, 2003, 吉備池廢寺發掘調査報告-百濟大寺跡の調査-, PL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77 3) 당탑지의 축기부 조성 금당이나 목탑은 사원 내 다른 건축물에 비해 지붕의 구조나 내부 장엄물의 하중으로 말미암아 축기부를 굴광하 거나 기반토를 정지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사례는 산전사 금당지(그림 20)나 목탑지, 길비지사지 금당지 등에서 살필 수 있고, 후자는 길비지사지 목탑지 및 회외사지 금당지(그림 21)2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전사 금당지나 목탑지, 길비지사지 금당지의 굴광된 축기부 내부는 판축토로 조성되어 있고, 길비지사지 목탑 지 및 회외사지 금당지는 기반토 정지 후 판축토로 축토되어 있어 백제의 토목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림 20. 산전사 금당지 굴광 축기부 판축토 그림 21. 회외사지 금당지 정지 축기부 판축토 4) 초석과 적심석의 사용 6세기 말~7세기 전반 일본에서의 사원 창건은 백제에서 파견된 장인들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이들 사원의 각 전각에는 기와를 올렸으며 많은 하중이 기둥 및 기단토에 전달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가옥에서 같은 굴립주의 건물 로는 지붕의 하중을 원활히 지탱하기 어려워 백제의 건축기술로 등장한 초석과 적심석(비조사) 등을 시설하게 되었 다. 이처럼 기와의 등장은 가옥의 외관뿐만 아니라 기초시설까지도 변화시켰다. 그러나 길비지사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7세기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승방과 같은 부속건물에는 아직까지 굴 립주로 축조되고 있어 초석건물과 굴립주건물이 혼용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초석이나 적심석, 적심토를 사 용한 백제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백제 제와술의 전파와 유행 588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와박사 麻갘文奴, 陽貴文, 낑貴文, 昔麻帝彌 등은 비조사를 창건하면서 와요 및 기와(와당 포함)를 제작하였다. 와요(그림 22)29)는 계단식의 지하식 등요로 현 비조사 인근 구릉상에 축조되었다. 와 당은 판단 중앙이 삼각돌기인 것과 원주문이 있는 것 등 두 가지 형식으로 생산되었다(그림 23 24). 28) 飛鳥資料館, 1983, 渡걐人の寺-檜뮠寺と坂田寺-, 3쪽 하단 우측 사진. 29) 大川淸, 昭和47年, 日本の古代瓦窯, 雄山閣, 第 8圖.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77

78 그림 22. 비조사 와요 그림 23. 삼각돌기식 와당 그림 24. 원형돌기식 와당 비조사에서 보이는 와당 및 와요의 형식은 사천왕사를 비롯한 법륭사 약초가람, 오산폐사, 三井瓦窯, 쏆上り瓦窯 등에서도 살필 수 있다. 4. 승사와 니사를 바탕으로 한 二寺制의 확립 대화정권의 실권자 였던 小我馬子는 자신의 氏寺로서 승사인 비조사와 니사인 豊浦寺를 창건하였다. 두 사원은 비조천을 경계로 양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리는 도보로 20분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이사제는 이후 제도화 되어 나라시대의 國分寺30)로 발전하게 되었다. 信濃國分寺31)와 같이 승사와 니사의 거리가 40m 정도로 인접한 것이 있는 반면, 山城國分寺32)처럼 1.8km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살필 수 있다. Ⅲ. 백제사지의 축조기법과 토목 건축기술의 일본 전파 여기에서는 그 동안 부여 및 익산지역에서 발굴조사된 백제사지를 대상으로 이의 가람배치 및 축조기법 등을 살 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백제사지의 토목 건축기술을 검토함에 있어 앞에서 살핀 일본사지도 함께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1. 가람배치 백제사지의 가람배치는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부여 능산리사지(그림 25)33), 왕흥사지, 금강사지, 정림사지(그림 26)34), 익산 제석사지(그림 27)35) 등에서 살펴지는 남북장축의 1탑1금당식이다. 특히 금강사 30) 나라시대 聖武天皇의 칙령으로 설치된 국립 사원을 의미한다(갘良國立博物館, 1980, 特別展 國分寺, 3쪽). 31) 長野縣 上田市 國分에 위치하고 있다. 32) 京都府 相갪郡 加茂町에 위치하고 있다. 33) 國立扶餘博物館 扶餘郡, 2000, 陵寺, 5쪽 도면 5. 34)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扶餘 定林寺址, 83쪽 도면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益山 帝釋寺址 -제 2차조사-, 9쪽 도면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79 지를 제외한 나머지 사지의 동서회랑 북단에서는 (세)장방형의 건물지가 조사된 바 있어 고대 일본사지와 차이를 보 이고 있다. 그러나 남북장축의 1탑1금당식은 일본 오사카의 사천왕사에서도 이미 조사된 바 있어 백제사지와의 친 연성을 엿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익산 미륵사지와 같은 3탑3금당식(그림 28)이다. 중원 가람을 사이에 두고 동원 및 서원 가람이 좌우에 배치된 다원식36) 가람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원 배치는 비조시대의 비조사나 회외사, 귤사, 백제대사 등에 서는 확인된 바 없고 법륭사 동원 서원 가람에서 살필 수 있다. 향후 다원식 가람배치를 매개로 한 백제와 일본과의 관련성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한편, 미륵사지의 동 중 서원 금당지 전면에서는 석등지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석등지는 부여지역의 군수리사 지나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금강사지, 정림사지, 부소산사지 등에서 전혀 확인된 바 없고 익산지역의 제석사지에서 도 마찬가지이다. 현재까지 가람배치가 밝혀진 백제사지 중 금당 전면에서 석등이 확인된 사례는 미륵사지가 거의 유일하다. 이렇게 볼 때 가람에서의 석등 출현은 백제사지에서 볼 경우 7세기 초반으로 생각되며 그 시초는 미륵사 라 판단된다37). 그런데 이러한 석등지가 일본의 산전사지에서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일본 최초의 사원으로 불리는 비조 사를 비롯해 사천왕사에서도 검출된 바 없다. 따라서 산전사의 석등은 가람배치와 더불어 미륵사의 영향으로 조성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석등을 포함한 산전사의 가람배치(그림 29)는 기본적으로 미륵사 중원가람(중문 - 목탑 석등 - 금당 - 강당, 그림 30)38)과 일맥 상통하고 있어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39). 그림 25. 능산리사지 가람배치 그림 26. 정림사지 가람배치 그림 27. 제석사지 가람배치 36) 다원식의 가람배치는 남조 양 武帝 때 창건된 종산의 愛敬寺에서 살필 수 있다. 이는 태조 문황제를 위해 건립되었으며 중원을 중심으 로 36원이 배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중원 이외의 36개 방원 모두에 탑이 배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굃裕群, 2009, 중국 가람배치의 변화 및 백제에 미친 영향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백제, 36쪽). 37) 이러한 석등 존재는 신라의 황룡사지에서도 확인된 바 없다. 38) 전라북도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1997, 미륵사지유물전시관, 123쪽 작도. 39) 조원창, 2006, 일본 산전사지에 나타난 백제의 건축문화 문화사학 26호.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79

80 그림 28. 미륵사지 가람배치 그림 29. 산전사 가람배치 그림 30. 미륵사 중원가람 배치 2. 백제사지의 건축기술 1) 다양한 기단건축 (1) 단층기단 ① 가구기단 : 왕흥사지 강당지 남면기단(그림 31)40), 금강사지 금당지, 미륵사지 강당지(그림 32) 등. 치석된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결구된 기단을 의미한다. 주로 당탑지 이중기단의 상층기단 및 금강사지 금당지에 서 확인되고 있으며 왕흥사지 강당지의 경우 정면인 남면기단에서 만 가구기단을 살필 수 있다. 그림 31. 왕흥사지 강당지 남면 가구기단(지대석) 그림 32. 미륵사지 강당지 가구기단 ② 와적기단 : 군수리사지 금당지(수직횡렬식 그림 3341), 합장식 그림 3442)) 강당지(평적식), 능산리사지 남회랑 지(수직횡렬식) 강당지(평적식), 왕흥사지 서회랑지, 정림사지 강당지(평적식 합장식, 그림 3543)) 회랑지(합장 식), 부소산사지 서회랑지(평적식) 등 백제사지에서 확인되는 와적기단 형식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평적식 이며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는 백제와 일본의 사지에 조성된 와적기단 중 축조기법에서 차이 40)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2, 王興寺址 Ⅳ, 357쪽 도판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扶餘軍守里寺址Ⅰ-木塔址 金堂址 發掘調査報告書, 179쪽 사진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扶餘軍守里寺址Ⅰ-木塔址 金堂址 發掘調査報告書, 176쪽 사진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扶餘 定林寺址, 348쪽 사진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81 그림 33. 군수리사지 금당지 북면 수직 횡렬식 와적기단 그림 34. 군수리사지 금당지 남면 합장 식 와적기단 그림 35. 정림사지 강당지 동면 평적식 와적기단 가 나는 것을 중심으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백제의 경우 평적식의 평면 와열은 1열 외에 정림사지 강당지에서와 같이 2~3열도 확인되고 있으나 일본은 대체로 1열 위주로 관찰되고 있다. 