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세상을 연주하다 블라인드 뮤지션 (이승현 외 지음/예솔/2015년 11월/176쪽/14,000원)
블라인드 뮤지션 (이승현 외 지음/예솔/2015년 11월/176쪽/14,000원) 책 소개 블라인드 뮤지션 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했던 시각장애 음악인들에 관한 책이다. 먼저 조 선 시대에 나라에서 관리했던 궁중 악사 관현맹인 (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소개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세종대왕, 성종, 정조 시대 의 선진적인 정책을 돌아보며 독자들은 학벌이나 스펙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NCS(직무능력표준제도) 의 정신이 이미 조선 시대에 있었음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책에는 조선 시대에 이름을 남긴 유명 한 시각장애 음악인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서 활동했던 시각장애 음악인들에 대한 내용도 담 겨 있으며, 현대 우리나라에서 재탄생된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및 왕성하게 활동 중인 시각장애 음악인 들, 그리고 시각장애가 있지만 음악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가들까지 소개함으로써 차별과 편견 없이 장애인들을 돌아보게 한다. 저자 이승현 경희대 영어학부, 언론정보대학원 졸업,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한림성심대학교 영상콘텐츠학 과 겸임교수. 현재 춘천MBC 아나운서이자 연출자로 활동 중이다. 뉴스데스크 강원 앵커이며 라디오드라마 조선 관현맹인 열전, 라디오다큐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연주하다, TV다큐 관현맹인 문종석, 춘천MBC 한글날 특별기획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창사 46주년 특별기획 지역 MBC 5개사 공동기획 의인열 전 붓과 총을 든 여전사, 윤희순, 지역MBC 8개사 연속기획 40부작 살.신.성.인-살아서 신선이 되 는 법, 인문학 등을 연출했다. 방송통신위원회 한국방송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3회), MBC전국라디오작품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하였고, 논문 지역MBC 라디오PD의 작업 문화와 정체성 형성에 관한 연구 로 2015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 추계학술대회 우수논문상 등을 수상하였다. 송보나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석사. 한양대 일반대학원 대중문화 시나리오학과 박사수료. 현 재 신한대학교 출강. 2011년 고려시대 건축물을 소재로 한 혜음원 참모들 로 경기디지털콘텐츠진흥원주최 경기 창작희곡 공모전 입선하였고, 2012년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연주하다, 2014년 의인열전 10부작, 2014년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을 각각 수상하였으며, 2015에 는 방송대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15년 지역MBC 8개사 연속기획 40부작 살신성인-살아서 신선이 되는 법, 인문학 중 춘천MBC 조선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동학의 깃발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였다. 방송작가협회 소속 드라마 작가로서 한국의 문화원형 소재를 웹 콘텐츠로 발굴 소개하는 작업을 전문적으로 해오고 있다. 디지 - 2 -
털시대의 한국의 드라마 콘텐츠를 글로벌 웹 콘텐츠로 육성 개발하는 데 연구 매진하고 있다. 차례 추천의 글 저자의 말 제1장 조선 시대의 블라인드 뮤지션, 관현맹인 1. 궁중악사 관현맹인 관현맹인이란 관현맹인의 공연의상 및 악기 관현맹인의 월급 관현맹인 제도의 존속기간 2. 음악을 사랑한 임금 세종대왕 음악은 나라의 기둥 음악 애호가이자 프로 음악인 궁중악사로 시각장애인들을 등용 시각장애 악사들을 위한 정책 3. 마에스트로 박연 타고난 재능 뛰어난 음악가 인간적인 관리 4. 왕립음악원 장악원 인재들의 집합소 입학시험 장학원이 배출한 음악인 5. 대표적 시각장애 음악인들 조선 시대 최고의 시각장애 궁중악사 이마지 가야금의 명인 김복산 거문고의 대가 이반 거리의 악사, 비파의 백성휘 귀신도 감동시킨 아쟁의 김운란 시각장애인 가수 일찍 사라진 거문고의 명인 김대정 여성 음악인 백옥 스승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주세근 제자가 사랑한 윤동형 6. 시각에 문제가 있었던 임금님들 세종대왕 연산군 선조-광해군 현종-숙종-경종 정조 tip: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음성보이스 제2장 현대 우리나라의 블라인드 뮤지션 1. 관현맹인전통예술단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백 년 만에 부활하다 21세기 관현맹인들의 이야기 2. 우리나라 시각장애 음악인들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재즈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가수 이용복 음악인 이소영 마림비스트 전경호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 팝 보컬리스트 김지호 tip: 점자 악보를 읽는 방법 제3장 세계의 블라인드 뮤지션 - 3 -
1. 중국의 고대 시각장애 음악인 사광 2. 중국의 전통악기 얼후 연주자 아빙과 문화춘 아빙 문화춘 3. 대만의 먀오인웨지 악단 4. 일본의 전통 시각장애 음악인 5. 시각장애가 있는 음악의 거장들 스티비 원더 레이 찰스 라울 미동 다이안 슈어 호세 펠리치아노 참고문헌 - 4 -
블라인드 뮤지션 조선 시대의 블라인드 뮤지션, 관현맹인 궁중악사 관현맹인 관현맹인이란 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했던 관현맹인은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별빛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태양의 화사한 눈부심을 비교할 수 없었으며, 누군가 손잡아 주지 않으면 발걸음 하나 떼는 것조차 어려웠습 니다. 낡은 툇마루 위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슬픈 일이 없어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를 보고 어떤 이가 한마디 위로를 건넵니다. 눈이 보지 못하는 건 마음이 보게 될 거야. 어떤 것으로 보든,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기왕 태어난 인생인데 멋지게 살 아보고 싶습니다. 