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성곽 이기봉(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 - 목 차 - I. 전통문명과 성곽 1. 전통문명과 국가 2. 전통문명의 갈등구조와 전쟁 3. 방어를 위한 시설, 성곽의 유형과 규모 4. 도시와 성곽의 관계 II. 한국의 고대 국가와 성곽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통치 1) 역사 2) 문명 전파론적 의의 2. 토착인 국가의 형성과 성장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영향 2) 북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3) 중남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3. 3국의 경쟁과 통일신라의 성립 1) 역사 2) 통치 체제 4. 한국 고대의 성곽과 특징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도시와 성곽 2) 고구려의 도시와 성곽 (1) 수도와 성곽 (2) 지방도시와 성곽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3) 중남부 지역의 도시와 성곽 (1) 수도와 성곽 1 신라 2 백제 (2) 지방도시와 성곽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III. 한국 근세의 국가와 성곽 1. 후삼국의 경쟁과 고려의 건국 1) 역사 2) 통치 체제 2. 고려의 번영과 멸망 그리고 조선 1) 역사 2) 통치 체제 3. 한국 근세의 성곽과 특징 1) 수도와 성곽 (1) 후삼국시대 (2) 고려와 조선 4. 지방도시와 성곽 1) 후삼국시대부터 고려후기까지 2) 고려말부터 조선전기까지 3)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I. 전통문명과 성곽 1. 전통문명과 국가 인류는 짧게는 몇 백만 년, 길게는 약 천만 년 전에 유인원 계통 중 유일하게 육식 위주 의 독자적인 종으로 분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여러 단계를 거쳐 약 5만 년 전에 현 생 인류로 진화하였고, 사냥감이 살고 있는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살고 있는 유일 - 1 -
한 유인원 계통이 되었다. 하나의 종으로 분화된 후 인류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이동하는 생 활을 하였는데, 약 1만년에서 8천년 전 사이에 일부 지역에서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 위주의 농업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이란 새로운 삶터를 형성하였다. 이후 8천년과 4천년 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지역 등을 중심으로 집약농업의 발달을 기초로 한 잉여 생산 능력의 현저한 향상과 함께 문명이 발생하면서 도시 란 새로운 삶터를 만들어냈 다. 이러한 문명의 발생은 잉여 생산물을 둘러싼 지배-피지배의 관계 즉, 주로 마을에 살면서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피지배 신분과 이들을 지배하는 지배 신분의 발생을 의미한다. 지배 신분은 잉여 생산물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인 권력을 매개로 피지배 신분을 지배하는데, 효과적인 방어와 체계적인 통치를 위해 마을과는 다른 삶터인 도시를 세워 거 주했다. 그림-1 하나의 도시가 다수의 마을을 지배하는 도시국가 문명과 동시에 탄생한 전통도시는 생산의 공간인 수많은 마을을 지배하는 거점이며, 권력 을 매개로 마을의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여 소비하는 기생의 공간이었다. 마을이 생산의 효 율을 위해 입지와 구조가 결정되는 반면 전통도시는 마을을 체계적으로 통치하고 권력을 효 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원리에 의해 입지와 구조가 결정된다. 따라서 도시는 처음부터 계 획적으로 정해지며, 노골적인 물리적 도전에 대한 방어와 장기적 번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상징이 이루어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그리스 문명 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대부분의 문명 초창기에는 수많은 마을과 하나의 지배 도시가 세트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도시 국가 하나만 고립되게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러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일정 한 지역 체계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으로,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림-2 다수의 독립적인 도시국가 지역 체계 첫째, 우세한 도시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채 모든 도시국가가 상대적으로 평등한 지역 체 계를 이룰 수 있다. 둘째, 하나의 도시국가가 상대적으로 우세하면서 다른 도시국가를 아우 르는 도시국가 연합 체계를 이룰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여러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체 - 2 -
계는 쉽게 깨지지 않는 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도시국가가 지나치게 힘이 세져 자신 들의 도시국가가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합종연횡을 통해 서로 견제하기 때문이다. 그림-3 도시국가 연합 체계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생겨 통일되거나, 강력한 외부 세력 이 침입하여 정복함에 따라 영역국가로 변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어떤 이유 때문에 형성되 었건 영역국가는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정점으로 하고 지방도시가 하위 계 층의 지배 거점이 되어 수많은 마을을 지배하는 통치 체계를 이룬다. 그리고 영역국가의 규 모에 따라 2단계, 3단계, 4단계 등 다양한 단계의 통치 체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림-4 영역국가의 규모에 따른 단계별 통치 체계 그렇다고 지방도시가 항상 수도에 거주하는 왕의 직접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상당한 자율성을 지닌 간접 지배를 받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영역국가의 형태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지방관의 파견을 통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직접 지배가 이루어지는 중 앙집권적 영역국가가 있다. 둘째, 지방에 대한 통치는 지방 세력 자체에게 맡기면서 세금 납부나 군대의 차출 등 중앙에 대한 의무만 충실히 수행하게 하고 외교권을 통제하는 지방 분권적 영역국가가 있다. - 3 -
그림-5 지방분권적 영역국가 체계 그림-6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체계 영역국가도 내부의 갈등이나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다시 여러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 도시국가보다는 큰 작은 영역국가로 분열되기도 하는 등 전통 문명 의 국가 체계는 지역과 시대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띨 수 있다. 또한 모든 국가 체 계는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어 어떤 국가 체계가 더 우월하다고 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전 통시대의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발전론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를 범하 기 쉽다.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농업혁명이나 전통문명의 성과는 교류와 갈등을 통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농업기술의 혁신이 일어남에 따라 집약 농업이 가능한 기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문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록 후대에 일어난 문명이기 때문에 최초 라는 수 식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일정한 수준에 다다르면 최초의 문명과 후대의 문명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 서로 고립되었던 문명권이 교류 충돌하면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나는 것은 세계사가 잘 보 여주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장거리 국제무역에서 번영한 일부의 상업도시를 제외하면 거 의 대부분의 전통문명이 농업에서 나오는 잉여 생산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산업혁명에 의해 생산의 성격이 강화된 근대도시가 탄생하기 이전, 생산 공간인 수많은 마을을 지배하 는 거점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의 성격이 도시 사이에 맺고 있는 체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전통문명의 갈등구조와 전쟁 수렵채집단계의 인류 집단 사이에도 생존을 위해 충돌이 발생했고, 심한 경우 다른 집단 을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우연적인 소규모의 충돌에 지나지 않았는 데, 원래 집단의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의도적인 충돌로 - 4 -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나 마을이 형성된 후에도 집약 농업으로 진입하기 전에는 마을 사이의 충돌이 의도적인 대규모의 형태를 띠지는 않았 다. 하지만 집약 농경에 의한 잉여 생산과 장기 저장이 가능해지면서 도시에 의한 마을의 지 배가 이루어지고 국가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의도적인 대규모의 충돌 가능성이 항상적으로 잠재해 있게 되었다.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수렵채집사회 단계나 원시농경 단계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전투나 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과거의 역사가 잘 증명해주 고 있다. 규모나 형태가 어떠하든 전통문명의 국가는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 다양한 물리적 이데올 로기적 장치를 만들어 놓았지만 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건국-번영-멸망의 과정을 반복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단지 인류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을 방어하거나 빼앗기 위해, 또는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근본 바탕 에는 문명 자체가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갈등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림-7 전통문명의 갈등구조 첫째, 지배-피지배의 관계 속에 잠재한 갈등구조를 들 수 있다. 지배 신분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와 권력을 매개로 피지배 신분이 만들어낸 잉여 생산물을 수취 저장하며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와 같은 관계를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것, 또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데올 로기적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 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배 신분이나 피지배 신문 모두 이 를 당연하게 인식 수용한다. 그리고 군사적 행정적 여러 수단을 통해 잉여 생산물에 대한 수 취를 체계적으로 이루어낸다. 하지만 잉여 생산물에 대한 수취가 항상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때로는 기후적 재 앙으로 인해 잉여 생산물 자체가 적게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 신분의 생존을 위협 - 5 -
할 정도로 수취를 강제하려 할 수 있다. 때로는 지배 신분 내의 혼란과 갈등으로 인해 군사 적 행정적 체계의 합리성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피지배 신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과도한 수취가 이루어질 수 있다. 피지배 신분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게 될 때 지배 신분에게 저항하여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은 현상이었다. 하지만 피지배 신분 스스로 지배 신분을 정복하 여 평등 사회를 만든 적이 없고, 새로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기존 체제를 무너뜨렸다고 하더 라도 새로운 지배-피지배 관계의 창출로 결말이 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문명을 가 능하게 했던 지배-피지배의 관계 자체 속에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전투나 전쟁으로 비 화되는 갈등구조가 잠재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둘째, 최고 권력을 둘러싼 지배 신분 사이에 잠재한 갈등구조를 들 수 있다. 문명과 함께 발생한 지배 신분 역시 개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지 배 신분의 집단 내부에는 최고 권력자인 왕을 정점으로 피지배 신분으로부터 잉여 생산물을 직접 수취하는 최하위 지배 신분까지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는 계층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 었다. 이들 사이에는 엄격한 질서가 존재했지만 더 많은 권력, 더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기 위한 지속적인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최고 권력인 왕권을 둘러 싼 갈등과 암투는 왕실 내부에 항상적으로 존재했다. 왕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왕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 드물지 않게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은 세계 문명 대부분의 지역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또한 왕권을 잇기 위해 왕의 아들들 사이 에 갈등과 암투가 늘 존재했으며, 결국엔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 역시 세계의 문명사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 아니었다. 왕실의 권위 자체가 흔들릴 경우 왕실 외부의 권력자로부터의 도전이 나타났던 것 역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중앙 권력의 내부에 있던 권력자일 수도 있고, 중앙으로부 터 멀리 떨어진 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권력자일 수도 있다. 이들은 기존의 왕권에 도전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란의 형태를 띠며, 성공할 경우 기존의 왕조와 경쟁하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아예 기존의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열기도 한다. 셋째,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국가 사이의 갈등구조를 들 수 있다. 문명이 일어났던 어느 지역도 국가가 한 개만 존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규모가 어떠하든 여러 개의 국가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경쟁하는 시스템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럴 경 우 국가 사이의 서열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갈등이 벌어진다. 심하면 하나의 국가가 다른 국가를 멸망시켜 통합시키기 위한 전쟁으로 비화되는 현상 역시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국가는 피지배 신분에 대한 지배 신분의 지배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국가와 국가 사이의 갈등 과정에서 하나의 공동운명체적 단위로 기능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국가 내부의 지배-피지배의 갈등이나 권력자들 사 이의 갈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국가의 총력을 동원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특히 약탈전의 양상을 띨 경우 공동운명체적 단위로서 국가의 기능은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한쪽 국가의 힘이 현저하게 약하여 결국엔 멸망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면 내부에 잠재하고 있던 지배-피지배의 갈등구조나 권력자들 사이의 갈등구조가 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 강한 외부 적의 출현과 이에 대한 미흡한 대처는 국가 권력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 며, 이는 내부의 반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외부 적과의 직접적인 전쟁 에서 패하여 멸망하는 국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부의 반란이나 기타의 갈등이 먼저 - 6 -