아울러 백제에서는 사원의 중심 건물인 금당44)이나 목탑지 외의 회랑지나 강당지 등에서 평적식의 와적기단을 살필 수 있으나 일본에서는 당탑지에서도 이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합장식의 경우도 군수리사지 금당지에서와 같이 와적 아래에 완형에 가까운 암키와를 깔아놓는 경우가 있으나 일 본에서는 이러한 기단형식이 최근까지 조사된 바 없다. 와적기단은 그 동안의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할 때 고구려에서는 아직까지 보고된 자료가 없고 신라의 경우는 천 관사지 및 전 인용사지 등에서 합장식의 아류작으로 보이는 사적식이 출토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삼국시대에 조성 된 거의 대부분의 와적기단은 백제사지를 비롯한 기와건물지에서 만 주로 볼 수 있다. 이는 와적기단의 축조가 백제 에서 비롯되었음을 판단케 하는 동시에 일본에까지 그 기술이 전파되었음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와적 기단이 비단 사지뿐만 아니라 관아건물에까지 조성되었음을 볼 때 기단의 혁신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고 이의 주체 가 백제의 장인들이었음도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이렇게 볼 때 백제의 와적기단은 독창성뿐만 아니라 신라 및 일본에까지 그 기술이 전파된 국제성을 내포한 기단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③ 전적기단 : 군수리사지 목탑지(수직횡렬식, 그림 3645)), 관음사지 건물지(수직횡렬식), 오합(함)사지 강당지 (평적식, 그림 3746)) 등 일본 비조시대 사지 중 전을 이용하여 축조한 기단은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다. 그림 36. 군수리사지 목탑지 전적기단 그림 37. 오합(함)사지 강당지 전적기단 44) 군수리사지 금당지의 경우 수직횡렬식 및 평적식의 와적기단으로 조성되었다. 45)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0, 扶餘軍守里寺址Ⅰ-木塔址 金堂址 發掘調査報告書, 189쪽 사진 ) 保걒市 忠南大學校博物館, 1998, 聖住寺, 원색사진 13.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81

82 ④ 할석기단 : 왕흥사지 금당지 강당지, 능산리사지 회랑지 등 할석난층으로 조성되었다. (2) 이중기단 백제사지에서의 이중기단은 주로 금당지 및 탑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를 표로 살피면 아래와 같다. 구 분 상층기단 하층기단 금당지 수직횡렬식 합장식(남면), 수직횡렬식 목탑지? 전적기단 금당지 가구기단 치석기단 목탑지 가구기단 치석기단 왕흥사지 목탑지 할석기단(?) 치석기단 금강사지 목탑지 가구기단 가구기단 금당지 가구기단 면석+갑석 목탑지 가구기단 면석+갑석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 미륵사지 비고 이중에서 미륵사지 금당지 및 탑지(그림 38)47) 등에서 확인되는 상 하층의 기단 형식 은 법륭사 서원가람의 금당지(그림 39) 및 목 탑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부 부재에서 약간의 차이는 발견할 수 있으나 치석된 면석 이나 갑석, 지대석 등을 이용하여 가구기단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친연성을 살필 수 있다. 그림 38. 동원 금당지 기단 복원도 그림 39. 법륭사 금당 기단 아울러 미륵사지 금당지 및 강당지의 지대 석 중 모서리에서 확인된 우석 상면에는 우주를 올리기 위한 홈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 산전사 금당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목탑 심초석의 위치 변화 6세기 중 후반에 해당되는 백제 목탑지의 경우 대부분 심초석이 지하에 시설되어 있다. 즉, 부여 군수리사지 및 능산리사지(그림 40)48), 금강사지 등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러나 577년경의 왕흥사지에 있어서는 심초석과 공양석 이 지상과 지하로 분리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7세기 이르면 익산 제석사지(그림 41) 및 미륵사지 중원 목탑지에 서와 같이 심초석은 지상에 시설되게 된다. 이와 같은 백제 목탑지 심초석(공양석)의 시기적 위치변화는 일본에서도 큰 차이없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왕흥사 지에서와 같은 심초석과 공양석의 분리 등은 아직까지 찾아볼 순 없지만 지하에서 지상으로 변천해 감은 확연히 살 필 수 있다. 47)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9, 彌겇寺, 揷圖 1. 48) 國立扶餘博物館 扶餘郡, 2000, 陵寺, 243쪽 도판 33-③. 82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83 그림 40. 능산리사지 목탑지 심초석 그림 41. 제석사지 목탑지 심초석 3) 당탑지의 축기부 조성 백제사지의 일부 당탑지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축기부를 굴광하거나 정지하고 그 위 에 건축물을 조영한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는 그 내부를 판축 혹은 성토다짐하고 있으며, 후자에서 는 일본에서와 같이 정지 후 판축기단토로 축토하 고 있다. 축기부를 굴광하고 그 내부를 판축한 사례는 목탑 지에서 확연하게 살필 수 있는데 용정리사지, 능산 리사지, 왕흥사지, 금강사지,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 을 들 수 있다. 특히 미륵사지 중원 목탑지(그림 그림 42. 미륵사지 중원 목탑 지 축기부 그림 43. 백제대사(길비지사 지) 금당지 축기부 42)49)의 경우 축기부의 최하단에 할석축기를 하고 그 위로 판축토를 축토하였다. 축기부의 범위는 이중기단의 경우 하층기단을 포함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왕흥사지 목탑지에서의 경우는 상층기단의 규모로 축기부가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굴광 축기부 시설은 백제의 토목건축기술이 간취되는 일본 산전사 목탑지와 금당지, 백제대사(길비지사 지) 금당지(그림 43)50) 등에서 찾아볼 수 있어 백제의 건축기술과 무관치 않음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축기부를 정지하고 판축기단토를 조성한 사례는 제석사지 금당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일본의 경우는 회외 사지 금당지, 길비지사지 목탑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4) 적심토의 유행 적심토는 적심석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며 초석 아래에 조성되었다. 사지뿐만 아니라 부여 관북리유적(그림 44)51), 화지산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등 사비기 대부분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평면 형태는 원형을 비롯한 (장)방형, 부정형 49)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한 중 일 고대사지 비교연구<1>-목탑지편-, 59쪽 사진 1. 50) 갘良文化財硏究所, 2003, 吉備池廢寺發掘調査報告-百濟大寺跡の調査-, PL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 扶餘 官겗里百濟遺蹟 發掘報告Ⅲ, 149쪽 도면 47.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83

84 등이 있다. 적심공 내부는 판축토(그림 45)52)나 성토다짐토 등으로 축토되었다. 단면 1단과 2단으로 조성되었으나 전 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일본에서의 경우 유구 상부의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이러한 적심토의 형태가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백제 에서 유행하였던 다양한 건축기법 등이 활용되었음을 볼 때 적심토의 사용도 능히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림 44. 부여 관북리 대형 건물지 적심토 그림 45. 능산리사지 금당지 판축 적심토 3. 우수한 목탑기술의 대외 전파 자장의 건의로 축조케 된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 선덕여왕의 대 역사 중 하나였다. 목탑의 높이가 225척으로 당시 신라에는 이러한 거탑을 조성키 위한 조탑공이 존재하지 않아 어전회의 끝에 백제 의 阿非知가 탑의 축조를 맡게 되었다53). 당시 백제 의자왕의 대야 성 함락(642년)이라는 정치적 관계를 고려해 볼 때 파격적인 결정 이 아닌가 싶다. 이는 그 만큼 백제의 건탑기술이 신라 나아가 고구 려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월등하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 건이라 할 수 있다. 9층목탑은 신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백제대사에도 창건되었다. 일본측의 자료에 따르면, 이 목탑은 황룡사 9층목탑보다 조금 작고 미륵사의 중원 목탑 보다는 조금 큰 것으로 추정되었다(그림 46)54). 舒明天皇 11년(639년) 즈음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황룡사 9층목 탑과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 일본에 그림 46. 백제대사 미륵사 황룡사 목탑의 비교 거형의 목탑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전제할 때 이의 기술력 또한 백제와 무관치 않음을 판단해 볼 수 있다. 이는 사찰 명에서 볼 수 있는 백제 라는 이름, 그리고 금당지에서 관찰되는 축기부 굴광 판축공법, 3m가 넘는 목탑지의 판축 토 등을 통해 백제의 토목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52) 國立扶餘博物館 扶餘郡, 2000, 陵寺, 222쪽 도판 12-②. 53) 삼국유사 권 제3 탑과 불상 제 4 황룡사구층탑. 9층목탑은 선덕왕 12년(643)에 착공되어 14년(645)에 완공되었다. 