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 년 ( 숙종 9) 남경승격, 풍양현 견주 사천현 ( 현동두천시지역 ) 을남경의직할지로삼음 1308 년 ( 충렬왕 34) 남경을한양부로격하 1394 년 ( 태조 3) 한양부를한성부로개칭양주치소를대동리 ( 현광진구광장동 ) 로옮김양주를지양주사로강등 1395 년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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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남양주시는지리적으로경기동북부지역에위치하며녹색문화도시로주목받고있다. 동북쪽으로는북한강을사이로가평군과양평군, 서쪽으로는왕숙천 불암산 수락산을경계로구리시와서울특별시노원구, 북쪽으로는운악산 서리산을경계로의정부시와포천군, 남쪽으로는한강을경계로양평군 광주군 하남시와접하고있다. 시전체는동북쪽으로주금산 서리산 축령산 운길산에, 서쪽으로운악산 수락산 불암산에에워싸여있고, 그가운데천마산이솟아있다. 남양주는지리적으로북부지역에산이많고남부지역에구릉이많으며천혜의자연조건을갖추고있다. 이때문에남양주시는 녹색문화도시 를표방하고있다. 남양주는역사적으로양주의남쪽과기타인접한시 군과의행정구역통폐합과정을거치면서형성되었다. 따라서현재남양주시만의독자적인역사형성과정을파악하는것은매우어려운일이다. 여기에서는양주를중심으로, 특히진접 진건일대인풍양에초점을맞추어남양주지역의역사적변천과정을살펴보도록하겠다. 남양주지역은수석리선사유적지와토성에서나타나듯이한강을중심으로선사문화를꽃피웠던곳이다. 삼한시대에는마한의영역으로고리국 ( 古離國 ) 에속하였다가삼국시대에는백제 고구려 신라삼국이한강을차지하기위해각축전을벌이던군사적요충지라고할수있다. 특히인근의아차산유적은백제와고구려의접전지역으로유명하며, 고구려가이지역을점령하였을때진접일대는한산주 ( 漢山州 ) 소속북한산군 ( 北漢山郡 ) 의골의노현 ( 骨衣奴縣 ) 이었다. 이후신라가삼국을통일하고 9 주 5 소경을설치하면서한주 ( 漢州 ) 의한양군 ( 漢陽郡 ) 에소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한양군에속한황양 ( 荒壤 ) 으로지명이바뀌었다가이후풍양으로불리었고양주또는남경 ( 南京 ) 으로불리면서군사적요충지에서점차행정적인성격이강한지역으로변모하였다. 조선시대에는수도를한양으로천도하면서그주변에위치하게되어모든생활영역이한양과밀접한관계를맺게되었다. 고려시대에오늘날의서울지역에있던양주가북쪽으로이동하면서, 서울외곽의큰군현으로자리잡게되었다. 이때남양주는양주의속현인풍양현에속하였으며, 대부분의지역은양주와직 간접적으로연관을갖고있었다. 중종대이후에는현이폐지되면서양주의직할지로변하였다. 풍양은서울의인접지역으로세종대풍양궁이조성되어왕의왕래가빈번하였으며, 묘적산과운악산등수려한산수와자연경관으로인하여왕실의사냥터나강무장으로이용되었다. 한강유역은세곡선의운반등강을보호하는차원에서지역간의경계가결정되었기때문에현재와부읍팔당리와조안면능내리지역은광주와양근에, 수동면의일부지역은가평군에, 진접읍부평리지역은포천군에속하기도하였다. 즉남양주지역은풍양으로대표되는지역을중심으로양주, 광주, 양근, 포천, 가평등과서로연결되어있었다. 이후 1906 년광주군초부면의편입과 1914 년행정구역통폐합을거치고, 1963 년에수동면이신설되면서읍 면단위에서현재의편제와유사한형태를갖추었으며, 1980 년 4 월 1 일양주에서분리되어남양주군이신설됨에따라독자적인행정구역을갖게되었다 년에는구리읍이, 1989 년에는미금읍이각각시로승격되면서남양주군에서분리 독립되었고이후 1995 년 1 월 1 일에는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어남양주시로승격되었다. 이글에서는남양주시의연혁을오늘날의행정구역을기준으로하여고찰하도록하겠다. 단, 고려시대이전에는현남양주지역을가리키는고리성 골의노현, 그리고풍양현의변화과정을살펴보고자한다. 조선시대는풍양현이양주의속현으로있다가폐현이되어직할지역으로남아있던시기이므로풍양현과양주의역사적변화과정을중심으로서술하고자한다. 한말과일제시기는현남양주지역이양주와양평 가평 광주등으로나뉘어있던상태이므로행정구역통폐합을통해이들지역의일부가현남양주지역의읍 면단위로편제되는과정을살펴보겠다 년이후에는남양주지역이독립된행정단위로성립되어변화 발전하는과정을알아볼것이다. < 남양주시의연혁 > 시대연도연혁 삼한시대마한 54 국중고리국 ( 古離國 ) : 풍양 양주일대 삼국시대 백제 286 년 ( 책계왕 1) 아차성수축 고구려골의노현 ( 骨衣奴縣 ) 신라 553 년 ( 진흥왕 14) 신라가한강하류를점령 통일신라시대 757 년 ( 경덕왕 16) 골의노현을황양 ( 荒壤 ) 으로개칭 935 년 ( 태조 18) 한양군을양주로개칭, 양주를견훤에게식읍으로하사 940 년 견주 ( 見州 ) : 현양주지역풍양 ( 豊壤 ) : 진건 진접지역평구 : 남경소속 983 년 ( 성종 2) 양주목설치 고려시대 1012 년 ( 현종 3) 안무사로고침 1018 년지양주사로강등 1067 년 ( 문종 21) 남경유수관으로승격, 곧격하

2 1104 년 ( 숙종 9) 남경승격, 풍양현 견주 사천현 ( 현동두천시지역 ) 을남경의직할지로삼음 1308 년 ( 충렬왕 34) 남경을한양부로격하 1394 년 ( 태조 3) 한양부를한성부로개칭양주치소를대동리 ( 현광진구광장동 ) 로옮김양주를지양주사로강등 1395 년양주부로승격 1397 년양주치소를고주내 ( 현양주군고읍리 ) 로옮김 1410 년 ( 태종 10) 양주목으로승격 조선시대 1413 년 1413 년양주도호부로강등 1419 년 ( 세종 1) 풍양현을포주에서양주로이관 1466년 ( 세조 12) 양주목으로승격되고풍양현을속현으로둠 1504년 ( 연산군 10) 양주목폐지, 왕의사냥터가됨 1506년 ( 중종 1) 양주목복구 1895년 ( 고종 32) 8도제폐지. 전국 23부로구분. 한성부양주군소속 1896년 23부제폐지. 13도로개편. 경기도양주군소속 1906년 광주군초부면 ( 草阜面 ), 양주군편입 일제시기 1914 년경기도양주군 ( 행정구역통폐합 ) 1940년 2월 14일 조안출장소설치 1963년 1월 1일 수동면신설 ( 화도면 3리, 진접면 1리, 가평군외서면 3리를통합 ) 1966년 7월 11일 별내면퇴계원출장소설치 1973년 7월 1일 구리면, 읍승격 1979년 5월 1일 미금면, 읍승격 1980 년 4 월 1 일 남양주군신설 ( 구리 미금읍, 진접 진건 화도 수동 와부 별내면 : 2 읍 6 면 ) 1980 년 12 월 1 일와부면, 읍승격 1983 년 2 월 15 일진건면양지리 오남리 팔현리, 진접면편입 해방이후 1986 년 1 월 1 일구리읍, 시승격분리 1986 년 4 월 1 일조안출장소, 조안면승격 1989 년 1 월 1 일미금읍, 시승격분리 1989 년 4 월 1 일 진접면, 읍승격퇴계원출장소, 퇴계원면승격 1991년 12월 1일 화도면, 읍승격 1992년 4월 1일 진접읍오남출장소설치 1995년 1월 1일 미금시 남양주군통합, 남양주시신설 (3읍 6면 6동) 1995년 5월 6일 오남출장소, 오남면승격

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1. 선사시대 선사시대에남양주지역은수많은선사인들이살았던흔적을찾을수있다. 와부읍도곡리, 화도읍금남리, 수석동, 도농동, 지금동, 가운동등한강유역을중심으로각처에선사유적지가산재되어있다. 선사시대사람들은내륙과강변에서생활하였는데, 현재이러한지역에서특이한주거지인반지하형태의수혈주거지가발견되었다. 유물로는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돌화살촉, 방추차, 다두석부 ( 多頭石斧 ), 반달모양돌칼, 간돌창, 토추 ( 土錘 ) 등이발견되었다. 특히민무늬토기는석립이많이섞인조질태토로백갈색이며표면에는어골문이시문되어있고주로논밭에서발견되었다. 생활형태로는초기에는채집경제를주로하다가후기에는농경생활을하였다. 주거지주위에목탄이발견된것으로보아난방을하고음식을익혀먹었음을알수있다.

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2. 삼한시대 마한 ( 馬韓 ) 진한 ( 辰韓 ) 변한 ( 弁韓 ) 의삼한은기원전 3 세기전후로형성되었다. 삼국지 ( 三國志 ) 동이전 ( 東夷傳 ) 에따르면 한 ( 韓 ) 은대방남쪽에있고동서가바다로경계를짓고남쪽은왜와접하고있다. 고하였다. 이중마한은현재경기 충청 전라도일부지역을포괄하면서목지국 ( 目支國 ) 백제국 ( 伯濟國 ) 아림국 ( 兒林國 ) 감해국 ( 感奚國 ) 고리국 ( 古離國 ) 등 50 여개의소국들로구성되었다. 이병도는오늘날의양주 풍양일대가고리국에속하였다고비정하였다.* 이당시큰부족장은 1 만여가 ( 家 ), 작은부족장은수천가를거느렸으며, 이들은대략 10 여만호라하였다. 그러나고리국대부족장이거느린호수는상세히알수없다. 삼한위치도

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3. 삼국및통일신라시대 기원후 4 세기후반부터고구려와백제가국경을접하게되면서상호간의대립이시작되었다. 4 세기무렵남양주지역이어디에속해있었는지는백제와고구려의전쟁기사에서추단할수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책계왕조에수록되어있는 왕이고구려의침략을염려하여아차산성 ( 阿且山城 ) 을수축하고방비하게하였다. 라는기사와 371 년고구려와백제가패하 ( 예성강 ) 와평양성에서전투를벌인사실은당시남양주지역을포함한한강유역이백제의영토임을짐작하게해준다. 하지만고구려는 396 년 ( 광개토왕 6) 남진정책 ( 南進政策 ) 으로백제의 58 개성과 700 개촌락을점령하였다. 광개토왕릉비 의기사중에도당시점령한지역중 고리성 ( 古利城 : 현진접 진건일대 ) 이나오는것으로보아이지역이고구려에속하게된것을보여준다. 즉고구려의지명인골의노현과음이유사한데, 骨衣 古利 古離 로음이일치한다는사실에서오늘날의진접 진건일대를고리국으로추정할수있다.* 삼국시대남양주위치도 이것으로현남양주지역은마한에서백제로, 또다시고구려의영토로바뀌었음을알수있다. 이지역이고구려의세력권으로들어간뒤백제의수도인한성 ( 현경기도광주 ) 과아차산성은한강을경계로서로대립하는형태를띠었다. 남양주의경계인한강유역은고구려의남진정책으로백제와고구려의전쟁이끊임없이벌어지는격전지한가운데에위치한것이다. 475 년 ( 장수왕 63) 9 월고구려군사 3 만명이백제의도읍지한성을함락하여개로왕을아차산성아래에서살해하고한강이남지역을점령하였다. 이때현재의양주지역은고구려매성군 ( 買城郡 ) 또는창화군 ( 昌化郡 ) 에소속되었고, 남양주지역은한산주에속한북한산군 ( 오늘날의서울지역 ) 관내의골의노현이되었다. 이후남양주지역은신라가한강유역에진출하기전까지약 80 년동안고구려의통치하에있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 新增東國輿地勝覽 ) 양주목조의속현으로나오는풍양현관련기사를보아도알수있다. 풍양은주동쪽 50 리에있으며, 본래고구려시대의골의노현이며, 신라가황양으로고쳐한양군의영현이되었다. 고려때에풍덕으로고치고, 현종 9 년양주에속하고후에포주에속하다가조선시대세종원년다시귀속되었다.* 삼국시대남양주위치도 고구려의관할에있던한강주변은 551 년 ( 성왕 29) 백제가신라와연합하여한강하류지역을되찾음에따라일시적으로백제의영역에속하게되었다. 이때백제는사비로수도를옮기고지방행정구역을중방 동방 남방 서방 북방등 5 방 ( 方 ) 으로나누었는데남양주지역은북방에속한것으로보인다. 하지만 2 년후 553 년 ( 진흥왕 14) 에신라가백제를공격하여한강하류를차지하게되면서남양주지역도신라의신주 ( 新州 ) 에속하게되었다. 557 년신라는새로정복한영토에지방통치조직을적용하였는데, 국원 ( 國原 : 충주 ) 을소경 ( 小京 ) 으로삼고, 신주를폐하고북한산주를설치하였다. 이때남양주는북한산주에속하였다. 568 년 10 월에는북한산주를폐하고남천주 ( 南川州 ) 를설치하여주치를이천에두었다가 604 년 ( 진평왕 26) 7 월에남천주를폐하고북한산주를설치하였다. 주치변경은한산과남천의비중이상호작용하였다고볼수있는데이는고구려세력의저항에영향을받은것으로보인다. 이같은사실은 603 년 고구려가북한산성을침범하니국왕이친히 1 만병력을인솔하여싸웠다. * 는사실로뒷받침되고있다. 삼국시대남양주위치도신라는삼국을통일하고, 확대된영토를 9주 5소경체제의지방행정조직으로개편하였다. 이때고구려의옛영토에는한주를비롯한 3주를두었는데한주의치소는광주 ( 廣州 ) 였고, 그관할하에북한산군이있었다. 그후 757년경덕왕의한화 ( 漢化 ) 개혁과관련하여중국식으로지명이개칭되면서현재서울을중심으로한지역에있던북한산군도한양군으로바뀌었다. 이때진접 진건으로대표되는골의노현도황양으로개칭되었다. 신라말에통치체제전반이무너지면서지방의유력세력들이스스로성주 ( 城主 ) 장군 ( 將軍 ) 을칭하면서독자적인세력을구축하였다. 이에남양주지역도신라의직접적인통제력에서벗어나게되었다. 효공왕 ( 孝恭王 : ) 이후에는후백제, 후고구려가번창하게되면서신라의영역은더욱축소되었다. 이당시남양주지역을포함한한강유역은궁예 ( 弓裔 ) 와왕건 ( 王建 ) 의세력권에편입되어있었다.

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4. 고려시대 고려시대의양주 ( 또는남경 ) 는조선시대이후양주지역이라불리는곳과는다르다. 즉, 당시의양주는오늘날의서울지역을말하는것이며조선시대의양주지역은당시에견주 ( 見州 : 오늘날의양주지역 ), 사천 ( 沙川 : 오늘날의동두천지역 ), 풍양 ( 豊壤 : 오늘날의진접 진건일대 ) 등으로불렸다. 현남양주지역은이당시에풍양이나양주 ( 또는남경 ) 에속해있었다. 고려사 권 82, 병지참역조의춘주도 ( 春州道 ) 와평구도 ( 平丘道 ) 를보면풍양과남경이라는지명이같이나온다. 즉진접 진건일대는풍양에속하였고평구도가있었던지금의삼패동일대는남경에소속되었던것으로나타나있다. 양주에관한지명이처음으로나오는것은 898 년궁예가 왕건을정기대감 ( 精騎大監 ) 으로삼고양주와견주를공략하였다. * 라는기사이다. 통일신라시대한양군이었던지명이양주라는이름으로처음등장하게되는것인데, 개칭시기는언제인지확실하지않다. 이당시주 ( 州 ) 라는명칭은후삼국의쟁패과정에서궁예와왕건세력에점령되거나또는귀부 ( 歸附 ) 한지역에붙인일반적인명칭으로서군사적인요충지의지역단위명칭으로볼수있다. 왕건의공략으로양주는궁예정권에속하게되었고, 이후고려까지이어진것으로보인다. 또한다음해궁예가광주를공격하였다는기록이있어 899 년에는궁예의영역에속한것으로추측할수있다. 이당시남양주지역은호족이존재하지않은것으로보이며, 지역적으로중앙에위치하는관계로다른지역보다빨리점령된것이아닌가생각된다. 왕건이궁예를몰아내고고려를개창하였다. 이당시양주와관련된기록은후백제의견훤이귀화하자양주를식읍으로내려주었다는기사이다. 견훤이들어오자왕은다시그를상보 ( 尙父 ) 라고부르고남궁 ( 南宮 ) 을사관으로지정해주었다. 그리고견훤의품계는백관의위에있게하고양주를식읍으로주는동시에금과비단을주고노와비각각 40 명과말 10 필을주었으며그보다먼저항복하여온신강을그의아관 ( 衙官 ) 으로삼았다.* 이것은고려왕실이양주를확실하게장악하고있었고, 또한양주지역이왕실직할지의성격을지니고있었다는것을보여준다. 즉왕건은개성과지리적으로가깝고군사적 경제적요충지이기때문에양주지역을어느호족에게맡기기보다는자신이직접통치하여세력기반으로삼으려하였을것이다. 이에견훤에게식읍으로하사해줄수있었던것이다. 고려시대의지방관제개편과정을살펴보면, 태조대에지방제도를주 부 군 현제로개편하였고 983 년 ( 성종 2) 에본격적으로지방제도정비에착수하여, 전국에 12 목 ( 牧 ) 을설치하였다. 12 목의설치는중앙의지배력이지방까지미치지못하고호족의영향력이온존하고있는상황에서지방관을파견함으로써중앙집권을위한수순을밟고자한것으로보인다. 이에양주에목사를두게됨으로써명실상부한최고의지방행정구역중에하나로주목받게되었다. 당시의양주목의규모는지방통치의최고행정기관으로문종대남경유수관에설치된주 부 군 현의숫자인 31 개의지방행정조직과그규모가유사할것으로추측된다. 이때의범위는 고려사 지리지남경유수관조에의하면교하 ( 交河 : 파주시교하면 ) 견주 포주 ( 抱州 : 포천군 ) 행주 ( 幸州 : 고양시 ) 봉성현 ( 峰城縣 : 파주시 ) 고봉현 ( 高峰縣 : 고양시 ) 심악현 ( 深嶽縣 : 파주시 ) 풍양현 사천현등 3 군 6 현이었으며, 관할지는 1 부 2 군 1 현으로편제되어있었다. 995 년 9 월에는 10 도제 ( 道制 ) 를실시하고절도사체제로개편하였다. 이에따라양주는관내도 ( 關內道 : 현경기 황해도 ) 에속하였으며, 양주를좌신책군 ( 左神策軍 ), 해주를우신책군 ( 右神策軍 ) 이라칭하고좌우 2 보로삼았다 년 ( 현종 3) 2 보와 12 절도사를폐지하고 5 도호 75 도안무사를두었는데양주를비롯한 6 주에안무사를설치하였다 년에는안무사를폐지하고, 4 도호 8 목 56 주군 28 진 20 현을두면서양주는 8 목에서빠져지주사 ( 知州事 ) 로강등되었다. 지주사로의강등은양주가점차군사적인성격에서민정적인성격으로전환함과동시에그중요성이감소됨을의미하는것이다. 오래전부터양주는군사 교통의요충지로주목받고있었지만중앙집권력이강해지면서중앙의행정력이쉽게전파될수있을것으로파악하여목으로승격시킬필요가없었던것이다. 지주사로강등되었던양주는 1067 년 ( 문종 21) 남경유수관으로승격되었다. 남경은서경 ( 西京 : 평양 ), 동경 ( 東京 : 경주 ) 과더불어 3 경체제를이루고있던당시지방제도상최고의지위에있었다. 남경설치는 1068 년남경에새궁궐을창건하였다는기록에서 * 사실임이확인된다. 남경이설치된이유가정확히무엇인지는알수없으나지리도참사상과정치적인상황이같이고려된것으로보인다. 고려사 에나타난역원관련기사에영서 ( 迎曙 ) 노원 ( 蘆原 ) 구곡 ( 仇谷 ) 평구등이남경, 녹양 ( 綠楊 ) 은견주, 임천 ( 臨川 ) 은사천소속으로나와있어당시남경이현재의남양주와직접적인관련이있음을알수있다. 남경은얼마후폐지되었지만 1104 년 ( 숙종 9) 에다시설치되었다. 그후여러차례지방제도가개편되어 5 도, 양계안에 4 도호 8 목 15 부 129 군 335 현 29 진의제도가확립되었다. 5 도중의하나인양광도지역은개경을제외한경기지방과충청도를포괄하는광범위한지역이었다. 양주는교하 견주 포주 3 개지역을속군으로, 행주 봉성 고봉 심악 풍양 사천등 9 개군현을속현으로삼았다. 남양주지역이속했던양광충청주도 ( 楊廣忠淸州道 ) 는 1106 년 ( 예종 1) 에통합되었다가 1171 년 ( 명종 1) 에양광주도와충청주도로분할되었다. 그후 1314 년 ( 충숙왕 1) 에는다시양광도로정하였는데이는양주와광주의앞머리를딴것이었고, 1356 년 ( 공민왕 5) 에는충청도로개칭하였다 년 ( 충렬왕 34) 에는남경이한양부로개편되었는데광릉 ( 廣陵 ) 이라고도불렸다. 이것으로보아양주라는명칭은 1067 년경부터고려말까지는사용되지않았을것으로추정된다. 오늘날남양주지역에있었던풍양현은고려초 ( 태조 23 년 ) 풍양으로바뀌었는데, 1018 년 ( 현종 9) 에는양주에속하였다가뒤에포주 ( 抱州 ) 로소속이바뀌었다. 평구는당시육로교통의중요한기능을하면서남경에소속되었다.*

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5. 조선시대 현남양주지역을대표하는옛지명인풍양은고려말에서조선세종초까지양주가아닌포천에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조풍양현에의하면, 주동쪽 50 리에있으며, 고려현종 ( 顯宗 ) 9 년양주의속현으로있다가후에포주 ( 포천 ) 에속하였고, 본조 ( 조선 ) 세종원년에다시양주에속하였다. 고되어있다 년 ( 태조 3) 도평의사사에서경기각고을의성쇠와크기에따라좌 우도로나눌때풍양은경기좌도에소속되었고 * 1419 년 ( 세종 1) 풍양현터에이궁을지을계획을하면서양주도호부의관할이되었다. 현재의서울지역은고려시대에양주또는남경으로불리면서군사적요충지에서점차행정적인성격으로변화되었다. 조선건국직후인 1394 년에도읍을한양으로옮기면서, 양주는점차수도의외곽지역으로옮겨지게되었다. 서울이한양부에서한성부로개칭되자양주치소는한성부밖의아차산남쪽대동리 ( 大洞里 : 현서울특별시광진구광장동 ) 로이동되었고, 지양주사 ( 知楊州事 ) 로강등되었다. 하지만 1395 년부 ( 府 ) 로승격시켜부사를두었고, 1397 년에부치 ( 府治 ) 를다시견주옛터로옮겨양주라불렀다. 고려시대현서울을중심으로있던양주는조선시대한성부가생기면서그위치가오늘날의양주지역으로이동하게되었고, 수도외곽에위치하는큰군현으로자리잡게된것이다. 팔도군현지도 의남양주부근 (18 세기중엽 ) 그뒤양주는 1410 년목으로승격되었다가 1413 년도호부로강등되었다 년 ( 세조 12) 에다시양주목으로승격되어견주 풍양 사천 3 지역을속현으로두었으며, 관내에는 1 주 ( 州 ) 1 군 ( 郡 ) 5 현 ( 縣 ) 을두었다. 1 주는파주이고, 1 군은고양이며, 5 현은영평 ( 永平 ) 포천 적성 교하 가평으로진관 ( 鎭管 ) 을두었다.* 세조는군사조직을대대적으로개편하여전국을여러개의진관으로개편하는진관체제를단행하였다. 따라서중요한지역을중심으로중 좌 우익으로편성하던것이중요한거진주변제진 ( 諸鎭 ) 을통솔하는체제로바뀌었다. 이때양주진은거진이되어연천, 마전, 적성, 원평, 교하, 고양, 영평, 포천, 가평의제진을이끌었다 년 ( 연산군 10) 에는양주목을폐지하고일부지역을사냥터와강무장으로사용하였다. 이과정에서양주속현으로있던풍양현이폐지된것으로보인다 년 ( 중종 1) 양주목이복구되고양주의치소를불곡산남쪽 ( 현재양주군주내면유양리 ) 으로옮겼다. 이때부터유양리는양주관아가있는중심지로자리잡았다. 이시기에남양주지역은양주의직할지로편입된것으로보인다. 조선시대에는각종읍지류를통해오늘날의남양주와관련된지명을찾아볼수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新增東國輿地勝覽 ) 에따르면풍양현은양주의속현으로동쪽 50 리지점에있다고하였다.* 하지만책에따라서조금씩지명의변천이있었던것으로파악된다. 이것으로보면오늘날진접지역을진대 진벌이라불렀으며, 여기서진대는진벌의오기인듯하다. 수석동지역인미음 독음을같이부르다가후기에미음으로통일되었다. 덕소지역은와곡 와공을같이부르다가와곡으로통일되었다고볼수있다. 내동이라는지명은 여지도서 에는나타났다가 대동지지 에는사라졌고 1912 년다시나타났다. < 조선시대남양주의지명변천 > 출전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년간행 ) 지명 별비곡 ( 別非谷 ), 진대 ( 榛代 ), 진관 ( 眞官 ), 미곡 ( 尾谷 ), 상도 ( 上道 ), 하도 ( 下道 ), 접동 ( 接洞 ), 건천 ( 乾川 ), 금촌 ( 金村 ), 미음 ( 美音 ) 여지도서 (1760 년간행 ) 대동지지 (1864 년간행 ) 명칭변천 진대 ( 榛代 ) 진벌 ( 榛伐 ) 새로운지명 와공 ( 瓦孔 ), 내동 ( 內洞 ), 독음 ( 禿音 ) 사라진지명 미곡 ( 尾谷 ), 미음 ( 美音 ) 명칭변천 진벌 ( 榛伐 ) 진대 ( 榛代 ) 새로운지명 와곡 ( 瓦谷 ), 미음 ( 美音 ) 사라진지명 내동 ( 內洞 ), 와공 ( 瓦孔 ), 독음 ( 禿音 ) 이후 1895 년 ( 고종 32) 5 월 26 일칙령제 101 호로지방관제가개정 공포되었다. 개정된내용을보면 8 도제를폐지하고전국을 23 부로나누었으며, 부 목 군 현을통폐합하여 337 군으로개편하였다. 이에따라현남양주지역이속해있었던양주군은한성부의 11 개군중하나로편제되었다. 지방제도개편은정치적변화를겪으면서다시논의되어 1896 년 8 월 6 일칙령제 36 호지방제도 관제 봉급 경비개정에의하여다시 23 부에서 13 도제로개편되었고, 부제가폐지되어도제가마련되었다. 칙령제 36 호제 5 조에따라양주군은경기도 38 군중에 3 등군에속하였다.* 또한 1906 년 9 월칙령제 49 호지방구역정리에따라행정구역이개편되는데, 양주군에는 32 면이편제되었으며, 그중 11 면이현남양주지역에해당된다. 이때에광주군소속이었던초부면의봉안 마현 능내 조동 고랑 진촌 중 평 삼봉의 9 개리가양주군으로편입되었다. 여기에서현남양주지역과관련된면 리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 한말남양주의행정구역 >

8 면명별비면 ( 別非面 ) 진벌면 ( 榛伐面 ) 접동면 ( 接洞面 ) 건천면 ( 乾川面 ) 진관면 ( 眞官面 ) 상도면 ( 上道面 ) 하도면 ( 下道面 ) 초부면 ( 草阜面 ) 와공면 ( 瓦孔面 ) 미음면 ( 渼陰面 ) 금촌면 ( 金村面 ) 리명 도감리 ( 都監里 ), 흑석리 ( 黑石里 ), 광암리 ( 廣岩里 ), 화접동 ( 花蝶洞 ), 간촌리 ( 間村里 ), 동촌리 ( 東村里 ), 영지동 ( 靈芝洞 ), 동학동 ( 東鶴洞 ), 응달리 ( 應達里 ), 덕동리 ( 德洞里 ), 묘동리 ( 廟洞里 ), 퇴계원리 ( 退溪院里 ), 서촌리 ( 西村里 ), 거흑동 ( 巨黑洞 ), 마전리 ( 麻田里 ), 식송리 ( 植松里 ), 삼안리 ( 三安里 ), 전도리 ( 全道里 ), 내곡리 ( 內谷里 ) 19 개리 진벌리 ( 榛伐里 ), 금곡리 ( 金谷里 ), 수막동 ( 水幕洞 ), 내마산리 ( 內馬山里 ), 중리 ( 中里 ), 검단리 ( 黔丹里 ), 후평리 ( 後坪里 ), 주곡리 ( 周谷里 ), 팔야리 ( 八夜里 ) 9 개리 본접동리 ( 本接洞里 ), 전동리 ( 全洞里 ), 내동리 ( 內洞里 ), 와촌리 ( 瓦村里 ), 중포리 ( 中浦里 ), 장생리 ( 長牲里 ), 봉현리 ( 蜂峴里 ), 비각리 ( 碑閣里 ), 현창리 ( 縣倉里 ), 궁동리 ( 宮洞里 ) 10 개리 팔현리 ( 八賢里 ), 어남상리 ( 於南上里 ), 어남하리 ( 於南下里 ), 점막리 ( 店幕里 ), 송정리 ( 松亭里 ), 오산리 ( 梧山里 ), 단곡리 ( 丹谷里 ), 오룡동 ( 五龍洞 ), 성능리 ( 成陵里 ), 식동리 ( 植洞里 ), 하독정리 ( 下獨井里 ), 상독정리 ( 上獨井里 ), 양지리 ( 陽地里 ) 13 개리 평촌리 ( 坪村里 ), 월음리 ( 月陰里 ), 본진관리 ( 本眞官里 ), 고현리 ( 高峴里 ), 신촌리 ( 新村里 ), 법동리 ( 法洞里 ), 배양동 ( 培養洞 ) 7 개리 가곡리 ( 嘉谷里 ), 석수대리 ( 石水臺里 ), 송라동 ( 松蘿洞 ), 전의동 ( 典儀洞 ), 점막리 ( 店幕里 ), 묵동리 ( 墨洞里 ), 지사리 ( 芝沙里 ), 지둔리 ( 芝屯里 ), 운하동 ( 雲霞洞 ), 구곡리 ( 九谷里 ), 답동리 ( 畓洞里 ), 등경동 ( 燈턓洞 ), 호만리 ( 好滿里 ), 궁촌리 ( 宮村里 ), 당두평리 ( 唐豆坪里 ), 장천리 ( 長川里 ), 응암리 ( 鷹岩里 ), 내동리 ( 內洞里 ), 세월산리 ( 細月山里 ), 평동리 ( 坪洞里 ), 장내리 ( 墻內里 ) 21 개리 진동리 ( 眞洞里 ), 녹동리 ( 鹿洞里 ), 장현리 ( 獐峴里 ), 맹곡리 ( 孟谷里 ), 월길리 ( 月吉里 ), 남하리 ( 南下里 ), 계전리 ( 鷄田里 ), 궁촌리 ( 宮村里 ), 광암리 ( 廣岩里 ), 배기리 ( 盃基里 ), 무수동 ( 無愁洞 ), 백월리 ( 白月里 ), 산성리 ( 山城里 ), 마산리 ( 馬山里 ), 차산리 ( 車山里 ), 시우리 ( 時雨里 ), 남상리 ( 南上里 ), 남중리 ( 南中里 ) 18 개리 삼봉리 ( 三峯里 ), 중리 ( 中里 ), 조동리 ( 鳥洞里 ), 마현리 ( 馬峴里 ), 봉안리 ( 奉安里 ), 평촌리 ( 坪村里 ), 진촌리 ( 鎭村里 ), 고랑리 ( 高浪里 ), 능내리 ( 陵內里 ) 9 개리 율북리 ( 栗北里 ), 덕소리 ( 德沼里 ), 도심리 ( 陶心里 ), 월곡리 ( 月谷里 ), 적실리 ( 赤室里 ), 도산리 ( 陶山里 ), 문곡리 ( 文谷里 ) 7 개리 수변리 ( 水邊里 ), 석실리 ( 石室里 ), 가재리 ( 加在里 ), 지사리 ( 芝沙里 ), 석도리 ( 石島里 ), 조운리 ( 朝雲里 ), 금교리 ( 錦橋里 ), 도농리 ( 陶農里 ) 8 개리 일패리 ( 一牌里 ), 이패리 ( 二牌里 ), 삼패리 ( 三牌里 ), 사패리 ( 四牌里 ) 4 개리

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6. 일제시대 1910 년조선을병합한일본은 1914 년 4 월 1 일행정구역통폐합을단행하여침략통치를위한행정구역개편을실시하였다 년행정구역개편때나타났던자연취락명이통폐합되어단순화되었다. 이때양주군은주내면 9 개리, 회천면 8 개리, 은현면 7 개리, 광적면 7 개리, 백석면 8 개리, 시둔면 11 개리, 별내면 8 개리, 진접면 9 개리, 진건면 9 개리, 화도면 13 개리, 와부면 11 개리, 미금면 10 개리, 구리면의 12 개리, 노해면 9 개리, 이담면의 10 개리, 장흥면 7 개리의총 16 면 148 리로구성되었다. 이중현재의남양주지역에해당되는지역은별내면 진접면 진건면 화도면 와부면 미금면의 6 개면이다. < 일제시기남양주지역의행정구역 > 면명리명개편내용 묵현리 ( 墨峴里 ) 하도면 ( 下道面 ) 직동 ( 直洞 ), 상도면 ( 上道面 ) 묵동리 ( 墨洞里 ) 녹촌리 ( 鹿村里 ) 창현리 ( 倉峴里 ) 차산리 ( 車山里 ) 하도면녹동리 ( 鹿洞里 ), 궁촌리 ( 宮村里 ) 일부 하도면마산리 ( 馬山里 ) 장현리 ( 獐峴里 ) 월길리 ( 月吉里 ) 무수동 ( 無愁洞 ), 산성리 ( 山城里 ) 궁촌리각일부 하도면광암리 ( 廣岩里 ) 맹곡리 ( 孟谷里 ), 맹기리 ( 孟基里 ) 차산리각일부 마석우리 ( 磨石隅理 ) 하도면산성리일부, 계전리 ( 鷄田里 ) 화도면 ( 和道面 ) 금남리 ( 琴南里 ) 가곡리 ( 嘉谷里 ) 운수리 ( 雲水里 ) 송천리 ( 松川里 ) 구암리 ( 九岩里 ) 답내리 ( 畓內里 ) 하도면남중리 ( 南中里 ) 남하리 ( 南下里 ), 남상리 ( 南上里 ) 백월리 ( 白月里 ), 상도면 답동리 ( 畓洞里 ) 각일부 상도면가곡리 상도면석수대리 ( 石水臺里 ) 당두평리 ( 唐豆坪里 ) 운하리 ( 雲霞里 ), 장천리 ( 長川里 ) 일부 상도면송라동 ( 松蘿洞 ), 장천리 등경동 ( 燈턓洞 ) 각일부 상도면전의동 ( 典儀洞 ) 응암리 ( 鷹岩里 ) 구곡리 ( 九谷里 ), 답동리 하도면남상리각일부 상도면내동리 ( 內洞里 ), 답동리일부 월산리 ( 月山里 ) 상도면등경동일부, 세월산리 ( 細月山里 ) 점막리 ( 店幕里 ) 지둔리 ( 芝屯里 ) 고산리 ( 高山里 ) 산곡리 ( 山谷里 ) 청학리 ( 靑鶴里 ) 상도면지둔리내동면 ( 內洞面 ) 입암리 ( 笠岩里 ), 고산리일부내동면산곡리, 고산리 별비면 ( 別非面 ) 흑석리 ( 黑石里 ) 각일부별비면동학동 ( 東鶴洞 ), 응달리 ( 應達里 ) 흑석리 덕동리 ( 德洞里 ) 각일부 별내면 ( 別內面 ) 용암리 ( 龍岩里 ) 별비면도감리 ( 都監里 ) 거묵동 ( 巨墨洞 ) 덕송리 ( 德松里 ) 별비면식송리 ( 植松里 ) 묘동리 ( 廟洞里 ), 덕동리 ( 德洞里 ) 일부 화접리 ( 花蝶里 ) 별비면삼안리 ( 三安里 ) 화접동 간촌리 ( 間村里 ) 노원면 ( 盧原面 ) 불암리 ( 佛岩里 ) 퇴계원리 ( 退溪院里 ) 광전리 ( 廣田里 ) 진벌리 ( 榛伐里 ) 별비면퇴계원리 전도리 ( 全道里 ) 진관면 ( 眞官面 ) 본진관리각일부 별비면마전리 ( 麻田里 ) 광암리 ( 廣岩里 ), 응달리 ( 應達里 ) 일부 진벌면진벌리 중리 ( 中里 ), 검단리 ( 黔丹里 ) 일부 수산리 ( 水山里 ) 진벌면수막동 ( 水幕洞 ) 내마산리 ( 內馬山里 ) 팔야리 ( 八夜里 ) 진벌면팔야리, 검단리일부 금곡리 ( 金谷里 ) 진벌면금곡리 주곡리 ( 周谷里 ) 진접면 ( 榛接面 ) 부평리 ( 富坪里 ) 연평리 ( 蓮坪里 ) 장현리 ( 長峴里 ) 내각리 ( 內閣里 ) 진벌면후평리 ( 後坪里 ), 접동면 ( 接洞面 ) 본접동리 접동면궁동리 ( 宮洞里 ), 와촌리 ( 瓦村里 ) 중포리 ( 中浦里 ) 비각리 ( 碑閣里 ) 내동리 ( 內洞里 ) 봉현리 ( 蜂峴里 ) 건천면 ( 乾川面 ) 양지리 ( 陽地里 ) 각일부 접동면장승리 ( 長承里 ) 전동리 ( 全洞里 ), 봉현리 중포리각일부 접동면현창리 ( 縣倉里 ), 비각리 봉현리 내동리각일부

10 진건면 ( 眞乾面 ) 내곡리 ( 內谷里 ) 팔현리 ( 八賢里 ) 오남리 ( 梧南里 ) 송능리 ( 松陵里 ) 용정리 ( 龍井里 ) 사능리 ( 思陵里 ) 양지리 ( 陽地里 ) 신월리 ( 新月里 ) 진관리 ( 眞官里 ) 배양리 ( 培養里 ) 율석리 ( 栗石里 ) 덕소리 ( 德沼里 ) 별비면내곡리 영지동 ( 靈芝洞 ) 동촌리 ( 東村里 ) 서촌리 ( 西村里 ), 전도리일부건천면팔현리건천면어남상리 ( 於南上里 ) 어남하리 ( 於南下里 ) 오산리 ( 梧山里 ), 단곡리 ( 丹谷里 ) 일부건천면송정리 ( 松亭里 ) 성능리 ( 成陵里 ) 상독정리 ( 上獨井里 ) 각일부건천면하독정리 ( 下獨井里 ), 오룡동 ( 五龍洞 ) 상독정리각일부건천면식동리 ( 植洞里 ) 점막리 ( 店幕里 ), 오룡동 성능리 진관면신촌리 ( 新村里 ) 각일부건천면양지리 단곡리 접동면중포리각일부진관면평촌리 ( 坪村里 ), 월음리 ( 月陰里 ) 신촌리 접동면와촌리 ( 瓦村里 ) 각일부진관면법동리 ( 法洞里 ), 본진관리 월음리 신촌리각일부진관면고현리 ( 高峴里 ), 배양동 미음면 ( 渼陰面 ) 도농리 ( 陶農里 ) 각일부와공면 ( 瓦孔面 ) 율북리 ( 栗北里 ) 석실리 ( 石室里 ) 각일부와공면덕소리, 석실리 월곡리 ( 月谷里 ) 금촌면 ( 金村面 ) 사패리 ( 四牌里 ) 각일부 도곡리 ( 陶谷里 ) 와공면도산리 ( 陶山里 ) 도심리 ( 陶心里 ) 와부면 ( 瓦阜面 ) 월문리 ( 月文里 ) 능내리 ( 陵內里 ) 조안리 ( 鳥安里 ) 진중리 ( 鎭中里 ) 와공면문곡리 ( 文谷里 ), 월곡리 하도면맹기리 차산리각일부초부면 ( 草阜面 ) 봉안리 ( 奉安里 ) 마현리 ( 馬峴里 ) 각일부, 능내리초부면조동리 ( 鳥洞里 ) 고랑리 ( 高浪里 ), 마현리 진촌리 ( 鎭村里 ) 각일부초부면중리, 진촌리일부 송촌리 ( 松村里 ) 초부면평촌리 ( 坪村里 ) 일부, 송송동 ( 松松洞 ) 미금면 ( 渼金面 ) 삼봉리 ( 三峰里 ) 시우리 ( 時雨里 ) 팔당리 ( 八堂里 ) 도농리 ( 陶農里 ) 지금리 ( 芝錦里 ) 가운리 ( 加雲里 ) 수석리 ( 水石里 ) 삼패리 ( 三牌里 ) 이패리 ( 二牌里 ) 일패리 ( 一牌里 ) 금곡리 ( 金谷里 ) 평내리 ( 坪內里 ) 호평리 ( 好坪里 ) 초부면삼봉리, 평촌리 하도면백월리각일부하도면시우동광주군 ( 廣州郡 ) 동부면 ( 東部面 ) 팔당리미음면도농리 금교리 ( 錦橋里 ) 가재동 ( 加在洞 ) 구지면 ( 九旨面 ) 인장리 ( 仁章里 ) 각일부미음면지사리 ( 芝沙里 ), 금교리 진관면배양동각일부미음면조운리 ( 朝雲里 ), 가재동 도농리 석실리 금촌면삼패리각일부미음면석실리 수변리 ( 水邊里 ) 석도리 ( 石島里 ) 각일부금촌면삼패리 사패리 와공면석실리각일부금촌면삼패리 와공면율북리각일부금촌면이패리, 일패리일부금촌면일패리 건천면송정리 ( 松亭里 ) 각일부상도면궁촌리 ( 宮村里 ) 장내리 ( 墻內里 ) 각일부상도면호만리 ( 好滿里 ) 평동리 ( 坪洞里 ) 지사리, 궁촌리 ( 宮村里 ) 장내리각일부 화도면은하도면과상도면이통합하여묵현 녹촌 창현 차산 마석우 금남 가곡 운수 송촌 구암 답내 월산 지둔리의 13 개리가되었다. 별내면은별비면과내동면 3 개리를통합하여고산 산곡 청학 용암 덕송 화접 퇴계원 광전리의 8 개리가되었다. 진접면은진벌면과접동면이통합하여진벌 수산 팔야 금곡 부평 연평 장현 내각 내곡리의 9 개리로구성되었다. 진건면은건천면과진관면이통합하여팔현 오남 송능 용정 사능 양지 신월 진관 배양리의 9 개리로구성되어있다. 와부면은와공면과초부면이통합하여율석 덕소 도곡 월문 능내 조안 진중 송촌 삼봉 시우 팔당리의 11 개리로되었다. 미금면은미음면과금촌면이통합하여도농 지금 가운 수석 삼패 이패 일패 금곡 평내 호평리의 10 개리를이루었다. 현재수동면에속해있는입석 외방 내방리는당시가평군외서면에편제되어있었다.

1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1 절시연혁 7. 해방후 해방직후행정편제는일제시기에만들어진것을큰변화없이유지하였다. 즉, 1945 년 11 월 2 일법령제 21 호에의거하여도 부 군의명칭 위치 관할구역에대해조선총독부지방관제를그대로계승하였다. 그러나사회변동이점차커지면서, 양주군의경우수도권외곽에위치한데다가다른군지역에비해면적이넓어지역분할이광범위하게이루어졌다 년법률제 1176 호에의거화도면의운수 지둔 송촌리, 진접면수산리, 가평군외서면의입석 외방 내방리를합하여수동면을신설하였고 1966 년 7 월 11 일에는퇴계원출장소가설치되었다 년 7 월 1 일대통령령제 6543 호에의거구리면이읍으로승격되었고, 1979 년 5 월 1 일대통령령제 9409 호에의거미금면이읍으로승격하였다 년 4 월 1 일법률제 3169 호에의거양주군내의구리읍, 미금읍, 진접면, 진건면, 화도면, 수동면, 와부면, 별내면일부가분리되어남양주군이신설 분군되었다. 처음으로남양주군이라는독립행정단위가생긴것이다. 이때별내면의고산 산곡리가양주군에서의정부시로이관되었으며, 12 월 1 일에는대통령령제 호에의거와부면이읍으로승격되었다. 또한 1983 년 2 월 15 일대통령령제 호에의거하여진건면양지 오남 팔현리가진접면에편입되었다. 남양주시행정구역도 1986년 1월 1일에는법률제3798호에의거구리읍이시로승격 분리되었다. 1986년 4월 1일에는 1940년 2월 14일설치된와부읍조안출장소가조안면으로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미금읍이시로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진접면이읍으로, 퇴계원출장소가퇴계원면으로승격되었다. 1991년 12월 1일화도면이읍으로승격되었고, 1992년 4월 1일진접읍오남출장소가설치되었다가 1995년 5월 6일진접읍양지 오남 팔현리가오남면으로분리 승격되었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법률제 4774 호에의거, 도시와농촌의복합도시인남양주시로통합되었다. 남양주시는금곡동에신청사를신축하여사용하였으며옛남양주군청이있던지금동군청사도그대로사용하고있다 년현재남양주시읍 면 동관할구역은와부읍 진접읍 화도읍의 3 읍, 별내면 퇴계원면 진건면 수동면 조안면 오남면의 6 면, 호평동 평내동 금곡동 양정동 지금동 도농동의 6 동으로구성되어있다. < 남양주시행정구역현황 > 읍면동관할구역리 동 통 반수 와부읍덕소리, 도곡리, 팔당리, 월문리, 율석리행정리 27, 법정리 5, 반 212 진접읍장현리, 내각리, 내곡리, 연평리, 부평리, 팔야리, 진벌리, 금곡리행정리 41, 법정리 8, 반 197 화도읍 마석우리, 묵현리, 가곡리, 구암리, 금남리, 창현리, 답내리, 월산리, 녹촌리, 차산리 행정리 42, 법정리 10, 반 179 별내면 청학리, 용암리, 광전리, 덕송리, 화접리 행정리 16, 법정리 5, 반 120 퇴계원면 퇴계원리 행정리 19, 법정리 1, 반 168 진건면 사능리, 배양리, 진관리, 신월리, 용정리, 송능리 행정리 33, 법정리 6, 반 176 수동면 운수리, 지둔리, 송천리, 수산리, 내방리, 외방리, 입석리 행정리 20, 법정리 7, 반 38 조안면 능내리, 조안리, 진중리, 송촌리, 삼봉리, 시우리 행정리 12, 법정리 6, 반 39 오남면 양지리, 팔현리, 오남리 행정리 18, 법정리 3, 반 90 호평동 호평동 행정동 1, 법정동 1, 통 7, 반 39 평내동 평내동 행정동 1, 법정동 1, 통 16, 반 136 금곡동 금곡동 행정동 1, 법정동 1, 통 29, 반 174 양정동 일패동, 이패동, 삼패동 ( 이상법정동 ) 행정동 1, 법정동 3, 통 12, 반 58 지금동 가운동, 수석동, 지금동 ( 이상법정동 ) 행정동 1, 법정동 3, 통 19, 반 105 도농동 도농동 행정동 1, 법정동 1, 통 21, 반 134

1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남양주시는 3 읍, 6 면, 6 동으로구분할수있으며, 도농통합으로행정구역이복잡한양상을띠고있다. 읍 면에는행정리와법정리가있지만대부분행정리의명칭을사용하고있다. 동은크게행정동인양정 지금동과법정동인일패 이패 삼패 가운 수석 지금동으로나누어진다. 따라서양정동처럼행정동으로만사용되는경우, 지금동과같이법정동 행정동모두에해당되는경우, 일패 이패 삼패 가운 수석동과같이법정동으로만사용되는경우가있다.

1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 와부읍 ( 瓦阜邑 ) 한말까지이지역의대부분은양주군와공면과광주군초부면 동부면에속해있었다 년초부면이양주군에편입되고 1914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와공면의 와 자와초부면의 부 자를따서와부면이라하였으며, 율석 덕소 도곡 월문 능내 조안 진중 송촌 삼봉 시우 팔당리의 11 개리로구성되었다. 율석리는와공면율북 석실리각일부를통합한것이며덕소리는와공면덕소리전부, 석실 월곡리와금촌면사패리각일부를병합하였다. 도곡리는와공면도산리와도심리를병합하였으며월문리는와공면문곡리일부월곡리와하도면맹기 차산리각일부를합한것이다. 능내리는초부면봉안 마현리각일부와능내리를합하였고조안리는초부면조동 고랑리전부와마현 진촌리각일부를합하였다. 진중리는초부면중리전부와진촌리일부를합하였고, 송촌리는초부면평촌리일부와송송동을합하였다. 삼봉리는초부면삼봉리전부, 평촌리와하도면백월리각일부를합한것이며시우리는하도면시우동이편입된것이다. 팔당리는광주군동부면팔당리가양주군으로편입된것이다 년 2 월 14 일조안출장소가신설되었고, 1980 년 4 월 1 일법률제 3169 호에의거남양주군에편입되었으며, 그해 12 월 1 일대통령령제 호에의거와부읍으로승격되었다 년대통령령제 호에의거조안출장소가조안면으로분리 승격되었고, 1989 년 1 월 1 일조안면시우리일부가군조례제 640 호에의거와부읍에편입되었다 년현재덕소 도곡 팔당 월문 율석리를관할하고있다. 동쪽은조안면, 남쪽은한강건너광주군과하남시, 그리고서쪽은양정동 금곡동, 북쪽은화도읍 호평동과접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1 만 1708 세대이고인구는 3 만 4612 명으로남자가 1 만 7613 명, 여자가 1 만 6999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6.14 km2이다.

1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2. 진접읍 ( 榛接邑 ) 이지역은고구려시기에골의노현이었으며신라때는황양현으로되었다가고려때풍양현으로바뀌었다. 풍양은조선초기인 1419 년에양주목에편입되어속현이되었다. 한말까지는대부분의지역이진벌면과접동면으로나뉘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진벌면의 진 자와접동면의 접 자를따서진접면이라하였으며, 진벌 수산 팔야 금곡 부평 연평 장현 내각 내곡리의 9 개리로이루어졌다. 진벌리는진벌면진벌 중리전체와검단리일부를, 수산리는진벌면수막동과내마산리를병합한것이다. 팔야리는진벌면팔야리와검단리일부를, 금곡리는진벌면금곡리와주곡리를합하였다. 부평리는진벌면후평리와접동면본접동리를합한것이며연평리는접동면궁동리전부, 와촌 중포 비각 내동 봉현리와건천면양지리각일부를합하였다. 장현리는접동면장승 전동리전부, 봉현 중포리각일부를합하고내각리는접동면현창리전부, 비각 봉현 내동리각일부를합하였다. 내곡리는별비면내곡리 영지동 동촌리 서촌리전부와전도리일부를합하였다 년 1 월 1 일법률제 1175 호에의거하여수산리는수동면으로이관되었고, 1983 년 2 월 5 일진건면양지 오남 팔현리가진접면으로편입되었다 년에는진접면이읍으로승격되었으며, 1992 년 4 월진접읍오남출장소가개설되어현오남면지역의대민업무를수행하였다. 미금시와남양주군이남양주시로통합되면서, 1995 년 5 월에는오남면이진접읍에서분리되었다 년현재장현 내각 내곡 연평 부평 팔야 진벌 금곡리의 8 개리를관할하고있다. 동쪽은수동면, 서쪽은별내면과의정부시, 북쪽은포천군내촌면, 남쪽은진건면 오남면과접하고있다. 도농복합도시에적합한구조로되어있으며근교농업과중소기업유치가활발하다 년현재세대수는 1 만 1337 세대이고인구는 3 만 5218 명으로남자가 1 만 8001 명, 여자가 1 만 7217 명이다. 면적이 km2이고농경지는 12.8 km2이다.

1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3. 화도읍 ( 和道邑 ) 한말에이지역은양주군상도면과하도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상도면의 16 개리와하도면의 17 개리를병합하여화도면으로개편하였는데, 당시에는묵현 녹촌 창현 차산 마석우 금남 가곡 운수 송촌 구암 답내 월산 지둔리의 13 개리로구성되어있었다. 묵현리는하도면직동과상도면묵동리를합하였고, 녹촌리는녹동리전부와궁촌리일부를합하였다. 창현리는마산 장현 월길 무수동전부, 산성 궁촌리각일부를통합하였고, 차산리는하도면광암 맹곡리전부와맹기 차산리각일부를합하였다. 마석우리는하도면산성리일부와계전리를합하였고금남리는하도면남중 남하리전부, 남상 백월리와상도면답동리각일부를합하였다. 가곡리는상도면가곡리를개편한것이며운수리는상도면석수대 당두평 운하리전부와장천리일부를합하였다. 송천리는송라동전부와장천 등경동각일부가합해진것이며구암리는상도면전의동 응암리 구곡리전부, 답동리와하도면남상리각일부를합한것이다. 답내리는상도면내동리전부와답동리일부를통합했으며, 월산리는상도면등경동일부와세월산 점막리전부를합하였고지둔리는상도면지둔리를편제한것이다 년운수 송천 지둔리를수동면으로이관하였으며, 1991 년 12 월 1 일조례제 810 호에의거화도면이읍으로승격되었다 년현재마석우 묵현 가곡 구암 금남 창현 답내 월산 녹촌 차산리의 10 개리를관할하고있다. 동쪽으로가평군, 서쪽으로평내동, 북쪽으로수동면, 남쪽으로와부읍 조안면과접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1 만 4775 세대이고인구는 4 만 3526 명으로남자가 2 만 2117 명, 여자가 2 만 1409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13.1 km2이다.

1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4. 별내면 ( 別內面 ) 한말에이지역은양주군별비면지역이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별비면의 별 자와내동면의 내 자를따서별내면이라하고, 고산 산곡 청학 용암 덕송 화접 퇴계원 광전리의 8 개리를관할하게하였다. 고산리는내동면입암리전부와고산리일부를병합한것이며산곡리는내동면산곡리전부, 고산리와별비면흑석리각일부를합한것이다. 청학리는별비면동학동전부, 응달 흑석 덕동리각일부를합하였다. 용암리는별비면도감리와거묵동을병합하였고, 덕송리는별비면식송 묘동리전부와덕동리의일부를병합하였다. 화접리는별비면삼안리 화접동 간촌리와노원면불암리를병합하였다. 퇴계원리는별비면퇴계원 전도리 진관면본진관리각일부를합하였고, 광전리는별비면마전 광암리전부와응달리일부를병합한것이다 년 4 월 1 일법률제 3169 호에의거남양주군에편입되었고, 의정부시에이관한고산 산곡리 2 개리를제외한 6 개리를관할하게되었다 년 7 월 11 일퇴계원출장소가설치되었으며, 1989 년 4 월 1 일에퇴계원리가면으로분리 승격되었다 년현재청학 용암 광전 덕송 화접리의 5 개리를관할하고있다. 동쪽으로진접읍 퇴계원면, 서쪽으로서울특별시, 남쪽으로구리시, 북쪽으로의정부시에접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4775 세대이고인구는 1 만 3866 명이며남자가 7233 명, 여자가 6633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6.91 km2이다.

1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5. 퇴계원면 ( 退溪院面 ) 퇴계원면은한말에양주군별비면과진관면에속해있었으며, 도제원 ( 道濟院 ) 또는토원 ( 兎院 ) 이라불리기도하였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별비면퇴계원 전도리와진관면본진관리각일부를합하여퇴계원리로편제하였고, 별내면의관할하에있었다 년퇴계원출장소가설치되었으며, 1989 년 4 월 1 일면으로승격되어별내면에서분리되었다. 퇴계원면은서울동부에위치하여교통이편리하기때문에인구가증가하는추세에있으며, 수도권문화지역으로부상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6328 세대이고인구는 1 만 9769 명이며남자가 9966 명, 여자가 9803 명이다. 면적은 3.25 km2이고농경지는 0.65 km2이다.

1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6. 진건읍 ( 眞乾面 ) 현진건읍지역은한말에건천면과진관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진관면의 진 자와건천면의 건 자를따서진건읍이라하였으며, 팔현 오남 송능 용정 사능 양지 신월 진관 배양리의 9 개리로구성되었다. 팔현리는건천면팔현리가편제된것이며오남리는건천면어남상 어남하 오남리전부, 단곡리의일부를합한것이다. 송능리는건천면송정 성능 상독정리각일부를합했으며용정리는하독정리전부, 오룡동 상독정리각일부를병합하였다. 사능리는건천면식동 점막리전부, 성능리 오룡동과진관면신촌리각일부를합하였다. 양지리는건천면양지 단곡리 접동면중포리각일부를합하였고신월리는진관면평촌리전부, 월음 신촌리 접동면와촌리각일부를합하였다. 진관리는진관면법동리전부, 본진관 월음 신촌리각일부를합병한것이며배양리는진관면고현리전부, 배양동 미음면도농리각일부를합병하였다. 진건읍은 1980 년 4 월 1 일법률제 3169 호에의거남양주군에편입되었다 년 2 월 15 일대통령령제 호에의거양지 팔현 오남리를진접면으로이관하였고, 1998 년현재사능 배양 진관 신월 용정 송능리의 6 개리를관할하고있다. 이지역은서울동북쪽에서 25 km거리에위치하고있어, 근교농업이발달하고있다. 동쪽은호평동 평내동, 남쪽은양정동 지금동 도농동, 서쪽은구리시, 북쪽은진접읍 오남읍과접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8242 세대이고인구는 2 만 5513 명이며남자가 1 만 2842 명, 여자가 1 만 2671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km2이다.

1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7. 수동면 ( 水洞面 ) 현수동면지역은한말에양주군상도면 진벌면그리고가평군에일부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당시상도면의석수대 당두평 운하리전부, 장천리의일부가화도면운수리로통합되었고상도면의송라동전부, 장천리 등경동각일부가화도면송천리로통합되었으며상도면의지둔리는그대로지둔리로개편되어화도면에속하였다. 또한진벌면수막동과내마산리는수산리가되어진접면에속하였다. 한편가평군신촌 하입석전부, 상입석리와양주군상도면장천리각일부가입석리로합해지고상입석리일부와외방동이외방리로통합되었으며내방동과비금리가내방리로되어가평군외서면에소속되었다. 그후 1963 년법률제 1175 호에의거하여화도면의운수 송촌 지둔리일부와진접면의수산리, 가평군외서면의입석 외방 내방리를병합하여수동면을신설하였다 년현재수동면은운수 지둔 송천 수산 내방 외방 입석리의 7 개리를관할하고있다. 수동면은동쪽으로가평군상면 외서면, 남쪽으로화도읍, 서쪽으로오남면과진접읍, 북쪽으로가평군상면에접하고있다. 농경지보다임야면적이많아임산물이풍부하고산을이용한관광사업을추진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2092 세대이고인구는 6316 명이며남자가 3293 명, 여자가 3023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8.73 km2이다.

2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8. 조안면 ( 鳥安面 ) 조안면지역은한말에광주 양평 가평군과양주군하도면에속해있었다 년에광주군초부면의삼봉 중 조동 마현 봉안 평촌 진촌 고랑 능내리의 9 개리가양주군으로편입되었으며 1914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와부면에소속되었다. 이때능내리는초부면봉안 마현리각일부와능내리를합한것이고조안리는초부면조동 고랑리전부, 마현 진촌리각일부를통합한것이다. 진중리는초부면중리전부와진촌리의일부를합하였고, 송촌리는초부면평촌리일부와송송동을합하였다. 삼봉리는초부면삼봉리전부, 평촌리와하도면백월리각일부를합한것이며시우리는하도면시우리를그대로편제한것이다 년 2 월 14 일조안출장소가설치되어능내 조안 진중 송촌 삼봉 시우리의 6 개리를관할하다가 1986 년 4 월 1 일대통령령제 호에의거면으로승격되었다 년시우리일부가와부읍으로편입되었고, 1998 년현재능내 조안 진중 송촌 삼봉 시우리의 6 개리를관할하고있다. 한강변에위치한조안면은산수가수려한전원도시로서삶의질을누리기에적합한환경을갖추고있다. 조안면의동쪽은강건너양평군양서면, 서쪽은와부읍, 남쪽은광주군 하남시, 북쪽은화도읍과경계를이루고있다. 한강유역에위치하여작은삼각주농업지대를형성하고있으며근교농업도발달하였다 년현재세대수는 1240 세대이고인구는 3652 명으로남자가 1835 명, 여자가 1817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4.72 km2이다.

2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9. 오남읍 ( 梧南面 ) 오남읍은본래풍양현지역으로양주군에속하였으며건천면과접동면일대였다 년행정구역통폐합때이지역은진건읍에편제되었다. 팔현리는건천면팔현리를그대로편제한것이며, 오남리는건천면어남상 어남하 오산리전부와단곡리의일부를합하였고, 양지리는건천면양지 단곡리 접동면중포리각일부를개편한것이다. 오남은오산리의 오 자와어남상리의 남 자에서유래한것이다 년 2 월 15 일대통령령제 호에의거진건읍에서진접면으로이관되었고, 1989 년진접읍오남출장소가개설되었으며, 1995 년 5 월 6 일시조례제 140 호에의거오남읍으로승격되었다 년현재양지 팔현 오남리의 3 개리를관할하고있다. 현재이지역은수도권인구의유입으로인구가증가하고있으며서울과인접하여동일생활권을이루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6061 세대이고인구는총 1 만 8433 명으로남자가 9350 명, 여자가 9083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는 3.49 km2이다.

2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0. 호평동 ( 好坪洞 ) 호평동지역은한말까지양주군상도면에속해있었으며, 1914 년미음면 금촌면 상도면각일부를합하여미금면으로통합할때미금면에편제되었다. 통폐합당시상도면호만 평동 지사리전부, 궁촌 장내리각일부가합하여호만의 호 와평동의 평 자를따서호평리라하였다. 미금면은 1979 년대통령령제 9409 호에의거읍으로승격되었다가 1980 년양주군에서남양주군미금읍으로관할구역이변경되었다. 이후 1989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됨에따라호평리는호평동으로조정되었다 년 1 월 1 일법률제 4774 호에의거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자남양주시호평동이되었다. 호평동은서울특별시, 강원도춘천시와연결되는동북부지역의교통요지이며천마산인근에위치하고있는까닭에전원도시로발전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1724 세대이고인구는 5154 명으로남자가 2603 명, 여자가 2551 명이다. 면적은 9.10 km2이고농경지는 1.22 km2이다.

2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1. 평내동 ( 坪內洞 ) 현평내동지역은한말까지양주군상도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상도면궁촌 장내리각일부를합하여평내리라하고미금면에속하게하였다 년 1 월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평내동이되었다가 1995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의통합으로남양주시소속이되었다. 평내동은도시와농촌복합지역으로도시문화가발전하고있으며, 중심에녹지공간이공존하여시민의정서생활에도움을주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4033 세대이고인구는 1 만 2142 명으로남자가 6123 명, 여자가 6019 명이다. 면적은 7.24 km2이고농경지는 1.21 km2이다.

2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2. 금곡동 ( 金谷洞 ) 금곡동지역은한말까지양주군금촌면과건천면에속해있었으며, 1914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금촌면일패리와건천면송정리각일부를병합하여금곡리라하고미금면에편제하였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됨에따라금곡리는금곡동으로개편되었다가 1995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면서남양주시에소속되었다. 금곡동에는시청이소재하고있으며, 이로인해인구증가를가져와인구밀집지대로성장하고있다 년현재세대수는 7781 세대이고인구는 2 만 3859 명으로남자가 1 만 2033 명, 여자가 1 만 1826 명이다. 면적은 6.93 km2이고농경지는 1.66 km2이다.

2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3. 양정동 ( 養正洞 ) 양정동지역은한말까지양주군금촌면 와공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금촌면이패리전부와일패리일부를합하여일패리라하였고, 금촌면삼패리와와공면율북리각일부를합하여이패리라하였으며, 금촌면삼패 사패리와와공면석실리각일부를합하여삼패리라하고미금면에편제하였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됨에따라각각법정동인일패동 이패동 삼패동으로바뀌었고, 이때양정동이라는하나의행정동을신설하여관할하게하였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하자남양주시소속이되었다. 양정동은서울에서 23 km떨어진거리에있어근교농업이발달하였다 년현재세대수가 2234 세대이고인구는 6600 명으로남자가 3390 명, 여자가 3210 명이다. 면적은 km2이고농경지가 4.60 km2이다.

2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3. 양정동 ( 養正洞 ) 1) 일패동 ( 一牌洞 ) 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금촌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금촌면이패리전부와일패리일부를합쳐일패리라하였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법정동인일패동으로바뀌었고행정동인양정동에편제되었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됨에따라남양주시소속이되었으며자연마을로는봉두메, 안곡, 명우리, 진안등이있다.

2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3. 양정동 ( 養正洞 ) 2) 이패동 ( 二牌洞 ) 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금촌면과와공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금촌면삼패리와와공면율북리각일부를합쳐이패리라하였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법정동인이패동으로변경되었으며행정동인양정동에편제되었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면서남양주시관할로바뀌었다. 자연마을로는왕자궁, 석포, 마산등이있다.

2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3. 양정동 ( 養正洞 ) 3) 삼패동 ( 三牌洞 ) 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금촌면과와공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금촌면삼패 사패리와와공면석실리각일부를병합하여삼패리라하였으며미금면에소속되었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법정동인삼패동으로변경되어행정동인양정동에편제되었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면서남양주시삼패동으로바뀌었다. 자연마을로는궁안, 평구, 역말등이있다.

2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4. 지금동 ( 芝錦洞 ) 조선시대부터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금촌면 미음면과진관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미음면지사 금교리와진관면배양동각일부를합하여지사리의 지 자와금교리의 금 자를따서지금리라하였다. 또한미음면조운리전부, 도농리 석실리 가재동과금촌면삼패리각일부를합하여가재동의 가 와조운리의 조 를따서가운리라하였다. 미음면의석실 수변 석도리각일부를병합하고수변의 수 와석실의 석 을따서수석리라하였다. 이때지금 가운 수석리는미금면에편제되었다 년 1 월 1 일미금읍이시로승격됨에따라지금 가운 수석리를법정동으로변경하여행정동인지금동에편제시켰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하자남양주시지금동이되었다. 지금동은경춘국도변에위치하고있어교통이편리하며인구의증가가빠른지역이다. 서울과인접한도농복합지역으로서토지이용규제가심하며, 시설채소재배농가가많다 년현재세대수는 4804 세대이고인구는 1 만 4573 명으로남자가 7253 명, 여자가 7320 명이다. 면적은 7.36 km2이고농경지는 2.15 km2이다.

3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4. 지금동 ( 芝錦洞 ) 1) 가운동 ( 加雲洞 ) 조선시대부터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미음면에속해있었으며, 1914 년 4 월 1 일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미음면조운리전부, 가재동 도농리 석실리와금촌면의삼패리각일부를병합하여가재동의 가 자와조운리의 운 자를따서가운리라하고미금면에편제하였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법정동인가운동으로변경되었고행정동인지금동에편제되었다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면서남양주시가운동으로바뀌었다. 자연마을로는가재, 조운등이있다.

3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4. 지금동 ( 芝錦洞 ) 2) 수석동 ( 水石洞 ) 조선시대부터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미음면에속해있었으며, 1914 년 4 월 1 일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미음면석실 수변 석도리각일부를병합하여수변리의 수 자와석실리의 석 자를따서수석리라하였으며미금면에소속시켰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수석동으로편제되었으며 1995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면서남양주시수석동으로변경되었다. 자연마을로는황곡, 석실, 봉두, 세원, 내미음, 외미음등이있다.

3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4. 지금동 ( 芝錦洞 ) 3) 지금동 ( 芝錦洞 ) 조선시대부터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미음면에속해있었으며, 1914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미음면지사리 금교리각일부, 그리고진관면배양동일부를병합하여지사리의 지 자와금교리의 금 자를따서지금리라하고미금면에소속시켰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지금동으로편제되었으며 1995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통합되면서남양주시소속으로바뀌었다. 행정동의지명과동일한명칭을사용하고있으며금교, 지사, 황골등의자연마을이있다.

3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1 장연혁 제 2 절읍 면 동연혁 15. 도농동 ( 陶農洞 ) 조선시대부터한말까지이지역은양주군미음면과구지면에속해있었다 년행정구역통폐합에따라미음면도농리 금교리 가재동과구지면인장리각일부를합하여도농리라하고미금면에편제하였다. 도농이라는이름은질그릇을구웠다하여붙여졌다고한다 년미금읍이시로승격되면서도농동으로개칭되었으며, 1995 년 1 월 1 일미금시와남양주군이남양주시로통합되면서소속이바뀌었다. 도농동은구리시와인접해있어소비시장의확보가용이하며, 주위에왕숙천이흐르는기름진토양이있어채소농업이발달하였다 년현재세대수는 5388 세대이고인구는 1 만 6448 명으로남자가 8338 명, 여자가 8110 명이다. 면적은 2.26 km2이고농경지가 0.98 km2이다.

3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1 절위치와면적 남양주시는경기도의동북부에위치하며북쪽으로는포천군, 동북쪽으로는가평군, 동쪽으로는양평군, 남쪽으로는하남시와광주군, 서쪽으로는구리시와서울특별시, 서북쪽으로는의정부시와인접해있다. 위도상으로남양주시의최북단은 로수동면내방리이고, 최남단은 " 로조안면능내리마현앞한강한가운데이다. 경도상으로서쪽끝은 " 로별내면수락산정상이되며, 동쪽끝은 " 로화도읍구암리북한강중간이된다. 따라서동서간 26 km, 남북간 30 km의연장거리를갖는다. 한편, 남양주시행정의구심인남양주시청의위치는동경 , 북위 이다. 남양주지역이분리되기이전에속했던양주군은면적이 km2로광주군과더불어경기도에서가장큰비중을차지하고있었다. 그러나 1963 년부터양주군의일부지역이의정부시와서울특별시도봉구 노원구 중랑구등으로떨어져나가고 1980 년에는남양주군이분리되었다. 이로써양주군의면적은 km2, 남양주군의면적은 km2가되었고, 남양주지역은독자적인행정구역을이루게되었다. 그후남양주군은 1986 년구리시독립, 1989 년미금시독립, 1995 년미금시와의재통합과정을거쳐남양주시로승격하면서현재의행정단위를구성하였다 년현재남양주시는 3 읍 ( 와부읍 진접읍 화도읍 ), 6 면 ( 별내면 퇴계원면 진건면 수동면 조안면 오남면 ), 6 동 ( 호평동 평내동 금곡동 양정동 지금동 도농동 ) 의행정구역으로구성되어있으며총면적은 km2이다. 여기에는 km2의개발제한구역과 km2의군사시설보호구역이포함된다. 남양주시의권역별 행정구역별면적은다음과같다. < 권역별면적 > (1997. 현재, 단위 : km2 %) 계성장관리권역자연보전권역 ( 상수원보전특별대책지역 ) 과밀억제권역 (100.0) (49.4) (40.6) (10.0) < 행적구역별면적 > (1997. 현재, 단위 : km2 ) 읍면동면적읍면동면적 와부읍진접읍화도읍별내면퇴계원면진건면수동면조안면 오남면호평동평내동금곡동양정동지금동도농동계 출전 : 남양주시, 남양주시통계연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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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한반도의등뼈를이루는백두대간은백두산병사봉에서시작해지리산천왕봉까지이어지는 1400 km의크고긴산줄기를말한다. 이처럼우리나라는산지가많은지형이다. 백두대간을따라남쪽으로달려내려오다서남향으로백암산 오성산 적근산 대성산 국망봉 명지산 천마산 도봉산 북한산등이 700 여리의줄기를이루는데, 이를한북정맥 ( 漢北正脈 ) 이라한다. 남양주시는한북정맥의끝자락에자리잡고있다. 남양주시의맨가운데에는천마산과묘적산이우뚝서자리잡고있으며, 그둘레에는북쪽으로용암산과운악산이포천군과살피를이루고축령산과서리산이가평군과경계를이룬다. 동남쪽으로는송라산 문안산 운길산이양평군과마주보며, 남쪽으로는조조봉 적갑산 예봉산이하남시와경계를이룬다. 한편, 서쪽으로는불암산 수락산이서울과경계를이룬다. 이렇듯남양주시는온통산으로이루어져있고평야라고는왕숙천을따라진접읍내각리 내곡리 연평리, 진건면신월리, 지금동등개울가유역이고작이다. 남양주시의지형은원형천막모양으로서, 마치가운데큰지주를세우고둘레를따라지주를세운듯이높은산들이배열되어있다. 남양주시의표고분석결과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 표고분석결과 > 구분면적 ( km2 ) 비율 (%) 50m 미만 m 미만 m 미만 m 미만 m 미만 m 이상 계 비고 : 면적은 1/25,000 도상에서실측한것이며, 1994 년면적 ( km2 ) 을기준으로하여분석한결과이다. 출전 : 남양주시, 남양주시하수도정비기본계획변경, 남양주지역은전체면적의 70% 정도가산으로이루어져있다. 따라서농산물의생산량이적어서부유한지역은못되었다. 표고 50m 미만인지역은한강유역과왕숙천하류지역이며, m 지역은왕숙천유역으로연평들, 풍경내들, 배양리앞들이다. 표고 m 지역은널울분지 ( 호평동 평내동 ) 와수동면의구운천유역, 화도읍의묵현천유역, 월산천일대가여기에해당하며논과밭이어울려있어벼농사와밭농사가이루어진다. 표고 m 인곳은구릉지역인데목초지로개발이가능하며, 300m 이상의산지는삼림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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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1. 산 * 1) 묘적산 ( 妙寂山, 589.9m) 천마산과이어져붙어있으며정상에서북으로는평내동, 동으로는화도읍, 남으로는와부읍이자리잡고있다. 잣봉산, 백봉 ( 白峯 ) 이라고도부른다.* 평내리삼양목장부근부터아까시나무 상수리나무등이나타나고잎갈나무와은수원사시나무식재림, 붉게죽어가는소나무가드문드문보이고떡갈나무와싸리, 잣나무식재림, 기생식물인샐새암이관찰되었으며산초나무, 애기똥풀, 찔레꽃, 보리장나무, 애기나리등이많았다. 벌목지역으로잡목이들어선지역이많으며정상부근에는신갈나무, 갈참나무등이분포한다. 묘적산

3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2) 문안산 ( 文案山, 536.1m) 화도읍차산리에있다. 문 ( 門 ) 처럼생긴바위 ( 문바위 ) 가있어생긴이름이라는설과, 산이높아산마루에서서울장안의사대문안쪽이들여다보인다하여붙인이름이라는설이있다. 저지대에는잣나무 잎갈나무가식재되어있고,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많이분포한다. 200m 에는졸참나무 떡갈나무, 250m 에는소태나무 가래나무, 300m 에는갈참나무 굴참나무 소나무가분포한다. 400m 에는당단풍 물오리나무가있으며, 그위는신갈나무군락이다.

4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3) 불암산 ( 佛巖山, 508m) 불암산은남양주시별내면화접리와서울특별시노원구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과경계를이룬다. 산서쪽에는서울특별시가있고동쪽으로는남양주시별내면이있으며바위산이라수목은울창하지않지만능선이기암으로이어지고봄철철쭉꽃이장관을이룬다. 산정상에는작은산성터가있는데군사시설로보인다. 산전부가화강암으로구성되어있으며, 주봉남쪽에는높이 402m 의제 2 봉이있다. 불암산이라는명칭은화강암의큰바위로된봉우리가마치송낙을쓴부처의형상이라붙여진것이라한다.* 508m 의우뚝솟은바위산인불암산은필암산 ( 붓바위산 ) 이라고도하였는데이는먹골, 벼루말과함께땅의기운을꺾는다는문방사우의이름을빌린풍수지명이었다. 남쪽산자락에는불암사 ( 佛岩寺 ) 가있다. 조선세조때한양을중심으로동불암사, 서진관사, 남삼막사, 북승가사의네곳에호국안민기도도량을정하였는데불암사를그첫번째로삼았다. 지금도별내면덕송리주민들은불암산산신제를지내고있다. 전체적인지형지세는남북으로능선이뻗어내린장방형의산지로지형변화가심하고암반노출지가많다. 불암산경사의대부분이 30% 이상의급경사면을이루고있으며, 주경사방향은남향또는서향이많다. 불암산은수락산과같이바위산을이루고있으며최고봉의표고는 507m로그자체가준험한화강암의바위덩어리같은느낌을준다. 그런가하면불암산의제2봉은제1봉남쪽에 420m의표고로깎아지른듯우뚝솟아있다. 한편불암산은주능선과부능선에의해 5개의분수령으로이루어져있다. 분수령으로둘러싸인유역은비가오면일정한배수체계를형성하지못하기때문에계곡과같은자연적인배수로를따라서당현천을거쳐중랑천으로흘러든다. 식생분포를보면활엽수와침엽수의혼용림이 59.2%, 침엽수림이 15.5% 를이루고있다. 정상을중심으로남쪽능선에는소나무가대부분을차지하며, 북쪽의덕릉에이르는지역은참나무류 물오리나무 소나무가우점종을이룬다. 동쪽의불암사부근에는높이 20m 의소나무들이많은데, 이는토양이메마르고모암이화강암이기때문인것같다. 점차위로올라갈수록소나무, 국수나무, 물오리나무, 붉은병꽃나무, 신갈나무, 노린재나무, 생강나무, 누리장나무등이섞여있으며, 정상부근은암석이밀집되어소나무와싸리가극히왜소하게자라있다. 불암사를중심으로하여화접리에서덕송리에이르는지역은참나무류, 소나무, 물오리나무, 국수나무, 붉은병꽃나무, 싸리등이대부분을차지하면서불암산에서가장양호한식생을보인다. 북쪽의덕릉부근은출입금지구역으로통제되어있으며참나무류, 물오리나무, 생강나무, 싸리, 고사리들이잘자란다. 350m 지역에서는상수리나무, 산뽕나무, 산벚나무, 나무딸기, 싸리, 붉나무, 물푸레나무, 오리나무, 작살나무, 병꽃나무, 억새, 졸참나무, 진달래, 떡갈나무등이자란다.

4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4) 상산 ( 霜山, 825m) 수동면, 가평군상면경계에있는산으로서리산이라부르기도한다.* 내방리에서서리산방향으로군사도로를따라가평군경계중턱까지는벌목이되었고잣나무, 잎갈나무등이식재되어있다. 떡갈나무가우점종이고상수리나무가많았으며싸리, 칡, 자귀나무, 망초, 쑥, 노박덩굴, 산딸기, 산뽕나무, 갈매나무, 애기나리가군락을이루고있다. 약 50 년생으로보이는쪽동백나무들과약 100 년생으로추정되는물푸레나무들이분포해있다. 400m 에는쪽동백나무와물푸레나무가많고, 산벚이나단풍나무들이자라고있다. 그위에는신갈나무가우점종을이루고있다.

4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5) 수락산 ( 水落山, 637.7m) 수락산은남양주시별내면, 서울특별시노원구상계동과경기도의정부시의경계를이루고있다. 수락산의남쪽기슭에는선조의생부인덕흥대원군의묘역이자리잡고있어일명덕릉이라불린다. 그원찰로흥국사가있고, 별내면덕송리에서서울상계동으로넘어가는고개를덕릉고개라부르고있다. 도봉산과함께서울근교의양대명산으로손꼽히는곳이다. 내원암에오르는계곡은옥류동 금류동 은선동의폭포와연못을만들었으며해발 637m를장식하는투구, 고속, 오리봉의장관과칠성대, 향로봉, 미륵봉의기이한모습이눈을끈다. 계곡의곳곳이울창한활엽수림으로이루어져가을에는단풍이유명하며유서깊은흥국사, 석림사등많은사찰과암자가있다. 수락산유원지는별내면청학리에위치한수락산계곡일대를지칭하는것으로, 이곳에는바위가마당만큼커서마당바위로불리는곳이있다. 예로부터 위에는 100명이앉을수있고, 잡곡을털수도있다. 는말이전해올만큼넓고크다. 여름철피서지로손색이없다. 수락산한국전쟁때는서울방어선으로수락산과불암산전선이이루어짐으로써많은전재를입었고, 불암산유격대로불리는육군사관생도들이내원암을중심으로유격전을벌이기도하였다. 한북정맥을형성한산줄기는가평운악산과양주주엽산에서축석령을넘어한줄기는의정부북서쪽을휘몰아불곡산과홍복산 도봉산으로이어지고, 또한줄기는앞의산줄기와마주하여광릉뒤를감싸고돌아서원천과중랑천을사이에두고그동쪽으로주엽산에서남하하여산줄기를형성하고있다. 이를따라내려오면천보산, 송산, 외송산에이어깃대봉과숫돌고개를거쳐수락산이솟아있으며, 그여맥은불암산과검암산 ( 구릉산 ), 아차산으로이어진다. 수락산은동쪽으로도봉산과마주하고, 서쪽으로순화궁고개를넘어국사봉과마주하며서울의북쪽시계를이루고있다. 해발 637m 의수락산은빗물을흘려버리는사암으로형성된바위산이다. 산전체가바위벽과암반이며도처에기암괴석을이루고있어수목은울창하지않으나산세가웅장하고계곡이깊고수려하다. 360m 지역에는갈참나무, 물푸레나무, 소나무, 생강나무, 서어나무, 진달래등이분포하며 400m 지역에는서어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산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생강나무등이분포한다. 대체로갈참나무와굴참나무사이사이에소나무가자라있으며진달래, 철쭉꽃이많다.

4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6) 수리봉 ( 蘇利峯, 536.8m) 별내면용암리와진접읍부평리경계에있는산으로 수리봉 으로전해오다가한자로옮겨지면서소리봉 ( 蘇利峯 ) 이라기록된것으로보인다.* 마을사람들은서리봉이라부른다. 수리봉의토양은주로풍화된편마암에부식토가혼합된갈색삼림토 ( 褐色森林土 ) 이며표층에서의토양구성은주로사양토 ( 砂壤土 ) 이고, 특히영대천유역의평지에서수리봉에이르는완사면은부식토가두텁게쌓여있으며습기가적당하다. 가장많이출현하는종은참나무류, 서어나무, 까치박달, 단풍나무, 덜꿩나무, 생강나무, 산딸나무, 쪽동백나무, 팥배나무등이다. 퇴뫼산, 옛성산, 수리봉일대는군부대가주둔하고있어출입이통제되고있다.

4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7) 운악산 ( 蕓岳山, 234.8m) 진접읍부평리와포천군소흘읍 내촌면의경계를이룬다. 광릉의진산으로숲이잘보존되어울창하다. 970 여종의목본과 779 종의초본식물이있고, 크낙새를비롯한 772 종의진귀한새들이있다. 운악산남쪽기슭에세조와비정희왕후의능인광릉이자리하고있으며, 광릉의원찰인봉선사가있다. 봉선사는 1469 년에정희왕후의명으로광릉을위하여세웠고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때불에탔으나여러번개창하였으며현재창건당시에만든대종 ( 높이 2.38m, 두께 23 cm ) 이보물제 397 호로지정되어있다.

4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8) 운길산 ( 雲吉山, 610.2m)* 조안면에자리잡고있으며북한강과인접해있다. 강원도금강산에서발원하여화천 춘천을거쳐약 371 km를흘러내려온북한강물과, 대덕산에서발원하여영월 충주를거쳐흘러내려온남한강물이서로만나는두물머리 ( 양수리 ) 의장엄한광경을내려다볼수있는좋은지점에위치하고있으며산수 ( 山水 ) 가모두수려하게조화를이루고있다. 160m 지역에는밤나무가많고은수원사시나무, 잎갈나무, 잣나무, 노간주나무등의식재림이있으며정상부근에는대체로소나무사이에떡갈나무가섞여있다. 떡갈나무가있는것으로보아천이가상당히진전된것으로생각된다. 그외에진달래, 억새, 졸참나무, 나리, 물푸레나무, 철쭉꽃, 청미래덩굴등이있다. 운길산

4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9) 예봉산 ( 禮峯山, 683.2m) 와부읍팔당리, 조안면진중리경계에있으며 산을위해제사지낸다 하여 예봉산 으로이름붙여졌다.* 마을사람들은 사랑산 으로부르기도하는데, 철마산과구분하여 큰사랑산 이라한다. 일본잎갈나무식재림이있고호도나무, 붉나무, 가래나무, 뽕나무, 신나무등이분포한다. 290m 에는산사나무와인가식물인애기똥풀이많았다. 310m 에는갈참나무와가래나무, 그리고복분자딸기가많다. 갈대와단풍나무가있으며습기가많은곳에서자라는멸가치가발견되었다. 벌목을위해닦아놓은길에는떡갈나무, 억새가많이분포한다. 380m 에는소태나무가많았고갈참나무, 밤나무, 억새가분포했다. 395m 에는벌목지역이있었고, 정상은신갈나무 - 고로쇠나무, 신갈나무 - 단풍나무, 신갈나무군락이분포한다.

4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10) 천마산 ( 天摩山, 812.4m) 남양주시의중앙에우뚝자리잡고있는산으로동북쪽은화도읍, 남쪽은호평동, 서남쪽은오남면과경계를이룬다. 남쪽에서바라본천마산의산세는달마대사가어깨를쫙펴고앉아있는모양으로웅장하고침착한모습을하고있다. 산이높아겨울에는흰눈으로덮여설산 ( 雪山 ) 을이루고, 봄에는신록이아름다우며, 여름철에는짙푸른녹색을띠며가을에는단풍이그림같아서사시사철아름답게보인다. 천마산꽃지도 천마산의한자명은문헌에따라다르게표기되었으며,* 현재는 천마산 ( 天摩山 ) 으로쓰고있다. 전설에의하면고려말이성계가이곳에사냥을나왔다가산세를살펴보니산이높고험준한지라지나가는촌부에게이산의이름을물으니 소인은무식하여모릅니다. 하고답하여, 이성계는혼잣말로 인간이가는곳마다청산은수없이있지만이산은매우높아푸른하늘에홀이꽂힌것같아손이석자만더길었으면가히하늘을만질수있겠다 ( 人間到處有靑山手長三尺可摩天 ) 하였다고전한다. 주민들은천마산을화수분이라고부르기도한다. 화수분은보물그릇으로, 그안에물건을넣어두면새끼를쳐서끝없이나온다고한다. 이는천마산이겨울에는추운방을덥히는땔감을대주고, 봄에는산나물이나오고, 봄 가을에는누에를칠때쓰이는뽕잎을대주며산뽕나무에서나는열매로요기를할수도있기때문이다. 또한산에서나오는목재로기둥, 석가래, 널빤지, 쇠구유, 가구재, 낫자루, 호미자루등을만들수있었다. 천마산 천마산정상에서서남쪽으로수십보만돌아서내려가면높은절벽바위가있는데이곳을사람들은약물바위라고부른다. 이바위앞에는연중물이끊이지않는샘물이있는데, 이를 약물바위샘 이라고한다. 산이높고골이깊어많은종류의식물들이자라고있어대학의생물학과와약학과에서식물과곤충채집장소로활용되고있다 년에전봉식등이, 1962 년에손중수등이, 1971 년에육창수등이주로약용식물을조사발표했으며, 서울대학교에서는 344 종을채집하여서울대학교생물학과표본관에보관하고있다. 이들조사를종합해보면천마산에는 690 여종의식물이자라고있음을알수있다. 식생을보면교목은참나무류, 서나무, 층층나무, 산벚나무, 소나무등다양하다. 관목은진달래, 철쭉나무, 싸리나무, 버들강아지, 노린재나무, 생강나무, 딱총나무, 국수나무, 올괴불나무등이있다. 야생화는얼레지, 앉은부채, 처녀치마, 복수초, 꿩의바람꽃, 노루귀등이있고약용식물로는도라지, 더덕, 오갈피, 복령등이있다. 산나물로는수리취, 곰취, 참나물, 고사리등이있고식용버섯도싸리버섯을포함해서상당히많다. 해발 m 서북사면에신갈나무군락, m 동남사면에굴참나무군락, m 동남사면에상수리군락이분포한다. 천마산의집 에서위로올라간 310m 지점에는한국전쟁때벌목후남은소나무가몇그루있는데, 대부분이식재림이었고솔잎혹파리때문에고사중이었다. 벌목지역에는떡갈나무, 원추리, 칡등과양지바른곳에피는까치수영, 꿀풀등이있다. 330m 에는잎깔나무식재림, 370m 에서는잣나무식재림과피나무등이있다 m 에는신갈나무단순림, 500m 에는신갈나무단순림과철쭉꽃, 530m 능선에는진달래와신갈나무 - 철쭉군락이분포하고, 임상 ( 林床 ) 에는김의털 쑥 뚝갈 삽주등이있다. 600m 에는흉고둘레가한아름이넘는자생소나무가, 630m 에는층층나무 피나무 산뽕나무등이자라고있다. 660m 의헬기장부근에는신갈나무, 억새와은방울꽃이많고높은곳에자라는쇠물푸레나무가있다. 750m 에는신갈나무, 철쭉, 대사초, 홀아비꽃대등이있으며 805m 에는신갈나무, 싸리, 병꽃나무, 양지꽃, 억새등이분포한다. 심신수련장의안내표지판에의하면주요임상요소로소나무, 소태나무, 서어나무, 작살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병꽃나무, 물푸레나무, 괴불나무, 쪽동백, 개암나무, 당단풍, 신나무등이자생한다고되어있다. 그외에도졸참나무, 옻나무, 사람주나무, 생강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등이자생하고있다. 350m 까지는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소나무등이분포하며, 그위로는갈참나무가대부분이고사이사이쪽동백이있다. 450m 지역에는 15m 정도의아까시나무군락이있는데, 소나무를벌목한지 40 년이상지난것같으며벌목후아까시나무가들어선듯하다. 490m 부터주로신갈나무가분포하며임상에는꿩의다리, 칡억새, 비노리, 점박이천남성, 마, 짚신나물, 세잎양지꽃, 벌깨덩굴등이있다.

4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11) 축령산 ( 祝靈山, 879.5m) 남양주시수동면외방리와가평군상면행현리에경계를이루고있으며문헌에는비랑산 ( 非郞山 ), 비령산 ( 飛靈山 ), 축령산 ( 祝靈山 ) 으로기록되어있다.* 숲이울창하고인공조림한잣나무숲이있다. 외진곳이어서대체로숲이잘보존되고다양한종류의식물들이있으며, 자연휴양림이조성되어있다. 내방리에서석고개에이르는수동천을따라길가와마을근처에갯버들, 버드나무, 용버들, 오리나무, 자작나무, 개암나무등이분포한다. 축령산 산기슭에는잣나무, 일본잎갈나무, 은사시나무식재림이있다. 전지라골에서축령산산기슭등산로에는양버들, 물오리나무, 생강나무, 진달래등이있고마을근처에는은행나무, 젓나무, 오동나무등이분포하며산기슭입구주변에는젓나무, 소나무,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일본잎갈나무, 낙우송, 노간주나무등이식재되었다. 등산로를따라올라가는주변에는떡갈나무, 신갈나무, 느릅나무, 산뽕나무등이있으며계곡을따라떡버들, 고리버들, 개박달나무, 까치박달, 소태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 물푸레나무, 귀롱나무, 팥배나무등이분포한다. 산정상가까이에는철쭉꽃, 산철쭉이분포한다. 전지라골의왼편뒤쪽능선부터전지라골오른쪽앞능선까지참싸리, 다릅나무, 자귀나무, 초피나무, 산초나무, 붉나무, 개옻나무, 헛개나무, 오갈피나무, 엄나무, 작살나무등이숲을이루고있다. 산꼭대기능선을따라내려오면굵은참나무류와소나무등이있는것으로보아과거에는울창한숲이었던것으로추측된다. 내방리일대에는굴참나무, 조록싸리, 아까시나무, 신나무, 고로쇠나무, 쥐똥나무등이분포한다. 정상가까이의해발 500m 이상에는철쭉꽃, 산철쭉, 때죽나무등이많으며능선을따라굵은소나무가여러그루눈에띈다.

4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1. 산 * 12) 한이산 ( 汗伊山, 173.5m) 진접면연평리, 오남읍양지리경계에있는산이다. 문헌에는대이산 ( 大伊山 )* 과한이산 * 이라고기록되어있으며 하니미산 이라고도부른다. 풍양에서왕산천 ( 王山川 : 왕숙천 ) 을건너동쪽으로마주보는곳에있으며, 지도를보면천마산의한줄기가서쪽으로뻗어나가다가다시서북쪽으로갈라져나간끝자락쯤된다. 현재발행되는지형도에는한이산이표기되어있지않으며오남읍과진접읍연평리의경계를이루는 173.5m 고지가있는산으로추정될뿐이다. 이외에다음과같은산이있다. 갑산 ( 甲山, 520m) : 와부읍월문리와조안면시우리의경계에있다. 경산 ( 鯨山, 501.1m) : 와부읍월문리, 조안면시우리, 화도읍차산리경계에있다. 고래산 이라부르기도한다.* 고성산 ( 古城山, 288.0m) : 별내면광전리, 진접읍내각리 내곡리경계에있는산으로 옛성산 이라고도하며, 토박이들은 퇴뫼산 ( 胎峯 ) 과구분하지않고그냥 퇴뫼산 이라고부른다. 옛날을지문덕이쌓았다는고구려산성터가있었다고전해진다. 활석산 ( 滑石山, 217.2m) : 별내면광전리, 퇴계원면, 진접읍내곡리경계에있다. 곱돌산이라부르기도한다. 국사봉 ( 國賜峰, 331m) : 별내면청학리와용암리경계에있는산으로의령남씨의사패지라한다. 금대산 ( 金垈山, 90.6m) : 와부읍덕소리 도곡리경계에있다. 쇠터산 이라부르기도하며, 문헌에는 금대산 ( 金臺山 ) 이라표기되어있다.* 깃대봉 (289.0m) : 별내면용암리와의정부시고산동의경계에있다. 달기산 (390.4m) : 화도읍월산리 금남리 창현리경계에있는산이다. 달기미, 당미로부르기도한다. 두리봉 (370m) : 화도읍답내리 구암리와수동면송천리의경계에있다. 문령산 ( 文嶺山, 156.3m) : 진건읍진관리 사능리 배양리경계에있는산이다. 석수봉 ( 石水峯, 311.3m) : 수동면운수리에있다. 송라산 (493.5m) : 화도읍마석우리 가곡리, 수동면송천리경계에있으며통신시설이있다. 수리봉 (354m) : 와부읍율석리에있다. 신선봉 ( 神仙峰, 220m) : 와부읍월문리에있다. 오득산 ( 五得山, 678.4m) : 수동면, 가평군상면경계에있는산으로은두산, 은두먹, 오똑산이라부르기도한다.* 용암봉 ( 龍巖山, 479.9m) : 진접읍부평리와의정부시민락동과포천군소흘읍의경계에있다. 적갑산 ( 赤甲山, 561m) : 와부읍도곡리와조안면진중리의경계에있다. 조조봉 ( 朝照峰, 300m) : 와부읍도곡리에있다. 주금산 ( 鑄錦山, 813.6m) : 수동면외방리, 가평군상면, 포천군내촌면경계에있는산으로문헌에는주금산 ( 鑄金山 ) 이라고도기록되어있다.* 천견산 ( 天見山, 393.1m) : 진접읍내각리와장현리경계에있는산으로꼭대기에샘이있다. 마을사람들은 샘재, 천겸산, 천참산 ( 泉站山 ) 이라부르며, 신증문헌비고 에는 천점산 ( 泉? 山 ) 이라기록되어있다. 철마산 ( 鐵馬山, 585m)1 : 조안면능내리 조안리, 와부읍팔당리경계에있다. 마을사람들은예봉산과합하여사랑산이라부르고철마산을 작은사랑산 이라부른다. 철마산 ( 鐵馬山, 710m)2 : 수동면수산리, 진접읍금곡리 진벌리경계에있다. 문헌에는검단산 ( 黔丹山 ) 으로기록되어있다.* 퇴뫼산 (363.7m) : 별내면광전리, 진접읍내각리 내곡리경계에있다. 태봉 ( 胎峯 ) 이라부르며남쪽봉우리인고성산 ( 古城山 ) 까지를함께가리킨다.* 학계산 ( 鶴鷄山, 315.7m) : 별내면광전리 덕송리경계에있는산으로검정산, 학애산, 학애봉으로불린다. 바윗돌이없이흙으로만되어있는데, 흙산 ( 土山 ) 이라는뜻으로 뫼 가변천되어학계산으로기록되었다.*

5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2. 고개 남양주시는온통산으로둘러싸인곳이기에고개도많다. 고개는사람이넘어다니는산허리나언덕의높은부분으로마을과마을을연결해주는역할을하였으며, 대부분의고개마루에는성황당이있었다. 많은고개중에서큰고개만알아본다. 각골고개 (60m) : 46 번국도상남양주경찰서앞에서덕소방향으로갈라지는 6 번국도분기점이있는곳이며, 한국전쟁때한국해병대와북한인민군간의격전장이기도했다. 여기에 해병대북한강지구전첩비 가세워져있다. 각골고개가있는야산에서의전투가특히극심하였는데, 이는춘천과양평의갈림길로교통의요지이기도했기때문이다. 검단이고개 (630m) : 진접읍팔야리검단이동쪽에있다. 검단이에서수동면내방리안마산과연결된다. 과라리고개 (440m) : 수동면수산리물막골서남쪽에있고물막골과오남읍팔현리과라리를연결한다. 광대울고개 (310m) : 수동면지둔리와화도읍가곡리안말을연결한다. 너브네고개 (240m) : 화도읍마석윗닭계에서가곡리와수동면으로가는고개이다. 노원고개 (210m) : 별내면화접리서쪽에있고화접리에서서울하계동으로넘어가는고갯길이다. 덕릉고개 (150m) : 별내면덕송리덕릉서쪽에있고덕릉에서서울상계동당고개로넘어가는곳이다. 덕릉은조선선조의생부덕흥대원군의묘이다. 남양주시주요고개돌고개 : 화도읍답내리새개에있는작은고개이름이다. 돌팍고개 (130m) : 46번국도에서시청이있는금곡동과평내동을연결하는곳으로노선직선화작업과확 포장공사를하면서먼저있던곳에서약간동쪽으로옮겨졌다. 동구리고개 (60m) : 경춘선철도금곡역가까이 46번국도상에있으며, 금곡동과양정동을연결한다. 마치고개 (240m) : 46번국도에서호평동과화도읍묵현리와연결된다. 조선시대부터있었던고개로 46번국도가생기면서넓어졌다. 옛길고개마루와신작로고개마루와는가까이이웃해있다. 옛날에는도둑이많아서한낮에도무리를지어서넘어가야만되는험준한고개였다. 1980년대에들어고개밑에마치터널이생기면서부터이고개는거의이용되지않고있다. 고개마루에는한국전쟁후에도 500여년된전나무가있었다. 먹치고개 (210m) : 조안면시우리와와부읍월문리구선을연결한다. 물막골고개 (710m) : 진접읍진벌리갬벌에서수동면수산리물막골로넘어가는고개이다. 박수고개 (150m) : 별내면동학골에서의정부시고산동독바위로넘어가는곳이다. 배래니고개 (370m) : 호평동호만북쪽에있고호만에서오남읍팔현리로넘어가는고개를말한다. 팔현리고개라고도부른다. 비루고개 (190m) : 별내면용암리비루개서북쪽에있다. 비루개에서의정부시고산동가잿말과연결된다. 사기막고개 (130m) : 별내면청학리사기막북쪽에있고사기막에서의정부시용현동거문돌마을로넘어가는곳이다. 새우젓고개 (350m) : 조안면시우리에서운길산능선을오르는고개이다. 새재고개 (240m) : 조안면시우리와와부읍도곡리자운동을연결한다. 서낭당고개 : 46 번국도에서평내동과담안 ( 장내 ) 을연결하는곳이며 1960 년대까지만해도성황당이고개마루에있었다. 성릉고개 (230m) : 호평동지새울에서진건읍송능리로넘어가는고개이며독쟁이 ( 윗독정 ) 로도가는고갯길이다. 성릉은조선선조의후궁이며광해군과임해군의어머니인공빈김씨의묘로진건읍송능리에있다. 소래비고개 (210m) : 수동면송천리소래비남쪽에있고소래비와화도읍머재를연결한다. 수레넘이고개 1(360m) : 수동면외방리와가평군상면행현리를연결한다. 수레넘이고개 2(240m) : 화도읍차산리남쪽에있고차산리원차선과와부읍월문리선원을연결한다. 옛날에수레가이고개를넘어가서붙여진이름이다. 순화궁고개 (100m) : 별내면청학리에있다. 사기막에서순화궁으로넘어가는곳이다. 순화궁은조선선조의왕자순화군 ( 順和君 ) 의무덤이다. 숫돌고개 (110m) : 별내면청학리월촌에서의정부시용현동거문돌로넘어가는곳이다. 쑥고개 (60m) : 금곡동어룡골에서진건읍사릉으로넘어가는작은고개이다. 약대울고개 (120m) : 금곡동어룡골에서평내동약대울로넘어가는고개이다. 어남이고개 (150m) : 진건읍윗독정에서오남리로넘어가는고개이다. 여우고개 (80m) : 금곡동무대마을에서와부읍율석리로넘어가는고개인데, 옛날에밤길에여우가자주나타나서붙여진이름이다. 이르네미고개 (480m) : 평내동새탄말평내초등학교뒤편에있는골짜기약수터에서와부읍율석리밤뒤 ( 대동마을 ) 로넘어가는묘적산줄기에있는고개이다. 잣고개 (250m) : 진접읍내각리안골에서별내면청학리아래응달말로넘어가는고개이다. 재재기고개 (250m) : 화도읍차산리맹골과조안면재재기를연결한다. 전도치고개 (170m) : 진접읍내곡리전도치서쪽에있고전도치에서별내면광전리퇴뫼로넘어가는고개이다 년도중반에이고개밑으로터널이생겼다. 파위고개 (460m) : 수동면입석리파위동북쪽에있고파위와가평군상면임초리를연결한다. 학고개 (190m) : 수동면송천리장재울과화도읍월산리가리당미를연결한다.

5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3. 하천 < 남양주시의하천수계 > 수계 1 차지류 2 차지류길이 (m) 구운천 ( 九雲川 ) 수산천 ( 水山川 ) 지둔천 ( 芝屯川 ) 외방천 ( 外坊川 ) 가곡천 ( 嘉谷川 ) 15,000 2,400 1,500 3,500 3,500 북한강수계 (17,300m) 묵현천 ( 墨峴川 ) 신기천 ( 新基川 ) 월산천 ( 月山川 ) 아양천 ( 峨洋川 ) 삼봉천 ( 三峰川 ) 시우천 ( 時雨川 ) 진중천 ( 鎭中川 ) 조안천 ( 鳥安川 ) 마석우천 ( 磨石隅川 ) 맹동천 ( 孟洞川 ) 10,600 3,500 2,500 2,300 6,000 2,120 2,230 6,350 4,500 2,000 한강수계 (12,700m) 왕숙천 ( 王宿川 ) 엄현천 ( 奄峴川 ) 진벌천 ( 榛伐川 ) 봉선사천 ( 奉先寺川 ) 금곡천 ( 金谷川 ) 진건천 ( 眞乾川 ) 오남천 ( 梧南川 ) 용정천 ( 龍井川 ) 사능천 ( 思陵川 ) 용암천 ( 龍岩川 ) 덕송천 ( 德松川 ) 불암천 ( 佛岩川 ) 23,530 2,600 3,200 3,800 1,900 7,000 2,600 2,800 10,000 12,000 2,600 2,100 홍릉천 ( 洪陵川 ) 일패천 ( 一牌川 ) 율석천 ( 栗石川 ) 월문천 ( 月文川 ) 궁촌천 ( 宮村川 ) 6,100 2,000 5,000 8,200 2,300 남양주시의남쪽으로는한강이흐르고 (12.7 km ), 동쪽으로는북한강이흐른다 (17.3 km ). 남양주에는왕숙천, 구운천, 묵현천 3 개의큰하천이모두한강으로합류되며이하천에딸린지류들이모여한강수계를이룬다.

5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3. 하천 1) 북한강 (17.3 km ) 남양주시경내에서는화도읍구암리에서시작되어조안면조안리까지흐르며, 길이는 17.3 km의직할하천이다. 구운천, 신기천, 월산천, 묵현천, 아양천, 삼봉천, 시우천, 진중천, 조안천이모여북한강수계를이룬다. (1) 구운천수계구운천의수질오염도는지역별로정도의차이는있으나수질환경기준보다비교적좋은상태를보이고있다. 북한강으로유입되고있는구운천의수질현황은다음표와같다. 북한강 구운천수계 < 구운천수계현황 > 하천 시점 종점 연장 ( km ) 비고 구운천 수동면내방리 화도읍구암리 ( 북한강합류점 ) 15.0 본류 수산천 수동면수산리 수동면수산리 ( 구운천합류점 ) 2.4 제1지류 지둔천 수동면지둔리 수동면지둔리 ( 구운천합류점 ) 1.5 제1지류 외방천 수동면외방리 수동면외방리 ( 구운천합류점 ) 3.5 제1지류 가곡천 화도읍가곡리 수동면송천리 ( 구운천합류점 ) 3.5 제1지류 계 본류1, 지류 출전 : 경기도, 구운천하천정비기본계획, < 구운천수계수질현황 > 위치 BOD(mg/l) COD(mg/l) SS(mg/l) 비고 구운천상류 비금 2 교밑 수산천 수산천합류점 수산교밑 외방천 외방천합류점 석현교밑 가곡천상류 가곡교밑 구운천중류 입구교밑 가곡천하류 구운천하류 구운교밑 구운천중상류 출전 : 경기도, 구운천하천정비기본계획, 구운천구운천은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에는굴운천 ( 屈雲川 ) 으로표기되어있다. 수동면내방리서리산서쪽밑해발 500m 골짜기에서발원하여수산천 외방천 지둔천 가곡천과차례로만나, 화도읍구암리에와서북한강과합류하는준용하천이다. 하천주변에약간의농경지가분포되어있으며, 주변경관이수려하여유원지로활용되고있다. 구운천의유역은수동면내방리 지둔리 운수리 입석리 송천리, 화도읍구암리이며, 분수계는파위고개 수레넘이고개 축령산 서리산 주금산 검단이고개 물막골고개 쇠푼이고개 과라리고개 천마산 송라산 소래비고개 학고개이다. 2 수산천수산리쇠푼이고개서쪽아래에서발원하여수산리동쪽끝자락에서구운천과합류하며, 유역은수산리개갯말, 덕말, 물막골이다.

53 3 지둔천지둔리지둔지고개 (410m 북쪽밑 ) 골짜기에서발원하여삼각골 돌모루를지나원지둔에서구운천과만난다. 4 외방천발원지는서리산과축령산사이골짜기이며, 전자라골 불당골을지나석고개앞에서구운천과만난다. 5 가곡천천마산북쪽안말골짜기와넘어골골짜기에서발원하여송천리섬말앞에서구운천과합류한다. 유역은화도읍가곡리안골, 넘어골, 벌말, 수동면장자터, 군안, 섬말이다. (2) 묵현천수계 < 묵현천수계 > 하천 시점 종점 연장 ( km ) 비고 묵현천 화도읍묵현리 화도읍금남리 ( 북한강합류점 ) 10.6 본류 마석우천 화도읍묵현리 화도읍창현리 ( 묵현천합류점 ) 3.5 제1본류 맹동천 화도읍차산리 화도읍차산리 ( 묵현천합류점 ) 2.5 제1본류 계 본류 1, 지류 묵현천묵현천은천마산의남쪽골짜기인묵현동 ( 먹갓 ) 에서발원하여마석우천, 맹동천과차례로합류한후화도읍금남리신당재에서북한강으로유입한다. 묵현천유역은묵현리직골 묵동 ( 먹갓 ), 녹촌리불당골, 차산리맹골 잔터, 마석우리, 창현리나분바위 무시울 담박골이며분수계는달기산 소래비고개 송라산 천마산 마치고개 묘적산 수레넘이고개 재재기고개 문안산이다. 2 마석우천천마산동쪽산기슭화도읍묵현리직골 ( 동 ) 에서발원하여화도읍묵현리아랫닭계와마석우리를거쳐창현리에서묵현천과합류한다. 묵현천수계 3 맹동천화도읍차산리맹골 ( 동 ) 에서발원하여새말, 배기, 잔터를거쳐차산리무시울에서묵현천과합류한다. (3) 신기천화도읍답내리두리봉동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화도읍구암리응암에서북한강과합수한다. (4) 월산천화도읍달기산정상북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화도읍금남리수입나루에서북한강과합수한다. (5) 아양천조안면삼봉리재재기고개밑동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삼봉리아양에서북한강과합수한다. (6) 삼봉천조안면삼봉리재재기고개남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조안면삼봉리구봉에서북한강과만난다. (7) 시우천조안면시우리먹치고개동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송촌리송신에서북한강과합수한다. (8) 진중천조안면진중리적갑산동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조안면진중리중리에서북한강과만난다. (9) 조안천조안면의예봉산동남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조안초등학교앞에서북한강과합수한다.

5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3. 하천 2) 한강 (12.7 km ) 두물머리는남양주시조안면과양평군양서면, 광주군의남종면이서로만나게되는곳으로북한강물과남한강물이합수되어한강을이루게된다. 한강은조안면능내리에서시작되어팔당댐에서호수를만들고와부읍팔당과덕소를지나며양정동과지금동남쪽으로흐른다. (1) 왕숙천수계김정호가만든 대동여지도 에는왕산천 ( 王山川 ) 으로표기되었다. 진접읍에팔야리 ( 八夜里 ) 가있는데, 조선태조이성계가함흥에서한양으로상경하다가이곳에서여드레밤을묵은데서마을이름이생겨났다고전해지며, 하천이름도여기서연유된것이라한다. 순우리말로는왕산내인데한자로왕산천 ( 王山川 ) 으로표기하다가어느시기에왕숙천 ( 王宿川 ) 으로변하게된것으로보인다. 왕숙천수계현황은다음과같다. < 왕숙천수계현황 > 하천시점종점연장 ( km ) 비고 왕숙천진접읍부평리수석동수석마을 ( 한강합류점 ) 본류 엄현천진접읍팔야리진접읍부평리 ( 왕숙천합류점 ) 2.6 제 1 지류 진벌천진접읍진벌리진접읍부평리 ( 왕숙천합류점 ) 3.2 제 1 지류 봉선사천진접읍부평리진접읍부평리 ( 왕숙천합류점 ) 3.8 제 1 지류 금곡천진접읍금곡리진접읍금곡리 ( 왕숙천합류점 ) 1.9 제 1 지류 진건천오남읍팔현리진접읍연평리 ( 왕숙천합류점 ) 7.0 제 1 지류 오남천오남읍오남리오남읍양지리 ( 왕숙천합류점 ) 2.6 제 2 지류 용정천진건읍송능리진건읍신월리 ( 왕숙천합류점 ) 2.8 제 1 지류 사능천평내동진건읍진관리 ( 왕숙천합류점 ) 10.0 제 1 지류 용암천별내면용암리퇴계원면퇴계원리 ( 왕숙천합류점 ) 12.0 제 1 지류 덕송천별내면덕송리별내면덕송리 ( 용암천합류점 ) 2.6 제 2 지류 불암천별대면화접리별내면화접리 ( 용암천합류점 ) 2.1 제 2 지류 합계본류 1, 지류 출전 : 환경부, 왕숙천수질보전대책수립보고서, 왕숙천포천군에서발원한물이남양주시서쪽을꿰뚫어흐르며경내에서는진접읍부평리에서시작되어금곡리 장현리 내각리 연평리 내곡리, 진건읍신월리 진관리 배양리, 퇴계원면, 도농동을거쳐수석동수석마을에서한강과합수한다. 많은지류 ( 枝流 ) 가모여들어하천가에는넓은들을이루는곳도있다. 분수계는노원고개 불암산 숫돌고개 깃대봉 부루고개 용암산 운악산 검단이고개 쇠푼이고개 과라리고개 천마산 묘적산 돌팍고개 약대울고개 문령산 진관 아랫말 어은골 지사 금교 가재울이다. 2 엄현천포천군내촌면에서발원하였으며, 경내에서는진접읍팔야리신촌에서시작하여부평리에서왕숙천과합수한다. 3 진벌천발원지는진접읍진벌리쇠푼이고개동북쪽골짜기이고, 하구는진접읍부평리광천이다. 4 봉선사천운악산남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부평리로흘러왕숙천과합수한다. 왕숙천 5 금곡천진접읍금곡리에서발원하여왕숙천과합류하는지류이다. 6 진건천오남읍팔현리동쪽과라리고개골짜기에서발원하여진접읍연평리중포에서왕숙천과합수한다. 과라리와원팔현골짜기에서내려오는물을숫돌모루에서막아오남저수지를 1980 년대에건설하였다. 7 오남천오남리 226.5m 고지북쪽골짜기에서발원하여오남읍양지리벌말에서진건천과합수한다.

55 8 용정천진건읍송능리에서발원하여진건읍진관리에서왕숙천과합류한다. 9 사릉천발원지는평내동이고하구는진건읍진관리이다. 10 용암천발원지는별내면용암리세청말이며, 하구는퇴계원면퇴계원리이다. 왕숙천수계 11 덕송천별내면국사봉밑순화궁골짜기에서발원하여별내면화접리에서용암천과합수한다. 12 불암천별내면불암산의골짜기에서발원하여퇴계원면퇴계원리에서용암천과합수한다. (2) 홍릉천금곡동돌팍고개밑골짜기에서발원하여하구는삼패동이다. (3) 일패천진건읍배양리문령산밑에서발원하여양정동왕자궁에서홍릉천과합수한다. (4) 율석천발원지는묘적산수리봉남쪽골짜기이며하구는이패동이다. (5) 월문천발원지는묘적산남쪽묘적사골짜기이며와부읍덕소리에서한강과만난다. (6) 궁촌천발원지는조조봉북쪽골짜기이며와부읍도곡리에서한강과합수한다.

5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4. 평야 남양주시는한북정맥에자리잡고있어온통산뿐이며평야는찾아보기힘들정도로적다. 전체면적 ( km2 ) 중 70.1% 가산 ( km2 ) 이며, 농경지 (79.70 km2 ) 는 17.3% 에불과하다. 농경지중에서도산전 ( 山田 ) 이많고평야에있는논은아주적으며, 평야는왕숙천을따라서약간있을뿐이다.

5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4. 평야 1) 연평 ( 蓮坪 ) 들 진접읍연평리에있으며왕숙천이굽이쳐흐르면서안쪽으로들을만든곳으로곡창지대이다. 왕숙천의냇물을관개수로이용할수있어농경지정리가잘되어있으며중포, 오얏, 요연평, 와촌등의마을이있다.

5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4. 평야 2) 풍경내들 진건읍신월리에있으며연평들아래에이어져있다. 농경지정리가잘되어있고관개시설도잘되어논농사가발달하였다. 지둔지, 풍경내, 대래미, 비석거리등의마을이있다.

5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4. 평야 3) 배양리앞들 진건읍배양리에있으며왕숙천하류의유역으로비교적넓다. 왕숙천이장마에범람하면침수되기도하여근년에왕숙천제방을정비하였다. 논농사보다는채소비닐하우스재배가성행하고있다.

6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5. 널울분지 ( 盆地 ) 분지는높은산이나고지 ( 高地 ) 로둘러싸인평평한지역으로, 보통의평야보다해발이높은것이보통이다. 호평동과평내동은널울 ( 板洞, 板谷 ) 로불렸는데넓은마을이란뜻이다. 이지역은북쪽에천마산이있어한줄기는서쪽으로감싸고또한쪽은동쪽으로내려와묘적산과이어졌고, 남쪽에는묘적산이있어그한줄기는남서쪽으로뻗어큰산줄기가널울을완전히에워싸고있어산간분지 ( 山間盆地 ) 를이룬다. 금곡동은해발 50m, 화도읍마석은해발 70m 이나호평동과평내동은해발 120m 여서금곡보다는 70m, 마석보다는 50m 나더높은지역이된다. 한국토지공사가널울분지토지를 1998 년부터매입하였는데, 주택단지를개발하여완성하게되면인구 8 만명의도시로탈바꿈하게될것이다.

6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6. 댐과저수지 팔당댐 오남저수지 1974 년조안면능내리봉안에건설된팔당댐은높이 32m, 길이 545m 의시멘트콘크리트댐으로서설비용량은 8 만km이고, 총저수량은 2 억 4400 만m3이며, 만수면적은 2 만 3713 km2이다. 이댐은특유한저낙차형으로설치하여홍수에는상류에미치는배수의영향을완화하고, 수문개방으로자연하천을유지할수있게하였다. 발전용댐이지만수도권의상수도주요수원지가된다. 한편, 남양주시는연평균강우량이 1300 mm로서다우지역 ( 多雨地域 ) 이다. 따라서저수지는그리많지도않고규모도작다. 저수지현황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금남저수지 : 화도읍금남리신포에있다. 덕소저수지 : 와부읍덕소리사계에있다. 배나무골저수지 : 와부읍월문리배나무골에있다. 배양저수지 : 진건읍배양리에있다. 오남저수지 : 오남읍양지리에있다. 솟골저수지 : 진건읍신월리솟골에있다. 새말저수지 : 금곡동새말에있다. 새말저수지 : 진건읍신월리새말에있다. 어룡저수지 : 와부읍도곡동어룡에있다. 이곡저수지 : 와부읍월문리이곡에있다.

6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7. 지질 남양주시의지질은경기육괴내에놓여있어그지질은선캄브리아기에속하는경기편마암복합체, 시대미상의반상화강암, 쥐라기로믿어지는대보화강암과, 제 4 기에속하는홍적층 녹설층 충적층등으로구성되어있다. 선캄브리아기의경기편마암복합체에대해서는그들의원암이광역변성작용을받기이전의이질암과사질암으로양분되는데, 전자는운모질을많이지닌편암 편마암류이고, 후자는규질이풍부한편마암과편암류로변성되었다. 그후시대미상의반상화강암과쥐라기의대보화강암의관입에의해접촉변성작용이더해졌다. 경기편마암복합체를이루는변성암류는변성작용의정도나결구변화와상변화에따라크게편암류와편마암류로구분된다. 편암류는그들의원암의광물조성에따라운모편암, 석영편암, 규암, 각석편마암, 각석암등으로세분된다. 편마암류는변성작용의양상에따라혼성편마암, 화강암질편마암, 반상변정질편마암, 안구상편마암, 호상편마암등으로세분된다. 화강암류는시대미상의반상화강암과쥐라기의대보화강암으로구분되는데이들은산출상태, 조직, 구조, 광물조성등에서차이를보인다.

6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7. 지질 1) 변성암류 ( 경기편마암복합체 ) 선캄브리아기에속하는경기편마암복합체는모두가층적기원변성암류로서변성작용의정도와양상에따라편마암류와편암류로구분된다. (1) 편마암류 편마암류는퇴적기원편마암들이광역변성작용을받은후후심한편마암화작용, 화강암화작용, 혼성작용을받아생성된것이다. 편마암류는혼성편마암, 화강암질편마암, 반상변정질편마암, 안구상편마암, 호상편마암으로분류된다. 1 혼성편마암 (Migmatitic gneiss) 와부읍도곡리, 팔당등에넓게분포한다. 여기에는운모편암, 석회규산염암, 활석편암등의잔류암을포함시킨다. 2 화강암질편마암 (Granitic gneiss) 금곡동등지에소규모로산재한다. 3 반상변정질편마암 (Porophyroblastic gneiss) 와부읍금대산일대에비교적넓게분포하고있다. 주성분광물은석영, 사장석, 흑운모, 정장석, 퍼사이트등이다. 4 안구상편마암 (Augen gneiss) 와부읍덕소계곡부근에소규모대상분포한다. 5 호상편마암 (Banded gneiss) 남양주지역에분포하는경기편마암복합체중에서가장넓게분포한다. 편암류는여기에잔류되어있다. 대표적인노출은팔당, 부용터널, 시우리등으로신선한것들이많다. (2) 편암류 편암류는규암 석영편암, 각섬석편암 각석암, 그리고운모편암등으로구성되었다. 1 석영편암 (Quartz schist) 진건면과호평동부근의호상편마암내에대상분포한다. 치밀하고견고하며대부분석영으로구성되어풍화에대한저항성이강하고, 그외분포는산릉과절벽을이룬다. 2 운모편암 (Mica schist) 편암류중에서가장넓은지역을차지한다. 와부읍도곡리와팔당에호상편마암내에잔류되어있다. 운모편암은풍화되기쉬워분포지역은낮은구릉을이루며신선한노출면은찾기어렵다. 석회암은시우리와월산리에서채굴되는데, 호상흑운모편마암의편마구조에변성잔류체로존재한다. 3 각섬석편암각섬석편암은소량으로편암내에관입되어있다.

6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7. 지질 2) 화강암류 화강암류는시대미상의고기반상화강암과쥐라기의대보화강암과그에수반된암맥류로크게구분된다. (1) 반상화강암 (Porphyritic granite) 가운동과와부읍월문리에비교적넓게분포하고그외지역에소규모로산재한다. 이화강암은주로조립질로서가끔반정을포함하며석영, 정장석, 사장석, 흑운모, 각섬석, 불투명광물등으로구성되어있다. (2) 서울화강암 (Seoul granite) 쥐라기말의대보화강암은서울의중심부에넓게분포하는데이화강암의저층을서울화강암이라고명명하였다. 불암산일대가여기에속한다. 기계적풍화작용이활발히일어나며, 카리장석을많이함유하고담홍색을띤다.

6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7. 지질 3) 제 4 기 제 4 기퇴적층은고기하성층과신기하성층으로구분되며이들은주로남양주의한강남부연안에분포한다. 고기하성층은홍적세, 신기하성층은현세의산물인것으로믿어진다. (1) 홍적층 한강의건설사면과왕숙천등의합류부에넓게분포하며하안단구층, 자연제방, 배후저습지등의지형적특색을이룬다. 이층은홍적세기간중한강의범람에의해퇴적된것으로자갈, 모래, 점토등으로이루어져있으며층두께가 12m 에이르는곳도있다. (2) 녹설층 팔당에서도곡리에이르는한강연안의산비탈면에분포하며산록완사면을형성한다. 두께는대략 20m 이다. (3) 충적층 한강과왕숙천등지의바닥에넓게분포한다. 이층은자갈, 모래, 점토등으로구성되었다.

6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8. 토양 토양은바위가부서져서생긴것이기는하지만, 장구한세월에풍화작용이거듭되는동안모암 ( 母岩 ) 의영향은사라지고그지역의기후에의하여토양의종류가결정된다. 토양은광물질에서유래되었고많은무기물을함유하고있는무기질토양과유기물을많이지닌유기질토양 ( 부식토 ) 으로나뉜다.

6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8. 토양 1) 무기질토양 무기질토양은토양입자의굵기에따라 2 mm이상을왕모래 (gravel), mm를거친모래 (coarse sand), mm를고운모래 (fine sand), mm인것을미사 (silt), mm이하인것을점토 (clay) 라고부른다. (1) 토성 (Soil class) 토양을구성하는토양의종류를토성이라고하는데모래흙 ( 사토, sand) 은모래가 87.5% 이상인것이고, 모래참흙 ( 사양토, sandy loan) 은모래를 % 지닌것이다. 참흙 ( 양토, loan) 은모래를 % 지닌것이고, 질참흙 ( 식양토, silt loan) 은모래가 % 이하인것이다. 찰참흙 ( 점토, clay loan) 은모래가 50% 이하인것이며, 일반적으로식물생육에알맞은토성은모래참흙이다. (2) 토양산도 (Soil ph) 토양의반응이산성, 중성, 알카리성으로나타날때이런정도의값을표시한것이토양의산도 (ph) 이다. 단위는 1 에서 14 까지이며, 그중간 7 을중성이라하고, 7 보다작은수를산성, 많은수를알카리성이라고한다. 산성토양은석회질이적은토양에서나타나며대부분의농작물은중성내지약알카리성토양에서잘자란다. 흙이산성으로변하게되면토양입자가성글어져작물생육에필요한수분과양분을저장하는힘이약해져서생육이나빠진다. 1 흙이산성으로변하면해로운이유 수소이온의농도가높아져작물생육에해롭다. 알루미늄, 망간의성분이많아장애를받는다. 질소가모자라게된다. 인산의효과가낮아진다. 칼리, 석회, 마그네슘함유량이떨어진다. 철이녹아나와작물이해를받기쉽다. 토양구조가약화되기쉽다. 유용한토양미생물의활동이저해되기쉽다. 유황이너무많아서해를받기쉽다. 2 산성토양개량방법석회와같은알카리성물질을보충해줌으로써개량할수있으며퇴비, 구비등과같은유기물을토양에주면물리 화학적성질이좋아져서토양미생물이잘자라게된다.

6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2 절지형 8. 토양 2) 유기질토양 토양의유기물함량은토양비옥도의기초가된다. 유기물은토양의물리적구조를발달시키고, 토양수분의보존능력을높이며, 공기유통을좋게하며, 토양미생물의활동을돕는등여러가지이점이있다. 토양유기물은동물이나식물의몸체가미생물의작용에의하여분해된것이다. 부식토 (humus) 는토양유기물함량이 20% 이상함유된토양을의미하는데, 대부분의토양은유기물함량이 5% 이하인경우가많다. 이러한유기물은식물생육에필요한영양분을공급할뿐아니라이런영양분의유효도를증가시키기때문에매우중요하다. 유기물의주요한공급원은퇴비, 구비, 녹비, 짚등이다. 농촌진흥청농업기술연구소에서는 1977 년남양주의 토양정밀지도 를만들었다. 토양의종류를세분하여구분하고여기에경사로까지넣어서 73 종류의토양을구분하였다. 따라서농민들이자기소유농경지의토양종류를알수있고적합한작물이어떤종류인가를알수있다.

6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남양주시는위도 37 상에놓여있어중위도지대에속한다. 기후는 4 계절이뚜렷하게구별되는온대성기후의특징을가지며, 비가많은다우지역에속한다. 기후에영향을미치는요소는기온, 강수량, 습도, 바람, 증발, 일조, 일소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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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1. 기온 대기의여러가지변화중에서온도의상승과하강의정도를나타내는단위를온도 ( 溫度 ) 라고한다. 농업에서문제가되는온도는기온, 지온, 수온, 작물의체온등이다. 기온은농업에서중요한기상요인으로자료를쉽게얻을수있어편의상이용한다. 지온이나수온은기온에비해관측하기쉬우나국지적인조건의영향을받기쉬우므로기온만큼넓은지역의온도를대표할수는없다. 작물의체온은냉해와동해에직접적인영향을주게되므로중요한요인이된다. 남양주의연평균기온은 12.1 가된다 ( 년, 10 년간의평균치 ). 남부해안지방은 14 내외이고북부개마고원은 2 정도로내려간다. 겨울날은최저기온이 0 이하인날씨를말한다. 겨울날씨가계속되는기간을기후적인겨울이라하며, 이런시기는겨울날계절또는겨울철 (winter day season) 을이룬다. 1 년중가장추운달을최한월이라고부르는데, 남양주에서최한월의평균기온은 -8.2 이다 ( 최근 10 년평균 ). 남양주에서 0 이하의기온은 11 월에나타나며 0 이하의기온이계속되는것은 3 월까지이다. 따라서남양주의겨울철은 11 월부터 3 월까지 4 개월이된다. 1 월의최저기온평균은 -8.0 이고, 최고기온평균은 2.4 가된다. 최근남양주에서가장추웠던달은 1997 년 12 월로 였다. < 평균기온 > ( 단위 : ) 월 / 연도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평균 자료 : 남양주시농촌지도소제공. < 최고기온 > ( 단위 : ) 월 / 연도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72 11월 월 평균 자료 : 남양주시농촌지도소제공. < 최저기온 > ( 단위 : ) 월 / 연도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평균 자료 : 남양주시농촌지도소제공. < 1997 년월별평균기온 > < 연도별평균기온 >

73 겨울이몹시춥고길지만비교적견딜만한것은한파가일정한주기를두고내습해오는삼한사온이있기때문이다. 삼한사온은 3 일이추우면그후 4 일이따뜻해지는주기적현상을말한다. 그렇지만반드시 3 일동안춥고 4 일동안따뜻한것이아니라대체로이한오온, 삼한사온, 오한이온등 7 일을주기로해서날씨가변하는것으로장기간에걸친통계치에의하면비율이 3 : 4 가되기때문에삼한사온이라하는것이다. 삼한사온의원인은대륙내부에서발달하는고기압의일진일퇴로말미암아생긴다. 겨울기간이길고추운것처럼여름도덥고그기간도비교적길다. 여름철에최고기온을나타내는달은 8 월이다. 남양주시 8 월평균기온은 26.1 이고, 최고평균기온은 30.6 이며, 최저평균기온은 21.8 이다. 우리나라의북부해안지방의 8 월평균기온은 22 이고, 남부해안지방의 8 월평균기온은 26 인데그차이는 4 에지나지않는다. 1 월의평균기온이남 북의차이가 12 에달하는데비하여여름기온의분포는남 북의차이가거의없다는것을알수있다. 월평균기온이 18 인 6 월 9 월이여름기간으로겨울철과함께일년중큰비중을차지한다. 상대적으로봄 가을은짧다. 월평균기온이 18 가되면대략열대식물이자랄수있는기온이되며, 이시기에대부분비도많이내린다. 최근남양주에서가장더웠던달은 1994 년 7 월로서 33.2 를기록하였다 년 8 월최고기온은 31.3 이다.

7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2. 강수 강수는대기중의수증기가결정을이루어지면에떨어지는것으로비, 눈, 서리, 이슬, 우박, 싸락눈등을말한다. 우리나라의연평균총강수량은 mm내외이고대부분의지역이 mm가된다. 가장적은지역은함경북도내륙지대로 mm내외이고, 제주도남동해안이 1800 mm내외로가장많으며, 울릉도는 mm이고, 남해안과섬진강유역일대에는 1400 mm이상을나타낸다. 제주도와남해안일대를최다우지역이라부르며, 1400 mm이상의강수량을나타낸다. 다음으로다우지역은 1300 mm내외인한강중상류, 청천강중상류, 중부동해안지역이해당된다. < 강수량 > ( 단위 : mm) 월 / 연도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연강수량 , , , , , , , ,243.3 자료 : 남양주시농촌지도소제공. 남양주시는다우지역에속하며최근 10 년간평균강수량은 1326 mm에이른다. 가장강수량이많았던해는 1990 년으로연강수량이 2261 mm였고, 강수량이가장적었던해는 10 년전인 1988 년으로 756 mm였다. 강수량의연중변화가심하고비오는시기가여름에집중되어긴장마철과단시간에쏟아지는호우성을특징으로한다. 7 월상순부터장마가시작되어하순에걸쳐우리나라전역은장마권에들어간다. 8 월에는약간의건기를낀한여름이되나 8 월하순이나 9 월초에는열대저기압인태풍에수반되는비로가을장마에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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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3. 농업기상 3. 농업기상 1) 맑은날씨 천기 ( 天氣 ) 는일상생활뿐만아니라농업과사업에도상당한영향을미친다. 맑은날은태양이구름과안개등에의해서가려지지않고지면에내려닿게된다. 맑은날씨가계속되고온도가높아지면광합성양이많아져서풍년이들게된다 년남양주시의연중맑은날씨는 365 일중 64% 인 233 일이되었다. 5, 6, 7 월과 9, 11, 12 월의 6 개월이맑은날씨가 20 일이하였고그나머지달들은모두 20 일이상이맑은날씨였다. 최근 10 년간맑은날씨는평균한달에 19 일정도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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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3. 농업기상 2) 흐린날씨 흐린날씨가계속되면식물생장기에서는광합성양의부족으로식물생장이부족하게되며, 생식생장기에는꽃의가루받이가덜일어나며또한열매생장에영향을준다. 그러나흐린날에는증산작용은덜일어나며가뭄에는견딜수있다. 남양주시에서흐린날씨는 1997 년도에 365 일중 42 일로 12% 에해당된다. 최근 10 년간흐린날씨는평균한달에 5 일정도에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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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3. 농업기상 3) 비온날 식물체는약 70% 이상이수분으로구성되어있다. 비는식물체유지에필요한물공급원이된다. 비는땅속으로스며들고식물의뿌리에서는수분을흡수하여생명체를유지하며, 흡수한수분으로광합성작용을하여생장한다. 남양주시에서 1997 년에비온날은 81 일로연중 22% 에이른다. 최근 10 년간비온날은 705 일로서, 한달에 6 일정도라고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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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3. 농업기상 4) 눈온날 겨울철강수는상당량눈으로내린다. 겨울이길때에는강설기간도길고강설량도중요하다. 평균초설일은북부개마고원이빨라서 10 월 7 일이고, 남쪽으로내려감에따라차차늦어져남해안에서는약 2 개월후인 12 월 20 일경이된다. 우리나라의강설량은세계적으로볼때적설이많은편이다. 겨울철의눈은저기압에따른기압골에의해형성되는외에겨울계절풍의영향을많이받는다. 남양주시에서 1997 년에눈온날은모두 9 일로서 1 월에 5 일과 월에각각 1 일씩이다. 최근 10 년간눈온날은모두 94 일로연평균 9 일이다. 초설일은평균 11 월 24 일이고종설일은평균 3 월 12 일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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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3. 농업기상 5) 서리 평균초상일 ( 初霜日 ) 이가장빠른곳은개마고원의삼수지방으로 9 월 10 일경이고, 남부지방에서는지리산기슭인구례, 곡성, 남원, 임실, 장수, 진안등지로서 10 월 8 일경이며중부내륙지방과거의비슷하다. 남양주의평균초상일은 10 월 18 일이된다. 평균만상일 ( 晩霜日 ) 도초상일의경우와비슷하게개마고원지대가 5 월 일경으로가장늦고, 남부지방에서는지리산기슭의임실, 진안등지가늦은편인데, 5 월 1 일경이다. 남양주의평균종상일은 4 월 25 일이된다. 무상기간 ( 無霜期間 ) 은만상일부터초상일까지의서리가내리지않는기간을말하며, 농작물의재배적부를결정하는데많이이용되고있다. 우리나라에서무상기간이가장짧은곳은개마고원지대로 120 일내외이고, 가장긴곳은제주도의 275 일이며, 그다음은남해안지방의 250 일내외가된다. 남양주의무상기간은평균 175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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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3 절기후 3. 농업기상 6) 극기온 최고극기온은남양주에서 1994 년 7 월 23 일자로 38.6 였다. 최저극기온은남양주에서 1981 년 1 월 3 일자로 였다. < 천기일수 > 구분 / 월 1 월 2 월 3 월 4 월 5 월 6 월 7 월 8 월 9 월 10 월 11 월 12 월계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file:///c/ /history/his_69.html[ :16:19]

87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계 맑음 흐림 비 눈 < 농업기상 > 시기 / 구분 서리눈얼음최고극기온최저극기온 초상일만상일무상일수 초설일종설일초빙일종빙일일자온도일자온도 file:///c/ /history/his_69.html[ :16:19]

88 평균 file:///c/ /history/his_69.html[ :16:19]

8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1. 식물 제 4 절동 식물 1. 식물 1) 녹지자연도 녹지자연도는생물의생활권중육역 ( 陸域 ) 이인간에의하여개조 변화하는상황과실태를파악하기위해식물군락과식생천이단계를기반으로하여육역을 0 10 등급까지 11 개등급으로나누어표시하는녹지의지표이다. 1 등급으로접근할수록개발에의해녹지의질이떨어지는상태이고 10 등급으로접근할수록자연상태가잘보전되었음을나타낸다. 그리하여 8 등급이상은환경부에서환경영향평가를협의할때보전하도록하며 7 등급이하지역만을개발하도록협의해주고있다. 한편 0 등급은등급사정을위해조사지를 1 km2의격자로나눌때격자를긋는선이어느쪽에속하는지조사자의판단에따라달라지는경우를뜻한다. < 녹지자연도 > (1989. 현재 ) 지역 / 구분 1 등급 2 등급 3 등급 4 등급 5 등급 6 등급 7 등급 8 등급 9 등급 10 등급 0 등급線 mesh 와부읍 진접읍 별내면 퇴계원면 진건면 수동면 화도면 조안면 미금지역 합계 구성비 (%) 출전 : 환경처, 90 전국생태계전국조사 (Ⅰ-1) 제 5 차연도 : 서울 경기의녹지자연도, 1990, 135 쪽 년조사에서남양주지역은 1 등급이 2.83%, 2 등급이 24.18%, 4 등급이 0.22%, 6 등급이 10.90%, 7 등급이 17.21%, 8 등급이 40.96%, 9 등급이 0.87%, 0 등급이 2.83% 를차지하였다. 이지역은개발제한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자연보존권역, 상수원보호구역, 팔당상수원보호특별대책지역등으로묶인면적이많아수도권뿐만아니라경기도에서도하나의거대한삼림지대를이룬곳이다. 평균녹지자연도가 5.4 등급으로녹지의자연성을가장잘유지하고있는경기북동부내륙지역에서도남양주시의평균녹지자연도는 7.8 등급으로가장높게나와녹림상태는양호한것으로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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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1. 식물 2) 식물연구현황 남양주시는서울에서가까운데다광릉을비롯해서천마산, 서리산, 운길산등의높고큰산이많아식물연구의대상지가되어왔다. 따라서남양주의식물에관한논문과학위논문도상당히많다. 최근들어서울대학교식물학과의현진오는 1986 년에 천마산권역의플로라 에서 85 과 237 속 299 종 42 변종, 3 품종등도합 344 종을채집하였다. 성신여자대학교생물학과오용자는 1980 년 수동면지역의식물상 에서고사리류 6 과 10 속 17 종, 나자식물 4 과 6 속 9 종, 피자식물류중단자엽류 15 과 74 속 138 종, 쌍자엽류 78 과 271 속등 456 종을발표하였고, 1981 년에는 상산 ( 서리산 ) 식물의개화기에관하여 에서 89 과 426 종을발표하였다. 임업연구원에서는 1994 년광릉숲에분포하는식물을조사하였는데, 모두 124 과 983 종으로이중에서양치식물은 10 과 21 속 62 종이며, 나자식물은 2 과 3 속 4 종, 피자식물은 99 과 397 속 917 종이었다. 또한목본이 292 종이고, 초본은 691 종이다. < 남양주의식물에관한학위논문 > 연구자 제목 연도 학위 현진오 천마산권역의플로라 1986 서울대학사학위논문 이남주 천마산남북사면의삼림식생의구조적특성에관한비교연구 1987 중앙대석사학위논문 소진복 천마산소류상 ( 蘇類相 ) 연구 1986 고려대석사학위논문 임영자 천마산중복의억새형군락구조의계절적천이에관하여 1973 이화여대석사학위논문 조은희 축령산새 (Arundinella) 1982 이화여대석사학위논문 엄정숙 운길산의관속식물 1995 고려대석사학위논문 김봉주 운길산의자연휴양림조성 1994 동국대석사학위논문 김성호 경기도축령산식물 1986 성신여대석사학위논문 김기원 운악산의식물조사연구 1990 고려대석사학위논문 장성찬 운악산의관속식물분류및식생에관한연구 1992 강원대석사학위논문 손창희 수락산의식물상 1993 인천대석사학위논문 박상준 광릉숲생물다양성보전계획 1997 서울대박사학위논문 유영모 광릉의활엽수림과침엽수림소유역생태계내무기영양소의유입과유출 1994 서울대석사학위논문 김진희 광릉잎갈나무숲의임상식생연구 1979 이화여대석사학위논문 조기현 광릉지역활엽수천연림과침엽수조성지의서식지구조와조류군집과의관계 1996 서울대석사학위논문 박홍현 남산과광릉의침엽수림연구 1995 서울대석사학위논문 정철의 남산과광릉의활엽수림연구 1996 서울대석사학위논문 송창섭 광릉림내각식물군집하초본식물집단의종상관및 niche metrics에관한연구 1984 서강대석사학위논문 정태경 광릉산 Ephemera의생활사연구 1983 고려대석사학위논문 김정수 광릉산야생버섯의마우스자발운동에미치는영향 1995 성균관대석사학위논문 김창민 광릉쥐오줌풀의성분연구 1976 경희대박사학위논문 최성식 광릉지역의토양미소절지동물상 1983 조선대박사학위논문 김정림 광릉지역내털진드기의계절적소장연구 1993 인천대석사학위논문 이해빈 광릉침엽수림의곤충생태에관한연구 1971 동국대박사학위논문 강순용 광릉삼림군집에대한 ordination에방법적용 1981 서강대석사학위논문 전봉식외 천마산식물보고 ( 제1보 ) 1961 성균약학 손정수외 천마산의식물상 1962 중앙약학 육창수외 천마산의약품자원식물 1963 경희의약지 김창민 광릉쥐오줌풀의성분연구 1997 경약회지

92 오용자 수동면지역의식물상 1981 한국자연보존연구보고서 (3집) 오용자 상산식물의개화기에관하여 1982 한국자연보존연구보고서 (4집) 최상범외 동국대운길산연습림의식물상 (Ⅱ) 1985 동국대논문집 (24)-자연과학편 조도순 광릉천연림의교란체계와수목의재생 1992 한국생태학회지

9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1. 식물 3) 천마산식물목록 - 1 식물명 학명 양치식물문석송강부처손목부처손과바위손 속새강속새목속새과쇠뜨기 양치식물강고사리삼과고사리삼고비목고비과고비고사리목고사리과황고사리넉줄고사리고사리개면마야산고사리거미일엽초꼬리고사리참새발고사리개고사리광릉개고사리뱀고사리만주우드풀두메우드풀면마과관중족제비고사리십자고사리낚시고사리왁살고사리지네고사리처녀고사리산일엽초우단일엽 나자식물문소철강은행나무목은행나무과은행나무 구과식물강구과식물목소나무과전나무일본잎갈나무소나무잣나무편백과측백나무향나무노간주나무개비자나무과개비자나무 PTERIDOPHYTA LYCOPSIDA SELAGINELLALES SELAGINELLACEAE Selaginella involvens SPRING ARTICULATA EQUISETALES EQUISETACEAE Equisetum arvense L. FILICES OPHIOGLOSSACEAE Botrychium ternatum (THUNB.) SWARTZ OSMUNDALES OSMUNDACEAE Osmunda japonica THNBERG FILICALES PTERIDACEAE Dennstaedtia wilfordii (MOORE) KOIDZUCEAE Davallia mariesii MOOR Pteridium aquilinum kunth var. latiusculum UNDERWOOD Matteuccia orientalis (HOOKER) TREVISAN Onoclea sensibilis L. var. interrupta MAX. Camptosorus sibiricus RURECHT Asplenium incisum THUNBERG Athyrium brevifrons N. Athyrium nipponicum (METT.) HANCE A. concinnum N. A. yoscense ( FR. ET. SA) CHRIST Woodsia manchuriensis HOOKER W. subcordata TURCZ. ASDIDIACEAE Dryopteris crassirhizoma N. D. bissetiana (L.) KUNTZ Polystichum tripteron PRESL P. craspedosorum DIELS Rumohra miqueliama (MAX.) CHRIST. Lastrea japonica (BAK.) COPEL. L. thelypteris N. Lepisorus ussuriensis CHING Pyrrosa linearifolia (HOOKER) CHING GYMNOSPERMAE CYCADOPSIDA GINKGOALES GINKGOACEAE Ginkgo biloba LINNE CONIFEROPSIDA CONIFERAE PINACEAE Abies holophylla MAXIMOWICZ Larix leptolepis (S. et Z.) GORDON Pinus densiflora SIEBOLD et ZUCCARINION P. koraiensis SIEB. et ZUCC CUPRESSACEAE Thuja orientalis L. Juniperus chinensis LINNE J. rgida S. et Z. CEPHALOTAXACEAE Cephalotaxus koreana NAKAI

94 피자식물문쌍자엽식물강이판화아강호도목호도과가래나무호도나무버들목버드나무과사시나무당버들미루나무갯버들떡버들호랑버들버드나무쪽버들참나무목자작나무과오리나무털오리나무물오리나무물박달나무사스레나무자작나무개박달나무까치박달난티잎개암나무개암나무참나무과밤나무상수리나무갈참나무떡갈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굴참나무쐐기풀목느릅나무과느릅나무혹느릅나무검팽나무느티나무시무나무뽕나무과뽕나무산뽕나무가새뽕닥나무환삼덩굴삼쐐기풀과가는잎쐐기풀쐐기풀모시물통이산물통이풀거북꼬리거북꼬리단향목단향아목단향과제비꿀마디풀목마디풀과수영소리쟁이마디풀나도닭의덩굴닭의덩굴 ANGIOSPERMAE DICOTYLEDONEAE ARCHICHLAMYDEAE JUGLANDALES JUGLANDACEAE Juglans mandshurica MAX. J. sinensis DODE SALICALES SALICACEAE Populus davidiana DODE P. simonii CARRIERE P. deltoides MARSH. Salix gracilistyla MIQUEL S. hallaisanensis LEV. S. hulteni FLODERUS S. koreensis ANDER. S. maximowiczii KOMAROV FAGALES BETULACEAE Alnus japonica (THUNB.) STEUDEL A. japonica (THUNB.) STEUDEL var. lucida N. A. hirsuta FISCHER Betula davurica PALLAS B. ermanii CHAMISO B. platyphylla var. japonica HARA B. chinensis MAX. Carpinus cordata BLUME Corylus heterophylla FISCHER C. heterophylla FISCHER var. thunbergii KOID FAGACEAE Castanea crenata SIEB. et ZUCC. Quercus acutissima CARRUTHERS Q. aliena BLUME Q. dentata THUNB. Q. mongolica FISCHER ex TURCZANINOW Q. serrata THUNB. Q. variabilis BLUME URTICALES ULMACEAE Ulmus davidiana PLANCHON var. japonica NAKAI U. davidiana PLANCHON for. suberosa N. Celtis choseniana NAKAI Zelkova serrata MAKINO Hemiptelea davidii PLANCHON MORACEAE Morus alba LINNE M. bombycis KOIDZUMI for. dissecta N. M. bombycis KOIDZUMI for. kase N. Broussonetia kazinoki SIEB. Humulus japonicus SIEB. et ZUCC. Cannabis sativus L. URTICACEAE Urtica angustifolia FISCHER U. thunbergiana SIEB. et ZUCC Pilea mongolica WEDDELL. Achudenia japonica MAX. Boehmeria tricuspis MAKINO var. unicuspis MAKI. B. tricuspis MAKINO SANTALALES SANTALINEA SANTALACEAE Thesium chinense TURCZANINOW POLYGONALES POLYGONACEAE Rumex acetosa LINNE R. coreanus NAKAI Polygonum aviculare LINNE Bilderdykia convolvulus DUMORTIER B. dumetora DUMORTIER

95 범꼬리개여뀌여뀌이삭여뀌산여뀌며느리배꼽바보여뀌며느리밑씻개미꾸리낚시고마리싱아중심자목쇠비름아목쇠비름과쇠비름패랭이꽃아목석죽과개미자리쇠별꽃별꽃벼룩나물참개별꽃덩굴개별꽃개별꽃큰개별꽃점나도나물대나물술패랭이꽃패랭이꽃덩굴별꽃장구채가는장구채동자꽃명아주아목명아주과명아주좀명아주취명아주댑싸리비름과개비름털비름쇠무릎목련목목련과함박꽃나무녹나무과생강나무미나리아재비목미나리아재비아목미나리아재비과황새승마승마촛대승마노루삼동의나물놋젓가락나물투구꽃싹눈바꽃개싹눈바꽃세잎돌쩌기그늘돌쩌기백부자흰진범진범은꿩의다리꿩의다리좀꿩의다리산꿩의다리 Bistorta vulgaris HILL Persicaria blumei GROSS P. hydropiper SPACH var. vulgaris N. P. filiforme NAKAI P. nepalensis MIQUEL et KUDO P. perfoliata GROSS P. pubescens GROSS P. senticosa NAKAI P. sagittata GROSS var. americona NAKAI P. thunbergii GROSS Aconogonum polymorphum T. LEE CENTROSPERMAE PORTULACINEAE PORTULACACEAE Portulaca oleracea LINNE CARYOPHYLLINEAE) CARAOPHYLLACEAE Sagina japonica OHWI Stellaria aquatica SCOPOLI S. media (L.) CYRILLUS S. alsine var. undulata MURRAY Pseudostellaria coreana (N.) OHWI P. davidii (FR.) PAX P. heterophylla (MIQUEL) PAX P. palibiniana OHWI Cerastium holosteoides var. hallaisanense WIRTGEN Gypsophila oldhamiana MIQUEL Dianthus superbus L. var. longicalycinus MAX. D. sinensis LINNE Cucubalus baccifer L. var. japonica MIQUEL Melandryum firmum NAKAI M. seoulensis NAKAI Lychnis cognata MAX. CHENOPODIINEAE CHENOPOPIACEAE Chenopodium album LINNE var. centrorubrum MAKINO C. filifolium SMITH C. glaucum LINNE Kochia scoparia SCHRADER AMARANTACEAE Amaranthus lividus LINNE A. retroflexus LINNE A. japonica (MIQ.) NAKAI MAGNOLIALES MAGNOLIACEAE Magnolia sieboldii KOCH LAURACEAE Lindera obtusiloba BLUME RANUNCULALES RANUNCULINEAE RANUNCULACEAE Cimicifuga foetida LINNE C. heracleifolia KOMAROV C. simplex HARA Actaea asiatica HARA Caltha palustris L. var. membranacea TURCZ. Aconitum ciliare DC. A. jaluense KOMAROV A. proliferum NAKAI A. pseudoproliferum NAKAI A. triphyllum NAKAI A. uchiyamai NAKAI A. koreanum RAPAICS RAYMONI Lycotonum longicassidatum NAKAI A. pseudo-laeve N. var. erectum Thalictkum actaefolium SIEB. et ZUCC T. aquilegifolium LINNE T. minus L. var. hypoleucum (S. et Z.) MIQUEL T. filamentosum MAXMOWICZ

96 할미꽃노루귀사위질방외대으아리검종덩굴종덩굴으아리큰꽃으아리자주조희풀병조희풀할미밀빵미나리아재비개구리미나리복수초매자나무과매자나무꿩의다리아재비삼지구엽초새모래덩굴과댕댕이덩굴새모래덩굴후추목홀아비꽃대과홀아비꽃대쥐방울목쥐방울덩굴과족도리풀미족도리풀쥐방울덩굴물레나물목다래아목작약과백작약산작약참작약모란다래나무과다래나무개다래나무차나무아목물레나물과물레나물고추나물좀고추나물양귀비목양귀비아목양귀비과애기똥풀왜현호색산괴불주머니가는괴불주머니들현호색애기현호색현호색댓잎현호색빗살현호색피나물풍조아목십자화과쑥부지깽이나도냉이황새냉이은쟁이냉이미나리냉이논냉이장대나물꽃다지냉이 Pursatilla koreana (YABE) NAKAI ex MORI Hepatica asiatica NAKAI Clematis apiifolia DC. C. brachyura MAX. C. fusca TURCZ. var. mandshuricum MAX. C. ianthina KOEHNE var. violaceae(max.) N. C. mandshurica MAXMOWICZ C. patens MORREN et DECAISNE C. heracleifolia var. davidiana HEMSL. C. heracleifolia DC. C. trichotoma NAKAI Ranunculus japonicum THUNBERG R. tachiroei FRANCHET et SAVATIER Adonis amurensis REGEL et RADDE var. parviflora N. BERBERIDACEAE Berberis koreana PALIBIN Caulophyllum robustum MAX. Epimedium koreanum N. MENISPERMACEAE Cocculus trilobus A.P.DE CANDOLLE Menispermum dahuricum DC. PIPERALES CHLORANTHACEAE Chloranthus japonicus SIEB. ARISTOLOCHIALES ARISTOLOCHIACEAE Asarum sieboldii HIQUEL var. seoulensis N. A. sieboldii HIQUEL Aristolochia contorta BUNGE GUTTIFERALES DILLENIINEAE PAEONIACEAE Paeonia japonica (MAKINO) MIYABE et TAKEDA P. obovata MAX. var. glabra MAKINO P. albiflora PALLAS var. trichocarpa BUNGE P. subfruticosa ANDERSON ACTINIDIACEAE Actinidia arguta (S. et Z.) PLANCHON ex HIQUEL A. polygama (S. et Z.) MAX. THEINEAE HYPERICACEAE Hypericum ascyron L. H. erectum THUNB. H. laxm (BL.) KOID. PAPAVERALES PAPAVERINEAE PAPAVERACEAE Chelidonium majus var. asiaticum DC. Corydalis ambigua CHAMISSO et SCHLECHIENDAL C. speciosa MAX. C. ochotensis TURCZ. var. raddeana N. C. ternata NAKAI C. turschaninovii BESSER var. fumariaefolia T. LEE C. turtschaninovii BESSER var. jenuina NAKAI C. turschaninovii BESSER var. linearis (REGEL) N. C. turschaninovii BESSER var. pectinata (MAX) N. Hylomecon vernale MAXIMOWICZ CAPPARINEAE CRUCIFERAE Erysimum cheiranthoides L. var. japonicum BOISSIEU Barbarea sibirica (REGEL) NAKAI Cardamine flexuosa WITHERING C. komarovi MAKAI C. leucantha (TAUSCH) O.E.SCHULTZ C. lyrata BUNGE Arabis glabra (LINNE) BERNHARDI Draba nemorosa L. var. hebecarpa LEDEBOUR Capcella bursa-pastoris (L.) HEDICUS var. triangularis GRUNER

97 다닥냉이장미목범의귀아목꿩의비름과가는기린초기린초바위채송화돌나물바위솔범의귀과노루오줌 바위떡풀바위취흰괭이눈산괭이눈애기괭이눈물매화고광나무매화말발도리물참대말발도리산수국장미아목장미과국수나무당조팝나무조팝나무꼬리조팝나무터리풀산딸기덩굴딸기멍석딸기음딸기붉은인가목용가시나무찔레나무산짚신나무짚신나물오이풀가는오이풀큰뱀무뱀무딱지꽃털딱지꽃돌양지꽃세잎양지꽃양지꽃가락지나물콩배나무돌배나무배나무능금나무야광나무팥배나무밀팥배나무벌배나무산사나무 살구나무산옥매이스라지개벚나무귀룽나무복사나무자두나무앵두나무콩아과콩과 Lepidium apetalum WILLENOW ROSALES SAXIFRAGINEAE CRASSULACEAE Sedum aizoon LINNE S. kamtschaticum FISCHER S. polystichoides HEMSLEY S. sarmentosum BUNGE Orostachys japonicus (MAX.) BERGER SAXIFRAGACEAE Astrlbe chinensis NAX. ex FRANCHET et SAV. var. chinensis FRAN. Saxifraga fortunei HOOKER var. karaiensis NAKAI S. stolonifera MEERBURGH Chrysosplenium barbutum NAKAI C. japonicum MAKINO C. flagelliferum FR. SCHMIDT Parnassia palustris L. var. multiseta LEDEBOUR Philadelphus schrenckii RUPRCHT Deutzia coreana LEVEILLE et VANIOT D. glabrata KOMAROV D. parviflora BUNGE Hydrangea serrata SERINGE for. acuminata WILS. ROSINEAE ROSACEAE Stephanandra incisa (THUNBERG) ZABEL Spiraea chinensis MAXIMOWICZ S. prunifolia SIEB. et SUCC. for. simpliciflora N. S. salicifolia L. var. lanceolata TORREY et GRAY Filiperdula glaberrima NAKAI Rubus crataegifolius BUNGE R. oldohamii MIQUEL R. parvifolius L. var. triphyllus (THUNBERG) N. R. phoenicolasius NAXIMOWICZ Rosa marretii SEVEILLE R. maximowrrixiana REGEL R. multiflora THUNBERG Agrimonia coreana NAKAI A. pilosa LEDEVOUR Sanguisorba officinalis LENNE S. tenuifolia FISCHER ex LINK var. alba TRAUT. et HEYER Geum aleppicum JACQUIN G. japonicum THUNBERG Potentilla chinensis SERINGE P. chinensis SERINGE var. concolor FR. et SAV. P. dickinsii FRANCHET et SAVATIER P. freyniana BORNMUELLER P. fragarioides L. var. major MAXIMOWICZ P. kleiniana WIGHT et ARNOII var. robusta FR. et SAV. Pyrus calleryana var. fauriei(schneid.) REHDER P. pyrifolia (BURM.) NAKAI P.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 T. LEE Malus asiatica NAKAI M. baccata BORKHAUSEN Sorbus alnifolia K. KOCH S. alnifolia K. KOCH var. hirtella NAKAI S. alnifolia K. KOCH var. lobulata NAKAI Crataegus pinnatifida BUNGE var. pinnatifida C. K. SCHNEIVER Prunus armeniaca L. var. ansu MAXIMOWICZ P. glandulosa THRNBERG P. japonica var. nakaii (SEV.) Rehder P. leveilleana KOEHNE P. padus LINNE P. perisica (L.) BATSCH P. salicina LINDLEY P. tomentosa THUNBERG LEGUMINOSINEAE LEGUMINOSAE

98 자귀나무차풀박태기나무다릅나무아까시나무자귀풀도욱금의갈구리돌콩싸리나무비수리참싸리땅비싸리조록싸리개싸리매듭풀토끼풀갈키나물네잎갈퀴덩굴나비나물꽃나비나물광릉갈퀴활량나물새콩 칡쥐손이풀목쥐손이풀아목괭이밥과괭이밥큰괭이밥쥐손이풀과선이질풀쥐손이풀이질풀아마과개아마대극아목대극과광대싸리여우주머니깨풀땅빈대개감수운향목운향아목운향과산초나무황벽나무소태나무과소태나무원지과애기풀부환자나무목옻나무아과옻과무과붉나무개옻나무옻나무부환자나무아목단풍나무과신나무고로쇠나무왕고로쇠나무내군도단풍당단풍나무복자기봉선화아목봉선화과노랑물봉선 Albizzia julibrissin DURAZZINI Cassia nomame (SIEBOLD) HONDA Ceris chinensis BUNGE Maackia amurensis RUPRECHT et MAXIMOWICZ Robinia pseudo-acacia LINNE Aeschynomene indica LINNE Desmokium oxyphyllum DC. Glycine soja SIEBOLD et ZUCCARINI Lespedeza bilcolo TURCZ. var. japonica NAKAI L. cuneata G. DON L. cyrtobotrya MIQUEL Indigofera kirilowii MAX. L. maximowiczii C. K. SCHNEIDER L. tomentosa SIEBOLD et ZUCCARINI Kummerowia striata SCHINDLER Trifolium repens LINNE Vicia amoena FISCHER V. nipponica MATSUMURA var. nipponica N. V. unijuga AL. BROUN V. unijuga AL. BROUN var. apoda MAX. V. subcuspidata NAKAI Lathyrus davidii HANCE Amphicarpaea edgeworthii BENTHAM var. japonica OLIWER Pueraria lobota (WILLDENOW) OHWI GERANIALES GERANIINEAG OXALIDACEAE Oxalis corniculata LINNE O. obtriangulata MAXIMOWICZ GERANIACEAE Geranium japunicum FRANCHET et SAVATIER G. sibiricum LINNE G. thunbergii SIEB. et ZUCC. var. roseum N. LINACEAE Linum stelleroides PLANCHON EUPHORBIINEAE EUPHORBIACEAE Securinega suffruticosa REHDER Phyllanthus ussuriensis RUPRECHT et MAXIMOWICZ Acalypha australis LINNE Euphorbia humifusa WILLDENOW E. sieboldiana MORREN et DECAISNE RUTALAS RUTINEAE RUTACEAE Zanthoxylum schinifolium SIEB. et ZUCC. Phellodendron amurense RUPRECHT SIMAROUBACEAE Picrasma quassioides D. DON BENN. POLYGALACEAE Polygala japonica HOUTTUYN SAPNIDALES ANACARDIINEAE ANACARDIACEAE Rhus chinensis LINNE R. trichocarpa MIQUEL R. verniciflusa STOKES SAPOINDINEAE ACERACEAE Acer ginnala MAXIMOWICZ A. mono MAX. A. mono MAX. var. savatieri (PAXTON) NAKAI A. negudo LINNE A. pseudo-sieboldianum KOMAROV A. triflorum KOM. BALSAMINEAE BALSAMINACEAE Impatiens noli-tangere LINNE

