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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國史學會第 78 回學術發表會 對外交涉을통해본中國史 日時 : ( 土 ) 13:50-19:30 場所 : 崇實大學校 ( 서울, 大韓民國 ) 主催 : 中國史學會 主管 : 崇實大學校史學科 後援 : 崇實史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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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中國史學會第 78 回學術發表會 主題 : 對外交涉을통해본中國史 日時 : 2013 年 6 月 8 日 ( 土 ) 13:50-19:30 場所 : 崇實大學校曺晩植紀念館 317 號室 主催 : 中國史學會 < 大會登錄 > (13:50-14:00) < 開會式 > (14:00-14:10) 司會 : 金鍾健 ( 慶北大 ) 開會辭 : 中國史學會會長李潤和 ( 安東大 ) 祝辭 : 崇實史學會會長河政植 ( 崇實大 ) < 第 1 次發表會 >(14:10-15:40) 司會 : 辛太甲 ( 東亞大 ) 1. 김정열 ( 숭실대 ), 平頂山유적과西周시대의應侯 討論 : 박재복 ( 경동대 ) 2. 李容一 ( 嶺南大 ), 秦과列國의交質事例 討論 : 민후기 ( 연세대 ) 休息 (15:40-16:00) 紀念撮影 < 第 2 次發表會 >(16:00-17:30) 司會 : 이재령 ( 단국대 ) 3. 윤욱 ( 고려대 ), 滿文月摺包의朝淸關係史關聯史料와그價値 - 朝淸關係史연구에있어서滿文史料의중요성에관한試論 - 討論 : 정혜중 ( 이화여대 ) 4. 석미자 ( 고려대 ), 만주사변이후남경국민정부외교의변화에대한연구 討論 : 김형열 ( 동의대 ) 晩餐 (18:00-19:30) 閉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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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平頂山유적과西周시대의應侯

8 2 [ 그림1] 평정산유적남구남단, 중단덤배치도

9 3 편호 구조묘주부장품 방향묘실 ( 남북 동서 ) 곽관성별두향장식예기옥기병기차마기자기토기 M232 * m 4.40m 1 1 M?? 匕 2 〇〇〇〇鬲 1 甕 1 M231 * m 1.98m 1 F 북앙직 - 〇??? M m 1.80m 2 M 북앙직鼎 2 簋 2 尊 1 卣 1 爵 1 觶 2 〇〇〇 鬲 1 鬲 3 大口尊 1 豆 2 罐 1 M229? 3.70m 1.66m 1 M 북? 鼎 1 簋 1 爵 1 觶 1 〇〇 鬲 1 罐 2 M230 * m 3.80m 1 2 M?? - 〇〇〇〇 - M48 *??????? 鼎 2 簋 1 壺 1????? M m 1.52m 1 M 북앙직鼎 1 盉 1 〇〇〇 鬲 1 M m 1.40m 1 M 북앙직鼎 1 〇〇〇 鬲 1 M m 1.36m 1 1 M 북앙직鼎 1 簋 1 尊 1 卣 1 爵 1 觶 1 〇〇〇 鬲 1 罐 1 M86 * m 3.80m 1 1 M?? 匕 2 〇〇〇〇豆 1 M m 1.55m 1 1? 북앙직 - 〇 鬲 1 M m 1.36m 1 F 북측굴 - - M m 1.24m 1 M 북앙직 - 〇 大口尊 1 M m 1.10m 1 M 북앙직 - 〇〇 - M53 * 16? 1??? -?? 〇?? M83 *??????? -????? M49 *??????? -????? M84 * 鼎 2 甗 1 盨 1 盤 1 盉 1 尊 m 2.65m 1 1 M 북앙직卣 1 爵 1 觶 1 鼎 3 簋 4 盂 1 盤 2 盉 2 尊 1 M m 2.64m 1 1 F 북앙직觶 1 豆形器 1 M m 3.90m 1 1 M 북? 鼎 5 簋 6 鬲 4 盨 3 方壺 2 盤 2 匜 2 甗 1 尊 1 鼎 5 簋 6 方壺 2 盤 1 盉 1 M m 3.10m 1 1 M 북앙직甗 1 方彝 1 〇 〇 〇 〇 鬲 1 〇 〇 鬲 1 〇 〇 〇 鬲 1 罐 5 豆 1 〇 〇 〇 鬲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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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5 [ 그림 2] 西周시대土鬲비교도 [ 그림3] 평정산유적 M242호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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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7 [ 그림4] 西周시대三足甕및土豆비교도

14 8 [ 그림5] 서주중기의청동제세발정 (3, 4는축척불명 )

15 9 [ 그림6] 匍盉와그명문 (1. 기영 2. 명탁 ) [ 그림7] 평정산유적의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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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1 [ 그림8] 應侯見工鐘 (1.2. 陝西藍田출토 3.4. 書道博物館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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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3 䍙 䍙 爯 爯 爯 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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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戰國時代秦과列國의交質事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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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21 趙의 藺ㆍ離石ㆍ祁를 함락시켰다. 그러자 趙가 公子 郚를 秦에 質로 보내면서 焦 黎 牛狐의 城과의 교환을 청하게 했다. 마침내 秦을 배신하였다. 秦王이 大怒하여 衛 胡昜에게 趙를 공격하게 하여 閼與를 공격하였으나 趙奢가 구원하였다. 魏는 公子 咎로 하여금 정예병을 거느리고 安邑에 주둔하여 秦을 협격하여 秦은 閼與에서 패하였다. 방향 을 돌려 魏의 幾를 공격하자 廉頗가 幾를 구원하여 秦君을 대파하였다. 秦이 ㆍ ㆍ 54) 趙公子 郚의 秦 入質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趙의 藺ㆍ離石을 함락시킨 인물이 秦將 白起라는 것이다. 史記 4 周本紀 에는 周赧王 34年에 周君에게 유세하는 蘇厲의 말을 통해 趙의 藺ㆍ離石을 함락시킨 인물 이 秦將 白起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周赧王 34年은 기원전 281年이다. 기원 전 281年은 秦昭襄王 26年이고 趙惠文王 18年에 해당한다. 위 내용을 토대로 하면, 趙 公子 郚가 秦에 入質한 시기는 秦昭襄王 26年 이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秦軍이 趙將 趙奢에게 閼與에서 패한 것이 기원전 269年(秦昭襄王 38年, 趙惠文王 29年)의 일이 기 때문에 趙公子 郚의 秦 入質시기는 기원전 281年에서 269年 사이였음을 알 수 있 위 기사를 통해 55) 56) 다. 趙惠文王시기(기원전 298年-기원전 266年), 趙는 기원전 295年(趙惠文王 4年)에 일 어난 沙丘之變 과 뒤이은 權臣 李兌의 국정 전횡으로 趙의 王權은 매우 미약하였다. 기원전 286年(趙惠文王 13年), 李兌가 죽자 趙惠文王은 비로소 자신의 親政 체제를 수 립할 수 있었다. 趙惠文王은 樂毅ㆍ廉頗ㆍ藺相如ㆍ趙奢 등을 중용하여 趙는 대내외적으로 크게 팽창 하였다. 趙惠文王시기 秦에 의한 趙 공격이 비록 강하기는 하였으나, 9 趙 역시 趙 奢 ㆍ廉頗 ㆍ藺相如 등의 활약으로 秦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였다. 아래의 기 사는 당시 秦의 대외 정책의 방향을 말해주는데, 趙公子 郚의 秦 入質 배경에 시사되 는 바가 있다. 57) 58) 5 ) 60) 61) 62) 策 趙策三 秦攻趙藺ㆍ離石ㆍ祁章. 秦攻趙藺ㆍ離石ㆍ杞章 拔 趙以公子郚爲質於秦 而請 內焦 黎 牛狐之城 易藺ㆍ離石ㆍ祁於秦 卒倍秦 秦王大怒 令衛胡昜伐趙 攻閼與 趙奢將救之 魏令公子咎以銳師居安邑 以挾秦 秦敗于閼與 反 攻魏幾 廉頗救幾 大敗秦師. 55) 史記 4 周本紀. (周赧王)三十四年 蘇厲謂周君曰 敗韓ㆍ魏 殺犀武 攻趙取藺ㆍ離石者皆白起. 56) 史記 5 秦本紀. (秦昭王)三十八年中更胡傷攻趙閼與 不能取 史記 43 趙世家. (趙惠文 王)二十九年 秦ㆍ韓相攻 而圍閼與 趙使趙奢將 擊秦 大破秦軍閼與下 賜號爲馬服君. 57) 史記 43 趙世家. (惠文王)三年 滅中山 遷其王於膚施 起靈壽 北地方從 代道大通 還歸 行賞 大赦 置酒酺五日 封長子章爲代安陽君. 章素侈 心不服其弟所立 主父又使田不禮相章也 主父及 王游沙丘異宮 公子章卽以其徒與田不禮作亂 詐以主父召王 肥義先入 殺之 高信卽與王戰. 58) 沈長云ㆍ魏建震ㆍ白國紅等, 趙國史稿, 中華書局, 2000年, pp ) 史記 43 趙世家. (趙惠文王)十七年秦怨趙不與己擊齊 伐趙 拔我兩城 十八年秦拔我石城 (趙惠文王)十九年秦敗我二城 (趙惠文王)二十五年與魏共擊秦 秦將白起破我華陽 得一將軍 史 記 73 白起王翦列傳 (秦昭王)二十七年白起攻趙, 取光狼城.. 60) 史記 5 秦本紀. (秦昭王)三十八年中更胡傷攻趙閼與 不能取 史記 15 六國年表. (趙惠文 王)二十九年秦發我閼與 趙奢將擊秦 大敗之 賜號曰馬服君 史記 43 秦本紀. 趙惠文王二十九 年秦發我閼與 趙奢將擊秦 大敗之 賜號曰馬服君. 61) 史記 43 趙世家 (趙惠文王)二十三年 樓昌將攻魏幾 不能取 十二月 廉頗將攻幾 取之. 62) 史記 81 廉頗藺相如列傳. 秦王使使者告趙王 欲與王爲好會又西河外澠池 趙王畏秦 欲毋行 廉 頗ㆍ藺相如計曰 王不行 示趙弱且怯也 趙王遂行 相如從. 54) 戰國 ㆍ ㆍ

28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22 穰侯가 韓ㆍ魏를 넘어 東으로 齊를 공격한 지 5年에, 秦은 조그마한 땅도 얻지 못했으 穰侯는 陶邑을 자신의 封邑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 63) 宋의 都城이었던 陶는 중원에서 가장 번성한 城市 중의 하나였고, 서쪽으로 韓ㆍ魏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 전략적 군사 요충지였다. 宋이 齊에 멸망하기 전까 지 陶는 齊ㆍ秦ㆍ趙 등의 탈취 대상이 되었다. 秦의 穰侯 뿐만 아니라 齊湣王과 趙의 權臣 奉陽君 李兌 역시 일찍이 陶를 자신의 封地로 삼으려 했다. 이후 齊가 宋을 멸 망시킨 후 강성해져서 列國에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도 당시 陶의 부유함을 잘 나타내 당시 64) 65) 66) 67) 주고 있다.68) 年 昭襄王 22年)부터 꾸준히 齊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蒙武(蒙 驁 齊를 정벌하여 齊의 河東에 9縣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84年에 秦은 5국이 연합하여 齊를 정벌할 때 이 전투에 참가한 후 秦으로 귀환하기 않고, 기원전 281年에 위 기사와 같이 齊의 陶를 점령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秦의 齊 공격은 三晋의 묵인 아래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 기사의 내용을 통해 본 趙公子 郚의 秦 入 質은 당시 趙의 國力과 秦에 入質한 公子 郚가 趙의 太子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秦 入質 조건이 영토 교환을 통한 화평 담보였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趙와 秦 간의 대 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交質 행위로 볼 수 있다. 다섯 번째로 秦에 入質한 인물은 魏太子 增이었다. 다음의 기사는 魏太子 增이 秦에 입질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秦은 기원전 285 (秦 9 )6 )가 70) 71) 72) 安釐王 年 魏無忌가 魏로 돌아와 5國의 군대를 이끌고 秦을 공격하여, 河外에서 격파 蒙驁 쫓아버렸다. 魏太子 增이 秦에 質子로 있었는데 秦이 두려워 그를 두려 였 63) 韓非子 定法. 穰侯越韓ㆍ魏而東攻齊五年, 而秦不益尺土之地, 乃成其陶邑之封. 64) 楊寬, 戰國史, 上海人民出版社, 1998年, p ) 史海念, 釋 史記貨殖列 所說的 陶爲天下中心 兼論戰國時代的經濟都會, 河山集, 1963年. 未 見, 李成珪, 戰國時代 秦의 外交政策, 古代中國의 理解Ⅱ, 1995年 再引用. 66) 史記 38 宋微子世家. (宋)君偃十一年自立爲王 宋敗齊 南敗楚 取地三百里 西敗魏軍 乃與齊 ㆍ魏爲敵國 盛血以韋囊 懸而射之 命曰射天 淫于酒ㆍ婦人 群臣諫者輒射之 於是諸侯皆曰桀宋 宋其 復爲紂所爲 不可不誅 告齊伐宋 王偃立四十七年 齊湣王與魏ㆍ楚伐宋 殺王偃 遂滅宋而三分其地. 67) 戰國策 趙策四 齊將攻宋章ㆍ五國伐秦無功章. 68) 史記 46 田敬仲完世家. (齊湣王)三十八年伐宋. 於是齊遂伐宋 宋王出亡 死于溫 齊南割 楚之淮北 西侵三晋 欲以幷周室 爲天子 泗上諸侯鄒ㆍ魯之君皆稱臣 諸侯恐惧. 69) 史記 88 蒙恬列傳. 蒙驁自齊事秦昭王, 官至上卿. 70)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二十二年蒙武伐齊河東, 爲九縣. 71) 史記 80 樂毅列傳 에는 樂毅가 趙ㆍ楚ㆍ韓ㆍ魏ㆍ燕 등 5國의 군대를 이끌고 齊를 공격하였 다고 적고 있고, 史記 45 田敬仲完世家 에도 燕ㆍ秦ㆍ楚ㆍ三晋合謀, 各出銳師以伐, 敗我濟西 와 楚使淖齒將兵救齊 因相齊湣王 이라고 기록하여 그 내용이 서로 모순이 있다. 史記 15 六 國年表 의 楚表에 보면 五國攻擊湣王 이라고 적어 5國이 齊를 공격한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戰國策 齊策六 貂勃常惡田單曰章에 燕之伐齊之時 楚王使將軍將萬人而佐齊 라고 적고 있어 당시 楚는 淖齒를 主將으로 하여 齊를 구원하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齊를 공격하였던 5國은 燕ㆍ秦ㆍ魏ㆍ韓ㆍ趙가 맞다. 72)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二十三年尉離與三晋ㆍ燕伐齊 破之濟西. 73) 史記 44 魏世家. (安釐王)三十年無忌歸魏 率五國兵攻秦 敗之河外 走蒙驁.)魏太子增質於秦 ( )30, 秦을 하고 를 가 하 다.73)

29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23 年 즉 秦莊襄王 3l年에 일어난 일로서, 魏太子 增의 秦 入質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원전 247年 이전이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秦의 6國 兼倂戰 과정을 통하여 魏太子 增의 秦 入質시기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260年(秦昭襄王 47年), 秦의 공격을 받던 韓의 上黨郡守 馮亭이 上黨郡의 17 개 邑을 가지고 趙에 투항하였다. 이에 秦은 趙를 공격하여 長平에서 趙軍을 대파 하였다. 秦은 이 여세를 몰아 기원전 259年(秦昭襄王 48年), 趙의 수도 邯鄲을 포위 ㆍ공격하였다. 수세에 몰린 趙는 魏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秦의 위세에 눌린 魏安 釐王이 趙 구원을 포기하고 정세를 관망하자, 魏無忌가 魏安釐王의 兵符를 훔쳐 魏 將 晋鄙를 죽이고 趙의 邯鄲을 구원하였다. 魏無忌는 魏安釐王을 속이고 晋鄙를 죽 인 죄책감에 魏로 돌아가지 않고, 趙에서 10年 간 머물렀고, 秦은 魏無忌가 趙에 10年 간 머는 동안 계속해서 魏를 압박하였다. 9 기원전 254年(昭襄王 53年), 천하가 모두 秦에 귀복하였을 때, 魏가 가장 늦었고, 이 에 秦은 魏의 吳城을 빼앗았고, 魏安釐王이 나라를 위탁하여 秦昭襄王의 명령을 들었 다. 따라서 魏太子 增의 秦 入質은 대략 이 시기이고, 和平을 전제로 하였음을 알 위 기사는 기원전 247, 74) 75) 76) 77) 78) 7 ) 80) 수 있다. 섯 번째 秦에 入質한 자는 趙太子이다. 다음의 기사는 趙太子의 秦 入質을 보여주 여 고 있다. 王 政) 4年, 秦의 質子가 趙에서 돌아왔고, 趙太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秦 81) 趙太子의 秦 入質 시기도 魏太子 增과 비슷한 秦昭襄王 末年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257年(秦昭襄王 50年), 秦은 趙의 수도 邯鄲 공격 실패 이후에도 三晋 위 기사의 恐 欲囚魏太子增. 記 白起王翦列傳. (昭王)四十五年 伐韓之野王 野王降秦 上黨道絶 其守馮亭與民謀曰 鄭道已絶 韓必不可得爲民 秦兵日進 韓不能應 不如以上黨歸趙 趙若受我 秦怒 必攻趙 趙被兵 必親 韓 韓趙爲一 則可以當秦 因使人親趙 趙孝成王與平陽君ㆍ平原君計之 平陽君曰 不如勿受 受之 禍 大於所得 平原君曰 無故得一郡 受之便 趙受之. 75) 史記 5 秦本紀. (秦昭王)四十七年秦攻韓上黨 上黨降趙 秦因攻趙 趙發兵擊秦 相拒 秦使武安 君白起擊 大破趙于長平 四十餘萬盡殺之. 76)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四十八年十月韓獻垣雍 秦軍分爲三軍 武安君歸 王齕將伐趙武安ㆍ 皮牢 拔之 司馬梗北定太原 盡有韓上黨 正月兵罷 復守上黨 其十月 五大夫陵攻趙邯鄲 史記 73 白起王翦列傳. (秦昭王)四十八年十月 盡復定上黨郡 盡賁軍爲二 王齕攻皮牢 拔之 司馬梗定太 原 武安君所爲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 南定鄢ㆍ郢ㆍ漢中 北擒趙括之軍 雖周ㆍ召ㆍ呂望之功 不 益于此矣 王聽之 割韓原雍ㆍ趙六城以和 正月皆罷兵 武安君聞之 由是與應侯有隙 其九月 秦 復發兵 使五大夫王陵攻趙邯鄲 史記 79 范睡蔡澤列傳. (秦昭王四十三年)後五年 昭王用應侯謀 縱反間賣趙 趙以其故 令馬服子代廉頗將 秦下破趙于長平 遂圍邯鄲. 77) 史記 77 魏公子列傳. 秦王使使者告魏王曰 吾攻趙旦暮且下 而諸侯敢救者 已拔趙 必移兵先擊 之 魏王恐 使人止晋鄙 留軍璧鄴 名爲救趙 實持兩端以觀望. 78) 史記 77 魏公子列傳. 至鄴 矯魏王令代晋鄙 晋鄙合符 疑之 擧手視公子曰 欲無聽 朱亥袖 四十斤鐵椎 椎殺晋鄙 公子遂將晋鄙軍 得選兵八萬人 進兵擊秦軍 秦軍解去 遂救邯鄲 存趙. 79) 史記 77 魏公子列傳. 公子留趙十年不歸 秦聞公子在趙 日夜出兵東伐魏. 80)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五十三年天下來貧 魏後 秦使摎伐魏 取吳城 韓王入朝 魏委國聽令. 81) 史記 6 秦始皇本紀. (秦始皇帝)四年 秦質子歸自趙 趙太子出歸國. 秦 74) 史 73

