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과정 박찬욱 ( 서울대 ) I. 대의정치 1. 서론 1 ) 논의의범위이절에서는해방이후국회를중심으로하여전개된의회정치를고찰한다. 시기적으로는 14 대국회까지를대상으로하는데, 대한민국의정사의전사에속하는미군정당시의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대해서도간략하게다룬다. 중심주제는현재의제 6 공화국에이르는정치체제의변동과국회의위상을비롯하여국회의조직, 운영, 그리고기능수행이될것이다. 2) 남조선과도입법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미군정이한국인의지지를확보하려는필요에의하여주도하여구성하였다. 이는자주적이고적극적역할을수행한입법기관이라고는할수없으나국회가탄생하고의회정치가전개되는바를다각도로이해하기위해서연구자의주요한관심대상이아닐수없다. 이기관의존재로인하여미군정하에서제한적이나마의왼올선출하는선거가있었고, 군정당시에공포된법률안올제안하고심의하는역할을수행하였다. 과도입법의원은때로는미군정과의이견올노출하기도하였고, 의원구성의측면에서중도좌파에서우파에이르는비교적넓은이념적스펙트럼을보여주었던것이다. 그리고여기서제정된보통선거법은이후에수정되어제헌국회선거를위한법적기초를마련하였다
40 남조선파도입법의원은미군정이 1946 년 5 월 8 얼의제 1 차미소공동위원회가결렬된이후에설치한기관이다. 이는정치적, 경제적및사회개혁의기초로사용될법령초안을작성하여군정장관에게제출 할목적의자문기관으로서설치되었고, 의원총수는 90 인이었는데절반은관선, 나머지절반은민선으로충원되었다. 관선의원은좌우합작위원회가지명하는인사들을군정이임명하였다. 민선의원선거는 10 월 21 일에서 31 일에걸쳐시행되었는데서울과강원도에서는재선거가치러지는등우여곡절이있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6 년 12 월 12 일에개원하였다. 이과도적입법기관이설치될당시에는여운형과김규식중심의중도좌우합작위원회가중심적인역할올하였다. 그러나점차한민당을중심으로한우파가세력을확장하고이기관의운영을좌우하게되었다. 좌우합작에기반을두고출발한이기관이실질적으로종말올맞는계기는 1948 년의 2. 23 파동이었다. 당시에남한에단일정부를세울것인가의여부를두고정치논쟁이치열하게전개되고있었는데 1948 년 2 월 19 일한민당과이숭만지지파는단정결의안을제안하였다. 원내갈동을거친후에이안이통과되자의장인김규식등관선의왼 20 여명이의원직을사임하였고다른일부는제명되는동총 33 명의의원들이사퇴하게되었다. 과도입법의원은제헌국회선거가치러진이후 5 월 20 일에공식적으로폐원되었다. 이기관은 33 건의법령을심의하여 18 건을통과시켰는데이가운데 13 건만이군정장관의서명을받아공포되었다 ( 김혁동. 1995: 박원호. 1997; 손회두, 1993). 2. 정치체제변동과국회의위상 1 ) 저 11 공화국 (1948. 7~1960. 4) 1948 년 5 월 10 일제헌의회구성을위한총선거가실시되고 5 월 31 일임기 2 년의제헌국회 (1 948. 5. 31 ~ 1950. 5. 30) 가개원되었다. 제헌국회에서제정된헌법은 7 월 17 일부터효력이발생하였다. 정부형태는의원내각제적요소를가미한대통령제가채택되었다. 대통령이국가원수이자행정부수반인데의원내각제에서와같이국회에서선출되었다. 정부의법률안제
정치과정 / 박찬욱 41 출권, 국무총리와국무위원의국회의원겸직파국회출석 발언권도모두의원내각제적요소이었다. 국회는단훤제, 국회의원의임기는제 2 대국회부터 4 년으로규정되었다. 국회회의는정기회와임시회로구분되고회기제한은없었다. 국회는대통령선거권이외에입법권, 예산안심의및확정권, 조약비준동의권, 국무총리임명승인권, 공무원에대한탄핵소추권, 국정감사권등이부여되었다. 제헌의회선거에는좌익은물론남북협상을통한통일정부를추구하던중도세력대부분이참여하지않았다. 그러므로제헌국회는대한독립촉성회나한민당과같은우익세력의주도하에출범하였다. 제 1 공화국시기에이숭만행정부를견제하며자율적인지위를확립하기위한노력은제헌국회에서가장적극적으로경주되었다. 그러나그후국회는점차행정부에대한통제력을상실해갔다. 제헌국회전반기에는이른바 소장파 의원들이집권세력을활발히견제하였다. 소장파는이승만지지세력과보수세력에대항하는소수자세력이었는데친일파척결, 지방자치의조속한실현동의사안에있어서행정부와대립되는입장을강력히표명하였다. 그런데소장파는국회프락치사건을통해핵심인불들이제거되어소멸되었다 ( 백운선, 1992: 백영철, 19RR: 백영철, 1995: 길승홈, 1996). 제헌국회전반기에이숭만대통령을지지하던한민당세력은민주국민당으로개편되어제헌국회후반기에들어서이승만대통령에반대하는세력이되었다. 민주국민당은국회에서내각제개헌을관철시키고자하여대통령을정점으로하는집권세력과대결하게되었다. 한국전쟁이 3 년째지속되었던 1952 년 7 월제 2 대국회 (1 950. 5. 31 ~ 1954. 5. 30) 에서제 1 차헌법개정 ( 발훼개헌 ) 이이루어졌다. 원내지지기반이확고하지못한이승만대통령은국회의영향력을배제하기위해서국민에의한대통령직선을실현하여집권연장을기도하였다. 개정된국회법에는국회가양원제로구성된다고명시되었으나참의원구성을위한입법은제 l 공화국이막윷내리기까지지연되었다. 저il3대국회 (1 954. 5. 31~1958. 5. 30) 초반인 1954 년 11 월에자유당은대통령의중임제한을철폐하는헌법개정 (4 사 5 입개헌 ) 을무리하게관철
42 하였다. 이때훤내의반이숭만세력이철집하여민주당형성의토대률마 련하였다. 개헌이후이대통령의專斷的권왜주의체제가더욱심화되었 다. 대통령올중심으로하는집권세력이 자유당올흉해국회률점차장악 하면서국회의자융성은심각하게축소되었다. 제 4 대국회 0958. 5. 31-1960. 7. 28) 시기인 1958 년 10 월의국가보안법파동은야당에대한탄압, 그리고대통령의국회유련을극명하게보여준사건이었다. 마첨내권위주 의적독재정치에저항한혁명으로정치체제의변동을가져오면서 4 대국회 는 4 년의임기를단축하게되었다. 2) 저 12 공화국 (1960.7'""1961.5) 1960 년 4 월의학생혁명을거쳐개막된제 2 공화국의헌법은 7 월에시행 되기시작하였다. 이헌법은의원내각제와양원제를채택하였다. 국무총리 와국무위원의과반수는국회의원이어야하며국무원은민의원에연대책임 을지게되어민의원이집행부불신임권을갖게되었다. 국무원은민의원 에서불신임을받는경우에민의원을해산할수있었다. 민의원이조약비 준에대한동의를부결하거나신년도예산안을법정기한내에의결하지않 게되면이것역시불신임결의로간주되었다. 참의원이실제로구성되었 다. 내각제운영으로말미암아국회가국정의중심이되는위상을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민주당정권은정치적정당성을갖고있었음에도불구하고 집권세력내의신 구파대립으로마침내분열되고대중의폭발적인요구 에효과적으로대웅하지못하였다. 제 2 공화국은 9 개월정도에걸쳐안정 을찾지못하고지속되다가 1961 년 5 월에군부쿠데타를맞게되고단명으 로종식되었다.5 대국회 0960.7. 29-1961. 5. 16) 는해산을당한것이다. 3) 제 3 공화국 (1963. 12--1972. 12) 쿠데타의주역들은당분간군부직접통치체쩨 0961. 5-1963. 12) 롤유지 하다가제 3 공화국의중추적인정치인으로변신하였다. 이시기에는대통 령제와단원제국회가다시헌정의요소가되었다. 조국근대화의명분아래 강화되는권위주의체제하에서점차행정부에예속되게되었다. 행정부에 대한정치적지위로볼때제 6 대국회 0963. 12. 17-1967. 6. 30) 는철저
정치과정 / 박찬욱 43 히예속되었다고할수는없으나제 7 대국회 (1967. 7. 1~1971. 6. 30) 에서이루어진 3 선개헌이후국회위상은역력히첨몰하였다.8 대국회 (1 971. 7. 1 ~ 1972. 10. 17) 는개원이후불과 1 년 4 개월만에계엄령으로해산되었다. 4) 저 14 공화국 (1972. 12---1980. 10) 1972 년 10 월에유신을명분으로출발한제 4 공화국온다분히관료적권위주의형군부체제이었다. 산업화를추진하는기술관료와자본, 그리고억압기구를독점하는집권엘리트가지배연합올형성했다고볼수있다. 제 4 공화국의대통령은초월척국가기관으로서긴급조치권을부여받는동삼권분립의헌정원리가무너졌다. 국회는그이전의어느시기에서보다도예속적지위를갖게되었다. 국회재적의원의 3 분의 1 은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선출하는데그후보자는대통령이일팔추천하도록되었으므로이렇게선출된유정회의원들은여당인공화당의원들과함께대통령의국회지배를뒷받침하였다. 유신헌법에서는대통령제를운영했던 1 공화국과 3 공화국에서부여되지않았던국회해산권이규정되었고제헌국회이래확립된국회의국정감사권이폐지되었다. 뿐만아니라국회는전체회기알수에있어서년 150 일을초과할수없게되는활동상의제약이주어졌다. 국회에서정당간합의를거치지않고비상국무회의가주도한 15 차국회법개정 (1 973) 은국회의기능수행을노골적으로제약하는많은규정을마련하였다. 이를테면국회의장의권한을대폭강화하였는데, 이것은결코국회권위의제고를위한것이아니고강화된의장권한을십분활용하여대통령과집권당의의사를신속하고효과적으로관철하기위해서이루어졌다. 강압을토대로삼았던유신체제는서서히반체제세력의도전올받게되었다. 제 9 대국회 (1 973. 3. 12-1979. 3. 1 1) 의후반기에국회내에서는금기시되던체제비판이서서히일게되었다. 제 10 대국회 (1979.3. 12-1980. 10. 27) 시기에와서는야당과더불어대학생, 지식인, 그리고노동자세력이반체제연합을형성하기에이르렀다. 체제논쟁의와중에서권력중추부내에알력이빚어지고 1979 년 10 월 26 일박정회대통령이암살되었다. 박대통령의종말은실질적으로 4 공화국의종식이었고한동안정치적과도기
44 를초래하였다. 그런데유선헌법은공식척으로제 5 공화국헌법의시행이개시된 1980 년 10 월까지존속하였다. 5) 저 15 공화국 (1980. 10"'1988.2) 전두환장군주도의신군부는 1979 년 12월부터정치적주도권올장악하고이어서이듬해 5 월 17 일계엄령을확대하면서본격적으로권력창출에나섰다.10 대국회는 1980 년 10 월신헌법이효력올개시함과동시에공식적으로해산되었다. 전두환은 1981 년 3 월제 5 공화국대통령으로취임했다. 광주항쟁을겪으면서확립된제 5 공화국의체제는기본적으로유신체제의후계적성격올갖고억압성과군부의패권적지위가더욱두드러졌다. 대통령의임기가 7 년단임이고대통령선거인단에의해선출되었다. 5 공화국이출범하면서기성야당정치인들이대거규제를받아제 11 대 국회 (1 981. 4. 11-1985. 4. 10) 에는진출하지못하였으나 12 대총선직전 에이규제가해제되자신한민주당의기치하에결집하였다. 신한민주당은제 12 대국회 (1 985. 4. 11-1988. 5. 29) 의제 1 야당으로당당히부상하였다. 1987 년 6 월에민주화요구는절정에이르렀고전두환대통령은개헌요구를수용하지않을수없었다. 헌법이개정되면서 12 대국회의임기는단축되었다. 5 공화국의국황는휴신체제하의국회와다름없이그정치적지위가매우취약하였다. 헌법이나국회법을통해서볼때그러했을뿐만아니라공식화되지는않았으나정형화된의원행위율에서도그러한점을발견할수있었다. 의원이원내발언에서조차체제의본질이나대통령과그친인척인사를비판하는것이 성역 으로금기시되었다 ( 김종림 박찬욱, 1985). 헌법에서는의원의직무상발언에대한면책톡권을보장하고있었으나 12 대국회에서한야당의원이사실상원내에서의체제비판발언으로구속되기도하였다. 또한 1986 년 3 월에는여당총무를비롯한수명의현역의원들이비공식적인회식석상에서현역군인에의해구타당한사건이있었다. 이일화는당시국회의취약한정치적위상올단적으로말해주었다. 6) 저16 공화국 (1988.2"') 제 6 공화국이출범한이후의회정치의법제척측면만본다면국회의자
정치과정 / 박찬욱 % 율성이크게신장될여건이마련되었다. 국회의헌법상지위는대체로 3 공화국시기의경우와같게복원되었다. 대통령의국회해산권은철폐되고국회의국정감사권이회복되었다. 임시회의소집을요구할수있는요건도재적의원 3 분의 1 에서재적의원 4 분의 1 로환원되었다. 정기회와임시회를합하여연 150 일을초과할수없도록했던종전의회기규정도변경되어연회기일수제한이철폐되었다. 제 13 대국회 (1988. 5. 30-1992. 5. 29) 를구성하기위한총선에서대통 령의정당인집권당이헌정사상처음으로원내과반수를확보하지못하였고 4 당분립구도가성립되었다. 이러한여소야대정국에서국회법이국회의권능을강화시키는방향으로전면개정되었다 (23 차개정 ). 특히국회가행정부의감독이나국민의의혹을해소하는데에도움을줄청문회제도가도입되었으며, 유신직후에의장이단독으로행사하도록삽입된권한이상당부분삭제또는축소되었다. 위원회의소집요건을완화하고위원회에서정책질의를 1 문 1 답식으로할수있도록하는등의회기능의활성화조건을확충하였다. 13 대국회전반기에는강한야당세를바탕으로국회의자율성도강화된 모습이분명하였다. 예를들어. 1988 년 7 월에대통령이제출한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부결되었는데이러한사례는 4. 5 공화국시기에는찾아볼 수없었다. 그런데 ]990 년초, 다당체계운영에어려움을겪던여당인민정당이야당인민주 공화당과함께민자당으로통합하여거대한원내다수세력이되었다. 그후에여야당간에첨예한대립이전개되었고국회는파행을거듭하였다. 13 대후반기에와서집권여당은행정부의국회지배를정당화하는전위대의역할을자임하였고, 국회의제도적자율성이훼손되었다. 그런데 14 대국회 (1992. 5. 30-19%..,. 29) 의후반기초에통과된 27 차 국회법개정은의회정치의활성화측면에서긍정적으로평가되는주목할만한법제적개선이다. 국회외부의전문가를포함하여의장의자문기구로구성된국회제도개선위원회가국회개혁문제를다각도로검토하고개선방안을제시하였다. 개선된방향을개괄적으로말하자면, 국회를상시운영하기위한기틀이마련되었고, 원내토론을진작시키며의원의발언기회를확대하는방안이강구되었으며, 의안심사를내실화하기위한조처가이루