99 물봉선노박덩굴목노박덩굴아목노박덩굴과푼지나무노박덩굴화살나무참회나무회나무미역줄나무고추나무과고추나무회양목아목회향목과회양목갈매나무목갈매나무과갈매나무털갈매나무헛개나무묏대추나무포도과왕머루담쟁이덩굴개머루 아욱목아욱아목피나무과피나무찰피나무아욱과무궁화벽오동과까치깨팥꽃나무목보리수나무과보리수나무제비꽃목산유자아목제비꽃과졸방제비꽃태백제비꽃금강제비꽃남산제비꽃낚시제비꽃잔털제비꽃제비꽃노랑제비꽃고깔제비꽃알록제비꽃자주알록제비꽃청알록제비꽃도금양목도금양아목바늘꽃과달맞이꽃산형화목박쥐나무과박쥐나무층층나무과층층나무말채나무두릅나무과오갈피나무땃두릅나무음나무가는잎음나무두릅나무 I. textori MIQUEL CELASTRALES CELASTRACEAE CELASTRACEAE Celastrus flagellaris RUPRECHT C. orbiculatus THUNBERG Euonymus alatus (THUNBERG) SIEBOLD E. oxyphylla NAKAI E. sachalinensis MAXIMOWICZ Pripterygrum regelli SPRANGE et TAKEDA STAPHYLEACEAE Staphylea bumalda (THUNBERG) DC. BUXINEAE BUXACEAE Buxus microphylla SIEB. et ZUCC. var. koreana N. RHAMNALES RHAMNACEAE Rhamnus davurica DALLAS R. koraiensis C. K. SCHNEIDER Hovenia dulcis THUNB. var. koreana N. ex KIMURA Zizyphus jujuba MILLER var. spinosus BUNGE VITACEAE Vitis amurensis RUPRECHT Parthenocissus tricuspidata (SIEB. et ZUCC) PLACHON Ampelopsis brevipedunculata var. heterophylla (MAX.) TRAUTVETTER MALVALES MALVINEAE TILIACEAE Tilia amurensis RUPRECHT T. mandshurica RUPRECHT et MAXIMOWICZ MALVACEAE Hibiscus syriacus L. var. chinensis LINDLEY et PAXTON STERCULIACEAE Corchoropsis psilocarpa HARMS et LOESNER HYMESAEALES ELAEAGNACEAE Elaeagnus umbellatus THUNBERG VIOSALES FLACOURTIINEAE VIOLACEAE Viola acuminata LEDEBOUR V. albrda DALIBIN Viola diamantiaca NAKAI V. dissecta var. chaerophylloides (REAES) W. BECKER V. grypoceras A. GRAY V. keiskei MIQUEL var. okuboi MAKINO V. mandshurica BECKER V. orientalis (MAX.) W. BECKER V. rossii HEMSLEY V. variegata FISCHER ex DC. V. variegata FISCHER var. chinensis REGEL V. variegata FISCHER var. ircutiana REGEL MYRTIFLORAE MYRTINEAE ONAGRACEAE Oenothera odorata JACQUIN UMBELLIFLORAE ALANGIACEAE Marlea macrophylla SIEB. et ZUCC. var. trilobata MIQ. CORNACEAE Cornus controversa HEMSLEY C. walteri WANGERIN ARALIACEAE Acanthopanax sessiliflorum (RUPRECHT) SEEMANN Oplopanax elatum NAKAI Kalopanax pictus (THUNB.) N. var. pictus NAKAI K. pictus N. var. maximowiczii N. Aralts elata SEEMANN

100 미나리과참반디긴사상자사상자참나물개발나물감자개발처녀바디흰바디나물잔잎바디구릿대바디나물참당귀큰참나물묏미나리기름나물어수리 UMBELLIFERAE Sanicula chinensis BUNGE Osmorhiza aristata (THUNB) MAKINO et YABE Torilis japonica (HOUTTUYN) DC. Pimpinella brachycarpa (KOM.) KITAGAWA Sium suave KOH. S. ninsi SINNE Angelica cartilagino-marginata NAKAI A. distance KITAMURA A. czerneria (FISCHER et MEYER) KITAGAWA A. dahurica (FISCHER) BEN A. decursiva FRANCHET et SAVATIER A. gigas NAKAI Ostericum melanotilingia (DEBOISSIEU) KITAGAWA O. sieboldii (MIQUEL) NAKAI Peucedanum terebinthaceum FISCHER ex REICHENBACH Heracleum moellendorffii HANCE 여뀌 술패랭이꽃 동지꽃 함박나무꽃 투구꽃 이질풀

101 큰으아리꽃 물봉선 애기괭이눈 꼬리조밥나무 덩굴딸기 자귀풀

10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1. 식물 3) 천마산식물목록 - 2 식물명 합판화아강진달래목노루발과노루발풀진달래과진달래철쭉산철쭉산앵두나무앵초목앵초과까치수영큰까치수영좁쌀풀봄맞이꽃큰앵초앵초감나무목감나무아목감나무과감나무고욤나무때죽나무과때죽나무쪽동백나무노린재나무과노린재나무물푸레나무목물푸레나무과개나리나무들메나무물푸레나무쥐똥나무용담목마전과큰벼룩아재비용담과용담자주쓴풀박주가리과산해박민백미꽃백미꽃은조롱박주가리왜박주가리꼭두서니과긴잎갈퀴민둥갈퀴산갈퀴갈퀴덩굴네잎갈퀴솔나물꼭두서니큰꼭두서니갈퀴꼭두서니덤불꼭두서니층화식물목메꽃아목메꽃과애기메꽃메꽃 학명 SIMPETALAE ERICALES PYROLACEAE Pyrola japonica KLENZE ex ALEFOLD ERICACEAE Rhododendron mucronulatum TURCZANINOW R. schlippenbachii MAXIMOWICZ R. yedoense MAX. var. poukhanense NAKAI Vaccinium koreanum NAKAI PRMULALES PRIMULACEAE Lysimachia barystachys BUNGE L. clethroides DUBY L. vulgaris L. var. davurica R. KNUTH Androsace umbellata BUNGE Primula jesoana MIQUEL P. sieboldii MORREN EBENALES EBENINEAE EBENACEAE Diospyros kaki HUNBERG D. lotus LINNE STYRACACEAE Styrax japonica SIEBOLD et ZUCCARINI S. obassia SIEB. et ZUCC. SYMPLOCACEAE Symplocos chinensis (KER-GAWLER) N. for. pilosa N. OLEALES OLEACEAE Forsythia koreana NAKAI Fraxinus mandshurica RUPRECHT F. rhynchophylla HANCE Ligustrum obtusifolium SIEB. et ZUCC. GENTIANALES LOGANIACEAE Mitrasacme alsinoides R. BROWN GENTIANACEAE Gentiana scabra BUNGE var. buergeri (MIQUEL) MAX. Swertia pseudo-chinensis (BUNGE) FRANCHET ASCLEPIADACEAE Cynanchum paniculatum (BUNGE) KITAGAWA C. ascyrifolium (FR. et SAV.) MATSUMURA C. atratum BUNGE C. wilfordii (MAX.) HEMSLEY Metaplexis japonica (THUNBERG) MAKINO Tylophora floribunda MIQUEL RUBIACEAE Galium boreale L. var. vulgare TURCZANINOW G. kinuta NAKAI et HARA G. pogonanthum FRANCHET et SAVATIER G. spurium LINNE G. trachyspermum A. GRAY G. verum L. var. asiaticum NAKAI Rubia akane NAKAI R. chinensis REGES et MAACK R. cordifolia L. var. pratensis MAX. R. cordifolia L. var. sylvatica MAX. TUBIFLORAE CONVOLVULUNEAE CONVOLVULACEAE Calysteegia hederacea WALLICH C. japonica CHOISY

103 나팔꽃실새삼새삼지치아목지치과덩굴꽃마리참꽃마리꽃마리당개지치마편초아목마편초과작살나무누리장나무꿀풀과조개나물자란초깨나물향유꽃향유층층이꽃산박하오리방풀방아풀주이깨풀산들깨들깨풀차즈기쉽사리벌깨덩굴꿀풀송장풀익모초석잠풀속단광대수염참배암차즈기단삼배암차즈기골무꽃광릉골무꽃산골무꽃가지아목가지과구기자나무미치광이풀가시꽈리고추까마중독말풀현삼과토현삼현삼나도송이풀구와꼬리풀꼬리풀긴산꼬리풀송이풀꽃며느리밥풀애기며느리밥풀절국대파리풀아목파리풀과파리풀질경이목질경이과질경이긴잎질경이산토끼꽃목인동과 Pharbitis nil CHOISY Cuscuta australis R. BROWN C. japonica CHOISY BORAININEAE BORAGINACEAE Trigonotis icumae MAKINO T. nakaii HARA T. peduncularis BENTHAM Brachybotrys paridiformis MAXIMOWICZ VERBENINEAE VERBENACEAE Callicarpa japonica THUNBERG Clerodendron trichotomum THUNBERG LABIATAE Ajuga multiflora BUNGE A. spectabilis NAKAI Amenthystanthus inflexus N. var. microphyllus MAX. Elsholtzia ciliata GARCKE E. splendens NAKAI Clinopodium chinense O. KUNTZE var. parviflorum Isodon inflexus NAKAI I. excisus (MAX.) NAKAI I. japonicus NAKAI Mosla dianthera MAXIMOWICZ M. japonica MAX. M. punctulata NAKAI Perilla sikokiana NAKAI Lycopus ramosissimus var. japonicus KITAMURA Meehania urticifolia (MEQUEL) MAKINO Prunella vulgaris L. var. lilacina NAKAI Leonurus macranthus MAXIMOWICZ L. sibiricus LINNE Stachys riederi var. japonica NIQUEL Phlomis umbrosa TURCZANINOW Lamium barbatum SIEB. et ZUCC. Salvia chanroenica NAKAI S. miltiorrhiza BUNGE S. plebeia R. BROWN Scutellaria indica LINNE S. insignis NAKAI S. pekinensis var. transitra HARA SOLANINEAE SOLANACEAE Lycium chinense MILL. Scopolia japonica (DUNN) NAKAI Physaliastrum japonicum (YATABE) MAKINO Capsicum annum LINNE Solanum nigrum LINNE Datura tatula LINNE SCROPHULARIACEAE Scrophularia koraiensis NAKAI S. buergeriana MIQUES Phtheirospermum japonicum (THUNB.) KANITZ Veronica dahurica N. V. linariaefolia DALLAS V. longifolia PRINTZ Pedicularis resupinata LINNE Melampyrum roseum MAX. var. typicum FR. et SAV. M. setaceum (MAX.) NAKAI Siphonostegia chinensis BENTHAM ex HOOKER et ARNOTT PHRYMINEAE PHRYMACEAE Phryma leptostachya var. asiatica (MIQUEL) LINNE PLANTAGINALES PLANTAGINACEAE Plantago asiatica DECAISNE P. sibrica POIRET DIPSACALES CAPRIFOLIACEAE

104 인동덩굴올괴불나무붉은병꽃나무병꽃나무덜꿩나무수국백당나무백당나무넓은잎딱총나무딱총나무연복초과연복초마타리과긴잎쥐오줌풀쥐오줌풀넓은잎쥐오줌풀마타리금마타리뚝갈초롱꽃목초롱꽃과자주꽃방망이초롱꽃넓은잔대층층잔대모시대잔대털잔대더덕 소경불알영아자도라지국화과등골나물골등골나물미역취까실쑥부쟁이쑥부쟁이참취개미취개망초망초금불초긴담배풀여우오줌도깨비바늘까치발진득찰털진득찰해바라기뚱딴지톱풀산국구절초산구절초바위구절초개똥쑥사철쑥제비쑥큰제비쑥더위지기맑은대쑥산쑥쑥흰쑥넓은잎외잎쑥중대가리풀머위멸가치 Lonicera japonica THUNB. var. repens (SIEB.) REHDER L. praeflorens BATALIN Weigela florida (BUNGE) DC. var. glabra NAKI W. subsessilis L. H. BAILEY Vibumum erosum THUNB. var. punctatum FR. et SAV. V. pubinerve BLUNE for. letescens NAKAI V. sargentii (N) KITAGAWA Sambucus latipinna NAKAI S. williamsii HANCE var. coreana NAKAI ADOXACEAE Adoxa moschatellina (TOURNEFORT) LINNE VALERIANACEAE Valeriana dagoletiana N. ex MAEGAWA var. integra N. V. fauriei BRIQUET V. officinalis L. var. latifolia MIQUEL Patrinia scabiosaefolia FISCHER P. saniculaefolia HEMSLEY P. villosa (THUNB.) JUSSIEU CAMPANULALES CAMPANULACEAE Campanula glomerata var. dahurica FISCHER C. punctata LAMARCK Adenophora mandschurica NAKAI A. adenophora radiatifolia NAKAI A. remotiflora (SCEB. et ZUCC) MEQUEL A. triphylla var. japonica DC. A. radiatifolia N. var. hirsuta NAKAI Codonopsis lanceolata (SIEB et ZUCC.) BENTHAM et HOOKER C. ussuriensis (RUPR. et MAX.) HEMSLEY Phyteuma japonicum MIQUEL Platycodon grandiflorum (JACQ.) A. DC. COMPOSITAE Eupatorium chinense var. simplicifolium KITAMURA E. lindleyanum DC. Solidago virgaaurea L. var. asiatica (BENTHAM) A. GRAY Aster ageratoides TURCZ. var. ovatus NAKAI A. yomene FRANCHET A. scaber THUNBERG A. tataricus L. var. nakaii KITAMURA Erigeron annuus LINNE E. canadensis LINNE Inula britannica L. var. chinensis (RUPR.) REGEL Carpesium divaricatum SIEBOLD et ZUCCARINI C. macrocephalum FRANCHET et SAVATIER Bidens biternata (LOUREIRO) MERRILL et SHERF B. pubescens MAKINO Siegesbeckia glabrescens MAKINO S. pubescens MAKINO Helianthus annuus LINNE H. tuberosus LINNE Achillea sibrica LEDEB. Chrysanthemum boreale NAKINO C. zawadskii var. latilobum TURCZANINOW C. zawadskii (DC.) KOM. C. sibricum TURCZ. var. alpinum NAKAI Artemisia annua LINNE A. capillaris THUNBERG A. japonica THUNBERG A. japonica THUNB. var. mandshurica KOMAROV A. iwayomogi N. A. keiskeana HIQUEL A. montana KITAMURA A. indica WILLDENOW A. siebersiana WILLDENOW A. stolonifera (MAX.) KOMAROV Centipeda minima (L.) AL. BRAUN et ASCHERSON Petasites japonicus (SIEB. et ZUCC.) MAX. Adenocaulon himalaicum EDGEW

105 쑥방망이솜방망이개쑥갓우산나물박쥐나물 곰취지느러미엉겅퀴고려엉겅퀴조뱅이지칭개금강분취은분취서덜취각시더덜취각시취수리취큰수리취삽주당삽주단풍취솜나물쇠서나물조밥나물까치고들빼기이고들빼기보리뺑이고들빼기왕고들빼기산씀바귀선씀바귀흰민들레산민들레민들레도꼬마리께묵뻐꾹채 Senecio argunensis TURCZANINOW S. integrifolius var. spathulatus MIQUEL S. valgaris LINNE Syneilesis palmata MAXIMOWICZ Cacalia kamtschatica (MAX.) var. matsumurae (N.) KITAMURA) Ligularia fischeri (LEDEBOUR) TURCZANINOW Carduus crispus LINNE Cirsium sentidens NAKAI Cephalonoplos segetum (BUNGE) KITAMURA Hemistepta lyrata BUNGE Saussurea diamantiaca NAKAI S. gracilis MAXIMOWICZ S. grandifolia MAX. var. genuina HERDER S. grandifolioides NAKAI S. pulchella FISCHER ex DC. Synurus deltoides (AITON) NAKAI S. excelsus (MAKINO) KITAMURA Atractylodes japonica KOIDZUMI A. chinensis A. P. DC. Ainsliaea acerifolia SCHULTZ-BIPONTINUS Leibnitzia anandria (L.) NAKAI Picris hieracioides var. glabrescens OHWI Hieracium umbellatum LINNE Youngia chelidoniifolia KITAMURA Y. denticulata KITAMURA Y. japonica (L.) DC. Y. sonchifolia MAXIMOWICZ Lactuca indica var. laciniata MAKINO L. raddeana HAXIMOWICZ Ixeris chinensis N. var. strigosa OHWI Taraxacum coreana NAKAI T. ohwianum KITAMURA T. platycarpum H. DAHLSTAEDT Xanthium strumarium LINNE Hololeion maximowiczii KITAMURA Rhapontica uniflora DC. 단자엽식물강백합목백합아목백합과처녀치마여로파란여로참여로윤관나물애기나리큰애기나리참비비추산옥잠화원추리큰원추리애기원추리얼레지산자고털중나리말나리중나리하늘말나리무릇달래참산부추산부추부추은방울꽃풀솜대 MONOCOTYLEDONEAE LILIIFLOREAE LILIINEAE LILIACEAE Heloniopsis orientalis (THUNB.) KOMAROV Veratrum maackii var. japonicum T. SHIMIZU V. vesicolor N. for. viride NAKAI V. maackii REGEL var. macranthum NAKAI Disporum sessile D. DON D. smilacinum A. GRAY D. viridescens (MAX.) NAKAI Hosta clasus N. var. normalis F. MAEKAWA H. lancifolia ENGLER Hemerocallis falva BAKER H. middendorfii TRAUTVETTER et MEYER H. minor MILLER Erythronium japonicum DECAISNE Tulipa edulis (MIQUEL) BAKER Lilium amabile PALIBIN L. distichum NAKAI L. leichtlinii HOOKER var. tigrinum NICHOLSON L. tsingtauense MAKINO Scilla scilloides MERRILL Allium monanthum MAXIMOWICZ A. sacculiferum MAX. A. thunbergii D. DON A. odorum LINNE Convallaria keiskei MIQUEL Smilacina japonica A. GRAY

106 왕죽대아재비풍둥굴레용둥굴레둥굴레왕둥굴레개맥문동방울비짜루비짜루청미래덩굴선밀나물밀나물청가시덩굴수선화과상사화마과마참마부채마국화마단풍마도꼬로마붓꽃아목붓꽃과꽃창포붓꽃금붓꽃골풀목골풀과날개골풀골풀비녀골풀꿩의밥닭의장풀목닭의장풀아목닭의장풀과닭의장풀덩굴닭의장풀곡정초아목곡정초과실개수염흰개수염화본목벼과포아풀청포아풀김의털쌀새참새귀리메귀리향모실새풀 갈대새조개풀개나래새그령참새그령대새풀잔디개기장돌피주름조개풀바랭이민바랭이나도개피참새피금강아지풀강아지풀 Streptopus koreanus (KOM.) OHWI Polygonatum inflatum KOMAROV P. involucratum MAXIMOWICZ P. odoratum var. pluriflorum OHWI P. robustum NAKAI Liriope koreana NAKAI Asparagus oligoclonus MAXIMOWICZ A. schoberioides KUNTH Smilax china LINNE S. nipponica MIQUEL S. riparia var. ussuriensis HARA et T. KOYAMA S. sieboldii MIQUEL AMARYLLIDACEAE Lycores sguamigera MAXIMOWICZ DIOSCOREACEAE Dioscorea batatas DECAISNE D. japonica THUNBERG D. nipponica MAKINO D. septemloba THUNBERG D. quinqueloba THUNB. D. tokoro MAKINO IRIDINEAE IRIDACEAE Iris ensata THUNB. var. spontanea (MAKINO) N. I. nertschinskia HORNEM I. savatieri NAKAI JUNCALES JUNCACEAE Juncus alatus FRANCHET et SAVATIER J. effusus L. var. decipiens BUCHENAU J. krameri FRANCHET et SAVATIER Luzula capitata (MIQUEL) NAKAI COMMELINALES COMMELININEAE COMMELINACEAE Commelina communis LINNE Steptolirion cordifolium (GRIFFITH) O. KUNTZE ERIOCAULINEAE ERIOCAULACEAE Eriocaulon decemflorum MAX. var. nipponicum N. E. sikokianum MAXIMOWICZ GRAMINALES GRANIACEAE Poa sphondylodes TRINIUS P. viridula PALIBIN Festuca ovina L. var. vulgaris KOCH Melica oneoi FRANCHET et SAVATIER) Bromus japonicus THUNBERG Avena fatua LINNE Hierochloa odorata BEAUVOIS Calamagrostis arundinacea (L.) ROTH var. sciurioides HACKEL Phragmites communis TRINIUS Arundinella hirta (THUNB.) TANAKA Arthraxon hispidus (THUNB.) MAKINO Arrhenatherum elatius (L.) PRESL Eragrostis ferruginea (THUNB.) DE BEAUVOIS E. cilianensis (ALLION) LINK Cleistogenes nackelii HONDA Zoysia japonica STEUDEL Panicum bisulcatum THUNBERG Echinochloa crus-galli (L.) BEAUV. Oplismenus undulatifolius ROEM. et SCHULT Digitaria sanguinalis (L.) SCOP. D. violascens LINK Eriochloa villosa (THUNB.) KUNTH Paspalum thunbergii KUNTH Setaria glauca (L.) BEAUVOIS Setaria viridis DE BEAUVIOS

107 기장대풀억새나도바랭이새 쇠치기풀나도기름새개솔새쇠풀큰기름새기름새솔새왕바랭이수크령천남성목천남성과창포앉은부채천남성두루미천남성점박이천남성넓은잎천남성반하사초목사초과솔방울고랭이송이고랭이방울고랭이네모꼴꽃하늘지기방동사니왕골참방동산이방동산이대가리파대가리길둑사초청사초애기사초산거울참삿갓사초개찌버리사초그늘사초산괭이사초왕비늘사초애기흰사초대사초생강목난초과개불알꽃은난초은대난초닭의난초타래난초병아리난초제비난초큰방울새란천마키다리난초나나벌이난초나리난초감자난초 Isachne globosa (THUNB.) O. KUNTZE Miscanthus sinensis var. purpurascens RENDLE M. vimineum(trinius) E. CAMUS var. polystachyum (FR. et SAV.) OHWI Hemarthria sibirica (GANDOGER) OHWI Bothriochloa parviflora (R. BROWN) OHWI Cymbopogon tortilis var. goeringii (STEUD.) HAND.-MAZZ. Andropogon brevifolius SWARTZ var. genuina HACKEL Spodiopogon sibiricus TRINIUS S. cotulifer A. CAMUS Themeda triandra var. japonica (WILLDENOW) TANAKA Eleusine indica (L.) GAERTNER Pennisetum alopecuroides TRINIUS ARAIES ARACEAE Acorus calamus L. var. angustatus BESSER Symplocarpus renifolius SCHOTT Arisaema amurense MAX. var. serratum N. A. heterophyllum BLUME A. peninsulae NAKAI A. robustum (ENGLER) NAKAI Pinellia ternata (THUNB.) TENORE ex BREITENBACH CYPERALES CYPERACEAE Scirpus karuizawensis MAKINO S. mucronatus LINNE S. wichurae BOCKEREL Elaeocharis tetraguetra NEES Bulbostylis densa (WALLICH) HANDEL-MAZZETTI Cyperus amuricus MAX. var. laxus (FR. et SAV.) N. C. exaltatus RETZIUS var. twasakii T. KAYAMA C. iria LINNE C. sanguinolentus VAHL Kyllinga brevifolia var. leiolepis HARA Carex bostrychostiagma MAXIMOWICZ C. breviculmis R. BROWN C. conica BOOTT C. humilis LEYSSER var. nana OHWI C. jaluensis KOMAROV C. japonica THUNBERG C. lanceolata BOOTT C. leiorhyncha C. A. MEYER C. maximowiczii MIQUEL C. mollicula BOOTT C. siderosticta HANCE SCITAMINEAE ORCHIDACEAE Cypripedium macranthum SWARTZ Cephalanthera erecta (THUNB.) BLUME C. longibracteata BLUME Epipactis thunbergii A. GRAY Spiranthes sinensis (PERSOON) AMES Amitostigma gracilis (BLUME) SCHLECHTET Platanthera metabifolia F. MAEKAWA Pogonia japonica REICHENBACH Gastrodia elata BLUME Liparis japonica (MIQUEL) MAXIMOWICZ L. krameri FRANCHET et SAVATIER L. makinoana SCHLECHTER Oreorchis patens LINDLEY

108 큰까치수염 민백이꽃 백당나무 마타리 용담 박주가리 꽃며느리밥풀 인동덩굴

109 처녀치마 애기나리 털중나리 무릇 은방울꽃 둥글레

11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1. 식물 4) 약용식물 남양주시는산이높고골이깊어서임상 ( 林相 ) 이잘발달되어있고약용식물도대단히많이있다. 예로부터남양주지역에서나오는약용식물은민간사약으로도널리이용되었을뿐만아니라수도한양이가까워서한약자원의중요한공급원이되어왔다 년대부터남양주의약용식물에대한채집과연구가활발하게이루어졌다 년성균관대학교약학대학의전봉식 안병호 윤미정등은 천마산식물조사보고 ( 제 1 보 ) 를성균약학에발표하였고, 1962 년중앙대학교약학대학의손정수 정사홍 박수서 이만구등은 천마산의식물상 을중앙약학에발표하였으며, 1963 년경희대학교한의대학의육창수 김종우 안덕균등이 천마산의약품자원식물 을경희의약지에발표하는등천마산을대상으로약용식물채집과연구가이루어지기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자생하는고등식물은 3000 여종에이르며약용식물은 900 여종으로알려져있다. 다음표는육창수가채집 발표한것중남양주지역에서채집된것을정리한것이다. 이에따르면이지역의약용식물은약 19 과 46 종에이른다. < 남양주지역의약용식물 > 과 / 구분식물명자생지효능 고비과 고란초고비 불암산천마산, 광릉 이뇨제, 임질약강장제, 이뇨제 고사리과 관중고사리은방울꽃얼레지중의무릇 광릉천마산, 축령산외천마산, 광릉천마산, 광릉광릉 촌충구제약고혈압강심, 이뇨제이질, 연골, 강장제, 구토, 하제자양강장제 백합과 원추리개맥문동왕둥글레여로 천마산, 축령산외광릉광릉광릉 이뇨, 지혈, 소화, 간질환치조, 평사제, 진해, 자양제강장제, 지사약비듬치료제 벼과 띠두루미천남성 광릉불암산 이뇨제, 지혈제거담, 이뇨, 진통, 강장, 창상 천남성과 점박이천남성넓은잎천남성 광릉광릉 거담, 이뇨, 진통, 강장, 창상거담, 이뇨, 진통, 강장, 창상 난초과천마천마산진경, 중풍, 강장, 현기증, 두통 뽕나무과 환삼덩굴복수초승마 광릉천마산, 광릉광릉 고미진위약, 이질, 이뇨약강심, 이뇨발한, 해열, 해독, 두통 미나리아재비과 자주조희풀노루귀진교할미꽃 광릉천마산, 광릉광릉천마산, 광릉 치냉, 건위, 거담장질환, 두통, 해수진경, 진통, 살충약, 신경통, 중풍이질, 소염, 수렴 매자나무과 매자나무삼지구엽초애기현호색들현호색 광릉천마산광릉광릉 지사, 이질보정, 강장, 음위, 진망, 동물정력제정혈, 진통, 지통, 복통, 월경등정혈, 진통, 지통, 복통, 월경등 양귀비과 현호색빗살현호색피나물 광릉천마산, 묘적산, 광릉천마산, 광릉, 평내 정혈, 진통, 지통, 복통, 월경등정혈, 진통, 지통, 복통, 월경등거풍습, 지통, 지혈 장미과 뱀무딱지꽃 광릉광릉 이뇨제아메바성적리, 해열, 통경, 지혈 제비꽃과둥근털제비꽃천마산, 광릉통경 두릅나무과 가시오갈피나무잔잎바디흰바디나물 광릉천마산, 광릉광릉 강장, 정력증진, 고혈압, 당뇨, 신경통신경통, 중풍, 요통, 두통두통, 진통, 진정 미나리과 참당귀묏미나리어수리 천마산천마산, 광릉광릉 보혈, 빈혈증, 산후복통, 진통, 건위, 진정신경통, 중풍, 진정, 진통신경통, 중풍, 요통, 두통

111 노루발과노루발풀광릉이뇨, 금창출혈, 절상, 독충 용담과자주쓴풀천마산소화불량, 식욕부진, 감기, 설사, 구충제 마편초과누린내풀천마산, 광릉피임제, 이뇨제, 기관지염, 복통 꿀풀과 조개나물향유 광릉광릉 이뇨, 연주창, 임질, 치창, 골근통발한, 해열, 이뇨, 소염, 복통, 토사 국화과 큰엉겅퀴뻐꾹채 광릉광릉 정력제해열, 해독, 항염증, 유옹 출전 : 육창수, 한국약용식물도감, 아카데미서적, 1989 ; 이창복, 약용식물도감, 농촌진흥청, 고비 (Osmunda japonica) 고비과에속하며, 여러해살이양치류이다. 뿌리줄기는덩이모양을이루고잎은깃꼴겹잎이며뭉쳐나는데, 높이는 1m 가량된다. 전국적으로높은산에난다. 고란초 (Crypsinus hastatus) 고비과에속하며, 여러해살이상록양치류이다. 땅속줄기는옆으로뻗으며적갈색의선형비늘조각으로덮여있고여러개가총생한다. 불암산에난다. 관중 (Dryopteris crassirhizoma) 고사리과에속하며, 여러해살이양치류이다. 땅속줄기는덩이모양으로비대하며곧게서고, 높이는 1.4m 에이른다. 광릉에난다. 고사리 (Pteridium aquilinum var. latiusculum) 고사리과에속하며, 여러해살이양치류이다. 뿌리줄기는연필굵기이지만단단하고, 길이는약 30 cm정도이다. 전국각지의산야에난다. 은방울꽃 (Convallaria keiskei) 백합과에속하며, 여러해살이초본이고, 땅속줄기는가로로뻗으며많은수염뿌리가난다. 잎은 2 3 개잎이근생하며잎자루가길다. 천마산과광릉에난다. 얼레지 (Erythronium japonicum) 백합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비늘줄기는난상원주형으로비후하며, 화경은가늘고길다. 높이는 25 cm이고, 천마산과광릉에난다. 중의무릇 (Gagea lutea) 백합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비늘줄기는난형이며지름은약 1 cm정도이고황백색을띤다. 화경은곧게서며연하고높이는약 20 cm가량이다. 광릉에난다. 원추리 (Hemerocallis fulva) 백합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화경은곧게서며높이 1m 에이르고, 잎은선형으로단단하고길이는 cm이다. 천마산과축령산에난다. 개맥문동 (Liriope koreana) 백합과에속하며상록여러해살이초본이다. 땅속줄기는짧고굵으며수염뿌리는가늘고길며드물게소괴근을낸다. 잎은선형으로길이 cm이다. 광릉에난다. 왕둥글레 (Polygonatum robustum) 백합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땅속줄기는길게가로로뻗으며다소마디가있고수염뿌리가있다. 줄기는곧게서며모가있고약 70 cm이다. 광릉에난다. 넓은잎천남성 (Arisaema robustum) 천남성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알뿌리는공모양이며인편은얇은막질이고위경은곧게서며높이 20 cm이다. 잎은위경꼭대기에서나온다. 광릉에난다. 천마 (Gastrodia elata) 난초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기생초본이다. 덩이줄기는비대하여긴타원형이고가로로뻗으며길이 7 15 cm이다. 줄기는곧게서며높이 1m 정도이고황적색을띤다. 잎은보통없고인편엽이드물게나며, 덩이줄기를천마 ( 天麻 ) 라한다. 천마산에난다. 복수초 (Adonis amurensis) 미나리아재비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꽃은이른봄에줄기끝에한송이씩노랗게피며잎은깃모양으로깊게갈라진다. 천마산과광릉에난다. 승마 (Cimicifuga heracleifolia) 미나리아재비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줄기는곧게서며높이 1.2m 에이른다. 꽃은수상화서가줄기끝에나는데, 8 9 월에작은꽃이많이달린다. 뿌리줄기를승마 ( 升麻 ) 라고한다. 천마산과광릉에난다. 노루귀 (Hepatica asiatica) 미나리아재비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뿌리줄기는비스듬히올라가며마디가많고수염뿌리가많다. 잎은뿌리에서뭉쳐나며잎자루는길고 25 cm정도이며 3 개의소엽이달린다. 천마산과광릉에난다. 삼지구엽초 (Epimedium koreanum) 매자나무과에속하는여러해살이초본이다. 뿌리줄기는단단하고수염뿌리가많으며줄기는보통모여산다. 근생엽은잎자루가길고, 줄기에서나온잎은잎자루가짧고 2 회 3 출엽이달린다. 전초를음양곽이라고하며천마산에난다. 현호색 (Corydalis turtschaninovii) 양귀비과에속하며여러해살이초본이다. 덩이줄기는구형이며지름은 1 cm정도이다. 줄기는연하고곧게서며높이 20 cm정도이다. 광릉에난다. 피나물 (Hylomecon vernale)

112 양귀비과에 속하며 두해살이 초본이다. 온몸에 털은 없고 노란액체를 지닌다. 뿌리줄기는 약간 비대하며 줄기는 연하고 곧게 선다. 높이 30 가량으로 천마산, 평내, 광릉에 난다. 가시오갈피나무(Acanthopanax senticosus) 두릅나무과에 속하며 낙엽관목이다. 높이 2 3m이고 잎은 장상복엽으로 소엽은 3 5개가 된다. 뿌리껍질을 소련에서는 시베리아 인삼이라 고 부른다. 광릉에 난다. 참당귀(Angelica gigas) 미나리과에 속하며 2 3년생 초본이다. 잎은 1 2회, 3출엽이며 소엽은 3 5갈래로 갈라진다. 뿌리를 당귀라고 하며, 천마산에 난다. 어수리(Heracleum moellendorffii) 미나리과에 속하며 여러해살이 초본이다. 줄기는 곧게 서며 높이 1.5m이다. 잎은 깃꼴겹잎으로 어긋나며 3 5출엽이고 소엽은 3 5갈래로 갈라진다. 뿌리를 만주독활이라 한다. 천마산, 광릉에 난다. 노루발풀(Pyrola japonica) 노루발과에 속하며, 여러해살이 상록 초본이다. 잎은 1 8개가 밑부분에 모여 나며, 잎자루는 길다. 잎 줄기는 이뇨제에 쓰고 즙액은 독벌레 에 쐬었을 때 바른다. 전초를 녹제초라 하고 광릉에 난다. 자주쓴풀(Swertia pseudo-chinensis) 용담과에 속하며 2년생 초본이다. 줄기는 곧게 서며 흑자색이고, 높이 이다. 전초를 당약이라 하며 천마산에 난다. 누린내풀(Caryopteris divaricata) 마편초과에 속하며 여러해살이 풀이다. 전체에 짧은 털이 있고 높이 1m 정도이다. 온몸에서 누린내가 난다. 천마산과 광릉에 난다. 향유(Elsholtzia ciliata) 꿀풀과에 속하며 한해살이 초본이다. 줄기는 모가 지며 높이 이다. 온몸을 향유라고 한다. 광릉에 난다. 고비 관중 엘레지 천마 노루귀 삼지엽초 file:///c/남양주사료집/history/his_74.html[ 오후 2:16:21]

113 노루발풀 누린내풀 두령편 여수리 원추리 승마 향유 자주쓴풀

11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2. 동물 동물계는크게척추동물과무척추동물로나눈다. 척추동물은포유류, 조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5 분야로나누어지고, 무척추동물은절지동물, 연체동물등이있다. 포유류는척추동물에속하는한강 ( 綱 ) 으로, 몸의피부에는반드시털이나그변형물이있고, 조직이복잡하고온형동물이며, 태생 ( 胎生 ) 을한다. 폐로호흡을하는고등동물이며암컷은젖을먹여서새끼를기른다. 남양주시는한북정맥에놓여있고, 백두대간과연결되어있어동물의이동이자유로웠으나한국전쟁을거치는동안에많은동물들이사라졌고남북의철조망마저생겨이동로가차단되었다. 또한자연환경이많이파괴되기도하였지만인간들이동물을남획함으로써동물의종들이줄어들고개체수마저적어졌다. 환경청에서는자연보존의시급함을깨닫고전국적으로동물생태계조사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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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2. 동물 1) 포유류 남양주에서식하는동물로는 10 과에 13 종정도가알려졌다. 환경청에서는천마산에서조사한포유류로멧돼지, 청설모, 족제비, 너구리, 하늘다람쥐, 오소리, 노루등 7 종 14 개체의발자국 배설물 서식처등을찾아낸바있다. 멧돼지, 노루, 오소리, 족제비는개체수가극히적어졌다. 여우, 늑대는 50 여년전에멸종되었으며너구리역시드물어졌고삵 ( 살쾡이 ) 도멸종되었으며산토끼, 다람쥐, 청설모, 하늘다람쥐등은약간의개체가활동중이다. 고슴도치, 두더지등은그개체수가많이줄어들었다. 삼림이복원되고수렵을억제하여자연보존에힘쓰게되면많은포유류들이늘어날것으로본다. < 남양주에서식하는포유류 > 과이름학명비고 멧돼지과멧돼지 Korean wild boar 사슴과노루 Korean roe 족제비과 오소리족제비 Korean badger Korean minle 개과 여우늑대너구리 Korean fox Asiatic wolf Korean racoon dog 멸종멸종 고양이과삵 ( 살쾡이 ) Smalleared cat 멸종 토끼과산토끼 Corean hare 다람쥐과 쥐과 다람쥐청설모하늘다람쥐 집쥐 ( 시궁쥐 ) 생쥐 Manchurian chipmunk Korean squrell Korean small flying squrrell Brown rat Asian house mouse 고슴도치과 고슴도치 Korean hedge hog 두더지과 두더지 Korean mole 박쥐과 박쥐 출전 : 문교부, 한국동식물도감 동물편( 포유류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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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2. 동물 2) 조류 척추동물에속하는한강 ( 綱 ) 으로, 파충류에서진화되어체제가비슷한데, 온혈동물이며난생을한다. 몸의표면은우모 ( 羽毛 ) 로덮여있고, 후지 ( 后肢 ) 는발이되고, 전지 ( 前肢 ) 는날개로변하였다. 몸은머리, 목, 몸통, 날개, 발의다섯부분으로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서식하는조류는약 396 종이보고되었으나현재는그수가줄어들어 220 여종정도가된다. 그중일년내내살고있는텃새는 58 종, 겨울철새 117 종, 여름철새 64 종, 나그네새 103 종이며우리나라를통과하다가길을잃고그냥눌러사는미조는 53 종이된다. 남양주시는천마산을비롯해산이많고, 한강과북한강의수계가발달되어많은새들의보금자리가되고있다. 이지역에서식하는조류는약 31 과 89 종에이른다. 그중텃새가 33 종, 여름철새가 35 종, 겨울철새가 14 종, 나그네새가 7 종이다. 또한천연기념물로크낙새, 원앙, 독수리, 말똥가리, 매, 황조롱이, 두견이, 소쩍새, 솔부엉이등이있다. < 남양주에서식하는새 > 과 / 구분이름서식처텃새여름철새겨울철새나그네새천연기념물 논병아리과논병아리전국하천, 호수, 못 백로과 덤불해오라기검은댕기해오라기 광릉광릉, 논, 개울 오리과원앙광릉, 팔당댐등산간계류 수리과 독수리말똥가리솔개새매 광릉전국경기, 강원의구릉지 매과 매황조롱이 경기, 강원, 경남, 전남전국 꿩과 메추라기꿩 전국전국 뜸부기과 쇠뜸부기사촌쇠뭍닥뜸부기 전국의숲팔당호, 전국의저수지전국의논, 물가 비둘기과멧비둘기전국 두견이과 뻐꾸기두견이수리부엉이칡부엉이소쩍새솔부엉이올빼미 전국전국전국전국전국전국, 특히중부지방광릉 물총새과 청호반새호반새물총새 전국물가의구릉전국물가의구릉전국물가의구릉 파랑새과파랑새전국 후투리과후투리전국, 특히중부지방 딱다구리과 청딱다구리까막딱다구리크낙새오색딱다구리큰오색딱다구리쇠딱다구리 광릉, 전국광릉, 설악산광릉광릉, 전국광릉전국 종다리과종다리전국 제비과 제비귀제비 전국전국 할미새과 노랑할미새알락할미새 전국개울가, 산간계곡전국개울가, 산간계곡

119 검은등할미새진접읍내각리 할미새사촌과할미새사촌전국 직박구리과직박구리전국 때까치과 칡때까치때까치노랑때까치 중부내륙의숲광릉, 전국전국 여새과 황여새홍여새 전국전국 굴뚝새과굴뚝새전국 딱새과 딱새호랑지빠귀되지빠귀흰눈섭붉은배지빠귀개똥지빠귀노랑지빠귀붉은머리오목눈이휘바람새개개비흰눈섭황금새노랑딱새삼광조 전국전국경기도일대경기도, 광릉전국전국전국전국전국강가갈대밭전국전국, 홍릉임업시험장광릉, 거제, 제주, 김제 오목눈이과오목눈이전국의숲 박새과 쇠박새진박새박새곤줄박이 광릉, 전국의숲광릉, 전국광릉, 전국광릉, 전국의숲 동고비과동고비광릉, 전국의숲 멧새과 멧새흰배멧새붉은뱀멧새노랑눈섭멧새쑥새노랑턱멧새꼬마참새촉새 전국의숲과들전국의숲과들전국의숲과들남양주, 포천전국전국전국의조밭, 보리밭전국 되새과 되새방울새양진이멋장이새밀화부리콩새참새 전국전국광릉, 전국광릉, 중부지방내륙덕소, 전국전국전국 찌르레기과 찌르레기북방쇠찌르레기 광릉, 전국중부이북지방 꾀꼬리과꾀꼬리광릉, 전국 까마귀과 어치물까치까치까마귀떼까마귀 광릉, 전국내륙지방전국전국전국 출전 : 문교부, 한국동식물도감 동물편 ( 포유류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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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2. 동물 3) 어류 어류는척추동물에속하는한강 ( 綱 ) 으로, 입의위턱과아래턱을움직여아가미로호흡을하고, 먹이를포식한다. 대개배, 가슴, 등, 꼬리, 볼기에지느러미를갖추고부레가있어서물속을헤엄쳐다닌다. 몸의표면은비늘로덮이고, 뼈는연골또는경골로이루어지고, 코는한쌍이있으나인두와통하지는않는다. 난생또는난태생을한다. 물고기는고대부터식용으로널리이용되어왔다. 원시인들은사슴, 멧돼지, 노루등을잡는수렵생활과냇가에서물고기를잡는수렵생활로생명을이어갔다. 현대역시물고기는인간에게식량자원으로서무척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식하는물고기는모두 900 여종에이른다. 많은종류들은바다에서사는것들이고민물에서사는것은훨씬적다. 남양주에는북한강수계의구운천과한강수계의왕숙천이있어물고기가많이있었으나수량이부족해지고더욱이하천의오염으로인하여물고기들의생활환경이파괴되면서그수가급격히줄어들었다. 남양주시에서식하고있는담수어류는 8 과 17 종에이른다. 뱀장어과의뱀장어, 잉어과의잉어 붕어 쉬리 모래무지 버들치 피라미 끄리, 기름종개과의미꾸라지 미꾸리 기름종개, 메기과의메기, 퉁가리과의퉁가리, 송사리과의송사리, 농어과의꺽지 쏘가리, 가물치과의가물치등이있다. 뱀장어뱀장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130 cm에이른다. 담수에살다가산란하기위해늦은여름에바다에내려가깊은바다에산란한다. 부화된새끼뱀장어는탈바꿈을거듭하면서실뱀장어가되어하천으로올라온다. 아직뱀장어의산란장소는규명되지않았다. 식용으로많이이용되며실뱀장어를잡아양식한다. 잉어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100 cm에이른다. 물살이세지않은진흙바닥인담수에서식한다. 잡식성으로수서곤충, 소형갑각류, 실지렁이등을먹고살며산란기는 5 6 월경이다. 우리나라전역담수에분포한다. 붕어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cm이고우리나라전담수지역에살며하천중류이하의물흐름이적은수초가많은곳에서식한다. 잡식성으로소형갑각류, 수서곤충, 식물의연한조직이나씨를먹는다. 산란기는 4 7 월로큰비가온후수초가무성한얕은장소에모여산란한다. 쉬리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10 cm이다. 하천중상류의맑은물이흐르는곳의여울자갈바닥에살면서수서곤충이나작은동물을주로섭식한다. 산란기는 5 7 월로여울자갈이나큰돌의아래쪽에산란하며, 두꺼운알껍데기에싸인다. 성어가되기까지는 3 년이걸린다. 우리나라의고유종으로예성강과휴전선이남의담수역에분포한다. 근래그서식지가파괴되고있어서서식밀도가급격히줄어들고있으므로보호가필요한종이다. 모래무지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20 cm에이른다. 물이맑고바닥에모래가깔린곳에서살며, 때로는모래속에몸을묻는습성이있다. 수서곤충과작은동물들을잡아먹는다. 산란기는 5 6 월이며모래바닥에산란한후모래로알을덮는다. 버들치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10 cm정도이다. 산란계류의찬물속에주로살면서수서곤충이나조류를먹고산다. 산란기는 5 6 월이며모래바닥에알을낳는다. 피라미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17 cm에이른다. 물이맑은하천의중류여울에서많이살며자갈이나모래에붙어있는조류를주로먹는다. 산란기는 5 7 월로바닥에모래가깔린곳에서낳고수컷이산란장소를만들고암컷을유인하여알을낳으나보호하지는않으므로산란하는도중이나산란후에다른물고기가알을먹는경우가흔히있다. 끄리잉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30 cm에이른다. 강하류에서식하며조류, 수초, 수서곤충등을먹고산다. 산란기에는떼를지으며산란기는 6 8 월로추정되나한살이에대해서는알려진것이없다. 최근에많이줄어들어보호가시급하다. 미꾸라지기름종개과에속하며몸길이는 20 cm에이른다. 입가에 5 쌍의수염이길게나있다. 하천이나못, 논의수로등지에산다. 바닥이진흙인곳에서식하지만하천에서도살고, 조류나유기물질을먹는다. 산란기는 6 7 월이며저녁이나밤사이에산란하고알은진흙속에묻는다. 미꾸리기름종개과에속하며몸길이는 17 cm에이른다. 형태는미꾸라지보다좀작고빛깔과얼룩무늬가심하며배는담황색이고수염이좀짧다. 식성과서식지는미꾸라지와비슷하다. 기름종개기름종개과에속하며몸길이는 15 cm에이른다. 물의흐름이느린모래가깔린깨끗한곳에서식하면서조류와작은동물들을먹고산다. 산란기는 5 6 월로추정되며생활사는불분명하다. 몸에비늘이없고매끄러워서잡기가쉽지않다. 메기메기과에속하며몸길이는 50 cm에이른다. 콧구멍앞과아래턱에수염이각각 1 쌍씩있다. 몸빛깔은검은갈색이거나황갈색이고구름모양의얼룩무늬가있는개체도있다. 물흐름이완만하고바닥에해감이깔려있는하천이나호수에살며밤에어린물고기와소동물들을잡아먹고

122 산다. 산란기는 7 8 월이고바닥이나수초에알을낳는다. 퉁가리퉁가리과에속하며몸의길이는 13 cm이다. 물이맑고자갈이많은하천의중상류에서식하며야간에수서곤충을주로먹는다. 산란기는 5 6 월이며지느러미에찔리게되면통증을느낀다. 우리나라의고유종으로한강수계, 임진강등에분포한다. 송사리송사리과에속하며몸길이는 4 cm정도이다. 수심이얕고물이거의흐르지않는호수, 늪, 하천에많이살고있으며수면가까이떼지어헤엄친다. 오염에잘견딘다. 산란기는 5 7 월이며햇빛의양에따라연중산란한다. 산란은주로아침에하고암컷이알을달고다니다가수초에붙인다. 주로동물성플랭크톤을먹고산다. 꺽지농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20 cm정도에이른다. 물이맑고자갈이많은하천상류에서식하며갑각류나수서곤충을주로먹고산다. 산란기는 5 6 월이며우리나라의전하천에분포하는한국고유종이다. 쏘가리농어과에속하며몸길이는 30 cm이다. 물이맑고바위나큰자갈이많은큰강의중류에서살며수서곤충이나다른물고기를잡아먹는다. 산란기는 5 7 월이며최근에는그수가많이줄어들었다. 가물치가물치과에속하며몸길이는 100 cm에이른다. 연못, 늪또는흐름이거의없는하천에서물고기나개구리따위를먹고산다. 아가미안에있는부속호흡기관을이용하여공기호흡을할수있으므로수온이높은곳에서도잘산다. 산란기는 5 8 월이며암수공동으로물위에둥지를만든후산란한다. 거의전국적으로분포한다. < 남양주에서식하는물고기 > 과 / 구분이름학명분포비고 뱀장어과뱀장어 Anguilla japonica 전국의하천 잉어과 잉어붕어쉬리모래무지버들치피라미끄리 Cyprimus carpio Carassius auratus Coreoleuciscus splendidus Pseudogobia esocinus Phoxinus oxyceph Zacco platypus Opsariichthys uncirostris 전국의담수역전국의담수역예성강, 휴전이남의담수역서해, 남해로흐르는하천서해, 남해로흐르는하천서해, 남해로흐르는하천서해, 남해로흐르는하천 고유종 기름종개과 미꾸라지미꾸리기름종개 Misgurnus mizolepis M. anguillicaudatus Cobitis sinensis 서해, 남해로흐르는하천전국의담수역낙동강수계 메기과메기 Silurus asotus 전국의담수역 퉁가리과퉁가리 Liobagrus andersoni 한강, 임진강의수계 송사리과송사리 Oryzias latipes 수심이낮은하천, 호수, 늪 농어과 꺽지쏘가리 Coreoprca Siniperca scherzeri 전국의하천전국의서해, 남해로흐르는하천 고유종 가물치과가물치 Channa argus 전국의못, 늪, 흐름이없는하천 출전 : 최기철외, 한국담수어도감, 향문사, 1990; 최기철외, 민물고기이야기, 한길사, 1991; 김익수외, 한국어류도감, 아카데미서적, 1993; 정기문, 어류박물지, 일지사, 1983.

12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2. 동물 4) 양서류와파충류 양서류는척추동물에속하며, 동물분류상한개의강 ( 綱, Class) 을이룬다. 어류와파충류의중간으로, 육생 ( 陸生 ) 과수생 ( 水生 ) 을하므로양서류 ( 兩棲類 ) 라하는데, 어류의가슴지느러미와배지느러미는네발로변하고, 부레는폐로발달되며, 비강은구강과통합되었다. 비늘 털등은거의없고심장은 2 심방 ( 心房 ) 1 심실 ( 心室 ) 이며, 늑골은흉골과연결되어있지않다. 난생또는난태생이고냉혈성이며변태발생을한다. 환경청에서천마산의양서류를조사하였는데그결과로도롱뇽, 무당개구리, 두꺼비, 청개구리, 참개구리, 산개구리, 옴개구리, 아무르산개구리등이보고되었다. 파충류는척추동물의유양막류 ( 有羊膜類 ) 에속하는강 ( 綱 ) 의하나로, 몸은머리 목 몸통 꼬리의네부분으로나뉘는데, 꼬리의장단차이가심하고네발의발달이불량하여, 뱀이나일부도마뱀은발이전혀없다. 여러가지모양의비늘이있고, 귀별류에는진피 ( 眞皮 ) 속에배갑 ( 背甲 ) 과복갑 ( 腹甲 ) 이있다. 피부선 ( 腺 ) 이전혀없어서귀별류이외는대개탈피 ( 脫皮 ) 를하며, 골격은대개경골 ( 硬骨 ) 이다. 악어를제외하고는심장이두개의심이 ( 心耳 ) 와한개의심실 ( 心室 ) 로되고불완전한격막이있어허파로호흡을한다. 배설기는후신 ( 后腎 ) 에서이루어진신장이며, 수컷은교미기가있어서항문에서나오는정충을운반한다. 냉혈동물이며난생 ( 卵生 ) 을한다. 환경청에서는천마산을중심으로파충류를조사하였는데그결과로표범장지뱀, 유혈목이, 능구렁이, 무자치, 살모사, 쇠살모사등이보고되었다. < 천마산과운악산에서식하는양서류와파충류 > 과 / 구분 학명 천마산 운악산 도롱뇽 Hynobius leechii 무당개구리 Bombina orientalis 두꺼비 Bufo bufo gargarizans 청개구리 Hyla japonica 참개구리 Rana nigromaculata 산개구리 Rana dybowskii 옴개구리 Rana rugosa 아무르산개구리 Rana amurnensis coreana 아무르장지뱀 Takydromus amurensis 표범장지뱀 Eremias argus 유혈목이 Rhabdophis tigrina tigrina 능구렁이 Dinodon rufozonatum rufozonatum 무자치 Enhydris rufodorsata 누룩뱀 Elaphe dione 살모사 Agkistrodon blomhoffii brevicaudus 쇠살모사 Agkistrodon caligino 출전 : 환경청, 전국생태계전국조사 (Ⅳ) 4차년도 (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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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4 절동 식물 2. 동물 5) 나비 나비는동물분류상절지동물문곤충강나비목에속한다. 나비목은두쌍의날개가있으며온몸이가루와같은작은비늘로덮여있다. 나비목은다시나비아목과나방아목으로나뉜다. 전세계동물중에서곤충이 3/4 을차지할만큼그종류가대단히많다. 우리나라에기록된나비의종은 203 종이고, 남양주에서채집된종들은다음표와같이약 7 과 86 종에이른다. < 남양주에서식하는나비 > 과 / 구분이름서식지채집일자 호랑나비과 애기호랑나비꼬리명주나비모시나비붉은점모시나비사향제비나비산호랑나비호랑나비긴꼬리제비나비제비나비산제비나비 광릉광릉광릉천마산천마산, 보광사천마산, 보광사광릉천마산광릉광릉 흰나비과 북방기생나비기생나비노랑나비멧노랑나비각시멧노랑나비큰줄흰나비배추흰나비갈구리나비 광릉천마산, 광릉, 평내광릉광릉천마산, 광릉광릉광릉평내 부전나비과 붉은띠귤빛부전나비금강산귤빛부전나비암고운부전나비귤빛부전나비참나무부전나비북방녹색부전나비산녹색부전나비금강산녹색부전나비벚나무까마귀부전나비범부전나비쇳빛부전나비작은주홍부전나비암먹부전나비푸른부전나비산푸른부전나비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천마산광릉천마산천마산, 광릉천마산광릉평내천마산천마산광릉광릉광릉광릉광릉광릉광릉 뿔나비과뿔나비평내 네발나비과 금빛이리표범나비어리표범나비담색어리표범나비작은은점선표범나비작은표범나비큰표범나비암검은표범나비구름표범나비은줄표범나비풀표범나비긴은점표범나비은점표범나비왕은점표범나비줄나비제일줄나비굵은줄나비애기세줄나비 광릉천마산, 광릉천마산광릉광릉, 장현광릉천마산, 광릉광릉광릉천마산천마산, 광릉광릉광릉천마산광릉광릉광릉

126 높은산세줄나비세줄나비참세줄나비별박이세줄나비왕세줄나비두줄나비어리세줄나비거꾸로여덟팔나비북방거꾸로여덟팔나비네팔나비산네팔나비들신선나비황오색나비유리창나비흑백알락나비홍점알락나비 광릉광릉광릉광릉천마산, 평내평내광릉천마산, 광릉천마산천마산광릉천마산광릉광릉광릉광릉 뱀눈나비과 애물결나비석물결나비외눈이지옥사촌나비눈많은그늘나비알락그늘나비먹그늘나비먹그늘나비붙이 광릉광릉평내천마산광릉천마산광릉 팔랑나비과 먹그늘나비붙이부처사촌나비도시처녀나비시골처녀나비큰수리팔랑나비왕팔랑나비멧팔랑나비흰점팔랑나비파리팔랑나비돈무늬팔랑나비줄꼬마팔랑나비산줄점팔랑나비 광릉천마산광릉천마산광릉광릉천마산, 광릉광릉천마산, 광릉천마산, 광릉광릉광릉 출전 : 신유항, 한국나비도감, 아카데미서적, 1991; 김정환, 우리나비백가지, 현암사, 1992; 주홍재외, 한국의나비, 교학사, 1997.

12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보호수 1. 천연기념물 광릉숲에는남한지역에서유일하게서식하는크낙새가있고, 원앙새 ( 천연기념물제 327 호 ) 검독수리 ( 제 243 호 ) 참매 붉은배새매 매 황조롱이등의매류 ( 제 323 호 ), 수리부엉이 칡부엉이 쇠부엉이 소쩍새 큰소쩍새 올빼미등의부엉이류 ( 제 324 호 ), 까막딱다구리 ( 제 242 호 ) 등의조류와하늘다람쥐 ( 제 328 호 ) 와장수하늘소 ( 제 218 호 ) 등의천연기념물이서식하고있다. 거듭되는환경의악화로장수하늘소는멸종되어천연기념물에서해제되었고, 크낙새역시자취를감춘지여러해가지났다.

12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보호수 1. 천연기념물 1) 광릉크낙새서식지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제 11 호 소유 : 국유 사유 위치 : 진접읍부평리산 99-1 외 3 필지 면적 : 75 만 6000 평 크낙새의서식지는남양주시의진접읍 별내면, 의정부시의일부, 포천군의소흘읍 내촌면일대에걸쳐위치하며, 동서길이 3997m, 남북길이 8024m, 면적으로는 2305 km2에이른다. 광릉은조선조제 7 대세조와정희왕후윤비의능으로 1468 년에개장되어 530 여년간숲이보존되어원시림에가까울정도여서상록수와활엽수의거목들이많아크낙새서식환경에알맞은곳이었다. 광릉숲속에분포하는식물의종수는 917 종으로, 초본 691 종과나무 29 종등이살고있는것으로보고되고있다. 나무는활엽수가대부분인데, 신갈나무 떡갈나무등의참나무류와서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등의온대중부활엽수가가득차있고, 침엽수로소나무 젓나무 잣나무등이있다.

12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보호수 1. 천연기념물 2) 크낙새 크낙새서식지 크낙새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제 197 호 지정일자 : 1968 년 5 월 30 일 영명 : White-bellied Black Woodpecker 딱다구리목딱다구리과에속하는조류로우리나라의중부지역에만서식하는텃새이다. 이새는천연기념물제 197 호로지정 보호하고있으며, 국제자연보존연맹 (ICUN) 의 Red Data Book 제 104 호로등록되어있는국제보호새이다. 황해도평산, 금강산송림사, 개성송악산, 수원, 양평, 군포, 천안, 남양주광릉 홍릉 유릉, 설악산, 속리산등여러곳에서관찰되었으나서식지가줄어들어현재는설악산과광릉에만서식하는것으로알려져있다 년 5 월 1 일광릉임업시험장내약 80 년생산밤나무에서수컷한마리가벌레를잡는것이발견되었고, 1977 년에는 10 여마리가관찰되었으며, 1987 년 5 월 2 일에도서식하고있는모습이관찰된바있다. 형태를보면수컷은이마 머리꼭대기 뒷머리가진한붉은색이며 ( 암컷은검은색 ), 뺨선은어두운붉은색이다 ( 암컷은검은색 ). 배는흰색이며그밖의부분은광택이있는검은색이다. 부리는녹색을띤황색으로끝만검다. 다리는검은색을띤흰색이다. 몸길이는약 40 cm이고, 부리는 mm, 날개는 mm, 꼬리는 mm이다. 매우희귀한텃새로젓나무, 잣나무,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등의노거수가우거진어두운자연혼효림에서서식하며주로이른아침과저녁에활동하지만흐린날이나비가올때는낮에도활동한다. 나무줄기를나선형으로기어올라가인근의나무로옮겨간다. 까막딱다구리보다훨씬민첩하기때문에접근하기가어렵다. 둥우리는참나무, 젓나무, 소나무등의자연구멍을이용하거나직접구멍을만든다. 산란기는 5 6 월이고, 알은흰색이며, 2 5 개를낳고 14 일간포란한다. 울음소리는끼이약, 끼이약하며울고, 나무를두들겨벌레를찾을때는뚜루루루, 뚜루루루하는둔탁한소리를내는데 1 km밖까지잘들린다. 딱정벌레의애벌레, 곤충류등을잡아먹고산다.

13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보호수 1. 천연기념물 3) 양지리향나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제 232 호 지정일자 : 1970 년 11 월 5 일 소유 : 국유 개인 위치 : 오남읍양지리 530 외 6 필지 면적 : 2375 평 수령 : 500 년 영명 : Chinese Juniper 지정사유 : 노거수 향나무는구과목측백나무과에속하는상록침엽교목이다. 이나무는우리나라에서평안북도와함경북도를제외한전국의표고 800m 이하에서자생하며일본과중국에도분포한다. 양자리향나무양수이므로햇빛이잘드는곳에서잘자라며그늘에서는잎과줄기가말라죽게된다. 공해에견디는힘이강하며맹아력이우수하여여러가지수형을만들수있다. 1 2년생가지는녹색이고 3년생가지는암갈색이며, 7 8년생부터는비늘잎이생긴다. 맹아에서는바늘잎이나오는데, 바늘잎은짙은녹색으로돌려나거나마주난다. 비늘잎은모가나있고끝이둥글며가장자리는백색이다. 양지리향나무는조선초기에거창신씨 ( 居昌愼氏 ) 가선조의묘를쓰고서기념식수한것으로전해져내려오고있다. 상록침엽수이며나무높이는 13m 에이른다. 이나무는땅위 2m 높이쯤되는곳에서줄기가다섯갈래로갈라지면서사방으로수관 ( 樹冠 ) 을뻗치고있다. 그가운데하나는아랫부분의둘레가 1.8m 에이르고돋아난가지는아래로쳐져있다. 흉고둘레는 3.25m 에이르고, 가지는동쪽으로 5.7m, 서쪽으로 5.7m, 남쪽으로 7.5m, 북쪽으로 8.5m 로퍼져있다. 굵은줄기를잘라향불자료를얻었던동쪽부분은지금도큰상처가아물지못하고그흔적이남아있지만, 500 여년이되었어도건강하게잘자라고있다.

13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보호수로지정된수목은모두 63 그루이다. 그중도나무 13, 시나무 34, 읍 면 동나무 10, 마을나무 6 그루이다. 수종으로는느티나무가 33 그루로가장많고, 은행나무 11 그루, 향나무 9 그루, 소나무 6 그루, 상수리나무 2 그루, 피나무 1 그루, 시무나무 1 그루로모두 7 종이다.

13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1) 느티나무 느릅나무과에속하는낙엽활엽교목으로전국에자생하며중국, 일본, 몽고등지에분포한다. 생장이빠르고이식이잘되며중성토양을좋아하는장수나무이다. 잎은어긋나며길이 13 cm, 나비 5 cm의긴타원형으로끝이뾰족하고톱니가있다. 가을에노랗고빨갛게물드는단풍이매우아름다우며, 암수한그루이고암꽃은가지끝에 1 2 개씩, 수꽃은새로자란가지밑에 10 여개씩모여서핀다. 수명이길고수형이단정하며수관폭이넓어서주로녹음수, 정자목, 가로수등으로이용된다. 느티나무의보호수는모두 33 그루이며도나무 5 그루, 시나무 18 곳 21 그루, 동나무 1 그루, 읍 면나무 3 곳 4 그루, 마을나무 2 그루이다. 답내리느티나무 < 느티나무 > 보호수소재지품목지정번호수령 ( 년 ) 수고 (m) 흉고둘레 (m) 수관폭 (m) 평내동느티나무 평내동 416( 궁평 ) 도나무 능내리느티나무 조안면능내리 금남리느티나무 화도읍금남리 답내리느티나무 화도읍답내리 덕송리느티나무 별내면덕송리 금곡동느티나무 금곡동 513( 무대 ) 시나무 호평동느티나무 호평동 453( 지사 ) 지금동느티나무 지금동 340( 막자골 ) 덕소느티나무 와부읍덕소리 율석리느티나무 와부읍율석리 505( 대동 ) 사능느티나무 진건읍사능리산 운수리느티나무 수동면운수리 금남리느티나무 화도읍금남리 차산리느티나무 (2) 화도읍차산리 녹촌리느티나무 (2) 화도읍녹촌리 월산리느티나무 화도읍월산리 수석동느티나무 수석동 106( 석실 ) 동나무 내곡리느티나무 (2) 진접읍내곡리 195 읍 면나무 퇴계원느티나무 퇴계원면퇴계원리 160 뱅이 팔야리느티나무진접읍팔야리 부평리느티나무 진접읍부평리산 235( 봉선사 ) 내각리느티나무진접읍내각리 신월리느티나무진건읍신월리 오남리느티나무진건읍오남리

133 진관느티나무 (2) 진건읍진관리 내곡리느티나무 진접읍내곡리 송능리느티나무 진건읍송능리 조안리느티나무 조안면조안리 937 마을나무 수석동느티나무 수석동산37( 석실 ) 비고 : (2) 는같은장소에 2그루가심어져있음을뜻한다.

13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2) 은행나무 은행나무과에속하며, 지금은활엽수이지만그조상은원래가 6 개의침엽이달린침엽수였다. 은행나무는 1 과 1 속 1 종뿐이며우리나라를비롯해중국, 일본등동양에만있는나무이다. 은행나무는낙엽활엽교목으로나무높이 60m, 흉고직경 4.5m 정도로자라며전국적으로식재되고있는데추위에강하고비옥한토양에서잘자란다. 양수이므로햇볕을좋아하며생장이빠르고대기오염과불에견디는힘이강하다. 특히병충해가별로없다. 잎은부채모양으로어긋나지만짧은가지에서는총생한것처럼보이며잎맥은부채살모양이다. 암수딴그루이므로암꽃과수꽃이각기다른나무에달리며, 5 월에잎과함께핀다. 보호수는 11 그루이며그중도나무 5 그루, 시나무 3 그루, 동나무 1 그루, 읍 면나무 2 그루이다. 연평리은행나무

13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3) 향나무 측백나무과에속하는상록침엽교목이다. 보호수로지정받은향나무는도지정보호수로오남리향나무와양지리향나무, 시지정보호수로율석리향나무, 읍 면지정보호수로월문리향나무, 마을지정향나무로녹천리향나무등이있다. 향나무보호수는다음표와같다. 율석리향나무 < 향나무 > 보호수소재지품목지정번호수령 ( 년 ) 수고 (m) 흉고둘레 (m) 수관폭 (m) 오남리향나무 오남면오남리장자마을 661 도나무 양지리향나무 오남면양지리 율석리향나무 와부읍율석리 505 시나무 율석리향나무 와부읍율석리 월문리향나무 화도읍월문리 1246 읍 면나무 녹천리향나무 화도읍녹촌리 334 마을나무 비고 : (2) 는같은장소에 2그루가심어져있음을뜻한다.

13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4) 소나무 소나무과에속하는상록침엽교목으로나무높이 35m, 흉고직경 180 cm에이른다. 전국적으로표고 1300m 이하의지대에서자생하며일본과만주에도분포한다. 햇빛이충분한곳에서는물론건조하고척박한토양에서도잘자라며추위에도강하다. 또한천연하종 ( 天然下種 ) 이잘되어아무곳에서나씨가날아가잘퍼진다. 줄기는보통붉은색인데오래된껍질은흑갈색이되며거북등모양으로갈라진다. 곧게자라며늘푸르고오래사는나무이므로충절, 지조, 장수를의미한다. 잎은길이 8 9 cm, 나비 1.5 mm로 2 개씩속생하며밑부분의잎은 2 년이지나면떨어진다. 암수한그루이며꽃은 5 월에피는데수꽃은노랗고길이 1 cm내외의긴타원형이며암꽃은달걀모양으로자주빛이다. 열매는솔방울 ( 구과 ) 이라고하는데길이 4.5 cm, 지름 3 cm의난상원추형이며이듬해 9 10 월에황갈색으로익는다. 외빙리소나무 외방리소나무 소재지 : 수동면외방리 182 품목 : 시나무 지정번호 : 수령 : 426 년 수고 : 14m 흉고둘레 : 2.7m 수관폭 : 12m 지둔리소나무 (5 주 ) 소재지 : 수동면지둔리 품목 : 시나무 지정번호 : 수령 : 426 년 수고 : 16m 흉고둘레 : 1.9m 수관폭 : 12m

13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5) 상수리나무 참나무과에속하는낙엽활엽교목으로나무높이 30m, 흉고직경 100 cm에이른다. 전국의표고 800m 이하의양지바른산기슭에군생하고일본, 중국에도분포한다. 내한성, 내건성, 내조성이강하여건조한곳이나해안지방에서도잘자라며직근이발달했다. 내음성은약하지만맹아력이좋기때문에맹아의줄기에서발생하는갱신근 ( 更新根 ) 으로새로운나무를만들기도한다. 줄기는곧게올라가큰수형을이룬다. 잎은긴타원형으로길이 cm이고, 잎가에는예리한톱니가있으며 쌍의측맥이있다. 암수한그루로서 5 월에꽃이피며수꽃은꼬리모양으로처져있다. 열매는지름 2 cm정도의긴타원형으로다음해 10 월에익는다. 변재는회백색이고심재는엷은적갈색이며나무결이거칠고단단해서갈라지기쉽다. 덕송리상수리나무 덕송리상수리나무 소재지 : 별내면덕송리산 51 흥국사 품목 : 시나무 지정번호 : 수령 : 426 년 수고 : 20m 흉고둘레 : 3.6m 수관폭 : 11m 연평리상수리나무 소재지 : 진접읍연평리 255 품목 : 읍 면나무 지정번호 : 수령 : 226 년 수고 : 20m 흉고둘레 : 3m 수관폭 : 16m

13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6) 시무나무 느릅나무과에속하는낙엽활엽교목으로나무높이 20m, 흉고직경 2m 에이른다. 전국에걸쳐표고 m 사이의계곡이나하천가에자생하며중국과만주에도난다. 내한성이강해서전국어디서나잘자라고, 내건성은약하나내습성이있어서홍수때물에잠겨도피해가없다. 내조성과내공해성도강하며토심이깊고비옥한사질양토를좋아한다. 줄기는곧게서며원추형의수형을이루며수피는회갈색으로세로줄이있으며작은가지가가시로변한다. 잎은어긋나고길이 1 6 cm의긴타원형또는타원형으로가장자리에짧은톱니가있으며뒷면잎맥에털이있다. 꽃은암수한그루이며 5 월에피는데작고연두색이다. 열매는시과 (? 果 ) 인데 10 월에익는다. 지둔리시무나무 수령 : 626 년 수고 : 15m 흉고둘레 : 5.7m 수관폭 : 15m 지둔리시무나무 소재지 : 수동면지둔리 416 품목 : 도나무 지정번호 : 5-49

13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2. 보호수 7) 피나무 피나무과에속하며낙엽활엽교목으로나무높이 20m, 흉고직경 100 cm에이른다. 전국의산야 m 의계곡과산기슭및산허리에서야생하며, 중국, 만주, 몽고, 흑룡강등지에분포한다. 내한성, 내음성, 내조성이강하며토심이깊고비옥한곳을좋아하며참나무류, 다릅나무, 박달나무류와함께혼생한다. 수피는회갈색이며, 잎은 3 9 cm의난형으로끝이갑자기뾰족해지고가장자리에예리한톱니가있다. 꽃은산방화서로잎겨드랑이에달리며 6 월에담황색으로피고향기가강하다. 황색의많은수술이밖으로튀어나온다. 열매는황백색의도란형으로프로펠라모양의모 ( 芼 ) 가달려있으며갈색털이밀생하고 9 10 월에익는다. 흉고직경 : 1.7m 수관폭 : 11m 묘적사피나무 묘적사피나무 소재지 : 와부읍월문리 330 묘적사 품목 : 시나무 지정번호 : 수령 : 326 년 수고 : 20m

14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3. 노거수 오랫동안살아서나이가많고, 큰나무로서보호해야할나무를노거수라고한다. 현재보호수로지정되어있지않지만보호되어야할나무이다.

14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3. 노거수 1) 음나무 낙엽활엽교목으로나무높이 25m, 흉고직경 100 cm에달하는거목이다. 표고 m 에두루자라지만표고 m 부근이중심지대이고전국적으로자생한다. 어릴때는나무그늘밑에서생육하나성장하면서햇빛을요구하며외줄기로생장하고, 토심이깊고비옥한곳에서잘자란다. 수피는흑갈색이며세로로불규칙하게갈라져있다. 잎은어긋나고길이와나비가각각 cm로크며손바닥모양으로갈라져있다. 잎자루는길이 cm이다. 꽃은양성화로산형화서를이루며 7 8 월에새로난가지끝에황록색으로핀다. 열매는 10 월에콩알처럼검게익는다. 아름다운수형과잎, 꽃, 열매는관상수로서훌륭하다. 지금동음나무 소재지 : 지금동가재울지금동음나무 수령 : 약 1000년 ( 산림청조사 ) 수고 : 약 30m 수형 : 원줄기와두개의움가지로이루어져있고, 그중한가지는땅에닿았다가뿌리를내고위로비스듬히올라와있다.

14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3. 노거수 2) 반송 ( 盤松 ) 소나무의한품종으로소나무와는모든것이다같은데, 다만소나무는교목으로줄기가외줄기로곧게올라가지만반송은땅가까이에서부터많은줄기가나와서마치관목같이보이며수형이아름다워서고급정원수로쓰인다. 조선조에어떤학자는자기집정원에심은반송을사육신송 ( 死六臣松 ) 이라이름붙이고나무의 6 개줄기마다사육신의이름을붙여가며추모하였다는전설이있다. 가곡리보광사반송 소재지 : 화도읍가곡리보광사 수령 : 약 100 년 수형 : 줄기가여러개올라와서옆으로퍼져서자란다. 수고 : 3m 가곡리보광사반송

14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2 장자연환경 제 5 절천연기념물과 3. 노거수 3) 은행나무 내각리에있는은행나무는함령군묘앞에서자라고있는노거수로서 1600 년대함령군의묘를쓰고서기념식수한것으로보인다. 한국전쟁때에비행기의포격으로원래의줄기는불에타흔적만남아있고 8 개의움가지 ( 맹아 ) 가수관을이루고있다. 큰줄기는흉고직경 60 cm, 작은줄기는 30 cm정도이고, 수고는약 20m 정도이다. 내각리함령군은행나무 소재지 : 내각리함령군묘지앞 수령 : 약 400 년 수형 : 8 개의움가지가관목형태로자란다. 수고 : 40m 내각리함령군은행나무

14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1 절광릉숲의조성 * 제 1 절광릉숲의조성 * 1. 광릉의조성경위 수백년을이어져내려온광릉숲은우리나라에얼마남지않은자연림으로그보호가치가매우크다. 광릉의자연림이보존될수있었던것은세조의능이풍양현직동 ( 直洞 ) 으로정해지면서이곳에광릉이조성되면서가능하였다. 즉, 세조가진접읍직동에묻히게됨으로써능을조성하고가꾸는일환으로주위에소나무를심거나화소 ( 火巢 ) 를만드는등능주변조경사업을벌이고관리하였기때문에오늘날의울창한수목이보존될수있었던것이다. 먼저세조의능이직동에조성된경위를살펴보도록하겠다. 세조는세종의둘째아들이며어머니는소헌왕후 ( 昭憲王后 ) 심씨 ( 沈氏 ) 로영의정부사 ( 領議政府事 ) 심온 ( 沈溫 ) 의딸이다 년 ( 태종 17) 9 월병자에태어났으며, 부인은정희왕후 ( 貞熹王后 ) 윤씨 ( 尹氏 ) 이다. 광릉전경 세조는재위당시에많은치적과함께왕권을강화하는데노력하였음에도불구하고, 계유정난 ( 癸酉靖難 ) 을일으켜어린단종을죽이고왕위를찬탈하는과정에서많은사람을죽였다는죄책감으로말년에는불교에심취하게되었다 년 ( 세조 14) 9 월에세자에게정치를맡기는한편, 계유년의옥사와관련된사람들을방면하였으나,* 방면한지 3 일만에병이위급해지자예조판서임원준 ( 任元濬 ) 을불러왕위를물려줄것을전하였고 * 같은해 9 월 8 일수강궁 ( 壽康宮 ) 의정침 ( 正寢 ) 에서승하하였다.* 이에따라왕이묻힐장소를선정하게되었는데, 정인지 ( 鄭麟趾 ) 등으로하여금먼저영릉 ( 英陵 ) 근처를살펴보게하였지만마땅한장소를찾지못하였다.* 마땅한?? 장소가없자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박원형 김질 홍달손 강순 조석문 이침 이부 이준등이모여서원릉 ( 園陵 ) 으로쓸만한땅을의논하여살피게하였다.* 능침은여러곳이대상이되었는데그중에하나가광주 ( 廣州 ) 의이지직 ( 李之直 ) 분영 ( 墳塋 ) 과풍양의정흠지 ( 鄭欽之 ) 분영이었다. 두곳을살펴본결과 * 신숙주는정흠지의분영이좋기는하지만 오른쪽팔뚝이좁고주혈 ( 主穴 ) 이기울어져서흠 이라고하였다.* 이외에능지로연희궁 ( 衍禧宮 ) 뒷산, 여흥 ( 驪興 ) 권총 ( 權聰 ) 부모의묘자리, 박은 ( 朴誾 ) 의묘자리가대두되었다. 그중에서정흠지의묘자리가가장좋은것으로판단되어예종이직접풍양에가서자리를살펴보고여러신하들로하여금다시길흉 ( 吉凶 ) 과절을지을터를살피게하였다.* 예빈시정 ( 禮賓寺正 ) 최호원 ( 崔灝元 ) 이능지로적합하지않다고반대하였지만예종은그를의금부에구속하고,* 결국풍양직동을능지로정하였다. 이후양주부 ( 楊州府 ) 는광릉이있는곳이라하여목 ( 牧 ) 으로승격되었다.*

14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2. 금산정책 ( 禁山政策 ) 과광릉숲의보존 1) 금산정책 국가에서는풍수적인면과함께국가에서필요로하는나무를공급받기위하여서울주변의사산 ( 四山 ) 과왕릉또는특별히지정한곳에서나무하는것을법으로금지하였다. 현종대에는형조에서 8 개조항의금제조 ( 禁制條 ) 를, 한성부에서 6 개조항의금제조를만들었는데그중하나가사산에서소나무를베지못하게하는것이었다.* 그러나이와같은법령에도불구하고일반인들이죽은소나무를베어가자한성부로하여금순찰케하여좋은재목이면영선 ( 營繕 ) 에사용하고, 재목이못되는것이면기와가마에쓰게하였다.* 한편산에나무를베고불을질러밭을만드는백성들때문에물의근원이모두끊어져산에나무가무성하지못하였다. 이에산에다불놓는자를죄로다스리게하였다.* 소나무등각종나무가손상되는것은벌채로인한것도있지만송충이에의한피해도많았다. 중종대에서울근처 10 리사이의소나무와능침의소나무를송충이가모두갉아먹는사건이발생하자한성부에서송충이를잡게하였으나너무많아모두잡을수가없었다고한다. 특히동대문밖과동소문밖, 성균관주산 ( 主山 ) 과건원릉 ( 健元陵 ) 근처에송충이가많았는데사람들은이것을재앙이라고하였다.* 송충이의피해가극심하자영조대에는사산의소나무를갉아먹는송충이를부민 ( 部民 ) 들로하여금날마다 3 승 ( 升 ) 씩잡아바치도록하였다. 이에백성들은공역이심하자파묻은것을파서다시바치는등폐단도있었다.* 금지된곳의나무를베어가는자는엄중히처벌하였다. 인조대에사직단내의소나무를몰래베어간사람이있자유사에게명하여다스리게하였다.* 현종초에는권세가인영양군 ( 嶺陽君 ) 인평위 ( 寅平尉 ) 동평위 ( 東平尉 ) 집의노예들이사산의소나무를베어내는것을산직 ( 山直 ) 이막자오히려몽둥이를들고겁박하는경우가발생하였고, 이에국가에서는그주인을파직시켰다.* 또전감사조구석 ( 趙龜錫 ) 이다른사람들이름으로정장 ( 呈狀 ) 하여체문 ( 帖文 ) 을낸후동대문밖 5 리쯤에있는금산의소나무수백그루를벌채하자이를허가해준행호군 ( 行護軍 ) 조형 ( 趙珩 ) 을하옥하고고신 ( 告身 ) 을빼앗았으며, 조구석을 2 년동안양주쌍수촌으로귀향보냈다.* 또한조구석에게문서를만들어준충주목사홍전을파직하였다.* 숙종대에는남한산의수목을작벌하지못한다는금령에도불구하고광주부윤 ( 廣州府尹 ) 윤양래 ( 尹陽來 ) 가금령을준수하지않고제멋대로베어다가썼다고하여파직하고법률에따라추고하였다.* 이러한엄한법률적용은조선후기로가면서더욱강화되었다. 국가에서사용되는물건을만드는곳의땔나무를대는시산 ( 柴山 ) 의작벌인을엄하게처벌하였는데, 원릉의수목을도둑질한죄로도배에처하였다.* 한편, 장릉 ( 長陵 ) 의나무를벤사람가운데소나무나회나무열그루이상을벤자는효시 ( 梟示 ) 하는형률을감정 ( 減定 ) 하여 3 차의엄중한형신 ( 刑訊 ) 을가한뒤먼변방에정배 ( 定配 ) 하라고명하였는데, 이는금호절목 ( 禁護節目 ) 가운데형법이너무무거워행하기어렵기때문이었다.* 사산의소나무를벤백성들을단속하지못한관리들을월봉 ( 越俸 ) 3 등에처하거나,* 각능의수목도벌을살피지못한능관 ( 陵官 ) 을나처 ( 拿處 ) 하였는데,* 이러한강력한법률의시행에도불구하고능원의소나무는많은사람들에의해도벌되었다. 말기에이르러서는 지금만약전부를법으로다스린다면능관으로서무죄에서벗어날사람이거의하나도없을것이다. 라고할정도로도벌이심하였다. 사태가이러하자능원령 ( 陵園令 ) 에게는 1 년을한도로수령 ( 守令 ) 에의망 ( 擬望 ) 하지말게하고, 참하관 ( 參下官 ) 에게는 1 년을한도로사일 ( 仕日 ) 을물려우선은대죄행공 ( 戴罪行公 ) 하게법률로정하였다. 그러나온릉 ( 溫陵 ) 과소령원 ( 昭寧園 ) 에서가장많은수의나무가도벌되고, 영릉 ( 英陵 ) 의국내 ( 局內 ) 는민둥산이되자이를관리하지못한지방관모두를견책하고파면시키는율을시행하였다.* 즉, 나무를필요로하는사람들이많아지자시대를막론하고음성적인벌목이행해졌고, 이에강력한금송 ( 禁松 ) 정책이필요했던것이다.

14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2. 금산정책 ( 禁山政策 ) 과광릉숲의보존 2) 광릉숲의보존 우리나라에서수목이제대로보존되고있는지역중에하나가광릉숲이다. 광릉숲은능이조성된이후인공적으로조성된것도있지만본래부터울창하였다. 봉선사숯묻이기사를살펴보면봉선사주변에나무가많았다는사실을확인할수있다. 봉선사는땔나무를취하는곳이멀지않고노비가또한많아서숯묻이하기가어렵지않으니, 금년부터는여러고을로하여금준비하여바치게하지마소서.* 또한한명회는세조대에풍양궁근처에자주사냥하여짐승을많이잡았다고하고지금도광릉의산에짐승이많아서곡식에해 ( 害 ) 가미친다고하였는데, 이사실을통해서도숲이우거졌음을알수있다.* 특히능주변의수목에대한보호는철저하였다. 제릉참봉 ( 齊陵參奉 ) 장광한 ( 張光瀚 ) 은능안수목의도벌을금하지않는다고하여파직당하였다.* 광릉의경우에는이익엽 ( 李益燁 ) 이집을짓기위하여강제로수릉군 ( 守陵軍 ) 과능밑에사는백성들을동원하여능안의나무수백그루를벌목하게하였다.* 이일은처음에이익엽이청어 ( 靑魚 ) 200 개 ( 介 ) 를유씨 ( 柳氏 ) 성을가진참봉에게주고그대가로서까래감 200 조 ( 條 ) 를벌목하였던것인데,* 이사건으로관계자들이문책되었다. 그러나이와같은일들은당시일반적인현상으로, 신하들이집을화려하게수축하는경향때문이었다.* 공사가많고나무가격이상승하자능침의나무가불법적으로벌목되었던것이다. 한편궁가 ( 宮家 ) 의사나운종 ( 悍僕 ) 이능에심어놓은나무를함부로베는것을막지못한광릉의시임 ( 時任 ) 참봉 ( 參奉 ) 을태거 ( 汰去 ) 시킨일도있었다.* 이렇듯신하들과종실에서필요에따라능침의나무를베어가는것을엄격히금지하였다. 하지만신하들만이아니라일반인이나무를베어가다가처벌당하기도하였다. 사간 ( 司諫 ) 서명형 ( 徐命珩 ) 의다음과같은상소가있다. 포천사는이성 ( 李姓 ) 인사람이광릉의나무하나를몰래베었는데, 그크기가여러아름이나됩니다. 청컨대경옥 ( 京獄 ) 에잡아다가율뮨 ( 律文 ) 에따라감안하여처단하소서.* 광릉숲은이상에서살펴본것과같이나무가생활에필요한주재료라는이유와양반가에서집을짓기위하여벌목되는경우도있었지만, 화전민의경지개간으로화재가나소실된적도있었다. 한말국가의통치가지방으로미치지못하게되자광릉주변에도화전민이많이들어와살게되면서능까지화염에휩싸이게된것이다.* 그러나광릉의경우능침으로보호되었기때문에오늘날과같은숲이될수있었고, 이렇게보전되어온광릉숲은일제시대에임업시험림으로지정되면서본격적으로보호되었다.

14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3. 광릉수목원의조성 * 3. 광릉수목원의조성 * 1) 화소의설치와수종 ( 樹種 ) 능설치당시의사정을기재한 광릉지 에의하면, 화소를넓게정하고, 수목을많이심었다. 주엽산북쪽 15 리에있다. 세상에봉릉 ( 封陵 ) 이라고전해왔는데, 후에수목을널리심어이에호칭으로삼게되었다고한다. 주산 ( 主山 ) 과동구사표내에나무를심어금양하고밖으로해자를파서화소를설치하였다. 화소안에심은것은모두잡목이라비록베어가더라도매우무성하였다. 오직홍살문안과청룡 ( 靑龍 : 주산에서갈려나간왼쪽산맥 ) 밖에나무가드문곳이있으니한식 2 일전에육청 ( 六廳 ) 의가호 ( 家戶 ) 로하여금어린소나무와잣나무를옮겨와서홍살문내외 좌우와청룡등에손수심게하고이후에도계속준행함이마땅할것이다. * 라는기록이있다. 위의내용에의하면나무를보호하기위하여화소를설치하였으며,* 광릉에화소를설정할당시부분적인인공식재가이루어졌음을알수있다. 그러나특별히묘목을양성한것은아니고다만부근에있던천연생치수를이식한정도였다. 또한이식한수종도뚜렷이기재되어있지는않으나후절에치송아백 ( 稚松兒栢 ) 이라고기재되어있는것을보면, 식재수종은소나무 잣나무 젓나무등의침엽수였고, 잡목은다만벌채를금하는정도였다. 인공식재는참봉또는산지기의지휘하에계속되어행해졌다고하나그범위는능묘주변의일부분에한정되었다. 이렇게관리되던광릉은임진왜란으로능과봉선사가소각되고부근의임야도소실되었으며, 그후 1815 년 ( 순조 15) 에도불이나서산림의일부가소실된적이있다. 광릉의산림은이와같이여러번화재를입었으니화재가난곳이나면적, 진화방법에대해서는기록이남아있지않다. 화소는능지주위에폭 1.8m 정도의도랑을파고, 그안쪽으로둑을구축한방화선이며, 동시에능역경계선을표시하는것이기도하다. 조선이몰락하기까지역사를두어경계내와부근도로변에적송 잣나무 젓나무등어린나무를정성들여이식하였으며, 역내에는경작과매장을금하고불을놓지못하게하였을뿐만아니라심지어는땔나무까지도채취하지못하게하는등삼림보호제도는대단히복잡하였다. 영 ( 令 : 종 5 품 ) 과참봉 ( 參奉 : 종 9 품 ) 을두어산릉의사전 ( 祀典 ) 과기타업무를관장케하는한편, 몸소능림금양 ( 陵林禁養 ) 에전력힘쓰게하고산직과군정들을지휘감독하는책무를맡게하였다. 산직은화소내에산림보호금양에종사하는벼슬아치로약 20 명이있었는데, 이들에게주엽산화전현 ( 花田峴 ) 축석령 ( 祝石嶺 ) 등의요소에주둔하면서구역을나누어순산하게하였으며, 별도로다수의보군과수호군을두어능역경비를맡아보게하고, 금양하는일의일부도분담시켰다. 또한정규의관원은아니지만화소에근접한 8 개마을에서각 1 명의두두인 ( 頭頭人 ) 을선출하여산직의일을보조하게하였다. 오늘날능부근에보이는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등의노목과능앞을남북으로지나가는도로양쪽의잣나무 젓나무의노령목을제외하고는시험림에인공적인식재는없다. 광릉시험림은우리나라산림의온대중부에속하기때문에소나무 잣나무 젓나무등의침엽수와참나무류 서아나무류 단풍나무류 물푸레나무등의낙엽활엽수가혼요된천연림으로계승되다가 1913 년시험지로지정됨에따라 1916 년에인공조림을처음실시하였다 년제 1 차로경영안에편성된후천연림의임상을개량할목적으로잣나무 낙엽송 잎갈나무 젓나무 리기다나무 방크스소나무등주로침엽수인공조림이계획적으로실시되었다.

14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3. 광릉수목원의조성 * 2) 일제시기의광릉숲 중부임엄시험장이창설된것은 1912 년 11 월부터산림의일부를개간하여다음해인 1913 년 4 월에 시험묘포 와 광릉시험지 를설치하면서부터이다. 9 년뒤인 1922 년에 임업시험장 이설치되었고, 1929 년에 임업시험장광릉시험지 가설치되었다. 그러나임엄시험장태동의뿌리는조선시대로부터이다. 왜냐하면광릉시험림은원래세조가묻힌 광릉부속림 의일부분으로, 460 여년간엄격히보호되다가 1911 년왕실에특수한연고가있는능묘부속지를제외하고 화소구역 대부분이 갑종요존예정임야 ( 甲種要存豫定林野 ) 에편입되었는데, 이것이곧지금의광릉시험림이기때문이다. 조선총독부소속으로소규모양묘조림등에관한시험을실시하다가 1922 년 8 월에임업시험장이창설되어모든시험사항을관장하게됨에따라 1924 년 6 월에본시험림과건물등설비시설전부가임업시험장으로이관되었다. 이때부터광릉시험림을무대로한임업시험사업이본격적인체제를갖추기시작하였으며, 양주군 ( 현남양주시 ) 진접면장현리에보호주재소를설치하여기수 1명과보호광릉숲원 3명을두고삼림보호취체를맡아보게되었다. 1929년 6월에중앙임업시험장광릉출장소가정식으로설치되고기사 1명, 기수 3명, 고원 임업수 기타 18명이배치되면서조림 이용 시업등임업전분야에걸친대규모의시험계획을수립하고사업을추진하였다.

14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3. 광릉수목원의조성 * 3) 해방이후의광릉숲 우리나라임업발전의태두로서자주적인산림개발의뜻깊은새출발을하게된것은 1949 년부터이다. 이는능부속림으로지정된이후 420 여년만의일이었다. 이후한국전쟁때에각종시험시설물들이완전소실되었으나다행히도광릉림만은치명적인전화에서벗어났기에오늘의시험림으로보존될수있었다. 하지만오늘의광릉시험림이보존되기까지는많은어려움이뒤따랐다. 특히 1960 년대말부터 1970 년대초에는조직적인도벌이성행하였다. 이시기는국가경제나가정살림이가난했던시기로생계를위해어쩔수없이도벌하는경우도있었으나큰돈을목적으로조직적인도벌이기승을부렸던때이기도했다. 따라서도벌단속에나섰던직원들이도벌꾼의 공갈협박 에시달리기도하였다 년산림청발족으로광릉출장소가중부지장 ( 中部地場 ) 으로승격되었고, 그후지금의산림청산하임업연구원중부임업시험장이된것은 1987 년 12 월이다 년에는광릉수목원과삼림박물관사업을착수하였는데, 이때부터임업시험장의기능에많은변화가오게되었다. 오늘날의광릉숲즉, 현재의직제가산림보호를담당하는관리과, 종자배양 양묘 육림 ( 育林 ) 및기계임업과임도개설을연구하는시험과, 수목원과산림박물관을관리하며생물종다양성을연구복원하는수목원과의 3개과로편성되는데모태가된것이다. 중부임업시험장이관리하는시험림은약 672만평으로, 이곳에서각종시험을통해얻어진결과는국내산림현장에이식되고있으며, 수많은학술연구자료로발표되어국내외에서이용되고있다. 산림자원조성과임업발전에일익을담당하고있는광릉숲은한국임업의산실이라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15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1. 광릉숲의자연환경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1. 광릉숲의자연환경 1) 위치 지형 광릉숲은한반도의중앙에위치한숲으로경위도상으로는북위 , 동경 , 행정구역상으로는남양주시진접읍과별내면, 포천군소흘읍과내촌면, 의정부시민락동과낙양동의 2 시 1 군에걸쳐있다. 숲의규모는동서약 4 km, 남북약 8 km에달한다. 광릉숲은함경도와강원도의경계지인철령으로부터시작된광주산맥의한지맥으로, 최고봉인죽엽산 ( 해발 600.6m) 을비롯하여제 2 의봉우리인수리봉 ( 해발 536.8m), 물푸레봉, 천견산등이주변을둘러싸고있는산악분지형지대이다. 하늘에서본광릉숲

15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1. 광릉숲의자연환경 2) 토양 광릉숲의토양은화강편마암을모계로하여생성되었고층위의발달은 A-B-C 층위를갖는산성토양으로오랜기간풍화가잘이루어졌다. 유기물이풍부한갈색토양이전체면적의 97% 를점하고있으며나머지는침식토양과암석지이다 년임업연구원에서산림토양조사를실시하였는데일본의토양분류기준에준하여토양형을분류한결과광릉숲의토양형은갈색산림토양 4 개형, 침식토양 1 개형, 암석지로분류되었다.

15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1. 광릉숲의자연환경 3) 수계 수질 광릉숲을관통하는 314 번지방도를따라봉선사천이이숲의중심부를지나고있다. 포천군무림리를발원지로하는지류가이곡리에서또다른지류와합류하고, 이것이봉선사천본류와만난다. 봉선사천은비교적자연형하천의모습을유지하고있으며, 야생동물이이동할수있는통로의역할을하고있다. 그러나유흥업소의밀집으로수질이좋지않은데, 생물학적산소요구량 (BOD) 은 3.4ppm 에이르며용존산소량등을종합해볼때수질등급도 2 급수에해당한다.*

15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1. 광릉숲의자연환경 4) 면적 광릉숲은 1913 년에시험림으로지정될당시면적이 2286ha 였다가, 1939 년국유림편입, 1941 년임지교환등으로약간증가하였다. 그후용도폐기, 국방부와임업연수원으로부지이관, 개재지교환등의과정을거쳐 1993 년현재면적은 2240ha 이다. 이중천연림 인공림등임야면적은 2223ha, 시험묘포와각종시설부지는 17ha 이다. 임야를다시세분하면시험림이 1723ha, 수목원이 500ha 를차지하고있다. 다음표는시험림으로지정된이후광릉숲의면적변화를보여준다. < 시험림지정이후광릉숲의면적변화 > 연도 면적 (ha) 사유 ,286 시험림지정 ,302 주변국유림을시험림에편입 ,406 포천군내촌면의서울시험림과임지교환 ,313 용도폐기 ,251 국방부에 115ha 이관 - 대토로서 35ha 인수 ,244 임업연수원부지 6.7ha 이관 ,235 산림조사 ,240 임업연구원의양주군회천면시험림 5ha 이관시험림 1723ha, 수목원 500ha, 시설부지 묘포 17ha

15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2. 광릉숲의중요성 1) 임종구성 1468 년세조의능림으로지정된이래철저히보호 관리되어온광릉숲은온대중부산림대에속하며소나무 잣나무 젓나무등의침엽수, 신갈나무 졸참나무등의참나무류, 서어나무류 단풍나무류 물푸레나무등의낙엽활엽수가혼효된천연림으로발전하여왔다. 그후 1913 년에시험지로지정됨에따라 1916 년부터인공조림이실시되었다. 인공조림은주로잣나무, 낙엽송등의침엽수를중심으로실시되었다. 광릉숲의임종별면적과구성비를좀더자세히알아보면다음표와같다 년말현재천연림은 1200ha 로전체면적의 54% 에해당하며, 인공림은 986ha 로 44% 를차지하고있다. 그외에시험림관리를위한각종부대시설과식물원, 광장, 주차장등의수목원시설관리를위한제지는 37ha 이다. 광릉의숲 의임목축적과거의비슷한수준이다. 우리나라전국평균임목축적은 48 m3 /ha 정도이지만, 광릉숲의임목축적량은세계에내놓아도손색이없을만큼높다 년현재광릉숲의임목축적량은 210 m3 /ha 에달하는데, 이는독일의평균임목축적 266 m3 /ha 보다는적지만, 일본의 124 m3 /ha 에비해서는거의 2 배에가까운양이다. 특히침엽수림의경우는 1ha 당축적량이약 240 m3정도인데, 이는멀리서숲을바라볼때침엽수의짙은색이검은색으로보인다고하여우리가흔히흑림이라고표현하는독일침엽수림 한편 70 년이상의수령을지니고있는수목으로이루어진이숲은녹지자연도등급으로환산하면개발이이루어진지역을제외한거의모든지역이 8 등급이상에해당하여개발제한지역으로분류된다. < 임종구성 > 임상면적 (ha) 구성비 (%) ha 당축적 ( m3 ) 주요구성수종 계 2, 천연림 계 1, 천연림 침엽수 소나무류 활엽수 참나무류, 서어나무류, 물푸레나무 혼효림 참나무류 - 소나무림, 서어나무류 - 소나무림 계 인공림 침엽수 잣나무, 젓나무, 낙엽송, 리기다소나무등 활엽수 졸참나무, 들메나무, 자작나무, 느티나무등 혼효림 소나무, 갈참나무등 제지 37 2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1994.

15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2. 광릉숲의중요성 2) 천연림 숲은언제나그대로머무는것이아니라점차나이를먹으면서변해간다. 초본류나관목에서시작하여소나무와같이볕이있어야만하는양수 ( 陽樹 ) 가들어가고, 소나무의바늘잎사이로들어가는햇볕으로커나가는음수 ( 陰樹 ) 가우점종을이루면양수는점차사라지게된다. 즉, 숲은수분과광선의조건이변화하면서점차안정된숲인극상림을향해변해가는데이러한과정을 숲의천이 라고한다. 우리나라숲의경우극상림을이루는나무를서어나무류로보는데주봉인소리봉을중심으로한 347ha 의수림은서울을중심으로하는중부지방에서는유일한서어나무숲이라는점에서그가치를더해준다. 이와같이숲이보전될수있었던것은바로철저한보호와관리의덕택이다. 광릉숲의천연림은우리나라에서는보기드문가치를지니고있다. 우리나라대부분의산림은각종전쟁과남벌로훼손된후다시생성된 2차림인데비하여광릉숲은 450여년간능림으로철저히관리되다가시험림지정후에는학술보존림으로지정하여자연상태가유지될수있도록보존하였다. 이러한이유로광릉숲은천연림을대상으로한국내외의학술연구에많이이용되고있다. 서어나무광릉숲의천연림에자라고있는식물을높이에따라좀더자세히구분하면다음표와같다. 숲의가장높은부분인상층에는졸참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등의참나무류와서어나무, 까치박달나무, 팥배나무, 고로쇠나무등이우점하고있다. 숲의중간부분인중층에는까치박달나무, 회나무, 국수나무, 산딸나무, 당단풍나무등이자라고있으며숲의바닥부분인하층에서는봄 여름 가을의구분없이애기나리와단풍취가가장우세하다. 그외에선밀나물, 고깔제비꽃등도많이볼수있다. 이러한하층식생은상층 중층에자라는나무들의잎이나오기전인초봄에특히그화려한모습을볼수있다. 이와같이화려한꽃들의모습때문에광릉숲의사계중에서봄, 그중에서도초봄을가장아름답다고말하는사람들이많다. < 천연림의층위별주요수목종류 > 구분 상층 중층 수종명 졸참나무, 신갈나무, 서어나무, 팥배나무, 까치박달나무, 굴참나무, 고로쇠나무 까치박달나무, 회나무, 국수나무, 산딸나무, 당단풍나무, 쪽동백나무, 팥배나무, 덜꿩나무, 생강나무, 작살나무, 잣나무, 참회나무, 개옻나무, 서어나무, 산벚나무, 왕머루 하층 춘계 하계 애기나리, 단풍취, 고깔제비꽃, 선밀나물, 생강나무, 현호색, 벌깨덩굴, 피나물, 국수나무, 큰개별꽃, 빗살현호색, 족제비고사리 애기나리, 단풍취, 고깔제비꽃, 선밀나물, 큰개별꽃, 족제비고사리, 국수나무, 골무꽃, 피나물, 참나물, 까치박달 추계 애기나리, 단풍취, 국수나무, 고깔제비꽃, 골무꽃, 큰개별꽃, 참나물, 생강나무, 까치박달, 족제비고사리, 선밀나물, 우산나물, 방아풀, 참취 출전 : 김지홍 이유미외 6 인, 훼손된생태계의 Biodiversity 평가및복원기법개발, 산림청임업연구원, 쪽. 젓나무 현사시나무

15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2. 광릉숲의중요성 3) 인공림 광릉숲이시험림으로지정된것은 1913 년이지만시험림지정이전에도소나무, 잣나무, 젓나무등의천연생치수를굴취하여도로변이나시설물주변등에소량으로이식 조림하였다. 현재능부근에보이는소나무 잣나무등의노령목, 능앞도로양쪽의잣나무 젓나무등은이때심은것들이다. 특히이중에서젓나무는광릉숲언저리에자리잡고있는봉선사의기록에의하면오대산젓나무의후예라고한다. 즉, 세조의능으로광릉이지금의자리에정해지자능으로들어가는우마차길을표시하기위해오대산에서젓나무들을옮겨다심었으며지금의나무들은그자손이라는것이다. 시험림지정이후본격적인조림사업이실시된 1913 년부터 1930 년까지는침엽수 45 종, 활엽수 60 종을 184.6ha 에식재하였다. 침엽수 45 종중국내산 13 종은모두현존하고있지만도입수종은 32 종중 16 종만이현재까지적응하여생육하고있다 년까지 1387ha 에걸쳐 149 종이식재되었는데, 이때넓은면적에심은종은잣나무 낙엽송 리기다소나무 방크스소나무 젓나무 잎갈나무 소나무등주로침엽수였으며, 활엽수로는상수리나무 밤나무 졸참나무가많이심어졌다. < 인공림의주요수목종류 > 구분 침엽수 활엽수 수종명 은행나무, 잣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섬잣나무, 젓나무, 분비나무, 구상나무, 종비나무, 리기다소나무, 리기테다소나무, 방크스소나무, 구주소나무, 콘톨타소나무, 독일가문비, 잎갈나무, 낙엽송, 편백, 화백, 메타세쿼이아, 서양측백나무 가래나무, 좀잎산오리나무, 물갬나무, 산오리나무, 현사시나무, 두충나무, 계수나무, 칠엽수, 자작나무, 왕사스레나무, 만주자작나무, 베루코사자작나무, 거제수나무, 큰잎자작나무, 물박달나무, 루부라참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꽃개오동나무, 가중나무, 붉나무, 복자기, 은단풍나무, 사탕단풍나무, 개사탕단풍나무, 층층나무, 튤립나무, 세로티나벚나무, 다릅나무, 음나무, 물들메나무, 들메나무, 물푸레나무, 황벽나무, 찰피나무, 쉬나무, 비슬나무, 밤나무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1994.

15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3. 광릉숲의동 식물상 우리나라의동물상은세계동물분포상구북구에속하며, 구북구는다시지형과지세 기후에따라시베리아아구와중국아구로구분된다. 광릉숲은남부인중국아구에속한다. 우리나라의생물종수는 1997 년현재 2 만 9828 종으로알려져있는데, 동물이 1 만 8029 종, 식물 8271 종, 균류 1625 종, 원생생물 736 종, 원핵생물 1167 종이다. 동물중에서는무척추동물인곤충이가장많아 1 만 1853 종에이르고있다. 광릉숲에서기록된생물은척추동물 244 종으로우리나라전체종의 17%, 곤충류는 2384 종으로 20%, 거미류는 198 종으로 17%, 고등식물류는 841 종으로 18% 를차지하고있다. < 우리나라의생물종수 > 대분류군소분류군종수대분류군소분류군종수 포유류 100 단자엽식물 842 어류 905 쌍자엽식물 2,815 척추동물 양서 파충류 41 고등식물 양치 나자식물 314 조류 394 식물 선태류 691 동물 소계 1,440 소계 4,662 무척추동물해면동물, 편형동물등 3,564 하등식물규조류, 편모조류등 3,609 무척추동물 곤충 11,853 균류 1,625 거미 1,172 원생생물 736 소계 16,589 원핵생물 1,167 출전 : 자연보호중앙협의회, 국내생물종문헌조사연구, 환경부, 1996: 한국동물분류학회, 한국동물명집, 1997

15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3. 광릉숲의동 식물상 1) 야생동물 광릉숲에서기록된척추동물은담수어류 34 종, 양서류 10 종, 파충류 14 종, 조류 157 종, 포유류 29 종의 75 과 244 종이며이들중에는천연기념물 19 종과희귀동물 22 종이포함되어있다. < 동물상 > 강 목 과수 종수 강 목 과수 종수 어강 경골어묵 소목 8 3 포유강 유미목 1 2 소계 양서강 무미목 5 8 하루살이목 1 9 파충강 유인목 4 14 잠자리목 9 42 황새목 1 3 사마귀목 1 1 기러기목 1 4 강도래목 1 2 메목 2 13 집게벌레목 1 1 닭목 2 3 메뚜기목 6 32 두루미목 3 3 대벌레목 2 2 도요목 1 8 총채벌레목 2 13 조강 비둘기목 1 1 노란재목 곤충강두견이목 1 5 매미목 올빼미목 1 7 풀잠자리목 6 11 속독새목 1 1 딱정벌레목 파랑새목 3 5 벌목 딱다구리목 1 9 밑들이목 1 3 참새목 파리목 식충목 3 4 날도래목 4 4 박쥐목 1 1 나비목 41 1,174 포유강 토끼목 1 1 소계 203 2,384 설치목 2 12 거미강거미목 식육목 3 8 총계 302 2,826 < 어류의종류 > 과명종명과명종명과명종명 둑중개과 둑중개메기과미유기 꺽정이 기름종개 몰개 돌고기 농어과 꺽지새코미꾸리왜몰개 쏘가리기름종개과미꾸리두우쟁이 가물치과 가물치 쌀미꾸리 버들치 송사리과 송사리 종개 잉어과 쉬리 뱀장어과 뱀장어 붕어 끄리

159 동자개 누치 피라미 동자개과 대농갱이잉어과참마자갈겨니 퉁가리 모래무지 메기과메기줄몰개 묵납자루 독종개 버들치 맹꽁이 < 양서류 파충류의종류 > 아무르장지뱀 구분과명종명구분과명종명 도롱뇽과 도롱뇽 꼬리치레도롱뇽 장지뱀과 아무르장지뱀 표범장지뱀 두꺼비과 두꺼비 유혈목이 무당개구리과무당개구리실뱀 양서류 맹꽁이과맹꽁이 ** 무자치뱀과청개구리과청개구리구렁이 * 파충류참개구리누룩뱀 개구리과 산개구리아무르산개구리 능구렁이 살모사 파충류 도마뱀과 장지뱀과 비고 : * 는멸종위기야생동 식물, ** 는보호야생동 식물이다.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옴개구리까치살모사 ** 살모사과도마뱀쇠살모사장지뱀 < 주요조류의종류 > 과명종명과명종명과명종명오리과원앙 ** 매 ** 가막딱다구리 ** 매과솔개 * 황조롱이 ** 크낙새 **

160 참매** 수리부엉이** 큰오색딱다구리* 딱다구리과 붉은배새매** 칡부엉이** 아물쇠딱다구리* 조롱이* 쇠부엉이** 팔색조** 소쩍새** 뿔종다리* 큰말똥가리* 큰소쩍새** 되지빠귀* 말똥가리* 솔부엉이** 왕새매* 올빼미** 올빼미과 털발말똥가리* 수리과 딱새과 삼광조* 검독수리** 쏙독새과 쏙독새* 잿빛개구리매** 물총새과 청호반새* 비고 : *는 희귀조류, **는 천연기념물이다.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수리부엉이 원앙 멧토끼 큰소쩍새 말똥가리 오소리 한편 광릉숲의 수계에 서식하고 있는 담수어류는 9과 32종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우점하고 있는 종은 버들치로서 우점도는 54.4%이며, 그 다음으로 둑중개 15.3%, 밀어 13.9%의 순이었다. 그 외에도 꺽지, 쏘가리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다른 동물상에 비하여 어류상은 풍부하지 못한 편인데 수계 상류지점은 수질과 유량 변화가 심한 반면, 수목원의 입구지역은 수심 이 얕고 하천 폭이 매우 좁으며 또한 하층 하상이 계단식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어류로는 한국 특산종 인 둑중개와 참중개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양서류 파충류의 수는 41종으로 매우 적다. 광릉숲에는 이 중 24종이 분포하여 전체의 59%가 살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여기에는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야생 동 식물로 지정한 구렁이와 보호야생 동 식물로 지정한 맹꽁이, 까치살모사 등도 포 함되어 있다. 광릉의 숲에 사는 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새는 크낙새이다. 크낙새는 천연기념물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자연보존연 file:///c/남양주사료집/history/his_111.html[ 오후 2:25:57]

161 맹 (IUCN) 에서지정한적색자료목록에올라꼭보호해야하는새로서, 세계에서오직우리나라에서만살고있다. 아주오래전에는쓰시마섬에서도살았다고하나 1930 년대이후로발견할수없고우리나라에는현재광릉숲과설악산에 10 쌍정도살고있다. 광릉숲에크낙새가둥지를틀수있는것은오래되어죽은고목들과크낙새의먹이가되는풍부한곤충들때문이라고한다. 크낙새라는이름은 클락클락 하고울기때문에붙여진것이라고한다 년에발견된후지난몇년간발견되지않아광릉숲을떠난것으로여겨졌으나, 최근에다시발견되었다는제보가있어화제가되기도하였다. 광릉숲에는이밖에도원앙 소쩍새 솔부엉이 붉은배새매등천연기념물로지정된 17 종의새와솔개 조롱이 삼광조등많은희귀조류들이날아들어오래된나무에터를잡고살고있다. 광릉숲에서식하는포유류로는청설모가유명하며, 고슴도치나멧토끼 너구리등도살고있다. 이외에도다음표와같이많은동물들이발견된것으로보고되었으며, 1970 년대말까지는담비 오소리등도자주볼수있었다고한다. 한편천연기념물로지정된하늘다람쥐와환경부에서지정한멸종위기야생동 식물인늑대 여우 표범등과보호야생동 식물인삵 대륙목도리담비등이드물지만서식하는것으로기록되어있다. 광릉숲에는총 17 목 203 과 2384 종의곤충, 1 목 24 과 198 종의거미류가분포하고있으며국내미기록종곤충 51 종이발견되었다. 이외에도다른지역에서볼수없는희귀곤충들이계속발견되고있다. 이러한곤충의다양성은광릉숲보다훨씬넓은면적인속리산 설악산보다커광릉숲이천혜의자연을지니고있다는것을알수있다. 그러나최근들어서는환경오염에민감한종으로알려진곤충의숫자가뚜렷하게감소하고있는데, 예를들면나비목에속하는 1174 종이대부분그숫자가줄어들고있는추세이며그중에서도수리팔랑나비, 암어리표범나비등 4 종은멸종된것으로알려져있다. 광릉숲에사는곤충중에서가장유명한것은천연기념물로지정되어있는장수하늘소이다. 까맣고반짝이는몸체에커다한뿔을이고장수처럼늠름한모습을하고있는데, 길이가 10cm 에달한다. 이종은 1970 년이전에는풍부했으나광릉숲이개발되기시작한 1980 년대이후급속히줄어들기시작하여 1990 년이후에는광릉숲에서도만나기가어렵고,* 단지광릉수목원안에있는산림박물관에전시되어있는표본으로만그위용을짐작할뿐이다. 장수하늘소외에나비종류도매우다양하다. 대표적인종을들면작은사발만큼큼직하며검푸른색에코발트빛이도는아름다운날개를가진산제비나비, 사향냄새를피우며다니는사향제비나비, 이름만큼멋있는큰멋쟁이나비, 팔랑거리며온숲을헤치고다니는수풀떠들썩팔랑나비, 한숲에같이살고있는도시처녀나비와산처녀나비등이대표적인종들이다. 또한희귀곤충으로알려진좀깽갱매미, 사슴벌레, 두줄제비나비붙이등도광릉숲에살고있는것으로보고되고있다. < 포유류의종류 > 과명종명과명종명과명종명고슴도치과고슴도치 ** 흰넓적다리붉은쥐개과너구리쥐과두더지과두더지등줄쥐대륙목도리담비 * 땃쥐과 작은땃쥐 곰쥐 족제비과 족제비 땃쥐 집쥐 오소리 애기박쥐과멧박쥐생쥐삵 * 고양이과토끼과멧토끼비단털쥐표범 * 개과청설모대륙밭쥐멧돼지과멧돼지 다람쥐과 다람쥐 쇠갈밭쥐 고라니 하늘다람쥐 ** 늑대 * 쥐과멧발쥐여우 * 비고 : * 는희귀동물, ** 는천연기념물이다.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사슴과 노루 장수하늘소 < 주요곤충류 > 과명종명과명종명 매미과좀깽깽매미 *

162 사슴벌레과하늘소과 사슴벌레 * 장수하늘소 ** 밤나방과 흰줄뒷날개나방 * 흰뒷날개나방 * 왕흰줄태극나방 * 제비나방붙이과두줄제비나비붙이 * 반달누애나방과반달누에나방 * 솔나방과줄무늬솔나방 * 대왕박각시 * 박각시나방과털보고리박각시 * 비고 : * 는희귀동물, ** 는천연기념물이다.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팔랑나비과 네발나비과 대왕팔랑나비 * 어리세줄나비 * 중국황새줄나비 * 중국황새줄나비 * 갈구리신선나비 *

163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3. 광릉숲의동 식물상 2) 식물 광릉숲에자생하고있는식물은총 841 종으로광릉물푸레나무등 215 종류의목본식물과광릉갈퀴등 626 종류의초본식물이분포하여자라고있는데, 우리나라의전체식물 4000 여종가운데남쪽에만살고있는난대식물을제외하고생각하면광릉숲에는참으로다양한식물이살고있음을알수있다. 이러한광릉숲식물의다양성을알아보기위하여광릉숲보다면적이넓고, 빼어난자연경관을지닌몇개국립공원의식물상과비교해보았다. 다음표에의하면광릉숲보다면적이 3 18 배이상큰국립공원에비하여광릉숲의식물상이오히려다양하거나큰차이가나지않는것으로나타났다. 또한광릉숲에는다른지역에서는찾아보기힘든느리미고사리, 참주름조개풀, 참나래새등특산식물 13 종이자라고있으며, 광릉요강꽃, 광릉물푸레나무, 광릉나비나물, 광릉골무꽃, 광릉말털이슬, 광릉개고사리등이름에 광릉 이라는글자가붙은식물들도많이있다. 이처럼광릉숲에는먹이피라미드의가장아랫부분을차지하는식물이많아서이어지는모든생물상역시풍부하다. 광릉숲은말그대로다양한생물의보고라고칭할만하다. < 식물상 > 강목과수종수강목과수 종수 석송강부처손목 1 1 장미목 4 97 속새강속새목 1 2 쥐손이풀목 7 19 고사리강 고사리삼목 1 3 무환자나무목 5 20 고사미목 6 37 갈매나무목 2 8 구과식물강구과목 2 4 아욱목 2 3 소생식물목 3 4 물레나물목 3 8 벼목 2 80 제비꽃목 1 20 단자엽식물강 천남성목 2 1 도금양목 4 12 분질배유목 3 7 산형화목 3 35 백합목 4 49 쌍자엽식물강 진달래목 2 8 난초목 1 14 앵초목 1 7 후추목 1 1 감나무목 2 3 버드나무목 1 9 물푸레나무목 1 8 참나무목 2 30 용담목 2 10 쐐기풀목 4 17 통화식물목 8 61 쌍자엽식물강 단향목 1 1 질경이목 1 1 쥐방울덩굴목 1 2 꼭두서니목 4 26 마디풀목 1 22 박목 1 2 중심자목 4 23 초롱꽃목 출전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미나리아재비목 7 49 양귀비목 3 22 계 < 광릉숲 국립공원의면적과식물종수 > 지역과수종수최고봉 (m) 면적 ( km2 ) 자료 광릉 임업연구원 (1994)

164 설악산 1,013 1, 설악산의식생 (1985) 지리산 156 1,257 1, 지리산희귀식물학술조사보고서 (1989) 한라산 , 국립공원자연자원조사 (1992) 북한산 국립공원자연자원조사 (1992) 소백산 , 소백산국립공원일대종합학술조사보고서 (1994) 내장산 국립공원자연자원조사 (1994) 가야산 가야산국립공원자연자원조사 (1997) 주왕산 주왕산국립공원자연자원조사 (1997) 광릉요강꽃 광릉골무꽃 광릉제비꽃 아무르장지뱀 < 광릉시험림의특산식물 > 과명종명과명종명 면마과 벼과 느리미고사리 참주름조개풀 미나리아재비과 개싹눈비꽃가지복수초 참나래새두릅나무과털음나무 천남성과노랑앉은부채진달래과흰진달래 백합과 중의무릇물푸레나무과광릉물푸레나무 참비비추꿀풀과광릉골무꽃 버드나무과털사시나무

16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2 절광릉숲의자연생태 * 3. 광릉숲의동 식물상 3) 버섯 광릉숲은침엽수림 활엽수림 혼효림이고루분포되어있고수종도다양하며, 특히오래된나무가많기때문에많은종류의버섯이발생할수있는천혜의요건을갖추고있다. 국내에분포하는버섯의종류는식용 212 종, 약용 62 종을포함하여 885 종이기록되어있는데광릉숲에는 58 과 462 종의버섯이자생하고있다. 과히크지않은광릉숲에우리나라전체버섯종의 52% 가살고있는셈이니, 광릉숲의생물다양성은동식물뿐만아니라균류까지포함하여매우높은수준임을짐작할수있다. 광릉숲에자라는유명한버섯으로는최근매스컴을탄화경버섯을들수있다. 이버섯은오래된서어나무에붙어자라는데밤이면빛을발하는형광버섯이다. 보기는좋지만독버섯이어서먹을수는없다. 먹을수있는버섯으로는오리궁둥이버섯이있는데이름그대로살짝구어놓은오리궁둥이를닮았다. 그러나광릉의숲에서가장아름다운버섯을꼽으라하면누구나망태버섯을말한다. 망태버섯은흰레이스로뜬그물망태같은갓을둘러쓰고피어난다. 그외에도운지버섯, 알버섯등이널리알려져있다. 껄껄이그물버섯 혈색무당버섯 나팔버섯 말장버섯

16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1. 시험림으로서의광릉숲 광릉숲의인공림중에서가장눈에띄는나무는잎갈나무라고할수있다. 이나무는특히백두산을다녀온사람들에게는낯익은나무일수도있다. 왜냐하면백두산에넓은면적으로펼쳐져있는나무이기때문이다. 하지만남한지역에서는자연상태로자라지않고오직광릉숲에만 1919 년에심어진이래지금까지자라큰숲을이루고있다. 광릉숲의인공시험림에는잎갈나무뿐만아니라우리나라의각처에서자라는나무들중에서자원으로서의가치가있다고판단되는나무들이많이있다. 이곳에서는약 80 년전부터우리나라에서중요하다고여겨져인공적으로심어온나무들을모두만나볼수있다. 또한이러한수목들은천연림임상의개량, 침엽수인공조림을위한기술개발과묘목육성등에제공되어우리나라산림자원조성에많은공헌을하였다 년부터 1993 년까지 118 수종 470 여만본의양묘가생산되었는데, 이들은시업기준과육묘관리등양묘법을개발하기위한시험양묘를겸하여이루어졌다. 광릉숲의인공시험림에서는산림생태계의물과양분의순환고리를밝히기위한실험, 적절한임도건설을위한시험, 그리고좋은숲을가꾸기위한시업등이이루어지고있으며천연림을대상으로한연구도활발하다. < 광릉숲을대상으로한주요연구목록 > 연구자 연도 제목 발표지 박봉규등 1980 광릉의전나무생장의정량적분석에관한연구 이대생활과학연구원논총 이승모 1980 광릉산하닌소와갑충 한국곤충학회지 강윤호등 1982 광릉삼림군집에대한 Ordination 방법의적용 한국식물학회지 (25권 3호 ) 장남기등 1982 광릉의참나무림에있어서방위에따른초엽의분해와축적 과학교육연구논총 박봉규등 1980 광릉의전나무생장의정량적분석에관한연구 이대생활과학연구원논총 이승모 1980 광릉산하닌소와갑충 한국곤충학회지 강윤호등 1982 광릉삼림군집에대한 Ordination 방법의적용 한국식물학회지 (25권 3호 ) 장남기등 1982 광릉의참나무림에있어서방위에따른초엽의분해와축적 과학교육연구논총 함규황 1982 한국산딱다구리류의생태학적연구 한국자연보존연구보고 ( 제4집 ) 최성식 1984 광릉지역의토양미소절지동물상분석에관한연구 조선대박사학위논문 송창섭 1985 광릉림내각식물군집하초목식물집단의종상관및 niche metrics 에관한연구 서강대석사학위논문 임양재등 1985 광릉의학술연구보존림에관한군집생태학적연구한국생태학회지 (8 권 3 호 ) 이경재등 1990 광릉삼림의식물군집구조 (Ⅰ) - Classification 및 Ordination 방법에의한소리봉지역의식생분석 한국임학회지 (79 권 2 호 ) 이봉수등 1990 광릉시험림내천연림의천이에관하여임업연구원연구보고 오정수등 1991 광릉천연림지역의군집분류및임분구조임업연구원연구보고 유영한 1994 광릉의활엽수림과침엽수림소유역생태계내무기영양소의유입과유출 서울대박사학위논문 윤여창등 1994 광릉크낙새의보존가치평가환경경제연구 장호찬 1994 야생조류의가치평가에관한연구 : 광릉지역을중심으로서울대석사학위논문 조기현 1996 광릉지역활엽수천연림과침엽수조림지의서식지구조와조류군집과의관계 서울대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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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1) 광릉수목원의개원 광릉숲은그일부지역에광릉수목원을조성함으로써일반인이널리이용할수있게되었으며이지역에좋은숲이존재하고있다는것을일반인에게도알리는계기를마련해주었다. 광릉수목원은 1988 년서울올림픽을앞두고국가적차원에서수목원 ( 또는식물원 ) 의필요성이크게대두되면서그중요성이인정되어설립되었다. 지금은학생이나일반인이자연을배우고쉽게접할수있는공간으로써널리인식되어있지만, 당시만해도이러한식물원문화는정부부처는물론일반인들에게매우생소하여수목원조성은그계획단계부터많은어려움이따랐다. 수목원은 1983 년부터조성을시작하여올림픽이개최되기 1 년전인 1987 년에개원하였다. 광릉수목원전경 식물원이나수목원문화는그나라의국력과비례하는문화적척도라고도알려져있는데우리나라의경우이분야에대한관심과투자가전무한실정이었다. 때마침올림픽의열기가한창이었으므로국가적차원의수목원설립이설득력있게받아들여져당시로서는파격적인규모와예산으로광릉수목원을조성하게된것이다. 광릉수목원은개원한이래지금까지수도권을중심으로하는지역의학생들과일반인은물론전국의임학도, 식물학도등에게식물을공부할수있는요람으로크게호응을받았다. 수목원에대한폭발적인수요와함께인근지역이개발되는등수많은사회적파급효과를거두었다. 광릉수목원의성공적인개원은전국으로파급되어도별로수목원을조성하고수목원문화를국내에정착 확대시키는중요한전기를마련해주었다. 광릉수목원은현재까지도국내최고 최대의수목원으로자리잡고있다.

16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2) 면적과구성 광릉숲가운데총 500ha 의면적을차지하고있는수목원은 100ha 의전문수목원과 400ha 의천연수목원으로나누어져있으며, 수목원내에는목본식물이 1663 종, 초본식물이 1268 종으로모두 2931 종이심어져관리되고있다. 한편식물들의특징이나용도 기능에따라 15 개의전문수목원으로나누어져있으며보유종수는다음표와같다. < 광릉수목원내전문수목원의면적과보유종수 > 구분 면적 (ha) 보유종수보유종수구분면적 (ha) 과수종수과수종수 침엽수원 활엽수원 습지식물원 관목원 수생식물원 외국수목원 약용식물원 고산식물원 식용식물원 지피식물원 만목원 맹인식물원 관상수원 난대수목원 1.610m2-320 화목원 이밖에도각종산림사료 표본등을전시한국내최대의산림박물관, 야생동물원, 삼림욕장등이자리잡고있다.

17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3) 보유식물의종류 광릉수목원에는목본 1663 종류, 초본 1268 종류로총 2931 종류의식물들이수집되어있다. 우리나라전역에서자생하는식물의수가 4000 여종임을감안할때작은면적의수목원에서얼마나많은식물들이식재, 관리되고있는지잘알수있다. 이가운데에는우리나라전역에서자라고있는 1968 종류는물론외국에서도입된식물도 963 종류포함되어있다. < 광릉수목원보유식물의원산지별종수 > 구분과수종수구분과수종수 목본 소계 101 1,663 소계 102 1,268 국내 초본 국내 국외 국외

171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4) 광릉수목원의주요기능 일반적으로수목원의역할은식물을전시, 관리함으로써자연교육을할수있는장을마련하는것으로알려져있지만이외에도매우다양한역할을하고있다. 우선수목원에식재되어있는식물의상당수는희귀식물인데, 수목원에식재되어보존함으로써자생지외보존이된다. 실제로외국의경우, 희귀식물이멸절되면식물원이나수목원에식재되었던식물을증식, 자생지에복원하는예가있다. 광릉수목원역시이러한기능은물론전국의희귀식물보존사업, 야생식물을탐색하여자원화하는연구, 곤충 동물 식물 재감버섯등생물표본을수집하여분류 동정 소장, 생태계조사등여러분야에걸쳐생물다양성보존과관리등다방면의연구사업이이루어지고있다. 또한매주초등학교를대상으로하는자연학습체험인녹색수업 (Green School) 운영과숲과의만남등자연환경교육의장으로도활용되고있다.

172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5) 전문수목원 습지식물원습지식물원은광릉수목원의초입에있는관찰원으로물속에뿌리를박고살아가는낙우송을비롯한여러습생식물들이있다. 물과가까운식물을볼수있는아름다운장소이다. 또한육림호의위쪽에는자연적으로어우러진수많은습생식물들이피고지는생태적인습지식물원이조성되고있다. 관상수원진입로를거쳐안으로들어오면넓게펼쳐지는곳이관상수원이다. 이곳은일반적으로정원에서많이쓰이는반송이나철쭉그리고돌이어우러진공간으로우리나라에서주로정원과공원에심는나무들을위주로하여정원양식을재현하였다. 가운데광장을중심으로작은블록들이연결되어있는데위에서내려다보면거대한꽃모양을형상화한것임을알수있다. 우리나라에들여와가장처음심은나무이기때문에가장오래된나무라고할수있는계수나무의수벽 ( 樹壁 ) 을비롯하여우리나라특산식물인구상나무, 철쭉, 소나무, 조팝나무, 백송등이있으며그밖에마이산돌탑, 석가탑, 다보탑모형과나리원, 원추리원과같은야생초원등이자리잡고있다. 만목원만목원은수목원중앙광장의오른쪽에위치하고있으며, 덩굴성목본식물들이다양한형태의철재구조물을타고올라자라고있는곳이다. 대표적인산과일인으름, 머루, 다래, 오미자는물론다양한으아리속식물과품종들이수집되어있어꽃이피는시기는물론가을이면우리의산야에서만나는각종야생과일을볼수있다. 난대수목원관상수원의오른쪽에큰유리온실이있는데여기가바로난대수목원이다. 유리온실은산모양으로만들어져있다. 온실안으로들어서면왼쪽에는증식온실이있는데이곳에서는연구를목적으로특별히키우거나증식해야할필요가있는희귀식물들이자라고있다. 따라서일반인들에게는출입이제한되어있다. 일반인들을위한전시온실은온실문을들어서서오른쪽에위치하며기후대에따라크게두개의전시실로나누어진다. 먼저만나는곳이아열대식물원으로주로외국의아열대지방식물들이자라고있고그건너편에있는곳은난대식물원으로우리나라의남부도서지방에서자라는식물들을중점적으로수집해놓았다. 아열대식물원에서는백악기에번성했던나무고사리를비롯하여커피나무, 야자수와같은아열대나무들을직접볼수있다. 또한제주도에서천연기념물로지정되어있는파초일엽과문주란 금새우란 자란등의희귀식물을비롯하여오죽등의대나무류도모아져있다. 난대식물이있는칸으로건너가면여러가지동백나무가있고천연기념물팔손이, 후추대신이용했다는덩굴식물후추등, 송악, 멀꿀등과겨울이되어도잎이지지않는상록으로넓은잎을가진각종상록활엽수들을볼수있다. 맹인식물원온실을나오면연결되는곳이국내유일의맹인식물원으로광릉수목원의특색가운데하나이다. 장애인을위한시설에많은투자를하는선진국에서도맹인식물원을별도로만드는일은거의없다고한다. 이곳은관찰로를이끌어주는바닥면이도돌하고손잡이를잡고따라가다볼록튀어나온곳에다다르면보지않아도그자리에서서나무에대한점자판설명을읽고동시에나무를눈이아닌다른감각즉맛, 촉감, 향기등으로느낄수있도록배치해놓은곳이다. 화목원화목원은꽃나무들을품종별로모아놓았다. 봄을알리는매화 ( 매실나무 ) 만해도흰꽃, 분홍꽃, 겹꽃등 40 품종이나되고그밖에명자꽃나무원, 철쭉원, 복숭아나무원, 모란원등의다양한품종을수집한작은정원들로구성되어있다. 대부분의나무들이봄에아름답게꽃을피워장관을이루며, 가을에는열매도볼수있다. 수생식물원수생식물원은정자가하나있는데물과가장잘어울리는나무인버드나무가옆에서서가는가지를물가에드리우는풍치가좋다. 수생식물원은한반도의모양을본떠서설계되었으며많은식물들이자라고있다. 수면에는대표적인희귀식물인가시연꽃을비롯하여노랑어리연꽃, 수련, 왜개연꽃등이있고그가장자리로고랭이, 창포, 꽃창포등습지나강가 저수지주변에살고있는수십종의식물들이구획별로구분되어있다. 특히우리나라의경우수질오염이급속히확산되어수많은수생, 수변식물이사라지고있는상황에서이곳수생식물원은희귀 멸종위기식물의매우귀중한자생지외보존장소이다. 또한언뜻보면단순히인위적으로만들어놓은작은공간인것같지만그속을들여다보면어디에서왔는지모를물고기들과소금쟁이를비롯한수많은수서곤충류가살아가고새도찾아드는또하나의작은생태계로서자연교육의장이다. 수생식물원 관목원관목원은동쪽끝의산비탈면에자리하고있다. 이곳은걸어다니기에그리쾌적한곳이못되어사람들의발길이많지않지만식물을전공하는사람들은우선이곳부터찾는다. 식물분류학을공부하는사람들이관찰하고, 연구하기에편리하도록같은종류의식물끼리모아놓았다. 예를들면조팝나무의경우참조팝나무, 덤불조팝나무, 산조팝나무, 당조팝나무하는식으로심어놓았기때문에아주유용할뿐만아니라종류를모으는데애쓴결과다른곳에서좀처럼만나기어려운나무들도많이있어대학에서분류학을공부하는이들이주로찾아오곤한다. 이곳에는우리나라에서자라는웬만한나무들이거의대부분있고아주귀한흰진달래, 산개나리, 만리화, 장수만리화, 개느삼과같은희귀식물들도여럿있다. 식 약용식물원광릉수목원을다니다보면울타리가있어서들어갈수없는장소가나온다. 고산식물원, 약용식물원, 식용식물원, 활엽수원, 지피식물원, 침엽수원등의관찰원들인데이곳을공개하지않는가장큰이유는일반인들에게공개될경우많은식물들이없어지기때문이다. 하지만연구와자연학습을목적으로사전에허가를받을경우에는관찰이가능하다. 특히수목원의북동쪽숲속에위치한식 약용식물원에는매우다양한식물들이전시되어있어매년한의학이나약학, 식물학, 임학, 식품영양학등관련분야학생들의중요한학습장소로이용되고있다. 우리나라에서자라는식물가운데먹을수있는식물과약초로이용되는식물들이 2 2m 의사각블록에전시되어있으며학명, 과명은물론성분과용도까지적혀있어공부하는이들에게매우유용하다.

173 외국수목원외국수목원은외국수종들을심어놓은곳으로작은숲처럼보인다. 만주자작나무를비롯하여구주소나무, 서양측백, 독일가문비등다양한외국수종들이 1912 년부터우리나라에들어와처음이곳에심어진이후국내적응시험을거쳐이제는널리퍼져나갔다. 활엽수원활엽수원은수목원북쪽의다소경사진곳에위치하고있다. 국내에서자라는낙엽활엽수가운데교목류를중심으로조성된관찰원이다. 유사한분류군순서대로전시되어나무를연구하기에매우유용한곳이다. 하층에는다양한자생초본군락을조성하고있으며이것이모두정리되면공개할예정이다. 침엽수원침엽수원은수목원의가장서쪽에위치하고있다. 우리나라에서자생하거나도입되어심어진대부분의침엽수들을모아전시하였다. 구상나무, 잣나무, 눈잣나무등의자생수종과독일가문비, 화백, 구주적송등유명한외국수종이다양하게있다. 지피식물원지피식물원은수목원의입구에서동쪽으로하천변에조성되어있다. 정원을비롯한다양한녹지공간에잔디를대신하여지면을덮을수있는자생초본류를선정하여생태적으로적합하게심어전시하였다. 광릉숲의대표적인식물인피나물을비롯하여바람꽃류, 둥굴레, 앵초, 물봉선등이있다. 고산식물원고산식물원은수목원의동북쪽끝, 숲속에위치하고있다. 여름철의고온을견디지못하는고산식물들의특수한생육환경에적합한곳이며한국특산식물인금강초롱을비롯하여솜다리 ( 한국에델바이스 ), 모데미풀, 섬남성등의식물들이산지별로식재되어있다.

174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6) 산림박물관 산림박물관은수목원의중심에자리잡고있다. 국민들이숲을잘이해하고자연을효과적으로공부할수있도록만들어진이곳은지하 1 층, 지상 2 층의건물로 1987 년에개관하였다. 모든소재와기술을우리것으로하되가장최고의것으로하며자연에순응한한국의전통양식을현대감각에맞도록설계한다는기본원칙하에세워졌다. 외부는국산석재인화강암, 내부는잣나무, 낙엽송등국내에서생산된목재로만들어졌으며주제별로나누어진총 5 개의전시실과표본관, 시청각실, 도서소장고등의부대시설이있다. 산림박물관에는총 1 만 3000 여종 3 만 3000 점의전시물, 5760 종류 1 만 5311 점의동식물표본이소장되어있다. 이곳은우리나라산림의역사를고스란히보여주는값진곳이기도하다. 산림박물관외벽에새겨진벽화는 7 세기경백제의산수문양을컴퓨터그래픽으로단순화하여음각으로조각한것이다. 이산수문양은나무, 산, 돌, 구름과같은자연을내용으로하고있어박물관의외벽으로는아주적합한소재라고할수있다. 박물관에들어서서천장을바라보면독특한모양의구조물이있다. 목재로는크게인기가없는낙엽송간벌재를이용하여한국의전통문양을살려만든것으로작은간벌재 ( 나무가잘자라도록속아내느라생긴목재 ) 를가지고우리의집성기술로대형구조물을만든좋은본보기가되고있다. 안으로들어오면박물관은 5 개의전시장과표본실, 특별전시실로구성되어있다. 제 1 전시장은 산림과기술 을주제로한다. 호랑이와곰의박제는단군신화에나오는동물로서이들과나무들이우리의환경을상징한다. 큰느티나무는임하댐이생기면서수몰될나무 5 그루를합쳐서하나의커다란나무로만든것이다. 이와함께자원이되는여러원목들과기술을나타내는각종도구들이함께전시되어있다. 여기에나무의여러단면을잘보여주는원목들은우리나라에서산림에조림을권장하는 23 개의대표적인수종이며재질, 특징, 용도등이설명되어있다. 박물관에들어서서정면에보이는영상기기는한국의임업을설명하는비디오로컴퓨터에관련자료가입력되어있어원하는제목의번호를누르면해당되는화면을볼수있다. 2 층으로연결되는계단의왼쪽에는우리나라의판재 66 종이, 오른쪽에는우리나라에서널리쓰이는외국산판재 32 종이나열되어있다. 2 층의제 2 전시실은 산림과환경 을주제로한다. 그동안인간이산림과함께쌓아온산림의역사를비롯하여나무를이용하는여러가지기구등이전시되어있고최근들어특별히강조되고있는환경보전기능이자세히설명되어있다. 신생대때너도밤나무에규산염이침투하여나무가돌이된규화목을비롯하여여름날시원하게안고자는대나무로만든죽부인등하나하나들여다보면옛선조들의해학과지혜가담겨있고그숨결을느낄수있는각종기구들을만날수있다. 또예전에한지를만들던과정, 커다란암석을가공하여석재로이용하는과정, 정약용이발명하여화성을쌓을때이용했다는기록을보고고증해실제의 1/3 크기로만든녹로의모형등이있다. 제 3 전시실은우리나라의임업사를소개하고있으며제 4 전시실은산림의생태계를주제로하고있다. 특히이곳은숲속의생태이론을알기쉽게그림과모형으로설명하고, 장수하늘소나크낙새와같은귀한표본과 500 여종의갖가지곤충들을나선형으로배열하여둥글게돌아가는곤충의군무, 새와동물의모습을울음소리와함께보여주는곳등볼거리가많다. 이외에도표본실, 우리나라의각종목재로만든가구들이전시되어있는특별전시실, 임산물의하나인석재 ( 石材 ) 전시장이있다.

175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7) 야생동물원 야생동물원은급속하게사라진우리나라의야생동물혈통을보존하고증식하여더이상멸종되는일이없도록하자는취지에서만들어진곳이다. 이곳에는백두산의호랑이와반달곰을비롯하여천연기념물인산양, 원앙이, 멧돼지, 독수리, 노루와같은동물들이따로따로집을마련하여살고있다. 백두산호랑이에대한국민적인관심으로한때이곳은일반인들에게공개되기도했으나, 관람객이많아지면서야생동물을번식시키려는본래의목적을이루기가어려워져지금은출입을제한하고있다.

176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2. 광릉수목원 8) 기타시설 수목원에는지금까지말한전문수목원과기타시설이외에도여러명소가있다. 광릉숲의전망대는높이 18.7m 로우리가흔히낙엽송이라고부르는일본잎갈나무목재로만들어졌으며생태타워라고불린다. 이타워의꼭대기에오르면수리봉과죽엽산을둘러싼산자락이한눈에내려다보인다. 이곳은숲과나무의생리, 생태, 야생동물의동태에관한연구와산불감시를위해세워졌다. 광릉수목원의안쪽에있는커다란호수는육림호이다. 현재이곳에는수많은비단잉어가헤엄쳐다니고여름에는잔잔한수면에노랑어리연꽃이퍼져무척아름답다. 예전에는이곳의물로전기를돌리는실험도하고배도띄우는등감추어진명소였다고한다. 또한관찰원과연이어져있는전시림은 1927 년에식재를시작한다양한유용수들의생장특성을파악하고생육상황을조사할수있도록만들어진일종의실험지로황벽나무를비롯하여현사시나무, 튤립나무, 가래나무등다양한나무들이차례로심어져있다. 나무들대부분은현재실험대상에있으며여기에는물의조절기능실험등여러가지실험장치가있으므로출입이제한되어있다. 그러나이러한곳들이언제까지나출입이제한되지는않을것이다. 좀더다양한볼거리가마련되고보호방안이세워진다면이숲들도이곳을찾는모든이의숲이될것이다. 이외에도삼림욕장이있는데아마도삼림욕장의효시일것으로추측된다. 그코스의적절함과쾌적함, 주변의좋은나무들로인하여가장사랑받는삼림욕장의하나였지만광릉숲의보존문제가대두되면서잠정폐쇄된상태이다. 현재광릉수목원은지나친관람객으로숲의보존에문제가생기자적정수용인원을검토하여, 평일에한해 5 일전에예약한사람들에게만입장을허용하고있다.

177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3. 광릉숲의지속가능한개발과보전 1) 광릉숲에영향을미치는요인 광릉숲보존을목적으로개최한 광릉숲보존을위한심포지엄 에서는광릉숲에장기적으로영향을미치는요인으로인근도시의도시계획구역확장, 광릉숲이용자의지속적증가, 주변지역에유흥 위락시설의증가와확장가능성, 광릉숲주변지역의주거지화, 대기오염과소음공해, 광릉숲의생태적고립화등을들고있다. 이중에서가장심각한문제는광릉숲의입구에개발중인위락랜드나음식점, 여관등의개발이법적으로는아무런하자가없다는점이다. 특히이러한개발행위는 1994 년부터준농림지역의행위제한이완화됨에따라더욱증가하고있으며,* 최근제기되고있는개발제한구역의재조정작업과맞물려문제의심각성이더해진것으로추측된다. 광릉숲입구의유흥위락시설 인장애요인이된다고할수있다. 이러한개발에따라광릉숲은점점생태적으로고립되어섬과같은위치에서고있다. 생태계내에서생물이살기위해서는유전적다양성을유지할수있는최소한의개체군크기가보장되어야한다. 또한동물, 특히고등동물의경우에는상당히넓은면적이확보되어야만생존이가능하다. 그러나현재광릉숲의상태는주변지역이도시화, 주거지화, 상업화됨에따라다른생태계와단절된일종의섬과같은처지에놓이게되었다. 이는결국광릉숲이건전한발달을하는데치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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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3. 광릉숲의지속가능한개발과보전 2) 광릉숲보존을위한노력 광릉숲을보존하고자하는노력은 314 번지방도로가포장되어자동차통행량이증가함에따라광릉숲에살던동물들이점차사라지면서나타나기시작했다. 수목원과삼림욕장의개장으로엄청난수의관광객이찾아오게되면서광릉숲이제모습을잃을위기에처하게되자광릉숲보존노력은강도가더욱높아졌고보다구체화되었다. 그러다가 1996 년에광릉숲입구에위락시설이조성되기시작하면서광릉숲을살리고자하는노력들이하나의결집된힘으로나타나기시작하였는데, 이것이바로 광릉숲보존협의회 의결성이다. 광릉숲보존협의회는임업단체, 학회, 환경단체등 개의민간단체가광릉숲을보존하자는취지에서자발적으로구성한협의체이다. 이협의회는광릉숲보존을위한공청회개최, 개발반대운동등을실시하였다. 이후정부에서는광릉숲보존을위한용역사업 ( 광릉시험림의보존대책과효율적인관리방안연구, 서울대학교환경계획연구소 ) 을실시하였고, 이연구의결과를반영하여광릉숲보존을위한몇가지방안을마련, 시행하게되었다. 구체적으로언급하면우선광릉숲에지나치게많은사람들이찾아오는것을막고수목원을연구와학습의장으로만이용하기위하여주말 휴일개장을금지하고, 평일에만예약제에의하여관람객을받고있으며, 삼림욕장을폐쇄하였다. 그결과휴일에 1만 4000여명에이르던탐방객들이줄어들게되었고, 동시에광릉숲주변에음식점 여관등이지나치게난립하는것을막는효과도거둘수있었다. 또한교통량이감소하여자동차배기가스와소음에의한동식물피해가상당히줄어든것으로평가되고있다. 장기적으로는광릉숲을가로지르는광릉숲을통과하는도로 314번도로를폐쇄하고우회도로를건설할예정인데, 이사업이완료될경우광릉숲의모습은 10여년전도로가포장되기전의모습과상당히유사한정도까지회복될수있으리라판단된다. 이연구에서는그외에도광릉숲을보전구역으로지정하는방안, 광릉시험림보호를위한특별법 ( 가칭 ) 제정과, 산림법 국토이용관리법 개정등보존위주의방안, 광릉숲인근지역의개발에대한합리적인관리방안의설정과토지소유자에대한적절한보상대책마련방안을제시하였다. 이문제에대해서는앞으로좀더구체적으로검토하여보다합리적인대처방안을마련해야할것이라고생각한다.

180 제 1 권역사 제 1 편연혁과자연환경 제 3 장광릉숲 제 3 절광릉숲의이용과보존 3. 광릉숲의지속가능한개발과보전 3) 광릉숲의미래 광릉숲이지니고있는가치로다음의세가지를들수있다. 첫째, 광릉숲은우리나라산림생태계에서는보기드물게극상림을간직하고있는숲이라는점이다. 이는하루아침에이루어진것이아니다. 수백년간에걸쳐국가뿐만아니라많은이들이보호노력에동참해서이루어진결과로서그가치는금액으로환산할수없을정도로매우크다. 특히우리나라의다른숲들이대부분한번파괴된후에이루어진 2 차림으로서광릉숲과같은모습을지니게되려면앞으로최소한 200 년이상의기간이더필요하다는점을고려할때더욱그렇다. 그러므로이러한숲이후대에까지이어질수있도록잘보존해야한다는것은더말할필요가없을것이다. 둘째, 광릉숲은수목원과함께매우훌륭한자연교육의장으로제공될수있다. 우리조상들은수려한경관을지닌산천에서호연지기를길러왔는데, 광릉숲은자라나는세대들에게이러한호연지기를키울수있는장의역할을할수있을것이다. 특히수목원은대도시에살면서자연을모르고지내는세대들이자연을쉽게접하는방법을배울수있는장으로서매우가치가높다. 현재는수목원이임업연구원의부속기관이지만멀지않은장래에국립수목원으로발전해나갈수있을것으로보이며, 이렇게될경우광릉수목원은우리나라에서명실상부한자연교육의메카로서자리잡을수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에서언급한광릉숲에대한여러가지보전방안이성공적으로이루어질경우광릉숲은자연생태계의보전과개발을조화시킨모델로제시될수있을것이다 년브라질의리우에서열린유엔개발과환경회의에서는우리의후손들도현재의우리와동등한권리를가지고환경을이용하거나이에의한혜택을누릴수있도록모든개발행위는친환경적으로이루어져야함을천명한바있다. 광릉숲은서울이라는거대도시뿐만아니라주변의많은도시와인접해있어개발에의한압력을지속적으로받아왔고, 이는앞으로도계속될것으로예상된다. 개발행위들이무분별하게이루어질경우우리의후손들은현재의광릉숲과같은모습을볼수없을지도모른다. 그러므로광릉숲주변에서일어나는모든개발행위는광릉숲에대한영향을최소화할수있도록친환경적으로, 다시말하면지속가능한이용이되도록하여야한다. 즉사유재산권과숲의보전이라는두가지명제를다만족시킬수있는형태로보전과이용이조화를이루어야하며, 여기에서지속적으로이용할수있는모델을완성한다면다른지역의개발에도그대로적용할수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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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인류의역사는문자의유무에따라선사시대와역사시대로구분되고있다. 선사시대는 1838 년스웨덴의닐슨 (Nilson) 이최초로주창했던용어로문자가사용되지않았던시대를말한다. 그러므로선사시대연구는유적 유구 유물등을통해서만이루어질수밖에없다. 문자의출현은지역에따라차이가많기때문에선사시대의종말이일률적이지는않다. 선사시대란용어는 19 세기후반기이래로전세계적으로사용되고있다. 선사문화에대한시대구분은덴마크코펜하겐박물관의관장이었던톰센에의해구체적으로체계화되었고, 그제자인윌사애에의해야외에서확립되었다. 톰센의 3 시대구분법은도구의재질과도구에반영된기술발달정도에따라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구분되며, 여기에는시간적인역사성이부여되어있다. 그이후영국의존러복은석기시대도석기제작방법에따라타제와마제로구분하였다. 이에따라타제법으로제작한시대는구석기시대로, 마제법을사용하게된시대는신석기시대로분류되어 3 시대법은 4 시대법으로좀더세분화되었다 년대이후에는구석기시대와신석기시대의사이를연결해주는문화층이발견됨으로써중석기시대라는개념이추가되어톰센의 3 시대법은그골격을그대로유지한채 5 시대법으로확장발전하게되었고, 더나아가각시대마다유적 유물의특성에따라전기 중기 후기로재분할되어오늘에이르고있다.

18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1 절구석기문화 해방이전에우리나라구석기문화의존재는일제식민주의사관의영향으로부정되었다. 한반도내에서구석기유적이발견되지않아야일본이선사시대부터한국에비해문화적으로우월했음을주장할수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1960 년대에들어오면서공주석장리, 웅기굴포리를비롯하여여러지역에서구석기유적지가발견됨으로써한반도에서도구석기인들이살고있었음이증명되기시작하였다. 이러한연구성과는거의같은시기에남북한학계에서이루어지게되었다. 이제는유적과유물의수가많아지고종류도다양해졌으며, 연구범위도확대되어본격적인구석기연구단계로진입하였다. 구석기시대는지금부터 1 만년이전에살았던인류의문화시대를말하는것으로, 이때는빙하시대이기도하다. 빙하시대는신생대 4 기인홍적세에살았던사람들의시대로, 4 번의빙하기 ( 氷河期 ) 와 3 번의간빙기가있었다. 이시대에는빙하의남하와북상에따라서점차적으로자연환경의변화가일어났고, 이러한현상은인류문화에많은영향을미치게되었다. 구석기시대에사용된도구는동물의가죽, 뼈, 나무, 뿔, 돌등이있었을것이지만석기외에는부패되어현존하지않는다. 그렇기때문에구석기시대연구는주로석기의형태학적측면에서이루어지고있다. 또한구석기문화의연구는석기와더불어유적의층위를통해서도이루어지고있다. 즉지질학적으로유적의층위를구분하고, 그안에서문화층을찾아내어층위에따라상대적편년을시도하는것이다. 구석기유적에서지질층, 동물화석, 화분, 구석기석공, 화석인골들이모두조사되었지만이유적의정확한연대는알수없고, 단지상대연대로편년될뿐이기때문에가능한한절대연대측정법을통하여연대를알아내는것이중요하다. 이것은과학적방법의수용문제이며절대연대측정법의응용문제와당시문화를담당하고이룩한사람들의행위를밝힐수있는해석방법이다. 석기의형태와제작기술, 사용흔적에대한연구를통하여당시인들의기술, 생활, 사회구조, 계통등을복원할수있다. 석기는제작기술에서크게타제법과마제법으로구분되는데, 타제석기는석기의제작 사용이시작된이래지금까지사용되고있으며, 마제석기는구석기 중석기시대에는거의제작되지않았고신석기시대이래의특징적인것이다. 타제석기는돌을깨뜨려서만드는것이기때문에기술이필요하고마제석기는우선타제를먼저행하고그형태를만든다음마연을하는것이다. 석기에대한연구는그것이만들어진지점에서인간의행위를연구, 즉석기의형태와제작기술을연구하는것과석기가사용된시점에서인간행위를연구, 즉석기의기능을연구하는방법이있다. 종래에는석기의연구가기술자체를규명하는형태론에주안점을두었지만오늘날에는다양한방법을통하여인간행위의차이점을연구하는것으로발전하였다. 즉연구경향이석기를통하여인간의행위를시스템으로파악하는쪽으로흐르고있다. 석기의재료인돌은인간이최초의단계에서불가결하게이용한천연자원의하나이다. 석기를만드는경우제작기술과더불어석기에알맞은원재를선택하는것도중요하다. 그러므로석기의제작에는지역에따라생산되는암석이다르기때문에그중에서경험적으로각종용도에가장알맞은석질이선택된다. 따라서석기에는지역특유의석질에적응하여제작법과형태를발달시키는면이나타난다. 타제석기로이용되는돌은우선견고한것이필요한데, 그중에서도적당한타격과가압에의해서일정한방향으로규칙적으로박탈되고그주변이예리하게될수있는것이필요하다. 주요석재로는유럽 아프리카등에서주로사용된프린트 (Flint), 북아메리카의흑요석과규암 (Chort) 석영 (Quartz) 등이있다. 이중프린트 흑요석등은산지가일정하여수백 수천 km 를수송해야했기때문에, 이를통해당시문화와사람들의이동경로를추적할수있다. 석기의속성중에서사용했다는것은중요한요소의하나이다. 종래석기사용법의복원은형태와민족지적인예로부터의추정이중심이었고실증적인검토, 분석이결여되었다. 그러나현재는석기의사용시점에서사용흔의검토가행해지고또출토지점 ( 폐기된시점 ) 에서사용시점을복원하는것이가능해졌으며, 통계학적처리에의해서석기군의차이를인간의석기사용의행동면에서보려는시도, 즉석기를통해서당시인간의생활을복원하는시도가이루어지고있다. 석기의분류법에는여러가지가있다. 현재주로사용되는분류에의한형식학은형태에의해성립하기때문에제작시점에서의형식학이다. 이외에사용시점에서의형식학은사용흔에서고찰되는용도의분류에기초한다. 또한유물을관찰하여사용흔을찾아낸후, 실제로석기를사용하여그사용흔을실제유물과대비시키는방법도있다. 석기제작에는직접타법, 간접타법, 가압법이있다. 이렇게하여완성된석기가운데몸돌석기 (core tool) 는석기를만들고자하는속돌을가지고석기를제작하는것을말하고, 격지석기 (flake tool) 는석기를만들고자하는격지를가지고석기를제작하는것을말한다. 전기구석기시대에는몸돌석기를많이사용하였으며, 중기에는격지석기, 후기에는격지석기중의돌날석기 (blade tool) 가많이사용되었다. 구석기인들의생활은수렵과채집그리고어로에의해이루어지고있었다. 채집의대상은나무열매류, 견과성식물류, 뿌리성식물류, 기타수확물등이었고이것이식량의절대다수를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또한강가에면한곳에살고있었기때문에어로의비중이상당히큰편이었다. 이밖에수렵활동을병행하기도하였는데, 수렵은협동생활을해야효과적이므로공동체적생활의일면을보여준다. 더불어이들은식량을구하기위하여이동생활을영위하고있었다. 또한구석기인들은예술품도제작하였다. 예술품의제작동기는미적인감각이아니라죽은사람에대한생각때문이거나채집 사냥이잘되기를기원하는경제적목적에있었을것이다. 또는동물이나질병으로부터보호받기를원하는것으로볼수있다. 예술품은주로사람이나동물을평면혹은입체로조각하였는데생활과연관되어있었다. 그예로는비너스상, 동굴벽화, 암각화등을들수있다. 남양주지역에서지표조사에의해발견된구석기유적지는조안면능내리, 조안면삼봉리, 화도읍금남리 * 와화도읍검터, 조안면송촌리두촌유적, 조안면진중리마진유적, 조안면능내리마재유적 * 등이있으나정식으로발굴된것은없다. 하지만한강유역을중심으로많은유적이발견되는것으로보아앞으로남양주지역에서도이시기에해당하는유적들이발견될가능성이있다. 인근지역의유적으로는서울중랑구면목동유적,* 양평병산리유적 * 등이있다. 면목동유적은지표조사를통하여수습된유물분석을기초로하였을때상당히발달된후기구석기유적임이드러나고있다. 그러나보다광범

184 위한정식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않은상태에서도심지로변해아쉬운감이있다 년에처음발견된이유적은지표채집및시굴에의해수집된 327 점의석기중 39 점을형태학적으로분석하여그성격을정립하였다. 이분석에서찍개, 뾰족개, 긁개는대개석장리유적제 6 문화층의석기들과같은형식의석기로보고있으며, 북한의굴포리전기문화층과함께아시아적찍개문화전통을이어받은문화로그연대는 30,000B.P 를전후로하는후기구석기문화에해당한다. 이것은우리나라구석기의연구성과가거의없었던시기에한강유역에서최초의구석기유적지를알리는것이기도하다. 이러한계통의구석기유적이중랑천을앞에둔산기슭에상당히있었을것이확실하나현재는택지건설로인해지형이변형되어그원형을전혀살필수없을뿐만아니라다른유구의존재는확실히알수가없다. 병산리유적은중기구석기시대에서후기구석기시대에해당하는것이며, 이유적에서는돌날몸돌이나르발르아식몸돌은나오지않으며, 타격면은자연면을그대로이용하는경우가많다. 둥근몸돌을제외한나머지몸돌은흔히한쪽방향떼기, 서로마주보는두방향떼기, 또는수직과수평방향으로엇갈려떼기가베풀어진모습으로나타난다. 그리고찍개는한쪽면만을떼어서만든것이가장많다.

18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절신석기문화 구석기시대가끝나고기원전 8000 년을전후로해서신석기시대가시작되었다. 이때는지질학적으로볼때홍적세가끝나고충적세가시작되는시기이다. 신석기시대는빙하가물러난후빙기로서빙하기와달리자연환경변화의굴곡이심하였고, 이러한변화과정속에서새로운기술과도구의발달이일어나게되었다. 이시기에는구석기시대이래줄곧사용하던타제석기뿐만아니라마제석기도사용하게되었으며, 토기의사용도나타났다. 토기와마제석기의사용은신석기시대를알리는중요한사실이라고할수있다. 경제적인면에서도점차지역에따라획득경제단계에서생산경제단계로이행하고있었다. 그러나이러한생산경제로의이행역시해당지역의환경조건에따라다양한형태로나타나게되었다. 즉특정지역에서는생산경제로이행하지못하고여전히획득경제에머무르고있었다. 특히우리나라를포함한시베리아 만주 몽고가이경우에속하였다.* 하지만이러한획득경제도환경조건과결부되어적응하는과정에서다양한형태로나타나는것이므로이전구석기시대와질적인변화가있었던것이틀림없다.* 이시기는문명사회로나아가는시발점이므로세계사적으로는신석기혁명이라고부른다. 신석기시대의특색으로서는일반적으로토기의제작, 농경 목축 ( 생산경제 ), 방직기술등의발명을들고있는데이것은신석기문화의속성에놓을수는있어도본질은아니다. 그본질은석기의마제법에있는것이다. 신석기시대라하는것은기술사적인시대구분이기때문에문화사적, 일반사적인시대구분에기초한것은아니다. 또한신석기시대라는것도구대륙과신대륙에서의양상이다르며, 또생산경제를기준으로하는것과획득경제에의한것과는구별이있다.

18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절신석기문화 1. 유적과유물의연구 우리나라신석기문화는그동안정식으로발굴조사된유적이적을뿐만아니라그문화에대한연구도다른시대에비해서그리활발하지않다. 이것은조사된유적이적다는점이외에도출토유물자체가토기와석기가대부분이기때문이다. 신석기유적에서출토되는유물중그시대의문화성격을명확하게보여주는유물로는토기가있다. 따라서신석기문화에대한주된연구는현재까지주로토기를중심으로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신석기시대빗살무늬토기는단치구 ( 單齒具 ) 나다치구 ( 多齒具 ) 로, 토기표면을누르거나그어서각종기하학적문양을시문하여제작한토기이다. 이토기는신석기문화를대표하는특징적인유물로서지역적성격이강하게나타나며그분포권은크게중서부지역군, 남부지역군, 동북지역군, 서북지역군으로나누어진다.* 이러한분류기준은토기의기형에따른것이다. 이보다선행하여나타나는융기문토기가평저 ( 平底 ) 인점에비해빗살무늬토기는평저와원저 ( 圓底 ) 2 가지형태가있으며, 이는지역을달리하며뚜렷이구분되고있다. 우리나라의서부지역에서는청천강을, 동북지역에서는오산리를경계로하여그북쪽과남쪽지역에각각평저와환저의빗살무늬토기를만들어사용했던문화집단의존재가뚜렷하다.* 따라서중서부지역은한강유역과대동강유역을포함하는곳으로하나의문화권을설정할수가있다. 중서부지역에서발견되는토기는직립구연 ( 直立口緣 ) 에첨저 ( 尖底 ) 원저로이어지는반란형 ( 半卵形 ) 의빗살무늬토기로, 전기에는구연부에단사선문 ( 短斜線文 ) 점열문 ( 點列文 ) 이, 동체부에어골문 ( 魚骨文 ), 저부에단사선문등각기다른문양을시문한소위삼부위문양토기가성행한다. 그리고중기에는토기전면에평행선대문 ( 平行線帶文 ), 삼각집선문 ( 三角集線文 ), 어골문 ( 魚骨文 ) 을교대로시문한토기가나타나며, 후기에는토기전면또는동체부까지어골문등의동일문양을시문한토기가성행하고삼부위문양토기는단사선문등의구연부문양만이남게된다.* 신석기시대에대해서는현재까지대체로토기의기형이나문양, 시문방법에따라문화성격과편년을설정하고있으며,* 그연구결과를바탕으로신석기문화의유입과정에대한논의가 * 부분적으로이루어지고있다. 한편지금까지의연구경향가운데토기를포함한각종도구, 즉석기 골각기 ( 骨角器 ) 등을분석하여도구가가지는성격을종합적으로파악하려는움직임도있다.* 또한한반도의신석기유적은주로그입지가어로활동과밀접한관계가있는내륙강가와해안가에집중분포하고있고, 그유적의형태도대부분패총 ( 貝塚 ) 으로나타나고있어서그에대한분석을통하여당시사회상이나문화성격을파악하고있다.* 이시기의주거지에대한연구도현재활발하게진행되고있다. 주거지는사회구조를반영하고있는것이지만이것은종합적인연구가이루어져야만결과가정리되는것이기때문에현재는집구조에대한연구만진행되고있다.* 이러한사실로볼때주거문화에대한새로운해석이절실히요청된다. 이러한연구성과로볼때남양주의신석기문화는중서부지역군에속하는것으로문화적성격이뚜렷했음을알수있다. 하지만현재남양주지역에는정식으로발굴조사된유적이없고, 다만다른시대의유적조사나지표조사를통해서확인된것뿐인안타까운실정이다. 남양주지역에서발견된유적은수석리유적 *, 금동유적 *, 진중리유적 *, 동막동유적 *, 퇴계원유적 *, 금남리유적 * 등이있다.

