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우 2 0 1 0 년 12 월 호 통 권 170 호 vol_ 170 KAERI MAGAZINE 2 0 1 0 D E C E M B E R 어느덧 2010년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는 12월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달을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과 함께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보세요. 한 국 원 자 력 연 구 원
C O N T E N T S 2010 +12 KAERI MAGAZINE 02 04 06 10 12 14 15 16 18 20 22 24 26 28 30 32 36 38 39 40 42 44 46 47 chkim1978@kaeri.re.kr www.kaeri.re.kr 2010 12 170 2010 12 5 1045 150-1 042)868-8266, 2169 042)861-1428 042)255-8136~7 042)254-6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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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신지식인 글 사진 허 경 진 연세대 국문학 교수 hur@yonsei.ac.kr 그는 조선왕조가 망할 조짐이 보이자 중국 친구 장건(張 )의 권유를 받아들 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김택영의 한문 실력에 탄복한 장건이 자신의 고향 남 통(南通)에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이라는 출판사를 차리고 그를 편집전문가로 초청한 것이다. 1905년 9월 9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떠난 김택영은 10월 4일 남통에 도착해 왕씨네 집에 세를 얻어 살면서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기 시 작했다. 그는 중국어를 못했지만, 중국인 친구들과 붓으로 글을 써서 필담(筆 談)을 나누며 사귀었다. 온 국민들이 걱정한 대로, 1910년에 순종황제가 합방(合邦) 교서를 발표하자 김택영과 가장 친하던 시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나라 지키지 못한 지식인 의 책임을 통분하여 절명시(絶命詩) 4수를 짓고 자결하였다. 황현은 마지막 순 간에 시의 경우는 연도를 밝히고 문의 경우는 문류(門類)를 나눈 다음에 식견 (識見) 있는 사람에게 총괄하여 정리하도록 부탁하라 고 유언하였다. 영남과 호 중국 땅에서 조선 책들을 출판한 남통 낭산공원에 있는 김택영 무덤 비석에 한국 시인 김창강 선생의 묘 라고 새겨져 있다. 중국 망명시기 김택영의 사진 남의 선비들이 모금하여 출판비를 마련하고, 황현의 아우 황원(黃瑗)이 김택영 에게 유고를 보내어 문집 편찬을 부탁하였다. 황현의 글을 가장 잘 아는 시인이 김택영인데다, 조선에서는 그의 시집을 출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택영은 유고를 산정(刪定)하여 1911년에 7권3책으로 매천집(梅泉集) 을 간행하고, 창강 (滄江) 100년 전에 조선왕조가 망하고 총독부의 통치가 시작되자, 출판의 자유가 1913년에 속집을 2권1책으로 간행하였다. 50부는 중국 문인들에게 배부하여 없어지고 검열이 시작되었다. 개화기에 출판되어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 애국시인 황현의 문학을 소개하고, 225부는 두 차례에 나누어 국내로 우송하였 으며 읽혔던 애국계몽의 교과서나 외국 명작 번역들은 물론이고, 개인의 다. 그가 국내로 보낸 편지에 매천집 중에 일본에 저촉되는 글이 있다 는말 시집이나 문집도 검열이 엄격해졌다. 1909년 2월에 출판법이 공포되자, 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중국에 망명하지 않았더라면 황현의 시집은 제 을사조약을 규탄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신교육과 개화사상을 고취한 모습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원은 형 황현의 유고를 전부 수집해 1933년에 이해조의 자유종, 민족주의를 고취한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이 금서(禁 증보판 매천집 을 간행하려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중요한 작품들은 書)로 선정되어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삭제당해 결국 출판을 포기하였다. 한묵림서국에서 중국 책을 교정보던 김택영은 친구 황현의 시집을 출판하면 서부터 조선에서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출판할 수 없는 책들을 출판하기 시작 총독부의 검열 없이 망국의 역사를 간행하다 하였다. 사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1914년에 조선왕조 통사인 한사 고려왕조의 도읍이었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차별을 받아, 선비들이 과거시험 긍(韓史 ) 을 간행하였고, 1915년에는 여한십가문초( 韓十家文 ) 와 한 에 많이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상업에 나서 개성상인이 유 국역대소사(韓國 代小史) 를 간행하였다. 1916년부터 자신의 문집인 소호당 명해지고, 복식부기까지 발전시켰다. 개성 출신의 선비 창강(滄江) 김택영(金澤 집(韶護堂集) 을 비롯하여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중편연암선생집(重編 榮 (1850~1927)의 증조부도 모자 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인삼장사를 하며 어렵 燕巖先生集) 고려계세충신일사전(高麗季世忠臣逸事傳) 신고려사(新高麗史) 게 살았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책을 사 주고 선생을 구해주며 과거공부를 시 등을 간행하였다. 