46 어졌다 ( 국회사무처의사국, 1994). 하지만헌법이나국회법상의규정만으로국회의자율성올제대로확보할수는없었다. 이른바문민정부서대에서조차국회가독자성인위상을갖게되지못하였다. 중요사안에대한여당의원내전략을예를들어보아도대통령을핵으로하는권력의중추부의사에의하여좌우되었다. 국회의수장인의장은공식적으로국회에서선출된다고하지만사실상행정부수반인대통령이내부적으로지명한후에형식상선출절차가국회에서이행되고있었다. 3. 국회의조직, 운영과기능수행 1 ) 회기제도와그운영 본회의회기는제 1 공화국당시에는정기회 90 일, 임시회 30 일이내로하되국회의의결로연장할수있도록하였다. 제 2 공화국에서는정기회를 120 일로연장하고임시회는제한을두지아니하였다. 제 2 공화국까지법률사항이던회기에관한규정은제 3 공화국에와서헌법에포함되었다. 즉정기회 120 일, 임시회 30 일을초과하지못하도록하였다. 국회의활성화보다는행정편의를우선한제 4 공화국에와서는정기회 90 일, 임시회 30 일이내, 그리고연간총회기일수 150 일이내 ( 대통령의요구로소집된기간은제외 ) 로제한되고 5 공화국에서도마찬가지였다.6 공화국에와서는정기회 100 일, 임시회 30 일로정착되었다. 역대국회별로지속기간이서로달라본회의개의일수를단순히비교해서는본회의의활성화정도를가늠하기어렵다. 그러므로지속일수를 100 으로놓고개의일수를계산하는식으로표준화하면지속일수기준으로본회의개의비율은제헌국회 54.6. 2 대 43.2, 3 대 41.7. 4 대 26.8. 5 대 48.6. 6 대 28.3.7 대 16.5. 8 대 17.1, 9 대 7.6. 10 대 4.7, 11 대 9.9, 12 대 10.4. 13 대 11.2, 그리고 14 대 11.4가된다 ( 전진영, 1996 참조 ). 제헌국회로부터 3 대국회의본회의개의비율은 40% 를상회하여이기간에국회가활발하게열렸음을알수있다. 그러나 4 대국회에서국회활동은상당히위축되었다.6 대이후에본회의개의비율이대체로낮다. 이것은국회의운영방
정치과정 / 박찬욱 47 식이위원회중심주의로변경되었음율반영한다. 그런데이정올고려하고라도 10 대국회의개의비율은 4.7, 9 대의경우는 7.6 에지나지않았다. 국회가이시기에극도로위축되었음올알수있다. 제 5 공화국시기의 11 대, 12 대의경우에도제 3 공화국이나제 6 공화국시기에비하면본회의가비교적활발하게개최되지못하였다. 2) 위원회제도와그운영위원회는제헌국회이래상임위원회와특별위원회로대별되고있다. 상임위원회수는제헌국회당시에는법제사법위원회를포함하여 8 개였는데, 1951 년 3 월에국회운영위원회등 4 개위원회가신셜되면서 1Vß 로되었다. 다시 1953 년 1 월에는종래에재정경제위원회소관이던예산안 결산심사를전담하기위하여예산결산위원회가신설되면서 137ß 가되었다. 제 2 공화국당시에민의원에는 13 개상임위원회가유지되었으나 3 공화국초에예산결산위원회가특별위원회로되면서 127ß 로줄었다. 그뒤주로정부부처의개편에따라상임위원회편제도변경을거듭하였으며 14 대국회말에는 16 개가운영되었다. 3) 의원의사회적배경제헌국회부터 14 대국회에이르기까지의원의연령별분포를살펴보면대체로 40 대이하가점차로줄고 50 대이상은점차늘어나는경향을발견하게된다. 역대국회의원의연령별분포는한국사회의각분야에서지위의상향적이동이완만해지는추세를반영한다. 제헌국회부터 14 대국회에이르기까지의원의학력수준이높아지는분명한추세가있다. 5 대국회까지고졸이하의학력자가 60% 선에이르렀다. 6 대이후대학수준의학력집단의비율이높아졌으며 10 대이후에는 90% 가넘게되었다. 13 대이후에는대학원이상의학력만해도 40% 수준에도달하여최근으로올수록이를상회한다. 역대국회에걸쳐의원으로당선된당시주요직업경력윷보면전 현직의원및당료둥정치인이가장높은비율을차지환다. 대체로여당보다는야당에서직업정치인의비윷이높은것이상례였다. 1 공화국과 2 공화국에서가장높은비율을차지하던농업종사자는 3 공화국에서부터그비율이
48 급격히떨어진다. 산업화정책의소산이라고할수있올것이다.6 대국회에서부터군장교, 고위관료, 전문인집단 ( 언론인, 변호사, 교수, 의사등 ) 의비율이증가된점이주목활만하다. 군출신의경우에는군의정치개입직후인 6 대와 11 대국회에서현저히높았다. 군과관료출신의원들의비중은여당의경우에더욱부각되었다. 초선의원의비율은정치변동올겪고난공화국초기에새롭게정계에동장하는인물이많아비교적높다. 그러다가시간의경과에따라초선의원의비율은하향하는경향을보인다 ( 박찬욱. 1994b: 김현우.19%). 4) 법훌안심의제헌국회부터 14 대국회까지국회가접수한법률안은총 6.460 여건 ( 국가재건회의와국가보위입법회의는제외 ) 이었다. 제안자별로는정부제출안이 56%. 의원발의안이 44% 를차지하였다. 의원발의안이정부제출안보다건수가조금이라도많았던국회는 6 대. 12 대.13 대였는데, 이중의안발의안의비율이 60% 를상회한시기는 6 대와 13 대뿐이었다. 한편, 역대를통틀어정부제출안이가결통과된비율은꺼 % 이었고, 의훤발의안의가결통과율은 48% 이었다. 단지 3 대와 4 대에서나의원발의안의가결율이정부제출안의가결율을가까스로상회하였다. 이경우에용이하게가결된의왼발의안의상당수는당시집권다수당이었던자유당소속의원들에의한것으로판단된다 ( 국회사무처. 1994. pp. 375-377). 역대국회를통해대체로법률안의제안은의원보다행정부에의하여더빈번히이루어졌고입법을관철한빈도또한행정부제출안의경우가높았다 ( 신명순 1985: 정영국. 1988: 김철. 1992). 법안심사의절차를보면, 제헌국회부터 5 대국회까지에는의안이제출되어본회의에보고되면상임위원회에회부되어예비검토를거친다음, 본회의에서 3 독회를거쳐의결이이루어졌다. 이것은본회의중심주의를골간으로상임위원회중심주의를가미, 절충한것이었다. 그러다가 3 공화국에들어와상임위원회중심주의로변경하면서독회제가폐지되었다. 법안이국회에접수되면소관상임위원회에서일차심사되고법제사법위원회의형식심사를거쳐본회의가최종적으로심사하고의결하게되었다.
정치과정 / 박찬욱 49 5) 예산결산심의제헌국회에서의예산심의는다음과같은절차를통하여이루어졌다. 정부가제출한예산안은본회의에서각상임위원회로회부되어예비심사를거치고이후에재정경제위원회가종합심사하였다. 그리고이것이다시전원위원회에회부되어심사되고본회의에서 3 독회를거쳐의결되었다. 그러다가 1953 년 1 월이후재정경제위원회대신에예산결산위원회가설치되어종합심사하였다. 제 2 공화국에서도이와유사한심사절차를밟았다. 다만, 양원제이었기에민의원이선의권을갖고있었고전원위원회를폐지한것이달랐다.3 공화국에와서는종합심사를하는예산결산위원회가상임위원회가아닌특별위원회가되었다. 그런데 5 공화국의 11 대국회에서는상임위원회의예비심사가폐지되고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제안설명, 정책질의, 분과위원회부별심사계수조정소위원회, 전체회의의결과정을거쳐심사되었다. 그런데 12 대국회에서상임위원회의예비심사권이부활되었다 ( 손준철, 1989). 역대국회에서행정부가제출한예산안올삭감또는증액하여최종적으로수정한폭은한정적이었다. 단순히예산안의총량적인증감비율만살펴보더라도건국후 1996 회계년도까지를포함한 49 개년가운데일반회계예산안총액의 3% 이상을국회가수정한경우는 1950 회계년도 (1 950 년 ) 와 1972 회계년도 (1 971 년 ) 의 2 개년에불과하고수정비융은대체로 1% 전후이다 ( 국회사무처, 1994, pp. 395-40이. 더구나 1975 년정기회를포함하여그이후 1995 년정기회까지 1% 이상의수정은단 1 번에그치고었다 (1 989 년에차기예산 ). 국회의예산심의기능이소극적으로수행되고있음올말해주는것이다. 6) 국정감 조사제헌헌법에서부터국회의국정감사에관한명문이규정되었다. 그리고 1953 년 2 월에국정감사법, 1954 년 9 월에국회에서의증언 감정둥에관한법도제정되었다. 1972 년 10 월유선에서는국회의국정감 조사권이폐지되었다. 다만 9 대국회기간중인 1975 년 7 월의국회법개정 (18 차 ) 에서국정조사권이법률사항으로명시되었다. 5 공화국에들어서국정조사권은
50 헌법에명시되었지만국회의국정조사권은한번도발동되지않았다.6 공화국에들어서야국정감사권까지헌법에규정되었다. 국정감사는문민정부시대에와서개선된바가많다고평가된다. 여당의원들이맹목적으로행정부를두둔한다거나야당의원들이무조건적인비판으로일관하기보다는진지한정책대안을제시하려는노력이경주되고있다는것이다. 그러나여전히한건주의폭로, 현저한정파적목적관철, 지역구민원해결추구에치중하는등의행태가사라지지않고있다. 또한과다한수의감사대상기관과증인, 무리한자료제출요구, 중복감사와질의, 수감기관의불성실한자료제출과답변, 감사실시이후지적된사항에대한정부조처미확인퉁이문제점으로지적된다 ( 박종홉 임종훈. 19<)6: 김현구 1996: 윤영오. 1996). 7) 지역선거구대표기능 국회의원의대표활통에서가장두드러진점은지역선거구대표기능이압 도적인비중올차지해왔다는점이다.9 대.11 대. 12 대와 13 대국회의지 역구의원블을상대로조사한연구결과에의하면, 의원들은대체로원내에 서의정책활동과직접연결되지않은지구당관리, 지역구민의애경사와 민원돌보아주기에많은시간과자금을투자하고열의롤쏟는것이상례가되었음이밝혀졌다 (Kim and Pai, 1981, pp. 186-217: Kim, Barkan, Tumn andjewell, 1984: Yoon, 1985, pp. 230-283: 박찬옥, 19')0: 1994a). 물론이런 활동은특히지역구출신의원에게있어서본연적직무에속한다. 하지만 이것이대표활동의거의전부가되어있으며원내의의안심사활동올충실 하게수행하는데에지장을준다는점이지적되어왔다. 그리고의원들이 지역구편중의특정적인이익과의사의실현에주로매진하는국회는정책 적영향력올효과적으로행사하기가어렵다. 8) 원내정당의동태제헌국회에서의 1 차개정국회법 (1 949. 7) 에의하여그직후제 5 회국회부터 20 인이상의의원으로교섭단체를구성하게되었다. 제 6, 7, 8 대국회는 10 인이상의의원으로교섭단체를구성활수있게하였다가제 9 대국회이후에다시 20 인이상으로규정하여운영되고있다. 국회내의정당체계를규정할때는교섭단체즉정파의수를고려할뿐만
정치과정 / 박찬욱 51 아니라그들간의째력관계도아윷러감안해야한다. 원내에서제 1 정파가 55% 정도또는그이상의안정환과반수률확보하고있는반면에, 제 2 정파의의석비율이많아야 25% 에도훨씬못미친다면정파간세력불균형때문에일당우위체계라고할수있다. 제 1 정파가안정원과반수를확보하고있다하더라도제 2 정파가 25% 정도나그이상의의석올차지하고견제세력의중추로작용하고었다면불완전하나마양당체계로볼수있윷것이다. 그려고원내정파의수가 } 개이상이며어느한정파도안정된과반수의석을확보하고있지못한경우는연합정치가이루어켈소지가큰다당체계라고할것이다. 역대국회에서는분당, 탈당, 합당둥이합집산이빈번하여정당체계외유형은무정형했다. 다당채계는제헌국회, 2 대에서자유당이원내의제 1 정파로대두되기이전, 13 대에서 3 당통합이전, 14 대에서대선이전, 그리고 15 대에서대선이전에는다당체계가나타났다. 최근에올수록다당체계가빈번해지기는하나이보다는양당체계나일당우위체계가자주성립되었다.4 대 ( 자휴당파민주당 ), 5 대 ( 민주당의신 구파 ), 6 대 ( 공화당과민정당또는신민당 ), 8 대 ( 공화당과신민당 ), 12 대 ( 민주정의당과신한민주당또는통일민주당 ), 14 대후반기 ( 민자당과지방선거이전의민주당 ) 가운영되었다. 그리고 15 대에서대선이후에새정치국민회의와자민련은각각독자적인원내정파로남아있었으나공동여당이되어한나라당과의관계에서는양당체계와유사한면모를연출하고있다. 한편 2 대후반기와 3 대에서는자유당, 7 대에서는공화당, 9 대와 10 대에서는유신정우회와공화당올합친여권, 11 대에서는민주정의당, 13 대후반기에는민자당이체 1 정파가되는일당우위체계가성립되었다. 그런데일당우위의상황에서반대당은비록약한교섭력올갖고있었으나비판과도전을포기하지않았다. 즉일당우위체계도양당체계로변형되려는강한속성을갖고있었다. 결국, 국회내의정파구도는대체로양극척이었다. 국회에서는정당간갈등이결코원만하게처리되지못하였다. 중요의안을둘러싸고전개된정당갈둥은국회법과같은공식규범이처방하는바대로전개되고결말지어지지못하였다. 중요사안에대한여야논쟁은교착상태로치닫는확장과정과일방적결말로특정지워진다 ( 박찬욱, 1992). 국
52 회에서전개되었먼정당간의챔예한갈동사례훌훌쩔거하기란어렵지않다. 1954 년 11 월 3 대국회에서 4사 5 입개헌율물러싸고벌생한여야의원간의난투극이현저한예이다 4 대국회에서는 1958 년 12 월 24 일의국가보안법파동을빼놓을수없다 ( 이호진 강인섭, 1988, pp. 176-236). 3 공화국초기에가장심각한여야갈동의하나는 6 대국회에서한일협정비준동의를둘러싸고발생하였다 (K.B. Kim, 1971). 7 대국회에서는박대통령의 3 선을허용하는개헌안의전격통과로인하여여야대립이극심하였다. 1969 년 9 월 14 일에 3 선개헌안이공화당단독으로변칙통과되었고그후야당인신민당의원들은 1970 년 5 월에가서야동원하게되었다 ( 이호진 - 강인섭, 1992, pp. 304-3(9). 9 대국회에서는 1971 년 12 월국가보위법파동이여당의단독처리로인해발생하여국회가 7 개월공전되었다. 4 공화국과 5 공화국의국회에서는체제와집권세력의정당성시비가그어느때보다두드러졌다.9 대에서는김옥선의원의벌언, 10 대에서는김영삼신민당총재제명을둘러싸고첨예한갈퉁이있었다. 12 대국회는온통개헌논쟁으로소진하고파행을거듭했다. 최종회기의폐회일에마저국회의원선거법개정올둘러싸고정당간에치열한대립이전개되었다. 13 대후반기에변칙과파행이거의일상화되었다. 이시기에여당의일방적인강행통과의안이 79 건에달한다. 14 대국회도역시초반부터출발이순조롭지않아임기개시후 5 개월째들어서야원구성을마쳤다. 1993 년의정기회는문민정부최초의정기국회였는데안기부법, 통신비밀보호법의개정을둘러싸고여야의의견대립이있었고국회가꽁천되었다. 1994 년의정기회에서도여야경색으로의안심사가진행되지못하다가 12 월 2 일저녁에여당단독으로예산안울기습처리하였다. 4. 소결론한국국회는외생적요인에의하여자윷성이훼손되는시련올겪어왔다. 해방이후체제변동의소용폴이속에서국회는제도로서의생명이단절되는아픔을경험하고복원되는악순환올거쳐온것이다. 여태껏제 6 공화국에이르기까지 3 번의해산과 2 번의임기단축이있었다.
