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cle Psychoanalysis 2012;23:73-78 ISSN 1226-7503 Copyright c 2012 Korean Association of Psychoanalysis Suck Jin Yoo and Psychoanalysis in Korea Doo Young Cho Department of Psychiatry, Cheongsong Jinbo Hospital, Cheongsong, Korea 효산 유석진과 정신분석 조 두 영 청송진보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효산 曉 山 유석진 兪 碩 鎭 은 한국 정신의학의 대부 代 父 였던 분이고 한국에 정신분석을 파종 播 種 한 사람이다 그 는 광복이후 한국의 정신의학을 이끌고 온 선각자이며 서술 敍 述 정신의학 위주의 정신의학을 역동 力 動 정신의학 정 신분석 사법 司 法 정신의학 군진 軍 陣 정신의학 소아청소 년 정신의학 역학 疫 學 정신생리학 임상 臨 床 예술 사이 코드라마 음악치료 미술치료 분야로 넓혀나가면서 각각 분 야에서 후진들을 키운 분이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요 임상의 사요 조직자 組 織 者 요 활동가 活 動 家 요 계몽가요 예술애 호가였다 유석진은 조선조 숙종시대 창원 昌 原 유씨로 공조 工 曹 형조 刑 曹 호조 戶 曹 병조 兵 曹 판서를 지낸 귀와공 歸 窩 公 유득일 兪 得 一 의 대 손 孫 으로 아버지 유영로 兪 永 老 와 어머니 이영상 李 永 相 의 남 녀 중 째 아들로 년 월 일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법흥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큰형 흥진 興 鎭 은 뒤에 가톨릭의대 산부인과 교수를 지낸 의사였고 둘째 형은 교육계에 투신해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큰형의 둘째 아들인 태준 泰 俊 은 서울의대를 거쳐 미국 캔 자스 주립의대 내과교수를 지냈다 그는 년 서울의 경성공립제일고보 京 城 公 立 第 一 高 普 에 입학해 문학을 위시한 인문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는 뒤 이어 년 경성제대 京 城 帝 大 예과 豫 科 이과 류 理 科 Received: June 23, 2012 Revised: July 8, 2012 Accepted: July 10, 2012 Address for correspondence: Doo Young Cho, MD Cheongsong Jinbo Hospital, 66 Hupyeong-ri, Jinbo-myeon, Cheongsong 763-813, Korea Tel: +82-54-874-0340, Fax: +82-54-874-7717 E-mail: dycho2@dycho.co.kr 類 에 한국인 명 중 하나로 입학하였고 년 의학부 본 과에 진학해 년 봄에 졸업하였다 의대본과시절에는 당시의 정신의학이 주로 독일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아 등이 저술한 정신의학교과서와 정신병리학책이 주로 쓰였다 일 본인이 쓴 교과서로는 시마다 下 田 와 미야께 三 宅 가 쓴 교 과서가 있었고 뒤에 미국 정신생물학에 기간을 둔 마루이 丸 井 의 교과서가 나와 여기에 의 정신분석이론과 역동 정신의학의 기본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인기를 끌었다 의대졸업과 동시에 유석진은 정신과 의국에 입국하여 부 수 副 手 로 임명을 받았다 학생시절 읽었던 선집 選 集 과 의 조건반사 이론에 이끌려 정신과를 전공과목 으로 선택했다 고 그는 뒤에 말했다 당시 과의 학문분위기 는 선임과장이었던 동경대출신 구보기요찌 久 保 喜 代 二 교 수 가 세웠던 독일식 서술정신의학이 기본주류 가 되어 새 과장 와다나베 渡 遊 刀 道 雄 교수 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상황이었다 유석진은 교수진 가운데 성격 학 性 格 學 정신분석 병적학 病 跡 學 에 조예가 깊던 이도 고마오 伊 東 高 麗 夫 조교수에게 학문적으로 끌렸다 이런 인 연으로 이도 박사는 년대 초 학회장 유석진의 