18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절신석기문화 2. 정착생활 신석기시대의가장큰특징은정착생활을영위하고있었다는점이다. 이러한생활방식은구석기시대의이동생활과는큰차이를보이는것이며, 이미생활방법상일대전환이이루어졌다는것을의미한다. 정착생활의모습은현재발견되는집자리유적을통해서알수있다. 비록남양주지역에서이시기의집자리터가발굴되지는않았지만신석기시대유물산포지가발견되는것으로보아앞으로집자리가발견될가능성은충분히있다. 그리고남양주의한강변에서바라보이는하남의미사리유적 * 과강동구의암사동유적 * 에서대단위집단취락지가발견되고있는점으로보아서로왕래가있었을가능성을상정해볼때, 이지역에도집자리가있었을것이다. 즉, 암사동유적은신석기시대주거문화를밝히는데귀중한자료를제공해주고있다. 미사리유적지도최근에대대적인발굴작업결과집단취락지였음을알수있었다.* 이시기에정착생활을영위할수있었던것은생업경제가변화되었기때문이다. 즉이시기에는잉여식량의저장성때문에정착생활을영위할수있었다. 이와관련하여유적지에서식량을저장할수있는저장시설이발견되고있다. 저장시설속에는곡물이나작은생활도구를격납하고있다. 그형태를보면큰토기항아리를거꾸로묻어밑부분을떼어내어 1 개, 3 개, 5 개를설치한것도있다. 이중에서 1 개는화덕옆에만들어곡물이나취사등에사용되는작은도구를격납하고있으며그외의것은옥외작업에사용되는도구들을저장하고있다. 또한뚜렷한저장시설의형태가없는것이있는데저장시설은반드시필요한요소이기때문에아마도항아리를집자리내부의적당한곳에놓고곡물이나소형도구를격납했을것이다.* 집자리바닥에얕은구멍들이나타나는데이것은밑이둥글거나뾰족한항아리를완전하게세우고자한것이다. 수석리 A 지구출토유물 수석리 6 호집자리

18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절신석기문화 3. 생업경제 이시기의생업경제를보면수렵 채집 어로, 그리고일부지역에서는원시농경을하고있었다. 이중채집은선사시대에서식물 ( 食物 ) 의양을가장많이얻을수있는중요생활수단이었다. 신석기시대에도원시농경의비중이낮은지역에서는채집에의존도가높기때문에식량을저장하기위해서는채집물의낟알자체가저장성을가지고있는것이어야한다. 즉채집물의저장성이라는것이이시대를지탱해주는주요수단이었을것으로보인다. 그래서이시기에는주로견과성식물류, 화본과류, 뿌리성식물류등이채집되었다.* 이는여러유적지에서도토리등이발견되고있는것으로알수있다. 신석기인들의어로활동은어망추, 낚시바늘의발견에서알수있는데조그마한자갈돌을가지고만든것이다수발견되고있어당시어로의비중이상당히큰것을알수있다. 중서부지역은특히어망류를통한어로법이발달하였다. 그래서어로와관계되는도구도주로어망류와관계되는어망추가발견되고있는것이다. 동해안지역에서는좀더발달된어로도구인작살등이발견되는것으로보아큰바다짐승을포획하는데주력한것같다. 두지역은어로법에서큰차이가있다. 그러나단순히발달된어로도구가발견되는지역과그렇지못한지역을구별하여어로생활의부진을말할수는없으며이것은단순히어로방법의차이에서기인한다고할수있다.* 이처럼유적에서어망추 작살 낚시바늘등이발견되고있는점은이시기에어로의역할이상당히강했다는것을증명해주고있다. 원시농경의흔적은곡식의낟알과도구를통해서알수가있다. 도구의명칭은오늘날도구의형태와비교하여부여된것이므로그기능이반드시오늘날과일치한다고할수없다. 따라서세분화된실증이없이단순히도구의형태만을가지고발달된농경생활을했다고보는것은무리가따른다. 당시에농경도구라고할수있는것은괭이 보습 삽 낫등으로일부유적에서발견되고있으며, 조 피 수수 기장등의낟알도몇몇유적에서만발견되고있다. 이러한낟알이재배종인지아니면야생종인지는현재정확히조사된바는없다. 그러므로낟알의흔적만을가지고반드시농경생활이이루어졌다고말하기는곤란하다. 이러한문제점이있기는하지만신석기후기에와서일부지역에서는조 피 수수 기장등을통한원시농경을행했을가능성이충분히있다. 이러한증거들은신석기후기로접어들면서점차농경을중심으로한생활경제로바뀌어가고있음을의미하고있다.

18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절신석기문화 4. 토기의사용 이시기의특징적인유물은빗살무늬토기이다. 빗살무늬토기는재질상, 형태상지역적특성이강하게나타나고있다. 재질적인면에서보면사질계와점토질계로구분되는데, 한강유역에서는사질계가주를이룬다. 그형태는동해안식과서해안식으로구분된다. 동해안식은평저형태를띠고있으며서해안식은토기의기형이직립구연부에첨저바닥으로이어지는포탄형 ( 砲彈形 ) 을기본으로하고있다. 이러한토기의태토에는운모 ( 雲母 ) 가혼입된것이많으며, 소량이나마석면 ( 石綿 ) 활석 ( 滑石 ) 이혼입된것도있다. 토기표면에는이가하나또는여러개달린시문구로긋거나눌러서문양을장식하였다. 문양에는전면에시문된것과일부부위에만시문된것이있는데, 구연부에는평행밀집사단선문 ( 平行密集斜短線文 ), 열점문 ( 列點文 ), 사격자문 ( 斜格子文 ), 그리고동체부에는어골문으로장식한것이많다.* 동해안식은그기형 ( 器形 ) 에있어서예외없이평저인점이특징이다. 이러한평저형토기의바탕흙에는굵은사립 ( 砂粒 ) 이섞여있으며수적으로는많지않지만조개가루를혼입한것도있으며, 색은갈색계통이많다. 문양은구연부, 또는토기의상반부에국한되어있다. 시문기술은음각 ( 陰刻 ), 압날 ( 押捺 ), 돌자 ( 突刺 ) 에의한것이대부분인데무문양토기도반출된다.* 이러한토기의제작은바탕흙선정, 성형, 건조, 시문, 소성등여러단계를거쳐서이루어진다. 토기는바탕흙의성질에따라소성후결과가다르게나타난다. 점토질은사질점토에비해소성이후줄어드는비율이높을뿐만아니라경도도높게나타난다. 따라서점토질토기의경우에는사질점토의토기와같은온도에서구워도그경도는높게나온다고할수있다. 그러므로점토질토기가무조건더높은온도에서구웠다고말할수는없다. 빗살무늬토기의성형은일반적으로빚기수법, 테쌓기수법, 서리기수법을사용한다. 대형토기의경우바닥은빚기수법을, 동체부는테쌓기수법과서리기수법을이용하고있다. 빗살무늬토기는바닥이환저나원저형이기때문에거꾸로엎어놓고제작하였을것이라생각할수있지만, 이경우에는제작에어려움이많아똑바른상태에서제작하였던것으로볼수있다. 소성은토기제작에서완성을의미하며확실하게그과정을복원하기가어렵다. 토기소성에서가장중요하게고려되어야할사항은온도의변화과정이다. 야외에서소성할때온도의높고낮음은요의형태에따라차이가결정되기때문에요의문제가중요하다. 신석기시대의토기요는노천에서바닥에자갈돌을깔고굽는간단한방법이사용되었던것으로보인다. 오늘날유적에서발견되고있는토기편들은오랜기간땅속에서수분을함유하고있었고물리적변화를계속거쳐왔기때문에토기자체가많이약화되어있다는것을고려해야한다. 그리고토기중에서점토질계토기와사질계토기의강도가다르게보이는것은같은온도에서구웠더라도재질상의차이가있기때문일지도모른다는사실도감안하여야한다.* 이러한신석기시대의일반적인발달과정과남양주지역의신석기문화를비교해보았을때남양주지역에서는토기만이비교의대상이되고있다. 토기는바탕흙의재질에따라사질과점토질로나눌수있는데사질계토기가한강유역의일반적인양식이다. 그런데수석리나진중리유적에서발견된토기편을보면점토질의토기가발견되고있어동북계빗살무늬토기의성격을보여주고있다. 이러한점은동북계에서발전한토기와한강유역의토기가서로접목되는양상을보여주는자료라고생각된다. 이러한점에서남양주지역의신석기시대토기문화는일대전환기의양상을보여주고있다고생각된다. 결국남양주지역의신석기문화는자료의부족으로실상이제대로파악되지않고있다. 그런데토기편을가지고비교해보았을때, 전형적인서해안식빗살무늬토기도있지만동해안식에가까운바탕흙을가진토기편들도발견되고있다는점은매우주목할만하다. 이러한사실을통해서해안식토기문화와동해안식토기문화가긴밀한접촉을하고있었던곳이바로남양주지역이었음을보여준다. 그러므로남양주지역은청동기문화로이행하는과도기적성격을잘보여줄뿐만아니라신석기시대문화의전파나이동경로를추적하는데결정적인단서를제공해주고있다. 앞으로이지역의발굴조사가이루어지고, 신석기시대유적이발견된다면그동안공백으로남아있던한강유역의신석기문화가청동기문화로이행하는연결고리를밝힐수있다고생각한다.

19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2 절신석기문화 제 3 절청동기문화 청동기시대는청동으로만든도구가제작되었으나, 아직철의야금술이알려지지않았거나혹은보급되지않은시대를말한다. 따라서청동기는청동기시대를설정하는기준이된다. 그러나어떤지역에서는오랫동안신석기시대에정체하고있는사이에곧바로철의야금술이전해져서청동기시대가나타나지않는경우도있다. 우리나라의청동기시대는시기적으로기원전 10 세기에서기원전 4 세기에해당하며, 새로운도구인청동기가사용되면서부터급격한사회변혁이일어난시대이다. 또한청동기시대에는청동기뿐만아니라석기도보편적으로사용되어, 제작방법이더욱세련된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청동기시대의시작은아마도주동 ( 鑄銅 ) 이시작된단계부터잡아야할것으로보인다. 주동을확인하기위해서는거푸집, 채광유적, 주동유적의발견, 또한청동기의성분을분석하고더나아가외국과의비교연구를통해청동기문화의성격을밝히기위한노력을해야할것이다.* 현재발견된청동제품은그수가적으며, 주로발견되는것은비파형동검 ( 琵琶形銅劍 ) 세형동검 ( 細形銅劍 ) 동촉 동손칼 동부 동경 동단추등이며, 이에대한기술과원료의문제를분석해보면문화성격을유추할수있다. 하지만남양주지역에서는아직까지청동제품이발견된예가없다. 청동기시대는토기에서민무늬토기의사용이두드러진다. 따라서청동기시대의특징을민무늬토기문화라고도한다. 민무늬토기문화의석기는이전문화단계인빗살무늬토기문화의석기와다른양상을보이며, 마연법이보편적으로사용되었다. 신석기시대는마연이부분적으로사용되었으며, 마제보다는타제의비중이더컸으나청동기시대에들어서면마제는석기전면에이루어지고 ( 석기의형태가정비되고기능에따라정형화됨 ) 신석기시대에비하여석기의종류가다양해지고그기능도분화되었다. 그리고기술의집적으로대량생산 ( 교역을위한것일가능성이있음 ) 되고개별적생산 ( 재가공품이많이발견됨 ) 도이루어졌다. 민무늬토기문화의석기에는부장용의석기인석검 석촉등이포함되어있는데이는석기의기능분화를뜻하는것으로보이며장례의식에대한의식의변화를알수있다. 그리고민무늬토기문화의석기는한반도유입시기에따라서크게대별되는데석착 ( 石鑿 ), 사릉부 ( 四稜斧 ) 등의석부 ( 石斧 ), 지석 ( 砥石 ), 장방형석도등빗살무늬토기문화에서계속된것과석검, 반월형석도, 환상석부류등과같이민무늬토기와더불어출현한석기가있다. 또한유구석부, 석제검파두식등처럼민무늬토기시대후기에출현한것이있다. 청동기시대는신석기시대와비교해볼때도구의사용에서석기와금속기라는질적인변화를보이고있을뿐만아니라희귀성에의한상징성이부여되어있어서사회적분화가이루어졌을가능성을보여준다. 청동기는일반주민이일상생활에서사용한실용품이라기보다는소수의유력자들만이향유한신분상징적재물로볼수있다. 즉청동기의소유자는그사회에서권력과부를독점하고있는것을상징하므로이시기에곧계급과계층의분화가발생하고, 이를기초로하여점차국가의발생이이어지고있었음을알수있다.

19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3 절청동기문화 1. 민무늬토기의전개 민무늬토기는지역적으로큰차이를보이고있지만가장이른시기에나타나는것은서북계의팽이형토기와동북계의홍도 ( 紅陶 ), 공렬토기 ( 孔列土器 ) 로구분할수있다. 이토기들이각각남하하면서특징적인문화를보여주고있다. 팽이형토기는남으로예성강이남을넘지못하고평안남도와황해도의지극히제한된지역에국한되며, 전형적인팽이형토기대신그전통으로여겨지고있는소위변형팽이형토기는한강변의가락동집터에서발견되고있다. 또공렬토기는서북지방인평안도와황해도지역을제외한우리나라전역에출토되고있는데동북계와연관되는홍도의경우, 팽이형토기가출토된지역에서는아직까지출토되지않고있다.* 홍도는고운흙으로만드는데, 바닥이둥글고그릇표면에산화철을발라문지름으로써붉은빛을내는토기를말한다. 이토기는함경북도에서해안을따라강원도강릉까지연결되고있으며한강유역에집중적으로분포하고있다.* 민무늬토기시대후기를대표하는것은점토대토기로발생지역은한강유역 - 경기도지방이며기존민무늬토기문화의바탕위에새로운동검문화가융합된것이다. 한강유역의민무늬토기문화는비록시기는달리하나동북지방의공렬토기와홍도가짧은기간에걸쳐동일통로로전개되고있다. 이들공렬토기, 홍도두토기의요소가결합되어한강유역의빗살무늬토기의소멸과함께새로운민무늬토기문화를전개시키고있다. 서북계의팽이형토기는평안남도와황해도에국한되어더이상남으로전개되지못하고겨우변형팽이형토기가임진강을건너한강으로전파되었는데, 한강유역에서발견되는변형팽이형토기를가락리식토기라한다. 이들토기문화는한강유역에와서융합적인성격을보여주고있는데주로동북계토기문화가우세하게나타나고있다. 즉동북계인홍도, 공렬토기, 골아가리토기가한강유역에와서는서로결합되는데공렬 + 골아가리형식이나타나기도한다. 이러한양상은미사리유적에서도뚜렷하게나타나는점으로보아지역적으로바로건너편에위치한남양주지역의민무늬토기도이와유사했을것이라고생각된다.

19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3 절청동기문화 2. 청동기의전개 청동기문화를언급하게될때민무늬토기문화를어떻게보아야할것인가하는문제에직면한다. 민무늬토기문화는그자체만을협의로취급할때청동기유물을수반하지않는경우가있어이문화를청동기문화에다포함시키는데주저하게된다. 청동기유물은동일한시대에도신분의고하에따라제한될수있고또청동이란금속자체가귀중한물품이므로유물역시희귀하다. 민무늬토기만을사용한시기가설정된다면민무늬토기는청동기문화에서제외되며, 청동기문화를언급하고자할때묘제가되는지석묘 ( 支石墓 ) 와석관묘 ( 石棺墓 ) 가중요한연구대상이된다. 이시기주요한생업경제는농경인데, 도작의개시가가장두드러진특징이며우리나라에서는민무늬토기유적에서도작의흔적과곡물이발견됨에따라민무늬토기시대부터도작이시작되었음을알수있다. 농경문화로의전환이청동기시대부터출현하기때문에민무늬토기와청동기문화에관한새로운해석이필요하다. 청동기유물은지석묘와석관묘에서나오지만시대가다소내려오게되면철기시대의대표적인묘제인토광묘에서도철기와함께반출된다. 토광묘에서출토되는청동기유물은그전시대에서부터나타나는일련의문화계통속에서이해되어야하며구태여철기문화자체에서거론하는것은바람직한일이아닐지도모른다. 그러나청동기문화가역사상에서차지하는위치를정리해볼필요성이있다. 청동기시대의문화적성격을파악하는데중요한청동기는남양주지역에서는정식으로조사된것이없기때문에발견된바가없다. 하지만양평의지석묘에서청동기가발견된예가있으므로남양주지역에서도앞으로많은조사가이루어지면발견될것으로보인다.

193 力 1 鼻开荤 力 2 祈开荤 力 1 厘急荤巩拳 * 力 3 例没悼扁巩拳 3. 林芭积劝 茄馆档俊辑泅犁鳖瘤惯斑炼荤等急荤矫措笼磊府绰框笼磐啊措何盒栏肺茄碍蜡开俊辑绰鞠荤悼蜡利苞固荤府蜡利捞措钎利捞促. 巢剧林瘤开档捞蜡利瘤甸苞弊府钢府臼篮镑俊困摹窍绊乐绢辑腹篮蜡利瘤啊乐阑巴栏肺抗惑等促. 急荤矫措笼磊府绰沥剐瘤钎炼荤客惯奔炼荤甫烹秦辑林肺惯斑登绰巴牢单, 酒流巢剧林瘤开篮辆钦利牢瘤钎炼荤客惯奔炼荤啊捞风绢瘤瘤臼篮包拌肺惯斑等抗啊利篮祈捞促. 巢剧林瘤开俊辑惯斑等林芭蜡利瘤绰荐籍府急荤笼磊府 * 客啊款悼急荤笼磊府 * 啊舅妨廉乐栏唱啊款悼蜡利狼版快备眉利牢郴侩篮肋舅荐啊绝促. 弊府绊瘤钎炼荤甫烹秦扁鸥蜡拱魂器瘤甸捞舅妨瘤绊乐绰单捞镑俊绰笼磊府啊乐菌阑啊瓷己捞乐促. 巢剧林瘤开俊辑惯斑等蜡拱魂器瘤甫焊搁瘤陛悼蜡拱魂器瘤 *, 瓷郴府蜡拱魂器瘤 *, 陛巢府蜡拱魂器瘤狼ㄧ陛巢府 A( 篮驱狼笼林函 )*, ㄨ陛巢府 B( 篮驱狼笼嘎篮祈苞荐盔老措圭 )*, ㄩ陛巢府グ瘤痢 *, 陛巢府ケ瘤痢 *, 陛巢府ゲ瘤痢 *, 档邦悼配扁魂器瘤 *, 伙菩荐盔瘤林函配扁魂器瘤 *, 档邦悼涝籍 *, 捞菩府蜡拱魂器瘤 *, 伙菩府蜡拱魂器瘤 *, 格规府蜡拱魂器瘤 *, 傣家蜡利狼ㄧ傣家蜡利グ瘤痢 *, ㄨ傣家蜡利ケ瘤痢 *, 岿邦府蜡拱魂器瘤 *, 楷乞府蜡拱魂器瘤 *, 迫具府蜡拱魂器瘤 *, 归剧府蜡拱魂器瘤 *, 价瓷府蜡拱魂器瘤 *, 硅剧府蜡拱魂器瘤 *, 硼拌盔蜡拱魂器瘤 * 殿捞乐促. 捞矫扁俊唱鸥唱绰笼篮框笼栏肺顶阑距埃颇绊弊困俊笼狼寇屈阑父电巴捞促. 笼狼屈怕绰寇屈利牢葛剧阑汗盔且荐乐绰巴栏肺, 弊俊蝶扼笼阑犬厘窍绰规过, 傍埃劝侩, 弊府绊笼阑窿扁俊祈府茄规过栏肺函拳等促. 捞矫扁笼磊府狼乞搁屈怕绰盔屈捞唱规屈狼荐趋捞措何盒捞瘤父饶扁肺甸绢啊搁厘规屈捞唱鸥唱扁矫累茄促. 笼狼农扁绰傍埃劝侩巩力客楷搬登绰巴牢单泅犁惯斑等笼磊府绰措眉肺流版 4 6m 沥档捞促. 笼磊府表捞绰措帆 60 70Н 沥档捞哥辑器亲 23 龋林芭瘤狼版快 150Н 沥档登绰巴档乐促. 官蹿矫汲篮泅犁狼规官蹿苞鞍捞嚼扁规瘤客柯档蜡瘤开且阑窍绰单荐趋官蹿阑弊措肺捞侩茄巴苞柳入阑彬绊促柳巴, 柳入阑彬绊阂俊备况窜窜窍霸茄巴捞乐促. 没悼扁矫措俊绰林肺付瘤阜规过捞腹捞捞侩登菌绰单弊困俊啊磷捞唱钱肺父电稻磊府甫 2 瞒利栏肺瘪版快档乐促. 拳傣篮笼磊府俊辑绝绢辑绰救瞪矫汲拱肺辑夸府 抄规 炼疙 楷葛力累俊捞侩等促. 拳傣篮笼磊府吝居俊辑惯斑登绰巴捞措何盒捞瘤父饶扁肺哎荐废寒啊肺捞悼窍绊乐促. 拳傣狼屈怕绰盔屈肚绰鸥盔屈捞林幅甫捞烽促. 扁嫡备港篮瘤贺阑瘤攀窍扁困茄扁嫡捞乐菌带如利栏肺笼磊府官蹿捞斑绊且版快俊绰流立技快扁档沁促. 没悼扁矫措俊坷搁盔矫利牢檬籍捞扼绊且荐乐绰吵累茄魄籍捞唱沉倒殿阑扁嫡谎府俊罐媚辑扁嫡阑技快扁档沁促. 免涝矫汲篮盲堡 券浅 免涝 抄规 炼疙狼开且阑窍绰巴栏肺弊屈怕绰拌窜侥 版荤肺侥捞乐促. 捞观俊档荤促府肚绰炼弊付茄措籍捞唱唱公甫初绊免涝窍芭唱, 荐趋狼表捞啊捐阑锭俊绰弊成免涝茄版快档乐促. file:///c/ /history/his_136.html[ :26:03]

19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3 절청동기문화 4. 묘제 1) 지석묘 ( 支石墓 ) 청동기시대에남양주지역에서발견되는대표적인묘제는고인돌이다. 고인돌은지상에대석을올려봉분으로삼은것인데, 그형식에따라북방식 남방식으로나누어지고있다. 북방식은대동강 임진강 북한강등큰강상류지역에분포하며때로는군을이루고있다. 북방식고인돌의남방한계선은대체로수원 용인에서북한강을연결하는지역이다. 남방식고인돌은지하에석곽 석관등매장시설을만들고주변에돌을약간깐다음흙을덮고지상에큰상석을몇개의작은받침돌로고여놓은것이전형적인형태이다. 석곽속에는석함이라고볼정도로작은것이있어이중장 ( 二重葬 ) 또는세골장 ( 洗骨葬 ) 이이루어졌을것으로추측된다. 가운동지석묘 존재여부를파악하기가어렵게되었다. 남양주지역에서발견되고있는선사시대분묘는대부분지석묘이며지표조사나발굴조사된곳도여러기에이른다. 그러므로이지역은선사유적가운데지석묘가차지하는비중이컸음을알수있다. 또한고분에관계되는자료중에금곡동에서고분이발견되었다는기록 * 이있는데이고분이어느시기에해당하는것이며, 어떠한구조를가지고있었는지는정확히알수없다. 단지금곡동국도변남쪽밭가운데에여러기의고분이있었다고전할뿐이다. 현재금곡동지역은도심지가주변으로확장되어주택지와상가들그리고주변도로들이형성되어있어서고분이있었던위치나고분의 이지역에서발견된지석묘유적을보면삼패리지석묘 *, 가운동지석묘 *, 지금동지석묘 *, 금남리 5 호지석묘 *, 금남리지석묘 *, 진중리지석묘 *, 진관리지석묘 *, 송능리지석묘 *, 퇴계원면지석묘 *, 송촌리지석묘 * 등이있다.

19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3 절청동기문화 4. 묘제 2) 석관묘 ( 石棺墓 ) 석관묘는각각한장의판석 ( 板石 ) 으로짠상자모양이일반적이지만, 여러장의판석을이어서만든긴석관형도포함된다. 그러나형태는같아도판석이아니고덩어리돌을쌓아서만든것도석관묘라고불린다. 석관묘는지하에판석이나할석 ( 割石 ), 천석 ( 川石 ) 을이용, 또는이들을한데섞어서하나의매장구조를이룬것으로서지상에는봉토나상석 ( 上石 ) 같은뚜렷한묘표시설 ( 墓標施設 ) 을갖추지않은독립된유형의선사시대묘제라고할수있다.* 석관묘는한반도남북모두를걸쳐서단독묘로또는남방식지석묘의지하구조로나타나며, 이석관묘에서발전한것이고인돌이라는점에서청동기시대묘제로는가장선두가되는존재라고하겠다. 이러한석관이확대 지상화되어북방식고인돌이되고, 한편으로는남방식고인돌의지하구조로되면서영남지방에서는석관묘로발전, 삼국시대의기본분묘형식으로자리를굳히게된다.*

19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1 장선사문화 * 제 4 절초기철기문화 초기철기문화는철기의보급과사용이특징이며, 시기적으로는기원전 4 세기전후로보고있지만지역에따라차이가있었다고생각된다. 우리나라의철기문화는중국전국시대말기부터북방에서유입된유이민들에의해한반도북부지역으로급속히전파되었다. 이러한철기의보급과사용은당시주민들에게엄청난변화를야기하였으며, 철제농기구가대량으로사용되면서농업생산력도크게발달하였다.* 초기철기시대에들어와서철기의사용과더불어청동기의생산과그기술도이전시기보다훨씬늘어나고세련되었다. 대표적인청동기로는세형동검 ( 細形銅劍 ) 과세문경 ( 細文鏡 ) 을들수있다. 세형동검은요녕식동검의하반부가가늘어져서단검의이름에알맞은형식이된것으로칼자루가없고아무기능이없는허리양쪽의패임이퇴화기관으로남아있다. 그외에도칼집장식, 동과 ( 銅戈 ), 동모, 세문경, 팔령구 ( 八鈴具 ), 동물형대구, 말방울등이있다.* 철제로서는모 ( 矛 ) 부 ( 斧 ) 촉 ( 鏃 ) 등의무기류와괭이 낫 반달칼등농구류도많이발견되고있는데, 이것들은모두주조법 ( 鑄造法 ) 으로만들어졌다. 아마도초기에는주조법으로만들다가차츰단조법으로변해갔을것이다. 토기에서도다양한형태가나타나게되는데그대표적인것으로아가리띠토기가있다. 이것은청동기시대민무늬토기의형식은그대로이어받으면서, 아가리가띠를말아돌린것같은겹아가리의형태를띤다. 또한검정토기 ( 黑色磨硏土器 ) 는윤택이있는검은토기로긴목에둥근몸이달려있다. 석기는여전히일상도구로서쓰였으며홈도끼, 돌대팻날, 반달칼, 세모꼴화살촉, 돌칼등이계속만들어졌다. 이처럼철제농기구가석제농기구를대체하는동시에소나말이농업에이용되었다. 또한삼한지역은수전농업이크게발달하였는데김제의벽골제 ( 碧骨堤 ), 상주의공검지 ( 恭儉池 ), 의성의대제지 ( 大堤池 ), 제천의의림지 ( 義林池 ), 밀양의수산제 ( 守山堤 ) 등이이러한사실을뒷받침해준다. 농업의발달과함께기마민족의전통에따라목축도성행했다. 부여의관직명에마가 ( 馬加 ) 우가 ( 牛加 ) 저가 ( 猪加 ) 구가 ( 狗加 ) 등의가축이름이붙어있는것도이러한배경에서이다. 농업으로정착하게되면서점차가축의사육이부업으로이루어지게되었다. 철제농경문화를가진집단이정착하면서원시적인도구와농법에서벗어나지못한선주민과함께계층을이루어보다조직적인공동체를형성하게되었다. 공동체상호간에교역관계가활발해지면서여러계통의문화융합이촉진되었고, 철기는토목용구나일상생활용구로도만들어졌다. 이것은일상생활의내용을그만큼풍부하게하였고, 토기로는견고한중국식회도가나타났다. 가옥도온돌시설을한것이발견되고있으며지하가옥에서벗어나지상가옥으로변모되었다. 철기는농경구나토목용구에이어무기류도만들어졌는데, 이러한무기류는실용적인면이더욱강조되었다. 이와함께마구 ( 馬具 ) 도철제품이나타나는데, 역시실용적인요소가강조된다. 예를들면, 쇠로만든차축두 ( 車軸頭 ) 는이전의청동제품보다장식적인면이보이지않고단순화된형식을보이는것이다. 이러한철기문화를소유한집단의지배층무덤으로는지석묘대신에토광묘와옹관묘가새로유행하게되었으며그밖에부분적으로청동기시대이래로사용되었던석관묘와석곽분도축조되었다. 토광묘는토광목곽묘 ( 土壙木槨墓 ) 라고도불리는것으로, 매장부의구조가목곽으로되어있다. 이토광묘는 3.0m m 정도크기의토광을파고나무로곽을짜서넣은다음그안에한사람또는부부를합장하는무덤으로봉토의지름은 10 20m, 높이는 m 정도이다. 옹관묘 ( 甕棺墓 ) 는사체를독이나항아리에넣어서땅을파고토광을만들거나또는옹관을넣을만큼적당히땅를파서묻는묘제를말하는데, 관으로이용되는한개의항아리나독에뚜껑을막은것을단옹관 ( 單甕棺 ), 항아리나독두개의구부 ( 口部 ) 를맞대어놓은것을합구옹관 ( 合口甕棺 ), 그리고세개를이어서만든것을삼합구옹관 ( 三合口甕棺 ) 이라고한다.* 이러한옹관묘는세골장 ( 洗骨葬 ) 방식의 2 차장이었으며, 삼국시대까지이어진다. 남양주지역에서는초기철기시대와관련된유적지가확실하게조사되지않아이시기와관련하여구체적인역사적사실들을잘파악할수가없다. 현재지표조사를통해서알려진유적지는금남리유적으로이곳의여러지점에서유물산포지가확인되었고, 그중에는집자리라고추정되는곳도있다.*

19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1 절삼한시대의한강유역 한강이남지역에서는일찍부터하나의문화적통일성을가진정치세력이형성되어가고있었다. 위만조선 ( 衛滿朝鮮 ) 과병존하던중부이남지역의정치체로서진국 ( 辰國 : 衆國 )* 이그것인데, 삼한소국들의출현과정과연관되어일찍이많은연구가진행되었다. 사기 ( 史記 ) 권 115, 조선전 ( 朝鮮傳 ) 의기사에의하면, 진번 ( 眞番 ) 의곁에있던진국은중국한 ( 漢 ) 나라와직접통교하고자하였으나위만조선의방해로뜻을이루지못하였다는기록이있어기원전 2 세기경에는서북지방의위만조선과함께중부이남지역에는진국이라는정치집단이있었던것을알수있다. 여기서의중국 ( 衆國 ) 을진국보다포괄적인개념으로파악하여진국을포함한여러정치체가중국으로표현되었다고보려는주장도있다.* 국 ( 國 ) 의본래자는 혹 ( 或 ) 으로 읍 ( 邑 ) 과동자 ( 同字 ) 이고뜻을명료하게하기위해서 口 가추가되었으며, 점차의미가확대되어국가를의미하게되었다고한다. 삼국지 ( 三國志 ) 에는다양한수준의단위체에대해 국 이란표현을사용하였는데, 공통점은일정한영역을자립적 항상적으로지배하는정치적결합체에대한표현이라는것이다. 즉, 국은어느정도의지역적통합을유지하고그지역적통합을대표하는개인이존재하는사회이다. 단위의규모나차원으로볼때 낙 ( 落 ) 이나 읍락 ( 邑落 ) 보다확대된단위로복수의읍락이결집된형태로볼수있다는것이다. 진국의지리적위치는 사기 에 진번방중국 ( 眞番旁衆國 ) 으로표현한진번군의위치와관련이있다. 현재진번의위치는황해도일대로비정하는견해가정설처럼되어있는데이지역은청동기의출토량이위만조선의중심부인평양과평남일대에버금가고있다. 그러나한이위씨정권을멸망시킨다음그옛땅에낙랑군 ( 樂浪郡 ) 을비롯한네군을두었고그중진번군은황해도연해 ( 沿海 ) 지방과충청남도내포 ( 內浦 ) 지방을동시에관할하는특수한형태로운영되었다는견해도있다.* 진국이존속했던기원전 2 세기의중남부지역은세형동검 ( 細形銅劍 ) 문화가발달했던단계이다. 중남부지역에서이시기의청동유물과유적이집중적으로발견되는곳은금강과영산강유역이므로 * 진국의지리적위치역시충청남도과전라도지역일대에비정될가능성이높다. 또한한강이남지역은철기문화의보급도가장빨랐다. 진국의북계 ( 北界 ) 가한강유역까지미쳤을가능성은농후하지만세형동검을발견한예가매우드물고청동의기류 ( 靑銅儀器類 ) 가부장된무덤을발견한예가전무하다는점에서이지역은진국의주변부에해당되는것으로보기도한다. 위씨조선이멸망한후한 ( 漢 ) 의군현통치가실시되자고조선 ( 古朝鮮 ) 지역에서많은유이민이계속하여진국사회로들어왔다. 위씨조선이멸망되기직전에 2000 여호 ( 戶 ) 를거느리고진국으로이주한조선상 ( 朝鮮相 ) 역계경 ( 歷谿卿 ) 같은존재가대표적인경우이다. 진국사회는처음 20 년간은진번군과직접접촉하고진번군이철폐된후에는낙랑군예하의남부도위 ( 南部都尉 ) 와직접접촉하였다고볼수있다. 이때남부도위의치소는황해남도신천군청산리의청산리토성 ( 靑山里土城 ) 으로비정되고있다. 이들과접촉하면서더욱발달된철기문화를받아들이는한편유이민들을통해서도철기문화가크게전파되었다. 이에따라한반도중부이남지역에서는사회적변화가급속히진전되어마한 ( 馬韓 ) 진한 ( 辰韓 ) 변한 ( 弁韓 ) 의삼한 ( 三韓 ) 이대두하였다. 삼한의위치에대해서는여러견해들이있으나대체로마한은경기 충청 전라도지역으로보고, 진한은낙동강동쪽의경상도지역, 변한은낙동강서남쪽의경상도지역으로보는것이정설처럼되어있다. 삼한의성립시기역시다른주장들이제기되고있다. 삼한사회의시작에대해서는기원전 3 세기와기원전 1 세기라는두가지주장이있다. 기원전 3 세기설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진역 ( 秦役 ) 을피하여내주함으로써진한이성립되었다는기사와기원전 3 1 세기의세형동검, 점토대토기 ( 粘土帶土器 ), 흑색마연장경호 ( 黑色磨硏長頸壺 ) 가부장되는적석목관묘 ( 積石木棺墓 ) 를삼한전기로설정하는데에따른것이다. 기원전 1 세기설은주조철부 ( 鑄造鐵斧 ) 와철착 ( 鐵鑿 ) 의간단한조합상을보이는기원전 3 2 세기단계와고난도의단조기술 ( 鍛造技術 ) 이나타나는기원전 1 세기이후단계는구별된다고파악한다. 이를정치사적관점에서본다면, 고조선 ( 위씨조선포함 ) 과진국이병립하는단계와이후고구려와부여 ( 扶餘 ), 중국군현과삼한제국 ( 諸國 ) 이존재하는단계로인식하는것이합리적이라는것이다. 즉, 기원전 1 세기는위씨조선의멸망으로다수의주민집단이남하하여마한지역의사정이급변하고, 새로운제법 ( 製法 ) 에의한토기의등장, 철기제작기술의혁신, 청동기의기능축소등이나타나는시기이다.* 또한변한과진한은위씨조선의멸망이후영남각지에서제국 ( 諸國 ) 을형성하는데, 그시기도기원전 1 세기를올라갈수없다고보고있다. 즉, 기원전 1 세기이후중부이남의형세는마한제국 ( 諸國 ) 과위씨조선유이민의파동으로성립한진한 변한제국 ( 諸國 ) 이병존하던시기였다. 삼한은모두 78 개에달하는소국 ( 小國 ) 들로나누어져있었다. 그가운데큰세력인마한은 54 개국으로서, 큰나라는 1 만여가 ( 家 ), 작은나라는수천가에불과하여이를합치면 10 만여호에달했다고한다. 각각 12 개국으로된진한과변한의경우큰나라는 가, 작은나라는 가여서이를합치면모두 4 만 5 만여가에이르렀다. 이러한소국들가운데그위치를알수있는나라는많지않으며백제국 ( 伯濟國 : 서울 ), 사로국 ( 斯盧國 : 경주 ), 구야국 ( 狗邪國 : 김해 ), 안야국 ( 安邪國 : 함안 ), 미오야마국 ( 彌烏邪馬國 : 고령 ), 고자미동국 ( 古資彌凍國 : 고성 ) 등몇몇나라에불과하다. 삼한의소국들은낙랑군세력에제각기조종되어그정치적통합이늦어진다. 한군현 ( 漢郡縣 ) 은토착인수장인거수 ( 渠帥 ) 들에게의책 ( ) 과읍군 ( 邑君 ), 읍장 ( 邑長 ) 과같은인수 ( 印綬 ) 를주면서조공관계를맺어분열을획책하였다. 게다가피지배층에속하는하호 ( 下戶 ) 까지도의책을얻기위해낙랑군에조알 ( 朝謁 ) 하여군현으로부터이를받은숫자가 1000여명에이르렀다고한다. 또자체적으로도천군 ( 天君 ) 이주관하는별읍 ( 別邑 ) 인소도 ( 蘇塗 ) 에거수들의힘이미치지못했다는것은거수들이제사장인천군에의해정치적인권위와통제력을견제받았다는것을의미한다. 남양주지역은당시마한지역에속했는데,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마한풍속이다음과같이기술되어있다. 백성은곡식을심으며누에치기와뽕나무를가꿀줄을알고, 면포 ( 綿布 ) 를만들었다. 나라에는각각장수 ( 長帥 ) 가있어세력이강대한사람은스스로신지 ( 臣智 ) 라하고다음은읍차 ( 邑借 ) 라고하였다. 사람들은산과바다사이에흩어져살았다한다. 그풍속은기강이낮아서, 국읍 ( 國邑 ) 에는주수 ( 主帥 ) 가있으나읍락에뒤섞여살기때문에제대로다스리지못하였다. 엎드려절을하는예도없으며, 거처는초가에토실 ( 土室 ) 을만들어사는데그모양이마치무덤과같았고문은윗부분에있었다. 또온식구가그속에함께살기때문에장유 ( 長幼 ) 와남녀의분별이없었다. 장례에는관 ( 棺 ) 은있으나곽 ( 槨 ) 을사용하지않았으며, 소나말을탈줄모르기때문에소나말은모두장례용으로썼다고한다. 특히구슬을귀하게여겨옷에꿰매어장식하기도하고, 목이

198 나귀에달기도하지만금과은 비단등은보배로여기지않았다고한다. 해마다 5 월이면씨뿌리기를마치고귀신에게제사를지내는데, 떼를지어모여서노래와춤을즐기며술마시고노는데밤낮을가리지않았다. 그들의춤은수십명이모두일어나서뒤를따라가며땅을밟고구부렸다치켜들었다하면서손과발이서로장단을맞추는데, 그가락과율동이중국의탁무 ( 鐸舞 ) 와흡사하였다. 10 월에농사를마치고도이렇게하였다. 그들은귀신을믿기때문에국읍에각각한사람씩을세워서천신 ( 天神 ) 의제사를주관하였는데이를천군이라고불렀다. 또여러나라에는각각별읍이있으니그것을소도라하였다. 그곳에큰나무를세우고방울과북을매달아놓고귀신을섬겼다. 다른지역에서그지역으로도망온사람은누구도돌려보내지않으므로도적질하는것을좋아하게되었다. 그들이소도를세운뜻은부도 ( 浮屠 ) 와같으나행하는바의좋고나쁜점은다르다고하였다. 그나라는별다른진귀한물건은나지않고동물과초목은대략중국과동일하였다. 큰밤이생산되는데그크기가배만큼크며세미계 ( 細尾鷄 ) 가나는데그꼬리의길이는모두 5 자남짓된다고하였다. 또이나라남자들은간혹문신 ( 文身 ) 을하는사람들도있었으나중국군현에가까운지역에사는사람들은그런대로약간의예속 ( 禮俗 ) 이있었지만멀리떨어져서는흡사죄수나노예가모여사는곳과같았다한다. 특히사람들의성질이굳세고용감했으며머리칼을틀어묶어상투를틀었다. 또베로만든도포를입고발에는가죽신을신고다녔다. 기원후 2 세기후반에들어와서후한 ( 後漢 ) 이약화됨에따라군현의통제력이약화되고, 이에따라낙랑군의통제를받던많은토착세력들이한강이남지역으로흘러들어오게되었다. 삼한은이들을흡수하여점차강성해졌는데, 이러한삼한세력의대두를억제하기위하여 204 년경에공손씨 ( 公孫氏 ) 가대방군 ( 帶方郡 ) 을설치하였다. 바로이즈음에삼한사회에는마한세력의연맹장으로서진왕 ( 辰王 ) 이출현하여월지국 ( 月支國 : 目支國 ) 을거점으로하여삼한세력을대표하였다. 이사실을통해중국군현과의외교교섭에서주도적역할을한것이아니었을까짐작하기도하며, 최근에는 삼국지 마한조의진왕을백제국왕 ( 伯濟國王 ) 을가리키는것으로보는주장이유력하게대두하고있다. 이상에서남양주지역과관련된마한관계자료를살펴보았는데그렇다면당시남양주지역은마한 54 개국중어느나라에속해있었을까하는점이궁금한일이다. 이문제는비정에어려움이있지만우선역으로 광개토왕릉비 ( 廣開土王陵碑 ) 부터살펴볼필요가있다. 즉 광개토왕릉비 에는 ( 영락 ) 6 년병신에왕이직접군대를이끌고잔국 ( 백제 ) 을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쭕쭕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쭕리성, 잡진성 등을공격하여취하고. 로기록되어있다.* 여기서현재위치를추정할수있는성은파주의오두산성으로비정되는각미성 ( 閣? 城 : 關彌城 ), 연천의대전리산성으로후일매소성 ( 買肖城 : 買蘇川城 ) 으로비정되는미사성 (? 沙城 ), 서울의아차산성으로비정되는아단성 ( 阿旦城 ) 정도이다. 그런데여기에아단성다음에고리성 ( 古利城 ) 이보인다. 이는지금의남양주시진접읍 진건면일대로비정되는고구려때의골의노현 ( 骨衣奴縣 ) 과음이근사 ( 近似 ) 하다. 즉골의 ( 骨衣 ) 고리 ( 古利 ) 고리 ( 古離 ) 는음이일치할뿐만아니라아차산성다음에기록된것으로보아, 오늘날의진접읍 진건면일대를마한의고리국 ( 古離國 ) 이라고보는것은설득력이있다.* 즉고리국은한강을경계로백제국과인접하고있었다고생각된다.

19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2 절삼국시대의한강유역 1. 한성백제기 (3 세기후반 475) 2 세기후반부터중국내부의혼란으로군현통제가약화되자북방에서많은유이민들이한강이남지역으로남하하였다. 이러한상황은마한의북방에위치했던백제 ( 伯濟 ) 의성장에큰자극이된것으로보인다. 특히백제가한강유역에서연맹왕국 ( 聯盟王國 ) 으로성장한시기는 3 세기경이며이때중국군현과의대규모적인충돌이성장의계기가된듯하다. 당시중국군현과맞서싸운소국 ( 小國 ) 의맹주는백제였으며연맹장의신지 ( 臣智 ) 는제 8 대왕인고이왕 ( 古핺王 : ) 으로학계에서는보고있다.* 삼국사기 권 24 고이왕본기에의하면, 그는 260 년 ( 고이왕 27) 에여섯명의좌평 ( 佐平 ) 을두어각기국무를나누어맡게하고, 아울러 16 품 ( 品 ) 의관등 ( 官等 ) 을제정하였으며또한품계 ( 品階 ) 에따라서관리의복색 ( 服色 ) 을제정하였다고한다. 또한 261 년에고이왕은남당 ( 南堂 ) 에나와서정사 ( 政事 ) 를들었으며, 262 년에는관리로서재물을받은자와남의것을도둑질한자는물건값의세배를물도록하는동시에종신금고 ( 終身禁錮 ) 에처한다는법령을반포하였다.* 그리고 280 년이후몇차례에걸쳐서진 ( 西晉 ) 에사신을보낸마한왕을백제왕으로보는견해가많은데, 이는중국과의직접교통은연맹왕국의한표상으로볼수있기때문에고이왕때에백제가한강하류지역을중심으로비교적큰연맹왕국을수립했다고보아도무방할듯싶다.* 만일기원전 6 년 ( 온조왕 13) 에북으로는패하 ( 예성강 ), 남으로는웅천 ( 안성천 ), 서로는서해, 동으로는주양 ( 춘천 ) 으로강역을정했다는 삼국사기 의기록을고이왕때의사실로인정하는견해에따른다면 * 남양주지역은백제도성과접하고있기때문에일찍이백제국의영역에포함되어백제수도의선진문화를향유했을것으로짐작된다. 그러나고이왕이죽은후백제는중국군현세력의정치적간섭과동예 ( 東濊 ) 의침범, 왕실내부의권력쟁탈등으로안정을유지하지못하였다. 고이왕을이어즉위한책계왕 ( 責稽王 : ) 은 298 년맥인 ( 貊人 ) 으로호칭되던동예를앞세운군현세력의침략을받아전사하고, 그뒤를이은분서왕 ( 汾西王 : ) 도 304 년낙랑태수가보낸자객에게살해된다. 백제는 4 세기에접어들면서비류왕 ( 比流王 : ) 때에안정을꾀하였다. 이때는바로낙랑군과대방군이고구려에의해멸망되던시기로, 백제가중국군현의압력에서벗어나적극적인대외팽창을꾀했을것으로짐작된다. 백제가전성기를맞는시기는정복군주였던근초고왕 ( 近肖古王 : ) 때였다. 일본서기 를분석해보면, 369 년 ( 근초고왕 24) 경에남쪽으로대규모정벌을단행하여남가라 ( 南加羅 ), 비자벌 ( 比自 : 창녕 ), 안라 ( 安羅 : 함안 ), 다라 ( 多羅 : 합천 ), 탁순 ( 卓淳 : 대구로추청됨 ), 탁국 ( 啄國 : 경산으로추정됨 ) 등낙동강유역 7 개국을평정하여가야여러나라에대한지배권을확립하였다. 그후다시서쪽으로우회하여고해진 ( 古奚津 : 강진으로추정됨 ) 에이르러침미다례 ( 彌多禮 ) 를함락시키고비리 ( 比利 ), 벽중 ( 中 : 보성 ), 포미지 ( 布彌支 : 나주 ), 반고 ( 半古 ) 의네읍을항복시켜마한을멸하고 * 전라도남해안까지영토를확장한것으로짐작된다.* 남벌이후다시북벌을단행하여같은해 9 월에는태자인근구수 ( 近仇首 ) 가옛대방군땅으로진출하여고구려군을치양 ( 雉壤 : 배천 ) 전투에서격파하여 5000 여명을포로로잡고, 371 년겨울에는태자와함께 3 만의정예군을이끌고고구려의평양성을공격하였으며이때고구려의고국원왕 ( 故國原王 ) 이전사하였다. 이로써백제는경기 충청 전라도전역과낙동강중류지역, 강원 황해도일부를점유하는중앙집권적인귀족국가로성장하였다. 또 372 년에는서쪽으로중국동진 ( 東晉 ) 에사신을파견하여국제적안목을넓히고, 남쪽으로는왜 ( 倭 ) 와통하여국제적지위를확고히하였다. 그는왕권의전제화를지향하여왕위계승을형제상속에서부자상속으로확립하고진씨 ( 眞氏 ) 왕비시대를맞았으며, 국가의면모를과시하기위해고흥 ( 高興 ) 에게백제의국사인 서기 ( 書記 ) 를편찬토록하였다. 근구수왕 ( ) 역시부왕의정복사업을이어받아 377 년 ( 근구수왕 3) 에는 3 만명의병력을이끌고평양성을공격하는등고구려와대방군옛땅에대한쟁탈전에서유리한형세를이루었다. 근구수왕의뒤를이은침류왕 ( 枕流王 : ) 은비록짧은기간을재위하였으나 384 년에는동진에서인도중마라난타 ( 摩羅難陀 ) 가백제에와서불교를전하니왕은불교를받아들여그를궁내에맞아예우하고, 다음해에는한산 ( 漢山 ) 에불사를세우고 10 인의승려를두는등새로운관념체계수립에노력하였다. 한편고구려와의전쟁을통해잡힌포로들과고구려망명자들이고구려의문물을백제에전했을가능성도있다. 즉, 4 세기후반백제가고구려와직접접하면서고구려문화가유입되고소규모일지라도문화적인변동이생겼을가능성도생각해볼수있다. 침류왕 진사왕 ( 辰斯王 ) 아신왕 ( 阿莘王 ) 전지왕 ( 支王 ) 구이신왕 ( 久爾辛王 ) 비유왕 ( 毗有王 ) 때는왕권의동요와쇠퇴기였다. 왕의단명 ( 短命 ) 과정변 ( 政變 ) 이라는내적요인과고구려와의전쟁에서잇따른패배라는외적인파장으로왕권이쇠퇴하던시기였다.* 재위 2 년만에침류왕이 30 대전반에단명하자왕위계승분쟁이일어나왕제 ( 王弟 ) 인진사가왕위를찬탈하여즉위하게되었다. 진사왕 ( ) 때고구려의계속된군사적압박은왕권의안정에절대적인저해요인이었다. 392 년 ( 진사왕 8) 7 월에는고구려의광개토왕 ( 廣開土王 : ) 이 4 만의군사를거느리고북변을쳐서석현 ( 石峴 ) 등 10 여성을함락시키자, 왕은광개토왕이용병 ( 用兵 ) 에능하다는말을듣고나가막지못하여한수이북의여러부락이함락되었다. 또 10 월에는백제의전략적요충지인관미성 ( 파주오두산성으로비정 ) 이 20 일에걸친고구려군의집요한공격으로함락되었다. 관미성의함락은백제지배층의극심한동요현상을일으키는결정적인역할을한듯하다. 관미성함락직후진사왕은구원 ( 狗原 ) 에서사냥하던중에행궁 ( 行宮 ) 에서모종의음모에희생되었다. 대고구려전에서의패배로왕권이실추되고지배세력간의동요를극복하지못한채진사왕이피살되자, 침류왕의맏아들인아신왕 ( ) 이즉위하였다. 아신왕이즉위한후외숙인진무 ( 眞武 ) 가병권을장악하면서고구려와의전쟁을주도하였는데고구려의광개토왕에게계속패배하였다. 정복전쟁에탁월한역량을발휘하던광개토왕은 396 년 ( 아신왕 5) 에는수군 ( 水軍 ) 을이끌고백제를친정하였다. 이때의상황을 광개토왕릉비 를통하여살펴보면다음과같다. 왕건군 ( 王健群 ) 의판독문에따르면,* 광개토왕은백제를토벌하기위하여몸소수군을거느리고백제의국경으로들어와영팔성 ( 寧八城 ), 구모로성, 각모로성, 각미성, 미사성, 아단성, 고리성등한수이북의 58 성을점령하였다. 즉, 한수이북 58 성의점령은백제측에서보면기존의예성강방어선은물론임진강방어선, 아차산방어선의붕괴를의미한다. 한편고구려군이도성인한성에육박하자백제의아신왕은곧바로항복하지않고도성을사수하기위해백제군을총출동시켜완강하게맞서싸웠다. 광개토왕은이에격노하여정예군을보내어아리수 ( 阿利水 : 한강 ) 를건너백제의도성을공격하였다. 한강을건넌고구려의정예군은곧한성을포위하였다. 백제아신왕은어쩔수없이고구려에게남녀생구 ( 生口 ) 1000 인과세포 ( 細布 ) 1000 필을바치고광개토왕앞에굴복하여

200 지금부터영원히신민 ( 臣民 ) 이될것을서약하는성하 ( 城下 ) 의맹 ( 盟 ) 을맺는다. 이에광개토왕은전에고구려를배반했던백제왕의죄를용서하고, 앞으로공순하게충성을다하라는내용을기록하고, 왕의동생과대신 10 인을볼모로삼아회군하여본국으로개선하였다는것이다. 이때볼모로간대신중에는고구려와의전쟁을주도했던진씨귀족들이다수포함되었을것으로보인다. 또한고구려는 58 성 700 촌을공취하였는데, 빼앗은성과촌은고구려군의철수와함께백제에돌려진것으로보인다. 그러나많은백성들이잡혀간듯하며이중에서일부는고구려의수묘인 ( 守墓人 ) 이되었다. 전술했듯이앞서의고리성이남양주시진접읍 진건면일대라면남양주도역시이때고구려군에게점령된것을알수가있다. 그후 399 년에는백제가서약을어기고왜 ( 倭 ) 와통하여왜로하여금신라를공격하게하였다. 이에신라가고구려에사신을파견하여왜인이국경내에서성지를빼앗으며, 신라를자기들의백성으로삼으려한다면서군사적구원을요청하였다. 이에광개토왕은신라의충성을가상히여겨이를허락하고다음해인 400 년 ( 광개토왕 10) 에보병과기병 5 만을보내어신라를구원하였다. 이때백제군과그에가담한임라가라 ( 任羅加羅 ) 안라 ( 安羅 ) 왜의연합세력을격파하고, 낙동강중 하류지역까지추격하여섬멸하였다고한다. 한편 404 년에는백제가다시왜군과합세하여옛대방군지역인황해도방면으로침입하였으나고구려군에게격파되었다. 407 년에는고구려군 5 만이백제를침략하여사구성 ( 沙溝城 ), 누성 ( 婁城 ) 등 6 성을함락하고갑옷 1 만여벌과군량 무기를빼앗은것이이루헤아릴수가없었다고한다.* 이처럼고구려는고국원왕의죽음에대한원한으로백제를크게증오하면서대규모침략을단행하였고, 백제는왜군과가야군의지원을받아고구려의남침을저지하기위해총력을기울이던상황이었다. 아신왕이사망하자왜에체류하던전지왕 ( ) 이 8 년만에귀국하여즉위하였다. 전지의즉위과정에서아신왕의중제 ( 仲弟 ) 인훈해 ( 訓解 ) 가태자의환국을기다리면서섭정하였으나, 말제 ( 末弟 ) 인설례 ( 禮 ) 가훈해를살해하고왕이되는정변이발생하였다. 이때진씨세력은설례를옹립하여세력을만회하려했지만전지를지지하는해씨 ( 解氏 ) 의강력한대응으로무산되고전지왕을분기점으로정치의실권이진씨에서해씨로교체된것으로보는견해도있다. 또전지왕이죽자구이신왕 ( ) 이즉위하였는데왕이나이가어리므로목협만치 ( 木滿致 ) 가국정을장악하였다. 백제의대성 ( 大姓 ) 8 족 ( 族 ) 의하나인목씨는가야경영을기반으로성장한것으로보이는데, 부여씨왕족을중심으로진씨와해씨로이루어진지배구조에목씨가새로진입하여지배세력의세력균형에변화가발생한셈이다. 구이신왕이단명하고다음의비유왕 ( ) 이즉위하자전지왕이래왕비족이었던해씨세력의위치가보다확고해졌다.* 그러나개로왕 ( 蓋鹵王 : ) 이즉위하자왕권강화를추진하였다. 송서 ( 宋書 ) 에의하면 458 년 ( 개로왕 4) 송나라에그의신하 11 명에게장군호 ( 將軍號 ) 제수를요청하였는데이때제수된 11 명의귀족가운데 8 명이왕족인부여씨이고, 3 명만이이성귀족 ( 異姓貴族 ) 이었다. 8 명의왕족가운데정로장군 ( 征虜將軍 ) 좌현왕 ( 左賢王 ) 여곤 ( 餘昆 ) 과보국장군 ( 輔國將軍 ) 여도 ( 餘都 ) 는각각왕제인곤지 ( 昆支 ) 와문주 ( 文周 ) 라한다. 개로왕이즉위하자문주가상좌평이되었다. 또이러한장군호의제수기록은권력구조가왕족중심으로돌아갔음을의미한다. 개로왕때는병권도왕족이장악하였다. 앞서의좌현왕은군왕의후계자로서의자격을지니는동시에병권을장악하는위치에있었다. 좌현왕직을가졌던개로왕의동생인곤지 ( 일본서기 의軍君 ) 는고구려의남진에공동대처하기위해왜국에파견되었던인물이었다. 이처럼개로왕의즉위로정치와병권을모두왕족이장악하였다. 하여튼개로왕은지배체제의쇄신을통해대왕 ( 大王 ) 을정점으로하는강력한왕족중심의지배체제를구축하고, 왕권확립의효과를가시화하기위해대규모토목공사를진행하였다. 대규모의노동력을동원한왕성의수리, 궁실의조영, 왕릉의개수등은왕실의권위를회복하려는목적에서였다. 즉, 동방적전제주의의한특징인대규모의토목공사를통해개로왕은왕권의강화를기도했다고보는것이다.* 그러나개로왕의전체적인권력구축시도에가장저해되는요인은고구려의부단한남진압박이었다. 즉, 백제자체의국력으로방어하기힘든고구려의남진에효율적으로대처하기위해신라 가야와동맹하고, 왕제인곤지를왜에파견하여왜군의지원을도모하였다. 또한이전까지교섭이없던북위 ( 北魏 ) 에까지장무 ( 張茂 ) 라는한인계인물을왕족인여례 ( 餘禮 ) 를따라백제사신으로파견하여군사요청을하였으나실패하고말았다. 한편한성백제기의지방행정조직이부 ( 部 ), 성 ( 城 ), 촌 ( 村 ) 의 3 단계로이루어졌으리라고보는주장이있다. 즉, 국초부터설치 운영되기시작한상급의지방행정구역인부는크게 5 개구역으로나눈 5 부체제로지방을통치하였다. 각부에는지방관이파견되는성이있고, 성밑에는촌이있는 3 단계로편성되었던것으로보기도한다. 성은과거의소국을단위로하여편성된듯하며, 성들은몇개의촌들로구성된것으로짐작된다. 하여튼전술한것처럼 광개토왕릉비 에는 58 성과 700 촌을점령한것으로나오고있어당시지방통치의기본단위는성 ~ 촌으로이루어졌음을알수있다. 즉, 58 개성은촌과관련을맺고있는단위통치구역으로지방관이파견되고, 성곽이축성되어전략적인거점의기능도지니면서대고구려전에서중요한역할을하였던것으로짐작된다. 각성의중심지역은단위통치구역의명칭과동일하게불려졌을것으로추측된다. 이때남양주지역의행정구역은전술한대로고리성이아니었나추측되며, 5 부중어느부에속했는지는확실하지않다. 도성이있는중앙을중심으로전국을동 서 남 북중으로나누는 5 부체제는중앙집권체제가강화된근초고왕때까지는늦어도이루어진것으로보이는데남양주지역은도성과접하였기때문에중부에속했는지, 아니면북부로편제되어북부에속했는지는알수가없다. 그러나남양주지역은광개토왕의백제도성침공이후삼국간의본격적인대립지역으로등장하였음을짐작할수있다.

20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2 절삼국시대의한강유역 2. 고구려점령기 ( ) 고국원왕 ( 故國原王 : ) 의뒤를이어즉위한소수림왕 ( 小獸林王 : ) 은고구려에압력을가하던전연 ( 前燕 ) 이전진 ( 前秦 ) 의부견에게멸망되자전진과우호관계를맺고불교를수용하였다. 백제의압력도근초고왕이후상대적으로약화의징후를보이자망명한한인출신관료 군인들을통해중국식국가제도를도입 정비할수있었다. 즉, 372 년 ( 소수림왕 2) 에는불교를수용하고태학 ( 太學 ) 을설립하며, 이어 373 년에는율령 ( 律令 ) 을반포하였다. 소수림왕대의체제정비를통해고구려는중앙집권적귀족국가체제를갖추었다고할수있다. 소수림왕의뒤를이은고국양왕 ( 故國壤王 : ) 때는현도와요동두군을놓고전진을대신한모용씨 ( 慕容氏 ) 와다투었다. 고국양왕이죽은뒤대외적인정복사업을보다강력하게추진한이는광개토왕 ( ) 이었다. 392 년에는 4 만병력을거느리고석현성 ( 石峴城 : 경기도개풍 ) 을비롯한 10 개성을빼앗는가하면백제의전략적요충지였던관미성을 20 여일간공격하여함락시켰다. 드디어 396 년에는백제도성까지공격하여 58 성 700 촌을취했을뿐만아니라백제의아신왕으로부터많은전리품과영원히노객 ( 奴客 ) 이되겠다는맹세를받고백제왕의동생과대신들을인질로잡아오는전과를올린다. 그러나백제가이에굴복하지않고왜를내세워 399 년에는고구려와연결되어있는신라를공격하고 404 년에는대방군의옛땅을침공했지만, 5 만병력을신라에파견해왜군을몰아내고옛대방군지역에침입한왜군도궤멸시켰다. 나아가 407 년에는백제를공격하여막대한전리품을노획하고 6 성을함락시켰다. 백제에대한광개토왕의공격이계속되면서고구려의영역은한강이북지역까지확대되었다. 광개토왕의뒤를이은장수왕 ( 長壽王 : ) 은부왕의사업을계승하여고구려의전성기를만들었다. 439 년에는고구려와사이가나빴던후연 ( 後燕 ) 이멸망하고, 선비족 ( 鮮卑族 ) 출신의탁발씨 ( 拓跋氏 ) 가세운북위 ( 北魏 ) 가북중국을통일하였다. 고구려는북위와우호관계를강화하는한편, 남조인동진 ( 東晋 ) 송 ( 宋 ) 제 ( 齊 ) 에도계속사신을보내남북의대립된두세력을이용하는외교정책을폈다. 한편 427 년 ( 장수왕 15) 에는국내성 ( 國內城 ) 에서평양성 ( 평양동북쪽대성산성일대 ) 으로천도를단행하여국내성일대에뿌리깊은기반을가진고구려귀족세력의약화와국가운영을뒷받침할경제적기반의확대를도모하였다. 고구려의평양천도와남하정책은백제와신라에게큰위협이되었으며, 이에 433 년백제 ( 비유왕 7) 와신라 ( 눌지왕 17) 는동맹을맺었다. 나아가백제는 472 년 ( 개로왕 18) 에북위의효문제에게사신을보내고구려의남침을호소하고군사원조를요청하였으나실패하고, 오히려고구려의침략을유발하는계기가되었다. 이에격분한장수왕은 475 년 9 월 3 만의병력으로백제를침략하였다. 삼국사기 와 일본서기 에인용된 백제기 ( 百濟記 ) 를종합하면, 고구려군 3 만이북성 ( 北城 : 풍납동토성 ) 을공격하여 7 주야 ( 晝夜 ) 만에이를함락시켰다. 북성의전투는백제의운명을건전투였으며, 백제군은 7 일동안완강히저항하였으나역부족이었다. 백제기 에는이전투가벌어졌던성을대성 ( 大城 : 코니키시 ) 혹은왕성이라고하였다. 북성을함락시킨고구려군은이어남성 ( 南城 : 몽촌토성 ) 을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이네길로나누어협공하고, 바람을이용하여불을질러성문을태우자성안이크게동요하였다. 이때개로왕이수십기 ( 騎 ) 를거느리고성문을나서서쪽으로탈출하려다사로잡혀아차산성밑으로보내져살해되었다는것으로보아백제도성을공격하던고구려군의본영은아차산성에있었다고짐작된다. 북성을잃고전의를상실한백제군은남성전투에서는제대로싸워보지도못한채도성이함락된듯하다. 백제는국왕을비롯하여태후, 왕자등이적에게살해되고 8000 명의남녀가잡혀가는대타격을입었다. 사실북성전투에앞서광개토왕대부터계속된고구려의공격으로북한산 불곡산 수락산 불암산으로이어지는방어선이붕괴되고결국아차산성방어선까지붕괴되었을때이와같은비극이예견되었다. 근초고왕의평양공격으로인한고국원왕의죽음에대한고구려의복수가개로왕대에이르러일단락된셈이다. 이에앞서고구려가풍납동토성을포위하자개로왕은동생인상좌평문주를신라에보내어구원을청하였다. 문주가 1 만의병력을얻어왔을때는이미북성과남성이함락되고왕이살해된뒤였으므로목협만치 조미걸취 ( 祖彌桀取 ) 등과함께남으로내려가웅진 ( 熊津 : 공주 ) 으로도읍을옮긴다. 이때고구려는한강유역을일시적으로점령하는데그치지않고계속남진을계속하여죽령 ( 竹嶺 ) 조령 ( 鳥嶺 ) 일대에서아산만을연결하는선까지뻗치게되었다. 그러나이와같은선에서고구려의남진을저지할수있었던것도백제 신라 가야가연합하여결사적으로고구려의남진을막았기때문으로짐작된다. 이처럼고구려는장수왕말년에만주와한반도에걸친광대한영토를장악하여중국과자웅을겨루게되었다. 이러한정세는 중원고구려비 ( 中原高句麗碑 ) 에서고구려가신라를 동이 로칭하면서신라왕과그신료들에게의복을주는등종주국을자처하는모습에서당시막강했던고구려의위상을짐작하게한다. 이때고구려는적어도한강하류의 6 개군과상류의 10 개군을통치한것으로추측된다. 고구려는새로이차지한한강유역을다스리기위해관리와군사들을파견해주둔시켰다고짐작되며, 많은수의고구려인들도이주하여고구려문화를전파했을것이다. 고구려점령기의한강유역주민구성은고구려인외에백제계통의주민들이대다수를차지하고있었으리라고짐작된다. 백제의주민중왕족이나진씨, 해씨와같은귀족세력들은새로운도읍지로이주하였다. 도성민이나일반백성들가운데고구려군을피해남쪽으로피난하여내려간사람들도상당했을것으로보인다. 그러나지방행정구역인성이나촌에거주하던일반백성들중에는원래살던지역에머물면서백제문화를유지했던사람들도있었을것이다. 즉, 76 년의고구려통치기간중한강유역에살던과거백제의주민들은어느정도고구려문화를받아들였을것으로보이나, 고구려문화가종래의백제계통의문화를완전히몰아내기에는그기간이짧았던것으로여겨진다. 아무튼한강유역에는문화적변동이일어나, 고구려의성과건축물들이축조되었으며토기등일상용구를제작 사용하였을것이고고구려인들의무덤도남겼을것이다.* 한강유역새로운점령지의성에는지방관으로수사 ( 守使 ) 가파견되어성주로서성내의행정과군사를담당하였으며, 수사밑에는일정수의고구려인의관리와군대가파견된듯하다. 하여튼 삼국사기 지리지를통해이지역에고구려의군현이편제된것을볼수있다. 남양주시진접읍 진건면일대는골의노현이설치되었다고하는데이는골의노성이라고보면되겠다. 풍납동토성의발굴조사에서도고구려의것으로보이는토기편들이있었으며,* 몽촌토성의발굴에서도고구려의토기와유구가확인되었는데토기는광구장경사이옹류, 장동호류등 15 개기종에 329 개체분에달했다고한다.* 아차산성에서도앞으로건물지에대한발굴조사가이루어지면많은고구려토기들이출토되리라고기대된다. 이같은사실로고구려군이풍납동토성 몽촌토성 아차산성에주둔하다가점차그중심지를아차산성으로일원화한것은아닌가추측된다. 아차산성주변에는홍련봉보루성을비롯한아차산성에딸린소규모의보루성들이아차산줄기, 용마산줄기, 망우산줄기, 시루봉, 봉화산등에 16 개가포진하고있다.

202 이러한보루성들이사방에서포진하여아차산성을보호하는형세를취하고있다. 이들보루성에서도고구려토기편이채집되었다. 특히이중에서태봉보루성 ( 구의동유적 ) 과아차산 3 보루성이발굴되어고구려유적으로밝혀졌다.* 그러나아직남양주지역에서는이시기의유적은확인되고있지않다. 이지역은백제의한성시기도성과접하고있었기때문에고구려군의침입당시남쪽으로피난해내려간사람들도있었을것으로짐작되며, 고구려군의침입으로도성이함락되는와중에서엄청난혼란속에빠졌으리라고추측된다.

20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2 절삼국시대의한강유역 3. 백제탈환기 ( ) 고구려는장수왕이죽은뒤그의손자인문자왕 ( 文咨王 : ) 이즉위하여장수왕의정복사업을계승하면서백제와신라에대한압력을늦추지않았다. 그러나그가죽은뒤로는왕위계승을둘러싸고외척세력간에분쟁이그치지않아왕권이약화되고정국은불안해졌다. 안장왕 ( 安臧王 : ) 은왕위를노리는모종의음모에희생된듯하고, 안원왕 ( 安原王 : ) 도왕위계승을둘러싸고추군 (? 群 ) 과세군 ( 細群 ) 이라는유력한외척세력집단들이궁문에서싸우는중에죽고말았다. 이분쟁에서패배한세군쪽의집단은 2000 명이나희생되었다고하는데, 이와중에안원왕도해를입은것으로추측된다. 추군쪽의옹립으로 8 세에즉위한양원왕 ( 陽原王 : ) 은국내정세의불안과돌궐의침입으로 551 년 ( 양원왕 6) 에백제 신라연합군에게한강유역을빼앗기고말았다. 일본서기 의기록에는, 551 년에백제성왕이친히백제군과신라 임나 ( 任那 ) 군을이끌고고구려를북벌하여옛서울인한성을점령하고나아가평양 ( 북한산군지역 ) 을점령하면서한강하류의 6 개군의옛땅을수복하였다고한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의하면, 신라의거칠부등 8 장군이백제와더불어고구려를침공하여백제인들이먼저평양을격파하고거칠부등은승리의기세를타서죽령이북, 고현 ( 高峴 ) 이남의한강상류 10 개군을취하였다고한다. 이처럼고구려는백제 신라 가야연합군의공격으로후퇴하면서임진강을방어선으로구축하게되었다. 전술한태봉보루성의경우, 보루유지의필요성이사라져이곳을폐기했다면무기들은회수되었을것이다. 그러나토기와무기들이그대로놓여진채불타있는것은퇴각할때수비병들이무기를챙기지못한채불을놓고퇴각하고, 그후매몰된것으로보여주목된다. 즉, 성왕이이끄는연합군의한성탈환작전이전개되면서고구려군이급박하게퇴각하는상황을보여주는듯하다. 백제가옛도읍인한성을포함한한강유역을장악한시기는 2 년이되지않았지만고구려가반격할소지가있었던당시의전황으로보아주로군사적업무를지닌지방관이나군대가주둔한것으로짐작된다. 이때는백제가사비 ( 부여 ) 로천도 (538 : 성왕 16) 하고국호를남부여 ( 南扶餘 ) 로했던때였다. 사비시대의지방통치조직은방 ( 方 ), 군 ( 郡 ), 성 ( 城 ) 촌 ( 村 ) 의 3 단계로편성되어있었는데, 그중최상급의지방행정구역인방은여러개의군을관장하는조직이었다. 그중가장북방은웅진성에중심을두고있었다. 새로이회복한한성을포함한한강유역의 6 개군은북방관할이었을가능성이있다. 이에따라남양주지역도백제의북방관할에속했으리라고짐작된다. 그러나한성은옛백제의도읍지였고, 고구려와의대치속에서군사적중심지였던것으로보이기때문에특별히관리했을가능성도배제하기어렵다.

20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2 절삼국시대의한강유역 4. 신라점령기 ( ) 신라가중앙집권적귀족국가로서의통치체제를갖추게된것은법흥왕 ( 法興王 : ) 때였다. 520 년 ( 법흥왕 7) 에백관의공복 ( 公服 ), 17 관등, 골품제도등에대한중요한규정을포함했으리라추측되는율령이반포되었다. 이러한법제화경향은관직체계에도반영되어 516 년경에는영토확장의중추적역할을하는병부 ( 兵部 ) 가설치되고, 531 년에는진골귀족회의대표자로서상대등 ( 上大等 ) 제도를설치하였다. 앞서 521 년에는북조 ( 北朝 ) 대신에백제사신을따라남조 ( 南朝 ) 인양 ( 梁 ) 에사신을파견하였다. 이때신라에사신으로온승려원표 ( 元表 ) 가불교를전해준것이불교수용의직접적인동기가되었다고한다. 처음에는진골귀족들의반대로상당한진통을겪었으나, 늦어도 535 년경에불교가공인되어국가통치의사상적기반을마련하였다. 536 년에는건원 ( 建元 ) 이라는독자적인연호를처음으로제정하여왕권의확립과함께중국과대등한국가임을과시하였다. 한편 524 년에는왕이남쪽경계를순수하여영토를개척하고, 532 년에는김해본가야 ( 本加耶 : 金官加耶 ) 구해왕 ( 仇亥王 ) 이나라의보물을가지고내항 ( 來降 ) 하였는데, 신라는이를예로써대접하고상등 ( 上等 ) 의위 ( 位 ) 를주어본국을식읍으로삼게하였다. 이때함께내항한세아들중에는김유신의부친인무력 ( 武力 ) 이있었다. 신라는본가야의합병으로낙동강과남해안교통상의요지인김해를발판으로하여백제의낙동강유역진출을막고, 가야여러나라를위협하게되었다. 신라의대외발전을비약적으로추진시킨것은진흥왕 ( 眞興王 : ) 이다. 그는 7 세에즉위하여처음에는법흥왕의비인왕태후의섭정을받았으나, 551 년 ( 진흥왕 12) 에연호를개국 ( 開國 ) 이라개원하면서친정 ( 親政 ) 을시작하였다. 이미 541 년이사부 ( 異斯夫 ) 를병부령으로삼아군사에대한일을맡기더니친정과더불어대외정복사업은활기를띠었다. 전술한대로이해에백제의성왕과공동작전으로고구려가점유하고있던한강유역을공격하여한강상류의 10 군을점령하였다. 그러나 2 년뒤인 553 년에는백제군이점령한한강하류지역을기습적으로공격해서한강유역전부를독차지하였다. 이로써고구려의남진에공동대처하며 120 년간동맹관계를유지하던두나라는적대관계에놓이게된다. 신라는이지역에신주 ( 新州 ) 를설치하고아찬 ( 阿 ) 김무력을군주 ( 軍主 ) 로삼아통치하였다.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진흥왕조에는 7 월에백제의동북지방을취하여신주를두고아찬김무력으로군주를삼았다. 고하였고, 백제본기에도 7 월에신라가동북변을취하여신주를두었다. 라는기사가보인다. 일본서기 에는 백제가한성과평양을버렸다. 신라가이로인하여한성에들어와점거하였다. 라고하였으나 552 년일로기록하였다. 이에분격한백제의성왕은 554 년 ( 성왕 32) 에직접신라를치다가죽음을당하였다. 성왕의죽음을말하는자료를종합해보면, 백제의왕자인여창 ( 餘昌 ) 이백제와대가야 * 의연합군을이끌고신라의관산성을공격하였다. 여창은구타모라성을본영으로삼고, 신라군과전투를벌였는데신라에서는이곳군주인우덕 ( 于德 ) 등이이에대항하였으나여의치않자정예군인김무력이이끄는신주병 ( 新州兵 ) 까지동원하였다. 이때백제성왕은전투를독려하기위해 50 명의친위병을거느리고백제군의본영으로가던중구천에이르러신라의복병에의해살해되었다. 국왕의죽음으로사기가저하된백제군을공격한신라군은큰승리를거두고, 포위되었던여창은샛길로탈출을시도하여죽음을면했던듯하다. 일본서기 에는성왕을이은위덕왕 ( 威德王 : ) 이부왕을위해출가하여불도를닦고자했다는것으로보아성왕을잃은당시백제의충격이얼마나컸던가를알수있다. 즉, 성왕의죽음은개로왕의죽음과같은참담함을백제인에주었으리라고짐작된다. 신라는한강유역점령으로인적 물적자원의획득이외에서해를거쳐중국과직접통할수있는문호를얻었다는점에그중요성이있다. 그후남양만 ( 南陽灣 ) 의당항성 ( 黨項城 ) 을거점으로삼아자주중국에사신을파견하여외교를공고히하였다. 삼국을통일하는데한강유역의점령이큰몫을하였다고하겠다.* 한강하류를점령한진흥왕은 555 년 10 월에북한산을순행하여강역 ( 彊域 ) 을획정하고, 11 월에는북한산에서돌아올때지나는주군 ( 州郡 ) 에 1 년간의조세를면제해주고, 사형수를제외하고는해당지방의죄인들을특사하였다. 이어 557 년에신주를폐지하고한산주 ( 漢山州 ) 로개칭하였으며, 568 년에는한산주를폐지하고남천주 ( 南川州 ) 를설치하였다. 604 년 ( 진평왕 26) 에다시남천주를폐지하고북한산주 ( 北漢山州 ) 로고쳤다가한산주로그명칭을확정하였다. 이렇듯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자주확인되는한강유역주 ( 州 ) 의치폐 ( 置廢 ) 기사는아마도주의장관으로서일정지역에주둔해군사 행정을총괄하던군주의파견지, 즉군단 ( 軍團 ) 인정 ( 停 ) 의소재지를군사적필요성에의해옮긴사실을의미하는것으로이해하는견해가유력하다. 신라가한강유역을차지하면서설치한신주에신주정을배치하였고그후주의치폐과정에따라남천정 한산정등으로정의명칭또한변화했음을염두에둘필요가있다. 삼국의군사적대립이가장치열했던시기에한강을장악한신라로서는전략지역의통치에서군사적인측면을최우선적으로고려할수밖에없었을것이다. 한편신라의한강유역장악은이지역에적지않은문화변동을가져왔을것으로보인다. 신라가한강유역을점령한후신라인들이이주하였고, 그결과신라문화가한강유역에서발전하였을것으로추정된다. 전술한대로신라는한강유역을장악한후곧바로주를설치하고군주를파견하였다. 신라중고기 ( 中古期 ) 의지방통치조직은주밑의지방행정구역으로군을설치하고, 군밑에는촌 성이편성되었다. 주에는군주, 군에는당주 ( 幢主 ), 촌 ( 성 ) 에는도사 ( 道使 ) 나두 ( 邏頭 ) 가파견되었다. 즉, 한강유역에도주 군 촌 ( 성 ) 에는왕경 ( 王京 ) 인들인지방관과그밑의관리, 군대가머무르며한강유역문화변동의주역을담당하였으리라고짐작된다. 또새로이편입한한강유역의백제와고구려계주민중에그세력가들을지방세력으로인정하면서신라문화를수용하는중심세력으로삼았을것으로보인다. 이처럼주의치소 ( 治所 ) 에는군주를비롯한왕경인관리와그가족및군인이파견되어, 왕경인으로신라문화를유지하고, 신라의유물과유적을남겼을것으로보인다. 군의치소에도당주와그밑의관리와가족이왕경에서파견되어역시왕경의문화를유지하고, 신라의문화를남겼을것으로추정된다. 이밖에성 ( 촌 ) 에는도사 나두가파견되었는데그들역시왕경인들로신라문화를유지하였던것으로보고있다. 한편한산주 ( 신주의개칭명 ) 의주성은하남시춘궁동산 36 번지일대에있는이성산성 ( 二聖山城 ) 인듯하며, 이성은 553 년에축조되기시작한것으로보인다. 이해는신라가한강유역을점령하고신주를설치한해이다. 축성공사가완료된때는 557 년경이아닌가추측된다. 이해는신주를고쳐한산주로하고신주정을설치했다고추정되는해이다.* 이성이주성이라면한산성 ( 漢山城 ) 으로불려졌을가능성이있으며, 저수지출토의목간에서두번씩이나나타나는남한성 ( 南漢城 ) 이당시명칭일수도있겠다. 남한성은백제의서울이었던한성의남쪽에있는한성이란뜻이거나아니면남한산성의약칭일가능성도있다. 이상에서남양주의진접읍 진건면일대는 삼국사기 지리지에는한주 ( 漢州 ) 에속하며, 757 년 ( 경덕왕 16) 에는고구려때부터불려졌던골의노현을황양현 ( 荒壤縣 ) 으로개칭했는데한양군 ( 漢陽郡 ) 의영현이었다. 신라가점령한후에도역시고구려때의명칭인골의노성으로불려졌으

205 리라짐작된다. 신라때현이설치된시기가통일초로보이기때문이다. 남양주지역은주치인하남시춘궁동일대와도가까웠기때문에신라나통일신라때에도문화적으로완전히소외된곳이아니었던것으로보인다.

20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3 절통일신라시대의한강유역 1. 나당전쟁시기 전술한대로이성산성의축성이 6 세기중엽경이고, 양주의대모산성 ( 大母山城 ) 의현존하는성벽이 6 세기중엽이후라면,* 신라가한강유역을점령하면서이지역에성곽을축조하는등방어체제에대한정비가있었음을알수있다. 한편고양의행주산성 ( 幸州山城 ) 은출토유물로보아초축시기가 7 8 세기경에서그리멀지않을것으로추정되며,* 서울특별시구로구시흥 2 동에소재한호암산성 ( 虎岩山城 ) 도출토유물로보아 7 세기전반에서 8 세기중엽으로추정된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672 년 ( 문무왕 12) 에한산주에주장성 ( 晝長城 ) 을쌓았는데길이가 4360 보라고하였다. 아차산성의현재성벽도 8 세기경에축조된것이다. 앞의자료들은두가지정도의역사적사실과관계가있지않을까추측된다. 하나는나당전쟁 ( 羅唐戰爭 ) 과의관련이고, 다른하나는 718 년 ( 성덕왕 17) 에한산주관내에여러성을쌓았다는 삼국사기 의기록과관련이있지않은가짐작된다. 후자는발해의등장으로북방정책의강화와연관이있으리라짐작된다. 백제와고구려를멸망시킨이후, 당은 평양이남의백제토지는모두그대신라에게주어길이안일 ( 安逸 ) 케하리라. 는약속을지키지않고노골적으로한반도전체를예속시키려하였다. 당은백제를정벌 (660) 한직후웅진도독부 ( 熊津都督府 ) 와그아래에 7 주 52 현을설치하였고, 고구려를멸한뒤에도그땅에 9 도독부와 42 주 100 현을두고평양에안동도호부 ( 安東都護府 ) 를설치하였다. 안동도호부의설치는고구려의 9 도독부뿐만아니라, 기왕에설치한백제 신라의도독부를총괄하는성격의것으로당의야심을극명하게보여주는것이었다. 따라서신라는백제 고구려옛땅에대한지배권을차지하기위하여당과새로운전쟁을시작할수밖에없었다. 먼저신라는웅진도독부의주요근거지인사비성 ( 泗? 城 ) 을함락시키고소부리주 ( 所夫里州 ) 를설치함으로써옛백제지역에서당군을축출하였다. 그후나당전쟁에서최대의승부처가된지역이바로한강과임진강을경계로한한강이북지역이었다. 당은백제지역을상실한뒤에대대적인공세를취해신라와한강이북지역에서치열한격전을벌였다. 672 년 ( 문무왕 12) 이래치열해진양국의전쟁은 675 년절정에달한다. 나당전쟁기 ( ) 에신라는임진강을중심으로당군을방어하였다. 673 년에는당군이말갈과거란병을이끌고북변을침범하였는데아홉번을싸워신라군이승리하여적병 2000 여급을베고, 당병이호로하 ( 瓠蘆河 ) 와왕봉하 ( 王逢河 ) 에빠져죽은자가수를헤아릴수가없었다고한다.* 여기서호로하는연천군장남면원당 3 리장미산위에있는성지와파주군적성면장좌리에있는성지를말하는데, 이를흔히호로고루 ( 瓠蘆古壘 ) 라고부른다.* 즉, 호로하는호로고루가위치한임진강을의미하고, 왕봉하는행주산성부근의한강을지칭한다. 이처럼당군은방어가약한한강하류쪽으로침입을시도하고있었다. 당시주치가있었던하남시를중심으로신라가방비를보다엄히하였기때문일것이다. 즉, 672 년에는당의침략을대비하여주장성 ( 남한산성 ) 을축성하여북한산성과함께당군이임진강을건너한강을넘어내려오는것에대비하였다. 이처럼신라는한산주의주치가있던이성산성을중심으로경비를강화하였다. 한편이곳에는육정 ( 六停 ) 의하나인한산정, 오주서 ( 五洲誓 ) 의하나인한산주서, 만보당 ( 萬步幢 ) 이계당 ( 二텷幢 ) 의하나인한산주계당, 이궁 ( 二弓 ) 의하나인한산주궁척, 삼변수당 ( 三邊守幢 ) 의하나인한산변과같은부대들이설치되어삼엄한방어체제를구축하고있었다. 같은해겨울에도당군은거란과말갈병에게김포군하성면양택리에위치한동자성 ( 童子城 ) 을침공하게하여이를함락시켰다. 나당전쟁의전투지역으로미루어당군의육로로의침입을다음과같이상정할수있을듯하다. 당군은평양을근거지로하여옛대방지역인백수성 ( 白水城 : 황해도재령 ) 칠중성 ( 七重城 : 경기도파주 ) 매소성 ( 경기도연천 ) 한성으로의진격로, 거란 말갈과연합하여침입하는아달성 ( 阿達城 ) 매소성 한성의통로, 적목성 ( 積木城 : 회양 ) 철원 한성의세진로를들수있다. 이러한상황은신라의입장에서백제를멸망시킨후대적 ( 對敵 ) 전선을고구려로집중시킬때한주를근거지로삼았던것과마찬가지상황으로이해할수있다. 당의안동도호부가평양에설치되었다는점, 당과거란 말갈의행군로가 1 차적으로한주에집중되는것으로도당시한주의역할을짐작할수있다. 특히 675 년 9 월 29 일에는이근행 ( 李謹行 ) 이거느린 20 만의당군이매소성에주둔하자신라군은당군을공격하여세차례의전투를치른후당군을격퇴시키고전마 ( 戰馬 ) 3 만 380 필과병기의노획도이에상응하는대승을올렸다고한다. 매소성은연천군청산면대전 1 리산 1-1 번지에위치한대전리산성 ( 大田里山城 ) 으로비정되고있다.* 만일매소성을점령한후당군이동두천 의정부로이어지는협곡의도로망을돌파하면북한산성이위협받고, 북한산성이함락되면한강을건너한산주의주치를보호하던이성산성과주장성이위협받는상황이된다. 이들까지함락되면신라는한강유역을상실하여소백산맥까지후퇴할수밖에없게된다. 그러므로이러한소용돌이속에서남양주지역도긴장감에싸였을것이라는점은상상할수있겠다.

20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3 절통일신라시대의한강유역 2. 통일후지방통치제도의정비 당을축출하고새로이정복한지역의민심을아우르는한편신라는 681 년 ( 신문왕 1) 김흠돌 ( 金欽突 ) 의난을평정하고귀족들에대한일대숙청을단행하였다. 이는전제적성격의강력한왕권확립을의미하는것이었고통일시대에걸맞은지방제도의개편이뒤를이었다. 삼국통일직후인신문왕대에새로이편성된 9 주 ( 州 ) 5 소경 ( 小京 ) 이나, 9 주의행정구획에따라일종의군관구 ( 軍管區 ) 적조직으로짜여진십정 ( 十停 ) 을보면한강이북지역은방치된듯한느낌이다. 즉, 신라의서북국경지역에설치된한주의주치는현재의하남시에있었으며또한한주내에예외적으로두개나설치된정 ( 停 ) 도, 그중남천정 ( 南川停 ) 이현재의이천 ( 利川 ) 에, 골내근정 ( 骨乃斤停 ) 이현재의여주 ( 驪州 ) 에각각위치하고있었다. 이처럼서북일선의중심이전반적으로보아한강유역이남지역에치중되어있다. 신라가한강이북의임진강에서예성강이남에이르는지역에그지배권을확립한것은통일후상당한기간이지난후였다. 삼국사기 기사를살펴보면, 694 년 ( 효소왕 3) 에송악 ( 松岳 ) 과우잠 ( 牛岑 ) 두성을쌓았고 713 년 ( 성덕왕 12) 에는개성 ( 開城 ) 을쌓았다는기록이보인다. 이어 718 년에는한산주도독 ( 都督 ) 관내에여러성을쌓았다는기록이보이는데그위치는구체적으로알수없으나개성을쌓았다는기사로미루어당시신라영역권의북한계선을예성강이남지역으로보는것에무리가없을듯하다. 신라가당으로부터소위패강 ( 浿江 : 대동강 ) 이남의땅에대한영유권을정식으로인정받은것은 735년이며이것은당이신라를이용해발해를견제하기위한목적에서취한조처였다.* 신라의입장에서도발해의흥성 ( 興盛 ) 은한강이북지역, 나아가패강지역에대한적극적진출을꾀하도록크게자극하였던듯하다. 신라는패강이남지역의영유권을확보한직후북쪽경계의일선지대를점검하였다. 즉, 735년당이패강이남지역에대한영유권을인정한다음해 (736) 에이찬 ( 伊 ) 윤충 ( 允忠 ) 사인 ( 思仁 ) 영술 ( 英述 ) 을보내평양주 ( 平壤州 ) 와우두주 ( 牛頭州 ) 두주의지세를살펴보게하였다는기사가 삼국사기 에보인다. 여기서평양은북한산군을가리키는것이확실하고우두주는춘천일대이다. 이지세검찰의목적에대해서는더이상의내용이보이지않지만장차패강지역으로의진출을예상하고그에따른기존의북계지역의방비를조정하기위해취해진것이아닌가생각된다.* 신문왕 성덕왕대체제정비의노력은경덕왕에이르러일단락되었다. 경덕왕때에는신라중대의전제왕권이새로운진골귀족세력의등장으로흔들리기시작하여, 왕권의재강화를위한일련의관제정비와개혁조치가취해진시기였다. 이러한제도정비의방향은귀족세력을제어하면서왕권을강화하려는일종의한화 ( 漢化 ) 정책으로나타났다. 757 년 ( 경덕왕 16) 에는지방 9 개주의명칭을비롯한군현의명칭을, 759 년에는중앙관부의관직명을모두중국식으로바꾸었던것이다. 남양주는이때에한주한양군황양현으로개칭되었다. 통일이후신라서북지역의확장과정에서남양주지역의통일기상황을유추해본다면다음과같다. 통일직후인신문왕대에는 9 주 5 소경체제로지방제도를개편하였는데, 한산주지역은통일전쟁기이래주치가있었던광주 ( 廣州 ) 를중심으로한강이남에대한지배력의공고화에주력하는양상을띠고있다. 이러한모습은신문왕이나당전쟁이후실질적인지배력을확보한한강이북지역의통치문제보다는귀족세력에대한견제와중앙정치체제의집권화에주력한사실을반영한다고이해해도좋을듯하다. 신라의한주경영은통일을달성할때까지군사적인효율성이최우선고려사항이었다. 이사실은주의치폐과정과그이동등에서확인되고있다. 또 9 주 5 소경은주로한강을경계로이남지역인백제의고토 ( 故土 ) 를중심으로한지배권역의정비를위해실시했던듯하다. 684 년안승 ( 安勝 ) 의족자 ( 族子 ) 인대문 ( 大文 ) 이금마저 ( 金馬渚 ) 에서반란을일으켰다. 반란을진압한후그곳사람들을남쪽의주와군으로옮기고금마저를금마군으로고쳤다는기록이주목된다.* 이외에도신문왕대지방제도관련기록에서한강이북지역과관련된지역은확인되지않는다. 694 년 ( 효소왕 3) 에이르러서야한주이북지역에서의축성기사가보인다. 비록당군을 675 년매소성전투를계기로한반도에서구축 ( 驅逐 ) 했다고는하나당에대한견제와 699 년이후발해에대한의식등으로, 서북경계를임진강이북에서예성강유역까지확장하는작업을일단락하기전까지한강이북의한산주지역통치는민정 ( 民政 ) 적성격보다는중고기이래의군정 ( 軍政 ) 적성격을벗어나지못하고있었다고추측할수있다. 남양주지역을포함한한강이북지역에서군정적인성격의중고기적통치방식이종식되고지방사회로서본격적인민정적지배를실시한시기는앞에서지적하였듯이 735 년당으로부터패강이남지역의영유권을공인받을무렵이라생각해도큰무리는없을듯하다.

20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2 장고대사회한강유역의지배세력 * 제 3 절통일신라시대의한강유역 3. 역사상양주의등장 신라몰락의기운은사회적혼란이극치에달했던진성여왕 ( 眞聖女王 : ) 때표면으로나타났다. 이에앞서 822 년 ( 헌덕왕 14) 과 825 년에진골귀족인김헌창 ( 金憲昌 ) 범문 ( 梵文 ) 부자가왕위계승에불만을품고반란을일으켰다가진압되는사건이있었다. 특히범문은평양에도읍을정할목적으로북한산주를공격하였으나, 한산주도독총명 ( 聰明 ) 의군사에게살해되었다.* 이사실로보아당시까지는신라정부의지방통제력이어느정도관철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그러나김헌창부자의반란은 830 년대왕위계승쟁탈전의효시를이루었으며, 호족 ( 豪族 ) 의지방할거적인경향을크게촉진시켰다.* 이미언급한대로통일이후신문왕 경덕왕대의지방통치체제의정비로남양주지역은한주한양군황양현으로존속하였다. 그러나신라말에들어통치체제전반이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유력세력들이장군 ( 將軍 ) 성주 ( 城主 ) 를칭하면서독자세력을구축하는시대상황이전개되자한주지역도신라정부의직접적인통제력에서서서히벗어난것같다. 원종 ( 元宗 ) 과애노 ( 哀奴 ) 의난 ( 진성여왕 3 : 890 년 ) 이후지방세력들은신라정부에대항해각지에서반란을일으키는데, 그중대표적인물이견훤 ( 甄萱 ) 과궁예 ( 弓裔 ) 이다. 이들은백제와고구려의부흥을외치면서후백제와후고구려를수립하고, 후삼국을정립하였다. 진성여왕의뒤를이은효공왕 ( 孝恭王 : ) 대는후백제 후고구려가날로발흥하여궁예의세력은죽령동북지역까지이르고, 견훤은일선군 ( 一善郡 : 선산 ) 이남의 10 성을공취하는등신라의영토는계속줄어들었다.* 당시신라는소백산맥외곽을벗어나지못한경상도지역만을겨우관장하는소국으로전락하였다. 후삼국간의쟁패기에남양주가속한한강유역을장악하는데성공한이는궁예와왕건 ( 王建 ) 이다. 처음에궁예는기훤 ( 箕萱 ) 을거쳐양길 ( 梁吉 ) 에게의탁해자신의세력을도모하다가 895 년명주 ( 溟州 ) 점령이후독자적으로철원일대를장악하였다. 이에패서지방의호족들이귀부하고, 896 년송악 ( 松岳 ) 의왕건부자가귀부하였다. 이후궁예는 896 년에승령현 ( 僧嶺縣 : 연천 ) 임강현 ( 臨江縣 : 장단 ) 을공취하고, 897 년에는한강이북지역의유명한군이라하여송악으로도읍을옮기고, 인물 ( 仁物 : 개풍 ) 공암 ( 孔巖 : 강서구가양동 ) 검포 ( 黔浦 : 김포 ) 혈구 ( 穴口 : 강화 ) 등을장악한후에국원 ( 國原 : 충주 ) 등 30 여성을차지하고있던북원 ( 北原 : 원주 ) 의양길을축출해한강이남지역진출의최대장애를제거한다. 898 년에는왕건을정기대감 ( 精騎大監 ) 으로삼아양주 ( 楊州 ) 견주 ( 見州 ) 를공략하였고,* 899 년에는한강을넘어광주 ( 廣州 ) 충주 당성 ( 唐城 : 화성 ) 청주 ( 靑州 : 괴산 ) 괴양 ( 槐壤 : 괴산 ) 등을공략하였다. 명주지역에서자립한지 5 년만에신라북계 3 개주 ( 명주 삭주 한주 ) 를차지하는커다란세력으로발전하였으며이를계기로 901 년왕을칭하고국호를고려라하였다.* 궁예의세력확장경로를정리하면, 강원도동해안 ( 명주 ) 에서출발해황해도에서한강이북지역 ( 한주북부지역 ) 을거쳐원주지역 ( 북원 ) 의양길을축출한후한강이남지역으로본격적으로진출하고있다. 남양주지역도궁예가광주를공략할무렵에는궁예정권의지배에예속되었던것으로보인다. 당시한주지역의호족세력들은이과정에서궁예에게귀부하는데, 대표적인세력이패강진세력과송악의왕건이었다. 이외에도광주의왕규 ( 王規 ), 금주 ( 衿州 : 시흥 ) 의강감찬 ( 姜邯贊 ) 선대 ( 先代 ) 세력, 파주의윤신원 ( 尹莘遠 : 윤관의고조 ), 이천의서필 ( 徐弼 : 서희의부 ) 등고려태조때재상 ( 宰相 ) 및삼한공신 ( 三韓功臣 ) 세력들이있다. 그러나남양주지역의호족세력은문헌에보이지않는다. 오히려 935 년견훤이왕건에게귀부하자상보 ( 尙父 ) 로삼고양주를식읍 ( 食邑 ) 으로주었다는기록으로보아남양주지역에는기득권을가진호족세력이존재하지않았음을유추할수있다. 삼국시대때부터한강유역의전략적요충지였던이지역은그지리적조건에의해오히려호족세력의등장이주변으로부터견제를받아일종의완충지대로서존속하지않았을까생각할수도있겠다. 이유는불분명하지만이지역호족세력의공백은상대적으로송악에도읍한고려왕건정부의직할지가되어지방세력보다도중앙정부에의해식읍 전시과 ( 田柴科 ) 지급의대상지가되고, 나아가천도 ( 遷都 ) 의대상지역으로검토되는등우월한경제적 지리적입지조건에따라중요성을인정받게되었다.

20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1 절고려의건국 신라하대 ( ) 에지속되었던정치 사회적인혼란속에서지방세력은각지에서나름대로의세력기반을구축하면서성장하고있었다. 이러한경향은신라의몰락과정속에서확산되는데진성여왕 ( 眞聖女王 : ) 대원종 ( 元宗 ) 애노 ( 哀奴 ) 의난 (890) 이후지방세력들은신라정부에대항해각지에서반란을일으킨다. 진성여왕에이어즉위한효공왕 ( 孝恭王 : ) 이당 ( 唐 ) 에보낸표문가운데다음의구절은당시의상황을잘보여주고있다. 지금군읍 ( 郡邑 ) 은모두적굴 ( 賊窟 ) 이되었고산천은다전장이되었습니다. 어찌하늘의재앙이우리해동 ( 海東 ) 에만흘러드는것입니까.* 효공왕즉위이후견훤 ( 甄萱 ) 이후백제를건국하고 (900) 궁예 ( 弓裔 ) 가후고구려를세우면서 (901), 신라는소백산맥외곽을벗어나지못한경상도지역만을겨우관장하는소국으로전락하고말았다. 918 년왕건 ( 王建 ) 은궁예를추방하고고려 ( 高麗 ) 를개창한뒤신라 (935) 와후백제 (936) 를차례로통합하여통일을이루었다. 고려에통일되기까지후삼국기한강유역의정세는궁예의세력확장경로와연관이있다. 궁예는 895 년명주 ( 溟州 : 강릉 ) 에서출발해독자적으로철원 ( 鐵圓 ) 일대를장악한후한강이북지역으로진출한다. 궁예는이과정에서패서 ( 浿西 : 예성강 ) 지역의호족과송악 ( 松岳 ) 의왕건부자가귀부함에따라한강유역진출의발판을마련할수있었다. 897 년에는북원 ( 北原 : 원주 ) 의양길 ( 梁吉 ) 을축출하고한강이남지역을넘어죽령동북지역까지이르러신라를압박하기에이르렀다. 이과정에서양주 ( 楊州 ) 라는지명은 898 년궁예의휘하에서왕건이양주와견주 ( 見州 : 양주군주내면 ) 를점령하였다는기록에서처음등장한다.* 양주가통일신라의한양군 ( 漢陽郡 ) 에서언제양주로개칭되었는지는정확히알수없다. 당시의주는후삼국쟁패과정에서궁예와왕건에의해점령또는귀부하는지역에붙인명칭으로서군사적요충의지역단위명칭으로붙여진것이라는견해가있다.* 궁예는 901 년왕을칭하고국호를고려라하였다. 아울러 904 년에광평성 ( 廣評省 ) 등을비롯한새로운관제를마련하여국가체제를정비하였으며, 신라의군읍이름이비루하다하여새롭게개정하였다. 당시세력권안에있던양주, 견주, 행주 ( 幸州 : 고양 ), 수주 ( 樹州 : 부평 ), 금주 ( 衿州 : 시흥 ), 과천 ( 果川 ), 괴주 ( 槐州 : 괴산 ), 청주 ( 淸州 ), 죽주 ( 竹州 : 안성 ) 등은이때의지방제도정비에해당되었을것이다. 따라서이때양주라는지명이신라한양군을대신하여등장했을가능성도있다. 또한고려가후삼국을통일한후 940 년 ( 태조 23) 에이르러처음으로주 ( 州 ) 부 ( 府 ) 군 ( 郡 ) 현 ( 縣 ) 의이름을고치니, 이때양주의명칭이제도적으로정착되었을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아무튼양주는 898 년왕건의공략으로궁예정권에예속되었으며이는고려까지계속되었을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상황의이해에주목되는기록이있다. 견훤이막내아들능예 ( 能乂 ), 딸애복 ( 哀福 ), 애첩고비 ( 姑比 ) 등과함께나주로달아났다가입조하기를청하므로 ( 중략 ) 그일행이이르자다시견훤을일컬어상보 ( 尙父 ) 라하고남궁 ( 南宮 ) 을관사로주고위 ( 位 ) 를백관의위에두게하며양주를주어식읍으로삼게하였다.* 위의기록에서보면당시이지역이고려왕실에서마음대로처리할수있는직할지였음을알수있다. 만약호족세력이존재하고있었다면고려태조가마음대로견훤의식읍으로하사할수없었을것이기때문이다. 이곳은고려왕건이궁예의휘하에있을때직접공격하여점령하였을뿐만아니라고려건국이후에도왕실에서직접통치하는일종의직할지였다고보아야한다. 이지역에토착적인호족세력이존재했다면그호족이비록고려왕실과밀접한관계가있다하더라도견훤에게식읍으로하사하기는어려웠을것이기때문이다. 이곳은이미건국초부터고려왕실의행정력이어느정도미치는지역이었기때문에인근의광주 ( 왕규 ) 나시흥 ( 강감찬선대세력 ) 의경우와달리견훤에게식읍으로하사할수있었던것으로보인다.* 그러나고려의왕건은견훤을포함한후백제세력을항상경계하고감시함으로써견훤이세력을키우거나견훤을중심으로후백제세력이집결하지못하도록하였을것이다. 그렇다고견훤에대한대우가미비했을경우후백제인의민심이반을막을수가없었다. 이러한상황에서형식적으로높은지위와훌륭한식읍을주되그식읍은개경에가까워감시하기에편리한곳, 다시말해서양주지방이가장적합하였다고할수있다. 견훤에대한예우나양주의하사가형식적이었음은견훤의사후그후계자나관계자가양주와관련된기록에서전혀보이지않고있다는것으로도알수있다.* 신라말에서고려초까지남양주지역에는토착적인호족세력이존재하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경제 교통 군사적으로중요한지역인남양주는궁예가왕건을보내공격하여지배한이후중앙과지역적으로인접해있어서중앙의행정력이직접미치는직할지로통치하였을가능성이높으며이러한사정은왕건이고려를건국한이후에도비슷하였으리라추측된다. 왕건은개성에도읍한후지리적으로가까우며군사적 경제적요충지인이지역을어느호족에게맡기기보다는자신이직접통치하여자신의세력기반으로삼으려하였을것이다. 따라서호족의세력이미치지않았기때문에견훤이귀부하였을때이지역을식읍으로하사할수있었던것이다.

21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2 절고려전기지방제도의정비 1. 성종대의지방제도정비 양주가고려지방통치체제내에서정식으로등장한것은 983 년 ( 성종 2) 이다. 성종은처음으로지방에 12 목을설치하였는데, 이때의 12 목은양주 ( 楊州 ) 광주 ( 廣州 ) 충주 ( 忠州 ) 청주 ( 淸州 ) 공주 ( 公州 ) 진주 ( 晋州 ) 상주 ( 尙州 ) 전주 ( 全州 ) 나주 ( 羅州 ) 승주 ( 昇州 ) 해주 ( 海州 ) 황주 ( 黃州 ) 이다.9) 잘아는바와같이고려초에는호족세력이지방을통치하였으며, 중앙의행정력이아직전국적으로미치지못하고있었다. 성종대에이르러처음으로전국을 12 개의목으로나누고각지역에처음으로지방관을파견하면서중앙집권화가시작되었다. 이로써양주는명실상부한최고의지방행정구역으로승격하였다. 또한중앙정부로부터상주관 ( 常住官 ) 이파견되어여러향직을지휘 감독하게하였으며, 968 년 8 월에는 12 목에가족을거느리고부임할수있게하였다.* 987 년 8 월에는 12 목에서각 1 명씩을차출하여교육을담당하게하고유교적소양이나의술이있는인재를중앙에천거하도록하여 * 중앙집권화에박차를가하였다. 993 년에는개경과서경그리고전국의 12 목에물가조절기관인상평창을설치하였고 *, 같은해 8 월주 부 군 현 역로 ( 驛路 ) 에공수전지 ( 公須田地 ) 를지급하여 * 전국 12 목을중심으로하는지방행정조직을갖추었다. 양주목의규모는지방통치의최고행정기관으로문종대의남경유수관에설치된주 부 군 현의숫자인 31 개의지방행정조직과그규모가유사할것으로추측된다. 이때의범위는 고려사 지리지남경유수관조에의하면교하군 ( 交河郡 : 파주 ), 견주, 포주 ( 抱州 : 포천 ), 행주, 봉성현 ( 峰城縣 : 파주 ), 고봉현 ( 高峰縣 : 고양 ), 심악현 ( 深嶽縣 : 파주 ), 풍양현 ( 豊壤縣 : 남양주시진접 진건 ), 사천현 ( 沙川縣 : 양주 ) 의 3 군 6 현이었으며, 관할지는 1 부 2 군 1 현이있었다. 1 부는안남도호부 ( 安南都護府 : 부평 김포 ) 로그밑에금주, 동성현 ( 童城縣 : 김포 ), 통진현 ( 通津縣 : 김포 ), 공암현 ( 孔巖縣 : 양천 ), 김포현 ( 金浦縣 ), 수안현 ( 守安縣 : 김포 ) 등 6 속현이직할지로소속되었다. 2 군에는인주 ( 仁州 ) 와수주 ( 水州 ) 가있는데인주에는당성군 ( 唐城郡 : 화성 ), 재양현 ( 載陽縣 : 화성 ) 이직할지로소속되어있고, 수주는안산현 ( 安山縣 : 안산 ), 영신현 ( 永新縣 : 평택 ), 쌍부현 ( 雙阜縣 : 화성 ), 용성현 ( 龍城縣 : 화성 ), 정송현 ( 貞松縣 : 화성 ), 진위현 ( 振威縣 : 평택 ), 양성현 ( 陽城縣 : 안성 ) 의 7 개현을포함하고있다. 1 현으로는강화현 ( 江華縣 ) 이있는데그밑에진강현 ( 鎭江縣 : 강화 ), 하음현 ( 河陰縣 : 강화 ), 교동현 ( 喬桐縣 : 강화 ) 의 3 개현이있다.* 983 년에설치된 12 목제는 995 년에이르러대대적인개편이이루어졌다. 고려사 지리지서문에다음과같은기록이보인다. 성종이다시주 부 군 현과역참 강하 포구의명칭을고치면서마침내전국을 10 도로나누고 12 개주에각각절도사를두었다. 당시설치된 10 도는관내 ( 關內 ) 중원 ( 中原 ) 하남 ( 河南 ) 강남 ( 江南 ) 영남 ( 嶺南 ) 영동 ( 嶺東 ) 산남 ( 山南 ) 해양 ( 海陽 ) 삭방 ( 朔方 ) 패서 ( 浿西 ) 이며그관하의주군의총수는 580 여개였다.* 위의기록에는 995 년에전국을 10 도제로나눈사실이보이지않지만, 고려사 지리지남경유수관조에의하면 성종 14 년에전국을 10 도로나누고 12 개주에절도사를두면서양주를관내도에소속시켰다. * 라는기록으로보아 10 도제와 12 절도사제는 995 년에실시된듯하다. 995 년 12 목에절도사를설치한것은몇가지중요한의미가있다. 개편의기본목적은당 ( 唐 ) 에서안사 ( 安史 ) 의난이후에편성한군사적인절도사체제로의지방관제개편이었음을알수있다. 목을혁파하고군으로삼은것을도표로나타내면다음과같다. <12 절도사군호 >* 목 절도사군호 목 절도사군호 양주 좌신책군 진주 정해군 해주 우신책군 상주 귀덕군 광주 봉국군 전주 순의군 충주 창화군 나주 진해군 청주 전절군 승주 곤해군 공주 안절군 황주 천덕군 성종이민사행정체제인 12 목체제에서군사행정체제인 12 절도사체제로바꾼이유는무엇이었을까. 첫째, 성종은유교적이상국가를실현하기위하여유교적인의례의정비, 특히중국제도수입에노력해중앙정치기구로 3 성제, 지방제도로서 10 도제 12 절도사제를실시하였다.* 성종은유교적윤리를근본으로하는중앙집권적예의국가를건설하려고하였다. 이에유학자를등용하여왕권의안정을도모하고유교적중앙집권국가의정치형태를완성시키려하였으며, 중국의문물을숭상하여중국제도를본받으려하였다. 이러한과정에서실시된것이 10 도제와 12 절도사제이다. 둘째, 성종대에이르러왕권의확립이어느정도이루어지게되자왕은독자적인중앙집권의실효를거두기위해서 12 목제를개정할필요성을느꼈다. 또한지방행정에도상당한관심을가지게되면서당시분산된지방세력을견제하고새로운강력한중앙집권체제를갖추기위하여종래의 12 목제보다새로운지방제도의제정을필요로했다.* 마지막으로, 이무렵은거란 ( 契丹 ) 의제 1 차침입이있은직후이므로지방행정에서군사적인면을강화했던듯하다. 성종대는최승로의시무 28 조에서보이는바와같이유교적정치이념을확립하여중앙집권적국가의출현을기대했으며대외적으로는거란의침입으로국방의중요성이강조된시기였다. 따라서성종은이러한국내외적인상황에대처하기위해서새로운제도의개편이필요했을것이며, 이러한제도개편이 12 목제의폐지와 10 도제 12 절도사제의성립으로나타났다. 이러한개편에따라양주는 10 도제의실시로광주 황주 해주와더불어관내도에예속되었다.* 그리고행정적인성격의목사 ( 牧使 ) 대신군사적인성격의절도사 ( 節度使 ) 를파견하였다. 그러나양주가관내도에소속되었다고하더라도도의장관으로부터행정적인간섭을받는것은아

211 니었다.* 고려의 10 도는행정구획이아니라감찰또는순찰구획이었으므로상주하는장관이없었던것이다. 다만필요한경우수시로중앙관을파견하여그구획을순찰하도록하였다. 따라서도가주의상급기관이라할지라도실제로는주가여전히지방행정의최고단위였다.* 다만성종의중앙집권화정책의일환으로군사적인성격으로개편되어지방세력을통제하였고, 그명칭도위의표에서보듯이좌신책군으로명명되어해주의우신책군과더불어개경의좌우이보 ( 左右二輔 ) 가되었다. 또한성종은 12 절도사외에 2 유수 ( 留守 ), 5 도호부사 ( 都護府使 ), 7 도단련사 ( 都團練使 ), 11 단련사 ( 團練使 ), 15 자사 ( 刺使 ), 21 방어사 ( 防禦使 ) 를파견하여중앙집권체제를완성하였다.*

21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2 절고려전기지방제도의정비 2. 현종대의지방제도개편 성종대의지방제도개편은그다음왕인목종대에이르러크게위축되었다 년 ( 목종 8) 3 월에관찰사 도단련사 단련사 자사등의지방관직을모두혁파하고다만 12 절도 4 도호 동서북계방어진사 현령 진장만남겨두었다.* 이러한제도의변경은당시까지의 100 여개의지방관을모두혁파한것으로양계지방을제외한나머지지역에 4 도호부와 12 절도사만남겨두게된것이다. 이때혁파된관찰사 도단련사 단련사 자사등의관직은비교적민사행정의성격이강하였다. 반대로도호부사 절도사등은철저한군사행정기관으로이와같이군사적인성격이강한것만남기게된이유는확실치않으나, 아마이때까지지방통제를위한지방관의파견은아직도군사력을배경으로할수밖에없었던듯하다. 바꾸어말하면민사행정을기본으로한지방관의파견은이때까지도조건이성숙되지못한것이아닌가생각된다.* 그러나목종의뒤를이은현종대에는 995 년부터지속된 12 절도사를폐지하고 75 도안무사 ( 道安撫使 ) 가설치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서문에의하면 현종초에절도사가폐지되고전국에 5 개도호 ( 都護 ) 와 75 도에안무사 ( 安撫使 ) 를두었다가얼마후안무사를없애고 4 개도호와 8 개목을두었다. * 라는기록이보이고있다. 12 절도사에서 75 도안무사로의개칭은군사적인성격에서민사적인성격으로의전환을의미한다. 그러나 1010 년 ( 현종 1) 에있었던거란의침입을염두에둘때결코군사체제를약화시키지는않았을것이다. 따라서 12 절도사라는소수의지방관파견에서 75 도안무사라는다수의지방관을파견함으로써지방통제를강화하고지방으로부터인적 물적자원의동원을충실히할수있었을것이다.* 현종초의이러한지방관제는 1018 년 2 월에각도의안무사를혁파하고 4 도호 8 목 56 지주군사 28 진장 20 현령으로개편되어중앙의지방통제가다시민사행정의성격을가지게되었다.* 1018 년의지방제도개편에서양주는목 ( 牧 ) 으로환원되지못하고지주사 ( 知州事 ) 로강등되었다.* 지주사로의강등은군사적인성격에서민정적인성격으로전환함과동시에민정적인면에서도점차중요성이감소된것으로판단되었기때문이다. 옛날부터경제 군사 교통의요충지이며개경에서멀지않아중앙의행정력이정상적으로침투되었으므로목을둘필요를느끼지않았기때문이었다.*

21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3 절지리도참사상과남경 1. 남경설치및혁파의배경 양주목에서절도사로, 절도사에서지주사로강등되었던양주는 1067 년 ( 문종 21) 에남경으로다시승격된다. 남경은서경 ( 평양 ) 동경 ( 경주 ) 과더불어 3 경체제를이루어지방제도상최고의지위를점하였다. 다음은 고려사 지리지의양주연혁과남경설치에관한기사이다. 양주는원래고구려의북한산군 ( 北漢山郡 : 南平壤城이라고도한다.) 인데백제의근초고왕 ( 近肖古王 ) 이빼앗아서 25 년에남한산 ( 南漢山 ) 으로부터이곳으로수도를옮겼다. 개로왕 ( 蓋鹵王 ) 20 년에고구려자비왕 ( 慈悲王 : 고구려長壽王 ) 이군사를거느리고와서한성을포위하므로개로왕이성을벗어나달아나다가고구려군사에게살해당하였으며, 이해에개로왕의아들문주왕 ( 文周王 ) 이수도를웅진 ( 熊津 ) 으로옮겼다. 그후신라진흥왕 15 년에북한산성에이르러국경을정하였고, 17 년에북한산주 ( 北漢山州 ) 를창설하여군주를두었으며, 경덕왕 ( 景德王 ) 14 년에개편하여한양군으로만들었다. 고려초에다시양주로고쳤으며, 성종 14 년에처음으로전국을 10 개도로정하고 12 개주에절도사를두면서양주를좌신책군 ( 左神策軍 ) 이라고불러해주 ( 海州 ) 와함께좌 우 2 보 ( 輔 ) 로삼아서관내도에소속시켰다. 현종 3 년에좌 우 2 보와 12 개의절도사 ( 節度使 ) 를폐지하고안무사 ( 安撫使 ) 로고쳤다가 9 년에는지주사 ( 知州事 ) 로낮추었으며, 문종 21 년에남경유수관으로승격시켜인접군의백성들을이주시켜살게하였다. 숙종원년에위위승동정 ( 衛尉丞同正 ) 김위제 ( 金謂?) 가 도선밀기 ( 道詵密記 ) 에근거하여왕에게수도를남경으로옮길것을요청하면서말하기를, 양주에목멱양 ( 木覓壤 ) 이있는데수도로정할만하다. 고하였으며천문을맡은관리인문상 ( 文象 ) 이그의의견에동의하였으므로 4 년가을에왕이친히그곳에가서터를잡고평장사 ( 平章事 ) 최사추 ( 崔思諏 ) 와지주사 ( 知奏事 ) 윤관 ( 尹瓘 ) 에게명하여남경건설공사를감독하게하였다. 5 년만에공사가끝나자왕은드디어친히그곳에가서건설정형을시찰하였다. 충렬왕 34 년에한양부로고쳤는데광릉 ( 廣陵 : 성종이정한명칭이다.) 이라고도부른다. 삼각산 ( 三角山 : 신라에서는負兒嶽이라고도불렀다.), 한강 ( 漢江 : 즉沙平나루를말한것 ), 양진 ( 楊津 : 신라때의북독이던漢山河를中祀로올렸다.) 이있다. 본주에소속된군이 3 개, 현이 6 개있으며관할하에도호부가 1 개, 지사군이 2 개, 현령관이 1 개있다.* 이밖에도 1068 년남경에새궁궐을창건하였다 * 는기록이나, 1076 년의외관록 ( 外官祿 ) 에남경유수관의녹봉 * 이기록된사실로보아남경의설치는확실하지만문종이왜양주를남경으로승격시켰는지에대한내용은보이지않는다. 다만이때문종이지리도참사상을숭배하여남경으로승격시킨것으로추측한다.* 도선이지었다는 송악명당기 ( 松岳明堂記 ) 에의하여문종이예성강가의병악 ( 餠岳 ) 에장원정 ( 長源亭 ) 을지었다 * 는사실로보아문종이지리도참사상에심취했음을짐작할수있다. 그러나남경설치에대한문제를지리도참설로설명하기보다좀더당시의정치상황과연결시켜설명한연구가있다.* 남경은선사시대이래문화 교통 군사적요충지였고, 고려시대에도그중요성이더욱증대되어문종대에이르러남경으로격상되었다. 문종대에는관제 전시과 녹봉제등의제도를정비하였으며, 대외적으로송 일본 아라비아와의국제무역이활발한시기였다. 그러므로남경은국내적제도정비와대외무역발달이라는문종대의시대상황에서육운과해운이결합된그지역적중요성이커졌고그결과남경유수관의설치가이루어졌다는것이다.* 그러나이후남경에대한기록이없어남경이곧혁파된것으로보인다. 남경이혁파된이유를현재로선정확히알수없다. 지리도참설에근거해남경으로승격되었으나별효과가없자곧폐지되었던듯하다.* 지리도참설이외에생각해볼수있는것은문종대정치세력간의갈등이다. 문종대남경을근거지로한귀족세력으로는이자연 ( 李資淵 ) 세력 ( 인주이씨 ) 과위정 ( 韋靖 ) 세력, 강감찬세력등이있었다. 이들귀족세력은기존의귀족층이아니기때문에상대적으로왕과밀착될수있었고또한그러한의미에서자신들지역에경 ( 京 ) 이설치되어왕과보다친밀한기회를갖기를원했던것으로생각된다. 그러므로이들양자의입장이남경을설치하게했던것이다.* 그러나이들남경세력중에서세력을유지한것은이자연세력뿐이었다. 처음에남경을설치한목적은기존의귀족세력과대별되는새로운세력을키우기위해서였는데, 이것이여의치않자남경을폐지한듯하며이후문종은새롭게경을설치할지역을물색하였다. 즉, 남경의폐지는인주이씨세력의강화와신진세력의약화로새로운세력근거지를만들어보려던왕의의도가차질을빚었기때문이었던것으로보인다.*

21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3 절지리도참사상과남경 2. 지리도참사상과남경의재건 숙종대에양주가다시남경으로승격된것은당시에유행하던지리도참사상과숙종의즉위과정에있었던유혈극이원인이었다. 숙종은나이어린조카헌종으로부터선위의형식을빌어왕위를계승하였지만사실은찬탈이나다름이없었다. 또한같은조카인한산후 ( 韓山候 ) 윤 ( 풹 ) 을옹립하려던이자의 ( 李資義 ) 세력과유혈극을벌였던숙종은재위후심한천재지변을겪게되었다.* 이러한천재지변속에서음양가인위위승동정김위제가지리도참사상에의거하여남경천도를주장하였다. 김위제는숙종원년에위위승동정으로임명되었다. 김위제는그방술을배워국도를남경으로옮길것을다음과같은글을올려청하였다. 도선의 비기 에는 고려의땅에삼경이있다. 송악을중경으로, 목멱 ( 木覓 ) 땅을남경으로, 평양을서경으로하는데, 월을중경에서지내고 월을남경에서지내며 월을서경에서지내면 36 개국이와서조공할것이다. 하였으며또 건국한후 160 여년에목멱벌에도읍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저의생각에지금이바로새서울로옮길때라고봅니다. 또제가도선의 답산가 ( 踏山歌 ) 를보니거기에이르기를 송도운수가다되면어느곳으로가려는가. 삼동 ( 三冬 ) 에해돋는그곳에벌판이있네. 후대의어진사람이이곳에도읍하면한강의어룡이사해로통할것이다. 하였습니다. 삼동에해돋는곳이란즉손방 ( 巽方 ) 이며목멱이송경의동남방에있는까닭에그렇게말한것입니다. 답산가 에는또 송악산은진한과마한의주인이되었으니, 아어느대에가서그시종 ( 始終 ) 됨을알겠는가. 뿌리가가늘고약하며지엽도역시그러하니, 겨우백년기간지나면어찌시들지않으랴. 만약새로운꽃다시한번피려거든서울을떠나양강 ( 陽江 ) 을건너국왕이왔다갔다고하라. 그러면사해의어룡이모두한강으로모여들것이요, 나라와백성이편안하여태평세상이룩되리라. 하였습니다. 한강양지쪽은왕업이장구하며온세상이입조하고왕실이번창할것이니이는실로대명당의터입니다. 또 답산가 에는 후대에현명한사람이인간의운기를알아낸다면한강을건너가지말아야그운수오래간다. 만약그강을건너가서도읍을정한다면나라는두조각나서한강으로국경을삼으리라. 하였습니다. 또 삼각산명당기 ( 三角山明堂記 ) 에이르기를, 눈을뜨고머리를돌려산세를두루살펴보니북을등지고남을향한곳이곳이바로명당대지로다. 음과양이서로맞아겹겹이꽃이피니자손이번창하고국가를수호하리라. 앞에놓인산들은첩첩이들어서서조공바치듯하고, 뒤로옆으로늘어선산들은부모삼촌과같이보호해주며, 문지키는산또대궐문이나성문밖에는개세마리씩있어주인을위하여충실히문을지키네. 좌측의청룡과우측의백호가드높다고시비말라. 사방의장사꾼은저마다보배를바치러올것이요, 명예를탐낸이웃손님들자식이부모따르듯이와서모두한마음으로나라와임금을도우리라. 임자년 ( 壬子年 ) 에첫삽괭이를대면정사년 ( 丁巳年 ) 에성군이될왕자가탄생할것이다. 삼각산을의지하여도읍을정하면 9 년후에는사방에서조공을바칠것이다. 하였으니이곳은현명한임금이태평성대를이룩할터입니다. 또 신지비사 ( 神誌泌詞 ) 에이르기를 비유해서저울의저울대 추 ( 錐 ) 극기 ( 極忌 ) 와같은데그대는부소 ( 扶疎 ) 이며추는오덕구 ( 五德丘 ) 요, 극기는백아강 ( 百牙岡 ) 이다. 이곳에서 70 개나라들의조공을받고땅의덕과신령의보호를입을것이다. 저울은극기와꼬리가반듯하여야나라가융성하고태평이보장된다. 만약비유하여말한이세곳에도읍하지않으면왕업이쇠퇴할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저울을가지고삼경을비유한것입니다. 극기는머리요, 추는꼬리이며대는저울끈을잡는곳입니다. 즉송악산을부소라고하여대에비유하였으며, 서경을백마강이라고하여저울머리에비유하고, 삼각산의남쪽을오덕구라고하여추에비유한것입니다. 오덕이란중앙에면악 ( 面嶽 ) 이있어서원형으로되었으니토덕 ( 土德 ) 을상징한것이요, 북에감악 ( 紺嶽 ) 이있어서곡형 ( 曲形 ) 으로되었으니수덕 ( 水德 ) 을상징한것이요, 남에관악 ( 冠嶽 ) 이있어서첨예하게되었으니화덕 ( 火德 ) 을상징한것이요, 동에양주남행산 ( 南行山 ) 이있어서직형 ( 直形 ) 으로되었으니목덕 ( 木德 ) 을상징한것이요, 서에는수주 ( 樹州 ) 의북악 ( 北嶽 ) 이있어서방형 ( 方形 ) 으로되었으니금덕 ( 金德 ) 을상징한것으로서이것도도선의삼경의설과합치됩니다. 그런데지금우리나라에는중경과서경은있으나남경이없습니다. 그러므로삼각산남쪽목멱산북쪽평지에도성을건설하고때를맞추어순행하소서. 이문제는진실로나라의흥망과성쇠에관련되는일이기때문에저는당돌함을무릅쓰고이에기록하여삼가올립니다. 하였다. 일자 ( 日者 ) 문상 ( 文象 ) 이김위제의의견에찬동하였고또예종때은원중 ( 殷元中 ) 도도선의설을가지고글을올려의견을말하였다.* 위와같은김위제의주장으로 1101 년 ( 숙종 6) 9 월에남경개창도감 ( 南京開創都監 ) 을설치하고, 최사추 ( 崔思諏 ) 임의 ( 任懿 ) 윤관 문상 음덕전 ( 陰德全 ) 최자경 ( 崔資顥 ) 등이양주지방을조사하였다.* 이들은현지를조사하고돌아와남경도읍의후보지로동대문밖노원, 도봉산아래의해촌면, 면악남쪽인지금의경복궁자리, 용산방면을후보지로추천하였다. 특히최사추는면악의남쪽인지금의경복궁자리가최상의자리라고건의하였다.* 드디어 1101 년 10 월남경전설을종묘 사직 산천에고하고공사에착수하여 1104 년 5 월에남경궁궐을완성해같은해 8 월남행하여연흥전에서백관의조하를받았다.* 남경의규모를살펴보면 3 군 6 현의속군현과 1 도호부 2 지사군 1 현령관을포함하는지역이었다. 이러한지역을 고려사 지리지남경유수관을바탕으로도표화하면다음과같다. < 남경의영군현 * > 지명현위치제도변천 안남도호부수주 1 금주 2 동성현 3 통진현 4 공암현 부평시흥김포통진양천 성종 14 년단련사, 목종 8 년혁파, 현종 9 년지주사성종 14 년단련사, 현종 9 년내속신라경덕왕이장제군의영현으로함, 고려에서그대로소속신라경덕왕이장제군의영현으로함, 고려에서그대로소속현종 9 년내속

215 5 김포현 6 수안현 인주 1 당성현 2 재양현 수주 1 안산현 2 영신현 3 쌍부현 4 용성현 5 정송현 6 진위현 7 양성현 강화현 1 진강현 2 하음현 3 교동현 김포통진 인천화성군남양화성군남양 수원안산, 반월양천수원수원수원진위안성 강화강화강화강화 신라경덕왕이장제군의영현으로함, 고려에서본주에소속신라경덕왕이장제군의영현으로함, 고려에서본주에소속 현종 9 년수주소속, 숙종대경원군으로승격, 인종대인주로개칭현종 9 년수주소속, 뒤에내속현종 9 년수주소속, 뒤에내속 성종 14 년도단련사, 목종 8 년혁파, 현종 9 년지주사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신라경덕왕대수성군영현, 고려에서그대로본군에소속현종 9 년내속 현종 9 년현령설치신라경덕왕대해구군의영현, 고려에서그대로본현에소속신라경덕왕대해구군의영현, 고려에서그대로본현에소속신라경덕왕대해구군의영현, 고려에서그대로본현에소속 < 남경의속군현 > 지명현위치제도변천 교하군견주포주행주봉성현고봉현심악현풍양현사천현 파주교하양주포천고양파주파주파주남양주동두천 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성종 14 년단련사, 목종 8 년혁파, 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현종 9 년내속 위의표에서알수있듯이남경은지금의남양주시를포함하여양주 포천 의정부 수원 인천 시흥 평택 화성 파주 고양 김포 강화 안성 안양등경기도의반이상을차지하는넓은지역이었다. 이후남경은고려지방행정의근간으로 200 여년간존속한다. 위와같은지역을포함하고있는남경의기능과역할은무엇이었을까. 남경의기능은대체로세가지로요약할수있다. 첫째, 조세의징수와수송업무를원활히하여고려의중앙집권체제를강화시켰다. 남경은역참 조운양면에서중요한위치를점하였다. 개경은서북지방과의연결은쉬웠으나동남부지방과의연결이어려웠고, 이것은결국남경의존재를통해서보완할수있는것이었다. 따라서남경은역참과조운에서개경과함께조세의원활한운송을가능하게했으며, 이로써중앙집권체제강화에일익을담당할수있었다. 둘째, 남경은중남부지역의통치를원활히함과동시에귀족들의토지겸병을억제하고국가재정의충실을기할수있게하였다. 남경은고려중기의전시과를비롯한제반문물 제도의정비와관련될뿐만아니라이지역에대한통제력을강화함으로써귀족들의물적기반을통제하고국가재정을충실히할수있었다. 마지막으로고려대송무역의경로는북로와남로가있었는데고려전기에는북로를, 고려후기에는주로남로를이용하였다. 북로는개경근처의예성강벽란도에서출발하여옹진반도를거쳐서해를지나중국으로가는항로이며, 남로는예성강의벽란도에서출발하여옹진반도를지나서해안일대를거쳐흑산도에서서해를지나중국의남부지방으로가는길이다. 따라서대송무역은물론일본과의무역에서도예성강에서서해 남해로이르는길이중시되었음을알수있다. 대외무역이활발하던이시기에고려는중요한무역로였던서해안의섬이나항구에대한체계적이며조직적인관리가필요했을것이다. 이러한이유에서고려는남경을설치하여이해로를보호하였을것이다.* 숙종이후예종 인종대에도남경은그중요성이더욱커졌다. 예종은지리도참사상에심취하여지리도참서인 해동비록 ( 海東秘錄 ) 을편찬하였고,* 숙종이설치한남경을중시해 4 회에걸쳐남경에친행하였다.* 예종의뒤를이은인종대에도남경이중시되었다. 특히인종대에는중요한역사적사건이일어나는데 이자겸의난 과 묘청의서경천도운동 이다. 이러한변란으로정신적인충격이컸던인종은지리도참사상에따라 1126 년 ( 인종 4) 10 월에남경에친행하였다가 11 월에귀환하였고,* 1150 년 ( 의종 4) 9 월과 1167 년 8 월에도남경에친행하였다.* 그러다가 1234 년 ( 고종 21) 7 월내시이백전으로하여금어의를남경의가궐에안치하게하였는데, 한승려가지리도참을인용하며남경에궁궐을짓고어의를안치하면국운이 800 년을연장할수있다고했기때문이다.* 문종대와숙종대의남경은주로지리도참사상에입각하여설치되었고, 이후예종 인종 고종대에도지리도참사상의유행으로계속남경의중요성이강조되었다.

21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4 절고려말기남경의변천과천도 1. 한양부로의개편 200 여년간지속된남경은고려말 1308 년 ( 충렬왕 34) 에한양부로격하되었다. 이는서경과동경도마찬가지여서서경은평양부로, 동경은계림부로격하되었으며모두윤 ( 尹 ) 판관 ( 判官 ) 등의관제로개편되었다.* 이러한지방제도의개편으로견주등 3 개의속군과봉성현등 6 개의속현을거느리고안남도호부와인주 수주 강화현등을통치하던것에비하여그규모가상당히축소되었다. 즉길주목으로승격한안남도호부수주보다는하급관청이고부평부 수원부로된수주 ( 樹州 ) 수주 ( 水州 ) 와는동급의관청이되었다.* 한양부로바뀐양주는 3 속군 6 속현을지배하는하급관청으로지금의서울 남양주 양주 포천 고양등서울과그주변일대만을다스리게되었다. 남경에서이렇게한양부로개편된이유를고려가원간섭기에접어들면서국가기업에관한관념이약화되었기때문이라고생각하는견해가있다.* 또한충선왕의왕권강화정책의일환으로보는견해도있다.* 즉지방관서를부로존치시키고중앙에서각지역으로부윤을파견함으로써지방관의독자성을견제하고동시에지방을왕권의영향력아래에두려고하였다는것이다. 이와함께충선왕의지리도참설에대한무관심도하나의요인이었다고할수있다. 선대왕에비하여충선왕은어렸을때부터원의수도인북경에서오랫동안생활하며당대의거유들과교유하면서만권당을설치하는등유교적소양이상당히강하였다. 이러한충선왕이지리도참에관심을가질리가없었기때문에남경의중요성은퇴색하였다. 이제한양부로격하된양주는왕의휴양지내지는사냥터로전락하였는데이것은역대왕의행행 ( 幸行 ) 과는성격이다르다. 충숙왕은 1317 년 ( 충숙왕 4) 2 월에한양부로내려와사냥을하였으며, 1325 년 8 월에부인조국공주와한양에와서용산원자를출산하기도한다. 이처럼충렬왕이후의행행은이전왕들의경우와는성격이다름을보여주고있다.

21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3 장고려시대지방제도와남경천도 * 제 4 절고려말기남경의변천과천도 2. 남경으로의환원과천도 한양부로격하된남경이다시옛제도로환원된때는공민왕대이다. 공민왕이즉위한이후중국에서는커다란변화의조짐이보이기시작하였다. 원의세력이서서히약화되고명이새롭게등장하는원명교체기였다. 이때공민왕은원의간섭을배제하는강력한반원개혁정책을추진하였으며옛제도로돌아가기에이르렀다. 이러한일련의개혁정치에힘입어한양부는남경으로환원되었고, 1356 년 ( 공민왕 5) 에는평양부를서경으로승격시키고유수이하의제관원을두었다가 1362 년에다시평양부로환원하였다.* 평양이다시서경으로환원되었다는기록말미에 다른유수도같다. 라는기록으로보아한양부도다시이때에남경으로승격되었음이확실하다. 공민왕은남경으로천도할것을결심하여 1356 년 6 월에판서운관사진서영에게명하여남경의길지를상지하도록하였으나천도의계획이민간에알려져개경의민심이동요되고개경에서한양으로이사가는무리가줄을이어왕경인으로서가족을데리고이사하는것을금지하였으며같은해 12 월에남경궁궐을중수하였다.* 1357 년정월에왕이친히봉은사에가서태조의진전 ( 眞殿 ) 에참배하고천도에대해가부를물었으며다시이제현에게점을치게하여길하다는점괘를얻음으로써남경으로천도하기위해궁궐을새로지었다.* 공민왕대에는국가의제도가문란해져국내외의위기감이팽배했고토지제도의문란으로권문세족들은권력을이용해대토지를합병해농장으로삼아백성의유망이극에달하였다. 또한남해안과서해안일대에왜구가창궐하여그피해가극심했으며급기야수도인개경근처까지침입하기에이르렀다. 북쪽변방에서는홍건적의침입으로평안도 황해도일대가큰피해를입었다. 공민왕은이러한국내외의우환을남경천도를통해극복하려하였다. 그러나남경의성곽축조와천도의계획은윤택 ( 尹澤 ) 의상소에의해중단되고말았다. 전개성부윤 ( 開城府尹 ) 윤택은상소를통하여지리도참설은믿을것이못되며, 앞서묘청이참언으로인종을현혹하여수도를서경으로천도하려던사태를상기시키면서변방의외환이그치지않아군사의양성이시급한때에궁궐의역사 ( 役事 ) 로인력을소모하는것은잘못된것이며, 외환과기근을막기위해서라도중단해야한다면서남경성곽축조를반대하였다.* 이에남경천도는결국실패로끝나게되었다. 공민왕의뒤를이은우왕대에도남경천도문제가심각하게거론되었다. 우왕즉위초기에는국내외의정치가혼란하여이를극복하고자강화 철원 연천등지로천도할것을검토하다가 1381 년 ( 우왕 7) 에본격적으로남경천도가제기되었다. 즉같은해 8 월서운관 ( 書雲觀 ) 에서한양으로천도할것을주장하였으며,* 이듬해 9 월에시중이자송 ( 李子松 ) 에게개경을유수케하고우왕은남경으로이주하였다.* 그러나이때의남경이주는일시적인것이어서우왕도약 6 개월정도머무르다 1383 년 2 월에다시개경으로환도하였다.* 우왕은개경으로환도후에도남경천도를기정사실화하고실천에옮기려하였으나당시국내정세가이를허락하지않았다 년에고려조정은친원파와친명파로나뉘어대립하다가결국위화도회군으로이성계가정권을잡게되면서남경천도는수포로돌아가고말았다. 위화도회군을통해정권을장악한이성계는우왕과창왕을폐위하고공양왕 ( 恭讓王 ) 을즉위시키는데, 이러한과정에서즉위한공양왕은지리도참설을신봉하여다시남경천도문제가대두되었다 년 ( 공양왕 2) 7 월서운관에서한양천도를다시주장하자배극렴 ( 裵克廉 ) 을양광도찰리사로삼아한양궁궐의수리를담당하게하였다.* 그러나공양왕의천도노력에박의중 ( 朴誼中 ) 이 옛날의임금들이지리도참으로나라를보존했다는말을들어본적이없습니다. 지금백성들은많은의혹을품고있습니다. 중국에서공문이오면국경에서사건이발생한것이라고하며, 첩보를가지고달려오는병사가있으면중국의군대가곧올것이라고하며, 궁궐문안에들어오는것을금지하면반드시무슨원인이있을것이라고합니다. 민심이이러한데많은백성을동원하여수도를이주하면백성들은더욱의혹할것입니다. 공억 ( 供億 ) 의비용과소요의폐단은말로다할수없습니다. * 라고반대하였으나공양왕은계획대로천도를실행하여 1390 년 9 월한양천도를단행하였다. 그러나한양으로천도한지얼마안되어천재지변이발생하는등내외우환이겹치자 1391 년 2 월에다시개경으로환도하였다.* 결국고려말의국내외적혼란을지리도참사상에입각하여일신하려했던고려정부의노력은수포로돌아갔고, 한양으로의천도는조선의건국을기다려야했다.

21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지방제도의정비 *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지방제도의정비 * 1. 지방행정조직 성리학을근본이념으로하는조선의성립은남양주일대에커다란변화를가져왔다. 위화도회군과사전 ( 私田 ) 개혁을통하여왕조개창의기틀을마련한신흥사대부들은조선의개국과동시에풍수도참사상의지덕쇠왕설 ( 地德衰往說 ) 을내세워천도를주장하였다. 이는개경을중심으로한고려의잔재를청산하고자하는의도에서비롯된것으로태조는 1394 년 ( 태조 3) 10 월에한양천도를단행하였으며, 1395 년양주일부지역을한성부 ( 漢城府 ) 로정하였다. 그리고 1396 년 9 월여러궁전을위시하여종묘와사직 관아 도성등의축조공사를마쳤다. 이로써양주를중심으로한남양주지역도새로운지역편제의대상이되었다. 조선시대지방행정조직을보면전국을크게 8 도로나누고, 그밑에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두었는데이는취락의대소 인구 전결 ( 田結 ) 지역적특성을고려한것이었다. 각도에는관찰사, 각읍에는수령을파견하였는데, 수령은부윤 ( 종 2 품 ) 대도호부사 ( 정 3 품 ) 목사 ( 정 3 품 ) 도호부사 ( 종 3 품 ) 군수 ( 종 4 품 ) 현령 ( 종 5 품 ) 현감 ( 종 6 품 ) 등직에차이를두었다. 이러한통치기반정비는강력한중앙집권화정책의일환이었다. 고려시대에는주현모두에수령을파견한것이아니라주현 ( 主縣 ) 과속현 ( 屬縣 ) 으로구분하여주현에만수령을파견하고, 주현가운데큰읍을계수관 ( 界首官 ) 으로삼아주현과속현을통솔케하는이원적형식을취하였다. 고려시대계수관은 3 경 ( 三京 ) 3 도호부 ( 三都護府 ) 8 목 ( 八牧 ) 에두었다. 이러한계수관체제는조선건국후에도존속하다가중앙집권화과정에따라점차정비되었다 년에는전국에 25 개처의계수관이있었는데, 경기도는한양 ( 양주 ) 철원 부평 연안등에두어졌다. 세종대에는전국 37 개처의계수관가운데광주목 수원도호부 양주도호부 철원도호부 부평도호부등 5 개처의계수관이경기도에속해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의하면경기도에는 1 개의목과 8 개의도호부 6 군 26 현 ( 현령 6, 현감 20) 이속해있었고이들군현들은 5 개처의계수관에분속되어있었다. < 세종실록 지리지의경기도내계수관 > 계수관광주목양주도호부수원도호부철원도호부부평도호부 관할군현여흥 양근 음죽 이천 과천 천녕 지평 금천원평 고양 교하 임진 적성 포천 가평남양 안산 안성 진위 용인 양성 양지삭녕 영평 장단 안협 임강 마전 연천강화 인천 해풍 김포 교동 양천 통진 그러나계수관체제는여말선초도제 ( 道制 ) 의확립과군정 ( 軍政 ) 의분화로그기능을상실하였으며세조대진관체제의정비로행정과군정이분화되자소멸되었다. 결국중앙집권화과정의군현통폐합에따라경기도는 경국대전 에기록되어있는것처럼 4 목 7 도호부 7 군 19 현 ( 현령 5, 현감 14) 으로정비되었다. 여기서양주는광주 여주 파주와함께최고지방행정단위로서정 3 품목사가파견되었다.* 1395 년 6 월개성부를개성유후사 ( 開城留後司 ) 로고치고, 양광도 ( 楊廣道 ) 는충청도 ( 忠淸道 ), 서해도 ( 西海道 ) 는풍해도 ( 豊海道 ), 강릉도 ( 江陵道 ) 와교주도 ( 交州道 ) 는통합하여강원도 ( 江原道 ) 라하였는데, 이때부터강원도 충청도가지역의도명칭으로굳어졌고풍양은경기도에속하게되었다. 태조는 1396 년지방경계개편을단행하여주 군의땅이개어금니 ( 犬牙 ) 와같이서로얽혀있는상태에서긴것은끊고, 짧은것은더하여구획과지경 ( 地境 ) 을정리하였다. 이때양주도지경이정리되었던것으로보인다. 조선초기양주는한양이수도로정해지면서지양주사 ( 知楊州事 : 오늘날의서울근처 ) 로강등되었다가한양부를한성부 ( 漢城府 ) 로고치고아전과백성들을견주 ( 見州 ) 로옮기면서양주군 ( 楊州郡 : 오늘날의양주 ) 이라하였다.* 1397 년에는군에서부 ( 府 ) 로승격되었는데,* 1413 년 ( 태종 13) 에이르러서는도호부가되었다 년 ( 세종 17) 에는지방행정을정비하면서경기의철원을강원도에이속시키고강원도소속의영평 연천 삭녕을양주에포함시켰으며, 임강 마전 장단과양주관할의교하 임진 고양등지의고을을원평부소속으로옮겼다.* 그리고 1466 년 ( 세조 12) 양주는목으로승격되었고, 군제편제에따라진 ( 鎭 ) 이설치되었다. 연산군대에는양주목이폐지되고일부가사냥터로사용되기도하였으나 1511 년 ( 중종 6) 에다시복주 ( 復州 ) 되었다.* 1393 년 11 월각도에계수관을정하였는데, 경기좌도는한양 철원이며, 경기우도는연안 ( 延安 ) 부평 ( 富平 ) 이었다. 이에남양주지역은한양에속하게되었다. 조선왕조가중앙집권체제를확립해가는도중지방제도는많은변화를겪게된다. 특히고려시대부터속현으로남아있던곳들이주현으로승격되거나인근지역으로통폐합됨에따라속현의수는점차줄어들게되었다. 고려말 15 개소에달하던경기도의속현수는세종대에 12 개소, 중종대에는 5 개소로줄어들었다. < 고려 조선시대경기도속현수 > 시기전국속현수경기속현수전거 1018 년 ( 현종 9) 고려사

219 1391 년 ( 공양왕 3) 고려사 1432 년 ( 세종 14) 세종실록 지리지 1530 년 ( 중종 25) 72 5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의경우 세종실록 지리지에의하면속현이견주, 사천, 풍양의 3 개소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풍양만남아있다. 또한중앙집권화가더욱강화되면서풍양현마저중종대를전후하여폐지되면서양주의직할통치를받게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조풍양현 그런데고려말에서조선세종초까지풍양은양주가아닌포천에속해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조풍양현에의하면, 주동쪽 50 리에있으며, 고려현종 9 년양주의속현으로있다가포주 ( 抱州 : 포천 ) 에속하였고, 본조 ( 조선 ) 세종원년에다시양주에속하였다. 고되어있다. 즉오늘날의풍양지역은고려현종때부터 1419 년에이르는기간에양주가아닌포천에속하였음을알수있다. 포천의속현으로있던풍양은 1394 년도평의사사에서경기지역을각고을의성쇠와크기에따라좌 우도로나누게되자경기좌도에포함되었으며,* 1419 년에이궁수축계획에따라양주도호부에합쳐지게되었다. 다음인용문은이러한사실을보여준다. 임금이포천의속현풍양을양주도호부에합치라고명하고, 본현및서울각사로하여금연례로실어들이는미곡을모두그고을안에있는연복사 ( 演福寺 ) 에거두어쌓아놓게하였는데, 앞으로이궁을지을계획이었다.* 또한 경기양주와공리의민가에서아이가우박에맞아숨졌다. * 는기록에서와부지역이양주에속해있었음을알수있는것처럼현남양주지역과관련된대부분의지역은양주에속하였다. 그러나일부지역은 1906 년양주로편입되기전까지광주에속해있기도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을중심으로현재남양주지역과관계된지명과그경계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별비곡 ( 別非谷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30 리이고마지막은 50 리이다. 접동 ( 接洞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40 리이고마지막은 50 리이다. 진벌 ( 榛伐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50 리이고마지막은 70 리이다. 건천 ( 乾川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40 리이고마지막은 60 리이다. 진관 ( 眞官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40 리이고마지막은 60 리이다. 금촌 ( 金村 ) : 주동남쪽에있는데, 처음은 60 리이고마지막은 70 리이다. 상도 ( 上道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70 리이고마지막은 100 리이다. 하도 ( 下道 ) : 주동쪽에있는데, 처음은 80 리이고마지막은 100 리이다. 와공 ( 瓦孔 ) : 주동남쪽에있는데, 처음은 60 리이고마지막은 80 리이다. 독음 ( 禿音 ) : 주남쪽에있는데, 처음 50 리이고마지막은 70 리이다.

22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지방제도의정비 * 2. 지방군사조직 조선은건국직후지방통치조직의개편과동시에군제의개편작업을실시하였다 년 ( 정종 2) 왕권을강화하고자권신들이소유한사병 ( 私兵 ) 을혁파하여병권을중앙으로집중하였다. 중앙군제의개편은병권을소유한공신과권신들의권력구조개편과왕권의신장을의미하였다 년 ( 문종 12) 에이르러서는각도의시위군 ( 侍衛軍 ) 을선군 ( 船軍 ) 으로교체하는조치가취해졌다. 이러한조치는시위군이분화하고있었던점에서시위패병력을선군으로변화, 지방군에속하게함으로써시위패의병력을약화시키는동시에지방병종화 ( 兵種化 ) 하려는것이었다. 따라서지방에서는영진군 ( 營鎭軍 ) 이확장되고, 중앙에서는금군 ( 禁軍 ) 이증가하였다. 이는왕권의신장을의미하는것으로모든병권이중앙집중화하는계기가되었다. 이때양주진 ( 楊州鎭 ) 의군대도증가하였다. 즉왕권을확립하고자갑사 ( 甲士 ) 별시위 ( 別侍衛 ) 내금위 ( 內禁衛 ) 등중앙군의병종을증설하였고, 이들은왕권에충성하는군대로변모하였다. 영진은국방방위병력을강화하는성격을띠고있었다. 경국대전 에의하면조선중앙군은오위도총부 ( 五衛都摠府 ) 로도총관이총괄하였다.* 오위는의흥위 ( 義興衛 ) 용양위 ( 龍퀤衛 ) 호분위 ( 虎賁衛 ) 충좌위 ( 忠佐衛 ) 충무위 ( 忠武衛 ) 를말하는데, 양주가속한경기도는강원 충청 황해도와함께의흥위에속하였다. 오위는각기번상 ( 番上 ) 하는지방이지정되어충원하였다. 각위는모두 5 부로나누었고, 각부는 4 통 ( 統 ) 으로조직하였으며, 하부조직으로는여 ( 旅 ) 대 ( 隊 ) 오 ( 伍 ) 가설치되었다. 오위는갑사 ( 甲士 ) 와같이시취 ( 試取 ) 에의하여편입하며, 병종은정병 ( 正兵 ) 과수군이다. 번병 ( 番兵 ) 은방병과번차로구분하여장기근무병과교대병이있었다. 근무교대는별시위 ( 別侍衛 ) 가 5 번 6 년상체 ( 相遞 ) 와갑사는 5 번 6 삭 ( 朔 ) 상체, 그리고정병은 8 번 2 삭상체였다. < 경기도의군정 ( 軍丁 )> 지방시위군선군계지방시위군선군계 광주 ( 廣州 ) 여흥 ( 驪興 ) 양근 ( 楊根 ) 음죽 ( 陰竹 ) 이천 ( 利川 ) 과천 ( 果川 ) 천녕 ( 川寧 ) 지평 ( 砥平 ) 금천 ( 衿川 ) 양주 ( 楊州 ) 원평 ( 原平 ) 고양 ( 高陽 ) 교하 ( 交河 ) 임진 ( 臨津 ) 적성 ( 積城 ) 포천 ( 抱川 ) 가평 ( 加平 ) 수원 ( 水原 ) 남양 ( 南陽 ) 안산 ( 安山 ) 안성 ( 安城 ) 진위 ( 振威 ) 용인 ( 龍仁 ) 양성 ( 陽城 ) 양지 ( 陽智 ) 철원 ( 鐵原 ) 삭녕 ( 朔寧 ) 영평 ( 永平 ) 장단 ( 長湍 ) 안협 ( 安峽 ) 임강 ( 臨江 ) 마전 ( 麻田 ) 연천 ( 漣川 ) 부평 ( 富平 ) 강화 ( 江華 ) 인천 ( 仁川 ) 해풍 ( 海豊 ) 김포 ( 金浦 ) 양천 ( 陽川 ) 교동 ( 喬桐 ) 통진 ( 通津 ) 선군 195, 장번수군 선군 195, 장번수군 합계 1,744 선군 3,424, 장번수군 528 5,696 양주근무병인영진군은 4 번 1 삭상체였으며, 수군은 2 번 1 삭상체규정이있어서로교대하여방위책임을수행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의하면양주도호부군정은시위군 133 명, 수군인선군은 132 명이었다. 이때양주의호수 ( 戶數 ) 는 1481 호, 인구는 2726 명이었다.* 한편, 군제는세조때큰변화를겪게된다 년세조는북방의익군 ( 翼軍 ), 남방의영진군으로이원화되어있는군사제도를북방과같은군익도체제 ( 軍翼道體制 ) 로개편하였다.* 내륙에는거진을설치하고, 거진내근방의여러고을을중익 ( 中翼 ) 좌익 ( 左翼 ) 우익 ( 右翼 ) 에분속하였다. 양주도호부는양주진을중심으로 4 개좌익진과 4 개우익진의상호호위를받으며중익이연결된상태에서전쟁발발시전투에임하게되어있었다. 당시경기도는광주도 ( 廣州道 ) 양주도 ( 楊州道 ) 부평도 ( 富平道 ) 로구분되어각기소속군현을거느리고있었다.* < 경기도의군익도체제 > 구분분속소속 광주도 ( 廣州道 ) 중익좌익우익중익 광주 이천 양근 양지좌익여흥 천녕 지평 음죽안성 진위 양성 용인 죽산양주 원평 포천 적성 가평

221 양주도 ( 楊州道 ) 좌익삭녕 마전 영평 연천 부평도 ( 富平道 ) 우익중익좌익우익 풍덕 장단 임진 임강부평 인천 양천 금천 고양좌익수원 남양 안산 과천김포 교하 통진 독진 ( 獨鎭 ) 교동 강화 개성부 그러나 1457 년 ( 세조 3) 군익도체제는진관체제 ( 鎭管體制 ) 로바뀌게된다. 즉제도 ( 諸道 ) 의중익 좌익 우익을혁파하고거진을설치하였다. 이에따라경기도는수원진 광주진 양주진 강화진 개성진을거진으로하고, 양주진에는연천 마전 적성 원평 교하 고양 수평 포천 가평이속하게되었다.* 진관체제에서병사 ( 兵使 ) 가있는곳은주진 ( 主鎭 ) 이라하여그아래제진을포진하였다. 거진에는지방관이첨절제사 ( 僉節制使 ) 를겸하고, 이하여러진에는지방관이동첨절제사를겸하였다. 이와같이진관체제로바뀌게된데에는군익도체제의중첩성을배제하고거진을중심으로주변의여러진을편제시켜단일화하려는목적이있었다. 진관체제하에서양주는후보 ( 後輔 ) 였으며수원은전보 ( 前輔 ), 광주는좌보 ( 左輔 ), 원평은우보 ( 右輔 ) 였는데도성수비의중요한지역이었다. 거진은제진의독자성 자위성을부여하면서동시에일원적방위체제를위한조치로서중요한지역을중익으로삼고, 그주변의단위지역을위치에따라서좌 우익으로설정하였다. 이러한군익도체제하에서명령권은중익병마절도사에게있었고, 제진과상호충돌을피하기위해거진을독자적으로편제함으로써다른제진과상하관계를갖게하는군사명령체제를갖추었다. 따라서 1466 년병마책임자는병마절도사 ( 종 2 품 ) 로주진에소재하며도내육군에대한지휘권을행사했다. 목사가겸직하는경우가많은첨절제사는거진을단위로하는진영의군사권을장악하였다. 한편제진은군수나동첨절제사 ( 同僉節制使 ) 가통괄하였다. 따라서관찰사는도의행정책임자인동시에군사책임자였기때문에주진은관찰사의소재지로하였다. 양주는거진으로관찰사지휘하에부윤이행정과군사권을장악하고있었다. 이때양주진영은파주 고양진을지휘하고, 동시에영평 적성 포천 교하 가평등의진을통괄하여경기도에서광주진영 수원진영 장단진영등과동격의위치에있었다. 물론양주는관찰사가있는수원진영의통제를받았지만수도한성의후보로서수원을전보로하고, 원평을우보로, 그리고광주를좌보로한전후좌우의한성보위핵심지로서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었다. 숙종실록 에수원은기보 ( 畿輔 ) 의중요한진으로항상병마 8000 을두고위급한상황에대비하였다고한다. 따라서 4 보중하나인양주도그에준하는병마가주둔해있었다고여겨진다. 이로써양주가한성보위를위한중요지역으로인식되었음을알수있다. 한편수군은육군의진관편성에따라진영조직을갖추었다. 각도의수군지휘관은수군절도사였다. 그러나지역에따라서는관찰사나병사가겸임하는경우도있었는데, 경기도의경우는전임수사 ( 專任水使 ) 와관찰사가겸임하는 1 인의수사 ( 水使 ) 가있었다. 경기진영편성은다음과같다.* 양주는시위군과수군의병종이방위하였는데, 양주진은거진으로제진을관장해야하는책무가있었다. < 경기진관편성 > 관찰사 ( 병사 수사겸 ) 감영 = 한성부서문밖 ( 첨절제사 ) ( 동첨절제사 ) ( 절제도위 ) ( 광주진관 ) 광주목사 ( 수원진관 ) 수원부사 ( 양주진관 ) 양주목사 ( 장단진관 ) 장단부사 여주목사 이천목사 양근군수 부평부사 남양부사 인천부사 안산군수 안성군수 파주목사 고양군수 강화부사 풍덕군수 삭녕군수 마전군수 광주판관 여주판관 지평현감 음죽현감 양지현감 죽산현감 과천현감수원판관 진위현령 양천현령 용인현령 금천현감 양성현감 통진현감영평현령 포천현감 적성현감 교하현감 가평현감연천현감 교동현감 수사 수영 = 남양화양만 ( 첨절제사 ) ( 만호 ) ( 월곶진관 ) 월곶 ( 강화 ) 첨사 영종포 ( 인천 ) 만호 초지량 ( 강화 ) 만호 제물량 ( 강화 ) 만호 정포 ( 교동 ) 만호 (= 교동현감겸 ) 비고 : 경기는병사 1 인 ( 관찰사 ), 수사 2 인 ( 관찰사 경기수사 ) 이다. 조선시대정군은자신이군사활동에임하고있는동안에소요되는경비를 2 3 명의보인으로부터수급받을수있는권한이부여되었다. 따라서보인은정군을위한보조적군역자라고할수도있었다. 정군은복무기간에동원되는부역에서고통을느낄경우보인에게보다많은경비를요구하여보인은그고통을견디지못하고도주하는경우가많았다. 보인이도망해버리면정군은자신이단신주역 ( 單身主役 ) 해야하기때문에재산을탕진하는경우도많았다. 따라서국가는도망한군사의궐입 ( 闕立 ) 을보고하면관서는그군사의궐입에따른속가 ( 贖價 ) 를그군사의일족 ( 一族 ) 과가까운이웃에게강제로징수하였다.

