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한국상고사학회 대한문화재연구원일자 2015. 8. 28( 금 ) 2015 장소국립전주박물관강당주관국립전주박물관후원한국연구재단 후원고려문화재연구원 대한문화재연구원 성림문화재연구원 울산문화재연구원 전라문화유산연구원 중앙문화재연구원 중원문화재연구원 충청문화재연구원 한강문화재연구원 한빛문화재연구원 호남문화재연구원 이발표논문집은 2015년도정부재원 ( 교육부 ) 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발간되었음
주최한국상고사학회 대한문화재연구원주관국립전주박물관일자 2015. 8. 28( 금 ) 장소국립전주박물관강당후원한국연구재단
:: 대회일정 2015. 8. 28. 금 시간내용발표자 개회식사회 : 이종철 ( 상고사학회총무 ) 09:00~09:30 개회사 : 김승옥 ( 한국상고사학회장 ) 환영사 : 유병하 ( 국립전주박물관장 ) 축사 : 최성락 ( 한국고고학회장 ) 제1부 주제발표 사회 : 조대연 ( 전북대학교 ) 09:30~10:00 1. 구석기시대 성춘택 ( 경희대학교 ) 10:00~10:30 2. 신석기시대 이영덕 ( 호남문화재연구원 ) 10:30~11:00 3. 청동기 초기철기시대 이기성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 11:00~11:30 4. 원삼국시대 정인성 ( 영남대학교 ) 11:30~13:00 점 심 제2부 주제발표 사회 : 최흥선 ( 국립전주박물관 ) 13:00~13:30 5. 고구려 최종택 ( 고려대학교 ) 13:30~14:00 6. 백제김낙중 ( 전북대학교 ) 14:00~14:10 휴식 14:10~14:40 7. 신라 가야 김용성 ( 한빛문화재연구원 ) 김대욱 ( 영남대학교박물관 ) 14:40~15:10 8. 중근세 ( 통일신라이후 ) 홍보식 ( 복천박물관 ) 15:10~15:30 휴식및장내정리 15:30~18:00 종합토론 좌장 안승모 ( 원광대학교 ) 토론 강현숙 ( 동국대학교 ) 신숙정 ( 한강문화재연구원 ) 이희준 ( 경북대학교 )
:: 목차 주제발표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 성춘택 ( 경희대학교 ) 8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 이영덕 ( 호남문화재연구원 ) 38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이기성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 68 韓國考古學史에서의 原三國時代 정인성 ( 영남대학교 ) 94 고구려고고학연구사 최종택 ( 고려대학교 ) 118 백제고고학사 김낙중 ( 전북대학교 ) 148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김용성 ( 한빛문화재연구원 ) 김대욱 ( 영남대학교박물관 ) 188 중 근세고고학사 홍보식 ( 복천박물관 ) 214 토론 한국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고고학사토론문 신숙정 ( 한강문화재연구원 ) 242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 강현숙 ( 동국대학교 ) 252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와 중 근세고고학사 를읽고 이희준 ( 경북대학교 ) 26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주제발표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8-37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 성춘택 ( 경희대학교 ) 목차 Ⅰ. 머리말 Ⅱ. 학사를보는시각 Ⅲ. 구석기고고학의진전 1. 1950년대까지 2. 굴포리와석장리 3. 1980년대까지 Ⅳ. 1990 년대이후의구석기고고학 1. 지역별조사의진전 2. 북한의구석기고고학 Ⅴ. 구석기고고학의주제와과제 1. 연구주제 2. 자연과학분석 3. 석기연구 4. 편년과문화변화 5. 원석재연구 6. 동물뼈와예술품의문제 7. 고고학과 구석기학 Ⅵ. 맺음말
Ⅰ. 머리말 19세기북유럽에서는삼시대법이갖추어지고서유럽에서는절멸동물과석기를인지하면서구석기고고학이성립하였다 ( 트리거 2010). 이런과정을거쳐선사고고학은기록이없는인간의먼과거에대한학문으로서자리를잡았다. 이처럼구석기시대의기나긴문화진화의과정을연구하는일은고고학이학문으로성장하는데중요한역할을하였으며, 20세기후반과정고고학과민족지고고학의발달에서도그역할이이어졌다. 한국고고학의성장에구석기고고학이어떠한역할을담당했는지는아직제대로논의된바없으며, 한국에서구석기고고학은다른시대의고고학과유기적인피드백관계가부족한것도사실이다. 고고학사상구석기시대는늘학문의이론과방법론의발달에중요한기여를해왔던것을생각하면아쉬운일이다. 학사를쓰는일은단순히어떤시간과장소에서어떤발굴이이루어졌는지를확인하고나열하는데머물지않는다. 어떤학문의역사란과거의학문적인행위를되짚어봄으로써현재의지평을확인하고바람직한방향을모색하는일이다. 철학자이자역사가, 그리고고고학자인콜링우드 (R. G. Collingwood, 1889-1943) 는현재의역사및고고학설명과해석은늘사상의흐름과밀접하게연관되어있다고하였다 ( 트리거 2010). 오늘의학문적지평을확인하고검토하기위해서는학사를돌이켜봐야하는것이다. II. 학사를보는시각 학문의역사를기술하는방법은하나일수없다. 먼저중요한사건이나발굴을나열하는방법을생각할수있다. 구석기고고학의경우공주석장리, 연천전곡리와같은중요한유적의조사를기준으로서술할수있을것이다. 쉽고단순하지만, 이러한서술에서먼과거의조사와연구는흔히과거의어려웠던사정속에서개척적인연구자의능력이나업적을강조한다. 해방이후처음으로이루어진석장리구석기유적발굴이불과 50여년전의일이다. 아직많은사람이추억으로기억할만한과거라하겠다. 다시말해중요한사건이나유적조사, 인물만을강조하면 학사 라기보다는자칫어려웠지만좋았던시절을추억하는식의과거회상으로끝날수있고, 이런식의학사서술이이미나와있다 ( 한국고고학 60년 ).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9
학사를서술하는일은과거에이루어진조사와연구를추억하거나높이기위함은아니다. 거꾸로현재의연구가모든면에서과거의방식보다발전하였음을확인하기위함도아니다. 고든윌리와제르미새블로프 (Willey and Sabloff 1993) 는미국고고학사를쓰면서사변기 (Speculative Period, 1492-1840), 분류-기술기 (Classificatory-Descriptive Period, 1840-1914), 문화사편년기 (Classificatory-Historical Period concerning with chronology, 1914-1940), 문화사기능기 (Classificatory-Historical Period concerning with Context and Function, 1940-1960), 현대기 (Modern Period, 1960-1992) 라는용어를사용한바있다. 이처럼학사를고고학편년표와도같이시간대별로나누어각시간대를맹아기, 성장기와같은이름을붙여고고학의발전을요약하는것이학사를서술하는일반적인방식이고, 우리에게친숙하기도하며, 일목요연함도있는것이사실이다 ( 한국선사고고학사 (1992) 참조 ). 그러나이런방법역시현재고고학을하는방식은먼과거에비해발전되었다는가정을깔고있다. 그렇게발전해왔다면학사를개괄하면서늘자족해야할것이지만, 학사의진전은그렇게단선적이지않다. 학사를쓰는일은현재고고학의지평이어떤과정을거쳐형성되어왔는지를되짚어보고, 반성과함께앞으로방향을모색하는일이다. 브루스트리거 ([ 성춘택역 ] 2010) 는토마스쿤의패러다임개념을통해서고고학사를세계적인시각에서논의한바있다. 패러다임이란특정시기연구자들이공유하는사고와행동방식, 학문적기준과방법을말한다. 동시기연구자들은자료를관찰하고, 수집하며, 분류하고, 학문을하는방식과목적을공유하면서학문공동체를이룬다. 새로운패러다임은기존의관습에문제를제기하고대안을제시하고, 이것이학문공동체, 곧학계에수용되면서학문이변화한다. 패러다임의시각에서고고학은기존의관행적인접근에문제를제기하고새로운이론과방법론을모색했던흐름속에서변모하여왔다고할수있다. 고고학사에서는 19세기학문으로서고고학의성립을거쳐 20세기전반문화사고고학 (Culture historical archaeology), 20세기중후반과정고고학 (Processual archaeology) 과탈과정고고학 (Postprocessual archaeology) 의성장을거쳐최근에는실용적종합 (Practical synthesis) 의흐름을볼수있다 ( 트리거 2010). 그런데패러다임의전개는결코단선적이지않다. 1990년대후반이후두드러지고있는이론적인성향에대한지나친논쟁보다는실용적인대안을찾고있다. 가령문화사고고학의방법이사라진것도아니며, 심지어재무장한문화사고고학 (retooled culture history) 라는개념을사용하기도한다 ( 오브라이언 라이맨 2009). 실제여러접근방식, 곧패러다임이경쟁하면서고고학의지평을넓히고있는것이다. 그러나한국고고학사를서술하면서이와같은패러다임식접근을그대로적용할수있을수는없을것같다. 한국고고학의전개가반드시미국과유럽중심의학문동향과같은궤적을그릴필요도없다. 다만고고학사상패러다임의성장과흐름역시무시할수는없다. 고고학이란학문의관심 1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이문화사편년을중심으로하는접근과이에만족하지못하고과거사회와문화의기능적이고과정적인측면에관심을가지는흐름, 그리고그에대한비판과통합의움직임과같은주제를중용하여고고학을하는방식을요약하는것역시좋은시도일것이다. 현실적으로특정시기의조사와연구는그자체로고립된과거의발견이아니라그시대의사회정치, 그리고학문적인배경아래에서이해하는것이바람직하다. 물적유존물로서고고자료의발견과이해는그자체로사회의맥락과떨어져서이루어지는것이아니다. 뗀석기와같은자료를인식하고판단하는체계가없다면구석기시대유물을연구할수없는것이다. 나아가구석기자료가없었다고해서구석기시대연구가없는것도아니다. 이처럼특정유적의발굴과조사과정에치우치기보다과거고고학행위를그사회및학문적맥락에서이해하려는노력이필요하다. 아무리선의의조사라할지라도당대의사회적인배경에서가능했던것이며, 학문적인이해와패러다임에따라잘못된견해를제시하거나한계가뚜렷한해석을내릴수도있다. 이같은비판적시각이야말로학사를통해현재우리의고고학지평을되짚으면서미래를계획하는길이다. 다만현실적으로한국고고학, 그리고구석기고고학을학문적시각에대한논쟁을통해정리하는것은어려운일이다. 시간대별접근과함께주제별접근을혼합하여지난 100년에가까운구석기고고학의역사를되짚고평가하는것이현실적일것이다. III. 구석기고고학의진전 한국구석기고고학에대해서는이미학사개괄이이루어졌으며 ( 배기동 1983b 1993 1996; 이선복 1988 2002; 정영화 1976 1986 2002), 초창기연구에대한회고와연구사역시출간된바있다 ( 손보기 2002 2009; 최복규 2013; 한창균 2015). 1. 1950 년대까지 19 세기유럽에서는절멸동물과사람이만든주먹도끼가반출하면서구석기시대에대한관심 과연구가시작되었다. 전통시대한국에서도뇌부와같은석기에대한관심과기술이있지만 ( 이선복 2001), 모두간석기 ( 마제석기 ) 이고구석기시대뗀석기에대한언급은찾을수없다. 지식인또는학계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11
에서구석기시대에대한관심은 20세기에들어서야보인다. 주지하듯이 1962년북한의웅기굴포리, 그리고 1964년남한의공주석장리에서 최초 구석기유적발굴이이루어졌다고생각되고있다. 그런데이때의조사는그자체로불쑥등장한사건일수는없다. 전술하였듯이어떤학사적으로중요한유적의발견과발굴은사회적인배경과학문적인맥락을통해이해하는것이가장바람직하다. 그어떤업적도무에서유를창조하듯이이루어질수는없다. 최근한창균 (2014) 의연구에서잘드러나듯이, 구석기자료를찾기위한노력은이미 1920년대부터, 그리고한국에서선사문화에대한관심은그이전부터있었다. 이미 1895년영국의선교사골랜드 (W. Goland) 는한국을여행하면서고인돌을스케치하고돌화살촉을수습하여도면을발표하였지만, 구석기유적이나유물을찾으려하지는않았던것같다. 그런데 1920년대가되면상당수지식인들은구석기시대와인류의진화에대한인식을갖게되고, 주변동아시아에서도관련조사와연구가시작된다. 중국의경우 1920년대선교사와지질학자의활동으로다수의유적이알려졌다. 감숙성에서프랑스의선교사리상 (E. Licen) 이석기 7점을채집하였고, 1923년선교사이자지질학자였던드샤르뎅 (P. Teilhard de Chardin) 은내몽고지역을조사하여살라우수 ( 薩拉烏蘇, Salawusu) 와수이둥거우 ( 水洞溝 ) 유적을찾았다 (Bar-Yosef and Wang 2012). 1921년부터스웨덴의지질학자안데르손 (J. G. Andersson) 등은저우커우뎬 ( 周口店 ) 을조사하기시작하였고, 이후페이원중 ( 裵文中 ) 을비롯한중국학자들도발굴에참여하여 1929년 12월북경원인화석을발견하는것이다. 일본은 1931년 9.18 사변을일으키고, 이듬해만주국을세운뒤 1933년부터만몽학술조사를실시한다. 도쿠나가와나오라등은하얼빈근처에서이미알려진구샹툰 ( 顧鄕屯 ) 유적을조사하여털코끼리-털코뿔소등많은동물화석과석기를수습하였다. 이보다더고위도인바이칼호근처의말타 (Mal ta) 유적에서는이미 1927년 ( 또는 1928년 ) 게라시모프 (M. M. Gerasimov) 가발굴조사로유물을수습하였고, 1936년오클라드니코프 (A. P. Okladnidkov) 가부레트 (Buret) 유적을조사하였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이처럼 1920-30년대이미중국과시베리아의여러유적이조사된맥락에서동관진유적조사를이해할수있다. 1932년동관진에서는철도공사와중에코뿔소뼈가발견되었으며, 1933-34년도쿠나가시게야수 ( 德永重康 1934) 가이끄는제1차만몽학술조사 ( 顧鄕屯유적조사 ) 에서들소와코뿔소뼈수습하였고, 근처연대봉까지조사하여지질학잡지에보고한다 ( 森爲三 1935). 다음해 1935년발굴조사가이루어졌으며 ( 德永重康 森爲三, 1939), 나오라노부오 ( 直良信夫 1940) 는구석기유적으로학계에보고하기에이른다. 이에따르면유적의가장위층에서는신석기유물이출토되었으며, 그아래 2( 황토층 ), 3층에서구석기시대동물뼈와유물이, 2층에서는하이에나, 털코끼리, 코뿔소, 들소, 말뼈와함께흑요석제석 1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기 2점, 골각기 ( 재검토필요 ) 가출토되었다고한다. 흑요석제석기는 2차가공이없는격지조각으로판단된다. 신석기시대층에서흘러내렸을가능성도제기되지만 ( 장용준 2010), 2층에서출토되었다는원보고를신뢰할수밖에없다. 위에서술하였듯이이미 1920-30년대동아시아에서상당수유적이조사되었고동관진출토유물역시구석기시대자료로서보고하고이해되었다. 다만, 한반도에서집중적인고고학조사를벌였던우메하라 ( 梅原末治 ), 후지다 ( 藤田亮策 ) 등일본관학자들은이같은조사를애써무시하였던것으로보인다 ( 배기동 1992: 13). 이와더불어 1930년대에한국에서활동하였던요코야마쇼사부로 ( 橫山將三郞 ) 는파주문산에서찍개와몸돌같은규암으로만든뗀석기유물을수습하였고, 현재국립중앙박물관에 橫山資料 라이름하여보관되어있다 ( 이선복 1989; 장용준 2010). 이는물론일본학자들의조사와성과이지만, 당시일제강점기우리나라의지식인사이에도구석기시대유적이나유물의존재에대해서는상당히공감대가있었다. 한창균 (2014) 에따르면, 1920년대부터한국의지식인사이에서도구석기시대 ( 또는고석기시대 ) 라는개념이쓰이고인류진화에대한인식이자리잡았다고한다. 특히한흥수의경우구석기유적의존재가능성을확신하였으며, 실제황해도금천에있는천양굴을시험삼아파보기도하였지만, 유물은찾지못했다고한다 ( 한창균 2014). 한흥수는고인돌과패총과같은석기시대관련자료에대해논문을쓰기도하였고, 이후유럽으로가서빈대학민족학연구소에서수학하면서도유호와교류하였다 ( 전경수 2015). 1940년스위스에서박사학위를수여하였고프라하에서활동한뒤도유호와인류의선사시대에대한해석을두고논쟁 ( 이선복 1992; 한창균 2013) 을벌이기도했으며, 결국적대적인논쟁속에서실각했다고한다 ( 전경수 2015). 어쨌든일제강점기학자와지식인들은구석기자료의존재에대해확신하고실제조사를벌였으며, 어느정도성과도거두었던것이다. 비록실제조사는일인학자들이주도하였지만, 당시주변동아시아에서여러유적이알려진상황에서한반도에서구석기시대유적의존재가알려지는것은시간문제로생각되었을지도모른다. 이런구석기시대에대한관심은북한에서는한흥수가실각하고, 도유호가고고학을주도하였지만 ( 이광린 1990; 이선복 1992; 한창균 1990 2013), 남한의경우남북분단과한국전쟁등의어수선한상황에서학계에이어지지못한것으로보인다. 그렇지만, 1950년대후반부터다시구석기시대에대한관심이시작된다. 1957년펜실베니아대학의형질인류학교수칼튼쿤 (Carleton Coon) 이아시아각지를여행하는과정에서한국을방문하였는데, 김정학이안내하여단양의북하리에서석회암동굴을시굴조사하였다고한다 ( 손보기 1993: 16). 조사에서는선사시대유물이나오기는하였지만, 구석기유물을수습하지는못하였다. 이를바탕으로김정학 (1958) 은한국에서구석기시대유적의존재가능성을검토하는글을발표하기에이른다.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13
2. 굴포리와석장리 이처럼일제강점기를거쳐 1950년에이르기까지한국의지식인과연구자사이에는구석기시대유적의존재에대해확신과적극적인조사도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전반굴포리와석장리에서이루어진 최초 조사는시간의흐름에따른필연적인것이었으며, 오히려늦은감이있을정도이다. 두유적조사는어느날갑자기나타난것이아니며, 그렇기에발굴과함께당시학계에서큰논란없이받아들여질수있었던것이다. 다만이제두유적조사를통해공식적으로손에잡히는자료를얻었으며, 구석기고고학은시작되었던것이다. 1 굴포리유적조사 1961년함북화대군장덕리에서는털코끼리화석이이탄층에서발견되어주목을받았다 ( 김용남 1962). 석기가출토되지않은순수동물화석유적이었지만, 구석기시대의인류가남긴유적이존재할가능성을높여주었다. 1962년웅기서포항의조개더미를발굴하는과정에서신석기층보다아래에서문화층이발견되고이듬해부터본격적인조사가이루어져학계에보고되었다 ( 김용간 서국태 1962; 도유호 1963 1964; 도유호 김용남 1964). 발굴자는굴포문화라명명하고 1기와 2기로구분하였다. 아래의 1기층에서는석기제작에이용된분암괴와맥석영제석기들이출토되었는데, 몸돌과찍개류석기가많다고한다. 2기층에서는대리석과각혈암 ( 角頁巖 ), 맥석영으로만들어진석기가출토되었으며, 일부는눌러떼기기법으로만들어졌다고한다. 굴포리에서서쪽으로 5km 정도떨어져있는부포리덕산에서도 2기층석기와유사한석기들이출토되었다. 북한의학자들은굴포 1기층의경우대략 10만년전, 2기층은 3-4만년전이라는연대를제시하고있다 ( 김용간 서국태 1972). 석장리유적조사 1963 년부산동삼동유적을조사하던미국고고학자모어와샘플은금강일대를조사하면서석 장리에서뗀석기 ( 타제석기 ) 를찾는다. 같은해미국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돌아와연세대학교에 1 1960년대초고고학의사회정치적인배경으로서잘언급되지않는사실이하나있다. 1960년 4월혁명으로등장한제2공화국의대통령이었던윤보선은에딘버러대학에서고고학을전공하여 1930년석사학위를받았는데, 고고학을전공하게된것은오직한인간으로서 인간의도리를깨쳐주는학문은, 정치학이나신학보다는순수과학 ( 윤보선 1967: 32-3) 이었기때문이었다고한다. 귀국후서울시장과장관을거쳐정치에투신하였고, 대통령에취임한뒤에도문화재보존에힘써영암내동리고분발굴에도도움을주었다고한다 ( 김원용 1987: 20). 그과정어디에도 1961년서울대학교에고고인류학과설치에관여했다는기록은찾을수없지만, 넓은배경에서상당히호의적인상황을짐작할수도있다. 1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자리잡은손보기 (2002) 가주도하여이듬해 11월부터발굴조사가시작되어, 그뒤 10년동안거의해마다이루어졌다. 1964년첫조사에는서울대학교의김원용이 지도차 20여일이나참여하였다는사실 ( 김원용 1987: 24) 은석장리발굴이그만큼학계의관심을모았음을비추어준다. 물론연구초창기이기때문에어려움과불신이없지는않았지만, 이처럼학계의관심이컸다는사실은일제강점기이후구석기시대유적의존재에대해지속적인관심과조사가있었기때문일것이다. 다만석장리유적조사를통해한국고고학은이제실제손으로만질수있는구석기자료를갖게되었으며, 구석기고고학이본격적으로출발하였다고할수있다. 공주석장리발굴은 1960년대부터많은유물이출토되면서집중적으로이루어졌다. 개척적인조사, 석기이름에대한한글화작업, 1969년구석기시대유적으로서는최초로방사성탄소연대측정 (30,690±3000 BP) 등초창기연구로서높은평가를받을것이다. 발굴자는이어진조사를통해모두 27개층을확인하고, 유물이나오는 문화층 역시 12개를설정하였다. 세계에서드문전기, 중기, 후기구석기층의문화가이어져있고, 중석기시대의문화층이찾아졌다 고했지만 ( 손보기 1993: 16), 야외유적에서그토록많은층에서유물이이어져나올수있는지에대해서는회의적인시각이많다 ( 배기동 1992; 정영화 1986, 2002). 특히후기구석기이전의층에서출토되었다고하는석기들역시대부분인공성이결여되었기때문에재고가필요하다 ( 성춘택 2006c; 장용준 2004). 전기구석기시대나 45만년전이라는연대 ( 손보기 1988) 는무리한주장이며, 과학적인근거가없이제시된것이다. 또한이른바 집자리 와예술품이나머리털같은것역시받아들여지지않고있다 ( 배기동 1992; 성춘택 2015). 석장리조사는인공의가능성이있는모든자료를수습하고, 될수있는대로세부적으로층을구분하는등구석기시대유적에대한세밀한발굴의시작일것이다. 세밀한시각과연구가필요하기도하지만, 유물을부엌용, 사냥용등으로나누는것과같이지나치게미시적인분류는사실과거리가멀어질뿐이다 ( 배기동 1992). 학사적으로석장리유적은남한에서처음으로발굴된구석기유적을넘어서연세대학교를중심으로구석기고고학연구자를다수배출하였을뿐만아니라현재도계속되는연구전통으로자리잡았다. 유적발굴과보고, 그리고특정유적의특정유물형식에치중하는틀은지금도지속되고있어, 한국구석기고고학이갖고있는강점뿐아니라많은약점의유산도남겼다고할수있다. 3. 1980 년대까지 공주석장리에서멀지않은마암리동굴에서도뗀석기가수습되었다는보고가있었다 ( 김원용 1967). 다만보고문에제시된유물대부분에서인공의타격흔적을확인하기어렵다. 서울면목동유적역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15
시마찬가지다. 맥석영을중심으로하는석기가수습되었다고하지만 ( 황용훈 1970), 실제사람이뗀석기는아닌것으로보인다. 북제주군의빌레못동굴에서도석기 150여점이수습되었다는보고가있었지만 ( 정영화 1974), 현무암으로만들어지고, 풍화가심한것들이라역시인공성을인정하기어렵다. 2 이처럼초창기한국구석기시대유적의조사에서는대부분유적에서석기의인공성여부에논란이있으며, 다수는더이상고고유적으로인정받지못하고있다. 교과서와논저에서아직도유적으로다루어지고있지만, 이제는고고자료가아니라초창기학사적인의미만있을뿐이다. 청원두루봉동굴에서는 1976년부터몇개동굴에서조사가이루어졌는데, 코뿔소와큰원숭이등다양한동물화석이알려졌다 ( 이융조 1981a b). 사멸종이포함된동물이비교적따뜻한시기의유적임은사실이지만 ( 이융조 1986), 문제는이곳에서나온석기가거의없는데다골기 ( 뼈연모 ) 라고보고된것에도회의적인시각이있어과연인간의점유가어느정도이루어졌는지의문이다. 이에대해서는이미동물뼈에대한계량적이고 ( 권학수 1998), 화석형성학 ( 화석환경학, taphonomy, 조태섭 2015) 적으로부정적인견해가제시된바있다. 이런부정적인기류를바꾼유적은 1978년연천전곡리유적발견이다. 주지하듯이동두천에근무하던미군병사가한탄강변을산책하던중이른바 아슐리안 형의주먹도끼를찾았고 (Bowen 1979), 이듬해서울대와경희대, 건국대, 영남대의합동발굴이이루어졌다 ( 김원용 정영화 1979; 김원용 배기동 1983; 정영화 1983; 최무장 1983; 황용훈 1983). 전곡리조사는한국구석기고고학에서획기적인일이었다. 유적도대규모였으며, 여러대학이연합조사를벌였고, 자연과학분석역시도입되어종합보고서에실렸으며, 영문학술지에서도실려국제적으로도명성을얻었던것이다 ( 박동원 1983; Yi and Clark 1983). 용암대지위에구석기퇴적층이두껍게형성된유적에서주먹도끼를비롯한다수의규암, 맥석영제석기가수습됨으로써임진한탄강유역에서남계리, 금파리, 장파리 ( 금파리 ), 주월리, 가월리를비롯한 30여지점에서유물이수습되었던것이다. 1990년대이후에는상류의철원장흥리, 포천화대리등지에서중요한후기구석기시대유적이확인되고조사되었다. 1983-84년충주댐수몰지구에서는수양개와창내, 금굴, 명오리등지에서여러지점에서다양한유물이조사되었다. 금굴에서는주먹도끼와같은비교적이른시기의유물이수습되었으며, 특히수양개에서는그동안알려지지않았던야외의석기제작소 (workshops) 가다수알려졌다. 수양개유적은규질셰일로만들어진 (1980년대에는제대로이해되지못하였지만 ) 잔몸돌 ( 세석핵 ) 과슴베찌르개등전형적인후기구석기시대유물이당시까지생각하지못했던규모로보존이양호한상태의많은유물이수습되었던것이다 ( 이융조 1983 1984). 2 아직도구석기유적으로기술되고있지만, 바로잡아야할것이다. 면목동수집품도글쓴이의관찰에서는인공성을찾을수없었다. 서울과제주에서분명한구석기유적이발굴된것은아주최근, 2010년들어고덕동과생수궤이다. 1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1980년대말에는전남주암댐수몰지구에서도금평, 곡천, 죽산등지다수의후기구석기시대유적이알려지고조사되었으며, 곡성옥과 ( 주산리와송전리 ) 와거창임불리, 화순대전에서도유물이수습되어조사되는등전국적으로후기구석기시대유적이알려지기시작하였다. 비슷한시기파로호퇴수지역상무룡리에서도흑요석제석기를비롯한다수의후기구석기시대유물이발굴조사되어수습되었다. 1990년정도까지조사된남한과북한의구석기시대유적과유물에대해서는박영철 (1992) 이종합하여개괄한바있다. IV. 1990 년대이후의구석기고고학 1. 지역별조사의진전 임진한탄강유역의용암대지로형성된하안단구와주암댐수몰지구에많은유적이있음이드러나면서특정지역에대한체계적인지표조사가이루어졌고, 유적의숫자는그만큼늘어났다. 특히 1990년대이후대규모개발사업에따라수많은유적이알려지고조사되었다. 구석기시대퇴적층은흔히강의하안단구에서확인되었으며, 산기슭이나구릉지대에도폭넓게분포하고있음이알려졌다. 특히발굴조사된유적의수는 2000년대이후더욱증가하여전국적으로 200지점을넘고있다. 경기 : 여전히임진한탄강유역에서가장많은유적이알려지고조사되었다. 비교적이른시기유적이분포하는하류에서는파주장산리와주월리, 가월리를비롯하여금파리, 원당리가발굴조사되었고, 횡산리, 은대리등이시굴조사되면서상당수의주먹도끼류석기와대형격지류가수습되었다. 상류에서는후기구석기시대유적이많이확인되고있는데, 철원장흥리를비롯하여최근포천중리 ( 아래심재, 늘거리, 문배뜰 ) 에서도많은흑요석유물이수습되었으며, 근처대회산리에서도돌날중심의유물군이알려졌다. 흑요석유물은의정부민락동에서도밀개와잔돌날등이발굴되었으며, 전곡리에서도수습된바있다. 또한양주광석리에서도나왔고, 최근하남미사지구에서도잔몸돌한점이수습되었다. 포천화대리에서는격지소재의슴베찌르개가출토되었고, 최근냉정리, 그리고용정지구에서도대규모의퇴적층과규암및맥석영중심의석기군이알려졌다. 남양주호평동에서는다수의흑요석유물과규질셰일계돌날과잔몸돌 ( 세석핵 ) 등거의만점정도의유물이출토되어후기구석기시대문화연구에귀중한자료가되었다. 주변지새울, 덕소, 그리고차산리, 창현리등지에서도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또한한강하류에서도최근파주상지석리와운정지구와동리, 동패리의많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17
은지점에서찍개와몸돌, 다각면원구, 주먹도끼류등규암과맥석영중심의유물이출토되었고, 흑요석제석기도수습된바있다. 고양일산신도시, 탄현동, 신원동, 덕이동에서도발굴조사가이루어져구석기시대유물이수습되었다. 한강남쪽의김포신곡리, 장기동, 풍곡리등지에서도발굴조사가이루어져주먹도끼나가로날도끼등석기가수습되었다. 또한서울고덕동, 암사동에서주먹도끼와몸돌등구석기시대유물이발굴조사되었으며, 하남미사지구에서도비교적넓은범위에서구석기유물이산재또는집중분포하는것이확인되었으며, 의왕포일동에서도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한강을거슬러올라가양평병산리, 도곡리, 여주연양리, 백석리에서도발굴조사가이루어져상당수유물이수습되었다. 경기남부에서는맥석영제석기군이중심이된유적이많이조사되었는데, 용인동백동, 평창리, 천리, 신갈동, 화성오산리, 안성개정리, 광주궁평리등을들수있으며, 광주삼리에서는규암, 맥석영유물과함께흑요석석기도수습되었다. 강원 : 최근강원도에서는수많은구석기유적이알려지고조사되었다. 강원도는면적이넓고산지가많으며, 강이굽이쳐흐르는강이많기때문에그만큼구석기퇴적층이많이보존되어있고, 또유적도알려지고발굴조사되고있다. 일찍이양구상무룡리와홍천하화계리에서흑요석제유물이수습되었으며, 최근인제부평리에서도흑요석제유물이다량출토되는등경기도와강원도등중부지방의후기구석기시대유적에서다수의흑요석유물이수습되었다. 2000년대이후철원상수리, 강산리, 춘천갈둔, 거두리, 서상리, 홍천하화계리백이, 돌터거리, 도둔, 사둔지, 내 외삼포리, 영월삼옥리, 후탄리뒷들, 옹정리, 피난굴, 평창기화리쌍굴, 횡성현천리등영서지방에서다수의구석기유적이조사되었다. 동해안에서는 1980년대이미강릉심곡리, 양양도화리등해안단구에서구석기유물이수습되고조사된바있다. 유적뿐만아니라 2000년이후에는고성원당리, 초도리, 속초청간리, 강릉초당동, 주수리, 안현동, 정동진리, 동해망상동, 기곡, 월소, 발한동, 구미동, 추암동, 평릉동등해안단구퇴적층에서도유적이알려지고상당수는시 발굴조사되었다. 특히기곡과월소에서는구석기시대최말기의화살촉이수습되어학계의주목을받고있다. 충청 : 공주석장리유적은 1990년대에도몇차례발굴조사되었으며, 현재박물관이건립되어있다. 대전에서도일찍이구즉동에서구석기유물이알려졌으며, 이후용호동, 용산동, 대정동, 노은동, 그리고둔산에서슴베찌르개와밀개, 잔석기를포함한후기구석기시대의다양한유물이발굴조사되었다. 아산과천안의두정동, 청당동, 수헐리, 우신리, 용곡동, 아산실옥동, 권곡동, 그리고홍성옥암리, 예산신가리, 부여나복리등지에서도맥석영을중심으로하는석기군이알려졌다. 청양대박리에서는흑요석제유물이수습되기도하였고, 보령관산리같은유적에서도상당수구석기시대유물이수습된바있다. 청주율량동에서는보존상태가양호한석기제작소가알려졌고, 주변신봉동에서도유물이수습되 1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었으며, 봉명동, 복대동, 대농, 사천동재너머들등후기구석기시대유적이집중적으로발굴되었다. 청원에서는동굴유적과함께노산리와용방, 소로리, 학소리등지에서다양한후기구석기시대중심의유물이수습되었다. 만수리에서는대규모의두꺼운퇴적층에서아마도이른시기부터비교적늦은후기구석기시대에이르기까지여러시기에걸친규암및맥석영석기중심의석기군이발굴조사되었다. 충주송암리에서는최근슴베찌르개를중심으로하는유물군이알려졌으며, 제천두학동중말, 계산리, 명오리, 진천송두리와장관리에서도구석기시대유적이발굴조사되었다. 또한최근단양하진리에서도근처의수양개와유사한석기제작소가집중적으로확인되었으며, 자갈돌에짧은선들이새겨진사례도알려졌다. 충주용탄동, 금릉동, 그리고최근송암리에서는후기구석기시대초의슴베찌르개가수습되었다. 동굴유적으로는제천점말동굴, 단양구낭굴에서다수의사슴뼈가수습되었으며, 상시바위그늘역시발굴조사되어동물뼈와사람머리뼈일부가출토되었다. 전라 : 호남지방은 1990년대이후가장많은유적이알려지고조사된지역이기도하다. 지표조사를통해임실군에서만 40여지점이알려질정도로많은유적이분포하고있음이알려졌으며, 만경강, 섬진강줄기를따라많은유적이분포하고있다. 군산내흥동에서는다수의맥석영유물이, 그리고전주송천동, 봉곡, 사근리, 장동, 완주갈산리, 진안진그늘과장수침곡리, 임실하가, 익산신막, 서두리등이후기구석기시대대표적인유적으로서규질셰일계다양한유물이수습되었다. 전라남도에서는일찍이순천우산리곡천, 덕산리죽산, 금평등주암댐수몰지구유적들이조사되었다. 영산강유역의나주에서도촌곡리, 당가, 장년리당하산, 장동리, 송월동, 상잉, 용호등많은유적이알려지고조사되었으며, 무안피서리, 고흥한동, 영광마전, 원당, 군동, 광주산월동, 치평동, 화순도산, 사창등에서유물이수습되고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곡성오지리, 주산리, 송전리, 순천죽내리, 월평, 외록골, 화순대전, 보성하죽, 장흥신북과같은유적이발굴조사되었다. 특히신북이나월평등의유적은대규모의유적으로규질셰일제잔돌날과몸돌을비롯하여수정제잔몸돌, 그리고간석기 ( 마제석기 ) 가수습되었다. 제주에서처음으로발굴된생수궤유적에서도다양한돌날유물이수습되었으며, 강정동에서도후기구석기유물이수습되었다. 경상 : 다른지역에비해상대적으로조사된유적의수가적다. 이는고고학조사가삼국시대나청동기시대에조사가집중된정도가지나치게높은탓이지다른지역에비해구석기시대유적의수가원래적었을가능성은없다. 그럴지라도이미 1980년대거창임불리에서잔석기가확인되었으며, 정장리를비롯하여진주내촌리와부산해운대중동, 좌동유적이조사되었고, 대구월성동에서는흑요석제잔돌날과몸돌유물이다량수습되었다. 밀양고례리에서는대형돌날과몸돌을중심으로하는후기구석기시대유물군이알려졌으며, 진주집현장흥리에서도규질셰일계후기구석기유물과간석기가수습되었다. 이밖에도안동마애리, 상주신상리, 산청옥산리, 울산옥현, 사천이금동에서도구석기유물이수습되고발굴조사되었다.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19
1990년대중반이후지금까지 20여년정도는비단구석기시대뿐아니라한국고고학에서자료의양적인성장이급격하게이루어졌던시기이다. 또한개발에따른구제발굴의일환으로크고작은유적들이알려져발굴되었다. 작은유적을물론전에보기힘들었던대규모유적이발굴되었던때이기도하다. 특정유적안에도몇개지점이있기도하며, 청동기시대와같이다른시기유적을조사하면서구석기퇴적층이알려지고뗀석기가몇점수습되는사례도있기때문에, 모든유적을개괄하여담는일이불가능할정도로유적의수역시비약적으로늘어났다. 그러나발굴된자료의양적인성장은질적인성장으로이어지고있는지돌아봐야한다. 진그늘, 신북, 용호동등몇몇중요한유적의발굴보고서가간행되지않고있고, 신속한문화재조사의측면만이강조되고학술적인분석이제대로이루어지지않기도하였다. 2. 북한의구석기고고학 북한에서굴포리와부포리에서시작된구석기유적의조사는 1966년 4월부터 1970년까지평양부근상원강언저리석회암동굴조사로이어졌다 ( 김신규 김교경 1974; 김용간 1984). 검은모루유적에서는다수의사멸종을포함하는동물뼈들이다량수습되었으며, 이와함께맥석영과석회암을사용한석기가발견되었다고한다. 주지하듯이 50-60만년전, 최근에는 100만년전까지한반도에서가장연대가올라가는유적으로서술되고있고 ( 장우진 2002), 실제로중기플라이스토세의동물상으로보인다. 그러나정작출토된석기의인공여부에대해서는회의적이다. 이후회령지경동에서도흑요석잔석기들이수습된바있다. 남한의경우단양과영월을중심으로한지역과청원, 제주등몇몇제한된지역에서만동굴이확인되고있지만, 북한에서는평안남도에서황해도에이르는넓은석회암지대에많은동굴이있고동물화석만나오는유적도있으며, 석기가반출되는유적도있다. 함경북도의굴포리와부포리, 장덕리등만이야외유적 ( 한데유적 ) 인데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이지역은아마도두만강이북의중국과마찬가지로퇴적층의성격상동물화석과같은유기물이잘보존되어있을가능성이높은것으로보인다. 1970년대초검은모루근처의청청암동굴에서도사멸종이다수포함된동물화석이수습되었다. 황해도해상동굴에서도유사한동물화석조합이알려졌다. 또한비슷한시기덕천승리산동굴에서다수의동물화석과함께인골이수습되었다. 북한에서는동물화석의사멸종의수와비율을검토하여편년의근거로삼는경우가많다. 가령검은모루동굴의경우사멸종이 63% 에이르러전기플라이스토세로추정되며, 랭정동굴에서는 54.5%, 대현동에서는 50.0% 이사멸종으로중기플라이스 2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토세말이나후기플라이스토세초로편년하고있다. 승리산동굴에서는 36.6%, 룡곡 1호동굴에서는 20.6%, 만달리아래층에서는 33.3% 의사멸종이확인되어후기플라이스토세초의유적으로생각된다는것이다. 후기플라이스토세말에해당하는만달리위층에서는 2종 (15.5%), 해상동굴 1종이사멸종이고, 철원저탄리에서는 12.5%, 해상동굴이나금평동굴에서는사멸종이확인되지않았다 ( 한창균 2011: 234). 이밖에도함남금야굴재덕, 용남리, 고원다천리범굴동굴에서도동물화석이수습되었다. 이같은유적에서는상당한인류화석이알려지고있다 ( 장우진외 2010). 가령대현동동굴에서나온머리뼈는고인단계의 력포사람 화석이, 덕천승리산동굴아래층에서나온인골을 덕천사람 이라부르며, 대체로 10만년전정도로편년하고있으며, 위층의화석은호모사피엔스로 승리산사람 이라불리고있다. 평양부근만달리에서는 1980년정도부터흑요석제잔몸돌등후기구석기시대유물이출토되었으며, 거의완전한인골역시수습되었다. 인골은성인남성으로판단되며, 만달사람 으로명명되었다 ( 김신규외 1985). 평양의용곡동굴에서도석기와동물뼈, 그리고인류화석 ( 룡곡사람 ) 이출토되었고, 화석은호모사피엔스이다. 다만북한에서는부정확한절대연대측정으로유적의연대를올려보고하였다. 황해도청파대동굴유적에서는석기와함께 황주사람 이라명명된성인남자화석이 4개체정도확인되었다고하며, 랭정동굴에서도성인남자윗머리뼈와아래턱뼈조각이확인되어이른시기신인단계라고한다. 덧붙여최근에는금평사람, 북창풍곡리동굴에서나온풍곡사람, 상원금천동굴의금천사람, 중리동굴의중리사람, 대흥리동굴의대흥사람등상당수의구석기시대인류화석이알려져있다 ( 전일권 김광남 2009). 앞으로적극적인조사여부에따라북경원인이나금우산인등과비교할만한시기의화석이나올수있을것이다. 최근북한에서는함경북도화대군 ( 석성리 ) 에서화산암속에서사람뼈몇개체를찾아 화대사람 이라명명하였는데, 용암분출시기가약 30만년전으로추정된다고하였다 ( 장우진외 2010). 도면이나사진자료는실려있지않지만, 이른시기고인 (archaic Homo sapiens) 단계의화석이라고한다. 신인단계사람들의직계선조라고하면서조선인이다른지역의인류와는달리아주오래전부터형성되어왔음을강조한다. 현재구석기시대자료에서남한과북한은많은차이가있다. 대다수가야외유적이고유물의거의전부가석기로만이루어진남한의자료와는달리북한에서는유적의대다수가동굴유적이고주로동물화석과인류화석이수습되었지만, 역으로석기는없거나수가적다. 청파대유적과같이 2,000 여점이수습되었다고하는사례를제외하고는대부분유적에서석기의수는 10점미만이거나많아야 30점정도인것이다. 또한만달리에서나온흑요석으로만든잔몸돌 ( 세석핵 ) 과유사한유물이보고된것은아직없는것같다. 또하나부기할것은북한고고학에서는열형광법, 우라늄계열법, 전자스핀공명법, 백문열법, 고지자기법등다양한연대측정법을사용하여유적의연대를측정하고발표하고있다. 한편으로과학적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21
인방법으로측정되었기때문에신뢰도가높을것으로생각될수도있지만, 경우에따라서는위측 정법에따른추정연대가현재우리의고고학적인해석과맞지않기도하다 ( 대체로너무이르다 ). 정작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같은가장일반적인방법은쓰이고있지않다. V. 구석기고고학의주제와과제 1. 연구주제 1999년에는구석기고고학자들이모여학술회의와함께 한국구석기학회 를결성하였다. 학회에서는 한국구석기학보 를 2000년부터연 2회발간하고있는데, 2015년현재 31호까지간행되고있다. 학술회의역시연례적으로열리고있으며, 국제적인학술교류도활발히진행되고있다. 10 년이넘은 수양개와그이웃들 학회를비롯하여, 2년에한번아시아구석기학회 (Asian Palaeolithic Association) 와함께중국과러시아, 일본연구자들과공동학술회의를개최하고있다. 가령 2014년 APA 학회에서는석장리유적발굴 50주년을기념하여 Variabilities in the East Asian Paleolithic: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라는주제로충남공주에서열려한국과러시아, 중국, 일본의많은학자가참여하였다. 그러나질적인성장은아직멀다. 학회에서발표되는많은내용이유적소개이다. 지금까지 한국구석기학보 에실린글역시유적소개가가장많고, 여기에해외연구동향이나자료소개, 학회참관등까지포함하면 70편으로서총 147편의거의 48% 를차지한다. 또한특정유적에서나온특정형식의유물에치중된글이나특정유적의퇴적물이나자연환경자료분석도 20편이나실려있다. 특정유적에대한발굴자료소개가논문이될수는없을것이다. 한유적이한학보에서로다른기관의발굴로중복하여소개되기도하며, 시굴조사개보까지도실리고있으니국내 1급전문학술지로서는내용이아쉽지않을수없다. 이에반해이론과방법론, 편년과기타해석적인논문의수는 48편정도인데, 이것은 한국고고학보 와같은다른고고학학술지보다현저히작은비중이다. 앞으로더분석적이고도종합적인, 더학술적으로심도있는글들이실려야할것이다. 분석논문역시내용에서는아쉬운경우가많은데, 가령한유적의특정형식의석기만을다룬사례도상당하여샘플수를고려할때구석기고고학의이슈에기여하고있는지회의적이다. 고고학의모든자료는특정시공간의물질문화의아주작은샘플에불과하기때문에될수있는한많은자료를확보하는 2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한국구석기학보 의논문주제별분류 논문수 유적소개, 특정지역자료소개 42 이론과방법론, 학사 20 퇴적물, 자연환경자료분석, 검토 12 유물분석 21 편년 ( 문화사 ) 9 유적, 유물기능 ( 과정주의 ) 7 특정유적의특정유물 8 학회참관, 예술품, 고인류, 기타자료소개 10 해외연구, 자료 18 노력이바람직하다. 나아가고고자료는문화행위와자연과정이라는유적형성과정의산물이다 (Schiffer 1972, 1987). 구석기유적은이동생활을하는소규모의수렵채집집단이남긴것이다. 따라서이와관련하여본거지와사냥캠프, 한정행위장소, 석재취득장소등다양한유적의종류에대해이해할필요가있다 (Binford 1981). 한국구석기고고학에서는, 예외도있지만 ( 박성진 2011; 성춘택 2009 2011; Seong 2008), 아직문화와행위적인측면에서유적의다양성과형성과정을고려하는노력이부족하다. 덧붙여유적의기능과함께유물의기능에대한연구도사용흔분석 (e.g., 김경진 2013; 최삼용 2005) 과함께폭넓은행위적맥락역시고려하여이루어져야할것이다. 2. 자연과학분석 구석기시대연구는초창기발굴에서부터자연과학분석을적극적으로도입하였다. 가령 1983년간행된전곡리유적보고서에는발굴조사보고뿐아니라고환경지형, 지질, 생물환경, 현무암연대측정과같은자연과학분석도실려있어유적에대한종합적인고찰로서손색이없다. 이것은고고학의영역을넓히는것으로긍정적인평가를받아야할것이다. 그러나수도없이이루어져온퇴적물분석과자연환경, 암석분석, 각종연대측정등이과연구석기고고학이알고자하는다양한문제에해답을주었는지는의문이다. 예를들면지형, 토양분석은많이이루어졌지만, 아직도퇴적환경과퇴적물의기원에대한논란이끊이지않는다. 수성퇴적을강조하기도하고, 다른연구에서는풍성기원을이야기하고, 사면에접하여발달한경우육성 (colluvial) 퇴적층이있는것도분명하다. 흔히 토양쐐기 라불리는땅갈라짐, 또는균열현상은다른시기연구자들도익히인지하고있는바인데, 정작그성인을알지못하고있다. 그러나최근방사성탄소연대와광여기루미네센스등절대연대값과퇴적물분석에따르면한국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23
구석기시대퇴적층에는상당한정도의일반성이있다 ( 이선복 2000; 성춘택 2004; 한창균 2003). 이런일반성은사실수성퇴적만으로는설명할수없는것이어서최근이루어진퇴적물분석결과와함께 (e.g., Jeong et al. 2013) 풍성기원의뢰스 (loess) 퇴적층일가능성이더커지고있다. 그렇다고해서모든구석기퇴적층이풍성이라는것은아니며입지에따라퇴적층의하부가육성이나수성퇴적층이자리잡기도한다. 많은분석에도이처럼혼란이있는이유는그동안자연과학적분석이너무특정유적에대해서만미시적으로이루어진때문이기도하다. 석기제작에사용된암석의판정에서도동일한암석을한쪽에서는규질셰일, 다른쪽에서는유문암과혼펠스라부르는것역시혼란스럽다. 이런혼란은분석을자연과학자에게만의뢰하였지고고학자가적극적으로고고학적인문제의식에서문제를풀고자하는노력이부족했기때문이다. 퇴적물이나암석같은자료에대한자연과학분석이인문학자의기대만큼단순하지않기때문에분석자가누구이고어떤분야를세부전공하느냐에따라다른결론이나왔던것이다. 고고학자는그결과를그저아무런비판의식없이받아들이기만하였던것이다 ( 성춘택 2015; 이선복 2000 2002). 자연과학분석은분명다른시대보다구석기시대연구에서더일상적으로이루어지고있으며, 이는두말할필요없이구석기고고학의강점이다. 앞으로분석은밝히고자하는고고학적문제가무엇인지하는뚜렷한문제의식아래고고학자가주도하는공동연구또는융합연구의형식으로이루어지는것이바람직하다. 3. 석기연구 한국구석기시대고고자료의대다수는석기이다. 석기, 특히구석기시대뗀석기는토기와같은고고유물과는달리우선인공여부판단에서시작하여몸돌과격지, 성형여부판단, 그리고도면과기술에이르기까지전문지식을필요로한다. 가령맥석영과규암은비교적거친재질의돌감으로서석기형식판단이쉽지않다. 흔히실험적인떼기의결과특정유물군의대다수는버리는석재 (waste) 일수밖에없고, 성형도구 (shaped tools) 라부를수있는것은전체석기군의극히일부일뿐이다. 그런데지나치게미시적인시각으로접근할경우조그만파손흔도의도적인타격의흔적으로판단할수도있고, 이런문제는연구자간신뢰와의사소통을어렵게한다. 의도적인성형을판단하기위해서는유적의형성과정에대한이해가우선되어야한다. 고고자료, 특히구석기자료는원재료획득과가공, 석기제작과사용, 폐기, 재사용등의복잡한인간행위뿐아니라지난수만년동안지형및지질작용을거쳐고고학자의손에이른다. 따라서석기의풍화, 파손은물론이고, 유물군의구성에이르기까지유적의형성과정을종합적으로판단하여야한다. 가 2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령한국의유적에서는석기가접합되는자료가나올경우석기제작소의존재를보고서에담는경우가많은데, 석기는재활용, 재가공되기도하고, 자연적인과정으로파손되기도한다. 보존상태가좋은유적에서재현실험에서와같이아주작은부스러기들이산재해있는경우석기제작소를추정할수있다. 구석기시대를전문연구영역으로하지않는고고학자들이가장어려워하는부분은석기의분류와기술일것이다. 학생들이구석기시대뗀석기에관심을가졌다하더라도바로이석기의명명과분류체계에들어서면외국어용어들이많기에어려움을겪는다. 뗀석기연구에서는유럽, 특히프랑스의용어와분류명칭이흔히사용되는데, 이는초창기손보기와정영화의소개와노력덕분이기도하다. 그런데프랑스의구석기시대분류체계는오랜연구전통에입각하여정립되어온것으로상당히세부적이다. 특히어떤특정석기가유럽의어느형식의석기와유사하다는기술과설명은자칫혼란만을줄수있다. 분류기준을일반화하려는노력이필요하며, 우리나라의경우맥석영과규암을소재로한석기가많음을고려할때지나치게세부적인분류체계가불합리할수있는것이다. 1980년대중반이후배기동 (Bae 1988) 과이선복 (1989; Yi 1986) 은이런문제의식아래아프리카의구석기분류체계를원용하여전곡리를비롯한유물군에적용하고자하였다. 가장많은연구가이루어진석기형식은아마도주먹도끼일것이다. 1970년대말전곡리에서발견된이른바 아슐리안형 석기를주목하여 1980년배기동의석사학위논문에서시작하여그동안많은분석과연구가이루어졌다 ( 박종현 2011; 배기동 1980, 1983a; 유용욱 1997; 유용욱, 김동완 2010; 이선복 1989, 2009; 이정은 2011). 전곡리를비롯한임진한탄강유역의유적에서는규암제자갈돌과대형격지를소재로만든주먹도끼와가로날도끼등 아슐리안형 의석기가확인되고있다. 하지만, 실제주먹도끼의수는고전적인아슐리안유물군과비교하여현저히적고, 주먹도끼의생김새역시더고졸하다는것이공통된의견이다 (Norton et al. 2006). 임진한탄강유역에서확인된주먹도끼는이제전국적으로확인된다. 다만임진한탄강의경우비교적좋은재질의규암제자갈돌과대형격지를소재로만드는등지역에따라상이한암석을이용하여주먹도끼와대형격지, 주먹찌르개같은유물이제작되었다. 후기구석기시대에는몸돌, 특히잔몸돌 ( 세석핵 ) 에대한연구가주도하고있으며 ( 김은정 2005; 서인선 2015; 성춘택 1998; 오타니카오루 2012; 이헌종 2015; 장용준 2002, 2007, 2015). 최근슴베찌르개에대한관심과연구가많다 ( 공수진 2007; 박가영 2012; 이기길 2011; 이융조외 2011; 이형우 2007; 장용준 2007; 최철민 2014; Seong 2008). 그럼에도가령긁개나밀개, 새기개같은다른형식의석기에대해서는집중적인연구가별로이루어지지않는실정이다.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25
4. 편년과문화변화 구석기고고학은이후의시대보다인류의일반적인문화진화의틀을따르는경향이강해오랜연구전통이있는유럽과아프리카의편년체계가광범위하게쓰이고있다. 구석기시대는전기, 중기, 후기로나누고있으며, 전기구석기시대에는아프리카초기인류가남긴올도완전통을거쳐주먹도끼를중심으로하는아슐리안전통으로진화한다. 대체로 30-25만년전부터돌날중심의석기군은후기구석기시대가시작하는 40,000-35,000년전까지를중기구석기시대 (Middle Paleolithic) 로부르는데, 이시기석기는준비된몸돌기법 (prepared core technique) 으로특징지을수있으며, 대표적인것이르발루아기법이다. 이러한전, 중, 후기삼분기의틀은한국고고학에서도흔히볼수있다. 그러나중기구석기시대를흔히 120,000년전, 혹은 75,000년전정도부터 40,000년전으로인식 ( 박영철 1992; 이선복 1989: 64) 하는것이보통인데, 이는유럽의기준도아니고이시간대를석기기술을통해정의할수있는것도아니다 ( 성춘택 2002). 이시간대를대표하는, 곧그이전시기 ( 전기 ) 와는구별되는석기기술을확인할수없기때문에 중기 의개념은문제가있는것이다. 사실한국구석기시대석기군은정질의암석으로만들어진후기구석기시대의유물군이나타나기까지별다른기술상의변화를보이지않는다. 따라서기술적인근거에따른분기는사실전기 ( 이른시기 ) 와후기의이분이합당한듯하다. 한국구석기시대유적가운데유럽과아프리카의기준으로전기구석기시대, 곧 30만년전이전으로올라가는유적은아직분명하지않다. 현재의한반도에언제부터인간의점유가있었는지는불분명하다. 광여기루미네센스, 발열광연대등절대연대값으로 20만년전정도가나온유적으로는파주장산리와가월리, 오송만수리하층, 단양금굴등의유적이있다. 현재로선이정도의유적이가장이른시기의자료인것으로보인다. 다만주변중국의전기구석기시대유적을참고하면한국에서도향후비슷한시기의유적이알려질가능성이있다. 발굴보고서가간행된지 30년이넘었지만, 주먹도끼가나오는전곡리의연대관의차이는계속되고있다. 전곡리의주먹도끼와하층유물이중기플라이스토세 ( 약 73만년전에서 128,000년전까지 ), 약 35 만년전의것이라고하지만 (Bae 1988; Bae et al. 2012; Norton et al. 2006) 후기플라이스토세유적이라는주장과분석결과가나오고있다 ( 이선복 1989, 2000, 2009). 다만 1990년대후반이루어진일본규슈남쪽에서기원한 AT화산재표본이전곡리를비롯한한국의전역의구석기퇴적층상부에서확인된것은구석기편년에획기적인일이었다 (Yi et al. 1998). 논란이있었지만현재학계에서는화산재가시사하는연대가받아들여지고있다. 다시말하면퇴적층의상한과주먹도끼가나오는층의연대, 그리고그지속시간에대해서는여전히이견이있지만, 퇴적층의상부, 곧하한연대는 20,000년전언저리까지내려온다는데동의하고있는것이다. 2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대부분의한국구석기시대유적은후기플라이스토세의것이다. 주먹도끼와찍개, 다각면원구, 몸돌, 대형격지가특징인유물군은후기구석기시대의시작시까지지속되고있는것이다 ( 성춘택 2006a b; 이선복 2000; 이헌종 2004). 다만최근연구에따르면맥석영을소재로한비교적작고다양한형식의석기가중심인유물군이후기구석기시대늦은시기까지도존속하고있음이드러났다. 최근특정석기기술을넘어구석기시대석기군에대한시각과연구가주목된다. 다시말하면석기군구성을중심으로구석기시대기술과유형의편년과변화를논의하고있는것이다 ( 김상태 2012; 성춘택 2006a; 이기길 2012; 이헌종 2004). 유형에따른유물군다양성과변화양상연구는선사고고학, 특히한국청동기시대고고학의주된연구틀이기도하다. 이를바탕으로한국후기구석기시대유물군은소형맥석영제석기군 ( 평창리유형 ) 과격지소재슴베찌르개중심의석기군 ( 화대리유형 ), 돌날과슴베찌르개중심의석기군 ( 고례리유형 ), 슴베찌르개와잔석기중심의석기군 ( 수양개유형 ), 잔석기중심의석기군 ( 하화계리유형 ) 등으로대별할수도있을것이다 ( 성춘택 2006b). 현재한국후기구석기문화의등장과진화와관련해서는슴베찌르개의역할이강조되고있다. 후기구석기기술의가장큰특징은규질혈암과흑요석같은정질의돌감을적극적으로이용하는것이다. 전통적으로는돌날중심의문화를후기구석기시대의설정기준으로삼지만, 한국의경우슴베찌르개의등장이돌날보다이른경향이있는데, 충주송암리와포천화대리등이른시기슴베찌르개는돌날이아니라격지로만들어진경향이있는것이다 (Seong 2015). 다만이유물들역시기존의규암과맥석영이아니라규질혈암이나반암과같은새로운재질의돌감을사용하여만들어졌다. 잔석기 ( 세석기 ) 의등장은철원장흥리나장흥신북, 남양주호평동등에서나온방사성탄소연대를평가하고해석한바에따르면 (Seong 2011) 보정연대로거의 30,000년전가까이소급되는데, 이는동북아시아에서도상당히이른연대이다. 물론시베리아에서는 35,000년전까지올라가는유적들이점점늘어나고있다 ( 이헌종 2015). 이것과함께특히현재한반도에는최후빙하극성기 (LGM) 이라불리는춥고건조하던시기의유적이많음을고려하면후기구석기시대의수렵채집민의높은이동성을짐작할수있다. 5. 원석재연구 수렵채집민의높은이동성과사회네트워크는사실흑요석제석기의분포와정질의암석의산지추정으로도확인할수있다. 다만, 돌감 ( 석재 ) 의획득에서석기의사용과폐기에이르기까지과정을연구하는작업연쇄 (chaîne opératoire) 연구와폐기후유적의형성과정까지종합적인연구가필요하다. 그러나석기원산지만하더라도현재로선분명히밝혀진것이없다. 상무룡리출토흑요석이백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27
두산에서기원하였을것 ( 손보기 1989) 이라는분석결과가발표되었으며, 이후지속적으로유사한연구가이루어진바있다. 많은진전이있는것이사실이지만, 아직정확한산지를알지는못한다. 현재까지증거로는여전히백두산이주된기원지일가능성이높으며 ( 이선복 좌용주 2015; 候哲 2015), 이는흑요석유물이한반도중부의후기구석기시대유적에서비교적많음을통해서도짐작할수있다. 그런데백두산은서울근처까지직선거리로만 500km 정도가된다. 이는유럽의후기구석기시대조개류와같은원재료와유물의교류에서도드물게넓은교류망을보여주는것으로 (Gamble 1986) 당시수렵채집민의사회교류네트워크의일단을추정해볼수있다. 흑요석보다원산지를추정하기힘든것이규질셰일 ( 응회암 ) 계암석들이다. 유문암이나안산암, 혼펠스등으로다양하게기술되고있는이암석은한국후기구석기시대의돌날과돌날몸돌, 밀개, 새기개등정형화한유물을만드는데가장많이쓰였다. 그러나이암석에대한연구는아직도극히초보적이며 ( 성춘택 2003), 현재동일한암석의산지를찾아실제유물과과학적인분석을통해비교하는연구는제대로이루어지지못하고있다 ( 권수진 2015; 서인선 2015). 유사한암석이라하더라도후기구석기시대돌날과잔돌날을만들때사용한정밀한암석과는다른성질인경우가많은것이다. 그럼에도돌감자체, 그리고돌감이가지고있는석기기술의성격에대한관심과연구는지속되고있다. 특히기존에거친재질로만생각되었던맥석영제석기에대한재검토를통해작고정교한석기제작에광범위하게쓰이고있음을확인하고있다 (Seong 2004; 장용준 2005; 유용욱 2012). 6. 동물뼈와예술품의문제 앞서지적하였듯이맥석영과같이암맥에서발달한것이깨져산재하는경우인공여부를가리기쉽지않다. 따라서고고학자는늘그렇지않을가능성을염두에두어야한다. 수만, 수십만년의시간대를다루는구석기시대에서그런인공성여부에대한논란은비단우리나라만의일이아니다. 다만 1960년대와 70년대연구초창기이루어진발굴에서보고된많은유물과유구에대한문제는다시한번비판적으로재고되어야한다. 석장리의집자리에서보고된고래모양이나예술품, 사람머리카락, 동물털등과더불어동굴에서나왔다는각종골각기는인공의흔적을찾기힘든경우가많으며, 예술품이라는것에대해서도그동안몇차례부정적인의견 ( 배기동 1993 1996; 정영화 1986 2002) 이제시되었다. 1980년대이전에조사된대부분유적에서나온골각기, 또는뼈유물이나예술품은모두사람에의한인위적인변형만을강조하고있지만, 최근청원두루봉동굴등의유물을재검토한결과거의모두식육류의흔적으로확인되고있는것이다 ( 조태섭 2014). 두루봉동굴의동물뼈에대해서는이미권학수 (1998) 가방법 2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론적인검토와체계적인비교연구를통해인간의점유흔적에대해비판적인의견을제시한바있다. 가령청원두루봉동굴에서동굴곰한개체가그대로발견되었다고하면그것이신앙의증거일까? 수만년이라는시간대를생각해보면사람에의해제물로바쳐졌다기보다는자연사했다고보는것이더상식적일것이다. 두루봉에서나온 흥수아이 역시과학적으로확인되지않은상태에서매스컴과대중서적은물론중고등학교교과서에까지실려있어구석기고고학자로서는당혹스러울수밖에없다. 오히려충북일보 (2011.6.27) 등의보도에따르면근세의인골일가능성이높은데, 구석기시대인골로보고되었으니, 늦었지만지금이라도바로잡아야할것이다. 과거의조사와연구는당시사회적인맥락에서이루어졌겠지만, 학사를개괄하여향후연구의토대로삼기위해서는잘못된관찰과해석은정리할필요가있다. 7. 고고학과 구석기학 구석기유적은거의전부가야외유적이기때문에발굴에관련전문가가참여하지않은경우도있다. 물론반드시구석기고고학전문가가발굴해야하는것은아니지만, 경우에따라서는단편적인지식만을가진연구자가석기의인공성여부도판별하지못하는상황에서조사를진행하는경우도있는것이다. 조사를한뒤에도자료에대한도면, 기술등에서관련전문가의조언만에의지하기도한다. 사실한국구석기고고학의가장큰문제가운데하나는구석기시대이후시기를주된전문분야로하는연구자와소통이이루어지지않는다는점이다. 실제 구석기학 이따로있을수는없는일이어서, 조선시대고고학을전문으로하는연구자도구석기시대유적을발굴하고유물을기술할수있을것이며, 그반대의경우도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모두고고학이기때문이다. 시대를불문하고모두고고자료를다루고있으며, 층위와출토맥락 ( 정황 ) 등동일한원칙에입각하여발굴조사하고, 유물을기술하고분류하여, 패턴을찾고그것을통해과거를탐구하는것이다. 다만글쓴이가지적하고자하는것은실제한국고고학에서구석기자료에대한관심은그리높지않다는점이다. 특히다른시기연구자의대다수는뗀석기에대해깊이있는이해를하지못하고있으며, 그저자신의분야가아니라고만여기며더깊이공부하지않는다. 사실이런상황의책임은구석기고고학자에게도있다. 구석기시대만의용어와개념과 구석기학 만의방법과원칙이있는것이아닌데, 마치그런듯이담을쌓았던것이다. 한국구석기학보라는전문학술지가있어서한국고고학보나지역고고학회의학술지가있지만, 구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29
석기시대논문은별로실리지않는다. 10여년전영남고고학회 (1999년) 와호남고고학회 (2001년) 는구석기문화를주제로학술대회를열었지만, 최근지역학회의학술대회주제역시구석기시대를담고있는경우는거의없다. 이처럼구석기시대는다른시기고고학과는점점차별화하는것이아닌가우려되는것이다. 석기는토기와함께가장흔하게마주하는선사자료이다. 신석기시대와청동기시대의자료의상당부분이석기로이루어졌음은두말할나위가없다. 설사간석기 ( 마제석기 ) 일지라도기본적으로뗀석기제작기술의연장선상에있다. 고고학사를돌아보면구석기시대의연구는고고학의성립과발전에지대한역할을하였음을알수있다. 19세기서유럽에서선사고고학의성립은구석기시대의절멸동물과뗀석기의확인이절대적이었다 ( 트리거 2010). 또한 20세기후반무스테리안논쟁으로대표되는유물군에서나타나는변이해석에대한논의는신고고학 ( 과정고고학 ) 발전의큰획이었음도두말할나위없다. 그리하여루이스빈포드 (Binford 1980, 1981, 1983; 켈리 2014) 는자신의생애내내구석기시대물적자료의패턴을설명하기위해수렵채집민의행위에대한민족지고고학연구를수행하였던것이다. 따라서구석기시대의기본적인자료와이같은학사를이해하지못하면현대고고학의지평을제대로안다고할수없다. 앞으로시대로대표되는전문영역간의벽을허물고과거문화의물적자료로서고고자료의변이를찾고해석하는데더통합적인접근을기대한다. VI. 맺음말 길게는일제강점기, 짧게는 1960년대전반첫구석기시대유적발굴에서시작된한국구석기고고학은자료, 연구자, 학회, 간행학술논문과보고서등에서괄목할만한성장을거듭해왔다. 고고학자의일차자료인유적과유물이엄청나게늘었으며, 이로부터많은연구성과들이나오고있다. 현재한국구석기고고학에서는절대연대가쌓이면서편년에서상당한진전이있으며, 석기제작에관한연구는지속적으로많은관심을받은분야이다. 이는비단구석기시대만의성과는아니다. 그러나학사를개괄하는것은자기만족만을위해서가아니다. 오히려곧학계를뒤돌아보고현재를되짚으면서앞으로연구과제를제시하는일이목적일것이다. 앞으로발전을위해서는더많은영역에서연구가이루어져야한다. 굳이유럽이나미국의학사적인경향이나추세에맞추어우리의학사를개괄하고앞으로과제를설정할필요는없겠지만, 세계고고학사의흐름에견주어우리의학문을회고하고전망하는일은여 3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전히유효하다. 세계고고학은문화사고고학이주도하던시기의문화편년, 그리고전파와이주를강조하는변화설명에서과거인간행위와문화과정을강조하는흐름으로변모하였다. 덧붙여객관적이고실증적인연구에서탈피하여과거에대한내러티브를구성하는탈과정주의적연구역시하나의경향이되었으며 ( 갬블 2013), 진화이론에입각하여유물변화의계통을수립하려는노력이있기도하다 ( 오브라이언 라이맨 2009). 최근에는여러방법을종합하고실용적으로취사선택하는흐름도보 인다 ( 트리거 2010; 성춘택 2014). 한국구석기고고학연구는유적발굴과자료소개, 개별유적의유물과퇴적물분석, 그리고석기기술과편년에집중되어있다. 더건실한형식분류와편년연구, 자연과학분석뿐아니라앞으로유적형성과정에서다양한문화와행위적인맥락을고려할필요가있다. 이를토대로수만년전이동생활을하면서동식물자원을이용하고, 주변집단과정보와원재료, 인적인교류를하던수렵채집민이남긴고고자료에대해더종합적이면서도체계적으로이해할수있을것이다.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성춘택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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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38-67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 이영덕 ( 호남문화재연구원 ) 목차 Ⅰ. 머리말 Ⅱ. 신석기시대유적의발굴 Ⅲ. 유물연구 1. 토기 2. 석기 3. 골각기 Ⅳ. 생업연구 1. 농경 2. 어로 3. 수렵 Ⅳ. 맺음말
Ⅰ. 머리말 2010년이후한국신석기시대연구는 성숙기 에접어들었다고한다 ( 신숙정 2011). 기존의연구가토기위주의편년체계를설정하거나주거지나적석노지, 수혈등유구중심의해석차원에서진행되었다면 2010년이후의연구흐름은연구시야의세분화와영역의확대, 학제간교류및방법론의활용등다양한연구가진행되고있다. 또한한국신석기학회가출범한지 15년이지나는동안여러분야의연구진이포진하고학회지인한국신석기연구발간을통해분야의연구성과를보여주고있다. 이러한신석기시대연구의확장은어느시대를막론하고연구자의증가와연구의 1차자료인발굴조사의급증에기인한다고할수있다. 주지하다시피한국고고학의양적, 질적성장은 1990년대후반들어매장문화재관련법안의정비에따른대규모발굴조사가이루어지면서라고해도과언이아니다. 비단신석기시대뿐만아니라각시대, 각분야별연구에서도마찬가지인것으로판단한다. 20여년전만해도한국신석기연구는 1년에한두권정도의발굴보고서와몇편에불과한연구논문이전부였으며, 발굴규모역시소규모로취락의전모라기보다는주거지한두기정도내지는간단한유구, 포함층에서출토된유물이전부이다시피했다. 연구논문역시인공유물이나유구를중심으로편년연구가주를이루다시피했다. 당시까지만해도중서부지방과남부지방을중심으로연구가진행되었으며, 중서부지방은암사동, 미사리의주제를크게벗어나지못했으며, 남부지방의경우동삼동과수가리등의패총연구가중심이었다. 1990년대중반이후이들지역을벗어난각지에서취락과패총등이발굴조사되고시공적범위에대한논의가전개되면서연구의증폭제역할을하게되었다. 제주고산리, 금강기수역의패총조사, 양양지경리 가평리등동해안지역의취락조사, 낙동강상류의김천송죽리, 금강상류인용담댐의발굴조사등은남부지방과중서부지방신석기문화의경계와흐름을잇게하였다. 또한 2000년대들어서중서부해안에서대규모의취락과아울러국립문화재연구소에의한연평도지역패총의발굴조사는 1950~60년대발굴보고서에의존했던북한지역자료에대한재검토를요구하게되었다. 그리고양양오산리C 지구발굴, 완도여서도, 창녕비봉리, 죽변리, 울산황성동, 부산장항, 고성문암리등기존발굴조사성과를재검토하게하거나새로운유구와유물등이쏟아지면서연구영역이확대되는계기를마련하게되었다. 한편신석기시대연구사는몇차례에걸쳐정리된바있다 ( 정영화 1981; 안승모 1988; 이성주 1992; 신숙정 1990 1991 1992 2004 2006 2007 2008 2011; 소상영 2015). 특히신숙정에의한꾸준한신석기시대전반적인검토는당시의연구현황과과제등을제시하고있으며, 지역별로연구성과와과제등을제시하고있어신석기연구의잣대와같은역할을해주고있다.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39