54) 朝日新聞社, 2002, 갘良文化財硏究所創立50周年記念 飛鳥 藤原京展, 55쪽. 84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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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강화를 위해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3). 한성시기의 불교와 관련된 유물은 연화문을 모티프로 하는 금속기나 자기, 와 당 정도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웅진시기 초기에 활동하던 發正의 사례를 보면 한성시기 말기나 웅진시기 초 기 백제의 불교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수면문와당이나 연화문와당은 백제에서 낙랑 이나 고구려 이외에도 중국 남북조의 여러 국가와 폭넓게 교류하고, 그것을 통해 불교문화를 수입했을 가능성을 유 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웅진시기가 되면 武걒王겓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 속에서 남조 불교의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王妃의 頭枕 표면에 묘사된 그림 1의 도상은 南朝系 天人誕生圖에 해당하기 때문에4) 무령왕릉이 축조 단계에 는 남조에서 창안된 불교 도상들이 직접적으로 백제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령왕릉을 완성시킨 장본인인 성왕에 의해 건립된 大通寺는 백제의 본격적인 불교사원이라 할 수 있지만 그와 관련된 유구가 전혀 발견 되지 않았다. 따라서 출토 와당을 중심으로 그 기술적인 계통에 대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출토된 와당들은 중국 남경 지역에서 발견된 특징적인 기와 제작기술이 확인되고, 송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겳官瓦爲師矣 銘 塼을 통해 南朝 겳의 영향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공주 大通寺址의 창건기 기와는 대통사식와당 으로 부를 수 있는데5), 이 와당들은 素瓣곝花文으로 중방이 연판 보다 낮고 1+6과의 연자가 배치되었다. 연판 끝이 반전하면서 돌기 형태로 되어 있다(그림 2). 와당 뒷면을 회전 물 손질하여 성형하였고, 와당부와 수키와부를 결합시킬 때 와당 뒷면의 일부와 수키와 선단부의 일부를 비스듬하게 잘라낸 다음 접합시켰다. 대통사지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연화문와당이 가장 많이 확인되었으며, 공주시 中洞, 班竹 洞 등 대통사지 주변 지역과 부여 구아리사지, 동남리유적에서도 동범품이 발견되었다. 또 공주 정지산유적, 부여 부소산성, 동남리유적, 금덕리요지, 능산리사지, 군수리사지, 관북리유적, 금성산와적기단건물지, 가탑리사지 등지 에서 동범 동계품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대통사식와당은 연판 문양이나 제작기법 등 와당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諸속성들이 南朝의 와당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남조계 造瓦 집단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 그림 1. 공주 무령왕릉 출토 왕비 두침의 실측그림 그림 2. 공주 대통사지 출토 와당 3) 趙景徹, 2006, 百濟佛敎史의 展開와 政治變動 韓國學中央硏究院 博士學位論文. 4) 吉村怜, 1977, 百濟武걒王妃木枕に畵かれた佛敎圖像について 美術史硏究 14 ; 1983, 中國佛敎圖像の硏究, 東方書店. 姜友邦, 2011, 武걒王妃頭枕과 足座의 괈氣化生의 造形解釋과 圖像解釋 武걒王겓을 格物하다-武걒王겓發掘40週年記念特別展,國 立公州博物館. 5) 朴容塡, 1978, 백제 와당의 체계적 분류 百濟文化 9. 淸水昭博, 2004, 百濟 大通寺式 軒丸瓦の成立と展開 日本考古學 17 : 2012 古代日韓造瓦技術の交流史, 淸文堂에 再收걧. 6) 겗朝와 대조되는 南朝 와당의 특징으로는 와당 굎面의 회전 물손질 조정, 수키와 접합시에 와당 이면에 새김 자국이 없는 것, 와당의 주 연이 높은 것, 연화문이 평판적이며 外區 內緣에 珠文이 없는 것 등이 지적되고 있다(佐川正敏, 2011 南겗朝時代から明時代まで造瓦技 術の變遷と變革 古代 합병호). 88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89 며6), 그러한 기와를 얹어 완성된 건물에도 남조계의 사원 조영기술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사식와당은 사비 천도 이후 부여 지역의 왕궁이나 관청, 사원 등의 가장 중심적인 와당으로 사용되는 등 주류 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신라나 일본 최초의 사원인 興輪寺址와 飛鳥寺의 창건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7). 흥륜사지로 비정되는 경주공업고등학교에서 출토된 기와들을 살펴보면 연판의 문양과 이면의 회전물손질 흔 적, 와당과 수키와의 접합 기법 등 연판과 제작기술이 모두 대통사지의 그것과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3). 또 함께 출토된 암키와의 경우에도 백제 특유의 통쪽와당을 사용하여 제작되었고, 수키와의 경우도 유단식수키와의 미 구 부분을 별도로 제작하여 덧붙인 다음 회전물손질하여 마무리하고 있다(그림 4). 이러한 암키와와 수키와의 제작 기술은 남조에서도 확인되지만, 공주 정지산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흥륜사지의 기와는 남조에서 연원한 것 이지만 백제를 경유하여 신라에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8). 특히 대통사식와당의 연판형이 남조에는 없는 백제적인 연판형이고,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연판의 문양이 남조가 아닌 백제의 연판 문양과 동일한 것을 보면, 흥륜사지의 경 우 남조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 보다는 남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백제 조와술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최초의 사원으로 백제계 기술 공인들에 의해 완성된 飛鳥寺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飛鳥寺의 창건와들은 문양과 제작기법, 암키와 수키와의 조합에서 크게 花組와 星組라는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그림 5)9). 최근 왕흥 사지에서는 이러한 두 그룹과 대응되는 와당의 조합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 星組 그룹은 대통사식 와당에서 확인되 는 연판 문양과 회전물손질 흔적, 선단을 2회 조정한 수키와를 부착하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대통사식 와당을 제 그림 3. 경주공고(전 흥륜사지) 출토 와당 그림 4. 경주공고(전 흥륜사지) 출토 암키와와 수키와 그림 5. 부여 왕흥사지(1 2)와 飛鳥寺 창건와(3 4)의 조합 관계 7) 부여 정림사지의 창건와는 남조계 연판 문양에 뒷면의 회전 물손질 흔적, 와당과 연결된 수키와 선단부의 2회 조정 등에서 대통사식 와 당과 同樣이다. 겳 南平王 蕭偉墓闕와 南京 鍾山 2호 사원 유적 출토품과 가장 유사하지만 그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정림사지의 창건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8) 이병호, 2013, 경주 출토 백제계 기와 제작기술의 도입과정 韓國古代史硏究 69. 9) 花谷浩, 2000, 飛鳥寺 豊浦寺の創建瓦 古代瓦硏究 Ⅰ, 갘良文化財硏究所.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89

90 작하던 공인들이 이주하여 기술을 전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飛鳥寺의 암키와 내면에 보이는 소위 補足痕(그림 6)은 백제에서 파견한 瓦博士들이 현지의 토기를 제작하던 공 인을 동원하여 그러한 기술을 전수한 구체적인 흔적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경주 흥륜사지의 경우에도 그와 동일한 암키와편(그림 4의 413번 암키와)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공주 대통사지를 건립하면서 창안된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 은 신라나 일본의 조와술을 성립시키는 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것이 비록 남조에서 연원한 것이지만 백 제적인 조와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백제의 매우 주체적인 행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기와라는 것이 사원 을 건립하는 중요한 건축부재라는 점에서 볼 때 그러한 영향이 단순한 기와 제작기술의 전파에 한정되지 않고, 사원 조영 기술 전반이나 사상적인 측면에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백제는 흥륜사나 飛鳥寺의 조영에 자 국의 기술자 집단을 파견함으로써 주변국가에 관한 외교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거나 강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6세기대 기와에 보이는 이러한 교류의 흔적은 7세기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도 계속해서 확인된다. 특히 미 륵사지에서 출토된 그림 7의 녹유서까래기와의 경우 기와의 표면에 녹유를 입힌 점이나 枷型의 사용 흔적이 남아 있 는 것이 주목된다. 녹유기와의 경우 경주의 월성이나 안압지, 사천왕사지 등지에서도 출토되고, 일본의 平安宮 유적 에서도 확인된다10). 枷型은 기와를 성형할 때 바깥쪽에 틀을 별도로 만들어 기와 테두리를 장식한 것으로, 7세기 후 반 이후 신라나 일본의 고대사원 유적에서 종종 발견되고 있다11). 익산 미륵사지의 경우 이러한 서까래기와 이외에 도 기존 보고서에서 G-1, G-2로 분류된 연화문수막새의 경우에도 무문의 木製枷型 흔적이 명확하게 관찰되고 있다 12). 이러한 익산 미륵사지 창건와들은 일본 河內의 소위 善正寺式瓦當과 문양 속성이 유사하기 때문에 백제 멸망 이 후 遺民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13). 