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현 인 애 통일연구원 남북이 만나면 너무 낯설다. 남북한의 도시와 시골은 얼핏 보아도 다르 다. 남북 주민들은 서로 말씨가 다르고, 옷차림이 다르고, 지어는 얼굴까지 도 달라 보인다. 분단 70년을 경과하면서 달라진 것이다. 생활조건이 변하면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것이 지속되면 고착된다. 남 북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국가경제, 자본주의 이데올로 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등 상반되는 체제하에서 살아왔다. 남한은 미국,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남북은 의식주와 관혼상제 같은 일상생활에서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남북 사이에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북이 함께 살아보면 서로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새삼 스럽게 깨닫게 된다. 반만년을 함께해왔으니까 헤어져 산 70년은 함께 산 기간에 비하면 찰나인 것이다.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1
이 글에서는 남북 주민의 평범한 일상에서 나타나는 다름과 같음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가장 많이 논의되는 북한의 의 식주와 관혼상제 풍습을 소개하고 그 변화의 사회적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데 한정하려고 한다. 분량상의 관계로 남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추 억을 떠올리며 스스로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 북한 주민의 의식주와 관혼상제 1) 의식주 (1) 옷차림 의복은 자아를 표현하며 사회를 반영한다.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고 사회 가 변하면 의복도 달라진다. 이데올로기와 정치 경제 제도의 차이는 남북 주민 사이에 옷차림의 다름을 만들어냈다. 북한에서는 지난 시기 사회주의 생활양식 확립을 위해 단정하고 깨끗하 고 건전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고 주민들을 설득해왔다. 북한 주민들은 이러 한 사상교양의 영향과 사치를 배제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단정하 고 실용적인 옷차림을 선호한다. 북한 주민이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는 옷은 남녀 모두 양장이다. 남자들은 넥타이를 착용하는 제낀(젖힌) 양복보다는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되는 인 민복 형태의 양복을 더 선호한다. 남자들은 여름에는 보통 와이셔츠나 반 팔 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다닌다. 북한 남자들이 특히 즐겨 입는 옷은 점 퍼다. 점퍼는 김정일이 즐겨 입다 보니 유행되어 누구나 한두 벌씩 다 갖고 있는 단체복이 되었다. 점퍼는 옷감의 두께와 형태를 달리해서 봄옷, 여름 옷, 가을옷, 겨울옷으로 사시절 착용할 수 있다. 색깔도 국방색, 카키색, 청 색 등 여러 가지로 만들며, 옷감의 재질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나타낸다. 여 성들은 투피스를 많이 입는데 윗옷은 블라우스, 와이셔츠, 스웨터, 양복, 점 2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퍼 등 다양하다. 고난의 행군 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추위와 편리성 때 문에 여성들의 치마는 바지로 바뀌었다. 현재 시골은 물론 평양을 제외한 도시에는 치마를 입은 여성이 많지 않다. 여성들의 바지 형태는 나팔바지, 일자바지로 바뀌어왔으며 현재는 남한의 스키니진(쫑대바지)이 유행이다. 북한 주민들은 손질하기 편리한 옷을 선호한다. 남한 주민들이 선호하는 면 마와 같은 자연산 직물은 손질이 까다롭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속옷으로 선호될 뿐 겉옷감으로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 주로 구김이 가지 않고 세탁 이 편리한 합성섬유 재질의 옷감을 이용한다. 북한 주민들은 간결한 옷차림을 선호한다. 일반 주민들은 옷이 별로 많지 않으며 보통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입는 옷을 각각 두세 벌 정도 가지고 있 다. 남한처럼 옷을 매일 바꿔 입으면 칠면조 로 비난받는다. 북한에서는 경 제적 여건이 충분하지 못하므로 의복비로 많은 돈을 지출할 수 없고, 세탁 도 어렵고 포장이 안 된 거리 등으로 인해 여러 상황에서 입어도 어울리는, 그리고 활동에 편리하면서도 단정하게 보이는 의복을 요구한다. 옷의 색깔은, 남한과 반대로, 나이 든 사람들은 회색조의 침침한 색을, 젊 은 사람들은 밝고 화려한 색을 선택한다. 북한에서 의복은 개성을 표현하기보다는 집단주의를 강조하고 체제 수 호에 복종된다. 북한 주민들은 단체복을 많이 입는다. 북한의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은 교복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다. 학교마다 교 복이 다른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교복 디자인을 국가에서 통일시키고 있 으므로 전국 학생의 교복이 모두 같다. 여름 교복의 경우, 남학생은 여름 셔 츠와 반바지, 여학생은 셔츠와 치마로 구성되어 있고, 겨울 교복은 남학생 여학생 모두 양복 형태다. 이전에는 교복이 모두 짙은 청색이었는데 금년에 교복 색상을 바꾸어 남학생은 밝은 청색 상의와 바지, 여학생은 자주색 상 의와 회색 치마로 바뀌었다. 대학생 교복도 양복인데 상의는 회색이다. 여 대생들은 양복뿐 아니라 짙은 청색의 한복도 교복으로 입는다. 또한 북한에는 직무에 따르는 단체복이 많다. 직무별 단체복으로 가장 많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3