이글은앞의연구자들에의해연구사를정리한글을토대로작성하였으며, 2000 년이후자료증 가에따른유물연구현황과생업의현상적파악을하였다. Ⅱ. 신석기시대유적의발굴 한반도에서신석기시대유적이처음확인된것은평안남도와황해도지역의고분을조사하는과정에서용반리, 몽금포의바닷가에서즐문토기를찾으면서부터라고할수있다 ( 鳥居龍張 1917). 이후동삼동, 영선동, 유판, 웅기패총등의유적이발견되었으나무문토기와의동시성내지는다른종족론이대두되면서신석기시대존재는부정되었다. 해방이후 1957년북한에서발굴한봉산지탑리유적은양자의층서관계를명확하게해주었으며, 한반도지역에서신석기시대의존재를거듭확인하게된계기가되었다. 북한지역에서의원시공동체사회에대한이른관심은 1950년에서부터 1960년대까지궁산, 금탄리, 농포, 지탑리, 미송리, 호곡동, 세죽리, 토성리, 서포항, 신암리등많은유적을집중발굴하게되고신석기편년의근간을형성하였다. 반면남한지역에서는 1960년대후반에들어서야암사동, 동삼동, 시도등의발굴이이루어졌다. 남한지역에서초기신석기시대유적의발굴은당시국립박물관이주도하였다. 일제강점기이미알려진유적의발굴조사가이루어졌고 1970년대재차조사가진행되었음에도불구하고동삼동과암사동의경우 1990년대에들어서야정식발굴보고서가발간되었다. 1970~80년대는신석기시대연구자가포진한대학박물관위주의발굴이이루어지는데부산대학교박물관을중심으로율리패총, 수가리패총, 연세대 동아대박물관의상노대도패총등과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3차례에걸쳐발굴조사한양양오산리유적이대표적인예이다. 신석기시대유적발굴의전국화는 1990년대중반이후라고할수있다. 개발과함께구제발굴조사로서신석기시대유적이찾아지게된것이다. 군산오식군도에속하는노래섬, 가도, 비응도, 띠섬등은신석기유적의공백지나다름없었던금강기수역에서신석기유적의존재를알려주었고남부지방과중서부지방의점이지대적인성격이확인되었다. 그리고진주남강댐수몰지구의발굴조사나김천송죽리유적등마을의모습이확인되기시작한시점이기도하다. 1994년제주고산리유적의발굴은당시까지만해도동북아시아지역에서초창기의공백지나다름없었던한반도에서존재를부각시키는계기가되었다. 고산리의발굴이후현재까지한반도초창기신석기논의는고산리유적을중심으로전개된다. 초창기단계는후기구석기의제작기법이남아있는세석기 ( 세석핵, 석촉 ) 와고식토기 ( 고산리식유기물혼입토기와무문양토기 ) 가출토되는유 4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표 1 신석기시대유적발굴조사현황시기유적 60년대서울암사동, 부산동삼동, 부천시도패총, 춘천교동동굴, 시흥별망패총울산신암리, 부산율리패총, 김해수가리패총, 통영상노대도, 양양오산리, 제주북촌리, 시흥오이도패 70~80초반총, 여수돌산송도, 통영산등패총, 합천봉계리등안면도고남리, 부산범방패총, 통영연대도패총, 청원쌍청리, 하남미사리, 청도오진리암음, 대전둔산, 80후반 ~90년대영종도송산, 군산노래섬, 가도, 비응도, 띠섬, 양양지경리, 하동목도패총, 김천송죽리, 양양가평리, 영종도는들, 오이도가운데살막, 파주주월리, 서산대죽리패총, 진주상촌리, 제주고산리소연평도, 연천삼거리, 진안갈머리, 진안진그늘, 울산세죽, 충주조동리, 공주학암리, 연평도모이도, 옥천대천리, 대전노은동, 대연평도까치산패총, 밀양살내, 아산풍기동, 영흥도외1리패총, 강릉초당동, 용유도남북동, 인천을왕동, 제주하모리, 남양주호평지새울, 영월쌍굴, 완도여서도, 동삼동정화구역, 2000년대범방, 인천삼목도, 아산성내리, 비봉리, 서천장암패총, 양양송전리, 고성철통리, 남양주농서리, 안도패총, 인천영종도, 안산신길동, 당진우두리, 시흥능곡동, 인천운서동, 제주사계리, 인천중산동, 울산처용리, 진주평거동, 영월공기리등울산죽변리, 광양돈탁패총, 울산황성동, 보령송학리패총, 부산가동패총, 파주대능리, 울주신암리, 익 2010년대산신용리갓점, 고성문암리, 부산가덕도장항, 제주고산리등 적으로시기는 10,000~8,000B.P. 로설정하고있다. 그리고 2012년확장조사된성과에따르면원형주거지 26기를비롯하여고산리식 무문 융기문 압날문토기등과화살촉 찌르개 밀개등성형석기, 돌날 박편 석재 망치돌 갈돌 갈판등당시주민들의생업경제를이해할수있는다양한유물들이확인되었다. 고산리유적조사이후제주도내에서의초창기유적은서귀포강정리, 삼양동등제주곳곳에서확인되고있다. 이러한초창기유적의한반도내공백에대한연구가진행된바있으나아직까지뚜렷한근거를제시하지못하고있는실정이다. 다만고산리유적의발굴조사이후기존에조사되었던유적의검토와후기구석기최말기에해당하는유적의석촉을통해초창기의공백또는연계성을지적하기도하였다. 고산리의격지를소재로한퇴화형세석핵이나강정동의정형화된세석핵의예에서전남지역의후기구석기유적인함평장년리나순천월평, 임실하가유적등의세석인문화에서기원을찾는다거나광주신촌유적, 곡성오지리, 거창임불리등의석촉을초창기단계로인식하여제주도에서확인되는초창기단계의유적이한반도남부지역의후기구석기최말기의세석인문화의유입으로판단하기도하였다 ( 박근태 2012). 한편 2000년대의발굴은신석기시대유적의확장이라고할수있다. 이시기중서부지역-특히해안-에서대규모의마을이확인되었으며, 전국적인분포를보인다. 인천운서동이나중산동이속한중서부해안지역의경우그동안패총유적이입지하는한시적인계절공간으로인식하였으나대규모의마을이확인됨으로써중서부지역의내륙과해안으로구분되었던생계경제에대한새로운논의가진행되었다. 취락간의운용방식이나취락내부공간과주거지의구조와변화양상, 그동안조사되었던방사성탄소연대자료를집성하여지역별편년과병행관계파악등다양한연구가진행되었다. 또한여수안도패총이나가덕도장항유적등의분묘, 울산황성동의골제작살이박힌고래뼈, 울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41
진죽변유적과양양오산리C 지구의동해안양식이라고할수있는토기군등다양한자료가쏟아지고있다. 이러한발굴자료와연구성과를집성하기시작한것이 2000년대이후의특징이라고할수있다. 동삼동패총전시관에서는 신석기시대어로문화 (2006), 신석기시대지역문화론 (2009), 한국의신석기시대패총 (2011) 을발간하여연구집성의기틀을마련하였다.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이발간되고신석기학회를중심으로 2011년에 한국신석기문화개론 ( 중앙문화재연구원편 2011) 이 2012년에는 한국신석기문화의양상과전개 ( 중앙문화재연구원편 2012), 한국신석기시대토기와편년 ( 중앙문화재연구원편 2014), 한국의신석기시대집자리 ( 한강문화재연구원편 2009), 한국선사 고대의골각기 ( 한강문화재연구원편 2014) 등다양한연구성과의집성이이루어지고있다. Ⅲ. 유물연구 한반도신석기시대인공유물의연구는크게토기, 석기, 골각기로대별된다. 패총이나저습지, 경작지등에서확인된동물유체, 식물유체등은환경이나생업과연동된연구가주를이루며, 유물자체의연구는인공유물위주라고할수있다. 인공유물중토기는편년의재료로, 석기와골각기는생업이나형식분류를통한편년등이이루어졌다. 1. 토기 한국신석기연구분야중가장활발히진행된주제가토기이다. 편년및분기설정을주로토기의문양을대상으로삼았으며, 형식학, 순서배열법과금탄리1 식과같은표식적인토기를기준으로한교차편년을통해연구되어왔다. 일반적으로토기는어느시기를막론하고당시가장많이사용되고잔존율이높아접근성이좋은자료로시간과공간적변이가다른유물에비해확연히드러난다. 토기를통한한반도신석기시대편년은일제강점기요코야마쇼자부로 ( 橫山將三郞 ) 에의해최초로시도되었다 ( 橫山將三郞 1933 1939). 그는동삼동패총을발굴하고융기문토기존재를인식하게되었으 4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며, 동삼동하층 상층 영선동식패총의상대편년안을제시하였다. 이후국내연구자로는김정학이당시층서적자료의부재를인정하면서기형이나문양, 시문부위등을근거하여신석기시대를 3기로편년하였다 ( 金廷鶴 1968). 한편북한지역에서는궁산, 지탑리, 금탄리의상대적인층서관계와문양, 태토등에근거하여대동강유역을위시한중서부지방을 궁산문화 로명명하였으며이를 4기로분기하였다 ( 김용남 1967). 이후동삼동패총을시굴조사한모아 (Mohr) 와셈플 (Sample) 의조사개보는동삼동패총의층서적근거에기반을두는데남부지역토기편년의기초가마련되었다고할수있다 (Sample 1974). 5기로분기하였으며, 조도기 ( 융기문토기 ), 목도기 ( 지두문토기 ), 부산기 ( 압인문토기 ), 두도기 ( 태선침선문토기 ), 영도기 ( 퇴화침선문과이중구연토기 ) 로설정하였다. 모아와셈플의성과를토대로남부지역의경우수가리패총의발굴조사보고서가발간되면서남부지역 5기편년안이완성되었다고할수있다. 즉, 남부지역즐문토기의문양형태와시문수법등형식학적내용과수가리패총층위에서확인된토기출토양상을통해조기 ( 융기문 ), 전기 ( 자돌압인문 ), 중기 ( 태선침선문 ), 후기 ( 퇴화침선문 ), 만기 ( 이중구연또는율리식 ) 의편년을제시하였다. 수가리패총발굴자들의편년은현재도세부적인차이는있으나제주도를포함한남부지역신석기시대토기편년의기본골간이되고있다. 중서부지방의편년은문양흐름과시문방법, 태토등지역적변이가있다는전제에서출발하였다. 특히한영희 (1978) 와임효재 (1983) 의편년연구는문양의변화가시간성을반영하고있다는전제의단초를제공하였다. 한영희는중서부지방의시문부위를기준으로구연부, 동체부, 저부다른문양시문된 Ⅰ식, 토기전면을하나의시문권으로보고시문한 Ⅱ식, 즐문계무문토기를 Ⅲ식, 토기외면에한줄의덧띠무늬나구연부에만시문된 Ⅳ식으로분류하였다. 이렇게분류된형식과북한지역의연구성과를토대로 Ⅰ식을 Ⅰ기로, Ⅱa식을 Ⅱ기로, Ⅱb, Ⅲ, Ⅳ식을 Ⅲ기로편년하였다. 임효재역시한영희의분류안을좀더세분화시켰는데한영희의 Ⅰ식을구분계로 Ⅱ식을동일계로분류하였다. 구분계와동일계는부위별시문여부에따라전면시문, 저부문생략, 저부문과동체부문생략의 3단계로나누었다 ( 임효재 1983). 이상의분류를당시까지확인된방사성탄소연대결과와비교하여전면시문단계를전기 (BC 5000~3500), 저부문생략단계를중기 (BC 3500~2000), 구연부문단계를후기 (BC 2000~1000) 로비정하였다. 그러나이들의연구는문양의변화가동일지역내에서의시간적인속성만을반영하는것이아니라집단과지역에따른공간적속성도무시할수없다는점에서이후편년체계가세분화되고있다. 주지하다시피이들의연구는북한연구자의성과가반영된것으로문양변화를증명하는객관적인자료가부족한상태에서출발하였다 1. 1 당시의인식은암사동과시도패총, 별망패총의발굴과궁산, 지탑리, 금탄리유적의한정된자료에근거하였기때문에당시로서는기존연구성과라고할수있는북한지역의성과가준거가될수있었을것으로생각된다.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43
이후중서부지방의토기연구는유적조사의공백과중서부지방편년의중심에있었던암사동보고서의발간이늦어짐에따라 1990년대중반까지는침체기였다고할수있다 ( 소상영 2013a). 그리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걸쳐조사된미사리유적의보고서간행, 인천영종도송산유적, 삼목도유적, 시흥오이도패총, 보령관창리유적, 관산리유적, 서산대죽리패총, 안면도패총과더불어금강기수역인오식군도의가도, 노래섬, 비응도, 띠섬패총이발굴조사되면서중서부지역의신석기편년이세분화되기시작했다. 또한 2000년대중반이후경기, 인천지방의해안및도서지역에서발굴조사된다수의취락유적은토기뿐만아니라이지역신석기문화전반에대한새로운시각을요구하게되다. 한편중서부지역의토기편년의세분화과정은주로임상택에의해 1990년대후반부터편년안을제시하기시작했다 ( 임상택 1999a b 2001b 2003 2006). 그는문양형태, 문양배치, 문양구성이라는기준을제시하여양호한주거지에출토된토기를대상으로논지를전개하였다. 중서부지역에서소지역별토기군을검토하고 14C연대측정치를참고하여 4기편년을제시하였다. 표 2 중서부지역상대편년 ( 임상택 2006) 분기주요특징주요유적 전반 구분계3부위시문 지탑리1지구 1호, 궁산 Ⅰ기후반구분계문양유지, 지탑리2지구, 마산리, 룡곡2호, 까치산 1호패총하층, 동체부타래중호문, 점열어골문삼거리, 암사, 미사 Ⅱ기 금탄리1문화층, 암사, 미사, 주월리, 삼목주거유적, 금탄리1식, 2부위시문, 오이도작은소라벌A, 가운데살막, 대부도흘곶패총, 구연한정시문, 동일계토기등장조동리, 관산, 가도등 Ⅲ기 금탄리2문화층, 남경, 표대, 송산, 는들, 소연평도, 금탄리2식, 서해안식동일계토기유행, 남북동, 풍기동, 오이도신포동, 원정리, 관창, 광천, 구분계쇠퇴, 소멸내흥, 내평, 역내리, 둔산, 대천, 쌍청리 Ⅳ기 문양단순화, 난삽화 용반리, 덕안리, 남산, 군량리, 제일리, 꽃뫼, 모이도, 을왕동1, 오이도뒷살막 절대연대 (B.C.) 4000?-3600 3600-3000 3000-2500 2500-2000?/1500 그는또한경기해안지역의발굴자료가증가함에따라해안지역의편년을제시했으며, 큰범주에서는중서부지역의편년과대동소이하다. 다만 Ⅱ,Ⅲ기를전반과후반으로세분하고유적명을따라운서동기 (Ⅰ기후반 )- 능곡기 (Ⅱ기전반 )- 삼목도기 (Ⅱ기후반 )- 는들기 (Ⅲ기전반 )- 운북동기 (Ⅲ기후반 )- 뒷살막기 (Ⅳ기) 로명명하였다. 그리고기존중부내륙, 중부해안, 서부지역으로나누어소지역간의병행관계를제시하였다. 이러한임상택의편년은기존연구자들의편년체계에서크게벗어나지않는것으로이해될수있다. 다만필자는기존궁산문화분기의 1차자료로삼은궁산, 금탄리, 지탑리, 남경유적등이층서관계가명확하지않고토기문양대의시간성에대한자의적인전제의오류를극복하지못하는한계가 4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있음을피력한바있다 ( 이영덕 2013). 즉, 중서부지역의편년체계가 1950~60년대의북한연구자의성과를토대로설정된출발에서부터문제가있으며, 당시의인식에대한검토가우선이라고생각한다. 특히중기 (Ⅱ기) 로분기된금탄리1 식토기의경우금강기수역에서남부지역전기토기군과공반관계를갖는것으로파악하며, 중서부지역에서는구분계종주어골문이나횡주어골문과공반되는것으로판단하였다. 또한금탄리1 식토기가출토된주거지의절대연대값이 4,000 calbc를전후한시점에집중되고있어오히려전기 ( 궁산 1, 2기 ) 에해당하는주거지의절대연대보다오히려상회하고있다. 즉, 까치산패총의층위별유물의변별력이떨어지고동일한조합을이루는궁산패총을두개의분기로두는것보다는궁산 1, 2기를통합하는방안도필요한것으로판단한다. 아무튼전반적인경향에서중서부지역에대한임상택의편년은기왕의연구성과를계승한것으로현재학계에서가장널리받아들여지고있는것은분명하다. 표 3 중부해안지역상대편년 ( 임상택 2012) 분기 주요유적 주요특징 연대 (cal B.C.) 분기명 I기후반운서동 I, 오이도안말, 구분계중심 (3부위), 단사선문, 조문, ( 전기 ) 까치산패총 VIII~X층종주어골문 4000-3600 운서동기 전반 능곡, 신길, 시도II지구 구분계중심 (2부위), 단사선문, 찰과상다치횡주어골문 3600-3400 능곡기 II 기 삼목도 III, ( 중기 ) 까치산패총 V-VII층, 구분계, 동일계, 단사선문, 후반시도 I지구일부, 가도하층, 서해안식횡주어골문, 구연한정단사선문 3400-3100 삼목도기 성내리, 풍기동 는들, 중산동, 대죽리가도? 동일계중심, 는들예각단, 다치횡주어골문, 전반 III 기을왕동A,B 고남리A 식단치횡주어골문다단단사선문잔존 3100-2600 는들기 ( 후기 ) 운북동제지점, 남북동, 후반고남리B, 화성가재리? 동일계중심, 예각서해안식횡주어골문 2600-2300? 운북동기 IV기 ( 말기 ) 오이도뒷살막, 을왕동I 동일계중심, 문양의난삽화, 무문양화 2300-1500? 뒷살막기 표 4 중서부지역소지역간병행관계 ( 임상택 2012) 시기구분서부중부내륙중부해안 절대연대 (cal B.C.) 전기 궁산 1 기??? 궁산 2 기 1 기운서동기 4000-3600 중기 궁산 3기궁산 4기? 2 기능곡기 3600-3400 당동리 4 지점? 삼목도기 3400-3100 후기궁산 5 기 3 기 는들기 3100-2600 운북동기 2600-2300? 말기룡반리, 덕안리등? 뒷살막기 2300-1500?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45
한편동해안지역의토기연구는 2000년이전까지오산리유적을중심으로이루어져왔다. 1990년대중반양양지경리의발굴을통해중기단계에중서부지역과남부지역의토기문화가혼재하는현상이파악되었으며, 동해안의특징적인토기군이라고할수있는오산리식토기의시공적위치는오산리유적의불분명한층위문제로답보상태였다. 2000년대접어들면서오산리식토기의위치는오산리C 지구의발굴을통해서논의가다시시작되었다. 문암리유적, 오산리 C지구, 죽변유적등의발굴을통해오산리식토기와융기문토기의선후관계와동해안지역융기문토기의위치를규명할수있는근거를마련하였을뿐만아니라남해안지역즐문토기의계통과전개과정을간접적으로이해할수있는실마리를확보하였다는점에서도중요한성과라고할수있다 ( 하인수 2011b). 한편오산리C 지구와문암리의발굴성과를토대로중부동해안지역의조 ~ 전기의편년은어느정도상대서열이자리매김되었다고할수있다. 고동순 (2009) 은오산리 A, C지구의차이를오산리식토기와융기문토기가사구의성장에따라위치와층위를달리하는것으로추정하였다. 그러나오산리 A지구퇴적층에서융기문토기와오산리식토기의혼재나오산리 A지구 2호주거지의압인문토기와융기문토기혼재등층서관계에대한좀더면밀한검토가필요할것으로판단한다. 또한그는문암리유적에서오산리식토기문화가먼저들어온후융기문토기문화가들어와일정기간병존한것으로보았다. 표 5 동해안지역조기및전기유적의발전단계 ( 고동순 2009) 순서 유적 출토유물 사구형성 탄소연대補正年代 (BC) 압날점열문토기, 1단계 오산리 C지구최하층무문토기, 좀돌날, ( 갱신세상면 ) 좀돌날몸돌 고토양층주변으로사구형성이미미한단계 5,710~5,610 6,010~5,870 2단계 망상동유적 압날점열문토기, 무문토기 고토양층상면 오산리보다퇴화된느낌 3단계 오산리 C지구 5호 소형의원형주거지 고토양층 1.5m 아래로사구가형성된단계 5,570~5,480 4단계 문암리 IX층 오산리식무문토기 사구의하층 6,000~10,000년 ( 기반층을확인하지못한상황 ) 의견제시 5단계 오산리 A지구주거지 오산리식토기 해발 2m인 A지구에사구가형성되며 C지 5,210~5,010 구해발 4m인고토양층상면에도사구가 5,260~4,690 올라오기시작한단계 6단계 문암리 VIII VII 오산리식토기와융기문토기병존 하층사구의상면 7단계 오산리 C지구융기문토기, 고토양층상면에 0.3~1m 높이의사구가 4,690~4,530 1 2 3 4 호주거지, 압인문토기, 목긴토기형성된시기 4,800~4,670 용호리유적 이밖에김은영 (2006a b 2007 2010) 은동해안의평저토기를 4 개의계통으로분류하고공반과영 4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향등을고려하여 4기로분기하였다. 한편송은숙 (2010) 은동해안지역의지리적인특징을들어전파와이주라는관점에서융기문토기와오산리식토기의출자문제를논하기도했다. 오산리식토기집단이동해안에회귀하는연어를잡기위해이동한아무르강하류의편목문토기집단의남하가능성을제기하였으며, 융기문토기또한아무르강유역과관련성이있는것으로판단하였다. 하인수 (2011) 는동해안융기문토기의기원을북방에서찾았던기존의논지와달리한반도지역에서가장성행한남해안지역일가능성을제시하였다. 연해주일대융기문토기의기종이나문양, 시문수법등이동해안지역의융기문토기와는다르고중간공백지대의존재등으로볼때오히려어로를기반으로한남해안융기문토기집단일가능성에무게를두고있다. 그리고융기문토기와오산리식토기의관계는일정기간동시기에병존하고한반도동부와남부해안지역에서서로다른토기양식으로존재하면서상호영향을주고받았던것으로판단하였다. 최근의토기연구경향은편년을위한문양변화를세밀하게관찰하거나 ( 이혜원 2015), 기존편년의세분화 ( 송현경 2012), 지역간병행관계 ( 古澤義久 2014), 분기별전환과정 ( 장은혜 2014) 등다양하게진행되고있다. 또한그동안간헐적이던활용되었던방사성탄소연대를집성하고지역별편년과병행관계파악한연구 ( 소상영 2013b 2014) 와울산세죽리유적의토기문양과탄소연대자료를비교분석한연구 ( 안재호 이창희 2013) 등방사성탄소연대를적극적으로활용한사례도돋보인다. 이상과같이간략하게살펴본신석기시대토기연구는 한국신석기시대토기와편년 ( 중앙문화재연구원 2014) 에집대성되었다. 물론신석기시대토기연구에서가장난해한문제인용어의혼란은여전히존재하나각지역별편년과그동안의성과를정리하였기때문에나름의의미가있는것으로판 단한다 ( 소상영 2015). 2. 석기 신석기시대석기는용도별로수렵구, 어로구, 채집농경구, 식료가공구, 가공구 ( 목공구, 석기가공구 ), 의례활동이나치레걸이로사용되는장신구로분류할수있다. 한반도신석기시대에서석기자체의연구는토기만큼활발하지는않다. 신석기시대석기에대한개괄적인연구 ( 황용훈 1983; 신숙정 1997; 임상택 2001a; 하인수 2011) 가있었으며, 종류별로는석촉 ( 박준범 2006; 이동주 2010), 석부 ( 김선지 2000; 박성근 2013), 굴지구 ( 윤정국 2009), 결합식낚시 ( 김충배 200 3) 등의주제에한정되었다. 그리고석기의사용흔분석 ( 김성욱 2008) 이나제작방법 ( 윤정국 2007) 등의연구도진행되었다. 또한암질분석을통한원산지추정연구의대부분이남해안지역에서출토된흑요석을중심으로진행되었다. 연대도, 욕지도, 상노대도, 동삼동, 송도등의 25점흑요석을분석하였는데미량성분을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47
표 6 석기의용도별분류표 ( 하인수 2011) 석기종류 생산용구 가공구 비실용구 수렵구 석촉 ( 마제, 타제 ), 석창 ( 마제, 타제 ), 첨두기 어로구 어망추, 石錘, 결합식조침 ( 축부 ), 결합식작살, 작살 채집 농경구 타제석부 ( 따비, 괭이, 곰배괭이등굴지구 ), 석겸, 유선형석기, 유견석기, 원반형석기 식료가공 갈돌, 마석, 갈판, 고석, 홈돌 ( 凹石 ), 대석, 석시, 박편석기 ( 긁개, 밀개, 찌르개등 ), 석도, 석인, 돌톱 ( 石鋸 ), 역기 목재가공 마제석부 ( 소형, 대형 ), 인부마연석부 ( 소형, 대형 ), 석착, 편평편인석부 석재가공 지석 ( 소형, 대형 ), 찰절석기, 고석, 석추 ( 송곳 ) 기타 발화석 장신구 이식, 수식, 석제팔찌 의례구 봉상석기 ( 石棒 ) 이용한성분분석결과 2개의그룹으로확인되었으나원산지에대한정보부족으로결론을보류하고있다 ( 조남철 2005) 2. 한편동삼동과범방유적의흑요석분석결과는규슈북부지역과직접관련이있음을보여주고있다 ( 高橋豊외 2003). 그리고문암리에서출토된석기의재질분석을통해석기종류에따른석재사용및시기별석재사용변화, 원산지추정에따른석재수급과정을파악한글도있다 ( 조미순외 2013). 문암리의분석사례는주변암석시료와비교분석을통해흑색셰일과같은석재는강릉이남지역에서유입되었을가능성을추론하고있다. 석기자체연구의상대적인부진은골각기와아울러생업에직접사용되는도구체계이기때문인것으로판단된다. 토기의경우일상의생활잔재로남겨지나석기나골각기는생업유형과연동되기때문에생업을연구하는한방편으로서석기의연구가이루어지는경우가많다. 또한석기의특성상시간에따른형태변이가크지않기때문에형식학적인접근을한다거나생업의직접적인도구로서생업방식에따른유형으로구분되기도한다 3. 예를들어석부를형태상의광의개념에서파악하면제작기법에따라마제와타제를포괄하기도하며 ( 박성근 2013), 용도에따라서는가공구와생산용구등으로분류된다. 일부연구자는굴지구를타제석부로분류하기도하며, 또한편에서는채집 농경구로분류하기도한다. 2 흑요석의미세조직은동일한지역에서채취되었다할지라도용암의분출시기가다르거나화학조성등이다르면다른특징을나타낼수있다고한다. 즉, 비교분석자료가풍부했을때만이원산지에대한확신을할수있다는전제에서결론을보류하고있다. 3 예를들어석제어망추의경우조기단계에서부터말기까지확인되나형태의변화가전혀없다. 즉, 조기의어망추나후기단계의어망추를형태상으로구분한다는것은불가능하다. 다만어망추의기능과관련된형태적속성인무게의차이는어로환경을반영하며, 지역별차이는확인된다. 4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3. 골각기 골각기의연구역시초보적인수준에머물고있다고과언이아니다. 재료의한계로인한출토유적의편중과 1990년대이전까지만해도도구로서골각기에대한인식이미미했던탓도있다. 석기에비해가공이용이하고탄력이나예리한날을갖출수있음에도불구하고골각기의연구는 1990년대에들어서야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당시의연구는골각기의형태적분류에따른용도와기능고찰 ( 박종진 1991; 김아관 1993; 김건수 1998), 생업과연계된분류 ( 최종혁 2001) 가주를차지했다. 표 7 신석기시대골각기종류와소재 ( 하인수 2014) 생산용구생활용구비실용구 종류 소재 어로구 결합식조침, 단식조침, 역T자형조침, 분리식작살, 고정식작살, 세형자돌구 사슴뿔, 사슴중수 ( 족 ) 골, 멧돼지견치 수렵구 골촉, 골창 사슴중수 ( 족 ) 골, 녹각 채집 ( 취 ) 사슴뿔, 사슴경골, 멧돼지 고라니견치, 뒤지개, 괭이, 아겸, 아도, 빗창농경구고래뼈늑골 가공구 첨두기 ( 중수중족골제, 척골제, 경골제, 녹각제, 조골사슴중수 ( 족 ) 골 척골 경골 뿔, 두루미소골, 제등 ), 골도, 골침, 침통, 삿바늘, 골거 ( 뼈톱 ), 원판형고래척추뼈등골기, 비형골기 ( 예새형골기 ), 숟가락 (?), 시문구 (?) 이형골기 각목문골기, 장식골기등 사슴뼈, 돌고래하악골, 고래뼈 사슴견갑골, 돌고래, 고래, 수달, 너구리이빨, 장신구 수식, 족식, 두식 ( 뒤꽃이등 ) 멧돼지견치, 독수리 ( 매 ) 발톱, 고라니견치, 새뼈 의례구 골우, 장식골기등 사슴뿔, 노루거골, 돌고래, 멧돼지견치등 최근들어제작기술에대한연구 ( 최삼용 2005, 2014), 개별기종에대한분석과제작실험 ( 하인수 2006; 김건수 2007; 이영덕 2006b; 이상규 2013) 과남부지역에국한한분석과검토 ( 하인수 2006 2009), 백령도말등 유적에서지표수습된강치와농어의해체흔분석 ( 최삼용 2001) 등이있다. Ⅳ. 생업연구 생업은포괄적의미에서 살아가기위해하는일 이라고할수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생존의구체 적인실현과정이며그방식 ( 하인수외 2009) 또는 한집단이생존하는데필요한물질의획득 으로정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49
의된다 ( 안승모 1998). 따라서생업은식료나연료와같은 1차적인생활필수품뿐만아니라그것을획득하기위한기술이나설비까지도포함한다. 즉생업을위한사냥, 어로, 농경, 채집등과같은기술과이과정에서파생된여러형태의도구도생업을위한과정또는그자체로판단한다. 수렵채집경제사회에서의생업은환경과기후에크게의존하는데신석기시대생업은획기적인환경변화와함께생업의영역도다양해진다. 즉, 이전의수렵위주의구석기시대에비해생업대상이다양해지며, 영역도바다나식물성자원으로확대된다. 생업의유형은노동과정과의례적인행위에서파생된것으로구분될수있다. 전자의경우직접적인생산과직결되는형태로수렵이나어로, 채집, 농경등이해당된다. 반면후자는생산을위한의례행위, 풍요나다산을위한기원등의형태이기때문에유형의잔재로남겨지는예는미미하다. 전자의경우라할지라도고고학적잔재로남겨진것은토기나석기, 골각기와같은도구와탄화된식물유체, 동물유체, 패각등이전부이다. 인공유물을통한편년연구에그초점이맞춰졌던그동안의연구경향은동 식물유체에대한관심부족을초래했다. 생업의파악은인공유물뿐만아니라자연환경과아울러그들의대상물이었던동 식물에대한인지에서부터출발한다는것은너무나자명한일이다. 궁산패총의발굴보고서를작성하는과정에서중국과학원고척추동물연구실의배문중으로부터동정을받아물소뼈의존재를통해현재보다훨씬더웠을것을추정한다거나사슴, 멧돼지, 복작노루등의분석을통한생업의추정은최초의예라할수있다. 한편생업의연구는농경과어로, 수렵등각각분야별로진행되어왔으며, 동물유존체와석기, 골각기등의조성을중심으로꾸준한연구를진행하고있는최종혁의일련의연구가대표적인사례라고할수있다. 또한최근들어신석기시대연구분야중에가장다양하게접근하고있는것이생업연구라고할수있다. 생업자체의연구-유형이나방법-를벗어나점유기간, 인공유물과자연유물을통한유적의성격등을추적하는연구가진행되고있다 ( 金殷暎 2006). 1. 농경 1957년지탑리 2지구에서조또는피로보이는탄화곡물과함께대형의보습과돌낫, 갈판등의존재를통해신석기시대전기단계에서부터농경이있었다고주장하였으며, 괭이농사에서보습농사로발전단계를상정하고있다. 즉, 당시궁산2 기에속하는지탑리2 지구의보습을무게나크기등으로볼때괭이보다는쟁기의초기형태로파악하였으며, 궁산패총이나서포항 1, 2기단계의괭이, 뒤지개보다는후행하는것으로판단하였다. 5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남한지역의경우 1980년대후반까지농구의형태분류에따라뒤지개농사 괭이농사 보습농사의단계를설정하였는데이역시북한지역의연구성과를크게벗어나지못한상태였다. 한편동삼동패총을시굴한셈플 (1974) 은돌괭이, 갈판, 반달모양의돌칼을근거로頭島期에소규모의괭이농사가시작되었다고주장하였다. 1980년대들어두드러지는성과는화분분석과토기바닥에서확인된볍씨자국을발견하면서농경에대한실체적접근이시작되었다는점이다 ( 손보기외 1987). 그럼에도불구하고 1990년대중반까지만해도신석기시대의생업의이해는수렵과어로가중심을이루고, 도토리등의식물자원이부수적인식량원이되었다는것이전반적인분위기였다. 당시까지만해도식물유체가거의확인되지않고도구조성을통한추론등농경에대한논의는답보상태였다고할수있다. 표 8 신석기시대주요식용작물유체 ( 안승모 2012에근거하여작성함 ) 식물유체 유적 유구명 벼 보리 밀 조 기장 피 두류 팥 기타 시료 시기 평양남경 31호주거지 동정의문 동정의문 후기전반 봉산마산리 7호주거지 동정의문 동정의문 전기후반 봉산지탑리 2호주거지?? 동정의문 동정의문 전기후반 청단소정리 2지점 4호 동정의문 동정의문 중기전반 시흥능곡동 19호주거지 팥 탄화종자 4770±40B.P.( 조 ) 시흥능곡동 15호주거지 탄화종자 4665±25B.P.( 목탄 ) 화성석교리 23호주거지 탄화종자 중기 아산장재리안강골 6호주거지 탄화종자 4550±50B.P.( 목탄 ) 아산장재리안강골 1호주거지 탄화종자 중기 옥천대천리주거지 탄화종자 동정, 연대의문중기 중산동 21지점 22호주거지 탄화종자 후기 인천중산동 21지점 22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1지점 22호주거지 (2차) 토기압흔 3740±50 인천중산동 21지점 25호주거지 탄화종자 4260±50( 목탄 ) 인천중산동 23지점 9호주거지 탄화종자 후기 인천중산동 23지점 3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3지점 4호주거지 토기압흔 4180±50( 목탄 ) 인천중산동 23지점 8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3지점 10호주거지 토기압흔 4085±25( 목탄 ) 인천중산동 23지점 13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3지점 14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3-18,346,375호수혈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1지점 20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1지점 21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1지점 23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인천중산동 21지점 26호주거지 토기압흔 후기 김포가현리패총 토기압흔 연대의문 4010±25B.P.( 토탄 ) 부산동삼동 1호주거지융기문토기 토기압흔 조기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51
식물유체 유적 유구명 벼 보리 밀 조 기장 피 두류 팥 기타 시료 시기 부산동삼동 5-1층영선동식토기 토기압흔 전기후반 창녕비봉리Ⅳ피트패층 1 탄화종자 전기전반 창녕비봉리Ⅰ피트 1호노지 탄화종자 전기후반 부산동삼동 1호주거지 탄화종자 4590±100B.P.( 조 ) 부산동삼동 1호주거지수가리1 식토기 들깨 토기압흔 중기전반 부산동삼동 1호주거지수가리1 식토기 토기압흔 중기후반 진주평거 3-1지구 28호수혈 탄화종자 4340±40( 기장 ) 진주평거 3-1지구 13호토취장 A수혈 탄화종자 4200±40( 콩 ) 진주평거 3-1지구 13호토취장 B수혈 탄화종자 중기후반 진주평거 3-1지구 13호토취장 C수혈 탄화종자 4350±25( 팥 ) 진주평거 3-1지구 61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평거 3-1지구 15호저장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평거 3-1지구 18호저장혈 탄화종자 4320±30( 도토리 ) 진주평거 3-1지구 2호주거지 탄화종자 3940±20( 기장 ) 진주어은 1지구 6호야외노지 탄화종자 4030±100B.P.( 조 ) 진주어은 1지구 1호야외노지 탄화종자 후기 진주어은 1지구 3호야외노지 탄화종자 후기 진주어은 1지구 4호야외노지 탄화종자 후기 진주상촌리 B지구 1호야외노지 탄화종자 4060±140B.P.( 조 ) 진주상촌리 B지구 3-125-3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상촌리 B지구 3-124-3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상촌리 B지구 3-114-1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상촌리 B지구 3-2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상촌리 B지구 3-8-1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진주상촌리 B지구 3-8-2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상진주촌리 B지구 2-140-1호수혈 탄화종자 후기 부산동삼동 4층 토기압흔 후기 부산동삼동교란층이중구연토기 토기압흔 후기 부산동삼동 2층무문양토기 토기압흔 말기 문암리 '11 G1 上갈색사질토 (Ⅷ층) 들깨 토기압흔 중기 고성문암리 1호주거지 들깨 토기압흔 중기,3780±50B.P. 고성문암리 8호노지 들깨 토기압흔 중기,4460±50B.P. 양양오산리C지구 1호주거지 팥? 토기압흔 조기,5804±33B.P. 양양오산리C지구중기문화층 토기압흔 침선문토기편 양양송전리 2호주거지 토기압흔 중기,4660±60B.P. 신석기시대농경의구체적인접근은부유선별과압흔분석, 규산체 ( 곽종철외 1995), 화분분석등의식물자료를확보하기위한방법이적극적으로도입되는 2000년후반부터라고할수있다. 물론 1990년대후반부터발굴조사의급증과식물유체에대한인식이확대되면서는조사과정에서탄화곡물을수습하고분석하는단계에이르게되었다. 2000년대후반부유선별 (flotation) 을통한식물유체검출등체계적으로토양을채취하고분석함으로써신석기시대뿐만아니라선사시대전반에걸친생계경제에대한논의를통해식물유체의중 5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요성이부각되었다고할수있다 ( 김민구 2008, 2009, 2010; 김민구외 2011; 이경아 2005, 2006, 2008; 이경아외 2012; 이희경 2010). 그리고 1990년대초부터일본에서진행되었던토기압흔분석법이도입되면서식물유체자료도급증하게되었다 ( 김성욱 2009; 손준호외 2010; 김민구 정유진 2010; 小畑弘己외 2011, 2012; 김성욱외 2012; 小畑弘己 2012; 조미순외 2014). 한편토기압흔분석법에의한동정의과학적근거에대한우려 ( 안승모 2012) 도있지만동삼동패총의융기문토기에서기장압흔의확인이나 ( 하인수 2011) 중부동해안지역의오산리, 문암리, 송전리유적의토기를대상으로한시기별분석 ( 조미순외 2014) 과부유선별 압흔분석 석기잔존전분분석이결합된인천중산동의사례 ( 한강문화재연구원 2012) 는신석기시대농경의실체를접근하는구체적인연구라고할수있다. 이처럼부유선별이나압흔분석등의동정을통해확인된식용식물은현재 60여개의유구에서확인되었다 ( 표 8 참조 ). 동삼동융기문토기의기장동정에대한의문을차제하고라도비봉리나동삼동영선동식토기단계인신석기시대전기에서부터기장과조의재배또는식용가능성은대부분의연구자가동의하는내용이다. 그리고중기이후조, 기장은대부분의유적에서확인되고있어공통적인양상이라고할수있다. 또한청동기시대부터본격적으로재배되기시작했다고하는팥이나두류등도확인되었다. 이상과같은식물유체의확인에도불구하고재배종과야생종의논의는꾸준히이루어지고있다. 특히압흔분석의결과로확인된동삼동융기문토기의기장압흔이야생종기장족일가능성을염두할필요도있다는주장도있다 ( 안승모 2012). 그러나진주평거동 3-1지구 13호토취장 A수혈에서조 1,185립, 기장 440립, 두류 45립이확인된점이나논란의여지는있으나고성문암리밭유구의검출사례로볼때신석기시대잡곡농경은어느정도자리를잡아가고있다고할수있다. 한편강화우도패총에서확인된볍씨자국을시작으로논의가출발된신석기시대벼농사는일산 1 지역의갈색토탄층 (4070±80B.P.) 볍씨 12립, 2지역 1지구의대화리층 (4330±80B.P.) 볍씨 10여립, 김포가현리토탄 (4010±25B.P.) 에서벼, 조등의확인과평거동 3-1지구 35호수혈에서벼 1립, 문암리 10 호야외노지아래에서탄화미 1립이검출된예를들어신석기시대중 후기한반도에벼가재배되었을가능성이제기되었다 ( 한창균외 2015). 또한대천리유적에서검출된조, 기장이외에벼, 보리, 밀, 콩의사례를들어적어도신석기후기단계에는벼농사가국지적으로나마개시되었을가능성을제기하고있다. 그러나일산지역이나가현리토탄의층위에대한의문과상부층의유입가능성등해결해야할문제가여전히남아있다. 또한대천리의경우주거지내부에서확인된안정된자료라할지라도아직까지다른지역에서명확한예가없고 2차에걸친동정결과가쌀로판명되었다할지라도 AMS연대값이기원전후한시기의값을보여주고있어벼농사에대한확신을할수없는상태이다.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53
식물유체의확인과함께남부지역중기단계가내륙으로확산되는동인을조, 기장을중심으로한농경에근거한다는주장도있다. 전기의잡곡농경은간헐적이거나지엽적인현상으로파악하며, 남부내륙지역의유적입지가곡류천충적대지에입지한점과돌따비 ( 굴지구류 ) 가빈출하는점등의예를들어경작체계를논하기도하였다 ( 송은숙 2002). 또한화전의가능성과기존채집경제에소규모의원경이포함되는단계 ( 안승모 2005) 등으로초보적인경작체계로인식하였다. 한편아직논란의여지는남아있으나문암리밭의존재는신석기시대농경에대한새로운시각을요구하고있다. 이상과같이신석기시대농경을바라보는시각은최소한중기단계에조와기장을중심으로한재배가이루어졌다는시각이지배적이다. 전기단계에비해정주성이급격히증가하면서내륙으로의확산, 대용량토기의증가, 기경구, 수확구, 제분구등석기의등장이시사하는바는분명한변화가있었음을암시한다. 다만작물의재배가계획적인지, 아니면국지적이면서소규모경작인지의여지는남아있다. 한편신석기시대인골에대한안정동위원소분석결과는시사하는바가많다. 동삼동, 대포패총, 고남리패총등 3개소유적의인골분석결과는해안유적이라는한계가있지만후기까지도잡곡의섭취가극히한정적이었다는것이다. 식물성단백질은주로주변지역의야생식물로부터섭취하였으며, 동물성단백질은동삼동이해양성어류, 고남리는육상초식동물로부터획득한것이라는결과가나왔다 ( 이준정 2011). 즉, 조, 기장등의잡곡이출토되긴하였으나신석기후기까지도여전히야생식물에대한의존도가높고잡곡의재배가생업에있어서그다지많은비중을차지하지않았을수도있는가능성을제시하고있다. 2. 어로 신석기시대조기단계에서부터이미바다자원에대해인지하기시작했으며, 어로라는생산기술이다양하게개발된다. 어로는별도의도구가필요없는소극적인방법부터도구의사용과바다자원의생태에대한인식이근간이된적극적인방법인낚시나그물등다양해진다. 한반도해안의어로형태는해당해역의환경과물고기뼈, 패류, 도구를통해확인되는데외양성, 내만성, 내만 + 외양성으로구분된다 ( 김건수 1999). 어로의연구는 2000년대들어서구체적인방법과지역적인전개, 인공유물과자연유물의결합등다양하게진행되고있다. 이전의연구는생업의한분야정도로미미하게추론되었으며, 큰비중을차지하지는않았다. 본격적인어로의연구는패총에서출토된동물유체의분석에서부터출발한다고할수있다. 일제강점기동삼동패총에서결합식낚시의침을아메리카인디언결합식낚시형태로인식하거나대형유 5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체의종동정이이루어졌으나어로의구체적인방법은제시되지않았다 ( 橫山將三郞 1933). 궁산패총의동물유체분석을진행하는등생업에대한꾸준한연구가진행되었던 1980년대이전까지북한지역에서는신석기시대어로의구체적인형태들이제시되기도한다 ( 서국태 1986). 서포항, 금탄리, 남경의어망추의사례를들어자망과지인망을추론하거나작살, 찔개살, 낚시, 흘리개등의도구를언급하였다. 또한서포항 4기층의고래뼈 ( 길이 31cm ) 를노로추정하여배의존재를언급하기도하였다. 한편남한지역에서는 1963~4년에시굴조사되었던동삼동패총의동물유체가 Sample(1974) 에의해보고되었다. 이후셈플에의해보고된분석자료는가네코히로마사 ( 金子浩昌 ) 에의해이루어진것이밝혀졌는데 ( 金子浩昌 中山靑隆 1994) 가네코히로마사는남해안지역의패총동물유체에대한꾸준한관심을보이며많은동정을실시했다. 1990년대후반국내연구자에의한분석이이루어지기전까지수가리, 연대도, 동삼동등많은동물유체분석이그에의해진행되었다. 이후에안덕임, 김건수, 최종혁, 이준정, 김은영등의연구자에의해동물유체가분석되고그에따른생업이논의되고있다. 안면도고남리패총패류의경우해산패와육지달팽이로구분하여서식처와계절성을밝힌성과는당시로서는상당한진전이었다. 또한참돔의성장선분석을이용한어획기의추정등다양한방법이도입되기시작했다 ( 안덕임 1993). 그리고신숙정 (1994) 은당시까지조사되었던남해안지역패총유적의입지와주변자원영역, 동물유체를통해계절성과정착을논하였다. 김건수 (1999) 는그동안발굴조사에서확인된어로구와동물유체를접목시켜한반도지역의신석기시대이후어로문화의흐름을파악하였다. 어로문화의집성은 2006년동삼동패총전시관에의해단행본이발간되면서시기별, 지역별어로양상이개괄적으로파악되었다고할수있다 ( 동삼동패총전시관 2006). 한편이준정 (2002) 과김은영 (2006) 의연구는동물유체동정자료를바탕으로생업변화양상이나패총유적의점유방식을추정하고있다. 표 9 신석기시대주요패총출토어류 ( 는주체종 ) 유적명 남해안 서해안 어류 연대도상노대도 상노대도안도가거도여서도동삼동수가리세죽비봉리까치산모이도소연평도노래섬가도상리산등 가 A' 상어류 가오리류 숭어 대구 농어 능성어 민어 조기 참돔 감성돔 돌돔 쥐돔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55
어류 유적명 어름돔 연대도 상노대도상리 상노대도산등 남해안 전갱이 서해안 안도가거도여서도동삼동수가리세죽비봉리까치산모이도소연평도노래섬 가 방어 다량어류 자바리 고등어 삼치 혹돔 쥐치 복어류 쏨뱅이 옥돔 잉어 양태 넙치 도미과 가도 A' 개별어로방식에대한연구도꾸준히증가하고있으며, 필자는잠수어로 ( 이영덕 2006b) 나어망추의무게와유적주변의지형에근거하여건강망의방식을추론하기도하였다 ( 이영덕 2006a). 또한결합식낚시의연구 ( 김충배 2003), 어망추를통한어로의연구 ( 김경규 2003), 패추를이용한쭈꾸미낚시 ( 김건수 2005), 서해안지역독살의가능성 ( 소상영 2012), 골제자돌구의제작방법과용도를실험고고학적방법과사용흔분석을통한해석 ( 이상규 2013) 과단일기종으로서작살에관한연구 ( 이상규 2014) 등세분화가이루어지고있다. 지금까지신석기시대의어로형태를파악할수있는유적은대체로해안이나도서에위치한다. 내륙의경우강안에위치한암사동이나미사리, 금탄리, 송죽리, 오진리암음등에서소형의석제어망추가확인될뿐다른어로구는확인되지않았다. 해안지역에서확인된유적은대체로등수심 20m 내의연안에위치하며, 일부남해안지역의유적은 50~100m 내외의해저수심대의원도권에위치한다. 일반적으로재래적인어로방법은채집어로, 맨손어법, 타격어법, 방축어법, 반두어법, 籠漁法, 어전어법, 자돌어법, 궁시어법, 釣漁法, 망어법등이있다. 이중잔존유물로추정이가능한어법은자돌구류에의한자돌어법, 궁시구류에의한궁시어법, 조어구에의한조어법, 망어구에의한망어법등이다. 지금까지한반도에서어로의결과물로남겨진물고기뼈는 표 9 와같다. 참돔이대부분의유적에서주체종이며, 대구, 농어, 가오리류, 상어류, 돌돔, 쥐돔, 감성돔, 어름돔등의돔류와복어류, 방어, 다량어류등수십종이넘는물고기뼈가확인된다. 남해안지역에서는상어류나참돔, 다량어류등이많은비중을차지하는반면, 서해안은참돔과아울러노래섬과가도에 5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서는복어류가많은비중을차지한다. 또한소연평도나모이도패총에서는다른물고기뼈에비해가오리류가월등히높은비중을차지한다. 남부지방에국한되기는하나조 전기단계에서는참돔 상어 다랑어등이주체를점하는등외양성어업이성행하나, 중기부터는외양성어업에서내만성어업이발달해외양성 + 내만성어업으로의변화와함께쇠퇴하는경향을보이는것으로파악하고있다 ( 최종혁 2012). 지엽적인양상이기는하나노래섬 가 나가도 A, 고남리, 수가리등지의물고기뼈부위출토량차이는어로의생산과소비라는차원에서접근필요성을느끼게한다. 이들유적에서는물고기뼈중머리뼈의개체가월등히많고등뼈와같이몸통에해당되는부분의뼈는간헐적으로만확인되었다. 즉, 소비지와생산지가다를가능성이있는것으로파악된다. 동일한지점에서해체와소비가이루어졌다면부위별고른분포를보이는것이당연하다. 하지만골각기의제작을위해의도적으로사슴과같은육지동물의사지골부위만을내륙에서반입해온것처럼물고기의머리부분을해체한후몸통만을건조하거나염장처리해서내륙으로반출했을가능성도있다. 한편내륙지역의경우하천에서어로가행해졌을개연성은충분하나어망추이외에물고기뼈와같은유기물은남아있지않다. 내륙유적에서확인된어망추는해안지역에서확인된어망추에비해크기가작고무게또한가볍다. 송죽리유적은중심무게가 38g, 지경리 4호주거지 98.0g, 지경리 6호주거지 98.1g, 지경리 9호주거지 67.1g, 오진리암음 11.41g 등 100g를넘지않는작은자갈돌을이용하였다. 오진리암음의경우다른유적에비해매우작은자갈돌을사용하였는데반두로추정한송죽리의어망추와는다른방법의그물이사용되었던것으로보인다. 또한동해안지역인지경리나초당동은석호가주무대로이용되었을것으로보이는데강안지역보다는좀더무거운어망추를사용했으며, 좁은물길에서사용되는반두보다는지인망과같은그물을이용해서공동어로를했을가능성도있다. 내륙지역의어로방법은어망추이외에다른유물이출토되지않아재래적인방법으로추론할수밖에없는실정이다. 내륙지역에서도기본적으로해안지역에서행해졌던어로방법이이용되었을것으로추정되며, 넓은수역에서는불가능한뜰채어법, 독초어법, 충격어법, 물푸기어법등이추가되었을것으로판단한다. 한편반구대암각화의조성시기론 ( 하인수 2012) 과도일맥상통한발굴이 2010년에조사된울산황성동유적이다. 전기문화층 ( 기원전 4,000년전후 ) 에서고래견갑골과미추에골제작살이박힌채로출토되었는데신석기시대포경의가능성을반증하는자료라할수있다. 물론작은작살로고래를잡을수있었겠는가? 하는의문은여전히남아있으나반구대암각화의작살에찔린고래의예처럼직접포획은하지않았다할지라도해체과정이결과일가능성도있다. 고래의포획은만을따라올라왔거나길을잃거나병약해진고래가해안으로올라왔을때고래의혈우병등을이용해서포획했을가능성이많을것으로판단한다 ( 최종혁 2012).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57
3. 수렵 수렵은구석기시대부터이용된보편적인식량획득방법이다. 방법의차이는있으나일반적으로 포획된동물은고기의섭취이외에남은뼈와가죽을이용해서일상생활에필요한도구를만들었다. 표 10 신석기시대주요유적출토동물뼈 유적명 남해안동해안서해안 내륙 동물뼈 연대도 욕지도 상노대도상리 상노대도산등 동삼동 영선동 수가리 비봉리 목도 구평리 북정 안도 가거도 여서도 돌산송도 세죽 서포항 농포동 궁산 까치산 모이도 소연평도 노래섬 가 범의구석 육지동물바다동물 호랑이 표범 말사슴 사슴 복작노루 노루 사향노루 멧돼지 집돼지 소 물소 삵괭이 ( 속 ) 개 ( 과 ) 늑대 여우 너구리 수달 산달 오소리 말 곰 큰곰 고양이 ( 속 ) 메토끼 등줄쥐 집쥐 청서 바다사자 강치 물개 바다표범 고래 돌고래 수염고래 작은곱등어 5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신석기시대는구석기시대와달리사냥대상이중소형동물이나날짐승, 바다동물로바뀌게된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활에의한사냥이시작되기는하나보편적이고정형화된것은신석기시대부터이다. 즉근거리몰이사냥위주에서원거리사냥으로변화를보인다. 신석기시대수렵을단일주제로연구한사례는없는것으로파악된다. 생업의한부분으로언급되었거나재래적인수렵방법 ( 김광언 2006) 을비교하여인공유물및자연유물과의추론등간헐적으로다뤄진분야이다 ( 안승모 1998; 이영덕 2011). 대표적인수렵구가석촉과석창이라는한계때문에도구체계로서형식분류가주를이루며, 일본죠몬시대 ( 繩文時代 ) 의오또시아나 ( 陷し穴 ) 와같은유구가아직확인된사례가없기때문이기도하다. 청동기시대함정의사례를들어신석기시대에도함정의존재가능성을언급하기도하였으나 ( 김도헌 2008) 여전히신석기시대수렵은패총을중심으로출토된뼈와석기, 골각기등의인공유물을통한추론의단계이다. 지금까지신석기시대유적에서확인된포유류는육지동물 30여종과바다동물 8종내외이다 ( 표 10). 육지동물의우제목동물로는말사슴, 우수리사슴, 누렁이, 고라니, 노루등의사슴과동물과사향노루과, 소, 물소등의소과동물, 멧돼지, 호랑이, 표범, 오소리, 산달, 수달, 곰, 늑대, 개, 여우, 삵괭이등식육목동물이확인되었다 4. 육지동물가운데사슴과와멧돼지가차지하는비중이가장많고대부분의유적에서고른분포를보이며출토되었다. 다른짐승의경우전체동물수에비해차지하는비중이 1% 도되지않아식량원으로서큰관심의대상은아니었던것으로보인다. 다만고기의양이많지않아식량원으로서가치가떨어지는산달, 수달, 오소리등은가죽을이용하기위해의도적으로포획했을가능성이있다 ( 안 승모 1998). 맹수류인호랑이나표범, 곰등의뼈도확인되는데적극적인포획보다는의례적인목적으로사용되었을가능성도있다 ( 金子浩昌 2008). 비봉리에서확인된호랑이뼈는경골편 2점으로양단이타격으로인해깨어진흔적이확인되며, 동삼동에서도척골, 중수골, 중족골, 지골등이확인되었다. 전체골격중치아나사지골에한정되는양상은곰뼈에서도동일하게확인되는데골단에해체흔이남아있는것으로보아포획지에서분배되고유적으로반입되었을가능성이크다. 한편사슴과의복작노루인고라니는내만지역의패총유적에서주로확인된다. 노루는서포항이나농포동등동북지방에서주로잡혔는데서포항유적에서는뼈수 40%, 최소개체수 30%, 농포동유적에서는뼈수 42.5%, 최소개체수 33.3% 로가장많은비중을차지한다. 그외에구평리나여서도, 궁산, 까치산등에서확인되나소량이다. 사슴과는외해의섬에위치한유적을제외한거의모든유적에서포획했다고해도무리가없을것같다. 서식처로서적합하지않은여서도와같은외해의유적 4 간헐적으로쥐나뱀등의뼈도확인되는데사냥보다는패각층에들어가서자연사한것으로보는견해가대부분이다.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59
에서출토된사슴뼈는골각기의이용을위해이동되어진것으로보이는데, 동삼동패총역시패총이위치한영도가아닌다른지역에서포획된것이이동된것으로파악된다. 동삼동의경우골각기로제작된것을포함하여두개골이나척추골의비중이낮고중수골, 중족골, 척골, 뿔등의비중이높은이유는영도이외의지역에서포획, 해체된다음이용률이높은부위만이패총지역으로반입되었기때문으로생각된다. 사슴과다음으로고른분포와비중을보이는것이멧돼지로범의구석유적에서는뼈수에서 38.6%, 최소개체수 19.9% 를차지한다. 멧돼지는무리를지어이동하며, 성질이사납기때문에쉽게사냥할수있는대상이아니다. 서포항유적에서활촉이박힌채로다리뼈가출토되었으나활만을가지고포획하지는않았을것으로보인다 5. 이외에동삼동과비봉리등지에서소뼈와물소뼈가확인되었다. 물소뼈는궁산유적에서 2마리분이출토되었으며 ( 김신규 1970), 기후의온난화에따른서식환경의변화로추정된바있다. 그러나물소뼈의동정에대한의문이제기되고 ( 안덕임 1993) 공반된다른짐승뼈의종류에서도이를뒷받침할만한근거가미약하였다. 그러나목도패총과동삼동패총에서거골, 종골, 지골등이확인됨에따라신석기시대전기단계에는물소가서식하고있었음이어느정도확실하다고할수있다 ( 金子浩昌 2008). 소뼈역시기존수가리패총의지표에서확인되었으나층위상불분명한점이있었다. 그러나동삼동과비봉리등지에서확인됨에따라물소와같이신석기전기단계에서식하였을가능성이높다. 이상과같은육지동물의사냥이외에도사육의흔적이확인되는데대표적인짐승이개와돼지이다. 개는전기단계의서포항1 기층에서부터확인되며, 거의모든유적에서확인된다. 서포항유적에서는전체개체수중 7.96%, 농포동 8.33%, 범의구석 7.4%, 궁산 1.4% 로북한지역에서개가차지하는비중은 10% 를넘지못하고있어원시적인사육단계임을알수있다. 개체크기로볼때동북지방의개는중대형인반면, 비봉리등남부지방에서발견된개는중소형이다. 일반적인관념에서개는수렵이나애완, 식용등을위해사육되었던것으로판단한다. 서포항 1기층의 9호주거지와 2기층의 26호주거지에서는죽은채로그대로확인되어 ( 서국태 1986) 철기시대늑도유적의순장견예와같이애완용으로사육되었을가능성도있다. 그러나대부분의유적에서개체를이루지못하고산발적으로확인되고있어폐기의원인은식용으로이용했을가능성이높은것으로판단하고있다 ( 김건수 2011). 개와비교하여돼지는좀더늦은시기에서부터사육되었는데후기단계에해당하는서포항4기층과범의구석Ⅰ문화층에서확인되고있다. 집돼지의비율이서포항은 0.63%, 범의구석은 3.7% 에그치고있으며, 범의구석에서출토된집돼지뼈에는멧돼지뼈의표징이채가시지않은가축화과정 5 활사냥으로대형동물의살상이이루어지는경우는활촉에독을묻혔거나견갑골과상완골사이의급소를맞혔을경우이다. 6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의과도기적인양상이남아있다 ( 서국태 1986). 또한범의구석Ⅰ문화층에서는여전히멧돼지뼈의비중이 29.63% 를차지하고있어아직까지는멧돼지의사냥이선호되었으며, 사육이아직까지는야생동물을대체하지는못했다 ( 김신규 1963). 이외에궁산유적에서출토된물소뼈의뿔의길이가짧은점을감안하여집짐승으로전환되는과정으로파악하기도하였다 ( 김신규 1970). 신석기시대수렵대상물을획득하는행위, 즉수렵방법은앞에서언급했듯이잔존물로남아있는창과활이가장근접할것이다. 이외에재래적인수렵방법인덫사냥, 함정사냥, 섶사냥, 그물사냥, 짐승을이용한사냥등을유추할수있다 ( 이영덕 2011). 짐승을이용한사냥은서포항이나여서도의개뼈의존재를통해유추가가능하다. 부위별로산발적으로출토되고있어식용의가능성이제기된바있지만 ( 김건수 2011) 여서도의예처럼동반견이었다면사냥에도적극적이든소극적이든이용되었을가능성이있다. 창사냥이나활, 덫, 함정등은공동작업이필요한사냥방법이며, 그물사냥의사례는모이도패총에서기러기목의뼈가다양한부위에걸쳐확인된점에착안하여유추하였다 ( 이준정외 2007). 필자는맹수류나고래의포획등은적극적인사냥보다는맹수가갖는경외의대상과같은상징성으로죽은고기를가져왔거나내만깊숙이들어온고래무리를쫓거나해안에밀려온것을포획하는소극적인사냥으로파악한바있다 ( 이영덕 2011). Ⅳ. 맺음말 최근번역본으로출간된 일본신석기시대생업과주거 ( 하야시켄사쿠지음, 천선행역, 사회평론 ) 을주마간산으로보면서먹먹함을느꼈다. 발굴조사와 1차자료에穿鑿한필자의모습을발견하였다. 연구사를정리한다는것이그동안진행되어온과정과내용의현상을옮기는것이라고생각했던그동안의노력을무색하게하였다. 애초연구사의정리를분야별로나눠서연구과정과성과를각각살펴보는정도로생각했다. 그러나취락과관련된개별유구 ( 주거지, 적석노지, 무덤등 ) 나교류, 그리고신석기시대연구에서민감하게받아들일수밖에없는고환경연구과정과흐름에대해서는언급조차도하지못했다. 그동안연구된맥락을이해하고개념이정리된상태에서해당분야의연구사를정리하고자하였으나철저하게필자의게으름으로발표자료집에는게재하지못했다. 동삼동패총의발굴조사를기점으로하면한반도에서신석기시대연구가시작된지 80여년이지났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이영덕 61
다. 2000년대이후 1차자료의급증과그에따른연구자가증가하고다양한방법과연구결과물이생산되는것은다행한일이라고할수있다. 특히자연과학의응용, 실험고고학적인접근, 민족지의적용등은개인적으로는상당히고무적이라고판단한다. 필자역시신석기시대를전공으로삼겠노라고하면서처음접한글들은관념적이면서이해하기어려운부분이많았던것으로기억한다. 많은신석기연구자가지적하듯이토기의용어는아직도혼선의연속으로보인다. 문양의다양화가내포하는개별성과집단성을간파한다는것은至難한일일지도모른다. 그럼에도불구하고문화권의개별성과집단성은분명구분되어야한다고생각한다. 아직신석기토기의소지역성이나지역간연동의연구는초보적이다. 토기의압흔이나석기의전분, 지방산분석등은자칫지엽적일수도있으나꾸준히성과가집성되면농경의형태가지역적인지아니면전반적인양상인지에대한답을제공할수도있다. 또한실험고고학적인접근이나민족지의적용이당시에꼭그러했다는답을얻을수는없다. 다만비슷한환경과제반조건을통해유추할뿐이다. 이제막성숙기에접어든한국신석기연구는남겨진물질자료에서얻을수있는답의한계를넘어선전위적인변화가필요한시점이아닌가생각한다. 6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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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68-93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이기성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고고학사 1. 양적인성장과연구경향의변화 2. 연구의흐름 1) 일제강점기의선사고고학 2) 해방이후 50년대의고고학 3) 연구의여명기 - 1960년대의고고학 4) 정리의시대 - 1970년대의고고학 5) 연구의활성화 - 1980년대의고고학 6) 청동기에서토기로 - 1990년대의고고학 7) 양적인성장에서질적인성장으로 - 2000년대의고고학 Ⅲ. 앞으로의과제
Ⅰ. 들어가며 한국에서고고학연구가시작되고일제강점기를포함한다면 100년, 일제강점기를제외한다고하더라도 70년의시간이흘렀으며, 그기간동안과거에대한우리의지식은크게늘어났다. 긴기간동안의연구흐름속에서한반도에석기시대가존재한다는사실이확인되고, 석기시대는다시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로구분되었으며, 이후한국의독자적인시대명칭인초기철기시대가설정되기도하였다. 연구내용도당초에는청동기시대의문화적내용을규정하는작업에서이제는세부적인문화요소에대한개별적인검토까지이르렀으며, 연구대상지역역시남한을벗어나중국동북지역, 연해주지역까지시야에넣고있다. 지금까지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발굴된유적은 2,000여개소를넘었으며연구논문역시 1,000여편이상이발표되었다. 1960, 70년대의연구논문들은지금의고고학적지식으로본다면잘못된내용의것들도있으나, 당시의고고학자료를대상으로도출해낸가장합리적인시각이었으며, 결국이와같은다양한연구들의축적으로지금의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이만들어진것이다. 그렇기에이전의고고학연구를다시금돌이켜본다는것은지금의한국고고학의성격을올바로이해하기위한기초적인작업이다. 본발표에서는제한된지면으로인해개개논문의연구성과를모두언급하기는불가능하기에주요연구의흐름만을간단히개관하도록한다. 그렇기에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는연구의많은수가언급되지못한점, 양해를부탁드린다. 또한주지하다시피 1970년대이후, 특히선사시대고고학의경우북한고고학은남한고고학과전혀다른방향으로발전해왔으며, 남한의고고학과같은범주로묶어서그연구의흐름을살펴보기는어렵기에본발표에서는북한고고학은제외하고남한고고학만을대상으로한다. Ⅱ.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고고학사 1. 양적인성장과연구경향의변화 해방이후지금까지한국고고학은비약적인양적성장과함께연구영역의확장을경험해왔으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69
며, 이러한경향은 1990 년대부터두드러진다. 아래는지금까지조사된유적중청동기시대와초기 철기시대의유적수를정리한것이다. 표 1 시대별발굴유적수의변천 ( 유적수 /%) 연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전체유적 1951-1955 0/0 0/0 6 1956-1960 3/20.0 1/6.7 15 1961-1965 22/35.5 4/6.5 62 1966-1970 18/19.8 3/3.3 91 1971-1975 31/25.0 9/7.3 124 1976-1980 33/21.2 11/7.1 156 1981-1985 41/16.1 14/5.5 254 1986-1990 46/16.2 19/6.7 284 1991-1995 97/17.2 11/1.9 565 1996-2000 356/23.9 38/2.6 1488 2001-2005 748/26.5 119/4.2 2825 2006-2008 518/24.3 70/3.3 2128 합계 1913/23.9 299/3.7 8002 그림 1 시대별발굴유적수의추이 ( 건수 ) 2008년현재까지발굴된유적수는총 8,000여건에, 청동기시대유적 1,913개소, 299개소로전체의 23.9%, 3.7% 를차지한다 1. 이러한비율은전기간을걸쳐조금씩차이를보인다. 특히 1960년대전반청동기시대유적이상대적으로높은비율을보이는것은당시활발하였던대학박물관에의한주거지와지석묘조사때문이다. 그외대부분의시기는 20% 내외의비율을점하고있는데, 1990 년대이후중세유적의발굴건수가증가하는등, 발굴유적의시대범위가확장됨에도청동기시대의유적이 25% 내외를차지하는것은청동기시대유적의발굴건수가지속적으로증가하고있음을보여주고있는것이다. 다음은청동기시대를다룬연구논문을대상으로연구경향이어떻게변화하였는지를살펴보도록한다. 아래의표와그래프는기본적으로청동기시대를대상으로한논문만을대상으로하였으나일부초기철기시대의논문도포함되어있으며, 발굴개보, 총설등을포함하면 1,000여편이상이되나본 1 발굴건수의정리는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제공하는발굴연표 (http://portal.nrich.go.kr/kor/excavationchron ologyusrlist.do?menuidx=566) 를기본으로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발굴연표는현재 2008년까지의조사성과가정리되어있으며, 연차발굴은매년 1건씩으로기록되기때문에실유적수와는차이가있을수있다. 또한초기철기시대유적은발굴보고서에철기시대로기록되어있는유적도포함되어있어일부원삼국시대의유적도포함되어있을가능성이있다. 7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표 2 시대별연구경향의변화유물 주거지 취락 분묘 편년 생업경제 사회상 대외관계 계 1951~1960년 3 3 1 7 1961~1970년 13 1 11 2 1 2 30 1971~1980년 23 2 8 3 2 3 2 43 1981~1990년 54 2 1 36 1 3 1 4 102 1991~2000년 23 4 2 13 3 10 9 6 70 2001~2010년 88 23 24 37 24 27 20 8 251 2011년 ~2015년상반기 53 11 19 17 3 14 12 6 135 계 257 43 46 125 37 57 47 26 638 그림 2 시대별연구경향의변화 발표에서는발굴개보, 총설등은제외하였다 2. 연구논문의수는지속적으로증가하는경향을보여주나, 그중 1980 년대논문의급증이눈에띈 다. 연구경향으로는유물과묘제연구가전시대를걸쳐다수를차지하고있으며, 1990 년대이후 2 논문의집성은 1990년까지는 한국선사고고학사( 최몽룡외 1992) 등여러문헌을참고하였으며, 1991년이후는 한국고고학보, 한국상고사학보, 영남고고학, 호서고고학, 호남고고학보, 고고학, 강원고고학보, 선사와고대, 야외고고학 등학보를대상으로하고학위논문은제외되어있다. 이후단행본발간시에는학위논문등을포함해문헌전체를망라해정리할것이다.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71
취락, 생업경제, 사회상에관한연구가점차증가한다. 1990 년대이후다양한주제의연구가정착되 기는하지만아직까지유물자체에대한연구가상당수를차지하고있음을알수있다. 2. 연구의흐름 다음에서는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의연구흐름을일제강점기, 해방이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이후로구분해서살펴보도록한다. 해방이후청동기시대및초기철기시대연구의흐름에서획기로볼수있는것들은대학박물관협회발족과서울대고고인류학과개설 (1961년), 한국고고학개설 발간(1973년), 송국리유적의발굴 (1975년), 신고고학의수용 (1980년대), 발굴법인의설립 (1994년), 청동기시대조기의설정 (2000년), 한국청동기학회발족 (2007) 등을들수있다. 물론이외에도많은중요한유적발굴, 논문등이있었으나, 본발표에서는편의상 10년단위로구분하여연구의흐름을살펴보도록한다. 1) 일제강점기의선사고고학 20세기초반부터시작된한반도의고고학조사당초에는석기시대의존재가인정되지않았다. 당시는신화를포함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 関野貞 1904) 로시대를구분하여, 선사시대는전혀언급되지않았다. 이후몇차례의조사이후 선사시대 삼국시대 신라통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 関野貞 谷井齊一 栗山俊一 1909) 로시대를구분하여선사시대를설정하기는하였으나아직구체적인문화내용은언급되지않고있다. 본격적인석기시대조사는 1910년경술국치이후도리이류조 ( 鳥居龍蔵 ) 에의한것으로, 당시지리적으로인접한만주, 일본에서이미석기시대의존재가확인되었기에한반도에서석기시대가존재할가능성이상정되었다. 이후수차례에걸친도리이류조의조사로한반도전지역에서석기시대유물이확인되었으며, 그러한조사결과를통해도리이류조는한반도의석기시대를다음과같이해석하였다. 석기시대는토기를기준으로 A와B 두종류로구분되는데, A는점토에모래가섞인태토에수날법으로만들어진소소 ( 素燒 ) 의것으로, 얇은기벽 ( 薄手 ) 에호 ( 壺 ), 접시 ( 皿 ), 병 ( 甁 ) 등의기종이있다. 문양은거의없으며, 있다하더라도구연부에기하하적문양이일부시문되거나할뿐으로, 파수가부착되어있는토기도있다. B는단단하게만들어졌으며, 소소 ( 素燒 ) 에두꺼운기벽 ( 厚手 ) 을가지고있다. 호 ( 壺 ), 접시 ( 皿 ), 병 ( 甁 ) 등의기종이있으며, 대개기하학적문양이시문되어있는유문양식으로, 7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태토에는운모가들어가있다. 간혹저부에나뭇잎눌린흔적이보이며, 파수부토기는없다. 고배는 A와 B에모두존재한다. 두종류의토기와함께출토되는석기는거의동일하지만, A 토기는주로산지에있는유적에서확인되며, B 토기는주로해안또는도서지방에위치하며패총을남긴집단의유적에서확인된다. 그렇기에 A 토기를사용한집단은수렵생활, B 토기를사용한집단은어업을주된생활로한것으로보았다 ( 鳥居龍蔵 1925). 이러한인식을바탕으로도리이류조 ( 鳥居龍蔵, 1920) 는한반도의역사를 석기시대 ( 유사이전 ) 원사시대 ( 삼한시대 ) 역사시대 ( 삼국시대 ) 로시대를구분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원사시대후기가삼한시대에해당되며, 원사시대전기는 역사에전해내려오지는않으나, 이시기의유물과유적은조선의각지에있는데석기시대에서금속기시대로이행 하는최초의단계로이야기하고있다. 도리이류조에이어 1920년대부터한반도선사고고학을담당한후지타료사쿠 ( 藤田亮策 ) 의선사시대이해역시크게다르지않았다. 1930년대의웅기송평동유적, 연길소영자유적등의석기시대조사와김해패총조사결과를포함해후지타료사쿠 ( 藤田亮策 1942) 는석기시대 금석병용시대 낙랑대방시대 삼국시대의 4 시대로구분하고, 신석기시대에있어서처음으로급격한발전을보여주며, 그말기에있어특색의문화상을보여준다, 며신석기시대로석기시대전체를이야기하고있다. 후지타료사쿠는석기시대토기를후수무문토기, 즐목문토기, 단도마연토기, 압형및타형문토기로구분하였다. 그리고이중후수무문토기만이한반도의토착적문화요소이며그외즐목문토기, 마제석기, 채문토기, 신라소식토기등의문화요소는모두외부로부터전파되어온것으로보았다. 선사시대문화요소의기원을외부에서찾고자하는시각은이때부터시작되었다고할수있다. 이러한후지타료사쿠의시대구분이도리이류조와가장큰차이를보이는것은 금석병용기 를설정한것이다. 1907년처음발견되고, 1920년조선총독부에본격적으로조사된김해패총의발굴결과, 금석병용기 가설정되고, 원시적인석기시대에살고있다가발달된한 ( 漢 ) 의금속기문화가한반도에강제로이식된단계로해석되었다. 그림 3 일제강점기조사된무문토기 ( 藤田亮策 1925, 第 18 圖 ) 그림 4 일제강점기조사된유문토기 ( 藤田亮策 1925, 第 19 圖 )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73