그런 점에서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은 백제 멸망 이후에도 신라나 일 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부여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塑造像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들은 대부분 서회랑 지와 남회랑지가 만나는 남서쪽 귀퉁이의 대형구덩이에서 적색의 燒土, 기와편들과 함께 출토되었고, 일부 금당지 부근에서 발견되었다14). 이곳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은 고운 태토를 이용하였고, 대부분 頭部와 身體를 별도로 제작하여 접합한 頭體別製式으로 만들었다. 소형소상이나 정경소상들은 목질의 심목을 사용 그림 6. 飛鳥寺 출토 암키와의 補足痕 그림 7. 익산 미륵사지 출토 녹유서까래기와 10) 일본에서 가장 빠른 단계에 속하는 녹유제품은 塚廻古墳 출토의 綠釉棺台, 藤原京 출토의 綠釉硯, 飛鳥池 출토의 綠釉壺, 川原寺 굎山 遺跡 출토의 綠釉塼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녹유제품들은 소위 白鳳綠釉 로 불리는데, 그러한 기술 유입의 계기에 대해서 白村江 전투 이후 일본에 건너간 百濟遺民의 영향으로 파악되고 있다. 高橋照彦, 2002 日本古代における三彩 綠釉陶の곎史的特質 國立곎史民 俗博物館硏究報告 ) 毛利光俊彦, 1990, 軒丸瓦の製作技術に關する一考察-땲型と枷型 畿內と東國の瓦, 京都國立博物館. 12) 花谷浩, 2000, 飛鳥の瓦と百濟の瓦 古代東アジアの造瓦技術, 갘良文化財硏究所. 13) 上田睦, 1997, いわゆる善正寺式軒瓦について 攝河泉古代寺院論纂, 攝河川古代寺院硏究會. 14) 굃炳鎬, 2005, 扶餘 定林寺址 出土 塑像의 製作技法과 奉安場所 美術資料 72 73合集. 90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91 한 흔적이 남아 있지만, 중형소상들은 갈대나 볏짚 또는 새끼를 감싼 각목을 골조로 하여 점토를 덧붙이는 방식 을 취하였다. 소조상의 대부분은 黑色이나 白色, 紫色 등 칠흔이 남아 있고, 일부 佛頭 중에는 황갈색의 釉藥 이 시유된 것을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그림 8). 소조 상의 성형 방식은 대형이나 중형소상들은 手捏法을 사 용하지만 소형 정경소상들은 땲型을 활용하였다. 땲 型을 이용한 성형은 정면과 배면을 전후로 접합시킨 合 模製는 보이지 않고, 片面의 땲型을 이용한 單模製가 주 류를 이룬다. 이러한 소조상의 제작지는 경도가 약해서 파손되기 쉬운 재료적인 특성이나 瓦陶兼業窯인 청양 왕진리요 지나 본의리요지에서 소조상편과 소조대좌편이 출토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사비도성 인근의 가마에서 제작되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소조상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양식의 소개는 외부로부터 그것을 전문적으로 제작할 그림 8. 부여 정림사지 출토 각종 소조상 수 있는 기술자 집단의 이주를 상정하는 것이 적절하며, 기술적으로는 瓦工과 같은 현지의 공인들을 동원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림사지 소조상들은 창건기 목탑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겗魏 洛陽 永寧寺나 日本 法괾寺 五重塔 初層 의 塔本塑像 사례를 비롯하여 사비시기 목탑 관련 유적에서 소조상편들이 공반되는 점이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15). 그 제작시기는 강당지 주변에서 수습된 곝花文靑瓷壺의 동체편이 南京 對文山南朝墓 출토 靑瓷곝花文壺나 공주 무 령왕릉 출토 靑瓷괯耳壺와 유사한 점, 籠冠을 쓴 두상을 비롯한 정경소상의 경우 겗魏末에서 東魏初에 해당하는 陶 俑과 유사한 점16) 등에서 사비 천도를 전후한 시점으로 생각되며, 이때 三國史記 성왕 19년(541)조의 다음 기록이 주목된다. 사료 1 : 十九年 王遣使入中겳朝貢 兼表請毛詩博士 涅槃等經義 幷工匠켫師等 從之 三國史記 ( 卷26 百濟 聖王十九年條) 이 기록은 周書, 南史 등에도 나오는데, 541년에 양 무제가 백제의 요청에 의해 열반경 등의 주석서와 유교전 문가인 모시박사, 공장 화사 등의 기술 공인을 파견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성왕은 사비 천도 이후 도성을 정비 하면서 국가적인 상징물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전문기술자를 양 무제에게 요청하였고, 불교 경전과 모시박사, 공 장 화사 등은 이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기술자문, 기술전수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양에서 건너온 공 장 화사의 활동 결과가 정림사지의 건립으로 나타났고, 특히 목탑의 건립과 탑내소상의 제작은 이들의 직접적인 관여와 기술 지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양 무제가 보낸 인물들은 백제에서 일본에 파견한 諸博士와 같이 15) 겳銀景, 2007, 괞寧겛 朝陽 겗塔 出土 塑造像 硏究 美術史學硏究 256. 向井佑介, 2011, 겗魏平城時代の佛敎寺院と塑像 佛敎藝術 316. 굃炳鎬, 2010, 百濟泗뚓期塑像の展開過程 갘良美術硏究 10, 早稻田大學갘良美術硏究所. 16) 朴淳發, 2008, 百濟 籠冠俑硏究 百濟硏究 48.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91

92 고도의 전문기술자나 지식인과 같은 것이었다. 양나라의 수도였던 南京의 鐘山 2호 사지에서도 소조상편이 출토되었는데 片面땲을 이용한 頭體別製式의 제작 방식, 채색 흔적과 색채, 일부 두상에 황갈색의 유약이 사용된 점 등 제작기법이 정림사지 소조상과 일치하고 있다 (그림 9-1)17). 또 新街區 紅土橋(傳 延興寺) 출토 소조상에서도 유약의 흔적이 관찰되는데(그림 9-2)18), 이처럼 소조상 의 제작에 유약이 확인되는 것은 그것을 소성했다는 반증이다. 지금까지 북조 계통의 소조상들은 소성하지 않은 것 이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南京 출토 소조상의 사례는 부여 정림사지 소조상의 제작에 남조 계 기술 공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도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정림사지에 대한 최근의 재조사에서는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인물과 좌우에서 그것을 侍衛하는 인물상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그림 10). 이러한 인물상의 자세와 복식은 겳職貢圖 에 묘사된 인물 가운데 맨 앞쪽에 등장하는 魯國 의 사신과 매우 유사하다(그림 11)19). 그림 10을 통해 정림사지의 소조상 중에는 무사상이 나 시위상, 승려상이나 문인상 이외에도 훨씬 격이 높은 인물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 림 12와 같이 괋佛圖나 궋列圖 장면의 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직공도의 제작 시기가 540년 또는 520~540년대 에 걸쳐 단계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참고하면20), 541년 양나라 기술자의 파견을 계기로 이러한 도상의 소조상들이 제작되었음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그림 9. 중국 南京 출토 각종 소조상 그림 10. 부여 정림사지 출토 인물상편 그림 11. 겳職貢圖의 魯國 사신 부분 그림 12. 중국 鞏顯石窟 제1굴 前壁의 皇帝 괋佛圖 부분 17) 賀云, 2007, 南京鍾山二號寺遺址出土南朝瓦當及與南朝定林寺關係硏究 考古與文物 期. 18) 王志高 王光明, 2010, 南京紅土橋出土的南朝泥塑像及相關問題硏討 東南文化 期. 19) 굃炳鎬, 2012, 扶餘 定林寺址よりみた百濟聖王代の佛敎と王權 佛敎文明の受容と君主權の構築, 勉誠出版. 20) 金鍾完, 2001, 겳職貢圖의 성립 배경 魏晉隋唐史硏究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93 한편 정림사지 소조상 중에는 捧寶珠菩薩像片이 섞여 있다(그림 13-1). 捧寶珠菩薩像은 남조 겳과 백제 사비시기, 일본의 飛鳥時期에 유행한 불교 조상의 한 양식으로 觀音菩薩일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시되었고21), 최근에는 봉보주 보살상이 원래는 舍利供養 도상을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22). 봉보주보살상의 持物이 舍利와 관 련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림사지 목탑의 한쪽 면에 봉보주보살상과 관련된 어떤 도상이 표현되었을 가능 성이 있고, 그림 13-2의 蠟石製三尊佛片에도 봉보주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림사지의 소조상은 남조의 불교 조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정림사지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法괾 寺 五重塔과 유사한 형태로 초층 탑신을 장식하던 것으로 그 중 한쪽 벽면에는 四川겛 成都 지역에서 발견된 남조 계 통의 불교조상들과 유사한 장면들이 입체적으로 시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백제 지역에서는 정림사지 이외에도 능산리사지, 구아리사지, 금강사지, 제석사지, 미륵사지 등의 사원지와 청양 왕진리 가마터와 본의리 가마터에서도 소조상편이 발견되었다. 그중 제석사지 폐기장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639년 소실되었다는 觀世音應驗記 의 기록을 증명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23). 미륵사지의 경우 보살상의 塼佛과 함 께 채색이 가미된 소조상의 파편과 다량의 나발이 출토되었다24). 6세기 중엽에 시작된 백제의 소조상들은 점차 다양 화되고, 대형화되는 과정을 거쳤고, 그 후 신라나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소조상편이나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전불편, 능지탑 출토 소조상편이 있고, 일 본의 경우 川原寺 굎山遺蹟 출토 소조상을 시작으로 近江의 南滋賀廢寺, 蒲生郡의 宮井廢寺 출토 소조상들이 있다. 이러한 소조상들은 백제의 제석사지에서 발견된 소조상들과 제작기법이 매우 유사하다25). 특히 川原寺굎山遺跡 출토 품의 경우 폐기 양상뿐 아니라 제작기법이 익산 제석사지 폐기장과 매우 유사하고, 소조상과 함께 발견된 녹유전의 경우도 백제 유민들에 의한 기술의 전파 가능성이 상정된다. 이처럼 남조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백제의 소조상 제작 은 백제 자체의 기술적인 변형과 발전을 거쳐 멸망 이후에까지 지속적으로 주변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3. 부여 정림사지 출토 소조봉보주보살상편과 납석제삼존불편 21) 갏理那, 1989, 三國時代의 捧持寶珠形菩薩굤像 硏究 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 갏理那, 1990, 寶珠捧持形菩薩の系譜 法괾寺から藥師寺へ. 22) 大西修也, 2002, 寶珠捧持形菩薩の成立過程について 日韓古代彫刻史걩, 中國書店. 굯侖貞, 2004, 三國時代 菩薩像에 대한 一考察 : 持物을 중심으로 佛敎美術史學 2. 23) 겳銀景, 2010, 百濟 帝釋寺址 出土 塑造像의 分析과 木塔址를 통한 奉安原形推定 湖西考古學 ) 崔聖銀, 2010, 동아시아 佛敎彫刻을 통해 본 百濟彌겇寺의 佛像 百濟文化 ) 崔聖銀, 2012, 百濟塑像の樣相とその傳播-新갥と白鳳の塑像と關聯して 飛鳥 川原寺굎山遺跡と東アジア-資料集, 關西大學文學 部考古學硏究室.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93

