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1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Ⅰ. 머리말 Ⅱ. 근대 개항도시 인천의 대중문화 기반 Ⅲ. 1930년대 인천의 대중음악 공연 상황 Ⅳ.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가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음악과 지역성의 결합은 전통음악의 경우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전근대시기에 대다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향유한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민요나 기층 신앙 의식에서 연주된 무속음악에는 이른바 토리 라는 개념으로 정리되는 지역적 특 성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토리, 관서 일대에서 주로 나타나는 수심가토리, 백두대간 동쪽에 널리 분포하는 메나리토리, 호남을 중심으로 하여 인접 한 충청 경상도에서도 보이는 육자배기토리 등은 그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는 것이 다. 또, 토속민요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사실상 대중 음악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잡가나 통속민요1)에서도 음악적으로 드러나는 지역적 특성은 역시 확인할 수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1) 권도희, 한국 근대음악 사회사, 민속원, 2004, 258~263쪽. - 209 - 이 준 희
2 인천학연구 9(2008.8) 그러나, 대중음악2)의 경우에는 음악과 지역성의 결합을 전통음악과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른바 근대의 산물인 대중음악은 음반 방송 출판물 같은 근대적 대중매체를 통해 계층이나 지역의 경계를 뛰어넘어 유통되는 기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과 지역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냥 어려운 문제가 아니 라, 어쩌면상당히모순적인것처럼보이는일이라고도할수있다. 1930년대이후 일군의 대중음악 작가들이 통속민요의 형식을 서양음악 입장에서 변용하여 만들어 낸 신민요에 전통음악 토리의 흔적이 다소 보이기도 한다지만, 3) 육자배기토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신민요라 해서 호남의 대중음악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대중음악과 지역성이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양자( 兩 者 ) 사이에 어떤 형식으로든 연결점이 존재하고, 그것은 충분히 고 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다만, 대중음악의 경우 전통음악과 같은 방법으로 지역성을 논할 수가 없으므로, 다른 각도와 수준에서 접근 을 할 필요가 있다. 토리 같은 음악적 형식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대중음악에는 생산자나 유통망 같은 각도에서 어떤 지역의 특징적인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있는것이다. 또, 대중음악에서도큰비중을차지하고있는대중가요같은경 우는 가사를 문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통해 접근해 볼 수도 있다. 대중음악과 지역성의 결합에 대한 초보적인 탐색은 목포나 부산의 경우 이미 시도 된 바가 있다. 2006 년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 李 蘭 影 ) 의 유해를 고향으로 이장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논의된 목포의 대중음악적 위상은, 이난영이라는 인물과 그의 대표 곡 목포의눈물, 노래비건립이나가요제개최와같은대중음악사( 史 ) 적이벤트, 일 제시대 대표적인 근대 개항도시였던 목포의 대중문화적 분위기 등을 통해 고찰되었 다. 4) 1945 년이전에초점이맞춰진목포와달리, 6 25동란시기임시수도였던부산 2) 대중음악의 정의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다.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 논의가 완전 히 달라 질 수도 있다. 여기서는 일단 근대 이후 대중매체의 의해 전달되면서 나름의 작품적 관행을 지닌 서민들의 노래 라는 한국 대중가요 에 대한 정의(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민속원, 2006, 24 쪽) 에 바탕을 두어, 그러한 음악 ( 반드시 가사가 붙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이 1930년대에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보고, 1930년대 대중음악으로부터 양식적 연관성 면에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그 이전 음악 또한 대중음악으로 간주하도록 하겠다. 3) 이소영,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74~110 쪽, 117 ~125 쪽. 4) 이준희, 이난영의 삶과 노래 ; 고석규, 일제강점기 목포의 애환 -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이난영 의 삶과 음악세계에 대한 재조명( 심포지엄 자료), 이난영기념사업회, 2006. -210-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3 은 전쟁 기간을 중심으로 1950 년대에 초점을 맞춰, 관련 인물이나 작품에 관한 자료 를 수집 정리하는 기초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5) 근대 개항도시로서 부산(1876 년 개항) 이나 목포(1897 년 개항) 못지않은 역사를 가지 고 있는 인천(1883 년 개항) 또한 대중음악과 관련된 연구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이영 태는 일제시대 대중가요 가운데 인천과 관련이 있는 작품을 뽑아 그 가사를 분석하여, 인천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그 의미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검토했 다. 특히 인천과 직접 관련이 있는 작품으로 연평 바다로 애수의 제물포 꿈꾸 는 항구선 세 곡을 예로 들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6) 그런데, 다른 영역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대중가요 작품과 가사에 주력한 이영태의 글은, 무엇보다 분석 대상 인 적절한 작품 자체가 많지 않은 탓에 대중가요와 인천의 연결점을 설득력 있게 뚜렷 이 부각시키지 못했고, 몇몇 대목에서는 논리적으로 무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 례로, 연평도가 속한 옹진군이 1995년에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고 해서 일제시대에 발표된 연평 바다로 를 인천과 직접 관련 있는 작품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수긍하 기 어려운 주장이다. 7) 꿈꾸는 항구선 또한 가사 제1절에서 인천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제2절과 제3 절에는 다른 항구도시인 부산과 청진이 등장하기도 하므로, 인천 관 련 작품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이다. 이영태의 시각보다는, 비슷한 방식으로 대중가요에 나타난 인천의 이미지를 연구하면서도 가사 분석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한 이현식의 견해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천 관련 대중가요라 해도 가사에서 몇몇 구체적인 지명을 빼고 나면 인천만의 지역성이 별반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음이 엄 연한 사실인 것이다. 8) 일제시대 인천의 대중음악적 위상을 고찰해 보고자 하는 이 글에서는 위에서 본 선행연구들의 성과와 한계를 취사( 取 捨 ) 해 논의를 전개해 보려고 한다. 우선, 대상 시 기를 일제시대로 한정했으므로 인천 관련 대중가요 작품을 뽑아 가사를 살피는 작업 은 따로 항목을 설정해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것이 이미 어느 정도 정리된 문제이기 도 하거니와, 거기서 별다른 의미를 추출할 수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대중음 5) 박성서 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 증언, 부산광역시 중구청, 2007. 6) 이영태,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에 나타난 인천, 인천학연구 4, 인천학연구원, 2005, 9~13 쪽. 여기서 연평 바다로 는 연평도 바다로 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7) 연평 바다로 가 발표된 때인 1941 년 당시 연평도는 황해도 벽성군 소속이었고, 경기도 옹진군에 속하 게된것도1945 년광복이후의일이다. 8) 이현식, 대중문화에 나타난 인천 이미지 연구, 인천학연구 3, 인천학연구원, 2004, 8 쪽. -211-
4 인천학연구 9(2008.8) 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그 기반이 되는 음반 방송 공연 등 이인천이라는지역에서어떤모습과의미로존재했는지를주로살펴볼것이다. 그 리고, 인천에서 출생했거나 성장했거나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는 대중음악가들의 이력 을 살펴, 그것이 음반 방송 공연 같은 생산과 유통의 기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점검해 보도록 하겠다. 거듭 강조하는 바이지만, 대중음악과 지역성의 연결점을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 니다.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사례를 무리하게 끌어들여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는, 없는것은없는것대로한계는한계대로인정하고가는것이오히려사실( 史 實 ) 에 보다 부합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은 어 쩌면 그 한계를 분명히 밝히는 데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Ⅱ. 근대 개항도시 인천의 대중문화 기반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1876 년) 에 의해 부산과 원산(1880 년 개항) 에 이어 조선 에서 세 번째로 개항을 한 인천에서는 그만큼 빠르게 근대 문물의 도입과 수용 또한 이루어졌다. 근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대중문화의 경우도 인천은 다른 지역에 비 해선진적인모습을보였다. 그대표적인예가대중음악은물론여타음악 연극 영 화 등 각종 공연예술의 기반이 되는 극장의 설립이다. 서울보다도 빨랐다고 하는 조선인에 의한 인천 지역 극장 설립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연구자들의 선행연구가 있다. 김양수는 주로 몇 가지 증언 기록에 의거하여 현 존하고 있는 애관( 愛 館 ) 극장의 전신인 협률사( 協 律 舍 ) 가 1895 년에 정치국( 丁 致 國 ) 이라 는 인천 거주 부호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기술했다. 9) 이에 대해 윤진현, 10) 김호연, 11) 이희환 12) 등은 1895년이라는 연도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함을 들어 김 양수의 견해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적어도 1900년 이전 인천에 조 선인의 의한 상설 공연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은 모두 긍정하고 있다. 연도야 어 9) 김양수, 개항장과 공연예술, 인천학연구 1, 인천학연구원, 2003, 21~23 쪽. 10) 윤진현, 1920 년대 전국순회극단과 인천의 소인극, 인천학연구 2, 인천학연구원, 2003, 3~4 쪽. 11) 김호연, 한국 근대공연예술 성립의 한 양상, 인천학연구 3, 인천학연구원, 2004, 5~6 쪽. 12) 이희환, 인천 근대연극사 연구, 인천학연구 5, 인천연구원, 2006, 18~23 쪽. -212-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5 찌 되었든 인천의 극장 설립 시기가 서울 협률사( 協 律 社 ) 의 1902년보다 빨랐음은 분 명하다 할 것이다. 극장 설립이 빨랐다고 해서 대중음악이 그 지역에서 당장 두드러지게 발전했다고 할 수는 물론 없다. 극장은 음악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연극이나 영화는 물론 그밖 에 다양한 행사를 모두 소화하는 공간이었고, 음악 공연이 이루어지는 경우라 해도 1930년대 초반 이전에는 대중음악보다는 판소리나 잡가 같은 대중적 전통음악의 비 중이 더 높았다. 