시각장애라는 장막을 대신할 무언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대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 시각장애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시각장 애인의 상당수는 구걸을 해서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점은 조선 사회에서는 구걸도 어엿 한 하나의 직업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밥벌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를 살았던 시각장애인들도 사회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습니다. 능력에 한계를 두지 않고 꾸는 꿈은 성공의 기회를 가져옵니다. 앞이 보이 지 않는 이들 가운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거리의 악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더 특별한 연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은 공직에 진출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바로 궁중 악사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궁중악사를 따로 선발한 제도가 있었는데 그렇게 뽑힌 연주가들은 관현맹 인이라 불렀습니다. 전국적으로 높은 경쟁을 뚫고 어렵게 선발된 자리인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마음으로 달려온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하면 조선의 궁중 뮤지션, 관현맹인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 관현맹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 6년, 1424년 7월로 거 슬러 올라가보면 시각장애인 26명과 박연 등이 세종대왕에게 올린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거문고과 비파를 타는 것으로 직업을 삼아 생계를 이어왔는데, 근래 국상으로 인하 여 음악을 중지하니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세종실록 제25권, 세종 6년 7월 22일 조선 초,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면서 생활을 하던 시각장애인 뮤지션들이 이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관습도감의 수장 박연은 상소에서 그들의 생계가 어려워졌음을 호소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렸습 니다. 이것을 근거로 시각장애인 궁중악사, 관현맹인 제도는 세종 6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관현맹인 직함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합니다. 관현맹인 제도가 마련된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 시 시각장애인 음악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관현맹인은 궁중악사의 신분을 가리 키는데, 그들은 공무원 신분으로 대궐에서 연주를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립국악원의 - 5 -
단원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관현맹인들의 공연 무대는 궁궐입니다. 궁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저마다 직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궁궐의 모든 것이 임금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습 니다. 관현맹인은 왕비나 대비를 위하여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연 주하는 음악은 주로 향악이라고 하는 연회용 음악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곱 살만 되면 남녀가 한 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남녀칠세부동석( 男 女 七 歲 不 同 席 ) 의 유교 가르침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조선의 예절이 이러하니 연주자라고 하더라도 왕비나 대비 가 주관하는 여성들의 잔치에 남자는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연주자는 예외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앞을 보지 못하는 음악가들을 관현맹인이라는 직책을 주고 등용 한 이유입니다. 내연 때에는 악공을 쓰지 말고, 시각장애인으로 주악을 연주하게 하라. -성종실록 제8권, 성종1년 12월 17일 조선의 제9대 임금 성종(1469~94 재위)은 더 많은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을 선발하여 지속적으로 음악 교육을 시키고,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관현맹인들에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들의 음 악에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성종 임금은 잔치에서 관현맹인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이 유를 알기 위하여 음악을 총괄 책임지는 장악원의 관리들을 불러 묻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어제 잔치에서 기생 및 관현악을 담당했던 시각장애인들이 모두 마음을 써서 연주하지 아니하고 또 한 가곡도 조화를 이루지 못했으니, 장악원의 관리를 불러 묻도록 하라. 임금의 부름에 놀란 장악원 제조(장악원에서 가장 높은 관리) 윤칠상은 임금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 렸습니다. 이에 성종 임금이 물었습니다. 신하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함인데 어찌 번거롭게 머리를 조아리는가? 다만 기생들은 노래 부르는 데 태만하였고 노래 부를 것 또한 항상 한 곡만 불렀으니, 어찌 사리와 체면에 합당하겠는가? -성종실록 제219권, 성종 19년 8월 16일 관현맹인들이 정성을 다하여 연주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성종 임금이 궁중 음악을 담당하던 장악원 의 책임자를 불러서 질책을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비록 연회에서의 공연이었지만, 감흥을 안겨주지 못하였을 때에는 궁중음악을 총괄 담당하는 부서인 장악원에 그 책임을 묻고 반성하도록 명하였습니 다. 관현맹인들은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한때는 보이지 않아, 살아가는 일에 의욕을 상실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저 얻어먹는 삶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서 습득한 연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하는 음악인이 된 것입니다. 별을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하다고 했던가요? 조선의 궁중악사 시각장애 음악인들은 어둠 속에서 그들의 음악으로 빛을 찾았습니다. 결코 행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 6 -
