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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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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2011 SPRG V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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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香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긴 문화재 그곳에 가면 _ 오래된 능선에서의 뜻 깊은 하루, 동구릉안의 건원릉을 다녀오다 밀어주고 끌어주고 _ 우리의 열정온도 측정불가 연구소의 명물 _ 고중일 행정운영과 전산정보실 정보화 담당 문화 속 들여다보기 _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희귀 고문헌 - 왕세자입학도 행복찾기 _ 국립문화재연구소 탁구동아리 NRICH 동정 문화재는 내 운명 _ 나는 왕이로소이다 42 43 Autumn + 2009

그 곳에 가면 글 김정상 사진 신상은

오래된 능선에서의 동구릉안의 건원릉을 다녀오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그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의 왕릉.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가지만, 그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하는 사람은 많지 않 다. 이번 여행은 이기훈 씨 가족과 함께 왕릉의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발견하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충실한 안내를 위해서 문화재연구소 이유옥 연구원이 함께했다. 동구릉은 말 그대로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무덤) 이라는 뜻이 다. 서오릉, 서삼릉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렇게 왕릉이 한 곳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묏자리를 뺏기기 싫어 왕을 설득한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도성 안에는 왕릉을 만들 수 없었고 또 너무 멀어도 안 돼 100리 이내에 왕릉이 입지해야 했습니다. 원당과 구리는 풍수지리 학적으로 좋은 곳으로 꼽혔죠. 이유옥 연구원은 그런 이유로 지금처 럼 왕릉이 모여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홍살문을 넘어 신성한 공간으로 저기 세워진 문은 홍살문 이라고 하는데,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 가는 문입니다. 이유옥 연구원은 홍살문은 세속의 공간과 신성한 공 간을 구분 짓는 문이라고 설명한다. 홍살문을 지나서는 몸과 마음가 짐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가족들은 좀 전의 들뜬 마음을 가 라앉히고 설명에 집중했다. 홍살문은 각 능이 시작되는 지점마다 다 시 세워져 있을 정도로 상징하는 바가 뚜렷했다. 기록에 따르면 왕릉 주변에는 연못이 같이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동구릉은 연못자리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서오릉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조선의 왕릉은 대체로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 왔지만, 시간이 지나 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린 부분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 중 하나로 연못 을 예로 들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 흔적이 사라져 옛터를 찾 기가 쉽지만은 않다고. 옛날 이곳은 한양에서 떨어진 외곽이었습니다. 왕릉이다보니 능 을 지키는 사람이 필요해서 능호를 두고, 능참봉이라는 직책을 내려 능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수복방에서 기거하면서 가장 가까운 곳 에서 능을 수호하는 능지기의 경우 호랑이에게 물려죽기도 하였다고 한다. 애틋한 사연이 담긴 이성계의 무덤, 건원릉 홍살문을 지나 10여 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묻혀 있는 건원릉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성계는 알다시피 함경도에서 자라 무인으로 성공한 사람입니 다. 당시 고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조선왕조를 개척한 왕이기도 하죠. 하지만 말년에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묻히지 못하는 불운을 겪 기도 했습니다. 44 45 Autumn + 2009

이성계의 능의 택지와 관련된 배후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자주 언급 된다. 그의 정실부인인 신의왕후는 북한 땅인 판문점 근처에 묻혀 있고, 둘째부인 신덕왕후는 정릉에 모셔져 있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곁에 묻히 길 원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아들 이방원(태종)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능자리도 마련해 뒀는데, 지금의 동구릉으로 오게 된 것이죠. 방원은 아버지의 뜻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구리에 아버지를 단릉으로 모셨다. 계모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에 그치지 않고, 신덕왕후의 무덤도 당시 도성의 바깥으로 옮겼다. 그렇 게 헐린 신덕왕후의 왕릉 정자각은 목재와 석재가 각각 중국 사신을 접대 하는 태평관을 짓는데 쓰였고, 병풍석은 지금의 청계천 광통교를 복구하 는데 쓰였다고 한다. 태종의 분노는 200년이란 시간 동안 이어져, 송시열 이 신덕왕후를 재발견할 때까지 종묘에 배향되지 않았다고 한다. 봉분위 특이한 사초 건원릉의 묘지 위에는 갈대가 심어져 있어요. 함흥에라도 묻히기 원 한 태조 이성계를 생각해 그곳의 갈대를 가져와 봉분 위에 심은 것이죠. 건원릉은 동구릉에 조성된 후기의 능들과 달리 강이 높고 봉분 위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리운 고향을 떠올려줄 갈대가 오랜 세월 왕의 곁을 지킨 것이다.

