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 제자백가의 등장과 유가 주나라의 귀족들은 통치자인 동시에 지주였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주나라 왕실이야말로 정치ㆍ경제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중심 지이기도 했다. 때문에 주나라 왕실에 속했던 관리들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실제적인 정치가였다. 행정상의 증대와 번잡은 많은 교양 있는 인물들의 참여를 요구하였고, 상황의 악 화와 정세의 급변은 대담하면서도 투철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 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사상가들은 발전하는 관료주의의 정화였고, 세습적인 지배자 들의 훌륭한 교사들이었다. 그러나 봉건제도의 붕괴는 그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민간 사이로 흩어지게 하 였다. 이처럼 전직 관리 또는 귀족들이 전국으로 흩어졌을 때, 그들은 자신의 사상 이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직업적인 교사가 되었다. 그 결과 왕실이 지식 의 주심지라는 사실은 과거사가 됐고, 지식은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실로 지식의 지 방화 내지 전국화가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상과 지식은 그들이 속했던 분야와 관심에 따라 같지 않았다. 그 결과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흔히 이런 사람들을 통칭하여 제 자백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개의 낱말이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자( 子 ) 이고 다른 하나는 가( 家 ) 이다. 제( 諸 ) 는 여럿을, 백( 百 ) 은 다수를 뜻한다. 이렇듯 제자 백가라는 말은 두 개의 낱말로 되어 있으나, 흔히 우리는 제자가 백가요, 백가가 제 자로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제자는 사상가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철학가를, 백가는 주례 周 禮 속의 전문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가리킨다고 하기도 한다. 1) 또 어떤 학자는 가 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말하고 있는데, 가라는 용어는 학파를 뜻하는 동시에 가족 또는 가 문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며, 따라서 사적 내지 개인적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상 개인적 자격으로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가르친 인물이 나타나기 이 전에는 사상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2) 이들 제자백가를 사마천( 司 馬 遷 :기원전 145~서기 86)은 그의 사기 史 記 마지 막 장에서 음양( 陰 陽 )ㆍ유( 儒 )ㆍ묵( 墨 )ㆍ명( 名 )ㆍ법( 法 )ㆍ도덕( 道 德 ) 등 6가로 분류했 고, 유흠( 劉 歆 :기원전 46~서기 23)은 10가로 분류했는데 그중 6가는 천과 같고, 종횡( 縱 橫 )ㆍ잡( 雜 )ㆍ농( 農 )ㆍ소설( 小 說 ) 등 4가 만이 다르다. 그러나 사상의 레벨에서 볼 때, 체제와 내용에 있어 일가를 이루고, 그것을 상고 할 수 있는 문헌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학파는 유ㆍ묵ㆍ도ㆍ법 등 4가에 불과하 1) ㆍ,,, 1985, 62쪽. 2),,, 1977, 65-66쪽.
6 다. 뿐만 아니라, 이들 학파가 2천여 년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정치사상사에 미친 영향에 있어, 그 우열은 있어도 단절은 없었다는 점에서도 같다고 하겠다. 이들 선진 4대 학파를 대표하는 공자(맹자ㆍ순자)와 묵자, 노자(장자)와 한비자는 지난 2천 5백여 년 동안 동아시아인의 영원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철학 적인 주장은 곧 동아시아인들의 좌우명이 되었고, 그들은 삶에 지혜를 제공한 인생 의 안내자들이었다. 과거는 현재와 긴밀히 얽혀져 있기 때문에 오늘의 동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이들 선진 4대 학파를 대표하 는 그들의 사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의 한 농부의 품성을 형성하는 데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가와 도가가 특히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이해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유가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史 記 에 실린 6가의 요 지 중 유가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유가는 광막한 것을 탐구하되, 요점은 파악하지 못한다. 