30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24 계속 압박하였다. 기원전 256年(秦昭襄王 51年), 秦은 韓의 陽城ㆍ負黍를 빼앗았 고, 趙의 20개 縣을 점령하였다. 또한 秦昭襄王은 秦을 배반한 西周를 공격하였고, 西周의 군주는 36개의 성읍과 인구 3만 명을 秦에 바쳤다. 기원전 255年(秦昭襄王 52年), 周의 백성들이 동쪽으로 도망쳤고, 秦은 周의 九鼎을 秦에 가져왔다. 기원전 254年(秦昭襄王 53年), 천하가 모두 秦에 귀의하였다. 아마 이 시기 和平을 담보로 趙 太子가 秦에 入質하였던 것 같다. 일곱 번째로 秦에 入質한 인물은 燕太子 丹이었다. 다음의 기사는 燕太子 丹의 秦 入質을 보여주고 있다. 을 82) 83) 84) 85) ① 蔡澤은 秦에 10여 年을 머르며 昭襄王ㆍ孝文王ㆍ莊襄王을 섬겼다. 마지막에는 秦 始皇을 섬기면서, 秦을 위해 燕에 使臣으로 갔다. 3年 후에 燕은 太子 丹을 秦에 質로 보 냈다 ② (燕王 喜)23年, 太子丹이 秦에 質子로 있다가 도망쳐 돌아왔다. 86) 87) ①ㆍ②를 통해 燕太子 丹이 秦에 入質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244年, 즉 秦 王 政 3年(기원전 244年) 경이고, 燕으로 도망쳐 돌아온 시기는 기원전 232年, 즉 秦王 政 15年(燕王 熙 23年)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46年, 秦王 政이 秦莊襄王의 뒤를 이어 秦王에 즉위하였다. 즉위할 당시 秦 王 政은 나이가 어려 親政을 하지 못했으나, 秦은 丞相인 呂不韋를 중심으로 蒙驁, 王 齮, 麃公 등이 國事를 처리하였다. 秦은 秦王 政 元年(기원전 246年)부터 본격적인 6 國 兼倂戰에 돌입하였다. 기원전 246年(秦王 政 元年), 秦은 趙의 晋陽을 공격하였고, 9 기원전 245年(秦王 政 2年), 秦의 麃公이 卷을 공격하여 3만 명을 참수하였다.9 기원전 244年(秦王 政 3年), 秦의 蒙驁가 韓의 13개 城을 점령하였고,9 暢ㆍ有詭를 공격하여, 기원전 243年(秦王 政 4年)에 함락시켰다.9 기원전 242年(秦王 政 5年)에는 魏를 공격 하여, 酸棗ㆍ燕ㆍ虛ㆍ長平ㆍ雍丘ㆍ山陽城 등 20개의 城을 함락시키고 東郡을 설치하였 위 기사 88) 8 ) 0) 1) 2) 다.93) 記 秦本紀. (秦昭襄王)五十一年將軍摎攻韓 取陽城ㆍ負麥 斬首四萬. 記 秦本紀. (秦昭襄王)五十一年 攻趙取二十餘縣 斬虜九萬. 記 秦本紀. 西周君背秦 與諸侯約從 將天下銳兵出伊闕攻秦 令秦毋得通陽城 于是秦使將 軍摎攻 西周君走來自歸 頓首受罪 盡獻其邑三十六城 口三萬 秦王受獻, 歸其君于周. 記 秦本紀. (秦昭襄王)五十二年周民東亡 其器九鼎入秦 周初亡. 記 9 范睢蔡澤列傳. 蔡澤居秦十餘年 事昭襄王ㆍ孝文王ㆍ莊襄王 卒事始皇帝 爲秦使于燕 三年而燕使太子丹入質于秦. 87) 史記 34 燕召公世家. (燕王喜)二十三年太子丹質於秦 亡歸燕. 88) 史記 6 秦始皇本紀. 王年少 初卽位 委國事大臣. 89) 史記 6 秦始皇本紀. 晋陽反 (秦始皇帝)元年將軍蒙驁擊定之. 90) 史記 6 秦始皇本紀. (秦始皇)二年麃公將卒攻卷 斬首三萬. 91) 史記 15 六國年表. 秦始皇帝三年蒙驁擊韓取十三城. 92) 史記 6 秦始皇本紀. (秦始皇帝)三年 十月將軍蒙驁攻韓氏暢ㆍ有詭ㆍㆍㆍㆍㆍ(秦始皇帝)四年 暢ㆍ有詭. 93) 史記 6 秦始皇本紀. (秦始皇帝)五年將軍蒙驁攻魏 定酸棗ㆍ燕ㆍ虛ㆍ長平ㆍ雍丘ㆍ山陽城 皆 拔之 取二十城 初置東郡. 82) 史 5 83) 史 5 84) 史 5 西周 85) 史 5 86) 史 7

31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25 맞서 기원전 241年(秦王 政 6年)韓ㆍ魏ㆍ趙ㆍ衛ㆍ楚 5국이 연합 하여 秦을 공격하였다.9 이 反秦 연합 공격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秦을 공격한 5국 중에 燕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燕과 趙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251年, 趙가 長平 전투에서 秦에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燕이 趙 를 공격하였다.9 趙는 그 보복으로 기원전 250年에 趙將 廉頗가 燕을 포위하였고, 기원 전 249年에도 趙의 武襄君 樂乘이 燕의 수도를 포위하였다.9 기원전 243年에도 趙將 李牧이 燕을 공격하여 武遂ㆍ方城을 빼앗았고, 기원전 242年에도 趙將 龐煖이 燕을 공 격하여 燕將 劇辛을 사로잡았다.9 이러한 趙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던 燕이 기원전 244年(燕王 喜 11年) 燕太子 丹을 秦 에 入質시켰다. 위 기사 ①을 통해 燕太子 丹의 秦 入質을 성사시킨 인물이 蔡澤이었음 을 알 수 있다. 蔡澤은 원래 燕人으로,9 秦昭襄王시기 入秦하여99 范睢의 뒤를 이어 秦相에 올랐던 인물이다. 기원전 246年, 秦의 文信侯 呂不韋가 趙를 공격하여 河間 땅을 넓히기 위해 蔡澤을 燕에 보내 事燕 하게 하였다. 여기서 蔡澤이 행한 事燕 은 燕에 파견되어 秦ㆍ燕 우호 교섭을 담당하는 것 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 事 는 燕을 섬기는 것 이 아니라 燕과 관련된 업 를 담당하는 것 또는 燕에 파견되어 관련된 업를 담당하는 것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이 시기 蔡澤이 秦과 燕 양국 화평의 교량 역할을 하였고, 燕은 親秦 정책의 일환으로 燕太子 丹을 秦에 入質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燕太子 丹의 秦 入質은 과거 燕太子 丹이 趙의 首都 邯鄲에 質子로 가 있을 때, 秦王 政과 사이가 좋았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秦은 燕은 秦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燕에 대한 직접적인 兼倂戰이 어려 이러한 秦의 공세에 4) 5) 6) 7) 8) ) 100) 101) 102) 103) 94) 史記 5 秦本紀. (秦始皇帝)六年韓ㆍ魏ㆍ趙ㆍ衛ㆍ楚共擊秦 取壽陵 秦出兵 五國兵罷. 95) 史記 34 燕召公世家. 燕王喜四年 燕王命相栗腹約歡趙 以五百金爲趙王酒 還報燕王曰 趙王壯 者皆死于長平 其孤未壯 可伐也 趙使廉頗將 擊破栗腹于鄗 樂乘破卿秦于代 樂間奔趙 閻羅逐 之五百餘里 圍其國 燕人請和 趙人不許 必令將渠處和 燕相將渠以處和 趙聽將渠 解燕圍 史記 43 趙世家. (趙孝成王)十五年 燕王令丞相栗腹約歡 以五百金爲趙王 燕卒起二萬 車二千乘 栗 腹將而攻鄗 卿秦將而攻代 廉頗爲趙將破殺栗腹 虜卿秦 樂間奔趙. 96) 史記 43 趙世家. (趙孝成王)十六年廉頗圍燕 十七年假相 大將武襄君攻燕 圍其國. 97) 史記 43 趙世家. (趙悼襄王)二年李牧將攻燕 拔武遂ㆍ方城 三年龐煖將 攻燕 禽其將劇辛. 98) 史記 79 范睢蔡澤列傳. 蔡澤者燕人也 遊學于諸侯小大甚衆 不遇. 99) 史記 79 范睢蔡澤列傳. (秦昭王五十年)後二歲 王稽爲河東守 與諸侯通 坐法誅 而應侯日益而 不懌 昭王臨朝歎息 應侯進曰 臣聞主憂臣辱 主辱臣死 今大王中朝而憂 臣敢請其罪 昭王曰 吾聞楚 之鐵劍利而倡憂拙 夫鐵劍利則士勇 倡憂拙則思慮遠 夫以遠思慮以御勇士 吾恐楚之圖秦也 夫物不素 具 不可以應卒 今武安君死 而鄭安平等畔 內無良將而外多敵國 吾是以憂 欲以激勵應侯 應侯惧 不 知所出. 蔡澤聞之 往入秦也. 100) 史記 79 范睢蔡澤列傳. 蔡澤相秦數月 人或惡之 懼誅 乃謝病歸相印 號爲綱成君. 101) 戰國策 秦策五 文信侯欲攻趙以廣河間,章. 文信侯欲攻趙以廣河間 使剛成君蔡澤事燕 三年而 燕太子質于秦. 102) 李成珪, 戰國時代 秦의 外交政策, 古代中國의 理解Ⅱ, 1995年. 103) 史記 86 刺客列傳. 燕太子丹者 故嘗質於趙 而秦王政生於趙 其少時與丹驩.

32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26 웠다. 따라서 燕이 列國의 反秦 합종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燕太子의 秦 入質 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燕太子 丹의 秦 入質은 秦과 燕 양국의 필요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의미는 화평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秦 入質 效果 年 惠 王 更元 11年, 韓宣惠王 19年), 韓太子 倉이 講和 조건으로 秦에 入質하였다. 이로서 秦은 楚 정벌 계획을 시행할 수 있었다. 기원전 312年(惠文王 更元 13年), 秦은 楚를 공격하였다. 먼저 秦의 庶長 章이 楚의 丹陽를 공격하여 楚將 屈丐를 사로잡고, 楚軍 8만을 斬首하였고, 다시 楚의 漢中을 공격하여 漢中郡을 설치 하였다. 이 시기 秦이 楚의 漢中을 점령함으로서 기존의 巴ㆍ蜀 과 秦 본토를 하나 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秦은 楚를 더욱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다. 이러한 秦의 楚 공격에 韓이 秦의 동맹군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에서 秦이 韓太 子 倉을 質子로 받는 조건으로 韓과 화친한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秦은 韓과 군 사 동맹을 맺음으로서 남방의 강국 楚를 도모할 수 있었다. 秦ㆍ韓 양국의 동맹은 韓 太子 倉이 秦에 入質한 지 2年 만에 韓宣惠王이 죽자, 韓太子 倉이 秦의 지지 아래 귀 국하여 韓襄王에 즉위하면서 9 더욱 공고해졌다. 기원전 306年(秦武王 4年, 韓襄王 5 年), 秦武王은 韓襄王과 臨晋 밖에서 회합을 가졌고, 樗里疾을 韓의 相으로 보냈다. 그러나 기원전 307年, 秦이 韓의 宜陽을 함락시킴으로서 秦ㆍ韓 양국 간의 군사 동맹 관계는 깨졌다. 아래의 기사는 秦과 韓 양국의 동맹 관계가 깨진 원인에 대해 실 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기원전 314 (秦 文 104) 105) 106) 107) 108) 10 ) 110) 111) 武王 年 武王 甘茂 말 였 ( 3 ) 이 에게 여한이 없다 라고 하 다.112) 寡人은 容車를 타고 三川을 지나 周王室을 엿보면 죽어도 같이 秦武王은 실제로 周王室을 도모할 생각이 있었다. 기원전 308年(秦 武王 3年), 秦武王은 甘茂와 庶長 封을 시켜 韓의 宜陽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307年 위 기사와 113) 楊寬 上海人民出版社, 1998, pp 志 蜀志. 周愼王五年 秋 秦大夫張儀ㆍ司馬錯ㆍ都尉墨等 從石牛道伐蜀 蜀王自於葭 萌拒之 敗績 王遯走 至武陽 爲秦軍所害 其相傅及太子退至逢鄕 死於白鹿山 開明氏遂亡 凡王蜀十 二世 冬十月 蜀平 司馬錯等因取苴與巴 周赧王元年 秦惠王封子通國爲蜀侯 以陳壯爲相 置巴郡 以 張若爲蜀國守 戎伯尙强 乃移秦民萬家實之 三年 分巴蜀置漢中郡 106) 羅運還, 楚國八百年, 武漢大學出版社, 1992年, ) 李成珪, 戰國時代 秦의 外交政策, 古代中國의 理解Ⅱ, 1995年. 108) 史記 45 韓世家. (韓宣惠王)二十一年與秦共攻楚 敗楚將屈丐 斬首八萬於丹陽. 109) 史記 45 韓世家. (韓宣惠王二十一年)是歲 宣惠王卒 太子倉立 是爲襄王. 110) 史記 5 秦本紀. (秦武王)三年 與韓襄王會臨晋外 南公揭卒 樗里疾相韓. 111) 史記 45 韓世家. (韓襄王)五年秦拔我宜陽 斬首六萬. 112) 史記 5 秦本紀. 武王謂甘茂曰 寡人欲容車通三川 窺周室 死不恨朽矣. 113) 史記 5 秦本紀. (秦武王三年) 其秋 使甘茂ㆍ庶長封伐宜陽. 104), 戰國史, 105) 華陽國 3

33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27 武王 4年), 秦의 甘茂가 마침내 韓의 宜陽을 점령하였다. 秦은 宜陽을 점령한 후 즉시 北으로 黃河를 넘어 武遂를 점령한 후 城을 쌓아 武遂를 관통하는 韓의 南北 要道를 통제하였다. 이 시기 秦의 韓 宜陽 공격은 秦ㆍ韓 양국의 동맹 파기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 에 秦 조정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특히 外家가 韓이었던 樗里疾과 公孫 奭 등이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秦武王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韓의 宜 陽 공격을 단행하였고, 2年에 걸친 공격 끝에 宜陽을 함락시켰다. 秦武王은 宜陽을 함락시킨 후 실제로 周王室을 엿보았다. 秦武王은 樗里疾을 시켜 車 100乘을 이끌고 周王室로 보냈다. 9 그리고 그 자신도 기원전 307年 8월 洛陽에 가서 孟說과 함께 鼎을 드는 比武를 하다가 죽었다. 秦武王이 이렇듯 친히 洛陽에 가서 周鼎을 든 것은 명확히 周天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위 내용을 통해 秦武王의 야망 때문에 秦과 韓의 동맹이 깨졌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03年(秦昭襄王 4年, 楚懷王 26年), 楚의 親秦 정책에 반발한 齊ㆍ韓ㆍ魏 등 은 楚가 反秦 합종 맹약을 파기하였다고 보고, 연합하여 楚를 공격하였다. 楚는 太子 橫을 秦에 入質시키는 조건으로 秦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秦은 이러한 楚의 구원 요 청을 받아들여 客卿 通에게 군사를 이끌고 楚를 구원하게 하자, 3國은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楚太子의 秦 入質로 이루어진 秦과 楚의 양국의 동맹 관계는 다음의 기사와 같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秦 114) 115) 116) 117) 118) 11 ) 120) 121) 122) 楚懷王)27年, 秦大夫와 楚太子가 私鬪를 벌여, 楚太子가 (秦大夫)를 죽이고 도망왔다. ( 123) 楚太子가 秦에 入質한 1年 뒤인 기원전 302年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로 秦ㆍ楚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秦은 楚太子의 죄를 묻기 위 해, 기원전 305年(昭襄王 2年)에 일어났던 季君(公子 壯)의 亂 에 연루된 武王后의 일로 사이가 나빠진 魏와 화해를 시도하였다. 秦昭襄王은 기원전 302年(秦昭襄王 5 위 기사는 124) 125) 記 樗里子甘武列傳. 卒使丞相甘茂將兵伐宜陽 五月而不拔 樗里子ㆍ公孫奭果爭之 武王 召甘茂 欲罷兵 甘茂曰 息壤在彼 王曰 有之 因大悉起兵 使甘茂擊之 斬首六萬 遂拔宜陽. 115) 史記 45 韓世家. (韓襄王)五年 涉河 城武遂. 116) 楊寬, 戰國史, 上海人民出版社, 第3版, 1998年, p ) 史記 71 樗里子甘武列傳. 今臣 羈旅之臣也 樗里子ㆍ公孫奭二人者挾韓而議之 五月而不 拔 樗里子ㆍ公孫奭果爭之. 118) 新書 雜事二. 樗里子及公孫子皆秦諸公子也 其外家韓也. 119) 史記 71 樗里子甘茂列傳. 使樗里子以車百乘入周 周以卒迎之. 120) 史記 5 秦本紀. (秦武王)四年 武王有力 好戱 力士任鄙ㆍ烏獲ㆍ孟說皆至大官 王與孟說擧鼎 絶臏 八月武王死 族孟說. 121) 楊寬, 戰國史, 上海人民出版社, 1998, p ) 史記 40 楚世家. (楚懷王)秦乃遣客卿通將兵救楚 三國引兵去. 123) 史記 40 楚世家. (楚懷王)二十七年秦大夫有私與楚太子鬪 楚太子殺之而亡歸. 124) 史記 5 秦本紀. (秦昭王)二年 彗星見 庶長壯與大臣ㆍ諸公子爲逆 皆誅 及惠文后皆不得良死 悼武王后出歸魏 史記 72 穰侯列傳. 武王卒 諸弟爭立 唯魏冉力爲能立昭王 昭王卽位 以冉爲 將軍 衛咸陽 誅季君之亂 而逐武王后出之魏 昭王諸兄弟不善者皆滅之 威振秦國. 114) 史 71

34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28 年), 魏襄王과 應亭에서 회합을 갖고, 과거 秦이 魏에게서 빼앗은 蒲阪을 돌려주며 군 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에 秦昭襄王은 韓太子 嬰과 臨晋에서 회합하고, 군 사 동맹을 맺었다. 이렇듯 秦은 楚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원전 301年(秦昭襄王 6年, 楚懷 王 28年), 齊ㆍ韓ㆍ魏와 연합하여 楚를 공격하여 楚將 唐昧를 죽이고 楚의 重丘를 빼 앗았다. 秦은 이 여세를 몰아 기원전 300年(秦昭襄王 7年), 楚를 다시 공격하여, 新 城을 함락하고 楚將 景缺을 죽였다. 9 楚는 이러한 秦의 銳鋒을 막기 위해 당시 秦과 연합하여 楚를 공격하던 齊에 6城을 바치고, 太子를 入質시키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 하였다. 기원전 272年(秦昭襄王 35年, 楚頃襄王 27年), 거듭되는 秦의 공격에 굴복하여 楚는 太子 完을 秦에 入質시켜 秦과 동맹을 맺었다. 이때 楚頃襄王은 左徒 黃歇을 太子와 같이 보내 秦에 보내 太子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것은 기원전 302年, 秦에 入質한 楚太子 橫이 秦의 大夫를 죽이고 秦을 단으로 탈출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조치 를 풀이된다. 아래의 기사는 당시 秦이 楚에 대한 공세를 멈추고, 楚太子의 秦 入質로 서 秦ㆍ楚 양국이 화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126) 127) 128) 12 ) 130) 131) 천하에 秦과 楚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들으니 大王께서 지금 楚를 공격하시 려 하신다는데, 이것은 마치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즉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틈을 타서 힘이 약한 개가 그 이익을 볼 것인데 이는 楚와 親善을 유지하 는 것만 못합니다. 대왕께서 楚를 공격하시면, 네 나라 즉 齊ㆍ趙ㆍ韓ㆍ魏가 반드시 대왕에게 대항할 것입니다. 秦과 楚가 오랜 기간 싸우게 되면, 魏는 출병하여 留ㆍ方與ㆍ 銍ㆍ湖陵ㆍ碭ㆍ蕭ㆍ相을 공격하여 옛 宋의 토지는 전부 魏가 차지할 것입니다. 齊는 楚를 공격하여 泗水 유역을 차지할 것입니다. 릇 대왕과 같이 넓은 국토와 많은 백성, 강 한 군대를 지니고 한 번 거사하여 楚와 원수관계를 맺고, 韓과 魏가 귀중한 帝號를 齊에 바치게 하는 것은 대왕의 실책이 아니겠습니까. 소인이 대왕을 위해 생각해 보건데, 楚와 친선을 도모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봅니다. 132) 記 本紀 昭王 二年 彗星見 庶長壯與大臣 諸公子爲逆 皆誅 及惠 后皆不得良死 悼武王后出歸魏 記 本紀 昭王 五年魏王來 亭 復與魏蒲阪 記 六 年表 韓襄王十年太子嬰與 會臨晋 因至咸 而歸 記 本紀 昭襄王 六年庶長奐伐楚 斬首二萬 記 田敬仲完世家 齊湣王 二十三年與 擊敗楚於重丘 記 楚世家 楚懷王 二十八年 乃與齊 韓 魏共攻楚 殺楚 將唐昧 取我重丘而去 記 魏世家 魏哀王 十八年與 伐楚 記 韓世家 韓襄 王 十 年與 伐楚 敗楚將唐昧 9 記 本紀 昭襄王 七年拔 城 記 楚世家 楚懷王 二十九年 復攻楚 大破楚 楚軍死者二萬 殺我將景缺 記 楚世家 楚懷王恐 乃使太子爲 於齊以求 策 楚策二 齊 約攻楚章 齊 約攻楚 楚令景翠以六城賂齊 以太子爲 記 楚世家 楚頃襄王 二十七年 復與 而入太子爲 於 楚使左徒侍太子於 記 春申君 傳 天下莫彊於 楚 今聞大王欲伐楚 此猶兩虎相與鬪 兩虎相與鬪而駑犬 受其獘 不如善楚 且王攻楚之日 四 必悉起兵以 王 楚之兵構而不離 魏氏將出而攻留 方 與 銍 湖陵 碭 蕭 相 故宋必盡 齊人 而攻楚 泗上必擧 夫以王壤土之博 人徒之衆 兵革 之彊 壹擧 而樹怨於楚 遲令韓 魏歸帝重於齊 是王失計也 臣爲王慮 莫若善楚 125) 史 5 秦. (秦 ) ㆍ 文. 126) 史 5 秦. (秦 ) 朝應. 127) 史 15 國. 秦 陽. 128) 史 5 秦. (秦 ) 史 46. ( ) 秦 史 40. ( ) 秦 ㆍ ㆍ 史 44. ( ) 秦 史 45. ( ) 一 秦. 12 ) 史 5 秦. (秦 ) 新 史 40. ( ) 秦. 130) 史 40. 質 平 戰國 ㆍ秦. ㆍ秦 質. 131) 史 40.( ) 秦平 質 秦 秦. 132) 史 78 列. 秦ㆍ 國 應 秦ㆍ ㆍ ㆍ ㆍ ㆍ ㆍ ㆍ 南 事 ㆍ.