정자각으로 통하는 두 개의 길이 있어요. 하나는 신도 라고 하여 피장자, 즉 선왕이나 대행 왕후의 혼이 다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어도 라고 하여 왕이나 왕의 대행으로 의례를 책임진 자가 다니는 길이죠. 의례는 정자각 안에서 행하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구분되어 있 다고 한다. 신도는 정자각을 가로질러 뒤편의 작은 금천을 건너는 곳 으로 연결된다. 이어 강을 따라 능침까지 올라가게 된다. 봉분의 앞에 는 혼유석이라는 넓은 돌이 있는데, 그곳에서 혼이 노닌다고 한다. 그 래서인지 정자각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신도 가 없다. 신들은 이미 정자각을 가로질러 능위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능을 지키는 조각을 석의물 이라고 해요. 대략적인 시간만 봐도 600년 이상 이곳에 있었던 것이죠. 석의물은 지금도 마모를 겪고 있 어서 보존처리 문제를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능 위에서 무덤을 지키는 석의물들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3개의 계단에 나눠져 있었다. 가장 아래에는 무신이 있고, 다음에는 문신, 그리고 위에는 석양과 석호 등이 있다. 또 무신, 문신의 위치도 무덤 을 봤을 때 오른쪽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 왼쪽에는 젊은 사람의 모습 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능위에 올라 보고 싶어 하나, 훼손의 위 험 때문에 능에 오르는 것은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왕릉에서 보낸 뜻 깊은 하루 이외에도 왕릉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권력 다툼 에서부터 시작해서 애틋한 사랑이야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죠. 왕 릉에 나들이를 나올 계획이 있으시다면 관련된 책이나 정보를 한번 살펴보시면 더욱 풍요로운 과거로의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옥 연구원은 왕릉에는 과거의 문화와 당시의 격렬했던 왕조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있다고 말한다. 휘몰아치는 능선의 역사 가그대 로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왕릉이라는 것이다. 눈을 뜨고 보고는 있지만, 사실 보고 있지 못했던 부분들이 많았 던 것 같습니다. 그 사연,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역사 속에서 살고 있 다는 느낌이 드네요. 문화재 탐방에 참여한 이기훈 씨는 그 동안 언 어를 몰라 소통할 수 없었던 것 같다면서,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가져 야겠다고 말했다. 아내인 이유경 씨는 나무가 많고, 조용해서 무언가 생각하기 좋은 공간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설명도 듣고 보니 더욱 소중한 공 간으로 느껴져 좋았어요. 라고 말했다. 한국사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3학년인 강준이는 그래도 저는 태종 이 가장 좋아요. 힘도 있고, 외교도 잘했어요. 그리고 왕권도 강해서 가장 맘에 들어요. 라고 했고, 아직 유치원생인 지원이는 부끄러워하 면서 재미있었어요. 라고 말했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의 왕릉여행은 끝났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주 변의 왕릉을 공부하고 찾을 거라고 한다.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왕릉은 무수히 많은 옛 이야기를 전해 주는 매력적인 공간 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옥 연구원은 왕릉은 왕의 무덤만이 아니라 과거의 소중한 문 화유산이라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아끼고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유로운 주말 연인 또는 가족과 함께 우리 주변의 왕릉을 찾아보 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잊고 있었던 왕릉을 다시금 떠올려보기도 하 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 쩌면 홍살문을 지나는 순간, 우리가 몰랐던 우리들의 신성함이 눈을 뜰지도 모를 일이다. 46 47 Autumn + 2009

밀어주고 끌어주고 글 유연주 사진 김민정 우리의 열정온도 측정불가 건축문화재연구실 남시진 사무관, 강현 선생 건축은 종합예술이다.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제 모습을 잃지 않도록 열정으로 하나가 된 두 사람, 남시진 사무관과 강현 선생이다.