일어나 외부의 적과 심한 전쟁을 겪지 않고 멸망하는 국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문명 자체의 갈등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하였 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 세 가지 중 하나의 갈등구조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몇 가지의 갈등구조가 중첩되어 설명되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전쟁의 이유와 진행 과정을 이해 설명하려 할 경우 갈등구조의 여러 형태를 고려해야만 한다. 하지 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변수를 고려하기 보다는 좀 더 큰 틀 속에서 원인의 가중치, 선후 문제 등을 체계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3. 방어를 위한 시설, 성곽의 유형과 규모 전통문명은 잉여 생산물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인 권력을 중심으로 세 개의 기본적 갈등구 조를 갖고 있고, 이것은 일정한 조건 속에서 언제든 전쟁의 형태로 비화되곤 하였다. 그렇 다고 전통시대 내내 전쟁이 계속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다. 전체적 으로 볼 때 전통시대 내내 전쟁기간보다는 평화기간이 훨씬 길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 중의 하나다. 어떠한 국가도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 나아가 더 큰 권력을 획득하여 실제로 오랜 기간 안정되게 행사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존재했다. 기존의 세력이든, 새로운 세력이든 전쟁은 권력의 행사, 나아가 더 큰 권력의 획득이 방해받을 때 취해지는 최후의 방법일 뿐 이다. 권력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행사에 좋은 조건은 갈등구조가 힘의 불균형 상태에 있 는 전쟁기가 아니라 균형 상태에 있는 평화기이다. 이런 측면에서 어떠한 전쟁도 힘의 균형 상태인 평화 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우며 나타났던 것이 아이러니컬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군사적 물리력을 동원하여 갈등구조의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권력의 장기적인 행사는 갈등구조의 상대방으로부터 지속적인 방어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해진다. 따라서 어떠한 권력도 공격과 방어 두 측면을 늘 염두 에 두고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 권력의 행사를 지속시 키기 위해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설 중의 하나가 바로 성곽이다. 성곽은 전쟁시기에는 뛰어난 군사적 물리력을 갖춘 상대방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 권력을 보호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긴 평화시기에도 상대방의 공격 을 일상적으로 감시 통제할 수 있게 함으로써 권력을 보호 유지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따라 서 성곽의 유형과 규모에 대한 이해는 실제의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적 통제와 잠재적인 방어시설로 인식되는 평화시기의 기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실제 전투에서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조건은 적은 힘을 들이 면서도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성곽의 형태와 규모가 가장 방어력이 좋은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나의 형태를 절대화시켜서는 안 된다. 첫째, 지형과 성곽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산이나 언덕, 절벽 지형이 거의 없는 평지에 성곽을 축조할 경우 최소 10m 이상의 높은 성벽과 20m 이상의 물웅덩이인 해자( 垓 字 )를 건설해야 방어력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성 벽을 공격하는 적을 좌우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성곽보다 바깥으로 튀어나가게 만 든 치( 雉 ),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좌우에서 협공할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옹성( 甕 城 ), 적의 화살이나 총포 발사에 몸을 숨기며 공격할 수 있는 성가퀴( 女 墻 ) 등 다양한 시설을 개발한 - 7 -
다. 하지만 평지 성곽은 아무리 높게 쌓아도 밖에서 성벽보다 더 높은 것을 쌓거나 만들어서 공격당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만약 산이나 언덕, 절벽 지형이 있을 경우 이를 적극 활용하여 성벽을 쌓으면 주위에 더 높은 지형을 만들기가 어려워 방어력이 배가될 수 있다. 또한 산성이나 언덕, 절벽 지형의 요새성은 지형의 경사도를 이용하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 가 4-5m만 되어도, 그리고 해자를 만들지 않아도 높은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적은 힘을 들이면서도 높은 방어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완전 평지 지역의 문명이 아니라 면 세계 다수의 문명지역에서 일반화된 성곽 형태다. 둘째, 전투의 규모와 성곽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성곽이 크면 좋을 것처럼 생각되는 경향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곽은 큰데 지킬 수 있는 병사가 적으면 방어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성곽은 작은데 지킬 수 있는 병사나 함께 들어온 주민이 너무 많으면 이 역시 방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 라서 성곽의 크기가 전쟁, 그 중에서 실제 전투의 규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역사의 상 식에 해당된다. 만약 중소규모의 단기전이 많이 벌어지면 그에 맞춰 중소규모의 성곽을 축조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도시국가의 경우 피지배 신분에 대한 일상적 통제와 반란에 대한 효과적 방어를 목적으로 성곽을 만드는데, 이때의 전투규모는 클 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시국가에 세 워진 성곽은 규모가 작은 경향이 있는데, 독립적인 도시국가 사이의 전투 역시 규모가 크지 않아 성곽의 규모를 크게 만드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1) 반면 대형 장기전의 전투가 자주 벌어지면 중단기전용의 중소규모 성곽은 무용지물이 되 며, 대형 성곽 위주로 재편되게 된다. 이러한 전투는 지배-피지배나 지배 신분 내에서의 갈 등구조에서는 거의 나타나기 힘들며, 국가와 국가의 전쟁에서 주로 나타난다. 특히 강한 군 사력을 가진 대규모의 외적이 쳐들어올 경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군사적으로 현저하게 힘이 약한 쪽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보급품을 조달해야만 하는 적의 약점을 이용 한 대형 성곽 위주의 장기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지형과 규모란 두 가지의 요소가 어떻게 고려되는 지를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실제 성곽의 방어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 가 따로따로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실제로는 중소형의 평지성, 중소형의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 대형의 평지성, 대형의 산성 등 다양한 유형의 성곽이 설정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도시와 성곽의 관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성곽의 유형과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도 시와 성곽의 관계다. 많은 문명권에서 도시 속에 성곽이 공존하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나타 났지만 도시 속에 성곽이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문명권 또 는 국가 내에서도 도시와 성곽의 관계가 다른 경우도 있다. 따라서 도시와 성곽의 관계에 1) 때로는 여러 도시국가가 합종연횡하면서 영역국가로 가기 위한 큰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천하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는 작은 성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공성전이 아니라 두 편으로 갈라진 군대가 들판 등에서 대규모의 단기전으로 승부를 가르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성곽의 규모는 가끔 나타날 수 있는 전투가 아니라 잠재적이든, 실제든 자주 나타날 수 있는 전투의 양상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 8 -
대해 하나의 유형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 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도시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물리적 방어력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을 갖추어야 하는 핵심 공간이었다. 전통문명에서 국가 권력의 획득과 행사를 위해 군사적 물리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거나 방 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전통시대의 역사 속에서 내외적 도 전을 물리칠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력을 갖추지 않고 오랫동안 번영한 국가를 찾는 것은 쉽 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군사적 물리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가를 유지한 경우 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실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존속한 유명무실한 국가였을 뿐이 다. 이렇게 국가 권력의 번영을 위해 군사적 물리력이 중요함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큼 중요하게 여겨야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역사 속에는 강한 군사적 물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한 국가도 꽤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 근본 이유는 권력을 자연스러운 것으 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상징체계를 개발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상 징체계에 의해 권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어떤 권력도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며, 아무리 강한 군사적 물리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번영하기 어렵다. 이러한 군사적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적 상징체계는 제도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구체화되어 야 하며, 그 핵심에는 국가 통치의 거점인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도시는 문명의 탄생과 함께 지배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의 번영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도시는 입지와 구조 및 상징 등 거의 전 부분에 걸 쳐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기도 했다. 그런데 국가 권력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군사적 물리력의 공간적 표현인 성곽과 이데올로 기적 상징 경관의 조영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도시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그 렇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세련된 논리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을 조영할 경우 군 사적 물리력의 공간적 표현인 성곽의 요소가 상당히 약화되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이 상대적으로 약하면서 성곽의 요소가 상대 적으로 강한 도시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둘째, 개별 도시와 성곽의 관계는 국가 전체의 방어 시스템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떠한 전통문명권에서도 도시는 수많은 마을에 대한 국가의 지배 거점이었다. 하지만 도 시와 도시의 관계에까지 관점을 넓히면 국가와 개별 도시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독립적인 도시국가가 병존하는 형태일 수도 있고, 도시국가 연합 형태일 수도 있 으며, 지방분권적 영역국가 형태일 수도 있고,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형태일 수도 있다. 또한 영역국가일지라도 2단계, 3단계, 4단계 등 다양한 도시체계를 갖출 수 있다. 이 중 도시국가에서는 국가의 지배 거점인 도시가 하나이고 자체적인 방어력을 스스로 가 져야 하기 때문에 도시에 성곽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영역국가, 그 중에서도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일 경우 개별 도시는 국가 전체의 방어 시스템에 따라 자체적인 방어력 을 가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단계가 많은 도시체계를 갖춘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일 경우 가장 하위의 도시는 보다 상위의 도시나 중앙에서 방어력을 대신해줄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력을 갖추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높이진다. 국가 전체의 방어 시스템은 내부의 반란이나 분열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도 설정 될 수 있다. 특히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갖춘 대규모의 외적이 장기적으로 침입하거나 침입이 - 9 -
