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의생활 장 수 현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상근연구원 인류학) 1. 옷차림의 변천 /192 (1) 1950년대-1970년대 /192 (2) 1980년대 초반 이후 /194 2. 현재의 옷차림 /195 (1) 민족복 /195 (2) 현대식 의복 /197 (3) 의례복 /200 (4) 이불 / 202 안가진( 安 家 鎭 )에서 조사하는 필자
182 중국 흑룡강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제 8 장 의생활 이 장에서는 신락촌의 의생활에 관해 살펴본다. 먼저 신락사람들의 옷차림이 전체적으 로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개혁개방 전후의 두 시기로 나눠 기술할 것이다. 이어서 현 재(1990년대 후반)의 옷차림을 민족복, 현대식 의복, 의례복, 이불의 네 부분으로 구분 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본다. 1. 옷차림의 변천 이 마을은 조선땅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구성된 곳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중국의 성 립 이전의 옷차림은 조선에서의 옷차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주위 한족들 과 접촉을 하긴 했지만 조선족들끼리 하나의 집단거주지를 형성하여 살았던 관계로 옷차 림에서 한족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았다. 당시 이 마을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가정에서 베틀을 이용해서 천을 짜고 그 천으로 조선옷 을 만들어 입었다. 1) 이런 상황은 사회주 의 정권하에서도 상당 기간 계속되어 1950년대까지는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활의 여유가 있는 부유한 사람들은 옷을 사서 입는 게 보통이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베틀로 짠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염색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검은색과 흰색의 옷이 주를 이뤘다. 내복과 양말등도 솜을 물레에 자아서 뽑은 실로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신발은 대개 고무신을 신었다. 1960년대는 베틀로 천 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대개는 가게에서 천을 끊어 와서 옷을 만들거나 아예 가게에서 기성복을 사서 입었다. 사회주의 통치 하에서 신락사람들의 옷차림의 변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눠 살펴봐야 한다. 첫째는 1950년대부터 개혁개방의 시작 이전인 1970년대까지 기간으로 이 시기는 전체적으로 실용성이 앞서는 간편한 옷차림이 널리 퍼졌다. 둘째는 1980년대 이후 현대 까지로 개혁과 개방으로 의류의 다양성이 크게 증대한 시기이다. (1)1950년대-1970년대 이 시기는 소련식 모델을 따라 중공업 위주의 경제개발 정책이 시행된 결과 소비재 생 산부문들의 발전이 아주 미약했다. 따라서 의류공업 역시 큰 성장을 경험하지 못했으 1) 가장 흔한 재료는 삼이었다. 삼으로 실을 자아 천을 만드는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집에서 재배한 삼을 베어 물에 삭힌다. (2)삭힌 삼의껍질을 벗겨 없앤 다음 솥에 찐다. (3)약간 손으로 빗어서 다듬는다. (4)약간 희게 변한 것을 실북에 감는다. (5)베틀에서 천을 짠다.