정치과정 / 박찬욱 53 한국은대체로대통령제를운영해왔기때문에국회의자율성은우선대통령을정점으로하는행정부와의관계에비추어규정된다. 그런데국회가행정부와의관계에서독자적인정치적입지를확보한기간은얼마되지않는다. 국회에는공식적으로는의안심사의내실화룰위한위원회제도가확립되어있고 ]4 대국회후반기이후에는민주적이고생산적인선진의회를지향하는방향으로국회법도잘정비되어있다. 의원의정책활동을지원하기위해서국회사무처산하법제예산실과각위원회의직훤조직, 도서관의입법조사분석실, 의원의개인보좌진이갖추어있다. 선진민주의회에비하면국회의지원인력이부족하기는하지만꾸준히개선되고있다. 그럽에도불구하고법률안심의나예결산심사동국회의정책활동이활발하다고평가되기에는이르다. 그리고해방이후국회에서는정당간갈둥행위의작용과반작용으로공전과파행이거듭되었다. 국민의대표기관인국회가민주체제의공고화에있어서견인차가될수있으려면여러측면에서개선된의회정치를운영할수있어야할것이다. 11. 선거 1. 서론 : 논의의범위 이절에서는해방이후 1996 년에이르기까지 14 대에걸친대통령선거와또한 15 대에걸친국회의원총선거를중심으로하되지방선거도함께고려하면서선거과정을고찰하기로한다. 이글은각종선거롤서술하면서선거가치러진배경, 적용된제도, 경쟁과정, 그리고결파를개관한다. 선거가민주정치에서대표선출과권력창출, 나아가서는당면과제에대한토론과대안모색의계기가되려면자유롭고공정해야함은당연한일이다. 이글은이런시각에서각선거의공정성에대해서도간략히언급하게될것이다. 뒷부분에서는해방이후선거에서보여진한국유권자의투표행태를고찰한다.
54 2. 역대대통령선거개판 : 저 도, 과정및컬과 1 ) 저 11 공화국과제 2 공화국 초대정 부통령선거는제헌의회에서의간접선거였다. 1948 년 7 월에초대대통령으로서는이숭만당시국회의장이, 부통령으로서는이시영이선출되었다. 그런데이시영부통령은중도에서사임함애따라 1951 년 5 월제 2 대국회에서김성수가 2 대부통령으로선출되었다. 1952 년 1 차개헌으로대통령및부통령은직접선거로선출하게되었는데, 정 부통령은동반입후보하는것이아니라유권자가별개의투표용지에기표하여선출하게되었다. 제 2 대대통령및 3 대부통령선거는 1952 년 8 월 5 일에실시되었다. 대통령선거에서자유당의이숭만은경찰과행정조직을활용하면서 74.6% 라는압도적득표율로당선되었다. 2 위조봉암은 11.4%. 3 위이시영은 10.9% 를얻었다. 부통령선거에서자유당의후보는이범석과이갑성 2 인이출마했는데이승만은무소속의함태영을도와그를당선시켰다. 3 대대통령및 4 대부통령선거는이숭만대통령의종신연임제를가능케하는 4사 5 입개헌을토대로 1956 년 5 월 15 일실시되었다. 대통령선거에는당초자유당의이승만, 민주당의신익회, 무소속의조봉암이입후보했으나신익회후보가선거를 10 일앞두고급서하여이숭만대조봉암의 2 파전이되었다. 이선거에서는신익회의서거에도불구하고그에대한지지표가많아무효표가총득표수의무려 20.5% 에달하였다. 유효표는이숭만과조봉암이 7:3으로갈라득표하였다. 조봉암의득표수와무효표수가총득표수의 44.3% 에이른다는것은당시에반이숭만분위기가팽배하였음을말한다. 그리고진보척인조봉암후보가대통령선거에서유효표의 30% 를득표했다는사실도주목할만하다. 한편부통령선거에서는자유당의이기붕을제치고민주당의장면이당선되었다. 1%0 년 3 월 15 일에 4 대대통령및 5 대부통령선거가실시되었는데자유당정부가대대적인부정올감행함으로써학생집단의저항을불러일으키고드디어 1 공화국의종말을가져왔다. 후술하는바와같이 1958 년의 4 대
정치과정 / 박찬욱 딩 민의원선거에서도선거의자유와공정성이심각하게훼손되었는데 1%0 년에와서극도에달했던것이다. 유권자에게향웅을베풀고현금올살포하여표를매수하는금권이난무하였다. 경찰과내무공무원들의선거간여와선거부정도현저하게발생했다. 야당측선거운동탄압. 후보의동록포기나사퇴종용퉁이선거간여의예였다. 선거부정의예로서는실제로는없는유령유권자를만들어놓고대리인으로하여금투표하게하는행위, 사전에무더기로투표하는행위, 개표과정에서야당후보를지지한투표용지를무효화시키는행위등이선거부정의혼한예이었다. 정치깡패나폭력단들이야당측을협박, 폭행하는일이많았고군에서는여당후보를대거지지하도록강제되었다. 이와같이부정과부패로얼룩진 1960 년의선거는 4. 19 학생혁명이후에소집된국회에서무효화되었다. 제 2 공화국에서는의원내각제를채택함에따라 1 %0년 8 월에민의원과참의원합동의회에서윤보선당시민의원의장을 4 대대통령으로선출했다. 2) 제 3 공화국 1963 년 10 월의 5 대대통령선거에는총 7 명의후보가풍록하였는데경 쟁구도는민주공화당박정희후보와민정당윤보선후보간의 2 파전이었다. 선거전에야당은군정종식을공동의목표로설정했으나후보단일화에도 달하지못하고분열하는양상을보였다. 이선거에서최대쟁점은박정희 후보의전력과사상에관련된논쟁이었다. 그런데야당이미래상에대한 제시없이유권자의반공의식에만호소하여득표하려는전략은한계를갖고 있었다. 야당은정책대안없이분열과난립을일삼는모습을보여오히려 박정희후보에게반사이익을가져다주었다. 선거결과, 박정회후보는총유 효표의 46.6% 를얻어 45.1% 를얻은윤보선후보에힘겨운승리를했다. 1967 년 5 월의 6 대대통령선거에서도경쟁은빈주공화당박정회후보와 신민당윤보선후보의대결로압축되었다. 이선거에서의쟁점은경제발전 의공파에관한것이었다. 기존집권여당은제 1 차경제개발의긍정적인성 과를과시하여득표하고자하였고야당은그경제적업적이부채에의존하 는둥의문제점을갖고있음을부각시키고자하였다. 유권자는야당보다는
56 여당쪽에더욱기울여졌고박대통령은무난히재집권에성공했다. 득표율 은박정회가 51.4%. 윤보선후보는 40.9% 이었다. 제 7 대대통령선거는 1971 년 4 월에실시되었는데이선거에서도경쟁은 2 파전이었는데민주공화당의박정희후보에신민당김대중후보가도전하였다. 주요쟁점은 3 선개헌이후박정회종신집권기도와함께주변 4 대국보장론이나예비군폐지, 그리고북한의남침가능성과같은안보문제였다. 기존의집권여당은국가안보상의위기의식올조성하는선거전략에크게의존하였다. 제 3 공화국에들어와제 5 대대통령선거는비교적공명한선거였는데 6 대대통령선거에와서관권과금권의횡포가확산되었고제 7 대대통령선거는매우혼탁한분위기에서치러졌다. 정부와여당이박정희대통령의당선을위해서금권과관권을총동원하여치른선거였던것이다. 영남출신박대통령과호남출신김대중후보가경합했기때문에양지역간대립의식도고조되었다. 공식적득표율은박정회 53.2%. 김대중 45.3% 로집계되었다. 그러나이결과에서시사되는것보다는근접한경쟁을벌인선거였다. 박정회대통령은이번이야말로마지막기회라고하면서지지를호소했는데힘겹게목표를달성하였고그의지지기반상의문제가드러냈다. 이를테면, 박정희후보의승리는경상도에서의집중적지지없이는불가능했다. 경상호에서김대중후보를 150 만표앞서고도전체적으로는 95 만여표정도를앞섰다. 박정희대통령은수단과방법을가리지않고총력을경주한다해도국민의직접선거로서는종신집권이용이하지않음을절감했을것이다. 3) 저14 공화국과제 5 공화국제 8 대 (1 972 ), 9 대 (1 978). 10 대 (1 979 ), 11 대 (1 980) 대통령선거는유신헌법에따른간접선거로서실시되었다 8 대와 9 대모두단독으로입후보한박정희가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선거에서선출되었다.10 대선거는박정희대통령의암살이후실시되었는데최규하당시대통떻권한대행이단독후보로출마하여당선되었다 11 대대통령선거에서는전두환당시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이단독후보로출마하여당선되었다. 1981 년 2
정치과정 / 박찬욱? 월 25 일에실시된제 12 대대통령선거역시칸션으로서선거인단이구성되어대통령올선출하였다.4 명의후보가출마하기는하였으나결과는이미정해져있었고민주정의당의전두환후보가 90% 를득표하여당선되었다. 4) 제 6 공화국 13 대대통령선거는제 5 공화국말기인 1987 년 12 월 16 일에실시되었는데민주정의당의노태우, 통일민주당의김영삼, 평화민주당의김대중, 그리고신민주공화당의김종펼후보의 4 파전이훨쳐졌다. 선거전에전통야당의양대지도자인김영삼과김대중은후보단일화에노력하겠다고했으나결국실패하고모두출마했던것이다. 오랜만에복원된직선인이선거의경쟁은매우치열하고과격하기까지하였다. 후보의유세도중과격시위와폭력사태까지발생하여유세가중단되는경우가있었다. 가장중요한선거쟁점은 5 공화국의유산과정치적안정문제이었다. 야당후보들은제 5 공화국과민주정의당의정치적정당성을공격하였다. 김영삼후보는군정종식을이룸으로써, 김대중후보는광주문제와지역감정의해소를통해서정치안정을성취할수있을것이라고주장했다. 한편노태우후보진영은야당의정치적정당성시비에대하여 5 공화국의경제적치적을내세우고계속적집권을통한정치안정을강조했다. 그어느때보다도정당간정권교체가능성이높은선거였으나전통야당의분열에따른반사이익으로민주정의당의노태우후보가당선되었다. 1992 년 12 월 18 일에있었던제 14 대대통령선거에서는민주자유당의김영삼, 민주당의김대중, 통일국민당의정주영후보가 3 파전을벌였다. 민자당의김영삼후보는안정속의개혁을위해자신이참여한여권통합을옹호하였는데한국의당면문제를한국병으로규정하고신한국창조를슬로건으로내세웠다. 민주당의김대중후보는온건한이미지의부각을위해서 뉴 QT 플랜 과대화합을내셰우면서정권교체를주창했다. 그리고, 정주영후보는자신의경력과이미지를십분활용하고자경제난국올해결하는 경제대통령 을구호로내세웠다. 선거분위기는초반에정책대쩔의조짐을보였으나종반으로갈수록혼탁해졌다. 김영삼후보진영은김대중후보에대한보수안정층의경계섬올
58 증폭시키고자 색깔론 올제기했다. 선거일을며철앞두고국민당은김영삼후보당선을위한 부산기관장대책회의사건 올쪽로했는데이사건은오히려김영삼후보에대한영남권유권자의지지훌강화한방향으로작용하였다. 정주영의후보는현대그룹에의존하는운동전략과비자금에의한선거지원으로인해득표력을과시하지못하였다. 14 대대선은이미선거기간부터돈이많이든선거로알려졌다. 민자당과국민당은금권선거의장본인으로서서로상대방을지목하여비난할정도로금권선거문제가쟁점화되었다. 선거전에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공시한후보자별법정상한은 367 억원정도였다. 그러나민자당의경우에예를들면수천억원에서 1 조원정도까지선거비용을지출했다는소문이파다했다. 여하튼법정상한액과실제선거비용간의엄청난괴리는한국선거의고질적인병폐로드러났다. 선거결과, 민자당의김영삼후보가 42% 의득표율올얻어당선되었다. 민주당의김대중후보는 34%. 국민당의정주영후보논 16% 를얻었다. 13 대대선에이어 14 대대선에서도지역주의투표성향은전혀완화되지않았다. 13 대대선에서는각정당이특정지역을거점으로유권자를 4 분하는구도가나타난반면 14 대대선에서는호남 비호남의 2 분구도로지역갈등이양극화되었다. 김영삼후보의당선은 1961 년군부의정치개입이후권위주의정치가지속되면서국민이점차강하게바라던문민정부를탄생시켰다. 금권의난무에대한시비는일었으나노태우정부의선거중립으로 14 대선거과정은 13 대의경우보다는공명했다고평가된다. 김영삼정부는확고한절차적정당성을부여받고출발했다. 3. 역대국회총선거개관 : 제도, 과정및결과 1 ) 저 11 공화국 제 1 공화국개막이전의제헌국회선거로부터제 1 공화국붕괴이전의제 4 대국회총선거까지는 1 구 1 인선출단순다수제가적용되었다. 21 셰이상의남녀에투표권이부여되었고피선거권연령은 25 세이상이었다. 제헌국
정치과정 / 박찬욱 59 회의원의임기는 2 년이었으나 2 대이후 4 대국회까지의원임기는 4 년으로되었다. 제헌의원선거시에는친일행위가뚜렷한자는선거권과피선거권을박탈한다는제한규정이있었다. 그리고제헌국회와 2 대선거에서정당공천제는실시되지않았지만제 3 대로부터정당공천제가서서히확대되었다. 자유당은 3 대총선시에지구당의선거후중앙당의심사롤거치는, 즉지구당의자율성과중앙당통제를절충하는공천제도를도입하기시작하였는데 4 대총선에가서는중앙당이공천을장악하였다. 야당인민주국민당도일부후보를공천하였다. 하지만국회의원입후보롤위해서정당공천이법적요건은아니었다. 제헌의회선거에서는좌익계의참여가봉쇄되고남북협상파및중간파가선거에공식적으로불참하였다. 그럽에도불구하고 48 개에이르는정당과사회단체가선거에후보자를내었고무소속후보자의수도상당히많았다. 제헌의회의선거분위기는충분히자유롭지못하였다. 지하에잠복한남로당중심의좌익세력은폭력행사를통한선거방해공작을일삼았다. 유권자동록거부운동으로부터시작하여투표방해홀함에있어서관공서를습격하고관리를살해하기까지하였다. 이에대하여미군정은강경하게대웅하여선거분위기는상당히자유스럽지못했다. 또한미군정은자진으로하게되어있는유권자둥록을적극유도하였기에강제동록이라는비난이일기도하였다. 향보단이조직되어투표참여동원에나서고, 경찰과더불어투표장안팎올경비하였다. 강제투표, 대리투표, 무더기투표, 선거시간연장등불법행위가수많은선거구에서목격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이아물지않아 3 개의선거구중두곳에서선거를치르지못했다. 선거의공정성보장을위해서유엔임시위원단이활동을했으나당시이위원단의인원은총 36 명이었고그중에서 30 명만여감시에참여하였다. 이정도의인력으로선거감시활동을철저히한다는것은생각하기어려운일이었다. 제헌의원선거는이와같이자유롭고공정한선거가되지못하였다. 그러나그이후의선거에서처럼노골적인투 개표부정이나매표퉁부정행위는자행되지않았다. 1 년뒤에선출된제주도의 2 석포함하여총 200 석가운데이숭만을가장