하지만, 대중음악 공연이 활성화되기 이전 극장 무대에서도 대중음 악이 유통되는 장면은 그리 드물지 않게 나타났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첫 장에 기록될 만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번안곡 카추샤의 노래 는 1916 년에 극단 예성좌( 藝 星 座 ) 가 서울 단성사( 團 成 社 ) 에서 신파극 부활 을 공연할 때 주제가로 무대에서 불려 세간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13) 예성좌는 결성된 지 채 1년 이 못 되는 1916년 12월에 해산했기 때문에 인천에서 공연을 했는지 여부가 확실치 는않으나, 개성에서공연한사실이확인되는점을보면14) 인천에서도 공연을 하면서 카추샤의노래를선보였을가능성을완전히배제할수는없다. 연극뿐만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가운데 대중음악이 유통된 사례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우선 1928년 10월에 애관극 장에서 영화 낙화유수 가 상영될 때 용동권번( 龍 洞 券 番 ) 소속 기생이 창가를 부른 사례가 있는데, 15) 관련 기사에 곡목이 명기되어 있지는 않으나 영화 주제가인 낙화 유수 를 불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1927년 영화와 함께 만들어진 주제가 낙화 유수 는 통상 한국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인정되고 있는 작품이다. 1929년 8월에 는 역시 애관극장에서 영화 터 마부제 와 소국만세( 笑 國 萬 歲 ) 를 상영하면서 배 우 겸 가수 김연실( 金 蓮 實 ) 의 독창회를 아울러 열기도 했다. 16) 당시 김연실은 영화 아리랑 낙화유수 세 동무 등이 상영될 때 극장 무대 한 편에서 주제가를 불 러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17) 애관극장에서 열린 김연실 독창회 또한 그러한 대중 13) 藝 星 座 의 近 代 劇, 매일신보 1916년 4월 23 일자. 카추샤의 노래 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이 영미 이준희 편, 사의 찬미( 외) 근대 대중가요, 범우, 2006, 21~22 쪽. 14) 藝 星 座 一 行 入 京, 매일신보 1916년 12월 6 일자. 15) 仁 川 讀 者 優 待 活 寫, 조선일보 1928년 10월 23 일자. 16) 金 蓮 實 孃 獨 唱, 중외일보 1929년 8월 10 일자. 17) 生 活 로 본 그들의 內 幕 七, 중외일보 1929년 11월 14 일자. 김연실은 무대에서 이들 노래를 불렀 을 뿐만 아니라 음반으로도 발표했다. 그에 관해서는 이영미 이준희, 사의 찬미( 외) 근대 대중가요 -213-
6 인천학연구 9(2008.8) 가요 중심으로 구성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1930년대 초반 이후 대중음악이 극장에서 본격적으로 유통된 사례는 다음 장에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겠지만, 극장 설립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빨랐던 인천에서 1930년대 초반 이전에 여타 공연예술과 함께 대중음악 공연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 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한 점이다. 현재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나, 신문 기사나 광고 같은 자료를 세밀하게 살펴 정리한다면 보다확충할수있는근거를확보할수있을것이다. 극장에 비해 등장 시기는 약간 늦지만, 대중음악 유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매체로들수있는것이음반이다. 한국에서음반에관한기사가처음등장한때는 1899 년이고, 상품으로서 정식 발매가 이루어진 때는 1907 년이다. 1911년 이후로는 주 로 일본 음반회사가 설치한 지점을 통해 음반 제작과 유통이 이루어져, 1932년에는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 오케(Okeh) 레코드 빅타(Victor) 레코드 포리돌(Polydor) 레코드 태평( 太 平 ) 레코드 등 이른바 5 대 음반회사 가 중심이 되는 음반산업 체제가 형성되었다. 18) 그런데, 이들 음반회사는 모두 서울, 즉 경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 로, 19) 음반회사와 인천이라는 지역이 공유하는 직접적인 연결점을 찾기는 쉽지가 않 다. 이는 비단 인천만의 문제는 아니니,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거점을 둔 음반회 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광복 이후 1940 년대 말이 되어서야 가능했고, 그나마도 부산과 대구에 한정되어 있었다. 1949년 이전에 설립된 것이 확실한 부산의 코로나 (Corona) 레코드와 대구의 오리엔트(Orient) 레코드가 지역 음반회사의 효시가 되며, 20) 이후 6 25동란 시기와 그 직후에는 전쟁기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도미도 (Domido) 레코드 미도파( 美 都 波 ) 레코드 서라벌레코드 유니온(Union) 레코드 등이, 34~37 쪽.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 1998, 11~13 쪽. 19) 1939년 4월 현재 5 대 음반회사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콜럼비아레코드( 株 式 會 社 日 本 蓄 音 器 商 會 京 城 支 店 )-京 城 府 櫻 井 町 1丁 目 31 번지, 오케레코드( 帝 國 蓄 音 器 株 式 會 社 京 城 支 店 )-京 城 府 南 大 門 通 1 丁 目 104 번지, 빅타레코드( 日 本 빅타- 蓄 音 器 株 式 會 社 京 城 支 店 ) - 京 城 府 長 谷 川 町 112 번지, 포리돌레 코드( 日 本 포리돌蓄 音 器 株 式 會 社 京 城 支 店 ) - 京 城 府 本 町 2丁 目 30 번지, 태평레코드( 大 日 本 蓄 音 器 株 式 會 社 京 城 營 業 所 ) - 京 城 府 鍾 路 6丁 目 276 번지. 人 文 社 편집부 편, 朝 鮮 文 藝 年 鑑, 人 文 社, 1939, 117 쪽. 20) 이준희, 1940 년대 후반(1945~1950) 한국 음반산업의 개황, 한국음반학 14, 한국고음반연구회, 2004, 159~161 쪽. -214-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7 부산과 대구에서 설립되어 음반을 발매했다. 21) 1945년이전일제시대에서울이아닌 다른 지역에서 음반이 발매된 예는 현재 후니치( 釜 日 ) 레코드 단 한 건이 확인되고 있 을뿐인데, 그또한앞서본5대음반회사와같은정식음반회사로보기에는무리가 있다. 존재 자체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최근에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 소개된 후 니치레코드는, 일제시대 부산에서 간행된 일본어신문인 부산일보 사업부에서 제작 한 것이다. 22) 발굴된 자료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도 음반번호나 연주자 등에 관한 표기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 음반 발매 경위를 상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음반 에 담긴 내용이 모두 일본 전통음악인 것으로 보아 부산에 거류하는 일본인 사회를 대상으로 발매된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부산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인천에도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던 만큼 어느 정도 유사한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지금으로서는 관련 자료가 나오지 않아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음반산업과 인천 지역의 연결점을 살피기 위해서는 서울에 근거를 두고 음 반제작과대규모유통을담당한음반회사가아닌다른대상에초점을맞출필요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지역에서 소규모 유통을 담당한 음반 판매점이다. 일제시대 음 반판매점은대부분 악기점 간판을걸고악기 유성기축음기 ( ) 음반등음악관련 상품을 종합적으로 취급했으며, 때로는 시계나 카메라 같이 크기가 작은 근대적 기 기 를 함께 다루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음반 판매점이 어느 지역에 얼마나 있었는지 를 보여 주는 통계적 자료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1934년 당시 전국적으로 2백 군데 정도 음반 판매점이 있었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기는 하다. 23) 당연히 인천에 도적지않은수의음반판매점이있었을것이나, 현재문헌자료를통해확인할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1937년 12월에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들이 출연하는 연주회 를 주최한 인천 덕선( 德 善 ) 악기점의 경우24)나,1940년 2 월에 인천공회당에서 열린 제 1 회 중( 中 ) 조선 신인가수 콩쿨 진행에 참여한 영광( 榮 光 ) 악기점의 경우25)는 흔치않 21) 도미도레코드와 미도파레코드에 관해서는 이준희, 1950년대 유성기음반사 연구 - 6대 음반회사를 중 심으로, 한국음반학 16, 한국고음반연구회, 2006, 2007~212 쪽. 22) 廣 井 榮 子, フニチ レコ- ド(FUNIChI RECORD) を通 してみた 日 本, 植 民 地 主 義 と錄 音 産 業 - 日 本 コ ロムビア外 地 錄 音 資 料 の硏 究 ( 硏 究 成 果 報 告 書 ), 福 岡 正 太, 2007, 43~45 쪽. 23) 三 千 里 機 密 室, 삼천리 1934년 8 월호. 24) 오- 케 歌 手 大 演 奏 會, 동아일보 1937년 12월 24 일자. 25) 第 一 回 中 朝 鮮 新 人 歌 手 콩쿨, 동아일보 1940년 2월 16 일자. 영광악기점은 콩쿠르 참가자들의 신 청서 접수처 역할을 했다. -215-
8 인천학연구 9(2008.8) 은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지역 판매점이 대중음 악 음반을 판매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대중음악 공연을 주최하는 방식으로도 해당 지 역의 대중음악 유통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덕선악기점이나 영광악기점과 유사한 예 로 목포 난영( 蘭 影 ) 축음기상회가 1935년 2월에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들의 공연을 주최 한 경우도 확인이 되므로, 26) 인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그러한 형태의 공연이 빈 번히있었음을알수있다. 통상적으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음반회사와 지역성의 관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없는사건가운데하나로1935년 1 월에있었던 향토노래현상모집을또들수있 다. 27) 이는 오케레코드에서 기획한 행사로, 조선 10대 도시 찬가 가사를 모집해 당선 작에 곡을 붙여 음반으로 발매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이 바로 이 현상모집을 통해 당선된 가사였고, 목포의 눈물 외에도 부산 노래, 평양 행 진곡 등이 그 해 8월부터 10 월까지 실제 음반으로 발매가 되었다. 28)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은 모집 광고에 예시된 조선 10대 도시에 인천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10 대 도시로 거론된 곳은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 산 함흥 청진등인데, 1935년당시인천인구가7만 5천명정도29)이고 군산 인구 가 3만 7천 명 정도30)였던 것을 보면,10대 도시 선정에 단순히 인구수뿐만 아니라 다른기준이고려되었다는것을알수있다. 만약인천이10대도시로선정되고인천 관련 노래 가사가 당선되어 목포의 눈물 처럼 발매되었다면, 그 곡이 인천 관련 대 중가요 제1 호로 꼽힐 수도 있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일제시대에 대중음악이 유통된 기반으로 한 가지 더 들 수 있는 것은 라디오방송 이다. 방송은 극장이나 음반에 비해 출발이 상당히 늦어, 1927년 2월이 되어서야 경 성방송국( 호출부호 JODK) 이 정식 방송을 개시했다. 5대 음반회사가 자리를 잡은 1933년 무렵 음반이 이미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31)하고 있었던 것에 26) 新 春 音 樂 과 實 演 의 밤, 동아일보 1935년 2월 24 일자. 