현대 우리나라의 블라인드 뮤지션 관현맹인전통예술단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백 년 만에 부활하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은 2011년 3월 결성되었습니다. 단원 모두 전통음악을 전공한 시각장애인 뮤지 션들입니다. 2011년 12월 14일 예술의 전당 국악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가지며 현재까지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은 조선 시대, 관현맹인 전통을 복원하는 의미에서 창단되었습니다. 역사 속에 꼭꼭 숨어있던 장악원 시각장애인 궁중악사들을 백 년 만에 현대부대로 이끌어낸 것입니다. 위대한 이름을 기억하고 위대한 모범을 계승하는 것은 영웅의 유산이라고 합니다. 전통은 한 나라의 문화척도를 반영하는 거울이어서 맥이 끊긴 옛 전통을 복원하는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금광을 소 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으며 역사 속 영웅과의 만남도 이룰 수 있습니다. 영웅의 유산이 보석처럼 찬란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미래의 유산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원들의 땀방울이 보이십니까?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의 부활은 먼저 조선 시대 시각장애인 뮤지션들의 예술적 혼을 되살려 낸다는 의 미가 담겨 있으며, 둘째로 다양한 직업군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시각장애인 음악인들에게 활 동의 범위를 넓혀주자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직접 손발을 걷어붙이지 않으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음악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 자 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쟁이 심해지는 현실 속에서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음악인에게 선 뜻 무대를 내줄 수 있는 사회적 배려는 좀처럼 찾기 힘드니까요. 더구나 국악을 전공하는 시각장애인 이 국립국악원의 단원으로 취업하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음악활동보다는 생계를 위한 다른 밥벌이를 찾게 되고, 전공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밥벌이가 다행스럽게도 적성에 맞는다면 그나마 행운입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경우라면, 열정을 끌어낼 수 없는 일로 하루를 견딘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입니다. 그 런 뜻에서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의 창단은 직업선택에 있어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인 뮤지션 들에 힘을 보태는 바람직한 행정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은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 다. 최동익 단장을 비롯하여 변종혁 예술 감독의 지도하에 총 7명의 단원들이 창단 이후에 각종 국내 외 공연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거문고, 가야금, 대금, 사물놀이에 들어가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으로 이 루어져 있으며, 가야금 병창과 정가부문의 소리를 담당하는 가수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포부는 조선 시대 관현맹인들의 전통을 잇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고유의 국악들을 선보이기 위해 땀을 흘리 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남는 것은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백 년 전, 시각장애인 궁중뮤지션이 없었다면, 오늘날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체적 장 애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만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한 두려움을 - 7 -
이기도록 사회와 기관이 나서서 환경을 만들었으니, 이제 세상 속 관객들과 소리로 소통하며 내일의 더 큰 꿈을 키우는 일만 남았습니다. 국악단을 이끄는 단장과 감독, 단원들은 공연무대를 해외로까지 확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중국의 장애인전통예술단, 천수관음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오겠지요.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 음악인들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일 때문에 행복하면서도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일이 없으면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상재 교수는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하트챔버오케스트라 단장이면서 클라리넷 연주자이며, 나라세 대 관현악과 교수입니다. 2006년에는 그래, 네 마음은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단다 라는 책을 펴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시각장애인 하트챔버오케스트라는 2007년도 10명의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을 포함 해 총 20명의 단원으로 창단했습니다. 실내악 수준의 규모이지만 장차 국립오케스트라 수준으로 키울 생각에 일부러 오케스트라 로 명명했고 지금까지 공연한 횟수가 130회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상재 교수가 하트챔버오케스트라를 창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인적인 꿈과 목표 때문이라고 합니 다. 