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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2. 興輪寺와 謙益 - 109 - 한국 최초의 인도구법승 겸익의 활동은 대통사의 창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 만 겸익의 귀국연도가 대통사가 창건되었다고 주장하는 527년30)의 바로 1년 전이면서, 필자가 주장하는 525년 바로 1년 후인 526년이라는 점에서 당시 백제 불교계를 살피는 데 빠져서는 안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겸익의 인도구법의 의미를 강조한 바 있고31) 나아가 성왕대 겸익의 활동을 유 불의 대립측면에서 파악한 바가 있다.32) 겸익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 시기는 무령왕 말년, 정확히 무령왕 22년(522)이었다.33) 인도유학하는 도중 523년 무령왕의 죽음 등의 이유로 귀국길을 서둔 겸익은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더불어 불교경전을 가지고 526년 백제 웅진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의 겸익의 활동에 대해서 미륵불광사사적 은 다음과 같 이 전하고 있다. 백제왕은 우보와 고취로 謙益을 교외에까지 나아가 맞이하고 그를 興輪寺에 안치시켰다. 이 곳에서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인을 불려들여 겸익과 함께 律部 72권을 번역케 하였다.34) 백제에 귀국한 겸익은 興輪寺에 주석하면서 율장번역사업을 주도하였다. 미륵불광사 사적 에 전하는 興輪寺에 대해서는 미륵불광사사적 의 사료신빙성의 문제 때문에 그 동 30) 527년은 통설이면서 삼국유사 가 인용한 국사 의 주장. 31) 趙景徹, 앞의 논문(1995.12). 32) 趙景徹, 앞의 논문(2000.12). 33) 최근 심경순(앞의 논문, p.9)은 겸익의 入竺年代를 512년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보는 입축 연대인 522년 보다 10년이 앞선다. 심경순은 그 이유는 첫째 겸익의 입축구법 활동기간을 종 래 522-526년 5년간으로 보았는데 5년의 구법 기간은 너무 짧다는 것이다. 둘째는 彌勒佛光 寺事蹟云 百濟聖王四年丙午 沙門謙益 矢心求律 航海以轉至中印度常伽那大律寺 學梵文五載 洞 曉竺語 深功律部 莊嚴戒體 與梵僧倍達多三藏 齎梵本阿曇藏五部律文歸國 百濟王 以羽葆鼓吹 郊 迎 安于興輪寺 召國內名釋二十八人與謙益法師 譯律部七十二卷 是爲百濟律宗之鼻祖也 於是 曇 旭惠仁兩法師 著律䟽三十六卷 獻于王 王作 毘曇新律序 奉藏于台耀殿 將欲剞闕廣佈 未遑而薨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上中) 彌勒佛光寺事蹟, 寶蓮閣, 1918, pp.33 34) 가운데 밑줄 친 學梵文五載 洞曉竺語 深功律部 莊嚴戒體 의 번역을 범어를 5년 동안 배워 인도말에 능숙 했으며 율부를 깊이 공부하고 계체를 장엄하였다 로 번역하지 않고 범문을 5년 동안 공부하여 범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 율부를 공부하여 계체를 장엄하였다 라고 해석하여 인도에서의 체류기간을 512-526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겸익이 인도로 간 1차적인 이유는 범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율을 공부하러 간 것이다. 겸익은 이미 인도로 떠나기전 범어를 알고 있었으며, 인도에 가서 배운 범어는 보다 심화된 내용이었을 것이다. 겸익의 귀국이 앞당겨진 또 하나의 이유로 무령왕의 죽음도 고려 해 볼 필요가 있다(趙景徹, 겸익-인도로 간 승려, 불교정치를 실현 백제를 빛낸 인물 미 간행, 부여군). 34)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上中) 彌勒佛光寺事蹟, 寶蓮閣, 1918. 원문은 주34)를 참조.

- 110 - 國史館論叢 第98輯 안 관심밖에 있다가 미륵불광사사적 의 사료로서의 가치가 긍정되면서35) 적극적으로 검 토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흥륜사의 창건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겸익이 526년 성왕 4년에 귀국해서 머문 절 인 흥륜사가 526년 이전에 창건된 절이라는 데는 異見이 없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어디 까지 소급시킬 수 있을까. 첫번째 성왕대 흥륜사가 창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6)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 멸신조 분주의 흥륜사를 百濟의 흥륜사로 보고, 이 흥륜사가 미륵불광사사적 의 흥륜사 와 같다는 전제에서의 주장이다. 두번째 무령왕대 흥륜사가 창건되었다는 주장이 이어서 제기되었다.37) 겸익이 무령왕 의 명에 의해 인도로 갔다는 점을 강조해서 내린 추정이다. 겸익이 인도로 떠나기 전 흥 륜사에 머물러 있었고 성왕대 귀국해서도 흥륜사에 머문 셈이 된다. 첫번째 견해는 성왕대 흥륜사가 창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 이유로 제 시한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 분주기록의 흥륜사가 백제의 흥륜사라는 점에는 다 소의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종흥법염촉멸신조 분주의 흥륜사는 新羅의 興輪 寺일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 견해는 대통사의 창건연대와 결부시켜 생각한다면 타당성이 있다. 대통사의 창 건연대를 종래의 통설대로 527년 혹은 필자의 주장대로 525년경이라면 그 이전에 성왕 이 흥륜사를 지었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흥륜사가 성왕대 이전에 지어진 절이라면 흥륜사의 창건연대는 무령왕대 보다 앞선 동성왕대까지 소급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음 흥륜사의 성격에 관한 문제이다. 미륵불광사사적 의 흥륜사에서 율장번역 사업 이 이루어졌으므로 흥륜사가 律寺 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興輪寺의 輪 은 흔히 전륜성왕이 굴리는 정법의 바퀴 라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미륵신앙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 미륵경전에 의하면 미륵이 하생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 전륜성왕이 세 상을 다스린다고 되어있다. 특히 미륵상생신앙에 의하면 도솔천에 왕생하려면 律 을 잘 지켜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으므로 율과 미륵신앙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이와 같 은 점을 염두에 두고 신라의 흥륜사에 대한 연구성과를 백제 흥륜사에 대비시켜 보기도 하였다.38) 35) 小玉大圓, 求法僧謙益とその周邊(上 下), 馬韓百濟文化 8 10, 1985 1987; 彌勒思 想의 本質과 展開 (文山金三龍博士古稀紀念) 韓國思想史學 6, 瑞文文化社. 趙景徹, 앞의 논 문(1995.12), pp.44 47. 36) 趙源昌, 앞의 논문(1999.12), p.122과 趙源昌, 百濟 瓦積基壇에 대한 一硏究 韓國上古史 學報 33, 2000.11, p.113 주29). 37) 盧重國, 앞의 논문(2000.12), p.131.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11 - 대통사를 다루면서 흥륜사의 율장번역을 강조하는 이유는 당시 백제의 불교문화역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중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도에서 범본 율장을 가져올 정 도로 백제는 중국이나 인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겸익의 귀국을 전후하여 창건 된 대통사를 단지 중국의 양무제를 위해서 지었다고 본 것은 당시 백제의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온 것이다. 흥륜사를 언급한 또 한가지 직접적인 이유는 대통사와의 관 련성이다. 성왕대 이전에 창건된 興輪寺는 미륵신앙에 입각한 전륜성왕사상에 의해서 창 건되었지만, 다음 절에서 살펴 볼 大通寺는 법화사상에 근거를 둔 전륜성왕사상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法華思想과 大通佛 대통사의 창건연대와 창건목적에 대한 오해는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대한 사료비판이 부족한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제시한 원문과 번역문을 다시 살펴보 겠다. 原文; ① 又於大通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 ②(熊川卽公州也 時屬新羅故也 然恐非丁 未也 乃中大通元年己酉歲所創也 始創興輪之丁未 未可及於他郡立寺也)( 三國遺事 卷3 興 法3 原宗興法厭觸滅身條). 