난영축음기상회는 가수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룡( 李 鳳 龍 ) 이 작곡가로 데뷔하기 전에 운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27) 第 一 回 鄕 土 노래 懸 賞 募 集, 조선일보 1935년 1월 28 일자. 28) 부산 노래 ( 염일화( 廉 一 華 ) 작사, 손목인( 孫 牧 人 ) 작곡, 고복수( 高 福 壽 ) 이은파( 李 銀 波 ) 노래, 음반번 호 1794) 는 8 월에, 목포의 눈물 ( 문일석( 文 一 石 )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음반번호 1795) 는 9 월에, 평양 행진곡 ( 김상룡( 金 相 龍 ) 작사, 문호월( 文 湖 月 ) 작곡, 고복수 노래, 음반번호 1808) 은 10 월에 각각 발매되었다. 29) 仁 川 人 口 七 萬 五 千 餘, 조선중앙일보 1935년 3월 9 일자. 30) 逐 年 激 增 하는 群 山 府 人 口, 동아일보 1935년 4월 13 일자. -216-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9 비해, 방송은 조선어 전용 방송인 제2방송이 개시된 193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중 의 관심을 어느 정도 받기 시작했다. 당시 5천 명도 되지 않던 청취자수가 이후 꾸준 히 늘기는 했지만, 조선인 청취자수 10만 돌파는 1940년 말쯤이 되어서야 가능했 다. 32) 방송은 음반에 비해 이처럼 더디게 자리를 잡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청취자 수가 확보된 뒤에도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영향력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대중음악 방송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1930년대 말에도 주당 방송 횟수는 평균 2회를 넘지 않았고,1회방송은통상30 분을넘지않았다. 33) 당초 경성에만 존재했던 방송국은 1935년 9 월부터 방송을 개시한 부산방송국( 호출 부호 JBAK) 을 시작으로 1938년 10월까지 1 차로 평양(JBBK) 청진(JBCK) 함흥 (JBDK) 이리(JBFK) 에도 설치되었다. 이어 1945 년 광복 직전까지 대구(JBGK) 광주 (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목포 (JBNK) 마산(JBOK) 성진(JBPK) 청주(JBQK) 에도 속속 방송국이 개설되어, 경성중 앙방송국 외에 열여섯 군데 지역방송국이 존재하게 되었다. 당시 지역방송국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중앙방송국에서 송출한 방송을 중계하는 것이었으나, 때때로 독자적인 방송 프로그램을 조금씩 선보이기도 했다. 지역방송국의 그러한 독자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과 지역성이 연결되는 지점을 엿 볼 수 있을 것인데, 대중음악에서도 그런 예가 발견된다. 예컨대, 부산방송국에서는 1936년 6 월에 신인가수 김기태( 金 琦 泰 ) 와 박수덕( 朴 壽 德 ) 이 출연해 가요곡을 불렀 다. 34) 두 사람은 1년 뒤인 1937년 5 월에 태평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냈으므로, 35) 방 송을 통해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해 인기를 얻은 뒤 서울 음반회사로까지 진출했던 것 으로 보인다. 부산과 함께 지역방송국 개국이 빠른 편이었던 평양과 함흥에도 방송을 통해 지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한 대중음악가들이 존재했다. 36) 이미 1930년대 초반 31) 음반의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반증하는 예로 1933년 6월부터 음반검열이 공식적으로 시행된 것을 들 수 있다. 이준희, 일제시대 음반검열 연구, 한국문화 3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 원, 2007, 167~169 쪽. 32) 서재길, 한국 근대 방송문예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20~21 쪽. 33) 이는 필자가 당시 신문에 수록된 방송 프로그램을 조사해 집계한 결과이다. 관련 내용은 아직 논문으 로 발표하지 않았다. 34) 釜 山 放 送 局 도 朝 鮮 歌 謠 放 送,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 7 일자. 35) 김기태와 박수덕이 함께 부른 데뷔곡은 세월 좇네 ( 태성아( 太 星 兒 ) 작사, 백파( 白 波 ) 작곡, 음반번호 C8287) 이다. 36) 第 二 放 送 에 活 躍 하는 女 性 群 像, 여성 1940년 1 월호. -217-
10 인천학연구 9(2008.8) 부터 왕수복( 王 壽 福 ) 과 선우일선( 鮮 于 一 扇 ) 등 권번 기생 중심으로 많은 가수를 배출 한 평양에서는,1936 년 방송국 개국 이후 김숙희( 金 淑 姬 ) 와 유선원( 柳 善 元 ) 등이 신 인방송 을 통해 지역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해,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음반까지 녹음 했다. 37) 함흥방송국 대중가요 프로그램에서 활약한 가수로는 김숙자( 金 淑 子 ) 심은파 ( 沈 銀 波 ) 손채란( 孫 彩 蘭 ) 박담담( 朴 淡 淡 ) 송춘숙( 宋 春 淑 ) 김일지화( 金 一 枝 花 ) 등이 확인되는데, 이름으로 보아 대부분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함흥 지역에서만 가수 활동을 한 듯하다. 방송을 통해 미미하나마 지역 대중음악의 장이 형성되었던 부산 평양 함흥과 달 리 인천에는 방송국이 들어서지도 않았고, 지역 방송을 통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대 중음악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방송에 관해서는 결국 인천에 이렇다 할 기반이 없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대중음악이 유통되는 장으 로서의미가있는극장 음반 방송을놓고볼때공간적제약이덜한것일수록인천 에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즉, 물리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공간 인 극장의 경우 서울보다 오히려 앞섰던 인천이, 운송 가능한 음반에서는 중심적 역 할을하지못했고, 공간적한계를거의극복한매체라할수있는방송의경우는언 급할 만한 내용조차 거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는 조선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 에 없는 문화의 중심이었던 서울에서 발생한 문화적 자장이 매체에 따라 다른 강도로 나타났고, 거기에인천이또한다른정도로반응해서나타난결과라해석해볼수있 을것이다. Ⅲ. 1930년대 인천의 대중음악 공연 상황 1930년대 초반 이전에는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이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 었다.1928년에 결성된 코리안재즈밴드가 한때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지방 순회공연 을 하기도 했으나, 38) 결성된 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활동을 그만두었던 것으로 보인 37) 김숙희의 데뷔곡은 1939년 6 월에 발매된 애교천국 ( 음반번호 포리돌 X558) 이고, 유선원의 데뷔곡은 1937년 10 월에 발매된 이별의 처녀 ( 이하윤( 異 河 潤 ) 작사, 전우삼( 田 祐 三 ) 작곡, 음반번호 콜럼비아 40783) 이다. 38) 本 報 讀 者 慰 安 의 巡 廻 音 樂 團 出 發, 중외일보 1928년 8월 3 일자. -218-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11 다. 39) 그보다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연극 영화를 무대에 올리면서 배우나 가수가 주 제가나 삽입가를 부르는 경우, 또는 연극 중간에 공연 내용과 관련이 없는 막간 무 대 를 따로 마련해 대중가요 공연을 짤막하게 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공연은아무래도대중음악이주가되는것이라고는할수없다. 명실상부한 대중음악 공연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때는 1933년 이후 5대 음반회사 체제가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였다. 음반회사마다 사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전속계약 을 맺은 가수와 연주자를 보유하고 있는 음반회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하 면서 대중음악 공연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5년 이전에는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설비가 조선에 전혀 없었고, 그 이후에도 시에론(Chieron) 레코드40) 오케레 코드 41) 빅타레코드42) 정도만 서울에 녹음 설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음반을 녹음하 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본사의 시설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으로 녹 음을 하러 가는 것은 소요되는 비용이나 시간으로 보아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녹음분량을모았다가대략계절에한번정도일본을가는것이보통이었다. 43) 전속 계약을 맺은 대중음악가들에게 매달 월급을 지급하고 있던 음반회사 입장에서는 수익 이나 홍보를 위해 녹음 일정 사이에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개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 다. 1930년대에도 S.M.C 째즈밴드, 44) 황금( 黃 金 ) 스윙밴드45)처럼 음반회사와 관련 없 이 조직된 대중음악 공연 단체가 있기는 했으나, 음반회사에서 개최하는 연주회에 비 해서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음반회사의 연주회는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보다 체계를 갖추고 대형화하는 모습을 보였고, 특히 오케레코드는 그러한 흐름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오케레코 드의 공연은 1938 년 무렵부터 그랜드쇼 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1939년 39) 완전히 단정할 수는 없으나, 현재 확인되는 코리안재즈밴드에 관한 마지막 기사는 코앤 스 드의 假 裝 音 樂 會, 동아일보 1928년 12월 21 일자이다. 코앤 은 코리앤 이 잘못 인쇄된 것이다. 40) 시에론레코드가 서울에 녹음시설을 설치한 시기는 1935년 겨울에서 1936 년 봄 사이로 추정된다. 이 준희, 시에론레코드 음반목록에 대한 보론, 한국음반학 13, 한국고음반연구회, 2003, 71~72 쪽. 41) 오케레코드가 서울에 녹음시설을 설치한 시기는 1936 년 후반 무렵이다. 人 氣 流 行 歌 手 의 心 境 을 드름 - 歌 手 生 活 六 年 間, 조광 1938년 7 월호. 42) 빅타레코- 드 京 城 에 吹 込 所, 조선일보 1937년 4월 27 일자. 43) 1938 년 당시 포리돌레코드 전속가수였던 선우일선은 한 해에 두 차례, 태평레코드 전속가수였던 최남 용( 崔 南 鏞 ) 은 여섯 차례 일본으로 가서 녹음을 했다고 한다. 전자는 평균보다 적게, 후자는 평균보다 많이간경우라할수있다. 鮮 于 一 扇 과崔 南 鏞, 삼천리 1938년 8 월호. 44) S.M.C 째즈밴드 결성, 동아일보 1938년 7월 1 일자. 45) 黃 金 스윙 뺀드 一 個 月 間 巡 廻 公 演, 동아일보 1938년 11월 17 일자. -219-