즉일제강점기에는한반도내석기시대의존재를확인하였지만신석기시대와청동기시대의구분이이루어지지못하였고, 금속기시대로의이행역시문화적인발전이아닌선진문화의강제이식에의한것이라는시각이일반적이었다. 이러한해석은물론당시고고학의학문적수준의한계에의한것이기도하나, 그러한인식이결국일제강점기식민사관의타율성론의근거로이용되었다는점은분명하다고할수있다. 이시기선사시대에관한한국인연구자의논문으로는손진태 (1932), 한흥수 (1935, 1936) 등이있는데, 특히한흥수는금석병용기에대해중국의영향으로인한금속문화로의이행은인정하고있지만, 당시일본인연구자들이한족의식민지배의결과로보았던겻과는달리문화적인교류로해석을하였다. 그러나이러한인식이해방이후로이어지지는못하였다. 2) 해방이후 50년대의고고학 1945년의해방이후한국전쟁을거쳐 1950년대까지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대한연구는거의이루어지지못하였으며, 석기시대및금석병용기의개념은그대로이어졌다. 경주구정리에서동검, 동모, 마탁, 동령, 철제품과함께마제석부가일괄로출토된것을금석병용기의유물로칭하며 석금과도기의양상, 낙랑문물과토착문화와의관계또는그유물자체와후에신라를세운사람들과의관계등의구명에일보일보우리를이끌어가고있다 ( 김원용 1952, p13) 라고이야기하고있다. 또한한국의선사시대에관해쓰여진가장최초의글에서도석기와함께청동기, 철기가같이등장하는양상을 우리나라史前社會가얕은石器時代의文化段階에오래도록머물러있는동안에, 일찍中國本土에서는이미靑銅器使用의最盛期를지나鐵器時代로들어간高度의文化가發達되어있어서, 이것이漢民族의對外活動에依하여四隣에波及하여옴에따라한꺼번에吸收하게되었으므로自然石器와함께銅器와鐵器까지세가지를同時에倂用하는金石竝用期時代가이루어지게된것이다 ( 김재원 1959, p56) 고말하고있다. 이당시까지는청동기와철기가순차적으로등장한다는것이아직밝혀지지않았기때문에금석병용기의역사적의미, 즉식민지기라는내용을제외하고문화의파급이라는점에중심을두고있는것이다. 금석병용기 라는용어를제외한다면당시의고고학적수준으로서는어쩔수없는현상이었을것이다. 그외당시남한에서는일부지석묘에대한단편적인보고만있을뿐으로, 해방이후 1950년대북한고고학에서도유호를중심으로많은수의유적발굴이실시되고여러연구논문들이발표된것과는매우대조적이라고할수있다. 7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3) 연구의여명기 - 1960년대의고고학 1960년대는비단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뿐아니라한국고고학이본격적인연구의틀을만들기시작한시기이다. 1959년고려대학교박물관의웅천패총조사 ( 김정학 1967) 를시작으로그이전에는국립박물관만이담당하였던유적발굴조사에대학박물관이참여하게되고, 이후 1961년대학박물관협회가만들어진후에는대학박물관에의한유적발굴조사가본격화된다. 또한같은해서울대학교에고고인류학과가만들어지는등국립박물관위주의고고학에큰변화가일어난다. 이때부터본격적으로청동기시대와초기철기시대에대한연구가시작되는데, 당시의연구초점은당연히청동기문화의기원을확인하는것과시대구분에관한것이었다. 주된연구대상은청동유물이었으며, 그외에도석기, 토기등에대한단편적인연구와함께대학박물관에의한주거지발굴이시작되었다는점이특징적이다. 김원용 (1961) 은한반도의청동기문화의기원을요녕지방에존재하던석관묘를동반하는비중국계청동기문화가파급된것으로보고, 연대는기원전 6-5세기로설정하였다. 이주장은이후가장기본적인인식이되었다. 이시기는이외에도세형동검, 동경등청동유물에대한연구가주를이룬다 ( 윤 무병 1966; 김양선 1964; 한병삼 1968 등 ) 또한이당시에최초로무문토기에대한구체적인검토가실시된다. 김원용 (1968) 은무문토기를기형별로구분한후,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남한의네지역으로구분하고, 무문토기, 반월형석도, 단인석부, 거석문화의기본적특성으로통일되어있다고지적하였다. 이것은무문토기문화의고고학적내용을확인한것으로볼수있다. 그외에도김정학 (1967) 은조질무문토기를한강유역의청동기시대전기의것으로보고있으며, 임병태 (1969) 는무문토기를전기, 후기로구분하는등무문토기내에서의시기구분을시도하고있다. 한국연구자에의해최초로조사된주거지인수석리유적 (1961년발굴, 김원용 1966), 명일리 (1961년발굴, 김정학 1962), 가락리 (1963년발굴, 김정학 1963), 역삼동 (1966년발굴, 김양선 1968) 등지금도잘알려져있는주거유적들이그당시발굴되었으나, 소규모에불과하였고주거지의구조와유물출토상황에대한간단한보고가일반적이었다. 특징적인것은이시기수석리, 옥석리주거지출토목탄에대해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실시하여각각기원전 2340±120 B.P., 2230±280 B.P( 수석리 ) 와 2590±105 B.P.( 옥석리 ) 의연대를얻었다는점이다. 기존에이야기되던청동기문화연대폭에포함되기때문에새로운연대관을제시한것은아니지만자연과학적인방법의사용이매우이른시기부터시작되었다는점은주목할만하다. 초기철기시대역시청동기, 철기유물의발견은이어졌으나구체적검토는보이지않는다. 1960년대의연구에있어서특기할것은 한국문화의고고학적연구 ( 김원용 1964) 의발간과국립박물관에서발간된 한국지석묘연구(1967) 를들수있다.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75
한국문화의고고학적연구 는단행본은아니지만최초의한국고고학에대한개설로서, 이후잘알려진 한국고고학개설 로이어진다. 이글이가지고있는가장중요한의미는최초로종합적인시대구분을시도하고있다는점이다. 구석기시대및중석기문화 신석기시대 청동기문화 초기철기문화 김해문화 삼국고분문화 로시대를구분하고있어, 청동기문화와초기철기문화를구분하고있는데, 당시의시대구분개념은지금우리가알고있는것과는조금다르다. 김원용은 1960년대초반까지의북한연구성과를간접적으로인용하면서북한지역에는각형토기, 반월형석도세형동검이아닌동제품이확인되는청동기시대, 즉신석기시대이후, 낙랑시대이전의시대가존재하기는하지만그것이남한에는존재하지않는다고이야기하며, 남한의경우는제 1차청동기문화라는명칭으로부르고있다. 제1차청동기문화를비중국계인북방계문화의남하로보았으며, 또한같이확인되는반월형석도, 유구석부등을근거로중국계문화요소역시포함되어있다고이야기한다. 또한제1차청동기문화에비해중국전국시대의철기문화와북방계청동기문화가혼합되어들어온것을제2차청동기파급또는철기의도래, 즉초기철기문화로파악하고, 연대는기원전 3-4세기경으로보았다. 이글에서도각시대의명확한연대폭을규정하고있지는않으나대략적으로청동기문화는기원전 6-5세기에서기원전 4-3세기, 초기철기문화는기원전 4-3세기에서서력전후까지로파악하고있다 ( 김원용 1964). 지금의고고학적지식과는차이가있으나일제강점기에확인된단편적인자료가아니라해방이후발굴된유적들의자료를이용해전체적인시대구분을시도했다는점에서매우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다. 이러한최초의개설적논문의발간과함께청동기시대유적에대한장기적인조사가실시되었으니그결과가 한국지석묘연구 이다. 앞에서언급하였듯이 1960년대들어대학박물관이유적조사 그림 5 한국지석묘연구 ( 국립박물관 1967) 그림 6 가락리주거지실측도 ( 김정학 1963, 제 2 도 ) 7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에참여하기이전유적조사는오로지국립박물관만이가능하였으며, 1950년대까지국립박물관의조사는역사시대에한정되어있었다. 국립박물관에의한최초의계획적인선사시대조사의대상이바로지석묘였으며, 총 5년간에걸쳐각지의 12개소, 약 60여기의지석묘를조사, 분석하였다. 그결과가 1967년발간된 한국지석묘연구 로, 강화삼거리유적, 제원황석리유적등아직까지도자주인용되는지석묘유적의다수가이때조사되었다. 이보고서에서는기존에남방식지석묘라불리던형식의지석묘가북한지역에도다수분포하고있기에남방식이라는명칭에모순이있음을지적하면서도, 북방식, 남방식의기준을따르고있다. 그리고남방식은또다시지석, 뚜껑, 적석의유무로형식을구분하고있다. 또한이보고내용중가장중요한것은이전암묵적으로이야기되던마제석검의세형동검모방설을반박하면서마제석검이세형동검보다이르다는것을확인하였다는점으로이후 1970년대의연구에큰영향을주었다. 1960년대는적은수이기는하지만자체적으로조사한여러유적들을대상으로청동기문화와초기철기문화의양상을밝히고자노력한시대였다. 이러한연구성과는 1970년대개설서의발간으로이어진다. 4) 정리의시대 - 1970년대의고고학 1970년대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의특징은송국리유적과흔암리유적으로대표되는취락유적의조사, 수몰지구조사에따른대규모유적의발굴, 다양한분야에대한연구의시작, 개설서의발간을들수있을것이다. 이때부터본격적으로청동기시대에대한연대추정과시기구분이등장하는데, 윤무병 (1972 1976), 김정배 (1979) 등의연구가있다. 또한 1960년대의종합적지석묘연구를바탕으로지석묘에서출토되는마제석검에대한기원지및형식분류에대한연구가이루어졌다 ( 김원용 1971; 윤덕향 1977). 그외이전단편적으로만검토되었던주거지와토기에대한연구가등장한다. 대표적인것으로당시까지발견된주거지를집성, 정리하여주거지표준면적과성인 1인이차지하는면적을 5m2로추정한연구를들수있다 ( 김정기 1974). 토기에대한구체적인검토도등장하여말기즐문토기, 공렬토기, 각형토기홍도의 A군과점토대토기, 우각형파수부토기, 흑도, 고배형토기의 B 군으로구분하여, A군은기원전 7-5세기중엽, B군은기원전 5-1세기로구분하는등무문토기를대상으로시기구분이시도되었다 ( 이백규 1974). 그외석관묘 ( 이종선 1976), 지석묘 ( 임세권 1976; 최몽룡 1978) 등의집성연구도있다. 1970년대청동기시대와초기철기시대고고학의가장큰특징은 3 종류의개설서가발간되었다는것이다. 1973년국사편찬위원회에서발간된 한국사 1 고대한국의선사문화, 한국고고학에대한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77
최초의개설서인 한국고고학개설( 김원용 1973), 한국고고학개설개정신판 (1977) 이그것이다. 출판일자로본다면가장먼저출간된 한국고고학개설 의목차는 서론 구석기및중석기문화의문제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 초기철기문화 원삼국문화 삼국고분문화 로구성되어있어 1964년의 한국문화의고고학적연구 와는 김해문화 가 원삼국문화 로바뀐것외에는크게다르지않다. 그러나그내용에서는일부변화가있다. 그이전남한에서청동기시대의존재에대한의문을제기하였던것에비해, 남한의청동기시대존재를긍정하고있다. 청동기문화의연대에대해서는기원전 700-600년경시작되어한국식동검이출현하는기원전 300년경까지를청동기시대 1기, 기원전 300년경에서서력기원전후까지를청동기시대 2기, 초기철기문화로파악하고있어청동기문화상한을조금올려보고있다. 같은해발간된 한국사 1 고대한국의선사문화 의목차는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 철기문화로구성되어있으며, 이중철기문화는서력기원에서 300년간의시대, 즉지금의원삼국시대를지칭하는것으로, 청동기문화 에서청동기시대와초기철기시대를다루고있다. 청동기문화 에서는주거지, 생업경제, 묘제, 토기, 석기 골각기, 청동기, 철기, 중요일괄출토유물, 편년의각절이있어, 문화요소전반을상세하게다루고있다. 토기의경우압록강유역, 평북해안및청천강유역, 평남 황해도지방, 함경북도지방, 함경남도지방, 남한지역의 6개지역군으로나누어설명하고있으며, 남한지역의토기를유공토기, 각형토기, 홍도, 가락식토기, 우각형손잡이토기, 점토대토기, 흑색토기, 두형토기등으로구분하여개별기종에대한자세한기술이있다. 토기뿐아니라석기역시적수용석도 ( 摘穗用石刀 ), 석서 ( 石鋤 ), 유구석부, 편평편인석부, 유견석부, 환상석부 다두석부 성형석부, 석촉, 마제석검등, 청동기는무기류, 장신구및경 ( 鏡 ), 탁 ( 鐸 ) 령 ( 鈴 ), 공구, 용기, 마구, 거여구 ( 車輿具 ), 기타등으로구분하여개별기종에대해세부적으로설명하고있다. 기존의논문등에서는유물에대한단편적인설명이주를이루고있었던것에비해유적에서확인되는대부분의기종을설명하고있어청동기시대의문화양상을종합적으로정리한것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각장이서로다른필자에의해작성되었기때문인지시대와시기구분이일정하지않다. 장제목인 청동기문화 와는달리본문중에서 청동기시대 라는명칭이일반적으로사용되고있으며, 각절별로시기구분이차이를보이고있기도하다. 묘제 부분에서는 1기 ( 청동기시대 ) 와 2기 ( 철기시대 ) 로구분하여설명하고있는데, 편년 부분에서는 무문토기시대 를청동기 Ⅰ기 (B.C. 600-300) 와청동기 Ⅱ기 (B.C. 300-0) 로구분하였으며, 다시청동기 Ⅰ기를전기 (B.C. 7, 6세기 ), 후기 (B.C. 5,4세기 ) 로나누고있다. 그러나청동기 1기 ( 지금의청동기시대 ) 를전후로나누는시기구분의내용은지금의그것과는전혀다르다. 1기의전기는압록강유역과함경북도의유적들로북방계청동기가한반도에유입되는단계를말하는것으로이시기남한은신석기단계에있는것으로보았다. 이후유적이점차남쪽으로확산되면서 1기의후기로넘어간다고이해하고있어, 아직까지청동기와무문토기가특정한하나의시대적문화요소로인식되지못하고있다는것을알수있다. 7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그림 7 한국고고학개설 ( 김원용 1973) 그림 8 1975년발굴당시송국리유적전경 1977년발간된 한국고고학개설개정신판 은내용면에서는 한국고고학개설 1판 보다는오히려 한국사 1 과유사하다. 우선시대구분에서 초기철기문화 가없어져 청동기문화 에서청동기시대와초기철기시대를모두포함하고있다. 또한아직 청동기시대 가아닌 청동기문화 라는명칭을사용하고있지만그문화적양상에대해서는 한국사 1 청동기문화 에서다룬내용들과유사해토기, 석기, 청동기, 철기등의개별기종에대해설명하고있다. 이렇듯 1970년대까지의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은기본적으로금속기문화의기원지를찾고, 교차편년을통해상한과하한을결정하는것이가장주된연구내용이었다. 그리고일제강점기부터잘알려져있던동검, 석검등의대표적인유물에대해서는자세한형식분류, 그리고해방이후본격적으로발견되기시작한석기, 토기등에대해서는개별기종의설정과지역적분포의확인이일반적으로이루어지는등, 아직까지유물의형식분류와문화전파가일반적인연구경향이었다. 이와더불어대규모취락유적의발굴과함께국토종합개발사업의일환으로대규모댐공사에따른수몰지구발굴이이어졌으며, 특히지석묘의발굴이두드러졌다. 특히흔암리유적과송국리유적에서탄화미가출토됨에따라, 이전까지반월형석도등의유물만으로논의되던청동기시대의도작농경이실물자료를통해확인되었으며, 한반도에서일본으로도작농경이전파되었다는견해가설득력을얻게되었다. 또한한반도만의청동기시대연구에서벗어나일본야요이문화와의관계를검토하여청동기문화의영향으로일본야요이문화가발생하였다는주장이제기되었다 ( 심봉근 1979). 그러나이러한발굴조사의성과가구체적연구로이어져새로운해석이등장하게되는것은 1980년대에들어서면서부터이다.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79
5) 연구의활성화 - 1980년대의고고학 1980년대는지금의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의기초가마련된시기라고할수있다. 이시기는 1970년대까지의형식분류에서벗어나개별유물에대한구체적인검토, 또단순히문화의기원을찾는것에서벗어나물질문화를담당하였던집단에대한검토, 사회성격에대한천착등다양한방면에서연구가활성화되었으며, 이는 1970년대활발한유적조사의성과가반영된결과였다. 우선개별유물에대한구체적인검토가두드러진다. 각형토기 ( 한영희 1983), 점토대토기 ( 한상인 1981) 등특정형식의토기에대한집성, 정리가시도되었으며, 남한지역을대상으로전체의토기문화를살펴보는연구 ( 이백규 1986; 임병태 1986; 이청규 1988) 등이있어남한지방무문토기에대한종합적정리가시도된다. 이러한연구를바탕으로동북지방의영향에의한역삼동식토기, 서북지방의영향에의한가락동식토기, 역삼동식토기와가락동식토기의결합으로흔암리식토기의형성등의기본적인인식이성립된다. 또한원형점토대토기와삼각형점토대토기의시간적선후관계에대한인식역시이때정리된다. 석기에대해서도개별기종에대한검토가이루어진다. 기존까지석기는대부분청동기시대문화요소의일부로다루어졌던것에비해유구석부 ( 노혁진 1981), 마제석촉 ( 최성락 1982), 반월형석도 ( 안승모 1985), 삼각형석도 ( 김상면 1985) 등개별석기에대한형식분류와기능에대한연구와함께철기에대한과학적분석도시도되었다 ( 이남규 1981). 그리고유물외에도수혈주거지에대한집성과분석도이 루어졌다 ( 임영진 1985). 이렇듯새롭게등장한토기, 석기에대한연구외에도기존의연구경향을이어온청동기에대한연구역시계속되었다. 이시기청동기유물에대한연구는함평초포리 ( 국립광주박물관 1988), 부여구봉리 ( 이강승 1987) 등청동일괄유물에대한검토와함께청동유물과함께출토되는유물을종합적으로분석하여단계를구분하는연구 ( 이청규 1981) 등이있다. 이시기에는 1970년대에이어서송국리유적이계속발굴되었으며송국리유적에서확인된송국리식토기문화가영암장천리 (1984년), 승주대곡리 (1987년) 등의유적에서출토되어지역적분포가확인되었다. 거창대야리유적 (1986년), 중도유적 (1980-1984년) 등에서다수의청동기시대집자리가조사되었고, 보령교성리유적 (1986년) 과늑도유적 (1985년) 의발굴로점토대토기취락과삼각형점토대토기연구에중요한자료가발견되었다. 또한이시기의가장큰특징은청동기시대의 3 시기구분이처음으로시도되었다는점이다. 물론그이전에도청동기혹은토기등을기준으로단계를나누는시도가없었던것은아니지만기본적으로전기, 후기의두시기구분이일반적이었으나, 1980년대중반송국리식토기가중기로설정 ( 藤口健二 1986) 된후, 각시기의문화적내용은조금씩변하지만전-중-후기의 3기구분은지속된다. 사회성격에대한논의도본격적으로시작된다. 1960년대부터고고학이아닌고대사에서부족국 8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가설 ( 김철준 1964), 성읍국가설 ( 천관우 1975) 등의개념이제기되기는하였지만본격적으로고고학분야에서청동기시대의사회성격을논하게된것은 1970년대신고고학이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후 1980년대에신고고학의사회발전단계론이적극수용되면서지석묘를고고학적근거로하여 Chiefdom 단계를청동기시대에비정하는경향이적극대두된다 ( 최몽룡 1981, Choi 1984). 특히최몽룡은토착농경을바탕으로하는잉여생산을배경으로전문인이등장하였으며지배자들의가족을위한공동묘지로서지석묘가존재한것이며지석묘의분포범위는지배범위와일치하다고보아, 지석묘사회가 Chiefdom 단계에속한다고주장하였다. 물론지석묘사회를 Band 단계로파악하는의견도있으며 ( 김정배 1973), Chiefdom을군장, 추장, 족장등으로번역하는등용어의통일이이루어지지는않지만, 청동기시대를 Chiefdom 단계로이해하는인식은 2000년대까지지속적으로이어진다. 1980년대의가장큰성과중하나는 고고학개설제3판 (1986) 의발간이다. 2000년대후반 한국고고학강의 가발간되기이전가장일반적인고고학개설서였던 고고학개설 3판 은 1977년의 고고학개설개정신판 과달리청동기문화와초기철기문화를각각별도의시대로구분하고있어아직까지시대구분이명확하지않음을보여주고있다. 전체적인서술내용에서는송국리유적의발굴성과를바탕으로토기형식에송국리식토기가추가되고, 송국리유적과흔암리유적, 평양남경유적에 그림 9 한국고고학개설제3판 의편년표 ( 김원용 1986, 268쪽 ) 그림 10 보령교성리집자리 ( 국립부여박물관 1987)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81
서탄화미가출토됨에따라실물자료를가지고청동기시대농경개시를이야기하고있다는점이크게달라진부분이다. 또한연대도흔암리유적, 내평리유적의방사성탄소연대치등을포함하여개시기를기원전 1000년경까지올려보았다. 그러나하한은기원전 300년, 경, 초기철기시대를기원전 300년경에서서력 0년까지보는견해는동일하다. 1980년대까지의또하나의연구경향은청동기시대를담당한주민에관한논의이다. 1960년대부터시작된청동기문화의기원탐구연구는결국그청동기문화를담당한주민이누구였는가, 그리고그이전시대인신석기시대인들과의관계는어떠하였는가의문제와결부된다. 실제고고학상으로증명하기어려운종족에관련된문제였으나당시는고대사로부터제기된견해를받아들여즐문토기인은고아시아족의일파, 무문토기인은고아시아족의일파인퉁구스족으로해석하고두집단의접촉은평화로운공존에서혼혈의과정을거쳐신석기시대에서청동기시대로이행하였다고이야기하였다 ( 김원용 1986). 그러나이주민교체설은고고학적으로설명하기어렵다고비판받은후 ( 이선복 1991),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전환기는더이상논의의대상이되지못하였다. 1980 년대는 1970 년대에비한다면유물의형식분류와기원지연구에서벗어나사회성격등을포 함해종합적인검토를추구하던시기였다. 그러나아직까지청동기시대와초기철기시대의시대적 규명은모호하였으며이러한경향은일정기간지속된다. 6) 청동기에서토기로 - 1990년대의고고학 1990년대는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연구의바탕이쌓여가는단계로, 2000년대이후본격적으로논의되는여러쟁점들이등장하게되는때이다. 유적발굴건수의증가에따라 1994년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설립되고, 이후대학과국립박물관주도의발굴조사는전문법인위주로변하게된다. 또한 1970, 80년대댐수몰지구유적발굴등에서시작된대학연합발굴도 1997년부터의남강수몰지구발굴을마지막으로끝이난다. 이러한유적발굴에따른비약적인고고학자료의증가는청동기시대고고학에중요한변화를불러일으킨다. 이전까지청동기시대고고학은북한을포함하는한반도전체를대상으로하였고, 청동기시대및초기철기시대등의시대, 편년, 획기구분등의기준은청동기또는철기였다. 그리고지역권의구분역시이전까지더많은고고자료가확인되었던북한이보다세분되고남한의경우는하나의권역으로설정하는경향이일반적이었다. 그러나발굴자료의증가에따라남한만을대상으로하는연구가가능하게되었고, 그결과출토량이적은청동기가아닌가장일반적으로출토되는토기자료가청동기시대연구의중심으로옮겨가게되었다. 이러한연구경향의변화는각토기에대한유형설정이가장큰계기가되었던것이다. 8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1980년대후반에사용되기시작한유형의개념은당초토기뿐아니라석기등의유물을포함한것이었으며 ( 이청규 1988), 박순발 (1999) 에의해 동일한시간적범주에드는여러유물형식들 ( 즉유물복합체 ) 로유형이규정된이후가락동유형, 역삼동유형, 흔암리유형등의개념은일반적인용어로받아들여지게된다. 이러한유형의개념은이후 2000년대각지역연구에중요한역할을한다. 또한 1980년대후반제기된송국리식토기의중기설정은, 송국리유형의문화양상이구체적으로밝혀지면서 ( 하인수 1989) 가락동유형 역삼동유형 흔암리유형은전기, 송국리유형은중기, 점토대토기는후기로보는 3기구분이일반화된다. 그러나단순히토기의형태적인변화만으로기준을나누기는어렵기때문에이질적인문화요소로의교체를획기로삼아공렬토기와가락동식토기를전기, 송국리식토기와점토대토기를후기로보는시각도등장하여 ( 이홍종 1996) 지금까지한축을이루고있다. 이와더불어 1990년대에는본격적인취락고고학이시작된다. 특히대규모유적의발굴성과에따라 1994년 마을의고고학 이라는주제의한국고고학전국대회가개최되었다. 또한 1991년검단리유적에서환호가확인된후창원남산유적 (1997년), 울산천상리유적 (1999), 대평옥방지구 (1997~1999) 등에서도환호가확인되면서이전주거지위주의취락고고학에새로운시각을주었으며, 이후 환호취락과농경사회의형성 (1998) 이라는주제로학회도개최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후반수전지가확인되면서청동기시대생업경제연구에새로운주제가등장하나본격적인논의는 2000년대로넘어간다. 초기철기시대의경우, 시대명칭에대한논의가본격적으로진행된다. 여러번의시행착오를거쳐 한국고고학개설제3판 에서초기철기시대가제시된후, 기원전 300년경에서고고학적으로고대국가의등장으로여겨지는기원후 300년경까지의기간을하나의시대로볼수있는가, 그리고기원전 300년경에서기원 0년까지의기간을하나의특정시대로구분할수있는가, 또한 초기 철기시대의 그림 11 울산검단리유적전경 ( 부산대학교박물관 1995, 도판 5) 그림 12 마을의고고학 ( 한국고고학회 1994)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83
명칭이타당한가, 초기철기시대와원삼국시대는기원 0년을기준으로구분할수있는가등의다양한방면에서논쟁이등장하게된다. 우선이시기에는기원전 300년에서기원후 300년까지를하나의철기시대로보아야한다는의견 ( 최성락 1998) 과삼한시대로보아야한다는의견 ( 신경철 1995) 이제시된다. 이후시대구분에대한논의는 2000년대까지계속이어진다. 그와함께본격적으로점토대토기가논의의대상이되면서기원지를찾는연구가시도된다. 당초점토대토기의기원지로는한강유역이지목되었는데 ( 한상인 1981), 1990년대초반에는이전과동일하게한강유역발생설이주장되었으나 ( 박순발 1993a), 심양정가와자 ( 鄭家窪子 ) 유적등요동지역에서점토대토기와흑색마연장경호등이출토된다는점에주목하면서이후요령지역발생설로수정된다 ( 박순발 1993). 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경에진개 ( 秦開 ) 의침입으로대표되는전국 ( 戰國 ) 연 ( 燕 ) 과고조선사이의무력충돌을전후하여요녕지역의주민들이한반도로이주한것으로본것이다 ( 박순발 1993b, 이건무 1994). 1990년대에상대적으로연구의수가적어보이는것은이때부터본격적으로고고자료의양적성장이시작되었으며, 발굴된자료가연구결과로나타나기까지에는일정의시간이필요하였기때문이다. 1990년대제기되었던다양한쟁점들은풍부한발굴자료를바탕으로 2000년대부터본격적으로논의되기시작한다. 7) 양적인성장에서질적인성장으로 - 2000년대의고고학 2000년대들어한국의고고학은급성장하게된다. 1990년대부터이어진유적발굴건수증가와그에따른고고자료의비약적증가는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대한기존의인식에큰변화를불러일으켰고, 연구인력의증가에따라연구범위도다양한분야로확장되었다. 이러한경향은청동기시대시기구분에서가장두드러졌다. 기존에일반적으로받아들여지던 3기구분에대해, 돌대문토기를표지로하는조기가설정되면서 ( 안재호 2000) 4분기설이등장하고, 이후점토대토기를청동기시대에서제외한조기-전기-후기의 3분기구분안도등장한다 ( 안재호 2006). 기존의 3분기분류와차이가나는점은송국리문화단계를후기로보는것으로, 결국은점토대토기를청동기시대의한시기로포함시킬수있는가의문제로귀결된다. 이에대해아직까지뚜렷한결론이나있는것은아니지만최근에발간되는청동기시대총서에서는일반적으로조기-전기-중기-후기의 4분기안을채택하고있다. 조기의설정은학사적으로매우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다. 돌대문토기가이전미사리유적, 황석리유적에서발견되었을당시에는큰주목을받지못하였으나, 1990년대후반남강유역에서이중구연거치문토기와돌대문토기의공반이확인되면서신석기시대에서청동기시대로의전환기의의미 8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를가진조기가설정된것이다. 1990년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주민교체설 이폐기되면서어떠한논의도진행되지않았던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전환기연구에새로운단초를마련한것으로, 조기의설정에의문이제기되기도하였지만 ( 김장석 2008; 이기성 2012 등 ), 이후돌대문토기의기원지탐색 ( 배진성 2003; 김재윤 2004; 천선행 2005 등 ), 문화양상의파악 ( 김병섭 2009 등 ) 등여러방면으로연구가확장되었다. 시기구분의논쟁은중기를둘러싸고도그러하다. 송국리식토기와송국리식주거지등을표지로하는송국리유형이 1980년대중기로설정된후, 1990년대들어와사회적인성격이본격적으로논의되기시작한다. 도작농경집단을중심으로한새로운사회조직체계의확립 ( 이홍종 1996), 가족공동체 대가족제, 세대공동체에서핵가족으로의변화 ( 안재호 2000), 공동거주형세대공동체에서독립거주형세대공동체로의변화 ( 김승옥 2006) 등이전기에서중기로의변화양상으로지적되면서, 수전농경의정착및확대, 그에따른인구증가와대규모취락의형성이중기의전형적인문화적특징으로인식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들어각지에서발굴사례가비약적으로증가하면송국리유형이확인되지않는지역에대한중기설정이문제로대두되고, 이에대한해결책으로지역적유형이설정되게되는데, 서울경기지역의역삼동 2식 ( 김한식 2006), 검단리유형 ( 배진성 2005 등 ), 북한강유형 ( 김권중 2005 등 ) 등이그것이다. 또한송국리유형의형성과정에대한연구역시 2000년대중반지속된다. 송국리유형의외래기원설 ( 이홍종 2002; 우정연 2002; 이진민 2004 등 ) 과자생설 ( 김장석 2003; 나건주 2005 등 ) 로구분되며이논쟁은지금까지이어지고있다. 대규모유적의발굴에따른취락연구역시활발하게진행된다. 각지역별연구자료의증가로인해더이상한반도전체를대상으로하는연구 ( 송만영 2001; 안재호 2006) 는줄어들고호서지역 ( 공민규 2003; 허의행 2007; 김범철 2005 등 ), 영서지역 ( 김권구 2005 등 ), 영동지역 ( 박영구 2004 등 ), 울산 ( 이수홍 2008 등 ) 등, 특정지역또는특정유형을대상으로하는연구가일반화된다. 또한취락연구의내용역시마을내에서의단위구분 ( 안재호 1996 2004) 의문제부터취락내에서개별공간을분리할수있는가, 그리고각취락간의위계를확인하고자하는연구 ( 이형원 2009) 까지이어져활발한논의가이루어지고있다. 그와더불어취락이아닌개별가구에초점을맞추는연구도등장한다 ( 김권구 2004; 김범철 2006 외 ). 또한발굴사례의증가에따라굴립주건물에대한검토역시가능해졌다 ( 배덕환 2000). 특히 1980 년대까지사회상을파악하는작업이주로지석묘를대상으로하였던것에비해 2000년대이후는취락이사회상파악의주된연구대상이되었다는점은특징적이다. 청동기시대의생업경제에대한연구는 1990년대들어와경작지유구가확인되면서새로운국면을맞이하게된다. 1990년후반무거동옥현유적 (1997년), 논산마전리유적 (1999년), 울산야음동유적 (2000년) 에서청동기시대의수전지와수리시설등이발굴되면서, 도작농경의기원지탐색이라는전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85
그림 13 마전리유적수전전경 ( 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2004, 도판 ) 그림 14 마산진동유적묘역식지석묘 ( 경남발전연구원역사문화센터 2011, 도판 45) 통적주제에서벗어나농경의방식에대한논의까지이어졌다. 생업경제에대한논의는농경뿐아니라함정등의수렵방식에대한연구 ( 김도헌 2005) 까지넓어진다. 유물연구는전통적인형식분류와그에따른상대편년, 지역상의파악은지속되지만여기에서한발더나아가토기제작실험 ( 신경숙 오민미 2010 외 ), 토기가마의연구 ( 김현 2002 외 ), 석기제작 ( 황창한 2004 등 ), 석기사용흔분석 ( 손준호 2005 등 ), 석기제작시스템 ( 홍주희 2009), 옥제작시스템 ( 庄田慎矢 2005) 등의다양한분야로확장되었다. 실험고고학분야는아직까지초보적인수준이고그연구의수도많지않지만출토유물의단순검토에서한발더나아갔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다. 또한토기와석기외목기의집성과정리 ( 김권구 2008) 도시도되었다. 청동기시대의묘제에대한연구역시 2000년대들어와활성화된다. 송국리유형의묘제전반에대한검토 ( 김승옥 2001) 에이어개별묘제에대한검토도이어진다 ( 김규정 2006 등 ). 특히 2000년대중반부터확인되는묘역식지석묘는 ( 김승옥 2006 등 ) 는특징적인구조와더불어청동기시대사회적계층화의근거로이야기되기시작하였다. 2000년대후반들어와가장특징적인것은청동기시대연구가남한의범위를벗어나주변지역까지확장되었다는점이다. 이전청동유물의기원지를찾는연구에국한되어있던요녕지역에대한검토는한국무문토기의기원지를중국동북지역에서찾고자하는시도로확장되고 ( 안재호 2010 등 ) 그지역적범위는연해주까지넓어진다 ( 김재윤 2011 등 ). 그리고그와더불어청동기문화기원지로서의중국동북지역에대한천착역시두드러진다 ( 이청규 2011 등 ). 또한북쪽뿐아니라남쪽으로일본과의문화관계 ( 천선행 2009) 등도다루고있다. 연구의내용과는별개로 2000 년대청동기시대고고학에하나의큰획기는바로한국청동기학회 의설립 (2007 년 ) 이다. 발족이후매해시기구분, 생업경제, 지역상, 무덤, 편년, 생산활동, 농경등다 양한주제의학회와더불어분과모임활동은청동기시대연구에큰역할을담당하였으며특히젊 8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은연구자들의적극적인참여와더불어세부분야에대한연구가가능하게되었다. 그외 2015 년가을현재진행중인청동기시대고고학의총서와개설서의발간작업은청동기시대 고고학의학문적성장을반영하고있는것이다. 2000년대들어와초기철기시대역시안성반제리유적 (2004년) 등의대규모취락유적의발굴과함께완주갈동 (2003 2007년), 신풍지구 (2010 2011년) 등의유적에서많은수의토광묘와청동기, 철기가확인되는등자료의양이급속하게증가한다. 그러나시대명칭에대한논란은지속되어원삼국시대를포함하여철기시대로부르자는제안 ( 최성락 2004), 삼한시대로부르자는주장에대한반론 ( 이희준 2004), 초기철기시대의용어를고수하는입장 ( 이남규 2004) 등다양한의견이제시되었으며, 지금은초기철기시대의명칭이일반적으로사용되고있다 ( 한국고고학회 2010). 시대명칭논쟁과더불어처음초기철기시대명칭이제시된후암묵적으로받아들여지던상한과하한연대도변하게된다. 상한연대와관련해서는중부지역점토대토기유적의발견사례증가에따라점토대토기의한반도유입연대가기원전 5세기경 ( 박진일 2007) 으로조정되면서기원전 4세기경으로인정되는세형동검의출현연대와차이가문제가되었다. 이전암묵적으로받아들여지던점토대토기와세형동검의동시출현이부정되면서초기철기시대를점토대토기와세형동검중무엇을기준으로할것인지의문제가대두되고, 현재는세형동검의출현을기준으로하는견해가일반적이다. 하한역시기원전 100년경으로조정되는데, 한사군 ( 漢四郡 ) 설치이후로영남지방에서본격적으로철기가생산되었기때문에, 이때부터를본격적인철기시대, 즉원삼국시대의시작으로보고있다 ( 이희준 2004). 점토대토기와관련된논의는요녕지역에서어떠한경로를통해한반도로전파되었는가의문제와점토대토기의지역성에관한연구로확장된다. 점토대토기는한반도남부를중심으로분포하고있으며, 한반도북부에서는거의확인되지않기때문에서해안을따라해로를통해전파되었다고보는것이일반적이었다. 그러나해로를통한전파에대해두가지의상반된의견이제시되었으니, 하나는요중지방에서해로를통해직접중서부지역으로전파되었으며이후한강유역에서한반도각지로퍼져나갔다는것이며 ( 박진일 2013), 또하나는해로를통한전파외에내륙지방으로의경로가하나더있다는것이다. 한반도서북부로전파된점토대토기가해로를거쳐중서부지방으로들어오며, 이러한해로외에원산만을거쳐동해안, 영남지역에이르는루트역시이용된것으로보고있다 ( 박순발 2004). 2000년대이후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은형식분류, 편년등의전통적인주제에서탈피해생업경제, 사회상, 실험고고학, 고고학자에의한자연과학적분석등다양한분야로확장되어종합적인검토를통한문화복원을시도하고있으며, 대상지역도한반도를벗어나주변지역까지시야에넣고있다. 한편으로는아직까지시대구분, 시대명칭, 획기의구분등대전제에대한논쟁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87
도지속되고있다. 한국고고학은이제더이상자료의부족을이야기할수는없을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들어새롭게시도되는여러연구분야는아직시도의단계에머물러있다. 이제는이러한풍부한자료를바탕으로다양한분야의적극적인연구가필요한시점이다. Ⅲ. 앞으로의과제 해방이후 70여년의기간, 본격적으로고고학연구가시작되고 50여년이조금넘는기간동안 2,000여개소이상의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유적이발굴조사되고, 1,000여편이넘은연구결과물이발표되어우리의선사문화에대한지식은급속도로성장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아직까지우리가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대해서알고있는것보다는그렇지못한것이훨씬더많을것이다. 한국고고학은 1990년대후반부터 2000년대, 2010년대를거쳐급속한양적성장을거쳐왔으며지금은질적성장으로변화해가는과도기의단계이다. 이러한때에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고고학에가장필요한것은전체를바라보는큰 인식의틀 이다. 한국의선사시대를어떠한식으로바라볼것인지에대한검토가필요한시점이다. 앞으로도고고자료는계속증가할것이다. 점차늘어가는고고학자료를어떻게파악할것인가. 이제는증가한자료의단순설명보다는그러한자료들을어떠한시각으로볼것인가에대한구체적인고민이필요할것이다. 8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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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이기성 93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94-117 韓國考古學史에서의 原三國時代 정인성 ( 영남대학교 ) 목차 Ⅰ. 머리말 Ⅱ. 20세기초일본고고학의 原史時代 인식 Ⅲ. 金元龍의 韓國文化의考古學的硏究 와金海文化의이해 Ⅳ. 후지타료사쿠 ( 藤田亮策 ) 와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의 朝鮮考古學 Ⅴ. 1920년의金海貝塚發掘과이해 Ⅵ. 김해패총출토토기의이해와변천 ( 瓦質土器論爭의前史 ) 1. 보고서의평가 2. 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의김해패총토기인식 3. 가야모토가메지로 ( 榧本龜次郞 ) 의金海貝塚의再檢討 ( 榧本 1954, 1957) 4. 김원용의金海貝塚분석 5. 광복이후의검증 : 조도패총의발굴과층위인식 Ⅶ. 새로운과제의인식
Ⅰ. 머리말 한국고고학에서 原三國時代 란초기철기시대의다음에오며삼국시대이전시기를말하는데, 선사시대와역사시대를잇는과도기에해당한다. 널리알려진것처럼이원삼국시대라는시대명을처음사용한것은해방후한국고고학을이끈김원용으로 1972년무렵이다 1. 그런데그로부터 35년이지난 2007년에한국고고학회가주도하여간행한 한국고고학강의 에도原三國時代가그대로적용된것을보면한국고고학계에서지지도가높은시대구분명이라고할것이다. 물론원삼국시대라는시대구분명에대해비판이없었던것은아니다. 문헌사와마찬가지로일각에서삼한시대라부르기도하며초기철기시대부터를철기시대로부르자는주장도있었다. 어차피삼국의前史를다루는시기이기에初期 ( 前期 ) 삼국시대로부르자는의견도있었다. 삼한시대라할경우부여나고구려, 낙랑등이존재했던공간이제외된다는문제가발생하며, 철기시대도그문화내용이제대로드러나지않는다는비판이있다. 또한, 초기삼국시대라는용어도삼국의국가형성시기가서로다르다는근본적인문제가있어폭넓은지지를얻지못한상황이다. 김원용의한국고고학시대구분에서빠져있는고조선과낙랑을어떻게처리할지와관련된문제도대단히중요하다. 결국원삼국시대를대신할용어에마땅한합의가없는상황에서 원삼국시대 는지금도삼국이고대국가로정립하는과정을설명하는 proto-삼국의의미로유용성을인정받고있는셈이다 2. 이렇듯시대구분의문제를점검하고대안모색을위한학술대회나세미나가여러차례개최되었음에도불구하고비판만이쏟아졌을뿐, 학회구성원들이동의하는대안이나오지않는이유를고민할때이다. 관련하여최근출판된 와질토기논쟁고 의정리에서주목되는주장을발견할수있다 ( 김성남외 2014). 즉 원삼국시대라는지칭법이국내고고학연구자대다수에게이미관행처럼굳어져버렸음을부정할수없으므로새로운지칭으로인한혼란을피하고또한국고고학계의태두이신고김원용선생의뜻을존중하는후학들의예의또는미덕차원에서이용어를잠정적으로그대로사용해도좋을듯하다 라는문장이그것이다. 원삼국시대이라는시대명이여전히사용되는이유를따로설명하지않아도좋을만큼선명한발언인듯하다. 그런데우리학계가정말원삼국시대라는시대명을사용한김원용의뜻 ( 의도 ) 와내용을이해하고있는것일까? 가문제가된다. 관련하여쏟아진많은논고에서는대개김원용이후의연구사만이거 1 1972년도일본어판고고학개론 ( 西谷正번역 ) 에서원삼국문화를, 考古美術 113.114합집에실린 石村洞發見原三國時代의家屋殘構 라는논문제목에서원삼국시대라는용어를사용하였다. 2 초기철기와원삼국시대의시대명을둘러싼논의는 2004년에제출된이희준의논고 ( 이희준 2004) 가자세하며, 이현혜와최성락 ( 최성락 2012) 등의논의도참고된다. 그리고 2012년에는국립문화재연구소고고학연구실이 한국사시대구분론-외부전문가초청포럼- 을개최하여한국사전반의고고학적시대구분의현황과문제를다룬바있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95
론될뿐그前史가제대로드러난적이없었다. 결국김원용의뜻을제대로이해하지못한상태에서문제해결의방향을모색해왔다는의구심을떨칠수가없다. 이러한맥락에서여기서는광복후한국고고학의틀을만들어가던김원용이어떠한학문적기반에서김해토기와와질토기, 그리고김해문화와원삼국시대를이해하고정리했는지를살피려고한다. 일제강점기김해패총이발굴되면서촉발된관련논의의흐름속에서김원용의소위그뜻? 을짚어보려고하는것이다. 결국원삼국시대연구사의전반부에해당한다. 물론발표자에게주어진과제는원삼국시대의연구사정리이지만, 최근에원삼국시대의연구사를다룬단행본 瓦質土器論爭考 ( 김성남 김경택 2013) 이출간되어와질토기를중심에놓은연대기적인경과가이미정리되었고, 발표자역시관련선행연구를몇차례정리했던바 ( 정인성 2008 2013), 여기서는기본적으로 1980년대이후의연구사에대해서는다루지않으려고한다. Ⅱ. 20 세기초일본고고학에서의 原史時代 인식 주지하는것처럼김원용은처음부터이시기를原初三國時代라는의미의 原三國時代 라고부르지않았다. 일본인연구자들이사용했던金海文化, 혹은金海時期라는문화명, 혹은시기명을그대로踏襲해서사용하다가 1972년에논문과일본번역판 韓國考古學槪論 에서원삼국시대라는용어를썼고 ( 金元龍 1972), 이듬해 1973년에한국어판을출간하면서국내에서도사용하였다 ( 金元龍 1973). 왜원삼국시대라는용어로바꾸었는지에대해서이때는구체적으로밝히지않았지만 1992년에작성되어 2000년에公刊된遺稿에서그의도를설명하고있다 ( 김원용 2000(1992)). 즉김해문 그림 1 일본에서번역출간된 韓國考古學槪說 : 원래 1972년초판번역에서는 韓國考古學槪論 이었으나개정판으로나오면서 韓國考古學槪說 이되었음. 화나김해시기는嶺南해안지역에치우쳐한 정된용어라는문제인식에서비롯되었다고하 며신석기와청동기에서이어지는시대구분명 9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과도어울리지않는지엽적인시대구분명이라고판단했기때문이었다. 덧붙여일본에서간행한책에서원삼국시대라한것은문제가없으나이를한국에서그대로사용하는데는주저가있었음을덧붙였다 ( 김원용 2000(1992)). 즉원삼국시대란선사에서역사로의과도기를원사로이해하는인식에서만든新造語라는것이다. 그런데살피건데일본학계에서는이미 1906에야기쇼자부로 ( 八木裝三郞 ) 의 日本考古學 에서원사라는개념을사용하고있다 ( 八木裝三郞 1906). 이때야기는일본역사를선사시대와원사시대, 그리고有史時代로구분하였다. 선사시대는석기시대와금속시기로구분되는데전자는구석기, 중석기, 신석기시대이며금속시대는청동기시대와철기시대로나누어진다고하였다. 그다음이원사시대인데이때도여전히철기가사용되는시기이나이를세분할필요가없다고하였다 3. 그다음이有史時代, 즉歷史時代인데이때原史時代는고분시대를포함하는개념이었다. 이미 1900년부터한반도를조사한야기 ( 八木 ) 의시대구분론은일본민족의인종론과밀접한관련이있다. 그는석기시대를츠보이의코로봇콜과관련시켜옹호하고대륙에서건너온 ( 강림한 ) 천손민족의조상이原史時代의담당주민이라고판단하였던것이다. 이후에일본에서전개된시대구분론이일본민족의기원, 즉인종론과불가분의관계에서전개된것도야기의정리와무관하지않다. 그리고 1913년다카하시겐지는선사시대가석기시대이며원사시대는고분시대라하였고후자가우등한야마토민족이고석기시대의담당자인아이누민족은劣敗한족속이어서동북으로쫓겨났다고설명하였다 ( 高橋健自 1913). 1918 년에도리이류조 ( 鳥居龍藏 ) 는석기시대와금속사용시기를일본의유사이전시기로판단하였는데역시유사시대와의중간에원사시대를설정하였음에주목해야한다 ( 鳥居龍藏 1918). 한편하마다고사쿠 ( 濱田耕作 ) 는 1918년에일본의신석기시대와원사시대사이에금속사용시기가있다고하였으며, 금속사용시기를야요이토기와관련된다고보았다. 비록내재적인변화로인식했지만죠몬, 야요이, 원사시대 ( 고분시대포함 ) 라는시대변화를상정하고있었다는것은중요하다 ( 濱田耕作 1918). 이교토대학의하마다야말로 1920년우메하라를앞장세워김해패총을조사하고보고서를책임작성한사람이기때문에이때의인식이식민지조선고고학자들의김해문화이해에큰영향을미쳤을가능성이높다. 우메하라는물론김원용에게현장고고학을지도하기도했던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역시해방후교토대학고고학연구실의교원이되었다는사실을음미할필요가있다. 결국일본고고학계에서는 20세기초에이미선사시대와함께원사시대라는개념을채용하고있었으며역사시대로의전개를설명하면서이시기문화요소의설정에도많은고민이있었음을읽을수있다 ( 河村好光 2014). 개별문화요소를담당한족속에대한考究는당연히일본민족의기원문제와도결부되어격하게연구자들의관심을끈측면이있다. 이미이기성도지적한것처럼 ( 이기성 2014) 3 이때의원사시대라는개념은주로일본열도에서고분이왕성하게축조되는시기를말하는것이었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97
이는김해패총의조사이유중의하나로작용하였다. 발표자가덧붙인다면신공황후신라정벌설과임나일본부의실체확인이라는조사목적이가미되어경쟁적인김해패총의조사가이루어진것이다. 김해패총의발굴성과는결과적으로는해방후한국고고학계의김해패총, 김해문화, 김해시대논의를포함하여결국한반도의원사시대인원삼국시대와와질토기논쟁의핵심단초를제공했다고할수있다. Ⅲ. 金元龍의 韓國文化의考古學的硏究 와金海文化의이해 여기서는원삼국시대라는용어대신김해문화라하여그시기를다루었던 1963년출판의 韓國文化의考古學的硏究 를살펴김원용의최초인식을들여다보려한다. 참고로이글은고려대학에서낸한국사대계시리즈에실린글이며 1972년과 1973년에출판된 韓國考古學槪論 의뼈대가되었기때문에중요하다. 여기서그는한국고고학을구석기시대및중석기문화의연구-신석기시대-청동기문화-초기철기문화-김해문화-삼국고분문화라는순서로살폈다. 그중에서나중에원삼국으로바꾸는김해문화의내용은아래와같이정리하였다. 1. 金海文化란북한에서樂浪郡을통해漢文化가퍼지고지석묘사회에는북에서내려온철기문화가침투하여새로운기술이확립되는즈음, 낙동강유역권에서일어난새로운토착문화이다. 영남해안에한정된다. 2. 이새로운토착문화는鐵을기반으로새로형성된것인데弁辰韓의철과군현및왜와의교역기사를통해그배경을이해할수있다. 철기보급의증거는鹿角刀子柄이다. 3. 김해문화는새로운토기즉김해토기로대표되며이는김해문화이고김해시대가된다. 김해토기는남한재래의무문토기에철기와함께북에서내려온중국灰陶技術이가미되어성립된다. 이회도는戰國時代이래의승문과격자문이포함된것인데이승문토기는명도전과관련된다. 태토는정선되고, 등요채용, 색조는홍색과회청색 2가지로구분된다. 타날은장식이라기보다는기벽을단단하게하기위한것이다. 기종은원저이거나평저인단경호, 고배, 외반구연호, 우각형파수 ( 무문토기말기에성립 ), 시루출현 ( 농경의발달과곡식이주식이었음을증명 ). 김해토기는후기가되어신라토기로발전하였다. 그대표가투창이있는고배인데결국김해토기는신라토기의직접기원이기에원시신라토기라고해도무방하다. 4. 출토된貨泉에서기원후 1세기초라는실연대를얻을수있다. 낙랑과연결되고삼국시대고분 9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기로기원전후한시기부터서력 300년전후이다. 이는내륙의초기철기시대와부분중첩된다. 여기서말하는내륙의초기철기란입실리와구정동등을말하는것이다. 5. 탄화미를통해도작이성행했음을알수있는데이입루트는분명치않다. 6. 김해기의문화는기본적으로낙랑과관련이있다. 삼국시대의성립은낙랑과대방군의말살에서비롯된다. 이는낙랑을통해확산된철기문화가화근이된것이다. 먼저이글에서이미원사시대란개념을사용 하고있었음이주목된다. 즉나중의회고문 ( 김원 용 2000) 에서밝혔듯이원삼국시대라는용어는 1972 년경에사용했다지만김해문화를원사시대 그림 2 김원용의 韓國文化의考古學的硏究 라는범주에서취급했던것은이미훨씬이전으로 1963( 김원용 1963) 은물론 1957년의김해토기재검토작업 ( 김원용 1957) 에서도확인된다. 이미위에서정리한것처럼이는김원용이일본고고학에서의原史개념에익숙했다는것을시사하는것이다. 김원용의이상과같은김해문화인식을들여다보면일제강점기의보고서및해방직후작성된후지타와우메하라의정리와많은부분에서공통되는데이는뒤에서살필것이다. 1963년의이발표문을 1966년에 200부한정판으로私刊했던것을 1972년에니시다니다다시 ( 西谷正 ) 가 韓國考古學槪論 이란제목으로일본에서번역출판하였는데여기서종래의김해문화라고했던것을原三國文化 ( 金海文化 ) 라고바꾸어놓는다. 원고를보내고간행사를쓴것은 1971년이기에原三國이라는명칭으로이시대를설명하는틀은이미이때갖추어진것이다. 그리고 1972년 6월에간행된 考古美術 113 114에서는논문에원삼국시대란용어를사용하면서시대명으로동학자집단들에게알려지기시작하였다. 여기서문제는이시기의연대를설정하는것이었는데, 이역시상한을紀元前後로보고하한을기원후 300년까지로보는일제강점기의인식과동일한것이었다. 즉김해패총하층의貨泉과낙랑멸망의연대그리고, 기원후 400년대는당시국사학에서말하는삼국시대였다는점을고려하여설정한연대인것이다. 김원용이설정한초기철기시대와김해기는당초의金石倂用期를상하로분리한개념과통하는데이것도강점기에이미후지타가정리한내용과유사하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99
김원용은광복전에이미경성제국대학에서후지타료사쿠 ( 藤田亮策 ) 의수업이나연구성과를접했을가능성이높으며, 실제로출강나온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에게서현장고고학도배웠다고회고하였다 ( 김원용논문집 ). 즉당시일본인고고학자들이주도한조선고고학의성과를어렵지않게접하고이해할수있는입장이었던것이다. 해방직후국립중앙박물관원이되었던지라그들이남기고간총독부자료와기록에도제한은있었겠지만접근할수있었을것이다 4. 게다가미국유학은광복후조선고적조사종사자들이일본에서내놓은한국관련연구성과를획득하는통로이기도했다. 이러한맥락에서해방후김원용고고학의土臺를이해하는의미에서그의경력을살펴보자. 1940년경성제국대학예과 ( 문과乙류 ) 로입학. 1942년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사학과 ( 東洋史專攻 ) 진학. 후지타료사쿠는교수 (43년해임 ), 고고학개설의강사는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박물관에주임 ( 관장격 ) 으로근무하며주 1회경성제대에출강. 제대박물관에김원용을데려가유물을보여주고탁본실습시킴. 한강유역에서백제토기채집. 1945년경성제국대학법문학부사학과 ( 東洋史專攻 ) 졸업. 1946년 (1947년초?) 국립박물관을찾아김재원박사에게박물관원자청. 1947년국립박물관취직. 1948년캐나다와미국에서박물관학연수. 1954년-1957년 4년간미국뉴욕대학대학원에서박사과정수학. 1958년미국 1년파견근무. 1959년 新羅土器硏究 로박사학위취득. 1961년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고고인류학과대우부교수겸임, 62년교수임용 ( 이하생략 ) 이상으로보아그가당시朝鮮考古學을전반적으로정리한후지타나우메하라의연구성과를충분히이해할수있는입장이었음을알수있고, 실제로초창기그의저서에인용된참고문헌을통해서증명된다 ( 김원용 1973). 한국전쟁중이었던 1952년에제출한 慶州九政洞出土金石竝用期遺物에대하여 란짧은보고문에서 金石倂用期 란용어를사용한배경도짐작할수있다 ( 김원용 1952). 물론해방직후새로확보한자료가제한된상황에서일본인연구자들의인식을극복하거나다른주장을내놓기가쉽지않았을것이라는점은인정된다. 이때세형동검이출토되는시기를漢代라고평가하였는데이는후지타와우메하라가韓半島의 4 일제강점기김해패총의발굴성과와발굴품에대한김원용의이해는의외로한정적인데 1957년무렵에도쿄를방문했을때조사담당자중 1인이었던가야모토에게옹관과패총의퇴적상황을확인받은정황이드러난다. 즉해방이되었다고중앙박물관소장유물에접근하는것은쉬운일이아니었던듯하다. 10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세형동검류를 南朝鮮의漢代遺物 로정리했던인식에바탕한판단이었다 5. 세형동검등의유물을처음으로漢代와관련시켜정리한것은도쿄제실박물관의다카하시겐지 ( 高橋建自 ) 였는데 6 그의연대관의기준은다름아닌흑교리에서오수전을동반한세형동검의출토사례였다. 여기에 1920년김해패총에서발견된貨泉을근거로세형동검이중심인앞선시기와기원전후를상한으로하여후행하는김해기라는시기구분에대한분명한기준이마련되었던것이다. 이러한강점기이래의연구사를숙지했었기에김원용은구정리에서청동기와철기, 그리고합인석부가동반되어출토된것을확인하고주저없이금석병용기로판단했던것이다. 흑교리와김해패총의출토유물은낙랑군설치와퇴출연대를의식하게하여일본에서야요이토기의절대연대기준이되었고결과적으로역수입되어한국에서와질토기나삼국시대의상한을가늠하는잣대로활용되었다. 주지하는것처럼금석병용기라는개념은나중에초기철기시대 7 와김해시대로분화되는데전자를청동기성행을이유로청동기시대후기 8 로도보았던것이다. 결국청동기시대후기, 초기철기시대, 김해시대등의명칭과시대구분과흐름은기본적으로강점기이래로일본연구자들의조선고고학인식에뿌리가있는설정이라는것을알수있다. Ⅳ. 후지타료사쿠 ( 藤田亮策 ) 와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의 朝鮮考古學 김원용은 1973 년한국어판 考古學槪說 을내면서실제로후지타와우메하라등의저술을참고 하였음을自序에서밝히고있다. 다만후지타가 1940 년에쓴 朝鮮考古學 을거론하였지만실제로 이글은 1942 년에작성된것이다 9. 뿐만아니라미국유학과정에서아리미쓰의김해패총논문을입 5 藤田亮策, 梅原末治, 1925, 大正 11 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總督府. 6 高橋健自, 1923, 日本靑銅文化의起源 ( 考古學會第 28회發表資料 ), 日本考古學選集 10- 高橋健自集 所收. 7 1955년에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는세형동검과철기가동반되는문화현상을초기철기시대문화라고명명한바있다.( 有光, 1955, 朝鮮의初期鐵器時代文化에대하여 東方學 第 10 集, 東方學會. 8 이미이희준이지적한것처럼 ( 이희준 2004) 김원용은한국고고학개설제 2판에서초기철기시대라는시대명대신청동기시대후기라하였다. 이는 1986년의개정 3판에서다시초기철기시대로돌아간다. 9 藤田亮策, 1942, 朝鮮考古學, 東洋史講座 18.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01
수해서읽은사실도확인된다 10. 특히앞에서이미살핀 1963년의김해문화에대한정리 ( 김원용 1963) 역시도일본인선행연구자들의그것과내용면에서유사한점이많다. 이전논고들을묶어서단행본으로편집한 朝鮮考古學硏究 는 1948년에간행되었다. 이책에는 1934년에집필했던후지타의 朝鮮古代文化 가실려있는데 11, 여기서그는조선의역사를石器時代文化 秦漢文化의浸潤 樂浪帶方文化순으로서술하고있다. 주목되는것은秦漢文化의浸潤이라는것이전국시대말기이후명도전을포함한중원문화의파급으로특정되는시기이며, 그다음은낙랑대방문화란군현의설치로중원문화가본격적으로 2차파급되는시기라는의미이다. 설명할필요도없이후지타가설정한진한문화, 혹은낙랑문화의영향현상을한반도의시대구분명으로설정한것은역사의주체를무시한설정이었다. 이를지적하지못한부분에서아쉬움이있다. 김원용은결과적으로문화내용에대한이해를같이한채전자를초기철기시대, 후자를김해시기로바꾸어놓은것이다 12. 한편후지타가 1942년에쓴 朝鮮の石器時代 ( 雄山閣東洋史講座第 18 卷 ) 에서는石器時代 金石倂用時代 樂浪帶方時代 三國時代의순으로설명한다 ( 藤田亮策 1942). 여기서는금속병용기란秦漢文化의침윤과마찬가지로미개상태의재지석기문화와선진금속기가혼합된문화라는인식이었다. 그상한은전국말에서진한교체의혼란기에서얻었기때문에당연히기원전 3세기전후로정해졌다. 貨泉으로설명되는기원전후이후의문화는낙랑대방문화를대표로인식되었다. 나중에한국고고학에서도일반화되는초기철기시대와원삼국시대연대관의윤곽은이렇게정해진것이다. 드러나는것처럼김원용의연구를이해하는데는후지타료사쿠의연구가중요한데그이해의심화를위해서는 1937년에작성된 朝鮮發見의明刀錢과그遺物 이란논문을살필필요가있다. 여기서그는청천강이북과압록강변, 그리고요동지역에서자주발견되는명도전이낙랑토성이나기타한대郡縣城으로여겨지는토성에서발견되는사례가거의없다고보아적어도전한무제대이전의상황과관련있는고고학적증거로보았다 13. 명도전이주로전국말의혼란기, 즉진의공격으로연의계성이함락되고태자가요동으로피신하는상황을포함하여연과제, 그리고조의유민들이요서나요동의고조선과예맥의땅으로흘러드는정치적인상황을설명하는현상으로이해하였다. 김해토기, 김해문화와관련하여중요한것이 明刀錢搬出土器에대한理解 라고이름붙인章 10 본인은콜롬비아대학에서아리미쓰의논문을보지않은상태에서김해패총의연대관을정리하여리포트로제출하였다고강조하였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공간된논문은아리미쓰가먼저작성한것이다. 11 藤田亮策, 1934, 朝鮮古代文化 ( 岩波講座日本歷史第 12 回配本 ) 12 초기철기시대라는용어는 1950년대에아리미쓰가사용했던것이다 ( 有光, 1955). 13 즉낙랑토성의발굴과출토유물은이후동북아시아전체에서기원전 1세기에서기원후 4세기초까지의절대연대를가늠하는가장중요한표지자료가되었다. 야요이시대의연대문제는물론삼국시대와일본고분시대의연대관에도낙랑군의설치와멸망은중요한연대기준을제시했다. 10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이다. 이는집필당시의의도를뛰어넘어결과적으로김해패총의타날문토기에대한기본인식의한축을제공한측면이인정되고, 나아가 1980년대와질토기논쟁이발발한이후에김원용에서최병현, 그리고이성주등으로이어지는戰國土器影響設지지자들의중요論據와도통하기때문에연구사적으로대단히중요하다 14. 후지타는명도전이요서의일부지역과요동반도남부, 그리고압록강과청천강유역에분포하는상황을전국시대말이래의중원계유민과관련지웠는데, 중요한것은그러한명도전과동반되거나혹은명도전이담긴토기들이타날문토기였다는점이다. 이를통해서김해패총에서가장흔하게출토되는승문이거나승석문타날토기들이이와통한다는당시로서는지극히자연스러운인식이생겨난것이다. 후지타의명도전관련토기의이해를좀더깊이들여다보자. 후지타가논문을쓸당시참고한명도전수납토기는요동반도의영성자에서출토된것과연산산맥을넘은灤平縣에서수습발굴된 2점이었다. 토기들은유흑색, 즉회청색에사립이포함되었다하였으며신라소, 즉도질토기중에소성도가좋지않은것과비교되었다. 김해패총의토기를설명하면서나오는유흑색이란표현이어떻게확장되었는지드러나는대목이다. 이것이원시신라소라한것을보면대표적인김해토기와유사한소성도, 즉도질에미치지못하는와질소성 ( 후기와질 ) 이겠지만주지하는것처럼와질토기논쟁에서일괄도질토기, 즉회청색경질토기로묶어지고말았다. 명도전과관련되는토기는중형의저장용옹이라서성형시에사립을섞었다고보았다. 토기는전면에승문이베풀어지고횡으로여러조의띠가돌아가는형태라고하였다. 토기문양의구현은押印이아니라타날이라하였는데이는낙랑토성지등에서나온승문토기와유사하다판단했다. 승문타날의원리는흥미롭게도 樂浪郡時代의遺蹟 에소개된세키노다다시의실험결과를참고하였다. 이때문양이전부평행하지않고 2중으로된부분이있다고하였는데이는저부에대한 2차조정타날의결과일것이다. 이들토기는하북성과요녕지역으로확산된중원계 ( 燕系 ) 승문타날문단경호인것인데어깨에횡조선이복수로돌아가는것이었기에더욱김해패총의타날문토기와비교되었을것이다. 목양성과고려채, 그리고대령둔성등지에서출토되는타날문토기도그성격이흡사하다했는데발표자가판단컨데이들은전국시대燕에계보를두는토기들이다. 후지타는이러한토기들이북경서북의선화지구, 장가구남채원, 고가둔, 포두지역의타날문토기와도유사하다고보았는데이역시燕系의타날문토기와연식부가분포하는지역이다. 이와유사한형식의토기를연하도성지에서찾아비교하고또하남안양시에서전국말이나진대 14 물론이들의인식이모두동일하다는뜻은아니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03
의명문이있는토기와비교한하마다의연구를참고하여그시기를전국시대말기이후로정했다. 게다가낙랑토성의승문타날토기도같은성격이라하고낙랑고분출토품과이질적인부분이있는것은약간의시기차로이해했다. 타날문토기는진한교체기이후에도지속된다고인식하였기에김해패총의타날문토기를낙랑을매개시켜연결시킨것이다. 그러한흐름속에한반도남부지역에먼저등장한同形의타날문토기가바로김해패총, 고성패총, 양산패총, 그리고경주반월성등지의그것이라고인식하였다. 이들토기를후한대이후로시기를내려낙랑과연관시킨것은앞에서말한것처럼김해패총의철기류와貨泉이라는발굴성과를고려한결과이다. 또퇴적층에적갈색의야요이토기가있다고한부분에서김해패총발굴성과와관련연구를숙지하고입론하였음을알수있다. 결론적으로타날문토기그자체는이미진한교체기즈음에前漢初期에만주및한반도남부까지로전해졌을것으로판단하였다. 즉기원전후가상한인김해토기보다시기가더빠른타날문토기류가있을수있다는인식이었음을알수있다. 마지막으로후지타는 2가지의남겨진문제를제시하며논의를마무리하였다. 하나는승문토기와파상문토기의계보가동일한지의의문이었고, 나머지는신라소 ( 고분시대도질토기 ) 가타날문토기와계승관계에있는지의문제였다. 즉하한과삼국시대토기와의상호관계에대한의문인것이다. 후지타는타날문토기 ( 김해토기 ) 의전파와관련하여전국시대말기에육로를통해승문타날토기가한반도북부로이입되었는데평양미림리상층의것이원시형 ( 고식 ) 이고, 김해패총의것은발달된 ( 신식 ) 것이라고인식한듯하다 15. 물론이것이발달하여종국에는삼국시대토기가된다고파악했다. 육로라한것은말할것도없이명도전의분포에서추론한것이다. 정리하면김해토기, 즉회청색타날문토기란전국시대말기에명도전, 철기와함께한반도에전해진것인데이것이점차남부지역으로확산되어삼한의특수토기가된다는인식이다. 물론이는기원전후를중심으로양분되는데전자가秦漢文化의浸潤으로대표되는시기이고후자는군현설치후樂浪文化의양향이라는것이다. 결국앞에서살핀김원용의이해와후지타의정리를비교해보면초기철기시대는물론김해문화 ( 원삼국문화 ) 라는시기구분은물론그문화에대한이해의밑그림은후지타의그것과기본적으로다르지않다는것을알수있다. 해방후아직한국연구자가주체가된관련자료발굴이거의없던상황에서어쩌면당연한결과였다고할수도있겠지만그경과와내용은분명히밝혀둘필요가있다. 한편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가해방직후인 1946년에간행한 朝鮮古代의文化 도김원용이 15 대동강변의미림리의층위조사는도리이류조가실시한것인데이를통해석기시대와낙랑, 그리고고구려문화층의층위관계가최초로증명되었다는의의가있다. 10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참고한중요한선행연구이다 ( 梅原 1946). 특히이책의서술중심은시대별대표문화인데半島史前의文化 금속기사용초기의문물 낙랑의문화 삼국정립시대의문화 초기불교관계의유적과유물순서로이루어졌다. 여기서금속기사용초기의문물이란명도전과주조철기, 그리고세형동검이어서후지타의인식과거의유사하여그의연구성과를큰폭으로참고했음이드러난다. 이는김원용의초기철기문화에대한 1963년과 1973년의설명과도그내용이유사하다. 다만우메하라는김해패총이나그문화에대한부분을완전히생략한채낙랑문화만을다루었다는점에서그림 3 우메하라의 朝鮮古代의文化 후지타와다르다. 낙랑문화야말로광복전일본인연구자들이가장왕성하게발굴하여자료를확보해둔것이었지만이것으로조선의한시대를설명한결과가되었다. 종합하면김원용의 考古學槪論 의원삼국시대인식은후지타의시대구분에우메하라의해당문화중심의정리가종합된것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김원용은결국낙랑문화를우리역사에서제외해야된다고고고학개설 3판 ( 김원용 1986) 에서명언한바있는데, 初版집필시에도그인식은마찬가지였을것이다. 왜냐하면초판에도낙랑문화부분이송두리채빠져있기때문이다. 결과적으로공백으로남게된原史라는시간대에김해패총을대표유적으로판단하여그출토유물로김해문화를시대구분에채워넣은것이다. 이때아리미쓰의연구가어떤영향을미쳤는지는앞으로더구체적인검토가필요할것이다. 어쨌거나시대구분의명칭을중국사중심의영향관계로정하고설명하던것을한국에서발견된특정물질문화를의식해서바꾸어놓은것이라는데중요한의의가있다. 다만사용가능한신자료가없던상황에서그내용이식민지일본고고학자들의견해에서벗어나지못한점이지적된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05
Ⅴ. 1920 년의金海貝塚發掘과이해 한편김해문화에대한논의의핵심은주지하는것처럼김해패총의발굴자료였는데특히 1920년의발굴조사성과를종합한 1923년간행보고서는관련연구의기본텍스트가되었다. 그렇기때문에관련연구사정리에서대단히중요하다. 김해패총은이미이마니시류 ( 今西龍 ) 가 1907년에부분굴착을시도하였으며 1909년에는세키노다다시 ( 關野貞 ) 를보좌하여전국을조사하던야쓰이세이치 ( 谷井齊一 ) 도굴착하였다. 이후에도 1918년의도리이류조 ( 鳥居龍藏 ) 의조사, 그리고구로이타가쓰미 ( 黑板勝美 ) 등의발굴이이어지면서패총의성격이조금씩드러났는데, 그전모가본격적으로학계의반향을일으킨것은교토제국대학의하마다고사쿠 ( 濱田耕作 ) 와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가실시한 1920년의조사내용이 1923년에학계에보고되면서부터이다. 1920년에패각층에대한계단식발굴과층위별동반유물의획득, 그리고중원세계의화폐인貨泉이출토되면서관련연구를크게촉발시킨부분이인정된다. 금석병용기에대한기본인식은물론초기철기와김해기로명명되는패각층의성격과연대비정도이를바탕으로형성되었다. 위에서살핀후지타의정리도결과적으로 1920년의발굴성과에전적으로기대고있다. 물론앞서는 1907년에김해패총을조사한이마니시류 ( 今西龍 ) 도소량이지만석기를사용하면서한편으로는금속기 ( 철기 ) 가보급된과도기에해당하는시기라고언급한바있다. 죠몬패총과는성질이다르고토기도진보된것이라는중요한발언을하기도하였다 16. 또 1918년에실시된도리이의발굴에서두꺼운패각층아래의패각미포함층에서무문토기와마제석촉이출토된석관이발굴되어층위상의중대정보가획득되었지만어찌된일인지이정보는연구자들사이에서그리넓게공유되지않았다 ( 國立金海博物館, 2014). 도리이의층위이해는아래에서살필김원용이나아리미쓰, 그리고가야모토의김해패총연구와도상통한다. 금석병용기라는용어는이미歐美에서사용되던것이어서이것만으로문제삼을일은아니다. 조선에만적용시킨것이아니라는이야기이다. 그리고 1923년보고에서말하는김해패총의금석병용이란청동과석기의동반이아니라철기와부분적으로석기가같이사용된다는의미였다. 철기보급의근거는패총출토의철도자와철편그리고녹각에서관찰되는철공구를이용한절단흔이었다. 이들철기는중국이본격적인철기시대에들어선前漢代이후에보급된것이라보고김해패총의거주민들이직접적으로철기영향을받게되는것은기원후 1세기인데그증거는당연히여러번언급한 16 1908년에김해패총을조사한도리이류조도층위상석상묘 ( 지석묘관련 ) 가패총에선행하며패총토기는전반적으로삼국시대토기류보다선행한다고주장하였다. 10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貨泉이었다. 결국김해문화는금석병용기중에서도후반에속한다고정리되었다. 보고서는한반도남부가석기시대단계에정체되어있었는데漢代, 중국 ( 보고서에서는지나 ) 인들의발흥으로철기가도입되어鐵石倂用期 17로발전했다고보았다. 또금석병용기의상황은內地日本과완전히동일한것이라하였는데, 중국문화가반도로확산되는현상은漢代以前부터지만漢代가되어郡縣이설치되면서남부지역까지연차확산되었을것이라하였다. 그고고학적증거가바로김해패총유물이라는이해이며, 앞에서살핀김원용의김해패총인식이어디서비롯되었는지를가늠할수있다. 결국前後漢의경계를기준삼는후지타와우메하라의인식은물론광복후김원용의초기철기, 김해문화의경계에대한인식기반도이미 1920년발굴을거치면서확립된내용이라는것을알수있다. 물론그경계의시간을가늠케했던것은여러번말하지만貨泉이다. 금석병용기 ( 鐵石倂用期 ) 를확신한것은발굴을통해최하층인제 7층에서철기편과철재편이발견되면서이다. 즉처음부터철기가있다는인식이생긴것이다. 김해패총의화천은단지상한연대를시사할뿐으로정확한연대를알수없는것이라했지만유통기간이짧다는점을참고하여기원 1세기대로보는것이무난하다는결론이었다. 기년자료에대한비교적타당한이해태도라할것이다. 그리고토기에대한해석이다. 즉패총에서출토된 3종류의토기중에서청유색의토기 ( 회청색경질토기 ) 는임나고분의것과동일한것으로김해패총축조인은임나고분축조인의직접조상인것이라고결론내렸다. 김해패총토기를고분출토토기와동일하다판단한것은 1980년대이후의와질토기논쟁과도통하는중요한발언인데, 조상운운한것으로보아계승관계이면서선행한다는판단이었음을알수있다. 발굴성과의총정리에서조사원들이가장흥분한것은일본內地, 특히야마토의고분에서출토되는도자및도자병과동일한유물이김해패총에도존재하는것을밝힌점이라고하였다. 그리고영남지역이야요이식토기계통과가장밀접한토기문화가있는공간이라고결론내렸다. 그런맥락에서김해패총의조사는단순히조선선사시대를연구하기위해서가아니라內地日本을연구하는데도움이되는것이라명언하였다. 이러한결론은비록문장으로밝히지는않았지만신공황후삼한정벌설과임나일본부설을크게의식한발굴조사였음을내비치는것이다. 결국이마니시류 ( 今西龍 ), 야쓰이세이치 ( 谷井濟一 ) 는물론구로이타가쓰미 ( 黑板勝美 ) 와같이대표적인신공황후삼한정벌설지지자들이패총발굴에매달리고, 이를믿는지역의好史家들까지도끼어들어끊임없이김해패총조사에매달린이유를알게해준다. 나아가한반도남부와일본열도를묶어서선사와역사전환기의문화를확인하는데도움이되었다고한것을보면, 당연한이야기지만帝國日本의역사考究가목적인조사였던것이다. 조사자체 17 금석병용기이지만청동기와석기가아니라철기와석기의조합이라는것을강조하기위하여일부러문장속에서사용한것이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07