번역; ① 또 大通 元年(527) 丁未에 梁나라 황제를 위하여 熊川州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大通 寺라 하였다. ②(熊川은 곧 公州이니 당시는 新羅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丁未年은 아닐 것이요 바로 中大通 元年 己酉에 세웠을 것이다. 興輪寺를 세우던 정미년 에는 다른 고을에 까지 절을 세울 짬이 미처 없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는 보통 一然의 저술이라고 여겨지지만 위의 인용 구절은 그렇게 생각하기 에는 의심쩍은 부분이 있다.39) 위 인용문 ①의 기사를 일연이 썼다면 그는 三國의 遺事 를 쓰면서 삼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全無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527년 신라의 법 흥왕이 당시 백제의 수도인 熊津에 양나라 황제를 위해서 대통사를 지었다고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 ①은 일연이 직접 쓴 기사가 아니고 지금은 전 하지 않지만 일연이 참조한 國史 의 기록을 그대로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轉載한 것일 38) 盧重國, 앞의 논문(2000.12), pp.130 141. 39) 필자는 이전 논문에서 위 ①의 기사와 ②의 분주를 일연이 썼다고 보았으나 여기서 정정한다 (趙景徹, 앞의 논문(1999.6), p.36).

- 112 - 國史館論叢 第98輯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위 대통사 관련사료 앞부분에 언급된 사료를 함께 제시해 본 것이다. 國史云 建福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壞 未幾眞興王妃比丘尼卒 按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 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亦出家爲尼 而非永興寺之創主也 則恐眞字當作法 謂法興之妃 巴刁夫人 爲尼者之卒也 乃創寺立像之主故也 二興捨爲出家 史不書 非經世之訓也 ①又於大通 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 ②(熊川卽公州也 時屬新羅故也 然恐非丁未也 乃中大 通元年己酉歲所創也 始創興輪之丁未 未可及於他郡立寺也)( 三國遺事 卷3 興法3 原宗興法厭 觸滅身條). 國史 의 기록에 대하여 일연은 의 비판을 통해서 의 眞興王妃를 法興王妃로 바 로 잡고 있다. 다음 ①의 기록은 又 字로 시작되므로 에 이어진 國史의 기록일 가능성 이 높다. ②는 國史의 기록에 대한 삼국유사 판찬자의 分註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재라고 가정할 때도 전재의 담당자는 일연이 아니라 일연의 門徒40)일 확률이 높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를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모으는 중에 백제 관계기 사로 넘어가야 할 ①의 기사가 일연의 문도에 의해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잘못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잘못 들어간 ①의 기사에 덧붙인 ②의 분주도 당연히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음은 물론 이다. 당시 웅진은 엄연히 백제의 수도였으며 신라의 땅이 아니었다. ①의 기사는 물론이 고 ②의 분주도 일연이 쓴 것이 아니다. 신라 법흥왕이 웅진에 대통사를 지었다고 잘못 알고 있던 일연의 문도가 527년 신라의 흥륜사가 창건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대통사까지 지을 수 없다고 논단하면서 대통사의 창건연대를 중대통 원년 529년으로 바로잡고 있다. 한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해가 이에 대해 왜곡된 해석이 덧붙여 질 수 있음을 보여주 는 사례다. ②의 분주는 엄연히 역사적 사실과 다름을 인정할 수 있지만 ①의 기사가 백제관계 기 사라면 믿을 수 있는 사실인가. 즉 ①의 기사를 또 大通 원년 정미 527년에 (백제의 성 왕이) 웅진에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이름을 大通寺라 하였다 라고 바꾸어 해석한다면 역사적 사실과 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삼국유사 편찬자들이나 ①의 기사를 썼던 그 이전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은 백제에 대통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호불군주인 양무제의 履歷은 당시 불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대통이 양무제가 사 용한 연호이므로 대통사는 대통연호를 쓴 양무제를 위해서 지어진 절이라고 속단한 것으 40) 여기서 문도란 삼국유사 편찬에 참여한 사람을 말한다.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13 - 로 생각된다. 더구나 고려말의 승려들은 선종의 初祖로 알려진 달마가 대통 원년 527년 양무제와 나눈 유명한 대화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41) 필자는 대통사의 창건연대를 단지 大通 이란 연호에 맞추어 大通元年인 527년이나 中 大通元年인 529년으로 보는 견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대통 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다 고 해서 모두 대통연간과 관련을 맺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대통 이란 명칭이 대통 연간과 관련이 없는 한 예로 양나라 普通 4년(523)에 주조된 大通錢이란 철전이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또한 대통사의 창건목적을 단지 양무제의 연호인 대통 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금석문 자료에 의하면 백제는 연대를 표시할 때 중국의 연호는 물 론이고 자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간지를 사용하였다. 양무제의 대통 이란 연호를 따 서 절 이름을 지을 정도라면 당연히 연대표시에 중국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백제가 중국 양나라에 문화적으로 경도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황제를 위해서 절을 지었다 고 본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42) 따라서 필자는 대통사의 창건배경을 다른 관 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한다.43) 다음은 法華經 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轉輪聖王>44) 그[지적보살]의 할아버지인 轉輪聖王은 1백 대신과 백천만억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도량에 나가 大通智勝如來를 다 같이 친근하고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려고 머리 숙여 예배한 뒤, 부처님을 돌고서는 일심으로 합장하고 세존의 존안을 우러러 보면서 게송으로 말하였느 리라( 法華經 化城喩品).45) <大通佛>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한량 없고 가없는 불가사의 아승지겁에 한 부처님이 계시었으니, 이름은 大通智勝 如來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었느니라. 그 나라의 이름은 好城이요, 겁의 이름은 大相이었느니라 ( 法華經 化城喩品).46) 41) 양무제가 자신의 불교 공덕이 높음을 자랑하자 달마는 그와 같은 공덕은 겉으로 드러난 외형 에 불과할 뿐이요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구제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통박하였다. 42) 무령왕 誌石에 나와있는 年月日을 계산하면 성왕대 백제가 사용한 달력은 梁나라의 大統曆이 아니라 宋나라의 元嘉曆이었다. 백제는 양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기는 했으나 영향력의 상징인 달력은 양나라가 아닌 송나라의 달력을 채용했던 것이다. 이는 백제가 나름대로 자신의 처지 에 맞게 문화를 받아들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43) 대통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趙景徹의 앞의 논문들에서 단편적으로 제시된 바가 있다. 44) <轉輪聖王> 이하 <大通佛> <智積菩薩> <釋迦牟尼佛>의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45)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동국대학교역경원, p.170. 46)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동국대학교역경원, p.168.