60 충실하게지지했던대한톡렵촉성국민회가 26.1% 의특표올로 55 석, 한민당이 13.5% 의득표율로 29 석, 대동청년단 ( 단장지청천 ) 이 9.6% 로 12 석, 조선민족청년단 ( 단장이범석 ) 이 2.1% 로 6 석, 기타군소정당및단체 13 석, 그리고나머지 85 석은무소속이었다. 무소속의대거당선이말해주듯이정당의선거기능수행은아직미숙하였다. 그런데무소속으로당선된인사가운데는한민당에대한부정적태도를의식하여무소속으로출마했으나잠재적으로는한민당동조자가많았고, 또한김구계열의한독당내지김규식계열의중간파에속하면서개인적으로출마하여당선한인사가없지않았올것이다. 여하튼제헌국회선거에참여한국내정치세력으로서는이승만지지세력과한민당세력이승리한선거였다. 제헌국회선거는당시국내외정치상황에비추어국토분단의불가피성을인정하는전제에서치러졌고친일분자둥의청산을가져오지못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미군정의종식과나아가서는근대국가건셜의계기를마련해주었다. 보통선거가실시되면서국민의정치참여통로가개방되고한국민주정치가출발하게된것이다. 1950 년 5 월 30 일에실시되었던제 2 대선거에는지난선거에불참했던남북협상파및중간파가참여했는데입후보자수가의원정수의 10.5 배가되어지금까지의역대국회의원선거중가장높은경쟁훌윷보였다. 지난선거보다선거참여정당및사회단체의수가다소줄기는했으나 39 개에달하게되어여전히난립현상이빚어졌다. 대한국민당이나면국당이보수적인이념적색채률갖고있었으나사회당과민족자주연맹동협신적인성격의정당도경쟁에참여하여통일이나경제정책에있어서정당간에현저한차이가드러났다. 그런데 2 대국회의원선거의경우에얼마되지않아전쟁이발발하게되어관계자료의소실및유실로인하여투표상황에대한상세한공식적자료가없는실정이다. 선거결과 10% 이상의득표융을기록한정당이나사회단체가없었다. 제 1 정파인대한국민당마저 9.7% 를얻는데에그쳤다. 제헌의원선거에서와같이무소속이발호하여국회총의석 210 석중 126 석올무소속이차지하였다. 여당적입장에있었던이숭만계의대한국민당이나제 1 야당격인은민국당은각각 24 석을얻었다. 이양대정당은선거전파후의의석수를비교
정치과정 / 박찬욱 61 할때세력이상당히위축된것이다. 특히지주의이익올대변하는민국당의경우에토지개혁으로농민에대한영향력올상실했옵올알수있다. 그런데대한국민당의약화가곧이송만지지세력의약화흘의미하는것은아니었다. 공식적여당이확립되지않은당시에는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총연맹, 일민구락부, 대한부인회, 중앙불교위원회, 대한여자국민당등도친이승만경향이있었기때문에이를모두합하면 60 석에근접하는이승만지지세력이여전히유지되었다. 3 대민의원선거는 1954 년 5 월 20 일에실시되었다. 전국적인지방조직을갖춘자유당이여당으로공식적으로동장하여선거에참여하고유권자들은경찰풍관권에의해자유당에투표하도록동원되었다. 민국당등야당측으로부터부정선거시비가제기되었다. 선거결과를보면, 자유당은 36.11% 의득표율로무려 114 석을확보하였다. 그외의정파로서는민국당 이 15 석, 국민회가 3 석, 대한국민당이 3 석을얻었다. 제헌과 2 대국회선 거에비하여무소속의진출이현저히줄기는했으나 6H 석이나되어여전히 무시못할수준의진출을보였다. 자유당은압도적인다수를차지하였으나 당초목표했던개헌정족수를차지하지못하자의원포섭에열중하여교섭 단체등록시에는 137 석을확보하였다. 4 대민의원선거는 1958 년 5 월 2 일실시되었다. 선거전의상황을보면, 같은해 1 월에진보당의조봉암등이평화통일주장이국가보안법에위반 된다고하여구속되고 2 월진보당은동록이취소되어해산되었다. 선거경 쟁의양상은자유당대민주당의각축전으로집약되었다. 관권개입에의 한자유당지원은지난선거보다더욱기승을부렸다. 투표일전후로폭력 사태가적지않았고, 유령유권자에의한투표참가, 부정개표및개표중 단등일련의비정상적사태가다수발생하였다. 제 1 공화국시기에실시된 국회의원선거가운데가장심각한부정선거가치러졌던것이다 ( 길승홈외, 1987, p. 31). 4 대선거의결과, 자유당은 42.1% 의득표율로 126 석을얻었고, 그다음 으로민주당은 30.4% 블얻어 79 석을확보하였고, 통일당이 1 석, 무소속이 27 석으로나타났다. 매우불리한여건에서경쟁한제 1 야당민주당의대약 진이두드러졌다. 4 대국회의원선거에와서내재적으로군소정당이나무
62 소속후보에게불리한 1 구 1 인다수대표제의효과, 이외에도선거전에자유당과민주당이협상올통해개정하여군소쩡당에불리하게작용하는선거법 ( 예를들면, 기탁금제도입 ) 의영향, 그리고권위주의의심화에따라형성된민주대체제유지의대립구도로인하여양대정당간의경쟁구도가자리를잡게되었다. 그런데자유당은 126 석가운데 90% 롤읍 면지역의선거구에서, 민주당은 79 석가운데 54% 를서울특별시및 26 개시선거구 에서획득하여여촌야도현상이현저하게부각되었다 ( 윤천주, 1989, p. 21). 2) 제 2 공화국제 2 공화국시기에는양원제국회가실제로구성되었다. 입기 4 년의 5 대국회민의원의경우에이전과동일하게 1 인선출단순다수제로의원을선출하여구성되었다. 한편참의원선거는시 도를선거구단위로하는대선거구제한연기제로써실시되었다. 5 대총선에서부터는유권자연령하한이 20 세로조정된점이특기할만하다. 1960 년 7 월에제 2 공화국개막을위해치러진제 5 대민의원및초대참의원선거는권위주의독재의와해와더불어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연맹둥혁신정당이선거에참여하였다. 그러나선거가보혁대결의양상을띠기보다는민주당의압승이예견되었으므로민주당내신 구파간대결의성격이강했다. 과도정부의중립적인선거관리로인하여이선거에서는경찰과관권의개입은없었다. 그러나자유당세력의출마제지를위한행동대의폭력행사, 그리고일부에서의여전한매표매수행위로인하여선거분위기가아주공명하다고할수는없었다. 민의원선거에서민주당은 41.7% 의득표율로총의석의 75% 인 175 석을차지하고자유당은 2 명의당선자만을내어실질적으로와해되었다. 사회대중당이 4 석, 한국사회당이 1 석, 기타 2 개정당및단체가각각 1 석을얻었고, 무소속은 49 석이었다. 참의원선거에서는민주당이총의석의 53% 에해당하는 31 석올얻었고자유당은 4 석, 사회대중당과한국사회당이각 1 석씩을얻었고, 무소속은 20 석이었다. 민의원선거에서의민주당압승은이승만독재말기민주당에대한강한지지와더불어 1 구 1 인선거구제의
정치과정 / 박찬욱 63 효과에크게도움올받은것이다. 3) 제 3 공화국제 6, 7, 8 대총선에서는종전의 1 인션출단순다수제를꿀간으로하고전국구비례대표제를부분적으로가미하는방식이적용되었다. 여기서비례대표제란실질적이라기보다는명목에그치는것이었다- 왜냐하면첫째, 비례대표제선거를위한별도의투표가있는것이아니라각정당이지역구선거에서획득한투표수에기초하여의석을배정하는방식을취했기때문이다. 둘째, 이제도는소정당의대표성을확보해주기보다는대정당, 그것도제 1 당의대표성을확대하는방향으로마련되었기때문이다. 지역구의석총수의 3 분의 1 에해당하는 44 석이전국구비례대표제의석으로설정되었고, 지역구선거에서 3 석이상과동시에유효득표율 5% 이상을확보한정당만이비례대표제의석을배정받을수있게되었다. 비례대표제의석의절반인 22 석은지역구선거에서최다수를득표한정당에배당되도록보장했다. 즉제 1 당이유효득표융 50% 미만을얻으면 22 석을, 그리고 50% 이상을획득하면그에비례하여의석을추가로배정받올수있었다. 제 2 당은그것이획득한유효표의총수가제 3 당이하모든정당의득표총수 2 배미만이면제 1 당이차지하고남은의석의 3 분의 2 를배당받았다. 제 3 당이하의정당들은제 1 당과 2 당이차지하고남은의석을득표수에비례하여배분받게되었다. 제 3 공화국국회의원총선에서는전국구비례대표제롤도입함과동시에후보자의정당공천제를법정화하고무소속후보의출마를봉쇄했다. 이것은정당책임정치의구현이라는명분아래이루어졌는데당지도부외권한과정당기율을강화하는방향으로작용했음은물론이다. 군부정권말기인 1%3 년 10 월에공화당은대통령선거에서승리하고다시 11 월에는유리한위치에서선거에임한반면에야당은난렵한채로선거를맞게되었다. 공화당은경제발전을위해서는정국안정이필요하다고하여지지를호소하고야당들은견제세력이필요함을내세웠다. 분열된야당의호소력은약할수밖에없었고게다가조직력이나자금력에서도열세를면하지못했다. 선거결과, 공화당온지역구선거에서 33.5% 의득표율로
64 지역구의석전체의 68% 인 88 석올차지하였다. 그리고전국구 22 석올추가로배정받아총의석 175 석중 110 석을확보하였다. 제 2 당인민정당은지역구 27 석, 전국구 14 석을합쳐 41 석을얻었다. 그밖의야당이획득한의석수는민주당이 13 석. 자유민주당이 9 석, 그리고국민의당이 2 석이었다. 제 7 대국회의원선거는 1967 년 6 월 8 일에실시되었다. 같은해 5 월의대통령선거에서와같이공화당대신민당의경쟁구도가잡혀있었고안정이냐견제냐하는것이쟁점이되었다.7 대선거의분위기는초반부터매우혼탁하였다.7 대선거는 3 공화국에서여당에의하여자행된선심공세, 부정, 부패, 불법, 타락이가장두드러진선거였다. 대낮부터술을대접하는것으로부터시작하여갖은방법으로유권자와상대방운동원을매수하는일이많았다. 대통령으로부터통반장에이르기까지공무원들이여당후보의지원에적극나섰다. 투 개표부정시비도많이일었다. 후보자들간에중상모략과흑색선전이난무하였다. 선거후에야당은전면부정선거라고주장하였고여당은일부나마부정선거를인정하지않을수없었다. 공화당은 50.6% 의득표율로지역구 102 석, 전국구 27 석을차지하였으며, 신민당은통합야당임에도 32.7% 의득표율에머물러지역구 28 석, 전국구 17 석을얻었다. 제 3 당으로서는대중당이유일하게지역구의석 1 석을얻었다. 의석분포로보아 6 대국회에서공화당의일당우위가역력했는데 7 대국회에서그러한경향은더욱강화되었다. 1971 년 5 월제 8 대국회의원선거가있었다. 선거과정에서노골적인관권개입은 7 대선거보다줄어들었으나금권은여전히위력을과시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3 선개헌으로고조된반공화당분위기로인하여제 1 야당이강화되어양당적경쟁에근접하게되었다. 선거결과에있어서도양당체계가정립되어가는것으로나타났다. 즉공화당은깎.7% 의득표율로 113 석올, 신민당은여당에비하여다소뒤떨어진 μ.4% 의득표율로 89 석을, 군소정당으로서는국민당과민중당이각 1 석씩을이총의석의 43.6% 를얻었다. 4) 제 4 공화국제 4 공화국의심화된권위주의독재정치는국회의원선거제도의면변올
정쳐과정 / 박찬욱 65 보아도잘나타난다.4 공화국시기나그이후의 5 공화국시기에는집권세력이무리하게노골적인부정, 불법, 타락선거률자행하여권력을유지하기보다는우선적으로선거제도자체훌원천적으로조작하여권력유지률도모했다고말할수있다. 물론권위주의독채가심화된이시기에선거분위기가공명했던것은아니었다. 금권과관권의위력은선거에서여전히약화되지않았다. 4 공화국에와서는지역구선거에는 1 구 2 인선출제도가, 또한전국구비례대표제대신에국회의원총수의 3 분외 1 을사실상대통령이임명하는유정회제도가도입되었다. 1 구 2 인제는거의모든선거구에서제 1 당후보의당선올가능하게하고제 2 당후보의당선가능성도현저히높여여야동반당선을용이하게하였다. 한선거구에서 2 인이당선되나유권자는 1 표만을행사하고득표순으로당선자가결정되었다. 이것은엄격히말해서, 유권자가선거구당의원정수보다적은수의표를행사하는제한투표의한종류로서단기비이양투표 (siogle 000-없 nsferable vote) 라고규정된다. 그런데대통령은국회의원총수의 3 분의 1 을일괄추천하여통일주체국민회의로하여금공식척으로확정하게하였다. 이들이바로유정회를구성하였는데유정회의원들은여당의훤들과더불어대통령의국회지배를적극뒷받침했던것이다. 지역구의원의임기는 6 년으로연장되어국회의원총선이종전보다덜빈번하게실시되도록하였다. 한편대통령이정치적생명을좌우할수있는유정회의원의임기는 3 년으로셜정되었다.4 공화국에와서는참정권을제한하지않는다는명분으로무소속출마가다시허용되었는데이것은야당후보들사이의경쟁올조장하는방향으로작용하였다. 1973 년 2 월 27 일에실시된제 9 대국회의원션거에서공화당은 38.7% 의득표율로 73 명의당선자를내고, 제 1 야당인신민당은 32.5% 의득표율로 52 명. 이어서민주통일당은 1.4% 로 2 명의당선자를내었다. 무소속은 19 명당선되었다. 유신체제에대한불만이고조되고또한부단히표출되자박정회대통령은긴급조치를발동하여체제에대한비판올금지했다.10 대국회의원선거는이러한상황에서 1978 년 12 훨에치러졌다. 득표율에서는제 1 야당인신민당이 32.8% 를얻어여당인공화당을 1.1% 로앞섰다. 이렇게단일의