가일선동조론으로귀결된측면이지적되지만광복후우리고고학계는그본질을제대로이해하지못 하였다. 그런상태에서원삼국시대론, 와질토기론만이덩치를키우면서홀로걷기를하였던것이다. Ⅵ. 김해패총출토토기의이해와변천 ( 瓦質土器論爭의前史 ) 1. 보고서의평가 한국고고학계에서원삼국시대논쟁이본격적으로전개된이후에는논의가와질토기에극도로쏠린점이인정된다. 그러나정작문제는논의의출발이자핵심이라할김해토기에대한이해가충분하지않았다는점이다. 오랫동안낙랑토기에대한이해가없으면서낙랑토기영향설을주장했던것과마찬가지로김해토기역시이해가부족한상황에서와질토기논쟁만이과열된것이다 18. 김해토기에대한이해가부족했던것은해방이후에도한국에서는관련자료를제대로살필수없었기때문이었다. 특히 1920년의발굴자료는대부분교토대학으로반출되었는데, 1980년대에이를관찰한것은신경철이유일한듯하다 ( 신경철 1989). 어쨌거나보고서에서는김해패총에서출토된토기를크게 3가지로분류하였다. 1) 1류 : 치밀한도질의청흑색, 혹은유흑색의것으로내지의이와이배 ( 축부 ) 토기, 조선에서말하는신라소라말하는것과같은계통에드는것. 2) 2류 : 산화염연질소성에우리 ( 일본 ) 의야요이토기와유사한것. 3) 3류 : 흑갈색연질소성에그질이약하고좋지않은것. 1류유흑색도질토기는가장기술적으로진보한것. 2류가그다음이고 3류는가장유치한窯法으로제작된것이라하였다. 발굴조사는분층하여이루어졌지만결국이러한 3종류의토기가층별쏠림이없고특정토기류의결여도인정되지않는다는결론이핵심이다. 경사면에서의패총퇴적은수직적新舊가인정되지않는것으로판단하여표토에서가까운것과먼것으로수평분층도해보았지만 ( 계단식발굴에동일층 a b 분리 ) 역시토기류의구분이분명히인정되지않았다. 발굴과정에서하층으로갈수록 2.3류의토기가많은느낌은있었지만결정적으로하층에서 1류토기가출토되어이를기술발전의도식으로설명할수없었다고하였다. 그렇지만이들대부분의토기가기원전후에서기 18 1980 년대이후의와질토기논쟁에대해서는최근간행된 와질토기논쟁 이자세하다 ( 김성남 김경택, 2013). 10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원후 300 년사이에중점적으로사용된토기군이며종국에는삼국시대고분토기의조형이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미앞에서정리해둔김원용의김해토기인식이어디에서비롯되었는지를보여준다. 2. 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의김해패총토기인식 그런데해방후교토대학에서김해토기를재검토한아리미쓰는층위별로토기종류의차이가있다고평가하였다 ( 有光 1954). 그가김해토기를검토할수있었던것은 1920년에출토된유물을보고서작성과정에서교토대학으로반출시켰기때문이다 ( 국립김해박물관 2014). 총독부가주도한고적조사와관련된법령이정비된 1916년에는원칙적으로출토유물의반출을금지시켰는데어떻게이를교토대학으로반출할수있었는지추후확인이필요하다. 어찌되었던아리미쓰는경사면퇴적의패총발굴에서계단식발굴이나수평분층자체가퇴적순서를완전하게반영하지않는다고하면서도김해패총토기의신구를살피기위하여최하층과상층을극단적으로비교하는분석법을선택하였다. 그결과보고서의 3종토기가상하층에서섞여나온다는것은인정하면서도그내용에차이가있음을주장하였다. 최하층에서는무문토기에가까운구연을겹친적색소소토기 ( 확인결과삼각형점토대토기 ) 와점토띠성형의거친태토가우세하고여기에 1종토기도있지만이것이유청색도질토기와적색소소토기의중간정도라고판단하였다. 지금의감각이라면이는와질토기의범주에속하는것인데그차이를당시아리미쓰가인지했다는점은주목된다. 또세형동검류가동반되는야요이옹관과동일한파편이같은 7b층에서출토되었기에김해패총의상한은옹관과연결된다고이해한것이다. 중간단계에대한구체적인설명을생략한채하한은상층인 2a층출토유물에서힌트를찾았다. 즉이층의도질유청색토기중에신라고분에서출토되는토기들과유사한것이있다는것을근거로김해패총의하한을삼국시대이후까지내려온다고결론내렸다. 대각과투창이뚫린회청색에가까운토기들이섞여있었기때문이다. 아울러보고자들은김해패총을금석병용기로인식했지만최하층에서이미철기가출토되기때문에김해패총출토품전체를철기시대의것으로판단해야옳을것이라하였다. 끝으로최하층에서도출토되었다는보고서분류의유청색도질토기가문제이다. 이토기를지금한국고고학개념으로보면와질토기우세에부분적으로소성도가높은도질의토기 ( 삼국시대의도질토기가아님 ) 가포함된개념이지만그분류기준과내용이오랫동안분명하게정해지지않은채와질토기논쟁이점화되었던것이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09
3. 가야모토가메지로 ( 榧本龜次郞 ) 의金海貝塚의再檢討 ( 榧本 1954, 1957) 귀국후도쿄박물관에서근무하게된가야모토는 1934년과 35년에본인이발굴한김해패총에대해서견해를제출하였다. 그것은아리미쓰와는달리층위별토기의차이를발견할수없다는것을전제로시종패총의퇴적이정상이아니라고주장하였다. 즉패총의층위에서新舊를가늠할수없다는보고서의인식과궤를같이하는것이다. 다만赤色素素土器들은색조등을고려했을때二分되는데그중하나는청회색토기류와동반되는것이라고이해하였다. 다만이것이삼각형점토대토기등과적갈색연질토기의차이를말하는것인지는분명하지않다. 또그는김해패총의유구와유물을크게 3개의군으로나누었다. 제 1군이선사토기와마제석기, 야요이토기와세형동검의세트이고제 2군이원시신라토기와철기및골기, 그리고제 3군은고신라토기 ( 가야모토는古新羅陶器라하였음 ) 라는것이다. 즉 2군과 3군이패각의퇴적층과관련된것이다. 분묘와주거지에서확인되는패총과의관계로보아제 1군이선행하는것은분명하다고할것이다. 옹관은매납후에이동된것으로판단하여패총에옹관편이섞인이유로해석하였다. 이는옹관과지석묘를패총이전으로완전히분리하여보는시각으로김원용의해석과같은것이다. 그러나패총상하에토기들이섞인이유는토목공사등으로인한패총의이동등에기인할가능성이있다고판단하는것이다. 4. 김원용의金海貝塚분석 광복후김해패총발굴성과를분석한김원용은일본인연구자들과마찬가지로貨泉에서기원전후라는상한연대를설정했지만三國期와의사이에놓이는문화내용이분명하지않다는의문을가진듯하다 ( 김원용 1957). 앞에서언급한것처럼미국에서아리미쓰 ( 有光敎一 ) 의논문을접하고는본인도 1955년즈음에같은주제로이미레포트를제출한바있다고하면서그내용을소개하고있다. 즉발행연도는아리미쓰가빠를지라도본인이김해패총을분석하면서아리미쓰의연구를참고하지않았다는것을강조하고있다. 김원용은김해패총의조성이일단야요이옹관조성시기와겹치지않는다고전제한다. 옹관에패각관련흔적이없다는것이근거인데이는가야모토가조사당시에찍은사진을참고했을가능성이높은것이다. 또한김원용은 1957년도쿄를방문했을때 1934, 35년발굴자인가야모토에게패각과옹관의관계를물어서내용을확인했다고도하였다 ( 김원용 1957). 또묘지가생활폐기장으로변하는데는시간이걸릴것이기때문에석곽묘와옹관이먼저조영되고약간의휴지기를거친후에야패총형성이시작되고 ( 최하층에서가까운貨泉으로보아상한은기원전후 ), 그하한은삼국기의고분토기 11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와연결되지만완전한고분유물이없는것으로판단하여 4세기말이라는연대를얻었다하였다. 세형동검과동반되는옹관은석곽분과同時期로판단하였는데결국석촉과무문토기가세형동검및야요이옹관과동시기가된것이다. 지금의이해라면지석묘출토의무문토기가기원전후한시기까지잔존하며김해패총보다는선행하지만겹칠가능성을버리지않았던것이다. 물론세형동검과옹관도마찬가지이다. 나중의개설에서김원용이원삼국시대에는청동기가소멸하고지석묘가소멸한다고명언한것은결과적으로김해패총의층위에대한이해를바탕으로한것임을알수있다. 그런데옹관이출토되는시기는중국화북과남만주의것이기원전 3세기까지내려오기때문에한반도남부지역에서출토되는옹관과세형동검등의상한도이를넘지않을것으로판단하였다. 한국고고학에서오랫동안지지받았던점토대토기와세형동검문화의상한연대가어떻게가늠되었는지를생생하게보여주는것이다. 정리하면김해패총에서지석묘와석기그리고무문토기는세형동검, 야요이옹관등과동시기이며그하한은기원전후한시점이다. 그리고김해패총의퇴적이개시된것도비슷한시기로추정할수있다는것이다. 결과적으로가야모토의정리와결론이유사하다. 물론하한은삼국고분기로이어지는기원후 4세기말경무렵에끝난다고보았다. 당시세형동검과동반되어출토되는철기는제법알려져있었던터여서철기가도입되지만청동기가성행한다는초기철기시대 19 의기본이해는이즈음에마련된것이다. 그리고후행하는김해시대의문화상은철기를위주로골각기와타날문토기등이동반된다고정리되고있었다. 1963년에작성된논고에서의김해문화에대한이해, 그리고그연대관이어떻게형성되었는지를알수있다. 이렇게정리해놓고보면광복후김원용에의한김해기의설정, 그리고이를원삼국시대로바꾸어설명한배경마저도일제강점기관련조사와연구를독점했던일본인연구자들의인식을토대로하고있다는것이드러난다. 강점기간내내고적조사사업의주체가된적이없으며, 나아가전쟁으로치달은사회혼란속에서새로운자료획득이어려웠던상황아래에서어쩌면당연한결과였을지도모르겠다. 5. 광복이후의검증 : 조도패총의발굴과층위인식 결국김해패총의퇴적은깊지만동반유물에서상하큰차이가없다는문제는관련연구를혼란스 럽게한측면이지적되며그것은현재까지도이어지고있다. 김해패총의퇴적을이해하기위한전략이깔린채진행되었는지는분명하지않으나 1970 년대초 19 1955 년에아리미쓰는이미이시기를초기철기시대라고판단한바있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11
가되면중요한유적이발굴된다. 부산동삼동패총에서가까운조도 ( 아치섬 ) 에서의발굴된패총이그것이다. 한병삼과이건무의이름으로 1976년에발표된조도패총은김원용이인식했던김해토기들과거의유사한토기들이출토된유적으로관련대표논자인신경철과최종규도실측에참가했기에중요하다. 물론김해패총이논쟁의핵심이었으나자료관찰이어려웠기때문에조도패총은이를검증할수최적의자료였다. 보고자들은유적을모두 3층으로나누고최하층인제 3층을공열토기와점토대토기가동반되는층이며세형동검와도관련된다고보았다. 여기에일부적갈색의타날문토기가있다고판단하여 3층종말기에북중국, 남만주의타날계토기의영향이있었을것으로정리하였다. 김해패총에대한이해를그대로대입하고있는상황을읽을수있다. 즉김해패총의지석묘와야요이옹관, 그리고세형동검관련층과동일시한것이다. 제 2층은격자문과승문타날이주체인토기들이많이출토되는층이며적갈색토기에는빗질정면흔이우세하였는데이역시본격적인북방타날문토기영향이라생각했으며부분적으로물레성형이채용된회청색경질토기가보인다고하였다. 또토기성형에물레가사용되고등요가도입된증거라고하였다. 이 2층은전형적인김해토기가중심이되는층으로보고철도자를증거로철기시대에돌입했으며볍씨자국으로보아벼농사실시되었다고판단하였다. 제 2층에대한평가도김해패총패각에대한평가와완전히일치하는것으로해방후김원용의정리가그대로녹아있는것을알수있다. 문제는최상층인 1층이었다. 물레사용토기가압도적으로증가하며빗질정면토기가현저히줄어드는현상이관찰되는것을등요채용의일반화로해석하고거치문등은신라토기로발전하는과도기의상황을보여준다고판단하였다. 그런데이층에서야요이토기가발견되었다. 수구식야요이토기편인데일본과의교류를상징하는것이된다. 철기등漢과교류를시사하는유물로이해하여삼국시대이전의역사상이녹아있는것으로평가하였다. 결국 1976년까지김해문화에대한국내학계의이해는일제강점기이래의인식, 그리고김원용이정리한내용의범위안에머물러있었다는것을알수있다. 평가한다면 1층에하층토기가섞일수있다는것을간과한아쉬움이있으나김해토기와점토대토기등이층위적선후관계를보이며고배등의삼국시대토기들이 1층에압도적으로분포하는등당시분명히드러내어설명하지못했지만지금의관점에서보면김해패총에서드러나지않았던층위별대표토기들의상관관계가분명해진점에서의의가있다. 이후웅천패총이나성산패총등과의상호관계를가늠할수있는기초가만들어졌다고평가할수있다. 당시절대연대는이타츠케의원형점토대사례와방사성탄소연대로기원전 250년전후, 그리고하한은 1층은수구식옹관의연대로기원후 2세기이하로내려올수없다는것이었다. 김해패총의발굴을계기로정해진연대관과시대에대한인식이야요이연구에적용되고그정리가다시광복후의한국고고학에영향을주는상황이선명하게드러난다. 11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Ⅶ. 새로운과제의인식 조도패총발굴보고서가작성된이후 1970년대말이되면김원용의원삼국시대와와질토기론에도전하며신경철과최종규가신설을주장한다. 와질토기논쟁의발발이다. 그전개에대해서는이미단행본이나와있는상태이다. 결과적으로김원용도인정했듯이김해패총을위시한남해안의패총출토타날문토기가삼국시대의토기로새롭게자리매김하고그자리를각종와질토기에내어주었다 20. 김원용의끈기있는반론도있었지만학계의인식은신설을지지하는쪽으로바뀌어갔다. 최근와질토기의발생을낙랑군의성립이아니라그이전으로소급시키려는연대역상론이새롭게제시되어논쟁은새로운국면으로전개되고있지만여기서는상론하지않겠다. 한국고고학에서초기철기라는시대는철기가출현하지만세형동검이여전히사용된다는의미이고원삼국시대는철기중심에중국발타날문회도가등장하는시기로이해한다. 물론이끈김원용의정리이다. 그러나따지면전자는진한교체기이래중국문화의영향을받는시대이고, 후자는후한대이후낙랑의영향을받는시대라는일제강점기일본학계와같은인식을딛고서있는것임을알수있었다. 살핀것처럼식민지조선고고학의시대구분에서는이땅에서살았던사람이주체가된적이없다. 중국문화의영향으로설명하고일본역사의부분으로써공통성이강조되었을뿐이다. 광복후시대명만조정되었을뿐인데그마저도일본고고학에서거론되던내용이었다. 낙랑군의설치로대표되는중국문화의영향으로만시대구분하고설명하면서어찌일제강점기이래의프레임에서한발자국라도전진할수있겠는가? 아울러김원용과일본연구자의시대구분에서연관이드러난만큼지금처럼굳이초기철기시대와원삼국시대를나누어볼필요가없다. 즉중국사에기대어漢文化의파급을 2단계로나누거나, 금속병용기나야요이시대라는일본사에기댄시대구분에서자유로워질필요가있는것이다. 시대구분과관련하여덧붙인다면낙랑문화를한국고고학에서제외하는바람에결과적으로그前史라고할수있는고조선문화마저도빠지게된점은뼈아프다. 이는우메하라가文化라는개념을전면에내세워발굴된고고자료만으로각시대를槪說하던분위기에서영향을받았기때문으로추측된다. 즉김원용역시考古學槪論初版에서고고문화의개념으로시대를다루었던지라확보된발굴자료가거의없었던고조선이제외된것이다. 실제로강점기에는낙랑과관련된유적만이과하게 20 물론이부분은근년이루어진김해패총재발굴보고서와일제강점기에조사된내용을재검토하여반드시새롭게검토되어야한다. 발표자는최근자료검토결과김해패총에서출토된대부분의토기들이원삼국시대에속한다고판단하기때문이다. 장담하건데김해패총토기의소속문제를둘러싼와질토기논쟁은앞으로새로운국면을맞으면서새로시작될것이다. 韓國考古學史에서金元龍과 原三國時代 정인성 113
강조되었으며, 반면고조선유적에대한조사는시도조차되지않았다. 최근발표자가확보한야쓰이세이치고고자료를살핀결과공식적인조선고적조사에서의도적으로배제되었을가능성도높다. 그대신공식적인고적조사가시작된 1916년의중심조사는한사군관련유적이었음을음미해야한다. 일제강점기에는고조선을배제하고낙랑만을강조하였고, 광복후김원용은낙랑마저도우리역사가아니라고제외하자결과적으로양자모두가한국고고학의서술체계에서빠지고만것이다. 그자리를대신꿰어찬것이초기철기시대와원삼국시대인것이다. 오랫동안국립중앙박물관에고조선실이설치되지않았고낙랑을우리역사로인정할것인지의논의가끊이지않았던것도이러한경과와무관하지않다고생각한다. 끝으로위에서살핀것처럼김해패총의상한이기원전후에서정해진것은오직화천의역할이었다. 현재원삼국시대의상한은이희준의정리 ( 이희준 2004) 로기원전 1세기로상향조정되고발표자처럼더소급해서보는연구자도있지만여전히반대론도존재한다. 관련하여말해놓고싶은것은이러한연대관이마련될당시만해도영남지역에서화천보다소급되는기년자료는없었다는것이다. 오직화천에서얻은기원전후에맞춘것이다. 연대론논쟁에서흔히참고하는일본야요이시대의연대관도화천에서시작되어낙랑군설치시기에맞추어놓은것이다. 와질토기논쟁이격화된이후영남지역에서는이미기원전 2세기이전으로소급되는중국청동기자료가다수출토되었다. 영남지역의와질토기, 즉회도가낙랑토기와다르다는연구성과도충분히제시되었다. 언제까지한반도의역사를타율적으로규정하며설정된시기구분과그연장선에있는낙랑군영향설에기대어논의를지속할것인가를고민해야할때이다. 와질토기논쟁이시작된이후의연구사는다음기회를약속하면서발표를마친다. 11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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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118-147 고구려고고학연구사 최종택 ( 고려대학교 ) 목차 Ⅰ. 머리말 Ⅱ. 문헌분석을통해본고구려고고학연구동향 Ⅲ. 시기별고구려고고학연구동향 1. 제 1기 (1895년 ~1945년 ) 2. 제 2기 (1946년 ~1973년 ) 3. 제 3기 (1974년 ~1994년 ) 4. 제 4기 (1995년이후 ) Ⅳ. 맺음말
Ⅰ. 머리말 기원전 37년졸본에서건국한고구려는국내성으로천도한이후국가체제를완비하여 4세기대에이르러동북아 4강의하나로부상하였다. 427년평양으로천도한이후고구려는남진을본격화하여 475년에는백제의수도한성을함락하고, 한반도중부및남부지역일부까지영토를확장하는등전성기를구가하였다. 668년멸망할때까지 700여년을존속한고구려는오늘날중국의동북지방과북한지역및남한의중남부지역에걸치는넓은영토를경영하였으며, 많은유적과유물을남겼다. 고구려고고학연구는 20세기초일본인에의해시작되었으나, 넓게보아고구려고고학의시작은 19세기말광개토왕릉비의재발견부터라고할수있다. 능비의재발견이후기록으로전하는고구려유적에대한최초의조사는 1895년도리이류조 ( 鳥居龍藏 ) 의랴오뚱 ( 遼東 ) 반도답사이다. 1 이때도리이는지안 ( 集安 ) 지역을답사하지는못하였으나봉황성을비롯한랴오뚱반도일대의석성을고구려유적으로보고하였다 ( 정인성 2009; 鳥居龍藏 1986a 1986b). 이후 1905년도리이는지안일대를답사하고광개토왕릉비와태왕릉, 장군총등주요고분을조사하였는데, 지안일대의고구려고분이 1,300기가넘으며, 1,500기에이를것으로추산했다 ( 정인성 2009). 1907년에는프랑스의에두아르샤반느 (Edouard Chavannes) 가국내성일대를답사한후보고문을남겼으며, 이때처음으로고구려벽화고분이서양에소개되어국제적인관심을유발했다 ( 서길수 2006; E. Chavannes 1907 1908). 이처럼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는러일전쟁이후포츠머스조약의성립 (1905년) 으로만주와한반도에대한일본의식민지화가진행됨과함께시작되었으며, 1910년세키노다다스 ( 關野貞 ) 등에의해만주와한반도전역에걸친고적조사가대대적으로시행되면서본격화되었다. 이상과같이고구려고고학의연구는일본인에의해시작되었으며, 순수한학문적인목적보다는식민지지배의합리화를목적으로연구가이루어졌다는점에서시작부터왜곡되었다고할수있다. 광복이후에도한반도가남북으로분단되면서고구려고고학연구는중국과북한을중심으로이루어질수밖에없었으며, 남한지역에서고구려고고학연구가본격화된것은 1990년대이후의일이다. 최근 2000년대이후중국의동북공정을통한고구려사왜곡과북한과중국의고구려유적을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하는과정에서고구려사문제가국제적인이슈로대두되기도하였다. 이처럼고구려고고학연구과정은학문외적인요인으로왜곡을겪어왔으며, 그간의연구동향에 1 1876년懷仁縣의관원이었던關月山이비를발견하고부분적인탁본을실시함으로써금석학자들을중심으로연구가시작되었다. 그러나이비의존재가처음으로기록에등장하는것은 1445년조선시대에편찬된 龍飛御天歌 로같은책 39장에고려말원나라동녕부를공격할당시이성계장군이이비와거대한석분 ( 적석총 ) 의존재를확인한내용이기록되어있다.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19
대해서는여러편의논고가발표된바있다. 2 그러나그간의연구동향을정리한글들은일제강점기의연구동향이나, 중국 북한 남한등지역별연구동향, 고분벽화 성곽 고분 토기등주제별연구동향을다룬것들이주를이루고있어서 100년이넘는기간동안의고구려고고학연구과정을일목요연하게정리하지는못하고있다. 이글에서는 1895년도리이의랴오뚱반도조사이후 2014년까지국내외에서행해진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현황과연구성과를시기별로검토하여연구경향을분석하고자한다. 3 Ⅱ. 문헌분석을통해본고구려고고학연구동향 1986년이후 2014년까지국내외에서발표된고구려고고학과관련된글은모두 1,972편에달한다. 4 표 1 은고구려고고학문헌을국가별 종류별로구분한것인데, 국가별로는남한에서간행된문헌이 742편으로가장많고, 중국에서간행된문헌이 663편으로그다음으로많으며, 일본, 북한이그뒤를잇고있다. 뒤에다시시기별로발표된문헌을살펴보겠지만남한에서간행된고구려고고학문헌이가장많은것은 2000년대중국의동북공정이후문헌의간행이폭증하기때문인것으로보인다. 한편문헌의종류별로보면논문형태가 1,504편으로 76.3% 를차지하며, 학위논문도 96편이나간행되었다. 논문의성격별로구분해보면연구논문의성격의글이가장많지만중국과일본의경우보고문이상당한양을차지하고있으며, 학회발표문이남한에서가장많이간행된것도특징적이다. 단행본의경우남한지역에서조사보고서가가장많이간행된것으로나타나는데, 일제강점기의조사나중국이나북한에서조사된내용이단행본형식으로간행된사례가많지않음을반영하는결과이다. 한편학위논문은남한에서간행된것이가장많은데, 중국이나북한, 일본의학위논문간행정 2 고구려고고학연구동향과관련된글은모두 87편에달하는데 ( 표 4 참조 ), 개별논문의자세한내용은 Ⅱ장의각절에서자세히검토하기로한다. 3 고구려고고학연구사를오롯이살피기위해서는시기별연구동향에대한검토와더불어주제별연구사적검토가반드시필요하지만시간상의제약으로주제별연구성과는검토하지못하였으며, 이에대해서는다른지면을통해보완하기로한다. 4 여기에는 2015년전반기에발표된학위논문 3편이포함되어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대해서는이미자세한연구문헌분석과주제별연구동향에대한글이발표되었으므로제외하였는데, 2003년까지고분벽화를주제로한연구문헌은 700편에달한다 ( 전호태 2004). 그러나벽화고분의구조와편년을주제로한문헌과조사보고문등은본고의분석대상에포함하였다. 12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표 1 국가별 종류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국가 종류 연구논문 조사보고 자료소개 논문학위논문단행본 학회발표문 단행본중논문 기타박사석사학술저서 조사보고서 도록자료집학회발표집 남한 338 5 9 69 56 8 10 55 38 36 40 12 55 11 742 북한 99 51 14 1 4 9 1-25 17 9 - - - 230 중국 333 126 22 20 57 6 6 23 34 11 5 19 1-663 일본 110 62 11 10 55 15 - - 23 16 12 1 1 3 319 기타 3 3-5 3-1 - 1 - - - 2 0 18 합계 883 247 56 105 175 38 18 78 121 80 66 32 59 14 1,972 1,504 96 372 기타 합계 표 2 연도별 국가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연도 1899년국가까지 1900-1909 1910-1919 1920-1929 1930-1939 1940-1949 1950-1959 1960-1969 1970-1979 1980-1989 1990-1999 2000-2009 2010 합계 -2014 남한 - - 2 1 1 2 10 5 14 25 118 420 144 742 북한 - - - - - 2 20 41 13 54 59 41-230 중국 - - - - 2-10 13 4 115 200 209 110 663 일본 2 4 53 17 66 31 12 7 22 30 31 41 3 319 기타 - 2 - - - - 1-4 - - 10 1 18 합계 2 6 55 18 69 35 53 66 57 224 408 721 258 1,972 그림 1 연도별 국가별고구려고고학문헌의추이 보를집계하기어려운점이있지만역시 2000년대이후남한에서고구려고고학연구가활발히이루어진상황을반영하는것으로생각된다. 한편연도별로고구려고고학문헌이간행된현황을살펴보면 표 2 및 그림 1 과같은데, 1980 년대이후문헌이급증하는것을볼수있으며, 특히 2002년중국의동북공정이후문헌이폭증하는것을확인할수있다. 1950년이전에는거의대부분의문헌이일본인에의해간행되었는데, 1920 년대에는간행물이수적으로감소하는현상을보이고, 1930년대에다시증가하였다가 1945년패전이후에는급격한감소를보인다. 1950년이후북한에서간행물의증가가눈에띄며, 1970년대간행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21
물의빈도가다소감소하였다가 1980년이후완만한증가세를보이고있다. 중국의경우는 1980년대이후간행물이급증하기시작하며, 남한에서는 1990년대부터점차증가하여 2000년대초반간행물이폭증하고있다. 국가별로보이는연도별문헌의증감현상은기본적으로는고구려고고학연구성과를반영하는것이지만각국이처한정치사회적상황과도밀접한연관이있는것으로보인다. 즉, 1945년이전일제강점기동안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연구는일본인들이주도한것은주지의사실이며, 1946년이후북한과중국에서고구려유적조사연구를주도하게되었다. 1946년정권수립이후북한은고고학조사연구에박차를가하였으며, 연구성과역시중국을압도하고있다. 또한중국에서는 1960년대후반문화대혁명의여파로고구려고고학연구는일정기간침체를겪다가 1980년대에들어와서야연구가급증하는것으로보인다. 반면에북한에서는 1960년대말주체사상의확립과더불어고고학연구가교조적으로변질되고, 1970년대중반이후경제상황과맞물려이후연구성과도침체를겪게된것으로생각된다. 한편남한에서는 1990년대초중국과의수교이후고구려유적에대한접근이가능해지면서고구려에대한국민적인관심이고조되었고, 2002년중국의동북공정과고구려유적의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등재, 2000년대초반남북한교류의활성화등에힘입어연구성과가폭증한것으로이해된다. 19세기말이후고구려고고학연구에있어서가장관심의대상이된것은고분이었다. 표 3 과 그림 2 에서보이는것처럼대체로 1980년까지는고분을대상으로한조사와연구가가장많았으 표 3 연도별 연구대상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연도대상 1899 년까지 1900-1909 1910-1919 1920-1929 1930-1939 1940-1949 1950-1959 1960-1969 1970-1979 1980-1989 1990-1999 2000-2009 2010-2014 성곽 - - 12 12 21 19 10 17 10 70 159 218 73 621 고분 2 3 38 4 30 13 36 39 35 94 126 184 63 667 건축 - 1 - - 3 1-2 - 12 15 11 10 55 유물 - 2 5 2 13 1 6 8 10 42 92 225 76 482 벽화 - - - - 2 1 1-2 6 16 83 36 147 합계 2 6 55 18 69 35 53 66 57 224 408 721 258 1,972 합계 그림 2 연도별 연구대상별고구려고고학문헌의추이 12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며, 1990년대이후성곽에대한조사연구가고분을앞지르기시작했다. 유물을대상으로한연구역시 1980년대부터증가하기시작하여 2000년이후에는가장많은연구성과가발표되고있는것이특징이다. 반면에건축에대한조사와연구는 1980년대이후조금씩증가하기는하기는하였으나여전히주요관심의대상이되지는못하고있는것으로나타난다. 고분벽화에대한연구는건축을제외한다른고고자료에대한문헌과비슷한연구동향을보이고있으나, 2003년까지의자료를제외한것이므로, 그림 2 의자료만으로동향을파악하기는어렵다. 이상과같이 1980년대이후고구려고고학연구는고분중심에서벗어나성곽과유물로관심이옮겨가고있는것으로보이지만여전히건축에대한관심은매우저조한것으로나타나고있다. 표 4 연도별 연구주제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연도 1899년 1900 1910 1920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주제까지 -1909-1919 -1929-1939 -1949-1959 -1969-1979 -1989-1999 -2009-2014 합계 개설 - 3 5 7 19 13 13 3 19 79 226 462 174 1,023 조사보고 2 3 42 7 40 15 19 35 14 59 44 58 25 363 자료소개 - - - 1 4 1 5 1 11 26 19 18 5 91 구조형식 - - - - - 1 3 4 1 23 23 21 9 85 편년 - - - - - 1 2 5 1 5 5 8 5 32 기원 - - - - - - 2 4 2 1 7 7 3 26 피장자 - - - - - - - 5 3 14 15 25 4 66 연구동향 - - - - - - 1 3 4 6 26 34 13 87 역사문화 - - - - - - 5 1 1 4 11 26 6 54 위치비정 - - 6 2 2 2 - - - 2 13 11 2 40 보존정비 - - - - - - - - - - 10 30 5 45 과학분석 - - - - - - - - - - 2 8 6 16 기타 - - 2 1 4 2 3 5 1 5 7 13 1 44 합계 2 6 55 18 69 35 53 66 57 224 408 721 258 1,972 고구려고고학연구문헌을주제별로살펴보면개설적인글이전체의절반을넘는수를차지하고있다 ( 표 4). 개설로구분된문헌들중에는고고자료에대한기본적인분석외에도구조형식이나편년에대한내용이포함되어있는경우가많으나자료의종합이나일반적인개설이주를이루고있는데, 1980년대이후의문헌중에도개설적인성격의글이가장많은수를차지하는것은연구의문제로지적된다. 그다음으로는조사보고문과자료소개가많은수를차지하고있으며, 연구동향과관련된문헌도상당한양을차지하고있는것이주목되는점이다. 고고자료의구조형식과형식분류, 기원과편년등에대한글은 1950년대이후조금씩증가하고있으나 1980년대이후뚜렷한증가세를보이는데, 이는 1980년대에들어와서야고구려고고학에대한연구가본격화된것을반영하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한편, 태왕릉과장군총등주요고분의피장자에대한관심은 20세기초반부터있어왔으나본격적으로이문제에관심을가진것은 1960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23
년대부터이다. 1980년대에들어서피장자에대한논의가급증하여 2000년대초반에정점에달하는경향을볼수있는데, 중국의동북공정과관련된사업중에서고구려왕릉에대한보고서가간행된것이기폭제가된것으로생각된다. 그밖에문화사나교류사, 사회구조등역사일반과관련된글과문헌에등장하는지명과성곽의위치비정과관련된글이상당수발표되고있으며, 1990년대이후유적의보존정비나자연과학적인분석을주제로한글의발표가증가한것도주목된다. 표 5 연도별 국가별고구려고고학연구자현황 5 연도 1899년 1900 1910 1920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전체 국가 까지 -1909-1919 -1929-1939 -1949-1959 -1969-1979 -1989-1999 -2009-2014 연구자 남한 - 1 1 1 1 2 8 3 10 19 68 192 72 263 북한 - - - - - 1 7 14 13 39 24 21-66 중국 - - - - 2-11 9 5 60 91 118 62 321 일본 1 4 15 6 29 8 8 5 21 17 20 26 2 116 서양 - 1 - - - - 1 - - - - 10-8 합계 1 6 16 7 32 11 35 31 49 135 203 367 136 774 그림 3 연도별 국가별고구려고고학연구자의추이 1896년이후 2014년까지고구려고고학에대한 1편이상의글을발표한연구자의총수는 표 5 에서보는바와같이 774명에달한다. 국가별로는중국의연구자가 321명으로가장많으며, 남한의연구자가 263명으로그다음을차지한다. 남한의경우 1980년대부터연구자가증가하지만 1990년대이후급증하여 2000년대에폭증하는추세를보이며, 중국의경우도이와유사하지만 1980년대부터연구자가급증하며, 이후연구자수의증가추세는남한지역보다다소완만하다 ( 그림 3. 북한의연구자는의외로적은숫자를보이는데, 기관명으로간행된자료가많은것도원인의하나로생각할수있지만, 다른지역과비교해볼때 1990년대이후연구자가배출되지못하고있는점이큰 5 표 5 에서연도별연구자의수는해당기간중에 1편이상의글을발표한개인과기관의수를의미하며, 전체연구자는 1896년이후 2014년 (2015년석사학위논문 3편포함 ) 까지 1편이상의글을발표한개인연구자의수를집계한것이다. 따라서연도별연구자의합계는전제연구자수보다많다. 12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이유로생각된다. 즉, 1980년대북한의연구자수는남한의두배에달하지만이후오히려감소하는추세를보이는데, 북한의정치사회적상황과관련된것으로생각된다. 1945년이전연구자의대부분은일본인이었음은주지의사실인데, 1910년대와 1930년대연구자가증가하였다가패전이후감소하였으며, 1970년대이후에는일정한수를유지하고있다. 표 6 연도별국내고구려관련분야석 박사학위논문현황 6 분야 구분석사학위논문박사학위논문 연도 1951-1959 1960-1969 1970-1979 1980-1989 1990-1999 2000-2009 2010-2015 합계 1970-1979 1980-1989 1990-1999 2000-2009 2010-2015 고고학 2 - - 2 4 19 28 55-3 4 3 10 문헌사 - 2 22 32 58 35 149 1 4 8 14 11 38 미술사 - 1 2 6 23 17 10 59 1 1 2 기타 - - 1 4 27 88 19 139 2 5 2 9 합계 2 3 3 34 86 182 92 402 2 4 13 24 16 59 중국 ( 고고학 ) - - - - - 14 9 23 - - - 3 3 6 합계 신진연구자의배출과관련하여학위논문의발간현황을참고할수있는데, 국내고구려관련분야학위논문현황은 표 6 과같다. 1950년대에발표된 2편의석사학위논문은고고자료를다루고있으나본격적인고고학논문으로보기어려우며, 7 이후 1990년대까지발표된논문도 4편에불과하여, 문헌사와미술사분야에비해매우저조한상황이다. 그러나 2000년이후증가세가두드러지게나타나서현재까지도증가세가이어지고있는데, 문헌사나미술사분야에서는 2010년이후증가세가감소되는현상에비해대조적이다. 또한중국의경우에도 2000년이후석사학위논문발표가증가하다가 2010년이후감소하는현상을보인다. 박사학위논문은 1990년대후반에들어서 3편이발표되었으며 ( 전호태 1997; 서일범 1999; 최종택 1999), 2000년이후 7편이발표되었다 ( 姜賢淑 2000; 백종오 2006; 심광주 2006; 정호섭 2009; 양시은 2013; 王飛鳳 2013; 박유미 2014). 이처럼 1990년대이후석사및박사학위논문이증가하고, 2000년대이후급증하는현상은고구려에대한관심의증가와더불어중국의동북공정에영향을받은것으로보이는데, 학문외적인요인이크게작용한것은바람직하다고할수는없으나학문후속세대의배출이라는면에서는고무적인면으로생각된다. 6 표 5 에부가된중국의고구려고고학학위논문은중국학술정보원웹DB(China National Knowledge Infrastructure) 를검색한것인데, 2000년이전의학위논문자료는찾을수없었다. 7 1950년대석사학위논문 2편은모두서울대학교에서발표된것인데, 江西遇賢里의大墓 ( 朴世元 1952) 는서울대학교도서관에원문이보관되어있으나 高句麗磁器의歷史的考察과器形의紋樣에對하여 ( 한동섭 1958) 는원문을확인할수없어자세한내용은알수없다.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25
Ⅲ. 시기별고구려고고학연구동향 앞에서국내외에서간행된고구려고고학관련문헌 1,972편을대상으로시간대별연구동향의변화를검토하여보았는데, 고구려고고학연구문헌은시기별, 국가별로뚜렷한차이를보이고있으며, 연구대상과주제에도일정한변화가확인된다. 이장에서는 Ⅱ장의분석결과를바탕으로고구려고고학연구동향을몇개의시기로구분하여살펴보고자한다. 지난 110여년동안간행된고구려고고학문헌의연도별현황을통해연구사적인획기가가능한데, 대체로 1920년, 1945년, 1970년과 1990년대후반을경계로연구문헌의빈도변화가감지된다 ( 그림 4). 문헌의빈도변화가학문내외의변화를반영하는것으로이해할수는있지만연구사적획기의절대적인준거가될수는없으므로연구사적으로중요한성과가발표된시점을함께고려하여시기를구분하고자한다. 우선 1945년을기점으로일제강점기와이후의시기를구분할수있다. 다른분야의경우도마찬가지이지만고구려고고학에서도일제강점기에는한국인이나중국인연구자가거의전무하며, 조사연구의목적도순수한학문적인것이라할수없으므로연구사사의획기로설정할수있다. 1946년이후에는중국과북한에서현지연구자들을중심으로고구려고고학연구가시작되는데, 특히북한에서의연구가활발히진행되었으며, 정찬영에의해적석총의형식분류와편년의기초적인틀이마련된 1973년을기점으로설정할수있다 ( 정찬영 1973). 이후중국과북한에서의연구는시간대별로다소부침이있으나중국의연구성과가증가하며, 1990년대중반이후에는남한의연구자도증가한 그림 4 연도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12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다. 또한연구주제도고분중심에서성곽과유물로다양해지며, 그간의연구성과를집대성한고구려고고학개설서가간행된다 ( 魏存成 1994). 따라서이무렵을기점으로하나의획기를설정할수있는데, 외이춘청 ( 魏存成 ) 에의해고구려고고학개설서가간행된 1994년을기점으로설정하고자한다. 이렇게하여 1945년과 1973년, 1994년을기점으로 4개의시기로구분하여각시기별주요연구성과와연구동향을살펴보기로한다. 8 1. 제 1 기 (1895 년 ~1945 년 ) 제 1기는도리이류조가랴오뚱반도일대를답사한 1895년부터 1945년일본의패전까지의기간으로대부분이일제강점기에해당된다. 이기간동안에는평양과지안일대의주요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가이루어졌는데, 모든조사는일본인에의해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의고고학연구에대해서는이미여러편의글에서자세한분석과평가가이루어진바있으므로 ( 李弘稙 1966; 西 川宏 1970; 李蓮 1984; 李殿福 1992; 李盛周 1995; 早乙女雅博 1997 2001 2005; 高橋潔 2001; 西谷正 2001; 정인성 2008 2009 2010 2011; 이순자 2009) 이글에서는간략하게조사상황과연구성과를정리하기로한다. 1909년시작된세키노다다스를중심으로하는일제의고적조사는 1910년조선총독부의위촉으로조사에탄력을받는다. 9 평양과지안일대에대한세키노의조사는 1917년까지진행되었고, 도리이류조도 1905년과 1912년두차례에걸쳐지안일대를조사하였으며, 1918년에는구로이타가쓰미 ( 黑板勝美 ) 가광개토왕릉비와주변지역에대한조사를진행하였다. 한편 1907년에는프랑스인에드아루샤반느가지안일대를답사하고벽화고분인산연화총의내용을보고함으로써서양에도고구려유적이소개되었다. 1918년조사이후조사는한동안중단되었다가 1935년다시재개되어 1945년까지지속되는데, 1940년이후의조사상황에대한보고문이나기록이부족하여자세한상황은알기어렵다 ( 이순자 8 임영진은광복이후의고구려고고학연구사를 1945년 ~1960년대초반, 1960년대중반 ~1970년대, 1980년대이후 의 3기로구분하여고찰한바있으나 ( 林永珍 1992), 1990년대초반까지의연구성과를다룬것이므로본고와는차이가있다. 또한강현숙은고구려고분에대한연구를집대성한개설서에서고구려고분연구사를 고분자료의선택적수집기 ( 일제강점기 ), 고분자료의확충기 ( 해방후 ~1960년대 ), 고분자료의집성기 (1970년대 ~1980년대 ), 고분의자의적조사기 (1990년대이후 ) 등과같이 4개의시기로구분한바있다 ( 강현숙 2013: 20-33). 강현숙은고분의조사주체와내용을기준으로시기를구분하였는데, 본고에서는고구려고고학조사와연구전반에걸친동향을분석하고자하는것이므로시기구분의기준에다소차이가있다. 9 1909년이후일제의고적조사는세키노다다스 ( 關野貞 ) 와야쓰이세이이치 ( 谷井濟一 ) 를중심으로진행되어 세키노다다스조사단 으로명명되기도하는데, 1909년도의조사는형식적으로라도한국정부의위촉을받은것으로되었으나, 1910년부터의조사는조선총독부의위촉으로조사가진행되었다 ( 정인성 2008: 17-21).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27
2009: 222). 1935년이후의조사는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이케우치히로시 ( 池內宏 ), 하마다교사쿠 ( 濱田耕作 ), 후지타료사쿠 ( 藤田亮策 ), 사와슌이치 ( 澤俊一 ) 등과더불어 2~3세대조선고고학자로분류되는오바쓰네기치 ( 小場恒吉 ), 노모리켄 ( 野守健 ), 고이즈미아키오 ( 小泉顯夫 ), 아리미쓰교이치 ( 有光敎一 ), 다쿠보신고 ( 田窪眞吾 ), 요네다미요지 ( 米田美代治 ) 등이주로참여하였는데 ( 정인성 2011: 14), 역시평양과지안일대의고구려고분과성곽을주요조사대상으로하고있다. 일제강점기의고적조사는조선총독부고적조사위원회가설립된 1916년과전시체제하에서조선고적연구회를중심으로조사를실시한 1931년을기점으로하여 3기로구분된다 ( 이순자 2009: 14). 그러나고구려고고학의측면에서보면 1930년까지의전반기와 1930년이후의후반기로구분할수있는데, 발표된문헌의수를보면 1910년대중반급증하던문헌수가조사가중단된 1918년이후급감하다가 1930년대부터증가하기시작하며, 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가재개된 1935년이후급증하는현상을보인다 (Ⅱ장의 그림 4 참조 ). 제 1기동안간행된문헌은모두 176건으로집계되는데, 조사보고가 108건으로전체의 61.4% 를차지한다. 표 7 을보면조사보고를포함한대부분의문헌은고분과성곽을대상으로하고있어서당시의주된관심이새로운고분자료의획득에집중되었던것을볼수있다. 고분과성곽에대한개설적인연구도일부있으나, 건축이나유물에대한연구는매우저조하다. 한편성곽의조사를통하여문헌에등장하는고구려성이나지명을고찰한글들이 11 편있는데, 대부분환도성이나국내성의위치비정과관련된것들이다. 표 7 제 1기연구대상과연구주제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구분 개설 조사보고 자료소개 위치비정 기타 합계 성곽 12 33 1 11 2 59 고분 17 67-1 1 86 건축 1 4 - - - 5 유물 8 4 5-6 23 벽화 3 - - - - 3 합계 41 108 6 12 9 176 제 1기동안의주요연구성과를들자면새로운자료의획득이라고할수있다. 이시기에조사된유적은평양주변과지안일대에분포하는주요한고분과성곽을거의망라하고있는데, 오늘날까지도고구려고고학연구의주요자료가되고있다. 그런데, 이때의고분조사는봉분을절개하여석실을확인하고내부를조사하는것이일반적이었던것으로보이며, 1930년대이후에는고분의구조양식확인과벽화의발견을목표로조사를실시하였지만현대적인의미의발굴과는차이가크다. 이러한조사방법상의문제와함께더큰문제는당시의조사내용에대한자세한보고문이간행되지못하였다는데있다. 1915년에간행된 朝鮮古蹟圖譜 1, 2권과 1929년에간행된 高句麗時代之遺蹟 상, 하권및 1938년에간행된 通溝 상, 하권을제외하면자세한조사보고서가간행되지못하였다. 12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그나마 朝鮮古蹟圖譜 와高句麗時代之遺蹟 은자세한조사내용을기록하지않은도록의성격이어서자세한조사상황이나내용을알기어려우며, 논문형태로발표된조사보고문에도당시조사에대한개괄만있을뿐자세한내용은보고되지못하고있다. 10 새로운자료의획득과함께고분의구조와형식에대한개설적인연구도이루어졌는데, 고구려고분을축조재료에따라석총과토총으로나누고석총이토총에선행하는형식으로이해하는정도였다. 고분벽화의발견과조사는당시에상당한충격을주었고, 관심이집중되었으나중국한, 위진대의고분벽화와비교를통해중국의고분벽화가랴오양 ( 遼陽 ) 지방을거쳐고구려로전해졌다는연구외에는대부분개별적인자료의소개에치중하는선에그치고있다 ( 전호태 2004: 307). 한편광개토왕릉비와인접해있는태왕릉에서출토된명문전을근거로태왕릉의주인공을광개토대왕으로비정하거나장군총을광개토대왕의능으로비정하는등지안일대대형적석총의주인공문제에대한견해도발표되었다. 1916년이후개별적인고분의구조에대한상세한도면을작성하는등고분의구조에대해관심을기울였으나이시기고구려고분의구조와형식및편년에대한종합적인연구는찾아보기어렵다. 이시기의주요조사가환런 ( 桓仁 ), 지안, 평양등고구려수도를중심으로행해졌으므로당연히오녀산성과국내성, 산성자산성, 안학궁성, 장안성등에대한연구도이루어졌으며, 장안성에대해서는부분적인발굴조사도실시되었다. 이때의도성지역에대한조사기록과도면, 및보고된유물은현재에도중요한연구자료로활용되고있다. 도성지역외에산성에대한조사도실시되었는데, 1940년과 1944년에는무순의고이산성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으며산성의전체구조와성문등이조사되었다. 고분과성곽외에도지안의동대자유적, 평양의원오리사지와청암리사지등건축에대한조사도실시되었는데, 원오리사지와청암리사지에대한발굴조사를통해고구려가람배치가처음으로밝혀지게되었다. 그밖에조사를통해출토되거나채집된유물에대한연구도이루어졌는데, 기와나와당, 전, 니불등에대한개설적인소개가주를이루며, 이때수집된와당에대한연구는 1945년이후일본에서이루어진연구의주요대상이되었다. 1941년평양진파리고분군조사에서금동투조장식이출토되었는데, 현재까지도고구려금동장신구를대표하는유물로평가되고있다. 이상으로 19세기말이후 1945년까지의고구려유적조사과정과연구현황을개략적으로살펴보았다. 이시기의고구려고고학조사연구는도성지역을중심의대형고분에대한선택적이고약탈적인조사라는측면과새로운자료의획득이라는양면성을갖고있다. 또한식민지지배의정당성확보라 10 일제강점기동안에행해진고구려유적조사중일부는 1945년이후에자세한보고서가간행된경우도있으나대부분은아직자세한보고서가간행되지못하고있으며, 최근당시의조사상황이나조사내용및유물에대한조사연구가이루어지고있다 ( 동북아역사재단 2008 2009 2010 2011).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29
는이념적배경이조사연구의기저에깔려있었음을고려할때고구려고고학은시작부터학문외적 인요인에의해왜곡되었다고할수있으며, 이러한역사의질곡은이후남북분단과중국의자의적 인고구려사인식과함께고구려고고학연구에있어서해결하기어려운난제가되고있다. 2. 제 2 기 (1946 년 ~1973 년 ) 고구려고고학연구제 2기는일본의패전이후북한과중국에서현지인에의해고구려고고학연구가시작되는시기인데, 북한이연구를주도하는시기이다. 광복직후인 1946년북한에서는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에관한법령 을공포하고, 각도에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를설치하는등문화유산보존에관한행정적인조치를취하였으며, 이듬해에는평양과지방에박물관을설립하였다 ( 정백운 1958; 이선복 1992; 林永珍 1992). 이어 1949년에는황해도안악고분군을발굴하였는데, 안악 3호분에서는정교한석실구조와함께벽화와묵서가발견되었다. 안악 3호분의발굴은한국전쟁이후중국과일본및남한에도알려져크게주목을받게되었으며, 고구려고분에대한관심을촉발하게되었다. 전쟁후인 1954년북한에서는경제개발과관련되어파괴위험에놓인모든유적에대한구제발굴을제도화하여고고학연구에필요한자료의집성이국가적인사업으로이루어지게되었는데 ( 林永珍 1992: 104), 이를통해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도탄력을받게되었다. 1953년에는 1934년에처음발견된요동성총에대한재조사가이루어졌으며, 이듬해에는공사중에평양역전이실분이확인되어조사가이루어졌다. 이후가장리벽화고분 (1956년), 약수리벽화고분 (1957년 ~1958년 ), 강서군보림리, 후산리, 태성리고분군 (1958년) 등이조사되었으며, 1959년과 1960년에는압록강과독로강의댐건설과관련한구제발굴이자성군일대에서실시되어송암리, 조아리, 법동리등에서적석총이대거발굴되었다. 1962년에는평양장산동고분, 1963년에는팔청리벽화고분, 복사리벽화고분, 전동명왕릉과주변고분군, 1971년에는수산리벽화고분등주요벽화고분이발굴되었으며, 1963년에는대성산성정비복원과정에서 3기의연못이발굴되었다. 중국에서는 1956년무순고이산성발굴조사를시작으로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가실시되었으며, 같은해환런고력묘자고분군과연강고분군, 통화강구촌및동강촌고분군에대한조사가이루어졌고, 이후 1959년에는이고분들에대한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한편중국에서도유적의보존에대한국가차원의행정조치가이루어지는데, 1961년에는광개토대왕릉비와통구고분군이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지정되었다. 이후 1962년부터는지안통구분지일대의고분에대한조사가시작되는데, 1966년문화대혁명으로한동안중단되었다가 1972년부터조사가재개되었다. 이시기중국에서는지안지역을중심으로발굴조사를실시하였는데, 1957년에는동대자유적을 13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발굴하였고, 1962년부터 1963년까지지안일대에대한대대적인유적조사를실시하여오회분 4호묘와 5호묘, 통구 12호분, 마선 1호분등주요벽화고분을재조사하였으며, 1966년에는산성하 332 호분, 산성하 983호분, 만보정1368호분등을발굴하였다. 1968년에는통구고분군에서 500여기에달하는고분을발굴하였으며, 1970년에는장천 1호분, 1972년에는만보정 78호분, 우산 41호분등을발굴하였다. 한편 1962년조사에서는패왕조산성, 관마장관애, 망파령관애등산성에대한조사도함께실시하였다. 그밖에도 1966년과 1970년두차례에걸쳐통구고분군에대한측량조사도실시되었으며, 결과는 1997년의 3차측량조사결과와함께단행본으로간행되었는데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2), 통구고분군의분포와입지를연구하는데중요한자료가되고있다. 표 8 제 2 기국가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연구주제 종류 구분개설조사자료구조연구역사학위편년기원주인공기타합계논문보고소개형식동향문화사논문 단행본 합계 남한 6 2 1 2-1 - 2 3 2 19 16 2 1 19 북한 4 32 1 5 9 5 4-2 3 65 50-15 65 중국 2 19 2 - - - - - - - 23 23 - - 23 일본 14 3 2 1-1 2 5 2 3 33 26-7 33 기타 4 - - - - - - - - - 4 3-1 4 합계 30 56 6 8 9 7 6 7 7 8 144 118 2 24 144 제 2기에간행된문헌은제 1기보다도약간적은 144편으로그현황은 표 8 과같은데, 북한에서발표된글이가장많다. 일본에서도 33편의글이발표되었는데, 안악 3호분에대한소개를제외하면대체로 1945년이전에조사된자료를정리또는종합한것이다. 중국에서간행된문헌은 23편으로일본에서간행된것보다도적으며, 그내용도조사보고문이주를이루고있다. 또한간행물의종류도단행본이 1편도없어서단행본이 15편이나간행된북한과는대조적이다. 한편남한에서도전쟁후안악 3호분발굴보고문이발표되었으며, 고분벽화와관련된몇편의연구논문이발표되었다. 이시기의연구성과를내용면에서살펴보면조사보고가 56편으로가장많지만고분의구조형식과편년, 기원문제, 주인공과관련된문제등에대한연구논문이여러편발표되는점에서이전시기와는차이가있다. 반면에중국에서는보고문과개설서및자료소개외에연구논문이발표되지못한점도특징적이라할수있다. 제 2기의주요연구성과는고분과관련된것이주를이루는데, 1949년발굴된안악 3호분이연구의시발이되었다. 발굴조사직후벽화의내용과고분의연대에대한글이발표되었고 ( 도유호 1949a; 1949b), 이어중국과일본에도그내용이소개되었다 ( 宿白 1952; 李進熙 1956). 1958년에는발굴보고서가간행되었으며 ( 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 1958), 남한에서는발굴에참여했던연구자가발굴기록을토대로안악 3호분의발굴상황을발표하였다 ( 蔡秉瑞 1959). 안악 3호분의연구에서가장관심이집중된분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31
야는피장자와관련된것이었는데, 발굴직후에는묵서명의동수를묘주로이해하였으나이후이견이제기되면서 1957년과 1959년두차례에걸쳐집중적인토론회가개최되었다. 토론결과안악 3 호분의피장자를고구려왕으로보는견해가지지를얻게되었으며 ( 전주농 1959), 이후미천왕릉으로 공식화된다 ( 박윤원 1963; 전주농 1963; 주영헌 1963). 한편이무렵석실봉토분의기원 ( 도유호 1959; 채희국 1959), 벽화고분의편년기준 ( 주영헌 1959), 벽화고분의구조형식과벽화내용의변천 ( 주영헌 1960a; 1960b) 등에대한연구성과들이발표되었고, 벽화고분의편년에관한연구로집대성된다 ( 주영헌 1961). 주영헌의 고구려벽화무덤에편년에관한연구 는일제강점기이후조사된벽화고분을구조형식과벽화의내용에따라편년한것으로당시까지의연구를집대성한것으로이후의연구에이정표가되었다는점에서중요하며, 이를기점으로제 2기를전반과후반으로구분할수있다. 벽화고분에대한주영헌의연구는봉토분전반에대한연구로확대되어봉토분의기원과변천에대한연구가 ( 주영헌 1963) 이루어지고, 벽화고분의기원과변천에대한연구도지속되며 ( 전주농 1964; 주영헌 1965), 이러한연구성과들은남한의연구에도반영되었다 ( 金 元龍 1973). 1959년부터압록강과독로강유역의적석총에대한발굴이이루어지면서연구도진전이있었는데 ( 정찬영 1961; 주영헌 1962), 자성군조아리, 서해리, 법동리, 송암리일대의고분군에대한자세한보고서가간행되어연구의탄력을받게된다 ( 정찬영 1963). 발굴조사보고서를작성한정찬영은적석총의기원에관한연구 (1967) 를발표하는등연구를지속하여 1973년에는 기원 4세기까지의고구려묘제에대한연구 를통해적석총에대한그간의연구를집대성하였다. 이글에서정찬영은지안지역을포함하는압록강유역의고분군과독로강유역의고분들을망라하여분석하였으며, 이를바탕으로적석총과봉토분의선후관계, 적석총의기원과편년등을종합적으로연구하였다. 특히, 적석총을무단적석총과기단적석총으로대분한후기단적석총은내부구조에따라수혈식석곽, 연도표시가있는석곽, 횡혈식석실등으로형식을나누고출토유물을바탕으로한편년을통하여기원전 2세기부터기원후 4세기까지의변천과정을고찰하였는데 ( 정찬영 1973), 이후의적석총연구의기본골격을이루는중요한연구로평가된다. 또한고구려적석총의기원을북방리형지석묘나랴오뚱반도남단의강상, 루상적석묘에두었는데, 이러한그의견해는이후연구자들에도한동안계승되었다. 이상과같은주영헌과정찬영의연구는기존의연구를집대성하고향후연구의기초를제공하였다는점에서고구려고분연구의새로운이정표를제시했다고평가할수있다. 그밖에이시기에는평양성과대성산성을중심으로성곽에대한연구도진행되었으며, 고분벽화에등장하는악기 ( 전주농 1957) 및건축 ( 박황식 1965) 에대한연구, 고구려기와의문양에대한연구 ( 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 1962) 등개별적인주제에대한관심도시작되었다. 이처럼제 2기의연구는북한연구자들의주도하였으며, 고분의기원및구조형식과편년에대한연구는다음시기연구를견인한것으로평가된다. 13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3. 제 3 기 (1974 년 ~1994 년 ) 고구려고고학연구제 3기는북한에서고구려고분에대한종합적인연구가발표된이후중국에서처음으로고구려고고학개설서 ( 魏存成 1994) 가출간된 1994년까지의시기이다. 제 2기는북한의연구자들이고구려고고학연구를주도했지만제 3기에는중국의연구자들이연구를주도한시기이다. 제 3기는고구려유물에대한종합적인연구 ( 耿鐵華 林至德 1984) 가발표된 1984년을기점으로전반과후반으로나누어볼수있는데, 제 2기후반에중국연구자들의관심범위가넓어지고, 연구문헌도증가한다. 한편제 2기후반에들어서남한연구자들에의해간행된문헌이증가하는데, 주로중국이나북한에서발표된조사연구성과를정리하는형태이지만남한에서고구려고고학에대한관심을유발하는데기여한것으로평가된다. 11 이시기에간행된문헌은모두 483건으로제 2기 144건의 3배가넘는수이다. 표 9 를보면중국의연구문헌이이전시기에비해 10배가량급증하였으며, 연구주제도다양해졌음을알수있다. 북한의연구문헌도전시기에비해증가하기는하였으나증가추세가완만하며, 3기후반에는남한의연구문헌도급격히증가하는경향을보인다. 이시기에도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는북한과중국을중심으로진행되지만중국에서의조사가더활발해진것도이전시기와의차이점이다. 한편 1980년대이후일본인들의중국현지답사가이루어지면서일본인에의한연구도활발히진행되었다 ( 林永珍 1992: 110). 표 9 제 3기국가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연구주제개설조사자료구조연구역사위치보존편년기원주인공시기국가보고소개형식동향문화사비정정비 기타 합계 남한 9 3 6 2 - - 1 - - - - 1 22 북한 7 11 2 2 - - 1 1 - - 1 25 전반 중국 12 27 8 5 - - 2 5 1 - - 2 62 (1973-1984) 일본 8 3 6 3 1 1 2 - - - - 0 24 기타 - 1 - - - - - - - - - 0 1 소계 36 45 22 12 1 1 5 6 2 - - 4 134 남한 42 2 4 1-1 1 4 1 - - 2 58 북한 30 22 6 5 5 1 9 2 - - - 80 후반중국 85 31 13 12 2-6 9-10 7 2 177 (1985-1994) 일본 18 1 2 5 1 1 2 1 2 - - 1 34 소계 175 56 25 23 8 3 18 14 5 10 7 5 349 합계 211 101 47 35 9 4 23 20 7 10 7 9 483 11 1992년중국과수교가이루어지기전에는북한은물론중국도적성국가로분류되어일반인은자료에대한접근자체가불가능하였는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 등국가기관에보관된중국과북한의간행물을통해연구성과들이남한에소개되었다.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33
이시기의주요조사성과를정리하면다음과같다. 북한에서는 1976년공사중에우연히덕흥리벽화고분이발견되었는데, 내부에서벽화와함께주인공과관련된묵서가확인되어주목을끌었다. 같은해마구일습과토기등이출토된지경동 1호분이조사되었으며, 이어서 1979년에는덕화리 1, 2호분이발굴되었다. 1981년에는안학궁남쪽대동강변에서고구려나무다리가발굴되었으며, 1985년부터황해도신원의장수산성에대한발굴이 3년에걸쳐실시되었다. 1987년에서 1989년에걸쳐초산군연무리고분군을비롯한자강도일대의고분이발굴되었고, 1988년에는평양시대성구역안학동, 삼석구역로산동일대의고분 20여기가발굴되었으며, 같은해동암리고분, 평정리고분, 월정리고분등벽화고분도새롭게발굴되었다. 1990년에는자강도운평리고분군과평양의고산동 20호분에대한발굴조사가있었으며, 1991년에는덕화리 3호분, 1993년에는용흥리벽화고분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다. 그밖에 1993년부터 1997년까지평양성중구역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는데, 자세한사항은보고되지못하고있다. 1994년에는강원도철령에서건물지가조사되었는데철제기마모형이출토되어주목을받았으며, 같은해평안남도증산군석다리고분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다. 중국에서는이시기지안지역의개발과관련된구제발굴이많이실시되었는데, 1975년과 1976년에는칠성산 96호분, 우산 68호분이발굴되었고, 1976년 4월부터 5개월여의짧은기간동안우산고분군 56기, 산성하고분군 37기, 칠성산고분군 26기, 마선고분군 69기등모두 188기에달하는고분이발굴되었다. 같은해동대파고분군이발굴되었고, 이듬해에는우산 1897호분이발굴되었으며, 1978년에는지안오도령구문에서공사도중우연히고분이발견되었는데, 청동기가출토되어적석총의기원과관련하여주목을받았다. 1979년에는정수장건설을위해우산서쪽의전산자고분군 31기가발굴되었으며, 1981년에는댐건설을위해노호초고분군이조사되었고삼실총에대한추가조사도이루어졌다. 1983년에는집안현문물지를편찬하는과정에서지안외곽의횡로9 대고분, 고마령고분등을발굴하였으며, 1984년에는도로건설을위해우산고분군의 113기고분에대한대규모발굴을실시하였다. 1985년에는장천 4호분발굴과절천정총에대한추가조사가실시되었으며, 1990년에는장백간구자고분군, 1992년에는환런의미창구장군분, 1994년에는우산 2112호분등에대한발굴조사간헐적으로이어졌다. 그밖에흑구산성 (1976년), 나통산성 (1980년), 고이산성 (1983 년 ), 봉황산성 (1985년), 최진보산성 (1992년 ~1993년 ) 등산성에대한조사도실시되었으며, 1984년에는국내성에대한측량조사가실시되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1979년중원고구려비가발견되어학계의관심이집중되었고, 이후 1981년과 1982년에춘천방동리 ( 金元龍 1981) 와신매리 ( 趙由典 1987) 의고구려석실분이조사되었으며, 1985년에는고구려의영향을받은순흥읍내리벽화고분이조사되었다. 그러나방동리고분과신매리고분에서는유물이출토되지않아고구려고분으로특정하지못하였으며, 고구려유적에대한추가조사로이어지지는못하였다. 13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고구려고고학연구제 3기의연구성과는국가별로차이가있는데, 대체로북한의연구는답보상태를보이는반면중국에서는매우활발한연구가진행되었다. 제 2기후반에들어와서일본과남한에서도활발한연구가진행되었다. 이시기북한에서이루어진고분과관련된연구는덕흥리벽화고분 ( 김용남 1979) 과관련된몇편의글과압록강, 독로강일대의고분조사보고서 ( 정찬영 1983) 등의보고문을제외하면봉토석실분의기원에관한연구 ( 주영헌 1984; 리창언 1991 1993) 등매우빈약하다. 안악 3호분과덕흥리고분의피장자와관련된전통적인주제에관한연구가계속되기도하지만벽화고분에등장하는천문도 ( 리준걸 1981), 복식 ( 천석근 1981) 및벽화의표현기법 ( 리경식 1990) 등연구주제가다양화된다. 연구주제와함께연구대상도다양화되어성곽과건축및유물에대한연구도여러편발표되었다. 성곽과관련된연구로는장수산성과관련된연구성과가많이발표되었고 ( 안병찬 1990; 최승택 1991a 1991b), 산성의분포과방어체계 ( 박창수 1990) 등이있으며, 정릉사지를비롯한고구려사찰의가람배치 ( 한인호 1981 1986; 장상렬 1990; ), 도성의이방에대한연구 ( 한인호 리호 1991) 등건축에관한연구도발표되었다. 그밖에토기에관한연구성과 ( 리광희 1990 1991a 1991b) 및새롭게확인된유물에대해소개한글도여려편발표되었다. 그밖에 조선고고학개요 (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1977), 고구려문화 (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1979), 고구려고분벽화 ( 주영헌 1985) 등그동안의연구성과를정리한개설서가출판되었고, 1993년에는조선유적유물도감고구려편 4권이간행되었다. 개설서와도록의일부는일본어로번역되어일본에서출판되기도하였다. 한편, 연구주제의다양화와함께이시기에는새로운연구자들이대거등장한다는점도주목되는점이다. 그러나이시기에발표되는논문의분량이이전시기에비해매우줄어들었으며, 자세한분석과논증이없이자신의견해를주장하는형태의글이대부분이다. 또한기존에간행되던학술지가모두폐간되고, 1986년부터는 조선고고연구 만간행되며, 여기에실린글의일부는학술적인내용이라기보다는일반대중을위한개설적인내용인것이많다. 개설서및도록의출판과함께연구논문에서보이는이러한외형적인변화는최근까지도지속되는데, 고고학의학문적목표의변화에기인한것인지경제등사회상황의변화에기인한것인지는알수없지만연구에상당한장애가되고있다. 12 중국에서는그간의발굴성과를바탕으로고분에대한연구가활발히진행되었는데, 특히적석총의기원과구조형식및편년과관련된것이주를이루고있다. 적석총의구조와관련해서는연구초기에는외부의분형이분류기준으로강조되었으나점차매장주체부의구조도함께고려되었다. 또 12 필자가개인적으로확인한바에따르면김일성종합대학도서관등에는학위논문을포함한상당한양의미간원고가보관되어있다고하며, 이시기에간행된짧은분량의논문들은이러한글의일부를발췌하여게재한것으로추정된다. 그까닭이무엇인지는정확히알수없으나일부는후에단행본 ( 손수호 2001; 리광희 2005) 으로간행되는것으로보아북한의경제적인상황과관련된것일가능성이크다.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35