12 인천학연구 9(2008.8) 일본 순회공연 이후로는 조선악극단 이라는 간판을 걸고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한 대 규모 종합 공연을 선보였다. 공연의 중심지는 당연히 음반회사가 근거를 두고 있는 서울이었으나, 조선 각지는 물론 만주 일본 중국으로도 순회공연이 이루어졌다. 일 본이나 중국까지 가서 공연을 하는 것은 사실 일상적인 예가 아니었으므로, 지방 공 연은 통상 서울 기준으로 남쪽에 해당하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중심의 남선( 南 鮮 ) 코스, 서울 기준으로 북동쪽에 해당하는 함경도 강원도 중심의 북선( 北 鮮 ) 코스, 서울 기준으로 북서쪽에 해당하는 평안도 황해도 중심의 서선( 西 鮮 ) 코스, 그리고 만주 코스로 구분해 진행되곤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구분을 좀 더 간소화하여 서선 과 만주를 모두 북선 코스로 넣기도 했다. 예컨대, 1935년 9월부터 11월까지 두 달 넘게 진행된 오케레코드 순회연주는 밀양을 시작으로 김해 마산 진주 통영 부 산 울산 포항 경주 대구 김천 상주 안동 충주 청주 조치원 천안 수원을 도는 남선 코스와, 원산을 시작으로 함흥 흥남 북청 성진 길주 청진 회령 용 정 국자가( 局 子 街 ) 도문 웅기 나진 고성 철원 김화를 도는 북선 코스로 이루 어져 있었다. 46) 인천은위치로보아남선코스에속한다고할수있는데, 뜻밖에도여러공연단체 의순회일정을알려주는기사나광고를보면남선코스에인천이들어있는경우를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바로 위에서 본 오케레코드 순회연주가 그러하고, 1937년 6 월부터 8 월까지 진행된 오케레코드 전국 순회 일정에도 인천이 없으며, 47) 1939년 1 월부터 2 월까지 진행된 오케레코드 남선 순회 일정에도 인천이 없다. 48) 태평레코드에 서 운영한 태평연주회의 1939년 4월 남선 순회 일정 또한 인천을 포함하고 있지 않 다. 49) 사실상 193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때라 할 수 있는 1940년 3월에 있었던 조 선악극단 남선 공연 일정에도 인천은 역시 보이지 않는다. 50) 음반회사와 관련이 없는 공연단체로 앞서 예를 들었던 황금스윙밴드가 1938년 11월부터 12월까지 한 달 동안 전국을 순회할 때에는 첫 지방 공연지로 인천을 택하기도 했지만, 51) 그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 공연 관련 광고와 기사를 모두 다 정리해 분 46) 오케- 地 方 巡 廻 大 演 奏 會, 조선일보 1935년 8월 17 일자. 47) 지방순회 오케- 대연주회, 동아일보 1937년 6월 14 일자. 48) 오케- 그란드쇼-, 동아일보 1939년 1월 19 일자. 49) 태평 演 奏 會, 동아일보 1939년 4월 9 일자. 50) 오케- 그란드쇼-( 朝 鮮 樂 劇 團 ), 동아일보 1940년 3월 9 일자. 51) 각주 45 번 참조. -220-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13 석한 것은 아니나, 당시 인천이 통상적인 순회공연 대상지로 꼽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그렇게 무리는 아니다. 물론 순회공연 대상지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인천이 대중음악 공연의 불모지였던 것은 전혀 아니다. 역시 성근 조사의 결과이기는 하나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1933 년 6 월에는 재미교포 연주가인 최( 崔 ) 리차드의 공연이 동아일보사 인천지국 주최로 극장 가무기좌( 歌 舞 伎 座 ) 에서 열렸고, 52) 1934년 7월에는 조선중앙일보사 인천지국이 주최하고 경성 각 레코드회사 전속( 專 屬 ) 명가수 들이 출연하는 인천 연주의 밤 공 연이 역시 가무기좌에서 열렸다. 53) 1937 년에 열린 덕선악기점 주최, 동아일보사 인천 지국 후원의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연주회는 앞서도 본 바이다. 정식 공연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연으로서 기능을 했던 콩쿠르 대회가 인천에서 열린 예도, 앞서 본 영광 악기점 경우나 1942 년 태평레코드 주최로 열린 레코드 예술상 순회 일정을 통해 확 인할수있다. 54) 이렇게 보면,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아도 인천이라는 지역을 놓고 두 가지 공연 양 태의 차이가 뚜렷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즉, 어느 정도 기간이 소요되는 음반회 사 관련 공연단체 중심의 전국 순회공연은 인천에서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반면, 인 천 지역 신문사 지국이나 음반 판매점 등이 관여하는 간단한 일회성 공연, 역시 단발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콩쿠르 대회 등은 인천에서도 그리 부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방 순회공연은 서울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연활동의 장을 바꾸어 상대적으로 소외되 어 있는 지방 주민의 대중음악 소비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의미를 어느 정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러한 순회공연 대상지에 인천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천 이넓은의미에서서울중앙무대의소비가능범위로간주되었음을뜻하는것이된 다. 부산이나 목포 신의주 같은 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오로지 공연을 보기 위해 서 울 나들이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인천 주민에게는 그것이 그래도 가 능했다는 말이다. 1930년대 당시 인천의 교통 상황을 보면 위와 같은 추정은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된 다.1934년 11월 현재 서울과 인천 사이에 놓인 경인선 철로에는 하루 13회 열차가 왕복하고있었다. 경성역에서인천역까지가는데한시간이채걸리지않았고, 서울 52) 故 國 訪 問 빤조 獨 奏 仁 川 과 水 原 에서 開 催, 동아일보 1933년 6월 18 일자. 53) 新 舊 名 歌 手 網 羅 한, 仁 川 演 奏 의 밤,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11 일자. 54) 레코- 드 藝 術 賞, 매일신보 1942년 3월 4 일자. -221-
14 인천학연구 9(2008.8) 기준으로 오전 6시대부터 오후 11 시대까지 열차 이용이 가능했다. 55) 오늘날 경인선 전철 운행과 비교해 보면 배차 간격 외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셈이다. 일제시대 에 경인선은 단선( 單 線 ) 이었기 때문에 배차 간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는 없었으나, 1938년 당시에는 계속 늘어나는 교통 수요에 맞추기 위해 하루 15회 왕복으로 열차 편수가 약간 증가해 있기도 했다. 결국 광복 이후에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무렵 경인선 선로를 복선전철( 複 線 電 鐵 ) 로 개선해 그것을 바탕으로 서울과 인천이 하나가 되어 특별도( 都 ) 로 발전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은, 56) 경인선 열차의 성격 이 서울과 인천 사이에 통근 통학을 가능케 하는 일상적 대중교통수단으로 정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1930년 현재 대중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열차 3등석 요금은 1km에 1.55 전이었다. 1942년에는 그것이 2 전으로 인상되었고, 끝자리를 절상해 5 전, 10전 단위로 맞추는 요금제가 시행되었다. 57) 인천역에서 경성역까지 거리가 38km 정도였으니, 1930년 요 금 기준으로 보면 60 전 정도, 1942년 요금 기준으로 보면 80전 정도가 들었던 셈이 다. 또, 열차 외에 영등포와 인천 사이를 하루 7회 왕복 운행하던 버스를 이용할 경 우, 요금을10 전이상더줄일수도있었다. 58) 인천 안에서도 어디서 어떤 교통편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1930년대 인천과 서울을 왕복하는 데에 드는 비 용은 대략 1원 50 전을 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기권을 이용하는 학생들 은 훨씬 더 저렴한 요금으로 인천과 서울 사이를 왕복할 수도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인천 지역 주민이 서울 부민관( 府 民 館 ) 이나 명치좌( 明 治 座 ) 같은 큰 극장에서 열리는 대중음악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서는, 입장료까지 쳐서 대략 2원 전후로 비용이 들었 으리라 추정된다.1937년 가을 당시 특등급 쌀 1kg가격이 25 전이었다고 하니, 59) 서 울가서공연한번보기위해쌀 10kg 값에육박하는경비를들이는것이결코부 담없는일이라할수는없다. 하지만, 같은시기음반한장가격이보통1원에서 1 55) 改 定 된 重 要 驛 列 車 發 着 時 間, 동아일보 1934년 10월 14 일자. 56) 京 城 仁 川 一 體 計 劃 京 仁 線 을 複 線 電 化, 동아일보 1938년 5월 5 일자. 57) 정재정, 일제의 한국철도침략과 한국인의 대응(1892~1945),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280 ~281 쪽. 58) 京 仁 뻐스- 京 電 이 經 營, 동아일보 1934년 2월 1 일자. 영등포와 인천 사이를 다섯 구간으로 나누 어 각 구간마다 6 전씩 요금이 부과되었다. 영등포에서 인천까지는 30 전이 되는데, 같은 시기 같은 구 간을 3등석 열차로 이동할 경우 42 전 정도가 들었다. 59) 쌀값또인하, 동아일보 1937년 10월 8 일자. -222-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15 원 50 전 정도 했던 점을 감안하면, 대중음악 소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입장에서는 한 두달에한번정도가끔서울나들이를시도할수있었을것으로보인다. 여기까지만 보아서는 인천 지역이 대중음악 공연을 향유하는 데에 오히려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형 공연단체의 순회공연이 활발하지 않아 추가로 비용을 들여 서울까지 가서 봐야 한다는 것은, 설령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부담이라 해도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방 순회공연의 내용과 서울 중앙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내용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수밖 에 없다. 그럴 경우 인천은 오히려 서울을 제외한 지방도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수 준 높은 중앙무대 공연을 현실적인 비용 부담으로 향유할 수 있는 곳이 되기 때문이 다. 실제 조선악극단의 경우 규모가 큰 공연은 회전무대나 특수한 소도구 등을 이용 할 수 있는 서울 명치좌 같은 극장에서만 제대로 할 수가 있어, 극장 설비가 열악한 지방에서는 아예 그런 공연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60) 대중음악 소비에 있어 일제시대 인천은 소외된 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 받은 지역일 수도 있었다. Ⅳ.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가 지역 음악계에 대한 인천의 자각은 상당히 일찍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5 월에 매일신보사 인천지국 주최로 열린 전( 全 ) 인천음악대회 는 인천 출신 음 악가 30 여 명이 참여한 의미 있는 지역 문화행사였다. 61) 참여한인물명단이나연주 된 곡목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아 그 공연을 대중음악과 바로 연결시켜 보기는 어렵지만, 당시 인천 지역 음악가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대중음악 분야에도 어느 정도 는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조우성은 인천 지역 서양음악의 역사를 개관하는 글 에서 일제시대에 인천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을 열거한 바 있는데, 거기에 대중음악 작 곡가 연주가로 활동한 전기현( 全 基 玹 ) 과 김흥산( 金 興 産 ) 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2) 인천에서 출생했거나, 성장했거나, 활동한 대중음악가로 현재 확인할 60) 나의 이력서, 김정구 26, 한국일보 1979년 9월 15 일자. 61) 仁 川 樂 界 大 家 總 出 音 樂 大 會 豪 華 版, 매일신보 1937년 5월 13 일자. 62) 조우성의 인천이야기, 서양음악, 조선일보 2003년 2월 8 일자. 기사에서는 전기현을 김기현 이라 고 썼다. 全 과 金 을 혼동한 데에서 온 오류인데, 김기현이라 잘못 쓴 예는 그밖에도 종종 보이는 편 이다. -223-