초청으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학술대회에 와서 병적학 에 대한 특별강연을 한 바 있다 당시의 의학계는 계급이 있었다 우선 대학과 의학전문학 교 간의 차이가 있어서 대학은 의학자 배출이 목적이요 전문 학교는 임상진료의사 생산이 주목적이어서 예컨대 전문학교 는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없었다 이런 차이는 일본도 마찬가 지였다 그래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나온 정신과의사 이중철 李 重 澈 이나 남명석 南 命 錫 등이 구주제대 九 州 帝 大 에 가서 수년 더 공부해 의학박사를 받아 나왔던 것이다 또 교육기간에도 큰 차이가 있어서 전문학교는 고등보통 www.freud.or.kr 73
Suck Jin Yoo and Psychoanalysis 학교나 중학교 학년 과정을 마치고 들어와 년 초기에는 년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이 기간 중에 영어 물리 화학 생 물 독일어 수업시간이 들어있었다 반면 대학은 예과 년이 있어 영어 독일어 물리 화학 생물 외에도 인문학 선택과목 몇 개를 더 배우고 본과에 진학해 년을 공부하는 과정이라 서 대학이 전문학교보다 년 정도 수업연한이 길었다 대학의 과 내에서는 주임교수인 교수 명과 조교수 수명 강사 수명 조수 助 手 명 부수 副 手 명 그리고 가 없는 일반의국원들이 있어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정 신과에서도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두가 일본인들이 이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광복 몇 해 전부터 일본인 의 국원들이 지원형식으로 일본국 군의관으로 들어가자 그 빈 자리를 한국인들이 채웠다 이리하여 보통 의국원생활을 몇 년간 해야 얻을 수 있는 자리인 부수 副 手 자리가 유석진에 게 졸업후 의국입국과 동시에 차례가 온 것이다 유석진보다 년 먼저 입국한 다른 한국인 의사들은 전문학교 졸업생 인지라 부수 자리가 오지 않았다 년 광복을 맞아 일본인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한국인 의사들에게 선심으로 남발하는 해방박사 인 의학박사 학위 를 유석진을 위시한 한국인 정신과의사들은 모두가 외면하 는 기개를 보였다 이어서 경성제국대학은 경성 京 城 대학으 로 개칭되고 같은 해인 년 월 일에 정신과의국 교수 진은 주임교수 명주완 明 柱 完 조교수 임문빈 任 文 彬 뒤에 부교수제가 생겨 진급 강사 최재혁 崔 在 赫 뒤에 조교수로 진급 조교 유석진 년 강사로 진급 으로 새 출발을 하였 다 그리고 미군정이 시작되고 국내 세브란스의전 대구의 전 광주의전 서울여의전이 각자 의예과를 신설하고 의과대 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유석진에게는 광복 이후 를 거쳐 년까지 그의 나 이 세 때가 아마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그는 정신의학계의 기린아요 독보적인 존재였다 해방당시 한국에는 대학병원 중 서울대학교에서 유일하게 정신과가 존재했고 그 뒤 여러 해 동안 한반도 내에서 정신 과를 배우려면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에 의국원으로 들어 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위치의 서울대학교 정신과의 주임교 수인 명주완은 부임 한 달만에 부속병원장으로 차출당해 병 원행정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임문빈 부교수는 년 서울여자의과대학 舊 女 醫 專 에 정신과를 개설해 두 대학을 오가며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기에 서울대학교 정신과교실을 이끌고 갈 교육진의 역량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 여 그중 젊은 교수인 유석진이 동분서주 좌충우돌하면서 새 로 도입된 미국의 역동정신의학을 읽고 배우고 다른 한편으 로 여러 의국원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중역할을 