35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29 歇 楚를 위해 秦昭襄王에게 유세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강한 秦과 楚가 서로 싸우면, 그 틈을 타 齊가 그 반사 이익을 가진다는 것이다. 당시 秦은 兼倂戰線을 확대시켜, 동쪽으로 三晋ㆍ齊, 남쪽으로 楚와 전투를 벌이는 어려운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방의 강력한 적인 楚가 太子가 入質하는 조건으로 秦에 화평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黃歇의 글은 읽고, 秦昭襄王은 楚太子의 入質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楚와 盟約하였다. 楚와 화평한 秦은 먼저 그 예봉을 齊로 돌렸다. 기원전 271年(秦秦昭王 36年), 秦은 齊를 공격하여 剛ㆍ壽 두 곳을 빼앗았다. 이 전투에 楚軍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楚太子의 秦 入質을 통한 양국 동맹의 효과에 시사되는 바가 있다. 다음으로 秦은 기원전 268年(秦昭襄王 39年), 范睢의 近攻遠交 정책을 받아들여 三晋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秦은 먼저 魏를 공격하여 기원전 268年 魏의 懷를 빼앗았 고, 기원전 266年에는 魏의 邢丘와 懷를 탈취하였다. 秦은 기원전 265年에는 趙 를 공격하여 趙의 3城을 함락시켰다. 秦은 기원전 265年 이후에는 韓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韓의 영토를 倂呑하였다. 9 기원전 272年, 楚太子의 秦 入質로 결성된 秦ㆍ楚 양국의 우호 동맹은 기원전 262年 (秦昭襄王 45年), 楚太子가 귀국하여 楚考烈王에 즉위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고, 양 국의 交戰 기록도 거의 없다. 기원전 247年, 魏의 魏無忌가 5國兵을 거느리고 秦의 函谷關까지 진격하였다. 당 시 魏太子 增은 秦에 入質하고 있었다. 아래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잇다. 위 내용은 黃 이 133) 134) 135) 136) 137) 138) 13 ) 140) 141) 安釐王)30年, 魏無忌가 魏로 돌아와 5國의 군대를 이끌고 ( 격 外 秦을 공 하여, 河 에서 記 本紀. (秦昭王)三十六年客卿灶攻齊 取剛ㆍ壽予穰侯 史記 72 穰侯列傳. (秦) 昭王三十六年 相國穰侯言客卿鼂 欲伐齊取剛ㆍ壽以廣其封邑. 134) 史記 15 六國年表 (齊襄王十四年)秦ㆍ楚擊我剛壽. 135) 史記 79 范睡蔡澤列傳. (范睢)因進曰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則王之寸也 得尺亦王之尺也 今釋此而遠攻 不亦繆乎. 136) 史記 79 范睢蔡澤列傳. 乃拜范睢爲客卿 謀兵事 (秦昭王)卒聽范睢謀 使五大夫綰伐魏拔懷. 137)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四十一年夏攻魏 取邢丘ㆍ懷 138) 史記 43 趙世家. (趙孝成王)元年 秦伐我 拔三城 趙王新立 太后用事 秦急攻之 趙氏求救於 齊 齊曰必以長安君爲質 兵乃出 於是爲長安君約車百乘 質於齊 齊兵乃出. 139) 史記 79 范睡蔡澤列傳. 范睡相秦二年 秦昭王之四十二年 東伐韓少曲ㆍ古平 拔之 史記 5 秦本紀. (秦)昭王四十三年 白起攻韓陘城 拔五城 斬首五萬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四 十四年攻韓南陽 取之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四十五年五大夫賁攻韓 取十城. 史記 73 白起王翦列傳. (秦昭王)四十六年秦攻韓緱氏ㆍ藺 拔之 史記 5 秦本紀. (秦昭王)四十七年秦 攻韓上黨 上黨降趙 秦因攻趙 趙發兵擊秦 相拒 秦使武安君白起擊 大破趙于長平 四十餘萬盡殺之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四十八年十月韓獻垣雍 秦軍分爲三軍 武安君歸 王齕將伐趙武安ㆍ皮 牢 拔之 司馬梗北定太原 盡有韓上黨 正月兵罷 復守上黨 其十月 五大夫陵攻趙邯鄲. 140) 史記 40 楚世家. (楚頃襄王)三十六年頃襄王病 太子亡歸 楚頃襄王卒 太子熊怨代立 是爲考 烈王. 141) 史記 77 魏公子列傳. 秦聞公子在秦 日夜出兵東伐魏 魏王患之 使使王請公子 魏安釐王三十 年 公子使使遍告諸侯 諸侯聞公子將 各遣將將兵救魏 公子率五國之兵破秦軍于河外 走蒙驁 遂乘勝 逐秦軍至函谷關 抑秦兵 秦兵不敢出. 133) 史 5 秦

36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30 격파 蒙驁 쫓 버렸 魏太子 增 두려워 두려 였 떤 增 王 말 公孫喜 魏相 컨 魏軍 신 파 격 십 오 王 노 반드 增 둘 魏王 격 반드 손 될 였 王께 금 太子 增 두 公孫喜 계략 빠 太子 增 환 魏 약 맺 魏 금齊 韓 받 십 오 였 王 소 增 두 않았 秦을 하고 를 아 다. 이 秦에 質로 있었는데 秦이 그를 가 하 다. 어 이가 을 위하여 秦 에게 하기를 가 일찍이 에게 청 대 을 속하게 견하여 秦을 공 하 시. 秦 이 하여 시 을 가 것입니다. 은 또 화가 나서 秦을 공 할 것이고 秦은 시 상 것입니다 라고 하 다. 서 지 을 가 는 것은 의 에 지는 것입니다. 을 대하여 와 화 을 고 로 하여 ㆍ 의 의심을 도록 하 시 라고 하 다. 秦 이 비로 을 가 지 다.142) 魏安釐王 30年은 秦莊襄王 3年에 해당한다. 秦은 魏太子 增이 秦에 入質하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魏를 공략하여 기원전 249年(秦莊襄王 元年)에는 秦의 국경이 魏의 首都 大梁에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247年(秦莊襄王 3年), 秦은 魏의 高都와 汲 을 점령하였다. 따라서 魏太子가 화평을 담보로 秦에 入質하였으나, 이것이 魏에게 는 화평을 보장하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243年(秦王 政 4年)에 秦에서 귀국한 趙太子도 위 기사의 魏太子 增과 비슷 한 시기에 秦에 入質하였으나, 秦은 계속해서 趙를 침략하였다. 기원전 248年(莊襄王 2年), 秦은 趙를 침공하여 太原을 평정하였고, 기원전 247年(莊襄王 3年), 趙의 楡次ㆍ 新城ㆍ狼孟 등을 공격하여 37개 城을 탈취하였다. 비록 秦에 趙太子가 入質하였으 나, 秦은 趙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秦에 入質한 燕太子 丹이 기원전 232年(秦王 政 15年, 燕王 喜 23年), 秦에서 도망쳐 燕으로 돌아갔다. 아래의 기사는 이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143) 144) 145) 얼마 뒤에, 마침 燕太子 丹이 秦에 質子로 가있다가 燕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燕太子 丹은 예전에 趙에 質子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秦王 政이 趙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丹 과 사이가 좋았다. 政이 즉위하여 秦王이 되자 丹이 秦에 質子로 왔다. 秦王이 燕太 子 丹을 잘 대우하지 않자, 丹이 이를 원망하여 도망쳐 돌아왔다. 146) 燕太子 丹은 대략 기원전 244年(秦王 政 3年) 경 秦에 入質하여 秦王 政 15年에 秦 을 도망쳐 燕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위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 質子 로서의 중대한 임를 포기하고 도망쳤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래의 기사는 燕太子 丹이 秦을 탈출한 이유에 시사되는 바가 있다. (秦始皇帝)20年. 燕太子 丹은 秦軍이 燕을 침략해 올 것을 근심하여, 두려운 나머지 荊 軻를 시켜 秦王을 척살하게 하였다. 147) 記 魏世家. (安釐王)三十年無忌歸魏 率五國兵攻秦 敗之河外 走蒙驁.)魏太子增質於秦 恐 欲囚魏太子增. 或爲增謂秦王曰 公孫喜因謂魏相曰 請以魏疾擊秦 秦王怒 必囚增 魏王又怒 擊 必傷 今王囚增 是喜之計中也 故不若貴增而合魏 以疑之於齊ㆍ韓 秦乃止增. 記 本紀. 秦界至大梁. 144) 史記 5 秦本紀. (秦莊襄王)三年 蒙驁攻魏高都ㆍ汲, 拔之. 145) 史記 5 秦本紀. (秦莊襄王)二年使蒙驁攻趙 定太原 三年 攻趙楡次ㆍ新城ㆍ狼孟 取三十七 城 王齕擊上黨 初置太原郡. 146) 史記 86 刺客列傳. 居頃之 會燕太子丹質秦亡歸燕 燕太子丹者 故嘗質於趙 而秦王政生於趙 其少時與丹驩 及政立爲秦王 而丹質於秦 秦王之遇燕太子丹不善 故丹怨而亡歸. 147) 史記 5 秦本紀. (秦始皇帝)二十年燕太子丹患秦兵至國 恐 使荊軻刺秦王. 142) 史 44 秦 秦 秦 143) 史 5 秦

37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31 王 政은 기원전 238年(秦王 政 9年)에 親政을 선포하였고, 기원전 237年(秦王 政 10年)에 相國이었던 呂不韋를 면직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9 이를 바탕으로 秦王 政은 계속해서 강력한 六國兼倂戰을 수행했다. 이러한 秦의 강한 압박에 燕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 燕太子 丹은 秦을 탈출하 여 燕으로 돌아갔다. 秦이 燕太子 丹의 入質을 허용한 것은 燕은 秦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공격이 불가능하였고, 때문에 燕이 기타 列國과 연합할 여지를 막 기 위함이었다. 燕은 太子 丹을 秦에 入質시킴으로서 秦의 직접적인 압박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32年(秦王 政 15年) 쯤 되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燕 역 시 秦의 戰禍에서 피할 방법이 없어졌다. 이것은 더 이상 燕太子 丹의 秦 入質이 燕의 평화를 담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秦 148) 14 ) 150) Ⅲ. 秦의 列國으로의 出質 子 파견된 인물은 기원전 328年 魏에 質子로 간 公子 繇였다. 아래의 기사는 公子 繇가 魏로 出質한 내용을 잘 전하고 있다. 戰國時代 최초로 秦에서 列國으로 質 로 惠王 年 公子 王 말 魏 금 張儀와 함께 蒲陽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았다. (張)儀가 돌려주었고, 公子 繇를 魏에 質子로 보냈다. 秦 10, 華로 하여 秦( )에게 하여 다시 에게 151) 惠王 10年은 魏襄王 7年에 해당한다. 魏襄王시기(기원전 334年-318 年), 魏는 秦의 강한 공격을 받았다. 魏襄王 5年(기원전 330年, 秦惠文君 8年), 秦은 魏 의 雕陰을 빼앗고, 焦ㆍ曲沃을 포위하였다. 魏襄王 6年(기원전 329年), 秦은 다시 河西에서 黃河를 넘어 魏의 汾陰과 皮氏를 점령했다. 그리고 魏襄王 7年(기원전 328年), 위 기사와 같이 秦이 公子 華와 張儀를 파견하여 魏의 蒲陽을 공격하여 빼앗 았다. 이러한 秦의 강한 압박에 魏는 주로 영토를 割壤하는 조건으로 화의를 청하였 다. 魏襄王 3年(기원전 332年, 秦惠文君 6年), 魏는 陰晋을 秦에 할양하고 강화를 청하 였다. 魏襄王 5年(기원전 330年)에도 魏는 河西지역을 秦에 헌납하였다. 魏襄王 위 기사의 秦 152) 153) 154) 155) 156) 記 始皇本紀. (秦始皇帝九年)四月上宿雍 己酉王冠 帶劍. 9 記 始皇本紀. (秦始皇帝)十年相國呂不韋坐嫪毐免. 記 始皇本紀. (秦始皇帝)十年 王翦ㆍ桓齮ㆍ楊端和攻鄴 取九城 取鄴安陽 桓齮 將 十三年 桓齮攻趙平陽 殺趙將扈輒 斬首十萬 王之河南 十月 桓齮攻趙 十四年 攻趙軍於平陽 取宜安 破之 殺其將軍 桓齮定平陽ㆍ武城 十五年 大興兵 一軍至鄴 一軍至太原 取狼孟 地動. 151) 史記 70 張儀列傳. 秦惠王十年 使公子華與張儀圍蒲陽 降之 儀因言秦復與魏 而使公子繇質 於魏. 152) 위 기사의 秦惠王 10年은 秦惠文君이 기원전 325年 稱王하기 이전인 秦惠文君 在位 10年을 말한다. 史記 5 秦本紀 에는 (秦惠文君)十四年更爲元年 라고 적고 있다. 153) 史記 44 魏世家. (魏襄王)五年秦敗我龍賈軍四萬五千于雕陰 圍焦ㆍ曲沃 予秦河內地 史記 71 樗里子甘茂列傳. 秦惠王八年 爵樗里子右更 使將而伐曲沃 盡出其人 取其城 地入秦. 154) 史記 5 秦本紀. (秦惠文君)九年 渡河 取汾陰ㆍ皮氏. 148) 史 6 秦 14 ) 史 6 秦 150) 史 6 秦

38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32 年 年 魏가 上郡 전체를 秦에 넘겼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위 기사와 같이 勝戰國인 秦이 敗戰국인 魏에 빼앗았던 땅을 돌려주고, 公子 繇를 質子로 삼아 魏에 보냈다는 것은 戰國時代 列國의 交質 사례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質子를 보내는 경우는 패전국이 승전국에 화친을 청하거나,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병을 요청하거나, 약소국이 강대국에 평 화 담보 조건 등으로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원전 314年(秦惠文王 更元 11年, 韓宣惠王 19年), 岸門에서 秦에 패한 韓이 太子 倉을 秦에 入質시켜 화친을 청한 경우 나, 기원전 303年(楚懷王 26年), 齊ㆍ韓ㆍ魏 3국의 침공을 받은 楚가 秦에 구원을 요청 하는 조건으로 秦에 質子로 보낸 太子 橫의 경우, 그리고 기원전 272年(楚頃襄王 27 年), 秦ㆍ楚 평화를 담보로 秦에 入質 楚太子 完의 경우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위 기사와 같이 기원전 328年(秦惠文君 10年, 魏襄王 7年) 秦에서 魏로 出質 한 秦公子 繇의 경우는 戰國時代 列國의 통상적인 交質 행위에서 벗어난 사례로서, 다 른 정치적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秦은 이듬해인 기원전 327年(秦惠文君 11年, 魏襄王 8年)에도 과거 魏로부터 빼앗은 焦ㆍ曲沃 및 皮氏도 魏에 돌려주었다. 아래의 기사는 이 시기 秦의 이러한 행위에 시사되는 바가 있다. 7 (기원전 328 )에는 157) 158) 惠 君 年 惠文王 元年으로 바꾸었다. ( 文 )14, 9 15 ) 年 惠 君 13年) 4월 戊午日에 秦惠文君이 秦惠文王으로 稱王하는 儀式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秦은 위 기사와 같이 기원전 324년(惠文君 14年)을 秦 惠文王 元年이라고 선포하였다. 당시 명목상이지만 周王(周顯王 45年)이 존재하는 가 운데서 秦惠文君의 이러한 稱王 행위는 列國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기원전 334 年(魏襄王 元年, 齊威王 9年), 魏惠王과 齊威王은 齊의 徐州에서 서로 稱王을 승인하는 소위 徐州相王 회합을 가졌다. 양국의 이러한 행위는 列國의 공분을 가져왔다. 趙肅侯가 派兵하여 魏의 黃을 포위ㆍ공격하였다. 楚威王 또한 魏ㆍ齊 양국의 徐州 相王 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徐州를 포위하여 齊將 申縛 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따라서 위 기사와 같이 秦惠文君이 稱王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列國의 승인이 필 秦은 기원전 325 (秦 文 160) 161) 162) 163) 記 15 六國年表. (秦惠文君六年)魏以陰晉爲和 命曰寧秦. 記 15 六國年表. (秦惠文君八年)魏入河西地於秦. 記 15 六國年表. (秦惠文君十年)魏納上郡. 記 15 六國年表. (魏襄王八年)秦歸我焦ㆍ曲沃. 9 記 5 秦本紀. (惠文君)十四年更爲元年. 記 15 六國年表. 秦惠文王十三年四月戊午 君爲王. 記 44 魏世家. (魏)襄王元年與諸侯會徐州 相王也 史記 4 田敬仲完世家. (齊宣王)九 年與魏襄王會徐州 諸侯相王也. 162) 史記 43 趙世家. (肅侯)十七年 圍魏黃 不克 築長城. 163) 史記 15 六國年表. (楚威王七年)圍齊於徐州 (齊宣王十年)楚圍我徐州 史記 40 楚世家. (楚威王)七年齊孟嘗君父田嬰欺楚 楚威王伐齊 敗之于徐州 史記 75 孟嘗君列傳. (齊宣王十 年) 楚伐敗齊師于徐州 而使人逐田嬰 田嬰使張丑說楚威王 威王乃止. 155) 156) 157) 158) 15 ) 160) 161) 史 史 史 史 史 史 史

39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33 했 던 魏의 승인은 필수적이었다. 이에 秦惠文君은 기원전 328年에 魏에게서 빼앗은 蒲陽을 魏에 돌려주고, 公子 繇를 魏로 出質시켜 양국의 평 화를 담보하려 하였다. 더하여 이를 증명하기 위해 기원전 327年에는 과거 魏로부터 빼앗은 焦ㆍ曲沃 및 皮氏 등을 魏에 돌려주었던 것이다. 秦의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秦惠文君의 稱王 儀式 준비 단계로 볼 수 있다. 즉, 당 시 秦이 가장 많이 공격하였던 魏의 협조 및 승인을 얻기 위해 秦은 魏와 화친하고, 魏를 더 이상 침략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표명하기 위해 公子 繇를 魏에 質子로 보냈 던 것이었다. 秦惠文君이 稱王한 이후 魏와 韓을 비롯한 列國들이 모두 稱王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秦惠文君의 王號를 秦이 列國에게 승인받는 동시에 魏ㆍ韓 등 列國 의 王號를 秦이 승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인물은 惠文王의 아들인 公子 稷이었다. 아래의 기사는 燕에 質子로 갔던 公子 稷이 秦으로 귀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 다. 특히 주요 交戰國이었 164) 武王 年 武王 죽었다. 孟說은 族刑을 당하였다. 武王은 魏女를 王后로 맞 였 武王의 異腹동생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昭襄王이다. 昭襄王의 母 楚人 姓 羋氏였 宣太后라고 불렀다. 武王이 죽었을 때 昭襄王은 燕에 質子로 燕人 즉 돌려보내 즉위할 수 있었다. (秦 ) 4, 8月에 이 이하 으나 아들이 없었다. 는 으로 은 고 가 있었는데 들이 시 165) 公子 稷이 언제 燕에 質子로 갔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燕에 質子로 갔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307年(秦武王 4年), 周王室을 도모하던 秦武 王이 周都 洛陽에서 죽었다. 秦武王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秦武王의 여러 형제들이 秦 의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秦武王의 부친인 秦惠文王에게는 秦武王 외에도 후에 季君 이라 僭稱하였던 公子 壯을 비롯하여 公子 稷(후의 昭襄王)ㆍ公子 悝ㆍ公子 市 등 여러 자식들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秦의 왕위계승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인물로서는 惠文后와 武王后 등이 있었다. 또한 公子 稷ㆍ公子 悝ㆍ公子 市 의 모친인 羋八子는 先代가 楚 출신으로 비록 惠文王의 正后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동생이었던 魏冉ㆍ羋戎 등과 함께 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으로 秦에 존재하였다. 9 秦武王은 正后인 惠文王后 소생의 적자로서 秦의 왕위 계승에는 아 문제가 없었 고, 부친인 秦惠文王의 위업을 이어 받아 변경을 안정시키고, 周王室을 도모하려는 위 기사를 통해 166) 167) 168) 16 ) 170) 記 本紀 惠 王 十三年四月戊午 秦君爲王 魏ㆍ韓亦爲王 史記 5 秦本紀. 顯王 四十四年 惠王稱王 其後諸 皆爲王. 記 本紀 武王 八 武王死 族孟說 武王取魏女爲后 無子 立異母弟 是爲昭襄王 昭襄王母楚人 姓羋氏 號宣太 武王死 昭襄王爲質于燕 燕人送歸 得立. 記 穰 傳 武王卒 諸弟爭立 唯魏冉力爲能立昭王 昭王卽位 以冉爲將軍 衛咸陽 誅 季君之亂 而逐武王后出之魏 昭王諸兄弟不善者皆滅之 威振秦國. 167) 史記 5 秦本紀. (秦昭王)二年 彗星見 庶長壯與大臣ㆍ諸公子爲逆 皆誅 及惠文后皆不得良死 悼武王后出歸魏. 168) 史記 72 穰侯列傳. 魏冉者 秦昭王母宣太侯弟也 其先楚人 姓羋氏. 169) 盧鷹, 穰侯魏冉新論, 人文雜志, 1998年 3期. 170) 史記 5 秦本紀. (秦)武王元年與魏惠王會臨晋 誅蜀相莊 張儀ㆍ魏章皆東出之魏 伐義渠ㆍ丹 ㆍ犁 史記 45 韓世家. (韓襄王)五年秦拔我宜陽 斬首六萬 涉河 城武遂. 164) 史 5 秦. (秦 文 ) (周 ) 秦 侯 165) 史 5 秦. (秦 ) 月 侯 時 166) 史 72 侯列.