열정은 열정을 부르고 1970년대 초 불국사 복원사업으로 남시진 사무관이 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된다. 고대를 복원하는 현장에서 이론을 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현재의 남 사무관의 모습을 만든 것도 그 때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경주에서 오랜기간 건물지 발굴 작업에 열정을 다한다. 2000년도부터 황룡사, 미륵사 등 건축문화재에 대한 복원 수요가 활발해진다. 열정이 열정을 부른 듯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연 구소에 몸을 담게 된 강현 선생이 경주에서 남시진 사무관을 처음 만나게 된다. 처음 남시진 사무관을 본 강 박사는 불에 달궈진 쇠 를 떠올렸다. 오랜 시간 현장에 몸담았던 남 사무관의 온몸 구석구석이 그을려지고 달궈진 상태였다. 건축에 대한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몸에 드러난 것이다. 강현 선생은 당시에도 지금처럼 차분하고 착실함이 묻어나던 사람이었다고 남 사무관은 떠올린다. 연구소에서 연 구 분야에 대한 열의만큼은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라고. 건축, 그 무한한 매력에 빠진 건축문화재 연구는 우리의 오랜 건물, 탑, 성곽 등을 조사 연구하여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고 보존되도록 하는 작업이다. 건물이 오 래되다 보면 비가 새고 보수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수 기법을 개발하고 자연재해 후에도 큰 손상이 없도록 연구한다. 이 작업은 다른 문화재 보존 작업처럼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하고 체력적으로도 고된 작업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변함없이 연구에 임하는 것은 이 일 련의 작업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이다. 회화, 조화, 공예 등 모든 예술적인 것이 건축 안에 담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건축은 그 자체로 최고의 경지라고 말한다. 보통 작업은 산골에서 이루어진다. 지금이야 어디든 맘만 있으면 갈 수 있지만 과거에는 쉽지 않았다. 그에 따 르는 장비도 많아 더욱 지치게 했다. 비가 내려 우산을 쓴 채 도면을 그리기도 하고, 한 겨울 추운 날씨에 연필이 손에 잡히지 않아 그만 두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에게 순간의 포기였다. 건축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아닌 원초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못한 인 간이 느끼는 절망에 대한 포기일 뿐이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건축과 건설의 차이가 뭔지도 몰랐어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빠져드는 제 모습을 보면 건축문화재연구 가 정말 매력적인 일이라고 확신을 갖게 됐죠. (남시진 사무관) 모두가 접할 수 있는 문화재가 되길 미술공예 건축부에서 건축문화재연구소가 발족된 지 벌써 6년이다. 최종 목표는 자료집성이다. 자료가 데이터가 되어 건축문화재 보 존관리를 위해 또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문득 이들이 생각하는 한국건축의 아름다움이 궁금해진다. 보(우미량)라고 생각해요. 휘어진 미랄까. 서양의 건물이 직선을 유지한다면 한국 건축은 수덕사 대웅전처럼 곡선미를 자랑하죠. 특 히 추녀 끝 곡선은 지붕이 곧 날아갈 것처럼 펼쳐지죠. 아주 부드럽게. (남시진 사무관) 우리 삶이 담겨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아름다움 아닐까요. 그래서 중국과 일본, 한국이 서로 인접해 영향을 받지만 서로 다른 그 나 름으로의 생활과 문화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기에 전통건축이 아름다운 것이죠. (강현 선생) 나이와 계급을 넘어 학문적인 열정으로 서로를 끌어내는 두 사람. 그것은 함께 하는 이들의 발걸음 뒤에 급을 넘어선 깊이와 넓이가 자연스레 자리하게 했다. 몰두의 즐거움으로 하나 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건축문화재연구소의 열정이야기 후속편을 기대해본다. 48 49 Autumn + 2009

연구소의 명물 글 유연주 사진 김민정 고중일 행정운영과 전산정보실 정보화 담당 가는 길이 험해도 즐거움이 있으면 행복하다 사람이 모이는 자리, 그 안에 비타민처럼 반가운 이가 있다. 모임을 만들고 웃음과 이야기를 담을 줄 아는 이들이 있기에 사는 것이 재미있고 사람이 좋아진다. 그것은 또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일 안에서 새롭게 발산된다. 연구소의 감초, 고중일 행정운영과 전산정보실 정보화 담당이다.

