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한국동남아학회연례학술대회 (Religion and Politics in Southeast Asia) 2017 년 8 월 25 일 ~ 26 일 서울대학교아시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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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발표논문집은 2017 년도정부재원 ( 교육부 ) 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발간되었음.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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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술대회구성 대회주제 전체회의 1 (Religion and Politics in Southeast Asia) 동남아시아의종교, 정치, 일상 전체회의 2 Roundtable: Asian Peace Union as a Realistic Utopian Project 분과회의 1 분과회의 2 분과회의 3 분과회의 4 분과회의 5 분과회의 6 분과회의 7 분과회의 8 Religious Tradition and Political Conflicts in Southeast Asia 동남아시아의종교미술과정치동남아시아정치경제의대내외적변화개별발표 : 동남아시아사회의이동성과다양성동남아시아전통내러티브의현대적표상화신진박사발표동남아시아정치와국제관계현안 : 인권, 선거, 테러리즘대학원생발표 : 동남아시아의정치, 제도와사회변화 분과회의 9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정체성 I 분과회의 10 분과회의 11 분과회의 12 분과회의 13 분과회의 14 분과회의 15 Politics of Culture and Discourse in Southeast Asia 한국의대아세안정책주요이슈와정책방향 메콩유역을둘러싼개발이슈와협력거버넌스 대학원생발표 : 일반논문 Political Developments in Southeast Asia: Democracy versus Authoritarianism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정체성 II

7 DAY 년 8 월 25 일 등록및개회식 09:00-09:30 등록 09:30-10:00 개회식 개회사 : 신윤환 ( 한국동남아학회장 ) 환영사 : 강명구 ( 서울대아시아연구소장 ) 210 호 영원홀 사회 : 여운경 ( 서울대 ) 제 1 부전체회의 동남아시아의종교, 정치, 일상 210 호 영원홀 사회 : 신윤환 ( 서강대 ) 10:00-12:00 말레이시아의할랄인증제와이슬람정치 - 발표 : 오명석 ( 서울대 ) 토론 : 여운경 ( 서울대 ) 인도네시아의이슬람정당과이슬람식정치 : 시론적접근 - 발표 : 김형준 ( 강원대 ) 토론 : 최경희 ( 서울대 ) 자비로운딸이되는길 : 전환기미얀마이주청소년노동자의리미널리티와덕의실천 - 발표 : 홍문숙 ( 서울대 ) 토론 : 박장식 ( 부산외대 ) 오찬 12:00-13:30 1 층감골식당 제 2 부 13:30-15:30 분과회의 1: Religious Tradition and Political Conflicts in Southeast Asia 303 호 Degrees of 'historical Nusantara' in contemporary Islamic Politics: Islam in Indonesia, Malaysia and Brunei as 'Malays " - Frank Dhont (University of Brunei Darussalam) Creative Approaches in Peace Building Initiatives in Indonesia - Putut Widjanarko (Paramadina University) Communicating Religious Values for Political gains in Indonesia: Banners in 2017 Jakarta Gubernatorial Election - Rudi Sukandar (London School of Public Relations-Jakarta) - Erda Handayani (London School of Public Relations-Jakarta) Islam and the Dynamic of Local Politics in Indonesia: The Fate of Pro-Shari'a Movement in Contemporary South Sulawesi - Wahyuddin Halim (Alauddin State Islamic University of Makassar) 사회 : 송승원 ( 한국외대 ) 토론 : 여운경 ( 서울대 ) 분과회의 2 동남아시아의종교미술과정치 230 호 탈식민주의시대동남아의문화재반환문제 : 종교에서정치로 - 강희정 ( 서강대 ) 자야바르만 7세의불교미술에보이는정치적성격 - 노남희 ( 서울대 ) 쿠베라상을통해본 8-10세기마타람왕조의정치와종교 - 김미소 ( 서강대 ) 대남국 ( 大南國 ) 효릉 ( 孝陵 ) 의조성과의의 - 김지혜 ( 서강대 ) 사회 : 강희정 ( 서강대 ) 토론 : 하정민 ( 서울대 )

8 분과회의 3 동남아시아정치경제의대내외적변화 240 호 트럼프시대불확실성의증대와동남아시아국가의대응전략 : 남중국해문제를중심으로 - 이진원 ( 국립외교원 ) 중국의대동남아내륙개도국 (CLMV) 경제외교정책 : 해외직접투자 (OFDI) 전략을중심으로 - 정혜영 ( 건국대 ) 정치체제의전환과정치변동의사이에서 : 미얀마의결손민주주의 - 장준영 ( 한국외대 ) 사회 : 박사명 ( 한국동남아연구소 ) 토론 : 배기현 ( 서강대 ) 브레이크타임 15:30-15:40 제 3 부 15:40-17:40 분과회의 4 ( 개별발표 ) 동남아시아사회의이동성과다양성 303 호 베트남생명보험시장의발달 : 문화적배태성 (embeddedness) 을중심으로 - 발표 : 백용훈 ( 서강대 ) 토론 : 이한우 ( 서강대 ) 중심부 와 주변부 사이에서 : 인도네시아이주민의이슬람공간의구축과활용 - 발표 : 박광우 ( 부산외대 ) 토론 : 강윤희 ( 서울대 ) 민주주의확산과이슬람화의불협화음 : 자카르타주지사아혹 (Ahok) 의쿠란인용사건을 중심으로 - 발표 : 이지혁 ( 서울대 ) 토론 : 강윤희 ( 서울대 ) 사회 : 이한우 ( 서강대 ) 분과회의 5 동남아시아전통내러티브의현대적표상화 230 호 필리핀의전통극모로 - 모로에나타난권력관계와국민정책성 : 지역연구방법론으로서의상 호택스트성을중심으로 - 김동엽 ( 부산외대 ) 태국전통가면무용극 콘 (Khon) 의현대적변용 : 전통문화와관광전략 - 이미지 ( 부산외대 ) 미얀마종교의식 까테인 의조직화양상과물품의변화가갖는사회문화적함의 - 김희숙 ( 부산외대 )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난힌두서사의사회문화적맥락화 : Mahabharata 를중심으로 - 김예겸 ( 부산외대 ) 사회 : 김예겸 ( 부산외대 ) 토론 : 조윤미 ( 서울대 ) 분과회의 6 신진박사발표 240 호 Elite capture of participatory governance : The case of Musrenbang in Indonesia - 발표 : 최인아 ( 서강대 ) 토론 : 전제성 ( 전북대 ) 범람과실험실 - 마을의중지 - 발표 : 이경묵 ( 서울대 ) 토론 : 전제성 ( 전북대 ) 발리우붓지역관광발달과전통의재구성 : 뉴꾸닝주민의문화적실천을중심으로 - 발표 : 정정훈 ( 서강대 ) 여운경 ( 서울대 ) 사회 : 여운경 ( 서울대 ) 한국동남아학회총회 17:50-18: 호 영원홀 사회 : 이상국 ( 연세대 )

9 DAY 년 8 월 26 일 제 4 부 09:00-10:30 분과회의 7 동남아시아정치와국제관계현안 : 인권, 선거, 테러리즘 303 호 조코위정부와과거청산 - 서지원 ( 창원대 ) 필리핀선거제도개혁의원인과결과 - 신재혁 ( 고려대 ) Counter-terrorism cooperation in ASEAN: state level capacity-building and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 Iordanka Alexandrova ( 고려대 ) 사회 : 신재혁 ( 고려대 ) 토론 : 이재현 ( 아산정책연구원 ) 분과회의 8 ( 대학원생발표 ) 동남아시아의정치, 제도와사회변화 230 호 군부의선택과신생민주주의정부의군부통제 : 태국, 인도네시아사례를중심으로 - 발표 : 오종원 ( 고려대 ) 토론 : 여운경 ( 서울대 ) 무엇이평화협상을막는가? 미얀마사례연구 : 카친족과카렌족비교 - 발표 : 소예니 ( 고려대 ) 토론 : 이상국 ( 연세대 ) 말레이시아인의종교성이성평등태도에미치는영향 : 무슬림과비무슬림비교 - 발표 : 강은혜 ( 서울대 ) 이상국 ( 연세대 ) 사회 : 여운경 ( 서울대 ) 분과회의 9 :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정체성 I 240 호 재태한인들의초국적경험 : 초국적정체성과현지문화와의관계를중심으로 - 김홍구 ( 부산외대 ) 교민생애사를통해본필리핀한인사회의변천 - 김동엽 ( 부산외대 ) 생애사를통해본말레이시아한인정체성의형성과변화 : 말레이시아이주정책에대한한인들의대응을중심으로 - 홍석준 ( 목포대 ) 사회 : 김홍구 ( 부산외대 ) 토론 : 임시연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 브레이크타임 10:30-10:40 제 5 부 10:40-12:40 분과회의 10 Politics of Culture and Discourse in Southeast Asia 303 호 Color Revolution in Cambodia - Too Much Ado about Nothing? - 발표 : Deth Sok Udom(Zaman University) 토론 : 오윤아 (KIEP) How Migration Has Shaped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an East Javanese Village Community: The Case of Pranggang from the 1890s to the Mid-1960s - 발표 : Nurchayati(Surabaya State University) 토론 : 오윤아 (KIEP) Comparing the National Ideologies: The History and Influences of Rukunegara in Malaysia and Pancasila in Indonesia - 발표 : Sahul Hamid Mohamed Maiddin (Sultan Idris Education University) 토론 : 송승원 ( 한국외대 ) Dolorosa Sinaga: The Life, Art, and Politics of an Indonesian Woman Sculptor - 발표 : Sony Karsono (Center for the Interdisciplinary Study of Culture, Society, and History) 토론 : 송승원 ( 한국외대 ) 사회 : 황인원 ( 경상대 )

10 분과회의 11 한국의대아세안정책주요이슈와정책방향 230 호 발표및토론 : 김형종 ( 연세대 ) 신재혁 ( 고려대 ) 이재현 ( 아산정책연구원 ) 이종하 ( 조선대 ) 이충열 ( 고려대 ) 최경희 ( 서울대 ) 사회 : 이충열 ( 고려대 ) 분과회의 12 : 메콩유역을둘러싼개발이슈와협력거버넌스 240 호 태국전력 / 에너지체제의경로형성과지속가능성평가 - 엄은희 ( 서울대 ), 신동혁 ( 서울대 ) 지역통합은국경비지니스에어떤영향을미치는가 : 태국-미얀마국경지역소수민족군벌을중심으로 - 이상국 ( 연세대 ) Determinants affecting on paddy productivity in Tonle Sap zone, Cambodia - 안정욱 ( 서울대 ), 김태윤 ( 서울대 ) 메콩지역스마트농업의주요사례분석 - 이재원 ( 서울대 ), 김태윤 ( 서울대 ) 개발도상국기후변화대응역량구축을위한국제사회의기여 : 캄보디아대학의기후변화교육을중심으로 - 전은정 ( 서울대 ), 윤순진 ( 서울대 ) 사회 : 이준표 ( 서울대 ) 토론 : 이요한 ( 한국외대 ) 이승호 ( 고려대 ) 오찬 12:40-14:00 오찬사 : 박원순서울시장 220 호 삼익홀 제 6 부 Roundtable Asian Peace Union as a Realistic Utopian Project 210 호 영원홀 사회 : 박은홍 ( 성공회대 ) 14:00-16:00 발표자 Walden Bello(State University of New York, Binghamton) Ekapant Pindavanija(Mahidol University) 백태웅 (University of Hawaii) 조희연 ( 서울시교육감 ) 박은홍 ( 성공회대 ) 김희정 ( 성공회대 ) 토론자 박사명 ( 한국동남아연구소 ) 박정은 ( 참여연대 ) 이상국 ( 연세대 ) 이인영 ( 국회의원, 외교통일위 ) 조효제 ( 성공회대 ) 브레이크타임 16:00-16:10 제 7 부 16:10-18:10 분과회의 13 ( 대학원생발표 ) 일반논문 303 호 잠재적이주자로서베트남여성들의초국가성경험 : 한국 NGO의신부수업프로그램을중심으로 - 발표 : 김경민 ( 서울대 ) 토론 : 최호림 ( 부경대 ) 對베트남관광공적개발원조 (ODA) 사업에대한수혜지역주민평가연구 - 발표 : 오수진 ( 부산외대 ) 토론 : 최호림 ( 부경대 ) Does Farmer Field School improve Farmers Willingness to Adopt the Drought-tolerant Rice Varieties in Pangasinan, the Philippines? - 발표 : 조선미 ( 서울대 ) 토론 : 정법모 ( 서울대 ) 사회 : 윤진표 ( 성신여대 )

11 분과회의 14 Political Developments in Southeast Asia: Democracy Versus Authoritarianism 230 호 Thai Politics in the Post-Succession Period - 발표 : Pavin Chachavalpongpun(Kyoto University) 토론 : 서지원 ( 창원대 ) Indonesian Democracy in Deconsolidation? Populism, Intolerance and Post-Truth - 발표 : Okamoto Masaaki(Kyoto University) 토론 : 서지원 ( 창원대 ) Re-authoritarianising Malaysia? Political Scandals and Problems of Accountability in the Post-Mahathir Era - 발표 : Iga Tsukasa (Kyoto University) 토론 : 김형종 ( 연세대 ) 사회 : 김형종 ( 연세대 ) 분과회의 15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정체성 II 240 호 생애사를통해본베트남한인사회 : 남과북의차이를중심으로 - 채수홍 ( 서울대 ) 이국에서살아남기 / 살아가기 : 구술생애사를통한인도네시아한인정체성의형성과변화 - 엄은희 ( 서울대 ) 라오스한인의삶 : 생애사를통해본정체성과네트워크 - 이요한 ( 한국외대 ) 사회 : 김홍구 ( 부산외대 ) 토론 : 심주형 ( 서강대 )

12 Contents 전체회의 1 동남아시아의종교, 정치, 일상 11 전체회의 2 Roundtable: Asian Peace Union as a Realistic Utopian Project 45 분과회의 1 Religious Tradition and Political Conflicts in Southeast Asia 83 분과회의 2 동남아시아의종교미술과정치 121 분과회의 3 동남아시아정치경제의대내외적변화 147 분과회의 4 개별발표 : 동남아시아사회의이동성과다양성 163 분과회의 5 동남아시아전통내러티브의현대적표상화 183 분과회의 6 신진박사발표 233

13 분과회의 7 동남아시아정치와국제관계현안 : 인권, 선거, 테러리즘 257 분과회의 8 대학원생발표 : 동남아시아의정치, 제도와사회변화 279 분과회의 9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 정체성 I 299 분과회의 10 Politics of Culture and Discourse in Southeast Asia 329 분과회의 11 한국의대아세안정책주요이슈와정책방향 357 분과회의 12 메콩유역을둘러싼개발이슈와협력거버넌스 359 분과회의 13 대학원생발표 : 일반논문 399 분과회의 14 Political Developments in Southeast Asia: Democracy versus Authoritarianism 427 분과회의 15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 정체성 II 447

14 전체회의 1 동남아시아의종교, 정치, 일상 1. 오명석 ( 서울대 ) 말레이시아의할랄인증제와이슬람정치 2. 김형준 ( 강원대 ) 인도네시아의이슬람정당과이슬람식정치 : 시론적접근 3. 홍문숙 ( 서울대 ) 자비로운딸이되는길 : 전환기미얀마이주청소년노동자의리미널리티와덕의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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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말레이시아의할랄인증제와이슬람정치 1) 오명석 ( 서울대 ) 1. 현대적할랄식품규정의등장과이슬람화의연관성 현대적할랄식품규정은쿠란과하디스에언급된기본원칙에기초하면서도이보다훨씬더복잡하고세밀한지침과절차를포함하고있다. 단순히어떤식재료가이슬람법에서허용되는가에대한규정을넘어서서, 식품의생산, 포장, 보관, 운송, 진열, 판매의전과정에서할랄에해당하는물질과하람에해당하는물질이서로섞이지않고엄격하게분리될것을요구하는세밀한지침과절차를포함하고있는것이다. 현대적할랄식품규정의특징은이러한분리를실현하기위한법적표준화와제3자에의한감사 [auditing] 의실행이라는측면에서두드러지는데, 이는할랄인증제의도입을통해체계적으로제도화되었다. 전통적의미에서의할랄음식규정이현대적인형태로바뀌게된배경으로현대의음식소비가공장에서대량생산된가공식품에크게의존하게되고, 그러한변화에따라무슬림국가들과비무슬림국가인유럽이나미국사이에글로벌한식품교역이활발해졌다는점을들수있다. 공장제가공식품은소비자가감지할수없는매우다양한식자재들을복합적으로활용하는식품기술과생산공정을거치게되는데, 여기에사용되는젤라틴, 효소, 유화제, 향미료, 보존제, 색소와같은식품첨가제의상당수가동물성원료로부터추출되기때문에전통적인할랄음식규정만으로는이에대해효과적으로대응하기어려운상황이발생하였다. 즉, 쿠란과하디스에는전혀언급되지않았던새로운식재료들이현대의식품생산에크게활용됨으로써이에대한규정을새롭게만들필요가생긴것이다. 또한전통적으로무슬림국가에서의음식생산과소비가국내적으로이루어지던상황에서는할랄식품의유통이당연한것으로여겨지던것과는달리, 이들무슬림국가들이미국과유럽의비무슬림식품업체로부터수입한가공식품에크게의존하게된현대의 1) 이발표초록은오명석, 유창조엮음 인도네시아와말레이시아의소비문화 (2016, 진인진 ) 중 9 장 말레이시아의할랄식품시장과할랄인증제 를발췌및수정한것이다. 13

17 상황에서는이렇게수입된식품의할랄여부가예민한관심의대상으로부상되었다. 할랄인증제에의한법적표준화와제3자에의한감사제도의도입은공장제가공식품의확산과글로벌식품교역의증대라는새로운상황에대처하기위한대응이었으며, 이를통해현대적의미의할랄식품규정과시행이글로벌한차원에서자리잡게되었다. 가공식품업체의입장에서보면할랄식품생산은기술적으로표준화된종교적시장을목표로한것이다. 생산자가어떤종교를가지고있는지와는무관하게현대적할랄식품을규정하는기술적표준을준수한다면, 그리고그제품이할랄인증기관에의해서승인된다면글로벌한할랄식품시장에참여할수있다. 리아즈와챠드리가쓴 할랄식품생산론 (2016[2004]) 은대부분의할랄식품업체가참조하는매뉴얼과같은위상을갖고있는데, 그내용은식품공학의입장에서식품업체가생산과정에서할랄기준을준수하는데필요한기술적지침을제공하고있다. 할랄이라는종교적규범이식품공학이라는기술적차원으로번역되어제시된것으로, 그것을토대로해서할랄식품산업이라는새로운, 변별적인산업부문의등장을예고하고있다. 식품업체의입장에서할랄식품의생산과유통은기술적인차원에서, 그리고판매전략의차원에서고려되고선택할수있는사항이된것이다. 무슬림소비자의입장에서보면현대적할랄식품규정의도입과시행은경건주의적 [pietist] 종교성의실천과 소비자움마 [consumerist ummah, 소비자무슬림공동체 ] 의형성이라는의미를담고있다. 글로벌무슬림세계에서 1960년대이후 이슬람부흥운동 [ 닥와, dakwah] 또는 무슬림각성운동 [ 나흐다, nahdah] 이지식인과중산층을중심으로활발하게전개되었는데, 이운동은한편으로는이슬람국가의수립이라는 정치적이슬람 [political Islam] 의성격을띠고다른한편으로는개인의종교적신실함을강화하는경건주의적이슬람의성격을띤것이었다 (Roy 2004). 할랄음식의소비는여성베일의착용과더불어무슬림이보다무슬림답게사는, 진정한무슬림 으로서의모습을보여주는일상적실천의중요한지표가되었다. 보다정교해진현대적할랄음식의규정을철저하게준수하려는태도는이러한경건주의적추세가반영된결과이다. 개인차원에서의할랄음식소비는그러한규범을준수하는전세계무슬림소비자들의연대의식을강화함으로써종교적신앙공동체라는원래의 움마 의의미에소비자로서의무슬림공동체라는새로운의미를덧붙이고있다. 소비라는행위를통해국가적차원에서, 나아가글로벌한차원에서무슬림으로서의정체성과권리를반영하려고한다는점에서소비자운동으로서의성격도갖고있는것이다. 14

18 이러한측면은특히무슬림소비자단체가할랄식품의규정에동물보호, 친환경, 건강함 [ 토이반, toyyiban] 이라는이슬람적가치가포함될것을주장하는데에서도두드러지게나타난다 (Istasse 2016: ). 할랄소비와 윤리적소비 [ethical consumption] 를결합함으로써현대의소비자운동과그궤를같이하면서동시에무슬림정체성을드러내고자하는새로운시도라고할수있다. 무슬림국가의정부입장에서보면현대적할랄식품규정의도입과시행은국내적으로는정부의종교적권위와정당성을확보하고, 온건한 이슬람국가로서의글로벌한이미지를창출하는데도움이된다. 정부가할랄인증제를직접관장하거나할랄식품의유통을관리하고감독하는행정시스템을마련하는것은정부의종교적권위와정당성을확보하는중요한수단으로인식되고있다. 특히, 국내의강경한이슬람주의세력으로부터세속주의정부라는비판을받는무슬림국가들의경우할랄정책의도입은정부의친이슬람적성격을표명하고각인시키는데효과적인방안이되었다. 이슬람주의가대중적으로확산되는상황에서정부주도의이슬람화는이에맞서는정책적선택이었다고할수있다. 한편, 글로벌한차원에서이슬람운동이지하드와같은폭력적인측면과깊게연루되어있는상황에서정부가할랄정책이나이슬람금융의육성에집중하는것은 온건한 [moderate] 이슬람국가 로서의글로벌한이미지를창출하는데도움이되었다 (Fischer 2016: 43). 정치적이슬람 이아닌 시장이슬람 [market Islam] 을지향함으로써현대적인이슬람국가로서, 그리고비무슬림국가와의교역을통한평화적공존을추구한다는긍정적인이미지를구축할수있었던것이다. 2. 말레이시아에서의할랄인증제도입의배경 말레이시아의공식종교는이슬람이지만, 인구비율에서무슬림의비중은절반이약간넘는수준으로중동과북아프리카와같이인구의절대다수가무슬림인국가와는뚜렷한차이를보인다. 종족집단별로인구구성을살펴보면 2016년기준으로말레이가 50.1%, 화인 [ 중국인 ] 이 22.6%, 비말레이계토착민이 11.8%, 인도인이 6.8% 를차지하고있다. 말레이는모두무슬림이고, 2) 비말레이계토착민과인도인의일부가무슬림인반면, 화인은거의대부분비무슬림이다. 즉, 말레이시아는이슬람국가이면서동시에 2) 말레이시아의헌법에말레이는반드시무슬림이어야한다고규정되어있으며, 실제로도말레이는이슬람을당연히자신의종교로인지하고있다. 15

19 다민족 / 다종교사회라고할수있다. 따라서, 무슬림이인구의절대다수를차지하는이슬람국가에서유통되고소비되는음식은당연히할랄로간주되는것과달리, 말레이시아에서는할랄음식과비할랄음식이공존하는양상을보여왔다. 특히, 말레이시아의주요한두종족집단인말레이와화인의음식소비에있어서돼지고기는무슬림에게금지된음식으로특별히강조되는반면, 화인에게는가장선호되는육류에해당된다. 그결과말레이음식 = 할랄음식, 화인음식 = 비할랄음식이라는이분법적인식이굳게자리잡고, 두종족집단의음식소비공간이확연하게구분되는현상이나타났다. 말레이시아식품시장의할랄화는 1990년대자킴 (JAKIM) 이관장하는할랄인증제의도입과매우밀접한연관을갖고있다. 자킴의할랄인증은글로벌한차원에서볼때선구적인할랄인증에해당하며국가관리라는예외적인방식을취하고있다는점에서주목할만한사례이다. 말레이시아에서할랄인증제가일찍도입되고체계적으로실행된데에는역설적이게도무슬림이인구의절대다수를차지하지못하는무슬림사회라는특성이크게작동하였다. 국내시장에서할랄식품과비할랄식품이공존하고있는상황에서무슬림이안심하고소비할수있도록제3자에의해해당식품이할랄임을입증하는인증의필요가보다강하게요구되었던것이다. 중동과북아프리카의무슬림국가에서식품에대한할랄인증의필요성이덜절실하게느껴지던것과대비되는상황이다. 이러한일반적인인구구성의요인을넘어서서말레이시아국내상황의변화가할랄인증제의도입, 이에따른말레이시아식품시장의할랄화에보다직접적인영향을미쳤다. 첫째, 1970년대이후말레이의도시이주가빠르게진행됨으로써과거에는화인이주도하던도시환경이다민족공간으로변화하기시작하였다. 말레이의도시이주는 1970년대초부터시행된 신경제정책 [New Economic Policy] 에의해말레이에대한정부의경제적지원이본격화되면서촉발되었는데, 그결과화인이다수를점하고있던도시가말레이와화인이비슷한비율로거주하는다민족공간으로변화하였다. 말레이가주로농촌에거주하던과거에는농촌에서유통되고소비되는음식은당연히할랄로간주되던것과는달리, 이들이이주한도시공간은화인음식이주도하는환경이었기때문에할랄 도시음식 에대한도시말레이 [urban Malay] 의요구를충족시키는것이당면한과제로대두되었다 ( 오명석 2012: 11). 둘째, 말레이무슬림사이에 올바른이슬람적소비 [proper Islamic consumption] 에대한태도와의식이크게강화되는현상이나타났다 (Fischer 16

20 2008). 이는 1970년대이후말레이대학생과중산층이주도한 이슬람부흥운동 [dakwah, 닥와 ] 이말레이시아사회에미친영향을보여주는두드러진징표에해당한다. 이슬람부흥운동은 진정한무슬림 으로다시태어나는각성을요구하는경건주의적종교운동으로서, 무슬림개인에게보다철저한이슬람적의식과실천을강조하였다. 이운동은 생활양식으로서의이슬람 을표방함으로써기도나단식과같은좁은의미에서의신앙활동뿐아니라일상적인생활전반에걸쳐이슬람적규범과가치를준수할것을요구하였다. 무슬림여성의베일착용과 올바른이슬람적소비 는그러한일상적실천과연관되는부분이다. 특히할랄식품은 올바른이슬람적소비 에서핵심적인사항에해당하며, 음식의할랄여부에대해말레이가보다철저하고예민하게반응하는태도가확산되었다. 정보기술의발전은이러한태도가일상화되는데기여하고있는데, 말레이젊은이와중산층들은인터넷과모바일폰앱등을통해할랄식품과할랄식당에대한정보를쉽게확인하고자신들의소비활동에활용하고있다. 셋째, 말레이시아정부가적극적으로 이슬람화정책 을시행하기시작하였다. 말레이시아의독립 (1958년) 이후집권여당의위치에있는말레이계정당움노 [UMNO] 는이슬람정당인파스 [PAS] 와이슬람부흥운동단체들로부터세속적정부라는비판을받아왔는데, 이들의비판이말레이대중에게확산되는상황이벌어지자 1980년대부터정부스스로이슬람화정책을적극적으로수행함으로써종교적권위와정당성을확보하고말레이유권자로부터의지지를공고히하고자하였다. 교육과미디어에서이슬람적요소의강화, 이슬람종교법정의강화, 이슬람금융의도입과더불어할랄인증제의시행은이러한이슬람화정책의중요한일환이었다. 특히, 이슬람금융과할랄산업의육성에정부의노력이집중됨으로써 시장이슬람 을지향하는온건하고현대적인이슬람국가라는이미지를창출하고, 급진적인 정치적이슬람 으로부터는거리를두는전략을취하였다. 이와같이말레이시아식품시장의할랄화는국내적요인들이복합적으로작용하여발생하였다. 무슬림과비무슬림이공존하는다민족 / 다종교사회라는점, 말레이의도시이주와말레이중산층의성장, 올바른이슬람적소비 에대한의식강화, 정부의이슬람화정책과할랄인증제의도입이식품업체의판매전략에맞물리면서말레이시아식품시장의할랄화가빠르게진행되었다. 17

21 3. 말레이시아국내법체계에서이슬람법과할랄인증제의위치 말레이시아의할랄인증제는 1994년자킴이할랄인증발급업무를관장하면서공식적으로시작되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정부가국내에서할랄식품의생산과유통에관심을가진것은이보다훨씬이른시기에이루어졌는데, 1975년의상품표시법시행령에할랄과관련된조항을첨부한것이그시발점이라고할수있다 (Trade Description[Use of Expression Halal ] Order 1975, 3조 ). 이조항은할랄식품의정의를제시하고, 이에해당하는식품에할랄이라는표지를부착할것을의무화하였다. 자킴의할랄인증발급은이처럼단순한법적규정에근거한것이었다. 하지만, 상품표시법의일부로할랄과관련된조항이포함된것은말레이시아법체계를고려해볼때는의미있는변화를시사하는것이다. 말레이시아는독립이후영국의식민지배시기로부터계승한시민법과이슬람법의이원적법체계를채택하였는데, 이슬람법은무슬림에국한해서가족법 [ 혼인과상속 ] 과신앙생활 [ibadat] 과관련된영역에만제한적으로적용되며, 상법, 행정법, 형법은전적으로시민법을따르는법체계이다. 말레이시아는독립이후이슬람을유일한공식종교로공표하였지만국가법체계내에서는이슬람법이주변적위치에놓여있었다고할수있다. 이런상황에서상법에해당하는상품표시법에이슬람과관련된조항이포함된것은기존의시민법과이슬람법의이원적체계에작은균열이생겼다는것을의미하며, 이슬람법이시민법의영역에침투하기시작하는조짐을보여준다. 3) 상품표시법에기초해서 80년대에는말레이시아수상실산하이슬람국이할랄식품의관리감독업무를맡았다가 90년대에들어이슬람진흥부인자킴이할랄인증발급을공식적으로담당하게되었는데, 이를계기로할랄인증을정부가관장하는말레이시아의독특한할랄인증제가자리잡게되었다. 미국과유럽국가와같은비무슬림국가에서의할랄인증발급이무슬림단체나이슬람사원과같은민간조직에의해수행되며정부가직접개입하지않는것과는대조되는측면이다. 자킴이할랄인증을관장할수있었던것은말레이시아에서이슬람이공식종교라는위상을갖고있고, 이슬람관련정부조직이있었기때문에가능한것이었다. 즉말레이시아는무스타파케말 [Mustapha Kemal] 의터키와같이정교분리의세속주의국가모델을 3) 말레이시아정부는 2013 년에이슬람금융서비스법 [Islamic Finance Service Act] 을제정함으로써, 할랄관련조항이상품표시법의일부로포함되었던것과는달리하나의독자적인조례로이슬람법이상법의영역에등장하였다. 18

22 전면적으로받아들이지않고이슬람을공적영역에서인정하는방식을취하고있었던것이다. 4) 또한말레이시아에서이슬람과관련된제반사항을정부가주도적으로관리하고통제하는 국가이슬람 [national Islam] 적성격이매우강하였다는점도무슬림민간단체가아닌정부조직의자킴이할랄인증과관련해배타적인권위를행사할수있었던배경이다. 2011년에이루어진상품표시법할랄관련규정의개정은자킴의이러한배타적권위를법적으로보다분명하게공인하기위한것이었다. 기존의상품표시법 (1975년) 에서는할랄이라는표지를누구나할수있고단지허위할랄표지를했을때에만처벌받는다고되어있었던반면에, 2011년의개정법안에서는자킴과주정부이슬람종교협의회만이할랄인증을발급할수있는 권한을가진기관 [competent authority] 으로명시되었다 (Trade Description[Certification and Marking of Halal ] Order 2011, 2조 ). 4. 할랄인증제의표준화와관료제화 말레이시아의할랄인증제는획일적이고정부가규제하는방식이라는특징을갖는다. 자킴의할랄인증이그런성격을명확하게갖고있는데, 이는할랄인증업무의표준화와관료제화를통해실천되고있다. 이러한표준화와관료제화는마하티르수상 [Mahathir, 년재임 ] 이후움노정부가지향하는 현대적이슬람 의두드러진특성을반영하는것이기도하다. 현대적이슬람 은이슬람적가치와규범에기초하면서도합리적이고효율적인방법과기술을동원하여현대적삶에부합하는이슬람적실천을지향하는데, 표준화와관료제화는이를위한주요한수단이었다. 할랄인증업무의표준은 2004년에제정된 MS1500(Malaysian Standard 1500: 할랄식품의생산 취급 저장에관한일반지침 ) 에의해뚜렷한형태로실체화된다. 자킴이내부적으로갖고있던할랄인증가이드라인을말레이시아표준원 [Department of Standards Malaysia] 이관장하는국가표준제의일부로공표한것이 MS1500이다. 이는글로벌할랄인증체계에서할랄인증표준이국가표준제의형태로제시된선구적인사례에해당한다. MS1500에는할랄식품의정의와함께, 할랄식품의생산 보관 운송 진열 판매 포장 라벨에대한일반지침이제시되어있으며, 식품가공에사용되는원료인 4) 정치적세속주의 [laicism] 는정치와종교를분리하고, 종교는개인의신앙생활과관련된사적영역에머무르며, 정치는공적영역과관련된것으로구획을짓는국가통치이념이다. 프랑스혁명의정교분리주의에서세속주의국가모델의이념형을찾을수있다 (Bowen 2010). 19

23 동물 해산물 식물 미생물 천연미네랄과화학물질 유전자변형식품에대한할랄규정과이슬람적도축의기준이제시되어있다. 다양한영역에대한세부적인규칙이제시되어있지만전체를관통하는원칙은매우단순하다. 할랄식품은돼지고기, 이슬람적도축을거치지않은동물의고기, 취하게하거나유해한물질을포함하고있지않아야하며, 할랄식품과비할랄식품은생산에서판매에이르는전과정에서분리되어교차오염의위험을피해야한다는것이다. 할랄식품규정의표준화는 MS1500에부록으로첨부된 이슬람적도축에서기절에관한요건 에서도잘드러나있다. 이는현대의도축장에서도축직전에광범위하게사용하고있는기절 [stunning] 기술에대한자킴의입장을표명한것인데, 가축총 [captive bolt stunner] 의사용은금지하고전기기절과공기압충격기술을사용하는것에한해서만허용하고있다. 기절장치를작동시킬동물의신체부위를명시하고있을뿐아니라, 동물의종류에따라허용되는전류량, 전압, 지속시간을구체적으로규정하고있다. 예를들어, 전기기절의경우닭에게는 A의전류와 V의전압을 3-5초동안가하고, 소에게는 A의전류와 V의전압을 3-5초동안가한다는식이다. 쿠란과하디스에규정된이슬람적도축에서도축전기절기술의적용에대한언급은전혀없는것으로, 현대의이슬람율법학자들사이에기절기술의사용이이슬람적도축에서허용될수있는지에대해논란이많지만, 자킴은동물이도축이전에살아있어야한다는이슬람법을준수한다는전제하에기술적으로표준화된기절의방식을제시하고있는것이다. 자킴의할랄인증업무는이러한표준화와더불어관료제적관리를엄격하게적용하고있다. 관료제적관리의측면에서문서화와감사 [auditing] 의기능이특히강조되고있다. 할랄인증을발급받기위해서신청업체는사업체현황, 생산제품목록, 식재료목록, 생산공정도, 할랄보장매뉴얼등에관한다양한증빙서류를제출해야하며, 자킴은이러한문서에기초해서심사를진행하고그기록을보관한다. 현대관료제의특징적인측면의하나인문서화가할랄인증발급에철저하게적용되고있는것이다. 또한신청업체가할랄규정을실제로준수하고있는가를점검하는감사업무가강조되고있다. 할랄인증발급이전에자킴의감독관에의해행해지는공장현장조사, 할랄여부가의심스러운식재료에대한대학연구소실험실테스트의뢰, 할랄인증을받은사업체의연차보고서제출, 회사내부의할랄위원회 [Halal Committee] 구성등이이러한감사활동의일환을이룬다. 자킴에의한감사뿐아니라회사내부의자체적인감사시스템의구비가점차강조되고있는데, 이를위해 20

24 할랄위원회의구성을할랄인증발급의요건으로요구하는새로운규정이만들어졌다. 문서화와감사업무의강조는자킴이관장하는할랄인증제의관료제적철저함과엄격함을보여주는동시에, 기업이할랄규정을스스로준수하도록이슬람적으로훈육하고있음을시사한다 ( 오명석 2012: 21). 기업에대한 이슬람적훈육 은기업임원또는할랄위원회의위원이할랄인증교육과정을이수하도록권장하거나의무화하는방식에의해서도수행되고있다. 할랄산업개발법인 [HDC: Halal Industry Development Corporation] 이나자킴의 e-halal에서제공하는할랄훈련과정은기업인을대상으로할랄식품의정의, 할랄인증의요건과절차, 할랄보장의방법에대해교육한다. 이를통해기업인들의할랄에대한인식을고양시킴으로써기업스스로할랄규정을준수하도록유도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여기서학습받는할랄규정은자킴의할랄인증제에서표준화된 현대적 할랄규정이다. 그규정을내면화함으로써기업인의할랄에대한인식과평가는자킴의기준을준거로삼게된다. 이러한현상은비단자킴의할랄인증을받는기업뿐아니라, 말레이소비자의태도에서도나타난다. 말레이소비자들역시식품의할랄여부를판단하는데있어서자킴의표준을따라가는경향을보이며, 자킴의할랄인증에대해높은신뢰를표명하고있다 (Fischer 2008: 89). 앞에서언급하였듯이, 비무슬림기업에있어서는자킴표준의준수가기술적차원에서또는판매전략의차원에서동기화된것임에반해, 말레이소비자에게있어서는종교적신실함의표현으로인식된다는점에서양자사이에중요한차이가있지만, 결과적으로는자킴의표준이말레이시아에서할랄식품을규정하는데헤게모니적인위치를차지하는현상이초래되었다. 5. 글로벌할랄인증네트워크속에서자킴의할랄인증의위상 글로벌한차원에서볼때미국의 IFANCA를제외하고는동남아국가들이할랄인증제의도입과확산에선도적인역할을하였다. 말레이시아의 JAKIM[ 말레이시아이슬람진흥부 ], 싱가포르의 MUIS[ 싱가포르이슬람종교협의회 ], 인도네시아의 MUI[ 인도네시아이슬람율법학자협의회 ] 가관장하는할랄인증이이에해당한다. 1980년대에출현한할랄인증은 2000년대이후비약적으로성장하여전세계의많은국가에할랄인증기관이존재하고있다. 유럽 [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오스트리아등 ], 북미 [ 미국, 캐나다 ], 남미 [ 브라질, 아르헨티나등 ], 동아시아 [ 중국, 일본, 한국, 21

25 대만, 태국, 필리핀등 ], 오세아니아 [ 호주, 뉴질랜드 ] 의비무슬림국가뿐아니라중동 [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방, 이란등 ] 과북아프리카 [ 이집트, 모로코등 ] 의무슬림국가에도할랄인증기관들이다수설립되었다 ( 코트라 2016; Bergeaud-Blackler 2016: ). 할랄인증이도입되던초기에는주로신선한육류가대상이되었지만, 가공식품전반으로그대상이확대되었고최근에는화장품, 세면제품, 의약품등이포함되기시작하였다. 글로벌한차원에서할랄인증의비약적인성장은큰혼란을야기하고있기도한데, 국가또는할랄인증기관에따라상이한할랄인증의기준, 전세계적으로난립한할랄인증기관의신뢰도가중요한쟁점으로부상하였다. < 그림 1> 세계의주요할랄인증기관 현재글로벌한할랄인증체제에서는글로벌할랄인증표준을제정하려는노력과할랄인증의구획화 (zoning) 현상이동시에발생하고있다. 글로벌할랄인증표준의제정은할랄식품의국제적유통을효율적이고원활하게하기위해필요한조치로인식되고있으며, 신자유주의체제에서국제통상을위해 22

26 교역과승인 [accreditation] 절차의글로벌표준화를추진하는것과맥을같이한다. 글로벌할랄식품표준의최초문건에해당하는것은 1997년에 FAO와 WHO의산하기관인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서제정하는국제식품규격 [Codex Alimentarius] 에포함된 할랄표지사용을위한 Codex 일반지침 이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아시아지부가이문건작성작업을추진하였는데, 초안작성과정에말레이시아에서파견된관료가주도적인역할을하였다 ( 오명석 2012: 30). 실제로 Codex 일반지침 에채택된할랄식품의정의와이슬람적도축의규정은말레이시아국가표준원의 MS1500의내용과대단히흡사하다. 글로벌할랄식품표준을제정하려는또다른시도의결과는 OIC[ 이슬람국가기구 ] 산하의 이슬람국가의표준및도량형연구기관 [SMIIC] 이 2011년에제정한 OIC/SMIIC 할랄인증가이드라인 이다. 이가이드라인의작성은터키가주도하였는데그내용역시기본적으로 MS1500의할랄인증표준을따르면서부분적인수정을가한것이다 (Bergeaud-Blackler 2016: 195). 글로벌할랄인증표준을제정하려는시도에서말레이시아의 MS1500이중요한준거로활용되었다는점이주목할만한데, 그렇게된배경으로 MS1500이국가기관에서제정한할랄표준이기때문에공신력이높았다는점과말레이시아정부가국제기구의글로벌할랄표준작성에적극적으로참여하였다는점을들수있다. 하지만, 이러한글로벌할랄표준은법적구속력을가진것은아니었으며, 또한이러한표준에기초해할랄인증을관장하는국제기구도없기때문에현실적으로작동하고있지못하는상황이다. OIC 국가들사이에이슬람적도축의방식으로충격기술의사용과가금류에대한기계식도살을허용할수있는가에대해입장이서로다르고, 비늘이없는생선을할랄로인정할수있는가에대해수니파와시아파간에의견차이가있기때문에완전한합의에이르기어렵다는문제도존재한다. 더큰문제는이슬람국가들사이에글로벌할랄표준의제정과관련해주도권경쟁이벌어지고있다는점이다. 중동의이슬람국가와동남아이슬람국가사이의경쟁, 중동내부에서도터키와걸프국가간의경쟁, 동남아내부에서도말레이시아와인도네시아간의경쟁이명시적으로또는은밀하게진행되고있다. 단일한글로벌할랄표준의제정과실행이어려운상황에서할랄인증이지역적으로구획화되는양상이나타나고있다. 말레이시아가주도하는 할랄일관성국제연대 [IHI Alliance: International Halal Integrity Alliance] 와 세계할랄포럼 [World Halal Forum], 미국의 IFANCA와인도네시아가주도하는 세계할랄식품위원회 [WHFC: World Halal Food 23

27 Council], 걸프국가가주도하는 GCC 표준화기구 [GCC Standard Organization], 터키가주도하는 OIC/SMIIC, 유럽국가가주도하는 유럽표준화위원회 (CEN: European Committee for Standardization) 와같은국제기구들이국가간네트워크를형성하여글로벌할랄표준에서자신들의기준을관철시키려고경쟁하고있다 (Bergeaud-Blackler 2016: ). 이들국제기구들에참여하는국가와할랄인증기관이부분적으로는중첩되면서도동시에분화되는복잡한방식으로글로벌할랄인증체계의구획화현상이발생하고있는것이다. 할랄인증규제와관련한다양한국제기구들이인증업무의글로벌한상호협력과단일한할랄표준의제정이라는목표를가지면서도실제로는서로경쟁하면서분화되어있는상황에서, 개별이슬람국가들이할랄인증의국가간상호인정에대해주권적권력을행사하는양상도나타나고있다. 예를들어, 말레이시아는글로벌할랄표준의제정에자킴의할랄표준을관철시키려는노력을경주하는동시에, 말레이시아의국내시장으로수입되는식품의해외할랄인증에대해서는자킴의인정이필요하다는식으로주권적권력을행사하고있는것이다. 2011년의상품표시법의개정안은이측면을법적으로명확히하였는데, 말레이시아로수입되는모든식품은자킴또는주정부이슬람종교위원회의인증을받지않았거나, 또는자킴이인정하는해외할랄인증기관의인증을받지않았을경우에는 할랄 이라고표기될수없다 는규정이이에해당한다 (Trade Description[Certification and Marking of Halal ] Order 2011, 4조 ). 이규정에따르면자킴이인정하지않는해외할랄인증기관의인증을라벨에부착한수입식품은법규를위반한것으로처벌의대상이된다. 자킴의인정을받기위해서는해외할랄인증기관이해당기관의할랄인증업무전반에관한문서자료를자킴에제출하는신청절차를밟아야하며, 자킴의서류심사와현장실사를거쳐승인여부가결정된다. 해외할랄인증기관의신뢰도를자킴이직접감사하는방식을통해확인하는것이다. 수입식품에대해서정부가인정하는국내및해외할랄인증이있는경우에만할랄이라는표지를부착하고국내시장에서유통될수있다고규정한말레이시아의이러한제도는인도네시아와중동의무슬림국가들로도확산될가능성이높다. 즉, 할랄인증의상호인정이개별국가의주권적영역에포섭되는양상이이슬람국가들을중심으로광범위하게전개될수있다는것이다. 글로벌할랄인증을관장하는단일한국제기구가부재하며그가능성도희박한상황에서그렇게될개연성이높다고할수있다. 24

28 참고문헌 리아즈 챠드리. 2016[2004]. 할랄식품생산론. 조영찬옮김. 서울 : 한울아카데미. 오명석 이슬람적소비의현대적변용과말레이시아의할랄인증제 : 음식, 이슬람법, 과학, 시장의관계. 한국문화인류학 45(3): 코트라 세계할랄시장동향및인증제도. KOTRA자료 서울 : KOTRA. Bergeaud-Blackler, Florence The Halal Certification Market in Europe and the World. in Bergeaud-Blackler, F., Fischer, J. & Lever, J.(eds.) Halal Matters: Islam, Politics and Market in Global Perspective. pp Bergeaud-Blackler, Florence Who Owns Halal? Five International Initiatives of Halal Food Regulation. in Bergeaud-Blackler, F., Fischer, J. & Lever, J.(eds.) ibid.,pp Bowen, John Can Islam be French? Pluralism and Pragmatism in a Secularist Stat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Fischer, Johan Proper Islamic Consumption: Shopping among the Malays in Modern Malaysia. Copenhagen: NIAS Press. Fischer, Johan Islam, Standards, and Technoscience in Global Halal Zones. New York: Routledge. Istasse, Manon Green Halal and Animal Suffering. in Bergeaud-Blackler, F., Fischer, J. & Lever, J.(eds.) ibid.,pp Roy, Olivier Globalized Islam: the Search for a New Ummah.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5

29 인도네시아의이슬람정당과이슬람식정치 : 시론적접근 김형준 ( 강원대 ) I. 들어가는말 87% 에이르는무슬림의비율이인도네시아정치에서어떤의미를가질수있는지는오랫동안관심의대상이었다. 이문제가본격적으로논의된첫시기는네덜란드식민지시대였다. 이슬람연구자인 Snouck Hurgronye의조언하에식민정부는이슬람의정치화는억제하되종교활동의자유는용인하는정책을펼쳤다 (Boland 1971: 13-14). 이슬람과정치의관계를생각해볼두번째기회는 20세기초반근대적대중운동단체사레깟이슬람 (Sarekat Islam) 의결성이었으며, 이후 1945년독립을전후로이문제는첨예한논란거리로부상했다. 신생국가의이념을이슬람으로해야하는지, 이슬람세력의요구를헌법에포함해야하는지를둘러싸고논쟁이전개되었으며, 민족주의정당에대항하는정치세력으로서이슬람정당의활동이활성화되었다. 1965년수하르또정권수립후이슬람세력에대한압박이거세졌고식민지시기와같이정치와종교의분리정책이행해졌다. 정부의탄압은이슬람정당의영향력을감소시켰지만, 다른식으로말하면이는이슬람의정치적폭발성이정부에의해인정되었음을의미했다. 수하르또퇴진은이슬람정당을재출현시켰으며현재까지 4-5개의이슬람정당이꾸준한지지율을유지하며정치활동을행하고있다. 독립이후, 혹은보다이전인 20세기초반부터현재까지이슬람세력에의한정치활동이계속되어왔음을고려해보면, 이슬람과국가의관계, 이슬람식정치체계, 국가운영, 정치참여, 정책등에대한논의가진행되고이들이지향하는이슬람식정치의개념이구체화되었으리라기대할수있다. 하지만현실은그렇지않았다. 이슬람세력의정치담론은현실정치의문제를중심으로진행되는경향을보였고, 정치와관련된본질적인수준의검토와논쟁은이루어지지않았다. 누가종교부장관이되어야하는지의문제가대의민주주의가이슬람교리에부합하는지의문제보다우선시되는상황이지속되었다. 26

30 이글의목적은이슬람으로의개종이후이슬람과정치의관계가인도네시아무슬림에의해어떻게개념화되고, 논의되고실천되었는가를개괄적으로검토해보는것이다. 이를통해정치적, 상징적자원으로서의이슬람이정부운영및정책의원천으로서의이슬람보다중시되어왔음이주장될것이다. 이러한상황이야기된정치적배경이무엇이었고, 그변화가능성은어떠한지의문제역시이글의검토대상이될것이다. 15세기이후현재까지의기간이연구대상으로설정되었기때문에이글은앞으로진행될보다체계적이고심층적인연구를위한시론적성격을띤다. II. 이슬람과정치 이슬람에서는종교와국가의분리가인정되지않는다고주장된다. 이슬람공동체의이익증진을위한조직체로서국가는신의명령에기초하여운용되어야하며오직신에게만주권이부여될수있기때문이다. 정교일치를이슬람의원리로이해할경우서구에서발전한근대국가체계, 특히민주주의적체계는무슬림사회에이질적인것으로비추어질수있다. 정교일치, 신권, 종교에기반한국가운영과같은원칙을고려할경우이슬람은독자적인정치체계를지향하고있다고말할수있다. 하지만, 현실에서이슬람의정치적특수성만을주장하기에는한계가있다. 무엇보다도이슬람식국가혹은정치가어떻게운용되어야하는지에대한구체적인규정이쿠란에제시되어있지않기때문이다. 정치관련교리가있지만이를현실에적용시킬구체적인방안, 혹은이를적용시킨확립된관행이나전통이부재하다는사실은중요한의미를가진다. 이는이슬람과국가의관계, 이슬람식정치가특정한역사적상황에서맥락적으로규정될수있을뿐특정한형식이그것을대표하는것으로인정될수없음을의미한다. 이로인해전제주의, 군주제부터민주주의까지다양한체계가이슬람국가에적용될수있으며 ( 손주영 1993: 142) 각체계의운용방식역시지역적, 역사적차이를가질수밖에없다. 이슬람과정치의관계가다양한방식으로전개될수있다면이슬람과정치의문제를검토하는데이용되어온 이슬람-민주주의의양립 ( 불 ) 가능테제 역시상이한각도에서평가되어야한다. 기존논의에서양립가능성과불가능성이본질론적인 (essentialistic) 차원에서검토되었던반면, 현실에서양자는명확히분리되기보다는상호교차적인관계를가질수있다. 현실조건에따라때로불가능한것으로, 때로가능한것으로이해될수있다. 27

31 현실정치에이슬람이어떻게적용될수있을지의문제는현대적변화를주도하는서구에대한무슬림들의태도와밀접하게연관되어있었다. 무슬림들이놓여있는특정한역사적,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조건속에서집단간협상과타협, 대립을통해이슬람과정치의관계가해석되어왔기때문이다. 이슬람식정치, 정치체계와과정은단수가아닌복수이며, 본질론적이아닌맥락적으로접근되어야한다. III. 인도네시아의이슬람정치 I: 개종부터독립이전까지 인도네시아에서이슬람으로의개종은종교적이면서정치적인변화였다. 당시종교가정치적정당성을제공하는원천으로작동했기에개종에담긴정치적의미가종교적의미를뛰어넘었다고까지말할수도있다. 가장강력한이슬람왕국으로부상한자바의마따람 (Mataram) 에서이슬람은권력을정당화하는역할을했다. 마따람왕국의 3대왕술탄아궁 (Sultan Agung) 의칭호 (title) 는이를예시한다. 자바전체를영토로확보한후그는메카로사신을보내 술탄 이라는칭호를받아왔다 (de Graaf 1976: 49). 술탄아궁의후계자들은보다대범한칭호를사용했다. 알라의대리인 을일컫는칼리파툴라 (Kalipatullah; Khalifatullah) 가그것으로써, 이들은자신들의정당성을신성에의거하여뒷받침하고자했다. 마따람에서이슬람은정치적정당성을뒷받침하기위한유일한수단이아니었다. 칭호를통해보자면, 마따람왕국분리후솔로의왕은빠꾸부워노 (Paku Buwono) 라불렸는데, 우주의축 이라는의미의이칭호는힌두불교적개념에기반을두고있었다 (Heine-Geldern 1942: 6). 힌두불교적우주론에서볼때신이거주하는메루 (Meru) 산은우주의중심으로서하늘과지구를연결하는데, 우주의축에비유됨으로써왕은신왕 (God-king) 의지위를획득할수있었다. 자바의이슬람왕국에서이슬람의우월성이부정되지는않았지만, 그것이이슬람식정치의실현을자동적으로의미하지는않았다. 이전의종교적전통과이슬람이혼재하는상황이유지되었고, 국가운영과일반인의삶에있어이슬람은비이슬람적관행과공존했다. 이러한상황을전환시킬변화는 19세기중반을거치며가시화되었다. 중동에서유행한개혁주의적흐름이인도네시아에유입되었던것이다. 20세기에접어들고개혁주의흐름이확산되자사회변혁의장애물이아닌마중물로서이슬람을이용하려는경향이출현했다. 이를대표할움직임은 28

32 1905년에설립된 사레깟다강이슬람 (Sarekat Dagang Islam: 이후사레깟이슬람으로개명 ) 으로서식민지하가장큰대중운동단체로성장했다. 이단체의이름에이슬람이포함되었음은종교가주요활동목표중하나임을시사하는듯하다. 그럼에도사레깟이슬람을이슬람단체로규정하기에는문제가있다. 이단체의활동목표는소외되어있던토착인의사회경제적상황개선이었으며, 단체의확산과대중화과정, 활동프로그램에서비종교적인문제가핵심을구성했기때문이었다. 이러한점을고려한다면이슬람왕국과사레깟이슬람에서이슬람이갖는동질성을찾을수있다. 이슬람이라는표현을통해일반적인수준에서왕국의성격이규정되었던것처럼, 단체의지향역시이를통해규정되었다. 하지만, 이는일반적인의미규정이었을뿐, 이슬람왕국에서이슬람의위상이절대적이지않았던것처럼사레깟이슬람에서도이슬람은중심적인위상을차지하지않았다. 이슬람에기초하여왕국이어떻게운영되어야할지의문제가중심적인이슈로부상하지않았던것과같이식민지하대중적정치활동, 사회발전에서이슬람이어떤의미를갖는지의문제는사레깟이슬람의핵심의제로대두되지못했다. 사레깟이슬람과같은시기에무함마디야 (Muhammdiyah), 엔우 (Nahdlatul Ulama) 와같은근대적성격의이슬람단체가설립되었다. 이들단체는탈정치적행보를취하며, 교육과사회문화분야를활동의주요대상으로설정했다. 정치와종교의분리라는선언의진정성은불명확했지만그것이이슬람정치에미친영향은명확해서이들단체의공식적담론에서정치문제가주변화되었다. 이러한주변화가가져온영향은심대했다. 근대적인정치공간에서이슬람이어떤역할을하고국가운영에서이슬람이어떻게적용될수있는지등의문제에대한논의가심도깊게이루어지지않았다. IV. 인도네시아의이슬람정치 II: 독립이후수까르노정권하 독립전후이슬람세력의활동과정에서이들의정치적지향점이명확해졌다. 이들은이슬람국가 (negara Islam) 건립을요구했고그것이받아들여지지않자 7어구 를대안으로제시했다. 7어구 는무슬림을대상으로이슬람법 ( 샤리아 ) 을적용할의무가국가에부여되어있음을밝히고있다. 이슬람법의적용이라는지향점은명확해졌지만이들의요구가받아들여지지않음으로써 7어귀, 나아가이슬람국가, 이슬람법의적용이갖는의미가무엇인지는구체화되지않았다. 그결과독립전후에제시된이슬람식정치담론은선언적의미 29

33 를보다많이내포하고있었다. 이슬람식국가운영이무엇일수있는지는이슬람국가설립을목표로분리주의무장투쟁을전개한다룰이슬람 (Darul Islam: 이슬람국가, 이하 DI) 을통해추정해볼수있다. 분리독립선언후 DI는이슬람국가의헌법을발표했다. 헌법 1조는국가명을 인도네시아이슬람국가 로규정했고, 국가의근간이이슬람이고가장상위의법이쿠란과하디스 (Hadith) 라는규정이 2조에제시되었다. 이슬람국가는대의제에기초하고있으며, 국민의대표자로선출된국회의원은법률제정뿐아니라이맘선출권한을부여받았다. 이맘은이슬람법을위반하지않는한종신제이며행정부를통솔한다. 3권분립이주장되어서입법부, 행정부와함께사법부가독립적으로구성되었다. 정치체계와운영에서이슬람식요소가강하게드러나지않았던반면, 형법에는상이한양상이나타났다. DI가공포한형법에는살인, 간통, 술, 도둑질등과같은범죄에대한처벌방식, 개종이나기도와같은종교적행동에대한대처방식이이슬람법에기초하여제시되어있다. 이러한사실은당시샤리아의적용이이슬람식형법의적용을의미하는것으로이해되고있음을시사한다. 이슬람식정치라는아젠다가이슬람담론의주류를구성하지못했던상황은수까르노정권하에서변화될개연성을가지고있었다. 이슬람정당이설립되고, 여기에이슬람세력이적극적으로참여했기때문이다. 당시의정치상황은주요정당이특정한이념적지향을가진자발적결사체의지지하에구성되었다는면에서사회문화적, 정치종교적지향을일컫는알리란 (aliran) 이라는말로표현되기도했다 (Geertz 1963: 14). 마슈미당이기존의주요이슬람단체를기반으로설립된것은알리란정치 (aliran politics) 를보여줄좋은예였다. 특정이슬람단체에속하거나그영향력하에있다는이유로그단체가지지하는정당을선택해야한다는주장이호소력을가지고받아들여졌다는사실은이슬람정치에있어중요한의미를가졌다. 즉, 이슬람정당의주요활동목표가근간이되는조직의확대에놓이게됨으로써이슬람식정치를위한논쟁을심화시키기보다는기존의인적, 조직적네트워크를유지, 확대하는작업이주요목표로설정되었다. 1950년대후반수까르노의독재체제가가시화되고마슈미가비합법화되자정치관련논의는점점더금기시되는경향을보였다. 엔우가수까르노체제의한축으로서정치적역할을수행했음에도불구하고, 이슬람식정치, 이슬람식정부운영에대한논의는이슬람담론의중심부로이동하지못했다. 그나마 DI 분리독립운동과정에서드러난모습, 즉형법에있어서의이슬람법적용 30

34 시도가이전과비교할때이슬람식국가운영의지향점을일부나마구체화시 킨것이라평가할수있다. V. 수하르또정권하이슬람정치 수십에서수백만명까지이르는일반인학살이라는폭압적상황에서등장한수하르또는자신의권력에위협이될이슬람세력에호의적이지않았다. 이들의정치활동을억압하려는압박은강화되었고, 인도네시아무슬림당 (Parmusi) 지도부의분열에서나타나는것처럼, 정당에직접개입하여영향력을약화시키려는공작정치가이루어졌다. 탈정치에대한압박이가속화되자, 1970년대중반엔우는정치활동에서탈퇴하여사회문화적활동에전념할것을선언했다. 마슈미비합법화이후탈정치행보를보이던무함마디야역시자신들의비정치적행보를재확인했다. 수하르또정권하에서이슬람정당의영향력은약화되었다. 정당합병은이슬람단체와정치세력간, 이슬람정치인과대중간연대를약화시켰다. 부유하는대중 (floating mass) 정책의타격을많이받은편은마슈미와관련된무슬림정치인이어다. 대중을대상으로한정치활동이불가능했기때문에이들이대중적영향력을회복할만한상황이주어지지않았다. 엔우정치지도자의상황은조금달랐다. 이들과대중의연대가정치적연합에그치지않고종교생활을포함한삶전체를포괄하는방식으로형성되어왔기때문이었다 (Dhofier 1999; Mansurnoor 1990). 엔우의정치적생명력은동부자바에서의선거결과를통해확인될수있다. 1977년과 1982년선거에서 PPP의동부자바득표율은 1972년엔우의득표율과유사했다. 이후 PPP 득표율이하락하는추세가나타났지만 1992년과 1997년선거를거치며다시원상태로회복되었다. 동부자바에서의엔우의정치적영향력유지는이슬람지도자와일반대중간의다면적인연대관계에의해부분적으로설명될수있다. 일반인에대한영향력을유지하는이슬람지도자들의연합체인엔우의경우정치적상황변화에도불구하고대중에대한정치적영향력을유지할수있었다. 이는인도네시아이슬람정당의활동에있어종교를매개로한근원적유대의중요성이수하르또정권하에서완전히제거되지않았음을, 수하르또통치기를통해알리란정치가완화된형태로지속되었음을시사한다. VI. 수하르또퇴진후이슬람정치 31

35 수하르또퇴진이후처음치러진 1999년선거에서이슬람관련정당 PKB는 12.7%, PPP는 10.7%, PAN은 7.0% 를득표했고, PBB의득표율은 1.9%, PK의득표율은 1.4% 였다. 이들 5개정당의득표율은 32.8%( 이들을포함한이슬람관련정당의득표율합은 33.7%) 로서 1997년 PPP의득표율 22.4% 와 1955년엔우와마슈미의득표율 39.3% 의중간정도에위치했다. 2000년대들어치러진 3차례선거에서 5개이슬람정당의득표율합은 30% 내외였다. 1999년 32.8% 였던득표율은 2004년 35.1% 로조금상승한후 2009년 25.9% 로급감하는모습을보였지만, 이후 2014년선거에서 31.4% 로상승했다. 1999년선거뒤구성된국회에서독립직전의상황이반복되었다. PPP와 PBB가자까르따헌장의 7어귀 를헌법에삽입해야한다는주장을제기했기때문이었다. 7어귀 를둘러싼논란이잠잠해진후이슬람세력이지지하는이슬람식정치, 이슬람과국가의관계가무엇인지를가늠해볼상황이전개되었다. 민주화이후지방자치강화에대한공감대가형성된후지방의회를중심으로샤리아를조례로제정하려는움직임이가시화되었다. 이러한시도는이슬람정당의광범위한지지를얻어서이슬람의지역적영향력이강한수마뜨라, 서부자바, 남부술라웨지등을중심으로유행처럼확산했다 ( 김형준 2013: ). 수하르또퇴진이후이슬람정당의활동을고려해보면, 이슬람식정치에대한이들의지향이과거와큰차이를보이지않음을알수있다. 특정이슬람단체나지도자를지지하기에관련정당을지지해야한다는주장은선거과정에서계속이용되었고정치적영향력유지의기반으로작용했다. 이슬람식조례제정역시 1950년대 DI를통해드러난정책, 즉이슬람형법의적용이라는틀에서크게벗어나있지않았다. 이러한사실은이슬람세력이사회변화에부합하는이슬람식정치가무엇일지의문제를심각하게고민하지않고있음을시사한다. 과거와의연속성이유지되는배경에는알리란정치가존재한다. 이슬람정당이이슬람단체나이슬람지도자에주로의존하기때문에이들의대중적영향력유지가새로운이슬람식정책보다중요한목표로간주될수있었다. 과거와의연속성이민주주의하이슬람정당의활동에서나타났다면과거와의절연을보여줄상황역시부분적으로표출되었다. PKS의등장과기성정치로의안정적인진입이그것이다. PKS가알리란정치에서완전히벗어나있는것은아니다. PKS 역시특정이슬람세력에기반을두고있고, 이슬람을상징적자원으로활용하려는모습 32

36 을보이기때문이다. 그럼에도다른이슬람정당과비교하여 PKS가가진차별성은간과될수없다. PKS의주도세력은 1980년대이후대학캠퍼스를중심으로이슬람선교활동을펼친따르비야 (Tarbiyah) 라불리는집단이다. 이들은이슬람교리의일상적적용을지지하고이를개인적으로직접실천하려했다는점에서이를선언적차원에서강조하는기존이슬람단체와차이를보였다. 이들이 PKS의주류를구성함으로써알리란정치와는차별적인모습이전개되었는데, 그이유는따르비야가명확한조직적실체를가지지않은집단이라는점이다. PKS의근간을이루는이슬람단체는강한대중적영향력을행사하지않았고그핵심지지자의규모역시제한되었다. 이는 1999년선거와 2004년이후의선거결과를통해추정해볼수있다. PKS의전신인 PK의 1999년득표율은 1.4% 였던반면, 2004년득표율은 7.3% 로급증했다. 이러한급격한증가는 PKS지지이슬람단체의확대가아닌 PKS의정치적활동과이미지를통해설명되어야한다. 즉, 알리란정치에서중시된상징적, 정치적자원으로서의이슬람이아닌정책의근원으로서의이슬람이 PKS의득표에핵심적역할을했다는것이다. 이슬람에대한 PKS의새로운접근은샤리아에대한태도를통해예시될수있다. 2000년대초반국회에서전개된 7어구 의헌법삽입요구움직임에 PKS는동조하지않았다. 이는 PKS가샤리아를이슬람형법의적용으로단순화시켜이해하지않았기때문이었다. PKS의前총재히다얏누르와히드 (Hidayat Nurwahid) 에따르면, 문제는많은사람들이샤리아를이야기하면서손을자르거나히잡을쓰는것으로이해한다는점이다. [ 샤리아를통한 ] 우리의프로그램은사람들이더잘살수있는방법이무엇이고, 정의로운상황을만드는방법이무엇인가를모색하는것이다 (Yon 2008: 196). 히다얏의지적처럼 PKS는샤리아를형법으로제한시키지않았고, 이슬람식가치와정신의구현이라는폭넓은시각에서이해하려했다. 도덕적차원이강조됨으로써샤리아는일거에적용되어야하는것으로개념화되지않았다. 즉, 과거이슬람정당의주장처럼샤리아적용을통해무슬림의삶이완전히향상될수있으리라는식의나이브한접근대신지속적인이슬람화를통해무슬림에게이슬람식가치의중요성을내재화해야한다는식의접근을지지했다 (Yon 2008: 195). 따라서샤리아의적용은다수의무슬림이그것을원하게될때까지점진적으로시도되어야한다. PKS의샤리아개념에서는윤리적, 도덕적차원이중시되었다. 이슬람식가치의활용방식에서도차이가나타나서, PKS는정의, 번영, 복지, 진보, 평화, 33

37 평등과같은현대적용어를통해이슬람의가치를구체화하려했다. 이는이들로하여금세속적정당의지향과정책을손쉽게전유할수있도록했다. 2004년선거에서는현대적정치담론의이슬람식수용이가시화되었다. 선거를앞두고 PKS는인도네시아사회의병폐를지칭하는표현인 KKN, 즉부패, 결탁 ( 유착 ), 연고주의의타파를핵심적레토릭으로내걸었고, 자기정당이부정부패에서벗어나새로운정치를지향하고있음을부각하려했다. 동시에 PKS는약자에대한보호를강조해서자연재해의피해를받은사람을돕고도시빈민을구제하는행보를직접펼쳤다. PKS의높은득표율은이러한이미지와활동이 PKS와직접연결되지않은보다광범위한무슬림에게호소력있게다가갈수있었기에가능했다고평가된다 (Permata 2008: 33). 이슬람정치에호의적이지만기존의이슬람정당에만족하지못한유권자들이 PKS 지지로선회했다는것이다 (van Bruinessen 2013: 35). PKS는알리란정치, 상징적자본으로서의이슬람, 정서적연대등에기반을두었던기존의정치환경에새로운레토릭을추가했고, 이를통해특정한이슬람단체나지도자에구속되지않는 부유하는무슬림 의지지를이끌어내고자노력했다. 이러한시도는이슬람에기반을둔정당이현대식정책정당으로전환할가능성을내재하고있음을, 샤리아적용이라는포괄적주장을정의, 복지, 평등과같은정치적담론으로전환시키고그에부합하는정책으로구현시킬잠재력을가지고있음을예시했다. VII. 맺음말 인도네시아에서이슬람의정치적중요성은개종이가속화된 15세기이후당연한것처럼받아들여졌다. 독립을전후로하여이는무슬림이라면이슬람정당에투표해야한다는식의레토릭으로전환되었고, 이슬람정당은이러한믿음에기초하여종교적영향력의확대를정치적영향력의확대와동일시했다. 무슬림이다수라는인구학적특성은이슬람식정치발전에있어부정적영향을미쳤다. 이슬람식정치가무엇이고, 그것이현실에어떻게적용될수있는지를논의하고고민하는대신이슬람정당을포함한이슬람세력은일거에이슬람식정치를구현하려고노력했다. 이는국가의기초를이슬람으로하고국가의기본규칙과법을샤리아로할경우이슬람식정치가완결된다는식의나이브한인식을뿌리깊게확립시켰다. 정치적환경의변화에도이러한인식은지속되는경향을보여서, 수하르토퇴진이후의민주주의적상황에서대다수이슬람정당은근원적감정과연대 34

38 에기반을두어대중적영향력을확대하려는전략을고수했다. 이러한지속성하에서최근변화의흐름이발생했다. 신생정당 PKS의출현과확대에서보이듯, 불특정다수의무슬림을대상으로현대적정치레토릭에의존하여정책을제시하고지지를이끌어내려는시도가나타났다. 이들의노력을통해이슬람식정책이현실에서어떻게구현될수있는지에대한논의가조금씩이나마구체화되는모습이나타났다. PKS의출현으로인해이슬람을상징적자원으로이용하고기존의네트워크에의존하여지지자를동원하려는경향과이슬람식가치를현대적으로전환하고이슬람식정책을통해무슬림에게호소하려는경향이경합하는상황이전개되었다. 이를통해이슬람식정치, 정치제도, 정책에대한논의를심화시킬환경이일부형성되었지만, 그것이지속될수있는지여부는불명확하다. 기존이슬람정치세력이자신들의영향력을유지하고있으며 PKS에서는보수화경향이나타나기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과정치를둘러싼인도네시아의논란이앞으로어떤방식으로전개될지의문제는현대사회에서이슬람식정치가어떻게발현될수있을지를검토할중요한기회를제공해줄것이다. 35

39 자비로운딸이되는길 : 전환기미얀마이주청소년노동자의리미널리티와덕의실천 5) 홍문숙 6) ( 서울대 ) 1. 들어가며 아시아최고수준의대학교육과사원교육의전통을자랑하는버마의 1950 년대의영광스러운지적 교육적자산을지금의미얀마에서찾기란쉽지않다. 미얀마는 1962 년부터지속된군부독재의영향으로교육기반이총체적으로붕 괴되었고 1990 년대에는아시아의최빈곤국으로추락했다. 특히체계적이고의 도적인고등교육시스템의붕괴는미얀마를 경전을읽을수있지만생각은하지 못하는사람들의나라 로전락시켰다는비판을받아왔다 년떼인세인대 통령이야심차게설립한교육종합평가단 (Comprehensive Education Sector Review) 의조사결과, 세의미얀마청소년중 42.9% 와 세의청소 년중 64% 가정규교육기관에소속되어있지않은 학교밖 청소년으로확인되 는등교육문제는예상보다훨씬심각하다는보고가발간되었다. 높은공교육 중도탈락현상과더불어공교육에대한학생들의깊은불신과불만족은미얀마 교육의문제의해결책을단순히빈곤에서만찾을것이아니라더정치 사회 문 화적인차원에서고찰할것을요구하고있다. 미얀마의군사독재는어떻게한 세대의교육을붕괴시켰는가. 지난수십년간미얀마의교육은어떻게계층, 지역, 종교간의불평등을재생산하는역할을하였는가. 그리고수많은중도탈 락생들은이와같은사회적, 교육적불평등을어떻게일상생활에서내재화하고 있는가. 이와같은맥락에서본연구는대규모의청소년들이공교육포기하고학교 를떠나고있는현상을심각한교육문제이자, 동시에미얀마현대사회의중요 한사회현상으로간주하고, 아래와같이세가지질문을중심으로연구를전개 하였다. 첫째, 공교육중도탈락을경험한 학교밖 청소년들은학교에서 탈락 ' 하 는과정에서이들은과거의학교경험, 현재의이주경험을어떻게인식하고 재구성하는가? 둘째, 여성청소년을중심으로일상생활에서전개되는젠더화되 5) 본발표자료는한국동남아학회학술대회를위해학위논문의내용을재구성한내용님을밝힘. 6) 홍문숙, 前양곤대학교인류학과객원교수, 서울대학교대학원글로벌교육협력전공강사 moonshiely@gmail.com 36

40 고종교화된나레티브의특징은무엇이며, 여성청소년들을이와같은일상속의담론형성에어떻게적용하고기여하는가? 그리고마지막으로셋째, 이주청소년노동자의나레티브는급격하게변화하고있는미얀마의사회구조와개인의역동적인사회관계에대한기존개념을재해석하는데어떻게기여할수있는가? 본발표는청소년이주노동자인 12명의동류집단중쉐다곤파고다인근에서거주하면서일하고있는 4명의여성청소년의리미널리티와일상에서의덕을둘러싼사회관계에대해집중적으로논의하고자한다. 2. 연구의이론적 방법론적고찰빅터터너는 의례의과정 (1969) 에서반겐엡의통과의례의성격인분리 (separation), 경계 (liminality), 재통합 (re-integration) 을분석하여, 다양한사회문화적현상에적용하였는데, 통과의례의전이상태를가리킨리미널리티혹은리멘 (limen, 문지방 ) 이라는개념을사회와개인의위치를연구하는데적용하였고, 이를통해사회의구조 (structure) 와반구조 (anti-structure) 사이에존재하는틈의공간인리미널한공간의꼬뮤니따스 (communitas) 의끼어있는상태혹은어중간한상태 (betwixt and between), 그리고구조적열등성 (structural inferiority) 이라고정의하고리미널한공간의중요성과공간을이동하는개인이경험하는통과의례와그상징을연구하였다. 리미널리티를다루고있는최신연구 7) 들은사업사회이전의전통사회에서발견된꼬뮤니따스와드라마틱한의식과제례를중심으로하는터너의리미널리티개념이지난 30 년간진화되어어떻게다양한구조와반구조속의불확실성에적용될수있는지, 최근내부적인과정 (internal process) 으로만강조되었던리미널리티의개념이외부적인과정 (outer process) 의사회변화와불평등한구조와상호작용하는역동적인과정으로확정되어해석되고적용되고있는지리미널리티연구의외연이확장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방법론적으로공교육중도탈락이라는교육적현상을사회구조와개인의사 7) 최근리미널리티에대한터너의해석은다양한관점에서확장되고재해석되고있는데인류학과종교학에서주로적용되던리미널리티의개념은 2000 년대들면서놀라울정도로다양한분야에서논의되고있다. 최근리미널리티에대한터너의해석은다양한관점에서확장되고재해석되고있는데도시히피들의리미널리티와이동을다룬 Morris (1987), 아동과청소년들의리미널리티를연구를진행한 Matthews (2003), Ann and Rivera-Sánchez (2005), 이주노동자의리미널리티를다룬 Sharman (2001), Menjivar (2006) and Wels and Spiegel (2011) 의연구등의연구가주목을받았다 년이후에는교육과정중에나타는연구들 (Hawkins & Edwards, 2015; Lake, 2015; Griess, 2014) 과청소년, 교도서수감자, 임시직전문가와일용직노동자들의리미널리티 (Borg, 2016; Daskalaki1, Butler& Petrovi, 2016; Green, 2015) 에대한논의를전개하였다. 특히, Field(2015) 의연구, Adult life course, Learning, Liminality, Getting stuck, becoming unstuck: Agency, identity and transitions 는 8 명의구조적으로취약한성인학습자들이어떻게 betwixt and between 를상태를직면하는지다루고있다. 37

41 회관계의역동을과정과의미를살펴보기위해에스노그라피 (ethnographic foundation) 에뿌리를두고, 사회이동과중도탈락의경험한 12명의청소년동류집단 (11명의버마족, 10명의불교도 ) 의전략적인생애이야기 (strategic life stories) 에대한접근 (Ginsberg, 1989) 을중심으로전개하였다. 2012년부터시작된미얀마사회 문화 발전에대한관찰은 2016년 2월부터 2016년 12월까지다면적인현장연구의진행으로확대되었다. 현장은불교국가의정체성을대표하는양곤의쉐다곤파고다와그주변지역, 그리고양곤의전통과현대도시화의복합성을상징하는술레파고다와그주변을선정하여관찰과인터뷰를진행하였다. 이두지역에일하고있는 11명의일터에서생활을참여관찰하는것을기본골격으로하고, 청소년들과의개별심층면담을진행하였으며, 그들의고용자, 동료, 친구들과면담을진행하면서연구전체과정에서자연적인방법과반구조화된연구방법을균형있게적용하였다. 본발표는전체연구중쉐다곤파고다와그주변지역에서일하고있는 4명의여성청소년들의리미널리티에대한연구를중점적으로다루고있다. 연구의방법론적인두번째측면은사회이동과중도탈락의경험한 4명의여성청소년 (Htet Htet Lin, Yin Yin Nwe, Khin Nwe Nwe, Kgat Nyunt Luu)( 가명 ) 이쉐다곤파고다주변지역에이주하여노동을시작하게된시점의삶과사회관계의특지을다루고있다. 미얀마중부지방출신으로공립학교에서중도탈락하여양곤으로이주한후, 찻집, 상점, 편의점등서비스분야에서일하고있는청소년노동자들이어떻게학교중도탈락을과거와의단절이라는 출발점 과도시로의이주라는 종착시점 을중심으로살펴본전략적인생애이야기이라는접근 (Ablemann, 2003; Elder, 1974; Ginsberg, 1989) 이다. 3. 연구결과및논의 과거와의분리 (separation) - 학교에서의낙제와예정된실패양곤의청소년노동자들에게분리 (separation) 란빈곤과구조화된낙제와실패로기억되는학교와의단절을의미하였다. 가난한가정형편과수많은고용의기회앞에서급하게이주한청소년들에게는과거와의단절그자체가중요하였는데, 그들에게과거의학교는내가남보다더가난함을사실을 발견하고확인한 공간이며, 특히 학교가어떻게돌아가는지아는 아이들에게낙제와실패는이미 결정된사실 로인식되었다. 전통적으로교육열이높고교사에대한존경심이특별한미얀마문화에서도지난수십년간진행된공교육의붕괴는섬겨야할오보 ( 五寶 ) 의대상으로존경받던교사의권위에도큰상처를남긴 38

42 다. 아이들은사회와학교에대해서는, 특히주입식교육과학교교육의 쓸모없음 을격렬하게비판함과동시에이와같이어른이되어가는과정속에서남성청소년들에게학교를그만둔것은자연스럽게 남자다운일 이며 돈이있더라고학교를가지않은행동 는책임감있는 남자의결정 으로미화하는데참여한다. 그나마미얀마불교가추구하는배움의가치를존중되는문화와스승에대한존경심덕분에 Khin Nwe Nwe, Kgat Nyunt Luu와같은아이들에게는아직도선생님에대한기억은종종추억으로남겨둘만한여지가있을뿐이었다. 권위적인학교문화, 유연하지않은교육과낮은교육의질에대한학교교육에대한불만은그들에게이미돌아갈수없는강력한단절된과거로서일상생활속의담론에뿌리깊게상징화되어있었다. 리미널리티 (liminality) - 젠더화된사회관계와불교적선택연구에참여한 12명의미얀마청소년들은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지위가고착화되고분화된계급적인체계로서의사회구조에서벗어나도시로이주를선택하고, 터너가제시한꼬뮤니따스와같은비교적평등한개인으로구성된비조직적이고미분화된중간집단으로서의사회구조속에서잠시의자유로움 ( 혹은터너가표현한바와같이민주적인공간에서의해방감 ) 을경험하였다. 12명의양곤청소년들에게학교로상징되는과거와의분리 (separation), 리미널한공간속에서어른도아니고성인도아닌, 학생도아니고아직노동자도아닌경계 (liminality) 의공간의이주청소년노동자들은기대한것보다아주빠르게그들에게기대되는사회적인역할로의첫발, 즉 생산적이고충실한 가족의일원그리고십바라밀 ( 十波羅蜜 ) 과아나데 (Anade) 와같은덕목을실천하는 자비로운아들과딸 로서의사회문화적인존재로자리로매김하게된다. 청소년들은리미널한공간인양곤으로의이주를통해상대적으로 어중간한존재 인자신을발견하였다. 어린이도아니고완전한성인도아닌, 학생도아니고완전한노동자도아닌, 다면적인자아의위치를경험했는데, 그대표적인사례가남성청소년들이겪는 현대적인성인식의밤 을경험한다. 이는권위적이고폭력적인 학교를떠나는졸업식과불교에서강조된엄격한사회관계와행동양식에서일시적으로자유로운새로운형태의일탈의경험이다. 반면여성청소년들에게새로운양곤에서의리미널한공간은터너가제시한 상대적인자유로움 과 익명성을보장해주는공간 으로전개되지않았다. 여성청소년들은친인척과안면이있는친인척을통해일자리를구해, 일련의강력한보호장치를마련한후, 이주를결정하였고, 이와같은이주과정의특성으로인해여성청소년들은일터에서도 이모 와 언니 에게비교적엄격한훈육을받는사회관 39

43 계안에위치하고있었다. 어린이도아니고완전한성인도아닌, 학생도아니고완전한노동자도아닌, 다면적인자아의위치를발견한다. 상대적으로엄격한환경은여성청소년들의신체적인표현뿐아니라일상의대화속에서잘나타났다. 여성청소년들의대화속에서늘등장하는아나데 (anade) 와다나 (ana, 자비, 관대함혹은베품 ) 는개념은미얀마인들의일상생활에서사회적인관계를보여주는중요한상징으로작용한다. 청소년들도 나눈다는것 에대해자신만의철학을가지고있다. 가진모든것은가족들과나누는것, 그다음에는사원에기부하는것이제일중요한일, 가장 자비로운일 이라고생각한다고강조한다. 이들에게아나데는가족에대한책임이본인에게가장크다고생각하는의무감이기도하고, 동시에다른사람들에게스트레스를주는자체에대한두려움이기도하다. 타인을불쾌하게하지않으려는두려움, 타인에대한배려, 체면을잃어버리는일이기도하다. 이와같은미얀마문화속의아나데는일상생활안에깊숙이녹아있는미얀마특유의불교문화에영향을받은사회적관계의기본을이루고있는것이다. 양곤청소년노동자들은 함께할때제일행복 하고, 사원에가서기부를할때내가 중요하다 라고느낀다고표현한다. 청소년들이생각하는가장중요한가치는단순히돈을더많이벌고, 학교를졸업해서지금당장학위를받는것이아니다. 이들이행복감과안정감을느끼고사회활동에서활력을얻는방법은자신들이 소속된공동체 속에서아나데를실천하는것, 그것은그들이속한사회관계속에서인정을받고덕을쌓는길이다. 종교, 젠더그리고여성청소년들의일상생활미얀마불교의상징으로쉐다곤파고다주변에서거주하고일하고있는 Htet Htet Lin, Yin Yin Nwe, Khin Nwe Nwe, Kgat Nyunt Luu에게하루는상징적으로나현실적으로나불교를떠나서존재할수없다. 이른아침 6시, 아침의여명을깨우는어른들의독송이나기도소리에잠을깨는아이들은승려에게음식을공양하는일로하루를시작한다. 이른아침부터 Htet Htet Lin 과 Yin Yin Nwe는함께사는고향이모와언니를도와보시할밥과음식을준비한다. 밥을잘짓는 x는늘보시할음식을만드는게즐겁지만, Yin Yin Nwe는늘허드렛일만하는것같아기분이안좋다. 그래서음식하기가싫어아침마나 온몸을비트는건 어쩔수없는아침의일상이다. Yin Yin Nwe는자신이보시할음식을하기싫어하는것은불심과전혀관계가없다고강조한다. 이유는아침공양이끝나고일하다가잠깐 10시즈음다시집에들려서 Htet Htet Lin이만들어놓은음식과물을작은컵담아부다를모시 40

44 고있는유리장에앞에놓고기도를먼저하기때문이라고설명한다. 스님에게보시를하는것보다부처님께직접기도를하는것이더 힘이세다 고강조한다. 아침의중요한일상생활의일부분이어떠한의미를가지는지설명을할때면그절차에대한설명은분분하지만쉐다곤파고다인근에거주하고있는이모, 언니, 그리고아이들이공통으로동의하는것이의견이하나있다. 쉐다곤파고다가바로뒤에서 365일을우리는지켜주고, 숙소와일터에는불상이있으니, 마음속에늘부처가얼마나다행인지모른다 저녁 10시즈음 Htet Htet Lin과 Yin Yin Nwe는세번절을하고잠이들준비를한다. 한번은부처에게두번째는. 얼굴도잘기억이나지않은 부모님, 그리고세번째는 학교를떠나서가족에도움이되라던 선생님에게절을한다. Yin Yin Nwe를절을하다엑소생각이났다며낄낄대며웃는다. 엑소가미얀마에와서얼굴을한번보고싶다고빌었다고살짝귀뜸한다. 그렇지만이런기도를하고종종은자기가원하는것을발라는기도를할때조금천박하다고생각한다. 쉐다곤파고다동문근처에서꽤큰불교용품공방과가게를몇개운영하고있는마딴딴에따르면, 이동네에서일하는여자아이들이바라는바가우리모두가원하는바 이며, 절, 파고다, 불상에서바라는바 모두가우리가언제나바라는바 라고설명한다. 따라서부처에게빌필요가없고학교를졸업하게해달라고빌거나, 잘생긴남자나좋은남편을만나게해달라고기도하는아이들은욕심이많은것이라고강조한다. 부처, 부모, 선생님들의건강과행복을위해서기도를하는일이바람직한일이며, 자신의건강, 부, 행목, 성공을위해서는욕심을부릴일이아니라그들의공덕, 즉선행을하는그자체에집중해야한다고강조한다. 그러면서 외국인이선생님이직접가르치는꽤비싼 B 학교 에다니는본인의딸은학업에많은부담이있음에도불구하고매일부처, 스승그리고부모를위해얼마나열심히기도하는지그리고그덕으로자신의사업이번창하고있음을강조하였다. 일상생활에미얀마의종교화되고젠더화된사회관계는의식적으로무의식적으로아이들자신을가장낮고열등한위치에놓고쉐다곤파고다인근지역의여성청소년들의일상생활속의종교는일상권력과의관계성안에서자신의위치를재발견하고끊임없이그위치를정립하는강력한기재로작동하고있는것이다. 제도로의재통합 (Re-integration) 이아닌다음삶으로청소년들이기대한바와달리, 상대적으로자유롭고평등하여민주적인사회관계의장이될수있는꼬뮤니따스의공간은기존의리미널리티연구에서강조되지않았던구조적인열등성속에위치한양곤의이주노동자청소년들에 41

45 게는자유의확대를허용하는공간으로작동되지않았으며, 오히려구조적으로취약한위치에있는그들에게더많은자비, 인내, 그리고생산성을요구되고있는공간으로쉽게변모한것을확인하였다. 연구에참여한청소년들은사회와공교육제도로의재통합 (re-integration) 에대한방향과경로에대해서상당히회의적이었다. 이들은 학교로돌아가는것은가능하지않다 라고생각하거나 돌아갈마음이절대로없다 며공교육에대한깊은불신을강조하였다. 구조적으로열등 (inferior) 한사회환경의환경으로사회와학교라는구조로의재통합 (re-integration) 을부정하는나레티브는그들의일상생활속에깊이배어있다. 차라리다음생애를기대한다. 이번삶에서는이미덕을쌓을수있는한계가있다는것이다. 남자가아닌여자로태어난아이들에게지금생애에서학교를다시돌아가는게중요하냐는대화에여성청소년들은당연히중요하지만, 다음생애도더넉넉한삶, 기왕이면남자로태어나는것이더중요하지않을까생각한다고이야기한다. 학교안과밖의교육에대한논의와평생교육의기회에대한논의는어느새이승과다음생애를오고간다. 4. 맺으며 미얀마청소년들은자신들의인생뿐아니라가지주변에서일어나고있는사회변화와관계를관찰하고그의미를찾아가는중요한관찰자이자, 전환기신흥국가의사회변화에참여하고있는적극적인주체이다. 그리고이들은일인당국민소득 700달러로 UNDP 인간개발지수 (2011년) 에서전세계 187개국중 149위를차지하며동남아시아의최빈국으로추락했던부모세대와달리, 군사정부의리더십하의단계적인민주주의가진행된 2000년초기에태어나서 2015년아웅산수치의국민민주주의연합 (NLD) 가선거에승리하며개방 개혁으로급격한변화를맞이한역사적인순간과같은괘도의삶을산세대이다. 비교적빠른사회변화속에서정보를자유롭게구입할수있는자유를얻고, 월급을은행과핸드폰으로자유롭게송금할수있는미얀마의첫세대로서이들이일상의상징체계에서드러나는사회적구조의모순과전환기미얀마사회변화의역동이중요한부분을차지하고있다. 본연구는기존의영미권에서연구된구조, 제도와개인, 학교와개인에대한이분법적인전제를미얀마의사회관계에대한고찰을통해도전하였다. 미얀마청소년들의일상생활에서포착된구조와개인간의권위와권력을둘러싼 관계적인사회환경 의중요성을강조하였다. 청소년들이경험하는일상생활속의내부적인구조 (inner process) 속에서이들이어떻게학교, 거주, 노 42

