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東 西齋 모두 前面 半칸은 툇마루이며 그 안에 온돌방을 꾸몄다. ⑤ 內三門 : 正面 3칸, 側面 1칸인 맞배지붕의 平大門이다. 막돌초석 위에 圓柱를 세운 三樑架 의 二翼工 양식이다. ⑥ 外三門 : 正面 3칸, 側面 1칸의 平大門이며 다듬은 圓形초석 위에 圓柱를 세웠다. ⑦ 文會齋 : 正面 3칸, 側面 3칸의 팔작집. 화강암 바른층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 을 놓고 그 위에 圓柱를 세운 五樑架의 二翼工양식이다. 처마는 겹처마, 천장은 宗 樑 위로만 우물 천장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연등 천장으로 꾸몄다. ⑧ 養士齋 : ㄱ字形으로 된 팔작집으로 樣式은 初翼工式이다. 光州鄕校의 祭享日은 春秋 2회이며 음력 2월 上丁日과 8월 上丁日에 집전한다. 지정문화재 13
19. 괘고정수 (掛鼓亭樹) 지정번호 : 기념물 제24호 소 유 자 : 광산이씨 종중 소 재 지 : 남구 원산동 579-1 규 모 : 1그루 시 대 : 조선시대 지 정 일 : 1998년 5월 7일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있는 왕버들로 높이가 약 15m 가량이며, 가슴높이의 직경은 약 1.7m 정도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13m 내외로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필문 이선제(畢門 굃先齊 : 1389 ~ 1454)가 심었으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쇄 락해지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선재의 후손들은 과거에 등제하게 되면 이 나무에 북 을 걸어놓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89년 이선재의 5 대손 이발(굃潑)이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일컬어지는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에 연루되 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자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발의 억울함은 밝혀지게 되었고, 죽은지 300여년이 흐른 뒤에 다시 잎을 피워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선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 나무를 광산이씨문중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다. 34 광주 남구 문화유적
5. 양파정 (楊波亭) 1) 위 치 : 남구 사동 사직공원내 2) 시 대 : 1914년 3) 소 유 자 : 정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양파정은 광주광역시 사동 사직공원입구의 계단상의 높은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바닥은 인조대리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1914년 참봉 정 낙교가 세웠으며 1932년 중건하였다. 운람 정풍현의 기 및 원운 30여개에 달하는 시문의 현판 이 있다. 정낙교의 기에 의하면 옛 석서정(石犀亭)의 유지가 이곳이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 가 된다. 문화유적 67
7. 만오정 (晩悟亭) 1) 위 치 : 남구 효덕동 노대 473번지 2) 시 대 : 1902년 3) 소 유 자 : 함안윤씨문중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만오정은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부락 앞에 위치해 있으며, 1902년 윤하검의 아들 희진, 희성이 건립하였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훼손이 극히 심하여 정 의 사방을 버팀목으로 받쳐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으나 보수가 시급하다. 가의(嘉義)의 품계를 받은 윤하검이 가정이 유족치 못하여 빈객이 찾아와도 접대할 곳이 없음을 노상스럽게 여김에 그의 자손들이 건립하였다. 문화유적 69
11. 남덕정 (覽德亭) 1) 위 치 : 광산구 석정동 120번지 2) 시 대 : 1864 3) 소 유 자 : 갥觀洙 4) 관련문헌 : 新 남덕정은 석정동 석정부락 뒷편에 있으며 최근 보수되어 주변에 철제 울타리를 둘러 보존되고 있다. 건물은 시멘트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워 정면3칸 측면 1칸반의 골기 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중앙은 대청마루이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전면은 고주위에 납도리를 지나가게 한 5량가이다. 내부의 처마는 선자서자래이며 전후좌우퇴집형태로서 회벽나 문화유적 73
13. 불로당 (不걛堂 또는 舞鶴亭) 1) 위 치 : 남구 구소동 165 2) 시 대 : 미상 3) 소 유 자 : 최순기 4) 관련문헌 : 호남문화연구 14집, (1985) 불로당은 일명 무학정이라고도 하며 구소동 1구 마을 앞 도로변 좌측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 칸반의 평기와 8작지붕이다. 문은 2분합문으로서 현재 최순기씨의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양철물받이 채양이 있고 기둥은 정평주초위에 사각기둥을 세워 도리를 올렸 다. 이 불로당에서는 최창규와 동료 8인이 동거하면서 유영강학의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다. 76 광주 남구 문화유적