또 힘은 많이 들이지만 공은 오히려 적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을 모조리 다 따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군신 부자의 예절을 정하여 놓았으며, 부부 장유의 차별을 구분하여 놓았는데, 이것은 바꿀 수 없다. 3) 그리고 사마천보다 한 백년 후생인 유흠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가학파는 대체적으로 주나라 관리의 사도 출신들이다. 그들은 군주를 도와 음양에 순응하였으며, 교화를 밝 히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다. 이 학파는 6경을 즐겨 연구하였으며, 인의와 도덕에 뜻을 두었고, 요순을 조술하고, 문무를 본받아 밝히고, 중니를 종사로 삼아서 자기의 학설을 높이어 도술상 가장 지위가 있는 일파가 되었다. 공 자는 만일 명예로운 일이 있으면, 시험된 바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는데, 당우의 태평, 은주의 번성, 그리고 중니의 사업은 이미 시험을 거쳐 나타났다. 4)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가의 특색과 공헌은 하( 夏 )ㆍ상( 商 또는 殷 )ㆍ주( 周 ) 3대의 문화에 대한 반성에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이러한 반성을 통하여 인( 仁 ) 의 개념을 도출해냄으로써 도덕적인 자각, 즉 객관적인 주체성을 확립하려 하였다. 이들 유가의 대표적인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 孔 子 : 기원전 551~479)이다. 제자백가 중 생졸년대가 분명한 사람은 공자 한 사람뿐이다. 공자 자신은 비록 술 이부작( 述 而 不 作 ) 하고 신이호고( 信 而 好 古 ) 한다고 했지만, 그는 저술생활을 통하여 동주( 東 周 ) 5) 이전의 모든 사상을 종합ㆍ집대성함으로써 유가의 사상체계를 성립시 3) (, :, 66, 3289쪽). 4) ( ). 5) 주나라의 정치는 유왕ㆍ려왕대에 이르러 더욱 부패하여 민심은 이반되더니 여왕은 마침내 견융에
7 켰음은 물론, 종주( 從 周 ) 와 정명( 正 名 ) 으로 당시의 혼란한 정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란 점에서 유가를 포함하여 동아시아정치사상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공자의 정치사상은 선진유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맹자와 순자를 통하여 유가정치 사상으로 형성ㆍ발전하였다. 비록 그들의 사상은 시대에 따라 타가로부터 혹독한 비판과 도전을 받기도 했고, 통치자의 사상적 성향과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기복이 없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같은 사상적 위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유가정치사상의 특성이라 할 수 있 는 시대적인 요구와 필요에 따라 스스로 수정하고 보완하였기 때문이었다. 본고에 서는 이 같은 사실을 유가정치사상의 핵심개념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3. 가장 오래된 개념 - 천( 天 )과 그 변용 흔히 동아시아인들이 말하는 요순 이전의 일은 알 길이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사상을 말하려면, 요( 堯 )ㆍ순( 舜 )ㆍ하( 夏 )ㆍ상( 商 )ㆍ주( 周 )까지 소급해서 말해야 하겠지만, 이를 말할 만한 증빙자료가 없어 상론할 수가 없다. 요 전 堯 典 과 순전 舜 典 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후세의 사람들이 전설에 따라 지 난 일들을 미루어 말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전설은 신화와는 달리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복희( 伏 羲 )로부 터 요에 이르는 관직의 소임은 주로 영농에 필요한 절기와 시기를 밝히는 데에 있 었다는 6) 점을 감안할 때, 당시의 생활이 수렵이든 농경이든 간에 일월성신의 운행 을 중요시하였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가 계절의 변 화를 살피는 데 있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중요시하던 상고인들에게 있어 하늘은 하느님( 上 帝 )의 거소 로 알았고, 상제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존재로 경외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상제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상제의 거소인 하늘도 숭배하였던 것이다. 7) 당시 문화의 기본 관념은 신권이었다. 특히 하ㆍ상대에 있어 신권 사상은 매우 짙었던 것 같다. 공자도 은나라 사람들이 신을 존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 다. 8) 그런데 이러한 신권 관념은 최초 다신관념이던 것이 유사시대에 이르러 비로 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그 아들 평왕이 국도를 호경에서 동쪽에 있는 낙양으로 옮겼다고 해서 동 천이라 하고 이 때의 주나라를 동주라고도 한다. 6) ( 49, ). 7) ( ). 8) ( 54, ).
