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가요(속요) 고려가요 특징 고대로 부터 내려온 민요에서 형성된 것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조선 성종대에 이르러 문자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향가가 쇠퇴하면서 귀족층의 한문학이 고려의 문단을 이끌어 가게 되자, 이와 상대적으로 평민층에서 새로이 나타난 노래가 고려가요이다. 이는 단순한 평민 문학이 아 니라, 고려 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진수라고 할 수 있으며, 고려가요가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문 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남녀상열지사라고 하여 개작 또는 삭제되어 현재 전하는 것은 악학궤범에4 편, 악장가사에 8편, 시용향악보에 위 두 책에 없는 것으로서 2편이 전한다. 형식상 특징은 대부분이 분절식(주로 3 3 2조, 또는 3 4 4조)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듬이 절대 적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서경별곡', 청산별곡'에서처럼 3 3 2조의 율조가 많이 나타나고, 대체로 분절체이며, 후렴구 또는 조흥구가 발달되어 있으며, 순 우리말로 구전되다가 나중에 문자로 정착되었다. 어느 개인의 독창적, 창작품이라기보다는 구전되는 동안 집단적, 민요적 성격을 띠게 되 었다. 내용상의 특성은 주로 향락적이며, 현세적이고,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 자연에 대한 예찬, 이별의 아 쉬움 등 평민들의 숨김없는 인간성을 나타낸 것이어서 소박하고 풍부한 감정과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 하였고, 남녀 간의 애정을 솔직히 표현한 작품이 다수 창작 되었으나, 조선조 유학자들이 남녀상열지 사라 하여 문헌에 싣지 않았으나 그 점은 조선조 정책이 숭유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 짐작이 되나 작품성은 인간적 매력이 넘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주제는 풍류적이고 현세적 이라는 점이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는 우호적일 수 있으나 고급 문학 의 관점에서는 일정 부분 문제점이 지적될 수도 있다. 작가층은 문자를 가지지 못한 평민 계급이고, 문학사적 위치는 표현의 소박성과 함축성, 꾸임 없는 생활 정서의 표현, 높은 문학성 등으로 시조와 더불어 우리 문학사의 대표적인 시가 양식. 의의는 적나라한 인간성과 풍부한 정서를 유려한 국어로 표현하여 국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음악적으로 경쾌한 리듬을 살리는 기교 등은 고대 문학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형성 ⑴ 고려 후기 시가의 새로운 양상 무신란 이후, 문벌 귀족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향가를 이을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고 문 화 담당층으로 신흥사대부가 나서서 시가 문학을 새로이 일으키고자 한 결과, 景 幾 體 歌 時 調 歌 辭 가 등장하였다. 경기체가의 첫 작품인 [ 翰 林 別 曲 ]은 속악 가사와 비슷한데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대목씩 부 르다 그 표현 방법이 이어져 경기체가의 틀이 생겼다. 이 경기체가는 사물을 중시하고 자아를 세계화한, 표면으로 부각된 최초의 교술시로 신흥사대부는 [한림별곡]의 전례가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조선 전기까지 발전시켰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면서
理 氣 哲 學 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고 밖에서 들어온 학설을 적용하였다. 시조는 서사시의 필요로 인해 발생하였는데 네 토막 형식으로 그 원형은 [ 井 邑 詞 ]나 [ 滿 殿 春 別 詞 ]에서도 보인다. 가사는 고려 말에 성립되었는데 현전하는 최초의 작품은 나옹화상의 [ 僧 元 歌 ]이나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문으로 전하는, 비슷한 형식의 노래도 있다. 이들은 모두 그 연원을 민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음이 삽입되며 장이 나누어지는 형식의 민요는 속악 가사 의 일부와 경기체가로, 여음이 없는 짧은 형식의 민요는 향가를 거쳐 시조로, 그리고 여음이 없 는 긴 형식의 민요는 가사로 각각 변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들이 존재했던 시기를 가지고 시대를 구분해 볼 수도 있는데, 경기체가 시조 가사가 공존했던 시기는 중세후기문학기, 경기체가가 붕괴되고 시조와 가사가 공존하던 시기는 중세문 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가사가 탈락하고 시조만 남은 시기는 근대문학기라고 할 수 있 다. ⑵ 경기체가 첫 작품인 [한림별곡]은 최씨 정권에 참여하면서 정권에 진출한 문인들이 득의에 찬 기상을 돌아가며 부른 노래로 경기체가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 작품은 개별적인 사실이나 사 물을 하나씩 열거하다가 한데 모으고 그것을 하나의 명사로 포괄하고는 景 을 붙여 어떤 광격 을 생각하게 하는 말의 짜임새와 '334, / 334 / 444 / 위 景 / 4444 / 위 '의 율격적 형식이 계속 이어진다. 