예상될 경우의 효과적인 방어 시스템은 국가 내부의 통치 체계 형성이라는 목적만으로는 이 룰 수 없다. 예를 들어 3단계의 도시체계를 이룬 영역국가에서 최하위의 도시가 포괄하던 영역 속의 인구만으로는 대규모 외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럴 경우 여러 개의 최하위 도시가 포괄하던 영역의 인구를 하나로 모아 방어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효과적이 다. 따라서 최하위의 도시를 건설할 때 처음부터 성곽을 갖추지 않고 한 단계 위의 도시에 대형 성곽을 갖춰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대규모 외적에 대한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도시 자체가 아니라 도시 외부에 대형 성곽 을 갖추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도시는 국가의 장기적 번영을 위해 물리적 방어력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을 갖추어야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 중 후자의 것에 더 초점을 맞추면 물리적 방어에 유리하지 못한 곳에 도시가 건설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도시 외부의 지형에 대형 성곽을 축조하여 대규모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방식 을 취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성곽이 없는 도시 또는 방어력이 높지 않은 성곽으로 둘러싸 인 도시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지금까지 도시와 성곽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하며 도시에 성곽이 없을 수 있 는, 또는 도시에 방어력이 높지 않은 성곽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런 가능성은 물리적 방어력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상징 경관의 조영에 집중할수록,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일수록, 대규모의 외적이 장기적으로 침입할 위험성이 상존할수록 높아진다. 전통 문명의 도시 중 성곽이 없는 경우보다는 있는 경우가 훨씬 대세를 이루어 왔다. 그렇다고 하여 성곽이 없는 도시나 방어력이 높지 않은 성곽이 있는 도시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 해서는 안 된다. II. 한국의 고대 국가와 성곽 1. 고조선 2) 과 한나라 군현의 통치 1) 역사 한국 최초의 문명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고조선에 대해 삼국유사 의 고조선 왕검조선 ( 古 朝 鮮 王 儉 朝 鮮 ) 3)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단군의 할아버지는 환인( 桓 因 )이란 하느님이며, 아버지인 환웅( 桓 雄 )은 하느님의 명 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내려왔다. 둘째, 아버지인 환웅은 인간 세상의 모든 현 상을 주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내려와 세상을 교화( 敎 化 )하였다. 셋째, 환웅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호랑이와 곰에게 쑥과 마늘 20개만 먹으며 어두운 동굴에서 버티라는 어려운 과 2) 한국에서는 전통시대의 마지막 국가였던 조선(1392~1910)과 구분하기 위해 옛날의 조선 이란 뜻의 고조선 ( 古 朝 鮮 )이라 부르는데, 본 글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한다. 3) 이 책은 1281년~1283년 사이에 일연( 一 然, 1206 1289)이 편찬하였으며, 고조선에 대한 내용에는 551년에 서 559년 사이에 완성된 중국측의 위서( 魏 書 ) 와 지금은 전하지 않는 한국측의 고기( 古 記 ) 가 인용되어 있다. - 10 -
제를 부여하였고 그것을 통과하여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넷째, 기원전 2,333년에 조선을 건국하였고 이후 1,500년 동안 살다가 1,908세에 죽었다. 건국 과정을 하늘과의 관련을 통해 은유적 신화로 묘사하는 것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난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고, 고조선의 단군 신화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건국신화를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은유적 내용에 대한 해석이 필요 하다. 삼국유사 의 위만조선( 魏 滿 朝 鮮 )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 첫째, 여러 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경쟁하던 기원전 430년부터 기원전 221년 사이 연( 燕 ) 나라가 최전성기 때 5) 진번과 고조선을 침략시켜 복속 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둘째, 연나 라 출신 위만( 衛 滿 )이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80년 사이에 세력을 키워 고조선의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이 되어 진번과 임둔 등을 복속하여 영토를 넓히는 과정이 간략하게 나 온다. 셋째, 위만의 손자 우거( 右 渠 ) 왕 때인 기원전 109년과 108년 사이에 고조선과 한나 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결국 고조선이 멸망당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지( 三 國 志 ) 6) 의 위서(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 7) 의 한( 韓 ) 부분에는 위만이 몰아낸 고조선의 왕이 준왕( 準 王 )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한( 韓 ) 지역에 거주하면서 한왕( 韓 王 )이라 스스로 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같은 부분에 위 ( 魏 ) 나라의 어환( 魚 豢 )이 280년에서 289년 사이에 편찬한 위략( 偉 略 ) 의 내용이 주기로 들어가 있는데, 준왕의 아버지인 부( 否 )도 조선의 왕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 ( 韓 ) 앞에 기록된 예( 濊 ) 부분에는 기원전 1,046년경의 인물이었던 기자( 箕 子 )가 조선에 가 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교화한 후 40여 세대를 지나 준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기원전 2,333년의 건국을 믿지 않더 라도 준왕이 고조선의 왕이었던 기원전 194년에서 180년경으로부터 훨씬 이전부터 국가를 형성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8) 그리고 진( 秦 ) 나라에 한( 漢 ) 나라가 재통일한 기원전 202년 이후에도 약 100년 동안이나 경쟁하며 존재했다. 사기 조선열전 에 묘사된 한나라와의 전쟁 모습에는 고조선의 국력과 대략적인 모 습을 추정할 수는 있는 내용이 나온다. 기원전 109년 가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한 군사의 수는 5만 명이었고, 왕검성에 처음 도착한 병사 수는 7천명이나 되었 다. 그리고 우거왕은 왕검성을 나와 7천명의 한나라 병사를 패퇴시키는 등 상당히 효과적으 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한나라의 포위 공격에도 몇 달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한나라의 공격에 내분이 발생하여 항복하는 무리가 생기고 우거왕이 피살되기도 했지만 기원전 108년 여름에 들어서도 고조선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계속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내분에 의해 결국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진번( 眞 蕃 ) 임둔( 臨 屯 ) 낙랑( 樂 浪 ) 현 도( 玄 菟 ) 등 한나라의 4개 군( 郡 )이 설치되었다. 4) 이 기록에는 반고( 班 固, 32~92)가 완성한 중국측 한서( 漢 書 ) 의 조선전( 朝 鮮 傳 ) 내용도 인용하고 있는 데, 기원전 91년경 사마천( 司 馬 遷 )이 편찬한 중국측 사기( 史 記 ) 의 조선열전( 朝 鮮 列 傳 ) 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5) 기원전 331년-기원전 279년 6) 진나라( 晋, 265~316)의 진수( 陳 壽, 233~297)가 중국의 삼국시대(220~265)에 대한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7) 동이전( 東 夷 傳 )은 중국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오랑캐에 대한 기록 이란 뜻이다. 8) 제( 齊 )나라 환공( 桓 公, 재위: BC 685~BC 643) 때의 인물인 관중( 管 仲 )이 편찬했다는 관자( 管 子 ) 23권에 발조선( 發 朝 鮮 ) 과의 교역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 제나라로부터의 거리가 8천리이고 조공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나와 이 때 이미 고조선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11 -
한나라의 4개 군 중 하나였던 낙랑군은 최초의 설치 때 11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고,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기까지 400년 이상 존재했다. 그러나 그 동쪽에 있으면서 15 개의 현( 縣 )을 거느렸던 임둔군은 설치된 지 30년이 되지 않은 기원전 82년에 혁파되어 현 도군에 합해진다. 낙랑군의 남쪽에 있던 진번군 역시 15개의 현을 거느렸는데, 임둔군과 같 은 시기에 혁파되면서 낙랑군에 합해졌다. 9) 출처: 위키백과 홈페이지(http://ko.wikipedia.org/wiki/) 그림-8 낙랑군 대방군과 토착인 국가(200년대) 10) 기원전 75년에는 낙랑군의 북쪽에 있던 현도군이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더 서북쪽으 로 옮겨 갔다. 같은 해에 낙랑군이 옛 진번군의 15개 현 중 7개의 현에 남부도위( 南 部 都 尉 ) 를, 옛 임둔군의 15개 현 중 7개의 현에도 동부도위( 東 部 都 尉 )를 두어 직접 통치하면서 원 래의 11개 현을 합해 총 25개의 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기원후 1세기에는 토착세력의 국가 인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해 현도군이 더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3개의 현으로 재편되었다. 토착세력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낙랑군에서는 본국의 혼란기인 기원후 23년에 토착인인 왕조( 王 調 )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자립한다. 기원후 30년에 한나라의 왕준( 王 遵 )에 의해 다시 통치력이 회복되지만 낙랑군은 동부도위에 대한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동옥저( 東 沃 沮 )와 예 ( 濊 )의 토착세력을 우두머리로 삼아 간접 통치를 시행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11) 동옥저와 예 지역은 한나라 군현의 직접통치 간접통치 독자적인 도시국가에 가까운 간 접통치의 순서로 변하였고, 끝까지 왕( 大 君 長 )은 없었다. 다만 한나라 때 이래로 후( 侯 ) 읍군 ( 邑 君 ) 삼로( 三 老 )의 관직이 있었는데, 낙랑군의 직접 간접 통치를 받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영역국가로 변하지 못하고 반 자치적인 도시국가의 수준에 머무르다 고구려 등에 게 정복당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안정적 통치를 유지하던 후한은 147년으로부터 189년 사이에 지방 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184년에 요동군을 중심 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공손탁( 公 孫 度 )이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된 다. 196년에서 220년 사이에는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 公 孫 康 )이 낙랑군의 남부도위를 혁파 하고 독자적인 대방군( 帶 方 郡 )을 설치하여 다스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38년에 위( 魏 ) 나라 12) 가 공손탁의 손자인 공손연( 公 孫 淵 )을 멸 망시키고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의 통치권을 넘겨받는다. 이어 진( 晋 ) 나라 13) 가 위나라를 멸 망시키고 3개 군의 통치권을 갖는다. 하지만 311년 흉노족이 진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켜 혼 란에 빠트리게 되고,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완전히 축출된다. 마지막 남은 현도군도 400년대 초에 고구려에 의해 정복된다. 14) 9) 후한서 위서 동이전 예( 濊 ) 10) 이 그림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주류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와 다르게 보는 비주류의 견해도 있다. 11) 후한서 위서 동이전 예( 濊 ) 12) 220년~265년 13) 265년~316년 14) 호구수의 규모에 대해 한서 지리지( 地 理 志 )에는 낙랑군이 62,812호 406,748명으로, 현도군이 45,006호 221,845명으로, 후한서 군국지( 郡 國 志 )에는 낙랑군이 61,492호 257,050명으로, 현도군이 1,594호 43,163-12 -
2) 문명 전파론적 의의 전통문명의 탄생은 곧 도시의 탄생이고, 나아가 국가의 탄생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통문 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록과 유적 등에 나타난 도시와 국가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분석 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록과 유적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 고, 문명의 특징을 체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고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과 기록은 아주 작은데, 이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어떤 시대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또한 기록의 주체가 다른 중국측의 문헌과 한국측의 문헌 내용 사이에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요소가 있어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증폭되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쉽게 줄어들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관점이 더 옳으냐가 아니라 기록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문명사적 큰 흐름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구대륙에서 최초의 전통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네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 적으로 발생했다. 이후 이들 지역의 문명이 주변 지역과 갈등과 경쟁, 나아가 민족의 이동 과 전파를 통해 차츰 퍼져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정 수준의 문명에 도달하면 어느 지 역이든 최초 문명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상당히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세계 문 명사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문명 전파론적 관점에서 한국 고대의 역사 에 대한 기록을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군현에 대해 중앙 조직이나 지방 통치체제, 나아가 도시 구조를 언급 할 수 있을 만큼의 역사 자료나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나라의 군현만 보면 군-현 2단계의 통치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학자들 사 이에서 주로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구체적 위치와 고조선의 건국 시기 및 중심지의 이동 경향 등이다. 대체로 주류 견해는 평안남도의 평양 부근이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이자 한나라 낙랑군의 중심지였다고 보고 있다. 본 글에서도 평양 부근 중심설을 그대로 따르고 싶다. 하지만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지 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한반도와 만주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고조선과 한나라 의 군현 모두 황화문명과 연결된 서쪽으로부터, 특히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서북쪽으로부 터 왔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어느 시기에도 한반도의 북부 지역은 남부 지역보다 인구밀도가 훨 씬 낮았다.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이 더 높은 문명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대 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전통문명에서의 인구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농사짓기 좋은 기후 조건이고, 이런 측면에서 겨울이 상대적으 로 긴 한반도의 북부 지역은 남부 지역에 비해 결코 좋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 의 문명 국가가 남부 지역이 아닌 북부 지역, 나아가 한반도 서북쪽의 만주 지역이라는 점 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는 민족의 이동에 의한 것이든, 전쟁과 전투를 통한 정복에 의한 것이든, 나아가 경제 적 문화적 교류에 의한 것이든 문명의 전파론적 관점을 벗어나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다.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통치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통치 체제나 도시 등을 구체적 으로 연구할 수는 없지만 두 시기가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충격을 가해 새로운 문명 명으로 나온다. - 13 -