40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34 망 드러냈으나, 그가 秦王으로 즉위할 때의 나이가 겨우 19세였다. 당시 秦의 권력 구도로 볼 때, 비록 秦武王의 王權은 강고하였으나, 秦武王이 周王室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外征하는 과정에서 국내에 있던 羋八子 세력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특히 羋八子의 同母異父弟인 魏冉은 惠文王과 武王 시기에 官職에 나간 賢能했던 인 물이었다. 이에 秦武王은 이들 羋八子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秦에서 멀리 떨 어진 燕에 羋八子의 장남인 公子 稷을 質子로 보내 이들의 구심점을 제거하였던 것이 다. 公子 稷이 19세의 나이로 秦王이 되었다는 기사를 통해, 燕 入質 당시 公子 稷 의 나이는 대략 15세 전후였을 것이다. 公子 稷의 出質國이 燕이었던 것은 당시 三晋 은 秦의 주 공략 대상국이었고, 齊는 강대국이었고, 楚는 公子 稷의 모친인 羋八子의 선조의 나라였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公子 稷이 質子로 갔던 燕은 秦武王시기 秦의 공략 대상이 아니었다. 秦과 燕은 지 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秦으로서는 군사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엇보다 당 시 秦武王의 주관심사는 周王室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秦武王은 韓을 공략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公子 稷의 燕 入質은 당시 위험 세력이었던 羋八 子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秦의 대외 정책인 近攻遠交 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인물은 기원전 300年(秦昭襄王 7年) 齊에 質子로 간 秦昭襄王의 親弟인 涇陽君 公子 市였다. 아래 기록은 涇陽君 公子 市의 出質 내용 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야 을 171) 172) 173) 174) ① (秦)昭王 7年, 樗里子가 죽었다. 涇陽君을 齊에 質子로 보냈다. ② 秦昭王은 그 현명함을 듣고, 이에 먼저 涇陽君을 齊에 質子로 보내 孟嘗君을 만날 것을 구하였다. 175) 176) ①ㆍ②와 같이 秦昭襄王은 涇陽君 公子 市를 齊에 質子로 보내 孟嘗君을 청하였다. 비록 이러한 秦昭襄王의 계획은 처음에 실패하였으나, 위의 涇陽君 公子 위 기사 177) 記 6 秦始皇本紀. 悼武王生十九年而立 立三年. 記 5 秦本紀. (秦武王)初置丞相 樗里疾ㆍ甘茂爲左右丞相 (秦武王)四年拔宜陽 斬首六 萬 涉 城武遂 魏太子來朝 武王有力 好戱 力士任鄙ㆍ烏獲ㆍ孟說皆至大官. 記 72 穰侯列傳. 魏冉者 秦昭王母宣太侯弟也 其先楚人 姓羋氏 秦武王卒 無子 立其弟爲 昭王 昭王母號羋八子 及昭王卽位 羋八子號爲宣太后宣太后 宣太后非武王母 武王母號曰惠文后 先 武王死 宣太后二弟 其異父長弟曰穰侯 姓魏氏 名冉 同父弟曰羋戎 爲華陽君 而昭王同母弟曰高陵 君 涇 君. 而魏冉最賢 自惠王武王時 任職用事. 記 5 秦本紀. (秦昭王)三年王冠 與楚王會黃棘 與楚上庸 史記 6 秦始皇本紀. 昭襄王 生十九年而立 立三年. 175) 史記 72 穰侯列傳 (秦)昭王七年樗里子死, 而使涇陽君質于齊. 그러나 秦本紀 에는 昭襄王 6年, 涇陽君이 齊에 質子로 갔다고 적고 있어, 涇陽君의 出質시기에 있어서 1年의 시차가 있다( 史記 5 秦本紀. (昭襄王)六年 涇陽君質于齊). 176) 史記 75 孟嘗君列傳. 秦昭王聞其賢 乃先使涇陽君爲質于齊 以求見孟嘗君. 177) 史記 75 孟嘗君列傳. 秦昭王聞其賢 乃先使涇陽君爲質于齊 以求見孟嘗君 孟嘗君將入秦 賓 171) 史 172) 史 河 173) 史.. ㆍ 陽 174) 史

41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35 出質 역시 일반적인 交質 행위에서 벗어난 매우 특이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위 기사 ②처럼 단순히 齊의 孟嘗君 田文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秦昭襄王이 孟嘗 君과의 만남을 청하기 위해 자신의 친 동생인 涇陽君 公子 市를 齊에 質子로 보냈다 는 사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質子란 어떤 정치ㆍ외교적 목적 하에 상대국 에 파견되었고, 그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거나 쌍방 간의 신뢰가 너질 때 비참한 최 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당시 涇陽君 公子 市의 齊 入質 역시 정 치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기원전 306年(楚懷王 23年), 楚는 秦과 동맹을 맺지 않고, 齊湣王와 合縱하고 韓과 친선관계를 맺었다. 9 그러나 그해 秦武王이 죽고, 楚 출신인 羋八子 소생의 公子 稷 이 秦王으로 등극하자, 楚懷王은 기존의 反秦정책에서 親秦정책으로 돌아섰다. 기원전 304年(秦昭襄王 3年, 楚懷王 25年), 秦ㆍ楚 양국은 黃棘에서 結盟하였고, 秦은 과거 楚 에게서 빼앗아간 上庸을 楚에 돌려주었다. 楚와 우호 맹약을 맺은 秦은 기원전 303年 (秦昭襄王 4年), 魏를 공격하여 蒲阪ㆍ晋陽ㆍ封陵 등을 빼앗았고, 동시에 韓의 武遂 를 점령하였다. 秦의 군사 압박을 받은 魏와 韓은 기원전 303年(魏哀王 16年, 韓襄王 9年)에 齊와 합종하고 楚가 맹약을 어겼다고 하여, 연합 출병하여 楚를 공격하였다. 수세에 몰린 楚는 太子 橫을 秦에 質子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02年(秦昭襄王 5年, 楚懷王 27年) 秦에 質子로 가있던 楚의 太子 橫이 私鬪 중에 秦의 大夫를 죽이고 楚로 다시 돌아오는 사건으로 楚와 秦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기원전 301年, 秦은 齊ㆍ魏ㆍ韓과 함께 楚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300년, 秦은 재차 楚를 공격하였다. 齊 ㆍ秦 양국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자, 楚懷王은 齊와 화친을 하기 위해 여섯 개의 城을 齊에 뇌물로 주고 太子 橫을 齊에 質子로 보냈다. 이에 秦도 涇陽君 公子 市를 齊에 質子로 보내는 조건으로 齊와 楚의 동맹을 막으려는 한편 秦과 齊의 결맹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齊의 孟嘗君을 秦相으로 청하였던 것이다. 市의 178) 17 )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客莫欲其行 諫 不聽. 策 策五 樓啎約秦魏章. 樓啎約秦魏 魏太子爲質 紛强欲敗之 謂太后曰 國與還者也 敗 而利魏 魏必負之 負秦之日 太子爲糞土也. 9 記 楚世家. (楚懷王)二十三年齊湣王欲爲從長 惡楚之與秦合 乃使使遺楚王書曰 於 是懷王許之 竟不合秦 而合齊以善韓. 180) 史記 15 六國年表. (魏哀王)十六年 秦拔我蒲阪ㆍ晋陽ㆍ封陵. 181) 史記 15 六國年表. (韓襄王)九年 秦取武遂. 182) 史記 15 六國年表. (魏哀王十八年)與秦擊楚 (韓襄王十一年)與秦擊楚 (楚懷王二十八年)秦 ㆍ韓ㆍ魏ㆍ 齊敗我將軍唐昧於重丘 (齊湣王二十三年)與秦擊楚 使公子將 大有功. 183) 史記 40 楚世家. (楚懷王)二十九年秦復攻楚 大破楚 楚軍死者二萬 殺我將景缺. 184) 史記 15 六國年表. 齊湣王二十三年與秦擊楚 使公子將 大有功 史記 46 田敬仲完世家. (齊湣王)二十三年 與秦擊敗楚于重丘. 185) 戰國策 楚策二. 齊秦約攻楚章. 齊秦約攻楚 楚令景翠以六城賂齊. 186) 史記 40 楚世家. 懷王恐 乃使太子爲質于齊以求平. 187) 史記 5 秦本紀. (秦昭王)九年 孟嘗君薛文來相秦 史記 46 田敬仲完世家. (齊湣王)二 十五年 歸涇陽君于秦 孟嘗君薛文入秦 卽相秦 文亡去 史記 75 孟嘗君列傳. 齊湣王二十五年 復卒使孟嘗君入秦 昭王卽以孟嘗君爲秦相. 178) 戰國 秦 秦 17 ) 史 40

42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36 네 번째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인물은 悼太子였다. 悼太子는 아래와 같이 기원 전 267年(秦昭襄王 40年, 魏安釐王 10年) 魏에서 죽어서 돌아왔다. 昭襄王)40年, 悼太子가 魏에서 죽어 돌아와 芷陽에 안장했다. (秦 188) 太子가 列國에 出質한 유일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昭襄王시기 (기원전 306年-기원전 251年), 秦은 三晋 특히 魏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昭襄王 21 年(기원전 286年), 魏의 河內를 공격하였고, 9 昭襄王 32年(기원전 275年), 穰侯 魏冉 이 魏의 수도 大梁을 포위하였고, 9 昭襄王 33年, 魏의 卷ㆍ蔡陽ㆍ長社 등을 빼앗았 다. 9 이러한 秦의 강한 군사 공격을 받은 魏는 南陽을 할양하여 秦에 강화를 청하였 고, 秦은 昭襄王 35年, 처음으로 南陽郡을 설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秦의 太子가 魏 에 質子로 갔다가 昭襄王 40年 魏에서 죽어서 秦에 돌아왔다는 위 기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戰國 말기 秦의 강한 군사적 압박을 받은 魏ㆍ趙ㆍ燕 등의 국가에서 쌍방의 평화 담보를 조건으로 魏太子 增ㆍ趙太子ㆍ燕太子 丹 등을 秦에 入質시켰다. 여기에서 왜 강대국인 秦이 약소국이었던 魏에 質子를 그것도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太子를 入質시 켰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아래의 기사는 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위 기사는 秦에서 18 ) 1 0) 1 1) ① 秦昭王 36年 相國 穰侯가 客卿 鼂와 더불어 의논하여 齊를 공격하여 剛ㆍ壽 두 곳을 빼앗아 자신의 封邑을 더욱 확장하려 하였다. 9 ② (秦昭王) 36年 客卿 鼂가 齊를 공격하여 剛ㆍ壽를 빼앗아 穰侯에게 주었다 ) 1 3) ①ㆍ②를 통해 昭襄王 36年(기원전 271年)부터 秦의 對外兼倂戰線이 三晋에 서 齊로 그 대상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穰侯 魏冉의 封邑 확대 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穰侯 魏冉은 秦惠文王의 後妃인 羋八子의 同母異父弟이자 秦昭襄王의 외삼촌으로, 秦昭襄王 7年(기원전 300年), 12年(기원전 295年), 16年(기원전 291年), 19年(기원전 288年), 26年(기원전 281년) 다섯 차례에 걸쳐 秦相을 역임하였 던, 9 당대의 權臣이었다. 위 기사 1 4) 記 本紀 昭襄王 四十年悼太子死魏 歸葬芷 記 本紀 昭襄王 二十 年錯攻魏 內 魏獻安邑 出其人 募徙 東 赦罪人遷之 記 穰 傳 穰 封四歲 爲 將攻魏 魏獻 東方四百里 拔魏之 內 取城大小六十餘 9 記 本紀 昭襄王 三十二年 相穰 攻魏至大梁 破暴鳶 斬首四萬 鳶走 魏入三縣以 和 記 魏世家 魏安釐王 二年 又拔我二城 軍大梁下 韓來救 予 溫而和 記 穰 傳 昭王 三十二年 穰 爲相 將兵攻魏 走芒卯 入 宅 遂圍大梁 9 記 本紀 昭王 三十三年客卿胡傷攻魏卷 蔡 長社 取之 記 魏世家 魏安釐王 三年 拔我四城 斬首四萬 記 穰 傳 明年 穰 與白起客卿胡 復攻趙 韓 魏 破芒卯于 下 斬首十萬 取魏之卷 蔡 長社 9 記 穰 傳 昭王三十六年 相 穰 言客卿鼂 欲伐齊取剛 壽以廣其封邑 9 記 本紀 昭王 三十六年客卿灶攻齊 取剛 壽予穰 9 記 六 年表 昭王 七年樗里子卒 擊楚 斬三萬 魏冉爲相 記 六 年表 昭王十二年 樓緩免 穰 魏冉爲丞相 記 穰 傳 昭王十六年 燭免 復相冉 乃封 魏冉于穰 復益封陶 號曰穰 記 穰 傳 昭王十九年 魏冉復相 記 188) 史 5 秦. (秦 ) 陽. 18 ) 史 5 秦. (秦 ) 一 河 秦 河 史 72 侯列. 侯 秦 河 河. 1 0) 史 5 秦. (秦 ) 侯 史 44. ( ) (秦) 秦 史 72 侯列 (秦 ). 侯 國 北. 1 1) 史 5 秦. (秦 ) ㆍ 陽ㆍ 史 44. ( ) 秦 史 72 侯列. 侯 陽 ㆍ ㆍ 華陽 ㆍ 陽ㆍ. 1 2) 史 72 侯列. (秦) 國 侯 ㆍ. 1 3) 史 5 秦. (秦 ) ㆍ 侯.. 1 4) 史 15 國. (秦 ) 史 15 國. (秦 ) 侯 史 72 侯列. (秦 ), 侯 史 72 侯列. (秦 ) 秦 史 5 秦 9

43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37 ①ㆍ②를 통해 秦의 齊 공격이 穰侯의 封邑 확대에 있었다고는 볼 수 있으나, 당시 秦 封君의 封邑은 개인의 私有地가 아니라 國家의 法令이 미치는 지역이었고, 당 연히 國家에 納稅 의를 지녔다. 또한 封君의 封邑은 中央政府에서 파견한 相이나 혹 은 守가 다스렸기 때문에 국가의 지배 영역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9 따라서 비록 이 시기 齊 兼倂이 穰侯의 封邑 확대로 볼 수 있으나, 이러한 겸병지역의 확대는 차후 있을 秦의 郡 설치의 전초 단계라고 볼 수 있다. 9 이 시기 秦의 齊 공략은 韓과 魏의 국경을 넘어야할 9 뿐 아니라 韓과 魏의 협조 가 필수적이었다. 魏에 質子로 갔던 悼太子가 언제 魏에 入質하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대략 昭襄王 36年(기원전 271年)에 있었던 秦의 齊 공략 정책과 연관되었을 가 능성은 매우 크다. 이후 昭襄王 39年(기원전 268年)까지 秦ㆍ魏 양국의 交戰 기록은 없다는 이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昭襄王 39年에 秦이 魏의 懷를 공략하였고, 9 昭襄王 40年(기원전 267年)에 悼太子가 魏에서 죽어서 秦으로 돌아왔다. 秦이 魏를 먼저 공격함으로서 交質 행위를 통한 秦ㆍ魏 쌍방 간의 화평은 깨졌다. 이 결과가 悼太子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秦昭襄王 40년에 悼太子가 質子로 가있던 魏에서 죽음으로 양국의 화평은 완전히 깨졌다. 秦은 이듬해인 秦昭襄王 41年(기원전 266年), 다시 魏의 邢丘와 懷를 빼앗았다. 99 그럼 왜 이 시기에 秦은 왜 魏를 공격하였을까. 아래의 기사는 이 시기 秦太子가 魏 에 質子로 가있음에도 불구하고 秦이 魏를 공격한 것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기사 1 5) 1 6) 1 7) 1 8) 1 ) 이에 아 들여 다.200) 范睢를 客卿에 임명하고, 兵事에 관한 일을 상의하였다. 마침내 范睢의 계책을 받 五大夫 綰을 보내 魏를 공격하여 懷를 함락시켰다. 2년 후에는 邢丘를 함락시켰 客卿 范睢는 원래 魏人으로, 秦에 들어와 穰侯를 비롯한 高陵君ㆍ涇陽君 ㆍ華陽君 등 소위 四貴 의 전횡과 부패를 지적하고, 이들이 秦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 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范睢는 穰侯가 齊의 剛ㆍ壽를 공격하기 위해 취한 韓ㆍ魏의 국경을 넘어 齊를 공격하는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范睢는 穰侯 魏冉의 이러 위 기사의 201) 202) 本紀 昭襄王 二十六年赦罪人遷之穰 冉復相 9 拙稿 封君 存在形態 中 硏究 第 輯 年 9 拙稿 中期 發展 魏冉 役割 功過 中 硏究 第58輯, 2009年. 9 記 9 范睡蔡澤 傳 因進曰 夫穰 越韓 魏而攻齊綱壽 非計也 少出師則不足以傷齊, 多出師則害於 9 記 六 年表 魏安釐王 九年 拔我懷城 99 記 本紀 昭襄王 四十 年夏攻魏 取邢丘 懷 記 9 范睢蔡澤 傳 乃拜范睢爲客卿 謀兵 昭王 卒聽范睢謀 使五大夫綰伐魏拔懷 後二歲 拔邢丘 記 9 范睡蔡澤 傳 今太后擅行不顧 穰 出使不報 涇 等擊斷無諱 高陵進退不請 四貴備而 不危者 未之有也 爲此四貴者下 乃所謂無王也 記 9 范睡蔡澤 傳 范睢 因進曰 夫穰 越韓 魏而攻齊綱壽 非計也 少出師則不足以傷 齊 多出師則害於. (秦 ) 侯. 1 5), 戰國時代 列國의, 國史, 73, ), 戰國 秦 에 있어서 의 과 그, 國史, 1 7) 史 7 列. 侯 ㆍ,. 秦. 1 8) 史 15 國. ( ) 秦. 1 ) 史 5 秦. (秦 ) 一 ㆍ. 200) 史 7 列. 事 (秦 ). 201) 史 7 列. 侯 華陽ㆍ 陽 國. 202) 史 7 列. ( ) 侯 ㆍ 秦.