의생활 193 므로 의류의 다양성은 크게 기대하기 힘들 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절약과 검소의 미덕이 강조되었으므로 화려한 옷보다는 노동계급에게 적합한 검박한 옷이 유행하 였다. 사람들은 무늬가 거의 없는 무채색 의 옷을 특히 많이 입었다. 1950년대에 찍은 마을사람들의 사진을 보 면 거의 대부분이 목천으로 만든 검은색, 흰색, 회색 등 무채색 계통의 옷을 입고 1950년대 흑백치마저고리 있다. 2) 남자들 가운데 민족복인 조선옷 을 입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이들은 주로 옛날에 입던 옷을 계속해서 입는 사람들이었 다. 이미 이시기에 젊은 남자들은 조선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남자들은 노동할 때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인민복과, 위쪽에 주머니 두 개, 아래쪽에 밖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 두 개가 달린 중산복 등을 즐겨 입었다. 여자들의 옷차림은 남자들에 비해 약간 다채롭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어두운 색깔(검은색, 회색, 남색 등)과 단순한 디자인이 많았다. 여자들은 여전히 광목으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치마저고리는 집안에서 주로 많이 입었지만 일할 때 입는 사람도 있었다. 일할 때는 몸빼 바지를 많이 입었고 위에는 간편한 런닝셔츠만 입든지 아니면 인민복과 같은 겉옷을 걸쳐 입었다. 여름철에는 남자들은 주고 목이나 삼으로 만든 셔츠를 많이 입었다. 속에 내의를 껴입 는 사람도 있었다. 런닝셔츠는 대략 50년대 말에 나왔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런닝셔츠만 입기도 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목천으로 만든 셔츠를 많이 입었다. 여자들 셔츠는 목깃이 둥글고 남자 것에 비해 조금 짧았다. 학생들은 일본 해군복같은 교복을 많이 입 었고 밑에는 검은색 목치마나 바지를 입었다. 봄가을과 여름에 비해 겨울의 옷차림은 별로 다양하지 않았다. 겨울 온도가 엄청나게 떨어지는 이 지역에서 겨울철 옷차림은 추위를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데 맞춰졌다. 1950년대에는 남자들은 주로 와이셔츠 위에 운동복같은 속내복을 껴입고 다시 그 바깥에 솜으로 만든 웃옷을 입었다. 아랫쪽도 비슷하게 두 겹 정도의 속내복을 껴입고 그 위에 솜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역시 두텁고 따뜻한 솜신을 신었다. 솜신은 바닥이 고무로 되 어 있었고 목이 복숭아뼈 위까지 올라올 정도로 길었다. 솜신의 색깔은 밖은 검은색, 안 은 흰색이었다. 이 솜신은 지금도 일할 때 사람들이 잘 신는다. 여자들도 남자옷과 비 2) 조선족 노인들은 특히 회색 계통의 옷을 많이 입었다. 이에 비해, 한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검은색 옷을 입는다.
194 중국 흑룡강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슷한 솜옷을 입었는데, 한가지 눈에 띄는 차이는 여자 솜옷이 남자옷에 비해 애리(목깃 에 해당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넓다는 점이었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옷감이 약간 다양 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목천이 여전히 주종을 이루긴 했지만 여러 가지 나이 론천이 등장하여 사람들 사이에 유행 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초반부터 나 일론으로 만든 셔츠와 양말이 등장했 다. 목천이나 비슷하나 주름이 가지 않는 디카천으로 만든 바지도 유행했다. 줄무늬가 들어간 와이셔츠, 꽃무늬가 들 어간 나일론 블라우스 등도 60년대 후반 1960년대의 가족사진 정도부터 조금씩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의는 남색과 검은색이 유행이었다.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치마저고리 옷감으로 목천 외에 모시, 뽀뿌링천, 옥양목(표백된 실로 짠 흰색의 천), 부드럽고 반들반들한 유 동천, 명주, 반투명한 조센또, 양단, 비로도, 배리도, 오빠루 등 새 천이 나와서 다양성 을 약간 높여 주었다. 남자들의 양복( 西 服 )은 70년대말부터 많이 입기 시작했다. (2)1980년대 초반 이후 1980년대 초반 이래 개혁개방이 폭넓게 이루어진 결과 옷차림에도 개방의 물결이 빠른 속도로 밀어닥쳤다. 새로운 개혁정책의 시행 이후 소비재 공업이 급속히 발전했는데, 의 류산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의류산업에서 생산하는 옷감의 종류가 아주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색깔과 디자인도 훨씬 화려하고 복잡하게 바뀌었다. 아울러, 시장 에 대한 규제의 철폐와 시장 발달로 마을사람들이 손쉽게 옷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옷차림은 과거보다 훨씬 화려해졌다. 이전에는 어두운 단색이 주 를 이루었는데, 이제는 밝은 원색의 옷이 많이 등장했고, 어두운 순색 바지가 점차 줄무 늬와 체크무늬 등의 복잡한 무늬가 있는 바지로 바뀌어 왔다. 여자옷의 경우에는 특히 꽃무늬가 들어간 옷들이 아주 많이 퍼졌다. 꽃적삼과 꽃바지가 크게 유행하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즐겨 입게 되었다. 남자들 중에서도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자 옷을 사서 입기도 했다. 3) 목천으로 만든 옷은 거의 사라졌으나 속옷은 아직도 면으로 3) 한국에서와는 달리 이곳의 남녀옷은 모두 단추(보통 5 개)가 오른쪽에 달려있어서 남녀가 옷을 바꿔 입 기 쉽다. 또 여자바지가 옛날에는 옆으로 타졌었는데, 지금은 남녀바지 모두 앞타개로 되어 있다.