- 114 國史館論叢 第98輯 <智積> 여러 비구들아, 大通智勝 부처님께서는 10소겁을 지나서야 부처님의 법이 그 앞에 나타나 게 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느니라. 그 부처님께서 아직 출가하시기 전에 열 여섯 의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 아들의 이름은 智積이다. 모든 아들은 저마다 갖가지 보배롭고 기 이한 기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그 보배 로운 기구들을 다 버리고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가니 그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보내 었느리라( 法華經 化城喩品).47) <釋迦牟尼佛> 여러 비구들아, 내 지금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그[大通智勝] 부처님의 제자 열 여섯 사 미48)는 지금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시방의 국토에서 현재 설법을 하되,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보살과 성문이 그들의 권속이 되었느니라. 그 가운데 두 사미는 동방에서 성불 하니, 첫째이름은 아촉으로 환희국에 계시고, 둘째 이름은 수미정이니라. 동남방의 두 부처 님은 그 첫째 이름이 사자음이고, 둘째 이름은 사자상이며, 남방에 계시는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허공주요, 둘째 이름은 상멸이며, 서남방의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제상이요, 둘째 이름은 범상이며, 서방의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아미타요, 둘째 이름은 도일체세간고뇌이 며, 서북방의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다마라발전단행신통이요, 둘째 이름은 수미상이며, 북방의 두 부처님은 그 첫째 이름이 운자재요, 둘째 이름은 운자재왕이며, 동북방의 부처님 의 이름은 괴일체세간포외며, 열 여섯째 부처는 나 釋迦牟尼佛이다. 이 사바세계에서 아뇩다 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느니라( 法華經 化城喩品).49) 장황하기는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法華經 의 化城喩品 구절을 인용해 보았다. 법 화경 에는 火宅의 譬喩 나 窮子의 譬喩 등 재미있고 교훈적인 내용이 아름다운 필체로 서술되어 있다. 위에 인용한 화성유품도 高麗佛畵에서 자주 애용되는 소재로서 고행에 지 친 이들에게 신기루의 化城을 보여주어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케 해 준다는 유명한 비유 를 설하고 있다. 이러한 화성유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부처가 大通智勝如來이다. 대통지승여래는 大 通智勝佛, 大通佛로 略하여 부르기도 한다.50) 대통불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에 전 륜성왕의 태자였다. 부처가 되지 않았다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이었다. 태자인 그가 출 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대통불이 되자 대통불의 16명의 아들들도 아버지를 따라 출가하게 된다. 전륜성왕은 아들인 대통불에게 예경하고자 직접 찾아가 대통불에게 찬탄의 글을 올 린다. 대통불을 따라 나선 16명의 아들들도 모두 부처가 되어 大通佛의 國土를 수호하게 47)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동국대학교역경원, p.170. 48) 대통불의 열 여섯아들이 출가를 하여 이제는 열 여섯의 사미가 된 것이다. 출가전에는 아들 이었지만 출가해서는 사미가 되었으므로 아들과 사미는 내용적으로 같은 사람을 가르킨다. 49)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동국대학교역경원, p.186. 50) 大通智勝佛( 添品妙法蓮華經 大正藏 9-157b). 大通佛( 佛名經 大正藏 14-182a 및 耘虛 龍夏 著, 佛敎辭典 東國譯經院, p.164)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15 - 된다는 내용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불교는 법화신앙이라 불릴 만큼 이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다.51) 특히 법화독송에 능한 백제 승려가 중국 고승전에 入傳될 만큼 법화경 은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경전이었다. 위 인용한 법화경 화성유품도 불교신자들 사이에 회 자되는 내용이었고 웬만한 이라면 大通佛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백제인들은 대통사의 大通이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법화경 의 大通佛이 라는 사실도 덧붙여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법화경 의 대통지승여래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 사람이 그 아버지인 轉輪聖王이었다 면, 백제의 웅진 대통사에 모셔진 부처님을 찾아 예배드린 인물은 대통사를 창건한 백제 의 聖王이었다. 聖王의 이름은 명농이니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영명하고 일을 잘 판단하였 다. 무령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매 나라 사람들이 聖王이라고 불렀다( 三國史記 聖王條). 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고 겸하여 표문을 올려 모시박사와 涅槃經 등의 주석서와 공인, 장인, 화사등을 청하였다( 三國史記 聖王 19年). 백제의 성명왕(다른 이름은 聖王)은 서부희씨 달솔 노리사치계를 등을 보내 석가불금동상 1구와 번개약간과 경론 약간권을 보냈다( 日本書紀 欽命紀 13年). 백제의 성왕은 웅진천도 이후 백제의 정치, 경제, 사상등 모든 면에서 업적을 남긴 왕 이며 불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도의 구법승 겸익을 통해 백제의 율을 정리 하고 열반경 등의 주석서를 중국에서 구하며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줄 정도로 국제적인 감 각도 뛰어났었다. 성왕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결국 불교의 손을 들어줬지만 유교와 불교의 조화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52) 나라 사람들이 聖王이라 불렀다면 이는 불교의 이상 군주인 轉輪聖王의 의미로 불렸을 것이다. 법화경 전륜성왕의 아들은 출가하여 대통불이 되었지만, 백제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 은 어떠했을까. 백제의 餘昌[威德王]이 제신에게, 나는 지금 죽은 父王을 위하여 출가하여 수도하려고 한다 고 말하였다. 제신과 백성이, 이제 군왕이 출가하여 수도를 하겠다는 것은, 잠시 가르 51) 安啓賢, 金煐泰, 趙景徹의 앞의 논문. 52) 趙景徹, 앞의 논문(2000.12), pp.21 25. 백제의 유교정치이념에 대해서는 李基東, 百濟國 의 政治理念에 對한 一考察 - 특히 周禮主義的 政治理念과 關聯하여- 百濟硏究 17, 1990 을 참조.