44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38 군사 계책을 비판하며, 소위 近攻遠交 정책을 秦昭襄王에게 유세하였다. 秦昭 襄王이 위의 기사와 같이 范睢의 계책을 받아들여 魏의 懷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즉, 秦의 대외겸병정책이 秦昭襄王 39년 近交遠攻 정책에서 近攻遠交 정책으로 바뀌었 고, 이 정책에 따라 秦은 魏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穰侯 魏冉은 魏와 韓의 협조 아래 齊를 공격하여, 자신의 封邑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리고 평화 담보 조건으로 秦太子를 魏에 入質시켰던 것이다. 그러 나 秦의 대외 정책이 近攻遠交 정책으로 바뀌었고, 이는 穰侯 魏冉의 실각으로 이어 졌다. 穰侯 魏冉의 실각은 秦의 권력 구조의 재편을 의미하였다. 秦의 대외 정 책의 변화로 魏에 入質하였던 秦太子의 質子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다섯 번째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인물은 趙에 質子로 들어간 秦昭襄王의 둘째 아들이었던 安國君이었다. 한 203) 204) 205) 陛下도 일찍이 趙에 軔車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趙의 호걸들과 사귀어 이름을 알고 낸 자가 적지 않습니다. 지금 大王께서 귀국하였고, 모두 서쪽만 바라고 있습니다. 지 206) 軔 은 고대에 수레를 세워놓은 다음 바퀴가 구르지 않도록 바퀴 밑에 넣는 굄목을 지칭하는 것 으로 軔車 는 수레를 멈추었다는 의미이다. 安國君은 秦昭襄 王 40年(기원전 267年)에 秦太子가 質子로 가있던 魏에서 죽어서 돌아오자, 2年 후인 昭襄王 42年(기원전 265年) 秦의 太子가 되었다. 安國君이 悼太子가 죽은 2年 후인 昭襄王 42年에야 비로소 秦의 太子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安國君이 秦에 있지 않았음 을 의미한다. 위 기사를 통해, 安國君이 趙에 머물렀고, 이를 통해 安國君이 趙에 質子 로 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安國君의 趙 入質 배경은 아래의 기사를 통해 엿볼 위 기사의 207) 수 있다. 음 昭王 年 穰 白起 客卿 胡 함께 다시 趙ㆍ韓ㆍ魏를 공격하여 華 芒卯 격파 斬首 였 魏 卷ㆍ蔡陽ㆍ長社 및 趙의 觀津을 빼앗 았 趙 觀津 돌려 趙 兵 더 齊를 치려하였다. 다 해( 34 )에 侯는 와 陽과 陽에서 를 하여 10만 명을 하 고, 의 다. 그리고 에 을 주고 의 을 하여 208) 記 9 范睡蔡澤列傳. (范睢)因進曰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則王之寸也 得尺亦王之尺也 今釋此而遠攻 不亦繆乎. 204) 史記 72 穰侯列傳. 范睡言宣太后專制, 穰侯擅權于諸侯, 涇陽君ㆍ高陵君之屬太侈, 富于王室. 于是秦昭王悟, 乃免相國, 令涇陽之屬皆出關, 就封國. 穰侯出關, 輜車千乘有餘. 穰侯卒于陶, 而因葬 焉. 秦復收陶爲郡. 205) 史記 79 范睡蔡澤列傳. 范睢曰 臣居山東 聞齊之內有田單 不聞其王 聞秦之有太后ㆍ穰侯ㆍ 涇陽ㆍ華陽ㆍ古陵 不聞其王 夫擅國之謂王 昭王聞之大惧 曰 善 於是廢太后 逐穰侯ㆍ高陵ㆍ 華陽ㆍ涇陽君于關外 秦王乃拜范睢爲相 收穰侯之印 使歸陶 因使縣官給車牛以徙 千乘有餘 到關 關 閱其寶器 寶器珍怪多于王室 秦封范睢以應 號爲應侯 當是時 秦昭王四十一年也. 206) 戰國策 秦策五 濮陽人呂不韋買於邯鄲章. 陛下嘗軔車於趙矣 趙之豪杰得知名者不少 今大王 反國 皆西面而望. 207) 史記 85 呂不韋列傳. 秦昭王四十年太子死 其四十二年 以其次子安國君爲太子. 208) 史記 72 穰侯列傳. 明年 穰侯與白起客卿胡陽復攻趙ㆍ韓ㆍ魏 破芒卯于華陽下 斬首十萬 取 魏之卷ㆍ蔡陽ㆍ長社 趙氏觀津 且與趙觀津 益趙以兵 伐齊. 203) 史 7

45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39 겸병전선이 三晋에서 齊로 그 대상이 바뀌었음을 더욱 확 실히 알 수 있다. 위 기사에서 秦이 趙의 觀津을 빼앗은 후 바로 趙에 돌려준 후, 趙 와 동맹하여 齊를 공격하려 하였다는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安國君이 언제 趙에 入質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신분이 秦에서 秦昭襄王의 太子 다음가는 둘째 아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昭襄王 36年 秦이 三晋을 넘어 齊를 겸 병할 당시 悼太子와 더불어 質子로 갔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여섯 번째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인물은 公子 子楚이다. 子楚는 太子인 安國君 위 기사를 통해 秦의 대외 의 여러 아들 중의 한 명이었다.209) 安國君의 아들로서 이름이 子楚인데 子楚의 생모는 夏姬로 그녀는 총애를 받지 못했다. 子楚는 秦의 質子로 趙에 머물렀는데 秦이 여러 차례 趙를 공격하여 趙는 子楚를 크게 우 대하지 않았다. 210) 子楚가 언제 趙에 入質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安國君이 秦의 太子가 된 昭襄 王 42年 이후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昭襄王 40年, 悼太子가 죽은 후 安國君이 質子 신분에서 太子가 되기 위해 秦으로 귀국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安國君을 대신하 여 趙의 質子가 되었어야 했고, 그렇다면 당연히 安國君의 아들 중 한 명이었을 가능 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子楚는 부친인 安國君의 代替 質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 시 秦과 趙의 국력을 감안했을 때, 子楚가 비록 安國君의 아들이기는 하나 위 기사와 같이 子楚의 모친이 安國君의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質子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子楚가 趙에 質子로 있을 당시 秦의 대외겸병전선은 다시 三晋으로 맞춰져 秦에 의한 趙 침략이 많았고, 그래서 趙는 子楚를 크게 우대하지 않았다. 일곱 번째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211) 212) 王 政) 4年, 秦의 質子가 趙에서 돌아왔고, 趙太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秦 213) 昭襄王 48年(기원전 259年)부터 秦이 趙의 수도 邯鄲을 공격하였다. 秦昭襄王 50年(기원전 257年), 秦將 王齮가 邯鄲을 포위하자 趙는 質子였던 子楚를 죽이려 했 다. 子楚는 呂不韋의 도움으로 趙의 관리를 매수하여 趙를 도망쳐 秦으로 귀국할 秦 214) 215) 9 記 呂不韋列傳. 安國君有子二十餘人 安國君有所甚愛姬 立爲正夫人號曰華陽夫人 華陽 夫人無子 安 君中男名子楚 子楚母曰夏姬 毋愛. 記 呂不韋列傳. 安國君中男名子楚 子楚母曰夏姬 毋愛 子楚爲秦質子于趙 秦數攻趙 趙 不甚禮子楚 記 本紀. (秦昭王)四十七年秦攻韓上黨 上黨降趙 秦因攻趙 趙發兵擊秦 相拒 秦使武 安君白起擊 大破趙于長平 四十餘萬盡殺之 四十八年十月韓獻垣雍 秦軍分爲三軍 武安君歸 王齕將 伐趙武安ㆍ皮牢 拔之 司馬梗北定太原 盡有韓上黨 正月兵罷 復守上黨 其十月 五大夫陵攻趙邯鄲 四十九年正月益發卒佐陵 陵戰不善 免 王齕代將. 212) 戰國策 秦策五. 濮陽人呂不韋買於邯鄲章. 王使子誦 少棄損在外 嘗無師傅所敎學 不習於誦. 213) 史記 6 秦始皇本紀. (秦始皇帝)四年 秦質子歸自趙 趙太子出歸國. 214) 史記 5 秦本紀. (秦昭襄王)四十八年 其十月 五大夫陵攻趙邯鄲 四十九年正月益發卒佐陵 陵 戰不善 免 王齕代將 史記 73 白起王翦列傳. (秦昭王)四十八年十月 其九月 秦復發兵 使 五大夫王陵攻趙邯鄲. 20 ) 史 85 國 210) 史 ) 史 5 秦

46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40 年 子楚의 부친인 安國君이 昭襄王의 뒤를 이어 孝文王으로 즉위하자 子楚는 秦의 太子가 되었고, 비로소 子楚의 가족들이 사히 秦으로 귀국 할 수 있었다. 따라서 子楚가 秦으로 도망친 후에도 子楚의 夫人과 아들 政이 여전 히 趙에 質子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9 위 기사에서 나타나는 質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용도는 子楚가 秦의 太子가 된 후 子楚의 가족과 맞교환된 代替 質 子였을 알 수 있다. 수 있었다.216) 기원전 250, 217) 218) 21 ) Ⅳ. 結語 금까지 戰國時代 秦과 列國 간의 交質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연구의 초점 지 행위가 실제 외교 관계에서 효과가 있었는가에 두었다. 지금까지의 연 구를 통하여 확인된 사실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먼저 戰國時代 列國에서 秦으로 入質한 사례와 그 배경을 살펴보았다. 이것을 정리하면, 아래의 <表 1>과 같다. 은 이러한 交質 子名 出質國 倉 韓 橫 楚 郚 趙 完 楚 增 魏 未詳 趙 丹 燕 質 子 身分 太子 太子 公子 太子 太子 太子 太子 質 <表 1> 入質 時期 惠文王 更元 11年 昭襄王 4年 昭襄王 26年 以後 昭襄王 35年 昭襄王 53年 前後 昭襄王 53年 前後 王 政 3年 入質 背景 講和 救援兵 要請 領土 交換 講和 平和 擔保 平和 擔保 平和 擔保 <表 1>을 통해 列國에서 秦으로 入質한 사례는 모두 일곱 차례 확인되고, 入質 한 質子의 신분은 모두 出質國 宗室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趙公子 郚를 제외하고 모두 太子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太子 는 일국의 차기 왕위계승 권자 이다. 실제로 秦에 入質한 韓太子 倉은 후에 韓襄王, 楚太子 橫은 후에 楚頃襄王, 楚太子 完은 후에 楚考烈王, 魏太子 增은 후에 魏景湣王 으로 즉위하였다. 이렇듯 列國의 太子가 秦에 入質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秦 入質을 통해 해결하여야 할 현안이 위 220) 記 85 呂不韋列傳. 秦昭王五十年使王齮圍邯鄲 急 趙欲殺子楚. 記 85 呂不韋列傳. 子楚與呂不韋謀 行金六百斤予守者吏 得脫 亡赴秦軍 遂以得歸. 記 5 秦本紀. (秦昭襄王)五十六年秋昭襄王卒 子孝文王立. 記 85 呂不韋列傳. 秦昭王五十六年薨 太子安國君立爲王 華陽夫人爲王后 子楚爲太子 趙 亦奉子楚夫人及子政歸秦. 219) 史記 85 呂不韋列傳. 趙欲殺子楚妻子 子楚夫人趙豪家女也 得匿 故母子竟得活. 220) 史記 44 魏世家. (爲安釐王)三十四年安釐王卒 太子增立 是爲景湣王. 215) 216) 217) 218) 史 史 史 史

47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41 막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表 1>의 講和ㆍ구원병 요청 등이 그것이었다. 기원전 314年, 秦의 침략을 받은 韓이 秦과 講和하기 위해 秦에 입질한 韓太子 倉, 기원전 303年, 韓ㆍ魏ㆍ齊 3國의 침략을 받은 楚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구원병을 요 청하는 대가로 秦에 入質시킨 楚太子 橫, 기원전 272年, 거듭된 秦의 공세를 이기지 못한 楚가 講和의 조건으로 秦에 入質시킨 楚太子 完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천하가 모두 秦에 귀의한 기원전 254年(秦昭襄王 53年)을 기점으로 列國의 秦 入質은 그 배경이 당면한 현안 해결 에서 出質國의 평화 보장 으로 조건이 바뀌었 다. 즉, 弱小國이 强大國인 秦에 太子를 入質시켜 평화를 보장받으려 했다. 이것은 볼 모 의 성격이 강하였다. 魏安釐王시기 秦에 입질한 魏太子 增, 趙悼襄王시기 秦에 入質 한 趙太子, 燕王喜시기 秦에 入質한 燕太子 丹 등이 모두 이 경우에 해당하였다. 다음으로, 戰國時代 列國에서 秦으로 入質한 사례가 실제로 어느 정도 외교적 효과 가 있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이것을 정리하면, 아래의 <表> 2와 같다. <表 2> 質子名 歸國 시기 入質 效果 韓太子 倉 惠文王 更元 13年 兩國 和親, 軍事 同盟 楚太子 橫 昭襄王 5年 秦 救援兵 도착, 5國兵 철수 趙公子 郚 未詳 未詳 楚太子 完 昭襄王 44年 兩國 和親, 軍事 同盟 魏太子 增 王 政 4年 이전 秦의 魏 공격, 趙太子 王 政 4年 秦의 趙 공격, 燕太子 丹 王 政 15年 未詳 備考 歸國, 韓襄王으로 즉위 入質國인 秦 단 탈출 歸國, 楚頃襄王으로 즉위 歸國, 魏景湣으로 즉위 雙方 交質 入質國인 秦 단 탈출 兼倂戰을 수행하였고, 격변하던 정세를 해결하기 위해 君主 간의 회합, 合縱ㆍ連橫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외교 활동을 하였다. 이를 통해 다양한 형태 의 군사 동맹이 결성되었다. 秦과 列國 간의 交質 행위를 통해서도 다양한 형태의 군 사 동맹이 체결되었다. 기원전 314年, 韓太子 倉의 秦 入質로 이루어진 秦ㆍ韓 군사 동맹, 기원전 272年 楚太子 完의 秦 入質로 이루어진 秦 楚 군사 동맹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交質을 통한 군사 동맹은 쌍방 간의 신뢰를 담보로 하 였다. 기원전 314年. 韓太子 倉이 秦에 入質하는 조건으로 秦ㆍ韓 양국은 군사 동맹을 맺 었다. 韓은 이 동맹으로 秦의 군사적 압박을 피할 수 있었고, 秦은 남방의 대국 楚를 정벌할 때 동맹국 韓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기원전 272年, 楚太子 完의 秦 入 質로 이루어진 秦 楚 군사 동맹으로, 秦은 楚를 공격하던 군대를 三晋으로 돌릴 수 있었고, 楚는 秦의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외에 秦에 入質한 魏ㆍ趙ㆍ燕 등의 국가도 質子의 秦 入質 당시에는 秦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韓太子 倉의 入質로서 형성되었던 기원전 314년의 秦ㆍ韓의 동맹 관계는 강 대국인 秦의 일방적인 동맹 파기로 끝났다. 마찬가지로 楚ㆍ魏ㆍ趙ㆍ燕 등의 국가가 秦과 맺었던 우호 동맹 혹은 군사 동맹은 강대국인 秦에 의해 간단하게 파기되었다. 戰國時代 列國은

48 42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말기 秦은 6國 兼倂과정에서 魏太子 增과 趙太子 등이 秦에 入質하고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들 국가들을 겸병하여,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戰國時代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사례를 정리하면 아래의 <表 3>과 같다. 특히, 戰國 質子名 出質國 公子 繇 魏 公子 稷 燕 公子 市 齊 悼太子 魏 安國君 趙 公子 子楚 趙 未詳 趙 出質 시기 惠文君 10年 武王 元年 昭襄王 7年 昭襄王 36年 昭襄王 36年 昭襄王 42年 孝文王 元年 <表 3> 歸國 시기 出質 배경 및 조건 未詳 惠文君 稱王을 위한 평화담보 武王 4年 羋八子 세력 견제 昭襄王 8年 秦ㆍ齊 우호 동맹 昭襄王 40年 近交遠攻을 위한 우호 동맹 昭襄王 42年 近交遠攻을 위한 우호 동맹 昭襄王 50年 安國君 代替 質子 王政 4年 公子 子楚 代替 質子 <表 3>에서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質子의 신분이 모두 秦 宗室의 일원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심지어 昭襄王 40年 魏에서 죽어서 돌아온 悼太子의 사례를 통해서 국 가의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太子까지도 秦의 당면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質子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秦에서 列國으로의 出質은 秦의 대외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秦은 孝公시기 商鞅을 등용하여 變法을 실시한 후, 과거의 失地를 회복하고 끊임없이 대외팽창을 시 도하였다. 기원전 325年(秦惠文君 13年) 秦惠文君이 秦惠文王 稱王을 하였다. 秦惠文君 이 稱王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公子 繇를 魏에 質子로 보내 기존의 秦과 魏의 交 戰 상태에서 평화를 담보하였던 사실은 秦의 대외 정책에 質子가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적절하게 이용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昭襄王 7年(기원전 300年) 齊의 孟嘗君을 청하기 위해 齊에 質子로 간 涇陽君 公子 市의 경우는 이러한 사례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秦과 齊의 공격을 받던 楚 가 기원전 300年(楚懷王 29年) 楚太子 橫을 齊에 보내 화친을 청하자, 秦은 涇陽君 公 子 市를 齊에 質子로 보내 齊와 楚의 동맹을 막으려는 한편 齊와 秦의 군사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齊의 실력자 孟嘗君을 진상으로 초청하였다. 특히, 秦昭襄王 36年(기원전 271年), 穰侯 魏冉의 주도 아래 秦의 대외겸병전이 近 交遠攻 으로 바뀌면서 이들 質子의 외교적 효용 가치는 더욱 커졌다. 穰侯 魏冉은 三 晋을 넘어 齊를 공략하려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三晋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秦은 太子와 秦昭襄王 둘째 아들인 安國君을 각각 魏와 趙에 質子로 보내는 강 수를 두어 魏ㆍ韓 양국의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나 秦昭襄王 39年(기원전 268年) 范睢의 건의로 秦의 대외정책이 近交遠攻 에서 近攻遠交 로 바뀌었다. 秦은 昭襄王 39년, 秦의 太子가 魏에 質子로 있음에도 불구하 고, 魏의 懷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또한 秦公子 子楚가 趙에 質子로 가있음에도 秦 은 계속해서 趙를 공격하여 長平에서 趙軍 40만을 죽이고, 趙의 수도 邯鄲을 포위 하였다. 위 221)

49 戰國時代 秦과 列國의 交質 事例 (李容一) 43 책 완전히 征服戰으로 돌입하였음을 의미하고, 더 이상 質子를 통한 외교는 효용 가치가 없어졌음을 보여준다. 비록 安國君의 代替 質子로 秦公子 子 楚가 趙에 質子로 갔고, 秦公子 子楚가 秦의 太子가 된 후, 趙에 억류되어 있던 子楚 의 가족을 대신하여 秦에서 누군가가 趙로 代替 質子로 갔으나, 이것은 列國의 통상적 인 交質 행위로, 이전에 秦이 列國에 質子를 파견하여 어떠한 특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戰國時代 列國은 講和ㆍ구원병 요청ㆍ평화 담보 등의 조건으로 秦에 入 質하였다. 즉, 列國은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자국의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太子 를 주로 秦에 入質시켰다. 이것은 列國이 秦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秦 入質 이라는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列國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合縱ㆍ連橫의 다양한 형태의 외교 활동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質子들은 이러한 외교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로 우호 군사 동맹이나 평화 담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質子의 존 재는 兼倂戰을 위시한 힘의 논리가 지배한 戰國時代 외교 관계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戰國 중기 이후, 秦과 列國 간의 交質 행위는 대부분 강대국인 秦을 중심으로 한 외교 관계였고, 비록 이러한 交質 행위가 일시적으 로 평화를 담보할 수 있었으나, 秦의 이해관계에 의한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었다. 이 것은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秦과의 交質에서 列國의 秦 入質이 가지고 있던 외교적 한 계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秦에서 列國으로 出質한 質子의 성격은 통상적인 列國의 交質 행위와는 내용 이나 성격이 매우 달랐다.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화친 요청이나 구원병 요청 등의 성격 을 띠지 않았고, 秦이 당면한 정치ㆍ외교ㆍ군사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특수한 수단 으로 사용되었다. 秦公子 繇는 稱王을 위한 수단으로, 秦公子 市는 齊와 楚의 同盟을 막는 수단으로, 悼太子와 安國君의 경우는 秦의 近交遠攻 정책 운용을 위한 우호 동 맹의 대가로, 그리고 秦公子 子楚는 代替 質子의 의미를 띠었다. 이는 秦의 대외 정 이 記 秦本紀. (秦昭王)四十七年秦攻韓上黨 上黨降趙 秦因攻趙 趙發兵擊秦 相拒 秦使武 安君白起擊 大破趙于長平 四十餘萬盡殺之. 221) 史 5