의생활 195 만든다. 개혁 이전부터 반바지를 입는 사람이 약간 있긴 했으나 보편화된 것은 10여년전 부터이다. 반바지는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먼저 입기 시작했으나 반바지 길이는 남자보다 여자 것이 더 짧다. 이 시기에 바지의 유행은 나팔바지에서 통바지로, 통바지에서 다시 쫄대바지로 바뀌어 가는 추세이다. 최근 젊은 여성들은 도시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주 짧 은 미니스커트도 많이 입고 있다. 전체적으로 중국에서 서구적 옷차림이 신속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조 선족과 한족이 옷차림에서 크게 구분되 지는 않는다. 다만 최근 10여년 동안 한 국과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들이 한국 옷을 많이 입기 때문에 스타일의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을 다녀오면서 한 국의 옷을 사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많을 뿐 아니라, 오상시의 민족상점이나 다른 상점들에서도 한국식 옷을 팔고 있다. 여성들의 일상복 조선족에게서 한국 옷은 상대적으로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옷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한국 옷을 많이 입는 추세를 보인다. 민족복의 경우에고 15년전 무렵부터는 연변의 공장 에서 만든 북한식 치마저고리를 오상의 민족상점 등에서 구입해 입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화려하고 장식이 많으며 노출 정도가 심한 한국식 치마저고리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초근 10여년 동안에는 이곳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국이나 다른 외국의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옷차림의 국제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젊은 층에서 외국의 유행 옷차 림에 대한 선망은 아주 심하게 나타난다. 머리에 물을 들인 젊은이의 모습이 가끔 보인 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 젊은이들이 외국과 도시의 유행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놀랄 정도로 빠른 것 같다. 2. 현재의 옷차림 (1)민족복 1970년대 들어서면 조선족 고유의 민족의상인 바지저고리를 입는 남자들은 거의 없어 졌다. 4) 물론, 과거부터 가지고 있던 바지저고리를 특별한 날에 입는 사람들은 극소수 4) 한 연구에 따르면(강순화, 1993, 연변 조선족의 생활행태에 대한 조사 연구 정신문화연구 16(2)::180-182) 연변의 도시지역에 사는 남자들 가운데 11.2 퍼센트, 농촌지역 남자들 가운데 20.4 퍼센트 만이 특별한 경우에 조선옷 을 입었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각각 64 퍼센트, 75.4 퍼센트였다.
196 중국 흑룡강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긴 했지만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국 방문이 많아지면서 환갑같은 중요한 잔치 때 한국식의 바지저고리를 입는 노인들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의 풍습이 이곳 신락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의 하나이다. 이 마을 여자들은 조선옷 치마저고리를 아직도 가끔 입는 편이다. 과거에는 집안에 서의 평상복이나 일할 때 입는 옷으로도 간주되었으나 지금은 가끔 나들이 나갈 때 입거 나 집안 잔치나 마을 공동의 운동회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입는다. 문혁기간중 에 민족자치의 원칙이 공격을 받아 한동안 조선옷 입는 것이 탄압을 받았으나 개혁개방 후 소수민족의 문화를 장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다시 여자들이 조선옷을 많이 입고 있으며 정부도 민족복으로서 조선옷의 착용을 권장한다. 특히 개혁개방정책의 시행으로 소비재 생산과 시장 거래가 활기를 띄면서 연변을 중심으로 조선옷을 만들어 파는 상점 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상에 있는 민족상점에서도 조선옷을 만들어 파는데 문예오락대 나 다른 단체에 있는 여자들끼리 단체로 같은 옷을 맞춰 입기도 한다. 최근에 와서는 한 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남한식 한복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에서 올 때 아예 한복을 맞추거나 사기도 한다. 한중간의 활발한 상거래 덕택에 지금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오상시나 하얼빈에서도 쉽게 한복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에 유행하는 남한식 한복은 과거 연변에서 만들어 팔던 조선옷과 디자인, 재질, 색깔 등에서 꽤 큰 차이를 보인다(표 1 참조). 표 1. 연변 조선옷과 남한식 한복 비교 저고리 치마 연변 조선옷 남한식 한복 소매 길이가 짧고 통이 좁다. 소매길이가 길고 통이 넓어 아래 쪽으로 많이 늘어진다. 겨드랑 밑길이가 길다. 겨드랑 밑길이가 짧다. 동전, 깃, 섶이 넓다. 동정, 깃, 섶이 좁다. 저고리 품이 좁다. 저고리 품이 넓다. 폭이 좁다. 폭이 넓다. 속치마와 겉치마와 분리됨. 속치마와 겉치마가 분리됨. 어깨 매는 선이 고정되어 있음. 어깨 매는 선을 조절할 수 있음. 묶는 선이 따로 있음.