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겠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외부세력이 군사적 정복을 통해 직접 통치할 경 우 다수의 토착세력과 소수의 외부세력 사이에 갈등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세계문명의 어느 지역에서든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세력의 완전한 융합을 통해 하나로 합해지면서 사라질 수도 있고, 더욱 증폭되어 결국엔 외부세력이 축출 되거나 동화되면서 토착세력이 다시 정치권력을 회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외부세력이 축출되는 경우라도 정복되기 전과 축출된 후의 토착세력의 상황이 같 을 수 없다는 것도 세계문명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높은 문명을 갖고 있던 국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문명지역을 정복할 경우 토착세력에게 많은 변화 를 가져다주는 것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했다. 기원전 771년에서 기원전 221까지 황하문명 지역에서 나타났던 여러 세력 사이의 갈등 과 전쟁, 기원전 2세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고조선에서 급격한 변화와 한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고조선의 멸망과 한나라 군현의 설치는 고조선 지역뿐 아니라 주 변 지역의 토착세력에게도 상당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토착세력의 국가인 고구려에 의해 설치된 지 약 420년만인 313년에 축출되기까지 이어진 한나라 군현과 주변 토착세력과의 교류와 갈등 관계 역시 한국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였다. 2. 토착인 국가의 형성과 성장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영향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다음 해에 4개의 군( 郡 )을 설치하여 직접 통 치를 실현하지만 후대 동이( 東 夷 )라 기록된 모든 민족이 사는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못했 다. 일반적으로 문명 지역의 국가가 정복하는 지역은 대부분 문명 지역이다. 비문명 지역의 사회 조직 자체가 정복하여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고조선 주변 지 역의 문명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팽창을 추구했던 한나라가 정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고 아주 저급한 수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된 후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켰다거나 고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가 남쪽의 진국( 辰 國 )과 한나라 사이의 교역을 막았다는 내용이 있어 문명 수준을 갖춘 국가가 생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이란 강력한 국가를 멸망시킨 한나라가 정복을 통한 직접 통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은 문명 수준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 는 어렵다. 어쨌든 한나라의 군현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당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한나라가 고조선 을 멸망시킨 후 직접 통치한 지역, 독립적이면서 외교적 군사적 관계를 통해 평화와 대결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간 지역 등 2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토착 세력과의 갈 등으로 인해 한나라가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간접 통치를 시행한 지역도 나타나 크게 3개 의 유형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당시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조선과 한나라라는 높은 문명을 가진 국가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기존보다 한 차원 높은 문명으로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게 할 수는 가능성을 높인다.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한반 도 중남부 지역의 경우 고조선과 한나라가 장악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비해 농사 - 14 -
짓기에 기후적으로 더 유리한 곳이라는 점이다. 농업생산성의 증가,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인구의 증가는 새로운 문명 수준으로 나아가는데 충분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다음으로 황화 문명 지역의 혼란 과정에서, 위만이 고조선의 왕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한 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유민이 직접 유입되면서 단순한 접촉이 나 교류에 의한 문화 전파보다 더 빠른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삼국지 위서 (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의 한( 韓 ) 부분에는 한반도의 서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히 많은 인구의 유입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첫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 準 王 )이 측근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 韓 ) 지역으로 내려와 한왕( 韓 王 )이라 칭했으며, 준왕의 후손이 끊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준왕에 대한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둘째, 진한의 노인들이 진( 秦 ) 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 ( 韓 國 )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다 고 말한다. 한국측의 역사책인 삼국사기 15) 신라본기 에도 신라가 건국되는 기원전 57년 이전 에 조선의 유민들이 현재의 경주시 부근에 내려와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6개의 촌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6개의 촌이 신라 건국의 핵심 세력이 되는데, 이것은 신라의 건국조차도 북쪽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충격의 여파, 그 중에서도 직접적인 인구의 유입에 의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 북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한나라 군현의 직접 또는 간접 통치를 받던 지역은 독립적인 토착인 지역을 크게 남북으 로 둘로 나누어놓았다. 그리고 두 지역은 서로 유형이 다른 충격의 반응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 북쪽에 있던 만주 지역은 황화문명을 끊임없 이 괴롭힌 북방의 유목민족, 중국의 분열시기에 동북의 강자였던 연나라, 통일 제국 한나라 가 설치한 요동군 등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던 지역이다. 따라서 고조선에 설치되었던 한나라 군현과의 관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강한 세력과의 접촉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높은 문명의 국가가 출현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부여( 夫 餘 )의 왕자였던 주몽( 朱 蒙 ) 이 스물두 살에 현재의 요령성( 遼 寧 省 ) 환인( 桓 仁 ) 지역의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주몽의 아버지인 금와와 할아버지인 해부루도 모두 부여의 왕이었기 때문에 부여는 기원전 100년 전후에는 이미 건국되어 있었던 셈이 된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 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주변 소국을 정복한다. 16) 고구려를 건국했던 기원전 37년에 비류국을 평화적으로 합병했으며, 이어 기원전 32년에 행인국을, 기원전 28년에 북옥저를, 기원전 14년에 양맥을, 기원후 26년에 개마국과 구다국 을, 56년에 동옥저를, 72년에 조나를, 74년에 주나를 정복했다. 이렇게 정복한 모든 지역을 지속적으로 통치했는지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 으로 꽤 넓은 지역을 정복하여 영역국가로 변모했음은 분명하다. 15) 1145년 김부식의 주도로 한국측과 중국측의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되었다. 16) 중국측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魏 書 ) 동이전( 東 夷 傳 )의 고구려 부분에도 전체적인 흐름이 비슷하게 기 록되어 있다. 첫째, 신나라(9~23) 때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며, 고구려왕의 칭호를 고쳐 하구려후( 下 句 麗 侯 )로 했다. 둘째, 32년에는 한나라의 무제가 고구려왕의 칭호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셋째, 32년 이후에 는 지속적으로 왕이란 표현이 나오며, 한나라이 군현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음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넷째, 정확한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나라의 직접 간접 통치를 받았던 옥저와 동예까지 복속시켰다. - 15 -
고구려의 영토 팽창은 주변의 강한 세력과 자주 충돌하며 지속적인 전투를 벌이게 만들었 다. 기원전 37년에서 331년까지 고구려가 다른 지역을 침략한 경우가 25번이나 기록되어 있지만 침략 당한 경우도 11번이나 된다. 그 중 동이족이 아닌 한나라나 북방 유목민족과 벌인 전투가 30번이나 된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투 기록에서 주목되는 특징은 대규모인 경 우가 많았으며, 국가의 사활이 걸릴 정도였던 경우도 꽤 된다는 점이다.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21년과 22년에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하여 부여를 정벌하러 나섰지만 대패하였다. 28년에 는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수도였던 위나암성까지 수십일 동안 포위하였 는데, 고구려가 잘 방어하여 물리쳤다. 172년에 한나라가 대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대대 적으로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가 성( 城 )을 지키는 장기전을 구사하여 이를 물리쳤다. 246년 에는 위( 魏 )나라의 관구검( 毌 丘 儉 )이 1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고구려측에서 는 2만명을 동원하여 이에 대항하였지만 대패하여 수도까지 함락 당하고 왕은 남옥저까지 도망가는 수모를 당했다.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였다. 고구려 주변에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양맥 개마국 구다국 동옥저 조나 주나 등으로 이름 붙 은 도시국가 수준의 나라가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 지역의 민족은 중국측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동이족이기 때문에 서쪽으로부터 시작된 충격의 여파가 이 지역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약 10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부여 숙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이족 지역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강력한 국가와도 지속적으로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고 구려는 도시국가나 도시국가 연합체계 단계를 별로 거치지 않고 단기간에 영역국가 체계를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이렇게 영역국가 체계를 빠르게 이루어낸 이유는 단지 고구려라는 국가 내부만 의 문제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세운 군현뿐만 아니 라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로 변하면서 만주의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강력한 세력들과 끊임없이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위치적 상황 조건이 중요하다. 대규모 전쟁까지도 불사하며 경쟁하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영역국가의 체계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영역국가 내부의 도시 체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3) 중남부 지역 토착인 국가의 성장 다수의 강한 세력과 경쟁했던 고구려와 달리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위치적 조건 때문에 낙랑군 대방군과만 주로 교류 경쟁하면서 새로운 문명국가로 성장해 나갔다. 중국측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한반도 중남부를 한( 韓 )으로 지칭하면서, 크게 마한( 馬 韓 ) 진한( 辰 韓 ) 변한( 弁 韓 )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마한은 서쪽에 있었으며, 54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동쪽에 서로 뒤섞여 살면서 각각 12개씩 24개의 나라가 있었다. 모두 합하면 78개의 나라가 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나라마다 최고의 통치자와 관료 조직이 있어 크든 작든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갖춘 도시국가였다. 둘째,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호수 편차가 상당히 커서 소수의 큰 나라 와 다수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 셋째, 마한의 진왕은 월지국( 月 支 國 ) 또는 목지 17) 마한의 전체 호수는 10여만 호이며, 큰 나라는 만여 가( 家 ), 작은 나라는 수천 가( 家 )였다. 10여만을 넓게 잡 아서 10만에서 15만 사이로 볼 때 54개의 나라로 나누면 평균적으로 한 나라마다 1,852호에서 2,778호밖에 - 16 -