46 동과같은거시적인외부적인구조의중요성을해체하는일상생활속의불교적인담론 다음생애의중요성과이를위한덕의축척-을만들어가는지, 그리고그속에서여성으로서사회의개인의위치를어떻게정립하는지그특징을미얀마의사회문화적맥락 - 관계적환경속에서의재구조화를시도하였다. 이와같은과정에서미얀마불교도인들은일상생활속에서의권위와권력에대한새로운논의의가능성을발견하였다. Worsly, Needam and Leacher와같은서양의이론가들이 Gramsci나 Foucault의영향을받아권력과권위의의미를고찰하였다면, 미얀마여성청소년들의일상생활에녹아있는불교적인권력과권위에대한의식그리고그젠더관계를통해녹아있음을확인했다. 이는미얀마정치문화에서발견되는정치 종교적권력인 Awza( 오자 )(Kawamani; 2009) 혹은남성에게부여되는권력인 Hpon( 폰 ), 여성들의사회관계속에서중요하게고려되고생활속담론의가장중요한화제로서위치하는나눔, 자비 (sedana, 혹은 dana) 와아나데와같은중요한개념들이구조적으로권력화되어이들의일상생활속에내재화되어있음을보여주는것이다. 독재와개방, 전통과현대, 농촌과도시그리고학교와노동의거대한경계에서있는전환기미얀마청소년에게구조와꼬뮤니따스, 그리고억압으로상징화된학교와새롭게맞이한양곤의노동이라는사회구조사이에서전환기미얀마청소년들의경험은어떻게변증법적으로진화할것인가. 미얀마사회가건너고있는도시화, 개발, 이주라는거시적인외부적인과정 (outer process) 와교육과삶의선택을종교적인사회관계로서해석하는미얀마인들의내재적인과정 (internal process) 의역동성, 그에대한이해에서출발해야할것이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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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전체회의 2 Roundtable: Asian Peace Union as a Realistic Utopian Project 1. Walden Bello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Binghamton) Socializing Peace and Democracy in East Asia 2. Tae-Ung Baik (University of Hawaii) Human Rights Mechanism in Asia 3. 조희연 ( 서울시교육감 ) ( 동 ) 아시아평화연합 상상프로젝트가가능한가? 4. Park Eunhong(Sungkonghoe University) Toward Asian Peace Union(APU) Beyond Bandung Spirit 5. Heejeong Kim(Sungkonghoe University) Political implication of Article 112 (Lèse Majesté Law) and civil society movement against military regime in Thailand [ 토론문 ] 1. 조효제 ( 성공회대 ) 유럽연합과평화 아시아평화연합구상을위한약간의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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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Socializing Peace and Democracy in East Asia By Walden Bello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Binghamton) (Speech at the Asian Peace Union Conference, Seoul, Aug 25, 2017) This is a time of crisis in East Asia. The crisis has both regional and national dimensions. The regional dimension is a transborder challenge to peace and security. We have just seen how dangerous things can become in the recent exchange between Nor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After North Korea s defense ministry said it had readied plans to fire missiles to the seas around the US territory of Guam, President Donald Trump responded by saying that North Korea would face fire and fury like it has never seen before. It really gets very frightening when war and peace depends on the moods of unstable personalities. I am so glad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reminded Trump that it s South Korea that gets to make decisions involving conflict in the Korean peninsula. Trump, however, must be seen as simply adding to the instability of a region that has long been destabilized by Great Power rivalry. US, China, and Japan is driving tensions in the region. Competition between The US s strategy has remained unchanged since World War II, and that is to project massive firepower onto the Asian mainland to prevent the rise of any rival that would threaten the regional and global primacy of the US. China s stance has long been a defensive one, but recently it has displayed ambitions of gaining regional 47

51 hegemony. Japan has depended on Washington to contain China; in fact, it is mainly from US naval and airbases in Japan that the US carries out its containment strategy. Lately, Japan, under right-wing Prime Minister Shinzo Abe, has pushed to have a more offensive strategy bringing Japanese military might to intervene in areas outside Japanese maritime territory and brazenly reinterpreting Article 9 of the Japanese constitution, the peace clause, for this purpose, which is euphemistically termed collective defense. Even Japan s economic blueprint, the so-called Abenomics, has been criticized by one of Japan s leading economists, Dr Noiko Hama, as dictated by Abe s drive to regain Japan s imperial influence in Asia, and not so much to jumpstart Japan s sick economy. In Southeast Asia, the main security threat is US-China sparring in what the Chinese have called the South China Sea and what we in the Philippines call the West Philippine Sea. As it has in Japan, the US is using the Philippines as the southern anchor of its containment strategy and it negotiated the Enhanced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 with the Philippines to enable it to deploy US forces in nominally Philippine bases. China for its part has claimed 90 per cent of the South China Sea, provoking territorial conflict with five Southeast Asian nations that have claims in the area as well as 200 mile Exclusive Economic Zones. China has, In fact, begun building bases on some of the islands that has illegally grabbed. In the meantime, the US Navy has provocatively sailed its ships through the area in an outright challenge to China under the guise of promoting freedom of navigation. In order to resolve or prevent conflicts, nations have historically resorted to collective security agreements to resolve their differences. The United Nations is 48

52 one such collective security agreement. The North American Treaty Organization (NATO) in Europe is another. However, in East Asia, there is no multilateral body to resolve tensions and conflicts because the United States has opposed the establishment of such a body on the grounds that only the US can provide peace and stability in the region through the unilateral use of its military power. There was a chance for the ASEAN Regional Forum to evolve into such a multilateral body to prevent and mediate conflicts in the 1990 s, but then President Bill Clinton doused this effort, saying the ARF and other multilateral initiatives are a way to supplement our alliances, not supplant them. So what the region now has is a system of security dependent on the balance of power, or a fragile system of power that borders on anarchy. Partisans of the balance of power say it is the best way of maintaining the peace. I disagree. It is a system prone to breakdown and disruption, especially when new elements emerge to destabilize the system. The balance of power is a system of controlled anarchy that stands at the edge of real anarchy, and there are times when it goes beyond this edge to disaster. This was the case with the First World War, when the shooting of the Archduke Ferdinand in Sarajevo unexpectedly brought down the balance of power in Europe and brought about a war that cost some 20 million lives over four years. Today, the volatile Donald Trump who is on the border zone between rationality and irrationality is such a destabilizing element. The crisis at the regional level is paralleled by a crisis at the domestic level. Let me explain. In the 1990 s, with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and the socialist states of Eastern Europe, it seemed like liberal democracy was the 49

53 future of the world. As Francis Fukuyama put it, liberal democracy was the end of history. Fukuyama was wrong. Over the last two decades, we have seen the emergence of authoritarian movements hostile to liberal democracy. There are various reasons for this. One is the disruptive impact of neoliberal globalization on people s lives, which leads many in frustration to believe in the false promises of demagogic leaders who promise to right things through coercive measures. Another is the failure of liberal democracy to promote equity and social justice. A third is the response of the elite and the middle classes to movements by the poor and marginalized to empower themselves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East Asia has been infected by authoritarianism. In Japan, the right is in power, partly because of the yearning of a significant part of the population for a strong leader owing to 20 years of economic stagnation. Prime Minister Abe, however, is not only a rightist, but one who is at heart unapologetic for the atrocities that Japanese troops committe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e wants to restore Japan to its pre-world War II preeminence. In Thailand, where 25 years ago it seemed military rule was a thing of the past, a military regime is securely in power, backed by the elite and middle class owing to their fear of democratic governments backed by the lower classes in the countryside and the city. That regime is now persecuting academics for holding a traditional, widely respected conference on Thai studies on the ground that such conferences breed dangerous ideas. 50

54 In my own country, the Philippines, a strong man has exploited fears of drugs and crime to carry out a bloody campaign of extra-judicial execution that has taken the lives of what some estimate as close to 10,000 people in its one year in power. President Rodrigo Duterte does not believe in due process and human rights for drug users because he believes they are no longer human beings whose brains have shrunk, leaving them with little control of their faculties of thinking and willing. Just as President Donald Trump denies climate science, so does Duterte deny neuroscience, which says that drug users can be rehabilitated. Duterte has reversed the usual model by which fascists and authoritarian populists come to power. In the conventional model of creeping fascism, the fascist personality begins with violations of civil and political rights, followed by the lunge for absolute power, after which follows indiscriminate repression. Duterte reverses the process. He starts with massive, indiscriminate repression, that is, the killing with impunity of thousands of drug users, leaving the violation of civil liberties and the grab for total power as mopping up operations in a political atmosphere where fear has largely neutralized opposition. His approach might be called blitzkrieg fascism, in contrast to creeping fascism. Amidst these regional threats to peace and security and internal threats to democracy, South Korea stands as an exception. A few months ago, Koreans showed the world that by going out to the streets in an exhibition of direct democracy, they could peacefully oust a corrupt and incompetent president from power. Now we have a progressive government that has not only told the United States it has no business deciding the fate of the Korean people but made as one of its key campaign promises the reopening peaceful dialogue with North Korea. This would have been unthinkable decades ago, when Korea was 51

55 under military dictatorships that were vociferously anti-communist vassals of Washington. Owing to its record on peace and democracy, Korea is in a unique position to be an influential voice for a progressive future for East Asia. Of course, you Koreans would be the first to point out your limitations in pursuing this ambitious task. But do not underestimate your capacity to serve as a moral beacon for the rest of the region. There are no easy answers to the challenges posed by the grave threats to peace and democracy in our region. But my sense is that only by working together across borders like we are now doing at this conference do we have the chance averting disaster. I would now like to make a few suggestions on what we can do collectively: First, we should push our governments to come together to establish a system of collective security that would include all governments in the Asia Pacific region. This system should have a clear set of rules, sanctions, and incentives. It can build on already existing institutions, like the ASEAN Regional Forum, where everyone is included but unfortunately remains a talk shop. Second, we should work to establish a permanent forum for peace and democracy, where the best practices on peace-building and democratic governance can be shared. This forum should be open to the participation of civil society organizations and governments and should work toward binding resolutions. Again, this initiative can build on existing Track Two processes, such as the one in ASEAN. However, unlike these earlier processes, the proposed forum should not be subordinated to the governmental or Track One process. 52

56 Third, we should establish an Institute for Peace and Democracy, which would bring together peace and democracy scholars and activists for sustained interaction for a longer period of time. The work of such an institute would not only be progressive research but also the coordination of citizen initiatives across borders, like people-to-people delegations, say, between China and the Philippines. A sympathetic government such a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long with South Korean civil society organizations, can take the lead in establishing such an institute. Seoul would, in my view, be the best location for such an institute. In conclusion, let me thank the government and civil society organizations and personalities such as Dr. Cho Hee Yeon, Superintendent of Education for Seoul, for taking the initiative in organizing this meeting. Let this conference in Seoul be a major step by which regional civil society joins hands with government in a creative effort to bring about a peaceful and democratic future for the Asia Pacific region. We have very big challenges ahead of us. I thank you. 53

57 Human Rights Mechanism in Asia Tae-Ung Baik 8) I. Introduction Asia is the only area in the world that does not have a human rights court or commission covering the region as a whole. It seems to be easy to denounce the mechanism of human rights protection in the region. However, a closer look at the recent development in the region leads us to realize that a potential human rights system is indeed emerging. Last decades have seen various activities and initiatives for human rights and human rights system in Asia is still a half-full glass. It has been filled with some positive elements, but is still half-empty with things to be developed further. Is there a possibility for Asia to develop a regional human rights court or commission? Considering the significant changes that have taken place in recent decades in Asia including in the areas of the human rights cooperation, we can prospect that Asia is moving toward that direction. Asia will establish a human rights mechanism in one way or another, because the elements of human rights institutions are rapidly growing in Asia. At the national level, domestic courts, traditionally the most important human rights institution, are expanding their function as fundamental judicial institution to protect human rights. Under the authoritarian regimes, the courts were weak in terms of human rights protection. Along with the development of constitutionalism and rule of law, national courts provide remedies to the victims when their human rights are violated. Some of the Asian states established constitutional courts for judicial review of constitutional rights, a role traditionally assigned to Supreme Court, and constitutionalism is getting even popular. 8) Professor of Law & Director of SJD Program, William S. Richardson School of Law, University of Hawaii; Member, UN Human Rights Council Working Group on Enforced or Involuntary Disappearances. This article developed relying on some of the contents in the author s book, Emerging Regional Human Rights Systems in As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This work was in part supported by Overseas Leading University Program for Korean Studies through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Republic of Korea and Korean Studies Promotion Service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KS-2015-OLU ). 54

58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and truth commissions designed to deal with transitional justice issues are an important addition to the protective role of the domestic courts. At the international level, Asian states are involved as members to the human rights institutions. The United Nations, the UN Charter-based human rights institutions, and treaty-based institutions are working in association with Asian States. Special courts established by international community that deal with mass-scale human rights violations are not excluding Asia. When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s (IMT) to punish Nazi war crimes was established in Europe, there was the Far Eastern Military Tribunal to punish Japanese war crimes after WWII. Following the establishment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 and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ICTR), an international tribunal was set up to prosecute human rights violations committed by the Pol Pot regime in Cambodia. The mixed judge panel system that consists of Cambodian nationals as well as international legal experts demonstrates that the institutional development on human rights is not setting aside Asian issues. At the regional level, the regional organizations such as APEC, UNESCAP, ASEAN+3, and recently established East Asian Summits illustrate that regional integration in Asia is rapidly advancing with far-reaching impact on human rights matters. The UN Workshop for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in Asia Pacific and The Asia Pacific Forum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APF) provide evidence for the developing human rights focused mechanisms in Asia. The sub-regional organizations such as ASEAN, SAARC, and Pacific Islands Forum have shown that a dynamic cooperation would be of great interest to them, and human rights elements are stemming out of them. Ⅱ. The experience of the human rights institutions in Europe, America, and Africa The development of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is not perceivable isolated from regional integration. The creation of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and the birth of Helsinki Accord could be attributed to the political 55

59 environment of antagonizing communism and the legacies of WWII. The creation of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and Inter-American human rights system was motivated by the strategic consideration of the United States to contain Cuban influence and by the regional demand for transparent governance. Asia did not have a strong motive for a regional integration until the end of the Cold War. The Asianization was recently triggered by the accelerated globalization, especially after the Asian financial crisis in However, a new regional order has not been completely established yet, and the uncoordinated development in Asia is in its early stage. Even the people living in Asia don t have a clear blueprint for a regional organization, let alone human rights institution. In this regard, the experience of the human rights institutions of Europe, America and Africa is worth visiting, because they show the difficulties as well as some solutions to the questions that Asian states encounter in their institution building process. Three organizations, namely, the Council of Europe, the Organis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OSCE), and the European Union (EU) function as human rights systems in Europe. The Council of Europe has several human rights mechanisms, namely th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European Social Charter, and the European Convention on Prevention of Torture and the Framework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National Minorities. The European Court and Commission of Human Rights, the most effective and significant human rights system of the Council of Europe have been established under the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which was signed on November 4, 1950 entering September 3, The European Commission and the Court were replaced with apermanent humanright court system on November 1, 1998 by Protocol No. 11 to the Convention. All of the 47 member states of the Council of Europe have ratified or acceded the convention, the Court has mandatory jurisdiction over all of the member states. The evolution by continuous adoption of Protocols transformed the European human rights court into a real judiciary body of the region. The OSCE gives an added protection to the people in European region. It includes the geographical area of 57 state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as well as Western and Eastern European states. The European Union also has human rights protection functions. All 28 EU member states are 56

60 members to the Council of Europe and the OSCE. The European Court of Justice under the EU system handles inter-governmental issues in the region. The multi-layered human rights systems offer an enhanced protection of human rights to the people in Europe. The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 in Americas was established in 1948, and it now has 35 member states. The OAS adopted the American declaration of Rights and Duties of Men - the first expression of human rights principles - in the same year it adopted Charter, which was two and a half years before the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The Inter-American Commission on Human Rights was created under OAS in 1959, and has played a key role since its first session in 1960 in the struggle against repressive regimes by offering protection for the people whose human rights are in threat. In addition, the Inter-American Court of Human Rights was established in Costa Rica in 1978 by the adoption of the Americ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25 out of 35 OAS member states have ratified the Convention as of The African Union (AU) was formed in 2001 with 54 member states as a successor to the amalgamated African Economic Community (AEC) and the 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 The recently reorganized and strengthened regional organization, AU shares most of the institutional goals of OAU. The African regional human rights system was established pursuant to the African Charter on Human and Peoples' Rights, which provides for a broad scope of protection for human rights including civil and political rights, economic and social rights, and third generation rights. The African Human Rights Commission has existed in Banjul, and the African Court on Human and Peoples' Rights was finally launched in 2005 to supplement the African Human Rights Commission. The experience of European human rights systems offers meaningful lessons concerning the institutionalization and establishment of Asian human rights institutions.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had started initially as a marginal institution under the Council of Europe, but it has become one of the most important institutions of the organization. The Court has jurisdiction over all member states including Eastern European states, and the rapid expansion of the membership basis is an added proof of the legitimacy and strength of the Court. As a permanent judicial body with full-time judges, the court greatly contributes to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in Europe. 57

61 Another important aspect of European human rights system is that each of the overlapping institutions is successfully supplementing other human rights institutions in Europe. Harmonious existence of different human rights institutions under different organizations has not weakened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but strengthened it, which sets a profound precedent for Asian states in their multi-tiered efforts to institutionalize human rights system. The OAS was established reflecting the political situation during the Cold War in the region, but it has become an integral part of human rights protection system in the region. III. The human rights institutions developing in Asia Does Asia have the potential basis to establish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The review of the roles of the United Nations human rights institutions and of the developing regional or sub-regional institutions shows that the foundation for a regional human rights cooperation exists in Asia. The UN and other international organizations include Asia as part of their regional and global operations. All Asian states are members to the United Nations. The degrees of participation of Asian states depend upon their domestic interests or financial situation, but Asian states have never been excluded from the UN activities including human rights institutions. UN facilitates a variety of human rights institutions that are categorized into the UN-Charter-based institutions and treaty-based institutions. Thirteen states have been elected from Asia region as part of the 47 memberships of UN Human Rights Council. UN Charter-based institutions monitor human rights practice of member states including Asian state members. According to a statistical survey as of 2016, Asian states have taken up to 14% of total memberships of the inter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al bodies. Asian states are also actively associated with the special procedure Mandates. The participation of Asian states in human rights institutions doesn t necessarily mean that they are serious about human rights protection. Nevertheless, Asian states institutional participation generates positive results. The participation makes it hard for them to justify gross violation of human rights. It also contributes to the governmental awareness of the human rights 58

62 facts. Owing to the continuous engagement, Asian states cannot but embrace human rights as part of their internal value system. Asian states have developed various regional organizations and institutions. The Workshop on Regional Cooperation for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in the Asia-Pacific Region (UN Workshop) and the Asia Pacific Forum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APF) promote the human rights institutionalization in the region. In addition, regional political economic institutions such as the UN Economic and Social Commission for Asia and the Pacific (UNESCAP),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ASEAN Regional Forum, ASEAN plus Three (APT) and East Asia Summit in Asia Pacific region directly or indirectly promote human rights institution building process. Probably ASEAN Plus Three (APT) and East Asia Summit (EAS) are the most important intergovernmental regional organizations that are growing in East Asia. After the Asian states were hit by the blow of financial crisis of 1997, ASEAN, China, Japan and South Korea agreed to work closely to ensure regional economic and financial stability and to manage the risk of recurrence. The first APT summit was organized on December 16, 1997 with the ten heads of ASEAN member states and the heads of China, Japan and South Korea focusing on the peace and prosperity of the region. The APT Summit meeting held in December of 1998 began to think about the future of Asian cooperation. The development in South East Asia is quite remarkable not only in the areas of economic development but also in the realms of human rights cooperation. ASEAN was established on August 8, 1967, and it had been traditionally reluctant in the field of human rights cooperation. ASEAN foreign ministers who met at the ASEAN Ministerial Meeting (AMM) in 1993 adopted a Joint Communiqué which stated that ASEAN should consider the establishment of an appropriate regional mechanism on human rights. 9) Being backed by the NGOs activities in the region, especially that of the Working Group for an ASEAN Human Rights Mechanism that have endeavored to promote the human rights mechanism in Asia, ASEAN agreed to establish the ASEAN Charter in 2005, 10) and adopted the ASEAN Charter on November 20, The ASESAN 9) Joint Communiqué of the Twenty-Sixth ASEAN Ministerial Meeting, Singapore (July 23-4, 1993) para ) Kuala Lumpur Declaration on the Establishment of the ASEAN Charter, Kuala Lumpur (December12, 59

63 human rights body AICHR came into existence in The case of ASEAN integration is a good example how economic cooperation encourages the states to cooperate in the area of human rights as well. The development of Southeast Asian human rights institution is already stimulating the external actors, and will have a positive impact to bring about a broader cooperation at the regional level. Differently from the rapid development of sub-regional integration in Southeast Asia, Northeast Asian states are moving slowly. The summits of China, Japan and South Korea started in 1999, and the Secretariat of the Summit was established in Incheon, South Korea. Bangladesh, Bhutan, India, Maldives, Nepal, Pakistan and Sri Lanka have organized 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SAARC) on December 8, The SAARC Charter, which is the foundation of the sub-regional cooperation, states that its primary goal is economic and social cooperation among member states. There is no reference to human rights in the Charter and human rights and social agenda have not been main themes of cooperation. However, in recent years, South Asian governments are paying more attention to the human rights. SAARC is becoming more receptive to human rights-related issues and is putting some efforts to include human rights in its discussion. One of the best known intergovernmental regional organizations in Pacific region is the Pacific Islands Forum (PIF). It comprises 16 independent and self-governing member states. Because ASEAN is reluctant to be associated with the Pacific island states as a group, the Pacific states are more interested in pursuing a sub-regional arrangement in the region. It is noteworthy that human rights issues are incorporated in the institutional development. The Pacific Plan emphasizes that the region pursue a region with the full observance of democratic values and the defense and promotion of human rights. 11) The pace and manner of the regional integration is not all the same, but the four sub-regions are moving toward greater integration which brings about the development of human rights institutions. At the national level,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truth commissions, fact finding committees, and other human rights related institutions have been established. The states exchange their 2005). 11) See Forum Communiqué Annex A - Nadi decisions on the Pacific Plan, 37th Meeting of the Pacific Islands Forum - Nadi,Fiji(October24-25,2006) 60

64 experience to overcome human rights violations, and human rights NGOs and transnational networks in Asia are supporting this important movement to protect human rights. IV. Asian regional integration and institution building strategy Asia is growing various elements of human rights institutions. The pieces and bits of development being accumulated in the region are not sufficient to build a regional human rights court or commission yet. The Asian institutional development demonstrates some characteristics of its integration. Asia has put greater priority on economic cooperation, and the human rights cooperation has been much slower than in other region. The major motivation for Asian states to cooperate in international institutions is to maximize their economic benefits. It was fortunate to witness that, as globalization and regional integration progresses, states accept human rights issues as part of that economic cooperation. Human rights treaty ratification and norm adoption is providing important foundation for regional activities and human rights cooperation. Asian states ratification ratios of the international human rights treaties have been steadily increased last decades. Asian states often manipulate the term human rights to avoid sharp criticism from international community. The rapid institutional progress in the Southeast Asia at the sub-regional level proves that there is no coordinated blueprint for the future integration in Asia. Asian States are pursuing both regional-level cooperation as well as sub-regional-level cooperation at the same time. The non-existence of a region-wide intergovernmental political organization makes the institution-building process more complicated and unpredictable. The development of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will be probably a result of complex interactions of various actors in the region as was the case in the European human rights mechanism. More important thing at this time is to minimize possible conflicts or waste of energy in pursuing different approaches at the same time. Efforts to coordinate the ongoing efforts will generate synergies among the institutional development. 61

65 Why is it necessary to establish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in Asia?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will assist in Asian states in many ways because they share geographical proximities and historical and cultural bonds. The definitive proof that demonstrates the feasibility of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is the organizational foundation that exists in Asia. There are so many international organizations already working in Asia, and Asian states are already cooperating with other states and international and domestic actors in the UN bodies and agencies, in the regional and sub-regional organizations, and also in their national institutions. Nobody can predict what would be the future process of institution-building in Asia. There are many contingencies in the process. More important is to have sound principles to rely on in the institution-building process regardless of the final form of the institution. First, the institution building process will need flexible approach in devising the future form of cooperation. Second, open regionalism approach will be beneficial in the institution building process. Third, the development of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in Asia will be inevitably an evolutionary process rather than a revolutionary one, because the institution-building efforts demand consistent persuasion of states until they believe that a regional institution will be beneficial for all actors in the region. It is likely that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will build-up on the overlapping mandates of pre-existing institutions. Therefore,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will not be established at once, but it will gradually evolve. Strong commitments and consistent long-term efforts will eventually make the regional institution to be established and properly working in Asia. V. Conclusion Even if Asia does not have a regional human rights court or commission, it already has many kinds of global, regional, sub-regional, or domestic human rights institutions that are lending some functions in human rights protection. Given the current developmental stage, the Asian community needs to go ahead to discuss the contents of the upcoming Asian human rights convention, in 62

66 which they will be able to consider the fundamental values and identities that Asian countries share and agree upon for their community. Agreeing upon the human rights values and languages in the provisions, a discussion on the institutional mechanism may also develop. At this time, the system may resemble the American and African systems in terms its institutional mechanism having both Human Rights Commission as well as Human Rights Court as its institutional mechanism. The Human Rights Commission will serve as a basic human rights protection mechanism for broader Asian states that are not ready to acknowledge a mechanism of Human Rights Court, and the Court will provided a heightened protection for the states that are ready to agree upon the jurisdiction of the regional human rights court. The states that have ratified the First Optional Protocol to the International Covenant to Civil and Political Rights, e.g. Mongolia, Nepal, Philippines, South Korea, Sri Lanka; Australia, New Zealand, and the Asia Pacific Forum member states that allow its nationals to submit individual petitions to its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such as India, Indonesia, Malaysia, Mongolia, Nepal, Philippines, South Korea, Thailand, Timor-Leste; Australia, New Zealand (states in italic are in both categories) could be potentially the states that may lead the move for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building, With the remarkable development of human rights activities in the region, even if they are not free from gaps or loopholes that need to be filled up, Asia is clearly moving toward a stage that member states will agree upon a regional human rights body in the near future.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can ensure higher standards of human rights norms, offer a better opportunity for Asian states to participate in the human rights cooperation, provide an improved implementation of the norms, and make remedies available with promptness and efficiency, once it is established. The continuous endeavors to establish a reg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 will ensure better protection of human rights in Asia. 63

67 ( 동 ) 아시아평화연합 상상프로젝트가가능한가? Is it possible to imagine and problematize (East) Asia Peace Union 조희연 ( 서울시교육감 / 전성공회대교수 ) 1. ( 동 ) 아시아평화연합 상상프로젝트가만들어지게된배경과의미 * 아시아민주주의와인권에대한소기금 에대한소개 2013년말에아름다운재단과몇몇의 긴급조치 9호 수형자들간에 아시아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기금 을만들고자하는협약이체결되었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는유신체제 ( ) 이자그후반기는 1975년 긴급조치9호 선포로시작된 민주주의암흑기 였다. 다행히한국민주주의의발전에따라, 유신헌법과긴급조치 9호가위헌판결을받게되고재심이이루어지게됨으로써, 당시의구속, 구금등피해에대해서배상을받게되었다. 긴급조치 9호로수형생활을한긴조9호세대들이자신들이받는형사배상금및민사배상금을기초로하여수억원의돈을기부하여, 자신들의수형생활을하게된정신을살려아시아의민주주의와인권을지원하는사업을하고자하는취지였다. 이들은조금이라도한국민주주의를위해서싸웠던정신을계승하는사업을구상하던차에, 민주주의와인권의측면에서어려움을겪고있는아시아를위한사업을하자는취지에뜻을모으게되었다. 이사업에참여한사람은김준묵 ( 전스포츠서울회장 ), 조희연 ( 전성공회대교수 ), 변재용 ( 한솔교육대표 ), 하석태 ( 전경희대교수 ), 김종수 ( 도서출판한울대표 ) 등이었다. 당초큰기금을모아서지속적인사업을하기로했으나, 전정부하에서민사배상의길이막힘으로써기금의규모가당초보다현저히축소되었다. 적은기금을전제로할때, 다양한사업을하기보다는집중해서몇가지사업이라도의미있는사업을지원하기로하던차에, 오늘토론하게되는 ( 동 ) 아시아평화연합 상상프로젝트를지원하기로하였다. 64

68 * ( 동 ) 아시아평화연합 상상프로젝트의의미 ( 동 ) 아시아의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근원적인조건을마련하기위해서는현재의민족적 국가적경계를뛰어넘는 ( 동 ) 아시아평화연합 과같은것을상상하고현실화해가려는노력이중요하다는생각을하게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 동 ) 아시아의영토분쟁들을포함하여지구촌의다양한문제들은세계화의영향으로인하여근대의국민국가 민족국가적질서를뛰어넘는노력이이루어지지않는다면해결될수없다. 미국의트럼프대통령의당선이나영국의 Brexit에서보여지듯, 세계화의파장과고통은세계화를주도하는중심국가들내에서도 우익포퓨리즘 적현상을촉발할정도로그심도가깊다. 세계화의고통은방향을잃은대중들의다양한분노들과저항들을만들어내고있다. 여기에과거의식민과전쟁의경험, 각종영토분쟁, 각종역사적주제를중심으로하는갈등이연결되어질때, 세계화의좌절과고통은역설적으로국가들간의끊없는갈등과분쟁을확대할가능성이크다. 현재 ( 동 ) 아시아의현실역시이것의예외가아니다. 아시아는다른여타의지역 (region) 과달리최소한의범아시아인권규범마저도존재하지않는독특한지역이다. 그만큼아시아의여러나라들간의국경을넘는정치적, 사회적문화적통합의전망은거의존재하지않는상태이다. 이런상황을염두에두고본다면, 100여년전에안중근의사가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거론한것은선구적인상상력이라고할수있다. 100여년전일본제국주의적침략의선봉에섰던이토히로미를암살하고형장의이슬로사라진안중근의사가동아시아평화회의, 동아시아공동은행및공동화폐를제안했던것은현재의시점에서보면대단히의외이고선구적이라고아니할수없다. 사실당시만하더라도서구열강의침략앞에서 ( 동 ) 아시아민중들과민족국가들간의초국가적연대성이필요함을현재보다더절박하게인식했던것같다. 역설적으로냉전의시대를겪으면서 ( 동 ) 아시아의많은나라와민중들은더욱더분열적인국가주의와민족주의에경도되어갔는지도모르겠다. 유럽과달리 ( 동 ) 아시아에서는초국가적인연합이나연방에대한상상이나논의는거의없다고할수있다. 그것이단기적으로현실화될것같지도않은것이분명하다.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이라는상상자체가사치스러운것이자비현실적인것일수있다. 그러나안중근의사의선구적인언급을염두에둔다면, 현시기에시대를앞질러 ( 동 ) 아시아평화연방에대한상상및논의를하는것은나름대로의미가있다고하겠다. 65

69 다행히현재 ( 동 ) 아시아에서도국경을넘는시민사회의연대와초국경적인적 문화적이동과교류현상이활발해지고있다. 이런속에서시민사회와지식인내부에서부터라도국경을넘는연대성과유대가확대되어야하지않을까싶다. 이러한연대성과유대는만일우리모두가국민국가적 민족국가적인식틀에얽매이지않고 ( 동 ) 아시아평화연방 과같은새로운상상을할수있다고하면더욱촉진될것으로판단된다. 이런점에서, 아시아민주주의와인권기금이비록작은기금이지만, 세계화시대 ( 동 ) 아시아에서국경을넘는연대에대한상상프로젝트를추진함으로써미래의새로운가능성을여는데조금이라도기여하고자하는취지에서아래와같은몇가지사업을지원하기로하였다. 1)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주제로한 ( 동 ) 아시아인권평화국제활동가워크숍지원 2)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의상상, 그가능성과경로를분석적으로탐구하는학술논문공모 3)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주제로한대학원강의개설지원 4) 동아시아에서초국경적시민사회교육교류를하는 CENA(Civil Society Education Network in Asia) 의교육지원등. 2.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만일토론한다면 개인적으로학계를떠나기전, 나는개인적으로두가지지적프로젝트와실천을마음에품고있었고부분적으로작업을진행시키고있었다. 첫째는내가개인적으로중시하고있었던시민사회, 시민사회운동, 사회운동의관점에서한국민주주의의역동적변화를시계열적으로분석하는것이었다. 이것은다행히작년에두권의책으로현실화되었다. 그책은 < 투트랙민주주의 : 제도정치와운동정치의병행접근 > 였다. 둘째는이러한시각을동아시아로확장하여 ( 동 ) 아시아의세계사적역동성을해명하는것이었고, 동시에 ( 동 ) 아시아적수준에서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시민사회적실천을지원하는것이었다. 유럽스럽게도개인의역량과시간적한계로이러한포부는몇개의논문을쓰는수준에서중단되고말았다. 실천적측면에서아시아민주주의와인권발전에기여하고자하는포부는여러긴급조치 9호동료들과함께--아름다운재단과함께--' 아시아민주주의와인권기금 ' 을만들고자하는시도로나타났다. 그런데이것도학계 66

70 와시민사회를떠나면서초보적인시도로그치게되었다. 그초보적인시도는다시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이라는상상을지원하는프로젝트로다시협소하게구현되고있다. * 세계시민교육과 이중국적 (?) 교육감이된후, 그좌절된포부는그나마 세계시민교육 을추동하는것으로나타나고있다. 협애한민족주의 국가주의를뛰어넘어서울의학생들이미래지향형열린세계시민으로키우고자하는노력으로구현해보고자노력하고있다. 유네스코적표현으로하면 global citizenship education이라고도할수있고내식으로하면 consmopolitan education이라고표현하고싶은교육을학생들에게알기쉽게전달하기위해나는가끔학생들에게이렇게당부한다. " 여러분은 ' 이중국적자 ' 가되십시요. 두개의국적, 두개의시민권을가진존재로스스로생각하고행동하십시요. 두개의국적이라고할때그하나는한국의국적입니다. ROK, 즉 Korea 공화국의국적을갖는것입니다. 다른하나는지구공화국의국적입니다. 여러분은이두개의관점을가지고인종, 민족, 종교가다른외국인이방인을환대의눈으로대할수있어야합니다 ". *( 동 ) 아시아평화연합상상프로젝트의토론주제 학술토론의장이기때문에,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이라는상상프로젝트와관련하 여, 나는아래와같은몇가지토론거리를생각해보게된다. 1.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이라는유토피아적프로젝트가현시기세계화의부침을고려할때과연현실성을가질수있는가? 2. 만일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상상한다면, 그때의 ( 동 ) 아시아의현실적경계는무엇이될수있는가? 아시아일반, 동남아시아 (ASEA+3, 동북아시아 +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 남아시아 + 동북아시아? 3.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상상하게되면, 그에속할다양한국가들혹은민중들간에모종의공통성 (commonness) 이존재해야하는데, 그것은무엇이며과연어떻게구성될수있는가? 서구제국주의에지배를받은공통의식민지적경험인가? 오리엔탈리즘의시선으로규정된아시아인가? 한자문화권의공통의경험인가? 반둥회의로상징되는피억압의경험인가? 4. 만일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상상한다면, 그것은근대성의핵심원리인민주주의와인권의최소규범을갖는것이어야할것이고그럴때과연그것의내용은무엇인가? ( 동 ) 아시아에서최소인권규범과최소민주주의규범을확립하는것이가능 67

71 한가? 5. 글로벌시대유럽연합등과유사한 ( 동 ) 아시아평화연합과같은정치체 (polity) 가현실화된다고만일가정한다면, 그것을포괄하는글로벌정치체의모습은과연어떤것이될수있는가? 세계연방? 세계정부? 확장된유엔? 이러한질문들에대해공상수준의이야기정도외에는어떤해답도갖고있지않다. 하지만상상은자유이기때문에, 나는여전히상상의나래를펴본다. 여기서부터의논의는주로 교육감조희연 으로서가아니고 이전의학자조희연 의생각을정리한것이다. 세계화의역류 (reverse wave) 의현시기, 세계화의주도국가인미국에서조차 신고립주의 를표방한트럼프가대통령이되는현시기, 지역적통합의선도모델이었던유럽연합이흔들리고 Brexit가현실화되는현시기에, ( 동 ) 아시아평화연합과같은상상을한다는것자체가사치스럽게느껴진다. 더구나아시아는인종적, 종족적 (ethnic), 종교적이질성이대단히크고복잡하다. 유럽연합처럼라틴언어문화권이라던가, 부분적이지만역사적공동체의기억도거의없다. 동아시아의일부국가들사이에서 유교문화권 이나한자문화권이라고하는동질성이존재하는정도이다. ( 동 ) 아시아의개별국가들내부에서다종다양한이질성들이존재하는터에, 그러한개별국가를뛰어넘는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상상하는것이쉽지않은일이다. 그러나 90년대인터뷰에서 I. Wallerstein은 향후 50년안에세계정부가들어설것이다 라고말한적이있다. 거의 20년이흘렀기때문에, 그의말을액면그대로적용한다면향후 30년안에세계정부가들어서게될것이다. 그런 파격적 주장 도있을터인데, 오랜시간이흐른후를상정하고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을 상상 하지못할이유는없을것같다. 근대의민족국가가 상상의공동체 였던것처럼, 또다른초민족국가적정치체가또다른상상의대상이되지말란법은없을것같다. *1 차및 2 차지배적지구화, 1 차및 2 차대안지구화 개인적으로, ( 동 ) 아시아평화연합이라는상상을하는것은근대이후아시아와 세계 (world) 를보는우리의인식지평을전환하고자하는인식론적노력의하 68

72 나라고의미부여를해보고싶다. 그동안세계화의과정에서파생된많은문제들은경쟁하고대립하는국민국가적프레임내에서는해결될수없는지점에도달했다고생각된다. 경제적차원에서이른바 글로벌신자유주의 의흐름, 그리고그것에영향받으면서국내적수준에서의각종복지와공공재정축소를둘러싼갈등과적대는이제일국적차원으로는해결될수없는지점에와있다. 갈등의무한악순환적확대이외에는다른경로가존재하지않는다. 이런점에서과감하고용감하게무모하더라도, 더욱급진적상상을하는것이필요한시점이와있다고생각한다. 근대이후세계를나는개인적으로지배적지구화 (dominant globalization) 대대안지구화 (alternative globalization) 의각축과정, 나아가 1차와 2차의지배적지구화와대안지구화의부침으로보고있다. 100여년전 19세기후반과 20세기초반의지구화를 1차지배적지구화로보고, 그 1차지구화의모순에대응하는 1차대안지구화가시작되었다고본다. 1차대안지구화는 1차지배적지구화가제국주의적지구화로전개되고그내적모순이폭발적으로표출되는것에의해서촉진되었다. 주로사회주의혁명운동이나급진민족주의운동으로표현되고있었던 1차대안지구화가 2차대전을계기로저항운동에서국가혹은지배적체제로전환함으로써상황은완전히역전되었다. 예컨대중국, 동유럽등에서의사회주의정권의등장이나제3세계에서의급진민족주의정권의등장을연상하면될것이다. 그러나역설적으로저항운동이국가혹은지배적체제가됨으로써역의모순에직면하게되었다. 중국의시장사회주의로의전환, 동유럽체제의붕괴, 북한의 3대세습 등은 1차대안지구화를배경으로출현한체제가위기와모순을상징한다. 1차대안지구화는대체로 70년대중반까지지배적흐름을점하고있었으나, 89년동독의붕괴, 91년소련의붕괴를계기로역전을겪게되고, 2차지배적지구화가시작되었다고본다. 이 2차지배적지구화가지금우리가경험하고있는 신자유주의적지구화 이며, 이 2차지배적지구화의모순에대응하는 2차대안지구화운동 이이미시작되었다고본다. 그리고우리는바로 2차대안지구화 적상상력을가질필요가있다고본다. *nationalist Bandung or globalist Bandung? 주지하다시피 1955년반둥회의가열렸다. 이회의는역사적의의가있다고생각한다. 이는나의식으로표현하면 1차대안지구화운동을배경으로하여 2차대전이후성립하였던진보적국가담당세력들이--이미퇴조되고있었던--제국 69

73 주의적지구화에대립하는연대의선포였다. 우리가만일반둥정신 (The Bandung spirit) 이라고하는것을말할수있다고하면, 그것은자신들을지배했던이른바제국주의적블록의새로운지배에대항하는비동맹자조동맹 (non-aligned alliance of self-help) 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그런점에서만일현대적맥락에서반둥정신을되살려야한다면, 그것은글로벌신자유주의에의해특징지워지는 2차지배적지구화에대립하는새로운초국경적인평등주의적인집단적연대의정신으로되살려져야할것이다. 2차대전이후에나뉘어진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의구분은 2차지배적지구화의흐름속에서는해체되었다. 제2세계는현저히축소되었으며, 제1세계와제2세계의긴장이소멸한상황에서제3세계는제1세계의시장과국가의논리에포섭되어져가고있다. 제3세계의일부였던아시아도그런조건에놓여있다. 제3세계에속한많은국가들이각자도생하는식으로제1세계의중심국가들에연결되어존재하기보다는 2차지배적지구화의중심을벗어난권역별 (regional) 대안연대, 글로벌대안연대로나아가야할것이다. 이런의미에서우리가반둥정신을다시이야기한다면, 그것은민족주의적반둥 (nationalist Bandung) 이아니라글로벌지향적반둥 (globalist Bandung) 으로부활해야한다고생각한다. 우리가 ( 동 ) 아시아평화연합상상프로젝트가의미를갖는다면이러한맥락에서일것이라고나는생각한다. 70

74 Toward Asian Peace Union(APU) Beyond Bandung Spirit Park Eunhong (Sungkonghoe University) APU 프로젝트는분명히이상주의프로젝트이지만현실가능한내재적힘을갖고있다. 현재까지의인류사는인류가꿈꾸던이상의실현과정이었다. 그렇다면왜 APU는이상주의프로젝트인가? 사실상국제적수준에서국가간연대를꿈꾸었던것은제1차대전이끝나고조직된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 이었지만국가중심주의의벽을넘지못했고, 2차대전이끝나고조직된국제연합 (UN) 역시여전히국익우선주의의벽을넘지못하고있다. 미국예외주의 (American exceptionalism) 는그대표적인예이다. 심지어프로레타리아트국제주의까지중-소갈등에서볼수있었듯이국가주의혹은민족주의의종속변수였을뿐이다. 그러나국익과민족의이익역시상황의존적이다. 국제기구의탄생이국가중심주의가홉스가상정한만인에대한만인의투쟁상태로추락할뿐이라는경험을배경으로한것인데도여전히국가중심주의는마치인간으로부터자아 (ego) 를제거하면더이상인간이라고볼수없다는논리처럼국가를국가답게하는본질인양보인다. 중요한것은인간이서로상생하는시민사회를조직해내듯이국가역시국익의관점에서서로가상생할수있는국가간연합을소극적으로혹은적극적으로추구하고있다는점이다. 이러한측면에서 APU는이상주의적측면과현실가능성을동시에갖고있는이질적개념 (hybrid concept) 이다. 여기에서중요한것은국가간평화실현을위해서는각국가내민주적공화주의의도입이전제되어야한다는이마누엘칸트 (I. Kant) 의영구평화론이여전히유효하다는점이다. 그렇다면왜아시아인가? 아시아는식민주의, 빈곤, 독재등의경험을공유하고있고, 이중에서도특히식민주의경험에서연유되었다고볼수있는국가주권제일주의 (national soverignty-first ideology) 는인민주권 (popular soverignty) 혹은개인주권 (individual soverignty) 을무시하는양상을보였다. 그리고이러한국가주권제일주의가늘상강조하는용어가평화와질서였 71

75 다. 혹독한탄압을일삼았던버마의군사평의회명칭이국가평화발전위원회 (SPDC) 였고, 현재태국에서군정체제를이끌고있는군사평의회명칭역시국가평화질서회의 (NCPO) 이다. 흥미로운것은비동맹회의 (Non-Aligned Movement) 의모태가되는 1955년인도네시아에반둥에서열린아시아-아프리카회의 (Asian-African Conference) 에서도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기치를내걸고아래와같은세계평화와협력의추진에관한 반둥 10 원칙 12) 을선포하였는데, 이들국가대부분이인민주권혹은개인주권을무시하는국가주권제일주의를추구하면서반민주, 반인권국가로낙인찍혔다. 비동맹회의의지도그룹에속하는중국에서노벨평화상수상자기도한중국의류사오보의죽음은개인주권을무시하는국가주권제일주의의극단적예이다. < 그림 1> 아시아평화연합구축의경로 12) 1. 기본적인인권과유엔헌장의목적과원칙을존중 2. 모든국가의주권과영토보전을존중 3. 모든인류의평등과 크고작은모든나라의평등을승인 4. 타국의내정에불간섭 5. 유엔헌장에의한단독또는집단적인국토방위권을존중 6. 집단적방위를강국특정이익을위해이용하지않는다. 또한다른나라에압력을가하지않는다. 7. 침략이나침략의위협이나무력행사는타국의영토보전이나정치적독립을침범하지않는다. 8. 국제분쟁은평화적수단에의해해결 9. 상호이익과협력을촉진 10. 정의와국제의무를존중 72

76 아세안의경우에도 2008년 12월인권개선과민주주의증진, 좋은지배구조 (good governance) 정착, 법치주의실현등을명문화한아세안헌장을공표하였지만필리핀에서의두테르테정부의출범, 태국에서의쿠테타부활과군사정부의왕실모독죄적용남발, 버마에서의아웅산수지정부의소극적태도로인한로힝야인권문제의악화등에서볼수있듯이동남아시아에서의인권개선도답보상태이다. 특히이러한인권개선의느린행보는회원국의인권문제에여전히눈을감고있는불간섭주의독트린 (doctrine of non-interference) 이실행되고있는것과연관이깊다. 이렇듯많은한계를안고있는아세안이지만회원국들이모여평화와인권증진에합의했다는점에주목하면서 APU의현실화가능성을확인해볼수도있겠다. 아세안의변화가아세안시민사회의성장의결과이기도하다면아세안을토대로아세안 +3( 한, 중, 일 ) 이지역내평화. 인권레짐을갖도록하기위해서동남아와동북아로구성된동아시아내시민사회간교류확대와자체내역량강화, 그리고위의 < 그림 > 이보여주듯이시민사회트랙이씽크탱크트랙과정부간트랙에지속적으로영향력을행사하는것등이필수일것이다. 그리고이러한네트워크가다른아시아지역으로까지확대되면서명실상부한 APU 의기초가만들어질수있을것이다. 아래는 APU에현실화를위한초보적구상이다. 가. 아세안 +3( 한 중 일 ) 을중심으로한동아시아공동체논의의부상정부간수준에서 아세안 +3( 한 중 일 ) 을중심으로동아시아공동체논의가활발하게이루어지고있음. 동아시아에서는역사적, 상황적특수성의산물인주권, 개발, 안보중심의논의가여전히지배적이며국가중심주의사고를넘어서지못하고있음. 그렇지만정부간동아시아평화. 인권공동체논의과정에국가주의를넘어보편적가치로서의공공선을추구하는비정부기구 (NGO) 의영향력이점증하고있음. 나. 민주주의와인권을끌어안은평화이념에기초한동아시아정체성조직화동아시아는체제, 역사, 문화, 민족, 국력등의차이로인해정체성을이끌어내기가용이하지않았음. 이러한이질성과원심성은그동안동아시아에서보편적가치에토대한지역내평화, 인권레짐의역사가왜전무했던가를설명해줌. 그러나영토분쟁, 테러, 이주노동자, 난민, 환경오염등과같은지리적 73

77 인접성에따른상호연관된문제에봉착하게되면서동아시아국가들은인간안보, 생태계보존등과같은의제를공유하는방향으로나아가고있음. 이러한의제는서구주도의지구화 (globalization) 흐름속에서동아시아의정체성을어떻게자리매김할것인지, 동아시아의번영과평화공존의방식을어떻게조직할것인지등과같은과제와연관되어있음. 다. NGO와유기적관계를맺고있는씽크탱크 (Think Tank) 집단역할의확대특히서구중심의지구화파고와이와상반된지구시민사회 (global civil society) 의출현은보편적가치로서의민주주의 인권 평화이념에기초한동아시아정체성논의를촉발시키고있음. 그리고국경과민족, 종족, 종교, 문화의차이를넘어서서보편적가치를지향하는동아시아정체성논의과정에 NGO, 그리고이들 NGO와유기적관계를맺고있는씽크탱크집단의비중이커지게됨. 동북아를보자면일본의경우지역단위에서활동하는다양한 NGO들이있지만국가주의를견제하고완화시킬만큼의역량을갖고있지못함. 중국의경우 NGO의수가늘어나고있고그활동범위도넓어지고있지만정부의통제로부터자유롭지못한실정. 반면한국은동아시아에서가장활력있는시민사회를갖고있는것으로평가받고있음. 따라서동아시아시민사회지도자교류와차세대활동가양성에보다적극적일필요가있음. 이는시민사회네트워크강화를통한지역차원에서민주적거버넌스 (democratic governance) 구축과인적자본 (human capital), 사회적자본 (social capital) 창출효과를기대하는것임. 라. 국가주의적민족주의를뛰어넘는동아시아공동체구축에기여이는장기적맥락에서곧국가주권제일주의, 인권을경시하는국가간평화, 다시말해국가주의적민족주의에의해지배되어있는동아시아, 나아가아시아에평화, 인권레짐으로서의 APU를현실화하는경로구축이될것임. 이과정은 1955년반둥회의정신을넘어서극단적국가주의프레임에갖혀있는북한을아시아평화연합트랙으로어떻게이끌어낼것인지를공동으로논의하고지혜를모으는한반도평화정착프로젝트의성격도동시에지닐것임. 74

78 Political implication of Article 112 (Lèse Majesté Law) and civil society movement against military regime in Thailand Heejeong Kim(Sungkonghoe University) 1) Thailand's Military Junta and Human Rights Violence - May in the name of restoring peace and order the National Council for Peace and Order (NCPO) and the military junta declared martial law. - According to martial law authority can detain individuals for up to 7 days without having to bring charges against them - Individuals/politicians/member of the United Front for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 (UDD) / red shirt activists with a history of activism / high profile figures have been summoned for attitude adjustment and asked to cease their political activism - June 2014: the NCPO issued order No on the suppression and prevention of forest resource exploitation - November 2014: General Prayuth Chan ocha visitied Khon Kaen, Dao Din activists flashed the three-fingered salute drawn from The film The Hunger Game) - June 27 to July : The Dao Din student activists held in custody at the Bangkok Remand Prison - NCPO bans all political gatherings of five or more people - Dao Din members faced retaliation from state officials after they held banners displaying their opposition to state development project (7 students charged) - Civilians alleged to have committed certain offences are required to be tried in the military court system - Dao Din activists organized an activity to mark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coup à Military s constant presence in Thai politics - Relation between King / questions of sovereignty 75

79 à - Popular, martial, constitutional, monarchical? Pro-and anti-thaksin sentiments have divided Thailand and contributed to the unrest of the past decade. - modernizing change / universal healthcare, microcredit loans/minimum wage vs. traditionalist/urban bureaucratic elites-military establishment: political legitimacy and complicate the notion of popular sovereignty à Suppression of freedom of speech and assembly is a means of re-asserting its authority à Compared to 2006 coup the military intensified its suppression (more violent) 2) Protest against military oppression - Jatupat Boonpattararaksa - Dao Din - New Democracy Movement (NDM) - Three-fingered salute Political implication of Article 112 (Lèse Majesté) Whoever defames, insults, or threatens the King, the Queen, the Heir-apparent, or the Regent, shall be punished with imprisonment of three to fifteen years. 1) Problems of Article 112 Problem from the legal provision - The penalty rate of three to fifteen year imprisonment is too high and comparable to an offence of preparation to commit the insurrection, or manslaughter, or kidnapping of a minor younger than 15 years. - Vague elements of crime: the term insult - Protection of people holding different positions: a matter of equality - Offences relating to the Security of the Kingdom: maintaining national security? Problem from its enforcement - Its extensive interpretation and use: hamper ordinary people s understanding - Bringing charge against another 76

80 - Pressure to law enforcement officials to make any discretion in favor of the defendants: i.e., by refusing to indict the case, or allowing the alleged offenders to have bail or dismissing the case. 2) Political conflicts and Article Amidst political conflict in Thailand since 2005, there have been instances that the expressions of political opinions by one faction bad been accused of being Lèse Majesté and culpable per Article 112, which is a serious crime. And it has put the accused at a very disadvantaged position. 3) Impact on society - Climate of fear - Engulf the society with the notion that the Monarchy is untouchable and unspeakable and people are supposed to practice self-censorship. 4) Recent trend - The number of prosecutions under lese majeste has risen sharply since the coup. - Before the coup there were just five people in prison under lese majeste and only two ongoing prosecutions. - After the coup the total number of people who have been charged under lese majeste is now at 51 (4 released, 3 bailed out, 1 suspended, others still in open cases or are already serving their terms) 77

81 [ 토론문 ] 유럽연합과평화 아시아평화연합구상을위한약간의시사점 조효제 ( 성공회대 ) 제2차세계대전이후 70년간유럽은역사상최장기의평화를누리고있으며, 그러한성과는유럽연합으로대변되는유럽의지역통합에기인한다고보는것이통설이다. 유럽이역사속에서평화시대를구가한것은 20세기가처음이아니다. 고대에 로마제국의평화 (Pax Romana) 를 200년가량경험했었고, 1814년부터제1차세계대전발발직전까지약한세기동안 대영제국의평화 (Pax Britannica) 를운위한적도있었다. 이때평화라고하면전쟁의완전한부재가아니라상대적으로전쟁이적었다는뜻이다. 로마에의한평화가절대적지배를통해갈등이억제된상태를의미했다면, 영국에의한평화는외교적헤게모니를통한갈등의관리를의미했다. 그러나 20세기후반부유럽에서의평화는지역통합을통해평화를구축한다는새로운실험인소위 유럽의평화 (Pax Europaea) 로표출되었다. 팍스유로피아는비지배적이고비패권적인새로운평화개념으로서전세계인에게하나의모범사례로제시되고있다. 그러나여기에는세가지조건이선행한다. 첫째는유럽연합과유럽이지리적으로나정치적으로나일치하지않는다는사실이다. 특히현재유럽연합이전냉전시대의유럽경제공동체단계에서는이러한불일치의범위가컸다. 둘째, 전후유럽의통합은몇단계를거치며발전해왔으며우리가현재이해하는평화체제로서의유럽연합은정치적통합이이루어진마스트리히트조약이후 1993년부터의구성물이라는점을기억해야할것이다. 셋째, 유럽냉전체제를군사적으로뒷받침하기위해결성된나토 (NATO) 에가입한유럽회원국들과경제-정치공동체로서의유럽은상당히중복되었다. 냉전종식이후확대된나토의구성을보면유럽연합회원국과나토회원국이중복되는경우가 21개국이나되며이중에는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그리스, 폴란드, 체코등주요유럽국이망라되어있다. 나토는한회원국에대한외부의공격을모든동맹국들에대한공격으로간주한다는집단방위체제원칙에의해설계되었으므로이체제에속한구성원들사이의결속력및동맹국들사이의전쟁의부재는당연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1945년부터 1957년까지유럽은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라 78

82 는상업-무역협정에의해협력의단초가시작되었다. 1950년의슈만플랜이제시한경제협력을통한평화의기반구축이라는관점이 ECSC의기본토대가되었다. 그러나이때만해도유럽전체를조율하는컨트롤타워개념의조직체는존재하지않았다. 1957년부터 1973년사이에원자력에너지와경제협력활동이 ECSC와통합되어유럽경제공동체 (EC) 가탄생하면서본격적인유럽통합의경험이쌓이기시작했다. EC는계속확장을거듭했고동유럽붕괴이후그범위를동쪽으로확대하면서유럽대륙전체를아우르는단일한무역지대로발전했다. 이러한움직임의종착점으로서 1992년의마스트리히트조약을통해정치적조직으로서의유럽연합 (EU) 이 1993년탄생했으며이는오늘날우리가이해하는 유럽의평화 에가장근접한체제가되었다고볼수있다. 하지만점진적유럽통합의주류에속하지않았던유럽의주변지역에서는군사충돌과갈등이여전히계속되었음을직시해야한다. 그리스내전, 루마니아유혈혁명, 북아일랜드사태, 알바니아내전, 스페인바스크지역분쟁등 1945년부터지금까지총 41회의대소무장충돌이있었다. 소련이지배하던동구권에서도내전, 봉기, 시민저항등이끊이지않았다. 또한국가들간의본격적인전쟁도발생했다. 슬로베니아와유고슬라비아의전쟁, 터키와키프로스의전쟁, 특히 1990년대의구유고슬라비아내전은본격적인전면전에의한인명살상, 제노사이드, 파괴의모든패턴이드러난심각한사건이었다. 이렇게본다면전후유럽대륙에서전쟁이사라지고평화가도래했다는도식적설명은일종의역사적수사에불과할수도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적어도 1993 년이후유럽의열강들 (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 을포함한유럽연합국가들사이에서는전쟁이부재했으며앞으로도전쟁의발발가능성은낮다고볼수있다. 그러나유럽의지역통합이유럽의평화를가져왔다하더라도그것은어디까지나유럽내부의평화라는한계를지닌다. 실제로유럽의개별국가들이유럽바깥에서자국의국익을수호하기위해전쟁에개입한경우가적지않으며, 이런경우유럽연합은회원국의행동에이의를제기하기보다묵인하는편을선택한경우가흔했다. 알제리전쟁, 스페인과모로코사이의이프니분쟁, 프르투갈구식민지에서의내전,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리비아공습등이좋은사례이다. 즉유럽내부의평온은유지하되유럽외부에대한회원국의독자적군사행동에대해서는유럽연합차원에서개입하지않는이중적행동을불문율로삼아온것이다. 물론유럽연합차원에서외부지원과개입을전혀하지않은것은아니다. 전쟁이아니라갈등예방, 평화구축, 위기관리등의평화지향적활동은적극적으로전개해오고있다. 유럽연합은연평균 3억유로이상의막대한예산을투입하여전세계여러분쟁지역의평화유지를위해전향적으로개입해왔다. 바로이점에서개별회원국의국익위주대외정책과유럽연합전체의대외정책이상충될가능성이상존한다. 어쨌든유럽연합제도의설계내에이미평화주의적지향이포함되어있고그것을회원 79

83 국들이집단차원에서동의한다는점이중요하다고할것이다. 또한이점은전세계에서유럽이평화애호대륙이라는일종의외교적평판자본을창출하고있는것도사실이다. 유럽의경험으로부터우리는몇가지교훈을끌어낼수있다. 첫째, 유럽연합은전후경제협력을위한느슨한조직으로시작되었지만경제협력과더불어정치적협력을위해지속적으로제도화수준을높여왔다는사실이다. 유럽연합의성립이전부터유럽이사회, 유럽집행위, 유럽의회가결성되어, 중첩되는복수의정치적의사결정구조가진화를거듭했다. 그리고유럽재판소 (ECJ) 및유럽인권재판소 (ECHR) 는시민인권의확실한보장을유럽민주주의의핵심특징으로안착시켰다. 이처럼경제- 정치-사법의세기둥이어우러진 3주 ( 柱 ) 체제는유럽연합의평화체제구축에결정적인기여를했다. 둘째, 일찍이칸트는 < 영구평화론 >(1795) 에서국각간평화를유지하기위해서는국제관계에참여하는행위자들이내부적으로 ( 민주 ) 공화정에입각한국가들이어야한다고주장한바있다. 이는유럽연합의진화과정에서특히강조된부분이기도하다. 예를들어그리스는군부독재를벗어난이후에야유럽경제공동체가입이허용되었고, 터키는민주주의와인권보장의수준때문에아직도유럽연합에가입하지못하고있다. 적어도일정한민주주의수준에도달한국가들그리고제도적으로이를확약한국가만이유럽에공식적으로가입할수있고, 이런나라들사이에서평화가유지되었다는사실은이른바 민주평화이론 을뒷받침해주는좋은사례라할것이다. 최근폴란드국내에서 3권분립이손상되었다는이유로유럽연합이이나라의회원국투표권박탈을논의중인사실은개별회원국의민주주의가역내평화유지에얼마나중요한지를상징적으로보여주는사례이다. 셋째, 아시아의평화는전통적으로중국의정치-문화적헤게모니가압도적영향력을발휘하는가운데형성된 중화권의평화 (Pax Sinica) 라는형태로발현되었다. 이와반면일본은제2차세계대전중대동아공영권이라는구상아래억압적이고지배적인 일본의평화 (Pax Japonica) 를시도했었다. 두기획이오늘날까지지속되지못했던까닭은그것이본질적으로반근대적이고반민주적인평화구상이었기때문이었다. 그러므로아시아평화연방이장기적으로적실성과구체성을가지려면그구성요소에해당하는각국의내부민주주의는선결조건중의선결조건이라할수있다. 넷째, 문화와교육의차원에서도유럽연합은평화를위한여건을조성하는데에큰기여를했다. 예를들어에라스무스교육프로그램을통해매년수많은젊은이들이교환학생으로서유럽각국을방문하기시작했고, 이는현재소크라테스프로그램으로계승되었다. 소크라테스프로그램은평생교육까지포괄하는넓은의미의지성적교류기획으로발전해있는상태이다. 또한에라스무스프로그램은원래는대학생들의교류를위해창설되었지만지금은중고등학생을포함하는포괄적인역내상호교육프로그램으로확대되었다. 아시아권에서도이런교육적교류프로그램을통해중등교육수준에서부터아시아각국간의상호이해도를높이고, 젊은세대의인식의 80

84 폭을넓힌다면그것이 10년, 20년뒤에아시아의평화에있어어떤효과를낼것인지를상상해볼필요가있다. 또한이러한역내교육교류는공통의역사인식구축을위한프로그램 예를들어, 공동역사세미나와공동역사교과서집필등 과도밀접한연관을맺으면서확장되었다. 마지막으로, 나토의군사동맹하에서전쟁억지의명분으로미사일과핵무기를증설해왔는데유럽의반전평화운동이이를저지하는과정에서유럽시민사회차원에서평화공동체의식이발전했음을지적할필요가있다. 이는군사적수단을통한전쟁의억지라는소극적이고전도된평화개념이아니라평화적수단을통한평화의달성이라는적극적 본질적평화개념의설정으로이어졌다. 이는전통적격언인 평화를원하면전쟁을준비하라 (Si vis pacem, para bellum) 라는격언을거부하고, 평화를원하면평화를준비하라 (Si vis pacem, para pacem) 라는새로운정언명령으로평화개념이바뀐것이다. 또한유럽의반전평화운동은전후유럽진보세력의오랜전통인반핵운동 ( 예를들어 CND) 과연동되어급진적이고근본적인평화요구로이어졌다. 지금은거의망각되었지만 1980년대초신냉전대결의분위기속에서소련의핵위협과그에맞선미국의중거리탄도미사일 ( 퍼싱미사일 ) 의독일영토내배치가유럽에서핵전쟁의위기를극단적으로고조시켰던시기가있었다. 이때독일을위시한유럽의반전-반핵운동이대규모대중동원을통해전쟁위기를진정시키는데일조했었던사실을상기해야할것이다. 이는오늘날한반도를둘러싼핵전쟁위기의상황에서동북아역내의각국시민사회들이상대적으로침묵하고있는상황과뚜렷이대비되는역사의교훈이라할수있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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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분과회의 1 Religious Tradition and Political Conflicts in Southeast Asia 1. Frank Dhont (University of Brunei Darussalam) Degrees of 'historical Nusantara' in contemporary Islamic Politics: Islam in Indonesia, Malaysia and Brunei as 'Malays " 2. Putut Widjanarko (Paramadina University) Creative Approaches in Peace Building Initiatives in Indonesia 3. Rudi Sukandar / Erda Handayani (London School of Public Relations-Jakarta) Communicating Religious Values for Political gains in Indonesia: Banners in 2017 Jakarta Gubernatorial Election 4. Wahyuddin Halim (Alauddin State Islamic University of Makassar) Islam and the Dynamic of Local Politics in Indonesia: The Fate of Pro-Shari'a Movement in Contemporary South Sulaw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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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Degrees of 'historical Nusantara' in contemporary Islamic Politics: Islam in Indonesia, Malaysia and Brunei as 'Malays Frank Dhont (University of Brunei Darussalam) 1. Nusantara the imagined community of the elusive past Nusantara : the islands with the sea in between. There is a tradition of seagoing people who have travelled these waters over great distances ranging from Australia and Polynesia to the Straits of Malacca. Some argue that people even reached Africa. The Malay has historically always been recognized as a sailor and navigator. It is only normal that this concept of ancestral pride became a political label for the region. Was the area first referred to by the Europeans as Straits Settlement, Netherlands Indies, Borneo Chartered Company, or even Sarawak kingdom of the Brooke White Raja. The older glory of kingdoms such as the Sultanate of Brunei found themselves of shrinking importance. In what we now refer to as Indonesia (a name that reflects perhaps also a foreign cultural sphere: the Indian Islands), the nationalists in the early 20th Century did away with the Dutch concept and saw themselves as brothers. The term Nusantara did not gain traction but Indonesia was chosen. In what is now Malaysia (and possibly even more colonial engineered as nation bringing various administrations together) there was interest in Indonesia as example to the Malays that were not part of this larger unit but historically colonial borders were just not changed. Even Brunei that never accepted the stripping away of the fertile Limbang valley splitting the country in two never managed to regain that territory even when colonial powers were long gone. 85

89 Yet although that community of indigenous peoples found themselves to be in politically different entities both colonial, historical as well as now national. The concept and affinity never disappeared. It is a given that there is a natural affinity within this region. As Customs, Culture and Language are largely similar. Malaysia, Brunei and Indonesia (including even some regions outside of these three countries) all speak Malay/Indonesia and they all recognize an affinity with their neighbors. This affinity is strengthened by an imagined history together that is partially based on this proud seafaring tradition as well as one more trait known to all: Islam. 2. Historical Islam in the region Islam came to the region in the 12th Century and by the time the Europeans arrived Islam had well established itself. Simplifying the historical complexity Islam came to a local socially structured tribal unit and changed the make-up of this unit quite often through marriage where a local princes or prince married with an important Islamic dignitary and thus turned the whole tribe or group into Muslims as people followed the ways of the king. Islam brought law, education of a new kind, administration but also access. Access to networks of trade that made the communities prosper more. The depth of the Islamization religiously compared to a more mere acculturation of Islam differed in the various regions but it did have a major impact. This is easiest seen in Java where over a few centuries the people who had built Hindu and Buddhist temples of a scale and grandeur rivaling India and other areas found themselves only living on the slopes of Bromo Mountain in East Java or the relatively small island of Bali. Absorbed was the Hindu-Buddhist dye and Islam was now the dominant religion. This was even stronger in the Northern areas that depended more on trade. There the kingdoms of Sumatra, Malaya and even Brunei and the Moro in what is now the Philippines all made Islam a central part of their identity in a network of trade accessible over the sea. Only one element seemed to be missing. 86

90 3. The language of: Pasar Malay The Dutch colonial administrators in the 19th Century and the 20th Century recognized that they ruled over a very diverse community of people. Some of these had prospered and were very numerous although the population increase in Indonesia only dates back from that area. Yet they found that one language dominated. It was named where it was found in the Passer or Pasar: the marketplace. That language was Malay. Hence the name Marketplace Malay. People all spoke this Marketplace Malay. Historically again only spoken by a community surrounding the Straits settlement area and perhaps some Northwest parts of Borneo, this was the language that was acquired and used by traders who spread it all over the region. Historical Nusantara to modern Nations This picture merely indicates the there was a very clear historical connection between various people in the region yet this was more done than merely through haphazard luck. There was an effective design that steered the process. 1. Dominance of the Center and its political impact Historically the Nation of Indonesia consists of a large number of ethnic groups and cultures. It seems too simplified to essentially consider these are Malay. In fact the largest nation in the Indonesian group consists of Javanese. Many other members of Indonesian society are not even Muslims and a huge number of Indonesians only have Indonesian Malay as their second as language alongside their native local language. The same is true in Malaysia where one sees many cultures again combined. Here the big divide is between East and West Malaysia. East Malaysia in particular is rich in cultures with ethnic indigenous peoples classified as Malay yet not being Muslim. These people speak various languages alongside Malay. Finally this is also not different from what happened in Brunei Darussalam. Eight groups are legally considered to be Brunei-Malay. These groups also have their own regional language and some of them are not even Muslim. 87

91 Yet one can see the same evolution in all three of these nations that has taken place. Beginning with Indonesia the nation building efforts of Suharto in particular have made Indonesia into a nation where Muslim dominance and the dominance of Bahasa Indonesia is without question. The dominant culture in Indonesia is Islam. In Malaysia this pressure is even higher as one can see that it is even part of the law that a Malay in Malaysia must be Muslim. This creates some difficulties in East Malaysia on Borneo Island but largely the dominance of the Malay Peninsula where Malays are Muslim and speak Malay is widely accepted and emphasized. The policies sent in Kuala Lumpur project an image of the Malaysian that conforms these Malaysians that do not meet this pattern as it were. Brunei also uses that same policy design. Here the philosophy of Brunei is MIB: Malay, Islam, Beraja (Malay, Islam, and King). The ideal picture of a Bruneian as a Muslim Malay devoted to his or her king. Here the pressure of the Malay is also very large. Those Bruneians in Kuala Belait or in Temburong and other areas who are not Malay Muslims are also under pressure to conform to this ideal image that the center of government shaped and presented. This clearly shows that the national identity of these three nations has been constructed and shaped by deliberate political decisions made by the national leadership expecting conformity to this norm by the population that in fact is quite diverse. Islam is in this construction a very important element in all three nations. Whereas all these people are living in this historical Nusantara region there is also a double dynamic that plays out. The countries in the region are all nationally, internally focused on identity and Islam. On top of that there is also the mutual attraction and influence that takes place between the different countries on a transnational, international scale. These nations chose to emphasize Islam and Malay that they turned (more so in the South where the Dutch lorded) into an identity trait A language now renamed to reflect the anti-colonial struggle Bahasa Indonesia. In the North matters were more complicated. Brunei continued to name the language Bahasa Melayu yet was largely forced in the 1960s to emphasize English when in the split from Malaysia Malay language teachers were recalled from the region by Malaysia. Singapore with a huge Chinese majority also saw itself on a path 88

92 where Malay reduced in importance. In Malaysia however the emphasis on Malay was strengthened in a position where Arabic and English as well as the languages of the Indian and Chinese communities also thrived. What all these nations shared is that they built their identity around these 2 or 3 identity points. Ironically the one indigenous marker of a proud seafaring people does not really match up well with the colonial boundaries. It is remembered yet not that emphasized politically. Culturally the trait is still there. In Brunei there are yearly boat races on the Brunei River. Far more important have become Malay and Islam as these were jumped upon by the nationalists in both Indonesia and Malaysia to be emphasized. Bruneian authorities essentially followed suit. The discussion of the development of the Malay language falls outside the scope of this paper but it is sufficient to say that this trait is not neglected. Emphasized and strengthened by the nationalist movement as well as the Japanese occupation. Malay became the language of the government in the independence era and especially in Indonesia was consciously adopted and codified and give a larger and larger academic body where it is now the language of literature and science. The process in Malaysia and Brunei was more complicated but there as well this emphasis is underway. Even here though a colonial split is noticeable as loanwords are either British or Dutch instead of a standard. It seems that here as well the Center does not see beyond the national borders as no cooperation exists to standardize loan words. Bahasa Indonesia does not ring well as name with Malaysia and Brunei. 2. Three Malay-Islam nations: Islam in a Nusantara divided Despite these differences there is clearly a feeling of belonging and identity. The mobility of the past also produced large intermarriages and a large segment of the people living in Malaysia now are of Indonesian ancestry dating back in the colonial era. The language is easily picked up and with the dominance of Indonesia and modern communication Bruneians and Malaysians almost all understand Indonesian. Vice versa many Indonesian workers living in Brunei or Malaysia very quickly speak practically indistinguishable from a local. There is still a large variety also within the county as the locals also speak their own different local dialects and languages. 89

93 Islam is extremely important to the region. In Southeast Asia there are in fact only three countries that are largely Islamic and of these three only two have popular power. Brunei is important as it is recognized as an equal in ASEAN and Southeast Asia but more Muslims live in the Philippines or Myanmar or Thailand than in Brunei where the total population is about people with about 60% Muslims. Discounting the temporary immigrants this raises the number to a respectable 80%. In Indonesia the number is far higher with about 90% of the population being Muslim to an extent. The number of the minority communities gradually declines in Indonesia over the decades. The break-away of East Timor showed the opposite evolution of what otherwise naturally would occur. The nation is now 90% Catholic but was less than half so before the Indonesian invasion. The natural strength of Islam as an enlarging, unifying factor providing access to the various political and economic opportunities of government was present. Yet this should also not be romanticized too much. Islam is seen as the most important factor for people to be Malay. An indigenous Indonesian or an indigenous local who speaks Malay fluently in the preferred style or dialect will by his mastery of over the cultural norms of Islam very easily be adapted and considered Malay. Indian minority people who are fluent in Malay and Muslim themselves will have this to a far lesser extent. The look is clearly different. The same applies to Chinese and even Caucasians. This does mean that the tribal ethnic element is also quite important and should not be politically ignored. But the importance of Islam and the language is quite paramount as Islam is relatively open to various groups entering. The broader identity of Islam as a religion that is based on equality and inclusiveness of the converted with ideally no racial discrimination opens the path for people to become Malay. Contemporary Islam politics and the Malays The idea of a joined past and heritage is quite important for the Malays and is understood and felt as a proud elusive thing somewhere in the past. Yet in the actual reality this element is often blocked by various practical obstacles. The political will to maintain this proud heritage is there and Islam features as most prominent of the identity marker in this as the other element of language 90

94 and heritage are understood to be given as it were therefore Islam is a focal point of political attention. This expresses itself in many forms and ways. 1. Using the present to build the Malay past. Despite these elements of a search for identity there is an emphasis on Islam as almost eternally present in the region. In Indonesia the larger public is often unaware of elements of Hindu-Buddhist culture and mislabels these Muslim such as in the eastern tip of Java. At other moments there is a clear prominence of Islam that downplays previous heritage and ignores the fact that the teaching of Islam and actual knowledge of Islam is in fact even today fairly limited with the masses who have more pressing economic, social and sometimes political concerns. Indonesia does award a larger degree of freedom and diversity within Islam and Malay identity in the sense that many people are more exposed to other influences with an overarching idea of the group identity. In the case of Malaysia the emphasis on an Islamic past still carries some element of Malay pride with it but the Malay is equaled to Islam. This however does not make the Malays into Arabs and there the identification breaks down. The pride of the Malay as a people who adopted but was so much more seems to struggling and ignored. All the much more so in Brunei where Malaysian policy seems to be largely copied and with Shariah law the emphasis has even more been put on Islamisation. This is also reflected in the history writing and the emphasis towards the past where very limited research is done and little of known about the Malay element of Brunei in the long history of the Islamized Bruneians. The identity markers are there and set around Islam and little space is left to include more. 2. Islam together yet apart: transnational relations. Pan-Islamism as a philosophy has been tried historically and only had some impact when the political power was also in the hands of one empire. In the era of modern borders and nations there have been no successful attempts to break this limit. Even the more recent elements in the Middle East find themselves confronted by the nation and a break-up along the colonial borderline 91

95 is bound to re-emerge. Only nations supported by other nations maintain power. On the contrary politically any change of border has historically been a smaller break-up. Pan-Islamism is therefore quite limited also in Nusantara. This however brings to the crux of the matter as despite the similarity in background: heritage of seafarers, Islam and Malay lingua franca the national boundaries prevail. As all three countries find themselves Malay Muslim there are significant differences and accents that are also prominent in each of these nations. Politically the Malays work together but in fact there is much more competition than not. In Brunei there are major attempts to make the region into a tourism area for Islam. Indonesia also jumps on the bandwagon with Aceh the Islamic province in Indonesia and Malaya pioneered this Malay Islam idea attracting quite a number of Arab tourists in the process. On the matter of Halal food there again we see that the brands established by Malaysia, Indonesia and Brunei are trying to compete. Brunei invests in building itself as a Halal expert. Singapore seems to be prized out of the market ethnically. Student cooperation between the various Islamic universities is also another domain where there is a lot of interaction. There the ASEAN space has created option for student mobility beyond the networks that existed in the past. And yet these elements are all quite different. Politically there is little actual cooperation. The Rohingya incident in Myanmar of these past years has left Malaysia quite inert. The same with Brunei where Shariah law is prominent but not much is stated towards international issues involving Islam. The Indonesians have themselves a delicate position as predominant power in ASEAN but also victim of cold war era issues in the past and experience with East Timor making them think twice before wholeheartedly entering the political field. These different interests are easily explained. The size of Brunei as equal partner on the international stage does not allow Brunei to jeopardize this position regardless of what occurred. The Indonesians have their own past history mentioned before and Malaysia is in a way the most active of nations there trying to involve itself to an extent internationally but it has recently had to deal with tremendous problems at home. 92

96 3. National domestic politics and policies towards Islam. BRUNEI Smallest of the three modern Malay nations yet most important perhaps in the length it went to prove itself to be Islamic. The nation of Brunei adopted Shariah Law not that long ago. There had been an increase of Islamic dress after the independence in 1984 where more and more veils began to be noticed as the dress code of the population became more conservative. This has however gradually become more institutionalized. The top-down approach of the country where laws are dictated by the center does guarantee a level of stability but it also has the effect of being an imposed stability that will most likely not continue as soon as the imposing element of the absolute monarchy shifts policies. In this sense the Shariah Law made a limited impact in a country that was already devout to begin with. Many policies top-down clearly indicate a limited ability to look beyond the theoretical and see also the practical as ideology trumps realism to an extent with limited feedback possibilities open to the government to improve. Islamic policies placed an economic burden on the population. Very important is also the pressure on minorities to convert to Islam with several rewards and incentives given to those people who do convert. The Dusun community in particular has seen many such cases but also many Chinese in Brunei are now Muslim and many of the Iban minority also tend to convert. Brunei has the important asset that the population is in general satisfied with its own Islamic identity and not hostile toward other groups in society. In that sense the policy of emphasis on Islam has provided a stability where most people are more relaxed than the government as it were in attitude towards other ethnic groups. Bruneian Islam is of a non-militant nature and the absence of political parties bidding against each other to emphasize Islam also does not rally the political tension to extreme heights. MALAYSIA In Malaysia the political situation was imposed by the British when the country was constructed especially with the including of the regions Sabah and 93

97 Sarawak in Borneo. This put pressure on the central state. The Malay position was and remains protected and advantaged in Malaya but also the local people in Borneo were disadvantaged to an extent in Malaysia. A lot of riches from Borneo flow into Kuala Lumpur. As Malaysia is largely made up of Malays, Chinese and Indians who are all put in different categories, this created a difficulty where the politics of the Malays were limited to themselves in the society. The various historically immigrant groups caused the Malay to be strongly defensive. This is an issue that plagues them to today. The Malay Muslim identity made these Malays the first-class citizens and this continues to today. The general system is somehow fair to an extent but the profiling of the identity of the Malays by emphasizing Islam and using this as an international marker has caused an unease in society as other groups cannot access these same privileges. It also opened the door for groups in society to politically try to profile themselves taking advantage of the privileged positions to become even more militant. This has caused a tension in the whole society. It is the political area both in Kuala Lumpur and the regions that has unleashed a militancy and a pride in an identity confronted with other-cultured segments in the country. This becomes an easily rallying element for the political class to avail itself of and has repeatedly led to problems and religious unrest in the country. INDONESIA Indonesian identity is based on Pancasila as the compromise solution that was historically hard fought to achieve. Occasionally violence erupted and erupts yet the major difference with the two other nations is that the Pancasila ideology had created a community inclusive of other religions. The government also defends these interests (not always successfully). The recent political events and the political defeat as well as imprisonment of a Christian Chinese governor of Jakarta for two years for blasphemy that has caused a serious stain on the image of Indonesia. The recent decision to move against groups who champion Islam and not Pancasila is perhaps a reaction to this event. 94

98 Since the regional autonomy of the early 2000s the region has seen more political power permeate into the lower levels of administration. The difficulty of people using Islam for political reasons is also here a major issue and causes quite serious tension on lower levels. In general however the population of Indonesia continues to consistently reject a more prominent political role for Islam in society as the votes gained by Islamic parties remains a clear minority. The government portrays itself respectful of Islam and an important regional positive power but also is cautious not to overplay the Islam emphasis. Conclusion. The paper started out by looking at the historical and Nusantara with these quotation marks and identified several traits that form a shared cultural heritage for the Malays in the region. It clearly identified a heritage of seafarer mobility, Islam and Pasar Melayu as language as the unifying traits of the nations that are now Malaysia, Brunei and Indonesia. Despite question marks and caveats that can be put next to the complete accuracy of these traits are genuinely dominant and recognizing that many other people who are only nominally Malay but in fact hold many other identities it became clear that only Indonesia has managed to successfully subsume this Malay Islam identity in the broader Indonesia. In the areas of Malaysia and Brunei there is inclusiveness as well but the traits are in fact very exclusive as only Malay language and ethnicity and Islamic culture and religion are accepted to be the nation. Even more so in Brunei than in Malaysia where there is at least some room for the presence of other groups clearly outside of the main identity as fellow-malaysians. This is different from the inclusivity of Indonesian that also has more experience in nation-building than the neighboring countries who only became independent under British tutelage in the late 1950s and 1960s. Brunei in fact only became independent in Whereas Indonesia struggled for 4 years after the Japanese occupation against the Dutch since 1945 and had a long history of nationalist thinkers long before that. In the level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identity of Islamic or Islam dominated countries there is a clear competition that seems to overrule 95

99 cooperation issues of a more philosophical matter. Real politics trumps the Umma. The degrees of historical Nusantara are seen in the way these different branches of the Nusantara peoples portray their own heritage. Very narrow in Malaysia and Brunei (even more so), dominant but more open in Indonesia albeit also under constant scrutiny. As largely reflected in their national policies of Islam internally where Brunei works very top-down imposing stability but also artificiality and uniformity. Malaysia advantages their Malays who seem still in need of protection as majority to cope with the minority races. Indonesia on the other hand has a more relaxed attitude that allows for a more diverse element that is especially important in the grassroots movement. The historical teaching of Indonesians that diversity is important and strengthens Indonesia is therefore very important as narrative. This has been sacrificed for a more monotonous Islam and nothing else narrative in Malaysia and Brunei and leaves the other society groups in a difficult position. The Islamic Identity in Brunei and Malaysia seems to an extent maintained very artificially. This could lead to difficulties in the future whereas the compromising vision of the Indonesian founding fathers in 1945 might very well turn out to make Indonesia into one of the Islamic dominated countries with the largest potential in the future in the sense that it promotes stability and space as equal citizens of all Indonesians. Something very hard to do for the Bruneians with Shariah or the Malaysians with very large segments of the population being consistently seen as immigrants from a colonial past. 96

100 Creative Approaches in Peace Building Initiatives in Indonesia Putut Widjanarko 13) With the worrying growing tendency of religious radicalism in most parts of the world, Indonesia,with itslittle more than 200 million Muslims (87 percent of total population), the largest Muslim population in a country in the world, is certainly not immune from this global phenomenon. Being often dubbed as the world s third largest democratic country, its democratic future is challenged by what some observers called as a conservative turn in Indonesian society (Bagir, 2014; van Bruinessen, 2014). For example, the recent event in Marawi in the Southern part of the Philippines, where an armed militant group associated themselves with ISIS took over the city for around two months, certainly alarmed governments in the region. Indeed, there were Indonesian and Malaysian fighters who joined in the attack (Institute for Policy Analysis of Conflict, 2017 & ISIL invation, 2017). Furthermore, the government has estimated that around Indonesians (including women and children) have joined ISIS ( Foreign Ministry, 2017), and many of them are involved in the violent fighting. Along with the demise of ISIS, some of these people are returning to Indonesia which naturally triggers some concern from both the authority and the society. This concern is certainly justified, although, according to some observers (e.g. Friedman, 2016), Indonesia has been successful in some degree, although probably for temporarily, in reducing terror acts in the country. The latest and more recent terror attacks that happened in Indonesia are much smaller in scale compared to previous attacks, indicating that the capability of the terror network 13) Putut Widjanarko, Ph. D. is a lecturer at Paramadina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Paramadina University, Jakarta, Indonesia. He co-founded the school and was its first Program Director ( ). Putut earned his Ph. D. and master s degree in media studies from the School of Media Arts and Studies, Ohio University, USA. He is also the Vice President of Mizan Group, one of the most prominent publishing groups in Indonesia. Prepared for the Kor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Studies (KASEAS) Religion and Politics in Southeast Asia Conference, August 25-26, 2017,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Republic of Korea. (NOTE: Unfinished paper, please do not cite). 97

101 seems to be dwindling.it must be pointed out, however, that this is a completely new phenomenon, because Islamic conservatism in various forms, and in varying degrees with regards to its relationship with the state and the rest of the society, has always been part of Indonesian history (see Solahudin, 2011). This phenomenon has taken into a new dimension with the growingly unstable Middle East and the proliferation of new communication technology and social media use to make a globally interrelated conservatism around the word. Moreover, there are signs showing that the conservative approach to Islam is gaining ground in Indonesia. For example, some research reveal that radical view of Indonesian youth is increasing (Azca, 2013; Fananai, 2013; Gaus, 2013; see also Survei: hampir 50% pelajar setuju tindakan radikal, 2011). The radical or conservative views, for a lack of better terminologies, certainly do not necessarily lead to violent expressions manifested in terrorism acts. But since all terrorism attacks certainly initially stem from such radical views on religion, then peace building efforts to prevent such atrocities from happening need to be taken. The state Islamic organizations (such as Muhammadiyah and Nahdlatul Ulama) and other non-state civil society organizations actors have dealt with this issue with different approaches, executions and results. This paper will discuss the peace building program conducted by organizations that have been working on this issue for about a decade: Peace Generation and Yayasan Prasasti Perdamaian (YPP) Peace Generation Peace Generation was founded in 2007 by two friends, Irfan Amalee and Erik Lincoln (an American living in Bandung, Indonesia). It was the journey of their friendship from two people with a set of prejudice and who were strange to each other to becoming best friends that lead the establishment of the organization. Amalee works professionally as one of the CEO in Mizan Groups, one of the most prominent publishing groups in Indonesia, and has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in the digital initiatives of the company. He earned his master s degree in Peace Studies from Brandeis University, Boston, USA, in Amalee was listed as one of the 500 most influential Muslims in the world by the Royal Institute for Islamic Studies, Amman, Jordan, for two years 98

102 in a row: 2010 and 2011 (Amalee: 2107). His co-founder of Peace Generation, Eric Lincoln, is a teacher of an international school. Peace Generation formulated what they call 12 Nilai Dasar Perdamaian (12 Basic Values of Peace), which is derived from Islamic teachings, to serve as its platform for any their peace building initiatives. The first initiative was to create a module consisting of 12 books to be used in the training. The training has covered as many as 45 regions in Indonesia, involving more than 30 thousand youths and they are called agents of peace --and more than 500 school teachers. There are now seven versions of the modules published for different target audiences: Muslims (in Indonesian and English), Christians (in Indonesian), Aceh (in the local language Acehnese), children, Malaysians and Mindanao (The Philippines). Peace Generation uses one of the most innovative and recent method for training and learning called Accelerated Learning method in the module. A study conducted by psychologists from the State Islamic University Bandung, albeit with a small sample, shows that the aggressiveness level among student participants decrease 31,6 percent and the EID (emotional intelligence and diversity) among teacher participants increase 30 percent (Peace Generation, 2017; see also Rusyana, 2015). Other than peace trainings using the module, Peace Generation has explored and organized some creative events in its peace building program line, e.g.rock The Peace, Walk The Peace,Rock The Peace, Peacetival (2015, 2017) and PeaceZone (2017). These various programs are intended to give example or insights for the agents of peace to conduct similar or modified, if necessary, programs in their own local settings. The first big event was when Peace Generation held a rock concert called Rock The Peace in 2009, with main performers The Mahad (a rock band which members are students of the Islamic boarding school Pesantren Darul Arqam Muhammadiyah, Garut) and the indie rock band North of Here from Georgia, USA (see also Tan 2014). Around one thousand youngsters attended the concert which was filled with peace themed songs. Walk The Peace, held once only in 2011, attracted forty participants consisted of five participants from both South Korea and the US, and the rest of the participants were youths coming from various provinces in Indonesia. The participants walked from Bandung to Pangandaran, which is about 200 kilometers 99

103 apart, for ten days. Along the way they stopped and met Peace Generation communities to learn and teach about peace at schools or local communities. Following the success of Rock The Peace, Peace Generation expanded the concept to what it called Peacetival, a portmanteau from the words peace and festival, and held in Bandung in It was a12-hour event with various types of programs, such as a rock concert, film showings, talk shows and workshops, games, exhibition from around twenty institutions related to peace building (including such organizations as UNICEF, UNESCO etc), booths for peace-themed merchandise and environmentally friendly foods, and the launching of BobotohBageur (literally means nice and kind football fans since the local football fans was known to be quite notorious and rough) campaign. The Mahad, the indie rock from the pesantren, also performed, and a rock band from Canada called Air Marshall Landing was the guest performer. It was estimated that more than five thousand people attended the festival. In early 2017, with some small modifications to meet the local needs, Peacetival was held in Makassar, the capital city of South Sulawesi Province. The latest event Peace Generation organized in mid-2017 was a funfair called PeaceZone. The event was held in upmarket shopping malls in Greater Jakarta, intended to attract children to play various games in twelve zones specially designed and created to promote the 12 basic values of peace formulated by Peace Generation. Around two hundred children participated in this Peace Generation new initiative to teach peace. Yayasan PrasastiPerdamaia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Peace Building) Noor Huda Ismail worked as a special correspondent for the Washington Post Southeast Asia Bureau when the first Bali Bombing which claimed more than 200 lives (most of them were foreigners) happened in Later on, when the police announced the perpetrators of the atrocity, Ismail recognized one of them as his roommate and close friend when they studied together at Pesantren Al Mukmin, Ngruki, Solo a pesantren which it s leaning to radical Islam was widely known. It was a watershed moment for him to seek more understanding about Islamic radicalism and to do something about it (Ismail, 2010). In 2005, he continued his study for a Master s degree in International Security at St. Andrews University, Scotland, under a Chevening Scholarship awarded by the 100

104 British government. He also met with some former IRA leaders that had been successfully reintegrated into the society, which gave him the confidence that terrorists could be rehabilitated. Upon his return to Indonesia, he established Yayasan Prasasti Perdamaian (YPP) or International Institute for Peace Building in Ismail s writing and interviews on Islamic radicalism have appeared in national and international media outlets. He has also given public talks on this matter in many countries around the world. Currently he is doing his Ph.D. at Monash University on an Australian Award Scholarship with dissertation research on Indonesian foreign fighters. Ismail believes more on disengagement rather than de-radicalization with regards to rehabilitation of people who already hold radical or violent view on Islam. Replacing a type of strongly held, albeit misleading perspective on religion with a more inclusive and tolerant perspective (i.e. de-radicalization), is much more difficult than trying to disconnect the person with their previous social network by giving the person chances to do something different and form new social networks (i.e. disengagement). Disengagement is seen as a more natural process of reintegration to society rather than de-radicalization. For this reason, one of YPP programs serves similar to a business incubator of especially for ex-prisoners who intend to start a new life and to abandon violent acts.the most successful program which had got wide attention and even international publicity (e.g Bend, 2014) is Dapur Bistik, a restaurant with around 100 seats run by Yusuf Adirisma, an ex-convict serving seven years sentence in prison.since YPP s inception, there had been about 35 ex-convicts and/or their spouses who are in this program with varying degrees of success and failure in doing the business (Yayasan Prasasti Perdamaian, 2017). YPP also had helped the government by conducting capacity building for parole prison officers. Certainly, the inmates who have extreme views on Islam, whom even had committed violent acts in the name of the religion, have very different characteristics compared to ordinary inmates. Consequently the parole and prison officers need to have some different approaches in dealing with those inmates, something that they are mostly not trained in and lack the experience to do so. YPP also engages selected inmates who are receptive to more moderate perspective on Islamic ideas with the hope that they will be able to persuade the 101