94 Ⅲ. 발굴 유적과 유구에 관한 검토 : 가람배치와 사리안치 방식 정림사지는 부여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하는 매우 중요한 사원이다. 앞서 소조상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이곳에는 원래 목탑이 있었고, 그것을 대신하여 현재의 5층 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소조상 들은 창건기 목탑에 안치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사료1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이 사원의 건립 시기는 사비 천 도 전후, 특히 541년 양나라의 기술자들의 기술적인 지원을 받아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최근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의 재조사에서는 사원을 건립할 때 매립한 토층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고지자기 분석 결과 6세기 말이나 7세기 전반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26). 어느 쪽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정림사지를 건 립하면서 성립된 가람배치나 건물지의 유구는 현재까지 자료가 전무한 남조의 불교사원의 형태를 추정하고, 그 영 향관계를 검토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한 백제 사원의 가람배치에 보이는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그림 14)27). 이러한 양식 의 가람배치는 남문이 없는 상태에서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이를 회랑이 감싸는 형식을 말 한다. 강당과 회랑의 연결방식은 회랑 북단의 부속건물이나 강당 동서쪽의 별도건물로 연결되는 형식이다. 회랑 북 단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속건물은 금당보다는 격이 낮은 건물로 僧房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寢食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인 강당 북쪽의 승방보다는 좀 더 公的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東堂 西 堂 과 같은 용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밖에 동서회랑과 남회랑은 L자형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고 단절되었으며, 남회랑은 동서회랑 보다 좀 더 길게 돌출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림 14. 부여 정림사지의 가람배치(1. 藤澤一夫, 2. 윤무병, 3. 부여연구소, 4. 필자안) 그림 15. 백제 사비시기 주요 사원의 가람배치도 26)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2011, 扶餘 定林寺址 發掘調査報告書. 金洛中, 2011, 百濟 泗뚓期 寺刹의 伽걄配置와 造營의 特徵 韓國上古史學報 74. 鄭子英, 2012, 扶餘 定林寺址 伽걄配置와 編年的 檢討 韓國上古史學報 76. 金洛中, 2012, 百濟 定林寺의 創建곐代 文化財 ) 굃炳鎬, 2011, 百濟 定林寺式伽걄配置의 展開와 日本의 初期寺院 百濟硏究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95 이러한 특징을 가진 가람배치는 군수리사지나 왕흥사지가 건립되는 6세기 중후반 단계가 되면 외곽에 또 다른 건 물이 증축되는 변화가 나타나는데, 신라 皇龍寺址 重建伽걄이나 일본 飛鳥寺 三金堂과 같은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 에서 성립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28). 6세기말 이후에는 부속건물이나 별도건물, 강당과 같은 시설들이 생략되는 사 례가 증가하고 있다(그림 15). 한편 미륵사지의 경우 기존의 동당과 서당이 강당지 남쪽의 동 서 승방지로 변형되 고, 강당 동서쪽의 별도건물이 사라지고 있다. 특히 미륵사지의 伽걄配置는 塔과 갏堂이 동등하게 배열된 三院이 아 니라 木塔과 中갏堂, 그 북쪽의 講堂과 東西僧房이 하나의 완결된 사찰 배치를 구성하고, 東西로 다시 塔과 갏堂을 追加(또는 擴張)로 配置한 다음 東西回걉으로 전체 사역을 감싸면서 경계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29). 그 중 東西 僧房址는 1동 2실 형식의 단위 공간을 병렬시켜 구성한 것으로 기존의 소위 정림사식가람배치와 연속성을 가진다. 따라서 미륵사지의 三院竝곢式伽걄配置는 중국의 隋唐代에 유행하는 大型院갳式 사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백제 적인 사원형을 바탕으로 하여 변형된 독자적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림사지가 건립되면서 성립된 백제사원의 가람배치는 일본의 초기 고대사원에 관한 연구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중 백제사원과 가장 유사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大阪 四天王寺의 경우 강당 동서쪽에 별도건물과 같은 시 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그림 16), 또 후술하는 것처럼 夏堂과 冬堂으로 이루어진 강당의 경우도 백제사원의 소 위 1棟 2室建物址와 유사한 점이 있다. 또한 新堂廢寺와 龜石古墳의 관계는 고분과 사원이 결합된 좋은 사례로서 능 산리사지와 능산리고분군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그림 17)30). 그리고 新堂廢寺에서는 동서 회랑의 북쪽에서 東 方建物 西方建物이라는 특징적인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이 건물은 정림사지를 비롯한 백제사원의 회랑지 북단 의 부속건물지에 해당한다. 이처럼 백제의 절터에서 새롭게 조사된 건물 유구들은 백제뿐 아니라 일본의 초기 사원 을 연구하고 기존의 견해를 재검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정림사지에서 확인되는 가람배치가 일본의 초기 고대사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림 16. 일본 四天王寺의 가람배치그림과 관련 유구도 그림 17. 일본 新堂廢寺의 가람배치와 주변 유적 28) 굃炳鎬, 2013, 百濟寺院과 飛鳥寺 三갏堂의 源流 百濟硏究 ) 國立文化財硏究所 益山市, 2010, 彌겇寺의 寺刹配置 彌겇寺겖原考證基礎調査硏究報告書2 (彌겇寺겖原硏究學術資料叢書Ⅲ). 30) 新堂廢寺는 그 북쪽에 오간지이케 瓦窯가 위치하고 있는데 오간지(オガンジ) 라는 지명은 보령 성주사지의 전신인 烏含寺와 音相似하 다. 따라서 이 사원은 일찍부터 백제의 영향을 받은 도래계 씨족과 관련된 사원으로 추정되어 왔다(藤澤一夫, 1961, 新堂廢寺の性格 河內 新堂烏含寺の調査 ).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95

96 정림사지에서 확인되는 가람배치는 소조상이나 제와술이 남조 의 그것과 유사한 점에서 남조의 불교사원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 다. 그렇다고 백제사원의 모든 것이 남조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二重基壇 건물지의 상층기단과 하층기단 사이에 발견되는 소위 下成礎石이나 강당지 좌우측의 별도건물지의 경우 남조가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으로 성립되었 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중기단의 경우 5~7세기 사원의 금당이나 목탑에 주로 이용 되는 기단형식으로 초기의 이중기단에는 상층기단과 하층기단 의 사이에 초석(이하 下成礎石이라 부름)이 있는 사례들이 발견 되어 주목된다(그림 18)31). 이러한 하성초석은 고구려의 청암리사 그림 18. 이중기단과 하성초석(1. 청암리사지, 2. 군수리사지, 3. 황룡사지, 4. 飛鳥寺) 지 팔각건물지(추정 목탑)를 필두로 백제의 정림사지 금당지, 신 라의 황룡사지 금당지, 사천왕사지 금당지, 飛鳥寺 동 서 금당 지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백제에서는 군수리사지 금당지나 금성 산건물지, 부소산폐사지 등에서도 하성초석이 확인되었다. 그런 데 백제사원에서 발견되는 하성초석의 경우 시기적으로 약간 빠 른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飛鳥 寺 동 서 금당지의 경우도 고구려로부터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 라 백제를 통해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32). 강당지 좌우측의 別途建物址도 마찬가지이다. 이 건물지는 능 산리사지의 경우 비대칭적인 형태를 띠다가 군수리사지나 왕흥 사지 단계가 되면 대칭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건물지 중 가장 빠른 단계의 것이 고구려 청암리사지에서 확인되고 있다(그 림 19) 목탑으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와 금당지 북쪽에서 확인된 건물지군은 백제나 신라 사원의 가람배치를 참고할 때 강당지와 그 동 서쪽의 별도건물지 및 북쪽의 승방지였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사원의 강당지들은 매우 이른 단계 부터 그 좌우측에 별도건물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특 그림 19. 