8 소 일신관념이 되었다. 이때의 신을 일러 천( 天 ) 또는 상제라고 한다. 여기서 종래 의 신의정치는 천의정치로 발전하였으므로 이를 천치주의( 天 治 主 義 )라고도 한다. 9) 천은 인간은 물론 만물을 창조하고 총괄하는 창조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 다. 10) 그리고 이러한 천의 관념은 가족 관념과 결합함으로써 정치상 천자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낳았다. 천자는 천의를 대행하며 일체의 정치를 감독하는 최고의 통 치자로 군림하였는가 하면, 후일 국가와 가정, 정치와 윤리가 결합하는 시단이 되었 다. 통상 동아시아인들은 정치의 호불호를 천에 의거하여 평가하였다. 치자와 피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천은 제 3자로 그 사이에 개입되었다. 치자는 한편으로 백성을 통 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알았다. 피치자인 백성은 치자에 통치되지만,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그들의 의사(민의)는 곧 하늘의 뜻으로 인식되었 다. 이는 치자란 천명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 관계는 교호적인 삼각 순환관계로 인식되었다. 이 같은 인식은 선진 제가들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천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행동하였으므로 천이야말로 일체의 사고와 행위의 준거였 다. 이로 인해 천의와 민의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듣고,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본다. 11) 이것은 곧 치자의 초월적인 태도에서 내려와서 백성을 보라는 것이다. 때문에 백 성이 보고( 民 視 ), 백성이 듣는 것( 民 聽 )이 옳지 못하다고 느끼면, 백성은 곧 반역하 고, 그를 타도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다. 12) 이 같은 천은 본래 서구의 Nature와 God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천은 시대와 사람들의 지적인 발달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 양한 천으로 이해되었다. 1 물질의 천 2 주제의 천 3 운명의 천 4 자연의 천 5 의리의 천 등과 같이 적어도 다섯 가지로 이해되었다. 13)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인지의 발달은 의지적이고 인격적인 천의 관념을 동요시켰다. 그리하여 종래의 종교적인 천은 철학적인 의미로 변했고, 그것은 후일 모든 사상이 형성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근거가 되었다. 왜냐하면 종교 9),, :, 1996, 23쪽. 10) ( ). 11) ( ). 12) 이는 통치자의 눈은 하늘로 향하지만 말고, 백성이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심하고 두 려워해야 함을 뜻한다. 동시에 천명을 얻으려면 하늘만 쳐다보는 것으로는 완전치 못함을 시사하 고 있다. 13),,,, 1967, 54-55쪽.
9 적인 천의 철학적인 자연화는 인격신과 자연법이 일치하는 관념의 확립을 가능케 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념의 변화는 천에 대한 회의와 실망으로 표시되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천에 대한 원망으로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하늘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든지 호천이 편치 못하여 우리 왕이 편치 않으시다 는 등과 같은 표현이 그런 것들이다. 이러한 천은 이제 경외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정성과 근면 그리고 노력을 더 중시하는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종래의 천에 대 한 원시적인 인식은 공자 이전에 이미 동요하고 변화하였다. 그러나 천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여전히 주제의 천, 운명의 천 내지 자연의 천이 라고 하는 3개의 복합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주제의 천으로는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 14)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15) 운명의 천으로는 내가 기도한 지는 오래다. 16) 백성의 뜻에 힘쓰고, 17) 그리고 자연의 천으로는 낮과 밤이 쉬지 않는구나. 18)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느냐. 19) 이상과 같은 것들이 공자가 인식하고 있던 천의 의미들이었다. 다만 공자는 천의 입장에서 천을 보기보다는 인간의 입장에서 천을 보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공자 는 비록 천을 포용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별로 말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는 괴력 난신( 怪 力 亂 神 )을 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를 경이원지하였다. 20) 그리하여 공자 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달하니 나를 아는 자는 그 하늘일 뿐 이다. 21)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10 여기서 우리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을 허물하지도 않으며, 오직 자기를 반 성하고 인간사에 충실한 것만이 하늘을 아는 방법이라는 공자의 인간 중심 내지 자 아 중심의 사고와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자의 사고와 태도는 다음과 같은 백성 중심의 관념상의 변화를 가능케 하였다. 백성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늘도 반드시 따른다. 22) 또한 이 같은 변화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는 동시에 백성의 부모가 된다고 23) 한 것처럼 국가와 가정, 정치와 윤리가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의 변화는 천의 지위를 약화시킨 반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지 위를 향상시켰다. 그 결과 종래의 하늘이 다스린다고 하는 권위에 대치될 수 있는 인간 중심의 권위가 시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 같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등 장한 것이 공자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 이라는 개념이다. 4. 혼돈의 시대적 상황과 인( 仁 )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는 주대에 와서 크게 발전하였다. 문왕의 아들 무왕이 주( 紂 ) 를 벌하여 천하를 통일하였고, 그 동생 주공은 예악을 제정하여 봉건사회의 질서를 확립했는가 하면, 피정복자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농업에 투입, 상당한 부를 이루었 고, 24) 학교를 세워 덕행을 숭상함으로써 민심은 착하고 온후하여져서 형벌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주나라의 문화는 크게 발달하여 공자는 주나라를 쫓겠다는 종주( 從 周 ) 와 꿈에 주공을 볼만큼( 夢 見 周 公 ) 주나라 문화를 동경하였는가 하면, 주 공에 대해서는 대단히 경모하고 있었다. 이렇듯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던 주나라도 동천 이후, 왕실은 쇠미하여 나라의 호령은 제후에게 미치지 못했다. 초기의 주나라 왕실은 영토를 확장한 제후들로부 터 더 많은 공물을 받았기 때문에 제후들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지 않았다. 더욱 적의 세력이나 반대 세력을 격퇴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군비확장에 필요한 조치가 제후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 졌다. 25) 그 결과 제후들은 봉건영주인 주 나라 천자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강화시킴으로써 정치적인 독자성을 띠게 되었다. 춘추 240년간에는 36차의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시군( 弑 君 )이 있었는가 하면, 자 21) ( ). 22) ( ). 23) ( ). 24) 4, 4, :, 66, 120쪽. 25) 위의 책 32, 2, 1477쪽 이하 참고.