50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朝淸關係史 연구에 있어서 滿文史料의 중요성에 관한 試論- 려 윤 욱 (고 대) 머리말 資料의 紹介 漢文史料와의 關係 1) 同文彙考 2) 淸朝의 漢文記錄 Ⅳ. 滿文月摺包를 이용한 硏究事例 1) 잊혀진 恒祿의 國境巡視 旅行 2) 乾隆11年 莽牛哨 事件의 眞實 V. 맺음말 Ⅰ. Ⅱ. Ⅲ. I. 머리말 현재 국내외의 淸代史 학계에서는 이제까지 한문자료에 의존한 역사서술에서 벗어 나 淸帝國을 지배했던 滿洲族의 문자인 滿洲語로 남긴 사료, 특히 관청에서 문서의 전 달과 보관을 위해 작성했던 滿文檔案에 주목하고 있다. 사실, 가장 많은 淸代檔案을 보유하고 있는 북경 中國第一歷史檔案館 (이하 一史館 )에 있는 천만 건에 달하는 당 안자료 가운데 20%가 滿文檔案이며, 遼寧省檔案館, 黑龍江省檔案館 등 內蒙古, 滿洲 지역의 檔案館에도 상당량의 滿文檔案이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滿 文檔案의 중요성이 이제 와서 비로소 학자들 간에 널리 공감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 체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이 滿文檔案은 주로 한문자료에만 의존했던 청대사에 대한 시각을 수정하고, 한문사료의 공백을 보완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Elliott 2001, 2; Bartlett 1985, 33). 특히, 청 중기까지 만주, 몽고, 신강, 티벳 등 청대 변경지역의 청조관원들이 만주어를 주된 기록 수단으로 사용했으므로 滿文檔案은 청대 변경사 연 1) 2) 中 第 館 9 얼빈 龍江 館 월 M 吳元豊 트 M l 館 량 釋 권 國 一歷史檔案 1 85, 3쪽; 2002, 171쪽. 一史 의 滿文檔案의 수 은 전국에 분산 보관되어 있는 滿文檔案의 80퍼센 에 해당한다. 朝滿文硃批奏摺全, 상, 2쪽. 2) 하 의 黑 省檔案 에만 60톤의 滿文檔案이 되어 있다. (, 일, anchu Language Lives ost y in Archives. ) 1) 雍正 소장 New York Times 년

51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45 필수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朝鮮은 청대에 吉林將軍, 盛京將軍의 관할지와 연접해 있었다. 吉林, 盛京將軍衙門의 관원은 장군이하 다수가 만주족 관원이었으므로 두 아문의 관할지역에서 그리고 두 아문과 중앙정부 사이에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오갔던 상당량의 문서도 - 특히 건륭연 간 이전의 문서가 - 만주어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들 滿文檔案은 조선시대 韓中關係 에 관한 연구에 진귀한 자료를 제공하리라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국 내외의 역사학계는 이들 조선 관련 滿文檔案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 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조청관계사에 관해 수많은 글들이 발표되었지만, 滿文檔案에 기초해 쓴 글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본 글은 목록작업이 되어 있는 滿文檔案 全宗 중 一史館의 滿文月摺包에 포함된 조 선 관련 사료를 통해 조청관계사 연구에 있어서 滿文檔案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滿文月摺包 내의 조청관계와 관련된 滿文檔案을 소개하고 2장에서는 이들 당안과 조청관계사 연구에 그간 널리 사용되어온 한문사료인 同文彙考, 淸實 錄 을 비교함으로써 滿文月摺包에 수록된 자료의 특징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3장 에서는 만문사료의 이용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기존의 선행연구를 수정하는데 기여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기로 한다. 결론에서는 滿文月摺包 이외에 필자가 현재까지 검토한 一史館이 소장하고 있는 조청관계사 연구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수종의 滿文檔案 全宗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 구를 위해서는 3) 다. II. 資料의 紹介 청대에 지방에서 황제에게 보고된 문서는 형식상 題本과 奏摺, 두 가지로 대별할 수 奏摺은 康熙연간부터 실물이 현존하는데 황제와 지방대관 사이에 사적인 의사전 달의 통로로써 도입되었다. 乾隆연간 즈음에는 일상적인 공는 題本으로 보고되었고, 긴요한 사안은 奏摺을 통해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있다. 조정 내에서 조선과의 교섭은 禮部의 소관이었지만 조선변경의 地方大官이 보낸 奏摺은 북경으로 보내져서 宮中과 軍機處에서 처리, 보관되었다. 북경에 도착한 奏摺은 批答을 적어 다시 원래 발송한 관원에게 보내졌다가 연말에 궁중으로 돌아와 보관되었다. 이 奏摺 원본이 현재 一史館 (또는 臺灣 故宮博物院)에서 硃批奏摺 (宮中 檔)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軍機處는 업처리에 참고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별도로 硃批奏摺의 복사본을 만들어서 보관했는데 이 부류의 당안이 현재 錄副奏摺 (軍機檔) 으로 일컬어진다. 청대에는 이 錄副奏摺을 달마다 혹은 반달마다 한 포에 넣어서 보관 청대에 노력 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홍성구(2013)는 현재 국내에 존재하는 만 조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3) 하지만 이러한 이 전 문문서의 상황에 대한 소장

52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46 했으며 이 꾸러미를 月摺包 라고 불렀다. 이 月摺包에는 錄副奏摺 이외에 咨文, 呈文, 議覆奏摺, 軍機處가 기안한 상유의 草稿 등도 들어있지만, 錄副奏摺이 절대다수를 이 룬다. 硃批奏摺이 원본이긴 하지만 錄副奏摺의 사료적 가치는 사실 硃批奏摺을 능가한 다. 왜냐면 硃批奏摺에는 작성자가 奏摺을 발송한 날짜만 기록된 반면, 錄副奏摺에는 황제가 硃批奏摺을 받아보고 주비를 가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종종 군기처에서 문 서를 처리하기 위해 발송한 기관의 명칭도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硃批奏摺과 錄副奏摺 중 일부가 滿文으로 작성되어 현재 北京 一史館과 臺灣 故宮博物院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진 [그림1] 滿洲月摺包의 마이크로필름 사진 1장의 예. 번 첫 번째 마 크 필름 마 크 필름 번호 오른 접 작 름 : l 漢: 恒祿 乾隆帝 짜 日 글 약 館 소장 오른 읽 (이 사 은 표1, 51 滿文錄副奏摺의 이 로 이다. 맨 위 쪽의 아라비 아 숫자는 이 로 의 일련 이다. 내용은 왼쪽에서 쪽으로 는다. 왼쪽 맨 위 에 주 을 성한 사람의 이 (滿 heng u, )과 가 이 奏摺에 硃批를 가한 (6月 7 )가 보인다. 그 아래 잔 씨는 이 奏摺의 내용을 요 한 부분이다. 출전 國 一歷史檔案 滿文月摺包) 날 :中 第 소실을 겪은 듯하다. 하지만 滿文錄副奏摺 (月摺包)이 一史館에 비교적 완정한 형태로 남아있다. 그 수량은 18만여건에 달하고 이 가운데 滿文硃批奏摺은 이미 상당한 館 소장 康熙 번 바 康熙 釋 99 雍正 雍正 4) 故宮博物院 소장 조금 넘 康熙 합쳐 않 4) 一史 은 한 연간과 연간의 滿文硃批奏摺을 臺灣 에 된 것과 서 역 출간한 있다는데 여기에 수록된 것이 도 1만 1천여 건이 는데 지나지 는 다. 연간의 滿文硃批奏摺 5100건과 연간의 滿文硃批奏摺 6600건이 朝滿文硃批奏 摺全 (1 6)과 朝滿文硃批奏摺全 (1 8)으로 출간되었다. 雍正 釋 99 합 각각

53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47 현재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이용이 가능하다. (滿文月摺包의 마이크로 필름의 각 면의 형태는 그림1 참조) 더구나 이 가운데 만주지역을 포함한 변강지역에서 상주한 12만 여 건은 현재 목록이 만들어져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 목록을 조사한 결과 一史館에는 조선과 관련하여 盛京將軍, 吉林將軍 등이 올린 滿文錄副奏摺이 71건이 존 재한다. 이 71건이 다루고 있는 사안은 犯越 (양국민의 越境사건 등), 漂流 (漂流民의 救護, 還送과 審問 등), 疆界 (카룬의 설치 운영과 변경의 조사 등), 使行 (使行과 관련 된 폐단의 시정, 使行노선의 조정 등), 失銀 (使行 중 특히 失銀案과 관련된 안건), 白 山 (白頭山에 대한 調査나 祭祀), 貿易 (변경역) 등 7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犯越 이 24건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疆界 13건, 失銀 12건, 使行 6건, 漂流 6건, 白山 5건, 貿易 3건이다. 현재까지 이들 滿文檔案을 인용한 연구는 거의 전한 실정이다. 71건 의 滿文錄副奏摺의 각각의 요지와 작성시점, 同文彙考, 淸實錄 에 인용되었는 지 여부, 漢譯本 의 존재여부는 [표1]과 같다. 5) 6) [표1] 번호 마로 이필 크름 번호 滿文月摺包 중의 조청관계사 관련 滿文錄副奏摺 일람표 작성시 漢文譯 점 분류 기존사료의 인용 여부 本* 16/2020 巡察御史慧中이 鳳凰城의 八旗兵丁들이 매년 中江에 雍正 1-21 서 朝鮮人과 역할 때 中江의 稅務監督에게 감독하 11/5/4 貿易 게 할 것을 청함. 刑部尙書海壽가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수명의 중국 雍正 2 18/1458 인 參夫를 살상한 사건이 발생해 범인을 수색케 했 11/11/1 犯越 -64 음을 보고함. 8 12/2633 盛京戶部侍郞 双喜가 通事, 迎送官 등이 鳳凰城과 사 乾隆 3-36 행는길에서 朝鲜进贡使臣들을 괴롭히고 물건을 착취하 4/3/15 使行 폐단을 시정할 것을 청함. 盛京禮部侍郞 德福이 朝鮮의 大通官 李樞 등이 유능 月摺包 4 1/ 한 通事 徐宗順을 鳳凰城에 영원히 유임할 것을 청 乾隆 貿易 1/ 했음을 보고함. 4/4/ /1376 盛京禮部侍郞 德福이 奉天의 조선사신이 묵는 館을 乾隆 使行 -84 수리하도록 奉天府尹에게 명하길 청함. 4/4/15 同文彙考 月摺包 12/2643 盛京禮部侍郞 德福이 풍랑을 만나 표류한 조선인 어 乾隆 6-49 a-27a 12/263 9 부 金鐵 외 7명을 육로로 귀국하게 했음을 보고함. 4/10/17 漂流 66/26 (전폭) -41 盛京禮部侍 郞 德 福 等 이 鳳凰城 해안에 표류한 조선 同 文彙考 7 12/2651 인 어부 金亨兌 등 8명에게 救護 물품을 주고 본국 乾隆 -56 4/12/2 漂流 66/28a-b 에 보냈음을 보고함. (전폭) 同文彙考 12/2659 奉天將軍 額爾圖가 幌子溝에 표류한 宣明등 조선인 乾隆 명에게 구호물품을 주고 盛京禮部에 보내 朝鮮에 5/10/3 犯越 55/25a-26a 송환하게 했음을 보고함. (전폭) 盛京禮部侍 郞 德福 등이 표류해온 조선인 여자를 조 文彙考 續編 선조선賫咨 官 李樞에게 주어 귀국하게 했는데 이어서 乾隆 漂流 同66/ /2665 a-32a p 국왕이 감사를 표하는 咨文을 보내왔음을 보고 5/10/12 (전폭) (no.2) 함. 中 第 요지 館等 編 邊 錄 林: 廣 師 大學出版社 999 목 안 목 권권 권 장 많 蒙古 권 권 편 조선 접 던 盛京 권 권 吉林 권 권 처 內 軍 處등 루 져 漢 本 생겨났 애 작 때 장 두종 작 우 國 一歷史檔案, 淸代 疆滿洲檔案目 桂 西 範, 1. 이 록 은 전체 12 인데 新疆과 관련된 당 록이 6 ( 6-11)으로 가 고, 가 3 ( 3-5) 으로 그 다 이다. 한, 과 경하고 있 지역은 1 ( 1), 지역이 0.5 ( 2의 부분)이다. 6) 청대에는 滿文檔案의 리를 돕고자 閣, 機 에서 한역이 이 어 서 譯 이 다. 또한 성자가 초에 문서를 성할 부터 문 을 의 문자로 성하는 경 도 있었 다. 5) 앞 권 음 작

54 48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奉天將軍 額爾圖가 조선 변경을 침입해 인삼을 캐다 조선측 에 체포된 王淸云을 심문하고 아울러 柳條邊 乾隆 犯越 순찰 을 소홀히 한 愛哈門章京 達色을 交部察議할 것 7/3/11 을 청함. 盛京禮部侍 郞 納爾泰가 冷子溝에 표류한 韓地興 등 同文彙考 11 12/2684 조선 인 11인에게 구호품을 주고 조선으로 되돌려 보 乾隆 -88 7/9/28 漂流 67/3a-b 냈음을 보고함. (전폭) 10/1577 奉天將軍 達爾党阿가 不法 採參者가 통과하는 길목 乾隆 同文彙考 12 인 中朝邊界의 莽牛哨에 초소를 설치하고 병사, 배를 10/9/15 疆界 48/19a-26b 1601 배치할 것을 건의함. (부분) 奉天將軍 達爾党阿가 錦州의 3백 漢軍 병사를 삼분 乾隆 4/ 해, 莽牛哨 및 旅順 水軍營, 錦州에 배치 할 것을 10/9/15 疆界 청함. 奉天將軍 達爾党阿가 柳條邊 밖 인삼이 출토되는 산 9 0 지에 관원, 병사를 내보내 대대적으로 不法採蔘者를 乾隆 14 12/26-99 체포하고 아울러 조선인 越境採蔘者 5인을 검거했음 10/9/15 犯越 을 보고함. 同文彙考 12/2701 奉天將軍 達爾党阿가 체포한 조선인 월경자 李應昌 乾隆 등선에5인을 漂流民으로 간주하고 盛京禮部에 보내 조 10/10/1 漂流 67/5a-b 송환했음을 보고함. 9 (부분) 奉天將軍 達爾党阿가 莽牛哨는 중국의 경내이므로 同文彙考 16 10/1603 초소의 설치에 문제가 없음을 아뢰고 아울러 莽牛哨 乾隆 疆界 48/22b-24a /5/1 의 관병을 위해 船과 草家를 건설할 것을 청함. (부분) 17 10/1617 兵部尙書 班第가 兵部의 屬官을 데리고 驛站을 이용 乾隆 疆 界 해 莽牛哨에 가기를 청함. 11/7/21 乾隆實錄 10/1658 兵部尙書 班第가 莽牛哨의 상황을 조사하고 蔘場으 乾隆 로의 불법 진입을 막기 위해서 이곳에 카룬을 설치 11/8/30 疆界 273/30a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함. (요약) 18 乾隆實錄 乾隆朝 의 10/1669 朝鮮國王이 청한 대로 莽牛哨에 초소를 설치하는 것 乾隆 疆界 273/30a-31b 上諭檔 附 -72 을 중지할 것을 명한 上諭. 11/8/30 (전폭) 권,124쪽 件 10/1674 兵部尙書 班 第 가 莽牛哨 에 초 소 를 설 치해서는 안 되 乾隆 는 이유들을 열거함. 11/8/30 疆界 奉天將軍 達爾党阿가 朝鮮使臣이 大馬를 반출하지 乾隆實錄 20 12/2707 못고하도록 北京에서 이들에게 大馬를 파는 것을 금하 乾隆 /4/15 使行 289/38b-39a 山海關 등지에서 단속하게 할 것을 청함. (전폭) 戶部尙書 傅恒이 達爾党阿의 상주를 의논하고 北京 의 稅局, 山海關 등지에서 조선인이 大馬를 구입, 반 乾隆 月摺包 21 12/ 출하는 것을 막고 아울러 使行沿道에서 通事들이 조 12/4/27 使行 12/2716 선인을 도와 大馬를 사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함. 寧古塔將軍 阿蘭泰 等이 순찰 중 체포한 不法採蔘한 / 181 流配人 3인, 조선여자 2인, 조선여자들과 동거한 불 乾隆 법를 형량 채삼자 3인의 공술을 보고하고 아울러 이들의 죄 12/6/8 犯越 해 아룀. 盛京刑部侍 郞 介福이 조선인 李贊淑의 失銀案을 조 乾隆 23 12/2718 사하라고 명했음과 아울러 현재까지 3차례(건륭9, 12/12/2 失銀 , 11년) 失銀案이 발생했음을 보고함. 8 盛京將軍 達爾党阿 등이 건륭9년과 10년에 발생한 2 同文彙考 故宮 軍 12/2724 건의 失銀案을 재조사하기 위해 당시 失銀한 조선인 乾隆 a-2b 機處檔 李古魯子, 李允芳과 사건에 연루된 기타 조선인들을 13/4/20 失銀 75/1 (전폭) no.2307 소환해 피의자와 대질신문하길 청함. 盛京將軍 達爾党阿가 失銀한 조선노비 士還이 중국 故宮 同74/28 文彙考 인 宋二達子가 은을 훔쳤다고 고했음을 밝히고 아 乾隆 軍檔 機 處 25 12/2734 失 銀 a -30 a -71 울러 士還과 고를 失察한 중국, 조선관원의 죄를 13/4/20 (요약) 형량해 보고함. no.2300 盛京刑部侍郞 鍾音이 조선인 李贊淑의 失銀案과 관 同 文彙考 月摺包 련해 攬頭 劉存, 徐宗唐을 가두고 기한 내에 배상하 乾隆 26 12/ 게 하는 한편 죄 없는 차부, 여관주인을 석방할 것을 14/3/29 失銀 75/16b (요 12/277 9 약) -80 청함. 盛京刑部侍 郞 鍾音이 조선인 李贊淑의 失銀案과 관 月摺包 27 18/1311 련하여 無辜한 사람들을 오래 감옥에 가운 郎中 錫 乾隆 18/ /3/29 失銀 琳, 准泰를 탄핵함 /2781 盛京將軍 阿蘭泰 가 朝 鮮 人 李 古魯子 와 李 允芳 의 失 乾隆 同 文 彙考 銀案을 재조사해서 중국인들이 고를 당했다고 주 14/4/20 失銀 75/9b-11a 月摺包 12/ /