의생활 197 연변의 조선옷은 남한식 한복에 비해 저고리 소매 길이가 짧고 통이 좁다. 길이가 긴 대신 품은 좁은 편이다. 동전과 깃, 섶은 상대적으로 넓다. 치마도 폭이 좁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연변 조선옷은 몸에 끼는 듯하며 누출 부분을 줄인다는 인상을 주며, 남한 한복은 품이 넓고 저고리 길이가 짧은 한편 목 선이 깊이 파여 노출의 정도가 크다는 느 낌을 갖게 한다. 남한식 치마는 겉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겹치마인데 반해 연변 조선옷 은 속치마와 겉치마가 분리되어 있다. 또 연변 조선옷은 치마의 어깨 매는 선이 고정되 어 있어 조정이 불가능한 반면, 남한 한복은 어깨 묶는 선이 따로 있고 어깨 매는 선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조선옷 와 한국옷 이 함께 있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하는 한국의 한복 재료와 색깔에서도 조선옷과 한복은 꽤 큰 차이를 보인다. 연변 조선옷의 재료로는 유 동천, 조센또, 비로도, 배리도 등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1990년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남 한의 한복은 모두 얇게 비치는 깔깔이천을 그 재료로 하고 있다. 색깔도 조선옷은 주로 빨간색, 노랑색, 자주색, 검은색, 초록색 등이 많으나 한복은 염료와 염색 기술의 발달 로 색상이 아주 다양하다. 또 한복 가운데는 여러 가지 화려하고 대담한 장식과 문양(산 수도, 꽃무늬, 금박, 은박 등)을 가진 것이 많다. 어린아이들도 특별한 경우에만 조선옷을 입는다. 유치원, 학교, 마을에서 특별한 행사 가 있을 때나 명절 때 조선옷을 입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 조선옷은 색동이나 노란색, 분홍색 등 밝은 색이 많은데, 최근에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남한식의 한복을 입는 아이 들이 늘어나고 있다. 옷감도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깔까리천이 많이 사용되며 금은박 을 입히거나 화려한 무늬를 넣은 한복이 유행하고 있다. (2)현대식 의복 개혁개방은 민족복의 다양화를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다채로운 서양식 옷차림을 개
198 중국 흑룡강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화시켰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녀 모두 가장 흔히 입었던 무채색 의 평범한 인민복과 중산복은 개혁 개방과 함께 말려들기 시작한 새로 운 소비의 물결 속에서 나이든 사람 들이나 좋아할 구식옷으로 간주되어 젊은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노 인들은 아직 회색과 검은색 계통의 어두운 색조의 옷을 많이 입지만 점차 다양한 무늬와 색깔을 가진 신식 옷들 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성들과 젊 청소년들의 밝은 옷차림 은 세대의 옷차림은 그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농촌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최신 유행의 옷차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름철에는 남녀 모두 무늬가 든 밝은 색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는 사람이 많아 졌다. 목면과 합성섬유 등의 다양한 옷감으로 만든 티셔츠, 블라우스, 와이셔츠, 스웨터, 치 마, 미니스커트, 바지, 점퍼, 오바들은 안가시장과 오상의 상설시장, 그리고 때로는 옷 을 팔러 다니는 행상에게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의 옷차림이 유행을 덜 타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 다. 