222 각진과포는도망하는군사가늘어남에따라영진방위에어려움을겪게되었고도망한군사는역의의무가없는노 ( 奴 ) 가되든지아니면승도 ( 僧徒 ) 혹은재상의반인 ( 伴人 ) 이되기도하고또는조예 (? 隸 ) 나장 ( 羅將 ) 등이되기도하였다 년호패법 ( 號牌法 ) 이실시되었을때승도는 14 만 3000 명이었으나성종때에는 50 만 60 만명에이르렀다. 이와같이승도의수가날로증가한원인은대부분의양인들이피역의수단으로승도가되고자하였기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많은군사들이묘적사 ( 妙寂寺 ) 불곡사 ( 佛谷寺 ) 등의사원에투탁하여농노로전락하고있는모습이나타난다.* 조선후기석실서원 ( 石室書院 ) 에사액전 ( 賜額田 ) 이있었던것으로볼때군사들의서원전에대한농노투항도있었다고추측된다. 조선후기 5 군영체제의개편에서양주는수어청좌영에서중영으로소속이바뀌었다.* 그리고당시미음진은한강하구로들어오는선박이모두통과하던교통의요지로군사적으로도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었다. 이에 1728 년 ( 영조 4) 비상시를대비하여서울로올라오는입구인미음진에상 하장교 2 인을선발하여정포 1 초를삼고, 이곳에주둔하여선박과행인을조사하도록하였다.* 그며칠후에변란 ( 變亂 ) 이발생하여반란군이서울로진격해오자한양방어체제를구축하는한편, 남한순무사김동필은수원에주둔하고있던동로진어사 ( 東路鎭禦使 ) 인양주목사유척기를한양으로올라오는길목인미음강으로옮겨방어하게하고춘천방어사정도원, 여주목사이행검도미음진으로옮겨방어하도록장계하였다.* 이것으로볼때당시미음진은군사 교통의요지였음을알수있다. 이후양주는군사적으로수도한양을방어하는중요성이점차커지면서비변사의요청에따라방어영으로승격되었다.*

223 제1권 역사 제2편 역사 제4장 조선 전기 정치 사회의 변화 제1절 지방제도의 정비* 3. 교통과 통신 1) 역참(驛站) 고려시대 남양주지역은 수도인 개경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으며, 한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과 강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국방상으로 천혜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세 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려고 노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로 볼 때 이 지 역에서 군사와 관방체제상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봉화 역원의 설치와 발달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역제(驛制)는 삼국사기 에 따르면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사방 우역(郵驛)을 수 리(修理)하도록 하여 관도(官道)를 정비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에 의하 면 고려역은 22도 525역으로 병부에서 총괄하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삭주 방면인 흥화도, 운산 방면인 운중도, 영흥 방면인 삭방도와 같이 개경 을 중심으로 북쪽 지방이 중심로였다. 당시 남양주지역은 남경 소속의 평구도에 소속 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평구역은 남경에서 양근(陽根) 천녕(川寧) 충주(忠州) 단 산(丹山) 죽령(竹嶺) 흥주(興州) 봉화(奉化)까지 이어지는 사이에 양근에서 지 평(砥平)까지, 청풍(淸風)에서 제천 원주 평창 영월까지의 지선로를 포함하는 30개의 역으로 이루어진 역도였다. 동여도 에 나타난 평구역로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역제를 이어받아 서울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역제를 발전시켰 다. 이 중 남양주와 관련이 있는 역도는 청교도(靑郊道)와 춘주도(春州道)였는데, 청 교도는 역수가 15개로 개성으로부터 장단 파주 교하 고양 양주 서울 사이를 잇는 지 역이고, 춘주도는 역 수가 24개로 춘천을 중심으로 가평 포천 양주 서울을 잇는 지역 과 춘천에서 남하하여 홍천 횡천을 잇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의 역로(驛路)는 40 44개의 역도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전국의 역수는 개에 달하였다. 역의 기능은 관료국가에 있어서 지방의 통치를 원활하게 수 행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강화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속성과 편의성을 갖추어 원활한 공무집행을 돕는 장점과 우편 통신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조선은 고려 때 사용하던 역제를 근간으로 태조부터 중종시기 역제의 정비와 개편을 단행하는 동시에 역로 보수작업을 실시하였다. 본래 역을 관리하는 관원으로는 역 승(驛丞)과 찰방(察訪)을 두었으나 세조대에 역승을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 해서 부패가 심하고, 관품이 높지 않아 사신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는 건의에 따라 종6품의 찰방만을 두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1462년(세조 8) 1월에는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과다하여 역승을 다시 가설하 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기도에 찰방 3명과 역승 5명을 배치한 것으로 나타 나 있는 데 비해 경국대전 에는 찰방 역승이 각 3명으로 기록된 사실은 바로 이러 한 변화를 반영한다. 역승의 폐지는 이보다 훨씬 후인 1535년(중종 30)에 이루어지게 된다. 고려 조선시대 평구도* 역도는 중요성에 따라 대 중 소로 구분된다. 조선 전기에는 한양에서 개성부 죽산 직산 포천까지를 대로로, 한양에서 양근, 죽산에서 상주 성주, 직산에서 전주, 포천에서 회양, 개성에서 중 화까지를 중로로, 그리고 나머지는 소로로 규정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대로는 경기의 12역(驛), 중로는 경기 9역, 충청 24역, 전라 4역, 경상 5역, 강원 6역, 황해 11역, 평안 13역, 함경 17역 등이었고, 나머지는 소로였다. 경기도의 역도에는 영화도(迎華道 良才道 속역 12역), 영서 도(延曙道 : 속역 6역), 경안도(慶安道 : 속역 7역), 중림도(重林道 : 속역 6역), 도원도(桃源道 : 속역 5역)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양주와 관련 있는 역으로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청파 노원 영서 평구 구곡 쌍수 등 6개 역이 보이는데, 이 중에서 평구역은 구 곡(仇谷) 쌍수(雙樹) 봉안(奉安) 오빈(娛賓) 전곡(田谷) 백동(白冬) 감천(甘泉) 연동(連洞) 등 8개 역을 관할한다고 하였다. 경국대전 에서 평구도는 녹양(綠楊) 안기(安奇) 양문(梁文)의 3개 역을 더하여 12개 역의 명칭이 보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는 영서 평구 녹양 쌍수 등이 나타난다. <평구도의 변천> 전거 지명 고려사 역명 고려사 읍명 지리지 읍명 고려사 역도명 지리지 역도명 경국대전 역도명 평구 남경 양주 평구도 평구도 평구도 봉안 광주 광주 남양주시 조안면 봉안리 오빈 양근 양근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전곡 지평 지평 양평군 지제면 송형리 file:///c/남양주사료집/history/his_157.html[ 오후 2:27:10] 현재 지명 남양주시 삼패동

224 백동지평지평 양평군단월면덕수리 < 조선시대평구도이속역 > 전거 고려사역명 고려사읍명 지리지읍명 고려사역도명 지리지역도명 경국대전역도명 현재지명 구곡남경양주춘주도평구도평구도남양주시화도읍구암리 쌍수풍양양주 남양주시진접읍내각리 감천횡천가평 가평군외서면하천리 지명 연동조종가평 가평군상면연하리 녹양 견주 청교도 양주군주내면유양리 안기 포천 경기강원도정역찰방 포천군포천읍신읍리 양문 영평 포천군영중면양문리 이중에서남양주와관련이있는것은평구역 쌍수역이다. 평구역 * 은주동쪽 70 리지점에위치하며, 평구도는종 6 품찰방 1 인이있었다고하며, 녹양 안기 양문 봉안 오빈 쌍수 전곡 백동 구곡 감천 연동등 11 역을관할하였다. 쌍수역은풍양현남쪽 2 리에있으며, 녹양역은주남쪽 30 리에있다고한다. 여지도서 에서는녹양 구곡 쌍수 평구 연서등 5 개역이보인다. 구곡역은상도면에있으며동쪽으로거리가 100 리로춘천도로 ( 春川道路 ) 평구에맞닿는다. 말은 5 필, 이노 ( 吏奴 ) 는 17 명, 비 ( 婢 ) 가 1 명이었다. 쌍수역은별비곡면에있었으며동쪽으로거리가 40 리로관북간로의평구역에속하였다. 말은 8 필, 이노가합하여 48 명, 비가 3 명이었다. 평구도는금촌면에있으며동쪽으로의거리가 70 리로관동로의시발점이었다. 이에평구역에는관우 ( 館宇 : 객사 ) 가있었으며말은 9 필, 이속이 24 명, 노가 44 명, 비가 9 명이있었다. 봉안역은광주의치소동북 30 리지점에위치하여소속되어있었고, 말이 13 필, 노비가 9 명이었다. 당시남양주지역은관동지방 ( 춘천 원주 ) 과영동지방으로가는길목에위치하고있었기때문에지방을오가던관리의공무수행을위한교통수단이던평구역이발달했던것으로추측된다. 한편각역의중간지점에는숙식을제공하는원 ( 院 ) 이있었다. 양주와관련있는원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광제원 ( 廣濟院 ) 광인원 ( 廣仁院 ) 상지원 ( 相知院 ) 도공원 ( 陶孔院 ) 덕해원 ( 德海院 ) 도제원 ( 陶濟院 ) 등이보이고있다. 이중에서도제원은풍양현남쪽 15 리에있으며, 일명토원 ( 兎院 : 오늘날퇴계원 ) 이라고도불렀다고한다. 경기읍지 에는평구원 ( 平丘院 ) 이추가되어있는데, 주동쪽 70 리지점에있다고한다. 이와함께군사시설인진 ( 津 ) 이설치되었다. 여지도서 에따르면남양주지역에는미호진 ( 渼湖津 ) 이있는데, 독음면에소재하며남쪽으로 60 리지점에있고, 사선 ( 私船 ) 1 척이있다고기록되어있다. 대동지지 에는미음진이라고하였으며동남쪽으로 70 리지점에있는데광주 ( 廣州 ) 로통한다고하였다.

22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지방제도의정비 * 3. 교통과통신 2) 봉수 ( 烽燧 ) 대이산봉수평면도 대이산봉수 봉수는글자그대로횃불과연기를의미하는데, 변경의긴급한소식을중앙이나변경기지에전하 던군사통신방법으로동서양을막론하고사용되 었다. 우리나라에서봉수제의시행은삼국시대이전부터이루어졌을것으로보인다. 본격적인국가제도로자리잡은것은고려시대부터이며조 선시대에접어들어더욱발전하였다. 봉수제는우역제 ( 郵驛制 ) 와더불어신식우편 ( 新式郵便 ) 과전기통신이창시되기이전의전근대국가에서가장중요시하고보편적으로사용한통신방법으로서주로국가의정치 군사적인전보기능을목적으로설치 운영되었다. 봉수는대개수십리의일정한거리마다조망의요지가되는산정상에연대 ( 煙臺 ), 즉봉수대를설치하고유사시밤에는횃불로, 낮에는연기로, 우중이나안개 구름이덮여불이나연기로연락하기어려울때는봉수군이직접달려가서위급한사실을보고하였다. 그리고평시에는횃불한번, 적이출현하면두번, 적이가까이접근하면세번, 적이국경을침입하면네번, 적과접전을벌이면다섯번올리는것으로구분하였다. 고려시대봉수제는 1149 년 ( 의종 3) 에처음으로실시되어각봉수대에방정 ( 防丁 ) 2 명, 백정 ( 白丁 ) 20 명을배정하고, 평전 ( 平田 ) 1 결을지급하였다.* 조선시대전국의봉수는동서 5 개노선을통하여중앙의목멱산으로연결되었다. 남양주와관련된대이산봉수는진접읍연평리와양지리경계상의해발 173.5m 인산능선에위치하였는데, 제 1 선의아차산봉수로부터연결되어포천의잉읍점 ( 仍邑岾 ) 까지연결되어있었다. 특히이봉수는조선초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조선후기까지의각종읍지에빠짐없이기록되어있으며, 명칭의변경및대응봉수노선의변화가많았던것으로보인다. 먼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경기양주도호부에소재하는 2 개소의봉수중 1 개소로 烽火二處大伊山在府東南北准抱川仍邑岾南准加仇山 이라고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에서는 大伊山烽燧在州東六十里北應抱川縣仍邑岾南應峨嵯山 이라하여주의동쪽 60 리라는구체적위치가명시되어있다. 한편남쪽대응봉수명이가구산 ( 加仇山 ) 에서아차산 ( 峨嵯山 ) 으로바뀐사실을알수있다. 동국여지지 (1656) 의기록도위와같으나다만남쪽으로응하던대응봉수인아차산의한자음이 峨 컚 로변하고있다. 여지도서 (1760) 에서는 在汗伊山烽燧在乾川面自州東距五十里北應抱川廣山烽二十里相準南應峨嵯山烽三十里傳準有監官一人軍二十五名保人五十名軍摠等物 이라하였다. 여기에서봉수명이대이산봉수에서한이산봉수 ( 汗伊山烽燧 ) 로바뀌었고, 위치도주동쪽 60 리에서주의동쪽 50 리인양주목건천면소재로변화했음이드러난다. 대응봉수의변화및거리표시는북으로포천현잉읍점에서포천광산봉 ( 廣山烽 ) 20 리로, 남으로는아차산에서아차산 30 리로바뀌었다. 그리고군복무인원과보인의수, 장비등이자세히기록되어있다. 그후간행된 경기지 에서는 大伊山烽燧俗稱汗伊山在州東乾川面五十里北應抱川廣山烽西應峨嵯烽有監官一人軍二十五名保五十名 이라하여대이산봉수를달리 汗伊山 이라고도칭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 여도비지 ( ) 에서는한이산봉수라는이름으로동쪽 60 리지점에위치한다고하였으나, 대동지지 (1862) 에서는동남쪽 55 리지점에위치한다고하여 5 리의차이가있다. 경기읍지 (1871) 에서는앞서발간된 경기지 의내용을그대로옮기고있다. 이상에서대이산봉수는양주건천면 ( 현재진접읍연평리 ) 소재로고려초기에설치되어조선후기까지존재하였으며, 초기에는대이산으로불리다가한이산으로변경되었다는것을알수있다. 또한제 1 거내지봉수직봉으로남쪽의아차산과북쪽의잉읍점을잇는중요한기능을하였음이드러난다.

22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지방제도의정비 * 3. 교통과통신 3) 진도 ( 津渡 ) 진도는고려 조선시대에주요한강변의요충지에설치했던나루터로원래왕래자를검색하기위하여설치하였지만실제로는명령의전달과도강을위한교통및통신기관의기능을수행하였다. 특히한강은서울의진입로로군사상요충지로분류되어많은진들이설치되었다. 남양주와관련이있는진으로는용진 ( 龍津 ) 도미진 ( 逃迷津 ) 미음진 ( 渼陰津 ) 등이있다. 그중용진은남 북한강이만나는지점에있었던관계로조선시대에는군사 전략적측면에서국가방어진으로알려졌다. 조선초기용진은군사상매우중요한지역이었지만좌도수참별감으로하여금광진, 용진을겸하여관할하게할정도로독자적인관리체계는갖춰지지않았다.* 용진나루터 연산군대용진은북한강이흐르는나루로양근진과연결되었으며, 금표 ( 禁標 ) 를사방 100 리로하였을때, 경기관찰사송일은동쪽은용진, 서쪽은임진, 북쪽은회암 ( 檜巖 ), 남쪽은용인현 ( 龍仁縣 ) 에이른다고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경기조의남 북한강이합쳐광진나루로이르는설명을보면다음과같다. 대천 ( 大川 ) 으로말하면, 한강은그근원이강원도오대산으로부터나와영월군 ( 寧越郡 ) 서쪽에이르러여러내를합하여가근동진 ( 加斤同津 ) 이되고, 충청도충주 ( 忠州 ) 의연천 ( 淵遷 ) 을지나서한결같이서쪽으로흘러여흥을지나여강 ( 驪江 ) 이되고, 천녕 ( 川寧 ) 에서이포 ( 梨浦 ) 가되며, 양근 ( 楊根 ) 에서대탄 ( 大灘 ) 이되고, 또사포 ( 蛇浦 ) 와용진 ( 龍津 ) 이되었으며, 한줄기는인제현 ( 麟蹄縣 ) 이이포소 ( 伊布所 ) 로부터나와춘천 ( 春川 ) 에이르러소양강 ( 昭陽江 ) 이되고, 남쪽으로흘러가평현 ( 加平縣 ) 동쪽에서안판탄 ( 按板灘 ) 이되고, 양근 ( 楊根 ) 북쪽에서입석진 ( 立石津 ) 이되며, 또양근남쪽에서용진도 ( 龍津渡 ) 가되고, 사포 ( 蛇浦 ) 로들어가서두물이합하여흘러광주 ( 廣州 ) 경계에이르러서도미진 ( 渡迷津 ) 이되고, 다음에광나루가되었으며, 즉, 당시용진은양근소속으로되어있으며, 현재남양주와관련이있는진으로서는입석진 ( 오늘날수동면근처 ) 과도미진 ( 와부읍팔당근처 ), 사포 ( 조안면조안리근처로추정 ) 등이있었음을알수있다. 용진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양근조에의하면양근치소서쪽으로 44 리지점에있으며, 도 ( 渡 ) 위에개울이있고가물면건너갈수있다고하였다.* 경국대전 에의하면도에는위록 ( 衛祿 ) 8 결씩을분급하였고, 진부 ( 津夫 ) 에게는대도 ( 大渡 ) 의경우 10 결 50 부, 중도 ( 中渡 ) 7 결, 소도 ( 小渡 ) 3 결 50 부씩을주었다고한다. 그리고수부 ( 水夫 ) 에게는매 1 명씩 1 결 35 부가주어졌다고기록되어있다. 따라서미음진은중도라고할때 7 결의도전이지급되었을것으로보인다.* 세종실록 에의하면도미진은진두 ( 津頭 ) 에수참 ( 水站 ) 을두었으며참선 ( 站船 ) 이 15 척이었다. 나루에는나룻배가있었고, 광진도에도도승이있어드나드는사람을조사하였다. 좌도수참전운판관 ( 左道水站轉運判官 )* 이겸하여조운 ( 漕運 ) 을관장하였다. 용진은임진왜란과관련이깊다 년 ( 선조 25) 4 월 14 일일본은총병력 28 만 1800 여명을 1 진에서 16 진까지편성하여부산성을공격함락하고, 15 일에는동래성 ( 東萊城 ) 을약 2 만의병력으로포위 공격하였다. 동래를함락한왜군소서행장은 2 만여병력으로신립의군대를충주에서무너뜨리고두갈래로공격하였는데, 하나는여주 양근 용진나루를지나한성의동으로진격하고, 하나는죽산과용인쪽으로나가한강에이르렀다. 이때용진나루에서는강을사이에두고치열한격전이벌어졌다. 소서군은우로나가여주에서강원도조방장 ( 助防將 ) 원호 ( 元豪 ) 의저항을받았고, 경기도양근에서경기방어사고언백 ( 高彦伯 ) 군대의공격을받았지만용진성수비를뚫고한성을공격하기에이르렀다. 왜군은 1592 년 5 월 2 일한성동대문으로입성하였다. 당시남양주백성들은군역에동원되어항전하며싸웠지만왜군이소지하고있던신무기조총에밀릴수밖에없었다.* 임진왜란이한창이던 1594 년조정은변응성으로하여금서울방어의중요한거점인용진에서승려들을훈련시키게하였다.* 만일에대비하여그가상 ( 喪 ) 을당했음에도불구하고다시불러들여둔전과조련을계속하게하였다.* 1596 년 5 월비변사에서, 용진성은승도 ( 僧徒 ) 만을부역하게하여제대로안되는일이많고, 진장 ( 陣將 ) 의명령도따르지않는다고하여용진 독성 ( 禿城 ) 파사성 ( 婆娑城 ) 등을정비하였다.* 양근은용진과파사사이에있었으며강탄 ( 江灘 ) 을수어하는중요한지역이었다. 따라서용진과양근 파사는강탄을잇는방어전선 ( 防禦戰線 ) 의한벨트였다. 선조는용진 파사 독성에대포와소통 ( 小筒 ) 그리고활과화살등을갖추고성을수비하는절차도훈련하도록하였다. 이때경기군사는육수군 기선군을합하여 1 만명에이르렀고 100 인중 명이활을쏠수있었다.* 그러나당시군인들은한사람이여러가지일을다하여고생을이겨낼수없다고하였으며또나이가 세가되어도군역을면제받지못하며, 면제받지못한채사망하면자손에게역이돌아가는폐해가있었다. 이로인해이후점차진 ( 陣 ) 에서이탈하는군인들이많았고, 또한그에대한관리와정비가허술해졌다. 비변사가 용진과파사산성은수장 ( 守將 ) 이자주바뀌어군기 ( 軍器 ) 만유치해두는빈성이되었으며, 국가의부국강병에도움이되지않으므로정비하고군사를충원해야한다. 고주장하게된데에는이러한배경이있다. 또한용진은파사산성과더불어서로의지하는형세에있어기보 ( 畿輔 ) 의보장 ( 保障 ) 이될만하므로용진수장은별장을정하여수직하고수축하였다. 당시용진성에는 100 여명이파수 ( 把守 ) 하여수비하고있었다. 용진의설치는이처럼 1 차적으로군사적목적에서출발하였음을알수있다. 한편평화시용진 도미진 미음진은농산물과세곡등을충청도 강원도로수송하고, 공무여행객과백성들이왕래하는교통수단의역할을하였다. 진에는종 9 품직도승 1 명이있었는데, 현남양주 3 도진 ( 渡津 ) 에교량이설치되었던곳은 2 곳이고, 용진만이교량이설치되지않았다.

22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풍양궁과강무장 * 제 2 절풍양궁과강무장 * 1. 풍양궁 ( 豊壤宮 ) 의조성과운영 1) 이궁 ( 離宮 ) 의조성목적 풍양궁은조선초기세종대에설치한이궁으로, 진접읍내각리에있었던것이다. 당시에는도성을중심으로동쪽에풍양궁, 서쪽에연희궁 ( 衍禧宮 ), 남쪽에낙천정 ( 樂天亭 : 일명臺山離宮 ) 의삼이궁이있었다. 삼이궁의조성계획은태종대부터있었으나실제준공은세종초기에이르러서야이루어졌다.* 이궁을설치한가장큰목적은피방 ( 避方 ) 의수단으로이용하는데에있었다. 도성주위에이궁을설치하기시작한것은왕자의난으로인해임금의피방장소가필요했기때문이다. 다시말하면왕실에무슨일이일어난다든가, 일어날가능성이있을때도성가까운곳에이궁을지어놓고피방의장소로삼았던것이다. 서울주변에이궁을조성하게된직접적인계기는궁궐에서부엉이가우는변괴때문이었다 년 ( 세종 1) 태종은궁궐에서부엉이가울자옛기록을찾아보고새가우는것은흉한징조라고하여피방할장소를물색하게하였다. 당시개경근처에기존에사용하던이궁이있기는하였으나개경까지는거리가멀어왕래하는데에폐단이있었으므로서울과가까운포천과풍양에본궁 ( 本宮 ) 노자 ( 奴子 ) 만으로 10 여칸규모의집을지었다. 그리고낙천정을거쳐포천으로내왕하면서흉한방위를피하고자하였다. 포천과풍양에이궁을조성할수있었던배경에는방위가맞기도했지만본궁에딸린전토와백성이많아서축조에어려움이적었기때문이다. 풍양은노자만있고전토가없었으나, 옛읍터에집을짓고또묵은토지를노자에게주어생계를꾸려나갈수있게하였다.* 그리하여 1419 년 11 월부터풍양현의옛터에이궁을짓기시작하였다. 해마다재액을피하는방위가달라지기때문에이궁은사방 ( 四方 ) 에있어야했다. 태종은남쪽에낙천정과동쪽에풍양궁을건설하는한편, 서쪽에도피방할수있는장소가필요하다고생각하여무악 ( 毋嶽 ) 의명당자리에 100 여칸이넘지않는이궁을짓게하였는데이것이연희궁이다.* 태종은풍양궁의침실이완성되자이를둘러보고나서감역관 ( 監役官 ) 인박자청 ( 朴子淸 ) 등과군사들을위로한후, 다음과같이말하였다. 왕실에서흉한일을당하거나그럴가능성이있을경우 항간에술사 ( 術士 ) 의말에의하면액운을당하면천피 ( 遷避 ) 함이마땅하다고하였는데두번이나송도 ( 松都 ) 에행차할때운송비용이실로적지아니하였으므로도성남쪽에낙천정 ( 樂天亭 ) 을건축하고, 동쪽에이풍양궁을건축하였으며, 서쪽에무악궁 ( 毋岳宮 ) 을건축하게한것이다. 이리하여수시로왕래함으로써생기는폐단을덜게하는것이다.* 이궁으로잠시옮겨가는것은흔히있는일이었다. 그러나조선초기한양으로천도한후피방의장소로개경주변의이궁을이용하기에는거리도멀고많은비용이소요되었다. 이러한이유에서조선은건국초기부터한양주변에이궁을건축했던것이다. 한양주변에이궁을설치한또다른이유는한양을명실상부한서울로자리잡게하기위한것이었다. 한양천도이후왕이자주개경으로왕래하면개경에대한미련이남게되고이것은곧신하들의개경환도주장을뒷받침해주는결과를가져올수도있었기때문이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이궁의본래목적은피방의수단이었으나조선초기한양주변에새롭게이궁을세웠던것은왕궁으로서의규모를갖추기위한것이기도했다. 개국초혼란한정국속에서피방을목적으로이용되었던이궁은국가체제가정비 안정되고후기로넘어오면서왕의시어소 ( 時御所 ) 또는휴식처로사용되었다.

22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풍양궁과강무장 * 1. 풍양궁 ( 豊壤宮 ) 의조성과운영 2) 풍양궁의조성 (1) 풍양궁의위치 풍양궁은보통동이궁 ( 東離宮 ) 이라한다. 그위치를살펴보면 경성부사 ( 京城府史 ) 에는양주군접동면에있다고명기되어있고, 서울명소고적 에도양주군진접면이라적혀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풍양이양주목의속현으로나온다. 풍양은주 ( 州 ) 의동쪽 50 리에있으며, 본래고구려시대골의노현이며, 신라가황양으로고쳐한양군의영현이되었다. 고려때에풍덕으로고치고, 현종 9 년양주에속하고후에포주에속하다가조선시대세종원년본래로귀속되었다. 궁전조 ( 宮殿條 ) 에는풍양궁의위치를풍양현동쪽이라하였다. 궁궐지 ( 宮闕志 ) 의풍양궁조에는풍양궁이양주동쪽 50 리지점, 폐지된풍양현의동쪽에있으며 1401 년 ( 태종 1) 에건축하였고태상왕 ( 태조 ) 이왕위에있을때자주왕래하였다는기사가있다. 이후영조대에와서궁터 ( 宮墟 ) 에비를세웠다고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양주도호부조에는 풍양이궁은부 ( 양주부 ) 의동남쪽에있는데곧풍양현의옛터이며, 또한태종이거둥하여계시던곳이다. 라고하였다. 이기사를보면서로내용이맞지않는것을알수있다. 즉풍양궁의위치에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나 궁궐지 에서는풍양현의동쪽에있다고하였고, 세종실록 지리지양주도호부조에는풍양현의옛터라고하였다.* 그러나풍양궁설치에대한내용이자세하게실린 세종실록 을보면 풍양은전토는없으나옛읍터에집을짓고, 또묵은밭을노자에게주어생계를돕도록하였다. * 는기록이있어풍양궁의위치는풍양현의옛읍터일가능성이높다고하겠다. (2) 풍양궁의축조과정 조선은건국초의지방제도정비과정에서경기를좌 우도로나누었는데, 이때풍양은장단 ( 長湍 ) 사천 ( 沙川 ) 등과함께좌도에속하였고이후에는양주의속현으로존재하였다. 풍양은한양가까이있었던관계로왕실의사냥터로사용되었다. 임금이상왕 ( 上王 ) 을모시고풍양에서사냥하는것을구경하였다. 다음날산곡동 ( 山谷洞 ) 에서사냥을하였는데, 임금이노루한마리를활로쏘아잡았다.* 위의기사에서알수있는것처럼풍양은건국초기부터왕실에서사냥을즐기던곳이었다. 이후살곶이목장 녹양목장이왕실에서사용하는말을공급하면서한양과비교적가까운풍양으로사냥을많이오게된것이다. 이에국가에서는양근 ( 楊根 ) 광주 ( 廣州 ) 풍양등을강무장 ( 講武場 ) 으로정하고개인이사냥하는것을금지하였다.* 풍양궁의조성에대하여처음언급한것은 1419 년 ( 세종 1) 11 월이었다. 태종은부엉이가우는것을흉한징조로보고도성 ( 都城 ) 을떠나이궁으로피하려고하였다. 그러나마땅한이궁이없어서서울가까운곳에이궁을짓게한것이풍양궁인것이다. 태종은피방의장소를물색하게하는한편, 한양근처인포천과풍양등지에본궁노자만으로집 10 여칸을짓게하였다. 그중에서풍양은전토는없으나노자가있기때문에풍양현의옛읍터에집을짓게하고노비들에게묵은밭을주게하였다.* 이렇게이궁을건설하기로결정한후태종은이궁터를선정하기위해친히풍양과포천등지를살펴보았고,* 그결과풍양의옛읍터에집을짓게하였던것이다. 같은해 12 월태종은병조로하여금방패보충군 ( 防牌補充軍 ) 과당령선군 ( 當領船軍 ) 을천보산 ( 天寶山 ) 으로보내어재목을벌채하여포천 풍양으로수송하게하였다.* 목재를수송하면서이궁의역사 ( 役事 ) 가본격적으로진행되었다. 그러나당시에는풍양이포천에속했기때문에집을짓거나인부를동원하는데에행정적인문제가나타나자풍양을양주도호부에합치시켰다. 또한당시이궁영조를위한본현및경중각사의연례수납미곡 ( 年例輸納米穀 ) 이모두현내 ( 縣內 ) 에있는연복사 ( 演福寺 ) 에보관되어있었다.* 이처럼이궁수축미가양주연복사에보관되어있었던관계로포천소속인풍양을양주로합치하라고하였다. 이후태종은이궁의역사를보기위하여서울과 40 여리정도떨어진풍양으로자주행차하였다.* 1420 년 1 월, 역사를시작한지 10 일만에침전 (? 殿 ) 이완성되자태종과세종은광나루 ( 廣津 ) 를통해풍양에행차하여이궁을둘러보았다. 태종은이궁을짓는데참여한동역관 ( 董役官 ) 박자청 ( 朴子淸 ) 등에게술과과일을내려군인들을위로하고, 여러신하들과주연을베풀었다.* 또한이궁이완성되자태종과세종은이궁을구경하였으며, 같은해 2 월중순에대비가먼저낙천정에서풍양궁으로옮겨갔다. 이에변계량등이문안하자태종은많은사람들이문안하는것을제한하기위해부원군 ( 府院君 ) 이하는허락을얻은후에풍양궁에가도록하였다.* 그다음날태종은풍양궁남쪽에장전 ( 帳殿 ) 을설치하고거처하다가 3 일후에낙천정에서풍양궁으로옮겼다.* 이후태종과대비가풍양궁에거처하는관계로세종이풍양궁을자주왕래하였다. 태종은낙천정과풍양궁을수시로왕래하면서거처하였다.* (3) 세종대풍양궁의이용 세종대에풍양궁은주로피방처나상왕인태종의거처로이용되었다. 풍양궁을수축하고가장먼저대비가거처를옮겼는데병을치유하고자공기가맑고산수가좋은곳에서지내려고했던것이다 년 5 월에대비가한점 ( 寒?) 으로학질병 ( 微恙 ) 을앓게되자, 6 월부터대비의회복을위한여러가지방법들이행해졌다. 세종은양녕 ( 讓寧 ) 효령 ( 孝寧 ) 과더불어대비를모시고도가류 ( 道家流 ) 의승려해순 ( 海恂 ) 으로하여금풍양궁근처에있는오부 ( 吳溥 ) 의집으로가서둔갑술을행하기도하였다.* 이와같은노력에도불구하고대비가승하하자이후풍양궁에는태종이거처하였다. 또한사냥터로서도자주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한양과양주 풍양등지는군사요충지로중요한위치를차지하였으나고려중기이후점차군사적요충지에서왕실의휴양지로성격이변화하면서풍양은왕실의사냥터나휴양지로이용되었다. 이와같은면은조선이건국된후에도비슷했던것같다. 서울과가까웠던관계로주로사냥에이용되었는데, 세종초의기사를보면태종이풍양궁에거처하면서매사냥을하거나고기잡이를구경하는기사가자주보이고있다. 태종이풍양궁의서산 ( 西山 ) 북산 ( 北山 ) 동산 ( 東山 ) 등지에서사냥을즐기고, 풍양북촌 ( 北村 ) 괘라리 ( 掛羅里 : 현재의오남면팔현리 ) 의산골에서놀이하고작은잔치를베풀었다는것에서도이러한사실이확인된다. 풍양궁은여름휴식처의역할도하였다 년풍양궁에있던태종이단오절이임박하자석전희 ( 石戰戱 ) 를보기위해신하들의만류에도불구하고풍양궁을떠나도성으로가려고했지만도성에서여름을나기가어려울것이라하여다시풍양궁으로돌아왔다는기록이보인다.* 이로써풍양궁은태종의여름휴식처로사용되었음을알수있다.

229 (4) 부속물의수축과조경사업 풍양궁이완성된후 1420 년 6 월하순에휴식공간의하나로수각 ( 水閣 ) 을만들었다.* 수각은연못속에만든일종의정자 ( 亭子 ) 이다. 병조로하여금방패군 ( 防牌軍 ) 과보충군 ( 補充軍 ) 을동원하여이궁서쪽에연못을파고축대를쌓고못가운데정자를짓게하였다. 이정자는매우청아하고상쾌한곳이었다고한다.* 수각이완성되자태종은여러신하들을불러술을마시거나휴식을취하는장소로이용하였다. 수각의규모는자세히알수없지만크지는않았던듯하다 년 5 월에태종이영평 ( 永平 ) 으로가려다가더운날씨때문에가지못하고수정 ( 水亭 : 수각 ) 에서여러신하들과술을마셨는데 3 품이상의관원이모두입시하였다.* 는기사를보면규모가컸던것같기도하다. 하지만그해 8 월풍양궁수각에서술자리를마련하고음악을연주케했는데, 이때수각위에는 14 명정도만앉히고나머지는수각아래에앉혔다.* 는기록에의하면대략 14~16 명정도가앉을수있는규모였을것으로추측된다. 이수각은 1422 년 4 월에무너졌는데그때의상황을묘사한기록을보면 큰바람에기둥이뽑혀정자에서십여보쯤떨어진북쪽언덕에날아갔는데마치사람이뜯어서쌓아놓은것같았다. * 고한다. 이후정자는다시축조되었으나정확한시기는알수없다 년 ( 중종 20) 광릉참배후에수행한종재 ( 宗宰 ) 종 2 품 ( 從二品 ) 이상, 병조 도총부 별운검 ( 別雲劒 ) 대간 홍문관 승정원 주서 ( 注書 ) 한림을대주정 ( 大晝停 ) 때인견 ( 引見 ) 하고공궤 ( 供饋 ) 하려하는데, 다만누상 ( 樓上 : 풍양궁루 ) 이좁으므로종 1 품이상은누상에앉고정 2 품이하는누하 ( 樓下 ) 에앉도록하였다.* 이로보아세종이후어느시점인지는확실하지않으나수각이다시수축된것만은확실하며규모는종 1 품이상만앉을수있을정도로크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그런데이곳에서여름을보내기위해서는얼음이필요하였다. 당시얼음은일부사람들만이먹을수있는것으로태종이이궁에서여름을나기위해서는필수적인것이었다. 이에정자를건축하는한편빙고 ( 氷庫 ) 를지었다 년 12 월에태종은얼음창고가풍양궁과거리가멀어운반에어려움이있다고하여이궁동쪽에별도로빙고를만들게하였다.* 그러나그규모등구체적인사항은알수없다. 또한주변조경사업으로병조에명하여하인들과인부를징발하여풍양궁과함께서이궁 릉 광효전의뒤쪽언덕에소나무를심게하였다.* 소나무를심게한것은숲을푸르게하는의미와함께주변을보기좋게하기위한조경의효과가있기때문이었다. 소나무가마르거나병충해를입으면인력을동원하여송충이등해충을잡게하였다. (5) 풍양궁의관리 ( 官吏 ) 풍양궁을관리하는관원은수적인면에서다른이궁과비슷하였을것으로생각하기쉽다. 특히낙천정이나연희궁은풍양궁과같은용도였으므로그곳을수직하는관리들의수는비슷했을것으로생각되나, 실제수직관리수는확연한차이를보이고있다. 풍양궁의전수 ( 典守 ) 는내시 ( 內侍 ) 다방별감 ( 茶房別監 ) 각 2 인이돌아가면서입시하도록하였던반면낙천정은각 10 명으로하였다.*

23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풍양궁과강무장 * 1. 풍양궁 ( 豊壤宮 ) 의조성과운영 3) 풍양궁의관리 ( 管理 ) (1) 수축과관리 태종이죽고난후는풍양궁에왕이거처하는경우가많지않았다. 세자는연희궁과같이도성에서상대적으로가까운곳에거처하였고, 이후창경궁등이수축되어피방의방편으로이용되었기때문이다. 이에상대적으로거리가먼풍양궁은관리가허술하게되었다 년에조정에서풍양궁은낙천정과함께태종이거처하였던장소로서소중한곳이므로수호와관리를위한대안이마련되어야한다는주장이제기되었다. 그러자이궁의처리문제를둘러싸고먼저내시별감을나누어보내이들에게별사 ( 別仕 ) 를주어야한다는의견과왕자 제군에게내려주거나철거하여국용으로사용하자는제안이있었다.* 이에풍양궁에는내시 다방별감각 2 인을, 낙천정에는각 10 인을두어 2 일을한번 ( 番 ) 으로수직 관리하게하였다. 즉평상시에거처하는장소가아니기때문에수직하는관리 ( 官吏 ) 만을두었던것이다. 풍양궁의관리는이후계속소홀히다루어졌는데, 1441 년 11 월에집현전부제학최만리 ( 崔萬里 ) 는흥천사사리부도 ( 舍利浮屠 ) 의경찬회개최에대한잘못됨을지적하면서태종이거처하던풍양궁과낙천정에잡초가무성하다고상소하였다.* 이에대하여왕은승정원에, 풍양궁과낙천정은비록선왕께서납시던곳이나항시납시는곳은아닌데, 하필창호를바르고자리를펴겠느냐, 요 ( 要 ) 는새고허물어지거나쓰러지지아니하게하면그만일것인데, 이상서 ( 上書 ) 를보면후세에나를성왕의옛궁을헛되게버렸다고하지않겠느냐. 라고하였다. 이에도승지조서강은이미삼이궁은선공판사 ( 繕工判事 ) 이하로나누어맡아서완전히갖추어졌는지여부를고찰하고이유를기록하여, 만일쓰러지는것을곧수리하지아니함이있으면유사로하여금추핵 ( 推劾 ) 하게하는법이만들어져있다고하였다.* 따라서이전과같이단지수직하는관리만을두어허물어지지않게하는상태가유지되었다. 풍양궁은태종이승하한후거처하는왕이많지않았고거리가멀었기때문에관리에소홀하게되었다. 그러던차에 1449 년집현전과군자판관 ( 軍資判官 ) 조휘 ( 曹彙 ) 등이영응대군의집이너무화려하고웅장하여법도에어긋난다며문제를삼자, 세종은영응대군의집은법제에어긋나는것이없을뿐아니라본래인군 ( 人君 ) 의노모를거처하게하려고지은것이라하였다. 그러나신하들이계속잘못되었음을건의하자풍양궁을수선하여영응대군의저택으로하사하였다.* 하지만이후계속해서영응대군의저택으로사용되었는지는알수없다. (2) 강무장으로의이용 풍양궁은왕궁과가깝기때문에강무장으로자주이용되었으며태종사후에도비슷한상황이었다 년정월세자가농사도실패한터에철원 ( 鐵原 ) 등지로강무하는것은폐단이많을것이라고주청하자세종은일찍이자신이강무했던풍양등지에서하루 100 여마리의짐승을잡은일이있다고하면서풍양에서강무를행하라고하였다.* 1448 년 12 월에는삼군진무소 ( 三軍鎭撫所 ) 가강무장을선정하면서풍양현과함께적성현 ( 積城縣 ) 양주 ( 楊州 ) 포천현 ( 抱川縣 ) 가평현 ( 加平縣 ) 원평부 ( 原平府 ) 고양현 ( 高陽縣 ) 광주 ( 廣州 ) 등지의산을강무장으로삼고벌목 ( 伐木 ) 을금하게하였다.* 이렇게한성과가까운곳을강무장으로삼으면서풍양궁은자연스럽게숙소로이용되었다. 강무는한번이동할때의번거로움과비용, 백성들의수고등을고려하여가뭄이나, 실농 ( 失農 ) 의경우에는먼곳의강무장을피하고가까운곳으로바꾸게되었다. 이때도성과가까운천마산과묘적산등지는강무장으로아주적절한장소였다. 세조는특히풍양궁을자주이용하였다 년 ( 세조 4) 9 월에세조가풍양등지에서사냥하고이궁에머물렀다는기록이보인다. 이에 1459 년정월에세조는병조판서 ( 兵曹判書 ) 한명회 ( 韓明澮 ), 선공감제조 ( 繕工監提調 ) 박강 ( 朴薑 ), 도승지 ( 都承旨 ) 조석문 ( 曹錫文 ) 에게명하여풍양에가서이궁의허물어진곳과제언 ( 堤堰 ) 을쌓을만한땅을살펴보게하고, 환관 ( 宦官 ) 홍득경 ( 洪得敬 ) 을보내어선온 ( 宣툥 ) 과내수 ( 內羞 ) 를가지고가서위로하게하였다.* 그리고며칠후선공감에명하여군인 500 명을거느리고풍양궁을수리하게하였다. 세조는풍양성산 ( 城山 ) 에서사냥을참관하고, 수종한종친 ( 宗親 ) 재추 ( 宰樞 ) 야인 ( 野人 ) 등과함께이궁에거둥하여술자리를베풀었다. 태종께서이궁 ( 宮 ) 에계실때세종 ( 世宗 ) 께서조계 ( 朝啓 ) 를받던곳인데, 유적 ( 遺跡 ) 이완연 ( 宛然 ) 하니, 감창 ( 感愴 ) 한마음을이길수가없다. 나도또한중수 ( 重修 ) 하여봄 가을강무 ( 講武 ) 때이곳에거처하겠다.* 위의기사를통하여세종대영응대군의거처로사용되고있었던것을다시세조가강무시숙소로사용하고자하였음을알수있다. 이에이궁을다시수축하게하였다. 왕은이궁축조에고생하는사람들을위로하기위하여주서 ( 注書 ) 하한근 ( 河漢近 ) 에게명하여선온을가지고풍양궁에가서선공감제조박강에게내려주게하였다. 또한계양군 ( 桂陽君 ) 이증 ( 李?) 도승지조석문 판내시부사 ( 判內侍府事 ) 전균 ( 田畇 ) 을풍양궁에보내어수리 ( 修理 ) 하는곳을살펴보게하였다.* 이궁축조를겨울철에시작한이유는농한기를이용하려했기때문이다. 한편풍양천에방천 ( 防川 ) 을만들게하였는데, 이궁앞에흐르는풍양천냇가에제방을만드는일은야인중추 ( 中樞 ) 이두리 ( 李豆里 ) 에게지시하였다. 그러나병조판서한명회와도승지조석문이방천의공사가지극히어려워농사철이전에끝내지못하니우선정지하였다가가을추수이후에계속하게하자고청했다.* 세조가풍양궁을강무시숙소로사용하기로한이후이곳에자주거둥하자신하들은풍양궁은태종이피방의뜻과함께정사를세종에게물려주고유람을하기위해서만들었지만지금은시대가달라졌으니이궁에오래머물지말기를청하였다.* 그러나세조는군사들로하여금 10 일의양식을가져오게하였으니갑자기환궁할수없다고하면서민간에피해를끼치는사람만단속하라고하였다. 세조는풍양냇가의산봉우리에올라화천군 ( 花川君 ) 권공 ( 權恭 ) 을좌상대장 ( 左廂大將 ) 으로삼고, 중추원사 ( 中樞院使 ) 박강을우상대장 ( 右廂大將 ) 으로삼아군사를나누어거느리고습진 ( 習陣 ) 하게하였다.* 즉, 이당시에도강무시연습장으로사용되었음을알수있다. 이와같이풍양궁은태종 세종조에는피방을위한장소나휴식공간으로이용되다가세조대에이르러주로강무의장소로이용되었다. 강무장으로서의역할은이후성종대에도비슷하였던것으로보인다 년 ( 성종 4) 10 월에성종이풍양에서강무한이후풍양궁에머물렀다는기록이보인다.* 즉, 풍양궁은세조이후강무의장소로널리이용되었고, 풍양은관렵지로이용되었다. 이와같이강무장으로사용된이유는한양과가깝다는것과한강을건너지않는지역이므로비바람이불어도피해가적다는점, 풍양은가까우면서도짐승이많이잡힌다는점등이었다.* (3) 연산군대금표비 ( 禁標碑 ) 의설치

231 연산군은재위기간동안마음대로제도를개편하고자신에게대항하는사람을함부로죽이는등폭정을일삼았다. 또한자신의사냥터를확보하기위해도성주변의산에강무장을만들고, 그안에있는사람들을강제로이주시켰다. 아울러금표비를세워일반민의출입을통제하였다. 이에연산군은여러곳의건물을다시수축하게하고병사를두어지키게하였다 년 ( 연산군 5) 9 월에연산군은풍양궁과벽제관 ( 碧蹄館 ) 을수리한후에병조로하여금사람을시켜수직하게하고거둥을기다리게하였다.* 상황이이러한지경에이르자신하들은풍양궁에서밤을새우며사냥하는것은온당치못하다고건의하기도하였다.* 그러나연산군은무령군 ( 武靈君 ) 유자광 ( 柳子光 ) 등에게명하여사장 ( 射場 ) 의편리여부를살펴보고도형 ( 圖形 ) 을만들어보고하게하였다. 경성 ( 京城 ) 에서주엽산천점 ( 注葉山泉岾 ) 까지의거리가 70 여리니, 성상의옥체가수고로우실까염려됩니다. 신들의생각으로는거가 ( 車駕 ) 가떠나는날풍양궁 ( 豊壤宮 ) 에서주무시고이튿날주엽산, 또이튿날천점, 또이튿날아차산 ( 峨嵯山 ) 에서사냥하시는것이편할것같습니다.* 연산군은사냥을할때면풍양궁등지에며칠이고머물만큼몰두하였다. 이에따라풍양지역에도금표비가설치되었다. 이지역의금표비설치과정을자세히살펴보면먼저서울주변지역중풍양궁을금표안에넣고, 이후광릉산천점 ( 光陵山泉岾 ) 과풍양산까지금표지역으로정하였다. 또한광릉봉선전과봉선사에출입하는사람의수를다른능의예대로줄이라고하였다.* 이와같이금표지역을현재남양주일대까지확대한것은백성들이풀을베거나나무를하여짐승이줄어드는것을막겠다는것과사냥시백성들의눈을피할수있다는데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 이처럼풍양이금표안에속하게되면서자연히풍양현은없어지게되었다. 따라서풍양의곡식 1018 석을양주로옮기게하였다.* (4) 중종대이후광릉참배 중종대에풍양궁은대주정 ( 大晝停 ), 즉왕의행차시머무르는장소로사용되었다. 중종이풍양궁을대주정으로삼은것은 1523 년 ( 중종 18) 흉년으로먼곳까지참배할수없게되자추석을기하여광릉에참배하고자하였기때문이다. 왕은봉선전에서다례 ( 茶禮 ) 를거행하고궁으로돌아올때는사냥을구경하고자하였다. 풍양궁은태종이기거하던곳이고, 세종도때때로거둥하던곳이라하여병조로하여금겸사복 ( 兼司僕 ) 을보내어길을살피게하였다.* 1525 년에도왕이광릉에참배하려고하자신하들은광릉참배의일은효성에관한일이라반대할수없으나 오례의주 ( 五禮儀註 ) 에 능소 ( 陵所 ) 에멀리떨어져있으면, 하루전에행궁 ( 行宮 ) 으로가서재숙 ( 齋宿 ) 한다 는규정이있으므로거처할장소를마련해야한다고하였다. 이에유숙할능침은공한지 ( 空閑地 ) 여서수치 ( 修治 ) 에폐단이있으며, 봉선전은재소 ( 齋所 ) 로서불가하지만, 풍양궁은능소와가까우므로합당하다고하였다. 이렇게장소가정해지자경기도사 ( 京畿都事 ) 로하여금풍양궁과교량을수리하도록하였다. 신하들은경기지방에흉년이심하여폐단이심할것이며, 특히풍양궁은비워둔지오래되어 7 8 일만에수리하도록하는것도무리가많을것이니가을에참배하도록청하였다. 하지만왕은큰염려가없을것이라고하면서그대로진행하게하였다.* 이에포영사 ( 布營使 ) 안윤덕 ( 安潤德 ) 등이숙어소의안팎성을결진할상황을도표로그려보고하고풍양궁에독충이나타날위험이있으니봉선전을숙소로정하자고하였지만봉선전은좁은골짜기에있어진 ( 陣 ) 을칠수없다고하여계획대로진행하게하였다 년 7 월중종은그해 10 월 11 일에녹양장에서대열하기로결정하고, 대열한후에병기와군복의점고를마치고풍양궁에서묵고계속강무하고자하였다.*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조선초기부터풍양일대의현재남양주지역은왕의강무장으로꾸준히사용되었다고할수있다. (5) 구궐유지비 ( 舊闕遺址碑 ) 의수축 조선후기풍양궁에관한기사는보이지않는다. 어떤연유로불타버린것으로추정된다.* 이와관련된기사로 1696 년 ( 숙종 22) 정월에지평이세재 ( 李世載 ) 가명혜공주 ( 明惠公主 ) 방 ( 房 ) 의궁인 ( 宮人 ) 이대내의분부를받아소를잡고제수를장만하여풍양궁터에서이틀동안이나신사 ( 神祀 ) 를베풀고파하였는데그비용이지극히사치하고풍성함을비난한기록이주목된다.* 이기록에의하면풍양궁은이미건물이불타고터만남은것으로보인다. 이당시에는국가에서도풍양궁에대한사용을중히여기지않은것으로생각된다. 왜냐하면태종이거처한이궁에서무당이굿을하였는데도큰문제가되지않았기때문이다. 중종이후풍양현이폐지된다음풍양이라는지명은거의사용되지않았으나현남양주지역일대는여전히왕실의강무장으로사용되고있었다. 이와같이터만남아있는풍양궁에비를세우도록한것은 1755 년 ( 영조 31) 의일이다. 영조는자신이늙어선릉 ( 先陵 ) 을알현하고풍양에거처하려고하는데성조 ( 聖祖 ) 의구궐 ( 舊闕 ) 유지 ( 遺址 ) 에표식 ( 表識 ) 이없는것을보고, 경기감영으로하여금예조와함께양주풍양구궐유지에비 ( 碑 ) 를세우도록하였다. 여기에필요한석재 ( 石材 ) 는칠릉 ( 七陵 : 오늘날의동구릉을말함 ) 의것으로하고표석 ( 表石 ) 은영건청 ( 營建廳 ) 의남은돌로세우라고명하였다. 각능에비석을세우는역사가한창진행중이므로여기에동원되는인력에게는비국 ( 備局 ) 에서저치미 ( 儲置米 ) 를나누어주게하고, 모든일에는절대로백성을동원하지못하게하였다. 영조는친히비의앞뒤면을썼는데전면에 태조대왕이상왕으로계실때의옛궁궐터 ( 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 ), 후면에 황명숭정기원후삼을해중춘에이곳에주정하면서절하고공경히쓴다.( 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拜手敬書 ) 라고썼다. 그리고두줄로 지명풍양 ( 地名豊壤 ) 네글자를썼다. 이처럼영조대의구궐유지비는태종이건립한이궁터가아니라태조가거처했던곳에세워졌다.*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풍양궁은왕실에서피방을위한장소나휴식처로사용하기위하여태종이계획하여세종초기에완공되었다. 이곳은태종의휴식공간으로사용되다가태종사후강무시숙소로사용하기위하여수축과보수를계속하였다. 세조도강무를목적으로오랫동안거처하기도하였다. 현재는비석만남아있고, 단지주위의지명만이궁 ( 宮 ) 이있었다는사실을알려주고있다.

23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풍양궁과강무장 * 2. 강무장과사냥터 조선시대양주지역은한양과가깝고, 강을건너지않아도되는지역이면서도산이많아조선초기부터왕실의강무장이나사냥터로자주이용되었다. 특히조선을개창한직후에는한양을주변으로하여사냥터와강무장을정하는것이많았으며, 이에따라한양과가까운양주일대는강무장으로널리사용되었다. 그대표적인곳이묘적산사냥터와풍양근처의강무장이었다. 조선시대강무는조선의만조백관 ( 滿朝百官 ) 과군사가일체가되어야영을하면서국가의보위를위하여군사행위를하는거국적인행사였다. 강무는중요한국가행사였기때문에여기에동원되는병력도보통 1 만명이넘었다. 동원된병력은그때의상황과형편에따라다르지만경기뿐만아니라전라, 경상, 황해도병사들도징집하였다. 이렇게많은규모의군졸이동원되었던것은국가의안위와국방에중점을두고행사를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강무행사는문신과무신이함께참여하여상호소외하였던평소의불화를해소하고화합을도모하는계기가되기도하였다. 따라서강무는국가의문신과무장의화합을위한장소라고할수도있다. 강무의규모는 1447 년 ( 세종 29) 8 월기록에의하면 강무를하려고전라도, 경상도, 황해도에군사를징집하였다. 이때살곶이에모였는데기병이모두 7800 여명, 보병이 2400 명이고경중 ( 京中 ) 은기병이 2400 명, 기병이 3600 명이다. 라고하였다. 강무시에는군인들이보행훈련, 구보, 산등성오르내리기, 전투작전의진도 ( 陣圖 ) 행렬 대오, 기마전술 ( 騎馬戰術 ) 등을실시하였다. 즉임금과병사가군사훈련을통하여진법 ( 陣法 ) 진도를습지하여유사시에대비하고자하는데강무의목적이있었다. 강무의기간은대체로 20 일내외로정하였는데흉년이나국휼 ( 國恤 ) 등으로인하여 4 5 일로줄여서실시하기도하였다.* 강무장은국정의수렵장인동시에진법훈련의장소로서, 산곡 ( 山谷 ) 이험하여짐승을쫓기에불편한곳이거나군사이동에불편한곳보다는백성들이살지아니하고금수 ( 禽獸 ) 가많은한광 ( 閑曠 ) 한지역을택하고있다. 옛날제도에강무장은도성근방에있었지만조선초기에상설적인강무장이설정되어있지않았으므로도성에서먼곳에이르게되었다.* 강무장에는금표 ( 禁標 ) 를세웠고, 백성들이이곳에서풀을베지못하도록하였다. 따라서금령을어긴자는고을수령과감사까지논죄 ( 論罪 ) 하였다. 강무장내에들어간범법자는장 100 대에처하였고이를막지못한고을수령은자급 ( 資級 ) 3 등을감하였다.* 강무장은군사훈련장으로적합한지도중요했지만산짐승도많아야했는데이는사냥자의호기심을유발하는역할을하기때문이다. 산짐승은대체로산토끼, 늑대, 노루, 여우, 호랑이, 오소리, 너구리, 꿩, 사슴등이었다. 결국강무는짐승의포획, 병사훈련, 장수의능력단련그리고진법진도를동시에수행하는훈련이었다고할수있다. 풍양지역에서강무를행하였다는기사는태조대부터보인다. 즉 1397 년 ( 태조 6) 에양주목장에서강무하였다거나 1398 년진도를훈련하였다는기록이보이는것으로알수있다 년 ( 태종 5) 에도양주에서강무하고풍양에서사냥을한뒤평구역에머물렀다는기록이보인다. 이후태종은여러차례양주에서사냥을하거나강무를하였으며, 매사냥이나고기잡이를구경하는경우가많았다. 태종은왕위를세종에게물려준후풍양에이궁을짓고여기에머물면서사냥을즐겼다. 즉풍양북쪽괘라리 ( 掛羅里 : 현재오남면팔현리 ) 에서놀이를하고잔치를베풀었다는기록을볼때 * 풍양궁수축후에자주사냥을즐겼다는것을알수있다. 태종이평구역에서사냥할때는상호군 ( 上護軍 ) 대호군 ( 大護軍 ) 호군 ( 護軍 ) 사금 ( 司禁 ) 사엄 ( 司嚴 ) 및사사로이딸린반당과갑사 ( 甲士 ) 별패 ( 別牌 ) 시위패 ( 侍衛牌 ) 등 2000 여명과말이 1 만여필, 별군방패 ( 別軍防牌 ) 수천명이따랐다고할정도로많은인원이동원되었다. 이에따른백성들의피해도막심하였다. 세종대에는묘적사의북쪽산과시우현 ( 時雨峴 ) 에서사냥하였다는기록이보이며,* 1428 년 ( 세종 10) 가을에는양주에서강무를행하였다.* 이와같이강무장으로자주사용되는곳은특별히관리하기도하였으며, 이후필요에따라서장소를바꾸기도하였다 년삼군진무소 ( 三軍鎭撫所 ) 의청에따라강무장을선정하면서풍양현의입관산 거질을산 ( 居叱乙山 ), 양주의홍복산 달이산 장흥산 우괴동산 대모성산 범금릉동산 사동산 산막동산 대랑동산 ( 大郞洞山 ) 서을곡산 ( 西乙谷山 ) 등을강무장으로삼았다. 이에강무장으로지정된곳에는벌목을금하는한편, 수렵을금하게하였다.* 또한흉년이들거나농사가실패하였을때에는원거리강무보다근거리인양주지역의강무를선호하였는데, 1449 년강원도의농사가실패하였다고하여풍양으로강무장소를옮긴사례가있다.* 조선초기부터양주지역이강무장으로널리사용된이유는한양과가깝다는점과큰산이많다는점때문이었는데태종은풍양에이궁을수축하여사냥을즐기는한편, 세종은풍양궁을강무나사냥을위한숙소로사용하였던것이다. 풍양을중심으로한남양주지역에서자주사냥을한이는세조이다. 세조가즉위하자오랫동안폐지되어있던강무를다시시행하기로하고그장소를풍양으로정하였다. 이후세조는주엽산 ( 注葉山 ) 무둔산 ( 無屯山 ) 에서사냥을구경하였다 년에는풍양의이궁을수축하여사냥시에숙소로이용하는한편, 봄 가을강무를풍양에서실시하기로하였다. 세조는신하들의반대에도불구하고자주풍양에서강무나사냥을실시하였다. 세조는신하들의반대가거세지자오히려군사들로하여금 10 일의양식을가져오게한후풍양냇가의산봉우리에올라가권공 ( 權恭 ) 을좌상대장, 박강 ( 朴薑 ) 우상대장으로삼아모의전을펴게하고구경하기도하였다.* 이외에묘적산도자주사냥터로이용되었다. 이지역에서자주사냥을즐겼던태조 태종과세조는조선왕조의왕권강화에주력했던군주였다. 이러한측면에서남양주풍양, 묘적산등은수렵과군주의강무군사훈련장소인동시에심신을정화하는곳이기도하였다. 세조이후에도풍양지역은여전히강무장으로사용되었는데성종역시풍양, 주을동에서강무하여잡은날짐승을종묘와대왕대비전에바치게하고, 풍양궁에머물렀다는기록이보인다.* 즉풍양궁은세조이후강무의숙소로, 풍양은관렵지로사용되었다. 연산군대는강무장의기능을더욱강화하였으며, 1499 년 ( 연산군 5) 에는풍양궁을수리하게하였다. 연산군이사냥에몰두하자유자광은풍양궁을사냥시의숙소로정하고주엽산과아차산을사냥지로추천하였다.* 이에 1504 년에풍양궁주위의인가를모두철거시키고풍양궁과광릉까지를금표안에넣어풍양의대부분을사냥터로사용하였다.* 이후금표지역은더욱확대되어광릉산, 묘적산, 평구역일대까지포함되었다. 우찬성이계동, 경기관찰사안윤덕, 승지윤순등이금표에가서살펴보고도면을만들어올리며아뢰기를, 호명산 ( 號鳴山 ) 술당리로부터작령 ( 鵲嶺 ) 을따라귀암에이르기까지토성을쌓되높이를 10 척으로하고, 성밖에는구덩이를파되넓이와깊이를각각 3 척으로하며, 귀암서낭당산고개로부터우이현 ( 牛耳峴 ) 까지는표를세우고, 또걸석현에토성을쌓고, 이동 ( 梨洞 ) 에서직동 ( 直洞 ) 까지무릇 8 개처에는삭장을만들며, 주엽산동으로부터새길을따라그노상에표를세우고, 잉읍현및소야동 내송현 ( 內松峴 ) 에는모두토성을쌓으며, 마산현 ( 馬山峴 ) 길점 괘라리현 ( 掛羅里峴 ) 추현은모두막아버리고, 또함정원 ( 檻穽峴 ) 부터웅주현 묘적사동 ( 妙寂寺洞 ) 동구 문신각동 ( 文臣閣洞 ) 동구를지나평구역북쪽길위까지는금표를세우고근방에사는사람들에

233 게나누어지키게하고, 또별도군사를배치하여지키게하면스스로범해들어오는자가없게될것입니다. 하였다.* 즉, 오늘날광릉 철마산 천마산 묘적산 덕소로이어지는선까지금표안에넣었다. 이후용진까지포함시킴으로써오늘날의남양주지역대부분이금표내에속하였다. 금표지역내에일반인의출입을통제하고백성들을이주시키는강경책을실시하였다. 그리고금표내에있는광릉 봉선전의제사를지내기위한참봉직을모두혁파한후그제사는봉선사의승려들로하여금대신지내게하였다.* 이에연산군은한양주변을모두사냥터로만든이후 1506 년에는조준방의군사 1 만과병조의군사 3 만을동원하여광릉산에서사냥하였다.* 이때동원된군사들은 10 일치의양식을가져오게하는한편, 생포한멧돼지와사슴을죽게한응사 ( 鷹師 ) 를국문하기도하는등많은폭정을자행하였다. 또한봉선사의어용 ( 御容 ) 를이안하고, 승려들은장가보내사냥할때역사에동원하였다.* 그리고백성들이금표내에들어오는것을감시하기위하여동도검찰사 ( 東道檢察使 ) 와수쇄관 ( 搜刷官 ) 으로하여금금표안을검찰하도록하였다.* 이것으로보아풍양은조선초기부터왕의강무장으로사용되었으며그중에서묘적산은사냥지로주목받았다. 이렇게되자인근백성들의고충은날로증가하였는데, 1474 년 ( 성종 5) 에전생서주부변철산이묘적산강무장부근의백성들이겪는고충을토로하고있다. 사시 ( 四時 ) 의사냥은예로써마땅히거행해야할것이고강무할장소도폐할수가없습니다. 그러나신이양주묘적산의안팎을둘러보니, 토지가교박 ( 퍱薄 ) 하여산밑의백성들이능히생산을하지못하고, 봄이면화전을개간하여먹고, 겨울이면땔나무를해다팔아서먹고입을거리를오직이산에만의지하고사는데, 강무장을설치하고부터는백성들이밭갈고땔나무를벨수없도록금하여먹고입을근원을끊었으니, 이는백성과더불어함께한다는뜻이아니기도하고, 더구나초목이무성하여도적과모진짐승의의지할곳이되어크게백성에게해 ( 害 ) 가되기도합니다. 청컨대금령 ( 禁令 ) 을완화하여백성의생업에자본이되게하소서.* 즉, 강무장주위에는밭을경작하거나나무와풀을베는것을금지하였기때문에백성들의생업에막대한지장을초래한다는것이었다. 이와함께강무장주위의백성들은각종사역이나몰이에동원됨으로써더욱고통받게되었다.

23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우리나라에서불교는삼국시대에처음수용된이후통일신라와고려를거치면서한국인의사유방식을지배해왔지만, 유교를국가이념으로했던조선의건국과더불어점차쇠락의길을걷게되었다. 조선시대의불교교단은깊은산중에서겨우그명맥만을이어왔으며왕조가몰락할때까지그러한현상은계속되었다. 그러나조선왕조 500 년간불교계내부에아무런변동이없었다고할수는없다. 비록시종일관억불정책이추진되었다고는하지만임진왜란이후의불교계는서서히중흥의기운을보이고있었다. 즉조선전기에는국가에서사원소속의토지와노비를몰수하고종단의통폐합을강행하면서불교교단은쇠미한상태였다. 그러나임진왜란때에많은의승군 ( 義僧軍 ) 이전란에참여하여국가적위기극복에동참한것을계기로하여국가에서승려들의존재를인정함으로써불교계는점차활기를되찾아갔다. 나아가서산대사 ( 西山大師 ) 휴정 ( 休靜 ) 과부휴대사 ( 浮休大師 ) 선수 ( 善修 ) 를필두로하는양대문파가성립되어참선 ( 參禪 ) 과강경 ( 講經 ) 이성행하였고승려교육의체계화가이루어지는등조선후기불교계에는새로운기운이감돌았다. 고려전시기에걸쳐극성했던불교는고려말기에이르러사회를이끌어나가는지도이념의기능을완전히상실하고세속화와그에따른폐단만을드러내게되었다. 그결과새왕조는전면적인불교계재편 ( 再編 ) 과함께불교억제정책을단행하였다. 즉태종때에 11 종 ( 宗 ) 이 7 종으로축소되고세종때에다시선종과교종의양종으로통폐합된것은불교계의뜻과는상관없이국가의편의에의해서일방적으로강행된것이었다. 양종으로통합된이후연산군때일시적으로폐기되었다가중종때완전히사라진불교종단은명종때에잠시부활했다가이후공식적으로자취를감추어버리고, 승려들은깊은산속으로밀려났다. 이에따라조선시대승려들은궁실과관가에종이와기름, 짚신등을바쳐야했고그밖에여러가지잡역 ( 雜役 ) 을부담했다. 또한임진왜란과병자호란이끝난뒤에는산성 ( 山城 ) 을쌓고이를수비하는일을도맡아야했음에도불구하고성내와도회처에출입이금지되었고가장천한대우를받게되었다 년도성 ( 都城 ) 출입금지가해제될때까지이러한처우는계속되었지만조선후기에이르러어려운상황속에서도사원의유지와수행에진력하였던승려들에의하여불교계는다시소생할수있었던것이다. 특히영조와정조대를전후한조선문화전반에걸친문예부흥기운과맞물려불교건축과불상 불화등의불교문화도크게발전할수있었다.

23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1. 조선전기의불교정책 고려말기에이르러불교교세는극도로팽창하여사원과승려의수가크게늘어났을뿐만아니라사원소속의토지와예속민이확대증가하였으며아울러각종행사와도량 ( 道場 ) 이빈번하게베풀어졌다. 이에따라각종혜택을누리는불교교단의경제력은국가의존립을좌우할정도로막강하게되어그폐단이속출하였다. 이에따라고려말기에도이미불교에대한억제책이시행되어귀족들이원당 ( 願堂 ) 을함부로세운다든지사원에토지와노비를시납 ( 施納 ) 하는등의행위를금지하였으며사원과승려들의상행위 ( 商行爲 ) 와식리 ( 殖利 ) 활동을금지하였다. 그리고도첩 ( 度牒 ) 을받지않고서는승려가되지못하게하여출가를제한하였고부녀자가절에가서재 ( 齋 ) 를지내고등불을밝히는등의일을하지못하도록하였으며, 귀족들이금이나은으로불경을베껴쓰는사경 ( 寫經 ) 을금지시켰다. 고려시대를통한불교교세의팽창은고려말에이르러극도에달하여여말선초 ( 麗末鮮初 ) 새로운지배세력으로등장한신흥사대부에의한배불론의대두와이에따른억불책의시행이라는결과를가져왔다. 결국불교의세속화와그폐단은여말선초에이르러사상적으로유교와불교의교체라는하나의큰전환을가져왔던것이다. 고려말토지제도의문란과신분체제의해이는결국국가의인적 물적자원의보충을어렵게만들었으며이에따라사전 ( 私田 ) 개혁과노비변정 ( 奴婢辨正 ) 문제가제기되었다. 실제로이러한사태를초래한중요한원인은권문세족 ( 權門勢族 ) 의농장 ( 農莊 ) 확대와사원경제의팽창에있었다. 원의세력이물러가고고려의왕권을재확립하기위해서도이같이팽창되었던권문세족들의농장과사원의사회적 경제적세력을그대로방치할수는없었던것이다. 그리하여고려시대전시기를통하여일종의치외법권적인지위를누리고있던사원과승려들을국가의통제아래두는방안을강구하지않을수없었다. 그리고이러한정책은주자학 ( 朱子學 ) 의전래와수용이래, 성리학자들사이에혹은유교와불교의일치가논하여지고또는불교가계속신봉되는가운데시행되었다. 성리학자들은불교의현실적타락상을지적하며비록이론상으로는불교를이단시하는경우가있었지만그것이곧억불책의근본적인계기가되었던것은아니다. 다만고려말기부터이미억불시책이강구될수밖에없었던사회적 정치적추세에새로전래 수용된주자학사상이불교배격을이론적으로뒷받침하면서억불책의시행을고무 자극했던것이다. 즉주자학자체가불교배척의선두에섰던것이아니라단지국가의인적 물적자원을확보하기위한시책으로불교교단에대한개혁이이루어지고있던추세를이론적으로뒷받침하는역할을했던것이다.

23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1. 조선전기의불교정책 1) 태종대의불교계정비 조선왕조는개창이후모든체제를중앙집권적으로개편해갔다. 불교에대해서도이러한정책이취해졌는데, 특히태종대에이르러종래에사원이차지하고있던방대한인적 물적자원을국가로흡수하기위한강력한조치가있었다. 즉 1406 년 ( 태종 6) 3 월에전국에남겨둘사찰의수와토지및노비의수를정했는데개경과한양에는오교양종 ( 五敎兩宗 ) 각 1 개의절을두고, 외방의목 ( 牧 ) 과부 ( 府 ) 에는선종과교종중에각 1 개의절을남겨두기로하였다. 이에따라종파별로는조계종 ( 曹溪宗 ) 과총지종 ( 摠持宗 ) 을합해서 70 개절, 천태소자종 ( 天台疏字宗 ) 과천태법사종 ( 天台法事宗 ) 을합해서 43 개절, 화엄종 ( 華嚴宗 ) 과도문종 ( 道門宗 ) 을합해서 43 개절, 자은종 ( 慈恩宗 ) 36 개절, 중도종 ( 中道宗 ) 과신인종 ( 神印宗 ) 을합해서 30 개절, 남산종 ( 南山宗 ) 10 개절, 시흥종 ( 始興宗 ) 10 개절, 도합 11 종 242 개절만이남게되었다. 이외나머지사원은토지와노비가모두국가에몰수되어폐사되고말았다. 그리고이듬해 1407 년 12 월에는이전의 11 종이다시 7 종으로폐합되었다. 천태소자종과천태법사종을합하여천태종, 중도종과신인종을합하여중신종 ( 中神宗 ), 총지종과남산종을합하여총남종 ( 摠南宗 ) 이라고함으로써조계종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과함께 7 종이되었던것이다. 이때종파별로남겨둘사찰의수를정하였는데조계종이 24 개절, 천태종과자은종이각각 17 개절, 화엄종이 11 개절, 중신종과총남종이각각 8 개절, 시흥종이 3 개절로모두합하여 88 개절이었다. 이에따라 1406 년에전국에남겨졌던 242 개절이그이듬해다시 88 개로감소하면서불교계는사회경제적으로막대한타격을받게되었다. 이처럼국가에서사찰들을무더기로없애버리고이에따라남은절에는오직한정된수량의토지와노비만을지급하였으며그외사원의토지와노비는모두관부에귀속시켜국가의인적 물적자원을보충하였다. 즉공인된사찰이외의토지는둔전 ( 屯田 ) 으로써군자 ( 軍資 ) 에보충하고, 또그러한절의노비는관노비, 즉공천 ( 公賤 ) 으로서여러관아에배속시켜사역하게하였다. 이때속공된노비가총 8 만여명에달하였다고한것으로보아태종당시까지의사원세력이얼마나막강했는지를쉽게알수있다. 한편, 고려말부터시행된승려도첩제 ( 僧侶度牒制 ) 는태종때부터한층강화되어일반백성이임의로승려가되는것을막아양민의확보를꾀하는수단으로이용되었다. 또한새로운도읍의건설에따르는막대한노동력수요는역의의무를지지않고있던하급승려들을그대로징발하여역군 ( 役軍 ) 의주동부대로서이에충당하였다. 요컨대, 종파의통폐합, 사원소속토지및노비의제한과그속공 ( 屬公 ), 승려도첩제의강화및하급승려의징발사역등태종대의불교관련시책은새로운왕조를확립해나가는데필요한국가의재정적기반을견고히하는동시에이를위한인적 물적자원을직접활용하려는데서비롯된것이었다. 그것은결과적으로종래의사원세력의기반을박탈하는것이었고불교교세를억압하는것이었다. 그러므로조선초기의불교억제책은사회경제적인요구로말미암은것이었지, 종교신앙의문제와직접관련된것은아니었던셈이다. 그러므로조선초기의불교정책은척불정책이라고하기보다는국가의현실적인요구로말미암아불교를억제하려고했다는점에서억불정책이라고하는것이옳을듯하다. 종교적인의미에서불교를배척한것은오직일부성리학자들의이론일뿐이었고국가에서불교를전적으로배척하거나말살하려고했던것은아니었다. 그러한까닭에억불정책이시행되는가운데서도한편으로는의연히불교가공적으로신봉되었다. 그결과조선초기에도고려시대의관행을이어서전시대와다름없이불교의신봉과일반불사 ( 佛事 ) 가널리행해졌으며, 이러한현상은일반백성뿐만아니라일부를제외한유학자들사이에서도나타났다. 조선초기의억불책아래서도불교신앙이공적으로전승되었던까닭은불교자체가지니는종교적인요소와성격에서연유한것이었다. 유교의마음을바르게하고덕을닦는정심수덕 ( 正心修德 ) 의이념만으로는해결될수없는천재지변 ( 天災地變 ) 과유교적제례만으로서는충족되지않는사후의명복에대한기원등은불교의종교적기능에의지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인간의힘으로는어찌할수없는죽음과재앙에대해서불교가갖고있는종교적기능에의지하여재앙을물리치고복을빌수밖에없었으므로조선전기에도고려이래의여러불교행사가존속될수있었던것이다. 요컨대불교를억제하려는시책은불교교세가그극한에이르렀던고려말에이미발단을보게되었으며조선개국후에는국가의사회경제적토대확보라는현실적인요구에서기인하였다. 따라서억불정책이고려말기에수용된주자학의전파와그영향에서발단된것이라고할수는없다. 그리고억불책의궁극적인목적은인적 물적재원을확보하여새로건설한국가의재정기반을확립하기위한것이었다. 조선전기에도왕실이나일반백성들사이에서불교가그대로공적으로신봉된것은천재지변이나인간의죽음이라는초극할수없는절망을위로하고극복할수있는종교적기능을가지고있었기때문이었다. 다시말해여말선초의억불정책은신왕조개창기에불교의세속권에대한통제였으며, 그러한억불책아래서도재앙을물리치고명복을기원하는등의종교적기능은불교가그대로전승되었던연유로작용하였다.

23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1. 조선전기의불교정책 2) 세종대의불교계재정비 불교를전면적으로정비한태종에이어세종대에는선교양종으로의종파통합과더불어재차불교계전면에걸친정비가이루어졌다. 세종은연례행사로남아있던경행 ( 經行 ) 과궁중에서의초파일연등행사를폐지하였으며 7 종이었던종단을다시양종으로축소시켰다. 태종때의종단통폐합과이에따른사찰소속토지와노비의대대적인감축이후에도여전히사찰과암자의무단건조와불상을조성하는등의일은그치지않았다. 그리고종단통폐합으로 88 개의공인사찰에상주하는승도의수는극히적음에도불구하고사원이광대한토지를점유하고있다는사실은당시지배층들의공격대상이되었다. 또한유학자들은불교의세속적인면, 즉무분별한사찰의창건과승려들의무위도식내지는상업행위와각종불교행사에따른국고의낭비등을거론하였다. 여기에더하여승려들의범법행위와도덕적타락은세종대불교재정비의직접적계기가되었다 년 ( 세종 6) 4 월에조계종과천태종및총남종을합하여선종으로하고,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합쳐서교종이라함으로써지금까지의 7 종은선교양종으로폐합되었다. 이와아울러교종과선종에각각 18 개절, 도합 36 개절만을국가공인사찰로남기고나머지사찰의토지와노비는모두관에서몰수하였다. 이때경기지방에남겨진사찰로는선종소속으로양주의승가사 ( 僧伽寺 ) 개경사 ( 開慶寺 ) 회암사 ( 檜巖寺 ) 진관사 ( 津寬寺 ) 와고양 ( 高陽 ) 의대자암 ( 大慈庵 ), 교종소속으로해풍 ( 海豊 ) 의연경사 ( 衍慶寺 ), 송림 ( 松林 ) 의영통사 ( 靈通寺 ), 양주 ( 楊州 ) 의장의사 ( 藏義寺 ) 와소요사 ( 逍遙寺 ) 가있었다. 그리고이때각사찰별로승려수와토지의결수를제한하였는데선종 18 개절에는승려 1970 명, 전답 4250 결, 교종 18 개절에는승려 1800 명, 전답 3700 결로규정하였다. 세종때에종단을폐합하면서각사찰에주었던토지는태종대와마찬가지로승려 1 인에대하여 2 결의비례였는데승려수가 70 명이면토지 150 결, 120 명이면 250 결로 2 배수에 10 결을더해준것이다를뿐이다. 이는물론없어지는절에있던토지로써더해주거나보태준것이며이렇게하여재분배된사찰소속토지의총결수는 1424 년정비전의사원소속토지의총결수 1 만 1100 결에비하여약 1/3 이삭감되었다. 또한불교계의제반업무를관장하고있던승록사 ( 僧錄司 ) 를폐지하고한양도성안에있는흥천사 ( 興天寺 ) 를선종의총본사격인도회소 ( 都會所 ) 로삼고, 흥덕사 ( 興德寺 ) 를교종의도회소로삼게하였다. 아울러연륜이있고덕행이높은고승으로하여금양종의여러가지업무를각각맡아보게하였다. 이리하여태종때에 11 종에서 7 종으로통폐합되었다가세종대에이르러선종과교종양종으로다시폐합됨으로써불교계의교세는크게약화될수밖에없었다. 즉태종대에전국의사찰가운데 242 개절만남겨졌던것이세종때에는다시 36 개로줄었으며전국 36 개사찰의승려수는 3770 명, 전답은 7950 결로축소되었던것이다. 그결과국가적으로는사원에소속되어있던토지와노비를관에서관장할수있게되었으므로국가의인적 물적기반을튼튼히할수있었다. 따라서세종대의불교계에대한정비의궁극적인목적역시국가의재정기반과인적자원을확보하는데있었다고할수있을것이다. 세종때에불교계에대한대대적인억압과정비에도불구하고왕실뿐만아니라일반인들사이에서도불교신봉은여전하였다. 기우 ( 祈雨 ) 행사라든지병이낫기를빌거나죽은이의명복을비는행사는반드시불교식으로거행되었다. 뿐만아니라사대부들중에서도불교식제례 ( 祭禮 ) 를거행하는경우가과반수에이를정도로일반적현상이었다. 한양에머무르는승도는거의양반자제였으며, 대군 ( 大君 ) 과빈 ( 嬪 ) 후궁 ( 後宮 ) 등의종친 ( 宗親 ) 과궁인 ( 宮人 ) 들의신불 ( 信佛 ) 과출가는누구도이를제지할수없었다. 한편, 효령대군 ( 孝寧大君 ) 의빈번한불교행사개최에서발단했던흥천사 ( 興天寺 ) 의중수와이에따른경찬회 ( 慶讚會 ), 그리고중궁 ( 中宮 ) 의죽음에따른불경의조성과법회개최, 내불당 ( 內佛堂 ) 의건립등종친과궁중의계속적인불사는유신 ( 儒臣 ) 들의반대를격화시켰다. 그리하여세종과신하들사이에이를둘러싼격심한대립과논란이벌어지기도하였다. 일부유학자들의불교전폐주장에도불구하고역대임금과왕실이신봉해온불교를하루아침에갑자기없앨수는없다는세종의태도는고려말기이래로불교의폐단이꾸준히거론되면서도관행적으로불교를신봉할수밖에없었던풍조와전연무관하다고는볼수없다. 절을모두없애버리고승려들을모두환속시킨다는것은현실적으로도불가능했기때문이었다. 세종의즉위이래해마다이어지는가뭄과기근, 대량의유망민발생이라는절박한조건속에서재정부족은국가의특별한조처를필요로했고이같은상황에서불교의세속권을어느한계내에서재정비할필요를느끼게하였던것이다. 여기에승려들의타락행위가직접적계기가되어 1419 년에사찰소속노비를대대적으로몰수하여관에귀속시켰으며, 1424 년에선교양종으로의종파병합과사원의수와토지및승려수에대한재정비가이루어졌다 년 4 월에정해진 36 개절가운데 5 개절은그직후에다른절로서교체 편입되어그뒤로는다시변동이없었다. 즉원래 36 개절에들어가있던경복사 ( 景福寺 ) 와화엄사 ( 華嚴寺 ) 정곡사 ( 亭谷寺 ) 흥룡사 ( 興龍寺 ) 서봉사 ( 瑞峯寺 ) 를빼고대신에상원사 ( 上院寺 ) 와정양사 ( 正陽寺 ) 흥교사 ( 興敎寺 ) 송광사 ( 松廣寺 ) 장안사 ( 長安寺 ) 가편입되었다. 이에따라공인사찰의승려수와토지결수에도증감이생겨 1439 년의기록에의하면사원소속토지는총 7982 결이었으며각사찰의주지가그전조 ( 田租 ) 를수취하는것으로되어있다.

23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1. 조선전기의불교정책 3) 문종대이후의불교정책 문종과세조도이전의왕들과마찬가지로불교를하나의이단으로간주하면서도이를극단적으로배격하는것은유가 ( 儒家 ) 의도가아닌것으로생각하였다. 스스로불교를좋아하는군주라고자처했던세조는불교를업신여기고훼손하는행위는속된유자 ( 儒者 ) 나어리석은유생 ( 儒生 ) 이하는짓이라고경멸하였다. 세종대에전국의사찰을선교양종에분속시켜절의수와토지및승려수를제한하는등불교교세와관련된정비조처가취해진뒤로는그와관련된국가적조처는더이상없었다. 그리고문종과세조대에는절의중창 ( 重創 ) 과불상의조성, 경전간행등의사업이전대에비하여한층더활발해졌다. 즉, 문종이즉위한지얼마되지않아소헌왕후 ( 昭憲王后 ) 의명복을빌기위한대자암 ( 大慈庵 ) 의중수 ( 重修 ), 화엄경등여러경전의금글자사경, 석가와관음 2 불상의조성등이추진되었는데이에대한반대논의가신하들사이에서물끓듯하였다. 그러나문종은선왕의조처또는후궁의소행임을내세워끝내이를관철시켰다. 즉대자암의무량수전 ( 無量壽殿 ) 을헐고다시크게지어극락전 ( 極樂殿 ) 이라하였으며진관사 ( 津寬寺 ) 도고쳐지어수륙사 ( 水陸社 ) 를낙성하였다. 이와는별도로안양사 ( 安養寺 ) 와용문사 ( 龍門寺 ) 가옛터에중창되기도하였다. 이같은공사에공로가있는승도와관원에게는상과직책이주어지기도하였으며, 왕실과양반관료에의한사적인불당조영과경전간행및불상조성도없지않았다. 단종때에도대간 ( 臺諫 ) 은내불당의철거를주장하고화재로소실된금강산유점사 ( 楡岾寺 ) 의중수계획을반대하였으나의정부와육조 ( 六曹 ) 당상 ( 堂上 ) 들의의논대로내불당은그대로유지되었고유점사도중수되었다. 세조대에불교와관련된두드러진일로는원각사 ( 圓覺寺 ) 의창건과정업원 ( 淨業院 ) 의복립 ( 復立 ) 및대규모의경전언해와그간행사업을들수있다. 지금의서울탑골공원에있었던원각사는원래흥복사 ( 興福寺 ) 가있던자리로근방의민가 200 여호를철거하고창건하였으며이와아울러대종 ( 大鐘 ) 을새로만들고불상을조성하고불탑을건립하였다. 지금탑골공원안에남아있는원각사다층석탑은조선전기의대표적인탑으로서바로세조때에세워진것이다. 이밖에세조대에는금강산의유점사와양양의낙산사도중창되었다. 그리고오갈데없는비구니들의수도처로정업원을다시세우고토지와노비도지급하였다. 또한세조는대장경등불경을새기고찍어내는사업을크게일으켜대장경 50 질을해인사에서찍어내게하고, 법화경등수많은여러경전을주자소 ( 鑄字所 ) 에서찍어간행하게하였으며, 불경을우리말로번역하고간행하기위한간경도감 ( 刊經都監 ) 을설치하여많은불전을간행 유포하였다. 명복을기원하는기신재 ( 忌晨齋 ) 와뭍이나물에떠도는영혼을위로하기위한수륙재 ( 水陸齋 ), 절을짓거나불상을조성하는데따른경찬회 ( 慶讚會 ) 와법회등은역시대간과집현전관리들의거듭된중지요청에도불구하고계속되었으며, 비내리기를빌거나병이낫기를기원하는등의여러가지불교적행사는관례대로계속이어졌다. 또한세조는호패법 ( 號牌法 ) 을다시실시하면서승려에대해서는따로승인 ( 僧人 ) 호패법을실시하여도첩을소지한승려들에게호패를주고관리들로하여금그명부를작성하게하였다. 당시승려들은공물 ( 貢物 ) 을대신납부하는이른바방납 ( 防納 ) 에의한영리도도모하였는데이미세종조에도간사승 ( 幹事僧 ) 이나연화승 ( 緣化僧 ) 등이공물을대납하는폐단이있었다. 문종과세조때에도승려들의대납에따른폐단은여전하였고, 특히일본국왕이나제후들이사신으로흔히승려를파견하여대장경등을빈번하게요청해왔으므로조선에서는많은부수의불경을이들에게내려주었다. 예종과성종대에도이전의왕들과마찬가지로불교에대한전면적인제도의변혁은없었으며, 새로절을짓거나불교적인행사를개최하는것은이전처럼계속되었다. 예종때에는낙산사와원각사를위시한많은사찰과팔만대장경을봉안한해인사판당 ( 板堂 ) 을중창하였고, 정희왕후 ( 貞熹王后 ) 와대비 ( 大妃 ) 등의명으로내불당 ( 內佛堂 ) 과개경사 ( 開慶寺 ) 를이건 ( 移建 ) 하였으며봉선사 ( 奉先寺 ) 와흥복사 ( 興福寺 ) 를창건하기도하였다. 대비의명령으로경전을베껴쓰는사경과불경을새기거나찍어간행하는일이이루어지기도하였으나, 다만신하들의요청으로불교경전간행을위해설치되었던기구인간경도감은혁파되었다. 여러가지의불교적행사는오랜관례였기때문에그대로계속되어국왕과왕비의서거에따른기재 ( 忌齋 ) 와법석이베풀어졌으며호조에서는부처와승려들을공양하기위한행사경비를관장하였다. 한편천재지변에따른기우 ( 祈雨 ) 와기청 ( 祈晴 ) 및부처에게병이낫도록해달라고비는행사등은부처의효력을믿어서라기보다는백성들의마음을위무한다는잠재적기능때문에관례대로계속되었다. 성종은자신이불교를신봉하지않는다고자처하면서도유교와불교는각기그도에따르도록하여야하며불교를갑자기없앨수는없는것이라고하였다. 즉성종은불교의전면적인폐지를주장하는데대해서는전통이오래된불교를일시에없앨수는없다는태도를분명히하여유교정치의구현에노력하면서도불교의전통은이어가게하였다. 그래서사원소속토지를전부없애야한다는혁파론이제기되었을때도사원의토지를그대로유지하게하였다. 이에절의주지가거두어온전세 ( 田稅 ) 만이라도국가경비의보충을위하여직전 ( 職田 ) 에서와같이관수관급제 ( 官收官給制 ) 로고쳐야한다는논의가일어나자, 결국 1491 년 ( 성종 22) 에사원전전세의관수관급제가시행되었다. 승려들에대한단속은강화되어범죄를일으킨승려의처벌과도첩이없는승려를환속시켜군에편입하는조치가취해졌고 1492 년에는승려가되는것을더욱까다롭게규정한금승절목 ( 禁僧節目 ) 이마련되었다. 부녀자의경우남편과사별한경우에는비구니가되는것이허용되었으나처녀나사족 ( 士族 ) 의부녀또는죄를짓고도망가서승려가되는것은금지하였다. 요컨대, 성종은유교를정치의정도 ( 正道 ) 로여겨유교정치체제를정비해나가는한편불교를신봉하지는않았지만오랜전통을지닌불교를전면적으로없앨수는없다고하여사찰의조성이나여러가지불교식행사의개최등은관례대로계속이어가게하였다.

23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2. 봉선사의창건과변천 1) 봉선사의창건과왕실의후원 봉선사는조선예종때에세조의능인광릉 ( 光陵 ) 을수호하고세조의명복을빌기위한능침 ( 陵寢 ) 사찰로창건되었다. 봉선사의창건은왕대비인정희왕비 ( 貞熹王妃 ) 의명에의하여이루어진것이다 년 ( 예종 1) 윤 2 월에영릉 ( 英陵 ) 과광릉및봉선사를조성하는공사가병행되었는데, 때마침흉년에다농사철이어서민폐가심했으므로여러신하들과의논끝에봉선사를짓는공사는가을로연기하였다. 그러나바로뒤이어영의정한명회 ( 韓明澮 ) 와능성군 ( 綾城君 ) 구치관 ( 具致寬 ), 도승지 ( 都承旨 ) 권감 ( 權콑 ) 등이다시능을조성하는공사와봉선사를짓는일을상의하고있는것으로보아절의창건공사는곧바로재개된듯하다. 봉선사 4 월에는이조 ( 吏曺 ) 에서봉선사영전 ( 影殿 ) 에참봉 (? 奉 ) 두사람을두게하였으며, 5 월에는이미봉선사조성이추진중이어서도승지권감이현장에가서공사감독관들을위로하기도하였다. 이어 6 월에는승학열 ( 學悅 ) 과학조 ( 學祖 ) 에게명하여현장에머물면서공사를감독하게하였다. 학열은역대임금의총애를받았던인물로진관사 ( 津寬寺 ) 대자암 ( 大慈庵 ) 낙산사 ( 洛山寺 ) 등여러절의공사를주관한바있는승려였다. 그는봉선사조성도제조 ( 奉先寺造成都提調 ) 인한명회 구치관과의견이맞지않아자기마음대로승당 ( 僧堂 ) 을허물고다시짓게하거나, 돌과나무를나르는데도성사람들과 500 여대의수레를동원하는등백성들의힘을많이소모하게하였다. 그해 8 월에는봉선사종도조성되어이에관여한고위관리들에게는각각말 1 필씩을하사하였다. 이때만든종은보물로지정되어지금도봉선사에그대로안치되어있다 년 9 월에봉선사조성이끝나게되자예종은봉선사에행차하여숭은전 ( 崇恩殿 ) 에서제사를지내고절에쌀 100 석을내려주었으며, 또세조를위한칠일불사를베풀었다. 뒤이어서대비의분부에따라봉선사조성에공이있는관리와간경도감관리에대한논상논의를거쳐서조성공로자들에게말 1 필을주거나자제들의직급을올려주는등의조치가있었다. 이로써봉선사의조성은일단락된셈이었다. 조성이끝난이후봉선사는성종대에도능침사찰로서왕실에의해계속중시되었다. 즉왕실에서봉선사에곡식과면포를내려주는일이잦았으며, 왕실의후원으로절에서금물로경전을베껴쓰는금자사경 ( 金字寫經 ) 과, 절을수리하는데청기와를사용한다는것때문에물의를빚었다 년 ( 성종즉위 ) 12 월과이듬해 1 월에는선왕예종을위한삼재 ( 三齋 ) 와오재 ( 五齋 ), 칠재 ( 七齋 ) 를봉선사에서지냈으며 3 월에는노비 40 명을절에내려주기도하였다. 이어서 4 월에는유점사와낙산사의염분세 ( 鹽盆稅 ) 와함께봉선사의세외잡역및노비잡역을줄여주기도하였다. 그리고 1471 년 3 월에임금이광릉에가서제사를지내고또숭은전에서다례를지낸후, 봉선사에거둥하여향을피우고예불하니임금을수행했던종친과관리들도또한예배하였고이날쌀 40 석을절에하사하였다. 이듬해 2 월에는대왕대비와인수왕대비 ( 仁粹王大妃 ) 및왕대비가광릉에가서친히제사하고또봉선전 ( 奉先殿 ) 에서제사를지낸후, 봉선사에들어가예불하고승려들에게베 100 필을하사하였다 년 9 월에쌀과콩을아울러 40 석을내려주었고, 1477 년 8 월에도봉선사에쌀과콩 70 석을하사하였다. 이처럼봉선사는성종때에왕과대비등이행차하여쌀과베를내리는등광릉을수호하는사찰로서왕실에의하여매우중시되었다.

24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2. 봉선사의창건과변천 2) 금자사경 ( 金字寫經 ) 과청기와보수 ( 補修 ) 1477 년 ( 성종 8) 3 월에봉선사에서금글자로사경한다는소문을들은이조좌랑이창신 ( 李昌臣 ) 이당시명나라에대해서조선에서금은을바치는일을그만두게해달라고청하고있는형편에봉선사에서금글자로사경을할수있겠느냐고이의를제기하자, 성종은인수왕대비가선왕을위하여하는일이므로이를제지할수없다고하였다. 이어서사헌부대사헌김영유 ( 金永濡 ) 등도글을올려봉선사에서이숙생 ( 李淑生 ) 등이금글자로경전을베껴쓴다는소문을듣고매우통탄스럽게여긴다며, 유도 ( 儒道 ) 가날로성해지고이단이날로쇠해가는때에금자사경같은무익한일로임금의덕에누를끼치지않기를바란다고간청하였으나, 성종은금자사경을제지하지않았다. 김영유등이다시글을올려임금이직접대비에게정황을아뢰고사경을정지하도록할것을청원하였으나성종은들어주지않았다. 성종은모후 ( 母后 ) 가선왕을위하여금글자로사경한다는것을알면서도대간 ( 臺諫 ) 에서자꾸간하는것을못마땅하게여겼으며, 직제학노공필 ( 盧公弼 ) 과응교유순 ( 柳洵 ) 도사경이나라를다스리는데에해로울것이없다며성종의태도를비호하였다. 또한시독관 ( 侍讀官 ) 김흔 ( 金?) 과예문관 ( 藝文館 ) 부제학 ( 副提學 ) 손비장 ( 孫比長 ) 등도이에관하여상소하였으나성종은자신의뜻을관철하였으며더이상의논란은없었다. 금글자사경이논란된이후봉선사에내려주는곡식과베를줄이자는의논이조정에서일어났다. 즉, 1482 년 8 월에전지 ( 傳旨 ) 를내리기를, 봉선사에는선왕의영전 ( 影殿 ) 이있고또임금이이곳에행차하면반드시하사함이있었는데지금은흉년이들어서한결같이전례를따를수없으니쌀과콩 30 석과면포 ( 綿布 ) 100 필, 정포 ( 正布 ) 100 필을하사하라는것이었다. 그러자사헌부 ( 司憲府 ) 장령 ( 掌令 ) 이감 ( 李堪 ) 이흉년으로인하여사방의백성들이굶주리고있고 30 석이면한고을을구제할수있는양인데이를봉선사에주어서함부로허비하는것은불가하다고아뢰었다. 그러나성종은이절에선왕의영정이있고대왕대비도여러번행차하였으므로이미잘생각해보고조처한것이라고하며들어주지않았다. 이후에도왕실의봉선사에대한관심은여전하여 1485 년 3 월에쌀과콩을아울러 60 석, 면포 50 필, 정포 10 필을내렸다. 창건이후성종대후반에는학조 ( 學祖 ) 가봉선사주지를맡고있었던듯하다 년 6 월에학조가아뢰기를 일전에저를봉선사의주지로명하셨는데강원도월정사 ( 月精寺 ) 에있는승려행겸 ( 行謙 ) 은일을주관할만한자이니청컨대본도의관찰사에게명하여말을보내어올라오게해주십시오. 라고하니성종은그의말대로따랐다. 이후학조는행겸과더불어봉선사를관리하였던것으로짐작된다 년 7 월에는, 봉선사주지학조가승정원에나아가절의곡식을동원하지말기를청한일에대하여홍문관부제학안처량 ( 安處良 ) 등이글을올려이의부당함을논하였으나성종은학조와봉선사를적극옹호하였다. 즉학조는본래사족의자손으로고금의사리를대강알고있으며범상한승려가아니므로낮추어대우하여서는안된다고하였다. 또한학조는선왕인세조도지극히공경하여항상승정원으로하여금접대하게하는등은총이매우두터웠고, 승려도나라의백성이므로곡식을주어굶주림을면하게하는것은당연하다고하였다. 그리고봉선사는선왕의진전 ( 眞殿 ) 이있는곳으로서항상화기 ( 火氣 ) 를금하고소제 ( 掃除 ) 하는일이긴요하므로거처하는승려가적어서는안되며절의곡식은정희왕후 ( 貞熹王后 ) 가내린것이니빼앗을수없다고하였다. 그러자안처량등은흉년이매우심하여나라의모든창고가텅빌지경이고민간이저장하고있는곡식까지찾아내어굶주리는백성의목숨을잇게하도록하는처지에유독봉선사에있는곡식만은학조의청으로인하여특명으로손대지않도록하는것은옳지않다고재차상소하였다. 이에대해성종은봉선사는선왕의진영 ( 眞影 ) 이있는곳이고, 선후 ( 先后 ) 도매우소중하게여기던절이므로다른절과아울러논할수없으며봉선사의곡식에관해서는신하들이상세히알바가아니라고하였다. 봉선사는창건된지얼마되지않아다시수리하는문제가제기되었다. 이미 1480 년에성종이봉선사를수리하라는명을내린일이있으나이때는별다른일이없었던것같다. 그러나 1488 년에이르러다시봉선사를수보 ( 修補 ) 할필요가있어청기와로전면개수하려고하였는데이때문에약간의물의가일어나게되었다. 원래절을중창하는것이아니라수리하는경우에는당국에알리지않아도되었으나, 1488 년 4 월에봉선사에서절을수리하겠다고예조 ( 禮曹 ) 에보고하였을때예조는선왕의진영이안치되어있는봉선사는다른절과다르므로그대로시행하라고하였다. 그러나때마침명나라사신이도읍에들어오는번거로움때문에공사가지연되었다. 그해 7 월에정언 ( 正言 ) 안윤덕 ( 安潤德 ) 과대사간 ( 大司諫 ) 윤민 ( 尹?) 은봉선사수리에공역 ( 功役 ) 이많이들뿐만아니라대궐에서도잘쓰지않는청기와를절에서쓴다는것은사리에어긋나는일이라고비판하였다. 또한지평 ( 持平 ) 이녹숭 ( 李祿崇 ) 은봉선사의건물이견고하지못하여훼손될때마다수리하는일은옳지않으며, 선왕의영정을절에안치하기보다는따로재궁 ( 齋宮 ) 을지어봉안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뒤이어서사간원대사간윤민등도글을올려원래봉선사창건당시에청기와를쓴것이기는하지만선왕의능묘에도쓰지않는청기와를백성들을수고롭게하고재물을허비하면서까지무익한절의건물에쓸것인지를다시생각해보고명령을거두어줄것을촉구하였다. 사간원사간이인형 ( 李仁亨 ) 등도글을올려사찰에청기와를쓴곳은봉선사뿐만이아니라원각사와장의사도있으므로봉선사를선례로하여다른사찰의수리때에도계속청기와의사용을막기위해서봉선사를청기와로개수하지말기를간청하였다. 이러한신하들의요청에대하여성종은이미수리하라는명령을내렸으므로더이상논란하지말라며끝내들어주지않았다. 봉선사의청기와개수이후에도왕실의봉선사에관한관심은여전하여곡식과면포를내리는일이계속되었다 년 9 월에는임금이광릉에거둥하여친히제사를지내고봉선전에나아가세조의진영을배알하고다례를행하였다. 이때봉선사주지승조징 ( 祖澄 ) 이음식을바치니호종한신하들에게내려주도록하였으며아울러봉선사에쌀과콩을합쳐 30 석, 면포 100 필, 마포 ( 麻布 ) 100 필을내려주었다 년 10 월에도봉선사는다른사찰에비할바가아니어서일찍이쌀과베를준전례가있으니봉선사에쌀 30 석, 면포와정포각 100 필을내려주도록하라는왕의명이있었다. 그러자호조판서이극돈 ( 李克墩 ) 과참판 ( 參判 ) 권건 ( 權健 ), 참의 ( 參議 ) 김우신 ( 金友臣 ) 이재정사정이좋지않거나국가에일이많을경우에는하사할때쌀만주고면포는주지않거나그양을줄여서주기도했으니봉선사에도줄여서줄것을건의하였다. 이건의를받아들여성종은면포와정포를각각 50 필줄여주도록하였다. 이에대해서집의 ( 執義 ) 이예견 ( 李禮堅 ) 과정탁 ( 鄭鐸 ) 은승려들이본래놀고먹는데다가주지또한가만히앉아서조세를거두므로, 봉선사에쌀과면포를내려준것은매우옳지못하다고비판하였다. 이에성종은봉선사와정인사 ( 正因寺 ) 에일찍부터곡식과베를준전례가있는데이는선왕을위한것이지승려를위한것이아니라고하였다. 또한동지사이세좌 ( 李世佐 ) 와사헌부대사헌이유인 ( 李有仁 ), 사간황사효 ( 黃事孝 ) 와장령양면 ( 楊沔 ), 지평유경 ( 劉璟 ) 과정언권류 ( 權瑠 ) 등이각각글을올려봉선사에쌀과면포를내려준것이부당하다고논하였으나성종은유시 ( 諭示 ) 한바있듯이승려들을위한것이아니고선왕을

241 위해주는것이라며신하들의주장을반박하였다. 이러한논란이있었던일주일후인같은해 10 월 27 일에호조 ( 戶曹 ) 에명을내려봉선사의예에의하여정인사에쌀 30 석과면포와정포각 50 필을하사하게하자, 정인사에는진전 ( 眞殿 ) 이없음에도불구하고쌀과베를내리는것은옳지못하다는신하들의반대가있었으나성종은역시들어주지않았다. 또한성종대에는봉선사에서거두어들이는전세 ( 田稅 ) 에관하여논란이있기도하였다. 즉 1492 년 12 월에봉선사의승려가, 절의토지에서거두어들이는곡식은선왕과선후를위하여수륙재 ( 水陸齋 ) 를마련하는데소요되는것으로절에서직접거두어들인것은그유래가이미오래되었는데, 이제직접거두지못하게하고대신군자창 ( 軍資倉 ) 곡식으로주니, 이것으로재를지내면아마도정결하지못할듯하므로예전대로절에서거둘수있게해달라고요청하였다. 이러한요청에대하여호조판서정숭조 ( 鄭崇祖 ) 등은모든전세를경창 ( 京倉 ) 에수납하게한것은민폐를덜기위한조치이므로절의전세도직접거두도록할수가없으며, 다만수륙재에쓰이는곡식은소격서 ( 昭格署 ) 에서받게하고그나머지는군자감 ( 軍資監 ) 에서받도록하는것이적당하다는의견을내놓았으므로그대로따르도록하였다.

24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2. 봉선사의창건과변천 3) 봉선사철거논의 창건이후왕실의지속적인후원을받았던봉선사는연산군대에이르러전례없는큰고초를겪었다. 연산군은집권초기에는사원과승려에대하여별다른조처를취하지않고전왕들과마찬가지로봉선사와원각사등의사원을후원하였으나집권후반기에는승과 ( 僧科 ) 를폐지하고선종과교종의본사인흥천사와흥덕사를없애는등불교계에일대타격을가하였다 년 ( 연산군 2) 2 월에는봉선사에서선왕을위한재 ( 齋 ) 를지낸것이문제가되어대간들이그부당함을논하였으나연산군은절에서재를지낸것은이전부터있었던일인데그허물을모두자신에게돌리니임금으로서는답할말이없다고하였다 년 4 월에는봉선사등 12 개의절과내불당 ( 內佛堂 ) 및선종과교종등의절에잡인 ( 雜人 ) 들이들락거리며폐단을일으키는것을엄히다스리도록하였다. 연산군은세상이다스려지거나다스려지지않는것은불교를물리치거나물리치지않는데달려있는것은아니라고하였으며, 같은해 9 월에는봉선사와내불당및원각사에지급하는물품을일찍이흉년이들었기때문에줄였는데, 이제그전과같이지급하라는지시를내리는등불교계를지원하였다. 집권전반기에불교에대하여적대감이거의없었던연산군의태도는후반기에는완전히바뀌어불교계를마구잡이로유린하였다 년 1 월에통례원 ( 通禮院 ) 인의 ( 引儀 ) 이간 ( 李墾 ) 은 국가에서선왕의능침을위하여다섯절을창건했고그중봉선사와정인사에는특별히토지와노비및장리 ( 長利 ) 곡식을하사하여승려들의생계비를충당하게했는데, 두절은오히려치부에열을올려받을빚이여러고을에가득하고흉년을헤아리지않고빚을독촉하여백성들의재산이이미고갈되었으니, 어찌놀고먹는사람으로하여금앉아서백성들의피와땀을빨아먹게할수있겠느냐. 고개탄하였다. 그리고 승려들은청정하게살고욕심을버리라는불교본래의가르침을저버리고돈놀이를기꺼이하여백성들에게폐단을끼침이적지않으니지금부터는머리깎는것을금지해서그들을군대의수효에충당시키고그곡식을거두어군대의비용에보태면나라의근본이더욱튼튼해질것이다. 라고주장하였다. 이러한건의가있은후에곧바로회암사와봉선사의주지들과도성밖에거주하는승려들에게두종파의도회소와원각사에출입하지못하게하라는명령이하달되었다. 그리고비구니들이왕래하는것도법으로써엄격히금지하게하고유생들이승려들과더불어교분을맺는것도제한하도록하였다 년 8 월에는일반인들의출입을금지하는금표 ( 禁標 ) 안에봉선사를포함시키는조처가취해졌다. 즉, 풍양궁 ( 豊壤宮 ) 을금표안에넣고광릉산천점도또한풍양산까지연이어모두표를세우고광릉봉선전과봉선사에출입할사람을다른능의예와같이그수를정하였다. 이어서이듬해 5 월에는광릉과봉선전의참봉을모두다없애고, 두곳의제물 ( 祭物 ) 은봉선사의승려들이조리하여제사지내게하였다. 그러다가 1506 년 3 월에는봉선사에있는세조의진영을다른곳으로옮기도록하고, 절에있는승려들을모두찾아내어머물만한자는장가들게하여금표내의밭을갈아살아가게하고사냥할때에사역시키도록하였다. 그나머지승려들은금표안에있는내수사 ( 內需司 ) 의종의집에부쳐살도록하였다. 또한외방의승려들에대해서도감사와수령에게명하여모두찾아내서절에머물만한자만남겨놓고그나머지는금표내의종의집에부쳐사역시키게하였다. 이에따라봉선사를비롯한사원들은거의텅빌지경에까지이르렀다. 한편중종대에는급기야봉선사를철거해야한다는논의까지나오게되었다 년 ( 중종 11) 5 월태학생유엄 ( 柳儼 ) 등은절에서기신재 ( 忌晨齋 ) 를지낸것을문제삼아왕릉곁에절을세우고절에서명복을비는행위를하지않기를바란다며기신재의폐지와봉선사의철거를주장하였다. 이에대해중종은절에서기신재를지낸것은그유래가이미오래되어태종도혁파하지못하였고, 세종도 기신재는선왕과선후를위한것이어서차마갑자기혁파할수없다. 하였으며, 성종조에대간도혁파하기를청하였으나윤허받지못하였는데어찌지금와서가벼이없앨수있겠느냐고하였다. 이러한논란이있었던이후에도선왕의명복을비는기신재는절에서계속베풀어졌던것으로짐작된다 년 9 월에는성균관진사박문수 ( 朴文秀 ) 등이글을올려근년이래로승려의무리가날로많아져서선비들을흘겨보기까지하는데칙령을내려호패를받은승려들을다시조사하여그들의호패를환수한다음군적에올리고, 숨어있는승려들을차근차근찾아내어농사를짓게해야한다고하였다. 나아가사찰을헐어버리고서적도태워버려야하는데반드시봉은사와봉선사로부터시작하여나머지사찰도모두이와같이하면농민이날로많아지고군대도충실해질것이며인륜을저버리고세속을어지럽히는폐단이없어질것이라고주장하였다. 사찰을헐어버리고없애자는성균관유생의주장에서보듯이봉선사는봉은사와함께맨먼저거명될정도로중종당시까지도서울근방의대표적인사찰이었다 년 6 월에는성균관생원유예선 ( 柳禮善 ) 등은, 유생들이먼저봉선사와봉은사를철거하여승려들의뿌리를뽑아버리자고청하자임금이듣지않고다만여러도의사찰을순차적으로철거하겠다며경기와전라도의사찰만철거한뒤에는더시행하지않은것을탓하고, 승려들의뿌리는봉선사와봉은사여서이두절을철거함으로써그뿌리를근절시킨다면나라의근본이튼튼해지고왕도가탕탕하여질것이라는내용의상소를올렸다. 이에대하여중종은두사찰은도적 ( 圖籍 ) 에기재되어있을뿐만아니라선왕의명복을빌기위하여창건된사찰이어서경솔히철거할수는없다고하며이들의요청을들어주지않았다.

24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불교정책과봉선사 * 2. 봉선사의창건과변천 4) 교종본사봉선사 명종이즉위한뒤그어머니인문정왕후 ( 文定王后 ) 윤씨가섭정을하면서불교는일시부흥의기운을보게되었다. 문정대비는양주회암사에와있던허응당 ( 虛應堂 ) 보우 ( 普雨 ) 를맞아들여선교양종을다시세우고승과를부활시켰다. 즉 1550 년 ( 명종 5) 12 월 15 일에선교양종을다시둘것을명하였는데그이유와하교의내용은다음과같다. 양민의수가날로줄어군졸의고통스러움이지금보다더한때가없다. 이것은다른까닭이아니라백성들이 4 5 명의아들이있을경우에는군역 ( 軍役 ) 의괴로움을꺼려서모두도망하여승려가되는데이때문에승도 ( 僧徒 ) 는날로많아지고군액 ( 軍額 ) 은날로줄어드니매우한심스럽다. 대체로승도들중에통솔하는이가없으면잡승 ( 雜僧 ) 을금단하기가어렵다. 조종조의 대전 에선종과교종을설립해놓은것은불교를숭상해서가아니라승려가되는길을막고자함이었는데근래에혁파했기때문에폐단을막기가어렵게되었다. 봉은사와봉선사를선종과교종의본산으로삼아서 대전 에따라대선취재 ( 大禪取才 ) 조및승려가될수있는조건을신명하여거행하도록하라. 즉, 선교양종의제도를없애버림으로써도리어백성들이마음대로승려가되어군액이모자라는등의폐단이생겼으므로이를시정하기위하여다시양종을두게한다는것이다. 그다음날사헌부가선종과교종을다시두라고한명령을거두어달라고하자, 명종은재차선종과교종에관한일은불교를숭상하기위해그렇게한것이아니라군역을꺼리는백성들의태반이승려가되기때문에이폐단을없애기위하여조종조의법을거듭밝혀백성들이제멋대로승려가될수없도록봉은사와봉선사에선종과교종을다시세운것이라고하였다. 양종이부활됨에따라양종판사의제도도부활되었는데, 봉은사와봉선사의주지가각각선종과교종의판사직을맡게되었다. 그리하여봉은사를선종본사로, 봉선사를교종본사로삼아 1551 년 6 월에는보우를 판선종사 ( 判禪宗事 ) 도대선사 ( 都大禪師 ) 봉은사주지 로, 수진 ( 守眞 ) 을 판교종사 ( 判敎宗事 ) 도대사 ( 都大師 ) 봉선사주지 로임명하였다. 그리고이듬해에는양종의승려선발고시인승과를실시하였다. 그러나 1565 년 4 월에문정대비가세상을떠나자모처럼의종단부활은중도에서좌절되고말았다. 즉문정대비사후에다시양종의폐지와더불어공적인양종판사의직제는없어졌던것이다. 명종대에는봉선사승려의비행으로절의주지인수진을문책하는것이문제가되기도하였다 년 3 월 15 일자실록기록에의하면봉선사의승려불각 ( 佛覺 ) 이도둑질을하다가세사람을죽였는데양주와포천에서그를체포하려하자봉선사주지수진이 불각은그날불사 ( 佛事 ) 때문에외출하지않았다. 고하였다가그정상 ( 情狀 ) 이탄로난뒤에는다시 불각은연전에이절에서떠났으므로있는곳을알수없다. 고하였다는것이다. 이보고를들은명종은작은죄도아닌살인을한중죄인을절에서숨겼을리가없다고하며사대문을닫고수색하고또절의중들을점검하게하였다. 그러자 3 월 24 일에는사간원에서, 불각이라는승려가일가족 3 명을죽였으니곧대역부도 ( 大逆不道 ) 의죄로능지처참해야하며봉선사주지수진은죄인을숨기고내어주지않았으니살인자를숨겨준죄로처벌해야한다고간하였다. 이에따라수진을하옥시키기는했지만율에따라살인자를숨겨준죄를따로처벌하지않는것에대해신하들이여러번간하였으나명종은끝내들어주지않았다. 봉선사는임진왜란때왜군의방화에의하여불타버렸는데그와중에광릉참봉으로있던이이첨 ( 李爾瞻 ) 이세조의영정을구해낸것이 선조실록 에특기되어있다. 왜란이발발한후봉선사의승려삼행 ( 三行 ) 이영정을봉선전에묻어두었는데뒤에적에게발각되어영정을찢어버리려고하는것을삼행이애걸하여보전해서절의은밀한곳에봉안해두었다. 그뒤왜군이더욱날뛰어날마다광릉근처에불을지르므로이이첨이일의급박함을듣고개성에서곧장적진을가로질러낮에는숨고밤에는걸어서광릉에이르렀는데왜적들이불을질러화염이하늘을찌르는등사태가점점긴박해졌다. 날이어두워져서야이이첨이삼행에게영정이있는곳을물어창황중에받들고나오는데이때불길은벌써절앞골목어귀까지번졌다. 이이첨은숲속을헤치고하룻밤에 90 여리를걸었으며적의진영을두번만났으나간신히빠져나와곧바로행재소 ( 行在所 ) 로나아가영정을바쳤는데 1593 년 ( 선조 26) 3 월 16 일의일이었다. 이에임금이백관을거느리고 5 리쯤나와서맞아들였다. 이때원천군 ( 原川君 ) 은급히글을올려이이첨이나라를위하여몸을돌보지않은의리를진언하였으며, 그날밤경기방어사 ( 防禦使 ) 가봉선사의본전과광릉의재실 200 칸이모두불에탔다는소식을행재소에급히알려왔으므로여러신하들이모두이이첨이세조의영정을받들고온것을다행스럽게여겼다고한다. 임진왜란때에역대왕의영정이다적의화를면치못하였는데유독집경전 ( 集慶殿 ) 참봉홍여율 ( 洪汝栗 ) 이태조의영정을받들었고광릉참봉이이첨이세조의영정을받들어끝까지보존해냈다. 이이첨은임진왜란이일어난처음부터피란할생각을하지않고의병을모아늘군막에있었으며또적의불길속에서영정을받들어내왔으므로사람들이모두다의롭게여겼다. 이상으로봉선사의창건과시기별변화상에대해살펴보았다. 봉선사는 1469 년 ( 예종 1) 세조의원찰 ( 願刹 ) 이된이후조선불교사뿐만아니라한국현대불교사의중심에위치하게되었다. 예컨대 1551 년 ( 명종 6) 에는교종을대표하는사찰로승격되었으며당시수렴청정을하고있던문정왕후의지원으로불교계에새로운활력을불어넣었다. 이밖에도봉선사는 1790 년 ( 정조 14) 에용주사 봉은사등과함께 5 규정소의하나로지정되어함경도일원의사찰을감독하기도하였다 년 ( 광무 6) 에는경기도내의본사가되었으며, 1968 년에는제 25 교구의본사가되어오늘날에는고양군을제외한한강이북 10 개군에걸쳐 82 개소의말사를관장하고있다. 한편봉선사에주석했던인물가운데월초거연 ( 月初巨淵 : ) 은 1906 년서울동대문밖에명진학교 ( 明進學校 ) 를열어청년승려들의교육을시작하였는데이것이오늘날동국대학교의효시였다. 운허용하 ( 耘虛龍夏 ) 또한 1946 년에광동학교를개설하고교장으로취임하였으니현재의광동중학교 광동종합고등학교 광동여자고등학교의모체가된다. 그리고그는 1963 년동국역경원 ( 東國譯經院 ) 을설립하여고려대장경 ( 高麗大藏經 ) 을우리말로옮겨불교의대중화에적지않은기여를하였다.

24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4 절임진왜란 * 조선시대의한성부와그주위의경기지역, 즉오늘날의수도권지역은각지방의다른지역들에비하여행정구획상많은변화를겪었던곳이다. 당시한성부관내 ( 管內 ) 와는무관하던지역들이현재는서울특별시행정구획안에편입되어있는가하면, 서울과인접한경기도내시 군들의명호 ( 名號 ) 관호 ( 官號 ) 경역 ( 境域 ) 들이조선시대에그자리에있었던군현들과는크게달라져있음을볼수있다. 특히조선시대의경기도양주목 ( 楊州牧 ) 과현재그지역의변화상이야말로가장대표적인예라고할수있다. 그러므로현재의남양주시 구리시 의정부시, 그리고양주군등의지방사를서술하는문제는자연히양주목의역사를충실히구성하는것에서부터시작해야할것이다. 따라서여기에서는임진왜란초한성부가왜군의수중에들어간직후양주목을중심으로한경기도의실정이어떠했는지에대해먼저알아본다음, 양주목관내또는그주위에서벌어진왜군과의전투상황, 또한당시양주와관계있었던인물들의활약상에대해서도함께살펴보고자한다.

24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4 절임진왜란 * 1. 도성의함락과경기지역의실정 1592 년 4 월 14 일소서행장 ( 小西行長 ) 이지휘하는왜군선발대가부산성을공격함으로써시작된임진왜란은곧바로수도한성을향한왜군의공격으로계속되었다. 조정에서는 4 월 17 일경상좌수사박홍 ( 朴泓 ) 으로부터최초로급보에접한뒤이어서경상관찰사김수 ( 金?) 의보고가있자사태가심상치않음을깨달았다. 잇따른변보는경상도의여러고을이일시에적의수중에들어가고말았다는것이다. 이에조정에서는비상대책으로신립 ( 申砬 ) 을도순변사, 이일 ( 李鎰 ) 을순변사, 김여물 ( 金汝?) 을종사관으로임명하여왜군의급침에대비하는한편, 김성일 ( 金誠一 ) 을경상우도초유사, 김륵 ( 金?) 을경상좌도안집사로삼아민심의수습과왜군에대한항전을독려케하는조치를취하였다. 조정과백성들은신립을주축으로한장수들이북상중인왜군을조령등지의요해처에서능히저지할수있을것으로믿고있었다. 그러나 4 월 25 일순변사이일이상주에서, 4 월 28 일신립이충주탄금대 ( 彈琴臺 ) 에서배수진을치고기다렸으나거듭패전하였다는소식이조야에전해지자이로인한충격은매우컸다. 한편이일과신립이서울을떠난뒤조정에서는왜군의공격에대비하여도성의방비조치를취하였다. 우의정이양원 ( 李陽元 ) 을수성대장으로, 이진 변연수 ( 卞延壽 ) 신각 ( 申恪 ) 을좌 우 중위대장으로, 박충간 ( 朴忠侃 ) 을경성순검사로, 윤탁연 ( 尹卓然 ) 을부순검사로삼고, 김명원 ( 金命元 ) 을도원수로삼아한강을지키게하고경기감사에게주민과군사를징발하여얕은여울을파서적의도강을저지하게하였다. 그런데당시지방의군사는모을수없었고도성의장정들은대부분징발되었으므로도원수라할지라도군사를거느리지못한실정이었다. 따라서결국은도성을비우고모두서울을떠날수밖에없었으니장안의민심은날로흉흉해져피란가는사람들이줄을잇기시작하였다. 이와같이수도한성이위기에휩싸이게되자 4 월 29 일조정에서는종친과대신들의건의에따라평양으로몽진하였고명나라에구원요청할것을결정하였다. 또한함경도에는임해군 ( 臨海君 ) 을, 강원도에는순화군 ( 順和君 ) 을파견하여구원병을모으게하고이원익 ( 李元翼 ) 과최흥원 ( 崔興源 ) 을평안도와황해도의순찰사에각각임명하여근왕군을모집하도록하였다. 다음날인 4 월 30 일새벽선조일행은평양을향하여도성을출발하였다. 그들이도성을벗어난직후수도한성은극도의혼란에빠져들었다. 국왕의서천 ( 西遷 ) 소식이전국에전해지자백성들의불안감은더해갔고, 따라서아직왜군이쳐들어오기도전에피란소동이일어났다. 이같은현상은일반백성들만의예가아니었고고위층관료들사이에서도흔히있었던일이었다. 즉전라도관찰사이광 ( 李洸 ) 이도내관군을이끌고도성의방위를위하여북상하던중공주에이르렀을때선조가서울을떠났다는소식에접한다음현지에서군대를해산시킨것도그한예라하겠다. 이렇게되자도성에남아있던일반백성들뿐만아니라사대부들사이에서도 나라가반드시망하고만다. 는유언비어가나돌게되었고도성안에서는난동을부리는백성들까지나타나기시작하였다. 이들난민들은먼저노비문서가보관되어있던장례원과형조의관사를불태운뒤,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등의궁궐과관아를약탈하거나방화하였다. 이때왜군은부산에상륙한후불과 20 일만에한성에당도하였다. 한강방어의책임을맡았던도원수김명원이한강에서후퇴하여임진강에진을치고, 수성대장이양원과부원수신각이서울을포기하고양주관내로물러나자 5 월 2 일한강을건넌왜군은이튿날도성에진주하게되었다. 뒤에서다시설명하겠지만바로이무렵양주로후퇴했던신각이흩어진군사를수습하고있을때, 때마침함경도남병사이혼 ( 李渾 ) 이휘하군사를거느리고서울로가던도중에양자의합류가이루어지면서유명한 해유령전첩 ( 蟹踰嶺戰捷 ) 을가능케한것이다. 당시신각과이혼은이미도성을유린한왜군이인근지역에출현하여약탈을자행한다는정보를입수한뒤양주의해유령에복병을대기시켰다가적을기습공격함으로써적병 70 명을참살하였던것이다. 이전투는왜군의상륙이후적을공격하여우리측의피해없이승리를거둔 최초의전승 이란점에서매우중요한의의를지닌다. 한편, 이에앞서 선조실록 을통해왜군이도성을점령하게된과정에대하여좀더살펴보면다음과같다. 적들이충주에도착하여그들정예병을아군처럼꾸며경성 ( 京城 ) 으로잠입시켰다. 왕의파천이이미결정되었음을염탐한뒤에드디어두갈래로나눠진격하였으니, 왜군은양지 용인을거쳐한강으로들어오고나머지왜군은여주 이천을거쳐용진으로들어왔다. 적의기병 ( 騎兵 ) 두어명이한강남쪽언덕에도착하여장난삼아헤엄쳐건너는시늉을하자우리의장수들은얼굴빛을잃고부하들을시켜말에안장을얹도록명하니군사들이모두붕괴되었다. 이양원등은성을버리고달아났고, 김명원 신각등은뿔뿔이흩어져도망하였으므로도성이텅비게되었다. 적이흥인문 ( 興仁門 ) 밖에이르러서문이활짝열려있고시설이모두철거된것을보고의심쩍어선뜻들어오지못하다가먼저십수명의군사를뽑아입성시킨뒤수십번을탐지하고종루 ( 鍾樓 ) 에까지이르러군사가한사람도없음을확인한뒤에입성하였는데, 발들이모두부르터서걸음을겨우옮기는형편이었다고한다. 이때궁궐은모두불탔으므로왜적대장평수가 ( 平秀家 ) 는무리를이끌고종묘 ( 宗廟 ) 로들어갔는데밤마다신병 ( 神兵 ) 이나타나공격하는바람에적들은놀라서서로칼로치다가시력을잃은자가많았고죽은자도많았다. 그래서수가 ( 秀家 ) 는하는수없이남별궁 ( 南別宮 ) 으로옮겼다. 이것은한고조 ( 漢高祖 ) 의영혼이왕망 ( 王莽 ) 에게위엄을보인것과다를바없다. 위의글에서먼저쉽게알수있는사실은당시의우리국방력내지군사력이얼마나허술하였으며, 소위지휘관이란사람들의무능함이어느정도에이르고있었는가에대해서이다. 이와같은실정에서도성을장악한왜군의횡포와만행은이루말할수없었다. 도성의사족 ( 士族 ) 들이처음에는모두멀리피해달아났고, 일반백성과천민들도가까운경기도각지에흩어져달아났다. 그런데적병들이방 ( 榜 ) 을내걸어불러모으자점점모여들어빈집과골목들이모두꽉차게되었다. 적이성문을지키면서적첩 ( 賊帖 : 왜군이발급한증명서 ) 을휴대한사람은출입을허용하였으므로백성들이모두적첩을받게되었다. 그리고불량한젊은이와무뢰배들이모두적에게붙어그들의앞잡이노릇을하며못된짓을저지르는경우도많았다. 왜군은그들의금계 ( 禁戒 ) 를강화하면서조선사람들의고자질하는길을열어놓았으니간사한백성들이이로써상을받기도하였다. 또왜군들은서로모여말을하거나거동이수상한자는모두태워죽였는데동대문밖에해골들이산더미처럼쌓여있었다는기록들이당시한성의처참한실상을말해준다. 도성함락이후소서행장의군사는평안도로, 가등청정 ( 加藤淸正 ) 의군사는함경도로, 그리고흑전장정 ( 黑田長政 ) 의군사는황해도로진로를정하는한편, 도성을지키는부대와강원도 전라도 경상도방면을맡는군사와후방의안전및보급로확보를위한부대를따로배치하였다. 이때전수성대장이양원, 순변사이일, 전부원수신각등은연천의대탄 ( 大灘 ) 근처에위치하고있었으며도원수김명원과도순찰사 ( 都巡察使 ) 한응인 ( 韓應寅 ), 경기감사권징 ( 權徵 ), 방어사신할, 조방장유극량 ( 劉克良 ) 등은모두임진강변에진을치고있었다.

246 김명원은전군을강변에배치하여북상하는적군을막아내게하였으며, 강위에있는모든선박들을거두어북쪽의강언덕에집결시켰다. 이에적은임진강남쪽에접근하여진지를구축한다음, 조선측의도전을기다렸다가거짓으로퇴각하는계교를꾸며조선측군사들을유인하였다. 이와같은적의계략을제대로간파하지못한방어사신할과경기감사권징등이배를타고적군을추격하였다. 적진이위치한남쪽강변에이르렀을때일시에적의복병이일어나급습을가해왔고, 난전끝에조선군대는크게패하고말았다. 이싸움에서방어사신할과조방장유극량이전사하였으며, 도원수김명원과도순찰사한응인등은이곳을피해평양의행재소까지퇴각하였다. 임진강전투의패보를접한조정에서는마침내이덕형을구원사로삼아명나라에원군을요청하기로하였다. 이로부터왜군은임진강을건너조선이포기한개성을장악한뒤 6 월초다시이곳을출발하여황해도안성역에이른다음여기에서가등청정군은함경도로, 소서행장군은평안도를향해진격을계속하였다. 그후수도한성과인근의경기일원은왜군의소굴처럼되어좀처럼회복하기어려운실정에놓이게되었다. 양주목사고언백 ( 高彦伯 ) 이이끄는군사들이모두서울과양주지역출신들로서수도권의사정을잘알고있었으므로수시로게릴라전을통하여왜군을괴롭히는한편, 도성내의실정을정탐하여조정에보고하는등그들의활약이적지않았지만수도권의적세는여전히높기만하였다. 명군이처음진주할무렵에는적세가크게위축되어서울의숙청문 장의문 동소문까지는모두성을수비하는적병들이없었으므로도성의북쪽은텅비어있었다. 단지남쪽에만산위에까지왜군이주둔해있었는데그병력과군세는적었고, 또행주산성에서의패전으로인해죽은자들이태반이었다. 그러나점차경기이북지역에주둔하고있던왜군은모두서울로돌아왔고, 강원도원주지역의적들까지서울의흥덕동 ( 興德洞 ) 백자정 ( 栢子亭 ) 부근에내려와대오를정렬하였다. 그뿐만아니라도성안에서는적이남대문안에서모화관 ( 慕華館 ) 근처에이르기까지진을쳐서용산창 ( 龍山倉 ) 을잇는가하면, 평양에서도망쳐온적의군사들이또성을쌓고진을치고있었다. 한강에도적진이있어다리를걸쳐놓고이쪽저쪽을오가고있었으니, 선조실록 에는사평원 ( 沙平院 ) 과천현 ( 穿峴 ) 으로통하는길목에많은적병들이출몰하여, 수원 금천 청회일대에는날마다분탕질이그치지않았다고전하고있다. 임진왜란이일어난후도성의주변상황에대하여는 1593 년 9 월, 현지를직접답사한후선조에게보고한대사헌김응남 ( 金應南 ) 의다음글이그실상을잘말해준다. 종묘 사직과궁궐은모두불타허물어졌고큰집과일반민가들도거의무너져연기만자욱하며백골이종횡으로흩어져있어산하는그대로이지만시가지모습은이미변해버렸습니다. 어찌성대 ( 聖代 ) 에이렇듯난리로상란된참담한모습을바라보게될줄생각이나했겠습니까. 도성백성으로서산야에도망하여숨어있던사람들이처음왜적이물러나고대가 ( 大駕 ) 가돌아올것이라는말을듣고서는서로들경성으로들어갔는데, 대가는아직진주 ( 進駐 ) 하지않으셨고창고에는저축된곡식도없었습니다. 진제장 ( 賑濟場 ) 을설치하기는하였으나그것으로서는굶주린백성을구제할수가없어서하루에도죽는백성이얼마인지를알수없을정도였습니다. 그래서죽은시체가길에가득하고썩은살점이냇물을막고있으며살아남은사람들도모두도깨비같은몰골이되어스스로들마침내는다죽게될것으로알고노인은부축하고어린애는끌고서줄지어도성을빠져나가고있었으며, 도성백성들이대가가돌아오기를기다리는것은어린아이가어머니를기다리는것같은정도가아닙니다. 어떤자는길거리에서슬피울면서 대가가언제쯤이나돌아와서우리들을죽음에서구제해주려는가. 하였는데그비참한형상은차마볼수가없었습니다. 그리고경성주위의수백리지역은초목이우거져새와짐승이노는장소가되었으며, 어떤백성은파괴된곳에돌아와거접 ( 居接 ) 하였다가중국군의뒷바라지와빈번하게오가는사신들의접대에시달려고혈 ( 膏血 ) 이모두말라서다시회생할가망이없으므로하늘을원망하고울부짖으며죽으려해도못하고있는가하면, 숲속에서목매어죽기도하고말앞에뛰어들어밟혀죽기도합니다. 백성들이이러한실정이니나라의형편을알만합니다. 그중에양주 포천 파주 고양 교하 풍덕 양천 김포 부평 금천 과천 용인 죽산 광주가더욱심하게판탕되었습니다. 경성과용산의창고에있는쌀은 1 만여석밖에되지않는데중국군과우리의백관들이모두그것에매달려먹고있습니다. 그러니한달이못가서반드시다소비되고말것입니다. 수송대책을지금비록강구한다고하더라도양식은적고먹을사람은많기때문에수급하기가사실상어렵습니다. 서울과경기지역에굶어죽은시체가잇달았어도구제할대책이없어오래지않아모두죽게되고말것이니더없이염려스럽습니다. 도성과경기도의구황책 ( 救荒策 ) 에있어서는이미진휼사와구황어사 ( 救荒御史 ) 등의관원이있으나대체로곡물이결핍되어마치밀가루도없이수제비를만들려는것과같습니다. 즉, 도성의궁궐은말할것도없거니와서울의시가지전역이온통폐허화하였고, 한성을포함한양주 포천 고양등인근지역의전쟁피해가특히심각하였음을말해주고있다.

24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4 절임진왜란 * 2. 해유령전투의승리와그의미 임진년 (1592 년 : 선조 25) 5 월초 2 일한강전투에서패한조선군대가임진강방면으로퇴각한후약보름이지난 5 월 일경양주목관내에서는전략상매우중요한의미를갖는전투가벌어졌다. 양주땅산곡간의해유령에서벌어진해유령전투 ( 게재싸움 : 게너미재싸움 ) 가그것이다. 한강에서퇴각하던날부원수신각은임진강으로달아난도원수김명원을따르지않고수성대장이양원을따라양주로물러났다. 여기에서그는흩어진군사들을다시모아전열을가다듬었다. 또한당시함경도남병사로있던이혼 ( 李渾 ) 이부하군사들을이끌고도성수비를위해서울로들어오던중신각의군사와조우하면서합동작전이펼쳐지게되었다. 그러나구체적인기록이없어참전경위에대해자세히알수는없다. 다만인천부사이시언 ( 李時言 ) 이이전투에돌격장으로참가하여큰공을세웠는데, 그는이미양주관내에주둔해있으면서적을물리친경험이있었다. 해유령에서의전투과정과그전과를알아보기에앞서먼저이시언과관련하여양주에서의선행전투가있었던사실부터살펴보기로한다. 선조실록 임진년 5 월 20 일조의비변사계문 ( 啓文 ) 에의하면다음과같은내용이기록되어있다. 해유령싸움의승리에대한논공행상은마땅히그주장이등급을아뢴뒤에라야시행할수있습니다. 그러나돌격장인천부사이시언은지난번양주의장수원 ( 長壽院 ) 싸움에서도힘껏싸워진을뚫었는데지금또먼저성벽에올라가적병을 3 명이나죽였으니, 우선당상관에특별히가자 ( 加資 ) 하시어싸움에나간병사들의사기를격려하소서. 하니상이따랐다. 위의글은비변사가선조에게인천부사이시언의전공을포상하여당상관에올려줄것을건의한내용이다. 이같이해유령전투에서는이시언이돌격장으로활약하였으며이전투이전에양주장수원에서는또다른전투가펼쳐졌고거기에서도그가용전하였음을알수있다. 이것으로볼때임란초한강저지선이무너진뒤양주관내에서는해유령전투만있었던것이아니라그전후에도크고작은전투가계속되었다고하겠다. 해유령전투가벌어지기에앞서양주경내에서적정을살피고있던부원수신각은도성에주둔하고있던적의한부대가양주를중심으로한지역에자주출몰하여식량을약탈한다는정보를입수하였다. 그는곧바로왜군의행동경로를자세히확인한다음, 이혼의군사와합세하여대오를편성한뒤해유령근처에매복했다가귀로의왜군을요격하기로하였다. 기다리던왜군이해유령부근에나타났을때관군은현지의지형지물을이용하여적의동태를세밀하게정찰한다음일시에기습공격을감행하였다. 오합지졸의행태로경계도없는가운데약탈한우마와식량을수레에싣고서울로돌아가던적진을완전히포위한다음, 신각의명령에따라급습을가하였다. 적은뜻밖의기습을받자말들이놀라뛰고군사들이겁에질려흩어져달아나는등좌충우돌의수라장속에서순식간에 70 여명의군사를잃고말았다. 이전투는임진왜란이발발한이후조선측으로서는추풍역전투에이어두번째로거둔전승이었으며, 수도권에서벌어진전투에서는최초로거둔완승이었다. 특히중요한것은적의선발대가도성을장악한직후그위세를부리며온갖만행을자행하는가운데이나라에는군대가있어도없는것과같다고으시대고있을무렵에적을제압하였다는점에서더욱큰의미가있다. 즉, 한편으로는경기지역에있던왜군에게심리적인타격을줌으로써그후그들은함부로군사행동을할수없게되었으며, 다른한편으로는한강패전이후거의절망적인상태에빠져있었던조정에국력회복의의지를갖게해주었다. 이렇게볼때해유령전승의전략적의의는결코작은것이아니었다. 한편, 부원수신각은이전투가끝난직후군령불복종이란죄목으로죽음을당하였다. 앞에서이미밝힌대로신각은부원수로서처음에도원수김명원을따라한강방전에참가하였는데, 명원의군사가패하자이양원을따라양주에와서흩어진군사들을수습하여해유령전투를주도했던것이다. 그런데이양원은당시산골짜기에있었으므로상황의보고가끊겼고, 김명원은신각이이양원을따른다고핑계대고도망쳤다는내용의장계를조정에올려그의처벌을주장하였다. 이에우의정유홍 ( 兪泓 ) 이선조에게글을올려선전관을보내곧바로신각을참형케하였다. 선전관이떠나고난뒤해유령의승전보가이르렀으므로조정에서는바로뒤따라선전관을보내신각의처형을중지하도록하였으나미치지못하여억울한죽음을당하게된것이다. 유성룡 ( 柳成龍 ) 은 징비록 에서해유령전투의주장으로활약했던부원수신각에대하여다음과같이서술하였다. 부원수신각은양주에서적과싸워적을패퇴시키고적의머리 60 여급을베었으나조정에서는선전관을보내군중에서그를베어죽였다. 각 ( 恪 ) 이처음엔김명원을따라가부원수가되었는데한강싸움에서무너졌을때각이명원을좇지않고수성대장이양원을따라경기도양주로갔었다. 때마침함경도남병사이혼의군사가도착하였으므로각이합세하여경성에서흩어져나와민가를약탈하는적을맞아싸워이를깨뜨렸다. 왜적이우리나라에쳐들어온이래이번의승첩이처음이었으므로사람들이모두춤추고뛰면서좋아했다. 그러나김명원이임진강에서장계를올려선조에게보고하기를, 각이제마음대로다른곳으로가버리며호령에복종하지않습니다. 라고하였다. 이에우의정유홍은각이군령을어겼다하여임금께베어죽일것을주청하였다. 그리하여선전관이이미떠났는데각이해유령에서승리하였다는보고가들어왔다. 이에조정에서는급히사람을시켜쫓아가그의참형을중지시키게하였으나미처가기도전에각은이미죽음을당하고말았다. 각은비록무관이었으나평소에청렴하고조심성있는사람이었다. 일찍이연안부사로있을때성을쌓고호를파고군기를많이준비하여두었으므로뒤에이정암 ( 李廷콬 ) 이연안을지켜성을보존할수있었으니사람들은이것을각의공이라고말하였다.* 유성룡이쓴대로그는무관이었지만청렴결백하였으며, 임진왜란전에연안부사로있을때연안성의관방시설을완비하는데최선을다함으로써훗날연안대첩을가능케하였으니그의공이해유령승첩에만있는것이아니었음을알수있다.

24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4 절임진왜란 * 3. 남한강마탄전투 ( 馬灘戰鬪 ) 와변응성의활약 임진년 6 월초전라 충청 경상 3 도의근왕군은경기도관내에까지진군, 대기해있다가용인관내에서왜군과의접전끝에패퇴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이이끄는전라도관군을주축으로한약 5 만의 3 도연합군이일시에패산하였다는소식이피란정부에전해지자그충격은매우컸다. 그러나그로부터불과며칠후, 가까운남한강유역의여주방면으로부터거듭승전보가들어옴으로써용인패전으로인한수도권에서의퇴세를만회하기시작하였다. 남한강유역에자주드나들던왜적은강원도원주에주둔하고있던모리길성 ( 毛利吉成 ) 휘하의군사들이었는데, 여주의구미포 ( 龜尾浦 ) 에서벌어진전투에서는강원도조방장원호 ( 元豪 ) 가이끄는향병이그들을물리쳤다. 또한마탄 ( 驪江의말여울 ) 에서는이천부사변응성 ( 邊應星 ) 과원호가합동작전을펼쳐전승을거두었다. 그런데이지역의전황에대하여는그구체적인사료가거의남아있지않은가운데이형석의 임진전란사 만이단편적인사료들을엮어구미포전투와마탄전투에대한개괄적인상황을정리해놓았을뿐이다. 따라서여기에서는남양주출신의인물변응성의활약에관련하여그의활동상과마탄전투에대하여만살펴보고자한다. 변응성의본관은원주이며그의부친은공조판서를지낸변협 ( 邊協 ) 으로서대대로현재의남양주지역에거주하였다 년 ( 선조 12) 무관에급제한뒤, 1590 년강계부사로있을때부친상을당하여일시관직을떠났다. 임진왜란이일어난직후경주부윤에임명되었으나왜군이이미경주를장악한후였으므로현지에부임하지는못했다 년이듬해유성룡의천거에의해경기도방어사와이천부사를지냈는데, 이때여주목사원호와의합동작전에의해남한강마탄전투에서적을무찔러큰전공을세웠다. 그후전쟁이교착상태에빠졌던 1594 년경기도방어사로있으면서양주 이천 광주일대에출몰하는토적을소탕하여무위 ( 武威 ) 를떨쳤다. 그리고용진에나아가진을치고군사훈련을계속하는가운데둔전 ( 屯田 ) 을설치하여군량확보에도공을세웠다. 이무렵모친상을입었으나선조로부터기복종군 ( 起復從軍 ) 의권유를받고전란극복을위해더욱힘썼으니, 당시 선조실록 사관 ( 史官 ) 은변응성에대하여평가하기를 용진은한강상류인데왜적이당초에이곳으로건너왔기때문에변응성으로하여금승군을모아이곳에서조련시키고아울러둔전을개간하게하니지난날이곳을떠난백성들이차츰모여들고도적떼가감히도적질을자행할수없게하였다. 고하였다. 그뒤 1596 년 ( 선조 29) 이몽학의난이일어났을때는용진과여주의파사성 ( 婆娑城 ) 을수비하면서역시승군들을동원, 용진토성 ( 龍津土城 ) 을수축하고군기를정비하는데진력하였다. 임진왜란이끝난이후광해군초에는관직이한성판윤에까지이르렀으나 1612 년 ( 광해군 4) 박응서 ( 朴應犀 ) 의옥사에연루된일이있었다. 그러나곧바로누명을벗었고, 사후에병조판서에추증되었으며양혜 ( 襄惠 ) 라는시호를받았다. 현재원주변씨의세거지가위치하고있는조안면진중리에그의묘소가있다. 다음으로 임진전란사 에서술된내용을중심으로변응성이마탄에서왜군을섬멸하는과정에대하여살펴보고자한다. 그가여주목사겸강원도조방장이었던원호와합동작전으로이전투를승리로이끈것은임진년 6 월중순의일이었다. 6 월 10 일경여주구미포에서적을물리친여주목사원호는계속적의동정을살피던중가까운마탄방면에적병이나타나방화와약탈을자행하고있다는정보를입수하였다. 그는이사실을이천부사변응성에게급히알리고서로협력하여합동작전을펼치기로약속한다음, 한강위에미리선박을비치하여작전을개시하였다. 변응성은아침안개가자욱한시점을이용하여배위에활쏘는군사들을태운다음그위에덮개포를덮어마치짐실은선박처럼꾸민뒤에마탄을향하여출전하였다. 이때그곳에서약탈을일삼고있던적들은좋은약탈물을발견하고모두강언덕에나와기다리고있다가강가에정박하도록명령하였다. 한편, 배안에숨어있던우리측군사들은미리전투준비를갖춘다음강변에접근하자마자일시에적들을향해화살을쐈다. 적은급습을받고순식간에수십명이현장에서즉사하였고나머지군사들도황급히도망쳐달아났지만변응성의군사들이뒤쫓아계속공격을가함으로써거의격멸되어살아달아난자가많지않았다. 그리하여아침에해가떴을무렵에는적의근거지를완전히소탕하고군기와각종군수물을모두노획하여선박에가득싣고돌아오게되었다. 왜군은이전투의패전으로서울에서원주로통하는보급선이끊어지게되었으므로충주로통하는선에서보급을받아야했다. 따라서적의후방연락은이후큰차질을빚게되었으며, 반면에여주 이천 양근 양주등지의백성들은왜군의방화 약탈등의전쟁피해에서벗어나게되었으니이것은모두변응성과원호의용전, 즉마탄승첩이가져온결과였다.

24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4 장조선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4 절임진왜란 * 4. 양주목사고언백의활약 전란중수도한양에서가장가까운고을가운데하나였던남양주지역은남부일면을제외한관내전역이산간지대로서왜군의작전전개에는어려움이있었지만, 반대로조선군에게는유리하였다. 그이유는현지의지리적조건을이용하여유격전을펼칠수있었기때문이다. 도성이함락된직후부터왜군은서울주변의여러곳에군진을설치하였는데남양주지역에쳐들어와분탕질하는예가한두번이아니었고, 따라서이지역의한방면은적이차지하고있었던것도사실이다. 그러나현지를지키는우리측의군사가관내곳곳에매복하고있다가큰타격을주었기때문에그들뜻대로군사행동을펼치지는못하였다. 임진년말경의통계에의하면전국에포진해있던조선군의총병력은약 17 만 2000 명이었는데그가운데서울과경기도에주둔하였던병력은약 3 만에이르렀으며, 남양주지역일대에는당시양주목사고언백이이끄는군사 2000 명이지역방위를맡고있었다. 그런데한때는고언백 이시언 ( 李時言 ) 정희현 ( 鄭希玄 ) 박명현 ( 朴名賢 ) 등이이끌던관군이모두양주지역에주둔해있었으며, 고언백이인솔한군사들은모두가이지역사람들이었으므로그의군졸들로정찰하게하고다른장수들은각자가인솔한병사들로기각지세 ( 햏角之勢 ) 를이루어적진을공격한적이있었다. 이때단한번의전투에서적병을참살하고군수물을노획한경우가매우많았는데, 그후에도김응서와고언백휘하의군사들이구법곡 ( 仇法谷 ) 의적을공격하여약 50 명의적병을섬멸하기도하였다. 그러나전란이장기화되자식량난으로인한기근이심화되고민심이더욱흉흉해지면서전국각처에서는토적들이일어났으니이지역도예외는아니었다. 남쪽의지리산으로부터남원 순창의회문산 ( 回文山 ), 장성의노령 ( 蘆嶺 ) 등전국수십개고을의산골이모두적의소굴이되었는데, 경기도의경우는적괴 ( 賊魁 ) 현몽 ( 玄夢 ) 이광주 이천의산골을근거지로하여횡행하였으며, 이능 ( 李能 ) 은양주목경내의산간지대를무대로노략질을일삼고있었다. 이들토적들이오랫동안평정되지못하더니비변사가이지역출신의변응성을방어사로삼고, 토적들스스로서로죽이고투항케하도록현상금을내거는등새로운계책을마련함에따라토적의난동이종식되기에이르렀다. 양주지역의괴수이능의경우에는꼬임에빠져자기무리들에게죽임을당함으로써마침내평정된것이다. 한편오랜전란의고통과왜군의횡포에도불구하고양주지역에서는여성의고귀한정절을지켜조정의칭송을받은일이있었다. 임환수 ( 林環壽 ) 란백성의막내딸향옥 ( 香玉 ) 이그장본인인데향옥은가족과함께도봉산으로피란을갔다가적에게붙잡히게되었다. 당시나이열여섯으로서적의손아귀에서빠져나올수없다는것을잘알고있었던향옥은그어머니에게말하기를, 아버님께말씀드려서내시체나거두어주소서. 라고한뒤, 천길낭떠러지로떨어져목숨을끊었다. 영의정유성룡에의해향옥의절행 ( 節行 ) 이조정에알려지자선조는크게감동하여이르기를 이런사람을표창하지않으면누구를표창하겠는가. 하고크게포장 (? 奬 ) 하여이사실을세상에널리알렸다고한다. 임진왜란초기수도한성에인접한경기동부지역이비교적안정을유지할수있었던것은양주목사고언백의활약과관계가있다. 그는양주출신으로본관이제주이며일찍이무과에급제한후북방여진족을물리치는데에공을세웠을뿐아니라임진왜란이일어난직후에는도원수김명원의장령 ( 將領 ) 으로서도무용을떨친바있었다. 임진년 7 월그가양주에들어가군사를모은뒤적군을치겠다고자청하니, 선조가특별히당상관의품계를내리고양주목사로기용하였다. 피란길에오른조정이약 1 년만인 1593 년 4 월에환도할때까지그는양주로부터도성을오르내리며적극적인군사활동을전개하였다. 그리하여여러차례에걸쳐큰전공을세움으로써조정으로부터포상과함께거듭승진하는영예를누리기도하였다. 임진왜란중그가세운공은군사활동에만그친것이아니었다. 정릉이나태릉등의왕릉수호에서도그의활약이적지않았으니, 이와같은사실은 선조실록 을포함한임란관계의여러사료에서도쉽게확인할수있다. 우선여기에서토적활동 ( 討賊活動 ) 을통해나타난그의전공과포상에관한몇가지예를 선조실록 을통하여살펴보고자한다. 이제심대 ( 沈岱 ) 의장계를보니 양주목사고언백은한달사이에세번이나싸움에이겨위엄스러움과명성이멀리까지소문이나서울에사는사람들이왕왕멀리서호응한다. 하였습니다. 언백이은연중에동로 ( 東路 ) 의보장 ( 保障 ) 이되었으므로이미높은품계를제수, 그공을충분히보답하였으니이제그부하들가운데도참획이많은자는차차논상 ( 論賞 ) 하여야할것입니다.* (8 월중에 ) 왜적 600 여명이토원지방 ( 兎院地方 : 현퇴계원지역 ) 의가옥을불태우자양주목사고언백이군사를거느리고진격하니적이산기슭으로도망쳤는데수급 62 과를참획하였습니다.* 고언백에게가의대부 ( 嘉義大夫 ) 의품계를내렸다. 언백은궁마 ( 弓馬 ) 를잘다루었는데적을만나면몸을돌보지않고분격 ( 奮擊 ) 하였다. 나라에서공으로써양주목사겸경기방어사를제수하였는데, 진을쳐대전 ( 對戰 ) 한적은없고동에서번쩍서에서번쩍하여적으로하여금그가있는곳을알지못하게하였다. 또적의형세를잘염탐하여혹야경 ( 夜驚 ) 도하고혹은숲속에서저격하였는데자신이사졸들보다앞서서싸웠으며그가쏜화살은적중하지않는것이없었다. 전후하여적병을베어바친것이얼마인지모를정도로많았으므로적들이매우두려워하였다.* 유몽정 ( 柳夢鼎 ) 이아뢰기를 고언백이항오 ( 行伍 ) 에서발신하여끝까지힘껏싸우고, 조호익이백면서생으로게을리하지않고애써싸운것은과연주상의분부와같습니다. 따로선전관을보내어물품을내려가상히여기고권장하는뜻을보이는것이지극히마땅합니다. 하니답하기를, 지금내린마장과녹비를고언백 조호익에게보내되, 정원은물건을보내는뜻을글로써서교지를내리도록하라. 고하였다.* 각진에서의승첩과노획보고를경략에게대략다음과같이이자 ( 移咨 ) 하였다. 경기방어사고언백은양주지방에서왜적을차단, 살륙하여수급 42 과를참획하였고, 조방장홍계남은용인지방에서적을만나 58 과의수급을베었고, 방어사고언백은또고양지방여석령 ( 礪石嶺 ) 에복병을배치, 왜적을차단살륙하여 87 과의수급을참획하였으며.* 왕이전교 ( 傳敎 ) 하기를, 고언백의처자에게식물 ( 食物 ) 을제급하라고누차전교를내렸는데도그고을에서이를거행하지않았으니, 고을의수령을파직하라. 또고언백의처자에대하여전일세시 ( 歲時 ) 에식물을제급할것으로하서할때단지처자만을적고노모는적어놓지않았기에매우의심스러워하였는데지금서장 ( 書狀 ) 을보니과연노모가있는것이분명하다. 다시하서하라. 고명하였다.* 이와같이양주목사고언백의활약은눈부신것이었고따라서그에상응한포상과승진의영예가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러나임진년 11 월, 고언백의명성이널리떨치게되면서선조가양주로부터그를불러의주행궁을지키게하라는명을내림으로써물의를빚는일이일어났다. 선조는도성보다는자신이머물고있는행재소가보다중요하므로명장을자기곁에두어야한다고생각했던것이다. 이때비변사가그것의불가함

250 을들어다음과같이아뢰었다. 지금각도에서가장공로가드러난자는오직박진과고언백두사람입니다. 본도가이미근본이되었으니급한곳을먼저해야마땅합니다. 다만고언백이이미양주에있으면서여러번전공을세워그곳백성들의마음을사고있으며, 경성의백성들이모의해서내응 ( 內應 ) 한것은다고언백의힘입니다. 그가그곳에있으면서동로 ( 東路 ) 의보장 ( 保障 ) 이되어있는데이곳에와서남의절제를받아여러모로자유롭지못하게되면하나의용장 ( 勇將 ) 에불과할뿐입니다. 피차의경중으로보아비록선후가있어야하지만형세에있어서는반드시쉽고어려움이있는것입니다. 더구나그곳을버리고오면동쪽변방일대는조치할사람이없고감사 ( 監司 ) 는지금패전한뒤이므로인심의이합 ( 離合 ) 역시염려하지않을수없습니다. 이와같이비변사는선조의잘못된생각을바로잡게하였다. 어떻든이것은국난을당하여나라가큰어려움에빠졌을때양주목사고언백의활동과그의역할이그만큼컸음을강조한것이라하겠다. 앞에서언급한바와같이왜란중고언백의활약은군사활동에서만그친것이아니라왕가 ( 王家 ) 의능침 ( 陵寢 ) 을수호하는일에서도매우중요한역할을수행하였다. 유교주의국가였던조선왕조에서국난에임하여왕릉을수호하는일은국가사직을지키는것에버금갈만큼중대한일이었다는점에서볼때전란중고언백의공은더욱큰것이었다. 그는장사들을모집하여양주산골짜기의험한곳에모여웅거하면서유격전을펼치고적군을습격하는가운데휘하군관들의차출, 도성의능침을지키게하였던것이다. 왜적이많은군사를풀어곳곳을수색하였으나무용에그쳤으니, 고언백의군사들은기회를엿보아잘피하고잘숨었으므로해치지를못하였다. 이로인해경기좌도에피란했던사람들이엉뚱하게살해되거나노략질당한예도있어고언백을원망하기도하였으나그는항상여러능에군사를잠복시켰다가왕릉을해치는적을수시로쳐서죽이곤하였다. 적이태릉을침범하였을때역시고언백이그들을퇴치하였으므로여러능이온전할수있었다. 왜란중중종의능이었던정릉 ( 靖陵 ) 이왜군에게파헤쳐진사건이발생한뒤그유체의진위여부를놓고동서간의당쟁이격화되는등조정이온통들끓었지만, 당시도체찰사 ( 都體察使 ) 유성룡의지시에따라그때그때군사를차출하여능침과유체를감시보호한것도양주목사고언백이었다. 그가양주목사겸경기도방어사로서군사들을거느리고관내해유령에주둔하고있을때도체찰사로부터정릉의변 ( 變 ) 에대한공문을받게되었다. 그는곧바로도성내의사정과정릉주변의길을잘아는군사를선발, 도체찰사의군관인이홍국 ( 李弘國 ) 과함께현장에파견됨으로써즉각정릉의변에대처하였다. 그리하여파헤쳐진정릉근처에서유체를수습한군사들이도성을빠져나온뒤양주송산리민가에이를봉안함에따라그는군사들을동원, 현지를지키면서그유체를봉심 ( 奉審 ) 하였던것이다.

25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상의변화 제 1 절석실서원 ( 石室書院 )* 석실서원은존명사대 ( 尊明事大 ) 와반청 ( 反淸 ) 의기치를표방함으로써후일북벌론 ( 北伐論 ) 의이념적표상으로길이추앙받았던청음 ( 淸陰 ) 김상헌 ( 金尙憲 : ) 의도덕과충절을기리기위해세워진서원이었다. 이경석 ( 李景奭 ) 을위시한당대조정의명사들과사림의발의로 1656 년 ( 효종 7) 에창건된이석실서원은바로이와같은이유때문에사림의강학 ( 講學 ) 과장수 ( 藏修 ) 라는서원본래의기능뿐만아니라사림정치아래붕당정국의추이속에정치적 사상적으로중요한역할을담당하는유수한서원으로발전하였다. 처음에는서인계 ( 西人系 ) 서원으로, 이어노 소론 ( 老小論 ) 분당후에는노론계서원으로, 그리고노론내에서인물성 ( 人物性 ) 논쟁으로호론 ( 湖論 ) 낙론 ( 洛論 ) 이갈릴때에는낙론의진원지이며다른한편으로는조선후기사대부문화의큰특색인진경문화 ( 眞景文化 ) 의산실 ( 産室 ) 로서의역할을수행하였던것이다. 그뿐만아니라영조 정조연간의탕평정국에서는한때조제 ( 調劑 ) 탕평에반대하는의리론 ( 義理論 ) 의본거지였으며, 국구 ( 國舅 ) 인김한구 ( 金漢耉 ) 와결탁한호론계정치세력에대항하는척신 ( 戚臣 ) 홍봉한 ( 洪鳳漢 ) 의정치적우익이되기도하였고, 김상헌의직계후손이주축이된안동김씨세도정권하에서는집권명분을정당화해주는정치도구가되기도하였다. 따라서석실서원은 1000 여개에이르는조선후기의수많은서원중에서정치 사상 학문적으로극히중요한역할을수행한손꼽히는서원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석실서원은 1868 년대원군의서원훼철령에따라철폐된후유적 유물은물론이고관련된고문서나기록등문적 ( 文蹟 ) 이거의남아있지않고, 더욱이지금은정확한위치 1) 나건물규모, 배치등에관한이해마저확실하지못한상태로세인 ( 世人 ) 의관심에서벗어나망각된채로있다. 남양주지역의유교문화재를발굴 정비한다는면에서, 나아가조선시대양반사족의정치 사회 문화활동의향촌적근거지이며모임의장소였던서원에대한일반인의관심제고와새로운이해를촉구한다는면에서도석실서원에대한자료발굴 정리와그역사적인역할에대한재조명이요청된다고하겠다. 그런의미에서석실서원의건립유래와공간구성, 그역사적변천에대해이지역을근거로활동했던사족세력의동향과결부시켜살펴보고자한다.