- 116 國史館論叢 第98輯 침을 받드는 것입니다. 아, 전에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후에 큰 화를 부른 것은 누구의 잘못이었습니까. 고구려, 신라와 다투어서 백제가 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 나 라를 세운 이래 이 나라의 종묘의 제사를 어떤 나라에 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지켜야 할 도 리를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노인들의 말을 잘 들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처지에는 이 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건대 전과를 뉘우치고 출가하는 것을 그만 두십시오. 만일 성명왕 의 명복을 빌자는 원을 풀 것을 생각하신다면 국민을 출가시키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알았다 라고 대답하고, 신하와 상의하였다. 신하는 100인을 출가시켜 많은 번개를 만들고 여러 가지 공덕이 있는 일을 하였다( 日本書紀 欽命紀 16年). 백제 威德王 13년 정해년에 누이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 창왕명사리감 ).53) 백제 성왕은 신라와 싸우는 아들 여창을 돕기 위해 가는 도중 신라군의 매복을 만나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30세의 위덕왕은 진정으로 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신료들은 관산성 패전의 책임을 따지듯 신 랄한 비판을 퍼붓고 왕의 출가 대신 100명의 승려를 출가시키라고 한다. 이러한 비판은 백제 성왕과 여창의 친불교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54) 위덕왕의 출가 배경에는 아버지 (전륜)성왕이 죽었지만 법화경 의 대통지승여래처럼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속세의 군왕의 출가는 며칠 간의 상징적인 출가겠지만, 관산성 패전 이후 침체된 정국 분위기를 불교를 통해서 안정 시키는데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위덕왕은 죽은 부왕을 위하여 부여 능산리에 陵寺를 조 영하여 명복을 빌고 누이와 함께 사리를 공양하고 구세관음상이란 불상도 조성하는 등 대통지승여래 못지 않게 불교에 돈독하였다.55) 한편, 법화경 대통지승여래의 아들 16명도 출가하여 부처가 되었는데, 백제 위덕왕 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서에 전하는 위덕왕의 아들은 阿佐와 法王, 武王 3인이다. 이중 일본서기 에 전하는 阿佐는 위덕왕의 아들임에 틀림없지만 보통 法王은 위덕왕의 아들로 보지 않고 위덕왕의 동생인 惠王의 아들로 보고 있다. 하지만 위덕왕계이든 혜왕 계이든 法王은 백제 성왕의 孫子이므로 성왕이 의도한 법화경 의 전륜성왕-대통지승여 래-16손자(석가모니불)의 구도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구도와 관련하여 주 목할 왕이 法王이다. 53) 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능산리 발견 舍利龕銘) 54) 趙景徹, 앞의 논문(2000.12), p.25. 55) 지난 2001년에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다수의 목간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寶熹寺 子基寺라 는 절 이름이 적힌 것도 발견되었다. 한편 일본 사천왕사 금당의 구세관음상과 법륭사 몽전의 구세관음상은 위덕왕이 성왕의 追福을 위하여 조성한 불상이라 한다(金相鉉, 앞의 논문). 威 德王의 시호인 威德도 威德王佛 ( 佛名經 大正藏 14-129c) 또는 威德佛 (상동, 14-130a) 처럼 흔히 쓰이는 부처의 이름이기도 하다.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17 法王의 이름은 선(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이니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죽으매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隋書에는 선을 昌王[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겨울 12월에 令을 내 려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민가들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 버렸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거두어서 태워 버렸다. 2년 봄 정월에 王興寺를 창립하고 중 30명 에게 도첩을 주었다. 크게 가물어 왕이 칠악사에 가서 비를 빌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 다. 시호를 法이라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法王條).56) 봄 2월에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은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채색으로 웅장하고 화려하 게 장식하였다. 왕이 매양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武王 35年). 삼국사기 에 기록된 법왕의 행적을 살펴보면 우연인지 모르지만 모두 불교에 관한 내 용이다. 살생을 금한다거나 왕흥사를 창건한다거나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 등이 그 것이다. 특히 王興寺는 法王이 재위 2년(600)으로 단명하자 그의 아들인 武王이 634년 에 완공할 정도로 중요한 사찰임에 틀림없다. 王興寺의 王은 國王의 王57)이나 轉輪聖王 의 王이거나 法王의 王으로 볼 수 있지만, 法王이란 시호에서 法王의 王일 가능성이 높 다. 法王은 바로 불교의 釋迦牟尼佛이다. 법화경 에는 여러 곳에서 석가모니불을 法王이 라 부르고 있다.58) 왕흥사에 주존불로 모셨을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이었을 것이다.59) 법 화경 대통지승여래의 16번째 막내 아들이 석가모니불이었다. 다음은 법화경 대통지승여래의 첫째 아들 智積에 대해서 검토해 보겠다. 智積은 전 륜성왕의 손자이면서 아버지 대통불이 깨달음을 얻자 나머지 15명의 동생들과 함께 출가 하여 동방을 지키는 부처 아촉불이 된 인물이다. 智積은 법화경 의 화성유품 이외에도 등장하는데 智積菩薩로 나온다. 그때 하방 세계에서 多寶세존을 따라온 智積菩薩이 다보불께 인사하고 그의 본국에 돌아 가려 하니 석가모니불께서 지적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잠깐만 기다려라. 여기에 문수 사리라고 이름하는 한 보살이 있으니 서로 만나보고 미묘한 법을 논하고 말한 뒤에 그대의 56) 三國遺事 卷3 興法 法王禁殺條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57) 金壽泰는 王興寺의 王을 國王으로 보고 있다(김수태, 앞의 논문(2000.12)). 58) 聖主이신 法王께서 무량 중생 위로하며(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서품, 동국대학교역경원, p.42) 위 없는 法王이신 세존이시여 염려치 마시고 말씀하소서 여기 모인 무량한 대중들이 공경하고 믿을 이 있나이다(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방편품, 동국대학교역경원 p.53). 등등. 59) 서산마애삼존불을 법화경 의 수기삼세불 사상에 따라 釋迦佛 提華羯羅菩薩 彌勒菩薩로 파 악한 논고가 있다(文明大, 韓國石窟寺院의 硏究 歷史學報 38, 1968; 韓國彫刻史 悅話 堂, 1980; 百濟 瑞山 磨崖三尊佛像의 圖像 解釋 美術史學硏究 221 222, 1999.6). 서 산마애불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60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추정시기는 왕흥사를 창건하여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안치하고 본인도 법왕 곧 석가모니불로 자처한 법왕대(599-600)와 일치한다.