평양 청암리사지의 가람배치도 징은 백제나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33). 소위 1동2실 건물지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그림 20). 이 건물지는 능산리사지 강당지를 비롯하여 익산 왕궁리유 적, 미륵사지 강당지와 승방지, 경주 황룡사지 창건가람의 강당지 하부유구, 경주 감은사지 공방지 등지에서 발견되 31) 趙源昌, 2002, 百濟 二重基壇 築造術의 日本 飛鳥寺 傳播 百濟硏究 35. 淸水重敦 山下秀樹, 2009, 古代寺院建築における特굋な基壇 平面とその構造 갘良文化財硏究所紀要2008. 裵秉宣, 2008, 扶餘地域 百濟建物址의 構造 定林寺-역사문화적 가치와 연구현황, 國立文化財硏究所. 32) 淺野淸, 1958, 飛鳥寺の建築 佛敎藝術 ) 백제의 강당 좌우 건물지는 승방과 같은 것이지만, 신라의 경우는 예배 공간으로 약간 차이가 있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한나 래, 2012, 신라 사찰 강당 좌우 건물지의 유형과 성격-백제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探究 12). 96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97 그림 20. 소위 1동 2실 건물지의 모습 그림 21. 중국 東魏겗齊 쨈南城 趙彭城廢寺址 목탑의 반지하 식심초 고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곳은 집안 東台子遺蹟 제1건물지이다. 東台子遺蹟 제1건물지는 그림 20-1과 같이 평면 형태와 규모, 내부에 시설된 온돌 구조 및 서실 중앙부에 배치된 臺石, 벽체 구조 등이 능산리사지 강당지 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백제의 1동 2실 건물지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파악할 여지가 있다. 다만, 1동 2실 건물에 대해 이 건물은 기둥과 보를 결구한 일반적인 건축 결구와 달리 보를 사용하지 않고 기둥이 직접 도 리를 받치는 소위 穿斗式 구조로서 중국의 남방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기 때문에 남조의 영향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34). 남조의 불교사원이나 고구려의 불교사원에 관한 발굴조사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백제사원에서 발 견되는 특정 유구들이 어디에서 연원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상술한 이중기단과 하성초석, 강당지 양 쪽의 별도건물지의 존재는 백제의 사원들이 남조나 고구려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증거라는 점에는 의심이 없다. 한편, 소위 1동 2실 건물의 성격에 대해 일본의 사례를 통해 그 기능을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가 확인되기도 한다. 백제 사원의 가람배치와 가장 유사한 大阪 四天王寺의 경우 비록 平安時代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四天王寺御手印 緣起 (1007년)에 이곳의 강당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곳 강당은 8칸인데 서쪽 네 칸은 夏堂, 동 쪽 네 칸은 冬堂으로 부르면서 각기 다른 불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35). 이러한 夏堂과 冬堂의 내부구조가 어떠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능산리사지 강당지의 경우 西室에 온돌이 설치되고 東室에는 설치되지 않아 이와 유사한 점이 있 다. 따라서 양자를 서로 대응시켜 보면 그림 20-2 능산리사지의 온돌이 설치된 西室은 사천왕사의 冬堂과 같이 겨울 에 주로 사용되던 곳이고, 東室은 夏堂과 같이 여름에 주로 사용되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 사원에서 종종 발 견되는 1동2실 건물이라는 것도 건물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는 계절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활용하기 위해 고안되었 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四天王寺 이외에도 飛鳥寺나 山田寺, 法괾寺 등 일본의 초기 사원에서는 강당의 칸 수가 홀수가 아닌 짝수 로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것도 백제사원의 강당지에서 주로 발견되는 1동 2실 건물의 구조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처럼 백제사원에서 발견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유구나 배치는 동아시아 고대사원의 문화 전파 루트나 건물의 기능에 대한 비교사적인 연구를 진행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1차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능산리사지나 군수리사지, 왕흥사지의 사리안치 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중국 남조의 사리안치 방식에 대해서는 현존 유물이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지만, 문헌기록을 통한 연구가 34) 裵秉宣, 2010, 미륵사의 조영과 동아시아 건축 백제 불교문화의 寶庫, 彌겇寺, 국제학술심포지엄자료집. 35) 講法堂一宇 瓦葺八間 夏堂四間 金色阿彌陀佛像一軀丈괯 冬堂四間 色觀音像一體丈괯. 四天王寺御手印緣起.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97

98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육조시대에는 사리를 직접 넣는 용기는 황금제가 통례라고 하고, 다음은 은제 용기, 그 다 음에 동제나 철제 용기, 그리고 가장 바깥의 용기에는 石製函이 이용되며, 이와 같은 사리기는 땅 속의 심초석보다 더 아래에 사리탑 명문을 새긴 방형이나 원형의 돌을 석함 위에 놓고 매장하였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유리병에 직 접 사리를 넣을 때도 있고, 가장 바깥의 石函을 대신하여 塼函을 사용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36). 중국 河겗겛 쨈南城의 趙彭城廢寺址에서는 목탑 기단이 발굴되었는데, 기단 잔존 부분에서 3.5m의 구멍 밑에서 方座의 한 변이 약 1.2m인 심초석이 발견되었고, 심초석에서 약 1.0m 밑에 塼函이 놓여 있었다(그림 21)37). 이것은 중 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반지하식 심초라고 할 수 있다. 백제에서는 6세기 중후반에서 7세기 초엽에, 일본에서는 6 세기말에서 7세기에 많이 확인되는 지하식 심초의 원류가 중국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다만 문헌기 록에서 볼 때 남조에서도 지하식 심초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백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建康(南京市)에서 도 (반)지하식 심초의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38). 백제에서 지하식 심초의 사례로 가장 확실한 사례는 능산리사지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는 사리공이 없는 형식의 심초와 그 위에 별도로 안치한 석제 사리감이 발견되었다(그림 22). 능산리사지의 昌王銘 석제사리감의 경우 문헌기 록에 보이는 남조의 사리안치 방법 중 가장 바깥 부분의 용기인 석제함에 해당되지만 그 형태나 크기가 전혀 다르다. 사리감의 형태는 공주 무령왕릉 등 웅진시기 전축묘의 아치형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육조시대 사람들은 佛骨의 안 치를 자기들의 전통적인 매장 방법에 따라 사리안치 방법을 창안했지만 백제 사람들도 육조시대 사리안치의 원리를 이해한 결과 당시 백제 왕릉인 전축묘의 구조를 모방한 석함, 즉 석조 사리감의 내부에 사리를 안치하게 되었던 것 이다39). 군수리사지에서도 목탑 심초석이 발견되었지만, 사리공이 없기 때문에 사리장엄구의 안치는 능산리사지와 같거 나 심초 아래 혹은 심주에 사리구를 안치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그림 23). 577년에 사리를 매납한 왕흥사지의 경우 지하심 심초 구조가 명확히 확인되고, 특히 심초석에 사리를 봉안하는 형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그림 24). 다 그림 22. 부여 능산리사지 목탑의 지하식심초와 사리감, 무령왕릉 모습 그림 23.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의 지하식심초와 사리봉안형 식안(佐川正敏) 36) 小杉一雄, 1934, 六朝時代の佛塔に於ける佛舍利の安置に就いて 東洋學報 21-3(1980 中國佛敎美術史の硏究, 新樹社에 재수록). 37)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等, 2003 河겗굢障縣쨈城遺址東魏겗齊佛寺塔期的發現與發掘 考古 2003년 10기. 朱岩石, 2010, 南겗朝寺院遺跡と出土遺物 古代東アジアの佛敎と王權-王興寺から飛鳥寺へ, 勉誠出版. 38) 佐川正敏, 2006, 일본고대 목탑기단의 구축기술 복원과 심초설치형식의 변천에 관한 연구 百濟硏究 44. 大橋一章, 2012, 六世紀後半の百濟寺院の舍利安置について 早稻田大學大學院文學硏究紀要 ) 金姸秀, 2006, 6~7世紀韓國の佛塔と舍利莊嚴 곎史と文化 40, 東겗學院大學. 98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99 그림 24. 부여 왕흥사지 목탑의 지하식심초와 설치공사 복원안(佐川正敏) 그림 25. 일본 飛鳥寺 목탑의 지하식심초와 사리공 만 사리공의 뚜껑의 角錐台形을 하고 있는데, 그 형상은 중국의 사리석함의 뚜껑을 모델로 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런 의미에서 사리공은 사리용기의 가장 바깥 용기인 석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왕흥사지의 목탑에 서는 심초와 사리안치 시설이 결합된 사리공이 출현하였고, 그것은 593년 일본의 飛鳥寺의 목탑에 사리를 안치하는 방식과도 상통한다(그림 25)40). 