252 제1권 역사 제2편 역사 제5장 조선 후기 정치 사회의 변화 제1절 석실서원(石室書院)* 1. 청음 김상헌의 석실 우거와 서원의 건립 양주지역에 기반을 둔 성씨를 조선 초기 지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살피면 다음과 같다. 와부읍 석실마을 견주(見州) : 이(李), 김(金), 송(宋), 신(申), 백(白), 윤(尹), 피(皮) - 토성(土姓) 한양(漢陽) : 한(韓), 조(趙), 민(閔), 신(申) - 토성 양근 함(楊根 咸), 춘천 박(春川 朴), 남양 홍(南陽 洪), 수원 최(水原 崔), 과천 부(果川 夫) - 내성(來姓) 풍양(豊壤) : 조(趙) - 토성 사천(沙川) : 경(耿) - 토성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성씨의 분포는 이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이나 조선 후기 지리지에 그대로 등재되고 있으며 풍양 조 씨, 한양 조씨 등 몇몇 성씨를 제외하고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모두 이족화(吏族化)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리지의 성씨조가 이 지역의 사족 분포를 모두 반영한 것은 아니다. 실제 이 지역을 답사해보면 지리지에 등재된 성씨 외에도 조선시대 에 많은 성씨의 유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실서원이 위치하였던 수석동과 안동 김씨의 선산(先山)이 있는 와부읍* 일대를 중심으로 입 향 성씨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씨들의 입향시기를 살펴보면 모두 15세기 초반부터 16세기 중반에 걸쳐 이 지역과 연고를 맺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정치적 성 향은 남인가(南人家)인 사천 목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서인 노론의 당색을 가졌던 가문들인 관계로 이후 남양주지역은 노론세력의 주 요한 기반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처럼 와부읍 일대에 여러 성씨들의 유입이 활발하던 16세기 중반, 석실서원의 창건과 운영을 주도하게 되는 안동 김씨가 입향하게 된다. 우리 6대조 이상은 안동에서 세거하다가 5대조 서윤공(庶尹公 : 김번)에 이르러 비로소 대소과(大小科)에 합격하여 성 중(城中) 북악(北嶽)의 아래에 집을 짓고 복거(卜居)하였다. 가정 32년 갑진에 돌아가셨다. 이듬해 양주 도혈리(陶穴 里) 석실 오향지원(午向之原)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각 성씨의 시기별 입향 추이> 입향시기 15세기 15세기 16세기 16세기 16세기 16세기 초반 중반 초반 초반 중반 중반 성씨 사천 양주 능성 청풍 안동 기계 목씨(泗川 조씨(楊州 구씨(綾城 김씨(淸風 김씨(安東 유씨(杞溪 睦氏) 趙氏) 具氏) 金氏) 金氏) 兪氏) 입향조 생몰년 분묘소재지 당색 목진공(睦進恭) 조말생(趙末生) 구수영(具壽永) 김 식(金 湜) 김 번(金?) 유 강(兪 絳) 평내동 수석동 금곡동 삼패동 와부읍 화도읍 남인 노 소론 서인 서인 노론 노른 노른 원래 안동에서 세거하던 김씨 가문은 김번(金? : )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서울의 북 악산 아래로 이주하였다. 김번이 죽자 양주 석실에 묘소를 마련하였는데 이로부터 양주 석실산이 안동 김씨의 묘산(墓山)이 된 것이다.* 안동 김씨가 양주에 장지(葬地)를 쓰게 된 이유는 통혼관계에서 그 단초를 파악할 수 있다. 김번은 상경 한 후 남양 홍씨 걸(傑)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그의 처가인 홍씨 집안은 세조 성종연간에 연이 어 공신을 배출한 훈구계열에 속하였으며 일찍이 와부읍 일대에 묘산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남자가 여 자의 집으로 장가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속으로 볼 때 김번의 묘가 와부읍 석실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홍씨와의 혼인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처럼 혼맥 등의 요인으로 양주와 인연을 맺게 된 김번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재경사족과 혼인관계를 넓혀나갔고, 관직으로 현달하면서 서울생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서울생활 초기 이 가문의 기반은 관 직 혼인 그리고 소유토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서울 정착과정의 일면을 보여주는 입향 초기 안동 김씨의 혼인관계와 벼슬살이를 김번부터 그의 직계 후손인 6대손 김수증(金壽增 : 1624~1701)대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안동 김씨 입향조인 김번의 묘 김번의 아들 생해(生海)와 손자인 대효(大孝) 극효(克孝)대까지는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채 외직(外職)으로 돌고 있었지만 혼인관계에서 file:///c/남양주사료집/history/his_179.html[ 오후 2:27:19]

253 왕족내지왕실과혼인관계에있는유력한관인세력, 즉보통훈구파라불리는세력과연결되고있었다. 생해는성종의열번째아들로숙의 ( 淑儀 ) 홍씨소생인경명군 ( 景明君 ) 이침 ( 李?) 의사위가되었고, 다음세대의대효는당대의명문가이던광주이씨 ( 廣州李氏 ) 집안출신이며태종의외예 ( 外裔 ) 로중종의총애를받았던이영현 ( 李英賢 ) 의사위가, 극효는중종대명재상이던정광필 ( 鄭光弼 ) 의손자로서선조초좌의정을지낸임당 ( 林塘 ) 정유길 ( 鄭惟吉 ) 의사위가되었던것이다. 이후안동김씨는청음김상헌대부터용인이씨, 전주이씨, 은율송씨등서인계의주요가문과인척관계를맺게된다.* 혼인관계를통해사회적기반을마련한안동김씨가문은광찬 ( 光燦 ) 에이르러명가 ( 名家 ) 의하나로세상에알려졌다. 좌참찬김수흥 ( 金壽興 : ) 과예조판서김수항 ( 金壽恒 : ) 등이부상 ( 父喪 ) 을당하였다. 수흥의부친인광찬은바로문정공상헌의양자이다. 이때에이르러 72 세의나이로졸하였다. 이당시수흥과수항은문학과재주로서세상에이름난명재상이되었으며, 두사위도명로 ( 名路 ) 에있어자손들의영달함과번창함이세상에드문바가되어사람들이모두부러워하였다.* 위의인용문에서보듯김상헌과김광찬이래로안동김씨는중앙정계에서현달하였으며, 이후김수항 김수흥 김창집 ( 金昌集 : ) 이연이어영의정에오르는등서인계최고집권세력의하나로부상하였다. 이러한안동김씨영달의이면에는혼인관계를통한인척관계의확산이그주요한요인중의하나로작용하고있었다.* < 김번과그후손들의사환과혼인 >

254 또한재경사족과의혼인을통해서처가의재산도분급받았다. 적장자상속제가정착되기이전시기의상속관행은자녀균분을원칙으로이루어지고있었다. 따라서사위에대한재산상속도균등하게이루어져사족들의이주를용이하게하는요인이되고있었다. 이와같은점을고려해볼때안동에서올라온김번과그후손들은혼인관계를통해서울에서정착하는데일정한재정적지원를받을수있었던것으로보인다. 균분상속에의한안동김씨의경제력집적은앞서언급한김번의장지를그의처가인남양홍씨의기반이있는양주로택정한것이나, 김번의아들생해가성종의열번째아들인경명군이침의사위로부유한처가의재산을분급받았다는사실에서확인할수있다.* 한편서울인근의토지는석실의제수 ( 祭需 ) 비용마련을위한묘전 ( 墓田 ) 약간과미음 ( 渼陰 ) 에밭 10 여묘가있었다고한다. 또한기전 ( 畿甸 ) 에약간의토지가있었는데관리하지않아타인에게넘어갔다가서질 ( 庶姪 ) 이되찾아온것이있다.* 이처럼가산으로얼마간의토지는있었지만일용 ( 日用 ) 에대기도어려웠던관계로관곡 ( 官穀 ) 에의지하여생활하였고김상헌이석실에거주할때는그에대한예우차원에서녹봉으로지급한본주의전세를받아생활하는등경제적으로그리넉넉하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정착의기반이잡혀가던안동김씨가조선후기대표적인명벌 ( 名閥 ) 의하나로성장하게되는계기는김상용 ( 金尙容 : ) 과김상헌대부터이다. 김상용은병자호란당시강화도에빈궁과원손을수행하여피란하였다가성이함락되자남문루에있던화약에불을지르고순국한인물이다. 김상헌은인조반정이후청서파 ( 淸西派 ) 의영수로서활동하다가병자호란이일어나자주화론을배척하고끝까지주전론 ( 主戰論 ) 을주장한인물이다 년 ( 인조 17) 청나라가명나라를공격하기위해요구한출병에반대하는상소를올렸다가청나라에압송되어 6 년후풀려났다. 귀국후대부분은둔하며생을마쳤지만, 효종이북벌을추진할때그이념적상징인대로 ( 大老 ) 로추대되어조야에영향력을행사하였다. 심양 ( 瀋陽 ) 에서의 7 년간에걸친구금 ( 拘禁 ) 생활에서풀려나귀국한청음김상헌은선산이있는지금의와부읍에우거하고자하였다. 원래이곳은청음의조부김생해가병사 ( 丙舍 : 묘막 ) 를두었던곳으로이미청음이 1632 년에옛터앞에사당 ( 祠堂 ) 을세우고그남쪽언덕 100 여걸음되는지점에 2 칸짜리작은집을지어두는등일찍부터공을들인곳이었다. 이건물은청음에의해 1647 년사당오른쪽으로옮겨지며후일그의손자곡운김수증에의해수리되어송백당 ( 松栢堂 ) 이란현판을걸게된다.* 청음은우선그때까지적실 ( 賊室 ) 로불리던지명을석실 ( 石室 ) 로고치고자신의아호 ( 雅號 ) 역시석실산인 ( 石室山人 ) 이라하면서종로지지 ( 終老之地 ) 로삼았는데, 이때그가우거한건물에대해서는만년의그를시봉 ( 侍奉 ) 하던손자김수증이다음과같은기록을남기고있다. 을유 ( 인조 23) 왕고 ( 王考 ) 께서심양에서돌아오시어석실에거처하셨는데옛집은남향에누 ( 樓 ) 가 2 칸, 방 ( 房 ) 이 2 칸, 청 ( 廳 ) 이 1 칸일뿐이었다. 왕고께서는항시방안에거처하셨는데여름이면마루위에서좌정하셨다. 안채에는초옥수삼칸이있었는데서조모 ( 庶祖母 ) 가거처하셨고, 밖에도초실이있어불초 ( 不肖 : 김수증 ) 가거처하며출입시옆에서모셨다.* 이를보면이때에는다락 2 칸, 방 1 칸, 마루 1 칸짜리의남향한집한채와별도로안식구가거처하는몇칸짜리초가한채가안쪽에, 밖에는손자등이거처하는작은초가가있었다고하겠다. 그러나후일송백당으로불리는건물은사당과함께따로있었던것으로짐작된다. 효종이즉위하여북벌의명분을강하게표방하던시기에국왕은김상헌을대로로추대하여조야사림의중망을모으려하였다. 김상헌역시산림인김집 ( 金集 ) 을추천하거나산인 ( 山人 ) 세력의정책을지지하여척화신으로서의영향력을발휘하였다. 이러한사실은그가은거하던석실에서교류한방문자들의면면을살펴보면잘알수있다. < 석실방문자 * > 이름본관생몰년관직비고 김육 ( 金堉 ) 김익희 ( 金益熙 ) 박세채 ( 朴世采 ) 송시열 ( 宋時烈 ) 신익전 ( 申翊全 ) 유계 ( 兪啓 ) 유황 ( 兪榥 ) 윤문거 ( 尹文擧 ) 윤선거 ( 尹宣擧 ) 윤순거 ( 尹舜擧 ) 윤이지 ( 尹履之 ) 이경석 ( 李景奭 ) 이경여 ( 李敬輿 ) 이기조 ( 李基祚 ) 이만영 ( 李晩榮 ) 이식 ( 李植 ) 이일상 ( 李一相 ) 이행원 ( 李行遠 ) 이행진 ( 李行進 ) 정광성 ( 鄭廣成 ) 정두경 ( 鄭斗卿 ) 정만화 ( 鄭萬和 ) 조계원 ( 趙啓遠 ) 조문수 ( 曺文秀 ) 조석윤 ( 趙錫胤 ) 청풍광산반남은진평산기계기계파평파평파평해평전주전주한산전주덕수연안전의전의동래온양동래양주창령백천 의정 ( 議政 ) 판서 ( 判書 ) 참판 ( 參判 ) 참판감사 ( 監司 ) 참판집의 ( 執議 ) 해은군 ( 海恩君 ) 의정의정판서부사 ( 府使 ) 판서판서의정참판지사 ( 知事 ) 판서참판판서하령군 ( 夏寧君 ) 참판 시 ( 詩 ) 묘지명등찬 ( 撰 ) 시 서 ( 書 ) 시석실서원상량문찬, 시시 시, 서 서청음의만사 ( 挽辭 )

255 조속 ( 趙涑 ) 조한영 ( 曺漢英 ) 최명길 ( 崔鳴吉 ) 홍명일 ( 洪命一 ) 홍명하 ( 洪命夏 ) 풍양창령전주남양남양 장령 ( 掌令 ) 의정감사의정 시김수증의장인 앞의표에등재된김상헌과교유한인사들중송시열, 윤문거 윤선거형제, 조석윤, 유계등은주로김집의문인으로대부분산당 ( 山黨 ) 이며, 중앙정계에서활동하던인물들이었다. 이들은배청적성향을표방했기때문에자연히청음과의잦은교유가가능하였다.* 당시산당계의등용에우호적이었던이경여 이경석등의방문도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 효종이후산당이표방한북벌의이념적기반은송시열로대표되는산인들과김상헌사이의이러한교유속에서구축되었다고하겠다. 또한산당계와는그경향이달랐던김육 * 이나주화파인최명길등도내방하여교유하였던데에서청음이당대에서차지하는위치를짐작할수있다. 이처럼양주석실은김상헌이은거하면서서인들에의해부각되었고, 이는그의사후곧이어서원이창건되는배경으로작용하였다 년 ( 효종 3) 김상헌이죽자그의손자김수증은무덤옆에 2 칸의초옥을지어도산정사 ( 陶山精舍 ) 라명명하였고, 또한조부의유허를기리기위해 도산석실려 ( 陶山石室閭 ) 와 고송오류문 ( 孤松五柳門 ) 을각자 ( 刻字 ) 하여세웠다.* 문중내에서이루어진숭조 ( 崇祖 ) 사업과함께청음김상헌을추숭하기위한사업은경외장보 ( 章甫 ) 들에게까지확산되어입사 ( 立祠 ) 를위한논의가제기되었다. 따라서다음에서는조선후기서원건립의추이를개관하고석실서원의창건과사액과정을살펴보기로하겠다. 석실서원이창건되던 17 세기중반은사림에의한서원건립이활발하던시기이다. 조선후기서원은사림의등장과함께성장한것으로그건립의추이는시기별로나누어파악해볼수있다. 성리학이념으로무장한사림은 16 세기부터향촌에서의활동을본격화하였다. 향안 향규를통한자기결속의기반위에서향약을통해향촌민을효과적으로통제하면서향촌사회에대한지배력을장악해갔다. 또한중앙정계의진출을통해그들의이념을현실정치속에서실현하려하였으나거듭된사화로좌절을경험하기도하였다. 그과정에서사림들은성리학이념의교육과교화를표방하면서사림의결집을도모하고향촌활동을합리화할구심체로서서원건립에나서게된다. 그런데인조반정이후서인의집권으로붕당간의이해관계가구체화되면서서원의성격에변화가나타나기시작했다. 즉집권세력은도학적정통성을확보하기위해자파계인물의제향처로서서원을적극이용하였고, 이에서원은자파붕당에게유리한여론을조성하는장소로서향촌내의여론발의 수렴의장소로서기능하였다. 서원은본래사족의장수처와강학소그리고성현 선현에대한사현 ( 祀賢 ) 의기능에서시작되었지만, 사림정치가전개됨에따라정쟁과정에서피화된당인 ( 黨人 ) 의신원과이를통한특정정파의정치적도덕성을합리화하는기구로변모하였다.* 17 세기중반효종즉위이후 숭장산림 ( 崇奬山林 ) 을표방하고춘추대의와주자학적화이론이정치명분화하면서이를구현한다는목적하에김집 송시열등의산림계인물이등용되었다. 이러한존명의리의명분론과함께현종대복제시비를계기로정권교체가이루어지면서서원의정치적역할은더욱커졌다. 각붕당은경쟁적으로서원을건립하였고, 기존의서원을자파계로포섭하기위한물질적 행정적지원의일환으로사액을추진하였다. 이러한추세는환국기 ( 換局期 ) 라불리는숙종대에들어오면서더욱심화되어남설의경향을띠게되었다.* 이시기의서원은각붕당세력의지방근거지로서기능하여왕권을상대적으로제약하는측면이있는가하면, 양정모입 ( 良丁募入 ) 으로군역의도피처가되어양역의폐단을일으키는원인이되기도하였다. 이에숙종후반기강력한왕권확립을위해탕평책을추진하면서서원에대한금령 ( 禁令 ) 이내려졌으며, 결국 1741 년 ( 영조 17) 에 173 개소의서원을대대적으로훼철하기에이르렀다.* 석실서원은위에서살핀바와같이서원건립이확산되는추세속에서김상헌이석실별장에서 83 세의나이로생을마감한지 2 년후인 1654 년에양주유생을비롯한중외사족의입사 ( 立祠 ) 논의가일어나면서창건작업이시작되었다. 석실서원창건시의상황은다음과같다. 끝내자취를거두어명을마치시니진신 ( 搢紳 ) 이영수 ( 領袖 ) 를잃은것을애통해하였고, 장보들은양목이꺾어짐을슬퍼하였다. 이에계획하지않았는데도의견이모여드디어서로의힘을다하여높은산을우러러보는곳에장차조두 ( 俎豆 ) 를두어영령을편히하고자하였다.* 이경석이지은위의상량문에의하면경외의사족들이뜻을모아시작한서원공역은별다른반대나이견없이이루어졌다고하였다. 서원은청음이우거하던석실촌에서조금떨어져풍광이수려하고육로나특히뱃길을통해왕래가편한한강가 ( 현미음부근 ) 에세워졌으며 * 우선김상헌과그백씨 ( 伯氏 ) 인김상용을모셔병향 (? 享 ) 하였다. 하지만서원건립당시재정적궁핍때문인지서원창건공역은 2 년 7 개월에걸쳐이루어졌다.* 또한묘우 ( 廟宇 ) 공역이끝난이후에강사 ( 講舍 ) 가영건되는것 * 으로보아원생들이거처하는동재 ( 東齋 ) 서재 ( 西齋 ) 의건물은이후하나씩건립되었을것으로추측된다. 이때건립된김상헌 김상용병향서원은 1663 년 ( 현종 4) 에이르러 석실 이라는편액을받게된다.* 양주유학이추 ( 李樞 ) 등의발의 * 로이루어진사액요청은당시서원의첩설폐가현종에의해언급되는상황인데도예조판서홍명하 ( 洪命夏 ) 를중심으로한서인계신료들의거듭된건의로관철되었고 * 같은해 10 월에사액치제 ( 賜額致祭 ) 의의식을올리게된다.* 충절서원 ( 忠節書院 ) 의성격으로건립된석실서원은위에서살펴본것처럼김상헌이석실에은거할때왕래하였던이경석 송시열등서인계인사가창건을지원하였고, 사액시에는현종대예조판서로있던홍명하의지지로석실서원의공인화작업이이루어졌다. 이로써안동김씨를비롯한기계유씨, 청풍김씨등서인계주요가문에기반을둔서원의사액은이지역서인들의입지를더욱견고하게하는요인으로작용하였다.

25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석실서원 ( 石室書院 )* 2. 낙론학통의형성과서원의발전 1663 년사액된석실서원은치제과정에서전례 ( 典禮 ) 를어기고감독을태만히하였다는이유로경기감사오정일 ( 吳挺一 ), 양주목사민희 ( 閔熙 ) 등남인계관료가처벌된것 * 에서알수있듯이각정파의분립에따른갈등에서자유로울수없었다. 안동김씨가문은숙종대에서인 남인간의정쟁의와중에서 1689 년 ( 숙종 15) 김수항이사사 * 되는등정치적격변을겪게된다. 이후 1694 년 ( 숙종 20) 갑술환국으로남인들을축출하고재집권한서인은정치명분상의우위를확보하기위해자파인물을배향하는서원의건립과사액을조직적으로전개하였다. 삼주삼산각 ( 겸재정선 ) 양주지역의경우이러한서인세력의의도는 1694 년 5 월유학이숙 ( 李?) 이상소하여송시열을양주의도봉서원에배식 ( 配食 ) 하기를청한데에서처음드러난후 * 동년 8 월관학유생 ( 館學儒生 ) 이기익 ( 李箕翊 ) 등이재차상소하여도봉서원에송시열을배향하는것으로실현된다.* 도봉서원은석실서원건립이전인 1573 년 ( 선조 6) 에창건하여사액된서원으로정암조광조를제향하고있었다. 하지만이시기는서인내의노 소론분파가표면화하고있던시점이었기때문에노론이중심이되어추진한송시열배향사는순탄하게진행될수없었다 년올라온이제억 ( 李濟億 ) 의상소는송시열의도봉서원추배를반대하여정국에파장을몰고왔다.* 이제억은이상소이후정배되었지만노론측의송시열배향시도에대해, 소론계로당시이조판서를역임하고있던윤지선 ( 尹趾善 ) 이배향에반대함으로써분란은더욱확산되었다.* 이에노론계에서는관학유생의상소를필두로송시열의합향 ( 合享 ) 에대한타당성을주장하는동시에반대론자들에대한공격을가하여마침내배향을관철시켰다. 이처럼도봉서원의송시열배향사는노론집권과함께이루어졌고이후노론계가정국에서의우위를점하는가운데더이상거론되지않았다. 이로써양주지역은노 소론분립이후노론세력의정치적기반으로자리잡았고, 1697 년에는도봉서원의직장 ( 直長 ) 인한영휘 ( 韓永徽 ) 가청금록에서소론의종장 ( 宗匠 ) 인윤증 ( 尹拯 ) 의이름을삭제하여소론세력의제거를꾀하기도하였다.* 양주석실서원에서비슷한시기노론계인물인문곡 ( 文谷 ) 김수항, 노봉 ( 老峯 ) 민정중 ( 閔鼎重 : ), 정관재 ( 靜觀齋 ) 이단상 ( 李端相 : ) 이추배되는것도이와같은배경에서연유한다. 송시열의도봉서원배향논의와때를같이하여 1695 년위의세사람을석실서원에추배하자는요청이경기유생이세위 ( 李世瑋 : 1636?) 에의해제기된다. 예조참의이징명 ( 李徵明 ) 이상소하기를, 경기의유생이세위등이고 ( 故 )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 김수항, 고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 민정중, 고부제학 ( 副提學 ) 이단상이세신하를양주의석실에있는선정신 ( 先正臣 ) 문충공김상용, 문정공김상헌의사우에배향하기를청하였습니다. 대개양주는바로세신하의고향이고, 세신하의충업 ( 忠業 ) 과덕행 ( 德行 ) 은당세에모범이되기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해조 ( 該曹 ) 로하여금품지하여거행하도록하였다.* 위인용문은예조참의이징명이세신하의석실서원추향을건의한경기유생이세위의상소에대해윤허해주기를청하여추배가결정되었다는내용이다. 이징명은이단상의문인이었고, 상소의수창자이세위는병자호란때공조판서를역임하다강화도에서자결한이상길 ( 李尙吉 : ) 의증손자이며, 이후그의후손이노론으로활동하게되는인물이다.* 또한이무렵은김창협 ( 金昌協 : 1651~1708) 이 1689 년이후관직에서물러나양주에은거하며이지역에영향력을미치던시기임을고려할때추배상소가올라오게되는배경으로이해할수있다. 추배결정후 1697 년에석실서원에추배 * 되는이들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먼저석실서원에배향된김수항 ( 김상헌의손자 ) 과민정중은모두 1689 년기사환국으로남인이집권하자송시열과함께사사되거나유배된인물들이다. 민정중은송준길 ( 宋浚吉 ) 의문인으로송시열과그정치적행보를같이했던인물이고,* 김수항역시김상헌을잇는노론계의중신 ( 重臣 ) 으로숙종대에활동하였다. 당화 ( 黨禍 ) 에피해를입은두인물과다르게이단상은노론학계에서학통의일각을이룬학자였다. 송준길의문인이기도한그는효종이후출사하지않고양주동강 ( 東岡 ) 의영지 ( 靈芝 ) 라는곳에거주하면서후생을지도하였다. 그는김창협 김창흡 ( 金昌翕 : ) 임영 ( 林泳 ) 등유수한학자들을배출하였으며, 또한제자인김창협을사위로맞이함으로써안동김씨가문과혼인관계를맺고있었다.* 이시기석실서원에추배된인물들은모두정계나학계에서노론계의핵심으로활동하였고, 혼인이나사승관계로맺어진인물들이었다. 숙종대추배를통해노론계서원으로위상을정립한석실서원은이시기를전후하여성격상의변화가나타나기시작했다. 충절서원에서강학서원 ( 講學書院 ) 으로의변화가그것인데, 이는 18 세기경화학계 ( 京華學界 ) 의학풍과김창협 김창흡형제의학문에서기인한바크다. 당시경화학계의흐름은이전시기와차이를보이고있었다. 즉, 학문형성과정에서쇠퇴해가고있는산림 ( 山林 ) 유학자의전통주자학을계승하기보다는사회경제적으로경화사족적처지를같이하는서울과그인근의학자를찾아수업하거나가학 ( 家學 ) 을계승하는것이일반화하고있었다. 이러한경향은학문의관심을의리지학 ( 義理之學 ) 에서경제지학 ( 經濟之學 ) 과사장지학 ( 詞章之學 ) 또는명물도수지학 ( 名物度數之學 ) 으로까지넓히는요인으로작용하였다.* 석실서원의학풍도농암 ( 農巖 ) 김창협과삼연 ( 三淵 ) 김창흡의가학을기반으로하고있었다. 김창협은이단상 송시열의문인으로 24 세때에송시열로부터장차사표 ( 師表 ) 가되리라는칭찬을들은서울지역의제일가는제자였으며특히경학 ( 經學 ) 에밝았던인물이고, 김창흡은이단상의문인으로경학과시문학 ( 詩文學 ) 에뛰어난학자였다.* 김창협과김창흡형제의학문성향도경화학계의영향을받아전통주자학의의리지학과는차이가있었다. 이들안동김씨가문의두학자는 20 세의청년기에서울남산아래에서은거하고있던졸수재 ( 拙修齋 ) 조성기 ( 趙聖期 ) 와교유하게되면서 명물도수 ( 名物度數 : 禮樂, 律曆, 兵刑, 山川, 官制, 食貨 ) 를내용으로하는경제지학에관심을갖게되었다.* 이처럼노론의주류와는그경향을달리하는학풍이안동김씨의가학으

257 로형성되었다. 이러한학문경향은 18 세기이후노론학계에서경향 ( 京鄕 ) 으로나뉘어진행된심성논쟁 ( 心性論爭 ) 인호락논쟁에서인물성부동 ( 人物性不同 ) 성범심부동 ( 聖凡心不同 ) 을주장하는호서지방의호론에반해인물성동 ( 人物性同 ) 성범심동 ( 聖凡心同 ) 을주장하는근기지방의낙론의입장을견지하는요인으로작용하기도하였다.* 김창협 김창흡형제는을사환국으로남인이집권하고그아버지김수항을위시한서인계가죄를입어축출되자관직을버리고영평의백운산으로낙향 피신하였다. 김창흡은삼부연 ( 三釜淵 ) 쪽에, 그리고김창협은백운산아래농바위부근에농암서실 ( 農巖書室 ) 3 칸을짓고은거하였다. 김창협은이후수년간농암서실에서독서하다가 1694 년의갑술환국으로서인이재집권하여그의부친이신원되고그역시호조참의로복직할때를즈음하여가족과함께선산이있는석실촌부근의금촌 ( 金村 ) 으로이사했다가다시그집안의장토 ( 庄土 ) 가있던석실서원부근의미음촌 ( 渼陰村 ) 으로옮기면서석실서원을근거지로하여본격적인강학활동에전념하게된다. 을해 (45 세, 숙종 21 년 ) 11 월석실서원에머물다. 이때에선생이미음에우거하며 ( 석실 ) 서원에왕래하였으니 ( 농암서실과서원이 ) 모두양주에있었기때문이다. 이에이르러서원에계시면서강학하니원근 ( 遠近 ) 의사자 ( 士子 ) 로모인자가매우많았다. 정축 (47 세, 숙종 23 년 ) 8 월삼주 ( 三洲 ) 에거소를정하다. 선생은원래농암에서여생을마칠생각이었으나대부인 ( 大夫人 ) 이경제 ( 京第 ) 에계시어성시 ( 省侍 ) 를쉽게하게위해근교에거처를마련하셨다. 또석실서원은강산이수려하니 드디어 ( 이곳에 ) 거처를정하시어편액하여이르기를삼산각 ( 三山閣 ) 이라하였다. 앞에는사저 ( 沙渚 ) 가 3 개있으므로그땅을이름하여삼주라하였다.* 이때김창협이미음에우거하며강회를여니원근의사족들이많이모여들었다고하였다. 2 년후인 47 세때에그는농암서실에서석실부근으로거처를옮겨삼산각이라편액하고서원에서의강학과함께이곳에서여생을마칠뜻을보였다. < 석실서원중심의학통 > 출전 : 조선유현연원도 ( 朝鮮儒賢淵源圖 ) 참조. 그의아우김창흡도서울집에서자주석실서원에왕래하였다. 그는 1675 년 ( 숙종 1) 그의부친이예론 ( 禮論 ) 에연루되어영암으로유배가게되었을때부터관직생활을포기하고학문활동에전념하였으며, 특히서울집근처에낙송루 ( 洛誦樓 ) 를짓고이곳에서폭넓게서울의명사 ( 名士 ) 들과교유하였다.* 1695 년이후중형 ( 仲兄 ) 김창협이석실에서강회를개최하면서부터거기에자주참여하였고수시로석실촌의송백당에머물기도하였다.* 시와문장은물론이고퇴계와율곡을절충한이기심성설 ( 理氣心性說 ), 특히인물성동론을이론적으로합리화함으로써낙론의대표자가되었던이들형제의뛰어난학문적역량은자연히근기지방을중심으로낙론을신봉하는큰문인집단을형성하였다. 김창협 김창흡형제의학통을간략히살피면앞의 석실서원중심의학통 표와같다. 앞의표에서보듯김창협 ~ 이재 ~ 김원행 ( 金元行 : ) 으로이어지는학문의계통은석실을중심으로이루어진낙론적학통의형성을보여주는것이다. 이러한김창협의학문과서원에서의강학활동은자연히그가지닌낙론적학문경향을서울의문인들에게전파시켰으며, 이는석실서원이강학서원으로전환하는계기가되었다. 낙론의근거지이자강학서원으로발전한석실서원의학풍은서울 경기지역의문풍 ( 文風 ) 과미술계에도파급되었다. 김창흡의문하에서진경시의대가인사천 (? 川 ) 이병연 ( 李秉淵 ) 과진경산수화의겸재 ( 謙齋 ) 정선 ( 鄭敾 ) 이배출되어조선의고유색을지닌진경문화를이루는기틀을마련하였다.* 김창협의이와같은행적은그의사후곧이어서원추배를가능하게한요인이되었다. 다음의사료는 1713 년김창흡의문인어유봉 ( 魚有鳳 ) 이찬하고양주유생구문기 ( 具文沂 : 1662?) 등의이름으로올라간김창협의석실서원추배상소중일부이다. 신 ( 臣 ) 등이살고있는고을에석실이라불리는곳이있습니다. 이곳은선정신문충공김상용, 문정공김상헌선생이병향된장소이며이후에영의정김수항, 좌의정민정중, 부제학이단상세신이배식되었습니다. ( 김 ) 창협은상헌의증손이자수항의아들이고, ( 이 ) 단상에게는제자입니다. 또만년에서원의아래쪽강기슭에집을짓고날마다여러학자와함께독서하고강도 ( 講道 ) 하기를 10 여년간하였습니다. 그러하니제향의일이이사람보다우선하지않을수없습니다.* 즉, 김창협이만년에석실근처에서 10 여년간독서 강학한정상을들어그의석실서원배향을요청하고있는것이다. 상소의수창유생구문기는앞서살펴본것처럼 16 세기부터양주에기반을가지고있던능성구씨문중의인물로김창협의양주지역문인이었다.* 구문기등의상소를계기로숙종후반기노론우위의정국에서김창협은곧바로석실추배의반열에오를수있었다.

25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석실서원 ( 石室書院 )* 3. 노 소론정쟁과서원의수난 숙종대에노론계서원이자강학서원으로다져진석실서원의위상은경종연간에들어오면서한차례파란을겪게된다. 그단초는숙종후반기의정국동향에서이미배태되었다. 갑술환국이후노 소론간에내재해있던갈등은 1715 년의 가례원류 ( 家禮源流 ) 시비와이듬해병신처분 ( 丙申處分 ) 으로명분을상실한소론이정국에서배제되고노론이전권 ( 全權 ) 하는형태로나아가고있었다. 이어 1717 년숙종의후계자문제를놓고왕과노론계좌의정이이명 ( 李헊命 ) 사이에이루어진정유독대 ( 丁酉獨對 ) 와세자대리하명 ( 世子代理下命 ) 은노쇠한숙종의후계자문제를둘러싸고제기된일반의의혹을깊게하였다. 이제사문시비 ( 斯文是非 ) 를중심으로전개되던노 소론간의대립이왕위계승문제를둘러싼충역 ( 忠逆 ) 의시비분쟁으로변질된것이다. 이시기노론은숙종의독대에의한특별부탁이라하여세자의대리청정을보필하는한편연잉군 ( 延혿君 ) 연령군 ( 延齡君 ) 두왕자를보호하였고, 소론은노론이그들에게불리한왕세자를교체하지않을까하는의심하에노론을감시하고있는형국이었다. 경종이즉위하자노 소론간의상반된이해관계는정쟁의형태로표면화하여노론이일시에축출되는사건, 즉신축옥 ( 辛丑獄 ) 으로결말이났고, 이와중에왕세자 ( 후일의경종 ) 대리시부터세자에게불리하게움직였고, 임금이된다음에는모해하려했다하여노론 4 대신인김창집 이현명 이건명 조태채를위시한 60 여명의노론계인물이사사되거나정형에처해졌다. 이를임인삼수옥 ( 壬寅三手獄 ) 이라하며, 앞의신축옥과함께흔히신임옥사 ( 辛壬獄事 ) 라부른다.* 1721 년 ( 경종 1) 이후정치권력의급격한교체는곧바로양주지역의노론계서원에도여파를몰고왔다. 먼저 1723 년노론을역 ( 逆 ) 으로판정한상태에서올라온관학유생김범갑 ( 金范甲 ) 과사도 ( 四道 ) 유생등의상소에서송시열의출향사를거론하자집권소론세력은송시열을도봉서원에서출향 ( 黜享 ) 토록하였다.* 송시열이도봉서원에입향될때공론을수합하지않았고, 더나아가송시열의인물이나행적자체가조광조같은도학자와병향되기에는적합하지않다는것이출향의명분이었다.* 왕위계승을둘러싼정쟁과정에서승리한소론은반대당의종장인송시열을공격함으로써정치명분상의우위를확보하려했던것이다. 이시기석실서원에가해진박해도도봉서원에서의송시열위패축출과같이정치적이유에서였다. 송시열을출향시킨직후소론계의장령윤회 ( 尹會 ) 가먼저석실서원의제향인물중김수항과김창협을문제로삼고나왔다. 사헌부지평심준 ( 沈埈 ) 에의해다소보완된그내용은다음과같다. 양주의석실서원은바로문정공김상헌을제향하는곳인데지난번에흉당 ( 凶黨 ) 들이김수항과그아들김창협을외람되게도추배하는열에들게하여사림의놀라움과분노가아직가라앉지않고있습니다. 만일역적김창집의아비와그아우가지금살아있다면마땅히연좌 ( 連坐 ) 의율 ( 律 ) 을베풀었을것인데, 현사 ( 賢祀 ) 에종향 ( 從享 ) 까지하여나라의법을무너뜨리고유궁 ( 儒宮 ) 을욕되게하였으니여기에대계 ( 臺啓 ) 가나오게된것입니다. 수항부자는말할만한명절 ( 名節 ) 과학술 ( 學術 ) 도없거니와이제창집이역적으로잡혀죽임을당함에이르렀은즉더욱종향의열에그대로둘수없사오니청컨대해당관청으로하여금곧바로출배하도록하소서.* 본래부터김수항과김창협이서원에추배될만한도덕과충절이없는데도흉당 ( 노론 ) 의괴수였기때문에당인에의해추배된것에불과할뿐만아니라, 이들이신임옥사의원흉으로서죽임을당한김창집의아비와동생이어서더욱불가하므로출향시켜야한다는주장이었다. 김수항은송시열과함께노론의영수였고기사환국때남인의정치적보복으로죽임을당하였기때문에평소그에게비판적이던소론계인사들도그의죽음을동정하여애초에석실서원추향을반대하지않았고, 특히김창협은당대의석학으로이름난데다가석실서원에서오랫동안강학활동을벌여강학서원으로서의면모를갖추게하였던관계로추배가당연시되어서별다른물의가없었다. 그런데김창집은숙종말영의정으로노론을대표하는자리에있으면서소론의공격에앞장선데다가경종초이른바왕세제 ( 후일의영조 ) 책봉과세제에의한대리청정 ( 代理聽政 ) 을추진한중심인물이어서소론의미움을한몸에받아신임옥사에서역모의원흉으로몰려사형을당하고, 이제새롭게김수항과김창협의석실서원제향이문제가된것이다. 이로써본다면윤회 심준에의한김수항 김창협출향론은일차적으로노론계인사에대한정치적보복의성격을지녔다고할수있다. 그러나석실서원이도학정치 ( 道學政治 ) 의표상인조광조를제향하는도봉서원과마찬가지로대명의리 ( 大明義理 ) 의상징인김상헌을모시는곳이었기때문에비록도성밖에위치하기는했지만경중사대부 ( 京中士大夫 ) 와사림이모이고강습하는연수 ( 淵藪 ) 이며, 경중여론 ( 京中輿論 ) 의향배에큰영향을미치는진원지로서노론측의정치적기반이되고집권명분을합리화해주는역할을하고있었던사실로미루어본다면, 소론의공세는단순히김수항 김창협의서원출향에만머물지는않았을것이다. 두사람위패의출향이이루어진뒤에도유 무형의압력이가해졌을것이며, 이로인해석실서원의장래가크게위축될것이분명했다. 그러나석실서원의수난은오래가지않았다. 1 년도못되어경종이훙거 ( 薨去 ) 하고김창집등노론계가목숨을바쳐가며보호했던왕세제가임금의자리에오르게되었기때문이다. 소론이쫓겨나고노론정권이들어섰음은말할것도없거니와노론 4 대신의신원에따라김창집의죄도씻겨없어지고오히려그충절에대한장려로사충서원 ( 四忠書院 ) 에제향되기까지하였다. 노론의집권으로석실서원에대한박해가없어진동시에김창집이신원 포증되었을뿐만아니라출향되었던김수항 김창협의재입향도추진되었다. 을사처분으로신임옥을무옥 ( 誣獄 ) 으로판정하고, 피죄 피화자를신원하여노론명분의정당성과집권의합리화를다져나갔다. 이런일련의과정에서먼저도봉서원의송시열복향 ( 復享 ) 이이루어졌고이어양주유학이지항 ( 李志沆 ) 등의복향요구상소를예조에서동의하는형식으로김수항 김창협의석실서원제향이회복되었다.* 이러한상황에따라노론 4 대신의복관 ( 復官 ) 에맞추어이들을배향하는사충서원의건립과사액이이루어졌다.* 영조대에는즉위초노론계서원에대한복설과사액이몇차례이루어진것을제외하고 1741 년 ( 영조 17) 의사우훼철을단행한데서볼수있는것처럼이후에는탕평책의추진과함께서원의건립이나사액은엄격히통제되었다. 이러한정책은정조연간에도이어져영 정조연간석실서원에김창흡을추배하자는건의가계속되었지만,* 결국이루어지지않았다. 위와같이경종연간석실서원에불어닥친정치적풍파는영조의즉위와함께해결되었지만석실서원과서울사이를오가며이루어졌던강학은이후한동안계속되지못하였다. 신임옥으로김창집이사사되고김창흡이그충격으로세상을떠나는등안동김씨문중내에흉사가연이어일어났기때문이다.

25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석실서원 ( 石室書院 )* 4. 김원행의서원진흥 ( 운영과공간구성 ) 경종연간소론의박해이후침체하였던석실서원을활발한강학활동으로다시진흥시키고, 호론에대항하는낙론의본거지로서그학문적 정치적위상을새롭게확립시킨인물은김원행이었다. 그는본래김창집의손자였으나김창협의아들인숭겸에게출계함으로써김창협의사손이되었고 * 그조부의제자로서영조전반기낙학의대표였던이재의문인이되어가학을계승하였다. 그러나 20 세가되던해임인삼수옥이일어나그생부인제겸과조부인창집, 친형인성행등이죽임을당하는개인적인불행을겪었다. 다행히그는출계하였기때문에연좌율에걸리지않아무사할수있었으나이때의충격으로벼슬하기를포기하고다시는도성안에한발자국도들여놓지않았으며, 영조가추구하는조제탕평에비판세력으로존재하면서학문에만전념해당대낙학의대표자로서의지위를확보하고산림으로서의명성을쌓았다. 김원행영정 김원행에게석실서원은김상헌 ~ 김수항 ~ 김창협으로이어지는 3 대가제향된매우자랑스런장소이자은거하여학문을연구하는터전이었다. 그는일찍부터서원부근에있는조부창협의거처였던미음의삼주삼산각에거주하면서제생들과함께학문을강론하였고가학인낙학을이론적으로심화시키고체계화했으며, 마침내만년에는석실서원의원장 ( 院長 ) 까지역임하였다 년유척기 ( 兪拓基 ) 가죽음으로써원장자리가공석이되자사림들은그가원장직을맡기를강력히요구하였다. 그역시석실서원의면모일신을위해그럴생각이없지는않았으나세간에서석실서원을놓고김씨사당이란비방이일고있어 * 망설였다. 마침이재문하의동문이요, 충청도에거주하면서도낙론을지지하던송명흠 ( 宋明欽 ) 이그고조부인송준길을독향하는흥암 ( 興巖 ) 서원원장을지내고있다는소문을듣고이에힘을얻어그요청을수락하였다고한다. 이제석실서원은그의책임하에명실상부한강학서원이며낙론계정치론의출발점으로대두하게된것이다. 김원행이단절되었던석실서원의강회를시작한사실은강생 ( 講生 ) 들에게내리는유시에서살필수있다. 서원은본래강학을위해설립한곳이다. 사 ( 士 ) 가강학하지않으면사대부라고일컬을수없다. 우리고을에는이서원이있어실로우리고을사대부에게큰다행이건만강학이이루어지지않아쓸쓸하니사대부의수치이다. 이에 ( 근자에 ) 다행히도유림의의논으로강학이이루어지니심히성대한거사이다.* 언제부터인가석실서원에서강학이이루어지지않아고을의수치로생각했는데근자에유림의의논이일어나강학을시작하니성거 ( 盛擧 ) 라고김원행은칭하고있다. 또한김원행이석실서원의강규 ( 講規 ) 와학규 ( 學規 ) 를마련한것으로보아이때서원의규모가완전해졌음을알수있다. 그강규와학규의내용을간략히소개하면다음과같다. 먼저석실서원에입재 ( 入齋 ) 하기위한자격을 장유 ( 長幼 ) 나귀천 ( 貴賤 ) 을막론하고독서위학 ( 讀書爲學 ) 에뜻이있는자 로규정하여서원이널리인재를받아들인다는뜻을밝히고있다. 하지만입재후에는학문에정진하게하기위해묘정 ( 廟庭 ) 분향 ( 焚香 ) 독서 식사 귀가등서원생활의세세한부분까지학규를정하여엄격한규범하에생활하도록하였다. 원생들은각기 1 실을배정받아서원에서생활하였고과거를준비하는자는다른곳에서학습하게하였다.* 서원의제반사는원장 장의 ( 掌議 ) 유사 ( 有司 ) 색장 ( 色掌 ) 을각 1 명씩차정하여주관하게하였다. 원장은대개공경대부중에서사망자 ( 士望者 ) 가역임하였으며, 대개원중 ( 院中 ) 의논의는장의의소관으로큰사안일때에는반드시원장에게재가를받도록하였다. 임기는모두 2 년씩이지만, 유사는원중에일이있을경우이제한에구애받지않았다. 재임 ( 齋任 ) 들은수복 ( 守僕 ) 등을관리하며이들에게잘못이있을때처벌하는권한을지녔다. 일반재생들간에사사로이형장을사용하는것은금지되었으나속인 ( 屬人 ) 이죄를지어벌할때에는형장을사용하는것이허락되었다.* 재생들의학문을격려하기위해한달에한번씩매달 16 일에강회를열도록하였다. 강회시에는별도로경술 ( 經術 ) 과행의 ( 行義 ) 로추앙받는자를강장 ( 講長 ) 으로차정하여원장과함께이를주관하게하였다. 재생들은강회에참석하는것이원칙이었고만약이유없이불참할경우에는면계 ( 面戒 ), 출좌 ( 黜座 ), 간거안중 ( 刊去案中 ) 의처벌이내려졌다.* 강서 ( 講書 ) 의순서는반드시 소학 대학 ( 겸혹문 ) 논어 맹자 중용 심경 근사록 이후에제경 ( 諸經 ) 에미치도록하며, 돌아가면서반복하게하였다. 강회는대략참여재생 ( 參與齋生 ) 의인원수에따라장수 ( 章數 ) 배정 임강 ( 臨講 ) 과배강 ( 背講 ) 토론과의목 ( 疑目 ) 상달 ( 上達 ) 백록동규 ( 白鹿洞規 ) 와 학교모범 읽기 파강 ( 罷講 ) 의순서로진행되었다. 서원에서강회할때에참여인원은따로직월 ( 直月 ) 을정하여열서 ( 列書 ) 해두어기록으로남기게하고, 재생들이제시한의목에대한원장 강장의답변도원중에비치해두었다. 석실서원에마련된규범에따라이루어진강회의내용을좀더구체적으로살펴보면다음이참조된다. 먼저 1762 년 3 월의강회에는유한정 ( 兪漢禎 ) 등 20 여명이참석하였다. 강회의순서는우선강규에따라알묘 ( 謁廟 ) 하고내려와강유 ( 講儒 ) 들이선생께재배한이후에선생은북벽에좌정하고제생은남쪽에앉아직월의인도로 맹자 공손추편 ( 公孫丑篇 ) 을강독하였다.*1764 년 6 월의강회는김원행이참석하지는않았지만강유 12 명이재임 고강 직월의인도로강회를마치고있다.* 이같은강회를마친후강회록 ( 講會錄 ) 을정리하여원장인봉조하유척기의집에보냈으며강장인김원행에게는강회록과함께강설 ( 講說 ) 을기록하여증정하였다.* 당시강학을진행하던석실서원의건물도창건시건립된묘우와강사이외에동재 서재와강생들의숙식처인강당 ( 講堂 ) 남방 ( 南房 ) 북방 ( 北房 ) 등의구체적인명칭이나타나고있는것으로보아그규모가한층정비되었음을알수있다.* 여기서잠시김원행에의해강학이활발하게이루어지던영조후반기 ( 년대 ) 석실서원의주변풍광 ( 風光 ) 과공간구성이어떠하였는가를보겠다. 이와관련해서는농암김창협의문인으로일찍부터그거처였던미음의삼주삼산각과석실서원을자주찾아이일대의풍광에익숙하였을것이분명한겸재정선이그린 석실서원 삼주삼산각 그림과김원행의문인이던이재 ( 헊齋 ) 황윤석 ( 黃胤錫 : 1729~1791) 이석실서원에출입하면서남긴기록 * 이좋은자료를제공한다. 우선 석실서원 은겸재가 년에그린것으로 경교명승첩 속에포함되어있는데, 겸재정선의화풍을연구한최완수는이그림에나타난석실서원의전경을다음과같이풀이하고있다.

260 석실서원 ( 겸재정선 ) 이그림에서보는오른쪽언덕위에있는마을이서원말이다. 그중에숲속에둘러싸인기와집들이석실서원이고그아래초가집들은서원을수호하기위해고용된재직 ( 齋直 ) 이나모군 ( 募軍 ) 들이사는집일것이다. 양주읍지 ( 楊州邑誌 ) 석실서원항목에의하면원생 ( 院生 ) 20 명, 재직 10 명, 모군 40 명의규모였다고한다. 오른쪽언덕에있는기와집한채는청음가 ( 淸陰家 ) 의별서 ( 別墅 ) 인듯하다. 지금가보아도미사리쪽강상에서바라보면바로이렇게보인다. 전경을연초록빛일색으로설채하여초봄의새틋한맛을강조하였는데, 겸재의그림에서드물게표현되는전답 ( 田畓 ) 의표현이있어가능한한사실성에충실하려했던그림인듯하다. 평구역말로이어지는이패리일대의논밭이다 년석실서원을처음방문한황윤석도서원주변의강산풍경이한강위에서유람하기에가장좋은곳이라고극찬하고있다.* 본래서원은사림의덕성함양과수기 ( 修己 ) 를위해사람들이들끓는번잡한곳을피하여인적이드문한적한심산유곡이나물가에세워지게마련이었는데그러다보니자연히주변의풍광이수려하지않을수없었을것이다. 이는현존하는서원들을찾아보면확인할수있다. 석실서원은이와같이경치좋고뱃길을이용해내왕이편리한곳에위치하였다. 겸재의그림에서원경 ( 遠景 ) 으로드러난석실서원건물의규모나배치등의공간구성은황윤석이남긴기록을통해보다구체적인모습을찾아볼수있다. 전라도흥덕 ( 興德 ) 출신으로서성리학에는물론물명도수지학 상수학 ( 象數學 ) 천문학등에뛰어난능력을보여실학자의한사람으로손꼽히기도하는이재황윤석은 1759 년그의나이 31 세때미음으로김원행을찾아가사제의의를맺고석실서원에유숙하면서문업 ( 問業 ) 하기도하고때로는김원행을모시고서원에서강학을주관하기도하였다. 그런만큼석실서원에대해잘알았을것이며실제로도그가남긴일기인 이재난고 ( 헊齋亂藁 ) 에는석실서원에대한기사가적지않게보인다. 그가운데서원의건물구조라든가배치에관한기록만을따로모아보면다음과같다. 첫째, 사당은서원의위쪽에위치하였다. 사당에는제현들의위패 ( 位牌 ) 를봉안하였는데그순서는다음과같다 ( 단이것은 1756 년 ( 영조 32) 의기록이므로 1713 년 ( 숙종 39) 에추배되었던김창협까지만들어가있다. 김창흡 김창집 김원행 김이안 김조순의위패는후일철종때들게된다 ). 주벽 ( 主壁 ) 에는 2 위 ( 位 ) 가있으며선원 ( 仙源 ) 문충공김상용은서상 ( 西上 ) 에, 청음문정공김상헌은동차 ( 東次 ) 에제향하였고, 동서벽 ( 東西壁 ) 에는 4 위가있는데문곡문충공김수항은서일 ( 西一 ) 에, 노봉안정공민정중은동일 ( 東一 ) 에, 정관재문정공이단상은서이 ( 西二 ) 에, 농암문간공김창협은동이 ( 東二 ) 에제향하였다.* 둘째, 사당옆에선원김상용의영정 ( 影幀 ) 을봉안한영당 ( 影堂 ) 이있었다.* 셋째, 석실서원묘정비 ( 石室書院廟庭碑 ) 는서원의앞마당에있었다고하였다. 이비는우암송시열이짓고, 곡운김수증이쓴것이다.* 넷째, 강생들교육의장소로동강당이문헌에나타난다. 맞은편에서강당의존재도추측해볼수있는데문헌상으로는확인할수없다.* 동강당은원생의교육뿐만아니라서원을방문한사족의임시거처로이용되기도하였다. 이는강당남방 북방에서숙식하였다는기록으로알수있다.* 다섯째, 강당과함께원생들의숙식처인동재의명칭이나타나며이로보아서재도있었음을알수있다.* 여섯째, 원문 ( 院門 ) 밖에는시문을짓거나대담하는장소로원향정 ( 遠香亭 ) 이있었다.* 일반적으로서원을구성하고있는건물은크게선현의제사를지내는사당과교육을실시하는강당, 원생이숙식하는동재와서재세부분으로이루어진다. 이외에책을보관하는서고와제사에필요한용구를보관하는제기고 ( 祭器庫 ), 서원의관리자인원지기의거처이면서유생의식사를준비하는고직사 ( 庫直舍 ) 등이추가되기도한다. 이상의서원의구조를염두에두고황윤석의기록들을종합하여석실서원의규모와건물배치등공간구성을복원해보면다음과같다. 이와같은공간구성이반드시김원행에의해처음으로이루어졌다고할수는없겠으나, 강학활동의터전으로서그와그문인들에의해정비 보완되어비로소완전한규모를갖추게된것만은사실이다. 강학의활성화를위한강규 학규마련과서원의공간구성은대개위와같이정비되었지만서원의재정은매우빈한했던모양이다. 이는석실서원뿐만아니라경기지역의다른서원들도비슷한형편이었다.* 따라서석실서원에서강회를할때는물론서원에서유숙하는원생들은경제적인어려움을겪고있었다. 그결과강회에참석하는강생들은필요한노자나양식을각자가지참하였고여비가떨어지면귀환하였다.* 석실서원의경우유숙하는원생들은대체로 1 삭 ( 朔 : 30 일 ) 정도머무는것이일반적이었으며그비용으로 1 냥 ( 兩 ) 정도를미리서원에내야했다.* 그러나김원행은서원생활의어려움을토로하는제생 ( 諸生 ) 들을책망하며강학과장수에정진하도록독려하였고낙학의학풍을펼쳤다. 그리하여경향 ( 京鄕 ) 의많은사림이그의문하로몰려들었다. 이미낙파의종장이었으며 1768 년경에석실서원원장과화양서원원장을역임하여그의명망이높았던탓도있겠지만다음에서보듯그의문인관 ( 門人觀 ) 이개방적이었던사실도간과할수없다. 김원행은그의제자이영유 ( 李英裕 ) 와의대화에서 이언지인 ( 異言之人 ), 즉당론이다른자가배우기를청하면어찌할것인가라는질문에답하는과정에서그의문인관을피력하고있다. 김원행은그의제자중에한강 ( 寒江 ) 정구 ( 鄭逑 ) 의후손인정동술 ( 鄭東述 ) 의예를들어비록남인일지라도생각을고쳐서귀의하면제자로받아들였다고이야기하였다.*

261 김원행의이러한입장은말년에이르러남인의근거지인영남에서 명의제자를길러내는데까지이른다.* 석실서원 (1750년대) 공간구성복원도김원행의문인관은당시서울을중심으로한경화학계의성향을어느정도반영한것이었다. 18세기이후한강 임진강의수로를중심으로서울과수도권지역의 1일생활권에거주하던학인들은당색등의차이에도불구하고일정한학문적교류를하고있었다.* 김원행이강학했던석실서원도한강수로의요충지에자리하고있어서울에서하루정도면왕래할수있는, 지리적으로가까운위치였다.* 이와같은개방적인학풍이김원행의문인관에반영되었던것이다.* 지리적으로교통의요지에위치한석실서원은당시근기지방에서낙론의종장으로부상한김원행의위치와그의개방적인문인관등에기인하여많은제자들을배출하였다. 김원행의문인은근기지역뿐만아니라호남 영남등에까지걸치고있다.* 김원행의제자인황윤석의술회에따르면이때석실에서이루어진강의의내용은전통적인성리학외에도역학 율학등상수학에까지미쳤으며, 문인들에게이에대한관심을촉구하고학습을장려하였다고한다.* 이점은당시노론학계내에서진행되던호락논쟁에서낙론적입장을유지함으로써김창협 김창흡이래이어져내려오던가학의전통을발전시키는연장선상에서이루어졌다고파악할수있다. 결국석실서원은김원행을중심으로한낙론계인사들의결집처역할을하였고, 이후제자들은낙론을계승하거나북학의형태로발전시켰다. 김원행사후에도석실서원의강회는계속되었다. 김원행의아들인김이안 ( 金履安 : ) 은이전부터석실에서여러유생들과교유하였으며추수헌 ( 秋水軒 )* 에머물면서부친의문집을교정하였다.* 또한손자김인순 ( 金麟淳 ) 도석실서원에머물면서강회를주관하였다. 무술 ( 정조 2 년, 1778) 그집은서울에서지방에잠시머무르다가인서 ( 仁瑞 : 김인순 ) 가근래에가족을거느리고미상 ( 渼上 ) 에거주하면서다달이석실의유생과강회를여니선사 ( 先師 : 김원행 ) 가생전에계시는듯하였다.* 김원행사후 6 년이지나김인순이미상에거처를정하여그의조부가생전에행하였듯이석실의유생들과매달강회를열었다는것이다. 이처럼석실의강회는김원행의자손을중심으로이어졌다. 이후석실은영조말년 화양서원묘정비 ( 華陽書院廟庭碑 ) 의비문을둘러싸고호론과갈등을겪게된다. 이는 1769 년김원행이화양서원장역임시권상하 ( 權尙夏 ) 의문인으로서호론을주장하던병계 ( 屛溪 ) 윤봉구 ( 尹鳳九 ) 가생전에지은묘정비문의내용이호론의주장을은연중에합리화하려한것을보고이를지연시킨데에서발단하였다. 이때의문자시비 ( 文字是非 ) 는처음에는단순히학통내의주도권다툼이었다가점차정치논쟁으로변질되어갔다.* 영조말년의정계는노론세력의집권하에같은척신인김한구와홍봉한이권력을다투는형세를보였다. 영조계비정순왕후의친정아버지로국구의자리에있던김한구는김구주 ( 金龜柱 ) 김한록 ( 金漢祿 ) 등경주김씨일족과함께하나의척신당을이루며 ( 이를남당이라부름 ) 호학의영수이던남당 ( 南塘 ) 한원진 ( 韓元震 ) 에게학맥을연결함으로써호론계인사를우익으로삼아서, 사도세자의장인이자왕세손 ( 후일의정조 ) 의외조부였던홍봉한과그추종세력 ( 이를북당이라부름 ) 을공격하였다. 이에홍봉한의북당계는낙론을정치적후원세력으로삼고자하였는데, 마침당대낙론의종장이던김원행과홍봉한이인척관계에있었으므로그접근이쉽게이루어졌다.* 그리하여석실서원은부홍파 ( 扶洪派 ) 의주요거점으로인식되었다. 인물성동이론에서비롯된호락논쟁이이제정치세력간의정권다툼을합리화해주는이념논쟁의성격까지띠게되었으며석실서원역시바로그런정치적소용돌이의한축에서게되었다고할것이다.

26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1 절석실서원 ( 石室書院 )* 5. 안동김씨세도와서원의변화 영조말의홍봉한 김한구두척신간의대립은정조의외척제거노력에의해표면적으로는일단가라앉은것같았지만이번에는시파 ( 時派 ) 벽파 ( 僻派 ) 라는외피 ( 外皮 ) 를바꾸어입고서내면적인암투를지속하다가마침내순조초정순왕후의수렴청정기간, 벽파인경주김씨가시파에대해대대적인탄압을가함으로써폭발하였다. 이로인해홍봉한집안은거의재기불능의타격을받지만, 1805 년 ( 순조 5) 왕의친정이시작되면서벽파를제거하고정권을장악한것은거꾸로정조의고명 ( 顧命 ) 을받은김조순 ( 金祖淳 : ) 과그일족인안동김씨일문이었다. 이른바안동김씨에의한세도정치가첫발을내딛게된것이다. 김조순은김원행의종손 ( 從孫 ) 이었고당시석실서원에서강학을열던김인순과는종형제사이였다.* 그리고김조순의부친인김이중 ( 金履中 ) 은숙부되는김원행에게수학하였다. 김조순과석실서원과의직접적인관계를알려주는자료는현재더이상찾지못하였지만이러한친족관계와영조말년이래의일련의정치과정에서석실서원이차지하였던정치적위상과역할로볼때김조순중심의정권창출에석실서원이어느정도기여하였으리라는것은짐작하기어렵지않다. 나아가이제석실서원은단순한안동김씨집안의사당에만그치지않고김상용 김상헌이래의충절을앞세워안동김씨세도정권의존재명분을뒷받침해주는정권유지기반이된다. 즉, 순조이후에이르면호락논쟁이효용성을상실함으로써낙학의전통을계승하는석실서원의강학적기능은상대적으로약화된다. 이것은안동김씨세도가극성기에이른철종연간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 * 등안동김씨집안의학자는물론당화를입었다하여충절인으로현양되는인물까지한꺼번에추향된사실에서알수있다. 물론김창흡등이추배됨으로써석실서원의제향자는모두 11 명이나되었고그중민정중과이단상을제외하면안동김씨는 9 명이나되어김씨사당의성격이더강해졌다고볼수도있다. 그러나조선시대의서원은 19 세기이후에들어오면입향자의선정은물론운영과재정관계등거의모든면이제향자후손의수중으로넘어가게되어문중적성격을강하게지니게된다.* 이것은종전까지의사족중심사회체제가동요함에따라족적결속이더욱긴밀해진것으로, 사회적지위를유지하기위해가문내지문중을단위로한사회적조직이강화된결과로이해된다. 석실서원의문중적성격강화도이러한사회적추세의일면을반영한것이었으며, 동시에그것이정치적측면으로나타난대표적예를보여주는것이다. 그리고바로이런이유때문에석실서원은비록대원군에의해훼철되기는했으나다른서원이얼마후다시모습을회복하던것과는달리, 안동김씨세력이한번실세하자그건물지의흔적마저찾지못할정도로그자취를남기지못했던것이다. < 석실서원제향자와인적사항 > 이름생몰년최종관직시호제향연도비고 김상헌 ( 金尙憲 ) 김상용 ( 金尙容 ) 김수항 ( 金壽恒 ) 민정중 ( 閔鼎重 ) 이단상 ( 李端相 ) 김창집 ( 金昌集 ) 김창협 ( 金昌協 ) 김창흡 ( 金昌翕 ) 김원행 ( 金元行 ) 김이안 ( 金履安 ) 김조순 ( 金祖淳 ) 좌의정우의정영의정좌의정집의영의정예조판서집의찬선좨주영돈녕부사 문정 ( 文正 ) 문충 ( 文忠 ) 문충 ( 文忠 ) 문충 ( 文忠 ) 문정 ( 文正 ) 충헌 ( 忠獻 ) 문간 ( 文簡 ) 문강 ( 文康 ) 문경 ( 文敬 ) 문헌 ( 文獻 ) 충문 ( 忠文 ) 상용의아우상헌의형상헌의손자 창협의장인수항의장자창집의아우창협의아우창협의손자원행의장자창집의현손 < 석실서원제향안동김씨가계도 >

263 < 미호김원행의문인 1> 이름호본관생몰년선조관직거주지비고 강한 ( 姜瀚 ) 권필칭 ( 權必稱 ) 김상진 ( 金相進 ) 김이안 ( 金履安 ) 김이장 ( 金履長 ) 남기제 ( 南紀濟 ) 민익열 ( 閔翼烈 ) 박달원 ( 朴達源 ) 박윤원 ( 朴胤源 ) 박찬선 ( 朴燦璿 ) 방석필 ( 房錫弼 ) 서묵수 ( 徐默修 ) 서형수 ( 徐逈修 ) 선우각 ( 鮮于恪 ) 신경준 ( 申景濬 ) 심정진 ( 沈定鎭 ) 오윤상 ( 吳允常 ) 유한기 ( 兪漢紀 ) 유한정 ( 兪漢禎 ) 이규위 ( 李奎緯 ) 이기보 ( 李基普 ) 유천 ( 柳川 ) 탁계 ( 濯溪 ) 삼산재 ( 三山齋 ) 설하 ( 雪下 ) 근재 ( 近齋 ) 운영정 ( 雲影亭 ) 직재 ( 直齋 ) 용암 ( 龍岩 ) 여암 ( 旅菴 ) 제헌 ( 霽軒 ) 영재 ( 寧齋 ) 팔물재 ( 八勿齋 ) 진주안동금산안동안동의령여흥반남반남진원남양대구대구태원고령청송해주기계기계 벽진 ? ? ? 1740? 원행 ( 元行 : 父 ) 성행 ( 省行 : 父 ) 사건 ( 師建 : 父 ) 사석 ( 師錫 : 父 ) 호석 ( 祜錫 : 父 ) 명훈 ( 命勳 : 父 ) 문 ( 父 ) 래 (?: 父 ) 사증 ( 師曾 : 父 ) 언술 ( 彦述 : 父, 大憲 ) 언범 ( 彦範 : 父 ) 석오 ( 錫五 : 父 ) 좨주 ( 祭酒 ) 서연관 ( 書筵官 ) 진사 ( 進士 ) 대간 ( 大諫 ) 진사 ( 進士 ) 승지 ( 承旨 ) 동지 ( 同知 ) 승지 ( 承旨 ) 양주 ( 楊州 ) 경 ( 京 ) 흥양 ( 興陽 ) 평양 ( 平壤 ) 경 ( 京 ) 경 ( 京 ) 경 ( 京 ) 경 ( 京 ) 광주 ( 廣州 ) 삼산재집 ( 三山齋集 ) 김원행의여서 ( 女?) 여암집 ( 旅菴集 )

264 이민철 ( 李敏哲 ) 이직보 ( 李直輔 ) 이해진 ( 李海鎭 ) 정달제 ( 鄭達濟 ) 조유선 ( 趙有善 ) 조유헌 ( 趙有憲 ) 홍낙신 ( 洪樂莘 ) 홍낙진 ( 洪樂眞 ) 홍낙현 ( 洪樂顯 ) 홍대용 ( 洪大容 ) 황윤석 ( 黃胤錫 ) 황인기 ( 黃仁紀 ) 황주석 ( 黃胄錫 ) 중주 ( 中洲 ) 소암 ( 素菴 ) 나산 ( 蘿山 ) 지산 ( 芝山 ) 담헌 ( 湛軒 ) 이재 ( 헊齋 ) 일수암 ( 一水菴 ) 성주연안 청주직산직산풍산풍산풍산남양평해창원평해 ? 도신 ( 度臣 : 父 ) 성제 ( 聖臍 : 父 ) 성제 ( 聖臍 : 父 ) 배한 ( 配漢 : 父 ) 역 (?: 父, 목사 ) 전 ( 父 ) 간 ( 幹 : 父, 校理 ) 판서 ( 判書 ) 군수 ( 郡守 ) 현감 ( 縣監 ) 현감 ( 縣監 ) 군수 ( 郡守 ) 익찬 ( 翊贊 ) 부사 ( 府使 ) 흥덕 ( 興德 ) 비고 : 조선유교연원도 ( 朝鮮儒敎淵源圖 ) 와 미호집 ( 渼湖集 ) 에같이등재된인물이다. < 미호김원행의문인 2> 개성 ( 開城 ) 개성 ( 開城 ) 경 ( 京 ) 경 ( 京 ) 흥덕 ( 興德 ) 경 ( 京 ) 이재난고 이름호본관생몰년선조관직거주지비고 강시영 ( 姜時英 ) 김견 ( 金킱 ) 김광정 ( 金光晶 ) 김매순 ( 金邁淳 ) 김사국 ( 金師國 ) 김수 ( 金璲 ) 김수민 ( 金壽民 ) 김수조 ( 金壽祖 ) 김원섭 ( 金元燮 ) 김응필 ( 金應弼 ) 김재탁 ( 金再鐸 ) 김천규 ( 金天逵 ) 김천근 ( 金天根 ) 김필태 ( 金必泰 ) 김흥용 ( 金興龍 ) 나정의 ( 羅廷誼 ) 문약연 ( 文躍淵 ) 박경 ( 朴턳 ) 박성은 ( 朴聖퓧 ) 박종 ( 朴琮 ) 박찬선 ( 朴燦璿 ) 박찬영 ( 朴燦瑛 ) 박환 ( 朴晥 ) 배진영 ( 裵鎭榮 ) 변석후 ( 邊碩?) 봉정환 ( 奉鼎煥 ) 서봉주 ( 徐鳳周 ) 송문즙 ( 宋文楫 ) 송상언 ( 宋相彦 ) 송상은 ( 宋相殷 ) 신달후 ( 申達厚 ) 안정철 ( 安廷哲 ) 안지행 ( 安志行 ) 양득희 ( 楊得熙 ) 양학점 ( 梁學點 ) 오동훈 ( 吳東勳 ) 오서운 ( 吳瑞雲 ) 유진기 ( 柳震起 ) 윤치언 ( 尹致彦 ) 이계신 ( 李啓臣 ) 이덕근 ( 李德根 ) 이도중 ( 李度中 ) 이문상 ( 李文祥 ) 이복상 ( 李復祥 ) 이정호 ( 李挺祜 ) 이진복 ( 李鎭福 ) 이한응 ( 李漢膺 ) 임춘원 ( 任春源 ) 정용언 ( 鄭龍彦 ) 위동 ( 渭東 ) 송암 ( 松岩 ) 대산 ( 臺山 ) 복재 ( 復齋 ) 명은 ( 明隱 ) 초암 ( 肖菴 ) 성당 ( 性堂 ) 백파정 ( 白坡亭 ) 오파 ( 梧坡 ) 만수 ( 晩修 ) 임이재 ( 臨헊齋 ) 입재 ( 立齋 ) 용호당 ( 龍湖堂 ) 신와 ( 愼窩 ) 당주 (? 洲 ) 운영정 ( 雲影亭 ) 양동 ( 陽洞 ) 종암 ( 鍾菴 ) 귤당 ( 橘堂 ) 율정 ( 栗亭 ) 남파 ( 南坡 ) 동산 ( 東山 ) 운호 ( 雲湖 ) 연천 ( 淵泉 ) 인재 ( 忍齋 ) 절와 ( 節窩 ) 담재 ( 澹齋 ) 번계 ( 磻溪 ) 한포 ( 寒圃 ) 겸와 ( 謙窩 ) 영모재 ( 永慕齋 ) 주경당 ( 主敬堂 ) 몽산 ( 夢山 ) 신재 ( 新齋 ) 입지당 ( 立志堂 ) 동사 ( 東史 ) 국와 ( 菊窩 ) 삼인재 ( 三仁齋 ) 매암 ( 梅菴 ) 진주연안강진안동경주도강부안울산개성금령진주김해광산광산상산나주남평순천순천함양진원진원반남성산장연하음풍산신평신평신평평산순홍여산남원제주해주보성문화남원전의전주연안완산완산창평청안경주장흥경주 ? 1735? 1733? 1712? 창흡 ( 昌翕 : 高祖 ) 회성 ( 會盛 : 父 ) 호석 ( 祜錫 : 父 ) 홍등 ( 鴻登 : 父 ) 면지 ( 勉之 : 父 ) 진사 ( 進士 ) 예판 ( 禮判 ) 참봉 ( 參奉 ) 생원 ( 生員 ) 집의 ( 執義 ) 진사 ( 進士 ) 생원 ( 生員 ) 장령 ( 掌令 ) 생원 ( 生員 ) 진사 ( 進士 ) 지평 ( 持平 ) 지평 ( 持平 ) 도사 ( 道事 ) 진사 ( 進士 ) 동교 ( 童敎 ) 부솔 ( 副率 ) 감역 ( 監役 ) 대간 가선 ( 嘉善 ) 경 ( 京 ) 남원 ( 南原 ) 장성 ( 長城 ) 흥양 ( 興陽 ) 수원 ( 水原 ) 남원 ( 南原 ) 순창 ( 淳昌 ) 적성 ( 積城 ) 경 ( 京 ) 대산집 ( 臺山集 ) 명은집 ( 明隱集 )

265 정용운 ( 鄭龍運 ) 정재운 ( 鄭載運 ) 정현성 ( 鄭顯性 ) 조학원 ( 趙學元 ) 조현 ( 趙玹 ) 최관 ( 崔瓘 ) 최신지 ( 崔愼之 ) 한명덕 ( 韓命德 ) 허단 ( 許檀 ) 현진택 ( 玄鎭澤 ) 현학 ( 玄鶴 ) 홍익진 ( 洪翼鎭 ) 황야 ( 黃椰 ) 황인영 ( 黃仁瑩 ) 학이재 ( 學而齋 ) 암은 ( 岩隱 ) 안재 ( 安齋 ) 농은 ( 農隱 ) 심시재 ( 尋是齋 ) 무고정 ( 撫孤亭 ) 대소헌 ( 大笑軒 ) 심원당 ( 心元堂 ) 남애 ( 南崖 ) 독기재 ( 獨碁齋 ) 나주나주하동풍양한양삭령경주청주태인성주성주풍산창원창원 비고 : 조선유교연원도 에나와있으나 미호집 에는보이지않는인물이다. 장사랑 ( 將仕郞 ) 경 ( 京 )

26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조선후기사상계의가장중요한특징은실학사상의성립이라고할수있다. 실학사상은당시사상계의지배적위치에있던성리학에대한반성에서출발하였다. 성리학은 15 세기이래조선사회를이끌어온지배적사상으로서왕조체제의성립과유지에적지않은기여를하였다. 그러나역사의발전에따라조선후기사회에서는새로운사상의출현이요청되고있었다. 이에붕괴되는조선왕조체제를계속유지하고왕권을강화하며, 이를위해서민 ( 民 ) 과국가와의관계를재조정해보려는시도가진행되었다. 여기에서실학사상이태동할수있었다. 이사상은 18 세기를전후하여그형태를분명히드러냈으며정약용 ( 丁若鏞 : ) 에의해서집대성되었다. 그는이익 ( 李瀷 : ) 의학통을이어받아이를발전시켰으며, 각종사회개혁사상을제시하여 묵은나라를새롭게하고자 노력했다. 그의사상은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역사현상의전반에걸쳐있었는데, 그가제시한방대한사상의주류 ( 主流 ) 는조선왕조의기존질서를전적으로부정하는 혁명론 이었다고보기에는어려움이따른다. 그는혁명론을제시하기보다파탄에이른당시의사회를개량하여조선왕조의질서를새롭게강화하려는생각을가지고있었다. 그리하여그는조선에왕조적질서를확립하고유교사회에서중시해온왕도정치 ( 王道政治 ) 의이념을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 ( 國泰民安 ) 이라는이상적상황을도출해내고자했다. 여기에서는조선후기의대표적실학자인정약용의생애를간략히검토하고, 정약용사상의특성과그의미를검토해보고자한다. 우선이를위해서실학사상의일반적특성과그의실학사상이발생하게된역사적배경을살펴보기로한다. 이러한점이규명된다면, 조선후기라는전환기를살면서시대의병폐를치유하고자고민했고, 새롭게개혁된사회가도래하리라는희망을간직하고있었던한인간을이해할수있게될것이다. 또그를통해서 18 세기후반기와 19 세기전반기조선사회에대한인식을높일수있을것이다.

26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1. 실학사상의성립 * 1. 실학사상의성립 * 1) 실학의개념 (1) 실학사상의존재 실학사상은 17 세기이후조선사회에서출현한현실개혁적사유형태를지칭한다. 해방이후남북한의학계에서는실학사상의존재를확인하고그의미를규명하기위한작업을활발히전개해왔다.* 그러나실학에대한최근의연구결과를검토해볼때실학사상과관련된몇가지문제에봉착하게된다. 이문제들을규명하는차원에서실학의존재및개념과관련된문제점에대한분석을시도해보고자한다. 본고에서는먼저조선후기실학사상의존재여부에대한문제부터검토해보고자한다. 최근일부연구자들은조선후기실학사상의존재자체를의문시하기도했다.* 그리고해방이후의연구자들이실학의범위로설정해오던일반적인방법과는달리, 실학의적용범위를축소하려는시도도진행되었다. 이러한문제제기는실학의개념을분명히하는데에기여하는것으로생각된다. 그러므로실학의개념을설명하기위해서는이미제기된이문제에관해서먼저검토해보아야할것이다. 실학사상의존재를확인하기위해서는실학이란단어의용례및실학이라는용어에함축되어있던사상의특성이구체적으로드러나고있는상황들을분석해볼필요가있다. 우리는먼저실학이라는용어가시대에따라서각기다른의미로사용되었음을다음과같이확인하게된다. 즉, 한국사상사에서실학이란단어는여말선초 ( 麗末鮮初 ) 부터쓰이기시작했다. 이때의실학은오늘날실학이라는개념에함축되어있는바와는달리성리학을지칭한용어였다. 고려말에수용되었고조선의관학 ( 官學 ), 즉통치원리로정립된성리학은원래수기 ( 修己 ) 와안인 ( 安人 ) 을목적으로했다. 이때문에 14 세기후반정주 ( 程朱 ) 의성리학을수용한이래여말선초의유학자들은유학, 즉성리학이도덕과정치에유용 유익한생활관과경세론을제공해주는실제적사상이란의미에서이를실학이라고했다. 이러한성리학적실학은오늘날의연구자들이논하고있는조선후기의실학사상과는일정한차이를가지고있다. 조선왕조의성립을전후해서자신의성리학을실학이라고인식했던대표적인물로는익재 ( 益齋 ) 이제현 ( 李齊賢 : ) 과삼봉 ( 三峰 ) 정도전 ( 鄭道傳 : ), 그리고양촌 ( 陽村 ) 권근 ( 權近 : ) 을들수있다. 그들은성리학이불교나훈고사장 ( 訓퇑詞章 ) 에치우친한당 ( 漢唐 ) 의유학보다우월함을인식했으며, 인의충신등의수기로인해서훈고나사장의유학보다 위기 ( 爲己 ) 의실효를거둘수있는학문이라고생각했다. 그리고충효를비롯한오륜과육례 ( 六禮 ) 의학습을통해서불교보다 제가치국평천하 ( 齊家治國平天下 ) 의실효를거둘수있을것으로확신했고, 이러한이유로이를실학이라고불렀다. 또한이황 ( 李滉, 退溪 : ) 이나이이 ( 李珥, 栗谷 : ) 도수기안인의설인성리학을실학으로인식하고있었다. 반면에조선후기에접어들어예 ( 禮 ) 지향적수기의예론을전개했던윤증 ( 尹拯 ) 은예학을실학이라고인식했다.* 이러한조선의성리학자들은대체로주자 ( 朱子 ) 를유일한기준으로삼아유학을해석하면서자신의학문체계를실학으로인식하고있었다. 그러나 17 세기이후일단의유학자들사이에서관학, 즉통치원리로기능하고있던성리학의주자유일기준을거부하는탈성리학적 ( 脫性理學的 ) 경향이나타나기시작했다. 그들은선진유학 ( 先秦儒學 ) 내지는원초유학 ( 原初儒學 ) 의정신회복을통해서성리학을극복하고자하는의지를가지고있었으며예론적실학이지배하고있던당시상황에대한비판을시도했다. 이러한사상적경향을가지고있었던인물로는지봉 ( 芝峰 ) 이수광 ( 李? 光 : ) 이나미수 ( 眉?) 허목 ( 許穆 : ) 을들수있다. 특히허목의경우에는주자학일변도의경색된학문풍토를거부했다. 그는주자주 ( 朱子註 ) 를중심으로하는사서 ( 四書 : 論孟庸學 ) 나칠서 ( 七書 : 論孟庸學詩書易 ) 체제를거부하고, 원초유학경전으로서 요순지학 ( 堯舜之學 ) 을간직하고있는육경을강조했다.* 이러한탈성리학적연구경향은조선후기실학사상의전개에있어서선구적역할을했다. 이처럼조선중기이래유학계에서는탈성리학적학문경향이등장하고있었으며, 여기에서조선후기적실학이움터나왔다. 조선후기의실학자로지칭되는사람들은경세치용적학문을강조하거나자신의저서에서실학이라는단어를직접구사하기도했다. 즉, 유형원 ( 柳馨遠 : ) 의학문체계는당대부터 경세치용 의학문으로평가되었다. 그리고이익도학문이란장차천하만사를조치할만큼치국 평천하의경세에치용 ( 유용 ) 한것을지향해야한다고역설했고, 자신이직접실학이라는단어를사용하기도했다.* 담헌 ( 湛軒 ) 홍대용 ( 洪大容 : ) 은실학이라는단어를구사하여사장 ( 詞章 ) 과기송 ( 記誦 ) 그리고훈고 ( 訓퇑 ) 와구별되며, 공리 ( 功利 ) 나노불육왕 ( 老佛陸王 ) 과는다른학문체계를제시하고자했다.* 연암 ( 燕巖 ) 박지원 ( 朴趾源 : ) 의경우에도농 공 상의이치를포함하는사 ( 士 ) 의학문을실학이라고지칭하면서농 공 상이소업 ( 所業 ) 을잘못하는것은사에게실학이없기때문이라고말했다.* 정약용은그의저서에서실학이라는단어를사용하지는않았다. 그러나당대의성리학을 잡학 ( 雜學 ) 이라고까지폄하하면서, 치국안민의목적을달성하기위해이적 ( 夷狄 ) 을물리치고재용을넉넉히해야하며, 능문능리 ( 能文能吏 ) 하여무소부당한능력을양성해야한다고주창했다.* 19 세기의추사 ( 秋史 ) 김정희 ( 金正喜 : ) 는 실사구시 ( 實事求是 ) 를중시하는학문태도를강조했으며,* 혜강 ( 惠崗 ) 최한기 ( 崔漢綺 : ) 는사 농 공 상에걸친실사를실지로탐구 실천할것을제창하면서자신의실학사상을표현했다.* 이와같은조선후기사상계의변화를논하는가운데실학이라는분야를설정하게된것이다. 그러나조선후기의실학사상은당대의학인들이직접문호를열고기치를세우며자신의존재를 실학파 등으로스스로확인한사상은아니었다. 그들은스스로를실학자로자처한바도없었고, 자신의학문을실학이라고선언하지도않았다. 또한서로모여타자와구별되는배타적견지에서학파를조직한바도없었다. 그렇다하더라도오늘날학계에서당시의학풍을실학으로명명하는데에는충분한근거가있다. 즉조선후기의실학사상은즉자적 (an sich) 형태로존재하고있었다. 실학사상은자신의존재를의식하고자신의독립성을확연히천명하는대자적 (fur sich) 단계의사상으로까지전개되지는않았지만분명조선후기사상계의중요한흐름가운데하나였다. 이즉자적사상의형태를 1950 년대에이르러남북한학계에서는실학사상이라고지칭하게되었다. 따라서실학사상에대한연구는과거역사적존재자체를밝히고그의미를규명하려는작업이라고할수있다. 이러한특성을가진 조선후기실학 은종전의 성리학적실학 이나 예학적실학 혹은 양명학적실학 등과구별된다. 그리고이 조선후기실학 이라는긴관용어대신에여태까지한국사학계에서통용되어오던상례에따라이를단순히 실학사상 으로명명해줄수도있을것이다. 이실학사상은조선초기성리학

268 의학문전통과는엄연히구별되는사상이었다. (2) 실학사상의특성 조선후기실학사상에대한본격적연구가진행되기시작한 1950 년대이후오늘에이르기까지실학사상의개념은다양하게규정되어왔다. 일부연구자들은실학을경세학의일종으로파악하면서이를 근대지향적사상 이나 탈성리학적사상 으로규정하려했다.* 또한일부의연구자들은실학의범위를북학사상만으로제한하여부르기를제안했다.* 이처럼실학사상의특성내지는개념에관한다양한의견이제시됨에따라실학의특성을파악하는데에는어려움이따르게되었다. 이러한다양한견해들가운데먼저 탈성리학적사상 이라는규정을중심으로하여실학사상의특성을살펴보겠다. 탈성리학적사상은주자주를유일한근거로하여유교경전을해석했던조선성리학의관행을거부하고, 경전해석의새로운기준을모색하는사상경향을총칭한다. 그리고조선후기사회에서이러한경향을나타내는사상을실학으로규정했다. 이견해가가지고있는의미를분명히하기위해서는주자내지주자학에대한조선후기실학자의태도를검토해야한다. 이를위해서는실학자들이남긴주자나주자학에관한언급들을주목할필요가있다. 실학자들이주자에대해서가지고있던사례가운데유형원의경우를먼저살펴보고자한다. 유형원은주자의견해를 기강리약 ( 氣强理弱 ) 이라고하여비판적인입장을취하고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주자를크게존신하고있었다.* 이익도 정주가맹자이전에있었다면반드시성인으로지목되었을것이다. 라고 * 말할정도로주자에대한존숭을지속하고있었다. 홍대용도 주자학은중정 ( 中正 ) 하여편벽되지않으니, 참으로공맹의정맥이다. 라고말하여 * 주자학의가치를충분히인정했다. 정약용도 주자는육경을깊이연구하여진위를판별하고사서를드러내어심오한뜻을천발했다. 고말하면서주자의학적권위를전적으로거부하지는않았다.* 정약용은 춘추 ( 春秋 ) 의해석과관련하여말하기를 역대선유의논의를살피건대주자의설만이참으로확실하고평정하다. 주자어류 ( 朱子語類 ) 에실린천만가지말마디가모두요체에들어맞으니내가무엇을덧붙이겠는가. 라고말하여주자를적극적으로인정하기도했다.* 이러한언급들을통해서볼때실학사상은주자학을굳이배격하지않았음을알수있다. 실학자들의사상은성리학을기본으로하여출발했고, 그들의사고에서부분적으로는성리학적사고와새로운사고들이공존하는경우도있었다. 실학자들이주자학의모든부분을확연히배척하지는않았다. 이는그들이현실에대한올바른인식과개혁의방향을제시해주는이론이라면주자를비롯해서누구의이론이라도수용했기때문이었다.* 그러나실학자들은주자를명시적으로거부하지는않았지만, 유학의해석에있어서적용되어오던주자유일기준을거부하면서주자설에대한맹종이가지고있는문제점을극복하고자했다. 주자설에대한맹종의거부는허목이나이수광단계에서부터이미드러난일이었다. 이점은유형원의경우에있어서도마찬가지였다. 그는주자학의왕도정치론을극복하고원초유학으로회귀해가는과정에서주자학의이기인성론을극복했다.* 이익은주자성리학의연장에만머물지않고이에대한반성과비판적태도를견지했다.* 홍대용은성리학에대한비판적인태도를견지했고, 그인간론의전개에있어서도자신이속한낙론계 ( 洛論系 ) 의성리학자들과는다른인물성심 ( 人物性心 ) 의동론 ( 同論 ) 을주장했다.* 박지원도주자유일기준에대해반발했고인식론에있어서자신의새로운주장을제시했다.* 이점은정약용의경우에도동일하게나타나는현상이다. 예를들면정약용은성리학의기질지성에대한해석을달리하여기질을선천적제약으로해석했던성리학의입장을거부하고, 새로운인간관을제시했다. 그는천 ( 天 ) 은인간의마음에자주권을부여해주었다고주장하였다. 이로써인간은그자아의주체적자율성을가진존재로새롭게규정되었다.* 이상의사례에서볼수있는바와같이실학자들은주자의주석을기준으로한성리학의유학해석방법에서벗어나새로운철학을구성해갔다. 이상에서알수있듯이실학자들은주자를존숭하기는했지만주자설을유학해석에유일한기준으로삼기를거부했다. 이러한주자에대한비판적인식은실학적사유의본령이었고, 이를탈성리학적현상이라고규정할수있을것이다. 이탈성리학적현상은실학을비롯한조선후기의여러사상에서공통적으로드러나는것이었다. 특히조선후기실학자들의탈성리학적경향은이러한주자성리학에대한비판에서나타날수있었다. 이러한이유로인해서실학을탈성리학과동일시하기도했다. 그런데조선후기에출현했던탈성리학으로범칭되는사상들은상당히다양한성격을띠고있다. 주자유일기준에입각한성리학과는계통을달리하는학문사상의경향중에는유학의범위에드는양명학 ( 陽明學 ) 이나훈고학 ( 訓퇑學 ) 사장학 ( 詞章學 ) 등이있다. 그리고도가사상 ( 道家思想 ) 등유학과는궤를달리하는사상도있다. 이처럼다양한요소를가진사상을탈성리학이라는한가지측면을기준으로하여실학이라고부르는데에는어려움이따른다. 그렇게할경우에는그사상들이가지고있는다양성으로말미암아, 실학이란용어에도개념적다양성이나모호성이수반될수밖에없다. 그리고탈성리학이라는소극적개념을구사하여한시대의정신을대변하는적극적이고명확한사상을표현하는데에는한계가따른다. 그러므로탈성리학적사상일반을실학으로규정하기보다는탈성리학적사상가운데자신의고유한논리를적극적으로제시하고있는특정사상만을분리해내야한다. 학술용어는그개념이명확해야하며, 적용범위가분명히제한되어야하기때문이다. 그렇다면실학사상은조선성리학의학문풍토에비판적입장을견지하던사상가운데선진유학내지는원초유학의입장에서제기된왕정론 ( 王政論 ) 혹은왕도정치론 ( 王道政治論 ) 으로제한하여설명할수있을것이다.* 실학자들은자신의왕도정치론이현실사회에시행될수있을것으로생각했다. 그들은중세사회해체기에처하여국가재조론 ( 國家再造論 ) 의입장에서왕도의강화와실천을주장했다. 그들은이주장을통해당시의현실사회에대한자신의책임을확인하고자했다. 실학사상은바로이측면에서볼때제한적의미에서나마현실참여적특성을가지고있었다. 따라서실학사상을실천성이결여된이념이나중세체제의단순한유지강화론으로만볼수는없다. 요컨대, 조선후기사회에서는즉자적사상의형태로실학사상이존재하고있었다. 실학사상은유학의해석에있어서주자설을유일한기준으로삼기를거부한탈성리학적사상으로서, 선진유학내지는원초유학에입각하여왕도정치론혹은왕정론에기반을두고변법적개혁을추진하던국가재조의사상이었다. 그리고실학자는성리학에대해비판적입장을취하면서원초유학의이상형으로제시되고있는왕도정치의정론에따라고법과고제를조선후기자신들이살고있는현실사회에구현하려고노력하던사람들이었다. 또한실학파는실학자상호간에직접적인유대나연결관계와큰상관없이조선후기의지적운동에서드러나는이와같은경향성을공유했던학인의무리를뜻한다.

269 이실학파에속하는학인으로는유형원이하이익을거쳐홍대용이나정약용등흔히북학파사상가로불리는일단의인물들이모두포함된다. 그리고 19 세기중엽헌종대에활동했던이규경 ( 李圭景 ) 이나최한기의경우에도실학자의범위안에속하였다.

27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1. 실학사상의성립 * 2) 실학사상의형성배경 실학자들은자신이처해있던현실세계의분석을통해서주자설에입각한성리학이현실과괴리된것으로판단했다. 곧실학자들은성리학자들과마찬가지로왕도정치론을존중했지만, 주자유일기준은거부했던것이다. 그들은성리학에대체될수있는경세론으로육경고학에기초한왕도정치론을제시했다. 조선후기사회에이르러성리학적왕도정치론을반대하고실학적왕도정치론이제기된데에는일정한배경이있다. 즉, 실학사상의성립배경에는조선후기사회의해체가강화되어나가던내재적상황이주된역할을담당했고, 일부외래적요인도함께작용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오늘날 실학 으로규정하고있는사상의경향에대해학문적으로관심을표명하기시작했던일제시기에는이사상의형성배경으로청조문물의수용이나서학의전래와같은외래적요인들을주로주목했다. 그후 실학 의개념을정립시켰던해방직후의학계에서는대부분이식민사관극복론과민족사에대한주체적인식논리에따라내재적발전론의입장에서실학의발생원인을추구하게되었다. 한편 1970 년대에이르러실학발생의원인에대한재검토작업이진행되었다. 이과정에서실학발생의내재적요인과함께외래적요인에대한균형적인식이가능하게되었다. 그리하여주체적인식을강조하기위해서외래적요인의인정을거부하려는경향을경계했으며, 주체성의문제는수용의태도나방법에관한문제이지외국의영향을받았는지여부에대한결과의문제가아님을확인했다.* 그리고한민족의역사는그민족의자생적능력에의해서추진되고전개되는것이지만밖으로부터의외적요인이나변수를무시해서는안된다는입장이제시되기도하였다.* 여기에서는기존의연구성과들을기초로하여실학사상발생의원인에대해서검토해보고자한다. (1) 내재적배경 실학사상발달의내재적요인으로는우선조선후기사회의경제적변화와발전현상을주목할수있다 세기이래농촌사회에는커다란변동이일어나고있었다. 일부대토지소유자에의해토지겸병이확대되고그에따라대다수의농민은소작농으로전락하거나아니면토지를잃고농촌을떠나는현상이발생했다. 이와함께또다른한편에서는소작경영이나상업적농업을통해부를축적해가는경영형부농 ( 經營型富農 ) 이나서민지주 ( 庶民地主 ) 가나타나고있었다. 이는곧농민층분해현상의집중적이고구체적인표현이었다. 실학은이러한농민층분해과정에서이에대한대안적사상으로형성되었다. 여기에서실학자들은농민층분해의여러방향에따라각기다르게자신의개혁안을구상했던것이다. 일부실학자들은농민분해현상을주의깊게관찰하면서상업적농업경영자및일부성장하고있는부농층의처지를대변했고, 또다른사상가들은토지에서이탈된빈농들에대한대안을마련하고자했다. 또한편에서는지주적토지소유를근본적으로부정하는가하면, 지주의토지소유자체는인정하고경영의전환과소작조건의개선방안을모색하기도했다.* 아울러양란이후상품화폐경제의발전역시실학사상발생배경의하나로작용하고있었다. 특히 18 세기이후상품화폐경제의발전과정에서서울이상업도시적양상을짙게띠게되자이에영향을받은일군의실학자들이나타났다.* 이들은상업과수공업의새로운동향을주목하면서 18 세기이후서울의도시적분위기에걸맞은유통을중시하는경세론을펴게되었다. 이와함께조선후기의사회계급적변동역시실학발달의원인으로들수있다. 전쟁후의조선사회는중세적신분질서가비교적폭넓게붕괴해갔고, 그것은대체로양반의일부와대다수의농민층이경제적으로몰락해가는하향성과서민층의일부가신분상승을성취하는상향성으로나타났다. 이런변화에직면한일부진보적성향의사상가들은사회적으로하향과정에놓여있는양반층의생계대책과함께상향과정에들어선서민층의이익을보장하는문제에주목하게되었다. 이과정에서실학자들은사회현상에대한정확한진단과대책을모색했고, 이를통해현실개혁적실학사상이형성되었던것이다.* 조선후기실학사상이성립하게된또다른배경으로는성리학을본위로한조선사상계의지형이바뀌고있었던점을들수있다. 성리학은 15 세기조선왕조의사회질서를수립하고이를유지하는데가장근간이되었던사상이다. 성리학은조선후기사회에서도조선왕조의대표적사유형태였으며, 경세론으로의연히작용하고있었다. 더욱이양란후의조선사회는모든분야에걸쳐그부조리가드러나변화의조짐이나타남에따라전면적이고본질적인개혁이필요했다. 이러한상황에서 16 세기후반부터 17 세기에이르러서조선의사상계에서성리학의학풍을추구하면서도주자유일기준의입장을벗어나서새로운기준에입각한학문경향이나타나기도했다. 한백겸 ( 韓百謙 ), 이수광등으로대표되는이러한경향의학인들은당시성리학계에서주류를이루고있던주자를유일한기준으로삼아공허한논의가성행하고있던상황에대해비판적입장을견지했다.* 권득기 ( 權得己 : ) 와권시 ( 權? : ) 부자나허목의경우에도주자유일기준을거부하고있었다. 특히허목의경우에는고문고학을존중하며주자주소의번잡함과폐쇄성을탈피하여육경을중시하는원초유학의체제로복귀하고자했다.* 이들의사상은상술한바와같이 17 세기에이르러새로운상황으로전개되었다. 이에그들은성리학을비판적으로재검토하여선진시대의원초유학으로돌아가왕도정치론의견지에서새로운개혁안을모색했다. 그결과조선후기사상계에서는성리학적학문체계에서벗어난새로운학풍이형성되어갔고, 여기에서탈성리학적 - 원초유학적입장의개혁사상인실학사상이발생하게되었다. 이러한경향은 18 세기후반성리학적명분론에입각한사회질서가동요되던당시의사상계에서도동일하게나타났다. 그리하여경화사족을중심으로한경화학계일각에서는기존의성리학적의리지학을반성하는새로운학문적지향이제기되었다.* 이렇게성리학의자기극복과정에서실학이나타나게된것은실학자대부분이성리학적지식을기본교양으로가지고있었기때문이었다. 상술한바와같이실학자들은적극적으로성리학을부정하거나거부하지않았다. 이에조선후기당시의실학자들은기득권을장악하고있던성리학자들과본격적인갈등이나대립을겪지않을수도있었다. 그러나그들은자기시대의권력구조와사회질서, 문화전통의해석에새로운패러다임을제시하여전면적으로반성 비판하는데에는실패했다. 이때문에실학사상은조선후기라는중세사회해체기에등장한이상사회의중세적재건논리였다는특성에만머물게되었다.* 마지막으로실학사상발달의또다른내재적요인으로는정치적인면에서전쟁후의조선왕조사회가직면하고있었던통치질서의경직화현상을들수있다. 16 세기경부터일부변질되기시작한조선왕조적통치질서는전쟁을겪으면서동요하기시작했다. 집권층의벌열화, 수취체제의붕괴, 신분체제의동요, 농본주의생산체제의일부변화등은 15 세기를통해짜여진조선왕조본래의경국대전적통치질서에상당한수정을가해야할필요성을절실하게했다.

271 전쟁후의조선사회에는전면적이고본질적인개혁이요청되었으나성리학적왕도정치론에침잠되어있던집권세력은폭넓은개혁방안을제시하지못하고, 다만소변통론 ( 小變通論 ) 의입장에서보완적체제유지책을세우는데그쳤을뿐이다. 그러나일부상대적진보성향의관료와재야의지식인들이조선왕조자체를유지하는범위안에서벌열세력을억제하고국가의통치체제를강화해서민생을안정시킬수있는방안을강구하고자했다.* 여기에서볼수있는바와같이조선후기통치질서의경직화현상은왕도정치론의구현을위한현실적대안들에대한사고를요청하고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 16 세기말이이가제시한바와같은무실론 ( 務實論 ), 즉현실개혁론의영향을받으면서도주자유일기준이아닌원초유학의입장에선무실론을전개했고, 그것을다시발전시켜독자적인학문영역으로성립시켜나갔다. 조선후기실학자들에게왕조전기의과학부문업적이나무실론으로대표되는경세적학풍들은참고된바가적지않았다. (2) 외래적요인 실학사상의발달에는내재적요인과함께국제정세의변동과이시기에전래된서학 ( 西學 ) 및청대학문의영향도일정하게작용했다. 여기에서는먼저국제정세의변동가운데조선과청이맺고있던관계를주목해보고자한다. 조선은 17 세기전반기병자호란의과정에서참패를당했고이를만회하기위한노력을여러측면에서전개하였다. 또한대륙에서도명청교체가일어나, 만이 ( 蠻夷 ) 였던청이중국의정통을이어받게되었다. 이와같이새롭게전개된일련의상황에서조선의사상계에서는전통적인정통론과화이론 ( 華夷論 ) 에대한재검토작업의과정중조선중화주의 ( 朝鮮中華主義 ) 가일어나면서소중화론 ( 小中華論 ) 혹은소화론 ( 小華論 ) 이제시되었다.* 이주장은조선의성리학자들이당시의현실을중화가이미소멸된상황으로규정했던사실을전제로해야올바르게이해할수있을것이다. 조선의성리학자들은성리학을기준으로한왕도정치론의입장에서조선만이중화문화의정수를보존하고있다고확신했다. 그리하여이들은조선의학계가다시중국에이를전수시켜야할책임을지고있는것으로생각하기도했다. 국제정세의변동으로초래된조선중심주의적사고방법의출현은실학자들의자아각성에도일정한영향을주었다. 실학자들은정통론과화이론에대한재검토작업을진행하였고, 이재검토작업은실학자자신의사상이새롭게정립되는데에적극적으로기여했다. 한편당시국제정세의변동은서세동점의현상을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서세동점의결과로중국에전해진서학사상은조선에도전파되었다.* 그리고 17 세기이래중국에서간행된각종한문서학서들가운데상당수가조선에전래되어당시의지식인들에게읽히고있었다.* 이때전해진서학서가운데에는천주교사상을논하는서적과함께수학 천문학 농학 측량 지도와같은과학기술계통의서적도있었다. 한문서학서를통해실학자들에흡수된서학의종교사상은그들의철학적사유에일정한영향을미쳤다. 조선후기서학사상을수용한지식인층은대체로성리학에대해비판적이었으며, 선진유학에기초하여원초유학적입장에서성리학적가치체계를변혁하고자했다. 그들은당시의학문풍토가지니고있던사변적경향과관련하여한문서학서가운데천주교교리를설명하는이편 ( 理篇 ) 에관심을가지고있었다. 여기에서주로논하고있던내용은원초유학의신관 ( 神觀 ) 에대한수용을뜻하는보유론적 ( 補儒論的 ) 천주교신앙이었다. 보유론은서학이유학에대립되는사상이아니라유학의부족한점을보충해준다는이론이었다. 따라서그들은자신이기초하고있던원초유학적입장을포기하지않고서도서학에접근할수있었다. 즉, 그들이원초유학의틀을빌어자신의교리에대한설명을시도하던서학에접근할수있었던까닭은심성론을비롯한그들의사상이이미성리학적사상의틀을떠나고있었기때문이기도했다. 그들은서학서에서논의하는인간관등의개념을원용하여자신의이론을발전시켜나가기도했다.* 그들은선진유학의재검토를기초로하여성리학의사상체계를개혁하고자시도했고, 여기에서그들은서학자체도변혁의이념으로파악하고이를연구했던것이다.* 이리하여서학은실학이성리학과구분되는독자적인사상체계로발전하는데에일정한도움을줄수있었다. 또한서학의과학기술에대한이론들도실학자들의사상형성및과학연구에자극을주었다. 실학자들은서학의자극을받으며천문학과지리학혹은기하학등의연구에박차를가하기도했다.* 서양과학기술의우월성을인정하고이를적극적으로수용하자는주장도제기됐으며, 서학서의이론을직접적용하여거중기 ( 擧重機 ) 와같은실용적인토목공사용기계를제작하기도했다. 서양천문학에대한이해의폭이넓어지면서중국이세계의중심이아니라는인식이확대될수있었고, 이를통해학문의관심이조선과조선문화로돌려질수있었다. 즉, 실학이조선중심적인사유체계로발전할수있었던것에는서양천문학의영향으로인한지식의확대가중요한배경이되었던것이다. 한편, 명말청초중국의실학적학풍과청대의고증학도조선후기실학사상형성에영향을주었다. 황종희 ( 黃宗羲 ) 고염무 ( 顧炎武 ) 왕부지 ( 王夫之 ) 안원 ( 顔元 ) 등에의해제시되었던명말청초의학술사상에서는일종의 민족의식 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의식 이강하게나타나있었다. 그러나이와같은학문경향에서등장하는개혁적이상은청조지배층의의도적인왜곡으로인해변질되었다. 그개혁적이상이거세되고고증학으로전환되었던것이다. 그렇지만 18 세기후반기이후에활동했던조선실학자들은명말청초의사상을통해자신의개혁이념을가꾸어나갔다.* 한편청조의고증학 ( 考證學 ) 도조선후기의일부실학자들에게영향을끼쳤다. 청조고증학의영향을받은실학자로는이덕무 ( 李德懋 ) 박제가 ( 朴齊家 ) 정약용 김정희 이규경등을들수있다. 그러나정약용이청대고증학에대해동조하기보다는오히려냉담하기조차했던사례에서드러나듯이조선후기실학에미친청대고증학의영향은상당히제한적인것이었다. 전체적으로볼때조선후기의실학은고증학보다명말청초의학문경향에좀더가까웠다고할수있다. 이와같이조선후기실학사상의발생배경은내재적요인과외래적요인으로나누어검토할수있다. 특히조선후기실학사상의발생배경가운데가장중요한부분은내재적요인이다. 실학사상이조선후기라는장기간에걸쳐전개되던과정에서각시대에따라달리나타난내 외적배경들은실학사상의전개과정에서그사상적특성을형성하는데에적지않게영향을주었다. 그내재적요인으로는농업변동과농민층분해, 상품화폐경제의발달, 신분제의붕괴및평민의식의성장등을주목할수있다. 한편, 조선후기사회가직면하고있었던국제환경의영향아래실학의외래적요인들도조성되어갔다. 실학은대륙정세의변동이나서세동점이라는역사적사건과무관할수없었으므로서학및명 청대학술의수용등조선후기사의주체적전개과정속에서형성되고발전되어갔다. 아울러실학자의이러한사상전환은기존사상을전적으로부정하고얻어진단절의결과가아니라그것을비판적으로수용함으로써가능했기때문에, 조선후기의실학사상은전통성리학의발전적자기극복과정에서성장하고발달하였던것이다.*

27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1. 실학사상의성립 * 3) 실학의연구방법과분야 조선후기실학에서드러나는특성은그연구방법론에있다. 실학자들이가장강조하던방법론상의특성은 박학 ( 博學 ) 이었다. 실학자들은 16 세기퇴율 ( 退栗 ) 단계에서강조되던무실 ( 務實 ) 의방법, 즉현실개혁의논리에주목하되, 성리학자들이경홀히여겼던박학의방법을무실정신을바탕으로하여중요시했다. 박학은원래심문 ( 審問 ) 심사 ( 深思 ) 명변 ( 明辯 ) 과함께원초유학의단계에서부터중요시한방법가운데하나였다. 박학이원초유학단계에서중요시되었기때문에조선성리학계에서도이연구방법론을적극적으로부인하거나포기하지는않았다. 그러나성리학은이박학의방법을구사한연구보다는경학의형이상학적탐구에치중하여, 그학문이비실제적성향으로흐르고있었고, 실천에서는치인 ( 治人 ) 보다수기 ( 修己 ) 에만열중하고있었다. 실학자들은성리학적경학의연구풍토에대한반성을촉구하며, 일상적 현실적분야의연구가중요하다는것을강조했고여기에서박학의방법이존중되기에이르렀다. 그들이박학을중요시한의도는성리학이상으로광범한현실파악능력을배양하여민생을구제하려했던것이다.* 실제성과박학을중시했던실학자들은이를강조함으로써학문연구에절대적위치에놓여있던경학을상대화시키게되었다. 실학자들이박학의연구방법론을중요시했기때문에그들의학문연구는백과전서적경향을띠고있었다. 실학자들에게서흔히발견되는백과전서적경향은성리학이제시하고있었던의리론의유일기준과주관적사유에서벗어나자연과세계와인간에대한객관적이해를공유하기위해제시했던저술에서나타나고있다.* 실학은백과전서적학문경향을가지고있으므로연구분야가매우다양하다. 이다양한연구분야를계통별로살펴보면다시몇분야로나눌수있다. 우선실학은이기 심성등에관한철학적탐구를시도했다. 여기에서그들은조선성리학과는구별되는견해에도달할수있었고, 이에근거하여인간과세계와자연을보는새로운안목을키울수있었다. 또한실학은왕도정치론에대해각별한관심을두고연구하였다. 실학은성리학과는구별되는원초유학에입각하여왕도정치를구현하고자했다. 그들이왕도정치론을개진했던시점은조선후기중세사회해체기였다. 그들은해체기적양상으로각분야에서드러나고있던비리와모순을개혁하고경색된현실을타개하여, 유교적이상사회를구현하려했다. 그리고그들은이를위한구체적방법으로각분야를개혁하고자하는과제들을검토했다. 실학은새로운철학과왕도정치론을총론으로삼아이를기초로하여분야별각론을전개했다. 실학의각론에서는첫번째로조선의존재와전통에관한문제를들고있다. 실학자들은민족의존재를확인하면서전통적화이관의극복을시도했다. 여기에서그들은중국과는구별되는조선적자아에대한인식을강화시키게되었다. 그들은조선의존재자체를정확히이해하고자했다. 그리하여조선어와문학에대한관심뿐만아니라세시풍속을비롯한민속에관해서도애정을가지고조사와연구를진행시켰다. 그들은역사지리와인문지리에대하여깊은관심을가지고있었다. 또한그들은조선의역사적전통에대해관심을쏟았으며, 자신이제시하는개혁안의원리도지난날의역사경험을통해서검증하고자했다. 그들에게역사란조선의주체적인식을위한도구였고, 자신의개혁안을설득력있게제시하게해주는스승이었다. 실학의각론에서두번째로지적할수있는분야는정치제도의개혁에관한문제들이다. 실학자들은왕도정치론에관한부연적성찰을통해서군신간의관계를새롭게확인하고자했다. 국정의각분야에관한연구에힘을기울여국가의제도개혁에관한문제를논했다. 수취체제의개편에관한폭넓은인식을하였으며, 과거제도등관리임용방법의개선책을논했다. 그들은군사제도의개혁안을제시하기도했다. 실학의각론에서는세번째로현실개혁을위한사회 경제적문제들을주목하고있다. 실학사상을낳게한것은조선후기의역사적현실이었기때문에당시의실학자들은농촌의피폐상을극복하기위해토지제도및농업경영의개선책을모색했다. 그리고농업생산력의발전을촉진시키기위한문제에관심을가지고있었다. 또한그들은상공업의발전을위한개선안을내놓았으며, 그들은부당한수취체제의문란상을바로잡고자노력했다. 그리고그들은전통적신분제도의모순을극복하기위해노력하기도했다. 이러한그들의노력은 신아구방 ( 新我舊邦 : 묵은우리나라를새롭게하자 ) 이라는말 * 한마디로집약할수있을것이다. 실학의네번째연구분야로는자연과학과기술과학을들수있다. 실학자들은자연의논리와인간의논리가가지고있는차이점에대해연구했고, 자연에대한과학적관찰과연구를지속했다. 그리고그들은농민을중심으로한민중생활에직접관심을가지고농업기술의혁신에관해서연구했다. 동시에새로운광업기술이나공학기술의도입에대해서도적극적인자세를가지고있었다. 요컨대, 실학자들은중요한연구방법론으로서박학을존중했고자신의학문연구에적용했다. 따라서실학은백과전서적경향을띠게되었으며, 연구분야도매우다양하게전개되었다. 실학자들은새로운사고방법을도출해내기위한전제로서이기론 인성론등에대한연구를새롭게전개하여인간과세계에대한새로운안목을드러내주었다. 그리고원초유학적왕도정치의연구를통해서자신의개혁방향을선정해나갔다. 원초유학적철학사상과왕도정치론은실학사상의총론이었다. 이총론을전제로하여실학자들은구체적실천사항으로각론을수립하였다. 그들은민족의존재와전통에대해서연구했고, 현실개혁을위한정치 경제 사회에관한문제를논했다. 또한자연과학과기술과학에대한연구에도정진하였다. 이모든각론적연구는왕도정치의구체적실현을목표로한것이었다.

27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2. 다산정약용의사상 1) 정약용의생애 18 세기후반실학의정치 사상적분위기는조선의지식인들사이에널리펴져있었다. 특히당쟁을거치면서오랫동안정치참여에서소외되었던근기 ( 近畿 ) 지방의남인들이기존의통치방식에회의를느끼며그러한분위기를갖게되었다. 따라서그들은정권을장악하고있던노론들이존중하고있던성리설과는달리선진유학에기초한새로운개혁이론을일찍부터발전시킬수있었다. 이들의학문적경향을 근기학파 라는범주안에서이해하기도한다. 정약용은이와같은시대적배경을가지고태어났고, 어릴때부터이러한학문적분위기를접하게되었다.* 그가태어난양근 ( 楊根 : 현남양주지역 )* 일대는후대의연구자들로부터실학자로불리게된일군의학자들이새로운학풍을형성해가고있었던곳이었다. 그의친인척들도이지역의학풍을발전시키는데에일익을담당하고있었다. 그는 1762년 ( 영조 38) 진주목사 ( 晋州牧使 ) 를역임했던정재원 ( 丁載遠 ) 과해남윤씨사이에서 4남 2녀중 4남으로태어났다. 다산생가 ( 복원 ) 그의부친은진주목사를지냈으나, 그의집안은당시로서는권세와별로가까운처지가아니었다. 그의일생은대략다음과같이네단계로나누어볼수있다. 그생애의첫번째단계는, 출생이후과거를준비하며지내던 22세까지를말한다. 그는부친의임지인전라도화순, 경상도예천및진주등지로따라다니며부친으로부터경사 ( 經史 ) 를배우면서과거시험을준비했다. 리고 17 세가되던 1777 년 ( 정조 1) 에는성호이익의학문을접할수있었다.* 이때그는부친의벼슬살이덕택에서울에서살게되어, 문학으로세상에이름을떨치던이가환 ( 李家煥 ) 과학문의정도가상당하던매부이승훈 ( 李承薰 ) 이이익의학문을계승함을알게되었다. 그리하여자신도성호의유서를공부하게되었다. 성호이익은근기학파의중심적인물로당시실학의원조 ( 元祖 ) 라고불렸다. 정약용이어린시절부터근기학파의개혁이론에접했다는사실은청장년기그의사상이성숙해가는과정에서적지않은의미를던져주는사건이었다. 그리고훗날정약용자신이근기학파의실학적이론을완성한인물로평가를받게된단초도바로이시기에마련되었다. 정약용의생애에서두번째단계는, 1783 년그가진사시 ( 進士試 ) 에합격한이후부터 1801 년에발생한신유교난으로체포되던시기까지를들수있다. 그는진사시에합격한이후 1789 년식년문과 ( 式年文科 ) 갑과 ( 甲科 ) 에급제할때까지서울의성균관등에서수학하며자신의학문적깊이를더했다. 그는이기간동안여러관직을역임하며정조 ( 正祖 ) 의특별한총애를받게되었다. 그는이때 대학 ( 大學 ) 과 중용 ( 中庸 ) 등의경전을집중적으로연구했다. 그리고 1789 년에는마침내대과에합격하여희릉직장 ( 禧陵直長 ) 을시작으로벼슬길에오른다. 이후예문관검열 ( 藝文館檢閱 ), 사간원정언 ( 司諫院正言 ), 사헌부지평 ( 司憲府持平 ), 홍문관수찬 ( 弘文館修撰 ), 경기암행어사 ( 京畿暗行御史 ), 사간원사간 ( 司諫院司諫 ), 동부승지 ( 同副承旨 ), 좌부승지 ( 左副承旨 ), 곡산부사 ( 谷山府使 ), 병조참지 ( 兵曹參知 ), 부호군 ( 副護軍 ), 형조참의 ( 刑曹參議 ) 등을 10 년동안역임하였다. 또한 1789 년에는한강에배다리 ( 舟橋 ) 를준공시키고, 1793 년에는수원성을설계한것과같은기술적업적을남기기도했다. 한편, 이시기그는이벽 ( 李檗 ) 이승훈등과의접촉을통해천주교에입교하였지만다른형제들과는달리교회내에서뚜렷한활동을전개하지는않았다. 그러나그의입교는자신의정치적진로에커다란장애로작용했다. 왜냐하면당시천주교신앙은성리학적가치체계에대한본격적인도전으로인식되어집권층으로부터격렬한비판을당하고있었기때문이다. 그의천주교신앙이공식적으로문제시된것은 1791 년이후였다. 이로부터그는천주교신앙과관련된혐의로여러차례에걸쳐시달림을당해야했고, 그때마다자신이천주교와무관함을변호했다. 그러나그는 1801 년의천주교교난때에유배를당함으로써중앙의정계와는결별하게되었다. 정약용의생애에서세번째단계는, 1801 년유배이후다시향리로귀환하는 1818 년까지의기간을들수있다. 그는 1801 년의교난이발발한직후경상도포항부근에있는장기로유배되었다. 그러나곧이어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 ( 黃嗣永帛書事件 ) 의여파로다시문초를받고전라도강진 ( 康津 ) 에서유배생활을하게되었다. 그는강진유배기간에학문연구에매진하였고, 이를자신의실학적학문을완성시킬수있는기회로활용했다. 다산의강진유배기는관료로서는확실히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매우알찬수확기였다고할수있다. 이는그의강진생활이관리로서는고난의연속이었지만, 학자로서는문도를거느리고강학과연구와저술에만전념하던시기였기때문이다. 그는이기간동안중국진나라이전의선진 ( 先秦 ) 시대에발생했던원시유학을집중적으로연구했다. 그리하여이선진유학을기반으로해서성리학적사상체계를극복해보고자했다. 또한그는조선왕조의사회현실을반성하고이에대한개혁안을정리했다. 그의개혁안은 경세유표 ( 經世遺表 ) 흠흠신서 ( 欽欽新書 ) 목민심서 ( 牧民心書 ) 와같은책을통해제시되었다. 이러한그의저서가운데에서는유학의경전인육경사서 ( 六經四書 ) 에대한연구와사회개혁안을정리한일표이서 ( 一表二書 :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 가주목된다. 정약용자신의기록에의하면이러한연구서들을비롯한그의저서는경집에해당하는것이 232 권이고, 문집에해당하는것이 260 여권에이르는데, 그대부분이유배기에이루어졌다. 정약용의생애에서마지막단계는, 1818 년 57 세되던해에유배에서풀려나생을마감하게되는 1836 년까지의기간을말한다. 그는이기간동안향리에은거하여지내면서 상서 ( 尙書 ) 등을연구했으며, 강진에서의귀양기간동안마치지못했던저술작업을계속해서추진했다. 매씨서평 ( 梅氏書平 ) 의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 ( 雅言覺非 ) 사대고례산보 ( 事大考例刪補 ) 등이이때에만들어졌다. 그리고자신의회갑을맞아자서전적기록인 자찬묘지명 ( 自撰墓誌銘 ) 을저술했다. 그는그밖에도자신과관련되는인물들의전기적자료를정리하기도했으며, 스스로 500 여권에이르는자신의저서를정리하여 여유당전서 ( 與猶堂全書 ) 를편찬했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그의생애는결코순탄하지만은않았다. 그러나그는생애의거의전기간에걸쳐위기에처한조선왕조의현실을개혁하고자했으며, 그현실개혁의이론적근거를확보하기위해선진유학을비롯한여러사상에대한연구를게을리하지않았다. 그가유배과정에서불교와접촉을했고,* 유배에서풀려난후천주교에다시접근했다는기록도이와같은그의끊임없는탐구정신의일단을나타내는사례로생각된다. 그는학문연구와당시사회에대한성찰을통해서실학사상을집대성했던조선후기사회의대표적지성이었다.

27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2. 다산정약용의사상 2) 정약용의실학사상 오늘날실학을연구하는사람들은정약용을실학사상의집대성자로높이평가하고있다. 그는당시조선사회가직면한위기를해소하고왕도정치가시행되는이상적사회로재편되기를희구하며각종의개혁적사상을개진했다. 한편당시는오늘날과는달리사회와학문의분야가미분화되어있던상황이었으므로그의개혁사상은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사상등각방면에걸쳐서제시되고있었다. 이러한그의사상은 여유당전서 의분석을통해서밝힐수있을것이다. (1) 정치사상과관제개혁론 19 세기의대표적실학자인정약용은그의 1 표 2 서를통해서군주권의절대성과우월성을내용으로하는왕권강화론을제시했다. 그는벌열이권력을장악하고정치를전횡하던상황에서국가공권력의회복을위해왕권의절대성을강조했다. 그러나그가주장하는왕권은공권력을대표하는권위의상징일뿐이었고절대왕정과는거리가멀었으며, 영 정조대탕평정책에서추진되었던왕권강화책과도일정한거리가있었다. 정약용은국왕이나관료가공적인관료기구를통해권력을행사하는것이가장이상적이라고생각했다. 정약용의정치사상은왕도정치의이념을구현하려는데에집중되고있었다. 이러한그의정치사상은주로집권층의정치관을수정시키려는방향에서전개되었다. 즉, 집권층이위로는국왕을정점으로하는통치질서의강화에협조해야하며아래로는애민 ( 愛民 ) 교민 ( 敎民 ) 양민 ( 養民 ) 휼민 ( 恤民 ) 하는목민지도 ( 牧民之道 ) 를확립하여선진 ( 先秦 ) 시대이래유학의기본적가르침이었던민본 ( 民本 ) 의식을실천해야함을주장하였다. 그는한때국가의최고권력자인천자 ( 天子 ) 도인장 ( 隣長 ) 이나이정 ( 里正 ) 과같은인민의대표자들이선출하여추대해야하는것으로생각했다. 그리고맹자에의해서주장된바있었던폭군방벌론 ( 暴君放伐論 ) 의입장에서민은폭군을거부할수있다고까지생각한바있었다. 그러나그의정치개혁안의주류는왕조체제를근간으로한것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그는봉건적통치구조의파행적운영으로말미암은폐단을제반제도의개편을통해최대한으로막아보려는의도를가지고정치분야에서의개혁안을제시했다. 19 세기에이르면, 정치운영의형태가소수의벌열이권력을독점하는세도정치로변화하면서국가기강의문란과관료체제의부패, 극심한사회경제적혼란이야기되었다. 이를바로잡기위해정약용은관료기구의개혁안마련에주력했다. 우선그는 6 조에소속된아문들을재배치하고, 승정원및왕실관련아문들을모두이조에속하도록하였다. 군영아문 ( 軍營衙門 ) 의경우도병조에소속시켜명령전달체계를일원화하였다. 또한, 권력이집중된관료기구의효율적운영을위하여의정부의기능을강화하고자했다. 그는비변사를혁파하고중추부를실직화 ( 實職化 ) 하여변무 ( 邊務 ) 만을담당하게하는방안을제안했다. 동시에이전까지비변사가장악하던군국기무처리기능을의정부에회복시키고고위관직에대한인사권을부여함으로써, 의정부가명실공히관료기구의중심이되는행정체계를구상했다. 그리고왕과관료집단간의사적인연결을방지하고, 관료기구를효율적으로운영하기위해서규장각의초계문신 ( 抄啓文臣 ) 을비롯한청요직 ( 淸要職 ) 의폐지를주장했다. 즉, 왕을정점으로하고의정부를통해권력을일원적으로행사하여행정의본체인 6 조를중심으로하는관료체제를강화하고자하였다. 또한왕과관료사이에도일정한거리가유지되도록하여사회개혁을위한정책이일관성있게추진될수있는독자적인관료체제를조직하고자하였다. 한편, 정약용은과거제개혁론도피력하였다. 그는나름대로의새로운관료제개혁안을제시하면서이에걸맞은새로운관료를선발하기위한과거제개혁론을제시하였다. 정약용은이익의견해에찬동하여식년시를제외한모든부정기시를혁파하고, 급제자수도줄임으로써과거에합격하고도관직을얻지못하는일이없도록해야함을강조하였다. 이는과거제본래의기능을일단회복시키자는목적에서제기된것이었다. 또한정약용은과거제의실시절차를정비 보강하였다. 공거제 ( 貢擧制 ) 를과거시험의 1 단계에서도입하고, 소과 ( 小科 ) 와대과 ( 大科 ) 를통합하였으며, 마지막으로삼관 ( 三館 ) 의관료들이급제자와경륜을논하는조고 ( 朝考 ) 를첨설했으며, 고시과목도대폭증설하였다. 경학과관련된과목들이시험때마다바뀌면서응시생들에게요구되는부담이매우커졌으며중국사는물론우리역사, 관료로서의실무행정과관련되는잡학 ( 雜學 ), 체력의단련을요하는시사 ( 試射 ) 등이새로이추가되었다. 정약용의이러한과거제개혁론은관료를선발하는기준을덕행 재주등으로다양하게확대하고, 학교제와과거제의연결을통해관료양성과선발을구조화하고자하였으며, 관료로서의기본적인자질과실무능력을고양시키려는것이었다. (2) 토지개혁론 원초유학의단계에서제시되고있던왕도정치론에서는그구체적실천방안으로민에게항산 ( 恒産 ) 을보장해주고, 정전제의실시를통해서부세와요역을고르게하고, 상공 ( 商工 ) 의보호를제시했다. 또한당시의왕도정치론에서는전반적차원에서 보민 ( 保民 ) 을주장했고, 특히궁민 ( 窮民 ) 의구제에관심을가져야함을말했다. 조선후기의실학자들은원초유학의왕도정치론을중세해체기의조선사회에적용함으로써조선에서왕도정치를구현하고자했다. 이는정전제의정신을살려토지개혁을단행함으로써인정 ( 仁政 ) 의회복을주장하는새로운왕도정치론으로서의의미를가지고있었다. 실학자들이제시했던정전제등에관한주장은단순한경제개혁의이론이라기보다는왕도정치를구현하고자하는통합적이론가운데주요한일부였다는측면이있다. 즉, 실학자들이주장했던토지개혁사상은왕도정치를조선사회에알맞게재해석하여그시행을역설한것이다. 실학자들은왕도정치의구현이라는현실적목표를가지고정전론을제시함으로써, 국가내지국왕은민을본위로하고민을위하는민본위민의의무를수행해야함을천명하고자했고, 항산을보장받게될민에게무농 ( 務農 ) 을강조하고자했다. 그런데조선후기실학자들이살고있던당시의농업에있어서주요한생산관계는지주 - 전호제가보편적이었다. 따라서이시기토지개혁론은이러한지주제를인정하는위로부터의개혁과지주제를해체하고자립적소농이나중소상공인의입장을지지하는아래로부터의개혁으로두가지입장이있었다. 실학파의토지개혁론은후자의입장과관련된다. 이러한조선후기토지문제에대한개혁론은균전론 ( 均田論 ) 한전

275 론 ( 限田論 ) 정전론 ( 井田論 ) 여전론 ( 閭田論 ) 으로크게구별할수있다. 이들은모두중국의토지개혁논의를자신의근거로삼고있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 ( 磻溪隨錄 ) 에서국가체제의전반적인개혁방안을제시하였는데, 그중에서도토지제도의개혁을가장중요시했다. 그는지세불편 ( 地勢不便 ) 이나공전 ( 公田 ) 에서의수세 ( 收稅 ) 의어려움때문에정전제의시행이어렵다고하면서정전제가가지고있던균산 ( 均産 ) 의의미를살리는방향에서균전제의시행을주장했다. 그리하여그는균전의토지분급과정전의공동부담을근간으로한토지개혁안을제안해서당시의문란한토지소유관계를혁신하고국가가이를재분배하여균등분배 점유하는토지관계를설정하고자했다. 그가토지개혁론을주장했던궁극적인목적은토지를국유화하여토지의겸병을억제하고토지의균점을통해농민생활을안정시키고국가재정을재건하는데있었다. 이익은전통적인토지국유의원칙을토지제도의기본적인대전제로삼아개인의토지사점 ( 私占 ) 을원칙적으로배제하고자했다. 그는농민의균등한토지소유를보장하며, 토지에대한절대적처분관리권을국가에귀속시켜야한다는개혁론을주장했다. 이익이제시했던토지개혁안의구체적인내용은첫째, 토지겸병이빈민 ( 貧民 ) 의매전 ( 賣田 ) 에서비롯된다고파악하여이를방지하기위해호당영업전 ( 永業田 ) 의면적을설정할것을주장했다. 둘째, 영업전외의토지는자유로이매매하고이를팔도록강요하지않는다는것이다. 셋째, 영업전으로제한된토지내에서는매매를금지해야한다고했다. 넷째, 일체의전지매매는관에보고하여관에서이를통제해야한다는것이다. 이와같은그의토지개혁론은귀부자 ( 貴富者 ) 의토지사유를인정한위에서점진적인방법으로균전제를실시하자는것이었다. 또한유형원의균전제가국가의권력으로토지를균분하려는것임에반해이익의한전제는국가권력으로소전주 ( 小田主 ) 들의몰락을방지하는데중점을두어점진적으로장기간에걸쳐꾸준한개혁을실시하려는것이었다. 박지원은 과농소초 ( 課農小抄 ) 에서 한민명전의 ( 限民名田議 ) 라고하는토지재분배론을주장했다. 이주장은일종의한전법으로토지소유상한선을설정하고그이상의소유를허락하지않으면수십년후매매와상속을통해토지가균등해질것이라고예상했다. 서유구 ( 徐有폓 : ) 의한전론도이와비슷하다. 서유구는처음에는한전제를주장했으나현실적방안으로서둔전론 ( 屯田論 ) 을제기했다. 이방안은국가가주체가되는국영농장제의개혁론이었다. > 이러한실학자의토지개혁안가운데가장주목되는것은정약용의이론이었다. 정약용은자신의개혁론을제시하기에앞서정전제 균전제 한전제를차례로비판한바있다. 그는중국고대의정전제가한전 ( 旱田 ) 과평전 ( 平田 ) 에서만시행되었던것이므로, 수전 ( 水田 ) 과산전 ( 山田 ) 이많은우리나라의현실에는맞지않는다고판단했다. 또한균전제는토지와인구를계산하여이를표준으로삼는방법인데, 당시조선은호구의증감이수시로변동되며토지의비옥도가일정치않기때문에조선에서이를실천하기에적합하지못하다고했다. 그리고한전제는전지의매입과매각에일정한제한을두고자하는이론이나, 타인의명의를빌어한도이상으로늘이거나줄이는것을일일이적발해낼수없다고했다. 이들의기본적결함은치전 ( 治田 ) 에반하여농사를짓지않는자에게도토지를주고균산에주안을둔데있다고지적했다. 그러면서그는균산에목적을두지않고오직농업생산력을상승시킬수있는치전에목적을둔토지제도의개혁을주장하면서, 경자유전의원칙을분명히하고자했다. 그의토지개혁론은 전론 ( 田論 ) 에나타난여전제 ( 閭田制 ) 와 경세유표 에보이는정전제의두단계로나누어볼수있다. 그리고다시정전제는고대정전제에대해나름대로해석한정전론과전제개혁안을적용한정전의 ( 井田議 ) 로나누어볼수있다. 정약용의토지개혁안가운데여전제적개혁안을담고있는 전론 은 1798 년에작성되었고, 정전제적개혁을추구하던 경세유표 는 1817 년에쓰여졌다. 먼저, 정약용의경우는농업생산력의향상에관심을두고토지개혁안인여전제를논하였다. 전론 에서주장하는여전제의목적은토지균분으로토지와재부가집중되는것을방지하고자하는것이었다. 여기에서는경자유전의원칙에따라농사를짓는자만이농지를얻고, 농사를짓지않는자는얻지못하도록했다. 이는정전제 ( 정전론 정전의 ) 의입장과같다. 여전제에서제시하고있는구체적인내용은다음과같다. 여전제는 30 가구를 1 여 ( 閭 ) 로하여여민 ( 閭民 ) 은공동노동을통해서생산과수확을하는것으로설정하였다. 여기에서여민이선출한여장 ( 閭長 ) 은생산작업을분담하고, 일역부 ( 日役簿 ) 를만들어노동량을기록했다. 이와같이여전제아래에서는공동생산을추진했지만, 소비에서는가족단위의소비형태를구상했다. 그러므로생산물은생산에투하된가족의노동량에따라분배해야한다고했다. 여전제는봉건적토지소유를부정하고토지의공동소유 공동경작을창안함으로써그경제적내용에서토지는사회적소유로규정되었다. 여전제아래에서인구의자유로운이동을 8 9 년간허용하면, 이익을추구하고해를피하려는농민의합리적행동에의해각여의노동생산성과빈부는균등하게될것으로전망하였다. 그리고 10 년째부터는인구와노동력의이동을노동생산성을균등화하는방향에서만국가가계획적으로관리해야한다고주장했다. 그리고나아가여전제의토지제도를군사조직의근간으로삼아여 ( 閭 )- 리 ( 里 )- 방 ( 坊 )- 읍 ( 邑 ) 에따른병농일치제적군제개혁안을구상했다. 정약용은농사를짓지않는사 공 상의토지소유를반대했다. 이에따라상인과수공업자는독립하여여전제와는사회적분업관계를이루도록했다. 사족의경우직업을바꾸어농사에종사하거나이외의생산활동, 즉상업 수공업 교육등에종사할것을주장했다. 특히사 ( 士 ) 들이이용후생을위한기술연구에종사하는것을가장높이평가했다. 한편, 경세유표 에보이는 정전의 의내용은국가에서재정을마련하여그돈으로사유농지를유상매입하여전체농지의 9 분의 1 을공전 ( 公田 ) 으로하자는것이었다. 이공전을민의노동력으로경작하여그수확을전세에충당한다는것이다. 그리고이를실천하기위한과제로서공전을마련하기위한재원마련, 기구편성, 공전편성, 공전경작을위한노동력할당, 토지대장작성, 공전의조세량등에관해언급했다. 그가제시한이 정전의 의개혁론은조세개혁적성격이크며, 토지개혁이나경작권조정이라는측면도있었다. 그는 정전의 를통해서농업전문화를통한상업적농업을추구했으며그경영규모는 100 무를단위로하는부농에의한자본주의적개별경영을지향했다. 한편, 경세유표 의정전론은전국의토지를국유화하여정전을편성하고, 그중 9 분의 1 은공전을만들어조세에충당하고나머지는농민에게분배하며, 공전은토지를분배받은농민의공동노동으로경작케한다는내용이었다. 정약용은정전론에서국가에토지처분권을귀속시켜지주전호제의재등장을막아보고자했다. 전반적으로정약용의토지개혁론은상업적이윤과자본주의적경영을전제로한것으로농민에게토지를분배하되양반및상 공계층은제외하고농업을통한상업적이윤을추구하게한점에서다른실학자들과차이가있다. 한편, 그가제시한여전제와정전론은유사점이많다. 즉그는자신의개혁안에서모두토지의사적소유를부정했고, 경자유전의원칙에따라농민에게만토지를주고자했다. 그리고농업생산력의발전을목표로삼았으며, 전제개혁을통해서병농일치제를관철하고지방제도와병제의일체화를시도한점도비슷하다.

276 그러나이두개혁안사이에는차이도있었다. 즉, 정약용은여전론을통해서여의설치를논했고여민의공동생산을분명히했다. 그러나정전론에서는정전의경우는그운영에서여전과차이가있었고, 농업의전문화와부농에의한개별경영을제안했다. 그렇다하더라도정전론과여전론은근본적으로다른개혁안일수없었다. 정약용은아마도지향해나가야할궁극적목표내지는방향으로여전제적개혁안을제시했다고생각된다. 그리고현실적개혁안으로서정전제를주장했기때문에이둘사이에는상이점보다도유사점이더많이드러나게되었을것이다. 조선후기의실학자들은선진시대의왕도정치론에서제시하고있었던정전론의이념을살려서지주전호제의모순에시달리던조선의토지제도를개혁하고자했다. 실학자가운데유형원의경우는균전론을논했고이익은한전론을제안했다. 이들은농민보유지의확보, 즉자영농민의확보에주안점을둔개혁을제안했다. 한편, 정약용의경우에는정전론과여전론을통해서새로운토지개혁안을제시했다. 정약용을비롯한실학자들이제안한이토지개혁안들은당대사회에서왕도정치의재현을시도하고자했던실학자들의이상을담고있었다. (3) 상업 공업정책론 원초유학에서제시하고있었던왕도정치론에서는인정 ( 仁政 ) 의지표가운데하나로상인과장인 ( 匠人 ) 을보호하는문제가거론되고있었다. 뿐만아니라전반적인사회개혁을시도하며실학사상이제시되던조선후기사회는선진시대와는달리상공업이상대적으로발전하고있었다. 그리하여실학자들은선진유학에서제시하고있었던공고 ( 工賈 ) 에대한보호논리와조선후기상공업계의발전등에영향을받아서상공업진흥론을전개했고, 화폐의유통정책에적극적이었으며, 광업의개발에대해서도깊은관심을가지고있었다. 따라서왕도정치의재현을시도하던실학자들이상공업진흥론을개진한것은일견당연한일이었다고하겠다. 우선상업에대한실학자들의견해를주목할수있다. 그들은상업을천업시하는말업관과상인의관직진출을막는금고법의철폐를주장했다. 이러한주장은유수원 ( 柳壽垣 ) 이나정약용에의해서강하게제시되고있었다. 그들이상인에대한금고의철폐를주장한것은유식양반에대한문제를해결하기위한방법의일환이었다. 한편, 실학자들은상업발전론을직접제시하였다. 유형원단계의실학에서는농본적입장을견지하면서, 농업생산중심의경제체제를유지하는데에지장을주지않는범위내에서만상업을한정시켜야한다고주장했다. 그러나 18 세기중엽에활동한유수원의단계에이르러실학의상업론은상당한발전을이룩했다. 유수원은상업자본의육성을전망하면서대상인에게금난전권 ( 禁亂廛權 ) 과같은전매특허를주어야한다고했으며, 영세상인의자본을합자 ( 合資 ) 시켜대규모의상인자본으로육성해야한다고생각했다. 그가금난전권의보장을요구한것은국가재정에서중요한의미를차지할수있는상업세의증수에직접적인목적을둔것이었다. 또한지방도시의상업발전을위해서정기시장의상설화를주장했고, 농촌지역에정기시장의개설을장려하고자했다. 정약용은특권상업및매점상업에대한반대론을전개했다. 이시기에는이미 18 세기이후발달한특권및매점상업에의한폐단이발생하고있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그는 선왕의법 을들어서상업이윤을확보하고있던상인들에대한상업세의증수를꾀했다. 그는이를위해서세과사 ( 稅課司 ) 나독세사 ( 督稅司 ) 와같은세무관서의설치가필요하다고인식하였고, 상업세의증수를위한구체적방안을제시했다. 실학자들은상업뿐만아니라수공업분야에대해서도일정한관심을가지고있었다. 박지원 박제가등실학자는방직 ( 紡織 ) 분야등에서드러나는낙후된국내기술을발달시키고생산력의향상을통한국부의증대를목적으로하여선진기술을과감히수용해야한다고주장했다. 정약용도중국으로부터선진기술을받아들이기위해서이용감 ( 利用監 ) 과같은관청의설치를제안했다. 그리고선박과수레제조기술을장려하기위해전함사 ( 典艦司 ) 나전궤사 ( 典軌司 ) 와같은관청을중앙정부에설치하여정부주도로기술을발전시켜야한다고생각했다. 화폐유통에관해서는 17 세기이후화폐의전국적유통으로인한여러가지문제점이나타나면서화폐유통에대한부정론과긍정론이등장했다. 특히 18 세기초발생한전황 ( 錢荒 ) 또는전귀 ( 錢貴 ) 현상이후, 화폐제도나유통을개선시키려는개혁론이실학자들사이에적극적으로나타났다. 화폐유통에대한긍정론은유형원과유수원 박제가등을중심으로전개되었다. 그리고이익 이규경은화폐유통에수반되는문제점을제시하고자했으며, 정약용은화폐제도개선을요구하였다. 유형원은화폐유통에긍정적이었다. 그는중국및고려시대의화폐유통을연구하여국내에서의동전유통을주장하는근거로삼았고, 화폐를식량과함께민생의근본으로인식했다. 이에따라화폐주조의국가관리를주장했으며, 화폐체제및품질의규격화를논했다. 그는화폐원료의공급및화폐주조량을결정하는문제에대해서도관심을가지고있었다. 한편, 그는화폐의보급을장려하기위해국가에서화폐의유통가치를결정해주고, 국가의수입과지출을화폐로납부할것을제안했다. 그리고상설점포의설치를제안했고, 물품화폐였던추포 (? 布 ) 의유통금지를주장했으며, 관용비를금속화폐로지급할것등을제안했다. 반면에, 이익은화폐유통에비판적이어서폐전론 ( 廢錢論 ) 을주장하기도했다. 그는상품교환수단으로서동전의기능이나가치는원칙적으로인정했다. 그러나지역의협소성및재화를운송하기위한교통의편리를들어금속화폐의유통에부정적이었다. 그가부정적인화폐관을가지고있었던까닭은동전유통으로인해상업의발달이촉진되고이와병행하여고리대가성행해서, 농업이위축되고농민이몰락하던현상과관련이있었다. 정약용은화폐유통의현실을인정하고있었지만, 농본적인절약론의입장에서화폐유통의구조개선을주장했다. 그는화폐가상품유통의매개체로서국가경제에중요함을인식했다. 그는당시화폐정책및화폐제도의개혁과전황 ( 錢荒 ) 을극복하려는개혁안을제시했다. 전환서 ( 典? 署 ) 를설치하여화폐의주조와관리체계를일원화하고화폐의품질과체재를개선하려고했다. 또한화폐제도의개혁안으로동전을가장이상적인화폐로생각했으나, 고액전의통용및금 은화의주조를제안하기도했다. 조선후기에는광업분야에서도큰변화가일어나고있었다. 그리하여 18 세기말에는매뉴팩쳐단계의덕대제 ( 德大制 ) 광업경영이진행되었다. 동시에농민층분화와관련하여광산노동자가증가하였고, 이로인해농업노동력의부족현상이나타났다. 광업의발달은전답과봉건질서를함께파괴시켜갔다. 그리고광세 ( 鑛稅 ) 의징수문제, 금 은의국외유출에따른손실등여러문제가수반되었다. 이와같은상황에서유형원은광업에대해공장세 ( 工匠稅 ) 징수등에약간의관심을보였지만, 관영제 ( 官營制 ) 보다는사채제 ( 私採制 ) 를지지하는입장에있었다. 이익은농사에피해가없는한광산개발의필요성을주장했다. 그리고과중한징세로인해서광업개발이위축된다고하여당시시행되었던설점수세제 ( 設店收稅制 ) 의보완을요구했다. 이외에도박지원 박제가 서유구 이규경등과같은실학자들은대체로설점수세제에의한광산개발을인정하면서광산물의효율적활용에더큰관심을지니고있었다. 이렇듯당시실학자들은산업에서광업이차지하는비중이높지않았으며, 사회적독립분업론등에대한인식도미숙하여체계적이고진보적인광업론을제기하지않았다. 그러나정약용의광업론은특출한면모를보이고있었다. 그의광업론은크게두단계로나눌수있다. 초기는국영광업정책의단서가마련되는 지리책 ( 地理策 ), 응지논농정소 ( 應旨論農政疏 ) 가저술된시기이다. 이때정약용은설점수세제를기본으로한정부의광업정책을용인하면서동점 ( 銅店 ) 과철점 ( 鐵店 ) 에대한억제정책을완화시킬것을요구했고, 광업의민영화를인정했다. 그러나정약용의광업개혁론은광업민영화보다는관영화또는국영화의필요성을강조하는방향으로전개되었다.

277 정약용의광업개혁론에서두번째단계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의단계이다. 여기에서그는광업정책과광업경영론을논했고, 광업제도의운영을개선하는방안을마련하고자했다. 이시기에그는중앙정부차원의근본적개혁방안으로국영광업정책및국영광업론을제시했다. 즉, 중앙에는사광서 ( 司틶署 ) 를설치하고지방에는감무관 ( 監務官 ) 을파견하여광산을관리하고자했다. 이외에도이용감의설치를제안했고, 금광군의생산 노동조직과광산의경영형태및생산기술에대해구체적으로기술하면서생산성향상을전망했다. 그리고그는아전의중간수탈을막고소란의근원도방지하기위해서지방관차원의광업제도운영방안으로광업행정지침을구상했다. 이러한다산의국영광업개혁론은당시발달한덕대제광업경영의기술수준을바탕으로하고있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정약용을비롯한실학자들은왕도정치의이념에따라상공인을보호하고, 당시사회의한과제로제시되고있었던상공업발전을촉진시키기위해서상공업개혁론을전개했다. 그리고그들은상업의말업관을거부했으며통공발매정책을지지했고상업세의증대에관해서도관심을가졌다. 또한금속화폐의제조와유통, 수공업의발전에대해서대체적으로긍정적인입장을취했다. 그들은광업을국부의원천으로파악하여국가재정의확보를위해서는광산국영이필요하다고판단했다. 이러한그들의상공업개혁론은현실적으로국가의재정을확보하고유식자 ( 遊食者 ) 를정리하여개직 ( 皆職 ) 을성취해야한다는사회개혁적입장에서제시되었다. (4) 사회신분제도개혁론 조선후기의실학자들은경제사상의경우에서와마찬가지로자신들이추구하고있던왕도정치의이념과조선사회가직면해있던현실에대한성찰을기반으로하여일련의사회개혁론을전개했다. 즉왕도정치의이념을제시한맹자는 등문공 (? 文公 ) 상 ( 上 ) 에서 백공 ( 百工 ) 의일은본래농사를지으면서할수있는일이아니다 ( 百工之事固不可耕且爲也 ). 라고말하며, 노심자 ( 勞心者 ) 와노력자 ( 勞力者 ) 를구별해서사회적분업개념의원형을제시했다. 그러나봉건사회해체기에처해있었던조선후기당시의사회구조에서는사회적분업이라는측면보다는신분제도가적용되는사회적불평등이엄존하고있었다. 실학자들은이와같은당시사회에서사회신분제도의모순성을지적하고, 고착적신분제에의해서사회를설명하기보다는사회적분업에가까운개념으로조선사회를재편하고자했다. 우선실학자들은당시사회신분제도의모순을철저히인식하고있었다. 사람을평가하는데있어서능력보다는문벌이중시되는사회에서양반이아닌중서 ( 中庶 ) 나노비들은차별받을수밖에없었다. 이러한신분간의차별을그들은조선의역사전개과정에서특유하게형성된인습으로바라보았다. 특히당시의성리학에서는기자 ( 箕子 ) 가창시한정당한법으로간주했던노비제도에대해이익은이를훗날에형성된그릇된규정으로단정했다. 그는나라를좀먹는여섯가지병폐로서과업 ( 科業 ) 벌열 ( 閥閱 ) 기교 ( 技巧 ) 승니 ( 僧尼 ) 유타 ( 遊惰 ) 와더불어노비를들었다. 특히관직도없는양반층이노비를부려놀고먹는구조적악습을지적하면서노비법이야말로인습중의인습이라하였다. 그리하여노비의세전법과매매를반대하는등노비에게동정적인입장을취했다. 또한노비소유의상한을정하고종모법 ( 從母法 ) 을시행할것을강조했다. 하지만그도노비제도자체에대한폐지를주장하는데에이르지는못했고, 현실적인관행의불합리를개선하는수준에서신분제도의모순을제거하려하였다. 그리고이익은풍속의타락으로인한향촌신분질서동요를사림파의인륜회복노력을원용하여극복해보려하였다. 그는제 ( 悌 ) 라는횡적인사회윤리회복을통해풍속교화및국운회복까지기대하고있었는데, 여전히주자학의명분론적관념은떨쳐버리지못하고있었다. 실학을집대성한정약용의경우에도사회신분제의개혁논의에는미진한점이많다. 그는모든신민을사 ( 士 ) 농 ( 農 ) 공 ( 工 ) 상 ( 商 ) 포 ( 圃 ) 목 ( 牧 ) 우 ( 虞 ) 빈 ( 嬪 ) 주 ( 走 ) 의구직 ( 九職 ) 으로나누어배치해야한다고보았다. 이는직역에대한종래의신분적파악에서사회분업에따른직능적파악으로나아갔음을보여준다. 또한사의농 공 상에의참여와농 공의과학기술적기반의중요성을강조하고, 농육과제도와공장의기예경영을통해우수한농 공인을행정직에발탁하는일종의직업별과거제를주장했다. 하지만이러한 9 직은공동체적필요에의해국가에서배정하는것으로자유로운선택의의미가들어있는것은아니며사민구직을수평적 직능적으로파악한다는것이신분제의철저한혁파를의미하는것도아니었다. 그는또한인간의본질적평등은인정했지만신분간의위계질서는어느정도필요한것으로보았다. 그리하여 국가에서의지하는것은사족인데그들이권리도세력도없어지면위급할때소민의난리를누가막을수있겠는가? 라는우려를나타내기도했다. 그는양반사족의지도나통솔없이는국가가존립할수없다는신분관을가지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인식은교육관에도드러나양반자제와서민은교육기관이나교육내용을엄격히구분하여양반은지도자로서수기치인의전인교육을, 일반백성은효제의윤리교육을실시해야한다고했다. 양반은통치자로서갖추어야할덕목을배우고평민은피지배자로서지켜야할윤리를배워야한다는것이다. 그는지배계급의선천적인우월과피지배계급의선천적인열등을합리화하는운명론을부정하고인명을중시하는민본주의사상에서계층간격차를좁혀보려했다. 그러나정치의담당자는양반이라는고정된신분관에서벗어나지못했으며, 완전한신분제의타파로나아가지도못했다. 또한실학자들은군현의면임 ( 面任 ) 까지도사실상책임을지고업무를수행할현지의직관 ( 職官 ) 으로충보해야한다고보았다. 유형원은면리 ( 面里 ) 의향정 ( 鄕正 ) 에사족을동원하여직무를맡도록해야하고, 홍대용은면임을종 9 품의정식관원으로삼아야한다고하였다. 정약용은정전제의시행과정에서유산 ( 有産 ) 의유지를동원해응분의직임을맡기도록하고, 그재능에따라정식관원으로발탁해야한다는생각을가지고있었다. 좌수 ( 座首 ) 별감 ( 別監 ) 등향임 ( 鄕任 ) 에대해서도정식관직을부여하고사족으로서응분의대우를할것이며반드시승진기회를허용해야한다고보았다. 정약용은기술개발의최종통로를관직의수여에귀착시켰으며, 성공적인독농가나향촌지도자의경우에도그최종귀착점을관직에두고있었다. 이는당시사회문제가되고있던유식 ( 遊食 ) 양반들에게개직 ( 皆職 ) 을보장하고, 그들을지방행정의하급담당자로삼아행정의운용효율을높이고, 사회풍속의개선도기대할수있다는인식과도연결되는것이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정약용을비롯한실학자들은사회신분제도자체를인습적관념에매달리지않고직능적관점에서파악하고자했다. 그들은사회적분업을인정하는입장에서사회구조를논했던것이다. 그들은성리학적견지에서제시되던선천적불평등성에입각한인간불평등성론에는분명한반대의지를가지고있었다. 그러나그들은만민평등의원리를객관적으로이론화하는데에는이르지못했고, 신분제를철폐하여사회적평등을이루어야함을선명히주장하는단계에까지이르지는못했다. 그렇다하더라도정약용과같은실학자들은왕도정치의이념에따라서자신들이살고있던조선후기사회의불평등성에대해문제의식을가지

278 고있었다. 한편, 그들은향촌제도의개편과연결하여향직 ( 鄕職 ) 을정식관직화하기를제안했고, 향리 ( 鄕吏 ) 제도의문제점을지적했다. 이와같은그들의개혁안은유식양반들에게개직 ( 皆職 ) 을보장하기위한노력의일환이기도했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정약용의사상은당시의사회적제약성을완전히극복하지못한바도있었다. 그러나그의개혁안가운데상당부분은당시사회가직면해있던봉건적질곡을극복해줄수있는탁월한것이었다. 그러므로오늘의학계에서는그를실학사상의집대성자로평가하며조선후기사회가배출한대표적개혁사상가로말하고있다. 다산정약용은조선후기사회가배출한대표적사상가였다. 그는당시사회가직면해있던각종해체현상을직시하고, 사회개혁을위한여러방향을생각했다. 그는현실에대한날카로운비판의식을가지고그문제점들을찾아나갔다. 그는문제점이가지고있는근본적원인을분석하고, 이를기반으로하여이에대한구체적이고실천적인개혁안을마련하기위해노력했다. 그리고이와같은개혁안은정조 ( 正祖 ) 와같은성군 ( 聖君 ) 이왕도정치의구현을위해서실천해야할것으로생각했다. 이왕도정치의실현에는창의적이고강직한신하의보필이필요하다고했는데, 아마도그는자신이이와같은역할을감당할수있을것으로생각한듯하다. 정약용은정조가재위하고있던자신의젊은시절한때관직에있으면서직접개혁정사를실천한바도있었다. 그러나정약용은생애의대부분을개혁의현장과는유리된상태에서보내게되었고, 오랜기간의귀양살이를통해당시사회의피폐상을정확히파악할수있었다. 여기에서정약용은이상적이며참신한개혁안들을제시할수있었지만그개혁안을자신이직접추진할수는없었으며관직경험이부족함에따라그의개혁안은현장성이결여되었다는문제점이제기되었다. 즉, 그는개혁의목표와개혁이후의사회상에대해서는선명히제시했지만, 그길로나아가기위한구체적방법이나과정에대해서는별다른아이디어를가지고있지못했다. 여기에서그의개혁안이가지고있는이상적특성과함께실천의제한성이드러난다. 그의개혁안은민본주의가가지고있는한계를완전히벗어나지는못했다. 민본주의에서는민을객체화하여통치나보호의대상으로만파악할뿐, 민자신을통치의주체로인식하지는못하고있었다. 이러한제약성은그개혁안의실현가능성에대해상당히심각한문제를제기하게되었다. 그러나정약용은 18 세기를전후하여우리나라사회에서강력히제시되고있던개혁의의지를집대성했고, 개혁의당위성을명백히해주었던인물임에는틀림없다. 그에게는개혁을향한열정이끊임없이타오르고있었으며, 빈곤과착취에시달리던민에대한넘치는애정이드러나고있다. 그는시대의문제점을밝혀내는데에과감했으며, 그것을해결하기위해고뇌하던양심적인지식인이었다. 그는이상적인왕도정치가이땅에서이루어질수있으리라는꺾이지않는희망을간직하고있었다. 그러기에그는스스로좌절하지않고그방대한개혁사상을전개할수있었던것이다. 우리는그의개혁안이묵살되거나좌절되는과정에서조선왕조몰락의원인을찾을수있을것이다. 동시에그의개혁안을통해역사의발전을위해꾸준히노력하던선인 ( 先人 ) 들의의연한자세를확인할수있는것이다. 우리가정약용의개혁사상을검토하는근본목적도역사발전을위해노력하던그의연한자세와, 어떠한역경가운데에서도간직하고있던개혁된미래를향한그희망을거듭확인해보기위해서이다. 그러므로정약용의개혁정신은오늘날에도검토할만한가치가충분히있다.

27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3. 다산정약용의마재생활 * 전근대한국문화의총체적점검이자비판이라고할수있는조선후기실학은다산 ( 茶山 ) 정약용에의해체계적으로정리 집대성되었다. 일찍이정인보 ( 鄭寅普 ) 는 선생일인에대한고구 ( 考究 ) 는곧조선사의연구요, 조선근대사상의연구요, 조선심혼 ( 心魂 ) 의명예 ( 明톣 ) 내지전조선성쇠존멸에대한연구 라고까지말한바있다. 한마디로말하기는곤란하지만, 다산에대한연구는그의개혁론중심의경세학과고경 ( 古經 ) 연구를통해근원적으로비판한경학위주의사상체계에대한분석에치중되어있었다. 그동안다산연구에관한많은성과에도불구하고, 조선후기학인 ( 學人 ) 다산을이해하는데이러한시각은그의삶에서사상만을돌출시켜이해할우려를내포하고있다. 그러므로여기에서는정약용의마재생활을중심으로논의하기위해, 먼저다산정약용의다양한이름을정리하고, 다음으로마재에서의성장기와청년관료로서서울에거주한사환기 ( 仕宦期 ), 장기 강진의유배기를거쳐해배 ( 解配 ) 되어돌아온고향마재 ( 馬峴 ) 에서의만년의생활을살펴보고자한다.

28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3. 다산정약용의마재생활 * 1) 다산과관련된이름들 이름은한사람한사람을규정하는일차적인표지 ( 標識 ) 이다. 공자는정명 ( 正名 ) 을거론하면서 명 ( 名 : 이름혹은명분 ) 이실 ( 實 : 당위적실제 ) 에부합되어야한다. * 고언급하였다. 흔히 다산 이라불리는호는정약용이자신을표현하던대표적인호는아니었다. 그가 62 세때지은 자찬묘지명 ( 自撰墓誌銘 ) 의서두를보면다음과같다. 이무덤은열수 ( 洌水 ) 정약용의묘이다. 본이름은약용 ( 若鏞 ) 이요, 자 ( 字 ) 는미용 ( 美庸 ), 또다른자는송보 ( 頌甫 ) 라고했으며, 호는사암 ( 俟菴 ) 이고, 당호 ( 堂號 ) 는여유당 ( 與猶堂 ) 인데겨울내를건너고이웃이두렵다는의미를따서지었다.* 즉, 다산자신은그의여러호중에서도특히사암 ( 俟菴 ) 이란호를손꼽아자신의삶을표현했던것이다. 사암은 뒷날의성인을기다려도미혹됨이없다. 라는뜻으로 기다림 의의미가강하다. 또한여기에는전근대사회의이상적인인간형인성인에게도자기의학문은질책받지않으리라는확신의뜻도내포되어있는것이다.* 다만다산이란호는그가유배기대부분을강진에서머물렀기때문에뒷사람들이즐겨부르게된것이다. 그리고국학자인정인보 안재홍 ( 安在鴻 ) 등이 1934 년에 다산서거백주년기념사업회 를결성하고, 그이듬해에 신조선 잡지에다산특집호를게재하면서부터다산이라는호가일반에게널리알려지게되었던듯하다.* 그러나위의 자찬묘지명 ( 壙中本, 集中本 ) 에서나타나듯이다산자신이즐겨사용한아호는 다산 보다도 사암 임을알수있다. 조선시대에는양인이나노비의경우 세기에도성 ( 姓 ) 을갖지못하는경우가많았던반면, 사대부의경우에는초명 ( 初名 ) 관명 ( 冠名 ) 자 아호등의다양한이름이있었으며, 경우에따라서는국가에서내린시호까지부여받기도하였다. 정약용과관련된여러이름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본관압해 ( 押海 ) - 나주의옛지명이다. 아명 ( 兒名 ) 귀농 ( 歸農 ) - 부친정재원 ( 丁載遠 : ) 은 1762 년 3 월에생원시에입격 ( 入格 ) 하였는데, 윤 5 월 21 일사도세자가죽임을당하는참변이일어나자관직을그만두고시골에돌아가기로결심하고있었는데, 다산이마침태어났으므로귀농이라이름지었다.( 마현은고조부때부터낙향한다산의고향임 ) 관명 ( 冠名 ) 약용 ( 若鏞 ) 자 ( 字 ) 미용 ( 美庸 ) 또는송보 ( 頌甫 ) 당호 ( 堂號 ) 여유당 ( 與猶堂 ) - 여 ( 與 ) 여! 마치겨울에냇물을건너는듯하고, 유 ( 猶 ) 여! 사방을두려워하는듯하노라 ( 與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 라는 * 노자 도덕경 ( 道德經 ) ( 상편, 15 장 ) 에서따온말이며, 그의 여유당기 ( 與猶堂記 ) 에의하면, 여유당이란당호는자신의단점을경계하여붙여진것이다.* 6 7 년전부터생각해오던것을 1800 년 6 월 28 일정조가승하하자초천 ( 苕川 ) 의별장으로돌아와형제가한데모여경전을강 ( 講 ) 하고, 그당 ( 堂 ) 에 여유 ( 與猶 ) 라는편액을걸고아울러기 ( 記 ) 를지어아이들이보도록하였다. 아호 ( 雅號 ) 시호 1 삼미자 ( 三眉子 ) - 다산은 2 살때천연두을순하게앓았으나, 오른쪽눈썹위에흔적이남아눈썹이세개로나뉘었으므로스스로 삼미자 라하였다. 삼미집 ( 三眉集 ) 은 10 살이전에지은저작으로 14 세쯤이를엮어편하였다. 2 균암 ( 筠菴 ) - 30 대관료시절죽란시사 ( 竹欄詩社 ) 를결성했을때사용했던것으로보인다. 3 철마산초부 ( 鐵馬山樵夫 ) - 마재일대의철마산에서따온호로해배되어마재에돌아온후 1819 년에쓴 아언각비 ( 雅言覺非 ) 서 ( 序 ) 에는철마산초 ( 鐵馬山樵 ) 라고썼다. 4 열수 ( 洌水 ) - 한강의이칭에서따온호이며, 전근대에는저서에대개관향 ( 貫鄕 ) 을쓰는것이관례였으므로다산도 열수정약용미용 ( 洌水丁若鏞美庸 ) 이라고자신의저술에서명하였다.* 5 열초 ( 洌樵 ) - 열수의초부 ( 樵夫 ). 조선열수지간철마산거 ( 朝鮮洌水之間鐵馬山居 ) 라는인장 ( 印章 ) 을사용하였다 ( 김영호교수소장 ).* 6 다산 ( 茶山 ) - 강진의다산유배기 (1808 년봄 1818 년 8 월 )* 에지은별호 ( 別號 ) 이다 년에지은 현진자전 ( 玄眞子傳 ) 의말미에는 다산초부 ( 茶山樵夫 ) 가송풍암 ( 松風庵 ) 에서쓰다. 라고하여 11 년간을지낸강진유배기에즐겨사용하였음을알수있다. 이호와관련작품으로는 다산문답 ( 茶山問答 ) 다산팔경사 ( 茶山八景詞 ) 와 다산화사 ( 茶山花史 ) 20 수가있으며, 다수 ( 茶?) 라는아호도사용하였다. 다산은동백꽃 ( 山茶花 ) 을좋아했으며차를즐겨마셨는데, 해배되어마재에돌아온후강진의제자들이차를선물로보내기도하였다. 7 정석 ( 丁石 ) - 강진다산초당의서쪽바위벽에새긴글에나타나있다. 8 사암 ( 俟菴 ) - 백세이사성인이불혹 ( 百世以俟聖人而不惑 ), 즉훗날성인이보아도전혀의심할것이없다는의미의자호 ( 自號 ) 로서, 어떤성인에게도자기학문은질책받지않으리라는확신의의미가있다. 아울러자신의경학저술을 사암경집 ( 俟菴經集 ) 이라고도하였다. 다산자신의대표적인호이다. 9 자하산인 ( 紫霞山人 ) : 김씨부인전 (1813) 의말미에는 단오 2 일전에자하산인정약용이다산의동암 ( 東菴 ) 에서쓰다. 라고하였다. 10 기타 - 탁옹 (? 翁 ), 여유병옹 ( 與猶病翁 ) 등이있다. 문도공 ( 文度公 ) 년친일정권이내린전시용시호이다. 즉, 1910 년 ( 순종 4) 7 월 18 일에정헌대부규장각제학으로추증하고, 박학다문 ( 博學多聞 ) 하고제사합의 ( 制事合義 ) 하다. 는의미의 문도 라는시호를내렸다.