66 야당이여당보다더많이득표한결과는한국의선거사상처옴이자아직까 지유일한결과로기록되고었다. 민주회복올주창하는신민당의득표력은 유신체제에대한유권자의불만과비판의식이광범하게확산되어있음을 역력히말해주었다. 그리고유신체제의종말이멸지않았옴을예고하는결 과였다. 하지만불공정한선거제도로인하여지역구의석은공화당이 68 석 으로 61 석을얻은신민당을앞섰다. 민주통일당이 3 석, 무소속은 22 석이었 다. 지역구의석에유정회 77 석을더하여여권은 10 대국회에서 60% 이상 의안정과반수를만들수가있었다. 5) 제 5 공확국 제 11 대와 12 대국회의원총선에서는지역구선거를위해 1 구 2 인선출 제도가유지되고제 4 공화국의유정회제도대신에제 3 공화국에서실시된 전국구비례대표제를다시도입하였다. 지역구의석총수의절반인 92 개전 국구비례대표제의석은다음과같이배분되었다. 즉지역구선거에서의 석수가가장많은제 1 당이그 3 분의 2 에해당하는 61 석을배정받고나머 지 31 석은제 2 당이하의지역구 5 석이상을얻은정당들사이에서득표율 에따라배분되도록하였다. 이것은정당간정권교체의경험이없는한국 정치에서제 1 당이란언제나여당일것이라는전제하에여당의세력유지를 위해마련된배분방식이다. 1981 년 3 월의 11 대총선에는많은구정치인들이규제되어출마하지못 하고체제에적극적으로도전하지않는위약한야당들이여당인민주정의 당과경쟁했다. 지역구선거에서민주정의당이 35.8% 의득표율로 90 석을 얻어제 1 당으로부각되었고민주한국당이 21.6% 로? 석올, 한국국민당이 10.3% 로 7 석올확보하였다. 그밖의 5 개정당이모두 8 석을얻었고 11 석 의무소속이진출했다. 한편전국구의석은민주정의당에 61 석, 당에 24 석, 그리고한국국민당에 7 석이배분되었다. 결국, 민주한국 11 대국회는민 주정의당 151 석, 민주한국당 81 석, 한국국민당 25 석, 나머지군소정당이 8 석, 무소속 11 석의의석분포로출발했다. 12 대총선 (1985 년 2 월 12 일 ) 직전에구야당계의정치인들에대한정치 활동규제가해제되었고이들은신한민주당을결성하여선거에참여하였
정치과정 / 박찬욱 67 다. 신한민주당은다수국민이얼망하는대통령직선제개헌둥민주화기치를내걸고안정과번영올외치는여당과대결하였다. 선거결과민주정의당이 35.3% 의득표율로지역구의석 87 석, 전국구의석 61 석으로제 1 당의위치를지키기는했으나신한민주당이여러가지불리한여건에서도 29.3% 의득표율로지역구 50 석, 전국구의석 17 석을얻어기존의야당을제치고제 2 당이되는돌풍올일으켰다. 제 5 공화국체제에안주하던민주한국당과한국국민당은각각 19.7% 로총 35 석과 9.2% 로총 20 석을얻었다. 이외에기타 2 개정당이 2 석, 무소속은 4 석이었다. 6) 제 6 공화국 13 대이후국회의의원정수는 299 석이되었다.13 대국회총선에임박해서 224 석의지역구의석을선출하기위해서 4 공화국이전의 1 구 1 언제로다시돌아갔다. 그리고전국구꺼석의배분방식은다음과같이변경되었다. 지역구의석수의 2 분의 1 이상을확보하는정당이있는경우에는지역구의석 5 석이상을얻은정당이지역구의석수에비례하여전국구의석올할당받는다. 제 1 당이지역구의석수의 2 분의 1 을얻지못하게되면 38 석이제 1 당에우선배정되고나머지는지역구 5 석이상을얻은제 2 당이하의정당에게지역구의석수에비례하여배당된다. 전국구의석배분시에제 1 당에주는특별배려가여전히남아있는것이다. 14 대총선을앞두고전국구의석수는 62 석으로축소되고그만큼지역구의석수가늘었다. 전국구배분을함에있어서제 1 당에게 2 분의 1 을보장해주는장치는폐지되었다. '5석이상지역구의석을얻은정당이지역구의석수에비례하여전국구의석을배분받도록하였다. 다만지역구의석을 1 석도얻지못하더라도유효득표율 3% 이상의정당에게는 1 석을우선배분하도록하였다. 15 대총선에와서도국회재적의원정수는여전히 299 인으로변함이없으나지역구의석은 253 석, 전국구의석은 46 석이되었다. 그런데전국구비례대표제의의석배분규칙은변경되었다. 즉지역구 5 석이상또는유효득표율 5% 이상을얻은정당에유효득표수에비례하여전국구의석이할당되도록하였다. 다만이번에도지역구의석을 1 석도확보하지못한경우
68 에라도유효득표윷이 3% 이상이고 5% 며만이면 1 석을우선배정받게되어있다. 1988 년 4 월 26 일에실시된 13 대총선기간에현저히부각된정책쟁점은없었다. 실질적인정책문제보다는제 5 공화국전두환정부와집권당인민주정의당의정당성에관련하여시비가제기되었다. 야당은 13 대대통령선거를부정선거로규정하고여당이총선에서도부정선거를획책하고있다고공세를펼쳤다. 야당에서는또한전경환사건동제 5 공화국의권력형비리문제를부단히제기하였다. 13 대총선은선거폭력, 금권선거, 관권채입시비동여러측면에서혼탁하고타락한선거였다. 13 대총선에서집권여당이국회의석의과반수를확보하지못하는사상초유의결과가나타났다. 민정당은지역구와전국구의석을포함하여총의석수의 42% 를얻는데에그쳤다. 한편, 의석비율에있어서형민당이 23.4%, 민주당이 19.7%, 그리고공화당이 11.7% 을얻어 4 당분립체제가구축되었다. 이러한분립체제를가져온왼인은무엇보다도 13 대대선에서선명하게노출된지역주의투표현상이그대로재현되었기때문이었다. 여하튼선거결과는정당간연합의정치를불가피하게하였다. 이것은한국의회정치의진전에대한기대와함께정국의불확실성과불안정에대한우려도함께초래하였다. 13 대총선이후형성된 4 당체계는 2 년이채안되어민정 민주 공화 3 당의민자당에로의통합으로인해변화를겪었다. 평민당은마침내민주당으로되고또한정주영현대그룹명예회장이주도하는국민당이출현하게되었던것이다. 14 대총선은 1992 년 3 월 24 일에실시되었다. 민주화가진전되면서 14 대총선에서는체제쟁점의비중이약화되는대신에경제분야에서의정책성과가쟁점으로대두되었다. 특히신당인국민당은공식적인선거운동기간이시작되기이전에이미신문광고를활용하여경제정책에대한논쟁을유발했으며, 아파트반값분양, 통화량 2 배공급 집권 1 년만에 1 백만달러무역흑자 둥과같은정책구호로지지를호소했다. 민주당은전통야당의입장에서 3 당통합, 인사정책의지역편중성, 국회에서의날치기의안처리, 자치단체장선거의연기, 선거직전에밝혀진군에서의부재자투표부
정치과정 / 박찬욱 69 정과안기부개업을쟁점화하였다. 이와같은민주대반민주, 안정대견제의체제쟁점은예전의선거에비하면그리크게부각되지않았다. 민주자유당은정국의안정을강조하며각종개발사업공약을발표했다. 그동안진전된민주화, 주택 200 만호건설, 북방정책등의성과에역점을두면서야당의공세에대웅하였다. 14 대총선에서는어느정도정책대결양상이드러났다. 14 대총선의공명성은 13 대총선에비하여향상된편이었으나경북칠곡에서면사무소직원에의한무더기부정투표, 충남연기군에서의관권개입, 군부재자투표의부정, 안기부의선거간여동심각한불법사례가발생하여여전히훼손되었다. 14 대총선에서민자당은과반수에서 1 석미달되는 149석올얻었고민주당은 97 석을얻어총의석의 3 분의 1 에근접하게되었다. 국민당은창당된지불과두달만에원내교섭단체를독자적으로구성활수있는수준의 31 석을확보하였다. 군소정당은신정당만이 1 석을얻었고무소속이 21 명당선되었다. 지역주의투표성향은 13 대총선에비하여다소완화되었으나여전히지배적이었다. 새로운정치에대한수요와민생의불안정이국민당의약진에기여했다. 그러나국민당은국가와똑점자본간의갈등, 특정자본이익의정치적관철이라는성격을갖고있었기때문에비판을받지않을수없었다. 14 대대션이후국민당이와해되어민자, 민주양당구도가되었다가그후여야가각자분열하면서자유민주연합과새정치국민회의가탄생하였다. 그리고민자당은신한국당으로개명하였고민주당은시민운동세력과함께통합민주당을출현시켰다. 결국. 1 딩대총선직전에는 4 당경쟁구도가형성되었다. 15 대총선을살펴보기전에 1994 년 3 월에제정된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에대한언급이필요하다. 이법은기존의각종선거법올단일화하여 통합선거법 으로도불린다. 이법은선거운동의자유를획기적으로확대하였다. 종전에는선거운동을포괄적으로금지하고특정방식만을허용했으나, 여기서는특정의선거운동방식올개별적으로열거하여최소한의수준에서제한하고나머지는허용하였다. 그리하여후보자와유권자가서로접촉할수있는기회가대폭확대되었다. 아울러선거의공정성제고를위
70 해서여러조처률마련하였다. 선거일의법정화, 사전선거운동금지강화. 사회단체의공명선거추진활동허용, 선거법위반에대한처벌강화, 재정신청제도도입, 국회에선거구획정위훤회설치, 전국구의석배분방식의개선등이그러한조처이다. 선거비용을최소화할목적으로법정선거비용의제한액올대폭축소하였으며선거비용의수입과지출시에금융기관의예금계좌이용을의무화하였고선거비용보고서의공개와일반열람및이에대한이의신청을허용하였다. 선거비용의회계보고시에는예금통장사본, 영수증둥증빙서류를제출토록하고선관위에선거비용설사권을부여하였다. 한편법정선거비용을초과지출하면당선무효가될수도있으며추후공직출마를제한받는동의강력한법적제재수단이규정되었다. 선전벽보, 선거공보, 소형인쇄물의인쇄와첩부, 수거및발송비용을국가및지방자치단체가부담하는선거공영제를확대하였다. 통합선거법의제정은김영삼정부가공명선거룰정착시키기위해서기울인노력의산물이다. 그렇지만이법은처음제정된이후 1996 년 4 월총선전까지의기간에 6 차례나개정되면서부분적으로는개혁의지가퇴색되었다는평가를받기도하였다. 이법은 1995 년 6 월의지방선거에서전국규모로첫적용되었고지방선거에서는그효과룰발휘하여공명한선거가실시될수있었다. 그러나 15 대총선에서는후술하는바와같이철저한공명선거를가져오지못했다. 정책경쟁면에서보면. 15 대총선은 14 대총선보다못하다고평가될수있다. 주된쟁점이된것은세대교체.3 김청산, 전직대통령처벌, 역사바로세우기, 대선지원금, 공천헌금, 지역할거주의둥실질적이고구체적인문제가아니었다. 세대교체나 3 김청산둥이주요쟁점이된점에서알수있듯이 15 대총선은각정당의선거전을누가주도하는가하는것이크게중시된선거였다. 신한국당은선거전에이회창, 박찬종, 이홍구와갈이유권자들사이에서호감도가높은인물을영입하였는데이것이신한국당에게는상당히유리한점이었다. 김영삼정부는돈안들고깨끗한선거분위기를조성하겠다는의욕으로통합선거법을제정했으나 15 대총선에서도불법과타락상은사라지지않았다. 선거운동의자유는보장되었으나선거비용을최소화하여공정한선거
정치과정 / 박찬욱 71 를치른다는당초의개혁목표는결코달성되지훌못하였다. 선거가끝난 후에후보자들의선거비용보고는한사랍의예외도없이법정제한액올지 킨것으로되어었다. 그렌데권한상의제약과직무수행의어려움이적지 않았던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실사툴통해공표한결과에따르면초과지 출, 축소및누락둥허위보고둥무려 1 천 5 백여건의위법사례가적발되 었다. 총선출마자의 80% 이상이선거비용에관련된규정올준수하지않 은것으로나타났다. 이것만으로도 15 대총선에서통합선거법의입법취지 에반하는위법사례가적지않았음올알수있다. 선거결과, 신한국당이 139 석, 새정치국민회의가 79 석, 자유민주연합이 50 석, 통합민주당은 15 석율얻었고무소속은 16 석으로나타났다. 이총선 에서제 1 당과제 2 당이확연하게숭리하거나패배했다고판단하기가용이 하지않았다. 신한국당은과반수의석은물론선거직전수준의의석수도 확보하지는못했으나선거전의지배척인예측보다상회하는의석수를달성 하여선전한면이있다. 새정치국민회의는선거직전보다는많은의석수를 확보했으나자당목표의최저선이나예상에미달하는결과를얻어부진한 점이분명히있었다. 제 3 당이된자유민주연합만이성공적인약진을했다 고판단되었다. 마지막으로통합민주당은독자적으로원내교섭단체조차구 성할수없을정도로패배와좌절을겪었다. 서울에서의지역구의석을보 면총 47 석가운데신한국당 27 석, 새정치국민회의 18 석, 민주당 1 석, 그 리고무소속 1 석으로분포되었다. 신한국당이 15 대총선에서이룩한서울 승리는유례없던이변이었다. 해방이후국회의원총선거에서집권여당이 서울에배정된의석수의과반수를획득한것이처음있는일이기때문이다. 15 대총선에서는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이지역적으로 연고를갖고있는곳에서강력한지지를받았는데이러한지역주의투표현 상은 14 대총선과비교하여심화되었다. 4. 지방선거 한국에서는 1950 년대에지방정치가존재하기는했으나제 6 공화국에들 어서 1991 년이후에실질적인지방정치가전개되었다. 자유당정부시기의
72 지방자치는엄격한의미에서볼때주민참여외확대와민주정치의심화라고보기어려웠다. 집권세력이권력기반올강화할목척으로국민대중을조직, 동원하려고지방자치제를활용했다고보는것이정확할것이다. 1949 년 7 월에지방자치법이제정되었으나, 이숭만정부는정치 사회적혼란을이유로지방자치의실시를미루었다. 그런데이대통령은 1952 년의대통령선거를앞두고국회에서의간선을통한재선이어려울것으로판단하여직선제개헌올추진하였다. 이러한방편으로지방의회를구성하여정치세력을조직화, 동원하고자하였다. 그해 4 월 25 일에시 읍 변의회선거. 5 월 10 일에도의회선거가실시되었다. 시 읍 면장은각각해당의회에서선출되었고서울특별시장과도지사는대통령이임명하였다. 각급의회는선거결과자휴당과친여세력 ( 노총, 국민당등의단체 ) 에의하여장악되었다. 1956 년지방선거에서는시 읍 면장이주민직선으로바뀌었다. 선거결과자유당과무소속기초단체장이대거탄생하였다 시 읍 면의원선거와서울특별시 도의원선거에서도전체적으로는자유당이다수의석을차지하였으나서울특별시, 대구시, 광주시, 인천시의원선거에서는예외적으로야당인민주당에패배하였다. 지방선거에서도여촌야도의투표성향이나타났다. 1960 년 4 월의학생혁명이후에 7. 29 총선을홍하여집권한민주당정부는민주화열기를반영하여지방의원은물론지방자치단체장도주민이직접선출하도록지방자치법올개정하였다. 1960 년 12 월 12 일에실시된서울특별시 도의원선거와시 읍 면의회선거결과, 도시지역에서는무소속 ( 구자유당출신 ) 이가장많이당선된가운데민주당과신민당 ( 민주당구파 ) 이경쟁하는양상이나타났고농촌지역으로갈수록정당간경쟁의성격은약화되고무소속후보가강세를보였다. 12 월 26 일에는시 읍 면장선거가, 같은달 29 일에는서울특별시장과도지사선거가있었다. 대체로의원선거보다단체장선거에서정당소속후보가많이당선되었는데, 이러한현상은특히도시로갈수록현저하게보여졌다. 재 2 공화국시기의지방자치실험은불과 5 개월이상올지속하지못하고 1961 년 5 월 16 일에군이정치에개입하면서중단되었다.