다른 교수 들보다 더 많이 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종전의 전통적 학과목 외에 새로 최재혁이 유전생물학을 추가로 만들어 강 의하고 유석진은 조건반사학 條 件 反 射 學 을 신설해 가르쳤 다 그는 미군정을 통해 흘러나오는 서적을 구해 정신위생 역동정신의학 정신분석학 정신신체의학 심리학을 대상으로 초독회를 주관하여 토론을 이끌 어 갔고 한편 선집 選 集 을 의국원들과 함께 번역해보 려는 의욕도 있었다 이 선집의 일부원고가 완성된 것 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때 의국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는 말을 유석진에게서 직접 들은 바 있다 당시는 오늘과 같은 전공의 수련제도가 없어서 의 국원들 교육을 위해 대학원제도를 만들었었다 이때 유석진 이 환자 명을 대상으로 하여 쓴 석사논문이 정신분열증 예후요인의 통계적 관찰과 난점법을 응용한 객 관적 예후판정법의 일시안 一 試 案 이다 유석진은 미군정 보건고문관을 통해 미국의 소년원제도 운영요령을 소개받아 년 말 범법 犯 法 불량청소년을 수 용하는 서울소년심판소 少 年 審 判 所 에 의무실을 개설하여 주기적인 진료상담을 시작하였고 년에는 범위를 넓혀 심리학자 성백선 成 百 善 뒷날의 교려대 심리학과 창립교수 과 사회사업가 권기주 權 基 周 와 더불어 남산소년구호상담 소 南 山 少 年 救 護 相 談 所 에 정기적으로 나가 실제 상담사업 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년에는 미국서적인 교 사용 아동정신위생학 교과서를 권기주가 번역하여 출판보 급하는 사업을 벌였으니 이는 오늘날 말하는 사회정신의학 과 청소년정신의학 사법정신의학을 도입하고 실천한 격이 다 이런 활동은 계속 범위를 넓혀갔고 사회사업가 하상락 河 相 洛 뒷날의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대학과장 과 함 께 정신지체아 수용치료 전문기관인 중앙각심원 中 央 覺 心 院 을 설립하여 정신과의사가 경무관 警 務 官 으로서 최고책임 자가 되는 제도를 년도에 만들었으나 막상 실천에 옭기 지 못하고 도중 폐기되고 말았다 유석진은 이렇게 의학 외 인접분야와의 협업 協 業 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천한 최초 의 정신과의사였다 유석진은 한편 사회정신의학에 관심이 많던 최재혁과 함 께 정신질환 빈도조사를 하였는데 직접 현지에 나가서 조사 한 곳이 경기도 포천 파주 덕적도였다 이러한 정신과 역학 조사는 이후에도 서울대학교 정신과의국에서 남명석 南 命 錫 이정균 李 定 均 이부영 李 符 永 조두영 趙 斗 英 김용식 74 Psychoanalysis 2012;23:73-78
DY Cho 金 容 植 우종인 禹 鍾 仁 등이 의국사업으로 이어받았고 지 금은 조맹제 趙 孟 濟 가 역학분야를 주전공으로 해오고 있다 이렇게 유석진은 광복이전에 풍미한 독일식 서술정신의학 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학문세계로 발을 넓혀가는 한국 정신 의학계의 선두주자 겸 젊은 지도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 년의 월 신학년을 맞아 서울대학병원 정신과로 본교 와 타대학 졸업생들이 대거 입국해 과 사기가 올랐던 것도 잠 시 뒤이은 사변은 이 국내유일의 정신과교실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때 교수진이었던 임문빈과 최재혁이 월 북하고 또 상당수의 의국원들도 월북하거나 행방불명이 되 었기 때문이다 명주완은 그해 월에 육군군의 소령 곧 중령진급 으로 자 원입대하고 교수진 가운데 과에 홀로 남은 유석진은 후 퇴를 맞아 의국도서실과 기구 서류 등을 정리하고 일부는 천 장이나 마루 아래에 감춰놓고 일부 중요서류와 도서는 개인 적으로 들고 부산으로 내려가 전시피난 대학부속병원에 인 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년 월 조교수로 진급하 였으나 곧이어 월 말 영장을 받고 육군대위 곧 소령진급 로 입대하여 부산 육군병원 정신과 군의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쟁초기의 