일본 최초의 사원인 飛鳥寺의 경우 심초석의 한 가운데 방형의 사리공을 두고 그 안 쪽에 사리기를 안치한 것으로 생각되어 왕흥사의 심초석과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부여 구아리사지에서 발견된 심 초석에서 그와 가장 유사한 형식이 발견되기 때문에 백제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41). 특히 왕흥사 지의 사리공 주변에서 발견된 각종 사리장엄구와 飛鳥寺의 사리공 주변에서 발견된 甲이나 蛇궋鐵器 등은 사리 봉안의식과 공양품의 봉납 의식에서 보면 공통성이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백제에서는 639년에 소실된 제석사지 단계가 되면 지상식 심초석과 사리공이 나타나고, 639년 무렵에 건립된 미 륵사지 서석탑에서는 석탑의 1층 중심주에 구멍을 뚫는 사리공이 나타나게 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층 탑신 사방에 문을 내고 탑 내부에 십자형 통로를 만든 다음 한 가운데 심주석을 세워 사방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심주석 에 사리공을 설치한 것은 이전 목탑에서 보이던 사리의 매납 방식과는 그 위치가 달라졌지만 지하식 심초 구조가 지 상식 심초로 바뀌면서도 여전히 목탑의 찰주 기능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42). 즉 미륵사지의 사리안치 방식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백제적인 사리안치방식으로 재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 일본 최초의 지상식 심초의 사례는 620년경에 조영된 法괾寺 겭草伽걄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飛鳥寺 의 사리안치 방식이 겭草伽걄과 같이 지상식으로 바뀌게 된 배경에는 백제 사원에 관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백제 사원에서 발견되는 심초석들은 지하식의 지상화 과정을 이해하고, 중국 과 일본의 사리안치 방식의 변화상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현재 미륵사지와 정림사지에는 백제를 대표하는 두 기의 석탑이 남아 있다(그림 26). 미륵사지 석탑의 경우 우리 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전에 성행하던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 40) 佐川正敏, 2010, 王興寺と飛鳥寺の伽걄配置 木塔心礎施設 舍利奉安形式の系譜 古代東アジアの佛敎と王權, 勉誠出版. 41) 구아리사지에서는 소조상편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심초석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리공의 돌 뚜껑 뒷면에는 朱漆이 되어 있다(굃炳 鎬, 2007, 부여 구아리 출토 소조상과 그 유적의 성격 百濟文化 36.). 이러한 주칠은 왕흥사지의 뚜껑, 飛鳥寺의 뚜껑에서도 공통적 으로 확인되는 요소로서 삼자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42) 이귀영 박대남, 2010,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의 의의 백제 불교문화의 보고, 미륵사.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99

100 써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43). 그 보다 약간 늦게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는 정림사지 석탑의 경우 목탑의 구조를 참고하면서도 미륵사지 석탑에 비해 훨씬 더 간략화하고 단순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미륵사지 와 정림사지 석탑의 세부 수법은 단순한 모방이 번각에 머물지 않고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성을 함께 담고 있다. 미륵사지와 정림사지를 거치면서 완성된 백제 석탑의 양식은 이후 통일신라 뿐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백제계 석탑이 라는 형태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두 기의 백제 석탑은 한국 고대 석탑의 시원형이자 프로토타입이 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고대 한국 문화의 유구성과 독창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아이콘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 다. 한편, 정림사지 석탑의 1층 탑신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자신의 전승기념문을 새겨 넣은 것 이 현재도 남아 있다. 이 전승기념문은 부여 관북리에 있었던 石槽에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백제 마지막 수도인 사비 도성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정림사지의 한 가운데 5층 석탑이 건립되고, 그 1층 탑신에 당나라의 전승기념문이 새 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 석탑이 도성의 랜드마크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백제라는 고대 국가를 멸망시키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외국의 전승기념문을 새긴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백제 국가가 이룬 문화적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국가의 멸망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 비문을 통해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 석탑을 비롯한 부여 지역 의 유적지를 들러보면서 많은 詩와 文章을 남겼으며44), 일제강점기에도 平塚運一이라는 일본의 화가는 百濟舊都 라는 작품에서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그 주변의 풍경을 판화로 제작하여 쇠락해 가는 백제 옛 수도의 이미지를 애잔 하게 표현하기도 했다(그림 27). 그런 점에서 정림사지나 미륵사지의 석탑은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도 보편적으로 인 식할 수 있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 자료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26.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그림 27. 百濟舊都, 平塚運一(1895~1997), 版畵 ( ) 43) 각 부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단부는 목탑과 같이 낮고 작은 편이며, 初層屋身은 각 면이 3칸씩인데 중앙 1칸에는 사방에 門戶를 마련하 여 내부로 통하게 하였으며, 그 내부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거대한 方形 石柱, 즉 목탑의 찰주와 같은 것을 세웠기 때문이다. 각 면 에는 엔타시스(entasis : 배흘림)가 있는 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平枋과 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또 그 위에 두공 양식을 모방한 3단 의 받침으로 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100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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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굴조사를 통하여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현황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폐허 상태 또는 발굴조사 상태대로 노출시켜 정비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의 미케네(Mycenae) 유적이나 델피(Delphi) 유적, 에피다우루스 (Epidaurus) 유적 등 비가 많지 않고 석조 부재로 구성된 유구를 가진 유적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노출 정비한 상태 로 놓아둘 경우 훼손이 가속화 될 우려가 있으므로 보존 처리를 하지만 훼손이 심해지면 현상 유지를 목적으로 수리 또는 보강을 하게 된다. 수리시 부득이하게 신재를 보충할 경우 원래 부재와 구별되도록 하고 있으며 보강시에는 최 소한의 범위 내에서 현대적 재료와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유구를 노출정비하면서 관람객에게 볼거리 를 제공하기 위해 무너져 흐트러져 있는 부재를 재조립해서 세우는 소위 해체조립(anastolysis) 기법을 적용하여 부 분 복원하는 경우도 많다. 이 정비방식은 유적이 가진 역사적 환경을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강 우량이 많아 유구 표면에 식물이 생장하기 쉽고 우수로 인해 유구 일부가 유실될 우려가 있으므로 많이 채택하지 않 았다. 드물게 익산 미륵사지 동서 금당지, 경주 감은사지 금당지 등에서 유구의 지하 구조 부분을 노출시켜 정비한 사례가 있는데 이 경우 우수를 배출할 수 있는 구조를 유구에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림 1. 미륵사지 동원 금당지 노출정비 그림 2. 감은사지 금당지 노출정비 2. 유구 보호시설 설치 폐허 상태 또는 발굴조사로 노출된 상태대로 정비를 하고자 하나 수리나 보강 만으로 유구의 훼손을 막을 수 없을 경우 별도의 보호시설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시설은 유적 전체를 덮는 대규모로부터 단일 유구 또는 기단 판축토층 등 유구의 일부분을 보호하는 소규모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유구 시설에 사용되는 재료와 기술 또한 유구 성격에 맞추어 전통적인 재료와 기술이 사용되기도 하고 현대적 재료와 기술이 적용되 기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하다. 특히 유구 보호시설이 설 치되어있는 경우 유적이 가진 정보의 전달을 쉽게 하기 위하여 관람로나 전시시설 등 관람을 위한 장치를 같이 설치하는 경우도 많으며, 더 나아가 활용적 측면을 강조 그림 3. 