이 입고 다니는 옷은 군복이다. 북한은 군인이 100만 명이 넘다 보니 원래 군복 입은 사람이 많은 데다 군에 복무하지 않는 사람도 군복을 입어야 할 때가 많다. 남성들은 환갑이 될 때까지, 여성들은 시집을 가기 전까지 민간 무력인 노농적위대에 소속되어 군사훈련, 비상소집 훈련 등에 자주 동원되 기 때문에 남녀 모두 군복을 최소 한 벌씩은 가지고 있다. 또한 정규군 외 에도 국가안전보위부 보위원, 중앙당연락소, 돌격대 등은 군복을 정장으로 입는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북한에서는 일상 시에 군복을 입고 다녀도 별로 어색하지 않으며 군복 차림으로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김정일 점퍼는 북한 주민들이 가장 많이 입는 옷으로 거의 단체옷 수준으 로 되고 있다. 북한 주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점퍼를 한두 벌 가 지고 있는데 일상생활뿐 아니라 공식적인 장소에서도 착용되고 있다. 점퍼 는 옷의 재질과 만든 정도에 따라 공식 행사복부터 노동복까지 다양하게 이 용된다. 색깔은 국방색 계통이 가장 많고 카키색 청색 등 여러 가지다. 팔이 짧고 옷감이 엷은 여름옷, 팔이 길고 옷감이 두꺼운 겨울옷 등 다양한 모양 으로 만들고 있다. 여성들은 위는 점퍼, 밑에는 스커트를 맞춰 입기도 한다. 북한은 보수적인 사회이므로 직장 출근 시 캐주얼한 복장은 허용되지 않 는다. 요즘 많이 입는 티셔츠나 반바지는 일상생활에서는 허용되지만 직장 출근 시는 입을 수 없다. 북한에서는 민족성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이 한복을 많이 착용할 것을 강조한다. 행사 시에는 여성들이 무조건 한복을 입을 것을 요 구하기 때문에 북한 도시여성들은 누구나 한복을 한 벌씩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한복을 남한보다 덜 착용한다. 북한에서 한복은 행 사 때와 결혼식 예복으로 착용할 뿐 입을 기회가 거의 없다. 결혼식 때도 신 랑 신부 어머니는 한복을 입지 않는다. 특히 남성들은 한복을 전혀 입지 않 는다. 지어 남성 한복을 만드는 곳조차 없다. 북한의 한복은 남한보다는 재 일교포들과 중국교포들의 유행을 따르기 때문에 화려하고 색도 밝은 것이 특징이다. 4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북한에서는 옷차림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매우 심하다. 북한은 튀 는 옷차림을 사회주의 체제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의복에 대한 단속 통제, 사상교양과 비판을 강화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북한에서는 입지 못하도록 규정된 옷이 많다. 영어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 짧은 치마, 스 키니진 등은 통제의 대상이다.. 청바지는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미국 사람들 이 즐겨 입는 옷이므로 입을 수 없다.. 결혼식 때 신부가 드레스를 입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남한에서 여성들의 로망인 웨딩드레스는 북한에서는 부 르주아지의 사치로 지탄받는다. 북한 주민의 머리 모양은 남한과 비슷하다. 여성들은 파마를 하거나 머 리를 길러 묶고 다니며, 남자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다. 머리 모양 통제 는 심한 편이다. 남한처럼 머리를 여러 가지 색으로 물감을 들이는 것은 허 용되지 않는다. 또한 남자들의 긴 머리, 여성들의 묶지 않은 긴머리는 통제 대상이 된다. 남성의 경우, 북한에서는 머리 모양도 장군님식으로 짧게 하 라고 요구한다. 1970년대는 김정일의 머리 모양을 따라 짧게 자른 속도전 머리 가 유행이었고, 2010년대는 김정은 머리 모양을 따라 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2) 식생활 북한 주민들의 주식은 입쌀, 옥수수, 감자다. 옥수수와 입쌀을 섞어서 지 은 강냉이밥을 먹는 주민이 가장 많다. 강냉이밥은 입쌀과 옥수수를 섞은 잡곡밥이지만 옥수수를 너무 많이 섞기 때문에 옥수수만의 밥처럼 된다. 옥 수수밥은 소화가 잘 안 되고 식으면 맛이 없다. 옥수수밥의 맛을 개선하기 위해 김일성은 옥수수를 가공해서 옥쌀을 만들게 하였으나, 맛보다 양이 우 선인 북한 상황에서 그 조치는 현실화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대신 주민들은 자체로 여러 방법으로 옥수수를 가공해서 이용하고 있다. 가장 많이 이용하 는 옥수수 가공 음식은 옥수수국수와, 옥수수 변성가루로 만든 떡이다, 옥 수수국수는 옥수수를 가루 내어 고온에서 압축해 뽑은 면을 말린 것이다.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5