국( 目 支 國 )을 통치하면서도 마한 전체를 대표하며, 진한의 12개 나라를 아우르는 진왕( 辰 王 ) 이 있었다. 다만 변한만은 전체를 아우르는 왕이 없이 각 나라의 왕만 존재했다. 18) 결국 마한과 진한 지역은 전체를 영도하는 우월한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도시국가 연합 체 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변한 지역은 전체를 영도하는 우월한 도시국가가 없이 독립적인 도 시국가 지역 체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측의 기록인 삼국사기 는 중국측의 기록인 삼국지 에 78개 나라의 하나로 기 록된 신라와 백제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백제는 기원전 18 년에 건국하였고, 두 국가는 기원후 64년부터 국경을 맞대고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인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국가가 일찍부터 영역국가였던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인 데, 신라의 영토 팽창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신라는 102년에 음죽벌국과 실직곡국 및 압독국을 정복하는데, 그 원인은 음즙벌국과 실 직곡국 사이에 있었던 영토 분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복당한 실직곡국이 2년 후인 104 년에, 압독국이 42년 후인 14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다. 108년에는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침략하여 정벌하며, 185년에는 소문국을, 232년에는 감문국을 정복한다. 그리고 236년에는 소문국이나 감문국보다 신라에 가까이 있던 골벌국을 정복한다. 19) 결국 신라는 감문국을 정복하는 232년과 골벌국을 정복하는 236년경까지도 진한지역을 완전히 아우르는 영역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시까지도 우월한 도시국가의 입장에 서 나머지 도시국가들을 영도하는 도시국가 연합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 리적이다. 또한 신라가 기원후 64년부터 백제와 벌였던 것으로 기록된 수많은 전투도 영역 국가 신라가 아니라 도시국가 연합체계를 이끄는 우월한 도시국가 신라의 입장에서 이루어 졌던 것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백제는 건국된 지 20여년이 지난 기원후 8년에서 15년 사이에 마한을 정복한 것으로 기 록되어 있으며, 그 밖의 도시국가에 대한 정복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통 해 기원후 15년부터 백제가 마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영역국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 측의 기록인 삼국지 에 마한에 54국이 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또한 151년과 189년 사이에 있었던 낙랑군 대방군과의 구체적인 전투 상황에 대 한 묘사에서도 백제가 아니라 한( 韓 )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마한의 54개 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영역국가였다 기보다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마한의 54개 전체 또는 그 상당수의 도시국가 연합 체계를 이 끄는 우월한 도시국가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고 백제가 작은 도시국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째, 마한의 54국 중 만여 가의 큰 나라도 있었는데 백제가 가장 큰 나라 였을 수밖에 없다. 둘째, 여러 차례에 걸쳐 낙랑군 대방군과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던 한( 韓 ) 안 된다. 그런데 큰 나라는 만여 가라고 했으니 큰 나라가 5개만 되어도 전체 호수의 50%에서 33%를 차지 한다. 따라서 만여 가를 넘는 소수의 큰 나라와 1-2천가 안팎의 다수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변한과 진한을 합한 전체 호수의 규모는 4-5만 호이며, 작은 나라는 4-5천가, 작은 나라는 6-7 백가로 나온다. 4만에서 5만을 24국으로 나누면 평균적으로 한 나라마다 1,667호에서 2,083호이다. 만약 4-5천가나 되는 큰 나라가 5개만 되어도 이미 전체 호수의 50%나 되기 때문에 소수의 큰 나라와 6-7백가 안팎의 많은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 진( 晋 )나라(265-418)의 역사를 편찬한 진서( 晋 書 ) 동이열전의 마한 부분에는 277년에서 290년까지 6차 례에 걸쳐 그 왕( 主 )이 사신을 보냈으며, 진한 부분에도 280년에서 286년까지 3차례에 걸쳐 그 왕( 王 )이 사 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 정복 기록은 아니지만 297년에는 신라와 아주 가까운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에 있었던 이서고국 즉, 이미 정 복당했던 이서국의 후예들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까지 공격하여 거의 성공할 뻔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17 -
은 마한을 지칭하는데 20), 그 때 마한의 지도적인 도시국가 역시 백제일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는 마한의 백제와 진한의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변한 지역에 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진한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인 가야와 신 라의 전투 기록이 94년에서 116년 사이에 6번이나 나타나며, 대규모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 다. 또한 209년에는 변한 내에서 가라( 加 羅 )란 나라와 8개의 나라 사이에 있었던 세력 다툼 때문에 가라의 요청을 받은 신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하는 내용도 나온다. 따라서 삼 국사기 의 신라 기록만으로도 변한 지역에 여러 도시국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진한 지역에 대한 가장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삼국유사 의 오가야( 五 伽 耶 )에는 총 6개 의 가야 이름과 당시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이 6개의 가야는 마지막까지 남은 진한 지역 의 도시국가로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변한 12개의 나라가 서로 경쟁하면서 최종적으로 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변한 지역은 마한이나 진한 지역처럼 우월적인 도시국 가를 중심으로 도시국가 연합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다수의 독립적인 도시국가 지역 체계 를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3국의 경쟁과 통일신라의 성립 1) 역사 311년 흉노족이 진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켜 혼란에 빠트리게 되고, 이를 이용하여 고구려 는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군과 대방군을 완전히 정복한다.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 남부 에서 외부세력의 통치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새롭게 성장한 3개의 토착인 국가인 신라 고 구려 백제가 완전한 영역국가로 성장하여 서로 국경을 맞대며 경쟁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 지역에서도 589년 수나라 21) 가 통일을 이룰 때까지 약 360년간의 분열기가 이어진 다.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은 중국 지역의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족과 일본의 왜( 倭 )를 포함한 다수의 국가와 합종연횡의 외교전을 펼치면서 치열한 경쟁과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한국에서는 300년 이후부터 500년대 후반까지 삼국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대를 가장 공세적인 국가의 입장에서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눈다. 첫 번째 시기는 300년대 후반 백제가 고구려에 공세적이었던 시기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했지만 모용외( 慕 容 廆 )와 그의 아들 모용황( 慕 容 皝 )이 세 운 전연( 前 燕 ) 22) 과의 대결에서 패하여 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342년에는 모용황의 군대 5만5천명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남녀 5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였다. 369년에서 377년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 각각 3만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투가 세 번 에 걸쳐 벌어지는데, 두 번이나 백제가 대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왕이 화살에 맞아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300년대 말부터 500년대 전반까지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에 공세적이 었던 시기다. 300년대 말 고구려는 후연( 後 燕 ) 23) 과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요동 지역을 모두 20) 진한 변한과 낙랑군 대방군의 사이에는 마한 예의 넓은 지역이 자리 잡고 있어 진한 변한이 낙랑군 대방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21) 수( 隋 ), 581년-618년 22) 337년-370년 23) 384년-409년 - 18 -
차지했으며, 거란까지 정벌하기도 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까지 압박하였으며, 상 당히 넓은 땅을 빼앗았다. 400년대 중반부터는 남쪽을 주로 공략하기 시작하여 454년에 신 라의 실직주성을 빼앗았고, 475년에는 병력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을 뿐 만 아니라 왕까지 죽였다. 494년에는 북쪽에 있던 부여가 항복해 왔으며, 이후 신라와 백제 에 대한 공세를 지속했다. 세 번째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공세적이었던 시기다. 400년대까지 계속된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해 신라와 백제가 연합을 맺어 잘 막아냄으 로써 500년대 전반기는 어느 국가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서로 공방전만 벌이는 힘의 균형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550년부터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에 공세를 펴기 시작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았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격전을 치르는 틈을 타서 한강 유 역 전체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의 남쪽 지역까지 공격한다. 554년 백제는 신라 의 배신에 보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왕이 사망하는 패배를 당한다. 이후 세 나라 모두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서로 공방전만 벌이는 힘의 균형 상태에 들어간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600년대 후반까지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통 일신라가 성립되는 시기이다. 수나라와 이어 등장한 당나라 24) 는 중국 통일의 기세를 몰아 대외 팽창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만주와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세 나라의 경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고구려는 남쪽에 전력을 투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수나라는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한 1 차 원정을 감행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한다. 이어 612년에 113만 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2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으며, 30만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역시 실패한다. 이후 613년과 614년에 3차 4차 원정을 시도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다.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 역시 대외 팽창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로 인해 고구려에 대한 침략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644년과 645년 2년에 걸쳐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1차 고구려 원정을 시행하여 많은 성을 함락시키지만 안시성( 安 市 城 ) 싸움에서 성 공하지 못하여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장기전 전략을 구사하면서 655년과 659년에도 중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한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남쪽에 전력을 쏟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 자 백제의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이루어진다. 가장 큰 공격은 642년에 일어났는데, 신라의 서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는 데, 전반적으로 백제가 우세하였다. 655년에도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30여 성 을 함락시키기도 하여 신라는 국가적인 위기감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결국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 위기 를 모면하고 공세적인 상황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660년 당나라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대군이 연합하여 동서에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 약 4년에 걸친 백 제의 부흥운동을 무력화시키고 백제를 영원히 멸망시켰다.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는 661년과 662년에 약 44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 24) 당( 唐 ), 618년-907년 - 19 -