16 인천학연구 9(2008.8) 수 있는 인물로는 전기현과 김흥산 외에도 가수 이화자( 李 花 子 ) 와 묵해낭( 墨 海 娘 ) 이 있다. 또,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작곡가 고가 마사오( 古 賀 政 男 ) 도 인천과 인연을 맺은 인물로 들 수 있다. 고가 마사오(1904~1978) 는 일본 대중음악사에서 첫 손에 꼽히는 작곡가이다. 1930 년에 작곡가로 데뷔한 이후 1970 년대까지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고, 1959년에 일본 작곡가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에 취임한 이후 타계할 때까지 그 직에 있기도 했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국민영예상( 國 民 榮 譽 賞 ) 을 받은 열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또 한국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니, 일제시대에 고가마사오작품을번안해낸곡이현재확인되는것만44 곡에이른다. 63) 가시적으 로드러나는작품외에감각적인현악기선율을특징으로하는이른바 고가멜로디 가한국대중음악양식에암묵적으로끼친영향또한상당하다. 그러한고가마사오 가 인천과 관련이 있는 것은, 1912년에 인천으로 건너와 1914년까지 약 2년 동안 인 천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짧은 기간 거주한 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 만, 시골에서 출생한( 규슈( 九 州 ) 후쿠오카( 福 岡 ) 출신) 고가 마사오로서는 어린 시절 에 접한 인천이 고향과는 너무나도 다른,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근대적 도시였으므 로, 64) 그 의미를 가볍게만 볼 수는 없다. 또 인천에 거주할 당시 그는 형수가 연주하 는 일본 전통현악기 고토( 琴 ) 에 매료되었고, 사촌형으로부터 일종의 개량현악기라 할 수있는다이쇼고토( 大 正 琴 ) 65)를 받기도 했다. 66) 형수의 고토 연주는, 앞서 본 후니 치레코드와 부산 일본인 사회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당시 인천에 집단적으로 거주하 고 있던 일본인 사회의 문화적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와는 약간 달리, 다이쇼고토는 서양음악 도입 이후 새롭게 싹트고 있던 혼성적 음악문화를 상징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14년에 서울로 이주한 고가 마사오는 1922 년에 선린( 善 隣 ) 상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조선에서 줄곧 청소년기를 보냈고, 이후 일본으로 돌아 63) 번안곡으로 소개된 고가 마사오 작품 목록은 본문 뒤 부록 참조. 64) 菊 池 淸 麿, 評 傳 古 賀 政 男 - 靑 春 よ永 遠 に, アテネ書 房, 2004, 52 쪽. 65) 다이쇼고토는 1912 년( 다이쇼( 大 正 ) 1 년) 에 모리타 고로( 森 田 伍 郞 ) 가 고안해 낸 악기이다. 속이 빈 나 무로 된 몸통에 금속제 줄을 걸고, 줄 위에 간단한 건반을 설치해 운지( 運 指 ) 를 편하게 했다. 왼손으 로 건반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겨 연주한다. 연주법을 배우기가 쉽고 가격도 저렴하여 일본에 서 대중적인 악기로 널리 보급되었다. 66) 高 橋 功, 評 傳 古 賀 政 男, 全 音 樂 譜 出 版 社, 1984, 23 쪽. -224-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17 가 작곡가로 성공한 뒤에는 조선 거주 당시 들었던 조선 민요 선율을 차용해 작품을 쓰기도 했다. 67) 김흥산(1906~?) 은 현재 확인 가능한 인천 출신 대중음악가 가운데 출생 시기가 가 장 앞서는 인물이다. 상세한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1920년대 후반에 일본 으로 건너가 5 년 동안 작곡을 연구하고, 후스 라는 외국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 다고 한다. 68) 김흥산의 이름이 대중음악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3년 10월 무렵으 로, 당시 그는 방송국 대중음악 프로그램에 기타 반주자로 출연을 했다. 69) 이어 1934 년에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무심 70) 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아직 다른 작 품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작곡가로서는 크게 활동하지 못한 듯하다. 1938년에 는 오케레코드 전속 C.M.C 악단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고, 작곡가 박시춘( 朴 是 春 ) 과 함 께 기타를 맡았으며, 기타 외에도 바이올린과 전기기타를 잘 연주했다. 그런데 당시 기사에서는 그를 漢 陽 人 사나히 三 十 세 라고 소개했는데, 71) 이는 다른 기록에 나타 난 그의 이력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일제시대 신문에서 나이가 잘못 소개되는 예는 흔 히 발견되므로 그냥 넘길 수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 모두 인천 출신이라고 되어 있 는그를 서울사람으로쓰고있는점에대해서는생각해볼여지가있다. 단정할수 는 없으나, 인천에서 출생한 뒤 어린 시절에 서울로 이주해 성장했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이력으로는 1943년 3 월 당시 라미라( 羅 美 羅 ) 가극단에서 음 악 담당 스태프로 참여한 정도가 확인된다. 72) 주로 연주가로 활동을 한 일제시대와 달리, 광복 이후 김흥산은 다른 방식으로 대 중음악계에 다시 등장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7 월에 스타(Star) 레코 드가 제1 회 작품으로 슈샨 보이 삼다도 소식 승리 부기 바로 그날 밤 등 을 발표했는데, 73) 스타레코드를 설립한 사람이 바로 김흥산이었다. 74) 부산에서 제물 67) 예컨대 1932년 1 월에 발매된 思 い出 の唄 ( 西 岡 水 朗 작사, 長 谷 川 一 郞 노래, 음반번호 コロムビア 27189) 는 민요 닐니리야 선율을 차용했다. 하세가와 이치로( 長 谷 川 一 郞 ) 는 가수 채규엽( 蔡 奎 燁 ) 이 일본에서 활동할 때 사용한 예명이다. 68) 64 年 度 小 波 賞 金 興 産 氏 에, 조선일보 1964년 9월 12 일자. 황문평, 한국 대중연예사, 부루칸모 로, 1989, 268 쪽. 69) 동아일보 1933년 10월 3 일자, 6 일자 라디오 프로그램. 70) 김안서( 金 岸 曙 ) 작사, 김선초( 金 仙 草 ) 노래, 음반번호 40493. 71) 째스의 獅 子 座 C.M.C 藝 術 家 群 像, 동아일보 1938년 4월 21 일자. 72) 羅 美 羅 歌 劇 團 광고, 매일신보 1943년 3월 8 일자. 73) 스타- 레코- 드 第 一 回 作 品 遂 出 現, 동아일보 1954년 7월 4 일자. -225-
18 인천학연구 9(2008.8) 포악기점 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손영준( 孫 泳 俊 ) 이라는 사람과 함께 음반 제작을 기획 했고, 전쟁 직후라 국내 여건이 좋지 않았으므로, 녹음은 부산에서 하고 음반 프레스 작업은 일본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음반을 생산했다고 한다. 스타레코드는 휴전 이후 새로 등장한 음반회사 가운데 제1 호로 꼽히는 곳이다. 김흥산이 운영하고 있던 제물 포악기점은 스타레코드 광고에도 총판매점 으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그가 인천 출신 이라는사실을방증하는자료로도볼수있을것이다. 스타레코드가 이후 언제까지 음반을 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가 없다. 다만, 음반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존속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문인지 김흥산은 음악활동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1957년 10 월에 대한농 아( 聾 啞 ) 리듬교육연구소 를 창설하고 농아연주단 을 조직해 이끌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던 당시에 그가 장애인 음악교육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인식하 고 지속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일제시대 어린이운동 에 앞장섰던 방정환( 方 定 煥 ) 을 기려 제정된 소파상( 小 波 賞 ) 이 대중음악가로 활동했던 그에게 1964 년 수여된 까닭은 그러한 공적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75) 전기현(1909~?) 은 1930년대에 손꼽히는 대중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며 최소한 250곡 이상을 발표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나, 76) 그게 관한 자료는 오히려 김흥산에 비해 서도 많지 않다. 그의 이력에 관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사는 현재 단 한 건이 확인될 뿐이다. 77) 인천에서 출생해 서울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는 김흥산과 달리, 전기현은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으로 이주해 성장했고,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인천부청( 府 廳 ) 에 근무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보 인 그는 열세 살 때 고사카( 高 阪 仁 風 ) 라는 일본인으로부터 작곡법과 바이올린 연주 지도를 받았다. 만약 개인지도를 받은 곳이 인천이었다면, 1920년대 전반 당시 인천 지역의 서양음악 유통 상황을 엿보는 데에 좋은 참고가 되는 사례이다. 인천부청을 곧 사직한 전기현은 음악동지회 라는 음악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또한 인천에서 조직 된 것이라면 드물게 확인되는 지역 음악단체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1930 년대 초에는 밴드부가 설치되어 있던 극단 조선연극사( 朝 鮮 硏 劇 舍 ) 에 입단했다. 74) 황문평, 한국 대중연예사, 341 쪽. 75) 각주 68 번 참조. 76) 전기현이 작곡한 작품 목록은 본문 뒤 부록 참조. 77) 本 社 後 援 으로 全 朝 鮮 音 樂 巡 禮 콜럼비아 男 女 歌 手 總 動 員 出 演 歌 手 는 누구?, 조선중앙일보 1934 년 9월 13 일자. -226-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19 당시 조선연극사에는 배우 겸 극작가로 활동하던 왕평( 王 平 ) 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는 1932년에 조선으로 진출한 포리돌레코드 지점에서 문예부장을 맡고 있기도 했 으므로, 그 인연으로 전기현이 이후 포리돌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5월 방송 프로그램에 작곡자로 기재되어78)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 작한 전기현은, 이어 시에론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발표했고, 포리돌레코드에 전속된 뒤 첫 히트곡 고도( 孤 島 ) 의 정한( 情 恨 ) 을 발표해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1934 년부터 콜럼비아레코드로 옮겨 전속작곡가로 활동했으며, 이 무렵 본명 외에 유일( 劉 一 ) 이라는 필명으로도 곡을 발표했다. 1936 년부터는 유일춘( 柳 一 春 ) 이라는 필명으로 태평레코드에서도 작품을 발표했다고 하며, 79) 1938년 말에는 아예 태평레코드로 전 속을 옮겼다.1940년에 잠시 태평레코드에서 나와 전속 없이 여러 음반회사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다가, 1941 년에 다시 태평레코드로 복귀했다. 태평레코드 전속으로 있 는 가운데 1941년부터 1942 년까지 콜럼비아레코드에서도 몇몇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때 계약 문제로 본명을 쓸 수가 없어 하영랑( 河 英 琅 ) 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43 년에는 라미라가극단에 지휘를 맡아 참여했는데, 80) 같은 시기 김흥산 역시 라미 라가극단에서 활동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이 인천이라는 지역 배경이 같은 덕에 평 소교분을나누고있었을것이라추정해볼수도있다. 1943 년까지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한 전기현이었으나, 1944년 이 후로는 어떤 행적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증언에 의하면 그가 1940년대 초에 이미 아편에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하므로, 81) 1944년 무렵에 그로 인해 건강상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한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지만, 1956 년 이후 기사에서 모두 고인 이라 표현하고 있 는 것으로 보아, 82) 늦어도 1950 년대 중반 이전에는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 이화자(1918?~1950?) 는 인천 출신 대중음악가 가운데 일제시대에 대중적 인기가 가장 높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또한 그러한 인기에 비해서는 이력이 그다지 상세 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화자에 관해 언급한 선행연구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83) 78) 동아일보 1933년 5월 17 일자 라디오 프로그램. 79) 반야월, 불효자는 웁니다 - 반야월 회고록, 화원, 2005, 88 쪽. 80) 각주 72 번 참조. 81) 반야월, 불효자는 웁니다 - 반야월 회고록, 146 쪽. 82) 추억의 가요, 추억의 가수들, 명랑 1956년 10 월호. 나 혼자만이 부르는 노래, 명랑 1959년 5 월호. 부부가수 천일야화, 야담과 실화 1961년 6 월호. -227-