면을 삶아서 온면 또는 냉면으로 만들어 먹는다. 옥수수 변성가루는 옥수수 를 강한 압력과 뜨거운 열로 가공한 가루다. 강냉이 변성가루는 물을 부어 반죽하면 곧 찰떡과 같이 빨리 떡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북한말로 속도전 가루 라고 한다. 겨울에 별미로 통강냉이죽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양강도와 함경도 고원지대 주민들의 주식은 감자다. 이 지역은 기온이 낮 아서 옥수수농사는 되지 않지만 대신 감자와 보리가 잘된다. 양강도와 함 경도 고원지대의 감자는 봄에 심고 가을서리가 내린 후에 수확하는데 전분 이 많아 달고 가루가 많이 나며 맛이 있다. 북한은 교통이 열악하여 수송이 불편해서 감자를 타곳으로 내보내기도, 타곳에서 양곡을 들여오기도 어렵 다. 그래서 양강도 시골에서는 농사지은 감자가 주식으로 되었다. 주로 감 자를 삶아 먹지만 농마국수, 감자떡, 감자찰떡, 감자지짐 등도 만들어 먹는 다. 양강도의 농마국수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매끄러운 면발이 특 징이다. 북한은 고기 생산량이 적고 고기 수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육류가 귀하 다.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육류는 돼지고기, 닭고기, 개고기다. 양강도 대 홍단과 평양에 돼지공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수요도 충족하기 어렵 다. 타 지역에서는 개인 집에서 돼지를 한두 마리씩 기르는 방법으로 육류 를 보장하므로 일반 주민들은 명절 또는 대사( 大 事 ) 때나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 가장 많이 해먹는 음식은 돼지고깃국이며 생활이 넉넉한 집에서 는 돼지고기 볶음, 불고기 등을 해먹는다. 북한 주민들은 개고기를 무척 좋 아하는데 단고기국을 많이 먹으며 개고기엿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개고 기엿은 개고기를 푹 삶아 뼈를 추린 후에 설탕 또는 엿을 넣고 졸여서 만든 다. 이외에 닭고기와 오리고기가 식용으로 이용된다. 닭고기도 흔치 않기 때문에 주로 국을 끓여 먹으며, 오리고기는 기름이 많아 불고기나 볶음 요 리를 해먹는다. 소고기는 북한에서 생산하지 않으므로 식용으로 이용되는 것이 거의 없다. 북한은 바다를 끼고 있어서 육류보다는 어류가 흔하여 어류 요리를 많이 6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해먹는다. 많이 잡히는 어류로는 명태, 도루메기(도루묵), 이면수(임연수 어), 오징어, 멸치 등인데 국, 조림, 구이, 탕을 만들어 먹는다. 회 음식으로 서는 명태 오징어가 많이 이용되는데, 고급식당이 아닌 일반 식당이나 가정 에서는 남한처럼 회를 떠서 먹는 것이 아니라 냉채를 만들어 먹는다. 북한 에서는 젓갈을 많이 담근다. 냉장 시설이 부족하고 수송이 어려운 상황에서 젓갈은 어류를 보관하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 에는 처치하기 힘들 정도로 명태가 많이 잡혀 명란젓, 창난젓을 많이 담갔 고 건뎅이젓(곤쟁이젓), 멸치젓, 가자미식혜(가자미식해), 명태식혜(명태 식해) 등을 집에서 직접 담가 먹었다. 북한에는 미역, 다시마가 많이 난다. 양식도 하지만 자연산도 많다. 미역과 다시마로는 국, 나물 등을 만들어 먹 는다. 김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야유회나 소풍 같은 특별한 때 먹을 수 있는 식재료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는 어류가 잘 잡히지 않는 데 다 어류를 중국에 수출까지 하게 되면서 어류가 귀해졌다. 이러한 상황으로 북한 주민들의 반찬은 채소 위주로 되고 있다. 채소의 종류는 많지 않다. 봄 에는 시금치, 여름에 들어서면서 열무 호박 오이 양배추 가지가 나며, 가을 에는 무와 배추가 난다. 그것으로 국, 냉국, 찌개, 김치 등을 만들어 먹는다. 반찬을 만드는 데 필요한 된장과 간장은 국가가 식료공장에서 생산해 팔 아주었으나 1990년대 경제 파산으로 된장 간장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 사람들은 시장에서 콩을 사거나 소토지에 콩을 심어 직접 메주를 써 서 된장 간장을 담가 먹기 시작했다. 최근 다시 된장과 간장을 공급하고 있 으나, 생활에서 여유가 있는 집은 여전히 된장과 간장을 담가 먹고 있다. 북한에서 음식은 남한에 비해 지방에 따른 차이가 크다. 수송이 어려워 자기가 사는 곳에서 나는 식재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양강도는 감자 음식, 동해안은 어류 음식, 서해안은 알곡으로 만든 음식이 발전했다. 북한의 음식은 남한 음식에 비해 양념을 적게 쓰므로 슴슴한 것이 특징이 다. 음식이 달지 않고 향도 약하다. 북한은 양념이 귀한 곳이다. 설탕, 고춧 가루, 깨 등 양념이 귀하다 보니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으로 맛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7