105 other more militant inmates to gradually soften their positions and therefore more open for further dialogue (Yayasan Prasasti Perdamaian, 2017). YPP also has taken another different approach by producing a documentary film Jihad Selfie in This film, directed by Ismail himself, tells the story of Teuku Akbar Maulana, a young Indonesian studying in Turkey who was ready to join ISIS and later on abandoned the idea.it shows how social media has been an effective tool for recruitment. It also reveals that it is not always ideological reasons for somebody to become interested in joining violent extremism some other factors like masculinity or identity searching frequently play a more important role. The film was screened at more than 80 places such as campuses and schools, media outlets, NGO offices, and community centers across Indonesia. Jihad Selfie was also screened in Geneve Forum on Countering Violent Extremism, and other special screenings in other countries such as Singapore, South Korea, Australia, and the UK. Other than Dapoer Bistik, Jihad Selfie is one of YPP s programs that had been frequently covered by the media, both national and international media (e.g. Topsfield, 2016). Some Lessons Countering violent extremism (CVE) programs, or its other terminology, preventing violent extremism (PVE), are usually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first, programs intended to the general society to prevent them from being attracted to radicalism; second, programs dealing with specific communities or even individuals already drawn to the radical views and may have thought of violent acts as an option; third, programs aimed to deal with groups or individuals who have committed violence and are now still serving their sentence or trying to reintegrate with society (Sumpter, 2017). Peace Generation s programs largely fall into the first category, by exploring many creative initiatives and events. Meanwhile, YPP touches all the three categories largely thanks to Ismail s background as a journalist and personal relationship which enable YPP on many cases to build direct access to, and win the trust of terrorism perpetrators. Both YPP and Peace Generation carry out their programs with no, or very little at the least, coordination with the national counterterrorism agency 102

106 Badan Nasiona lpenanggulangan Terorisme (BNPT). There is some reluctance even to deal with BNPT because its approach is seen to be too top-down, and, by its nature as a state body, is seen cautiously and even distrustfully by the radical groups or terrorism perpetrators. Both YPP and Peace Generation have strong and wide grass-roots networks and hands-on experience that can be shared with other non-state actors, and even with BTPN, as well. 103

107 References Altier, M. B., Thoroughgood, C. N., &Horgan, J. G. (2014).Turning away from terrorism: Lessons from psychology, sociology, and criminology.journal of Peace Research 51(5), Amalee, I. (2017). Islam ituramah, bukanmarah.jakarta: Noura Books. Azca, M. N. (2103). Yang muda yang radikal: Refleksisosiologisterhadapfenomenaradikalismekaummuda Muslim di Indonesia pascaordebaru. Maarif, 8 (1), Bagir, Z. A. (2014). Pengantar: Membacaberagamwajah Islam di Indonesia. In van Bruinessen (Ed.), Conservative turn: Islam Indonesia dalamancamanfundamentalisme(pp11-23). Bandung: Mizan. Bend, B. (2014, June 10). Indonesian scheme serves up a new life for reformed militants. Financial Times. accessed July 1, Gaus, A. (2013). Pemetaan Problem RadikalismediSMUNegeri di 4 Daerah.Maarif, 8 (1), Ghumro, A. K., Qureshi, F. &Mahezar, P. A. (2017). Religious extremism in Pakistan: A new perspective based on TPB and TRA model. International Journal of African and Asian Studies, 33, Fanani, A. F. (2103). Fenomenaradikalisme di kalangankaummuda.maarif, 8 (1), Foreign Ministry identifies Indonesians who regretted joining ISIS. (2017, June 21). Antara News.com. o-regretted-joining-isis, accessed on July 15, Friedman, U. (2016, September 25). How Indonesia Beat Back Terrorism for Now.The Antlantic Monthly. -terrorism/500951/, accessed July 3, Idhamsyah, E. P. &Sukabdi, Z. A. (2013). Basic concepts and reasons behind the emergence of religious terror activities in Indonesia: An inside view. Asi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16, Institute for Policy Analysis of Conflict (IPAC). (2017). Marawi, the East Asia Wilayah and Indonesia.Jakarta: IPAC Isil invasion' in the Philippines: Indonesians and Malaysians among foreign jihadists laying siege to city. (2017, May 26). The Telegraph. ians-malaysians-among-foreign/, accessed on July 3, Ismail, N. H. (2010). Temanku, teroris?:saatduasantringrukimenempuhjalanberbeda. Jakarta: Hikmah. Ismail, N. H. (2017). Jihad Selfie: Listening to the other side , accessed on May 2, Muhammad, W. A. &Pribadi, K. K. (2013).Anakmuda, radikalismedanbudayapopuler.maarif, 8 (1),

108 Peace Generation (2017). 10 years teaching peace to thousands of students [Brochure]. Bandung: Peace Generation Rusyana, A. Y. (2015). Building peace generation: How the Islamic values of peace to be educated in Indonesia. Edukasi10 (2), Sarwono. S. W. (2017). Sebab-sebabpsikologiskemunculanterorisme: Sebuahpengantarteoretis. In Darraz, M. A. (Ed.), Jihad, KhilafahdanTerorisme: Reformulasiajaran Islam (pp ). Bandung: Mizan& Jakarta: Maarif Institute. Solahudin. (2011). NII SampaiJI :SalafyJihadisme di Indonesia. Jakarta: KomunitasBambu. Sukabdi, Z. A. (2015). Terrorism in Indonesia: A review on rehabilitation and deradicalization. Journal of Terrorism Research 6 (2), Sumpter, C. (2017).Countering violent extremism in Indonesia: Priorities, practices and the role of civil society.journal of Deradicalization11, Survei: hampir 50% pelajarsetujutindakanradikal. (2011, April 26). BBC Indonesia. l, accessed June 23, Tan, S. L. (2014). Forging a musical peace communitas among the youth in Indonesia. In King, R. R. & Tang, S. L. (Eds.), (un)common sounds: Songs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among Muslims and Christian (pp ). Eugene, OR: Cascade Books. Topsfield, J. (2016, July 24). Jihad Selfie: The story of how Indonesian teenagers are recruited to Islamic State. The Sydney Morning Herald, ruited-to-islamic-state gqb8gy.html, accessed on June 24, vanbruinessen(2014).mukadimah: PerkembangankontemporerIslam Indonesiadan conservative turn awalabad ke-21. In van Bruinessen (Ed.), Conservative turn: Islam Indonesia dalamancamanfundamentalisme(pp 24-49). Bandung: Mizan YayasanPrasastiPerdamaian (2017). LaporanKegiatanKerjasama YPP Dirjenpas 2016 danrencanakerja

109 Communicating Religious Values for Political gains in Indonesia : Banners in 2017 Jakarta Gubernatorial Election Rudi Sukandar / Erda Handayani (London School of Public Relations-Jakarta) The 2017 Jakarta Gubernatorial Election was undoubtedly raised some concerns regarding the use of religious values for political gains in Indonesia. The pitting of Christian-Chinese Indonesian Basuki Tjahaja Purnama, widely known for his nick name Ahok, against the other two Muslim candidates (Anies Rasyid Baswedan and Agus Harimurti Many argued that this election was the continuation contest between the pro- and anti-jokowi, despite the fact that the president himself did not declare openly that he supported Ahok. This assessment might be correct if looked from the parties that supported incumbent Ahok and his opponents. This condition was the more intensified version of Jakarta 2012 Gubernatorial election, in which similar phenomena of racial and religious issues were used against, then, Jokowi-Ahok candidacy. Djarot Saiful Hidayat, did not help him win the supports from the majority of the Muslim communities who were leaning to be more influenced by the campaigns and narratives against his non-muslim background and alleged defamation to Islam. The narrative war between the pro- and anti-ahok was waged online through social media and offline through the displays of banners and posters. The former included the distribution of hoaxes and fake news against a candidate (Franciska, 2017). The phenomenon of the fake news spreading and hates speech posting through social media during the election has prominently been discussed and analyzed (see, for example, Lim, 2017). The latter, however, was given less attention in spite of its high visibility to residents in many neighborhoods and at Muslim places of worship. As the messages were 106

110 considered discriminatory and racist, the authorities had to pull them. It is reported that more than 1,000 banners were pulled down (Lamb, 2017). Given the above situation, this paper attempts to analyze the content of the message printed in banners, especially in its relation to the use of religious values for political gains. The research employed the qualitative approach. The data were collected from reports from online media and other online sources, in the forms of news piece and photos posted online dated from the beginning of candidacy campaign in 2016 to the Election Day in The data were then classified and analyzed according to the wording, tone, and target of the message. The wording included the words being chosen in the banners. The tone classified the messaged in the banners into three categories: reminders, warnings, and threats. Finally the target focused on the intended recipients of the message, which were classified into three: general voters, Muslim voters, or Ahok/Djarot. Finally, since the research limited only on the content, it did not include the effects of the messages to the intended recipients. Results and Analyses Anti-Ahok Banners The anti-ahok banners contain various messages, which fall into the three categories of messages as stated in the methods section. 1. Reminders The reminder messages were mostly intended for the voters, especially the Muslims. The message relied heavily on pathos (emotional appeals) to urge the Muslim voters to vote for the Muslim governor candidates. The researcher, however, could not find reminder messages intended for Ahok and his running mate, Djarot. A sample of such banners is Do you love God? Do you love the Koran?// Do you love the Prophet Muhammad?// If you love Him // Elect a Muslim leader!!! (Gual, 2017). The banner effectively used repetition in its rhetorical questions which brought to the attention of the people about the similar message underlined in those questions, namely the appeal to uphold the religious principle. 107

111 In terms of word choice, the words chosen were not fiery, but a polite reminder to Muslims to show their love to their religions by electing the Muslim candidate. The banner could also be seen as to incite the guilt among the Muslims if they had not voted for a Muslim candidate. This sent the underlying message that they did not love God. The suffix pronoun Nya (object form for he/she) was capitalized to indicate God whereas the message repeated three most important element of Islam: God, Koran, and the Prophet. Rather than using the pronoun to indicate the amalgamation of the three entities, the banner producer opted to use the pronoun for God. Additionally,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grammatically speaking, the writing of kepada and Nya should be combined as per standard Indonesian writing; hence kepadanya. Another interesting aspect of the message in the banner in terms of word choice is the use of respective/formal form of you, namely anda. The use of anda indicates the degree of respect and polite appeal to persuade the educated Muslim voters. To emphasize the message the word was specifically typed bold and capitalized. On another case, banners containing reminders did not have religious values and norms in the messages. Instead, they contained a reminder for impacted Muslim voters that whoever the governor was, the current policy would still remain intact. The message specifically answered the concerns among the Muslim voters who worried that such programs would have been terminated if Ahok had not been reelected. The banner clearly stated their argument that the funding for the programs came from the provincial budget and not from a governor s personal funding. Therefore, a newly elected governor could continue the program. In the banner, the message producer used logos (knowledge/logic appeal) instead of pathos. The intended recipient would be the pragmatic Muslims who arguably appreciated realistic programs more than religious rhetoric. 2. Warnings Most banners containing warning messages were directly intended for Ahok or Djarot as his partner as the recipient. The message, however, could arguably be interpreted to include Muslim voters indirectly, especially in the resolve of the producers resolve to stand against Ahok in the election. Such banners carried the same message and labeled Ahok as a blasphemer. They were displayed in the neighborhoods that rejected the reelection of Ahok and were 108

112 used to prevent Ahok s running mate, Djarot, from entering/visiting the neighborhood. One example of such banners is Forbidden!!!// The religion blasphemer// To enter our neighborhood (Alfiansyah, 2016). The crude design of the banner could mean that it was prepared in a haste to disrupt the Ahok-Djarot s campaign tour to certain neighborhoods. Another banner (Sethyadi, 2017) combined religious labeling for Ahok as a blasphemer and his perceived arrogant attitude. This verbal message was strengthened by three additional nonverbal messages, namely: an empty prohibition sign (which actually means nothing because it was not a No Entry sign), the crossing out of Ahok s fiery facial expression, and raised fists as symbol of resistance toward Ahok. Another banner ( Aneka Spanduk, 2016) highlighted Ahok s reputation as the governor who had forcefully relocated residents from their illegal lodgings, the second sent a religious message of the need to have a leader who is religious as opposed to the one who oppressed the less privileged. While the Arabic-borrowed word alim connotatively means pious, the word can actually be applied persons who piously adhere to their religions. Nevertheless, in this banner the word was claimed to refer to only a pious Muslim leader although Ahok is actually a devoted Christian. Finally, a warning for Ahok can also be seen in the banner (Timyadi, 2017) that sent a message of rejection to Ahok-Djarot if they planned to campaign in the neighborhood. The banner announced the neighborhood s position in the election to passers-by. The banner contained religious statements to provide the justification for their rejection of Ahok who was labeled as an Islam blasphemer. As a further note, many of such banners did not state their producers. 3. Threats The most infamous kinds of banners spread in the news and social media were ones that contained threats to Muslim voters who would support Ahok. The banner was mostly displayed at mosques in Jakarta. The banner explicitly stated that those mosques would not provide funeral rites for those who were known to support Ahok. An example of such banners is: (We) will not pray for, cite prayers to, and help arrange the dead body of the hypocrites who defend and 109

113 support// the religious blasphemers // And never (Muhammad)// pray (funeral prayer) for// any of them (hypocrites) who dies// forever. And never// stand at// his grave. Certainly they// disbelieved in Allah and His Messenger// and died while they were rebellious// (Q.S. At-Taubah: 84// A Muslim who defend a religious// blasphemer is a hypocrite ( 200 meter dari CSIS, 2017). Here, the banner mentioned the producers explicit intention to not help arrange the funeral process of a deceased Muslim who supported a religious blasphemer, in this case Ahok. Here, the political preference to Ahok was categorized as hypocrisy. Their threat is supported by a verse in the Koran that forbade the Prophet to arrange the funeral service for the hypocrites. A similar message could also be found in a banner (Soraya, 2017) displayed in another mosque. Such religious stance was, unfortunately, firmly held and implemented in many neighborhoods. According to a report (Amrullah, 2017), during the round-one election, a deceased Muslim woman was allegedly not treated properly as she had been known to vote for Ahok while being bed-ridden and helped to cast her ballot. Since her political choice was known, when she passed away, the people in the neighborhood refused to help her funeral process and to pray for her in the neighborhood prayer hall. The news was denied by the chairperson of the Neighborhood Association, who mentioned several reasons why the funeral process of the deceased was not properly arranged. He claimed that it was time and weather problems, not her political orientation, that made people unable to help arrange the funeral process. The chairperson s claim, however, was contradicted by the family of the deceased (Amrullah, 2017). Those banners were not without being challenged. Many people and organizations expressed their defiance against the message in such banners. One of the opposition toward the message was voiced by Gerakan Pemuda Ansor, the youth wing of Nahdlatul Ulama, the biggest Muslim organization in Indonesia (Iqbal, 2017). They displayed opposing banners containing messages (Boim, 2017) that they offered services to assist the funeral process of those rejected by the community. One of such banners is: The Command Post of Ansor and Banser s// Care for peaceful election// Accepting reports if intimidation and coercion occur in choosing a candidate// we are ready to arrange the funeral for those rejected// Ready to maintain harmony and peace 110

114 in 2017 election (Iswahyudy, 2017). While Point Number 1 stated their intention to help anyone being intimidated due to his/her political choice, Point Number 2 clearly stated the organization s opposition to the inappropriate treatment by the community to those whose political orientation leaning to Ahok. The Point also explicitly informed the people that they were willing to arrange the funeral procession for the deceased who was rejected in his/her neighborhood. Interestingly, Anies Baswedan, one of the governor candidates, urged his supporters to arrange the funeral procession for those who were rejected due to the deceased s political support to Ahok (Cahya, 2017). Many, however, believed this was merely an image-building move by Anies due to two reasons. First, allegedly it was his supporters who started the threat campaigns despite his constant denial. Second, he received the competitive advantages from the threat campaigns as many Muslims who would vote for Ahoks might have been scared due to the consequences of their action. Pro-Ahok Banners The banners to support Ahok using religious issues were not many. They were classified as reminders only. One of the banner samples used the event of the Islamic holy fasting month of Ramadan as a vehicle to send the campaign for Ahok-Djarot. The banners says: Welcome Ramadan// Happy fasting// Tested and Proven// Ahok-Djarot Volunteers ( Posko monitoring Pilkada, 2016). The phrase Tested and proven was used as a message to tell the public that the candidate pair was more than capable to continue the development of Jakarta. The target recipient of the message was undoubtedly the Muslim voters in Jakarta who were about to start the fasting in Ramadan. The producer of the banner was explicitly mentioned, namely Ahok-Djarot volunteers. Humorous, tongue-in-cheek Despite harsh words displayed in many banners, not all banners contained fiery rhetoric and serious messages. One banner that falls into this category contained the following message: Our governor candidates are ABA// Agus, Basuki, and Anies// As long as not Ahok (Deny, 2016). This is a word play 111

115 and tongue-in-cheek message. The acronym banner mentioned the acronym of the three governor candidates names, in which the banner producer used Ahok s real name instead of his nick name to counter the negative-tone ABA acronym which originally means As long as not Ahok. This banner provided a comic relief, especially for those who carefully read the message that anyone starting the ABA/ As long as not Ahok campaign should also see that the acronym can be interpreted differently. Conclusion The banners displayed during the 2017 Jakarta Gubernatorial election contained Islamic religious messages to either support or reject candidates. The majority of the banners, however, explicitly or implicitly sent rejection messages to Ahok as one of the governor candidate. The messages in the banners can be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reminders, warnings, and threats. While all anti-ahok banners fit into all these three categories, the pro-ahok banners only took the form of reminders. The banners with threats for not arranging the funeral services in the mosques or neighborhoods for pro-ahok supporters received counter responses from concerned organizations and communities. The competing banners sent messages that the organizations and communities would provide funeral services for those who were rejected as well as support fair election without intimidation. Finally, not all banners contained serious messages. At least one banner was found to display a humorous message using a word play that resulted in a tongue-in-cheek message. This banner could provide another look on the election process when a group of people might see the phenomenon beyond pro and con stances. 112

116 References 200 meter dari CSIS, mesjid ini pampangkan spanduk anti pendukung Ahok. CSIS gagal misi? (2017, March 8). Retrieved July 12, 2017 from uk-anti-pendukung-ahok-csis-gagal-misi/ Alfiansyah, F.(2016, November 16). Spanduk anti-ahok di penjuru ibu kota bakal diturunkan. Retrieved July 20, 2017 from kan.html Amrullah, A. (2017, March 11). Ketua RT bantah jenazah nenek Hindun tak dishalatkan karena perbedaan pilihan politik. Retrieved July 21, 2017 from -jenazah-nenek-hindun-tak-dishalatkan-karena-perbedaan-pilihan-politik Aneka Spanduk yang Diturunkan Aparat Bernada Anti Ahok? (2016, August 24). Retrieved July 20, 2017 from ti-ahok/ Boim. (2017, March 13). PW GP Ansor DKI siap mengurus dan mensholatkan jenasah Muslim yang ditolak warga. Retrieved July 21, 2017 from kan-jenasah-muslim-ditolak-warga/ Cahya, K. D. (2017, March 11). Anies serukan tunaikan shalat jenazah dan turunkan spanduk penolakan. Retrieved July 20, 2017 from at.jenazah.dan.turunkan.spanduk.penolakan Deny. (2016, November 23). Spanduk Asal Bukan Ahok di Tanah Abang akhirnya dicopot. Retrieved July 12, 2017 from -dicopot/ Franciska, C. (2017, April 18). How fake news and hoaxes have tried to derail Jakarta's election. Retrieved July 27, 2017 from Gual, M. (2017). ACTA sebut pemasangan spanduk anti-ahok otonomi masjid. Retrieved July 20, 2017 from angan-spanduk-anti-ahok-otonomi-masjid/ Iqbal. (2017, Maret 11). th, 2017). Jika ditolak masyarakat, GP Ansor siap tampung pengurusan jenazah Pro Ahok. Retrieved July 21, 2017 from -pengurusan-jenazah-pro-ahok/ Iswahyudy. (2017, April 7). GP Ansor Jaktim siapkan pengurusan jenazah gratis. Retrieved July 21, 2017 from tis Lamb, K. (2017, April 15). Jakarta election challenger Anies accused of courting Islamic vote amid religious divide. Retrieved July 25 from sed-of-courting-islamic-vote-amid-religious-divide 113

117 Lim, M. (2017). Freedom to hate: social media, algorithmic enclaves, and the rise of tribal nationalism in Indonesia. Critical Asian Studies, 49(3), Posko Monitoring Pilkada Siap Copot Spanduk. (2016, September 24). Retrieved July 25, 2017 from Sethyadi, I. (2017, March 13). Pemprov copot ratusan spanduk anti Ahok. Retrieved July 20, 2017 from ok Soraya, D. A. (2017, March 28). DKM Al-Ijtihad tidak Larang Pengurusan Jenazah Pendukung Ahok. Retrieved July 15, 2017 from -alijtihad-tidak-larang-pengurusan-jenazah-pendukung-ahok Timyadi. (2016, November 9). Spanduk penolakan Ahok dipasang di Kembangan Selatan. Retrieved 20 July 2017 from 114

118 Islam and the Dynamic of Local Politics in Indonesia : the Fate of Pro-Shari'a Movement in Contemporary South Sulawesi Wahyuddin Halim (Alauddin State Islamic University of Makassar, Indonesia) Introduction In response to political reform agendas after President Soeharto s downfall in 1998, in 1999 President Habibie s government passed two important laws to promote regional autonomy. The most important one was Law Number 22/1999 on Regional Government. This law establishes two basic levels of governance: the Central Government headed by the President and autonomous Local Governments at the kabupaten (district) or kotamadya (municipality) level, headed respectively by the bupati (regent) or walikota (mayor). Implementation of regional autonomy was launched in January 2001, but many problems have since arisen. One of them is the aspiration for a full implementation of shari a (in its strict sense as Islamic law) in some regions by using as its legal basis the local regulation designated in the Law on Regional Government (Hidayatullah 2000). Until 2000, besides Aceh, the regions that have demanded to implement shari a in their own areas include South Sulawesi, two districts in West Java (Cianjur and Tasikmalaya), Banten, West Sumatera, and South Kalimantan. After 2000, this trend was followed by a number of regencies in two provinces, West Nusa Tenggara and East Java (Komnas Perempuan 2009). After Aceh, South Sulawesi was probably the most determined of those regions, where aspiration to implement shari a for its Muslim citizens has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pro-shari a groups or institutions (Hasan 2000). This paper describes the most active pro-shari a group and movement in South Sulawesi province, the Komite Persiapan Penegakan Syariat Islam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Implementation of shari a) (KPPSI). The paper 115

119 investigates the ideological basis, the socio-religious and political dimensions of this movement, and its prospect within the contemporary political dynamics in the province. KPPSI and Aspiration for the Implementation of Shari a in South Sulawesi In the mid of October 2002, a three-day called Muslim Congress was held in Makassar. The congress was convened with special objective of discussing Special Autonomy for the Implementation of shari a in South Sulawesi. One of the recommendations of this congress was the establishment of a special preparatory body to work on the implementation of shari a in the province. Such an institution was later established and the name is Komite Persiapan Penegakan Syariat Islam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implementation of Islamic shari a), popularly abbreviated KPPSI. The aspiration to implement shari a was planned to be realized using the regional autonomy laws already enacted by the Habibie government in 1999, as mentioned earlier. The KPPSI tries to take all necessary efforts to first obtain special autonomy for the province of South Sulawesi, similar to that granted to Aceh, and then to enforce shari a with the same legal basis and status (KPPSI 2003). The KPPSI comprised two main bodies, the Majelis Syuro (a largely advisory council) and the Majelis Lajnah Tanfidziyah (the executive council). Member of Majelis Syuro were mostly university intellectuals and ulama (religious scholars), including members of local branch of the Majelis Ulama Indonesia (Indonesian Council of Islamic Scholars) or MUI. The executive council was and is always led by Abdul Aziz Qahhar Mudzakkar, one of the many sons of the legendary Abdul Qahhar Mudzakkar, who led the loosely organized Darul Islam (DI), a rebellious paramilitary group, in South Sulawesi from 1950 to Due to this family connection, among other reasons, it is hard for the movement to deflect accusations of nostalgia with the DI rebellious movement in the past (Pradadimara and Juneddin 2003). As discussed further in this paper, the historical relationship or association between KPPSI and this movement is even more evident. 116

120 Although numerous groups of South Sulawesi Muslims can be considered to take moderate stand with respect to the implementation of strict shari a in their region, KPPSI insisted on announcing a pre-prepared draft of a law which would grant special status to South Sulawesi and allow the local government to impose comprehensive shari a. As mentioned earlier, the draft law was clearly inspired by similar legislation already enacted in Aceh. In the early phase of its inception, KPPSI also maintains a close connection with several local anti-maksiat (anti-immorality) or anti-kejahatan (anti-crime) groups which have burgeoned in various regions in the interior areas of South Sulawesi since the Reformation in 1998 (Halim 2005). Historically, in terms of religious inclination, some South Sulawesi Muslim people tend to retain fanatic, rigid, and orthodox Islamic beliefs and practices. Historically, attempts to implement shari a in the province have a deep-rooted history, dating from the Islamization of the region in the early 17 th century. When the Darul Islam led by Abdul Qahhar Mudzakkar was inpower in some remote are as in this region in the 1950s, some strict Islamic rules had been partly observed and enforced by this group. The Darul Islam(literally, the region of Islam) is an Islamist group responsible for an insurgency against the Indonesian government during the 1950s and 1960s(Dijk1981). Qahhar Mudzakkar s Darul Islamis one of several similar groups in Indonesia that occurred during those period. According to C. Pelras (1985), the principle underlying Qahhar Mudzakkar s DI movement tended towards a kind of Islamic socialism, to be expressed in measures including a moderate degree of land reform; the suppression of social inequality and of all ostentation in dress and behavior, such as the wearing of gold, jewels and silks or sumptuous feasting at weddings; the eradication of all traces of feudalism, such as traditional political offices and aristocratic titles, and of paganism, such as pilgrimage to sacred places and the performance of pre-islamic rituals; and the implementation some aspects of shari a in its strictest form such as publicly stoning adulterers to death and the amputation of hands for theft. The impact of this movement is still felt and observable within the population and Qahhar Mudzakkar has become a legendary figure and patriot 117

121 among many older people in South Sulawesi, even more than fifty years after his death (Bakti 2005). KPPSI is probably the best example for this influence. On many occasions, KPPSI activists could not conceal their respects and admiration for the history of DI. KPPSI considers that the pioneering attempt made by the DI to implement some of elements of shari a in South Sulawesi in 1950s is one of the undeniable historical and cultural foundations of the pro-shari a movement today such as KPPSI. Aswar Hasan (2003), the secretary general of KPPSI, once asserted that for many of its members, KPPSI is a way of continuing the Darul Islam struggle [to implement shari a] through constitutional means. Supporters of KPPSI come from different social and educational background. Its main support comes mostly from urban-based university-educated males, while most of its activists and hardliners come from Indonesian Muslim University (UMI), the biggest private-run university in South Sulawesi. KPPSI ideologues who occupy most position in its advisory council and who generally take more moderate stands are mostly professors and lecturers at the Alauddin State College for Islamic Studies in Makassar (Pradadimara dan Juneddin 2003). Pro-shari a Group and Movements as Local Political Tools Despite KPPSI s attempts to display an image of intellectualism, there has been very little open and intellectual debate on what this group actually means by Syariat Islam (Indonesian term for shari a). Statements made in local newspapers by its activists about shari a are often dogmatic, as if the meaning of shari a is something that all Muslims have taken for granted. Partly due to this problem of conceptualization, some have argued that the aspiration to to implement shari a in several parts of Indonesia, including in South Sulawesi by KPPSI, is more of a kind of political projects by the Muslim activists. Various Muslims groups have been very skeptical about the possibility and efficacy of complete shari a implementation in Indonesia through state power. They warn that other regions should learn from Aceh s experiment (or lack of success) in enacting shari a-based local laws before they continue to demand the same autonomy by which the shari a is to be implemented (Halim 2006). 118

122 Many observers, however, perceive that the implicit meaning of shari a for most of Indonesia s pro-shari a groups is the practice of Islamic penal law where, for example, thieves have their hands amputated, adulterers are stoned to death, and other harsh punishments. These groups perceive these sanctions as authentic elements of shari a. In the perspective of KPPSI, to create a Muslim society within the unitary state of Indonesia in which law could be firmly enforced and the level of corruption, adultery, gambling and other criminal actions could be drastically eliminated, it is not enough for the Indonesian Muslims to merely enjoin what is good according to Islamic teachings through lenient da wa (religious preaching) but also, and more importantly, to combat crimes and any immoral action by means of state power. KPPSI also believes that the Muslims can only reach their potential in a society guided by shari a, and that adherence to it is the best way for Indonesia to emerge from different crises confronting many of its people in daily life (KPPSI 2003). Nevertheless, given the clear association, directly and indirectly, of many members of KPPSI and, most importantly, the general chairman Abdul Aziz Qahhar Mudzakkar, with the ideology and struggle of the DI, many have argued that, for its members and supporters, KPPSI is not only aimed at uniting various pro-shari a groups in the constitutional struggle to implement shari a as its chief aim but is also used a socio-religious instrument to reclaim political bargaining position in local political contestations (Kabri 2002). Two major facts are put forward to proof this hypothesis. Firstly, the fact that since the establishment of KPPSI, Abdul Aziz Qahhar Mudzakkar was always elected as its general chairman until today through three consecutive conferences in which a new chairman should be elected for the next term. In other words, KPPSI seems identical with the figure of its general chairman and as if without his leadership it will be no longer relevant or challenging. Later on, even after Abdul Aziz was elected as a member of Dewan Perwakilan Daerah (Regional Representative Council) in 2004 to represent the Province of South Sulawesi and reelected for the next two terms ( and ), no member of KPPSI dares to question or challenge Aziz s position as the Committee s general chairman. Certainly, his success to get popular support for his three terms membership in the Council related to his ability to exploit the 119

123 popularity and the collective memory of his father among many older people in South Sulawesi. Although it might not be the only factor, since his service as a member of DPD until today, the activities of KPPSI that he is still leading has been very much unheard publicly, except news about its conference. On the other hand, his personal actions as a politician are always covered and highlighted by local media. Secondly, being the chairman of KPPSI and exploiting his leadership roles in several other Islamic education institutions and social organizations in South Sulawesi, Aziz enjoyed and take advantage from the popular image of him as a pious, committed Islamic politician who should claim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position in the province, the governor. Because of this political capital, while still a member of DPD, Aziz run for South Sulawesi governor in local election in 2008, and again run for vice-governor in 2013, but he failed in both attempts. The next election for South Sulawesi governor will be conducted in 2018 and Aziz has just accepted to be nominated again as the vice-governor nominee to run with Nurdin Halid, the governor nominee, as his pair. In all of these general elections for a DPD seat and governor and vice-governor positions, KPPSI members and pro-shari a groups and networks became the most active groups, among others, in purposefully supporting Aziz s candidature. These facts make it difficult for the pro-shari a groups and movements in South Sulawesi to deny the accusations from the critical moderate Muslim groups that such movements that occurred since Reformation in 1998 have only utilized or exploited religious jargons and symbols for political expediency (Hasan 2009). For example, with Aziz as its general chairman, KPPSI has demonstrated more political activities and programmes to support its chairman at local and national political contestations rather than real and systematic actions to achieve its mission to implement, at least in South Sulawesi contexts, what KPPSI considers to be the most important aspects of shari a. Judging from local media coverage, at least in the last three years, news about the religious programmes of KPPSI has been almost non-existent except when it is convening coordinating meetings among its top leaders. But the name KPPSI would always appear on the news when its leader, Aziz, is on the run again for political position in the province. 120

124 분과회의 2 동남아시아의종교미술과정치 1. 강희정 ( 서강대 ) 탈식민주의시대동남아의문화재반환문제 : 종교에서정치로 2. 노남희 ( 서울대 ) 자야바르만 7 세의불교미술에보이는정치적성격 3. 김미소 ( 서강대 ) 쿠베라상을통해본 8-10 세기마타람왕조의정치와종교 4. 김지혜 ( 서강대 ) 대남국 ( 大南國 ) 효릉 ( 孝陵 ) 의조성과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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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탈식민주의시대동남아의문화재반환 : 종교에서정치로 - 인도네시아의반야바라밀상을중심으로 - 강희정 ( 서강대 ) I. 종교미술의맥락 (context) 과미술의정치성종교미술에는각종교의이념을추상화한예배대상인성상, 기도를하기위한예배건축, 성소를장엄하기위한장식, 종교의식을거행하는데쓰이는각종공예품이포함된다.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어느종교든마찬가지이며동남아시아역시마찬가지다. 이들종교미술의조성배경과목적, 기능과역할에대해다양한연구가이뤄지고있으며, 원래조성당시의목적과기능에대한연구는흔히맥락에대한연구라고할수있다. 일반화하면이때의맥락은종교미술의종교적속성과신앙이되지만정확하게말하면각기다른종교미술은각기다른맥락을갖는다고보아야한다. 어떤맥락에서조성되었는가를파악하는일은종교미술의고유성을이해하는데중요한역할을한다. 그런데조성당시의맥락은바뀌기마련이다. 오랜세월동안신앙의대상이되거나혹은폐기되어방치되면미술의의미와역할역시달라질수밖에없다. 주종교가바뀌어신앙대상으로서의역할을더이상하지못하게된신상과건축은말할것도없다. 아시아의많은식민지에서종교미술은 미술품 으로. 골동 으로수집의대상이되었고, 값어치 가매겨져식민본국으로팔려가거나약탈되었다. 예배의대상에서수집의대상으로바뀐것이다. 그에따라이들은과거역사와는다른맥락을가지게되었다. 그가운데여기서주목하려는것은문화재라는이름으로식민본국에서식민지로반환된종교미술이다. 인도네시아를대표하는조각인반야바라밀상을대상으로종교적맥락이정치적맥락의이해대상으로변모된것을살펴보려고한다. II. 반야바라밀보살의종교적맥락 1978년네덜란드국립민족학박물관 (Rijksmuseum voor Volkenkunde) 이인도네시아자카르타국립박물관에반환한반야바라밀 (Prajñāpāramitā) 보살은 13세기동부자바의싱아사리왕국때조각된작품이다. 반야는최고의 123

127 지혜를의미하며반야바라밀은보살이수행하는 6바라밀중의마지막바라밀이다. 이반야바라밀상은현지인들이싱아사리의첫번째왕껀아록 (Ken Arok) 의부인껀데데스 (Ken Dedes) 왕비의조각이라고생각했다. 껀데데스의후손들은싱아사리와마자빠힛두왕조의혈통으로이어졌기때문에후대사람들은모든왕의어머니로그녀를신격화했다. 그녀가완벽한아름다움을갖춘미인이었다는기록이 빠라라톤 (Pararaton) 에나온다. 껀데데스는불교승려인움뿌뿌르와 (Mpu Purwa) 의딸로믿기어려울정도로엄청난미인이었다고한다. 자바전역에소문난그녀의미모에현재의싱아사리인뚜마펠 (Tumapel) 의뚱굴아므퉁 (Tunggul Ametung) 이홀딱반해서그녀를납치해다가부인으로삼았다. 딸이납치됐다는소식에상심한아버지는뚱굴아므퉁이살해당할거라고저주를퍼부었고, 그의예언은현실이되었다. 껀데데스의아름다움에반한껀아록 (Ken Arok) 이뚱굴을암살하고껀데데스를빼앗았던것이다. 우연히젊은여왕을본껀아록에게로가웨 (Lohgawe) 라는힌두승려가 껀데데스에게는신성한능력이있는데그것은바로그녀가모든왕들의어머니가된다는것 이라고말했다. 이말을들은껀아록은맘을다잡아먹고뚱굴아므퉁을암살하고나라를전복시켰다. 반란을일으키고얼마지나지않아아록은꺼디리 (Kediri) 의왕꺼르타자야를무찌르고싱아사리를건국했고껀데데스는싱아사리의첫번째왕비가되었다. 동부자바싱아사리에는껀데데스의이름을딴거리들이있고, 그녀가목욕했다는장소는양귀비의화청지처럼현지명소가되었다. 이는그녀가라자 (raja) 는아니지만충분히신격화됐음을말해준다. 여기서놓칠수없는것은힌두승려의말이다. 껀데데스가신성한미모를가졌기때문에모든왕들의어머니가될거라는말은바로반야바라밀의속성과연관이된다. 반야바라밀은불교에서불모 ( 佛母 ) 로불린다. 반야바라밀자체가최고의지혜를의미하며, 바로그지혜를얻어야붓다가되기때문에반야바라밀이붓다의어머니가된다. 데데스의자손인왕들도아직태어나지않았고, 반야바라밀을얻지못한붓다들도아직은붓다가아니다. 미래에왕이되고, 붓다가될존재라는공통점이있다. 그러므로각기왕과붓다의어머니인껀데데스와반야바라밀의합일은자연스러운일이다. 이보살상을반야바라밀로비정한이유는손에웃팔라 (Utpala, 靑蓮花 ) 를잡고있기때문이다. 웃팔라위에얹혀있는것은론따르야자잎에쓴 반야심경 ( 般若心經 ) 이다. 인도와네팔, 동남아시아에서나뭇잎에쓴경전을패엽경 ( 貝葉經 ) 이라고한다. 원래인도에서는 패트라 (Pattra) 라는나무를써서패다라 ( 貝多羅 ) 로부른데기인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야자수잎을이용했고, 인도 124

128 네시아에서는론따르야자수 (lontar palm) 를이용했다. 14) 반야심경 은반야의지혜를다룬경전이다. 15) 대승불교와밀교에서보살이수행하는 6바라밀 ( 六派羅蜜 ) 의제일마지막을반야바라밀이라고한다. 16) 바라밀은속세의이땅 [ 此岸 ] 에서열반의저땅 [ 彼岸 ] 에이르는길이다. 인도팔라 (Pala) 왕조의제3대드바라팔라 (Dvarapala, ) 왕재위기간에샤일렌드라계통의슈리비자야마하라자였던발라푸트라 (Balaputra) 는인도날란다에승원을짓고이를운영하게했다. 이후수마트라와자바에서는 < 팔천송반야 (Ashtasahasrika Prajñā pāramitā Sutra)>( 소품반야심경 ) 필사본이유통되었고, 반야바라밀보살에대한신앙이번성하게되었다. 13세기싱아사리왕조의꺼르따나가라 (Kertanagara) 왕이밀교를숭상하고적극적으로후원하여동부자바에서는여러구의반야바라밀보살이조성되어숭배되었다. 동부자바에서발견된반야바라밀보살상은 최상의지혜 라는추상이보살상으로구체화된셈이다. 최상의지혜인반야를얻어야성불하여붓다가되어피안으로건너갈수있다. 불모반야바라밀을껀데데스왕비의모습으로만든것이바로이반야바라밀보살의종교적, 불교적맥락이다. III. 네덜란드문화재반환의상징 : 반야바라밀상반야바라밀보살은거의파손된부분이없는상태로 1819년에거의황폐해진유적에서발견됐다. 당시네덜란드동인도회사소속주재관보모네로 (D. Monnereau) 가동부자바말랑 (Malang) 의싱아사리사원근처쭝꿉뿌뜨리 (Cungkup Putri) 에서발견해서불법으로취득한후 1820년에다시라인왈트 (C.G.C. Reinwardt) 에게주었는데그가이를그대로네덜란드로가져갔다. 그이후약 150년간싱아사리의반야바라밀보살상은네덜란드라이덴의국립민족학박물관에소장되어있었다. 17) 이반야바라밀보살상이고국으로돌아온것은 1977년이다. 1949년네덜란드와인도네시아의독립협상에있어서인도네시아의문화 14) 이지역에자생하는 46 속 500 여종의야자나무가운데론따르나무의고운잎을골라서물에담궜다가땅에묻어건조시키는과정을여러번거치는데그기간만 2 주일이걸린다. 15) 반야 (prajñā) 는그발음에따라반야 파야 ( 波若 ) 발야 ( 鉢若 ) 반라야 ( 般羅若 ) 발랄야 ( 鉢剌若 ) 라고번역된다. 지혜를뜻하므로혜 ( 慧 ) 명 ( 明 ) 지혜 ( 智慧 ) 라고의역되기도한다. 사물의이치를꿰뚫어보는통찰력, 세상의이치를깨닫는힘을말하며, 초기불교에서는반야를통해제행무상 ( 諸行無常 ) 의이치를알게된다고말한다. 16) 바라밀 ( 婆羅蜜 ) 은산스크리트파라미타 (pāramitā) 를음역한말이다. 파라미타는완전한상태, 최고의상태를뜻한다. 그러므로반야바라밀은자연스럽게최고의지혜를의미하게된다. 17) 1823 년에국립고미술박물관 (Rijksmuseum van Oudheden) 에소장됐다가 1903 년에국립민족학박물관으로이관됐다. 125

129 재는전혀중요한문제가아니었다. 주권회복과정에서열렸던각종협상에서 문화재반환문제는뒷전이었지만이들은점차정치적고려의대상으로바뀌 었다. UN 후원으로열린 1949 년 11 월라운드테이블공동회의 (RTC: Round Table Conference) 협약에서는 원래인도네시아땅에기원을두었으나현재 네덜란드정부소유, 혹은동인도회사의소유가된 문화적가치가있는물건 (objects of cultural value) 은인도네시아공화국 (RIS, Republik Indonesia Serakat) 정부에넘겨질것 이라는내용을명시하고있다. 18) 그러나선행연구 가지적했듯이이것은인도네시아정부로부터네덜란드의기록유산을돌려받 고자하는의지가강하게개입된협약이었다. 19) 협약은 상호교환 을추진하 는내용이었고네덜란드가그때까지인도네시아에남아있던문화재로돌려받 고자했던것은동인도회사 (VOC) 의기록유물이었다. 이점은한일협정당시 한국과일본의협상과는전혀다른네덜란드 - 인도네시아간의특수성이다. 그러나이협약은그내용대로진행되지못했다 년부터이어진협정 수행을위한협의는서로간의이견차이가좁혀지지않았다. 네덜란드내부적 으로인도네시아역사와문화에관한네덜란드학계의자부심이유지될수있 을지에관한의문도있었지만문화재를돌려주었을때, 네덜란드박물관수장 품이줄어든다는점, 돌려준문화재를아직까지문화적으로열악한인도네시아 가제대로관리할수없을것이라는점등의반대가만만치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네덜란드의관료들은전후재편된세계질서속에서네덜란드의도 덕적위상을높일수있고, 여전히인도네시아와문화적협력관계를유지내 지는돈독히하리라는기대감으로문화재전량반환을긍정적으로추진하고 있었다. 순조로운반환이이뤄지지않은것은오히려인도네시아때문이었다. 1950, 60 년대의정치, 사회적혼란과서뉴기니 (West Papua) 병합문제 로인한갈등이계속되면서수카르노는 1957 년후반에네덜란드기업들을국 유화하고, 당시인도네시아에살고있었던 4 만명이상의네덜란드시민을추 방했다 년에는네덜란드와의국교를단절하고, 서뉴기니문제를무력으 로해결하겠다고주장했다. 20) Nasionalisasi', 'Indonesianisasi' 를기치로한 수카르노의급진적인반네덜란드경제, 문화의탈식민화로인해어떤협상도 순조롭게진행될수없었다. 21) 이기간에인도네시아는문화재반환과인도네 18) S. Legêne and E. Postel-Coster, "Isn't it all culture? Culture and Dutch Development Policy in the Post-Colonial Period", in J. A. Nekkers and P. A. M. Malcontent eds., Fifty Years of Dutch Development Cooperation, (Hague: SDU Publishers, 2000), p ) Cynthia Scott, "Renewing the 'Special Relationship' and Rethinking the Return of Cultural Property: The Netherlands and Indonesia, ",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0(0) pp ) 수카르노와소련의관계를우려한미국의중재로서뉴기니는 1962 년 10 월유엔의관리에들어갔다가이듬해인 1963 년 5 월인도네시아에인도됐다. 21) J. O. Sutter, Indonesianisasi: Politics in a Changing Economy, (Ithaca, 1959)(Cynthia Scott, 126

130 시아에서의네덜란드문화에관한네덜란드정부의제안을거절했고, 단지주권이양의상징이될만한특정유물만을요구했다. 22) 서뉴기니사태가어느정도진정이된 1963년에네덜란드정부는다시인도네시아와의문화적인관계를재확립하기위한방안을강구하기시작했다. 주관부서는외교부, 교육예술과학부였다. 반야바라밀보살상을반환하기로한계기는어느철도노동자가쓴편지에서비롯됐다. 하지만그의제안은교육예술과학부장관과외교부장관의반대에부딪혔다. 이들은문화재를한번내주기시작하면언제까지계속될지모르므로이것이원칙의문제라고주장했다. 23) 1949년의주권이양당시와달리 1950~60년대네덜란드가겪은탈식민의후유증이라고볼수있다. 서뉴기니문제는모범적인식민본국을자처한네덜란드의자긍심에상처를주었을뿐만아니라모멸감을주는방향으로전개되었다. 24) 이에네덜란드는자신들의문화적, 도덕적우위를인도네시아문화재반환을통해드러내고확인받고싶어했다. 반야바라밀보살을돌려줌으로써전세계에자신들의선의를보여주려했던것이다. 1960년대중반에이르러과거식민지였던나라에서자신들의반출문화재문제가중요하게대두되기시작했다. 1954년에선포된 < 전시문화재보호협약 ( 일명헤이그문화재협약 )> 을기점으로유네스코를중심으로국제법과각종규약을통해식민본국과식민지간의문화재문제해결을위한다각도의노력을펼쳤다. 25) 1960년대에는 UN경제이사회를중심으로과거식민지들이우선경제문제를문화재반환과결부시켜해결하려는시도를했고 1970년에는 < 문화재의불법적반 출입및소유권양도금지와예방수단에관한협약 ( 유네스코협약 )> 을맺었다. 26) 문화재반환에관한반식민주의적요구들은제3세계로단결을주창한 1955년의반둥회의에서부터비롯됐으나 20여년간큰진척이없을정도로양측의입장이판이하게달랐다. Ibid, 8 재인용 ). 서뉴기니를둘러싼알력은 1962 년에는마침내무력분쟁으로까지발달했다. 22) C. Scott, ibid., p ) Legêne and Postel-Coster, "Isn't it All Culture? Culture and Dutch Development policy in the Post-Colonial Period", pp ) 네덜란드는서뉴기니가인도네시아에병합되는것을원치않았기에 UN 관할로맡겼으나 UN 은바로이듬해인 1963 년빠르게인도네시아로주권을넘겼다. 25) 전시문화재보호에관한협약 (Th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Property in the Event of Armed Conflict, 1954 년헤이그협약 ), 문화재의불법적반 출입및소유권양도금지와예방수단에관한협약 (Convention on the Means of Prohibiting and Preventing the Illicit Import, Export and Transfer of Ownership of Cultural Property, 1970 년유네스코협약 ), 이후 1995 년로마에서 UNIDROIT 로발전시킨다. 유네스코협약에대해서는이동기, 문화재환수협약의성립경위와현황 - 유네스코협약과의관계를포함하여, 法學論叢 第 22 卷第 1 號, , pp ) 이문제에대한유네스코협약은다음논문에정리가잘되어있다. 제성호, 문화재의반환과국제법, 법학논문집 제 29 집제 1 호 (2005) pp

131 1964년네덜란드와인도네시아가 기술협력 에대한제한적인협약을체결하면서두나라의관계가우호적으로돌아서려던차에 1965년수하르토가쿠데타로정권을잡았다. 수교를다시맺은이후첫번째주인도네시아네덜란드대사였던쉬프 (E.L.C. Schiff) 는수하르토정권초기가문화협력관계를개선할절호의기회라고네덜란드외교부관리를설득했다. 네덜란드는인도네시아개발원조를확대하여문화적관계재개를위한기금을포함시킬지를고민하던중이었다. 인도네시아의문화재반환을적극적으로고려하던 1969년네덜란드교육과학부장관은극동학전문가들과상의하여네덜란드박물관컬렉션에지장이제일적고, 상징적으로의미가있는문화재를고르려고노력했다. 처음에는박물관의유물보다상징적인의미가있는인도네시아의기록문서를진품이아닌마이크로필름상태로돌려주겠다는안을냈다. 첫번째고려대상이됐던것은반야바라밀보살이아니라롬복컬렉션중의고문서사본이었으나당시라이덴대학교언어문화학과장안드리스티우 (Andries Teeuw) 은인도네시아박물관의열악한상황을문제삼으라고조언했다. 27) 티우만이아니고박물관피터포트 (Peter H. Pott) 학예국장역시문서사본반환을반대했으며이들은영국과연대하여문화재반환을반대한인물이었다. 그러나네덜란드외교부는 1968년자카르타에서헤이그협약에따른문화재교환을천명하고, 곧이어네덜란드대사관에에라스무스하우스라는이름의문화센터를열었다. 양국의관계는개선되어 1970년수하르토가네덜란드를방문하는성과로이어졌지만이는다시네덜란드의문화적정책에대해자신들의경제적인이해를해결하기위한신식민주의적발상이라는비판을받았다. 28) 그러나여러정책에도불구하고새로구축한문화적관계가충분하다고여기지않은네덜란드외교부관료들은다시박물관수집품반환에관심을돌렸다. 이를더욱극적으로전환시킨것은네덜란드에서의중도좌파연합정권의탄생이었다. 노동당당수줍덴윌 (Joop den Uyil) 의집권으로구성된연합정권은정치 경제 사회전분야에서급진적인개혁정책을주도했고, 마침내나가라꺼르따가마를돌려주기로결정했다. 1973년쥴리아나여왕이수하르토에게직접나가라꺼르따가마사본을건네줬고, 역으로 VOC의자료와자카르타와보고에있던네덜란드공문서에대한접근을허가받았다. 문화재반환의결심을굳힌네덜란드는 1975년협정을준수하는차원에서 27) 롬복의고문서는 1894 년차크라네가라 (Cakranegara) 에서발리왕을굴복시키고얻은전리품이었다. 티우는네덜란드가인도네시아경제 기술개발원조에대한선의를표해야한다고했다. 그러나롬북, 말레이, 아체등지에서수집한전리품사본들을상태가열악한자카르타박물관으로넘겨줄수없다는주장을폈다. 사본에는나가라꺼르따가마 (Nagarakertagama) 가포함되어있다. 28) 대표적으로 길잡이 De gids 라는잡지에피터슈마허 (Peter Schumacher) 가쓴말이라고한다. Scott, ibid., pp 재인용. 128

132 라이덴민족학박물관소장의롬복컬렉션부터광범위하게반환을추진했다. 여기에반야바라밀상이포함된다. 1978년양국간의문화적인정책을강화하는데합의하고, 4월의바타비아협회 (Batavian Society) 200주년기념식에즈음하여포트학예국장은반야바라밀상을반환했다. 이로써네덜란드는바타비야협회설립의유효성을검증하고, 과거식민통치시절네덜란드의문화재수집행위의중요성을천명한셈이다. 29) 이제반야바라밀상은껀데데스를모델로만든불모이자지혜의상징으로서의보살상이라는조각제작당시의원래맥락에서완전히벗어났다. 지금자카르타국립박물관을대표하는신상반야바라밀은네덜란드와인도네시아양국의우호와친선을상징하는정치적인화해의대상으로새로운맥락속에위치한다. 한국과일본이맺은한일협정당시의문화재반환문제와비교해보면일본은한국에일본문서의열람과반환을요구한적이없다는점, 최소한의문화재만을돌려주려고했다는점, 미반환의이유는사유재산이라거나불법취득이아니라고주장하여오래도록논쟁을한점에서근본적으로차이가있다. 이는한국과인도네시아의정치적상황이달랐고, 한국점유기간이훨씬짧았으며, 한일협정이인도네시아-네덜란드간의협상보다먼저이뤄졌다는데기인하는것으로보인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일본은네덜란드가인도네시아문화재를반환했는지의여부에촉각을세우고일일이확인하여박정희정권에문화재를반환하지않을근거로삼으려고했다. 30) 그러나인도네시아정치상황이예상과다르게돌아가는바람에오히려일본이먼저한일협정과부속문화재반환규약을맺게되었다. IV. 문화재반환문제의정치적함의 문화재반환문제는과거식민지였거나자국의영토를지킬능력이없는약소국이었던나라들이독립해서자신들의국가정체성을확보하기위해그들의과거를보여주는문화재를반환하라고요구하면서발생했다. 제 2 차대전이후, 신생독립국들은국가의정통성과국민의일체감을고양시키기위해문화재를적극적으로활용하려고했으며이과정에서탈식민은가장중요한명제였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국가와국가간의갈등이불거지자 UNESCO 가규약과협정등의법적장치를통해국제법적인규제와협상의가능성을열었다. 31) 하지만문화재소유의위법성이나탈법성을따지는것은반환요구의 29) Scott, ibid., pp ) 일본외교문서 < 제 498 호문화재인도에관한실례조사훈령의건 >, 同 < 문화재문제에관한건 >. 일본은 반환 대신 인도 라는용어를썼다. 굳이원래위치로돌려준다는표현을피하고싶었던것이다. 31) 이분야에대해서는일찍부터주로국제법분야에서의연구가이뤄졌으나다른분야에서의접근은미약하다. 백충현, 문화재반출입의국제법적규제, 한국미술사교육 (1989), pp 문화재 129

133 근거, 혹은반환하지않을권리의근거는되지만이것만으로실질적인문화재반환논의의진전을보기는어렵다. 식민지에서과거의유물은각시대의시대정신에따른특정한맥락을지니고있었으나, 근대이후원래의맥락과유리되어제국의뜻에합당한미적인가치, 역사적인의미가있는 문화재 가되었다. 식민지에서독립한신생국은반출문화재의불법성을주장하며적극적으로반환을요구한다. 기본적으로한때자신들의영토에속했던유물에대해국가소유권을주장하며, 이는문화재반환요구가국제분쟁으로치닫게되는중요한원인이된다. 인도네시아의나가라꺼르따가마에서볼수있듯이전후독립국의경우, 문화재국가소유권은심각한문제를안고있다. 그것이단지원래의맥락과유리되었다는점만이아니라원소유주로서의 국가 인정문제가걸려있기때문이다. 어쩔수없는역사의전개이지만지금의인도네시아가과거롬복, 혹은발리문화재의정당한소유자가되어도좋은가하는문제가필연적으로발생할수밖에없다. 이경우모든식민지였던나라와마찬가지로현재의국가가과거모든역사의대리자임을자처하는셈이된다. 특정한문화재가만들어졌을당시의국가는현재의국가가아니다. 근대이후국가가세워지고, 인위적으로국경선이그어진상황에서현재의국가가과거어느시대의국가를계승하여정통성을갖는다고말할수는없다. 국민의대리자로서이들신생독립국은반출문화재에대한국가소유권을암묵적으로전제하고행동한다. 돌려받지않은, 돌려받을가능성여부에관계없이국가의반환요구는문화재의국가소유권을전제로한국제적인행위이며자연스럽게식민주의청산의목소리와연동됐다. 문화재를돌려받는다고해서그것이바로식민주의를극복하는방법이라고할수는없다. 그럼에도식민주의청산이라고생각하게만드는것은사실상문화재가약탈당한물건이라고판단하기때문이다. 하지만네덜란드가인도네시아문화재를취득한방법은다양해서롬복컬렉션에서는전리품이었고, 아체의유물중에는술탄으로부터받은선물도있었다. 이점은인도네시아가적극적인반환요구를하기어렵게만든배경이었을지도모른다. 이미신생국으로독립을한지도반세기가지난오늘날, 형식적으로문화재를만든원산국과현재의보유국은대등한관계에있다. 하지만그이면에는과거식민지와제국이었거나약소국과강대국으로결코대등한관계가아니었던두나라사이의 현재 가있다. 문화재반환이계속문제가되는것은과거에수직적인관계에있었던나라들이얼마간수평적관계로변화됨에따라이것이국가대국가의문제로확대되었기때문이다. 따라서문화재국가소유권은단순히현상적인소유의문제가아니라역사의흐름에따라자연스럽게부상된일이며, 한나라의시간과공간이고스란히결부된일이다. 결국문화재반환문제는 20 세기현대사에서제국과식민지가문화재라는거울을통해각각자신들의민낯을들여다보는것이라할수있다. 반환문제의선두가된것은대영박물관소장의그리스파르테논신전약탈문화재엘긴마블이다. 130

134 자야바르만 7 세의불교미술에보이는정치적성격 노남희 ( 서울대학교 ) I. 서론 1181년, 크메르의한왕자는톤레삽호수근처에서마지막남은참파군을마침내격퇴시켰다. 그리고이듬해에그는이승리를발판으로앙코르왕국의왕위에올랐으니, 그가바로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 재위 ) 이다. 앙코르왕국의다른왕들과마찬가지로그도즉위직후부터사원을건설하기시작했다. 어머니와반야바라밀보살을위한타프롬 (Ta Prohm) 사원, 아버지와관세음보살을위한프레야칸 (Preah Khan) 사원, 붓다에게봉헌한바욘 (Bayon) 사원이그가건설한대표적인사원들이다. 물론자야뱌르만 7세가세운모든사원의수는이보다훨씬많았다. 그러나중요한것은그가가장먼저세운사원이바로그의어머니와아버지를위한곳이었다는점이다. 이는이전의왕들과는분명히차별화되는지점으로, 본래앙코르왕국의왕들이제일먼저공들여지은사원은데바라자 (devaraja) 숭배를위한시바사원이었다 (Kulke, 1978: 1-47). 32) 자야바르만 7세가어머니와아버지에게바치는사원을가장먼저지은이유는그의시대에새로이등장한불교조각과도연결된다. 그조각은바로관세음보살입상, 불좌상, 반야바라밀보살입상으로구성된, 이전에는없던형식의청동삼존불상이다. 이상은붓다와보살로구성된단순한삼존상이라기보다는 가족관계 라는또하나의중요한도식을구현하고있는상이다. 다시말해관세음보살은아버지를, 반야바라밀보살은어머니를나타내며, 중앙의붓다는바로자야바르만 7세자신을뜻한다 (Jessup, 2004: ; Harris, 2005: 21-22). 그리고이러한가족구도는프레야칸, 타프롬, 바욘이라는세사원과도이어진다. 이렇게청동삼존불상과세사원이구현하고있는종교적 세속적인의미는곧 32) 데바라자라는단어는신 ( 데바 deva) 과왕 ( 라자 raja) 이합쳐진것으로서, 산스크리트문법상 신 ( 神 ) 인왕 ( 王 ) 과 신들의왕 이라는두가지뜻으로모두해석이가능하다. 세데스는전자의해석을취하여, 왕은고대캄보디아의신그자체이자모든건축물은왕에게봉헌된것이라주장하였다. 그러나 60 년대이후장필리오자 (Jean Filliozat) 등은비문분석을통해신을가리키는단어 ( 캄라텐자갓타라자 kamraten jagat ta rāja, 신들의왕이자세상의왕 ) 와왕을가리키는단어 ( 캄라텐프다이카롬 kamraten phdai karom, 낮은면 ( 땅 ) 의지배자 ) 가구분되어있다는점을지적하고, 크메르의왕은신들의왕인시바신에대한올바른제의를통해신들로부터통치할수있는권위를부여받은것이라고주장하였다. 131

135 다음과같은질문으로이어진다. 자야바르만 7세는왜사원과조각으로이러한가족구도를강조했으며, 군주로서의자신을어떻게인식했던것일까? 그는이전의왕들과달리불교적이념에기반한통치를실현하고자했고, 이러한그의의도는자연히그가만든사원과조각에도반영되었다. 따라서이를이해하는것은자야바르만 7세시대의불교및불교미술뿐만이아니라, 고대크메르의정치에대한담론도보다풍부하게만들어주는길일것이다. II. 사원과조각 : 가족구도의구현자야바르만 7세가즉위후가장먼저세운타프롬사원은 1186년에완공되었다. 이사원은그의어머니였던자야라자추다마니 (Jayarājacūḍāmaṇi) 와반야바라밀보살을위한곳이었다. 33) 타프롬이라는이름은크메르어로 조상 ( 인 ) 브라흐마 (Ancestor Brahma) 라는뜻이나, 사원의비문에의하면세워질당시의이름은산스크리트어로 왕의사원 이라는뜻의라자비하라 (Rajavihara) 였다 (Cœdès, 1906: 55, 74). 반야바라밀보살의사원답게내부에는반야바라밀보살상이안치되었다고하나, 지금은전하지않는다. 몇년후인 1191년에는프레야칸사원이완공되었다. 프레야칸은크메르어로 성스러운칼 이라는뜻이지만, 사원에남아있는비문에의하면이사원의본래이름은산스크리트어로 성스러운승리 라는뜻의 자야스리 (Jayasri) 였다 (Cœdès, 1941: 257, 288). 이승리는바로참파에대한승리를가리키는것이며, 이를증명하듯비문에서는사원이세워진장소가바로참파군과의격전이벌어졌던곳임을밝히고있다 (Cœdès, 1941: 274, 288). 프레야칸사원은자야바르만 7세의아버지인다라닌드라바르만 2세 (Dharaṇīndravarman II, 재위 ) 와관세음보살에게바쳐진곳이었으며, 내부에는관세음보살상이세워졌다고전한다. 34) 한편자야바르만 7세가세운사원가운데가장중요한곳은바로앙코르톰 (Angkor Thom) 중심에건설된바욘사원이다. 바욘사원은약 54개의거대한인면탑 ( 人面塔 ) 과외벽회랑에빽빽하게새겨진섬세한부조들로유명하며, 1933년에이루어진발굴을통해지성소에안치되었던불좌상이출토되었다 (Jessup and Zephir, 1997: 50). 대좌를포함한높이가약 3.6m에달하는이 33) 그의군대가정복한땅에그는라자비하라를세웠다... 성자들 (Munis) 의왕의어머니 (= 반야바라밀보살 ) 에게 ( 이곳을 ) 바쳤다. 그는몸이보석으로빛나는자야라자추다마니를세웠는데, 그가세운상은그의어머니의모습 (image) 이었으며, 이것은붓다들 (Jina) 의어머니의상이었다 (Cœdès, "La stèle de Ta-Prohm,"(1906), pp ). 원문은세데스의해석을따랐다. 34)... 왕은스리자야바르메슈바라 (Sri Jayavarmeśvara) 라는이름의관음 (Lokeśa) 을봉헌했는데그의아버지의이미지였다 (Cœdès, "La stèle du Práh Khan d'ankor"(1941), p. 288). 원문은세데스의해석을따랐다. 132

136 상은 10세기무렵부터앙코르왕국에서붓다의도상으로통용되던 나가 (Naga) 위의붓다 상으로서, 얼굴표현역시전형적인바욘양식을따르고있다. 사실타프롬사원과프레야칸사원은즉위후잇달아완공되었으며그연대도비교적명확한데반해, 바욘사원의착공과완공연대는불분명하다. 바욘사원의완공시기를자야바르만 7세재위후반기로간주하는견해도더러있기때문에 (Rooney, 2005; Harris, 2005: 21), 이세사원이처음부터하나의프로그램으로계획되었다고확언하기는힘들다. 그러나봉헌대상을통해아버지-관세음보살, 어머니-반야바라밀보살, 그리고붓다-자야바르만 7세라는도식을각각의사원이구현하고있는것만은확실해보인다. 흥미롭게도이시대에새로이등장한조각역시이러한구도를보인다. 그것은바로현재캄보디아국립박물관에소장된청동삼존불상이다. 전체높이약 49cm의이상은관세음보살입상, 불좌상, 반야바라밀보살입상으로구성된작은청동상으로서, 각각의상을개별주조하여결합한것이다. 얼핏보기에는평범한이상은그러나이전에는없던새로운형식의상이다. 즉사비 ( 四臂 ) 관세음보살상, 여성형의반야바라밀보살상, 나가위의붓다상은이미있었으나, 이셋을 삼존상 이라는세트로묶은상은이때처음등장하였던것이다. 물론이전에도이세가지상이함께조성된사례가없지는않았다. 예를들어현재방콕국립박물관에소장된석비조각의경우, 정면에는나가위의붓다상을, 양쪽측면에는각기형태가다른남성신과여성신을아래위로함께새겨놓았다. 각남성신과여성신의도상을밝혀줄명확한명문이나근거는없으나, 그중한면의조합은대개관세음보살과반야바라밀보살인것으로비정된다 (Woodward, 2007: 71-83). 그러나이들은총여섯개의상이새겨진석비의일부로존재할뿐, 붓다를두보살이시위하는형식이라고는볼수없으므로엄밀한의미에서 삼존상 이라부르기는어렵다. 따라서무엇보다도중요한점은자야바르만 7세때이들이 삼존상 이라는묶음으로재구성되었다는사실과그이유라고할수있다. 그렇다면이렇게새로운형식의상이만들어진이유는무엇이며, 이는무엇을나타내기위함이었을까? 우선교리적인측면에서이상은깨달음에이르는길을시각화한것이라고할수있다. 즉자비 ( 관세음보살 ) 와지혜 ( 반야바라밀보살 ) 라는두방편을통해깨달음 ( 붓다 ) 에이를수있다는불교가르침의요체를구현하고있는것이다 (Jessup, 2004: ). 그러나상이표현하고있는것은그것이전부가아니다. 앞선세사원과마찬가지로이조각에도역시가족관계라는구도가투영되어있다. 즉관세음보살 133

137 은아버지를, 반야바라밀보살은어머니를, 붓다는자야바르만 7세자신을뜻한다. 깨달음을낳는자비와지혜 라는도식이면에는 자야바르만 7세를낳은아버지와어머니 라는도식이깔려있고, 궁극적으로이는통치의정당성을확보하기위한자야바르만 7세의정치적의도와관련이있다. III. 가족적구도의이용과역사적상황이처럼자야바르만 7세가세운세곳의사원과새로운형식의조각을통해강조되는것은바로가족관계이다. 특히아버지와어머니에게봉헌하는사원을본인을위한사원보다먼저세운것은분명히이전의왕들과는다른점이며, 그이유는역시그의왕위계승을둘러싼역사적환경에서찾아야할것이다. 사실자야바르만 7세이전에도자신의부모나왕실조상들을위해사원을세운전례가없지는않았다. 그러나그맥락은자야바르만 7세와매우달랐던것으로보인다. 부모님이나조상을위한상을만들고그상을안치할사원을세우는것, 혹은그반대의활동들은어디까지나조상숭배라는맥락안에서이루어졌던것으로추측된다. 캄보디아나인도네시아의불교혹은힌두교신상에대한논의에서는이 조상숭배 가빠지지않고언급되는경향이있는데, 이것의정체와내용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에대해서는여전히간단하게정리하기어려운면이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죽은사람을추모하고그들로부터복덕을얻고자하는열망에서비롯된관습이라는점에는대체적으로이견이없어보인다 (Reichle, 2007: ). 그러나자야바르만 7세의경우이러한일반적인의미의조상숭배라는맥락보다는정치적인의도의개입이강했던것으로추측된다. 자야바르만 7세는우여곡절끝에왕위에올랐다. 앙코르왕국의왕들이신에버금가는지위를누렸다는초기의견해와는달리, 앙코르왕국의왕위계승역사는사실피로얼룩져있었다. 숙부나이복형제에의한왕위찬탈이흔하게발생했고, 심지어첫번째왕위찬탈은건국자인자야바르만 2세가죽은직후에일어났다 (Chandler, 1992: 63-64). 그럼에도불구하고앙코르왕국에는이를강력하게제어할만한정치적 제도적장치가없었거나상당히느슨했던것으로추측된다 (Higham, 1989: ). 자야바르만 7세역시아버지였던다라닌드라바르만 2세로부터왕위를물려받지못했다. 아버지의뒤를이은것은또다른아들이었던아쇼바르만 2세 (Yaśovarman II, 재위 ) 였고, 이때자야바르만 7세는정확히무슨이유에선지는모르지만앙코르왕국을떠나있었던것으로추측된다 년, 트리부바나디탸바르만 (Tribhuvanadityavarman, 재위 ) 이반 134

138 란으로새로이왕이되었을때도그는별다른움직임을보이지않았다. 그러나 1177년참파군이메콩강을거슬러톤레삽호수까지침입한후왕을시해하고수도를유린하자, 자야바르만 7세는자신의군대를이끌고출격하여치열한전투끝에이들을몰아내기에이른다. 결국이공으로그는앙코르왕국의왕이되었는데, 이때그의나이가이미오십에가까웠다고한다 (Cœdès, 1968: ). 안정적인왕위승계가이루어진적이별로없었다고는하나, 어떤이유에서든무력으로왕이된상황에서자야바르만 7세는왕족으로서의자신의정통성을강조하고싶었을것이다. 게다가즉위후에도그는한동안영토내에남아있던참파의반군은물론, 그들과결탁한내부적들과산발적인전투를치러야했다 (Mabbett and Chandler, 1996: 162). 그런면에서주목되는점은즉위후아버지를위한사원보다어머니를위한사원이먼저지어졌다는사실이다. 타프롬사원의비문에서는어머니였던자야라자추다마니의계보에대해매우상세히기술하고있다. 비문에서는그녀의가계도를거슬러올라가그최상층에누가있었는지를밝히고있는데, 이에따르면그녀의조상은당시신화적인인물로여겨지던스루타바르만 (Srutavarman) 과스레스타바르만 (Sresthavarman) 이었다 (Higham, 2004: 185; Cœdès, 1906: 45). 이는아버지였던다라닌드라바르만 2세에대해 마히다라푸라 (Mahīdharapura) 에서살았던사람의후손이다 라는것외에는별다른언급이없는것과도좋은대조가된다 (Higham, 2001: 185). 이러한차이는크메르에서가계를서술하는방식과연관이있는것으로, 왕의지위는그의조상이누구인지에관한문제였기때문이다 (Vickery, 1986: ). 즉자신의정통성을어필함에있어오랜왕실혈통을가진자신의어머니를내세우고현창하는것이, 왕이었던아버지를이야기하는것만큼, 혹은그보다더유효하리라생각했던것이다. 결국어머니와아버지에게바치는사원을가장먼저짓고 부모 의은유를활용한불교조각을만든것은모두그의이러한정치적상황에서비롯되었다고볼수있을것이다. IV. 데바라자에서생불 ( 生佛 ) 로자야바르만 7세의이러한불사 ( 佛事 ) 에서또하나두드러지는점은군주로서의자신에대한인식, 즉자신을붓다로바라보는관념이다. 불교도였던그는즉위후본격적으로통치를시작하고부터는힌두교가아닌불교라는종교에서통치이념을찾고자했을것이다. 전통적으로앙코르왕국의왕들이가장공을들여건설했던것은바로데바 135

139 라자의식을치르기위한사원이었다. 데바라자 라는단어의해석을둘러싼앙코르왕국의통치이념에대한논의, 즉데바라자숭배 (devaraja cult) 는크메르역사에서매우논쟁적인주제이다. 간단히말해데바라자숭배에대한해석과논의는 신 ( 神 ) 인왕 ( 王 ) 에서 신들의왕 으로변해왔다고할수있다. 그리하여현재는데바라자숭배라는것이 신들의왕 인시바신에대한올바른제의를지내고링가 (linga) 를안치할사원을세우는의식이라는점에대체로견해를같이한다 (Kulke, 2014: ). 데바라자숭배와비교했을때자야바르만 7세의세사원과삼존불상에서발견되는가장흥미로운점은바로 자야바르만 7세 = 붓다 라는도식이다. 세데스는이러한도식을근거로자야바르만 7세가자신을생불 ( 生佛 ) 로인식했음이확실하다고주장했다 (Cœdès, 1966: 97-98). 이렇게스스로를붓다로보는인식은크메르전통에서매우이색적인데, 왜냐하면앙코르왕국의왕들은데바라자숭배를통해시바신과의합일을염원했지만결코살아있는동안시바신그자체로여겨지지는않았기때문이다. 즉이렇게살아있는통치자를의식적으로신성화하는일은이전까지없던전통이었던것이다 (Kulke, 2014: ). 통치자가자신을 살아있는붓다 로여기는현상은고대동아시아에서보다보편적으로발견된다. 중국남북조시대북위의통치자들은 왕즉불 ( 王卽佛 ) 사상을폈으며, 당 ( 唐 ) 대무측천은자신을미륵불이라여기고스스로를현창하는수많은불사를일으켰다. 비단무측천뿐만이아니라난세의영웅들은종종스스로를세상을구하고정토를구현하는미륵불로설정하곤했다. 자야바르만 7세역시참파의침입으로무너질뻔했던왕조를구하고다시일으켜세운인물로서, 그러한그를자신뿐만이아니라백성들도 구원자 (savior) 로인식하는것은충분히있었을법한일이다. 그런데흥미롭게도자야바르만 7세는자신을살아있는붓다로격상하되, 미륵불이아닌약사불이라는붓다를택했다. 앞서언급한청동삼존불상중가운데본존불을보면, 양손바닥을위로하여배꼽앞에서포개고그위에작은함을얹어놓았음을알수있다. 이러한함은보통약사불의도상으로여겨지기때문에, 이상은단순한석가모니불이아닌약사불을의도하고만들어졌을가능성이있다 (Jessup, 2004: ). 이상과는모습이약간다르지만양손을가슴께에서모아둥근물체를잡고있는모습의약사불이이시기에이르러많이만들어졌으며, 이러한상들은보통병원이었던것으로추정되는건축물들에서많이발견되었다 (Sharrock, 2015: 25-27). 이병원들은자야바르만 7세가전국에세운 102개의병원중일부로, 타프롬사원의비문에그러 136

140 한사실이기록되어있다 (Cœdès, 1906: 66, 80). 이러한병원의바깥쪽에는 왕 ( 자야바르만 7세 ) 은자신의병이아니라백성들의병으로인해고통받는다... 백성들의고통은곧왕의슬픔이다 라는내용을새긴비석이세워졌다 (Sharrock, 2015: 32). 이처럼스스로를약사불로나타내는조각을만들거나병원을세우는행위등은통치권에대한자야바르만 7세의인식의전환에서비롯된행위였다. 즉전통적인데바라자숭배에서는보이지않던, 살아있는통치자를신격화하는발상이토대가되어스스로를붓다로표상하는조각과사원이만들어지기에이르렀던것이다. V. 결론종교적건축물을짓고종교적상을만드는것은단순한미적즐거움으로행하는일이아니었다. 그러한행위를통해얻고자하는바가분명히존재했으며, 또한그러한행위는어떤의도를분명히표명하는것이기도했다. 동시에그것은많은재화와노력을요하는일이었으며, 그규모가크고횟수가많을수록배경에는더강력한후원자의존재가있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이를잘보여주는대표적인사례라하겠다. 자야바르만 7세는앙코르왕국의마지막전성기를이끈인물이었다. 젊은시절에는권력의중심부에서밀려나있었지만전쟁을통해왕이되었고, 즉위후에는불교를통해그의왕국을통치하고자했다. 그가세운불교사원의수가다른왕들의것을훨씬능가하고, 그의시대에이르러불교조각의수가폭발적으로늘어나고새로운도상이나형식의불교조각이등장하는것도모두이러한상황에서비롯하였다. 그러나이보다더중요한것은그가종교적상과건축물을통해자신의통치권에대한인식을드러내고또주장하기도했다는점이다. 즉위후어머니와아버지를위한사원을먼저세우고부모를강조한구도의불교조각을만든것은, 부모님의계보를통해자신의통치권을주장하기위한행위로해석할수있다. 또한이러한구도에서자기자신을붓다로상정한것은, 이전까지통치정당성을부여해주었던데바라자숭배를대체하는 생불 로서의불교군주인자신을주장한것으로해석할수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구현한이러한구도에서종교와정치는서로분리되지않았고, 일부러분리될필요도없었다. 오히려어떤의미에서그것은 의도된이중성 에가까웠으며, 이를통해통치자의프로파간다는더욱효과적으로작동할수도있었던것이다. 137

141 [ 참고문헌 ] 단행본 Chandler, David. A History of Cambodia. Chiang Mai: Silkworm Books, Cœdès, George.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trans. Susan B. Cowing, Canberra: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Press, Harris, Ian. Cambodian Buddhism: History and Practice.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Higham, Charles. The Civilization of Angkor.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Higham, Charles. The Archaeology of Mainland Southeast Asia.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Jessup, Helen Ibbitson. Art & Architecture of Cambodia. London: Thames & Hudson, Jessup, Helen Ibbitson and Thierry Zephir. Sculpture of Angkor and Ancient Cambodia: Millenium of Glory. Washington, D. C.: National Gallery of Art, Kulke, Herman. The Devaraja Cult. trans. I. W. Mabbett. New York: Southeast Asia Program, Mabbett, Ian and David Chandler. The Khmer. Chiang Mai: Silkworm Books, Reichle, Natasha. Violence and Serenity: Late Buddhist Sculpture from Indonesi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Rooney, Dawn. Ankogr. Hong Kong: Odyssey Publications, Sharrock, Peter D. Banteay Chhmar: garrison-temple of the Khmer empire. Bangkok: River Books, 논문 Cœdès, George. "La stèle du Práh Khan d'angkor." Bulletin de l'e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Tome 41 (1941): Cœdès, George. "La stèle de Ta-Prohm." Bulletin de l'e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Tome 6 (1906): Kulke, Herman. "From Aśoka to Jayavarman VII: Some Reflection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Buddhism and the State in India and Southeast Asia." In Buddhism Across Asia; Networks of Material, Intellectual and Cultural Exchange, Volume 1, Tansen Sen ed. (Singapore: ISEAS Publishing; New Delhi: Manohar, 2014): Vickery, Michael. "Some remarks on early state formation in Cambodia." In Southeast Asia in the 9th to 14th Centuries, David Marr and A. C. Milner eds. (Singapor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1986): Woodward, Hiram. "The Karandavyuha Sutra and Buddhist Art in 10th-century Cambodia." In Buddhist Art: Form & Meaning (Mumbai: Marg Publications, 2007):

142 쿠베라상을통해본 8~10 세기마타람왕조의정치와종교 김미소 ( 서강대 ) 기원전 1500년경인도베다경전에서약샤의왕으로등장하는쿠베라는 B.C. 5세기이후로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등과같은주요종교의발전과함께세종교로각각흡수되었다. 힌두신화속에서쿠베라는오랜고행을통해북방을수호하고재보와관련된신으로서의지위를얻게되었고, 불교에서도쿠베라는잠발라 (Jambhala) 라는이름으로등장하며재보와번영의신으로등장하게된다. 상으로제작된쿠베라의가장이른사례는기원전 1세기북인도바르후트스투파와산치스투파의난순및외벽부조에서찾아볼수있다. 초기쿠베라상은약샤의속성을강하게드러내고있으며신격화된지위를상징하는도상들을아직갖추지못한것처럼보인다. 그러나기원후 5세기굽타왕조대부터쿠베라상은화려한보관과장신구들을함께갖춘모습으로나타나는데이는아마도재보신으로서의지위를시각적으로표현하기위한목적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 이시기의쿠베라상은주로석굴사원의외벽이나입구쪽에위치하고있다. 사원의공간배치는신들의위계 (hierarchy) 를반영하고있기때문에사원밖에위치한쿠베라의지위는사원내부에위치한신과비교하여하위신의범주에속한다고할수있다. 8세기중반팔라왕조대부터는청동신상의제작이더욱활발해졌으며, 특히날란다를중심으로한불교의번성과함께다양한청동상들이제작되었다. 이렇게제작된청동신상들은각지에서찾아온승려들에의해동남아시아와동아시아등지로전파되었다. 팔라왕조대에제작된청동상가운데잠발라상을다수찾아볼수있으며, 팔라시대잠발라상의양식적인특징과영향력은중부자바의초기청동쿠베라 ( 잠발라 ) 상에서도살펴볼수있다. 8세기초중부자바는시바신앙을중심으로하는산자야계왕조와불교를기반으로하는샤일랜드라왕조가자리잡고있었다. 산자야계힌두왕조는마겔랑 (Magelang) 을중심으로한디엥고원일대에세력을형성하였고, 샤일랜드라는마겔랑의남쪽부근, 즉보로부두르를중심으로한지역을일대로영향력을행사했던것으로보인다. 선행연구들은두왕조를왕실과귀족층의주요 139

143 신앙을바탕으로힌두교대불교의경쟁관계로인식하였지만, 사실상중부자바의수많은종교사원 ( 짠디 ) 와신상들의후원자들은두종교를엄격히구분했던것같지않다. 중부자바의대표적인힌두사원인프람바난사원군내부에도수십여개의불교짠디가함께공존하고있으며, 종교신상들도상호간다소자유롭게양식을공유한것처럼보인다. 한편 9세기중반에이르러산자야계왕조는세력을확장해나가면서샤일랜드라왕조의영역을흡수하였고, 이시기이후로두종교간의융합은더욱적극적으로이루어졌다. 이러한맥락에서중부자바의쿠베라상은불교의잠발라상과양식적으로는거의구분하기어려울정도로공유된특징을보이고있다. 따라서신상의정체성과관련해서는상이발견된장소인근의짠디를기준으로대략적으로종교를구분하고있긴하지만, 석상이아닌청동상의경우이동이쉽다는특성으로인해발견장소가신상이놓인본래의위치가아닐가능성이있다. 그러나선술한바와같이힌두교와불교로상을구분하는것은당시신앙주체인자바인들에게그다지중요하게여겨지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그러므로본연구에서는쿠베라와잠발라신상을구분하지않고쿠베라로통칭하였다. 현존하는중부자바쿠베라상의개수를토대로다른신상과비교했을때쿠베라는당시중부자바에서매우인기있는신이었음을추정해볼수있다. 또한산자야계왕조가동부자바로이동할때까지인 8세기에서 10세기에걸쳐쿠베라상은지속적으로제작되었으나본격적으로대량생산된것은 9~10세기경으로추정된다. 중부자바의쿠베라상은은 청동 석재와같은다양한재료를기반으로생산되었고, 고정된도상적인특징을제외하고매우변화무쌍한모습을보여준다. 그러나초기팔라의영향을받은잠발라상과는달리 9~10세기로비정되는쿠베라상들은토착적인특성을반영하고있다. 따라서쿠베라상을분석하는것은인도의영향에서점차벗어나지역특유의토착적인양식으로조각이변화하는과정을살펴볼수있다는의미를가진다고할수있다. 그렇다면정치적관점에서중부자바의쿠베라상유행은어떻게설명할수있을까? 본발표문에서는이러한연관관계를살펴보기위해크게세가지관점에서접근하고자한다. 첫번째로는산자야계왕조의정치와종교의관계와그변화양상을분석하고, 두번째, 해당왕조의정치적움직임에수반된사회 경제적인변화가쿠베라에대한신앙과어떠한관련이있는지살펴보고자한다. 마지막으로는앞의두분석을통해서쿠베라에대한신앙주체가누구인지그리고산자야계왕조하에서쿠베라의유행이의미하는바는무엇인지분석해볼것이다. 140

144 먼저산자야계왕조의정치적상황부터살펴보자. 9세기후반집권한산자야계왕인발리퉁 (Balitung, r ) 은중부자바에걸쳐수많은비문들을남긴왕으로알려져있다. 따라서그의재위기를 비문의시대 라고통칭하기도하는데, 발리퉁재위기에각석된비문에서는산자야부터이어지는왕조의계보가기록되어있으며, 마타람 이라는이름으로산자야왕조를지칭하기도하였다. 발리퉁대조성된비문들은중부자바북부의세마랑 (Semarang) 에서족자카르타의남부지역까지걸쳐위치해있는데이를통해마타람왕조의최대통치영역을추정해볼수있다. 특히중부자바의비문들은발리퉁재위기를기점으로그특징이구분되는데주요한차이로는 시마 (Sima) 라고하는특별지역의임명권을왕이독점하게된다는것이다. 시마로임명된지역의주민들은세금을면제받는대신일정기간동안종교의례를위한노동력을제공해야했는데, 이제도를통해마타람왕조는수많은종교사원들과신상, 의례용구등을생산해낼수있었다. 쿠베라상도이러한과정속에서생산된것이라고할수있다. 중부자바의왕들은그들의통제하에있는전영역과노동력에대한직접적인소유권을가지지못했다. 특정지역의토지는전통적으로거주민에의해공동으로소유되었으며, 지역을대표하는자는나이나재력에의해결정되었다. 그렇기때문에시마와같이의례를명목으로부과되는노동력과토지를운용할수있는시스템은마타람의왕들에게매우효율적인정치적수단으로생각되었을것이다. 발리퉁이후시마에대한임명권이왕에의해독점되는것도바로이러한연원에서비롯되었다고할수있다. 시마임명권의독점은단순히발리퉁의개인적인능력에의해만들어진상황은아니며 9세기이후중앙의권위를강화하기위한마타람왕조의지속적인정치적움직임속에서구축된것이다. 따라서중앙의권위가강화되는과정은선대왕부터걸치는연속적인흐름속에서파악해야만한다. 이과정에서주목해야할것은바로 의례 이다. Kulke는고대자바왕조의정치적특징을 의례정치 (ritual policy) 라고설명하기도하였는데, 마타람왕조에서도의례는왕권과의깊은관련성을가지고있다 (1980: 347). 마타람통치하에서는다양한목적을가진의례들이행해졌는데그가운데서대표적인것은시마제도와관련된의례이다. 예를들어, 시마로임명된지역의장인들과지역민들의노동력이동원되어사원이완성되면마타람의왕들은이를기념하기위한의례를베풀었다. 관련비문에서는왕을포함한종교사제, 귀족, 장인집단, 무희, 상인등다양한계층의사람들이의례에참여하였다고기록하고있다. 이와같이대규모의사람들이참여하는의례는단순한유희의목적 141

145 이상으로참여자들에게사회적계급에따른지위와역할을강조하는중요한기능을담당했을것이다. 비문에서는시마로임명된지역을통치하고있던귀족들이왕을대신하여신에게제사를지내고참여자들을위한선물들을준비했다는내용을담고있다. 왕은귀족들의노고를치하하기위해금반지와같은장신구등을선물로주었으며비석을세워그들의공을기록으로남겼다. 의례동안에주고받은선물의목록들은비문안에자세히기록되어있으며 9세기중반이후비문들에서는선물의양이절대적으로증가함을확인할수있다. 또한일부비문들은마타람의왕들이슈라다 (Śrāddha) 의례를통해돌아가신조상의영혼을불러내신상에안치시킨후공경을표하고제사를지냈다는사실을언급하고있다. 의식에사용된상은주로쉬바, 파르바티, 두르가, 가네샤, 비슈누, 스리 ( 락슈미 ) 와같은힌두주요신 (Tri-murti) 들로이를통해마타람의왕들은가족관계가분명히드러나는힌두신들을선호하였던것으로추정된다. 이는왕실의존재를신성한존재로서구별짓기위한하나의정치적방법이었으며, 이와같이조상들의영혼과신을결합시키는의례는현존하는왕을신들의후계자로서합리화시켜주었다 (J.W.Christie 1994: 29). 이러한분석들을통해샤일랜드라를통합한 9세기중반이후로마타람왕조는의례를통해중앙의상징적권위를확보하고, 시마제도를통해서통치영역에걸친노동력과토지를통제함으로써왕실의권력을강화시켜나갔다고할수있다. 그렇다면, 쿠베라의유행은위와같이중앙의권력이확대되어가던마타람의정치적인상황에서어떠한의미를가지는것일까? J.W.Christie(2015:85) 는중부자바의비문에서드러나는가장두드러진주제는 종교 와 부 이며, 특히 9세기이후로부에대한열망이노골적으로드러난다고분석한바있다. 마타람왕조의경제적성장은프람바난을포함한대규모사원군을축조하는데에서도찾아볼수있으며, 중부자바를포함한동남아인근해역에서발굴된수많은금화들은마타람왕조가적극적으로해상무역을시작했음을추정할수있는근거가되고있다. 또한 9세기중반이후중부자바의남쪽으로왕궁을이동한마타람왕조는머라삐에서날아온화산재로축적된비옥한토지를바탕으로관개농업을크게발전시킬수있었다. 이와같이교역과농업생산력의확대로인한경제적성장은마타람사회의신분체계에변화를준것으로보인다. 중부자바의금석문연구자인카스파리스 (1991: 220) 에의하면, A.D. 850년으로비정되는짠디뻬롯 (Perot) 의비문은직위의순서에따라귀족들의계급이기록된가장오래된사례라고주장한바있다. 이후중부자바의비문들에서는유사한직위의명칭이지속적으 142

146 로등장한다. 그러나직위의순서는엄격하게고정되어있지않으며, 때때로위치가변경되어각석되기도하였다. 이를통해카스파리스는마타람왕조의계급질서는고정적이지않았으며, 개인의부 ( 富 ) 에의해변화할수있는것으로주장하기도하였다. 즉 9세기중반이후마타람왕조에서는왕을중심으로한다양한직위가생겨났지만직위간의체계는엄격하게운영되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따라서마타람왕조는경제적능력을바탕으로지위가변동될수있는다소느슨한신분제사회였다고할수있다. 쿠베라에대한신앙이마타람왕조의통치영역인중부자바에서유행한것도바로이러한정치적배경에서비롯된것이라고할수있다. 다시말해부는개인의지위를변화시킬수있는가장중요한수단이었기때문에재보신으로서쿠베라에대한신앙은자연스럽게유행했을것이다. 그렇다면쿠베라상의제작을후원하고신앙했던주체는누구였을까? 비록구체적인문헌적증거는찾을수없지만본연구에서는그주체를마타람왕조의귀족들 ( 지방영주 ) 이었을것이라결론짓고자한다. 이에대한근거는앞서언급한시마제도에서찾아볼수있다. 시마제도가왕의입장에서는중앙의권력을확장시킬수있는주요한정치적수단이었다면, 반대로귀족들의입장에서는중앙과의관계를형성할수있는중요한기회로생각되었을것이다. 그들은자신의통제하에있던영토일부를왕에게자발적으로바치기도하였고, 시마임명의례동안에는수많은선물을준비하여왕에대한충성을보이고자하였다. 귀족들에게중앙과의관계는자신의지위를유지하기위한방법이었고, 의례를통해자신의부를분배하는것은중앙의신임과함께사회적명망을함께얻을수있는주요한정치적기반이었던것이다. 그러므로부에대한갈망과축적은마타람의귀족들에게매우필수적인것이었으며이러한바람이쿠베라에대한유행으로이어진것으로보인다. 한편쿠베라에대한신앙과신앙주체로서귀족과의관계를좀더구체적으로밝히기위해서는힌두신화에등장하는쿠베라의역할에주목해야한다. Cecelia(1999:255) 는인도의대표적인힌두신화인 마하바라타 와 라마야나 가중부자바왕실의중요한정치적지침서역할을했다고지적한바있다. 마타람의대표적인왕실사원인프람바난의중심사원테라스에는 라마야나 의서사부조들이조각되어있으며, 인도네시아의대표적인문화유산인그림자극와양 (Wayang) 의모티프도두신화를기반으로하고있다. 특히마타람말기인 10세기경에는산스크리트어로전해진두신화가자바어로번역되기도하 143