특히 중년 이상의 남자 중에는 과거에 자주 입던 흰색, 검은색, 회색 들 어두운 색 조의 옷을 여전히 즐겨 입는 사람이 적지 않 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시장의 발달로 다 양한 옷을 구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줄무늬 나 다른 무늬가 든 화려한 색조의 티셔츠를 아이들의 한복차림 입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지의 색상 과 모양과 길이도 옛날보다 훨씬 다채로와졌 다. 여름철에는 반바지를 입는 것은 이미 대대 시절부터 있어온 일이지만 근래에 아주 보편화되었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 인기있는 바지는 주름이 잘 서고 폭이 넓은 양복바지 이다. 이들은 또 운동복을 집안에 있을 때나 외출을 할 때 자주 입고 다닌다. 혼례, 상 례, 환갑, 명절 등 특별한 날에는 양복( 西 服 )을 입는 남자가 많다. 남자 어린이들에게는
의생활 199 옛날부터 국방색 계통의 군복이나 경찰복이 큰 인기를 끌어 왔다. 인민공사 시절에는 남녀 모두 해방군모자라고도 불리는 샌또모자를 쓴 사람들이 많았으나 최근에 와 서 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지금 여자들 중에 이 모자를 쓰는 사람은 전혀 없다. 요즘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에는 소풍 ( 원족 )을 갈 때 햇빛을 가리는 데 필요한 태양모 (밀짚모자처럼 생긴 천으로 만든 모자),남자 들이 주로 쓰는 중절모( 禮 帽 ), 모자 면이 8 개인 팔각모, 그리고 겨울철에 방한을 위해 쓰는 털모자 겨울용 방한복 등이 있다. 50, 60년대에는 겨울 방한모로 여우털모 자, 개털모자. 너구리털보자등이 유행했는데 지금은 주로 양털모자를 많이 쓴다. 보통은 바깥이 천이고 안쪽이 양털인데, 바깥은 양피로 만든 것도 있다. 이 양피모자는 가격이 꽤 비싸서 50-100 위안 정도 된다. 수달비의 가죽과 털로 만든 모자는 800 위안이나 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쓸 수 없다. 여자들의 경우, 여름철에는 면이나 합성섬유로 만든 반소매 티셔츠와 와이셔츠, 그리 고 블라우스를 많이 입는다. 특히 한국에서 들어온 티셔츠가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있 는데, 오상의 민족상점이나 다른 일반상점에서 주로 구입한다. 연령에 따라 치마 입는 유행이 달라서 젊은 세대로 갈수록 짧은 미니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무릎 위로 약간 올라오는 정도의 주름치마나 스카트치마를 주로 입고, 젋은 여 자들은 그보다 더 짧은 미니치마를 좋아한다. 때로 이런 치마들은 하늘하늘 속이 비치는 화학섬유를 재료로 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주로 단색의 무늬 없는 천이 일반적이었는데, 지금은 색깔이 화려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무늬가 든 꽃천 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남 자들에 비해 늦게 반바지를 입기 시작하긴 했지만 지금의 반바지 길이는 남자 것보다 더 짧은 것이 보통이다. 긴 바지는 나팔바지에서 통바지로, 다시 통바지에서 쫄대바지로 유 행이 바뀌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치마와 반바지 밑에 스타킹을 신는 사람도 많아지 고 있다. 여자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집에 있거나 일할 때 간편한 몸뻬옷을 자주 입는 다. 과거에는 몸뻬가 보통 무늬 없는 순색의 옷이었으나 최근 여자들이 즐겨 입는 몸뻬 는 화려한 꽃 문양이 들어간 꽃바지이다. 한 여중생은 자기가 멀쩡한 청바지를 가위로 잘라 만든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를 물었더니, 텔레비젼에서 보고 좋아서 흉내를 냈다고 했다. 몇몇 사춘기 남자애들 중에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채 최근에 유행하는 통이 넓은 일자 바지나 운동 복을 입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유행에