을 낸다. 예로 동해안 지역에서는 물고기 국이나 탕을 끓일 때 물고기만으 로 요리를 만든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음식의 종류가 적다. 북한은 사회주의 평등정책으로 생활수준이 하향 평준화 되었기 때문에 부유층이 형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고급음식이 발전하지 못했다. 또한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질보다 양이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봉건을 타파하면서 종가집이 없어지고 양반문 화가 청산되어서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음식도 대부분 계승이 끊어졌다. 게다가 외국과의 교류가 단절되다 보니 다른 나라 음식도 들어오지 못했다. 김정일이 미식가여서 이름난 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었지만 그의 사생활은 철저한 비밀이라 김정일 궁중요리 는 확산되지 못했다. 북한 주민의 식생활은 가정식 위주로 이루어지며 외식문화는 일반화되 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음식점이 국가계획에 의해 설립되었고 음식점의 주 되는 사명은 출장 온 사람들의 식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식당에서 식사 를 하려면 돈과 함께 배급 대신 발급받은 양표를 내야 했다. 식생활을 즐기 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한 음식점은 평양의 옥류관, 청류관, 제일면옥 등 손 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외식문화를 즐길 정도로 주민들의 생활 여유도 없었다.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3) 살림집 북한 도시주민들이 선호하는 살림집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아파트다. 2008년 북한인구센서스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방 칸 수 2칸 이하 가 전체 주택의 81.9퍼센트이며, 크기가 75제곱미터 이하 인 주택은 전 체의 90.5퍼센트다.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률은 전국 평균이 59.4퍼센트, 농촌은 46.2퍼센트다. 난방은 석탄이 47.1퍼센트, 나무가 45.1퍼센트다. 북한에 가장 많은 살림집은 방 2칸에 부엌이 딸린 집이다. 1960년대 건 설한 아파트의 면적은 45 55제곱미터, 1970년대 이후는 80 100제곱 미터, 1985년 이후는 120제곱미터 이상으로 지었다. 아파트는 실내에 화 8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장실이 있지만 단층집은 집 바깥에 화장실이 있다. 살림집의 구조는 건설 시기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안방을 부엌과 연결되게 배치하여 밥 짓는 열로 방을 덥히게 했다. 아파트도 온돌을 놓고 공동 굴뚝을 뽑아서 석탄을 땔 수 있게 만들었다. 평양시에 건설된 온수난방 아파트는 이러한 영향을 받지않아 편리하게 방을 배치했다. 2000년대 이전에 건설된 아파 트는 작은 전실( 前 室 )을 거쳐 각방으로 들어가거나 방이 좀 많은 경우에는 복도를 통해 각방으로 들어가게 설계했다. 그러나 현재는 공동살림방(전 실)을 중심으로 방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살림집 난방은 평양시 중심 거리의 아파트만 중앙난방이며 절대 다수의 주택은 개별난방이다. 개별난방에 쓰는 연료는 석탄과 나무다. 함흥 이남 지역은 무연탄으로 빚은 구멍탄(연탄), 함흥 이북의 함경도 지역은 갈탄, 양 강도 지역은 나무, 황해도 벌방지대는 볏짚을 연료로 이용한다. 평양의 중 앙난방은 평양화력발전소와 동평양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면서 나 오는 폐열을 이용하는데, 고난의 행군 시기 화력발전소가 멎으면서 온수 를 보내지 못해 관이 삭아 현재까지 겨울에도 난방을 보내지 못하는 아파트 들이 많으며, 새로 건설한 아파트들도 온수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주민들 이 겨울에 춥게 지낸다. 평양뿐 아니라, 북한은 연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 에 대다수 주민집들이 겨울에 충분한 보온을 하지 못한다. 평양의 중앙난방아파트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데 석유곤로를 가장 많이 사용하며 최근 들어 가스곤로가 늘고 있다. 그러나 중앙가스 공급 체계를 통해 가스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가스통을 이용한다. 북한 아파트 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물이다. 전기 부족으로 평양시 아 파트도 하루 1 2시간 정도 물을 공급한다. 지방 도시의 아파트도 역시 시 간 물을 보내는데, 압력이 낮아 고층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아파트가 많 다. 그런 경우에는 아파트 공동수도나 다른 집에서 물을 길어다 쓴다. 북한 의 대부분 지역은 10미터 정도 파이프를 박으면 물이 나오므로 시골에서는 상당수 집들이 집 안에 펌프를 설치하고 지하수를 뽑아서 물을 해결한다.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9