벅찬 단어, 문화재연구소 문화재연구소와의 첫 인연은 자그마치 19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일용직으로 창경궁에서 근무한 것이 시작이 었다. 다음해에 정식으로 발령받아 미술공예연구실에서 몸담게 되었고 그 끈이 지금에 이른다. 그에게 문화재연 구소는 자부심이자 인생 자체이다. 당시에 문화재연구 소 라는 이름만으로도 참으로 벅찼다고 떠올린다. 연구 소는 몸담은 사람들이 대부분 석 박사들이 많아 끊임없 이 연구하는 학구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모습을 함께 땀 흘리고 호흡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소속감은 두터워졌다. 지난해에는 시야밴드에도 동참하여 올해 국립문화재연구소 40주년 기념 홍보를 위해 전민동 한 여름밤축제 공연에 참가하여 많은 갈채를 받았다. 단 순한 오락과 재미를 넘어 각자의 소리가 모여 하나의 화 음을 내는 것이다. 결성된 모임 하나하나가 커뮤니케이 션의 장이 되었고 이웃사랑 나누기 일일찻집, 직원 화합 의 한마당, 퇴직자 송별식까지 화합이 더 넓고 깊게 새로 운 화합을 낳게 되었다. 보며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고 소속 일원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도 많이 했었다. 동시에 학구적인 분위기 안 에 즐거움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 했고 연구소 안에 동아리를 만 들자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문화재가 삶에 가까워지도록 모임이 대전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지방 연구소들과의 교류가 적었다. 앞으로는 지방 연구소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문득 고중일 정 보화 담당의 꿈이 궁금해진다. 문화재 아카이브를 만드 화합이 화합을 낳는 조직의 중심은 소속감과 단결성으로 단단 해진다. 그 소속감과 단결성은 함께 하는 어울림 속 에서 싹트는 것이 가장 완벽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을 간파한 고중일 정보화 담당은 1992년 병월 회 라는 연구소 최초 볼링 동아리를 창단했다. 모두가 이런 장을 원했던 탓인지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모임에 참여했다. 주말과 주중에 2번 진행되는 모임에 40명 정 도의 인원이 고정 인원이 되었다. 모임이 활성화되자 같은 해 축구동아리도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이끌어 오 고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탓이죠. 없으면 만들고 이미 있는 것은 새롭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요. 소소한 일이 많아 버겁지는 않느냐는 말도 듣지만 사실 제가 즐거움을 가장 많이 받는 수혜자라고 생각해요. 는 것이죠. 물론 그 중심에는 국립문화재가 있을 겁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까지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문화재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처음 연구소가 정보화사업을 기획했을 때만 해도 지 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부족한 인력에 열악한 환 경까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만큼 고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끈을 놓지 않은 단단한 정신력으로 연구소 정보화의 새 로운 도약을 맛볼 수 있었다. 새벽운동으로 하루를 열고 점심시간을 쪼개 어학공부를 하는 그의 에너지는 어디 서 샘솟을까? 긍정적인 사고와 실천하는 자세라는 간단 한 대답이 이어진다. 가장 쉬우면서도 또 어려운 것이다. 살아있는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두배세배의 노력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고중일 정보화 담당은 연구소 의 달콤한 약, 비타민이었다. 50 51 Autumn + 2009

문화 속 들여다보기 글 양진조 미술문화재연구실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희귀 고문헌 王 世 子 入 學 圖 왕세자입학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정보관실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귀중한 고문헌들이 다량 소장되어 있 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 등 의궤류와 건원릉지 등 능지류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효명세자 孝 明 世 子 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을 카메라로 담듯이 사실적인 그림과 함께 거행하는 의식을 소개한 책이 있는데 그 것이 바로 왕세자입학도다. 1 1_ 출궁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 왕세자 출궁 의 장 儀 仗 행렬이 창경궁 昌 慶 宮 대궐문을 나와 성 균관으로 향하고 있다. 2_ 작헌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 왕세자가 출궁 하여 성균관에 도착한 후, 대성전 大 成 殿 에들 어가 술을 부어 신위 神 位 앞에 드리는 작헌 酌 獻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3_ 왕복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 왕세자가 대성 전 大 成 殿 에서 헌작의식 獻 爵 儀 式 을 마치고 명륜 당 明 倫 堂 으로 들어가 선생에게 수업을 요청하 는 왕복의식을 치루고 있다. 4_ 수폐 의식을 그린 그림. 박사가 왕세자의 선 생이 되기를 허락하면, 다음에는 왕세자가 선 생에게 폐백을 드리는 수폐의식이 거행된다. 2 3 4