한연구자별로분류기준과용어에차이가있는데, 1980년대후반에는분류와용어의통일및편년에대한대체적인합의가이루어진것으로보인다 ( 長雪岩 1979; 方起東 劉振華 1979; 李殿福 1980a; 陳大爲 1981; 方起東 1985; 魏存成 1987 1994; 孫仁杰 1993; 徐光輝 1993). 1978년지안외곽에서청동유물이부장된오도령구문고분의조사를계기로적석총의기원문제와출현시점이관심의대상이되었는데, 이고분의성격에대해서는최근까지도논란이계속되고있다. 이후적석총의기원에대한문제는 1990년장백간구자고분군의발굴로새로운방향으로전환되었다. 한편연접식적석총에대한연구 ( 孫仁杰 1993a) 와적석총에서출토된관정과관고리등장구에대한연구 ( 孫仁杰 1993b) 및묘제와장속에대한연구 ( 方起東 1993) 등이이루어졌는데, 적석총의매장주체부의구조를이해하는데중요한역할을하였다. 그밖에적석총외에도벽화고분에대한연구 ( 李殿福 1980b) 나묘주에대한연구 ( 劉景文 1981; 方起東 1986; 耿鐵華 1987; 魏存成 1993) 등도이루어졌다. 도성과산성 ( 李殿福 1982; 栗谷 1983; 魏存成 1985a; 陳大爲 1986; 李殿福 孫玉良 1990; 梁志龍 1992; 李健才 1994a), 도성방어체계 ( 遲勇 1993) 와교통로 ( 佟達 1993; 李健才 1994b) 및동대자건축유적 ( 方起東 1982) 에대한연구도이루어졌는데, 이전시기와비교해볼때연구대상과주제가훨씬확대된결과이다. 이시기연구성과중주목되는점은유물에대한종합적인연구가이루어졌다는것이다. 기존의유물에대한연구는고분의편년을위한부수적인연구대상으로취급되었으나 1980년대중반부터는독자적인연구대상으로부각되기시작하였다. 특히지안지역에서출토된고구려토기에대한연구 ( 耿鐵華 林至德 1984) 는지안지역고분에서출토된토기를태토와제작기법, 기형등을근거로 3조로구분하고편년하였는데, 향후유물에대한연구의출발점이되었다는점에서중요하다. 이후지안출토고구려와당 ( 林至德, 耿鐵華 1985), 고분에서출토된사이전연호 ( 魏存成 1985b), 금동신발 ( 孫仁杰 1985), 마구 ( 魏存成 1991), 농기구 ( 耿鐵華 1989), 무기 ( 耿鐵華 1993), 철솥 ( 趙書勤 1993) 등에대한연구가연속적으로이루어졌다. 이처럼중국에서는고분에대한연구성과가집적되었으며, 고분외에도도성과산성, 건축및유물에대한다양한주제의연구가활발히진행되었으며, 이러한연구성과들을집대성한개설서가출간되었다 ( 魏存成 1994). 외이춘청의 高句麗考古 는중국에서간행된최초의고구려고고학개설서로학사적인의미가크다. 제 2기한국에서의고구려고고학연구는주로북한의연구성과를정리하는데집중하였으나, 1980년대말부터는적석총에대한분석을통한고구려의성립과정연구 ( 池炳穆 1987) 를시작으로봉토분에대한연구 ( 姜仁求 1991; 姜賢淑 1994), 고구려무기에대한연구 ( 金性泰 1993 1994) 등의연구가이루어졌다. 벽화고분에대해서는일찍부터연구가시작되어개설서가간행되었으며 ( 金元龍 1980), 연구사적인검토도이루어졌다 ( 全虎兌 1994). 일본에서는일제강점기의자료에대한연구가지속되는한편중국과북한에서조사된새로운자료에대한소개가꾸준히계속되었다. 그밖에중국이나북한의자료를바탕으로한연구가발표되기시작하는데, 적석총의구조와분류에대한연구 ( 田村晃一 1982; 緖方泉 1985a 1985b), 적석총의피장 13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자에대한연구 ( 田村晃一 1984), 벽화고분에대한연구 ( 永島暉臣愼 1982; 東潮 1988a), 유물에대한연구 ( 東潮 1988b) 등이대표적이다. 이시기일본인연구자들은중국의고구려유적답사가가능하였고, 경우에따라서는북한의고구려유적도답사할수있었기때문에연구에유리한조건을갖추고있었으며, 일본고고학특유의정치한분석을바탕으로한연구들을발표하였다.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제2기는중국인연구자들이조사연구를주도하였으며, 상대적으로북한의연구성과는빈약하다. 일본에서는일제강점기에수집된유물에대한연구와함께중국의조사연구성과를반영한새로운연구성과들이발표되었으며, 남한에서도 1980년대후반부터연구논문들이발표되기시작하였다. 이시기에는적석총의구조형식과편년에대한여러견해들이대체로정리되었으며, 성곽과건축및유물에대한연구도활발히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광복이후의연구성과를회고하는글들이여러편발표되었으며, 고구려고고학에대한개설서가처음으로출판되어그간의연구를집대성하는동시에이후의연구를견인할계기가마련되었다. 4. 제 4 기 (1995 년이후 ) 1992년중국과의수교이후한국인연구자들의중국내고구려유적답사가가능해졌으며, 1994년에는고구려고분벽화에대한전시회를통해고구려에대한국민적관심이높아졌다. 또한 2002년이후한동안은제한적이지만공동조사의형태로북한지역의고구려유적을답사하는일이가능해졌다. 특히 2002년에실시된중국의동북공정과 2004년의고구려유적의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등재등을통해고구려에대한국민적관심이폭증하였으며, 그에대한대응으로국내에서는고구려연구재단이설립되었다. 이러한일련의학문내외의환경변화로인해이시기의연구는새로운국면을맞이하게되었다. 이시기에는모두 1,169편의연구문헌이간행되었는데, 20년동안에발표된문헌이 1994년까지 90여년동안간행된연구문헌을합친것보다도많다 ( 표 10 참조 ). 특히동북공정이실시된 2002년이후에는연구문헌의간행이폭증하여 849편에달한다. 이러한현상은남한과중국에서두드러지는데, 제 3기후반의 10년동안남한과중국에서간행된문헌이각각 80편과 239편 ( 표 9 참조 ), 제 4 기전반의 8년동안간행된문헌이각각 138편과 126편이었으나, 동북공정실시이후 13년동안에는 501편과 273편으로급증하였다. 이러한연구문헌의증가는남한의경우폭증이라고할수있을정도이다. 아무튼간행된문헌만을통해서본다면이시기의고구려고고학연구는남한이주도했다고할수있다. 반면에북한은이전시기에비해연구문헌의수가오히려줄어들었으며, 일본은비슷한수를유지하고있다. 이시기북한에서는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가매우저조한것으로보이는데, 1995년평양시삼석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37
표 10 제 4 기국가별고구려고고학문헌현황 시기 연구주제 국가 개설 조사보고 자료소개 구조형식 편년기원주인공연구동향 역사문화사 위치비정 보존정비 과학분석 기타합계 남한 96 4 5 6-4 3 8 5 2 2 2 1 138 북한 11 5 3 5 - - 2-5 - - 1-32 전반 (1995-2001) 중국 71 13 6 5 1 2 4 11 4 5 1-3 126 일본 14 - - 1 - - 1 6 1 - - - 1 24 기타 - - - - - - - - - - - - - - 소계 192 22 14 17 1 6 10 25 15 7 3 3 5 320 남한 346 28 9 13 5 6 15 19 18 1 26 6 9 501 북한 23 2-1 1 - - - 1 - - - - 28 후반 (2002-2014) 중국 148 46 9 8 6 3 12 13 4 10 5 7 2 273 일본 25 - - 3 1 - - 3 1-1 - 2 36 기타 7 - - - - - - - 1-3 - - 11 소계 549 76 18 25 13 9 27 35 25 11 35 13 13 849 합계 741 98 32 42 14 15 37 60 40 18 38 16 18 1,169 구역호남리불당골고분과평양시승호구역금옥리고분군이발굴되었다. 2000년이후에는영천리고분 (2001년) 과태성리3 호분 (2001년), 송죽리고분 (2002년), 옥도리고분 (2010년) 을포함한몇몇고분이발굴되었지만이전시기에비하면매우저조하다. 중국에서도 1990년대후반유적조사가감소하지만세계문화유산등재와유적의정비복원을목표로한발굴조사가계획적으로실시되었다. 환런에서는 1996년부터 1999년, 그리고 2003년에오녀산성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다. 지안에서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국내성의성벽과문지시설및배수시설이조사되었으며, 성내부건물지에대한발굴이실시되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환도산성발굴조사가실시되었으며, 성벽과 7개에달하는문지, 점장대와궁전터등이조사되었다. 지안통구분지의대형고분에대한조사도이루어졌는데, 2003년까지마선2378호분, 산성하전창 36호분, 마선 626호분, 칠성산 871호분, 임강묘, 우산 2110호분, 칠성산 211호분, 서대묘, 우산 992호분, 마선 2100호분,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등 14기의왕릉급고분에대한발굴이실시되었다. 그밖에도심양석대자산성 (1997년 ~2004년 ), 무순시가구고분군 (2000년 ~2001년 ), 마선구안자구고분군 (2002년), 통화만발발자유적 (2003년) 등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으며, 동북공정이끝난이후인 2008년에는국내성주거지와우산 1041호분, 우산 901호분, 마선 1호분, 호자구 1호분등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고, 상활용산서교분군 (2008년) 과고검지산성 (2011년), 지안태왕진신홍촌적석묘 (2011년) 등에대한발굴조사가지속되고있다. 한편 2012년에는지안마선구에서새로운고구려비가발견되어또다시학계의관심이집중되고있다. 13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이시기중국에서의발굴조사는동북공정및세계문화유산등재, 정비복원을통한관광자원화등의학문외적인목적하에계획적으로실시되었다는특징이있다. 정부주도의이러한계획적인발굴조사에는많은예산이투입되어광범위한발굴조사가실시되고, 자세한보고서가간행되는등긍정적인부분도있으나졸속발굴과정비복원시의원형훼손이라는문제도심각하다. 이시기에는남한에서도고구려유적의조사가이루어졌다. 1988년몽촌토성에서고구려토기의존재가확인된이후 1994년에는아차산에서 20여기의고구려보루가조사되었는데, 1997년부터발굴조사가실시되어 7개보루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으며, 최근까지도계속되고있다. 또, 임진강및한탄강유역과양주분지일대에서도다수의고구려보루가확인되어연천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및무등리2 보루, 양주천보산 2보루, 태봉산보루에대한발굴조사가실시되었다. 또한청원의남성골산성과연기나성, 대전월평동유적등금강유역에이르는넓은범위에서고구려유적에대한조사가실시되었다. 그밖에임진강유역의연천신답리고분, 강내리고분을비롯해춘천, 화천, 홍천등북한강유역, 용인, 성남, 화성, 판교신갈등내륙지역은물론남한강상류의충주지역에이르기까지넓은지역에서고분이발굴되었다 ( 최종택 2014). 이시기의연구는너무많아서각각의내용과성과를자세히검토하기어려우며, 중국과남한의연구를중심으로개략적인연구경향을살펴보기로한다. 중국에서는 1994년이후고구려사의귀속문제에대한논의가대두되자이에대한정부차원의연구계획이준비되었던것으로보이는데, 1999 년에는전국적인규모의고구려학술토론회가개최되었다. 이후 2002년동북공정을통해고구려사전반에걸쳐정부주도하에일련의연구들이진행되었다. 고고학분야에서는고구려왕릉및도성과관련된문제에연구가집중되었는데, 특히왕릉과주인공비정문제는남한과일본학계에까지영향을주어이에대한연구결과가양산되었다. 이시기중국에서는이전과는달리다양한단행본개설서들이출간되는데, 대표적인것으로고구려고고학및유적개관 ( 朴眞奭 姜孟山 1999; 魏存成 2001; 耿鐵華 2004), 고구려의역사와문화개관 ( 耿鐵華 倪軍民 2001). 성곽에대한연구 ( 王綿厚 2002), 왕릉과귀족무덤에대한연구 ( 孫仁杰 遲勇 2007; 張福有 孫仁杰, 遲勇 2007; 耿鐵華 2008a), 벽화고분및벽화에대한연구 ( 尹國有 2004; 耿鐵華 2008b), 와당에대한연구 ( 耿鐵華 尹國有 2001) 등이있으며, 고구려고고학연구사와관련된단행본도출간되었다 ( 李樂營 李淑英 2006; 耿鐵華 李樂營 2012; 耿鐵華 2013). 또한이시기에는자세한조사내용이수록된보고서가여러권간행되었으며, 출토유물에대한도록도간행되어연구자료의공개라는측면에서는매우긍정적으로평가된다. 2007년까지이어진동북공정기간중대학연구소를비롯해고구려관련연구기관이여러개설립되었으며, 연구자도증가하였다. 특히길림대학, 통화사범대학, 연변대학등에서신진연구자들이대거배출되었으며, 연구주제도다양화되었다. 이시기남한에서는중국과북한의고분과성곽자료를정리하는작업과연구성과들이꾸준히지속되는한편남한의고구려유적에대한연구들이지속적으로이루어졌다 ( 최종택 2014). 2000년이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39
전남한에서간행된단행본은중국이나북한의연구성과를집성하는것이었으나 ( 申瀅植 1996; 余昊圭 1998 1999), 2000년이후에는남한에서도분야별로연구성과를집대성한개설서가여러권간행되 었다 ( 전호태 2000; 姜賢淑 2005; 백종오 2006; 김일권 2008; 서길수 2009; 임기환외 2008; 정호섭 2011; 강현숙 2013; 최 종택 2014). 한편고구려연구재단이설립된 2004년이후에는재단의지원으로많은연구가이루어졌으며, 일부북한과의공동연구도이루어졌다. 해마다여러차례의고구려관련학술회의가개최되었으며, 이를통해고구려고고학연구성과를정리하는한편새로운연구들이발표되었다. 또한많은수의신진연구자들이배출되었는데, 2000년이후에발표된석사학위논문만 47편에달하며, 박사학위논문도 7편이나제출되었다. 공동연구성과나일제강점기일본인들에의한조사연구와유물에대한연구도여러권간행되었다 ( 동북아역사재단 2008 2009 2010 2011). 이시기남한에서이루어진연구주제는매우다양한데, 주요내용만열거하면다음과같다. 우선고분과관련해서는적석총의기원과분포, 구조형식, 편년및봉토분의기원과변천등전통적인주제외에도고분을통해본고구려사의전개과정과사회구조및왕릉급고분의구조와주인공문제등이주요한연구주제로다루어졌다 ( 강현숙 2013). 그밖에남한의고구려고분에대한연구도여러편발표되었다 ( 崔鍾澤 2011). 성곽과관련해서는성곽의구조와시기별특징, 성곽과방어체계등이주요연구주제로다루어졌으며, 국내성과평양성의도성체계에대한연구도활발히진행되었다 ( 양시은 2013 2014; 여호규 2013). 또한이시기남한지역의고구려성곽과보루에대한연구도상당한성과를거두었는데, 정밀한발굴조사를바탕으로고구려성곽의축조방식에대한새로운견해들이제시되었다 ( 심광주 2006; 최종택 2014). 건축과관련해서는환도산성왕궁지및안학궁성과관련된궁궐건축에대한연구와사찰건축에대한연구가있으나다른분야에비해연구가부진한편이다. 이시기유물에대한연구가급격히활발해졌는데, 토기, 기와, 와당, 무기, 마구, 장신구, 금속용기등모든종류의유물에대한자료집성과형식분류및편년이진행되었다. 일본에서도몇권의단행본이출판되었는데 ( 東朝 田中俊明 1995; 東潮 1997 2011; 田村晃一 2001), 아즈마우시오의 고구려고고학연구(1997년) 는 1990년대후반까지의연구를집대성하였으며, 고고자료에대한정치한분석이이루어졌다는점에서평가되고있다. 북한에서는고구려고고자료를집성한 조선고고학전서중세편 (27~35권) 9 권이간행되었으며 (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2009), 그간의연구성과를종합한개설서도간행되었다 ( 손수호 2001; 리광희 2005). 이상으로 1995년이후의연구성과를중국과국내를중심으로살펴보았는데, 이전시기에비해연구자의수가증가하였으며, 연구문헌의발표가폭증하였는데, 이러한추세가앞으로도지속될지는미지수이다. 이시기연구의경향은중국과남한공히정부의주관이나지원하에이루진연구가많다는것인데, 학문외적인요인이연구결과에반영될수있다는점에서부정적으로평가된다. 다른측면에서는이시기의연구경향은기존연구성과의집대성과연구주제의다양화로요약할수있는데, 신진연구자의증가라는측면과함께매우긍정적으로평가할수있다. 14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Ⅳ. 맺음말 이상 19세기말이후고구려고고학의연구동향을제 1기 (1895년 ~1954년 ), 제 2기 (1946년 ~1973년 ), 제 3기 (1974년 ~1994년 ), 제 4기 (1995년 ~2014년 ) 등네개의시기로나누어살펴보았다. 제 1기에는일본인이연구를주도하였으며, 고분을중심으로한새로운자료의획득을중심으로연구가이루어졌다. 제 2기에는북한과중국현지인에의한연구가시작되었다. 이시기에는북한의연구자들이연구를주도하였으며, 적석총과봉토분의구조형식과편년등연구의기본적인틀이마련되었다. 제 3기는중국의연구자들이연구를주도하였는데, 적석총의기원과구조형식에대한다양한견해들이제시되었으며, 1980년대에는이에대한대체적인합의가이루어졌다. 또한고분외에도성곽과건축및유물등으로연구주제가확대되었으며, 현재논의되고있는대부분의주제에대한개설적인연구가이루어졌다. 1995년부터현재에이르는제 4기동안에는남한과중국연구자들이연구를주도하였는데, 2000년대이후남한연구자들의활동이두드러지게증가하였다. 이시기남한과중국에서양질의자료가확보되었고, 이를바탕으로새로운연구성과가발표되었으며, 고분과성곽등에대한연구성과를집대성한개설서들이발표되었다. 또한이시기에는연구주제가다양화되었고, 새로운연구자들이대거등장하였는데, 이러한점에서향후의연구전망은매우긍정적으로평가할수있다. 돌이켜보건대고구려고고학연구는시작부터일제의식민지지배로인한왜곡을겪었으며, 광복후에도남북의분단, 중국의동북공정등학문외적인요인의영향을벗어나지못하고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그동안많은연구성과가축적되었지만, 여전히학문외적요인이고구려고고학연구에장애가되는것또한엄연한사실이며, 빠른시간내에상황이변화되기를기대하기는어려울것으로보인다. 또한학문외적인장애요인을극복하기위한방법이마땅치않은것또한사실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남북한을비롯한국제적인학술교류및연구주제의다양화와새로운연구방법론의개발등다음시대를맞이할노력은지속적으로이루어져야할것이다. 고구려고고학연구사최종택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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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148-187 백제고고학사 김낙중 ( 전북대학교 ) 목차 Ⅰ. 머리말 Ⅱ. 백제고고학연구의전기가된발굴 1. 일제강점기조사 2. 공주무령왕릉 3. 서울석촌동고분군 4. 서울몽촌토성 5. 영산강유역고분발굴조사 6. 서울풍납토성 7. 사비기도성및사지 8. 마한분구묘 ( 보령관창리유적등 ) 9. 지역사회의고분군과위세품 10. 행정중심복합도시개발지역발굴 11. 웅진성 Ⅲ. 연구기반의확충과종합 1. 고고학관련학과의설립 2. 백제고고학연구인력의확충 3. 주요연구시설의확충 4. 고고학적종합 Ⅲ. 주요쟁점 1. 백제의국가형성 2. 금동관등위세품의성격 3. 영산강유역세력의성격및복속시기 4. 영산강유역규슈계 ( 九州系 ) 횡혈식석실묘와전방후원형고분 ( 前方後圓形古墳 ) 5. 문헌기록과고고자료의괴리와극복 ( 왕흥사및미륵사지사리기 ) 6. 익산백제유적의성격 Ⅳ. 맺음말
Ⅰ. 머리말 백제는패자였고승자와그의후예는백제와관련된기록을거의남기지않았다. 그만큼문헌기록만으로백제의역사를복원하는것은한계가있었다. 이러한한계를극복하는데고고학적인발굴조사와연구는커다란공헌을하였다. 아직도채워야할틈이많지만백제의모습이충실해져가고있다. 백제고고학은일제강점기에식민지지배정책과관련하여고분과사지를중심으로시작되었다. 해방이후소수의기관이나개인에의한조사및연구가이루어지다가 1971년무령왕릉발굴을계기로새로운활력을찾게되었다. 1970년대중반에는서울잠실지구개발에따른구제발굴이여러대학과국가기관에의해이루어져개발사업에앞서시행되는유적조사의선례가되었다. 1980년대이후에는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계획 에의한유적정비사업이이루어지며미륵사지, 공산성, 정림사지등에대한대규모의장기학술발굴이진전되었다. 한편유적조사에대한일반국민이나행정기관의인식이이전보다개선되어각종구제발굴이각지에서이루어지게되었다. 1990년대이후에는국토개발이급속하게이루어지면서발굴전문법인을중심으로구제발굴이폭증하였다. 그에따라조사대상과연구주제도세분되어갔으나연구보다는조사에중점을둘수밖에없는한계가노정되었다. 국가사적등지정문화재의정비를목적으로한연차적인발굴조사도국가기관을중심으로지속적으로이루어졌는데 1989부터현재까지도조사되고있는익산왕궁리유적이대표적이다. 2015년 7월 4일에는공주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관북리유적 부소산성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나성및익산왕궁리유적 미륵사지를포함하는백제역사유적지구의유네스코세계유산목록등재가결정되었다. 이로써백제유적은관광만이아니라학술적으로도다시한번관심을받게되었다. 이러한백제고고학조사및연구의흐름에대해서는이미여러차례전반적으로정리된바있다 ( 임영진 1988, 尹德香 1992, 최성락 2007, 노중국 2013). 또한특정시기혹은지역의백제유적에대한연구사정리도이루어졌다 (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2009, 李炳鎬 2011). 이글에서는이러한연구성과를바탕으로백제고고학조사및연구의흐름을전기가된주요발굴을중심으로살펴보고, 연구자, 연구기관및학회등연구기반의현황을정리한다음지금도논란이되고있는몇가지주요한연구쟁점을나름대로제시하고자한다. 이를정리하여앞으로백제고고학연구의방향과과제를제시하고자한다. 다만필자의관심분야위주로풀어나갈수밖에없는한계를가지고있어중요한조사및연구성과가일부누락된점에대해서는양해를바란다.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49
Ⅱ. 백제고고학연구의전기가된발굴 고대사연구는문헌기록만으로는불충분하다. 왜냐하면남아있는기록이매우빈약하기때문이 다. 백제는가야와마찬가지로더욱빈약하다. 그래서이러한연구의한계를극복하는데고고학적 자료가활용되어왔으며중요한몇몇발굴조사는백제사연구의방향을크게전환시킬정도였다. 1. 일제강점기조사 일제강점기에일본인학자에의한유적조사는조사주체나조직, 제도등에따라그내용이변화 하였다. 백제고지에대한유적조사는세키노다다시 ( 關野貞 ) 일행에의해 1909 년부터시작되었는데 그림 1 서울석촌동고분군 (1917 년분포도에해방후조사된고분을표시함, 조가영 2012) 15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광주 ( 廣州 ), 공주, 부여, 익산등백제의도성지에대한조사가이루어졌다. 1916년 고적및유물보존규칙 ( 古蹟及遺物保存規則 ) 시행이후고적조사위원회가조직되어가장광범위하고조직적인발굴조사가실시되었는데, 도성지에더하여나주지역에대한조사가추가되었다. 1920년대이후재정적, 행정적인이유로발굴조사가줄어들며발굴보고서간행과같은정리작업이한동안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외곽단체인조선고적연구회가설립된 1935년부터는부여의사원지에관한조사가집중적으로실시되었다 ( 李炳鎬 2011). 백제의도성별로좀더살펴보고자한다. 백제의첫번째도성인한성 ( 漢城 ) 의위치비정에서석촌동고분군은풍납토성, 몽촌토성과함께서울강동구, 송파구일대를백제도읍지로보는근거이다. 석촌동고분군은 1911년의현황조사를통해한성기고분으로인식되었다. 1912년에는구리야마쥰이치 ( 栗山俊一 ) 에의해석촌부근백제고분분포도가작성되었는데갑총 ( 甲塚 ) 23기와을총 ( 乙塚 ) 67기가표시되어있다. 갑총은봉토분, 을총은적석총으로추정되나을총중에는즙석봉토분등도포함될것으로여겨진다. 이후이분포도는석촌동일대에대한연구에서 1차사료로이용되었다. 그러나조사결과는매우간략하게보고되었다. 1916년에도고분분포와현황에대한간략한조사가이루어졌다. 1917년에는석촌리 가락리 방이리고분군에대한분포도가국유림정책과관련하여작성되고 ( 그림1) 석촌리 1~4호적석총, 6 7 호분, 가락리 2호분등일부고분도발굴되었다. 그러나보고내용은역시매우소략하다 ( 李炳鎬 2011, 조가영 2012). 한편 1926년대홍수때청동제초두 ( 鐎斗 ) 등중요유물이수습되면서풍납토성이주목받아하남위례성으로추정되기도하였으며 1936년성벽만고적으로지정 (1963년에사적 11호로재지정 ) 되었다. 웅진기의웅진성으로추정되는공산성은조선시대부터백제의산성터로인지되어왔으며일제강점기에는유적정황에대한간략한조사나개인 ( 가루베지온輕部慈恩 ) 에의해공산성내도로개설에따라노출된유적에대한검토를통해공산성의역사적성격이개괄적으로언급되는정도였다. 한편공주지역의고분발굴은가루베지온에의해주도되었다. 그는 1927년부터 5년간공주고보교사로근무하면서 738기에달하는고분을도굴에가깝게발굴하였다. 그가석실천장의가구기법을기준으로분류 (6형식) 한방식은해방이후에도중요한지침이되었다. 1936년에는사신도가그려진전축분인송산리 6호분이수습조사되어백제문화가남조의영향을받았음이지적되었다. 사비도성에대한조사도고분위주로이루어져왕릉군인능산리고분군은 1915 1917년에조사되었고, 이고분군과작은골을사이에두고바로인접한능산리동고분군은 1937년에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등에의해발굴되었다. 능산리고분군에대한조사결과도매우소략하여현재도연구의장애가되고있다. 한편 1930년대에는절터발굴조사가집중되어군수리사지 (1935~1936), 외리유적 (1936), 동남리및가탑리사지 (1938) 등이조사되었다. 부여사지에대한조사는일본초기불교사원, 특히아스카 ( 飛鳥 )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51
시대고대사원과백제사원의관련성을찾기위해이루어졌을것으로추정된다. 군수리사지는목탑지, 금당지, 강당지및회랑지등으로구성된 1탑1금당의가람배치가밝혀졌으며불상 2점 ( 군수리사지석조여래좌상, 금동미륵보살입상 ) 이목탑지심초석상부에서출토되었다. 외리유적에서는백제의대표적인예술품인문양전이출토되었다. 하지만일본인만에의한단기간의시굴혹은수습조사에다유적의중요성에도불구하고짤막한개요만보고되었을뿐이었다. 외리유적은현재그위치를확인하기도어렵다. 1941년에는정림사지, 구아리사지, 구교리사지, 부소산폐사지, 금성산폐사지등이조사되었지만이역시보고가극히간략하다 (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2009). 익산지역의유적도 1910년부터조사되었으나답사수준에그쳤다. 1917년에는야쓰이세이치 ( 谷井濟一 ) 에의해익산쌍릉이발굴되기도하였는데당시보고서는한페이지에도못미치는소략한내용으로봉토둘레의호석, 고분축조에사용된석재, 대왕묘내목관잔존상태등에대한간략한기록과석실의구조를근거로백제말기의왕족능묘라고추정한정도이다. 나중에우메하라스에지 ( 梅原末治 ) 는쌍릉출토목관관재가능산리고분군출토품과동일한금송 ( 金松 )[ 일본어로는고야마키 ( 高野槇 )] 이라는분석결과및대왕릉발견의목관복원도를제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고도가아닌나주지역에서도발굴이이루어졌다. 1917 1918 1935년에반남고분군의신촌리 9호분등을조사하였는데, 고대한분구를쌓고그표면의얕은곳에주체를매장한점, 신촌리 6호분과덕산리 2호분이전방후원분을닮은점, 주구가돌려져있는점, 부장품중에녹각장도자 ( 鹿角裝刀子 ), 하니와 ( 埴輪 ) 형토제품이있는점등구조와부장품으로보아반남고분군은한반도내에서가장일본적인색조가농후한고분군이라거나왜인의무덤이라고판단한것은당시의식민지지배정책과무관하다고할수없을것이다. 일제강점기조사는일인학자가독점하여한국인이조사 연구에참여할수없었고, 보고도제대로이루어지지않은경우가허다하여어느정도자료축적의성과를남겼다고하더라도이후의연구에부정적인영향을크게미쳤다. 2. 공주무령왕릉 1971년공주송산리 6호분의배수문제를해결하기위한공사를하던중우연히발견된무령왕릉의발굴조사는백제사연구에서가장중요한전기가되었다. 백제고분은도굴되어부장품이거의남아있지않다는것이상식처럼여겨졌는데, 무령왕릉은전혀도굴되지않은상태로발견되어백제묘 장제 ( 墓葬制 ) 연구에서기본이되는자료를제공하였다. 중국남조양식의전축분임에도불구하고왕과왕비의묘지석이발견되어한반도내에서처음으로무덤주인공과조성시기가분명히 15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밝혀진왕릉이되었다. 이묘지석의내용은 삼국사기 의신뢰성을높여주었을뿐만아니라백제의상 장례를상세하게알수있게하였다. 묘지석에표현된무령왕릉의방위와공산성의위치에근거하여나중에발굴조사된정지산유적이빈전터로추정되기도하였다. 또한도굴되지않고완전하게출토된 108종 4,687점에달하는부장품은백제미술의정수를보여주었다. 축조연대가분명한고분에일괄로묻힌이러한부장품은백제유물의편년연구에도절대적인기준이되었다. 이중용봉문환두대도는한반도및일본열도출토동류의환두대도연구에기준이되었다. 다만토기가부장되지않아백제토기의편년연구에그다지도움을주지못한점은아쉬운대목이다. 웅진기전축분이사비기이후의횡혈식석실의구조변화에막대한영향을미쳤음도분명해졌다. 전축분과중국및왜에서유래한물품은백제의국제성을보여주었다. 발굴결과에대한세미나와보고서작성에서고고학뿐만아니라역사학, 보존과학이함께참여하여학제간연구가모색되었다. 이러한시도는이후발굴조사와연구의방향을제시하였다. 게다가무령왕릉발굴은학술적인차원을넘어대중에게백제문화의우수성을알리고흥미를갖게하는계기도되었다. 무령왕릉출토품을현지에보관 전시하기위해국립공주박물관도새롭게개관 (1973) 되었다. 다만하룻밤에졸속으로발굴이마무리되어더많은정보를얻지못한아쉬움이있다. 발굴 20주년이후 10년마다학술회의가개최되어미처보고되지않았거나새롭게드러난자료에대한검토뿐만아니라다양한분야에서새로운시각으로보완적인연구가지속되고있다. 2008년이후에는국립공주박물관에의해기초자료집, 출토유물분석보고서, 신보고서및특별전도록이지속적으로간행되고있다 ( 국립공주박물관 2011 등 ). 3. 서울석촌동고분군 서울에위치한초기백제고분에대한발굴조사는이미살펴본대로이미일제강점기부터이루어졌다. 해방이후에도석촌동, 가락동및방이동고분군을중심으로여러차례발굴이이루어졌다. 1969년에는가락동 1 2 호분이조사되었는데, 가락동 2호분은평면방형에분구는즙석 ( 葺石 ) 되었으며매장시설이복수로확인된가장이른대형고분으로밝혀지면서백제국가의성립과관련하여중요하게논의되고있다. 1974년에는석촌동 3 4 호분이조사되었으며, 1976년에는잠실지구개발에따른조사의일환으로방이동 4 5 6 호분, 석촌동파괴분및 5호분이발굴되었다. 3 4 호분에대한조사로석촌동고분군의적석총이집안 통구에위치한고구려의그것과유사한구조를가지고있음이확인되었다. 이후 1983~1987년에석촌동 3호분재발굴, 3호분동쪽토광묘군및 1 2 호분발굴이대대적으로이루어졌다. 적석총에선행하는묘제로토광묘군이확인되어백제국가성립이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53
전의 기층문화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발굴된 고분은 석촌동 고분군의 서쪽 부분에 치우 쳐 있다(조가영 2012). 2013~2014년에는 누락된 유물을 포함한 재보고서가 간행되어 자료에 대한 새 로운 해석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4. 서울 몽촌토성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그동안 고분 위주로 이루어졌던 백제 고고학에서 생활유적, 그것도 초기 백제의 도성에 대 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그림2). 백제는 두 번에 걸쳐 천도하였는데 첫 번째 도성인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몽촌토성이 발굴조사되기 이전까지 문헌에 기초한 역사지 리학적 연구에 머물렀 다. 그러다가 88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몽촌토 성 일대가 정비되면서 토성의 성벽과 내부가 조사되었다(1983~1989). 이를 통해 성벽 축조 기 법과 내부 시설은 물론 이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 도 출토되었다. 한편 서 남지구 고지대에서는 그림 2 154 몽촌토성 조사 현황(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대회 - 한국의 고고학사Ⅰ 적심건물지 온돌건물
지 판축대지로구성된지상건물지가확인되었는데, 층위적인검토나백제에서는돌을이용한적심이사용된사례가없는점등으로보아고구려점유기의시설로여겨졌다. 또한백제토기의등장과변천을본격적으로연구하는계기가되었다 ( 朴淳發 1992). 몽촌토성에는백제토기인 몽촌유형 과구별되는 구의동유형 이존재하는데그것이고구려토기임이밝혀져이러한토기가출토되는몽촌토성에는한성함락후일정기간고구려군대가주둔하였던것을알수있게되었다. 몽촌토성과달리풍납토성에서는고구려토기가거의출토되지않아함락후의양상이달랐던것으로추정된다 ( 박순발 2010). 몽촌토성의발굴조사로축조기법과내부시설및변화양상이밝혀지며한성의위치를몽촌토성으로비정하려는움직임이풍납토성발굴이전까지지속되었다. 자료의한계에따른어쩔수없는현상이라고할수있다. 5. 영산강유역고분발굴조사 백제사연구는중앙의정치제도를중심으로이루어져왔다. 이에따라지역사가소홀히다루어진경향이있었다. 이러한상황에서이루어진영산강유역의고분에대한조사는마한의존속시기, 지역사회의양상은물론이고백제와왜와의관계를연구하는데중요한자료를제공하였다. 영산강유역의고분에대한조사는일제강점기에도이루어졌으나조사의도가순수하게학술적이지않았다는점은이미지적하였다. 해방후에옹관묘를중심으로이루어진조사와연구는마한과관련하여영산강유역의독자성을강조하는경향으로흐르기는하였으나백제와의관계는문헌사학에서세운틀에서크게벗어나지못하였으며조사도반남고분군등제한된범위에서이루어졌다. 이러한상황이변하는데큰역할을한것이전방후원형고분에대한조사이다. 영산강유역전방후원형고분에대한연구는강인구 (1987 1992) 에의해선구적으로이루어졌으며일본학계에서도관심을가지고종합적인분포조사를실시하였다. 본격적인발굴조사는 1990년대에시작되었는데, 대표적인고분으로는함평신덕고분 (1991~1992), 영암자라봉고분 (1991), 광주월계동 1 2 호분 (1993~1995), 광주명화동고분 (1994), 해남장고산고분 (2000) 등을들수있다. 최근에도전방후원형고분에대한조사는계속되어해남창리용두고분 (2008), 광주명화동고분재발굴 (2010), 영암자라봉고분재조사 (2011 2015), 함평마산리표산 1호분 (2013), 담양성월리월전고분 (2013), 고창칠암리고분 (2015) 이조사되었다. 다른분형에비해상대적으로많이발굴된편이다. 발굴조사결과를바탕으로한일학계의수많은연구자들이백가쟁명식논쟁을벌이고있으나근현대의특수한역사적관계도바탕에깔려있어서인지논의의진전이제대로이루어지고있지못한실정이다 ( 김낙중 2011b).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55
더구나초창기에조사되었으며부장품도풍부한광주월계동고분과함평신덕고분의정식보고서가발간되지않은점도아쉬움을남긴다. 한편영산강유역고대사회가 6세기까지도독자적인세력을유지하였을가능성을제기하는데가장중요한역할을발굴조사는나주복암리 3호분 (1996~1998) 이다. 일본규슈 ( 九州 ) 계횡혈식석실에전통의대형옹관을이용하여시신을안치하였으며백제가사여한금동신발등을부장한고총고분으로축조의주체가현지세력이며왜, 백제등과의활발한교류를기반으로성장한지역세력의유력집단이묻혔음이밝혀졌다. 또한대형옹관을석실묘가도입된이후까지도사용하였고사비기에백제식횡혈식석실을축조하고백제관등제에따른은제관식등을받았지만여전히하나의분구에매장시설을복수로설치하는분구묘전통을유지하는모습을보여주었다. 이고분의발굴을계기로일정강점기에조사되었던나주신촌리 9호분이 80여년만에재발굴 (1999) 되었다. 이러한독특한묘제의고총고분이조사되면서영산강유역세력의독자성이고고학자를중심으로강조되었다. 이에영향을받아문헌사학계에서도인식의전환이이루어져근초고왕대남방경략을인정하더라도그성격과이후의통치방식이직접적이지는않았을것이라는수정론이퍼지게되었다. 한편영산강유역에서고총이발달한시기는 5세기말에서 6세기전엽에걸치는데이시기의묘제에는왜의영향이상당히미쳤다. 그런데 2006년고흥길두리안동고분조사이후해안이나이에근접한섬에서해남신월리고분 (2009), 신안배널리고분 (2011), 고흥야막고분 (2012~2013) 등 5세기전 중엽의왜계고분이속속발견 조사되어왜와백제의교섭, 연안항로의중요성그리고이러한교류에참여한남서해안지역세력, 이에영향을받아영산강유역에서고총 ( 영암옥야리방대형고분등 ) 이등장하는과정을살피는데중요한자료를제공하였다 ( 김낙중 2013). 6. 서울풍납토성 한성기의왕성이다시주목을받게된것은 1997년풍납토성이발굴되면서부터다. 풍납토성은이미 1926년대홍수때청동제초두등중요유물이수습되면서하남위례성이나사성 ( 蛇城 ) 으로비정되었다. 해방후인 1964년에서울대학교고고인류학과에서토성내유물포함층을시굴조사하여풍납리식무문토기등을수습하고처음축조된연대를기원후 1세기경까지올려보아 삼국사기 초기기록에대한긍정론이대두되는계기가되었다. 그러나강변에위치하는점과지명의변화 ( 배암드리 바람드리 ) 를근거로사성으로비정되면서도성으로서주목받지못하였다. 이후 1970~1980년대에토성내 외부지역이급격히도시화되면서내부유적을조사하거나보존할기회를잃어버렸다. 게다가 1980년대중반몽촌토성이조사되면서상대적으로관심도소홀해졌다. 풍납토성에대한본격적 15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인조사와보존대책논의는 1997년선문대학교이형구교수가토성실측조사를하다가아파트공사현장에서대량의백제유물을수습하면서시작되었다. 이후몇곳의재개발부지와성벽에대한연차적발굴조사는물론이고소규모건축물신축에따른조사도지속적으로이루어져 (1997~ 현재 ) 풍납토성의성격을논의하는데중요한자료를제공하였다. 발굴을통해확보된풍부한자료는풍납토성이왕성임을분명히보여주었다. 이에따라하남위례성등한성기의도성에대한논의는풍납토성을중심으로이루어지고있다. 다만사유재산권행사제약에따른주민과의마찰은해결해야할큰숙제이다. 7. 사비기도성및사지 사비기도성과관련된유적은 1980년대이후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계획 에따른유적정비사업의일환으로정림사지, 부소산성등이지역대학과국립기관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국립부여박물관 ) 이참여하면서장기적이고계획적으로발굴조사되어성과를얻게되었다. 가장먼저미륵사지가장기적으로발굴조사되어 (1980~1994) 삼국유사 무왕조의기록과부합하는삼원식 ( 三院式 ) 가람배치가확인되었다. 미륵사지에이어익산왕궁리유적이 1989년부터현재까지연차적으로조사되고있는데, 단일유적으로는한국에서가장오랫동안조사된사례이다. 왕궁리유적은우리나라고대국가의왕궁중규모, 내부구조, 변천과정등전모가밝혀진거의유일한사례이다. 익산왕궁리유적과함께익산지역의대규모사찰인제석사지도 2008년이후연차조사중이다. 2001년부터는미륵사지서탑해체 복원이루어지고있는데 2009년에사찰조성의발원주체와연대를알수있는사리봉영기 ( 舍利奉迎記 ) 등사리장엄구일괄이발견되어백제사연구에한획을그었다. 우선사비도성을살펴보면, 사비도성의외곽인나성 ( 羅城 ) 에대한발굴조사를통해북나성과동나성만이축조되었으며청산성으로불린곳에는별도의산성이없고나성벽만이산중복을지나며, 산정에서는벽주건물등으로이루어진특수한건물군이존재하는것이밝혀졌다. 부소산성에대한조사 (1981~2002) 를통해백제때는포곡식 ( 包谷式 ) 산성만이존재하는것이확인되었다. 또한축조시기, 시기별축조방법의변화, 수혈주거지등다양한시설을확인하였다. 다만아직부소산성의성격을명확히파악할정도로내부조사가충분히이루어졌다고할수는없다. 한편왕궁터로추정되는관북리일대에대해서도충남대학교박물관에의한조사 (1982~1992) 에이어 2001년이후현재까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부여고도문화재단에의해연차조사가이루어져점진적인대지조성과정, 이에따라선행하던공방과곳간이폐기되고왕궁의범위가확장되며도로에의해공간이구획되고기와건물이조성되는과정이밝혀졌다. 다만아직왕궁의정확한범위와중심건물의위치등은확인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57
되지않았다. 왕궁의중심구역으로추정되는남쪽지역의건물철거와지속적인조사가필요하다. 고대도성의경관을구성하는건물중에가장눈에띄는것은사찰이다. 사비도성의사찰에대해서는국립부여박물관과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연차조사를실시하여많은성과를얻었다. 지금까지부여용정리사지, 능산리사지 (1992~2009), 왕흥사지 (2000~ 현재 ), 부여정림사지 ( 재발굴 2008~2010), 임강사지 (2009) 등이조사되었다. 이러한조사를통해사비기사찰은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일직선상에배치되며, 강당및금당좌우측의폭넓은동 서건물과그남쪽에회랑이접속하는가람배치가일반적이며, 그중에서도회랑및동 서건물 ( 승방 ) 의배치형태는중국과일본은물론이고고구려와신라에서도보이지않는독특한모습을보이는점이밝혀졌다. 이러한가람배치의세부적인변천과정과대지조성에대한검토를통해정림사지나군수리사지등의축조연대에대한재검토도이루어지고있다. 한편굴광기부 ( 掘壙基部 ) 및달구질에의한기단축조, 와적기단 ( 瓦積基壇 ), 적심토 ( 積心土 ), 토목혼합식구조의일당다실건물 ( 一堂多室建物 ) 도사비기백제의독특한건축기술로신라나일본에영향을미쳤음을확인할수있었다. 이러한연구성과는백제에영향을미쳤을중국남조건강성 ( 建康城 ) 의사찰유적에대해중국학자들이관심을가지도록자극하였다 ( 김낙중 2011c 2012). 8. 마한분구묘 ( 보령관창리유적등 ) 1994~1995년에발굴된보령관창리유적은방형의주구가돌려진무덤으로이보다앞서천안청당동유적등충청내륙지역에서발견된주구토광묘와는다른양상을보였다. 주구토광묘는구릉사면에주로조성되어매장시설위쪽에만눈썹형의주구가돌아가는것에비해방형의주구를돌린관창리유적의주구묘는구릉평탄지에주로조성되고매장시설은남아있지않아지상에설치되었을것으로추정되었다. 매장시설과분구의축조순서의차이에따라봉토분과분구묘를구분한연구 ( 李盛周 2000) 를계기로관창리유적의주구묘와같은분묘를 분구묘 로부르기시작하였다. 이후이런분구묘는영산강유역의대형고분들과계통이이어지는마한의분묘로인식되기시작하였다. 최근에는분포범위가북쪽으로확대되어경기김포지역에서도확인되었는데운양동유적에서는지상에설치된매장시설도남아있었다. 그리고남쪽으로내려올수록분구묘축조전통은오랫동안지속되어영산강유역에서는 6세기까지이어지며매장시설도여러가지가복수로설치되는것이확인되었다. 다만분구묘는주구토광묘와입지, 분포지역, 평면형태, 매장시설의위치등에서차이를보이지만공존하는지역도있고매장시설의위치와분구와의선후관계를실제발굴과정에서제대로파악하기어려운점등이있어서로명확하게구분하는데한계가있고, 일본야요이 ( 彌生 ) 시대무덤 15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을가리키는용어와같다는점등애매한부분과불합리한측면이남아있는용어이기도하다. 그렇 지만이러한무덤을사용한세력과백제의관계를파악하거나유사한무덤축조전통을보이는소 가야, 왜등과의교류를연구하는데여전히중요한개념으로이용되고있다 ( 한국고고학회 2014). 9. 지역사회의고분군과위세품 2003년발굴조사된공주수촌리고분군은한성기지역세력의양상은물론이고백제의웅진천도의배경을추정하는데도좋은자료를제공하였다. 한편수촌리고분군의묘제는목곽묘에서수혈식석곽을거쳐횡혈식석실묘로급격히바뀌는모습을보여주었는데, 이것은 4세기후반 ~5세기에는묘제가보수성을가진단순한문화적소산이아니라정치적의미를가지는기념물이었을것으로평가되기도하였다. 또한청주신봉동, 천안용원리, 연기송원리, 서산부장리유적등으로보아한성기에는지역사회마다중심적인무덤의종류가목곽묘, 수혈식석곽묘, 횡혈식석실, 분구묘등으로다르고무덤종류의구성에도차이가보이는등다양한양상을드러내었다. 이러한지역사회의대표적인고분군에서는금동관, 금동신발, 중국자기등위세품이출토되어백제의지역사회지배과정과성격을파악하는데중요한계기를마련하였다. 10. 행정중심복합도시개발지역발굴 72.91km 2 에이르는행정중심복합도시 ( 세종시 ) 건설에따른역대최대규모의전면적인발굴조사는지리적으로하나의생활권혹은영역권의조건을갖춘지역사회의양상과변화과정을고고학적으로연구하는데양호한자료를제공하였다. 행정중심복합도시는 2005년관련법이제정되어건설되기시작하였다. 개발에앞선지표조사가먼저실시 (2005~2007) 되어 128개소 1,200만여m2에이르는범위에서다양한유적이확인되었다. 2006년부터이루어진발굴조사를통해주로청동기시대와백제의유적이집중적으로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유적은전기의가락동유형이대표적이다. 한편고지형분석을통한충적지발굴로한성기지방도시의양상을보여주는나성리유적등이확인된점은유적의중요성뿐만아니라발굴방법의개선에도일조하여이후충적지유적조사의활성화에기여하였다. 나성리유적 ( 그림3) 에서는도로, 구획도랑이돌려진대중소의대지, 고상가옥및창고가배치된구획, 미고지에조영된분묘, 금강하안의토기가마및빙고그리고제의시설로추정되는후방의토단형태의방형구획, 토성등이갖추어진백제의지방도시유적이라고할만하다 ( 박순발 2014).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59
이러한거점취락이외에도이와관련된백제고분군도다수조사되어행복도시조성지역이라는넓은범위의단위지역내집단의사회조직과지역사그림 3 연기나성리유적모식도 ( 박순발 2014) 회의운용방식을연구하는데중요한실마리를제공하였다. 이중송원리고분군은한성기횡혈식석실의조영에백제의영향은물론이고낙랑의이주민이관여하였을가능성도석실구조에서보이고있어주목된다. 백제의지역사회의양상과웅진천도의배경연구에서주목받고있다 ( 호서고고학회 2013). 백제의영역확장과지방도시의성립이라는관점에서다른지역, 예를들면영산강유역의광주동림동유적등주요취락이주요한연구대상이되는점도최근의주요한경향이다. 11. 웅진성 웅진기도성에대해서는아직제대로된자료를확보하고있지못하다. 1980~1993년에공산성내부에대한조사를통해다수의백제유적이일부확인되기는하였다. 이중쌍수정앞대지를왕궁터로비정하기도하였지만대지의면적이좁고, 건물의구성및상태가좋지못하여부정적인의견도남아있다. 이러한와중에 2005년이후공산성내부에서가장넓은면적을차지하는성안마을에대한조사가연차적으로이루어지며연구의새로운전기가마련되었다. 성안마을에서는구획된대지에벽주건물등다수의건물이정연하게배치된양상이확인되었으며정관 ( 貞觀 ) 19(645) 년명옻칠찰갑등중요한유물이출토되어웅진성이웅진기뿐만아니라사비기에도중요하게활용되었음이확인되었다. 16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Ⅲ. 연구기반의확충과종합 1. 고고학관련학과의설립 서울대학교에고고학전공이설치된것은 1961년이다. 학과를설치한김원용교수자신도풍납토성등백제유적을조사 연구하였으며백제를전공하는후학을양성하여백제고고학연구에튼튼한기초를놓게되었다. 한편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초에백제고지에해당하는충청 전라지역의여러대학, 즉, 목포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북대학교 (1988), 고려대학교조치원캠퍼스 원광대학교 (1989), 충남대학교 (1991) 에도고고학관련학과가설치되면서백제고고학연구의인적자원이더욱증대되었다. 2. 백제고고학연구인력의확충 인적자원이증가하면서백제고고학을주제로박사학위를받은연구자도늘어나현재 30여명에이른다. 주제는백제국가성립의바탕이되는원삼국시대 ( 최성락 1993) 혹은소국단계 ( 권오영 1996) 를시작으로취락과정치체의성장 ( 송만영 2011), 백제의국가형성과정 ( 박순발 1998), 고고학자료로본율령 ( 山本孝文 2005), 지역사회의양상과백제의통합과정 ( 성정용 2000, 이동희 2005, 이현숙 2011, 이성준 2014), 도성지역의고분 ( 임영진 1995, 이남석 1994), 지역사회의고분 ( 최완규 1997, 김낙중 2009), 위세품을통한지방지배과정 ( 이한상 2009, 이훈 2010), 백제토기편년 ( 土田純子 2013), 토기를통해살펴본지역정치체의변동 ( 서현주 2006, 조상기 2014), 철기 ( 이범기 2015), 연대론 ( 김일규 2015), 성곽 ( 서정석 2000), 불교사원 ( 신광섭 2006, 김선기 2010, 李炳鎬 2013), 유적출토목간 ( 박중환 2007, 김성범 2010), 고분을통한왜와의교류 ( 崔榮柱 2011, 李澤求 2014) 등으로매우다양하다. 2010년대에학위취득자가급격히증가하였다. 최근에는지역사회연구, 왜와의교류에대한연구가증가하고있다. 이러한학위논문은대개단행본으로발간되었다. 학위논문이외에도백제관련단행본이여러연구자에의해간행되고있다 ( 박순발 2010 등 ). 3. 주요연구시설의확충 백제의도성이거나거점지역이었던서울, 공주, 부여, 익산, 나주에는국공립박물관또는국립문화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61
재연구소가설립되어기획발굴및연구, 조사및연구성과를반영한전시와교육프로그램을운영하여학술적인성과는물론이고백제연구의대중화에노력하고있다. 고도지역의기획조사는국립문화재연구소가주도하고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서울풍납토성을장기조사하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왕흥사지등사비기사찰유적과익산왕궁리유적에집중하고있으며, 백제사비기기와연구 등발굴조사와연계된기획연구를추진하여성과를얻고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나주복암리 3호분등의발굴을계기로영산강유역권의조사를위해설립되었는데고분발굴은물론이고영산강유역의특징적인매장시설인옹관의생산과유통등에대한기획연구도실시하여학술적인성과를얻고있다. 나주에는국립박물관도반남고분군근처에설립 (2013년개관 ) 되어전시와교육을담당하고있다. 발굴조사가국립문화재연구소와발굴법인위주로이루어지고있는요즘국립박물관은일제강점기등과거에이루어진발굴에대한재보고를실시하여연구자료의확충에노력하고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무령왕릉신보고서, 송산리고분군재보고서를발간하였으며,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동남리사지, 군수리사지등에대한재보고서를발간하였다. 2012년개관한한성백제박물관은백제관련특별전은물론이고몽촌토성등에대한발굴조사도실시하고있다. 대학연구소로는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공주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원광대학교마한 백제문화연구소가활발하게활동하고있는데, 각각 백제연구 (1970년창간 ), 백제문화 (1967년창간 ), 마한백제문화 (1975년창간 ) 을간행하여백제사연구의성과를집중적으로게재하고있다. 1982년설립된백제문화개발연구원은학술적목적의발굴조사를지원하고백제문화에대한각종기초자료집 ( 백제와전도록, 백제조각 공예도록등 ) 뿐만아니라논문집 백제논총 (1985년창간 ) 을발간하여민간차원에서백제고고학연구에크게기여하였다. 2009년부터는문헌사학, 고고학등을아울려통합적인백제학연구를목표로설립된백제학회가정기적인학술대회를개최하고 백제학보 (2009년창간 ) 를발간하고있다. 4. 고고학적종합 고고자료및연구자의증가에따라백제연구가전문화, 세분화되면서이를종합하여새로운방향을제시할필요성이제기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특별전 백제 (1999) 를개최한것은백제연구의전기가되었다. 이특별전은백제지역에서출토된각종유적과유물을통해백제의건국과성장및대외관계를종합한것이다. 이후국립공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을중심으로백제와관련된주제의특별전을지속적으로개최하고있다. 16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에서도학술대회를개최하고그결과를단행본으로꾸준히간행하고있는데 백제의중앙과지방 (1997), 百濟史上의戰爭 (2000), 고대동아시아와백제 및 한국의전방후원분 (2003) 등이대표적이다. 이와함께백제사연구총서가여러기관에의해발간되었다. 백제문화개발연구원에서는시민을대상으로한역사문고 33권 (2004~2008) 을발간하였다. 이외에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은백제사의전개과정을정치사편과생활 문화편으로나누어그동안의연구성과를정리한 백제문화사대계 15권 (200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는한성기백제의역사와문화를총괄적으로정리한최초의작업결과물인 한성백제사 5권 (2008), 그리고부여군에서는 부여군백제신서 5권 (2006~2008) 을발간하였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백제사에서쟁점이되는주제를잡아문헌사학과고고학자함께토론하고그결과를 2013년부터 1권 백제, 누가언제세웠나 를시작으로시리즈 ( 백제학연구총서쟁점백제사 ) 로발간하고있다. 2007년에발간된 한국고고학강의 에백제에대한고고학적성과가정리되었지만분량의제한으로사실을나열하는데그쳐아쉬움이있다. 한편이책에서영산강유역을백제편에서별도의장으로구분하여설명한것은문헌자료에의한연구와는다르게 6세기까지도독특한문화적양상을보이는고고학적자료에서비롯된현상이반영된것이다. 앞으로백제고고학을총정리한단행본의발간을기대한다. Ⅲ. 주요쟁점 1. 백제의국가형성 삼국사기 에의하면백제는기원전 18년에세워졌다. 그런데백제는 4세기후반박사고흥에의해 서기 가편찬될때까지문자화된역사기록물을남기지못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나타난백제초기기사는암송 기억과구전을통해전해온것을근초고왕대에일괄정리한것으로볼수있다. 즉, 기원전 18년건국을그대로믿기어렵다. 이와관련하여백제건국지인한강하류역에는 2세기중엽까지고고학적자료가공백지대로남아있는점이주목된다. 고고학적편년에문제가있을수도있겠지만낙랑의간섭이중요한요인으로작용하여나타난현상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왜냐하면한예 ( 韓濊 ) 가강성해진이후낙랑의통제력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63
이약화되며그문물이본격적으로중부지역에나타나기때문이다. 삼국사기 에의하면백제지배집단은자신들의출자를고구려와마찬가지로부여로천명하고있다. 그런데백제건국기에해당하는고구려혹은부여관련유적및유물은아직확인되지않았다. 풍납토성축조이전의환호취락및토기류등은토착세력의존재를강하게시사한다. 이처럼토착세력과백제건국중심세력사이의관계를제대로해명하기는아직자료가부족한편이다. 한편백제의국가형성을반영하는고고학적지표로특정토기양식의형성및그에의한공간적통일성의출현, 대형봉분을가지는분묘의등장및특정지역에의집중화, 성곽의출현이대표적으로거론되고있다 ( 朴淳發 2001). 그러데최근에는이러한지표들이동시에모두갖추어지는것은아니었을것이라는점이여러연구자에의해지적되고있다. 1 백제한성양식토기의성립우선고배, 삼족기등한성양식이라고부를만한토기양식이성립되고확산된것은분명하지만형성과정및시기에대해서는논란이있다. 백제한성양식토기는한강유역의원삼국시대토기인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및회흑색무문양토기는물론이고이중구연호등범마한지역의토기와도다른직구단경호, 삼족기등새로운기종, 흑색마연토기와같은새로운기법등이등장하면서성립된새로운양식의토기로정의되었다. 3세기중 후엽에성립하여 4세기중반을기점으로한성 Ⅰ Ⅱ 기로구분된다는것이일반적인견해였다 ( 박순발 1992 2001). 이연구는층서적인맥락을제대로알수없는몽촌토성출토자료를대상으로형식학적방법과토기질을바탕으로이루어졌다. 그런데풍납토성에대한층서적인조사를통해출현기에는고배, 삼족기, 꼭지달린뚜껑등이출현하지않았으므로한성양식백제토기는일시에출현한것이아니라점진적으로형성되었으며회청색경질토기의출현이분기의기준이되지않는다는점도지적되었다 ( 권오영 2011; 한지선 2013; 土田純 子 2014)( 그림 4). 한성양식토기의출현시점을 3세기중 후엽으로본견해는함께출토된중국시유도기와전문도기의연대관에근거하고있는데그것은서진대의동위교위부 ( 東夷校尉府 ) 를매개로진행되었던서진과백제의외교교섭이이러한도기유입의중요한계기가되었을것으로보기때문이다. 다만이런중국도기를모두서진대이전으로올려볼수없고최근중국남경에서는풍납토성출토품과유사한시유도기가 5세기까지도이어지고있다는주장이제기되고있어연대추정의어려움이있다. 한편한강유역원삼국시대토기, 즉중도식무문토기의하한연대를내리거나마구, 도질토기단경호등영남지역출토품과의교차편년을통해백제한성양식토기의출현을 1세기가량늦춰 4세기후반이후로비정하는견해도제기되고있다 ( 이성주 2015). 앞으로한성양식토기의출현시점에대한논란을해소하기위해서는출토유적의성격, 출토맥락, 층서정보, 공반자료가잘갖춰진자료를최 16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그림 4 원삼국시대 ~ 한성백제기토기편년표 ( 한지선 2013)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65
대한확보하고, 직구단경호등대표적인양식의출현과관련하여교차편년에사용될양호한자료가 중국등에서확보되어객관적으로검토되어야할것이다. 2 한성백제기중앙의묘제와횡혈식석실의확산한성기중앙의묘제는적석총, 즙석봉토분, 토광묘등이다. 이중분명하게왕릉으로추정되는것은적석총이다. 석촌동고분군내에서적석총으로보고된것은 4기이다. 그런데축조방법이모두달라 3호분과 1호분남분만내부까지돌로채운전형적인적석총이고나머지는내부를흙으로채운소위 백제식적석총 이다. 적석총의축조연대는 1호분의동북쪽기단에반쯤걸쳐축조된석곽형시설의용도와그곳에서출토된직구단경호등의연대, 3호분북변기단에서출토된동진청자반구호 ( 東晋靑磁盤口壺 ), 2호분보다먼저축조된것으로추정되는목관묘출토직구단경호, 개로왕대고분수리기사등이참고가된다. 이것들에대한다양한견해가있으나일러도 3세기중엽경이며대개 4세기중엽경부터축조된것으로보고있다. 이중근초고왕의왕릉은축조시기, 규모 ( 밑변길이 50.8 48.4m로최대 ), 구조, 동진청자반구호를비롯한금제영락등의출토유물로볼때 3호분으로비정되고있다. 석촌동고분군내적석총의연원을고구려에서찾는데는이견이없다. 다만기원전부터점진적으로변화한고구려적석총과는달리백제에서는일러도 3세기중엽에나계단식적석총이갑자기등장한다. 이러한차이때문에축조배경에대해서의견이분분하다. 즉, 고구려유이민의남하에의한백제건국, 부여계에서고구려계로의중심세력의교체, 4세기중후반경국가지배권강화를위한선진문화요소의도입, 고구려를능가하는부여계의적통적지위를확보하게되었음을보여주는상징등다양한견해가제시되었는데, 지배집단의계통및정치적행위가관련된것은분명하다. 석촌동적석총의매장주체는명확하지않다. 계단식적석총인 4호분의경우 3단에연도처럼보이는통로가한쪽중앙에위치한방형의석축공간이남아있어매장시설을횡혈식석실로추정하기도하지만내부를먼저흙으로쌓고외부에석축기단이부가된백제식적석총으로서매장시설은횡혈식석실이아니라고보는의견도있다. 4세기이후고구려에서는이미석실이매장시설인계단식적석총이유행하였다는점을참고할때백제적석총에횡혈식석실이매장시설로채용되었을가능성은있다. 그렇지만석촌동적석총의구조가다양하고주변에즙석봉토분이상당수있는점을고려하면즙석봉토분등에정치적고려에따라적석부를부가하였을가능성도있으므로매장시설이반드시횡혈식석실일필요는없을것이다. 한편가락동 2호분등즙석봉토분 ( 목관봉토분, 즙석분구묘로도불림 ) 은백제중심부에서고분이등장한것이고내부에는한성양식토기들이출토되고있어그계통과축조시기를파악하는것은고대국가의출현을논의하는데매우중요하다. 즙석봉토분은목관, 옹관등의매장시설을설치하고봉토 16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에돌을인고분으로추가매장에따라봉분이연접하거나확대되어복수의매장시설이남게되기도한다. 즙석봉토분으로는가락동 2호분이외에도석촌리 6 7 호분, 86-즙석봉토분, 76-파괴분, 5 호분등이있는데 76-파괴분은고분군의서남단에위치하며다른고분에비해월등히크다. 즙석봉토분은하나의분구에여러종류의매장시설이주로지상에복수로안치되며매장시설추가에따라분구가확장되는특징이있다. 이런점은서해안일대에서유행한 분구묘 와상통한다. 그렇지만먼저조성한분구를되파고매장시설을설치하는양상이나주구등분구묘의가장큰특징이잘보이지않는다. 그리고즙석은고구려적인요소이다. 따라서즙석봉토분의계통을논의할때는서북한지역의토광묘전통, 마한의분구묘및주구토광묘전통을복합적으로고려해야할것이다. 출현시기는흑색마연토기등을근거로대체로 3세기중엽으로추정하고있지만백제토기의연대관차이에따라 4세기이후로보는견해도있다. 이처럼백제국가형성기의석촌동일대묘제가다양한것은계통이다른집단의존재가능성과백제초기사회의복잡성을반영한다. 적석총은대체로고구려에서이주해온백제건국주체집단과관련된것으로보고즙석봉토분이나토광묘는지배집단에편입된현지토착세력의무덤으로본다. 한편석촌동고분군과인접한가락동 방이동고분군에는횡혈식석실분군이존재한다. 이고분군의축조주체를밝히는것이한성기에중앙의묘제로횡혈식석실이도입되었는지를판단하는중요한관건이다. 한성이외의지역에서횡혈식석실의등장을백제의지역지배과정과밀접하게관계된것으로보는입장에서는이고분군의석실을한성기에축조된것으로보려는경향이강하다. 한편백제유물이거의출토되지않은것에비해 6세기중엽이후의신라토기가분명하게부장되어있으므로신라의한강유역진출과관련되어축조된신라고분으로보는견해도여전히남아있다. 그런데한성지역은백제의도성이었던것은물론이고 475년고구려에의해함락된이후한동안고구려의지배아래에있었으며 70여년이지난 6세기중엽이후에는신라의지배를받게되었다. 따라서이곳에백제, 고구려, 신라계통의석실이존재할가능성은모두존재한다. 가락동 3호분처럼석촌동고분군에인접해있으며다른석실분들과입지와위치에차이가있고구조가한성주변지역의횡혈식석실과상통한것등일부는백제때축조된것으로보아도무방할것이다. 그리고가락동 5호분처럼모를죽여가며천장을올리는특징을가진고분은고구려와관련되었을가능성이있다. 이외대부분의군집분은신라의석실일것이다. 그런데가락동 방이동에한성기의횡혈식석실이존재한다고하더라도그것이왕과왕족의무덤이라고단정하기는어렵다. 고구려에의해일시적으로멸망하여웅진으로천도한백제의왕및왕족이현지에남아있다가신라의치하에서도같은석실에서추가장하며신라토기를장송의례에사용하였다고보기는어렵다. 백제에서횡혈식석실이고대국가의영역확장에따른지역세력의재편과정과밀접한관계를맺고등장한것으로본다면왕릉군등중앙의묘제로그러한석실이존재하는지가중요한관건일것이다.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67
그런데앞서살펴본것처럼한성기에횡혈식석실이왕릉의매장시설로사용되었는지는확실하지않다. 석촌동 4호석실이횡혈식석실일가능성이제기되기도하지만분명하지않다. 다만도성주변의여러지역에서횡혈식석실이축조된것은성남판교동고분군등최근의발굴사례를통해확인할수있다. 이것은적어도왕권을구성하는유력귀족세력이횡혈식석실을채용한것은분명히보여준다. 한성기의석실은금강중하류역까지분포한다. 따라서지역세력과중앙의주요귀족세력과의관계에서횡혈식석실이등장하는과정도상정해볼만하다. 한성기횡혈식석실의분포를보면적석총을축조한왕실보다는왕권에포함된일부귀족이나한성주변의지역세력이먼저받아들였을가능성이높다. 왕권은적석총처럼자체의독특한묘제를어느정도유지하고있었을가능성이높다. 신라도비슷한양상을보인다. 즉, 왕경에는적석목관분이조성되지만지역에는수혈식석곽묘나횡구식석곽묘가조성되었다. 횡혈식석실도지방에서먼저조성되었다. 따라서새로운묘제등의도입에왕권의역할이있었다고해도반드시직접적이라고하기는어렵고, 현지세력의주체적인의도가크게작용했을가능성도높다. 백제한성기에지역세력의입장에서왕권 ( 왕실, 중앙의유력귀족 ) 이도입한새로운횡혈식묘 장제를따라고분을축조하는것은그위세를빌리는수단이되고, 왕권의입장에서는새로운묘 장제와금동관등위세품사여를통해지역공동체내에서유력친족을차별적으로우대함으로써간접적으로지역에대한영향력을강화해나갈수있었기때문에횡혈식석실묘가지역사회에도입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다만지리적인위치, 현지의사정, 왕권과의관계등에따라수용양상은다양하였을것이다. 즉, 성남판교, 연기송원리고분군처럼중국계유이민의관여가관찰되는경우도있지만공주수촌리고분군처럼현지세력이새로운묘제를간접적으로받아들인사례도보인다. 한편군산산월리고분군처럼대외교섭이나지역지배확대에필요한거점지역에는왕권이직접적으로영향을미쳐위세품이적고토기까지백제양식으로거의바뀌는지역도있다 ( 김낙중 2012). 3 풍납토성및몽촌토성의축조시기 삼국사기 등문헌기록에의하면백제한성기의도성은처음에는한강이북의이른바하북위례성 ( 河北慰禮城 ) 에있다가얼마지나지않은온조왕 14년 ( 기원전 5년 ) 에옮긴한강이남의하남위례성을거쳐근초고왕 26년 (371년) 에한산 ( 漢山 ) 혹은그아래의한성 ( 漢城 ) 으로이도 ( 移都 ) 하였는데, 멸망당시한성은북성 ( 대성 ) 과남성 ( 왕성 ) 으로이루어져있었다. 위례성이라는이름은책계왕원년 (286) 년까지보이고한성이라는명칭은후대의사실이부회된것으로추정되는온조왕대를제외하면비류왕 24년 (327) 에다시등장한이후멸망때까지이어진다.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산및한성의위치와성격, 그리고상호간의관계에대하여여러설이존재하지만몽촌토성과풍납토성이본격적으로발굴된이후두성을중심으로논의가진행되고있다 ( 한성백제박물관 2013; 김낙중 2014). 16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풍납토성은한강변의충적대지위에판축으로쌓았으며, 성벽의전체길이는약 3.5km이다. 동벽의세지점에대한발굴조사결과초축이후내부로두번에걸쳐증축이이루어진것이밝혀졌는데, 최종성벽의너비는 43m, 외벽기저부에서현재남아있는성벽최상부까지의높이는 9.5m이다. 몽촌토성은풍납토성남쪽에인접해있으며, 낮은구릉을연결해축조하였는데주로성토하고부분적으로판축하여풍납토성과는다른양상을보인다. 성의길이는약 2.3km, 내부면적은 21만m2로서성내부에서는건물지와판축대지, 수혈주거지, 저장공, 연못등이확인되었고, 성벽외부에서는해자의흔적이드러났다. 백제국가의성립과관련하여중요한고고학적지표로성곽의축조가활용되고있으므로풍납토성및몽촌토성의축조연대를밝히는것은매우중요하다. 그렇지만현재이에대해서는논란이정리되지않고있다. 문제의핵심은풍납토성성벽축조와관련하여구지표면이나초축성벽안에서출토되어성벽축조의상한을추정하는데결정적인단서가되는토기등의유물에대한해석이다. 대표적인사례가풍납토성동성벽에대한 2011년조사시구지표면과 1999년조사시성벽기저부에서출토된승문타날 + 횡침선이시문된심발형토기, 2011년조사지점중구지표면에서출토된경부암문흑색토기호및성벽축조를위한기반토에서출토된견부수장문 ( 肩部垂帳文 )[ 혹은휘장문 ( 揮帳文 )] 단경호이다 ( 그림5). 타날심발형토기의출현연대에대한견해는 3세기이전, 3세기 1/4분기늦어도 3세기중엽, 4세기중엽등여러가지다. 경부암문흑색토기호와초축성벽내부출토회색연질완은낙랑의토기제작기술과관련이있는것으로추정된다. 녹로를이용하여성형하였으며, 기벽의내외면에뚜렷한회전물손질의흔적이관찰된다. 구체적으로는 2세기대로비정되는평양석암리 205호왕우묘 ( 王盱墓 ) 출토품과유사하며목이길고흑회색을띠어유사한측면이있는낙랑계토기가출토된미래마을부지다-6 호주거지등성벽축조이전시기의취락과관련된토기로추정된다. 견부수장문단경호에대해서는아직본격적인분석이이루어지지는않았다. 다만이토기의태토와문양이 4세기전반의고구려토기 ( 파주주월리한양대조사 2호주거지평저호, 안악 3호분출토평저호, 집안국내성체육장지점저장공출토토기등 ) 와유사하지만낙랑 대방군현에는 3세기대에이미견부수장문평저호가존재하고있었으므로파주주월리나풍납토성출토수장문토기는그와연계되는군현계토기로추정하고토성축조과정에 삼국사기 책계왕원년 (286) 조의기사로알수있듯이친밀한관계를유지하고있던대방군의선진기술이동원되었을가능성을고려하여 3세기 4/4분기무렵을성벽축조의상한으로비정한견해가제시되기도하였다. 그렇지만군현의견부수장문토기에대한실체가분명하지않아아직단정하기는이르다. 그리고풍납토성출토품은직구호인데비교자료로삼은안악 3호분등고구려토기는구연부가 C 자형에가깝게외반하는단경호여서견부수장문이외에직접적인비교자료로삼을수있는지의문이다. 한편기초공사이전의구지표면과초축성벽의골조에서출토된기와편은동성벽축조이전에성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69