그렇지 못한 집에서는 우물을 길어 먹거나 개울물을 음료수로 이용한다. 농촌 살림집은 단층으로 부엌과 살림집 두 칸이었고 화장실은 바깥에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는 시리카트벽돌 [1] 로 2 3층 다세대주택도 지었 다. 현재 농촌 살림집 설계도 고급화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어 최근에는 집 안에 화장실과 샤워실을 둔 주택도 건설되고 있다. 난방은 연탄이나 갈탄, 나무를 때서 해결하도록 되어 있다. 2) 관혼상제 (1) 결혼 북한에서 결혼은 중매나 자유연애를 통해 시작된다. 북한은 남녀가 교제 할 때는 결혼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남한처럼 남녀가 이성 친구로 사귀다가 헤지는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중매나 자유연애의 비중은 남한 과 비슷하다. 결혼정보회사는 없다. 중매나 자유연애를 통해 남녀가 서로 마음에 들면 양편 부모에게 가서 인 사를 하고 허락을 받은 후 약혼식을 한다. 약혼식은 신랑 집에서 약혼 선물 과 음식을 해가지고 신부 집에 가서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약혼 선물 로 신부의 첫날 옷과 화장품 등을 마련하는데, 최근 부유층에서는 반지가 인기가 있다. 약혼식에는 양가 직계가족이 주로 참가하나 신랑 신부 아버지 나 신랑의 가까운 친구가 초대되는 경우도 있다. 결혼식은 신부 집과 신랑 집에서 각기 진행한다. 먼저 신랑이 우시군들 (위요 圍 繞 가는 사람, 즉 혼인 때에 가족 중에서 신랑이나 신부를 데리고 가 는 사람)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온다. 우시군은 주로 신랑의 삼촌이나 형제 들로 구성되며, 신부 집에서는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한다. [1] 모래와 생석회를 주원료로 알루미늄 분말 등 발포제를 첨가하여 벽돌 틀에 넣고 고압으로 다 져 만든 다음 고압 고온 증기가마에서 굳혀 제조한 벽돌. 가볍고 보온성이 높고 보통 시멘트 벽 돌에 비해 강도가 세고 단열성과 내화성이 우수하다. 1990년대 초까지 많이 건설했으나 현재 는 중단되었다. 10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신랑은 결혼식 상을 받는 의식을 치른다. 결혼식 상에는 갖가지 음식을 올 려놓는데, 상 중심에는 붉은 고추를 문 닭을 세워놓는다. 그리고 떡, 과일, 고기, 당과류, 술 등 각종 음식으로 화려하게 차린다. 상을 받는 의식은 특 별한 절차로 내려오는 것은 없는데, 신랑은 보통 상에 앉아 신부 부모와 술 을 주고받는다. 상을 받은 신랑에게 밥을 주는데 다산을 축복하는 의미로 밥에 계란을 묻어 주는 풍습이 있다. 신랑과 신부가 밥을 나누어 먹게 하는 데, 이때 신랑이 계란을 남겨야 앞으로 신부를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는 관 습도 있다. 또 신랑상이라고 해서 상에 차려놓은 음식 중 맛있는 것을 골라 우시군들에게 선심 쓰며 주기도 한다. 신랑은 상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이 제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김 부자 동상과 명소 등에서 사진을 찍는다. 우시군들은 준비해온 차에 신부가 마련한 가장집물( 家 藏 什 物 : 집에 놓고 쓰는 온갖 살림도구)을 실어서 신랑 집으로 가져간다. 북한의 결혼식에서는 신랑 집과 신부 집에서 각기 친구들과 친척,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과 술을 대접한다. 손님들은 부조를 하며 신부가 신 랑 집에 가지고 가는 가장집물을 구경하기 좋아한다. 신부는 이불과 이불 장, 양복장, 식장( 食 欌 ), 경대 등 가구들과 그릇을 비롯한 취사도구를 장만 하며, 재봉기와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장만하면 잘 준비했다고 부러워한다. 신랑 신부 친구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덕담을 나누면서 결 혼을 축하해준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이틀에 걸쳐 첫날은 신부 집, 이튿날 은 신랑 집에서 손님을 치르지만, 평양에서는 같은 날 오전과 오후로 나누 어 하루에 손님을 치른다. 결혼식 예복으로는 신부는 한복을, 신랑은 양복을 입는다. 1960년대까 지는 신부가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을 했으나 이를 일제 잔재라고 중단한 이 후부터 신부 결혼식 예복이 한복으로 되었다. 결혼식 한복은 1970년대는 견직으로 지었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화려한 무늬와 색깔의 합성섬유 로 만들고 있다. 결혼식에 입는 한복은 특별한 격식이 없으며 화려하고 고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11
급스러우면 된다. 남자는 양복을 입는데, 장교들의 경우 군복이나 예복을 입고 식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평양에서는 1990년대에 결혼식 식당을 내왔으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 족하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잘사는 집에서만 식당에서 예식을 올리고 있 다. 결혼식 식당에서 치러지는 예식은 양가가 함께하며 역시 상을 차리고 받는 것을 중심으로 식이 진행된다. 결혼식 이튿날 아침 신부는 시집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가지고 온 예 물을 나누어준다. 예물은 옷 위주로 마련한다. 3일째 되는 날에 신랑과 신부 는 음식을 만들어 다시 신부 집에 가서 인사를 하는 예를 거치는 것으로 결 혼식은 끝난다. 남한과 같은 신혼여행 풍습은 없다. 이전에는 결혼하면 국 가에서 집을 주었기 때문에 신랑과 신부는 살림살이에 필요한 가구와 물건 만 장만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신랑 측에서 집을 마련한다. 