安 軸 의 [ 關 東 別 曲 ]과 [ 竹 溪 別 曲 ]은 혼자 정착한 경기체가의 첫 예로 꼽히며 신흥사대부가 경기체가를 통해 새로운 사고 방식을 표현한 명백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 에 벼슬아치로 나가 민심을 살피고 시대의 병폐를 파헤친 기행시이며, [죽계별곡]은 작가의 고향 인 순흥의 경치를 찬양하고 거기서 놀며 공부하는 흥취를 표현한 작품이다.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 경기체가는 고려조에 생성하여 한문 문화권의 상층 지식인들에 의해 발달한 노래로, 특히 신 흥 사대부의 향락적인 생활상과 그들의 감정을 읊은 노래이다. 이러한 경기체가에 대한 연구는 여타의 국문학 장르보다 일찍부터 연구되어 왔고, 대부분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장 르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경기체가는 엄격한 형식적 제약 속 에서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일정한 관점에 의해 선택 또는 재구성하고, 그것을 하나의 경( 景 ) 안에 포괄하는 정서적 감격의 표현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이 같은 특성을 놓고 경기체 가 장르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여러 이견들이 제시되었는데, 처음에는 서정 장르의 하나로 보 다가 나중에는 교술 장르의 일종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서정이 나 교술의 어느 한쪽으로 귀속시키지 않고, 중간혼합적 갈래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 박 경주, 앞에 책, p210 이처럼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이 분명하게 해명되지 못한 것은, 국문학의 장르론이 확립되지
못함과 경기체가 작품들의 구조나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장르적 성격과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노력의 미흡에 의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의거하여, 이 글에서는 먼저 국 문학의 장르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경기체가의 역사적 장르로서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 경기체가의 장르에 대한 견해 1교술장르(조동일) 조동일은 경기체가를 교술 장르로 보았는데 경기체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세계상의 제시이므로 자아의 세계화 인 교술시로 보아 교술시에서의 세계상은 작품은 특별히 설정된 작품 내적 창조물이 아니라 작품을 떠나서도 존재하는 실제물을 작품 내에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 는다. 고 했다. 조동일,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 학술원 논문집, 15, 1976 2서정장르(김학성, 성호경, 박일용) 김학성은 자아의 세계화 란 있을 수 없으며 경기체가는 세계의 객관성을 자아의 미적 감각에 의해 변형시켜 미적 구조물을 형상화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세계의 자아화 인 서정시로 보아야한 다고 했다. 김학성, 한국고전시가의 연구, 원광대출판국, 1980. (그러나 후에 견해를 수정하여 장르 변천을 율격적으로 살핀다고 하면서, 초기에서 후기로 갈 수록 경기체가의 율격적 통제가 사라지고 상당히 자유로운 율격을 취하는 점에 근거하여 장르 적 성격도 처음에는 교술성이 두드러졌다가 후대로 갈수록 서정성이 두드러져 간다고 보았다.) 김학성, 경기체가, 한국문학연구입문, 황패강 외 편, 지식산업사, 1982 성호경도 한림별곡을 대상으로 하여 경기체가에서 제시되는 세계상이 실재의 세계상이 아닌 상상의 세계상이라도 작자와 독자 사이에 잘 알려져 있어 동일한 정서적 체험을 얻을 수 있다 면 작품이 성립되므로 경기체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정서에 있는 것이지 세계상 자체가 아니라 하여 서정장르로 보았다. (성호경,경기체가의 장르,한국문학사의 쟁점, 장덕순 외, 집문당, 1986.) *경기체가의 발생과 전개 경기체가는 고려 고종 때 발생하여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까지 독립된 한기가 형태로 존재하 다가 임란이후 자취를 감춘 시가이다. '경기체가'라는 명칭 외에 '별곡( 別 曲 )' 혹은 '별곡체( 別 曲 體 )'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들 노래가 말미에 반드시 '위 景 의 엇더? 