147 는데, 이는두신화가당시가졌던영향력을추정해볼수있는주요한근거이기도하다. 쿠베라는 마하바라타 와 라마야나 에서공통적으로시바의친구이자조력자로등장하며, 수천년간고행을통해재보신으로의자격을얻어히말라야의카일라사 (Kailāsa) 에기쁨과재물로가득찬궁전에서살고있는것으로묘사된다. 여기서주목할만한것이바로쿠베라와시바의관계이다. 마타람왕조의힌두신앙은시바가중심이된신앙으로일부왕들은시바에비견되기도하였다. 또한시바교의신앙체계에서쿠베라는시바를보호하는방위신 (dikpala) 가운데북방의수호신역할을담당하는것으로등장한다. 그러나방위신중에서도특히쿠베라상만이두드러지게조성되었고, 이에대한신앙이각별하게발전하였다는사실은신화속쿠베라의상징과역할이마타람의시대적상황과부합했기때문이었을것이다. 쿠베라신앙의유행은마타람의경제적발전과연관되어있기도하지만, 힌두신화를중심으로구현된마타람의사회적질서와도관련이있다고할수있다. 다시말해힌두신화속에서최고신인시바에대해협조적이자충성스러운조력자로등장하는쿠베라의역할은마타람의왕들에게도분명히인식되었을것이다. 따라서마타람의왕에게는귀족들이쿠베라를신앙하는것이오히려그들의존재와귀족의지위를차별화할수있었던것이다. 힌두판테온의위계상쿠베라의지위는절대시바에비견될수없으며, 쿠베라는시바의존재가선행되어야온전히기능할수있는신이었다. 이와같이신화속신들의지위와역할체계를통해마타람의왕과귀족과의관계를간접적으로드러내준다. 그러므로본연구에서는중부자바에서재보신인쿠베라상이유행한이유에대해다음과같은결론을제시하면서마무리하고자한다. 쿠베라상의유행은중부자바를중심으로세력을확장해나간마타람왕조의정치적상황속에서이해할수있다. 마타람의왕들은의례를통해중앙의권위를확보할수있었고, 이러한통제를바탕으로교역과농업이크게발전하여경제적인호황기를누릴수있게되었다. 이과정속에서새로운계급질서가생겨나기시작하는데, 마타람의사회적질서는엄격하게고정된계급사회가아니었으며다소느슨한구조속에서유지되었다. 마타람사회에서 부 는개인의지위를변화시킬수있는주요한수단이었기때문에재보신으로서쿠베라에대한신앙은자연스럽게발전할수있었던것이다. 특히쿠베라에대한주요신앙계층은마타람의귀족계층으로추정되는데, 이는힌두신화에서등장하는쿠베라의역할과지위를통해뒷받침할수 144

148 있다. 즉, 시바에대한충실한조력자로등장하는쿠베라의역할은마타람의왕들에게그들의존재를경제적으로뒷받침해줄수있는귀족들의역할과유사하다고생각되었을것이다. 귀족들의입장에서재력은중앙과의관계를만들수있는하나의수단으로이는그들이마타람사회에서특권적인직위를유지할수있도록보조하는역할을해주었을것이다. 따라서부에대한추구는재보신에대한쿠베라의신앙으로이어졌을것이고이러한역사적정황속에서쿠베라상이유행하였다고할수있겠다. < 참고문헌 > Alain Daniélou, The myths and gods of India: the classic work on Hindu polytheism from the Princeton Bollingen series Vol. 73, Inner Traditions/Bear & Co. (1966). Barrett Jones, Antoinette M, "Early tenth century Java from the inscriptions: a study of economic, social and administrative conditions in the first quarter of the century" (Verhandelingen van het Koninklijk Instituut voor Taal-, Land-, en Volkenkunde 107, 1984). Bernet kemper, Ancient Indonesian Art (Amsterdam: N.V. Boekhandel antiquariaat en Uitgeverij C. P. J. van der Peet, 1959). Cecelia Levin, The RAMAYANA OF LORO JONGGRANG Indian Antecedents and Javanese Impetus, Institute of Fine Arts New York University Ph.D. Dissertation (1999) De J.G. Casparis, Prasasti Indonesia II: Selected Inscriptions from the 7th to the 9th Century AD (Bandung: Masa Baru, 1956). F. H. Van Naerssen and R. C. De Iongh, The economic and administrative history of Early Indonesia (Leiden: E. J. BRILL, 1978). H. Kulke, Early State formation and Ritual policy in East Java in proceedings, Eighth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Historians of Asian Conference, Kuala Lumpur, (1980). J. Wisseman Christie, "States without cities: Demographic trends in early Java." Indonesia 52 (1991). J. Wisseman Christie, Revisiting Early Mataram in Marijke J. Klokke & Karel R. van Kooij, Fruits of Inspiration studies in honour of Prof. J.G. de Casparis- (Amsterdam: Egbert Forsten Groningen, 2001) John N. Miksic and Goh Geok Yian, Ancient Southeast Asia. (Singapore: Taylor & Francis, 2016). Pauline Lunsingh Scheurleer & Marijke J. Klokke, Ancient Indonesian Bronzes, (Leiden and New York: E.J. Brill, 1988) 145

149 대남국 ( 大南國 ) 효릉 ( 孝陵 ) 의조성과의의 김지혜 ( 서강대 ) 이발표문은학술대회당일에배포하겠습니다. 146

150 분과회의 3 동남아시아정치경제의대내외적변화 1. 이진원 ( 국립외교원 ) 트럼프시대불확실성의증대와동남아시아국가의대응전략 : 남중국해문제를중심으로 2. 정혜영 ( 건국대 ) 중국의대동남아내륙개도국 (CLMV) 경제외교정책 : 해외직접 투자 (OFDI) 전략을중심으로 3. 장준영 ( 한국외대 ) 정치체제의전환과정치변동의사이에서 : 미얀마의결손민주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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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트럼프시대불확실성의증대와동남아시아국가의대응전략 : 남중국해문제를중심으로 이진원 ( 국립외교원 ) 불확실성의시대와남중국해문제 트럼프행정부가지난 1 월출범하였지만, 6 개월이상이지난지금까지도외교정책에일정한원칙을세우고그에따라정책을이행하고자하지않고있다. 트럼프행정부는오히려사안별로자국의이익을극대화하기위하여그때마다다른대응을취할것으로예상된다. 뿐만아니라, 각지역별주요사안에대해서도기존과유사한입장을취할것인지, 혹은향후정책적인변화를염두에두고있는지불확실한것이사실이다. 또한, 트럼프행정부의주요외교안보인사참모진역시변화하였는바, 여전히트럼프정권의외교 안보정책이예측가능하지않다. 이에향후미국의외교 안보정책의모호성과불확실성은지속될것으로보인다. 이처럼, 트럼프정권의등장으로미국이라는강대국의정책지향이변화하면서다수의정책영역에서 초불확실성 의시대가대두되었다는논의가지속되었다. 이같은정책적불확실성은현재까지트럼프행정부가상대적으로중요한이슈로간주하고있는것으로보이는중국, 러시아, 북한정책을제외한타지역에서더심화되어나타난다. 특히, 동남아시아는트럼프행정부의출범으로정책적불확실성이커진지역중하나이다. 오바마정부가 Pivot to Asia 를주창하며동아시아재균형정책을수행하게되면서미국과동남아시아간의협력은크게증대되었다. 특히, 중국이 2000 년대후반부터남중국해문제에관하여공세적인입장을취함에따라, 미 - 필리핀, 미 - 베트남간의관계는크게개선되었다. 특히, 미국과이들국가간의군사적협력도증대된바있는데, 미국과필리핀은합동군사훈련을더욱강화하였으며, 냉전이후철수한기지에미군재배치를고려한바있다. 또한, 미국과베트남의경우에는동아시아재균형정책이후, 군사적협력이과거양국관계를고려하였을때이례적으로증대된바있다. 그중 2015 년공동비전성명 (JVSDR) 의경우남중국해문제에있어서중국에대응하기위해양국간의방산교역확대까지포함하는이례적인상호협력안이라고볼수있다. 35) 그러나트럼프행정부의등장이후사실상오바마행정부가주창하였던동아 35) 김원식 신무기함께개발해중국겨누자 시사저널

153 시아재균형정책의연속성과일관성이담보되지못함에따라, 남중국해문제에대응하는동남아시아국가들의전략역시변화가필요하다는논의들이있다. 하지만트럼프행정부가향후대동남아시아및남중국해정책에큰변화를가할지는아직미지수이다. 미국의대동남아시아정책방향에대해서는아래와같이두가지로생각하여볼수있다. 우선, 첫번째로트럼프행정부가향후동남아시아역내개입을축소하고남중국해문제의해결을위해서제한적리더십을행사할것이라는의견이있다. 이는 America First 라는미국우선주의, 미국의이익을우선시할것이라는거대한기치하에, 미중무역경쟁이가시화되지않는다는전제를바탕으로한다. 경쟁보다오히려향후미국과중국간에무역과경제문제에서의타협이발생한다면, 미국이중국의경제적양보에대한반대급부로서중국의동남아에대한영향을인정하게될것인데, 이때남중국해문제에대해서도미국이중국의헤게모니를인정하게된다는논리다. 36) 다음으로는, 트럼프행정부가 America First 라는기치의적용을경제적이익에국한하지않고, 미국의외교 안보적이익을더우선시할경우를가정하여분석한미국의대남중국해전략이있다. 공격적신현실주의적인시각을기반으로, 미국이미 - 중경쟁이불가피하며이경쟁을미국에게유리한방향으로이끌어나가는것이향후미국의역내헤게모니와이익을유지하는데에필수적인요소로인식하게될경우, 남중국해정책에있어서트럼프행정부역시기존오바마정권의관여정책을완전히폐기하기어려울것이다. 남중국해를중국이증대된자국의힘을투사하려는지역으로판단하여, 미국이남중국해사안의중요성을인식할경우, 트럼프행정부는자국의영향력과이익을지키고중국의역내영향력과힘을봉쇄하기위해서, 남중국해문제에도개입하려는입장을견지할것으로예상된다. 이연구에서는위에서서술한트럼프행정부의등장과정책변경가능성이라는새로운변수가분명존재함에도불구하고, 향후동남아시아국가들은기존에사용해온헤징전략을지속적으로사용할것이며, 이들이연성균형 (Soft-Balancing) 전략을견지하는것이정책적으로유리한선택이될것이라는주장을전개해보고자한다. 동남아시아국가들의헤징전략으로서 Soft-Balancing 이론과정책 이론의발전은기존이론들이설명하지못하나분명히국제정치의현장에서일어나고있는현상들을분석하기위한과정속에서이루어진다. 연성균형 (Soft-Balancing) 역시기존의군사적세력균형이아닌, 다자적, 지역적기구안에서이루어지는국가간협력과경쟁을설명하기위해서발전되었다. 36) 이재현 트럼프당선이동남아에게희소식이아닌 6 가지이유 아산정책연구원이슈브리프 NO

154 Robert Anthony Pape, Stephen G.Brooks, William C.Wohlforth 와같은학자들은연성균형의개념을구성하는데에큰역할을한바있다. Robert A.Pape 는연성균형은 국제제도, 경제적스테이트크래프트, 외교적협정을사용하여세력균형을이루는것 으로정의하고있다. 이개념은기존의경성균형과마찬가지로, 균형을통해국가의안보를지키는것을가장중요한목표로하고있으나, 균형을달성하는수단으로전통적인군사적자산을통해서가아니라, 다자적, 지역적기구안에서비격식적지지 (Informal alignment) 혹은투표혹은거부권 (Veto Power) 을활용한다. 결국연성균형은각국가의군사적인협력이상황적으로어렵거나, 이를통해해결하는것에대한리스크가존재할경우, 구성된지역적, 다자적기구내의협력을통하여자신의안보적이익을극대화하고자하는상황을설명하고자하는이론이다. 동남아시아국가들은 ASEAN 을구성함으로써 (Sub-regionalism) 역내에서위치를공고화하기위해서노력하여왔을뿐만아니라, ASEAN 을중심으로한지역적, 다자적기구를구성하는데에큰역할을해왔다. 특히, ASEAN+CJK(East-Asia regionalism) 를통하여정치적, 경제적으로긴밀한관계를유지하고있는중국, 일본, 한국과의협력을증대시키고, 궁극적으로동아시아지역의주요정상들을포괄하는지역기구를통하여동남아시아의이익을증대시키고자하였다. 또한, 동아시아를넘어아시아 - 태평양지역국가들과의협력을증대시킬수있는아세안중심의다자기구들역시구성한바있다. 그중에서도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 동아시아정상회의 (EAS) 는다양한층위에서, 오랜기간동안지속되고있는주요지역기구라고간주할수있다. 이러한아세안의전략은기존국가들이자국의안보를지키기위해서추구하였던타방의위협에동맹을중심으로대응하는균형 (Balancing) 이나약소국들이강대국이나지배국가와의연대를통하여 (Alignment with the source of danger) 자국의안전을담보받는형태의편승 (Bandwagoning) 37) 과는다르다. 기존의약소국들이선택할수있는전략에는균형이나편승이라는양자선택지밖에없었다고한다면, 아세안의전략은어느한쪽을선택함으로써자국의안보를담보받는형태가아닌, 다양한방식을함께사용함으로써궁극적으로헤징 (Hedging) 을지향하는형태라고볼수있다. 헤징전략은이용가능한모든국내적 국제적인수단을동시에사용하여안보에대한선택지를다양화함으로써궁극적으로국가의안보를극대화하는것이라고볼수있다. 동남아시아국가들은미 - 중간의협력과경쟁이동시에일어나고있는상황속에서자신의전략적인위치를공고화하고안보적이익을극대화하기위해서는, 어떤한국가를선택하여균형또는편승의전략을펴기보다는두강대국들을모두지역적프레임워크에관여시켜 38), 그안에서의협력과경쟁을지속하는것 37) Stephen, Walt. The Origins of Alliances. Ithaca New York 1(1987):87, pp ) Cheng-Chwee Kuk, How Do Weaker States Hedge? Unpacking ASEAN State s Alignment 151

155 이보다헤징에가까운전략이라고볼수있다. 아세안중심의다자프레임워크속에서자국의이익을관철키위해서협력과견제를시도하는것은, 아세안으로하여금미국과중국중어느한국가를선택해야만하는양자택일딜레마 (Side-taking dilemma) 를회피할수있는헤징전략이될수있다. 미국트럼프변수와향후동남아시아국가들의남중국해대응전략분석 궁극적으로미국의대동남아시아전략변화혹은지속여부는여전히불확실하지만, 이미국발불확실성이라는변수에대한동남아시아국가들의대응전략은궁극적으로아세안차원에서는연성균형을활용한헤징전략으로수렴할가능성이높다. 우선, 미국트럼프행정부의대동남아정책이크게약화되어미국외교정책에있어서남중국해가주변적인이슈에머무르게될경우를상정하여향후동남아국가들이취할수있는남중국해전략을살펴보고자한다. 트럼프정부는미중정상회담에서취임초기부터강조해온미국우선주의 (America First) 에기반하여대중국무역수지의해결을위해서중국과의협력을강조했다. 취임초기부터미 - 중간의갈등이부각되는것은위험이따를수있기에, 미 - 중간협력을강조하면서남중국해문제에있어서도상대적으로느슨한태도를견지하여왔다. 특히, 두차례나미해군의 FONOP( 항행의자유작전 ) 를승인하지않았다가 5 월말이되어서야이를승인한바있다. 이처럼미국이전오바마정권의적극적인개입정책을유지하지못하게된다면, 동남아시아국가들은다시냉전이후와같은수준의미국의무관심을극복하고, 증대된중국의군사력에대응하여자국의안보적이익을수호해야만한다. 이경우, 남중국해문제와관련된국가들은중국의공세적이며팽창된군사력등하드파워를마주하여야만한다. 상대적군사력을고려하였을때, 아세안독자적으로중국의공세적인군사행동에대응하기에는분명한한계가있다. 물론베트남등일부남중국해문제와연관된아세안국가들이여전히미국과의우호적관계유지를 39) 통하여군사적인협력을유지 증대하고있지만, 사실미국의직접적인군사적개입없이는아세안국가들이중국의군사적행위를막아내기가여의치않은상황이다. 남중국해영토분쟁에포함되지않는모든아세안국가들의총군비를중국의군비와비교하여보더라도, 아세안국가들의군비는중국의 1/5 에불과하다. 40) 이처럼군사력을투영하여균형을이루지못할경우, 각국가들이취할수있는것은편승, 혹은군사력등전통적인자산을제외한다른외교적인수단을활용하여균형을이루는연성균형전략을사용하는방안이남게된다. 중국이남중국해라는중대한영토적문제를다루면서, 남중국해문제와연관된아세안국가들의신뢰를상실하였고이들국가 Behavior towards China, Journal of Contemporary China 25, no 100(July 3, 2016):502 39) 권홍우 미, 베트남에호위함 1 척도무상제공.. 중견제나선듯 서울경제 ) 이재현 미 - 중 - 동남아의남중국해삼국지 아산정책연구원이슈브리프 NO

156 들이실질적인안보위협을느끼는만큼각국가들이자국이이익을극대화할수있는다른수단이있음에도, 아세안국가들이중국에편승을선택할것이라고예측하기는어렵다. 이에, ARF 와 EAS 등이미구성되어있는지역기구를활용하여아세안국가들은자국이가지고있는외교적인수단들을최대한활용하여이문제에대응하는것이바람직하다. 단, 미국이대동남아정책이약화된다면이에대응하여아세안중심의다자주의적프레임워크에미국의참여역시오바마정권에비해적극적이지않을것으로예상되는바, 최대한많은아세안국가들이통일된목소리를통하여중국을압박하고, 이지역프레임워크에참여하는다른역외행위자 ( 일본, 호주등 ) 들의지지역시꾸준하게강화하는노력이필요하다. 다음으로는, 트럼프행정부역시동남아시아지역의중요성을인식하고, 남중국해문제에대하여적극적으로대응하는경우로일정부분오바마정권의정책을계승하는경우로볼수있다. 아세안은현재미국의 4 대무역국으로서미국으로하여금경제적인중요성을가질뿐만아니라, 남중국해지역은석유와천연가스가풍부하며세계상선들이남중국해의해상무역길을다수이용하고있다는측면에서도가치를가진다. 또한, 안보적측면에있어서도미국은향후역내해상안보확보및역내패권경쟁에서우위를점하기위해서남중국해지역에서중국의통제권을인정할수없다. 이러한미 - 중관계의경쟁적구도하에서미국의이익을고려했을때, 트럼프정권에서도남중국해문제에적극적으로개입할수있는방향역시생각해볼수있다. 미국은실제로, 마이크펜스부통령이인도네시아를방문하였을당시, 미국이동남아시아와의기존협력기조를유지할것이라는점을시사하였으며, 트럼프대통령이 11 월에있을동아시아정상회의 (EAS) 에참석할것임을확인하였다. 41) 이를통하여, 미국의대남중국해전략및아세안중심의다자주의프레임워크에적극적으로참여하는기조에큰변화가없다고한다면, 아세안역시기존의연성균형정책을지속하는것이향후남중국해문제를해결하는데긍정적일것으로사료된다. 미국의군사적힘을이용한전통적인세력균형정책은미국이트럼프정권에서남중국해관여정책을지속한다고하더라도, 미 - 중관계는갈등과협력이반복되는만큼향후에도미국의정책이변화할가능성이있다는점, 미국자체의안보적관심사가타지역으로이동할수있다는점에서온전히의존할수없다는단점이있다. 이에, 아세안은연성균형을통한헤징전략을사용하여, 미국이참여하는아세안중심의지역기구하에서미국과아세안국가들과의정치적 외교적수단을통해대중국연성균형을이룸으로써지역기구내에서외교력을투사하여남중국해문제를자국이유리한방향으로이끌어나가려는중국을견제할수있을것이다. 41) Vannarith Chheang. The US Needs ASEAN in Its New Asia Strategy. The Diplomat, Jun.06,

157 중국의대동남아내륙개도국 (CLMV) 경제외교정책 : 해외직접투자 (OFDI) 전략을중심으로 정혜영 42) Ⅰ. 들어가는말시진핑체제하, 중국은주변국과의경제관계강화를위한경제외교 (Economic Diplomacy) 가더욱부각되었다. 중국의해외직접투자는 중국경제발전 목표실현의임무와함께, 중화제국의꿈 의실현이라는 국가대전략 이행수단으로 경제외교 (Economic Diplomacy) 전략 이라는큰틀하에진행되어온측면이강하다. 본논문은아시아내륙개도국에대한중국의경제외교영향력이원조와연결된투자를통하여어떻게전개되고있는지규명하고자하였다. 특히중국과인접하고있으면서세계투자경쟁구도가형성되고있는 CLMV (Cambodia, Laos, Myanmar, Vietnam) 국가에대한중국의투자는중국의외교정책과긴밀한관련성을지니고있음을규명하였다. 이들국가들은중국과의수교를전후하여정부대정부차원으로진행했던원조 (ODA) 를통하여관계를발전시켰으며, 이는다시강화된투자협력관계로이어졌다. 중국이제시한 일대일로 ( 一帶一路 ) 이러한정책의연장선상에있다. 그러나동아시아내륙개도국공동번영을위하여, 중국의투자는여전히지역내, 해결해야할과제를안고있다. Ⅱ. 중국의경제외교변화와전략중국의경제외교전략의발전과정은마오쩌둥 ( 毛澤東 ) 시기 세계혁명 이라는 대전략 ( 大戰略 ) 기치하, 제3세계개발도상국을포섭하기위해맹목적으로실시한원조 (ODA) 시기를근간으로하고있다. 개혁개방이후에는자국경제발전그자체가경제외교의목적이되어, 제3국과의경제관계폭을넓혀왔다. 후진타오집권이후에는, 경제발전이라는목표와이를달성하는데필요한자원과에너지를확보할필요성때문에경제외교에더욱주력하였다. 시진핑시대의경제외교는 평화적부상 이라는외교전략적목표를실현하고자 경제 를수단으로기존세계통상및금융질서에도전하는주도적움직임을보이고있다. 원조 (ODA) 본연의사전적의미와는다르게, 기존국제사회에서실시된 원 42) 건국대학교중국연구원 154

158 조 (Official Development Aid: ODA) 의전략적내용은과거식민지배국가가피식민지를대상으로자국영향권내편입을위해실시했었던측면이강했다. 냉전시대중국의원조역시, 국가이념을같이하는동지국을지원하기위한수단적결합성격을지녔다. 중국의대외원조는 2002년후진타오집권시기아프리카국가들에게 남-남원조방식 을실시하면서개도국들과우호적협력관계를유지하고발전시키는비약적대외원조의발전을이루었다. 그러나중국원조는순수한개발재원이라기보다는공공차관, 상업차관과수출신용, 합작투자등이함께진행되는구속적, 전략적내용을담고있다는국제사회의비판을받아왔다. 중국은 2012년 8억 8,000만달러의양허성원조를동남아에공여하였다. 이시기중국과우호적인외교관계를지니는캄보디아는미얀마에이어중국최대수원국 ( 중국동남아전체원조 72%) 으로부상하였다.(KIEP, 2017) 중국은개도국해외직접투자 (OFDI) 전략으로특히아시아내륙개도국에괄목할만한투자를진행하고있다. 그런데투자사업의내용이원조로진행된분야와상당부분일치하고있어, 원조와투자가연계되어있다는사실을짐작할수있다. 동남아내륙개도국에대한중국의 OFDI는실행초기제조업투자가중심이되었지만, 1990년대중반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자원개발과에너지투자에집중되었다. 2015년중국상무부의해외직접투자통계에의하면아시아는중국세계투자의 69% 를차지하고있으며, 그중에서도개도국에대한비중 (2014년통계자료에의하면 79% 를차지 ) 이크다. 최근에는중국내포화된산업의해외이전을위한투자와에너지투자가더욱고도화 43) 되고있다.( 정혜영, 2017: 88-91) 중국은그동안일본이중심이된 GMS 44) 사업에간접적으로참여하여아시아내륙개도국에원조와투자를확대하여왔다. 이는 도광양회 ( 韜光養晦 ) 의외교전략과미국의 아세안중시전략 때문이었다. GMS사업 45) 에간접참여하는전략으로중국이얻은바는, 다자협력을통해개발원조공여를확대하였으며, 역내전통적관계에있던국가들과는경제관계를강화하고개발에대한정보및사업기회를획득을하였으며, 중국과이해관계가충돌하는국가들과는협력을용이하게하였다. 중국은소극적투자를진행하는대신, 2009년이후부터는동남아국가들과개별교역확대 (2014년총교역액은 3666억달러 ) 에 43) 개도국시장개척과선점을위한투자움직임과종합적인자원탐사, 즉개발, 운송, 수송물류확보와에너지안보를위한군사기지건설투자가내용적으로진화하고있다. 일대일로 ( 一帶一路 ) 투자구상 (Initiative) 은이를단계별, 전략적으로담고있다. 44) GMS 광역메콩강유역경제협력 (Greater Mekong Subregion Economic Cooperation, 大湄公河次区域经济合作, 이하 GMS 로약칭 ) 45) 1992 년시작된이사업은 5 개국의경제성장규모 (2001 년 년기준 ) 를 1,600 억달러에서 4,470 억달러로 3 배가까이증가시켰다. 155

159 집중해왔다. 투자가아닌교역의수단으로역내국가들과의경제외교관계를 강화해온것이다. < 표 1> CLMV 각국에대한무역상대국중, 중국이차지하는순위와비중대중국수출중국으로부터수입국가순위비중 (%) 순위비중 (%) 미얀마 % % 라오스 % % 베트남 % % 캄보디아 6 5.1% % 자료 : IMF 2016 및 KIEP 자료재인용 위의 < 표1> 는중국과동남아내륙개도국의무역량을보여주는무역순위를나타낸것인데, CLMV 각국의대중국수입은상당히높은비중을차지하고있다. 지역협력메커니즘의역내투자경쟁구도를살펴보자면, 교역액의증가로동남아국가들에대한관계강화에자신감을얻게된중국은, 독자적인개발협력사업을제의하기에이르렀다. 즉 일대일로 ( 一帶一路 ) 와연계한윈난성을중심한지역사업인 란 메이협력정상회의, 광시장족자치구난닝시를중심으로하는 중국 아세안엑스포 가그것이다. 이는기존의 GMS 사업내용을바탕으로하거나그확장사업을근간으로하고있어서일본의 GMS사업과대결경쟁이예상 46) 된다. 그동안 GMS 사업으로개발된중국과일본의 5개경제벨트는, 양국인프라건설의경쟁구도를보여주는데, 북-남방향 의회랑은 중국 에서완성시켰으며, 동-서방향 회랑은 일본 이주도하여완성시켰다. 중국은 비용절감 을일본 47) 은 친환경에너지기술과안전 을강점으로내새워투자의경쟁구도를형성하고있다. Ⅲ. 중국의대 CLMV 국가해외직접투자 (OFDI) 캄보디아 (Cambodia) 는라오스와더불어중국과긴밀한경제관계를유지 해온국가이다. 중국은공식수교이전부터조건없는원조를제공하여, 긴밀한 46) 2016 년 6 월 25 일열린첫 AIIB 연차총회에서결정된 4 건의사업 ( 방글라데시전력시설확장 (1 억 6500 만달러 ), 인도네시아슬럼가정비 (2 억 1650 만달러 ), 파키스탄고속도로건설 (1 억달러 ), 타지키스탄국경도로개선 (2750 만달러 ) 등에대한투자를확정 ) 중 1 건이일본이주도하고있는아시아개발은행 (ADB) 과연계된만큼앞으로도일본의영향력을무시할수없을것이란예측도있다 년부터 2020 년까지 2 억 7300 만달러가투입되는파키스탄고속도로건설사업은기존 ADB 사업에 AIIB 가협조해들어가는형식이다. ( 출처 AIIB 에하토야마영입 중국, 금융영토확장노린다. 중앙일보 ) 방글라데시인프라투자를제외한나머지투자사업 3 건은세계은행 (WB), 아시아개발은행 (ADB),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 과공동으로추진한다. 47) 일본은대부분의인프라원조를아시아지역에집중하고있으며, 역내최대 ODA 인프라투자국은베트남과미얀마이다. 중국은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를중심으로인프라투자를하고있다. 156

160 양국관계를다졌다. 1950년대본격적으로이루어진중국의원조분야는농업관개시설, 경공업설비, 방직 가공 식품분야공장과도로, 교량, 전기통신시설인프라, 학교, 병원, 연구소건축, 수력과화력발전소등이있다. ( 주홍,2015:333) 이후에도중국은캄보디아시엠립공항증축원조, 체육경기장과선수촌건설을도왔으며, 캄보디아가아세안신흥국체육대회를개최하도록돕는다. 1979년에는캄보디아를지원하면서베트남과의국경전쟁을치루기도하였다. 2010년이후캄보디아에최대규모의신규차관을매년승인하여그동안의최대원조국이었던일본의자리를중국이차지하게되었다. 투자는관광, 농업, 봉제업에서금융분야로확대되고있다. 국가 < 표 2> 캄보디아의주요국별 / 산업별외국인투자추이 ( 단위 : US$ 백만 ) 2009년 ~2014년투자년도 2011년 ~2015년업종별투자현황 투자업종 위 : 중국 , 농업 , 위 : 홍콩 제조업 1,341 1,490 1,107 2, 위 : 영국 0 8 2, 위 : 한국 120 1, 인프라 2, , ,130 5위 : 사모아 관광업 위 : 싱가포르 위 : 대만 합계 5,763 2,966 4,962 3,933 4,644 자료 : 캄보디아개발위원회 (Council for Development of Cambodia) 투자승인액기준 Kotra. 재검색일 라오스 (Laos) 1956 년중국은캄보디아에원조했던것처럼조건없는원조 로라오스를지원하고자하였으나, 이후미국의간섭으로양국정부의관계는 더이상발전하지못했다 년미국의지원하, 발발한대라오스정부반란 으로푸마수상은캄보디아로망명을하였는데, 이때중국은푸마라오스정부를 위해재정 경제 군사원조를실시한다. 이후미국이지원하는라오스우익세력 이정권을잡게되자, 중국은라오스항미구국전쟁을지원하기위해, 라오스를 중점원조국으로지정하고군사물자 5000 만여위안 ( 元 ) 과라오스북부도로부 설공사원조를강화한다. 라오스가친베트남 친소정책을실시하면서부터중국 과라오스관계는악화되었으며, 20 여년동안실시했던중국의원조가모두 중단되기도한다.( 주홍, 2015: ) 대원조국은일본이었지만, 중국기업의 그동안, ADB 의활동으로라오스최 대라오스투자 48) 가 1990 년대부터본격 화되면서, 중국과라오스의경제관계는급속히강화되었다 년중국상무 부발표자료에의하면 CLMV 국가중, 중국은라오스에게캄보디아보다많은 ( 투자누계통계 2015 년기준 484,171 만달러 ) 최대투자를실시하여경제적으로 48) 중국기업의주요투자업종은수력발전, 광산개발, 무역서비스업, 건설자재, 종자산업및농업분야, 약품생산분야이다. 157

161 긴밀한관계를강화하고있다. < 표 3> 라오스의주요국별 / 산업별외국인투자 ( 단위 : US$ 백만, 비중 %) 국가 1989년 ~2014년투자누계 1989년 ~2014년업종별투자누계투자액건수투자업종비중투자업종비중 1위 : 중국 5, 수력발전 28% 건설 4% 2위 : 태국 4, 광산업 24% 통신 3% 3위 : 베트남 3, 농업 12% 목재산업 2% 4위 : 한국 서비스업 11% 은행 2% 5위 : 프랑스 산업 & 수공업 8% 무역 1% 호텔요식업 4% 기타 1% 자료 : 라오스투자기획부투자액은누적치자료 ( 월말기준 ) Kotra. 검색일 미얀마 (Myanmar) 는중국과 2000km 이상의국경을공유하고있으며, 역 사적으로긴밀한관계를유지하고있는형제국가이다. 중국은미얀마를최대무 역협력국가및투자목적지로여기고있다 년이후, 중국은미얀마를군 사적으로지원하였으며, 인프라건설을지원하면서그대가로천연자원을수입 하고있다. 투자규모는 2008 년 10 억달러 2010 년 130 억달러로급증하였으 나, 미얀마에출범한신정부가 2012 년이후부터미국 일본과긴밀한관계를 형성하자, 중국의대미얀마투자규모는 10 억달러미만으로급속히줄어드는 추세 49) 를보였다. 그러나여전히미얀마와중국은군사 에너지사업및투자 부분에서긴밀한관계를유지하고있다. < 표 4> 미얀마의주요국별 / 산업별외국인투자 ( 단위 : US$ 백만, 비중 %) 국가 투자액 비중 투자산업 투자액 비중 1위 : 중국 15, 석유 / 가스 19, 위 : 싱가포르 12, 전력 19, 위 : 태국 10, 제조업 6, 위 : 홍콩 7, 교통 / 통신 4, 위 : 한국 3, 부동산개발 2, 위 : 베트남 산업단지개발 위 : 일본 건설 합계 59, 합계 59, 주 : 투자승인기준 ( 월말기준 ) 누적치자료 : 미얀마투자위원회 (MIC) 자료 : KOTRA검색일 베트남 (Vietnam) 중국과베트남은같은사회주의동맹국으로서냉전시대부터긴밀한관계를지속하여왔으며, 베트남의항불과항미전쟁기간에도중국은원조로동맹관계를유지하였다. 1979년중국과베트남사이의국경전쟁으로잠시양국관계가단절된시기도있었지만, 양국은 전면적전략협력동반자관계 라는틀아래, 투자와경제협력을지속적으로유지하면서, 자국의실리 49) 이로인해 2012 년 ~2013 년양국사이의대규모협력사업이중단되기도하였다. ( 김정희 2016:30) 158

162 추구를위한관계를유지하고있다. 양국사이에는남중국해분쟁과베트남인의뿌리깊은 반중정서 라는걸림돌이존재함에도불구하고, 중국은베트남에투자한 114개국중 9번째투자국이며, 베트남 1위무역상대국이다. < 그림 1> 참조. < 그림 1> 베트남의주요국별외국인투자규모비교 주 : 2015 년 12 월 20 일누적등록자본금기준.( 단위 : 억달러, %) 자료 : Vietnam Investment Review(2016 년 2 월 29 일판 ), p.20. 곽성일, 이재호 (2016) p.21 재인용 Ⅳ. 중국의대CLMV국가해외직접투자 (OFDI) 전략과그함의중국은자국이경제개발초기에경험하였던자금부족, 인프라기반취약, 산업기반미흡등의경험을메콩강유역의개도국과공유하고, 상호 win-win 협력의중요성을부각하여원조와투자협력관계를강화하는전략을택하여왔다. 중국과 CLMV국가들은수교를전후하여정부대정부차원으로진행했던원조 (ODA) 를통하여경제외교관계를발전시켰으며, 강화된경제관계는다시무역확대와투자협력으로이어져왔다. 경제외교역할로서의중국투자정책 : 중국의해외직접투자 (OFDI) 는투자협력국과의 관계강화 및 원조 와깊은연계성을지닌다. 중국은 2010년이후 CLMV국가들에대한 OFDI를급격히증가시켰다. 특히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에대한투자량이급증하였다. 이는 2008년부터강화된중국의대동남아원조정책과연관이있을것으로추정되는데, 중국의원조에공공차관, 상업차관과수출신용, 합작투자등이함께진행되는상황에기인하여이들국가에대한투자량도함께증가하였을것으로분석된다. 2014년중국은라오스에대하여최대투자를하였는데, 이는역내중립적외교정책을견지하고있는라오스에대한중국의전략적경제외교정책에기인했을가능성이크다. 개발도상국의원조 (ODA) 와병행된투자 : 중국이 CLMV국가들에게진행하고있는투자협력분야는중국의국영기업부문에서담당하고있는산업분야이다. 이때문에중국의국영기업이원조와투자의주체가되는경우가많아, 중 159

163 국은타국에비해원조와투자를통한대외경제외교정책수행에상대적으로용이한구조를지니고있다. 이러한구조는중국과 CLMV국가가원조를통해외교관계를수립하고이를통해강한정치경제결속력형성이가능한구조를가지고있으며, 투자 (OFDI) 를다시경제외교의수단으로사용하기에용이한전략적구조를지닌것으로분석된다. 새로운지역협의체를통한투자정책과지역거버넌스 : 메콩강유역국개발을위하여, 역내복잡한기존의지역협의체가존재함에도불구하고중국정부는 2004년 중국-아세안엑스포 CAEXPO(China-ASEAN EXPO) 와 2016년 란- 메이정상회의 라는협의체를구성하였다. 동아시아의다양한지역협의체는참여국의이익에따라양자관계혹은다자관계로복잡한이해관계에있는동남아국가들의국제정치와경제외교창구역할을담당하여왔다. 중국이주도하여형성한지역협의체는향후지역거버넌스구도에어떠한영향력을미칠것인가? 의새로운문제는중국의원조와투자정책의향방에따라지역거버넌스주도권경쟁에영향을미칠것으로예상된다. 지역개발과투자주도권확보노력을위한투자패러다임의전환 : 중국의투자는동아시아지역거버넌스구도를중국중심으로재편하고자하는시도가포함되어있다. 중국이중심이된지역협의체구성도 중국중심의거버넌스구도만들기 의한축을형성하고있다. 이러한중국중심의투자패러다임전환은미국과일본의투자경쟁구도를부채질하여, 과도한개발로역내국가들의환경을파괴하거나주민의평화로운삶터를해체하는부정적결과를초래할수있으며메콩강유역개도국의경제주권을침해할가능성이있다. 따라서투자경쟁국과의투자협력문제는중국이이지역진출시, 선결해야할과제일것이다. 160

164 참고문헌 : 권혁재, 최지영 시진핑체제중국경제외교의발전과특징 : ' 중국의꿈 ( 中國夢 )' 을위한교두보의실현 現代中國硏究, 제 16 집 2 호, pp 김송죽 중국국제송유관건설의정치경제 : 중국 - 카자흐스탄송유관 (2006/2009) 건설을중심으로, 세계지역연구논집, Vol.13 No.1.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메콩지역개발전략 :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전략지역심층연구 류석춘, 최진명 메콩강유역개발사업 (GMS) 을통해본중국의대동남아시아지역협력연구, 국제지역연구 제 21 권제 2 호. 서승원, 북풍과태양 : 일본의경제외교와중국 서울 : 고려대학교출판부신의철 내일이더빛나는나라캄보디아 : 캄보디아현장에서본개발협력 (ODA) 과투자 (FDI), 서울 : 라이스메이커원동욱 중국대외원조의특성과메커니즘연구, 比較經濟硏究 제 19 권제 1 호. pp 정혜영 중국과일본의공공외교지역으로서의베트남에대한양국의 ODA 정책연구, 한중사회과학연구 제 12 권제 2 호 중국의 OFDI 정책패러다임변화와전략, 한중사회과학연구 제 15 권제 1 호. 주홍 중국대외원조 60 년, 서울 : 푸른사상. Hao, H China s Trade and Economic Relations with CLMV,in Sotharith, C.(ed.), Development Stratege for CLMV in the Age of Economic Integration, ERIA Research Project Report , Chiba: IDE-JETRO, pp Zhu Zhenming, China s Foreign Economic Cooperation for CLMV: Contact Engineering in CLMV. in Japan and Korea with the Mekong River Basin Countries, edited by Mitsuhiro Kagami, BRC Research Report No.3, Bankok Research Center, IDE-JETRO. 李杰梅 中国在 GMS 国家直接投资的实证研究, 北京 : 北京理工大学出版社. 李燕等 中国云南省与越南西北四省边境贸易研究, 北京 : 中国社会科学出版社 刘鸿武, 黄梅波等著.2013 中国对外援助与国际责任的战略研究, 北京 : 中国社会科学出版社 中國商務部 年度中國對外直接投資統計公報 北京 : 中國統計出版社. 161

165 정치체제의전환과정치변동의사이에서 : 미얀마의결손민주주의 50) 장준영 ( 한국외대 ) Ⅰ. 들어가며 2015년 11월민주총선을통해미얀마군부정권은 54년만에제도적으로종식되었다. 그러나최소주의적관점에서미얀마의제도적민주화는달성되었다고할수있으나비민주적헌법의존재, 허약한시민사회, 장기간지속된군부독재등민주주의의실질적작동을방해하는변종의정치체제가제도적민주화개시이후의특징이다. 나아가미얀마와같이군부독재의기간이긴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민간정부가비용을치르지않고단기간에군부를통제하고우위에서는것은불가능하다. 미얀마의경우위로부터변화 (transformation) 가시작되었기때문에군부에게는 예약된영역 (reserved domain) 51) 이존재한다. 특히유사민간정부 (quasi civilian government, ) 와민간정부는정전협정을통한국민화해와국민통합을최고국정운영과제로선택함에따라국민국가의완성을추진한다. 그러므로국방, 치안, 안보를책임지는군부는그들에게보장된예약된영역으로서정치적영향력을포기하지않는다. 이글은선거민주주의이후자유민주주의를지향하지만민주적요소와비민주적또는반민주적요소와견고하게결합된미얀마민간정부의정치행태를분석하고, 이를바탕으로고착화될수있는정치체제를유형화하는데목적이있다. 시각을좁혀동남아에서선거민주주의를달성한국가가운데자유민주주의로나아가는유일한국가는인도네시아이며, 사회주의와술탄주의를제외한국가는제도적민주주의의변종들로비교정치학자들의주요관심사와일맥상통한체제를유지한다. 주목할점은동남아의정치체제를비롯한민주화이후제도적민주주의를달성한국가들의이행이일시적인현상이아니라불안정한상태로정체되어지속된다는측면에서민주주의와구별되는새로운형태의독 50) 한국동남아학회발표 ( ) 를위한초고입니다. 51) 이용어는군부정권의종식이후에도군부가삼권에영향력을행사할수있는상황을의미하는것으로서군부의특권 (prerogatives), 권위주의의거주지 (enclave) 등으로도통용된다 (Linz and Stepan 1996, 15). 162

166 립적정치체제로고착화된다는것이다. 민주주의의결손이나제체, 또는미성숙의문제로정치발전의문제를지적할수있지만, 이러한요소들이비민주적요소와결합되어있다는차원에서정치엘리트들은변화에저항하거나심지어민주주의로이르는길을막고있다고보아야한다. 민주주의를지향하면서도민주주의에반하는정치제도와정치행태는그사회에내재된권위주의적문화와양식의일면일수도있고, 국민의뜻 이라는이데올로기를대신하여정치적이익을추구하는과정에서발생하는일탈일수도있다. 전자는헌법에보장된시민적자유를국가적특수성의원리로대체하는과정에서발생한비자유적민주주의 (Zakaria 1997) 로설명될수있고, 후자는내각과의회에대한수평적책임을보장하지않는위임민주주의 (O'Donell 1994) 가대표적이다. Ⅱ. 이론적논의 : 착근민주주의와결손민주주의 2016년민간정부출범이후미얀마는 회색지대, 또는 안개지대 에갇혀있다 (Carothers 2002, 9-11; Schedler 2002, 37-39). 그렇다면회색지대와안개지대를형성하는요소와그것들이작동하는방식은어떻게분석될수있는가? 선거민주주의를바탕으로한자유민주주의의이상적단면은어떻게측정될수있는가? 슘페터와달에서부터시작된민주주의의최소원칙으로서선거의필요성은혼합체제 (hybrid regime) 를설명함에있어서도정기적이고경쟁적이며다당제선거민주주의로연장된다 (Dahl 1971; Diamond 2002, 22; Schumpter 2008). 즉 형용사가있는민주주의 (democracy with adjective) 이지만 (Collier and Levitsky 1996), 정기적선거와참여와경쟁의원리가보장되는선거민주주의체제는권위주의정권보다발전된정치체제로규정할수있다. 이제선거에의한체제의성립과연계또는유기적으로결합되는요소들은무엇들인가? 메르켈에따르면, 민주주의가안정화되고실질적으로작동되기위해서는선거체제를바탕으로하는 4가지조건이필요하다고본다. 그에따르면선거체제, 정치적자유, 시민권, 수평적책임성, 실효적통치등을정치체제의하위요소이다. 1과 2는전통적으로민주주의의핵심정의에해당되고, 3과 4는자유주의적법치국가이념의핵심과관련된다. 5는 1과 2를통해선출된입법자들의실질적권력행사여부이다 ( 신진욱 2016, 89). 메르켈은 1이 2-5 등내적착근요소및외적착근요소와결합하여안정적으로작동될때효율적인민주주의가완성될수있다고보며, 이를착근민주주의 (embedded 163

167 democracy) 라고정의한다. 외적착근요소로서사회경제적조건은립셋 (S.M. Lipset) 이주장한대로민주주의와친화력이높은사회경제적발전, 불평등의해소등이고, 강한시민사회가민주주의를유지시키고강화한다는고전적이념도수용한다. 국제와지역적통합인국가성은민주주의를강화하는요인으로평가된다 (Merkel 2004, 44-48). < 그림 1> 착근민주주의의개념 출처 : Merkel(2004), p.37 에서수정함. 한편, 내적착근요소가운데 2-4까지각각요소들의다양한 형용사 에의해기능이침해되거나제대로작동하지않게될경우흔히우리가정의하는민주주의의변종으로변질되는데, 메르켈은이러한체제를결손민주주의 (defective democracy) 라고정의한다. 비자유적민주주의는절차와형식에있어서민주주의의조건을충족하지만헌법에명시된시민적자유가보장되지않고국가기구의견제와균형의원리또한지켜지지않으며, 결정적으로민주적책임성이결여된체제이다 (Zakaria 1997). 배제적민주주의는정치적기본권이제한된경우로서경쟁적권위주의 (competitive authoritarianism) 로명명되기도한다. 그들에따르면, 경쟁적권위주의는민주제도가정치적권위를행사하고획득하는주요수단으로보이지만실제로현재정부가이원칙을위반함으로써민주주의를위한최소한의조건을충족시키지못하는체제를의미한다 (Levitsky and Way 2002, 52). 다음으로권력분립에근거한수평적책임이결핍되면위임민주주의로나아간 164

168 다. 위임민주주의는경쟁적이고공정한선거에의해대표자가선출되는수직적책임성은완성하지만, 권력을위임받은정부가집권후유권자와의회에책임을지지않는일방적이고폐쇄적인정치현상이다 (O Donnell 1994, 56). 국가가심각한정치경제적위기에처해있고, 개혁이성공하지못하여현존정치체계가허약할때, 대의제정부의경험이일천하여권위주의적행태의역사가오래된국가에서위임민주주의가출현할가능성이크다. 정부의무능과무한한힘 (omnipotence) 의결합이위임민주주의를가능케한다. 마지막으로후견민주주의 (domain democracy) 는군부, 대기업, 지주, 다국적기업등현정부에거부권 (veto power) 을가진집단이선출된대표자의실질적인권력을방해하는체제로서남미와동남아사회에서일반적이다 (Merkel 2004, 49). 후견-수혜관계는권력또는재력을가진자가그렇지못한자에게수혜를베풀고그대가로수혜자로부터자발적인보답을받는상호호혜성에바탕을둔수직적불평등관계를의미한다. 그것은비인격적교환관계가아니기때문에상품을매개로하는것은아니고, 무조건적인충성을강요하는일방적인지배-피지배관계도아니다 (Scott 1972). 이구조에서정치체제 (regime) 는후진적으로제도화된정치영역에의해통제되고, 체계 (system) 는정치제도보다정치적당사자들에의해구조화된다. 그러므로정치행위는제도내의절차에의해서가아니라사적관계를맺고있는소수권력엘리트들에의해결정된다 (Jackson and Rosberg 1982, 11-12). 이러한정치행태는상대적으로사회경제적수준이낮은국가에서나타난다 (Jackson and Rosberg 1982, 19-24). 후견주의는기본적으로법치 ( 法治 ) 와정면으로대립관계에있고, 헌법질서를수호하지않는다는측면에서정치적자유또한지켜지지않을가능성이크다. 중남미지역에서나타나는정실주의, 족벌주의, 위계적인특수교환관계의형성등이다원제의방해요인이라는연구도주목할만하다 (O'Donell 1996). 정치권력, 사회경제, 문화적착근성에따른결손민주주의는정치적전환기에나타나는일시적현상이아니라비민주체제가복원되거나현재와같은상황이지속 (equilibrium) 된다는특징이있다 (Merkel 2004, 49). 따라서결손민주주의는자유민주주의의공고화로나아가는길을제시해주기도하지만권위주의체제로회귀하는길이될수도있다 (Puhle 2005, 11). 메르켈은세계의정치체제를그의기준대로분석함에있어서비자유적민주주의 (illiberal democracy) 와위임민주주의 (delegative democracy) 가가장유행하는정치체제로평가했다 (Merkel 2004, 49-50). 나아가그는결손민주주의가나타나는주요요인으로서근대화로향하는경로와수준, 경제적위기, 165

169 사회자본의존재유무, 시민사회의역량, 국민국가의완성, 민주화이전권위주의체제의특성, 정치적이행의형태, 정치제도, 국제및지역적맥락등을제시한다 (Merkel 2004, 52-54). 메르켈의주장은선거민주주의, 경쟁적민주주의, 헌법주의에바탕을둔민주주의가자유민주주의의이상에가장가까운체제라고본다. 더군다나 1990년대민주화의 제 3의물결 이후나타나는 역류 에대한연구가주류를이루는상황에서그의연구는변형된민주주의를포괄하고있다는점에서매우중요하게사료된다. 또한특정국가가결손민주주의로유형화된다면어느분야에서어느정도의결핍에직면해있는지를확인할수있는기준을제공한다. 그러나그의초기주장에서는선거에대한과도한신뢰는비판되어야할것이다. 정기적이고포괄적인선거가실시되지만선거법자체가비민주적이어서선거의결과를예상할수있다면선거민주주의의기본적원칙에위배된다. 후속연구에서그는소수집단, 계급, 여성의선거배제나선거불참유권자의증가를착근민주주의의한위기로본다 (Merkel 2014, 14). 더욱중요한비판은내적착근요소가상호어떻게연결되는가에대한성찰이다. 선거체제를제외한각요소간상관관계, 예를들면정치적자유와제한된시민권간긴장과갈등이나타나는이유와배경, 정치지도자가실효적통치를하고있으나특정집단이나지역이정치참여에서억압을받는배제적민주주의간상호관계등이다. 다시말해네변수가제대로착근되지않을때나타나는네가지유형의민주주의가배타적이기나상호간양비론적시각에입각하지않으며상호중첩된다는측면에주목할필요가있다. 그러므로네변수를통합하거나이를단일변수로설명할수있는각국가나사회의특성이내재할것이다. 그것은정치문화가될수도있고, 민주주의를반대하는특유의제도가될수도있다. 또한외적착근요소로서국제및지역적연계, 사회경제적조건은자유제도주의적시각에따른것으로보이는데, 이는필수조건이라기보다충분조건으로보는것이더욱타당하다. 또는내적착근요소를정치적측면으로국한하지않고정치경제로스펙트럼을확장하면국제및지역적연계라는국가성만이외생변수로남고, 시민사회는시민권과정치적자유로, 사회경제적조건은내적착근요소의새로운영역을차지할수있다. 실제로정치적민주주의체제를선택한국가들가운데시장경제체제를배척한사례는없기때문이다. 이글에서민주주의의변종으로정의되는다양한체제들이갈등하고대립하는것이아니라고본다. 그러한체제들은각정치적상황에대한연구자의시각에따라다르게정의되고있으며, 궁극적으로이들체제가자유민주주의로나아가는경로에서일탈해있다고가정한다. 미얀마가선거체제를포함한다섯 166

170 가지변수간유기적관계를형성함에있어서결손민주주의의양상은어느분야에서어느정도로나타는지를고찰할것이다. 중요한과제는메르켈이나결손민주주의를주장한학자들이규명하지못한결핍요인의근원적배경이나요인의모색이다. 그러한과정은민간정부에서발생한구체적사건을배경으로설명될것이다. Ⅲ. 국민민주주의연합 (NLD) 과결손민주주의 : 수평적통치와실효적통치 1. 제한적수준의위임민주주의 수평적통치와실효적통치의착근이발생하지않는정치체제는위임민주주의와후견민주주의로서제도운영의성공을좌우하는정치문화로설명될수있다. 즉특정한형태의정치문화가구조적요인들과결부하여민주주의공고화의속도를조절할수있다 ( 김웅진외 2005, 124). 이글을쓰는시점에서미얀마에서위임민주주의가출현했다고평가하기에는시기상조이지만그징후는다양하게포착된다. 또한위임민주주의는독자적인형태로출현하기보다호혜적관계에의한인치 ( 人治 ) 중심의후견민주주의에근거한다. 국민의지지로민주주의체제를수립했으나선거는형식적행위로전락하고정권유형은 1인독재체재로퇴보하는형태가위임민주주의의전형인데, 2016 년 3월정권을이양한국민민주주의연합 (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의허약한역량과초헌법적인물로서아웅산수찌 (Aung San Suu Kyi) 의군부를제외한정치권력의독점이이를증명한다. 아웅산수찌가취임한국가고문 (State Counsellor) 직은헌법에명시되지않은총리에준하는역할을대행하지만궁극적으로대통령을비롯한입법부와사법부등주요국가기관과의관계와상호책임성의규정이없는사실상국가최고지도자이다. 대리통치 또는 대통령위의존재 로서아웅산수찌의수평적책임에대한자기면책행위는취임이후적지않게나타난다. 52) 한가지특이할점은아웅산수찌는당소속국회의원이나내각이개인적으로언론인터뷰를비롯하여공개적장소에서자신의의견을피력하는것을제한한다. 이는 2015년총선유세부터시작되었는데, 아웅산수찌는자당소속당원이나국회의원의정치적역량을신뢰하지못하기때문이다 (Khin Maung Win 인터뷰 2017/8/12). NLD 중진국회의원이지역구농민과면담하지못하도록하는내부방침에반발하여탈당한최근사례만보더라도아웅산수찌가 52) 이와관련한구체적사례는장준영 (2017, ) 을참조하라. 167

171 내린함구령은유효하다 (Salai Thant Zin 2017/7/24). 목적은여전히민주주의이지만, 그녀의행위는권위적이다. (Fuller 2015/8/8) 라는언급도그녀가동료들에대한정치적관용이없음을전시한다. 정치평론가시두아웅민 (Sithu Aung Myint 인터뷰 2017/8/12) 은아웅산수찌의행위가권위주의적인이유를다음으로설명한다. 첫째, 민주주의가발전한국가에서장기간생활했기때문에미얀마의상황을제대로이해하지못한다. 나의의도는그를외국인으로보는반대자의의견이아니라그가거주한영국, 일본, 미국등은그가특별하게관찰할것없이민주주의가성숙된국가이다. 그래서그에게민주주의는매우당연한정치체제이지만, 그것을실현하는방식과전략이결여되었다고본다. 둘째, 이와연관하여그가양공에있는지난약 30년간은우리의상황을배우고익힐시간이었으나가택연금으로인해실제로동지들과민주화전략을수립하고시행할기회가없었다. NLD 창당당시그가 삼촌, 아저씨 라고부르는선친 ( 先親 ) 의후배군인들은민주주의를추구하는것이아니라네윈에의해축출된인물로서근본적으로사회주의체제의해체를목적으로했다. 그래서일부군인들은공산주의자들과연대하기도했고, 대학생들은인기없는사회주의사상을다시그들의운동이념으로채택하기도했다. 짧은기간이었으나그는혼자서민주주의를쟁취하기위해투쟁했으나현실에대한낮은이해와민주주의를추구하기에는당원이라고하더라도그들을못믿을정도였다. 전략적사고가부족하다. 영리한정치인은아닌것같다. 나아가아웅산수찌의최측근으로분류되는자들에대한간접적평가도가능하다. 표밍떼잉 (Phyo Min Thein) 양공주주지사는 15년간의투옥생활가운데아웅산수찌에대한존경과불교도수행이자신을성숙하게만들었다고한다 (Raslan 2017/5/16). 아웅산수찌또한불교도동지들처럼가택연금동안위빳뜨나 (wipatthana, vippasana) 수행을했고, 정치적으로도고승 ( 高僧 ) 들의가르침이큰힘이되었다고고백했다 (Aung San Suu Kyi et al. 1997, 160). 불교수행은아웅산수찌가넬슨만델라, 바클라브하벨, 마하트마간디등빈틈없는 (shrewd) 정치인이되기보다성인 ( 聖人 ) 에가까운인물로각인된다 (Lintner 1997, 52-53). 표밍떼잉또한정치인으로서역량을강화하기보다아웅산수찌의전철을밟으며후견주의를강화하는데천착했음을알수있다. 한편, 표밍떼잉주지사는 2017년 7월 9일시민사회와양심수워크숍에서 민주주의시대에는민간-군부관계는존재하지않으므로군부는민간의하위에위치해야한다. 또한군총사령관은국가의전서열상국장 (director general) 급에불과하지만민간-군부관계에서군총사령관을국가지도자급으로격상하면그것은민주주의가아니다. 라고언급했다 (7Days News Journal 168

172 2017/7/17). 2016년틴조 (Htin Kyaw) 대통령은국가의전서열 38명을발표했는데, 군총사령관은연방법원장다음인 8위에해당한다 (Ei Ei Toe Lwin 2017/7/17). 떼잉쎄인 (Thein Sein) 정부에서도군총사령관은연방법원장다음인서열 7 위로 (Thet Aung Min Latt 2015), 국가고문이신설된민간정부와비교하면동일한지위이다. 그럼에도아웅산수찌의최측근이자서열 19위인연방주지사의언급은현정부의군부에대한시각을대변하는것으로이해된다. 군부는대통령실을통해군총사령관과그들에대한모욕이자정전협정을통한평화정착을추구하는군부의노력을평가절하하는것으로서양자간건설적이고장기간관계에적절하지않다고불만을접수했다. 이에저테 (Zaw Htay) 대통령실대변인은군총사령관의지위에대한표밍떼잉주지사의발언은개인적견해이고, 정부와군부간오해에서비롯된것이라고설명했다. 또한군부는정부에게 필요한조치를취해달라. 고요청했다. 정부는표밍떼잉에게징계나경고등처벌에소극적이었고, NLD는경고를취하는것이외에다른조치는없었다. 군부는페이스북 (Facebook) 을통해표밍떼잉주지사의사과를수용했다고발표했으나구체적인사과내용은발표하지않았다 (Facebook: Myanmar Military News 2017/7/17). 위사건은미얀마민간정부가군부를통제하지못함으로써민간우위의원칙을달성되지않았고, 아웅산수찌의최측근의정치행태또한민주적사고와방식에근거하지않음을증명한다. 군부에게예약된영역은국방비할당에서도나타난다. 2010/11년총지출대비국방비는 20.9퍼센트로최고수준에도달한뒤매년감소하여 2017/18년회계연도에는약 14퍼센트인 2조9천15억짯 ( 약 17억5천만달러 ) 로할당되었으나매년가장높은할당율을유지했다 (Hete Naing Zaw 2017/8/9). 시두아웅민 (Sithu Aung Myint 인터뷰 2017/8/12) 은현재군부가취할수있는이익은국방과치안에서군부의배타적역할이고, 이역할을추진하기위한적당한예산의확보가필요하며, 이에대해서는어떤인물이나집단의간섭도묵과하지않을것으로본다. 사실 NLD가 2015년선거에서승리했을때만하더라도아웅산수찌는군부의과오에대한책임대신협력의대상으로인식했으나군부의정치적영향력이유효하고이들에대한통제가불가항력적이라고인식하여이들에대한방임을선택하는듯하다. 아웅산수찌는대중연설에서과거사문제와관련하여 띤봉치 (thin boun che) 라는용어를자주사용하는데, 보복또는복수의의미인 렛싸치 (let sa che) 와대조된다. 한지역언론은 그녀 ( 아웅산수찌 ) 와그녀의정부는군부와대결하기를원치않는다... 그들이민주주의를위해투쟁하는 169

173 동안그들은두렵지않았다. 그러나현재그들은권력을잃는것을두려워한다. 라고썼다 (Lazar 2017/8/16). 1990년총선사례에서도보았듯이군부를자극하거나과거사청산을빌미로군부의내적위기감을조성하는행위는군부쿠데타와같은정치적쇠퇴로귀결될수있다. 그렇기때문에민간정부는군부와불안정한동거를채택하며군부를제외한권력기관에대한선별적위임민주주의로나아가고있다. 2. 군부통치의유산으로서후견민주주의 필자의경험에따르면, 군부통치가지속되는동안양공쉐공다잉 (Shwe Gong Daing) 도로변에위치한 NLD 중앙당사에출입하는일은불가능했다. 더욱흥미로운점은떼잉쎄인정부출범이후 NLD가판매하는기념품을구매하기위해서나한번씩개최되는언론사기자회견에내외신기자들이몰리는등인산인해를이루던격변의장면이 2016년이후에는흔한광경이아니라는것이다. 역설적이게도이전정부에서접근조차쉽지않았던네삐도 (Nay Pyi Taw) 소재연방단결발전당 (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 방문과관련당원과의면접은용이했다. 필자가현지조사를실시하는동안군소정당도외부인과의접촉을경계하지않았다. 앞서언급했듯이아웅산수찌의개인지침을따르는차원에서당직자의수동적행위가나타나는것으로보인다. 그렇지만 NLD의작동방식과권력구도등내적역동성을이해한다면, 민주주의를추구하는 NLD 또한과두제의철칙 ( 鐵則 ) 을벗어나지않는정당임이확인된다. 그것은미얀마정치문화와군부통치의유산으로설명될수있다. NLD는공식적으로중앙집행위원회 (CEC: Central Executive Commission) 을통해의사결정을하지만, 수뇌부는아웅산수찌를비롯한 1989년창당당시네윈 (Ne Win) 으로부터축출당한군부모임인애국원로장교회 (Patriotic Old Comrades League) 53) 출신으로구성된다. 54) 이들은 1988년민주화운동당시군부의유혈진압에큰자극을받았다 (Kyaw Phyo Tha 2017/8/15). 그들에게있어서민주화보다네윈정권의몰락이더욱중요한정치적과제였고, 이합집산체로서 NLD 내부는퇴역장교, 대학생을중심으로한청년당원등으로이원 53) 1988 년민주화운동당시결성되었고, NLD 와자매결연당으로발전했다 년총선에참가하여꺼잉주에서 1 석을획득했다 년정부에의해강제해산됐다. 54) 대표적인인물로는초대의장우아웅쉐 (U Aung Shwe), 우르윙 (U Lwin), 우찌마웅 (U Kyi Maung), 우띤우 (U Tin Oo), 우아웅지 (U Aung Gyi) 등이다. 이들가운데와병으로건강이위독하다고알려진우띤우를제외하고모두사망했다. 170

174 화되었다. 공산당원들이 NLD에가입했다며탈당한아웅지 (Aung Gyi) 사건을제외하고외부로표출된당내갈등은목격되지않았다. 그러나매사에신중한원로장교들에대한청년당원의불만은폭증했고, 아웅산수찌는청년당원과의교감을우선시했다. 원로장교들은아웅산수찌의비폭력주의에대한끊임없는재고를요청했으나받아들여지지않았다. 55) 아웅산수찌와청년당원사이에위치한원로장교들은아웅산수찌가가택연금중일때유일하게당을지켰다. 아웅산수찌와원로장교간갈등이심각했고, 아웅산수찌의독단을제지할인물도없었다 (Kyaw Yin Hlaing 2007, ). 원로장교와달리아웅산수찌의정치행위를적극적으로비판하고대립각을세우는데주저하지않은인물은윈띤 (Win Tin) 이었다. 네윈정권부터정부에비판적인언론인으로활동한그는 NLD를공동으로창당했으나 1989년투옥된뒤 2008년정부의대사면으로출소했다. 투옥되기전부터아웅산수찌가군부에대해보이는유화적인태도를비판하며과거사청산을통해군부통치기간국민이입은피해를보상받아야한다고주장했다. 그는장기간언론인이라는직업을통해다양한국가에서근무했고, 이를통해다양한정치적경험을축적했다. 이에반해아웅산수찌는선친 ( 先親 ) 과그의동료들이군인이었기때문에군대문화가자연스러운배경에서성장한정치인으로서그와식견이다를수밖에없다고한다 (Macaraig 2014/4/21). 역대군부수장또는수뇌부가반복적으로언급해왔던것처럼미얀마군부인땃마도 (Tatmadaw) 의계보는집안의부모 (miba)-자식(thathami) 관계이자, 내부적으로스승 (saya)-제자(dapyei) 관계이다. 아웅산 (Aung San) 으로부터시작된군부의역사는네윈-쏘마웅 (Saw Maung)-딴쉐 (Thanshwe)-민아웅흘라잉 (Min Aung Hlaing) 으로이어지는스승-제자관계를형성하고있다. 아웅산수찌또한군부의울타리안에서정치에입문하고성장한터라군부문화와파벌주의에길들여졌다. NLD 내부사정에정통한다수의분석가들은군부배경이없는윈띤만이아웅산수찌를비판하고당내민주주의도입과정착을추진한유일한인물이며, 2014년그의사망이후당에서그를견제할세력은아무도없다고평가했다 ( 다수의익명분석가인터뷰 2017/8/7-9). 특히 1991년청년당원의대규모탈당사태이후당의기능은마비되었고, 원로장교들이사망함에따라당내권력공백은불가피하다. 2012년보궐선거이후청년당원모집 55) 아웅산수찌의비폭력에대한비난은일부장외학생세력에의해서도제기됐다. 예를들어모떼중 (Moe Thee Zun) 은아웅산수찌에게급진적이고폭력적인방식을통해민주화를달성해줄것을요구하는공개서한을보낸적이있다. 이에대해아웅산수찌지지자들은 모떼중 : 줄이없는연 이라는소책자를발행하여그를권력만꾀하는자로비난했다 (Kyaw Yin Hlaing 2007, ). 171

175 에나서고있으나당의외연확장은성공적이지못하다. 56) 민간정부출범이후 NLD는양공의중앙당과네삐도의임시사무소등이원체제로운영중이다. 전자는윈테인 (Win Htein) 당대변인이, 후자는전대변인인냥윈 (U Nyan Win) 이총괄한다. 통상주중에는냥윈이당내부업무를총괄하고주말에네삐도에서아웅산수찌, 윈민 (Win Myint) 하원의장등주요당직자와비공식정례회담을개최한다. 일부는두전현직대변인사이에파벌갈등이발생하고있다고평가하지만 (Ko Sai 인터뷰 2017/2/6). 신군부정권당시딴쉐의위상처럼 NLD 내아웅산수찌가존재하는한파벌갈등은발생하지않을것이다 (Sithu Aung Myint 인터뷰 2017/8/12). 윈테인과냥윈모두 70-80대고령으로당자체가노쇠하다는것을상징한다. 한편, 2015년 Asian Barometer Survey(ABS) 에따르면미얀마국민들은상호간충돌을피하는것을선호하고 (53%), 그방법으로반 ( 反 ) 다원주의를선호 (95%) 하는것으로나타났다. 또한정치엘리트에게정치권력을위임하게되는상황에서지도자가도덕적이면그들에게복종해야한다는정치적위계질서가높았다 (70%)(Welsh and Huang 2016, 23-24). 그런데, 민주주의의를지지하는응답자는높았으나 (90%, 정작이에대한이해도는 5% 에불과했다 (Welsh and Huang 2016, 28, 30). 또다른조사에도민주주의는자유를의미한다고응답했지만 (53%), 권리와책임에대한이해도가낮다 (The Asia Foundation et. al 2014, 60, 64). 민주적가치와제도의기반이없는미얀마에서경쟁하는두집단으로서 NLD와군부는그들의전통인스승-제자관계, 즉후견-수혜관계에따른정치질서의위계화를유지하고, 그로인해민주적절차는배제의대상이된다. 아웅산수찌또한민주주의의토양이없는집단에서민주주의의절차와방식을도입하여당내혼란을가중시키기보다최소한의자원을동원할필요가있다. 이런의미에서당내에서그를비호한원로장교는훌륭한보호막이었고, 민주주의에무지한대중에게이미그는민주주의의상징이되었다. 법치를주장하는아웅산수찌의이면은후견주의로시미얀마정치문화의특징이라고평가할수있다. 그렇지만, 최소한권위주의를선호하지않으면서다원주의를반대하는국민들의선호는상호충돌하며, 이는미얀마에서일정기간동안후견민주주의가유효할것이라는징후이다. 56) 2012 년보궐선거를앞두고당원들을중심으로아웅산수찌의비민주적행태, 후견주의, 자유로운발언권제한등에대한불만을토로했고, 보궐선거에당선된당원들이자신의측근을주요당직자에임명함으로써당내화합을저해했다고평가했다. 이로인해서남부뻐떼잉 (Pathein) 지역당원 500 명이집단탈당하는사건이벌어졌다. 또한 2017 년현재당원은약 40 만명으로추산되는데, 100 만명을모집계획은불가능해보인다. 172

176 Ⅳ. 군부와결손민주주의 : 시민권과정치적자유 1. 버마족중심의배제적민주주의 2008년헌법제 8장에따르면미얀마시민은인종, 지역, 종교, 직업을막론하고평등한권리를누린다 (MOI 2008, ). 그럼에도불구하고무슬림로힝자족 (Rohingya) 문제와정전협정에있어서군부는민간정부의역할을초월하여그들의 예약된영역 을향유한다. 표밍떼잉주지사사건에대응하는군부의태도에서도확인했듯이그들은최소한국방과치안에있어서정부로부터배타적인자율성을유지한다. 또한경제활동에서배제된이후군부가정치권에남아있어야할최후의보루를여기에서찾는셈이다. 57) 이는군부에대한민간통제가불가능한현재구도를직접적으로보여주는사례이기도하다. 사실아웅산수찌가국외적으로가장많이받는비난이바로로힝자족문제해결에대한소극적인입장이다. 2016년 9월, 유엔총회연설에서그는정전협정을통한국민화해와국민통합을완성하고, 국가내모든공동체의평화, 안정, 발전을위해지속적인해결책을강구할것이라고언급했다. 그연장선으로로힝자족문제에대한국제사회의조사에도적극적으로임할것이라고했다. 종교문제가발화된 2012년이후달라이라마 (Dalai Lama) 를비롯하여노벨평화상수상자들은아웅산수찌의도덕적책임을거론하며적극적인문제해결의지를요청해왔다. 그러나이양희유엔인권보고관이이지역을방문할때마다불교도들의반발을사거나내정간섭이라는비난이있을때마다이에대처하는정부의입장은미온적이었다. 실제로 NLD와정부는역대정부들과마찬가지로로힝자족을공식적으로벵갈리 (Bengali) 라고부르고, 시민권부여기준인 1824년이후방글라데시에서월경 ( 越境 ) 한불법이주민으로서미얀마시민이아니라고본다. 전 UN미얀마대표부뗏띤자뚠 (Daw Thet Thinzar Tun) 대표도국제사회가로힝자족을 여카잉주무슬림공동체 로사용해줄것으로요청했다 (Reuters 2016/6/20). 아웅산수찌도로힝자족은 감정적용어 로정의했고 (Cockett 2016/6/9), 유엔총회당시에도로힝자족이라는용어는끝내사용하지않았다. 국제사회는로힝자족을시민으로인정하고일반국민과동등한자유와권리를보장하는것으로, 유엔은여카잉주무슬림을 세계에서가장박해받는소수 라고정의한다 (Cockett 2016/6/9). 아웅산수찌는국내적지지와더불어미얀마군부정권의학정과만행을국제의제로주목시킴으로써민주화의상징으 57) 군부의경제활동이축소되는내용에대해서는장준영 (2015, 59-65) 을참조하라. 173

177 로지지를받은인물이므로그에게는도덕적책무가따른다. 국제사회의보편주의와달리미얀마내에서는로힝자족에대한배타적의견이지역과종교를막론하고지배적이며, 로힝자족문제가거론되는것자체를인내하지못한다. 띤우 (Tin Oo인터뷰 2014/2/14) NLD 고문을비롯하여, 필자가만난로힝자족이아닌국민은모두이문제를공론화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했다. 그들에따르면, 로힝자족이무슬림이기때문에배제의대상이되어야하는것이아니라소수종족인여카잉족 (Rakhine, Arakan) 의터전이이들에의해잠식된다고본다. 꼬꼬흘라잉 (Ko Ko Hlaing 인터뷰 2013/9/29) 전대통령선임정치자문관은무슬림은이교도와결혼하면반드시이슬람교도가되어야하기때문에여카잉지역의무슬림인구는 10배이상으로늘어났다고지적했다. 58) 아웅산수찌의최측근인띤우부의장의견해처럼그또한미얀마국민의보편적인견해에정면으로반박할수없는상황이다. 59) 국가고문이자여당대표로서국민여론을고려해야하는세속정치인의굴레를벗어날수없지만, 정착그가여카잉문제해결에소극적인입장을보이는이유는군부와의관계라고보는견해가있다. 그예로서떼잉쎄인정부는 2014년여카잉주문제해결을위해 여카잉주행동계획 60) 을발표했으나, 이미 2005년 지역명령 2005/1 호 61) 를통해로힝자족의출산을제한해오고있다. 이법령은민간정부에서도유효하며, 폐기나수정이불가능하다 (Sithu Aung Myint 인터뷰 2017/8/12). 2016년 10월이후마웅도지역을중심으로로힝자족에의한유혈사태가발생함에따라군부가이지역의치안확보를위해그들의영향력을확대한다. 2016년 10월무장괴한의국경지역초소습격사건이후미얀마대통령실은중동테러리스트들과연계된로힝자결속기구 (Rohingya Solidarity Organisation) 의소행으로결론내렸고, 2017년 8월에도여카잉로힝자구세군 (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 을극단적테리리스트들로정의했다 58) 역사에따르면, 로힝자족은 세기까지여카잉지역을실효적으로지배했다. 여카잉족과벵골인은공통적으로니그로이드 (Negroid) 의후손으로, 일부는북부여카잉으로이주하여 8 세기경이지역에내도한아랍상인과결혼하여무슬림이되었고, 또다른일부는남부로이주하여상좌불교도가되었다 (Ardeth Maung Thawnghmung 2014, 328). 그러나이러한역사적사실은미얀마인에게단절의일면이고, 그들에게는정부가주장하는 1824 년과역대정부가자의적으로정한기준에따른다. 59) 이와관련한대표적인사례는 Wade(2012/8/30) 을보라. 60) 원문은다음의사이트를참조하라. 61) 마웅도 (Maungdaw) 와부디다웅 (Budhidaung) 등로힝자족이집중거주하는지역의결혼예정인로힝자족은 2 명이상의자녀를출산할수없고, 결혼신고전에는여성이임신테스트를받아야한다는내용이주를이룬다. Fortify Rights(2014, 24-27) 또는 < 174

178 (Htet Naing Zaw 2017/8/17). 후자는로힝자족의미얀마시민권획득, 교육기회취득, 거주이전의자유등을요구하는것으로알려진다. 국경의치안을유지하기위해군사작전의불가피성을주장하는군부의정책에동조하는것은아웅산수찌가정치에입문하면서한번도꺾지않았던비폭력주의에대한자가당착에도달하는것이다. 치안유지에있어서군부가주도권과결정권을잡는것자체가민간정부가완전히군부를통제하지못했다는사실을반증하기도하지만, 최소한아웅산수찌는무고한로힝자족이나시민들이국가폭력에희생당하지않는방안을모색하는데실패했거나해결의지가없음을전시한다. 떼잉쎄인정부부터추진되어온정전협정에서도군부의우월한지위는확인된다. 로힝자족문제의경우군부의군사작전에대한비난을군부가아닌아웅산수찌를비롯한현정부가직접받지만, 정전협상에서군부는정부, 소수종족대표와함께공식적인협상당사자이다. 그렇기때문에협상자리에서군부는국민통합의실체와연방주의에대한솔직한입장을피력해왔다. 군부정권은소수종족의무장해제와동원해제가우선시되어야하고정부가설계한정치대화에참여해야한다고주장해왔다. 또한모든정치집단은내부적으로문제가있기때문에현재 14개주를 8개주로재편하려는진보적인소수종족지도자들의의견도반대하는입장이었다 (Kyaw Yin Hlaing 2014, 12). 군부정권의시각은지속성을유지한다. 2016년 8월시작된 21세기삥롱회담에서군부는향후 3-5년이내무장해제, 동원해제, 재통합과치안분야개혁등을완성할수있으며, 이에따라소수종족의무조건적인무장해제를요구한다 (GNLM 2016/9/4). 민아웅흘라잉군총사령관은정부와소수종족이지향하는연방제를언급하지않는대신협상의정신에어긋나는소수종족중심의대화가능성에대해경고했다 (Lun Min Mang 2016/8/31). 이에반해소수종족은헌법에연방제 (federalism) 의법제화와이를바탕으로한평등과자치의확립등 8대사항을요구한다. 정부는내전종식을 1차목적으로설정하고각소수종족들의동등한납세, 천연자원의공유, 국가적정체성을형성하는데있어서국민적책임성을강조했다. 시두아웅민 (Sithu Aung Myint 2017/8/12 인터뷰 ) 에따르면, 떼잉쎄인정부시기군부와 USDP의의견은동일했기때문에정전협정에서있어서도입장은동일했다. 이의견을존중하여소수종족의연방주의와 USDP가추구하는연방주의에대해원나마웅르윈 (Wunna Maung Lwin) 전외교부장관 ( 현 USDP 중앙위원회위원, 인터뷰 2017/8/10) 은다음과같이언급했다. 175

179 독립이후미얀마현대사를보면분리주의와게릴라로정부가제대로기능한적이없다. 네윈군부정권당시군사작전은우리가행할수있는최선의방책이었고, 주변국가의위협으로부터국가를수호하기위해서는국내치안유지가가장중요한과제였다. 그래서우리당정강은국민의 3대대의로정한것인데, 이는딴쉐군부정권시절제정된국가이념과동일하다. 그러나우리는역사적교훈에따라국가와주권의수호가무엇보다중요하다고인식하기때문에군부정권과별개로우리의정강을선택한것이다. 군부가군사작전을하는이유는헌법에명시되어있듯이국가와국민에위해가되는집단에대한방어적차원이다. 그리고 2008년헌법에는연방제 (federalism) 정신이포함되어있다. 무장집단들은그들의영토와재정권을희망하지만이는장기적으로봤을때연방이분열되는근원이될것이고, 연방제가가능하지않다는것을의미한다. 우리당이추구하는연방제는먼저무장집단이무장해제를하고정부를비롯한군부와신뢰에바탕을둔협상을통해항구적인평화체제를구축하는것이다. 그것이바로연방제이다. 또한그는전직외교부장관으로서중국국경지역의무장반군에대한개인적 인입장도피력했다. 사실우리나라와중국은형제 (paukphaw) 관계로서불필요한갈등과대립을희망하지않는다. 그런데꼬깡족 (Kokang) 이나와족 (Wa) 등무장반군은국경을넘나들면서지역사회의치안을어지럽히고있다. 이들이중국지역의치안에심각한위기를초래할경우양국간외교문제가발생할수있으므로우리는이들이무장활동을하지못하도록종용한다. 그러나대화로설득하는것은이미영역밖의일이다. 한편, 정부가추진하는정전협상전략에대해전미얀마평화센터 (Myanmar Peace Centre) 아웅나잉우 (Aung Naing Oo 인터뷰 2017/2/16) 은다음과같 이언급했다. 정권이교체되고협상과정이모두바뀌었다. 나도일을그만두었지만떼잉쎄인정부당시여기서일하던전문가들은모두자리를떠났고, 정전협상경험이없는자들이그자리를대체했다. 이전정부에서비공식적, 비정기적으로하던무장집단과의회담도모두폐지되었고, 실무진은오로지윗선의명령만기다린다. 도쑤 ( 아웅산수찌 ) 가정전협정을책임지고있으므로모두그의의사가반영된다고보면되지만, 누구도아웅산수찌에게의견을제시하거나정치대화를포기함으로써무장집단과쌓은신뢰가무너지고있다는사실도솔직히말하지못한다. 결론적으로지난 5년간정전협상의성과는무의미하게되었고, 처음부터정전협정을시작해야하는데내의견으로는불가능하다. 아웅산수찌뿐만아니라정부협상단, 여기서일하는말단직원까지도아무런능력이없다. 민간정부가군부를완전히통제하지못하더라도정전협정에대한입장차이 176

180 를조율할경우군부의군사작전은완화될수있다. 그러나군부의입장은완고하고, 정부는군부를설득할여력이없어보인다. 정전협정과같은치안분야에있어서정부에대한군부의우월의식은헌법을매개로하여전시된다 (Htet Naing Zaw 2017/8/14). 2010년과 2015년두번의총선, 2012년보궐선거에서분쟁지역으로분류된까친주 (Kachin State) 와샨주 (Shan State) 의유권자들은정치참여의기회마저도박탈당했다. 62) 대의민주주의를근본으로하는현대민주주의체제에반하는기본적시민권의제한이다. 정부-군부-무장집단간의견이조율되지않는상황에서, 또한군부를통제해야하는정부의의무를완성하지않는이상아웅산이추구한연방정신의실현은불가능한과제가될것이다. 여기서지적할점은군부가추구해온버마족화 (Burmanization) 는지속성을유지하고있다는것이다. 국민의 3대대의 ( 연방분열방지, 국가결속, 주권영속 ) 를바탕으로한군부의이념은소수종족의정체성과문화를버마족중심으로통합하여국가를재편하는것이다. 정권의주체는아니지만그들이특권 (prerogative) 을행사할수있는치안분야는군부가주창하는버마족화와궤를같이한다. 민간정부의로힝자족문제해결과 21세기삥롱회담 이소기의성과를거두지못하는것은군부의정치적의도를대리수행하는것으로시민권의제한, 배제적민주주의로나아가는길이다. 2. 헌법에의한비자유적민주주의 2008년제정된헌법은그자체로비자유적민주주의로정의될수있을만큼민주주의와친화적이지않다. 2013년 7월정기국회에서 109명으로구성된헌법연구위원회가발족한뒤헌법개정은착수되었다. 시민사회와일부여당의원의지원으로헌법개정의가능성은높아지기도했지만, 민간정부는현행헌법을바탕으로출범했다. 2015년총선이전아웅산수찌는헌법개정은정부출범이후가능한한빠른시일내에헌법개정을완성하겠다고했고, 떼잉쎄인대통령과군부는각직능대표단, 소수종족대표단과협의후결정할것이라고다른입장이었다. 그러나정부출범이후아웅산수찌는후자의견으로입장을바꿈으로써헌법개정에대한초기의의지를꺾거나중장기적전략으로선택했 62) 2010 년총선에서샨주하원 5 개구, 까친주와샨주지방의회각 2 개구에서선거가실시되지않았다 년총선에서도하원 7 개선거구, 지방의회 14 개선거구의선거가취소되었는데, 하원선거구가운데 4 개지역 (Pan Sang, Nar Phang, Pan Waing, Maing La) 은 2010 년에이어또다시미실시지역으로지정되었다 년 4 월보궐선거에서는당초 48 개선거구에서까친주파깐 (Phakant), 모가웅 (Mogaung), 버모 (Bhamo) 등 3 개하원지역구에대한선거를무기한연기하여 45 개구에서만선거가실시되었다. 177

181 다 (Sithu Aung Myint 인터뷰 2017/8/12). 시두아웅민은이를아웅산수찌의큰실책이라고지적한다. 그는여당이된후야당을비롯하여특히군부와같은이익집단으로부터적극적인견제를받고, 국정수행과이에대한책임의강도가높기때문에개헌에집중할수없다고본다. USDP도개헌에대한당초원칙을지키는것으로확인되는데, 원나마웅르윈전장관은기본적으로개헌에는동의하지만정전협정이완료되고군부를포함한각집단의의견을청취한뒤개정에착수하는것을원칙으로한다고말했다 ( 인터뷰 2017/8/10). 국민통합당 (NUP: National Unity Party) 뚠이 (Tun Yi 인터뷰 2017/8/8) 합동사무총장도헌법이시행된지 10년가까이되었고의회에서개헌에대한논의조차되지않았으며, 특히헌법개정을시도할경우군부의거센저항을예상한다. 2016년 1월정기국회당시 NLD 소속의원을중심으로헌법제 59조 (f) 의일시적효력정지를추진했을때군부출신국회의원의거센반발을그사례로들었다. 군부의헌법수호의지는매년국군의날 (3.27) 군총사령관의연설이나정전협상개회식과같은국정행사의주요장면에서수시로확인된다. 특히표민떼잉주지사의군부폄하발언, 2017년초틴조대통령의사임설을군부가유포했다는소문, 헌법개정을주도했던 NLD 소속의꼬니 (Ko Ni) 변호사암살과관련한군부의연루설등군부의부정적인이미지가확산되었다. 국방대학 (National Defence College) 소속의아웅민우 (Aung Myint Oo) 대령은 군부가정치에서물러나는것은불가능하며... 만약정부가군부를정치에서제거하고자한다면정부스스로해결해야만한다. 고했고, 정치분석가는 2008년헌법의본질에따르면군부가미얀마정치의운명을결정할것이다. 군부가관대함을보여줄때미얀마는평화를찾을수있을것이다. 라고했다 (Htet Naing Zaw 2017/8/14). 또한언론사와의대담에서한정치분석가는 군부는그들의이미지를향상시키려고노력중이다. 그러나내전은지속되고있고, 민간정치인에대한군부의뿌리깊은불신은여전하다. 고본다 (The Irrawaddy 2017/7/25). 이러한군부의이중적인태도는그들이정치를떠날수없는집단으로스스로를재무장하는기제가된다. 지난 50년간정치의주역으로서군림한군부였지만어떠한정치경제적성과를달성하지못했고그결과로정권을이양했으나, 조건부종속 (subordination) 을유지하며그들에게할당된지분을적극적으로행사한다. 헌법개정을위해의회정족수 75% 이상의동의를구해야하는조항은군부의정치개입을지속시킬수있는최적의보호막이고, 그런이유로헌법은군부의정치적역할을결정할수있는유일한도구이다. 정전협정이 178

182 완료되거나종교문제가해결된다고하더라도민간정치인에대한불신이해소 되지않는이상군부는민간에의한통제를수용하지않을가능성이크다. Ⅴ. 결론 - 잘못된관행이되풀이되어고착화됨으로써민주주의의분질을왜곡할가능성이큼. 역사적으로증명된미얀마정치체제의특수형태로나아감. 예를들어아웅산수찌가이끄는틴조정부. 민주주의의의미등 - 군부통치가현실화될경우선거체제의퇴행 ( 쇠퇴 ) 가발생할수있음. - 군부의완전한병영복귀와정치에서의배제 민간에의한군부통제현실화필요 - 정부차원에서후견주의와수평적책임의청산필요 시민문화 (civic culture) 의학습필요 < 그림 2> 미얀마에서결손민주주의의분야와구도 군부우위 군부의개입 여당우위 출처 : 필자작성. < 그림 3> 미얀마에서결손민주주의형성의주체와양상 출처 : 필자작성. 179

183 참고문헌 1. 한글및영어문헌 김웅진, 김지희, 김형기, 김형철, 안승국, 홍재우 비교민주주의: 분석모형과측정지표. 서울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신진욱 헌법국가에착근된민주주의 : 독일기본법의형성과체계를중심으로. 한독사회과학논총. 26(3) 장준영 미얀마신정부하군부의역할변화 : 통치자에서수호자로. 아시아연구. 18(3) 하프와공작새 : 미얀마현대정치 70년사. 서울 : 눌민. Ardeth Maung Thawnghmung Contending Approaches to Communal Violence in Rakhine State. Gravers, Mikael and Flemming Ytzen. eds. Burma/ Myanmar: Where Now?. Copenhagen: NIAS Press. Aung San Suu Kyi and Alan Clements, U Kyi Maung, and U Tin U. 1997[2008]. The Voice of Hope: Conversations with Alan Clements with Contributions by U Kyi Maung and U Tin U. London: Penguin Books. Carothers, Thomas The End of the Transition Paradigm. Journal of Democracy. 13(1) Collier, David and Steven Levitsky Democracy with Adjectives: Conceptual Innovation in Comparative Research. Kellogg Institute Working Paper # Diamond, Larry Thinking of Hybrid Regime. Journal of Democracy. 13(2) Jackson, Robert H and Carl G. Rosberg Personal Rule in Black Africa. Berkeley: University of Berkeley Press. Kyaw Yin Hlaing Aung San Suu Kyi of Myanmar: A Review of the Lady's Biographies. Contemporary Southeast Asia. 29(2) Introduction to the Perspectives and Politics of the National Reconciliation Process in Myanmar. Kyaw Yin Hlaing. ed. Prisms on the Golden Pagoda: Perspectives on National Reconciliation in Myanmar. Singapore: NUS Press. Levitsky, Steven and Lucan A. Way The Rise of Competitive Authoritarianism. Journal of Democracy. 13(2) Litner, Bertil Burma's Voice of Democracy.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60(37). Linz, Juan and Alfred Stepan Toward Consolidated Democracies. Journal of Democracy. 7(2) Merkel, Wolfgang Embedded and Defective Democracies. Democratization. 11(5) Is There a Crisis of Democracy. Democratic Theory.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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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분과회의 4 개별발표 : 동남아시아사회의 이동성과다양성 1. 백용훈 ( 서강대 ) 베트남생명보험시장의발달 : 문화적배태성 (embeddedness) 을중심으로 2. 박광우 ( 부산외대 ) 중심부 와 주변부 사이에서 : 인도네시아이주민의이슬람공간의구축과활용 3. 이지혁 ( 서울대 ) 민주주의확산과이슬람화의불협화음 : 자카르타주지사 아혹 (Ahok) 의쿠란인용사건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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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베트남생명보험시장의발달 : 문화적배태성 (embeddedness) 중심으로 63) 백용훈 ( 서강대학교 ) 1. 서론 본연구의목적은베트남에서생명보험시장이형성되고발전해온과정을전통문화적인측면에서탐구하는것이다. 거시경제사회학에서장 (field) 에대한이론은해당범위내에있는행위자들간의상호작용에대한맥락을파악하는데도움을준다. 시장 (market) 을하나의장으로간주한다면, 생명보험시장내에있는행위자들, 즉국가, 기업경영자, 판매대리인, 구매자 ( 보험가입자 ), 보험수익자등이들간에이루어지는거래를통한상호작용은문화적인규범들을이용하는게임 (games) 으로볼수있다. 따라서장이론은게임이진행되는양상및환경을역사및문화적인관점을통해규명하는데있어서풍부한설명을제공해줄수있다 (Bourdieu 1984; DiMaggio and Powell 1991; Bourdieu and Qacquant 1992; Fligstein 1996; Martin 2003). 베트남재정부 (Ministry of Finance) 보험감독관리국 (Insurance Supervisory Authority) 자료에따르면, 베트남생명보험시장은해마다꾸준한성장세를보여주고있다. 2016년말기준으로베트남에서는 17개의생명보험사가영업을하고있다. 64) 2016년한해동안베트남에서영업중인생명보험사들의총사업소득 (total life insurance revenue) 은약 50조동 (VND)( 약 24억달러 (US$)) 으로 2015년에비해약 30% 증가하였고, 생명보험료 (life insurance premium) 의총합계는약 500억동 (VND)( 약 240만달러 (US$)) 으로 2015년에비해 26.3% 증가한것으로추정된다. 이가운데 2016년신규가입자의생명보험료는약 170억동 ( 약 81만달러 ) 으로 2015년에비해 26.3% 63) 진행중인연구입니다. 64) 2016 년기준시장점유율 1 위부터 5 위까지의보험사는푸르덴셜 (Prudential Life) 27.1%, 바오비엣 (Bao Viet Life) 26.0%, 매뉴라이프 (Manulife) 11.9%, AIA 10.3%, 그리고다이치 (Dai-ichi) 10.2% 이다. 그이외에도처브 (Chubb Life), 제너랄리 (Generali), 한화 (Hanwha Life), 선라이프 (Sun Life) 등이있다. 185