그림 5 풍납토성 동성벽 축조 단계와 출토 유물 토 재료의 공급지에 폐기된 것이 유입된 것으로 백제의 한성 지역에서 풍납토성 동성벽의 축조 시 점 이전에 이미 기와가 본격적으로 공급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백제의 기와 제작 시점 이전으로 풍납토성 동성벽 축조시기를 올려보기 어렵다. 그런데 성벽 축조 이전의 구지표면과 초축 성벽에서 출토된 태격자문 암키와의 제작 속성은 한성기 기와의 변천 과정에서 비교적 발달된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출토맥락을 알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만으로 풍납토성 초축 동성벽이 300년을 전후한 시 점보다 이른 시기에 완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자료 등을 함 께 고려하면 4세기 중엽 이전에는 초축 성벽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몽촌토성의 축조 시기와 관련된 자료로는 1985년에 실시한 동북지구 성벽 절개조사 과정에 서 성벽의 안쪽 퇴적토 속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 편을 들 수 있다. 여타 성벽 절개 조사 지점 에서는 유물이 혼입된 사례가 없었다. 이 전문도기를 몽촌토성의 축조 하한을 말해주는 자료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전문도기는 성벽이 축조된 이후 얼마간 경과한 뒤 퇴적된 층에서 출토되었으므로 성벽의 축조 시점은 전문도기의 폐기 시점보다 이르며, 해당 전문도기는 서진(西晉) 이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 기벽이 얇은 소형으로 晉書 동이전의 마한과 서진의 교섭 기간인 3세기 4/4분기 170 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대회 - 한국의 고고학사Ⅰ
무렵에유입되었을가능성이높고, 토기나도자기는오래사용되지않을것이라는전제를바탕으로몽촌토성은적어도전문도기유입이전의어느무렵 (3세기중 후엽, 구체적으로는 3세기 4/4분기 ) 에축조된것으로추정한것이다. 그렇지만전문도기가소형의파편인점을고려하면재퇴적의문제도있고, 전문도기에대한연대관도이견이상존하므로이자료만을가지고몽촌토성의축조연대를단정하기는아직어려움이있다. 이에비해동남지구성토층 (S14E22) 에혼입된토기를근거로몽촌토성의축조상한을 4세기중엽이후로비정한견해도제시되었는데, 그곳에서출토된토기와중국자기가 4 세기중엽이후의것이라고해도이지점은망루지로추정되는토단에서성내측으로약 40m 가량들어온지점이어서성의수즙 ( 修葺 ) 과관련하여성토가이루어진것으로추정되므로이를근거로몽촌토성의초축연대를상정하는것은문제가있다는비판이제기되었다. 최근에는몽촌토성의점유기간을토기기종의변화가거의없는점을근거로 5세기중후엽을전후한 50년정도로짧게보는견해도제시되었다 ( 이성주 2015). 한편시유도기를포함해풍납토성과몽촌토성에서보이는중국도자기가운데분명하게동진중 후기보다이른것은없고 5세기중 후기의유송 ( 劉宋 ) 대것이가장많으므로이를근거로풍납토성이 3세기중 후엽에축조되기시작했다는결론은성립할수없다는중국학자의견해가제시되었다. 다만이러한중국도자기의연대가 4세기후반에서 5세기중 후엽에해당한다고하더라도고고학적으로성벽의축조와직접관련시키는데는문제가있다. 2. 금동관등위세품의성격 고분에부장되는다양한성격의물건중백제의지역지배확대혹은지방통치와관련하여금동관등위세품이주목받았다 ( 이한상 2009; 李勳 2010). 위세품은다양하게정의되지만여기서는필자가제기한기존의견해에따라실용성에서벗어나사회적관계를주로표현할목적으로만든것중에서중앙왕권과지역집단이우열의관계에있지만완전한지배-피지배관계가형성되지않은단계에양자의정치 사회적관계를표현하기위한상징적도구로사용한금동관등과같이당사자사이에만거래되어일반인이입수하기어려운물건이라고하고자한다. 백제에서사용된대표적인위세품으로는중국자기, 장식대도, 금동관등을들수있다. 한편 6세기중엽이후신분질서가정비되어관등이체계화된이후의관제와관련되어사용된은제관식, 대금구, 색복등은신분표상품등으로따로구분하여사용할필요가있다. 백제에서위세품을사여한방식과사여품의유형이큰틀에서는맥락을같이한다고볼수있지만위세품으로사여된금동제복식품 ( 금동관, 금동신발 ) 의양식, 환두대도의위계, 중국자기의종류등세부적인부분에서는차이를보이고, 부장양상에서도착장혹은부장으로지역마다차이를보이고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71
있다. 이것은위세품의사여목적이나시기또는피장자의성격등에서차이가있음을의미하는것이다. 따라서위세품사여는일원적이고제도적인차원에서이루어진것이아닐가능성이있다. 여기서는금동관을중심으로백제연구에서위세품이가지고있는의미와논쟁점을살펴보고자한다 ( 김낙중 2015). 백제에서금동관은 4 세기후엽에서 6세기전엽이라는한정된시기에유행하였다. 그런데문제는금동관이문헌기록에는등장하지않는다는것이다. 백제의금동관 ( 그림6) 은공주수촌리 1호분그림 6 백제금동관변천도 ( 김낙중 2015) 출토품처럼투조로시문하고관모와입식이일체로된것에서나주신촌리 9호분출토품처럼타출로시문하고입식이관모에서분리되어대륜에부착되고입식자체도 3개로나눠진것으로변한다. 이러한변화를금동관제작주체가백제중앙에서지역세력으로변화한것이라거나시문기법등이백제가아니라가야의관에접근한것으로보아계통을달리보기도한다. 그런데금동관양식의유행에변화가있었을가능성, 모티브의연속성등을고려할때이러한견해는문제가있다. 형태, 문양, 제작기법등에서보이는어느정도의정형성과금공품이가지는제작처의한정성을 17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고려하면백제금동관은한성에서제작된것으로추정할수있다. 이것은백제의금동관이중앙세력에의해일괄적으로제작되어사여된것을시사한다. 그런데입식의형태 수 부착위치, 문양의종류, 시문기법, 부품의조립순서및리벳의수, 영락결구방법등세부적인면에서는몇가지유형으로나뉠정도로차이가있다. 이것은금동관이상시적이고조직적인체계로하나의공방에서표준화된제품으로제작되었다고보기어렵게한다. 중요한복식품중의하나인대금구도웅진기까지는형태가통일적이지않다. 그렇다고이러한현상이지역세력이위세품을자체적으로제작하여사용하였다는것을의미한다고보기는어렵다. 왜냐하면금동관을위세품으로본다면그사여의주체는일정한정치적목적을가지고분배하였을중앙의백제왕권으로보는것이타당하기때문이다. 백제의지배영역확장과관련하여금동관이위세품으로사용된점에대해서는의견이일치한다. 이것은금동관의유행시기와담로제혹은왕 후호제 ( 王侯號制 ) 의실시시기가대체로일치한다는점에서출발한다. 하지만구체적으로문헌에서보이는특정한제도와관련시킬수있는지에대해서는이론이만만치않다. 금동관착용자를귀족관료제와연관된왕 후호를받은귀족들로보기도하고, 지방통치방식인담로제와관계되는것으로서왕 후호와같은작호를받은토착세력으로보기도한다. 한편담로제또는왕 후호제가제도적으로정비되기이전의특정시기에한정하여각지역의토착세력을중앙의통치체제안에묶어두기위한하나의방편으로금동관이사여되었을가능성을고려해야한다는의견도있다. 그런데담로제와왕 후호제의관계, 담로제의실시시기등은여전히논란거리이다. 그렇지만 송서 등문헌의내용을통해분명한것은왕이나후를파견하는주체는왕권, 파견된자는공이있는자제종족이나중앙의고위관료였다는점이다. 그런데금동관이출토되는묘제는각지역의현지유력자가묻혔음을보여준다. 그리고대부분의금동관연대가왕 후호제가실시된것이분명한개로왕대보다앞선다. 한편금동관사여의대상은그지역별, 시기별분포상황을고려하면백제의영역확장에따라세력권내로편입되어가는변경의주요거점지역의토착세력이지이미직접적인지배대상이된세력은아니었을것이다. 한편금동관은다른국가혹은정치세력과의교섭 교류에중요한백제세력권내는물론이고가야나왜의지역세력에게도사여되었다. 즉, 금동관사여의성격은다양하였다. 따라서금동관이중앙집권체제의확립과정이나지방지배체제만을반영한다고보기는어렵다. 금동관은소유여부자체가중요한위세품으로서집권세력내부에서의역할보다는왕권과지역세력또는가야및왜의일부세력과의인격적관계를표상하거나금동관을사여받은유력자가포함된지역집단내에서의사회적역할이더중요하였을가능성도높다. 따라서금동관이사여된단계에백제의영역또는세력이미치는범위전체를대상으로일관되고통일된기준의관제 ( 冠制 ) 가시행되었다고보기는어렵다. 다만중앙의의관제와관련된실상을고고학적으로아직알기는어렵다.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73
이러한점들을고려하면 4~5 세기에유행한금동관을시행시기및성격이분명하지않은왕 후 호제나담로제와억지로연결시키는것보다또다른지역편제방식및외부정치체와의교섭 교류 시스템확보에활용된수단등다양한각도에서검토할필요성이있겠다. 3. 영산강유역세력의성격및복속시기 삼국사기 에따르면백제가마한을병합한것은온조왕대이다. 그러나 진서 등중국사서에는마한이 3세기후엽까지등장한다. 마한의맹주국인목지국은이즈음에백제에병합되었을것으로여겨지고있다. 그런데백제의영역확장이점진적이었다는점을고려하면영산강유역을포함하는남해안지역까지영역을확대한시기가언제인지는따로검토할필요가있다. 그렇지만이러한사정을보여주는직접적인문헌기록은없다. 다만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기록에나타나는지명의역사지리학적비정을통해 369년 ( 근초고왕 24년 ) 에전남남해안까지병합한것으로보는것이문헌사학계의일반적인견해였다. 마한 이라는국명이 3세기후엽이후문헌기록에등장하지않는것도영산강유역세력을마한 ( 잔여세력 ) 으로보는견해를부정하는중요한근거로거론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은 249년에해당하지만이시기의 일본서기 기년은 2주갑 ( 周甲 ) 인하하여보는것이일반적이다. 내용은크게두가지인데, 하나는왜가목라근자 ( 木羅斤資 ) 와사사노궤 ( 沙沙奴跪 ) 등을보내신라를격파한후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등 7국을평정하였다는것이며, 다른하나는가라에서출발한목라근자가고해진 ( 古奚津 ) 에이르러남만 ( 南蠻 ) 침미다례 ( 忱彌多禮 ) 를무찔렀고, 한성에서군대를이끌고출발한근초고왕과왕자근구수가남으로진격해오면서비리등 4(5) 읍이스스로항복하였다는것이다. 이기사의주체는왜로되어있지만 남만 등의표현으로보아백제로바꾸어보는것이일반적이다. 복속지역은전라남도일대로비정하지만개별지명의위치비정에는견해차이가있다. 한편이기사의연대에대해서는근초고왕대의일로여기는것이일반적이지만성왕대의사실을근초고왕대로소급시켜기록하였다는견해, 일본서기 응신기에나오는목만치 ( 木滿致 ) 와 삼국사기 문주왕기에나오는목협만치 ( 木劦滿致 ) 를목라근자의아들인동일인물이라는전제하에서 3주갑인하하여 429년의사실로보아야한다는견해도있다. 그리고이기사의성격에대해서는백제의마한잔여세력병합과가야제국과상하관계를맺게된역사적사건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다. 다만최근의고고학적조사상황을고려하여백제의영역확대방식이내륙지역을통한점진적인지배영역의확보방식뿐만아니라해안을통한교두보적인거점확보의방식으로이루어졌을가능성이있다거나근초고왕대이후에도고구려와의관계때문에직접적인지배에는이르지못하였다고보는수 17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정론이등장하였다. 영산강유역이근초고왕대에백제의영역이되었다는견해에부정적인근거로작용하는고고자료는 6세기까지존속한옹관분등독자적인고분이다. 특히 5세기말에서 6세기전엽에는고총이유행하였다. 문헌사학자들은대체로고분등은풍습에기인한문화적인현상이나전통으로서지역성을띄는것에불과하다고본다. 그렇지만 3~6세기한반도에서고분은정치성을강하게가지고축조된기념물이다. 횡혈식석실의도입과확산, 고총의조영등을통해이를확인할수있다. 한성기에서사비기로갈수록묘제의다양성이사라지고횡혈식석실이라는묘제를중심으로규격등에규제가이루어지는현상은이를잘보여준다. 한편고총은신라의여러지역에서보인다. 다만영산강유역은고총조영의배경이백제에만있는것이아니다. 왜, 가야등외부정치체와도밀접한관계를맺으며등장하였다는점에서신라의지방고총과는차이가있다. 영산강유역이 4세기중엽이후백제의지배하에있었는지와관련하여주목해야할점은백제의지역지배가점진적이었으며지배혹은관계설정의방식도변했다는점이다. 백제의영역이라고인식하였다고하더라도배타성과군현제의실현정도에따라강도가높은것부터영토, 세력권, 영향권등으로범주화할수있다. 한편직접지배와간접지배로나누어볼수도있다. 4세기이후지배방식과관련된문헌기록도분명하지않고영산강유역권에서는옹관분을중심으로독특한묘제가더욱발전하는데비해백제의문물은토기일부에그치고있다. 백제의간접지배를보여주는위세품은 5세기말이후에나고분에부장된다. 따라서고총이조영되는 6세기전엽까지지방통치조직을통한지배및통제, 개별인신에대한장악, 노동력수취를통한통치기반마련이이루어진직접지배체제에영산강유역이편입되었다고단정하기는어렵다. 그렇다고영산강유역정치체를독자적인국가로볼수있을것인지는따로검토할필요가있다. 영토혹은직접지배와관련된고고학적지표로무엇을삼을수있을지어려운문제이지만백제토기양식의확산, 묘제의규격화와규제, 관등조직및의관제 ( 衣冠制 ) 확립과관련된복식품 ( 은제관식, 대금구 ) 의수수를들수있을것이다. 이와관련하여영산강유역에서는 6세기중엽까지도하나의고분에복수의매장시설이순차적으로조성되는일분다장 ( 一墳多葬 ) 의풍습이계속되었다. 이것은일시에여러명이묻히는가야의다장묘보다피장자사이의관계가대등한편임을보여준다. 그리고영산강유역권안에서정치적인관계로서의중앙과지방이성립되었다고볼수있는적극적인증거를찾기어렵다. 또한광범위한지역에서영산강유역양식으로부를만한토기가유행하지만신라나가야등과비교할때규격이나양식등에서중앙에서통제가있었던정도로정형화되었다고보기는어렵다. 5세기후엽이후부장량이증가하는무기 무구류도중심세력에의한군사력의편제보다는백제- 왜-가야와의교류가활발해지면서교역상의필요에의해입수한위세품으로기능했을가능성높다. 관료등정치엘리트집단을수용할거관 ( 居館 ) 성격의주거단위인성곽이존재하지않을뿐만아니라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75
방어시설로서의산성도아직까지분명한사례를확인하지못하였다. 이처럼반남고분군을중심으로한영산강유역중핵지역의공동체가영산강유역전체를정치적으로아울렀다고보기에는묘제나토기양식의분포범위에서어려운점이있다. 따라서영산강유역고대사회는지역사회를정치적으로조직하는고도의정치체로발전하였지만최종적으로고대국가백제와동등한체제에이르지는못하였다고할수있겠다. 이러한점을고려할때영산강유역이독자적인국명을가진정치체로존재하였다고보기는어렵지만 4세기이후백제의지방으로단순하게인식하는것도문제가있다. 시기에따라상호관계의양상이변화해가는과정에초점을맞춰연구가이루어져야할것이다 ( 김낙중 2009 2011a). 4. 영산강유역규슈계 ( 九州系 ) 횡혈식석실묘와전방후원형고분 ( 前方後圓形古墳 ) 남해안일대에서 5세기전 중엽에왜계 ( 倭系 ) 의수혈식석곽, 횡구식석실이간헐적으로축조된이후 5세기후엽부터는그러한묘제와연계되어규슈계의횡혈식석실묘가본격적으로축조되기시작한다. 이와함께이러한횡혈식석실을매장주체시설로사용한고분중에는분구의형태가전방후원형을띠는것도등장한다. 규슈계횡혈식석실묘는 영산강식석실봉토분, 월송리형석실, 영산강유형석실 등으로불리는것처럼영산강유역에서유행하였다 ( 그림7). 영산강유형석실은평면이대부분안쪽이넓고입구쪽이좁은장방형이다. 각벽은위로올라갈수록안으로기울게쌓인사벽조임식이며평천장이다. 현실입구는문설주석과문지방석등을갖추고있는문틀식이다. 현문은판석을세워서폐쇄하는것이기본이다. 연도는중앙식이다. 해남방산리장고봉고분을제외하고현실높이 / 연도높이가 1.5 이상으로차이가크다. 벽면하단에커다란장대석을놓은경우가많다. 이러한속성은일본북부규슈지방에서 5세기후엽에정형화된북부규슈형횡혈식석실에서보이는것들이다. 영산강유형석실은속성조합에서다양한양상을보여조산식, 장고봉식, 월계동식, 영천리식으로세분된다. 그리고북부규슈형의영향을받았으면서도현저한개별성과변용이인정되고단발적으로축조되어계통적인발전과정을찾아보기힘들다. 짧은기간 (5세기말~6 세기전엽의 30년내외 ) 에급속히퍼져지역공동체별로계통을밟아지속적으로발전한것이아니기때문에속성의연속적인변화를관찰하여형식학적으로상대편년하기는매우어렵다. 한편조형이된석실과의관계등계보에따라도입형, 발전형, 창출형으로도구분된다. 도입형은조형이되는석실의구조적특징이거의그대로보이는것이고, 발전형은조형이된석실의전체적인속성을유지하지만석실이축조된현지의요소를가미하며일부속성을변형, 발전시킨것이다. 17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그림 7 영산강유형석실의 분류와 편년(김낙중 2009) 창출형은 개별적인 속성은 여러 지역에서 연원을 구할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어느 한 지역에서 조형을 구할 수 없는 석실이다. 따라서 영산강유형 횡혈식석실을 구축하는데 북부규슈의 공인 혹은 백제고고학사 김낙중 177
축조집단이 반드시 직 접적인 관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부규 슈계를 기본으로 하면 서도 백제, 현지, 가야의 요소가 축조집단인 현 지세력의 다양한 선택 에 의해서 복잡하게 나 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영산강유역에 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엽 무렵에 일본 고분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인 전방후원분과 형태 가 거의 같은 고분이 축조되었다. 전방후원 형고분은 영산강유역 과 고창 및 해남의 해 안가에만 존재하는데, 지금까지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를 통해 15기 가 알려졌다. 이 중 현 그림 8 영산강유역권 전방후원형고분 분포도 재까지 시굴 또는 발굴 조사된 것은 11기이다 (그림8). 전방후원형고분은 영산강유역에서도 대형 전용옹관을 매장시설로 사용한 옹관분이 유행한 반남 지역을 에워싸듯 그 외곽지역에 분포한다. 그리고 광주 월계동, 고창 칠암리에서 2기가 인접해서 확 인되었을 뿐, 모두 1기씩 점적으로 분포하는 것도 특징이다. 전방후원형고분의 입지는 이 지역의 전통적인 묘제인 옹관분과는 상통하지만 산록에 입지하는 백제 석실분과는 다르다. 규모는 55m 이하의 중소형과 70m 이상의 대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함 평과 해남에 존재하는 70m 전후의 대형 전방후원형고분은 당시 북부규슈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 178 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대회 - 한국의 고고학사Ⅰ
고있던일본열도내기나이 ( 畿內 ) 주연부의지역대수장이묻힌전방후원분과규모가유사하다. 중소형이라도당시한반도에서축조된원분이나방분에비해서는큰편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한반도내에서는이질적인분형이고, 일본열도에위치하는것이아니기때문에한반도내다른분형이나일본열도의전방후원분과규모만을가지고상대적우열을비교하는것은적절하지못하다. 전방후원형고분의평면형태는원부와방부의비례, 방부의형태에따라장고봉형과월계동형으로나누어진다. 장고봉형은해안에입지하는대형고분이많고석실입구가분구장축과직교하거나일치하는데비해, 월계동형은영산강유역에주로분포하며중소형분이고석실의입구가허리부로향하는것이많아서두유형사이에약간의배타성은관찰된다. 고분조영집단마다전방후원분에대해얻은정보의출처가달랐을가능성이있다. 일본고분시대의전방후원분에는외부시설로주구 ( 周溝 ), 둑 ( 堤 ), 단축 ( 段築 ), 즙석 ( 葺石 ), 하니와 ( 埴輪 ) 가있는데, 이를모두갖춘경우는일본에서도왜왕권중심부의초대형고분에한정된다. 영산강유역의전방후원형고분에서는발굴조사결과모두주구가확인되었으며일부에서즙석, 하니와가확인되었다. 다만일본전방후원분에서 2~3단으로나타나는본격적인단축과허리부에방형으로돌출하여장송과관련된제사가이루어지던장소로추정되는돌출부는전혀확인되지않았다. 일본에서도기나이이외지역의전방후원분중에서단축, 즙석, 하나와를모두갖춘예는매우낮은비율을차지한다. 따라서영산강유역전방후원형고분을일본기나이지역의전형적인전방후원분과비교하여차이점만을부각시키는것도성격을제대로이해하는데적절하지못하다. 내부매장주체시설은모두원부에있으며영암자라봉고분을제외하고는모두북부규슈계의횡혈식석실이다. 석실은분구중, 즉지상에위치하는데이점은영산강유역의전통적인묘제에부합한다. 일본전방후원분에서도매장시설은수혈식석실이래여전히분구중에위치한다. 부장품은그계통이다양하다. 개배, 호등현지적인것은물론이고, 백제로부터받은위세품, 왜와관련된물건등이다양하게부장되어복합적인성격을드러내고있다. 이상에서살펴본영산강유역의전방후원형고분과규슈계횡혈식석실의축조시기및계보, 다원적인양상에대해서는어느정도의견이일치하지만피장자와축조배경에대해서는백가쟁명이다. 피장자에대한지금까지의견해는크게현지세력설과왜계세력설로구분된다. 현지세력, 왜 ( 계 ) 세력및백제왕권이상호연계되어나타난것은명확하지만이삼자의역학관계가어떠했는가, 누구에게중점을두었느냐에따라조금씩의견이달라진다. 피장자에대한견해차이는백제와영산강유역집단의관계에대한해석의차이와도관련되어있다. 등장의역사적배경으로는주변국가의정치적변동, 즉고구려의남진에따른백제의혼란과이에따른남쪽으로의세력확장, 그리고이와유사하게왜왕권의세력확대에따른일본열도의정치적동요와통합이거론되고있다. 그리고분형으로상징하고자하는것으로대내외적인정치성뿐만아니라정치성이배제된경제적인측면을중요하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79
게보기도한다 ( 김낙중 2011b). 이와관련하여필자도의견을제시한바있으므로 ( 김낙중 2008 2009) 아래에서그내용을간략하게정리하고자한다. 전방후원형고분의등장은영산강유역과왜의일방적이고단선적인관계가아니라다원적이고복합적관계의산물이다. 즉, 전방후원형분구등왜계요소가나타난다고바로왜인의무덤이라고단정하기는어려운상황이다. 매장시설인횡혈식석실도북부규슈형이지만현지요소가혼합되어발전된양상을보이며결국에는영산강유역에서만볼수있는독특한형태 ( 창출형 ) 를만들어내고있다. 이러한점은피장자의출자를생각하는데매우중요하다. 전방후원분이라는왜계요소가나타난것은당연히교류의흔적이겠지만그교류의배경이정치적인것인지경제적인것인지아니면더복잡미묘하게복합된것인지분명히밝히기는어렵다. 다만단순한교류에의해정치적인기념물인고분이축조되기는어렵다고생각된다. 또한석실등의요소로볼때주요한교섭상대가규슈세력인것은분명하다. 다만월계동고분의목제분주물 ( 墳周物 ) 처럼기나이계 ( 畿內系 ) 유물도나타나고있기때문에이원적인교류시스템도고려해야한다.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백제의일시적멸망과지역세력과의관계재편, 왜의계체기 ( 繼體期 ) 를중심으로한일본열도내의정치적변혁을배경으로영산강유역과경남서부해안에전방후원형고분과규슈계횡혈식석실이등장하였다. 지역세력에대한유연한정책과정에서등장한북부규슈세력은백제왕권-야마토왕권의직접적인교섭이미약했거나약화된상황을이용해별개의또는이를보완하는대한반도교섭루트를구축하고자하였으며, 백제와밀접한관계에있으면서도일정한정치적거리를유지하고자한영산강유역집단의일부세력이외부위신 ( 威信 ) 으로이러한북부규슈세력을이용하게되면서한반도내파트너로활동한것으로추정된다. 영산강유역세력, 일본열도내의북부규슈세력및북부규슈계석실이분포하는지역의세력은백제와야마토왕권에완전히종속적이지않았으며대립적이지도않았다. 단지정세의변동기에두왕권사이에서실리를좇는방법을모색하였으며그것이영산강유역-남해안-규슈-야마토왕권외연지역 ( 若狭등 ) 등북부규슈계석실을사용한지역을엮어준배경이아니었을까추정해본다. 5. 문헌기록과고고자료의괴리와극복 ( 왕흥사및미륵사지사리기 ) 발굴조사를통해새롭게발견된명문자료는당시사람들이직접남긴 1 차사료로서가치가매우 높다. 그런데이런명문자료가문헌기록이나그것을토대로추정한내용과일치하지않는경우가 있어새로운논란을불러일으키기도한다. 발굴조사를통해출토된대표적인백제의명문자료로는 18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무령왕릉묘지석, 능산리사지창왕명석조사리감, 왕흥사지목탑지사리기, 미륵사지서탑사리기등이있다. 이중왕흥사지및미륵사지출토사리기의명문으로촉발된논란을간단히살펴보고자한다. 왕흥사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의하면법왕 2(600) 년봄정월에세워지기시작하여무왕 35(634) 년봄 2월에준공되었다. 그런데목탑지에서출토된청동사리합의명문은 정유년 (577년) 2월 15일백제왕창이죽은왕자를위해사찰을세우고본래사리두매를묻었을때신묘한조화로셋이되었다 1 는내용으로왕흥사의창건연대가문헌기록과차이가있음을알수있었고, 위덕왕에게 597년일본에사신으로보낸왕자인아좌태자 ( 阿佐太子 ) 외에다른왕자가있었음도확인할수있었다. 사리기명문과문헌기록에서보이는창건연대의불일치와관련하여목탑만먼저만들어졌을가능성등기존의문헌기록을존중하면서다른사정을고려하는수정론이제기되기도하였다. 즉, 명문중 立刹 에주목하여 577년에먼저죽은왕자를위해추복탑 ( 追福塔 ) 으로목탑이건립되었으나법왕대인 600년에호국사찰로그기능이확대되어본격적으로조영되기시작하여무왕대에완공되었다는주장 ( 이도학 2008) 등이그것이다. 이와관련하여 2008년도조사에서목탑이먼저세워졌을가능성을염두에두고금당지조사를실시하였는데, 실제로는금당이먼저만들어졌거나금당과목탑이동시에축조되었음이토층조사를통해확인되었다 ( 그림9). 즉, 가람중심부의 1차정치층위에금당의기단석이위치하며그외곽으로 2차정치층이목탑쪽으로조성되어있는데목탑의굴광 ( 掘壙 ) 기초부가이 2차정지층을파고만들어졌다. 그리고창건당시에사용된막새가두건물에서모두확인되었다. 이러한현상은시차가아니라공정순서를반영하는것으로추정되었다. 대지가일괄로조성되었고대규모기와가마군이조성된것도주요건물이배치된본격적인사찰의조영을뒷받침한다. 이러한창건연대의불일치와관련하여 삼국유사 에서왕흥사를미륵사라고도한다는기록이주목된다. 왕흥 ( 王興 ), 미륵 ( 彌勒 ) 등은일반명사이다. 이경우부여왕흥사지나익산미륵사지는왕실의원찰이라는차원에서는모두왕흥사이고가장중요한신앙의대상이둘다미륵불이었다면미륵사로불렸을가능성이있다. 王興 명기와로볼때파괴된백제의절터를이용해고려초에재건된사찰이왕흥사로불리게된것은분명하다. 삼국사기 등의찬자가그곳이백제때에도왕흥사였을것으로미루어짐작하고미륵사등다른사찰관련기록을잘못모아놓았을가능성도있다. 한편 2009년익산미륵사지서탑해체과정에서도최하단심주석 ( 心柱石 ) 에서사리기가출토되었다. 미륵사는그동안 삼국유사 의기록을바탕으로무왕과왕비인선화공주가창건한것으로믿어왔다. 발굴조사로드러난삼원 ( 三院 ) 가람배치와 삼국유사 의창건설화에나오는 미륵삼존과전 ( 殿 ), 탑 ( 塔 ), 낭무 ( 廊廡 ) 를세곳에세우고미륵사라하였다 는내용이부합하여그신뢰성은더높아 1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81
그림 9 182 부여 왕흥사지 금당-목탑 평면도 및 토층도 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대회 - 한국의 고고학사Ⅰ
졌다. 그런데 사리봉영기(舍利 奉迎記)에는 좌평 사택적덕(沙宅 積德)의 딸이 왕후로 나오고 있 다. 당장 미륵사 창건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 게 되었다. 그런데 둘 중 하나 를 배척하지 않고 모두 미륵사 와 연계시키고자 하는 차원에 서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 다. 즉, 미륵사는 삼원이므로 목탑이 있는 중원과 석탑이 있 는 동 서원이 시간차를 두고 다른 사람의 발원에 의해 조성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무왕에게 둘 이상의 왕 비가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고 려되었다. 고대사회에서 사찰 건립에 오랜 기간이 걸린 사실 은 신라 황룡사의 조성 과정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서탑의 지하기초부는 흙을 겹겹이 다져 쌓는 과정에 잡석을 채워 넣었다. 이렇게 지하 기초 부분을 다져 쌓는 과정에 돌을 이용하는 기법은 신라 황룡사지 분황사지 금당 지 사천왕사지 등에서 확인된 그림 10 익산의 백제유적 분포도(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4) 바 있으나 사비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법이어서 주목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미륵사를 짓는데 신라 진평왕이 여러 기술자를 보내 돕게 하였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익산 미륵사지에서 신라의 영향으로 보이는 토목이나 건축기술의 흔적이 관찰될 가 능성이 있을 것이다. 미륵사지와 황룡사지 등에서 보이는 건축술은 백제와 신라의 활발한 교류를 시 백제고고학사 김낙중 183
사한다. 그렇다면신라공주선화가미륵사조영에관여하였을가능성은여전히남는다. 그런데이런문제를해결하려면사역의전반적인대지조성과정, 목탑과양석탑사이에서보이는기단축조기법, 초석의형태, 창건기와등의차이를면밀히검토하여가람이시차를두고순차적으로조성되었는지여부를확인해야한다. 6. 익산백제유적의성격 익산은백제의마지막도읍인사비, 즉지금의부여와함께일찍부터주목받고있는곳이다. 그곳에는왕궁 ( 왕궁리유적 ), 거대한사찰 ( 미륵사지, 제석사지 ), 산성들 ( 익산토성등 ), 왕릉으로추정되는고분 ( 쌍릉 ) 등고대도성의경관을구성하는대부분의시설이흔적으로남아있다 ( 그림10). 최근에는고지형분석을통해도시의흔적인도로등이존재할가능성도제기되었다. 왕궁성인왕궁리유적을중심으로분포하는여러유적의분포를고려하면익산은고대국가의도성의범주에포함된다고할수있다. 익산지역이경영된것은무왕대로보는것이일반적이지만동위 북제업성 ( 鄴城 ) 등북조궁성과의평면형태의유사성및교섭기사, 왕궁성에서나온중국자기등을근거로위덕왕대부터시작된것으로보기도한다. 익산경영의실상에대해서는천도설, 천도계획설 ( 미실행설 ), 사비도성의별부 ( 別部 ) 설, 행궁 이궁 별궁설, 별도설등으로의견이다양하다. 이와관련하여익산제석사지가주목받았다. 제석사지는최근수차례에걸친조사를통해사비의일반적인가람배치와동일한 1탑 1금당의가람배치임이확인되었다. 또한백제유물과함께통일신라시대의 제석사 명기와가다량출토되었다. 그리고제석사지북동편지역에서불탄제석사의폐기물을버린것으로추정되는폐기장도확인되었다. 이러한조사결과는백제무왕이현재의익산시금마면일대로추정되는지모밀지 ( 枳慕密地 ) 로천도하여제석정사 ( 帝釋精舍 ) 를지었는데정관 ( 貞觀 ) 13 년 (639) 뇌우로인하여불당과 7층목탑 ( 七級浮圖 ) 및낭방 ( 廊房 ) 이모두불탔다는 관세음응험기( 觀世音應驗記 ) 의신뢰성을높여주는계기가되었다. 이러한상황을바탕으로현지의연구자들사이에서익산천도설이제기되고있다. 이에대해문헌사학자들을중심으로 관세음응험기 는불교와관련된내용으로수세기에걸쳐전사되면서오류가생겼을여지가있고, 무엇보다 삼국사기 등문헌에분명한천도기록이없으며, 630년에사비성을대규모로중수한기록등을들어천도설을부정하며익산백제유적의성격에대해다양한견해를제시하고있는상황이다. 고고학적으로도왕궁성과연결되는도로의흔적이나고지형분석에따라도성내공간구획의흔적을상정하는연구가있기는하지만아직분명한도시의흔적은발견되지않았다. 또한왕궁리유 18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적에서왕궁과관련된시설이밀집된전각구역도얼마되지않아사찰로바뀌었다. 이런점등을고려하면익산지역이도성의역할을수행했다고보는데의문이생긴다. 따라서백제무왕이실제로익산으로천도했는지에대해서는복도 ( 複都 ) 혹은배도 ( 陪都 ) 등의가능성등고려하면서고고학뿐만아니라건축, 도시계획등인접과학과동아시아차원에서의꾸준한비교검토 (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2014) 가지속적으로이루어져야실마리를찾을수있을것이다. Ⅳ. 맺음말 고고학적인조사및연구는백제연구를왕권 정치중심에서지방지배방식과지배범위의변화, 지역사회의양상을구체적으로논의할수있도록하였다. 그만큼백제사를충실하게복원하는데일조하고있다. 그러나발굴조사와연구가진행될수록논의가더복잡해지는경우도있다. 문헌사의연구성과와따로진행되거나크게인식의차이가발생하는경우도많다. 이러한문제점을극복하기위해서는우선충실한기초조사가이루어져야한다. 연구주제와관련된도성, 고분및취락등고고자료를지속적으로조사하여충실한데이터를확보하여야한다. 다음으로백제역사연구에중요한유적은이미발굴조사되었다고하더라도시대적한계로조사가충실하지못하였거나보고서내용이미흡할경우재발굴과재보고가필요하다. 또한발굴조사뿐만아니라그동안의조사성과를정리하고통합적으로관리하는체계의구축이필요하다. 특히소규모구제발굴이많이이루어지는사비도성의연구에는반드시필요하다. 마지막으로백제는중국, 일본, 가야등주변제국과의교류를통해성장하고발전하였다. 그러한과정에외래문물도들어오고그것을자체적으로발전시켜다른나라에전해주기도하였다. 따라서백제문화의진면목을파악하기위해서는동아시아차원에서각국의학자들이조사연구성과를공유하고토론해야할것이다. 이러한성과를얻기위해서는고고학자만이아니라백제를연구하는다양한분야의학자들이학제간연구를활성화하고새로운연구주제나방법론을끊임없이제시해야할것이다. 백제고고학사김낙중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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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188-213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김용성 ( 한빛문화재연구원 ) 김대욱 ( 영남대학교박물관 ) 목차 Ⅰ. 머리말 Ⅱ. 고분의발굴 1. 신라권의주요고분발굴 2. 가야권의주요고분발굴 Ⅲ. 발굴성과와진전 1. 발굴대상의변천과의의 2. 성과와진전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신라와가야의영역은대체로지금의영남지방에해당하는데본래부터두정치세력권의범위가뚜렷하게구분되는것은아니었다. 삼국지( 三國志 ) 위서 ( 魏書 ) 동이전 ( 東夷傳 ) 은 3세기경까지영남지방에진한 ( 辰韓 ) 변한 ( 弁韓 ) 24개소국이있었다고전한다. 이중에사로국 ( 斯盧國 ) 이 3세기후반경에경주일대에서정치적영향력을확대하여신라라는고대국가로성장하였던것으로보인다. 가야라는명칭은구야국 ( 狗倻國 ) 으로부터유래하지만가야라는실체가연맹체를형성하고있었던것인지, 과연그렇다면그시점은언제이고존속기간은얼마인지, 그리고그범위는어느정도되는지등에대해이견이많다. 그러나 5세기를기준으로한마립간기신라의정치적영향력안에있었던소국들을제외한나머지영남지방의소국들을통칭하여가야라고한다면대체로가야산이남이면서낙동강이서에해당하는지역이가야의영역이될것이다. 여기서신라권과가야권의구분은이기준에따라정리하도록한다. 최근한국고고학회에서펴낸 한국고고학강의 에서는신라와가야에대한연구성과를구분하여서술하였지만, 이둘의고고학적정황을통해볼때고대국가로성장하기이전에는문화적으로공통적인부분도많고지역적으로는그권역에대한이해가연구자마다다른부분도있어본고에서는신라 가야고분발굴사를묶어정리하였다. 신라 가야고고학에관한기본적인인식은 한국고고학강의 의개관과구분을따랐다. 이러한전제하에 Ⅱ장에서는신라와가야의주요지역의고분발굴과정을정리하였고, Ⅲ장에서는신라와가야의고분발굴이어떠한성과와논의의진전이있었는지, 그리고그것이고고학의발달에어떤영향을주었는지를살펴보았다. 신라와가야의고고학사를정리한다는주최측의의도에맞추자면여기서다루는신라와가야고고학의주요연구쟁점이된고분발굴과그연구성과외에도경주의왕경유적이나지방도시유적이라든지신라 가야지역의발굴이증가하면서새로운연구주제로주목된생활유적이나취락유적, 토기가마나제철공방등의생산유적, 성곽유적이나사찰유적등도함께다루어야마땅하나이러한유적들의발굴과논의는비교적근래에이루어지고있으므로여기서는논외로하였다. 한편신라는 6세기중고기에접어든후가야지역을통합하고남한강을따라북상하면서한반도중부지방을손에넣게되고삼국을통일하기에이른다. 따라서중고기의고고학현상도여기어다루어야할것이나여기서는신라와가야가대치된시점을기준으로하고이에대해서는생략하였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189
Ⅱ. 고분의발굴 신라와가야고분의발굴은근대적의미의한국고고학의시작과맞물려있다. 1910년일제에의한강점이전부터일본인에의한고고학조사가시작되었는데, 처음지표조사수준을넘어굴토를하여고분을조사한것은 1906년경주황남동남총과동천동북산고분 2기 (?) 로보인다. 이후일본인들은경주지역의발굴을중심으로신라와가야지역각지의주요고분을발굴하게되었다. 해방이후우리손에의한발굴역시경주지역의신라고분을필두로하였다. 비록일본인의힘을빌린발굴이었으나국립박물관의호우총과은령총발굴이그것이다. 이후 1950년대국립박물관에의해경주지역고분이발굴되었고, 이후 1960년에이르러국립박물관과문화재관리국에의해서의성탑리고분을필두로경주의대형고분들이발굴되었다. 여기에는일부대학박물관도참여하였다. 그리고이시기에대학박물관이구미, 안동, 창녕, 경산, 부산등각지의신라지방고분을발굴하였다. 1970년대에는문화재관리국주도로국가시책에따른경주천마총과황남대총이발굴되어우리나라발굴의커다란획기가되었고, 이주변에대한대학박물관의발굴이이어졌다. 그리고역시대학박물관들에의해서신라와가야각지의고분이발굴되었다. 같은시기에대규모토목사업이진행되면서구제발굴도시작되었다. 문화재관리국에의한경부고속도로구간에포함된방내리고분의발굴이그시초가되었으며이후안동댐수몰지구등에대한구제발굴이뒤를이었다. 1980년대에는학술발굴도일부지속되었으나대학박물관에의한구제발굴이주를이루게되었다. 이후 1990년대초반까지는대학박물관에의한구제발굴이있었으나전반을지나면서영남문화재연구원을필두로한발굴전문기관이출현하여영남각지의구제발굴을주도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이후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창립되어가야지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경주지역의학술발굴을연차적으로진행하게되었고, 근래에이르러각시군에의해학술발굴의시행이늘어나고있다. 이러한신라 가야고고학발굴과정은발굴을주도한기관의변화에따라다음 < 표 1> 과같이 4 기로구분할수있다. 이러한시기구분에따른신라권과가야권의주요지역별발굴과정을살펴보도록하자. 표 1 신라 가야고분발굴의획기구분 발굴기관 전기 제1기 (1910 ~1945) 일인학자주도 일제강점 해방 제2기 (1945~1975) 국립기관주도 대릉원지구발굴 ( 천마총과황남대총포함 ) 제3기 (1976~1994) 대학박물관주도 발굴전문기관의설립 제4기 (1994~2015) 발굴전문기관주도 현재 19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1. 신라권의주요고분발굴 1) 경주지역경주지역신라고분의발굴은우리나라고고학을선도한특징을가진다. 발굴된고분가운데중요한의미를가져학사적으로적시되어야할것을뽑고포항과울산을같은경주권으로묶어더하여주요고분을살피면다음과같다. 대략앞시기인제1기와제2기에는경주중심고분군인월성지구의고분군이조사되었고, 이후에는경주외곽지역의고분군이조사된특징이있다. 최근에다시쪽샘지구에대한발굴이주목을끌고있다. 제1기 : 보문리합장분 (1915) 1, 금환총 (1915), 완총 (1915), 금관총 (1921), 금령총과식리총 (1924), 서봉총 (1926), 황남리 109호분 (1934) 제2기 : 호우총과은령총 (1946), 황성동석실분 (1967), 용강동석실분 (1968), 안계리고분군 (1970), 계림로고분군 (1973), 전미추왕릉전지역고분군 (1966, 1973~1974), 천마총 (1973), 황남동 110호 (1973), 황 남대총 (1973~1975) 제 3 기 : 조양동고분군 (1979~1982), 월성로고분군 (1986), 포항냉수리고분군 (1990~1991), 울산중산리 고분군 (1991) 제4기 : 사라리고분군 (1995~1996), 구어리고분군 (1998), 황성동고분군 (1994, 1997, 2000~2002, 2006~2008), 포항옥성리일대고분군 (1994, 1995), 덕천리고분군 (2002, 2004~2006), 쪽샘지구 (2007 ), 포항대련리일대고분군 (2008) 이외에도많은고분들이특히제4기에이지역에서발굴되었다 2. 2) 부산지역부산지역의고분은 1969년주택공사로고분이조사된이후 8차례에걸쳐발굴이이루어진복천동고분군 (1969, 1970, 1970~1971, 1974) 이대표적이며이때의발굴은소규모로진행되었으며제2기에해당한다. 이후부산대학교 (1980~1981, 1983, 1986, 1989, 1991) 와부산박물관 (1989, 1994~1995) 등에의한본격적인발굴은제3기에해당하는것으로정리할수있다. 이외화명동고분 (1972), 학소대고분 (1974), 당감동고분 (1981), 연산동고분 (1987) 등이제3기에발굴되었다. 그리고최근 ( 제4기 ) 에연산동고분 (2000, 2007) 이다시학술발굴되었으며복천동고분군도복천박물관에의해지속적으로발굴조사 1 이하유적뒤의 ( ) 에는발굴연도를표기하였다. 2 경주지역고분의발굴조사경과와성과에대해서는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심포지엄이나자료집을통해비교적상세히다루었으므로본고에서는개략적인내용만기술하였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191
(1998, 2002, 2006, 2008) 되고있다. 이들발굴고분가운데신라 가야고고학에중요한의미를지닌고분으로는복천동 38호분, 10 11호분, 21 22호분, 32 33호분, 35 36호분, 54호분등이있고, 최근발굴된연산동고분도학사적의미가있다. 3) 양산지역양산지역에대한고고학발굴은일제강점기에부부총이발굴 (1920) 되면서시작되었다. 그러나이후관심의대상에서좀멀어졌다가제3기인 1990년대에부부총이속한북정리고분군에대한조사 (1990, 1991) 가시행되어금조총과같은주목되는고분이확인되었다. 그리고이때일제강점기에발굴된부부총 ( 북정리 10호분 ) 이재발굴되고, 출토유물도다시정리되어보고서로간행됨으로써이지역고분의묘제와유물에대한이해의폭을넓혔다. 4) 창녕지역창녕지역의고분은일제강점기의이른시기인 1910년에이미그분포상이알려지기시작했으며본격적으로 1917년대규모의발굴이교동지구에서이루어졌으나대부분보고서가작성되지않아문제가된다. 이후대학박물관과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등에의해서교동과송현동의고분이몇차례발굴되었고, 영산과계성지구의고분들도수차례에걸쳐발굴이이루어졌다. 발굴된주요고분을뽑아보면다음과같다. 제1 기 : 교동 31호 (1918), 교동 7호 (1918 1919, 2004~2006 재발굴 ), 교동 89호 (1918 1919) 제2기 : 계성리 1호 4 호 (1968~1969) 제3기 : 계성지구고분 (1976), 교동 1 5호 (1992), 계성고분군 (1994) 제4기 : 송현동 6호 7 호 (2004 2006년 ), 송현동 15 17호 (2006~2008), 교동주차장부지 (2009~2010), 영산고분 (2012), 계성리 2호 3 호 (2015) 이외창녕지역으로분류되기도하는달성현풍지구의쌍계리고분군 (2009~2010) 과성하리고분군 (2010~2012) 이최근에발굴되었다. 5) 대구지역현재의대구광역시지역은앞의현풍지구를제외하면크게 5개의지구로나눌수있다. 중앙 ( 달성 ) 지구, 동부 ( 불로 ) 지구, 북부 ( 칠곡 ) 지구, 서북부 ( 하빈 ) 지구, 서남부 ( 화원 ) 지구가그것으로각각에는대형의고총군이중심고분군으로자리하며주변에소형고분군이분포하고있다. 이들각각이발굴되었는데그주요고분은다음과같다. 19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제1기 : 달서고분군 (1923), 대명동고분군 (1938), 해안1호 2 호 (1938) 제2기 : 불로동고분군갑호 을호 (1963) 제3기 : 구암동 56호 (1975) 제4기 : 죽곡리고분군 (1994, 2006), 화원성산동고분군 (1998), 비산동목곽묘 (1999), 문산리고분군 (2000~2002), 불로동 91호 93호(2002) 6) 경산지역경산지역에대한고고학적관심은일제강점기부터있어왔으나본격적인고고학조사는제2기인 1960년대북사리고분군의발굴 (1969) 부터라고할수있다. 이후제대로된고고학조사가없었으나제3기인 1980년대에들어와임당동 (1982) 과조영동 (1988~1989) 의고분발굴이전면적으로시행되어신라고고학의해석에밑거름이되었다. 이후제3기말과제4기의초반에걸쳐대구시지유적에대한대규모의발굴 (1992~1994) 이시행되면서신라고고학의자료를풍부하게하였고, 제4기에계속된임당유적의발굴 (1995~1997, 2006~2008, 2010, 2014, 2015) 은이지역원삼국시대부터삼국시대까지문화상을단계적으로이해할수있는자료를산출하여주목되었다. 또한신상리고분군 (2003) 이제4기에발굴되어이지역문화상을밝히는데주요한자료가되었고, 같은제4기에는소형고분으로구성된많은수의발굴이있었다. 특히임당유적과시지유적은한국발굴사에서대학박물관주도의발굴기에서발굴전문기관이설립되어발굴전문기관주도의발굴기로넘어가는전기가된중요한유적이다. 대규모의택지개발로광역에걸친넓은범위의전체지역이발굴되고, 거기에서는그동안그다지주목되지않았던생활유적, 생산유적등에대한철저한조사도이루어져고고학의지평을넓히는계기가되었다. 7) 의성 안동지역경북의중북부에해당하는이들지역에대한고고학적관심은일제강점기에는보이지않는다. 그러나제2기에의성탑리고분 (1960) 이발굴되고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안동조탑동고분군 (1963) 을발굴하면서지역문화양상이드러나게되었다. 이가운데의성탑리고분은우리손에의한첫지방고분의발굴이라는데에큰의미가있다. 이후제3기에이르러안동조탑리고분군 (1991, 1992, 1994~1995) 에대한대규모발굴과의성대리리 3호분의발굴 (1994~1995), 횡혈식석실로유명한학미리고분군 (1996) 의발굴이이어졌다. 이외안동의임하동에서도신라고분이발굴 (1987) 되었다. 그리고제4기에의성대리리 2호분과 23호분등이발굴 (2009~2010) 되어이지역의고분자료를보탰으며근래에도대리리에분포하는다수의고총고분이발굴되었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193
8) 성주지역성주지역은앞의창녕지역과함께이미일제강점기에가야의고분으로주목되면서중심고분군인성산동고분군의조사 (1918) 가시행되었다. 이때조사된 5기가운데 3기의발굴자료가공표되어있다. 이후계명대학교박물관에의해서제3기에같은곳의고분 5기 (38, 39, 57 59호 ) 가발굴 (1986~1987) 되었다. 그리고제4기에이르러주변의고분군인명포리 (1998), 가암리 (2002~2004, 2006), 시비실 (2002~2004), 장학리 (2005) 등지의고분군이속속조사되었다. 한편지금은성주지역에속하지는않지만유사한유물상을가진현칠곡군의약목복성리고분군의고분 1기가제2기에조사 (1960) 된바있다. 9) 구미지역과거선산군지역을포함한현구미시지역에는중심고분군으로추정되는고분군이구미의중앙부황상동과더북쪽의해평들을기반으로한낙산리두곳에존재한다. 이고분군들은비교적일찍부터고고학의조사대상이되어왔으며제4기에이르면서그주변의소형고분군도많이조사되었다. 주요한고분의발굴은일제강점기에낙산동의고분이지표조사수준의조사에서좀더진전된조사 (1915, 1917) 가시행되었고, 이낙산동고분군의대형분들이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의해서제3 기에본격적으로조사 (1987, 1988, 1989) 되었다. 그리고황상동고분군은제2기에경북대학교박물관에의해서발굴 (1962) 된이후제4기에는대구대학교박물관에의해대형고분을포함한 60여기의고분이발굴 (1998~1999) 되었다. 10) 상주지역상주지역에는상주시가지남쪽에위치한병풍산을중심으로한지구인병성동, 헌신동, 성동동지역에중심고분군이분포하고, 상주군의북서부에해당하는함창지역의오봉산을중심으로한지구에역시중심고분군으로볼수있는신흥리고분군이분포하고있다. 이들상주지역에분포하는고분군에대한관심은비교적늦게시작되어제4기에이르러서야그문화상이밝혀지기시작하였다. 조사는대부분구제발굴로병성동 헌신동고분군 (1999~2000), 함창의신흥리고분군 (1997) 의조사가그것이다. 또한상주시서부에해당하는청리고분군 (1996~1997) 에서는좀더늦은석실분시기에중심을둔고분군이발굴되었다. 11) 영주지역 영주지역은일찍부터벽화분이확인되어주목되었다. 주요한고분의발굴로는제 2 기에이루어진 19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읍내리어숙묘 (1971) 와제3기에발굴된읍내리벽화고분 (1985) 과읍내리고분군 (1986) 이있다. 이들고분은여기서논하는시기보다늦은시기의것이나신라고분가운데기년을알려주는고분들로유명하다. 이외이들고분이분포한주변의태장리고분군등에서는최근에좀더이른시기에해당하는다수의대형분들이발굴 (2006~2007, 2010~2012) 되고있다. 12) 동해안과여타지역신라고분은청원미천리에서제3기에발굴 (1991, 1992) 되어 5세기에이미신라가호서지방으로진출한것을알려주었으며, 제3기와그와제4기의교체기무렵에강릉초당동에서많은신라고분이확인 (1993, 1995) 되어신라의동해안진출과정을파악할수있게하였다. 이후초당동에서는지속적으로신라고분의조사 (2000년이후지속적으로조사가진행중 ) 가이루어지고있다. 이외강릉의주변지역에서도소형의신라고분조사가이루어졌다. 또한이강릉지역과연결되는경북북부동해안을따라영덕괴시리의고분 (1986) 이제3기에발굴조사되어신라고분이동해안을따라확산되는현상을보여주고, 김천덕천리고분군 (2002) 이제4기에발굴조사되어신라가추풍령으로진출하는과정을보여주기도한다. 2. 가야권의주요고분발굴 언제부터가야라고할수있느냐의문제가있지만앞의신라와같은시기에대척된영남지방의정치세력을가야라고한다면그문화상은최근박천수등에의해크게금관가야권 ( 김해와창원일부지역 ), 소가야권 ( 고성, 산청, 진주, 사천, 하동지역 ), 아라가야권 ( 함안, 창원, 의령지역 ), 대가야권 (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남원, 장수지역 ) 으로나누는안이제기되어있다. 그러나이들가야권각각이통합된정치체로존속했느냐는점에서는의문점이많다. 금관가야권과대가야권의경우는그영역이여기에묶은지역과유사했을것이지만나머지소가야권과아라가야권은그러하지않았을것이다. 여기서는편의를위해이러한정치체의영역과는관계없이앞의권역별로고분의발굴과정을살펴보도록한다. 가야권을신라권과같은획기로나누는데에는문제가있을수있으나한국발굴사라는넓은의미에서는통용될수도있다고여기기에여기서도앞의신라권획기를따르도록한다. 가야지역에대한고고학조사는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당시가야로인식되던고령, 함안, 진주, 창녕, 성주등지에서확인되는고분을대상으로조선고적조사의일환으로시작되었다. 하지만이러한조사결과는단편적인개인기록이나유리원판사진자료또는일부발간된보고서를통해알수있으나그기록들이일치하지않는것도있어발굴조사의연대와해당발굴조사고분을추정하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195
고있는실정이다. 확인되는발굴조사가운데 1917년과 1918년에걸쳐앞서적기된성주성산동과창녕교동과함께고령지산동의고분이발굴되었고, 함안말이산고분, 진주수정봉고분등의발굴이잘알려져있다. 1945년광복이후 1960년대까지는전쟁과사회적혼란등으로가야지역고고학발굴조사는거의진행되지못하였다. 그런가운데서 1963년고령대가야의고아동벽화고분이발견되었으며, 1970 년대경제개발이본격화되면서가야지역에대한고고학조사가활발하게진행되었다. 특히제3기에해당하는 1977년경북대학교박물관과계명대학교박물관에의한고령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의발굴은가야고고학의큰획기가되는발굴이었다. 1980년대에들어와서는김해나고령지역외에도함양, 합천, 진주등지에대규모발굴조사가진행되었다. 1990년대를지나 2000년대에들어와서는발굴조사가급격히늘어나일일이열거하기어려울정도가되었다. 이중 1990년부터경성대학교박물관의발굴을시작으로연차적으로최근까지발굴된김해대성동고분군의발굴은금관가야의실체를증명하는획기적인성과를냈다. 또한 1985 년부터시작하여 1992년까지연차적으로발굴된합천옥전고분군은삼국유사에모가야로전하지않고일본서기에비치는다라국이라는가야소국의실체를알려주는중요한발굴이었다. 이러한고분의발굴가운데중요한것을권역별로정리하도록한다. 1) 금관가야권김해지역에대한고고학발굴은일제강점기에김해패총의발굴이시행된이후현재의원삼국시대를김해기라고명명하는계기가되었다. 본격적인고분의발굴은제3기에예안리고분군의발굴 (1976) 로시작되었다. 이후칠산동고분군 (1987) 과 3차에걸친대성동고분군 (1990~1992) 등활발한발굴이진행되었다. 또 4차에걸친양동리고분군의발굴조사 (1990~1996) 도진행되었다. 따라서주요발굴은제3기에이루어졌다고할수있다. 이후제4기에는각발굴전문기관에의해서이들주요고분의주변고분군들이많이조사 (2004, 2010) 되었고, 근래에대성동고분박물관에의해대성동의주요고분 (2009, 2011) 이발굴되고있다. 이외김해구산동고분군 (1997), 내덕리고분군 (1996), 덕정리고분군 (1996~1997), 창원다호리고분군 (1988~1998) 등을비롯한많은소형분으로이루어진고분들이제3기와제4기에걸쳐발굴되었다. 2) 소가야권고총이축조되던시기소가야권역내의중심고분군은고성송학동고분군과율대리고분군, 산청중촌리고분군, 진주수정봉 옥봉고분군등을들수있다. 송학동고분군은일제강점기에확인 (1914) 되었으나발굴조사는제4기에동아대학교박물관이 1 19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6호분을대상으로시행 (1999~2000) 하였다. 발굴에서는왜와관련된고분으로추정되는유물이나고분축조수법이확인되어주목되었다. 고성의율대리고분군은제3기에국립진주박물관에의해조사 (1989) 되었고, 이와유사한고분의축조수법을가져소가야식고분이라고할수있는고성내산리고분군이제4기에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의해발굴 (1997~2001) 되었다. 진주수정봉 옥봉고분군은일제강점기에關野貞에의해조사 (1910) 되었으며산청중촌리고분은제3기신라대학교박물관에의해서발굴 (1982) 되었다. 이외이권역에서조사된주요고분으로는진주가좌동고분군 (1988), 진주무촌리고분군 (1993, 2001), 산청묵곡리고분군 (1996), 생초고분군 (2002, 2004) 등이제3기와제4기에걸쳐발굴되었다. 3) 아라가야권아라가야권이라고할수있는곳에분포하고있는중심고분군은함안의도항리 말산리고분군과의령의경산리고분군과중동리고분군을들수있다. 도항리 말산리고분군은일제강점기에알려졌으며 34호분 ( 현4호분 ) 의발굴 (1917) 이주목된다. 해방후에는제3기에이르러창원대학교박물관에의해고분발굴 (1986) 이시작된이래 16차례에걸쳐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와각발굴전문기관에의해발굴 (1991, 1992, 1994, 1996) 이시행되었다. 이외함안황사리고분군 (1991), 윤외리고분군 (1992), 오곡리고분군 (1993) 등을비롯한소형고분으로이루어진고분이제3기말에주로발굴되었다. 또한경상대학교박물관이제3기에는의령중동리고분군 (1993) 을, 제4기에는경산리고분군 (2000) 을발굴하였다. 이외의령지역에서는예둔리고분군 (1992), 운곡리고분군 (1998, 2005) 등이제3기와제4기에발굴되었다. 한편이권역에속한마산의현동고분군 (1989, 2009) 과대평리고분군 (1991~1992), 창원삼동동고분군 (1982), 도계동고분군 (1986, 1987, 2002), 가음정동고분군 (1990) 등에서도소형의고분이제3기와제4 기에걸쳐발굴되었다. 4) 대가야권대가야는고령지역을중심으로성장하기시작하여 5세기후반에는고령을중심으로황강수계, 남강수계, 섬진강수계, 금강수계및남해안일대까지그권역이확대되었다. 이지역들은대가야토기와묘제라는공통성을가지고있어다른가야와는달리광역의정치체를구성하고있었음을알려준다. 따라서같은대가야지역이라고하지만각지에는고령을상위에두고그아래배치되었던중심고분군이존재하고있다. 고령의대규모고분군과이들지방의중심고분군대다수가조사되었는데, 그것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대가야의왕릉이자리한것으로보이는지산동고분군은일제강점기에일찍부터주목을받아조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197
사되었다. 그대표적인것이지산동 ( 구 )2호와금림왕릉으로전하는 47호 ( 구39호 ) 조사 (1918) 이다. 이후제2기에고아동벽화고분이확인되어조사 (1963) 되었다. 본격적인조사로는제3기에지산동 44호와 45호분이발굴 (1977) 된이후계명대학교박물관에의해지산동 32 35호분이발굴 (1978) 되었다. 그리고역시제3기에본관동 34 36호가발굴 (1983) 되었다. 이후제4기에이르러왕릉전시관부지일대의지산동소형고분과함께대형분인지산동 30호분이발굴 (1995) 되었고, 쾌빈리에서목곽묘단계의고분이발굴 (1995) 되어주목되었다. 또한대가야역사관신축부지에대한발굴 (1999) 도진행되었다. 그리고최근에는지산동 73 75호분이발굴 (2007~2008) 되어지산동고총의연대기가완성되게되었다. 이외고령권이라고도할수있는합천의반계제를비롯한합천댐수몰지역에대한조사 (1985, 1986) 에서대형분뿐만아니라많은소형고분들이제3기에발굴되었다. 대표적인것이반계제고분군 A B C 호 (1986) 등이다. 위의대가야권본지에서벗어나지방이라고볼수있는지역들에서도대가야고분의발굴이많았다. 그대표적인것이함양백천리고분군 (1980, 1992), 거창말흘리고분군 (1985), 남원월산리고분군 (1982, 2010) 두락리고분군 (1989) 유곡리고분군 (2013), 장수삼봉리고분군 (2004) 등으로이들은대략대가야지방의중심고분군으로볼수있는것으로제3기와제4기에걸쳐발굴되었다. 또좀더작은고분들이함양상백리고분군 (1972), 남원건지리고분군 (1988), 장수삼고리고분군 (1995) 과동촌리고분군 (2003), 진안황산리 (1997) 등에서발굴되었다. 한편이들대가야식의고분만발굴되는곳과는달리처음에는독립된정치체로성립되었으나대가야의영향권으로편입된것으로보이는중심고분군도발굴되었다. 바로합천옥전고분군 (1985~1986, 1987~1988, 1989, 1991, 1991~1992) 으로이는제3기에발굴된가야지역의대표적인고분군의하나이다. Ⅲ. 발굴성과와진전 앞에서는신라와가야의고분발굴을주도한기관이시간의흐름에따라변천하고있는과정을설명하고신라권과가야권의주요고분의발굴에대하여살펴보았다. 이러한자료를기초로하여본장에서는시간적변화속에서발굴의대상이각시기별로어떻게변천해왔으며또그것이가지는발굴사적의의에대해살펴보도록한다. 19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1. 발굴대상의변천과의의 표 2 신라 가야주요고분의발굴연표 * ( ) 는발굴연도임 권역과지역제 1 기제 2 기제 3 기제 4 기 신라권 가야권 경주 부산 보문리합장분 (1915), 금환총 (1915), 완총 (1915), 금관총 (1921), 금령총과식리총 (1924), 서봉총 (1926), 황남리 109 호분 (1934) 호우총과은령총 (1946), 황성동석실분 (1967), 용강동석실분 (1968), 안계리고분군 (1970), 계림로고분군 (1973), 전미추왕릉전지역고분군 (1966, 1973~1974), 천마총 (1973), 황남동 110 호 (1973), 황남대총 (1973~1975) 복천동고분군 (1969, 1970, 1970~1971, 1974) 조양동고분군 (1979~1982), 월성로고분군 (1986), 냉수리고분군 (1990~1991), 중산리고분군 (1991) - 복천동고분군 ( 부산대 ) (1980~1981, 1983, 1986, 1989, 1991), 복천동고분군 ( 부산박 )(1989, 1994~1995) - 화명동고분 (1972), 학소대고분 (1974), 당감동고분 (1981), 연산동고분 (1987) 양산부부총 (1920) 북정리고분군 ( 부부총재조사 )(1990, 1991) 창녕 대구 교동 31 호 (1918), 교동 7 호 (1918 1919), 교동 89 호 (1918 1919) 달서고분군 (1923), 대명동고분군 (1938), 해안 1 호 2 호 (1938) 계성리 1 호 4 호 (1968~1969) 경산북사리고분군 (1969) 의성안동 성주 구미 상주 성산동고분군 5 기 (1918) 낙산동고분조사 (1915, 1917) 불로동고분군갑호 을호 (1963) 구암동 56 호 (1975) 의성탑리고분 (1960), 안동조탑동고분군 (1963) 영주읍내리어숙묘 (1971) 여타강릉초당동고분 (1971) 금관가야권 계성지구고분 (1976), 교동 1 5 호 (1992), 계성고분군 (1994) 임당동고분군 (1982), 조영동고분군 (1988~1989) 안동임하동고분 (1987), 안동조탑리고분군 (1991, 1992, 1994~1995), 의성대리리 3 호분 (1994~1995), 학미리고분군 (1996) 약목복성리고분군 (1960) 성산동고분군 38, 39, 57 59 호 (1986~1987) 사라리고분군 (1995~1996), 구어리고분군 (1998), 황성동고분군 (1994, 1997, 2000~2002, 2006~2008), 포항옥성리고분군 (1994, 1995), 덕천리고분군 (2002, 2004~2006), 쪽샘지구 (2007~), 포항대련리고분군 (2008) 연산동고분 (2000, 2007), 복천동고분군 ( 복천박 ) (1998, 2002, 2006, 2008) - 송현동 6 호 7 호 (2004 2006 년 ), 송현동 15 17 호 (2006~2008), 교동주차장부지 (2009~2010), 영산고분 (2012), 계성리 2 호 3 호 (2015) - 쌍계리고분군 (2009~2010), 성하리고분군 (2010~2012) 죽곡리고분군 (1994, 2006), 화원성산동고분군 (1998), 비산동목곽묘 (1999), 문산리고분군 (2000~2002), 불로동 91 호 93 호 (2002) 대구시지유적 (1992~1994), 임당유적 (1995~1997, 2006~2008, 2010, 2014, 2015), 신상리고분군 (2003) 의성대리리 2 호분, 23 호분 (2009~2010) 명포리고분군 (1998), 가암리고분군 (2002~2004, 2006), 시비실고분군 (2002~2004), 장학리고분군 (2005) 황상동고분군 ( 경북대 )(1962) 낙산동고분군 (1987, 1988, 1989) 황상동고분군 ( 대구대 )(1998~1999) 읍내리벽화고분 (1985), 읍내리고분군 (1986) 영덕괴시리고분 (1986), 청원미천리 (1991, 1992), 충주누암리고분군 (1990, 1991), 강릉초당동 (1993) 예안리고분군 (1976), 칠산동고분군 (1987), 창원다호리고분군 (1988~1998), 대성동고분군 (1990~1992), 양동리고분군 (1990~1996) 청리고분군 (1996~1997), 신흥리고분군 (1997), 병성동 헌신동고분군 (1999~2000) 태장리고분군 (2006~2007, 2010~2012) 강릉초당동 (1995, 2000 이후 ), 김천덕천리고분군 (2002), 충주누암리 하구암리고분 (2009) 창원다호리고분군 (1988~1998), 양동리고분군 (1990~1996), 내덕리고분군 (1996), 덕정리고분군 (1996~1997), 김해구산동고분군 (1997), 대성동고분 (2009, 2011)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199