한 2차 정벌을 시도하였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나 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오랫동안 공격을 받은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667년에 시작된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3차 원정에 견디지 못하고 668년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 면서 왕이 항복하였다. 이후 약 5년에 걸친 고구려의 부흥운동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은 당나라와 신라가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 나라의 대외 팽창은 그 영향권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실행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도 예 외가 아니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멸망시킨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의 도 독부를,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를 비롯한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세워 직접 통치권의 안으로 편입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충돌 위기 상황에서 670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군 등 2만명을 동원하여 압록 강을 건너 당나라 군대를 선제 공격하였다. 이어 백제 지역에 주둔하던 당나라의 군대와 그 지휘를 받던 백제군도 함께 공격하였으며, 671년에는 백제 지역 거의 대부분을 신라가 차 지하게 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671년부터 반격을 시작하였으며, 673년까지는 신라군이 패 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675년에 당나라의 육군 20만면이 신라군에게 패하고, 676년 에는 당나라의 수군이 신라 수군에게 패배하면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현재의 평안남도 대동강에서 함경남도 원산에 이르는 선의 남쪽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후부터 한국 역사에서는 통일신라라 부른다. 2) 통치 체제 고구려는 멸망할 때 5부( 部 ) 176성( 城 ) 69만여 호( 戶 )였다는 기록이 있다. 25) 이것에 입각 해 보면 고구려는 수도-부-성의 3단계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 킨 후 그 지역에 9도독부( 都 督 府 )-42주( 州 )-100현( 縣 )과 평양에 안동도호부( 安 東 都 護 府 )를 두어 통치하려 하였다. 26)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으려 했다면 고구려는 4단계의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에는 60여 성( 城 )에 주와 현을 두었는데, 대성( 大 城 )에는 욕살( 褥 薩 ) 1명을, 나머지 성( 城 )에는 도사( 道 使 ) 또는 처려근지( 處 閭 近 支 )를 두어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다. 27) 여기에 입각해 보면 고구려는 수도-대성-성의 3단계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에 욕살이 파견된 대성, 도사( 道 使 ) 또는 처려근지( 處 閭 近 支 )가 파견된 성( 城 ), 가라달( 可 邏 達 )이 파견 된 소성( 小 城 )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8) 여기에 입각해 보면 고구려는 수도-대성-성-소 성의 4단계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백제는 5부( 部 )-37군( 郡 )-200성( 城 )-76만호( 戶 )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9) 이것에 입각 해 보면 백제는 수도-부-군-성의 4단계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 킨 후 5도독부-주-현을 두고 웅진의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통치하려 하였다. 당나라가 백 제의 옛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으려 했다면 백제는 4단계의 통치 체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 25) 삼국사기 권 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고구려 26) 삼국사기 권 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 /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27)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 신당서( 新 唐 書 ) 동이열전 고구려 28) 한원( 翰 苑 ) 고려조( 高 麗 ) 29)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9년(660)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백제 - 20 -
로 볼 수 있다. 그림-9 고구려와 백제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또 백제에 5방( 方 )이 있고, 각 방마다 10군( 郡 )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30) 여기서 5방은 지방행정의 최고 단위이기 때문에 수도-방-군의 3단계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 된다. 이 기록에는 방에는 백제의 16관등 중 2위에 해당되는 달솔( 達 率 ) 1명을 방령( 方 領 )으로 파 견하였고, 군에는 제4위에 해당되는 덕솔( 德 率 ) 3명씩을 파견하였다고도 되어 있다. 그렇다 면 백제는 방 5개와 군 50개 등 총 55개의 도시에 지방관을 파견했던 것이 된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270년 가까이 번영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기 록을 남겼다. 신라는 400년대 중반까지 지방에 대해 간접통치를 실행하다가 후반기부터 지 방관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어 505에년 수도-주( 州 )-군( 郡 )-현( 縣 )의 4단계 통치 체계를 공 식적으로 갖추면서 주에 군주( 軍 主 )를 파견한다. 31) 다만 이 때 모든 단위에 지방관을 파견 한 것은 아니며 점차적으로 확산시켜 나간다. 514년에는 중앙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면 서 지방 통치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소경( 小 京 )을 처음으로 설치한다. 32) 영역국가로서 신라의 통치체제가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인 759년(경덕왕 18)이다.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수도-주-군-현의 4단계 통치체제를 완성하며, 북원경 중원경 서원경 남원경 김해소경 등 5개의 소경을 갖춘다. 33) 주( 州 )에는 도독( 都 督 )-주조( 州 助 )-장사( 長 史 )를 파견하여 조직을 장악하게 했으며, 소경 ( 小 京 )에는 사신( 使 臣 )-사대사( 仕 大 舍 )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군( 郡 )에는 태수( 太 守 )를 파견 하였고, 현( 縣 )에는 등급에 따라 현령( 縣 令 )과 소수( 少 守 )를 파견하였다. 이외에도 주와 군의 통치를 감시 감독하기 위해 외사정( 外 司 正 )을 두었는데, 주에 2명씩 그리고 군에는 1명씩 파 견하였다. 신라의 지방통치체제는 수도-9주-117군-293현과 5소경 등 총 424개나 되었다. 30) 북사( 北 史 ) 열전 백제 31)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6년(505) 32)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15년(514) 33)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雜 誌 ) 제3 지리 신라 - 21 -
그림-10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신라의 통치 체제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지방 세력을 철저하게 차별하는 중앙집권 적 영역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34) 첫째,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수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출신들만 이 신분제로 편제될 수 있었다. 지방 출신자들은 골품제 가 아닌 다른 신분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지방 출신으로 가장 높은 외진촌주( 外 眞 村 主 )가 골품제의 5두품 대우밖에 받지 못했다. 둘째,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개인의 지위를 표시한 관등제가 운영되었는데, 600년대 중반 까지 수도 출신자는 17등의 경위( 京 位 )로, 지방 출신자는 11등의 외위( 外 位 )로 구분되어 있 었다. 뿐만 아니라 외위 중 가장 높은 것이 경위의 7등과 비슷했으며, 외위를 가진 자는 중 앙에서 임명하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600년대 후반에 경위와 외위의 구분이 사라지 고 경위로 일원화 되었지만 지방 출신자가 가질 수 있는 관등은 8등까지였다. 셋째, 모든 관직마다 맡을 수 있는 관등이 정해져 있었는데, 지방 출신자는 중상위 관직 에 임명될 수 없었다. 지방관직만 예를 들어도 주의 도독, 소경의 사신, 군의 태수는 지방 출신자들이 거의 임명될 수 없었다. 넷째, 신라에서는 성인이 될 남자들을 모아 집단적으로 교육 훈련하여 미래 인재의 풀을 만드는 화랑도( 花 郞 徒 )란 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이곳에는 골품제의 신분을 얻을 수 있는 수 도 출신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화랑도에서 형성된 인적 관계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 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관직의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지방 출신자들이 참여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지역적 차별을 의미했다. 신라에서 이렇게 지방 세력을 철저하게 차별하는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의 통치 체제가 만 들어진 이유는 신라의 영토 팽창 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원 전후에 진한 지역에는 12개 이상의 작은 도시국가가 병존해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신라였다. 200년대 중반까지 신라는 진한 지역의 모든 도시국가를, 500년대 중반경 변한 지역의 모든 도시국가까지 정 복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자발적으로 항복해온 일부를 제외하면 도시국가 시절의 신라 지배층 과 정복된 도시국가 지역의 지배층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정복의 주체 세력과 정복 된 지역의 세력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은 세계 문명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이며, 이 점에서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많은 도시국가를 정복하여 영역국가로 성장했 던 신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34) 이기봉, 2007,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1장, 푸른역사 - 22 -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두 나라의 지배층을 포섭할 때도 신라 출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35) 이 역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 복한 것이기 때문에 정복된 두 나라 출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이다. 또한 일부를 제외하면 두 나라 출신 모두 수도 출신자가 아닌 지방 출신자로서 대우 받았을 뿐이다. 4. 한국 고대의 성곽과 특징 1) 고조선과 한나라 군현의 도시와 성곽 고조선과 한사군은 모두 문명국가였기 때문에 도시와 성곽을 건설했음이 분명하다. 하지 만 기록도 극히 적게 남아 있고 유적 역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대략적인 흐름의 입장에 서만 살펴볼 수밖에 없다. 사기 와 한서 의 조선전에는 비록 수도인 왕검성( 王 儉 城 ) 하나밖에 나오지 않지만 한나라와의 전쟁 모습 속에서 고조선의 성곽에 대해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109년 가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한 군사의 수는 5만 명이었고, 왕검성 에 처음 도착한 병사 수는 7천명이었다. 우거왕은 왕검성을 나와 7천명의 한나라 병사를 패 퇴시키는 등 상당히 효과적으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한나라의 포위 공격에도 몇 달 동안 함 락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한나라의 공격에 내분이 발생하여 항복하는 무리가 생기고 우거왕 이 피살되기도 했지만 기원전 108년 여름에도 고조선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계속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내분에 의해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하게 되었다.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아직 합 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36) 또한 왕검성의 정확한 유적도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사기 와 한서 의 기록에 나타난 왕검성에 대한 기록만으로도 방어력이 상당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1년 정도의 대규모 장기전에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성이었다는 점을 확 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왕검성은 지형을 이용한 대형산성이나 요새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년의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식량뿐만 아니라 물도 풍 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 의 동옥저 부분에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현도군을 설치할 때 중심 지로 삼았던 옥저성( 沃 沮 城 )이 나온다. 또한 낙랑군의 동부도위를 설치할 때 불내성( 不 耐 城 ) 에 중심지를 두었으며, 118년에는 고구려가 예맥( 濊 貊 )과 함께 현도군의 화려성( 華 麗 城 )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의 군국지( 郡 國 志 )에는 낙랑군이 18성( 城 )으 로, 현도군이 6성( 城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의 중심지는 모두 성곽을 갖춘 도시였 다. 하지만 기록에 나오는 옥저성 불내성 화려성을 포함하여 낙랑군 군현의 중심지 중 구체 적인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진 곳은 없다. 다만 일제시대부터 낙랑군 대방군과 관련된 유물이 35) 삼국사기 권 제40 잡지 제9 외관 36) 위만 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 크게 첫째, 만주의 요동이나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설 둘째, 북 한의 평안도 평양 부근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 중 두 번째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정확한 유적의 발 굴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 23 -
대량으로 출토되어 낙랑군의 중심도시였던 것으로 이해되는 낙랑토성과 대방군의 중심도시 였던 것으로 이해되는 지탑리토성 등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11 낙랑토성의 위치 낙랑토성은 현재의 북한 평양특별시 낙랑구역 토성동에 있는데, 동서와 남북 각각 약 660m와 700m로 이루어진 둘레 약 2,500m의 대형 성곽이다. 성곽 안에는 최고 높이가 해 발 23m인 언덕밖에 없어 거의 평지성에 가까우며, 북쪽으로는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대동강과 바로 접해 있다. 지탑리토성은 현재의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에 있는 데, 둘레 약 2,000m의 대형 성곽이다. 거의 평지성에 가까우며, 남쪽과 서쪽으로 자연 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서흥강과 접해 있다. 그밖에 낙랑군이나 대방군의 토성으로 추정되는 성 들도 평지나 낮은 언덕에 축조되어 있다. 2) 고구려의 도시와 성곽 37) (1) 수도와 성곽 삼국사기 지리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졸본천( 卒 本 川 )에 수도를 정하여 건 국되었지만 성곽을 쌓지는 않았다. 처음에 수도를 정한 곳이 홀승골성( 紇 升 骨 城 )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기원전 4년에 이르러서야 성곽을 축조한 곳이다. 기원후 2년에는 수도를 위나암성으로도 불렀던 국내성으로 옮겼으며, 427년에 평양으로 다시 옮긴다. 마지막으로 586년에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668년에 멸망한다. 현재 졸본천에 있던 홀승골성이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록과 고분 및 발굴 결과를 토대로 중국의 요녕성( 遼 寧 省 ) 환인현( 桓 仁 縣 )에 있는 오녀산성 ( 五 女 山 城 )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째의 수도였던 국내성(또는 위나암성)은 중국의 길림성( 吉 林 省 ) 집안현( 輯 安 縣 ) 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에는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 산성( 丸 都 山 城 ) 38) 이 있다. 세 번째의 수도였던 평양성은 북한의 평양특별시 대성구 대성동 지역에 있었으며, 평지성인 안학궁과 산성인 대성산성이 있다. 네 번째 수도였던 장안성은 북한의 평양특별시 시내에 있는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호구수를 비롯하여 고구려 수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도시의 규모나 내부 구조를 상세하게 알기는 힘들다. 다만 성곽의 흔적은 남아 있기 때문에 도시와 성곽의 관계 에 대해서만큼은 큰 틀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이를 위해 고구려의 수도에 있던 성곽을 대략 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7) 한국 고대의 성곽에 대해 가장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곳은 수도이기 때문에 성곽 연구의 다수가 수도의 성 곽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의 성곽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한국 고대 성곽의 일반적 인 특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도와 지방도시는 상하 계층 질서 속에서 분명히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어 서로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 따라서 수도와 지방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난 성곽의 형태는 서 로 분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산성자산성( 山 城 子 山 城 )으로도 불린다. - 24 -