- 118 國史館論叢 第98輯 본국에 돌아가거라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나는 바다 가운데서 오직 妙法蓮華經 만을 설하였나이다. 智積菩薩이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그 경이 매우 깊고 미묘하여 여러 경 전 가운데 보배이며 세상에 희유하나니, 중생들이 만약 부지런히 정진하고 이 경전을 수행 하면 빨리 성불할 수 있나이까. ( 法華經 提婆達多品).60) 菩薩은 부처가 되기 전의 수행자를 말하니 지적이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 智積菩 薩로 불린 것이다. 지적보살이 주로 모시고 다녔던 부처는 法華經 見寶塔品의 중심인물 인 多寶佛이었다. 多寶佛을 모신 후 다시 下方세계로 돌아갈 때 석가가 문수보살과 더불 어 중생을 구제할 도를 논해 보도록 권고하였다. 문수보살은 법화경 이 중생을 구제할 최고의 경전이라 말하였고, 지적보살도 중생들에게 법화경 을 수지하고 강독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직접 대중에게 붓다의 진리를 전해 주는 보살의 기능이 강화되 었다. 이들을 法師라도 한다. 특히 법화경 에는 法師品과 法師功德品이 있을 정도로 법 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 다라니품에는 법화경 을 강하는 법사를 보 호하기 위하여 열명의 羅刹女와 鬼子母를 호위신장으로 두고 있다. 智積菩薩은 법화경 을 위시한 여러 대승경전들을 강하는 뛰어난 법사이기도 했다. 智積菩薩이 智積 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경위를 大哀經 은 智積菩薩品 까지 두면서 다 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때에 체분별변이란 보살이 또 부처님 앞에 나와서 사뢰었다. 智積菩薩은 어찌하여 그 명호를 智積이라 하였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하 간추린 줄거리) 옛날 수적여래 가 있었는데 그 부처님 세계는 안온하고 쾌락하여 중생들이 아무런 병이 없었다. 수적여래 가 중생을 제도할 백억가지 질문에 대답할 보살을 찾더니 그때 覺意菩薩이 나와 사자후로서 대답하였다. 각의보살의 대답을 듣는 이들은 마치 어두움 속에서 광명을 본 것처럼 기뻐하 는 동시에 그 모임의 6만 대중은 다 더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발심하고 8만 4천의 보살들은 생사없는 법의 지혜를 얻었다. 이에 하늘의 천왕들이 이제 이 보살이 백억가지 질문한 이치 를 충분히 대답하였으니 마땅히 그의 명호를 智積이라 해야하리라 라고 말하였다. (부처님께 서 말씀하시길) 족성자야, 지혜가 그러하기 때문에 智積이라 함이니, 알아두라. 그 때의 각 의 보살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지금의 智積菩薩이다. ( 大哀經 卷8 智積菩薩品).61) 首寂如來가 중생을 제도할 여러 가지 방법을 묻자 각의보살은 거침없이 중생 앞에서 부처의 도를 강설하였다. 각의보살의 이야기를 들은 모든 중생들은 生死없는 法의 지혜를 다 얻었다. 각의보살의 설법에 감동한 천왕들은 그의 지혜에 찬탄하며 智積 이란 명호를 60)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동국대학교역경원, pp.245 246. 61) 이진영 옮김, 한글大哀經, 東國譯經院, pp.188 189.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19 - 붙여주었다. 智積菩薩의 전생이 바로 각의보살이었다. 지적보살은 각의보살의 지혜의 힘 을 빌려 법화경 을 중생들에게 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붓다의 나라 백제에도 법화경 을 강한 보살법사가 있었다. 642년 백제의 사신 大佐平 智積등을 위해서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다른 책에는 백제사 신 대좌평 智積과 아들 달솔(이름은 모름) 및 은솔 군선이라 했다) ( 日本書紀 皇極紀).62) 갑인년 654년 정월 9일 나지성 砂宅智積은 속세의 몸이 쉬이 늙음을 강개하여 금을 뚫어 金堂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寶塔을 세우니 위위한 모습은 신광을 토하여 구름을 제치고 위 위비간하여 성명을 머금고( 砂宅智積碑 ).63) 日本書紀 에 등장하는 백제사신 大佐平 智積이 역사의 관심을 끌게 된 계기는 1954 년 사택지적비 가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大佐平은 백제의 좌평제의 측면에서, 砂宅은 大 姓八族 가운데 冒頭를 차지하는 沙氏와의 관련성에서 관심을 끌었다. 사택지적은 642년 대좌평의 직함을 띠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나 10년 뒤에는 중앙정계에서 은퇴하고 있 다. 비문의 내용은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한편으론 정치의 무상함이기도 하다. 비문 가운데 金堂과 寶塔의 불교적 내용이 보이지만 비문에서 풍기는 은둔의 쓸쓸 함으로 이 비를 道家의 입장에서 보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사택지적의 智積 이란 이름은 법화경 대통지승여래의 큰 아들 智積이나 多寶 세존을 따라다닌 지적보살의 智積, 또는 대애경 지적보살의 智積과 같다. 따라서 사택 지적의 지혜 智, 쌓을 積의 智積이란 이름은64) 법화경 이나 대애경 에서 따온 이름으 로 생각된다.65) 사택지적이 金堂과 寶塔을 세운 사례는 법화경 의 지적보살이 모시고 있는 다보세존 의 多寶塔과 관련이 있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보면 법화경을 강하는 곳이면 언제든지 다보세존의 탑이 솟아올라 법화경의 위대함을 증명해 준다고 하였다.66) 62) 饗百濟使人大佐平智積等於朝 (或本云 百濟使人大佐平智積 及兒達率闕名恩率軍善) ( 日本書 紀 卷24 皇極 元年) 63) 甲寅年正月九日柰祇城砂宅智積/慷身日之易往慨軆月之難還穿金/以建珎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懇含聖明以( 砂宅智積碑 ) 許興植 編著, 韓國金石全文 古代, 亞細亞文化 社, 1984. 洪思俊, 百濟砂宅智積碑에 對하여 歷史學報 6, 1954. 64) 智積의 梵語는 prajñākūṭa( 妙法蓮華經 大正藏 9-35a) 혹은 Jñānākara( 妙法蓮華經 大 正藏 9-22c). 65) 대좌평 지적의 이름이 법화경 이나 대애경 에서 따왔다는 점은 이미 간단히 지적한 바가 있다(趙景徹, 앞의 논문(1995.12), p.15). 66) 그때 부처님께서 대요설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배탑 가운데는 여래의 전신이 계심과 같 나니, 오랜 과거에 동방으로 한량없는 천만억 아승지 세계를 지나서 寶淨이라 하는 나라가 있 었으며 그 나라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그 이름이 多寶이었느니라. 그 부처님께서 보살도를 행