189 증가한것으로추정된다. 65) 베트남보험협회 (Vietnam Insurance Association) 에따르면, 이러한지표는지난 5년동안가장높은성장률을기록한것으로나타났다. 또한, 2017년 1사분기를기준으로보험설계사의수는 64,511명으로서지난해같은기간대비 41.5% 증가한것으로나타났다. 현재베트남생명보험시장에서활동하고있는보험설계사의수는약 50만명으로서지난해에비해 18.6%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상과같은베트남생명보험시장의성장세에도불구하고인구의약 90% 는여전히생명보험상품을구매하지않고있다. 이에따라신흥국가인베트남에주목하는국내외기업들은향후생명보험시장의성장에대한기대감을가지고있다. 66) 본연구는이상과같은시장에대한사회학적관심과신흥지역시장으로서베트남의상황을바탕으로베트남생명보험시장의등장과발전을역사및문화적인측면에서파악해보고자한다. 주요연구아이디어는다음과같다. 생명보험회사와상품이베트남역사상최초로등장했을때베트남사람들은이를어떻게받아들였는가? 인간이라면누구나경험할수밖에없는죽음의당면성에대하여자신혹은자신의가족의생명을담보로시장에서거래되는생명보험상품을베트남인들은어떻게인식했는가? 그리고이러한인식이경제적인거래에어떠한영향을주었고이러한결과는문화적인가치와어떠한상호연관성을지니는가? 2. 이론적논의 시장에대한경제사회학적접근은크게거시적접근과미시적접근으로구분된다. 거시적접근의주요관심은시장이라는제도혹은장 (field) 이어떻게형성되는지, 여기에영향을주는요소는무엇인지, 그리고시장이라는것이다른사회영역과어떠한관련이있는지에대한것이다. 따라서거시적접근은정치, 문화, 법등이시장에어떠한영향을주었는지를규명하는데중점을둔다. 반면에미시적접근의주요관심은시장내에서이루어지는행위자들의사회적관계, 즉네트워크의특성이경제적인성과로어떻게나타나는가에관한것 65) 출처 : 베트남재정부보험감독관리국 (Cục Quản Lý Giảm Sát Bảo Hiểm, Bộ Tài Chính). Tổng quan thị trường bảo hiểm năm (2017/01/24), portal/cqlgsbh/r/m/tttt/sltkctt/sltkctt_chitiet?ddocname=mofucm098072&_afrloop= #!%40%40%3f_afrloop%3d %26ddocname%3dmofucm098072%26_adf.ctrl-state%3d 18gc8o5q4_34 ( 검색일 : 2017/06/28). 66) Forbes Vietnam. Bảo hiểm nhận thọ: Miếng ngon không dễ. (2016/10/17), l ( 검색일 : 2017/06/28). 186

190 이다. 미시적접근은특정시장내사회적관계가어떠한구조적특성하에위치하고있는지그리고그러한구조적특성이개인의행위에어떠한영향을주는지를규명하고자한다. 결국경제사회학적관점에서볼때시장은사회적으로구성된실체이고시장에서이루어지는메커니즘즉, 가격, 생산량, 매출액등의성과와같은변수들은사회제도, 관계, 그리고문화의복합적인구조와양상속에서나타나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특히, 생명보험은발생하지않을수있는미래의손실에대한금전적인보상을목적으로생명보험사와개인간에이루어지는계약, 약속으로이해할수있다. 따라서보험거래는미래의불확실성에대한보상을담보로이루어지는계약적인요소가담겨있기때문에약속, 관습, 믿음과관련된것으로이해할수있다. 본연구는거시경제사회학적관점을기반으로시장이상호원자화된, 독립적인행위자들의이익추구와자원을통해성립된다기보다해당사회의문화적특성에의해구성된다는점을규명하고자한다. 특히, 사회적규범, 가치, 그리고공유된의미체계로서문화가생명보험시장에어떠한영향을주는가를설명하는데중점을두고자한다. 즉, 사회적규범등의문화가경제적행위를촉진혹은저하시키고, 동기를부여하고, 그리고통제하는맥락을살펴봄으로써시장의탄생및변화과정을이해할수있다. 3. 연구질문, 연구방법및자료, 분석틀 본연구의주요연구질문은다음과같다. 베트남의경우생명보험시장의등장은어떠한특징을지니고있는가? 베트남에서생명보험시장의성장과발전은전통문화적인특성과어떠한상호작용속에서이루어졌는가? 베트남에서현재인기있는생명보험상품은무엇이고그것은베트남인들의문화적인규범과어떠한연관성을지니는가? 이상과같은연구질문들을토대로본연구는경제사회학적인관점에서베트남인들이가지고있는생명에대한가치, 죽음에대한인식, 그리고관련된전통및문화적인규범이경제적인거래혹은경제적인장 (field) 에어떠한영향을줄수있는가에대하여파악해보고자한다. 본연구를위한자료는베트남재정부보험감독관리국및베트남보험협회의통계자료및보고서, 베트남에서영업중인생명보험사홈페이지에소개되어있는생명보험정책및상품약관, 베트남에서영업중인 B사와 H사에서근무하고있는익명의연구참여자들 ( 관리자급 ) 과의인터뷰내용, 베트남인들의죽 187

191 음과생명에대한가치및각종의례등에대한문헌들그리고생명보험에가입한베트남인들과의인터뷰자료등이다. 본연구는생명보험시장에서의도덕 (moral) 적양상에대한함의를제공할것이다. 다시말해서, 이글은생명과죽음등에대한문화적가치가그것과관련된특정시장이형성되고발전하는데어떠한영향을주는지그리고그러한특징들이국가별시장의독특성을형성하는데어떠한영향을주는가에대하여규명해보고자한다. 베트남생명보험시장의특성을전통및문화적인맥락에서이해하기위하여구성한본연구의분석틀은아래의 < 그림 1> 과같다. 그림 1. 논문의분석틀 : 문화 + 행위자들간의상호작용을중심으로 출처 : 필자작성. 4. 논의 생명보험상품은크게두가지로구분된다. 하나는보장성보험이고다른하나는저축성보험이다. 보장성보험은다시사망보험과생사혼합보험으로분류된다. 사망보험은가입자가계약에명시된보장기간내에사망하거나장애를가지게될때본인또는유가족이혜택을받을수있다. 생사혼합보험은사망보험의보장기능과저축성보험의저축기능을결합시킨상품이다. 일반적으로볼때사망보험이저축성보험에비해보험수익률이상대적으로높다. 188

192 1) 전통문화 : 생명에대한가치와죽음에대한인식, 종교적특성 현재베트남에서는보장성보험상품보다는저축성보험상품에대한수요와인기가높다. 베트남에서보험산업발전을방해하는가장큰장애중하나는생명보험에대한대중의인식이다. 베트남인들은보험상품을구매하는데있어서불길한조짐, 좋지않은일에대한생각을금기 (taboo) 시하는등전통문화적인측면에대한이해를필요로한다. 2) 베트남의교육열 베트남보험시장에서관찰되는주요특징들가운데하나는생명보험상품가운데교육보험에대한수요와인기가높다는점이다. 최근베트남에서는부모가아이들에게좋은미래환경을제공하고자하는부모의역할에대한인식과재정적인준비에대한관심이높다. 호치민시에서거주하고있는맞벌이부부의경우아이들의미래를위한투자로서생명보험에가입하는경우를관찰할수있다. 5. 추가연구주제 1) 사회구조로서의생명보험시장 : 네트워크, 사회적관계분석 ( 보험모집인과 생명보험구매자의관계 ) 2) 북부, 중부, 남부의보험시장발달의차이 : 하노이, 다낭, 호치민시에서생 명보험사들의영업방식, 판매망, 성과의차이 3) 문화적혼성성 : 베트남의전통문화 + 시장경제 + 생명보험시장의등장 => 사회주의시장경제에서보험에대한대중인식의변화과정 189

193 중심부 와 주변부 사이에서 : 인도네시아이주민의이슬람공간의구축과활용 67) 박광우 ( 부산외대 ) 12시가조금넘은시간, 학교를나와근처에위치한이슬람부산성원으로향했다. 차로 5분정도달려도착한그곳은아파트와주택가사이에위치해있었으며커다란돔형지붕과높이솟은첨탑은이곳이이슬람사원이란것을한눈에알수있게해주는이국적인풍경이었다. 1시예배가시작되기까지시간이남아사원내부를돌아보았다. 1층은사무실, 게스트룸, 여자무슬림실, 화장실로이루어져있으며 2층예배당입구에는 1980년사원건립당시에많은기여를한리비아출신팔락박사의업적을기리는머릿돌이있었다. 예배당에들어서자터키정부의지원으로최근작업을마친이슬람색채가강하게느껴지는문양들이눈에들어왔다. 다시아래층으로내려가로비에서잠시시간을보내고있으니예배시간에맞춰우두 (Wudu) 68) 를마친사람들이하나둘들어온다. [ 중략 ] 오늘예배에는약 150명정도의무슬림들이참석하였고그중인도네시아인이라고짐작되는사람은절반이넘었다. ( 필드노트, 2017년 7월 28일금요일 ) 부산에인도네시아사원많아요. 인도네시아무슬림단체가있는데거기서주도해서우리사원들을몇개세웠어요. 신평, 사상, 녹산그리고부산외곽에몇개더있다고들었는데 [ 중략 ] 저는사상하고신평, 두군데를가봤어요. 처음사상에있는인도네시아사원을갔을때사원이라는표시가없어서찾기가너무힘들었어요. 보통한국의상가건물있죠? 거기 4층에있었는데아무리봐도간판이없어서 [ 중략 ] 신평에있는사원도비슷해요그냥상가건물 3층에있어요. 그런데 1층에서그뭐죠... 아돼지국밥을팔아서좀그래요 [ 중략 ] 이사원들을유지하려면월세, 전기세, 물세를내야하는데사실인도네시아사람들의기부금만으로는힘들어요. ( 인도네시아인 A씨와의인터뷰, 2017년 7월 24일 ) 위의짧은두글은부산지역의인도네시아무슬림들이종교생활을영위하고 67) 이글은 2017 년동남아학회연례학술대회발표를위해작성된글이며, 본격적으로조사를시작하기전에연구에대한구상을간략하게작성한글이기에인용을삼가시기바랍니다. 연구구상에관련한글이라대단히거친구성에양해바랍니다. 68) 무슬림들이예배를드리기전에신체의특정부위를씻는행위 190

194 있는공간의상반된특성을함축적으로보여준다. 좀더명확히말하면부산이슬람성원 69) 은종교공간으로서 중심부 이며부산외곽에위치한인도네시아사원들은 주변부 로나눌수있다. 그구분과정에서본연구는세가지특성에주목한다. 첫째, 안정성 이다. 부산이슬람성원은한국사회에서무슬림공동체의중심적역할을수행하고있는한국이슬람중앙회 (Korean Muslim Federation) 의지원과부산 영남지역의최대이슬람사원으로오랜시간자리매김한명성을통해각국의무슬림신자들의지속적방문으로안정성을확보하고있다. 반면에최근사상, 신평, 녹산과같은부산변두리지역에설립된인도네시아사원들은 불안정성 을내포하고있다. 인도네시아사원의건립은인도네시아무슬림공동체 (Komunitas Muslim Indonesia) 70) 의지원을바탕으로이루어졌다. 그러나이단체는한국이슬람중앙회에속하지않고본국의이슬람기관과도관계가없으며오로지한국에이주해온인도네시아무슬림에의해운영되고있는공동체이다 ( 유일상, 2011). 때문에한국과인도네시아양국에뿌리내리고있는이슬람종교단체의지원을받기가어려우며그들스스로사원운영에대한부담을갖고있다. 특히한국이슬람중앙회소속으로공간을지원받아운영하는부산이슬람성원과는달리인도네시아사원들은상가건물한층에세를얻어정기적으로월세를납부해야한다. 이러한재정적부담외에도한국에한시적으로머무르는외국인으로서의신분상한계점으로인해공동체와사원의지속성을확보하는데어려움이있으며이는인도네시아사원들의 불안정성 을증대시키는요인이된다. 둘째, 가시성 이다. 부산이슬람성원은지하철 1호선이지나가는큰도로변에위치하고있으며하늘높이솟아있는첨탑과둥근아치형의지붕은주변의일상적인풍경에서이질감을만들어낸다. 도시공간에서확인할수있는외연적특수성은곧사람들의호기심으로이어졌고부산이슬람성원은점차부산내에서이국적정취를만끽할수있는명소로알려지게되었다. 사원을방문한사람들중일부는사원의외관뿐만아니라꽃무늬에기초한아라베스크문양과스테인드글라스로꾸며진내부의사진을찍어서본인의 SNS에올리고, 69) 부산이슬람성원은한국이슬람중앙회의지부중하나이며서울중앙성원을제외하고한국에서가장오래된이슬람사원이다. 인근에한국이슬람중앙회소속의지원들이생기기전까지부산, 영남지역의무슬림들이모이는대표적인장소였으며현재도금요일정오합동예배참석자수가 150 명에서 200 명에이를정도로규모가큰성원이다. 70) 인도네시아무슬림공동체는한국의유일한인도네시아이슬람관련단체이며, 한국의모든인도네시아인중심의이슬람사원은이단체에속해있다. 191

195 방문중에익힌사원에서지켜야할예절에대한당부도잊지않는다. 또한이곳에서는지역주민들을위한이슬람특강이나무료영어및아랍어강좌를운영하기도한다. 즉부산이슬람성원은도시공간속 가시성 을바탕으로누구에게나열린공간인 개방성 을만들어내며한국사회에 이슬람 을당당히드러내고있는것이다. 이와는대조적으로인도네시아사원들은 비가시성 을보인다. 앞서언급하였듯이인도네시아사원들은도시공간에서흔히발견할수있는상가건물의일부분을활용하고있다. 때문에건물에위치하고있는공간이이슬람사원이라고짐작할수있는외형상의특징은두드러지지않는다. 이런 비가시성 은인도네시아사원의 폐쇄성 을강화시킨다. 이는외부인의침입으로부터그들을보호함과동시에주류사회와분리된 캡슐 과도같은공동체를만들고그들의고유한문화를유지하면서수용국사회의한부분으로성장해나간다 (Portes, 1995; Werber, 1995). 이러한맥락에서, 인도네시아이주민들은그들만의사원을설립하는것을한국사회에 인도네시아 를재창조하는행위로여기며 ( 박광우, 2016), 표면적으로그들의사원이국적과인종을초월하여모든무슬림에게개방되고있다고강조하지만, 다수의인도네시아사람들위주로진행되는예배와행정은다른국적의무슬림이주자들의접근을어렵게만들고있다 ( 참고엄한진, 2010). 이는그들스스로를한국사회에드러내기보다는인도네시아무슬림이라는이름하에고립을선택하고있다. 셋째, 신성성 이다. 부산이슬람성원은이슬람이라는종교그자체를위해지어진건물이며건물의모든공간은무슬림의활동을위하여사용되고있다. 또한아파트와주택가사이에위치하고있어음식점, 유흥업소등세속화된여러시설들과는동떨어져있다. 이러한지리적이점은성원의신성성을극대화시키는데도움을준다. 이와는다르게인도네시아무슬림들은상점, 사무실, 식당등으로사용한종교적이지않았던기존의공간들을활용하여사원을만들고종교활동을하고있다. 이들의사원은도시공간에서흔히볼수있는전형적인상가건물의일부분을활용하고있기때문에다양한목적으로건물내입점해있는업체들과공간의공유는불가피하다. 서두의짧은글에서 A씨는그들의사원이위치한건물 1층에돼지고기를판매하는것에대한유감을표현하고있듯이검증되지않은구성원과의 동거 는인도네시아인들의의지와는상관없이사원의 신성성 을훼손시키는결과를가져오게한다. 하지만 중심부 ( 부산이슬람성원 ) 와 주변부 ( 인도네시아사원 ) 로언급된 각사원들의특징은앞서논의된 안정성, 가시성, 신성성 의개념들이서로 192

196 교차되면서새롭게해석될여지가있다. 예를들면행 재정적지원을받는부산이슬람성원은인도네시아사원보다 안정적 이지만 가시성 을바탕으로개방된공간은 비가시적 이다. 그래서폐쇄적인공동체를형성하고있는인도네시아사원과비교할때외부세력들로부터 안정적 이라평가하기어렵다. 또한물리적인측면에서의 신성성 을갖추고있는부산이슬람성원이지만, 국적과인종이다양한무슬림들을대상으로한아랍어와영어로진행되는설교는인도네시아무슬림들에게마음으로와닿기가어렵다. 때문에그들은인도네시아사원에서그들의언어로진행되는설교를듣는것을선택하며비록물리적공간에서세속성에노출되더라도설교를완전히이해함으로써감정적측면에서의 신성성 을발현할수있는것이다 ( 참고 Garbin, 2013). 따라서부산이슬람성원과인도네시아사원이중심부와주변부로특징지워짐은각사원이가지고있는고유한특성을인도네시아무슬림이주민들이어떻게선택을하느냐에따라결정되어지며따라서매우유동적일수있다. 이러한맥락에서본연구는어떻게인도네시아무슬림들이부산이슬람성원과인도네시아사원들을활용하고있는가에초점을맞춘다. 구체적으로인도네시아무슬림들이각각의종교공간에서에서경험하는 안정성, 가시성, 신성성 을분석함으로서거시적인차원에서이루어지는종교공간에대한체험이어떻게미시적차원의생활과관련을맺고있는지살펴볼것이다. 193

197 참고문헌 박광우 디아스포라와경계만들기 : 원곡동인도네시아이주민사례. 동남아시아연구. 26(1): 엄한진 한국사회이주민종교공동체의실태와성격 종교문화연구. 14:1-43. 유일상 초국적공간의구성과이주전략 : 국내인도네시아노동자사례 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Portes, Alejandro Economic Sociology and the Sociology of Immigration. Alejandro Portes (ed.), Economic Sociology of Immigration: Essays on Networks, Ethnicity and Entrepreneurship: New York: Russell Sage Foundation. Garbin, David The Visibility and Invisibilitiy of Migrants Faith in the City: Diaspora Religion and the Politcs of emplacement of Afro- Christian Churches. Journal of Ethnic and Migration Studies. 39(5): Werber, Pinina The Transaction of Culture: Community Cohesion and the Force of Multiculturalism in History. The Editorial Board of the Sociological Review. Oxford: Blackwell Publishing Ltd. 194

198 민주주의확산과이슬람화의불협화음 : 자카르타주지사아혹 (Ahok) 의쿠란인용사건을중심으로 이지혁 71) Ⅰ. 들어가는말 2014년조코위대통령의취임과함께인도네시아민주주의는제도적인측면뿐만아니라실질적인내용면에서도진일보한모습을보여주었다. 중앙정치경험의부재에도불구하고자카르타주지사신분으로대통령에당선된조코위대통령은자카르타주지사의정치적위상을높이는효과를가져왔고, 더불어자신의러닝메이트이자부주지사였던바수키차하야푸르나마 (Basuki Tjahaja Purnama, 이하아혹 ) 에게주지사가될기회를부여함으로써화인이면서크리스천이라는이중약자 (double minority) 신분의주지사가등장할수있는발판을마련했다. 주지사승계와관련하여반대의목소리가없었던것은아니지만아혹주지사의등장은다양성과관용 (tolerance) 이라는측면에서인도네시아민주주의의발전으로해석될수있다. 2009년당시국무장관자격으로인도네시아에방문했던힐러리클린턴이 만약당신이이슬람, 민주주의, 현대적인것 (modernity), 여성의권리가공존할수있을지를알고싶다면, 인도네시아를방문하세요 라는말을할정도로인도네시아민주주의는성공적인것처럼보였다 (Landler 2009). 2016년 9월아혹이플라우스리부 (Pulau Seribu) 지역주민과의간담회에서쿠란에대해언급하기전까지그의재선가능성은매우높았다. 지지율이거의 60% 에육박하면서큰이변이없는한무난하게재선에성공할것으로예상되었다. 하지만쿠란인용사건은선거패배와함께현직주지사를구속시키는다소파격적인결과를초래했다. 2017년전반기에있었던자카르타주지사선거는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인측면에서자카르타가인도네시아의축소 71) 서울대아시아연구소선임연구원 195

199 판인만큼이나복잡한인도네시아정치의핵심쟁점을축약해서보여주고있다. 예컨대, 무슬림다수사회에서의기독교-화인정치인의종교적-인종적대립이라는상징성과함께민주주의와관용, 자카르타주지사의정치적중요성, 2019년대선의대리전, 개혁적신진세력과기성세력의대결등주요한정치사안을포함하고있다. 본연구의목적은일명아혹 신성모독 (?) 사건 ( 이하아혹사건 ) 72) 이라고불리는사건의정치적함의를살펴보고이사건과관련된주요쟁점을분석하는것이다. 인도네시아정치에서자카르타주지사가차지하는정치적상징성, 이중약자라는아혹의정체성, 세계최대의무슬림인구를보유한인도네시아에서비무슬림이쿠란을언급한점, 선거에서가짜뉴스의문제점등아혹사건은다양한정치 사회적이슈를내포하고있다. 무엇보다아혹을법정구속까지이르게한 쿠란 5장 51절에대한해석, 거짓뉴스, 신성 ( 쿠란 ) 모독죄 에초점을두고인도네시아민주주의와관용에대해고찰하고자한다. Ⅱ. 아혹사건을통해살펴본정치적이슈 (1) 사건의전개 2014년 9월당시자카르타주지사였던조코위가대통령에취임하면서자카르타주지사직은규정에따라부주지사였던아혹에게승계되었다. 주지사를승계하는과정에서아혹이화인이라는점과기독교도라는점은이를반대하는세력들의주요공격대상이었다. 하지만당시반대집회를주동했던이슬람방어전선 (Front Pembela Islam, 이하 FPI) 은 1,000명남짓한인원을동원하는데그쳤고큰이목을끌지도못했다. 하지만 2016년 11월 4일 FPI가주도했던집회는 2년전과는사뭇다른양상을연출했다. 재선이무난할것으로예상되었던선거의국면은아혹이간담회에서 " 쿠란 5장 51절을정치적으로악용하는이들에게속았다면내게투표하지않아도된다 " 고말한내용이편집돼어동영상으로유포되면서급변했다. 2016년 11월 4 일주지사의퇴진및구속을요구하는대규모집회가자카르타시내에서일어났고, 이를기점으로연쇄적인집회가이어졌다. 이에따라아혹의지지율은 72) 본연구에서는아혹의플라우스리브주민간담회에서쿠란을언급한것부터, 대규모집회, 검찰의기소, 주지사선거, 구속까지를포함한일련이사건을 아혹사건 으로칭한다. 196

200 급락했고아혹은신성모독혐의로검찰에기소되었다. 지지율이급락했음에도불구하고아혹은 2017년 2월 15일선거에서약 43% 의득표를획득하며 1위를차지했다. 하지만한후보가과반이상의표를획득해야하는결선투표제를실시하는규정에따라 4월 19일아혹은조코위정부에서교육부장관을역임했던아니에스바스웨단 (Anies Baswedan) 과결선투표를치렀고, 결과적으로 58% 를득표한아니에스에게 16% 라는큰차이로패했다. 아혹의몰락은낙마에그치지않고지난 5월 9일자카르타지방법원이그에게신성모독죄로징역 2년을선도함으로써구속으로귀결되었다. (2) 정치적이슈아혹사건에내재된중요한이슈를살펴보기에앞서, 이사건의중요성을올바르게인식하면서동시에이를지나치게확대해석하고싶은유혹에서벗어날필요가있다. 무엇보다이번사건을무슬림절대다수인인도네시아에서소수계층 ( 기독교-중국계 ) 의정치적인의리트머스테스트로프레임을지우려는유혹에서벗어나야한다. 아혹의선거패배, 쿠란에대한언급, 구속등의일련의사건은인도네시아정치에큰파장을가져다주었고, 추후 2019년대선에도많은영향을줄것으로예상된다. 하지만아혹이라는인물의정치적역량및취약성, 과열된선거분위기등을배제하고지나치게종교적관점, 혹은소수민족이라는정체성만을부각시키면사건의본질이흐려질수있다. 자카르타에서아혹이추진했던정책에대한기득권세력의반발, 그의거침없는의사소통스타일, 중요한시기에공격당할빌미를제공한측면이간과되어서는안된다. 또한아혹이선거에서패배함으로써온건한무슬림유권자의의사가명확하게전달되지못한측면도간과되어서는안된다. 기울어진운동장을다시복원하려는움직임도일어날것으로예상된다. 그럼에도불구하고아혹사건은앞으로전개될인도네시아의정치적변화를이해하는핵심적요소들을축약해서보여주고있다. 2019년대선, 개혁성향의신진세력과엘리트중심의기성정치세력의대립, 인도네시아정치에서의관용의문제, 정체성의정치등다양한이슈를내포하고있다. 아혹이쿠란에대해언급하기전부터자카르타주지사선거는자카르타시민들뿐만아니라전국적인사안이었는데그이유는주지사선거가 2019년에있을대선의전초전혹은대리전의성격을띠고있었기때문이다. 우선 3명의후보군-아혹, 아니에스바스웨단, 아구스하리무트리유도요노-은각각현직 197

201 대통령인조코위, 2014년조코위의대선라이벌이자거린드라당의당수인수비얀토프라보워, 전직대통령인유도요노와연합되어있다. 실제적으로아니에스의승리는수비얀토의대선출마에힘을실어주는결과가되었다. 지자체의장을뽑는선거이지만수도자카르타의상징성과각각의후보가속한정당과배후인물들로인해자카르타선거는전국가적사안으로확대되었다. 지금까지의상황이조코위대통령에게불리하게돌아가는것은분명하다. 아혹의낙마는조코위의대선라이벌로예상되는프라보워에게힘을실어주는결과를낳았다. 선거승리후거린드라당에서는 우리는자카르타를장악했다 년대선에서는프라보워 라는배너를세웠다 (Topsfield 2017). 하지만아혹의낙마가조코위에게얼마나큰타격을줄것인가는조코위가이를어떻게극복하느냐에달렸다. 조코위의정치적위상은아혹과는차이가있으며 2019년대선에서조코위가중립적인자세를유지할필요가없다. 또한근본적으로아혹처럼정체성정치에취약하지않다. 그러나이번사태를통해확인된사실은 2014년조코위현상이라고일컬어질정도로대중의전폭적인지지를받았던조코위대통령이지난 3년간정당정치의기반을다지는동안자신을대통령으로만들어준일반대중의지지-정치적자산-의상당부분을상실했다는것이다. 대선의대리전과유사한맥락에서 2017년자카르타주지사선거는개혁성향의신진세력과기성정치세력간의대립을내포하고있다. 조코위와아혹모두기성정치와는차별화된개혁적인정책을시도하였고기존정치에만연된부정부패를뿌리뽑는데노력했다. 이러한개혁적이고깨끗한이미지는이들의정치적자산이다. 2012년자카르타주지사선거에서조코위-아혹조합의승리는엘리트중심의기존정치세력에서분리된정치세력의탄생이었다. 이러한승리는 2005년부터실시된지자체장직접선거 (Pemilihan Kepala Daerah, Pilkada) 가없었으면불가능했을것이다. 그러나기존정치세력과결탁되지않은깨끗한이미지가후보시절에는정치적자산이었지만막상대통령이되고주지사를승계하고나면, 이러한자산이정치력부재와기존정치세력의견제를불러오는걸림돌로작용한다. 기성정치세력의입장에서조코위의재선을저지하기위해서는아혹의재선을막는것은매우중요한사안일수있다. 실질적으로언론매체는아혹반대집회를후원하는세력으로전직대통령유도요노가거론되기도했다. 세속적이고개혁적인이미지의조코위대통령을흔들기위해기득권세력들이이슬람과관련된이슈를선점하려는경향이뚜렷해질것으로예상된다. 198

202 한편아혹사건은정체성정치의전형을보여주고있다. 아혹사건이인도네시아뿐만아니라세계의이목을끌게된것은정치와종교, 다수종족과소수종족이라는근본적이고고전적인주제를포함하고있기때문이다. 아혹이라는인물의정체성과그의발언은선거에서핵심쟁점이될수있는다른모든사안을잠식했고오직정체성의정치만부각시켰다. 이번선거에서주지사로서의능력, 지난임기동안의업적, 공약의실현가능성같은요소들은전면에서사라지고, 신성모독여부, 비무슬림을지도자로뽑을수있느냐에대한논쟁, 토착민 (pribumi) 이아닌인물이대표성을가질수있느냐등의정체성의문제가수면위로떠올랐다. 3차례의텔레비전토론회에서자카르타의인구문제, 삶의질개선, 교통문제, 범죄예방, 보건정책, 학생들의거리폭력등이다루어졌지만이는선거의핵심이되지못했다. 수하르토시절부터통일성에위협이되는요소로간주되었던 SARA(suku-ethnicity, agama-religion, ras-race, antar-gorongan-intergroup relations) 가선거의중요한요소로작용하고있다. 이는결과적으로인도네시아민주주의에서관용의범위와한계에관한문제다. Ⅲ. 신성모독죄와관용아혹사건이다이내믹한현실정치의여러사안과복잡하게얽혀있지만근본적으로이사건의핵심은쿠란에대한언급과이행동에대한신성모독죄적용이다. 아혹의구속은쿠란의해석과함께인도네시아민주주의에서관용의범위와한계에대한논쟁의도화선이될것으로전망된다. 또한이는전세계적으로문제가되고있는가짜뉴스의문제와도맥이닿아있다. 1998년아시아금융위기이후인도네시아에서제도적인민주주의가점차적으로공고화되고있지만, 이는자유주의가수반된서양식민주주의와는차이점이있다. 서구에서일반적으로민주주의의정착은민주주의와자유주의가커플링 (coupling) 이되어나타나는것과달리무슬림이절대다수를차지하는인도네시아에서는민주주의와자유주의가디커플링 (de-coupling) 되어있다 (Menchik 2016). 다양성속의통일성을국가모토로하고있지만이표현자체에국가적한계가포함되어있다. 이는이상적인바람일뿐이지현실정치에서는다양성이라는것이통일성에위협이되지않는범위내에서만가능한것이고, 대개는이슬람에기반을둔사회질서에위협이될수있는것은허용될수없다. 199

203 아혹의구속에직접적으로영향을미친쿠란 5장 51절에대한해석은앞으로끊임없는논쟁을불러일으킬것으로예상된다. 플라우스리부간담회에서아혹발언의핵심은 누가주지사로당선되느냐와상관없이, 어민의양식프로그램은계속진행되어야하고주민들이여기에적극적으로동참해야한다 는것이었다. 발언중자신이주지사로당선되지못하는경우가생길지라도양식프로그램이지속되어야함을강조하면서 2007년자신이방카-블리퉁 (Bangka-Belitung) 주지사선거에서알마이다 (Al Maidah) 51절때문에패배했던경험을언급했다. 그리고가벼운어조로 이구절을정치적으로이용 ( 악용 ) 하는사람들에게속았다면나에게투표하지않아도된다 라는취지로말했다. 하지만부니야니 (Buni Yani) 에의해유포된동영상은 이용 에해당되는인도네시아어 pakai 가삭제되어마치 쿠란자체에속지말라 는듯한오해를불러일으킬소지를제공했다. 실제로그가페이스북을통해유포한비디오는이슬람보수주의자들의엄청난공분을자아냈다. 이들대부분은아혹의발언을전체문맥상에서이해하기보다는쿠란을모독했다는것에만현혹되어매우감정적인표현을서슴지않았다. 2016년 10월 11일이슬람최고의결기구인울라마협의회 (MUI) 는아혹의행위는신성모독에해당되고, 그결과기소되어야한다고주장하면서다음과같은다섯가지의근거를제시했다. 첫째, 쿠란의 5장은분명하게비무슬림이지도자가되는것을금지하고있다. 둘째, 이장 (surah) 을근거로해서, 울라마 ( 신학자 법학자 ) 는무슬림지도자를선택하는것이의무임을모든무슬림에게가르칠의무가있다. 셋째, 모든무슬림은지도자를선택할때가이드라인으로서이구절의진실을반드시이해해야한다. 넷째, 비무슬림을지도자로선출하는것을금지하는것을거짓말이라고주장하는것은쿠란에대한모독에해당한다. 다섯째, 비무슬림이지도자가되는것을금지해야한다고주장하는데쿠란의구절을인용한울라마를거짓말쟁이라고주장하는것은울라마와이슬람사회에대한모독에해당한다 (International Christian Response 2016). 자카르타지방법원재판부는검찰이구형한징역 1 년에집행유예 2 년보다훨 씬강한처벌을내렸는데그근거로 아혹주지사가형법 156 조 신성모독혐 200

204 의 가인정된다 고밝혔다. 하지만법률전문가들은재판부가신성모독여부를판단하는근거중하나로무슬림과격단체인 FPI의리지크시합의장의진술을사용한것은문제가있다고지적한다. 쿠란 5장 51절과관련하여추후계속해서논란이될수있는부분은 auliya 라는단어다. 아랍어 auliya 는상황에따라 지도자 혹은 친구, 동지, 동맹 등으로해석될수있다. 하지만대부분의현대적해석에서 auliya 를 지도자 로해석하지않을뿐만아니라, 이단어는상황속에서해석되어져야만한다. 만약그렇지않다면무슬림이비무슬림지도자와함께일하는모든상황이문제가될수밖에없다. 이는비단정치뿐만아니라회사에서도마찬가지일수있다 (Fachrudin, 2017). 신성모독죄와관련하여주목해야할것은민주화이후이와관련된사건의횟수가훨씬증가했다는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의보고서에따르면 1965년신성모독죄가제정된이후 1998년까지는오직 10명에게만신성모독죄가적용되었지만 2005년이후 2014년까지 106명이신성모독죄라는미명하에유죄를선고받았고, 이는대부분소수종교와관련된것이다 (Amnesty International 2014). 인도네시아에서선거때마다등장하는가짜뉴스는유권자들로부터후보자의공약과능력에대해검증할기회를박탈하고오직후보자의정체성에호소하는분위기를조장한다. 2014년대선때에도당시대통령후보였던조코위가중국계기도교인이라는루머가돌았고이는그의지지율에큰영향을미쳤다. 결국조코위는선거를 3일앞두고자신이무슬림을증명하기위해사우디아라비아의메카를방문하는모습을연출했다. 더최근에는중국인들이농작물을고사시키는세균을퍼뜨렸다는소문과함께중국인불법이주노동자가 1천만명에이르러현지인의일자리를빼앗고있다는음모론이소셜미디어를통해확산되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이소셜미디어사용에매우적극적인점을고려하면이러한거짓정보는진실여부와상관없이일단확산되면엄청난사회적파장을일으킬수있다. 현재부니야니가편집된동영상을유포한행위는정보및전자거래법 ( Informasi dan Transaksi Eletronik) 28조 2항과 32조 1항을위반한혐의로재판이진행되고있다. 아혹을규탄하는일련의대규모집회가이슬람강경노선을표방하는조직에의해주도되었다고해서이들이정치세력으로성장할것으로섣불리예상할수는없다. 하지만그동안주변부에만머물러있던강경론자들이반아혹집회를통해보여준대중동원능력에주목할필요가있다. 또한정당강령에이슬람을표방하지않더라도이슬람친화적인노선을보였던정당들이선거철이되면정체성정치를시도할가능성이높다. 201

205 Ⅳ. 들어가는말 1998년아시아금융위기를거치면서인도네시아는경제적으로개방되었을뿐만아니라정치적으로도민주화를이룩했다. 인도네시아는지자체의장에서부터대통령까지직선제로선출하는제도적민주화를성취했을뿐만아니라소수계층의종교와종족에관해일정부분다양성과관용이용인되는, 민주주의와이슬람이공존하는대표적국가로여겨졌다. 하지만 2017년자카르타주지사선거에서나타난소수종교와종족에대한불관용은인도네시아민주주의의취약성을드러내보여줌과동시에자유주의가동반되지않는인도네시아민주주의의변화에대한우려를자아내고있다. 과거권위주의시절에정치의주변부에위치했던강성이슬람세력이민주화이후점차적으로자신들의이념과가치를사회전반에주입하려고시도한다. 이는비단강성이슬람뿐만아니라온건한이슬람단체로구분되는단체에서도목격된다. 결과적으로이러한현상은인도네시아주류무슬림에반하는소수계층의주장을약화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아혹사건을계기로인도네시아민주주의에서관용의범위와한계가재정립될것으로전망된다. 참고문헌 Amnesty International Prosecuting Beliefs: Indonesia s Blasphemy Laws. Basuk Tobias, Indonesia s Plitical Islam and Liberalism. Jakarta Post. April 6. Batu, Safrin La, Quranic Interpretation Issue Continues Amid Election Lead up. October 25. Fachrudin Aziz Anwar Persisting problems from the al-maidah 51 debate. October 18. International Christian Response Indonesia Faces Defining Moment in Blasphemy Protests against Christian Governor Ahok. December 2. Landler Mark Clinton Praises Indonesian Democracy. New York Times. February 18. Menchik Jeremy Islam and Democracy in Indonesia: Tolerance Without Leberalism.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arameswaran Prashanth The Trouble with Indonesia s Ahok Test. The Diplomat. February 18. Setijadi Charlette Ethnic Chinese in Contemporary Indonesia: Changing Identity Politics and the Paradox of Sinification. Perspective 2016(12) Wijaya Callistasia Anggun Ahok's Controversial Speech not Aimed at Wooing Voters: Expert.: Jakarta Post, March

206 분과회의 5 동남아시아전통내러티브의현대적 표상화 1. 김동엽 ( 부산외대 ) 필리핀의전통극모로 - 모로에나타난권력관계와국민정책성 : 지역연구방법론으로서의상호택스트성을중심으로 - 2. 이미지 ( 부산외대 ) 태국전통가면무용극 콘 (Khon) 의현대적변용 : 전통문화와 관광전략 3. 김희숙 ( 부산외대 ) 미얀마종교의식 까테인 의조직화양상과물품의변화가 갖는사회문화적함의 4. 김예겸 ( 부산외대 )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난힌두서사의사회문화적 맥락화 : Mahabharata 를중심으로

207

208 필리핀의전통극모로 - 모로에나타난권력관계와국민정책성 : 지역연구방법론으로서의상호택스트성을중심으로 73) 김동엽 ( 부산외대 ) 1. 연구목적 본글에서는 17세기부터스페인식민주의의영향으로필리핀민간에전래되기시작한전통극 모로-모로 의특성과의미를 문화 라는개념과 상호텍스트성 이란방법론으로이해하고설명하고자한다. 특히기독교전파라는목적을내포한 모로-모로 의중심내용이필리핀국민내부의권력관계와국민정체성형성에어떠한영향을주었는지를살펴보고자한다. 또한방법론적측면에서는그동안지역연구가인문학과사회과학, 그리고생태학등각기다른연구주제를각기다른연구방법으로접근함으로써지역학으로서학문의정체성정립이어려웠던점을감안하여, 이들은포괄하는주제로서 문화 를제시하고, 이에대한포괄적인접근법으로서 상호텍스트성 을제안함으로써지역연구에대한총체적접근법을제시하고자한다. 2. 연구방법 지역연구가지역학으로서학문의정체성을정립하기위해서는연구의대상과주제를명확히밝힘은물론이러한연구의목적과방법을제시해야한다. 그동안지역연구의일환으로수행되어온동남아시아연구가학문의한영역으로자리잡지못한원인에대한반성적고찰과더불어새로운방안을제시할필요가있다. 야노토르 ( 박장식역, 2009) 는 지역연구 (area studies) 를현재발전중에있는학문적방법론으로서 타자 를대상으로정하고, 그 타자성 (otherness) 의해명과이해를목표로하는새로운지적인식방법에서시작되었다 고했다. 이지역연구는현대사속에서어떤역사적요청에의해태어난것으로서식민지배기이후새로운지배질서의구축을위해타지역에대한정보수집의일환 73) 본글은향후연구진행을위한초보수준의연구노트임을밝힙니다. 205

209 으로활용되었다. 즉 20세기최강국인미국이동시대적상황에서만들어낸세계적대응을위한정책과학으로서출발한것이었다. 이러한역사성으로인해지역연구는 추악한신조어 (ugly neologism by Edward W. Said) 라는신랄한비판을받기도했다. 그러나오늘날탈식민주의, 탈패권주의시대의도래와더불어지역연구는그실용적가치의하락과연구의비윤리적측면이부각되면서정체시기를맞이하고있다. 이러한시점에서지역연구의새로운발전을모색하기위한방안으로야노토르는 지역연구의주체를새로운관점에서정립할필요와더불어지역연구의목적을새롭게수립하며, 이를수행하기위한적절한방법론을도출할필요가있다 고했다. 즉과거타자화되었던지역연구의대상이지역연구의주체로부상하여내부자적관점을제시하고외부자적관점과상호교류하는방안이제시되어야한다는것이다. 이를통해외부자에게는지역에대한이해를증진시키며, 내부자에게는스스로의정체성에대한인식을증진시키고이를창조적으로재생산해낼수있는기초를제공해야한다. 이러한건설적인연구목표가오늘날침체기를맞이하고있는지역연구에새로운돌파구를제공해줄것이다. 기존의지역연구는인문학과사회과학으로나뉘어각기구분된연구영역과연구방법으로수행되었으며, 이를종합하는방법으로서학제적연구를수행해왔다. 그러나이러한학제적연구는통합적인것이아니라모자이크적이라는비판을면하지못하고있다. 즉학제적연구는현상을다면적, 다층적으로보고, 다양한시각에서다양한접근방식을가지고볼수있다는잇점이있지만, 현상에대한총체적인이해를가져온다고볼수는없으며, 이러한다양성은오히려학문의정체성수립에불리한점이될수있다는지적이있다 ( 윤택림 2003). 따라서지역학으로서학문의정체성을수립하기위한일환으로인문학적요소와사회과학적인요소를종합하는개념으로 문화 를상정하고, 이에대한연구방법을도출하는방안을모색해볼필요가있다. 유사한맥락에서 한국문화학 을주창한문옥표는 문화학으로서의한국학에접근하는일차적방법은 한국문화 라는것이하나의일관된총체로서존재한다는가정하에그것의성격을밝힐수있는이론이나방법론을개발하도록노력하는일이될것이다 라고주장했다 ( 문옥표 1995). 이러한맥락에서지역연구의범주를벗어나지못하는동남아시아연구가 동남아시아학 이라는학문의정체성을정립을위한방안으로 문화 를중심개념으로해서새로운연구방법론을개발할필요가있다. 문화는일반적으로철학적, 인류학적관점의정신문화와농경과현대과학 206

210 기술을포함하는물질문화로대변된다. 한편상징으로서의문화는언어, 종교, 예술, 과학등포괄적분야를인간이만든 지성적상징물 이자총체적인 상징체계 로보고 해석 의대상으로이해할수있다. 이는곧문화를텍스트 (text) 로 74) 간주하여다양한열린해석을가능하게한다 ( 전기철 2007, ). 이처럼문화를하나의텍스트로바라봄으로써기존에문예분야에서활용되고있는텍스트분석방법을지역연구방법론으로활용할수있다. 구조주의관점에서텍스트의개념은자율적인체계를갖추고안정되고일관된언어적구조물을가리킨것이었다면, 후기구조주의로넘어오며텍스트의개념은의미의발생과소통이작용하는모든현상으로보고, 그텍스트는연접된다른분야의의미들과강한상호성 (intersection) 을만들어낸다. 텍스트를읽고이해하는과정은독자가텍스트를구성하는과정이며, 이때독자는자신의경험과사고틀을바탕으로텍스트를구성하게되는데, 원텍스트와관련되는다양한텍스트를통해독자가의미를구성하게된다. 이러한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y) 은독자가의미를구성함에있어매우중요한수단이된다 ( 박지윤 2013, 100). 상호텍스트성이론에서이해하려는텍스트의 의미 (Wort) 가 살아있는사회적이고구체적인 것으로서또다른다양한의미근거를가지기때문에이에대한적절한이해는상호텍스트를고려하지않으면안된다는것이다 ( 박건용 2001, 384). 텍스트의의미와그의미에대한이해의과정에서독자는자신이가지고있는선입견인내적인텍스트와전통인외부적으로존재하는다른텍스트들에영향을받는다. 여기서전통의문제는텍스트의의미이해를위해서는다른텍스트의활용이바탕이되어야함을뜻하는것이기도하다. 따라서텍스트의미의이해는다른텍스트에도움을받는상호텍스트성을바탕으로접근해야한다고본다 ( 김도남 2001, 205). 텍스트로서의공연예술은열린구조를가진의미화의대상이라할수있다. 광의의의미에서의공연텍스트는언제나관객과의상호작용을유도할수있는대상이되어지며, 텍스트자체의불명료성및해석과정을수행하는관객들의다의적인해석과정으로인해이세계에존재할수있는문화적산물로서재생산되어질것이다. 공연텍스트는복잡하고산만한사건에따라서몇몇의표현적인요소들이상호짜맞춰진결과인데, 이결과는조직적기술의다른실제적인내용들을설명하는것으로주어진반면에, 의사소통과의미화의과정을거치면서다양한약호들로구성되어진다 ( 박명숙 2007, 4). 버넷 (Bennett 1988) 74) 텍스트의라틴어어원은텍스투스 (Textus) 로서퀸딜리아누스의대표저작인 Institutio oratorial (IX, 4. 13) 에서최초로사용된것으로알려졌으며, 텍스투스는언어사용의실례는짜여진직물이라비유였다 (Kelly 1998, 371; 박명숙 2007, 4). 207

211 은현대공연텍스트의읽기이론중후기구조주의의상호텍스트성개념의적용을주장했다. 공연텍스트를분석하고이해하는해석과정에서는언제나해석자의주변이나다른텍스트의영향을받을수있는상호텍스트성에대한규명에초점을맞추어야한다는것이다. 필리핀의전통극 모로-모로 는서구의스페인을배경으로발전한코메디아 (Komedya) 가전파된것으로써필리핀의토착환경에따라변형되어정착한공연예술이다. 여기에는식민주의자의목적과당시필리핀의상황, 그리고이후변화하는시대적환경에따른요구등다양한요소들이포함되어있다. 특히서구에서전례된전통극이동양적가치체계안에서어떻게변형되고있는가는문화의전파와정착이라는맥락에서중요한시사점을제공할것이다. 일반적으로동양전통극의사상은이원적세계의이중적의미들로본다. 여기에서이중성은절대적대립과불균형의의미가아니라, 공존을통한정신적균형상태를의미한다. 모호성이공존하며, 일정한차별을유지한채보존되는감정적상태들을창조한다 ( 김상교 1996). 이러한동양전통극의사상이서구에서전파되어정착한 모로-모로 에어떻게표현되는지도살펴볼필요가있다. 3. 필리핀전통극 모로 - 모로 모로-모로 ('Moro-Moro) 는일반적으로필리핀군도내에다양한부족들의전쟁춤 (war dance) 을지칭하는말이었다. 이러한전쟁춤에스페인에서들여온무대극인코메디아 (Komedya) 의극적요소를가미하여현지인의취향에맞게변형되고현지화된무대극 (hybridized & localized Komedya) 으로탄생하게된것이다 (Briones 2010, 33-34). 따라서모든코메디아가모로-모로는아니며, 오직안무에많은부분이싸움에관한내용과전쟁춤이포함되어있어야모로-모로라고할수있다 (Brinones 2010, 42). 전통적인모로-모로의공연모습은개방된무대에서수일에걸친장시간공연되는것으로, 주로마을의축제시기에마을광정에서지속적으로공연된다. 공개적인리허설은축제의흥을돋는일부로간주되기도한다. 또한거듭되는반복은지루함보다는내용의이해를위한유용함과흥겨움으로간주된다. 공연줄거리에대해관객들이이미인지하고있으므로며칠씩지속되는공연에집중해서관람할필요가없는것이특징이다. 또한공연하는배우들은연사 (Dicktador) 의대사에따라연기 (act) 하며, 연사는원고의노예가아니라, 주인공이기도하다. 즉공연의내용은상황에따라서유연하게수정되기도한다. 관객들의호응에따라서노래와춤등을넣기도하고, 빼기도한다. 이러한특 208

212 징은동남아시아공연예술의특징에서흔히찾아볼수있는요소이기도하다 (Brinones 2010, 74-75). 모로-모로공연은근대화의과정에서다양한변형이이루어졌으며, 특히대사를전통적인연사에의해읽는방식과극중인물이암기하는방식을두고열띤논쟁이벌어지기도했다 (Briones 2010, 121). 근래에공연되는모로-모로는대부분극중인물이대사를암기하여연기하는방식을취하고있다. 스페인식민지시기모로-모로는주로기독교의전파를위해사용되었으며, 선을상징하는기독교와악을상징하는이슬람간의싸움이내용의주를이루었다. 이러한내용적인측면때문에독립이후모로-모로는정치적인문제로부상하기도했다. 1967년무슬림상원의원으로국가통합위원회위원장이었던타마노 (Mamintal Tamano) 는모로-모로의공연이국민통합에방해된다는이유로금지시켜줄것을마르코스대통령에게건의하기도했다 (Brinones 2010, 11). 한편필리핀국립문화센터 (CCP) 의예술감독을지낸 ( ) 띠옹손 (Nicanor Tiongson) 은모로-모로가필리핀에서가장오래되고, 역사적이며, 가장널리퍼진공연예술이라는점에서국가정체성에중요한요소라고주장했다. 그에따르면, 모로-모로는스페인식민주의자들에의해식민질서를유지하고, 지주들에의한봉건주의질서유지에활용되었음이사실이지만, 민중들은이대중공연을통해현실의고통에서안식을구하기도했다고평가했다. 그는또한모로-모로가국민공연 (national theater) 이되기위해서는현실에맞추어내용을수정할필요가있음을강조하기도했다 (Brinones 2010, 12-13). 아래에간단히소개되는빠라냐케 (Paranaque) 지방에서공연된로단테왕자 (Prinsipe Rodante) 는시대적요구를반영하여그내용에변형이가해진대표적인사례이다. 즉단순히기독교도의무슬림에대한승리를묘사한것이아니라, 두종교가서로협력하여악에대항하는내용을다루고있다. 프린스로단테 (Principe Rodante, 1992 version) - 줄거리 w 기독교왕국인 Crotona에서공주 Floresca의짝을찾기위한무술경연이벌어진다. w 신분을감춘무슬림왕자 Aladin이승리하고 Floresca의마음을얻는다. w 이슬람왕국 Segovia의술탄이사신을보내서범죄를저지른 Crotona의왕자 Alvaro를넘겨줄것을요구한다. w 사신이 Segovia 왕국의왕자 Aladin을알아봄으로써그의정체가드러났고, Alvaro 왕자가결혼을반대했지만, 왕은경연결과를존중하여결혼을 209

213 강행한다. w 왕은 Aladin과함께다른왕자 Rodante를 Segovia 왕국에보내왕자 Alvaro의죄에대한용서를구하기로결정한다. w 왕자 Alvaro는공주가불신자와결혼한것에대해불만을품고, 그들이떠난후아버지로부터왕좌를빼앗고왕과왕비를감옥에가둔다. w Segovia로가는도중밀림에서농부를만나 Crotona 왕국에서반란이일어난사실을알게된다. 이에 Aladin은군대를모으기위해 Segovia로떠나고, Rodante는동굴에서그를기다린다. w 밀림에서남장을하고 Aladin을찾고있던 Segovia의공주 Porciana는 Rodante와마주쳐싸움을하다가여성의정체가드러나고, Rodante의마음을얻게된다. w 한편, 왕자 Alvaro는자신의동생 Rodante를잡기위해사람을보냈고, 그가 Rodante에게몰래약을먹여힘이약해지게만든후, Crotona 왕궁으로데려온다. w 왕자 Alvaro는인질로잡고있던무슬림공주 Perlita를유혹하다가실패하자강제로겁탈하려고한다. w Alvaro는잡혀온 Rodante 왕자를처형할것을명하지만, 공주 Floresca 에의해구출된다. w Segovia 왕국으로부터온술탄과 Aladin이 Crotona 왕국의민중들과함께왕궁으로처들어가 Alvaro와그의군대를무찌른다. w 반란을저지른 Alvaro에게화가난왕은칼로그를치려다가그를구하려고뛰어든왕비를찌른다. w 어머니의사랑에감동받은 Alvaro는후회하며죄에대한용서를빌면서, 자신의목숨으로어머니를살려달라고신에게간청한다. w 순간, 성모마리아가먼산위로나타나고기적이일어나죽은왕비가다시살아난다. 플로란테와라우라 (Florante at Laura, 1996, 공연 ): 빠라냐케메리 빌에서코메디아공연단 (Komedya Ng San Dionisio) 에의해공연됨 ( 영상 관람소감 ) w 무대는체육관에설치되어있고, 관객들은간이의자에앉아서관람한다. 무 대배경그림은반쪽은성당을묘사하고다른반쪽은이슬람모스크가그려 져있다. 210

214 w w w w 긴인사말과축사가이어진후브라스밴드의경쾌한음악에맞추어등장인물들이행진하며등장한다. 무대에서다양한몸짓과모양을만들며약 20분간행진이지속된다. 연사는없고배우들은무선마이크를착용하고공동마이크가설치되어배우들이대사를외워서말하는형식을사용한다. 배우들의의상은옛스페인의전통의상과무슬림무어족의전통의상을하고있으며, 남녀배우모두짖은화장을하고과장되고코믹한몸짓으로관객들의웃음을자아낸다. 필리핀어로공연되는내용의줄거리를자세히알수는없었지만, 주로크리스천과무슬림이편을나누어싸우는모습이주를이룬다. 필리핀전문가 (Dr. Anril Tiatco, Dir. of Office for Initiatives in Culture and the Arts) 인터뷰내용요약 ( ) w 필리핀전통극모로-모로 ( 혹은 Komedya) 의출현배경과현지화에나타난특징은무엇인가? F 기록된최초의유사한공연은보홀 ( 산타바바라 ) 지역에서 16C에기독교전파를위한공연되기시작한것으로알려져있다. 이러한모로-모로는겔리온무역을통해멕시코에서전해졌으며, 본격적으로공연이전파된것은 19C부터였다. 대부분의지방에서연례행사로공연되었으며, 모로모로는따갈로그지방에서코메디아 (Komedya) 를지칭하는용어로사용되었다. 연사 (Dictador) 의형식등다양한측면에서현지화된것을볼수있다. w 전통극에나타난권력관계, 즉주인공 (Protagonist) 과악역 (Antagonist) 의설정과관계는어떻게묘사되고있는가? F 전통적으로선 ( 크리스천 ) 과악 ( 무슬림 ) 의싸움을묘사하고있다. F 무슬림의강력한반대로현대극에서는선과악의대비를다변화하는경향이나타났다. w 전통극모로-모로가필리핀의국민정체성형성에어떠한영향을미쳤는가? 긍정적혹은부정적측면? F 공연을통해공동체정신을만드는데에영향을준다고본다. F 비록내용이변화되기는했지만, 크리스천과무슬림을선악으로대비함으로써부정적인영향을남기기도했다. F 민족주의를함양이기보다는지역공동체의형성에보다많은영향을준 211

215 것으로본다. w 전통극모로-모로의현상황은어떠한가? 보전과상업화의여부? F 모로-모로는정식극장을가지고공연되는형태로상업화되지않았다. F 오직마을축제 (Town Fiesta) 에서마을광장 (Town Plaza) 에간이무대를설치하여공연하는형태가일반적이다. w 필리핀문화유산으로서 Komedya가가지는의미는무엇인가? F 아직모로-모로는국가문화유산으로지정되지는않았다. F 필리핀에는모로-모로뿐만아니라다를유형의공연물들도문화유산으로지정되어제도적인보전노력이필요하다고본다. [ 참고문헌 ] 김상교 이미지와기호 : 이중의경계 - 동양전통극의경우. 한국연극학 제8권 197~228. 김도남 상호텍스트성에기반한텍스트이해단계설정검토. 독서연구 6: 박건용 상호텍스트성이론에따른텍스트분석의한유형 : 프리쉬의 비더만과방화범들 의경우. 독어교육 22: 박명숙 공연예술해석에있어서상호택스트성 무용해석을중심으로. 韓國舞踊敎育學會誌, Vol.18 No [Intertextuality] 박지윤 텍스트이해를위한상호텍스트활용의실제 : 문학텍스트와미디어텍스트의징표와변형을중심으로. 한민족어문학 64: 문옥표 인류학, 현대문학분석, 한국학. 한국의사회와문화 23: 야노토루 지역연구란무엇인가? 박장식역. 지역연구어떻게할것인가 제1장. 부산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윤택림 한국학연구방법의모색 : 문화기술지적방법 (ethnographic method) 을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6(1): 정기철 문화해석의진리 : 상대주의적해석. 해석학연구 20: Bennett, Susan Theater Audiences. A theory of production and reception. Second editi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Brinones Moro-Moro: From War Dance to Theater of War: Moro-Moro Performances in the Philippines. Dissertation.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Kelly, Michael ed Encyclopedia of Aesthetics. New York,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12

216 태국전통가면무용극 콘 (Khon) 의현대적변용 : 전통문화와관광전략 75) 이미지 ( 부산외국어대학교 ) 키워드 : 가면무용극, 콘, 라마끼엔, 전통무용, 전통의재창조, 전승, 관광전략 1. 연구목적및배경 본연구의목적은태국의대표적전통예능양식의하나인가면무용극 콘 (Khon) 의현대적변용과정을규명하고그것이가지는함의에대해고찰하는것이다. 콘은원래는왕실에서만공연이허용되던고급문화였다. 그러나시대의변화에따라현대에이르기까지많은변용과정을거쳐왔다. 본연구에서는가면무용극콘의역사와유래, 콘의소재인라마끼엔, 그리고태국전통예술에서의콘의위상을살펴보는것과동시에, 특히태국관광산업과전통문화와의연계에중점을두어, 콘이현대에들어와대중적가치를획득하기위해어떻게변용되어왔는지살펴보고자한다. 즉전통을둘러싼관광전략을살펴봄으로써현대사회에서전통문화가가지는함의에대해서고찰한다. 특정국가의전통문화의이해는그나라를이해하는유효한방법중하나이다. 동남아전통극은동남아문화이해의기초가될수있는중요성에도불구하고그동안국내에서이들주제에관해이루어진연구는거의전무하다. 특히태국의경우태국공연예술의개괄적성격을지닌불과몇편의논문이존재할뿐이다. 본연구에서는이론, 문헌, 필드워크에기초한종합적지역연구의방법론을채택한다. 특히문헌에대해서는국내선행연구와참고자료가부족한상황에서필드워크에서수집한문헌자료와인터뷰, 시청각자료등을적극활용하여분석할것이다. 2. 가면무용극 콘 의역사적변용 75) 발표요약문 : 진행중연구 213

217 태국무용에는고전무용과민속무용이있는데, 가면무용극콘은무용극라컨과함께고전무용에속한다. 콘은아유타야시대부터전승되어태국중부지역을중심으로전개된음악, 무용, 연극이결합된고전적인예능양식이다. 원래상류층을대상으로왕실내에서만공연이허락된고급연극 (Wattanatham Sung) 이었지만, 현재는대중화되어누구나쉽게접할수있게되었다. 콘은손가락의움직임을중시한태국의다른무용과는달리, 발의움직임에중점을둔독특한동작을통해극중등장인물의감정을표현한다. 원래남성들만연기할수있었고모든연기자가가면을착용했지만, 라마 4세 ( 재위 ) 가여성의연극참여를장려하면서여성도참여할수있게되었으며, 왕과여성, 익살꾼역은가면을쓰지않게되었다. 일반적인콘공연양식은태국관현악단전통악기합주에맞추어등장인물들이연기하며, 등장인물은가면을쓰고있기때문에직접소리내어대사를말하지않는다. 대신 2명이상으로구성된나레이터가극중줄거리와대사를낭독한다. 최근에는관객들의흥미를유발하기위해등장인물중하나인익살꾼 ( 승려역 ) 과나레이터가직접대화하기도하고, 즉흥적대사로관객을무대로끌어들이기도하는등해학적요소가첨가되기도한다. 또한디지털스크린이도입되어무대배경이디지털화되고있는추세이며, 관광화의진전에따라영어및일본어자막이덧붙여지기도한다. 극의원활한전개를위해하나의역할을두세명이분담하는경우도있다. 물론가면극이기때문에가능한일이다. 콘에서는인도서사시라마야나 (Ramayana) 를번안한태국버전라마끼엔 (Ramakien, 라마의영광 ) 단한가지의이야기를소재로한다. 라마끼엔은현방콕왕조 ( 짝끄리또는랏따나꼬신왕조, 1782-현재 ) 의라마1세 ( 재위 ) 가그동안구전을통해전해져오던단편적인라마이야기를기초로하여최초의완성본을저작했으며, 이후라마 2세와 4세, 5세, 6세등이라마끼엔저작에참여했다. 태국국왕들은라마끼엔스토리속주인공인라마를태국국왕자신과동일시함으로써왕권강화와정통성을확보하고자했다 ( 이은구2014: ). 라마끼엔에서는불교의업사상이강조되는데 76), 선업을쌓은프라나라이가인간인라마로환생한것처럼태국국왕또한과거의선업에의해현세의왕으로탄생했다는것이다. 즉왕족출신이아닌현방콕왕조의초대왕라마1세의정통성은라마끼엔의저작을통해정당화되었다 ( 이은구 2014:169). 라마 라는호칭은작년재위한라마 10세와치라롱껀국왕에이르 76) 라마끼엔에서는악업을지은톳싸깐 ( 라바나 ) 의전생이야기가새롭게추가되었다. 214

218 기까지계속해서세습되고있다. 특히라마2세 ( 재위 ) 는직접왕실내가면극용대본 ( 라마끼엔 ) 을제작하고, 예술적재능을가진인재를적극등용하는등태국고전예술의발전에기여했다. 라마2세가저술한라마끼엔은지금도콘공연에서널리사용되고있으며호평받고있다. 라마끼엔의스토리는공연예술의소재가될뿐만아니라사원의벽화, 조각등에도폭넓게사용되고있으며, 어린이들이이해하기쉬운동화책으로도꾸준히발간되어아이, 어른구분없이태국인들사이에서대중적인기를획득하고있다. 왕실의수호신인에메랄드불상이보존되어있는왕궁사원왓프라깨우 (Wat Phra Kaew) 에도라마끼엔의벽화가화려하게그려져있다는사실에서, 힌두신화라마야나가태국에서는불교적이상과융합되어있음을확인할수있다. 역사적으로라마끼엔을표현하기위해활용된콘은왕실을대변하는상징적공연예술로서발전해왔으며, 현재도왕실행사가있을때에는콘이공연된다. 필자가방문한작년 8월 12일왕궁앞싸남루엉공원에서이루어진왕비생일기념행사때에도콘공연이이루어졌으며그모습은 TV를통해생중계되었다. 특히같은날 하누만 이라는제목의콘공연 77) 이계획된쌀라찰름끄룽왕립극장 (Sala Chalerm Krung Royal Theatre) 에서는어머니와아이들은무료로입장가능한어머니의날 ( 왕비생일 ) 프로모션이함께진행되어만석을이루었다. 방콕에서콘은국립극장과왕립극장을중심으로공연된다. 특히국립극장의관람료는 60바트에서 200바트사이로왕립극장보다매우저렴하며 78), 두극장모두외국인보다내국인관객들이압도적으로많다. 대부분공연에서의하이라이트는하누만원숭이부대를이끈프라람 ( 라마 ) 과톳싸깐과의전쟁씬이다. 일반적으로태국에서는바람둥이하누만의비상적인인기와악역톳싸깐 ( 라바나 ) 에대한동정적인분위기 79) 가형성되어있다. 3. 관광과의연계 관광산업이 GDP 의약 10% 이상을차지하는태국에서는관광산업의발전에따 라전통문화가관광자원으로서적극적으로활용되어왔다 년에관광청 77) 7 개의막으로구성되어있었으며, 하누만의탄생과톳싸깐이시다를납치라는장면으로극이시작되며, 라마와함께시다를무사히구출시킨하누만의성공으로극이끝나는스토리였다. 78) 국립극장은좌석에따라 60 바트, 100 바트, 150 바트, 200 바트로형성되어있고, 왕립극장은 800 바트, 1000 바트, 1200 바트로형성되어있다. 79) 태국라마끼엔에서는하누만의역할비중이높으며, 하누만을주인공으로내세운공연도어렵지않게볼수있다. 또한톳싸깐의패배와죽음이단순히정의의승리가아니라, 비극의감정을불러일으킨다. 시다를진정으로사랑한인물은톳싸깐이라고답하는태국인들의반응도적지않았다. 215

219 이설치되면서 60년대부터관광개발이진행되었으며, 1980년대중후반중점산업으로지정되었다. 그과정에서여러가지관광전략이전개되었는데, 태국정부는국가전략으로서전통문화를관광산업자원으로서개발하고활용하는데주력하고있다. 일례로최근태국정부는가면무용극콘과타이마사지를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으로등록하는안을적극검토하고있으며, 올해내각회의에서승인되었다. 태국전통예능의최고봉격인콘을관광산업에적극이용함으로써, 정부는그동안매춘등성산업의이미지가강했던태국관광의이미지개선과고급화를꾀한다. 태국국내뿐아니라해외에서도콘공연이활발히소개되고있다. 태국정부가추진하고있는태국요리의세계화전략또한같은맥락에서이해가능할것이다. 태국경제에서국제관광수입이차지하는비율이적지않은상황에서전통무용을활용한고급화전략은민간에서도진행되고있다. 태국을방문하는외국인관광객은디너쇼, 디너크루즈등을통해태국전통무용을쉽게접할수있다. 5성급만다린오리엔탈호텔별관에서예약제로진행하는쌀라림남 (Sala Rim Naam) 디너쇼는외국인관광객을대상으로이루어지고있는태국요리와전통무용이결합된대표적인관광코스이다. 가격대는기본 2500바트 ( 기준약8만5천원 ) 로다소높게설정되어있으며드레스코드 80) 또한비교적엄격하다. 전통악기합주에맞춰약 5분씩 6개의전통무용공연이진행되는데, 소개자가각공연이시작되기전에영어와태국어로무용에대한간략한설명을한다. 여기서공연되는콘에서는프라람과톳싸깐의전쟁씬중심으로전개되며, 해학적요소는찾을수없다. 공연이끝난후관광객과의사진촬영이포함된다. 비슷한예로아시아티크의칼립소 (Asiatique Calypso) 태국레스토랑에서도매일저녁 7시전통무용을관람하면서태국요리를즐길수있으며 81), 이곳또한대부분이일본인을비롯한외국인관광객이주요고객층이다. 필자가방문했을때에는 5개의전통무용중콘이두번포함되어있었는데, 하누만과그의셋째부인수판나맛차의애정씬과프라람과톳싸깐의전쟁씬두가지에피소드가짧게공연되었다. 관광객들에게널리알려진약 2000명을수용할수있는싸얌니라밋 (Siam Niramit) 또한콘을비롯한전통무용을관람할수있다. 지금은전통무용 + 태국요리는외국인관광객들의선호하는관광코스로자리매김하고있다. 최근에는콘을소재로한테마파크도만들어지고있는데, 방콕근교에위치한무반콘쌀라야 (Khon Village) 가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콘관람뿐만 80) 복장규칙은 Smart Casual Dress Code 로서여성은엘레강트한복장과남성은와이셔츠, 긴바지, 구두착용이라고홈페이지에쓰여져있다. 81) 가격대는 2000 바트이며, 약 50 분간이루어진다. 216

220 아니라콘관련용품을구입할수있으며, 가면을직접제작해볼수있고, 춤을배울수도있다. 아직이곳을찾는방문객은거의없었으며현시점에서대중화에는실패한것으로보인다. 그러나이사례에서도콘을관광산업과연계하려는노력을확인할수있다. 4. 전통의전승과보존, 재창조 국가전략의과제중하나인전통의발굴과재창조는태국에서는학교교육으로이어지고있으며, 전통을계승하는젊은인재와교육자를적극적으로양성하고있다. 태국에서는 20세기초부터사설기관이아닌초등학교에서대학교에이르기까지공공기관을중심으로전통무용교육이이루어지고있으며, 태국국립대학의약 30% 가전통무용관련학부를두고있어 ( 岩澤 2012:1-5), 그중요성을가늠할수있다. 그중에서파타나씬태국국립예술대학 (Bunditpatanasilpa Institute) 은 1998년에전통예술 ( 미술, 무용, 음악 ) 의전승을위해설립된태국문화청이관리하는 4년제대학 ( 교육학부는 5년제 ) 이다. 82) 미술학부, 음악 연극학부, 예술교육학부 3개의학부로구성되어있으며, 음악 연극학부에태국연극무용학과가소속되어있어무용극라컨과가면무용극콘을전문적으로배울수있다 83). 커리큘럼에는전통무용이어떻게하면현대에도지속, 존속될수있을지그고민이반영되어있다. 살펴본바와같이가면무용극콘은시대적변화에대응하여변화를거듭해왔다. 특히그변화의중심에는관민이하나가된관광산업전략이있었다. 자칫딱딱하고지루할수있는가면무용극콘은내국인에게는대중화, 보편화가진행되고있으며, 동시에외국인관광객에게는콘을활용한태국관광의고급화전략이전개되고있었다. 거기에는전통문화의창조적계승을위해전수자를적극육성하는태국정부의노력이뒷받침되고있었다. 논의 : 전통의정의, 만들어진전통 82) 중등교육기관의중심에는전국에 12 개교있는국립연극무용학교가있다 년절대군주제폐지로인해왕실소속무용단이해산되면서그들을교사로수용한태국최초의국립음악무용학교가설립되었다 ( 岩澤 2012:2). 83) 여학생은라컨을남학생은콘을배운다. 콘의등장인물은프라 ( 라마 ), 약 ( 톳싸깐 ), 링 ( 원숭이 ), 낭 ( 시다 ) 4 가지캐릭터로이루어져있으며, 콘을선택한남학생은낭캐릭터이외의자신이정한세가지캐릭터중하나를학습한다. 콘공연에서여성역 ( 낭 ) 은라컨을전공한여성연기자가투입된다 ( 파타나씬태국국립예술대학총장인터뷰, ) 217

221 참고문헌 김진영 근대동남아불교의힌두문화수용 : 태국라마끼엔의힌두신화와불교적변용. 동남아시아연구 21(2): 이은구 발미끼 (Valmiki) 라마야나 (Ramayana) 와태국 라마끼엔 (Ramakien) 의비교연구. 동남아연구 23(3): 최난옥 태국공연예술의연구. 한국태국학회논총 7: 岩澤孝子 タイにおける伝統舞踊教育. 舞踊学 35:

222 미얀마종교의식 까테인 의조직화양상과 물품의변화가갖는사회문화적함의 김희숙 ( 부산외대 ) 1. 연구의배경과목적영국의자선지원재단 (Charities Aid Foundation, 이하 CAF) 이발표한 2016년세계기부지수 (World Giving Index) 보고서에따르면미얀마는기부지수 70% 로, 전세계 140개조사대상국가운데 1위인것으로나타났다. 이로써미얀마는 2014년이래 3년연속기부순위 1위의 기부강국 으로서세계의주목을받고있다. CAF의기부지수는전세계 140개국, 평균 1천명을선정하여인터뷰한후결과를바탕으로, 낯선사람을도와준비율, 기부경험, 자원봉사시간등을종합적으로집계하여산출된다. 미얀마의경우응답자의 91% 가자선단체에기부한경험이있다고답했고, 낯선사람을도와준비율도 63% 에달했으며, 응답자의절반이상이자원봉사의경험이있다고답한것으로나타났다. CAF는미얀마의이와같은높은기부지수가국민대다수가믿고있는불교의영향, 즉사찰과수도승에게기부하는테라바다불교의관행이반영된것이라고설명하였다 (CAF 2016; Newsweek 한국판 ). 하지만이러한설명은기부라는현상이이루어지는사회문화적배경을지나치게단순화한것으로, 각사회마다그와같은차이가나타나는이유를적절히설명해주지는못한다. 우선미얀마에이어기부 2위국가로, 미얀마와는극적으로대조적인특성을지닌사회로여겨지는미국이자리하고있는데서부터설명의틀은어그러지는것처럼보인다. 무엇보다동일한테라바다불교의전통을보유하고있는동남아시아의다른사회들-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등-에서는유사한결과가나타나지않았다는점에서이설명은더욱힘을잃는다. 가령태국의경우순위에서한참밀려나 37위로기록되고있으며, 캄보디아의경우에는거의하위권에속하는 98위로한국 (97위), 일본 (114 위 ) 과그리큰차이를보이지않는다. 이러한결과는타인을위한사심없는행위로서 기부 라는행위가반드시특정한종교적전통과관련된것만은아닐수있으며, 또한양자간에일정정도유의미한상관관계가있다하더라도, 그 219

223 것-예컨대테라바다불교사회에서두드러지게나타나는공양의문화-이어디에서나사회적인차원으로확장되는것은아닐수있다는점을보여준다. 종교가그와같은행위를길러낼수있는토양을제공해준다하더라도, 그로부터어디에서나같은씨앗이싹을틔울것으로기대할수는없는것이다. 그렇다면이와같은차이를만들어내는요인은각기다른사회가공통적으로보유하고있는특정한문화요소에서찾기보다는그것이발현될수있는가능성의조건이라할수있는사회에관한분석으로부터찾아져야할것이다. 재난과전쟁으로큰피해를입은나라에서나눔의문화가더발전했다는, 기부지수산출결과에대한로이터통신의분석결과 (Newsweek 한국판 ) 역시기부라는행위를하나의사회적현상으로서, 각기다른역사적경험과조건속에서길러진, 사회적관계를조직화하고재화를분배함으로써사회를존속시키려는사회적인차원의움직임이라는관점에서다루어볼필요가있다는점을시사한다. 현대사회의 기부 는, 모스가 총체적인사회적사실 이라명명한바의전체적인급부의체계 ( 모스 2002) 로서, 그자체가사회를구성하는원리라고는보기어려우나, 그럼에도불구하고사회적인힘이그모습을드러내는한방식으로서여전히중요한사회과학적연구의대상이다. 전세계적으로전례없이기부의미덕과도덕적명분이강조되고, 또한각국에순위를매겨평가하는것과같이사회적으로이를확산시키려는움직임이강화되어가는현상은다양한차원에서분석될수있는여지가많다. 가령우리는이같은움직임이국가의역할을축소시키고이를사회에전가하기위한신자유주의적프로파간다에가까운것은아닌지를의심해볼수도있다. 모스의 증여론 에대한해석을통해 순수한선물 의관념이자기이해의추구가지배적인경제원리와함께나란히출현하였다는페리 (Parry 1986) 의주장은신자유주의의선두주자라할수있는미국이세계기부지수순위 2위를차지하게된기이한현상을설명하기에매우적절히들어맞는것으로보인다. 또한 공동체 와 자조 (self-help) 의중요성을강조하며사회적힘을동원하는데총력을집중하고있는근래의국제개발협력역시이러한설명틀이적용될수있는중요한영역가운데하나일것이다. 그러나그와같이다양한분야로연구를확장하기에앞서우리는먼저, 그것을옹호하기위해서든비판하기위해서든, 기부 라는사회적실천이특정한사회적맥락에서갖는의미와역할을확인할필요가있다. 이는, 겉보기에는동일해보일지라도실상서로다른원리에의해조직되거나체계화된것일수있는현상을하나의원리로환원시키는오류를경계하기위한것임과동시에 기부 라는행위가특정한역사적경험과환경을가진사회에서수행하는역할 220

224 을보다정확히이해함으로써, 자칫 그것을받는사람에게는더욱마음의상처를입히는 부유한 보시가 의무의식적이며모욕적인후원 ( 모스 2002: 250) 과같은것으로서기부의사회문화적의미가오염되는것을경계하기위한것이기도하다. 이에본연구는세계기부지수순위에서 1위를차지한, 그리고종교라는매우두드러진문화요소가그것의주된요인으로서제시되고있는미얀마를대상으로, 기부행위가미얀마사회라는맥락에서갖는의미와역할을살펴보고자한다. 이를위해 기부 에대응하는미얀마사회의개념인 아흘루 의특징을가장분명하게보여주는아흘루의한형식인종교의식 까테인 (Kahtein) 에대한분석을시도한다. 2. 까테인 의기원과세속적변형 까테인 은미얀마불교도들의삶에서매우중요한종교의식가운데하나로, 우기동안안거 ( 安倨 ) 에들어수행에정진하였던승려들에게의복과여러가지물품을봉헌하는의식을가리킨다. 이와같은형태의의식이시작된배경에는부처가살아있던시절의일화하나가전해지는데, 이를간략히요약해보면다음과같다. 부처가생존해있던당시 30명의승려들이부처를뵙고더깊은가르침을얻기위해먼여행을떠났다. 그런데긴여정이다끝나기도전에우기가시작되었고, 이에승려들은우기에자라는작물들과벌레들을해치지않도록우기동안밖으로나가는것을자제하라는부처의가르침에따라발걸음을멈추고그자리에거처를마련하여머물며수행에정진하였다. 이윽고우기가끝나자이들은다시여행을재개하였고, 마침내목적지에다다랐다. 부처앞에도착한이들의옷은온통진흙이묻고낡고해져누더기가되어있었다. 이를본부처는가르침을지키며수행에정진한승려들에대한보상으로세속의신도들로부터새옷을받는것을허용하였다. 본래승려들의옷은누군가가쓸모없어버린천조각을취하는것이라야했지만, 이사건을계기로승려들은신도들이기부한천으로새옷을만들어입을수있게되었다. 까테인 ( 빨리어로는 까티나 (Kathina) ) 은본래승려들이신도들로부터기부 받은옷감을옷으로만드는사용되던틀을가리키는말이었지만, 이후승려들 에게옷과여러가지필요한물품들을바치는의식을뜻하는말로사용되고 221

225 있다. 이와같은유래와까테인의본래의뜻으로짐작컨대초기의까테인은승려들이새옷을만들수있는옷감과바늘, 실정도를봉헌하는간소한형태로이루어졌을가능성이크다. 그런데현재의그것은경쟁적인포틀래치를연상케할정도로물품의종류와가짓수가매우다양하고많아졌으며, 세속의축제를방불케할정도로요란하고흥겨운것으로그성격이크게변하였다. 까테인의의미와취지를설명하는승려들의설법이나문헌들에서는전혀찾아볼수없는, 흡사서양의크리스마스트리처럼승려들에게바치는갖가지물건들을주렁주렁매단 빠데이다삔 (Padaythapin) 이까테인의상징물이된데서부터이러한변화를확인할수있다. [ 사진 ] 까테인을위해장식된빠데이다삔 ( 좌 ) 과빠데이다삔을싣고사원으로향하는차량행렬 ( 우 ) ( 사진출처 : w.exploremyanmartours.com/festival/kahtein-thingan-offering/) 모든것을갖춘나무 라는뜻을가진빠데이다삔이언제부터까테인의식 에등장했는지를알려주는문헌은 ( 현재까지는 ) 찾아볼수없으며일반인들은 물론필자가만나본승려들을통해서도알아볼수가없었다. 노소를불문하고 사람들은그들이기억할수있는아주어린시절부터까테인시기가다가오면 도처에서빠데이다삔을볼수있었다고말하며, 그와같은풍습은자신들이태 어나기도훨씬전, 어쩌면바간왕조시대보다더이전으로거슬러올라가는오 랜전통일것이라고말하곤하였다. 모두에게서확인할수있었던분명한사실 은과거와는달리최근으로올수록빠데이다삔은더욱화려해지고풍성해졌으 며, 이를꾸미기위한사람들의모금활동또한훨씬다채로워졌다는점이다. 마빠마핏, 즉까테인의식에서빠져서는안될물품들로, 가장중요한띤 간 ( 승복 ), 실과바늘, 윗투응웨 ( 돈 ), 공양그릇, 우산, 신발, 부채등이거론되곤 하지만실상그것의전체수와내용을정확히알고있는사람들은드물다. 띤 간과함께중요한것으로서꼽히는윗투응웨의경우영국식민통치시기에는 화폐가모두동전이었던까닭에현재와같이지폐를접어빠데이다삔에매다 는일도없었다. 본래까테인의핵심요소라할수있는띤간조차도본래는옷 222

226 감만을바치던것에서이미바느질이다되어있는기성품으로전환되어, 마빠마핏 에속하는실과바늘은과거관행의흔적처럼포함된물건이기도하다. 이처럼현재는쓸모가없어진물건까지도빠뜨리지않고모두포함하여빠데이다삔을장식하는물건들의목록은늘기만할뿐결코줄어드는법이없으며, 현대로올수록물품들은더욱다양해지고또한진보된기술을반영하여해가갈수록더욱풍성해져가고있다. 물주전자를대신하여전기주전자가매달리고경우에따라서는 ( 나무에매달지는못하지만 ) 정수기와에어컨, 심지어이들물건모두를실은차량까지사원에봉헌되기도한다. 까테인에봉헌되는물품들의목록에서발견되는이같은변화는본래테라바다불교의탁발관행에비추어보았을때는사뭇이해하기어려운측면이라할수있으며, 종종가난한사람들의등골을빼먹으며사회에기식하는것처럼보이는살찐승려들에대한비판의빌미를제공하기도한다. 하지만때로지탄의대상이되기도하는소수의사례들을들어까테인을 종교에빠져살아가는사람들의악습 으로매도하는것은삼갈일이다. 까테인이미얀마사회에서갖는의미를이해하기위해서는빠데이다삔과같이쉽게눈에띄는현상만이아니라, 대다수의까테인아흘루에서승려들에게봉헌하기위해모아진물건들이어떻게모인것이며, 또한그것이어떻게분배되는지, 그리고그러한과정전체가여기에참여하는사람들에게어떠한부가적인 ( 그러나본래의목적인까테인아흘루못지않게중요한 ) 의미를주는지등이함께고려될필요가있다. 3. 까테인을위한모금활동의조직화양상이갖는사회적의미까테인에서특히인상적인점은미얀마사회도처에서거의일상적으로행해지는여느아흘루와는달리, 그것이준비되고시행되는전과정에서집단적성격이매우강하게나타난다는점이다. 이러한특성을갖게된데는까테인의식을행함에있어지켜야할하나의규칙이적용된결과이다. 미얀마의불교도들은언제라도사원에방문하거나승려들을집에초빙하는등의형태로승려들에게공양을올리고설법을들을수있다. 이러한아흘루의횟수는제한되지않으며, 따라서한달에몇차례라도사원이나개인의집, 혹은담마용 ( 일종의명상센터 ) 과같은공동공간에서아흘루가개최될수있다. 하지만까테인은 땃흐닛흐마땃라, 땃라흐마땃짜웅, 땃짜웅흐마땃카 라는규칙의적용을받는다. 풀이하자면, 일년에한달동안만, 한달에한사원에서만, 한사원에서한번만 이라는뜻으로, 개인의집이나담마용으로승려들을초빙하는형식이아니라오로지사원에서만, 일년에단한차례만개최 223

227 되는것이규칙이다. 따라서누군가가이미한사원에서까테인을치르게되면다른사람들은그사원에서까테인물품을바칠기회를잃게되는것이다. 까테인에적용되는이제약은사람들로하여금무리를지어까테인에참여하게하고, 또한신도들이모은수많은물품들을한사원으로집중시키지않고여러사원에고르게분산되도록만드는효과를만들어낸다. 부유한개인이가족단위로물품을바치는경우도없지않으나대개의경우집단적인형태로이루어진다는점에서까테인에대한분석은미얀마사회에서사회적관계가형성되는방식을살펴보기에유용한방법이된다. 까테인물품을마련하기위해사람들은무리를이루곤하는데, 이러한조직화의양상은도시와농촌간에, 그리고같은지역내에서도개인이속해있는집단의성격에따라차이를보인다. 가령농촌지역의경우에는대체로마을단위나거주구역별로까테인모금이이루어지는반면, 다양한직업들로분화된도시의경우업종별로까테인을위한집단이조직화되는경향이발견된다. 또한같은업종이라도지역별특성에따라조직화되는양상이다르게나타난다. 예를들어대도시인만달레이와인근의소도시인삔우린의택시기사들이까테인에참여하는양상을비교해보면, 관광도시로서의성격이큰만달레이도심의택시기사들의경우영업과관련이있는호텔의경영주및직원들과함께까테인에참여하고, 모금액수에도강제성이없어내고싶은만큼을내는방식으로까테인에참여한다. 이와달리만달레이와삔우린을오가는장거리택시를운행하는택시기사들의경우택시기사들끼리모임을구성하여까테인에참여한다. 특히후자의경우에는까테인을위해매달 7천짯씩을적립하는데, 이경우소속원들은개개인이가진종교와무관하게의무적으로함께기금을적립하고불교의식인까테인에참여한다. 제법큰돈벌이가되는장거리영업을하는이들은손님이있다고하여내키는대로손님을받는것이아니라서로간에순번을정하여손님을받는형태로영업을하고있었으며, 따라서일정한규율이준수될필요가있었다. 종교를불문하고모두가함께적립하여참여하는까테인은바로그와같은조직문화를만들어내고주기적으로강화하는계기로서작용하고있는것이다. 4. 연구의의의와한계까테인은비단미얀마뿐아니라테라바다불교의본거지라할수있는스리랑카는물론태국이나라오스, 캄보디아등동남아시아국가들에서도공통적으로치러지는중요한종교의식가운데하나이다. 그러나기부의문화가동일한종교전통을가진나라에서동일하게사회적으로확산되지않는것과마찬가 224

228 지로까테인이갖는사회적의미와중요도또한각사회마다차이를보일수있다. 그러나그와같은차이로부터우리는동일한기원을갖는의식이각기다른사회적궤적을따라변화하게된원인과조건을찾고, 그로부터현재의차이를이해할수있는가능성또한찾을수있을것이다. 이를위해서는우선각사회마다의차이와그러한차이를배태해낸사회적조건을충분히이해하기위한연구를진행하고, 이를바탕으로각사회에대한비교연구로심화시켜갈필요가있을것이다. 까테인에관한본연구는그러한작업의출발점으로, 이후유사한전통을가진사회와의비교연구는물론그기원과형식은다르되유사한기능을하는다른사회의실천들에대한연구또한이끌어낼수있는실마리를제공해줄것으로기대된다. 이론적인차원에서욕심을내어보자면, 까테인을포함하여미얀마에서 아흘루 로지칭되는기부의행위는, 기존의선물교환에관한논의가대부분교환의당사자들간의관계에주목하고있는것과달리교환을중심으로여기에참여하는사람들간의관계에주목하게함으로써선물교환이갖는또다른차원의사회적의미를포착할수있는가능성을가진주제라고생각된다. 현재로서는아직연구가진행중인단계여서그가능성을보여주었다고보기는어렵지만, 연구를발전시켜감에따라그가능성은커질것으로기대한다. 무엇보다까테인에봉헌되는물품의변화와조직화양상이갖는의미를충분히분석하지못한점이현재로서는가장시급하게극복해야하는한계이다. 짧은요약문에미처담아낼수없었기때문이기도하지만, 현지조사를통해수집한다양한사례들이아직정리되지않았고문헌조사또한충분히이루어지지않았기때문이기도하다. 내용을보완하는한편분석을보다정교하게다듬는일이과제로남았다. 조만간더욱완성도를갖춘논문으로발전시켜과제를완수할것을약속드린다. 참고문헌및자료 모스, 마르셀 2002, 증여론, 이상률역, 파주 : 한길사 [ 원본초간 1925] Parry, Jonathan 1986, The Gift, the Indian Gift and the Indian Gift, Man 21(3): CAF 2016, CAR World Giving Index 2016: The World s Leading Study of Generosity, ( 16_report_web_v2_ pdf?sfvrsn=4) Newsweek 한국판 나눔 을가장좋아하는나라미얀마 (

229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난힌두서사의사회문화적맥락화 : Mahabharata 를중심으로 김예겸 ( 부산외대 ) 본연구는 Mahabharata 힌두서사를기반으로하는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대한분석을통해서 Mahabharata의힌두서사적내용이현대인도네시아에서어떻게맥락화되었는지를고찰하고, 이를통해서 Mahabharata의현대적표상과그맥락적함의를규명해보는데그목적이있다.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난 Mahabharata의힌두서사적내용의사회문화적맥락화는기존에거의다루어지지않은연구주제이며, 본연구의주분석대상인 Mahabharata 에대한사회과학적연구도흔치않은실정이다.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난 Mahabharata와관련된기존연구물들은다음과같은경향을보이고있다. 우선, 1920년대와 1930년대서구지식인및예술인들이만들어낸인도네시아의이국적인 진짜문화 (authentic culture) 이미지가글로벌화된관광이라는형태로소비되는현상하에서 Mahabharata가어떻게변해왔는지에대한분석을시도한다 (Kadek Suartaya 2016). 둘째, Mahabharata 공연예술에대한안무 (choreography) 나음악분야의심미적분석을통해 Mahabharata를소재로하는공연예술자체의심미적재구성과변용에대한분석을시도하기도한다 (Alter 2011). 셋째, 외부의영향으로부터인도네시아의문화를보호하기위한토착적방식들을모색하면서특정문화보전담론이형성되기도하는데이러한문화보전담론의기제하에서의 Mahabharata 등의전통문화가어떻게적응하는지를조명하기도한다 (Allen and Palermo, 2005; Atmadja, 2010). 넷째, Mahabharata의내러티브가소설및만화등의현대출판물에서어떻게투영되어나타나는지에대한분석도시도한다 (Damar Sasongko 2012). 또다른한편으로는 Mahabharata의힌두서사적내용자체를하나의텍스트로설정하고도구주의적으로해석 (Chakravarti 2009; Manikutty 2012; Smith 2002; Thaker 2011), 여성주의관점에서해석 (Brodbeck and Black 2007; Dayal 2010) 또는비교문헌분석 ( 참고 : 이은구, 2014; 임근동, 2012) 을시도하기도한다. 226

230 그러나본연구는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난 Mahabharata를글로벌문화소비현상의관점, 문화보전담론관점, 도구주의적관점, 예술심미적관점또는문헌분석관점보다는 Mahabharata의힌두서사적내용과구성자체를구조인류학자 Claude Lévi-Strauss의구조적비교분석방법을응용하여분석해보고브싸야의 Mahabharata가인도네시아의사회문화적맥락하에서어떻게혼종화되고, 재구성되고, 변용되는지고찰해보고자한다. 이유는상기된기존의 Mahabharata와관련된연구물들이문화의혼종화, 재구성및변용을다루고는있으나무엇이구체적으로어떻게맥락화되었는지, 즉어떻게혼종화되고, 재구성되고, 변용되었는지에대한구체적논의가부족하다고느끼기때문이다. 본연구에서는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나는 Mahabharata의사회문화적맥락화내용을고찰하기위해서세가지유형의 Mahabharata 작품을수집하고수집된다양한유형의 Mahabharata는구조인류학적분석방법 ( 배열분석, 비교분석 ) 을응용하여분석한다 ( 브야싸의 Mahabharata / 자바섬의 Bharata Yuda / 발리섬의 Adi Parwa). 그러나이들 Mahabharata 작품들을구조적으로비교분석함에있어서다음과같은방법론적제약도고려한다. 우선, 오늘날발견되는 Mahabharata 작품들이유구한역사시간동안에창안, 변경그리고재구성되어왔고, 또한발리사회에전해진 Mahabharata의원형이무엇인지조차불분명하기때문에, 브야싸의 Mahabharata에나타난 순전한 (purely authentic) 원형적내용또는다양한작품들에반영된 순전한 토착적가치체계와상징성을파악한다는것은현실적으로불가능한일이다. 또한비교분석을위해서수집된 Mahabharata 작품들이자료수집당시의시점과공간을기준으로자료들이선택되기때문에자료수집당시의시점과공간과관련된 선택성 ' 의문제가분명히존재한다. 따라서본연구에서는현실적으로파악이불가능한 순전한 원형적내용과상징성분석에초점을맞추기보다는브야싸의 Mahabharata를기준으로 Mahabharata 작품들간에나타나는 차이 (difference) 를구조적으로파악해내고그함의를분석하는데초점을맞춘다. 또한자료 선택성 의문제를극복하기위해서현실적으로가능한일반화와보편성을고려하여 Mahabharata 작품들을선택하여분석한다. 본연구는인도네시아의 중층적 문화구성에지대한영향을준힌두서사시 Mahabharata 가어떻게인도네시아의역사문화적맥락하에서재구성되고, 혼 종화되고, 변용되고그리고표상화되는지를공연예술에대한분석을통해서고 227