출처: 서길수, 1994, 고구려 성, 한국방송공사, 25쪽 그림-12 오녀산성 평면도와 전경 첫 번째의 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오녀산성은 해발 800m의 오녀산에 있다. 남 서 북쪽으로 평균 200m에 이르는 높은 자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동쪽에만 약 1,100m의 성벽을 쌓았다. 성곽의 정상에는 남북 1,000m, 동서 300m에 이르는 평탄지가 있어 왕궁 등 중요 시설이 들어서기에 알맞다. 자연 절벽과 성벽을 모두 합하면 둘레 약 8,000m나 되는 초대형 산성이며, 바로 아래쪽에 평지성인 하고성자성( 下 古 城 子 城 )이 있었 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다. 39) 출처: 서길수, 1994, 고구려 성, 한국방송공사, 64쪽 그림-13 환도산성과 국내성 두 번째의 수도였던 환도산성은 가장 높은 곳이 해발 676m인 환도산의 정상으로부터 통 구하( 通 溝 河 )란 하천까지 이어진 산줄기 위에 축조된 포곡식의 산성이다. 하천 변의 절벽 등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둘레 6,951m의 초대형 산성이다. 환도산성으로부 터 동남쪽 2.5km 지점에는 궁성 역할을 했던 국내성이 있는데, 사각형에 가까운 둘레 39) 서길수, 1994, 고구려 성, 한국방송공사, 24-25쪽. - 25 -
2,686미터의 대형 평지성이다. 그림-14 대성산성과 안학궁 세 번째의 수도였던 북한 평양시 대성구 대성동 지역에 있는 대성산성은 해발 270m의 을지봉을 중심으로 6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다. 중요 부분에는 2중 3중의 겹성을 쌓았고, 성곽의 둘레는 7,076m에 이르는 초대형 산성이다. 대성산성 남쪽에 는 궁성 역할을 했던 둘레 2,488m의 대형 평지성인 안학궁성이 있다. 출처: 최무장, 1995, 고구려고고학 I, 민음사 / 임기환, 2003, 고구려 도성제의 변천, 한국의 도성-도성 조영의 전통,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24쪽에서 재인용. 그림-15 고구려의 장안성 네 번째의 수도인 장안성은 북한 평양시 시내에 있는 평양성으로 이전과 달리 산성과 평 지성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된 내성 중성 외성 북성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 성 곽의 총 길이는 23,000m이며, 이 중 내부에 건설된 성벽을 제외하면 성곽의 둘레는 17,000m로 도시 전체를 감싸는 나성( 羅 城 )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때는 평양성 이 북성, 내성, 외성+내성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중 낮은 산이나 높은 언덕이라 고 할 수 있는 지역에 왕궁과 중요 관청이 들어선 내성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내성만으로 도 둘레 6,000m 안팎의 초대형 산성이 된다. 외성+중성은 거의 완전 평지에 들어서 있으 며,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2) 지방도시와 성곽 고구려의 지방도시와 성곽에 대한 정보로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멸망할 때 5부 176성 69만여호였다는 기록, 60여 성에 주와 현을 두었는데, 대성( 大 城 )에는 욕살 1명을, 나머지 성( 城 )에는 도사 또는 처려근지를 두어 다스렸다는 기록, 욕살이 파견된 대성, 도사 또는 처 려근지가 파견된 성, 가라달이 파견된 소성이 있었다는 기록 등 세 가지가 있다. 이런 기록에 입각하여 첫째, 고구려는 성곽을 중심으로 지방 행정단위를 편제하여 다스렸 기 때문에 지방도시와 성곽이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둘째, 성곽의 규모가 대성- [중]성-소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셋째, 멸망할 때 지방 행정단위의 총 숫자는 176성 이상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성곽이 많았음은 삼국사기 의 고구려본기, 구당서 와 신당서 등의 여러 전투 과정에 대한 묘사 속에 상당히 많은 성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의 고구려 백제 부분에는 압록수 이북에서 아직 항복하지 아니한 11성, 항복한 11성, 도망한 7성, 공취한 3성 등 32개의 성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부 분에 고구려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의 9주에 편입된 164개의 고을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성( 城 ) 또는 고구려에서 성을 의미했던 홀( 忽 )이 고을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이 35 개나 발견된다. 또한 759년에 완성된 통일신라의 행정단위에 포함된 고구려 때의 고을 이 름에는 성( 城 )이나 홀( 忽 )이 더 많이 발견된다. - 26 -
이러한 성곽 중 현재까지 남한 지역에서 조사된 것 대부분은 첫째, 장천현성( 長 淺 城 縣 )과 마전천현( 麻 田 淺 縣 )의 통치성이었던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처럼 10m 이상의 절벽 지형을 이 용한 요새성이 일부 있지만 생활면으로부터 200m 이하의 높이에 건설된 테뫼식 산성이 대 부분이다. 둘째, 거의 모든 산성이 고을의 거의 중심에 있고, 높지 않으면서도 고을 대부분 의 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셋째, 크기는 둘레 1,000m와 2,000 사이의 중형과 1,000m 미만 의 소형이 비슷한 숫자의 분포를 보인다. 이는 비록 2,000m 이상의 대형산성이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고구려의 지방 통치체제였던 대성-중성-소성의 기본 흐름과 크게 어긋나지 는 않는다. 그림-16 고구려 마전천현의 당포성 그림-17 고구려의 마홀( 馬 忽 )인 포천의 반월산성 현재 여러 연구 및 조사를 종합해 볼 때 중국에 속한 요녕성과 길림성에는 150-160개의 고구려성이 있다고 조사되었다. 그 중 요녕성의 것 87개만을 기준으로 할 때 둘레 2,000m 가 넘는 대형이 27곳, 1,000-2000m 사이의 중형이 17곳, 200-1,000m의 소형이 37곳인 데, 대부분 산성이다. 40) 이와 같은 성곽 규모의 분포는 고구려가 대성-중성-소성 중심의 지 방도시를 기초로 전국을 통치해 나갔다는 문헌 기록의 내용과 상당히 부합한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고구려에는 2,000m가 넘는 대형산성이 요녕성의 고구 려 산성 87개 중 약 31%인 27곳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비율로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요녕성에 있는 대형산성의 숫자만으로도 한반도 중 남부 지역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둘레 2,000m 이상의 것을 모두 대형으로 분류했지만 3,000m 이상의 초대형 산성도 꽤 있다는 점이다. 둘레 8,000m의 오녀산성과 6,951m의 환도산성 및 7,076m의 대성산성은 원래 수도와 관련되어 축조된 초대형 산성이지만 천도가 이루어지고 나서부터는 지방 통치의 거점성으로 바뀐다.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고구려의 초대형 산성은 이 두 개에 한정되지 않는다. 요녕성 장하현( 莊 河 縣 )에 있는 성산산성( 城 山 山 城 )의 앞성은 둘레 2,898m이고, 뒷성은 약 5,000m이다. 요녕성 보란점시( 普 蘭 店 市 )에 있는 산성인 오고성( 吳 姑 城 )은 둘레 약 5,000m 이고, 당나라 태종의 1차 침입 때 격전을 치렀음에도 함락되지 않은 안시성으로 알려진 요 녕성 해성시( 海 城 市 )의 영성자산성( 英 城 子 山 城 )은 둘레 약 4,000m이다. 요녕성 봉성시( 鳳 城 市 )에 있는 봉황산성( 鳳 凰 山 城 )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바위 지형을 제외한 일부만 성벽을 축 조했지만 총 둘레가 15,000m나 된다. 41) 북한에도 고구려의 초대형 산성이 일부 알려지고 있다.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에 있는 황룡산성( 黃 龍 山 城 )은 둘레 약 6,600m이고, 황해남도 신원군에 있는 장수산성( 長 壽 山 城 )은 둘레 약 10,500m이다. 40) 서길수, 1994, 앞의 책, 12-15쪽 41) 서길수, 1994, 앞의책 - 27 -
그림-18 초대형 산성인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 이러한 대형 산성 그 중에서도 초대형 산성은 중소규모의 단기전이나 일상적인 통치의 효 율성을 높이기 위한 성곽이 아니다. 중소규모의 단기전을 고려했다면 중형이나 소형의 산성 이 더 적합하며,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황화문명 지역처럼 평지성이 더 유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산성과 초대형 산성을 축조한 것은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해석하기 어렵다. (3) 성곽의 특징과 이유 한족의 국가든 이민족의 국가든 황화문명권을 장악했던 국가의 팽창과 함께 확산된 중국 적 도시나 성곽은 기본적으로 평지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으며, 실제로도 수도와 지방을 막론하고 대다수의 도시가 평지성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수도에서는 평 지성+산성 또는 평지성+절벽 지형의 요새성의 도시가, 지방에서는 산성이나 절벽 지형의 요새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가 건설되었다. 따라서 도시나 성곽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적인 것 과 고구려적인 것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많다. 고구려는 건국되는 그 순간부터 때로는 무력 대결을 통해, 때로는 평화적 관계를 통해 황 화문명권의 국가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성장했다. 이런 상황 조건 속에서라면 고구려가 황화문명권의 국가에서 건설한 이상적인 도시와 성곽을 모방했을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인 데, 먼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 있었던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살펴보기 로 하자.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이 수도와 지방도시 에서 나타난다는 점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지만 좀더 세부적으로 들 어가면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고구려 지역에서는 초대형 산성이 상당히 많이 건설되었던 반면에 신라 지역에서는 4개만 발견되며, 백제 지역에서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대형 산성의 전체 숫자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에서는 최소 30개를 넘었던 반면에 백제와 신 라 지역은 모두 합해도 10개 정도에 불과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 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첫째, 고구려는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의 위협을 항상적으로 받았다. 고구려는 건국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문명국가를 이루었던 한나라의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뿐만 아니라 이미 왕국을 이루었던 부여와도 치열한 전투나 전쟁을 벌이면서 성장해 나갔 다. 그리고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요동 지역을 장악한 위 진의 요동군이나 북방 유목민 족 계통의 강한 세력과 대규모의 공방전을 벌였다. 또한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을 멸망시키고 요동 지역뿐만 아니라 부여와 한반도의 중부를 차지한 이후에도 수나라 당나라와 여러 차례 에 걸친 대규모의 전쟁을 수시로 경험하였다. 이렇게 강한 세력과의 공방전 속에서 고구려가 상대적으로 힘이 셀 때는 공격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약할 때는 대규모 침공을 받을 수밖에 없 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실제로 국가의 존폐가 걸릴 정도로 심한 침략을 받은 적이 한 두 번 - 28 -
이 아니다. 결국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이 항상적으로 내재해 있는 조건 속에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은 고구려에게 국가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일이었고, 도시와 성곽의 건설에서 고려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총력전을 벌일 수 있는 대 형 성곽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또한 산지가 많은 지형적 조건 속에서 평지성보다 더 높은 한 방어력을 갖고 있는 산성을 택할 수밖에 없다. 42) 중국적 도시와 달리 수도에 초대형 산 성을 항상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대형 산성과 초대형 산성이 많았던 것을 이런 배 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43) 둘째, 고구려는 작은 국가로 출발하여 많은 지역을 정복한 거대한 영역국가로 성장했다. 거대한 이라는 수식어는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적절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 다. 만약 수나라나 당나라처럼 중국 대륙을 통일한 국가를 기준으로 삼으면 고구려는 거대 한 국가였다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고구려가 건국될 당시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으면 최전 성기 때의 고구려는 분명 거대한 국가라 말할 수 있다. 거대한 국가라는 용어는 원래 고구 려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수많은 지역을 정복했다는 정복국가의 성격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정복했던 지역은 그곳이 높은 문명국가의 체계를 이루었든, 상대적으로 낮은 국 가나 준국가의 체계를 이루었든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따라서 정복의 주체인 고구려에 의해 피정복민의 입장에 서는 것이며, 고구려는 정복민의 입장에서 피정복 민을 다스리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더 강한 세력과의 대결 과정에서 정복된 지역의 독자 적인 정체성이 사라지거나 약화된 곳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곳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 분히 존재한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 경향이 멈춘 500년대 중반 이후 국가적 통합성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이루 어질 때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갈등 관계가 쉽게 사라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지방을 통치할 때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실제로 분출되지 않더라도 도시와 성곽의 건설에 고려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된다. 