국군 의무진영은 정신의학의 중요성을 이해하 지 못해서 군병원에 정신과 설치를 기피하였고 쓸모없는 정신과 군의관을 내과 특히 전염병 내과의 말단의사로 배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군과 민간에서는 디프테리아가 유 행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다가 전선이 고착되면서 한 국군 전투일선에서 공황발작과 히스테리가 집단으로 발생 해 전투력이 큰 손상을 입고 장병의 사기가 떨어지는 현상이 빈발했다 그래서 미군 의무고문단에서는 한국군 정신과군 의관을 역동 정신의학에 의거한 새로운 군진 - 정신과의사로 재교육시켜 일선 사단 師 團 에 배치시키 려고 년 월에 그 첫 번째 재교육 이수자로 세의 유 석진을 선발해 미 육군 병원 정신과에서 단기속성수련을 시키고 뒤이어 여러 명의 한국인 정신과 군의관을 차례차례 그곳에서 단기교육시켰다 년 월에 미 육군 병원의 정신과가 따로 투완 투라 불렸다 정신과부대 로 분리되어 나와 진료 외에 한국군 의관훈련까지 맡게 되었다 유석진은 여기서 미국식 역동정 신의학을 이론이 아닌 실제 치료기법으로 배우고 익혀나갔 고 그곳에 남아 뒤에 오는 한국인 의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에 큰 몫을 하였다 그는 제일차로 도미단기연수에 선발되어 년 월 출국해 미국 육군병원 정신과에서 개월 연수를 받고 돌아왔고 계속 한국군 정신과 군의관의 선두주자로 활 동하며 쌍방 포로교환에서 정신과 자문관으로도 일하였다 그리고 년 서울의 수도육군병원 정신과 과장으로 임명 되었고 휴전 후에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역동정신의학 에 정통한 일선사단에 근무할 젊은 정신과의사 양성을 그곳 에서 계속하였다 당시의 교육기간은 개월에서 년이었고 년까지 총 명의 젊은 의사가 수도육군병원에서 이 과 정을 거쳐 나갔다 연수받은 사람들만이 참석하는 군진정신 의학 집담회가 매월 수도육군병원에서 열렸던 기록이 지금도 있는데 그 참석자들의 일부명단은 다음과 같다 노동두 盧 東 斗 사단 뒷날의 가톨릭의대 교수와 백제병 원장 오석환 吳 碩 煥 육군병원 뒷날의 부산의대와 인제 의대 주임교수 명주완 육군병원 진성기 陳 星 基 사단 뒷날의 한양의대 주임교수 강준상 姜 晙 相 육군병원 한 기수 韓 琪 洙 훈련소 뒷날의 부산의대 주임교수 박인호 朴 仁 鎬 사단 뒷날의 울산의대 교수 김채원 金 菜 元 사단 뒷날의 연세의대 주임교수 이병윤 李 丙 允 훈련소 뒷날의 고려의대 주임교수 민병근 閔 秉 根 육군병원 뒷날의 중 앙의대 주임교수 임백인 任 百 仁 뒷날의 청량리정신병원 부 원장 이봉기 李 鳳 基 수도육군병원 뒷날의 서울의대 외래 교수 한동세 韓 東 世 수도육군병원 뒷날의 서울의대교수 김제권 金 齊 權 수도육군병원 뒷날의 전남의대 외래교수 정영한 鄭 榮 翰 서울대학교병원 뒷날의 순천개업의 등이다 유석진은 년 수도육군병원 정신과 과장인 중령으로 전역을 하였고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가장 의의 意 義 있는 유석진의 학문적 공헌은 그가 이 시기에 열정을 가지고 정신분석을 정신의학의 중추 학문으로서 확고하게 심고 알리고 후학들을 격려한 것일 것 이다 그는 년 월 일자 경향신문 문화면을 통해 일주일 전 미국 정신의학회가 연 탄생 백주년기념 특 별토론회 내용을 회에 걸쳐 일반사회에 알렸고 이는 바깥 문화에 굶주린 지식인사회에 자극을 주었다 드디어 다음 해인 년 월 일 오전 시부터 오후 시 까지 서울의대 본관 층 대강당에서 유석진이 조직하고 주관 하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탄생 百 一 주년 기념강연 회 가 열렸는데 지식인과 대학생 청중이 무려 천 백 명 참 석자 수를 헤어 본 것이 아니라 당일 강연초록을 그만큼 인쇄 해 입장객 매인에게 한 부씩 주었는데 이것이 오전 중에 동 이 나서였다 이나 되어 인산인해를 이룬 강당 안은 학문의 열기 熱 氣 와 사람의 열기로 숨이 탁탁 막혔다 필자도 청중 www.freud.or.kr 75