권역과지역제 1 기제 2 기제 3 기제 4 기 가야권 소가야권 아라가야권 대가야권 수정봉 옥봉고분군 (1910) 도항리 말산리고분군 34 호분 ( 현 4 호분 )(1917) 지산동 ( 구 )2 호, 47 호 ( 구 39 호, 금림왕릉 ) (1918) 고아동벽화고분 (1963) 산청중촌리고분 (1982), 진주가좌동고분군 (1988), 율대리고분군 (1989), 진주무촌리고분군 (1993) 창원삼동동고분군 (1982), 도항리 말산리고분군 ( 창원대 )(1986), 도계동고분군 (1986, 1987), 마산현동고분군 (1989), 가음정동고분군 (1990), 함안황사리고분군 (1991), 대평리고분군 (1991~1992), 도항리 말산리고분군 ( 창원문외 ) (1991, 1992, 1994, 1996), 윤외리고분군 (1992), 예둔리고분군 (1992), 오곡리고분군 (1993), 의령중동리고분군 (1993) - 지산동 44 호 45 호 (1977), 지산동 32 35 호 (1978), 본관동 34 36 호 (1983) - 함양상백리고분군 (1972), 함양백천리고분군 (1980, 1992), 남원월산리고분군 (1982), 합천반계제고분군및합천댐수몰지역 (1985, 1986), 거창말흘리고분군 (1985), 남원건지리고분군 (1988), 남원두락리고분군 (1989) - 합천옥전고분군 (1985~1986, 1987~1988, 1989, 1991, 1991~1992) 산청묵곡리고분군 (1996), 내산리고분군 (1997~2001), 송학동고분군 (1999~2000), 진주무촌리고분군 (2001), 생초고분군 (2002, 2004) 운곡리고분군 (1998, 2005), 경산리고분군 (2000), 도계동고분군 (2002), 현동고분군 (2009) - 왕릉전시관부지및지산동 30 호분 (1995), 쾌빈리고분 (1995), 대가야역사관신축부지 (1999), 지산동 73 75 호 (2007~2008) - 장수삼고리고분군 (1995), 진안황산리고분군 (1997), 남원유곡리고분군 (1998), 장수동촌리고분군 (2003), 장수삼봉리고분군 (2004), 남원월산리고분군 (2010) 앞에서논의한신라 가야의주요고분발굴과정을종합하면 < 표 2> 와같다. 일제강점기이전일인학자에의한경주황남동남총과동천동북산고분등에대한고고학조사가진행된이후로일본인들은주로경주지역을중심으로신라와가야지역각지의주요고분을발굴하게되었다. 경주지역에는금관총, 금령총과식리총, 서봉총등경주노동동과노서동일대의중대형분이발굴되었는데금관등화려한장신구가출토되어유명해졌으며적석목곽분이라는특이한구조가밝혀지게되었다. 경주외의지역은선산, 고령, 성주, 창녕, 함안, 양산, 대구지역등조사전외관상이미그규모가드러나있었던고총이대부분이었다. 이때에는경주지역을신라로인식하였고경주외지역은대략가야고분의범주로파악하고발굴한것으로보인다. 따라서 1기는일인학자들에의해발굴이주도되었으며신라중앙과가야일부지역고총이주요발굴대상이라고할수있다. 제2기해방이후에도국립기관에의한경주지역이주요발굴대상이되었다. 일본인의힘을빌리긴하였으나국립박물관에서실시한호우총과은령총발굴이대표적이다. 이외에도 1950년대와 60 년대에는국립박물관과문화재관리국에의해황오리와노서리고분, 마총, 쌍상총등경주지역고분이다수발굴되었다. 경주이외지역의국립박물관발굴은의성탑리고분의발굴이있다. 이발굴은처음으로경주이외지역의고분에대한발굴로이후각대학박물관에의한지역발굴의단초를연것으로보인다. 이때서울의대학들은경북북부지방에관심을두어안동, 의성등지의고분을대상으로발굴하였 20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다. 한편대구와부산에근거를둔대학에서는각기해당지역의문화상을밝히거나가야문화의실체를찾아고분을발굴하였다. 대구, 구미, 창녕, 경산, 부산등지금에서보면신라의지방고분을발굴하였는데, 봉토가남아있는특정지역의대형분을발굴하기시작한것에의미가있다. 따라서제2기는국립기관에서주도한경주지역고총이주요발굴대상이었고, 대학박물관이특정지방고분조사를통해지역문화상을밝히려는시도가있었다고할수있다. 이러한상태에서 1970년대에는국가시책에의해문화재관리국의주도하에경주의천마총과황남대총등대형고총이발굴되었으며그주변에대해서는대학박물관이발굴하는등경주대릉원지구에대한대규모발굴이진행되었다 3. 이발굴에는당시국립기관이총력을기울였을뿐만아니라서울과지방의발굴여력이있는대학박물관이대부분참여하여조사를진행하였다. 따라서천마총과황남대총을포함한대릉원지구의발굴은당시까지의모든역량이동원된발굴이라고할수있다. 그리고이러한발굴은이후각대학박물관이각지의고분발굴에나설수있는역량을키운계기가되었다고할수있다. 이를제2기발굴의종결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이대릉원지구발굴을계기로발굴역량이증가한영남지방의각대학박물관은계속해서부산, 고성, 함양, 사천, 순흥, 대구, 구미, 칠곡, 고령지역등에분포한대형고분을발굴하였다. 특히고령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의발굴은대가야연구의획기가된것으로대학박물관에의해서이루어졌다. 따라서대학박물관에의한발굴의시대라고할수있는것이제3기이다. 이러한발굴은또각대학박물관에근무하는인력의연구력을구비시켜배출함으로써발굴이전제가된대학박물관등이설립되기도하여발굴을시행할수있는대학박물관의수가증가하게되었다. 한편같은시기에대규모토목사업이진행되면서구제발굴이크게성행하게되었다. 그시초가바로문화재관리국에의한경부고속도로구간의방내리고분발굴이었다. 이후안동댐수몰지구, 구마고속도로건설구간등에대한구제발굴이뒤를이었다. 1980년대에는특정목적을위한국립박물관의학술발굴 4 과대학박물관에의한단위지역문화상을밝히기위한발굴 5 이진행되었으며대규모토목사업으로인한구제발굴 6 이본격화되었다. 이러한발굴로인하여단위지역의묘제나편년서열, 3 천마총과황남대총의발굴은경주에있는대형적석봉토분의구조를이해하는데에큰기여를하였으며, 경주미추왕릉지구의발굴은경주시내의대형적석목곽분주변에소형적석목곽묘와수혈식석곽묘가많이축조되어있음을알게해주었다. 4 경주조양동고분군, 창원다호리유적, 경주구정동유적, 경주용강동고분발굴등이국립기관에의한특수목적발굴의대표적사례이다. 5 영남대의임당동고분군, 부산대의복천동고분군, 경상대의합천옥전고분군, 경성대의김해칠산동고분군, 부산여대와경성대의동래연산동고분군, 창원대의도계동고분군, 계명대의성주성산동고분군발굴등이대학이한지역을단위로잡아문화상을밝히기위한발굴을진행한대표적인사례라고할수있다. 6 국립진주박물관과영남지방대학이함께발굴한합천댐수몰지역발굴, 영남대의경산조영동고분군발굴등이구체적인사례이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01
토기의지역성, 분묘의변천상 7 에관한연구가진전되었다. 한편제3기에들어서면서국립기관에서는경주지역고분보다는안압지나황룡사지등의유적에관심을두고발굴대상을넓혀나갔다. 반면에대학박물관은지역고분발굴에참여하며지방사와지방문화연구와복원에크게기여 8 하게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초중반까지는아직대학박물관에의한구제발굴이있었으나학술발굴은거의사라지게되었다. 무엇보다 1990년대중반경산시지유적과임당유적이라는대규모발굴을토대로영남문화재연구원을필두로한발굴전문기관이출현하기시작하여영남각지의구제발굴을주도하게되어 9 제4기로들어서게되었다. 이시기에는발굴전문기관뿐만아니라제3기말 (1990년) 에설립된국립창원 ( 가야 ) 문화재연구소와복천박물관 (1996년), 대성동고분박물관 (2003년) 등각지역마다고고학발굴자료와성과를중심으로고고학전문박물관이설립되어지역고고학연구에함께기여하게되었다. 따라서제4기의문화재발굴전문기관의출현은전국각지의작은규모의소형고분이나잘알려지지않았던고분의발견에도기여하였다. 또한고분외에도생활유적 10 이나생산유적 11 등여타유적에대한발굴을통해취락고고학이나생산고고학등고고학의영역을넓힘으로써각지역의모든문화현상을복원할수있는데에큰역할을하게되었다. 2. 성과와진전 신라 가야고분의발굴과고고학연구성과와그진전상황은일일이열거하기어려울정도로많이추출할수있을것이다. 특히개개유적의조사성과를열거하는것은이지면으로감당할수없다. 따라서여기서는신라와가야의영역구분문제와고분의구조와변천과정, 고분의편년설정, 신라사회의형성과발전과정, 가야의대한실체인식과가야사회의변화, 그리고순장에대한인 7 고총에앞선목관묘나목곽묘유적이다수발굴되어영남지방전체의분묘변천양상에대한심도있게진행되었다. 8 이러한지역발굴및연구는훗날국가나지방에서주도적으로박물관이나연구소를설립하게되는결정적계기가되었다. 9 경산임당유적, 동래복천동고분군, 창녕교동고분군, 포항옥성리고분군, 경주사라리고분군, 김해대성동고분군등이대표적인발굴사례이다. 10 대구의시지생활유적과칠곡택지개발지구, 임당생활유적, 봉무동생활유적, 김해봉황대유적등이대표적인생활유적이라할수있다. 11 경주지역의손곡동, 물천리가마유적, 화곡리가마유적, 화산리가마유적등이발굴되었으며지방에서는경산의옥산동가마유적, 대구신당리가마유적, 양산호계리 산막리가마유적, 창녕여초리와함안우거리가마유적등이대표적토기생산유적이다. 또한경주황성동제철유적, 밀양사촌제철유적등이발굴조사되었다. 20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식과순장습속의이해등몇가지의주제를선정하여그성과와진전과정을서술하도록한다. 1) 신라와가야의영역과토기양식신라는경주분지일대의사로국에서출발하여주변의진한소국을복속시키고낙동강이동지역일대에정치적인영향력을행사하였다. 그후에는낙동강이서지역을포함한영남지역전체를통합하여중앙집권화된고대국가로성장한다. 이처럼신라의성장에따라그공간적인영역은점차확대되어간다. 반면가야는변한을모태로발전하는데, 변한소국중구야국을중심으로전기가야연맹체가구성되었고, 5세기부터는전기의금관가야가몰락하고고령의대가야를중심으로후기가야연맹이결성되었다가신라에의해통합된다. 당연히신라의확장에따라가야의영역은계속축소되어갔다는것이현재학계의대체적인의견이다. 이러한영역을방증하는자료로신라토기와가야토기의분포범위가이용되고있다 12. 신라토기와가야토기의양식적구분은제2기의비교적이른시기에당시까지발굴자료의분석으로출현하였다. 낙동강동안양식토기와낙동강서안양식토기로구분된다는견해가그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초까지고고학의주된의견은경주와그주변지역을제외한전지역이가야라는인식이팽배해있어서낙동강동안양식토기를신라토기와가야토기로나누기도하는등혼란이있었다. 이것이제3기신라지방고분과가야지역고분의발굴이이어지면서신라토기와가야토기, 또는낙동강동안양식과낙동강서안양식이확연하게구분됨이밝혀졌다. 이후제3기와제4기에걸쳐발굴된고분에서출토된유물을통해현재신라토기와가야토기는다음과같이인식되고있다. 신라토기와가야토기는이전 김해식토기 라고불렀던고식도질토기라는같은모태에서발생한것이며그기종구성이나제작기술또한유사한부분이많아시 공간에따라구분하는것이단순하지않다. 그럼에도불구하고토기의기형에서양식적인구분을할수있다. 공간적으로보면, 낙동강이동지방과이서지방의성주, 그리고김해지역은신라양식으로볼만한기본형이존재한다. 특히 5세기대에낙동강을경계로동안과서안의양식적인차이가뚜렷해지고양지역안에서는토기양식의유사성이매우높아진다고할수있다. 또한경주와인근한경산, 울산, 포항등에서출토되는토기양식은경주의양식과거의구분되지않지만부산이나대구, 칠곡등은조금씩차이를보이고안동이나창녕, 성주등은꽤큰차이를보인다. 이러한토기양식의분포는정치, 경제적인교류에의한결과로이해할수있다. 반면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등가야지역의토기는서 12 그러나신라토기와가야토기에대한정의에대해서도연구자마다큰시각차가있으며토기의분포범위를정치적인범위로해석하기에는지나치다는비판도있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03
로다른양식을보이고있으며낙동강이동의지역양식들간의차이보다훨씬큰차이를가지고있다. 또한신라양식토기의지역분포는시기에따라다소다르게나타나기도한다. 즉 4세기대김해 부산지역에는고배나노형토기등독특한양식의토기를확인할수있으며 5세기대에는전형적인신라양식토기가전지역에넓게분포한다. 그리고 6세기중엽부터는가야지역에서도신라토기후기양식토기가확산되어나타난다. 결국신라 가야지역의토기양식은크게신라양식과가야양식으로대별되고각양식군안에서는지역에따른특징을볼수있다. 이러한소지역양식은개별정치체의존재와무관하지않다. 즉가야지역은말할것도없고, 신라지역내에서신라에복속된지방세력이라하더라도큰규모의고총고분군을축조해나간지역정치체가존재하였던것으로볼수있으며이러한정치체들이독자적인양식의토기를생산했던것으로이해할수있다. 이와같은토기양식의차이는금공위세품의차이와함께신라와가야영역을설정하고자하는논의의중심에서게되었다. 특히제3기초에발굴된부산복천동고분의 5세기를중심으로한고분 (21 22호, 10 11호 ) 에서재지양식이라할수있는토기와함께신라토기라고할수있는낙동강동안양식의토기가출토하였는데, 나중에발굴된김해대성동을비롯한제고분군의현상과결합하여금관가야권을김해대성동고분군과부산복천동고분군을중심으로한집단으로이해하는견해와위세품과낙동강동안양식에초점을두어이시기에는이미부산지역이신라에포함되었다는견해가대립되어아직이어오고있다. 이외에도신라와가야의접경지에해당하는창녕지역과성주지역에대해서도신라냐, 가야냐의논쟁이지속되고있다. 창녕과성주는다같이삼국유사등의기록에모가야라는명칭으로등장하고있어그동안가야로인식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발굴된자료가검토되고이후지속적으로발굴된두지역의고분에서는역시신라식의금공위세품과낙동강동안양식토기를기저로한유물만이출토되어신라의지방으로인식하려는경향이발생한것이다. 2) 고분의구조와변천신라 가야고분을매장시설의종류와구조에따라분류할수도있는데, 이는시기에따른변천으로이해할수있다. 이와같은변천상은제3기경주지역의조양동고분발굴, 경산임당동고분발굴, 부산복천동고분발굴, 김해의예안리고분발굴, 양동리고분발굴등목관묘, 목곽묘, 적석목곽묘또는수혈식석곽묘등이발굴된고분의현상분석을통해목관묘단계, 목곽묘단계, 적석목곽묘또는수혈식석곽묘단계 ( 고총단계 ), 석실분단계등으로신라와가야고분의구조변천을읽을수있게하였다. 이렇게단계적인이해의내용은제4기의발굴을통해더욱확고해지게되었다. 현재이해하고있는신라와가야고분의변천은대략다음과같이요약할수있다. 20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먼저경산임당동, 대구팔달동, 김해양동리, 김해대성동발굴조사를통해 B.C.1세기무렵부터 A.D.2세기중엽까지사용된목관묘의구조를확인하게되었다. 목관묘는당시소국 ( 小國 ) 의지배집단에의해축조된것으로검, 창등의무기와한경, 방제경등의청동기, 철제무기와농공구류, 고식와질토기가부장된다. 그리고김해양동리 162호, 하대 44호묘, 경주조양동고분군, 포항옥성리등의발굴을통해 2세기중엽에출현하여 4세기후반, 일부지역은 5세기전반까지유행한목곽묘를확인할수있었다 13. 이무덤은능선의주축선상에입지하며무덤의규모는비약적으로커진다. 무덤에는대부호나노형토기등신식와질토기가부장되며철제무기와철소재, 장신구인옥등이대량으로부장된다. 목곽묘는 3세기후반이되면부곽이설치되어훨씬더많은유물을부장하게되고경주형 ( 신라식 ) 목곽묘 14 와김해형목곽묘 15 로그형태가구분된다. 이고분에는새로운기술로제작된도질토기가와질토기와함께부장되고철소재뿐만아니라갑옷등의무기류, 농공구류등의철기, 수정, 마노등의옥류도대량부장된다. 또한순장이발생하기도한다. 이후 4세기후반이되면신라와가야는각지역마다각각다른묘제로고분을축조해가며 5세기들어서면거대한봉분을가진고총이출현하여유행한다. 경주지역에서발생하여고총단계동안사용된적석목곽묘 16 는신라묘제를대표하며다른지역과달리평지에축조된다. 여기에서출토되는각종금, 은제의위세품은이들의신분을상징하며여러명의순장자를매장하기도한다. 낙동강동쪽의신라권지방에는대부분수혈식석곽을기조로한고총이축조된다. 수혈식석곽은전시기소형무덤에축조된묘제를대형화하고목곽묘의속성을이어받아축조한묘제이다. 하지만, 창녕지역에서먼저축조되어확산된횡구식석곽묘는추가장을위한묘제로전환되어유행한묘제이다. 이러한고총단계의묘제는축조재료 17 나주부곽의배치등에서지역마다다른형식을취하고 13 특히조양동고분군발굴조사 (1979~1983) 에서경주시내의적석목곽묘에선행하는묘제가목관묘와목곽묘임을인식하게되었는데이전에는토광묘로인식하던것을이때비로소토광내부에목관이나목곽이들어간것으로이해하게되었다. 14 경주구정동 2호와 3호, 덕천리 120호목곽묘등이대표적이며경주를중심으로울산, 포항, 경산등에분포한다. 15 김해대성동 39호목곽묘가대표적이다. 16 적석목곽묘의계통론은다소이견이있는데, 재지목곽과고구려적석총의적석기법의결합, 북방아시아의쿠르간묘의전파, 자체발생한후점진적인확대발전등이그것이다. 이계통에대한이해는그것을둘러싼정치 문화적해석도달리하며적석목곽의등장시기, 나아가신라고분의편년안에도영향을미친다. 또한이러한적석목곽묘가처음경주에서발생한후부산, 창녕, 경산, 포항등으로그분포범위가확대되어가는현상도확인되는데이를신라영역의표징으로이해하기도한다. 17 예를들면경산임당동과조영동고분군의경우가해당될수있다. 이고총군에는암광목곽묘가축조되는데, 그기본축조기법은수혈식석곽묘의속성과크게다르지않다. 즉이러한경산지역고총의독특한묘제는지형적인여건을반영한결과라고할수있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05
있으며이러한다른형식이지속되어나타나는경향이강하다. 또한각지역에서출토되는토기도각지역양식을따르고있어각지역이독자적인묘제와토기생산체제를갖추고있었음을추론할수있다. 신라고총은분구자체가과시성을띠면서원형또는타원형의분구를조성하고묘역이분명해서독립성이강하다. 또한경주지역이구심적위치에있으면서그규모가가장크고지방의고총은교통의결절지에위치하면서그규모와수가차이가난다. 이는경주와각지방간의거리나집단규모, 정치적상관관계등을반영한다고볼수있다. 동시기가야지역에는수혈식석곽묘가주묘제로축조되었다. 석곽의입지나그구조는신라권과도유사하지만축조재료나주부곽의배치에서는지역마다독자성을가지고있다. 그리고부장품에서는신라권과비교해볼때, 철제무기류가상당히중요한위치를차지하며위세품도그형식이다소다른편이다. 이러한현상은가야의각지역에서각각독립된정치체가발전하였음을알려주는근거로볼수있다. 이후신라의지방에서는횡구식석곽묘나횡구식석실묘가간헐적으로도입되며 5세기후반쯤에횡혈식석실묘도출현하였으나주묘제로채택되지는않았다. 그리고 6세기전반을지나면서신라와가야의모든지역에서석실묘의축조가유행한다. 석실묘의축조로인해추가장이시행되고후장이나순장의습속이사라지고무덤의규모도작아지고부장품도빈약해졌다. 즉무덤축조에따른사회적인경비가훨씬줄어들게된것이다. 이러한현상은신라가각지에지방관을파견하여직접통치하는통치체제의변화와맞물려나타나는현상이다. 3) 고분의편년문제신라 가야고분고고학연구에서가장큰쟁점중하나가고분의편년문제로서이는토기를비롯한유물의편년과직결된다. 특히기년명등이나주인공이적시된자료가거의출토하지않은신라와가야의고분에서는고분의연대판단에출토유물의분석을이용하고있는실정이다. 특히고분에서출토된유물가운데외국에서출토되어유물의연대를어느정도가늠할수있는유물과의비교를통해서연대의추정이이루어지고있다. 그렇다고기년을알려주는자료가전혀출토되지않은것은아니다. 일제강점기인제1기의서봉총발굴에서출토된은합의명문 (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太王敬 ( 敎 ) 造合于用三斤六兩延壽元年太歲在辛三月中太王敬 ( 敎 ) 造合于用三斤六兩 ) 중의기년을나타내는신묘 ( 辛卯 ) 년이 391년또는 451년으로추정되었고, 제2기의시작이었던호우총의발굴에서출토된호우의명문 (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 가운데기년인을묘 ( 乙卯 ) 년은 415년으로판단되어고분의연대결정에이용되었다. 그러나이들명문이출토된유물이고분의축조기즈음에제작되어고분에부장된것이아니라상당기간전세되어고분에부장되었을가능성이커서신라고분의연대결정에결정적인자료가되지못했고, 20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다만대략적인고분의축조연대를가늠하는자료로활용될수있을뿐이었다. 이러한상태에서신라와가야고분의연대는출토유물의형식학적인방법으로선후를구분하고, 그가운데외래계유물등연대를비정할수있는유물을기준으로고분을편년하는것이대세였다. 이러한세부적인유물분류를통한고분축조연대의추정은제3기단일고분군에서장기간에걸쳐고분이축조된유적이발굴되면서활기를띠었다. 김해예안리고분군은고분의상대서열을분기로나누어파악하는기초자료가충실하여그시발점이되었다. 이후부산복천동고분군, 경산임당동고분군, 합천옥전고분군등의여러시기에걸친대규모단일고분군이발굴되고그것이분석되면서고분의상대서열이잡혀졌고, 지역적연대기도설정되기시작했다. 그리고그러한자료들이바탕이되어지역별자료, 권역별자료가검토되어제3기와제4기에걸쳐편년의틀을잡을수있게되었다. 신라고분전체의편년, 금관가야권고분의편년, 대가야권고분의편년, 함안아라가야고분의편년, 의성지역고분의편년, 성주지역고분의편년등이앞의분석에이어나오게된것이다. 특히제3기에발굴된경주월성로고분군의발굴자료는이후지속적으로학계의관심을받아신라고분연대의설정에중요한역할을하였다. 특히고구려녹유호가출토된가-5 호, 고구려계통과비교되는재갈이출토되었고, 화려한금공품의출현을알려주는가-13호, 일본제석천이출토된가-29호, 일본의하지키계토기가출토된가-31호등이주목을받아해당유물의원산지연대가참조되어신라고분편년의기준으로활용되었다. 이러한편년틀에도불구하고아직구체적인연대의결정에는연구자사이에차이가존재하고있다. 예컨대경주신라고분의경우황남동 109호 3 4 곽 황남동 110호 황남대총남분 황남대총북분 천마총 호우총 보문리합장분과같은상대서열은인식이통일되게되었으나그각각의구체적인실연대는 50 60년정도차이를보이면서평행선을달리고있다. 고분에서출토되는유물가운데주요금공품과마구등의제작전통이고구려에서유입된것으로판단되는데, 광개토왕남정에의해영남지방에유입되었다는견해와그러하지않고이미그이전부터신라와고구려의교섭사실이있기때문에고구려계로보이는이들유물의유입이훨씬더이른시기에이루어질수있다는견해의대립등이그것이다. 18 4) 신라의성립및발전과정 제 3 기를지나면서지역의고분발굴이성행하고이를통한지역의연대가가닥을잡아가면서이 루어진지역사적관점의지역사회상복원이시작되었다. 그리고곧바로이어신라권의중앙인경주 18 이논쟁의중심에있던것이부산복천동 21 22호와병행되는시기의고분으로판단되는경주황남동 109호 3 4 곽에서출토된철제등자가 1980년대까지알려진세계에서가장이른시기의금속제쌍등자가출토된북연의풍소불묘 (415년) 보다빠를수없다는의견과그에대한반론이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07
와각지역발굴고분을통한유물의비교가이루어지고그관계가논의되기시작하여관계사적연구도진행되었다. 이러한논의는신라가언제성립되어어떤과정을거쳐본격적인고대국가로성장하는가의문제와도연결되어신라와가야의고고학본래목적에부합하는것이라고할수있다. 지금까지의연구결과를대략정리하면다음과같다. 제3기의구정동목곽묘이후조사된경주와그주변지역, 그리고각지의목곽묘는대략 3세기중엽까지는진 변한각소국이병렬적상태에서경제적관계를기반으로느슨한정치적관계를형성하고있었는데, 4세기초나전반에걸쳐사로국을정점으로하여각소국이그하위에배치되며지배- 피지배라는새로운관계가형성되는것을알려주었다. 이를신라사회의성립이라고할수있다. 이를대변하는것이 3세기말또는 4세기초경주주변지역에서출현하는신라식목곽묘이다. 또한 4 세기전반에는적석목곽묘가출현하고얼마지나지않아고총이등장한다. 이러한무덤에는각종금공위세품과신라양식의토기가부장되는데이무덤들의분포는금호강이남의낙동강이동지방과금호강이북의낙동강이동 이서지방이라는범위에해당한다. 이들금공위세품과관련하여는각지방의고분출토품이경주지역고분출토품과별차이가없는것이확인되어경주에서제작되어분여된것으로이해되고있다. 이로써신라가대략 4세기후반신라권을장악하고지방지배를개시하였던것으로추론하고있다 19. 이후고총이출현하여성행하고쇠퇴하는고고학적현상을확인할수있는데이를통해신라국가의형성과발전과정을이해할수있다. 즉마립간기지방통치방식을흔히간접지배방식이라하는데, 신라가광역의정치체를형성하면서간접지배방식을통해지방을통치함으로써경주와지방사이의관계나지방간의상호관계에도상당한변화가일어나게되었다. 이를고고학적으로보면늦어도 4세기중엽에는신라만의독특한묘제인적석목곽묘가출현하여지배층의묘제로자리잡음 20 으로서시작된다. 이후 4세기중후반부터 6세기초반까지경주분지내에는황남대총, 천마총등과같은대형의적석목곽분이축조되며신라고분의실체및마립간기왕릉의존재를명확하게보여준다. 동시기낙동강이동의여러지방에서도대형고총고분군이축조되는데대구달성고분군, 경산임당동과조영동고분군, 부산복천동고분군, 부산연산동고분군, 양산북정리고분군, 의성금성산고분군, 선산낙산리고분군등이그것이다. 이들고총은각지방의지배자집단이축조한것이지만경주중심지고총의규모나부장품에는훨씬미치지못하므로신라중앙의집단과상하의위계를두고정치 경제적 19 신라성립의배경에는지정학적으로아주유리한조건에있어철과소금의장악하고물자를집산하던육로관문이었던점을들수있다. 그리고이시기신라가광역의정치체로성장하는과정을신라식목곽묘에서출토되는유물 ( 고식도질토기, 갑주등철제무기, 곡옥등위세품 ) 로설명하고있다. 20 적석목곽묘에나타나는고고학적현상은고대사에서마립간기라고칭하는시기와일치하여신라가본격적인국가로출발하였음을보여주는징표로이해하고있다. 20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으로밀접한상관관계를유지하였던것으로이해할수있다. 다음단계는석실을축조하는단계로신라가이른바중앙집권적귀족국가로서통치체제를정비하고율령을반포하며사회적발전을도모하는시기로 6세기중반이후삼국통일을완성하는 7세기중엽까지로볼수있다. 이때에는낙동강이서지역의가야세력을정복하고서쪽으로백제와국경을마주하게되었다. 나아가한강유역에진출하는한편, 동해안을따라그영역을북쪽으로확장하였는데횡혈식석실묘와단각고배및부가구연장경호의존재가이를방증한다. 이를알려주는대표적인것이충주누암리고분의발굴이다. 하지만 7세기후반에들면서경주와그주변지역일부를제외하고는점차고분문화가쇠퇴하게되는데, 이는통일후화장묘가성행하면서나타나는현상으로보인다. 5) 가야의실체와영역제3기부터제4기에발굴된김해대성동고분군은김해가락국의중심고분이조사되지않아김해가과연가락국의고지로가야의중심지인가하는회의론까지대두되던때에그러한경향을완전히일소시키고금관가야의실체를규명하는중요한발굴조사였다. 즉대성동고분군에서왕묘로볼만한고분이발굴됨으로써금관가야의실체를규명하는결정적단서가되었다. 또한이시기에구야국의중심지가양동리고분군에서대성동고분군으로이동한것으로파악하도록했다. 고분에서출토되는 4세기대금관가야양식토기의특징은노형기대와외절구연고배, 그리고격자타날호등으로이해할수있다. 이러한유물의분포로볼때, 금관가야는옛김해만을중심으로주변의진영, 진해일대를장악했던것으로보이며전기가야의중심국으로이해할수있다 21. 이후복천동고분군발굴조사내용과의비교를통해금관가야와그와의관계가논의되게되었다. 즉, 복천동고분군이 5세기이전까지금관가야와동맹관계를유지하였으나고구려남정을전후해신라문물이집중이입되었고특히옛김해만일대에는대형고총고분군이더이상축조되지않고금관가야양식토기가소멸되고신라양식토기가출현한다는점에서금관가야가쇠퇴하고이지역에대한신라의영향력이증대되었다고이해하는것이다. 그러나연대관의문제와결합하여 4세기후반에는이미복천동집단이신라의영향력아래들어갔다는의견도제시되었다. 한편 6세기초에축조된창원다호리 B1호분의사례처럼이때까지도가야양식의토기와마구가확인된다. 이는금관가야의중심읍락이김해중심지에서이고분군의배후지인진영일대로옮겨져신라에투항할때까지존속한자료로이해하기도한다. 후기가야를대표하는대가야에대해서는고령지산동고분군발굴과주변지역발굴을통한대가 21 금관가야의정치적성격에대해서는금관가야중심의단일연맹체설과금관가야와아라가야의양대구도가형성되었다는설이있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09
야영역에관한연구가주목된다. 즉그동안발굴된지산동고분군에서 대가야양식 으로불리는여러종류의토기류와금동제환두대도, 마구, 금동제관, 금제이식등장신류, 마구, 무기등이출토되었는데, 이러한출토유물과못과꺾쇠로결합한목관의사용, 세장방형수혈식석곽, 순장등묘제의특징이대가야권역설정의기준이된다. 대가야권역의확장과관련한발굴조사는다음과같다. 1972년함양상백리고분군발굴조사에서대가야식토기와함께철판갑옷이출토되었으며, 1980년대함양백천리고분군과남원월산리고분에서는대가야식묘제와대가야양식의토기가발굴되었다. 1980년대중반합천댐수몰지역반계제고분에서는이지역수장급분묘로추정되는고총에서단곽순장묘의묘제에대가야양식일색의토기와축소모형농공구, 대가야권토기인원통형기대등이출토되어이지역이이른시기부터고령의대가야와깊은관계였음을보여주었다. 1985년국립진주박물관에서발굴조사한거창말흘리고분군에서는소형석곽묘와대가야양식토기가출토되었고, 1988년진주가좌동고분군, 1989년하동고리리고분군, 1989년고성율대리 2호분에서도수혈식석실구조에대가야양식토기가주류를이루고있어대가야문화권이넓게형성되어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또한 1988년에조사한남원건지리고분군과 1989년에조사한두락리고분군에서도대가야식묘제에대가야식토기가주류를이루고있어이지역까지대가야권역에편입되어있었음을알수있었다. 2000년에발굴한부림면경산리고분출토토기도대가야양식이주류를이루고이른시기에는함안양식토기, 뒤에는신라양식토기가혼재되어있다. 서부경남의함양손곡리, 산청묵곡리등에서도대가야관련고분이조사되었고, 1995년금강상류의소백산맥서쪽지역인전북장수군천천면삼고리고분군과같은수계의진안군용담면월계리황산리고분군에서도대가야식묘제와토기가주류를이루고있었다. 이러한발굴성과를통해볼때, 5세기후반전성기의대가야권역은고령을중심으로황강수계의합천과거창, 남강수계의함양, 산청, 운봉, 아영, 섬진강수계의남원, 임실, 곡성, 하동, 광양, 남해안의여수와순천, 금강수계의장수와진안에걸친지역까지분포한다고할수있다. 이외고성소가야를중심으로한문화권, 함안아라가야를중심으로한문화권등의고고학현상이발굴에힘입어파악되었다. 6) 순장의인식과순장습속의이해신라 가야고분발굴이전에는순장에관한인식만있었으나고분발굴을통하여그구체적인증거를확보할수있게되었다. 순장의구체적인증거가나오고영남지방고분에순장이시행되었음을처음알린것은제3기지산동 44호와 45호의발굴이었다. 이후고령지역의지속된대형분발굴, 부산복천동고분군의지속 21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적인발굴, 경산임당고분군의발굴, 김해대성동고분군의발굴, 창녕교동고분군의발굴,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의발굴등에서각각순장의흔적이명확하게나오게되었다. 순장이확인된대표적인가야와신라의고분을적시하면다음과같다. 먼저가야의순장은 3세기중엽김해대성동고분군에서최초로확인되었는데도질토기의발생과그시기가비슷하다. 이후 4세기전엽대성동 13호분에서는 3인, 4세기후엽대성동 1호분에서는 5 인의순장이확인되었다. 5세기전엽지산동 75호분에서는 10인전후, 30호분에서는 5인전후가확인되었다. 그러다가 5세기말지산동 44호분에서는 30인이상의순장자를매장하며순장이극대화된다 22. 이러한다양한가야고분순장습속을통해수장의위계에따라순장자의수와신분이규제되었던것으로추정하기도한다. 신라의경우는 4세기초의경산의조영1A-19호목곽묘에서가장이른순장이확인되며경주정래동 2곽과 3곽, 경산조영1B-60호의사례를볼때, 신라식목곽묘의출현시기에순장이시작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이후경주황남대총의경우남분과북분에서각각 10인정도가순장된것으로파악하고있으며경주를비롯해부산, 양산, 창녕, 경산, 대구, 성주, 의성, 영덕지역등신라권전체에서순장이확인된다 23. 이를통해볼때, 순장은신라고총의보편적인장법으로사용되었다고할수있다. 이후 6세기전반에는신라 가야고분에서순장이사라지는것으로보인다. 이시기 < 삼국사기 > 순장금지기록이나법흥왕대불교의공인, 율령의반포, 지방관파견등의제도개혁과맞물려순장이소멸한것으로이해할수있다. Ⅳ. 맺음말 학회의부탁은신라 가야고고학사의서술이었다. 물론발굴사를중심으로서술해달라는것이었 22 고령지산동고분군의순장에대해서는 1977년발굴조사된지산동 44호, 45호조사에서그실체가밝혀졌다. 5세기후반으로편년되는 44호분에서는주석실과부장실 2기, 순장석곽 32기에서적어도 35인정도순장되었는데, 이는삼국시대확인된순장중에서가장많은수에해당한다.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조성된 45호분에서는 13인이상이순장되었다. 이들순장자의신분은비교적높은계층도확인되었고왕의호위무장 ( 武將 ) 이나왕의근시 ( 近侍 ) 등순장자의성격도추정되었다. 이발굴로인해대가야순장의이해및대가야묘제및역사연구를본격화시키는계기가되었다. 23 발굴을통한순장자료가증가함에따라각권역별또는지역별순장자의배치형태나그규모, 순장자의신분이나성격등에관한연구도활발해졌다. 또한순장인골분석을통해성별이나연령분석뿐만아니라성장과발육상태, 식생활과영양상태, 출산이나질병, 심지어고대인의얼굴을복원하는연구까지진행되고있다.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11
다. 그러나필자들의역량은학사를서술할만큼충족되었다고할수없었다. 학사를서술하기위해서는객관적인사관의정립이필요한데, 아직자신의주관을펼치기에급급한것이그를대표한다. 따라서발굴가운데도중심을이룬고분발굴사라는입장에서발표문을작성하였다. 발표문을작성하면서이렇게범위를좁힌주제에도필자들이만족하게서술할능력이부족함은별다르지않았다. 따라서이것이발굴사라는사적입장에서논의를시작한다는데에의미를두고주관적으로필자들이생각한것을서술하였다. 발굴고분의나열은자료의제시라는점에서의미가있을수있으나시기의구분, 성과와그것의진전문제등은계속해서검토되어야할것으로보인다. 이발표와토론회에서한국고고학사서술의원칙이나방향, 논의되어야할주제등이토론되고, 이부족한토론문에대한지적을통한수정방향의설정등을통해앞으로출간될글에는대폭수정하여좀더올바른학사적입장에서글이완성되기를기대한다. 21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김용성 김대욱 213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214-239 중 근세고고학사 홍보식 ( 복천박물관 ) 목차 Ⅰ. 머리말 Ⅱ. 유적조사의진전과성과 1. 양적인성장과연구경향의변화 2. 통일신라유적 3. 발해유적 4. 고려유적 5. 조선유적 Ⅲ. 연구의진전과과제및방향 1. 연구의진전 2. 과제와방향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종래의고고학은문자가없거나있더라도문자를통해해당시대의역사와문화복원이어려운선사및고대가주요하게다루어져왔다. 그러나중 근세는완전하지않지만. 고대이전에비해상대적으로해당시대 ( 시기 ) 의사건을문자로기록한사례가많을뿐만아니라대규모및빈번한개발행위와사용에의해유적 ( 유구 ) 의훼손과그로인한동시사용의확인이어려운한계와함께다른학문분야 ( 미술사 건축사 경제사등 ) 의대상물로인식되고, 고고학의대상자료로인식하지못한한계등이복합적으로작용하여중 근세고고학은상대적인부진을면치못하였다. 그러나 1990년데이후국토의대규모개발에의한발굴조사와정비복원을위한발굴조사에서획득된중 근세물질자료의증가는문헌기록으로서는구명하기어렵거나구체적이지못한문헌기록의내용을구체적으로구명할수있는가능성과함께물질자료로서중 근세사회의복원가능성이엿보임으로서중 근세고고학에대한관심이높아지게되었다. 중 근세고고학의관심이높아졌음에도불구하고이를전문적으로연구하고리더할수있는학회와연구인력이부족하고, 연구방법론도제대로정립되지못한게현실이다. 본발표는우리나라의중 근세고고학의연구사를개괄하고, 과제와연구방향을제시하여중 근세고고학의발전가능성에보탬이되고자한다. 1 Ⅱ. 유적조사의진전과성과 1. 양적인성장과연구경향의변화 통일신라이후고려 조선시대의유적조사는일제강점기부터시작되었는데, 이때의조사는주로 무덤 자기가마터 불교사찰터등이대상이었다. 일제강점기에조사한대표적유적으로는경주충 효리고분군 (1932), 경주성동리유적 (1937), 경주천군리사지 (1938), 발해상경성 (1933~34, 동경성 ), 대전 1 일제강점기이후부터 2000년대까지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유적조사와연구성과를일목요연하게정리하는것은대단히어려운일이고, 또필자의능력외의일이므로여기서는전체적인흐름과각시대별유적조사와문제점등을짚어보기로한다. 주요유적발굴조사와연구성과를제대로인용하지못한것은전적으로필자에게책임이있음을밝혀둔다.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15
진금면청자가마터 (1927), 공주학봉리분청사기가마터 (1927) 등이다. 이시기의유적조사에서주목할내용은공주계룡산학봉리분청사기가마터를보고하면서보고서말미에당시전남강진칠량, 경기여주북내, 충남공주, 대전유성, 함북회령오동등의지역에서조업하던옹기가마의특징에대한간략한기술과함께사진과도면을보고한부분이다 ( 조선총독부 1927). 그리고경주성동리유적의조사에서殿堂址 長廊址 문지 배수시설등통일신라시대의건축구조물의일단이확인되었고, 통일신라의왕경연구에기여를하였지만, 유구의정확한성격을파악하지는못하였다. 천군리사지의조사를통해가람배치의특징을파악하였고, 도괴된삼층석탑을복원하기도하였다. 발해의수도인상경성의발굴조사를통해발해의도성구조와문화에대한일단의이해가가능하게되었지만, 조사가정밀하게되지않았고자료보고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는한계가있었다. 해방이후, 정치 경제적으로불안정한상황으로통일신라이후뿐만아니라그이전인선사및고대의유적조사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으나 70년대이후안압지 월정교지등을시작으로 80년대전반까지많다고는할수없지만, 간헐적인조사가이루어졌다. 해방이후부터 80년대전반까지이루어진발굴조사의내용과성과및문제점등은이미이희준 (1988) 에의해정리된바있다. 80년대후반이후, 각종국토개발과댐건설에의해통일신라이후의유적조사사례가증가하였고고려이후의유적과유물에대한관심이높아졌지만, 발굴된유적의수와출토유물의수량에비해고고학적인논문은많지않았고, 대부분발굴된자료가미술사연구의소재로활용되었다. 이시기에분묘 건물지 성곽등의조사가이루어지면서앞시기의발굴조사보다발전되고면밀한조사가이루어졌지만, 고려시대이후거의모든유적 ( 유구 ) 에서보편적으로출토한자기는고고학자들의관심밖에놓여있었다. 90년대이후에들어와국토개발이활발하게이루어지면서단위유적전면을발굴하게되고, 각지자체에서성곽또는왕궁 불교사찰의정비복원을위한학술발굴조사가이루어지면서고려및조선의유적조사사례가증가하였고, 연차적인발굴조사에의해유적의전모가밝혀지거나새로운다양한사실이확인되었고, 통일신라와고려 조선의역사와문화를새롭게조명할수있는많은물질자료들이축적되었다. 새롭고다양한물질자료의축적과더불어 2000년대에들어서면서많은조사전문연구기관이설립되고, 젊은연구자가발굴조사현장에종사하면서통일신라와고려 조선의물질자료에도관심을가지면서다양한분야에서연구를진행하고있지만몇몇분야를제외하면, 여전히선사와고대의유적과유구에더많은관심과중요성이두어졌고, 중세 근세의유적과유구에대해서는관심도가낮다. 예를들면, 고려 조선시대의무덤구조가삼국시대의고분보다구조가단순하고규모가작고, 부장품의수량이적은게사실이지만고려 조선의무덤조사는간단하게조사하거나표본조사만 21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하는경우도있었다. 그리고통일신라이후의경작유구나금속기생산시설의조사는매우부진하다. 따라서향후각성격별유적 ( 유구 ) 조사방법이정리되고새롭고다양한정보를획득할수있는조사방법론이개발되어야한다. 일제강점기부터지금까지조사된통일신라이후의유적은도성 지방도시 촌락 관방 ( 성곽 보루 ) 불교사찰 생산시설 ( 토기가마터 자기가마터 도기가마터 기와가마터 제철 청동주조 탄가마터 유리등 ) 경작유구 ( 논 밭 ) 무덤군 침몰선등의유적, 전각 누각 관아 가옥 우물 하수시설 수혈 주거지 각종가마터 퇴장 수혈 도로 무덤 도수시설 연못 원지등의유구가매우다양하다. 이다양한유구들은해당시대의사회를지탱한물질자료들이다. 이물질자료들은일제강점기부터조사가되기시작하였지만, 60% 이상은 2000년대이후의최근 10여년사이에조사가되었다. 10 여년사이에전체의 60% 이상이조사된점은국토의대규모공사가이시기에집중되었을뿐만아니라공사면적이 30,000m2이상이면의무적으로조사가되어야한다는매장문화재보호법의시행과함께통일신라이후부터고려 조선물질자료의중요성에대한인식증대, 우후죽순으로설립되는조사전문연구기관의경영난해소등여러가지요인이복합적으로작용된결과이다. 그런데최근 10 여년사이에전체조사물량의 60% 이상을차지하면서, 조사비용및기간의부족과조사에종사하는연구자의인식부재및전문성결여등에의해조사의품질이저하된사례도증가하였다. 또한기본적인정보는물론새로운정보를획득하지못하면서통일신라 고려 조선의고고학적연구의발전을저해한측면도없지않았다. 2. 통일신라유적 1) 일제강점기 ~1980년대통일신라유적조사는일제강점기에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룡사지 창림사지 능지탑지등경주지역의불교사찰과전신덕왕릉 (1935, 1963) 과충효동고분군등이조사되었다. 해방후 1970년대이전까지쌍상총 (1953) 과마총 ( 노서동 133호, 1953) 등의고분과감은사지정도가조사되었다. 고분은묘제가모두횡혈식석실이고두침과족좌등주검안치시설과함께벽면과바닥에회를바른것이확인되었다. 이때의발굴조사를통해통일신라왕경의묘제는대부분횡혈식석실이란사실을어느정도확인할수있었지만, 매장행위와관련된인식이없었으므로제대로된조사는아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봉분과석실의평면 입 단면도가제시되어이후통일신라묘제를연구하는데일조를하였다. 1970~1980년대에통일신라유적의조사는정부정책에연동하여안압지를비롯하여월정교지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17
월성해자와동문지 전랑지등의왕궁시설과교각, 신라 44대민애왕 (838-839) 으로전해지는왕릉과주변, 삼릉주변의화장묘, 경주망성리, 부산두구동임석 서울사당동 시흥방산리등지에서토기가마터가조사되었다. 안압지와월성해자및동문지 전랑지등의조사는일제강점기인 1930년도에후지시마가이지로 ( 藤島亥治郞 ) 가처음신라왕경복원안을제시한이후이시기에신라왕경복원연구의활성화를가져와김병모 (1984) 윤무병 (1987) 등의고고학자는물론민덕식 (1986) 장순용 (1976) 등의지리학자들까지도이대열에합세하여신라왕경의구조와범위, 주작대로의존부등에대한논의가이루어졌다. 전민애왕릉주변의조사에서능이만들어진뒤에퇴적된것이분명한층에서 元和十 (815) 의글자가있는화장묘의뼈단지가확인되어이능이만들어진시기가적어도 815년이전임이확실하여이능의주인공이민애왕이아니고, 민애왕보다앞선제40대애장왕 (800~809) 의능으로추정하는등현재도능주가누구인지가논란이되고있다. 그리고통일신라토기자체에역연대가기재된최초의사례로서통일신라토기의편년연구에획기적인자료로평가되고있다. 이원화십년명장골기가보고된이후, 통일신라토기를편년하면서원화십년명토기에문양이시문되지않은점에근거하여 9 세기초를기준으로그이전시기를인화문기, 그이후시기를비인화문기로구분하였고, 이인식은현재의통일신라토기편년에지대한영향을미치고있는데, 이인식이통일신라토기의여러양상을논의하는장애물이되기도한다. 그리고삼릉주변의트렌치조사에서화장묘의장골기가확인되었는데, 내용기와외용기로된이중구조였고, 내용기로서당나라의長沙窯系첩화장식의호와월주요계옥벽저완이사용되었다. 이장골기역시통일신라토기의연구에매우중요한자료일뿐만아니라역연대가 9세기전반의늦은시기로밝혀져통일신라토기편년연구는물론통일신라화장묘의구조와특징을이해하는데주요한자료로활용되고있다. 2) 1990년대 1990년대에들어오면서통일신라유적조사는경주는물론경주를벗어나당시의지방으로까지확대되었다. 이시기의주요한유적조사로는함안성산산성보령성주사지 1~4차조사 남원실상사지, 익산미륵사지, 장도청해진, 광양마로산성, 보령진죽리토기가마터, 영암구림리토기가마터, 공주가교리가마터, 김해구산동가마터, 삼계동가마터, 용인성북리가마터, 경주손곡동가마터, 청도신원리가마터등을들수있다. 왕경과지방의거점사찰및성곽조사에서출토한중국도자기의수량이상당하고이중국도자기, 특히완의굽접지면폭이넓은옥벽저와한강수계에서조사된초기자기가마터에서출토한햇무리굽과의유사성을근거로 9세기의통일신라부터이미국내에자기가생산되었다고하면서 통일 21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신라청자 란용어까지사용되기도했다. 그런데 9세기전반통일신라와중국과의교역을장악한장보고의근거지인장도청해진유적의발굴조사결과, 중국으로부터수입한도자기는수십점확인되었지만, 국내산초기자기는전혀출토되지않았을뿐만아니라통일신라의여타유적에서도중국당나라시기의자기와국내산초기청자의공반사례나통일신라토기와국내산자기가동시폐기된사례가존재하는지등객관적자료검토없이단순히형태가유사하다해서동시기의소산물로인정하고논지를편다소비과학적인연구가도자사가들에의해제기되었고, 일부고고학자들도이런도자사연구자들의주장에동조해국내산초기청자생산시기를통일신라로소급하기도하였다. 함안성산산성의연차적인발굴조사에서동문지 남문지 수구 연지와성벽외측의보축시설등의유구가확인되었고, 토기 기와 목기등의유물과다량의목간이출토되었다. 그동안아라가야시기의산성으로추정되어왔지만, 발굴조사에의해신라가쌓은성임이확인되었다. 이성산산성의발굴조사에의해그동안서부경남각지에분포한성을가야시기의산성으로상정하고가야사회를논의해온연구내용들의재검토가불가피하게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지금도발굴조사가되지않는대부분의산성을가야시기의것으로보고가야와신라의관계를설명하려는시도가지속되고있는실정이다. 성산산성의발굴조사성과는아라가야멸망이후신라가축성한신라산성이란사실이외에도다양한목기류가출토되어 6세기후반이후성내부의생활내용을유추할수있는자료를확보한것과다양한내용이적힌다수의목간자료가출토되어 6세기후반이후신라의지방지배방식을새롭게구명할수있는 1차사료가확보되었다는점이다. 이성산산성에서목간이출토한이후, 한국목간학회가설립되고, 여러차례의학술심포지움이개최되고, 자료집이간행된사실로만보더라도성산산성목간자료는한국고대사연구에새로운계기를마련하였다고할수있다. 성산산성에대한발굴조사는이후에도여러차례이루어져당시의사회를이해할수있는중요한자료들이출토되었고, 지금도 15차발굴조사가진행되고있다. 3) 2000년대이후 2000년대에들어오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의해경주 중원 남원 부여 익산등지의왕궁 왕경 사찰 성등의유적을대상으로한학술발굴조사와더불어 30,000m 3 이상의개발지역이의무적인발굴조사면적으로지정되고, 전국각지에발굴조사연구전문기관이설립되면서전국각지의통일신라유적이조사되어통일신라유적의발굴조사수와유물은통계치를제시하기어려울만큼폭발적으로증가되었다. 대표적인조사유적의사례로는다음과같다. 경주나정, 경주화곡리가마터, 울산방리가마터, 상주구잠리가마터, 김천대성리가마터, 영천사천리가마터, 청원쌍청리다중환호, 장도청해진, 인천계양산성 (1~5차조사 ), 창녕하왕산성연지, 보령성주사지 (7 9 차조사 ), 익산미륵사지, 남원실상사지, 경주분황사지, 사천왕사지등이다.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19
이시기의왕경유적은그어떤성격의유적보다도많이조사되었는데, 황룡사지동편지역의 1방의발굴조사를시작으로경주박물관미술관건립부지유적, 동천동유적, 동궁지등대소면적의발굴건수가 50여개소에이르렀다. 왕경유적의발굴수가증가하면서그동안베일에쌓여있던왕경의 1방규모와가로 담장 배수시설, 가옥수와구조및배치, 수공업시설, 우물등이확인되었고, 도로를침범한가옥의존재와북천이남과이북지역에존재한방의규모와평면형태의차이등이확인되는등왕경의구조에대한기초적인정보가축적되었다. 특히 2007년부터황룡사지동남편의왕경유적에확인된동서대로와국립경주박물관미술관부지에서확인된남북대로가교차될것으로추정되는지역을대상으로하여 674년에완성된안압지를중심으로한동궁의규모와왕경중심부의도시구조를위한발굴조사가안압지동편지역을대상으로 2010년까지 4년간실시되었다. 이조사에서신라왕경의중심부인이곳은원래저습지의뻘층이었으나 7세기전반이후에이곳을매립하여생활공간으로활용하였음이확인되어신라왕경의도시형성과확장을확인할수있는정보를획득하였다. 안압지동쪽일대의발굴조사를통해왕경이어떻게조성되고변화해갔는지, 도시를조성하기위한토지구획정리사업과도시재개발사업이어떻게어떤방향으로진행되었는지를엿볼수있는중요한정보를획득하였다. 뿐만아니라동궁의범위확인을통해왕궁의동쪽경계를확인하여왕궁의범위를어느정도추정할수있게되었다. 그리고다양한크기와구조의건물지는물론배수로와담장등을통해통일신라의건축기술과도시를조성하기위한토목기술도확인하는등중요한성과를거두었다 ( 홍보식 2012). 이와같은발굴조사성과는신라왕경연구를다양한관점과방향에서연구를가능하게하였고, 여러편의논문이발표되었다. 그리고왕경으로부터직선거리로서북쪽으로 10km가량떨어진경주시건천읍방내리에서도로에의해구획된계획도시가조사되었다. 이방내리의계획도시와왕경과의관계에대해서는왕경의범위로보는견해 ( 박방룡 2013) 가있거나방내리와더불어남쪽의말방리, 서쪽의방말등과더불어왕경의위성도시로보는견해 ( 홍보식 2013) 가있다. 왕경과더불어통일신라연구의근간이되는지방도시의발굴조사와고고학적인연구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다가 2005년부터사벌주치소로추정된상주복룡동일대에대한발굴조사가여러차례에걸쳐이루어졌고, 발굴조사를통해통일신라지방도시의구조를이해할수있는주요한정보를제공하였다. 상주복룡동유적은사벌주의설치와동시에사벌주의치소를건설하기위해조성된통일신라의지방도시임이확인되었다. 도시전체가아닌일부분의조사가이루어져전체도시의규모와구조를파악할수없는한계가있어도시의규모와변화, 주작대로의존부, 방의수, 1방내의거주인구수와신분구성, 시장또는광장의존재등의문제에대해서는상이한견해가상존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서, 남북도로에의해구획된 1방의규모가 160 160m이고, 내부에여러기의건물과우물로이루어졌고, 도시내에다양한시설물을확인한것은큰성과이다. 화곡리생산유적에는통일신라의토기생산과공급관계를구명할수있는자료들이다수출토되 22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었을뿐만아니라지금까지다양한견해로분산된편년체계를총합적으로수립할수있는유적으로평가할수있다. 그리고월성해자 월지 둥궁등의왕궁, 왕경의가옥과불교사원등은당시거대한소비지였다. 이소비지중에서도이미 70년대에조사된안압지와추정동궁지조사에서도통일신라의다양한토기들이다수출토되어통일신라의토기생산과공급관계를추론할수있는자료들이축적되었다. 이시기에여러지역에서중요한불교사찰이조사되었는데, 그중에서도가장중요한유적조사로서경주사천왕사지를들수있다. 사천왕사는신라가당과전쟁을하던문무왕 9년 (669) 에시작하여동왕 19년 (679) 에낙성되었다. 사천왕사는감은사와더불어정확한창건연대를알수있을뿐만아니라삼국에서통일신라로전환하는과도기의모습과통일신라가람의전형을보여준다는점에서사천왕사지의발굴은상당히중요한의미를지닌다. 사천왕사지에대한발굴은 2006년부터시작하여 2011년까지 6년에걸쳐모두 6차례에이루어졌다. 6차례의발굴조사결과사천왕사지의가람구조와건물의규모와특징뿐만아니라건물지와탑지의하부기초, 증개축관계, 출입시설, 귀부와비편등사천왕사지의구조와성격, 구축기술등을구명할수있게되었다. 그리고일제강점기때출토된사천왕상전의다른편이발굴조사에서출토되어완전하게복원되었고, 또이사천왕상전이목탑기단부네면에모두 24구가배치되었으며, 종류가 3가지였음이밝혀졌다. 그리고통일신라시대의농경과관련깊은제방이나방조제시설이조사되었다. 김제벽골제, 제천의림지, 영천청제, 경주矢堤등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등고대사서의수리시설기록과함께실물이확인되었지만, 축조시기와공법은제대로확인되지않아고대의제방형태와구조및기술의실체에접근하기는매우어려웠다. 그런데울산약사동, 김천공검지의발굴조사와김제벽골제가재조사되었다. 울산약사동제방은좌우의구릉을연결하여물을저장한일종의댐으로서, 고대의제방구조와구축토목공법, 시기등이확인되어향후수리시설의실체와연구의진전을가져오게되었고, 중국및일본고대의수리시설의기능과축조기술등과비교검토가가능하게되었다. 3. 발해유적 1) 일제강점기 ~1980년대발해유적조사는일제강점기발해도성인상경성 ( 동경성 ) 의발굴로부터시작되었지만, 해방이전까지는상경성조사외에는거의없었다. 해방후, 발해유적은북한 중국 러시아조사단에의해몇몇중요한유적이조사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발해유적발굴조사의경우, 중국과북한은주로발해고분에집중되었고, 러시아에서는발해마을과사찰 성곽등의조사가이루어졌다. 조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21
사된주요한발해유적은상경성 ( 일제강점기동경성으로보고 ), 육정산고분군 (1949~1964), 해림현산저자고분군 (1966), 화룡현북대고분군 (1973, 1988), 화룡현용두산고분군 (1980), 흑룡강해림시북참고분군 (1983), 길림화룡현정효공주묘 (1980~1981) 등이다. 육정산고분군은 1949부터 1964년까지수차례조사하였는데, 1962년도에는중국과북한이공동으로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수차례의조사를통해 32기의발해고분이확인되었다. 조사된고분은대형석실묘 석실묘 석곽묘 석관묘등이확인되었고, 상경성을도성으로정한후인문왕대이후의발해왕릉과왕족및귀족들이매장된고분군으로서발해의묘제와장제를보여주는중요한유적이다. 육정산고분군에서조사된석실묘는고구려계통의석실로서발해의지배층이고구려계임을보여주는고분군으로서중요하게다루어졌다. 이육정산고분군에는 777년에죽은발해문왕의둘째딸인정혜공주묘와무왕의왕릉으로추정되는진릉이있음이확인되었다. 이육정산고분군은발해초기의왕족및귀족이묻힌곳으로단정되었고, 발해고고학의지표유적이되어왔다. 북대고분군은길림성화룡현의중경현덕부터로추정되는西古城址에서멀지않는곳인八家子의서북부에위치하여발해의지배층고분으로추정된다. 1973년에 54기, 1988년에 11기의무덤이조사되었다. 북대고분군은고분군을이루는고분수도 100기이상으로많고, 또여러형태의무덤이확인되어발해무덤의특징과변화는물론고구려무덤과의관계등을파악할수있는자료가풍부하다. 발해의 3대왕인大欽茂문왕의넷째딸로서 757년에태어나 792년 6월에사망한정효공주묘가중국길림성화룡현용수향용해촌서쪽의용두산고분군의용해묘구에서조사되었다. 정효공주묘는벽돌과판돌로만들었는데, 묘도 묘문 연도 현실 탑의다섯부분으로이루어졌다. 정효공주묘는부분적으로고구려석실의요소가남아있지만, 지하에벽돌로무덤을쌓고, 계단으로된긴무덤길을만들고, 무덤위에벽돌로탑을만드는등새로운구조와형식의발해왕실귀족무덤을보여주는자료이다. 그리고벽화에묘사된인물의특징과묘비의내용등은발해가국가기틀을확립한문왕시기의정황을이해하는중요한자료로주목되었다. 2) 1990년대이후 1990년대이후의발해유적은주로중국과러시아에서이루어졌고, 북한의발해유적조사의성과는제대로알기어렵다. 이시기에조사한발해의주요유적으로는상경성 팔련성 서고성, 홍준어장고분군, 화대군주의리능산동고분군 금성리고분군, 연해주콕샤롭카평지성 1, 크라스키노성, 체르냐찌노고분군등이다. 중국과북한의발해유적조사는해방이후부터시작하여 1980년대에집중되었지만, 중국과북한모두간략한개보만을발간하였고, 러시아의발해유적보고서는입수가어려워서발해유적의양상을제대로파악하기에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현지조사는물론발굴현장과출토유물을접할 22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수없는한계로인해발해고고학의연구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다. 중국과북한에소재한발해실물자료들의실견이차단되어있지만 1990년대이후, 이전에조사한상경성 서고성 팔련성등발해의도성을전면또는재발굴하고, 조사내용을비교적상세하게보고한보고서들이중국에서간행되어국내연구자들도입수하는등발해고고학, 특히도성과고분에대한새로운접근이가능하게되었다. 근년의발해도성의조사결과, 문왕과성왕이후발해의도성이었던상경성은당의장안성을모델로하여궁성 황성 외성으로이루어진 3중성구조임이밝혀졌다. 외성은평면형태가장방형이고주작대로를기준으로동과서로구획되었고, 동서각각이가로에의해구획된장방형의방이 41개배치되었고, 10곳의성문과성내외에 9곳의사찰이있었음이확인되었다. 황성은궁성의남쪽에위치하고, 궁성은성의북쪽에위치하며평면형태가장방형임이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결과, 한시기에도성이건설된것으로확인되었다. 상경성의조영시기에대해서는문황초기에완성되었다거나 ( 김진광 2012), 문왕초기에조성되기시작하였고, 성왕대에 3중구조의도성이완성되었다고보는견해가있다 ( 송기호 2004). 그리고현주의서고성 ( 천보년간 ) 과동경의팔련성 ( 정원년간 ) 과상경성과의시기적인관계와모델에대해서도중국측에서는한문화의도성형식을모범으로삼아서고성이조성되었고, 이서고성을확대발전한도성이상경성이란입장을취하고있다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2007). 이에대해완성된서고성은상경성의조영원리에영향을받아조성되었을것이란견해도제기되었 다 ( 김진광 2012). 2000년대에들어와크라스키노성, 콕사롭카평지성 1과체르냐찌노고분군등을대상으로우리나라와러시아의합동발굴조사가실시되면서발해유적조사에참여하고실물을관찰할수있는기회가되었고, 그동안의발굴조사내용을보고한보고서가이미여러권이출간되었다. 그리고 2014~2015년의연해주의발해유물을국내로들여와부산과서울에서전시하여국내에서발해유물을볼수있는기회를만들기도하였다 ( 부산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2014). 이와같이발해도성의구조와발전관계, 도성과지방치소성과의관계, 중국隋唐도성과의관계, 발해의촌락과생활모습, 유물에반영된발해의대외관계등이향후의주요한연구과제이지만, 발굴조사과정과내용, 유물은물론정보등을쉽게접할수없는한계로인해어려운부분이있다. 발해고고학의연구성과가제대로나타나지않는현상은안타깝다. 4. 고려유적 1) 일제강점기 ~1980 년대 일제강점기에고려유적조사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는데, 19 대명종지릉이 1917 년도에발굴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23
되었고, 공민왕릉의도굴이자행되었다. 해방이후북한에서공민왕릉의정비를위한간단한조사가이루어졌고 (1958), 고려 3대왕희종의安陵과 20대신종의陽陵이조사되었다. 60년대에들어와남한에서도개성시장단군法堂坊무덤, 철원군내문리파괴석관묘, 진주평거동기년명무덤군, 거창둔마리벽화무덤, 안동서삼동벽화무덤, 여주상방하원석실묘등이조사되었다. 법당방무덤은관에 12지를올린관인형 12지상벽화가그려진고려말의석실로밝혀졌다. 내문리파괴석곽묘는석관내면에회칠한후 12지상과팔괘가결합된벽화가그려져있었는데, 통일신라의몇몇전칭왕릉의호석에새겨진인신수수의 12지상이고려대에이르러지배층의묘실내의벽화로표현되었음을나타내는자료로서주목되었다 ( 이희준 1988) 진주평거동무덤군은각고분에서묘지가출토되었는데, 1709년부터 1229년까지 150여년조영된정씨무덤군으로확인되었다. 거창둔마리벽화무덤은주악천녀상의벽화가그려져있었고, 안동서삼동벽화무덤에는사신도와성숙도가그려져있었다. 이와같이공사나도굴등에의해간헐적으로고려무덤이조사되었고, 대부분벽화가그려져있어고려시대의지배층의무덤구조와특징을파악할수있는자료가일부축적되었지만, 조사방법과과정은고고학적이었다고는할수없다. 이때까지조사된고려무덤은대부분공사과정에서파괴된상태로발견되었고, 조사계획과방법이제대로적용되지않고수일만에수습조사를하였고, 봉분조사나매장주체부내부도면은물론벽화실측도를남기지않는그야말로현장수습의차원에머물렀고, 이는향후고려무덤의연구를진척시키지못하게된가장큰이유중의하나가되었다. 불교사찰의조사도이루어졌는데, 개성불일사지, 중원미륵리사지, 원효사지, 서귀포시법화사지, 곡성운주사지, 청주흥덕사지, 남원만복사지, 거창천덕사지등이대표적사례이다. 이시기의불교사찰조사는대부분사역의일부만이대상이되었고, 정비복원이란명분하에이루어졌기때문에발굴조사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고, 도면이나사진기록보존에도문제가있었다. 그중에서도만복사지는 7차례의정비복원을위한학술조사가이루어졌는데, 처음부터사지전역에대한조사계획을수립하지못하고해마다그때그때발굴을속개해나가면서조사진도변동됨에따라조사상의일관성이부족하였다. 거창천덕사지는합천댐수몰로발굴조사되었는데, 사역전체가조사되었고, 사역전체평면도와개별유구의도면등이제시되어다른불교사찰의조사와대비되었다 ( 이희준 1988). 이시기에도청자및도기가마터가남한과북한에서많지는않지만조사가되었는데,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등서해안지역에집중되었다. 특히강진계율리 사당리 용운리등지에서 11~13세기에이르는청자가마터가다수조사되었고, 도자사연구에좋은자료를제공하였다. 그리고용인서리가마터는여러차례에걸쳐수년간조사가이루어졌고, 기종별로분류한보고서가간행되었다. 아산댐수몰지구에포함되어조사가이루어진아산용계리가마터에는가마의부속건물지 22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에서 太平壬戌二年 (1022, 현종 1) 명평기와가출토되어청자편년의중요한자료로다루어졌다. 2) 1990년대 1990년대에들어오면경기도일대를중심으로불교사찰이다수조사되었는데, 고양중흥사지, 광주춘궁리桐寺址, 강화선원사지, 안성봉업사지, 여주고달사지 1 2 차조사가되었고, 군위인각사지, 부산전만덕사지등도조사가되었다. 이중몇몇사찰은수차례의조사를통해사역과가람배치및시기에따른건물의배치와구조등이확인되기도하였다. 단양현곡리에서고려무덤 33기가조사되었다. 이무덤군의보고서 (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한국도로공사 2008) 에는발굴조사방법과봉분및매장주체시설내의토층도면과토층사진이제시되지않았고, 유구의도면표현도미숙한등고려묘의발굴조사보고서로서는문제점이많았다. 고려묘의발굴조사경험이없거나유적발굴조사경험이없는비전문가들의수준에머물렀다. 배천군원산리고려초기청자가마터는모두 4기가조사되었는데, 2호-4차가마로명명된청자가마넷째칸에서 淳化三年壬辰太廟第四室亨器匠王公托造 명문두형제기가출토되었다. 淳化三年은 992년 ( 성종 10) 으로서초기청자의역연대와편년에중요한자료로서평가된다. 그리고해남진산리자기가마터가 1991년에조사되었고, 이가마터에서많은수량의청자가출토되었는데, 1984 년 6월에완도군약사면어두리어두지섬앞바다의침몰선에서인양한 3만여점의청자가해남진산리가마생산품으로확인되었다. 진산리일대에서생산한자기가다른지역으로유통되었음을확인시켜준사례로서주목된다. 3) 2000년대이후 2000년대이후의고려유적조사는그이전시기에비해기하급수적으로증가하였고, 궁성 촌락등의생활유적과관방유적 ( 성곽 보루 초소 ) 생산유적 ( 자기 옹기 기와가마터 ) 불교사찰, 제방유적 분묘군 철생산유적등다양하고, 또한많은유물이출토되었다. 이시기의가장대표적인유적발굴조사는개성고려궁성 ( 만월대 2007) 발굴조사와강화도의고려왕릉발굴이다. 만월대발굴조사는 2005년 11월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가개성의세계유산등재지원을위한남북공동학술회의 를개최한자리에서유네스코세계유산등재를위한개성역사지구유적남북공동발굴조사제안이계기가되어남북한이공동발굴조사단을구성하여발굴조사가 2007년부터 2010년까지모두 6차례이루어졌다. 남북공동발굴조사는주로중심건축군의서쪽에위치한서부건축군이대상이었다. 이조사에서 20여동의건물이확인되었고, 서부건축군의가장서쪽에위치한 17호건물지가경령전임을확인하였다. 그리고평면형태가亞자형건물지, 주건물지동 서 남회랑식건물지로이루어진건물지등과함께건물지군을연결한계단과석교등이확인되어고려궁성의부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25
분적인구조와배치에대한이해가가능하게되었다 ( 박성진 2011). 현재도남북공동발굴조사단이개성만월대를조사하고있는데, 조사성과를기대해본다. 지금까지이루어진고려궁성에대한발굴조사내용을검토하여고려궁성의구조와특징에대한연구와함께같은시기의발해 송 요 원등의궁성과의비교연구를통해고려궁성의특징을구명하는연구가이루어질필요가있다. 2001년부터 2006년에걸쳐강화천도시에조영된희종석릉 순경왕후가릉 원덕태후곤릉등이조사되었는데, 이 3곳의능은강화도에조영된왕릉으로서강화천도시의고령왕릉의구조와형식은물론고려왕릉의구조변천을파악할수있는중요한자료이자남한에서최초의고려왕릉발굴이라는데의의가있다. 석릉의발굴조사결과, 매장주체부는지하에할석으로구축한횡구식석실로서석실내부중앙부에판석으로조립한관대가놓여있었다. 개석위의가장자리에는가공한석재를 8각형으로설치하여호석을만들고그내부에봉토를성토하여봉분을만든구조로확인되었다. 호석외측에는얇은돌을깔고, 가장자리에는가공한돌을놓아구획을하고, 그바깥측에는담장을쌓았다. 이석릉의발굴조사와뒤이은가릉과곤릉등의발굴조사를통해강화천도시의왕릉구조의특징을파악할수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이후대규모의발굴조사가이루어지면서고려의지방촌락에대한조사도이루어지게되었는데, 그대표적인사례가대전상대동유적이다. 상대동유적의발굴조사에의해상대동유적을구성한중동골유적은고려전기에는사찰로서교통 숙박시설을구비한원촌이었다가고려후기에들어와읍사관련건물들을비롯하여객사 향교 창고등의공공시설들이자리하면서읍치 ( 古儒城 ) 로변모하고, 중동골에소속된촌락인원골유적은고려후기에교통로상에위치하면서숙식기능을한廣道院으로바뀌면서院村으로바뀌었다는분석결과 ( 최종석 2011) 는그신뢰성은제쳐두더라도발굴조사를통해고려시기지방촌락의변모양상을구명할수있다는사실을보여준점에서매우중요하다. 불교사찰의발굴조사는정비복원차원에서이미이전부터조사한연장선에서사찰의일부분을확인하기위한조사와대규모의개발사업에수반한조사에서새로운사찰이확인되기도하였다. 대표적사례로는양양낙산사, 안성봉업사, 원주법천사지 1~6차조사, 여주고달사지 3~5차조사, 군위인각사지 2~4차조사등을들수있다. 안성봉업사지 3차발굴조사에서봉업사가창건되기이전의통일신라의華次寺와관련된석탑의기단과막새기와와太和六年 (832, 신라흥덕왕 7년 ) 명기와등이출토되어통일신라시기에도중요사찰이있었음을다시확인하였다. 그리고봉업사와관련한층에서鑄鐘遺構가우리나라에서처음으로확인되어사찰내에서종의주조가이루어졌음을알수있었으며, 향후불교사찰의발굴에서각종불구의생산유구존재가능성과함께불구주조유구조사가필요함을인식시켜주었다. 고려의제방유적으로는드물게양산물금에서확인되었다. 고려시기에는석축을하여범람을방 22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지하였고, 석축제방이무너진후조선시기에토축제방을만들어범람을방지하였다. 고려시기와조선시기의제방축조기술과재료등을파악할수있는유적이다. 무덤조사에서주목되는것은밀양고법리벽화무덤이다. 고법리벽화무덤은송은박익의무덤으로서 1398년에몰하였고, 1408( 영락 6년 ) 년에장례를치루었음이확인되었다. 박익의관직과가족관계를기록한묘지석이발견되었고, 매죽도와인물풍속도의벽화가그려져있었다. 판석을 2단으로쌓아만든석곽안에송판 ( 잣나무 ) 으로만든목관재가확인되었다. 화강암제의석주형태의화문석과청동수저 1벌과천희통보 (1017) 에서영락통보 (1408) 등의중국동전 9매가출토되었다. 이박익무덤은고려무덤에서조선무덤으로의변화를보여주는중요한자료로서묘주와몰에서장례까지의기간등을알수있어조선초기의묘제와장례를파악할수있는자료로서평가할수있다. 2000년대이후에와서도자기가마터의조사는꾸준하게이루어졌다. 이시기의가마터조사는그이전시기와달리발굴조사현장에종사하는고고학자들에의해이루어졌고, 조사방법과과정및도면등에있어그이전시기의조사보다진일보했다. 하지만자기가마터의발굴은여전히가마터에만국한된예가많고, 폐기장과공방지등에대한조사는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 폐기장의층위를확인하였더라도단면에서확인한층위의범위를확인하기위한평면조사가실시되지않아자기의층위별수거는해당단면에서만이루어졌을뿐전체적인층위수거는사실상이루어지지않았다. 폐기상태가양호한폐기장의층위조사는동일가마터에서생산된폐기품의상대서열을파악할수있을뿐만아니라지금까지각단계의시기를 50년내외로편년해온편년의기간을짧게설정할수있는중요한정보를제공해줌에도불구하고그것을제대로인식하지못하고, 유물수습에머문사례도있었다. 그리고가마터위주의조사를하여가마터를포함해성형 건조등의시설물과공인들의주거등공방의경관을복원할수있는기회를잃어버린사례도있다. 이와같은조사는 1990년대이전도자사가들의발굴조사를답습한결과이며, 고고학적인발굴조사와는거리가멀다. 5. 조선유적 1) 일제강점기 ~1980년대이전공주계룡산학봉리분청사기가마터는조선총독부박물관의주관아래노모리겐 ( 野守建 ) 이모두 7기를발굴하였다. 이학봉리유적은최초의자기가마터발굴이었고, 많은수량의유물이출토되었다. 이곳에서생산된분청사기는철화기법으로독특한문양을그렸는데, 이를두고일명 계룡산분청사기 로부르기도한다. 이곳계룡산일대에는많은수의가마터가확인되어분청사기를대량으로생산한공방으로추정되었다.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27