28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2 절다산정약용의사상과마재생활 3. 다산정약용의마재생활 * 2) 마재에서의삶 다산의생애는대개다음과같이네시기로구분된다.* 제 1 기 : 성장기 ( 成長期 ) 1 21 세 ( : 영조 38 정조 6) 제 2 기 : 출사기 ( 出仕期 ) 세 ( : 정조 7 정조 24) 제 3 기 : 유배기 ( 流配期 ) 세 ( : 순조 1 순조 18) 제 4 기 : 해배기 ( 解配期 ) 세 ( : 순조 18 헌종 2) 제 1 기는철마산을뒤로하고남 북한강과초천강이합류하는광주초부면마현리 ( 지금의남양주시조안면능내리 ) 에서태어난후학문을연마하고 20 세에서울의창동 ( 지금의남대문안 ) 에거주하면서 21 세때인 1782 년 2 월세자책봉을축하하기위해실시된증광감시에서경의 ( 經義 ) 초시에합격하기전까지의시기이다. 제 2 기는 1783 년경의진사가되어국왕정조의은우를받으며현실정치에서혁신의꿈을펼치던개혁관료시절이다. 제 3 기는정약용의대부분저작이이루어진 18 년간의유배기이다 년신유사옥으로인하여정약종 ( 丁若鍾 : 다산의세째형 ) 이승훈 ( 李承薰 ) 등은사형되고, 중형인정약전 ( 丁若銓 ) 은흑산도로, 다산자신은경상도장기현에유배 (1801 년 3 월 11 월 ) 되었다. 다산은그후강진읍으로이배되었다가다산으로옮겨해배되기까지거처하게된다. 이시기에는 경세유표 (1817), 목민심서 (1818) 등이저술되었다. 제 4 기는해배기로서 1818 년 8 월 14 일비로소열수 ( 洌水 ) 의본집에돌아와만년을보낸시기이다. 이시기다산은 흠흠신서 ( 欽欽新書 ) 아언각비 ( 雅言覺非 ) (1819) 자찬묘지명 (1822) 및다양한경집 ( 經集 ) 을저술하였으며그후 1836 년회혼일 ( 回婚日 ) 인 2 월 22 일에생을마쳤다. (1) 성장기다산의마재생활 다산집안이마재에정착하게된배경은그의 임청정기 ( 臨淸亭記 ) 에잘나타나는데, 그내용을보면다음과같다. 숙종만년에나의할아버지병조참의정시윤 ( 丁時潤 ) 공께서상소하여양곡방출을애원한일을논하였다가임금의노여움을사서벼슬에서물러나게되었다. 이때한강의물가를따라노년에살만한곳을구하다가, 초천의위쪽에이르러반고를발견하게되었다. 반고의주인이있는지를물어보니주인은없었다. 산아래사는백성들을찾아가서그들을깨우쳐말하기를 이반고는하늘이우리에게준것이다. 그렇다고그저차지할수는없다. 너희들이먼저살았으니너희들이곧주인이되는것이다. 하고말다래를벗겨그들에게주고그땅을얻었다. 그땅의형세를살펴보니, 동쪽에는두물이새로모여서여울물이잔잔하지않고, 서쪽에는골짜기입구가처음갈라져서바람이모이지않았다. 다산은외 5 대조인공재 ( 恭齋 ) 윤두서 ( 尹斗緖 : ) 를많이닮았다고한다. 그래서다산재세시 ( 在世時 ) 에주위에서는공재를보고싶으면다산을보라고까지했다고한다. 사실지금많이이용되고있는몽타쥬같은다산의초상화 ( 그것은한말에다산의얼굴을본사람의증언을듣고만든몽타쥬라한다 ) 를보면공재의모습과비슷하다.* 한편, 사암선생연보 ( 俟菴先生年譜 ) 에의하면, 다산의얼굴모습과수염이이분을많이닮았으며, 그문인들에게말하기를나의정분은외가에서받은것이많다. 라고하였다는것이다.* 다산은 2 세때천연두를앓아어린시절에삼미자 ( 三眉子 ) 라는자호를사용하였다. 6 세때에는부친진주공을모시고경기연천임소로따라갔으며, 7 세때부터는오언시 ( 五言詩 ) 를짓기시작하였다. 그시에 작은산이큰산을가렸으니 / 멀고가까움이다르기때문 이라는구절이있는데, 부친은이를기특하게여겼다고한다. 9 세 (1770 년 ) 때에는어머니숙인 ( 淑人 ) 윤씨 ( 고산윤선도의후손 ) 가세상을떴다. 다산이 12 세때서모 ( 庶母 ) 김씨를맞이하였는데, 다산형제자매중에서특별히다산과정이돈독하였다. 다산은서모김씨를회고하여다음과같은묘지명을남겼다. 처음 ( 서모께서 ) 우리집으로올때약용의나이는겨우 12 세였다. 머리에는이나서캐가많이있었고또부스럼이나종기가잘생겼다. 서모는손수빗질을해주고또그고름이나피를닦아주었다. 속옷이나바지, 적삼이나버선도빨고바느질도하여꿰매는수고로움도역시서모가담당하였으며, 관례를올리고장가든이후에그만두었다.* 한편, 다산의성장기는셋째아버지인정재진 ( 丁載進 ) 의영향을많이받았던듯하다. 다산은 나의선고께서벼슬을그만두고집에계실때자주궁핍을당하였는데, 공 ( 정재진 ) 은자신의근심처럼여겨여러번자신의재산으로생활을꾸려나갔으며, 때때로맛있는반찬과따뜻한옷으로봉양하였으므로굶주리거나추움을한번도당한적이없었다. 고하였으며, 내나이 8, 9 세때였다. 초가을에게가살찌기시작할무렵온식구가모두그것을먹었는데, 얼마있다가독이퍼져안팎의어른아이할것없이모두호흡곤란으로죽게되었다. 공은중독이더욱심하였으나 몸소약물을만들어 그위급함을구하였다. * 고서술하였다. 이러한모습은계부정재진과의관계를묘사하는글이지만, 여기에서우리는초천 ( 苕川 ) 에서다산의유년시절이어려웠다는것을알수있다. 부친이관직을그만둔 10 세 (1771 : 영조 47) 때부터다산은부친에게경서와사서 ( 史書 ) 를수학하였다. 두시 ( 杜詩 ) 를뽑아베껴놓고그것을모방하여원운 ( 原韻 ) 에따라화답하는시를지은것이수백수 ( 首 ) 나되었다. 15 세때인 1776 년 2 월 22 일에다산은풍산홍씨에게장가들었다. 이해부터다산의서울생활이시작되었다. 다음의인용문은수학기다산의거처변화를잘보여주고있다. 우리집안은본래가난하여병신년 (1776) 봄에선군 ( 先君 ) 께서다시벼슬길에올라호조좌랑이되어명례방 ( 明禮坊 ) 에서임시로집을세내어살았다. 정유년 (1777, 정조 1) 가을에전라화순현을맡아외직으로나갔으며, 경자년 (1780) 봄에는예천군수로옮겨겨울에그만둔이후 7 년동안집에서지내셨다. 정미년 (1787) 여름에다시벼슬하여한성서윤이되어다시명례방에살았다. 기유년 (1789) 여름에외직 ( 外職 ) 으로나가울산도호부사가되었으며, 경술년 (1790) 겨울에진주목사로옮겨임자년 (1792) 여름에관청에서돌아가셨다.*

282 다산은외직에부임하는부친을따라임소 ( 任所 ) 로가서그곳의풍광을음미하면서경전연마에열중하였다. 그리하여 16 세때비로소성호 ( 星湖 ) 이익 ( 李瀷 : ) 의유고를처음으로보았다. 다산은항상자식이나조카들에게말하기를 꿈속같은내생각이성호를따라사숙 ( 私淑 ) 하는가운데깨달은것이많다. 고하였다. 그해여름에는외직인화순현감에제수된부친을따라화순현북쪽에있는동림사 ( 東林寺 ) 에서맹자를강독하였다.* 18 세때에는부친의명을받들어서울로올라와서여러문체를공부하였으며, 그이듬해예천임소의부친을찾아동헌동쪽에있는반학정 ( 伴鶴亭 ) 에묵었는데여기에서그는글씨를쓰고강독에만뜻을두었다. 부친이벼슬을그만두자고향마재에돌아와겨울에글을읽었다. 21 세때처음으로서울창동에집을사서본격적인서울생활을시작하였다. 그이듬해 2 월에세자책봉을경축하기위한증감감시에서경의 ( 經義 ) 초시에합격하였고 4 월에회시 ( 會試 ) 에서생원으로합격하였는데, 3 등으로일곱번째였다. 이때처음으로정조와만났다. 이해에성균관에들어갔으며, 회현방으로이사하여재산루 ( 在山樓 ) 에살았다. 23 세때정조가 중용 에대한의문점을기술한 80 여조항중첫머리에사칠이기 ( 四七理氣 ) 의변 ( 辨 ) 을논하면서퇴계와율곡의차이점을물었는데, 다른동료들은모두퇴계의사단이발 ( 四端理發 ) 의설이옳다고하였으나다산은율곡의기발설 ( 氣發說 ) 이곧바로통하여막힘이없다고주장하였다. 정조는 그가진술한강의는일반세속의흐름을벗어나오직마음으로이를헤아렸으므로견해가명확할뿐만아니라그공정한마음도귀하게여길만하니, 마땅히이권 ( 卷 ) 의첫째로삼는다. 고하고크게칭찬하였다.* 이후다산은정조의총애를받게되었다. 28 세때정조의개혁정책을이념적으로뒷받침할개혁파의젊은인재를중용한초계문신 ( 抄啓文臣 ) 으로임명된후정약용은관료의길을걷게되었다. (2) 해배기다산의마재생활 유배기다산에게고향땅마재는그리움의대상이자궁극적인회귀처였다. 다산은비교적객관적으로다음과같이마재를묘사하였다. 나의집은초천의시골인데, 물은활몇바탕거리만가면길어올수있으나, 땔감은 10 리밖에서해오며, 오곡은특별히많이나는것이없고풍속은이익만을숭상하고있으니대체로낙원 ( 樂園 ) 이라고는할수없으며, 취할점은오직강산 ( 江山 ) 의뛰어난경치뿐이다. 그러나사대부가땅을차지하여대대로전하는것은마치상고시대제후가그나라를소유함과같은것이니, 만일옮겨다니며남에게붙어살아서크게떨치지못하면이는나라를잃은자와같은것이다. 이것이바로내가미련을버리지못하고머뭇거리면서초천을떠나지못하는이유이다.* 다음으로다산의병력 ( 病歷 ) 및건강상태를살피고자한다. 먼저다산은어린시절언제인지정확히알수는없지만, 홍역 ( 麻疹 ) 을앓았는데몽수 ( 蒙?) 이헌길 ( 李獻吉 ) 이지은책으로말미암아살아나기도하였다.* 그리고시에의하면, 수염이희게된시기는장기현에유배중이던 40 세무렵부터인것으로보인다. 초봄에수염두개희어지는데初春兩個白毛新하나는검붉어지고하나는희어졌노라一個猶玄一個純이곳에서또하나생겨나서此地又來添一個자연히세개가되어은빛처럼희어졌구나天然三個白如銀 * 아울러장기현유배시에는 담배이제처음으로나왔는데 / 유배객과는가장잘아는사이 / 조금빨아들이면향기매우짙고 / 내뿜으면실같은연기하늘거리네 / 나그네항상편안치못한데 / 봄날은지루하기만하구나. * 라고하여유배객으로서의울혈한심사를담배로달래었음을알수있다. 그러나다산의후반생은반신불수의폐인의몸으로엮어진참혹한상황이었다. 반신불수의모진풍병 ( 風病 ) 을앓았던때는다산으로옮긴 47 세무렵이었다. 그로부터 49 세에이르기까지는다산에게있어서가장혹독한시련의시기였던것같다. 다산은왼쪽팔과다리가마비된채펴질못했고, 안면신경도마비되어항상입가에서흘러내리는침을어찌하지못했다. 언어신경마저마비되어말을제대로못할지경이었고, 머리엔빙상조부 ( 氷上釣夫 ) 처럼이상한털벙거지를늘얹고있어야만했던몰골이라고, 50 세때흑산도에유배중이던중형약전에게기막힌하소연을적어보내기도하였다. 67 세때송파윤외심에게보낸구절에서 말라비틀어진왼쪽다리는한발자국도방밖을내딛기싫어했고, 입에서는신음소리가한때도가실날이없었던 다산은 75 세로하직하는날까지병고로부터벗어날길이없었던생이었다.* 이같이다산의말년은개인적으로는병마에시달렸으며, 사회적으로는폐족 ( 廢族 ) 의처지를감내해야했던고통스러운시기였다. 다산에게유배기가자신의학문세계 ( 경학과경세학 ) 를완성한시기라고한다면, 해배기는집중적인저작시기에해당한다고하겠다. 해배되어고향에돌아온다산은자신을알아준정조와의만남을되새기기도하였다.* 이때에교유한인물로는경기학인김매순 ( 金邁淳 ) 홍석주 ( 洪奭周 ) 신작 ( 申綽 ) 등을들수있다. 한학계학인인신작은정약용이해배된직후 1819 년 ( 순조 19) 8 월부터, 송학계학인인김매순과홍석주는각각 1821 년 11 월과 1827 년 11 월부터정약용과교유하기시작하였다. 당대의대표적인경학가이기도한이들경기학인들은경학의연구물을돌려보며심도있는토론을나누었는데, 주로정약용의 매씨서평 ( 梅氏書平 ) 과 상례사전 ( 喪禮四箋 ) 등을검토하였다. 김매순 홍석주는정약용저술의과격한표현과논거상의오류를지적하였는데, 이는다산이유배로인하여이용할수있는자료가매우한정되어있었기때문이었다.* 이들과의교유를통해상서 ( 尙書 ) 관계의 매씨서평 을개정 증보 (1834 년가을, 73 세 ) 하는성과를거두었다. 다산은 1836 년 9 월 22 일진시 ( 辰時 ) 초각 ( 初刻 ) 에생을마쳤다. 이날은결혼 60 주년의회혼일 ( 回婚日 ) 로, 다산은족친과문생들이다모인자리에서운명하였다. 운명하기 3 일전에쓴 회근시 ( 回픟詩 ) 에서다산은불우한남편에게 60 평생을바친아내와의동고동락을회상하기도하였다. 육십년세월이바람개비처럼잠깐사이에흘러갔네六十風輪轉眼飜복숭아꽃곱게피던봄빛마치신혼때와같구나횑桃春色似新婚살아이별죽어이별은모두늙음을재촉하는것生離死別催人老슬픈세월짧았고기쁜세월긴것은임금의은혜련가戚短歡長感主恩결혼하던이날밤주고받은사랑얘기오늘따라더욱즐겁고此夜蘭詞聲更好지난유배시절아내의치마폭엔눈물자국번졌노라舊時霞? 墨猶痕헤어졌다다시만난것은우리들의참모습部而復合眞吾象 ( 합근례의 ) 바가지두쪽이나자식에게남겨줌세留取雙瓢付子孫 *

283 다산은말년에폐족과병마에시달린생을살았다. 또한 6 남 3 녀를낳았으나살아남은자녀가 2 남 1 녀뿐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터럭하나병들지않은것이없어당장개혁하지않으면조선국가는망하리라던, 다산이오늘날우리에게남기는의미는무엇일까? 1804 년 (43 세 ) 에강진에서지은 여름에술을대하고 ( 夏日對酒 ) 를보면, 그것은현실개혁의실현여부가아니라, 그개혁정신이아닐까한다. 어찌해야만개의대나무로那將萬箇竹천길높이쓸어내는빗자루매어가지고束? 千丈長쭉정이와겨와티끌을다쓸어내어盡掃秕쾘塵바람에한번날려보낼수있으리오! 臨風一飛퀢 *

28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근기지역의천주교전래 * 1. 사상계의변화와천주교의전래 조선후기사회에서는사회경제적변동과함께사상의변화도진행되고있었다. 물론당시조선의사상계를지배하고있었던사유양식은성리학이었다. 당시양반사족을비롯한지배층들은이를정학 ( 正學 ) 이라지칭하고있었다. 그러나이정학으로는조선후기의급변하던사회를설명하거나감당할수없었다. 이에정학에대한비판을통해실학사상이대두되었고, 미륵 정감록 동학 천주교신앙과같은새로운종교운동이일어났다. 신종교운동가운데미륵 정감록 동학사상이조선내자생적신앙운동이었던것에반해천주교는외국에서전래된신앙이란점에차이가있다. 이새로운종교운동의중심지가바로근기 ( 近畿 ) 지역이었다. 오늘의남양주시는이근기지방의범위안에포함되어있었다.* 한편, 당시광주 ( 廣州 ) 를비롯한근기지방에서는성호 ( 星湖 ) 이익 ( 李瀷 : ) 을비롯한일단의학자들이범유학 ( 汎儒學 ) 의입장에서새로운경세론을전개하고있었다. 이들을후일성호학파 ( 星湖學派 ) 라고부르게되었다. 이익의학통을이어받은성호학파는 18 세기후반기에이르러대체적으로두가지경향을띠게되었다.* 즉, 안정복 ( 安鼎福 ) 을대표로한일단의연구경향에서는박학 ( 博學 ) 을숭상하고유교의경전에대한재해석을시도하면서새로운경세론을전개해나갔다. 그러나이들은성리학에대한비판의식이상대적으로약했으며, 서양학문의수용이나사회질서의전반적변혁에대해서는부정적입장을취하고있었다. 이들을성호우파라고지칭하기도한다. 반면에성호좌파로분류되는대표적인물로는권철신 ( 權哲身 : , 세례명암브로시오 ) 을들수있다. 이들은성호이익의학통을이어받되, 성리학에대한비판을더욱강화하였으며, 새로운학문적이론을확보하기위한방법으로서학 ( 西學 ) 에대한관심을고조시켜갔다. 당시서학은서양의과학기술과천주교신앙이라는두가지측면이있었다. 그들은성리학에대한비판의식을가졌고, 서학을수용하는데에도적극적자세를취했다. 한국의천주교신앙은이와같은사상적배경아래에서근기남인계열의학자들을중심으로해서이론적으로수용되기시작했다. 권철신을비롯한남인계열의학자들은주어사 ( 走魚寺 ) 를비롯한산사에서강학 ( 講學 ) 을갖고유교경전을연구하던중중국에서한문으로간행된천주교서적에주목하기시작했다. 이들가운데이벽 ( 李檗 : , 세례명요한 ) 은서학에대한학문적호기심의단계를넘어서이를종교운동으로발전시키고자했다. 이벽은동지사 ( 冬至使 ) 의일행으로중국북경을방문하게된이승훈 ( 李承薰 : , 세례명베드로 ) 에게천주교에대해서자세히알아오도록부탁했다. 이승훈은 1784 년북경에서서양인선교사를찾아가천주교교리를배운후세례를받고귀국했다. 그해 9 월그는서울의수표교부근에있었던이벽의집에서이벽에게세례를줌으로써신앙공동체인교회를출범시켰다. 이렇게형성된교회는곧놀라운전파력을가지게되었다. 이초창기천주교신앙공동체는근기지방을중심으로하여퍼져갔다. 특히당시천주교신앙이성행하던곳으로는 여리양광 ( 驪利楊廣 ) 으로불리던경기의여주 ( 驪州 ) 이천 ( 利川 ) 양근 ( 楊根 ) 광주 ( 廣州 ) 일대였다. 그리고충청도내포지방과충주, 전라도의전주지방에도천주교가전파되어있었다.* 근기지방은천주교신앙운동을발아시킨곳이었고, 초기교회의지도자들가운데이지방출신들이많았다. 이지역에서천주교신앙이뿌리를내릴수있었던것은성호좌파적학문풍토와성리학에대한비판의식에기인한다고볼수있다. 또한이지역에서는신문화수용운동이활발하게전개되고있었다. 그리고당시천주교회에서는보유론 ( 補儒論 ) 의입장에서교리를설명해주고있었으므로이지방의양반사족들이천주교를상대적으로용이하게이해하고수용할수있었다.

28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근기지역의천주교전래 * 2. 초기의신앙공동체 조선후기근기지방에서는 1784 년교회가창설된이후 1801 년 ( 순조 1) 이른바신유박해 ( 辛酉迫害 ) 에이르기까지천주교신앙이활발히실천되고있었고적지않은신도수가존재하고있었다. 당시이지역의신도분포는아래의표와같이근기지방에서는초창기부터천주교신앙운동이전개되었고, 다양한신분계층에속하는사람들이신앙공동체를형성하고있었다. 이신앙공동체에있어서천주교신자의신분별분포는양반층이주류를이루고있었다. 이는아마도이지역이근기남인의중심지였고, 특히성호이익의학문적영향을받은양반사족들이천주교에입교했기때문이었을것이다. 한편, 근기지방에있어서천주교신앙이분포된지역적특성을찾아보면, 양근일대가주목된다. 그까닭은양근이천주교의선교와관련된주요인물들의연고지였고, 1784 년조선에천주교회가세워진이후양근지방은천주교신앙활동의중심지가운데하나였기때문이다. < 경기지방천주교신도분포도 (1801)> 지역 / 구분 합계양반중인양인천인미상 계남 : 여남 : 여남 : 여남 : 여남 : 여남 : 여 합계양근광주여주이천기타 : : : 4 20 : 5 2 : 0 9 : 1 65 : : 9 18 : 1 16 : 5 1 : 0 2 : 0 2 : 0 1 : 0 0 : 0 1 : 0 0 : 0 0 : 0 8 : 3 0 : 0 3 : 2 0 : 0 0 : 0 5 : 1 2 : 1 0 : 1 2 : 0 0 : 0 0 : 0 0 : 0 19 : 2 10 : 1 3 : 1 3 : 0 1 : 0 2 : 0 출전 : 조광, 조선후기천주교사연구, 1989, 46 쪽 당시양근감호 ( 鑒湖 ) 에는 * 권철신이거주하고있었다. 그는성호이익의학통을이어받은근기남인의대표적학자였다. 그가천주교에입교했고, 그의동생인권일신 ( 權日身 : , 세례명프란치스코사베리오 ) 이천주교선교에투신하는과정에서천주교신앙은이지역에뿌리를내리게되었다. 권철신 권일신형제가천주교에입교하는과정에서는이벽의역할이주목된다. 남인출신이었던이벽은권철신의명망을잘알고있었으며, 그의강학에참여해왔다. 이벽은천주교에입교한이후당시청년층의사상적지주였던권철신을입교시킴으로써천주교를청년지식층에전파시키고자하였다. 이에이벽은권철신과권일신을방문하여천주교교리를설명하고입교를권유하게되었다. 이에권일신은입교를결심하고이승훈으로부터세례를받았다. 얼마후권철신도세례를받았지만, 양근일대에서천주교활동은권일신을중심으로하여진행되었다. 권일신의선교에의해서이지역의사족가운데적지않은사람들이천주교에입교하게되었다. 이렇게입교한권일신은곧천주교를선교하는데에중심적위치를차지하게되었다. 그는이벽 이승훈과함께천주교신앙을전파시킨 세명의사도 ( 使徒 ) 로초창기교회사에기록되어있었다. 권일신으로부터천주교신앙을전수받았던대표적인물로는이존창 ( 李存昌 : , 세례명루도비꼬곤자가 ) 과유항검 ( 柳恒儉 : ) 을들수있다. 이존창은원래권철신의명망을듣고그의가르침을받고자양근을찾았다가권일신의권면으로천주교에입교했다. 이후이존창은충청도의주요지역이었던 내포 ( 內浦 ) 의사도 로불리게되었다. 또한그는 호남 ( 湖南 ) 의사도 로불리는유항검을입교시켰다. 이와같은권일신의노력으로양근은당연히 조선천주교회의요람 으로간주되었다.* 한편권일신은자신의신앙을다지기위해서도지속적으로노력하고있었다. 그는규칙적으로용문산 ( 龍門山 ) 에있는사찰에가서자신의친우인조동섬 ( 趙東暹 : , 세례명유스티노 ) 과함께종교적수양회인피정 ( 避靜 ) 을하면서예수그리스도와성인들의삶을본받고자했다. 조동섬은권일신의권면을받고천주교에입교했을것으로추정된다. 조동섬은학덕이높았던남인출신양반이었다. 조동섬은입교한이후자신의가족과친척들을입교시켰고주변의사람들에게천주교를권면했다. 그의아들은토마스라는세례명으로전해지고있으며, 1839 년서울의당고개에서순교한조증이 ( 趙曾伊, 세례명발바라 ) 도조동섬의집안사람이었다.* 조토마스나조증이의경우에도조동섬의감화를받아입교했던것으로추정된다. 이처럼양근을중심으로한근기지방의천주교운동은권일신에게서천주교를전수받은사람들을통해 1801 년이전충청도내포지방및전라도와근기지방등각처에서지속적으로전개되었다. 그리고조동섬의예에서볼수있는바와같이이들은박해가잠시끝난이후교회재건운동에도참여하였다. 한편, 권철신 권일신형제와함께, 정약종 ( 丁若鍾 : , 세례명아우그스티노 ) 과정약용 ( 丁若鏞 : , 세례명세례자요한 ) 의존재도주목할수있다. 정약종은초기천주교회의신도단체였던명도회 ( 明道會 ) 의회장이었다. 그는 주교요지 ( 主敎要旨 ) 라는제목의천주교교리서를집필하여초창기조선천주교의사상적기초를다지는데에이바지했다.* 정약종은오로지신앙에전념했고이로말미암아척사론자들로부터강력한비방을듣게되었다. 이러한사실은다음과같은목만중 ( 睦萬中 ) 의척사소 ( 斥邪疏 ) 에서드러난다.* 정약종은과거공부를하지않고, 오로지사술 ( 邪術 ) 을행하는데에만뜻을두었습니다. 만가지악이구비되어있고, 천가지요사함이모두모여있어서, 양근사람들이화를내고미워하지않은이가없었습니다. 정약종의동생인정약용의경우에도이승훈으로부터세례를받고천주교에입문한바있었다. 그러나그는천주교에대한금지령이반포된이후신앙공동체의생활을청산했음을강조한바있었고, 신해 (1801 : 순조 1) 의박해과정에서자신의기교 ( 棄敎 ) 를확인했다. 한편, 그는그후교회재건운동에다시참여했던것으로알려져있다. 그런데그의신앙실천여부와는상관없이그의사상에는천주교의신앙적요소가수용되어

286 있음이밝혀지고있다. 이외에도 1801 년이전양근출신의천주교신도가운데에는다음과같은인물들도포함되어있었다. 즉, 양근출신이었던남필용 ( 南必容 ) 은학장 ( 學長 ) 을업으로삼아서울에서지내고있었다. 홍익만 ( 洪翼萬 ) 의경우에도양근에서서울로전입했다.* 이들의예에서볼수있는바와같이서울로전입한양반출신신도들가운데에는양근출신들도일부포함되어있었다.*

28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근기지역의천주교전래 * 3. 신앙고백의전개 조선에천주교가전래된직후부터정부에서는천주교를박해했다. 정부는천주교가평등을주장하며신분제적질서를문란케하는위험한사상이라고규정했다. 그들은천주교를사학으로규정하고이에대한탄압을정당화했다. 이과정에서 1785 년서울명례방김범우 ( 金範禹 ) 의집에서진행되었던신앙집회가발각되어김범우가유배형에처해진사건이발생했다. 한편, 1791 년에발생한진산사건 ( 珍山事件 ) 을계기로하여천주교에대한본격적인문제가제기되었다. 이진산사건은전라도진산에서윤지충 ( 尹持忠 ) 과권상연 ( 權尙然 ) 이조상에대한제사를거부함으로써일어난사건이었다. 그리고이를계기로하여천주교에대한금령이내려졌고, 전국적인박해가단행되었다. 진산사건의여파는양근지방에도미쳤다. 이는당시양근이천주교신앙의중심지가운데하나였기때문이다. 그리하여홍낙안 ( 洪樂安 ) 과목만중등천주교에대한반대자들은양근에있던권일신을 천주교의중요한두목이요지지자라고지목해서고발했다. 고한다.* 사실, 권일신은양근지방의대표적신자였다.* 그때문에척사론자들은그를 양반출신천주교중의괴수 라고지목했다.* 권일신은이사건으로말미암아체포되었다. 그는신문과정에서자신의신앙을고백하고배교를거부했다. 목만중등척사론자들은그의사형을주장했지만정조 ( 正祖 ) 는이를용허하지않고제주도유배형을선고했다. 그가출옥하여유배지로떠나기에앞서서울에머물러있는동안그는 8 순노모를염려하여약간의양보적언사를제출했다. 그결과그의유배지가충청도예산으로바뀌었다. 그러나그는유배지예산을향해길을떠난직후고문의상처가악화되어주막에서임종했다.* 진산사건의여파로인한박해의피해는근기지방에서도적지않게있었다. 그런데권일신이죽은이후그의둘째아들이었던권상문 ( 權相問 : , 세례명세바스티아노 ) 은양근에머물며천주교신앙생활을계속해서실천하고있었다. 그러므로 1795 년이후주문모신부는양근직승 ( 直升 ) 에있던권상문의집에서 3 일간머물수있었다.* 양근지방에서는 1800 년 4 월에천주교에대한박해가일어나기도했다.* 이처럼박해가간헐적으로계속되었던것은양근일대에천주교신도가적지않게남아있었기때문이다. 당시정부관리들은양근일대를경기도가운데사학이최고로심한지역으로파악하고있었다.* 18 세기말양근일대에천주교신앙이성행하던상황은다음의상소문을통해서도잘드러난다.* 최근사학이삼남에번성하고, 근기에까지물들게하였으니, 그기세를막을수없을까걱정과근심이끝이없습니다. 비록여주와양근으로만말한다해도여주의옥에갇힌자가 10 여인에이를정도로많다고하며, 양근에는그것에미혹되지않은사람이없고, 배우지않았던마을이없으니, 장차온고을이모두금수의땅에들어갈것입니다. 이상소문의내용에는약간의과장된부분도있지만이를통해서양근을비롯한근기지방에서천주교가계속해서성행하고있었던사실과이에대한정부당국자의경계심을확인할수있다. 이러한경계심으로말미암아 1801 년박해가진행되던과정에서이지역의천주교신도들은적지않은고통을강요당했다. 즉, 신유박해가일어나자양근지방에서도다수의신자들이체포되었다. 체포된신자가운데양반출신들은양반의범죄에관한처결을전담하던의금부로압송되었다. 이과정에서근기남인들의사상적지주였던권철신도체포되어신문을받았다. 그는고문의후유증으로감옥에서죽었다.* 1801 년 4 월 25 일양근읍내에도순교자들이났다. 경기감사이익운 ( 李益運 ) 의장계에의하면, 유한숙 ( 兪汗淑 ) 과 1795 년순교한윤유일 ( 尹有一 ) 의사촌동생인윤유오 ( 尹有五 ) 를민인이많이모인양근관아의대로변에서참수했다고하였다.* 양근에서참수당한신도가운데에는윤유일의사촌누이인윤점혜 ( 尹占惠 ) 도있었다. 그는강완숙 ( 姜完淑 ) 과함께초기교회의여성신앙공동체를이끌어왔던인물이다. 윤점혜는당시 여회장 ( 女會長 ) 으로불릴정도로신망이높았으며 * 1801 년 2 월강완숙과함께체포되어신문을받았다 년 7 월 5 일 ( 양력 ) 윤점혜는양근에서참수를당했다 년 1 월 30 일양근출신김일호 ( 金日浩 ) 와권상문 ( 權相問 ) 이양근에서처형되었다. 권상문은박해가일어나자체포되어양근감옥에갇혔다가혹독한고문으로잠시배교를한바있었다. 그러나그가서울로이송된이후에는고문에굴복하지않고자신의신앙을증거하며, 10 개월동안수감되어있었다. 그는자신의출신지인양근으로이송되어사형을당하였다.* 신유박해의결과양근지역의신앙공동체는거의파괴되었고, 이지역출신의신자들이교회의지도부를이룰수도없었다.* 그러나이박해에서살아남았던조동섬만은이후에도조선천주교회의정신적지주로서지속적인활동을전개하였다. 조동섬도신유박해가일어나자양근의관원에게체포되었다.* 조정에서는조동섬에대한신문을주장했다.* 이때문에그는서울의의금부로이송되어신문을받았다. 아마도이때그는자신의신앙을부인했기때문에사형을당하지않고, 함경도무산 ( 茂山 ) 으로유배를갔던것으로추정된다. 조동섬의아들조토마스는조동섬이양근에서체포되어의금부로이송된이후무산에유배된직후까지도부친을배행 ( 陪行 ) 하며, 부친에게헌신적인효도를실천했다. 그러나조동섬의출신지였던양근의지방관은조동섬의유배가확정된이후그아들인조토마스를체포해서신문하고자했다. 그리하여조토마스는부친의배소 ( 配所 ) 에서 1801 년 8 월관원들에게체포되어양근에압송되었으며그해 10 월초에양근옥에서고문치사를당했다.*)

28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5 장조선후기정치 사회의변화 제 3 절근기지역의천주교전래 * 세기의교회박해 1801 년의신해박해는해가바뀌면서점차이완되어갔다. 그렇지만모든지역에서박해가끝났던것은아니었다. 국가에서는천주교에대한금령을여전히지속했다. 이과정에서지방민들이신도들을 천만가지로괴롭히고, 그들을종과같이다루었다. * 고하였다. 일반적으로지방민들은신도들을관가에고발하지는않았다하더라도, 신도들이국가에대한 범죄자 로인정되고있는한, 그들을천인으로인식했던것이다. 당시의관행으로범법자들은천인에준하는존재로취급되고있었기때문이다. 그러므로신도들은원래자신이양반가문출신이었다하더라도더이상사류 ( 士類 ) 에낄수없었다. 그들이상한 ( 常漢 ) 출신인경우에도일반양인들과대등한사회적대우를받을수는없었다. 박해이후그들은확실하게신분강등을강요당하고있었다. 이과정에서주목되는것은양근지방의양반출신이었던조숙 ( 趙淑 : , 세례명베드로 ) 의행적이다.* 그는신유박해과정에서체포되어유배당했던조동섬의가까운친척이었다. 그는박해가일어나자양친을따라서강원도로피신해서여러해동안살았다. 그러나조숙은 1804 년이천에서체포되었으며자신의출신지인양근으로압송되어신문을당했지만, 배교후석방되었던것으로추정된다.* 그는함경도무산에유배되었던친척조동섬을찾아가만나기도했다.* 조숙은 1805 년에권일신의딸인권데레사 ( ) 와결혼했다. 권데레사는권일신의 4 남매중맏딸이었다. 이들의혼사는그부모가천주교사건연루자였다는공통점으로용이하게이루어졌을것이다. 그리고두사람은합의에의해동정을지킬것을약속했으며, 이를실천에옮겼다. 당시조선에서는독신생활을통해서신앙에전적으로헌신하는생활을하는천주교적수도생활의실천이불가능했다. 이때문에수도생활을원하는사람들이결혼을가장하여살면서수도를실천했던사례가있었다. 조숙부부도이경우에속한다고할수있다. 그들은수도생활을통해서자신의생활을교회활동에전적으로봉헌하고자했다. 한편, 이때조동섬은유배지에서천주교신앙을계속하면서, 그곳주민들에게글을가르치며살아갔다. 그는 1811 년교회재건운동에참여하여북경의주교와교황에게보내는편지를보내는데에참여하였다.* 1816 년정약종의아들정하상 ( 丁夏祥 : ) 은무산을찾아가서그에게서한문을배웠다.* 조동섬 조숙 정하상등은교회재건운동에함께참여하고있었다. 특히조숙부부는서울로이주하여살면서정하상과함께교회재건운동을전개했다. 그과정에서 1817 년 3 월자신이가르치던예비신자의밀고로체포된듯하다. 그들부부는함께지내던고발바라와함께포도청에수감되었다. 고발바라는무산에서조동섬으로부터교리를배워세례를받았던사람이다. 이들셋은 1819 년 5 월 21 일서울에서참수되었다.* 그후조동섬은조숙의체포로말미암아 1819 년에관원으로부터다시신문을받았다. 이때그는관리에게자신이천주교신앙을계속지키고있다고선언했다. 관장은조동섬과주민들의접촉을차단하고자했다. 그러나그지역에서조동섬에게글을배우던사람들이이러한명령을공공연히무시하자관청에서도이를묵인할수밖에없었다.* 양근지방의천주교신앙에관한기록은 1830 년대에도계속해서나타나고있다. 당시조선교회는파리외방선교회의선교사들이입국하여선교를시도하고있었다. 그리하여 1836 년 1 월에는프랑스인선교사모방 (Maubant) 이조선인신도들의안내로압록강을건너의주 ( 義州 ) 를통해서입국했다. 그는입국후서울에머물며조선어를배우면서선교에종사하였다. 그의뒤를이어서 1837 년 1 월에샤스탕 (Chastan) 신부가조선에입국했고 1 월 15 일서울에도착했다. 샤스탕신부가서울에들어오자모방신부는양근으로옮겨서 4 주일동안머물며그고을의신자들을돌보았다.* 선교사의입국을전후하여가장두드러진활동을전개한인물로는정하상을들수있다. 그는 1816 년이후모두 9 회에걸쳐북경을왕래하며조선교회를재건하는데결정적인역할을수행하였다. 정하상은 1823 년부터조선교회의실질적지도자로활동하고있었다. 그는 1839 년의박해과정에서 상재상서 ( 上宰相書 ) 를통해서자신의신앙을옹호하고신앙의자유를주장했다. 그러나그는이박해의과정에서순교했다.* 1839 년의박해가일어나자그여파가양근지역에도미쳤다. 사실신유박해이후양근지방에서천주교를신봉하는신자들은소수에지나지않았다. 그러나정부당국에서는관원들을다시양근으로파견하여 1801 년의박해때에죽음을당한양반가문의후손들이천주교를계속신앙하고있는지를확인하고자했다. 물론그들은더이상천주교를믿지않았다. 이러한상황에서장사광 ( 베드로 ) 과손막달레나는이지역을중심으로신앙활동을전개하고있었다. 장사광은원래서울의중인가문출신이었다. 그는신유박해를겪은이후 1828 년까지는천주교신앙을포기하고있었다. 그러나그는자신의부인을비롯한주변신도들의권고로천주교신앙을다시회복했다. 그는향교의향안 ( 鄕案 ) 에서자신의이름을빼도록했고, 조상의위패를불사르고신앙을실천했다. 그는절제와극기를실천하면서신도생활을해왔다. 그후그는프랑스선교사로부터성사 ( 聖事 ) 를받을수있었다. 장사광의아내인손막달레나는신유박해때에서울에서순교한손경윤 ( 孫景允 ) 의딸이었다. 이들부부는 1839 년 8 월두아들과함께체포되어양근관아에체포되었다. 양근군수는이들을배교시키고자 10 여회에걸쳐서고문했고, 배교를유도하기위해서이들의면전에서두아들을고문하기도했다. 두아들은배교후 2 개월여를감옥에서지내다가석방되었다. 그러나이들부부는끝까지신앙을지키다가, 장사광은 11 월 13 일에, 손막달레나는 11 월 17 일에아사 ( 餓死 ) 당했다.* 양근출신천주교신도의존재는 1868 년 ( 고종 8, 戊辰 ) 박해때에도확인된다. 즉, 당시서울에살았던과부김마리아는원래양근출신이었다. 그는서울에있던숙모박우르술라의집에서분 ( 粉 ) 장사를하면서살다가 1868 년에체포되어 35 세의나이로순교했다.* 이처럼 18 세기말엽에서 19 세기의중엽에이르기까지양근을중심으로한근기지방에서는천주교신앙이일찍부터성행하고있었다. 초기교회사에등장하는이지역출신자들은양반지식인들로서신문화수용운동차원에서천주교를수용하고실천하고자했던인물들이었다. 그러나정부당국으로부터천주교에대한박해가계속되자양반사족출신들은대체적으로천주교신앙을포기했다. 이지역의천주교신앙공동체는일반민인들이주류를이루어갔으며, 그들의신앙운동은점차민중종교운동적차원으로전환되어갔다. 양근을비롯한근기지방에서는천주교박해의과정에서적지않은순교자가출현했다. 당시순교에는종교적열정과더불어역사적 사회적의미가함축되어있다. 즉, 그들은서학의가르침이었던인간존엄성과평등성을실천했던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인간의불평등성을주장하던당시의신분제적사회질서에서그들은범죄자일수밖에없었다. 또한신도들은종교와사상과양심의자유를주장하다가죽음을강요당했다. 요컨대, 그들의죽음은이러한자유를쟁취하는데에밑거름이되었다. 조선후기사회에서이러한선진적사상과사회운동이양근을중심으로한근기지방에서움터나오고있었다.

28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1 절조선후기호구의변화 조선은개국초부터호구파악에많은노력을기울였는데, 이는정부가징병과과세등을원활히수행하기위한필수요건이었다. 그러나조선전기호구자료는단편적으로남아있어전체적인증감상황을파악하기는어렵다. 조선건국직후에는고려의호적제도를답습하다가성종때에이르러 경국대전 을반포하면서 3 년마다호적을개정하였으며, 지방관의호구작성에통일성을기하기위하여예전의호구식과별도로호적부의사실을증명해줄수있는준호구식을작성하도록하였다. 호구식에는기본적으로면리와성씨 생년월일 본관을기재하였고, 수록기준에따라종친 의빈 서인으로구분하였다. 조선전기의전국적인호구통계자료는 1404 년 ( 태종 4) 과 1406 년것이전부라고할수있다 년의기록에따르면호수 ( 戶數 ) 15 만 3404 호와인구 32 만 2786 명으로되어있고, 1406 년에는호수 18 만 246 호와인구 37 만 365 명으로나타나있다. 두자료사이에는호수와인구수가모두증가하는것으로나타나지만이들자료가당시의전체적인호구를파악한것으로는보이지않는다. 호구총수 각군현별호구수를알수있는것은영조대의자료에이르러야가능하다. 조선전기의호구관련자료는태종대와 세종실록 지리지에실려있는것외에는임진 병자란으로대부분소실되어남아있는것이별로없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수록된양주의호수는 1481호, 인구는 2726명으로호구당인구수는 1.8명으로나타난다.* 그러나당시의호구파악은남정 ( 男丁 ) 만을대상으로한것이었기때문에전체적인호구수로보기는어렵다. 조선시대전국적인호구증감추이를미흡하나마확인할수있는것은 1639 년 ( 인조 17) 부터이다. 그러나 17 세기이후여러자료에나타난호구수가전기와비교하여매우자세하기는하지만실제의호구수를제대로파악한것으로는보이지않는다. 그이유는여러가지측면에서찾아볼수있는데, 특히호적제도와부세제도 부역제도의문란등에서찾아볼수있다. 주지하듯이조선은전국의호구를파악하기위하여 3 년에한차례씩주 부 군 현의행정단위로호적대장을작성하여보고하도록하였다. 호적의식년 ( 式年 : 子 卯 午 酉年 ) 에각가호의호주가가호내에거주하는인구와그신상에관한사항들을기록하여호구단자 ( 戶口單子 ) 를소속관아에제출하였다. 해당관아에서는제출된자료의이상유무를확인한다음면리별로 5 가작통법을시행하여그군현의호적대장을작성하였다. 이자료는 2 부가작성되어 1 부는관찰사영에, 다른 1 부는호조에보내도록하였다.* 하지만이러한호구파악절차가원활하게이루어지지는않았다. 왜냐하면호구의파악이공물의책정과군역및부역을차정하는기준자료로이용되었기때문에누락될소지가많았던것이다. 더욱이호구조사가주민의신고에의해이루어졌기때문에도망자나은루자 ( 隱漏者 ) 모록자 ( 冒錄者 ) 가많았다. 이와함께호적대장의작성을담당한면리임과감고 색리 수령들은임시직으로신분상확실하지않고관심이별로없고사리에만눈이어두워조작하는경우도허다했다. 그리고영아나유아는사망률이매우높아현실적으로파악할필요가적었기때문에호구파악에서제외되는것이상례였다. 따라서호적대장에기록되는호구는실제와는다른수치를나타낼수밖에없는것이었다. 또한지역에따라호구통계작성시서로다른기준을적용하여실제인구파악을어렵게하였다. 이러한문제점이있기는하지만조선후기의대체적인호구변동을파악할수는있다. 남양주지역의호구변동상황을알아보기전에먼저 17 세기전반부터 19 세기후반에이르는시기의전국호구수와서울 경기도의호구변동을살펴보자. <17 19 세기서울과경기도의인구변화 > 연도 / 구분 전국전국전국 호수구수호수구수호수구수 1640 년 ( 인조 18) 1648 년 1657 년 ( 효종 8) 1663 년 ( 현종 4) 1666 년 1678 년 ( 숙종 4) 1688 년 1717 년 1724 년 ( 경종 4) 1726 년 ( 영조 2) 1753 년 1774 년 1776 년 ( 정조즉위 ) 1783 년 1786 년 503, , , ,365 1,313,453 1,342,428 1,560,561 1,557,709 1,574,066 1,576,598 1,772,472 1,692,607 1,715,371 1,733,757 1,737,670-1,531,365 2,290,083 2,851,192 5,018,744 5,246,972 6,218,342 6,829,771 6,865,286 7,032,425 7,289,730 7,039,068 7,238,522 7,316,924 7,356,783 12,490 10,066 15,760-23,899 22,740 28,356 34,191 25,844 32,747 34,953 38,531 38,593 42,281 42,786-95,569 80, , , , , , , , , , , ,127 38,040 26,043 42, , , ,, , , , , , , , ,270-81, , , , , , , , , , , , ,482

290 1789 년 1792 년 1799 년 1807 년 ( 순조 7) 1837 년 ( 헌종 3) 1852 년 ( 철종 3) 1864 년 ( 고종 1) 1,752,837 1,741,359 1,741,184 1,764,504 1,591,963 1,588,875 1,703,450 7,403,606 7,446,256 7,412,686 7,561,403 6,708,529 6,810,206 6,828,521 43,929 43,963 44,945 45,707 45,640 45,678 46, , , , , , , , , , , , , , , , , , , , , ,399 출전 : 조선왕조실록 ; 증보문헌비고 ; 호구총수 ; 탁지지 ; 양보경, 서울의공간확대와시민의삶, 서울학연구 1, 1994, 55 쪽. 개략적인내용이긴하지만위의표를통해경기도와전국의호구증감요인을살펴보면현종대까지크게증가하던호구수가숙종대에이르러서는완만한증가를보인다. 이것은숙종대에자주발생했던여역 (? 疫 ) 때문이었다. 여역발생은흉년과기근을동반하는경우가많았기때문에이에따른사망자가증가한것으로볼수있다. 그리고호구를파악할때자연재해등으로농촌을떠나유리하는자들은결국호적에서누락되기때문에호구수를감소하게하는요인으로작용하기도하였다. 이후영조대중반기를지나면서부터는정부의여러가지적극적인정책에힘입어다소증가추세를유지하게되었다. 정부는이정법의시행, 호적법의강화, 흉년이나기근시전세의탕감등농민을안정시키기위한다양한정책을시행하였고, 부분적으로효과를거두기도하였다. 그리고순조대에이르러서는서얼허통을단행하고노비가운데 7 만여명에해당하는노비안 ( 奴婢案 ) 을불태워양인으로신분을상승시킨것을계기로순조초기에인구가증가하는것으로나타났지만근본적인인구증가는아니었다. 이것은 1810 년 ( 순조 10) 이후로 650 만명대를오르내리는수치를보아도알수있다. 18 세기후반이래전정 군정 환곡등전반적인세제의문란은농촌경제를어렵게하는한편농민들을토지에서이탈하게하였다. 이시기유민의발생은국가와지주층의농민수탈이라는바탕위에서전개되었다. 토지에서이탈된자들은일거리를찾아서울 평양 개성등상업도시로모여들었다. 이들은대개도시빈민이나부랑자의형태로존재하면서사회적으로많은폐단을발생시켰다. 조선후기호구변동은호구조사에관한제도와방법상에서오는문제점, 그리고호구대장등관련자료의부족으로정확한수치를파악하기는매우어렵다. 그러나호구증감의원인에대해서는다음과같이정리할수있을것이다. 증가현상은사회적 경제적안정과호구조사의강화에서비롯되었다고할수있다. 감소원인중가장큰요인은여역이었으며, 다음으로는기근으로인한유민의발생이었다. 또한과중한요역과부세수탈을피하기위하여도망함으로써실제의인구보다적은수치만이파악되었기때문이라고할수있다. 이제경기도와남양주지역을중심으로호구의변동상황을살펴보자. 이시기경기도와남양주의호구수에대한내용을담고있는자료로는 호구총수 여지도서 대동지지 대동여지통고 및읍지류등이있다. 경기도는공간적으로서울과연속되어있었기때문에경기도의인구증감은서울의인구변동과매우밀접한관련을맺고있었다. 16 세기중엽이래 경기의백성들이농사를버리고서울로모여들어말업 ( 末業 ) 인상업을좇고있다. * 거나 경기백성들이신역 ( 身役 ) 을피하여서울의재산이많은상인집에의탁한다. * 는기사를통해토지로부터배제된농민이나유민들이서울로집중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러한상황에서경기도의인구는높은증가현상을보였다 년 ( 효종 8) 에서 1666 년 ( 현종 7) 사이에서울지역이호수 51.6%, 인구 140.8% 의증가를보인반면경기도는호수 185.5%, 인구 310.9% 가증가하여경기도가서울이나전국평균치보다훨씬높은증가율을보이고있다.* 서울과경기도는 18 세기와 19 세기사이에전국호수에서차지하는비율이각각 1% 와 2% 증가하여조선후기에이지역으로인구집중이동시에이루어지고있었음을알수있다. 특히조선후기에이르러서는경기도지역으로인구가집중되는현상을보였다. < 조선시대경기도에서호구증가가높은군현 > 군현 / 문헌 세종실록 지리지 (1432 년 ) 해동지도 (18 세기중엽 ) 호구총수 (1789 년 ) 대동지지 (1828 년 ) 호 ( 순위 ) 구 ( 순위 ) 호 ( 순위 ) 구 ( 순위 ) 호 ( 순위 ) 구 ( 순위 ) 호 ( 순위 ) 구 ( 순위 ) 수원양주남양죽산용인안성양근안산과천교동영평 출전 : 양보경, 서울의공간확대와시민의삶, 서울학연구 1, 1994, 63 쪽. <18 19 세기양주인구증가율 > 군현 / 문헌 해동지도 (18 세기중엽 ) 호구총수 (1789 년 ) 대동지지 (1828 년 ) 호수구수호수구수호수증가율호수구수호수증가율

291 양주 8,007 51,794 12,465 64, ,777 61, 출전 : 양보경, 서울의공간확대와시민의삶, 서울학연구 1, 1994, 64 쪽. 그러면조선후기양주지역의인구가경기도에서어느정도의비중을차지하고있었는지살펴보자. 조선전기이래 19 세기초까지경기도에서인구가많았던군현의순위변동내용을대략정리하면다음의표와같다. 앞의표에서볼수있듯이호구증가가뚜렷한지역과인구증가가큰지역이대체로일치하는데수원 양주 남양 죽산 용인 안성 양근등이그러한지역이다. 이가운데양주는 18 세기중엽에서후기에이르는동안 55% 가넘는호수증가율을보였다. 인구수에서도양주는조선전기경기도의군현가운데 6 위에해당하였는데, 18 세기중엽이래계속 1 위를유지하고있다. 특이한점은호수에있어서 18 세기후반에는수원에이어두번째였고, 19 세기초에는수원 개성에이어세번째에해당하였으면서도인구수는계속수위를유지하고있다는것이다. 이와같은사실은양주지역의지리적특성을반영하고있는것이라고볼수있다. 이중환의 택리지 에서언급하였던것처럼양주는토질이비옥하거나농업에있어서이익이많은곳은아니었다.* 따라서양주지역의인구증가원인은서울의상업도시화와공간확대에있었던것으로파악된다. 조선후기서울의인구증가는동시에상품수요를증가시키고상품유통을활발하게하였다. 서울은주지하듯이소비도시이다. 따라서서울과인접한지역에서는대체로상업적농업을통하여채소 과일등과땔감을공급하거나, 서울로유입되는상품을중간에서도집 ( 都執 ) 하여상업적이익을챙기는것이일반적이었다. 특히누원은동북지방의수산물이서울로공급되는길목에위치하여새로운상업중심지로부상한곳이다. 누원지역을중심으로활동한사상인들은서울시전상인들에게막대한타격을주기도하였다. 해등촌 ( 海等村 ) 지역의주민들은한강을통해서울에땔나무를팔아생계를이어간다고하였다.* 이러한사실에서알수있듯이양주지역의호구증가는다른서울인근지역과마찬가지로서울의상업화 도시화와밀접한관계를맺고있었다. 이제현재의남양주지역을이루고있는곳을중심으로 18 세기이후호구변동상황을살펴보자. 먼저 비변사등록 에수록된양주지역의호수는 1732 년 ( 영조 8) 의경우 1 만 76 호였고,* 1786 년 ( 정조 10) 에는 1 만 2000 여호였으며,* 1809 년 ( 순조 9) 에는 1 만 2642 호였다.* 정확한수치는아니더라도지속적인인구증가현상은파악할수있다. 양주지역전체에서현재의남양주지역은조선시대양주목 34 개면가운데 10 개면과광주군초부면이이에해당한다. 따라서이들지역의호수를정리하면지금의남양주지역이양주전체에서차지하고있는비중을짐작할수있다. 여지도서 에실린이지역의호구수와인구수를표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 여지도서 에나타난양주 광주면별호구수 > 지역 / 구분 호수 인구 계남자여자 별비곡면 490 1, ,028 접동면 , 진벌면 218 1, 건천면 374 1, 양주군 진관면 297 1, 금촌면 343 1, ,041 상도면 415 1, 하도면 388 1, 와공면 431 2, 독음면 332 1, 광주군 초부면 361 1, 계 11 3,908 18,144 8,371 9,773 앞의표에서알수있듯이남양주의총호수는 3908 호였고, 인구는남자 8371 명과여자 9773 명으로합계수 1 만 8144 명으로호당인구는 4.6 명이다. 당시양주전체의호구수에서이지역이차지하는비율은그리높지않았다. 양주전체의호구수가 1 만 1363 호였으므로 34.4%, 인구가 5 만 2550 명이었으므로 34.2% 정도를차지한것이었다. 한편남녀별인구에서는여자가 1402 명더많아여자대남자비율이 53.9 대 46.1 로나타난다. 그리고가장많은원호 ( 元戶 ) 가있었던지역은별비곡면으로서 490 호가있었고, 그다음으로와공면 상도면의순으로나타난다. 인구수가가장많았던지역은와공면으로남자 904 명과여자 1233 명으로합계 2137 명이거주하고있었으며, 그다음으로는별비곡면 금촌면의순이다. 특히남녀성비에큰차이를보이고있는곳은와공면으로여자가 329 명더많았고, 그다음으로금촌면이 273 명, 독음면이 267 명많았다. 호구총수 의내용을정리하면다음표와같다. < 호구총수 에나타난양주 광주의면별호구수 >

292 지역 / 구분 호수 인구 계남자여자 별비곡면 435 1, 접동면 300 1, 건천면 371 1, 상도면 482 1, 양주군 하도면 370 1, 와공면 438 1, ,022 진벌면 321 1, 진관면 298 1, 금촌면 365 1, 독음면 297 1, 광주군 초부면 253 1, 계 11 3,930 16,123 7,701 8,422 호구총수 에실린남양주지역의호구와인구수는 여지도서 의내용과조금은상이한모습을보이고있다. 호수는약간증가하였지만전체인구수는 2000 여명이감소한것이다. 그리고남녀비율에서 여지도서 의기록보다는차이가좁혀지고있다. 즉 여지도서 에서는여자인구가 1400 여명많았는데 호구총수 에서는그절반인 700 여명으로줄어든것이다. 한편 19 세기중엽이후편찬된 경기지 ( 년 ) 와 경기읍지 (1871 년 ) 에는양주의호수가 1 만 2251 호, 인구는남자가 3 만 236 명, 여자가 3 만 126 명으로남녀를합해 6 만 362 명으로똑같이기록하고있다. 이러한호구수는실제조사된수치라기보다는 호구총수 의기록을그대로옮겨적은것으로보인다. 그리고 1809 년 ( 순조 9) 의양주전체호수가 1 만 2642 호였던것으로볼때 19 세기말에는이보다더증가했을것으로추측된다. 조선후기남양주지역의호구증가요인은앞에서도언급하였듯이지리적으로서울과인접해있다는것과교통의발달, 상품유통경제의활성화에서찾아볼수있다. 18 세기이래서울의인구는성내와성외를포함하여 20 만 25 만여명으로증가하였다. 이많은인구가필요로하는식량과연료의양은막대한것이었다. 당시기본적인식량이었던쌀과콩등의곡물은지방의세미와재경지주들의농장에서올라오는곡식으로충당하였으나신선한채소 과일 수산물등은원거리수송이불가능하였으므로땔감과함께주로근교지역에서조달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각지역에서발생한유민들은일거리를찾아서울 평양 개성등상업도시로모여들어임노동자로일하거나도시주변지역의장시를배경으로활동하는상인으로성장해갔다. 남양주지역의호구증가는바로이같은상황을반영하는것이었다. 남양주지역으로이주한자들일부는누원점을중심으로상업활동에종사하였고, 일부는채소 과일등을재배하는상업적농업에종사하며생계를이끌어갔다고볼수있다. 사상인들의경우시전상인들이행사하는금난전권의영향권밖에있었으므로동북지방에서올라오는북어등의상품을매점매석하며도성내의상업에심각한타격을줄정도로성장하였다. 특히동북지방으로통하는새로운교통망이형성되면서양주누원의경우사상인들의거점으로부상하였고, 이는이지역의호구를크게증가시키는요인이었다. 농민들은서울의대소비시장을배경으로일반농사보다는채소나과일등을재배하여보다많은수익을올렸다. 요컨대조선후기남양주는서울의인구증가와경제구조의변화에따른수요물품을공급할수있는지리적 상업적 농업적요건을갖추고있었기때문에호구가크게증가하는한편서울의위성도시로성장할수있었다.

29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2 절조선후기수취체제의개편 제 2 절조선후기수취체제의개편 1. 전세제도의개편 조선은임진왜란과병자호란을겪은후국가재정과농촌사회의안정을도모하고자여러가지제도를개편하였다. 두차례의전란은토지, 호구등조선사회의경제적기반을감축시켰다. 전란후가장큰문제는농경지의황폐화와토지제도의문란이었다. 전국의농토가황폐화되고경작면적은줄어들었으며, 토지대장인양안 ( 量案 ) 이산일 ( 散逸 ) 되어은결 ( 隱結 ) 이크게늘어났다. 임진왜란이전에 170 만결에달하던토지면적은전란이후 54 만결로줄어들었다. 이에따라정부에서는진전 ( 陳田 ) 개발에의한경작지의확충과양전 ( 量田 ) 사업을통한토지결수의파악에많은노력을경주하였다. 진전은신분에관계없이개간을허용하여개간자에게개간지의소유와 3 5 년간의면세혜택을부여했다. 따라서재력이있는사람이면누구나개간을통하여얼마든지자신의소유지를확대할수있었으므로왕실, 정부기관, 그리고양반뿐만아니라농민, 상인, 노비등사회의모든계층이개간에참여하였다. 이러한노력의결과인조대 120 만결, 숙종대 140 만결, 영조 정조대에는최고 145 만결까지증가하기도하였다. 양주목진관금촌양면소재명례궁속전답타량성책 (1793 년 ) 하지만전결수의증가에도불구하고전세수입은크게증가하지않아소기의성과를거두지못하였는데왕실의궁방전이나관아또는군영의둔전 ( 屯田 ) 등많은토지가면세전 ( 免稅田 ) 이었기때문이다. 이에정부에서는국가재정의충실을도모하기위하여전세수입의확대를위한대책마련에부심하였다. 효종대에는풍흉에관계없이토지 1 결당미 4 두로전세율을확정지었다. 즉, 토지의등급에따라전결의면적을다르게파악함에따라전세율은예전보다하향조정되었다. 그러나은결의증가와면세지의확대로정부에서기대한만큼의효과를보지는못하였다. 한편전세율의하향조정에도불구하고농민들은그혜택을받지못하였는데이는수수료 운송비 자연소모등에대한각종부가세의남징 ( 濫徵 ) 이자행되고있었기때문이다. 또한지주제의광범한진행에따라지주들이소작농민에게전세의부담을전가시킴으로써농민들의부담은더욱가중될수밖에없었다. 조선초기양주의토지결수는 1 만 5190 결로대부분이간전 ( 墾田 ) 이었고, 수전은총결수의 30% 정도인 5063 결로비옥하였다.* 토지결수가영조대에편찬된 여지도서 에는세종대의약 70% 로줄어들었는데이것은왜란 호란의영향으로보인다. 양주에속해있던농민들은이러한토지를경작하여국가에조세를납부하였다. 전조는수전은쌀로, 한전은황두 ( 黃豆 ) 로경창에납부하였다. 경기도는납부기간이육운 ( 陸運 ) 인경우당해년도 12 월까지였고, 수운인경우이듬해 2 월말까지였다.* 여지도서 에나타난양주의한전 ( 旱田 ) 은 7963 결 89 부 2 속이었고, 수답 ( 水畓 ) 은 2199 결 51 부 9 속이었다. 따라서원장부의전답은모두 1 만 160 여결이지만실제로는 3013 결 93 부 9 속이었고, 세미 ( 稅米 ) 와세태 ( 稅太 ) 는영원히감면하되봄 가을로 1 결당미 6 두를거두어아록 ( 衙祿 ), 공수 ( 公須 ), 지공 ( 支供 ) 등에사용하고, 그나머지는저치미 ( 儲置米 ) 로사용하고, 그사용하는바에따라선혜청에보고하였다. 그리고결전 ( 結錢 ) 은 1 결마다 5 전 (?) 씩거두어균역청에납부하였다.* 인빈방제전양주풍양복재매득후계하면세전답개타량성책 ( 규 19342,1689 년 ) 이와달리 19 세기에편찬된 양주목읍지 는약간변화된내용을담고있다. 즉, 원장부의전답은모두 1 만 163 결 41 부 1 속이었으며, 이가운데각종공수위 ( 公須位 ) 면세전답은 4428 결 90 부 3 속, 각종진전답은 3072 결 78 부 4 속이었다. 그리고각양재결복호 ( 災結復戶 ) 는봄 가을로 1 결마다미 6 두를거두어아록, 공수위, 지공등에사용하되선혜청으로부터항상정해진것을획급하며그나머지는저축하였다가능역 ( 陵役 ) 에사용하도록하였기때문에원래작미 ( 作米 ) 하여상납하는것이없었다.* 한편조선왕조실록에는양주지역에서실시된양전관련기사와전세감면등에대한기사가많이실려있다. 양주지역은고려시대부터길지라는인식이전해지고있었으며도읍과인접해있어서왕실의능침지로많이이용되었다. 능침을조성할때는전국에서수많은백성들이부역에동원되었다. 특히양주지역의백성들은역대왕들의능침참배의준비와각종제례행사, 능침관리등으로고통이매우컸다. 양주목읍지 에수록된능묘는다음과같다. 건원릉 ( 健元陵 ), 현릉 ( 顯陵 ), 광릉 ( 光陵 ), 목릉 ( 穆陵 ), 휘릉 ( 徽陵 ), 숭릉 ( 崇陵 ), 혜릉 ( 惠陵 ), 원릉 ( 元陵 ), 수릉 ( 綏陵 ), 경릉 ( 景陵 ), 정릉 ( 貞陵 ), 의릉 ( 懿陵 ), 사릉 ( 思陵 ), 강릉 ( 康陵 ), 태릉 ( 泰陵 ), 온릉 ( 溫陵 ), 순강원 ( 順康園 ), 소령원 ( 昭寧園 ), 수길원 ( 綏吉園 ), 의소묘 ( 懿昭墓 ), 덕흥대원군묘 ( 德興大院君墓 ), 성묘 ( 成墓 ), 회묘 ( 懷墓 ), 광해군묘 ( 光海君墓 ), 연산군묘 ( 燕山君墓 ), 원빈묘 ( 元嬪墓 ), 경빈묘 ( 慶嬪墓 ), 영빈묘 ( 寧嬪墓 ) 등이있었다. 이와같이많은능침이있었기때문에양주의백성들은각종요역과부역에동원되었다. 이에조정에서는양주지역의백성들에게각종전세나환곡등을감면또는탕감해주기도했다. 실록에나타난대표적인사례들을통해그러한모습들을살펴보기로하자 년 ( 현종 5) 호군 ( 護軍 ) 이유 ( 李濡 ) 는상소에서양주에부과된각종부세를감면해줄것을요청하였는데그이유를다음과같이말하고있다. 양주는서울과가장가까이있고, 능이일곱, 묘가넷이있으며동서의요충지대여서이미다른고을에비할바가아닌데도봄 가을봉심 ( 奉審 ) 때나사명 ( 使命 ) 이오갈때각종잡역이다른고을에비하여갑절이나되므로한고을의편중된고통의형세가본디그러합니다. 원하건대성상께서묘당에물어혹조세를감면하든지혹은부역을덜어주면조금이나마백성들이힘을펴고마음에위안을받을것입니다. 그리고본읍의측량이전의전결수는 892 결이었고징수하던쌀은 360 섬이었는데, 측량이후에는통용전결수가 3340 여결에이르고징수하는쌀도 1516 섬에달하여측량이전에비하면그수치가네배도더됩니다. 그런데작년가을에양안이완료되지못하였기때문에이듬해에와서비로소전세 1224 섬이보태졌습니다. 그래서같이내야할두종류의쌀이모두 2740 여섬이나되어그것을일시에다징수할경우백성들이감당할수없습니다. 바라건대금년봄에징수할쌀은원수 ( 元數 ) 내에서절반만징수하고절반은가을에가서받고, 해당청의경비가만약부족하면우선상평청에저장된것

294 을끌어다빌어쓰고징수할쌀의절반을가을걷이뒤에상환해주면국가로서는실제혜택을주는일이고백성들은남아도는힘이있을것입니다. 이에대해비변사에서는 양주고을이서울과는가장가까워서평상시역에응하는일이다른지역에비하면더욱무거운데선혜청을설치한후로는모든책응 ( 責應 ) 에있어서모두가미 ( 價米 ) 를주고있으므로지금변통하는일이없습니다. 새로측량한전결수가종전수치에비하여여러갑절인데작년가을에징수할쌀을지금에와서비로소받는다면이어징수할춘미 ( 春米 ) 는백성들힘이과연닿지못할것입니다. 금년봄에받아야할수량중에서절반은일찍상납하고, 절반은추등미 ( 秋等米 ) 와같이상납하도록하시기바랍니다. 라고요청하자현종도이를허락하고있다.* 그러나그후에도양주의백성들은전결의경중이균일하지않다며다시양전을실시하여원수를줄여줄것을요청하였다.* 결국 1665 년 ( 현종 6) 10 월양주의전부 ( 田賦 ) 를다시측량하였는데줄어든전결의수량이거의 1000 여결에달하여백성들이비로소조금소생할수있었다.* 1692 년 ( 숙종 18) 에도양주에열성 ( 列聖 ) 들의능침이많아마땅히특별하게배려해야한다며신유년부터병인년까지 6 년동안받지못한적곡 (? 穀 ) 과여러해동안거두지못한기병 보병의가포 ( 價布 ) 를탕감해주었다. 이때탕감해준곡식은 1500 석이고군포는 12 동 ( 同 ) 이었다.* 그리고 1693 년에는좌의정목내선 ( 睦來善 ) 이양주의경우조세로바치는쌀을감해주는것이적곡을탕감해주는것만못하다하여다른방안을강구할것을요청하고있다. 즉, 양주의전결가운데급복 ( 給復 ) 과실결을제외하면바쳐야할쌀 콩이 400 여석인데 200 석은목사가스스로특별히비치 ( 備置 ) 하려고하므로그나머지바치지않은것은 200 석뿐이라는것이다. 그러나이것은모두도성 10 리안의전결이므로바로서울에살고있는부호들이당연히바쳐야할것이기때문에양주의곤궁한백성들의경우끝내혜택을입을수없다고하였다. 따라서정묘년 (1687) 과무진년 (1688) 두해에거두어들이지못한적곡이 2000 여석의많은수량에이르렀으니, 특별히 1 년을감해준다면양주백성들에게막대한혜택이될것이라고하였다. 이에대해숙종은정묘년의적곡을탕감해주도록명하고있다.* 또한양주의유생이제화 ( 李齊華 ) 등이상소하여전세와수미 ( 收米 ) 중한가지를영원히감해주어서백성들이힘을펼수있도록청하자묘당에서이를논의한뒤양주의수미가모두 757 석 5 두인데이를모두감하는것은너무지나치다는의견이지배적이어서전세만특별히감해주도록하고있다.* 그후에도양주지역은능침이많은곳이라는이유로수시로전세를탕감받고있다 년 ( 영조 1) 에는삼남과강원도에흉년이들자전세에서결마다 1 두씩감해주고, 양주는서울에가까이있으면서여러능침을받들게되어민역이지나치게고달프므로대동미를결마다 3 두씩감해주고있다.* 1736 년에는경기의봄철대동미를 1 결당 1 두를감하게하였는데특별히양주는 2 두를감해주었다. 이는양주가연달아칙사의행차를맞이한데다또능행을겪었기때문이었다.* 한편 부역실총 에는양주지역에서납부한각종부세내용이수록되어있다. 이내용을통해조선후기양주지역의재정실태와운영구조의일면을살펴볼수있다. 그내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경사상납질 ( 京司上納秩 ) < 양주지역재정실태와운영 > 호조전세미태는 1692 년 ( 숙종 18) 임금의특별한분부에따라영원히감세 ( 減稅 ) 함. 노비공전 ( 奴婢貢錢 ) 19 냥 ( 노 8 구각 2 냥, 비 10 구각 3 전 ) 무녀포대전 ( 巫女布代錢 ) 10 냥 5 전 (3 구각 3 냥 5 전 ) 선혜청대동미매년이획 ( 移劃 ) 하여저치하는것이오히려부족하여경청 ( 京廳 ) 에서상하 ( 上下 ) 함. 균역청 면세대동미 136 석 4 승 9 홉 2 작결전 1937 냥 3 전선무군관번전 ( 選武軍官番錢 ) 396 냥 (198 명각 2 냥 ) 을강화부이납 ( 移納 ) 함. 병조기병전 ( 騎兵錢 ) 892 냥 (446 명각 2 냥 ) 보병전 ( 步兵錢 ) 184 냥 (92 명각 2 냥 ) 금군보전 ( 禁軍保錢 ) 46 냥 (23 명각 2 냥 ) 호연대보전 ( 扈輦隊保錢 ) 4 냥 (2 명각 2 냥 ) 경역보양군전 ( 京驛保良軍錢 ) 154 냥 (77 명각 2 냥 ) 노군전 ( 奴軍錢 ) 40 냥 (40 명각 1 냥 ) 내취보전 ( 內吹保錢 ) 44 냥 (22 명각 2 냥 ) 여정보전 ( 餘丁保錢 ) 2 냥 (1 명 ) 노비공전 12 냥 6 전 ( 노 6 구각 2 냥, 비 2 구각 2 전 ) 훈련도감포보전 ( 砲保錢 ) 226 냥 (113 명각 2 냥 ) 어영청군보전 ( 軍保錢 ) 369 냥 6 전 (154 명각 2 냥 4 전 ) 금위영군보전 28 냥 8 전 (12 명각 2 냥 4 전 ) 별파진보전 ( 別破陣保錢 ) 30 냥 (15 명각 2 냥 ) 수어청군수보미 ( 軍需保米 ) 52 석 3 두 (261 명각 3 두 ) 세정아병보미 ( 洗鼎牙兵保米 ) 4 석 12 두 (12 명각 6 두 ) 별파진보미 1 석 9 두 (4 명각 6 두 ) 부아병미 ( 部牙兵米 ) 105 석 6 두 (527 명각 3 두 ) 총융청수첩군관미 ( 守堞軍官米 ) 22 석 6 두 (56 명각 6 두 ) 별파진미 21 석 3 두 (53 명각 6 두 ) 둔아병양군미 ( 屯牙兵良軍米 ) 8 석 (20 명각 6 두 ) 노군미 ( 奴軍米 ) 13 석 6 두 (67 명각 3 두 )

295 양향청둔곡대전 ( 屯穀代錢 ) 206냥 6전 3푼 ( 租 1석 2냥, 太 1석 1냥, 稷 1석 1냥 2전 ) 각능향탄산세전 ( 香炭山稅錢 ) 224냥 5푼 (27결 29부 2속에매결마다 8냥 2전씩산지기가거두어齋所에바침 ) 수진궁노비공전 11냥 5전 ( 노 5구각 2냥, 비 5구각 3전 ) 공조장인보전 ( 匠人保錢 ) 32냥 (16명각 2냥 ) 관상감생도보전 ( 生徒保錢 ) 34냥 (17명각 2냥 ) 사복시제원보전 ( 諸員保錢 ) 86냥 (43명각 2냥 ) 장악원악공보전 ( 樂工保錢 ) 34냥 (17명각 2냥 ) 충훈부노비공전 32냥 7전 ( 노 15구각 2냥, 비 9구각 3전 ) 내수사노비공전 16냥 3전 ( 노 8구각 2냥, 비 1구 3전 ) 군기시별파진보전 42냥 (21명각 2냥 ) 내원토목장보전 ( 土木匠保錢 ) 6냥 (3명각 2냥 ) 감영상납질 ( 監營上納秩 ) 영수미 ( 營需米 ) 20석 ( 대동미가운데나누어상납 ) 순아병보전 ( 巡牙兵保錢 ) 285냥 (285명각 1냥 ) 청밀 ( 淸蜜 ) 4승 ( 營耗穀으로사들여서상납 ) 황랍 ( 黃蠟 ) 4근 ( 영모곡으로사들여서상납 ) 백지 60속 ( 災傷紙로거두어들인것중나누어상납 ) 본읍봉용질 ( 本邑捧用秩 ) 관수미 ( 官需米 ) 120석중군요미 ( 中軍料米 ) 14석사객지공미 ( 使客支供米 ) 150석획급미 ( 劃給米 ) 48석별획급미 ( 別劃給米 ) 200석아록미 20석이상은대동미가운데나누어주어매달비용으로분배함. 콩 113석 7두 ( 각면에서火田稅로거둠 ) 관둔세 ( 官屯稅 ) 각종곡식 20석 12두 ( 皮穀 18석 1두, 콩 2석 11두 ) 전 ( 錢 ) 15냥 1전 3푼중영군관전 ( 中營軍官錢 ) 30냥 (30명각 1냥 ) 모군전 ( 募軍錢 ) 36냥 (24명각 1냥 5전 ) 이상은중군의 1년치찬가 ( 饌價 ) 보선군관전 ( 補繕軍官錢 ) 55냥보전 ( 保錢 ) 55냥이상은거두어들여군물 ( 軍物 ) 을보수하는데사용함. 영군관조 ( 營軍官租 ) 120석 (128명각 1석 ) 주군관조 ( 州軍官租 ) 120석 (120명각 1석 ) 이상은거두어들여입번군관 ( 立入軍官 ) 10명의방료 ( 放料 ) 로사용함. 칠읍표하군미 ( 七邑標下軍米 ) 40석 (200명각 3두 ) 보군미 ( 保軍米 ) 80석 6두 (402명각 3두 ) 취수보미 ( 吹手保米 ) 55석 3두 (276명각 3두 ) 이상은거두어들여취고수 ( 吹鼓手 ) 등 19명의방료로사용함.

296 군수군관전 ( 軍需軍官錢 ) 140 냥 (70 명각 2 냥 ) 은기수 ( 旗手 ) 30 명의군복및군기 ( 軍器 ) 를보수하는데사용함. 결역 ( 結役 ) 산내 ( 山內 ) 영근 ( 嶺斤 ) 청송 ( 靑松 ) 와공 ( 瓦孔 ) 4개면의실결은 225결 12부 2속. 청밀 ( 淸蜜 ) 52두 2승 2홉 9작 ( 매결 2승 8홉 ) 진유 ( 眞油 ) 60두 9승 6홉 8작 ( 매결 2승 8홉 ) 법유 ( 法油 ) 34두 8승 6홉 ( 매결 1승 6홉 ) 점미 ( 粘米 ) 4석 5두 3승 5홉 2작 ( 매결 3승 ) 진말 ( 眞末 ) 4석 5두 3승 5홉 2작 ( 매결 3승 ) 목미 ( 木米 ) 4석 5두 3승 5홉 2작 ( 매결 3승 ) 적두 ( 赤豆 ) 6석 8두 9승 5홉 8작 ( 매결 4승 5홉 ) 직미 ( 稷米 ) 2석 6두 2홉 ( 매결 1승 6홉 ) 황랍 ( 黃蠟 ) 28근 2냥 3전 ( 매결 2냥 ) 전 ( 錢 ) 1577 냥 4 전 5 푼 ( 상도면 하도면의실결 131 결 45 부 3 속인데임자년부터민원에따라매결각종대전을 12 냥으로함 ) 전 91 냥 ( 청송면 영근면의降續은 14 결인데매결 6 냥 5 전씩거두어들임 ) 각면재상미 ( 災傷米 ) 48 석 4 두 4 승 2 홉 2 작 ( 結注非등처에서마련하여거두어들이고災傷紙地와官用紙地는구입하여사용 ) 호역 ( 戶役 ) 잡다한사고로실호 ( 實戶 ) 는 343 호를제외한것임. 시 ( 柴 ) 1060 속 (1677 호각호 6 속 ) 탄 ( 炭 ) 72 석 2 두 5 승 ( 班戶는 1 두, 民戶는 2 두 5 승 ) 계 ( 鷄 ) 1932 수 (1932 호각호 1 수 ) 연계 ( 軟鷄 ) 567 수 (567 호각호 1 수 ) 진맥 ( 眞麥 ) 22 석 10 두 (850 호각호 5 승 ) 생율 ( 生栗 ) 1 석 11 두 2 승 5 홉 (10 호각호 2 승 5 홉 ) 빙정 ( 氷丁 ) 2212 장 (2212 호각호 1 장 ) 전 861 냥 8 전 4 푼 ( 임자년元戶 1 만 2312 호가각호 7 푼씩으로장책지지, 書債및잡비로사용 ) 행담 ( 行擔 ) 48 부 ( 柳器店 4 호각매달 1 부 ) 마철 ( 馬鐵 ) 12 부 ( 冶匠 2 명매달 1 부 ) 병 ( 甁 ) 516 개 ( 사기점 43 호각매달 1 개 ) 백지 ( 白紙 ) 114 속 14 장 ( 동십리면 서십리면에서거둠 ) 향목 ( 香木 ) 한토막 ( 노원면에서거둠 ) 생마 ( 生麻 ) 122 소음 ( 召音 : 산내면 영근면 청송면 와공면 상도면 하도면에서거둠 ) 황백피 ( 黃栢皮 ) 8 근 향교모군미 ( 募軍米 ) 14 석 (70 명각 3 두 ) 노비공전 9 냥 ( 노 5 구각 1 냥, 비 8 구각 5 전 ) 도봉서원 ( 道峯書院 ) 모군미 4 석 (20 명각 3 두 ) 석실서원 ( 石室書院 ) 모군미 4 석 (20 명각 3 두 ) 청절사 ( 淸節祠 ) 서원모군미 4 석 (20 명각 3 두 ) 정절사 ( 旌節祠 ) 서원모군미 4 석 (20 명각 3 두 ) 이상은서원에서봄 가을제향때거두어사용함. 아차산봉대 ( 峨嵯山烽坮 ) 군보미 10 석 (50 명각 3 두씩元軍이거두어먹음 ) 한이봉봉대 ( 汗伊峯烽坮 ) 군보미 10 석 (50 명각 3 두씩원군이거두어먹음 )

29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2 절조선후기수취체제의개편 2. 공납제도의개편 공납은각지방의특산물을현물로납부하는방식으로먼저정부가각품목별로국가의연간수요량을책정하여각군현단위로배정하면각군현에서는다시주민의호를기본단위로하여부과 징수하였다. 즉, 군현단위로그지방의산물과토지결수를감안하고또관아의경비를고려하여액수를정한후에그액수를다시각민호에배정하였다. 각민호로부터수납되는공물은군현별로중앙에상납하되, 중앙에는공물의수납을전담하는관아가따로없고중앙각사에서소정의물품을각각수납하였다. 공물은각지방의특산물을국가에납부하는것으로수공업품 광산물 해산물 과일류 목재류 조수류등천연산물이주종을이루었다. 그런데공납은농민의생산물량을기준으로한과세가아니라국가의수요를기준으로하였기때문에과세량에문제가많았다. 공물의규정은조세와같이기후나토지의성질, 풍흉작등을고려하지않았고, 한번정해진공안 ( 貢案 ) 의내용은거의변화가없었다. 그리고공물은대개그지방의토산물로정해진것이나때때로그토산물이생산되지않을경우에도정해진공물을바쳐야했으므로다른지역에가서구입해야했다. 예를들어해안과멀리떨어져있는내륙에위치한군현에해산물이부과되는경우이다. 따라서이러한경우생산되지않는공물을마련하기위해많은노력과경비를소비해야하는폐단이발생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공물수납상의가장큰폐단을야기시켰던방납 ( 防納 ) 이행해지면서사회적으로도큰문제가노출되었다. 공물은소정의규격에맞아야하기때문에검사에합격하지못하면다시마련해야했다. 특히어물류는수송이나저장에어려움이많았기때문에이를판매하는상인이나관리의횡포가심하였다. 즉, 생산되지않는물품, 규격에맞지않는물품, 수송이어려운물품, 흉작으로인한공물확보가어려울때상인이나관리가이것을대신납부하고농민에게더많은대가를받아내는폐단이광범위하게행해졌다. 이러한고통을견디지못한농민들은농토를떠나지않을수없었다. 농민의토지이탈은농촌경제파탄의결과였지만일종의조세저항이기도하였다. 이와같은공납제의모순과폐해를없애고면세전의증가로인한세입의감축과영세소작농의증대로인한호역 ( 戶役 ) 의위축을극복하고자한것이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은 1608 년 ( 광해군즉위 ) 경기도에처음실시된이후강원 전라 함경 경상 황해도의순으로 100 년동안에걸쳐확대실시되었다. 대동법은공납의전세화를목표로한제도였기때문에그부과 징수는수조안 ( 收租案 ) 의전결을대상으로하고백미 ( 白米 ) 를수단으로하였다. 즉, 수조안에등록된전결가운데서호역을면제하는각종의급복전 ( 給復田 ) 을제외한모든전결에서 1 결당백미 12 말씩부과, 징수하는것을원칙으로하였다. 대동법의실시로어느정도국가재정이안정되기는하였으나, 정치가문란해지고조정의기강이해이해지면서오히려농민의부담을더욱가중시키는결과를초래하였다. 대동법은일부부정적인측면이지적되기도하지만긍정적인요소가많았다. 즉, 농민들의여러가지부담을전세로단일화하고, 지급수단을당시의물품화폐인미포 ( 米布 ) 로통일시킴으로써화폐재정으로발전할수있는기반이되었다. 그리고정부의소용물자를공인이나시인 ( 市人 ) 들로하여금조달하게하면서당시어느정도발달해있던상품화폐경제를더욱촉진시켜시장권의확대를가져오기도하였다. 조선시대남양주지역의백성들이부담하였던공물이무엇이었는지는자세히알수없지만대체로양주지역에서생산되고있던특산물이었을가능성이높다. 조선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양주의특산물로오곡 조 메밀 뽕나무 느타리버섯 송이버섯 잣등이수록되어있고 *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명주실 삼베 잣 옥돌 송이버섯 은어등이기록되어있다.* 또한 여지도서 에는물산으로파 토기 토끼 돼지 꿀과진공 ( 進貢 ) 물품으로토끼 돼지 파등이기록되어있다.* 양주목읍지 에는토산품으로명주실 삼베 옥석 해송자 ( 海松子 ) 송이버섯 은구어 녹반 ( 綠礬 ) 백토 ( 白土 ) 등과진공으로매년입춘일에파를진상한다고하였다.* 이러한기록들을통해남양주지역의백성들은서울과인접한지리적인여건에맞게파와같은신선한채소와가축등을공물로부담하였을것이라고추측할수있다. 한편환곡제도는당초춘궁기농민들의보호를위한진휼책의일환으로실시되었다가지배체제의문란과더불어정부의재정수입증대방안으로변질되었고, 지방관과향리들이자신들의사복을채우기위한수단으로이용하게되었다. 본래환곡은춘궁기에곡식을대여했다가추수기에 1 할의이자를붙여서회수하는것이었으나여러가지명목의이자가늘어남으로써농민들에게는도리어무거운부담이되었다. 대여곡의이율은지방마다편차가있었고기간내에상환하지못하면원곡에복리로이율을적용하였다. 늑대 ( 勒貸 ) 번작 ( 反作 ) 허류 ( 虛留 ) 반백 ( 半白 ) 분백 ( 分白 ) 등은농민수탈의대표적인방법이었다. 환곡제도는농민을괴롭히는원흉의하나였으며이로각처에서유민이발생하고도적의무리가횡행하게되었다. 여지도서 에수록된양주의환곡은각창고에있는것을모두합하여 2 만 7155 석 7 두 7 승 6 홉 8 작이었으며, 연말부터창고를열어보리를수확하기전까지대여하였다가가을부터겨울창고를봉할때까지는대여했던곡식을거두어들이되매년마다농사의풍흉에따라규정이일정하지않다고하였다.* 진접읍내각리에있던현창 ( 縣倉 ) 은조선시대남양주의환곡을보관하던창고로여겨지는데수년전까지는남아있었으나지금은철거되고민가가들어서있다. 여지도서 의기록에의하면현창은접동면에있었으며좌기청 ( 座起廳 ) 4 칸, 창고 20 칸으로되어있었다고한다. 양주지역은많은능역을감당해야했기때문에전세를비롯하여환곡도감면또는탕감받는경우가많았다 년 ( 영조 1) 에양주목사홍중주 ( 洪重疇 ) 는이지역이다른지역과달리능침을봉안하는지역이기때문에특별히오래된환곡을탕감해줄것을요청하여허락받고있다.* 1731 년에는목사홍덕망 ( 洪德望 ) 이양주는민호가 1 만여호인데환곡은단지조 ( 租 ) 7000 여석이있을뿐쌀은 1 석도없다며경리청의 1600 석과어영청의 600 석, 금위영의보미 ( 保米 ) 100 여석을옮겨다사용할것을요청하고있다.* 이와같은환곡부족현상은수령들의잦은교체로생긴업무공백과아전들의포흠 ( 逋欠 ) 등이주요원인이기도하였다.

29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2 절조선후기수취체제의개편 3. 군역제도의정비 조선시대의수취체제는조 용 조 ( 租庸調 ) 의형식으로그가운데용은인정 ( 人丁 ) 을단위로한신역의형태로부과되었다. 이것은국방의성격을지닌군역과수시로필요한노동력을징발하는요역으로나누어졌는데군역이기본이었다. 조선전기에는병농일치제에의해 16 세이상 60 세까지의양정에게군역을부과하였고정병에게는군사비용조달을위한보인 ( 保人 ) 이주어졌다. 그러나정군의번상 ( 番上 ) 이여러가지모순과폐단을초래하여번상대신군포를국가에바치게하는포납화 ( 布納化 ) 가이루어지게되었다. 이에따라양민들의군역은실제적인군역보다는군포부담으로변질되었다. 한편임진왜란을계기로 5 위제대신에 5 군영체제가갖추어져국가에서급료를주는직업군인을양성하는모병제가실시되었다. 특히 5 군영중심의조선후기군제는서울을중심으로하는궁궐내지왕의호위를위한중앙집중의군제로변화함에따라여러도에있는진관 ( 鎭管 ) 과분리되었을뿐만아니라함경도 평안도등과의관계가단절됨으로써전국의양역인구가제대로파악되지못하였다. 더욱이지방의감영이나병영은그들나름대로속오군이외에도각종군대를가지고있어서양역인구는어느역이자신에게부여된것인지모를정도로복잡하였다. 따라서군역의무자들은역이가벼운곳을찾았고, 관리들은잡다한명목의역을만들어자신들의사욕을채우는가운데그피해는양정 ( 良丁 ) 들에게돌아갔다. 군역이군포대납화하면서군역은힘없는양인농민만이부담하는것으로변질되었고, 사실상의면역혜택을받고있던양반층의군역면제는더욱가속화되면서그들이져야할부담까지도일반농민들이져야하는상황이전개되었다. 결국양역의무자는 2 중 3 중의부담을질수밖에없었다. 균역법이실시될무렵의 5 인이부담해야될것을 1 인이부담하게되었다. 는기사는당시군역제도의문란상을잘보여준다. 더욱이부족한군포량을채우기위해백골징포 ( 白骨徵布 ) 황구첨정 ( 黃口簽丁 ) 족징 ( 族徵 ) 인징 ( 隣徵 ) 등의형태로농민을수탈하면서이와같은부담을견디지못한농민들이유리 도망하는사례가빈발하였다. 이러한군역의폐단을시정하기위한논의와노력은인조대이래지속적으로이어졌다. 군사비지출을줄이기위한군사수의감축과군문 ( 軍門 ) 축소등의방법이제기되었으나양반층의이해관계와얽혀별다른성과를거두지못하였다. 양역변통논의는영조대초반부터활발하게전개되어호포또는호전론 ( 戶錢論 ) 이유력하게제기되었으나이역시양반층의반대로결실을맺지못하고, 우선각군문에소속된양정 1 인이 2 3 필씩의군포를부담하던것을반으로줄이자는감필론 ( 減疋論 ) 이대두되었다. 그러나재정이줄어드는데따른보충재원의마련이문제점으로지적되자, 그대책으로우선군문과군사수의감축, 군사시설의병합, 지출의절약을통해그일부를충당하게하였다. 그리고어염선세와선무군관포 ( 選武軍官布 ) 에서재원의일부를마련하고, 나머지는각고을에일정량을배당하여징수하는방식을취하였다. 이에따라 1751 년 ( 영조 27) 옛수어청자리에균역청을설치하고균역법을시행하게되었다.* 이로써농민들은 1 년에 2 필씩내던군포를 1 필만납부하게되었다. 정부는줄어든군포의수입을보충하기위한방안으로앞서언급한것처럼종래군역이면제되었던일부상류층에게도선무군관이라는군포 1 필을부담하게하였다. 또한지주로부터토지 1 결당미곡 2 두를결작 ( 結作 ) 이라는명목으로받아들였다. 이처럼균역법은농민의부담을감소시키면서도국가재정수입은종전대로유지할수있게하는방안으로긍정적인측면이많은정책이었다. 이에따라한동안농민들의피역저항도다소진정되는듯하였으나그운용에서많은문제점을노출시켰다. 토지에부과되던결작의부담이소작농에게전가되고, 수입증대를위한과다한양정수의책정은농민의부담을다시가중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또한어염세의과중한부담으로어민과염부 ( 鹽夫 ) 들의유망화가되살아나는가운데특히군포징수의폐단은지배체제의동요와더불어더욱심화되어다시족징, 인징등의파행적양상으로이어졌다. 양주의균역세는영조대의경우결전이매결당 5 전으로모두 2090 냥 1 전 3 푼이었고, 대미가 68 석 2 두 4 홉 6 작이었다. 19 세기에편찬된 양주목읍지 에의하면양주의균역세는자수 ( 自首 ) 한 170 결에대해매년봄 가을로매결당 6 두씩거두어매석당 5 냥씩을균역청에상납하도록규정되어있었다.* 이러한납세액이균역법실시이전과비교하여얼마나경감되었는지정확하게비교할수는없으나균역법시행초기에는농민들의부담을어느정도덜어준것으로보인다. 그러나군적 ( 軍籍 ) 관리가점차허술해지면서일반민인들의군역부담은더욱가중되었다. 각지방의수령들부족한액수를채우기위해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등각종불법적인수탈을자행하였기때문이다. 양주는군사적으로도매우중요한위치를점하고있었다. 광해군대사헌부에서는양주가수도서울을돕는세지역중하나이며지역이넓고사람역시많아반드시감당할만한수령을뽑아보내야한다고주장하기도하였다. 624 년 ( 인조 2) 총융사이서 ( 李曙 ) 가경기군사를점열 ( 點閱 ) 한뒤에양주에소속된 7 개고을의정군은 308 명, 속오군은 1292 명, 별대마군은 184 명이었는데 4 부로나누어각부의천총과파총이하에게대기수와취고수를일일이차출하여보충시키고있다.* 년 ( 숙종 8) 에는양주의홍복산에산성을쌓을것인지에대한논의가있었지만무산되고말았다. 홍복산에산성을쌓는문제는양주의치소 ( 治所 ) 를옮기는것과연관지어논의되었는데민유중 ( 閔維重 ) 과신여철 ( 申汝哲 ) 이홍복산을둘러보고와서그형편을보고하였다. 홍복산이험준하여성을쌓기에는매우적합하나다만토산으로돌이없으므로성을쌓는공역이대단히많이들것이며또서울의주산 ( 主山 ) 도이산에서이어져온것이므로 이어져오는산맥을끊고성을쌓는것 은지가 ( 地家 ) 에서꺼리고있다며어려움을토로하였다. 이에대해우의정민정중과여러조정대신들도반대하였으나윤계 ( 尹?) 만은적극축성을주장하였다. 숙종도여러대신들의의견을좇아축성은차후에다시논의하기로하고읍치를옮기는것도그만두게하였다.* 양주는본래총융청소속이었다가효종대에이르러남한산성으로이속되었다. 그러다가 1687 년 ( 숙종 13) 김수흥 ( 金壽興 ) 이총융청에속하기를요청하자다시본래대로환원하고남양의군사를남한산성에옮겨붙였다. 그런데 1689 년광주유수이항 ( 李沆 ) 이양주의군사 3000 명을남한산성에환속시킬것을청하자영의정권대운 ( 權大運 ) 도양주는남한산성과가깝고군사가많으나남양은거리가멀고군사가적으니양주를잃고남양을얻으면남한산성의형세는더욱고단하게될것이라며양주를다시남한산성에소속시킬것을요청하였다.* 정조대에는양주에방어영을설치하는문제로여러차례논의가있었다. 영의정정존겸에의하면양주에일찍이방영을설치하였는데남한산성에유영 ( 留營 ) 을폐지한뒤로양주의병영을광주에이속시켰다고하였다. 그러므로다시또양주에방영을설치한다면경기도를방어하는방법으로는적합하지만방영을설치한뒤군사의정원과병기도마땅히따라서변통해야하므로가볍게처리할수없다는의견을피력하였다.

299 이러한의견에대해훈련대장구선복, 어영대장이주국 ( 李柱國 ), 금위대장서유대 ( 徐有大 ), 총융사김사목 ( 金思穆 ) 등도파주에방영을설치한후별다른효과를보지못하였다며당분간유보할것을주장하자정조도이에따르고있다.* 1794 년 ( 정조 18) 에도전양주첨사김서정 ( 金瑞貞 ) 이양주를방어영으로승격시키는것이마땅하다는주장에대해비변사에서는양주가수어청의중영 ( 中營 ) 으로서전영 ( 前營 ) 인광주와후영 ( 後營 ) 인죽산과함께 3 영으로편제가되어있는데지금만일방어영을설치하면수어청의중영은장차귀속될곳이없게되므로이것이어려운단서가되므로가볍게논할수없다면서그만둘것을요청하여허락을얻고있다.* 조선후기양주지역의군병수에대해 여지도서 에는각종마병과보병을합하여 9668 명이고, 매년 7 월에도망하거나사망한자들에대해보충한다고간단하게기록하고있다. 한편 비변사등록 에는양주지역의군병수에대한내용이많다. 그가운데 1732 년 ( 영조 8) 양주목사이여적 ( 李汝迪 ) 은양주의호수는 1 만 76 호이며이중각아문등에소속된군병들이 9000 여호인데이들은비록양주에소속되어있지만막중한능역이나행행 ( 幸行 ) 할때에조금도책응 ( 責應 ) 함이없어실제응역하는자들은 1700 호정도에지나지않는다고하였다. 따라서역에서제외된자들도응역하도록요청하여허락을얻고있다.* 이와같은내용은 1786 년목사이일증 ( 李一曾 )39) 과 1809 년 ( 순조 9) 목사민명혁 ( 閔命爀 ) 등에의해서도지적되고있는문제였다. 이와함께 양주목읍지 (1871 년간행 ) 에는각관서에소속된양주의군액 ( 軍額 ) 을보다자세하게수록하고있어조선후기이지역의군역부담실태를짐작해볼수있다. 그내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 양주의군액 > 관서군관 ( 軍官 ) 수어청소속병조소속관상감소속장악원소속훈련도감소속사복시소속군기시소속감영소속어영청소속균역청소속공조소속내원소속총융청소속 군액 주군관 ( 州軍官 ) 65 명, 영군관 ( 營軍官 ) 65 명, 중영군관 ( 中營軍官 ) 25 명, 군수군관 ( 軍需軍官 ) 170 명 속오군 ( 束伍軍 ) : 25 초 ( 哨 ) 이고 ( 매초의군병은 125 명씩으로양주는 16 초로把下軍 81 명, 포천은 2 초로파하군 27 명, 양근은 3 초로파하군 27 명, 영평은 1 초, 가평은 1 초, 지평은 1 초 ) 파총 ( 把摠 ) : 5 명 ( 양주 3 명, 양근 1 명, 포천 1 명 ). 초군 ( 哨軍 ) : 25 명 ( 양주 16 명, 양근 3 명, 포천 2 명, 지평 2 명, 영평 1 명, 가평 1 명 ). 지구관 ( 知? 官 ) : 10 명. 기패관 ( 旗牌官 ) : 13 명. 예차초관 ( 預差哨官 ) : 20 명. 예차기패관 ( 預差旗牌官 ) : 22 명. 집사마부 ( 執事馬夫 ) : 60 명. 좌부아병 ( 左部牙兵 ) : 4 초파하군 27 명, 보군 ( 保軍 ) 206 명. 파총 : 1 명. 초관 ( 哨官 ) : 4 명. 기패관 : 12 명. 예차기패관 : 12 명. 마병 ( 馬兵 ) : 1 초 ( 양주 85 명, 資保 85 명, 영평 13 명, 가평 27 명 ). 초관 : 1 명. 칠색표하군 ( 七色標下軍 ) : 170 명, 보군 402 명. 경표하군 ( 京標下軍 ) : 753 명. 뇌순령수 ( 牢巡令手 ) : 30 명, 보군 90 명. 세악수 ( 細樂手 ) : 20 명, 자보 40 명. 세정아병 ( 洗鼎牙兵 ) : 12 명. 별파진 ( 別破陣 ) : 4 명. 군수보 ( 軍需保 ) : 300 명. 이상군병수 6180 명 기병 ( 騎兵 ) : 446 명. 보병 ( 步兵 ) : 92 명. 금군보 ( 禁軍保 ) : 23 명. 복직 (? 直 ) : 25 명 ( 장용영이계하한것과관련하여새로뽑은군병을고양으로보낼것을대신함 ). 호보 ( 扈保 ) : 2 명. 내취보 ( 內吹保 ) : 27 명. 청파노원양역보 ( 靑坡蘆原兩驛保 ) : 117 명. 이상의군병수 705 명 생도 ( 生徒 ) : 17 명 악공보 ( 樂工保 ) : 12 명 포보 ( 砲保 ) : 185 명. 매탄군 ( 埋炭軍 ) : 25 명. 이상군병수 137 명 제원 ( 諸員 ) : 43 명 별파진 : 21 명 순아취고수 ( 巡牙吹鼓手 ) : 50 명. 대년군 ( 待年軍 ) : 50 명, 자보 50 명. 가정취고수 ( 加定吹鼓手 ) : 30 명. 대년군 : 30 명, 자보 30 명. 전좌초군 ( 前左哨軍 ) : 154 명. 집사마부사후군 ( 執事馬夫伺候軍 ) : 8 명. 이상군병수 466 명 군병 : 79 명, 자보 84 명. 원보 ( 元保 ) : 12 명. 별파진 : 15 명. 이상군병수 153 명 선무군관 ( 選武軍官 ) : 198 명 장보 ( 匠保 ) : 16 명 토목장보 ( 土木匠保 ) : 3 명 북한수첩군관 ( 北漢守堞軍官 ) : 56 명. 별파진 : 53 명. 검갑양둔아병 ( 黔甲兩屯牙兵 ) : 262 명. 이상군병수 : 588 명 한이산군 ( 汗伊山軍 ) : 보 76명아차산군 ( 峨嵯山軍 ) : 보 76명각능원묘수호군보산직 ( 陵園墓守護軍保山直 ) : 1645명이상도합군병수 1만 509명

30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2 절조선후기수취체제의개편 제 3 절상품화폐경제의발달 1. 상업적농업의발달과경제구조변화 동국여도 경강부암진도 조선은임진 병자양란을거친후정치 경제 사회적으로많은변화를겪게되었다. 특히경제적으로는대동법의실시와동전유통의확대, 사상인의성장과증가, 농업생산물의상품화, 이앙법의실시등으로앞시기와크게구별되는변화를가져왔다. 대동법은수취체제뿐만아니라상공업계에도많은영향을주었다. 종래에는정부에서필요한물품을현물공납과관청수공업등을통해조달하였지만대동법이실시되면서대부분의관수물품은어용상인인공인을통해공급받게되었다. 농민들은대동법시행이후현물공납대신에미곡 포목또는전화 ( 錢貨 ) 로납부하게되었고, 공인들은관아에필요한물품을서울의시전이나지방의장시 ( 場市 ) 에서구입하여조달하였다. 이러한변화는농업 수공업 광업분야의생산활동을자극하는계기가되었다. 농민들은적극적으로시장판매를위한상품을생산하게되었고, 이러한과정에서자연스럽게유통경제에참여할수있었다. 한편이시기에는각지방에장시가개설되는곳이증가하였다. 15 세기말전라도지방에서형성된장시는 16 세기에들어서는충청 경상도를비롯하여전국적으로개설되기에이르렀고, 17 세기에이르러서는한달 30 일동안에열읍 ( 列邑 ) 에장이서지않는날이없을정도로확대되었다.* 이에장시를통한상품유통이더욱활발해졌고, 농업에서상업으로전업하는경우가증가하였다. 대동법의실시와상업적농업의확대로다양한농업생산물이상품화하면서상인이증가하게되었다. 사상인은주로지방의장시를배경으로교통의요충지등에서각종물품을매점매석하는도고상업을전개하며시전상인들과경쟁하였다. 사상인층의성장은이시기상업계를재편하는데매우중요한역할을 담당하였다. 토지에서유리된농촌인구가도시로유입되어상업인구가증가하면서대두된사상인층의성장은시전상인을중심으로하는기존체제에커다란변화를가져왔다. 농업생산력이발전하고농민층의분해와사회적분업으로비농업인구가증가함에따라도시인구가증가하면서농산물에대한수요가늘어나게되었다. 이러한사회적변화에따라농민들은상품작물재배에주력하여수입을증대시켜나갔다. 즉, 인삼 담배 목면등과같은특수작물을비롯하여도시주변에서채소등을재배하는상업적농업이발달하였다. 조선후기상업적농업은각지방에서개설되고있던장시와밀접한연관을맺고있었다. 농촌경제는유통시장인장시와연결되고있었으므로농산물의상품화가진전되었다. 즉, 시장성을고려하여농산물을재배 생산하였는데상업적농업은매우다양한형태로발달하였다. 먼저곡물생산이나목화재배업등과같이생산물의많은부분을자가소비에충당하고나머지를상품화하는형태가있다. 그리고인삼재배업이나도시주변의채소재배등과같이전적으로시장판매를목표로하는상업적농업의전형적인형태가있다. 지방장시에출하하기위해생산하는상품작물로서가장큰비중을차지한것은곡물류였다. 그중에서도가장많이생산된것은미곡이었고, 그다음으로콩과보리등의순이었다. 미곡이상품으로서다른곡물보다많이재배되었던까닭은우선값이훨씬유리하였기때문이다. 그리고미곡을판매할때는자신이거주하는군현뿐만아니라거리상멀리떨어져있는곳까지진출하여팔기도하였다. 남양주지역의농민들가운데일부는조선시대최대소비지였던서울까지진출하여곡물을판매하기도하였다. 이지방의재해여부를조사하기위해파견되었던사관구득로 ( 具得魯 ) 의보고서를통해이러한사실을살펴볼수있다. 즉, 장시의곡물값이전 ( 錢 ) 1 냥에쌀은 1 말 5 되가되고, 적두 ( 赤豆 ) 는 2 말 2 되가되는데곡식을판매하는자가서울의곡식값이높다는것을듣고거의모두경시 ( 京市 ) 로가기때문에장시에곡물이나오지않는것은그만두고라도비록동리사이에서도역시매매함이없어백성들이이를매우걱정하고있다고하였다.* 즉, 곡물가가지역에따라많은차이가있었기때문에곡가가높은지역으로곡물이유출되는경우가많았다. 이에따라많은밭을힘써경작하여곡식이남아넉넉한자가있으면매매하거나빌려주는데다른면이나다른지경으로옮겨가지말고단지한동리내에서만무판 ( 貿販 ) 하도록명하여, 적은돈으로사들이려고하는자가무판하는데걱정이없게하고돈이없어빌리고자하는자에게추이 ( 推移 ) 할수있도록조치하는사례도 * 나타나고있다. 이러한사실들을통해남양주지역의농민들이곡물가의시세에따라다른지역으로옮겨가곡물을판매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이처럼시세에편승하여가격이유리한곳에서생산물을판매하는것은다른지방도마찬가지였다. 특히서울은특별한경우이외에는곡물가가다른지역보다높았으므로서울과가까운지역의농민들이서울까지판로를확대하는것은자연스러운현상이었다. 한편서울의도시적성격이짙어지면서곡물상으로서경강상인의위치는더욱확고해졌으며, 이때문에그들의상권 ( 商圈 ) 과자본규모도확대되었다. 경강상인은그들이직접선박을이용하여생산지에서상품을구입, 운반해서경강연변의시전에매도하거나혹은수요자에게직접판매하였다. 경강상인들에의한미곡매점상업은서울의쌀값변동에큰영향을주었다. 서울시민의양곡가운데가장큰비중을차지하는강상미 ( 江上米 ) 를매점해두고판매하지않으면곧서울의쌀값은급등하였고, 이런현상을이용하여큰이익을취하였다. 또한각지방의미곡가차이를신속히파악하여대도시와농촌을막론하고가격차가심한곳이면어느곳이나운반, 판매하는등전국시장을대상으로상업활동을전개하였다. 서울은 17 세기중엽이래각지방에서몰려든유이민등으로인해인구수가크게증가하였다. 서울의인구는 1678 년 ( 숙종 4) 16 만 7406 명이었으나 1786 년 ( 정조 10) 에는 19 만 9127 명으로, 1807 년 ( 순조 7) 에는 20 만 4886 명으로늘어났다. 17 세기중엽이후서울의인구가크게증가한것은금속화폐의전국적유통으로상품화폐경제가농촌에까지침투되면서토지에서이탈한농민들이서울로유입된것도그원인중하나였다. 18 세기중엽서울에는인접한통진 김포 양천 부평등지의주민들이경강일대에모여들어하나의촌락을이루고있다고할정도였다. 당시기본적인식량이었던쌀 콩등곡물은지방의세미와재경지주들의농장에서올라오는곡식으로충당하였으나신선한채소 과일 수산물등은원거리수송이불가능하였으므로땔감과함께주로근교지역에서조달하였다. 특히생활수준이높은상류층은육류 어류 채소 과일등고급식품과난방용연료의소비가많았으므로남양주를비롯한근교지역에서는서울과

301 같이큰소비시장을배경으로하는상업적농업이발달하였다.* 남양주지역에서재배되던채소는특히상업성이높은것이었다. 18 세기이후상업도시들이형성됨에따라도시주민들에게채소를공급하기위한상업적채소재배업이발달하였다. 특히서울을비롯하여개성 평양 수원 전주등과같은도시의주변지역에서채소재배가증가하였다. 도시인구의증가와수공업및광업의발달에따른임금노동자층의증가로농산물의수요가증가하면서농민들의상업적농업경영이더욱활발해졌다. 시장판매를고려하여재배된작물로는배추 무 가지 파 마늘 오이 고추 호박 미나리 수박등의채소와생강 인삼등이대표적인것이었다. 도시주변에서의채소재배는대개상품생산적인성격을지니고있었으며수익성도높았다.* 최대의소비지인서울에서대량으로소비되는채소 과일등은원거리수송이어려웠기때문에땔감과함께주로근교지방에서공급되었다. 특히조선후기에이르러서울의인구가급증하면서채소 과일의수요가증가하였으며, 이에따라개간이가능한근교의토지는대개채소밭으로바뀌어갔다. 조선후기실학자인다산정약용은서울근교지역의토지이용에대해구체적인견해를밝히고있다. 그는도성안과도성밖지역에과원과채포를넓게설치하여과일과채소를도성에공급해야한다고주장하면서실제로도성내외에서 10 묘의땅에파 마늘 배추 오이등을재배하여많은소득을올리고있다고하였다.* 그리고홍만선 ( 洪萬選 ) 은서울의원전에는대추 밤 배 감 매실 은행 복숭아 자두 호도등을가꾸고, 그밖에사과 앵두 석류 모과등도재배하도록하였다. 또포사에는파 부추 마늘 무 오이 호박 배추 쑥갓 상추를비롯하여참외 수박 시금치 미나리등도파종하도록권하였다.* 남양주를비롯한서울근교에원예농업이발달할수있었던것은무엇보다도인근지역에방대한소비지를갖고있다는것과한강을끼고있어교통이편리하고인근에풍부한비료공급원이있었기때문이기도하다.* 한편 17 세기후반이래전국적으로도로망과상품유통로가새롭게개설, 정비되었다. 이시기에도로망이급속하게발전할수있었던것은지역간경제적연계가긴밀해지면서사회적요구가높아졌기때문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농업의가능성이높은지형조건이우선되었으나점차사회가발전하면서사회경제적조건이더큰영향을주게되었다. 그중에서도교통의편리함은사람들의교류를촉진시키고인구의집중을가져오는한편상품의유통을활성화시켰다. 조선후기전국적인시장권이형성되면서경강상인 ( 京江商人 ) 송상 ( 松商 ) 동래상인 ( 東萊商人 ) 의주상인 ( 義州商人 ) 등의활동은광범한지역으로까지확대하였다.* 특히경강상인들의활발한활동은서울주변의장시를배경으로성장하고있던사상인들을자극하였다. 경강상업이번성함에따라경강에서는상업활동에부수되는각종영업이발전하였는데세곡의하역운수업이나장빙업 ( 藏氷業 ) 이대표적인예이다. 미곡외에땔나무와재목도경강상인들의중요한취급상품으로서울에서소비하는가정용땔나무와건축용재목은모두한강상류인강원도산악지방에서벌채하여선박이나뗏목으로경강까지운반, 판매하였다. 남양주는바로이같은땔나무와재목이서울로집하되는길목에위치하고있었기때문에이지역을근거지로하는상인들이매점하여공급하면서이익을독차지하였을것으로짐작된다. 땔나무는미곡과함께도회지인으로서는자급할수없는생활필수품이었기때문에그공급로를독점할경우다른어떤물품못지않게이익을취할수있는것이었다. 이와함께각지방의장시를순회하며장사하는소상인들의활동도더욱활기를띠었다. 그리고상인들을상대로영업하는객주 ( 客主 ) 나여각 ( 旅閣 ) 이발달하였는데이들은독점적도매업인도고 ( 都庫 ) 뿐만아니라창고업 위탁판매업 운송업 여관업을비롯하여대부 어음발행 예금등의은행업도겸하였으므로지방의상업에서차지하는비중이매우높았다. 이러한상황에서전국각지에는상품유통을원활하고신속하게하기위한지름길이생겨났고, 이미있던길도새롭게정비되었다. 또한해상교통의발달로해안을끼고있는외방포구 ( 外方浦口 ) 가상품유통의중심지로부상하였다. 이러한포구중심의상업은주변의장시와연결되면서더욱그권역을확대시켰다. 새로운유통중심지로성장한포구는해상교통로의발달, 지방장시의대형화추세와연결되면서발달하였고,* 이에포구를중심으로한해상교통과장시를중심으로한내륙교통이유기적으로연결되면서전국적시장권이형성되었다.

30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3 절상품화폐경제의발달 2. 교통의발달과누원점의성장 남양주지역은 18 세기이후상품화폐경제가발달하면서크게성장하였다. 특히서울과인접해있으면서동북지방을연결하는교통의요지였기때문에이지역에도사방으로연결하는도로가새로개설되었다. 함경도로통하는길뿐만아니라여러곳으로통하는새지름길이개척되었는데평강의삼방로 ( 三防路 ) 로통하는길과낭천의주소령으로통하는길, 회양 ( 淮陽 ) 의법수현으로통하는길이었다. 북쪽으로는울대현으로넘어가는길이있었으며, 서쪽으로는평안도지방으로직통하는길이개척되었다. 또한삭령지방을거쳐황해도로통하는새길들이개척, 확대되었다.* 동북지방에서서울로직접연결되는삼방로의개설은매우주목되는것이다. 이도로는안변 덕원 함흥등을곧바로연결하는길이었는데특히상인들과여객 ( 旅客 ) 들이주로이길을이용하게되면서평탄한큰길이생겨나게되었다. 18 세기후반에는삼방로를왕래하는사람들과이지역에거주하는사람들이더욱늘어나큰마을을형성하기에이르렀다. 삼방로가급속하게확대되어간것은함경도로통하는지름길인동시에지세가다소평탄하여상인들과행인들의왕래에불편함이적었기때문이다. 이에따라안변과평강에이르는 100 여리사이에는곳곳에여점 ( 旅店 ) 들이생겨나고상인들과행인들을대상으로생업을이어가는사람들이늘어났다.* 여점은길가에위치하여술과밥을팔면서잠자리도제공하던곳으로흔히주막으로불렸으며, 점막 ( 店幕 ) 탄막 ( 炭幕 ) 야점 ( 夜店 ) 등으로도불렸다. 주막이늘어난것은도처에장시가개설되어장시를순회하는상인들이증가하였고, 서울을중심으로사회활동이활발히전개되면서각지방에서서울로오가는사람들이날로늘어났기때문이었다. 또한사회가분업화되고생산력이향상되면서그잉여물의유통이활발하게이루어졌기때문이다. 양주는바로이와같이원격지사이의상품유통이크게확대되는가운데특히서울과함경도등지를연결해주는요충지였다. 그리고서울과손쉽게이어주는도로의개설로안변 덕원 문천주민들은원산에서많은양의어물을운반해와서서울이나안성등지에서판매하였고, 그곳에서쌀이나필요한물건을구입함으로써함경도의여러고을주민들은큰흉년이들어도살아갈수있다고할정도였다. 조선후기서울근교의장시가운데큰시장으로발전한것이양주의누원점이다. 누원은본래서울외곽의한적한원촌 ( 院村 ) 에지나지않았다. 이곳은한양에서강원도나함경도를오가는사람들이잠시쉬어가는곳이었는데조선후기상품화폐경제의발달과더불어당시최대의소비지인서울로각지방의물화가공급되면서그요충지에위치하였기때문에크게번창할수있었다. 누원점은서울에서동북지역인함경도경흥서수라로가는초입에위치한유통로상의길목에위치하여상품교역의중심지로부상하였다. 더욱이이지역은도성에서비교적멀리떨어져있어시전상인들의영향권에서벗어날수있었기때문에사상인들의자유로운상거래가이루어질수있었다. 사상인들은처음에는칠패 이현 용산등지를근거지로삼아활동하다가점차그영역을누원을비롯하여송파등서울근교에위치한교통의요충지로확대해갔다. 신경준의 도로고 에의하면서울에서원산까지의경로는다음과같다. 서울 수유리점 누원 서오측점 송우점 파발막 장거리 만세교 양문역 풍전역 가노개령 장림천 김화 금성 창도역 재오현 송포강 신안역 회양 청령 고산역 용지원 남산역 안유 원산으로이어지고있었다. 누원은바로이들도로가운데서울인근의길목에위치하고있었기때문에상업중심지로성장할수있는요건을갖추고있었다. 그러므로사신들의행차시에도서화랑 ( 西花浪 ) 녹양 ( 綠楊 ) 양주읍참 ( 楊州邑站 ) 에서숙박하면서도점심은누원점에서하였다. 누원점은서울에서 30 리정도였고, 서화랑 녹양 양주읍참은서울에서 리여서굳이누원점에서점심을할필요가없었음에도불구하고상업중심지였기때문에누원에서점심을먹었던것이다.* 또한누원은함경도와포천지역에서서울로들어가는사람들의마지막쉼터로서상인들에게는물품의거래동향과가격등을점검하는곳이기도했다. 이렇게되면서누원은점차상거래가활발해졌고상업도시로탈바꿈하게되었다. 누원점은서울근교의도봉산기슭에위치하여송파장과긴밀히연결하면서경시전 ( 京市廛 ) 의상업적이윤을중간에서가로막고있었기때문에시전상인들과의마찰이적지않았다. 송파장은 만기요람 ( 萬機要覽 ) 에서전국의 15 대장시가운데하나로손꼽히고있었으며 * 위치상서울의시전과대단히밀접한이해관계를맺고있었기때문에시전상인들로부터송파장을폐지하자는주장이빈번하게제기되었다. 주장의근거는명목상 1 개월 6 개시의 5 일장이었으나실제로는매일열리는상설시장화되어시전의상업적이윤을중간에서빼앗고있다는것이었다. * 송파장을근거로활동하고있던상인들은서울주변의중도아 ( 中徒兒 ), 난전지류 ( 亂廛之類 ) 들과체결하여삼남과북도의상인들이이곳으로모이도록유인하여시전에서매매하는각종물품을날마다매매하고있었다. 그리고이지역을배경으로활동하고있던상인들은누원점의상인들과도긴밀하게연결되어있었다. 조선후기에는동북지방에서생산되는북어의수요가크게늘어났는데함경도원산에서수합된북어는철령을넘어서울쪽으로오다가누원에이르렀다. 이에사상인들은누원으로몰려들어북어등을매점, 서울로반입하여차익을챙기고있었다. 누원의사상인들은서울근교의미아리삼거리에이르고, 여기에서돈암동이나종암동두갈래로나뉘어도성으로들어갔다. 그들은서울시전상인들의간섭을피하기위하여동대문의이현상인들과접촉하거나뚝섬 송파상인과연결하였고, 한강을경유하여용산으로가기도하였다. 누원점은주로동북지방에서올라오는어물을도집하여상판 ( 商販 ) 함으로써시전가운데내 외어물전이실업할지경에이르게할정도로사상인의활동이활발하게전개되었던곳이다. 그리고삼남지역에서생산되는면포등의류와동북지방의어물 마포등의교환이활발하게전개되면서누원을통과하는상품량도증가하게되었다. 따라서이곳에장시가개설되어물화유통이활발하게이루어질경우시전인들이상리 ( 商利 ) 를잃게될것은분명하였다. 이때문에누원점은시전인들의반발로 18 세기초에이미장시개설움직임이무산된적이있었다. 이후 18 세기중엽에재차장시개설을도모하였다가이역시서울칠의전인 ( 七矣廛人 ) 들의반대로무산되었다. 누원점민들이장시개설을시도하려고했던사실을 비변사등록 에서는다음과같이기록하고있다. 누원점민이장시를신설하고자했던것은오래된일이다. 대저누원점촌은동북어상이서울로들어오는길목에위치하여따로건방 ( 乾房 ) 이라는명호를새로만들고각자상인들이주인과객상의관계를정하여양로 ( 兩路 ) 의어물을도집하여서울시전의이익을횡탈하여송파로수송할뿐만아니라혹은호중 ( 湖中 ) 으로나누어보낸다. 그러므로도성의매매가때로는중간에단절되고값은점차올라시전의생리 ( 生理 ) 가전혀의지할바가없게되었고생업은더욱조잔 ( 凋殘 ) 케하는작간 ( 作奸 ) 이많고그로인한

303 폐단이더욱심해졌기때문에갑오년 (1774) 을미년 (1775) 간에비변사에서전교를받들어경기감영에관칙 ( 關飭 ) 하여이를통금하도록하였다. 그러나세월이점차오래되자영갑 ( 令甲 ) 이해이해져서점민 ( 店民 ) 의악습이고쳐지지않고시전인의실리 ( 失利 ) 는옛날과같아져재작년과작년에마침어가가머무르며폐단을묻게되자이에시전의호소함을들어특별히전교하여재차엄칙하도록하고지방관으로하여금점한들을단속하고폐단의근원을살펴이미건방을혁파하고또중도아들을금하여간두 ( 奸竇 ) 를영원히제거하려고하였다. 모름지기점한배들이이익을탐하는마음이건방을다시개설하고중도아를금하지않아감히다시말을하지못하게하고오직이익을독차지하려는계획한가지에만집착하여여러모양으로경영하며궁색한백성들을가탁하여곡식을무천 ( 貿遷 ) 하는방법이라며장시를창설하고자여러차례본사에글을올렸으나엄하게물리쳐버렸다. 지금은방자하게거리낌이없이임금을번거롭게하면서 환설 ( 還設 ) 이라는글자까지썼으니더욱간교한것이다. 자고로누원장이라는명칭은없었으므로 환설 이라고하는것은가죽에터럭이있을수없는것과거의마찬가지로기만하는말이니참으로놀라운일이다. * 누원점과같은곳에장시개설을억제한이유는대체로국역의일부를담당하고있는경시전을보호하기위한것이었다. 그러나누원점민들의장시개설시도는시전인들의반대에도불구하고계속해서이어지고있었다. 누원점민들은자신들의요구가관철되지않자누원장을원래대로개설해달라고호소하였다. 이에비변사에서는누원장이란명칭은예전부터없었던것이고외방장시는경솔하게창설해서는안된다며이를불허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누원점을중심으로활동하던사상인들은주로동북지방에서올라오는어물을도집하여이를어물전에넘기지않고직접행상인들에게판매함으로써많은이익을남기고있었다. 누원점에사는중도아인최경윤 ( 崔敬允 ) 엄차기 ( 嚴次起 ) 이성로 ( 李聖老 ) 등은동북지역에서올라오는각종어물을도집하여산처럼쌓아놓고서울의남대문외칠패와이현근처의난전인등에게보내그들로하여금수시로값을올려팔게하므로서울시내의어물가가오를뿐만아니라어물전이환산 ( 渙散 ) 하여파시 ( 罷市 ) 하는지경에이르게할정도였다. 이에대한내용은 각전기사 ( 各廛記事 ) 를통하여알수있다. 대저이현 칠패두곳은모두난전이다. 도고행위는물론집류 ( 執留 ) 하여매매하는것이어물전의 10 배에이르렀다. 또한이들은도고최경윤 엄차기 이성로등과체결하여동서어물이서울로오는것을모두매입하여쌓아두었다가이현과칠패에보내난매 ( 亂賣 ) 토록한다. * 여기서언급되고있는서울의칠패와이현의어물시장은 18 세기중엽까지만하더라도외어물전의관할에놓여있던시장으로서어물전에서구입한어물을다시판매하는중간도매시장이었다. 그러나 18 세기후반이후칠패의중도아들은누원이라는새로운어물유통거점을배경으로동북어상들과직접연결되면서서울에서가장큰규모의어물도매시장으로성장하였다. 누원점은동북지방에서서울로들어오는대부분의물화가거쳐가는곳이기때문에이지역을근거로활동하고있던상인들은어물등을도집해놓고이를건방이라고하였다. 그리고중도아및송파의상인들과도연계하여끊임없이물건을주고받으며어리 ( 魚利 ) 를조종하여어물전인들의생업을잃게하였다. 더욱이전에없던장시를개설하여중간에서이익을독점하려하자경기감영에분부하여이를엄히금단시키도록조처하게되었다. 그리하여우선누원점의건방을혁파하고아울러중도아를금하여이를어기는자가있을때에는관련기관에서법률에의거하여엄히다스리도록하였다. 이에한성부와경기감영 평시서등에서누원점민들의난전도고활동을신칙 ( 申飭 ) 하였지만별다른효과를거두지는못하였다. 한편누원점은 18 세기말인근에동촌여점 ( 東村旅店 ) 이생기면서상호간에상리를둘러싸고분쟁이발생하였다. 누원점민들은대개동북어상들에게연세 ( 煙稅 ) 나어물을받아생활을영위해왔는데동촌여점에신접인 ( 新接人 ) 을모아들인이후에는비변사에서정해준대로연가 ( 煙價 ) 를나누어받아각자생업을이어가고있었다. 그런데동촌여점인들이이에만족하지않고오히려작당하여누원과흥인문 혜화문에서어상들을기다려자신들의집으로몰아넣어어물을염가로매입하는등도고를자행하였던것이다. 이때문에이곳에왕래하는동북지방의어상이날로줄어이지역어상들의생활을곤궁하게했을뿐만아니라서울의찬물가 ( 饌物價 ) 도따라서오르게하였으므로의정부에서는절목을제정하여이와같은폐단을없애고자하였다.* 이러한가운데누원민과동촌여점인사이에어물을도고하는일로서로간에소송이있게되어양주에거주하는최흥세 ( 崔興世 ) 가동북지방에서오는어물을중간에서억지로도집한일로장두 ( 狀頭 ) 로서정소 ( 呈訴 ) 하였다가은진 ( 恩津 ) 에 3 년간정배 ( 定配 ) 되기도하였다.* 그리고서울의포전 ( 布廛 ) 과내 외어물전의상인들은양주의누원점을근거지로하여활동하는상인들이북관 ( 北關 ) 에서생산되는어물과포를근기 ( 近畿 ) 100 리내에서도고하는폐단이있으므로일체금단해줄것을요청하기도하였다. 다음과같은기록을통해누원점을비롯하여서울근교에서활동하고있던사상인들로인해시전상인들이받고있던피해의심각성을어느정도파악할수있다. 근년이래로무뢰지도가성군작당 ( 成群作黨 ) 하여남문밖칠패의은밀한곳에서난전을베풀고아침에모였다가저녁에는흩어지는인마가숲을이루어무수히난매하며조금도꺼리는것이없이같은무리들을동쪽에서는누원주막에서, 남쪽에서는동작진두에서남북에서상경하는어상을유인하여수천바리를모두칠패로운반해들여성내의중도아들을불러모아날마다난전을행한다. 남자는축롱 ( 杻籠 ) 을메고여자는목표 ( 木瓢 ) 를이고연이어흩어져들어와각처의길거리에서매매함이이와같아수각교 회현동 죽전동 주자동 어청동 어의동 이현 병문등지에는산처럼쌓아놓은각종건어와어염이칠패난전에서나누어준물건이아닌것이없다. 위기사를통해누원점민들이동북지방에서오는물건을도집하여마음대로난매했던모습을볼수있다. 더욱이부상대고 ( 富商大賈 ) 가처벌을두려워하지않고북쪽의상인들과체결하여장시와점막에서마음대로도고하므로서울로올라오는물건이거의없어지게될정도였다. 이에따라이후로는북관에서올라오는상품을중간에서억류하거나다른곳으로보내지못하게하여포목과어물이서울로와서매매되도록하였다. 그리고양주의누원점과궁동에옛날습성을고치지않고전처럼억류하는폐단이있으면접주 ( 接主 ) 를잡아들이고두민 ( 頭民 ) 을형배한다는전령을큰길거리에게시하여이같은폐단을막고자하였다. 그러나도성내에서난매하는무리가그동류들을양주와광주에나누어보내관동 영북 ( 嶺北 ) 에서올라오는상인들을도중에서맞아포천의송우점과양주의누원점, 광주의송파 사평등지의객막 ( 客幕 ) 으로끌고가고어둠을틈타몰래도성내로들어와이현 병문밖 칠패등지에서무

304 수히난매하는데그짐바리가매우많고그동류들을각처의장시에나누어보내시리 ( 市利 ) 를농단하여시전인들의생업을빼앗음이끝이없을정도라고하는호소가끊이지않았다. 따라서난전을혁파하기위한여러가지조치가내려졌지만소기의성과를거두지는못하였다. 남양주의사상인들은관북지방의건어물을주로취급하였지만전국적시장권에편입되기도하였다. 누원주변에는마석우장 동두천장 신천장 송우장 차탄장등이있었고, 멀리철원 원산과연결되었으며가깝게는송파 용산 뚝섬등과도연결되었다. 누원의상인들은송파등지의상인들과자금을합자하기도하고정보를교환하기도하면서대규모로매점활동을전개하여 19 세기에이르면서전국에서손꼽히는상인중의하나로성장해갔다. 누원지역이상업중심지로발돋움하게된것은시전의특권적상업활동에대항하여사상인들이나름대로상권을확보하기위하여생산지에서서울로반입되는상품을이곳에서매점하는도고행위를전개하는과정에서얻어진결과라고할수있다.

30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6 장조선후기사회 경제의변화 * 제 3 절상품화폐경제의발달 3. 장시발달과상품유통 조선후기남양주지역의장시발달과상품유통상황을살펴보자. 장시는조선전기전라도지방에서형성된이래물화집산지와교통이발달한곳을중심으로더욱확대되어 16 세기에는전국적으로개설되기에이르렀다. 그리고시전을보호하기위해다른지역보다특별히장시개설을엄금하였던경기도에도양란을지나면서부터는장시가개설되는곳이더욱증가하였다. 장시성립초기에는 10 일장또는 15 일장이었는데 17 세기를지나면서대개 1 개월 6 개시의 5 일장으로발달하였다. 동국문헌비고 에의하면 18 세기말 5 일장은전체 1062 개의장시가운데 968 개로전체의 91% 를넘고있으며, 임원경제지 에의하면 19 세기초 5 일장은전체 1052 개중 905 개로전체의 86% 를차지하고있었다. 19 세기초경기도를비롯하여각도의장시개시일별분포상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19 세기초장시개시일별분포상황 > 지역 / 구분 3 일장 5 일장 1 6 일 2 7 일 3 8 일 4 9 일 5 10 일소계 10 일장 15 일장합계 경기 ( 京畿 ) 호서 ( 湖西 ) 호남 ( 湖南 ) 영남 ( 嶺南 ) 관동 ( 關東 ) 해서 ( 海西 ) 관서 ( 關西 ) 관북 ( 關北 ) 합계 ,052 구성비 (%) 출전 : 임원경제지 예규지권 4, 화식팔역장시조. 이표에서알수있듯이경기도에는 93 개의장시가개설되었는데 1 6 일장이 21 개, 2 7 일장이 21 개, 3 8 일장이 21 개, 4 9 일장이 18 개, 5 10 일장이 12 개로분포되어있었다. 이시기에도다른도에는 10 일또는 15 일간격으로열리는장시가있었지만경기도의장시는모두 5 일장이었다. 뒤에서자세히살펴보겠지만 19 세기남양주지역의장시도 5 일마다개시되고있는것으로나타난다. 어쨌든장시는그수적인증가로 18 세기이후에는전국에걸쳐 1000 여개이상이개설되어지역주민들에게는없어서는안될중요한경제 사회적기능을하였다. 조선후기남양주지역을비롯하여각지방에개설되던장시는 5 일에한번일반민들과상인들이취산 ( 聚散 ) 하는곳이었기때문에필요한정보의교환 수집과홍보의장소로이용되었다. 지방수령들이부세등을감면한다는내용이나윤음 ( 綸音 ) 정령 ( 政令 ) 등을선포하는경우대개장시의개시일을이용하였다. 그리고위유사 ( 慰諭使 ) 나암행어사등이민정을파악하고필요한정보를수집하는장소로이용하기도하였다. 민인들도장시를이용하고나서야자신들에게필요한정보를알게되는경우가많았기때문에장시가정보획득의장소로적극활용되었다. 이와같이장시는경제뿐만아니라문화적으로도지역주민들에게없어서는안될중요한공간이었다.* 따라서 19 세기중엽이후에는민원에의해장시를신설해주거나다른지역으로옮겨간장시를원래의장소로옮기는사례가많았다. 이와같은사실은장시의개설이지역주민들의생계와안집 ( 安集 ) 에긴밀하게연결되었음을보여주는것이다. 남양주지역은남한강과북한강이합쳐져내려오는길목에위치해있었고서울과도인접해있었다. 이와같은입지적조건은육로와더불어수로를이용해서경강지역에쉽게접근할수있었고, 남한강과북한강수로를이용하여강원도와충청도의물산과도연결할수있었다. 따라서이지역은다른어느곳보다도장시가발달할수있는여건을갖추었다고볼수있다. 앞서살펴본누원점이크게발달할수있었던것도이와같은조건을갖추고있었기에가능한것이었다. 양주지방의장시는시기에따라개설되는수가 4 7 개로나타나고있다. 대개읍지나지리지의경우장시에대한내용은 18 세기이후에편찬되는자료에나타나는것이일반적이다. 이와같은사실은 17 세기이래상품화폐경제가상당히발전하여전국적시장형성의필요성이제기되었고, 그에따라상업지리 교통지리에대한지식이절실히필요하게되어나온것이다.* 다음의표는양주지역에개설되었던장시를 18 세기이후에편찬된자료를통하여정리한것이다. <18 세기이후양주의장시개설상황 > 자료명연대장시개설내용 동국문헌비고 ( 東國文獻備考 ) 임원경제지 ( 林園經濟志 ) 1770 년 1830 년 가라비장 ( 加羅非場 : 3 8) 동도천장 ( 東道川場 : 5 10) 신천장 ( 新川場 : 2 7) 고주내장 ( 古州內場 : 5 10) 대탄장 ( 大灘場 : 4 9) 북도천장 ( 北道川場 : 1 6) 구곡장 ( 仇谷場 : 1 6) 가라비장 ( 서 10 리광석면 : 3 8) 신천장 ( 북 20 리진답면 : 1 6) 동두천장 ( 東豆川場, 북 40 리이담면 : 5 10) 마석우장 ( 麻石隅場, 동 80 리하도면 : 2 7)

306 경기지( 京畿誌 ) 대동여지통고( 大東輿地通考 ) 용구수전미상 ( 龍區壽典 ) 경기읍지( 京畿邑誌 ) 1842 년 년 미상 (19 세기 ) 1830 년 가업장 ( 加業場, 서 10 리광석면 : 3 8) 동도천장 ( 북 40 리이담면 : 5 10) 신천장 ( 莘川場, 북 20 리어등산면 : 1 6) 대탄장 ( 북 60 리청송면 : 4 9) 구곡장 ( 동 100 리상도면 : 1 6) 미호장 ( 渼湖場, 남 60 리독음면 : 3 8) 가라비장 (3 8) 동도천장 (5 10) 신천장 (2 7) 고주내장 (5 10) 대탄장 (4 9) 북도천장 (1 6) 구곡장 (1 6) 가라비장 (3 8) 동도천장 (5 10) 신천장 (2 7) 고주내장 (5 10) 대탄장 (4 9) 북도천장 (1 6) 구곡장 (1 6) 가라비장 ( 서 10 리광석면 : 3 8) 신천장 ( 북 20 리진답면 : 1 6) 동두천장 ( 東豆川場, 북 40 리이담면 : 5 10) 마석우장 ( 麻石隅場, 동 80 리하도면 : 2 7) 이표를통해먼저양주지역의장시발달상황을대략적으로검토해보면몇가지특징을알수있다. 우선자료에따라그내용이소략한것이있는반면에개설되는곳의위치까지세밀하게기록한것이있고, 같은장시이면서도자료에따라다른이름으로기록되고있는것도있어서장시명의변천을알수있으며편찬된시기에많은간격이있음에도불구하고같은내용을담고있는것등을파악할수있다. 18 세기후반양주지역에개설되었던 7 개의장시가 19 세기후반에는 5 개로감소하고있다. 이것은단순한장시수의감소라기보다는장시내부의질적인발달이라고볼수있다. 장시는 18 세기전반까지수적으로증가하는추세에있었다. 그러던것이 18 세기후반이래인근장시간에개시일이중복되거나물화교역이활발하지못한장시는주위의큰장에흡수되는등많은변화를겪게되었다. 이과정에서개시일이조정되거나입지가좋은곳에새로운장시가개설되는등장시와장시사이에연계가긴밀해졌다.* 이러한과정에서일정지역마다시장권이형성되었다. 그리고상업적농업의발달과함께장시에서의거래물품도다양해졌다. 또한상인의증가와이들의활동범위가확대되면서장시간의연계가긴밀해져멀리떨어져있는지역의상품이서로교역되었다. 당시장시에서거래되고있었던물품을살펴보는데는 임원경제지 가많은참조가된다. 임원경제지 는 1052 개의장시중대표적인 325 개의장시에서거래된물품을수록하고있다. 이자료에의하면양주에서개설되었던장시가운데가라비장에서는미곡 면포 어염 조 밤 철물 목기 옹기 지물 인석 ( 茵席 ) 우독 ( 牛犢 ) 등의물품이거래되었던것으로나타나있다.* 물론이들물품이외에도많은종류가있었겠지만이자료에수록된물품은가라비장에출하되고있던대표적인것들로보인다. 여기서참고로조선후기경기도각군현의대표적인장시에서거래되고있었던물품을표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 경기지역상품유통내용 > 군현 장시명 미 ( 米 ) 두 ( 豆 ) 모맥 ( 牟麥 ) 면화 ( 綿花 ) 면포 ( 綿布 ) 마포 ( 麻布 ) 과물 ( 果物 ) 어염 ( 魚鹽 ) 우독 ( 牛犢 ) 연초 ( 煙草 ) 양주 ( 楊州 ) 여주 ( 驪州 ) 파주 ( 坡州 ) 광주 ( 廣州 ) 수원 ( 水原 ) 강화 ( 江華 ) 교동 ( 喬桐 ) 남양 ( 南陽 ) 인천 ( 仁川 ) 부평 ( 富平 ) 죽산 ( 竹山 ) 통진 ( 通津 ) 장단 ( 長湍 ) 이천 ( 利川 ) 안성 ( 安城 ) 안산 ( 安山 ) 양근 ( 楊根 ) 김포 ( 金浦 ) 고양 ( 高陽 ) 가평 ( 加平 ) 삭령 ( 朔寧 ) 마전 ( 麻田 ) 교하 ( 交河 ) 용인 ( 龍仁 ) 가라비장 ( 加羅非場 ) 부내장 ( 府內場 ) 봉일천장 ( 奉日川場 ) 성내장 ( 城內場 ) 부내장 ( 府內場 ) 남문외장 ( 南門外場 ) 부내장 ( 府內場 ) 부내장 ( 府內場 ) 소암장 ( 疎巖場 ) 발라장 ( 鉢羅場 ) 부내장 ( 府內場 ) 통리장 ( 通里場 ) 부내장 ( 府內場 ) 부내장 ( 府內場 ) 군내장 ( 郡內場 ) 상직관리장 ( 上職串里場 ) 사탄장 ( 沙灘場 ) 신장 ( 新場 ) 신원장 ( 新院場 ) 군내장 ( 郡內場 ) 수욱장 ( 水郁場 ) 유림진장 ( 楡林陣場 ) 신화리장 ( 新花里場 ) 현내장 ( 縣內場 )

307 진위 ( 振威 ) 영평 ( 永平 ) 지평 ( 砥平 ) 음죽 ( 陰竹 ) 과천 ( 果川 ) 양성 ( 陽城 ) 포천 ( 抱川 ) 적성 ( 積城 ) 연천 ( 漣川 ) 양지 ( 陽智 ) 신장 ( 新場 ) 현내장 ( 縣內場 ) 전곡장 ( 田谷場 ) 장호원장 ( 長湖院場 ) 군포장 ( 軍浦場 ) 현내장 ( 縣內場 ) 송우장 ( 松隅場 ) 두일장 ( 斗日場 ) 차탄장 ( 車灘場 ) 개천장 ( 介川場 ) 군현장시명석자치계철물부정유기옹기사기목물유기지지 양주 ( 楊州 ) 여주 ( 驪州 ) 파주 ( 坡州 ) 광주 ( 廣州 ) 수원 ( 水原 ) 강화 ( 江華 ) 교동 ( 喬桐 ) 남양 ( 南陽 ) 인천 ( 仁川 ) 부평 ( 富平 ) 죽산 ( 竹山 ) 통진 ( 通津 ) 장단 ( 長湍 ) 이천 ( 利川 ) 안성 ( 安城 ) 안산 ( 安山 ) 양근 ( 楊根 ) 김포 ( 金浦 ) 고양 ( 高陽 ) 가평 ( 加平 ) 삭령 ( 朔寧 ) 마전 ( 麻田 ) 교하 ( 交河 ) 용인 ( 龍仁 ) 진위 ( 振威 ) 영평 ( 永平 ) 지평 ( 砥平 ) 음죽 ( 陰竹 ) 과천 ( 果川 ) 양성 ( 陽城 ) 포천 ( 抱川 ) 적성 ( 積城 ) 연천 ( 漣川 ) 양지 ( 陽智 ) 가라비장 ( 加羅非場 ) 부내장 ( 府內場 ) 봉일천장 ( 奉日川場 ) 성내장 ( 城內場 ) 부내장 ( 府內場 ) 남문외장 ( 南門外場 ) 부내장 ( 府內場 ) 부내장 ( 府內場 ) 소암장 ( 疎巖場 ) 발라장 ( 鉢羅場 ) 부내장 ( 府內場 ) 통리장 ( 通里場 ) 부내장 ( 府內場 ) 부내장 ( 府內場 ) 군내장 ( 郡內場 ) 상직관리장 ( 上職串里場 ) 사탄장 ( 沙灘場 ) 신장 ( 新場 ) 신원장 ( 新院場 ) 군내장 ( 郡內場 ) 수욱장 ( 水郁場 ) 유림진장 ( 楡林陣場 ) 신화리장 ( 新花里場 ) 현내장 ( 縣內場 ) 신장 ( 新場 ) 현내장 ( 縣內場 ) 전곡장 ( 田谷場 ) 장호원장 ( 長湖院場 ) 군포장 ( 軍浦場 ) 현내장 ( 縣內場 ) 송우장 ( 松隅場 ) 두일장 ( 斗日場 ) 차탄장 ( 車灘場 ) 개천장 ( 介川場 ) 출전 : 임원경제지 예규지권 4, 화식팔역장시조. 이표에서볼수있듯이조선후기경기도각군현의대표적인 34 개의장시에서출하되는물품중쌀은모든장시에서거래되었으며, 이외에면포 어염 마포 과물 우독 연초등의거래가많았다. 그리고농산물이주종을이루고있는가운데철물 부정 ( 釜鼎 ) 유기 옹기 사기등의수공업품이장시에서거래되었음을알수있다. 장시는대개읍치를중심으로하여 리간격으로개설되는것이보통이었으며, 인접장시와는개시일을다르게하고있었다. 그렇기때문에장시가매일열리지는않지만 4 5 개의장시가긴밀하게연결되어시장권을이루고있는지역의지역주민들에게는장시가상설되어있는것이나마찬가지였다. 양주지역의경우도앞의표에서볼수있듯이대개의장시가개시일을달리하며시장권을이루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리고개시일이중복된다하더라도그만한이유가있었다. 예를들어 경기읍지 에실린장시가운데가업장과광릉천장이 3 8 일로개시일이중복되기는하지만개설되는두장시사이의거리가 60 리정도떨어져있었기때문에큰문제가되지는않았다. 양주지방에개설되었던장시는 18 세기후반에서 19 세기후반에이르는동안급격한변화는없었던듯하다. 장시수의경우자료에따라 1 2 개의변화가있지만, 이들자료가운데는이전시기의것을그대로옮겨적은것도있기때문에기록내용을그대로수용하기는어렵다. 특히 대동여지통고 나 용구수전 의장시내용은 동국문헌비고 의내용을거의그대로담고있어시기별장시변동의내용을정확하게파악하기는어렵다. 그렇지만이들자료를통해서도어느정도그변화상을파악할수있다. 18 세기중엽이래개설되던장시가운데가업장 동두천장 신천장은 19 세기후반에이르기까지그대로개설되고있다.* 반면에고주내장 대탄

308 장 북도천장 구곡장은장시명이바뀌거나폐지되었다. 그리고 경기읍지 에서보듯이덕소장과광릉천장이새롭게개설되었음을알수있다.

30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1 절근대화정책 *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1 절근대화정책 * 1. 문호개방과개화정책 19 세기후반에이르러서구열강의급격한진출과함께조선사회는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편입이강요되었다. 조선은대외정책에서청 ( 淸 ) 과의기존속방관계를이용하면서서구열강의교섭요구를회피하였고이러한정책은 1864 년대원군정권이성립하자척사파의비등과함께쇄국정책으로고착되었다. 서구열강은당시동아시아최대의시장이었던청을아편전쟁으로굴복시킨뒤조선에도문호개방을통한통상요구와무력적침략을가해왔다. 대원군정권은증대하는자본주의세력의압박속에서아편전쟁이후열강의정치적 경제적침략에시달리던청의처지를고려해서라도외세의침략을경계하지않을수없었다. 쇄국정책과천주교탄압은그결과였으며이러한정책은반사적으로자본주의세력의적극적침략을유발하여프랑스에의한병인양요 ( 丙寅洋擾 : 1866) 와미국에의한신미양요 ( 辛未洋擾 : 1871) 가야기되었다. 이처럼전반적쇄국분위기에도불구하고한편에서는문호개방으로의지향이일부세력에게서나타나고있었다. 청으로부터유입되는서양사정이나세계정세에대한서적과두차례의양요로문호개방의필요성이일부의선각자들에의해대두되었다. 이들은통상을요구하는여러나라의실체를인정하고수교해야한다는현실적인식을가지고있었다. 이와같은상황아래서 1875 년일본이운양호사건을일으켜문호개방을강요하였다. 조선정부는일본의군사적침략을막기위한방법의하나로일본과조약을체결함으로써 1876 년강화도조약이성립되었다. 문호개방후조선정부는점차적으로개화정책을채택해나갔다 년 6 월 2 차수신사로서김홍집 ( 金弘集 ) 이일본에다녀오면서가져온주일청공사관참사관황준헌 ( 黃遵憲 ) 이쓴 조선책략 ( 朝鮮策略 ) 은열강과의결합으로러시아의남하를저지하자는동아시아국제관계의수립을주장한것이었다. 이것은당시세계의변화에어두웠던조선의정권담당자에게구미제국과의수교가조선에유리하다는생각을갖게하였고, 이후미국과의통상조약체결에영향을주었다. 한편조선정부는개화정책의효율적수행을위해관제개혁을단행하여 1880 년 12 월통리기무아문 ( 統理機務衙門 ) 을설치하였다. 또한외국의새로운문물을수용하기위해일본에조사시찰단 ( 朝士視察團 ) 을, 청에영선사 ( 領選使 ) 를파견하였다 년 1 월일본에파견된조사시찰단은박정양 ( 朴定陽 ) 등모두 62 명으로구성되어일본의각종제도와문화시설, 산업기관등을시찰하였다. 2 개월여에걸쳐일본의신문명을직접보고돌아온조사시찰단일행은각기복명서 ( 復命書 ) 를제출하여개화정책추진을뒷받침하였다 년 9 월김윤식 ( 金允植 ) 의인솔하에청에파견된 38 명의영선사는천진 ( 天津 ) 의기기국 ( 機器局 ) 에서무기제조법을배우기위해보내졌다. 천진에서의군기제조학습 ( 軍器製造學習 ) 이라는목적을이루지못하고 1 년만에돌아왔지만, 청의기술자를데리고와 1883 년삼청동에기기창 ( 機器廠 ) 을설치하였다. 이같은조선정부의개화정책에대해보수유생층의반발이있었는데, 그들은단순히개화정책뿐만아니라외국과의통상에도반대하였다. 이들은서양의공업생산품과조선의농업생산품을교역하면국내경제사정이타격을받을것이고, 이런과정을통해물밀듯이침략해오는세계열강을막을수없게될것이라는점을들어개화정책에반대하는상소를올리기도하였다. 문호개방과개화정책에대한반발은신식군인들에비해대우가나쁜구식군인들과서울의빈민층에서도일어나그결과 1882 년임오군변이일어나게되었다. 임오군변은조선정부가불러들인청군대에의해진압되었다. 당시청은임오군변으로재집권한대원군을납치하고, 조선의외교와내정에깊이간섭하였다. 청은강화도조약으로조선에진출한일본에위협을느끼고있었기때문에이를계기로조선에대한의례적종속관계를실질적식민지배관계로바꾸고자한것이다. 청의강화된간섭으로부터벗어나고자개화세력이 1884 년갑신정변을일으켰으나결국청의무력간섭으로실패하였고청의조선에대한간섭은청일전쟁까지계속되었다.

31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1 절근대화정책 * 2. 제도개혁 2. 제도개혁 1) 중앙제도개혁 1894 년갑오농민전쟁이발발하자민씨정권의폐정을비판하면서조선봉건국가를개혁하기위한정치운동이촉발되었다. 조선정부는 6 월 6 일자수자강 ( 自修自强 ) 을목표로한 대경장 ( 大更張 ) 을선언하고, 6 월 11 일에는교정청을설치하여개혁방안을마련하였다.* 이무렵일본은조선문제에서청나라보다우위에서기위해이른바내정개혁안을내놓았다. 그리고 1894 년 6 월 21 일경복궁점령으로민씨정권을무너뜨리고대원군을이용하여친일적인개화정권을세웠다. 6 월 25 일김홍집 김윤식 유길준 ( 兪吉濬 ) 등을중심으로하는김홍집내각은군국기무처 ( 軍國機務處 ) 를두고이후약 2 개월동안중요한개혁법안의대부분을통과시켰다. 우선국가의행정기구와관료체계를개편하였다. 의정부 ( 議政府 ) 와궁내부 ( 宮內府 ) 가분리되고, 국가와왕실권한이구분되는등중앙행정기구는의정부를중심으로개편되었다. 이에따라중앙의모든행정기구를의정부, 궁내부및팔아문 ( 八衙門 ) 아래배치하여체계적인근대국가의행정기구로전환하였다. 개혁정책은이같은행정기구를바탕으로세워졌다. 특히군국기무처는의정부산하에있었지만사실상국가최고의의사결정기관으로서개혁관료들에의한권력독점과국가운영을실현하는권력기구였다. 그러나이같은초기관제개혁은 1894 년 9 월말이후일본의내정간섭이심화되면서커다란변화를겪었다. 일본은조선정부에향후관제개혁에대한 20 개조항을제시하였다. 또한일본은내정개혁지침을공고히하기위해고종에게세자와대원군, 종친및신료를인솔하고종묘에나아가홍범 14 조 ( 洪範 14 條 ) 를포함한독립의서고문 ( 誓告文 ) 을바치게하였다. 이러한조치를배경으로본격적인권력구조의개편이이루어져 1894 년 12 월 16 일 칙령 16 호 를비롯한일련의칙령의제정과반포가있게되었다.* 이시기권력구조의개편조치에서는행정기구개편뿐만아니라근대국가에서나볼수있는삼권분립의권력기관을마련해두고있었다. 행정기구와분리된사법제도의수립과아울러의회적인기능의일부를담고있는중추원제도의개편이바로그것이다 년당시만하더라도의금사 ( 義禁司 ) 이하재판소는정부에부속하여행정관으로하여금재판을겸무케하였으나 1895 년에는법률 1 호 재판소구성법 을공포하여형식적이나마사법권독립을제도화하였다. 재판은이심제 ( 二審制 ) 을채택하고일심재판을담당한지방재판소에원칙상독임판사 ( 獨任判事 ) 를두어일체의민사및형사사건을심판케하였다. 그리고이심재판소 ( 二審裁判所 ) 로서고등재판소와순회재판소 ( 巡廻裁判所 ) 를설치하였다. 또한특별법원을설치하였는데이는왕실의범죄, 국가의중범에해당하는형사재판을담당하는재판소로서재판장인법부대신을위시하여 4 명의판사로구성되었다. 이밖에도각종사법기관및사법제도의근대적면모를갖추는제법령이제정 시행되었다. 그러나지방제도의개혁과정에서지방관이담당판사와검사를겸임하게되었으므로행정기구에서분리된독립적인근대적사법제도는아직수립되지않았다. 갑오개혁의 2 차개혁시기에는행정기관을뒷받침해주는의사결정기구도크게변화하였다. 군국기무처가폐지된반면중추원이정책자문기구로복구되었다. 중추원은종래실직이없는산관 ( 散官 ) 등의집합소에불과하였으나이로써법률의안을자순 ( 諮詢 ) 하는기능을갖추게되어경우에따라서는여론을주도하고정책에반영시킬수있는의결기구의성격을갖추게되었다. 그러나중추원은국정전반에정책을심의 의정하는권한이없었고, 행하는의안의결권한의대부분은사실상내각의결정에위임되어있어서중추원은개혁정책을사후추인하는기관에불과하였다. 결국중추원관제는종래의중추원을형식적인자문기구로변경한데불과하였고모든법률안은내각회의를담당하는국무대신의총의를통해서결정되었다. 이시기법률과칙령은국왕의유시 ( 諭示 ) 로서공포되었다. 내각회의에는국왕이반드시친임하도록되어있었지만군주의권한은현저히약화되어있었다. 내각회의에국왕이참석하지못할때에도바로상주하여재가토록한반면에재가주청 ( 裁可奏請 ) 하는안건에재가를불허할때는이유를명시하여다시내각회의를거치게되었고, 또한국왕이안건및관리의임면 ( 任免 ) 을주장하였더라도결행하기전에반드시내각에제출하여의결을거친다음에실시하도록하였다. 따라서내각관제하에서사실상군주권은행사되지못하였다 년 7 월제 3 차내각으로재집권한김홍집 유길준내각은내각의역할강조와궁내부의정무간여배제등을선언하였다. 반면에 8 월 27 일대조선왕국을대조선제국이라칭하고대군주폐하를황제존호 ( 皇帝尊號 ) 로올리는것과연호를제정하는안건을올렸고이어궁내부의위상도강화하였다. 나아가제 3 차내각은자신의권력기반을확보하기위해 1895 년 11 월 3 일향회조규 ( 鄕會條規 ) 와향약판무규정 ( 鄕約辦務規定 ) 을제정하였다. 비로소군, 면, 리에각각대회 ( 大會 ), 중회, 소회를설치하여지방민의이해와관련된제반사항을토의하고결정하도록하는일종의지방자치법이마련된것이었다. 특히지방유세자를집강 ( 執綱 ), 존위 ( 尊位 ), 차석 ( 次席 ) 에앉혀놓아여론을주도하도록하였다. 이는정권의권력기반을지방자치기구를통해서보완하고자한것이었다. 이렇게하반기에갑오개혁정권은외면적으로국가의위상, 황제권의강화를통해서그리고실질적으로는자신의권력기반을확장하면서권력의안정을확보하려고하였다. 그러나이런정책이실효를거두기도전에 1895 년 11 월 15 일단발령을실시하여당시명성황후암살을둘러싼민간의개혁정권에대한반감을더욱악화시켰다. 결국 1896 년 2 월 11 일에단행된국왕의아관파천은개혁정권을일거에몰락시키는결정적인계기가되어갑오개혁의권력구조개혁은실패하게되었다.

31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1 절근대화정책 * 2. 제도개혁 2) 지방제도개혁 중앙기구와인사제도의개혁이일단락되자지방제도의개혁이이루어졌다 년 5 월 26 일칙령제 101 호로 8 도제폐지와 23 부제실시를골자로하는지방관제개정이공포되었다.* 즉, 8 도의각감영 ( 監營 ) 및안무영 ( 按撫營 ) 과개성 강화 광주 춘천등각유수부 ( 留守府 ) 를폐지하고전국을 23 부의소지역행정구역으로개편하였다. 종래의부 목 군 현등의불균등한지방구획을폐합하고그대신 23 개신설부아래획일적으로군을두었다. 그리고군수는부 ( 府 ) 관찰사의, 부관찰사는내부대신의지도감독에속하되, 각부 ( 部 ) 의주무 ( 主務 ) 에따라각부대신의지휘감독을받도록하였다. 당시개편된 23 부, 336 군을보면다음과같다. 한성부 (11 군 ), 인천부 (12 군 ), 충주부 (20 군 ), 홍주부 (22 군 ), 공주부 (27 군 ), 전주부 (20 군 ), 남원부 (15 부 ), 나주부 (16 군 ), 제주부 (3 군 ), 진주부 (21 군 ), 동래부 (10 군 ), 대구부 (23 군 ), 안동부 (16 군 ), 강릉부 (9 군 ), 춘천부 (13 군 ), 개성부 (13 군 ), 해주부 (16 군 ), 평양부 (27 군 ), 의주부 (13 군 ), 강계부 (6 군 ), 함흥부 (11 군 ), 갑산부 (2 군 ), 경성부 (10 군 ) 지방각부 군의관제로는한성부에관찰사 1 인, 참사관 ( 參事官 ) 1 인, 주사 ( 主事 ) 약간인을두었다. 한성부에는특히경무청 ( 警務廳 ) 이설치되어있었기때문에경무관이하판임경찰관리 ( 判任警察官吏 ) 를배치하지않았다. 한성부이외의각부에는관찰사 1 인, 참사관 1 인, 주사약간인, 경무관 1 인, 경무관보 1 인, 총순 ( 總巡 ) 2 인이하를두었다. 이같은지방관제개혁으로모든지방관의계층제가확립되어직무상중앙의지휘감독을받게되었다. 또지방의병권과재판권 경찰권등을각기관할기관에서분리관장함으로써지방행정체계가정비되었다. 신설 23 부는단순한지방행정구획의재편이라기보다는지방관의봉건적절대권력을근본적으로타파하여지방관의횡포와부패를막고지방행정체제를중앙에예속시키기위한것이었다는점에서중요한의의가있다.* 1895 년 9 월 5 일에는 각군경비배정 ( 各郡經費配定 ) 에관한건 이반포됨으로써각군의군수이하세무주사, 장교, 이방 ( 吏房 ), 사령 ( 使令 ) 에이르기까지모든지방관료들의급료를명문화하였다. 이러한조치를통해무려 1 만여명의관료층이새로이행정관료층에편입되었다. 이는종래지방자치적세습관리였던향리층이근대적중앙집권국가의관료층으로귀속되었다는것을의미하였다.* 신설 23 부제아래서현재남양주시를포함하고있었던양주 * 는한성부에소속되어있었다. 당시한성부는서울인한성과오늘의경기일부를포함하고있는수도권행정구역으로서부청 ( 府廳 ) 소재지한성을비롯하여양주 광주 적성 포천 영평 가평 연천 고양 파주 교하의 11 개군으로구성되어있었다. 23 부제는외견상으로는획일적이고간편하여상당히합리성을지니고있었던것처럼보이지만소지역주의에입각한과대분할로실제행정운영상에어려움이있었다. 게다가종래의 8 도제를무시한인위적인획정이었기때문에오랜전통과현실사이에마찰이있었다. 이에따라 23 부제지방행정구역은 1 년 2 개월의짧은기간으로폐지되고 1896 년 8 월 6 일 13 도제개편이실시되었다. 이때의 13 도제는종래의 8 도를기반으로경기 강원 황해도를제외한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도를남북으로분할한것이었다. 13 도밑의하부행정구역으로부 목 군을두었는데수도인한성부만은정부직할하에두어도와격을같게하였다. 한성부를제외한일반부 ( 府 ) 는광주 개성 강화 인천등경기도관할하의 4 부와경상남도의동래, 함경남도의덕원, 함경북도의경흥등모두 7 개였다. 목은제주하나였으며군은 23 부제발족당시의 336 개군에서약간의통폐합을거쳐 331 개군으로확정되었다. 따라서 13 도제시행당시정부직할의한성부를제외한전국지방행정구역수는모두 13 도 7 부 1 목 331 군이었다. 이시기양주는경기도소속이었다. 그런데이들부 목 군의구별은지역의중요성과특수성에근거한것이었다. 부 목 군은다시 5 등급으로구분하여이에따라인원 봉급 경비등을달리하였다. 이러한구별은 23 부제하에있어서도인구 토지등의기준에따라운용하여오던것이었다. 다만이때에는그등급구분에서 5 등급을대폭축소하여 86 개군에서단 2 개군으로줄인대신 4 등급을확대하여 109 개군에서 214 개군으로늘인정도가그차이점이었고, 부와목은당연히 1 등급으로취급하였다. 경기도는 38 개구역으로나누어 1 등급에는광주부 개성부 강화부 인천부가속하였고, 2 등급에는수원군이해당되었으며 3 등급에는양주군을비롯해여주군 장단군 통진군이나머지 29 개군은 4 등급이었다.* 관제개편에서는한성부에는판윤 ( 判尹 ), 도에는관찰사, 부에는부사 ( 府使 ), 목에는목사 ( 牧使 ), 군에는군수를두었다. 판윤과관찰사는내부대신 ( 內部大臣 ) 의지휘감독을받아법률명령을집행하고행정사무를총괄하되각부 ( 部 ) 의관계사무는이를각부대신의지휘감독하에수행하도록하였다. 그러므로지방행정은내부소관이되었다. 부사와목사, 군수는관찰사의지휘감독하에법률명령과행정사무를집행 장리 ( 掌理 ) 하도록되어있었으나다만제주목사만은대정 ( 大靜 ) 정의 ( 旌義 ) 두군을관할함에관찰사와동일한권한을갖도록하는예외를두었다.* 1895 년 23 부제와 1896 년 13 도제의두차례에걸친대개편으로종래모든관인들이왕에대하여직접책임을지던평면적인행정조직체제로부터계서제 ( 階序制 ) 에의한책임분담원칙에입각한이른바피라미드형의현대적행정체제로의전환을보게되었다. 특히오늘날의지방행정체계는이 13 도제에서부터그기반이확립되었으므로지방행정구역발전사에서점하는의미는크다고하겠다.*

31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1 절근대화정책 * 2. 제도개혁 3) 사법제도개혁 1894 년시기만하더라도의금사이하재판소는정부에부속하여행정관으로하여금재판을겸무케하였으나 1895 년 3 월법률 1 호로 재판소구성법 을공포하여사법권독립을제도화하였다. 이로부터구한말사법제도는 3 차례개정되었다. 여기서는한말사법제도개혁을사법제도근대화의시발점인 재판소구성법 제정이후, 재판소구성법 전면개정이후, 통감부설치와 재판소구성법 일부개정이후, 신재판소구성법 제정이후, 통감부재판소설치이후등다섯단계로나누어살펴보기로한다.* (1) 재판소구성법 제정이후 ( ) 1895 년 3 월 25 일자법률제 1 호로 재판소구성법 이제정 반포되었다. 이것은종전에정령 ( 政令 ) 등을의안 ( 議案 ) 이라하였던것을법률이라는명칭을써서근대식양식의조문으로표현한최초의입법이었다. 재판은이심제를채택하고이심재판소로고등재판소와순회재판소를두는동시에특별법원을설치하였다. 그러나이같은신식제도에따라실제로개설된것은고등재판소와한성재판소뿐이며순회재판소는한번도개설되지않았다 년 8 월 15 일칙령제 55 호로개항장및지방재판소를폐지하고새로재판소를개설하였다. 법부령제 4 호로새로개설될재판소의위치가정해짐에따라종전의개항장및지방재판소의관할을개정하였는데양주는한성재판소가관할하였다 년 9 월 12 일에는칙령제 37 호와제 38 호로경성내에경기재판소를설치해경기 3 부 34 군에서불복하는상소안건을처리하게하였다. 한성재판소와경기재판소는다른재판소와는달리지방행정부에합설하지않고분리된전임재판소였다. 경기재판소가설치되자양주는여기에속하게되었다. (2) 재판소구성법 전면개정이후 ( ) 1899 년 5 월 30 일법률제 3 호로 개정법 이반포되었다. 이때는재판기관을모두지방행정기관에합설하였고, 판사도지방관으로충당하게하였다. 고등재판소가평리원 ( 平理院 ) 으로개편되어명목상독립되어있었으나재판장이나판사는일반행정관직과교류하였을뿐만아니라일정한중요사건은법부대신의지령에따라처리해야했으므로형식과실질면에서사법의독립은찾아보기어려웠다 년 4 월 29 일법부령제 1 호로이때까지설치하였던재판소의위치를일괄해정하였고, 법부령제 2 호로각재판소의관할관계규정을일괄규정하였다. 이에따라경기재판소는수원에설치되어 3 부 35 군을관할하였으며, 양주도여기에속하였다. (3) 통감부설치와 재판소구성법 일부개정이후 ( ) 1906 년 2 월 1 일서울에통감부를설치한후그해 10 월 26 일자법률제 7 호로 재판소구성법 의일부개정이있었다. 이때는지방재판소를따로설치하지않고각관찰부에권설 ( 權設 ) 하게하였던것을각관찰도로이임하고제주재판소판사는제주군수가겸임하도록하였다. 각개항시장재판소는각항시서 ( 港市署 ) 에겸설 ( 兼設 ) 하고감리가판사를겸임하던것을각부청에겸설하였으며, 부윤이판사를겸임하도록개정하였다 년 10 월 27 일에는법부령제 3 호로재판소의위치와관할구역이개정되었다. 경기재판소는수원에설치되어 3 부 37 군을관할하였는데양주도이에속하였다. 이시기특이한것은이사청 ( 理事廳 ) 의존재였다. 이사청은본래의미의사법기관은아니다. 한국에재류하는일본인의재판사건은재한일본영사관소관이었으나일본영사관이철폐되자그후신으로이사청이설치되었다 년 12 월일본칙령제 267 호에의해이사청관제가정해졌는데그주요내용을보면, 이사청은한국내주요지에두되, 그위치와관할구역은통감이따로정하도록하였고이사관은통감의지휘감독을받아종래재한일본영사에속해있던사무기타를관장하게하였다. 한편이사청에서재한일본인들에게한재판의제 2 심을관장하던기관으로서통감부법무원 ( 統監府法務院 ) 이있었다. 법무원은통감의관리하에한국에서의사법사무를관장하였다. (4) 신재판소구성법 제정이후 ( ) 1906 년 2 월통감부가설치되면서재판제도에도일본의영향이미쳐 1907 년 12 월 23 일자법률제 8 호로종전의 재판소구성법 과한성재판소관제등을전면폐지하면서 신재판소구성법 을제정반포하는동시에같은날짜법률제 9 호로시행법도반포하였다. 이에의해재판에서 3 심제도가채택되어구 ( 區 ) 재판소 지방재판소 공소원 ( 控訴院 ) 대심원 ( 大審院 ) 등의재판소를두었다. 우리나라는이때부터 3 심제도가채택되어지금까지시행되고있다. 양주에는구재판소를설치하여양주와고양을관할하도록계획되었다. 전국적으로구재판소는 112 개소가설치될예정이었으나 1908 년 8 월 1 일자로개청된 16 개를제외하고 96 개가미개청상태로남아있었다. 이후 96 개미개청재판소중에서 38 개만개청되고, 나머지는개청되지못한채규정상으로만설치예정되었을뿐이었다. 양주구재판소도미개청된구재판소중의하나였다. (5) 통감부재판소설치이후 ( ) 1909 년 7 월 12 일대한제국정부는한국의사법과감옥사무를일본정부에위탁하는약정서를체결함으로써일본에사법권을넘겨주게되었고,* 이는통감부고시제 66 호로고시되었다. 이로써대한제국의각종사법기관과감옥은 1909 년 10 월 31 일을기해모두폐지되고, 사법및감옥사무에관한일본국칙령, 통감부령, 통감부고시등이쏟아져나왔다. 대한제국은이를 1909 년 11 월 1 일내각고시 ( 內閣告示 ) 제 34 호로반포하였고, 이로써통감부재판소가설치되었다. 통감부재판소설치로대한제국내각의법부에속해서그지휘감독을받아오던각급재판소는통감부의지휘감독을받게되었다. 종전의대심원은고등법원으로개칭되었으며, 원장은고등법원의행정사무를지휘감독할뿐하급법원에대해서는권한이없었고전국의행정상지휘감독권은통감이직접행사하였다. 이시기특이한것은한국인출신판검사의재판권행사를제한하였다는것이다. 한국인출신판검사는민사에서는원 피고가모두한국인인경우, 형사에서는피고인이한국인인경우에만재판할수있고, 일본인에대해서는일본인판사만이재판할수있게하였다 년 10 월 21 일자통감부령제 28 호로통감부재판소가설치되면서 * 관할구역도정해졌다. 양주의경우구재판소가설치되었으며, 양주와함께고양 영평 포천 가평지역을관할하였다.