Suck Jin Yoo and Psychoanalysis 의 하나였다 뒤에 보니 전세계적으로 이런 백주년기념 학술 행사를 한 나라는 미국 영국 우루과이와 한국 네 나라뿐이 었다 이 강연회로 지식층에게는 소문이나 책으로 개요만 읽 던 정신분석학이 생동하는 학문과 기술로 다가왔기에 한동 안 정신분석이 곳곳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이 강연회는 역사적 의의가 있기에 당일의 연제와 연자를 나열하면 다음 과 같다 정신분석학의 중요개념 김오점 金 午 漸 노량 진구호병원 의 히스테리 論 민병근 수도육군병원 의 리비도 性 慾 論 노동두 서울의대 강사 의 꿈분석 論 이병윤 수도의대 강사 의 論 임석재 任 晳 宰 서울사범대 심리학 교수 의 예술 論 강준상 육본 의무감실 의 집단심리 論 성백선 고려대 심리학교수 의 종교 論 유석진 수도육군병원 심리학의 철학적 배경 이교창 李 敎 昌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조교 신원기론 新 元 氣 論 의 견지에서 본 성욕설의 비판 김용배 金 龍 培 동국대 철학교수 新 학파에 관하여 진성기 육군병원 최근미국정신의학계와 의 위치 김광수 金 光 洙 베드루병원 유석진에게서 군진정신의학을 통해 역동정신의학의 묘미 를 맛 본 후학들은 상당수가 년대 후반 현대정신의학을 더 배우기 위해 대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일부를 거 명한다면 오석환은 대학병원으로 한기수와 노동 두는 대학병원으로 민병근 박인호와 한동세는 대학병원으로 이봉기는 뉴욕주립병원으로 서정 귀 徐 貞 貴 는 캐나다 대학병원으로 떠났던 것이다 특히 민병근은 레지던트를 하면서 신프로이트학파에 속하는 정신분석연구소에 청강생으로 나갔다 유석진이 년에 구연하고 보충하여 활자로 남긴 논문 은 의 종교론 년 인데 이것이 명주완의 정신분 석 이란 종설이래에 근 년 만에 처음 나온 정신분석 분야 연구논문이다 공개강연회 개최를 위시한 이 같은 유석진의 공로는 년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인 영국의 교수의 서울방문 특별강연회 석상에서 인정되어 유석진은 교수로부터 공식적인 감사의 말을 들은 바 있다 ( ) 유석진은 수도육군병원 과장인 중령으로 정부에서 충무무 공훈장을 수여받고 년 전역하였지만 그보다 년 전인 년 월 일에 삼선교 큰길가 형 흥진씨의 건물을 빌려 입원실을 갖춘 베드루신경정신과의원 을 개원하였다 전쟁 이 끝난 당시는 중견군의관들의 야간개업을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병원은 성업 盛 業 으로 국공립병원 출입을 주저하 는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이 몰렸으나 그는 더러 무료환자 도 받았다 년 월 일자 경향신문에는 그가 동대문시장 의 가난한 정신병환자를 무료치료를 자청하였다 는 미담기사 가 실려 있다 전역 후 시간에 여유가 생긴 그는 법원행정처 권순영 權 純 永 법정국장의 협력을 얻어 서울아동상담소를 개설해 김 광수 민병근 등과 함께 무료상담을 정기적으로 하였다 한편 그는 서울의대 생리학교실에도 나가 정신생리학 연구도 하 면서 변연계 와 인간의 정신현상의 연관성을 정신과학계에 소개하고 정신신체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도 하였다 여기서 나온 것이 그의 의학박사 학위논문으로 뇌해마 腦 海 馬 의 손상이 전간발작에 미치는 영향 인 데 김철 지도교수 아래서 그가 직접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발표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물정신의학 - 영역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타과의사들 의 교육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내과학회 학술대회에서 노이 로제와 정신신체의학에 대한 학술강연도 하였다 그는 지도력이 있고 헌신적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년 가을에 전쟁으로 학술기능이 정지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를 재건하려고 중진들 명과 회의 임시총회를 열고 학회명 칭과 임원인선을 완료하였으나 실제에서는 회원 모두가 생 활고로 얽매어 학회다운 활동이 미미하였다 그리하여 년 유석진은 다시 정식으로 재건학회를 조직해 이번에는 그 가 직접 학회장이 되고 학회지를 