고구려 지방 통치의 다수가 중소형 산성이나 절벽 지형을 이용한 요새성 중심의 도시를 기초로 하 여 이루어진 것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내재한 갈등 관계, 심하게 말하면 반란을 일으 킬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 이외의 다른 요인을 찾기 어렵다. 42) 초대형산성은 첫째, 장기전을 위해 꼭 필요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수원( 水 源 )을 갖고 있고 둘째, 대규모의 병사와 주민이 함께 들어가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크며 셋째, 절벽이나 경사도가 높은 지형 및 자 연 하천을 적절하게 이용하였기 때문에 축조와 유지 및 보수에 비용과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넷째, 주변에 더 높은 지형이 없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평지성보다 유리하다. 43) 주례 고공기와 당나라의 장안( 長 安 ) 등에 나타나는 중국식의 도시와 성곽은 기하학적 원리를 통한 권위 표현이 1차적인 요인이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2차적으로 방어의 문제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중국 식의 수도는 구체적으로는 모두 똑같지 않지만 기하학적 대칭을 중요하게 여기는 형식을 구현하기 위해 거의 완전한 평지에 건설되었다. 그 결과 수도에 적용된 성곽은 최소한의 방어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성이든 궁성이 든 10-14m에 이르는 높은 높이로 만들어야 했으며, 치와 옹성 및 해자를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방어 시설을 개발하여 적용하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수도는 대규모 외적의 장기 침입에 대한 방어가 1차적인 요인이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2차적으로 여러 가지 원리를 통한 권위 표현의 문제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고구 려의 수도 역시 구체적으로는 모두 똑같지 않지만 장기전에 높은 방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초대형 산성을 건 설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수도에서는 기하학적 원리를 이용한 권위 표현 을 위해 평지에 대형의 궁성을 건설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네 번째의 수도에서는 방어와 권위 표현을 동시 에 실현할 수 있는 곳에 궁성을 축조하면서 기하학적 원리를 통한 권위 표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 29 -
3) 중남부 지역의 도시와 성곽 신라와 백제 모두 고구려와 300년 이상 국경을 맞대고 경쟁했던 독자적인 국가였기 때문 에 따로 분리하여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첫째, 낙랑군 남쪽에서 여러 도시국 가가 경쟁하던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영역국가로 성장했으며 둘째, 도시와 성곽이라는 측면에 서는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두 국 가에서 나타난 도시와 성곽의 유사성은 통일신라로 이어지며, 이후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제공한다. (1) 수도와 성곽 1 신라 신라는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시내를 중심으로 건국된 이후 한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았 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의하며 기원전 37년에 궁성인 금성( 金 城 )을 축조하는데, 이후 금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수도의 성곽 중 가장 많이 기록되지만 500년을 끝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금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 는 101년에 금성 동남쪽에 월성을 축조했다 44) 는 기록밖에 없는데, 현재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금성 다음으로 기록된 궁성은 101년에 금성 동남쪽에 축조했다는 월성인데, 현재도 존재 하기 때문에 신라 수도의 성곽에 대한 중요한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487년에서 488년 사 이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는 주로 해자를 건설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어 45) 기본 형태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월성은 둘레 1,841m의 중형 성곽으로 완전 평지성은 아니 다. 자연 하천인 남천을 해자로 이용하였으며, 약간 높은 언덕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아 방 어력을 높였다. 상당히 무너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성벽의 높이가 10-18m에 이를 정도로 높다. 그림-19 신라수도의 성곽 월성 다음으로 기론된 성곽은 현재의 명활산성으로 405년에 왜( 倭 )가 명활산성을 공격했 으며, 431년에도 왜가 포위 공격했다. 473년에는 명활산성을 수리하여 475년에 왕이 옮겨 살았으며, 488년에는 왕이 월성으로 옮겨갔다. 554년에 수축하였고, 593년에는 3,000보로 개축하였다. 삼국사기 지리 1 신라에는 명활성이 1,906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경 주 동쪽에 남아 있는 성곽은 해발 265m의 명활산 정상을 둘러싼 둘레 약 6,000m의 초대 형 산성이다. 원래 토성이었다가 나중에 확대하여 석성으로 바꾸었다. 593년에 명활산성과 함께 2,000보로 개축하였다가 673년에 증축하였다는 서형산성도 있 다. 경주시내 서쪽 해발 380.9m의 선도산 정상을 둘러싼 현재의 선도산성으로 약 2,900m 의 대형 산성이다. 591년에 2,854보로 쌓고, 673년에 증축한 남산성도 있는데, 경주 시내 44) 삼국사기 지리 1 신라 45) 김낙중, 1998, 신라월성의 성격과 변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30 -
남쪽의 남산 북쪽 산봉우리를 둘러싼 둘레 약 3,750m의 초대형 산성이다.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은 경주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해발 668m의 정상을 둘러싼 둘레 약 7,300m의 초대형 산성이다. 이밖에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경주시내 남쪽에 남산토성과 도당산토성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명활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 1 신라에 금성 월성과 함께 후대의 왕성 중 하나로 기록된 만월 성은 둘레가 1,838보라고 하나 현재 유적이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2 백제 삼국사기 지리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위례성( 慰 禮 城 )에 수도를 정하여 건국되었고, 376년에 한성( 漢 城 )으로 수도를 옮겼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자 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 시내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536년에는 현재의 충 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인 사비(또는 소부리)로 옮긴 후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 로 인해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위례성과 한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연구자들의 견해 차이가 존 재한다. 다만 백제의 고분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획득된 유물 등을 통해 일반적으로 현재 의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지역이 오랫동안 백제의 수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림-20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몽촌토성은 높은 언덕 위에 쌓은 둘레 2,700m의 대형 토성으로, 남아 있는 성벽은 6-7m 이지만 자연지형까지 합하면 10m가 훨씬 넘는 높이이다. 약간의 언덕 지형을 이용했지만 평지성에 아주 가까운 형태이며, 인공적인 해자를 둘렀을 뿐만 아니라 자연 하천의 일부도 해자로 이용하였다. 풍납토성은 둘레 3,740m에 이르는 초대형의 토성으로 높이는 낮으면 8m, 높으면 15m 정도로 알려졌다. 한강변과 연결되어 있을 정도로 거의 완전 평지에 축조 된 평지성이며, 북쪽의 한강을 자연 해자로 삼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림-21 공산성과 공주시내 475년에 옮겨간 현재의 공주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웅진성으로 기록된 공산성 이 남아 있다. 해발 110m의 공산 정상으로부터 북쪽의 금강으로 뻗은 골짜기를 둘러싼 둘 레 2,450m의 포곡식 대형 산성이다. 백제 때는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바꾸었다. 궁궐이 있었으며, 북쪽의 금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 다. - 31 -
그림-22 부소산성과 부여읍내 536년에 옮겨간 현재의 부여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사비성으로 기록된 부소산 성이 남아 있다. 해발 106m의 부소산 정상의 작은 테뫼식 산성과 북쪽의 금강으로 형성된 작은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 결합된 둘레 2,200m의 대형 산성이다. 토성으로 이루 어져 있으며, 웅진성과 마찬가지로 북쪽의 금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산성 남쪽의 평지에는 도시를 둘러싼 둘레 약 8,000m에 이르는 토축의 초대형 나성( 羅 城 ) 이 있었던 것으로 발굴되었다. 46) 다만 나성이 도시 전체를 두른 것은 아닌데, 서쪽과 남쪽 의 금강 변에는 축조되지 않았다. (2) 지방도시와 성곽 백제의 지방도시와 성곽에 대한 기록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5부-37군-200성-76 만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47) 이것에 입각하면 백제에서는 멸망할 당시에 최소한 지방의 마지막 행정단위 200개가 성으로 편제되어 통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에는 5방( 方 )이 있으니 중방( 中 方 )은 고사성( 古 沙 城 ), 동방( 東 方 )은 득안성( 得 安 城 ), 남 방( 南 方 )은 구지하성( 久 知 下 城 ), 서방( 西 方 )은 도선성( 刀 先 城 ), 북방( 北 方 )은 웅진성( 熊 津 城 ) 이라는 기록이 있다. 48) 여기서 5방은 지방의 최고 행정 단위로 5부-37군-200성에서의 5부 다. 그런데 5방의 이름 모두 모두 성( 城 )으로 끝나 성곽을 중심으로 통치가 이루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5방인 5부와 200성 사이에 있는 군 역시 성곽을 중심으로 통치되 던 행정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 5방의 성 중 하나로 나오는 고사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기원후 18년에 쌓은 것으로 기록된 고사부리성( 古 沙 夫 里 城 )으로, 조선시대 전라도 고부군의 백제 때 이름이다.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해발 132m의 성황산 정상을 둘러싼 둘레 1,050m의 테뫼식 중형 석축 산성이다. 생활면으로부터 100m 조금 넘는 높이에 있지만 옛 고부군 지역의 대부분이 한눈에 보이며, 중소규모의 단기전에 방어력이 높다. 그리고 5방의 성중 또 하나로 나오는 웅진성은 536년 사비로 옮기기 전까지 백제의 수도였던 현재의 공 산성이다. 그림-23 정읍군 고분면 고부리의 고사부리성 414년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58성( 城 ) 700촌( 村 )을 획 득하고 백제왕( 百 殘 主 )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 다. 49) 그리고 그 앞쪽에는 58성의 이름이 일부 지워진 것을 제외한 채 모두 나열되어 있다. 이를 통해 첫째, 백제가 성곽을 중심으로 지방 행정단위를 통치했으며 둘째, 고구려의 광개 46) 주서( 周 書 ) 이역열전( 異 域 列 傳 ) 백제에는 백제의 수도에 1만호가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7)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9년(660)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백제 48) 주서 이역열전 백제 49)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1권, 3-35쪽 - 32 -
토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58성-700촌으로, 다시 말해 1개의 성이 평균 약 12개의 촌을 통치하는 구조로 편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대해서는 성곽이 지방 행정단위를 통치하는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거나 전체의 성 곽 수를 짐작할 수 있도록 간명하게 기록해 놓은 문헌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삼국사 기 신라본기 에는 고구려본기 나 백제본기 에 비해 훨씬 많은 성곽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 삼국사기 세종실록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을 참고 할 때 고을의 이름과 동일한 성의 이름을 꽤 찾아낼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표-1인데, 그 속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표-1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나타난 성( 城 )과 고을의 이름이 같은 사례 번호 연도 출현 상황 성곽 이름 759년의 이름 일제시대 위치 1 261 축조 달벌성( 達 伐 城 ) 대구현 경남 대구군 2 463 왜인 침입 삽량성( 歃 良 城 ) 양주 경남 양산군 3 468 고구려 말갈 습격 실직성( 悉 直 城 삼척군 강원 삼척군 4 430 축조 삼년산성( 三 年 山 城 ) 삼년군 충북 보은군 5 474 축조 일모성( 一 牟 城 ) 연산군 충북 청원군 문의면 6 474 축조 답달성( 沓 達 城 ) 화령군 경북 상주시 화서면 7 481 왕 행차 비열성( 比 列 城 ) 삭정군 함남 안변군 8 485 축조 구벌성( 仇 伐 城 ) 고구현 경북 의성군 점곡면 486 수축 삼년성( 三 年 城 ) 삼년군 충북 보은군 9 486 수축 굴산성( 屈 山 城 ) 기산현 충북 옥천군 청산면 10 488 축조 도나성( 刀 那 城 ) 도안현 경북 상주군 모서면 11 504 축조 파리송( 波 里 城 ) 파리현 삼척군 원덕면 12 504 축조 미실성( 彌 實 城 ) 의창현 영일군 흥해면 13 504 축조 골화성( 骨 火 城 ) 임천현 경북 영천군 14 554 백제 가량 침입 관산성( 管 山 城 ) 관성군 충복 옥천군 15 555 주 설치 비사벌( 比 斯 伐 ) 화왕군 경남 창녕군 16 556 주 설치 비열홀주( 比 列 忽 州 ) 삭정군 함남 안변군 17 567 주 설치 달홀주( 達 忽 州 ) 고성군 강원 고성군 18 602 백제 침입 아막성( 阿 莫 城 ) 운봉현 전남 남원군 운봉면 19 603 고구려 침입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 한양군 경기 양주군 20 624 백제 침입 속함( 速 含 ) 천령군 경남 함양군 21 638 고구려 침입 칠중성( 七 重 城 ) 중성현 경기 파주군 적성면 22 642 당항성( 党 項 城 ) 당성군 경기 수원군 서신면 23 642 백제 침입 대야성( 大 耶 城 ) 강양군 경남 합천군 24 647 백제 침입 무산성( 茂 山 城 ) 무풍현 전북 무주군 무풍면 25 656 축조 장산성( 獐 山 城 ) 장산군 경북 경산군 660 고구려 침입 칠중성( 七 重 城 ) 중성현 경기 파주군 적성면 26 661 고구려 말갈 침입 술천성( 述 川 城,) 소천군 경기 여주군 대시면 661 고구려 말갈 침입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 북한산군 경기도 양주군 27 663 신라 공격 거열성( 居 列 城 ) 거창군 경남 거창군 28 670 후퇴 백성( 白 城 ) 백성군 경기 안성군 29 673 증축 사열산성( 沙 熱 山 城 ) 청풍현 충북 제천군 청풍면 30 673 축조 국원성( 國 原 城 ) 중원경 충북 충주군 31 673 축조 소문성( 召 文 城 ) 문소군 경북 의성군 32 673 축조 주양성( 走 壤 城 ) 삭주 강원 춘천군 33 673 거란 말갈 침입 동자성( 童 子 城 ) 동성현 경기 김포군 하성면 - 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