31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2 절지주제와근대적토지소유 * 제 2 절지주제와근대적토지소유 * 1. 근대변혁기의양전 지계사업과지주제강화 19 세기후반, 특히개항이후부터는조선사회내부에서도근대로의변혁움직임이다양하게전개되었다. 조선후기이래의사회적모순을진단하고그것을극복하기위한방법으로척사위정 ( 斥邪衛正 ) 의논리를토대로봉건적질서를재확립하고자했던보수우파적지식인들에서부터급진적근대개혁을선호했던개화지식인의보수좌파적논리에이르기까지다양한스팩트럼을형성하고있었다. 그러나모두지배층의입장에서현실의기득권을유지하고자했던보수적논리였을뿐아직자본주의적체제구상에까지는나아가지못하였다. 이처럼여러가지한계성을분명히지니고있었지만농민적토지소유를중심으로하여봉건적지배질서를타파하고자했던아래로부터의혁명적변혁논리는뚜렷하게존재하고있었다. 그러나구한말에반봉건 반외세의기치를내건아래로부터의거대한변혁운동이었던 1894 년갑오농민전쟁이압살되면서근대로의이행은지배층의보수적논리를토대로추진될수밖에없었다. 즉, 농민전쟁에의해추동되었으면서도기본적으로개화파정권에의해서추진된갑오개혁과아관파천이후대한제국정부의주체적입장이강조되었던광무개혁 ( 光武改革 ) 은모두지주적개혁방향을취하였다. 갑오개화파정부는근대적개혁을추진해가는가운데국가재정의강화와농민경제의안정을도모하는차원에서국가의토지를파악하기위한양전 ( 量田 ) 을계획하고 1895 년봄부터시행하고자하였다. 농민전쟁을수습하고삼정문란을이정하여근대적조세제도를확립하기위해서는토지의소재와면적그리고소유자를확인해야했는데이때의양전사업은토지조사와아울러실소유자에게소유권증서를발행하는것까지구상한것이었다 ( 박영효 유길준 ). 결국근대법적토대위에서지주제를재정비하기위하여계획된양전사업은일부지역에서농민전쟁이 1895 년까지지속되고그해하반기에는을미사변으로의병운동이광범위하게일어나는상황속에서실시되지못했다. 근대로의이행기에조선정부에의한마지막양전은광무연간에이르러서야착수되었다. 청일전쟁이후일본의지나친내정간섭을크게우려한고종은 1896 년 ( 건양 1) 2 월에아관파천을단행하여친일각료를제거한후 1 년만에환궁하여대한제국을수립하고국왕중심의관료군으로신정권을구성, 구본신참 ( 舊本新參 ) 의기치아래주체적으로개혁을추진하였다. 이른바광무개혁가운데서도양전은핵심적인사업이었다. 광무양전 ( 光武量田 ) 은 1898 년 ( 광무 2) 7 월에양전의공정성을위해양지아문 ( 量地衙門 ) 이독립관청으로설치되고직원및조사원들의처우규정등이마련되면서이듬해여름부터실시되었다. 양전사업은구 ( 舊 ) 를본 ( 本 ) 으로하고신 ( 新 ) 을참작한다는신 구절충의방침에따라기왕의토지소유권을근대적인법제로제도화하는것으로귀결되었다.* 즉, 이전의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그대로인정한위에서제규례를구법전에서끌어오고서양의신기술을도입하여진행했던것이다. 여기서토지파악의기준은결부법 ( 結負法 ) 과전품육등제 ( 田品六等制 ) 였지만전답의도형 ( 圖形 ) 을양안에그려넣고, 면적을척수 ( 尺數 ) 로표시한후등급에따라결부를산출하거나두락 ( 斗落 ) 일경 ( 日耕 ) 을기입하는등전답의형상과절대면적을파악하기위해많은노력을기울였다. 또한시주 ( 時主 ) 와시작 ( 時作 ) 을함께기입했을뿐만아니라지역에따라서는결호 ( 結戶 ) 까지조사하여기재하였고, 경지이외에가옥의규모와소유관계를기입함으로써부동산의소유권에관한문제와함께결세부담관계까지조사하였다. 이처럼토지에관한일체의사항을파악하고자한것은종래의양전과다른점이라고할수있다.* 1901 년의흉년으로그해 12 월에는양전을당분간정지하였다. 이때까지양전이이루어진곳은경기 15 군을비롯하여충북 17 군, 충남 22 군, 전북 14 군, 전남 16 군, 경북 27 군, 경남 10 군, 황해 3 군으로서모두 124 군에이르렀다. 한편양전이후에매매등을통한토지소유권의변동을보장하기위해서는별도로지계 ( 地契 ) 를발행해야했으므로같은해 11 월에지계아문을설치하고지계발행의몇가지원칙을마련하였다. 지계발행대상은농지뿐만아니라산림 가옥으로까지확대하였으며, 외국인은규정된지역외에서산림 토지 전답 가사를소유할수없도록하였다. 양전과지계발행은토지소유권자를파악하고그권리의변동사항까지국가가공증해준다는의미에서밀접한관련을가진동일선상의작업이었다 년 3 월에는그동안양전을중단하고있던양지아문을지계아문에통합하고지계아문의기구를확대하여양전및지계발행사업을함께담당하도록하였다. 그러나 1904 년 2 월러일전쟁발발을전후하여구한국에서유일한외세로서존립하게된일제는조선을반식민지화하는과정에서지계아문을혁파하고, 명목상그사업을탁지부 ( 度支部 ) 양지국 ( 量地局 ) 으로편입시켰으나결국양전지계사업은중단되고말았다.* 지계아문에서는경기 5 군, 충남 16 군, 전북 12 군, 경북 14 군, 경남 21 군, 강원 26 군을양전하여총 94 군을추가하였다. 양주군도지계아문에서양전을실시한것으로파악되고있다.* 양지아문에서시행한지역과합하면총 218 군으로전국의 2/3 정도를양전한것에그쳤으며지계발급도지계아문에서양전을실시한강원도및충남일부지역에서만실시되었다. 18 세기초삼남지역을중심으로한경자양전 ( 庚子量田 ) 이후 180 년만에실시된전국적양전은결국완료되지못한채중단되고말았다. 광무연간의양전 지계사업은지배층의입장에서한말의토지제도와농촌경제가지니고있던모순과폐단을제거하고농민경제와국가재정을안정시키기위한것이었다. 그러나구본신참의원칙하에서추진된양전 지계사업은근본적인개혁이될수없었다. 이전의토지소유자에게근대적법제로서그소유권을그대로추인해줌으로써봉건제하에서의지주층의토지소유와지주 전호관계를존속시켰을뿐만아니라오히려배타적소유권제도를바탕으로지주제를더욱강화하는결과를초래하였다. 그리고이후일제에의한조선토지조사사업의결과로창출되는식민지지주제에의해더한층왜곡되고말았다. 양주군의광무양안이남아있지않기때문에당시농민층의소유분해및경영분해를직접파악할수는없으나타지역사례를통해개략적인이해는가능하다. 우선경기도중에서도양주군의인근지역인광주군 ( 廣州郡 ) 초부면 ( 草阜面 ) 한부락의경우 31 명의부락민가운데부농과중농은각각 2 명으로전부락민의 6.5% 씩을차지하며, 소농은 3 명으로 9.6%, 빈농은 11 명으로 35.5%, 무전 ( 無田 ) 농민은 13 명으로 41.9% 를이루고있다. 이들이소유하고있는토지는각각부농이전농지 (6 결 54 부 6 속 ) 의 40.5%, 중농이 26.4%, 소농이 16.9%, 빈농이 16.2% 였다. 무전농민을제외한농민의평균소유규모는 36 부 4 속이었지만, 소수 (13%) 의부농 중농층이전농지의 66.9% 인 4 결 37 부 6 속을소유하고있어농민층의극심한분화현상을보여주고있다. 수원군 ( 水原郡 ) 토진면 ( 土津面 ) 의경우도비슷한현상을보인다. 중농이상은 34 명가운데 4 명으로서 11.8% 인데이들이소유한토지는전농지의 74.6% 이고, 23 명 (67.6%) 의소농과빈농은 25.4% 의토지를소유하고있을뿐이며무전농민도 20.6% 에달하고있다.

314 이러한농민층의분화는소작관계자들의토지차경에서도일어나고있었다. 광주지역에서는소작관계자가 26 명으로전부락민의 84% 인데, 토지차경에서순소작농보다우세한위치에있던자소작농의경우전체 13 명가운데 1 명이 54 부 2 속을차경하고나머지 12 명이총 1 결 4 부 7 속의시작지 ( 時作地 ) 를보유하여평균 8 부 7 속을차경하고있었다. 순소작농의경우는 13 명이 33 부 8 속의시작지를보유하여평균 2 부 6 속을차경하고있을뿐이었다. 수원지역에서는전부락농민의 85.3% 인 29 명이소작에관계하고있었는데, 22 명으로구성된자소작농의경우총시작보유지 6 결 25 부 2 속중에 50 부이상을차경하는농민은 5 명 (22.8%) 이었으며이들이차경하는전답은 3 결 77 부 6 속으로전체의 60.4% 를차지하고있었다. 50 부미만을차경하는 17 명 (77.2%) 은 2 결 65 부 6 속 (39.6%) 을차경하였으며특히 25 부미만을차경하는 14 명 (63.6%) 의평균차경은 9 부 6 속에불과했다. 순소작농 (7 명 ) 의경우는더욱열악하여소작농으로서의기준적보유농지인 50 부이상을차경하는자는 1 명에불과하고 71.4% 를점하는 5 명은평균 3 부 4 속을차경하고있을뿐이었다.* 한편충청남도온양군 ( 溫陽郡 ) 일북면 ( 一北面 ) 의경우, 광무양안상의농민 990 명가운데토지소유자는 569 명 (57.5%), 비소유자는 421 명 (42.5%) 이다. 이곳역시소유분화가극심해서 5 정보이상의토지소유자 23 명 (4.0%) 이전체경작지의 39.3%( 정보 ) 를소유하고있는반면, 0.5 정보이하의소유자 349 명 (61.3%) 은전경지의 15.1%(78.22 정보 ) 만을차지하고있을뿐이다. 경영분화역시소유분화만큼은아니지만심한상태였다. 전체농민가운데경작농민은 751 명 (75.9%) 이며비경작농민은 239 명 (24.1%) 인것으로나타났다. 경작면적의분포를보면, 3 정보이상의경작농민 11 명 (1.4%) 이전경지의 9.0%(46.61 정보 ) 를경작하고있으며, 0.5 정보이하를경작하는영세농 389 명 (52.9%) 은 18.5%(95.65 정보 ) 를경작하고있을뿐이다. 그리고 정보의경작농민은 184 명 (24.5%) 이며, 정보의경작농민은 158 명 (21.0%) 이다. 그리고농민의계급구성을보면빈농이 67.2%, 소농혹은중농이 22.6%, 부농이 7.9% 였으며 5 정보이상을소유하는지주가 2.3% 로서전체적으로빈농중심의계급구조였지만부농의대부분이자작상농이거나자소작상농인점으로보아전형적인부농의존재를확인할수있다.*

31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2 절지주제와근대적토지소유 * 제 2 절지주제와근대적토지소유 * 2. 역둔토조사와지주제변동 1) 갑오개혁기의역둔토조사 (1) 을미사판 ( 乙未査辦 ) 의성격 갑오개화파정부의역둔토조사에대한구체적인논의는별도로심도있게전개된것같지않지만군국기무처는여러개혁안건을처리하는가운데토지문제에대해서도분명한방향성을가지고처리하였다. 즉, 궁방전 ( 宮房田 ) 관둔전 ( 官屯田 ) 역토 ( 驛土 ) 에관하여, 1894 년 6 월에우선각궁 사 영으로하여금도장 ( 導掌 ), 전답 ( 田畓 ), 제언 ( 堤堰 ), 시장 ( 柴場 ), 수세에관한내용을조사 보고하게하였다.* 이어서 8 월의의안 ( 議案 ) 에서는 각궁에서소유하고있는토지에서곡식을수확하는따위의문제는종전대로각궁에서관리하게하되, 지세는새규정에따라내도록하고, 만약각역에서종전처럼결세를적게내거나각둔토에서도조만내고호조에납부하는결세가면제된것들이있으면모두새로운규정에따라작인 ( 作人 ) 과마호 ( 馬戶 ) 로부터징수케할것이다. * 라고하였다. 곧각궁이이미소유하고있는토지에대해서는종전대로지주경영을하도록법적으로확인해주고있는데,* 그것은면세지를승총 ( 陞總 ) 하여신식 ( 新式 ) 에 * 따라탁지아문에출세 ( 出稅 ) 토록조처하는과정에서이루어지고있었다. 조선후기면세지는유토 ( 有土 ) 와무토 ( 無土 ) 로구성되어있었다. 소유권의귀속이라는면에서보면유토는해당궁방 아문등의소유지였고,* 무토는그소유권이민에게있는민유지 ( 民有地 ) 였으나다만결세를호조 ( 탁지부 ) 에납부하는것이아니라해당궁 아문기타기관에납부하는토지로서, 갑오년의면세지승총에따라무토는역과둔에대한의무로부터해방되어사유지로확인되게되었다.* 그러나작인과마호, 곧경작자로하여금출세토록한것은유토에서는지주경영의강화를의미하는것으로, 경작농민은일토양세 ( 一土兩稅 ) 의부담을, 자경무세지 ( 自耕無稅地 ) 였던역토 ( 유토 ) 에서의마호는자작농의처지에서완전한소작농으로전락하게되었다. 그리고무토에서는무토가사유지로구분되었으나국가는출세자에게소유권을인정해주는조치를취하지않아소유권분쟁의소지를남겨놓게되었다. 사적지주제가재확인되기위해서는근대적인조세제도의확립뿐만아니라토지의소재도확인해야했다. 이에 1894 년 12 월에김홍집 박영효 ( 朴泳孝 ) 어윤중 ( 魚允中 ) 등이연명으로전국적규모의양전사업을요청했으나 * 즉각실시되지는못하였다. 한편개화파정권은 1895 년봄에지방제도를개편하고 * 이어재정제도의개혁을진행하면서종래전국각지에산재하여지방재정의자원으로기능했던국관유지 ( 國官有地 ) 를중앙정부에서직접파악하기시작했다. 그것은우선농상공부에의한역토조사로나타났다. 갑오개혁에서역둔토를비롯한토지문제는개혁의전반적인성격과함께구래의지주제를법적으로재확인하면서강화되는것으로귀결되었다 년하반기부터이듬해에걸쳐근대적관료제및재정제도의개혁차원에서우선적으로실시된농상공부의역토조사는정부의단일한중앙기관에의해서전국의역토를통일적으로파악한최초의국유지조사였다. 이른바을미사판은갑오개혁의방향과아울러기본적으로지주적조사의성격을지닌것으로서, 사판규례 ( 査辦規例 )* 및실제조사과정을통해서나타난특징들은다음의몇가지로구체화된다. 우선조사방법에서그것은기본적으로문부조사 ( 文簿調査 ) 였다. 농상공부는역제도 ( 驛制度 ) 의폐지와더불어이속받은전국의역토를조사하기위해제주부를제외한 22 개부에 33 명의사판위원 ( 査辦委員 ) 을파견하였다.* 위원들은각관찰부에도착하여공문을교부한후역참 ( 驛站 ) 을주행하며조사에임하였으며, 역토에대해서는군양안 ( 郡量案 ) 과역양안을상준하고마위전 ( 馬位田 ) 을중심으로답험한후조사성책 ( 調査成冊 ) 을완성하였다. 다만양안이유실된경우는호수 ( 戶首 ) 등이지니고있던추수기 ( 秋收記 ) 를참고하기도하였다. 그러나결국에는실지를답험척량 ( 踏驗尺量 ) 하였으며, 이러한경우보통 1 역참을조사하는데소요되는 4 5 일의 2 배에가까운시일이소요되기도하였다. 그리고조사내용은각군의지방관과협의하여타정하도록함으로써조사의효율성과객관성을유지하고자하였다. 다음으로는토지조사와함께소유권귀속문제에관한농상공부의입장과조처에서그특징을살펴볼수있다. 규례에나타난조사대상의토지는소유권이역에있었던유토역토인마위전뿐만아니라민결 ( 民結 ) 을역에획급하여각자수세 ( 各自收稅 ) 로운영되던공수위전 ( 公須位田 ) 장전 ( 長田 ) 급주전 ( 急走田 ) 등의무토 ( 민유지 ) 까지포함시켜, 이들무토에대해서도결수와함께도세 ( 賭稅 ) 책정의기준이되는절대면적, 곧두락과일경수를동일하게파악하도록하였다. 그리고이러한규정에따라실제사판과정에서위원들은토지구성상의유 무토를구분하지않고또한공유지 ( 共有地 ) 성격의보급전답 ( 補給田畓 ) 등을포함하여역과관련된일체의토지를사판정도 ( 査辦定賭 ) 하였는데이과정에서분쟁이발생하였다. 이청 ( 吏廳 ) 등의공유지라고하더라도역의문부 ( 驛案 ) 에실려있어일단역토로조사되면매매문기 ( 賣買文記 ) 등의증빙문적 ( 文蹟 ) 이없는한환급되기어려웠다. 그러나농상공부의역토조사에서는탁지부에문의과정을거쳐무토를민전으로인정하는조치를취하고있는데, 이러한점에있어서는이후국가적지주제가발달한시기의군부 ( 軍部 ) 내장원 ( 內藏院 ) 의조사가배타적이고독단적으로이루어진것과는달리상대적인객관성을보여주고있었다. 마지막으로지주에의한자체의토지조사에서는지대 ( 地代 ) 로서의도세의책정과그것을납부할작인의선정이중요한조사내용을이루었다. 역토조사에서는도전 ( 賭錢 ) 으로작정하되 100 두락을단위로답 ( 畓 ) 은 냥, 전 ( 田 ) 은 냥으로도액 ( 賭額 ) 을정하고, 상 중 하 3 등급으로구분된토품 ( 土品 ) 에따라가감균배 ( 加減均排 ) 하되마름 ( 舍音 ) 및동두민 ( 洞頭民 ) 과작인이공의 ( 公議 ) 하여결정하도록하였다. 100 두락단위로원도액 ( 原賭額 ) 을정해둔것은필지별도전을일일이심사하여책정하는번거러움을피하고자한것이었으나기본적으로는도세제운영의총액제적인성격을반영한것이었다. 그러나현지의사판정도과정에서는원정도액보다도토지품등을우선하여규례의두락당정액보다낮추어현실적으로정도하기도하였으며, 결복 ( 結卜 ) 의집총에서도마찬가지였다. 이러한현실적인배결집복 ( 排結執卜 ) 과정도 ( 定賭 ) 는척박한역전답에작인을선정하여경작케함으로써휴경으로인한토지자체의진폐 ( 陳廢 ) 를막기위한것으로합리적인측면을보여주고있다. 요컨대조사를위한별도의독립된기구가설치되지않은채농상공부가자체소관의토지를조사한역토사판은기본적으로지주에의한사장 ( 私庄 ) 조사였으나, 조사의공적인특징들과더불어전체적인측면에서는지주적조사의초기적인성격을나타내고있다. (2) 양주군의역둔토조사 한성부관하 11 개군의역토사판위원으로장제영 ( 張濟英 ) 이임명되었으나실제로그의책임하에역토조사가실시된지역은양주군을비롯한역이설치되어있던 7 개군이었다. 특히양주군은연서역 ( 延曙驛 )

316 쌍수역 ( 雙樹驛 ) 녹양역 ( 綠楊驛 ) 평구역 ( 平邱驛 ) 구곡역 ( 仇谷驛 ) 을포함한 6 개역으로구성되어다른군에비해역자체의수가많았기때문에역전답의규모도컸다.* 농상공부에서는 1895 년 9 월하순에사판위원을임명, 파견하면서각부관찰사에게사판규례를첨부한훈령을발하여 * 위원이도착하면각군수로하여금규례에준하여협의타정 ( 妥定 ) 하게하고군의이속중에서토지문제에밝은 1 인을정하여사판사무를담당하게하며사판을완료한문부는농상공부로올려보내는것외에본군에도 1 건을비치하여수도 ( 收賭 ) 업무에참고하도록하였다. 양주군에는한성부사판위원으로임명된장제영이파견되어당시군수임원호 ( 任原鎬 ) 와협의하여조사를진행하였는데실무는이속들의협조로이루어졌으나역토의조사및사판문부작성등의업무는사판위원의서사 ( 書寫 ) 로서처음부터위원과함께일을한공규복 ( 孔圭復 ) 이담당하였다.* 양주군소재충훈부둔토성책 (1896 년 ) 임명된사판위원들은대체로 10 월중 하순경에각관찰부에도착하여늦어도 11 월초부터는각군에소재한농상공부소관의역토조사에착수하였다.* 사판위원이양주군에도착한일자는확실히알수없으나 1895 년 12 월에는녹양역토를답험하였다. 특히전답품등을답험할때에는군의이속과동두민, 마호등과함께명확하게협의하여타정하였으며이듬해정월에는작인들을새로선정하여균일하게경작지를분배하였다 년 3 월말경에는연서역전답의조사가완료되었으며, 4 월초에는평구역토를사판하고, 6 월초순에이르러쌍수 구곡역등을포함한양주군관하각역의역토사판이거의마무리되었다. 문부정리까지완료된쌍수역및연서역의경우는답험성책이농상공부로상납되고있다.* 평구 구곡역등답험이끝났으나사소하게누락된것이있거나녹양역의경우처럼마름차정 ( 差定 ) 과작인선정문제로오랫동안분쟁이지속되었던곳도 1896 년 9 월중순이되어서는장부를마감정리하여각역별로성책 1 건씩을상송하고, 사판위원의신장 ( 信章 ) 까지농상공부에반납함으로써양주군을비롯한한성부관하각군의역토사판을종료하였다.* 그러나이후에도사판위원은일정기간현지에머물면서사판시에누락된전답을추후사집하거나가록 ( 加錄 ) 첨록 ( 添錄 ) 등의오기재 ( 誤記載 ) 로문제가있을때이를교정하는작업을계속하였다.* 양주지역의경우당시역토사판문부 ( 驛土査辦文簿 ) 가남아있지않아역토의전체적규모 ( 두락 일경수 ) 와필지별작인, 토지의등급에따른결수의산정과도전의책정, 그리고도세의수봉상납을비롯한역토경영을관장할마름의선정등에관한내용을구체적으로살펴볼수없으나 * 이지역에서도사판규례에의거하여답험하고현실의역전답실태를토대로수성책 ( 修成冊 ) 하였던것으로추정된다. 양주군소재 6 역토는구총결 ( 舊總結 ) 이 780 결 6 부였으나갑오경장때에군에서 492 결 70 부를 토지는없으면서결복만있는 ( 無土有卜 ) 것 으로인정하여탈탈 ( 헇減 ) 하고여결 ( 餘結 ) 287 결 36 부를 7 역의전답에배결 ( 排結 ) 하는것이기는하였지만, 양주군은당시역토사판에서신기 ( 新起 ) 전답과사득 ( 査得 ) 전답을많이파악하였기때문에무리없이배결할수있었다. 이는연천군 ( 漣川郡 ) 옥계역 ( 玉溪驛 ) 과적성군 ( 積城郡 ) 상수 ( 湘水 ) 단조역 ( 丹棗驛 ) 과파주군 ( 坡州郡 ) 마산역 ( 馬山驛 ) 등의토품이타지역에비해열박 ( 劣薄 ) 할뿐만아니라승총결이매우많아배결에어려움이있었던것과는다른데, 이때에도사판위원은각역토를일일이답험하여승총결을해당전답에수량대로모두분배하면답결은매두락에 10 여부, 전은매일경에 20 부가되어이와같이배결하고또도전을추가하면작인이경작을꺼려마침내막중한공토 ( 公土 ) 가진폐될것을우려하여다른역의예에의거하여결복과도전을토품의우열을따라공평히배정하였다.* 결국역전답의결복집총도 3 등급으로나누어상등답 1 두락은 3 부정도로, 상등전 1 일경은 7 10 부를배정하고중 하등전답에차등을두어배결함에따라위의 4 역에서실제로부족한허결 ( 虛結 ) 이도합 142 결 8 부 1 속이나되었지만이는양주군에서도현실을토대로한합리적인조사가이루어졌음을보여주는것이라고할수있다. 즉, 이지역에서도이후내장원에의한광무사검과는다른농상공부에의한을미 병신연간의역토조사의특성을살펴볼수있다고하겠다. 한편사판위원을파견하여농상공부소관역토를조사하는과정에서 1896 년 2 월부터는조사대상토지를역토에한정하지않고전역둔토로확대하였다.* 즉, 역토외에궁내부및탁지부소관둔전답과기타중앙각부와관련된둔전답, 각군의관둔전, 구영진소속의둔전등일체의국관유지를농상공부역토사판위원으로하여금역전답사판규례에의거하여조사하고정도하도록하였으며마름을신립 ( 新立 ) 하게하였다. 물론목둔토 ( 牧屯土 ) 를중심으로한궁내부소속의전답은마름과작인을사판위원이임의로바꾸지말도록하여면적 ( 結數斗數 ) 및수확량을중심으로조사한도세를새로책정하는것이었으며, 또한사판위원의역토사판이완료된지역의경우는해당군에서전임처판 ( 專任處辦 ) 케함으로써지방관의책임하에일반행정기구를이용한조사이기도하였다. 이와같이각둔토를일체조사하여일정한규정에따라지대를도전으로책정하고, 마름으로하여금수봉하게하여역토의도전과함께일반행정기구를통해상납하도록한것은전역둔토관리방식의단일화를추구한것으로이후국가에의한국유지의통일적인관리에접근해간것이었다. 양주군소재둔토의경우한성부사판위원의명의로 1896 년 8 월에작성된 양주군소재충훈부둔토성책 ( 楊州郡所在忠勳府屯土成冊 ) 이 * 남아있어당시충훈부둔토의규모와문부의양식을통해조사내용의일단을살펴볼수있다. 접동면 ( 接洞面 ) 장승리 ( 長承里 : 현진접읍장현리 ) 와백석면 ( 白石面 ) 능내리 ( 陵內里 ) 등지에주로소재한충훈부둔토는총 51 필지로답 15 필지의합이 2 석 3 두 5 승락이고, 전은 36 필지의합이 16 일 7 식반반경이고가대 ( 家垈 ) 2 좌 ( 座 ) 가포함되어있다. 기재양식은우선소재지역을면 동별로기록하고, 전답의품등을상중하로구분하였다. 면적은두락과일식경으로기재하였는데, 논은야미수 ( 夜味數 ) 를조사하였고구작인과신작인의성명을기록하여함께파악하였다. 그러나필지별도전과배결된결복은물론이고그총합도파악되어있지않다. 따라서이문부는전답과작인의성명성책으로서둔토를답험하여소재 면적 토품을파악하고작인을새로세우는조사의 1 차적단계의결과물이며, 이후전답품등에따른도전의책정과결복의배정은사판의 2 차적과정이었다. 필지별신구작인이교체된경우는거의없었는데객사촌 ( 客舍村 ) 3 두락의고순길 ( 高順吉 ) 이함백운 ( 咸伯云 ) 으로바뀐것이유일하다. 둔토의경우는역제도의폐지에따른전면적인역토조사에서작인을전혀새롭게선정한것과는달랐다. 양주지역의역토사판과정에서크게문제되었던사건으로는다음의 2 가지경우를들수있다. 하나는역마가폐지되고 ( ) 역이폐지됨에 ( ) 따라역역 ( 驛役 ) 으로부터해방되었지만아울러역전답을농상공부가새로조사하여작인과마름을새로선정하는과정에서전혀기득권이없어진구역속 ( 舊驛屬 ) 들을기만하여토색 ( 討索 ) 한사건이다. 양주군소재평구역의이방과경주인 ( 京主人 : 吳聖元 ) 은 1896 년 1 월경에영평군 ( 永平郡 ) 양문역 ( 梁文驛 ) 을비롯한각역참을몰래내왕하면서역을갱설복구 ( 更設復舊 ) 한다고칭하면서수천냥을토색하였다.* 특히

317 양문역에서는찰방의관황 ( 官況 ) 과 1 년공용마세 ( 公用馬貰 ) 라칭하고마호수 ( 馬戶首 ) 들에게 800 냥씩거두어 3000 여냥을토색하였으며, 포천군 ( 抱川郡 ) 안기역 ( 安寄驛 ) 에서 1055 냥, 양주군구곡역에서는마위답 ( 馬位畓 ) 이 3 석 18 두 5 승락일뿐인데도 1235 냥을토색하였다. 이외에도가평군 ( 加平郡 ) 의연동역 ( 連洞驛 ) 에서 100 냥, 감천역 ( 甘泉驛 ) 에서는마호수 3 명에게서 1122 냥을토색해감에따라마호들이파산하여흩어질지경에이르게되었다. 각지의마호들이협잡배들의요구가무리한것임에도불구하고역을복구한다는말에기만당하여쉽게응할수있었다는사실은기왕에역마를기르면서마위전답을자경무세 ( 自耕無稅 ) 하면서자작농의위치에있었던그들이당시의역토사판과정에서소작농혹은경작권마저도부여받지못한채토지로부터유리될처지로전락함에따른위기의식이매우컸음을보여주는것이라고하겠다. 따라서전 ( 前 ) 마호수들은역토사판시에선정된마름을교체하여자신들을마름으로차정해주도록공식적으로요구하였다. 경기관찰부에서도이들을그대로마름으로정하여생계를유지하도록하고또다른한편으로공역 ( 公役 ) 을시킬수있다는점에서이문제를농상공부에질품 ( 質稟 ) 하기도하였다. 그러나농상공부에서는 역전답을사판할시에마름과작인은공의를따라택정하였고수도업무를잘수행하고있는한무고하게마름을교체할수없고, 전역마호수들은이미역이삭제되었으니기료 ( 其料 ) 도없는것이거늘농업과상업에종사하여생계를유지할생각은하지않고군과부 ( 部 ) 에원통함을호소하는것만일삼으니불쌍히여길수는있으나일을해결하는것과는거리가멀다. 역토마름이맡은신역 ( 身役 ) 은작인들을권면하여부지런히작업하게하고도전을파악하여거두어상납하는일일뿐인즉공역을시킬수있다는것은이미논할수없는일이다. 라고하여거부하였다.* 또한구역속들은역토복구설 ( 驛土復舊說 ) 로작인들을선동하여도세를거납 ( 拒納 ) 하도록하였으며마름의수도업무를방해하거나, 더나아가서는각참의역민들이취당 ( 聚黨 : 成群作黨 ) 하여봉기를도모하기도하였다.* 둘째로는녹양역토의작인및마름선정을둘러싼사판위원과군수및장민 ( 狀民 ) 과의갈등을들수있다.* 위에서살펴본대로사판위원은 1895 년 12 월에녹양역토를답험하고이듬해 1 월에작인을선정하여역토를분배하였다. 이과정에서사판위원은구역속을포함하여녹양역동에거주하면서역토와관련이있는기왕의역민들뿐만아니라인근입석리 ( 立石里 ) 에거주하는일반민들에게도사판규례의허민경작 ( 許民耕作 ) 규정에의거하여균일하게역전답을분배하여경작하게하였다. 이에불만을가진녹양역동의대소민인 ( 大小民人 ) 이 1896 년 4 월초에농상공부에등소 ( 等訴 ) 하여잉구경작 ( 仍舊耕作 ) 하게하라는제지 ( 題旨 ) 를받아내면서사건이시작되었다. 양주군에서는농상공부의훈령에따라그역의분작기 ( 分作記 ) 를토대로두지역작인들을초치 ( 招致 ) 하여조사하게하였는데, 임농탈경 ( 臨農奪耕 ) 을당한역민들의호소를이해할수있으나사판위원의역토분작이불공평한것은아니라고보고하였다. 그러나이과정에서사판위원이이전에역과관련이없고신실한사람이라고판단하여추천한박치소 ( 朴稚紹 ) 가녹양역토마름에서배제되고대신녹양리민인들이추천하고군수가농상공부에거론한일반민이효중 ( 李孝仲 ) 과역민윤학종 ( 尹學鍾 ) 이차정되면서문제가확대되었다. 양자중전자는녹양역동에거주하는양반세력을대변하고, 후자는이전마호수로서역민세력을대표하면서사판시새로선정된작인들이분급받은토지를강제로빼앗아이작 ( 移作 ) 시키는등작폐를일삼았다. 마름이효중의숙부이신여 ( 李信汝 ) 와이철승 ( 李徹承 ) 등은초기의등소과정에서부터주도적역할을한대표적양반이었다. 특히이철승과이신여의아들이면용 ( 李冕容 ) 은작폐가더욱심하였다. 이들은지난 1 월사판위원에의한역전답분작도불균하다고하였을뿐만아니라농상공부령에의거하여 5 월중순경양주군수와함께재조정한분작내용도무시하면서늑탈 ( 勒奪 ) 하였다. 이철승은자신이특별히분급받은 1 석락 ( 石落 ) 을타인에게주어병작하게하였으며녹양역동에거주하는최두승 ( 崔斗承 ) 의분급답 ( 分給畓 ) 10 두락은늑탈하여김영산 ( 金永山 ) 에게분급조외 ( 分給條外 ) 로남급 ( 濫給 ) 하였다. 특히이면용은인근지역입석리에거주하는신작인들의토지곧양동악 ( 梁東岳 ) 의분급답 6 두락, 황몽술 ( 黃蒙述 ) 의 3 두락, 장수돌 ( 張壽乭 ) 의 3 두락, 장치극 ( 張致克 ) 의전반일경을탈거 ( 奪去 ) 하였다. 마름윤학종은소곡 ( 小谷 ) 에거주하는박치소의분급답 3 두락을탈경하였을뿐만아니라역답 4 두락을사사로이팔아버리기도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는각처의역토문부를마감 ( 磨勘 ) 정리 ( 整理 ) 하기어렵다고판단한사판위원장제영은농상공부에사의를표명하기도하였다. 결국 6 월중순에와서야위의탈경 ( 奪耕 ) 사실에대한조사와원작인으로의환급조치가이루어지고, 7 월에는군수와동의하여마름이효중과윤학종을태거 ( 汰去 ) 하고녹양역토마름에박치소를비롯한 6 명을다시차정하여각각 10 여석락씩을관할하도록함으로써마무리되었다. 녹양역토는답험뿐만아니라문부정리도일찍이루어졌지만저간의이러한사정으로인하여역토문부가여러차례개정되다가결국이사건이마무리되면서마감 정리되어 9 월에한성부사판위원관할각군의역토성책과함께상송되었다. 요컨대녹양역토사건은역토사판으로역토의분작에서소외된녹양역동의역민들뿐만아니라양반지주들까지합세하여농상공부에의한새로운역토경영하에서지역적 신분적기득권을지속시키기위해일어난사건이었다. 이들은지방관을통해녹양역동의유력자로하여금마름을득차 ( 得差 ) 하게하고인근입석리신작인의분급답을늑탈하면서결과적으로규례에따른역토조사를방해했던것이라고하겠다. 이외에연서역토작인백화경 ( 白化敬 ) 의거마평 ( 巨馬坪 ) 소재소경답 ( 所耕畓 ) 6 두락이사판성책에 11 두락으로기재되어가록된 5 두락및그도전을제감 ( 除減 ) 하여성책을바로잡는과정에서도을미사판의특성을살펴볼수있다. 즉, 양안과실지를사검하되구체적으로구양안의자호등수 ( 字號等數 ) 와결복사표 ( 結卜四標 ), 지주작인 ( 持主作人 ) 의성명을조사하고, 전후전매 ( 轉賣 ) 한문권을확인하였다. 아울러역토사판문부에기재된두락결복과도액실수, 시작인성명을대조하고, 농상공부주사를파송하여갱사이작 ( 更査移作 ) 할때에첨록한근인 ( 近因 ) 을밝히고당시참증 ( 參證 ) 한사람을조사하게하는등재사 ( 再査 ), 삼사 ( 三査 ) 를요구함으로써조사의엄격성을유지하고있으나합리적인정황만을토대로수정되기도하였다.* 그러나배타적인지주적조사에있어서는아직초기단계에머물러있었다.

31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2 절지주제와근대적토지소유 * 2. 역둔토조사와지주제변동 2) 광무개혁기의역둔토조사 (1) 광무사검 ( 光武査檢 ) 의성격 대한제국기의구한국정부는전국적인양전을통하여토지를조사하고그소유권을확인하기에앞서다양한명목으로전국에산재해있던국유지를일괄적으로조사 정리하였다. 갑오개혁에서중앙및지방관제의개혁에의해각영문 ( 營門 ) 아문, 기타각둔이폐지됨에따라그에소속되었던둔토도각기그내용별로탁지부와궁내부, 군부로나누어이속 관리하다가 1899 년에는전국의모든둔토를궁내부내장원관할로재편하였다. 그리고 1895 년역참제도의폐지와새로운우편제도의실시로그동안각역에서개별적으로경영하여경비로충당했던역토제도가철폐됨에따라역토의관리권은농상공부 군부 탁지부로이속되었다가 1900 년 9 월에내장원으로귀속되었다. 전국의역토 둔토 목장토 ( 牧場土 ) 등을모두자기관하로귀속시켜통일적으로관리할수있게된내장원은해당토지를보다정확히파악하고도조액을재조정할목적으로사검장정 ( 査檢章程 ) 을새로마련하고, 1899 년 6 월부터는둔목토 ( 屯牧土 ) 에대하여사검위원을, 이듬해 9 월부터는역토조사를위해전국각도에봉세관 ( 捧稅官 ) 을파견하여둔목토및역토에대한전국적인조사에착수하였다.* 그리고이른바광무사검을실시하여역둔토경영을강화해갔다 년 6 월부터전국각도별로사검위원들을파견하면서목둔토에대한조사가시작된이후이듬해역토까지조사 정리한소위광무사검은궁장토를제외한전국의국 관유지를중앙의단일기관에의해통일적으로조사하여정리한최초의국유지정리사업이었다. 이는역둔토조사를위한별도의독립기구를설치하지않고왕실재정을담당하는내장원에서주관했기때문에기본적으로는이미자체소관토지를조사하는내장원의사장조사 ( 私庄調査 ) 였다고할수있다. 그러나한편으로내장원은당시의정치 경제적인현실속에서탁지부와함께국가재정의중요한담당자였을뿐만아니라국왕을중심으로한개혁의실질적인중추기구였기때문에왕실사장조사의성격만을갖추고있었던것은아니었다. 우선조사대상이된중요한토지는각궁방소유의전답을제외한전국의목장토와각종영문 아문둔토및역토였으며, 이외에도각지방의관유지뿐만아니라공공의목적을위해마련된공유지마저도공토로파악하였다. 그야말로전국의국 관유지를망라하고있다는점에서일단형식적으로는국유지조사의성격이한층더해진다고하겠다. 광무사검에서의토지조사도문부조사를기본으로하였다. 각도에대개 1 인의사검위원을파견하여지방관의협조아래도내각군에비치된군또는면의일반양안과개인양안으로서의역둔토양안을중심으로조사하되, 사검을위하여내장원에서사전에마련한공토안 ( 公土案 ) 등을참고하였다. 측량을위한기사 ( 技師 ) 나학원 ( 學員 ) 이별도로파견된것도아니었다. 양안이유실된경우에는각군의행정에밝은향장 ( 鄕長 ) 서기 ( 書記 ) 등과함께답험척량하여사실대로집총 ( 執總 ) 하는방식으로이루어졌다. 이때조사자료가된양안은대체로구양안이었다. 대부분의지역에서는광무양전사업이본격적으로실시되기이전에목둔토에대한사검이독자적으로이루어졌으므로따라서신양안으로서의광무양안이조사의저본이될수없었다. 사검과정에서양전사업의협조가이루어진흔적은거의찾아볼수없고, 오히려앞으로본격적으로시행될양전사업에서내장원 ( 국가 ) 소유의토지로확인받기위해자체의토지조사를엄격하게할필요가있었다. 따라서내장원은소유권이명확하지않은목역둔토까지도내장원소관의공토로사검하여지대로서의도조를책정하였다. 내장원은역둔토사검과정, 특히분쟁지에대한조사와처리과정에서각문부에둔명으로기재된토지인지의여부를조사및사정에서의일차적인판단기준으로삼고있었다 년의면세지승총 ( 免稅地陞總 ) 이후에도여전히남아있던무토둔토 ( 無土屯土 ) 뿐만아니라, 승총된이후에는탁지부에결세만을납부함으로써완전히민전화한이전의무토둔토까지도사검정도 ( 査檢定賭 ) 하고자하였다. 또한성립사정으로보면소유권이각지방의관청에있지않은공유지로서의고마답 ( 雇馬畓 ), 군근전 ( 軍根田 ), 민고답 ( 民庫畓 ), 장청 ( 將廳 ) 이청 ( 吏廳 ) 향청전답 ( 鄕廳田畓 ), 제언전답 ( 堤堰田畓 ), 서원전답 ( 書院田畓 ) 등도공토로파악하여정도함으로써점차국유지화하였다. 이들토지의사검정도과정에서지주혹은경작농민들은일토양세임을내세워저항하기도하였으나양안과매매문기등의명백한입증자료를제시하지못하는한사토로인정받기는어려웠다. 분쟁지에대해서도조를감해주거나혹은결세를도조중에서공제하도록조처하는경우는있었지만, 일단공토로사검된것을사유지로다시환원해준경우는매우드물었다. 그리고공유지에서지주경영이이루어지고있었던경우에는지주가중답주 ( 中畓主 ) 로밀리면서정해진도조를내장원에납부하지않을수없었다. 독립된공적인조사기관뿐만아니라분쟁지처리를위한사정기관이별도로설치되어있지않은처지에서는당연한귀결이었으며, 조사의지주적성격은이전의을미 병신연간의역토사판에서보다한층강화되고있었다. 토지에대한조사와함께목역둔토의작인에대한파악도사검의중요한내용이되었다. 우선소유권조사의성격을지니고있는일반양전과는달리지주자체의사장조사에서는지대부담자로서의작인에대한조사가필수적이었다. 그러나다른한편으로광무양전에서국유지조사의경우에는 양지아문에서뿐만아니라지계아문에서도 시작 ( 時作 ) 을지세부담자로파악해서양안에기재하고있는사실과관련하여, 광무사검에서의작인조사는결과적으로지세납부자를파악한다는의미도동시에지니는복합적인것이었다. 사검문부에나타난작인파악형식은장정의규정대로성명을기재한경우가대부분이었다. 이외에도내장원은성이생략된채명 ( 名 ) 만을파악하고있거나내용적으로도실명 ( 實名 ) 과는거리가있는호명 ( 戶名 ) 또는노비명으로기재되는등한결같지는않지만역둔토와관련된현실의경작자를도세및지세의부담자로확인해가고있었다. 광무양안과는기재형식이달라쉽게비교될수없으나정도성책 ( 定賭成冊 ) 에서는광무양안에비해더욱세분화하여필지별로실경작자를 비록그것이호명이나노비명등으로표현되고있다고하더라도 파악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둔목토에대한광무사검의결과를경상북도지역의수량분석을통해살펴보면, 기해년 (1899) 의사검을통해서신사집 ( 新査執 ) 된수조실면적은 51 개둔전답에서 3584 두락으로, 이것은사검이전 41 개군의원총 ( 元總 ) 2 만 1639 두 3 승 7 합락 ( 合落 ) 과기해년의사검직후수조실면적 2 만 3254 두 2 승락을기준으로할때 % 정도의면적이증가했음을말해준다. 지목별로는전이 1307 두 1 승락, 답이 2276 두 9 승락으로원총의전답비율이비슷함에도불구하고새로조사된답의면적은그이전에비해월등히큰것으로나타나고있다. 그리고도조의경우둔답을중심으로살펴볼때, 군별두락당도세액의편차가심하지만경상북도전체의평균두락당도조는기해년에 5.2 두, 경자년 (1900) 에는 4.4 두로나타나고있다. 이러한수치는이전을미사판에서의도세액에비해크게증가한것은아니었다. 적어도기해 경자년의사검시기에있어서는두락당도세액의급격한증가를통해서라기보다는내장원소관이된전국의역둔토및기타공유지등을광범하게조사하여현실적으로정도함으로써도세수입의확대를꾀하였다고할수있다. 내장원에의한역둔토지주경영의강화는이러한역둔토토지조사와정리작업을바탕으로미구에실현될것이었다.

319 (2) 양주군에서의역둔토조사 당시양주군을포함한경기도지역에소재한역둔토를조사하기위한사검위원으로는이태하 ( 李泰河 ) 와강봉헌 ( 姜鳳憲 ) 이 1899 년 6 월 1 일자로임명되었다.* 현재남양주시가포함되었던당시양주군의사검은강봉헌이담당하였다.* 양주군에서는 1899 년 5 월이미군수주관하에각둔토의두락및결복의수량을파악하는 * 등사검을위한자료를준비하였다. 사검장정에의하면 * 사검위원 ( 봉세관 ) 이군에도착하는날에는군의서기 1 명과사용 ( 使傭 ) 2 명을대기하도록하였으며, 이들과함께역둔토를조사한후작성된각양의문부에는군수와사검위원이교환날인하도록하여형식상조사의주체는내장원소속의사검위원과지방관이었다. 양주군에서사검이진행된과정을구체적으로보여주는자료는없으며다만그해 11 월경둔목토의조사가완료되어문부를작성하고있을뿐이다. 광무사검에서작성된문부는크게두종류로나눌수있는데, 하나는소유자의개인양안으로서역둔양안 ( 驛屯量案 ) 이고, 다른하나는도조부에해당하는정도성책이다. 전자는 2 건, 후자는 3 건을만들어양자모두내장원과본군에 1 건씩비치하고후자의 1 건은마름에게내주어수도상납 ( 收賭上納 ) 의자료로삼게하였다. 그리고이외에도사검위원은위두종류의문부를토대로각군별과둔토별로전답의면적과도액의합계를산출하여각군각둔토집도도안 ( 各郡各屯土執賭都案 ) 을작성하여내장원에보고하였다. 양주군의광무사검문부는남아있는것이많지않지만대표적인사례로 전경리청갑사둔전답두락복수작인성명급봉도성책 ( 前經理廳甲士屯田畓斗落卜數作人姓名及捧賭成冊 ) ( 규 ) 과 양주군궁내부소관각둔토사검안 ( 楊州郡宮內府所管各屯土査檢案 ) ( 규 ) 을들수있다. 전자는 1899 년 11 월에작성된양주군둔야면 ( 芚夜面 : 현의정부일대 ) 각동소재의갑사둔전답의정도성책에해당하는것으로각동별로전답의일경및두락, 결복, 작인그리고도조를기록하고있다. 그런데이갑사둔의경우는 2 년전군에서둔토를조사 정리한것이있었으므로이때에별도로둔토양안을작성한것같지는않다. 즉, 위의갑사둔의정도성책은 1897 년 10 월에작성된 양주군소재전경리청갑사둔전답두락경수결복사검성책 ( 楊州郡所在前經理廳甲士屯田畓斗落耕數結卜査檢成冊 ) ( 규 ) 을저본으로하고그내용을그대로전재 ( 轉載 ) 한뒤에 의금추사검위원정도규례 ( 依今秋査檢委員定賭規例 ) 하여답 1 두락에는도조 7 두, 전 1 일경에는도조 14 두를필지별로일률적으로부과한것이다. 회룡동 ( 回龍洞 ) 을비롯한 7 개지역에산재한전답총 172 필지의도조합은 240 석 10 두 4 승이었다. 그리고후자의각둔토사검안은양주군의집도도안에해당하는것으로둔별로그리고둔토가소재한면리별로전답의합을일경및두락으로기재하고면적의합에따른도세의합을타조 ( 打租 ) 도조 ( 賭租 ) 도태 ( 賭太 ) 도전 ( 賭錢 ) 등의형태로기록하고있어광무사검에의해파악된양주지역둔토의전체적인규모를지역별로파악할수있다. 이문부의마지막부분에는군수조정구 ( 趙鼎九 ) 와궁내부사검위원강봉헌이함께날인하였다. 이둔토사검안을통하여 1899 년에내장원에서파악한양주군소재각둔토의면적및도세의규모를지역별로살펴보면다음표와같다. < 양향둔토 ( 친둔토 ) 의면별면적과도조 > 면명전답두락일경도조 ( 두 ) 도전 ( 냥 ) 비고 백석면 읍내면 답 7 42 타조 ( 打租 ) 전 1 10 답 2 19 타조 가대 ( 家垈 ) 8.66 이담면 답 3.5 전 도태 ( 賭太 ) / 전 9 일경, 병 ( 幷 ) 가대 둔야면 답 8 20 전 5 24 회암면답 6 43 구지면전 우미천전 ( 牛尾川田 ) 면적누락 상도면 답 0.5 전 신혈면 전 설리동 ( 雪里洞 ) 1 일경도전 6 전 답 3 2 건천면전 신사득 ( 新査得 ) : 장자동 ( 長自洞 ), 지석우 ( 砥石隅 ) 접동면전 4 12 신사득 : 원우 ( 遠隅 ) 상도면 답 전 가대 30 자완화궁이매우곽랑청금위사토운 ( 自完和宮已賣于튦郞廳今爲私土云 )

320 방축리 답 4 전 3 40 장흥면답 타도조 백석면 답 42 전 도율 ( 賭栗 ) 30 두 ( 도조외추가 ) 고주내면답 8 62 계 < 충훈부둔토의면별면적과도조 > 면명전답두락일경도조 ( 두 ) 도전 ( 냥 ) 비고 답 접동면 전 시장 ( 柴場 ) 7 시장 1 곳의시세 ( 柴稅 ) 읍내면 광석면 답 4 28 전 답 전 이담면전 망우리면 구지면 부내면 답 삼거리, 내동리, 직곡 전 삼거리, 황촌리, 토목동 답 11(17) 79 17두락 11두락 ( 추정 ) 전 1.5(0) 10(0) 전과도전추가 ( 추정 ) 답 2 14 마장리 전 진팔리, 마장리, 왕십리 계 69(75) 22.1(20.6) (7) < 기타각둔별 면별둔토면적과도조 > 면명전답두락일경도조 ( 두 ) 도전 ( 냥 ) 비고 경리둔 ( 經理屯 ) 둔야면 답 전 계 민상매매금시정도 ( 民相賣買今始定賭 ) 총융둔 ( 摠戎屯 ) 이담면 영근면 답 전 답 전 두락도조 2 두 1 일경도조 4 두 화속결 ( 火粟結 ) 결세전 ( 稅錢 ) 계 용호둔 ( 龍虎屯 ) 동대문외가대 8 가대세전 답 14 98

321 관둔 ( 官屯 ) 읍내면 금영 전 답 전 도조 6 석, 도전 7 냥 8 전 5 푼 계 어영둔 ( 禦營屯 ) 청송면 화속추수위 ( 火粟秋收爲 ) 600여 석 산내면 가량, 홍릉이부운 ( 洪陵移付云 ) 의정부둔 ( 議政府屯 ) 의정부평 답 2000 전 53.2 선희궁소관운 ( 宣禧宮所管云 ) 양주군에는군내의가장많은지역에분산되어있는양향둔을비롯하여충훈부둔 경리둔 ( 甲士屯이라고도함 ) 총융둔 용호둔 관둔 어영둔 의정부둔등 8 종류의둔토가분포되어있었다. 이가운데청송면 ( 靑松面 ) 및산내면 ( 山內面 ) 에소재했던어영둔토는이미홍릉 ( 洪陵 ) 으로이속되어그면적과도조를파악하지않고있으며, 또한의정부평 ( 議政府坪 ) 소재의정부둔토는 1899 년당시선희궁 ( 宣禧宮 ) 소관으로운위되고있어도세를파악하지않은것은물론이고면적도개략적으로만파악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이양자를제외한 6 개둔토의합은답이 37 석 9 두 6 승락 (749.6 두락 ), 전이 352 일 7 식경으로파악되고있으며, 이러한규모의둔토에서거두어들일도세의합은도조 ( 타조포함 ) 가 345 석 9 두 5 합, 도전이 415 냥 4 전 6 푼으로집계되고있다.* 그러나이후의정부둔은다시내장원소관으로되었고 * 1901 년내장원에서파악하고있는의정부둔의전답은의정부를비롯한 8 개지역에산재한총 200 필지로서답이 45 석 11 두 5 승락 (911.5 두락 ) 이고전이 51 일 7 식경이다. 답가운데 8 필지의구진 ( 舊陳 ) 1 석 15 두락을제외하면실제경작하고있는논은 43 석 16 두 5 승락인데여기에부과된도조는 164 석 19 두 5 승이며, 밭의도조는 12 석 12 두 5 승으로합하여 177 석 12 두를책정하여이중 15 석은마름의요비 ( 料費 ) 로제하고 162 석 12 두를실상납조 ( 實上納租 ) 로확정하고있다.* 따라서당시양주군전체둔토의실질적인면적은답 83 석 1 두 1 승락과전 -404 일 4 식경으로서도세는도조 523 석 1 두 5 합과도전 415 냥 4 전 6 푼으로파악되고있었다고하겠다.* 단위면적당도조의경우의정부둔에서는답의두락당평균도조는 3.76 두, 전의일경당평균도조는 4.88 두로낮게책정되고있는편이지만, 기타둔토의경우이담면 ( 伊淡面 ) 과영근면 ( 嶺斤面 ) 에소재한총융둔토 ( 두락및일경당도조는각각 2 두와 4 두를적용함 ) 를제외하고는대체로답의두락당도조는 7 두, 전의일경당도조는 14 두가적용되고있다.* 광무사검초기에는도조 도전간에양의정도 ( 量宜定賭 ) 하도록하였기때문에 * 양주군에서도도전정도 ( 賭錢定賭 ) 의경우는있었으나매우드물었다. 즉, 이지역에서는가대 ( 家垈 ) 와총융둔에소속된화속결 ( 火粟結 ) 20 결의세전 ( 稅錢 ) 320 냥을제외하면일반전답에서전 ( 錢 ) 으로정도한경우는미미한편이었다. 그리고초기의이러한규정은 1899 년 10 월부터 혹유사검관지대전정도처 ( 或有査檢官之代錢定賭處 ) 라도본곡으로써저저수확적치 ( 這這收穫積峙 ) 하라 * 는조치와더불어이후도전이아닌현물납의본곡으로정도하고수봉상납하게되었다. 현남양주지역에는양향둔토와충훈부둔토가상도면, 건천면, 접동면에걸쳐분포되어있었다. 양향둔토는답 18 두 5 승락과전 15 일경이위의세지역에산재했는데, 특히건천면장자동 ( 長自洞 ) 의전반일경과지석우 ( 砥石隅 ) 의전반일경, 그리고접동면원우 ( 遠隅 ) 의전 4 일경은이번사검에서새로조사되어사검문부에등재된것으로서 신사득 ( 新査得 ) 으로표기하고있는데접동면의경우도전 (12 냥 ) 으로정도하고있어주목된다. 그리고상도면묵동 ( 墨洞 ) 의답 5 승락과전반일경은전답을합하여도전 3 냥으로정도하였고, 같은지역의답 18 두락과전 9 일반경은완화궁 ( 完和宮 ) 에서이미곽랑청 ( 튦郞廳 ) 으로팔아버렸기때문에지금은사토 ( 私土 ) 로운위되던것이라는표시와함께이러한토지도역시내장원소관둔토로사검정도하고있다. 즉, 광무사검에서는사토혹은공유지등토지자체의성격과관계없이둔명으로표시된모든토지를내장원소관의토지로조사하였다. 이는광무사검의지주적조사로서의성격을보여주는것으로이후소유권분쟁의원인이되기도하였다. 그리고접동면소재충훈부둔토는답 10 두락과전 11 일 1 식경및시장 ( 柴場 ) 1 곳으로, 도조는각각 3 석 10 두, 7 석 17 두 5 승, 도전 7 냥으로정도된것이다. (3) 양주군소재역둔토에서의분쟁사례 광무사검을거치면서양주군에서도소유권분쟁을비롯하여경작권및도세문제를둘러싼분쟁이지속적으로발생하였다. 역둔토에대한내장원의지주적조사의성격이강화된것은이미이러한분쟁을증폭시킬개연성을충분히내재하고있었다. 광무사검직전에도예컨대연서역토와관련되어민답 ( 民畓 ) 이국가기구에의해억탈되거나, 매매문기의유무와관련된이중매매로민인사이의사사로운소유권분쟁이발생하는등분쟁은다양하게있었지만,* 내장원의역둔토조사이후의양상은국가 ( 내장원 ) 혹은그대리인과일반민인사이의분쟁이주류를이루고있었다. 양주지역의대표적인분쟁사례는비교적방대한규모로존재했던전경리청소관둔토, 일명갑사둔토와의정부둔토에서찾아볼수있다. 양주군내의둔토조사가일단마무리되는 1899 년 10 월중순에는각둔을관리할감관을파견하였는데, 주로이전부터맡고있던둔감 ( 屯監 ) 을그대로내장원에서임명하는형태를취하고있었다.* 그러나한편내장원에서는경기도각군소재둔목토에관한조사내용이누락되어사실과다른점이많다고판단하고그해 12 월초에이태하를경기도사검위원겸독쇄관 ( 京畿道査檢委員兼督刷官 ) 으로파견하여다시조사하도록하였을뿐만아니라,* 양주군갑사둔에는감관박홍석 ( 朴弘錫 ) 을별도로파견하여본둔의양안을토대로은루된것을철저히반핵 ( 盤?) 토록하였다.* 갑사둔에서의분쟁은무토둔토로인한소유권분쟁으로파악할수있다 년 12 월에내장원으로발송한양주군수의보고서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1 이둔을본래총융청에서구관 ( 句管 ) 할시에둔감을차송 ( 差送 ) 하여그토지에서거둔바는돈으로든곡물로든읍에서애초에상관함이없었으며, 그청 ( 廳 ) 을경리청 ( 經理廳 ) 으로호칭을바꾼이후에도그둔을전과같이구관하다가, 갑오경장이후에그청은폐지하고그결은승총 ( 陞總 ) 함에따라본군에서결세만을거두어탁지부에상납하는고로, 그내용을살펴보면이토지가비록둔안에실려있지만면세되는것으로인해결복 ( 結卜 ) 만해당청에서각작인들로부터거두어가고그토지는경작하는민이

322 전상매매 ( 轉相賣買 ) 하므로사토 ( 私耕 ) 인즉, 갑사둔이라고이름을칭하는것은언제부터시작되었고무엇에근거하고있는지를알지못하며, 소위경리둔은곧갑사둔이라백성들이사토로알고있는것이오래되었는데, 정유년 (1897) 가을에궁내부에서둔감을차출하여그토지를사검하고도세를징수하고자한즉, 해당각작인들이놀라고의심스러워하여몇백명이무리를지어군과 ( 관찰 ) 부에정소 ( 呈訴 ) 하여구례 ( 舊例 ) 를회복하기를기대하고전에의거하여결전 ( 結錢 ) 으로응납 ( 應納 ) 했는데.* 이자료에의거하면갑사둔토는무토면세지였음이분명하다. 즉, 갑사둔이라는명칭이언제부터사용되었는지는분명하지않지만그토지가총융청과경리청에소속되어각청에서관리할당시에는면세지로서작인 ( 소유자 ) 들은호조 ( 탁지부 ) 에납부하는결세를둔감을통하여해당관청에납부하면그만이었기때문에지방행정기구인읍에서는일체간섭하지않았던것이다. 또한 1894 년의면세지승총에의거하여유토 무토를막론하고면세지가혁파되어출세 ( 出稅 ) 하게됨에따라이들무토에서는군을통하여결세만을탁지부에상납하게된민유지로서일찍부터경작인들사이에전상매매되어왔기때문에자연스럽게사토로인식되어있던토지였다. 그러나농상공부소관의역토가군부로이속되면서도조의인상등을통하여그지주적관리를전반적으로강화해가던때인 1897 년에궁내부에서는갑사둔을소유토지로인식하여탁지부납 ( 度支部納 ) 의결세외에도세를징수하고자둔감을파견하여사검정도하고자하였다. 이에작인들은지방행정기구인군과관찰부에합법적으로정소하였고이것이인정되어결국도세를책정하지못하였다.* 이후 1899 년의광무사검에이르러서야내장원에서는 민상매매금시정도 ( 民相賣買今始定賭 ) 라는표현과함께답 두락과전 68 일경, 도조 두를사검정도하여위에서살펴본각둔토사검안에기재하였고, 갑사둔의정도성책에는다시필지별로도조를책정하여전체적으로답 554 두락 (27 석 14 두락 ), 전 66 일 6 식경, 그리고도조 두 (240 석 10 두 4 승 ) 와결복 9 결 60 부 4 속을파악하였다. 그런데내장원은여기서도누락된것이있다고보고재조사를지시하였다. 요컨대갑사둔의토지는비록둔안에실려있지만지금까지도세를납부한일이없고결세만을총융청, 그이후에는경리청, 그리고 1894 년이후에는군을통하여탁지부에상납했던소위무토둔토였던것으로, 소유권에있어서는민전, 민유지였던것이다. 양주군에서는이러한둔토의사정을인지하고군수가목민관으로서정유년 (1897) 의예로써시행할것을요구하였으나내장원에서는한마디로어불성설이라는입장이었다. 즉, 당당한공토를 비공이사 ( 非公伊私 ) 라칭하고차라리 ( 이토지를 ) 잃어버릴요량을하라는보고내용이놀라울뿐이니군에서는향장 ( 鄕長 ) 수서기 ( 首書記 ) 를별도로파견하여감관과함께도조를수봉하도록재차훈령하고있다.* 내장원에의해역둔토의조사가강화되었을뿐만아니라파악된역둔토에서내장원은점차지주제경영의형태로관리를강화해나갔지만그것은소유권이확실한유토둔토인경우였고, 양주군갑사둔에서와같이무토로서의존재형태와그내력이뚜렷한경우에는대한제국의실질적인권력기구인내장원이라하더라도민전지주지에서처럼도세수봉을강제할수없었다. 이후이갑사둔토에대한조사가새롭게이루어진흔적은없고, 결국내장원에서는 1899 년 11 월에최종적으로정리된정도성책인 전경리청갑사둔전답두수결복작인성명급봉도성책 ( 前經理廳甲士屯田畓斗數結卜作人姓名及捧賭成冊 ) 을토대로도세를수봉하고자하였으나그것마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 이러한도세거납현상은이듬해가을까지지속되었던듯하다.* 내장원파견감관및군의행정력을동원한도세독봉 ( 賭稅督捧 ) 에도불구하고도세수납이잘이루어지지않자내장원에서는 1900 년 11 월초에일방적으로타협적인조처를취하였다. 내장원은수도시에매번문제가있어상납이건체 ( 愆滯 ) 된다고생각한양주군소재갑사둔에완문을발하여갑사둔의도세를도전으로책정하였다. 즉답 27 석 14 두락 (554 두락 ) 에매두락도전 2 냥을부과하여합전 ( 合錢 ) 1108 냥과전 66 일 6 식경은매일경을 7 두락으로대체하여 ( 전 466 두락 ) 매두락도전 6 전을부과하여합전 279 냥 6 전으로정하여갑사둔의전답합도전을 1387 냥 6 전으로조정하여매년 10 월내에준납 ( 准納 ) 하게하였다. 그리고감관은둔토소재처의동두민 ( 洞頭民 ) 으로 1 인씩차정하여수납하게하였다.* 이러한조처는역둔토지주제를강화해가는내장원의입장에서는대단한결단이었다. 곡가 ( 穀價 ) 를비롯한지속적인물가상승과지역간곡가의차이로인한이득까지장악하기위해지금까지도전정도하던곳도본곡으로다시도세를책정하던내장원이갑사둔에서는오히려도전정도로환원시켜주었고, 답과전의단위두락당도세를각각 2 냥과 6 전으로정한것은하등전답의도전기준에도미치지못하는아주낮은수준이었다.* 이와같은내장원의전향적이고도절충적인조처에작인들다수가마지못해호응했을것이다. 관례상갑사둔의토지가민유지임이분명하다고해도한편으로는엄연히둔안에실려있는토지였기때문에민유지임을증명해줄수있는서류상의명백한증거자료가없는한강력한국가권력을상대로지속적인소유권투쟁을전개한다는것은쉽지않은일이었다. 그러나아무리낮은수준의도세라고해도그것은분명히그토지에대한내장원의소유권을인정하는것이었다. 이러한사정은 1899 년이미내장원에서갑사둔토에집도 ( 執賭 ) 하기시작한이후둔토작인 ( 전답주 ) 들이토지를팔거나혹은토지를버리고다른지역으로이사하는결과를초래하였다. 그리고신답주가도전으로감하조처된이후인 1900 년도도세는납부하더라도전년도도세는완고하게거부하여도세수봉자의어려움이많았던것으로보인다.* 도세의건납 ( 愆納 ) 실태는내장원의사검이후 2 년째인 1901 년에도여전하였다. 따라서내장원은지난 1900 년 11 월의완문을통하여갑사둔에서도세의수봉상납 ( 收捧上納 ) 은특별히민정을헤아려해당둔민으로하여금자율적으로거행하도록한내용을바꾸어다른둔토에서와같이내장원에서별도로마름함원근 ( 咸元根 ) 을파견하여그로하여금수도수납 ( 收賭輸納 ) 업무를전담하도록하였으나,* 위토 ( 位土 ) 를칭하거나권세가에자탁 ( 藉托 ) 하여거납하는등오히려건체사례가다양해지기도하였다.* 이와같은소유권분쟁은양주군소재의정부둔의전답에서도나타났다. 앞에서도살펴보았듯이의정부둔은 1901 년에내장원으로부속되었고그해가을역둔토에대한내장원의강화된지주적조사로인해이후내장원과둔민들사이에다양한분쟁이발생하였다. 그가운데는우선사검과정에서고의든실수든간에사토 ( 민유지 ) 가의정부둔토에혼입되어속공 ( 屬公 ) 된경우가있었다. 소유권분쟁에는대체로해당지역의군수가직접참가하거나혹은군에서파견한향장 서기와그동리의영소임 ( 領所任 ) 등이함께문제의토지에대한재조사를실시하지만결정은재조사보고된내용을토대로내장원이일방적으로처분을내릴뿐이었다. 이때도둔야면 ( 芚夜面 ) 범동 ( 犯洞 ) 소재김경실 ( 金敬實 ) 의사답 8 두락이의정부둔토에혼입된경우처럼우선수백년전상매매된문권이있었고, 그외토지의위치와경계, 의정부둔의내력과이토지의시기별관련내용, 동민들의견해등군의서기와영소임이함께조사한내용과군수의종합적인판단이명확해야만내장원으로부터대체로긍정적인반응을얻을수있었다.* 반면둔야면회룡동홍승지댁고용 ( 雇傭 ) 이주장한바와같이그들이대대로 400년간경작해온사패기지의경우는이전선희궁이사검할때의결정된내용과동민전체가공지한사실등비록전반적인정황이사유지로인정될수있다고하더라도의거할만한문적이없을경우에는탈급 ( 給 ) 될수없었다.* 그리고내장원의광무사검이이전조사에구애되지않고전반적으로새로조사하여정도한다는원칙에서이루어졌기때문에이전선희궁감이조사탈면 ( 査檢免 ) 한사실도소유권사정에서규정적인것이될수없었다.

323 이외에도사검시에면적이가록되거나토지품등및명자 ( 名字 ) 가오록 ( 誤錄 ) 되는것에의한분쟁도발생하였다. 둔야면호동 ( 虎洞 ) 에거주하는이용성 ( 李用成 : 李敬萬 ) 이경작해온의정부둔답은 8 두락뿐인데둔안에는형용근 ( 用根 ) 의이름아래에 6 두락답이가록되어분쟁이발생하였다. 이에군에서는서기를파견하여역시영소임입회하에해당토지를적간 ( 摘奸 ) 한결과, 실제로사검시에동민의지심 ( 指尋 ) 이잘못된것으로명자의가록, 첩록으로파악되었으나 1902 년에문제가발생한이래 2 년이지나도록완전히해결되지않았다.* 또한의정부둔작인이재룡 ( 李再龍 : 金守甫 ) 의소작답 3 두락은진황지와다름없어도조를책봉한적없이원결 3 부에해당하는결세만을납부하던토지였는데 1902 년가을상답 ( 上畓 ) 의도조례 ( 賭租例 ) 에따라매두락 6 두씩합 18 두를책징하여분쟁이발생하였다. 역시의정부둔작인김금동 ( 金今東 : 金萬心 ) 이 5 년간경작하던하답 5 두락을 1902 년에봉세관이상답 7 두락으로정도하여합도조를 10 두에서 2 석 2 두로독봉하면서분쟁이발생하기도하였다. 이에작인이본군및내장원에여러차례고소하고군의조사보고가이루어져 1904 년 8 월에가서야 이미두락의남집 ( 濫執 ) 에관계된즉, 사실을좇아집총하고수납하여공사가서로타당하게할것 이라는막연하지만작인의요구를일정하게수용하는듯한지령을받게되었다.* 이와같은일련의사건들은 1901 년내장원에서둔토를조사한이후지주적경영을강화해가는가운데이듬해까지지속하였던부분적인조사정도작업의과정에서발생한것들이었다. 그런데여기에서의기본적이고도주된분쟁은여전히무토둔토라는인식과관련된것이었다. 의정부둔민들의호소내용을통해이둔토의변천과정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2 본평 ( 本坪 ) 의전답은 300 년전상매매해온땅으로, 지난정유년 (1897) 분에이전답을선희궁에부속하여결조 ( 結租 ) 를매결당 4 석씩봉상했는데, 금년 (1901) 에이르러서는다시본원 ( 내장원 ) 에부속된바, 듣건대결세는양주군에납부하고도조는본원에납부하라하오니, 이것이어찌일토양세가아니옵니까. 이전선희궁에납조한예에따라매결에 4 석씩대전봉납 ( 代錢捧納 ) 케하시어.* 3 의정부둔토작인등의소구 ( 訴求 ) 저희들이본경 ( 本境 ) 전답을각자전환하여농사를지어왔고토리 ( 土理 ) 가본디척박한데도수백년허상매매 ( 許相賣買 ) 하면서경작해왔는데, 무술년 (1898) 분에선희궁에서의정부둔토라칭하고매결에 4 석씩봉도 ( 捧賭 ) 하옵기에감히거역하지못하고세부득이 ( 勢不得已 ) 응도 ( 應賭 ) 하였더니, 뜻밖에작년 (1901) 가을에봉세관이상답은매두락 6 두씩, 중답은 4 두씩, 하답은 2 두씩정도하옵고, 결전은또한해답주 ( 該畓主 ) 로부터징납 ( 徵納 ) 케하오니어찌억울하지않겠습니까. 인근지역의갑사둔토는토품의비박 ( 肥薄 ) 을논하지않고매두락에 2 두씩대전봉도 ( 代錢捧賭 ) 하오니, 해둔 ( 該屯 ) 과차둔 ( 此屯 ) 이공토는한가지요민또한한가지인데오직이둔민만이실업하여환산 ( 渙散 ) 할경우에이르렀으니특별히처분하시어갑사둔례로도세를거두어납부케하시길바람.* 4 의정부둔결민등호원 ( 結民等呼寃 ) 본둔토를어느해에창설하였는지는알수없으나수백년이래전상매매하여단지결전만을납부하고폐단없이경식 ( 耕食 ) 해왔는데, 정유년 (1897) 분에선희궁에서둔감을정하고내려와서타조 ( 打租 ) 를하고자했으나결민의억울하고원통한것을살피시어그토지는그대로본주 ( 本主 ) 에부속하여전과같이경식하여매결에도와결을막론하고조 ( 租 ) 4 석씩마름이전관수쇄 ( 專管收刷 ) 하여하나는본궁 ( 本宮 ) 의도전 ( 賭錢 ) 으로납부하고다른하나는본군의결전으로납부하였다. 그리고매결조 4 석외에결전은애당초각호 ( 各戶 ) 에책징하지않아도세납 ( 稅納 ) 은전에비하여배나무거워민정이험악한데, 갑자기작년 (1901) 가을에사검위원이도착하여매결 4 석조세를조금헐하다고하면서상 중 하답을분정하여도조를전에비해배로늘리고, 결세도상 중 하 3 등급으로교정 ( 較定 ) 하여피전차답 ( 彼田此畓 ) 의결세에관한행정 ( 結政 ) 이갑자기변하고전에비하여지금은그납부하는것이편중합니다. 도조의가배 ( 加倍 ) 가이미원통하거늘결세변혁 ( 結稅變革 ) 이한층더억울하오니. 군수의보고내용본군의결정이타군과달라갑오년 (1894) 이전에도도결로정식 ( 定式 ) 하여비록성천 ( 成川 ) 되어허결인경우라도변통할수없거늘, 기백년응납 ( 應納 ) 하던결수를토지측량도하지않고붓으로써더하고빼면결민 ( 結民 ) 이어찌호원하지않겠습니까.* 우선분쟁은 1901 년 11 월에의정부둔토에대한내장원의사검이일단완료된직후에김윤식 ( 金允植 ) 강순철 ( 姜順哲 ) 강순일 ( 姜順一 ) 등둔민 39 명이연명으로청원서 ( 사료 2) 를내장원에제출하면서시작되어이듬해말까지지속되었던것으로보인다. 이둔전답은대체로과전법체제가붕괴된이후절수 ( 折受 ) 등의방법을통해궁방전및각종둔전이설치되는 16 세기말내지는 17 세기초에설치되어 300 년 ( 사료 2) 동안전상매매되어온 ( 사료 2, 3, 4) 민전, 민유지로서 * 단지결세만을호조대신해당둔에납부해온무토둔토였다 년모든면세지가혁파될때이토지도승총되어탁지부에출세 ( 出稅 ) 하게되었을터인데어떠한연유에서인지 1897 년에선희궁에다시부속되었다. 선희궁에서차정한둔감은일반지주지의정률지대인타조제를실시하고자했으나 ( 사료 4) 둔민의저항으로실시할수없었을것이고, 결국선희궁은경작인을토지소유주로인정한채 ( 사료 4) 도와결을통합하여결당조 4 석을책정하였을뿐인데 ( 사료 2, 3, 4) 이것은조선후기이래결세에도미치지못하는수준이었다.* 따라서선희궁구관시기의이토지는제도적으로는갑오승총으로혁파되었지만여전히무토둔토적인성격으로존재했다고할수있다. 말하자면 1894 년의면세지승총으로인해법적형식적으로도완전히민전화한이지역전답의소유주들은 1897 년에다시이토지들을의정부둔이라는명칭으로선희궁에부속시켜도조를책정하는것을묵인하되결세보다낮은수준에서타협한것으로이해된다. 그러나이러한비합법적이고중세적인타협적관계는결국근대적토지소유권제도가발달하고특히내장원에의한국가적지주제가강화되어가는과정에서그소유권마저잃고마는결과를초래하였다. 그것은 1901 년 10 월전국에소재한선희궁구관둔토의내장원이속조치와 * 함께이토지가내장원에부속되면서구체적으로현실화되었다. 내장원은토지의성격을논하지않고둔명으로기재된모든토지를관유지로파악하여이제자신이토지소유자로서새롭게사검정도하고자했기때문이다. 이미이해는궁방전외모든둔토와역토가내장원에부속하여역둔토사검이일단락된상태여서새로부속한의정부둔토의도세는더욱비교되었을것이다. 가을에사검위원으로내려온내장원봉세관은상 중 하 3 등토품제에따라두락당각각 6 2 두씩을차등정도하였을뿐만아니라, 공사토를막론하고지대를정액제인도조로책정하였을경우결세는마땅히작인이부담하는관례를 * 적용함에따라자신들을실질적인토지소유주로인식하고있던이전답의경작자들은일토양세임을들어부당하고억울한사정을호소하기도하였다 ( 사료 2). 실제로이때사검정도한장부인 내장원소관양주군의정부둔전답조사정도성책 ( 內藏院所管楊州郡議政府屯田畓調査定賭成冊 ) ( 규 20709) 에의하면답 145 필지중구진 ( 舊陳 ) 8 필지 (35 두락 ) 를제외한두락당평균도조가 3.76 두로정도 ( 定賭 ) 되고있음을알수있다.

324 이는이번이둔토사검시에적용한중답 1 두락도조기준인 4 두에못미치는수준이었지만이전선희궁구관시기의도세보다는배가된것이었으며 ( 사료 4),* 무엇보다도이들작인은다시상 중 하품등별로부과된결세 ( 사료 4) 를별도로군에납부해야했으므로 ( 사료 2, 3, 4) 둔민들의전체적인부담은전보다엄청나게과중되었다. 말하자면이전의실질적인자작지에서내장원의완전한소작지로전락한처지가되었던것이다. 이전선희궁구관시기의납조례 ( 納租例 ) 를회복하여실질적인소유권을유지하고자했던초기의청원서활동 ( 사료 2) 은곧바로호세가를중심으로한도조의거납운동으로나타났고그결과내장원이사검한첫해 (1901) 의도조는이듬해 5 월이되도록 태반미수 ( 太半未收 ) 되기에이르기도하였다.* 그러나아무리이둔토의존재형태를통하여사유지였음이인정된다고하더라도실질적인증빙서류가구비되어있지않는한국가권력을상대로소유권투쟁을전개하는것은쉽지않았을것이다. 이러한상황에서이들은도세의감하를요구하는등소운동을전개할수밖에없었다 년 5 월말부터 8 월에걸쳐군과내장원에각각등소 ( 等訴 ) 하여도와결을이처럼독징 ( 督徵 ) 하면전답주는토지를버리는것만같지못하여마침내전답은방치되어황폐해질것이며농민이안심하고농사를지을수없으므로장차이산할수밖에없다고호소하였다. 그리하여인근갑사둔의예에따라토품에관계없이매두락에 2 두씩대전봉도할것을요구하고현실적으로실현가능한방법을스스로제시하기도하였다 ( 사료 3).* 갑사둔의토지에비하면의정부둔은토지품등이후하다는논리로내장원으로부터거부당하자의정부평과갑사둔이한지경 ( 地境 ) 에소재하여우열이없다는현지의실증과더불어 11 월에같은내용으로재차등소하였음에도불구하고결국한결같이실제결수대로준납하라는지령이내려졌을뿐이들의요구는수용되지않았다.* 내장원은기본적으로이토지를유토둔토로파악하여자신의확실한소유권을토대로사검정도하고이에대한농민층의저항에대응하였다 년의사판은선희궁구관시기의턱없이헐한도조를지주의입장에서새롭게정리하여현실화한것이었다. 또한지대를도지 ( 賭地 ) 로정한즉결세는마땅히작인이담납 ( 擔納 ) 해야하고또한토지품등에따라정도하였기때문에타둔 ( 他屯 ) 의예와비교할수없으며, 납세거부나수도를방해하는경우는지방의행정력 ( 공권력 ) 을동원하여엄하게조처하였다. 한편 1900 년 9 월에내장원으로부속된역토의경우는이미을미사판으로전체적인조사및정도가이루어졌을뿐만아니라이후군부, 탁지부에서철저히관리해왔기때문에역토조사를전관 ( 專管 ) 하기위한봉세관파견훈령 * 내용과는달리실제에있어서는특별한사검작업이필요하지않았다. 다만역토의소관부처가바뀌면서도세가증액되어왔음에도불구하고내장원은역토의도세가헐하다고보고지역에따라가도 ( 加賭 ) 를책정하기도하였다.* 원래정해진도지외에추가로거두는도지는역토작인들의저항을초래했는데 6 개의역이위치한양주군에서도예외는아니었다. 특히녹양역토 ( 綠楊驛土 ) 작인들은 1901 년정월에녹양리 입석리 ( 立石里 ) 등 11 개지역작인 87 명의연명으로내장원에발괄하였다. 지난해에는한재로인해거개가진황되었음에도불구하고장정의정식에의거하여납상 ( 納上 ) 할수밖에없어백지징세 ( 白地徵稅 ) 라는원망이많은데다가금년들어갑자기도조를첨가하여전 1 일경에는 2 두, 답 1 두락에는 1 두 6 승을각각배정하여순교 ( 巡校 ) 를보내독봉함에따라집단적인호원이발생했던것이다. 더구나녹양역토의경우비옥한상 중의전답은각능의위토로부속되어나머지는하전하답 ( 下田下畓 ) 이대부분인데도불구하고별도로가도한것이작인들을크게자극하였던것이다.* 이들녹양역하등전답작인들은 3 월에동일한내용을한차례더호소하였지만내장원지령은다음과같이여전히부정적이었다. 5 전에정한도조는지극히헐하여경자년 (1900) 부터별도로가도를책정하였으니견감할수없다. 이후부터는해역 ( 該驛 ) 의도조를상납할시기에민원에따라해동의영소임 ( 領所任 ) 으로하여금그것을거행하게하고전마름을시행하지말것 (3. 20).* 추가로배정한가도는봉세관이나마름의임의에의한것이아니라지주경영을강화해가고있던내장원이공식적으로인정한내용이었다. 그리고이지역역토에서는경작권과관련된분쟁도발생하였다. 녹양역토의경우는위내장원의지령에서와같이 1901 년부터마름대신에민원에따라그동의영소임으로하여금도세의수봉상납을담당하게함으로써 * 이들전마름및영소임과이들을사칭한유력자들에의한탈경 ( 奪耕 ) 이작 ( 移作 ) 조치로분쟁이발생하였다.* 녹양리에거주하는이면용 ( 李冕容 ) 은 * 마름도아니면서본군혹은봉세관의차첩 ( 差帖 ) 이있다고칭하면서이작 탈급 ( 奪給 ) 하였고, 작인들로부터협잡배로불린김한욱 ( 金漢旭 ) 은실제로녹양리영소임가운데한사람으로서 * 자칭내장원봉세관의임무를부여받았다고하면서임농탈경 ( 臨農奪耕 ) 을일삼았다. 경작권을둘러싼분쟁가운데작인이선용 ( 李先用 ) 이경작하던전반일경과답 3 두락의경우는한해에 2 번이나탈경되었다가회복되기도하였다 년 3 월에이면용이그것을빼앗아정천여 ( 鄭千汝 ) 에게주었으나작인들이내장원에등소한회지령 ( 回指令 ) 으로경작권을되찾아농사철이되어기경낙종 ( 起耕落種 ) 할수있었다. 그러나곧이어 4 월에는잉구경작 ( 仍舊耕作 ) 하라는내장원의제지를자칭봉세관이라고하는김한욱에게압수당하고소경전답도다시빼앗겨비우점 ( 碑隅店 ) 에사는박장안 ( 朴長安 ) 에게지급되었는데, 이번에도이선용은내장원에재차발괄하여경작권을회복하였다. 이외에도장치장 ( 張致章 ) 박치소 ( 朴稚紹 ) 장경중 ( 張敬仲 ) 및양성오 ( 梁成五 ) 가각각전반일경씩을이면용에게탈경당하였고, 이원재 ( 李元載 ) 의전반일경과답 3 두락은영소임들이탈경하여이복성 ( 李福成 ) 에게이작하였다. 그리고이미기경낙종한장상복 ( 張尙卜 ) 의답 6 두락도김한욱에게임농탈경되었으나이들작인들은대체로자신들의발괄및원정 ( 原情 ), 심지어는영소임들의청원및발괄을토대로내장원이판단하여내린지령에의해서경작권을회복하였다. 작인이도조를납부하지않거나타지역으로이거한경우마름이간혹이작하는것은이치에타당하겠지만, 탈경당한대부분의작인들은수년동안무폐경작 ( 無弊耕作 ) 하였고 1900 년에는한재로인한흉년임에도원도 ( 原賭 ) 외에가도까지상사 ( 上司 ) 의지위 ( 知委 ) 를준행하여각별히수납 ( 輸納 ) 했던신실한자들이었기에내장원에서는 경자년 (1900) 작인으로잉구경농 ( 仍舊耕農 ) 케 하도록지시하였다. 또한임농탈경은불법적인것으로처리되었다. 이와같이소유권과관련되지않은분쟁에서내장원은일단공적인위치에설수있었고지주경영의합리화를통하여도세수입을안정적으로확보할수있으면되는것이었다. 지주경영에서가장중요한것은지대의수취인데, 적당한지대를책정하고안정적으로그것을수취하는것이다. 내장원의광무사검도결국내장원소유의토지를조사하되전답의소재지와면적을파악하여토품에따라도조를책정하고아울러지대 ( 도조 ) 의납부를안정적으로할수있는작인을파악하는일이중심을이루고있었다. 더구나내장원의지대수취강화과정에서양주군소재평구역토작인들이흉년에타조제를요구한것은결코수용될수없었다.

325 평구역토의경우는 1894 년승총 ( 陞總 ) 이후, 구체적으로는을미사판이후도세를책정해놓고도실제에서는마름이작인들로부터타작례에따라수조하여그중에서도조는부원 ( 部院 : 農商工部 軍部 度支部 內藏院 ) 에납부하고결세는본군에납부함으로써별도로작인들에게결세를책징하지않은것이 7 8 년의관례였다. 그런데 1901 년 7 월에차정되어 1 차간평 ( 看坪 ) 한내장원평구역토마름고성일 ( 高聖一 ) 은그해큰흉년으로인해상납도조의수취마저어려울것으로예상되자역토에서도지로영정 ( 永定 ) 된원칙을적용하여도조 결전을작인에게책납하게함으로써분쟁이발생하였다. 평구역토작인들은풍년에는타작하여분반 ( 分半 ) 하고흉년에는도조로정하여결세까지매기면무고한잔맹 ( 殘氓 ) 이어찌살아갈수있으며, 이렇게토지에일정한규정이없고민이안도할수없으면공토는버려지고민은흩어질수밖에없다고호소하였다. 그러나내장원은마름이중간에서작간한것은불법적인것이니지방관으로하여금금단하게할것이나도세는내장원의사정실수 ( 査定實數 ) 에따라준납하고, 아울러정도인경우결세는마땅히작인의담납이니그간마름의종중작간 ( 從中作奸 ) 을빌미로다시마름에게결전을책징할수없다면서원칙론으로조처하였다.* 매년타작으로탁지부에상납해왔던양주어등산 ( 於等山 ) 원대 ( 院垈 ) 소재역답 15 두락의경우도마찬가지였다.* 지방현지에서목민하는지방관의판단과국유지의지주로서의내장원의조처는사뭇다를수밖에없었다. 한편내장원은양주군의각역토 둔토에서마름이나영소임을둘러싼사적인폐단을방지하고공적으로는도세건체의폐단을막아지방행정과내장원의역둔토관리를효율적으로하기위해 1902 년 8 월부터군에서각역둔토도세의수봉상납 ( 收捧上納 ) 을전관하도록허용하였다.* 또한그해흉년으로인해도조를사정실수에의거하되본곡이아니라시가에따라대전봉납토록허용하였다. 뿐만아니라시가에따른대전책봉 ( 代錢責捧 ) 도실곡 ( 實穀 : 사정실수 ) 을토대로하되그해실질적인수확량을참작하도록하였고, 지역에따른곡가차이도인정하여실질적으로효과를볼수있도록본군에도세수납일체를일임하였다.* 내장원의도세수취에대한엄격성을고려할때매우예외적인조처로생각되나흉년과결부된현실을인정할수밖에없었던것으로보인다.

32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2 절지주제와근대적토지소유 * 2. 역둔토조사와지주제변동 3) 일제통감부시기의역둔토정리와실지조사 이후통감부시기의역둔토조사는실질적으로권력이통감부로전이된상태에서일제에의해추진되었다. 조사주체의변동은그목적의변화를수반하기마련이다. 러일전쟁이후구한국에서독점적권리를확보한일제는한국을그들의자본주의발전에걸맞은식민지로경영하기위해통감부를설치하고실질적인통치를강화해갔다. 일제는우선황제권을강화하여국왕을중심으로한 구본신참 의주체적인노선으로근대적개혁을추진해가던대한제국의기본정책에제동을가하였다. 우선은국왕을온존시킨채, 국왕및정치 경제의전반적인면에서막강한영향력을행사하던궁내부의권한을축소하기위해 1905 년이후두차례에걸쳐황실제도를전반적으로정리하고이와더불어황실재정도순차적으로정리하였다. 특히황실재정의정리는국유재산, 곧국유지의확대와개편으로이어졌는데그전과정은크게두단계로나누어볼수있다. 하나는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 ( 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 ) 의제실재산정리 ( 帝室財産整理 ) 와국유화조치이고, 다른하나는임시재산정리국 ( 臨時財産整理局 ) 에의한각사궁장토 ( 司宮庄土 ) 를포함한전역둔토의조사 정리였다. 궁중및부중 ( 府中 ) 사무의분리와아울러국왕과왕실의사유재산과국유재산을조사하여구분할목적으로 1907 년 7 월에내각 통감의지휘와감독을실질적으로받고있는 소속의기구로설치된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은먼저경리원소관잡세를국고로이속시키고, 경리원의수조관을폐지하여경리원및각궁사무정리소의 1907 년도수조업무를탁지부에위탁시킨후, 1908 년 6 월에는궁내부소관일체의부동산을포함한전역둔토를국유화하였다. 또한 1907 년 11 월황실제도가일단정리되고, 경리원, 각궁사무정리소, 그리고제실제도국 ( 帝室制度局 ) 내의임시정리부등궁내부내의재정관리및정리기구가폐지됨에따라제실재산정리국이궁내부소속으로별도로설치되었지만, 궁내부의주요재산이국유화되는과정에서그기능은크게축소되었을뿐아니라결국에는황실재산의국유화작업을보조하는역할에그치고말았다. 그리고이와같이탁지부를중심으로한국가재정기구의실질적인일원화와권력기구의개편은근대민법적차원을토대로한토지가옥증명규칙및그보완법규로써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 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 ) 과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등의법제적인조처와함께실시되었다. 그러나이러한일련의개혁적조치는한국민의실존적모순을해결하기위한현실적인조처가아니라일본인을비롯하여외국인을포함한부르주아적객관주의에의거한것이었다. 봉건적인것에대항하는 근대적 이라는당위성에의해무한히합리화될성질의것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일제의한국강점 지배를위한사회경제적, 제도적, 법제적인기초를마련하는것에불과하였다. 일제에의한역둔토조사의단절성은여기서강조될수있다. 일제통감부는사궁장토를포함한전역둔토를국유지로확대하여탁지부로이속한뒤 1908 년 7 월에임시재산정리국을설치하여일단이관된문부를중심으로역둔토를조사 정리하였다. 동시에역둔토의수조업무와관련하여탁지부의사세국 ( 司稅局 ) 과지방의재무감독국및재무서를통해현지의전마름등이소지한장부를대조하여토지의소재와면적, 수확그리고작인을조사하여대장을작성하고역둔토관리규정등을마련하여관리를강화하였다. 그러나이듬해각지의의병활동이점차진압되어가는상황에서, 일제는국유화한역둔토를식민지강압통치의재정적기초로서확보하기위해서국유지의면적과작인및소작료를한층명확히파악할필요가있었고, 전국의토지조사사업에앞서국유지의소유권을배타적으로확보할목적으로역둔토실지조사를실시하였다. 또한 1909 년 5 월탁지부소관역둔토실지조사절차를발포하면서 60 개의실지조사반을편성하였는데탁지부관하각재무감독국의실질적인감독하에실시된역둔토실지조사에서는토지와작인및소작료를전면적으로새롭게파악하였다. 즉, 토지자체에대해서는그소재와면적을조사하되특히면적은측량조사를통하여절대면적을파악해나갔다. 동시에역둔토조사가기본적으로지주조사인한작인과지대에관한조사는근본적인것으로실지조사에서는현실의경작자를역둔토국유지의작인으로파악하여중간소작인을철저히배제시켰다. 소작료도이전에작인이부담하던내용과는무관하게동리별또는면별로민간소작지를토대로한표준지조사를실시하여국유지의등급에따라필지별소작료를전면적으로다시전정 ( 詮定 ) 하였다. 소작료자체가실질적으로각지역의민간소작료수준으로현실화함에따라국유지도이제지주인국가에의해, 구체적으로는일제의통감부에의해일반민유지에서와같이배타적으로관리를강화해갈수있었다. 그것은신분제적인질서에의거하거나공권력을배경으로하기이전에배타적인소유권에입각한지주적경영에의거한것이었다. 요컨대구한말의역둔토조사에서국가소유의토지를국가자신이조사하는경우에있어서는기본적으로지주조사의성격이관철되고있었다. 농상공부에의한역토조사에지주조사의초기적성격이반영되었다고한다면, 대한제국기내장원에의한목역둔토의조사에서는전국적토지조사에앞서국유지에대한소유권을배타적으로확보하고자하는방향으로전개되었으며, 이후도조의현실적인상과함께조사의지주적성격이한층강화되어갔다. 그리고일제통감부시기의조사에서도조사주체의전이와구별하여역둔토조사자체를중심으로그성격을살펴볼수있다면, 기본적으로내장원의지주적조사를계승하여다만민법적체계를바탕으로절대면적에대한소유권을확보해갔다고할수있겠다. 국가자체의공적기능과는별도로현실에서의사유체계가근대법적토대위에서진전됨에따라국유지에대한소유권과그것을기초로한국가의국유지경영도아울러변화되어갔다고할수있다. 이와함께내장원의역둔토조사를광무연간의양전사업과더불어대한제국기의국왕을중심으로한주체적성격의근대적개혁으로상정할수있다면, 일국적 ( 一國的 ) 의미에서의근대개혁의재정적토대로작용하였을것으로보인다.

32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대한제국은 1904 년러일전쟁으로국가의존망을위협받는심각한상황에처하게되었다. 전쟁에앞서대한제국정부가발표한전쟁중립화선언이영향력을발휘하지못함에따라이제한반도는러 일로대표되는제국주의열강들의각축장이되었다. 그리고영국과미국의지원을받은일본측진영이승리함으로써한국에대한지배권을확보한일본은본격적인한국식민지화에들어갔다. 러일전쟁직전한일의정서를통해한국에대한시정개선을권고한일제는이를바탕으로제 2 차한일협약을강제로체결하여한국의외교권을박탈하고보호국화를달성하였다 년 1 월서울에는통감부, 지방에는이사청을설치하고초대통감으로이토이등박문 ( 伊藤博文 ) 이부임하여한국은사실상식민지로전락하였다. 이후일제는한국을무력화시키기위해군대를해산하고일본헌병이한국경찰권을접수하였으며사법권과감옥사무를박탈하였다. 뿐만아니라민족저항을분쇄하기위해 신문지법 보안법 출판법 등각종탄압법을제정하여식민지지배를위한법적토대를마련하였다. 이처럼일제에의한국권침탈이가중되자민족적위기를타개하고국권을회복하려는국권회복운동이한반도전역에서불길처럼일어났다. 국권회복운동은당시국가의존립과관계된민족운동이었던만큼지역과계층을망라한거국적인반일운동이었다. 국권회복운동에서주류를이루었던것은당연의병운동으로일제의가혹한탄압에맨몸으로맞선의병들의희생은비록식민지화를저지하지는못했지만, 일제의식민지지배정책수행에상당한타격을주었다. 한편의병운동과같은무장투쟁외에도교육과계몽을통해민족을각성시키려는교육구국운동과대일부채를청산하여일제의침탈을저지하고자했던국채보상운동도모두국권회복운동의일환으로전개된것들이었다. 당시행정구역상양주군에편제되어있었던남양주지역은서울과인접한까닭에수도방어의외곽지대에해당하는군사적요지였을뿐만아니라수도서울과경기서북부, 강원도, 경기이남을잇는관문으로교통과상업이발달한지역이기도하였다. 이러한지역적중요성으로인해 1908 년에는연합의병부대였던 전국 13 도창의군 이서울진격을계획했을때집결지가되기도하였다. 이처럼남양주지역은사회경제적 지리적요인으로일제의핍박과침탈이집중되었으며, 이에대한저항으로의병투쟁도더욱활발하게전개되었다. 한편서울과가까웠기때문에신학문의수용과이해도다른지역보다용이하여각지에많은사립학교가설립되면서교육운동또한활발하게이루어졌다. 이글에서는남양주의지역적특성을염두에두고이지역에서전개된국권회복운동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이를위해먼저일제의식민지지배정책이지역단위에서는구체적으로어떻게나타나고있으며이것이남양주민에게어떠한피해를주었는지알아볼것이다. 그리고남양주지역국권회복운동을의병운동, 학교설립을통한교육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으로나누어검토하고자한다. 이를통해경기의병의거점으로역할했던남양주의병의활동과통감부의식민지적교육통제정책속에서도남양주전역에사립학교를설립했던남양주민의교육열, 외채를갚기위해성금을모금하던남양주민의국채보상열의와결집된힘등을확인할수있을것이다.

32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제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1. 일제의침탈과지역민들의피해 1906 년한국에통감부를설치한일본은본격적인식민지화기초작업에들어갔다. 통감부에서추진한식민지화정책은다방면에걸쳐있었지만그중에서도재정제도와헌병경찰제도의확립은핵심적인사항이었다. 이것들은대체로지방제도개편과맞물려진행되었는데그수탈성으로인해현지의일반민중들은직접적인피해당사자가되었다. 특히헌병경찰은통감부가추진하는식민지정책을용이하게하는한편, 이에저항하는민중을억압하는무력적기반이었다. 반일의병운동이확산되면서이러한억압기구도더욱증가하여남양주지역의금곡과광릉에수비대가, 별비면 ( 別非面 ) 퇴계원, 초부면 ( 草阜面 ) 봉안 ( 奉安 ), 주포 ( 周浦 ) 에는헌병분견소가파견되었고, 여기에순사대까지포진해있는상황이었다. 그런데당시양주군이담면 ( 伊淡面 ) 유산리 ( 杻山里 ) 와둔야면의정부에파견된헌병분견소를제외한헌병수비대대부분이남양주지역에집중배치되어있었던사실에서이지역의중요성을확인할수있다. 이는 1909 년 3 월 8 일현재양주관내헌병총인원은 8 명, 분견소외임시주둔한 4 개소합계 100 여명, 상비수비대 90 여명에 15 일용산수비대에서파견한 1 대대를합해헌병수비대총수는 300 여명에달한다. 고 * 한경부 ( 警部 ) 김윤복 ( 金允福 ) 의보고내용을통해서도알수있다. 이렇듯남양주지역이일본군의집중공격대상이되었던것은후술할남양주의지역적특성과이를기반으로한활발한의병투쟁때문이었다. 그런데문제는의병토벌이라는구실하에자행된일본군의무차별적인탄압으로이지역주민들이막대한피해를입었다는점이다. 의병투쟁이가열되는만큼의병탄압도가중되어주민들은그사이에서이중의고통을감내해야만했다. 다음에서는남양주지역에주둔한일본군의침탈사례를통해지역주민들이받았던피해정도를살펴보고자한다. 남양주지역주민들은인력동원남발에서가옥및재산손실, 인명살상에이르기까지다양한형태로침탈당하고있었다. 이러한가해주체가이지역에주둔한수비대, 헌병분견대, 순사대소속일본군과그하수인인헌병보조원, 이들을배경으로한일본인들이었음은말할나위도없다. 당시일본인들은이지역에파견된일본군의힘을믿고지역민을침탈하는경우가많았는데 일본인장곡 ( 長谷 ) 이상도면 ( 上道面 ) 판곡 ( 板谷 ) 궁평 ( 宮坪 ) 과금촌면 ( 金村面 ) 금곡역에목재공급을강요하는데상납할나무가없으니선처해달라. 는양주군수홍태윤 ( 洪泰潤 ) 의보고처럼 * 물자를강요하거나, 일본인이마을을돌아다니며자기집물건처럼값도지불하지않고닭과계란을빼앗아가면서만약닭이나계란이없다고하면집안을뒤지며행패부리는 * 경우도있었다. 한편남양주지역에의병투쟁이활발해지면서의병색출을명목으로한일본군의침탈도갈수록극심해졌다. 금곡에서는수비대병사들이민가에난입하여음료와땔감을함부로가져가는바람에부녀자들이겁에질려지냈으며,* 광릉수비대는인근마을면장에게매월닭수천마리를제공하라고독촉하면서대금은지불하지않아지역민들이생활을유지할수없는지경에이르기도하였다.* 일본병사들의침탈행위는이것만이아니었다. 무고한인민을의병으로오인해살상하는가하면의병을수색한다며민가에불을지르는일도빈번하게발생하고있었다.* 그러나무엇보다이지역주민들을공포에몰아넣은것은의병관련자라는무고한혐의였다. 이는다분히자의적이어서누구라도혐의를받을수있었고, 특히대대적으로의병토벌을전개한 1909 년부터는무차별적인의병관련혐의때문에주민들이생업을포기하고고향을떠나기까지하였다. 가령 1909 년 4 월에는이지역에내려온순사대가각면장과이장을의병과관련되었다는혐의로체포, 형벌을남발하여민원이자자했으며, 순사들이각마을을다니면서양민들에게의병관련혐의를씌우고무수히작폐하는바람에인민들이곤란함을이기지못해경성으로도피하는자가부지기수일정도였다.* 그런데지역민에대한침탈행위는일본군이나순사, 일본인에국한된것이아니었다. 이지역헌병분견소의말단하수인인헌병보조원의작폐또한이루말할수없었다. 더욱이이들은같은한국인이라는점에서민족적배신감까지불러일으키고있었다 년 10 월퇴계원주재일본헌병분대보조원들이풍양 4 동인민을부대근처로불러무수히구타하고공갈협박하여돈을갈취하더니, 이듬해 1 월에는별비면각민가에식수요금이라는명목으로강제로돈을걷었다.* 이러한불법행위와토색은접동면 ( 接東面 ) 장생리 ( 長牲里 ) 에주재하는헌병보조원들도마찬가지여서죄가없는촌민들이모두흩어질지경에이르렀다.* 뿐만아니라초부면고안헌병분견대에서는통역하는서광식 ( 徐光植 ) 이면장과이장을잡아다의병에게주기로한전곡 ( 錢穀 ) 을내놓으라며구타하는가하면, 민간의유부녀를의병가족이라는혐의로체포해첩으로삼는등무수한횡포로원성을사고있었다.* 이처럼남양주지역은의병투쟁과이를토벌하려는일본군의일대접전장이었고, 그와중에일본수비대, 헌병분견대, 순사대등의가중되는침탈과만행으로지역민들이받은피해는실로막대하였다. 더욱이군수와각면장들이서울로도망함에따라 * 행정마비와치안부재상황을초래하였고, 의병수색이라는구실로자행된일본병사와헌병보조원들의행패를견디지못한지역민들은결국생활터전을버리고떠나야하는비참한지경에이르게되었다.

32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제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2. 경기지역의병투쟁과남양주 1) 경기의병의거점, 남양주 수도서울과인접한경기지역은사회경제적으로는물론군사적으로도중요한지역이어서이곳의의병활동은일제에게큰위협이아닐수없었다. 특히남양주를비롯한양주지역은경기서북부와강원도, 경기이남지역에서서울로들어가는관문으로일찍부터교통과상업이발달한지역이었다. 때문에 1908 년 전국 13 도창의군 의서울진공을위한집결지가되었던것처럼경기지역의병활동의중심지로서역할하였다. 그런가하면일제의탄압을피하고그들을교란시키기위해의병부대간의연합과분산을거듭하며끊임없이이동하던경기의병의분산과집결의중심지이기도했다. 남양주를비롯한양주지역이경기의병에서차지하는비중은 1907 년말에서 1908 년초이지역을중심으로전개되었던전국 13 도연합의병의서울진공작전을통해알수있다. 13 도연합의병부대의결성은 1907 년 9 월원주에서관동창의대진소를결성한의병장이인영 ( 李麟榮 ) 이 5 적 7 간 ( 五賊七奸 ) 을죽인연후독립을꾀하기위해 서울로진격할계획을세우고각지의병부대에격문을보내양주에모이도록한데서비롯되었다. 그리하여 1907 년 11 월말이인영부대를비롯하여허위 ( 許蔿 ) 부대등무려 48 개부대 1 만여의병이양주에집결하여 12 월 13 도창의대진소 를결성하고이인영을총대장으로추대하였다. 연합의병의서울진공작전은 서울로쳐들어가통감부를타격하고성하 ( 城下 ) 의맹세를완수하며, 종래의신협약등을파기하는대대적인활동을꾀함이라. 고한것처럼서울을군사적으로점령하고정치적으로유리한위치에서통감부와국권회복문제를담판하기위해서였다. 연합의병부대는먼저군사장허위의선봉대가동대문밖 30 리지점에도착하면뒤이어총대장이인영이인솔하는후속본대와창의대장이이끄는의병들이진군하여일시에서울을공격할계획이었다. 그러나후군의진군계획에차질이생긴데다가부친의사망소식을접한이인영이귀향하면서각진에의 ( 義 ) 를중지할것을지시함으로써서울진공작전은무위로끝나고참가했던각부대는본래활동지로흩어지고말았다. 비록실패로끝나기는하였지만서울진공계획은당시일제와친일파대신들에게큰위협을주었다 년 1 월 양주군의병이결사대를만들어대신들을살해한다는풍설이있어헌병사령부에서헌병을파견해대신들의집을보호 하는가하면, 양주 포천등지의병이서울로들어온다는소문에일본군이동대문밖에대포를설치 하기도하였다. 또한양주를거점으로의병부대들이서울로진격하기위해정탐하고있으며서울에입성한다는등의소문이그후에도계속되어끊임없이일제를긴장시켰다 년 3 월에는양주군에서다수의병이동지를규합하여경성을습격한다는소문에경관 50 여명을양주로파견하였다. 또한 의병장이은찬이의병 700 여명을이끌고양주지방을횡행하며조만간서울로입성한다. 고하였으며, 양주군에출몰한의병이서울에들어와형편을정탐함에헌병사령부에서각방곡에정탐객을다수파견 하기도하였다. 이러한사실을반영하듯 1909 년 3 월말에서 4 월사이에는임진강유역과양주를중심으로한관동창의원수부 ( 關東倡義元帥府 ) 가결성되어각부대간연합과분산을거듭하며의병운동을고양시켰다. 이처럼양주지역은의병운동의최후진격지인서울로진출하는길목이자교두보였던만큼의병운동에있어지리적 군사적으로중요한지역이었으며연합의병운동의중심거점이되었던곳이다. 한편의병운동에서양주지역이차지하는중요성은다음자료를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당시양주지역에는경기의병의대표적의병장인이은찬 윤인순 정용대의병부대가활약했는데, 이들이양주에근거하는이유를일제는다음과같이파악하고있었다. 첫째, 세의병장의출생지가양주이거나양주인접지역이라는점이다. 이은찬이강원도원주, 윤인순과정용대가각각양주군석적면 ( 石績面 ) 과적성군남면출생이어서이들은양주지역에대한지리적인감을갖고있었다. 둘째, 지역민의도움없이거점확보나활동은불가능한데의병에대한양주지역주민들의호응은일제당국도우려할정도였다. 특히이은찬의경우양주지역민심이대단하였다. 군자양식을징발함에인민에게고통을주지않아부하의병은물론지방인민들도그덕에감동하여이은찬을대장혹은각하라칭하며, 완미한백성은기뻐이를영접하고후원하여항상토벌대의타격을면한다. 고한것처럼지방인민들의지지와후원으로오랜기간이지역을거점화할수있었다.

33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제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2. 경기지역의병투쟁과남양주 2) 의병투쟁의전개와양상 (1) 의병장과의병부대 경기의병에서남양주지역이차지하는지리 군사적중요성과거점으로서의역할은이미앞에서살펴본바와같다 년일제의무력탄압속에서도이지역을중심으로한경기의병운동은활발하게전개되었다. 특히남양주를비롯한양주지역은그중요성으로인해경기의병가운데많은의병부대의근거지가되었던곳이다 년 8 월 1 일 ( 군대해산 ) 부터 1910 년 8 월 29 일까지경기지역에서활동한의병장 140 명가운데양주를근거지로활동하거나이지역에서한번이라도활동한의병장은모두 52 명 (37%) 에달한다.* 이또한양주지역이경기의병에서차지하는위치를보여주는단적인예가될것이다. 많은의병부대가이지역을무대로활동하였지만, 이가운데서도특히남양주지역을근거지로활약한대표적의병장으로는이은찬 윤인순 정용대 강기동등을꼽을수있다. 이은찬 윤인순 정용대의병장은 1908 년결성된관동창의원수부에서각각원수부중군장 우군장 좌군장을맡아 * 1909 년 3 월의병대토벌때까지이지역을중심으로경기동북부지역에서맹활약하던의병장들이었다. 한편강기동은일제의대토벌로의병부대들이큰타격을입은 1909 년상반기부터 1910 년까지앞선의병장들의맥을이은가열찬투쟁을전개하여일제당국을놀라게했다.* 13 도연합의병결성과관동창의원수부조직에주도적역할을했던이은찬은강원도원주군부흥사면 ( 富興寺面 ) 의유생으로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에서명성이높고언제나정의를표방하여지역민들의신망을받았다. 독자적인활동보다는주로원수부각부대와연합하여활동하면서각군의서기와면장등에게격문을보내군자금을확보하거나, 창의원수부각부대사이의갈등을해소하는등후견적인입장에서경기의병을지원하는데주력하였다. 그러나 1909 년 3 월일제의대토벌이감행되자이은찬은부대를해산하고경상도에서다시의병을일으킬계획으로서울을지나가다 3 월 31 일용산정거장부근에서체포되어 6 월 15 일처형당했다. 농민출신인윤인순은허위부대의부장으로있다가창의원수부우군장이되어양주를근거지로파주 적성 포천 영평등지를옮겨다니며일본군과친일관리, 한인순사및헌병보조원등을처단하는데주력하였다. 이러한노력으로양주군유산리헌병보조원 5 명이무장한채의병에투신하였고, 양주군고안헌병분견소헌병보조원강기동이수감중인의병을구출하여의병에투신하는등, 일제의토벌군을교란시키고의병대열을강화하는데크게이바지하였다. 윤인순은일제의대토벌와중인 1909 년 3 월 16 일적성군동면 ( 東面 ) 문암리 ( 文岩里 ) 에서삭령수비대와격전을치르다전사하였다. 경기서북부지역에서활동하던특무정교출신정용대가양주지역으로근거지를옮긴것은 1908 년봄이었다. 이때윤인순부대와연합하여서기로활동하다가원수부가결성된뒤원수부좌군장이되었다. 정용대는 명단위의소규모부대를형성하여독자적으로활동하였는데주로유격전술을구사하였으며필요에따라다른부대와연합하기도하였다. 정용대부대는주로이은찬 윤인순부대와연합하였는데, 당시이들은양주지역의 3 인방으로일제의요시찰대상이었다. 그는 1909 년 9 월 9 일적성군남면덕도리 ( 德道里 ) 어느주막에서적성헌병에게체포되었다. 대토벌이후남양주지역에서가장활발한활동을벌인의병장은강기동이었다. 강기동은원래고안헌병분견소헌병보조원이었다가붙잡혀있던의병들을탈출시킨뒤이은찬부대의선봉장으로활동하였다 년 3 월이은찬이체포되자스스로원수부중군장이되어양주 포천 가평 영평등지를넘나들며활약하였다. 강기동의활약상은일제가강기동을체포하려고그의목에천금의현상금을내건데서도단적으로드러난다. 강기동은 1910 년 11 월일제의대대적인토벌이시작되자국내에서는의병항쟁이불가능하다는판단아래북간도로이동하던중 1911 년 2 월원산에서체포되어처형당했다. 이처럼이은찬 윤인순 정용대등창의원수부의세대장을중심으로하는연합부대는각지의일본군수비대와헌병대를유린하며남양주지역과경기동북부지역을 1 년남짓 의병구 로만들었다. 일제는이렇게공세를펼치는의병들의활동에수비대 헌병대 경찰서만으로는손을쓸수없게되자결국 1909 년 3 월들어이지역을대상으로대대적인의병토벌을단행하였다. 그러나일본군의집중적인토벌로대다수의병부대가궤멸하는상황에서도강기동은연기우부대와연합 분진하는가하면때로는위장전술로토벌군을교란시키면서 1910 년마지막대토벌때까지끝까지항전하였다. (2) 의병투쟁의전개양상 남양주지역의병투쟁은 1908 년 3 월관동창의원수부결성과함께본격화하였다. 당시이지역의병투쟁양상은일제가파악한 경기도북부지방폭도현황 에잘나타나있다.* 이자료에의하면, 경기도북부폭도 ( 의병 ) 는작년 (1908 년 ) 3 월이래그수가점차증가하여적으면 명, 많으면 명이집단을이루어각처에출몰하며재물을탈취한다. 이은찬이윤인순 정용대 연기우등과합하여스스로수장이되어부장 참모 전령등을설치하고부대를나누어대오를조직했는데부하가많을때는 2500 명에달한다. 고하였다. 즉, 당시의병부대들은주로소규모편제에의한유격전을실시하면서때에따라서는부대간연합을통해전면전을구사하기도하였다. 또한 ( 의병부대가 ) 누차통고문을산포하여납세또는미곡반출의정지를명하고군자양식을징발하였으며, 혹은헌병보조원또는한인순사에게격문을전송하여이를유인하는등민심을소요시켜 ( 일제 ) 관헌의행동을방해할뿐아니라전신선을절단하고우편체송인을요격하며심하면헌병분견소또는수비대분견소를습격하는등발호하여이지방이 1 년간불온한상황이었다. 고 * 한것처럼의병투쟁양상은군자금징발에서헌병분견소습격까지실로다양하였다. 당시남양주등지를무대로활동한의병들은주로다갈색복장에신식총과단발총 화승총등을휴대하였고,* 적 ( 의병 ) 의행동을보건대 1 대가엄호하면 1 대가사격하는등진퇴의도 ( 度 ) 가있으며흩어짐이실로놀랄만하다. 고 * 한것이나 해산된군인과순사가합류하여군기가정연하다. 고 * 한것으로보아해산한군인들이의병에합류하면서조직적인군사훈련을실시하여전투력과군기가한층제고되고있었다. 또한부대내의부정한의병을처형하여다른의병의본보기로삼기도하였는데, 1908 년 11 월의병장이은찬과정용대는자의로민가를약탈한의병김인식 ( 金寅植 ) 이의병의면목을훼손하였다하여와공면율북리 ( 栗北里 ) 에서처형하고의병이됨을자랑스럽게여겼다.* 그러면남양주지역을중심으로전개된의병부대의활약상을살펴보도록하겠다. 앞서살핀것처럼의병들의투쟁양상은다양한형태로나타나는데먼저일제에대한적극적인대응형태로헌병분견소나수비대를습격하거나일본군과직접교전하는형태가있었다 년 12 월 19 일이은찬 윤인순혼성부대 140 여명이별비면퇴계원헌병분견소를습격하였으며,* 1909 년 6 월에는의병장이은찬의체포소식에격분한강기동등의병장 4 명이연기우와연락하여양주 파주 포천등군에주재하는일본헌병병참소를습격하기로통문을보내기도하였다.*

331 의병과일본헌병및수비대와의교전은매우빈번하여정확한교전횟수를파악하기어려울정도이다. 의병들은대개소규모부대를편성하여기습적인유격전술을구사함으로써신무기로무장한정규일본군에대항하였다 년 3 월 2 일의병 100 여명이내동면 ( 內洞面 ) 거묵동 ( 巨墨洞 ) 부근에서헌병대와교전한후진벌면방향으로퇴각하였으며,* 11 월 일에는이은찬 정용대연합부대가건천면오룡리 ( 五龍里 ) 등지에서두차례전투를치른후포천방면으로이동하였다.* 한편 1909 년의병대토벌이시작되면서부터는일본군의감시를피하고기민하게움직이기위해부대규모도더욱작아졌다. 따라서부대간연합보다는소규모인원으로기습적인타격을가하는유격전을전개하였는데이시기맹활약한의병장이바로강기동이었다. 강기동부대는 1909 년 7 월 6 일건천면독정리 ( 獨井里 ) 에서퇴계원및후평리헌병혼성대와격전을치르고와공면월곡리 ( 月谷里 ) 로퇴각하였다.* 1910 년 1 월 18 일에는건천면팔현리 ( 八賢里 ) 에서주포헌병과교전하였고, 3 월 8 일에는별비면덕릉리 ( 德陵里 ) 에서의정부헌병분견소소속일본군과교전하였다.* 또한 1910 년 6 월 5 일진벌면금곡리 ( 金谷里 ) 부근에서도일본군을공격하자일제는결국강기동을체포하기위해 1 개월예정으로포천군 3 개리와양주군송현리 ( 松峴里 ) 에임시파견소를설치하기에이르렀다.* 의병들은일본병참소를습격하고일본군과교전하는등의적극적공세외에도일본인및친일분자처단을통해민족적각성을촉구하기도하였다 년 1 월 29 일금곡등지로출장온동부경찰서순사박창식 ( 朴昌植 ) 을납치응징하였고, 11 월에는의병 70 여명이평구동에들어와의병에투신했다가귀화한사람들을처단하였다.* 헌병보조원도예외는아니어서 1909 년 2 월 13 일에는이은찬의부하 6 7 명이유산리헌병보조원조석근 ( 趙石根 ) 을내동면에서참살하고정대근 ( 鄭大根 ) 을억류하였다.* 그리고 8 월 2 일에는의병 50 여명이덕소부근에서단발한사람을납치하기도하였다.* 특히일제앞잡이노릇을하던헌병보조원의경우지역민에대한패악이극심하여민족적감정이좋지않았다. 이에의병들은헌병보조원과밀정들을처단하고때로는회유하면서의병진영으로끌어들이고자하였다. 한편의병들은지주 부민 ( 富民 ) 들의추수곡인소작미를탈취하고방곡령을실시하였다. 이는일본으로의미곡유출과반봉건적수탈로부터인민의경제생활을안정시키고자신들의군량미를확보하기위한것이었다.* 이에 1908 년 11 월별비면광암리 ( 廣岩里 ) 에서부민들의곡식을압수하고방곡하였으며, 12 월에는의병들이퇴계원및노원등지의마름에게신칙하여군량미와군수전을납부하라고협박하였다.* 또같은해 4 월 2 일에는의병 600 여명이와공면덕소리남단한강연안에정박중인선박 27 척을불태우고배에싣고있던미곡을모두소각하기도하였다.* 이는관내곡류가다른지방으로유출되는것을저지하기위한것이었다.

33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제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3. 사립학교설립과교육운동의전개 1) 통감부교육정책과사립학교설립운동의확대 1906 년 2 월설치된통감부는한국의식민지지배를준비하면서그일환으로식민지교육의기반을구축할교육정책을구체화하였다. 통감부의교육정책은한국의민족교육을억제하고일제의침략에대한한국인의저항을약화시키는방향으로추진되었다. 이를위해통감부는실용교육을강조하였는데이는한국인의정치적관심을근원적으로봉쇄하기위한조치였다. 통감부의교육정책은크게두단계로진행되었다. 제 1 단계는학제의전면적인개편을통하여관학의체제와교육내용을바꾸는것이었다. 이에따라 1906 년 8 월 27 일칙령제 44 호 보통학교령, 8 월 31 일칙령제 41 호 사범학교령, 제 43 호 외국어학교령, 칙령제 42 호 고등학교령 등새로운교육령을반포하여종래의교육관제및규칙을폐지하고각급학교의학제를개편하였다.* 제 2 단계는사립학교령과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통해민족사학을통제 억압하며애국적인교육내용을교육현장에서봉쇄하는것이었다 년 8 월 26 일자로 사립학교령 을공포한통감부는신규사립학교는물론기존의모든사립학교까지도소정의절차에따라학부에서인가받도록하였으며, 그후속조치로 8 월 28 일 사립학교령시행에관한훈령 을발표하여각지방관들에게 사립학교령 시행에따른구체적인내용을지시하였다.* 또한사립학교에서사용하는교과서를통제하기위해 1908 년 9 월 1 일 교과용도서검정규정 과 9 월 17 일 학부편찬교과용도서발매규정 을공포하였으며, 학교설립에적극적인학회활동을규제하기위한조치로 9 월 1 일 학회령 을발표하여학회설립도통감부의인가를받도록하였다.* 그러나일제의식민지적교육통제정책에도불구하고교육만이민족의각성과단결을도모하여국권을회복할수있는최선의방법이라고판단한각계각층의사회세력들에의해사립학교설립운동은계속확대되었다. 황성신문 이나 대한매일신보 등당시민족신문들도학교설립의필요성을강조하면서지방유지들로하여금학교설립의주체로나설것을촉구하였으며, 학교설립이나교육활동기사를통해널리국민들을각성시켜나갔다. 특히나라의급무가학교설립및인재양성에있다고하여 1906 년 3 월 26 일각부 군에학교설립을강조한광학조칙 ( 廣學詔勅 ) 이반포되자, 각지방에서는군수가봉칙 ( 奉勅 ) 의의미로학교설립에앞장섰으며지방유지들이중심이되어학교를설립하기도하였다. 이러한노력으로이시기에설립된사립학교수는 1908 년현재관공립학교를포함하여 5000 여개교, 학생수도 20 만명에달하였으며, 사립학교령 발표이후그수가감소했음에도 1910 년 7 월 1 일학부에서조사한결과사립학교수가총 2082 개교로집계되어전국각지로확대된사립학교설립운동의열기를짐작할수있다.* 경기도지역도예외가아니어서 1910 년 7 월현재각종학교 139 개, 종교학교 44 개로총 183 개교가설립되었다.* 경기도지역의사립학교설립을연도별로보면, 1897 년 1 개, 1898 년 1 개, 1899 년 6 개, 1900 년 5 개, 1901 년 4 개, 1903 년 4 개, 1905 년 13 개, 1906 년 21 개, 1907 년 33 개, 1908 년 84 개, 1909 년 38 개, 누계 210 개로나타나 1908 년 사립학교령 이공포될때까지계속증가하는추세를보이고있다.* 이러한사립학교설립운동은경기도지역각군으로확대되어 1910 년현재총 37 개군가운데 30 개군에사립학교가설립되었다.

33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제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3. 사립학교설립과교육운동의전개 2) 사립학교의설립과현황 사립학교설립운동은남양주지역에서도활발하게진행되었다. 남양주지역사립학교는통감부의교육통제가강화되는 1908 년이후에도꾸준히설립되었으며, 지역적으로도하도면 ( 下道面 ) 상도면 ( 上道面 ) 금촌면 ( 金村面 ) 초부면 ( 草阜面 ) 접동면 ( 接洞面 ) 건천면 ( 乾川面 ) 별비면 ( 別非面 ) 미음면 ( 渼陰面 ) 진벌면 ( 榛伐面 ) 등대부분지역에고루분포하였다. 그러면구국운동의일환으로전개된남양주지역사립학교설립운동현황을살펴보자. 통감부설치이후제일먼저설립된학교는 1906 년 1 월전군수정인호 ( 鄭寅琥 ) 가하도면직동 ( 直洞 ) 에있는자신의집에설립한동흥학교 ( 東興學校 ) 였다. 교장정인호는같은해 3월교과서와지지 ( 地誌 ) 역사 ( 歷史 ) 등을보내달라고학부에청원하는한편, 6월에는 1년에 1800원가량소요되는학교경비를충당하기위해수락산덕방불향답 ( 德方佛享畓 ) 과성사불향답 ( 聖寺佛享畓 ) 을부속시켜달라고내부에조회해줄것을학부에청원하기도하였다.* 이러한요청에학부에서도양주군향교답토를학교경비로사용하라고조치해주었다.* 궐리학교설립기사한동학교설립기사그리하여 9월 3일상도면과하도면의 40개동집강과유지들이참여한가운데성대한개학식을거행하였다.* 한편 1907년 3월에는하도면녹동 ( 鹿洞 ) 에서교장홍태윤 ( 洪泰潤 ), 교감이철용 ( 李喆鎔 ), 감독강수원 ( 姜秀遠 ) 등이일성학교 ( 一成學校 ) 를설립하였다.* 일성학교는동흥학교평의장으로있던이철용이교장정인호와뜻이맞지않자갈라져나와신설한학교였다 년 6 월에는숙장 ( 塾長 ) 조중응 ( 趙重應 ) 숙감 ( 塾監 ) 구연팔 ( 具然八 ) 조중은 ( 趙重恩 ) 등 7 명이금촌면양정리 ( 養正里 ) 봉수동 ( 鳳壽洞 ) 에봉명의숙 ( 鳳鳴義塾 ) 을세우고, 학교재정유지를위해교사들끼리동맹 계약을맺었다. 그러나계속된재정난으로 1909 년 5 월시장우전 ( 牛廛 ) 구문 ( 口文 ) 을학교경비로보충하는문제를둘러싸고평구 ( 平邱 ) 사립보통학교와분쟁에휘말리기도하였다.* 상도면에서는 1908 년 7 월답동 ( 沓洞 ) 에있는기인학교 ( 基仁學校 ) 교장이건백 ( 李建白 ) 이빈궁한가세에도불구하고학교재정을담당하고청년교육에열심이어서인근주민들의칭송을받았다. 또한 1908 년 11 월에는상도면가오실 ( 嘉梧室 ) 에서교육에뜻을둔사람들이노동야학교를설립하고학도 50 명을모집 교육하였다. 이때마을의학교경비를경쟁적으로기부하였는데, 이마을의이근성 ( 李根成 ) 은가세가빈한해많이기부하지못함을개탄하여피우던담뱃대를팔아기부하기도하였다.* 초부면에서는 1908 년 9 월고랑리 ( 高浪里 ) 에사는신좌영 ( 申佐永 ) 신석균 ( 辛錫均 ) 이한우 ( 李漢宇 ) 등이청년교육을위해광동학교 ( 廣東學校 ) 를설립하고동민들의기부금으로학교경비를충당하였다. 이한우는한문교사, 신좌영은감독, 김석룡 ( 金錫龍 ) 은찬성원을담당하여열심히교육하였으며, 특히교장이된신좌영은 1909 년 6 월궁핍한학교에다수금액을보조하여학교발전에일익을담당하였다.* 접동면에는궐리학교 ( 闕里學校 ) 와명진학교 ( 明進學校 ) 가있었다. 궐리학교는 1909 년 2 월접동면유지신사신태형 ( 申泰衡 ) 윤양섭 ( 尹陽燮 ) 이순용 ( 李舜鏞 ) 이상규 ( 李圭相 ) 이만영 ( 李晩榮 ) 등이비각리 ( 碑閣里 ) 에학교를설립하고청년자제 30 여명을모집하여교육을시작한데서비롯되었다. 같은해 4 월에는신태형이교사 ( 校舍 ) 8 칸을기부하고, 이웃에사는이규응 ( 李奎應 ) 이토지를기부하여학교재정을보조하였다.* 한편 1909 년 2 월 25 일에는건천면평촌리 ( 坪村里 ) 한동학교 ( 漢東學校 ) 학감으로재직하던송영필 ( 宋榮弼 ) 이내동 ( 內洞 ) 에거주하는이석응 ( 李石應 ) 이수응 ( 李壽應 ) 과협의해 150 원을내어내동에명진학교를설립하였다. 학도는 70 여명에달했는데이지역인사들가운데기부하는사람이많자 대한매일신보 1909 년 6 월 24 일자광고란에명진학교설립과정과기부자명단을게재하고감사를표할정도로교세가흥왕하였다.* 한편명진학교설립에관여했던송영필은원래건천면평촌리사람으로이마을사람들과협의하여 1909 년 5 월건천면양지리 ( 陽地里 ) 에한동학교 ( 漢東學校 ) 를설립하였다. 청년교육을표방하여학도 40 여명으로시작한한동학교는협소한교실과재정곤궁에시달렸는데, 이마을의서정현 ( 徐正鉉 ) 이선산의소나무 500 그루를기부해재원을마련할수있었다. 또한임원구연태 ( 具然泰 ) 이수악 ( 李秀岳 ) 심원익 ( 沈遠翼 ) 등의찬성과, 교사유진하 ( 劉鎭河 ) 홍은섭 ( 洪恩燮 ) 이창식 ( 李昌植 ) 등의열심히가르치니학도가 명에달하였고원거리학도들까지입학을희망할정도로번성하였다.* 별비면에는성륜학교 ( 成倫學校 ) 와기독경인학교 ( 基督儆仁學校 ), 광문학교 ( 廣文學校 ), 그리고학문학교 ( 鶴聞學校 ) 등 4 개학교가있었는데모두 1909 년에설립되었다. 퇴계원성륜학교는 1909 년최춘영 ( 崔春榮 ) 김의현 ( 金宜賢 ) 안재철 ( 安在哲 ) 등이발기하여설립한학교로학생은 39 명에달했다. 기독경인학교도삼패 ( 三牌 ) 퇴계원에소재하였는데기독교신사들의보조를받고있었다. 광문학교는이철회 ( 李哲會 ) 안세근 ( 安世根 ) 등이협의하여이패광암리 ( 廣岩里 ) 에세운학교였다. 이외에도별비면동학동 ( 東鶴洞 ) 에사는남명희 ( 南明熙 ) 는 1909 년 7 월자기집에학교를설립하고교사를초빙하여청년을교육하였는데설립한지불과며칠만에학도가 50 명에달하였다. 이학교가바로학문학교이다.* 이밖에도미음면조운리 ( 朝雲里 ) 에사는이백경 ( 李伯景 ) 은 1908 년 8 월자기집에야학교를설립하고초동 40 여명을모집하여천자문을교수하다가학생들의학습이점차나아지자산술 소학 동국역사등을교수하였다. 또한진벌면유지신사들이협의하여 1909 년 7 월면내에신창학교 ( 新昌學校 ) 를설립하였는데, 이원영 ( 李源永 ) 김성연 ( 金聖演 ) 이재정 ( 李在正 ) 등인사들이경쟁적으로기부하여교세가흥왕하였고학도는 70 여명에달하였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통감부시기남양주지역에서는국권회복과문명계몽의일환으로사립학교설립을통한교육활동이활발하게이루어졌다. 특히학교설립이일부지역에편중되지않고남양주지역전체에분포하고있어이지역주민들의교육열과향학의지를짐작할수있다.

334 학교설립을주도한인물들은군수를포함한주사 면장등지역유지들이었지만학교설립과운영에대한지역주민들의열의도대단하여다양한형태로참여하고있었다. 학생규모는학교마다편차가있겠으나대체로 명정도였던것으로추정된다.

33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7 장개항과외세의침탈제 제 3 절국권회복운동 * 4. 국채보상운동 일제와통감부는한국의식민지화경영에필요한재원을자국에서도입한차관으로충당하였다. 이러한통감부의차관도입정책에따라한국의대일부채는 1907 년 2 월현재 1300 여만원에이르게되었고이에대한상환의무는고스란히한국정부의몫으로떠넘겨졌다. 그러나국고고갈로만성적인재정적자에시달리던한국정부에게외채상환은요원한일이었다. 결국일제의정치 경제적침탈이가속화되는상황에서대일부채는국권상실여부와직결될만큼심각한문제로대두하였고, 이에따라국채를보상하려는움직임이다각도로모색되었다. 별비면의국채보상금모금 국채보상움직임이구체화된것은 1907 년 2 월중순대구광문사 ( 廣文社 ) 사장김광제 ( 金光濟 ) 와부사장서상돈 ( 徐相敦 ) 등이공동명의로 국채 1 천 3 백만원보상취지서 를발표하면서부터였다.* 취지서의내용은 국채 1300 만원은우리나라의존망과직결된것으로갚지못하면나라가망할것인데국고로서는해결할도리가없으니 2000 만인민들이 3 개월동안흡연을폐지하고그대금으로국채를갚아국가의위기를구하자. 는것이었다.* 이러한대구광문사국채보상발기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각신문을통해알려지자일본의경제적침탈을자신들의생활현장에서자각하고있던각계각층의광범위한민중들의참여로국채보상운동은범국민적인운동으로확산되었다. 금촌면의국채보상금모금이에서울은물론각지방으로확산되어이운동을찬동 지지하는취지서가발표되었고도 군 면단위의국채보상회가속속설립되었다. 뿐만아니라고종도 2월 27일 우리국민들이국채를보상하기위해단연하고그값을모은다하는데짐이담배를피울수없다. 하여단연을실천하고영친왕길례 ( 吉禮 ) 를 7월로연기하도록하여이운동을독려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대개단연동맹 담배판매금지 분초 ( 焚草 ) 의연 ( 義捐 ) 등의형태로전개되었으며운동이확산되면서국민들이흡연을부끄럽게여길정도로운동의열기가고조되었다. 이운동에대한전국민의지지와성원이어느정도였는지는운동이전개되기시작한 1907 년 2 월하순부터 4 월말까지경향각지의성금기탁자수가무려 4 만여명에달했다는사실로도짐작할수있다.* 이처럼국채보상운동이전국적인규모로확대되자이를조직적이고체계적으로이끌어갈통일적인기구의필요성이제기되었다. 이에 1907 년 3 월말각지방의수금을총관하는통합기구로대한매일신보사내에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 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 ) 와함께 4 월초국채보상연합회의소 ( 國債報償聯合會議所 ) 가설립되었다.* 또한각지방에도보상소가설치되었는데이시기각도별로설립된보상소는강원도 3 개, 경상도 15 개, 경기도 8 개, 충청도 12 개, 전라도 14 개, 황해도 7 개, 함경도 7 개, 평안도 13 개였으며,* 이들각지방보상소는해당지역에서적극적인홍보및의연활동과함께수합된의연금을중앙에송금하는국채보상운동의하부단위로역할하였다. 이러한노력과전국민의성원에힘입어 1908 년 4 월 30 일현재중앙에접수된의연금총액은 14 만 3542 원 33 전에이르게되었다.* 이시기남양주지역에서도국채보상열기가뜨겁게달아올랐다. 당시남양주지역은행정구역상양주군의일부였던관계로남양주지역국채보상의연금은양주군고주내면 ( 古州內面 ) 에있는보성회에서취합하였다.* 남양주지역국채보상금모금은국채보상운동이전국적으로확산된 3 월이후 4 월부터 7 월에걸쳐집중적으로나타나고있는데이를 대한매일신보 를통해살펴보면다음과같다. 대한매일신보사에서는국채보상운동을독려하기위해 대한매일신보 광고란에국채보상금기탁자의지역 성명 액수를게재하고있었다. 남양주지역에서국채보상금을모금한곳은접동면궁동리 ( 宮洞里 ) 장생리 ( 長牲里 ), 초부면양수두리 ( 兩水頭里 ) 두릉리 ( 斗陵里 ), 상도면수전리 ( 水田里 ), 별비면사패동촌 ( 四牌東村 ) 사패영지동 ( 四牌靈芝洞 ), 진벌면수막리 ( 水幕里 ), 금촌면평구리 ( 平邱里 ) 삼현리 ( 三峴里 ), 미음면수변리 ( 水邊里 ) 석도리 ( 石島里 ) 조운리 ( 朝雲里 ), 진관면본진관 1 동 ( 本眞官一洞 ), 건천면팔현리 ( 八賢里 ) 등이었다.* 특히접동면궁동리, 초부면양수두리, 별비면사패동촌, 진벌면수막리, 금촌면평구리등은모금횟수가 2 회이상에걸쳐있어국채보상에대한지역주민들의열기를짐작할수있게해준다. 의연금모집형태는광릉참봉홍종휴 ( 洪鍾休 ) 처럼개인이직접중앙에의연금을보내는경우도있었지만, 동 리단위로주민들의성금을모아서송금하는경우가대부분이었다. 그런가하면같은마을안에서도문중단위로의연금을모으는경우도있었다. 별비면사패동촌성금기탁자가운데현씨 ( 玄氏 ) 39 명, 서씨 ( 徐氏 ) 12 명의명단이나타나는데이러한사례가문중단위로의연금을납부한경우로판단된다. 의연금모금액수는개인에따라 1 원에서 10 전까지다양하였으며마을별의연참여자수도작게는 20 여명에서부터많은곳은 100 명이넘은곳도있었다. 예를들어금촌면평구리는의연자수가모두 110 명에달해납부규모가상당했음을보여준다. 한편국채보상운동은학교도예외가아니어서동진관서숙 ( 東眞官書塾 ) 에서는교사와학동들이성금을모아기탁하고있는데특이한것은성금을기탁한학동들의나이를명시하고있다는점이다. 학동들의나이는대개 7 9 세가량이었는데이를통해나이어린학생들도국채보상운동에동참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이러한활동과더불어국채보상의취지를밝혀의연활동을독려하기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에게재된 양주군국채보상금취지서 는우리나라가외채 1300 만원때문에이웃나라의모욕과압제를받게되었으며, 따라서 2000 만동포가국채를보상해야하는당위를설명하고, 그방법과이웃군의모금상황을비교소개함으로써보다많은성금기탁을호소하고있다.* 이렇듯남양주민들은자기가살고있는마을을단위공동체로하여국권회복운동의일환인국채보상운동에동참하고있었다. 여기에는주민들

336 의지위는물론계층에상관없이모두가어우러져있었고자신의처지에맞게성금을기탁하였다. 남양주지역은수도서울의외곽으로서울과경기서북부 경기이남 강원도를잇는관문이었다. 이러한지리적특성때문에남양주는당시서울진공을전략적목표로하던연합의병의거점이었으며서울진출의교두보로서역할하였다. 그런가하면일제의탄압을피하고그들을교란시키기위해의병부대간에연합과분산을거듭하던경기의병의분산과집결의중심지이기도하였다. 남양주를중심으로한양주지역일대는 전국 13 도창의군, 관동창의원수부 등연합의병부대가결성된전략적요충지였으며아울러경기의병을주도하던상당수의병장의근거지가되기도했다. 여기에는대표적인경기의병장인이은찬 윤인순 정용대 강기동과그들이이끄는의병부대도포함되어있었다. 의병부대들은주로정예한일본군에맞서소규모유격전을구사하였으며때에따라서는연합부대형태로일본군과전면전을치르기도하였다. 투쟁양상도다양하여일본헌병분견소 수비대를습격하거나일본군과교전하는적극적인공세는물론, 일본인및친일분자처단및회유, 미곡유출을저지하기위한방곡령실시등다양한형태로일제의탄압에저항하였다. 한편남양주지역은활발한의병투쟁과서울에인접한지리적특성으로인해일본군의집중적인공격을받았다. 의병토벌이라는구실로자행된일본군의무차별적인탄압은이지역주민들에게직접적인피해로돌아갔다. 당시남양주민들은이곳에주둔하는헌병분견대 수비대 순사대소속일본군인과경찰, 그하수인인헌병보조원, 이들을등에업은거류일본인에의해침탈당했으며, 피해사례도인력동원남발에서가옥및재산손실, 인명살상에이르기까지실로다양하였다. 이처럼남양주지역은의병투쟁과이를토벌하려는일본군의일대접전장이었고군수와면장의피신으로행정마비와치안부재상황마저초래되고있었다. 이에더이상생업을유지할수없게된지역민들은생활터전을버리고떠나야하는비참한지경에이르고말았다. 이처럼일제의탄압과의병투쟁으로인해이중적인고통에시달려야했던어려운상황에서도남양주민들의교육의지와향학열은사그라지지않았다. 일제와통감부의식민지적교육통제정책에도불구하고교육만이민족각성과국권회복의방법이라고판단한각계각층의사회세력들에의해사립학교설립운동이계속확대되었던것이다. 그리하여통감부의교육통제가강화되는 1908 년이후에도남양주지역의사립학교는꾸준히증가하였다. 대표적인사립학교로는하도면동흥학교 일성학교, 금촌면봉명의숙, 상도면기인학교 노동야학교, 초부면광동학교, 접동면궐리학교 명진학교, 건천면한동학교, 별비면성륜학교 기독경인학교 광문학교 학문학교, 진벌면신창학교등을들수있다. 이처럼남양주지역의사립학교는수적으로도상당수에이르며, 특히설치지역이일부지역에편중되지않고면단위로고르게분포하고있다는점에서특징적이라고하겠다. 한편남양주민들의국권회복에대한열의는 1907 년전국적으로일어난국채보상운동에동참하는모습에서도찾아볼수있다. 대일부채 1300 여만원상환을목적으로시작한국채보상운동은일거에범국민적인운동으로확산되어중앙과전국도 군 면단위에서국채보상회가설립되었다. 당시남양주는양주군에속해있던관계로남양주지역에서모금한국채보상금은양주군고주내면보성회에서취합하여중앙으로송금하였다. 성금모금은대개동 리단위로이루어져접동면궁동리 장생리, 초부면양수두리 두릉리, 상도면수전리, 별비면사패동촌 사패영지동, 진벌면수막리, 금촌면평구리 삼현리, 미음면수변리 석도리 조운리, 진관면본진관 1 동, 건천면팔현리등에서성금기탁자와액수현황을확인할수있었다. 이렇듯남양주민들은마을을단위공동체로하여자신의처지에맞게성금을기탁함으로써국권회복운동에동참하고있었던것이다. 이상에서남양주지역에서전개된국권회복운동을의병투쟁, 사립학교설립운동, 국채보상운동으로나누어살펴보았다. 일제의탄압에도굴하지않고의연히저항하던남양주민들의애국심과결집된힘이오늘날의남양주를있게한밑바탕이되었음은말할나위도없을것이다. 나아가국권위기의상황에서보여준남양주민들의단결력은개인주의가만연하는이시대에다시한번짚어보아야할귀감임에분명하다.

33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1. 행정구획의재편 1910 년조선을강점한일제는 면의정치는국가정치의단위이자최첨단 이라는인식아래면을말단행정단위로설정하고, 이를전초기지로하여지방사회에대한직접적인지배를실현하고자하였다. 이를위해우선 1910 년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 와 면에관한규정 을제정하여면을말단행정기관으로법제화하는한편, 면회의추천으로임명되던면장을도장관이임명하는관리로바꿈으로써재래의자치적질서를박탈하기시작하였다. 즉, 면의행정력을강화하는대신면장을임명관리로바꿈으로써식민지지배권력이향촌에서효율적으로집행될수있는체제를만들고자하였다.* 그리고 1 년여의준비기간을거쳐 1914 년 3 월과 4 월에토지조사사업과지방행정의재정적안정화와관련하여행정구획을통폐합하였다. 행정구획의통폐합은구획의지리적불균등성과조세부담의불균등성문제의해결및시정상의편의, 경비절감을목적으로했으며, 군은 40 방리 10 만명, 면은 4 방리 800 호를기준으로시행하였다. 이결과 1918 년토지조사사업이종료하는때와같이하여군은 317 개에서 220 개로, 면은 4336 개에서 2522 개로, 동은 6 만여개에서 2 만 8000 여개로통폐합되었다. 다음표는남양주에서 1917 년까지진행된면과리의통폐합실태를보여주는것이다. < 행정구획재편 > 면명리명재편내용 고산리 ( 高山里 ) 산곡리 ( 山谷里 ) 청학리 ( 靑鶴里 ) 내동면 ( 內洞面 ) 입암리 ( 笠岩里 ), 고산리일부 내동면산곡리, 고산리 별비면 ( 別非面 ) 흑석리 ( 黑石里 ) 각일부 별비면동학동 ( 東鶴洞 ), 응달리 ( 應達里 ) 흑석리 덕동리 ( 德洞里 ) 각일부 별내면 ( 別內面 ) 용암리 ( 龍岩里 ) 별비면도감리 ( 都監里 ) 거묵동 ( 巨墨洞 ) 덕송리 ( 德松里 ) 별비면식송리 ( 植松里 ) 묘동리 ( 廟洞里 ) 덕동리 ( 德洞里 ) 일부 화접리 ( 花蝶里 ) 별비면삼안리 ( 三安里 ), 화접리, 간촌리 ( 間村里 ), 노원면 ( 盧原面 ) 불암리 ( 佛岩里 ) 퇴계원리 ( 退溪院里 ) 광전리 ( 廣田里 ) 진벌리 ( 榛伐里 ) 별비면퇴계원리 전도리 ( 全道里 ) 진관면 ( 眞官面 ) 본진관리각일부 별비면마전리 ( 麻田里 ) 광암리 ( 廣岩里 ), 응달리 ( 應達里 ) 일부 진벌면 ( 榛伐面 ) 진벌리 중리 ( 中里 ) 검단리 ( 黔丹里 ) 일부 수산리 ( 水山里 ) 진벌면수막동 ( 水幕洞 ) 내마산리 ( 內馬山里 ) 팔야리 ( 八夜里 ) 진벌면팔야리 검단리일부 금곡리 ( 金谷里 ) 진벌면금곡리 주곡리 ( 周谷里 ) 진접면 ( 榛接面 ) 진건면 ( 眞乾面 ) 부평리 ( 富坪里 ) 연평리 ( 蓮坪里 ) 장현리 ( 長峴里 ) 내각리 ( 內閣里 ) 내곡리 ( 內谷里 ) 팔현리 ( 八賢里 ) 오남리 ( 梧南里 ) 송능리 ( 松陵里 ) 용정리 ( 龍井里 ) 사능리 ( 思陵里 ) 양지리 ( 陽地里 ) 신월리 ( 新月里 ) 진벌면후평리 ( 後坪里 ), 접동면 ( 接洞面 ) 본접동리 접동면궁동리 ( 宮洞里 ), 와촌리 ( 瓦村里 ) 중포리 ( 中浦里 ) 비각리 ( 碑閣里 ) 내동리 ( 內洞里 ) 봉현리 ( 蜂峴里 ) 건천면 ( 乾川面 ) 양지리 ( 陽地里 ) 각일부 접동면장승리 ( 長承里 ) 전동리 ( 全洞里 ), 봉현리 중포리각일부 접동면현창리 ( 縣倉里 ), 비각리 봉현리 내동리각일부 별비면내곡리 영지동 ( 靈芝洞 ) 동촌리 ( 東村里 ) 서촌리 ( 西村里 ), 전도리일부 건천면팔현리 건천면어남상리 ( 於南上里 ) 어남하리 ( 於南下里 ) 오산리 ( 梧山里 ), 단곡리 ( 丹谷里 ) 일부 건천면송정리 ( 松亭里 ) 성능리 ( 成陵里 ) 상독정리 ( 上獨井里 ) 각일부 건천면하독정리 ( 下獨井里 ), 오룡동 ( 五龍洞 ) 상독정리각일부 건천면식동리 ( 植洞里 ) 점막리 ( 店幕里 ), 오룡동 성능리 진관면신촌리 ( 新村里 ) 각일부 건천면양지리 단곡리 접동면중포리각일부 진관면평촌리 ( 坪村里 ), 월음리 ( 月陰里 ) 신촌리 접동면와촌리각일부

338 진관리 ( 眞官里 ) 배양리 ( 培養里 ) 진관면법동리 ( 法洞里 ), 본진관리 월음리 신촌리각일부 진관면고현리 ( 高峴里 ), 배양동 미음면 ( 渼陰面 ) 도농리 ( 陶農里 ) 각일부 묵현리 ( 墨峴里 ) 하도면 ( 下道面 ) 직동 ( 直洞 ), 상도면 ( 上道面 ) 묵동리 ( 墨洞里 ) 녹촌리 ( 鹿村里 ) 창현리 ( 倉峴里 ) 차산리 ( 車山里 ) 하도면녹동리 ( 鹿洞里 ), 궁촌리 ( 宮村里 ) 일부 하도면마산리 ( 馬山里 ) 장현리 ( 獐峴里 ) 월길리 ( 月吉里 ) 무수동 ( 無愁洞 ), 산성리 ( 山城里 ) 궁촌리각일부 하도면광암리 ( 廣岩里 ) 맹곡리 ( 孟谷里 ), 맹기리 ( 孟基里 ) 차산리각일부 마석우리 ( 磨石隅理 ) 하도면산성리일부, 계전리 ( 鷄田里 ) 화도면 ( 和道面 ) 금남리 ( 琴南里 ) 가곡리 ( 嘉谷里 ) 운수리 ( 雲水里 ) 송촌리 ( 松村里 ) 구암리 ( 九岩里 ) 답내리 ( 沓內里 ) 하도면남중리 ( 南中里 ) 남하리 ( 南下里 ), 남상리 ( 南上里 ) 백월리 ( 白月里 ), 상도면답동리 ( 畓洞里 ) 각일부 상도면가곡리 상도면석수대리 ( 石水臺里 ) 당두평리 ( 唐豆坪里 ) 운하리 ( 雲霞里 ) 장천리 ( 長川里 ) 각일부 상도면송라동 ( 松蘿洞 ) 장천리 등경리 ( 燈턓里 ) 각일부 상도면전의동 ( 典儀洞 ) 응암리 ( 鷹岩里 ) 구곡리 ( 九谷里 ) 답동리, 하도면남상리각일부 상도면내동리 ( 內洞里 ), 답동리일부 월산리 ( 月山里 ) 상도면등경동일부, 세월산리 ( 細月山里 ) 점막리 ( 店幕里 ) 지둔리 ( 芝屯里 ) 율석리 ( 栗石里 ) 덕소리 ( 德沼里 ) 상도면지둔리 와공면 ( 瓦孔面 ) 율북리 ( 栗北里 ) 석실리 ( 石室里 ) 각일부 와공면덕소리, 석실리 월곡리 ( 月谷里 ) 금촌면 ( 金村面 ) 사패리 ( 四牌里 ) 각일부 도곡리 ( 陶谷里 ) 와공면도산리 ( 陶山里 ) 도심리 ( 陶心里 ) 와부면 ( 瓦阜面 ) 월문리 ( 月文里 ) 능내리 ( 陵內里 ) 조안리 ( 鳥安里 ) 진중리 ( 鎭中里 ) 와공면문곡리 ( 文谷里 ), 월곡리 하도면맹기리 차산리각일부초부면 ( 草阜面 ) 봉안리 ( 奉安里 ) 마현리 ( 馬峴里 ) 각일부, 능내리초부면조동리 ( 鳥洞里 ) 고랑리 ( 高浪里 ), 마현리 진촌리 ( 鎭村里 ) 각일부초부면중리, 진촌리일부 송촌리 ( 松村里 ) 초부면평촌리 ( 坪村里 ) 일부, 송송동 ( 松松洞 ) 미금면 ( 渼金面 ) 삼봉리 ( 三峰里 ) 시우리 ( 時雨里 ) 팔당리 ( 八堂里 ) 도농리 ( 陶農里 ) 지금리 ( 芝錦里 ) 가운리 ( 加雲里 ) 수석리 ( 水石里 ) 삼패리 ( 三牌里 ) 이패리 ( 二牌里 ) 일패리 ( 一牌里 ) 금곡리 ( 金谷里 ) 평내리 ( 坪內里 ) 초부면삼봉리, 평촌리 하도면백월리각일부 하도면시우동 광주군 ( 廣州郡 ) 동부면 ( 東部面 ) 팔당리 미음면도농리 금교리 ( 錦橋里 ) 가재동 ( 加在洞 ) 구지면 ( 九旨面 ) 인장리 ( 仁章里 ) 각일부 미음면지사리 ( 芝沙里 ), 금교리 진관면배양동각일부 미음면조운리 ( 朝雲里 ), 가재동 도농리 석실리 금촌면삼패리각일부 미음면석실리 수변리 ( 水邊里 ) 석도리 ( 石島里 ) 각일부 금촌면삼패리 사패리 와공면석실리각일부 금촌면삼패리 와공면율북리각일부 금촌면이패리, 일패리일부 금촌면일패리 건천면송정리 ( 松亭里 ) 각일부 상도면궁촌리 ( 宮村里 ) 장내리 ( 墻內里 ) 각일부 호평리 ( 好坪里 ) 비고 : 는면사무소소재지이다. 출전 : 越智唯七,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상도면호만리 ( 好滿里 ) 평동리 ( 坪洞里 ) 지사리, 궁촌리 답내리각일부

339 이후몇차례개정이있었으나기본적인방향은이틀을유지하고있었다. 면의경우는 2 3 개의면을 1 개면으로통합하였으나, 리의경우는다음과같이몇가지유형으로나눌수있다. Ⅰ 형구동리 신동리 Ⅱ 형구동리 + 구동리 신동리 Ⅲ 형구동리 + 구동리일부 신동리 Ⅳ 형몇개의구동리 + 구동리일부 신동리 Ⅴ 형구동리일부 + 구동리일부 신동리 Ⅰ 형은구동리가그대로신동리로된경우로진건면팔현리와화도면지둔리, 가곡리가그예이다. Ⅱ 형은 2 개이상의구동리가그대로합쳐져서신동리로된경우로별내면용암리, 진접면금곡리등이대표적이다. Ⅲ 형은하나의구동리에다가몇개의구동리일부를합쳐신동리로만든경우로진건면신월리, 진관리, 화도면송천리등이그예이다. Ⅳ 형은 2 3 개의구동리에다몇개의구동리일부를합친것으로진건면사능리, 화도면창현리, 금남리등을들수있다. 그리고마지막유형은몇개의구동리일부를모아신동리로만든것으로별내면산곡리, 청학리, 퇴계원리, 미금면이패리등이대표적인사례이다. 위의사례에서특히주목할점은 Ⅰ 형과 Ⅱ 형을제외하면새로형성된신동리대다수가기존의동리를분할하여통합한것이다. 그결과생활과생산의장이일치했던구동리가몇개의행정촌락으로분할됨으로써주민생활에많은변화가따랐다. 우선면 동 리통폐합에따라구동리의소유재산을어디로귀속시킬것인가라는문제가제기되었다.* 당국자는기존의소유재산에아무런변화가없다고강조하였으나, 이후공동재산의이용과귀속을둘러싼분쟁을낳는원인을제공하였다. 남양주의구체적인사례는보이지않으나, 일반적으로볼때면 동 리소유재산의처리는종래재산소유의주체로자치적기능을행사하던동리내소촌락의계등이소유주체에서제외됨으로써그자치기능이배제되는방향으로전개되었다. 이것은조선의관행과는배치되는것이기때문에민중의저항을불러일으킬수밖에없었다.* 또한행정의편의를위해임의적으로조선의행정구획을통폐합하였으나오히려행정을복잡하게만드는결과를낳기도하였다. 다음의인용은당시식민지조선의지방제도가가진문제점을가장잘드러내는것이다. ( 일본의 ) 정촌 ( 町村 ) 구역은토지, 민정등을고려하여인민의대표자가모여의견을잘교환한뒤에만들었기때문에꽤잘되었다. 그러나조선은이와는완전히반대로인민의의향따위는조금도헤아리지않고당시의관리들이마음대로책상에서경계선을그은흔적이뚜렷하다.* 즉, 주민의의견이반영되지않은채행정구획이임의로강제되었다는점과당시 책상도로 라는유행어가나돌았듯이지방실정을고려한통폐합이아니었기때문에행정구획에비합리적인요소가많았음을식민당국자도인정한것이다. 그결과생활공간과행정구역이일치하지않는경우가많이발생하였다. 다음은당시남양주지역에서지방관리가가장나쁜사례를정리한것이다. 첫째, 진접면에는동쪽으로큰산이있고, 그산뒤편에수산리라는마을이있다. 면에서 5 리이며, 험한고개때문에교통이매우불편하다. 면직원이출장하려면몇개면과가평군청평천을통과해서가야한다. 그러나가평군의외서면과겨우개울하나를사이에두고있어매일왕래하고있다. 이것은가평군과양주군을편의상강으로나눴기때문이다. 둘째, 와부면은중앙부에큰산이가로놓여있고동서로큰평야가있으며, 면사무소가그사이에있다. 동서평야부의중간산지가바로한강과접해있고, 3 개리사이에인가가거의없다. 동쪽은면에서 5 리나되고, 서쪽은오히려대다수마을이미금면과붙어있다. 이미금면에학교가있어동쪽의마을은학교혜택을받지못하는실정이다. 셋째, 별내면퇴계원리는별내, 진건, 진접 3 개면의중앙에있어상업이활발한곳이나행정구역은교통이불편한별내면에소속되어있다.* 이렇게재편된행정구획은일제가패망할때까지큰변화없이유지되었다. 참고로 1940 년조선총독부경무국에서각도의경비를계획한자료도기본적으로행정구역을기준으로하고있다. 즉, 경무국은침략전쟁이장기화되자 각도의경비를위해이용할수있는각종단체의현황및이용과훈련확충방책 을수립하여재향군인회, 방호단, 소방조, 청년단등을동원하여경찰의후원단체로서각종경비근무에이용하고자하였다. 특히소방조의경우봄 가을의점검을연 4 회로늘리며, 방호단청년단원은월 4 회또는주 1 2 회로나누어훈련, 철도수송, 경비경계등에이용하려하였다.* 다음표는양주군에서경비를위해이용할수있는단체현황을정리한것이다. < 경비를위해이용할수있는단체현황 > 소방조 / 구분 단체의소재지 ( 단위 : 명 ) 단체원수즉각응소하여근무할수있는인원수일본인조선인계일본인조선인계 의정부소방조 양주군시둔면 퇴계원소방조 양주군별내면 양주소방조 양주군주내면 동두천소방조 양주군이담면 망우소방조 양주군구리면 진접소방조 양주군진접면 덕소소방조 양주군와부면 화도소방조 양주군화도면

340 금곡소방조 양주군미금면 덕정소방조 양주군회천면 노해소방조 양주군노해면 광적소방조 양주군광적면

34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2. 면장과면직원 행정구획의통폐합조치는단순히지역을통폐합한다는의미가아니라통감부이래추진해왔던지방행정기관, 특히중앙권력을농촌으로침투시키는데주요한매개체인면의행정력을강화시켰다는점에큰의미가있었다. 따라서일제는자신들이원하는새로운인물을면장에충원하는한편, 면행정을효율적으로수행할면직원을양성하는것이절대적인과제였다. 먼저지방지배의핵심인면장의충원과정부터살펴보겠다. 일제강점초기에는면장의질이나내용이일제가원하는만큼높지않았던것같다. 즉, 면장중왕왕히목불식정자가거다 ( 居多 ) 하야혹관령 ( 官令 ) 이유할지라도자기가해득치못하는문학을얻지인민을교유 ( 敎誘 ) 하며혹막중막급한관령이라도고자 ( 톲者 : 소경 ) 와같이등기만안 ( 等棄滿案 ) 하니어찌관령의효력이생하리오. 면내에점점인격이유 ( 有 ) 한자는면장의직임을수치로지 ( 知 ) 하여사관 ( 仕官 ) 에고 ( 高 ) 한자도불청하며문학이우 ( 優 ) 한자도불응하며덕망이존 ( 尊 ) 한자도역 ( 亦 ) 불응하니면장의자격을가히추측할지로다. 라는사설에서도알수있듯이, 지역에서발언권을행사하는유지층이면장직을꺼려한결과그질이매우떨어졌다는설명이다. 전면장최형식기념비 그리고강점초기의면장들또한일제의지배정책에그다지협조적이지는않았던것으로보인다. 경기도내의면장이력을조사한김익한의연구에따르면 1914 년의통폐합과정에서면장의약 62% 가교체되었던것으로나타났다. 이것은무엇을뜻하는가. 원래면장은지역주민을대표하는성격과지배권력을지역말단에서전달 집행하는성격을동시에지니고있었다. 이처럼지역대표자와권력대리자로서의양면성을가진면장이식민지시기에들어오면서그대표성 ( 달리표현하면지역의자치성 ) 은부정되고권력대리자의성격만강요당하게되었다. 그결과지역유지층들이식민권력의심부름꾼역할을선뜻받아들이기는쉽지않았을것이다. 이것은곧일제강점초기까지는일제가식민지의지방통치에지방의유지들을효과적으로끌어들이지못했음을간접적으로증명하는것이기도하다. 따라서일제는통폐합과정을통해면장의 질을개선 하고지배정책에협조적인인물로충당하기위해전면적인개편을시도한것이다. 다음표는 1916 년에조사한자료로경기도와양주군의면장이력을통계로만든것이다 년당시경기도의전체면장 246 명가운데전직면장은 15 명으로 6.1% 인데비해전력이없는사람은 105 명으로 42.7% 에이른다. 그리고중추원의관이나군수, 군참사, 육군무관, 도 군 재무서의주사, 군청등의고원 ( 雇員 ) 을지낸인물, 즉한말이후신문물을접하면서관리로진출했던층이대거면장에임명되었다. 이는간접적이기는하지만일제의의도가어느정도성공했음을보여주는사례라고할수있다. < 경기도양주군내면장의이력 > ( 현재, 단위 : 명 ) 지역 / 구분 구한국고등관 군참사구한국육군무관 구한국판임관 관청고원 문묘직원 사립학교교사 전면장전면서기순사보 전력무 계 양주 경기도 비고 : 1 구한국고등관에는중추원의관 군수등이포함된다. 2 구한국판임관에는관찰도주사 군주사 재무서주사 능참봉등이포함된다. 3 관청고원에는구한국정부고원 군청고원등이포함된다. 출전 : 京畿道面長經歷調査表, 정부기록보존문서, 지방행정, 문서번호 33, 面制關係書類 ( 김익한, 1910 년대일제의지방지배정책,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50, 1996, 255 쪽에서재인용 ). 양주군의경우도비슷한경향을띤다. 다만전력이없는사람은 18.8% 에머물러경기도전체에비해상대적으로적은편이다. 대신구한국고등관출신이 25% 로높은비중을차지하는특징을보이고있다. 이들의구체적인신상을보여주는자료가없어이런특징이무엇을의미하는지는알수없다. 그러나강점초기보다는상대적으로지역에서발언권과행정력을가지고있는인물들이면장에충원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다음표는지금까지밝혀진자료를근거로일제시기남양주의면장을정리한것이다. 비교적장기에걸쳐면장을지낸인물로는별내면의윤자록과이효영, 진건면의구용조와김현경, 와부면의정규영과이택종, 진접면의김익성, 화도면의김갑수와최형식, 미금면의조중만을들수있다. 이가운데에서신상을확인할수있는사람들은다음과같다. 구연팔 토지조사사업당시송능리에 2 만 78 평, 사능리에 9855 평, 진관리에 1112 평, 배양리에 6983 평의토지를소유한지주 구용조토지조사사업당시배양리에 9262 평, 진관리에 4205 평소유, 양주청년회이사장 (1923) 김현경토지조사사업당시진관리에 2 만 6211 평, 배양리에 4665 평, 용정리에 1302 평소유, 양주청년의이사 (1923) 이상호제 2 회면협의회의원 (1935) 이해성 해방이후전국농민조합총연맹중앙집행위원 정규홍와부면출신, 1898 년생, 상업학교를졸업, 조선식산은행을거쳐군농회, 군기업 ( 郡機業 ) 조합, 수리조합등을역임, 1934 년 11 월면장으로발탁

342 < 남양주지역의면장 > 연도 / 지역 별내 진건 와부 진접 화도 미금 1914 구연팔 ( 具然八 ) 한원교 ( 韓元敎 ) 이용상 ( 李容相 ) 이택종 ( 李宅鍾 ) 조중만 ( 趙重萬 ) 1919 이해원 ( 李海元 ) 구연팔 정규영 ( 丁奎英 ) 유정렬 ( 柳廷烈 ) 김갑수 ( 金甲洙 ) 조중만 1920 이윤상 ( 李胤相 ) 구용조 ( 具容祖 ) 정규영 박종선 ( 朴鍾善 ) 김갑수 조중만 1922 윤자록 ( 尹滋祿 ) 구용조 정규영 박종선 김갑수 조중만 1923 윤자록 구용조 정규영 김익성 ( 金益聲 ) 김갑수 조중만 1924 윤자록 구용조 정규영 김익성 김갑수 조중만 1925 윤자록 구용조 정규영 김익성 김갑수 조중만 1926 윤자록 구용조 정규영 김익성 김갑수 조중만 1927 윤자록 김현경 ( 金顯敬 ) 정규영 김익성 김갑수 조중만 1929 윤자록 김현경 박용규 ( 朴容圭 ) 김익성 이해성 ( 李海星 ) 조중만 1930 윤자록 김현경 이상호 ( 李商鎬 ) 김익성 최형식 ( 崔텣植 ) 조중만 1935 이효영 ( 李效榮 ) 김현경 정규홍 ( 丁奎鴻 ) 김익성 최형식 조중만 1937 이효영 김현경 이택종 김익성 최형식 조중만 1940 이효영 송촌의웅 ( 松村義雄 ) 이택종동천철 ( 東泉徹 ) 최형식심능유 ( 沈能維 ) 1941 이효영송촌의웅이택종동천철최형식이좌용 ( 李佐鎔 ) 출전 : 1914 년은매일신보사, 지방부록 ( 경기도 ) 10 호, , 3 쪽 ; 1941 년은양주군지주회, 양주지주 ( 팸플릿 ); 나머지는 조선총독부직원록 각년판. 위의자료에서구연팔, 구용조, 김현경의토지규모는진건면의토지현황만기록한것이기때문에실제는더많았을것이다. 구용조와김현경은양주청년회에도관여한것으로보아재촌지주로서뿐만아니라지역유지또는명망가로서도상당한영향력을행사한것같다. 이에비해정규홍은일제하에서 20 대를보내면서식민지행정에참여하여실무를익힌인물로서비교적신진층에해당한다. 그런데이들은일제로부터어떤대우를받았을까 년의조사에따르면별내면장이효영은월수당 43 원, 화도면장최형식은월수당 41 원, 와부면장이택종은월수당 50 원, 진접면장김익성은월수당 48 원, 미금면장조중만은월수당 44 원, 진건면장김현경은월수당 43 원이었다. 이정도의액수는당시면서기의월수당이평균 10 원이고, 비록 1916 년의자료이기는하지만연간 1 면당면비액 ( 面費額 ) 이평균 1117 원, 월 93 원인것을고려한다면그다지적은편은아니다. 여기에는지방통치의핵심인면장에대해경제적인예우를함으로써그권위를살리고, 이를통해식민지지방사회를효율적으로지배하려는의도가담겨있었다. 이것은거꾸로말하면, 그만큼면의재정자립도가낮았음을뜻한다. 즉, 행정통폐합을통해면의재정이늘어났다고는하나, 면경비의절반정도가면장수당으로나가기때문에면서기에대한수당이나행정경비가적을수밖에없었다. 그결과부과되는행정업무에비해수당이적어불만이생기고행정의효율성도높아지지못했다. 그래서경기도에서는이러한문제를해결하기위한하나의방안으로 경기도읍면직원호조회 ( 互助會 ) 라는것을만들었다. 즉, 경기도는 읍 면직원이지방행정의최선단에서활약하며, 항상대중과접촉하는공무집행의임무를맡고있기때문에국가흥퇴 ( 興頹 ) 의중대소인 ( 素因 ) 이다. 그러나그들의사생활을보면, 다수는근무지가벽지여서수양을하고싶어도책이부족하거나필수물자가적고, 게다가읍면의재정이아직충분하지못하기때문에직원의급여또한충분하지못하다. 라는인식아래 회원의상호공제를목적으로설립한것으로회원의복지증진을도모함으로써그공적생활에유종의미를거두도록 하기위해 1935 년 6 월 19 일경기도읍 면직원호조회를창립하였다. 조선총독부의재정으로면직원의복지를보장하지않고직원들의자비에의존했다는점에서정책의기만성을엿볼수있으나, 그만큼재정이취약했음을증명하는사례라하겠다 년중국침략이장기화하는조짐을보이자일제는조선을전시체제로재편하면서효율적인동원을위해면직원에대한통제와훈련을강화하였다. 경기도는 30 세이하의읍 면서기가운데 1 년이상근무한자를선발하여 1937 년 6 월 21 일부터 7 월 20 일까지 경기도읍 면 리원제 1 회단기훈련 을도직할의의정부훈련도장에서실시하였다. 심신을단련하고, 황국신민된자의신념을계배 ( 啓培 ) 함과더불어영농의요체를체득함으로써농촌진흥의중견인물및장래읍 면 리원으로서활약할후보자를양성한다. 는취지에서마련된이훈련에는다음과같은학과시간이있었다. 1 수신공민 5 시간 2 행정법대의 ( 大意 ) 10 시간 3 읍 면제, 동시행규칙 50 시간 4 농업경영 50 시간 5 갱생계획 16 시간

343 6 과외농지령 농용림지 ( 農用林地 ) 농업개량시설 ( 농촌진흥회약속과부락지도 ) 14 시간 7 시험 5 시간 남양주소속의면 리원가운데제 1 회단기훈련에참가한사람은구리면서기이해곤 ( 李海崑 ), 시둔면서기이종만 ( 李鍾萬 ) 이고, 제 2 회단기훈련생은별내면서기남상국 ( 南相國 ), 미금면서기이원규 ( 李元圭 ) 였다.