榻 舅 卵?[ 景 幾 何 如 ]'라는 문구를 붙이기 때문에 거기서 경기( 景 幾 )라는 말을 따서 경기체가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현전 경기체가 26편 가운데 정형성을 띤 노래는 <한림별곡( 翰 林 別 曲 )>을 비롯한 7편 뿐이고 나머지는 변격 내지 파격이다. 경기체가의 형식과 율격을 논의할 때는 대개 <한림별곡>을 대상 작품으로 하여 논의하게 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몇 개의 장( 章 )이 중첩되어 한 작품을 이루는 연장( 聯 章 ) 형식을 취하고 있다(최소한 3장이상은 되어야 한다.). 둘째, 한 장은 6 행으로 되어 있되 제4행과 제5행에서 두 개의 구조적 단위[ 前 大 節, 後 小 節 ]로 양분되는 분절 형식이다. 셋째, 제 4행과 제6행에는 경기체가의 고정된 사투어인 '위 景 의 엇더? 榻 舅 卵?'가 오는 것이 원칙이다. 넷째, 제5해으이 4음보 가운데 뒤 2음보는 앞 2음보의 가사를 반복한다. 다 섯째, 제1행에서 제3행까지는 매행이 3음보이며, 제5행은 4음보인 것이 원칙이다. 여섯째, 음수율 은 제1, 2행이 3 3 4, 제3행이 4 4 4, 제5행이 4 4 4 4의 음절로 고정되어 있다. 경기체가는 지금까지 서정 장르로 다루어 왔으나, 그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작품 외적 세계상)을 작품 내에다 옮겨 열거하여 전달하는 것뿐이므로 작품 외적 세계상이 작품에 개입하 여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인 교술 장르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한편 이러한 견 해를 수용하면서 중간, 혼합적 갈래로 보는 경우도 있다. 고려 고종 3년 당시 신진 관인이었던 사대부들에 의해 <한림별곡>이 처음 불리어진 뒤 110년 이 지나 안축( 安 軸 )에 의해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이 창작됨으로 해서 한 기가 장으로 성립 하게 되었으나 그 형식은 전형인 <한림별곡>의 형식에서 다소 벗어났다. 안축의 작품은 후소절 ( 後 小 節 )의 첫 행(전체로서 제5행)이 5음보격에서 2음보격으로 줄어들고 반복을 생략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오저 초기에는 관학파 혹은 훈구파 사대부들에 의해 경기체가가 창작되면서 그 작품의 세계는 사대부적 이상이 투사된 자연과의 조화를 노래하는 경향에서 사대부로서의 관인 적 이상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이념 지향적인 교술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 형식도 유영( 柳 潁 )의 <구월산별곡( 九 月 山 別 曲 )>과 변계량( 卞 季 良 )늬 <화산별곡( 華 山 別 曲 )>, 예조( 禮 曹 )의 <가성덕( 歌 聖 德 )> 이외에 <오륜가( 五 倫 歌 )>, <연형제곡( 宴 兄 弟 曲 )>을 제외한 나 머지 작품들은 정격에서 변격으로 기울어 졌다. 이는 이들 노래가 궁중의 연향에 악장으로 사용 되었기 때문에 작가 나름의 형식적 변용을 시도한 결과로 추측된다. 경기체가의 소멸기인 조선조 중종, 명종, 선조대에 이르면 새 왕조의 예악이 일단 정비되고, (재도지문( 載 道 之 文 )의 문학관을 지닌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부화한 사장 취미의 불순한 문학 작 품이 배척되자, 그 작품의 세계는 관인적 이상을 강조하거나 이념 지향적인 교술성이 강조되던 경향을 탈피하고 다시 개인 신분의 사대부적 이상을 노래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졌고, 그 형식도 행의 수와 율격이 파격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김구( 金 絿 )의 <화전별곡( 花 田 別 曲 )> 베 5, 6장에서 이런 형식적인 파격의 경향을 보인 경기 체가는 주세붕( 周 世 鵬 )의 <도동곡( 道 東 曲 )>, <육현곡( 六 賢 曲 )>, <엄연곡( 儼 然 曲 )>, <태평곡( 太
平 曲 )> 등은 연장체 형식을 취하나 각 장은 반복, 전환의 구조와 분절 형식을 허물고 단형화하 는 경향으로 나아갔고, 권호문( 權 好 文 )의 <독락팔곡( 獨 樂 八 曲 )>애 이르면 연장체 형식이면서 각 장은 장형화 되었다가, 이후 소멸하였다. 이와 같이 경기체가가 소멸된 것은 결국 재도지문 의 문학관을 지닌 사림파의 등장이 직접적 원인이었고, 가사 시조의 융성이 간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체가의 참고문헌 강진문, 경기체가 정서표출의 시대적 변모양상, 경남어문학회, 1994 김광순, 국문학개론, 새문사, 2003 김동욱, 경기체가의 성립연대, 연세대 80주년기념논문집, 연세대, 1965. 