231 찰한다. 따라서본연구는다음과같은학문적기여및실용적활용방안을기대해본다. 첫째, 본연구는인도네시아공연예술을매개로 Mahabharata의힌두서사가인도네시아사회문화에어떻게맥락화되었는지를살펴봄으로서동남아문화연구에서주요하게대두되고있는외부문명의토착화 (localization), 재토착화 (re-localization) 또는맥락화 (contexualization) 를이해하는데주요한민족지학적자료가되어줄것으로기대된다. 둘째, 본연구는인도네시아공연에나타난 Mahabharata의힌두서사적요소에대한구조인류학적분석을통해서여타문화의 맥락화 또는 토착화 논의를한차원더높여주는연구가되어줄것으로기대한다. 셋째, 본연구힌두문화적상상력을가지고힌두문화의맥락화관점에서인도네시아를바라봄으로서인도네시아인이자신들의문화를만들어가는방식을그들의기저토대문화의맥락에서이해하는토대가되어줄것으로기대한다. 이러한측면에서 2017년개원예정인 아세안문화원 등의 Beyond Museum 문화컨텐츠 ' 개발에도일조할것으로기대한다. 동남아시아는기원전 2세기부터점차적으로다양한직간접적인경로를통해서힌두문화영향을받기시작했는데, 말레이반도등의동남아시아를왕래하던바이샤 (Vaisya) 계층의상인들및크샤트리야 (Kshatriya) 계층의여행자들이초기힌두문화유입에주요한역할을담당했다고알려져있다. 인도네시아는 1세기이전에이미다양한경로를통해서힌두문화를받아들였던것으로보이고, 4세기에이미깔리만딴 (Kalimantan) 과자바 (Java) 에힌두문화가번성한왕국들이존재했었다고알려져있다. 인도네시아의힌두문화는주로자바를중심으로부흥했는데, 특히 8~15세기에힌두문화의황금기를맞이했다. 이시기에 Mahabharata 및 Ramayana 등의힌두서사, 우주론적세계관, 의례, 사회문화적제도, 예술등의다양한힌두문화요소들이본격적으로유입되어실험되고실천되었다. 그러나 13~15세기이후에는발리 (Bali) 를제외한인도네시아전반적으로이슬람문화의팽창시기와맞물려힌두문화의영향력이급속히쇠퇴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간과하지말아야할것은힌두문화가산재되어있던인도네시아의토착적요소들에상징적인 통일성 을부여한외부문명이었다는점이다. 또한힌두문화의관념적인종교문화유산및우주론적세계관이시간을초월하여현대인도네시아전반에걸쳐아직까지도토착문화와더불어서주요한 기저토대문화 로존재하고있고, 이는현대인도네시아에서발견되는관념체계및예술문화에상징적으로나타나고있다는점은주목할만하다. 228

232 특히 Mahabharata는인도네시아의토착문화의토대위에서맥락화 (contextualization), 즉현지의환경적그리고상황적요소들과어우러져혼종화, 재구성및변용의과정을거쳐서인도네시아의 중층적 문화구성에있어서함축적이고상징적인영향을끼쳤다. 특히 Mahabharata는인도네시아공연예술구성및내용에있어서지대한영향을미쳤는데,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나는 Mahabharata의혼종화, 재구성및변용은힌두문화의관념적이고상징적인요소들이인도네시아의토착적인요소의토대위에서맥락화하여인도네시아의예술문화에표상되는전형적인본보기이다. 인도네시아의공연예술은힌두문화의관념적이고상징적인영향을받아들이거나, 또는 Mahabharata 및 Ramayana 등의힌두서사의토대위에공연예술의서사적구성및내용을독특하게발전시켜왔다. 주인공라마 (Rama) 가라바나 (Ravana) 에게납치된시따 (Sita) 를하노만 (Hanoman) 과원숭이동맹군의도움으로구해내는이야기를다루는 Ramayana의서사는오늘날와양꿀릿의주요한줄거리가되었다. 그러나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있어서보다더광범위하고포괄적으로표상화되어나타나는힌두서사는 Mahabharata인데, 자바지역에서는 Mahabharata가자바의토착적요소와혼합된 바라따유다 (Baratayuda) 로도알려져있다. 자바그림자극인와양꿀릿 (wayang kulit) 은빤다와 (Pandawa) 가문과꼬라와 (Kaurawa) 가문이하스띠나 (Hastina) 왕국을놓고분쟁하는이야기를다루는 Mahabharata의서사를주로공연하고있다. Mahabharata는기원전 3세기경선인브야싸 (Vyāsa) 에의해서작성된힌두역사서이며힌두서사시이다. Mahabharata는학술적인문헌의장구분법인 아드야야 를따르고있고, 문학작품의성격보다는백과사전적인역사서성격이강하여제5의베다 (veda) 로인정받기도한다. Mahabharata는전반적으로하스띠나 (Hastina) 왕국을놓고벌이는빤다와 (Pandawa) 가문과꾸라와 (Kurawa) 가문간의분쟁이야기를담고있다. < 표1> 에서보는바와같이힌두서사시 Ramayana는주인공라마 (Rama) 를중심으로전개되는 뿌라깔빠 의성격을띠고있는반면에 Mahabharata는여러주인공들을중심으로전개되는 빠리끄리야 의성격을띠고있다. 229

233 < 표 1> Ramayana 와 Mahabharata 의비교 Mahabharata Ramayana 브야싸 (Vyāsa) 가작품속의등장인물로발미끼 (Vālmīki) 가서자신이경험한사실을바탕으로작나라다에게서듣고작품을씀품을씀역사서이며대서사시 ( 대서사문학, 선인문학, 의지문학 ) 백과사전적인역사서성격이강함상대적으로문학작품의성격이강함 ( 제5의 Veda로인정받음 ) 학술적인문헌의장구분법 ( 아드야야 ) 대서사시의전형적인장구분 ( 싸르가 ) 빠리끄리야뿌라깔빠 ( 여러인물을중심으로전개되는역사 ( 한인물을중심으로전개되는역사서 ) 서 ) 시기적으로 Ramayana( 기원전 6세기 ) 가 Mahabharata( 기원전 3세기 ) 에선행했을가능성이있으나, 후대에삽입된부분들은일부 Mahabharata가선행했을가능성도있음. Mahabhatara가분량면에서 4배정도많음서로다른문화권의작품일가능성이큼 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나는 Mahabharata에는서사적내용의다양한변형이발견되는데, 이는 Mahabharata 서사적내용의맥락화 (contextualization), 즉현지의환경적그리고상황적요소들과어우러져혼종화, 재구성및변용의과정을거쳤음을보여주는사례이다. 예를들어, 브싸야의 Mahabharata 초반부에는 니요가 (niyoga) 라는 씨받이남편 풍습또는주인공가문인빤다와 (Pandawa) 가문에형제연혼 (fraternal polyandry) 풍습이나타나나, 자바및발리의 Mahabharata에는이러한풍습이표현되고있지않다. < 표2> 에서보는바와같이, Mahabharata는자바와발리섬에나타나는서사적내용의다양한변형뿐만이아니라지역에따라다양한구성의판본이존재한다. 230

234 < 표 2> Mahabharata 의다양한판본 판본 브야싸의 Mahabharata - 18 Parwa( 편 ) 으로구성 구성및내용 Adi Parwa, Sabha P, Aranyaka P, Wirata P, Udyoga P, Bhisma P, Drona P, Karna P, Shalya P, Sauptika P, Stri P, Santi P, Anusasana P, Aswamedha P, Asramawasika P, Maushala P, Mahaprasthanika P, dan Swargarohana PAdi Parwa, Sabha P, Aranyaka P, Wirata P, Udyoga P, Bhisma P, Drona P, Karna P, Shalya P, Sauptika P, Stri P, Santi P, Anusasana P, Aswamedha P, Asramawasika P, Maushala P, Mahaprasthanika P, dan Swargarohana P - 10세기경동부자바 Medang 왕조의마지막왕인 Dharmawangsa 왕의명으로여러명의편집자에의해서작성 - 주로 8 Parwa( 편 ) 으로구성 자바의 Mahabharata Adi Parwa, Wirata Parwa, Udyoga Parwa, Bisma Parwa, Asramawasika Parwa, Maushala Parwa, Mahaprasthanika Parwa, Swargarohana Parwa - 그외에 Utara Kanda (Ramayana 마지막부분 + Bagawan Byasa 의기원이야기 ) 도포함되기도함. 발리의 Mahabharata - 생략된 Parwa는자바변형작인 Bharata Yuda로대체되어나타남. - 발리에서는주로첫번째 Parwa인 Adi Parwa가일반적임 - Adi Parwa 에는다양한영웅들의이야기가포함되어있음 (Bharata Yuda, Arjuna Wiwaha, Gatutgaca Sraya, Bima Swarga, Dewa Ruci, Bomantaka, Kresnayana) 오늘날인도네시아공연예술에나타나는 Mahabharata는여전히브야싸의 Mahabharata의주요구성과이야기전개구조를유지하고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다른형태의힌두문화요소와마찬가지로 Mahabharata는인도네시아의토착적요소들과혼종화되면서재구성되거나또는인도네시아사회의맥락과필요에따라변용이되기도했다. 이러한혼종화, 재구성그리고변용은다양한형태의 Mahabharata로승화되었는데, 자바지역에나타나는 Bharata Yuda는그전형적인본보기라고할수있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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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분과회의 6 신진박사발표 1. 최인아 ( 서강대 ) Elite capture of participatory governance: The case of Musrenbang in Indonesia 2. 이경묵 ( 서울대 ) 범람과실험실 - 마을의중지 3. 정정훈 ( 서강대 ) 발리우붓지역관광발달과전통의재구성 : 뉴꾸닝주민의 문화적실천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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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Elite capture of participatory governance : The case of Musrenbang in Indonesia Ina Choi 84) Draft only. Please do not cite. 1. Introduction Over the last few decades, democratic decentralization has been one of the key reform measures in developing countries. There are various mixed motives for implementing decentralization (Manor 1999), but the latest wave for decentralization was a largely donor-driven initiative as a means to promote good governance. By bringing the government closer to the people, it is assumed that local governance is more responsive to citizens desires, thereby making the government more accountable and efficient. Here, citizen participation has been strongly emphasized both as a pre-condition and as a goal in the process of the successful decentralization, given its potential contribution to accountability, transparency, poverty reduction and the empowerment of the marginalized (Blair 2000). Against this backdrop, governments in developing countries have introduced various participatory schemes to encourage public participation in decision-making 85) Indonesia, where public participation was highlyl imited under Suharto s authoritarian rule, has also encouraged participatory governance with donors support for democratic decentralization. One of the key initiatives taken by the Indonesian government in the reformation era was the implementation of participatory budget process, called as Musrenbang (Musyawarah Perencanaan Pembangunan). With the introduction of Musrenbang, people are given the chance to reflect their aspirations in budget formulation and thereby have a greater say in the policy-making process which 84) 서강대학교동아연구소연구교수 85) The best-known example is the experiment in participatory budgeting in the city of Porto Alegre (Brazil) which provided a role model for other Latin America countries to follow. 235

239 was previously dominated by elites. To borrow Brock et al. s (2001) term, formerly closed spaces are now open to the public. What is less certain, however, is whether such institutional frameworks work to the extent of increasing people s voices and bargaining power in actual policy-making. Indeed, there is considerable evidence to show that participatory mechanisms do not necessarily produce the intended outcomes. Participatory processes could be manipulated to the extent of consolidating existing political and social inequality rather than increasing the voices of the marginalized in decision-making (Cooke 2001; Fox and Aranda 1996; Schönwälder 1997; Taylor 1998). As a principle cause of failure, critics highlight that current participatory development policies focus heavily on technical measures (institutional arrangements) with little consideration of the issue of power and politics (Cornwall 2004; Gaventa 2004; Rahnema 2010; Williams 2004). As such, Gaventa (2004: 25) emphasizes the need to understand participation in the context of the power relations, arguing that whether the creation of new participatory mechanism can be more inclusive or pro-poor depends on the nature of the power relations which surround and imbue these new, potentially more democratic, spaces. Drawing upon these criticisms, this paper explore the way in which institutional reforms towards participatory governance in Indonesia unfold in practice. Based on the case study of Musrenbang in two districts (Bantul and Magelang in Central Java), the paper examines how ruling elites take advantage of the participatory mechanism to claim democratic legitimacy while leaving existing power relations intact. By shedding light on elites co-option of participatory governance, the paper attempts to unpack a more nuanced understanding of elite capture in post-suharto Indonesia. 2. The mechanism of Musrenbang and the summary of the case study 86) Musrenbang is a process of synchronizing top-down (the government s macro development plans) and bottom-up (people s proposals channeled from villages) planning (see Figure 1). Through village and sub-district Musrenbang meetings, villagers make proposals and village representatives prioritize proposals from each village and decide which proposals will be brought to the meeting at the district level. Meanwhile, the district government also prepares their own plans through the Regional Working Unit (SKPD) forum and make a decision on what 86) This is drawn upon the fieldwork of the author in Bantul (Yogyakarta) and Magelang (Central Java Province) from February to April

240 programs will be prioritized in the government budget. When both sub-district governments and the SKPD submit their outcome documents to the district government, the district Musrenbang meeting is held. Led by the Regional Development Planning Agency (BAPPEDA) and attended by representatives of sub-district governments and local NGOs, the district meeting prioritizes those proposals again through agreement between sub-district delegates and the SKPD. The central government institutionalized Musrenbang through Law No. 25/2004 on National Development Planning, advising regional governments to adopt this participatory planning approach at all levels of government. Having seen Musrenbang as an integral part of local governance reform, donors (e.g. UNDP, USAID and the World Bank) have also enthusiastically provided technical assistance and consultation to regional governments. [ Figure 1 ] The Mechanism of Musrenbang 237

241 Villagers in Bantul and Magelang acknowledged that Musrenbang allowed them to freely put forward their opinions regarding development planning. Nevertheless, they were pessimistic about the role of Musrenbang in accommodating their voices in actual policy-making. Skeptical views on Musrenbang mostly stemmed from institutional loopholes that do not allow the public to have authority in budget allocation. People were free to submit their proposals, but whether or not these proposals can secure funding depended on bureaucracy at the district level. The cases in two districts show that the representatives of sub-districts could not join or observe the processes of budget formulation - the General Budget Policy (KUA: Kebijakan Umum Anggaran) and budget ceilings (PPAS: Penetapan Plafon Anggaran Semantara) - which were agreed upon by the executives (the regent) and local assembly (DPRD) (see Figure 1). This is often spoken of as a gray area or black box because the processes of KUA and PPAS are not open to the public. Delegates of sub-districts and local NGOs are excluded from overseeing how budget allocation is decided in these processes. It was observed that, although the district Musrenbang is designed to synchronize villages proposals and the government s own development plans (the result of SKPD forum), the government did not equally review proposals from villages, placing a greater weight on the plans of the government. Thus, in order to secure funding, villagers did not have any choice but to propose programs considering the government s own priorities, which is far from bottom-up planning. Yet, a more serious problem was that the lack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did not allow villagers to learn about which proposals would have more chance of being accepted. Furthermore, parliamentary members wielded heavy influence over budgeting processes. When politicians acquired seats, they negotiated with the regent over how much money would be given to the bedrock of the party s supporters. The money was allocated in the form of programs (e.g. reinvigorating the economy or infrastructure-building), but those projects usually brought benefits to their own supporters. Under such circumstances, villages without political backing found it difficult to secure budgets through Musrenbang. 3. Musrenbang as a depoliticizing tool? District governments claimed to advocate participatory governance, and it was widely accepted that Musrenbang set the foundation for this. When asked about 238

242 how public involvement worked in these districts, almost all government officials mentioned the example of Musrenbang, saying that people are actually engaged in policy-making from the village level. Compared to Suharto s regime, Musrenbang indeed opened a space for ordinary people to take part in policy-making. Those who had never been involved in community development planning came to voice their needs, which was impossible in the New Order era. People were no longer afraid of speaking out in public and became free to express their aspirations. However, in-depth examination revealed that such increased participation has not empowered the people to the extent of exercising actual power to affect decision-making processes. Although previously closed spaces were opened to the public, voices from below were virtually unheard when final decisions were made. Decision-making power still resided with senior government officials and parliamentary members. Nevertheless, the inclusion of the public in the planning mechanism created the impression that the local government was moving towards democratic governance, and this in turn helped elites strengthen their political legitimacy. Further to this, although budget allocation was heavily influenced by political interests, Musrenbang serves to obscure this by translating the perennial problem of unequal power relations into a merely administrative matter. This is explicitly shown in the responses of government officials to people s grievances over Musrenbang. When we see the details of proposals, we found many which are quite wrong they are not consistent because proposals from people are not based on what they really need, but on what they want. That s the difference. Why can t all proposals be accommodated? It s because 80 percent of the budget from the central government is used up covering the salary of civil servants if there is not money, what can we do? That s why we have to determine priorities (interview with the head of Economic division of BAPPEDA in Bantul on 21th Feb. 2011). By citing the budget deficit, the failure to fund villagers proposals was seen a technical problem. In this way, budget shortages became a plausible excuse for elites to prioritize their decisions over proposals from villages. On the other hand, there was no public scrutiny of whether such limited resources were properly distributed and whether decisions were made transparently. By simply pinning the blame on the budget deficit, elites diverted public attention from their exercise of political power over the distribution of scarce resources. Further to this, the government attributed the failure of proposals to villagers fault on the grounds that they proposed something wrong. The sentences above such as 239

243 they [proposals] are not consistent or proposals from people are usually based on what they want not on their needs imply that the problem was due to people s ignorance of public policy-making. As in the budget deficit problem above, villagers failure to secure fund was translated into the technical problem (villagers lack of knowledge of policy-making) which disguised the decision-making processes largely influenced by political interests. With no increase in the political power of ordinary people, improved participation through Musrenbang has done little to change entrenched power structures. Under external pressure (from the central government and donors) to carry out participatory governance, ruling elites chose to use the participatory mechanism in such a way as not to challenge the existing order. Further to this, they used Musrenbang as an instrument to seek democratic legitimacy arguing that bottom-up participation actually took root in their districts. On the other hand, under the guise of democratic participatory governance, unequal power relations embedded in Musrenbang the exclusion of the people in budget formulation and unequally distributed resources influenced by interests of the ruling elite received little attention. By highlighting the budget deficit or villagers incapability to propose the right proposals, the government tries to disguise two fundamental and structural problems: first, the institutional loopholes of Musrenbang which exclude the public from final decision-making; and second, the situation in which political interests are prioritized over aspirations from below. Treating political problems (i.e. decision-making largely influenced by political interests) as technical ones (e.g. limited budget or uncompetitive proposals) tends to gloss over the unequal power structure that controls budget allocation from behind the scenes. In additio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Musrenbang was likely to narrow the possibilities of radical movements by delegitimizing other forms of popular participation. Despite its ineffectiveness, Musrenbang was still seen the first channel that people considered to make their voices heard. The existence of the formal mechanism made them hesitate about taking radical action for fear that it might adversely affect the situation. Therefore, although people were aggrieved by unfair budget allocation, they preferred to solve the problem within the formal mechanism established by the government. This prevented people from considering radical action such as speaking out sharply against the government or mobilizing collective action to challenge government decisions. In this sense, it 240

244 can be argued that Musrenbang plays a part in facilitating participation amenable to government control in that it makes people avoid direct confrontation with the government. 4. Conclusion Although opening spaces for public participation improved ordinary people s engagement in policy-making to some degree i.e. transforming their aspirations into proposals and submitting them to the government, which was hardly imaginable in the New Order era, their capacity to influence final decisions turned out to be minimal. As the cases above illustrate, increased participation in the public forum did not necessarily mean that they could exercise enough political leverage in decision-making processes. Decision-making power was still left in the hands of a minority of powerful elites and the voices of the public were not effectively heard if these did not match elites ones. Yet with the existence of the participatory mechanism, the local government and the ruling elite sought democratic legitimacy claiming that villagers actually provide input into policy formulation. Furthermore, Musrenbang gave elites a legitimate chance to conceal unequal power relations by ascribing the problem of unevenly distributed resources to technical matters (i.e. limited budget or villagers ignorance of public policy). Especially, allocating budgets on a competitive basis obscures structural issues in the sense that it highlights villagers incapacity to propose appropriate or competitive proposals. In short, in the face of external pressures towards good governance, local elites found ways to accede to such demands while sustaining old patterns of politics. Instead of entirely resisting pressures from donors (or sometimes technocrats in Jakarta) that have promoted democratic decentralization, local elites effectively capitalized on them as a means of legitimizing themselves. Embracing participatory governance and the institutionalization of it (Musrenbang in this case) played a part in showing their commitment to democracy albeit only rhetorical, thereby building legitimacy for their rule. More importantly, the opening of official channels to accommodate people s aspirations tended to prevent the rise of radical social forces by incorporating them into managerial mechanisms controlled by the government. People were not tempted to politicize fundamental issues (i.e. their lack of authority in budget formulation and budget allocation heavily influenced by political interests). The ruling elite controlled the 241

245 mode of participation in such a way that people address problems and resolve their grievances within the boundaries defined by the government. This tended to preclude radical participation, helping ruling elites to maintain the status quo. References Blair, H. (2000) Participation and Accountability at the Periphery: Democratic Local Governance in Six Countries, World Development, 28 (1): Brock, K., Cornwall, A. and Gaventa, J. (2001) Power knowledge and political spaces in the framing of poverty policy, IDS Working Paper 143, Brighten: Institution of Development Studies. Cooke, B. (2001) The Social Psychological Limits of Participation?, in B. Cooke and U. Kothari (eds) Participation: the New Tyranny?, London: Zed Books. Cornwall, A. (2004) Spaces for transformation? reflections on issues of power and difference in participation in development, in S. Hickey and G. Mohan (eds) Participation: From Tyranny to Transformation?: Exploring New Approaches to Participation in Development, London and New York: Zed Books. Fox, J. and Aranda, J. (1996) Decentralisation and Rural Development in Mexico: Community Participation in Oaxaca s Municipal Funds Program, Monograph series 24, San Diego: The Centre for U.S.-Mexic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Gaventa, J. (2004) Towards participatory governance: assessing the transformative possibilities, in S. Hickey and G. Mohan (eds) Participation: From Tyranny to Transformation?: Exploring New Approaches to Participation in Development, London and New York: Zed Books. Manor, J. (1999) The Political Economy of Democratic Decentralization, Washington D.C.: World Bank. Rahnema, M. (2010) Participation in W. Sachs (ed) The Development Dictionary: a Guide to Knowledge as Power, New York: Zed Books. Schönwälder, G. (1997) New Democratic Spaces at the Grassroots? Popular Participation in Latin American Local Governments, Development and Change, 28 (4): Taylor, L. (1998) Citizenship, Participation and Democracy: Changing Dynamics in Chile and Argentina, London: St. Martin's Press. Williams, G. (2004) Towards a repoliticization of participatory development: political capabilities and spaces of empowerment, in S. Hickey and G. Mohan (eds) Participation: From Tyranny to Transformation?: Exploring New Approaches to Participation in Development, London and New York: Zed Books. 242

246 범람과실험실 - 마을의중지 Overflowing and Lab-Village in Suspension 이경묵 ( 서울대 ) 1. 부분적해결책과실험실 - 마을 본발표는지난 20 여년간물문제를해결하고자하는정책적실험이이어져 온북부자카르타의한빈민촌 ( 이하 P 마을 ), 그중에서도 우기의절정기 의마 을에초점을맞춘다. 87) 1998 년의물민영화와 2000 년이후잦아진대홍수는 자카르타의문문제를부각시켰고, 북부자카르타에위치한오랜빈민촌중하 나가여러물프로젝트의대상으로선정되었다. 상수도부분확장, 공동계량기 사업, 물보급소의운영과빈민촌에한정된낮은수도요율적용, 하수도를막 고있는쓰레기를치우기위한쓰레기은행사업, 홍수시기의무상구호품배급, 홍수가끝난후의소독약배포등의프로젝트가진행되었다. 여기서주목해야 할점은 P 마을에서의물프로젝트들이각가구에상수도를연결시키거나홍 수를근절시키는기반시설의건설이아닌 부분적 해결책들이었다는점이다. 부분적 해결책이란구체적개입이가능하도록문제를한정하여식별하는방 식이여럿이며그것들이왜그리고어떻게 해결책 으로받아들여지고실행될 수있는지, 그리고해결책이 부분적 이었음은언제까지드러나지않고용인되 는지를질문하게끔한다. P 마을에서 물문제와그해결책 의짝들은충돌한 다. 예를들어상수도부분확장은상수도관과각가구사이의연결을 의도적 으로 주민의몫으로남겨둔다. 빈민촌의주민중비합법적거주자가다수이기 때문이다. 반면공동계량기사업은합법 / 비합법의여부를묻지않았다. 또한 깨끗한물과마을정비에서주요한역할을담당하는 NGO 는홍수의절정시기 에무상구호를차선책으로만간주한다. 주민들이구호에의존하게된다는이유 에서이다. 그러나홍수가마무리될때수인성질환의확산을예방하기위한소 독약배포사업은 NGO 의주된활동이다. P 마을의물문제와해결법의연결 (coupling) 은계속해서새로운물 ( 문제 ) 을 87) 본발표는발표자의학위논문 5 장에초점을맞추었다. 이에부분적해결책, 물다양체, 실험실 - 마을중마지막인실험실 - 마을과우기의마을에만한정되어있다는한계를지닌다. 243

247 만들어내었다. 마을은여전히매년홍수에시달리고, 물장수는폭리를취하며, 도저히어찌해볼도리가없는 빈민들은여전히물을얻지못한다. 상수도의부분확장후물가게가들어서고여전히통상의수도요금보다 8-10배의가격으로생활용수가팔리고있음에도불구하고 이전과비교했을때더싼가격 으로 더편리하게 물을얻을수있다는이유로, 홍수의절정기의아수라장시기를제외하면도시의수돗물네트워크로의접속과홍수의원흉인쓰레기를없앨주민조직이활동하고있다는이유로, 바람직한주민 (NGO에소속된주민조직 ) 들이바깥으로여행하며성공사례를전하는강연자가되었다는이유로, P 마을은성공한실험실-마을이된다. 2. 모두가다아는비밀 (Open Secrets) 많은정책연구들이그정책이 ⑴ 엄밀한의미에서는계속실패하고그목적과충돌하는듯보이는예기치않았던효과를불러오며 ⑵ 그럼에도불구하고그중몇몇이성공사례로서또다른곳으로전파됨을보여주었다. 정책의예기치않은역효과와편향성은모두가아는비밀 (open secret) 이다. P마을은물문제에시달리는곳으로주목받았고외부 ( 국가와국내외 NGO) 의주도하에프로젝트가진행된다. 이에주목한다면 P마을은정책의실험실 이다. 그러나이단계에서실험이란은유 ( 隱喩 ) 에머물러있다 ; 마치과학자와같은정책전문가들이마을에서실험하듯이정책을시행한다. 은유에멈춘실험의의미에서정책 (policy) 의삶은정책을고안해내는전문가의머리에서나와그것을실행하는현장의활동가를거쳐정책대상에다다르는경로혹은계획에서출발하여현장에서의실행을거쳐정책의효과를평가하는작업을의미할것이다. 반면 P마을에서는상충하는전제와방법을지닌여러제안들이병립하며, 정책이시도되고실패하고또실패했음에도성공사례로탈바꿈하며기존의해결책과전혀다른방안이한시적으로적용되기도한다. 이럴경우마을은정책실험이수동적으로 적용되는 백지가아니라정책 ( 적진리 ) 이 ( 가 ) 태어나는장소가된다. 즉실험실-마을이란마을을무대로특정정책 ( 들 ) 이수행된다는점에그치지않고빈민촌의물 ( 문제 ) 이라는영역에서문제를식별하고그에대한해결책을고안하는평가하는기준이바로그자리에서만들어짐을뜻한다. 과학의실험실과달리정책의실험실-마을은 진리를찾아낼수있는잘조직화된조건 의충족시키는방법론을찾기보다는정책이실행될수있는지그리고그실행의결과효과 ( 또는성과물 ) 이나올수있는지에보다초점을맞춘다. 당면문제에대한해결책의효력을가름하는기준을마련할때 244

248 소극적의미의현장은실험실 - 마을이될것이다. 88) 3. 우기의절정 P 마을에서가장뚜렷이드러나는시-공간의분절은깨끗한물시기 / 짧은홍수의시기이다. 이는건기 / 우기라는통상적구분과는다르다. 설날 (Chinese New Year's day) 을전후로대략 2주간의홍수의절정에서 P마을은묘한분위기에휩싸인다. 마을곳곳을채운범람한물로인해 ( 깨끗한 ) 물-프로젝트들은정지하고평소에는보이지않았던 국가 의모습과역할이전면에드러난다. 깨끗한물, 하수도정비등의사업이 NGO의주도하여기획되고실행되며평가될수있는반면홍수시기에주민들이도움을청할수있는이는국가뿐이다. 우기의절정에서코디네이터와마을지킴이들은언제구호물자가도착하는지를묻는주민들의질문에시달리지만, 구호물자의배포시기는미리알수없다. 홍수의절정에서합법적 / 불법적, 모범주민 /( 마을의행사에적극적으로참여하지않는 ) 보통의빈민의구분은사라지고주민모두가같은입장이되고무상의구호품 ( 생수, 옷가지 ) 와거대한이동식물탱크, 흙탕물을쓸수있게해주는정수기계등이아무조건없이무상으로제공된다. 주민들은 1년내내홍수시기의경험을모험담처럼떠든다. 깨끗한물의시기에는보이지않던국가는분배의원칙을적용하거나주민을식별하지않고무상의선물을배포한다. 주민을보호하는유일한후견인으로서 은총 을베푼다. 그러나홍수가천재 ( 天災 ) 가아니라인재 ( 人災 ) 정확히말하자면국가가스스로만들어낸재해이자국기기능의실패라는점에서무상원조는국가가주민에게부채를갚는것이라고도볼수있을것이다. 마을의주민들은구호품과도움에감사하지만그와동시에 당연히받아야할것 이라생각한다. 국가가주민들의 유일한 후견인으로서가장확실한역할을하는순간은그자신의실패가만천하에드러나는순간이다 대응과도움 : 범람한물 - 실험실마을의중지 88) 과학기술학에서실험실 (Laboratory) 연구가등장했을때많은이들이구체적장소에대한분석을통해과학과기술이만들어지는방식을검토할수있게되었다는점에주목했다. 실험실이필드가된것이다. 반면, 과학기술학영역에서과학적실천이이루어지는공간구분에기대어실험실과학 (lab science) 과현장과학 (field science) 을구분했다는점에주목할필요가있다 (Henke and Gieryn, 2008). 과학자들이일하는실험실이라는공간과그실험결과가그바깥으로나와보통사람들의삶에영향을끼치는필드공간이라는구분을받아들일경우현장 (field) 의의미는실험실보다더욱더복잡한세팅이라는정도로축소된다. 본발표에서 실험실 - 마을 이란마치실험실처럼작동하는현장으로위의전통적구분을변형시킨다. 실험실연구가실험실을필드로간주했던반대방향으로현장이실험실과같이기능하는시공간을분석할수있다. 245

249 P 마을에서의홍수는일상적으로반복되는재해이며모두가마을에물이차오를것을알고있다. 그러나범람의정도가평상시와같을지아니면더심할지를알수없다. ( 발표자료의 홍수의나이테 참조 ) 그리고마을의 공식적 사업파트너였던 NGO, 미래의전망 ( 가명 ) 은홍수의절정시기에별다른활동을미리계획하지않았다. 미래의전망 의책임자였던길룸 ( 가명 ) 은본부에서홍수와관련된지원은하지않느냐는질문에다음과같이답했다. 길룸 : 홍수피해가아주심각하면구호품이내려옵니다. 아직까지그런상태는아니어요. 솔직히홍수구호물자는근본적인해결책이아니고장기적으로본다면그리좋은영향을끼치는것만도아니죠... 당연히침수가심각하면도와야죠. 하지만홍수때마다구호물자를당연히받는것으로생각하면안되는데이때쯤되면다들아무일도하지않고도움이오기만을기다리는사람들도있어요. 우기의절정이다가올때마을사람들은미래의전망의책임자, 코디네이터그리고활동가주민에게구호물자가언제도착할지에대한질문을수없이듣는다. ⓵ 보통의주민들은공무원-NGO활동가-지킴이주민을하나로묶어서구호물자를주는쪽이라생각한다. 그들은이미마을이물에잠긴상황에서항상늦게도착하는구호물자가언제도착할지를그들의눈에는공무원과다를것이없는 NGO활동가와주민활동조직 ( 지킴이 ) 에게반복해서붇는다. ⓶ NGO활동가는통상적으로반복되는홍수상황에서구호물자는주는쪽은공무원들이며, 구호물자주기가장기적인관점에서는바람직한시도가아니라고본다. 주민들이 도움 을당연히받아야한다고생각하는것은주민자치와역량강화라는목표를놓고볼때극복해야할문제이다. NGO조직을통한홍수시기의구호활동은홍수의규모가매우클때만한정된다. ⓷ 지킴이주민은구호물자를주는쪽은평상시의홍수와대홍수때를포함하여 NGO조직과국가공무원즉 사무실사람들 이라생각한다. 결정권이나권한이없는자신들은홍수의절정에서그저 주민 과다를것이없다. 구호물자를칭하는두가지단어인레스폰 (Respon) 과도움 (Bantuan) 은위의인식차이를보여준다. 언제구호물자가오는지를물을때혹은왜구호물자가오지않는지를물어볼때거의모든경우에 도움 이아니라대응대처라는단어가사용된다. 일반주민과지킴이주민의구분과관계없이 도움 이라는단어가사용되는때는이미구호물자가도착한이후에, 그리고자신들이기억하는예전의구호물자와올해의것을비교할때이다. 주민들의하소연에시달리는동사무소공무원와 NGO활동가그리고지킴이들은두단어를사용했지만 246

250 그함의는달랐다. 그한예가, 대응 ( 레스폰 ) 을당연히받아야할것이라고생각하는것이문제여요. 도움을기대하고아무것도하지않으려하니까. 대응 은아직도착하지않은구호물자혹은이전보다적은구호물자를칭하며, 도움은이미도착한구호물자, 국가 ( 나 NGO) 가무상으로주민들에게나누어주는물자를뜻한다. 주민들의입장에서대응, 대처란반복되는홍수속에서 사무실사람 들에게당연히요구할수있는것즉그들로부터주민이요구하고되돌려받아야하는부채 ( 負債 ) 이며, 도움이란홍수라는재해상황속에서국가로대표되는사무실사람들이무상으로베푸는선물혹은은총이라는뜻을지닌다. 반복되는홍수에계속시달리는 P마을에서범람한물로서의홍수는 실험실- 마을에서해결해야만하는 당면문제로받아들여지지않고, 범람의시기는실험실-마을이한시적으로중지되는 예외적 상황으로간주된다. 일상적인홍수가아니라 미리예측할수없는대규모의 범람이 언제얼마만큼도착할지알수없는 구호물자를가져다준다. 그예측불가능이 대응 과 도움 을가르고, 주민참여와역량강화의바람직한예인실험실-마을을중지시킨다. 홍수의절정에서의무상원조는국가가마땅히해야할일이지만주민들의자생적인자구노력과역량강화로이어지지않는미봉책이라는면에서홍수시기에만 예외적 으로만허용되어야한다 소독약배포 : 물러간홍수와실험실-마을의재개중지되었던실험실-마을은홍수가물러난후소독약배포를통해다시재개된다. 소독약배포하기는홍수의절정의끝에서깨끗한물의시기로넘어가는문턱에서의의례와도같다. 마을에서계속활동해온 미래의전망 의공동체개발코디네이터는 소독약배포는매년쭉해오던일입니다 라고설명했다. 범람한물은주민참여와역량강화를이상이자원칙으로삼는실험실-마을의중지이지만, 물이빠지고건기를맞이하는문턱에서의 지나간홍수 는실험실마을의재개이다. 소독약배포에서가장뚜렷한갈등이드러난장소는빈민용시영아파트 (Rumah Susun, 줄임말로 Rusun) 였다. 루순은조사시기 (2014년) 를기준으로 1년전, P마을에서가장열악한생활조건을지닌인구밀집지역으로부터다수의가구가이주한주택단지로서 P마을바로곁에있었다. 루순의각동아래에는커다란물탱크가달려있었고각가정에는수돗물이연결되어있었다. 그러나루순이지어진지역은땅값이싼침수지역이었고우기의절정기동안외부로부터거의고립되었다. 소독약을나누어주기위해사무실에서오토바 247

251 이를타고약 10분가량이동하던날, 마을의다른곳의물은대부분빠져나갔지만루순으로진입하는입구는여전히정강이까지물이차올라있었다. 루순이 P마을의다른지역과다른점또한가지는황토색으로뒤덮어버린수해의처리를위해인도네시아해군이여전히머물고있었다는것이었다. 마을의좁은골목길에서의소독약배포는각통의지킴이주민의집에서진행되었지만, 루순에서의배포는아파트의주차장에서진행되었다. 루순에서의소독약배포하기는시끄러웠고힘겨웠다. 다른동네와비교했을서너배가넘는양의소독약을나누어주어야했으며, 아이를지닌집마다하나씩 이라는원칙을둘러싼다툼도더빈번했고그다툼도격했다. 소독약을배포하는과정은모든주민들이특별한절차없이물과물자를배급받았던구호물자의배포와는확연히달랐다. 소독약을받기위해길게늘어선줄앞에서활동가들은미리준비해온리스트를펼쳐진짜주민들을식별해낸다. 소독약배포에서의원칙은 아이를지닌한가구에하나씩나누어준다 는것이었다. 그래서 매번 저아이는아까왔다간것같은데... 아니, 아니, 아니, 무슨소리냐이렇기줄을길게섰는데... 라는실랑이자주벌어졌다. 지킴이들은명단을확인하고소독약에서나누어주며또다른지킴이는커다란소독약을든어린아이와엄마의사진을찍었다. 불과 1년전마을에서함께살았던주민들에게, 홍수의의미는확연히바뀌었다. 루순에서의소독약배포를둘러싸고강력한반발이등장하는이유는그들에게이미 깨끗한물 이문제가아니기때문이다. 루순의주민들은 1년의대부분을차지하는기간동안에이미설치된물탱크를통해물을공급받을수있었다. 그들에게물문제는이미 생활용수부족 + 홍수 가아니라침수였고, 이사오기전살았던 P마을중심에서벌어지는행사에참가하는횟수도그리많지않았다. 홍수-생활용수부족이물문제인 P마을골목에서의소독약배포와홍수와생활용수가떨어진시영아파트에서의소독약배포의의미는확연히달랐다. 이는루순의빈민에게생활용수의문제는공급자인수도회사의서비스수준향상의문제이지 NGO와지킴이주민을통해야하는반-빈곤정책의문제와는다르다는점과이어져있다. 물문제에관한한루순의주민은그들과비슷한경제적지위를지니는 1년전의 P마을골목의이웃보다침수를도시기능의실패로맹렬하게비판하는옆마을의중산층에더욱가깝다고볼수있다. 이주이전과이후의생계방식과소득수준이거의그대로이며, 살아온경험이크게다르지않은루순의주민에게실험실-마을은제대로작동할수없는것이다. 248

252 4. 실험실 - 마을의효과 P마을의 부분적 해결책들은생활용수부족과홍수문제를더잘게그리고다르게식별한다. 특히우기의절정시기, 실험실-마을의원칙들이중지되었다가재개된다. 일거에마을내의물문제를해결할수있는프로젝트란존재할수없으며마을의주민들역시물문제에대한해결책이엄밀한의미에서실패라는사실을알고있었다. 89) P마을에서물문제에대한 부분적 해결책이 해결책 인양받아들여졌던이유들을다음과같이추론해볼수있다. P마을의물프로젝트는 30년이상방치되고무시되어왔던빈민촌의물을 ( 적어도 ) 해결해야할문제로부각시켰으며, 물문제의해결을 주민참여와역량강화 라는보다상위의바람직한이상 ( 理想 ) 으로바꾸어놓았다. 그리고마을의범위를벗어나는물문제 - 상하수도시설의전면적인확충- 는실험실-마을에서는다룰수없는예외가된다. 문제로식별되어그에대한해결책이제공되지않는범람한물과개입하여해결해야만하는범람이후의홍수는물문제와해결책의짝짓기 (coupling) 가여럿존재한다는사실을보여준다. 우기의절정기를전후로한실험실마을의중지와재개는, 두개의다른방식의개입이다른것을비판하면서맞물려다음과같은효과를만들어낸다 : 빈민들의권익이확대된다는느낌과여전히물문제 ( 홍수 ) 에대한온전한해결이유예된다는사실이망각된다. < 주요참고문헌 > Strathern, Marilyn 2004, Partial connections, Rowman & Littlefield: Savage. 이경묵, 2017, 물다양체와실험실 - 마을, 서울대학교사회과학대학인류학과박사학위논문. 이준석 2010, 공간화된기술과학적실천과실험실의물질문화 : 민속방법론적참여관찰을통해분석한뇌과학첨단연구공간의이해 공간과사회 34: 과학적실행의회색상자 (grey box)- 비가시적협력의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 로서의실험실공간. 과학기술학연구 13(1): ) 실패가계속되는 P 마을이성공사례로받아들여지는과정에대한설명은이경묵 (2017) 4 장참조. 249

253 발리우붓지역관광발달과전통의재구성 : 뉴꾸닝주민의문화적실천을중심으로 90) 정정훈 ( 서강대학교 ) Ⅰ. 문제제기및연구방향인도네시아는 18,000여개의섬으로구성된도서 ( 島嶼 ) 국가이자, 인구 2억4 천만명중약 88% 가이슬람을믿는무슬림인구가세계에서가장많은국가이다. 적도를중심으로북위 5 에서남위 10 사이에위치해연중열대성기후를보이는지역이다. 도서국가, 이슬람, 열대날씨로표상되는인도네시아에서힌두교도가절대다수를차지하는발리섬 (Pulau Bali) 은매우독특한위치를점하고있다. 발리섬은 5,633km2의크기로약 450만명의인구가거주한다. 91) 이수치는전체인도네시아영토의 1.44% 이며전체인구의 0.3% 를차지한다. 인구수가적음에도발리는서구의한조사에따르면인도네시아의다른어떤지역보다전세계인에게잘알려진지역이다 (Hobart & Ramseyer & Leemann 1996: 8). 20세기초반부터서구세계의다양한분야의학자와여행가에게 황홀한섬, 마지막지상낙원, 신들의섬 등으로소개되고있다. 필자에게발리섬은 휴게장소, 신혼여행지, 남쪽섬나라 등으로표상된다. 이러한표상은무엇보다한국, 인도네시아그리고다른국가에서발리는넓고푸른해변과초록빛열대우림이있는지역으로인식되고있으며, 이는대다수의관광객이공유하는발리의이미지이다. 그럼에도필자가처음발리를방문했을때느꼈던감정은이질감을넘은당혹감이었다. 파란색과초록색이자연스럽게어울린바다가아닌잿빛바다가눈에들어왔고, 자카르타와별반다르지않는도로환경등은표상화된발리이미지와크게달라실망감을넘어배신의감정까지들게하였다. 90) 본고는필자의박사학위논문 ( 정정훈 2017) 을 <2017 년한국동남아학회학술대회신진박사세션 > 에발표하기위해요약한글이다. 자료집의분량제한으로본고는문제제기, 연구방향, 결론을중심으로작성되었고, 본문의연구내용은각장별로간략하게기술하였다. 참고문헌및자료는생략하였다. 91) 2015 년을기준으로발리인구는약 450 만명이다 (Badan Pusat Statistik, 인도네시아통계청웹사이트참조 : 250

254 하지만여전히발리섬은매년 400만명의외국인관광객이방문하는국제적인관광지로명성을가진다. 필자는발리에대한이러한상반된감정의교차와해소가이루어지는이유가무엇일까에관심을가지고, 이와관련하여발리에서삶을영위해나가는 발리인 과이들의 문화적전통 에주목하였다. 이를위해본연구는발리우붓지역에위치한뉴꾸닝마을 (Banjar/Desa Pakraman Nyuh Kuning) 과주민을연구대상으로선정하였다. 관광지화된마을의문화전통에서비롯된다양한관광현상의실천과정을살펴보고현상에담겨있는사회 문화적맥락을검토한다. 더하여주민집단의실천적행위에대한검토를통해관광과전통의관계를고찰한다. 결국본연구는발리지역의전통, 발전, 관광의상호작용을검토함으로써, 발리관광에대한인식의지평을넓히고자한다. 발리인의종교와종족정체성은관광발전이라는역사적과정에서외국인관광객의경험이영향을미치는문화접변의현장이다. 이러한과정을이해하기위해다음세가지연구주제에집중한다. 첫째, 발리특히우붓지역의관광발달과정그리고현재의변화에이르는역사적과정을논의한다. 둘째, 뉴꾸닝마을의전통과생활환경변화과정에서나타난다양한사회문화적현상을살펴본다. 셋째, 관광발달과전통의재구성과정에서뉴꾸닝마을주민의문화적실천에대해논의한다. 이를통해발리의한농촌마을이관광마을로변화하는과정에서관광과전통에대한다양한담론이어떤방식으로마을공동체에투영되는가에대해논의한다. 특히마을공동체의전통의보존과활용에대한실천적행위에중점을두고, 주민집단의문화적실천이어떤역사적과정과사회문화적맥락을가지는지에주목한다. Ⅱ. 관광발리 마을공동체의역사적생성 Ⅱ장은인도네시아공화국수립이전과이후발리지역의역사적상황에서이지역의역사, 문화그리고관광의변화에대한논의이다. 발리지역은약 400년전부터다양한문화적특징이형성되었다. 발리왕족의역사는연구의주요대상이었던반자르문화형성과현재반자르를이해하는단초가된다. 동인도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로대표되는네덜란드의인도네시아식민지화는발리섬에직간접적인사회ㆍ문화적영향을끼쳤다. 역설적이게발리섬이전세계적인관광지로부상하게된이유역시제국주의시대의유산이다. 발리섬이국제적인관광지로부상하게된것은 1960년대인도네시아정부의문화관광진흥정책에서비롯된다. 지상최후의낙원 이라는발리의이미지는 251

255 정부의관광쇼케이스화되면서공고화되었다. 물론발리사회에서관광의발전에따른전통의보존과훼손이라는딜레마는 1971년발리주정부의 문화관광 (pariwisata budaya) 이라는담론으로흡수되었고, 우붓은이러한담론을표상하는지역이다. 결국 관광발리, 예술인마을우붓 이라는상징은식민지배와인도네시아국가형성이후경제성장과정에서나온결과물이다. 사회적상호작용과정속에서전통의이해방식이다양한방식으로변화하였고, 특히관광이라는매개체를통해다양성이더욱증폭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본연구의주요한연구배경이되는뉴꾸닝마을은지리적으로우붓왕궁에서남쪽으로약 5km 거리에있는마을이다. 우붓중심가남쪽에위치한일명원숭이사원 (Mandala Suci Wenara Wana) 라고불리는지역의남쪽이마을의북쪽구역과맞닿아있다. 마을은지형적으로두개의강인우스강 (Sungai Wos) 과툰두강 (Sungai Tunduh) 과접해있으며, 뉴꾸닝대로 (Jl. Raya Nyuh Kuning) 는마을중심부를남북으로관통하는뉴가딩길 (Jl. Nyuh Garding) 과뉴불란길 (Jl.Nyuh Bulan) 을만난다. 뉴가딩길의연장선에뉴보족길 (Jl. Nyuh Bojog) 이위치하고이길의끝은원숭이사원의후문과연결된다. 필자가현지조사를진행했던 2012년부터 2014년까지마을의총인구는약 800여명으로약 170여가구가거주하였다. 이중 20세이상의성인인구는약 500명이다. 마을규모는인근마을이대략 3,000명에서 10,000명인것에비하면상대적으로적은인구수와작은규모를가진반자르이다. 뉴꾸닝마을이주변마을과구별되는가장뚜렷한차이점은장기간마을에거주하는외국인이많다는것이다. 대략 60여명의외국인이마을에거주하였고, 2010년과 2011년마을통계에의하면각각 50명, 57명의외국인이마을에거주하였다. 마을통계에집계된외국인수는대략 3개월이상거주한외국인을대상으로하였다. 따라서 3개월미만으로거주한외국인과마을의소규모호텔에짧은기간머무르는관광객을포함할경우대략 100명의외국인이마을에상주하고있었다. Ⅲ. 관광과마을발전의사회 문화적전개 Ⅲ장은관광의성장과마을발전은누구에의해추진되었는지? 동력은무엇인지? 그리고발전을도모하는사회 문화적맥락은무엇인지에대한논의이다. 인도네시아공화국수립이후쿠데타, 장기독재그리고경제위기등인도네시아내부의정치 경제적위기상황에서도발리섬은관광을기반으로인도네시아경제성장을이끌어왔다. 하지만 2002년의발리폭탄테러는이전과는달리 252

256 관광발전에큰영향을미쳤고, 실질적으로관광분야는역성장을기록했다. 폭탄테러이후발리사회의 발리세우기캠페인 (Kampanye Ajeg Bali) 은관광분야의재성장을표면적으로내세우지만, 궁극적으로발리종족정체성을강화하는계기가된다. 폭탄테러의발생위치와요인등은도리어우붓지역의관광성장의계기가되었다. 특히장기거주외국인의수의증가는이지역발전의중요한요소가된다. 같은공간에서이질적인문화적정체성을가진현지주민과거주외국인은 관광 과 마을발전 이라는담론에서다양한정체성의경합과정을보여준다. 결국이상의논의를통해 경제적성장, 발전, 그리고 전통보존 담론이가지는사회 문화적전개과정을검토하였다. Ⅳ. 수박 (Subak) 과생태관광 Ⅳ장과 Ⅴ장은우붓지역과뉴꾸닝마을에서이루어지는구체적인관광유형인생태관광과문화관광에대해서논의한다. 생태관광과문화관광의발전요인, 진행과정그리고사회문화적자원과의상호작용에초점을맞춘다. 결국이러한논의과정은사회 문화적상황에따라구성된다양한전통들이어떤방식으로관광상품화되는지를검토할수있다. 나아가주민집단과관광객상호간의관계형성의구체적사례이다. Ⅳ장에서는발리지역에 그린발리 (Green Bali) 담론형성과외국인관광객의발리수박 (Subak) 92) 을활용한생태관광에주목한다. 수박을활용한생태관광은우붓지역을중심으로발전하였고, 이는우붓인근마을발전의동력이되었다. 수박이상품화되는과정에서지가는급격하게상승하였고, 이로인하여두가지문제점이도출되었다. 첫째는현지주민이상품의가치에상응하는대가를받고있는지여부이고, 둘째는급격하게훼손되고있는수박이가진문화적가치를어떻게평가하는지여부이다. 결국수박의상품화과정은현지주민에게땅에대한가치, 영혼세계와인간세계그리고자연의조화와균형을추구하는철학적사고를물질적인것으로치환시켜버린다. Ⅴ. 반자르 (Banjar) 와문화관광 Ⅴ 장에서는발리지역의문화관광발달과정에서반자르의소외된역할과관 광객의낮은인식에대한문제의식에서비롯된다. 발리전통문화에기댄다양 92) 수박은대략 12 세기부터시작된발리전통농업생산체계이다. 화전농업과대비하여수도작중심의농업이이루어지는지역의관개시설을일컫는다. 관개시설자체를지칭하거나이를수행하는조직의명칭이다. 하지만관광객은관개시설에의해만들어진일종의계단식논인사와 (sawah) 를수박으로인식한다. 253

257 한 문화관광 상품은반자르문화에서기인한다. 그럼에도대다수의관광객은문화관광과반자르와의연관성을인지하지못한채파편화된문화관광상품을경험한다. 문화관광발달에있어반자르의역할특히전통담론에대한재인식과정은마을번영의주요한계기가된다. 이를위해거주외국인을중심으로마을에대한이들의요구와이에대응하는현지주민의역할에대해논의한다. 결국관광객과마을공동체는한공간에서문화접변의과정을경험하고, 이는각각의집단이전통에대해서새롭게인식하는계기가된다. Ⅵ. 잘사는마을만들기 를위한뉴꾸닝공동체의대응과실천 Ⅵ장에서는관광발전을통한경제적성취의믿음을공유하는뉴꾸닝주민의대응과문화적실천과정을논의한다. 혈연과종족공동체로서뉴꾸닝주민은각자에게주어진경제적성취가마을로환원될것이라는믿음이있고, 반대로반자르의성공이주민의성공으로귀결될것이라는믿음이있다. 이러한믿음에근거하여주민은 잘사는마을 (Pembuatan Banjar Layak Huni) 이라는담론을수용하고이의실현을위해다양한노력을한다. 담론의구체적실천과정에서마을주민은기존에운영된주민모임활동 (Sangkep, PKK, Pemuda) 의강화와관광관련된모임 (Pecalang, Koperasi Taxi) 의창설을주도한다. 특히일상생활에서연행되는종교의례는 잘사는마을 담론을실현하기위한문화적실천이자주민이가진정체성의맥락을검토하는데유용하다. 뉴꾸닝주민의의례실천은과거와다른인식하에의례를이해하고실천한다. 특히개인, 가족그리고마을공동체스스로사회적자본의중요성을인식하고, 이를구축하기위해의례를적극적으로활용한다. 결국주민집단의의례실천은신뢰와규범, 협력적네트워크그리고사회적평판을유지하는수단으로활용된다. Ⅶ. 결론 : 발리에서관광발달과전통의재구성그동안관광연구에서인류학자들은여러방식으로관광을호스트의당위적운명으로개념화시키거나 (Stronza 2001: 268), 관광객의경험보다는관광대상물을통해 고유성 을어떤방식으로투영시키느냐의문제로귀결시켰다 (MacCannell 1973, 1976, Cohen 1988, Pitana 1993, Bruner 1994). 이러한접근방식은호스트사회가가진역사적, 사회문화적역동성을이해하지못한채, 관광대상물의고유성을중심으로한사회를이해하는오류를범하게된 254

258 다. 특히관광대상물위주의관광현상에대한이해는문화상품수용층인관광객의여행지에대한인식과경험을간과한측면이있다. 이러한비판은관광발달과전통에대한재인식과연관된다. 관광발달을위해전통을상품화과정에서전통은그동안주로발명과창출의개념 (Hobsbawm & Ranger 1983, 2006) 으로논의되었다. 전통의역사적실체에서벗어나현재속에서새롭게해석한다면, 전통을둘러싼다양한해석이가능해진다. 전통에대한이러한담론은결국관광객의고유성획득역시기존의관광대상에서찾아낸다는개념에서벗어나관광주체의관광경험에서비롯된존재론적인식까지확장하여논의할수있다. 본논문은이러한이론적바탕과민족지작성을통해세가지결론을도출하였다. 첫째, 발리관광발달의역사적과정은수하르토 (Soeharto) 체제의 개발 정책에서비롯된국가와마을의종속적인관계를상징하는공간인 RW(Rukun Warga), RT(Rukun Tentangga) 가발리지역에서사회 문화적으로중요하게받아들여지지않았던것과관련된다. 수하르또체제에서강화된 RW, RT는자바지역에서뿌리를내려마을간의경계와분리를상징한다. 하지만발리지역에서는마을간구분은반자르단위로구분되고, 마을내에서는끌롬뽁 (kelompok) 단위가우선된다. 이는발리인종족정체성을강화하는일련의과정에서행정마을인데사디나스 (desa dinas) 보다는관습법적인마을인데사빠끄라만 (desa pakraman) 을더중요하게여기는것과같은논리로, 마을간구별에있어 RW보다반자르가더욱중요함을보여준다. 특히마을의례와사회 문화적실천에서이러한경향이더욱뚜렷하게나타난다. 빠끄라만이전통적인측면에서더친숙하고고유성을지닌것과같이 (Haruya 2003: 64), 마을의례과정과같은전통적인관습의실천에서반자르와끌롬뽁은안정적인마을유지를위한경계와분리수단이고이는또한 1970년대이후국가통합을위한수단으로지역정체성을강조하는과정에서나타난 지역문화 강조정책이실질적으로마을단위나아가주단위에서 종족문화 가강조하는상황과관련된다. 결국뉴꾸닝을비롯한발리주민에게인도네시아중앙정부가부과한행정체계는문화적맥락을고려하지않은자의적이고불안정한체계이다. 둘째, 발리지역문화관광발전과정에서관광대상물의대다수는실제서구예술과접목되면서상품화와소비가이루어진다. 더욱이관광객을대상으로연행되는춤과음악등이도리어반자르의례과정에서시연되고, 이는개별반자르의고유한문화적전통이하나의문화적형식으로귀결되는결과로나타난다. 이과정에서전통문화의원천인반자르는관광객의관심에서멀어졌다. 255

259 하지만 2000년대를전후우붓지역에서수박체험, 유기농식품, 요가등으로대표되는생태-문화관광객의방문이증가하면서새로운전기를맞게된다. 거주외국인에의해주도된관광발전과전통의재인식과정은결국뉴꾸닝주민들이전통을재인식하는계기가된다. 특히문화의상품화과정, 반자르공동체유지, 실존적고유성 (existential authenticity) 유지과정은마을전통에대한재인식이자 정교화 (involution) 과정으로이해된다 (Geertz 1963). 즉관광발달과정에서반자르주민들은기존의논리, 형식, 유형에기초하여전통을실천하지만, 한편으로는전통의재인식과사회관계의변화를점진적으로재정렬한다. 이러한과정은일종의 전통의정교화 (traditional involution) 로이해된다. 셋째, 기존발리전통에대한담론은전통의발명과창출그리고전통의전승이라는관념에한정되어있다. 하지만관광객집단의전통에대한재인식과정은관광경험에서비롯된자기표현 (Yamashita 2003) 과자아발견을통한존재론적인식 (Wang 1999) 의결과이다. 또한관광객집단과함께주민집단역시같은공간에공존하면서다양한사회 문화적실천과정을요구받는다. 뉴꾸닝마을사례는기존의객관적 구성적고유성이추구하는가치와전통담론에대한재고찰의필요성을제기한다. 특히외국인의마을거주는기존의객관적 구성주의적고유성에대한개념에서비롯된대상물중심의관광실천에대해재고찰하는계기가된다. 거주외국인에게중요한가치는즐거움과만족을주는것이며, 때로는장기간거주하는과정에서필요한 안전 이다. 거주외국인의관광지에대한이러한바람들은결국이들이관광과정에서추구하는가치가실존적고유성의개념에서추구하는가치와유사한형태로보인다. 즉거주외국인의고유성에대한인식이관광대상물이아닌관광경험과정에서획득한존재론적인식과정으로변모하는과정에서뉴꾸닝마을이관광지로성장할수있게되었다. 뉴꾸닝마을사례는문화관광을통한지역활성화과정에서주민집단의대응과사회적실천의중요성을역설한다. 과거문화관광의실천은역사적으로 탁월한 문화유산을경험하거나혹은과거로부터 전승된 전통문화를체험하는것으로이해되었다. 또는관광대상물이지닌 고유성 을체험하는것을가장중요한관광경험으로간주하였다. 이러한 고유성 은구성되는것으로분석하는경향이늘어났다. 뉴꾸닝의사례는더나아가주민과관광객의경험뿐만아니라존재론적인식까지고려하여야함을보여준다. 이러한점은문화관광에대한그동안의인식의범위를확장할필요성을제기하는사례이다. 256

260 분과회의 7 동남아시아정치와국제관계현안 : 인권, 선거, 테러리즘 1. 서지원 ( 창원대 ) 조코위정부와과거청산 2. 신재혁 ( 고려대 ) 필리핀선거제도개혁의원인과결과 3. Iordanka Alexandrova ( 고려대 ) Counter-terrorism cooperation in ASEAN: state level capacity-building and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261

262 조코위정부와과거청산 서지원 ( 창원대학교 ) I. 문제제기및배경 정치적의지부족 (lack of political will) 은환경 인권문제등을놓고시민사회단체가원하는대로정치엘리트가움직이지않을때그들을비난하는데에널리이용되는말이다. 과거청산또는이행기 ( 전환기 ) 정의분야에서이용어의사용은특히두드러지는데, 예를들어 2011년에국제이행기정의센터 (International Center for Transitional Justice) 와인도네시아인권단체콘트라스 (KontraS) 가발간한인도네시아이행기정의에대한영문보고서에서는 정치적의지부족 이라는단어를세차례나사용하고있다. 정치적의지부족을문제시하는인권운동가들은적어도정치엘리트가인권문제에개입할여지가존재함을, 그리고정치엘리트가긍정적인역할을해낼가능성이있음을인정한다. 이러한관점은모든문제의근원을잘못된법조항에돌리는법리주의보다는낫다. 그렇지만정치적의지의근원에대해서는탐구하려고들지않으면서임시방편적인설명요인으로사용하고있다는점, 정치엘리트의태도및행동과관련된폭넓은요인을정치적의지부족으로뭉뚱그리고있다는점에서문제가있다. 이연구에서는 2014년취임한인도네시아조코위도도 ( 이하조코위 ) 정부의과거청산관련정책을가지고정치적의지의근원, 그리고정치적의지와다른정치적요인의변별에대해서살펴보려고한다. 1965년부터 1998년까지수하르토대통령의권위주의정권하에있었던인도네시아는탈권위주의과거청산에어려움을겪어왔다. 1999년동티모르독립투표유혈사태이후통과된 2000년인권법정법에의해국가인권위원회가조사를끝내고 중대한인권침해 로규정한사건에대해서는검찰의수사이후인권법정을, 또는해당법안통과이전에발생한사건에대해서는의회와대통령의동의를추가로얻어임시인권법정을세울수있게되었다. 그렇지만국제사회의관심사였던 1999년동티모르유혈사태와인도네시아이슬람의지지를받은 1984년탄중프리옥시위대학살두가지사건만이임시인권법정에서처리되었으며, 몇년에걸친재 259

263 판끝에결국모든피의자가무죄를선고받고풀려났다. 2004년의회에서임시인권법정의대안적기구로진실화해위원회를설립하는법안이통과되었지만실제위원회가설립되기도전에인권단체들이제기한헌법소원에의해법안이통째로폐기되었다. 그이후수실로밤방유도요노정부하에서뚜렷한돌파구가없던차에 2014년조코위대통령이취임한것이다. II. 조코위정부의과거청산 : 동기 조코위정부가과거청산에전향적인태도를보일것으로기대된이유로는몇가지가있다. 첫째, 2012년에국가인권위원회가 1965년사태와 1980년대폭력조직원들에대한비사법적즉결처형 ( 속칭 페트루스 ) 에대한보고서를내놓은것이다. 인권위원회는일찍이 1998년 5월폭동, 트리삭티-스망기, 강제실종및파푸아의와시오르-와메나사건등체제이행기에벌어진사건들에대한보고서를내놓은바있으나, 2007년에임기를시작한새로운인권위원들은 1989년이슬람주의자들이모여사는마을을정부가공격한사건인 탈랑사리 이외에새로운보고서를내놓지않고있다가그들의임기가끝나기직전에야 1965년사태와 페트루스 에대한보고서를내놓았다. 수하르토체제의유혈의기원인 1965년사태는그규모와중대성면에서다른 중대인권침해 사건들과비교되지않을정도이기에, 이사태에대한보고서가완결되면서비로소인도네시아의 과거사 를통합적으로처리할수있는조건이마련되었다고볼수있다. 게다가마침 < 액트오브킬링 >(2012) 과 < 침묵의시선 >(2014) 등 1965년학살을다룬다큐멘터리영화가세계적으로개봉하면서 1965년사태의해결이라는문제가국내외적인관심을받기시작했다. 둘째, 조코위대통령의 성분 과리더십에대한기대이다. 전임자인유도요노대통령은개혁파라지만본인이군부출신인데다, 장인인사르오에디장군이 1965년에직접육군공수부대를이끌고중부자바에서의공산당학살을지도 감독한사실이잘알려져있었기에다른사건이라면몰라도 1965년사태에대한과거청산을해낼적임자로는여겨지지않았다. 더구나그의지나치게신중한리더십은과거청산에방해가되는요인이었다. 2009년에의회가 년강제실종 ( 활동가납치 ) 사건에대한임시인권법정설립을권고했지만유도요노대통령의나머지임기는수많은물밑대화로점철된채흘러갔을뿐이다. 2012년에 1965년사태보고서가정부에제출되자유도요노정부와인권운동가들이협상해온임시인권법정과화해사이의 제3의길 즉 대통령사과이후피해자보상 은더욱어렵게되었다. 이에비해조코위대통령은, 탈랑사리 260

264 공격을지휘했던 A.M. 헨드로프리요노를주요자문역으로기용하는등과거의짐을짊어진인사들을주변에두고있기는했지만, 본인은평범한가문출신의기업가였기때문에수하르토정부의오점으로부터자유로운데다, 유도요노와는리더십스타일도차이를보일것으로기대되었다. 셋째, 2014년대선에서인권문제, 특히과거중대인권침해문제가선거이슈가되었다는점이다. 2014년에조코위의라이벌이었던인물은수하르토의사위였던데다본인역시육군특수부대출신인프라보오수비안토였다. 프라보오는동티모르에서 활약 하던경력초기부터인권침해에연루되었다는의혹을받아왔으며, 1998년 5월의반화교폭동및폭동의방아쇠를당겼으며네명의희생자를낳은트리삭티대학교시위대에대한총격의배후인물로도종종지목되었다. 이러한의혹들이의혹일뿐이라면, 결정적으로그에게는 1998 년의체제이행기를달구었던활동가납치사건의책임자로지목되어군복을벗은과거가있었다. 활동가납치를실행했던것이그가사령관으로있었던육군특수부대였기때문이었다. 인권침해로얼룩진프라보오의과거와조코위의깨끗한과거의대비는인권운동가들이 2014년대선기간중에조코위에게전폭적인지지를보내게하는요인이되었다. 선거일이가까워오면서박빙의승부로프라보오의당선가능성이현실화되자거의모든주요인권단체는프라보오의과거에대해알리는낙선운동에전력을다했다. 인도네시아의인권단체는한국낙천 낙선운동의영향을받아 2004년대선부터 유혈의정치인을뽑지말자 라는캠페인을펼치는등후보들의인권관련전력에관심을보였지만, 사실상지나치게높은기준을제시하거나특정후보를언급하기를꺼려그들의활동이실질적인낙선운동에는미치지못했다. 이에반해 2014년에그들이펼친것은명백히특정후보, 즉프라보오에대한낙선운동이었으며, 양자대결구도하에서이는조코위에대한당선운동이나다름없었다. 이제와서이들의캠페인이얼마나효과적이었는지측정하기는힘들지만, 사실별다른이슈가없었던선거였기에인권문제가두후보를차별화시키는중요한요소중하나였다는점은확실하다. 여기에서언급한세가지요인중인권위의보고서완성은조코위의정치적의지의동기라기보다는조코위에게주어진과제정도로볼수있다. 보고서는이미유도요노대통령의 2기임기중반에완성된것이기때문이다. 두번째와세번째요인중동기라고부를수있는것은세번째요인, 즉과거인권문제의선거정치이슈화이다. 인도네시아인권운동가들은인권문제의정치화를극도로경계해온것을생각하면아이러니이다. 261

265 III. 조코위정부의과거청산 : 진척상황 그런데조코위정부에게과거청산을위한의지가있었는가? 이에대해과거의인권문제를전문적으로다루어온많은인권운동가들은 아니오 라고답할것이다. 통합적임시인권법정이든, 진실화해위원회든, 아니면유도요노 2기부터 제3의길 로여겨진대통령사과및직속위원회를통한후속조치이든간에과거사에대한표준적, 최종적해결책이조코위정부에의해실행되지않았기때문이다. 도입부에서소개한 정치적의지부족 의문법에의하면과거청산의부재는곧정치적의지부족을뜻한다. 그러나필자는조코위정부에정치적의지가없었다는평가는온당하지않다고본다. 아래글상자에정리했듯이조코위대통령취임이후과거사문제에대한수많은해결책이제시되었다. 검찰총장과경찰청장, 전군사령관등중요한지위에있는인물들이몇차례나모여과거인권침해문제라는단일의제를가지고회의를한것자체가유례가없는일이다. 일부인권운동가들은조코위대통령이임시인권법정을고려하지않는다는이유로과거사문제해결에대한정치적의지를버린것처럼비난하지만동티모르인권법정이후과거청산관련인도네시아정부의기조는언제나화해를통한해결이었고, 지난 10 년동안에는정부뿐만아니라인권운동가들도임시인권법정을지지하지않았다. 93) 유도요노 2기에강제실종관련의회권고의후속조치로대통령사과와직속위원회라는 제3의길 을모색한것도임시인권법정에대한불신때문이었다. 필자가정리한연표를통해조코위정부에 1965년사태를포함한과거인권침해문제에대해대통령사과와직속위원회를통해해결하려는의지가있으며, 실제로이를목표로하여움직여왔음을확인할수있다. 다만대통령공식사과의가능성이실제로등장했을때이에대한사회적반발이극심했기에공식사과를가능한조치에서제외한이후어떠한방식의화해를할것인지에대한밑그림이불분명했던점, 주무장관인제1조정장관이교체될때마다정책의연속성이후퇴했다는점등을문제점으로지적할수있다. 특히대통령의최측근인루훗판자이탄의정치법률안보조정장관 ( 제1조정장관 ) 재임시기에열렸던 1965년사태에대한심포지움 (simposium) 은 1965년문제에대한공론화의장을마련한획기적인시도로평가받는다. 인권위원회의보고서가비공개인데반해심포지움은유튜브로중계되었고, 대통령자문위원인시다르토가 1965년학살에대한국가개입을인정하는발언을내놓기도했 262

266 다. 그런데심포지움직후조코위대통령이집단학살무덤발굴을지시하면서진실규명이급물살을타는가싶었지만이슬람단체와전직장성들의역공에밀려심포지움은오히려정부의반공정책이강화되는계기가되어버렸다. 제 1조정장관이위란토로교체되면서무덤발굴은없던일처럼되었고위란토가야심차게내세운대통령직속국민화합위원회제안은인권단체의보이콧으로보류된상태이다. 또한조코위정부는표준적, 최종적해결책이외의다른조치들에대해서도전향적인입장을보이고있다. 예를들어 2005년헬싱키평화협정에서아체에설립하기로약속한진실화해위원회는 2013년주정부조례가통과되었지만그이후에도설립되지않고있었고, 중앙정부의강력한반대가아체진실화해위원회의설립을막는가장큰요인중하나였다. 그러나조코위정부하에서중앙정부의반대가사라졌고, 아체진실화해위원회는드디어위원과사무실을갖추고본격적인활동을시작하게되었다. 유도요노정부시절인 2013년부터증인 피해자보호기구 (Lembaga Perlindungan Saksi dan Korban) 주도로시행하고있는중대인권침해피해자의료지원금도규모가확대되어지금은 1천명넘게혜택을받았으며, 94) 중대인권침해피해자가구가생계활동기술을배울수있도록하는경제적프로그램도외국정부의지원금을받아운영되고있다. 추모비등민간이주도하는기억사업들도곳곳에서벌어지고있기때문에인도네시아정부가현실적으로고려할수있는보상책의상당부분이이미실현되고있다고도할수있다. 정리하자면조코위정부의과거청산에대한태도는혁명적인패러다임전환을꿈꾸지는않지만그간인도네시아정부의정책기조를계승하여그것을실현하려는의지를보이면서몇가지새로운시도를가미하는정도이다. 이러한의지가매끄럽게실현되지않는이유에대해필자는선거 정당정치차원에서조코위정부의과거청산을지지할만한뚜렷한세력이없기때문이라고본다. 결과는실망스러웠을지언정이행기초기에임시인권법정설립에성공한탄중프리옥사태와비교해본다면, 탄중프리옥사태의경우임시인권법정의설립을지지하는정치적이슬람이라는뚜렷한세력이있었다. 반면 1965년사태의엄중함때문에군부출신인사들과거의모든이슬람단체가이와관련된모든조치를거부하는와중에이를지지할만한블록은없다. 정치적의지의부족만큼이나정치화의부족이문제인셈이다. 263

267 조코위-유숩칼라 (JK) 선거운동본부공약집발표, 과거인권침해문제의정의로운해결약속 인도네시아대통령선거. 조코위후보당선확실시 조코위-JK 정부통령취임 의회의 2015년우선심의예정법안명단 (prolegnas) 공개. 진실화해위원회법이법무인권부발의로포함됨 테조제1조정장관, 법무인권부장관, 국가정보원장, 국가인권위원누르콜리스, 경찰청장, 군부관계자가회동하여인권위원회의조사가끝난 7개사건 탈랑사리, 와메나-와시오르 ( 파푸아 ), 강제실종, 페트루스, 1965년사태, 1998년 5월폭동, 트리삭티-스망기 을해결할것에동의 테조조정장관이주재하는제2차관계부처회의가열림. 이미모든참가자가법안통과를거치지않고과거사해결을위한대통령직속 화해위원회 (Komite Rekonsiliasi) 를설립하자는데동의했다는사실이발표됨. 와메나-와시오르를제외한 6개사건이화해위원회로넘겨질것이며, 검찰의추가조사결과인권침해사실이밝혀진사건에대해서는대통령명의로유감을표명하고사과할계획 전군사령관물도코가최초로참석한관계부처합동회의가열려 15인의위원을둔위원회설립결정을내림. 검찰총장은화해의절차에대해먼저재차독립적인조사를거친후, 중대한인권침해가일어난것으로판명되면관련자들이재발방지를약속하고마지막으로대통령이피해자에게사과하는것이라고설명 개각, 루훗판자이탄제1조정장관취임 조코위대통령, 의회독립기념연설에서화해위원회설립계획을언급 이슬람단체무함마디야, 대통령에게공산당에게사과할것인지해명요구. 대통령은사과를할생각이전혀없으며, 사과했다가는엔우와무함마디야, 군부와대립하게될것이라고답변했다고무함마디야사무총장압둘무티가전달 총무장관프라모노아눙, 조코위대통령이글로라붕카르노경기장에서공산당가족과거르와니를만나사과할것이라는루머가문자메시지와 SNS로퍼진데대해이루머를 명예훼손 으로규정하며, 루머를퍼뜨린자를알고있다고주장 조코위대통령, 루방부아야행사에서 G30S/PKI와같은사건이다시일어나서는안된다고언급. 사과할생각은해본적이없다고도덧붙임 네덜란드헤이그에서 1965년사태에대한 4일간의국제민중재판 (IPT 1965) 시작. 부통령, 제1조정장관, 검찰총장, 엔우사무총장등격하게반발 대통령자문위원회, 조정장관실과공동으로 1965년사태에대한심포지움개최. 자문위원시다르토다누수브로토는정리발언에서 1965년의비극이수평적인폭력이었지만국가의개입역시인정해야한다고언급. 264

268 조코위대통령, 루훗조정장관에게집단학살무덤을찾으라고지시. 루훗조정장관, 지금까지단하나의집단학살무덤도발견된적이없다면서집단학살무덤이확실히발견된다면국가의사과도가능하다고언급 루훗조정장관, 이나라가수십만명을학살한나라라는오명을쓰지않도록피해자숫자에대한철저한조사가필요하다고언급 YPKP 65 등 65년관련단체, 수마트라와자바에위치한집단학살무덤 122곳의자료를정부에제출. 루훗조정장관, 조정장관실과인권위가집단학살무덤을조사할합동팀을꾸릴것이라고발표 리아미자르드국방장관, 심포지움과같은기억의시도가또다시유혈의분쟁을낳을수있다며경고. 집단학살무덤발굴에도반대입장표명 공산당의위협에서판차실라를지키기위한심포지움개최. 이슬람수호전선의리직쉬밥, 조코위가 1965년사건에대해국가차원에서사과한다면탄핵해야한다고연설 이슬람수호전선을위시한 1만명이상의시위대가금요반공집회개최 조코위대통령, 공산당에사과할계획이없다고재차강조 개각. 루훗제1조정장관이해양조정장관으로자리를옮기고위란토가제1조정장관에임명됨 위란토조정장관, 루방부아야기념식에서 1965년사태해결에대한정부입장을공식발표하며비사법적조치를통한해결의지천명 위란토조정장관, 대통령이참석한국무회의가국민화합위원회 (Dewan Kerukunan Nasional) 설립에동의했다고밝힘. 이기구는진실화해위원회의대체기구이자사회집단끼리의 (antaramasyarakat) 분쟁을중재하는기구가될것 인권단체콘트라스, 제1조정장관실과인권위를옴부즈만에고발 위란토조정장관, 국민화합위원회는수평적분쟁또는국가-사회간의분쟁을모두다루는기구이지만, 과거의중대인권침해사건을다루는기구는아니라고주장. 같은날테텐마스두키대통령비서실장은조코위대통령이과거인권문제를조정장관에게일임했으며, 비사법적방식이라도상관없으니얼른해결하라고지시했다고언급 대통령비서실의이프달카심, 대통령궁은위란토의국민화합위원회계획에대해잘모르며, 대통령궁에서도과거사해결을위한최종적인최적의방식을찾지못했다고주장. 265

269 필리핀선거제도개혁의원인과결과 신재혁 ( 고려대학교 ) Ⅰ. 연구질문필리핀에서는 2010년선거부터자동화선거제도 (Automated Election System: 이하 AES) 가도입되었다. AES는개표시광학스캔기계를이용하여후보별득표를집계하는것이다. 이러한선거제도개혁은수개표를전자개표로대체했다는의미도있지만, 세계에서가장후보자중심이었던선거제도를보다정당중심선거제도로변화시켰다는의미도있다. 정당의공천을받지않은무소속후보가허용되고, 유권자가정당이아닌후보에게투표하는등선거에서후보들간의경쟁이주가되도록유도하는제도를후보자중심선거제도라한다 (Shin 2017). 이러한선거제도는정치인들이정당보다개인의명성을높이도록유도하여선심정치를만연하게만든다 (Carey and Shugart 1995). 그결과, 후보자중심선거제도는정치부패를증가시키고정부의업적을악화시키는등많은부작용이있다고알려져있다 (Hicken and Simmons 2008). 반면오직정당의공천을받은후보만허용되고, 유권자가후보가아닌정당을선택하는등선거에서정당들간의경쟁을유도하는제도를정당중심선거제도라하는데, 이러한선거제도는정치인이개인보다정당의명성을높이도록만들어정당들간에정책대결을유도한다 (Shin 2017). 따라서정당중심선거제도는정치부패를감소시키고정부의업적을개선시키는등긍정적인효과가크다고알려져있다 (Chang and Golden 2006). 1951년이후필리핀은세계에서가장후보자중심인선거제도를유지하고있었다 (Carey and Shugart 1995, 425; Shin 2013a). 중앙과지방선거를같은날동시에실시하는필리핀에서는기명투표 (write-in ballot) 를실시하였다. 기명투표란투표용지에후보자의이름이나소속정당이표기되어있지않고, 유권자가빈칸에후보자이름을적는방식으로투표하는것을뜻한다. 이러한투표방식때문에필리핀선거에서는후보의소속정당보다후보자개인의명성이더욱중요했고, 후보자들은자기명성을높이기위하여 ( 이름을기억하게만들기위하여 ) 유권자에게막대한선심을제공해왔다 (Shin 266

270 Forthcoming). 그런데 2010년도입된 AES에서는투표용지에후보자의이름이인쇄되기때문에유권자들이후보자의이름을적을수있도록기억할필요가없어지게되었다. 또한소속정당도표기되기때문에정당의중요성도전보다높아지게되었다. 한마디로 AES는이전선거제도에비해정당중심의선거를유도하는것이었다. 문제는후보자중심선거제도에서당선된필리핀의국회의원들이왜기존제도를폐기하고보다정당중심선거제도를도입하였냐는것이다. 1986년피플파워혁명이후결성된헌법위원회 (Constitutional Commission) 는새로운국회의원선거법을논의하였는데, 이들은사실상기존의기명투표제를유지하기로결정하였다. 그이유는헌법위원회위원대다수가이후치러질선거에서자신들이당선되는데기명투표제가도움이될것이라믿었기때문이다 (Shin 2013a). 당시헌법위원회위원들은모두페르디난드마르코스사임이후취임한코라손아키노에의해임명되었는데, 이들중대다수가기성정치인 (trapo: traditional politician) 들이었다. 이들은자기지역에서막대한부와권력을축적하고있었으므로후보자개인의명성이중요한역할을하는기명투표제를선호하였던것이다. 그결과이러한기성정치인들은필리핀국회를계속해서장악할수있었다 (Quimpo 2007). 그렇다면이들은왜 2010년에와서는자신들에게어쩌면불리할지모르는보다정당중심으로의선거제도개혁에동의했을까? 본연구는그이유를설명하는것을목표로한다. II. 주장 선거제도개혁은국회에서선거법을개정함으로써이루어진다. 국회의원들이선거제도의개혁여부와방향을결정하는것이다. 그러므로이들이어떠한이유에서 AES를도입하는선거제도개혁을선택했는지를설명해야한다. 국회의원의궁극적인목표는재선이다 (Mayhew 1974). 따라서자신의재선가능성을높이는방향으로선거제도를개혁할것이라예상할수있다. 새로운선거제도가다수국회의원들의재선가능성을높일것이라기대되는상황이라면이들은선거제도개혁에동의할것이다. 반대로기존선거제도가다수국회의원들의재선에도움이된다면선거제도개혁을거부할것이다. 따라서필리핀국회의원다수가기명투표제보다 AES가재선가능성을높이는데더도움이될것이라기대하였기때문에선거제도개혁에동의하였다고 267

271 볼수있다. 결국핵심은 AES 가어떻게현역의원들의재선에더유리한제 도인지를밝히는것이다. III. 사례 1. 경과 1995년 6월 7일필리핀국회는 AES 도입을위해무슬림민다나오자치구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 이하 ARMM) 에서 AES를이용한선거를시범적으로실기하기로결의한다 (Republic Act 8046). 이에따라 1996년 9월 9일에 ARMM에서최초의 AES 선거가실시된다. 1997년 12월 22일에는국회가 1998년 5월선거에서 AES를전국적으로도입할것을결의한다 (Republic Act 8436). 그러나준비시간이부족하여 ARMM에서만 AES 선거를실시하려하였으나그마저도기계의오류로인하여술루지방의전자개표를취소하고수개표를실시하였다. 2001년선거부터는예산부족과기술적인문제로인하여어느지역에서도 AES 선거가실시되지못하였다. 2007년 1월 23일국회는 2008년 ARMM 선거부터 AES 선거를실시할것을결의하였다 (Republic Act 9369). 2009년 3월 23일국회는 2010년 5월전국선거에서 AES를도입하는데필요한예산을승인하였고 (Republic Act 9525), 이에따라 2010년 5월부터전국적으로 AES를이용한선거가실시되었다. 2. 분석필리핀정치인들이최초로 AES를선택한것은 1995년이었다. 왜였을까? AES 도입을최초로주장한것은 NAMFREL (National Citizens Movement for Free Elections) 이란선거감시시민단체였다. 이들은 1992년부터선거부정을막고, 개표과정에서의오류를줄이기위해 AES 도입을주장하였다. 95) 기존의기명투표제에서는유권자가최대 42개에이르는공직후보들의이름을적어넣어야했기때문에후보들은자신의이름을기억하도록만들기위해막대한금품을제공하였다. 개표도 45일가량걸렸는데, 표집계과정에서의도치않은오류뿐만아니라의도적인조작도빈번하게발생하였다. 96) 95) Damaso Magbual(NAMFREL 위원회위원 ) 과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96) 상동. 268

272 놀라운것이들의요구가국회의원들에게받아들여져국회상임위원회에서곧바로논의되기시작했고, 1995년 6월에 AES 도입이결의되었다는사실이다. 이과정에서 AES 도입을반대한국회의원도거의없었다. 97) 예산이나기술적인문제만없었다면 1998년부터 AES를이용한선거가전국적으로실시되었을지도모를일이었다. AES는 (NAMFREL의주장대로라면 ) 선거부정과개표오류를줄이는데기여할뿐만아니라유권자들이후보이름을외워서적을필요없이투표용지에인쇄된후보이름과소속정당을보고투표할수있기때문에기성정치인보다정치신인의재선가능성을높이는데도움이될제도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현역의원들이 AES 도입에적극적이었던이유는무엇일까? AES에서는전자개표시스템이핵심이다. 이는선거비용을크게절감시키는효과가있었다. 전자개표시스템을조작하여사전에입력한대로투표결과가출력되도록만들수있기때문이다. 98) 필리핀은세계에서선거결과가제일빨리나오는나라이다. 투표하기전날 이미결과가정해져있다. 99) 기존의기명투표제하에서는후보들이자기이름을기억할수있도록하기위해막대한금품을유권자들에게나줘주어야했다. 교육수준이낮은유권자들은교실이나강당에모아서식사와금품을제공하며후보의이름을적는방법을연습시키기도했다. 100) 그러나 AES 하에서는 정치운영자 (political operator) 라불리는브로커를고용하여선거결과를보다쉽고저렴하게조작할수있다. 정치운영자들은선거구 (precinct) 의개표를관리하는지방선거위원회 (Election Commission) 위원들과긴밀한관계를유지하면서, 자신에게거액을제공하는후보를위해선거결과조작을청탁한다. 101) 그결과선거부정은이전보다더욱만연해졌고, 현역의원, 즉막대한재력을지닌기성정치인의재선은더욱용이해졌다. 102) AES 도입을요구했던 NAMFREL은이러한문제들을지적하며디지털서명 97) Eric Jude O. Alvia(NAMFREL 사무총장 ) 와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 Teodoro L. Locsin, Jr.(2007 년 Suffrage and Electoral Reforms 상임위원회위원장 ) 와의인터뷰, 2017 년 2 월 3 일, 필리핀마카티. 98) Augusto Lagman( 전직선거관리위원회위원 ) 과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99) Maricor Akol(NAMFREL 위원회위원 ) 과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100) Teodoro L. Locsin, Jr.(2007 년 Suffrage and Electoral Reforms 상임위원회위원장 ) 와의인터뷰, 2017 년 2 월 3 일, 필리핀마카티. 101) Eric Jude O. Alvia(NAMFREL 사무총장 ) 와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102) Augusto Lagman( 전직선거관리위원회위원 ) 과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269

273 도입등조작이불가능하도록제도개선을요구하였다. 그러나 AES 도입에는 적극적이었던국회의원들이제도개선요구에대해서는위원회조차소집하지 않고있다. 103) IV. 결론필리핀정치인들에언뜻자신들에게불리해보이는 AES를선택한이유는그제도가자신의재선에도움이되기때문이다. AES는선거비용을감소시켜줄뿐만아니라보다확실하게승리를보장한다. 이러한결과는선거제도의내생성 (endogeneity of electoral systems) 을드러낸다 (Benoit 2007). 선거제도가결과에영향을미칠뿐만아니라, 예상되는결과가선거제도의선택에영향을미친다. 필리핀의경우, 새로운선거제도 (AES) 는선거부정을더욱용이하게만드는효과가있는데, 이를통해재선가능성을높일수있다고판단한현역국회의원들이이러한선거제도를채택하였다. 많은신생민주국가들에서는선거부정이만연하다. 이는민주정부에대한실망으로이어지는데, 이러한실망이큰경우대규모시위나폭동, 심지어내전이발생하기도한다. 본연구를통하여이러한국가들에서선거부정을줄이는것이왜어려운지도설명할수있다. 103) Damaso Magbual(NAMFREL 위원회위원 ) 과의인터뷰, 2017 년 2 월 2 일, 필리핀만달루용. 270

274 참고문헌 Benoit, Kenneth "Electoral Laws as Political Consequences: Explaining the Origins and Change of Electoral Institutions."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10: Carey, John M., and Matthew Soberg Shugart "Incentives to Cultivate a Personal Vote: A Rank Ordering of Electoral Formulas." Electoral Studies 14(4): Chang, Eric C. C., and Miriam A. Golden "Electoral Systems, District Magnitude and Corruption."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37(1): Hicken, Allen, and Joel W. Simmons "The Personal Vote and the Efficacy of Education Spending."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52(1): Mayhew, David R Congress: The Electoral Connection.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Quimpo, Nathan Gilbert "The Philippines: Political Parties and Corruption." Southeast Asian Affairs 10: Shin, Jae Hyeok. Forthcoming. Legislative Voting in the Pork-Dominant Parliament: Evidence from the Philippine House of Representatives, " Journal of Legislative Studies. Shin, Jae Hyeok "The Choice of Candidate-Centered Electoral Systems in New Democracies." Party Politics 23(2): Shin, Jae Hyeok "Voter Demands for Patronage: Evidence from Indonesia."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15(1): Shin, Jae Hyeok. 2013a. "Electoral System Choice and Parties in New Democracies: Lessons from the Philippines and Indonesia." In Party Politics in Southeast Asia: Clientelism and Electoral Competition in Indonesia, Thailand and the Philippines, edited by Dirk Tomsa and Andreas Ufen, Milton Park, Abingdon, Oxon; New York: Routledge. Shin, Jae Hyeok. 2013b. "Voter Demands, Access to Resources, and Party Switching: Evidence from the South Korean National Assembly, " Japanese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14(4):

275 Counter-terrorism cooperation in ASEAN : state level capacity-building and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Iordanka Alexandrova ( 고려대 ) Counter-terrorism cooperation in ASEAN started as a promising endeavor. The leaders of member states realized that coordinated effort is necessary to counter the challenge from the growing terrorist threat in the region. Early on they began establishing an institutional framework allowing states to communicate and take steps to increase the region s capacity to protect itself from militant groups. In 2001, ASEAN adopted a Declaration on Joint Action to Counter Terrorism the first specific legally binding agreement for security cooperation in Southeast Asia. Despite minor differences, all member states agreed on the need to enforce practical anti-terrorism measures at the regional level. Hopes were high that since cooperation in counter-terrorism between member states developed faster than in any other security area it could became a driving force for strengthening institutional mechanisms and create opportunities for joint action on other issues. As a matter of shared concern, the anti-terrorism agenda was believed to have the potential to turn into a driving force for regional security cooperation by developing channels for international coordination through information exchange, cooperation in law enforcement, and institutional capacity building 104). More than a decade later the record on the effectiveness of security cooperation is mixed. While some states have made progress in building their counter-terrorism capabilities, others show a remarkable lack of improvement. A prominent example of the latter is Thailand, which currently faces a high level of threat from Malay-Muslim militant groups in its Southern provinces. Security forces in the country appear to be unable to control what has become the 104) Such was the case in Europe. See for example Rik Coolsaet, EU Counterterrorism Strategy: Value Added or Chimera? International Affairs 86:4 (2010), pp