집이 없는 경우 는 집을 얻을 때까지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2) 장례 북한의 장례식은 집에서 치른다. 북한에서 문벌주의를 봉건주의로 지탄 하면서 철폐한 이후 장례식을 맡아 하던 주체가 문중으로부터 직장이나 지 역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장례 풍습이 제각각이다. 장례식을 주최하 는 사람이 기억을 살려 시행하고 있다 보니, 이전부터 내려오던 장례 풍습 이 많이 사라졌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깨끗이 하고 화장을 시키고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힌다. 수의를 지어 입히기도 하지만 평시에 고인이 입던 옷 가운데서 주로 자연섬유로 된 좋은 옷을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시신을 곧 게 펴서 묶은 후 방 한 켠에 휘장을 치고 그 안에 안치한다. 입관할 관은 나 무 관을 사용하는데 별도의 장식이 없는 판자로 만든 육면체의 관이다. 시 신을 관에 안치한 다음 위에 흰 천을 덮고 관 뚜껑을 닫는다. 북한에서 상복 은 따로 없으며 상주나 가족은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는다. 장례는 보통 3 일장이며 가족이 미처 도착하지 못할 수 있는 겨울 같은 때는 5일장을 치르 12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기도 한다. 친척 친구들은 발인하기 전에 상가를 찾아 고인에게 술을 붓고 절을 하는 방법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상갓집에서는 조문 온 사람들에게 술 과 음식을 대접한다. 북한 장례는 토장이며 화장은 평양에서 돈이 많은 집만 한다. 국가에서 지정한 공동묘지구역이 있으며, 땅은 국가 소유이므로 묘지 쓰는 값은 내지 않는다. 장례식은 사망한 사람이 직장인이었으면 그가 다니던 직장에서, 사 망한 사람이 은퇴했을 경우는 상주의 직장이 도와주어서 치르는 것이 일반 적이다. 그러므로 묘지를 파고, 시신을 묘지까지 차로 운구하며, 묘지를 만 드는 것은 보통 고인이나 상주의 직장에서 맡아서 해주며, 직장이 없는 경 우는 동네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도와준다. 관이 산에 도착하면 파놓은 구 덩이에 관을 넣고 그 위에 붉은 천을 덮는다. 천에는 고인의 이름, 생년월 일, 사망 일시 등을 써 넣는다. 관 위에 상주가 흙을 세 삽 떠서 뿌리고 그다 음 봉분을 만들고 상석을 놓고 비석을 세운다. 그리고 음식을 차린 후에 술 을 붓고 절을 하는 방식으로 제를 지낸다. 이튿날에는 가족 친척들이 다시 묘를 찾아 제를 지낸다. 돌제(사람이 죽은 후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소상) 와 3년제는 묘지에 가서 지낸다. 그다음부터는 집에서 제를 지내며 추석과 한식에 묘를 찾는다. 북한에서는 한동안 차례 지내는 것을 금지했다가 1980년대 말부터 다시 추석과 한식을 허용했다. 그동안 제기가 사라졌고 차례상 차리는 방법도 이 어지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식과 추석에 묘를 찾는 붐 이 일어 모든 집에서 묘를 찾아가고 있으며,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평시에 쓰는 그릇에 담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낸다. 북한에서 고인에게 절할 때는 남한과 달리 세 번 절을 한다. 전통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복구되면서 변형된 것이다. 산에 가지고 간 술과 음식은 보통 묘 옆에서 먹고 내려온다.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13
(3) 환갑 북한에서는 만 60살이 되면 환갑을 한다. 북한에서는 환갑도 집에서 차 린다. 환갑상을 차리는 별도의 방법은 없다. 맛있고 귀한 음식을 화려하게 잘 차리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넉넉하게 먹이면 잘 치른 환갑이 된다. 환 갑은 보통 남자를 기준으로 부부가 같이 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으나 자식 들의 정성이 특별하다거나 부부의 연령이 크게 차이 날 때에는 각각 하는 경우도 있다. 환갑 날 남자는 양복을, 여자는 한복을 입는다. 자식들은 부모 에게 환갑상을 차려주고 보통 옷을 선물한다. (4) 돌생일 북한에서는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돌생일(첫돌)은 작게 치른다. 집 안 식구들과 가까운 친척 그리고 보통 엄마 친구들이 모여 생일을 축하해 준다. 작은 상에 생일상을 차리고 옆에 갖가지 물건을 놓아 아이가 어느 것 을 집는가를 보면서 아이의 장래를 축복해준다. 연필 돈 장난감 같은 것을 차려놓고, 연필을 집으면 공부를 잘하겠다, 돈을 쥐면 돈을 많이 벌겠다 등 덕담을 해준다. 2. 남북 생활양식의 변천 1) 당의 유일사상체계 수립과 생활양식에서 남북의 차이 증가 북한에서 생활양식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준 계기는 1967년부터 시작된 당의 유일사상체계 수립이다. 당시 수정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 청산이 주 요한 목표로 되었는데 이 과정에 오랫동안 내려오던 전통이 상당히 없어졌 다. 