- 120 - 國史館論叢 第98輯 법화경 의 智積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이후 불국토의 동방을 지키는 아촉불이 되었 다. 백제의 사택지적도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백제의 東方을 新羅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그러한 서원을 세웠을 것이다. 불경에 나오는 이름을 자신의 아들 이름으로 삼은 사택지적의 아버지나 사택지적 자신은 대애경 의 각의보살[지적보 살]처럼 불교의 진리를 대중에게 널리 설하는 法師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67) 고대의 귀 족이 자신의 정치적 힘을 지탱해 주는 사상적 배경으로 불교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점 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68) 그러나 전륜성왕-대통지승여래-지적[아촉]으로 이어지는 법화경 의 계보에서 볼 때 지적은 성왕의 손자도 아니고 위덕왕의 아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택씨[사씨] 가 성왕-위덕왕-법왕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왕계에서 위덕왕의 큰 아들이어야 가질 수 있 는 지적이란 이름을 감히 칭할 수가 있었을까. 먼저 사택지적이 태어난 연대를 추정해 보자. 대좌평 지적이 642년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두 아들을 데라고 간 것을 보아 큰아들은 2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 지적은 50세 전후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지적이 태어난 연대는 592년 전후 위덕왕 (554 598)후기이다. 그렇다면 654년 사택지적비 를 세울 때의 지적의 나이는 62세 전 할 때 큰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만일 성불하여 멸도한 후 시방 국토에 法華經을 설하는 곳 이 있으면, 나의 탑은 이 법화경을 듣기 위하여 그 앞에 나타나 증명하고, 거룩하다고 찬양하 리라 하였느니라.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동국대학교역경원, p.230) 법화경 多寶佛에 대 한 신앙 예는 불국사의 多寶塔이 대표적이다. 한편 문명대는 태안마애삼존불을 多寶 釋迦와 彌勒菩薩로 보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文明大, 泰安百濟磨崖三尊佛像의 新硏究 佛 敎美術硏究 2, 1995.10). 67) 사택지적이 법화경 을 강하는 法師로 있을 때 이 법사를 위호해 주는 나찰녀가 있었으니 바 로 黑齒이다. 黑齒는 백제 부흥군 흑치상지의 성씨로, 백제인들은 智積을 법화경 을 설해주 는 법사로, 黑齒는 법화경 을 설하는 법사의 수호 나찰로 존경했을 것이다. 그때에 또 羅刹女들이 있었으니, 첫째 이름은 藍婆, 둘째 이름은 毘藍婆이며, 셋째 이름은 曲齒이고, 넷째 이름은 華齒이며, 다섯째 이름은 黑齒이고, 여섯째 이름은 多髮이며, 일곱째 이름은 無厭足이고, 여덟째 이름은 持瓔珞이며, 아홉째 이름은 皐帝이고, 열째 이름은 奪一切 衆生精氣이었다. 이 열명의 나찰녀는 鬼子母와 아울러 그 아들의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 앞으 로 나아가 다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또한 法華經 을 읽고 외우며 받아 지니 는 이를 위하여 옹호하고, 그의 쇠함과 환난을 없애 주오리다. 만일 어떤 이가 이 法師의 허 물을 찾아 내려 하여도 능히 얻지 못하오리다. (이운허 역, 한글법화경 다라니품, 동국대학 교역경원, p.389) 흑치상지묘지명(府君諱尙之 字恒元 百濟人也 其先出自扶餘氏 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에 의하면 黑齒가 부여씨에서 갈라진 시기는 법화신앙과 관련하여 유추해 보변 법화경 이 극성 에 달했던 성왕(대통불의 아버지)-위덕왕(대통불)-법왕(석가세존)대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지적이 태어난 위덕왕대가 주목된다. 68) 불교적 관점은 아니지만 백제의 五帝信仰이 왕권의 강화뿐만 아니라 貴族勢力의 특권적 신분 을 보장하는 이데올르기로 기능했다고 보기도 한다(徐永大, 百濟의 五帝信仰과 그 意味 韓 國古代史硏究 20, 2000.12, p.129).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21 - 후가 되겠는데 환갑을 넘긴 나이는 인생의 무상을 표현하고 있는 비문의 내용과도 맞아 떨어진다. 사택지적이 지적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태어난 592년대 전후의 정치 상황과 불교상황을 대비시켜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서 전혀 이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불교에 돈독했을 지적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시대를 염두에 두고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보겠다. 첫째 지적보살이 말 그대로 대통불의 아들이었듯이 지적도 왕실의 아들일 경우이다. 필자는 백제의 불교과정에서 解氏의 역할을 주목한 바가 있으며, 그러한 역할에 힘입어 해씨가 왕비족으로서의 권위를 누려왔다고 밝힌 바 있다.69) 백제사에 등장하는 왕비의 성씨는 한성시대 眞氏와 解氏이지만 웅진시대 이후는 밝혀진 바가 없다. 사씨는 세력근거 지가 사비로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천도를 뒷받침한 중심귀족이었으며70) 백제 후기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71) 그러한 사씨가 웅진 사비시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특히 사택지적이 태어난 해가 대통불에 비견되는 위덕왕대이므로 사씨가 위 덕왕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을 기념하여 智積이란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지적의 先代가 위덕왕과 직접적인 인척관계는 아니지만 위덕왕의 적극적인 지원 세력일 가능성이다. 성왕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씨는 성왕의 전사로 중대한 고비를 맞았을 것이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여러 귀족들에게 신랄한 비 판을 받았을 때 그래도 위덕왕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은 사씨였을 것이다. 위덕왕이 성왕 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부여 능산리의 능사 창건연대는 사리감이 만들어진 567년(위 덕왕 14)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이 절의 창건을 지원한 귀족세력은 성왕의 적극적인 후 원세력인 사씨일 가능성이 높다.72) 그래서 사씨가 왕실이 아니면서도 왕실의 아들이어 야 얻을 수 있는 智積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셋째 사택씨[사씨]가 왕실의 성, 이를테면 扶餘氏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일 가능성이다. 