창간하였다 이 학회가 지 금까지 존재하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요 학회지가 신경정 신의학 인데 학회지는 처음 연 회에서 연 회로 다시 연 회로 근래는 연 회로 발간되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심 리학과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이화대학교 교육심리학과 성 균관대학교 심리학과 연세의대 정신과 고려의대 정신과 사 법연수원의 강사로 나가 학생교육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정 신과의사로 정신분석에 관심을 갖는 후학을 찾아내어 격려 하고 번역서에 격려사나 추천사를 자원해 써 주었다 하나의 예로 당시 연세의대 본과 학년 학생이던 백상창 白 尙 昌 의 프로이트 성욕설 번역서의 추천문을 써 준 것이 있다 76 Psychoanalysis 2012;23:73-78
DY Cho 그는 년 서울의 백병원 신경정신과 부장으로 취 임해 진료와 전공의교육을 맡아 하였고 다시 년 순천향의대 정신과 주임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임상심 리학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아 늘 임상심리학자와 가까이 지냈고 특히 이런 그를 노명래 盧 明 來 가 임상심리학 교수로 서 보필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사이코드라마 - 를 입원환자치료법의 일환으로 쓰기 시작해 학내 외에 많이 알렸으며 그 영향으로 김유광 金 裕 光 김혜남 金 惠 男 이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는 또 백병원 시절부터 댄스 치료법과 음악치료법을 입원환자 치료에 도입하여 그가 직 접 치료자로 나서서 병실을 늘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였고 순 천향병원 시절에는 미술요법도 추가도입해 실시하였다 그 리하여 그는 년 이부영 李 符 永 과 조두영 趙 斗 英 의 보 필을 받아 한국임상예술학회를 조직하여 초대 학회장에 취 임하였고 뒤에 이부영 이근후 李 根 厚 와 김유광이 학회를 이어받아 이끌었다 유석진에게는 활자화된 논문이 편이 있다 역학분야 편 사법정신의학과 사회정신의학분야 편 생물정신의학분야 편 한국정신의학역사분야 편 등을 위시해서이다 그는 권 의 번역서를 내었는 바 럿셀의 교육론 연도미상 과 버나드 의 실험의학 서설 이다 그는 년 세로 교수로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삼선교 옛 베드루신경정신과의원 으로 복귀하였지만 학문적 활동은 접지를 않고 년에 대한사회정신의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지내면서 후학들을 격려하고 이끌었다 그는 일본정 신의학회 정기학술대회에 가서 한국 정신의학의 발전사를 강 연하기도 하였다 그는 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제정 한 최초의 학술상인 벽봉학술상 의 영예로운 제 회 수상자 가 되었다 유석진은 년 의원을 장남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여 수 원에 살면서 년에는 만 천 권의 장서를 서울의대 의학 박물관에 기증한 후 년 월 일 작고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석진은 한국정신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한국정신의학의 태두 泰 斗 였다 그는 성품이 온유하고 밝고 친화성이 높고 박식인데다 말도 잘했다 그리고 예술애호가였다 그는 그래서 여러 분 야에 친구가 많았다 그는 년대 중반부터 신문방송을 이 용해 자살 어린이 정신건강 가족과 부부문제 노이로제 살 인 정신지체 등의 토픽을 놓고 일반국민을 계몽해 나갔다 문학모임에 나가서는 이상 李 箱 의 시 詩 에 대한 정신분석 적 고찰 을 발표하는가 하면 미술가 모임에서는 이중섭 그림 의 분석 을 말하기도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것들이 활자 