276 deadliest conflict in Southeast Asia at present 105). The government relies on a weak intelligence infrastructure and its agents know little about the problem region. There is no strategic framework guiding stabilization efforts 106). Deployed forces are poorly prepared and coordination between agencies remains problematic 107). Several administrations consistently implemented policies that had the effect of increasing tensions. Most notably Prime Minister Thaksin Shinawatra adopted an aggressive approach, which contributed to a sharp escalation of violence since The authorities appear to lack the skills and commitment needed to effectively handle the problem. At the same time. the state repeatedly expressed commitment to ASEAN s security cooperative incentives. Thailand was one of the first countries to ratify the ASEAN Convention on Counter Terrorism encompassing measures to promote capacity building and strengthen measures to counter terrorism across member-states. Yet, as the Southern insurgency became more sophisticated and the levels of violence rose, regional cooperation did little to help improve the state s capabilities to handle the problem. Why did regional cooperation on counter-terrorism fail to improve Thailand s ability to fight the local insurgency? More specifically, why incentives intended to promote capacity building at the state level did not bring noticeable results in this case? Is regional cooperation on counter-terrorism effective? And what are the future prospects for security cooperation on this and other issues in the East Asian region? The terrorist threat in Thailand has been steadily growing for the past twenty years. Organizations resorting to terrorist tactics consist of Malay-Muslim rebels operating in the southern parts of the country. They demand autonomy and the creation of an Islamic state on the territory of the three provinces incorporated into the Thai state by the Anglo-Siamese Treaty of 1909 Pattani, Yala, and Narathiwat. The levels of violence increased in the early 2000s with militants resorting to the use of bombs and drive-by shootings. Since then, their ability to 105) Zachary Abuza, The Ongoing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Trends in Violence, Counterinsurgency Operations, and the Impact of National Politics, INSS Strategic Perspectives 6 (NDU Press: Washington D.C., 2011) 106) Peter Chalk,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 Understanding the Conflict's Evolving Dynamic: Rand Counterinsurgency Study - Paper 5," (Santa Monica, CA: RAND Corporation, 2008). 107) International Crisis Group (ICG), "Southern Thailand: Insurgency, Not Jihad," ICG Asia report (ICG, 2005). 273

277 launch deadly attacks has been increasing as they continue to became more aggressive. The insurgency has claimed close to 6500 lives between 2004 and 2017 as the Malay minority actively opposes assimilation with the rest of the society 108). By 2016 the rebels had successfully expanded their activities beyond the Southern regions and launched attacks in major tourist resorts, including Phuket and Hua Hin. The capacity of the police and the army to prevent future bombings in highly populated areas, however, failed to evolve and match the insurgency s improving capabilities 109). Resources to counter the threat were made available at the regional level under various ASEAN incentives. Since the Thai state lacked the needed internal capacity to address the problem common sense dictates that it could have sought help from outside. During the same period, Malaysia, Indonesia, and Singapore made significant improvements by utilizing ASEAN s cooperation structures even though they faced lower levels of threat. The fact that Thailand did not make progress in building its counter-terrorist capabilities when faced with increasing risks for the security of the population is a puzzling development in need of explanation. The ineffectiveness of ASEAN s incentives cannot be attributed to lack of effort or desire to counter the insurgency. The Thai government started developing a strategy for dealing with the unrest in the Southern provinces since violence levels increased in The Royal Thai Police (RTP) and the Royal Thai Army (RTA) deployed more than twenty thousand security personnel in the region by Paramilitary rangers, various village defense units, and even a teacher-protection battalion supplemented the efforts of the specialized units 110). At the regional level commitment to address both domestic and transnational terrorist threats was also evident. ASEAN repeatedly identified strengthening national counter-terrorism capabilities as a priority among the specific security enhancing measures listed in the 2001 Declaration. A Work Program to Implement the ASEAN Plan of Action to Combat Transnational Crime adopted 108) Gabriel Domínguez, A look at Southern Thailand's Smoldering Insurgency, Deutsche Welle, 20 July 2015 (available at last accessed 8 July 2017). 109)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110) Ibid. 274

278 in 2002 contained a terrorism section putting institutional capacity building and training among its main objectives. The Annual Conference of ASEAN Chiefs of Police (ASEANAPOL), held the same year, expressed a commitment to develop capacity-building enabling members to counter all forms of terrorist activities. Training programs were launched as early as Law-enforcement officials agreed to offer assistance in tracking suspects, which could include gathering evidence and forensic support 111). Why did Thailand fail to take advantage of these incentives? The argument advanced here is that domestic political rivalries affected the Thai state s ability to control the Southern insurgency. Politics took priority over a major security issue in the state. Working under lowered capacity, the government failed to recognize and admit changes in the nature of the rebellio n 112). As a result, its effort to counter the threat have been sporadic, unfocused, and of ten counter-productive. Leaders failed to come with a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that could have included appropriating there sources made available through ASEAN. Despite its commitment to promote capacity-building at the state level, ASEAN did not intervene for two reasons. First, ASEAN norms continue to present a challenge when it comes to enforcing policy agreements. The effectiveness of proposed counter-terrorism measures continues to depend on each state s willingness to cooperate, meaning that Bangkok had little incentive to improve its methods in fighting the insurgency in accordance with ASEAN prescriptions. Second, insurgent movements in Southern Thailand take great caution not to be identified with global terrorist organizations, thus effectively remaining outside the scope of concern of ASEAN, which as a regional organization focuses mainly on trans-national threats. Thailand s Malay-Muslim insurgency holds the potential of outgrowing its national agenda and becoming connected with transnational extremist groups, but so far the conflict has not become a part of a broader jihadist struggle. Although recently attacks have become more sophisticated, militants have deliberately made an effort not to be 111) ASEAN, "Asean Efforts to Counter Terrorism," Paper prepared for the UN Counter-Terrorism Committee (2003). 112) Chalk,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275

279 related with a broader jihadist cause, which would turn them into a target for international antiterrorist efforts 113). Previous research on terrorist groups in Thailand focuses on evaluating the level of threat or assessing the government s ability to counter the insurgency 114). This paper looks further into the under lying reasons for the state s inability to find an effective solution to the problem. The case of Thailand s Malay-Muslim rebellion merits discussion for several reasons. First, developments in Thailand hold a high potential of affecting the security environment in Southeast Asia. The insurgency is currently the most lethal conflict in the region and a source of significant instability 115). Next, as international jihadist organizations seek to expand their presence in the area, domestic terrorism can turn into a transnational threat 116). Southeast Asian states are no strangers to local radical extremism, but the dangers they are facing today cross state borders. As Singapore s Prime Minister Lee Hsien Loong noted in his Keynote Address at the Asia Security summit in 2015, the global war on terror is moving closer to home since ISIS declared an intention to establish its presence in the area. The group is seeking connections with local rebels sympathetic to its cause in an effort to build an additional outpost for the jihadists as they are being pushed out of their original zone of action. If Thailand s rebels are allowed to grow stronger, they will be more likely to provide a support base for transnational jihadist groups threating stability at the regional level. Lastly, with the threat from local intraregional groups such as Jemaah Islamiyah (JI) on the rise the question of the effectiveness of ASEAN s approach to the task of promoting peace and prosperity deserves attention. The second reason this case is particularly relevant to current events is that other regional organizations, including the EU, face similar problems with regard to security cooperation. The specific non-interference rules guiding ASEAN s 113) Ibid. 114) International Crisis Group (ICG), "Southern Thailand: Insurgency, Not Jihad," "The Malay-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Joshua Kurlantzick, "A New Approach to Thailand's Insurgency,"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2016). 115) Zachary Abuza, The Ongoing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Trends in Violence, Counterinsurgency Operations, and the Impact of National Politics, INSS Strategic Perspectives 6 (NDU Press: Washington D.C., 2011) 116) Walter Enders, Todd Sandler, and Khusrav Gaibulloev, "Domestic Versus Transnational Terrorism: Data, Decomposition, and Dynamics," Journal of Peace Research 48, no. 3 (2011). 276

280 activities make it one of the hardest test cases for cooperative endeavors 117). The organization s norms hinder inter-state cooperation as most activity between member states continues to be predominantly bilateral or trilateral precluding effective developments at the regional level 118). Identifying ways to overcome the barriers to cooperation in this region will have implications that go beyond the ASEAN community and can serve as lessons in overcoming the challenges of cooperation for other regional organizations. Theoretically, works on regional integration suggest that creating channels of communication in one area will promote security cooperation in related fields. Common threats such as transnational terrorist activities create incentives for dialogue and facilitate communication between states that may be suspicious of each other. This research contributes to the field by testing this proposition in a major case of regional cooperation. This paper is built upon a single case study and uses process tracing to uncover the reasons why Thailand s leadership did not benefit from the capacity-building resources provided by ASEAN. Additionally, it looks into the impact of counter terrorism cooperation on the framework for security dialogue on other issues. The focus on the promotion of capacity-building at the state level in evaluating the effectiveness of regional security cooperation is justified on grounds of relevance and simplicity. First. considering that several states in the region face active domestic terror groups, this approach allows to draw implications with high relevance to current events. The areas of cooperation outlined in the ASEAN Convention on Counter Terrorism from 2007 include appropriate measures to prevent terrorist acts, efforts to prevent the financing and planning of attacks, border control, capacity-building, increasing public awareness and dialogue, and exchange of intelligence. Most of these are related to cross-border control aimed at preventing terrorist acts by organizations acting internationally. Capacity-building enables states to address both transnational and domestic threats such as Thailand s insurgency. Second, changes in the capacity 117) Amitav. Acharya, "Constructing a Security Community in Southeast Asia : Asean and the Problem of Regional Order," (London: Routledge, 2001). 118) David Martin Jones and Michael L. R. Smith, "Making Process, Not Progress: ASEAN and the Evolving East Asian Regional Order," International Security 32:1 (Summer, 2007), pp

281 to deal with terrorist groups can be more easily observed and evaluated than more abstract variables such as cross-border cooperation. Lastly, this approach allows to avoid certain problems with measuring the effectiveness of regional security cooperation. Estimating the effectiveness of counter-terrorism legislation, for example, is bound to run into problems of definition as ASEAN states initially could not agree on a common understanding of what constitutes terrorism. Politically, the problem was solved in a customary for the ASEAN way by ignoring it. Officials decided instead to focus on the practical side of improving counter-terrorism capabilities. The same approach is taken here to avoid getting trapped in a confusion of meanings and differing expectations about desirable outcomes. The main conclusion made here is that ASEAN s success in developing state level counter-terrorist capabilities is determined primarily by national efforts. Nevertheless, the organization contributes to enhancing regional security by creating mechanisms for interstate cooperation that would be unavailable in its absence. Moreover, arrangements to cooperate on issues that require joint effort between states contribute to maintaining regional stability by promoting dialogue and understanding among all participants. 278

282 분과회의 8 대학원생발표 : 동남아시아의정치, 제도와사회변화 1. 오종원 ( 고려대 ) 군부의선택과신생민주주의정부의군부통제 : 태국, 인도네시아사례를중심으로 2. 소예니 ( 고려대 ) 무엇이평화협상을막는가? 미얀마사례연구 : 카친족과 카렌족비교 3. 강은혜 ( 서울대 ) 말레이시아인의종교성이성평등태도에미치는영향 : 무슬림과비무슬림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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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군부의선택과신생민주주의정부의군부통제 : 태국, 인도네시아사례를중심으로 오종원 ( 고려대 ) 문제제기 2016년 5월인도네시아의조코위도도 (Joko Widodo) 대통령은수하르토 (Suharto) 정권기인 1965~1966년에발생한반공학살의증거로제시된집단무덤에대해본격적인발굴조사에착수할것을밝혔다. 정치안보법률조정부장관과과거사진상규명인권단체관계자들이지속적으로노력한결과, 학살희생자조사재단 (YPKP) 는대학살희생자들의집단무덤에대해진상보고서를작성할수있었고, 이에따라정부는인권단체의전문가들에게규명의실무를일임하고이에수반되는반대세력의테러와위협으로부터신변보호를약속하였다. 이는 2012년인도네시아국가인권위가수하르토집권당시의숙청과인권침해에대한견해를밝혔음에도군부의영향력이상당했던정부와검찰당국이이를외면하여무산된사실과비교할때비교적신선한행보라고볼수있다. 반면같은해 10월, 태국에서는 1976년 10월 6일에발생한탐마삿대학교학살 40주기를맞아인권단체및대학생단체가합동추모식을거행하기로밝혔다. 이를위해태국대학생들은 2014년 9월홍콩에서중국정부에대해행정장관직선제를요구하며우산혁명을주도했던조슈아웡 (Joshua Wong) 을연사로초청하였다. 그러나그는입국을시도하는즉시태국정부에의해공항에서구금되었고, 하루만에강제출국조치를당했다. 태국경찰과이민국직원들은그가공항에도착하기를기다리다가곧바로구금조치를실시했으며, 이와함께통신기기사용을제한하는동시에강제출국조처를할것이라고통보하였다. 2014년쿠데타를통해집권한프라윳 (Prayuth) 장군은정치혼란과사회적동요를일소한다는명분으로사실상정치집회와언론자유를제한하는조처를취해왔다. 같은해에일어난두사건은민주주의국가에서군부의정치적퇴진여부와민간인출신의정치지도자의군부통제력에따라정치적으로상이한결과가 281

285 나타나는전형적인사례로볼수있다. 이른바문민통제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 는민주주의가지녀야하는기본원칙이다 (Huntington, 1956). 이는국가를통치함에있어서군부의개입을배제하고민간인에의해철저하게국군을통제하는것이민주주의국가를구성하는기본요소임을말한다. 문민통제는문민우위 (civilian supremacy) 라고도일컬어지며, 통수권이정부수반에의해행사되지만, 핵심은국민이선출한지도자가군을통솔하는것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왜어떤민주주의국가에서는군부의퇴진과문민정부의군부통제가수월하게나타나는반면, 다른어떤국가에서는군부주도의쿠데타가반복되는가? 주요주장이글에서다루고자하는질문은 왜군부가자발적으로문민정부에대한복종을선택하는가 에관한것이다. 과거에군사정부의권위주의정권을경험한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는민간의의도에따라군부를좌지우지할수없다. 다시말해신생민주주의국가에서군부통제는곧군부가자발적인민간으로의복종을선택하는것이다. 게디스가지적하였듯권위주의정권이민주화되는경우민간사회주도의상향식민주화나신생민주정부가단기간에모든영향력을장악하는포괄적인민주화는실현되기힘들다 (Geddes, 2003). 또한슬래이터와웡이고찰하였듯, 강력한권위주의국가가민주화를억압하지않고수용한이유를알기위해서는군부의선택을주로살펴야한다 (Slater and Wong, 2013). 군부는조직적으로통일성과일체성을유지하려노력하지만, 위기상황에서도분열을방지하는것을지상목표로두지않는다. 문민화된선거경쟁의상황속에서군의직업전문성을대표하고탈정치화를주장하는온건파는객관적군부통제를허용한다. 반면기존에경제적, 사회적, 정치적권력을독점하던지도부중심의강경파군부는군부통제를일방적으로허용하지않는다. 신생민주주의체제의출범이후선거경쟁이실시되면, 정치에개입하고자하는기득권중심의강경파군부는선거경쟁에서승리할가능성이있을경우군복을벗고정당을결사하여민주선거에참여할것이다. 반면선거경쟁에서의승리가능성이낮거나정부구성에참여하기힘든경우, 선거참여를거부하고군복을입은채로병영으로돌아간다. 선거에서의승리가능성을염두에두고정당을구성하여선거경쟁에참여한강경파군부는집권, 혹은정부구성에참여하며기성정치인화된다. 시간이지나며민간화된퇴역군인정치인들은선거승리및재선을위한이해를 282

286 가진다. 권력극대화 (power maximization) 을목표로하는민간정치권은군부에게문민통제를요구한다. 마찬가지로군의정치적중립성과직능전문성을고수하는온건파중심군부는문민중심의군수권, 군령권통제를받아들인다. 이렇듯정치적권력을추구하는군부강경파세력을정치권으로포섭하면서장기적관점에서는군에대한문민우위를확보한다. 반면강경파가선거경쟁을받아들이지않음으로써강경파와온건파가모두병영으로돌아간군부는불안한동거를시작한다. 온건파의친정부적성향과문민통제에대한수용은강경파가기대하는손실과실패를극대화하며그들에대한외부적위협과불안을극대화시킨다. 기존에자신들이소유하고있던경제적권력뿐만아니라사회적권력마저문민화가시도되기때문에군강경파는민간정부에의한통제를완강하게반대한다. 군부의내부적분열은온건파가문민정부에대한복종을더수용할수록, 강경파에대한국가의통제가심화될수록그정도가격화된다. 이러한논리의연장선상에서군강경파는군온건파를제압하고군내부장악을시도할것이다. 군강경파의득세로반문민화의경향이심화된군부는병영에서일체의문민통제를거부한채민주정부와대립한다. 위와같은이론을도식화하면아래와같다. 283

287 비교사례연구 : 민주화이후태국과인도네시아비교연구대상인태국과인도네시아는서로지리적으로인접해있으며, 두국가모두군부주도의권위주의정권을경험하였다. 또한공통적으로군부엘리트주도의근대국가를건설했으며비교적최근까지군이정치에직간접적으로개입하며자신들의영향력을과시하여왔다. 나아가양국은 2차대전이현재에이르기까지동남아시아지역에서의손꼽히는군사대국으로서두각을나타내고있다. 또다른특징으로는두국가에서모두군대가서구화를주도한엘리트집단이었으며, 다른민간사회조직에비해체계화및직업전문화정도가높다고할수있다. 내치적인목적과맞물려국가적폭력수단의독점이라는기능적인측면이맞물려서두국가의군부는막대한권위를행사하였다. 권위적이고비민주적인군사정부는사회, 경제자원에대한배타적이고독점적인접근을십분활용하여자신들의영향력을공고하게유지해왔다. 두국가사이의이러한유사점에도불구하고, 현재태국과인도네시아의민주주의안정성은서로차이를보이고있다. 1992년민주화이후에도각각 2006년과 2014년두차례의군부쿠데타로인해헌정질서가무너졌다가다시서기를반복하고있는태국의상황과는달리, 인도네시아는 1998년수하르토 (Suharto) 체제가붕괴한이후유숩하비비 (Jusuf Habibie) 과도정부부터현재에이르기까지민주주의질서를유지하고있는상황이다. 두국가에서상반된모습이나타나는주된이유는결국군이병영에서정치에직접개입하는지의여부에따라결정된다고볼수있다. 1. 태국의 1992년민주화이후상황과군부의반응대규모의민주화운동이발생한 1992년 5월위기직후태국군은외부적으로정치적중립을선언했고, 특히군인수를감축시키고사관학교의교과과정을개편하는등의개혁적인움직임을보인다. 문제는태국군부의기득권층상당수가여전히정치에의적극적인개입을주장하였고, 이를실제로관철시키기를원했다. 그들은타이군인은행의대주주인동시에다수의 TV 송국과라디오방송국을소유하고있었다. 또한대규모벌목사업의주체였으며광산개발, 골프장건설, 관광단지조성등고수익이보장되는사업들을독점하고있었다. 국방부장관은현역군인이일임하며단순히군인사권, 군행정권, 통수권을전유하는것뿐만아니라주변국과의외교정책수립까지도담당하고있었다 ( 김홍구, 2003). 군부일각에서의탈권위주의적주장과시도는군의정치개입을바라는이들에게실제적인위기로작용하였다. 군내부의파벌주의, 분열에더 284

288 해외부적으로민간정부에의한문민통제의강화는정치군인들에대한심각한위기로인식된다. 군수뇌부내강경파와온건파간의내부적분열과더불어민간인총리에의한외인적인군개혁방침은강경파의반응을더욱격렬하게이끌었다. 97 년헌법개정을통해태국선거에는이전까지채택되었던블록투표제대신비례대표제와소선거구제가도입되었다. 기존의중선거구제가유권자의폭이좁고다수결주의의경향이낮았던것에비해, 개정된선거법은유권자범위도넓어지고다수결주의경향성도높아졌다. 이러한경향성은선심정치, 후견인정치의특성을낮추고전국정당의보편적인정책이중요성이강조된다 (Selway, 2011). 즉, 기존의군부세력등이가지고있던정치적영향력이대폭삭감되면서탁신이이끄는타이락타이당 (TRT) 는총선에서보편적복지정책 (30바트의료보험정책 ) 을내세우면서압승을거두었고, 반대로정치에관여하고자하는군인들의선거참여의욕은줄어들게된다. 더불어탁신은자신과가까운인사나문민통제를용인하는인물을군의핵심인사에앉히고적극적으로군의영향력을배제하고자하였다. 이로인해군의핵심은탁신의행보를지지하거나군정치개입을반대하는신세력및기존의이익과권한을보호받길원하는구세력간의갈등으로비화된다, 여기에민간정치권의문민통제에대한압력이더해지면서점차강경파가자제력을상실하며초강경파가대두되는계기가마련된다. 그리하여 2006년군부일부세력은지휘계통을장악하는즉시쿠데타를일으켜총리를실각시킨다. 더욱이쿠데타주도세력이제시한 2007년헌법에서는탁신에게강한지지를보낸북부와북동부지역유권자들의영향력을무력화하기위해상원의반을임명직으로바꿈으로써, 군부와군관료가선거로구성된정부를견제할수있는장치를마련하였다. 무엇보다중요한것은 97년헌법을통해채택한소선거구제를선거구당 2-3명을선출하는중선거구제로다시돌려놓았다. 또정당별명부로투표하던 100명을 80명으로줄이고 8개선거구에서 10명씩선출하도록분할함으로써기존타이락타이당에몰렸던북부및북동부지역의몰표를분산시켜는효과를노렸다. 결과적으로 2007년의신헌법은타이락타이당으로권력이집중된정당체계를다수의정당들로분열시키는구도를만들었고, 정당과선출된정치인들의역할을현저히축소시켰다 ( 서경교, 2010). 2. 인도네시아의 1999 년민주화이후의상황과군부의반응 1998 년수하르토의하야로인해과학기술부장관하비비는과도정부를이끌 며정치개혁과관련된입법을주도한다. 중요한것은종래의정치군인들이지 285

289 녔던실제적인정치적영향력을인정하고새로제도권에등장한주체들과협상 (bargaining) 이이루어졌다는사실이다. 본래과도입법정부가마련했던선거법안은소선거구제에서대다수를뽑는것이골자였지만, 정치군인세력과신생정당, 그리고하비비내각삼자간절충속에서수하르토정권에서사용되던기존의비례대표제를기본으로할것을결정했다 ( 윤진표 and 제대식, 2000). 또한원외세력들이중심이된사회적압력은종래군인보장의석수의전면폐지를요구했지만, 과도정부및군부의의견이수렴됨과동시에다른정당의양보에힘입어기존의석의반을지켜내는결과가도출되었다. 즉, 3 당체제를허묾과동시에군인의석의일정수준이상보장, 그리고기존선거제도의점진적수정은정치에참여할의사가있는기존군인들이선거의승리를기대하여군복을벗고선거경쟁에참여하는유인을제공하였다. 뿐만아니라인도네시아의민주화는군부의세력을분열시키는역할을하기도하였다. 당시인도네시아군부는크게세계대전및건국혁명에참여했던구세대와인도네시아군사관학교출신이며군인의전문직업성교육을철저히받은마글랑세대 (Maglang Generation) 로구성된다 ( 윤진표, 1997). 특히구세대는혁명과신질서체제를겪으며국가형성업적을일임하고동시에정치적현실에적극참여한인물들이었다. 반면마글랑, 즉신세대들은건국과신체제수립경험이없을뿐더러, 수하르토체제에서독점적인경제및사회적권력을보유한이전세대와의괴리가존재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선거의문민화, 사회체제의문민화는군부에게이러한시류를수용할것인지거부할것인지에대한이견을발생시키고그틈을벌려놓았다. 그렇지만정치에깊이관여해온기득권정치군인관료들이선거에참여하면서, 군의직업적전문성을지지하는소장파군관료들위주로군이개편되어가는과정을성공적으로시작할수있게되었다. 특히과도내각의뒤를이은두정권의차이에대해서도비교적으로살펴볼필요가있다. 와히드 (Wahid) 는국방장관에민간인을앉혔으며군요직에개혁파인사들을임명하고, 특히 년공산당숙청학살의피해자들에게사적으로사과하는행동을하며군보수파의반발을샀다. 반면, 기대에비해영욕이엇갈렸던메가와티 (Megawati) 집권기간 (2002~2004) 은비록투쟁민주당 (PDI-P) 이개혁파정당들과연합하지못했다는비판을받기는하지만, 결과적으로군부와의우호적인관계를설정하고거국연립내각을구성하는한편군부에대한급진적인변화를자제하는행보를보였다. 이러한메가와티정부의행보는군의정치에대한온건한참여를독려하면서, 군의직접적개입에의한정권붕괴를막아냈다는점에서일견긍정적으로볼수있을것이다. 286

290 무엇이평화협상을막는가? 미얀마사례연구 : 카친족과카렌족비교 소예니 ( 고려대 ) 2011년집권한 Thein Sein 대통령은 60년동안지속되어온민족갈등을해결하는것을국시로삼았다. Thein Sein 대통령은 2011년부터지속적으로군부와평화협상을맺으려는노력을해왔고, 2015에시행한전국평화협정 (National Ceasefire Agreement, NCA) 은종족분규를해결하려는대통령의노력을단적으로보여준다. 이연구는이러한 NCA에다르게응답한두개의반군을비교한다. 첫번째반군은카렌민족전선 (Karen National Union, KNU) 이다. 이들은까렌해방군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KNLA) 을군대로유지하고있다. 이들은 1948년부터 2015년까지 70년이넘는기간동안줄곧정부군과대치상태에있었다. 두번째종족은카친독립조직 (Kachin Independence Organization, KIO) 이다. 이들은카친독립군 (Kachin Independence Army) 를군대로갖고있다. 이들은과거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동안군부와평화유지상태에있었지만, 2011년에다시대치상태로돌입했다. 2015년에 NCA가제안되었을때, 70년이나대치했던 KNU는이협정에응했고, 오히려과거에협력의경험이있었던 KIA는이협상에응하지않았다. 이들이이렇게다른선택을하게된이유는무엇일까? 이를파악하기위해게임이론을사용하여각집단의선택에대한손익을분석한다. <Figure 1> 은군부의선택에따른손익을분석한결과이다. 군부에게는평화협상제안을하느냐, 하지않느냐라는두가지선택권이있다. M1 은군부가평화협상을제안을하고반군이이를받아들일때, M2는군부가평화협상을제안하였지만반군이이를받아들이지않았을때, 마지막으로 M3은군부가평화협상을제안하지않았을경우이다. 군부가평화협상을제안하고이것이받아들여졌을때군부가얻을수있는이득은첫째, 정부는자원에더용이하게접근할수있다는점, 그지역반군의기반을무너뜨릴수있다는점, 외자유치를용이하게한다는점이다. 평화협상을통해군부가잃게되는것은무엇일까? 군부는재정적으로해당지역에원조를해주어야할것이고 287

291 정치적으로도그들의요구를들어줘야할것이다. 그러나군부가예상할수있 는손해는그렇게크지않다. <Figure 1 Ceasefire Game; tatmadaw> 물론, 군부가평화협상을제안했지만, 반군이이협상을거부할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군부는협상제안을하는것이유리한데, 왜냐하면, 평화협상제안을하는행위자체로군부는본인이화해하려는의지가있다는것을서방국가들에게어필할수있기때문이다. 따라서군부의손익은 M1 > M2 > M3 로군부에게는화해를제안하는것이언제나더좋다. 반군이이를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않던, 그들의화해제안이진정성이있던, 없던그들은대외적으로는언제나화해를지향하는것처럼행동할것이다. 288

292 <Figue 2, Cease-fire Game; ethnic group> 군부가평화협상제안을한상태에서이를받아들일지말지에대한선택은반군이하게된다. <Figure 2> 는반군의선택지이다. B1은반군이협상을받아들였을때얻는이득, B2는협상을받아들이지않았을때얻는이득이다. 반대로, D1은협상을받아들였을때입게되는손해이며 D2는협상을받아들이지않았을때얻게되는손해이다. 따라서 B1-D1 > B2-D2 일때, 반군은협상을받아들일것이다. 각각을따져보면다음과같다. 반군이평화협상을받아들임으로써얻을수있는이득은 전쟁의종식 이라는평화상태, 재제조치의완화이다. 반면반군이평화협상을받아들였을때잃게되는것은정부에의한지역자원의약탈이다. 만일반군이협상을받아들이지않는다면, 지역자원에대한접근성은유지하겠지만, 상시적으로군부와대립해야하고, 강력한제재조치로인해자유로운통행자체가불가능할것이다. 위와같은게임이론을통해, 반군의선택을유추할수있다. 평화를원하고원조가절대적으로필요한지역은 B1이높고 D2가높은지역으로평화협상에응할가능성이크다. 반대로자원을많이보유하는지역은 D1과 B2가높은곳으로평화협상에응하지않을가능성이크다. 따라서각질문에대한지역의 289

293 대답차이에따라각반군의선택이달라질것이다. 이를종합하자면, KNU/KNLA는내부적으로는지역민들의지지를잃었고, 외부적으로는한때후원국이었던태국이지지를철회했고, 그리고경제적으로는그지역에서그들이이용가능할수있는자원이거의없다. 반대로 KIO/KIA는여전히지역민들의지지를받고있으며, 중국과이해관계가매우복잡하게얽혀있어중국의지속적인지원을기대할수있고, 자원으로부터얻고있는이득이상당하다. 따라서 KNU/KNLA는정부와평화협상을하는것이더이득이고, KIO/KIA는평화협상을체결하지않는것이더이득이라는것을알수있다. 이러한분석의결과는미얀마군부가이문제의진정한해결을원한다면자원으로부터나오는이익을지역주민들과나누는방식으로헌법을개정하여야한다는함의를준다. 만일카친지역주민들이변함없이 KIO/KIA를지지하고, 중국또한 KIO/KIA에게암묵적지지를보낸다면, 군부의태세전환없이이러한대치상태가해결되기는쉽지않을것이기때문이다. 290

294 말레이시아인의종교성이성평등태도에미치는영향 - 무슬림과비무슬림비교 - 강은혜 ( 서울대 ) 연구배경 이연구는말레이시아에거주하고있는무슬림의종교성이이들의성평등태도에미치는영향을살펴보기위해, 말레이시아인을무슬림과비무슬림으로구분하여각집단의종교성과성평등태도, 그리고그관계를분석했다. 세계경제포럼 (World Economic Forum) 이매년발표하는세계성격차지수에서말레이시아는항상최하위권수준을유지해왔다. 119) 국제비교를통해종교성과성평등성간의관계를분석한잉글하트의연구에따르면 (2003), 종교성이강한국가일수록성평등성이낮게나타난다. 120) 말레이시아는전체인구의 98% 이상이종교를가지고있다. 121) 또한, 제6차 (2010~2014) 세계가치관조사 (World Values Survey) 결과리포트에따르면말레이시아인설문참여자의약 85% 가인생에서신이매우중요하다고응답했다. 말레이시아는다인종, 다종교국가이기는하지만, 인구의 60% 가이슬람교도이다. 122) 기존연구에따르면, 이슬람교신자는다른종교에비해더욱성불평등적인태도를보여준다 (Psacharopoulos and Tzanand natos, 1989; Healey, 1999; Seguino, 2011; Alamgir, 2014;). 따라서, 이연구는말레이시아의낮은국제성평등지수를설명하는데말레이시아무슬림과이들의종교성을중요한요인으로가정하고, 이를실증적으로분석하기위해세계가치관조사 (World Values Survey) 제6차조사 119) Global Gender Gap Report 2016 에따르면총 144 개국중말레이시아 106 위. 120) Inglehart, R., and Norris, P Rising tide: Gender equality and cultural change around the world.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하지만말레이시아는이연구의분석대상에서제외되어있다. 121) 전체인구중이슬람교도 61.3%, 불교도 19.8%, 기독교 9.2%, 힌두교 6.3% 그외다른종교 1.7% 차지 ( 총 98.3%). Population Distribution and Basic Demographic Characteristic Report: 2010.Statistics Malaysia 122) 말레이시아는이슬람국가는아니지만, 이슬람교를국가의공식종교로서지정하고있다 (Stivens, 2006). 291

295 자료 ( 조사주기 ) 를이용하여말레이시아인을무슬림과비무슬림으로구분하여이들각각의종교성과성평등태도에차이가있는지, 그리고이러한종교성과성평등태도간에관계가있는지분석한다. 이연구의연구질문은다음과같다. < 연구문제 1> 말레이시아인의종교성과성평등태도는무슬림과비무슬림간다르게나타나는가? < 연구문제 2> 무슬림과비무슬림의성평등태도는이들의종교성에영향을받는가? 연구방법 제6차세계가치관조사 (World Values Survey) 자료에포함되어있는말레이시아의자료는 2012년도에조사된자료이다. 총 1,300명의응답자중 1,234명이최종연구대상이고이중무슬림은 784명 (64%), 비무슬림은 450명 (36%) 이다. 표 1은독립변수와종속변수의구성을보여준다. 종교성을측정하기위해 Cornwall과그의동료들이분석을통해개념화한종교성척도에따라 (1986), 세계가치관조사자료에서이와상응하는변수들로이연구의독립변수인종교성을측정하였다. 종속변수인성평등태도는관련된네가지문항으로구성하였다. 각각의문항은더높은값을가질수록더욱성평등적인태도를가지는것으로코딩되었다. 종교성과성평등태도를구성하는각각의변수는해석의용이를위해 0~100의척도로변환하였다. 성별, 나이, 소득수준, 교육수준, 결혼상태, 인종을통제변수로포함시켰다. 나이와소득수준은연속변수로포함하였고, 성별, 결혼여부, 교육수준, 인종은더미변수로변환하여회귀분석에포함하였다. 교육수준은하위 ( 무학 ~ 중졸 ), 중위 ( 고졸 ), 상위 ( 대학 ) 으로재구성된변수를이용하였다. 표 1. 변수구성 독립변수 : 종교성질문응답범주 종교적믿음 신을믿는가? 네 혹은 아니오 종교적헌신 인생에서신은얼마나중요한가? 인생에서종교는얼마나중요한가? 10 점척도 (1~10) 네 혹은 아니오 292

296 표 1. 변수구성 독립변수 : 종교성질문응답범주 종교적행동 웨딩이나장례식을제외하고, 얼마나자주기도하는가? 8 점척도 종속변수 : 성평등태도 성평등태도 웨딩이나장례식을제외하고, 얼마나자주종교의식 ( 행사 ) 에참여하는가? 직업이한정적일경우, 남성이우선권을가진다 대체적으로남성이여성보다정치지도자에더욱적합하다 대학교육은여성보다남성에게더욱중요하다 대체적으로남성이여성보다회사임원직에더욱적합하다 7 점척도 3 점리커트척도 ( 비동의 - 중립 - 동의 ) 4 점리커트척도 ( 매우비동의 - 비동의 - 동의 - 매우동의 ) 4 점리커트척도 ( 동일 ) 4 점리커트척도 ( 동일 ) 통제변수 성별 ( 여성 ( 기준 ), 남성 ), 나이, 소득수준 ( 개인월평균소득수준 1~10 단계 ), 교육수준 ( 상, 준, 하로나뉜변수이용 ), 결혼여부 ( 미혼 ( 기준 ), 기혼 ), 인종 ( 중국인 ( 기준 ), 남아시아인 (South Asian, Indian), 말레이 ) 표 2 는조사대상자의일반적인특성을보여준다. 표 2. 조사대상자의일반적인특성 단위 : 샘플수 (%) 비무슬림 무슬림 성별 여성 209 (46) 380 (48) 남성 241 (54) 404 (52) 나이 10대 21 (5) 51 (6) 20대 111 (25) 173 (22) 30대 79 (18) 150 (19) 40대 134 (30) 226 (29) 50대 65 (14) 121 (15) 60대이상 40 (9) 63 (8) 293

297 표 2. 조사대상자의일반적인특성 단위 : 샘플수 (%) 비무슬림 무슬림 결혼여부 기혼 147 (33) 203 (26) 미혼 303 (67) 581 (74) 소득수준 수준1 8 (2) 14 (1.8) 수준2 12 (3) 27 (3) 수준3 20 (4) 61 (8) 수준4 23 (5) 65 (8) 수준5 75 (17) 96 (12) 수준6 98 (22) 175 (22) 수준7 117 (26) 163 (20.8) 수준8 80 (18) 157 (20) 수준9 13 (3) 20 (2.6) 수준10 4 (1) 10 (0.8) 교육수준 하위 127 (28) 237 (30) 중위 243 (54) 466 (60) 상위 80 (18) 81 (10) 인종 서남아시아계 95 (21) 1 (4) 중국계 282 (63) 27 (2) 말레이 73 (16) 987 (94 총 450 (100) 784 (100) 1, 234 (100) 연구결과 종교성을측정하는다섯가지변수에관한주성분분석을실시한결과공통된요인한개를추출할수있었고 ( 표 3), 이를 종교성 이라고이름붙였다 ( 크론바하알파계수 83%). 새롭게생성된이변수는독립변수로서회귀분석에사용되었다. 무슬림과비무슬림의각변수에따른종교성평균은표 4에서보여준다. 비무슬림과무슬림모두전체적으로강한종교성을보여주는데, 모든항목에서무슬림이비무슬림의종교성이더강한것으로나타났다. 294

298 표 3. 종교성주성분분석결과 표 4. 집단별종교성평균 요소 비무슬림 무슬림 ttest 신에관한신에관한 ***.419 믿음믿음 인생에서 인생에서 *** 신의중요성.478 신의중요성 인생에서 인생에서 *** 종교의중요성.424 종교의중요성 기도횟수.478 기도횟수 *** 종교의례종교의례 ***.434 참여횟수참여횟수 설명분산비율 60.6% 종교성평균 *** 성평등태도에관한주성분분석을실시한결과는표 5에제시되어있으며, 마찬가지로추출된한개의요소는종속변수인 성평등태도 로서회귀분석에사용되었다 ( 크론바하알파계수 76%). 표 6는비무슬림과무슬림의성평등태도의평균을보여준다. 전반적으로비무슬림과무슬림모두성평등적이라기보다는성불평등적인태도를보여주고있지만, 무슬림이비무슬림보다더욱불평등적인태도를지니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다만, 회사고위직자리에남성이더적합하다는질문에관한대답은비무슬림과무슬림간차이를보이지않았다. 표 5. 성평등태도주성분분석결과 표 6. 집단별성평등태도평균 요소 비무슬림 무슬림 ttest 정치지도자.510 남성더 *** 적합 정치지도자남성더적합대학교육남성우선권한정된직업남성우선권회사중역남성더적합 대학교육남성우선권한정된직업남성우선권회사중역남성더적합 ** ** 설명분산비율 58.5% 성평등태도평균 *** 표 7 는종교성이성평등태도에미치는영향에관환회귀분석결과이다. 분석결과, 비무슬림의종교성은이들의성평등태도에영향을미치지 295

299 않았으며, 무슬림의종교성은영향을미치는것으로나타났다. 무슬림의 종교성이 1점더강해질수록이들은 0.25점더성불평등적인태도를가지는 것으로나타났다. 말레이시아무슬림의종교성이더강할수록이들은더욱성 차별적인태도를보인다는것이확인되었지만, 그영향력의크기는매우 적었으며, 이분석의 R-square값이보여주는것처럼이들의성평등태도를 설명하는 요인으로서 종교성은 전체 분산의 12% 만 설명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말레이시아 무슬림의종교성이이들의성불평등적태도를결정하는주요한요인이 아님을알수있다. 표 7. 회귀분석결과 성평등태도 비무슬림 무슬림 종교성 ** (0.07) (0.08) 성별 *** *** (1.99) (1.46) 나이 (0.09) (0.07) 기혼 * (2.60) (2.16) 소득수준 * 0.33 (0.58) (0.39) 교육수준 ( 중위 ) (2.44) (1.77) 교육수준 ( 상위 ) (3.17) (2.79) 남아시아인 (2.53) (20.90) 말레이 (2.80) (5.39) Constant *** *** (6.69) (8.84) R-sqr * p<0.05, ** p<0.01, *** p<

300 말레이시아무슬림이더욱종교적이라는것, 성불평등적교리에노출될가능성이높고, 이러한교리와종교를인생에서중요하게생각한다는것이이들에게성불평등적인태도를형성하는데크게관련되지않다는것은, 두가지로해석할수있다. 실제로말레이시아인의성불평등적태도는종교성이아닌다른요소가더크게영향을미친다는것일수도있고, 다른한가지는말레이시아의세계가치관조사설문지응답자들의응답자료를통해측정된종교성이실제로이들의종교성을정확하게반영하는지에관한것이다. 이연구의결과와같이, 이들의성평등태도에종교성이미치는영향은크지않을수있고, 이들은설문지에실제자신의종교성이아닌, 사회에서요구되거나, 바람직하다고여겨지는종교성에맞게응답을했을수도있다. 또한, 이연구에서종교성을측정하기위해사용한척도가무슬림과비무슬림의종교성을제대로측정하지못했을수도있다. 하지만이러한자료의한계에도불구하고, 이연구는말레이시아인의종교적태도와행동을측정하는것을시도했고, 무슬림과비무슬림으로구분하여성평등태도와의연관성을실증적으로분석, 그리고집단별로비교함으로써, 무슬림의종교성과성평등태도에관해대부분의기존연구들이중동혹은아프리카지역을중심으로한것과다르게동남아시아지역을살펴보았다는의의를지닌다. 또한, 말레이시아인의종교성과성평등태도간의관계는무슬림과비무슬림사이에서크게다른양상을보이지않다는것도알수있다. 후속연구에서는말레이시아무슬림을종교성에따라더욱세분화하여, 실제로굉장히종교적이라고응답한무슬림과약한종교성을지닌무슬림을구분하여이들의성평등태도를분석해봄으로써, 말레이시아무슬림의종교성과성평등태도에관한보다심도있는분석을시도해볼수있을것이다. 297

301 참고문헌 Alamgir, A. (2014). Islam and Women s Rights: Discourses in Malaysia, Social and Behavioral Sciences 114, Cornwall, M. Albrecht, S. L., Cunningham, P. H., & Pitcher, B. L. (1986). The Dimensions of Religiosity: A Conceptual Model with an Empirical Test. Review of Religious Research, 27(3), Healey, L. (1999). Gender, Power and the Ambiguities of Resistance in a Malay Community of Peninsula Malaysia, Women s Studies International Forum 22(1), Inglehart, R. & Norris, P. (2003). Rising Tide: Gender Equality and Cultural Change Around the World. New York,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Psacharopoulos, G. & Tzanand natos, Z. (1989). Female Labor Force Participation: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World Bank Research Observer, 4(2), Seguino, S. (2011). Help or Hindrance? Religion s Impact on Gender Inequality in Attitudes and Outcomes, World Development 39(8),

302 분과회의 9 동남아와한인의삶 : 생애사연구를통해본동남아한인의 정체성 I 1. 김홍구 ( 부산외대 ) 재태한인들의초국적경험 : 초국적정체성과현지문화와의 관계를중심으로 2. 김동엽 ( 부산외대 ) 교민생애사를통해본필리핀한인사회의변천 3. 홍석준 ( 목포대 ) 생애사를통해본말레이시아한인정체성의형성과변화 : 말레이시아이주정책에대한한인들의대응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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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재태한인들의초국적경험 : 초국적정체성과현지문화와의관계를중심으로 김홍구 ( 부산외대 ) 목차 1. 들어가는말 2. 재태한인이주의역사 3. 재태한인의초국적경험 1) 이주의동기와조건 2) 일상적인삶과사회문화적실천 3) 현지화와초국적정체성 4. 나가는글 1. 들어가는말 재태한인들 ( 교민과체류자 ) 의초국적경험을살펴보고자하는이연구는구술생애사 (life history) 인터뷰를바탕으로이루어진다. 인터뷰는크게 2 차에걸쳐서행해졌다. 1차는 2016 년 7월 22일~8 월 2일, 201 7년 1월 8일~1 월 12일, 2017 년 2월 6일~2 월 14일에이루어졌으며, 각계각층한인 23명을인터뷰했다. 인터뷰장소는방콕과치앙마이였다. 1차인터뷰에서는연구자의개입을최대한줄이고대체로구술자의전반적인삶에대한주관적인구술을경청했다. 주로이주의동기와적응과정에관한구술이있었는데 1차년도주제 이주와정착의역사 에이들의경험을다수소개했다.2차인터뷰는 2017 년 7월 7일-7 월 20일과 8 월5일-8 월 15일에걸쳐서이루어졌는데각계각층한인 10여명을심층면접했다. 인터뷰장소는방콕이었다. 2차인터뷰는 1차인터뷰를바탕으로이연구목적에맞는 20여개의구체적인인터뷰항목을설정해서질문하는방식으로진행되었다. 2차년도인터뷰대상자중에는 1차년도와동일인물도있었고새로운인물도있었지만, 동일인물인경우는 1차인터뷰때불 301

305 분명한부분에대해서추후질문도했다. 이들을대상으로태국으로이주하게된동기와과정, 가족생활을비롯한사회적관계, 일상에서소비하는문화, 그리고현지인과의관계맺기등에대해서심층면접을통해초국적삶에대한다양한정보와견해를접할수있었다. 이연구에서는재태한인의이주현상을하나의틀속에서분석하기위해서재태한인의이주현상을거시적측면에서전지구화 (globalization) 라는배경속에서나타나는초국가주의적인 (transnational) 문화의흐름이라고전제한다. 카슬과밀러 (Castles and Miller 2003(2013)) 에따르면오늘날의이주를이해하는데전지구화는중요한배경이되고, 이주를유발하고이주의방향과형태를변화시킨다. 전지구화 (globalization) 와초국가주의 (transnationalism) 의개념을비교하면전자는후자보다더탈영토화 (deterritorialisation) 된개념으로볼수있을것이다. 최근의국제이주는단순히한사회에서다른사회로이동하는것이아니라둘이상의장소에서반복되는중요한연계를유지하는초국가적 (transnational) 인면모를가진다는것도여러학자들에의해밝혀진사실이다 (Kearney 1995; Portes et al. 1999; Vertovec 1999). 초국가주의현상으로서 재태한인이주현상 은 1990년대동아시아경제위기를겪으면서이지역에서본격화된지역협력에서기인하는것이며, 이는 1990 년대의신자유주의적지구화와세계각지의지역주의의심화로인해초래된현상이라고볼수있다. 1997년동아시아금융위기를경험한것을큰계기로하여한국과동남아국가간의관계는새로운전기를맞게되었다. 심각한경제위기를경험한이지역국가들은위기의식을공유했으며동북아-동남아경제의연계를인식했고, 동아시아지역협력에적극적으로참여했다. 동아시아지역협력의시작으로동북아와동남아가서로별개가아니라하나의유기적으로연결된단위이고, 나아가하나의동아시아라는지역으로묶일수있는단위라는인식을하게되었다. 그결과정치적, 경제적결속이빠른속도로발전했으며초국가적인적문화교류도활발히이루어지게되었다 ( 이재현 2009). 글릭쉴러 (Glick Schiller 1997) 는초국가주의 (transnationalism) 를이주민들의출신지와정착지를연결하는사회적영역을건설하는과정으로정의했다. 키비스토 (Kivisto 2001) 는초국가주의의등장을산업화되지않은지역에서안정적인정치와성공적인산업화를겪은국가로인적자본이이동하면서인종 302

306 적융합이발생하고, 이주민공동체가형성되는것으로초국가주의의등장을설명한다. 초국가주의의활성화요인으로는자본주의의세계적확산, 초국가적비정부기구의성장, 탈국민적시민의등장, 대중문화의융합을꼽는다. 초국가주의현상은몇가지특징을갖는다. 버토벡 (Vertovec 1999: ) 은초국가주의의특징여섯가지를제시했다. 첫째, 개인적인위치가초국가적인사회적회로에서접촉점으로작용해경계선을가로지르는사회적구성형태, 둘째, 한국가이상의여러국가와의다양한동일시에의해자극을받는새로운의식의형태, 셋째, 문화적혼합, 혼종성, 브리콜리지 (bricolage) 로특징지워지는문화적동일시와재현의새로운양식넷째, 지구화를가능케하는초국가적기업에의해설립되는자본의흐름다섯째, 출판과언론등의새로운공학적발전에의해가능해진정치참여여섯째, 멀고도가까운장소나지역에대한새로운개념의구성등이다. 이연구에서다루고자하는재태한인의이주현상은위버토벡이나포르테스등 (Portes et al. 1999: 221) 이주장하는초국가주의의특징과도부합하는것들이다. 포르테스외 (Portes et al. 1999: 221) 는초국가주의적행태를세가지로구분하고있다. 경제적초국가주의 는다국적기업의행태를의미한다. 둘째로 정치적초국가주의 는출신지와정착지모두에서정치적권력이나영향력을취득하기위해활동하는사람들의행태를의미한다. 셋째로 사회문화적초국가주의 는출신지국외에거주하며민족정체성의강화나민족의문화행사에집단적으로참여하는것과같은행태를의미한다. 초국가주의현상에관해서는다양한주장과논의들이이루어지고있다. 우선이주동기에관해살펴보기로한다. 초국가적이주에대한카슬과밀러 (Castles and Miller 2003) 를비롯한많은연구들은주로보다높은임금, 더나은취업기회, 직업능력의향상과같은경제적이유로인해더나은선진국으로이동한다고주장한다. 이주장들은이연구에서주목하는현상을온전히해석하기는힘들다는한계점을안고있다. 그핵심적인문제는선진국에서개발도상국으로의이동이라는방향성에대해서는설명하지못한다는점일것이다 년이후이주한절대다수의재태한인들은상대적으로부유한나라 303

307 에서가난한나라로이주했다는특수성을갖고있다. 이들은사실상태국에영구히정착할생각이없는사람들이다. 태국에서장기간체류하고있을지라도언젠가는한국으로돌아가야한다는생각을공유하고있다. 그결과이들은서구에서일반적으로논의되고있는이주 ( 노동 ) 자와는다른정체성과주체성을가지고초국가주의를경험하고있다고볼수있을것이다. 선진국에서개발도상국으로의이동이라는새로운방향성에대해잘설명해주는개념이바로라이프스타일이주 (lifestyle migration) 이다. 라이프스타일이주는북유럽사람들이스페인, 몰타, 이태리, 포르투갈, 그리스, 터키등지로, 영국인과네덜란드인이프랑스로, 북미인들이멕시코로이주하는현상... 또한이러한현상들일부에대한용어인은퇴이주, 레저이주, 반도시화, 제2의집갖기, 어메니티 (amenity) 이주, 계절이주등의현상을총괄하는개념이다. 이들에의하면, 라이프스타일이주자는파트타임이나풀타임으로, 영구적으로혹은한시적으로, 생활비용과 / 혹은땅값이더저렴한나라로, 삶의질로느슨하게정의되는어떤다양한이유로움직이고있는상대적으로부유한개인이라고정의할수있다 (O'Reilly and Benson 2009). 라이프스타일이주라는개념은과거의이주개념에비하면그외연이확장되었으나소비를중심으로하는개념이라는점에서본연구에서주목하는재태한인의이동성을적극적으로설명하지는못한다고볼수있다 ( 이민영 2016 재인용 ). 그동안의이주민의연구들은주로이주의배출- 흡인요인과이주의경제적영향및정부의동화정책과같은외부적요인에집중했다고볼수있다. 따라서개인과사회사이의관계들과이주자들의종족적 / 인종적정체성을찾는연구들에좀더집중할필요가있을것이다. 이연구에서도재태한인의정체성에보다많은초점을맞추기로한다. 포르테스 (Portes 1997) 는초국적이주민 (transmigrants) 의특성에대한언급에서이주민들이이중적인삶을살아가고있으며, 이중적언어를구사하고, 두국가에두곳의거주지를유지하고, 이두곳에서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이해를추구하는것으로묘사했다. 초국적이주민은한국가에고정되어있는단일정체성이아닌다중적이고가변적이며혼종적인정체성을형성하게된다는것이다. 카슬 (Castles 2002) 은초국가적공동체구성원들이오랫동안지속해온국민적정체성을넘어모순적이거나유동적인정체성을갖는다고한다. 또기든스 ( 앤소니기든스 1997) 에따르면탈전통적질서를그본질로하고있는현대에서자아정체성은자연스럽게주어진것이아니라성찰 304

308 적으로조직되는분투가된다. 그것은개인이생애주기를거쳐다수의선택지속에지속적으로만들어가야하는하나의궤도이다. 확대된세계, 다양해진선택지속에무엇을할것인가, 어떻게행동할것인가, 어떤사람이될것인가하는성찰은자아구성의핵심이된다. 초국가적행태는이주자가개인적으로경험하는이주의목적과배경, 그리고정착지로이주할당시의인적 물적자본의소유정도와밀접한관련이있다. 많은인적자본과물적자본을동반한이주의경우공적영역 -출신지사회의정치 경제적환경개선을위한활동-에서의초국가적활동에간여할가능성이높으며, 반대로적은인적자본과물적자본을동반할경우초국가적인활동이사적영역 -송금과사업목적으로유기적관계유지 -에치우치는경향이나타난다. 이같은이주자의개인적환경외에정착지에서의삶의환경또한초국가적행태의유형에많은영향을준다 ( 김동엽 2012). 포르테스 (2003) 에의하면이주민들이분산되어있고, 사회적으로부각되지않음으로인해차별로부터자유로운경우에는초국가적행태를나타내지않으며, 정착지국가와사회가이들에대해차별적이며이주자들이밀집되어있을경우초국가적행태가증가된다고했다. 포르테스 (Portes 1997: ) 는초국가주의를주류사회에제대로통합되지못하고하층동화의경향이있는계층에대한하나의처방으로의미를부여하기도했다 ( 김동엽 2012 재인용 ). 레빗과자워스키 (Levitt and Jaworsky 2007) 에따르면 초국적이주 의개념을사용한이론들은몇가지한계를드러내고있는데무엇보다중요한문제는이주노동자의초국적주체성을다룰때계급적변수를제대로검토하고있지않다는점이다. 채수홍 (2012) 은레빗과자워스키등을인용하여호치민에거주하는한국인매니저의사회문화적경험을초국가주의의관점에서해석하고있는데초국가주의족이주노동을사회문화적으로이해하기위해서는이주노동자내부의상이한계급적특성 ( 공장매니저와주재원 ) 을고려할필요가있다고주장한다. 이연구에서살펴볼초국가주의현상과관련한논의의초점은다음과같이정리할수있다. 첫째, 초국가주의현상인재태한인의이주현상을제대로파악하기위해서는기존의국가중심적인시각에서탈피하여지역적, 국제적인거시적인시각을가 305

309 져야한다는점이다. 또초국가적이주에대한많은연구들은경제적이유로인해더나은선진국으로이동한다고주장한다. 하지만이주장들은재태한인의이주와같이선진국에서개발도상국으로의이동이라는방향성에대해서는설명하지못하고있다. 둘째, 일반적으로초국적이주민은이중적인삶을살아가고있으며, 이중적언어를구사하고, 두국가에두곳의거주지를유지하고, 이두곳에서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이해를추구하는것으로묘사된다. 초국적이주민은한국가에고정되어있는단일정체성이아닌다중적이고가변적이며혼종적인정체성을형성하게된다는것이다. 또확대된세계, 다양해진선택지속에무엇을할것인가, 어떻게행동할것인가, 어떤사람이될것인가하는성찰이자아구성의핵심이된다. 초국가적행태는많은인적자본과물적자본을동반한이주의경우공적영역에서의초국가적활동에간여할가능성이높으며, 반대로적은인적자본과물적자본을동반할경우초국가적인활동이사적영역에치우치는경향이나타난다. 또정착지국가와사회가이주민들에대해차별적이며이주자들이밀집되어있을경우초국가적행태가증가된다. 초국가주의적이주노동을사회 문화적으로이해하기위해서는이주노동자내부의상이한계급적특성을고려할필요가있다. 위다양한논의의맥락에대한이해를바탕으로이연구는 2장에서재태한인들의이주와정착의역사를간단히살펴본후, 3장에서주로재태한인의초국적경험-이주의동기와조건, 일상적인삶과사회문화적실천 ( 현지문화와의관계 ), 현지화와초국적정체성-을살펴보는데목적을두고있다. 2. 재태한인이주의역사 2015년외교부재외동포현황자료에따르면재태한인의인구수는 19,700 명 ( 남성 11,354명, 여성 8,346명 ) 이다. 지역별로보면방콕 13,636명, 치앙마이 3,356명, 푸껫 1,500명, 촌부리와라영등에 1,208명이거주하고있다. 거주자격별로살펴보면시민권자 57명, 영주권자 120명이며대다수는일반체류자 (16,573명) 와유학생 (2,950명) 등이다. 재태한인사회는이른바 체류자중심이민사회 인셈이다. 그이유는대부 306

310 분의한인들은영구적인거주를목적으로태국에살고있는것은아니기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해도태국은동남아에서교민의비율이가장높은나라로, 한인들이뿌리를내린안정도측면에서는가장앞선국가이기도했다. 양국의역사적인연은 6.25전쟁훨씬이전인고려말부터간헐적으로이어져왔으나 2차세계대전까지우연한교류는단순히문화접촉수준에그쳤다고볼수있다. 재태한인사회형성과정을살펴보면, 최초세대 ( 년대 ) 는 2차세계대전중일본군 ( 징집병 ) 또는군속으로징용되어태국혹은동남아지역에진출, 정착하였거나, 일제시대중국등에서거주하다종전후태국에이주한사람들로구성된다. 이후의미있는역사적맥락에따라서대개세개정도의시기구분이가능할것이다. 첫째, 한국동란직후 ( 년대 ) 태국에는전쟁고아, 선교사, 연예인, 유학생, 유엔기구직원, 건설회사직원여행 호텔업자등이최초로진출해교민사회의인적구성원이다양화되었다. 전후본격적인국가건설과정에서해외진출이시도되고태국군의한국전쟁참전도태국진출의요인이되었다고볼수있다. 둘째, 베트남 ( 월남 ) 전은재태한인사회의발전에또다른계기로작용한다. 한국은아시아에서공산주의위협에공동대응한다는명목하에, 1964년 9 월 22일부터시작돼 1973년 3월단계적으로철수하기까지 8년여를참전했다. 그기간동안베트남에한국의건설회사, 토건회사, 군납회사, 운송회사들이이어서진출함으로써후에태국진출의교두보가되었는데, 베트남전경기가침체되면서한국인기업인들은그무대를태국으로옮겼다. 이시기 ( 년대) 는베트남을거쳐태국에진출하는한국인의수가급증하고, 태국을거점으로하여중동으로진출하는등국제적인경제활동을하는한국인의수가늘어났다. 셋째, 1980년대후반이후 (1980 년대후반~현재 ) 에는한국의해외여행개방에따라태국에대한한국인관광객이급증하면서관광산업관련진출한교민들과한국투자진출증가등한 태경제협력관계증진에따른상사지사원및투자업체직원등이급증했다. 1985년플라자합의결과와 1987년민주화와노동운동이활발해지자신발, 완구, 섬유등의수출형노동집약적업종들이공장운영이어려워지면서대거태국과동남아로진출하게되었다. 또이시기는태국의공업화와산업화가활발히진행되는기간이다. 태국경제는 1987년이후수출의급속한신장을바탕으로유사이래볼수없었던고도 307

311 경제성장을기록했다 년중의경제성장률은평균적으로두자리수이상의증가를기록했다. 이런요인들이 1980 년대중반이후재태한인사회의폭발적인증가를가져왔다고볼수있다 년대초부터는한류가태국의주요한사회적현상으로대두돼관련산업종사자들이크게증가했다.1997년재태한인의수는 7,901명으로 1986년에비해 10배이상증가했으며 2003년에는 15,100명에달했다. 필자의설문조사에따르면 70% 에이르는한인들이 2001년이후이주한것으로나타나고있다. 123) 3. 재태한인의초국적경험 1) 이주의동기와조건 1정착동기및정착시기 - 정착전이주경험 - 한국에서의일경험 2정착당시현지에서의경험 - 정착경로및과정 - 정착당시현지의정치경제적상황 2) 일상적인삶과사회문화적실천 ( 현지문화와의관계 ) 1 정착당시한인사회의상황 - 다른한인과의사회적관계 - 현지인과의사회적관계 2 일경험 - 현지에서의직업경험 - 일과정에서의어려움 - 현지인과한국인과의일속에서의관계 3 현지인과의관계 - 현지인과교류하는공간 ( 집, 직장, 인터넷등 ) - 교류하는현지인의사회경제적지위 - 현지인에대한이미지와생각 123) 한류가본격화되고양국관광객수가크게증가하는 2000 년대이후부터또다른구분된시기로분류할수도있을것이다. 이주시기를살펴보면, 1970 년이전 0.2%, 년 1.8%, 년 7.4%, 년 21%, 2000 년이후 69.6% 이다 ( 김홍구 재태한인의특성과태국에대한인식. 한국동남아학회. 동남아시아연구 24 권 3 호. 220) 308

312 - 한국인이생각하는현지인의한국인에대한이미지와생각 - 현지인과의갈등경험 ( 종교, 문화적갈등 ) 4현지에서의정치적경험 - 현지의이민정책에대한생각과경험 - 현지정책이한인의삶에미치는영향 - 현지정책에대한평가와불만 3) 현지화와초국적정체성 1가족관계 - 한국가족과의관계 - 현지가족과의관계 - 가족과의관계유지에서경험하는어려움 2자녀교육 - 현지에서의교육경험 - 한국어와문화에대한교육 - 학교종류및유형 - 자녀교육에서의어려움 - 자녀의미래에대한구상 3현지에서의문화적경험 - 현지에서가본곳 - 현지방문지에대한생각과평가 - 현지미디어소비와정보획득방법 4한인사회의사회경제적분화 - 한인사회의사회경제적지위에따른분류 - 사회경제적지위에따른상호관계 ( 일, 놀이등 ) - 사회경제적지위에따른갈등 5교통 통신의발달에따른변화 - 한국과의교류, 방문 ( 가족, 동창등 ) - 현지한인사회의교류 - 현지인과의교류 6한인-현지인가족 - 가족형성과정 - 한인-현지인가족의경제적재생산 - 한인-현지인가족의종족 / 국가정체성과갈등 309

313 - 한인-현지인가족의한국내친인척과의관계 - 한인-현지인가족의자녀교육과정체성 - 한인-현지인가족의한인사회내의시각과지위 7장거리민족주의 - 한국정치에대한관심 ( 선거참여등 ) - 한국에대한문화적관심 ( 스포츠, TV, 인터넷포털 ) 4. 나가는글 310

314 참고문헌 김동엽 필리핀국제결혼이주여성의초국가적행태에관한연구. 김홍구외 한국속동남아현상 : 인간과문화의이동. 서울 : 명인문화사.195. 김홍구 재태한인의특성과태국에대한인식. 한국동남아학회. 동남아시아연구 24 권 3 호 앤소니기든스, 현대성과자아정체성 : 후기현대의자아와사회, 권기돈옮김, 새물결, 이민영 헬 (hell) 조선 탈출로서의장기여행 - 인도의한국인장기여행자들을중심으로. 서울대학교비교문화연구소. 비교문화연구 22(2). 이재현 한 - 아세안관계개관 : 발전과현황. 한 - 아세안관계현황과전망워크샵. 외교안보연구원 2 층국제회의실 (2009 년 4 월 30 일 ). 채수홍 베트남거주한국인의초국적경험 : 공장매니저와주재원을중심으로. 김홍구외 한국속동남아현상 : 인간과문화의이동. 서울 : 명인문화사.27. Benson, Michaela, and Karen O'Reilly Migration and the Search for a Better Way of Life: A Critical Exploration of Lifestyle Migration, The Sociological Review 57(4): Castles, Stephen "Migration and Community Formation under Conditions of Globalization." International Migration Review, Vol. 36, No. 4 Kearney, Michael The Local and the Global: The Anthropology of Globalization and Transnationalism,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24: Castles, Stephen, and Mark J. Miller 2003[2013] The Age of Migration, New York: Palgrave Macmillan. 한국이민학회역, 이주의시대, 서울 : 일조각. Glick Schiller, Nina "The Situation of Transnational Studies." Identities, Vol. 4, No. 2: Kivisto, Peter "Theorizing Transnational Immigration: A Critical Review of Current Efforts."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 24, No. 4: Levitt, Peggy and B. Nadya Jaworsky "Development and Future Trends." Annual Review of Sociology. Vol. 33. Portes, Alejandro "Immigration Theory for a New Century: Some Problems and Opportunities." International Migration Review, Vol. 31, No. 4. : Portes, Alejandro, Luis E. Fuarnizo, and Patricia Landolt "The Study of Transnationalism: Pitfalls and Promise of an Emergent Research Field."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22, No. 2: Portes, Alejandro 'Conclusion: Theoretical Convergencies and Empirical Evidence in the Study of Immigrant Transnationalism." International Migrant Review, Vol. 37, No. 3: Vertovec, Steven, "Conceiving and researching transnationalism."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 22, no

315 교민생애사를통해본필리핀한인사회의변천 김동엽 ( 부산외대 ) 필리핀은지리적인근접성때문만이아니라, 역사적맥락속에서한국과다양한측면에서밀접한관계를맺어왔다. 제2차세계대전이후미국을중심으로한자유진영의일원으로서양국은국제사회의파트너로서함께활동하기도했으며, 한국전쟁이발발했을때필리핀은유엔군의일원으로참전하기도했다. 냉전시대에자유진영의동맹국으로서필리핀은문화와스포츠등다양한분야에서한국과국가간혹은민간차원의교류를이어왔다. 한편 1970년대들어양국간경제력이역전되고그격차가커져가면서상호간인적물적교류의형태도차츰변화했다. 이후한국은필리핀에주로공산품을수출하고, 저임금을겨냥한투자의목적으로진출하고, 필리핀은한국에주로농산품을수출하고저임금노동력시장에진출하는모습을나타내고있다. 한국인의필리핀이주는 1990년대이후급속히증가하였으며, 2011년이후매년 100만명이상의한국인이필리핀을방문하고있으며, 2015년기준으로약 8만9천여명의한국교민이필리핀현지에거주하는것으로나타난다. 그렇다면한국인의필리핀이주는어떠한측면으로이해할수있을까? 이론적차원에서이주의원인은다양한측면으로설명된다. 인구학적인불균형, 경제적기대에대한개인의합리성, 가족그리고공동체의생존전략, 제도적원인으로시장과국가가이주의흐름을추동하는경우, 그리고사회적자본을중심으로이주의원인을설명하기도한다 (Castles 2002). 특히이주의유형중국제이주에대한이론은주로노동력의이동을중심으로논의되어왔다. 이들중 배출-흡입 (push and pull) 이론 은국제이주가이주송출국과수용국간의현존하는불균형 (existing disequilibrium) 에의해형성되며, 결국이주를통해균형이회복된다는것을전제한다. 또한신고전주의경제학 (the neo-classical economics) 은개인의이주결정을효용 (utility) 을극대화하며, 복리를최대화하기위한거주지이동을전재한다. 한편 1980년대에등장한 이주의신경제학 (the new economics of migration) 이론은이주의결정을 312

316 고립된개인에의해서이루어지는것이아니라가족과가계 (household) 와공동체등의보다큰단위의행위자에의해결정된다고주장한다. 보다포괄적인접근법인이주체계법에따르면, 이주흐름은국가들을연결시키고정치, 경제, 사회, 인구차원의국내상황에의해발생하며, 또한이주흐름자체에의한피드백과조정이이주에영향을미침을강조한다 ( 김용찬, 2006: 92-96). 이처럼다양한차원에서의이론적기제들이한국인의필리핀이주현상과이민사회를설명하는도구로사용될수있을것이다. 한국인의필리핀이주에관한국내연구는아주제한적으로존재하며 ( 김동엽 2009; 김민정 2014, 2015; 박정현 김동엽 리노바론 2015), 이들또한특정유형의이주와특정부류의이주를다루고있어서필리핀한인사회전반을이해하는데에무리가있다. 김동엽 (2009) 의연구는한국인들의필리핀은퇴이주에관한내용을다루고있으며, 이는한국사회가노령사회로진입하면서은퇴지로서필리핀의환경과여건등을현지사례를통해소개하고있다. 한편김민정 (2014, 2015) 의연구는한국인의필리핀이주초기세대라고할수있는한국인결혼이주자, 특히 1950년대필리핀남성과결혼하여필리핀에정착한한국여성의삶을소개하는내용이다. 박정현 김동엽 리노바론 (2015) 의연구는한국과필리핀의교류사전반을정치, 경제, 사회문화로나누어포괄적으로다루고있으며, 필리핀한인사회의역사적맥락을살펴볼수있다. 하지만필리핀한인사회의내부의구성과분화와같은내용을다루지는않았다. 한편외국문헌으로서필리핀한인사회의형성과정과특성을시대적으로구분하여간략히소개하는글은카츠미 (Kutsumi 2007) 의연구가있다. 카츠미의연구는한국인들이필리핀에본격적으로진출하기시작한 1970년대이후필리핀내한인사회조직이어떻게조직되고분화되는가를소개하고있다. 그러나카츠미의연구는주로필리핀현지한인사회의구성과분화에만초점을맞추었으며, 이주의맥락이나이에따를구성원들의분화등필리핀한인사회를이해할수있는포괄적인관점을제시하지는못했다. 이러한기존연구들을바탕으로본글에서는특정시점에서특정유형으로이루어진한국인의필리핀이주를교민들의생애사를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한국인의필리핀이주의역사는학술적검증이필요한이야기까지포함하면삼국시대까지거슬러올라갈정도로길다. 임진왜란후포로로끌려갔던한국인이일본을거쳐필리핀에이주했다는사실이기록속에서확인할수있는한인의초기필리핀진출이다. 19세기들어서는표류의경험과기록을통해필리핀의생활상이한국에알려지게되었다. 20세기초에는국제적 313

317 명성을얻은한국산명품인인삼을팔기위한인삼장수들의발길이필리핀까지도달했음을알수있다. 이후일제강점기에는비록실현되지는않았지만만주를대신하여해외한인들이집단으로이주하여거주할지역으로필리핀이고려되기도했다. 또한태평양전쟁시기에는강제징용되어필리핀의땅을밟은한국인도상당수있었다. 독립과한국전쟁을거치면서불우한국내환경에서벗어나새로운삶을꿈꾸며외국인과결혼했던한국인신부들이도착한곳이필리핀이기도했다. 이때까지한국인의필리핀이주에영향을미친요인들은주로외부적인요인에근거했다고볼수있다. 일제식민지하에서이루어진비자발적인이주와독립이후미국의영향력아래에서한국과필리핀의특수한관계가이주의흐름을추동했다. 보다자발적이고진취적인입장에서한국인이필리핀에이주하기시작한것은 1970년대이후이며, 이는한국기업들의진출과함께시작되었다. 많은기업주재원들이파송되었으며, 이들중일부는필리핀에남아자신의기업을일으킴으로써필리핀한인사회의중심적인세력이되었다. 한편 1990년대이후해외여행자유화조치와더불어일어난국제화바람과 2000년중반해외부동산투자자유화정책에따른한국인의해외투자열기는한국인의필리핀이주자의수를급속히증가시켰다. 이론적차원에서이러한이주의형태는양국사이에형성된경제적차이와상호관계속에서개인의효용을극대화하기위한방안으로이루어진것으로이해할수있다. 이주의목적도다양한차원으로분화되었음을볼수있다. 중장기거주를목적으로하는이주의유형은사업, 교육, 선교, 그리고은퇴를포함한휴양등으로나눌수있다. 물론이러한목적들이서로중첩되어나타나는경우도흔하다. 체류기간도이주의목적과환경의변화에따라유동적이며, 항공노선의확대와다변화에따라정착지로서수도마닐라의비중은줄어들고지방도시들의한인수가증가하는양상을나타낸다. 본글에서는각시대별로필리핀에이주해온교민들의생애사를통해필리핀한인사회의변천을살펴보고자한다. 생애사인터뷰를실시한지역은마닐라이며, 인터뷰대상자는 20명정도로연구자의개인적인맥과필리핀의한인단체, 특히노인회회원들의소개로선정하였다. 개인적인생애사라는특징때문에일부교민은인터뷰에임하기를꺼려엄격한기준에의해인터뷰대상자선정은어려웠다. 따라서본인터뷰에포함된한인들이필리핀한인사회를대표한다고볼수없다. 단지이들개인의생애사를통해필리핀한인들의이주와정착과정, 한인사회와현지인사회와의관계, 그리고가족관계와한인정체성문제등을살펴보고, 이주시기에따라어떠한차이가 314

318 있는지를살펴보았다. 오늘날필리핀한인사회를구성하고있는사람들의이주배경과현지화의특성등을기준으로시기별구분이가능하다. 국제이주의원인을제공하는원인은다양하다. 특히전쟁이나기근, 혹은천연재해와같은요인에의해국제이주가이루어질수있지만, 이러한요인들은한국인의필리핀이주에는커다란요인으로작용했다고볼수없다. 물론한국전쟁이일부이주의원인이되기는했지만, 이는전쟁이라는사건보다는경제적요인에따른개인의선택으로보는것이더합당하다. 또다른국제이주의원인으로는정치경제적요인을들수있다. 이는개인이경제적합리성에의거하여보다낳은기회를제공하는지역으로이주하는것이다. 이러한이주의형태는송출국과수용국사이의경제적발전격차가원인을제공하는경우가많다. 그러나양국간의경제적발전격차는이주의필요조건이지충분조건은되지못한다. 실제는이주의흐름을결정하는흡입과배출 (push-full) 요인은경제적요인뿐만아니라국가간의합의나이주관련정책등다양한정치사회적요인들에의해서결정된다. 그럼에도불구하고송출국과수용국간의경제적발전격차는이주민의특성과현지에서의삶의모습을살펴보는데는유효하다고볼수있다. 즉소위후진국에서선진국으로향하는이주자의특성과선진국에서후진국으로향하는이주자의특성에일정부분차이가나타난다. 이러한맥락에서오늘날필리핀한인사회를구성하고있는사람들의특성별로구분하면세개의시기로나누어볼수있다. 우선,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까지이주한사람들을제1기이주자들로볼수있다. 이시기에포함된이주민들은일제강점기에일본회사에소속되어진출하기도하고, 유학이나상업을목적으로필리핀에이주한사람들, 그리고한국전쟁이후필리핀군인이나군속들과결혼하여이주한사람들이있다. 즉대체로열악한한국의경제사회적환경에서벗어나보다선진적인필리핀사회로의이주가이루어졌던시기로볼수있다. 이범주에속하는한인들가운데 4명에대한인터뷰를실시하였으며, 한명은 1935년에이주한사람으로 1979년에사망한사람이다. 그는현필리핀한인총연합회의전신인한인회의초대회장으로서 1967년부터 1979년까지약 10년간한인회를이끈인물로서한국정부로부터국민훈장을받기도했다. 그에관해남아있는다양한기록들을수집하고, 그가살았던시대에함께있었던사람들의증언, 그리고그의자손 ( 딸, Betsy Park) 과의인터뷰를통해살펴보았다. 두번째인물은 1955년에한국에서필리핀군속과결혼하여필리핀으로이주해온결혼이주여성이며, 현재 315

319 필리핀한인노인회에참여하여활동하고있다. 세번째인물은일제강점기에최초로필리핀에와서사업을했던작은아버지를따라 1963 필리핀에와서무역으로삶을개척한인물이다. 네번째인물은 1967년유학생신분으로필리핀에와서필리핀여자와결혼하여정착한사람이다. 그는필리핀시민권을획득하고현지화한한인으로서필리핀에서성공적인삶을살고있는인물이다. 이시기에진출한사람들은대부분현지화정도가깊숙이이루어져있으며, 자녀들도한국인이라는정체성보다필리핀인으로서의정체성이강하게나타난다. 한인들의필리핀이주의두번째시기로는 1970~80년대에진출한사람들이다. 이시기는한국에서경제적발전이급속도로이루어지고있었으며, 한국과필리핀의경제적발전수준이전환되는시기라고볼수있다. 이시기에필리핀에이주한사람들은주로필리핀에서있는국제기구 (ADB, WHO, IRRI) 에서근무하던사람들과필리핀에진출한외국인회사혹은한국기업의주재원들, 그리고유학생과선교사들이주를이루었다. 이들중국제기구 1명, 주재원을하다가개인사업으로전환한인물 2명, 개인사업으로진출한인물 2명, 그리고유학생으로와서현지에서사업하며사는인물 1명, 그리고선교사로진출한인물 1명등총 6명에대한생애사인터뷰를실시했다. 이시기까지만해도필리핀에거주하는한인들의수가그리많지않았으며, 상호간에긴밀한교류가있었던것으로조사되었다. 이시기에진출하여사업에성공한사람들이필리핀한인사회의주류를형성하고있으며, 장성한자녀들이미국유학을마치고필리핀에돌아와대를이어기업을경영하는경우가나타나고있다. 이시기에진출한한인들의특징은대부분당시한국사회에서도엘리트에속하는사람들로서진취적인생각을가지고필리핀사회에서성공한부류에속한다. 이들은대체적으로필리핀사회에대한깊은애정을가지고있으며, 현지인들로부터도존경받는한국인들이다. 이들은대부분한국에서결혼하여이주한사람들로서자녀들은국제학교나혹은유사한종류의학교에서영어로교육을시켜미국으로유학을보내는일반적인패턴을보였다. 자녀들은어려서부터국제학교에서교육을받아한국적인문화보다는국제적인문화에더욱익숙하고, 미국에유학한후미국국적을취득하는경우가대부분이었다. 세번째시기는 1990년대이후로서 1988년올림픽을계기로한국의국제적인위상이높아진반면, 필리핀은해외로가정부와노동자를송출하는국가로전락함으로써양국간의경제적격차가확연히역전된상황이다. 또한이시기에는한국의여행자유화와해외자본투자자유화정책등과같은 316

320 제도적인변화와 IMF와금융위기와같은한국사회의변화에따라많은한국인들이필리핀에진출한시기이다. 1990년대에는주로여행객들과유학생들, 그리고한국기업들의필리핀진출이본격화되면서몰려오기시작한한인들을상대로각종여행사나식당및하숙집등을운영하는교민들이늘어났다. 이러한추세는한국에서경제위기를겪고, 또한필리핀에서은퇴비자라는새롭고편리한비자제도가생겨나면서이를활용한한인들의진출이늘어났다. 이시기에진출한인물은총 6명에대한인터뷰를실시하였다. 그중에는미국유학시절필리핀남자를만나결혼한후필리핀에입국한사람 1명과필리핀에와서필리핀아내를만나서살고있은사람 1명, 선교사인부친을따라와서현지교육을받고현지변호사시험에합격한후국적을필리핀으로변경한사람 1명, 필리핀에골프를치러왔다가정착하여살면서필리핀프로골퍼가된사람 1명, 그리고한국에서사업을하다가여의치않아필리핀에왔다가정착하여성공적으로사업체를운영하고있는사람 1명등다양한부류의사람들에대해인터뷰를실시했다. 이시기에는많은한인들이다양한이유와목적을가지고필리핀에이주하였으며, 현지에서의삶의모습도다양한것을볼수있다. 교통의발달특히항공기취항수의증가와저가항공등이동의편리로인하여한국에수시로드나드는경우가많으며, 양국가를오가며사는모습도나타나기시작했다. 또한인터넷이나카톡과같은무료통신의발달로한국과필리핀간의거리감이확연히줄어들었다. 이처럼쉬워진이주여건으로인해많은수의한국인이필리핀에이주하고, 또한상황에따라쉽게되돌아가는경향이나타났다. 이러한경향은한국의경제적상황에따라확연히나타나는것을볼수있다. 이처럼교민수의급속한확대와체류기간과체류지그리고체류목적의다양성으로인해필리핀한인사회는점점더분자화되어가는경향을나타내고있다. 지방도시들에거주하는한인들의수가증가하면서지역한인회가나타났다. 또한체류목적에따라선교사회나학부모회등이활성화되었으며, 사업의유형별모임들도나타나기시작했다. 이러한다양한교민사회를대변하는단체로필리핀한인총연합회가결성되어있지만, 교민전반을아우르며대변하는조직이되지못하고있다. 이처럼교민상호간의교류의미비와교민사회에서발생하는다양한사건사고소식은교민들간의불신을가중시키고있다. 이러한현상은단순히교민수의증가와체류유형의다양화때문만으로볼것이아니라, 초국가주의현상이낳은하나의결과로해석할수도있다. 이는초기이주민들이느꼈던한국과의심리적거리감으로 317

321 인해고립된교민사회를더욱응집시켰을것이다. 그러나근래교통 통신의발달과소설미디어의발달은한국과필리핀사이의심리적거리감이훨씬줄어들고, 국경을초월하여일상적인교류가가능해짐에따라교민사회의존재가치가점점더약화되고있음을볼수있다. 결국오늘날필리핀한인사회의다양한측면은역사적맥락속에서이루어진이주민들의특성과이주에영향을미치는제도와과학기술등의변화를복합적으로고려하여이해해야할것이다. < 인터뷰목록, 일까지 > 시기 이름 출생년도 이주년도 이주배경 박윤화 ~ 일제남양이주정책 ( 인삼장수 ) W씨 ( 여 ) 필리핀선원과결혼해이주 제1시기 한상조 사업하는작은아버지를도우려이주 H씨 무역을목적으로이주 김용찬 유학을와서정착 한상태 국제기구 (WHO) 에근무 김춘배 한국기업주재원으로이주후사업 제 2 시기 엄익호 사업을목적으로이주 박현모 유학을와서정착 김유식 선교사로이주 장재중 외국기업주재원으로이주후사업 김현숙 ( 여 ) 미유학중필리핀인과결혼후입국 손범식 휴식차왔다가필리핀인과결혼정착 제 3 시기 최일영 선교사부친을쫓아와서정착 김인일 골프치러왔다가정착 정민재 돈떼고도망간사람찾으러왔다가정착 318

322 [ 참고자료 ] 김동엽 " 동남아은퇴이주의실태와전망 : 필리핀을중심으로." 동아연구 제57집 : 김민정 한국과필리핀 사이 : 세계화정책이전필리핀의재외한인과결혼이주. 한국사회학회사회학대회논문집 년대초중반기필리핀의한인이주에대한성찰적연구. 사회와역사 107: 김용찬 국제이주분석과이주체계접근법의적용에관한연구. 국제지역연구 제10권 3호 : 박정현 김동엽 리노바론 한국-필리핀교류사 서울 : 폴리테이아. Castles, Stephen "Migration and Community Formation under Conditions of Globalization." International Migration Review, 36(4): Kutsumi, Kanako Koreans in the Philippines: A Study of the Formation of their Social Organization. Miralao, Virginia A. and Lorena P. Makil (eds). Exploring Transnational Communities in the Philippines. Quezon City: Philippine Migration Research Netork and Philippine Social Science Council 319

323 생애사를통해본말레이시아한인정체성의형성과변화 : 말레이시아이주정책에대한한인들의대응을중심으로 124) 홍석준 ( 목포대학교 ) 1. 연구의목적과필요성 1차년도연구주제가한인의말레이시아이주에따른한인사회의형성과변화에대한연구이므로, 이연구성과를바탕으로 2차년도말레이시아한인과한인사회에대한연구에서는전년도연구목표와연구내용의연계성을고려하여, 연구주제를말레이시아한인사회의형성과한인정체성이라는주제로설정하였다. 연구방법은기본적으로생애사연구방법을활용하고자한다. 말레이시아한인사회의형성과한인정체성이라는주제에관한연구를위해선우선적으로말레이시아의이주정책의특징과그변화를살펴볼필요가있다. 이를통해말레이시아이주정책에대해한인들과한인사회가어떻게반응하고대응하는가를살펴본다. 이와더불어, 이과정에서말레이시아한인사회의형성과변화의의미와그로인한한인의정체성이어떻게형성, 변모하는지를고찰해보고자한다. 이는결국말레이시아의이주정책과그로인한한인정체성의형성과변화에대한고찰이될것이고, 이는한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이주의명과암을동시에조망해볼수있는학술적근거와원인을제공할수있을것으로기대된다. 이러한연구의목적과필요성에부합하기위해, 이글에서는말레이시아이주정책의핵심중하나인 MM2H(Malaysia, My 2nd Home), 즉 말레이시아마이세컨드홈 (MM2H: Malaysia, My 2nd Home, 이하 MM2H) 125) 프로그램의특징과의미를말레이시아의사회문화적맥락내에서살펴보고, 그에 124) 이글은초고의형태로작성된것으로, 현지조사후에대폭수정, 보완할예정이니, 필자의허락없이인용이나회람을삼가주길바랍니다. 125) MM2H 는 10 년비자취득의혜택을제공하는것을그주된특징으로하고있다. MM2H 10 년비자취득시혜택은다음과같다. 1. 개인사업허용. 2. 주택자금융자 ((1,000,000 링깃주택구입시 80% 대출가능 ). 3. 승용차면세구입 ( 현지세금의 40% 할인혜택 ). 4. 무심사비자연장 (10 년 ). 5. 개인이삿짐이송시세금면제. 6. 국적에관계없이 1 명의메이드를데려오거나고용가능. 7. 말레이시아내상속세금면제. 8. 국외소득세금면제. 9. 비자승인최소 8 주가능. 320

324 따른한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이주, 특히은퇴이주의이상과현실에대해비판적으로고찰함으로써, 이러한과정에서한인사회와한인정체성이어떻게형성, 변모하는지를살펴보고자한다. 21세기에접어들면서한국사회에서는고령화사회가급속도로진행되면서은퇴를앞두고있는한국인들중노후를동남아시아지역에서보내기위해 은퇴이주 를고려하는경향이두드러지게나타났다. 말레이시아와필리핀, 태국을위시로한동남아시아로의한국인은퇴이주자들의숫자는나날이증가하는추세에있다. 동남아시아국가들중에서, 말레이시아는한국의명예퇴직또는은퇴자들의주종을이루는 50대와 60대에속하는한국사람들이가장선호하는은퇴이주대상국으로부각되었으며, 이러한추세는 2010년이후더욱가속화되고있다. 2. 연구의배경 말레이시아는이슬람을신봉하는말레이인을비롯하여화인과인도계, 사라왁 (Sarawak) 의이반 (Iban) 족, 사바 (Sabah) 의까다잔 (Kadazan) 족, 그리고오랑아슬리 (orang asli, 원주민 ) 라불리는원주민등문화적다양성과종족적복합성을지닌다양한종족들이살아가고있는, 소위 ' 다문화사회 (multicultural society)' 이며, 이역사와전통을오랫동안보유해온국가이기때문에한국인은퇴이주자들을포함한외국인에대한혐오감이나거부감, 또는경계심이상대적으로적은나라로알려져있다. 이런이유로, 말레이시아는외국인들이선호하는은퇴이주대상국가에서수위를차지하고있다. 또한, 말레이시아의상대적으로높은경제수준과안정된물가, 안전성이보장된치안상태, 공용어로서영어사용가능국가, 그리고다문화 (multiculture), 다종족 (multiethnicity), 다종교 (multireligion) 등의다양하고복합적인문화적특성이비교적저렴한가격으로노후생활을안락하고편안하게보내기를희망하는한국인들에게최적지로인식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은퇴이주가증가하면서성공적인이주로인식되는경우도있지만, 반대로은퇴이주에대한정보를충분히준비하지못한채성급하게말레이시아로이주를감행한사람들이말레이시아현지에서제대로적응하지못하고다시한국으로돌아오는, 이른바 역이주 또는 역이민 현상도나타나고있으며, 이역시간과할수없는엄연한현실로다가오고있다. 이러한현상은은퇴이주에대한막연한기대로정확하고충분한정보를갖고철저히준비하지못한한계와또부정확한정보를바탕으로이주를지원하 321

325 는시스템에서비롯된것이다. 이런문제점은기대에미치지못하여다시돌아오면되는단순한결정의문제가아니라노후의인생설계를재설계해야하는과제에직면하게된다는점에서심각한어려움을초래할수있다. 이러한배경하에, 이글에서는말레이시아의이민정책의특성을알아보고, 이를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와연관시켜사회문화적맥락에따라기술, 분석함으로써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의특징과의미를한인과한인사회의형성과변화라는맥락내에서이해해보고자한다. 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는특별한형태의인간이동, 또는인적교류와이동이라고할수있다. 이는한국과말레이시아를잇는중요한문화현상으로자리잡을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이에대한보다체계적인연구가절실히요구된다고하겠다. 말레이시아를대표하는슬로건은 ' 진정한아시아 '(Truly Asia!) 이다. 말레이시아를방문한적이있는사람들은 말레이시아, 진정한아시아 (Malaysia, Truly Asia) 라는문구를거리와상점등지에서쉽게발견할수있다. 말레이시아가 진정한아시아 라는말은, 말레이시아가 아시아의축소판 이라는뜻이다. 문화적다양성과민족적복합성으로널리알려진아시아문화의진수가말레이시아에집약되어있다는말이다. 아시아문화모자이크 (Asian cultural mosaic) 는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시아문화모자이크 (Malaysian cultural mosaic) 라는축약어로구현되어있다. 진정한아시아, 즉, 아시아문화모자이크 의 진정한 축소판이바로오늘날말레이시아를대표하는슬로건으로자리잡고있는것이다. 이러한 진정한아시아, 말레이시아 에서은퇴이후노후생활을즐기기위해한국인들을비롯한수많은외국인은퇴이주자들이말레이시아를방문하고있다. 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입국요인으로조기유학과부동산투자와더불어최근각광을받기시작한것이은퇴이주라고말할수있다. 말레이시아정부는, 소위 MM2H 프로그램을통해안락한은퇴생활을위해말레이시아를찾아오라고대대적으로홍보해왔다. 외국인은퇴이주자들을유치하기위해정부가발벗고나선것이다. 특히한국인들을주요타깃으로삼고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를희망하는한국인들의방문이나체류를적극권장하고있다. 이는본연구에서말레이시아의이주정책의특징과의미를 MM2H를중심으로다루고자한주요이유중하나이기도하다. 최근한국에서도외국인은퇴이주자들의천국으로불리는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수요가증가하고있다. 특히말레이시아는 50대한국인들이가장선호하는은퇴이민대상국이다. 따라서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를 322