백제 멸망기 부흥군의 장군이었던 黑齒尙之도 그 선대가 부여씨였는 데 흑치지방에 봉해 져서 흑씨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73) 69) 趙景徹, 앞의 논문(1999.6), pp.3 9. 70) 盧重國,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 韓國史論 4, 1978. 尹琇姬, 百濟 泗沘遷都의 배경과 성격 三國時代硏究 1, 학연문화사, 2001. 71) 백제 무왕대 사씨는 대성팔족 가운데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餘璋[武王]立 其國有沙 氏 燕氏 劦氏 解氏 眞氏 木氏 首氏 此八族其大姓也( 翰苑 百濟條) 72) 陵寺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威德王이 沙氏와 더불어 조영되었다면 능사의 창건이 법 화신앙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성왕은 법화경 의 전륜성왕, 위덕왕은 법화경 의 대통불, 사씨는 법화경 의 지적보살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73) 府君諱尙之 字恒元 百濟人也 其先出自扶餘氏 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 黑齒尙之墓地銘 )

- 122 - 國史館論叢 第98輯 위 3가지 중 가능성은 둘째-첫째-셋째의 순이지만 어느 것이나 智積이란 이름은 왕실 과의 관련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법화경 에 설해진 전륜성왕-대통지승여래-지적 석가모니불의 계보와 백제 사에 나타난 성왕-위덕왕-사택지적 법왕의 계보를 서로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다음은 대 통사의 창건연대와 창건목적을 百濟史像 속에서 살펴볼 차례인 것 같다. 4. 聖王系의 神聖性 高揚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서 주장한 대통사의 창건연대는 527년과 529년이었 다. 527년은 삼국유사 가 참조한 國史 의 기록인 본문에 의한 것이고 529년은 527 년에 대한 반론을 붙인 분주의 견해이다. 삼국유사 편찬자의 견해는 529년이다. 따라 서 엄밀히 말하면 527년은 삼국유사 의 견해가 아니고 삼국유사 가 인용한 국사 의 견해이다. 이후 웅진의 대통사지와 사비의 부소산성에서 大通 명 인장와가 발견되면서 대통사의 창건연대는 527년으로 굳어졌다. 대통사 창건을 527년으로 본 결정적이면서 유일한 근 거는 大通이 바로 양나라 양무제가 527년부터 529년까지 사용한 연호라는 점이었다. 앞 으로 大通과 관련된 기와나 명문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 편년은 527-529년이 될 것은 자 명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大通 이라는 연호가 대통사의 창건연대를 가름하는 한 단서는 될 수 있지만 그 렇다고 반드시 대통연간에 대통사가 창건되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 각한다.74) 먼저 대통이 대통연간을 가리키지 않는 사례를 하나 들면서 논의를 진전시키 고자 한다. 十二月戊午 始鑄鐵錢( 梁書 卷3 武帝本紀 普通 4年) 五銖鐵錢 梁書武帝紀曰 普通四年 冬十二月 戊午 始鑄鐵錢 大吉錢 顧烜曰 普通四年 鑄大吉錢 錢大小輕重 如五銖 文曰五銖大吉 背文四出 大通錢 顧烜曰 普通四年 鑄大通錢 錢大小輕重 如五銖 文曰 五銖大通 背文四出 大富錢 顧烜曰 普通四年 鑄大富錢 錢大小輕重 如五銖 文曰五銖大富 背文四出( 三才圖會 珍寶)75) 74)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만, 삼국유사 편찬자의 견해도 대통사가 大通年間에 세워진 절이 아 니고 中大通年間에 세워진 절로 보았다. 75) 三才圖會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마이크로필름 소장자료)는 明나라 王圻가 찬한 책으로 총 106권으로 항목에 그림을 덧붙여 설명하였다. 책의 목차는 天文 地理 人物 時令 宮室 器用 身體 衣服 人事 儀制 珍寶 文史 鳥獸 草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大漢和辭典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23 - 梁書 의 기록은 양무제 보통 4년(523)에 鐵錢을 주조했다는 내용이다. 三才圖會 에 서는 이때 주조된 철전을 4가지로 나누어 그림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곧 五銖鐵錢 大 吉錢 大通錢 大富錢이 그것이다. 五銖錢은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의 지석 위에 놓인 그 오수전이다. 여기에 보이는 大通錢은 양무제 대통연간인 527-529년에 만들어진 철전이 아니고 대통연간보다 4년 전인 보통 4년 523년에 만들어진 철전이다. 이 대통전의 존재 는 大通 이 언제나 대통연간의 대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앞서 大通 의 여러 의미를 살펴보면서 大通錢을 언급한 바 있지만, 대통은 장자 에 나 오는 大道뿐만 아니라 여러 의미로 폭넓게 쓰이는 말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大通 을 연호로 보지 않을 경우 대통사의 창건연대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76) 필자는 대통사의 창건을 법화경 의 구조 속에서 파악한 바 있다. 이를 백제사에 적용 시켜 성왕이 대통사를 지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대통사의 창건연대는 성왕이 즉위한 523년부터 사비천도 이전인 538년 이전이 되지만 구체적인 창건연대는 여전히 미상이다. 법화경 에서 전륜성왕이 아들 대통불을 예경하였듯이, 백제의 성왕도 대통사를 지었 다면 아들 위덕왕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다음은 위덕왕이 태어난 연대를 알려주는 일본서기 의 기록이다. 백제의 왕자 餘昌은(明王[聖王]의 子, 威德王이다) 나라 안의 군사 전부를 일으켜 고구려 에 가서 백합야에 요새를 쌓고 병사와 침식을 같이하였다. (고구려 장수가 나와서 말하 기를) 부하들이 말하기를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왔다 라고 하였다. 마중하여 예로 대하지 않 으면 안된다. 원컨대 나와 예로써 응답하는 사람의 성명, 나이, 지위를 속히 말하시오 라고 하였다. 여창이 대답하여, 姓은 (고구려와) 동성이고, 지위는 간솔, 나이는 29歲 라고 말하 였다. 다음 백제 측에서 물은 즉, 전의 법도에 따라 대답하였다( 日本書紀 欽命紀 14年 冬 10月條). 위 일본서기 의 기록은 성왕의 아들 餘昌이 고구려와 싸우던 중 서로 통성명을 하는 내용이다. 왕자 여창이 553년 고구려를 공격한 목적은 이듬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사 전작업이었다. 통성명 과정에서 백제 왕자 여창은 자신의 나이가 29세라고 하였다. 553 년의 나이가 29세라면 그가 태어난 해는 성왕 3년인 525년경이 된다. 그런데 우연인지 는 모르지만 525년은 성왕의 부왕인 무령왕이 죽은 지 3년째 되는 해로 무령왕이 무령왕 릉에 묻힌 해이다.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 卷3, p.429, 大通錢條에 나오는 顧炟 은 顧烜 의 잘못이다. 76) 盧重國, 앞의 논문(2000.12), p.143 주62.