효명세자 입학식을 카메라에 담듯 기록 조선시대 왕세자는 한 나라 근본으로서 그의 학업 정도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 된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원자는 왕세자 로 책봉되기 이전부터 보양청과 강학청에 서 교육을 받았으며 사부와의 상견례를 가 졌다. 국조오례의 의동궁의례가운데왕 세자가 사 師 부 傅 빈객 賓 客 과 상견하는 의 식, 서연 書 筵 에서 회강하는 의식, 왕세자가 입학하는 의식 등이 국가 전례로 규정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조선시대 왕세자교육이 국가의 중대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입학 례는 왕세자가 성균관 대성전에 이르러 공 자 및 사성신위에 제사를 지내고, 박사에게 속수례 束 脩 禮 를 행한 뒤 명륜당에 올라 소 학 을강 講 하는 의례로서 가례 嘉 禮 에 속하는 국가 전례다. 여기에 소개하는 왕세자입학 도는 1817년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기념해 세자시강원에서 일종의 계첩 契 帖 으로 제작 된 작품이다. 효명세자(1809~1830)는 조선 제23대 임 금인 순조 純 祖 : 1801~1834의 아들이다. 어머니 는 안동김씨 김조순 祖 淳 의 딸인 순원왕후 김씨 純 元 王 后 氏 다. 1809년(순조 9)에 출생하 여 1830년(순조 30) 5월에 22세로 급서하 였는데, 사후에 시호를 효명 孝 明, 묘호를 문 호 文 祜 라 하여 효명세자 혹은 문호세자로도 부른다. 그후 헌종 3년(1837)에 익종 翼 宗 으 로 추존되고, 다시 대한제국시기에는 문조 익황제 文 祖 翼 皇 帝 로 추존되었다. 태어날 때 이마가 튀어나오고 용의 눈을 가졌던 세자는 1812년(순조 12)에 네 살 나 이로 창덕궁 희정당 熙 政 堂 에서 세자로 책봉 되고, 다섯 살 때부터 창덕궁 관물헌 觀 物 軒 에서 서연 書 筵 에 들어가 혹독한 세자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기초교육을 마친 세자는 아홉 살 되던 1817년(순조 17) 3월 11일 최 고학부인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치르는데, 이를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바로 왕 세자입학도다. 6 5_ 입학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 왕세자가 명륜당 실내에서 박사로부터 수업을 듣고 있다. 6_ 수하를 드리는 의식을 그린 그림. 성균관 입학 의식이 끝나고 환궁 하여 종친 및 문무백관으로부터 하례를 받고 있다. 5 도면 6면 의식 3면 시문 8면 구성 조선후기 왕세자 입학의식 고증 이 고문헌의 표지는 오동나무로 되어 있으 의궤절차가 차례로 기재되어 있는데 출궁의 피했던 것이다. 그 다음 10면에서 17면까지는 며, 표제 表 題 는해서 楷 書 로 王 世 子 入 學 圖 라고 를 비롯해 작헌의, 입학의, 수하의 등으로 되 입학을 축하하는 시문 詩 文 인데, 좌빈객 左 賓 客 이 씌어져 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文 祖 世 子 時 / 純 祖 丁 丑 이라고 종이에 써서 붙여, 어 있다. 그 다음 4면부터 9면까지는 회화로 그려졌는데 그 차례는 출궁의, 작헌의, 왕복 만수 晩 秀 등 13명의 글이 차례로 올라 있고, 끝으로 박사 博 士 겸 우빈객 右 賓 客 남공철 南 公 轍 의 52 53 1817년(순조 17)에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의, 수폐의, 입학의, 수하의 등 6장면이다. 그 발문 跋 文 이기재 記 載 되어 있으며 모두 해서 楷 書 왕세자입학도는 6면의 도면과 3면의 의식, 림은 매장마다 글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 로 씌어져 있다. 사진처럼 낱낱 장면을 입체적 그리고 8면의 시문으로 된 왕세자 입학 의식 을 상세하게 그려서 의궤를 알기 쉽게 표현하 으로 그린 기록화, 왕세자입학도를 보면서, 을 기록한 것으로, 그 전체 내용이 조선후기 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왕세자의 동의보감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왕세자의 입학의식을 고증하기에 충실한 자 료다. 첫 면과 2면, 3면에는 왕세자 입학 시 좌석위치는 알 수 있게 표시되었으나 왕세자 는지존 至 尊 이기 때문에 어용 御 容 을 그리는 것을 즈음 선조들의 기록문화가 얼마나 뛰어난 것 인가에 대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Autumn + 2009