11 식이 부모를 죽이는 시부( 弑 父 )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그 시대상을 이 렇게 말한 바 있다. 탁류가 천하에 넘쳐흐르는 것처럼 어지러운데 누가 이것을 바로 잡겠는가. 26) 공자의 이 말만 보더라도 당시의 정치 사회적 혼란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는 통일에서 분열로, 전통의 존중에서 전통의 파괴로, 질서에서 혼란이라는 사회적ㆍ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난 그런 시대였다. 실로 공자의 말처럼 그 시대는 천하무도( 天 下 無 道 )의 혼란 상태였다. 그는 천하무도의 사회를 천하유도 ( 天 下 有 道 )의 사회로 만드는 것을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7) 공자는 시대적 사명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는 현실 정치에 의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컸다. 물론 생존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현실 참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시 권 세가였던 계씨의 집에서는 미곡 출납의 위리( 委 吏 )와 가축 관리의 승전( 乘 田 )이란 말직으로부터 노나라에서는 지방 관리인 중도재( 中 都 宰 ) 그리고 농공 담당의 사공 ( 司 空 )을 거쳐 사법대신에 해당되는 대사구( 大 司 寇 )까지 승진하더니 나중에는 재상 의 일까지 섭행하여 노나라의 내치와 외치를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공자에 있어 정치는 그의 이상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인 동시에 구현코자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그는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비판적이고 저항적이었다. 그가 말직으로 있던 계씨라는 사람은 노나라의 대부로서 부와 권력 모두를 소유하 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개 대부로서 천자만이 출 수 있는 팔일무( 八 佾 舞 )를 그 의 뜰에서 추었다고 해서, 이는 자기의 권세를 믿고 국법을 유린하는 것이라 하여 통렬히 비난한 바 있다. 28) 공자는 그의 제자 염구가 이런 계씨에게 벼슬하면서 그의 온당치 않은 세금 징수 를 도와줬다고 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구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니 제군들은 북을 울리어 이를 성토하라. 29) 당시 탐욕스런 정치가 중 한 사람인 계강자가 도적이 생기는 것을 근심하여 그 방지책을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은 힐난성의 면박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대 자신이 도적질을 하려 아니한다면 백성들은 상을 주면서 하라 해도 아니할 것이다 30) 26) ( ). 27) ( ). 29) ( ). 30) ( ).
12 자공이 공자에게 당시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떠냐고 묻자 공자는 도량이 좁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면서 무시해 버렸다. 31) 심지 어 그는 노의 사구( 司 寇 )가 된 지 7일 만에 대부 소정묘( 少 正 卯 )를 죽인 바 있는데, 이유인즉 사설을 꾸미고 백성을 미혹했다고 해서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사설과 폭행이 난무했던 무도의 사회였다. 공자는 이러한 무도한 사회 상황을 인간 본성의 보편적 동정심인 인( 仁 ) 에 근거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인간에 대한 천의 통제적 관념이 약화되고, 인간 중 심적인 사고와 의식이 강화되던 당시 공자의 이러한 발상은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논어 論 語 에서는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고, 중용 中 庸 에 서는 인이란 사람이라고 했는가 하면, 맹자는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인이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동정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 이전의 전적 중에 인 자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시경 詩 經 에 단 2번, 서경 書 經 에는 단 1번 나오지만, 논어 에는 인을 말한 곳만도 58장 105자에 달 한다. 그러므로 논어 일서는 인 자를 중심으로 한 사상서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 다. 그가 인을 이처럼 강조하였던 것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은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분히 사회에 의해 서 인간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인 자의 구성이 그렇고, 인간이란 표현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공자는 이처럼 인을 중시했으면서도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 다. 이는 동아시아사상의 특색인 동시에 공자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을 알 기란 쉽지가 않다. 공자 자신도 인에 대해서는 묻는 사람에 따라 달리 대답하였다. 하기야 인간관계란 그 관계 여하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나므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에 대한 공자의 여러 가지 해답을 종합해 보면, 그것은 모든 덕목을 총괄한 인 격의 표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의 정치적 의미는 그 당시 정치의 주체인 군주가 먼저 인간다운 인간 이 되어 정치의 객체인 백성을 교화하여 인류 전체의 생활을 가장 원만한 이상에 도달케 하려는 지도 이념이라 하겠다. 때문에 유가를 일러 수기치인( 修 己 治 人 ) 또는 내성외왕( 內 聖 外 王 )의 학문이라 한다. 그런데 공자는 인을 매우 중시하였으면서도 동시에 효제와 충서를 강조하고 있었 다. 예를 들면, 논어 둘째 줄에 효제가 인의 근본이 된다고 한 32) 것이나, 공자의 도는 충서뿐이라는 기록이 그렇다. 33) 31) ( ). 32) ( ).