5. 전의관박태용시혜불망비(前議官朴台鏞施惠不忘碑) 1) 위 치 : 남구 효덕동 노대마을 2) 시 대 : 1965년 3) 소 유 자 : 밀양박씨문중 4) 관련문헌 : 新 前議官朴台鏞施惠不忘碑 議官 朴台鏞의 遺蹟碑는 孝德洞 老大마을 入口에 있으며 원래의 비는 마모되어 새로 세워져 있다. 박태용의 유적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96 광주 남구 문화유적
6. 경운박공재룡공적비(耕雲朴公載龍功蹟碑) 1) 위 치 : 남구 양과동 수산마을 2) 시 대 : 1969년 3) 소 유 자 : 함양박씨문중 4) 관련문헌 : 新 경운박공재룡공적비 박재룡의 공적비는 양과동에서 포충사로 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비는 화강암석제로 공적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공적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화유적 97
7. 성재최공홍진공적비(겛齋崔公鴻鎭功蹟碑) 1) 위 치 : 남구 양과동 수사마을 2) 시 대 : 1963년 3) 소 유 자 : 야과제유지계원 4) 관련문헌 : 新 성재최공홍진공적비 대촌 양과동에서 포충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경운 박재룡비와 함께 있다. 비는 화강암제로 최 홍진의 공적이 음각되어 있다. 공적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8. 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굃先生遺墟碑) 1) 위 치 : 남구 원산동 원산마을 2) 시 대 : 1957 3) 소 유 자 : 光山굃氏門中 4) 관련문헌 : 新 淸心堂 굃調元은 門 先齊의 子이다. 1433년 大村에서 出生 學궋이 뛰어나 正憲大夫 괋曹判 書를 贈職하였고 秀巖書院 五賢堂에 祭享되고 있다. 碑文內容을 보면 다음과 같다. 98 광주 남구 문화유적
9. 계남김선생유허비(桂南金先生遺墟碑) 1) 위 치 :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 2) 시 대 : 1913 3) 소 유 자 : 金仁圭 4) 관련문헌 : 新 桂南金先生遺墟碑는 禾場洞 農幕의 觀湖亭 竟內에 있으며 비갓을 갖춘 화강석碑이다. 碑文의 內容은 다음과 같다. 문화유적 99
韓弼五(1715~1789)와 韓弼괟은 兄弟間으로 모두 父母에 대한 孝誠이 至極하였다. 1760년 父 親喪을 당하여 두 兄弟는 墓所에 侍墓를 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84세로 노망을 하게 되었다. 두 형제는 어머님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겨울철에 산비둘기 고기를 원하는지라 山川을 두루 헤메었으나 산비둘기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산비둘기가 방 으로 들어와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이는 두 형제의 孝誠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하여 동 리 사람들의 치하를 받았다. 그러나 어머님의 臨終에 이르러 두 형제는 손가락을 잘라 번갈아 어 머님의 입속에 피를 흘리면서 차도를 빌었으나 他界하자 상례를 맞고 3년 侍墓를 행하였다. 이 에 國家에서 1862년에 命旌하여 1864년에 雙孝碑를 세웠다. 12. 효부고성이씨기행비(孝婦固城굃氏紀궋碑) 1) 위 치 : 남구 효덕동 노대마을 2) 시 대 : 1983 3) 소 유 자 : 金海金氏門中 4) 관련문헌 : 新 孝婦固城굃氏紀궋碑는 효덕동 노대와 구암부락 앞 사이 들판에 碑閣을 갖추어 세워져 있으며 碑文은 國漢文 혼용체로 쓰여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화유적 101
13. 송파김해김공유인밀양박씨효열비 (松坡金海金公孺人密陽朴氏孝곥碑) 1) 위 치 : 남구 효덕동 노대마을 2) 시 대 : 1914 3) 소 유 자 : 金海金氏門中 4) 관련문헌 : 新 松坡金海金公孺人密陽朴氏孝곥碑는 효덕동 노대부락 입구에 있으며 흰색 화강석의 석재로 음 각되어 있다. 碑文의 內容은 金괈斗의 孝궋을 기록한 것이다. 102 광주 남구 문화유적
14. 효자함안윤공광훈효열실적비 (孝子咸安尹公光訓孝곥實蹟碑) 1) 위 치 : 남구 효덕동 노대마을 2) 시 대 : 1986 3) 소 유 자 : 咸安尹氏門中 4) 관련문헌 : 新 孝子諱光訓곥婦孺人羅州굟氏實蹟碑는 구암부락가 노대부락 사이 도로변에 있으며 碑閣이 갖 추어져 있다. 크기는 145 55 24 이다. 碑文은 다음과 같다. 문화유적 103
18. 효행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 (孝궋遷善堂光山金善鎭궋蹟碑) 1) 위 치 : 남구 원산동 원산마을 2) 시 대 : 1956 3) 소 유 자 : 光山金氏門中 4) 관련문헌 : 新 遷善堂 金善鎭은 光山金氏로서 老祖母와 偏母에 대한 孝養誠心이 至極하여 鄕坊孝子로 著明 하였는데 이碑는 원산동 황산사 바로 밑에 豊山洪氏 實蹟碑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孝궋內 容은 다음과 같다. 106 광주 남구 문화유적
19.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孝곥婦豊山洪氏實蹟碑) 1) 위 치 : 남구 원산동 원산마을 2) 시 대 : 1956 3) 소 유 자 : 光山金氏門中 4) 관련문헌 : 新 實蹟碑는 金善鎭궋蹟碑와 함께 세워져 있으며 黃山祠 바로 밑 도로변에 있다. 주변은 대리석 의 石柱로 주위를 감싸고 돌담장이 쳐져있다. 碑文의 內容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유적 107