행복찾기 글 김정상 사진 김민정 핑퐁,핑퐁! 국립문화재연구소 탁구동아리 탁구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지만, 방법에 따라서 그 어떤 운동보다 격렬한 것이 되기도 한다. 부드럽지만 강한 스포츠 탁구, 그 안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숨겨진 또 하나의 얼굴들이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탁구동아리는 올해로 생긴 지 3년을 맞는다. 그 러나 정확한 이름은 없다. 어떤 타이틀보다도 그저 탁구가 좋아서 모 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써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름이 붙지 않아서 오히려 모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탁구동아 리다. 신입회원 모집으로 다시 활기를 찾아 현재 탁구동아리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다. 현재 는 전출이나, 프로젝트 진행 등의 이유로 몇몇 회원이 빠지기도 했지 만, 최근에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와 동아리가 활기를 띄고 있다. 전 초보자인데요, 선배님들이 너무 잘 가르쳐 주셔서 휴식시간은 대 부분 여기서 보내요. 얼마 전 새로 가입한 신입회원인 그는 탁구 치는 소리가 들려서 구경 을 내려왔다가 가입을 하게 되었다며, 이제는 휴식시간마다 탁구장을 들러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연구 때문에 부족한 시간이지만, 한번 땀 을 흘리고 나면 연구를 할 때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마구 솟아나는 것 같다고 한다. 연구 성과와 건강, 분명히 연관관계가 있는 거 같아요.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탁구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 탁구동아리는 20여 명 남짓의 회원으로 운영 되고 있다. 구성원을 보면 실장급부터 학예사, 연구원까지 골고루 분 포되어 있고, 미모의 여성회원들도 2명이나 된다. 현재 탁구동아리 에는 홍종욱, 양진조, 함철희, 권혁남, 김용한, 윤경동, 강영석, 이명 성, 박종서, 김재완, 김선영, 정희원, 김순관 등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이후의 휴게시간을 활용해서 탁구를 즐기고 있다. 탁구의 가장 큰 매력은 짧은 시간에 승부를 볼 수 있다는 거죠.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는 홍종욱 씨는 탁구의 매력은 단시간에 집중 해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연구 원들이 건강관리를 하기에 제격이라고. 연구소의 특성상 모두들 특 별히 많은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한 연구원 들에게 건강관리를 하기에 좋다고. 행정부서별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기도 해 탁구대 앞에서는 탁구 잘 치는 사람이 왕이야. 탁구동아리 사람들은 문화재청장님이 탁구동아리를 방문해서 함께 탁구를 쳤던 때를 잊지 못한다. 큰 어른이었음에도 격을 버리고 연구원들과 담소도 나누고 함 께 땀도 흘렸기 때문이다. 그때 기억 때문인지, 탁구동아리에는 직책 과 선후배간의 딱딱함은 찾아볼 수 없다. 함께 시합을 하다가 실수를 하더라도 서로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를 하는 친근함만이 있었다. 탁구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죠. 동아리활동에 좀 더 지원을 해 주면 좋겠죠.(웃음) 홍 회장은 욕심은 많지만, 우선은 탁구대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현재는 제비뽑기나 복 식 등을 통해서 돌아가면서 치고 있으나, 좀 더 많은 연구원들이 기 다리지 않고 게임을 즐겼으면 하기 때문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공 튕기는 소리가 따라왔다. 그들은 작은 공으로 우정을 이야기 하기도 했고, 서로 강스파이크를 날리며 업무 스트레스도 날려 버렸 다. 그들의 이야기는 밤이 끝나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54 55 Autumn + 2009

제9차 한러공동발굴조사 실시 지난 7월 2일에서 8월 16일까지 46일간 제 9차 한러공동발굴조사가 실시되었 다. 고고연구실 한지선 학예연구사 등 자문단을 포함해 6명이 참가한 이번 발 굴 조사는 7~8세기대 발해말갈의 트로이츠키 문화를 대표하는 대규모 취락유 적인 러시아 아무르강 중류 오시노보예 오제로 유적에서 실시되었으며, 이번 조사를 통해 이 유적의 취락분포, 주거지 양상, 유물상의 특징 등 그 면모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제6기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원 연수교육 실시 고고연구실에서는 2009년도 제6기 매장문화재 발굴 조사원 연수교육을 7월 13일에서 7월 17일까지 5일간 실시했다. 올해로 6회째인 연수교육은 매장문화 재 발굴조사원들의 조사 연구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지난 2005년부터 시작되 었으며, 그간 총 320여명(2005 2008년)이 수료한 바 있다. 올해에는 36개 소(발굴법인 23개소, 시군 4개소, 대학박물관 5개소, 연구소 4개소) 70여 명의 교육생이 참가한 가운데 치러졌다. 한 일 고분문화 비교연구를 위한 연구자 초청 지난 7월 24일에서 8월 2일까지 10일간, 한 일 고분문화 비교연구를 위한 연구자 초청이 있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와 일본 미야자키현립 사이토바 루 고고박물관의 학술문화교류 약정체결( 08.12.10)에 따른 것으로, 일본 미야 자키현립 사이토바루 고고박물관 학예연구원 甲 斐 貴 充 (카이 타카미츠) 씨가 초 청되어, 충주 하구암리고분군 공동발굴조사 및 사이토바루고분군 조사성과에 대한 학술발표 등을 진행했다. 충주 하구암리고분군 발굴조사 자문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지난 7월 28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충주 하구암리고분군 발굴조사에 대 한 자문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조사는 국립중원문화재연 구소가 2008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중원문화권 주요 고분군 학술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으로, 향후 하구암리고분군 전역에 걸쳐 실태조사 및 표본 발굴을 추진할 예정이다.