13 공자가 효제와 충서를 강조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춘추 시대란 시군과 시부가 자행되던 시대였다. 특히 당시 의 정치적 상황은 천자와 제후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가( 家 ) 라고 하는 정치 조직의 경ㆍ대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본래 가란 주나라 왕실로부 터 받은 채지( 采 地 )를 말한다. 그런데 그들 대부들은 그 본래의 채지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많은 백성과 토지 를 소유하려는 채지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가와 가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정치적인 혼란과 불안은 갈수록 심각하여 졌다. 그러므로 그들 간의 평화스런 관계 는 물론, 그들 내부의 안정과 질서 유지는 당면한 정치적 과제가 되었다. 공자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가의 내부 문제는 효제에, 외부 문제는 충서라고 하는 윤리와 정치를 연결시킨 이중적 방법을 강구하였다. 다만 효 제는 가정에 국한되어 사회 일반에 통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남과 나 그리 고 가정과 사회를 완전히 관통할 수 있는 동정심( 仁 )의 무한한 확대인 충서를 강조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중시한 인 은 윤리 근거인 동시에 정치 원칙으로 서 춘추라고 하는 사회 및 시대의 지도 이념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5. 불탈불염( 不 奪 不 饜 )의 정치적 상황과 의( 義 ) 공자는 그가 앉았던 자리는 더울 겨를이 없다( 孔 席 不 暇 暖 )하리만큼 열심히 무려 14 년간이나 열국을 주유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적 추세는 평화나 통일보다는 투 쟁과 분열의 힘이 압도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주장은 빠른 길( 迂 闊 )이 아니 라하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사회의 기반이었던 가( 家 )는 점차 몰락하고, 종래의 가와 가에 서 보다 큰 정치 조직인 국( 國 )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치 단위가 하나 둘 등장하였 다. 이러한 추세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신흥왕 조는 그들이 투쟁 과정에서 획득한 권력의 유지ㆍ확대를 위해서 이른바 부국강병책 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 결과 가 본위의 정치는 이제 국 본위라는 정치 주체상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부국강병은 언제나 타국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당시가 더욱 그랬다. 그러 므로 국가 간의 투쟁은 그칠 날이 없었고, 그것은 더욱 치열하게 확대되었다. 사회 는 문자 그대로 상하는 이익을 다투었고, 빼앗기를 싫어하지 않는 혼란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제 정치는 혈연 중심의 가로부터 권력 중심의 국으로 옮겨갔고, 그들 33) ( ).
14 은 철저한 국가 이익 위주의 권력만을 강화ㆍ행사하고 있었다. 이 같은 국가 간의 투쟁 아래서는 하늘( 天 )의 관념은 더욱 약화되어 맹자는 주로 의리 내지 운명의 천만을 말하였을 뿐, 주제의 천은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혈연 중심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제시했던 공자의 인도 그 한계성을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유가의 대표적 인물로는 공자보다 약 백년 후에 태어난 맹자를 들 수 있 다. 지금까지 맹자는 주나라의 안왕( 安 王 ) 13년인 기원전 389년에 출생해서 사왕( 赦 王 ) 5 년인 기원전 310년에 졸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원전 372년에 나서 기원전 289년에 졸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맹자는 그가 처했던 시대를 일러 제후는 방자하고, 처사는 횡의하며, 사설과 폭행이 자행되던 난세라고 하였다. 34) 그는 이러 한 난세를 바로잡을 수 있는 요체는 제후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믿고 있 었다. 맹자가 제후들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인간성(성선설) 의 신뢰에 기인한다. 인심( 仁 心 ) 이란 생래적인 인간의 본심이므로 치자가 정치를 함에 있어 인심 을 발휘하여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다름 아닌 정치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에게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곧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정치가 있다. 35) 이 같은 인식이 맹자가 말하는 정치의 시발인 것이다. 이른바 불인인지심( 不 忍 人 之 心 ) 이란 인심 이요, 불인인지정( 不 忍 仁 之 政 ) 이란 인정 이니, 이 인정( 仁 政 ) 을 그는 왕도 라 하여, 그가 만나는 군주들에게 언제나 왕도정치를 권유하고 있었다. 맹자가 주창한 왕도정치란 그의 성선설에서 연역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왕도 정치를 주창하게 된 이면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왜냐 하면 당시 백성들은 극도의 민생고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제후들은 부국강병을 추구 하면서 공벌을 일삼았는가 하면, 36) 부한 자는 더욱 부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생존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37) 그리하여 백성들은 부모를 섬길 수도 없었고, 처자식을 양육할 수도 없어서 풍년이 들어도 일년내내 고통스러웠고, 흉년이 들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38) 이 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맹자는 패도정치 라 하여 비난ㆍ반대하고 있었다. 34) ( ). 35) ( ). 廩 37) ( ). 38) ( ).