200 중국 흑룡강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민감한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신락과 같은 농촌지역도 텔레비젼이나 잡지 등을 통해 최신 유행에 바로 노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노인들의 경우에도 옷차림이 많이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10여년 전 노인들의 소풍 모 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남자들은 대부분 흰색이나 회색 계통의 와이셔츠와 회색과 검은 색 계통의 바지를 많이 입고 있고 여자들은 흰색 셔츠, 흰색 삼각수건, 그리고 치마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작년의 소풍 사진을 보면 무늬와 색깔이 이전보다 훨씬 다 양하고 화려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위에 흰 옷 입은 사람이 많긴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꽃 등의 무늬가 있는 옷이 많고 모자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운동모, 태양모 (밀짚 모자처럼 생긴 천으로 만든 모자), 샌또모자 등이 눈에 띈다. 남녀 모두 겨울철 옷차림은 그다지 다채롭지 못하다. 인민공사 시절에는 속옷을 두텁 게 껴 입고 중산복이나 인민복을 걸치거나 위에 두툼한 외투를 걸치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여자들은 솜옷이나 어깨를 넣은 두꺼운 니즈 반오바(두꺼운 모직천으로 만든)를 많이 입었고 보통 마후라를 걸쳐서 털모자를 썼다. 최근에는 남녀 모두 떵샨푸 라 불리 는 옷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이 옷은 오리털을 넣고 실로 박아 불룩불룩 나오게 만든 오바나 반오바를 말한다. 아주 최근에는 가죽으로 만든 잠바나 오바도 유행하고 있 다. (3)의례복 1950년대의 혼례식에서, 신랑은 보통 목으로 만든 감색이나 검은색의 양복을 입었고, 신부는 목을 재 료로 한 흰색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너울을 썼다. 이 너울은 보통 조센또 천으로 만들었고 길이가 발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산복의 착용이 일반화되고 또 문혁기간에 민족복의 착용이 탄압을 받으면서 혼례식에서도 남 녀 모두 중산복을 입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신 랑은 보통 중산복에 어울리는 샌또모자를 썼다. 개혁개방이 된 후 소수민족의 문화적 독립성을 상 징하는 것으로서 민족복의 착용이 정부에 의해 권장 되자, 신부의 혼례복은 다시 민족 고유의 치마저고 리로 바뀌었다. 1980년대 중반에 치른 한 혼례식 사 진을 보면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신부가 머리에 빨간 꽃을 꽂고 꽃무늬가 약간 든 흰색 너울을 쓰 고 있다. 5) 신부의 너울은 지금은 보통 망사천으로 만든 혼례복 5) 중국 여자들은 머리에 빨간색이나 검은색의 보를 덮어쓰고 혼례를 치른다.
의생활 201 다. 신부뿐 아니라 혼례식에 참석한 다른 여자들도 보통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신랑과 남자하객들의 복장은 양복 보급의 확산에 따라 중산복에서 양복으로 바뀌는 추세를 보인 다. 신랑은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짙은 색 양복을 입고 가슴에 빨간색 꽃을 다 는 것이 일반적이며, 모자는 쓰지 않는다. 도시지역에서는 신부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나 이 마을에서는 아직 드레스 입은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혼례를 통한 과시 풍조 가 점차 심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이 마을에 시집 오는 신부들도 머지 않아 드레스를 입 게 되리라 예상한다. 40,50년대까지만 해도 집안에 상을 당하면 고인을 위해 올바른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 르는 것이 효라 하여 조선의 풍습에 따라 상복을 입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통적인 관습 에 따라 고인과의 관계에 맞게 삼베로 만든 옷과 허리띠, 그리고 남녀에 따라 두건이나 천으로 만든 머리수건을 착용했다. 