55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49 장한하고 아울러 고한 조선인과 고를 발각하지 못 (요약) -93 중국 관원을 치죄할 것을 청함. 同文彙考 40/1542 盛京將軍 阿蘭泰가 鳳凰城이 관할하는 해안에 표류 乾隆 한 조선인 어부 李君弼 등 8인에게 구호품을 주고 14/12/1 漂流 67/7a-8b 본국에 돌려보냈음을 보고함. 6 (전폭) 盛京刑部侍 郞 鍾音 이 중국인 5명을 살 해한 조선 인 30 12/2795 金仁述 등을 심문하기 위해 조선에 咨文을 보내고 乾隆 犯越 /4/9 아울러 심문할 소속 관원을 파견했음을 보고함. 寧古塔將軍 新柱가 조선인들이 劉麻子 등 중국인 採 蔘者 5인을 피살한 안건의 생존자, 피살자의 지인, 乾隆 12/ 검시관, 관할지의 중국인 관원 등의 공술을 받아서 犯越 -14 사건의 진상을 재구성하고 아울러 임를 태만히 한 15/4/26 관할지 관원인 琿春佐領 巴克西納 등을 탄핵함. 同文彙考 月摺包 12/2817 盛京刑部侍郞 鍾音이 攬頭 徐宗唐, 劉存을 석방하고 乾隆 이들이 배상한 은을 盛京禮部에 送致하여 失銀한 조 15/7/20 失銀 75/16b-17a 12/2823 선국인 李贊淑에게 전달할 것을 청함. (전폭) -25 盛京刑部侍 郞 吳拜 가 중국인 2명을 살해한 조선인 952 趙子永을 소환 심문하기 위해 조선에 咨文을 보내고 乾隆 月摺包 33 45/ /6/9 犯越 12/1955 아울러 심문할 부하 관원을 파견했음을 보고함. 48 / 883 欽差副都統 傅景 등이 二道江을 넘어서 얼민 할민 乾隆 일대에서 인삼을 캐는 것이 長白山의 風水와 관하 23/3/16 白山 므로 官票를 발급하고 채삼을 허락할 것을 청함. 盛京將軍 淸保가 월경해 인삼을 캤다가 붙잡혀 조선 50/2224 에서 송환되어온 劉自成을 山東에서 盛京으로 소환 乾隆 해 正法하고 아울러 변경의 단속을 소홀히 한 관원 23/10/1 犯越 과 병사 및 劉自成의 거짓 공술을 믿고 그를 山東으 5 로 석방했던 관원을 처벌할 것을 청함. 62/2163 吉林將軍 恒祿이 자신이 관할하는 국경에서 조선인 乾隆 들이 월경한 사실이 없다고 보고함. 27/4/7 犯越 乾隆實錄 63 / 51 9 吉林將軍 恒祿이 金順定 등 조선인이 월경한 三水府 乾隆 加乙坡鎭(乾隆實錄:嘉義普正)은 길림장군이 아닌 성 2 7 / 윤 犯越 663/13b-14a 경장군 관할지의 맞은편이라고 보고함. 5/9 (요약) 吉林將軍 恒祿 이 南海, 우수리, 덕덩이 등지를 순찰 乾隆 乾隆實錄 64 / 한 결과와 아울러 盛京副都統 布彦達賚와 만나 三水 犯越 666/2a-3b /8/ 9 府 加乙坡鎭을 조사하러 출발할 날짜(8/9)를 보고함. (부분) 盛京刑部侍 郞 朝 銓 이 조선 인이 변경을 넘 은 사건을 乾隆實錄 64/1181 乾隆 조副사하지 않 고 部에 보고하지도 않은 盛京將軍 淸保, 27/8/24 犯越 668/3b-4a 都統 布彦達賚를 交部議罪할 것을 청함. (부분) 吉林將軍 恒祿 이 布彦達賚와 함께 會寧府使를 만나 64/1515 加乙坡鎭의 위치를 탐문한 내용과 아울러 이후 압록 乾隆 강고함쪽으로 三水府 加乙坡鎭을 찾으러 갈 계획을 보 27/9/1 疆界. 吉林將軍 恒祿이 조선인 金順定 등의 월경사건과 관 / 련하여 체포된 王成을 盛京將軍 舍圖肯에게 교부할 乾隆 犯越 /11/4 지 盛京刑部에 교부할지 旨를 구함. 同58/23 文彙考 吉林將軍 恒祿 이 조청변경에서 악천후로 인해 철수 a 함 을 보고하고 아울러 감시를 소홀히 하여 변경에서 乾隆 (요약) 犯 越 -406 체포한 조선인 8인 중 4인을 도망가게 한 披甲 巴雅 27/11/4 乾隆實錄 克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함. 674/19b-20a (요약) 吉林將軍 恒祿 이 조선 인 李 元三 을 생 포 했 다가 석방 乾隆 43 65/1649 한 鄭國正 등 4인과 이들의 공술을 盛京刑部에 보냈 27/11/2 犯越 -55 음을 보고함. 9 65/2037 吉林將軍 恒祿이 압록강지역의 조청경계를 답사하고 乾隆 직에 복귀했음을 보고함. 27/12/2 疆界 盛京刑部侍 郞 朝 銓 이 조선 인 金 順 定, 李 元三 등 의 월 乾隆 65/ 경사건에 연루된 중국인 鄭國正 등을 심문하기 위해 27/12/1 犯越 신병을 확보했음을 보고함. 2 乾666/2隆a-3實b錄 盛京將軍 舍 圖 肯 이 조선 인의 월 경을 失 察 한 副 都統 46 65/3572 布彦達賚를 北京 刑部에 압송하고 후임 후보자들의 乾隆 疆界 (부분) /1/9 674/19b-20a 명단을 진정함. (부분). 同文彙考

56 50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58/23a-b (부분) 吉林將軍 坡 犯越 將軍 印章 恒祿 都統 傅良 계함 함 위해 乾隆 28/2/25 疆界 9 9 盛京 都統조 盛 吉林將軍날짜恒祿 함께 함 조청변 乾隆 28/2/29 盛京將軍 圖 等 甲 常 조선 피살 乾隆 犯越 同59文/13彙考 9 99 金京大 등 b-15b 호송울 조선 행 피편의자 조 28/12/2 9 (내용유사) 선왕 죄 함 吉林將軍 恒祿 盛京착都統 조선盛 江邊 의 坡 맞 편 金 順定 乾隆 등 월각 아울 犯越 순찰 임소 귀환 것을 28/4/23 함 吉林將軍道恒祿 吉林 盛京 계선 작년 올그해려 乾隆 犯越 답 28/5/24 바침 67/1812 吉林將軍 恒祿이 백두산 天池를 참배하고 관원을 파 乾隆 견해 백두산에서 나는 香을 황제에게 바침. 28/6/7 白山 盛京 副 都統 倭 盛 額 이 恒祿 의 수정한 조 청변 계 의 지 67/1815 乾隆 도를 받고 앞서 吉林, 盛京의 경계를 표시하지 않았 28/6/8 疆界 음을 사죄함. 盛京將軍 舍圖肯이 披甲 常德을 죽인 조선인 범인들 70/1363 이 이미 조선에서 도착하였고 이들을 심문하기 위해 乾隆 북경의 형부관원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29/3/28 犯越 함. 乾 隆 55 70/1701 盛京將軍 舍圖肯이 披甲 常德을 죽인 조선인 金鳳守, 29/3/28 犯越 -02 金世柱의 죄를 의논해 보고함. (?) 盛京將軍 恒祿 등이 귀국하는 조선사신 일행이 정상 4/2906 적인 사행로를 벗어나 샛길로 가도록 방치한 通事와 乾隆 迎送官을 交部察議할 것을 청함. 37/3/29 使行 增海 등이 금지된 해역에서 고기잡이하다 月摺包 96/3244 盛京將軍 조선 에 표류하여 송환된 山東民人 祁文敬 등을 심문 乾隆 /3252 하고 이들과 해안의 순찰을 맡은 관원들을 치죄할 37/12/? 漂流 것을 청함. 盛京將軍 弘晌 등이 조선사신 일행이 高橋驛에서 잃 9 /152 어버린 은을 錦州府知府 등에게 찾도록 명했음을 보 乾隆 고하고 못 찾을 경우 그들이 균분하여 배상하게 하 41/6/15 失銀 길 청함. 盛京將軍 弘晌 등이 旨에 따라 조선사신 일행이 도 9 /202 둑맞은 은을 자신들이 배상하기로 하고 失銀案과 관 乾隆 련된 피의자들을 심문하기위해 盛京刑部로 소환했음 41/7/7 失銀 을 보고함. 109/314 盛京將軍 弘晌 등이 旨에 따라 조선인들에게 도둑맞 乾隆 60 5 은 은 일천냥을 배상해주었음을 보고함. 41/8/20 失銀 月摺包 盛京將軍 弘晌 등이 조선인들이 은을 분실한 정황과 9 /335 피의자들의 공술, 그리고 이들이 모두 고문에도 불구 乾隆 10 9 / 失 銀 /9/1 1하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함을 보고함. 74 盛京將軍 弘晌 등이 義州府尹이 조선왕의 명에 따라 同文彙考 11 0/ 15 賠償銀을 鳳凰城守尉에게 되돌려보낸 것을 다시 조 乾隆 선측 에 되돌려주게 했음을 보고함. (附한문문서2件: 41/9/16 失銀 75/21a-b 鳳凰城守尉의 呈文과 弘晌이 鳳凰城守尉에게 보낸 (요약) 答書) /740 吉林副都統 明英이 旨에 따라 白山에 제사지냈음을 乾隆 白山 -742 보고함. 43/8/28 吉林將軍 和隆武가 會寧과 慶源에 교역하러 파견하 乾隆 9 77 는 官兵과 隨從, 교역하는 물품을 엄격히 규제하고 44/10/1 貿易 / -986 두함. 명의 장경을 파견해 이들을 감독하게 할 것을 청 /230 吉林將軍 都爾嘉 등이 白山 神位의 滿洲文字를 고쳤 乾隆 白山 1-04 음을 보고함. 52/3/ /487 盛京將軍 嵩椿 등이 조선사신이 시한에 맞추어 熱河 乾隆 使行 이 加乙 鎭으로 다시 출발하기 47 66/ 을 副 에게 인 을 보고. 66/1 68 副 倭 額 이 과 48-6 경지역을 사하러 출발하는 를 보고. 舍 肯 이 披 德이 인에게 6 /2584 당한 사건을 보고하고 아 러 에 문해 4-2 을 성경에 해 와서 심문하는 한 과 관원을 치 하길 청. 과 副 倭 額이 鴨綠 加乙 鎭 은 에 도 하여 관원에게 67 / 의 경사건과 그곳의 지세를 탐문한 내용과 -644 러 이후 자 구역을 하고 로 할 보고. 이 과 의 경, 과 51 67/1374 통과한 程을 표시하여 사한 지역을 다시 -78. (지도1부 첨부)

57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착 참 55/6/20 준 했음 함 신 盛京將軍회 따막 조선편 장신 행 乾隆 58/2/2 使行 出 안 함 9 吉林將軍 林 乾隆 白 圖 려 바침 60/12/1 白山 함 9 6 盛京將軍 晋昌이 乾隆末 鳳凰城 변문 밖 卡倫의 증 감상황을 전임장군 琳寧에게 물어서 報告하고 急務 嘉慶實錄 /341 를 마친 후 직접 카룬을 조사할 예정임을 아룀 (附 嘉慶 疆界 62/14a-15b /4/6 한문문서1件:琳寧이 작성한 카룬 증감상황에 대한 보 (부분) 고서) /201 吉林將軍 瑚松額이 白山과 松花江에 제사지낸 날짜 道光 -02 를 보고함. 9/10/22 白山 密雲副都統 布勒亨이 사행 도중 사라진 조선인 말구 道光實錄 200/117 종이 동료들을 쫓아와 함께 山海關을 넘었음을 알리 道光 a-b 고 아울러 조선사신 일행의 호송 책임자를 치죄할 10/2/20 使行 165/18 (부분) 것을 청함 에 도 할 수 있도록 사 들이 가는 연도에 역 을 비 을 보고. 琳寧이 旨에 라 사 일 이 은을 휴 155/ 대하고 국하는 것을 는 한 래 이들에 의한 銀流 을 방지할 방 을 보고. 161/ 86 秀 이 수정한 山 를 그 을 보고 * 漢文譯本 란에서 續編 은 中國第一歷史檔案館 編, 淸代中朝關係檔案史料續編 (1998), 月摺包 는 一史館 소장 滿文月摺包, 故宮 은 臺灣故宮博物院 文獻館, 乾隆朝上諭檔 은 乾隆朝上諭檔 (1998)을 각각 지칭한다. 피 조선관련 滿文錄副奏摺은 대부분이 건륭연간에 작성되었다. 건륭이전은 그 숫자도 적고 또한 시기가 오래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한편 건륭연간 이후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동시기 만주어 사용의 감소, 한 문당안의 격증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道光연간 이후 만주지역의 滿文錄副奏摺은 滿漢合璧이 늘어나고, 다루는 주제도 주로 降雨量과 糧價의 정기적인 보고, 새로운 관 직임명에 대한 謝恩, 蝗蟲의 피해가 없음을 알리는 형식적인 보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북경으로의 출발 보고, 邊門章京등 속관의 임명을 위한 주청 등으로 한정되게 된 다. 따라서 滿文月摺包는 주로 건륭연간의 朝淸關係史와 관련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사 료들을 보완할 수 있는데, 아래서는 朝淸關係史 연구에서 이제까지 널리 사용되어 왔 으면서 月摺包와 내용상 비교가 가능한 同文彙考 및 淸實錄 과의 비교를 통해 滿文月摺包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로 한다. 위의 표에서 보다시 7) 1) 同文彙考 III. 漢文史料와의 關係 조선측에서 남긴 사료 중 조청관계에 관한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료는 7) 同 彙考 通 館志 王 實錄 備邊司 錄 등 계 조 계 조 익 별 通 館志 同 彙考 량 同 彙考 현격 편 王 實錄 備邊司 錄 계 둘 싼 조선 조 조 때 文 이외에도 文, 朝鮮 朝, 謄 의 淸과의 외교관 를 수록한 사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자료들을 滿文月摺包의 청관 관련 사료와 대 해 보는 것은 실 이 로 없다. 文 는 文 에 수록된 외교문서를 가공한 2차사 료이고 분 면에서도 文 에 비해 히 적다. 한, 朝鮮 朝, 謄 은 주로 외교관 를 러 정 내부의 토론을 보여주지 滿文月摺包 사료와 대 할만 한 문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문이다.

58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52 놓 同文彙考 이다. 同文彙考 와 현존 조선과 관련된 滿文錄副奏摺을 비교하면 내용이 중복되는 건수가 상당수 발견되는데 이는 대개 盛京 禮部, 盛京將軍, 禮部 등이 조선에 咨文을 보낼 때 奏摺을 참고하거나 인용했기 때문 이다. 간혹 咨文과 奏摺의 내용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문건은 기 존사료의 인용여부 항에 (전폭)이라고 표시했다.) 이러한 문건도 자세히 비교해보면 同文彙考 에 실린 咨文은 奏摺에 표시되어 있는 奏摺을 상주한 날짜, 상주한 사람 의 명단, 황제가 주비를 가한 날짜, 주비의 내용 등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내용도 완전히 일치한 것은 아니어서 내용의 일부 첨삭이나 同文彙考 에 실린 咨文이 원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기도 발견된다.9 同文彙考 의 咨文이 滿文奏摺을 일부만 인용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기존사료의 인용여부 항에 (부분)으로 표시했다.) 同文彙考 의 咨文에서 생략된 부분은 조선 측에 이미 통지 한 부분을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한 것이거나 외교적인 수사상 부적절하여 뺀 부분 이다. 또한 청조정의 내정과 관련된 부분을 생략하거나 조선조정을 속이기 위해 삭 제하기도 했다. 同文彙考 에 실린 咨文이 滿文奏摺의 요지만을 담고 있기도 한 데 (이 경우는 인용여부 항에 (요약)으로 표시) 失銀案 등을 보고하면서 피의자의 공 술을 생략하고 사건의 개요만을 보고한 경우 (표1, 25번, 26번 등)가 그 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滿文錄副奏摺 가운데 同文彙考 에 전폭적 내지 부분적으로 인 용되거나 또는 최소한 요약되어 나타나는 것은 전체 71건 가운데 18건으로 사분의 일 에 불과하다. 나머지 同文彙考 에 언급되지 않는 滿文錄副奏摺은 대부분이 조선문 제와 관련되었지만 청조의 내부의 의논으로 조선에 통보할 필요가 없거나 통보하기에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 奏摺 가운데는 당시 조선조정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스런 내용도 종종 포함되어 있다. 乾隆12년(1747) 조선사신을 따라갔던 청과의 외교문서를 모아 은 8) ) 10) 11) 예컨 9번 盛京將軍 올린 同 彙考 린 盛京禮部 온 君 등 언급 반 同 彙考 름 두 9 령 번 소녀 언급 반 同 彙考 린 같 담 총 소녀 생략 예 든 莽牛哨 소 설 번 약 同 彙考 禮部 낸 앞 雍正 莽 牛哨 설 蘇圖 上 조선왕 上 등 조선측 숙 두 생략했 조선왕 소 설 반 장 판 9번 盛京將軍 살 책임 물 조선 왕 죄 슷 담 盛京禮部 조선 낸 知會 생략 려 따른 조 였 번 盛京禮部 낸 조선 점 언급 城守尉 등 불법채 단 즉 內政 생략했 民 몇 밖 않았 술 함 언급 않 불법월 조선 조 법 따 형 처 므 마 크 필름 9 형 였 대, 표1, 2 이 奏摺과 文 에 실 에서 咨文을 비교 하면 奏摺은 표류당한 사람이 李 弼 8인이라고 한 면 文 의 咨文은 8명의 이 을 모 기재하고 있다. ) 가, 표1, 8 奏摺은 표류한 여자가 4명인데, 성인2명, 1명, 여자아기 1명이라고 하고 있다. 면 文 에 실 은 내용을 은 咨文은 여자가 4명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1명을 하고 있다. 10) 를 다면, 에 초 의 치를 청한 達爾党阿의 奏摺(표1, 12 )을 요 인용하고 있는 文 에 수록된 에서 보 咨文은 達爾党阿의 奏摺의 내용 가운데 서 연간 의 치와 관련된 那 의 奏摺, 황제의 諭, 의 奏文 이 이미 지하고 있는 내용은 모 다. 그리고 의 초 치에 대하는 입 에 대한 達爾党阿의 비 도 역시 제외되었다. 표1, 4 의 奏摺은 인사건의 을 어 국 의 치 를 요청하고 있는데 이와 비 한 내용을 은 가 에 보 는 이 부분이 되어 있다. 이 또한 외교적인 고 에 치 을 것이다. 11) 표1, 15 奏摺을 인용하고 있는 가 朝鮮에 보 咨文은 표류민을 에 교부한다는 만 할 뿐, 達爾党阿가 에게 삼자의 속을 명한 부분, 과 관련된 부분은 다. 그리고 漂流 (?) 5명이 인삼을 뿌리 에 캐지 다는 그들의 공 은 포 하되 실제로 33뿌리나 캔 실상은 하고 있지 은데 이는 인삼을 캐기 위해 경한 자 들을 정이 국 에 라 사 에 하 로 (滿文月摺包, 이 로 12/26 7) 이들에게 사 을 면해주기 위해서 다. 8)

59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53 노비 11명이 북경에서 말 40필을 사서 鳳凰城을 나갔다가 이 사실을 알고 쫓아온 鳳 凰城의 관원과 병사가 이들을 변경에서 체포하여 盛京으로 이송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奉天將軍이었던 達爾党阿가 올린 滿文奏摺(표1, 20번)은 다음과 같은 조선관계의 불문율을 적고 있다. 我朝가 盛京에서 開昌의 길을 연이래 큰 말(大馬)을 조선에 팔 게 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해진 법전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현재 백여 년을 전하여 왔습니다. 변경의 국경에서는 아직도 법령을 따르고 엄격하게 준수합니다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2/ ). 이 奏摺에서 達爾党阿는 북경의 左右稅局에서 조선의 사 신일행에게 말을 팔지 않게 하고 山海關과 盛京 邊門의 관원들에게 조사를 엄격하게 하도록 명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戶部尙書 傅恒 등의 議復(표1, 21번)을 거쳐 達爾党 阿의 건의는 황제의 재가를 받았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에서는 말을 산 노비들을 인솔한 사신들을 혁직하고 범인들에 대해서는 청조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내용의 咨文 을 보냈다( 同文彙考 권64, 28b-29a). 이에 대한 답변으로 淸朝 禮部에서 보낸 咨 文은 刑部에서 파악한 이 사건의 진상과 관련자에게 내릴 처분만을 기재했을 뿐 불문 율을 담고 있는 達爾党阿의 奏摺이나 傅恒의 議奏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 었다 ( 同文彙考 권64, 29b-30a). 銀의 유출을 막을 방도를 건의한 盛京將軍 琳寧의 奏摺(표1, 67번)은 또 다른 예이 다. 조선사신을 원래 돌아갈 때 중국돈을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런데 건륭58년(1793) 조 선사신이 다시 禮部에 이것이 가능한 지 물어보았다. 禮部는 이를 거절하는 한편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고, 乾隆帝는 盛京將軍에게 혹시 조선 사신들이 몰래 가져갈지 모르니 짐을 수색하되 조선 사신들을 괴롭히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 상유를 받은 盛京將軍은 사신이 돌아오면 놀라지 않게 은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든 조선국의 사신들이 邊境의 문에 진입한 후 영접하는 관원 한 명, 통역 한 명을 파견하여 조선의 사신 일행을 따르면서 이들이 銀으로 매매한 돈의 수, 사용한 돈의 수를 은밀히 파악하였다가 돌아올 때 盛京將軍衙門에 보고하면 盛京 將軍이 邊門에서 사신들이 사용하고 남은 돈의 액수와 대조하고 남은 액수의 돈은 銀 으로 바꿔가게 하겠다는 건의를 올려서 건륭제의 승인을 받았다. 청조 관원이 조선인 사신들을 은밀히 감시할 것을 건의한 이 奏摺의 내용이 조선측에 전달될 리 없었다. 同文彙考 에 언급되지 않는 滿文奏摺은 국경의 범월, 양국민의 충돌, 은의 분실 등의 사안이 발생한 후 淸朝에서 범인이나 연루된 자를 심문한 내용을 보고한 奏摺들 도 포함하는데 同文彙考 에 실린 조선에서 사건의 관련자를 조사한 기록과 이들을 비교해보면 사건의 전개과정에 관해 상충하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乾隆14 년 중국인 7인이 조선의 柔遠鎭 對岸에서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아 5명이 살해된 사건 이 발생했다. 同文彙考 는 조선인 범인들의 공술을 담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 인들이 중국인들이 쌀만 챙기고 쌀값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습격했다고 주장한 다( 同文彙考 권56, 14a). 반면, 이 사건을 보고하는 寧古塔將軍의 奏摺(표1, 31번)은 습격당해 사망한 5명에 대한 검시기록, 신원과 아울러 생존자의 진술을 담고 있는데 그 생존자는 습격원인에 관해서 자신들이 쌀을 가져오면 주겠다고 인삼을 꺼내 보이