김동임, 경기체가연구:향유방식과 형식변화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1993 김문기, 경기체가의 종합적 고찰, 백강서수생박사환갑기념논총, 형설출판사, 1981 김창규, 별곡체가연구 (1), 국어교육연구 3집, 1971, 경북사대국어교육과 박경주, 경기체가 연구, 이회문화사, 1996, 박일용,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과 그 변화, 한국학보, 1987 성기옥, 경기체가, 국문학신강, 새문사, 1985 성호경, 경기체가의 장르, 한국문학사의 쟁점, 장덕순 외, 집문당, 1986. 성호주, 경기체가 형태론 경기체가의 형성 연구 제일문화사, 1988 성호주 경기체가, 한국문학개론, 혜진서관, 1991, 안지영, 고려경기체가 구성에 있어서 후절의 역할 한국고전연구 통권 7집, 한국고전연구학회 윤석현, 조선조 경기체가 연구, 숭실대 석사학위논문, 1993 이상보, 박성건의 금성별곡 연구, 명대논문집 8집, 1975. 이찬식, 고전시가강의, 역락, 2009 임기중, 경기체가 연구, 태학사, 1997 임종욱, 우리의 고전시가1, 나무아래사람, 2002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1994, 조윤제, 국문학사, 동국문화사, 1949, 최상은, 경기체가의 풍류적성격과 사대부문학의 서정성, 영남어문학회 16집, 1989 ⑶ 시조 고려 말에 나타났으며 작품은 몇 백 년 간 구전되다가 조선 후기에 국문으로 기록되었다. 많이 작품 중에는 후대인의 의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작가가 많이 나타나는데 禹 倬, 李 兆 年, 李 存 吾, 崔 塋, 李 芳 遠, 鄭 夢 周 등이 유명하다. 사설 시조도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邊 安 烈 의 [ 不 屈 歌 ]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말의 정
치적 격동과 관련되어 창작된 작품으로, 이로 미루어 볼 때, 시조가 그만큼 큰 구실을 하는 동 시에 절박한 상황에서도 묘미있는 표현이 개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⑷ 가사 가사의 첫 작품으로는 나옹화상 혜근의 [승원가]를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작품 이전에도 원 감국사 止 의 [ 臂 短 歌 ], 태고화상 普 愚 의 偈 頌 등도 뒤에 가사로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가사는 처음에 구전되는 불교가사로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으나 申 得 淸 의 [ 歷 代 轉 理 歌 ] 를 볼 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서사문학 ⑴ 설화 고려 후기에도 많은 설화가 있었으나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격하되었다. 그것은 신유학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도 비판적인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던 까닭에 이념 수립에 관련된 긴요한 것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것들도 원형을 그대로 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 나 李 奎 報 와 一 然 은 당시의 추세에 구애받지 않고 이른 시기의 설화를 재인식하여 설화를 모 으고자 하였다. 고려 후기에 등장한 詩 話 는 설화의 판도를 바꾸었는데 이는 수록된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하 므로 자연스레 설화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 때문이다. 李 仁 老 의 { 破 閑 集 } 이후의 시화집은 시 화 이외의 잡록 등을 수록하였는데 상층부의 관심에 의해 보은담, 孝 友 烈 女 方 技 등이 긍정 적으로 인식되었다. 몽고란 이후의 설화 중에는 중국인이 나쁜짓을 하여 돌아가는 길에 그를 산신의 아우가 죽였 다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이후의 소설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⑵ 무가 신유학을 숭상하는 신흥사대부가 등장하면서 무속이 적극적으로 배제되었으나 고려 후기의 혼 란스로운 상황에서 예언자이며 구세주로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무속에 대한 탄압 은 조선에 들어 더욱 심해졌으나 고려 후기부터 전해진 무가가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ㅁ분제 성이 있는 사설은 정리되고 곡조를 보아 채택하였다. ⑶ 연극 나라 굿놀이라고 할 수 있는 八 關 會, 燃 燈 會, 儺 禮 같은 행사에는 歌 舞 百 戱 가 따랐는데 이중에서 연극적 요소의 발견 가능성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전문적인 놀이패가 있어 연극을 공연했고 궁중에서도 연극이 있었으나 후대로 이어질만큼 자리잡지 못했으며 연극 의 주류는 민간 연극과 하층 연극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길거리에서 하는 풍자적 연극이 존재했 었다고 하는데 河 回 탈춤 등의 탈춤과 꼭두각시놀음도 민간 연극으로 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