또한 주체를 강조하면서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과정에 북한만의 고립 된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남한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이 유지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문화 유입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 14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라 남북의 이질성이 커졌다. 남북 한복의 변화를 보면 이러한 특징이 뚜렷이 나타난다. 1960년대 초 만 해도 남북의 여성 한복은 비슷했다. 면을 이용해 흰색이나 검은색으로 만들어 입은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의 여성 한복 은 확연하게 차이 난다. 북한은 합성섬유 재질의 꽃문양 천으로 치마 길이 를 무릎 위로 짧게 만들고 저고리 길이는 길지도 짧지도 않게 만들어 입은 데 비해, 남한의 한복은 짧은 저고리에 치마 길이는 바닥까지 끌리게 길어 졌다. 치마 속에는 페티코트를 입어 아래로 퍼지는 실루엣을 만드는 등 폭 넓고 장식이 많이 강조되었다. 남한에서는 1970년대 식량 문제가 풀리면서 음식문화가 급속히 발전 했지만 북한은 식량 문제가 좀 더 어려워지면서 음식의 종류가 더 줄었다. 관혼상제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조선 시기 전통이 기본적으로 유지되 었으나 당의 유일사상체계 수립을 시점으로 김일성이 낡은 생활문화 청산 을 여러 차례 지시하면서 [2] 간소화되거나 없어졌다. 북한은 결혼식을 간소 화하면서 신부 면사포가 없어졌고 일반 한복이 혼례 옷으로 된 반면 남한 은 서양의 웨딩드레스와 결혼식장이 도입되면서, 남북한 결혼식 풍습이 완 전히 달라졌다. 지금까지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남북 생활양식의 차이는 1980년대 초 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주민의 대다수는 획일적 문화와 억압적 통제에 대해 당연시하고 있 다.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튀는 옷차림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옷을 매일 갈아입거나 몸치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부르주아 생활양식에 물든 사람으로 매도되며, 이에 대해 대다수 주민이 긍정한다. [2] 아직도 우리에게는 개인생활을 비롯한 사회생활의 여러분야에 낡은 사회의 생활양식이 적지 않게 남아있습니다. 잔치를 크게 차려 랑비하는것이라든지 사람이 죽었을 때 향불을 피우는것 같 은것은 다 낡은 사회의 생활양식입니다. 오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허례허식과 낡은 관습은 필요없습니다. 김일성, 교육사업에서 사회주의교육학의 원리를 철저히 구현할데 대하여, 김일성 저작집 제26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583쪽.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15
청바지를 입고 시내에 다니다가 단속이 된 한 대학생은 그로 인해 비판무 대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결함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고 친구들로부터 호상 비판을 받았으며 그 비판에 대해 접수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왜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가? 그는 그러한 정책을 펴는 당에 불만을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탈북했다. 그러나 주택 인테리어는 서양식이어도 나쁘게 보지 않으며 오히려 누구 나 부러워한다. 식생활문화도 마찬가지다. 커피집에 가거나 서양식 음식을 먹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양주를 마시거나 외국 담배를 피우는 데는 제한 이 없다. 다만 외화를 많이 축적하고 물 쓰듯 하다가 걸리면 이러한 것들이 다 죄목으로 첨가된다. 2) 시장의 영향으로 인한 생활양식의 변화와 남북의 차이 감소 1980년 후반기부터 북한의 생활양식은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나라와 민족의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패션과 음식, 주거 등이 통일 되는 세계화 과정을 겪고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지 만 외국의 영향을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다. 북한에서 열린 1989년 제13 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평양 주민들이 외국을 광범하게 접하는 중요한 계 기가 되었다. 1982년부터 해마다 평양에서 열리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등도 북한 주민이 외국인을 접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적 난국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 장의 출현, 중국과의 경제 교류 등으로 인해 북한에 외부의 영향이 스며들 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김정은 체제에 들어서면서 더 가속화되고 있다. 