장애극복을 위한 일종의 힐링 프로젝트라고 할까요. 7살 때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고 방황했을 때 음악을 만났고, 어렵게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와 악기 연습에만 몰두하여 수석졸업을 하 게 되고, 이후 유학을 떠나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피바디 음악대학에 입학하여 6년 만에 석사와 박 사 학위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상재 교수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채용하겠다는 곳은 없었습니다. 시 각장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휘자의 지휘봉을 쳐다봐야 하는데, 시각장애인 음악인들은 볼 수가 없 으니까 음대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음악을 전공해도 밥벌이는 보통 다른 업종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관련 자리에 취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음악전공자도 사회복지사나, 안마사와 같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고 합니다. 이상재 교수는 그런 현실이 안타까워서 직접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데에는 초인의 힘이 필요합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 불가능을 극복하고 자 이상재 교수는 오케스트라를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챔버하트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은 초인의 힘으 로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이상재 교수는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는 다른 연주자들 과 호흡이 중요한데, 악보를 볼 수 없으니 오직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도록 혹독한 연습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과연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단원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고민 하며 연습했습니다. 단원들이 지방 각지에 거주하고 있던 터라 매주 토요일의 연합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8시간이 넘는 시간을 쓰는 단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파트별로 익힌 내용들을 토요일에 모여서 합쳐보았습니다. 곡당 연습 횟수는 최소 200번이 넘었습니다. 완전히 곡을 익히지 못한다면, 그들의 도전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챔버하트 오케스트라에는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지휘자가 없습니다. 일치된 호흡으로 완전 무장했 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열매는 달다고 했나요? 첫 공연을 시작으로 챔버하트 오케스트라는 7년째 공 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훌륭한 안착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상재 교수는 챔버하트 오케스트라만의 특별한 무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암전( 暗 轉, 어두움) - 8 -
무대입니다. 어떤 관현악단도 흉내낼 수 없는 어둠속의 공연입니다. 객석을 비롯하여 연주자들이 있 는 공연 무대에까지 작은 조명마저도 모두 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용히 연주가 시 작되는 것입니다. 관객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오직 소리 하나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간혹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도 들립니다. 이 암전 무대는 인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제공합니다. 이상재 교수는 말합니다. 우리는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극복해가고 있고, 죽 을 때까지 극복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서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암전 무대 의 신선한 감동 때문 에 장애가 없는 일반관객들도 공연 후에는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겠다고 감사인사를 합니다. 이상재 교수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세계의 블라인드 뮤지션 시각장애가 있는 음악의 거장들 스티비 원더 난 특별한 눈을 가졌을 뿐이다. 스티비 원더는 가수이자 음반 프로듀서이며 사회 활동가입니다. 그는 1950년 미국에서 조산아로 태 어나 인큐베이터에 있던 중 산소가 너무 많이 공급되는 바람에 눈의 망막이 파손돼 실명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팝 뮤직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성공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스티비 원더의 본명은 스티블랜드 하더웨이 모리스지만 11 살 때 리틀 스티비 원더라는 예명으로 데뷔하였습니다. 스티비 원더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 수업에 흥 미를 느끼기보다 피아노를 치고 노래할 수 있는 교회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스티비 원더는 1963 년에 발표한 <Fingertips>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전 세계에 팝가수로 이름을 알리게 됩 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움츠러들 필요는 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 달라. -스티비 원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등 그가 부른 많은 곡들이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30 여 개 이상의 히트곡들이 톱 10에 들었습니다. 앨범 판매량도 1억 5천만 장이 넘습니다. 스티비 원더 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그래미상을 21회 수상하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오 른 전설적인 팝 뮤지션입니다.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하모니카, 피아노, 드럼, 베이스 기타 등 다양 한 악기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그는, 음악에는 장애가 없음을 증명한 만능 아티스트입니다. 레이 찰스 나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다 - 9 -