사회주의 정권하에서(특히 문혁 시기) 전통적인 봉건미신적인 관행으로 탄압을 받았 고, 그에 따라 봉건의례의 일부분으로 비판받은 상복의 착용이 금지되었다. 상주와 가족 들은 중산복이나 깨끗한 일상복을 입고 왼팔에 검은색 상장( 喪 章 )과 가슴에 흰색 조화를 부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례식 자체가 전반적으로 간소화되어, 과거처럼 나무관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시신을 칠성판 위에 눕힌 뒤 양철함으로 덮었다. 물자를 아끼기 위 해 아 양철함은 다시 사용되었다. 개혁개방을 전후하여 과거의 장례 관행이 일부분 되살아났다. 현재의 장례에서 고인의 아들과 며느리들은 삼베로 만든 두건과 허리띠를 착용하고 손자는 허리띠만 착용한다. 그러나 구사회에서와는 달이 삼베옷을 입는 상주가 없다. 과거처럼 지금도 나무관 대신 에 양철관이 사용되고 있으며 시신을 화장한 뒤에 양철관을 마을로 가져와 다시 사용한 다. 한족마을에서와는 달리 이 조선족마을에서는 전통적인 장례관습이 부활이 크게 두드러 지지 않는다. 한 예로 개혁개방 후 장례식 기간이 삼일장, 사일장, 오일장 등으로 행해 지다가 칠팔년 전부터는 아주 간소화되어 새벽에 죽으면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죽으면 그 다음날에 출상을 한다. 한족마을들에서는 매장하는 집들이 늘어나는 에 비해 이곳 조 선족 마을에서는 시신을 화장한 다음 뼛가루를 정해진 골회당( 骨 灰 堂 )에 보관하거나 강 에 뿌린다. 조상 숭배와 관련된 제사, 성묘 등의 다른 의례에서도 전통 부활의 경향이 아주 미약하다. 이것은 아마도 이곳 조선족들의 이동성이 강하여 친족유대가 약하다는 사실과 관련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앞으로도 상복의 착용이 과거처럼 엄격한 격식에 따라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202 중국 흑룡강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양복을 입은 성용제씨와 그 가족 개혁개방 후, 양복 착용이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경향 이 환갑잔치에도 나타나고 있다. 1980년 대의 한 환갑 잔치 사진을 보면 주인공인 노인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고 나머지 남자들은 중산복을 입은 한 명을 제외하 고는 거의 모두 감색 계통의 양복을 입고 있다. 여자 들은 모두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분홍색, 초록색, 옥색, 노란색, 빨간색, 자주색, 검은색 등 색채가 다 채롭고 옷감도 다양하다. 아이들의 복장은 아주 다양 하여 스웨터, 군인복, 운동복 등이 섞여 있다. 최근에 와서는 한국의 영향을 받아 환갑잔치 때 남자들도 민 족복을 입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한복이 이 마을사람 들이 새로 획득한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한 국에서 하듯이 부부가 한복을 입고 잔치상을 받는 집 이 조금씩 늘어날 것 같다. (4)이불 한족의 이불은 솜이 적게 들어가 얇고 호청이 없다는 점에서 조선족의 이불과 구분된다. 또 한족 이불은 목면으로만 만드는 데 비해, 조선족 이불 중에는 비단을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곳 의 이불은 원래 목면으로 만들었으나 뒤에 비단이불로 유행이 바뀌었다가 다 시 최근에 목으로 만든 이불이 유행하고 있다. 속은 모두 솜이 들어가며 대부분 가정에서 손수 이불을 만든다. 호청은 촉감 때문에 모두 목을 사용한다. 근 래에 와서는 양모 담요와 화학섬유 담요 도 많아졌다. 이불채 이곳의 이불은 한국에 비해 상당히 얇고 좁아 한족의 이불에 가깝다. 보통 요는 넓이 가 3 자(1미터), 길이가 6 자(2미터)에 솜이 8 근(4킬로그램) 들어간다. 이불은 넓이가 4자 반, 길이가 9 자이며 솜은 10 근이 들어간다. 과거에는 12 근까지 넣었는데 꽤 줄어 들었다. 조금 작은 이불의 경우, 요는 넓이가 2 자 남짓에 길이가 6 자이며 솜은 5 근이
의생활 203 들어가고, 이불은 넓이 4 자, 길이 6 자에 솜이 역시 5 근 들어간다. 베게는 옛날에 베 던 네모난 모양의 베게가 없어지고 지금은 모두 둥근 베개를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