정치과정 / 박찬욱 73 우여곡절을겪으면서 1990년 12 월에지방자치법이개정되고, 1991 년 3 월에기초 ( 시 군 구 ) 의회선거와 6 월에광역 ( 시 도 ) 의회선거가실시되었다. 광역의회선거에서는정당참여가허용되고, 기초의원선거에서는정당참여가배제되었다. 그러나기초선거에서도각정당은내부적갈둥과지지기반의분산올방지하기위하여공천에가까운사전조정올하였다. 기초의원당선자들가운데 70% 이상은정당에소속하고있었다. 광역선거에서는여당인민자당의압승으로나타났다. 무려 31 년만에다시실시된지방자치선거였으나실제로는선거결과가중앙정치의권력구도변화에어떤영향을미칠것인가에대단한관심이쏠렸다. 정부와여당은 3 당통합이후의비판적인분위기를바꾸어지지기반을재구축하기위해몰두하고, 야당은왜소해진자신의세력을확대하는데에신경을곤두세웠다. 1995 년의 6. 27 지방선거에서는기초와광역자치단체수준에서의회와 단체장을모두동시선거하여본격적인지방자치시대를열었다. 이선거는중앙과지방관계의변화를예고하는의미있는선거였다. 단체장선거는 % 년만에이루어졌다. 기초의원의경우에만정당추천이금지되었는데, 후보자들은사실상정당의비공식적인내천이있거나경력상특정정당과관련되어있었다. 선거결과의특정으로는예전의선거에서와대조적으로여당인민자당이패배하고야당이숭리한것을우선적으로지적활수있다. 서울의경우에이점이특히역력했다. 그리고지역주의의강한영향이다시확인되었다. 여하튼, 이선거로지방정치의시대가본격적으로열리기시작하였다. 5. 국회의원선거구제와대표의공정성국민의대표를선출하는국회의원선거는대의정치의출발이다. 출발점에서부터국민의의사를왜독하지않고대표할수있는선거구제가마련되어야민주적대의정치가운영될수있는것이다. 전술한바와같이해방이후국회의원선출을위한선거구제는거듭하여변경되었다. 이렇게빈번한제도적변화는공화국이바뀔때마다집권세력이주도하여이루어진것이다. 집권세력이선거구제룰변경하면서주로어
74 떤동기에서그렇게했는가? 다양한정파가정치척영향력올행사활수있 도록대표성을제고하는방향으로제도변화훌추진했는가아니면권력을 유지내지확대하려는계산에충실하여경우에따라서는강권올행사하여 제도변화를가져왔는가? 선거구제변화를개관하면대체로후자의결론에 이르지않을수없다. 역대공화국의집권세력들은모두그들이선거에서 항상제 1 당이된다고전제해왔다. 그리고혼히정국안정올명분으로삼아 제 1 당이결코손해보지않고유리한결과를보장받을수있는선거구제를 강구해옹것이다. 대표의공정성이라는촉변에서보면역대총선에서선 거구제가공정하게운영되어오지못하였다. 경우에따라서는야당가운데 서도집권세력에가장유리한선거구제가채택또는유지되는것을묵인하 거나협조하는정파가있기도하였다. 이것은여당에대하여불리한입장 에있으나자기정파와경쟁관계에있는다른야당세력보다는럴불리하 기때문에그러하였다. 지금까지의국회의원선거구제를단순하게휴형화하면 (1) 제헌국회션 거로부터 5 대민의원선거까지의 1 구 1 인선출단순다수제. (ll) 제 3 공화 국 6 대부터 8 대국회선거까지와, 제 6 공화국 13 대부터 15 대국회선거까 지적용된바있는 1 인선출단순다수제와특이한비례대표제를결합한제 도. (m) 제 4 공화국의 9 대와 10 대국회선거시에적용된바와있는 1 구 2 인선출단기비이양투표와사실상의임명제롤결합한제도. (W) 제 5 공화 국의 11 대와 12 대국회선거시에채돼된바있는 2 인선출단기비이양투 표와특이한비례대표제를결합한제도등네가지로대별할수있다. 이러한네가지유형을대표의공정성측면에서실제의선거결과를토대 로평가해보자. 대표의공정성은선거경챙의주체인정당이의회에공정하 게대표되는정도에따라평가될수있다. 각정당의득표율과의석률이높 은비례성을보일수록선거구제의공정성수준이높다. 선거제도에관한 경험적연구자들은여러가지방식으로이러한비례성을측정해왔다. 개별 정당이얻은의석률올득표율로나누어이득비 (advantage ratio) 또는전환 율 (conversion rate) 을계산하는방식이가장상례화된것중의하나이다. 무소속이다수를차지하고공식적인여당개념이확연히정립되었다고 보기어려운제헌, 2 대국회선거를제외하고역대총선의경우에여당과
정치과정 / 박찬욱 75 제 2 당 ( 제 1 야당 ) 의이득비또는전환율올구해훌수있옳것이다. 어떤유 형의선거구제에서나여당은대체로득표율의 1.5 배정도되는의석률올 확보해왔다. 어떤유형의선거구제에서나집권여당운상대적으로유리한 선거결과를거둘수있도록선거구제가작용해왔다는것이다. 그런데네 가지중유신체제에서운용된바있던 m 유형이집권세력에가장유리하였 다. 지역구의원의절반에해당하는유정회의원을대통령이지명할수있 었기때문에집권세력의의석률은당시여당인공화당득표율의 2 배정도 에달하였다. 다른유형에서는제 1 당인여당의이득비또는전환율이 1.5 를전후하여거의비슷하였다. 모든유형의선거구제는소정당으로갈수록불리하게작용하였다. 제 3 당은어떤선거구제에서나득표율보다낮은의석훌올보였다. 그런데제 2 당의경우는여당보다불리한가운데서도득표율과거의비슷하거나이를 상회하는의석률올확보하기도하였다. H 유형이나 N 유형에서가능하였 다. 제 3 공화국과제 6 공화국, 그리고제 5 공화국시기에제 1 야당은다른시 기의제 1 야당에비하여불리한정도가상대적으로낮고또한제 2 야당과 그이하군소야당보다유리하였다. I 유형과 R 유형은 1 구 1 인선출단순다수제졸그리고 m 유형과 W 유형 은 1 구 2 인선출단거비이양투표를콜간으로삼아왔다. 지역구선거에서 의결과를놓고볼때 1 구 1 인선출제도하에서제 1 당인여당의이득비 또는전환율은 9 회선거에서평균적으로약 1.5. 제 2 당의경우에는 0.9 정 도였다. 한편 1 구 2 인선출제도로써치러진 4 회의선거에서는제 1 당이 득비의평균이 1.3. 제 2 당평균이 1.2 로대략계산된다. 두가지제도모두 제 2 당보다제 l 당에상대척으로더욱유리하게작용했다. 그렇기는하지만 1 구 2 인선출제도가 1 인선출제도보다는제 2 당에덜볼리하였다. 선거 구당의원정수를증가시킴으로써대표성을제고시킬가능성이었다는것이 다. 전국구비례대표제를가미하는경우에전국구의석의배분방식이상이하 였다. 전국구의석배분방식은 (1) 제 3 공화국시기. (2) 제 공화국시기, (3) 제 6 공화국의 13 대총선시기. (4) 14 대총선시기, 그리고 (5) 15 대총 선시기의다섯가지로나누인다. 그런데전국구비례대표제가명목적인
76 것이아니라실질적인효파률창출한다는것윤전국구의석이조정의석 (adjustment seats) 으로서지역구선거에서나타난뿔비례효파를교정하는역할을해내야한다. 즉언제나이득비가가장큰제 l 당의경우지역구와전국구의석모두를포함해서구한이득비가지역구의석만고려한이득비보다는작고그값이 1 에접근해야하는것이다전국구를포함해서구한제 1 당의이득비가 1 에거의근접한적은없었다. 즉전국구의석이조정의석역할올제대로수행한경우는한번도없다는것이다. 다만지역구선거에서제 1 당이득표율보다훨씬상회하여의석률을보인상대적이점을다소나마축소한경우는제 3 공화국시기와제 6 공화국의 15 대총션에서나발견할수있다. 나머지경우에는지역구선거에서이미혜택올얻은제 1 당에게전국군의석배분에있어서도다시혜택올주었다. 전국구의석이이렇게배분되는경우에이것은실질적비례대표제의취지와는어긋나게운용되는것이다. 해방이후국회의원선거구제는야당보다는여당, 소정당보다는대정당, 선진정치세력보다는기성정치세력에유리한효과룰창출한것이다. 선거구제자체가대안적이념과정책프로그램의부각올어렵게하고국회의보수성과현상안주적성향을강화한것으로생각된다. 특히한국특유의전국구비례대표제는비례대표제본래의목적과내용과는거리가멀게왜곡되어운용된것이다. 정국의안정을기한다는명분아래의석배분에있어서제 1 당에, 즉여태껏여당에, 터무니없이유리한특혜를주었다. 이러한의석배분은권력유지를달성하려던권위주의정권의실체를잘반영해주는것이었다. 그리고각정당운전국구의원제도를통해서각분야의전문적식견올갖춘인풀올충원하여정책중심의정당활동및의정활동을수행하도록해야함에도실제로는그렇지못하였다. 기존여당들은전국구제도를정권수립과유지에대한논공행상, 당사무국중진간부에대한보상, 집권자의친정체제구축등을위한수단으로활용해왔다. 야당의경우에는전국구의원충원과정에서특별헌금올통한정치자금의조달, 파벌안배. 당사무국간부에대한배려등이두드러졌다 ( 신명순, 1994).
정쳐과정 / 박찬욱 77 6. 한국유권자의투표행태선거일에유권자는두가지결정올내린다. 하나는투표활것인가아니면기권할것인가하는결정이며, 다른하나는투표하는경우에어느정당및후보자를선택하여지지할것인가하는결정이다. 즉투표참여, 그리고지지선택의결정이유권자투표행태의핵심적내용이다. 해방이후 14 대대선까지포함해서대통령직선이? 차례있었다. 제 1 공화국시기에 2 대선거에서 88.0%. 3 대선거에서 94.4% 로평균 91.2% 를기록하였다 2 대대션은전쟁이종료되지않은상황에서치러진선거임에도매우높은투표율이기록되고있다. 3 대대선의더욱높은투표율은당시정부의노골적인선거간여와여당지지를위한유권자동원을고려하면이해될만하다. 제 3 공화국시기의투표율은 5 대 85.0%. 6 대 83.6%. 7 대 79.8% 로평균적으로는 82.8% 이었다.6 공화국대통령선거에서의투표율은 13 대 89.2%, 14 대 8 1. 9% 로평균은 85.6% 이었다. 대통령션거의투표율은 3 공화국보다 6 공화국의경우가다소높다.6 공화국에서대통령직선은수차례의간선이있은후국민의개헌요구가관철되어가능하게되었다.6 공화국에서대선이좀더경쟁적이고유권자에의한선택의폭이좀더넓어관심을더욱유발하고선거과정이좀더자유롭고공정한방향으로가기때문일것이다. 그리고공화국초기에실시되는선거에서그뒤의선거에서보다투표율이상대적으로높은경향이있다. 이것은정부여당의동원효과가점차감소한다는점, 3 공화국에서처럼동일한여당후보가출마하고무슨수단을쓰던당선될것이라는생각이팽배해지거나아니면선거가거둡되면서정당간차이가별로없다는인식이확산되고선거에대한신뢰와관심이줄게되는점과관련이있을것이다. 그런데투표율의시계열적변화를만족스럽게셜명하는것은한선거에서유권자의투표참여여부를인구특성별차이에비추어젤명하는것보다훨씬어렵다. 다양한선거상황요인이선거때마다다르게영향을미치기때문이다. 한요인에의한일관된설명이쉽지않다. 이를테면, 6 대대션은정당및후보자간경쟁도에있어서 7 대대선에훨씬못미쳤으나투표
78 율은좀더높았다. 선거의경쟁도만가지고투표율변화롤설명할수없음 이금방밝혀진다. 제 1 공화국시기에실시된국회의원총선의투표윷은제헌 95.5%. 2 대 91.9%. 3 대 91.1%. 4 대 90.6% 로서평균적으로는 92.3% 였다. 제 1 공화국 시기에는대선의투표율이나국회총선의투표율이엇비슷했다. 두가지 선거모두중요성이많이다르지않게인식된것같다. 이점은국회총선의 투표율이대선투표율보다제 3 공화국시기에는 10% 정도낮고제 6 공화국 시기에는 15% 정도낮은점과대조를보인다. 제 1 공화국시기의이와같 이높은투표율은그후의역대총선과비교하여예외적이었는데건국초 기정치적관심과참여의폭발, 그리고정부여당의동원에기인하는것이 다. 그런데제헌국회선거에서의투표율계산에대한언급이필요하다. 당 시에선거법은유권자등록을자진해서하도록하였고 ( 물론미군정이강제 등록을하기도했으나 ). 투표율은등록된선거인에대비하여산출된것이 다. 만약선거인으로등록되지않은유권자를포함한유권자총수대비로 투표율을계산하면당시투표율은대략 72% 정도로밝혀지고있다 ( 황수 익. 1993. p. 324). 다. 관권개입이없던 5 대민의원및참의원선거에서의투표율은 84.3% 였 제 3 공화국에서는 6 대 72.1%. 7 대 76.1%. 8 대 73.2% 로평균적으로 73.8% 이고선거별로큰차이가없었다. 제 4 공화국에서는 9 대 72.9%. 10 대 77.1% 로펑균은 75.0% 인데 3 공화국시기의평균과큰차이는없다. 하 지만공화당과신민당이접전을벌였던 10 대선거에투표율이 9 대에비하 여는주목할만큼높아졌다. 제 5 공화국시기에는 11 대 78.4%. 12 대 84.6% 로평균적으로는 81.6% 이었다. 민주화요구의열기속에서실시된 12 대선거에서의투표율이 4. 19 학생혁명직후치러진 5 대선거의투표율 을약간상회할만큼높았다는점은이해할만하다. 그러나권위주의군부 독재의심화기에실시된 11 대총선의투표울이제 3 꽁화국시기의어느총 선의투표율보다높았던것에대한만족할만한설명은아직발견되지않 는다. 정부여당의간섭은 3 공화국말기에도기숭을부렸기에 4 공화국에와 서더욱강력한효과를발휘했다고도볼수있으나이것은견강부회의인 상을준다.