미륵사지 중원 석등 보호 덮개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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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4. 복원 지상 구조가 멸실되어 초석과 기단 일부만 남아있는 폐사지나 발굴조사를 필요로 하는 터로 남아있는 유적이 많 다. 그러나 유적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숙지하지 않은 관람객에게는 이러한 유적은 의미없는 공터로 인식될 수 밖에 없 다. 만약 유적 내에 유용한 정보를 가진 가시적인 시설물이 있다면 역사적 장소로서의 의미 뿐아니라 과거에 존재하 였던 건물의 모습을 상상하여 유적을 쉽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복원의 사전적 의미는 원래대로 회복함 이다. 즉 복원은 유적이 갖는 원형 혹은 역사적 특정한 시기의 모습을 전 체 또는 그 일부를 되찾는 행위이다. 복원은 결과가 가지는 매력 때문에 문화재 보존 및 활용의 중요한 분야로 인식 되어 지금까지 계속 시도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목조건축은 주재료가 목재이므로 화재나 침수, 충해 등에 취약 하여 상부 구조는 소멸되고 기단부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서 발굴조사한 많은 유적들이 복원의 대상이 되었다. 복 원이 가지고 있는 과정상의 여러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1970년 경주 불국사의 복원에서부터 최근의 익산 미륵사 와 경주 황룡사 복원연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체에 의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어 왔다. 복원 찬성측은 유적 복 원을 통하여 찬란한 고대 문화를 재현해보고 이를 관람객들에게 보여 교육의 장으로 삼자는 활용의 측면을 강조하 고 있으며, 복원 반대측은 제대로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오히려 유적을 파괴할 수 있다는 보존의 측면을 강 조하고 있다. 두 가지 입장 모두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다. 최근의 국제적인 추세를 보면 유적의 단순한 보존보다는 활용의 측면에 무게가 더 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 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관람객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이미 유적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사가현의 그림 6. 일본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 복원 그림 7. 중국 양조우의 따밍쓰 복원 그림 8. 일본 헤이조쿄 동원 유적 복원 그림 9.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복원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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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Ⅳ. 백제 사원유적의 활용 방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 문화재 보존은 소극적인 현상 보존에서 점차 적극적인 보존과 활용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 경향이다. 보존이 원칙적이고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활용은 방편적이고 정책적 개념이다. 활용은 유적 에 잠재되어있는 문화재적 가치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므로 유적의 활용 방안은 그 가치를 향유하는 사람을 중 심으로 수립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보존이 마무리 된 후의 종합적인 유적 활용 뿐 아니라 정비 또는 공사 단계에서의 유적 활용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유적을 오로지 보존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활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적극 인 보존과 활용이라는 개념과도 부합되지 않을 것이다. 1. 정비 단계에서의 활용 유적 정비 단계에서의 활용자원은 기존에 발굴조사 후 정비된 유구와 전시관 및 관람 시설 등이 있다. 이 단 계는 비교적 활용자원이 적지만 초 중 고 학생들의 현장교육과 일반관람객을 대상으로 유적의 역사적 이 해와 복원 사업에 대한 홍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이다. 복원조감도 등의 전시물을 통해 관람객이 유적의 그림 15. 발굴조사후 정비된 유적 관람 그림 16. 전시관의 영상물 상영 그림 17. 유적 발굴 체험 그림 18. 유적 복원의 3차원 그래픽 컨텐츠 그림 19. 석조물 야외 전시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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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백제의 위기와 유토피아[Utopia]의 구현 - 정림사(定林寺)와 미륵사(彌겇寺)를 중심으로-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백제는 전고려(前高麗) 장수왕의 공격으로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는 등 500년 백제의 역 사에서 겪지 못했던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어쩌면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문주왕이 급하게 금 강 남쪽 웅진[공주]에 새로 도읍을 정했지만 한성에 비하면 모든 게 불안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이후 백제는 사비를 거쳐 익산으로 유토피아를 찾아 나선다. 1. 웅진 제1단계, 혈연적 유토피아 백제는 웅진천도이후 웅진이 한성만큼 살기 좋은 도시라는 점을 부각시켜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 다. 성을 쌓아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였고 능산리에 능묘를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그리고 사 찰을 창건하여 인민들의 정서적 안정과 미래에 대 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산성, 무령왕릉, 대통사이다. 웅진은 한성 함락을 전제로 설계한 도읍지가 아 니었다. 공간구조를 배경으로 설계가 이루어 진 것 그림 1. <공주박물관도록> 필자가 일부 추가 도 아니었다. 특히 도성내의 공간구조를 통해 신성 관념을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 대안으로 제 시된 것이 밖으로부터의 권위와 사찰창건이었다. 이 두 가지는 대통사 창건을 통해 하나로 모아졌다. 대통사는 무령 왕의 3년상이 끝나고 창[위덕왕]이 태어난 해[527]와 중국 양무제의 연호인 대통이 시작되는 해(527)를 전후한 곧 525~527년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되었다. 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현재 공주 반죽동에 세워진 당간지주에 서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은 자신의 지석에 중국 양나라가 내려 준 영동대장군(곻東大將軍)이란 작호를 맨 처음 적을 정도로 자신의 권위를 중국에 기대고 있었다. 아직은 왕의 권위를 내부에서 만들지 못하고 밖인 중국에서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하지만 성왕은 부왕인 무령왕의 죽음을 훙(薨)이 아닌 붕(崩)으로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위상을 중국과 대등하게 122 백제 사찰과 주변국 사찰과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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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ßÇ¥¿äÁö229-286 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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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vii 요 약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 동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정책은 기존의 정책 방향과 내용을 유지 변화시키면서 정책을 계승 완료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 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과 조직,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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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 배 국가기록원 공업연구사 첨단서고 건립의 필요성 중앙행정기관을 비롯한 각급 공공기관의 의사결정 과 정과 정책시행에 관련된 국가의 주요 기록을 온전히 후세에 전승하기 위한 기록물 보존공간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1999년 제정되어 2000년 발효 기획특집Ⅰ 기록관리, 나라기록관시대의 개막 나라기록관 신축과정과 특징 34 2008 SPRING + Vol. 2 박 성 배 국가기록원 공업연구사 첨단서고 건립의 필요성 중앙행정기관을 비롯한 각급 공공기관의 의사결정 과 정과 정책시행에 관련된 국가의 주요 기록을 온전히 후세에 전승하기 위한 기록물 보존공간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1999년 제정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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