해방이후조선의유적조사는거의이루어지지않다가 1970년대후반에들어오면서국가나지방단체에서정비복원을목적으로궁궐지와건물지, 성곽등의조사가이루어졌고, 학술자료의확보란목적으로국립중앙박물관에의해자기가마터조사가간헐적으로이루어졌는데, 가마터조사는도자사연구자들이주도하였고, 고고학적인층위및평면조사를제대로실시하지않는등유물수습의성격이강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조선건물지유적의발굴조사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고, 70년대말에이르러서조사되기시작하였지만, 조사는건물지복원이란미명하에건축사무소에서수습한수준에머물렀고, 조사방법이나도면이전혀제시되지않았다. 1980년대에들어오면조선의건물지발굴조사사례가증가하였는데, 특히궁궐을구성한건물지조사가많이이루어졌다. 이시기에궁궐조사가많이이루어진점은궁궐복원을위한기초조사란명분에의하였지만, 발굴조사의기본계획이수립되지않았고, 발굴조사결과를담은유구의평면도와입 단면도는물론사진등이보고서에제대로수록되지않는등 1970년대이전의발굴조사와크게다를바없었다. 이때의조사는주로건축사무소의건축담당자또는건축연구자들이주도하였고, 고고학자는자문정도만참여하는수준으로서이전시기와달라진게없었다. 귀중한문화유적임에도불구하고조사와보고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는점은당시우리의문화재행정의모순이어느정도인가를알려준다. 2) 1990년대 1990년대유적조사의특징은다음몇가지를들수있다. 1980년대까지아주부분적으로그것도비전문가에의해조사된경복궁에대한발굴조사가국립문화재연구소에의해본격적으로이루어지게된점이다. 1990년에서 1992년의 3년에걸쳐康寧殿 交泰殿구역을대상으로모두 3차례의조사가실시되었다. 조사결과, 건물하부는높이 220cm높이까지굵은모래층과모래층사이에점질토를다진판축층위에 150cm정도의마사토다짐을하였고, 이마사토다짐층을파고그안에흙을채운위에잡석을깔아적심부를만들고그위에장대석 3매를나란히붙여계단을만들었음이확인되었다. 그런데이때의조사에는발굴구역의전체적인평면도는물론전체와세부토층도가작성되지않고, 극히일부의사진만삽도식으로제시되는등제대로된발굴조사는되지못하였다. 강화조선궁지의발굴은학계의인식을바꾼조사였다. 강화군이고려궁지영역에대한고고학적근거자료를마련하고향후복원사업의기초자료로삼고자조사기관에의뢰하여수차례의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그동안학계에서강화천도시의고려궁전지로추정하여왔지만, 발굴조사결과고려청자수점만출토되었을뿐고려시기문화층이전혀확인되지않았다. 5차례의발굴조사에서궁지로는공간이협소하고, 궁궐의정전으로볼수있는건물지가확인되지않았고, 17세기초이 22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후의문화층만확인되어건물지들은 17~18세기의강화부궁전일가능성이제시되었다 ( 인천광역시강화군 겨레문화재연구원 2011). 따라서전강화궁지의발굴조사에의해강화궁지의위치가다른곳에있었을가능성을높게하는등발굴조사의중요성이새삼스럽게강조된조사였다. 조선시기의왕과세자 대원군공주 옹주등의왕족의태를매장한태실의발굴조사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는데, 일제강점기에이왕직이파괴및손실방지라는명목하에전국각지에산재해있는태봉에매장된 54기의태항아리를경기고양시원당동한곳에이장하였다. 발굴조사결과이곳에이장된태실은매장당시의구조물과전통적인규범을벗어나동일한규격의시멘트로만들어졌고, 일부는이장하기전에묘지또는원항아리가없어졌거나바뀐사실도확인되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삼릉태실의발굴조사결과, 태를담은항아리는조선시기의도자기편년에중요한자료로활용되고있다 3) 2000년대이후 2000년대에들어오면다른시기의유적발굴조사수도증가하였지만, 특히조선시기유적의발굴조사수는폭발적으로증가하였다. 중앙과지방자치단체의유적정비복원을위한발굴조사와함께건설공사에수반하여전국각지에서조선시기유적 ( 유구 ) 이조사되었으며, 그중에서도무덤군과건물지조사는그이전시기에비해비교할수없을만큼증가하였다. 궁궐복원정비사업에수반하여국립문화재연구소주도로창덕궁금천교, 경복궁興福殿址 咸和堂 緝敬堂 行閣址 燒廚房址, 창경궁우물지 빈청지, 숭례문, 경복궁光化門址 月臺址 御道址 宮牆址 用成門址 西守門將廳址 協生門址 營軍直所址 哨官處所址, 경복궁흥복전주변지역등다수의궁궐지를발굴하였다. 2008년 2월 8일설날연휴의마지막날밤에한노인의방화에의해숭례문이불에타서무너지게되었고, 숭례문복원사업에앞서조선시기의숭례문원래의모습을확인하고, 조사결과를숭례문복원에반영하기위해발굴조사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모두 3차례실시되었다. 숭례문발굴조사결과, 조선전기와후기의도로면과숭례문및숭례문의동쪽과서쪽성곽의기초부축조양상등숭례문의원형파악에어느정도의조사성과가있었다. 2005년부산도시철도 3호선공사과정에서지표조사와시굴조사를거쳐동래읍성해자가 60m 정도확인되었다. 발굴조사결과동래읍성해자는동래읍성체성벽과는약 20m 정도떨어져설치되었고, 폭은 550cm 내외이고, 석축의높이는 170~250cm 정도였다. 조사결과내부에는퇴적토가가득차있었는데, 최하층의상부에서다량의조선시기무기가발견되었다. 발견된무기는환도 소도 창 목궁 활과화살촉 깍지 송곳 철제갑옷 ( 찰갑 ) 1벌과다수의찰갑편, 투구등의무기류, 인골 분청사기 도기 기와편등이출토되었다. 이무기들은동래읍성이왜군에게함락되는과정에서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29
전사한조선군과조선군이사용하던무기, 동래읍성주민들의시체를왜군이모두해자내부로묻어버린결과로추정되며전쟁의피해가조선군에게만이아니고일반양민에게까지미쳤음을보여주는자료이다. 이곳에서출토한무기는 1592년 4월 15일 ( 음력 ) 동래성전투의모습을파악할수있는자료이자, 발굴조사를통해임진왜란시의무기와무구가조사된첫사례로서임진왜란당시의무기체계는물론조선전기의무기체계를연구할수있는중요한유적으로평가되지만, 이자료를활용한연구논문은거의발표되지않았다. 서울은평구진관동분묘군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한강문화재연구원과중앙문화재연구원, 상명대학교박물관에의해발굴조사가되었는데, 4,300여기의분묘와 4,500여점에달하는유물이출토되었다. 한곳에서 4,300여기정도의분묘가조사된사례는지금까지거의없었다. 이곳에서조사된분묘는토광묘가 22%, 목관묘가 70%, 회묘가 8% 미만으로확인되었고, 백자 분청 도기 청동수저 합 장신구류등의유물이출토되었다. 분묘형식과출토유물의구성등으로볼때, 조선전기초부터후기초까지상당기간조영되었고, 피장자들은예제에따라도자의부장위치와구성을이행한士大夫層이란견해가제시되기도하였다 ( 정지영 2013). 사대부층이란조선시대에서어느정도의신분을소유하였는가에대해서는명확하게정의되지는않았기때문에추상적이다. 그리고이와같은시기의지방에서조사된분묘의구조와규모, 그리고부장품의구성및당시의예제를실천하였는지등이향후검토되어지방과근기지역분묘와의차이와지역성등에대한연구가이루어지길기대한다. 2000년대이후에도자기가마터조사는전국적으로활발하게이루어졌는데, 현재파악한사례만도 30여개소가넘는다. 앞시기보다넓은면적을조사하여가마터는물론공방지 폐기장 수혈 소성유구 적석유구등자기생산과관련한여러가지시설을확인하여자기공방의전체경관을이해할수있는자료가축적되기도하였다. 그러나넓은면적과많은유구가존재함에도불구하고상당히짧은기간에조사가마무리된유적사례도다수있어조사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는현상도나타났다. Ⅲ. 연구의진전과과제및방향 1. 연구의진전 통일신라이후고려 조선의고고학적조사와연구성과의현황과과제를짚어본기회는여러번 23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있어왔다. 1983년한국고고학의시대구분에서고려시대를설정하였거나 ( 西谷正 ) 1999년도에 高麗考古學の諸問題 에서간단하게고려고고학의가능성에대한논의 ( 西谷正 ) 가있었으나크게주목받지못하였다. 1988년한국고고학회에서한국고고학의회고와전망이란주제하에각시대별연구성과와과제를다루면서통일신라이후의고고학이란주제를통해통일신라 고려 조선의유적조사내용과문제점, 그리고향후과제를제시하였다 ( 이희준 1988). 여기에서이희준은해방이후부터 1980년대후반까지의통일신라이후의유적발굴조사의문제점, 특히통일신라의안압지나월정교지, 고려의벽화고분, 조선의궁지인창경궁과경희궁지등과각종건물지의발굴조사가정비복원이란미명하에사전의발굴조사계획없이비전문가들이도면이나제대로된사진없이대충조사를마친행위의문제점을적나라하게비판하였다. 이런문제점에도불구하고몇몇유적의조사는당시의수준으로볼때, 제대로된조사가있었음도제시하였지만, 전반적으로볼때, 이시기까지만하더라도통일신라이후의유적발굴과연구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음을보여주었다. 통일신라이후의유적발굴과연구성과및문제점, 향후과제를제시한학술발표나기획논문등은거의이루어지지않았고, 개별연구자들에의한연구성과들이발표되었지만, 선사및고대에는비할바가되지않았다. 1980년대이후부터성곽과기와는삼국시대부터도성과지방각지에서확인되거나출토하면서각시대의주요한연구자료로다루어져왔고, 1990년대이후국토개발에수반하여전국각지에서다양한시기의성곽이조사되고, 다양한성격의유적 ( 유구 ) 에서많은수량의기와가출토하면서성곽과기와연구자의수가증가하였다. 또한연구도진전되면서관련전문학회의필요성이고조되어 2003년도에한국성곽학회와한국기와학회가설립되었다. 2004년한국고고학회에서 통일신라시대의고고학 이란공통주제를선정하고, 왕경 사찰 생산유적 묘제 토기 기와등 6개분야의현황을일별하고과제를제시하였다 ( 한국고고학회 2004). 이학술심포지움에서종래건축사나미술사에서다루어온사찰과기와를고고학의영역에포함시킨점은통일신라고고학의분야를확장한계기가되었다. 이 2개부분을제외하면전통적인고고학의부분에국한되었고, 불교유물과유구, 청동용기, 무기, 관방, 농기구, 경작유구, 수입도자기등은다루어지지않았다. 그리고 2005년한국기와학회에서 한국기와연구의회고와전망 이란공통주제하에신라 고려기와연구의성과와과제를검토하였다. 이논문집에서는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초까지의기와연구성과를일별하고, 향후기와연구의과제를제시하였다. 2006년서울경기고고학회에서 고려시대의고고학 이란주제로학술대회가개최되었다. 2007년서울경기고고학회에서서울경기지역의중세-고려시대를주제로하여고려시대고고학연구와고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31
고학과문헌사학과의협력관계의필요성과협력방안에대한논의가있었고 ( 안병우 2007), 이외에경기지역을주대상으로하여고려고분의구조와특징등이검토되었다. 그리고연호명이있는평기와의제작기법을검토하여고려평기와의변화를단계구분하였고, 고려무덤에부장된유물의종류와각유물의특징및대체적인변화와흐름을설정하여고려와조선의유물을구분하는기준을제시하였다. 2008년도에는강원고고학회추계학술대회에서 강원지역의역사고고학 이란주제를통해강원지역의청자 기와 산성에대한논의와검토가있었다. 이학술대회에서중세강원지역의불교미술이란주제의발표가있었는데, 여전히불교관련자료들을미술사의영역으로한점은한계였다. 2009년도에는전국역사학대회고고학부의공통주제로서 고려 조선시대의주거와마을 이다루어졌는데 ( 한국고고학회 2009), 모두유적조사사례발표이고, 고려 조선의주거및마을의구조와특징및생활사복원등은다루지않았다. 2010년도에는한신대학교박물관주최로 중부지역고대와중세의최신연구성과 란주제로서울 경기지역의통일신라 고려시대의유적조사현황과연구성과를검토하였다 ( 한신대학교박물관 2010). 2011년도에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한국고고학전문사전-성곽 봉수편 이발간되었다. 이사전은우리나라뿐만아니라중국과러시아연해주는물론일본에있는성곽까지도설명한 1600쪽에달하는방대한분량이었다. 이방대한분량에는개별성곽의설명은되었고, 읍성 봉수 간봉등개념을정리한몇몇표제어는있지만, 성곽의개념과성곽명칭 구성 시대또는나라별성곽의특징, 성곽에적용된축조기술과기법, 치소성과관방성의개념과구조차이등에대해서는서술되지않았다. 서술하지않은이유는어떠하든지간에전문사전에성곽의개념과구성요소, 축조기술, 시대또는나라별설명이되지않았다는점은전문사전으로서의기본에충실하지않았다고할수있고, 이는현재우리나라의성곽연구수준을보여주는바로미터가아닌가한다. 2012년도에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5년부터 2010년도까지조사된주요유적의발굴성과를소개한책자에서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설정하여각시대의특징과함께주요유적을소개하여통일신라이후시대유적의중요성과가치를설명하였다 (National Research Institute Cultural Heritage 2012) 2013년도에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발간한 한국중세고고학자료집성-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의책자에서중세를다룬보고서와문헌을집성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2012년도이전까지조사된통일신라 고려 조선유적을생산 생활 관방 분묘 기타 ( 침몰선 ) 등성격별로분류하여집성하고, 유물은토기 도기 자기 기와 금속기 기타등으로구분하였다. 부록에토기가마 제철유적, 고려도기 자기가마, 조선도기 옹기 분청사기 백자가마 제철유적으로구분하여지금까지간행한보고서를정리하였다. 그리고수공업사와분묘관련논문과분석및보존관련논문목록을집성하였다. 이자료집성에의해그동안조사된유적의수와내용및관련연구논문및연구주제의큰 23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흐름과경향, 연구분야등에대해개략적인이해가가능하게되었다. 하지만, 조사유적과연구목록만집성되어그동안의연구경향과성과및향후과제등의제시가되지않은점은한계였다. 그리고미술사의방법론과관점에서발표한미술사논문과고고학적방법론에서발표한논문을구분하지않고집성한점은자료집성의성격을다소모호하게한부분도있었다. 같은해, 한국중세사학회주관으로 한국중세고고학의현황과과제 란주제하에중세철및철기생산의고고학적연구현황과과제, 한국중세수공업고고학의조사연구현황과과제-고려시대를중심으로-, 한국중세고고학기초자료데이터베이스구축과정-한국중세역사학의고고학자료이용활성화-란개별주제가검토되었다. 이기획논문을구성한철및철기생산유적의논문에서중세고고학의범주를통일신라이후부터조선까지로설정하고, 철및제철유적의지역별현황, 철및철기생산관련연구경향과향후과제를제시하였다 ( 송윤정 2013). 그리고고려시대를중심으로수공업과관련한연구성과와문제점, 향후중세고고학을위한제언이있었다 ( 이남규 2013). 2013년도에는통일신라시대의유적 ( 유구 ) 과유물에서역연대가표기되었거나추출할수있는 統一新羅時代曆年代資料集 이간행되어통일신라의편년체계를구축하는데일조를할것으로기대 된다 ( 세종문화재연구원편 2013). 이상과같이통일신라이후를공통주제로하여학술심포지움과자료집성이 2000년이후에들어와간헐적으로이루어졌는데, 고려와조선의정치 경제 문화의중심지역이었던서울 경기도를중심으로비교적활발하게이루어졌고, 호서 호남 영남지역에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다. 그리고통일신라와고려는한국고고학회나서울경기고고학회, 한국중세사학회등에서빈번하지는않았지만, 학술심포지움이개최되었으나조선만을대상으로한학술심포지움은개최되지않았다. 최근영남고고학회에서 영남고고학개론 을펴내면서통일신라와고려 조선을설정하고, 그동안이루어진영남지역의발굴조사및연구성과를서술하였다. 2 고고학적자료를다루면서도문헌내용과성과가섞여있어고고학적인서술이라하기에는부족함이있듯이여전히중 근세고고학성립의길이멀다는느낌을지울수가없다. 2. 과제와방향 통일신라이후고려 조선의물질자료를소재로한연구는상당한수에이르고다루어진분야도 궁궐 도성 관방 ( 성곽 보루 봉수등 ) 분묘 취락 생산시설 ( 토기 도기 자기 기와등의가마터, 철 동 옥공방 지등 ) 수전 한전 관아 사찰 제방 제언등의유적 ( 유구 ) 와토기 도기 자기 기와 청동용기 ( 합 2 영남고고학회에서근간에출간할예정에있다.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33
완 수저 ) 장신구 ( 이식 목걸이 허리띠꾸미개 동곳 ) 화장도구 ( 동경 가위 ) 금속기 ( 취사도구 관정 철정등 ) 불교용품 ( 불상 사리기 불구 석탑 부도등 ) 등다양하다. 기발표된논문은다양하지만, 기와와자기, 성곽 분묘등의연구는상대적으로많지만, 이외의자료를대상으로한논문은수편에불과하여연구내용이특정부분에몰려있고, 다방면에서균형적인연구가되지않았다. 이는대부분의유적 ( 유구 ) 에서출토되고, 가장많은수량을차지하는자료의보편성에기인한바가커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지나치게편중되었다. 한곳으로의쏠림은다양한물질자료가존재함에도불구하고, 그가치를제대로알고있지못하다는사실을나타낸다. 제대로다루어지지않는물질자료의가치를드러내기위해서는해당물질자료의특성을파악하고, 의미를부여하기위한새로운방법론의개발이필요하며, 다른물질자료와의관계를설정하여종합적으로인식하고설명할수있어야한다. 지금까지발표된고려 조선의논문들은물질자료와문헌기록또는문헌연구성과가서로혼합된형태가대다수를차지하고있다. 이는고고학적인방법론을적용하여분석하고, 유의미한해석을도출하여사회및문화를복원하지않고, 자료분석결과를문헌기록의전체내용을제대로파악하지않는상황에서귀속시키거나또는특정문헌사가의연구결과에맞춰버리는한계가있다. 고고학과문헌사학의연계와협력의구축은필요하지만, 물질자료의해석을전적으로문헌기록이나문헌사연구성과에의존하는연구방식과태토는바람직하지않다. 물질자료의특성을분석하여해당물질자료의사회적기능과당시사회활동등을복원할수있어야한다. 선사 고대보다문헌기록이월등히많은통일신라이후부터고려 조선의물질자료활용과가치및인지도를높이기위해서는자료의세밀한관찰과과학적분석등을통해미시적인특성의도출및개별자료의가치뿐만아니라맥락 ( 상관관계 ) 를통한분석과해석을할필요가있으며, 실증적이면서논리적으로중 근세의물질자료에반영된사회적역할을추출하기위해서는고고학적방법론이개발되어야한다. 물질자료의외형을분석한후, 실제내용은문헌기록또는그연구성과를빌려해석하는태도는지양되어야한다. 문헌기록과문헌연구성과를배척하거나무시하자는뜻은아니며문헌기록또는연구성과를수용하기전에물질자료자체에대한연구와가치에우선주목해야한다는점을강조하는것이다. 물질자료의가치와특성을파악하고이해하는바탕위에서문헌기록또는문헌연구성과를접목해야만중 근세고고학의역할과목적이제대로이루어질수있다. 우리가우선적으로고민해야할주제는시대구분이다. 중세와근세란고고학적인시대구분의전제와특징및목적등이제대로설정되지않은채중세고고학 = 고려시대고고학이란틀에갇혀있다. 왜고려가중세고고학의시간적대상이되어야하는지와함께통일신라와조선은고고학적으로어떤차이가있고, 이시기는어떻게규정을해야하는지에대해서는제대로검토하지않았다. 통일신라와조선의물질자료를모두대상으로한틀에서중세와근세라는시대구분을할필요가있다. 아 23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니면고대 중세 근세고고학등고고학적인시대구분에대한자료검토와논의가필요한시점이다. 물질자료의성격과함께시대적상황을반영한물질자료의인식이이루어질필요가있다. 중 근세고고학을유기적으로설명하고, 사회를동태적으로설명할수있는기초적인편년체계의수립이우선요구된다. 통일신라는국내에서자기가생산되지않았지만, 고려초부터조선말까지청자 백자 분청사기등의자기가대량으로생산되고소비되어생산유적 ( 유구 ) 뿐만아니라거의모든소비유적에서출토된공통성이있다. 이자기를가장기준되는편년자료로삼아고려 조선을관통하는편년체계를수립할수있다. 각시기의자기를분석하여형식을설정하고, 가마폐기장의층위를구분하여층위에따른형식의상대서열을설정한후, 자기자체또는관사명, 자기를부장한분묘의조영시기, 침몰선에서출토한목간에새겨진연호나인물등을통해역연대를추출하여실연대를부여하면고려 조선을관통하는비교적세밀한편년체계를수립할수있을것으로기대된다. 자기를편년체계수립의기본자료로활용하고여기에기와나다른금속유물을보완자료로활용한다면, 전체적인편년체계수립은가능할것으로기대된다. 수립한편년체계를통해자기와공반한다른유물또는해당형식의자기가포함된유구의시기를알수있어더욱구체적인연구가이루어질수있을것이다. 통일신라에서고려로의이행, 고려에서조선으로의이행에의해물질자료에어떤변화가나타나는지, 나타난다면정치경제적인변화가일어난이후에변화가나타나는지, 물질자료의전반적인변화가나타나면서정치경제적인변화가이루어졌는지등물질자료의전반적인변화와전환기적사회변화와의상관관계를구명하고이해할수있는연구가이루어질필요가있다. 그리고지역적인차이, 즉변화가빨리나타나는지역과앞시기의전통을그대로지속하는지역이존재할가능성도있다. 새로운문화의전파와수용에지역적인차이가존재할가능성을주시할필요가있으며, 그것은곧중앙과지방과의관계, 새로운사회세력의등장, 즉왕조개창세력과수구세력과의관계등을반영하는문화요소로도이해할수있는부분이다. 그리고몇몇특정자료만을검토해서그결과를전체적인양상으로일반화하는연구경향도있다. 예를들면, 명문이있는막새의특징을분석하고그분석결과를범주화해서전지역의해당시기기와를평가하는연구방법이나타나고있다. 전체를파악하는방법론으로서는일견의미있는연구라고할수도있으나구체적이고실제적인모습을파악하는데한계가있다. 유적단위별, 지역단위별의세밀한분석을통해해당유적 ( 유구 ), 지역의특징을추출한후, 지역간의관계를추적해서전체적인양상과변화의모습, 방향을제시할수있는연구방법과태도가요구된다. 현재우리고고학계에서는각시대의역연대자료집과자료집성및개설서간행이활발하게이루어지고있고, 이를주도하는단체는한국신석기학회 청동기학회 고분문화연구회등시대고고학회와일부조사전문기관이다. 한국기와학회와성곽학회등중 근세를주대상으로한학회가현재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35
활동하고있지만, 중 근세의전반을다루지못하는한계가있으므로중 근세고고학연구를주도할수있는학회설립이필요한시점이다. 2013년도에이미이남규 (2013) 가중 근세고고학의문제점과대책방안을제시한바와같이, 중 근세의유적 ( 유구 ) 를정비복원대상으로만여기지말고, 연구대상으로승화시켜야하며, 이를위해서는전문연구자의육성과학제간융합적연구체제구축, 정부의올바른정책수립과실천등을통한새로운페러다임을구축할필요가있다. 우리나라의중세와근세고고학에대한인식은아직미진한데, 그것은곧우리의역사문화연구에있어고고학이담당하여야할역할과기능을제대로자각하지못한소치이다. 우리는현재한국고고학의지평을넓히는데있어중 근세고고학의활성화가절대필요한시점에있다 ( 이남규 2005). 이는고고학에종사하고있는연구자의몫이기도하지만, 국가의정책도매우중요하다. 현재 13곳의국립박물관, 7곳의국립문화재연구소, 255곳의공립박물관이설립되어활동을하고있다. 3 13곳의국립박물관중고려 조선시대의특화된박물관은국립진주박물관 1개소뿐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도경주 부여 중원 가야 나주등주로삼국시대의유적조사와연구로특화되었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고려 조선시대의수중발굴과연구및전시기능을하고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설립운영하고있는공립박물관중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특화된박물관또는전시관은 10여곳에지나지않고, 자기또는옹기전시와연구가중심이다. 이와같은국공립박물관및연구소의현상은선사와고대에치우친우리나라의고고학연구와맥을같이하고있다. 선사및고대사회를조명하고연구하는박물관및연구소의지속적인육성과함께통일신라 고려 조선을특화한박물관과연구소의설립과운영을위한정책을수립하여정책적으로중 근세고고학의발전을도모하여야한다. 마지막으로향후의중 근세고고학의연구는다음과같은주제들이주요하게논의되어야할것으로기대된다. 도성의경관과시설물의배치및구조를통한도시사구명, 도로와역등의교통시설과배치, 취락의입지와구조및규모, 변화양상을통한촌락사재구성, 관아의구조와배치를통한전근대지배방식과이념구현방식, 관방의구조와축조기술, 무기구성과각무기의특성을밝혀전쟁의방식과변화, 생활문화의복원과생산및소비를둘러싼유통경제, 건물의배치와구조 성격등을밝히는건축, 토목기술, 경작및경작면적과재배방식, 도성및마을제사와기우제 산신제등의제사유적과제사에사용한용기의구성및파쇄행위의의미, 분묘의계층성과지역성및변화양상을통한상장의례구명등이중 근세고고학의주요과제가될수있다. 또한개별물질자료의분석을통한기능과용도, 제작기술의특징과변화발전방향, 구조 편년, 계통, 출토유구 유적 지역단위연구등의연구토대를바탕으로지역사의해명은물론중 근세사회의전반을이해할수있 3 이수치는국립중앙박물관 ( 사 ) 한국박물관협회 (2012) 에서간행한 한국박물관 100 년사 에게재된기관수이다. 23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는연구주제로나아가야한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통일신라이후부터고려 조선의유적조사를일별하고, 각시기의조사및성과와문제점등을일제강점기부터최근까지를몇시기로구분하여대충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부터통일신라이후의유적이지속적으로조사가이루어졌지만, 1990년대까지만하더라도정비복원을위한발굴조사를제외하면, 선시및고대의유적조사에비할바가되지않았다. 2000년대에들어오면서여러가지상황이결부되어통일신라이후의유적, 특히고려 조선의유적조사가폭발적으로증가하고, 많은유물이출토되어고려 조선의고고학적자료가축적되었고, 젊은연구자들이현장조사에종사하면서고려 조선의물질자료에관심을가지면서다양한소재를검토분석한연구논문들이발표되었다. 그러나과제와방향에서도이미언급하였지만, 고고학적방법을구사하여자료에대한치밀한분석과검토를한후, 해당고고자료의사회적기능과역할이무엇인지를고찰한논문은많지않았다. 최근에와서중 근세고고학에대한관심이증대하였지만, 중 근세고고학의개설서도전무할뿐만아니라학파도형성되지않았다. 이는중 근세고고학의연구목적과방법론및중 근세고고학을리더하는연구자의부재에서오는문제점이자과도기의현상으로비춰진다. 따라서중 근세고고학사에서중요하게다루어야할연구자또는학파의사고와연구방법및역사관, 역할과영향등에대한검토는현시점에서는시기상조이다. 최근의발굴조사성과를볼때, 중 근세고고학의연구가치가매우높을뿐만아니라다양한학문과의융복합을통한연구가가능하고, 일반대중들도관심을가질수있는대상이될가능성이상당히높다. 중 근세고고학사홍보식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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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토론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242-251 한국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고고학사토론문 목차 신숙정 ( 한강문화재연구원 )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에대한토론 1. 석장리와전곡리가그이전 ( 일제강점기까지를포함한 ) 의고고학적관심과조사성과등에의해비교적잘받아들여졌다는의견에대해 : 2. 자연환경 / 동물상 / 사냥 / 구석기시대의예술문제 3. 지질 / 지형 / 자연과학적분석 4. 석기분류체계 / 시기구분 : 중기구석기의존재 5. 중요보고서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 - 에대한토론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대한토론 1. 시대개념 / 시기구분 / 편년 / 연대측정의문제 : 2. 토론자 ( 또는廳者 ) 의입장에서 2015년의학사라면 1990년대이후 ~2000년대의연구가운데중요한논점, 성과와향후전망을더심도있게다루어주었으면좋겠다는생각임. 3. 청동기시대에도여전히연구방법의부재는크다고본다. 4. 한국의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연구를해오면서가장 issue 가되었던중요주제를좀더부각시켜주었으면한다. 이를테면이런것이다 :
학사적고찰에대한토론자의입장 : 하나의또다른의견을제시하는역할. 주지하다시피학사란어떤하나의 fact나고고학적유물 유적의가치, 분석의옳고그름을판별하는작업이아니기때문이다. 학사란한동안의연구에서찾아지는경향성과특징을추출하고, 그런경향 ( 또는 유행 이라도좋다 ) 이성립될수밖에없었던배경을추적해보며, 연구들에서남겨지는과제나반성, 또는계승하거나더확장해야할부분들을살펴보는작업이라고생각한다. 이작업동안우리가하는학문의철학적측면이세워지고 ( 고고학이란무엇인가, 우리는왜이공부를하는가, 고고학의존재가치는? 등등 ), 연구의발전과개량을위한방법론이모색될것이다. 결국학사적고찰을하는동안에연구의 3대축을이루는이론 (theory) 과방법론 (method), 실제 (practice) 가운데두가지가확립되어간다고본다. 현재의한국고고학에서철학과방법론이매우부족하다는것은학사적고찰이부족했다는뜻도되지않을까. 그리고이런측면을찾아보는사람 ( 발표자 ) 에대한토론자의입장은더더욱 나름대로의 의견을제시하는사람이될것이다. 한국구석기고고학사시론에대한토론 1. 석장리와전곡리가그이전 ( 일제강점기까지를포함한 ) 의고고학적관심과조사성과등에의해비교적잘받아들여졌다는의견에대해 : 1) 일제강점기에德永重康, 直良信夫, 森爲三등일부고고학자, 수의학자들로구성된사람들에의한발굴성과가있었지만당시의일제방침은한반도내구석기를부정하는것이었고, 널리알려지지않았다. 2) 남한에서석장리유적은 1970년대중반까지회의적인시각으로바라보고있었다. 석장리유적은역설적이게도, 전곡리유적을발굴하면서받아들여진것이다. 3) 북한의굴포리유적은유물사관의입장에서이론상요청된유적이다. 조선사 는유물사관적발전단계 ( 즉보편사 ) 에서소외된특수사 ( 정체성 타율성이론이적용되는 ) 가아니라는입장에서, 역사발전의전단계가다필요했던것이다. 즉북한내에서시급히구석기유적이찾아지기를매우고대하였던것이다. 그러나누구라도굴포리유적보고서를보면서어떤종류의석기들인지, 암질이무엇인지, 아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43
래문화층의유적이어떤종류인지, 그시기가왜 10 만년이되어야하는지, 10 만년이면중기구석기 인지등등을납득하기어려울것이다. 2. 자연환경 / 동물상 / 사냥 / 구석기시대의예술문제 발표자는구석기시대의동물에대한생각보다는동물뼈예술품에대한회의가크다. 토론자는이같이다소소극적이고부정적인시각에서벗어나원론적으로구석기시대동물상의중요성부터언급함이좋다고본다. 주지하다시피구석기시대의전모는한데유적 (open site) 를발굴해서는잘드러나지않는다. 석장리 전곡리유적을통해서라면당시상당한인지기능을가진사람들이사냥을위해석기를만들었고그제작기술이점차발전해갔다는정도외에더구체적인사실을알기어렵다 ( 일부지질 / 지형적고찰, 퇴적과정을통한기후고찰등빼고 ). 동굴유적에서확보되는동물화석을통해서만비로소당시의사냥감, 기후 ( 사멸종, 쥐뼈등의기후지시자존재로인해 ), 특이한짐승상이있다면그지역의서식환경, 사냥방법의유추, 석기와의대비등이가능하다. 이들은구석기시대의전반적인식을위해서는너무나중요한자료들이며, 구석기시대의주인공인사람뼈도, 식물자료조차도나온다는점에서동굴 ( 바위그늘 ) 유적과한데유적조사의융합이절실하다. 동물화석연구에서는무엇보다도정확한동정 (identification) 이중요하므로전공자가계속길러져야할것이다. 뼈에새겨진 ( 인위적인 ; 자연흔적이아니라 ) 어떤형상이예술작품이될수있을까라는논의에대해, 문제제기는좋다고본다. 현재예술의기원은프랑스쇼베 (Chauvet) 동굴등의예를볼때구석기시대중기까지소급되고있으므로... 다만예술이란무엇인가라는개념의문제로부터출발한진지한성찰없이, 주장자의동어반복적언술만되풀이된다면받아들이기어려울것이다. 3. 지질 / 지형 / 자연과학적분석 구석기시대연구에특히필요한여러자연과학적분석에대해서도발표자의글이다소적극적이지않게느껴지는데, 분석결과가혼란스러운것도여러가지가능성을제시한다는점에서흥미있을수있다. 후학들에게이런 재미 를불어넣어주어야할듯하다. 드넓은현무암대지위에찰흙과암질이뛰어난전곡리유적을예로들면, 사람들은구석기시대이른시기부터이곳을활용하며살아가지않았을까? 후기구석기사람들은이런곳을버렸을까? 이넓은지역내에지형에따라수성퇴적, 풍성토, 사면붕적의퇴적은있기마련일것이다. 24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구석기유적의연대측정활용에서한가지주의해주면하는바람이있다. 현재파주운정유적을비롯한한강하류에서는 5만년을넘어가는, 중기구석기의가능성을제시하는연대들이뫃아지고있다. AMS 연대는 5만년을넘어가면精度가떨어지니이시기의 dating 은대개 OSL 에맡겨지는데, OSL 이 AMS 와무차별로호환할수있는연대체계일까? 예를들어 AMS 40,000년과 OSL 40,000 년이같은값인지? 여러층에서나오는자료를두가지방법으로일관되게 cross-checking 해보기전에는알수없다고생각한다. 자연과학자들은이러한사실을잘알고있으면서도질문하기전에는주의를주지않는다 ( 그럼에도불구하고, 자료는계속축적되어가야할것이다 ). 구석기시대의사람화석에대한논의 : 전공자 ( 형질인류학~생물인류학 ) 의판단과생물인류학적분석에따라야할것이다. 북한유적출토인골에대해서도동일한생각이다. 4. 석기분류체계 / 시기구분 : 중기구석기의존재 뗀석기는알아보는데까다롭다보니스스로고립되는느낌이있다. 그리고그분류체계는현재프랑스의것이중심이되는지, 아프리카의것? 또는양자를혼합한제 3의방식이쓰이는지궁금하다. 한편우리나라에서돌날에잔손질한뗀석기가청동기~초기철기시대까지나온다는점에서 ( 무산범의구석, 회령오동유적등 ) 뗀석기를보는훈련과정은기초적으로필요하다. 고고학과의전공필수과정으로넣어지길바란다. 중기구석기존재의회의론은 1990년대부터구미유학파들에의해제기되었다. 토론자는문외한으로서, 중기구석기야말로보는관점에따라시대의편차가매우크고, 한국의전기및후기구석기의양상도서구의것과똑같지않은상황에서서구의중기에상응하는시기 / industry 등이안보인다고바로부정론으로들어갈필요가있을까싶어진다. 최근비교적오래된측정연대들이모이고있으니기다려봄이어떨까... 5. 중요보고서 학사고찰에서는누구라도보고서등의 자료의바다 를주목하기어렵다. 그러나몇몇의기념비적보고서는언급해주면좋겠다. 예를들면광주삼리유적과호평유적 ( 두보고서모두기전문화재연구원 ) 은구석기연구사에서기억되어야할것이다. 유적의형성과정과층위분석, 석기분류및기술 (description) 등의기본작업과, 자연과학적분석결과를고고학적발굴성과에대입하고녹여내려는노력등에서매우뛰어난작업이다보니당분간이것을뛰어넘는작업이나오기어려울것같다고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45
느꼈다 ( 토론자가최근의성과를잘모름 ). 무엇보다도한지역의구석기유적을통해당시한반도의구석기 문화를이해하고자한점을높이사는바이다. 신석기시대연구사 -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 - 에대한토론 이글은발굴성과를중심한간략한연구사 (Ⅱ장), 토기, 석기, 골각기의연구성과를담은 Ⅲ장, 생업연구로서농경, 어로, 수렵의연구성과를요약한 Ⅳ장으로이루어졌다. 도구와생업을중심으로한연구사라는것이조금어색하긴하나범위를좁혀이렇게도서술할수있을것이다. 다만연구사를쓸때누구나의식해야하듯이, 그리고주지하다시피연구사는연구성과를뫃아놓는것이아니라는점에서이글은토론의여지가적은편이다. 여기서는발표자가선정한주제들이있으므로 - 발표문에서다루지않은자연환경등중요주제들이더있겠으나 - 그에대한 comment 만개진하고자한다. 신석기시대의토기연구는곧편년연구라고할수있다. 전국적으로는 6기, 한강유역에서는 4기등의분류가있고, 최근에는 AMS를기준삼아한강유역의신석기문화연대를재편년한학위논문 ( 소상영 ) 도나왔는데, 기존의편년관과큰차이는없다. 이것은기존의편년자체도항상 AMS 연대를고려하였다는의미일것이다. 토기의물성 (physical properties) 에대한자연과학적분석은좀축적된반면더이상활발하지않다. 소성흔분석등은없다. 아마도토기용도및형태가분화되지않아특정부위에특정흔적이나타나는현상이없음이가장중요한이유일듯하다. 석기연구에대한토론자의견해만언급하겠다. 신석기시대의석기연구는간석기연구라고할만큼마제에치중되어있으며이것으로당시의생업 - 주로농업 - 을유추하고있다. 우선농사짓기에꼭간석기만사용되었겠는가라는문제가제기되어야한다. 그보다먼저, 신석기시대는뗀석기의비율이훨씬높고, 생업에서도농업보다는사냥채집물고기잡이의비중이높다는점에서뗀석기연구가활성화되어야한다. 앞서구석기연구가다른시기와유리되는경향이강하다는지적이있었는데, 신석기시대뗀석기연구의중요성을고려하여두시기간의교류가많았으면한다. 골각기연구도형태의서술중심으로이루어진다. 최근에 한국선사 고대의골각기 (2014) 자료집이출간되어골각기의존재감을보여주었다. 그러나연구대상은뗀골각기보다는 ( 대개인식못하고 뼈 로만다루어질수있을듯 ) 완제품의마제골각기가중심이된다. 골각기형태서술, 용도추정, 그제품의생산 ( 폐기 ) 연대를아는정도가현재의주목적이다. 신석기연구의목적이언제나편년중심이므로생 24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업에긴요했을도구들도편년에도움이안되면연구의진척이잘안되는것이현상이다. 장차골각기연구는동물뼈연구와병행되어야할듯하다. 골각기를개별유물로만한정하면그이면의동물뼈의출처, 사냥행위, 생업등과유리된다. 출토된골각기를통해어떤동물의서식환경, 사냥감의종류, 사냥행위, 생업, 부산물의처리과정에서탄생하는골각기, 그것의용도등을고려하여생업을복원하는데주안점을두게되기바란다. 신석기시대의생업연구, 그가운데농경과어로연구는비교적활발하다. 1990년대이후이부분에많은노력이경주되어왔기때문이다. 물고기뼈연구를통해서조개더미유적의점유방식에대한추론으로연결되는논문도상당수있다. 사냥연구가부족한편이다. 일반적으로신석기시대생계방식의변화를서술할때간취되는한특징이있다. 예를들면신석기조 전기단계의외양성어업이중기부터는내만성어업으로변해가며, 그것이후 만기가되면또달리변해가는... 등의서술에서이다. 변화의양상에대한기술은매우자세하나현상의이면에있는변화의원인, 그것이왜어떻게 (how& why) 그리되어갔는지에대한설명 ( 해석 ) 은없다. 이것은비단어로에국한되는문제가아니다. 변화의원인에대한가설을세우는순간부터고고학적사유가아닌공상, 소설등으로여기는전통적사고가있는듯하다. 많은가설 model 을세워보고, 검증하고, 폐기하고, 부분적으로채택하는연구풍토가길러지면좋겠다. 토론자가연구자들의관심을요구하는한가지문제 : Pleistocene의토기출현문제가있다. 이것은구석기 / 신석기의전환문제와긴밀하므로두시기의전공자가모두신경써주면좋겠으나, 이런부분은언제나서로미루게되고, 공백지대로남게된다. 그러나이제갱신세의토기출현은현실적인문제가되었다. 토론자는영월공기2굴의발굴보고서 ( 국립춘천박물관, 2013) 를보는중에이곳의동물상과뗀석기의조합이단양상시 3바위그늘과매우흡사함을알게되었다. 상시 3바위그늘에서는오산리와도, 남해안과도닮지않은덧무늬토기가출토되어유명하나토론자에게는오랫동안 mystery 였다. 강원도석회암동굴에서이같은양상들이계속나온다면이제상시바위그늘은더이상고립된예가아닐것이다. 그리고상시 3바위그늘에서덧무늬토기는 4층, 그아래 6층에서최후하이에나 (Crocuta ultima Matsumoto) 가출토되는양상은갱신세의토기출토유적인중국江蘇省神仙洞동굴유적과흡사하다. 이런동물상과토기출현양상이동북아시아갱신세후기의일반적인양상일지모른다... 는추측을하게되었다. 한편중국일본러시아를포함한동북아시아갱신세의토기출토유적은거의동굴 / 바위그늘이며가끔鯉魚觜유적 ( 중국 ) 처럼조개더미가있다. 결국토론자는한국의고토기기원을반드시제주고산리에서만찾을것이아니라강원충북지역의석회암지대, 해안가의조개더미유적에도주목해야하겠다는추정을하고있다.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47
한국고고학사 -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대한토론 이글은언뜻일제강점기이후로부터여명기-정리기-연구활성화-토기위주의연구-질적성장등시간의흐름에따른평범한서술방식을취하고있으나, 각시기별연구의특징은적시해주었다. 다만발굴성과로부터도출되는연구주제를구분하여당대의논점, 쟁점과학사적으로의미있는주제등을선별하고그의미에대해본인의생각을보여주었으면더좋았을듯하다. 너무나많은자료에다, 두시기를넘나드는학사를고찰한발표자께몇가지토론자의의견을개진해보고자한다. 1. 시대개념 / 시기구분 / 편년 / 연대측정의문제 : 두시대의학사검토를 요청 받았다고해도, 이를각각따로서술할것만아니라두시대에대한발표자나름의개념정리가먼저제시되었으면한다. 한국고고학에서 1970-80년대는물론이고, 지금까지도두시대의특징과분리에대한고민, 노력이계속되고있기때문이다 ( 원래시대구분의속성아닌 가...) 위문제와연속되는것으로, 이발표다음순서로원삼국의학사가발표될것이나, 초기철기시대를개관하는입장에서이시대와영호남의삼한, 마한시대는어떻게서로맞물리고중복되고또는연결될수있는지? 본인의의견이제시되었다면더좋았겠다 ( 아마도이글에서초기철기시대의서술이적은 것도다음의원삼국시대연구사를의식해서일지모르겠다 ). 지역편년의완성 ( 어렵겠지만 ), 전국편년과의대비, 편년의통합도시도되어야하지않을까. 신석기시대보다사회문화발전속도가매우빨라진청동기시대에는지역편차가더커졌을것이므로이런편차가편년으로제시되면좋겠다는바람이있다. 燕의철기문화를받아들이는한반도의서북지방과강원도의청동기시대취락의문화상, 생업의차이등이생생하게보여질수있을때청동기시대연구의흥미도더커질것같은데, 그전초작업으로편년이있을것이다. 북한의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관한연구는이글에서제외되었으나이것은주지하다시피잠정적인것이다. 청동기시대논의에서 AMS의역할은절대적이라고보는데, 이발표문에서는연대측정의역할에대한언급이없다. 한국의청동기시대가 BC 10C를넘어선다고보게된것은거의탄소연대를많이확보하는과정에서가능해졌고, 조기 라는용어가가능해진것도 AMS의성과때문으로볼수있다. 그러므로 AMS의역할에대해, 방법과한계, 적용해석상의차이등에주목해주어야한다. 과거에 BC 10C 이전으로재어져서잊혀진청동기시대유적들의연대값을지금에와서다시종합활용한다 24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면더욱풍성한연구가나오지않을까. 2. 토론자 ( 또는廳者 ) 의입장에서 2015 년의학사라면 1990 년대이후 ~2000 년 대의연구가운데중요한논점, 성과와향후전망을더심도있게다루어주었 으면좋겠다는생각임. 학사도항상새로쓰는것이긴하겠으나 1990년대이전연구사의비중은그특징과당시논의의주안점정도를다루면어떨까하는바람이다. 발표자는 1990년대의연구의경향을 청동기에서토기로 보았으나, 한국고고학에서토기가주인공의역할을비껴간적이있었던지? 1990년대청동기초기철기시대연구의주인공을좀다른시각에서찾을수있지않을까. 3. 청동기시대에도여전히연구방법의부재는크다고본다. 우리는현재너무나많은청동기시대의자료를가지고있는데, 이정도의자료라면청동기시대사람들이무엇을먹었는지, 사유의개념 ( 또는토지소유 ) 은어떤식으로구현되고있었는지, 계층화는어느정도? 이웃마을과물물교환 ( 또는시장의존재?) 은어떻게? 고인돌을축조하면서어떤생각을하였을까등 everyday life를제시해주기를기대하는것이다. 이걸풀어나가는것이연구방법일것이다. 이러한방법들을소개하고적용해서당시사회를연구하는기회가왔으면한다. 예를들면중심지이론같은것을취락군집이많은울산, 충남지역유적등에활용해본다면어떨까. 이가운데어떤취락이교류의중심지역할을하고, 한지역의 center(city) 는어느곳이며주변취락 (village) 은어느곳으로설정할수있나, 양자간의관계는? 물자의제공과보호의관계등등이다. 4. 한국의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연구를해오면서가장 issue 가되었던중요주제를좀더부각시켜주었으면한다. 이를테면이런것이다 : 1) 1980년대중반부터여러연구자들이편년의개념을검토하기시작하였는데 ( 손병헌최성락이청규이희준등 ), 그이전부터오랫동안편년작업을해왔으나, 이론적기반을검토하거나 14C과연결시킨작업을한다는것은고고학의이론화작업에눈을뜨게되었음을의미할것이다. 2) 족장사회론 : 서구의이론을우리의청동기사회에접목 ( 대입이더어울리는 ) 시킬수있을까? 구미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49
에서공부하고온유학파들이많아짐에따라논의가시작되었고, 여기에는사회문화인류학자, 고대사학자들까지관심을보여주었으나뚜렷한결론을얻지못했다는아쉬움이있다. 한번논의가달아오르다식어버리면그만인경향이우리의사회풍토만이아니라지적풍토에도들어있을까? 지금쯤청동기시대의발전단계에대한정의는내려있어야하지않을까. 3) 청동기시대내의시기구분 ( 전-중-후기의 3구분. 조-전-중-후기의 4구분, 송국리식토기의위치등 ) 에대한현재진행형논의와그배경시기구분과밀접한역삼동, 가락동, 흔암리, 송국리등의 ( 뜨거운 ) 유형논의와그러한관심의배경 4) 청동기시대담당주민 : 이무렵에는문헌 ( 역사 ) 학을통한고찰도가능하나, 역시발굴자료를가지고분석하는생물인류학의역할이커졌으면좋겠고, 분석자료를계속축적해나가야할것이다. 5) 청동기시대의생업연구 : 청동기시대의농사짓기는자명하며발굴자료로는증거가확보되어있으나지형조건에따라도작, 수도작, 화전등다양한양상을띌것이다. 이시대에어로 (fishing) 는폐기되었는가? ( 조개더미적고, 그물추적다보니어로전공자들은대개내수면으로전환되었을것이라고추정함 ) 6) 청동기시대의의례, 장례의식, ideology 등을언제까지미루어두지말고무덤연구로부터시작해야하지않을까. 7) 한국청동기문화의영역을중국동북삼성, 연해주지역으로확대해보려는시도 : 과연애국심으로부터자유로운이성적입장에서, 동북공정의공세속에, 북한의연구성과도잘모르는현재, 선사시대주민집단의활동영역을어떻게규정할수있는것일까. 그리고그것이 전파일변도 의설명이아니기를기대한다. 250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51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252-259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 목차 강현숙 ( 동국대학교 ) 1. 한국고고학사에서김원용과원삼국문화 2. 고구려고고학연구사 3. 백제고고학사 1) 국가형성의고고학적지표? 초기고구려, 초기백제와원삼국과의관계 2)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의교차편년에서의문제 2-1) 승문타날회도 2-2) 교차편년과자연과학적연대측정법의효용성 3) 고총과관련된여러쟁점 3-1) 고분과역사기록 3-2) 횡혈식석실의해석 3-3) 지방의고총과위세품 4) 왕도와지방도시
삼국사기기록에의하면, 고구려, 백제는시간적으로원삼국의시간범주에공통분모를갖고있다. 고구려초기, 백제초기 ( 초기백제 ) 가시간적으로원삼국의범주에해당된다. 그러한의미에서원삼국, 고구려, 백제를포괄하여토론을부여한것으로생각된다. 그러나토론자의역량은각시대를대표하는연구자인발표자에미치지못하여서각론에대한구체적인토론에는한계가있을수밖에없다. 다만, 발표문에기초해서원삼국과고구려, 백제고고학에서함께고민해야할논제들은제시함으로써토론에가늠하고자한다. 1. 한국고고학사에서김원용과원삼국문화 이글은 원삼국시대 에서주요한것은김해토기와와질토기, 즉김해문화와원삼국시대라고파악한듯하다. 따라서김원용이김해문화 ( 김해기 ) 를대신한원삼국시대라는시대명을처음사용하게된학문적배경을정리하는데상당량을할애하였고, 김원용의고고학적인식은일제강점기하의역사인식의연장선상에있는것으로평가한듯하다. 물론발표자도언급하였듯이김원용의인식은당시고고학적상황을감안해보면당연한결과이기도하다. 그러나김원용이후의연구자들은원삼국시대라는용어가어떤배경하에한국고고학시대구분용어로자리하였는지에대한비판적검토없이, 원삼국시대라는용어에초점을둔나머지고조선과낙랑을한국고고학에서배제시킨결과를초래한것으로파악하였다. 그동안원삼국시대를둘러싼논의는크게두주제로나누어볼수있다. 하나는원삼국시대가한국고고학시대구분의용어로서적절한것인가하는문제로, 이에대해서는여러견해가제기되었고아직까지는한반도전체의고고학적상황을아우르는용어로서유효하다는견해가다수인듯하다. 다른하나는영남지방을중심으로한소위 와질토기논쟁 과관련된논의라고할수있다. 이논쟁은영남지방에서는와질토기에국한된문제라기보다는신라, 가야의분립과도연결되어서복잡한양상으로전개되어가고있고, 아직은합일된견해를마련하지못한실정이다. 따라서원삼국시대를둘러싼여러논의들은지속적으로자료에대한객관적분석과검증이이루어져야할문제라고생각된다. 다만, 논의의진전에는원삼국시대의사상을어떻게그릴것인가하는문제를염두에두어야한다는생각이다. 현재통용되는원삼국시대는시간적으로는선사에서역사시대로의과도기에해당되며, 공간적으로는한반도뿐아니라일부만주지역을포함하는광범위한개념이어서더더욱그러하다. 발표자가고조선이나낙랑을언급한것도같은이유에서라고생각된다. 따라서고조선 ( 위만조선포함 ), 그리고낙랑을한국고고학에서어떻게담아갈것인가하는문제가그하나로, 이경우한국고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53
고학에서다루는공간범위를어디까지범주화할것인가하는문제와도결부되어있다. 다른한편으로지역마다각기다른기원전1 세기부터 300년까지의고고학적상황을고대국가의형성과정이라는관점에서어떻게수렴하여원삼국시대라는개념을일반화시킬수있을것인가하는문제가있다. 이에대한발표자의대안이있는지궁금하다. 덧붙여원삼국시대의고고학연구는양적으로팽창할뿐아니라주제도형식편년일변도연구에서벗어나사회의여러측면으로확대되고있는데, 원삼국시대연구전반에대해발표자는어떻게평가하고있는지궁금하다. 2. 고구려고고학연구사 고구려가만주와한반도북부에걸쳐있었던까닭에국내외적정치환경에의해고구려고고학자료에접근이용이하지못하였고, 삼국중가장연구가부진하였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발표자도지적하였듯이고구려고고학연구는일제의식민지지배로인한왜곡에서시작되었고, 중국동북공정이라는학문외적요인에의해연구가활성화되는상황이되고말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여러관점에서고구려고고학연구가진행되어서일정한성과를내었고, 또진행중에있다. 발표자는연구동향과성과를 4시기로나누어정리하였다. 연구동향의시기구분이된 1945년, 1973년, 1994년은해방후, 북한의주체사상확립과중국의문화혁명, 그리고중국의대외개방등과맞물린다. 북한의경우고고학자료가정권의안정과선전에이용되었고, 대중화주의를표방하는중국도고구려고고학자료를정치적으로이용하고있기는마찬가지이다. 북한의동명왕릉과단군릉과관련된제견해들, 중국의집안의고구려왕릉비정등이그단적인예이다. 때문에해방후중국이나북한의정치적상황이연구에어떤영향을미쳤는가를함께고려할필요가있을않을까한다. 향후인식의차이를줄이기위한노력등이필요하다고생각되기때문이기도하다. 남한의연구도살펴볼필요가있다. 1990년대에들어서기전까지만하여도고구려사연구는문헌사학의전유물이었다고할수있고, 고구려고고학연구가본격적으로이루어진것은 1990년대후반이라도할수있다. 1990년대이후남한에서고구려고고학연구의증가는두단계로나누어볼수있다. 발표문의표와그림에서잘보이듯이 1990년대까지는완만한증가추세를보이다가 2000 년대들어서면서정점을찍고현재는차츰줄어드는추세이다. 1990년대는중국의개방정책에따른고고학자료에접근이가능하게됨에따른결과일것이며, 2000년대연구의급증은중국동북공정에따른고구려사연구에대한지원과관심이계기가되었을것이다. 따라서 2000년대들어서서고구려고고학연구의양적팽창이질적향상으로전환되었는지에대한평가가필요하지않을까한다. 문자화된고고학자료를이용할수밖에없는남한에서의고구려고고학환경을감안해볼때왜곡된 254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역사인식이반영된중국이나북한의조사보고를그대로신뢰할수없는상황이다. 중국이나북한의조사보고에대한비판적검증하에논문이진행되기도하지만, 중국이나북한의견해를차용한연구도적지않았다고판단되므로, 두차례계기가남한의고구려고고학연구에끼친영향에대한평가가필요하다고생각된다. 3. 백제고고학사 발표자는백제고고학연구의전반에대해개괄하고, 쟁점별로연구성과를소개. 평가하고향후연구과제를제시하였다. 주요쟁점에대한토론보다는발표자가정리한연구쟁점중에는백제고고학뿐아니라원삼국이나고구려고고학에서도함께고민해야할문제도있다고생각되어서함께대안을모색한다는차원에서논의해야할사항을몇가지를제시하고자한다. 1) 국가형성의고고학적지표? 초기고구려, 초기백제와원삼국과의관계백제의경우한성양식토기, 풍납토성이나몽촌토성과같은대규모축성사업, 고총, 위세품등이고대국가형성의지표로제시되고있는점에는별이견이없는듯하다. 그러나한성양식토기의출현시기나풍납토성의축성시기에관한논쟁은현재진행형인듯하며, 일부편년안을차용하자면, 원삼국의시간범주에해당되기도한다. 고구려의경우는고분의규모에초점을두자면고총은늦어도 2세기경에는등장하였지만, 고총을제외하고는중앙권력의상징으로볼만한검증자료는 4세기대에들어와서야확보되어서과연거대한고분이국가형성의지표가될수있을까하는의문이든다. 따라서고대국가형성의지표는무엇이며, 어떻게볼것인가, 일반화시킬수있는지표는있는가등등의문제는고민해보아야하지않을까한다. 이는원삼국시대와도관련된문제이어서더욱그러하다. 2)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의교차편년에서의문제원삼국이나고구려, 백제고고학연구에서교차편년에이용되는자료는두부류로나누어볼수있다. 하나는원산지가외부에있는경우이다. 가령, 원삼국시대편년의기준이되는중국화폐와한대동경, 삼국시대의중국자기와전문도기등이외부로부터온외래유물이다. 다른하나는소위 계 로표현되는 - 연계, 중원계, 낙랑계, 부여계또는북방계, 왜계등등 - 유물들이다. 전자에비해후자의유물들에는여러요인들이복합적으로작용하였음은주지하는바이고, 이와관련한여러연구성과도발표되었다. 그러나여전히특정유적이나유물의편년안에서는합일된의견을모으기쉽지않다.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55
2-1) 승문타날회도승문타날회도를연계로또는중원계로표현하고구분하지만, 중국에서사용하는중원은단순한공간적인개념이라기보다는시대에따라그의미가조금씩달리사용되었고, 전국의여러나라들도중화민족이라는개념에포함시켜중원으로이해하기도한다. 때문에연계와중원계에시간적의미를부여하고자한다면, 오해의소지가있어서개인적으로는연계와한계로표현하는것이더적절하다고생각된다. 낙랑계도마찬가지인데, 낙랑의긴시간을고려한다면단순히낙랑계라는표현으로단순화할수는없을것이다. 따라서니질승문회도를연계와중원계로구분하는것이적절한것인가? 적절하다면양자를판단하는기준이태토나제작기술등으로가능한것인가? 등은고민해야하지않을까한다. 결국연계와중원계로대표되는승문타날회도의정의가구체적이고명확할수있는가하는점은와질토기논쟁에서선결해야할문제라고생각되기때문이다. 2-2) 교차편년과자연과학적연대측정법의효용성안정적인교차편년안을마련하기위한여러전제가운데전파론적입장은동북아시아또는한국고고학에서암묵적인전제가되었고, 전파의방향이나소요시간, 배경등을고려하여교차편년하여야한다는점은누구나인지하고있다. 그러나문제는각지역마다축적된자료와연구역량의차이로검증을하기쉽지않다는데있다. 특정한지역유물의편년안이안정적이라고하더라도다른지역의유물편년에대입시키기위해서는앞의문제들에대한충분한검증이필요하지만, 정작고고학자료가검증할만큼축적되지못한경우가왕왕있기때문이다. 그일례가금속제기승용마구이다. 금속제기승용마구는만주지역으로부터고구려를거쳐한반도각국으로전해졌을것으로전제하지만, 전파의출발지나경유지보다전파의마지막지역이라고할수있는영남지역이나일본에서많은연구가축적되었다. 그러하다보니, 고구려나백제마구편년에신라, 가야마구의편년을차용하여연대를상향하거나역으로하향하기도하는데, 정작교차편년안을검증하고자하여도자료의한계로검증하기어렵다. 그러한점에서그동안역사고고학에서크게의미를부여하지않았던자연과학적연대측정법이고구려나백제역사고고학에서도활용할수있는가도고려해봐야한다고생각한다. 3) 고총과관련된여러쟁점고총은고대왕권국가의고고학적지표이자, 각국의정체성을보여주는상징물로이해되었고, 삼국의성장과발전을설명하는데있어서고분은절대적이었다고해도지나치지않을것이다. 그러나축적된고분자료의질과양이나라마다다르기때문에각론에대한연구성과는차이가있을수밖 256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에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고구려나백제고분해석에서고려해야될몇가지를점검해보고자한다. 3-1) 고분과역사기록고구려나백제는시간에따라영역을확대하여갔다. 고구려의중앙은특정지역에제한적으로분포하는고분형식을통하여, 지방의경우각지의성을통해영역확대과정과지방지배의일면을유추할수있다. 백제는이와는사정이조금다른데, 한성기에서는고분형식보다는특정한토기양식, 위세품금속제관식과관모, 중국제자기등을통해서영역확대와그에따른중앙과지방의관계를설명한다. 중앙과지방과의관계도근래백제고고학자료의증가추세에따라서자세한관찰은물론자연과학적접근등여러방법론이결합되어서새로운관점의해석들이행해지고있다. 사여와사여방식, 지역편제방식, 외부정치체와의교섭, 교류시스템등은백제고고학연구가이룬진전된성과라고할수있다. 그러나여기서고구려나백제고고학공히고민해야할점은고고학자료와문헌기록이꼭일치하지않는다는점이다. 일례로, 부여에서출자한주몽이고구려를건국한것으로전하지만정작고구려초기자료에서부여의모습은가시적이지못하고, 초기도성에대해서도여러이견이상존하고있는실정이다. 이는백제의사정도마찬가지여서비류와온조가고구려에서내려왔다고전하지만, 한강유역의적석총은고구려적석총과는차이가있으며, 시간적공백도있다. 발표문에서제시한왕흥사지도마찬가지이다. 역사고고학에서고고학자료와역사기록의이러한문제는고고학학문의정체성과관련된문제이어서지속적으로논의가필요한문제라고생각된다. 3-2) 횡혈식석실의해석묘제가전통을고수하려는경향이강하고, 무덤을축조한사회의전모가반영되었을것이는전제에서, 횡혈식석실은집단의계보나대외교류, 사회내위계, 중앙과지방의관계등여러해석의도구로이용되어왔다. 횡혈식석실의등장배경이나시기는삼국이각기다르지만, 삼국에서공통된묘제이므로이를통하여삼국의관계를풀어낼여지는적지않다. 한강유역의횡혈식석실이그한예이다. 마한의한소국이자리하였던한강유역은백제의왕도가되었고고구려에점유되었다가최종적으로는신라의영역이되었던곳인만큼한강유역의횡혈식석실은축조와사용주체를분리해서생각해야한다. 실제서울가락동3 호분이나안성장원리나청원주성리의한성기축조된백제석실에서신라토기의부장이확인된바있다. 한편, 중부지역의신라고분군내에 1, 2기의고구려고분이혼재된양상등으로부터한강유역을둘러싼복잡한정치상황을유추한연구성과들도있었다.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57
여기서고려해야될점이바로, 횡혈식석실구조가과연국적판단에유효한가, 유효하다면유효한속성은무엇인가? 하는문제이다. 이는비단한강유역의문제에국한된것이아니라영산강유역의구주계석실이나전방후원형분의석실해석에있어서쟁점이되기때문이기도하다. 여러기술이집약된하나의완성된건축물로서석실을소위낙랑계, 고구려계, 백제계, 구주계, 혹은왜계등단선적인관계로표현할수도있지만, 사회관계망이복잡할수록축조배경과과정, 피장자의관계는복잡하기때문이다. 3-3) 지방의고총과위세품고구려의경우고총은왕도에제한되는경향을보인다. 물론, 5세기중엽이후가되면지방의중심지마다대형분이자리하여서초대형분을정점으로고분의위계가일원화된모습을보여준다. 반면, 백제의경우각지에서고총이자리하여서고구려와는다른양상으로, 여러해석을가능하게한다. 더욱이백제지방각지의고총에부장된다종다양한유물가운데금동관이나관식, 신발, 장식대도등의위세품이포함되어있다. 개별위세품개개에대한다양한각도에서의연구성과가있었지만, 아직도지방편제방식에치중된경향을보인다. 따라서지방의고총과위세품이해당지역내에서차지한위상이나성격에도관심을가질필요가있고, 또제작기술이나상징, 의례등미시적관점에서의접근도필요하지않을까하는데그에대한연구는어느정도이루어졌는지궁금하다. 4) 왕도와지방도시도성은고분에비해아직은많은연구성과가축적되지는못하였지만, 근래들어와서관심을갖고연구가시작되고있는단계라고할수있다. 고구려의경우평지성과산성, 고총을결합한도성의구성과경관, 의례등에대한연구가진행되고있고, 백제의경우연기나성리등지의자료로지방도시에대한연구도축적되었다. 따라서왕도와지방도시연구에서고려해야할점들을고려해보아야하지않을까한다. 이상과같이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에서고려해야할문제들을일별하다보니, 고고학적인식에차별을두는것은아니지만, 일부연구는전통고고학적인식에서, 또일부는일보전진하여과정주의고고학적인식에서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한편으로는한국원사와역사시대고고학연구에서공히부딪치는문제인고고학자료와문헌기록사이에서고고학자료해석에문헌기록을무비판적으로적용하지않았나하는반성도하게된다. 이는향후한국원사, 역사고고학에서끊임없이관심을가져야할문제이다. 이의해결을위한첫출발은안정적이고신뢰할만한고고학자료의축적에있고, 이는객관적이고과학적인발굴조사의완전성을담보할때가능할것이다. 258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두서없이나열하다보니, 발표자의논지를잘못이해한부분도있을것이며, 연구성과를충분히 소화하지못한점도있을것이다. 발표자들의양해를구한다. 원삼국, 고구려, 백제고고학사발표에대한토론강현숙 259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pp. 260-263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와 중 근세고고학사 를읽고 목차 이희준 ( 경북대학교 ) 1.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에대한토론 2. 중 근세고고학사 에대한토론
한국상고사학회에서는이번제43회학술대회의주제를야심차게 한국의고고학사Ⅰ 이라정하고토론자에게의뢰공문을보내면서 한국고고학사를쉽고체계적으로정립하는토대를마련하기위한것 이라고하였다. 그런데고고학사란무엇인가? 개론서이기는하지만콜린렌프류 폴반의 현대고고학의이해 (21쪽) 에따르면고고학의역사를대개대발견 ( 즉발굴 ) 의역사로여기고있지만그렇지않다고하면서고고학의역사란첫째로는과거를바라보는인식, 이론및시각의역사이고그다음으로는이런인식들을갖고과거에관한질문들을탐구하면서여러가지방법들을발전시켜온역사이며실제발견의역사는단지그다음일뿐이라고하였다. 이런관점에서보면두발표문은고고학사연구에서다루어야할위의세가지측면들가운데우선순위로맨마지막에해당하는문제에만거의초점을맞춘셈이다. 하기야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의맺음말에서 학회의부탁은신라 가야고고학사의서술이었다. 물론발굴사를중심으로서술해달라는것이었다. 고하였으니당연한결과라고할수도있겠다. 그래서신라 가야분야발표문은제목자체가아예 발굴사 가되었다. 그럼에도중 근세분야는 Ⅱ. 유적조사의진전과성과 와 Ⅲ. 연구의진전과과제및방향 으로나누어유적발굴의역사와그에입각한연구의역사라는두부문을다룸으로써비유해말하자면두마리토끼를잡고자하였다. 하지만, 잘알듯이두마리토끼를잡기란지극히어려운일이다. 사실고고학에서발굴및그성과가연구의토대를이루기는하지만그렇다고해서발굴사가곧고고학사로환치되지는않는다. 또각시대의연구사를모으면곧그대로한국고고학사가나오는것도아니다. 이런점에서앞으로한국고고학사에어떻게접근해야할지의방법론에관한심각한고민이있어야할것으로보이고, 나아가한국상고사학회에서앞으로 한국의고고학사Ⅱ 만이아니라, Ⅲ, Ⅳ 아니어쩌면 Ⅹ 까지열어야할지도몰라종합토론에서도그런문제들을우선적으로논의해야하는것이아닌가싶다. 따라서여기서는두발표문의구체적내용보다는앞으로고고학사를서술하는데필요한시기구분등전체틀에관련된사항에초점을맞추어약간의코멘트와질문을하고자한다. 두발표문에대한토론문을하나로통합한소이이기도하다. 1.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에대한토론 가 ) Ⅲ. 발굴성과와진전 가운데 1. 발굴대상의변천과의의 는고고학사 ( 여기서는발굴사 ) 의 견지에입각한분석과해석이라할수있지만 2. 성과와진전 은실은현단계의고고학자료에입 각해신라 가야에관한몇가지주요주제에대한발표자의종합적이해를피력한것이다. 그래서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와 중 근세고고학사 를읽고이희준 261
실은고고학사와직접관련은거의없어보이는데? ( 다만, 그에서거론된각주제는위에거론한고고학사의분야가운데두번째우선순위에관련된질문들로서앞으로신라 가야고고학사를정리할때기준되는논점들은충분히된다고볼수는있다.) 나 ) 신라 가야고분발굴사를네시기로구분하면서일인학자주도의제1기 (1910-1945) 를설정하였는데이제1기는한국고고학사안의전기 ( 前期 ) 혹은초기로보아야할것인가아니면아예조선후기호고가의시대와더불어전사 ( 前史 ) 로보아야할것인가? 다 ) 발굴을주도한기관의성격을기준으로삼아발굴사의네시기를설정하였는데일견타당하지만그것이진정한고고학사라할고고학연구사의획기로환치될수있는지는더깊이검토해야한다. 그것을점검할수있는방안이있다면? 즉발굴성과가바로연구에유기적으로반영되었음을확인할수있는지? 라 ) 이와관련된질문으로토론자는제4기 (1994년이후현재까지 ) 신라 가야고분발굴의가장중요한특징가운데하나로기왕과달리중대형고총중심이아니라소형고분군집분이대대적으로발굴된점을들고싶은데, 수백기의무덤이발굴보고된사례들에서과연그간무엇을이끌어내었는지는회의적이라서발굴성과가반드시바로연구에반영되는것은아니라는생각도든다. 때로는그사이에상당한시차가있기도한듯하므로고고학사를정리할때양자를유기적으로검토하는방안을강구해야할듯하다. 마 ) 영남지방의삼국시대라하면대개신라 가야시대를대상으로하는통례에따라중고기의고고학에대해서는생략하였는데사실중고기가운데 6세기중엽이후 7세기중엽까지의고고학조사및연구가거의사각지대에놓인현상을알게모르게의식한때문은아닌지? 2. 중 근세고고학사 에대한토론 가 ) 발표자가세개의시대를다루면서분야로는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으로네개분야를대상으로했기때문에방대한자료를혼자감당해야했을부담이느껴진다. 이는학회에서발표자수를되도록줄임으로써효율을기하고자한점도작용한것이지만기본적으로는한국고고학각시대연구의현실을보여주는것이기도하다. 어떻든그런만큼한정된지면속에각분야의성과를제대로다루기는어려울수밖에없었다하겠다. 이를테면진주무촌유적의발굴성과를토대로고려와조선시대의예제를다룬논문 ( 崔鍾圭, 고려 조선의예제 鐵箱集 Ⅰ- 葬送 - ( 도서출판考古, 2014) ( 原載 晋州武村 Ⅱ, 경남고고학연구소, 2004) 이있으나그에대한언급이없이... 당시예제를실천하였는지등이향후검토되어... 라고한데서그런점을엿볼수있다. 앞으로는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각분야를분담해서하는쪽이바람직한것은아닌지? 262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대회 - 한국의고고학사 Ⅰ
나 ) 한국고고학의시대구분은역사시대이후로대개왕조에따라자연스럽게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로나누기때문에중세고고학및근세고고학이라는시대혹은분야설정이굳이필요했나싶다. 특히중세는그기점혹은종점이어디에있든일단편의적일수밖에없다고생각하는데통설로는고려시대를기점으로하나경제사등일각에서는통일기초인신문왕대이후를중세로잡기때문이다. 한편근세라는용어는시대사적용어가아니다. 즉일본의에도시대를근세라함을원용해조선전기에대해그렇게규정하기도하였으나이제와서는거의사용되지않는용어로알고있다. 그대신에고려시대를중세전기로하고조선전기를중세후기로한다거나 ( 이경우조선후기는근대도입기또는초기등으로하는데, 다만통설은개항기를근대로한다.) 조선전기를중세중기, 후기를중세후기로하는등이라서우리의고고학현실과는맞지않은용어라고하겠다. 다 ) 고고학사를논하려면당연히시기구분이이루어져야하는데그것을명확히설정하지는않은점이눈에띈다. 다만, Ⅱ. 유적조사의진전과성과 에서는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시대의유적에대해거의공통되게일제강점기~1980년대 /1990년대/2000년대이후라는세단계로나누어검토를하였는데이는시기구분을그렇게한다는뜻인지? 만약그렇다면그근거는무엇인지? 라 ) 고고학사를주제로하면서 과제와방향 에너무큰비중을두고다룬것은아닌지싶다. 그것은학술대회의주제가해당분야의연구현황과과제였다면딱맞지만고고학이지나온길을검토하는데서는어울리지않는다고여겨진다. 마 ) 서술내용중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따를때눌지마립간 13년 (429) 에쌓았다는시제 ( 矢堤 ) 의실물이경주에서확인되었다고하였는데어떤유적을말하는것인지? 신라 가야의고분발굴사 와 중 근세고고학사 를읽고이희준 263
韓國上古史學會 한국상고사학회운영위원회 회 장김승옥 전북대학교 부회장성정용 충북대학교 총 무이종철 전북대학교박물관 편 집이영철 대한문화재연구원 운 영김경택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재홍 국민대학교 신숙정 한강문화재연구원 이성주 경북대학교 조상기 중앙문화재연구원 최종택 고려대학교 총무간사신민철 전북대학교박물관 편집간사이혜연 대한문화재연구원 54896 전라북도전주시덕진구백제대로 567 전북대학교박물관내한국상고사학회전화 (063)270-3490, 팩스 (063)270-4710, http://www.sanggo.or.kr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ical Society Chonbuk National Univ. Museum, 567, Baekje-daero, Deokjin-gu, Jeonju-si, Jeollabuk-do, 54896, Korea 제 43 회한국상고사학회학술발표대회 인쇄 : 2015년 8월 25일발행 : 2015년 8월 25일편집인쇄 : 진인진 02)507-30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