20 인천학연구 9(2008.8) 거기서도 기본적인 이력에 관한 서술에 오류나 근거가 분명치 않은 대목이 종종 보인 다. 예를 들자면, 송방송은 이화자가 개성권번 출신이라 했고, 84) 장유정과 이승연 송지영은 이화자가 1916 년에 출생했다고 보았다. 85) 그러나, 이화자의 이력에 관한 정 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당대 기사 두 건 86) 의 내용은 그와 차이가 있다. 기 사에 의하면, 이화자의 본명은 순재( 順 載 ) 이고 고향은 인천이다. 1936년 당시 열아홉 살이었다고도 하고 1940 년 당시 스물두 살이었다고도 하므로, 나이 세는 방식이 두 가지로 가능함을 감안할 때 출생 시기는 1917년에서 1919 년 사이가 된다. 1936년 당 시에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인천권번 소속 기생이자 뉴코리아(New Korea) 레 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화자가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계기에 관해, 박찬호는 작곡가 김용환( 金 龍 煥 ) 이 1935 년 여름에 부평 술집에서 작부로 일하고 있던 그를 발견해 가수로 발탁했 다고 썼으나, 87) 김용환과 함께 이화자를 발탁한 김소동( 金 蘇 東 ) 은 구체적인 시기와 부 평이나 작부에 대한 언급 없이 김용환과 같이 인천에 놀러 갔다가 이화자를 발견했 다고 회고했다. 88) 부평이 이미 1940 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인천과 부평을 차이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는 없겠으나, 작부 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근거를 보 다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36년 3월 방송에 출연하여89) 가수로서 이 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화자는, 뉴코리아레코드에 한 해 전속으로 있다가 1937년부터 는 포리돌레코드로 옮겨 활동했다. 다시 1938년 가을에는 오케레코드로 전속을 옮겼 고, 이후 꼴망태 목동 어머님전상백( 前 上 白 ) 화류춘몽 가거라 초립동 목 단강 편지 등을 발표하여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가 되었다. 음반을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악극단 무대에서도 주연으로 활동했고, 광복 직전 1945 년에는 조흥( 朝 興 ) 연예대 같 83) 송방송, 신민요가수의 음악사회사적 조명 - 권번 출신의 여가수를 중심으로, 낭만음악 55, 낭만음 악사, 2002; 장유정, 1930년대 기생의 음악활동 일고찰 - 대중가요 가수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30,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4;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인천학연 구 6, 인천학연구원, 2007. 84) 송방송, 신민요가수의 음악사회사적 조명 - 권번 출신의 여가수를 중심으로, 59 쪽. 85) 장유정, 1930년대 기생의 음악활동 일고찰 - 대중가요 가수를 중심으로, 495~496 쪽; 이승연 송지 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65 쪽. 86) 人 氣 歌 手 알범, 사해공론 1936년 5 월호. 朝 鮮 樂 劇 團 의 名 花 들 歌 手 李 花 子 孃, 만선일보 1940 년 7월 31 일자. 87) 박찬호( 안동림 역), 한국가요사, 현암사, 1992, 348 쪽. 88) 나의 이력서, 김소동 25, 한국일보 1982년 4월 9 일자. 89) 동아일보 1936년 3월 2 일자 라디오 프로그램. -228-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21 은 공연단체에 참가하기도 했다. 90) 일제시대에이화자가발표한곡은현재대략130 곡 가까이 확인이 된다. 91) 광복 이전에 절정의 인기를 누린 이화자였으나, 광복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몇몇 악 극단 무대에 서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전기현과 마찬가지로 이화 자도 1940 년대 전반에 이미 심각한 아편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92) 그것이 가 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화자의 죽음에 관해서도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보이는 공연 광고가 1950년 3 월까지는 확인이 되나, 93)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구체적 인 연도를 밝히지 않고 35 세로 죽었다고만 쓴 후대 기록이 있고, 94) 북한 학자 최창호 의경우이화자가 1953 년에중국에서마약중독으로죽었다고쓰기도했으나, 95) 어떤 자료에근거했는지는알수없다. 인천지역대중음악가로거론해볼수있는마지막인물은가수묵해낭이다. 묵해 낭에대해현재알수있는사실은1941 년에데뷔해 수건일기 등노래네곡96)을 발표했다는 것과 태평레코드 월보( 月 報 ) 에 실린 仁 川 海 關 産 의 墨 色 의 아가씨. 나면 서부터 異 國 的 인 强 한 그로味 를 이 手 巾 日 記 에 담엇다. 라는 선전문구 및 작은 사 진이 전부이다. 97) 인천 출신 가수임을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들고 나와, 예명도 용모 의 특징과 출신 배경을 조합해 검은 살결( 墨 ) 의 인천 바닷가 출신( 海 ) 아가씨( 娘 ) 라 는뜻을담아지은것이이채롭다. 묵해낭의가수활동은그다지성공적이지못해광 복이후에도전혀그흔적을찾을수없으나, 98) 그가 부른 노래 가운데 인천과 관련 있는 작곡가 전기현이 만든 꿈꾸는 눈썹 이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만약 묵해낭이 인기 있는 가수로 계속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면, 목포 가수 이난영이 오빠이자 목 90) 朝 興 演 藝 隊 광고, 매일신보 1945년 1월 21 일자. 91) 이화자가 부른 작품 목록은 본문 뒤 부록 참조. 92) 박찬호( 안동림 역), 한국가요사, 355 쪽. 93) 國 都 樂 劇 團 광고, 동아일보 1950년 3월 25 일자. 94) 김기제 편, 한국연예대감, 성영문화사, 1962, 337 쪽. 95)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평양출판사, 1997, 406 쪽. 96) 묵해낭이 부른 작품 목록은 본문 뒤 부록 참조. 97) 월보는 음반회사에서 매달 발매하는 새로운 음반을 선전하기 위해 간행한 소책자이다. 정식 명칭은 아니나 편의상 월보라 칭하고 있다. 태평레코드 월보 1941년 6 월호. 98) 동아일보 1946년 7월 27 일자 朴 是 春 樂 團 창립공연 광고에 묵해란( 墨 海 蘭 ) 이라는 이름이 보이 나, 묵해낭과같은사람인지여부는알수없다. -229-
22 인천학연구 9(2008.8) 포 출신 작곡가인 이봉룡과 짝을 이루어 목포의 추억 목포는 항구 등 목포 노 래를 발표했던 것처럼 전기현과 짝을 이루어 인천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Ⅴ. 맺음말 앞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일제시대 인천의 대중음악적 위상은 한계를 드러냄 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천에는 음반회사도 없었고, 방송국도 없었 고, 대형 대중음악 공연단체가 순회공연을 하러 자주 오지도 않았고, 평양 같은 도시 에 비하면 거기서 출생한 대중음악가도 많지 않았다.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점 가운 데 상당수는 수도 서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인천의 태생적인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천은 서울보다도 일찍 근대적 극장 문화를 발전시 켰고, 지역 음반 판매점이나 신문사 지국의 활동에 힘입어 그만의 대중음악 유통망을 분명히 유지하고 있었고, 일제시대 최고의 가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화자를 배출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이 드리운 그늘은, 경우에 따라 역으로 인천 지역 대중의 대중음악 소비 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순기능을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평양 함흥 부산 목포 등에 비하면 인천의 지역적 특성이 미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비단 대중음악 분야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나름의 대중음악 문화를 유지하고 인적 물적 토대를 발전시켰기에, 광복 이후에는 인천 관련 대중가요나 인천 출신 대중음악가들 이 보다 많이 등장할 수 있었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묻혀 온 역사를 있는 그 대로만 평가를 한다 해도, 인천의 대중음악사적 의미는 충분히 되살아날 수 있다. 1935년에는 분명치 않은 이유로 이른바 조선 10대 도시 에 선정되지 못했지만, 이제 다시 선정을 한다면 누구라도 인천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종원고제출일 : 2008. 6. 30 원고심사일 : 2008. 7. 16 주제어 : 인천, 대중음악, 지역성, 대중매체, 이화자, 전기현 - 230 -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23 부록( 연도란네자리숫자가운데앞두자리는년, 뒤두자리는월을표시) 번안곡으로 소개된 고가 마사오 작품 목록 제목 연도 작사 노래 상표 음반번호 달빛 여힌 물가 3201 홍로작 김선초 콜럼비아 40269 아가씨 마음 3202 홍로작 강석연 콜럼비아 40284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3203 채규엽 콜럼비아 40300 희망의 고개로 3203 채규엽 콜럼비아 40300 님 자취 찾아서 3209 채규엽 콜럼비아 40332 창에 기대어 3211 김선초 콜럼비아 40363 비싸게 굴지 마라 3302 김문규 김선초 채규엽 콜럼비아 40378 못잊을사랑 3305 채규엽 콜럼비아 40425 아름다워라 3307 김선영 콜럼비아 40438 사랑은 구슬퍼 3312 채규엽 콜럼비아 40468 희망의 북소리 3401 유도순 채규엽 콜럼비아 40475 떠도는 신세 3401 김동진 채규엽 콜럼비아 40488 병운의 노래 3402 김동진 채규엽 콜럼비아 40490 비련의 야곡 3408 이일해 김선초 콜럼비아 40527 아가씨 마음 3411 김덕희 송영애 리갈 C221 달 같은 님 3412 범오 전옥 콜럼비아 40566 눈물의 바다 3507 범오 강홍식 콜럼비아 40616 외로운 길손 3508 유도순 채규엽 콜럼비아 40628 숨어서 우는 울음 3509 유도순 최영희 콜럼비아 40636 사랑의 십자가 3602 유영일 미스리갈 리갈 C310 무지개 설움 3603 채규엽 오케 7002 서글픈 마음 3603 채규엽 오케 7002 우리 둘은 젊은이 3604 김능인 김해송 이난영 오케 1880 사나이 설움 3605 박영호 김해송 오케 1887 캠프의 노래 3606 문하연 리갈 C334 꽃서울 3608 박영호 김해송 오케 1906 사나이 스물다섯 3609 박영호 김해송 오케 1915 가을에 보는 달 3610 범오 전옥 콜럼비아 40713 아 글쎄 어쩌면 3706 박영호 이난영 오케 12007 처녀일기 3706 박영호 송달협 오케 12007 순정의 달밤 3706 박영호 송달협 오케 1998 캠핑전선 3706 박영호 남인수 오케 12008-231-