326 위한정보제공의필요성역시증대하고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의수요에비해관련정보는매우미흡한실정이다. 또한말레이시아이민정책의특징과의미에대한정확한정보는턱없이부족하다고할수있다. 이에본연구는이러한수요에학술적으로부응하기위해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의특징과의미에대해고찰하고자한다. 이를위해말레이시아이민정책의핵심이라할수있는 MM2H 프로그램의특징과의미를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라는사회문화적맥락속에서살펴본다. 이를통해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의사회문화적특징과의미에대한이해를제고하고자한다. 본연구는말레이시아의대표적인한인타운인쿠알라룸푸르의 암팡 (Ampang) 과 몽키아라 (Mon Kiara) 지역의한국인은퇴이민자들을대상으로, 말레이시아로의한국인은퇴이민의특징과의미를고찰함으로써이민과관련된한국인들의말레이시아에서의생활의이면을들여다보고자한다. 이를위해 MM2H의특징과의미를그내용과실천에주목하여고찰하고, 그이상과현실을은퇴이민자와현지교민들을대상으로한인터뷰내용에대한기술과분석을통해맥락적으로파악하고자한다. 동남아시아의여러나라들은이미오래전부터다양한이주관련프로그램을제공할것을표방하면서외국인은퇴이주자들을유치하고자노력을경주해왔다. 그중에서말레이시아는정부주도로외국인은퇴이주자들을유치하는데성공적인나라로알려져있다. 말레이시아는 1996년부터은퇴비자를발행하기시작하였는데, 1998년 50명에불과하던은퇴비자수급자숫자가 2001 년에는 800명을기록했고, 2006년까지동반가족을제외하고도총 8,700명에게은퇴비자가발급된것으로알려졌다. 2008년세계금융위기이후 2010년이후부터현재까지이러한경향이더욱강화된양상으로전개되고있다. 이와같이말레이시아정부의적극적인유치정책과한국사회의고령화와조기은퇴또는명예은퇴등을비롯하여은퇴이주자의증가는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현상이한국사회내에서일종의 문화현상 으로자리잡을가능성을높이고있는점을부인하기어려울것이다. 3. 기존연구의검토 최근국내학계에서도국제이주에대한관심이크게부상한바있다. 전지 구적인이주의흐름, 이주가전세계국가와사람들에게미치는영향에대한 323

327 이론적, 방법론적관심역시매우크다 ( 카슬 밀러 2013). 이러한국제이주에대한관심을반영하듯이, 국내학계와출판계에서는이러한국제이주의전지구적영향에대한분석을다룬책이번역, 출간된바있다. 그대표적인것이 < 이주의시대 > 와 < 이주 > 라는책이다. < 이주의시대 > 는 <The Age of Migration( 제4판 )> 을옮긴것이다. 국제인구이동연구분야의권위자인스티븐카슬과마크 J. 밀러는전지구적인이주의흐름, 이주가전세계국가와사람들에게미치는영향에관한이론적연구및최신정보를제공하고자이책을썼다 ( 카슬 밀러 2013). 이책에서저자들은국제이주관련이론및개념설명으로시작하여 1945년이전부터현재까지전세계의국제이주현황을살펴보고, 이주와국가적통제, 안보, 종족적소수자, 정치등의관계를분석했다. 총 13개장에서각주제에대한내용과더불어관련통계및이주흐름을보여주는지도, 별도의박스로다룬구체적인사례등을소개하여독자들의이해를도왔다. 한편, 2012년국제이주관련연구의결과에따르면, 당시전세계인구의약 3%( 약 2억 2000만명 ) 는자신이태어난기원국가를떠나다른국가에서살아가고있다고한다. 3% 라는수치가그다지높지않을뿐만아니라이주의주체는주로개인이기때문에이주및이주자와관련된사회현상은자칫간과될수도있다. 그러나이주당사자가개인이라고할지라도그들의삶의궤적과상황은정착한국가는물론그들의기원국가에도다양한방식으로영향을미치고있다. 즉, 이주및이주자와관련된사회현상은나머지 97% 에해당하는비이주자들의삶과도밀접하게연결되어있으며, 글로벌화와더불어그영향력은더욱확대되고있다. 한국의상황도이와크게다르지않다. 해외에서들어오는이주노동자와결혼이주자는물론이고, 이른바고숙련이주자라고불리는기업가및연구가, 그리고유학생과관광객의수도크게증가하고있다. 그뿐만이아니라한국에서해외로이주하는사람들의수도크게증가하고있다. 단일민족국가로서오랜역사적전통을이어온한국사회는지금다문화사회로의큰전환기를맞고있는것이다 ( 새머스 2013). 이와같은이주의시대를맞이하여국제이주현상과관련정책에관한이론및실천의문제들을심도있고정확하게파악하는것이시급히요구되고있으나, 유감스럽게도한국에서이주현상을이론적으로깊이있게분석한개론서는무척이나부족한실정이다. 이에이주에대한이해의폭을넓히고, 무엇보다이주의사회성과공간성에대한관심을높이고자 < 이주 (Migration)>(2013) 가출간되었다. 특히, < 이주 (Migration)> 는이주에대한개 324

328 념적ㆍ이론적접근을강조하는데, 구체적으로장소, 스케일, 영역등과같은공간적개념을차용하여지리학적접근을강조한다 ( 새머스 2013: 12-14). 나아가정치학, 사회인류학, 사회학등다학문적차원에서국제이주에대한다양한이론과관점, 이주와노동, 이주통제의지정학적경제, 이주와시민권및소속의지리등에관한주제를종합적이며비판적으로다루고있다 ( 새머스 2013). 또한글상자를통한다양한사례제시와용어해설등은이주에대한독자들의이해를한층돕고있다. 하지만, 이러한국제이주관련서적의연속적인출간에도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현상에관한연구를포함한동남아시아로의한국인들의은퇴이주에관한이론적, 방법론적연구와사례연구는찾아보기힘들뿐만아니라여전히시작단계에머물고있는것이사실이다. 국제이주관련, 특히말레이시아를비롯한동남아시아로의한국인들의국제이주에관한연구가보다체계적인연구로까지진행되기위해선, 앞으로이에관한더욱더많은학술적, 실천적관심과지원이이루어져야할것이다. 이런점에서국내의명예은퇴자들을포함한은퇴자들을수용하려는국내외적유치경쟁은주목을끈다. 특히말레이시아정부에서정책적차원에서이들을적극유치하려는정책의수립및실행은더욱중요한의미를지닌다. 이들을타깃으로한말레이시아정부의정책이어느정도효과적으로이루어질것인가를말레이시아의이민정책과한국인은퇴이주자들과연계해서분석하는학술적, 실천적작업이필요하고중요한이유가바로이때문이다. 이연구에서는문헌조사와현지조사가병행해서사용될것이다. 이연구를위한현지조사에서는생애사 (life history) 연구방법을적극활용하고자한다. 이글에서는생애사연구를통해한인들의말레이시아로의은퇴이주의사회문화적특징과의미에대한 1차적자료의수집과분류, 정리작업을우선적으로시도하고자한다. 이를기초로, 이를분석, 해석하는과정에기존문헌연구에대한비판적검토결과와기존연구성과에대한비판적분석과해석을포함시켜 1차자료와 2차자료에대한기술과분석의융합연구를수행하고자한다. 이러한한인들의생애사연구를통해서본말레이시아이주정책과그에대한한인들의반응과대응을통해말레이시아한인사회와한인정체성의형성과변화과정의특징과의미를사회문화적맥락내에서이해하고자한다. 4. 연구방법과자료 본연구의수행을위해우선이민정책과관련된문헌조사를실시할것이다. 325

329 사전에이민박람회관련인터넷자료역시적극활용할것이다. 이와같이본연구에서는문헌연구와더불어질적연구방법을주로활용하고자한다. 특히, 실제말레이시아로은퇴이주를떠난사람들이나말레이시아행정기관을찾아연구에도움이될만한자료를수집하여이에대한기술, 분석을시도하고자한다. 앞서언급한바와같이, 본연구에서은퇴이주에관한기존연구의검토는은퇴이주에관한이론적배경및기존선행연구들에대한비판적검토를위주로살펴볼것이다. 이를위한연구방법으로는우선적으로문헌조사에바탕을둔문헌연구가필수적이다. 나아가이를바탕으로, 말레이시아로의한국인은퇴이주의사회문화적특징과의미를고찰하기위해선현지조사가필수적으로요구된다. 126) 현지조사기간중에는쿠알라룸푸르행정청을방문하여관계자들과인터뷰를실시하고자한다. MM2H 비자와관련한행정을담당하고있는쿠알라룸푸르의행정담당자를만나말레이시아에서은퇴이주를위한이민정책이실제로어떻게이루어지는지에관해심층적인인터뷰를실시할것이다. 또한말레이시아에거주하고있는현지교민들과의심층인터뷰를통해말레이시아이민정책의특징과의미에대해알아보고자한다. 현지교민들과의인터뷰를위해선은퇴이주관련정책에대한정보와자료를제공하는대표적인사이트인 cafe.naver.com/mymalaysia의자료내용을적극활용하되, 그자료의타당도와신뢰도를높이기위해이를비판적관점에서비교체크한후활용하고자한다. 이연구에서는은퇴이주정책및관련자료역시적극활용하고자한다. 통계청, 외교통상부, 말레이시아관광청, 기타인터넷자료등을이용하여말레이시아의은퇴이주정책과통계조사내용과자료의성격에대해알아본후이를정리, 분석함으로써말레이시아가어떤이민정책을택하고있고타국에비해어떤장점이있는지등에관해서도조사를실시할예정이다. 은퇴이주에관한문헌조사도병행하여실시하고자한다. 이주라는개념은경제가발전하며, 여유로운노후를즐기고싶은사람들의욕구에서시작되었다. 2000년대이후로, 급속히늘어나고있는은퇴이주는아직도자료와문헌등이많이부족한실정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비교적최근에몇개의논문들이나오고있는실정이기에논문및다양한정보를조사하여충분한정보의양을확보하고자한다. 국내에서개최된해외이민박람회를방문하여담당자와인터뷰를실시하 126) 현지조사에는심층인터뷰와관찰등이포함된다. 참여관찰은시간상의제약으로말미암아현실적으로거의불가능하다고판단하기에심층인터뷰와관찰에집중하여자료를수집하고, 그에대한분석과해석에집중하고자한다. 326

330 고인터넷에서찾을수없는자료는담당자와의심층인터뷰를통해관련정보와자료를확보할계획이다. 이러한문헌조사와현지조사자료에대한기술과분석과더불어, 이연구에서생애사연구방법은주로한인들의생애사, 특히구술생애사에대한자료수집과정리및분석을통해보다적극적으로활용될것이다. 일반적으로구술사는개인의기억이나경험, 인식을현재로불러내어기록으로남긴사료이자역사적사실을의미한다. 따라서구술사는역사연구를위한한가지방법론이자역사적기록그것자체이기도하다. 구술사는생존한개개인의기억과경험에의존하므로주로 가까운과거 와문자를가지지못한사람들의역사를이해하기위한방법으로채용되어왔다. 구술자료는기억의환기에의해발화된것이라는점에서객관성과신뢰성, 보편성등의문제가제기되기도하지만, 구술성과주관성, 개인성, 서술성등의고유성으로인해문헌자료를통해서는찾아보기힘든그자체의특수한신뢰성역시가질수있다. 127) 한편, 구술사는한개인이태어나서현재까지삶을영위해온과정을기억의환기를통해현재화시킨것으로삶의궤적이씨줄과날줄로엮여있다는점에서이주자로서말레이시아한인들의삶의양상과그의미를이주자자신들의시각으로현재화시킬수있다는점에서한인들의삶에대한기록과이해를위한연구방법으로서의장점을지닌다. 말레이시아한인들에대한구술사를통해한국을떠나이주국가에정착, 적응하면서겪은다문화, 초국적생활의경험과인식이집중적으로제시될수있다. 일반적으로이주자들은개인혹은집단이든최적의정착지를찾기전에는대개여러곳을이동해다닌다. 이주지역마다이주민정책과환경을비롯하여마주치는사람과문화가달라경험이상이할수밖에없다. 이른바문화와민족의경계를넘나들며경험하는다문화, 초 127) 이와같은특성을갖는구술사는구비전승, 구술증언, 구술생애사등을포함한다. 구비전승 (oral tradition) 은세대를통해오래전부터구전된민요나민담, 설화, 속담, 수수께끼등의서사를의미한다. 구술증언 (oral testimony) 은과거의특정역사적사건이나집단기억을회고한구술자료이다. 구술생애사는개인의생애이야기이면서동시에생애과정과연계되면서기억, 경험되는구비전승과구술증언까지포함한다. 구술생애사는개인의출생과청소년기, 성인기, 장년기, 노년기등생애주기별로경험하는의식주생활과놀이, 의례생활, 세시풍속과생활관습, 종교생활, 경제및직업생활, 가족및친족생활, 사회구성원간의갈등과협력등일상생활의문화사를포함한다. 이처럼생애과정에서기억되는일상생활의문화사는생애주기에따른단순생애담과는다르게 구술생활사 (the oral history of everyday lives) 로일컬을수있다. 구술생애사는생애주기별로혹은생애속에서경험하는주요사건별로구조화되기도한다. 생애주기별구조는생애주기에따른삶의단순한변화상에한정된생애담수준의협의의구술생애사 ( 일반구술생애사 ) 와생활문화사까지포괄적으로보여주는광의의구술생애사 ( 포괄적구술생애사 ) 로구분가능하다. 바람직한구술생애사가되기위해서는생애주기의단순한삶의변화상에더하여개개인의삶이교직, 순환되는공동체의생활문화사까지포괄할필요가있다. 코리안디아스포라구술생애사는재외한인의이주와적응, 생활사를개인의생애경험과인식을바탕으로구술을통해현재화시킨것이다. 327

331 국적생활경험이다. 이주민은주류사회로부터유목민, 주변인, 소수자, 기생자등과같은부정적인낙인으로인해, 공식적인담론형성으로부터배제되거나주목을받지못하는경향이있다. 결론적으로, 이글에서는말레이시아한인들의이주와적응, 생활에대한기록과기억을통해그들의정체성의형성과변모과정을한인정체성의재구성이라는시각으로살펴봄으로써, 말레이시아이주정책의문화적특징과의미의변화에따라말레이시아한인과한인사회의대응이어떻게형성, 변화하는지를이해하고자한다. 328

332 분과회의 10 Politics of Culture and Discourse in Southeast Asia 1. Deth Sok Udom(Zaman University) Color Revolution in Cambodia - Too Much Ado about Nothing? 2. Nurchayati(Surabaya State University) How Migration Has Shaped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an East Javanese Village Community: The Case of Pranggang from the 1890s to the Mid-1960s 3. Sahul Hamid Mohamed Maiddin (Sultan Idris Education University) Comparing the National Ideologies: The History and Influences of Rukunegara in Malaysia and Pancasila in Indonesia 4. Sony Karsono (Institute for the Study of Humanities, Culture, and Society, Indonesia) Dolorosa Sinaga: The Life, Art, and Politics of an Indonesian Woman Sculp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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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Color Revolution in Cambodia: Too Much Ado about Nothing? DETH Sok Udom(Zaman University) Since independence in 1953, Cambodia s dominant political establishments have always experienced challenges from opposition forces, who usually had the support of external powers. During the Cold War period, these opposition movements varied in their modes of operation. While some were civilian democratic movements which tried to compete for power from within the electoral system, others chose open or guerilla warfare as means of achieving their political goals, which culminated in a series of bloody regime changes and ensuing civil wars between 1970 and ) The post-cold War period has seen a gradual ending of open-armed conflicts in Cambodia. By the end of the 1990s, the country s civil war had come to an end as the Khmer Rouge guerillas were reintegrated into the Cambodian Royal Armed Forces. 129) Opposition parties competing in a multi-party electoral system dominated by the incumbent Cambodian People s Party (CPP) have become the main platforms for expression of dissent in bringing about political change. 130) Thanks to the established party and state structure under the CPP since the 1980s, as well as impressive economic growth in the past two decades, the ruling party has been able to hold a firm grip of power, especially in the 2008 national election when it won a landslide 90 out of 123 National Assembly seats. 128) David P. Chandler, The Tragedy of Cambodian History: Politics, War and Revolutions since 1945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1). 129) Sowath Nem, Civil War Termination and the Source of Total Peace: Win-Win Policy of Samdech Techo Hun Sen in International Context (Phnom Penh: Reahoo Publication, 2012). 130) Kheang Un, "The Cambodian People Have Spoken: Has the Cambodian People s Party Heard?," Southeast Asian Affairs 2015 (2015):

335 In the wake of the Arab Spring, Cambodia s then-in-exile opposition leader Sam Rainsy visited Tunisia for a field study on the revolution movement in Tunisia where its dictator Zine El Abidine Ben Ali had been toppled from power. Upon his return to Cambodia in 2013, tens of thousands of Cambodians went out to greet Rainsy, who claimed to rescue Cambodia from Hun Sen s rule. In fact, prior to the 2013 national election, the two main opposition parties had merged to become the Cambodian National Rescue Party, a name which suggests to the chagrin of the ruling party that the country was in danger. The so-called Arab Spring which erupted in Tunisia and later spread to other countries in the region have prompted numerous observers to try and draw comparisons to the earlier wave of the so-called Color Revolutions. The Color Revolutions refer to a series of mass protests against authoritarian regimes in former Soviet and Balkan countries during the 2000s, which made use of a single color in unifying their forces (for instance, Georgia 2003: Rose; Ukraine 2004: Orange; and Kyrgyzstan 2005: Tulip). 131) Despite their different colors and varying degrees of success, there were a number of common features among them. Vicken Cheterian observed the following common features: i) they occurred following fraudulent elections by semi-autocratic regimes; ii) groups of young people played prominent roles in organizing the movements, but they were also led by individuals who had already occupied high political positions (i.e. intra-elite rivalry); iii) they were meant to be non-violent (on the part of the protestors); and iv) they use catchy slogans or creative tactics to spread their message. 132) In the case of Cambodia, the discourse on Color Revolution did not enter the public consciousness when the movements took place in the 2000s, but only became a media lexicon following the Arab Spring, and particularly after the national election in July 2013, when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led by opposition leaders Sam Rainsy and Kem Sokha protested the official results of the National Election Committee (in which the ruling party won 68 seats, and the opposition 55 seats). Citing voter frauds and electoral irregularities, the 131) Melinda Haring and Michael Cecire, Why the Color Revolutions Failed, Foreign Policy, March 18, 2013, 132) Vicken Cheteria, The Arab Revolt and the Colour Revolutions, opendemocracy, March 10,2011, 332

336 opposition party refused to accept the official results, and as the protest gained momentum, the protesters demanded Hun Sen to step down. After government lethal crackdowns on gatherings at the Freedom Park and one year of political deadlock, however, the opposition party ended its boycott of parliament and reached a political compromise with the government in July ) Having learned from the 2013 experience, the Cambodian government has shown little tolerance even on the slightest mentioning of a revolution. As a case in point, Kung Raiya a 26-year-old political science student, was imprisoned for 18 months over a Facebook post calling for a color revolution. Likewise, during the past year, as the country is edging closer to another national election in 2018, the Cambodian government has doubled-down its efforts in forewarning the possible destruction of the country should people flirt with the idea of staging mass protests again. On April 26, for instance, the Press and Quick Reaction Unit of Cambodia s Office of the Council of Ministers released an 18-minute video showing footage of the devastation caused by the war in Syria, juxtaposing images of Syria at peace under President Bashar al-assad with scenes of children killed in the conflict, before launching into speeches by Hun Sen about maintaining peace in Cambodia and suppressing those who would start a color revolution aimed at ousting his government. The video also quoted a young Syrian man who had called for revolution expressing regret at having done so. 134) In May 2017, CPP MP Chheang Vun delivered a presentation to some 100 parliamentary staff titled Colour Revolution and War Destruction, in which he openly accused power countries like the United States and NGOs such as the National Democratic Institute (NDI), 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 and Freedom House of pushing regime change through civil society actors in small countries that don t follow US interests. 135) The MP also attacked media organizations such as he Phnom Penh Post, the Cambodia Daily, Voice of America and Radio Free 133) Amnesty International, Taking to the Streets: Freedom of Peaceful Assembly in Cambodia (Amnesty International, June 4, 2015). 134) Amnesty International, Taking to the Streets: Freedom of Peaceful Assembly in Cambodia (Amnesty International, June 4, 2015). 135) Shaun Turton, CPP Calls out Foreign NGOs for Stirring colour Revolution, Phnom Penh Post, May 24, 2017, volution. 333

337 Asia, as tools to damage the country s leaders reputation. 136) As the Shaun Turton of the Phnom Penh Post remarked: Though levelling such accusations at the US is not unusual for ruling party figures, the singling out of specific organisations is a step up in rhetoric, particularly in the context of recent threats by senior military figures to crack down on colour revolutions. 137) Likewise, in May, the Commander-in-Chief of the Royal Cambodian Armed Forces General Pol Saroeun reaffirmed the RCAF s commitment to strongly oppose the colour revolution in Cambodia in any images or places. 138) Rhetoric from the government aside, is Cambodia heading toward a color revolution? Signs on the ground are mixed. As Amnesty International pointed that People in Cambodia are now more willing to speak out against injustice and to join public assemblies. [ ] the establishment of a more permissive legal framework has contributed, along with a number of trends in society, to an explosion in the amount of public assemblies. 139) According to the same report, Despite a series of violent, at times lethal crackdowns by security forces, and a ban on public demonstrations for the first seven months of 2014, people continued to take to the streets. In July 2014, Phnom Penh Police Chief Chhuon Sovann reported that there had been 445 demonstrations in the capital since the July 2013 National Assembly elections an average of more than one assembly per day. 140) Yet, as I noted elsewhere, conflicts in Cambodia have shifted from macro to micro levels. Instead of armed conflicts between different political factions as had been the cases in the past, violence in contemporary Cambodia appear generally in the form of clashes between state armed forces and civilian protesters on such issues as land grabbing and demands for higher minimum wage. 141) Since early 2014, there have not been any mass gatherings or protests against the government. This stems from the fact that the momentum of anti-government protests were lost after the authority crackdown as well as the 136) Ibid. 137) Ibid. 138) AKP, RCAF Commander-in-Chief: No Colour Revolution in Cambodia, Agence Kampuchea Presse, May 23, 2017, 139) Amnesty International, Taking to the Streets: Freedom of Peaceful Assembly in Cambodia, ) Ibid. 141) Sok Udom Deth, Cambodia from Civil Wars to Fragile Peace : A Secular Perspective, Journal of MCU Peace Studies 4, no. 1 (2016):

338 opposition s political compromise with the ruling party to end the parliamentary boycott in exchange for promised reforms and power sharing in the National Assembly committees. To the government s credit, reforms are visible in the restructuring of the National Election Committee (with members appointed from both parties), the promotion of reform-minded ministers in different ministries (albeit not to everyone s satisfaction), as well as the relatively noticeable responsiveness and willingness from the government in addressing public discontent. In July 2016, however, when a popular commentator and grassroots activist Kem Ley was gunned down in broad daylight in downtown Phnom Penh, tens of thousands of people joined other supporters and carried his body across the city. An even bigger of number of mourners eventually filled the streets of Phnom Penh to attend his funeral procession to his hometown province more than 70 kilometers from the city. The spectacle reminds the government of the uncomfortable reality that such mass gatherings (though not directly to protest the government) are still possible when there is a sufficient cause to unite them. To this day, while the alleged gunman has been arrested and sentenced, many have no faith in the Cambodian court and believe the killing is politically motivated. Interestingly, the chief editor of the Thailand-based The New Atlas remarked in his article US Color Revolution Haunts Cambodia as follows: It is curious that the opposition gathered at the crime scene [of Kem Ley] so quickly, and with equal haste, turned his death into a public spectacle, all but preventing a proper forensic investigation from taking place. That the opposition consisted of members of the National Rescue Party, headed by Rainsy himself, suggests at the very least, crude political opportunism at work, and at worst, invites much more sinister theories surrounding the possible role of the opposition itself in Kem Ley s death, side-by-side theories promoted by VOA against Cambodia s sitting government. 142) Whatever the case may be in relation to Kem Ley s death, the more relevant question would be whether Cambodians have a reason, or would be willing, to 142) Joseph Thomas, US Colour Revolution Haunts Cambodia (Center for Research on Globalization, August 17, 2016), 335

339 take part in a color revolution that the government has so ardently warned against. The results from the most recent commune election may offer some clues about the political outlook of Cambodia in the near future. According to the final counts of the National Election Committee, the Cambodian People s Party took 1,156 communes, while 489 communes went to the Cambodia National Rescue Party. Based on this result, The opposition party drastically improved on the 40 communes it had won in 2012, when it contested separately as the Sam Rainsy Party and Human Rights Party. Yet, it also fell way short of winning over half of the communes it had anticipated. That said, other observers also opined that commune elections could not be compared with national elections, as people may have voted for candidates based on acquaintance and personal history, and not necessarily according to party lines. Therefore, they suggest, the likelihood that the opposition will win the national election in 2018 cannot be dismissed. True as that may be, the structural factors, in my opinion, seem to favor the ruling party. First, it should be pointed out that not all those who had voted for the opposition did so out of a genuine belief in the latter s leadership capacity; they may have done so as a way of sending a message to the ruling party to be more accountable to the electorate. The fact that the government has been pressured to pursue reforms and appeared to be more accountable to the public may have satisfied that particular segment of the electorate. Second, others may choose not to vote for the opposition for fear of the likely instability that follow the election. Most importantly, the opposition may have already lost the momentum it had gained at the 2013 national election. This may be evident in the creation and increasing support of smaller parties, and the failure to win a more sizable share in the commune elections. If the above prospect holds true, the question of a color revolution or mass anti-regime protests will certainly not occur. The electoral victory by the CPP will entail the status quo. In a less likely scenario of an electoral victory by the opposition, however, clashes between government forces and mobilized protesters in support of the opposition are likely to occur. After all, there is no sign that Hun Sen, who has repeatedly claimed that the country will plunge into chaos if he loses political control, will step down from power. As Sorpong Peou recently 336

340 noted, The ruling elite also think they cannot afford to lose power in a political environment where Hun Sen and his family, as well as loyalists feel that an election loss might subject them to prosecution, despite assurances from their foes to the contrary. 143) Furthermore, he argued: The trouble with countries like Cambodia long afflicted by the persistence of weak state institutions, as well as a lingering history of betrayal, retribution and bloodshed is that good intentions alone can never be a good enough foundation for trust-based peacebuilding. 144) As a result, in the unlikely scenario that the opposition wins the next year s national election, the prospect for violence following the election is high albeit unlikely to last long. After all, as even opposition officials admit, they have no means of violence to wage any war against the ruling party, and Hun Sen knows this to be true. 145) In the event of a government crackdown, it is unlikely to result in a prolonged civil war (as in the case of Syria) given the lack of sectarian factions, the lack of an overwhelming support for the opposition (as in Myanmar) to put strong pressure on the government, as well as the absence of external power interests in sowing conflicts in Cambodia. If anything, the stability of Cambodia serves the interest of major powers better, especially in the case of China. Therefore, even in this hypothetical scenario, given the distaste for civil wars in the country, it is presumable that the majority of Cambodians would opt for stability under a government that lacks legitimacy rather than continued instability just to honor a democratic election result. The same, however, cannot be said for another generation from now. Overall, given the current economic trajectory, although Cambodia will continue to face numerous small-scale protests, a color revolution is unlikely to occur. In any event, it serves the interest of the government better to focus its energy on making comprehensive reforms rather than to dwell on the discourse of war and instability that does not win the hearts and minds of its critics. 143) Sorpong Peou, No Retirement Plans for Hun Sen, East Asia Forum, August 2, 2017, 144) Ibid. 145) Ibid. 337

341 References: AKP. RCAF Commander-in-Chief: No Colour Revolution in Cambodia. Agence Kampuchea Presse. May 23, Amnesty International. Taking to the Streets: Freedom of Peaceful Assembly in Cambodia. Amnesty International, June 4, Chandler, David P. The Tragedy of Cambodian History: Politics, War and Revolutions si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Cheteria, Vicken. The Arab Revolt and the Colour Revolutions. opendemocracy, March 10, Government Video Won t Stop Color Revolution in Cambodia: Student Activist. Radio Free Asia, May 1, Haring, Melinda, and Michael Cecire. Why the Color Revolutions Failed. Foreign Policy, March 18, Nem, Sowath. Civil War Termination and the Source of Total Peace: Win-Win Policy of Samdech Techo Hun Sen in International Context. Phnom Penh: Reahoo Publication, Peou, Sorpong. No Retirement Plans for Hun Sen. East Asia Forum, August 2, Thomas, Joseph. US Colour Revolution Haunts Cambodia. Center for Research on Globalization, August 17, Turton, Shaun. CPP Calls out Foreign NGOs for Stirring colour Revolution. Phnom Penh Post. May 24, Un, Kheang. The Cambodian People Have Spoken: Has the Cambodian People s Party Heard? Southeast Asian Affairs 2015 (2015):

342 How Migration Has Shaped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an East Javanese Village Community: The Case of Pranggang from the 1890s to the Mid-1960s Nurchayati(State University of Surabaya) The village of Pranggang lies in the sub-district of Plosoklaten, which belongs to the district of Kediri in East Java. Pranggang consists of six hamlets and occupies an area of seven square kilometres. Its population is mostly Muslim by religion and Javanese by ethnicity. Most of its inhabitants are junior high school graduates by education and farmers or service sector workers by occupation. My paper discusses the society, culture and human geography of Pranggang from its origins in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mid-1960s. It highlights the social world that helped to shape the village and the lives of its inhabitants from the 1890s to the mid-1960s. I analyse the ways the village community has interacted with Indonesia and the rest of the world. It starts with an account of the development of the district of Kediri, the district where Pranggang is located, which is necessary for understanding Pranggang in its socio-historical context. The Kediri Regency and Its Development, The development of the Kediri residency from 1830 to 1950 was shaped by its exchanges of people, commodities, money, ideas, practices, and technology with the outside world. Dutch imperialism integrated the Kediri region into the world economy, compelling its peasants to grow various cash crops and sending some of its labourers to the Outer Islands and overseas. At the same time, Europeans took up residence in the district, investing in plantations, factories and sugar mills and building supporting infrastructure and institutions, including Western-style schools. In search of land and livelihood, many Javanese migrated to the region, where their numbers increased rapidly. 339

343 During the period under discussion, industrialisation in the Kediri region was slow, and the greater part of the native population there continued to depend on agriculture. This way of life came under increasing pressure as the population continued to grow and there was no more forest to clear for farming. Finding themselves at a crossroads of cultures, the Javanese in Kediri attempted a synthesis between the Javanese culture and Islam, Christianity, communism and nationalism. Many participated in the Revolution, expecting that freedom from Dutch rule would bring them a better life. Modern education enabled some to become part of a small middle class, which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post-independence era. The Development of Pranggang to 1950 The history of Pranggang from the 1890s to 1950 illustrates the evolution of a Javanese village community through the interaction of local and global factors. These factors included the volcanic Mount Kelud, Dutch imperialism and capitalism, world wars, migration by Javanese and other peoples and the meeting of cultures. In this complex process, people s actions were influenced not only by others, but also by their interaction with the physical environment, cultures, economic systems, nation-states, and networks of local, national, and international institutions, which they both preserved and transformed. The Sukorejo district (of which the Pranggang village was a part) began to be occupied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by settlers from Yogyakarta and Surakarta, the Brantas river valley, the Kediri plain and the north coast of Central and East Java. Some of them cleared the jungle in the Plosoklaten sub-district, and established the village of Pranggang at some point in the 1890s. Other social actors that engaged in the clearing and settlement of land were European owners of private enterprises, Chinese entrepreneurs and numerous Javanese migrants. The Europeans and the Chinese established a sugar mill and plantation estates, employing Javanese labourers. Clearing the forest in Kediri involved people working as a team. But when it came to dividing the fruits of the endeavour, some team leaders took the lion s share. And there emerged the figure of cleric-as-greedy-landowner, which would 340

344 become important in the early 1960s. The last clearing of forest in Pranggang occurred in This was done at the request of the Dutch manager of the nearby Jengkol estate, who needed additional accommodation for his workers. This was one of the ways the Dutch company changed the landscape in the sub-district of Plosoklaten. Another was its construction of infrastructure in support of its operations, including tramways and railways. In the period between 1942 and 1945, Kediri, like other part of Indonesia, was under Japanese Occupation. Life became harder for the villagers. The occupation authorities demanded that the villagers surrender all their crops to them. Primary schoolchildren were required to collect banana-trunk fibres and pineapple leaves as raw materials to make ropes and mats. Many of the villagers experienced food shortages and some suffered from forced labour. The early history of Pranggang contained the seeds of its two future problems, namely cultural polarisation and the struggle for land. The Kediri Regency and its Development from 1950 to the mid 1960s Kediri lost its character as a frontier zone during the period of From 1950 to the early 1960s, the social world of the Kediri residency was shaped by deforestation and steady population growth, the weakening of the central government s control over the countryside, the strengthening of rural elites, and the deterioration of agriculture. In this period, the poor abangan (syncretic Muslim) villagers who had been supporting themselves by occupying and cultivating the Dutch-owned plantation and factory lands left idle since the Japanese Occupation began to experience difficulties. Under the terms of the transfer of sovereignty in 1949, Dutch entrepreneurs were permitted to return to Indonesia and resume control over their former assets. In Kediri, this brought them into conflict with the abangan squatters who now depended on this land for their livelihoods. In these years Indonesia underwent a shift from liberal democracy to authoritarianism, and its people experienced a politics of mass-mobilisation that polarised them along class, cultural and ideological lines. One aspect of this 341

345 polarisation that was to be significant in Kediri was the issue of land reform. In its struggle for power in the national arena against the Army and Muslim political parties (the Masyumi and Nahdlatul Ulama, NU), the PKI built a mass base in the countryside, not only among the abangan squatters on the plantations but also among sugar mill workers nearby. It supported the cause of the abangan squatters. The PKI continued to champion the interests of the abangan poor after , when the plantations and sugar mills were nationalised and then placed under the control of Indonesian civilian managers and military officers. After ten years of mobilisation by political parties, the village world of Kediri became highly polarised along cultural, ideological and party lines. In 1963, the PKI mobilised its village followers to take over the land of several wealthy Muslims. This combination of class conflict, ideological warfare, cultural divisiveness and the mobilisation of the rural masses by political parties resulted in the explosion of violence in Kediri in In late 1965, some Islamic clerics and their followers, along with Christians, elements in the Army and some members of the local Indonesian Nationalist Party (PNI) engaged in massacres of people affiliated with the PKI. In Kediri alone around 10,000 people considered to be communists were killed. The victorious anti-communist elites established the New Order and, in order to achieve political stability and economic growth, implemented a set of policies, including a ban on communism and radical Islam, the depoliticisation and demobilisation of the village population, the Green Revolution, family planning, improvements in infrastructure, large-scale investment in human capital, and the establishment of rural banks. Pranggang from 1950 to the Mid 1960s At this period of time, Pranggang was no longer a frontier area. This transformation resulted from a combination of factors, including the growth of the human population and their need for space for housing, agriculture and plantations. The 1950s and the 1960s were also a time of hardship, scarcity and difficulty for many villagers in Pranggang. The Indonesian economy had yet to 342

346 recover from the damages inflicted by the Revolution. And the Indonesian government failed to deliver prosperity to the people. Some Javanese in Pranggang were farmers, but those on the eastern side of the Pare-Wates road made a living as plantation workers or as squatters who occupied and cultivated the land that once belonged to the European plantation estates. Due to population growth and the end of the expansion of agricultural land, there emerged in Pranggang a lower class whose members laboured for the landlords. In return, the landlords provided them with food and shelter. Other members of this class made a living by renting cows and oxen, which they used to transport produce or draw a cart. Mount Kelud continued to be two-sided in its interaction with the villagers of Pranggang. Through its eruptions, it fertilises the surrounding areas, enabling people in Pranggang to grow many kinds of crops. But from time to time the volcano endangers the lives of the people of Pranggang. In Pranggang and the neighbouring villages, there developed a struggle for land between landlords, who tended to be NU clerics, their supporters and the state-owned plantations on the one hand, and lower-class villagers who joined the BTI and the PKI on the other. These religious and political differences divided the people of Pranggang into two opposing camps. East Pranggang was the stronghold of those who were abangan in their religious orientation and supported the PKI. West Pranggang was the bastion of devout Muslims who allied themselves with the NU. In the early 1960s, in response to the government s reluctance to carry out land reform, the PKI and the BTI staged a unilateral action campaign. They encouraged their followers to occupy the lands belonging to the landlords and plantation companies. The supporters of the PKI in Pranggang included, among others, a machinist, several primary school teachers, coffee plantation workers and the squatters who cultivated the parcels of land belonging to the plantations on Mount Kelud s western slopes. That many of the poor and the landless in Pranggang found the PKI s propaganda attractive was easy to understand, as one of the party s key programs was land redistribution. 343

347 After a time, the left and the right in Pranggang were ready for a violent confrontation. In October 1965, two santri men from Pranggang were kidnapped and murdered by members of the PKI. The incident intensified the hostility between santri villagers affiliated with the NU and abangan villagers loyal to the PKI. In retaliation for these murders, on the night of 1 November 1965, a group of santri youths belonging to the Ansor captured several women who were members of the PKI-affiliated Gerwani, including one from Pranggang. What became of these women is unclear, but in response, on 2 November 1965 hundreds of PKI men from Gurah and several villages on the slopes of Mount Kelud descended on Pranggang in a show of force. They marched through the village, throwing rocks at houses and madrasah along their way. Outnumbered, the santri men of Pranggang fled to Brenggolo, then the centre of the sub-district of Plosoklaten, seeking the protection of the local police station and military headquarters. They then marched back to their village with the backing of groups from the Indonesian Nationalist Party and a convoy of tanks and truckloads of Army and Police Mobile Brigade troops. They pursued the PKI members, capturing some of them. They rounded up the captives and, at 4 or 5 in the afternoon, lined them up and shot them. Every day during the annihilation of the local PKI in late 1965, captured PKI members were brought in to the local madrasah that functioned as a makeshift headquarters for the purges. The destruction of the PKI marked the end of an era when landless villagers could use political action on a mass scale to push for land reform. The New Order government banned political parties from conducting political activities in the countryside except once every five years in the lead-up to general elections. As a result of this ban on political activities in the countryside, landless villagers were forced to rely on non-political ways of acquiring land and rising out of poverty. The developments that Pranggang experienced in had four consequences. First, the struggle for land in the village took the form of a growing conflict between the supporters of the NU and those of the PKI, coming to a head in 1965 with the massacres of PKI members and supporters. Second, obsessed with economic development, political stability and a fear of communism and, later, radical Islam, the New Order government placed Pranggang and other 344

348 Indonesian villages under constant surveillance to prevent the re-emergence of political mass movements. Third, no longer a frontier zone, Pranggang and its surroundings contained no more forest that could be cleared for housing and farming. Banned from engaging in political mass movements calling for land reform, the landless in the village were left with few ways to acquire land. Fourth, with the destruction of the PKI and its affiliated organisations in , Islamisation continued its advances in the village, penetrating further and deeper into the socio-cultural life of its inhabitants. Conclusion Pranggang emerged in the 1890s as the product of a combination of factors, both local and global. The village was founded by groups of Javanese migrants, who were pushed out of Central Java by the disorder that spread in the wake of the Java War, and pulled into the Kediri region by its forests and by its expanding European-owned plantation capitalism, which introduced commercial agriculture, a monetised economy and modern infrastructure. Pranggang s development up to the 1960s was shaped not only by the actions of its inhabitants, but also by major external forces, including the economic policies implemented by the Dutch colonial government and European capitalists, the nationalist struggle for independence, and the Indonesian ruling elites struggle for control over state and society. Over the course of these seven decades, the village underwent several major changes. Ecologically, it changed from a part of a frontier zone into that of a densely populated agricultural district, suffering from deforestation and the attendant extinction of wildlife species. Economically, the transition from a colonial to a national economy failed to improve the standard of living of the villagers. In addition, the major way in which villagers obtained land underwent a shift: first by clearing forest then by an agrarian reform movement, and finally by purchase. Politically, the destruction of the PKI in 1965 did much to purge the village, once and for all, of communism and left-wing mass mobilisation around key issues, especially land reform. Culturall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ncounter between Islam and the Javanese worldview, the community experienced a shift from synthesis to polarisation and, 345

349 finally, the ascendancy of Islam. Sociologically, Pranggang saw the removal of two elements from its social hierarchy, namely the Dutch colonial masters and their allies, the Javanese aristocrats. In addition, with the expulsion of Sino-Indonesians in the 1950s, the village became monolithically Javanese. But the development of Pranggang over the last seven decades also reveals several key continuities. With its periodic eruptions, Mount Kelud continued to exercise its power as destroyer and as nurturer. Whether for religious or economic purposes, geographical mobility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social life of the village. Despite the penetration of the countryside by plantation capitalism (first by the Dutch and later by state-owned enterprises), agriculture remained the dominant way of life among the villagers. Finally, the struggle for land continued to play a central role in Pranggang s development. It was this struggle that had compelled people to migrate to the frontier area in Kediri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It was also the struggle over land that characterised life in Pranggang from the early 1950s to Those who benefited most from Pranggang s development from the 1890s to the 1960s included landowning Islamic clerics, wealthy farmers and, in general, pious Muslims. These people achieved economic, political and cultural ascendancy in the village. By contrast, those who benefited least from the process were villagers who had no land and lacked modern education and the entrepreneurial spirit. They tended to be abangan in their cultural and religious orientations and they allied themselves with the PKI politically. As we shall see in the chapter that follows, it was this group of abangan villagers who came to constitute the working class of present-day Pranggang. 346

350 Comparing the National Ideologies : The History and Influences of Rukunegara in Malaysia and Pancasila in Indonesia Sahul Hamid Mohamed Maiddin (Sultan Idris Education University) ABSTRACT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history and influences of the national ideologies both in Malaysia and Indonesia. These countries, to great extent, have had shared the same cultures, language and history. However, the decolonization era in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has split Malaysia and Indonesia into two nation-states with their own identities. The decolonization process driven these nations two formulate their own national ideologies, which nonetheless, have many similarities when further examined. However, Indonesia created its national ideology in 1945, far earlier than Malaysia in This paper discusses the processes of creating and promoting the national ideologies both in Malaysia and Indonesia. Using an objective approach, this paper will reveal the underlying reasons for the formulation of the Rukunegara and Pancasila. It then continues to discuss the influences of these national ideologies in both countries. This is crucial to demonstrate the level of significance they imposed on the people, and also to show how much propaganda they take to be promoted as national ideologies. The paper concludes that between Malaysia and Indonesia, these postcolonial national ideologies served as a main source for the framework of nation building. However, in comparison, the Pancasila in Indonesia performed far superior and venerated as a gift from the God. This paper utilizes primary sources located from the National Archive of Indonesia and the National Archives of Malaysia. As for the secondary sources, most of the materials are from the author's personal collections and journals from the online sources. 347

351 Introduction National ideology is an established system of ideas and principles, which, as any other ideology, accepted and adhered by its followers. A national ideology defines how the nation should live in accordance to own idea and identity. A national ideology reflects the past and determines the future of the nation. In short, a national ideology, as aspiration, is a driving force, to helping the government in galvanizing the country and guiding it towards national unity. A good thing about the national ideology in some countries is, it may be turned as a tool of propaganda to instill patriotism and to support the government of the day who tends to promote the national ideology as a source of national pride and strength. Should the people disobey the government, they will be labeled as if disobeying the national ideology. In the decolonized countries of Southeast Asia, this trend is apparently popular. In the middle of 20th century, during the period of decolonization, many countries in Southeast Asia gained their independence from the colonial powers. In order to build the country anew, the national ideology was used as a main tool of the nation-building propaganda. In this context, Indonesia was the first country to be independent from the Dutch in August As this paper concerns, the comparison will be between Indonesia and Malaysia, which was later freed by the British colonialist in August Indonesia and Malaysia, two neighboring countries, have shared some invaluable histories and identities in the Malay Archipelago until the advent of colonial powers that separated them into two nation-states and marked the national boundaries between them. In the quest for developing and building their identities, Indonesia invented the Pancasila, while Malaysia, later, introduced the Rukunegara. The History of Pancasila and Rukunegara Pancasila, literally the Five Principles, was the brainchild of Sukarno, the Indonesia s Father of Independence. During the Revolution, , Sukarno and his advisers had laid the basis for an explicit national ideology that could underpin the development of Indonesian nationalism, which in turn would make Indonesia a prosperous state. They key to this ideology was the doctrine of 348

352 Pancasila, first made public in a speech of Sukarno s on 1 June 1945, at the meeting of the Body for Investigating Efforts in Preparation for Independence. 146) In formulating his ideas Sukarno keenly used foreign words, especially the number five in Sanskrit and Islamic values, like Pancamuka(five-faceted), 147) Pantjalogi(five-ideology) 148) and Panca Azimat (five-talisman). 149) The principles of Pancasila are visually depicted on the Indonesian coat of arms. A star in the centre represents the supreme God; an Indonesian bull represents the symbol of nationality; a chain portrays the symbol of humanity; a Banyan tree portrays the sovereignty of the people; and cotton and paddy represent the symbol of social justice with a sufficient and equal distribution of the daily necessities. 150) As a part of a larger campaign to popularize and indoctrinate the Pancasila, first and foremost, it was conferred with religious attributes. The teachings of Prophet Muhammad, Jesus Christ and Ratu Adil (the Just King), were propounded to accord Pancasila legitimacy as a supra-national ideology. For decades past I have been thinking about this, that is, the principle of Indonesian Merdeka, our Weltanschauung, said Sukarno. 151) The inspiration of Pancasila was delivered to the public as if it were God s gift to Sukarno. 152) 146) The Indonesian Revolution, Basic Documents and the Idea of Guided Democracy, dengan tambahan Resopim, Tahun Kemenangan, Genta Suara Revolusi Indonesia, Tjetakan Pertama, Surabaja: Pertjetakan Negara, 1963, p ) Sukarno, Djalannya Revolusi Kita (Djarek), 17 August 1960, Tudjuh Bahan Pokok Indoktrinasi, p ) This refers to the government policy on irrigation, education, emigration, industrialisation and indoctrination. See Sukarno, Laksanakan Pantja-logi: Irigasi-Edukasi-Emigrasi-Industrialisasi-Indoktrinasi, Jakarta: Departemen Penerangan, ) This refers to Sukarno s five most significant speeches namely NASAKOM (1926), Pancasila (1945), Manipol/USDEK (1959), Trisakti TAVIP (1964) and Berdikari (1965). See Sukarno, Tjapailah Bintang-bintang di Langit (Tahun Berdikari), pp. 27& ) Ibid. P ) The Indonesian Revolution, Basic Documents and the Idea of Guided Democracy, pp ) In his address at the opening of the Short Courses for Indoctrination of Nasakom s Cadres, Sukarno explained his experience rhetorically before thousands. He said: On that night, I went out of my house and directed my face and my heart to Allah. Thousands of stars were glittering, stars of May and June, without rains without clouds, clean skies, thousands of stars. I kneeled down and looked up to the sky. I sent my prayer amidst the stars to Allah. Oh Allah, please inspire me. Tomorrow I have to deliver speech at the meeting suggest policies for the Independence Indonesi a Please guide me if there are any policies than I can introduce... He then went to bed, woke up another morning, and was inspired with Pancasila. He delivered this experience with full of emotions and shed his tears. See Sukarno, Nasakom adalah Benar, Jakarta: Gunung Agung, 1965, pp

353 To Sukarno s enthusiasts, however, Pancasila served as a medium to honour him as a Superior leader and provide a noble impact on Pancasila and Sukarno s teaching. 153) Inshort, thepancasila which became the blueprint of the Indonesian nation consists of these five basic principles: the belief in One God; Just and Civilized Humanity (Internationalism); Indonesian Unity (Nationalism); Democracy; and Social Justice for the people of Indonesia. Unlike Indonesia which had coined Pancasila before the Independence, Malaysia formulated the Rukunegara much later in 1970, 13 years after the independence in August The trauma of May , the racial riots that shocked the nation, has inspired the inception of the Rukunegara. It was proclaimed by the Supreme Ruler of Malaysia (Yang DiPertuan Agong) in conjunction with the celebration of the 13th anniversary of the Malaysia independence on 31 August The Rukunegara,( literally meaning the national tenets), as Pancasila, also consists of five principles. They are: Belief in God; Loyalty to King and Nation; the Supremacy of the Constitution; the Rule of Law; and Good Behaviour and Morality. 154) The Rukunegara was established as a mean to: achieving a greater unity of all her peoples; maintaining a democratic way of life; creating a just society in which the wealth of the nation shall be equitably shared; ensuring a liberal approach to her rich and diverse cultural traditions; and building a progressive society which shall be oriented to modern science and technology. 155) The basic source for the Rukunegara emanated from Ghazali Shafie s, the Head of the Department of National Unity, speech in July Ghazali s speech may be summarized under three headings: the need for an ideology; the nature of the ideology required; and the governmental arrangements for the formulations of the ideology. 156) The special sanctity of the ideology was indicated by Ghazali s reference to it as Rukenegara. 157) A long-termmeasure, 153) In a magazine published by Partindo, the author, R.A. Kartawirana wrote about the parallels between Pancasila and Islamic teachings. He titled his article Wahyu Ilahi yang Terkandung Dalam Pancasila (God s Revelation Contained in Pancasila). The author endeavoured to prove that Prophet Muhammad s concept of an Islamic state had actually consisted of Pancasila principles. Gempar, No. 2, 1964, pp ) accessed on 13 August ) Ibid. 156) R.S. Milne, National Ideology and Nation Building in Malaysia, Asian Survey, Vol. 10, No. 7, July 1970, p ) Ibid. p

354 designed to promoted national unity, was the suggestion that the ideology should be taught in schools, and also printed in every school exercise and textbooks. Conclusion National ideologies are crucial to build and develop a new nation and society. As Apter put it, In the new developing areas, consensus is low, primordial loyalties high. Ideology binds them. 158) In this case, Indonesia and Malaysia have used the Pancasila and Rukunegara, respectively, to bind their diversified people using the primordial loyalties. In comparison, the successful implementation of the national ideologies is more successful in Indonesia. Pancasila was and still venerated as a gift of God, the status that Rukunegara fails to achieve hitherto. References Apter, David E., Ideology and Discontent, in David E. Apter (ed.), Ideology and Discontents, New York: Free Press, Gempar, No. 2, Milne, R.S., National Ideology and Nation Building in Malaysia, Asian Survey, Vol. 10, No. 7, July Sukarno, Nasakom adalah Benar, Jakarta: Gunung Agung, Sukarno, Laksanakan Pantja-logi: Irigasi-Edukasi-Emigrasi-Industrialisasi-Indoktrinasi, Jakarta: Departemen Penerangan, The Indonesian Revolution, Basic Documents and the Idea of Guided Democracy, dengan tambahan Resopim, Tahun Kemenangan, Genta Suara Revolusi Indonesia, Tjetakan Pertama, Surabaja: Pertjetakan Negara, accessed on 13 August ) David E. Apter, Ideology and Discontent, in David E. Apter (ed.), Ideology and Discontents, New York: Free Press, 1964, pp

355 [THIS IS DRAFT ONLY. PLEASE DO NOT CITE OR QUOTE WITHOUT PERMISSION] Dolorosa Sinaga: The Life, Art, and Politics of an Indonesian Woman Sculptor Sony Karsono (Institute for the Study of Humanities, Culture, and Society, Indonesia) BORN IN SIBOLGA on 31 October 1952 but spending most of her life in Indonesia s capital, Jakarta, the sculptor Dolorosa Sinaga is one of the country s major women visual artists still active today. She makes her presence felt in Indonesia s contemporary socio-cultural and political landscapes, not only as a commercially successful and critically respected artist, but also as politically engaged educator at the Jakarta Art Institute and (since the mid-1990s) as a women s and human rights activist. Operating at the intersection of gender studies and art, as well as intellectual and social histories, my paper examines how in contemporary urban Indonesia Sinaga continues to grapple with her finite life and social world although she possesses much richer experiences and much greater social aspirations. By analyzing Sinaga s personal history and its connections (and disconnections) to the formal and thematic evolution of her art, this paper looks at the role played (or not played) in her life and oeuvre by her multiple subject positions as an upper-middle-class woman, a Batak, a cultural Christian, and a citizen of Jakarta and Indonesia. It also asks what Sinaga and her artworks do and do not and can or cannot tell us about changes and continuities in modern Indonesian art, in the city of Jakarta, in Indonesian society, and the world. Conversely, the paper considers the ways the conflict-ridden and much-debated transformations of Indonesia and the world since World War II have both hindered and aided Sinaga s genesis and development as a female artist, educator, and activist, as she continues to draw on and fight against several 352

356 structures in her life, including the nuclear family, a version of Protestant Christianity, Jakarta s upper middle class, Batak culture, and a modernizing Indonesia. I seek to show and understand how she and her artworks are the products of her changing urban, national, and global environments. I also attempt to see and understand the strains and sufferings she has had to bear for her to create her distinctive identity, and for her artworks to come into being. Then this paper probes this question: when it concerns Indonesia s contemporary art and cultural history, what is gained (and what is lost) in a gender-focused analysis like this, which examines art in the context of the connected and conflicting interaction of the artist s biography and the history of her society? Born the fourth of eight siblings to Karel Mompang Sinaga, a successful insurance salesman, and Pinta Nur Sihombing, a former teacher, Dolorosa Sinaga spent her childhood in the urban Sumatra and Java of the 1950s and early 1960s. With her upper-middle-class, Protestant, Toba Batak family, she moved from Sibolga to Medan, to Palembang, and, finally, to Jakarta, always inhabiting an upper-middle class neighborhood. Such circumstances meant she enjoyed a good education at Catholic primary schools, received a devout Protestant upbringing at home, and led a comfortable life. From a psychocultural point of view, however, she had a rough start in life. Her birth as a baby girl filled her father s heart with deep sorrow, for under the burden of his patrilineal Toba Batak culture Karel had long been waiting for a son to continue his lineage. To express and memorialize his grief, he named his newborn daughter Dolorosa after Via Dolorosa ( Painful Path ), the path that Jesus is believed to have taken to crucifixion. In response to such a beginning, Dolorosa grew up a tomboy; developed a loving and respectful, yet fiercely independent, attitude toward her father; had no chance to master her ethnic language but would embrace her ethnic identity wholeheartedly; and despite her espousal of a variant of Marxism in her forties retains a generally upper-middle-class outlook on life. It was while living in Jakarta in the mid-1960s that under the influence of her male bench-mates in primary and junior high school Dolorosa Sinaga discovered the joy of drawing and that sense of freedom which art could help her achieve. Besides taking pleasure in swimming recreational driving, playing basketball, and learning several Japanese martial arts, she continued to pursue drawing through 353

357 her senior high school years. That she could afford to live this way in the midto late 1960s (when political and economic crisis shook the country to its core and finally brought about a bloody regime change) was because her upper-middle-class pragmatic parents found a way to shield the family from the crisis cruelest consequences. Sinaga s mother ran a thriving fish shop at home in the upscale Menteng neighborhood while her father started his own life insurance company. In the 1970s, in defiance of her father s wish that she study theology to become a minister, Dolorosa Sinaga, who desired a career as a professional artist, studied the visual arts at the newly founded Jakarta Art Institute (LPKJ, but now known as IKJ), majoring, at first, in painting, sculpture, and graphic arts. But after discovering that sculpture was her strongest suit, she decided to specialize in it. Along with Yani Mariani Sastranegara (b. 1955), Dianthus Louisa Pattiasina, and Altje Ully Pandjaitan (b. 1958), Dolorosa Sinaga was among the Institute s first female students of sculpture. She took sculpture classes taught by Edith Ratna Siagian (b. 1946) and Surya Pernawa ( ), who typical of the graduates of the School of Arts and Design at the Bandung Institute of Technology (ITB) introduced her to, rather narrowly, Henry Moore s aesthetic vision. Small wonder that the works that Sinaga produced as her capstone project show the influence of Henry Moore s formalism. To broaden her aesthetic horizon, Sinaga befriended and learned from teachers outside the Visual Arts Department, such as film director Wahyu Sihombing, composer Slamet Abdul Syukur, and choreographer Farida Feisol. In 1977, she completed her studies at the Jakarta Institute and became its first graduate. During her student years at the Institute she won two awards in recognition of her artistic achievements. The funding for her studies came, for the most part, from the money she made by taking part-time jobs and from her mother s contribution. Believing that the art world was morally dangerous for her daughter, Dolorosa, Karel refused (save for the first academic year) to pay for her tuition and fees. During the first decade of its life, in support of the economic modernization that the New Order government undertook on a national scale, the Jakarta Art Institute forged itself into a modern institution (as opposed to a cluster of traditional communal studios) for the training of Indonesian professional artists. It 354

358 attempted to make its structure, processes, and products worthy of state recognition and capable of meeting society s needs. 159) The Institute moved toward operating like a modern school of arts, that is to say, as an academic bureaucracy that adhered to a curriculum; divided the learning experience of its students into fields, sub-fields, courses, units, stages, academic years, and semesters; conducted examinations; and award degrees and diplomas. Governor Ali Sadikin wanted the Jakarta Art Institute to produce the professional artists he needed to realize his vision of Jakarta as a city of culture and a metropolitan city. Thus the birth of professional artists like Dolorosa Sinaga was a product of the transformation that the city underwent under Sadikin s leadership.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in the early 1970s, which saw a surge in student political activism in Jakarta, Dolorosa Sinaga stayed away from politics. She did so in 1973, when she served as president of the Student Council of Jakarta Art Institute 160) ; and in January 1974, when anti-government student demonstrations in Jakarta turned into riots; and in 1975, when a group of young artist calling themselves Gerakan Seni Rupa Baru (New Art Movement) criticized the absence of socio-political commitment in the contemporary Indonesian arts. To prove to her father that she was serious about her career choice, she seems to have focused her energies on doing well in her training as a professional artist. The first stage in Dolorosa Sinaga s development as a professional artist and the first phase in the evolution of Jakarta Art Institute occurred simultaneously in a Jakarta that was experiencing a time of great cultural dynamism. It was a time when the city s commerce was growing fast; when media technology was becoming more powerful and sophisticated; when high-rise buildings were populating the city s landscape; when Jakartans were creating their versions of modern Indonesian culture by borrowing many elements of Western cultures. These developments combined to create a growing market for modern Indonesian visual arts. Nowadays Dolorosa Sinaga sometimes remarks in retrospect that she received less than what she needed from her undergraduate studies at the Jakarta Art 159) Owned by Jakarta Provincial Government, the Jakarta Art Institute was, and still is, half public and half private. 160) She is perhaps the first woman to lead such a student organization. 355

359 Institute. This is true. But there is no denying that the Institute played a vital role in her transformation into a professional sculptor and an art educator. It was Jakarta Art Institute that admitted her to pursue a BA degree in fine arts. It was the Institute that for all its shortages in funding, human resource, and facilities has trained her to develop the basic skills and the worldview she needed to become a professional artist. It was the Institute that helped her find herself as a sculptor. And it was the Institute that gave her the key to Jakarta s art world, where she could exploit the chances for her further development. One of these was the chance to study overseas. It was at St Martin s School of Art in London in that on a British Council scholarship Dolorosa Sinaga received the most rigorous part of her training as a sculptor. Her postgraduate studies in the UK constitute a turning a point in her professional life. Why it is the case, how the process unfolded, and why in the last decade of the New Order era she underwent an ideological shift to the left are among the puzzles that I seek to crack in my still ongoing research into her artistic biography. 356

360 분과회의 11 한국의대아세안정책주요이슈와 정책방향 이세션의발표문은별도의자료집으로제작되어 학술대회당일날배포될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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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분과회의 12 메콩유역을둘러싼개발이슈와협력 거버넌스 1. 엄은희, 신동혁 ( 서울대 ) 태국전력 / 에너지체제의경로형성과지속가능성평가 2. 이상국 ( 연세대 ) 지역통합은국경비지니스에어떤영향을미치는가 : 태국 - 미얀마국경지역소수민족군벌을중심으로 3. 안정욱, 김태윤 ( 서울대 ) Determinants affecting on paddy productivity in Tonle Sap zone, Cambodia 4. 이재원, 김태윤 ( 서울대 ) 메콩지역스마트농업의주요사례분석 5. 전은정, 윤순진 ( 서울대 ) 개발도상국기후변화대응역량구축을위한국제사회의 기여 : 캄보디아대학의기후변화교육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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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태국전력 / 에너지체제의경로형성과지속가능성평가 엄은희, 신동혁 ( 서울대 ) 1. 서론 메콩유역은현재지구상에서가장집약적인수력개발현장으로부상중이다. 특히하류메콩본류와지류에서만계획되거나건설중인수력발전용댐의수는 100개를상회한다. 이러한수력붐의중심에라오스가있다. 라오스는하류메콩유수량의 35% 를차지하고있으며, 현재 9개의본류댐을포함해 60여개의댐이계획중이거나건설중에있다 (Grumbine and Xu, 2011). 그런데라오스에서생산된전력은자국의경제성장을뒷받침하는데사용되는것보다이웃국가, 특히태국수출용 (90% 내외 ) 으로기획되고개발되어왔다. 예컨대, 하류메콩최초의본류댐인샤나부리댐의 36억달러에달하는건설비용조달과시공을모두태국의국영은행과국영기업에서담당하고있다. 수력댐완공후생산전력의 95% 를태국으로수출하겠다는계약도체결되어있다. 이처럼라오스의전력생산의목표는국내전력화 ( 국민의전력접근성증진과국내산업발전을위한기초인프라 ) 보다는태국으로의전력수출에맞춰져있다. 161) 본연구는메콩지역의전력 / 에너지체제의형성을역사지리적으로분석한연구 ( 엄은희, 2015) 의후속연구로, 역내최대의전력 / 에너지소비국가인태국의전력 / 에너지체제에대한고찰하려는시도이다. 다시말해, 태국의경제발전과정치적변동의과정내에서전력 / 에너지인프라구축의과거와현재에관한맥락적이해를제공하려는것이다. 앞의라오스와태국의전력 / 에너지교류의예에서보듯, 태국의전력 / 에너지인프라정책은국경내에서머무는것이아니라메콩유역국가들간, 더나아가아세안의전력교류및경제통합과도긴밀한연계를맺고있다. 따라서본연구의분석범위는국가적차원뿐아니라지역적차원에서태국의전력 / 에너지체제의형성과변화과정까지를포함한다. 161) 1970 년대초반건설된 150MW 용량의남응댐 (Nam Ngum Dam, 현재는남응 1 댐 ) 은라오스의제 1 호수력발전용댐이다. 이댐은 1960 년대말메콩위원회와세계은행의기술지원및 10 개국의금융지원으로건설되었고, 1971 년상업적인운영을시작한이후 1980 년대까지생산전력의 70~80% 를태국으로수출했다. 남응댐을시초로라오스에서는태국으로의전력수출을주요목적으로하는수력발전용댐건설이라는특수한경로가형성되었다. 361

365 경제발전에대한전망과이를뒷받침하기위한전력 / 에너지의안정적공급은국민국가의중요한과제중하나이다. 오늘날대부분의국가의전력 / 에너지체제는화석연료에기초하고있는데, 화석연료는한편으로는자원고갈의압력을받고다른한편으로는연소시발생하는온실가스가기후변화에주요원인으로지목되면서화석연료에덜의존하는전력 / 에너지체제로의전환을요구받고있다. 2015년파리협정을기점으로출범하게될신기후체제하에서는선진국뿐아니라개도국에게도기후변화대응에대한자발적책임과감축기여를요구하고있다. 따라서동남아시아의신흥국인태국역시전력 / 에너지체제의유지와관리에있어기존의경제사회전망에따른고려뿐아니라자원고갈및기후변화대응을통해지속가능한에너지체제로의전환을고려할것을요구받고있다. 본논문의연구목적은다음과같다. 첫째, 태국의전력 / 에너지체제의형성과고착화과정을이국가의정치경제적변화의과정과연계하여설명한다. 둘째, 2010년이후본격화되고있는메콩유역내에서전력 / 에너지체제의지역화흐름에서태국의주도적역할을밝히고, 이러한역할이이국가의전후지정학적위치성에의해경로의존적으로발전해왔음을드러낸다. 셋째, 태국의현재전력 / 에너지체제를기후변화대응과지속가능성의측면에서비판적으로고찰하고, 이를변화시키기위한태국시민사회의노력을조망한다 태국의전력 / 에너지체제의형성 : 역사 - 지리적접근 1) 국가적차원 태국은대륙부동남아에서가장큰경제규모를갖추고있으며 2011년세계은행의구분에따르면중상위소득국가 (upper-middle-income economy) 로분류된다. 이나라는 1960년대이래로농업국가에서산업화되고도시화된사회로서서히전환되어왔다. 태국의국가전력시스템의기초는 년대에형성되었는데, 당시는동아시아의냉전체제가심화되던시기로태국은메콩유역국중서구원조기구 ( 세계은행 ) 와서방세계 ( 특히미국 ) 의집중적인지원을받았다 (Greancen 2004: 129). 362

366 1961년계엄령하에서태국정부는세계은행의자문을바탕으로농업국가에서시장경제하의산업국가로의전환을강조하는제 1차 5개년국가발전계획을발표했다. 이시기에주된발전패러다임은유럽에서의마샬플랜의성공과로스토에의해설파된경제의이륙 (take-off) 이론의영향을받았으며주로국가주도의대규모발전을강조하였다. 태국은약한발전주의국가모델을추구했는데여기서정부의역할은공공지출에집중투자하여민간영역을지원하는기초인프라를건설하는것에맞춰졌다. 대규모전력생산및공급체계와농촌전력화는이계획의근간이었다 (Wattana et al, 2008: 42, Middleton, 2016). 태국경제는 1980년대를지나면서경제구조의뚜렷한변화와더불어본격적으로세계경제와통합 162) 되기시작했다. 1980년대중반부터 1990년대중반까지약 10년동안태국은연 10% 이상의고도성장률을달성하면서동남아시아에서가장주목받는신흥공업국가로발돋움하였다. 당시태국은 바트경제권, 제 5 의용, 아시아의신데렐라 와같은찬사를얻었다 ( 박번순, 2014:22). 하지만 1990년대동아시아외환위기는또다른아시아의신흥공업국으로성장하려던태국경제의꿈을좌절시켰다. 이후등장한태국정부들에게 경제살리기 는무엇보다선행되는정책적과제가되었다. 그런데태국정부들이경기부양을위한주요한정책수단으로삼은것은소위 메가프로젝트 (Mega project) 라고불리는대규모국책사업을펼치는것이었다. 특히 2001년집권한탁신 (Thaksin) 전총리는인프라건설을통한대규모재정지출을경제성장의견인차로여기는정책을널리활용하였고, 이를통한단기적인경제부양과정치적지지확보에도성공한바있다. 이후정권에서도경기부양을위한대규모국책사업을활용하는정책은반복적으로되풀이 ( 이재호, 2014) 되어왔는데, 국가적차원뿐아니라지역적차원에서전력광역화, 교통인프라확충, 수자원통합관리등이주요국책사업으로진행되어왔다. 오늘날의태국의경제성장을뒷받침하는전력 / 에너지체제는대규모화석연료기술에의해주도되는국가적전력시스템에의존하고있지만, 산업화초기단계였던 1960년대의전력체제의기초는짜오프라야상류의대형댐건설과이를관리할국영전력회사의건설을통해이루어졌다. 국제사회가태국에제공한기술자문과유무상원조를바탕으로최초의수력발전용댐인부미폰댐 (Bhumipol hydroelectric dam, 535MW 용량의대형댐임 ) 이 1957년건설되었는 162) 1985 년합의된플라자협정 (Plaza Accord) 이후일본정부와기업들은엔화가치절상과국내생산비용증가에대한대안으로對아시아지역에대한투자를확대하였다. 엔고현상은동남아시아국가들의수출경쟁력을전반적으로제고시키는결과를낳았고, 대표적으로태국은동아시아공업국들 ( 일본, 한국, 대만 ) 의매력적인수출기지로부상하였다. 1980~90 년대태국의급속한경제성장은수출주도경제로이행해왔는데여기에는일본을위시한동북아산업국으로부터의외국인직접투자 (FDI) 이큰기여를하였다. 363

367 데, 건설비용에만당시세계은행의차관 6900만달러가소요되었다. 이차관은과거태국이받았던차관총액의 3배에이르는거금이었다 (Ryder, 1996). 수력발전이외에도태국내의가용자원 ( 갈탄 ) 에기초한화력발전소도다수건설되었으며, 더불어전력송전네트워크도매우이른시기부터구축되기시작했다.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 (TVA, Tennessee Valley Authority) 을모델로한태국전력공사 (EGAT, the Electricity Generation Authority of Thailand) 도 1968년국제사회의권유에따라수립되었다 (Greacen and Greacen, 2004). 163) 수상직속의이국영기업은현재까지도태국의전력생산과발전소운영및송전기능을통합운영하는가장중요한주체이다. 태국의전력부문은국가소유의단일구매계획 (a state-owned single buyer scheme) 에기초한다. 전력생산은국영기업인태국전력공사 (Electricity Generating Authority of Thailand, 이하 EGAT) 가약 44~46% 를담당하며, 전력부문의부분민영화이후등장한독립전력생산자 (IPPs, Independent Power Providers) 가차지하는비중은 40% 내외를, 재생에너지에기초한소규모발전소 (10-90MW of capacity 및 10MW 미만 ) 가차지하는비중이 10% 을차지한다. 그외 7% 내외의내수용전력을라오스로부터수입하고있다. EGAT은송전설비의관리와운용을전적으로담당하고있다. EGAT과민영전력생산자들이생산한전력을이원화된지역전력청에배선하며, 일부대규모산업단지의경우배선업무까지담당하고있다 (METI, 2015). < 그림 1> 태국전력산업의구조 출처 : METI(2015: 44) 고성장시기동안 EGAT 은수상직속기구 164) 로서정부구조에서우선적접근 163) 1958 년메트로폴리탄전력청 (MEA) 이, 1960 년에는지방전력청 (PEA) 이설립되어각각도시 ( 주로방콕 ) 와농촌지역의전력화를담당했는데, 1968 년 EGAT 이설립되면서전력산업의국가적통합과수직계열화가이루어졌다. 164) PEA 와 MEA 는내무부관할. 364

368 권을지닌 EGAT은대규모개발자금을우선적으로활용하는가장큰국영기업이었다. 관료의임명과우선계약권을선취할수있는독점적기구로기능하였을뿐아니라국가경제사회발전위원회 (NESDB) 와더불어태국의중앙계획경제발전계획의수립에도주요한역할을해왔다 (Smith 2003: 281). 1961년제 1차국가사회경제개발계획이후, EGAT은재정부와 NESDB의승인하에경제성장에따른전력수요를예측하고이를위한인프라투자계획을준비해왔다 (Ryder, 1996). 그러나 1980년대일련의친기업적정부정책이진행되면서 EGAT의독점력은약화되고전력부문의부분적민영화시기가도래하였다 (Middleton, 2016). 태국은 1978년에서 1981년제 2차세계석유파동기간동안대규모공공부채에따른위기를경험하였다. 이위기는태국산물품의주요수입처였던 OECD 국가의경제정체와동반되면서국내적으로큰인플레이션을낳았다. 태국의전력부문은 년대급속한설비확장이대부분외채에의존했기때문에더큰위기를경험하게되었다 (Smith 2003: 283). 태국정부는세계은행과 IMF의지도에따라 년사이구조조정프로그램에진입하였다. 이러한국제금융기구는신자유주의적발전패러다임에따라차관의조건으로국영기업의민영화를요구하였고, 여기서전력부문을독점하고있던 EGAT의민영화도포함되었다. 당시 EGAT과 EGAT의노조는조직적으로저항하였으나마침내민영화에굴복할수밖에없었다 (Greacen and Greacen 2004). 전력산업의민영화는 1992년출범한국가에너지정책국 (NEPO, National Ener gy Policy Office) 에의해주도되었다. 1992년소규모전력공급 (SPP) 프로그램이, 1994년독립전력생산자 (IPPs, Independent Power Producers) 프로그램이발주됨으로써전력산업의재구조화가시도되었다. 다른한편으로는태국의경제사회발전위원회 (NESDB, National and Social Development Board) 에의해 EGAT이준비하던전력개발계획 (PDPs) 에대한관리감독도강화되었다. 2001년권력을쥐게된탁신의타이락타이 (TRT) 정부도 2002년새롭게에너지부를설립하고 NEPO 산하의에너지정책계획국 (EPPO) 의권력을크게낮추고, 전력시장의경쟁구도창출을시도하였다. 이러한부분적민영화를결과로 EGAT의전력생산부문에서의지분은 1980년대말 89% 에서 2012는 46% 까지떨어졌다 (EPPO, 2013). 그러함에도오늘까지 EGAT은전력부문의 국가챔피온 으로서의위치를유지하고있다 (Middleton, 2016). EGAT은산하에전력생산회사 (EGCO, Electricity Generating Company) 를설립하여가장수익성이높은두개의 IPPs 를운영하고있으며, PDP의세부계획 ( 발전소의규모, 연료원, 입지 ) 을세우는 365

369 가장중요한역할을담당하면서, 태국의전력계획에서오늘날까지지배적인위치를차지하고있다 (Foran 2006:5). 최근 EGAT의주요사업으로는송전효율개선을위한 500KW급송전망의전국화, 아세안전력망연계강화를위한송배전망개선프로젝트 (Electricity Access Expansion Project Phase II), 라오스의홍사 (Hongsa) 지역의화력발전소건설과수입을위한투자등이추진되고있다. 2) 지역적 (regional) 차원 인도차이나반도에서태국의위치는지정학적특이성에서나온다. 태국은메콩지역 (Mekong sub-region) 내에서 1인당국민소득이가장높은중소득국 (GNI per capita 5,410USD, 2014년기준 ) 이다. 태국은동남아국가들중에서는유일하게식민지경험없이서구사회와선린관계혹은후원관계를맺어왔다. 제 2차세계대전이후에는사회주의계획경제를채택한이웃국가들과는달리주요서방 ( 특히미국및일본 ) 의경제적원조속에안정적경제성장의기틀을마련하였다. 태국은냉전시기대륙부동남아시아에서유일한미국의동맹국으로서미국과세계은행으로부터실질적인경제원조와자문을받았는데, 여기에는전력생산, 도로개설, 저수지와운하건설등이포함되었다 (Muscat,1990; Middleton et al., 2009에서재인용 ). 1980년대말에시작되어 1991년의동구권의해체로일단락된세계사적변화는메콩유역국가들의대외관계와지역의정치및경제적경관변화에분명한영향을미쳤다. 변화의방향은당시태국수상이었던찻차이 (Chatichai Choohavan) 가내세운 전장에서시장으로 (from battlefields to marketplaces) 라는정책구호로요약될수있다. 1990년대중반이후태국정부에서계획한전력과에너지의수급은두방향으로변화를맞이한다. 하나는자국내전력생산의원천을수력에서액화천연가스와석탄으로돌린것이며, 다른하나는인근국가 ( 라오스와미얀마 ) 에서생산된전력을수입하겠다는계획을내세운것이다. 태국이이웃국가의전력생산시설의개발을지원하고거기서생산된전력을태국으로수입하겠다는전략은태국이주도하는메콩지역의지역화의흐름안에서해석될수있다. 태국의정책결정자들과 EGAT으로대표되는에너지부문의엘리트집단은라오스와중국윈난성 ( 수력 ) 및미얀마 ( 화력 ) 에서생산된전력을수입하는데상당한관심을가지고이웃국가를개발하는데폭넓은지원과개입을하게된것이다. 태국은특히자원외교 (resource diplomacy) 라는이름으 366

370 로라오스수자원개발에적극적으로참여하기시작했다 (Hirsh, 2001: 241). 동아시아의냉전체제해체를즈음하여 ADB가주도하는 GMS 프로그램의에너지부문의주요계획중하나인메콩전력망 (the Mekong Power Grid) 은지역내다양한에너지자원을공유하고역내의다양한수준의전력수요를충족시키기위해전력공급을최적화하는것을목표로한다. 165) 본계획의기본구상은수력원의공동개발과국경을가로지르는고압송전선로건설을통해지역의전력시장을통합적으로개발하고운영하려는것이다. 태국은현재 GMS 내전력수요의 29% 를차지하는최대전력소비국이자수입국이다. GMS 마스터플랜수정판 (Update of the GMS Regional Master Plan) (ADB, 2010) 에따르면, 2010년지역의최고전력수요는 83GW이었으나, 2025년에는 277GW로 3배가량증가할것으로전망되는데, 특히태국, 베트남, 중국 ( 윈난성 ) 의전력수요는 GMS 전체전력수요의 96% 를차지할것으로예상되고있다. 메콩지역의후발주자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의전력수요와실질사용량도과거대비증가할터이지만장기적인측면에서메콩지역의에너지생산과소비의지역내불균등은현재보다심화될것이다. 이처럼 ASEAN의에너지수요증가추세는회원국내에서불균등하게진행중이다. 2013년 ASEAN 전체에너지사용량의약 58% 가인도네시아와태국두국가에서발생했다 (Enerdata, 2014). 인구 2억 6천만명의인도네시아다음으로에너지사용량이많은태국의경우, 인구는역내 4위에해당하는약 6천만명이지만에너지사용량은경제성장과더불어꾸준히증가추세를보이고있다. 특히대륙부동남아시아 (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이상 5국 ) 만을놓고보았을때태국의에너지사용량은지역전체의약 60% 를차지하는수준이다. 3. 최근태국의전력 / 에너지계획의특징 : PDP 2015 를중심으로 1) 태국의전력 / 에너지체제의현재 165) 1995 년 GMS 지역에서는지역전력포럼 (EPF, subregional Electric Power Forum) 이설립되었는데, 이기구는역내전력정책과시설계획을다루는정부간기구의역할을수행한다. 이처럼지역차원의전력거래와전력망통합은 GMS 프로그램의출범당시부터핵심과제로여겨져왔다 년에는 GMS 정상회담에서정부간협력 (IGA) 에대한서명이이루어졌는데, 협력을구체적으로이행하기위한후속조치로지역전력조정위원회 (RPTCC) 의설립이합의되었다. GMS 국가들은총 4 단계의점진적과정으로역내전력시장통합을추진하기로합의했다 년합의된지역전력거래 1 단계에서는양자간전력거래를위한전력구매협약주체들 ( 민간포함 ) 을발굴하는과정이강조되었으며, 2008 년부터개시된지역전력거래 2 단계에서는 GMS 국경간전력거래의이행을위한로드맵이제시되었다. 367

371 태국은동남아시아에서두번째로큰경제규모를가지고있으며인구는역내네번째에달한다 (ADB, 2016). 태국의 1차에너지총사용량은 2003년에서 2013년까지매년 4.17% 씩증가하여 10년동안총사용량이 50% 이상증가하였다. 2015년에조사된태국의 1차에너지총사용량은약 135,496 ktoe으로지금까지사용량중에가장높은수치를기록하였다 (EPPO, 2015). 주요에너지원은석유, 석탄, 천연가스, 바이오연료, 폐기물등이며천연가스가 36.3%, 바이오연료와폐기물이 31.5%, 석유가 24.8% 그리고석탄이 6.5% 의점유율을차지하고있다 (IEA, 2016). 전력부문을살펴보면 2014년말기준으로전체발전량이 180,945GWh이며 1990년부터급격한성장세를보이다가최근 10년간에는비교적완만하게증가하고있는추세이다 (MOE, 2015; IEA, 2016). 연료유형별발전량비중은천연가스와석탄, 석유를포함한화석연료가 88% 로압도적우세이며, 다음이라오스로부터수입하는수력발전 7%, 국내수력발전 3% 그리고마지막으로재생에너지를포함한기타가 2% 수준이다 (EPPO, 2015). 2014년태국의전력설비현황은태국전력공사 (EGAT) 가 15,482MW로전체태국전력설비의약 45% 를담당하며그중복합발전이 54%, 화력발전이 24%, 수력발전이 22% 그리고재생에너지가 0.03% 를차지하고있다. 그외나머지 55% 는민간발전소와해외거래를통해조달하고있다. 2) 국가전력계획의특징 : PDP 2015 를중심으로 태국은 2014년말, ASEAN 경제공동체 (ASEAN Economic Community, AEC) 에서의공동논의를기반으로새로운에너지체제의도약을위한정책구상에들어갔고, 2015년 6월 30일에내각승인을통해전력개발계획 (Power Development Plan ) 을발표한다 (PDP, 2015). 2015년태국의에너지부 (Ministry of Energy) 는 통합에너지청사진 (Thailand Integrated Energy Blueprint ) 을발표한다. 통합에너지청사진 ( ) 은태국의정책방향의가장근간이되는제11차국가경제및사회발전계획 (11th National Economic & Social Development Plan) 을기반으로작성되었으며 2015년부터 2036년까지에너지부문의장기적인목표구상과달성을제시하고있다 (AEDP, 2015). 통합에너지청사진 ( ) 은다시 5개의에너지마스터플랜으로나누어져각부문별세부적인정책방향과목표가제시되어있다. 5개의에너지마스터플랜은전력개발계획 (Power Development Plan, PDP), 대체에너지개발계획 (Alternative Energy Development Plan, AEDP), 에너 368

372 지효율계획 (Energy Efficiency Plan, EEP), 석유관리계획 (Petroleum Management Plan), 천연가스공급계획 (Natural Gas Supply Plan) 이다. 그중에서전력개발계획 (PDP2015) 은 2015년부터 2036년까지 21년간태국의에너지정책의방향을잡고있는가장핵심적인부분이라고할수있으며 5개마스터플랜을종합하는계획이라할수있다. 전력개발계획 (PDP2015) 은크게세측면에중점을두고있다. 첫번째는에너지안보측면에서특정연료에대한의존성을줄이고연료의다양화를통해전력수요를충당하는것이다. 두번째는경제적인측면에서장기적으로경쟁력을확보하기위해적절한발전비용을유지하고에너지효율화를진행하는것이다. 세번째는생태계측면에서전력발전과정의이산화탄소배출을줄임으로써환경과사회에미치는영향을최소화하는것이다. 이러한측면에서전력개발계획은 2036년까지단계적으로현재 60% 에달하는천연가스의존율을낮추고, 청정석탄과재생에너지그리고주변국으로부터의수입 ( 수력발전 ) 비율을높이는것을목표로삼고있다 (PDP, 2015). 태국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의하면태국의전력수요는 2014년에서 2036 년까지매년 2.67% 씩증가할것으로예상하고있다. 따라서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이러한중장기적전력수요증가에대응하기위해크게몇가지의접근방법을제시하고있다. 가장핵심적인내용은연료의다양화를통해하나의연료원에대한의존율을낮추겠다는내용이다. 우선현재절대적인천연가스발전비중을낮추는대신에청정화석연료기술도입을통해청정석탄발전시설을확대할것으로보인다. 또한주변국으로부터의에너지수입비중을 20% 로제한하고장차재생에너지발전비중을증가시켜에너지안보에대응하겠다는취지이다. 마지막으로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안정적인전력수요의해답으로기대하는것이원자력발전이다. 태국정부가원자력발전도입하려는이유는전력생산에대부분을차지하고있는천연가스의국내매장량이한계에도달했으며, 재생에너지를포함한대체에너지의발전속도가더디거나아직까지비용대비효율성이낮기때문인것으로파악된다. 이외에도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안정적인전력공급을위해피크전력수요의 15% 이상을예비마진으로확보하는것을목표로하고있으며, 민간구매방식도대규모 IPP(Independent Power Producer) 에서 VSPP(Very Small Power Producer) 까지활성화시킴으로서재생에너지부문의활성화하겠다는목표도제시하고있다. 4. 태국전력 / 에너지체제의지속가능성 : 에너지트릴레마관점에서의비판적고찰 369

373 에너지트릴레마 (Energy Trilemma) 는 2013년세계에너지총회 (World Energy Congress, WEC) 에서처음으로언급되었다. 모든국가는에너지정책을계획하고실행하는과정에서에너지안보 (Energy Security), 에너지균형 (Energy Equity), 환경적지속가능성 (Environmental sustainability) 의상충을방지하기위해이세분야를조화롭고균형있게고려할필요가있다. 즉 에너지트릴레마의균형 (Balancing the Energy Trilemma) 을확보함으로써지속가능한에너지체제로의전환과도약의과제가제기된것이다 (WEC, 2013). 2015년유엔기후변화협약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UNFCCC) 제21차당사국회의 (COP21) 에서파리협정 (Paris Agreement) 이공식채택됨에따라이전과달리개발도상국도온실가스로인한기후변화대응과화석연료고갈에대한책임을갖게되었으며, 따라서이에부합하는지속가능한에너지체제로의계획수정을요구받고있다. 전세계에너지수요측면에서태국이차지하는비중은높다고볼수없지만, 메콩지역으로국한할경우최대의에너지소비국이면서, 공급위주의과잉생산과잉소비의경향을강하게보이고있다. 지난 2015년세계에너지협의회 (WEC) 에서발간한 2015 에너지트릴레마지수 (2015 Energy Trilemma Index) 에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130개국가의에너지트릴레마지수와순위가제시되어있다. 166) 에너지트릴레마지수에따라 3년간의종합순위를분석한결과태국은하위권인 89위에랭크되었다. 보다세부적으로, 태국은가격과전력망으로대표되는에너지형평성측면에서는 63위로비교적평균에속하였다. 전기요금과휘발유가격이저렴한것이주요했다. 반면에에너지수입과관련되는에너지안보측면과탄소배출, 재생에너지와관련되는환경적지속가능성측면에서 100위권으로최하위에속하였다 (WEC, 2015). 2016년에너지트릴레마지수에따르면에너지안보와환경적지속가능성측면이한단계씩개선되어 CBC로종합순위가 76위까지상승하였다 (WEC, 2016). 아래의 < 그림 2> 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태국의에너지트릴레마지수와순위를보여준다. 166) 에너지트릴레마지수는 75% 의에너지현황 (Energy Performance) 과 25% 의배경상황 (Contextual Performance) 점수를합산하여도출된다. 에너지현황에서는에너지안보, 에너지형평성, 환경적지속가능성측면을다루며, 각각의측면에대한점수는다양한지표를통해계산된다. 에너지안보는에너지사용량과소비량, 에너지원의다양정도, 에너지수입 수출량등의지표를통해확인한다. 에너지형평성은접근성에기초한전기의가격및품질등을통해확인하며, 환경적지속가능성은 CO 2 배출량, 공기및수질오염정도, 전력발전원별 CO 2 배출량등을통해산정한다. 배경상황도마찬가지로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측면의각각지표를통해합산한다 (WEC, 2015). 370

374 < 그림 2> 태국에너지트릴레마지수 ( ) ( 출처 : WEC.(2015) Energy Trilemma Index.) 에너지트릴레마차원에서태국의전력 / 에너지체제를보다구체적으로평가 해본결과는다음과같다. 1) 에너지안보측면 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현재의천연가스에대한높은의존율을낮추고연료의다양화를통해증가하는전력수요에대응하겠다고명시하고있다. 현재전력생산체제내에서천연가스에대한의존율이너무높다는점 ( 약 66%) 과자국내천연가스매장량이 2020년이되면한계에다다르는점이주요고래대상이다 (Peter Janssen, 2015). 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다른발전원에대한투자를목표하고있다. 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따르면 2036년까지전력생산에있어서천연가스의비중을 30-40% 까지낮추는대신에해외로부터수입하는수력발전비중과재생에너지의비중을 40% 까지끌어올리는방식으로이에대처한다고명시하고있다. 단순히인접국에서생산된수력기반전력을수입하는것을넘어그개발과정에직접참여하고있다는점에서태국의이러한시도는큰틀에서에너지안보를지키는것으로주장되고있다 ( 자주개발논리 ). 그러나이러한방식이과연지속가능한가에대해서는논란의여지가있다. 2) 에너지형평성측면 에너지트릴레마지수중에서에너지형평성측면은태국이세부문중가장 371

375 강점을보이는부문이다. 태국이특히에너지형평성측면에서높은점수를받은근거는저렴한전기요금과인접국가에비해상대적으로높은전력망구축과전기보급률덕분이다 (WEC, 2015). 참고로태국의전기보급률은동남아시아에서말레이시아다음으로가장높은수준이다 (KITA, 2014). 그러나지역적으로살펴보면수도방콕을포함하는중부와북부의전기보급률은높은반면, 동북부와남부는여전히전력공급에차질을빚고있다 (IEA, 2016). 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동북부와남부에안정적인전력공급을위해발전소추가건설-20기의천연가스발전소 (17,728MW), 9기의청정석탄화력발전소 (7,390MW)-을제시하고있다. 문제는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명시한바와같이태국의동북부와남부의전력난이사회적문제가되고있음에도신규건설발전소의대부분은여전히산업단지가몰려있는중부에치중하고있다는점이다. 다른한편, 전력난해소를위해남부에건설중인석탄화력발전소 167) 는환경문제로인한또다른형평성문제를야기하고있다 (Hiroshi, 2017). 현재건설중인 Krabi 석탄화력발전소의경우, 태국전력공사 (EGAT) 의계획단계에서부터지역주민들의반발과시위가이어져왔다. 여전히공급중심의계획이국가주도로이루어지고있으며, 계획과건설과정에서지역주민의생계위협에대한고려가부족하다는점에서형평성과환경적측면의한계를드러내고있다. 3) 환경적지속가능성측면 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기후변화를야기하는온실가스배출을감축하는방식으로에너지정책을구상할것임을확실하게명시함으로써, 국제사회의기후변화대응에동조함을보여주고있다. 태국의온실가스배출량은전세계배출량의약 0.84% 정도수준에불과하다 (Enerdata, 2014). 태국정부는앞서언급한바와같이기존의화석연료중심의발전원을수력발전을포함한재생에너지확충을통해지속가능한에너지체제로의전환을준비하겠다고발표했다. 화석연료중전력발전의대부분을차지하고있는천연가스발전의경우, 온실가스배출의문제에서는책임회피를할수있으나장기적으로봤을때화석연료고갈에대비하는차원에서도재생에너지증진은의미가있다고볼수있겠다. 또한청정석탄화력발전소를 20% 까지유지하겠다고목표했지만기술적측면에서아직실현가능성이높지않고현재의석탄화력발전소에서발생하는여 167) 년까지남부에건설하기로계획한발전소는총 3 기로 Krabi Coal-fired Power Plant(800MW), Thepa Coal-fired Power Plant unit 1(1000MW), Thepa Coal-fired Power Plant unit 2(1000MW) 이다. 372

376 러대기오염등에대한우려도여전하다. 따라서전력개발계획 (PDP2015) 에서는 이전의전력개발계획 (PDP2007) 과는다르게석탄화력발전의비중을줄이고재 생에너지를증진하려는정부의목표와방향을확연하게확인할수있다. < 그림 3> 에너지원별전력생산비중목표 ( ) ( 자료 : MoE.(2015). PDP2015.) 전력개발계획 (PDP2015) 의내용중대체에너지개발계획 (AEDP2015) 에는현재의재생에너지설비용량과 2036년에목표하고있는설비용량은아래의표에서보듯, 소수력발전, 바이오매스, 바이오가스, 에너지작물의비중이전체설비용량의절반에달한다. < 표 1> 재생에너지설비용량 ( ) 자료 : MOE.(2015). Alternative Energy Development Plan 특히바이오매스는현재도태국이주력하고있는재생에너지분야이며 2036 년에도태양광다음으로설비용량이증가할것으로예상하고있다. 태국에서사용하는바이오매스의원료는사탕수수, 팜, 카사바, 옥수수등이다. 대체에너지개발계획 (AEDP2015) 에서는에너지작물생산제한을해제하고바이오매스및에너지작물생산을획기적으로늘릴수있도록기업및개인사업자들의적극적인투자를이끌예정이다. 또한바이오매스와에너지작물을생산을장려하기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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