15 노약자들을 구렁텅이( 溝 壑 )에 굴러다니게 하고, 젊은이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散 之 四 方 ) 하는 것이야말로 토지를 가지고 인육( 人 肉 ) 을 먹는 것으로, 39) 이는 분명히 백성들을 도적질하는( 民 賊 ) 행위로 패도정치 의 전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왜냐하 면 패도란 군주 본위의 정치로써 군주의 의사를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정치를 뜻하 기 때문이다. 아울러 패도는 힘에 의한 정치로 타국의 희생 위에 자국의 부강을 추 구하는 오늘날의 패권정치와도 같은 것이다. 당시 맹자의 관심은 서상한 바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백성 들을 구제하는 데 있었다. 그 구제 방법이 인정 인 왕도정치 인 것이다. 이처럼 왕 도정치 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백성의 입장에서 정치를 설명 하고 해결하려 했으므로 자연히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귀민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 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 40) 때문에 그는 제후에게는 토지ㆍ백성ㆍ정사 등 세 가지 보배가 있지만, 주옥을 보 배로 여기는 자는 재앙이 반드시 몸에 미칠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41) 제후가 사직 을 위태롭게 하면 바꾸어 앉히게 된다고도 했고, 42) 심지어는 치자로서의 자질과 덕 성을 상실했을 경우, 그를 내쫓거나 죽이는 방벌( 放 伐 ) 을 당연시하기도 했다. 43) 이러한 맹자의 정치적 태도는 공자의 정명론에 따라 치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군주는 일부( 一 夫 ) 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은 나머지, 역사상 치자로서의 덕성을 상 실한 군주를 죽인 바 있는 사실( 史 實 )을 묵인함으로써 이른바 방벌 을 합리화시켰 다. 맹자의 이 같은 정치적 인식은 동아시아의 긴 정치사에서 수많은 군주들에게 말 할 수 없는 심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했고, 피치자들에게는 정치적인 반항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역성혁명( 易 姓 革 命 ) 의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주기도 했다. 공자가 치자의 입장에서 정치를 논했다면 맹자는 피치자의 입장에서 정치를 거론하 였다. 때문에 그를 민본주의자라고 하여도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민본사상 이 서구와 같은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1 후세 군주들에게 등용된 유학자 들이 존군( 尊 君 )을 강조한 반면 맹자의 민귀( 民 貴 ) 를 소홀히 했다는 점, 2 후세의 군 주들이 겉으로는 왕도정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패도정치를 추구했다는 점, 3 맹 자의 민본사상에 근거하여 후세의 유학자들이 위민( 爲 民 )ㆍ애민( 愛 民 )ㆍ보민( 保 民 ) 등 39) ( ). 40) ). 41) ( ). 42) ( ). 43) ( ).