2009-2차 한러 공동 연해주 고고유적 학술조사 실시 고고연구실에서는 7월 29일에서 9월 5일까지 39일간 2009-2차 한 러 공동 연해주 고고유적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러시아연방 연해주 콕샤로프카-1 평지 성에서 실시된 이번 조사는 김동훈 학예연구사 등 자문위원을 포함한 9명이 참가했으며 발해평지성 내부 쪽구들건물지 2동 및 돌담장 등에 대한 발굴조사 가 이뤄졌다. 호남문화유산 국내 외 비교연구 한 중 일 지석묘 비교연구 워크숍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한 중 일 지석묘 조사 연구 현황 및 향후 계 획 논의를 위한 호남문화유산 국내 외 비교연구 한 중 일 지석묘 비교연 구 워크숍 이 있었다. 지난 8월 26일 수요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회의실에 서 있었던 본 워크샵은 華 玉 氷 (중국 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陳 元 甫 (중국 절강 성문물고고연구소), 小 池 史 哲 (일본 후쿠오카현교육청총무부), 이영문(동북아지 석묘연구소장), 나주연구소 직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이뤄졌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발견 기념 학술심포지엄 지난 9월 3일 목요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 발견을 기념하기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경주시 북군동 교원 드림센터 대회의실에 서 있었던 이 행사는 관련 전문가 및 일반시민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 되었으며, 연구소에서는 향후 연구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기본 보고서 성 격의 浦 項 中 城 里 新 羅 碑 를 발간하였다. 원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 지(www.gcp.go.kr)를 통해 공개되어 누구든지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비물질문화유산보호센터 방문 무형문화재연구실에서는 무형문화재 제도개선 과제 및 개선사항 도출을 위한 자료수집과 무형문화유산 협약 이행을 위해 지난 9월 7일부터 4박 5일간 중 국 북경의 비물질문화유산보호센터를 방문하였다. 이번 방문에서는 중국 무형 문화유산 정책 동향 파악과 현장 방문을 통한 자료수집이 시행되었으며, 관련 기관과의 면담 및 교류 협의가 있었다. 56 57 Autumn + 2009

문화재는 내 운명 글 이은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실장 나는 왕이로소이다 1992년 3월 2일 대학 졸업장을 받은 이틀 뒤 고학자들은 금동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경주연구소로 첫 발 하나만 발굴해도 일생 을 내딛게 되었다. 출근 첫 날 소주 댓병을 비 의 행운인 것을, 나는 워야 하는 무시무시한 신고식(?)을 거치면서 신라 금제품은 지겨울 나의 사회생활은 젊음의 도전 그 자체로 시작 정도로 다루었으니. 되었다. 당시에는 조사원임에도 불구하고 9일 행운은 따라다니나 보다. 마다 숙직을 했으며 한 달에 1.5번 정도의 휴 보고서 작업도중 헌강왕릉 발굴 일 일직은 어찌나 빨리 돌아오던지 정신을 못 때 일손이 부족해 하루만 지원발굴을 나 차릴 정도였다. 당연히 젊은 날 사랑의 대상은 갔는데, 도굴된 석실 내에서 3명이 작업 중 나 혼자 아름다운 이성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술로 파던 곳에서만 1냥 정도 금제장식과 금사金絲를 발굴해 내어 금의 손 이라 불리웠다. 지내온 수많은 밤이었다. 입소한 지 5개월이 또한 국내 처음으로 조선시대 경주 옥사獄舍를 발굴해 조선이 세계최초의 인권국가라는 것 지나 발굴 현장이 몸에 익을 때쯤, 갑자기 황 을 증명한 점이 기억에 남는다. 왜냐고?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의 감옥을 구분하고 여 남대총 남분보고서 발간팀 으로 실내근무를 름 겨울의 감옥을 구분하라는 세종때의 기록(1426년)이 발굴에서 확인되었다. 2개의 다 하라는 것이었다. 사무실은 당시 황룡사지 내 른 규모의 건물이 확인되었고, 그림에서만 볼 수 있었던 둥근 형태의 원옥을 발굴해 밝혀 98호 창고 로 70년대에 축조된 유물만 잔뜩 냈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 1595년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남녀 혼거수용의 폐단을 없애고 들어있는 유리창도 없는 곳이었다. 아무런 생 자 여자감옥이 설치되었다는 기록보다 무려 170여 년이 앞선다는 점은 우리의 역사를 다 각 없이 창고내부의 유물상자를 열어보다가 른 방면에서도 해석해야 할 많은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경주 남산도록과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보존정비사업, 석탑 복원은 힘들었지만 너무나 즐거웠다. 그 중에서도 남산 돌부처님 앞에 수많은 금제, 은제유물, 구슬류, 곡옥류뿐만 있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엄청난 질타도 받았지만, 부처님의 시야를 너무나 시원하게 해 아니라 3천 점의 토기와 2천 점의 무구류, 비 드려서 복을 넘치도록 받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모두를 차치하고서라 단벌레날개장식 말안장까지 3만여 점이 들어 도 창문을 열면 첨성대가 훤히 보이고, 월성이 앞마당이었던 연구소 숙소에서 보낸 4년여 있는 이 창고는 그야말로 진짜 보물창고였다. 젊은 날의 삶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조사원의 빈약한 급여에 장래가 불안했지만 왕이 1973년부터 75년까지 발굴된 이 황남대총의 치장했던 장신구를 만지고, 왕이 다니던 도시를 발굴하고, 왕이 살던 월성을 마당으로 삼 유물들은 보고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 았으니, 나는 왕이로소이다 라는 영화 제목처럼 한 번 외쳐봄직도 하다. 왕자 공주형의 로 내가 당첨된 것이었다. 꽃보다 남자, 아가씨를 부탁해 다음에 나올 법한 드라마의 제목이 아닐까? 황남대총 남분 보고서 작업과 유물정리는 2년 10여 년의 경주생활과 7년여의 서울, 대전을 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거울 여의 세월이 걸렸다. 신라 왕이 사용하던 최고 앞에선 누님 보다는 언제 보아도 매혹적인 가야고배의 잘록한 허리처럼 싱싱함을 남기고 수준의 유물을 직접 만지고 실측 및 정리하면 싶다. 서 최대의 호사는 다 누려 본 것 같다. 보통 고