24 인천학연구 9(2008.8) 꿈을 안고 3708 박영호 송달협 오케 12039 눈물의 색등 3708 박영호 고복수 오케 12040 아가씨 운명 3711 박영호 남인수 오케 12062 남쪽의 여수 3808 조명암 남인수 오케 12150 감격의 언덕 3809 조명암 남인수 오케 12155 추억의 청춘가 4010 이가실 마월송 왕죽희 콜럼비아 44012 흘러간 분홍꿈 4101 산호암 김안라 박소성 콜럼비아 44020 봄편지 4105 김다인 이난영 오케 31035 지원병의 어머니 4108 조명암 장세정 오케 31052 백련홍련 4110 이가실 이해연 콜럼비아 40876 영춘화 4301 남려성 이해연 이향란 콜럼비아 40902 열사의 맹서 4301 이가실 이규남 콜럼비아 40902 전기현 작품 목록 제목 연도 작사 노래 상표 음반번호 청춘이 감이로다 3307 김진문 신태봉 시에론 103 담바구야 3307 이고범 나선교 신태봉 시에론 107 월색 따라 3308 이고범 나선교 신태봉 시에론 107 나루에 어둠 올 때 3308 김선영 콜럼비아 40440 아리랑 세상 3308 김선영 콜럼비아 40440 추억 3308 전기현 전옥 포리돌 19072 도라지타령 3309 왕평 지계순 포리돌 19077 그대여 아는가 이 마음을 3309 이백수 전옥 포리돌 19076 고도의 정한 3310 청해 왕수복 포리돌 19086 젊은 마음 3311 청해 왕수복 포리돌 19088 카페행진곡 3312 왕평 미스포리돌 미스터포리돌 포리돌 19095 외로운 꽃 3312 전기현 왕수복 포리돌 19094 언제나 봄이 오랴 3402 왕평 왕수복 포리돌 19110 섬밤 3402 유도순 전옥 콜럼비아 40481 열여덟 살의 봄 3402 유도순 윤옥선 콜럼비아 40482 진달래의 애심곡 3402 유도순 김선초 콜럼비아 40483 소녀연심곡 3402 유도순 김선영 콜럼비아 40484 그리운 님 3402 김희규 전옥 콜럼비아 40481 가고 싶어 3403 박영호 김용환 포리돌 19118 청춘회포 3403 전기현 왕수복 포리돌 19117 지향 없는 몸 3403 임창인 전옥 콜럼비아 40492 봄은 왔건만 3404 전기현 왕수복 포리돌 19122-232-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25 그 어데로 3404 전기현 왕수복 포리돌 19122 나도 몰라 3404 지경순 김용환 포리돌 19124 물길천리 3404 유도순 전옥 콜럼비아 40499 못 잊어요 3405 왕평 왕수복 포리돌 19130 옛 님을 그리면서 3407 김억 장일타홍 리갈 C197 울음의 벗 3408 이하윤 전옥 콜럼비아 40528 그 여자의 반생 3409 왕평 왕수복 포리돌 19153 모던비가 3409 나운규 김용환 포리돌 19152 월야의 탄식 3409 임서방 신카나리아 리갈 C209 못 잊을 장미화 3410 김잔듸 김선초 콜럼비아 40535 가을시악씨 3410 이백수 김선초 콜럼비아 40535 감상의 가을 3410 김희규 김선영 리갈 C220 가시옵소서 3411 유도순 강홍식 콜럼비아 40558 눈물 젖은 가야금 3411 범오 강홍식 콜럼비아 40558 달도 밝지요 3411 나운규 김선영 리갈 C221 첫사랑 3411 유일 장일타홍 리갈 C222 꽃이 피면 3411 임서방 신카나리아 리갈 C222 사향 3412 김안서 전옥 콜럼비아 40566 조선타령 3412 유도순 강홍식 콜럼비아 40565 풍년맞이 3412 유도순 강홍식 조금자 콜럼비아 40565 어이 가리 3412 유도순 석금성 콜럼비아 40574 달마중 가자 3412 유도순 석금성 콜럼비아 40574 눈오는 밤 3412 이하윤 송영애 리갈 C229 원수의 고개 3412 유도순 신카나리아 리갈 C229 시들은 청춘 3501 서두성 채규엽 콜럼비아 40575 탄식하는 밤 3501 이하윤 전옥 콜럼비아 40575 밤엿장사 3501 유일 신카나리아 리갈 C239 눈물 흘리며 3501 임창인 신카나리아 리갈 C239 아내의 무덤 안고 3502 유도순 강홍식 콜럼비아 40582 옛 생각 3502 김안서 석금성 콜럼비아 40585 울음은 한이 없네 3502 이하윤 조금자 콜럼비아 40581 고도의 추억 3502 이하윤 임헌익 콜럼비아 40583 고도에 지는 꽃 3502 왕평 이경설 포리돌 19177 수줍은 처녀 3503 유도순 전옥 콜럼비아 40593 정 두고 가신 님 3503 전기현 김선초 콜럼비아 40594 공허에 지친 몸 3503 천우학 신카나리아 리갈 C253 님 생각 3503 노자영 신카나리아 리갈 C260 정든 포구 3504 김희규 김선초 콜럼비아 40600-233-
26 인천학연구 9(2008.8) 비단실사랑 3507 유도순 전옥 콜럼비아 40624 사랑의 노래 3508 노춘성 석금성 콜럼비아 40626 님의 넋 3508 유도순 석금성 콜럼비아 40626 눈물의 일생 3509 유도순 최영희 콜럼비아 40636 잃어진 첫사랑 3510 유도순 김옥선 콜럼비아 40637 눈물의 배따라기 3510 김낙천 장일타홍 리갈 C291 청춘의 비문 3511 노은수 장일타홍 리갈 C296 일야몽 3512 이하윤 전옥 콜럼비아 40649 님 무덤 앞에서 3512 유영일 미스리갈 리갈 C303 낙화암의 천년몽 3601 유도순 강홍식 콜럼비아 40653 희망의 종이 운다 3601 유도순 채규엽 콜럼비아 40654 님의 그림자 3601 천우학 김옥경 리갈 C308 새봄맞이 3602 곤로생 조금자 콜럼비아 40659 성삼문의 노래 3602 유영일 미스리갈 리갈 C310 두 마음 한 뜻 3602 김잔듸 김옥경 리갈 C311 애원 3603 노춘성 김옥경 리갈 C320 사공의 아내 3604 유도순 전옥 콜럼비아 40667 가여운 여자 3605 유도순 조금자 콜럼비아 40672 가실여든 3605 유영일 최창선 리갈 C327 가여운 하루밤 3605 백파 최남용 태평 C8205 청춘시대 3605 백파 최남용 태평 C8205 유랑의 가수 3606 유도순 채규엽 콜럼비아 40677 수양버들 3608 유도순 전옥 콜럼비아 40694 울기는 누가 울어 3608 김운 미스리갈 리갈 C350 십년이 어젠듯 3609 김백오 장옥조 콜럼비아 40703 추억의 불면조 3610 이하윤 강홍식 콜럼비아 40711 못 오실 님 3610 이하윤 안명옥 콜럼비아 40712 날 좀 보소 3610 이고범 조채란 태평 C8253 어이나 할 것인가 3610 이고범 최남용 태평 C8251 너무 가엾오 3610 이고범 김응선 태평 C8252 십리고개 3610 이고범 최남용 태평 C8253 사랑을 믿지 마라 3611 김백오 김인숙 콜럼비아 40720 젊은이 노래 3612 이서구 최남용 태평 C8259 처녀행진곡 3701 천우학 이정원 리갈 C382 아리랑의 꿈 3701 금오 장일타홍 리갈 C383 이별의 눈물 3702 김백오 안명옥 콜럼비아 40743 옥루몽 3702 유영일 박영희 리갈 C387 무명화 3703 범오 강홍식 콜럼비아 40749-234-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27 가슴에 지는 꽃 3703 이하윤 김인숙 콜럼비아 40747 농부가 3703 강운성 윤혜선 콜럼비아 40749 다시 와 보니 3703 서항석 이정원 리갈 C392 녹수 3703 김안서 이정원 리갈 C392 강산의 신록 3704 이하윤 강홍식 콜럼비아 40752 추억의 초적 3705 유영일 이정원 리갈 C399 찾지나 말지 3706 이하윤 김인숙 콜럼비아 40762 나 홀로 울 때 3706 이서구 최남용 태평 C8295 춤추는 아가씨 3707 현우 김인숙 콜럼비아 40768 어디로 가셨느냐 3707 천우학 한화연 리갈 C406 가는 님을 잡지 마소 3708 현우 함영애 콜럼비아 40772 그러지 마세요 3709 현우 김인숙 콜럼비아 40777 에헤라 청춘아 3709 현우 김인숙 콜럼비아 40776 사랑은 꿈결 3710 이노홍 김인숙 콜럼비아 40784 상록수 3711 이노홍 강홍식 유선원 콜럼비아 40786 청춘명랑보 3711 이하윤 유선원 콜럼비아 40787 흐르는 세월 3711 현우 유종섭 콜럼비아 40789 정의의 행진 3711 김억 정찬주 콜럼비아 40793 두메아가씨 3712 소공자 강홍식 최명선 콜럼비아 40790 연지 찍고 곤지 찍고 3712 박영호 박정림 태평 C8331 추억의 윤락 3712 박영호 박정림 태평 C8338 포구에 우는 여자 3801 이하윤 유선원 콜럼비아 40795 남자의 눈물 3801 이하윤 박세환 콜럼비아 40796 마지막 혈시 3802 박영호 남일연 콜럼비아 40801 신접살이 풍경 3802 고마부 미스리갈 리갈 C429 울려 주지 마세요 3803 이노홍 미스리갈 리갈 C432 뱃사공이 좋아 3804 처녀림 김해송 남일연 콜럼비아 40806 산이 좋아 물 좋아 3804 고마부 김홍매 리갈 C436 지배인 될 줄 알구 3805 처녀림 남일연 콜럼비아 40808 초로인생 3805 김포몽 김홍매 리갈 C439 외로운 꿈 3805 천우학 함국심 리갈 C439 비 오는 나진항 3807 박영호 남일연 콜럼비아 40821 비 오는 선창 3807 이고범 최남용 태평 C8510 눈물의 금강환 3808 박영호 박향림 콜럼비아 40822 바람 든 열폭치마 3808 박영호 남일연 박향림 신 회춘 콜럼비아 40825 백만장자의 꿈 3808 김수련 강홍식 콜럼비아 40825 꽃바람 님바람 3810 김다인 남일연 콜럼비아 40832-235-
28 인천학연구 9(2008.8) 연애쌍곡선 3810 김익균 유종섭 콜럼비아 40833 청춘엽서 3810 박영호 신회춘 콜럼비아 40832 바다의 자장가 3811 김다인 신회춘 이옥란 콜럼비아 40836 울고 간 용산역 3811 김다인 신회춘 콜럼비아 40836 기생수첩 3812 김다인 이옥란 콜럼비아 40839 열매나 갖고 가소 3812 김상화 김장미 콜럼비아 40838 탄식하는 캐래반 3901 천우학 김춘희 리갈 C459 님도 꿈이런가 3901 이하윤 이옥란 콜럼비아 40842 울고 넘는 무산령 3901 박영호 박정림 태평 C8601 유랑극단 3901 박영호 백년설 태평 C8602 백두산 바라보고 3901 박영호 미스코리아 태평 C8603 달 같은 님아 3901 김다인 미스코리아 태평 C8603 천만에 말씀이오 3902 을파소 김춘희 리갈 C461 똥그랑 땡땡 3902 김다인 미스코리아 태평 C8607 상선뽀이 3902 박영호 채규엽 태평 C8610 은어알 처녀 3902 처녀림 미스코리아 태평 C8611 흘겨본 첫사랑 3902 무적인 송기옥 태평 C8612 두견화사랑 3902 천아토 백년설 태평 C8611 남치마 탄식 3904 이노홍 김숙현 리갈 C465 별일이 다 많아 3904 김다인 박향림 콜럼비아 40852 청춘다방 3905 박영호 박정림 태평 C8624 국경의 등불 3906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29 온돌야화 3907 김다인 이병한 함석초 리갈 C471 국경의 부두 3908 유도순 고운봉 태평 C8640 아들의 하소 3908 유도순 고운봉 태평 C8640 천리이별 3908 유도순 송낙천 태평 C8637 네 고향 내 고향 3908 유도순 송낙천 태평 C8637 사향몽 3908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38 애련화 3908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38 낙화암의 옛 꿈 3908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46 노래하자 젊은이 3908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46 광동아가씨 3909 이고범 왕숙랑 태평 C8642 제2 유랑극단 3909 이고범 채규엽 태평 C8643 조선의 명산 3911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51 삼천리 오대강 3911 유도순 채규엽 태평 C8651 정한의 달빛 3911 유도순 왕숙랑 태평 C8652 일자일루 3912 유도순 백년설 태평 C8656 압록강 뗏목노래 4001 유도순 선우일선 태평 C8661-236-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29 그대여 왜 우는가 4001 이고범 채규엽 태평 C8663 정한의 십년 4001 임서방 신카나리아 태평 C8664 고향생각은 병이드냐 4002 진우촌 고운봉 태평 C8669 비 오는 해관 4002 조경환 백년설 태평 C2001 봄은 청춘의 향기다 4004 이서구 채규엽 태평 C8672 춘소화월 4006 조경환 백년설 태평 C2003 순정애곡 4006 조경환 선우일선 태평 C2004 청춘문답 4006 유도순 고운봉 태평 C8677 제3 유랑극단 4006 유도순 백년설 태평 C2003 쌍심무 4006 유도순 선우일선 태평 C2004 울리는 백일홍 4009 이가실 계수남 콜럼비아 44010 만주로 가는 님 4009 이가실 손복춘 콜럼비아 44010 밤주막 4010 금영화 계수남 콜럼비아 44012 섧다 홍녀 4012 황금심 빅타 KA3027 눈물의 승방 4012 화산월 조백오 빅타 KA3027 타향천리 4012 이가실 손복춘 콜럼비아 44016 사창야월 4101 이가실 손복춘 콜럼비아 44019 목단강 술집 4101 이가실 계수남 콜럼비아 44019 방물장수 아주머니 4103 이가실 왕죽희 콜럼비아 44026 타향에 찾는 정 4103 이서구 계수남 콜럼비아 44026 방앗간아가씨 4104 이고범 박단마 빅타 KA3035 꽃 있는 목가 4104 이고범 박단마 빅타 KA3033 풋댕기 탄식 4104 김송파 조백오 빅타 KA3033 추풍령 사건 4104 조명암 장세정 오케 31022 야루강 춘색 4104 이가실 손복춘 콜럼비아 44030 푸념사거리 4105 이가실 손복춘 콜럼비아 44032 꽃 지는 백마강 4106 이가실 마월송 콜럼비아 44033 도라지 낭낭 4106 불사조 백난아 태평 C5002 승가리 고낭 4107 김다인 백난아 태평 C5004 꾀꼬리 곡마단 4107 김영일 진방남 태평 C5007 아세아의 종 4107 진방남 태평 C5007 꿈꾸는 눈썹 4107 불사조 묵해낭 태평 C5008 통타령 4107 불사조 모란봉 태평 C5005 미나리 이십세 4107 불사조 모란봉 태평 C5005 하르빈 풍경 4110 김성봉 옥잠화 콜럼비아 40877 산해관사랑 4111 김영일 백난아 태평 C5017 팔선녀 4111 불사조 모란봉 태평 C5015 기러기 편지 4111 불사조 모란봉 태평 C5015-237-
30 인천학연구 9(2008.8) 아리랑 만주 4112 윤해영 백년설 태평 C5020 백년항구 4112 처녀림 백년설 태평 C5020 아리숭 고개 4112 김영수 옥잠화 콜럼비아 40882 잘있거라 인풍루 4112 유도순 김영춘 콜럼비아 40882 여명의 아침 4201 원상준 김홍길 빅타 KA3038 사나이 기풍 4201 김소석 태성호 태평 C5021 백장미의 꿈 4201 김영일 진방남 태평 C5022 민초합창 4201 박영호 백난아 태성호 태평 C5021 도라지 순정 4201 유도순 이해연 콜럼비아 40884 인생썰매 4202 처녀림 백난아 태평 KC5026 낙엽 지는 신작로 4202 부평초 이규남 콜럼비아 40885 책력푸념 4202 함경진 남일연 콜럼비아 40886 영산강 뱃사공 4203 김성봉 옥잠화 콜럼비아 40887 타향살이목선 4203 함경진 김영춘 콜럼비아 40887 아가씨 사쿠라 4204 김영일 김영희 태평 KC5030 새 고향 북경차 4204 반야월 태성호 태평 KC5033 해양아 4204 김영일 태성호 태평 KC5035 딸 삼형제 4204 처녀림 김영희 태평 KC5030 인생극장 4204 처녀림 백난아 태평 KC5033 신곰배타령 4206 김다인 모란봉 태평 KC5040 천리사연 4209 김익균 서해림 태평 KC5045 버들잎 수첩 4209 김영일 백난아 태평 KC5045 공주강 4210 김다인 모란봉 태평 KC5050 사막의 영웅 4211 처녀림 나화랑 태평 KC5053 밀림의 달밤 4300 박향민 이인권 태평 KC5077 청춘복지 4300 김다인 진방남 태평 KC5077 화분일기 4301 김영일 백난아 태평 KC5053 꽃피는 북만선 4302 박향민 이인권 태평 KC5061 고원의 십오야 4303 김익균 진방남 태평 KC5066 부여 천리길 4303 김익균 황보은 태평 KC5074 어머니의 기원 4309 신목경조 차홍련 태평 KC5079 월야의 보 4309 김영일 차홍련 태평 C8703 대동강 물결 위에 김다인 모란봉 태평 -238-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31 이화자 작품 목록 제목 연도 작사 작곡 상표 음반번호 섬시악시 3604 박고송 성해성 뉴코리아 1018 새봄맞이 3604 박고송 김교성 뉴코리아 1018 뽕도 따고 님도 따세 3606 박고송 해성 뉴코리아 1021 시악시 열여덟 3606 뉴코리아 1021 금강아리랑 3607 칠석 뉴코리아 1026 청사초롱 3607 박고송 해성 뉴코리아 1026 월미도 3608 은호 은철 뉴코리아 1031 노래가락 3608 뉴코리아 1035 둘러라 3608 박고송 해성 뉴코리아 1048 꽃수레 3608 박고송 초적 뉴코리아 1059 영감마누라 3609 박고송 뉴코리아 1038 단풍이 들 때 3609 천안거사 해성 뉴코리아 1043 편지 3610 박고송 해성 뉴코리아 천리몽 3701 유한 김교성 포리돌 19372 말씀하세요 네 3701 편월 박영배 포리돌 19373 동풍이 불어오면 3701 유한 이면상 포리돌 19381 네가 네가 내사랑 3702 김운탄 이면상 포리돌 19383 정월보름 3702 유한 김교성 포리돌 19385 실버들 너훌너훌 3703 추야월 박영배 포리돌 19393 금송아지타령 3704 김운탄 김저석 포리돌 19399 그네 뛰는 선녀 3705 김운탄 이춘추 포리돌 19407 망둥이타령 3706 김용환 포리돌 19411 패성보 3706 고일출 형석기 포리돌 19413 참말 딱해요 3707 포리돌 19416 신고산타령 3707 김운탄 김용환 포리돌 19423 비련의 자취 3708 포리돌 19425 울어나 다오 3709 포리돌 19429 조선의 처녀 3709 김운탄 석일송 포리돌 19431 사랑의 국경 3710 포리돌 19435 창위에어린달빛 3710 포리돌 19437 잔월초 3711 이운방 김면균 포리돌 19442 처녀의 마음 3711 포리돌 19443 에헤라 노아라 3712 포리돌 왜그렁타령 3801 포리돌 바람타령 3802 포리돌 남원의 봄빛 3803 김용환 포리돌 -239-