화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년 사회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한정신건강 협회 의 창립이사와 사무총장을 지냈고 뒤이어 공보부 우수 국산영화 선정심사위원으로 년 대종상 심사위원 년 그리고 대한체육회 체력관리위원회와 스포츠과학위원 회 위원 년 법무부장관 정책자문위원 년 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는 년 독지가가 되어 삼일로 창고극장 을 인수받아 연극인들과 함께 운영하면서 처음 반 년 만에 무려 개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또 총리실 중앙 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 실 행위원회 위원 년 으로도 봉사한 바 있다 그의 활 동상은 자주 신문지상을 오르내렸다 그는 장년기부터 서양댄스를 즐겼으며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는 로타리클럽 활동도 열심히 하여 국제로타리 지 구 총재를 역임하였다 그는 어학실력이 뛰어나서 영어 일 본어 한문 독일어는 아주 잘 하였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까지도 손을 대었다 그는 보스 기질이 있어 후학들에게 주연 베풀기를 즐겼고 국제학회에 나가면 연장자로서 꼭 한국인 후학들에게 회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유석진은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년 서울태생 내 과의사 민병기 閔 丙 棋 박사의 차녀 학기 鶴 基 년 작 고 와 결혼하여 남 녀를 두었다 장인인 민병기는 뒤에 내 무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세인 년 상배 喪 配 하고 다음 해 서울태생 김명희 金 明 仁 希 와 재혼하였다 김명 희는 서울대 음대를 나온 성악가요 초창기 프로듀서로 오래 활동한 여성이다 재혼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유석진의 장녀 태정 泰 靜 은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를 나 와 고려의대 정신과 임상심리학자로 근무하다 도미하였고 맏사위는 미국 의 뉴욕주립의대 정신과교수로 있다 그리고 큰외손자가 미국에서 정신과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장남 태혁 泰 赫 은 서울대 심리학과와 가톨릭의대를 졸업하 고 한림의대 정신과교수로 있다가 현재 아버지 의원을 이어 받아 베드루신경정신과의원 을 운영하고 있다 차녀 태임 泰 姙 은 고려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전문의로 미국에서 활동 하고 있다 다섯째 사위는 정신과 전문의요 분석심리학자다 남 태익 泰 翊 은 순천향의대를 나온 소아정신과 전문의다 이렇게 유석진 집안에는 정신과의사가 명이나 된다 즉 www.freud.or.kr 77
Suck Jin Yoo and Psychoanalysis 장남 남 차녀 맏사위 다섯째사위 큰외손자 그리고 당사 자인 유석진이다 유석진은 집안에서도 정신과 태두였다 Conflicts of Interest The author has no financial conflicts of interest. REFERENCES*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분석학 -- Sigmund Freud 탄생 101주년 기념 Symposium. 1958.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사. 서울의대 정신과학교실;2008. 신경정신의과교실현황. 함춘의학, 2권 3호, 1973. 유석진. 건국 10년간의 한국정신의학. 1960. 유석진. 한국 정신의학계의 거목 : 유석진박사 문집. 서울: 학지 사;2001. 한국근대정신의학의 역사적 조명(좌담회). 서울의대 정신의학 14권 1 호, 별책 *참고한 자료들 학술지 규정상 영문표기가 원칙이나 자료 특성상 한글로 표기함 78 Psychoanalysis 2012;23: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