60 54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조선인들이 인삼을 탐해 습격했다고 전혀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건륭23년에는 중 국인 劉自成이 월경해 조선땅에서 인삼을 캐다가 체포되어 중국에 이송되었다. 同文 彙考 (권62, 34b-35a)와 滿文奏摺(표1, 35번)은 각각 劉自成이 조선관원과 청조관원에 게 공술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양자는 내용이 판이하다. 劉自成은 조선관원에게는 자 신이 鳳凰城 서쪽에 살고 인삼을 캐러갔다가 조선군에 체포되었다고 했지만, 중국에 송환된 후에는 자신이 山東사람이고 배가 난파되어 조선에 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乾隆연간 朝淸 간에 발생한 犯越, 失銀 등의 사안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 해서는 滿文錄副奏摺을 반드시 참고해야만 한다. 자 2) 淸朝의 漢文記錄 淸實錄 은 淸朝에서 만들어진 史書 가운데 최소한 乾隆연간의 朝淸關係史와 관 련하여 가장 풍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淸實錄 에 포함된 이 시기 朝淸關係 관 련 기사는 同文彙考 에 수록된 조선에 전달할 목적으로 작성된 청조의 咨文과 달 리 당시 청조내부의 의논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포함하고 있다. 가령, 앞서 언급한 조선에 大馬를 팔지 않는 불문율을 제기한 達爾党阿의 奏摺(표1, 20번)은 同文彙 考 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淸實錄 에는 나타난다. 하지만 朝鮮과 관련된 奏摺이 淸實錄 에 나타나는 것은 대개 그 奏摺이 중요한 내용을 포함한 상유를 유발해서 그 상유가 淸實錄 에 수록되고 상유의 앞부분에 해당 奏摺이 요약되었을 때에 한 정된다. 따라서 전체 71건의 滿文奏摺 중 불과 12건 만이 상유 속에 요약된 형태로 淸實錄 에 등장한다. 결국 수많은 조청관계와 관련된 중요한 건의나 보고를 담은 奏摺이 淸實錄 에서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부 滿文錄副奏摺은 漢文譯本이 존재한다. 이들 譯本은 楷書體가 아닌 行書 體로 쓰인 점으로 미루어 上奏者가 아니라 內閣이나 軍機處에서 보관이나 업처리를 위해 작성했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파악한 조청관계 관련 滿文奏摺의 漢文譯本은 모 두 13건인데, 대부분이 일사관의 滿文月摺包 내에 滿文奏摺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漢 文譯本은 가끔 번역상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滿文錄副奏摺의 내용을 빠짐없이 그대로 옮기지도 않았다. 역본은 대부분의 경우 滿文錄副奏摺에 나타나는 황 제가 주비를 가한 날짜와 주비내용, 그리고 상주를 올린 관원의 명단, 이 奏摺이 군기 처에서 전달된 관청명 등을 생략하고 있다. 심지어 滿文錄副奏摺에서 상당부분을 생략 해 버리고 번역한 譯本도 있다. 12) 13) 예 든 언급 使臣 져 못 번 받았 므 행 짐작 편 乾隆末年 鳳 城 밖 漢 件 實錄 혀찾 볼 금 조업 祁 敬 술 담 몰 감 奏摺(표1, 實錄 언급되지 않 생했 9번 奏摺의 大 會典 등에는 이 盛京將軍 增海 奏摺(표1, 12) 를 다면, 위에서 한 朝鮮 이 돈을 가 가지 하도록 래 시하게 한 67 )은 황제의 재가를 으 로 실제 시 되었으리라 되지만 淸 에 는다. 한, 에 凰 카룬의 배치에 중대한 변화가 발 는데 표1, 6 文附 은 그 구체적인 양상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淸, 淸 事例 와 관련된 사료를 전 아 수 없다. 13) 지된 해역에서 하다가 朝鮮에 표류한 文 의 공 을 은 의

61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55 결국 同文彙考 에 수록된 滿文奏摺은 淸朝가 朝鮮이 알도록 허락한 내용만을 발 췌한 것이고, 청조 내부기록을 엿볼 수 있는 淸實錄 에 인용된 滿文奏摺이나 漢文 譯本은 그 수량이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인용과 번역이 불완전하므로 乾隆年間 의 朝淸關係史 연구와 관련하여 滿文月摺包는 실로 필수불가결한 사료라고 할 수 있 다. 이 滿文月摺包을 이용하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찾아내고 기존의 연 구성과를 수정할 수도 있는데, 아래서 그 예를 보기로 한다. IV. 滿文月摺包를 이용한 硏究事例 1) 잊혀진 恒祿14)의 國境巡視 旅行 乾隆26년(1761) 8월에 三水府 加乙坡鎭의 조선인 金順定 등 7명이 인삼을 채취하러 중국에 넘어가 淸人의 물건을 약탈했다가 오히려 다시 淸人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조 선인 한 명은 淸人에게 붙잡혔는데 곧이어 행방불명되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안 건은 양 국민 간의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비교적 경미한 사안으로 청조는 이 사안과 관련하여 월경한 조선인과 책임을 맡은 변경의 지방관들을 관대히 치죄하 도록 조선정부에 명했다. 이 사건 자체의 경과는 同文彙考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 다( 同文彙考 권58, 1a-22b).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의외의 부산물을 낳았는데, 恒 祿의 國境巡視 旅行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同文彙考 등 한국측 기록이나 중국 측 한문기록인 淸實錄, 乾隆朝上諭檔 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조의 입장에서 볼 때 사건 그 자체보다도 조선에서 咨文이 와서 조선 인이 범월한 사실을 알려주기 전까지 변방의 盛京將軍이나 吉林將軍이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대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乾隆帝는 27년(1762) 2월 26일 盛京將軍 과 吉林將軍에게 왜 곧바로 상주하지 않았는지, 조선국의 백성이 어떻게 변경을 넘었 는지 분명히 조사해 상주하도록 명했다. 吉林將軍 恒祿은 吉林과 朝鮮의 접경지역을 관할하는 琿春協領에게 두 차례 국경을 조사하도록 명했는데 琿春協領은 조선인이 월 경한 사실이 없다고 아뢰었다. 南海를 시찰하러 나갔던 恒祿은 다시 諭旨를 받았는데 월경한 사람들이 咸境道 三水府 사람들이고 咸境道는 吉林에서 가까우니 월경한 사람 15) 번 漢 本 술 계 부분만 번역하고 祁文敬의 변명이나 금지 금 법령 생략해버렸다. 恒祿 宗室 輔 公 世職 襲했 乾隆 년(1760)부터 乾隆34(1769)년까지 吉林將軍을 임했 렴 판 盛京將軍 임 중이던 乾隆37년(1771)에 중풍으로 사망했 耆獻類徵初編 권 마이크로필름 95/ 同 彙考 恒祿 三水府 느 조사하러 나갔다가 鴨綠江 연안의 瑪哈拉山 조선 잡았 언급 同文彙考 권58, 23a) 淸實錄 에도 역시 恒 祿 순찰 압 강 조선 잡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乾隆實錄, 권674, 9 乾隆 庚午 57 )의 文譯 은 공 가운데 표류사건의 사실관 된 해역에서 어로를 한 을 인용한 부분은 14) 은 로 國 의 을 降 다. 25 역 는데 청 하다는 평 이 있었다. 재 다. 國朝 287, 14a; 滿文月摺包, 15) 文 에는 이 가 어 지역인지 에서 인 8명을 다고만 되어 있다. ( 이 변경을 하다가 록 에서 인을 1 b-20a, 27/11/12( ).

62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56 림 넘은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이제 恒祿은 자신이 변경 감시를 게을리 했다는 문책을 벗어나려면 三水府가 자신의 관할지와 접경하지 않음을 증명해야만했 다. 恒祿은 자신이 아직 南海 시찰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우선 군관을 파견하여 三 水府 加乙坡鎭을 찾게했다. 이들은 會寧의 조선관원을 만나 加乙坡鎭이 백두산 서쪽, 압록강 남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를 근거로 恒祿은 조선인들이 盛京將軍衙門이 관할하는 국경을 넘었음이 틀림없다고 보고했다.(표1, 37번) 하지만 乾隆帝는 吉林과 盛京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꾸짖고 恒祿과 盛京 副都統 布彦達賚가 직접 가서 조선국의 변경에 이른 후에 三水府의 加乙坡鎭이 어느 곳의 반대편에 있는지 아울러 실종된 조선인이 중국측 변경에 남아있는지 조사하라고 했다. 恒祿은 8월 3일 南海 순찰을 마치고 돌아와 순찰 중 체포한 도둑들과 압수한 인 삼을 刑部와 內務府에 인계하고 변경에 군대를 배치하던 중 布彦達賚가 출발했다는 글을 받고 布彦達賚와 합류하기위해 8월 9일 길을 떠났다.(표1, 38번) 恒祿은 8월 15일 布彦達賚를 만나 두만강가의 조청국경을 조사했으나 三水府나 金 順定 월경사건의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會寧府使를 강가에 불러 탐문한 결과 咸鏡道 南道(julergi golo)의 관할지인 長白山의 서남쪽 압록강의 동쪽에 三水府 가 있는데 加乙坡鎭은 三水府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恒祿과 布彦達賚는 일단 9월 1일 길림울라에 돌아갔다가 盛京將軍의 관할지로 넘어가서 旺淸邊門을 통해 압록 강 방면으로 가기로 했다. 恒祿가 이 긴 여행계획을 乾隆帝에게 아뢰었을 때 乾隆帝는 별다른 감동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냉소적으로 奏摺 말미에 이 역시 너희들이 서로 미룬 탓에 생겨난 일이다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4/1518) 라고 적어 돌려보냈다. (표1, 40번) 그런데 압록강 방면으로 가려던 계획은 곧 난관에 부딪쳤다. 盛京에서 8백리 떨어 진 帽子山이란 곳에서 동쪽으로는 범법자를 쫓는 군대를 파견하거나 카룬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기 때문에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恒祿과 布彦達賚는 마침내 얼민강과 할민강 지역의 人蔘을 캐는 증명서를 받아서 해마다 旺淸에서 나가는 山東省 백성 王 成을 길잡이로 하여 나갔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5/395). 이들은 압록강에 연결 된 골짜기인 三道溝에 이르러 월경해 담비를 잡는 조선인 8명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 두기도 했지만 五道溝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와 마주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10월 27일 일정을 접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7/1376). 乾隆帝는 恒祿 일행이 눈보라와 힘겹게 싸우다 철수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아직도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이 또한 서로 미루다 생겨난 일이거늘 누구를 원망하리오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5/403) 라고 조소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이 전 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되돌아오는 길에 王成에게서 작년에 자신이 압록 강 변에서 조선인으로부터 물건을 강탈했던 채삼인들과 이들이 사로잡은 조선인을 만 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恒祿는 이들이 작년에 있었던 金順定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들을 체포하게 했다(표1, 41번). 그러나 三道溝에서 붙잡았던 조선 인들 가운데 4명이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恒祿은 부에 넘겨져 의죄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길 국경을

63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57 同文彙考 권58, 23a-b). 恒祿은 12월 초2일 吉林으로 돌아가 장군의 임에 복귀 했다.(표1, 44번) 恒祿은 이듬해 3월 9일 다시 압록강을 향해 출발했다. 눈이 녹고 나서 旺淸의 변문 에 간 다음 布彦達賚를 대신해 새로 盛京副都統에 임명된 倭盛額과 만나 압록강가의 三水府 加乙坡鎭을 향해 나아갔다(표1, 47번). 이번에 恒祿과 倭盛額은 佟家江의 수원 으로부터 黑林嶺의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다가 十二道溝에서 내려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인 관원과 通事를 조우하고 이들에게서 三水府 加乙坡鎭이 서쪽으로 이틀거 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4월 21일 恒祿 일행은 드디어 강 건너편에 마중 나온 조선 인 관원들의 도움으로 加乙坡鎭에 있는 金順定 등이 도강한 곳을 찾아냈다. 加乙坡鎭 은 恒祿으로서는 다행히 吉林이 아니라 盛京이 관할하는 十一道溝의 맞은편에 있었다 (표1, 50번). 恒祿은 임를 마치고 임소로 귀환함을 상주하면서 자신이 여행한 지방을 그린 지도를 그려서 같이 올렸다. 恒祿은 4월 24일 자신의 관할지로 돌아가는 倭盛額 과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5월 23일 상유를 받았는데, 상유는 지도에 加乙坡鎭이 盛 京의 맞은편인지, 吉林의 맞은편인지 분명히 명시하고 아울러 작년에 갔다가 막혀서 되돌아온 지점과 이번에 갔던 길을 꼬리표를 붙여 명백히 표시해 상주하라고 했다. 恒 祿은 지도를 수정해 다시 상주했다.(표1, 51번) 恒祿은 길림울라로 되돌아갈 때 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반대로 압록강을 더 거슬 러 올라 長白山을 통과했는데 松花江을 타고 길림울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듯하다. 恒祿는 관원들을 데리고 長白山에서 묵은 후 天池를 참배했다(omo be hargašame hengkilefi). 그리고 그전에 長白山에서 산출된 특별한 香을 공물로 바친 적이 있음 을 떠올리고 長白山의 특산향 90묶음을 두 상자에 넣어서 6월 7일 관원을 파견해 乾 隆帝에게 보냈다.(표1, 52번) 향을 받았을 때 乾隆帝는 恒祿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않았 지만 恒祿에게 더 이상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奏摺에 단지 짤막하게 알았다 고 批 示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7/1813). 恒祿로서는 이 여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한 셈이었다. 加乙坡鎭이 盛京將軍 관할지의 對岸임이 밝혀짐에 따라 金順定의 월경사 건이 발생했을 당시 盛京將軍이었던 淸保는 部에 교부되어 조사하고 합당한 죄를 의 논하도록 했지만, 그는 별다른 처분을 받지 않고 넘어갔기 때문이다(滿文月摺包, 마이 크로필름 67/ ). 이미 잘 알려진 대로 康熙연간에 적어도 두 차례 청조 관원들이 長白山 일대 조청 국경을 답사한 사례가 있었다. 康熙16년(1671) 武黙訥의 長白山 여행은 청조의 發祥地 를 참배하기 위한 것이었고, 康熙51년(1712) 穆克登의 답사가 朝淸 사이의 경계를 정 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恒祿의 국경여행은 월경사건이 일어난 후 盛京과 吉林 간의 책임의 귀속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것으로 다소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 만 여행 자체의 노정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恒祿의 여행은 앞서 두 여행을 능가한 ( 16) 호 m 天池 형 물 질 恒祿 참 했 임 16) 이 수(o o)를 로 비정하는 것이 정확한지 의문을 가 수 있을 것이다. 이 배할 정도로 중요한 지 지 은 그가 정에 아래서 할 지도(그 2)에 표시 었을 것 에 없다. 이 지도에 표시된 o o는 하나뿐이다. 틀림 조 m 天池 올린 언급 림

64 58 中國史學會 第78回 學術發表會: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武黙訥은 康熙16년(1671) 5월 4일 길림울라에서 출발해 松花江을 따라 올라가 3개 월 반 뒤인 8월 21일 長白山에 이르렀다. 그리고 穆克登은 두 차례 국경을 조사했는데 우선 康熙50년(1711) 3월 10일 北京에서 출발해 鳳凰城에 이른 후 鴨綠江을 타고 올라 가 滿浦 근방까지 갔다가 6월 중순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는 다음해 해빙 렵인 3월 경에 다시 출발해 5월 11일 드디어 長白山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전후 도합 5개월 정 도 소요한 셈이었다. 반면 恒祿는 한차례 두만강변을 조사하고 두 번 압록강을 답사한 후 마침내 長白山에 이르러 天池를 참배하기까지 총 7개월이나 걸렸다. 긴 여정이나 穆克登의 뒤를 이은 청조관원에 의한 또 한번의 백두산 방문이란 점만 으로도 恒祿의 국경순찰여행은 기억할 만한 사건이지만, 恒祿의 여행이 더욱 갚진 것 은 恒祿은 자신이 여행한 행선지를 기록해 둔 지도를 남겨두었고 이것이 현존하고 있 다는 점이다. 위의 여행기에서 언급했던 盛京, 吉林의 경계와 자신의 행선지를 표시한 수정된 지도가 현재 만문 月摺包 안에 남아 있는데 이 지도는 현재까지 세상에 알려 진 바 없다.(그림2 참조) 恒祿는 자신의 주차지인 길림울라에서 長白山쪽, 즉 남쪽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 지 도에 담았다. 이 지도를 그린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이 갔던 행선지를 황제에게 보고하 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행선지를 점선으로 표기한 후 자신의 여정과 관련되어 특정지점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항을 그 자리에 꼬리표를 붙이고 적어 넣었다. 하지만 이외에도 이 지도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궁정에서 그린 실측도와 달리 경도와 위도선이 존재하지 않지만 두만강과 압록강 바깥의 만주지역을 묘사하고 150개가 넘 는 도시, 수로, 산, 역참, 관문의 이름을 기록했다. 주목되는 것은 恒祿 자신이 관할하 는 길림지역의 주요하천인 호이파강과 松花江에 대한 묘사가 이 지도가 나오기 4년전 (1759)에 예수회 선교사의 도움으로 완성된 당시로써 가장 자세한 지도인 乾隆13排圖 를 훨씬 능가한다는 점이다. 乾隆13排圖에는 호이파강의 21개 지류와 그 명칭이 표 기된 반면, 恒祿의 지도에는 32개가 이름과 함께 나타난다. 한편, 乾隆13排圖에서 松花 江이 길림울라에 이를 때까지 松花江에 합류하는 지류는 도합 21개가 묘사되어 있 다. 9 그런데, 恒祿의 지도에는 44개나 되는 松花江의 지류와 그 이름이 나타난다. 이는 吉林將軍으로서 자신의 관할지에 위치한 주요하천인 송화강과 호이파강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 17) 18) 1 ) 20) 恒祿는 27년 8월 9일 길림울라에서 두만강가로 갔다가 9월 1일 다시 길림울라로 돌아온 후 곧 바로 여행을 떠나 압록강의 다섯 번째 계곡까지 나아갔지만 눈보라에 막혀 12월 2일 길림울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28년 3월 9일 길림울라에서 다시 출발해 加乙坡鎭을 발견한 후 6월 7일경 長白山에 이르러 天池에 참배했다. 18) 이하에서 언급되는 乾隆13排圖, 雍正10排圖, 皇輿全覽圖는 淸廷三大實測全圖集 (北京, 外文 出版社, 2007)에 수록되어 있다. 19) 이 가운데 松花江에 합류하는 가장 큰 지류인 호이파강과 라파강의 지류는 계산하지 않고 호 이파강과 라파강 각각 하나로 계산했다. 20) 乾隆13排圖의 지류가 모두 恒祿의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乾隆13排圖에 호 이파강의 두 지류인 폐강(fe bira)와 교하강(giyoha bira) 사이에 소르호강(sorho bira)이 존재하 지만 恒祿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17)

65 滿文月摺包의 朝淸關係史 關聯 史料와 그 價値 (윤 욱) 59 恒祿 지도의 지명은 공식적인 지명이 아닌 다량의 당지에서 불렸던 이름을 그대로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雍正10排圖와 康熙帝의 皇輿全覽圖의 만주문자와 恒 祿의 지도의 만주문자를 비교하면, 雍正10排圖와 皇輿全覽圖는 長白山을 amba s anggiyan alin (大白山), 압록강 부근의 계곡들은 한자를 그대로 음차하여 ši el doo geo [十二道溝의 음차], ši i dao geo [十一道溝]... teo dao geo [頭道溝], 그리고 teo 그리고 中 第 크 필름 장 長白 그림2) 恒祿의 국경순시( ) 지도 館 소장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7/1381. (恒祿의 지도는 마이 담겨있다. 이것은 그 중 한 장이다. 위 사진 중앙의 흰색 산 天池가 보인다. ) 출전) 國 一歷史檔案 로 12 에 분할되어 이 山이다. 그 가운데 dao geo 앞의 산 이름은 mao el šan [帽兒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반면, 恒祿의 지 도는 이들을 golmin šanyan alin, juwan juweci golo (열두번째 계곡), juwan emuci golo (열 한번째 계곡), mahala alin (帽子山) 등으로 기록했다. 恒祿의 지도에서는 乾 隆13排圖, 雍正10排圖, 皇輿全覽圖에 나오는 많은 지명을 찾을 수 없는데 이들이 恒祿 의 지도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적혀진 것이 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恒祿의 지 도가 乾隆연간 만주의 지명을 연구하는데 진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 위가 없다. 2) 乾隆11年 莽牛哨 事件의 眞實 乾隆11년(1746) 청정에서 압록강에 위치한 섬인 莽牛哨 21)에 소 설치하려는 움 초 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