정치과정 / 박찬욱 79 여하튼제 6 공화국시기에는국회총선투표융이 13 대 75.8%, 14 대 71.9%, 15 대 63.9% 로평균적으로 70.5% 를기록하고있다. 대선에서의투표율과달리국회총선투표율은민주화이행또는민주화가진척되는 6 공화국의경우가어느다른공화국시기보다현저히낮다 12 대총선이후총선에서의투표율이점차하향의추세를보이는경향은수수께끼가아닐수없다. 정치적무관심파소외가투표율을저하시키는데독재정치의심화기보다그러한유권자의심리척태도가더욱뚜렷하다고말하기는어려울것이다. 물론투표율하락온정부여당의동원의효과가현져히감소되었다던가유권자가운데기권율이높은 20. 30 대연령충이높아졌다든가하는점과관계가있는듯하다. 그러나좀더설득력있고경험적근거가타당한설명이요구된다. 역대선거의투표율과판련하여확실한정은도시보다는농촌에사는, 즉도시화수준이낮은곳에사는유권자일수록투표장에나갈가능성이크다는것이다. 이것은바로투표융의도저촌고인데한국선거의불박이현상이라고할만하다. 투표행태연구가들이도저촌고현상올설명하는입장은크게세가지로나누어진다. 그러나후술하듯이어느하나도완전한설명이라고할수는없다. 첫째, 준봉투표 또는 동원투표 개념올빌려설명하는입장이다. 농촌거주자들이권력순용적태도를갖고있기때문에관권이나금권과같은비합법적압력또는감정적인호소에취약하여상대적으로투표장으로많이나선다는것이전자의개념이다 ( 윤천주, 1978: 1981: 1989). 이와유사하게농촌의위계적생활구조나익명성부재및강한대면적관계로인하여거주자들이비합법적압력뿐만아니라일상적으로상호작용하는사람들의투표권유조차불리치기어렵다는것이후자의개념이다 (C.L. Kim, 1980: Kim and Koh, 1972). 이러한부류의견해에따르면도시화정도가높은거주환경일수록자발적투표참여가상대적으로많지만투표율자체는낮다. 권위주의정치에서이러한젤명은설득력이있었는데민주화와함께이것의셜명력이약화되고있다. 둘째, 거주환경이도시화되면서공동체의와해와전통적유대의약화가초래되어개인들이고립감과정치적냉소감을갖고되고투표참여를덜하
80 게된다는것이다 (Kim and Choe. 1988 L 이견해는한선거를통해나타나 는도저촌고현상을이해하는데에도움이되기는하지만 1970 년대중반 이후 1980 년대중반에이르기까지도시화가지속적으로확대되지만도농 을막론하고투표율이상승하던시계열적변화를셜명하지못한다. 셋째, 합리적선택이론의입장에서유권자들이접하는정치적정보의내 용과투표참여의손익계산에초점을두어도농간의투표율차이를설명하 기도한다. 농촌유권자들이도시유권자들에비하여정당들의보수적정 책과정부의지역개발동에상대적으로더욱만족하기때문에더높은투 표참여를보인다는것이다 ( 이갑윤. 1985: 조기숙. 1992). 여기서는둘째견 해와같이도시유권자들의비판의식, 정치현실에대한소외와불만을지 적하지만그러한반웅이전통적유대의약화에서온다기보다는유권자들의 정책선호와투표참여의손익계산에서비롯된다고본다. 이견해는전통적 해석에대한대안으로서참신성이없지않다. 그럽에도불구하고실제로 정견과정책선호가한국유권자의투표참여여부를결정함에있어서의미 있는비중을차지하고있는지, 그리고과연유권자의감정적반응보다투 표행위가수반하는도구적가치에대한인지가중시되어야하는가라는하 는각도에서논란의여지가많다. 또한농촌거주자돌도권역별로기존개 발정책에대한태도가사뭇다른선거에서일수록이러한설명의단순성이 한계를보인다. 도저촌고말고도역대총선을통틀어투표율과관련하여일반적인경향은 2. 30 대의젊은유권자층, 특히 20 대에서투표율이현져히낮고연령과투 표율은반비례한다는것이다. 젊은층, 특히 20 대유권자들은성인으로서 의정착의식이아직약할뿐더러현실정치에대한불만이가장많기때문 에단순히기권할뿐만아니라기권으로서소극적저항을표출할가능성마 저적지않다. 지지할정당및후보자를결정하는행위를철저허분석하기위해서는집 합자료만으로는불충분하며신뢰할만한질문지조사자료의수집이펼수적 이다. 학술적연구를위해서이러한자료를수집한것은융천주교수에의 하여 1950 년대말. 1960 년대초에시도되기시작하였다. 그러나권위주의 정치가심화되는정치상황적제약으로이려한방법에의한투표행태연구
정치과정 / 박찬욱 81 는제대로발전되지훌못했다. 셜령학술적조사라하여도유권자에게특정정당에대한선호와지지선태에관련된질문올한다는것은사실상제 6 공화국시기에와서야용이하게되었다. 투표참여와기권행위에대한탐구는 1980 년대에도진행되었으나정당및후보자지지행위에대한학술적규명은 1992 년의 14 대총선을전후로해서본격화되었다해도파언이아니다. 물론 6 공화국이전의선거에서유권자가내리는투표결정올연구한업척이척지않으나당시의정치적여건상철저히연구하기에는제약이많았다는것이다. 특정지역또는전국적인유권자들을상대로한조사결과에의거했던기존의여러연구는한국유권자플이정당이나정견보다는인물휩을가장중요시하여투표결정올내린다는점을많이지적해왔다. 조사에서인물, 정당, 아니면정견가운데어느것이중요한가롤휴권자에게직접묻는방식이활용되었다. 조사결과를보면낮게는응답자들의 30% 정도로부터높게는 80% 정도에이르기까지가후보의인물됨올보고투표한다고말했다 ( 신 명순. 1996. pp. 138-140). 한국의정당정치가아직도제대로정착되지못 한점, 그리고선거경쟁이정책중심으로전개되지못한점을고려하면이러한웅답결과나이에대한해석에는수긍이간다. 그런데기존연구결과의신빙성에대한회의률감출수없다. 무엿보다도투표결정기준으로설정된인물됨, 후보의소속정당, 정당이나후보가내세우는정견에대한정의가분명하지않아연구자에따라, 또한조사에서는웅답자에따라각범주가가려키는내용이결코같지않율수있다. 또한이세가지범주는막연하게주어질수록서로연관이밀접하여그중에서무엇이파연가장중요한요인인가를구분하는것이무의미할수있다. 인물됨이란참으로막연하여후보자가갖는모든자질파속성올말하기때문에그소속정당이나정견까지포함된다. 한국선거에서는비례대표제에서조차정당투표를실시해보지않았다. 유권자의최종선택이란결국인물에표를주는것이었기에이점까지고려하변인물보고찍는다는웅답이많은것은지극히당연한노릇이다. 서구의투표행태연구에서정당요인온유권자가특정쟁당에대하여오랫동안간직해온친화감올가리키는데이는정당이장기간지속되어온
82 것올전제한다. 정당이명멸을거듭해온한국의정치현실에서이러한의미로정당요인을사용하는것은적컬하지않다. 우리가말하는정당선호감은서구정치에서의정당일체갑파는다르다. 정당이제도화되어장기간존속해야정당요인의독자성을말할수있다. 정당이빈번하게출몰하고이합집산을거듭해왔으면서도여야정당간권력의교체가없는한국의정치에서여러선거를거쳐일관적인의미를갖는정당요인은여당인가, 아니면야당인가하는것이다. 즉한국에서정당요인의내용은서구식의정당일체감이아니라유권자가여야의어느쪽으로기울어지는가를의미하는여야성향이더욱타당하다. 그런데유권자가정당에대하여갖는태도롤여야성향으로보게되면정당요인과정견요인의구분이불분명해진다. 구체적정책쟁점이중시되지않은한국의선거에서정견이란대체로권위주의체제의지속올바라는가아니면민주화를추진해야하는것이중추적이었으므로그것이바로여야성향과직결되어었다. 한국정당은사당적성격이강하다는지적이일반적야다. 제도화되지못한정당이그최고지도자와통일시된다. 그렇다면특정정당의최고지도자가후보자로나서는대선에서정당과후보자의인물요인을구분하는것은무의미하다. 국회의원선거에서도후보자들이소속정당최고지도자와의특수한관계를많이내세운다. 유권자가그후보자와특쩡지도자와의관계를중시하여지지결정을내리면서정당을보고선택한다고할수있다. 최근선거에서는지역주의투표현상이확산되어정당요인을파대평가할소지가었다. 지역주의투표는정당을선택하는것인데그정당수뇌부의출신연고를보고선돼하는것이지정치적결사체로서의그정당자체에대한일체감에서그렇게선택하는것이아니다. 이런저런문제점올고려할때, 불분명하고서로밀접한개념적범주를토대로투표결정요인을밝히려고했던기존연구들은근본적문제점을안고있다. 더나아가서는한국유권자의투표결정요인으로서인물, 정당, 정견가운데어느것이가장중요한가하는질문은당초부터잘못던져진것이아닌가한다. 해방이후의다수의선거에서정당별득표율의분포와관련하여여촌야도현상만큼지배적인것은없었다. 국회의원선거에서는 4 대. 6 대부터 7
정치과정 / 박찬욱 83 대까지, 그리고 5 대부터 7 대까지의대통령선거결과률보면여촌야도현상을우선적으로지적하지않을수없었다. 이것온집권여당이농촌으로갈수록높은지지를얻고야당은도시로갈수록높은지지를얻는현상이다. 유권자수준에서말하자면, 농촌에거주하는유권자가도시유권자보다여당을지지하는성향이강한반면에야당을지지하는성향은약하다. 여기서야당이라함은 15 대총선에서자유민주연합과같이과거에여당에톰을담았거나친여적인물이주도하는야당이아니라예전부터야권에있었던지도적인물의정당을가리킨다. 그런데 6 공화국선거에와서여촌야도는점차약화되고 15 대총선에이르러서는거의사라졌다. 여촌야도현상은도농간에생활의구조와주민들의정치의식이상이하다는점에착안하는사회학적또는사회심리학적시각에서주로이해되어왔다. 아울러이러한시각을크게벗어나지않으면서정부와여당이농촌에서지지를공세적으로동원하는것을포착하는정치과정적시각이가미되어해석되기도하였다. 그런데최근에합리척선택이론의영향을받아유권자의도구적합리성을전제하여이를셜명하기도한다. 농촌의유권자들은상대적으로낙후된거주환경의개발이나개인적민원의해결이여당의원에의하여좀더효과적으로성취될것으로판단했기때문에친여적투표성향을보였다는것이다. 이런주장들이최근선거에와서는모두적용되지않는다. 생활조건이나의식면에서도농구분이점차불분명하게되었다. 그리고무엇보다도특히영남, 호남, 충청권에서는도농의구분없이각각연고가깊은정당에집중된지지를보냈고수도권유권자도출신연고에따라투표하게되면서여촌야도의위력은약해질수밖에없었다. 최근에올수록한국유권자의투표행태를서술하면서지역주의투표를가장먼저강조하지않을수없다. 지역주의투표는유권자가자신이거주하거나아니면고향이나원적둥출신연고가있는시 도이상의권역을단위로, 그곳출신의대통령후보또는그곳출신의정치인이수뇌나수뇌부의구성원으로있는정당을지지하는현상이다. 지역주의투표는유권자가자신과출신연고권역이동일한정치지도자를지원하여자신이나해당권역의이익을극대화또는손실을극소화하겠다는합목적성의발현을넘어서는현상이다. 손익에대한인지와계산뿐만아니라특정지도자와
84 유권자사이에형성된정서적밀착판계훌반영한다. 1960 년대이후영남권출신인물들이국가최고권력자의지위률장악하여왔고불균형척인인사 개발정책으로특히호남권의소외의식올활러일으켰다. 그리고정당이특정지도자와동일시되는점과정당간이념적 정책적차별성이불분명하다는점이지역주의투표률조장하였다. 게다가정당은손쉬운득표전략으로이러한투표를유도해왔다. 제 5 대대통령선거에서추풍령이남공화당의박정회후보흘지지하고, 그이북이민정당의윤보선후보를지지한 남북현상 이있었다. 그런데이것을설명하기위해서는윤보선후보가선거시제기했던사상논쟁의영향을감안해야한다. 영남의박정회후보지지률지역적연고에서비롯된것이라고할수있으나호남의박후보지지는위에서정의한지역투표가아니다. 남북현상은유권자지지연합이지역균열에기초하는것이기는하나제 6 공화국시기의지역주의투표와내용이통일하지않았다.7 대대통령선거에서득표가동서로갈린현상은경제개발의수혜와지연이결합되어초래되었는데최근의지역주의투표와내용적으로같다고할수있다. 그런데당시만해도이러한현상은대통령선거에국한된것이었다. 대션을비롯해서국회의원총선, 지방선거에서도지역주의투표현상이일관되고두드러진것은제 6 공화국에와서의일이다. 7. 소결론해방이후부터 1997 년의 15 대대선직전까지실시된선거의과정을일별하면, 선거에대한부정적이미지가일단크게부각되는것이사실이다. 하지만심층적으로보면선거과정저변에민주정치가진전해용도도한흐름을발견할수가있다. 15 대대선이전에는집권여당이완전히패배해본경험이없었다. 대통령선거에서재선을추구한현직대통령또는권력의재창출올시도한여당의후보는언제나그목적올달성할수있었다. 국회의원선거에서도집권당은안정다수의석을획득하거나적어도제 1 당의지위를항상확보해왔다.