- 124 國史館論叢 第98輯 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니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武寧王 誌石 ).77) 성왕은 523년 부왕인 무령왕이 죽은 이후 부왕이 묻힐 무령왕릉의 축조를 마무리하면 서 부왕의 명목을 빌었을 것이다. 성왕이 죽은 후 위덕왕이 부여 능산리에 능사를 세워 부왕의 명복을 빈 일에서 유추할 수 있다. 성왕은 부왕인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 새로 태 어날, 혹은 태어난 아들 여창의 건강과 백세 왕실의 번영을 기원할 왕실 사찰의 조영을 생각했음직하다. 명실공히 聖王의 治世를 상징하는 사찰의 조영을 원했을 것이다. 바로 그 절이 大通寺였다. 성왕이 절 이름을 大通寺라 지은 이유는 무었일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양나라 무제가 大通 이란 연호를 썼던 이유에다 새로이 법화경 의 大通佛을 가미한 것이었다. 525년 대통사가 창건되고 2년 뒤 양무제는 대통연호를 썼다. 물론 양무제가 백제의 大通寺에서 大通 이란 이름을 빌려오진 않았을 것이다.78) 양무제는 이미 대통사가 창건되기 2년 전 인 523년 大通錢 이란 철전을 발행하면서 대통 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황해를 사이에 두고 梁나라와 百濟는 동시에 大通 을 캐치프레이 즈로 내세우고 있었다. 삼국유사 의 편찬자들은 이를 생각치 못하고 단순히 양나라의 대 통연호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얼마 지나 양나라는 백제의 웅진에 대통사란 절이 있 음을 알았고, 백제도 양나라의 대통연호를 알게 되었다. 백제는 양나라 사신에게 외교적 제스처로 양무제를 위해서 대통사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바랐던 외교적 성과를 얻 을 수 있었을 것이다.79) 백제의 성왕은 법화경 의 전륜성왕-대통지승여래-석가모니불의 계보를 실현시키기 위 해 大通寺를 창건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聖王系 王室의 神聖性을 강조할 수 있었다.80) 백제 성왕이 사비천도를 강행한 것이나 한강유역을 회복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大通寺 77) 寧東大將軍百濟斯馬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 申 安厝登官大墓 立志如左 78) 양무제의 대통연호와 법화경 의 대통불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양나라에도 법화신앙이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그 가능성은 남아있다. 79) 541년 열반경 등의 주석서와 工匠 畵師 등을 청했고, 禮에 밝은 陸詡를 백제에 불러들일 수 있었다(조경철, 앞의 논문, 2000.12, pp.10 14). 절의 창건 목적이 서로 다르게 파악된 예도 있다. 신라의 天王寺[四天王寺]가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지은 절이었지만 당나라에는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해 지은 절로 알려졌다. 당나라 사신이 확인 차 신라에 오자 신라는 그 를 뇌물로 매수하여 무마하였다. 당나라 사신은 다시 본국에 돌아가 신라가 천왕사를 지어 황 제의 장수를 빈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三國遺事 紀異 文武王法敏條). 80) 필자와 다른 입장에서 성왕대의 王族意識의 고양을 제의와 諡號制의 관점에서 살핀 논고도 있다(梁起錫, 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4, 1991.1, pp.89 93).

百濟 聖王代 大通寺 창건의 사상적 배경 - 125 - 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성왕의 의도는 이후 계속 진행되어 법왕 무왕대 王興寺의 창건 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釋迦의 계보 ( 法華經 ) 백제 왕실의 계보 사찰 大通佛 轉輪聖王의 아들 威德王. 聖王 出家 시도 聖王의 아들 大通寺 525년경 창건 主佛은 大通佛 轉輪聖王 智積(菩薩) 轉輪聖王의 큰손자 砂宅智積( 砂宅智積碑 ) 사택씨는 威德王의 후원세력 金堂 寶塔( 砂宅智積碑 ) 法王 轉輪聖王의 막내손자 法王 聖王의 손자 王興寺 主佛은 釋迦牟尼佛 Ⅳ. 맺 음 말 지금까지 대통사의 창건시기와 창건목적을 살펴보았다. 대통사의 창건시기는 성왕대이 지만 사비천도 이후 위덕왕, 법왕대의 불교도 아울러 검토하였다. 본 글의 요지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맺음말에 가름할까 한다. 기존에 대통사의 창건연대를 527년으로 본 것은 大通을 527-529년까지 사용한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의 年號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통사의 창건목적을 양무제를 위 해서라고만 보았다. 그러나 大通이 모두 연호로 쓰인 것은 아니다. 그 근거로 523년 양 무제가 발행한 大通錢을 강조하였다. 성왕대 대통사의 창건목적은 돌아간 부왕인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 다음 왕위를 이어갈 여창[위덕왕]을 위해서였다. 창건시기는 창건목적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525년으로 추 정해 보았다. 대통사란 절이름은 大通 이 의미하는 좋은 의미를 포함하여 법화경 화성 유품에 등장하는 大通佛[大通智勝如來]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았다. 법화경 대통불 의 아버지는 轉輪聖王이었고 아들은 釋迦牟尼佛이었다. 전륜성왕으로 자처한 성왕은 아들 을 대통불에 비기었다. 성왕은 법화경 의 전륜성왕-대통불-석가모니불에 이르는 부처의 가계를 빌려와 왕실, 구체적으로 성왕계의 신성성을 고양시키려 하였다. 성왕의 이러한 의도는 이후 위덕왕, 법왕 등 성왕 자신의 아들, 손자들에게 이어졌다. 즉 아들인 위덕왕은 출가를 결심하기도 하였고 손자인 법왕은 王興寺를 창건하여 釋迦牟尼佛을 주존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성왕 은 대통사 창건을 통하여 붓다의 권위를 빌려왔으며 이를 통하여 정치제도의 정비, 사비 천도의 단행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