그는 중국 신문 잡지에 조선에 관한 글을 많이 발표했을 뿐만 켰다. 김택영은 42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니, 서울 양반들에 비하면 20년이나 늦 아니라, 조선의 역사에 관한 책을 많이 편집 간행하였다.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 은 나이였다. 과거시험에 한계를 느낀 그는 고문(古文)에 흥미를 느껴 문장가로 서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45세에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가 되어 헐버트의 사민필지(士民必知) 를 번역 편찬하였으며, 이후 김홍집(金弘集)의 추천으로 내 각의 사적과장(史籍課長)이 되어 역사를 편찬하였다. 26 December 2010 막 사관(史官)으로 활동했기에 많은 사료(史料)를 수집할 수 있었으며, 중국으 김택영이 매천집 을 간행하고 국내로 보낸 편지. 오른쪽 밑에 두 차례에 나누어 225부를 국내로 우송하고, 50부는 중국에서 배부하였 다 는 사연이 적혀 있다. 왼쪽 끝의 큰 글씨에는 매천집 가운데 일본에 저촉되는 말이 있다 는 사연이 적혀 있다. 로 망명했기에 총독부의 검열 없이 망국의 역사를 출판할 수 있었다. 중국어 회 화도 하지 못하면서 조국의 문화를 정리하기 위해 낯선 중국으로 망명해 수많 은 책을 출판한 김택영을 조선의 신지식인으로 꼽을 만하다. KAERI 2010 27
donghwa@korea.com 815imag@hanmail.net 28 December 2010 KAERI 2010 29
jaekim@cnu.ac.kr 30 December 2010 KAERI 20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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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ERI news www.kaeri.re.kr 42 December 2010 KAERI 2010 43
December _ 12월호 위의 원본 사진과 아래 편집 사진에서 서로 다른 부분 다섯개 중 세개 이상을 찾아 보내주세요. 원본 사진 연구원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 개방의 날 우리 연구원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 개소 4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지역주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한 유대강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상호협력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지역주민 연구소 개방의 날 행사를 지난 10월 1일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 본관동 및 잔디광장에서 개최하였다. (오른쪽 사진은 정읍시 시립 농악단의 풍물놀이 공연 모습) 지난호 정답 축하드립니다 정새봄 충남 논산시 대교동 임웅기 대전시 중구 문화2동 이인식 대전시 서구 둔산3동 하연수 전남 여수시 웅천동 김창종 서울시 노원구 상계9동 응모 요령 44 December 2010 옆 페이지의 사진에서 열심히 찾으신 것을 독자엽서를 통해 한국원자력연구원 홍보협력팀으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되도록이면 색깔있는 펜으로 표시하여 보내주세요. 맞추신 분 가운데 다섯 분을 추첨하여 예쁜 선물을 드립니다. 편집 사진 KAERI 2010 45
원자력 만화 공동기획 한국원자력연구원 전자신문 <21화. 원자력의 또 다른 얼굴 방사선> 이현세 작화 공동제작 : 정준영, 전영옥 우리에게 꿩은 매우 친숙하게 느껴지는 새이다.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지척에서 푸드덕 날아오르는 이 친구들로 인해 한번쯤 놀란 추억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텃새로 수컷은 장끼라고 부르며, 그 깃털의 화려함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에 걸쳐 50여종의 꿩이 사는 데, 특히 한국 토종 꿩은 외국의 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태가 아름답다. 식성은 잡식성으로 식물, 지렁이, 곤충류 등을 섭식한다. 5-6월이 되면 암컷인 까투리가 수풀이 무성하게 난 산기슭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10-18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까투리의 몸 색깔은 장끼와 매우 달라 이학영 한국생태환경연구원 원장 koreafish@hotmail.com 다른 종류의 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보호색으로 알을 품을 때 천적으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갓 깨어난 꿩 새끼는 꺼벙이라고 하며 몸에 줄무늬가 나 있다. 꿩은 새벽에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먹이 활동과 모래로 목욕을 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산으로 올라가 잠을 잔다. 요리 재료로 인기가 높아 농장에서 인공 사육을 하고 있고, 관상용으로도 널리 보급되어 있다. ❶ 멋진 깃털을 자랑하는 장끼의 모습 ❷ 수수한 깃털로 보호색을 띠고 있는 까투리 모습 ❸ 번식기를 맞아 눈 주위의 붉은 피부가 두드러진 장끼 1 46 December 2010 3 2 KAERI 2010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