정치과정 / 박찬욱 85 제 1 공화국시기에집권얘력은대통령직선이나지방선거조차권력의유지흘위해유리한방향으로활용하고자했다. 역대집권세력은, 특히제 4 공화국의경우에가장현저히드러나는바, 국민의사의표출과대표성을왜곡해가면서권력의유지와확장을위해서국회의원선거구제를자주변경해왔다. 제 1 공화국의 4 대, 제 3 공화국의 7 대국회의원선거는극심한부정선거였는데지금까지의어느선거도철저히자유롭고공정했다고자신있게평가하기어렵다. 투 개표부정, 행정부의여당을위한선거간여와행정지원, 중상비방, 금권난무, 인신공격, 흑색선전이활개를쳐온점올부인하기어렵다. 선거에참여한정당과후보자들이차별적인선택대안올제공하지못하는가운데상당수유권자들이수동적으로동원되고집권세력의지지회유에휘말리고혼탁한분위기에부화뇌동하기도하였다. 이와같이선거과정에대한부정적이미지가강하여재 2 공화국에서는대통령직선을필수적으로하지않는의원내각제룰채돼하는여건이조성되었고, 제 4. 5 공화국에서는대통령제를유지하면서도생산적인정치의명분으로직선은회피하였다. 그런데한국선거에대하여지나치게부정적인방향으로경도되는평가는올바르다고할수없다. 해방이후의한국선거가부정척인측면을갖고있는것을인정할수밖에없으나단지집권세력이행사하는권력의합리화수단으로만단순화해서는안된다는것이다. 선거에서경쟁하는정당과후보자의이념적단색성만을지적하며선택대안이아주없었던선거로치부하는것도단견이다. 불리한여건에서집권세력과경쟁한야당과야당엘리트돌이존재해왔다. 많은유권자들이선거를참여의기회로인식하고정부와여당에대한거부감을표출했다. 권위주의체제유지와민주화추구라는경쟁구도에서야당에대한지지가폭발하는선거가있었다. 대체로권위주의정치가지배적이던제 6 공화국이전의시기에국회의원선거의경우여당및행정부에의미있게도전활수있는단일정당을만뜰지못한선거가대부분이었다. 그런가운데서도반대당이갑자기국회의석의상당수를확보하고정부와여당의존속윷위협하는중대선거 (crucial
86 eleαion) 가수차례있었다 ( 안병만. 1993. pp. 183-195). 4 대 (1958 년 ). 8 대 (1 971 년 ). 10 대 (1978 년 ), 그리고 12 대 (1 985 년 ) 총선이중대선거이다. 이러한선거의결파는집권세력의전횡이용이하지않올것이라는유권자의사의강한표현이었다. 이런의사를무시한독재권력은마침내와해되지않을수없었다. 제 6 공화국출범을전후하여션거의민주화가진전되었다. 대통령을국민이직접선출하겠다는열망이분출하여마첨내직선제도가복원되었다. 대통령선거에서정당간권력교체에이르지는못했으나선거를통한인물의교체는제도화되어가고있다. 국회의원선거에서도단일야당이다수정당이되지는못했으나여당은다수의석확보에실패하는사태가전개되었다. 여전히그취지가실현되지는못하고있으나일단선거법이자유롭고공정한선거를실현하려는의지를담게되었다. 집권세력이독자적인이익만를고려하여제도를변경하기는어려운상황이되었다. 유권자들은더이상손쉬운동원의대상이아니다. 이제한국의유권자는집권세력과기성정치인에대한불만을표출하고심판할태세를갖추고있다. 한국선거과정은엘리트충원과이에대한통제, 그리고민주정치의축제로서의의미를부각시켜나가고있다. 선거가정치권력창출의유일한통로로서제도화되어갈여지가큰것이다. 111. 정당정치 1. 논의의범위이절에서는해방이후 50 여년동안정당정치의주체인정당의출현과쇠멸, 그리고정당체계의변화를정치상황, 제도적배경, 사회적기반동맥락속에서개관한다. 정당과정당체계의지속성과변화에대한역사적개관을통해서한국정당정치의제도화필요성이부각된다. 1990 년대중반의시점에서한국정치의과제률한마디로집약한다면민주정치의공고화라고할수있다. 절차적의미에서민주정치의공고화는근
정치과정 / 박찬욱 87 본척으로정치경쟁의제도화이다. 그런데정치경쟁의제도화는앞서논의된의회, 선거와더불어정당과같이국가와시민사회롤연결하는정치조직이나절차를정착시키는것이다. 이절에서는정당정치의제도화과제와관련하여정당내파벌정치와응집성, 정당조직의복합성과이념적정체성, 정당운영의민주성과기능수행의효과성, 그리고정당체계의경쟁성측면에서해방이후정당정치를살펴본다. 2. 정당의성쇠와정당체계의번화해방직후에정당의형태를불완전하게나마갖추었던것은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 한민당 ). 국민당, 건국동맹둥소수에불과했으나정당내지준정당인단체의수는해방두달만에 100 여개로늘어났다 ( 심지연. 1997). 정당난립이극심해지자 1946 년 2 월군정장관은정치단체의등록을강제화하는군정법령제 55 호를공포했다. 이조치는정당의건전한육성과발전을명분으로내세운조치였으나당시국제적인냉전이서서히전개되는상황에서미국이좌익진영을배제하는방편이되었다. 정당등록제를공포한이후에도정당은계속분출하여, 미군정에미소공동위왼훨와의협의를신청한정당및정치성을갖는사회단체의수가 400 개를상회하였다. 제헌국회선거에는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민당둥우파만이선거에참여했다는것은이미언급되었다. 준정당사회단체와무소속후보자가난립하고또한많이당선된것에서보여지는바와같이정당정치의기틀은전혀잡혀지지않았다. 제헌의회에서헌법을제정하면서정당에관한규정이전혀없었으며별도의정당법도없었다. 이승만의남한단일정부추진에적극동조했던한민당은이승만대통령과의불화로그에반대하는입장에서게되었다. 1949 년 2 월한민당은과거한독당소속이었던대한국민회의신악회세력과대동청년단의지청천세력을영업하여민주국민당 ( 민국당 ) 으로개편하고야당으로서세력을확장해나갔다. 한편그해 12 월에는친여적의원집단인대한국민당이창당되었다. 그러나특정정치세력의지도자가아니라일민주의를내세우는초정
앉 { 파적국민지도자로서자처했던이숭만은여전히정당무용론을견지하고있었다. 대한국민당은엄밀한의미에서집권당이라고할수는없었다. 하지만이승만은종래의정당무용론을떨쳐버리지않을수없었다. 대통령취임한지얼마되지않아서부터국회와대립하게되었다. 국회에서의대통령간선제로서는권력유지가용이하지않음을깨닫게된이승만은원외에권력기반을공고히하고직선제개헌을추진하기위해서정당을필요로하게되었다. 그리하여 1951 년말에왼외의친여단체가모인원외자유당, 그리고이와별도로원내자유당의 2 개정당이동일한당병을내세우고모두이승만을총수로옹립하며탄생하였다. 이두정당의알력이전개되다가결국 1952 년말에원외자유당중심으로단일화되었다.2 대국회시기에자유당창당이후국회는정당중심으로서서히변하기시작했다. 그러나 3 대국회에서도무소속진출은다소약화되었을뿐여전히현저하였고야당인민국당에비하여여당의의석비중이압도적으로높아일당우위체계가나타났다. 19')4 년 11 월의사사오입개헌을계기로이숭만정권의독주에대한반대세력이결집되기시작하였고 19')') 년 9 월에민국당은자유당을탈당한의원, 홍사단계의원, 기타무소속의원들을규합하여동합야당의면모를갖춘민주당을창당시켰다. 한편조봉암이이끄는혁신계의진보당이 1956 년 11 월에창당되었다. 19 '58 년 5 월에실시된 4 대국회선거에서는경쟁이권위주의대민주의양극구도로전개되었고선거결과자유당과민주당의양당체계가정립되었다. 해방직후좌우익간에는물론좌우익내부에서도치열한이데올로기대립이있었다. 그러나미소냉전이심화되면서미군정하의남한에서는이숭만과한민당의단정노선과반공주의가우위를점하게되었다. 제 1 공화국수립이후에는이승만의전횡과독주가심화되면서이에대항하는세력도강화되었다. 1950 년대까지이러한양극적갈둥의사회적기반은도시와농촌을구분하는문화적균열이었다. 4. 19 혁명시기까지한국은압도적으로농업국가로서유권자의다수인농민들은과거지주층이중심이되어조직한한민당, 또는그후신인민국당이나민주당보다는토지개혁을추진한이승만과그의자유당을지지하였다. 농민들이집권세력에순응적이었던
정치과정 / 박찬욱 89 반면에도시에서미국식교육과문화의영향옳받운학생과지식인들온자 유민주주의이념을홉수하였고독재에반대하는민주당편에섰다. 1960 년에개정올거친제 2 공화국헌법에서는정당활동보호롤위한규정 이삽입되었다. 4. 19 학생혁명으로이승만정부가붕괴되자기존의야당 인민주당이 5 대총선에서압도적지지흘얻어집권당이되었다. 민주당을 제외한정당가운데는혁신정당인사회대중당이제 2 당으로서겨우 4 석을 얻었고무소속진출이현저하여딩대국회는일당우위체계로출발했다. 거 대여당으로부상한민주당내에서는이미 5 대총선이전부터진행되어온 신 구파대립이심각하게확대되어 1961 년 2 월에는구파가이탈하여신 민당을창당했다. 기성정치인의이러한알력과대학생올비롯한진보혁신 세력의직접행동으로정국이혼미해진와중에그해 5 월군은정국불안을 수습한다는명분으로정치에직접개입하게되었고권력윷장악하자정당 틀올해산했다. 4 월혁명은민주대독재대결구도를해소했지만이룹계기로보수대 혁신의경쟁구도가형성되지는못했다.4 월혁명후반사이익을얻은민주 당은혁신세력의정치적진출을가능하게하는제도적장치를마련하지않 았다. 혁신진보세력을체제내로편입하려는노력이경주되지않았으며의 회주의적방식올통한진출이용이하지않은혁신진보세력은직접행동을 통해정치적의사를관철하려고, 하였다. 당시의사회경제적조건을보면, 산업노동자의비율은여전히 10% 에이르지않아혁신진보세력의대중적 기반은학생올비롯한도시지식인충과일부노동계층에국한되었다. 분단 과한국전쟁을통해형성된반공주의의헤게모니효파가매우강력하여혁신진보세력의정치적신장은용이하지않았다 ( 최장집. 1996). 제 3 공화국출범올앞두고 1%2 년 12 월에정당법이제정되었음이특기할 만하다. 정당법은법정지구당의수, 지구당의분산. 지구당의법정당원수 등을규정하여대중적기반올갖춘책임정당올처방했던환면, 혁신계정 당을비롯한군소정당의출현을억제하는부정적측면을갖게되었다. 제 3 공화국의헌법은물론이거니와선거법이나정당법은이며군부가새로조 직한중앙정보부에의하여치밀하게준비되었는데쿠데타주체세력의정치 적의도를실현하는데유리한방향으로마련되었다.
90 군출신의민정참여를위한정당이정치활동의재개이전얘비밀리에조직되기시작하였던바이것이띤주공화당 ( 공화당 ) 이었다. 박대통령은당초에전문화된당료조직올갖추고대중적기반이있는강력한여당올만들려는의도가있었다. 그러나당내파별정치가전개되고현실적으로강력한여당이자신의강력한리더십수립에방해가될수밖에없었기때문에점차여당을약화시키고마침내는권위주의정치의도구로전락시켰다. 산업화를적극추진한박대통령은정당이나국회의활성화률통한민주적정국운영보다는중앙정보부를비롯한행정부를중심한효율성위주의통치를전개하였다 ( 잉m. 1989). 제 3 공화국출범올전후로야권은통합된양상올보이지못하고민정당을위시하여국민의당, 자유민주당퉁으로분립되어있었다. 그러다가 1967 년의대선올앞두고서야신민당이라는통합야당을출범시켰다.3 선개헌을계기로정치갈동은공화당대신민당으로확연히양극화되었다. 신민당은당시에김영삼, 김대중, 이철승등 40 대기수들에의한지도자세대교체를이루고 1971 년대선에는김대중을후보로내세웠다. 박대통령은이선거에서힘겨운승리를거두었고이어치러진 8 대총선의결과는공화당과선민당의양당체계를정립시켰다. 군사쿠데타로정권을장악한박정회장군의주도아래창당된민주공화당의사회적기반은이숭만정권의경우에서와같이농촌이었다. 군사정권은이미농어촌고리채정리와농산물가격안정동중농정책을시행하였다. 그리고공화당정부는양독수매정책풍대농민회유정책올견지하고농민의아들로서의박정희대통령이미지를적극부각시켰다. 그러나산업화정책이본격추진되면서이농현상이확산되고공화당정권의지지기반이서서히잠식되었다. 농촌의지지에만전적으로의존할수없었던박정희정권은호남출신김대중이야당후보로출마한 1971 년의대선에서는영호남간의대립적인지역정서를활용하면서정권올유지했다. 1960 년대말이후미국이긴장완화정책을추진하면서동북아에서주한미군감축둥유화조치를취했다. 박정회대통령도남북한대화를추진하는동주변정세에적웅하려고하였다. 그런데박대통령은국내정치에서권위주의적개인통치를더욱강화하는방향으로유신헌법올제정하여변화하
정치과정 / 박찬욱 91 는정세에대웅하고자하였다. 이러한헌정체제하에서유정회라는대통령친위집단이만들어지고공화당은집권당으로서의기능이더욱위축되었다. 국회내의여야관계로볼때는공화당파유정회룰합한여권의위세가강화되어신민당의지위가약화되었다. 즉제 4 공화국시기의정당정치는제 3 공화국시기에비하여극심한위축올모면하지못했다. 야당인신민당은이러한처지에서원외의대학생, 지식인, 종교인블과연대하여유신체제철폐운동을전개하게되었고특히 1979 년 5 월에김영삼이총재에선출되면서유신반대운동을강력히추진하였다. 박정회대통령의권위주의정치가심화되는동안한국사회에서는영호남의사회경제적격차에서보여지는지역균열, 중화학공업육성올내세운산업화로대거출현한노동자들에대한억압으로초래된계급균열, 야당정치인 학생을비롯한지식인들의민주회복투쟁이말해주는민주대반민주균열이확대일로에있었다. 이것이마첨내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의한박정희대통령암살과유신체제의붕괴로이어지는사회구조적조건이되었다. 유신체제붕괴는민주화이행이아니라신군부세력의둥장을가져왔다. 당시미국과소련간에는긴장이고조되는신냉전체제가나타나군부가국내의혼란수습과더불어국가안보룰정치개입의명분으로내세우기용이한여건이조성되었다. 전두환장군을정점으로하는신군부는군정보기관을활용하면서기존정치인의활동을규제하고군출신의정치적진출을위한여당을만드는등집권전략을실천했다. 이러한일련의조치와더불어제 5 공화국이출범했다. 제 5 공화국의집권당인민주정의당 ( 민정당 ) 은겨존여당이던공화당의조직을상당부분홉수하면서만들어졌다. 그런데특기할것은신군부가여당만을만든것이아니라체제내에서순응적인야당까지만들어냈다는것이다. 일부인사를정치규제에서풀어주거나아니면규제되지않윤기성정치인들을나누어배치하는식으로야당이만들어졌다. 주로야당인사중섬으로민주한국당 ( 민한당 ) 을, 공화당과유정회출신을주축으로한국국민당을, 그려고과거의진보혁신인사일부를내세워민주사회당을창당하도록주선했던것이다. 정당정치의외양만보면제 5 공화국에서는 4 공화국에
92 서와달리여러갈래의야당세력에게활동활공간올개방해훈듯이보인다. 그러나이것이정당간세력균형파연합형생이가농한다당체계훌조성한것온아니다. 체제에적극도전할성향이있는야당인사는규제해놓고체제내에서활동할야당만올허용했다. 정당체계변에서어디까지나민정당이우위에서고 2 개이상의야당이위약한지위에서는일당우위체계였다. 11 대국회에서제 1 야당민한당은군부권위주의체제자체에대한정면적인저항의지가없이제한된테두리속에서만비판옳전개했다. 그러나 12 대총선직전인 1985 년 1 월에정치활동금지가해제된정치인들이집결하여신한민주당을창당하였다. 김영삼과김대중의영향력하에조직된신한민주당은 12 대총선에서제 1 야당으로부상했다. 신한민주당온대통령직선을비롯한개헌을강력히요구하였다. 그런데신한민주당내에서일부소수가여당이제의한내각제개헌에동조활움직임이있자양김씨는 1987 년에신한민주당을와해시키고통일민주당올결성했다. 통일민주당은원외세력과의광범위하고강력한연대를통해민주화투쟁에나섰고 1987 년 6 월에민주항쟁이전개되고전두환대통령은직선제개헌올수용하였다. 집권세력에대항한강력한민주화운동의사회척기반온특허체 4, 5 공화국의권위주의정치시기에확대되었던중첩된사회균열로인하여형성되었다. 즉선군부가권력장악과정에서광주민주화후쟁올무자비하게무력진압하면서기존의지역균열이더욱확대되었다. 이와더불어노동자탄압으로심각해진계층적균열과직선제개헌둥쟁점을둘러싼민주대반민주균열이상당부분중첩되면서집권세력에대한강력하고폭넓은저항세력의출현을가능하게하였던것이다. 13 대대션을앞두고전통야당은후보단일화에실패했다. 김영삼주도의통일민주당으로부터김대중이지도하는평화민주당 ( 평민당 ) 이 1987 년 11 월에갈려나왔다. 한편, 같온달에과거집권세력요로셔한동안정치활동이규제되었던김종펼이신민주공화당울창당하였다. 이로써 13 대대선과 13 대총선에서는기존의여당인민정당과함째통얼민주당, 명민당, 신민주공화당둥 4 당의각축전이전개되었다. 민주화이행기에있어서도변함없이한국의정당체계는매우유동적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