20. 효열부문화유씨행적비(孝곥婦文化괤氏궋蹟碑) 1) 위 치 : 남구 이장동 복수마을 2) 시 대 : 1964 3) 소 유 자 : 高仁錫 4) 관련문헌 : 新 21. 광주공원사적비군 (光州公園史蹟碑群) 1) 위 치 : 남구 사동 광주공원내 2) 시 대 : 1957-65 3) 소 유 자 : 市有 4) 관련문헌 : 光州市史, 1985 5) 유적현황 : 광주공원 종래 光州市內에 여러곳에 있어서 훼손되어가는 先곥들의 遺蹟碑를 1957년 光州公園入口에 108 광주 남구 문화유적
eugene bell sent of god led the first service of christian worship in the of Kwang Ju. Ereoted By Chonnam Presbyiery The Presbyierian church of Korea December. 6. 1982 23. 서강사묘정비(瑞岡祠廟庭碑) 1) 위 치 : 남구 방림동 82-1 2) 시 대 : 1974 3) 소 유 자 : 유정복 4) 관련문헌 : 新 110 광주 남구 문화유적
<문(文)> 만오정의 실기(實記) 슬프다! 이 땅의 이 정자가 오늘에 이뤄짐이 아니라 이전부터 전하여 내려온 선세(先世)의 정 자이다. 나의 선인께서 오래전부터 누정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가지었다. 그러나 소시 때부터 가난의 빈 곤(貧困)에 시달려 이러한 경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살고 있는 그의 주택이 너무나 협소하여 옛날의 검구(黔 )60) 를 능가할 정도의 아주 험란한 164 광주 남구 문화유적
됨이 분명하나, 후손들의 부실관리로 보존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정내에는 상량옆에 판독하기 어려운 현판 한 개가 외로이 걸려 있을 뿐 별다른 시문이 보이지 않는다. 호남문화연구 제14집에 이 정자가 이미 없어진 것으로 정리되었으나, 무송정 이라는 간판 만 없을 뿐 건물 자체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아래에 수록한 시문들은 무송정실기 라는 책자 에서 그의 일부를 발취한 것이다. 172 광주 남구 문화유적
이 시구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지역 출신인 위 인사들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피서 및 시회, 연회 등의 장소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동국여지승람에 양과부곡의 지명이 있으나 양과동정의 정명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정자가 칠석동의 부용정과 함께 이 지역의 보기 드문 고적임은 분명하 다. 누정 193
문(文) 양파정기 (楊波亭記) 내 스스로 나의 위인을 생각하여 볼 때 지극히 어리석고 미련하여 거의 인간의 대열에 끼이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뜻만은 매우 높아 언제나 세상의 모든 일을 버리고 고요히 임천의 자연을 찾아 스 스로의 마음을 즐기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구상을 하고 있던 중 불행히 일찍 풍수(風樹)205) 의 서러 움을 당하게 되었고 또 연이어 조선의 종말을 고하는 일제침략의 험악한 시대를 만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하는 수 없이 세상의 여러 잡무에 얽매여 모든 일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참 으로 슬프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뜻만은 단 하루의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산전수애의 아름다운 누정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205) 풍수 : 돌아간 부모에세 효도를 못다한 아들의 슬픔을 일컬은 말임. 214 광주 남구 문화유적
는 이 청심 은 이 집의 당호일 뿐아니라 이조원의 아호이기도 하다. 사람도 맑고 집도 맑은 쌍야청청의 아름다운 이 집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채소밭으 로 개간되어 옛날의 유허임을 느끼게 할 뿐이다. 끝으로 청산백수로 시작된 이 사운시가 광주읍지(대정14년간)와 기타 문헌에 이조원의 원운으 로 되어 있으나 그의 조카뻘되는 이달선의 청심당기와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이조원의 소작이 아닌 이달선의 제영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를 다시 바로잡아 이 시구의 작자가 청심당 주인 이 조원이 아닌 그의 조카 이달선의 소작으로 정정하였음을 부언하여둔다. 문(文) 누정 237
淸心堂記 (청심당기) 이 당의 이름을 청심이라 한 것은 이 당 이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맑은 마음을 가진 맑은 사람이 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라서 맑게 된 것이다. 오늘의 이 집이 맑은 마음을 가진 맑은 사람에 의해 지어진 것은 지은 사람의 다행이 아니라 이 집의 다 행함이 되는 것이다. 당 이나 정(亭) 등의 많은 건물들이 거의 명승의 높은 지역을 골라 허공을 배경으로 그의 건 물을 지었다. 이른바 바람을 불게 하고 안개를 마신다는 극치의 경관을 갖춘 누정 등을 헤아려보 면 고금을 통해 그의 수효를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중에서 한 두 개의 대표적인 것을 고 른다면 위공에 의해 건립된 신당과 왕씨에 의해 축조된 죽정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건물 관계 의 우열을 떠나 주인된 사람의 현명한 임품과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청고한 명예를 견주어 본 다면 오늘의 청심당을 따를 수 없다. 238 광주 남구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