16 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의 정치적인 주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맹자의 정치사상이 현실적으로 효과를 거두는 데는 한계가 있어 부국강병만 을 추구하는 당시 제후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는 공자와 마찬가 지로 만일 평천하하려 한다면 이 시대에 나 말고 누가 있겠느냐 하리만치 대단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44) 하기야 내게 소원이 있다면 공자를 배우는 것 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같은 당연한 믿음이기도 하다. 45) 맹자는 맹자 머리 장에서 인의 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46) 그는 공자의 인 의 정치를 시행함에 있어서 인심으로 발전시켰지만, 당시 양주의 극단적인 개인주 의나 묵자의 절대적인 박애주의를 배격하는 데는 인( 仁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 다. 그리하여 그는 의( 義 ) 라는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양자와 묵자를 배격하는 이론 적 근거로 삼았다. 동시에 공리주의와 강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당시 제후들의 마 음을 바로잡는 데는 인은 이미 한계가 있다고 보고, 그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이 익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의 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의 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 人 心 )으로 인간의 도덕적인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맹자는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의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47) 그가 인과 의를 같이 논한 까닭도 인은 의의 내용이 며, 의는 인의 외적인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의는 이미 백성 을 이롭게 하는 이민( 利 民 ) 내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세( 利 世 )의 의미를 지닌다. 맹자는 이 같은 논리에 따라 정치도 인심의 외적인 표현으로 이해했으므로 표현 내용에 준하여 그것을 왕ㆍ패 두 형태로 구분하였고, 이상으로서의 정치를 인정, 즉 왕도라 하였다. 그러므로 왕도의 실현은 논리적인 면에서나 방법적인 면에서 볼 때, 인심을 바로 잡는 문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란 국내적으로는 상하가 이익을 다투고, 국제적으 로는 약한 나라를 겸병하고 어리석은 나라를 공략하면서 빼앗기를 싫어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때문에 맹자는 사사로운 이익의 상대적인 개 념으로서의 공공의 이익( 公 利 ), 즉 이익의 공정한 처리만이 국내 안정은 물론, 국가 간의 평화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의를 보편적 가치로 이해한 맹자이고 보면, 이익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가 치 규범의 기초로 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익만을 위한 결과는 갈등 과 전쟁만을 촉발하는 것으로 그는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 은 내부적 규범으로 가 시대의 경ㆍ대부들에게 제시된 지도 이념이었 44) ( ). 45) ( ). 46)? ( ). 47) ( ).
17 다면 맹자의 의 는 외부적 규범으로서 전국시대의 제후들에게 제시된 지도 이념이 었다. 그러므로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주로 경ㆍ대부들을 만났지만, 맹자는 국 왕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상적 레벨에서 볼 때, 공ㆍ맹자가 제시한 지도 이념이 그 시대의 문제 를 해결하는 데는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유가의 정치사상 을 시대적인 요구와 필요에 따라 수정하고 보완하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 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6. 망국난군( 亡 國 亂 君 )의 시대적 상황과 예( 禮 ) 순자( 荀 子 :기원전 314~228)의 학설은 정통 유가의 성선설과 완전히 상반되는 성악설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배척되었다. 특히 유가의 형식주의적인 학자 들에 의해 비정통적인 인물로 비난받았다. 그의 저술인 순자 荀 子 는 논어 와 맹자 가 대화체로 구성된 데 비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논리적 진술을 보이고 있 다. 이런 점으로 보아 순자는 논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인 간의 본성은 비인격적이고 초 도덕적인 천에 연유하고 있다고 보는 데서 그의 사상 은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맹자 이후를 대표하는 유가로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사상계에 지 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순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렇게 평 가하고 있었다. 순경은 혼탁한 세상의 정치로 망하는 나라와 난폭한 임금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대도는 수행되지 않고, 미신에 미혹하여 속이는 말을 믿으며, 비속한 선비들은 작은 일에 구애되고, 장자와 같은 무리들은 우수개소리로 풍속을 혼란케 함을 미워하여, 수만 어의 저서를 내고 졸했다. 48) 이처럼 순자는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의 주의와 주장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순 자의 유가 비판은 후세의 유가들로 하여금 그를 이단 내지 유가의 좌파적인 인물로 간주하게 하였다. 사실상 그의 저술에 나타난 유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언설과 제가들에 대한 태도 로 보아 그는 유가의 순수한 입장을 유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가들의 정화 까지 흡수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를 잡가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보 고, 순자는 유가와 제가를 집대성한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다. 49) 48) 49) 조성을 역, 고대사상사, 3249쪽. ( ).