레이 찰스에게는 소울 음악의 대부, R&B음악의 거장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닙니다. 7세 때 걸린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특수 학교에서 음악, 피아노, 점자를 공부하였습니다. <I Can t Stop Loving You>와 같은 명곡을 발표하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명 중 랭킹 2위를 차지할 만큼 이제 는 전설이 되어버린 뮤지션입니다. 레이 찰스의 이야기는 영화 레이 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에는 레이 찰스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위 대하고 강인한 그의 어머니가 두려움에 맞서는 강한 아들을 키우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몸의 장애보다 무서운 건 마음의 장애란다. -레이의 어머니 아레사 레이 찰스는 성공한 가수였지만, 그의 인생에도 굴곡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음악적 성 공을 거둔 레이는 음악을 통해 모든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고 말합니다. 라울 미동 시각장애는 핸디캡이 아니라 나의 자산이다 라울 미동은 전문 댄서였던 아르헨티나 출신 아버지와 미국 뉴욕 출신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었고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르 헨티나의 전통음악을 드럼으로 연주했던 라울 미동은 재즈와 플라멩코 기타 등 다양한 기타 연주법을 익혀 음악의 지평을 넓힙니다. 마이애미에서 대학을 다니며 라틴 뮤지션과 교류하던 라울 미동은 2002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스파이크 리의 영화에 자신의 노래 <Adam N Eve N Eve>를 선보이면 서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주목 받게 됩니다. 신체적 불편함의 이면에는 밝은 면이 있다. 시각장애는 핸디캡이 아니라 나의 자산이다. -라울 미동 라울 미동은 뛰어난 재능과 뜨거운 열정으로 시각 장애를 극복해낸 젊은 뮤지션인데요. 청중의 마음 을 움직이는 목소리와 기타 연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2011년 3월 19일에는 한 국에서 내한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단 두 장의 음반을 통해 스티비 원더의 대를 잇는 천재 싱어송 라이터 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라울 미동은 음반 작업을 할 때 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소 짓도록 하기 가 모토라고 합니다. 라울 미동은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신체적 장애를 가진 뮤지션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신체적 불편함의 이면에는 밝은 면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최대한 이용해 자신만의 관점과 독창성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는 미소만큼 멋지고 행복한 뮤지션입니다. 다이안 슈어 세상을 마음의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 10 -
다이안 슈어는 세계적인 시각장애인 여성보컬 재즈 뮤지션입니다. 1953년 피아니스트 아버지와 재즈 뮤지션 듀크 앨링턴을 좋아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후 인큐베이터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9세 때 노래를 시작해 10세에 첫 공연을 했으며 16세 때 자신의 밴드를 구성하여 연주를 선보인 이래로 지금까지 재즈와 함께 해왔습니다. 21세기 최고의 재즈 디바로 평가받는 다이안 슈어는 한 장르만 고집하지 않고 여러 뮤지션들과 공연 하며 자기 음악세계의 폭을 넓혀 나갔습니다. 2008년과 2014년에는 우리나라에 내한하여 공연을 하 는 등, 그녀는 한국의 재즈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뮤지션입니다. 어둠 속에서 절망하지 말아라. 항상 빠져 나갈 길이 있다. 생에 정복당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다이안 슈어 재즈 싱어 중에는 흑인계가 많은데 다이안 슈어는 백인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라서 더욱 주목받았습니 다. 재즈 음악인들은 말합니다. 흑인들의 깊고 관능적인 보컬에 비해서 다이안 슈어의 노래는 화사 한 봄의 느낌과 스산한 가을의 향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일직선으로 매끄럽게 솟아오르는 하이 소프라노는 다른 흑인 여성 보컬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아찔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음악은 그녀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이 음악 에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재즈의 여왕으로 불리는 엘라 피츠제랄드와 비교되곤 하지만 다이안 슈어는 자신의 음악적 근원은 어머니이며 늘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래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호세 펠리치아노 퍼붓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미국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는 미국계 라틴 팝가수입니다. 그의 노래 <Rain> 이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그는 대중음악계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졌지만, 어릴 때부터 아코디언과 기타를 독학으로 섭렵하였습 니다. 그는 9살 때 뉴욕의 스페니시 할렘가에 있는 푸에르토리코 극장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 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커피하우스에서 연주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푸에 르토리코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의 스페인 이민촌 빈민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천부적인 음악소 질로 인해 부와 명성을 함께 얻게 됩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