32 인천학연구 9(2008.8) 아지랑이 콧노래 3803 백춘파 김교성 포리돌 사랑의 적신호 3806 포리돌 19475 꼴망태 목동 3812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190 님전 화풀이 3812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190 미녀도 3902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212 어머님전상백 3902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212 금강산 절경 3904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223 산심야심 3904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236 얼룩진 화장지 3905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230 노래가락 3906 오케 12243 범벅타령 3906 오케 12243 겁쟁이 촌처녀 3907 조명암 손목인 오케 12248 물방아 3908 김용호 손목인 오케 12245 초가삼간 3908 조명암 김용환 오케 12245 젊어나 좋지 3908 조명암 박시춘 오케 12258 삽살개타령 3909 조명암 김령파 오케 12265 뗏목에 실은 정 3910 조명암 손목인 오케 12274 십오야타령 3911 조명암 낙랑인 오케 12283 울고 간 무명씨 3912 박원 낙랑인 오케 12295 청춘대합실 4001 유모아 낙랑인 오케 12304 신사발가 4001 오케 20005 신청춘가 4001 오케 20005 그 여자의 눈물 4001 문일석 이봉룡 오케 20008 반웃음반눈물 4001 조명암 채월탄 오케 20008 일편단심 4002 박원 박시춘 오케 20015 긴아리랑 4003 오케 20023 애수의 압록강 4003 조명암 손목인 오케 20020 신오돌독 4003 조명암 오케 20023 화류춘몽 4004 조명암 김해송 오케 20024 화륜선아 가거라 4004 조명암 김해송 오케 20024 살랑춘풍 4004 조명암 박시춘 오케 20026 신세한탄 4005 박원 채월탄 오케 20035 화류애정 4005 김용호 손목인 오케 20035 수심의 여인 4005 박원 박시춘 오케 20038 신사발가 4006 문예부 오케 20042 노래가락 4006 오케 20043 청루홍루 4006 조명암 박시춘 오케 20049 신베틀가 4007 김용호 문예부 오케 20051-240-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33 신작노들강변 4007 조명암 문예부 오케 20051 월명사창 4008 조명암 송희선 오케 20055 허송세월 4008 김용호 박시춘 오케 20055 님전 넋두리 4009 조명암 채월탄 오케 K5006 이별이외다 4009 조명암 박시춘 오케 K5006 비 오는 행화촌 4010 이성림 박시춘 오케 K5012 마음의 화물차 4011 조명암 손목인 오케 31004 추풍낙엽 4011 조명암 김해송 오케 31004 마지막 글월 4011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006 얼시구 당기 4011 강해인 박시춘 오케 31006 관서신부 4012 조명암 손목인 오케 31008 눈물의 노리개 4012 조명암 김해송 오케 31008 남산골 다방골 4102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13 오호라 부주전 4102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13 노랑 저고리 4103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17 아리랑 삼천리 4103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17 꽃바람 분홍비 4103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20 눈치로 살았소 4104 이성림 김령파 오케 31023 산염불 4104 조명암 오케 31034 가거라 초립동 4105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27 함경선 장사꾼 4105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27 강원도아리랑 4105 조명암 오케 31034 꽃거리 사정 4106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040 님이란 님자 4107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047 살림단장 4108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054 양산도 당나귀 4109 김다인 박시춘 오케 31060 이호실의 낙화 4109 조명암 김해송 오케 31060 남가일몽 4110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066 요동 칠백리 4110 조명암 김해송 오케 31066 산전수전 4110 조명암 이봉룡 오케 31073 목단강 편지 4203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093 장미와 폭풍 4204 김다인 이봉룡 오케 31098 춘풍곡 4204 조명암 이봉룡 오케 31098 이별 4205 김다인 박시춘 오케 31105 꿈타령 4206 김다인 박시춘 오케 31107 달력걸력 4206 김다인 이봉룡 오케 31107 영산홍 4207 조명암 이봉룡 오케 31113 일편정성 4207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113-241-
34 인천학연구 9(2008.8) 신작도라지 4208 조명암 오케 31125 신작아리랑 4208 조명암 오케 31125 마지막 필적 4209 조명암 이봉룡 오케 31126 비둘기 소식 4212 조명암 김령파 오케 31133 삼천년의 꽃 4212 조명암 김해송 오케 31133 반도의 처녀들 4212 조명암 김해송 오케 31144 결사대의 아내 4301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145 복수염낭 4303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160 옥퉁소 우는 밤 4303 조명암 박시춘 오케 31160 방아타령 4303 조명암 오케 31166 양산도 4303 조명암 오케 31166 묵해낭 작품 목록 제목 연도 작사 작곡 상표 음반번호 수건일기 4106 김영일 이재호 태평 C5001 꿈꾸는 눈썹 4107 불사조 전기현 태평 C5008 남끝동 수첩 4107 불사조 김교성 태평 C5008 산맥을 쓸어안고 4110 김상화 이재호 태평 C5013-242-
일제시대 인천 지역의 대중음악적 위상 이준희 35 < 참고문헌> 권도희, 한국 근대음악 사회사, 민속원, 2004 김기제 편, 한국연예대감, 성영문화사, 1962 박찬호( 안동림 역), 한국가요사, 현암사, 1992 반야월, 불효자는 웁니다 - 반야월 회고록, 화원, 2005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민속원, 2006 이영미 이준희 편, 사의 찬미( 외) 근대 대중가요, 범우, 2006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평양출판사, 199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 1998 황문평, 한국 대중연예사, 부루칸모로, 1989 高 橋 功, 評 傳 古 賀 政 男, 全 音 樂 譜 出 版 社, 1984 菊 池 淸 麿, 評 傳 古 賀 政 男 - 靑 春 よ永 遠 に, アテネ書 房, 2004 김양수, 개항장과 공연예술, 인천학연구 1, 인천학연구원, 2003 김호연, 한국 근대공연예술 성립의 한 양상, 인천학연구 3, 인천학연구원, 2004 서재길, 한국 근대 방송문예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송방송, 신민요가수의 음악사회사적 조명 - 권번 출신의 여가수를 중심으로, 낭만음악 55, 낭 만음악사, 2002 윤진현, 1920 년대 전국순회극단과 인천의 소인극, 인천학연구 2, 인천학연구원, 2003 이소영,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인천학연구 6, 인천학연구원, 2007 이영태,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에 나타난 인천, 인천학연구 4, 인천학연구원, 2005 이준희, 시에론레코드 음반목록에 대한 보론, 한국음반학 13, 한국고음반연구회, 2003 이준희, 1940 년대 후반(1945~1950) 한국 음반산업의 개황, 한국음반학 14, 한국고음반연구회, 2004 이준희, 1950년대 유성기음반사 연구 - 6 대 음반회사를 중심으로, 한국음반학 16, 한국고음반 연구회, 2006 이준희, 일제시대 음반검열 연구, 한국문화 3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7 이현식, 대중문화에 나타난 인천 이미지 연구, 인천학연구 3, 인천학연구원, 2004 이희환, 인천 근대연극사 연구, 인천학연구 5, 인천연구원, 2006 장유정, 1930년대 기생의 음악활동 일고찰 - 대중가요 가수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30, 영 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4 정재정, 일제의 한국철도침략과 한국인의 대응(1892~1945),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廣 井 榮 子, フニチ レコ- ド(FUNIChI RECORD) を通 してみた 日 本, 植 民 地 主 義 と錄 音 産 業 - 日 本 コロムビア外 地 錄 音 資 料 の硏 究 ( 硏 究 成 果 報 告 書 ), 福 岡 正 太, 2007-243-
36 인천학연구 9(2008.8) <ABSTRACT> Popular music and localization in Incheon before 1945 Lee, Jun-hue Introduction and accpeptance of the modern culture bagan so earlier in Incheon than other localities, and popular music was the one of the modern culture. The modern theater system in Incheon that was a background of popular music appeared before 1900. Local record sellers not only distributed popular music records but also set up its performance. However radio broadcast and popular music that was current in the locality by broadcast did not advance independently in Incheon. It's able to be explained that the less spatial restriction of media, the stronger influence of media center, Seoul and the less independence of Incheon. Influence of Seoul was exerted on performance type of popular music in Incheon after early 1930's. Many large performance groups of Seoul did not come to Incheon during their tours, because popular music consumers in Incheon was considered as the equality with that in Seoul. In fact, a visit to Seoul to attend a popular music performance was a little burdensome, but was not impossible. Popular musicians born or bred in Incheon before 1920's were Kim Heungsan, Lee Hwaja, Muk Haenang, Jeon Gihyeon and Koga Masao. Life of the popular musician was related with modern history of Incheon. Key Words : Incheon, popular music, locality, mass media, Lee Hwaja, Jeon Gihyeon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