NRICH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69년 서울에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로 발족하여 1995년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4년 대전 대덕연구단지 신청사 마련을 계기로 국내외적으로 손색없는 문화재 종합학술조사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연혁 조직도 1969. 11. 5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 설치(대통령령 제4203호) 1973. 3. 9 문화재연구실을 문화재연구 담당관실로 직제개정(대통령령 제 6537호) 1975. 4.17 문화재관리국 소속기관으로 문화재연구소 직제개정(대통령령 행정운영과 General Affairs Division 042)860-9114 제7600호) 1988. 9. 1 유적조사연구실 신설(대통령령 제12513호) 1990. 1. 3 경주문화재연구소, 부여문화재연구소, 창원문화재연구소, 목 연구기획과 Planing And Coordination Division 042)860-9131~9137 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 신설 (대통령령 제12895호) 1994. 5. 4 서무과 신설,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 로 명칭변경 및 문화재관리국 직속기관으로 관할 변경(대통령령 제14251호) 고고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Archaeology 042)860-9171~9188 미술문화재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Artistic Heritage 042)860-9191~9200 1995. 11.22 국립문화재연구소 기관명칭 변경(대통령령 제14809호) 1999. 5.24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청 승격(대통령령 제16347호) 2003. 7.25 건조물연구실 신설(대통령령 제18061호) 건축문화재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Architectural Heritage 042)860-9211~9222 2004. 1.17 대덕연구단지 신청사 이전 2005. 8.16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신설 및 서무과를 정 무형문화재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042)860-9231~9243 책기획과로 명칭변경(대통령령 제19001호) 2006. 4. 6 자연문화재연구실 신설(문화관광부령 제135호) 2007. 1. 1 국립문화재연구소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 (대통령령 제19749호) 2007. 3.15 연구기획과 신설(국립문화재연구소 훈령 제2호) 2007. 11.30 중원문화재연구소 신설, 창원문화재연구소를 가야문화재연구 소로 건조물연구실을 전통건축연구실로 실명칭 변경(대통령령 제20410호, 문화관광부령 제176호, 대통령령 제20420호, 국립문화재연 문 화 재 청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국 립 문 화 재 연 구 소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보존과학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Conservation Science 042)860-9251~9273 복원기술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Restoration Technology 042)860-9341~9346 자연문화재연구실 Research Division of Natural Heritage 042)610-7611~7619 구소 훈령 제4호) 2008. 8.12 유적조사연구실을 고고연구실로, 미술공예연구실을 미술문화 재연구실로, 전통건축연구실을 건축문화재연구실로, 예능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054-777-8800 속연구실을 무형문화재연구실로 각각 실명칭 변경(국립문화재연 구소 훈령 제7호) 2009. 4.29 기본운영규정 개정으로 본소 과명칭 변경.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지방문화재연구소 내에 실 과 신설(국립문화재연구소 훈령 제10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Buyeo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041-833-5901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Gaya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055-285-1314, 1315 시설현황 소 재 지 대전시 유성구 문지동 472번지 일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Na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061-337-9960~2 본 동 면 적 보존과학센터 6,745m 2 (2,040평) 7,808m 2 (2,362평)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Jungwon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043-855-8962 중앙문화재센터 연 구 동 천연기념물보호센터 3,577m 2 (1,082평) 984m 2 (298평) 3,625m 2 (1,097평) 문화재보존과학센터 Conservation Science Center 042)860-9374~9377

얼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ISSN 2005-808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