김 정은은 사회주의부귀영화 라는 구호하에 건축 예술 음식 등 모든 면에서 세계적 추세에 따라서려고 투자하고 있으며, 그 결과 평양은 해마다 몰라 보게 변화하고 있다. 시장의 형성은 부익부빈익빈을 심화시키지만 부유층의 출현은 고급한 생 활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시장을 통해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16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 이에 따라 패션과 주거, 음식 등이 고급화되고 있다. 고급화의 표준은 남한이다. 남한의 생활양식은 발전되고 세련된 것으로 인 정되는 데다 같은 민족의 것이므로 낯선 서구식뿐 아니라 중국식보다 더 북 한 사람들에게 맞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드라 마를 보면서 남한의 말씨, 남한의 노래와 춤, 남한의 패션과 인테리어 등을 빠르게 모방하고 있다. 북한이 남한을 닮아가면서 점차 남북 생활양식의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 남한 것과 다름없는 북한의 아파트, 남한 주민과 구별되지 않는 평양 부유 층의 옷차림,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는 남한의 너구리라면, 남한 간장을 비 롯한 각종 조미료, 북한 주부들 속에서 인기 높은 남한의 쿠쿠밥솥 등은 남 북의 차이를 나날이 줄여가고 있다. 앞으로 북한 주민의 생활방식은 시장화 와 외부 정보의 유입이 촉진되면서 더더욱 남한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의 생활양식은 그 차이가 줄어들며 점차 통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남북은 느리지만 통일 과정에 있다. 사실, 발전된 문화라고 해서 무조건 추앙할 수만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극 도로 개인화된 문화, 가족 간의 소통마저도 단절시키는 전자기기의 포로 가 된 남한의 생활양식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반대로 북한의 집단주의문화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인 자유를 부정하 고 구속하는 획일적인 문화로 지탄받지만 공생을 지향한다는 좋은 면이 있 다. 또한 전기와 통신수단의 부족은 역설적으로 남한 주민들이 향수를 느 끼는 1960 70년대의 사람냄새 나는 가족과 마을공동체를 보존하게 하 고 있다. 북한 주민의 남한문화에 대한 숭배는 통일 이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열등 감으로 인한 자존심 손상을 가져오게 할 것이고, 반대로 남한 주민들 속에 서는 우월의식과 북한 주민에 대한 차별의식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이는 통일 이후 사회통합을 저애하는 주요 근원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차별의식 을 줄이자면 북한이 발전해야 한다. 북한이 스스로의 개혁개방을 통해 발전 현인애 남북한 생활양식 다름을 넘어 통일로 17
하거나 남북이 갑자기 통일이 되는 경우에도, 가능하면 일정 기간 남북을 분리하고 북한 자체의 발전을 지원해줌으로써 북한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하면서 남북이 서로 통합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통일이 이 상대로 이루어질 확률은 매우 낮다. 통일 과정에 남북 주민은 모두 일정한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북한 주민은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불이익의 상당 부 문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동시에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 한 주민들 스스로 자긍심을 갖도록 각 방면으로 노력함으로써 후과를 최소 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남한 주민의 시민의식이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 사 람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열린 사고를 가지는 것은 통일 이후 남북의 문화적 통합을 이룩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이다. 현 인 애 현재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북한사회를 연구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했으며 북한 나진해운대학과 청진의학대학에서 주체철학을 가르쳤다. 2004년 탈북해서 남한에 입국한 후 이화여자 대학교 대학원 북한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한이탈주민의 정치적 재사회화연구 (2014) 노동 신문 사 논설을 통해서 본 북한 여성담론과 여성정책의 변화 (2015) 등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민주평화 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8 기획특집 분단 70년, 남북의 이질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