18 순자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지만, 그의 저 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속에 유가 사상은 물론,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적 편린 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호적은 일찍이 그의 학문은 매우 넓어 그가 살았던 시대의 기존의 학설을 두루 섭렵했다고 했다. 50)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순자는 그의 저서에서 유가의 대표적인 인물까지 서슴없 이 비판하고 있는가 하면, 제가들의 사상마저 적지 않게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 통 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유가의 정통적인 인성론인 성선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전국 말 진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 6국을 통합하려는 기운이 표면화됨으로써 통 일천하의 전야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유가의 인물로는 선진 유가의 3대 인물 중 한 사람인 순자를 들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시대는 세정이 혼탁하고 망하는 나라와 난폭한 임금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亡 國 亂 君 ) 는 것을 보면, 맹자의 시대와 별 차이가 없 었던 것 같다. 다만 맹자는 그런 시대에 처하여 도덕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긴 데 반하여 인간의 사회적 존재성을 51) 인정한 순자는 사회적 통제인 행위 규범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순자는 망국난군 이 줄지어 일어나는 까닭, 즉 정치ㆍ사회적인 혼란의 원인 을 가치의 희소성에 있다고 하였다. 52) 그러므로 그는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과 구별( 度 量 分 界 )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필요가 예의 기원이며, 이의 사 회적 통제가 순자 정치사상의 핵심인 예의 기능으로, 그것은 한계를 정하는 데 있 다. 그러면 예란 어떤 것인가? 예란 이( 異 )와 분( 分 )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다. 예기 禮 記 에 예는 이를 판별하는 것이라 하였고, 순자는 예란 이를 구별하는 것이며 분 은 예보다 큰 것이 없다고 했다. 예는 악한 사람의 본성을 고치기 위한 것으로 이 는 마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입에 쓴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다는 것 이 순자가 주장하는 예이다. 그는 또 구별이 없는 것( 無 分 )은 사람에게 큰 해가 되고 구별이 있는 것( 有 分 )은 천하의 근본적인 이익이 된다고도 하였다. 순자가 그 시대에 유분으로서의 예를 강 조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사회의 질서 회복 내지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 더욱 혼탁한 정치는 하늘( 天 )과는 무관한 인간의 일로만 인식한 그는 이미 의리의 50),, :, 1958, 331쪽. 51) ( ). 52) ( ).
19 천은 물론, 운명의 천도 부인하고 있었다. 53)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인간 중심으 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인간을 아주 멸시한 것 같으나, 사실 훌륭하고 가치 있 는 것은 모두 인간의 노력의 결정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논조이므로 순자의 사상 은 인간 본위의 사상이라고 하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가치는 인 간문화의 소산이며, 문화는 인간이 이룩해 놓은 치적이라는 것이 순자의 주장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순자는 천명과 재이( 災 異 )를 정치인사와 무관한 것으로 이 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 임금이 다스리고, 걸이 어지럽게 한 것은 인사일 뿐 하늘 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54) 이 같이 그가 하늘과 인간은 무관한 것( 天 人 之 分 )으로 본 것은 지금에서 보면 대 수로운 것 같지 않지만, 당시로는 매우 과학적인 사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 한 그의 사상은 당시의 미신적인 사상과 노ㆍ장자의 자유방임적인 사상을 배격하기 위해서 취해진 사상 태도란 점에서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인 이나 의 는 객관적인 형식을 갖고 있지 않은 데 약점이 있었다. 때문에 모종 의 표준 형식을 갖춤으로써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예 를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 다. 아울러 예는 정치 사회적인 구속력에 있어서 인이나 의보다는 훨씬 강하다. 여 기에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전국 말년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순자는 예라고 하는 지도 이념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55) 그러나 예는 앞으로 그렇게 될 것( 將 然 )을 구속할 수는 있으나, 이미 그렇게 된 것( 已 然 )을 막을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56) 이것이 예가 법에 접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순자를 유가의 좌파라고 하는 것은 순자의 예가 이미 법가의 법 ( 法 ) 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순자의 문하에서 법가의 대 표적인 인물인 한비자와 이사와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시대적 지도 이념으로 제시된 순자의 예는 정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확립하 려는 예에 의한 통치, 이른바 예치 를 통하여 이루려 한 사회는 유덕하고 유능한 사람이 대우받는 그런 사회였다. 이 같은 순자의 주장은 이른바 귀속적인 요인이 아닌 획득적인 요인에 의한 인사 와 계층 분류라는 데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그가 예 또는 지위에 따르는 능 력과 업적을 강조한 것은 그의 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권위주의가 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사회가 지극히 공평하여 상하가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한 지평 의 세계를 53) ( ). 54) ( ). 55) ( ). 56) ( ).
20 이상으로 했다. 이 같은 순자의 지평 세계는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예치를 통해 이 루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자의 정명 과 사상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지만, 형식적인 규범이 더 강조됐다는 점에서는 다르다고 하겠다. 본래 예의 정치적 기능이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지만, 질서를 확립하다 보면, 화 해와 협력을 유도해야 할 또 다른 정치적 기능을 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적인 소원을 초래하는 역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예에는 사회적 분화(social differentiation)를 일으키므로 이를 완화하고 해소하는 기능으로서의 음악이 강조되 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에는 사회적 결속(social solidarity)이라는 중요한 기능 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의가 항상 붙어 다녔는가 하면, 예악은 언 제나 함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