34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3. 농촌정책과중심인물 1) 1910 년대의농촌진흥책 조선총독부는조선의농촌사회를효율적으로통치하기위한방안의하나로경제적유인책인은사금제도를이용하였다. 즉각부 군에 1 개소의은사수산장 ( 恩賜授産場 ) 을설립하고이를통해경제적인지원이나교육을함으로써 천황의은혜에감사하는마음과식민정책에협력하는마음을유도하려는것 이었다. 당시금곡에있던은사수산장에서는어린누에 ( 稚蠶 ) 공동사육에관한기술을전수하거나대나무나가마니제조기술을전수하였다. 경기도의경우 1912년 12월 15일부터 1월 27일에걸쳐민가또는향교나묘당 ( 廟堂 ) 에대나무와가마니기계를설치하고은사수산장기수와농사순회교사를파견하여기술을가르쳤다. 이행사에참가한전습생 ( 傳習生 ) 은 1개소에 10명을기준으로모두 377명이었다. 학생들이가마니를짜는모습그런데여기서주목할점은일과성행사로만끝나는것이아니라이들수료자를조선총독부가계속관리하려했다는것이다. 즉, 학습에열성인자에게는기구 1대와부속품을대부하고, 1개월후성적이양호한자에게는다시이를대부하였으며, 생산품판매등을부 군에서알선하거나공동판매조합을설치해주는등의특혜를주었다. 이때문에수원의경우 10명모집에 100명이상이지원하는상황이벌어졌다. 이를통해일제는일본기술의우수성 ( 일본식대나무및가마니제작법의효율성 ) 과식민통치의 선정 ( 善政 ) 을선전하는도구로삼았으며, 또한하위단위에서의 협력자 를양성하고자했다. 남양주와관련된직접적인사료는없으나, 안성군의사례를통해보면은사금의이데올로기적인성격이잘드러난다. 안성군에서는통폐합이전각군마다수산자로서증진회또는보은회를설립하여상호의지의소통을도모하고또군의장려기관으로하였으나, 군병합결과각개에단체를존립케함은불편이적지않음을인정하여 6 월 20 일에이들단체를병합하여농우회를조직하였다. 이농우회의규약에는 제 1 조본회는산업의개량발달을도모하고근검저축을행함으로써목적함, 제 2 조본회는안성군에재주하는은사수산료자농축실습원으로써조직함, 제 4 조사업 1 관청의장려사업에관해서는솔선하여이를실행, 2 산림보호 등이포함되어있어관제단체적인성격이두드러지게나타나고있다. 이러한사정은남양주에서도마찬가지였으리라추정된다 년부 군폐합의결과각부 군의은사수산금의배분도다시설정되었다. 조선총독부는수산금을배분하면서이자의 6/10 은권업비에, 3/10 는학사비에, 1/10 은구제사업에사용하기로결정하였으며서울에 4 만 3585 원, 양주에 3800 원, 경기도에 12 만 4655 원의수산금을지급하였다. 한편, 1910 년대의유지모임으로서양주지역에서도교풍회 ( 矯風會 ) 가활동하고있었다. 일반적으로교풍회는지주 촌로 유생등이이끄는보수적인지방개량기구로서의성격이강했다. 양주군의교풍회역시 양주군민중요자의발의로교풍회를조직하고, 서민의의표 ( 儀表 ) 가되어먼저근검역행 ( 勤儉力行 ) 을실천하고, 또는풍속개량을촉구하여점차조장 ( 助長 ) 에노력하며, 또한편생산업의발달을촉진하여보통농사의개량도 ( 改良稻 ) 의보급을기도하며, 혹은퇴비를제조하는자가있으며, 또부업장려는양잠업자를독려하여개량종의사육을권유하여연년 ( 年年 ) 증진하는상태가있어. 라는기사에서도알수있듯이어용적인성격이컸다. 그리고이러한교풍회는 1930 년대에들어군단위로설립된농촌진흥위원회로계승되지않았나추측된다.

34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3. 농촌정책과중심인물 2) 1920 년대의 모범부락 과중심인물육성책 3 1 운동이후조선총독부는피폐해가는농촌의경제상황을개선하고 산미증식계획 을실현하기위해 모범부락 을조성하는한편중심인물을육성하는정책을펼쳤다. 이러한정책이의도하는바는모범부락을선정하는기준에서잘드러난다. 그기준은첫째군청 면사무소소재지 주재소등의관공서와거리가가깝거나교통이편리할것, 둘째일제의통치방침에순응하는영향력있는 중심인물 이있을것, 셋째부락민 = 동리민전체를구성원으로하는산업조합이나관제자치단체를설립하여도 군 면, 또는농회등의지도방침을일사불란하게시행해나갈것, 넷째농사개량이나부업등에서좋은성적을올릴것, 다섯째, 사회주의의영향권밖에있어소작쟁의가없을것등이었다. 이러한선정기준은모범부락이군 - 면 - 동리체제와긴밀한관련을맺으면서도그중심인물이관제자치단체등을설립하여민중을간접적으로통제하도록하여, 생산을늘리고민족운동을방어한다는목표를가지고있었다. 또한모범부락조성정책은 1910 년대의농촌지배가면단위에서머물렀다면, 1920 년대는그정책의단위가생활공동체의장인자연촌락으로까지확대되었음을뜻한다. 즉식민지권력이촌락단위로까지침투해들어가는매개로서모범부락이설정된것이다. 지금까지밝혀진자료에따르면, 양주군의경우 모범부락 으로지정된마을은시둔면의금오리와은현면용암리였다. 금오리의중심인물은윤원세 ( 尹元世 ) 로, 그가이끄는금오청년회는지방개량사업에적극적인역할을하였다. 금오청년회가경기도지방비에서나오는보조금을 1926 년 3 월에 100 원, 1928 년 3 월에 100 원씩두차례에걸쳐받았다는것은단지이름뿐인단체가아니었음을말해준다. 자세한내용은농촌진흥운동에서다시다루도록하겠다 년초조선총독부는모범부락을적극조성하는한편, 중심인물을양성하기위해보통학교졸업생에대한지도를시작하였다. 당시양주군에서청년지도에종사하고있던지방관리는일본에비해조선의농촌이궁핍한이유를, 조선의경지가일본의경지에비해생산력에서는여력이크지만농가노동력에서의잉여가너무크기때문이라고진단하였다. 즉, 조선농업은미맥작 ( 米麥作 ) 단일농업이대부분으로일본의농업에비해 1/3 의노동력만유용하고, 2/3 는무용하기때문에가난하다는것이다. 따라서농촌의보통학교졸업생을지도하여 자각하는농민 을육성하는것이필요하다고설명하였다. 양주군의제 1 회강습회는 1929 년 8 월 10 일에서 17 일까지, 제 2 회는 1930 년 8 월 15 일에서 22 일까지, 제 3 회는 1931 년 7 월 26 일에서 31 일까지실시되었다. 이후의자료는아직확인되지않으나강습회는매년여름비교적한가한때를골라실시된것으로보인다. 대상자는양주공립보통학교를졸업한학생가운데 20 세이상의청년으로 20 명또는 30 명씩모아강습하였다. 강습회의일과와수료생은다음과같다. 위의표에따르면, 3 년동안강습에참여한마을은 147 개리가운데 58 개리였으며, 매회각면당 1 2 명씩선발하여강습시켰다. 총 70 명의수료생가운데상업종사자 1 명, 상급학교진학자 1 명, 우편배달부 1 명, 군외전출 1 명을제외하면전원이농업에종사하고있다. 특히수료생가운데에는 반도농사개량상의획기적인사업이라할전작 ( 田作 ) 개량계획에따른전작지도마을의영예로운최초의지도원 이나 조부의뒤를이어이장 동장 으로활약한사람도있었다. 일제가의도했던촌락의 중심인물 로성장한사람들이다. 양주군의사례를정리하면다음과같다. < 강습회일과 > 기상 : 5 시풀베기 : 6 시 30 분까지세면 : 6 시 40 분까지정신훈화 : 7 시까지아침 : 7 시학과 : 8~12 시 점심 : 12 시실습 : 13~16 시저녁 : 18 시과외강화 : 18~20 시취침 : 21 시 < 강습회수료생 > 횟수 / 면명 주내 회천 이담 은현 광적 백석 장흥 시둔 별내 진접 진건 화도 와부 미금 구리 노해 합계 1회 회 회 이강득 ( 李康得 ) : 별내면고산리제 1 회강습수료생, 24 세 1931 년 3 월부터고산리가전작개량의지도부락으로지정, 지도원으로선정 김현경 ( 金賢卿 ) : 이담면보산리 1927 년의정부농잠실수학교졸업, 1929 년농림강습회출석구장 ( 區長 ) 을맡고있던백부와함께동아잠사회사의위탁을받아잠종 ( 蠶種 ) 사육군농회의알선으로새끼짜기기계를최초로구입, 성적이우수하여공제근농조합의지정부락이되었으며, 마을사람들이공제자금을빌려새끼짜기사업에합류 1930 년 5 월전작개량지도마을로지정, 지도원으로선정 1930 년 7 월유산농사개량조합설립, 백부는조합장, 김현경은간사

346 1930 년 9 월대두개량조합조합원, 가마니포장을실행하여군농회가알선하는동두천의대두공동판매에부쳐재래판매에비해한가마니당 20 전내외의이익을올려촌의모범을보임 윤이영 ( 尹以永 ) : 진접면팔야리사방이산으로둘러싸인분지로토양이척박윤이영의집안은촌의양반으로부친은구장이며, 재산가 1928 년보통학교졸업, 부친일을도와줌, 제 2 회강습회졸업, 양잠부업시작, 부락개량임태순 ( 任泰淳 ) : 회천면율정리밤나무농사지역으로 30 호의촌락 1930 년 4 월전작물증수의지도포 2 정보지정, 조부가지도원, 조부의대리인으로선정제 2 세대독농 ( 篤農 ) 으로신망

34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3. 농촌정책과중심인물 3) 농촌진흥운동 1929 년의대공황은산미증식계획으로피폐해진식민지조선의농촌을파국으로몰고갔다. 이는일본내공황의피해를식민지농촌으로떠넘기려는일제의공황타개정책에서비롯된결과였다. 비료값은오르는데, 쌀과누에고치가격은절반이하로떨어져웬만한중견농가조차빚더미에올라앉게되었다. 그러나가장큰문제는보릿고개였다. 다음표에서볼수있는것처럼조선총독부의통계를인용하더라도 1930 년당시전체소작농 209 만 3106 호가운데 116 만 981 호, 즉 56% 가춘궁상태에있었다. 양주의경우도사정은마찬가지였다. 계급별춘궁상태를보면, 특히순소작농의경우 80% 가넘는농가가보릿고개에허덕여야했다.* < 춘궁상태에있는농가호수 > 구분 / 계급조선경기양주 (A) 양주총호수 (B) A/B 자작농 92,304 2, , % 자작겸소작농 323,470 22,233 1,745 5, % 순소작농 837,511 97,001 7,542 9, % 계 1,253, ,641 9,656 15, % 출전 :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 ( 下 ), 1930, 쪽. ( 단위 : 호 ) 1931 년 6 월조선총독으로취임한우원일성 ( 宇垣一成 ) 은어떤식으로든이러한상황을타개하지않고서는식민지를안정적으로통치할수없다는생각에서대대적인농촌진흥운동을전개하였다. 그러나초기의진흥운동은주로색복 ( 色服 ) 장려나단발, 금주단연등과같은생활개선사업에치중되고있었다 년의자료이기는하지만남양주의사례로는단발과염색전습회의건이있다. 우선단발의실적을보면, 경기도내남자 92 만 4590 명가운데단발하지않은자는기혼자 9133 명, 미혼자 137 명으로그비율은 0.01% 이다. 양주는남자 5 만 4204 명중기혼자 341 명, 미혼자 0 명으로비율이 0.006% 에지나지않는다.* 이처럼뛰어난성적을보인것은길거리에서순사나면직원이가위를들고강제로단발을강요했기때문이다. 한편, 조선총독부는위생을핑계로흰옷대신색복을장려하였다. 그러나실제는부녀자들이흰옷을세탁하는데들어가는시간을절약하여전쟁수요를충당하기위한생산에동원하기위해서였다. 또한흰옷이갖는 백의민족 이라는상징성을없앰으로써조선의민족성을말살하려는의도가있었다. 양주에서는각면에, 염색전습회 를개최하여 염색에대한지식기능을습득하게함과동시에공동염색의실시요항도알게한다. 이후면내각농촌진흥회로하여금순차로공동염색을하게하여색복을착용하도록한다. 는명령을내린뒤, 염색에필요한염료와약품은도에서입찰을통해공동구입처를선정하고비용은염색자가부담하게하였다. 전습회의일정은 8 월 4 6 일광적면, 7 9 일노해면, 일진접면, 일진건면, 일화도면, 일와부면으로정해졌다.* 농촌진흥운동이본격적으로전개된것은 1933 년 3 월부터였다. 정무총감이각도에보낸통첩 농산어촌진흥계획실시에관한건 에서이른바 농가경제갱생 5 개년계획 의실행방침으로서각면마다 1 개의지도부락을선정하여 5 개년간 식량충실, 현금수지개선, 부채정리 의 갱생 3 목표 를연차적으로달성해나갈것을지시하였다. 양주군은우선당시사회적으로큰문제가되었던부채문제를해결하기위해금융조합에서조합원의고리채를정리할수있도록저리대부를실시하였다.* 또한동민들사이에서도공동체의파괴를막기위해채무자의빚을면제해주는일도있었다. 즉, 시둔면신곡리의한촌락인신촌 ( 新村 ) 에서는 동민간친목손상을방지하며채무에졸리어울고있는빈농을구제함에있어선결문제로큰도움을주고자 채무일체를삭감해주었다.* 그러나이것은일시적인해결책이었기때문에 중심인물 이없는곳, 즉지도부락이아닌곳에서는관이직접나서서농촌진흥회를만들어사업을주도하였다. 노해면방학리의잿고개마을은관이적극개입하여진흥운동을일으킨전형적인사례이다. 이마을은 동민의대개가완고하고나태하여면내에서제일파멸되는상태 * 에있어양주경찰서장과강원달면장이현장에출장하여직접지도에나서진흥회를조직하고, 실행사업으로쌀 1 홉씩을모으도록하였다. 절미저축운동은강원달면장의적극적인지도로잿고개뿐만아니라노해면전체에서시행되어, 저축 3 개월만에백미 41 석을모으는성과를이루었다.* < 양주군진흥회의진흥운동실적 > 실행사항진흥회수회원수수량금액 ( 원 ) 저금절미저축새끼짜기가마니짜기초혜 ( 草鞋 ) 재래연 ( 在來턁 ) 잠구 ( 蠶具 ) 가사용기구편물류부물 ( 敷物 ) 농구류 ,209 2,166 4,233 3,103 10, ,245 1,904 1, 석 ( 石 ) 1,150,595 관 ( 貫 ) 23,218 매 ( 枚 ) 161,836 정 ( 定 ) 649 매 5,173 매 3,748 개 ( 介 ) 544 매 10,181 개 3, , , , ,

348 국자연 ( 푎子筵 ) 탄표 ( 炭俵 ) 가마니짜기기계강물류 ( 綱物類 ) 적궤 ( 荻풴 ) 마승 ( 麻繩 ) 제입성 ( 製혷筬 ) 저채피 ( 楮採皮 ) 기류제품 ( 杞柳製品 ) 적세공 ( 荻細工 ) ,150 매 8,826 매 28 개 44 개 248 개 2,800 심 ( 尋 ) 300 개 5,700 근 ( 斤 ) 1,010 개 180 개 출전 : 동아일보 계 1,482 34, , 한편, 조선총독부는농촌진흥운동을고조시키고중심인물을양성하기위해 10 만원의예산을들여양주에농사훈련소를설치하고자하였다.* 그리고운동에박차를가하기위해도간부로구성된 7 개의지도반을파견하여관계자들을독려하였다.* 다음표에서보듯이관의적극적인개입으로양주군내 486 개부락진흥회에서는조직이만들어진지 6 개월만에 새끼꼬고짚신삼는것을필두로농잡구제조와절미저축저금 등이활발히전개된결과무려 11 만 2568 원이라는거금을모았다고한다. 이처럼관이적극개입한경우도있었지만, 이른바중심인물이주도하여관의지원을받아진흥운동을전개한사례도있다. 양주군상금오농촌진흥회가그것으로조선총독부가선전하는농촌진흥운동의대표적인성공사례이기도하다. 모범부락으로도지정되어보조금을받았던금오리는원래 50 호에인구 260 명, 경지면적은논 23.7 정보, 밭 14 정보, 자작농 4 호, 자작겸소작농 6 호, 순소작농 40 호로호당평균경작면적이 0.7 정보에지나지않는전형적인빈촌이었다. 이런가난한마을이성공사례로될수있었던것은 중심인물 윤원세의역할이컸기때문이다. 윤원세는 1890 년생으로서울보성중학교 3 학년을중퇴한뒤, 1913 년부터토지조사국에서고원 ( 雇員 ) 으로근무하였다 년에귀향하여농업에종사하다가 1917 년에야학회교사가되었다 년에는농사개량방면에착수하여합리적인영농법을실행하였는데, 때마침대홍수로채소값이폭등하여몇배의이익을올리자주민의신망을얻게되었다. 또한 1921 년에는금오리의구장으로선임되었으며면협의회원, 군농회특별의원, 금융조합평의원등을역임하였고, 1923 년 11 월에는마을청년 34 명을규합하여금오청년회를조직 (1926 년 7 월부인회조직 ), 회장으로추대되었다 년 5 월에이르러서는경기도주최교화단체간부내지 ( 內地 ) 시찰단원으로선발되었으며, 농촌진흥운동이일어나자 1934 년상금오농촌진흥회를결성하여회장으로활동하였다.* 상금오농촌진흥회의활동내용은마을단위단위에서의진흥운동실태를잘보여주는것으로발췌하여정리하면다음과같다. < 상금오농촌진흥회활동내용 *> 사업실적 1. 식량충실 2. 부채변제상황 : 종래 1 호당 원의부채가 40 원으로감소 3. 공동경작 : 1924 년윤원세의노력으로논 1 정보, 밭 0.5 정보의공동경작지를대여받았다. 밭의일부는군이나군농회의지정을받아뽕 밤 소나무등의식묘포를경영하여이용하고있다. 또한공동경작으로구입한토지는장차논 0.5 정보, 밭 0.5 정보의자작농을창정할방침이며, 수익금은토지구입이나비료구입등의영농자금으로연리 7% 로대여하여금융조합자금에의존한사업을마을에서자주적으로해결할것을기대한다. 4. 부업장려부녀자의가내공업으로새끼와가마니짜기를실행하여다음과같은성과를얻었다. 구분기대수호수 1 개년생산수량 새끼가마니 ,000 관 14,000 매 7. 부인회사업 : 회원은매월가마니 3 매또는새끼 4 관을만들어월례회에지참납부하도록하여, 판매고 1100 원을올려저금하였다. 8. 기타 : 색복착용, 미신타파, 기타교풍교화도대부분개선하였다. 그러나이러한사례가일반적이었는가는매우회의적이다. 물론실적이상당한농가나농촌이전혀없는것을아니나, 대체로보면지지부진하여일이순조롭게되고있지않은편 * 이라는지적이오히려실상에가까울것이다. 예를들어색복착용의경우에도 여전히백의는그대로활보하고있다. 색복장려의제일선에있는지도자라는자가태연히백의를입고 * 있거나, 농촌진흥운동의효과가전혀없는데가깝다는 * 평가가나오고있다. 심지어진흥운동의촉탁지도자였던증전수작 ( 增田收作 ) 조차 외견상잘정비되어일견갱생된부락같은모습을보이지만, ( 관이 ) 보조를중단하고지도의손길을늦춤과동시에옛모습그대로전락하는사례가결코적지않다. 지금까지전국에많은모범부락이창설되고또많은모범부락이조락 ( 凋落 ) 한사실이이를증명한다. * 고혹평하였다. 남양주의실태를정확하게보여주는자료는아직발굴되지않았으나, 경기도에서조선총독부내무국에올린 인구의도시집중방지에관한의

349 견 46) 에서농촌진흥운동이제대로진척되지못하고있음을간접적으로시인하는내용을볼수있다. 이의견은크게 1. 인구의도시집중을유인하는것 과 2. 전항의유인을없앨적당한시설에대한의견 으로구분되어있다. 1 항에대해경기도가조사한결과는 4 개년으로평균하여빈곤으로인한이전 (65%), 영업또는사업경영 (20.5%), 자녀교육 (6.3%), 공과기타부담의과중 (3.1%), 사업실패 (2.5%) 의순이다.* 즉, 가난때문에농촌을떠나도시로일자리를찾아나간경우가절대다수를차지하고있다. 그나마부업으로생계를보조했던일조차불황으로끊어지고만것이다. 게다가 농촌의궁핍이그극에달해조세공과는이에따라경감되지않을뿐만아니라도시에비해과중한것은각종통계에의해분명한바이다. 특히각종지방의기부금부담등또한적지않은 * 상황이었다. 비중만으로따지면적지만뒤에보듯이당국자가이문제에대해항목을따로하여해결책을제시한것으로보아실제의비중은통계보다도컸을것이다. 그러나농촌진흥운동은이러한상황을개선시키지는못하였다. 당국자도 자작농창정에의해경지소유의균분화가매우더디게진행되어여전히소작농의대부분을점하며, 농지령이시행되었다하나경지에대한이들소작농의불안은아직완전히배제하지못했다고할수있다. 특히현하농촌에서가장걱정되는것은저리영농자금의결핍 * 이라고인정하였듯이진흥운동은여전히구호에머물러있었다. 이에경기도는 산업조합의창설및확대강화에힘을두어생산물의판매및필수품의구입에농산어촌민의경제적지위를향상 시키고, 지방단체의직원에대해일층우우 ( 優遇 ) 의방법을강구하여 중심인물의육성에노력하는 방안을제안하였다. 또한농산어촌의부담을줄이기위해총독부에 지방세제개정, 지방재정조정교부금시행, 지방적기부금부담금등철저취체, 지방단체의구역을적당히변경 하려는등의다양한개선안을제안하였다.* 그러나 1937 년중일전쟁이발발하고 1938 년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전개되면서이른바 총동원체제 가수립되자농촌진흥운동은그방향을수정할수밖에없었다. 즉, 진흥운동내내요란하게내걸었던개별농가단위의자력갱생이라는구호는자취를감추고대신촌락단위의생업보국 ( 生業報國 ), 직역봉공 ( 職役奉公 ) 등이강조되기시작하였다. 이로써농촌진흥운동은갱생이라는이데올로기마저버리게되었다. 경기도는전시동원을효율적으로수행하기위해우선 1937 년 6 월이후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병행하여저축장려계획을실시하였다. 즉, 군 면단위로저축목표액을정해놓고목표달성을독려하였다. 경기도의목표액은 447 만 9984 원이었으나달성액은 326 만 8410 원으로약 73% 의성과를이루었으며, 양주군은목표액이 22 만 8421 원, 달성액은 17 만 5517 원으로역시약 73% 의성과를보았다.* 그리고 시국에대처하고농산어촌을철저하게지도하기위해 경기도내무부장과산업부장은공동명의로각부군수에게 1937 년의지도방침 을지시하였다.* 결국일본제국주의는침략전쟁에필요한물자를조선민중에게떠넘긴것이다. 더구나침략전쟁이장기화하자그부담은더욱커지게되어물자는물론사람까지공출당하는상황이전개되었다. 동시에효율적인동원체제를만들고, 후방의치안을안정적으로확보하기위해조선민중에대한지배망을더욱강화하였다. 공동작업반이니애국반이니사봉대 ( 仕奉隊 ) 니하여조선민중을오가작통의원리에따라편재하여통제하고, 노동력을무상으로수탈해갔다. 농촌진흥운동이라는허구적인이데올로기마저전쟁을맞아파산선고를받은것이다. < 인구의도시집중요인 > 구분 / 연도 계 공과기타부담의과중 23(2.4) 18(1.7) 37(3.6) 59(4.4) 137(3.1) 자녀교육 57(5.8) 93(8.7) 103(10.1) 10(8.2) 363(8.3) 영업또는사업경영 172(17.6) 198(18.6) 235(23.1) 296(22.0) 901(20.5) 사업실패 22(2.3) 22(2.1) 33(3.2) 25(1.9) 112(2.5) 빈곤으로인한이전 691(70.7) 731(68.6) 605(59.4) 838(62.4) 2,865(65.1) 기타 2(0.2) 3(0.3) 6(0.6) 14(1.1) 25(0.5) 계 977(100) 1,065(100) 1,019(100) 1,343(100) 4,403(100) <1937 년의지도방침 > 1. 갱생지도부락은물론기타농촌진흥회의지도에힘을쏟아부락민에게본건의요지를철저히하여발분이행을촉구함은물론, 특히진흥회간부, 지주, 기타유력자들의분기를촉구한다. 2. 구체적인실천사항 1) 퇴비는 30% 증산목표 2) 목화, 소맥, 대맥, 기타국책상중요한농산물의증수 3) 가축증산에노력하여군수자원의배양과자급비료의증산을도모 4) 휴양지, 기타공지이용생산증가 5) 가마니는금년 30% 증산목표 6) 누에는 10% 증산목표 7) 산림보호및연료절약 8) 부녀자의옥외작업장려, 공동작업이행 3. 증수와절약으로발생한잉여는소비하지말고미리표준을정해저축할것

350 수도 ( 水稻 ) 종별저축의표준비고 반당나락 5 승 목화, 소맥, 누에수입금의 5% 가마니와새끼수입금의 10% 휴경지와빈터이용수입금의 25% 자작과영세농은그상황에따라적당한비율을증감하며, 특히지주도부락에따라줄일수있다. 노임수입금의 5% 공사현장에서저축한것은제외 소비절약 매월 1 호당 15 전이상 공동경작과공동작업공동경비를공제한잔액 종래실행중인것은이와병행하여각호의상황에따라그금액을정해이행할것

35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1 절일제의지방지배정책 * 4. 남양주지역의유지층 지금으로서는일제시기남양주지역의유지층에대한상세한전모를알수없다. 다만면협의회원과 농지개혁시피분배지주및일제하대지주명부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 그리고 양주지주 의회원명단를통해서간단하게나마그실체의일부를볼수있을뿐이다. 먼저면협의회원부터보도록하겠다 년다시총독으로부임한재등실 ( 齋藤實 ) 은 1 년여의준비끝에지방자치를완성시킨다는목표로지방제도를개정하였다. 개정의주요골자는읍을신설하고읍을포함한도 부 면을모두법인화하며, 도회 부회 읍회를의결기관으로격상시키고면협의회는자문기관으로하는대신선거제를도입한다는것이었다. 면협의회를자문기관으로묶어둔것은만일도부읍회처럼의결기관으로할경우총독부의통제에서벗어날수도있었기때문이였다.* 즉 민의의창달기관으로온건한면민의의향을듣는것을목적 * 으로설립한면협의회가조선인의권리를주장하는기관으로발전할소지를없애는대신조선인의정치적욕구를해소시키기위한고육책이었다. 따라서선거 피선거권자의자격을 1920 년대와마찬가지로면부과금 5 원이상의납부자로한정시켜일제의식민지배에협조할수있는친일적유력자층을협의회원으로충당하려하였다. 일제가선거자격을제한하면서첫째, 무항산자무항심 ( 無恒産者無恒心 ), 둘째, 의무를부담하지않는자는권리를갖지못한다. 셋째, 조선의민도가유치하나 대체로자산을가진자는유식자로공직의수행을감당할수있다. * 는논리를내세운것도바로이때문이었다. 이런목적으로실시된면협의회원의투표율은예상외로높았다. 제 1 회선거에서경기도의평균투표율은 87.15%, 양주군의투표율은 87% 에달했다.* 제 2 회 (1935 년 ) 선거에서는양주군의경우총유권자수 1699 명, 투표자수 1508 명, 기권자수 191 명으로투표율이 88.75% 에이를정도로높은참여율을보였다.* < 제 1 회경기도지방선거군별투표율 > 군명고양광주양주연천포천가평양평여주이천용인안성진위수원시흥부천김포강화파주장단개풍평균 투표율 (%) 이를다시부 읍 면별로보면제 1 차는부 85.9%, 읍 92.1%, 면 86.1%, 제 2 차는부 85.8%, 읍 92.8%, 면 93.1% 로집계되었다. 이처럼조선총독부도예상밖에좋은성적을거두었다고할만큼높은투표율이나온것은그이면에지방당국자의선거선전, 또는기권방지등에대한노력이있었기때문이었다.* 즉 조선에서이러한숫자로직접일반민중의자치정신이풍부하며, 정말로선거사상이보급되어가고있다고단정할수없다. 거기에는본부를비롯하여도 군 부 읍 면당국자의선거사상선전에대한노력이매우컸기때문이다. 라거나 3 만여투표자가운데진정으로우리들의의원을뽑는다는신념을가지고스스로가서투표한사람은과연얼마이겠는가. 라는지적에서도알수있듯이선거에면 리원을비롯한말단관리들이적극개입한결과이처럼높은투표율이나온것이다.* 식민통치의선정을선전하기위한지표로투표율을높이려는조선총독부의독려와이러한요구에맞추려는면직원의활약에따른결과일것이다. 그렇다면면부과금 5 원이상의납부자는어떤계층의사람이었을지가의문시된다. 김익한의연구에따르면, 이들은논 1.8 정보, 밭 6.5 정보정도의토지를소유한계층으로최소한중소지주에해당하는층이다. 그러나실제선거에서는면부과금 3 원납부자도협의회원이된것으로보아소지주층까지선거자격을가지고있었을것이다. 이러한사정은양주도마찬가지이다 년의 양주지주 명부에따르면양주에거주하면서 5 정보이상의논을가진지주는 92 명이었는데, 1935 년당시양주군유권자가 1700 여명이었다는것은대상이소지주층도포함되었다는것을말한다. 다음표에실린사람들은남양주지역에서지주로서뿐만아니라지역유지로서도활동한사람들이다.* 이가운데서행적을알수있는사람들만정리하면다음과같다. <1935 년제 2 회면협의회원당선자명부 > 면명 / 구분별내면진접면진건면화도면와부면미금면 당선자 고산리이연국 ( 李演國 ), 광전리허봉래 ( 許鳳徠 ) 이규진 ( 李奎瑨 ), 산곡리김연우 ( 金演友 ), 용암리이상뢰 ( 李尙횧 ), 청학리남창희 ( 南彰熙 ), 퇴계원리팔강상조 ( 八江常造 ), 화접리김병호 ( 金秉鎬 ) 금곡리이선익 ( 李宣翼 ) 이원범 ( 李原範 ), 내곡리김세환 ( 金世煥 ) 이범재 ( 李范宰 ) 김영철 ( 金榮哲 ) 현선영 ( 玄瑄榮 ), 부평리최왕산 ( 崔旺山 ), 장현리이재희 ( 李在熙 ), 진벌리김홍태 ( 金興泰 ), 팔야리이만섭 ( 李晩燮 ) 팔현리홍만표 ( 洪萬杓 ), 오남리심종억 ( 沈鍾憶 ) 우수익 ( 寓洙益 ), 사능리구민서 ( 具敏書 ) 최용규 ( 崔龍奎 ), 양지리이은규 ( 李殷圭 ), 신월리이태석 ( 李台錫 ) 이상범 ( 李象範 ), 진관리박경오 ( 朴敬五 ), 배양리이창수 ( 李昌秀 ) 녹촌리최한식 ( 崔漢植 ), 답내리신철희 ( 申哲熙 ), 마석우리신성희 ( 申聖熙 ), 묵현리이봉응 ( 李鳳應 ) 김영섭 ( 金泳燮 ), 송천리김종헌 ( 金鍾憲 ), 월산리이승렬 ( 李承烈 ), 차산리이한정 ( 李漢鼎 ) 정환교 ( 鄭煥敎 ), 창현리박원이 ( 朴元伊 ) 능내리한준석 ( 韓駿錫 ) 김의회 ( 金義會 ) 정규승 ( 丁奎昇 ), 덕소리조원성 ( 趙元成 ), 도곡리이상호 ( 李商鎬 ), 송촌리김부길 ( 金富吉 ), 조안리박쬎쬎 ( 朴쬎쬎 ), 월문리이병주 ( 李炳宙 ), 율석리김종구 ( 金鍾九 ) 금곡리이덕승 ( 李德承 ) 오선근 ( 吳璿根 ), 삼패리김유순 ( 金裕淳 ), 수석리신창식 ( 申昌植 ) 김경삼 ( 金敬三 ), 이패리이석규 ( 李錫圭 ), 일패리이동규 ( 李東奎 ) 신철우 ( 申哲雨 ), 지금리송만식 ( 宋晩植 ), 평내리이승익 ( 李升翼 ) 팔강상조 ( 八江常造 ) : 전헌병분견소장. 양주지주회의평의원 년당시논 12 정보 ( 타조 ), 밭 11 정보 ( 정조 8, 타조 2) 에작인이 93 명인대지주

352 이범재 ( 李范宰 ) : 양주지주회평의원 년당시포천군에있는논 23 정보 ( 타조 ), 밭 24 정보 ( 정조 ) 에 80 명의작인을거느린대지주이상범 ( 李象範 ) : 양주지주회평의원우수익 ( 禹洙益 ) : 양주지주회회원 년당시논 50 정보 ( 타조 ), 밭 26 정보 ( 정조 ), 작인수 350 명의대지주 년서울거주. 토지조사사업당시진접면내용정리 1247 평, 송능리 1833 평, 사능리 2465 평, 진관리 2 만 9433 평, 신월리 1 만 4188 평, 배양리 1 만 5657 평, 합계 6 만 4823 평소유김연우 ( 金演友 ) : 양주지주회회원신성희 ( 申聖熙 ) : 양주지주회평의원이상뢰 ( 李尙횧 ) : 양주지주회회원이상호 ( 李商鎬 ) : 와부면장 (1936) 다음으로양주의지주층에대해살펴보면, 양주지주회는 1941 년 양주군내에 5 정보이상의논을가진 400 명의지주각위가대륙전진기지의임무를자각하여상호단결한위에오로지미작보국 ( 米作報國 ) 의열렬한적성 ( 赤誠 ) 으로써 * 조직되었다. 주요사업으로는 정부의미곡증산계획에순응하고, 경종법의개선, 병충해의방제, 농구의설비, 비료약제의판매알선, 소작인의표창, 생산물의합리적처리등 을내걸었다. 즉, 일제는침략전쟁이장기화되자쌀에대한통제를강화하는한편,* 미곡증산과쌀공출을위해지주들을동원하면서마치지주들의자발성을얻은것처럼만들고자지주회를결성시킨것이다. 양주지주회가관제단체라는것은회장 부회장 간사 상담역이모두관리이며, 평의원조차다음표에서보듯이면장이당연직으로들어가있다.* 양주지주회는 업무의발표, 당국의지시방침내용선전, 회원의연락및의견교환등모든자료를제공할사명으로 회보 양주지주 를수시로발행하였다.* 양주지주 에실린명단가운데관리를제외한지주 392 명을거주지역별로정리하면다음표와같다. 서울에거주하는지주가 70% 가넘고, 이들가운데 30 정보이상을소유한대지주가 34 명에이른다.* 이에비해양주에거주하는지주는 92 명으로 23.5% 에지나지않는다. < 양주지주회평의원 > 이름직책주소비고 이효영 ( 李效榮 ) 별내면장팔강상조 ( 八江常造 ) 동천철 ( 東泉徹 ) 진접면장이범재 ( 李范宰 ) 송촌의웅 ( 松村義雄 ) 진건면장이상범 ( 李象範 ) 최형식 ( 崔텣植 ) 화도면장신성희 ( 申聖熙 ) 이택종 ( 李宅鍾 ) 와부면장박진규 ( 朴鎭圭 ) 이좌용 ( 李佐鎔 ) 미금면장죽본명 ( 竹本明 ) 비고 : 현남양주시에해당되는내용만기재한것이다. 별내면퇴계원리별내면퇴계원리진접면장현리진접면내곡리진건면진건면신월리화도면마석우리화도면마석우리와부면덕소리와부면도곡리미금면금곡리미금면금곡리 제 2 회면협의회원 제 2 회면협의회원 제 2 회면협의회원 < 양주지주거주별통계 > ( 단위 : 명 %) 전체지주수 도내지주도외지주현남양주시기타서울기타 392(100%) 39(7.6) 71(18.6) 270(70.7) 12(3.1) 비고 : 1 양주거주지주는 92명이다. 2 도내지주기타에는고양군거주자가 7명이다. 이런경향은경기도에서일반적으로볼수있는상황이다. 그이유는첫째내외관리에의한토지겸병, 둘째지방관즉관찰사및군수등의다수가서울에서파견, 셋째서울거주자가축적재산을지방의토지에투자했기때문이다. 다만양주의경우는서울지주가금융재산가보다양반출신이많다는점에특징이있다.* 따라서양주지역은전통적인지배층이일제시기에들어와서도여전히영향력을행사하고있었던곳으로보인다. 부재지주가많았던것에비해비교적소작쟁의가적었으며, 쟁의또한격렬하게전개되지않았던배경에는이런영향이있었던것으로추측된다.* 농촌진흥운동에서도보았듯이지역주민들이부채로인해계급간의갈등이심화되는것을막기위해부채탕감을결의한것도같은맥락이다. < 양주지주의회원 > 면명 / 구분양주지주회원미금면금곡리정수용 ( 鄭壽用 ), 이패리서기풍 ( 徐起?), 호평리이보훈 ( 李輔勳 ) 이명휘 ( 李明徽 ) 고산리유건수 ( 柳健秀 ), 광전리조순득 ( 趙順得 ), 산곡리김연우 ( 金演友 ), 용암리이상뢰 ( 李尙횧 ), 별내면청학리남명희 ( 南明熙 ), 덕소리강승구 ( 姜昇求 ) 김인수 ( 金仁壽 ), 도곡리이총 ( 李塚 ), 삼봉리최춘겸 ( 崔春兼 ), 송촌 와부면리수종사, 조안리김의창 ( 金毅昌 ) 박치구 ( 朴稚龜 ), 월문리서진여 ( 徐陳汝 ), 진중리표성주 ( 表聖柱 )

353 진건면 신월리이상범 ( 李象範 ), 오남리심원두 ( 沈遠斗 ) 우수익 ( 禹洙益 ), 진관리김복성 ( 金福成 ) 김순배 ( 金順培 ) 진접면 금곡리이한근 ( 李漢根 ) 김제연 ( 金濟連 ), 내곡리이범재 ( 李范宰 ) 화도면 수전내리손재원 ( 孫在源 ) 비고 : 현남양주시에해당하는내용만기재한것이다. 위의표는양주지주의회원가운데남양주지역만을뽑아정리한것이다. 이밖에양주에거주하는 20 정보이상의대지주로한승석, 한문석이있으며, 도외지주로는평남안주군안주면남천리에거주하는박지찬이논 8 정보 ( 타조 ), 밭 23 정보 ( 정조 ), 작인 187 명을거느리고있었고, 특수지주인영제 ( 寧齊 ) 합명회사는논 147 정보 ( 타조 ), 작인 90 명을거느리고있었다.

354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1. 토지조사사업의실시와성격 조선토지조사사업 ( 이하 사업 ) 은일제가조선을식민지화한후실시한주요경제정책의하나였다. 사업 은 1910 년부터 1918 년까지 2040 여만원의경비를들여토지소유권 토지가격 지형지모 ( 地形地貌 ) 를조사하여식민통치의기초를마련하고자한사업이었다. 토지소유권조사는각필지별토지소유권과경계를사정 ( 査定 ) 하여토지등기제도를확립하기위한기초장부를만드는작업이었다. 토지가격조사는전국의지가를조사하여지세부과를위한표준을만들기위한것이었고, 지형지모조사는전국적으로지형도를작성하는작업이었다. 당시조선은전체인구의 80% 이상이농민인농업사회로서 사업 은조선의가장중요한생산수단인토지를완벽하게파악하려는것이었다. 따라서 사업 은조선경제에매우커다란영향을미쳤으며일제의식민통치에물질적기초를제공하였다.

35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1. 토지조사사업의실시와성격 1) 토지조사사업의준비과정 사업 은 토지등기제도및지세제도를확립하여토지에대한통치의기초를마련하기위해 1910 년 3 월토지조사국이개설되면서시작되었다가, 한일합방이후 1910 년 10 월조선총독부에임시토지조사국을설치하고그사업을계승하여수행하였다.* 여기서는 사업 의진행과정과성격, 의미등을파악하기위해서먼저 사업 의전사 ( 前史 ) 라할수있는통감부시기에시행된징세제도개혁과국유지조사과정을살펴보고자한다. 일제는러일전쟁발발직후인 1904년 2월 23일강제로체결한 한일의정서 를시작으로이후 3차에걸친한일협약을통해조선의내정을장악하였다. 경제적으로도재정정리, 토지소유권의법제화등을추진하여경제구조를식민통치에알맞도록개편하였다. 또한각의에서 대한시설강령 을의결하여이후식민정책의기본선을제시하였다. 토지조사사업당시이중농업의척식방안을살펴보면 우리농민다수가조선내지에들어간다면한편으로는초과인구를토지측량과정위한이식지 ( 移植地 ) 를얻고, 다른한편으로는부족한식량의공급을늘려일거양득이될것 * 이라는일제의의도가드러나있다. 이는곧식량 원료의공급지화정책과이주식민지화 ( 移住植民地化 ) 정책을병행한다는것을의미한다. 이러한기조로이시기농업식민정책은두가지측면에서추진되었다. 하나는조선내륙지방의개방과농업식민의기초작업으로일본인의토지소유를합법화하고토지소유권을제도적으로보장함으로써식민지주층의토지침탈을촉진하는것이었다. 다른하나는직접적으로일본농민의이주식민을장려하는것이었다. 이에지주 자본가주도의이주식민을보조하는한편일본정부스스로도국책이주식민회사의설립을추진하여 1908 년동양척식주식회사 ( 이하 동척 ) 가설립되었다.* 조선에대한일본인의토지침탈은외국인의토지소유가합법화되기이전인청일전쟁직후부터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이후러일전쟁을전후로급속히확대되어 1909 년현재일본인의토지점유면적은약 5 만정보를넘어서고있었다.* 그러나조선의국법상외국인의토지소유는불법이었으므로이러한상태는일본인토지점유자입장에서는불안하고불편한것이었다. 따라서일본인토지자본의토지매수및점유를합법화하는조치가시급히요구되었다. 이에따라이미상당히진행된일본인의토지소유를보증하고토지의집적을더욱촉진하기위해토지관련법의제정을추진하였다. 토지소유권을법적으로보장하는제도는이미조선에투자한일본인농업자본을위해서라도시급히해결해야할문제였다. 통감부는이를위해 토지가옥증명규칙 (1906)* 과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 (1908)* 등을공포하여토지에관한권리의변화와권리보존을증명할수있도록하였다. 토지가옥증명규칙 은그때까지불법이었던외국인의토지소유를합법화하였다는점에역사적의의가있다. 이규칙은토지나가옥을매매 증여 교환 전당하였을때통수 ( 統首 ) 나동장의확인을받아군수 부윤에게증명을요청할수있게한것이다. 또외국인이한쪽혹은양쪽당사자일경우일본이사관의사증 ( 査證 ) 을받아증명을얻도록하였다. 그러나이법은증명을받을수있는토지를신규매매가이루어지는토지로만제한하고있어서이전에점유된일본인토지는소유권증명을얻을수없었다. 이한계를극복하기위해제정된법규가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 이다. 그러나이법들은토지에관한모든물권이망라되지않았을뿐만아니라모든토지소유자에게증명받을것을강제하는법이아니었다. 따라서증명자체는제 3 자에대한대항력을가진것이라보기어렵기때문에임시방편적인성격이강하였다. 또한증명받은토지의절대면적이나위치등은여전히불명확한상태로남아있었다. 결부제 ( 結負制 ) 에기초한토지조사로는토지의절대면적을파악하기어려웠고, 토지의위치를지정하여필지별위치를확정적으로알수있게해주는지번 ( 地番 ) 도애매한채로남아있었기때문이다. 따라서소유권을절대적으로보호할수있는등기제도가실질적인내용을갖추기위해서는전국의모든토지를일률적인기준에의해조사할필요가있었다. 이것이일제가식민지화초기에토지조사를긴급히추진한이유의하나였다. 사업 당시최대의쟁점이었던국유지분쟁은조선시대의수조권적토지지배를철폐하고근대적인토지소유제도를확립하는과정에서발생한것이라고할수있다. 일제가국 민유의구분이라는문제에직접적으로접근하기시작한것은황실재산을정리하는과정에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는황실재산과국유재산이명확히구분되지않았다. 궁중과부중 ( 府中 ) 의분리, 황실재산과국유재산의분리는근대국가성립을위한필수조건이었으며일제로서는궁중을중심으로한항일민족운동을억압하기위해서라도황실재산을국유재산으로정리함으로써황실의재정적기초를해체할필요가있었다 년 7 월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 ( 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 ) 이설치되면서 * 국유와제실유 ( 帝室有 ) 로판단되는모든재산을조사하여각각의소속처를결정하도록했다. 이어 1907 년 11 월경리원, 제도국, 각궁사무정리소, 공진소 ( 供進所 ) 등황실재정기구들이폐지되고궁내부산하에제실재산정리국이설치되어 * 황실재산의정리를담당하게되었다 년 1 월 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관제 의개정 * 에따라국유나제실유로혼탈입 ( 混奪入 ) 된민유토지를구분하여환급하는조처가취해졌다. 이후궁전 종묘의부지와조선의능 ( 陵 ) 원 ( 園 ) 묘지의내해자 ( 內垓字 ) 내의토지를제외하고궁내부와경선궁 ( 慶善宮 ) 소속의토지를먼저국유로이관하도록하였다.* 또한역둔토의관리는탁지부가행할것과 1907 년분까지의역둔토도조 ( 賭租 ) 도전 ( 賭錢 ) 은궁내부의수입으로하고 1908 년분이후부터는국고수입으로할것을결정하였다.* 즉, 모든제실유토지를원칙적으로국유화한다는결정을내린것이다. 이시점에서조선의모든토지를국 민유로구별하는것에대한대강의방침이결정되었다. 국유미간지이용법 (1907)* 에의해미간지는국유로귀속되었다. 삼림법 (1908)* 으로사유임을입증하지못하는모든삼림 산야는국유로한다는방침이정해졌다. 경지에대해서는국유지와민유지로구별하였고이과정에서기존의역둔토는모두국유지가되었다 년 7 월탁지부안에임시재산정리국이설치되었는데 * 여기서는국유로옮겨진재산정리, 부동산상의권리에대한이의신청심의, 제실채무의처리, 토지측량에관한사무처리등의업무를담당하였다. 임시재산정리국의혼탈입지에대한처리방법은 1908 년 2 월에설치된토지조사위원회의국유지연구로부터많은영향을받았다.* 이때는단순하게유토 ( 有土 ) 는국유지로, 무토 ( 無土 ) 는민유지로인식하는수준이었고, 역둔토는모두유토이므로결과적으로역둔토에민유지가존재할가능성이있음을부인한셈이되었다.

356 전국의국유지를관리하게된탁지부는국유지에관한전체적인파악을위해역둔토의실지조사를계획하였다. 이에 1909 년 5 월 탁지부소관국유지실지조사절차 ( 度支部所管國有地實地調査節次 ) 가공포되었다.* 조사는 1909 년 6 월부터 1910 년 9 월까지실시되었다. 이조사의목적은국유지의소재와면적을실제로확인하고, 소작인을조사하여소작료를재조정하고일률적으로금납화하기위한것이었다. 소작인을조사한것은중간소작을배제하기위해서였다. 조사는현지답사정도의간이조사형태로진행되었지만광무사검당시강제로역둔토에편입된민유지들이국유지로파악됨으로써사업과정에서국유지분쟁이크게일어날소지를내포하고있었다. 조사가완료된후역둔토의면적은 11 만 8947 정보였다. 여기에 동척 에대한출자지및임대지를합하면 12 만 6432 정보였는데, 이는종래역둔토추산면적 10 만 3179 정보에비해 22% 가증가한것으로주로은토 ( 隱土 ) 의발견에서기인한것이었다. 역둔토의총필수는 56 만 7080 필이었으며관계소작인은 28 만 4228 명이었다.* 국유지의창출은국가와동일시되던황실이해체되는과정에서나타난필연적인산물이었다. 특히역둔토는대한제국시기에도끊임없이분쟁이제기되었던토지로, 소유관계가매우복잡했다. 광무사검역시역둔토를정리함에있어이를농민적토지소유로정리하는방안이아닌역둔토의지주경영을재원으로활용한다는것이었기때문에조선후기이래발전해온농민적토지소유를억압하는반민중적인원칙으로소유관계를정리한것이었다.* 일제의국유역둔토창출은바로반민중적인광무사검의성과를그대로계승하였다는점에서이후그결과를그대로계승한 사업 의역사적성격을규정하였다. 일제는효율적인조세징수를위해종래부정의온상으로인식되던향리층을배제한채징세기구를설치하고결수연명부 ( 結數連名簿 ) 라는새로운지세장부를만들었다. 이때작성된결수연명부는 사업 에서토지신고서와대조하는데사용됨으로써 사업 의토지소유권확정에중요한역할을하였다. 따라서결수연명부가작성되는과정은 사업 의전사 ( 前史 ) 로서중요한의미를가진다. 통감부가실시한징세제도의개혁은종래징세권을가지고있던수령과향리를징세기구에서배제시키는작업으로부터시작되었다 년 9 월 관세관관제 ( 管稅官官制 ) * 에의해종래수령 - 향리로이어지던징세체계대신세무사 - 세무주사로이어지는징세기구가만들어졌다. 이어군내 ( 郡內 ) 징세기구를개혁하기위하여 1906 년 10 월 조세징수규정 을공포하였다.* 그내용을보면지세는예전처럼면단위로징수하되면장과면내의다액납세자 5 명이상으로이루어진임원에의해각각의납세액이결정되고납세자로부터의현금영수는임원중에서선발된공전영수원 ( 公錢領收員 ) 이하도록하는것이었다. 제 3 차한일협약체결후징세기구에일본인을진출시키기위해 1907 년 12 월에공포된 재무감독국관제 ( 財務監督局官制 ) * 는종래관찰사가겸임하던세무감을별도로임명함으로써형식적으로는징세기구를행정기구로부터완전히분리하였다. 그러나면내부에서개별납세대상자의납세액을정하는구조가계속유지되었기때문에면을단위로한징세구조는여전히지속되었다. 개별적인납세자와납세액을국가가직접파악하기위해서는국가주도로개별납세자를대상으로한징세대장을만들어야했는데그것은결수연명부의작성으로나타났다. 새로운징세대장의작성은 1907 년의작부 ( 作?) 사업 * 에서비롯되었다 년 7 월 13 도세무감에게내린훈령 * 에서종래서원층이작성 장악하였던깃기 ( 衿記 ) 를세무 ( 분 ) 서에서관장하게함과동시에금년도의깃기작성을동장 ( 洞長 ) 지사인 ( 知事人 ) 세무 ( 분 ) 서에서담당하여종래깃기의기재불비 ( 記載不備 ) 를시정하도록하였다. 그러나서원층을배제한 1907 년의작부사업은충분한성과를거두지못하였다. 이에서원층의일부를결국징세기구에포함시켜야했고그감독을강화하는것으로현실적인타협을보았지만깃기를확보하지못한것은심각한문제였다. 이러한문제의대책으로 1908 년신고제를채택하였다. 대구재무감독국에서는 1908 년 7 월 작부에관해종래의작부를폐지하고결민 ( 結民 ) 에게정실 ( 正實 ) 한신고를하도록하여늦어도 8 월 31 일로써완료하도록하는결정 을내렸다.* 신고는속지주의를채택하여납세자가다른면에거주하더라도토지가있는면에신고해야했으며신고된필지를새로작성한광무양안 ( 신양안 ) 과대조하였다. 이는목표했던만큼원활하게진행되지는않았지만 1 만 1000 여결의은결을찾아내는성과를거두었다. 이러한결과에고무되어신고제에의한작부는 1909 년에전국으로확대되었고그것에기초하여결수연명부가작성되었다. 결수연명부는납세자별로매필지마다납세액을기입하는양식을취했는데종래의징세대장인깃기와동일한형식이었다. 그러나두락수를표기하고납세의무자와지주를함께적거나실명 ( 實名 ) 을적도록하였다는점에서깃기와차이가있었다. 또한작성된결수연명부를구양안과대조하였다는점에서 1908 년의경우와차이를보였다. 현실적으로광무양안의자번호 ( 字番號 ) 가아직민간에통용되지않았으며실제로사용된것은구양안의자번호였기때문에신양안에서구양안으로기초장부가변화된것이었다. 또한원칙적으로진전 ( 陳田 ) 을조사하지않은신양안에기초할경우은결을찾아내기어렵고, 조선후기이래궁장토나아문둔토의주요한성립방법인절수는양안상의진전을중심으로이루어졌기때문에국유지를파악하는데에도어려움이있었던것이다. 결수연명부를구양안과대조하도록한이면에는이러한현실적인고려가있었다. 그러나결수연명부에의한납세실적이저조하자일제는지세를더많이거두기위한방안으로지주를납세자로한다는원칙을세우고지주를신고자로하는결수연명부를다시작성하여 * 1911 년분지세부터는이결수연명부에의거하여징수하였다 년 12 월에는 결수연명부취급수속 을공포 * 하였는데결수연명부양식에서소작인의주소 성명란을없애는대신결가 ( 結價 ) 란을추가하여지주가납세의주체라는점을확실히하였다. 또한결수연명부를 현재에있어서토지에관한유일한장부 로규정하였다.* 그러나결수연명부의토지는구래의자번호로위치를파악하였기때문에실제그토지가어디에위치하는지를알기어려웠다. 이에따라결수연명부상의토지가어디에위치하는지를알수있게하는지형도에대한필요성이대두되었고이에 과세지견취도 ( 課稅地見取圖 ) 를작성하게되었다.* 이처럼결수연명부의작성은토지조사시의토지신고, 지주조사와불가분의관계를갖는것이었다. 즉결수연명부가나중에토지신고서와대조됨으로써 사업 과관련하여매우큰의미를지니게된것이다.

35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1. 토지조사사업의실시와성격 2) 토지조사사업의진행 사업 은 1910 년 1 월에토지조사계획 * 이입안되어같은해 3 월토지조사국이설치되고, 사업 의기간법령인 토지조사법 이공포 * 됨으로써시작되었다. 그러나합방후일제는토지조사국을폐지하고 1910 년 9 월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을설치하여토지조사를담당하게하였다. 토지조사법 은 1912 년 8 월에폐지되고 토지조사령 이공포 * 되면서 사업 에관한세부원칙들이결정되었다. 여기서는 사업 의구체적인진행과정을토지소유권조사와지가조사를중심으로살펴보고, 남양주지역 * 에서는 사업 이어떻게진행되었는지를살펴보고자한다. (1) 토지소유권조사 1 준비조사준비조사는면 동 리의명칭과경계를조사하고토지신고서를거두어들이는동시에지방경제와관습을조사하는것이었다. 이러한준비조사는 1910 년 5 월부터시작되어 1916 년 5 월외업반 ( 外業班 ) 이해산됨으로써종료되었다. 준비조사과정은외업반이그담당구역을지정하여해당도장관에게조사의개시를통지하고, 경무부장에게임시토지조사국출장원의신변보호를의뢰하도록하였다. 이는 사업 의준비기간에의병투쟁이치열하게고조되어 사업 의실시에많은어려움이있었고, 의병투쟁에대한일제의대대적인토벌이후에도농민들의저항은계속되었기때문에처음부터헌병경찰의무력을동원하여진행되었다. 다음으로는토지조사에대한제반사항을협의하기위해면장 동리장 지주총대및주요지주를일정한장소에소집하였다. 그자리에는당국자 경찰관헌및그지방을담당할준비조사원이동석하였다. 주지사항은토지조사의취지와방법, 지주의의무, 토지조사와측량순서에관한상세한설명등이었으며, 토지조사사업설명서 토지신고심득 지주총대심득 지주에대한주의서등을배포하였다. 동시에과세지견취도 결수연명부 국유지대장 역둔토대장 민적부등각종자료를수집하고면동리의명칭과경계를조사하여측량에도움이되도록하였다.* 준비조사에서가장중요한것은새로조사된동 리간경계를기준으로토지신고서를배포 수집하는것이었다. 토지신고서는토지소유자가작성하여임시토지조사국에제출하도록하였다. 토지신고서의배포 수집은지주총대가담당하였다. 지주총대는결수연명부와대조한후그확인과정에서이상이없을경우신고서에날인하고특별한사유가없는한그신고자를토지소유자로인정하는것을원칙으로하였다.* 토지신고서용지의배포경로는군 - 면장 - 지주총대였고, 면장은토지신고기간이고시되면지주총대를통해수집하고동 리별로묶어정리하였다. 이렇게준비조사를실시한결과수집된토지신고서는총 518 만 1628 통, 필수는 1857 만 3731 필이었다. 이외에시가지 도서 ( 島嶼 ) 및외업반이수집한신고서까지합하면총 551 만 3516 통이었으며필수는 1987 만 3745 필에달하였다.* 남양주지역이속한양주군의준비조사는 1913 년 8 월에시작되었다. 양주지역은제 5 준비조사반이관할하였으며감사원은중촌삼보 ( 中村三輔 ) 였다.* 9 월에는제 29 준비조사반 ( 감사원 : 山崎彦治 ) 도투입되어양주에서는 2 개반이준비조사를진행하였다.* 양주군의토지신고기간은 1913 년 8 월 1 일부터 1914 년 7 월 31 일까지였다.* 신고기간은다른군의경우대개 9 10 개월이보통이었으나양주군은 1 년으로긴편이었다. 신고서수집은빠른속도로진행되었다 년 1 월현재 157 개동 리중 135 개동 리의신고서수집이완료되었다.* 다음표는남양주지역의토지신고일을정리한것으로대부분이기간내에신고가이루어졌다. 토지신고서는각리별로같은날접수된것이많았으며면별로도토지신고서의접수일이거의같았다. 와부면은 1913 년 11 월 20 일, 진접면 화도면 별내면 진건면 수동면은 1913 년 10 월 1 일, 미금면은 1913 년 10 월 30 일과, 11 월 5 일에접수된것이대부분이었다. 수동면의경우내방리 외방리 입석리와송천리는 사업 당시각각가평군외서면과화도면에속해있었기때문에토지신고일이그에맞춰이루어졌다. 민유지의경우는대부분법정신고기간내에신고서가접수되었지만국유지의경우는법정신고기간을지나신고서가접수된곳도상당히있었다. 표에정리된신고일중법정신고기간인 1914 년 7 월 31 일을넘긴것은대부분국유지의경우였다. 민유지도신고기간을넘긴것이있었는데이것은원칙적으로받아들여지지않았지만타당한이유가있는경우에한해신고서를접수할수있도록하였다. 특히남양주지역은경성에거주하는부재지주들이많았는데기간내에신고가이루어지지않은민유지는대부분이들의소유지였다. < 토지조사사업당시지역별토지신고일 > 와부면덕소리와부면도곡리와부면팔당리와부면율석리 와부면 ( 조안면 ) 능내리와부면 ( 조안면 ) 조안리와부면 ( 조안면 ) 진중리와부면 ( 조안면 ) 송촌리와부면 ( 조안면 ) 삼봉리와부면 ( 조안면 ) 시우리 진접면장현리진접면내각리진접면내곡리진접면연평리진접면부평리진접면팔야리진접면진벌리 지역토지신고일지역토지신고일 별내면화접리별내면 ( 퇴계원면 ) 퇴계원리진건면사능리진건면배양리 진건면진관리진건면신월리진건면용정리진건면송능리진건면 ( 오남면 ) 팔현리진건면 ( 오남면 ) 양지리 진건면 ( 오남면 ) 오남리수동면운수리수동면지둔리수동면수산리수동면내방리수동면외방리수동면입석리

358 진접면금곡리 수동면송천리 화도면마석우리화도면묵현리화도면구암리화도면금남리화도면답내리화도면창현리화도면녹촌리화도면차산리 별내면청학리별내면용암리별내면광전리 비고 : 1 진한글씨의날짜는각리별로대부분의토지신고서가접수된날짜이다. 2 지명에서괄호안은현재의행정구역명이다.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미금면호평리 ( 호평동 ) 미금면평내리 ( 평내동 ) 미금면금곡리 ( 금곡동 ) 미금면일패리 ( 일패동 ) 미금면이패리 ( 이패동 ) 미금면삼패리 ( 삼패동 ) 미금면가운리 ( 가운동 ) 미금면수석리 ( 수석동 ) 미금면지금리 ( 지금동 ) 미금면도농리 ( 도농동 ) 일필지조사 ( 一筆地調査 ) 와사정 ( 査定 ) 일필지조사는지주조사, 경계조사, 지목조사, 지번조사로나뉘어진행되었다. 일필지조사는 1910 년 6 월에경기도부평에서시작하여 1916 년 11 월경상남도남해군의부속도서를끝으로종료되었다.* 조사필수는총 1910 만 1989 필이었다.* 일필지조사는외업반에서일필지측량을하는과정에서동시에이루어졌다. 남양주지역의일필지조사는외업제 1 반에서담당하였다.* 제 1 반이담당한구역은경기도의가평 포천 양평 양주 연천 파주 고양과강원도의평강 김화였다. 반장은송전갑 ( 松田甲 ), 감사원은기수 ( 技手 ) 요전대이랑 ( 要田待二郞 ), 금촌성영 ( 金村盛永 ), 원전신일 ( 圓田信一 ) 이었고, 측량원은각기수별로 8 명이었다.* 사업진행도중에일어나는토지변동사항에대해서는별도의이동지조사 ( 異動地調査 ) 를실시하였다. 이동지정리에관한외업사무는남양주지역의경우제 22 이동조사반이담당하였다. 이조사반의관할구역은고양의한지 뚝도면, 양주의구리 미금 와부 화도 진건 진접 별내면이었다.* 지주조사는민유지에대해서는토지신고서에, 국유지에대해서는보관관청의통지서에기초하여조사하는것을원칙으로하였다. 다만동일토지에대하여소유권주장자가 2 명이상있거나강계 ( 疆界 ) 에분쟁이있는경우먼저당사자간에화해를시도하여쌍방의의견이일치할때는화해서를작성해토지신고서에첨부하였으며, 화해가성립되지않은것에대해서는분쟁지로조사하였다. 또한소유권원에의문이있어신고지주를바로지주로인정하기어려운것에대해서는따로분쟁지에준하여처리토록하였다.* 단체명의로신고된토지의소유권귀속문제는매우복잡하였다. 개인이나법인이아니면소유자가될수없었음에도불구하고관행상단체소유인재산이매우많았기때문이다. 그래서법인이아니면서도사실상법인에준하여처리하는것이편리한경우그단체명을지주로하였다. 이러한예외를인정한단체로는면 동 리의소유에관계된것, 신사 사원 사우 향교 외국교회소유와관계된것등이었다. 죽은사람, 종중, 교회등이사정명의인이되는경우는명의변경을할수있도록하였다. 다만사망자의경우상속인, 외국교회는그설립자인외국법인, 사립학교는설립자의명의로만가능하였다. 신사 사원 사우 불당등은그명의로등기가가능했던반면외국교회는일본법인으로허가를받은후그이름으로등기하게함으로써철저하게외국인토지소유를관리하였다. 반면서원, 종중재산, 사립학교및기타관습적으로단체가소유하는토지에대해서는그들이법인자격을갖추었는지조사한후법인이아닌단체의경우에는그성질에따라공유명의로신고하게하였다. 경계조사는신고자로하여금그토지의사방에표항 ( 標杭 ) 을세우고지주, 관리인, 이해관계인또는그대리인및지주총대를입회시켜지주조사와더불어인지 ( 隣地 ) 와의관계를조사하는것이었다. 경계는소유자와지목을구분하기위해설정하는것이므로원칙적으로소유자와지목이같은경우중간에현저한지형지물이없는한하나의필지로구획하도록하였다. 지목과지주가동일한토지가연속되어있을경우이를일필지로조사하였다. 다만한지목의토지에포함되거나접속한토지중면적이작은것은본지 ( 本地 ) 에편입하도록하였다.* 지목은모두 18 종으로나누어조사하였다. 이것을다시 1 전 답 대 ( 垈 ) 지소 잡종지 임야, 2 사사지 ( 社寺地 ) 분묘지 공원지 철도용지 수도용지, 3 도로 하천 구거 ( 溝渠 ) 제방 성첩 ( 城堞 ) 철도선로 수도선로등의세유형으로나누었다. 첫째유형의토지는직접적인수익이있는토지로서현재과세를하거나장래에과세를목적으로하는토지이며, 둘째유형은직접수익이없고대부분공공용 ( 公共用 ) 에속하여과세를면제해야할토지이며, 셋째유형은사유를인정할성질이아닌것으로서전혀과세의목적이되지않는토지이다.* 이중셋째유형에속한도로는문제가발생하였다. 사유가아닌도로는모두 도로 로지목을정하였고, 관청에서는도로로, 지주는사유로주장하는것은모두분쟁지로처리하였다. 또한사유지이나도로의형상이명확하고동네의중요한통로로서일반교통상쉽게개폐하기어려운것은도로로사정함으로써분쟁을야기하였다. 특히시가지의경우대부분의도로가사유지에혼재되어있는것이보통이어서시가지에서불복신청한사례중에는사유지의도로편입을둘러싼것이많았다. 도로편입은사유지의무상몰수를의미하는것이므로지주들의심한반발은당연한결과였다. 지번조사는동리별 필지별로지번을부과하는작업이다. 사업 초기에는개황도 ( 견취도 ) 를작성하여실지조사부작성시편의를도모하였지만, 1912 년 11 월부터는일필지측량과동시에지번조사를시행함으로써개황도작성은폐지하였다. 이처럼일필지조사때조사한내용은실지조사부에기재하였다. 실지조사부는사정공시에사용될토지조사부작성을위한자료가되었다. 실지조사부는개항도에의거하여토지신고서를참조해동 리별로가지번 ( 假地番 ) 순서에따라작성하였다. 실지조사부에는지번 가지번 지목 사용세목 신고또는통지일 면적 구분 주소 성명등을기재하도록하였다.

359 일필지조사가종료되면그결과를지방토지조사위원회에회부하여심의를거쳐사정하도록하였다. 사정은 1913 년 11 월충북청주시가지를시작으로 5 년여에걸쳐진행되었으며 1917 년 12 월에모두완료되었다. 사정총필수는 1910 만 7520 필이었다. 이중지주신고가인정된것은 1900 만 9054 필, 이해관계인이신고한것이 3766 필, 상속미정인것이 1 만 4779 필이었다. 나머지중에서 8944 필은무통지지이고, 411 필은무신고지였다. 그리고 7 만 866 필은계쟁지였다.* 임시토지조사국에서는사업의신속한종료를위해조사반별로조사완료일을정하였다.* 양주군의경우외업반의세부측량은 1915 년 1 월 25 일에종료되었다. 양주군의조사총필수는 9 만 6857 필이었다. 이중남양주지역 7 개면 59 개리의필지수는 4 만 782 필로전체의 42% 를차지하였다.* 이상의조사사항이외업반에서내업반으로넘어가면내업반에서는각종장부를정리하였다. 신고서의정리는 1915 년 7 월하순, 원도의작성은 7 월하순, 면적일람부는 9 월중순, 지적도는 10 월하순, 등급조사부는 11 월하순까지마치며, 사정의원부가되는토지조사부는 12 월하순까지작성하도록하였다. 여기서만들어진지적도와토지조사부를심의하는지방토지조사위원회는 1916 년 1 월에개최하고그결과는 1916 년 2 월 1 일에공시하도록하였다.* 사정결과를공시한후에는일정한기간을두어불복신청을하도록하였다. 공시는 30 일간실시하였는데사정현재총지주 187 만 1636 명중 100 만 5352 명 (53.7%) 이열람하였다.* 사정에불만이있는경우는공시기간만료후 60 일이내에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불복신청하여재결을구하도록하였다. 양주군의사정일은 1916 년 2 월 1 일이었고, 공시기간은 1916 년 2 월 1 일부터 3 월 1 일까지, 불복신청기간은 1916 년 3 월 2 일부터 4 월 30 일까지였다.* 토지소유자의권리는사정의확정또는재결에의해확정되었다. 즉 사업 의사정이기존의증명또는등기와다를경우토지소유자는그등기또는증명의말소를신청할수있게함으로써사정이등기또는증명보다우위에있음을확인하였다. 사정이이루어지면그것을근거로토지대장이작성되었고, 이를근거로토지에관한제반권리의변경을등기하는토지등기부를작성하여토지등기제도를확립하였다. 이것은 1912 년 3 월 18 일민사에관한실체법규로서 조선민사령 * 를발포하고, 이어같은날 조선부동산등기령,*3 월 22 일 조선부동산증명령 * 을공포함으로써시행되었다. 등기사무는등기해야할부동산이있는지역의관할지방법원이담당하였다. 이에각군의군청소재지에지방법원출장소를설치하여그군의등기사무를취급하도록하였다. 양주군의경우 등기령 이시행된날짜는 1916 년 7 월 1 일이었고, 등기사무를담당한곳은의정부출장소였다.* 3 분쟁지조사분쟁지조사는 1910 년 9 월에착수하여 1918 년 1 월에종료되었다. 분쟁지총수는 3 만 3937 건, 9 만 9445 필로써사정총필수 1910 만 7520 필에비하면약 200 필에 1 필꼴로분쟁이발생하였다. 분쟁은주로소유권을중심으로발생하였으며국유지비중이전체의 65% 를차지할정도로많았다.* 곧전체필지에서국유지가차지하는비중이 5% 미만이었음을감안한다면국유지분쟁이압도적이었음을알수있다. 분쟁지처리는분쟁지심사위원회의결정에따랐다. 분쟁지조사는외업조사, 내업조사, 위원회의심사로이루어졌다.* 외업반은실지에서분쟁지에관한제반사항을담당하였는데화해를유도하고, 화해가이루어지지않은경우정밀조사하여그결과를분쟁지조서에기록하였다. 분쟁지조서에는당사자의성명 주소, 분쟁지의소재 지목 지번, 당사자의주장사실및이유, 조사원의인정의견및이유를기재하였다. 분쟁지조서를받은내업반에서는각사건별로담당심사원을임명하여다시실사하고심사서를작성한다음분쟁지심사위원회에회부하였다. 심사위원은각분쟁지사건의심사서에대해다시그인정의타당성을심사한후불충분한점이인정될때는의견을첨부하여위원장에게제출하고, 위원장은다른위원의의견에비추어타당하다고인정되는바에따라결정하였다. 그러면실제분쟁지가어떻게처리되었는지를살펴보자. 접수된분쟁지중전체의약 70% 가분쟁지로인정되어심사를받았다. 분쟁지발생을도별로살펴보면경기 전남 경남 황해도에서분쟁지의필수가많았다. 그것은이지역이역둔토실지조사때미측량지역이라는점과도관련이있다.* < 토지조사사업에서의분쟁지현황 > 구분국유지분쟁민유지분쟁계 소유권분쟁 64,449(65.0) 34,689(35.0) 99,138(100) 경계분쟁 121(39.4) 186(60.6) 307(100) 계 64,570(64.9) 34,875(35.1) 99,445(100) 비고 : 괄호안은전체분쟁에서국유지분쟁과민유지분쟁이차지하는비율이다. 출전 : 朝鮮土地調査事業報告書, 쪽. ( 단위 : 필 %) < 토지조사사업의분쟁지처리상황 > 처리내용 인정 재판확정 화해 취하 계 건수 21, ,058 10,590 33,937 필수 70,203 2,819 2,546 23,877 99,445 출전 : 朝鮮土地調査事業報告書, 쪽. < 남양주지역분쟁지현황 > 분쟁번호주소지목사정인비고

360 병 1014 호진건면진관리 466 지소 ( 池沼 ) 김순태 병 1039 호 별내면화접리 211 별내면화접리 212 별내면화접리 213 대 ( 垈 ) 전 ( 田 ) 답 ( 畓 ) 천견청오 ( 淺見淸吳 ) 병 1042 호별내면청학리 202-2, 대 ( 垈 ) 이백철 병 1043 호진건면진관리 702 답 ( 畓 ) 고희준불복신청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남양주지역분쟁지를살펴보면총 4 건, 7 필로써전반적으로많지않음을알수있다. 분쟁의한쪽당사자를알수없기때문에자세한내용은알수없지만지목이지소 ( 池沼 ) 인병 1014 호의경우는국가와개인 ( 김순태 ) 사이의분쟁이라생각된다. 또한병 1043 호는이후국가 ( 경기도장관 ) 가불복신청을한것으로보아나머지도국가와의분쟁일가능성이있다. 임시토지조사국의사정에불만이있거나분쟁지심사위원회의결정에대해불만이있는자는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불복신청할수있었다. 고등토지조사위원회는사정에대한불복및재심신청에대해재결을내리는기관으로, 토지소유권확정에관한최고의심사기관이었다.* 본회의구성은위원장 1 인, 위원 9 인, 간사 1 인, 서기및통역생약간명으로구성되었다. 위원장은정무총감이겸임하였으며탁지부장관, 내무부장관, 농상공부장관등도위원으로임명되었다. 또한약간명의판사도임명하여법률자문을구하였다. 분쟁지심사위원회의위원장이었던화전일랑 ( 和田一郞 ) 은위원회성립때부터 1918 년 11 월 4 일까지간사로재직하면서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도실무적으로관여하였다.* 사건의처리는간이사건처리와난건처리 ( 難件處理 ) 로구분하여실시하였다. 사건이접수되면상대방이승낙한것, 재결례나확정판결이있는것, 신청기간이지난것, 성명의기입이나면적 지목등이잘못된것등과같이간단한것은난건과구분하여즉시재결, 반부 ( 返付 ) 혹은취하의처리안을작성하였다. 나머지난건은각부에회부하여심의하도록하였다 년 6 월말현재접수된 2 만 116 건중난건으로처리된것은 3959 건이었다.* 1920 년 8 월현재접수된불복신청건수는 2 만 148 건이었다. 이중취하된건수는 9315 건, 반부된건수는 1444 건으로실제재결을구한건수는 9389 건 (46.6%) 이었다.* 불복신청의경우취하및반부가전체의반을넘는다는점에서분쟁지처리와는구별되는양상을나타냈다. 앞에서살펴본바와같이분쟁지심사에서는분쟁지로인정되어심사에들어간필지가 70% 에달하였다. 이는불복신청의요건이매우까다로웠음을보여주는것이다. 그러나일단심사대상이된불복신청건수는대부분불복신청자의의견을받아들이는것으로결정되었다. 재결건수중 8650 건이채용되어 90% 가넘는재결률을보여주고있다. 불복신청을제기한건수중사정당시에도분쟁지였던것은 2872 건 (14.3%) 에불과하였다. 이중취하또는반부된것이 1004 건 (34.9%) 이고사정이취소된것은 1610 건 (56.1%) 이었다.* 이는전체재결채용비율인 42.9% 보다높았다. 즉,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서는임시토지조사국의분쟁지조사결과를절반이상뒤바꾼셈이다. 그러나임시토지조사국의분쟁지조사결과에대해분쟁건수 (3 만 3937 건 ) 의 90% 이상이승복하였고 2872 건만이불복신청을하였다. 즉전체불복신청건수의 85% 를넘는 1 만 7276 건은임시토지조사국의분쟁지심사대상이아니었음에도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불복신청을했던것이다. 따라서 사업 의소유권및경계확정에분쟁이제기된것은분쟁지심사와불복신청을합해 5 만건이넘었음을알수있다. < 남양주지역불복신청지중재결건수 > 고위번호종류토지소재지번지, 필수분쟁제기자결정일자 소유권미금면삼패리 434 김윤수 ( 金允守 ) 소유권미금면삼패리 436 강선회 ( 姜善會 ) 소유권진건면신월리 373 경기도장관 소유권진건면 ( 오남면 ) 양지리 386 이익재 ( 李翼宰 ) 소유권진건면 ( 오남면 ) 양지리 이수헌 ( 李秀憲 ) 소유권 진접면팔야리진접면진벌리와부면진중리 경기도장관 경계미금면삼패리 경기도장관 소유권와부면송촌리 698 수종사 ( 박동과 ) 소유권와부면송촌리 896 이석이 ( 李錫伊 ) 경계진건면신월리 이용헌 ( 李容憲 ) 소유권와부면팔당리 55 김학봉 ( 金鶴鳳 ) 일부별내면퇴계원리외 2 면 110 외 4 필경기도지사 소유권진건면진관리외 2면 702외 6필경기도지사 비고 : 1 고위번호 은 1916년 ( 대정 5) 5126호를의미한다. 2 종류의 일부 는해당필지일부에대해소유권분쟁이제기된경우이다. 출전 : 각결정일자의 朝鮮總督府官報. 위의표에의하면남양주지역의불복신청지가모두얼마인지는알수없으나불복신청지중재결을받은것은총 13 건에 28 필이었다. 재결건수중국가가제기한것이 5 건 16 필이고, 경계분쟁은 2 건에불과하고나머지는소유권분쟁이었다. 앞에서살펴본바와같이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접수된불복신청건수중 46.6% 만이받아들여졌다. 경기도의경우는불복신청건수 2058 건중재결건수 1346 건 ( 이중 1220 건이채용 ) 으로

361 65.4%, 취하및반부건수는 712 건으로 34.6% 였다.* 남양주지역도경기도의경우에준하여불복신청지중 60 70% 정도재결된것으로보인다. 이불복신청지들이원래분쟁지였는지, 사정에불복한것인지는알수없다. 고위번호 는분쟁지로서심사를받았던것을불복신청한것이었다. 그러나일단재결이받아들여진토지는불복신청자의의견이대부분받아들여져소유자가분쟁제기자로바뀌었다. 또한경기도장관이불복신청한토지는모두개인명의에서국유로소유권이바뀌게되었다. (2) 지가조사 사업 의목적가운데하나는지가를조사하여새로운지세제도를확립하려는것이었다. 일제는 1911 년 5 월 수확고등급급지위등급조사심득 ( 收穫高等級及地位等級調査心得 ) 에서지가조사의목적이 토지의수확및가치를명확히하여토지의매매 저당, 기타토지에관한금융을원활히하려는것 과 재정상의기초로서부과의공정을기대하는것 * 에있다고하였다. 기존의지세는결수연명부에의거하여부과되었고, 부과기준은결부제였다. 그러나 1914 년 지세령 제정 * 으로토지대장에기초하여작성한지세명기장을지세부과장부로사용함에따라그지역결수연명부는폐기되었다 년 지세령 개정 * 으로결부제에기초한지세제도가과세지가에근거한지세제도로변화하였다. 과세지한필지의지세액은지가의 1.3% 를 1 년세액으로하였다. 지세율이일본의 3% 에비해낮게책정된이유는지세의급격한증가로인한사회적혼란을피하려는정치적고려때문이었다. 그러나지세율이일본에비해낮다고해서토지소유자의부담이경감된것은아니었다. 다만과세방법이결부제에서과세지가제로바뀌었기때문에종래부담의불공평성을개선할수있었을뿐이다. 지세령 개정전후의지세액증감을볼때전라도와함경도는오히려지세액이감소하였고경기 강원 경상도는급증하였다. 밭은평균적으로 9% 가감소하였으며, 논의경우 35% 가증가하였다. 필지별지가는필지의등급과절대면적에기초하여계산하였다. 면적은측량으로정확하게산정할수있었지만, 토지등급을어떻게결정할것인가가문제였다. 이러한지위등급 ( 地位等級 ) 을일차적으로결정하는것이등급조사반의역할이었다. 양주군의등급조사는제 1 등급조사반제 4 분반이수행하였다.* 지위등급과지가산정과정은 1 지위등급의구분, 2 표준지선정및지위등급조사, 3 필지별지위등급부여, 4 지위등급의조정및확정, 5 지가산정의순으로진행되었다. 첫번째로전국적으로통일적인기준에의해지가를산정하기위해서는그기준이되는지위등급에따른수확량을정할필요가있었다. 100 평당수확량을기준으로밭은 14 급부터특 4 급까지, 논은 22 급부터특 4 급까지구분하였다. 논의경우벼 0.5 석미만인경우가 22 급이며특 4 급은 2.8 석을생산하는논에해당하였다. 밭은주작물이여러종류일수있지만보리 콩 벼 조 귀리등 5 가지작물의수확량으로등급을정하였다. 두번째로지위등급조사의표준이될만한필지를선정하고그것의지위등급을조사하였다. 표준지는군 ( 郡 ) 표준지와면 ( 面 ) 표준지의두종류로구분하여선정하였다. 군표준지는 지목별로지위의표준이될중용이라할만한토지 3 필이상을선정하여타군의군표준지와균형을도모하기위한것 이고, 면표준지는 지목별로대개 3 등급에대해 1 개의표준지의비율로그급중에서가장중용이라할만한토지를선정하여군표준지와인접면표준지의균형을꾀하도록한것 이었다.* 군표준지는대개논 3 필, 밭 2 필, 대 ( 垈 ) 1 필을선정하도록하였다. 표준지의수확량은최근 5 년간의평균수확량을채택하되, 풍흉의해를제외하고평균을구하도록하였다.* 밭의표준지는주요한작물을생산하는토지중에서선정하되부작물 ( 副作物 ) 은생산액의 5 할이내의범위에서수확량에포함시켰다. 실제로실수확량과지가산정에사용한수확량을비교할때보리의경우는 27%, 조의경우는 40% 가참작되었던것으로나타났다. 논의표준지는재래농법에기초한토지를선정하였다. 이모작이이루어지는경우는 2 할이내에서주작물로편입하였다. 지가산정에사용한수확량과실수확량을비교한참작률은 19% 였다. 세번째로는필지별로지위등급을부여하는것이다. 각지목에대해대체로수확량 지세 지질 수리작업의난이도 교통의편리여부 수요관계 수확물의품위등을조사하고, 면 동 리장과지주총대 지주및소작인등의의견을수렴하였다. 그리고각방면에걸쳐수집된자료를참고한후이것을표준지와비교하여그우열의정도를판정해필지별지위등급을결정하도록하였다. 네번째로는각필지별지위등급을결정하는것으로그임무는내업반이담당하였다. 내업반에서는군과군의균형이이루어졌는지, 또한각필지별지위등급이균형있게부여되었는지를검토하였다. 이를위해표준지의등급과인접한각필지의등급이대체로균형을이루는지, 인접지와 3 등급이상차이가날때는그사유가정당한지, 이랑이나불모지가섞여들어온경우그참작률이정당한지등을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필지별로확정된지위등급을기준으로그필지의지가를계산하는단계이다. 지가는아래공식에의거하여일률적으로계산하였다. 이공식의지가는 100 평당지가이고필지별지가는이수치와면적에비례하여계산하였다. 지가 (X) = 수확량 곡가 ( 1-5/100-5/100 ) - 3/100 x 환원율 의공식이지니고있는의미를살펴보면수확량은등급별최소수확량을사용하였다. 곡가는도단위로 년수확후 4 개월동안의중등품도매가격평균으로결정하였다. 결정된곡가는원칙적으로도에일률적으로적용하였으며, 만일군평균곡가가 70% 미만일때에는감액하도록하였으나실제감액된지역은거의없었다. 양주의곡가는벼 6.45 원, 보리 5.48 원이었다.* 수확량에곡가를곱하면조수입액 ( 粗收入額 ) 을구할수있다. 여기에다음비용을공제하여순수입을구하였다. 경작비를조수입의 50%, 수선유지비로 5%, 지세와공과금으로 3% 를공제하였다. 이렇게구한순수입을지가로환산하기위해지역별로다른비율의환원율을적용하였다. 환원율은경제적으로는이자율에해당하는것으로대략 9% 였으나, 지역에따라서는 12% 까지인정해주었다. 양주의환원율은 9% 였다.* 이렇게결정된지가 ( 법정지가 ) 는시가의 70% 수준이었다. 그러나과세지가가시가보다낮다고해서그것이과세액의감소를의미하는것은아니었다. 필지별지세액은지세율의크기에영향을받기때문이었다. 실제로 지세령 개정에서지세율이 1.3% 로정해지면서지세는그이전보다 13% 증가하였다. 또한 1/4 이상의농가가이전보다 2 배이상의지세를납부하게되었는데그대부분이영세농가로서지세부담을견뎌내기힘든상황이었을것으로보인다.*

36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1. 토지조사사업의실시와성격 3) 토지조사사업후남양주지역의토지소유현황 사업 에의해임야를제외한모든토지에대해필지별로소유자와면적 지목 등급등이확정되었다. 사정이된토지소유자는그토지에관한절대적인소유권을갖게되었으며, 그필지에대한처분 수익 용익에관한모든권리를갖게되었다. 이러한 사업 으로확정된남양주지역의토지소유현황은다음표와같다. < 토지조사사업후남양주지역토지소유현황 > 면명소유별전답대임야분묘지기타총액 와부면 와부면 ( 조안면 ) 진접면 화도면 별내면 진건면 진건면 ( 오남면 ) 수동면 미금면 합계 ( 단위 : 평 %) 국유지 16,280 11,802 3,993 10, ,554 민유지 765, ,274 95,388 60,062 11, ,821,487 국유지 206, ,661 3,968 3, ,055 민유지 1,328, ,109 92,976 32,452 4,745 1,599 2,207,367 국유지 244, ,631 32,147 78, ,699 민유지 2,279,427 1,705, , ,815 33,110 4,758 4,269,987 국유지 60,732 48,358 3,961 35, ,211 민유지 2,737,733 1,623, , ,725 20,714 1,508 4,703,658 국유지 33, ,632 4,378 3, ,270 민유지 1,132,393 1,088,346 84,091 62,608 7,353 76,420 2,451,211 국유지 48, ,069 3,424 32,217 1, ,657 민유지 1,449,797 2,072,744 98, ,223 11,950 1,096 3,770,199 국유지 18,776 17,461 1, ,462 민유지 815, ,689 54,311 84,549 2, ,482,141 국유지 8,332 19,372 3,159 59,323 90,186 민유지 1,823, , , ,864 33,008 1,762 3,101,000 국유지 266, ,255 22,906 68,560 1, ,655 민유지 2,047,392 1,925, , ,979 36,843 2,017 4,387,840 국유지 민유지 903,633 (39.0) 14,379,566 (51) 1,036,241 (44.7) 11,557,983 (41) 79,551 (3.4) 1,025,704 (3.6) 비고 : 1 괄호안은현재의행정구역명이다. 단, 퇴계원면은별내면에포함하였다. 2 기타는잡종지 지소 사사지등이다.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 동척 소유지현황 > 292,846 (12.7) 979,277 (3.5) 1,158 (0.05) 162,352 (0.6) 3,320 (0.15) 90,008 (0.3) 2,316,749 (100) 28,194,890 (100) 지역지목필지수면적 ( 평 ) 미금면금곡리 ( 금곡동 ) 답 2 2,519 미금면도농리 ( 도농동 ) 전 5 14,648 별내면화접리답 1 1,238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국유지와민유지의비율은약 1:10 정도이며국유지의경우논과임야의비율이높다. 국유지가많은면은미금면, 진건면, 진접면인데이는능원 ( 陵園 ) 과관계가깊다.* 능원에는능위토 ( 陵位土 : 능원의부속토지 ) 와대지가많았는데이것이모두국유지로귀속되었기때문이다. 능위토에는논이많았고, 홍 유릉, 광릉이있는미금면과진접면에는능군 ( 陵軍 ) 이많이거주하였기때문에대지 ( 垈地 : 집터 ) 도많았다. 반면에 동척 의소유지는미금면금곡리와도농리, 별내면화접리에모두 8 필지 1 만 8405 평으로그다지많은것은아니었다. 남양주지역의일본인소유토지는많지않았다. 일본인의소유토지는주로별내면에집중되어있었다. 그중덕송리에천승록지조 ( 川勝鹿之助 ) 외 2 인이 18 필지의 3 만 9958 평을소유하였는데지목은전 답 대였다. 또한화접리에천견청오 ( 淺見淸吳 ) 는 13 필지의 8242 평을소유하였다. 사업 이후에는일본인의토지소유가더욱증가하여 1937 년조사에의하면별내면의헌병분견소장을지낸입강상조는논 12 정보, 밭 11 정보, 총 23 정보를소유하고소작인 93 명을거느린대지주가되었다.*

363 < 토지조사사업후남양주지역논밭비율 > ( 단위 : 평 %) 구분 / 지역와부면조안면진접면화도면별내면진건면오남면수동면미금면총계 밭 논 국유 16, , ,532 60,732 33,138 48,160 18,776 8, , ,625 민유 765,457 1,328,486 2,279,427 2,737,733 1,132,393 1,449, ,421 1,823,460 2,047,392 14,379,566 계 781,7370 (46.5) 1,535,283 (64.4) 2,523,959 (56.7) 2,798,465 (62.6) 1,165,531 (49.4) 1,497,957 (40) 834,197 (60.6) 1,831,792 (64.7) 2,314,270 (50.6) 15,283,191 (54.8) 국유 11, , ,631 48, , ,069 17,461 19, ,255 1,035,241 민유 888, ,109 1,705,220 1,623,613 1,088,346 2,072, , ,232 1,925,756 11,557,983 계 900,0760 (53.5) 849,770 (35.6)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1,928,851 (43.3) 1,671,971 (37.4) 1,191,978 (50.6) 2,249,813 (60) 542,150 (39.4) 1,001,604 (35.3) 2,257,011 (49.4) 12,593,224 (45.2) 논과밭의비율을살펴보면위의표와같다. 국유지는밭이 46.6%, 논이 53.4% 이고민유지는밭이 55.4%, 논이 44.6% 였다. 전체적으로는밭이 54.8%, 논이 45.2% 를차지하고있다. 사업 에의해확정된전국논밭의비율은논 279 만 1510 정보 (35.6%), 밭 154 만 5994 정보 (64.4%) 였다.* 경기도의경우도논이 35.7%, 밭이 64.3% 였다. 남양주지역은전국평균이나경기도평균보다논의비율이높았다. 양주군일대는전작 ( 田作 ) 지대라할수있는데남양주지역은북한강과한강, 그지천를끼고있어서상대적으로논이많았던것이다.* 이것을면별로살펴보면상대적으로산지가많은수동면, 오남면, 화도면, 조안면은밭의비율이 60% 정도를차지하고있으며한강의지천이많고 * 지형적으로도평지라할수있는진건면, 별내면, 와부면, 미금면은논의비율이약 60% 에이르고있다. 다음으로토지소유의구체적인실태를살펴보자. 이를위해진건면 * 의국유지를제외한개인토지소유실태를살펴보고자한다. 위의표에의하면진건면의토지소유자는모두 1066 명이었다. 이중 0.5 정보 (1 정보 : 3000 평 ) 미만의영세소유자가 503 명으로거의절반을차지하고있으며, 자작의하한으로간주되는 1 정보미만소유자는 733 명 (68.8%) 으로전체의 2/3 를넘고있다. 반면 1 정보미만소유자의소유면적은약 1/4 에그치고있다. 3 정보이상소유자는전체의 8% 정도에지나지않으나소유면적은전체토지의절반에이르고있다. 이것은대토지소유자의소유규모를감안하지않은것으로실제소유규모의불평등성은더욱컸을것이다. 당시남양주지역의대토지소유자들은대부분경성에거주하는부재지주였다. 이들은구래의양반관료출신으로경성과가까운경기도일대에토지를소유한자들이많았다. 이상은진건면의실상이었지만남양주지역의다른면도이와비슷한상황이었을것이라여겨진다. 지역 / 구분 사능리 배양리 진관리 신월리 용정리 송능리 계 < 토지조사사업후진건면토지소유자소유규모별인원 면적 > 0.5 정보미만 정보 1 3 정보 3 정보이상계 ( 단위 : 명 평 %) 소유자필지면적소유자필지면적소유자필지면적소유자필지면적소유자필지면적 100 (54.3) 109 (43.8) 95 (45.9) 61 (42.4) 86 (48.6) 52 (49.5) 503 (47.1) ,299 (15.4) 84,265 (10.5) 69,048 (8.2) 45,690 (6.1) 62,869 (11.7) 39,699 (11.2) ,870 (10.0) 37 (20.1) 60 (24.1) 44 (21.3) 32 (22.2) 37 (20.9) 20 (19.1) 230 (21.6)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799 (16.7) ,251 (15.2) ,251 (12.2) ,979 (9.2) 82,309 (15.4) 42,711 (12.1) ,300 (13.2) 37 (20.1) 61 (24.5) 46 (22.2) 35 (24.3) 43 (24.3) 25 (23.8) 247 (23.2) ,969 (35.4) 292,743 (36.4) 224,217 (26.5) 188,855 (25.3) 211,028 (39.3) 125,260 (35.4) 1,523 1,213,072 (32.2) 10 (5.5) 19 (7.6) 22 (10.6) 16 (11.1) 11 (6.2) 8 (7.6) 86 (8.1) ,744 (32.5) 305,366 (37.9) 449,061 (53.1) 443,851 (59.4) 179,953 (33.6) 146,348 (41.3) 1,498 1,681,323 (44.6) 184 (100) 249 (100) 207 (100) 144 (100) 177 (100) 105 (100) 1,066 (100) ,811 (100) 804,625 (100) 844,577 (100) 747,375 (100) 536,159 (100) 354,018 (100) 4,578 3,769,565 (100) 다음은진건면토지소유자중 10 정보이상소유자에관한사항을정리한것이다. 이들은대개진건면각리에걸쳐토지를소유하고있으며남양주지역각면, 주변의구리면, 양주군일대와주변각군에도토지가있는대토지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의출신이나언제부터이러한대토지를소유하게되었는지는자료의한계상알기어려우나이후의몇몇자료들을통해이들의토지소유규모를살펴볼수있었다. < 진건면토지소유자중 10 정보 (3 만평 ) 이상소유자의토지소유현황 > 소유자 / 구분 용정리송능리사능리진관리신월리배양리계 ( 단위 : 평 )

364 면적필지면적필지면적필지면적필지면적필지면적필지면적필지 김우식 48, , 김응균 35, , , , , 박완식 1, , , , 박한영 31, , , 서정현 22, , , , 우수익 1, , , , , , , 이근배 13, , , , 이상옥 9, , , , , , , 이종국 26, , , 이천응 38, , , 장태진 , , , 조동윤 2, , , , , 조정구 2, , , , , , , 최인기 7, , , 출전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일제하대지주명부 * 에의하면, 김응균 ( 金應均 ) 은경성에거주하면서 사업 후진건면에만 90 필지약 24 정보의토지를소유하고있었는데, 1938 년현재양주군에논 21 정보와밭 14 정보, 가평군에논 9 정보와밭 21 정보, 합계논 30 정보와밭 35 정보 ( 총 65 정보 ) 를가지고있었으며, 소작인수는총 170 명이었다. 또한이상옥 ( 李相玉 ) 은진건면에 89 필지약 48 정보를소유하고있었는데, 1938 년에는양주군에논 66 정보밭 8 정보외에도여주 용인 시흥 파주 장단군에걸쳐논 96 정보와밭 116 정보, 합계논 162 정보와밭 124 정보 ( 총 286 정보 ) 를소유하면서소작인총 873 명을거느리는대지주로서경성에거주하였다. 이근배 ( 李根培 ) 역시진건면에 40 필지약 47 정보의토지가있었고이외에도구리면에 46 필지약 20 정보를가지고었었으며경성에거주하였다. 한편군내에거주하는대지주로서는우수익 ( 禹洙益 ) 이진건면에 68 필지약 21 정보를, 양주군에논 50 정보와밭 26 정보 ( 총 76 정보 ) 를소작인 350 명으로운영하면서진건면오남리 ( 현오남면오남리 ) 에거주하였다. 박완식 ( 朴完植 ) 은진건면에 52 필지약 24 정보를, 구리면에 43 필지약 13 정보를소유하면서구리면에거주하였다. 그러나이들모두해방후농지개혁당시 30 정보이상피분배지주에서는제외된것으로보아일제말전시체제기에토지를많이처분하였거나농지개혁직전에방매하였던것으로추측된다.

36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2. 산업구조의변화 1) 인구와농업환경 일제시기에남양주지역은양주군에속해있었다. 양주군은경성부와접해있었으며동북부는산악지대가대부분이었고남부는한강을끼고있어서비옥한토지가많았다. 남양주지역은양주군의남부지역으로상대적으로논의비율이높은편이었고, 경성의지주들이이지역의많은토지를소유하고있었다. 남양주지역의인구는양주군전체의약 40% 정도를차지하고있었다. 인구증가율은양주군의경우한일합방을전후한시기의증가가눈에띄는데, 이는그전의조사가어느정도는과소평가되었던것으로파악할수있다. 꾸준한인구의증가를확인할수는있지만전국증가율에비해서는낮은편이었다.* 일제시기에는북부지역과도시지역의인구증가율이높았다 년이후에는해외로인구이동이많아지면서전체적인인구증가율은상대적으로낮게나타났다. 양주군 ( 남양주지역 ) 은전형적인농업지대였기때문에식민지지주제의강화로농촌인구가큰폭으로증가했지만인접한경성부로인구가이동하는등한일합방이후에는상대적으로인구증가율이낮게나타났다. 산업별로노동력인구구성을살펴보면남양주지역의특징을알수있다 년통계를보면, 양주군은농업인구의비율이상당히높은편이었다. 경성부 인천부등도시지역이많은경기도의전체비율은물론전국비율과비교해보아도농업인구의비율이높고공업이나상업인구의비율은낮다. 이것은남양주지역을포함한양주군이전형적인농업지역임을말해주는것이다. 즉, 일제시기의남양주지역은농업지역으로서농업인구의비율이높았는데경성부에인접해있었기때문에농업부문의과잉인구는경성부로이동하여도시빈민층을형성하였을것으로추측된다. 또한이지역이경성에거주하는부재지주가많았던것도이러한인구변동의요인이되었을것으로파악할수있다. 일제시기지주소작관계는이전의지주소작관계에비해경제적으로더욱철저하게진행되었으므로소작지마저빼앗긴농민들은더이상농촌에잔류하지못하고다른지역으로이동하였다. 특히부재지주의경우지주소작관계가재촌지주에비해더욱냉정하게이루어졌다. 소위마름이라는중간관리인을통해소작인들을관리하였는데이들은이중의가혹한수탈을자행하여소작농민들을더욱어려운상황에놓이게하였다. 재촌지주들이그들의농촌공동체를유지하는가운데지주소작관계를영위하려한것과달리부재지주들은보다많은경제적이익만을위해소작인을철저하게관리하였다.* 이러한이유때문에양주군의인구증가율이전국인구증가율에비해낮았던것으로여겨진다. <1930 년남양주지역의인구 > 지역 / 구분세대수 ( 호 ) 별내면진접면진건면화도면와부면미금면 897 1,338 1,126 1,511 1,782 1,377 인구 ( 명 ) 남여계 2,435 3,707 3,205 4,284 4,940 3,829 2,345 3,493 3,019 3,867 4,642 3,458 4,780 7,200 6,224 8,151 9,582 7,287 계 8,031(40.5%) 22,400(41.5%) 20,824(40.9%) 43,224(41.2%) 양주군 (1930) 양주군 (1920) 양주군 (1910) 양주군 (1906) 19,813 18,480 18,267 16,899 54,019 51,996 46,433 36,566 50,866 48,449 41,270 30,754 비고 : 지수는 1906 년을 100 으로계산한것이다. 출전 : 朝鮮總督府, 昭和 5 年朝鮮國勢調査報告, 1930;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譜 ,885(156) 100,445(149) 87,614(130) 67,320(100) <1930 년산업별노동력인구 > ( 단위 : 명 %) 지역 / 구분 농업 수산업 광업 공업 상업 교통업 공무자유업 기타 합계 전국 경기도 양주군 7,664,564 (78.48) 545,687 (62.30) 37,923 (86.31) 121,730 (1.25) 6,026 (0.69) 10 (0.02) 34,185 (0.35) 2,063 (0.24) 1 (0.00) 출전 : 朝鮮總督府, 昭和 5 年朝鮮國勢調査報告, ,765 (6.00) 84,334 (9.63) 917 (2.09) 562,099 (5.76) 94,287 (10.76) 1,969 (4.48) 107,541 (1.10) 22,832 (2.61) 412 (0.94) 182,684 (1.87) 39,925 (4.56) 748 (1.70) 506,976 (5.19) 80,716 (9.21) 1,957 (4.46) 9,765,544 (100) 875,870 (100) 이처럼농업이주산업이었던남양주지역의농업환경에대해살펴보면, 일반적으로일제시기남양주지역을포함한양주군은경기전작지대로분류되었다.* 경기전작지대는대체로토지총면적에대한경지면적이약 21% 정도였고, 경지총면적중논의비율은 34%, 밭의비율이 59%, 화전비율이 7% 였다. 그러나앞에서살펴본바와같이남양주지역의논밭비율은논이 45.2%, 밭이 54.8% 로밭의비율이약간많지만다른지역에비하면논의비율이높은편이었다. 경지의구성도로보면남양주지역은도작지역 ( 稻作地域 ) 으로볼수있지만실제작부 ( 作付 ) 면에서는 43,937 (100)

366 주변지역과의연관성이많기때문에경기전작지대의특성과경기도작지대 * 의특성을함께고려하여남양주지역의농업환경을설명하고자한다. <1938 년미수확고와반당수확량 > 면명작부반별 ( 町 ) 수확고 ( 石 ) 반당수확고 ( 石 ) 별내면 , 진접면 , 진건면 , 화도면 , 와부면 , 미금면 , 계 , 출전 : 朝鮮總督府農林部米穀課, 道府郡島邑面別米實收高調査及道府郡島別米品種別實收高調査成績, 논에서이루어지는수도작 ( 水稻作 ) 을중심으로보면남양주지역은경기중부지대에속한다.* 이지대의벼우량장려품종은풍옥 ( 豊玉 ), 중생은방주 ( 中生銀坊主 ), 곡량도 ( 穀良都 ) 등이었다. 볍씨를뿌리는시기는 4 월 일경, 이앙시기는 6 월상순에서중순경이었다. 벼를베는적기는조생종은이삭이팬후 38 일, 만생종은 43 일이었다. 다음은남양주지역의미수확고와반당수확고로양주군전체의반당수확고 석보다많았다. 경기전작지대의작부구조를살펴보면수도 ( 水稻 : 벼 ) 25.9%, 보리 17.2%, 밀 8.0%, 콩 18.8%, 조 11.8%, 기타 18.3% 였다. 밭의작부방식은 2 년 4 작 (1 년 2 작 ) 으로대부분밀 - 콩, 보리 - 조의순서로돌려심었다. 인접해있는황해도전작지대보다특히밀의작부율이적었다. 이것은밀 조 콩을돌려심는 2 년 3 작의서북선형과보리 콩의 1 년 2 작인남선형의혼합형태라할수있다. 또한이지역은밭농사를중심으로하여가축을기르는비율은적었던반면양잠은많은편이었다. 반면에경기도작지대의작부구조는수도 47.4%, 보리 18%, 밀 3.6%, 콩 15.9%, 조 3.4%, 기타 11.7% 로수도의비율이가장높고밭작물로는보리 콩의비율이높아그구성이단순함을알수있다. 밭의작부방식은보리 콩의 1 년 2 작으로남선형태가대부분이었다. 남양주지역은지역적특성과경지구성도등이이것의중간형태였으므로작부구조역시이에준하였을것으로추측된다. 경기전작지대의경영규모는평균 1.6 정보였고, 평균적으로자작농은 2.3 정보, 자작겸소작농은 3.3 정보, 소작농은 1.1 정보를경영하였다. 한편전체적으로는영세경영이 62.7% 를차지하여농민의생활이매우궁핍했음을짐작할수있다. 이지역의경영형태는자작농이 11.1%, 자작겸소작농 22.5%, 소작농이 66.4% 로서전국의소작농비율 51.8% 보다훨씬높았으며, 전라북도 (70%) 다음으로높았다. 소작형태는일반적으로논은분익제에의한타조 ( 打租 ), 밭은정액제인정조 ( 定租 ) 였다. 논의경우수리 ( 水利 ) 의혜택이적어수확이불안정하여타조가많았던것이라고할수있다. 경기도작지대의경영형태는경기전작지대와비슷하였다. 경기전작지대의경영집약도를살펴보면반당조수익 ( 反當粗收益 ) 은논이 엔, 밭이 엔, 전체 엔으로함경도 평안도고원지대와도서지역을제외하면가장낮은수준이었다. 반당비료소비고역시 3.85 엔으로가장낮고, 생산력지수도논 0.89, 밭 0.94, 전체 0.91 로낮은편이었다. 농업수익역시낮은축에속하였다. 반면위의표에서도알수있는것처럼경기도작지대의경영집약도는훨씬집약적이었다. 반당조수익은특히밭의수익이경기전작지대에비해월등히높고농업수익도높은것을알수있다. 즉, 경기도작지대가노동력이나자본에서모두훨씬집약적이었다. 이러한경영집약도의차이는인구밀도가전작지대의경우일반인구 84, 농업인구 64 인데반해도작지대는일반인구 169, 농업인구 117 이라는점에서찾을수있다. 즉, 양주군의인구증가율이상대적으로낮았던것과경영집약도가낮은것은상관관계가있었을것으로추측된다. < 경기전작지대와도작지대의경영집약도 > 구분 경기전작지대 경기도작지대 논 반당수익 ( 엔 ) 밭 전경지 반당비료소비고 ( 엔 ) 논 생산력지수 밭 전경지 호당 농업수익 ( 엔 ) 반당 종업자당 단위노동당 출전 : 久間健一, 朝鮮農業經營地帶の硏究, 農林省農業總合硏究所, 1950, 385쪽.

36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2. 산업구조의변화 2) 식민지지주제의성립과농가경제 토지조사사업이완료될당시조선인구의 80% 는농민이었다. 그러나토지소유상황은매우불균등하였고이에따라농촌에서의생산관계는지주 - 소작관계가지배적이었다. 식민지지주제 * 라고도표현되는이러한생산관계는 년대에더욱강화되었다. 다음표에보이는것처럼 년에지주호수는 4 만 3600 여호, 소작농호수는 9 만 1700 여호가증가하여 5 년동안지주호수는 93%, 소작농호수는 10% 늘어났다. 반면자작농과자작겸소작호수는같은기간에약 4% 감소하였다. 즉, 농민층분해는소유분해의양상을보여소수의지주와다수의토지가전혀없거나적은토지를소유한농민층이형성되었다. 이것을바탕으로조선농촌에서는식민지지주제가강화되었다. 자작농의몰락과소작농가의증대는정도의차이는있었지만일제통치기간내내유지되었다. < 조선농촌의계급 계층별호수 > 연도지주자작농자작겸소작농소작농계 ,754(1.8) 90,386(3.4) 569,517(22.0) 525,830(19.7) 출전 :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 下卷, 1932, 쪽. 1,065,705(41.1) 1,045,606(39.2) 911,261(35.1) 1,003,003(37.7) ( 단위 : 호 %) 2,593,237(100) 2,664,825(100) 남양주지역의계층별호수의변화상황역시비슷한추세였다. 토지조사사업이끝난후인 1921 년양주군의계층별호수는지주 3%, 자작농 10%, 자작겸소작농 35%, 소작농 52%* 로전국비율보다지주와소작농의비율이높았다. 여기에 1920 년대말농업공황으로농촌경제는더욱어려워졌고이에따라 1930 년대에들어서도소작농의비율은더욱크게증가하였다 년양주군청의조사에의하면양주군의소작농비율은 70% 에달하였고남양주지역또한비슷한상황이었다. 특히소작농의경우 1 년전에비해 1445 호나증가하여당시농촌사회의피폐함을짐작할수있다.* <1930 년대남양주지역계층별호수 > ( 단위 : 호 %) 면명 지주 자작농 자작겸소작농 소작농 계 별내면진접면진건면화도면와부면미금면 ,160 1,027 1,313 1,520 1,202 계 255(3.7) 505(7.2) 1,517(21.8) 4,693(67.3) 6,971(100) 양주군 509(3.1) 907(5.5) 3,423(20.7) 11,658(70.7) 16,497(100) 출전 : 동아일보 다음으로남양주지역을포함하고있는양주군의구체적인지주소작관계에대해살펴보면,* 소작농가 1 호당소속지주수는가장많은경우 12 명에서평균 3 명으로, 한소작농이여러지주의땅을소작하는일이많았다. 1 호당소작지면적은최고 70 반보 (2 만 1000 평 ) 에서최소 0.4 반보 (120 평 ) 까지다양하고평균적으로 12 반보 (3600 평 ) 정도였다. 소작료의형태는 100% 현물납이었다. 밭의경우도모두벼로소작료를거두었다. 이는당시미곡이일본으로이출되는경우가많아미곡의매매과정에서많은이익을얻을수있었고현금화하는데도가장유리하였기때문이다. 소작료수납방식은논은타조 ( 打租 : 82%), 밭은정액제인정조 ( 定租 : 90%) 가대부분이었다. 이는수리시설이철저하지못해수확이불안정하여논은타조의형태가많았고밭의경우는작물의변화가많고소작료도벼로받았기때문에정조가많았던것이라할수있다. 논의소작료율은보통 5 할이었는데타조인경우벼로납부하였으며계약소작료는 1.25 석, 실제납부소작료는 1.25 석, 평균수확고는 2.5 석이었다. 많지는않았지만정조의경우는계약소작료가보통 1.35 석 ( 년평균 ), 실제납부소작료는 1.35 석, 평균수확고는 2.5 석으로소작료율은 5.4 할로타조보다약간높았다. 양주군의논의가격은약 200 원으로경기도에서가장높은수준이었다. 밭의소작료율은정조는보통 4.7 할, 타조는 5 할정도였다. 지주의소재별로소작지비율을살펴보면양주군군내지주 ( 재촌지주 ) 의소작지는 47%, 경성부를포함한경기도내에거주하는지주 ( 부재지주 ) 의소작지는 49%, 경기도외에거주하는부재지주의소작지는 4% 로부재지주의비율이더높았다. 이것은남양주지역도역시같은상황이었을것이다. 경기도전체에서는군내지주가 54% 로집계되었다. 일제시기의농업생산관계에서는지주소작관계, 즉소작경영이주된것이었지만노동력을고용하여경작을하는경우도있었다. 필요할때마다고용하는일용노동력도있었지만, 1 년을단위로농사외에집안일까지도담당하게하는연고 ( 年雇 ) 인머슴을고용하는경우가많았다. 머슴을고용하는것은대개지주나자작농계층이었지만드물게는소작농이머슴을고용하기도하였다. 양주군전체의머슴수는총 1263 명이었다. 의외로지주계층이머슴을많이고용하지않았는데이는대부분의대지주가부재지주였고직접농사를짓는경우가많지않아집안일을돌보는정도에서머슴을고용하였기때문이라고여겨진다. 반면에자작농이나자소작계층은농사일을위해머슴을고용하였기때문에 3 인이상의머슴을고용하는경우도있었다. < 양주군의머슴고용상황 >

368 고용주 / 머슴수 1 인 2 인 3 인이상합계 지주 자작농 자소작농 소작농 출전 :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 下, 1932, 續篇 90 쪽. ( 단위 : 명 ) 이상을통해남양주지역의지주소작관계양상을어느정도는짐작할수있다. 남양주지역만의특성이라고할수는없지만일제시기의전반적인지주소작관계의양상과같이소수의대지주와대다수영세소작농으로구성된농촌사회였음을알수있으며, 그속에서일제하농민생활의어려움을짐작할수있다. 이에각계층별로경제상태와생활상을살펴보고자한다. 지주계층은소유면적에따라대지주, 중지주, 소지주로구분할수있고거주지에따라서는부재지주, 재촌지주로나누어볼수있다. 남양주지역의소유면적별지주수를살펴보면 5 반보미만의영세지주가 50% 정도를차지하며 50 정보이상의대지주는양주군전체로보아도 0.1% 정도의극히적은수였지만이들이소유한경지면적은막대한것으로소수에의한토지집중현상을볼수있다. < 경작소유지별지주수 > (1921. 현재, 단위 : 명 %) 지역 / 구분 5 반보미만 5 반보 1 정보 1 3 정보 3 5 정보 5 10 정보 정보 정보 100 정보이상합계 양주군 진건면 7,912 (58.4) 503 (47.2) 3,649 (26.9) 230 (21.6) 732 (5.4) 247 (23.2) 621 (4.6) 407 (3.0) 217 (1.6) 86 (8.1) 출전 : 京畿道內務部社會課, 京畿道農村社會事情, 1924, 95 쪽 ; 남양주시지적과, 토지조사부. 14 (0.1) 7 (0.05) 대지주들은대부분경성에거주하는양반과지방의호족, 즉지방양반이라칭하는자들로서자신의경지를모두소작시키고있었다. 이러한양반신분의부재대지주와중간지주들은평소지방에거주하지않고도회에서안일한생활을하며추수원에게소작지와소작료징수를감시하게하거나지방에마름 ( 舍音 ) 을두어관리하게하였다. 이들중일부는주식등에투자하는경우도있었지만대부분소작료수입을소비하며향락적생활을영위하였다. 지주중에가장선량한지주는순농촌의소작농민의마을에거주하는소지주였다. 이러한지주가사는부락은소작관계가원활하게이루어지고있다. 농촌의순농민부락에서평상시에여분의금전을소유하고있는농민은거의없었다. 수십호의마을에서겨우 1 호정도였다. 이들은지주계급의농민이었는데선량한지주는궁민 ( 窮民 ) 의구제자였지만악랄한지주는고리대를통해농민을수탈하며부를축적하기도하였다. 이러한지주들의수지상황을양주군에거주한지주들을통해살펴보자. 토지소유규모가클수록잉여가많았고일단소유면적이적더라도토지를소유하고있으면적자경영을하지는않았음을알수있다. 13,559 (100) 1,066 (100) 구분 < 양주군지주의 1 년수지상황 > ( 단위 : 엔 ) 수입 지출 차인 수확수입 부업수입 잡수입 계 경작비 생활비 제공과 소작료 잡지출 계 ( 差引 ) 대 3, , , , (+) 중 1, , , , (+) 소 , (+) 세 (+) 비고 : 대지주는경지 27 정보에가족 8 인, 중지주는경지 12 정보에가족 7 인, 소지주는경지 4 정 8 반보에가족 7 인, 영세지주는경지 7 반보에가족 4 인이다. 출전 : 京畿道內務部社會課, 京畿道農村社會事情, 1924, 쪽. 한편지주를대신하여경지를관리했던마름은경기도에 4591 명 ( 일본인 6 명 ) 이있었는데그중큰마름은소작지 600 정보, 소작인 600 인을관리하고있었다. 그러나 20 정보, 50 인정도의소작을관리하는것이대부분이었다. 이과정에서소작인들로부터중간수탈을자행하는경우가많아지주이상의생활을영위하는경우도드물지않았다. 이들은실질적으로농촌지역의권위자나소농민의지배자로행세하며지주를대신하여소작농민들과대립적인관계를형성하는경우가많았다.* 자작농계층은오래전부터한부락에영주하며약간의토지를소유하고농촌사회에서중추적인역할을담당해왔다. 대개경우 ( 耕牛 ) 를소유하였으며소작농민에게빌려주기도하였다. 노동자를고용하는경우도있었지만일반적으로는자기가족의노동을주로하고일용자로노동을보충하였다. 그러나자작농민중에서도중이하의농민은흉년이나불시에가계의재난을만나면토지를방매할수밖에없는상태였다. 일제시기에는재해등불가항력적인요인에의해서만이아니라경제조직의결함과생활비의앙등으로토지를방매하는경우가많았다. 이에일제시기내내자작농계층은자소작농이나소작농으로전락하는추세를보였다.* 대개자작농의 1 년수지는 1920 년대초반경기지역의경우최고 170 엔에서최저 2 엔정도로약간의흑자를보이고있었다.* 이러한경향은 1920 년대말농업공황을거치면서변화하였는데대부분의자작농들이적자경영을면치못하였다.

369 소작농계층은소수자작겸소작농과순소작농중정농가 ( 精農家 ) 를제외하고는자작농에서소작농으로또는궁민으로전락하고있었다. 양주군의경우춘궁상태에있는농민호수는전체 1 만 5989 호중 9656 호로 60.4% 에달하였고, 소작농은그정도가더욱심각하여전체소작농가 9216 호의 81.8% 인 7542 호가춘궁상태였다. 또한소작농중소작지를경영하는것만으로는생활이곤란하여임노동을하는호수가 7207 호로 78.2% 에달하였다.* 한편소작농민중자작겸소작농의일부와순소작농중에서도소작면적이넓거나비옥한토지를대여하여영소작하는경우는생활상태가비교적양호한편이나, 대다수의소작농민의경제는수지가맞지않아부족한것은대개돈을빌려보충하였다. 이러한부채는관혼상제등불시의지출때문에생긴것이지만, 농민들은돈을빌린후이를갚을여력이없어이자가추가되면서수백원에달하는부채를지게되었다. 이과정에서지주의토지겸병은더욱심화되었다. 양주군의부채농가비율은 82% 였고, 1 호당부채액수는보통 39 엔정도였는데가장많은경우는 257 엔이었다. 양주군부채농가의비율은경기도전체비율보다높았으나 1 호당액수는적은편이었다.* 이처럼다액의부채를지고갚지못할상황이되면소위야반도주하는일이자주발생하였다.* 소작농민들은대부분경우 ( 耕牛 ) 도소유하지못했으며농구도타인에게빌려쓰고있었다. 주택은자신의소유이지만집터는자작농이나지주의소유인경우가많았다. 소작지에서수확한곡물은소작료로납부하면손에남는것이거의없었고, 그나마남은식량도팔아써야하는극도로빈곤한상태였다. 역시 1920 년대초경기도소작농의 1 년간수지상황을보면비교적많은경지를경작하는자작겸소작농은약간의흑자를보고있지만 ( 최고 244 엔에서최저 8 엔 ) 5 반미만의영세경영자는적자를면치못하였다. 순소작농의경우는더욱심하여대부분적자였으며 3 정보이상을소작하는경우에는 엔정도의흑자를보고있다.* 일제시기조선의농촌사회는 1920 년대말의농업공황으로미가가급락함에따라농촌경제가더욱어려워져지주와소작인계층으로양극화되었고, 이는결국농촌사회내부에서소작쟁의등의갈등을격화시켰다. 이에조선총독부는 1930 년대에들어 농촌진흥운동, 조선농지령, 자작농지설정사업 등을통해농촌사회의 안정 을도모하고자하였다. 이것은한일합방이후상품화폐경제에무방비상태로노출되어몰락해가던농민들에게자급자족을통해자력갱생을도모하자는것이었다. 이러한정책의일환으로소작인들이공동으로소작지를빌려공동경작하는경우가있었는데, 그목적은소작인의친목, 근검, 저축장려, 생활자금과기타자금의조성, 당국의농업지도의편의등을위한것이었다. 남양주지역에서도소작지를공동경작하는경우가있었다. < 소작지공동경작상황 > 명칭인원차입면적경영동기 진건면공동경작계 80 인논 1.4 정보 1927 년금곡금융조합이모범부락을설치하여모범경작을할목적으로시작 별내면농민조합 11 인논 1 정보 1930 년농업개량발달을도모할목적으로조합을조직하여경영시작 진접면공동경작조합 30 인논 1 정보 1929 년부터마을농민이농사진흥을도모하기위해시작 진접면금구진흥회공동경작조합 와부면월문리묘적동민 진접면장현리전동진흥회 * 35 인논 2 정보 1929 년부터마을농민이농사진흥을도모하기위해시작 동민일동 36 인 논 3 반보동의공동이익을위해 1929 년부터시작, 소득은동유재산으로한다. 논 3 정보밭 3.5 정보 출전 :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 下, 續編 24 쪽 ; * 는 동아일보 년전동진흥회를조직하여마을농민의농사진흥을도모하기위해 1933 년부터시작 이와함께당시농가경제를더욱어렵게했던고리구채 ( 高利舊債 ) 를정리하기위한조치도취해졌다.* 당시의농가부채는매우심각한상황이었다. 특히고리구채로인해자작농은농지를뺏겨소작농으로, 소작농은도저히갚을능력을없어야반도주하는일이많았다. 그러나금융조합을통해실시했던고리부채정리사업은부채를지게된근본원인을제거하는것이아니었고, 그대상도금융조합원에한정되어있었기때문에실제로가장어려움을겪었던소작농에게는큰도움이되지못하였다 년에시작된자작농지설정사업역시농가경제의파탄을막지못하였다. 경기도의경우이후 10 년간 2000 호이상의자작농지를설정하기위해매년 13 만 2000 원을융통하여 200 호이상을설정한다는계획을수립하였다. 금융조합도특별저리자금을통해자작농지설정사업을함께추진하였다.* 그러나설정호수나설정면적자체가너무적었고토지가격의등귀, 일제의전쟁도발등으로토지를유지하기어려운상황이었기때문에농민들의고통은계속되었다.

37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2 절토지조사사업과산업구조 * 2. 산업구조의변화 3) 산업부문별현황 일제시기남양주지역은농업지대로서, 전체인구의 85% 이상이농업에종사하였다. 미곡을비롯한주곡농업에대해서는앞에서상세히살펴보았으므로여기에서는비록적은부분이지만주곡농업을제외한남양주지역의각종산업부문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먼저농업부문에서주곡농업을제외한특용작물의재배에대해살펴보자. 한일합방당시조사에따르면양주군의특용작물은밤, 배, 담배를들수있다.* 하지만많은양이생산된것은아니었다. 특히남양주지역에서많이재배되었던특용작물이무엇인지알수는없지만인접한양주군의특산물인밤과배등이남양주지역에서도상당히생산되었을것으로추측된다 년조사에의하면양주군의담배재배면적은 979 반보로경기도전체의 4.4%, 생산량은 1 만 769 관으로 3.1% 를차지하였다. 이외에농촌의가내부업과관련이있는직물원료의재배에대해살펴보도록하겠다 년조사에의하면양주군재래면의재배면적은 1285 반보, 생산량은 5 만 6540 관으로경기도전체의재배면적과생산량의 2.3%, 0.3% 로극히적은양이었다. 이것은상품생산을위한것이라기보다자가소비용으로재배되었던것이라고할수있다. 대마 ( 삼베 ) 도약간생산되었는데재배면적 760 반보 (7.9%), 생산량 1 만 336 관 (5.6%) 으로역시적은양이었다.* 이를원료로하여가내부업으로생산된양주군의직물생산액을보면면직물은 1134 엔으로경기도전체생산액의 1%, 마직물은 2625 엔으로 1.3% 에그치고있다.* 반면에견직물은 6624 엔으로 10.7% 에달하고있다. 남양주지역은특히양잠이많이행해졌던것으로보인다. 일제는러일전쟁이후본격적으로조선을식민지화하기위한준비과정에서조선의기후나토양이양잠업에매우적합하다고판단하여한일합방이후바로산견 ( 産繭 ) 증식계획을구체화하였다. 이계획의일환으로우량잠종을보급하기위해 1916 년 4 월은사수산원잠종제조소 ( 恩賜授産原蠶種製造所 ) 가양주군미금면금곡리에세워졌다가같은해 12 월경성부용두정으로옮겨져경기도수요의원잠종을제조 배부하고양잠에관한조사연구를실시하였다.* 1920 년대에들어서는종연방적동대문공장의배후지였던양주군일대에서양잠소작이실시되기도하였다.* 일제의반강제적양잠장려정책으로 1910 년이후산견액과양잠농가가비약적으로증가하였다. 이런흐름속에서남양주지역에서도양잠이활발히진행되었음을알수있다. 상업유통부문을살펴보면, 일제시기에는 5 일장으로불리는장시 ( 場市 ) 가농촌사회의유일한상업장소였는데 1930 년대경기도에는각군평균 5 개정도의장시가있었다. 남양주지역의장시는 19 세기이래로계속열린마석우장 ( 磨石隅場 ) 과일제시기에시작된광릉천장 ( 光陵川場 ), 금곡장 ( 金谷場 ) 등이있었다.* 1920 년대후반이후농민들이자신의공동이익을위해협동조합형태로만든산업조합은주로특산물을중심으로공동구매 판매 이용사업을하였다. 남양주지역에도청화산업조합 ( 淸和産業組合 ) 이있었다. 가평군상면, 하면, 외서면 ( 일부는현수동면으로편입 ) 과양주군의화도면, 진접면을관할지구로하고조합원은약 1000 명정도로 1935 년 11 월 15 일에설립허가를받았다. 청화산업조합의판매사업은이지역에서생산된목탄 ( 木炭 ), 신재 ( 薪材 ), 조선지, 저피 ( 닥나무껍질 ), 밤, 소나무열매, 묘목등이그대상이었고구매사업은산업용기계기구, 제지 제탄용재료, 원료및묘목, 미곡, 식염, 유류 ( 油類 ), 포백류 ( 布帛類 ) 등을구입하는것이었다. 공동이용사업은창고, 공동작업장, 산업용기계기구, 관혼상제용구였다.* 남양주지역의공업부문은매우미미하여근대적공업시설은전무하였고가내수공업형태로제지공업과도자기공업정도가있었다. 제지공업은경기도에서가평군이가장발달하였는데가평군과인접해있는남양주지역역시제지공업이활발하였을것으로추측된다. 이에양주군의제지공업상황은대부분남양주지역의상황으로보아도될것이다. 양주군의조선지원료인닥나무껍질생산량은 1445 관으로경기도전체의 1.9%, 조선지생산량은 80 괴 ( 塊 ) 의 3490 엔으로 10.9% 였고제조호수는 54 호 (0.4%), 종업인원은 68 명 (2.9%) 으로적었다. 도자기공업역시양주군에공장이 8 개 ( 경기도전체의 5%), 종업인수 26 인 (2.5%), 생산액 3268 엔 (1.4%) 으로미미한상태였다. 남양주지역의교통분야에서주목할것은 1938 년에경춘철도가개통된것이었다.* 경춘철도의주요목적은일제말기전쟁수행을위해건설중인 한강수력전기 의건설자재를운반하는것과강원도산림의개발로생산된목재 신탄류를경성으로운반하여경성시민에게연료를제공하는데있었다. 이처럼화물수송을주로하는것이었으나퇴계원유원지가만들어지면승객도증가할것이라고보았다.* 이렇게건설된경춘선은해방이후현재까지주변에뛰어난경관과유원지가생기면서많은사람이이용하는교통수단이되었다.

37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3 절사회생활상 * 조선을식민지로강점한일제는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모든영역에걸쳐서한민족의역사를말살하는정책을실시하였다. 초대총독사내정의 ( 寺內正毅 ) 의 조선민중은죽음아니면복종 이라는훈시에서보이는것처럼일제는한반도내의민족적저항을철저히차단하고동시에식민통치의경제적기반을구축하기위하여토지 산림등을약탈하면서민족산업의예속화를심화시켰다. 일제의경제적약탈정책은토지사업을통하여가장노골적으로시행되었다. 즉, 일제에의해강행된토지조사사업은하나의원시축적과정에서농민의토지이탈을촉진하는결정적인계기가되었다. 이사업은한반도를일제의식량원료공급기지로만들기위한것으로서봉건적소유와착취관계를법적으로공고히하는동시에지주를식민통치의사회적기반으로만들기위해시행되었다. 한편토지조사사업의여파로기존의토지소유권을어느정도인정받았던전호들은식민지형소작농으로전락하였으며,* 일제의거대농장의토지매입과그에따른고율의소작료는식민지의소작여건을더욱악화시키는결과를초래하였다. 고율의소작료와농장형토지겸병의증가로농민들은토지에서유리 이탈하였으며, 이인구들은자본의원시적축척단계의시장경제상황아래에서근대적공장에흡수되지못하였다. 왜냐하면당시의공장들은이들농촌이탈자들을고용할만큼규모나수적측면에서필요충분조건을갖추지못했기때문이다. 따라서유리된인구는자연적으로실업자로전락할수밖에없었으며일제도식민통치기간실업문제에대한대책과처리에고심하였다.* 이처럼실업자의수가큰폭으로증가하고농촌빈민들이걸인화하면서이들은인간으로서누려야할기본적인권리는물론의료혜택도받지못하였다. 요컨대일제시기남양주의사회생활실태는조선총독부와일본본국의식민지통치정책의실시, 그에따른지방통치의측면을아울러고찰할때더욱분명하게나타날것이다. 여기서는사회생활상의주된과제로소작조건의열악화, 기만적인농촌진흥계획과사회사업의실태및의료혜택의실상을구체적으로살펴보기로하겠다.

37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3 절사회생활상 * 1. 농촌경제의파탄과사회구조 1. 농촌경제의파탄과사회구조 1) 식민지농정과소작농의증가 1910 년한일합병조약의체결과동시에일제는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여러방면에걸쳐식민정책의골격을세우고그구체적활동을전개하였다. 특히경제정책은일제의상품원료공급지화와자본주의상품시장으로서의기능성을목적으로하여실시되었다. 즉, 금융조합을설치하여조선인의전통적저축관행을중앙정부에서간섭한다든가,* 토지조사사업을단행하여당시까지현실적보유자였던농민을희생물로삼아대다수의농민을토지로부터이탈시키는정책을실시하였다. 이가운데토지조사사업은문호개방이후부터농민들이강력히추구했던농민적토지소유제를철저히저지하고지주소유제를강화하기위한것으로자작농의성장을막고그들을일시에완전한소작농으로전락시킨것이었다.* 즉, 일제는토지조사사업을통해종래의중소지주적 자작농적농민들을일시에소작농으로전락시키는한편, 등기제도를실시하여토지매매를촉진시켰다. 이는대토지를분산시키는방향이아니라대지주층이토지를겸병하는방향으로진행되어중소지주층, 자작농층의소작농화를가속화시켰다.* 이러한일제의철저하고기만적인수탈정책은산미증식계획이후에도계속진행되었다. 소작농의반영구적계약권이실현될수없는상황에서지주와소작인의소작계약권체결은지주의일방적인횡포에의해서이루어졌다 년 4 월양주군주내면고읍리에서는소작인 17 명이지주에게소작권을강탈당하였으며심지어작년추수곡과종자까지몰수당하였다.* 한편, 당시일부지주들은소작인모두에게날인을요구하면서, 이에불응하면소작권을회수하여다른소작농에게계약권을이전하였다. 그대표적인예로 1933 년 6 월양주군시둔면의한지주에의해작성된불공정한소작계약을보면다음과같다.* 1 소작료의수량및납입장소등은모두지주가지정함에따라시행하며단, 소작료는매석마다고두 20 두나 212 근이나지주가청구하는대로함. 2 소작료는풍흉에관계없이지시기일에납입할것. 3 풍수해, 풍상, 충재가있을지라도이의없이정실조로납입할것. 4 소작기한은 1년으로하되기한전이라도지주가소용이있을경우에는언제라도지명에의하여반납할것. 5 소작료를건조의불충분또는불완전한곡물로납입할때는 1할이상 5할이하를증납할것. 6 단기일이경과할때도독촉수수료를똑같이납입할것. 이와같이지주는소작계약권의일방적체결을강요하였을뿐만아니라고율의소작료를징수하였다. 이러한현상은남양주에국한된것은아니었다. 지주의횡포로소작권을상실하거나자작농이소작인화하는경향은당시전국적인추세였다. 이는전통적경작권을상실한농민층의확대를의미한다.* 1920 년대양주를포함한경기도농촌의계급구성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 경기도농촌계급구성 > (1924. 현재. 단위 :% 호 ) 지역 / 구분 지주 자작농 자작겸소작농 소작농 순농가호수 경성부 ,841 인천부 고양군 ,287 광주군 ,603 양주군 ,746 연천군 ,155 포천군 ,756 가평군 ,418 양평군 ,408 여주군 ,413 이천군 ,844 용인군 ,524 안성군 ,462 진위군 ,565 수원군 ,507 시흥군 ,244 부천군 ,279

373 김포군 ,081 강화군 ,822 파주군 ,750 장단군 ,484 개성군 ,977 계 ,373 위의표에서알수있듯이양주군의경우자작겸소작농과순수소작농의비율이전체농가의 87% 에달하였다. 토지의대부분을소유한지주는대다수의농민과괴리된생활상태를유지하고있었으며이에반하여소작농민의경작상황은극히빈약하고생활상태는저열할수밖에없었다. 또한대다수가농민이라는것을감안할때자작농이적다는것은농촌사회구성의기본축이부실하다는것을반증하는것이다. 더구나이러한자작농역시소작농으로하강분해하는경우가날로증가하였는데이는농업의발달을저해하고농민생활의질적향상을원천적으로봉쇄하는결과를초래하였다 년당시양주군에서 50 정보이상의대지주는 21 명이었으며 5 반보미만의자작농은약 8000 호였다.* 즉, 극단적양극화현상이전국농촌의일반적인향상이었던것이다. 이러한상황은이른바농촌진흥운동이실시되었던 1930 년대에도지속되었다. 특히 소작조정령 ( 小作調整令 ) 과 농지령 ( 農地令 ) 이실시된이후양극적쟁의와소송이빈번하였는데 1933 년상반기 4 개월간소작쟁의법원심의사건은 76 건에달하였다.* 1933 년양주군청의조사에의하면전년에비하여자작농과자작겸소작농은날로몰락하고순소작농들은 1445 호로증가하였다고한다. 이상황을각면별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1930 년대양주군의계급구성 > 면명 / 구분 지주 자작농 자작겸소작농 소작농 회천면 주내면 이담면 은현면 광적면 백석면 장흥면 시둔면 별내면 * 진접면 * 진건면 * 화도면 * 와부면 * 미금면 * 구리면 노해면 계 ,423 11,658 비고 : * 는현남양주시관할구역이다. 당시군인구의 71% 가참담한소작생활을영위하였다. 즉, 지주층 509 호와자작농 907 호가하강분해하여당시농촌사회의계급형태는대지주와순소작농으로양극화되었다. 이렇듯소작농의확대재생산은농촌사회의경제여건을더욱악화시켰다. 농촌에서는평상시에여유자금을소유한농민은극히적었으며그대부분은지주계급에게집중되었다. 지주계급은여유자금을고리대사채로전환하여소작인들의생활은더욱궁핍해갔다.* 양주군의지주들가운데일부는도시, 즉경성에거주하였는데이들은차배인 ( 差配人 : 추수원 ) 을두고그들에게소작지및소작료의징수를담당하도록하였다. 이들부재지주들은경작지를자신의거주지와는별개의것으로인식하여주로농촌을상대로고리채사업을전개하였다. 양주군의한지주의 1 년간수지를표로나타내면다음과같다.* < 지주의 1 년간수지상황 > 구분 대중소 수입 수확부업잡수입계경작비생활비공과금소작료잡지출계 3,500 1, ,800 1,850 1, ,200 1, 지출 ,500 1, 차액

374 세 비고 : * 는현남양주시관할구역이다. 위의표에의하면약 300 원의순이익을올리고있음을알수있다. 이는남양주의농지가비교적비옥하고, 농민수탈의제도적장치가완비되었기때문이다 년남양주의쌀수확고는 17 만 4713 석으로경기북부지역가운데가장많았으며진접면 (1 만 667 석 ), 진건면 (1 만 3000 석 ), 화도면 (1 만 4355 석 ), 미금면 (1 만 3691 석 ), 구리면 (1 만 2595 석 ) 도다른지역에비해서훨씬많은수확량을올렸다.* 이렇듯미실수고가전년에비해증가했는데도소작농의생활안정을기대할수는없었다. 특히, 소작농은수입의대부분을소작료의지불과차입식량의변제또는부채원리금등으로공제하고나면남는것이거의없었다. 이는경기도한지역의소작농과궁민이연 15 원의손실을보고있다는사실에서도충분히짐작할수있다. 따라서대다수소작농의부채는커져만갔고, 이를극복하지못한채지주계급과관제금융기관에의해이중삼중의착취를당하고있었다.* 이처럼농민생활이극도로어려워짐에따라농민은토지에서이탈 유리하게되었는데, 이러한농민층의분화는지역이동뿐아니라업종전환도수반하는것이었다.* 한편일제는 1914 년지방제도를개정하고좀더원활한식민통치를수행하기위해각종세수를확보하였다. 도세, 즉지방세는당초지세부과세 시장세 도장세의 3 종이있었으나그후지방비재정의확충과세제제도의개혁으로그종류가증가하였다.* 또한지방세재정의확고한기반을마련하기위해임시은사금제도를실시하여조선인에대한각종구호사업을전개하였다. 양주군의경우금곡 ( 金谷 ) 에공동은사수산장 ( 共同恩賜授産場 ) 을설치하여적극적인구호사업을전개하였다.* 1917 년부터지방재원확충의일환으로실시된은사금수입은 1929 년부터소농생업자금으로대부되었다.* 그리고이를충당하기위해일부는매각하고일부는식산채권으로대체, 현금화하여각종사회사업을보조하였다. 이를표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 양주군의사회사업기금구성 > ( 단위 : 원 ) 기금 공채 ( 연 5%) 식산채권 ( 연 5.5%) 식산채권 ( 연 5.2%) 식산채권 ( 연 4.3%) 기금이자 수산비 ( 授産費 ) 교육비 구제비 76,000 16,200 29,400 25,000 8,000 3,967 2,380 1, 위와같이양주군의경우기금 7 만 6000 원의기금과공채, 식산채권및기금이자등을사회사업비, 궁민구제비명목으로책정하였으나, 실제소작농에게이러한보조금이지급되는경우는극히드물었다. 특히토지구입자금명목으로보조금이지급되더라도지주계급의농간으로소농민의토지소유는실현되기어려웠다.*

37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3 절사회생활상 * 1. 농촌경제의파탄과사회구조 2) 사회구조의변동 토지조사사업이후조선의산업근간인토지가다른외래분자와지주들에게집중되면서소작농은몰락할수밖에없었다.* 일제의한조사에따르면 1921 년한해동안양주의전업 유리농가수는 366 호였다.* 전업 유리의원인은대체로농작물감소였으며, 이를보충하기위해일시적 단기적으로노동에종사하는경우가많았다. 특히농사에실패했을때농민은자본이전무한상태에서도시로유입될수밖에없었다.* 그러나보다근본적인원인은일제의식민지농업정책에있었다. 식민지농업정책의결과농촌빈민의수가급격히증가하면서농촌인구의이농현상이급증하였다. 이농한인구는대체로도시지역의날품팔이꾼이되거나해외의노동시장으로흘러들어가기도했으며일부는그대로농촌의임노동자로전락하였다.* 1920 년대일제가자국의식량위기에대한대응책으로실시한이른바산미증식계획도토지개량, 수리시설의확충, 쌀의증산등허울좋은구호아래쌀과토지의약탈을보다강화하기위한수단에지나지않았다.* 따라서누적된조선인의빈곤문제는극에달하였으며, 1924 년 동아일보 의기사는당시의극한상황을다음과같이묘사하였다.* 첫째, 조선사람의빈곤이오늘날에시작된바는아니나오늘날과같이빈곤에울고빈곤에괴로워한때는일찍이없었다. 그러기에오늘날조선사람에있어서최대고통이무엇이냐하면오직빈곤이요오직생활의불안인가하다. 둘째, 조선인의빈곤은오늘날에와서극도에달하였다. 이것을조선사람의어떤계급에입각하여보아도엄정한사실임을알수있고또한조선의어떤지방에비추어보아도동일한조사를얻을수있나니다시말하면빈곤과피폐는빈자에게만있는것이아니요, 부자에게만있는것도아니다. 그러면조선사람이이같이빈곤하고피폐한원인은무엇인가. 그것은소위착취를심하게당한까닭이다. 즉, 그책임의대부분은일본사람에게있고총독정치에있다고단언한다. 그구체적인내용은첫째이민정책이니이것은조선사람의각계급에향하여실업문제를일으킨것이다. 즉, 농민에게있어서는소작권의상실이되고관공리에게있어서는지위상실이되니각자의직업과일자리를잃게되었다. 이와같이실업문제와소작문제의증가는극심한민중생활의파탄을초래하였다. 즉, 절망적인경제상태를극복하지못한채극단적인방법이사용되기도하였다 년별내면에서는자신의부모를봉양할수없는처지를개탄하고자살하는사건이발생하였다.* 또한 1927 년진접면에서는양육비가부족하여요양중인자식을굶겨죽인사건도발생하였다.* 이렇듯빈곤의문제는개인에그치는것이아니라사회문제화되어농촌사회의공황을초래하였다. 일제의야만적식민정책의실시로조선인의사회계층구성에는많은변화가나타났다. 식민지수탈은원료 상품의시장화에의한방법도있지만더욱중요한것은노동의시장화였다. 그리고식민지화를위한일본인의이민증가도매우중요한것이었다. 즉, 노동인구의창출과일본인이민증가의함수관계속에서사회계층의수직적변동은조선인의생활상을이해하는데매우큰도움이될것이다. 한편일제는합병후좀더조직적이고확실한수취체제를확립하기위해호구조사를실시하였다. 한말의인구조사는누락된것이많아부정확했기때문에국가재정에도문제가있고각지방을통치하는데도비효율적이었으므로이러한사업을추진했던것이다.* 또한일제는위생상태와인구의관계를크게부각시켜일제의식민통치를합리화하려고하였다. 앞서지적하였듯이남양주의인구변동은자연적증감과더불어식민통치의사회적영향으로복합적인양상을띠고있었다. 즉, 출생률은기후 지세 위생상태등에의해서도결정되지만, 그지역의문화 경제적영향에따라결정되기도한다 년양주의출생률은경기도평균인 1000 명당 명과거의비슷한수준이다. 사망률은주로기후및기상이변에따른재해, 위생상태, 기근등에따라결정되는데양주의자연적증가율은 1000 명당 15 명정도이다. 물론영아사망률을감안하면순재생산율 ( 純再生産率 ) 은낮은편이므로자연증가는출생률에비해급속하지않다 년양주의출생률과사망률을비교하면다음과같다.* < 양주의출생률과사망률 > 연도 평균 출생률 남 여 사망률 남 여 비고 : 1000명당출생률과사망률이다 위의표를통해서당시남아의출생률이여아에앞서고있으며사망률에서도남아의경우가좀더높게나타남을알수있다. 특이한점은 1925 년의사망률이전년에비해급격히증가하였다는것인데, 이는당시대홍수의영향으로수해를입거나그에따른전염병의만연에따른것이라볼수있다 년일제의국세조사가실시되었는데당시양주군의인구는 10 만 5785 명이었다.* 1925 년당시여자 (100) 대남자의비율은 에서 1930 년에는 으로증가하였다. 경기도의평균남녀비율이 에서 로감소한것과비교하면양주군에서는점차남초현상이심화되었음을알수있다. 다음으로직업분포를보면농업인구는남자 2 만 8518 명과여자 9405 명, 수산업은남자 9 명과여자 1 명, 광업은남자 1 명, 공업은남자 778 명과여자 139 명, 상업은남자 1041 명과여자 928 명, 교통은남자 409 명과여자 3 명, 무업자 ( 無業者 ) 는남자 2 만 1244 명과여자 3 만 9709 명이었다.* 당시무업자가많았던것은실업보다도당장의일자리가창출되지않아가용노동력을전혀쓰지못했기때문인것으로파악된다. 한편, 1925 년국세조사당시의인구가 10 만 5465 명 ( 외국인제외 ) 인점을감안할때 5 년전보다 1000 여명이감소하였다는사실을알수있다.* 이는인구의

376 자연적감소가아닌사회적요인에의한것으로 1920 년대일제의가혹한토지수탈과산미증식계획으로신음하던양주군민이상당수다른지역으로이주하였기때문이다.* 이시기양주군은경기지역에서가평군과함께가장큰인구감소율을나타내고있다.* 1935 년총독부에서국세조사를실시한결과당시양주의가구수는 2 만 521 가구였고인구는 11 만 1714 명이었다. 이는 1930 년보다약 8290 명이증가한숫자이다.* 당시외국인거주자는주로일본인과중국인이었다. 일본인은총 874 명으로시둔면에 397 명, 구리면에 131 명, 별내면에 18 명, 진접면에 9 명, 화도면에 13 명, 와부면에 5 명, 미금면에 20 명이거주하였다.* 연령별로보면노동력을사용할수있는연령층 (15 59 세 ) 이전체인구의절반이상을차지하고있어양주의노동력은매우풍부하였다.* <1930년국세조사양주군세대수와인구수 > ( 단위 : 호 명 ) 인구수 면명 / 구분 세대수 계 남 여 합계 19, ,785 54,919 50,866 주내면 965 5,126 2,593 2,533 회천면 989 5,128 2,658 2,470 은현면 847 4,525 2,352 2,173 광적면 980 5,052 2,580 2,472 백석면 1,104 5,661 2,879 2,782 시둔면 1,859 9,531 4,868 4,663 별내면 897 4,780 2,435 2,345 진접면 1,338 7,200 3,707 3,493 진건면 1,126 6,224 3,205 3,019 화도면 1,511 8,151 4,284 3,867 와부면 1,782 9,582 4,940 4,642 미금면 1,377 7,287 3,829 3,458 구리면 1,730 9,078 4,681 4,397 노해면 1,234 6,782 3,499 3,283 이담면 1,322 6,685 3,422 3,263 장흥면 752 4,993 2,987 2,006

37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3 절사회생활상 * 2. 농촌진흥정책과사회상 금곡금융조합에서발생한출자증권 (1930 년, 안태호제공 ) 년대초에걸쳐실시된산미증식계획은농촌사회의해체와농민층의분해를더욱촉진시켰으며도시빈민으로의몰락과세민화현상이라는결과를가져왔다. 한편일제는세계공황의여파와자국내의경제상황을고려하여피폐된조선농촌을구제한다는명분아래농촌진흥정책을실시하였다.* 1932 년 9 월 30 일농촌진흥에대한예규가반포되면서산미증식계획의실패를위장하고자조선총독부농어촌진흥위원회를설치해농촌진흥운동을전개하였다.* 농촌진흥정책중경제적측면에서실시된것은남면북양 ( 南綿北羊 ) 정책이었다.* 그러나이는일제방적공업의원료수출을주목적으로하였으며그것도일제지주층의대자본확대를위한노동력착취를의미하는것이었다. 따라서농촌진흥정책은소위자력갱생을표방했음에도불구하고농민생활에실질적으로기여한바는거의없었다.* 농촌진흥운동은자력갱생을내세우면서도민간자율에의거하기보다는조선총독부에서직접관여하는방식으로진행되었다.* 따라서각지역에서는도 군농회의간섭속에타율로강제된농촌일신을추진하였다. 다음의기사는당시농촌진흥정책의이러한면을잘보여주고있다.* 1932 년 11 월 9 일양주군노해면에경찰서장판본 ( 坂本 ) 과강 ( 康 ) 면장일행은현장에출동하여농민들을직접지도하고진흥회를조직함과동시에실행사항중에서우선관혼상제비용을절약할것과매일양미에서 1 홉을모아저축하기로결정하여농민 44 호에서는그다음날부터진행하고있다. 이와같이농촌진흥정책은농촌이안고있는근본문제의해결을회피한채기만적인자력갱생운동에입각하여전통적가족관습을해체시키고촌락공동체를위협하였다. 이러한현장지도는일회성으로그치지않고강제적 조직적이며지속적으로진행되었다.* 특히생활개선을위한공동세탁소의설치및재봉기술의학습등은총독부정책의효과를선전하는데더욱적극적으로이용되었다.* 당시조선총독이었던우원일성 ( 宇垣一成 ) 은산미증식계획으로인한농촌사회의파탄을인지하여피폐해진조선을어느정도갱생시키지않고서는식민통치가불가능하다고판단하였다. 따라서내선융화와생활안정이라는상호보완관계를유지하면서운동을전개하고자하였다. 그리고이러한활동을위해양주군에처음으로농사훈련소를설치하였다 년 8 월도내보통학교졸업생가운데신체건강하고의지가강고한청년을선발하여영농지식과기능을교육하여농촌진흥정책의중심인물로활동시키고자하였다.* 더욱이이농사훈련소는기숙사 양잠실 교사 우사 실습용지등의여러시설을갖추었으며건설비용도 10 만원에이르렀다.* 이는농촌진흥정책을보다효율적 체계적으로실시하여소작농들의불만과농촌의근본문제를희석시키려는데그목적이있었다. 이와함께농촌진흥운동의일환으로강습회 강연회등을실시함으로써대중침투를전개하여이운동의본질을왜곡하였다 년 2 월 5 일양주군에서는자력갱생과사회교화에대한총독부촉탁강사의순회강연을실시하였다.* 이러한강연회는군민들의자발적인의사와관계없이관공서에서강제적으로청중을동원하는경우가대부분이었기때문에구호적인선전활동으로일관하였다. 농어촌지도자대회나각종회의, 강습회등은소작농민에게는아무런도움도되지못하였고심지어자신의활동영역만빼앗겨그나마가지고있던자기발전의꿈마저짓밟히는결과가되고말았다.* 갱생계획은농촌진흥운동을구체화하려는하나의수단으로입안되었다. 각농가의실상을조사하여이를기초로적절한갱생계획을수립하는것인데이계획은일반적으로농촌진흥위원회회원이위촉되어참여하였다.* 갱생계획은또한도 군도 읍면은물론경찰관헌과학교 금융조합이혼연일체가되어실시하였는데특히중견청년을장기적으로육성하여향후농촌진흥운동의선도적역할을담당케하였다.* 또한각읍면에 호를단위로하는갱생지도부락을선정하여그마을내의모든농가를대상으로기본조사를실시하였다.* 기본조사는가족상황, 겸업상황, 토지이용상황, 농업경영상황, 경제상황, 노력조사의여섯가지였으며조사내용을 농가현장조사서 라고하는소책자에기입하였다. 이것을기초로하여농가경제갱생 5 개년계획을수립하였던것이다.* 경기도에서는이와같은갱생계획이순조롭게진행되고있다는판단에서 1935 년이후 13 년간도내모든마을을대상으로실시하고자하였다. 양주군의경우 1935 년총 591 개마을가운데 32 개만이갱생지도마을로지정되었으며 13 년뒤에는전군으로확대실시한다는것이총독부의목표였다.* 그러나농촌의춘궁과차금퇴치를목적으로마련했던갱생계획은본래의목적에서벗어나농촌을감시 통제하는방편으로이용되었다. 즉, 갱생계획은실시후많은부작용을낳았는데먼저지정호수와비지정호수의표면적알력을초래하였으며농촌의전통적유대관계를붕괴시켰다 년정무총감은갱생계획실행후경지의이동, 노동능력의감소, 천재지변등영농상의다양한변화에따라당면계획을시행하고농가의실정에맞게이를신속히시행해야한다고말함으로써스스로한계를인정하였다. 즉, 농촌진흥운동은본래의목적에서벗어나오히려농촌사회를파괴하는방향으로변해가고있었다.* 농촌진흥운동은각지역의군농회 * 등을중심으로전개되었는데, 주된사업은각군에지정된특정작물의재배와판매였다 년상반기양주군의춘잠견판매는의정부 금곡 동두천 마석우리의 4 개소에서실시되었다.* 또한양주금융조합에서도공동판매와일용품, 생산용품의공동구입을장려하여관리체계를더욱강화하였다 년당시공동구입상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 양주금융조합공동구매현황 > ( 단위 : 원 ) 구매물품 비료 시멘트 농구 기타 합계 구매액 24,175 1,660 2,311 1,130 29,276 한편군농회와는별개로지방행정을좀더효율적으로수행하기위해면협의회선거를실시하였다. 양주군의경우 1935 년당시총 16 개면가운데광적면 장흥면 화도면 와부면 미금면에서면협의회선거가실시되었다.* 이는우원일성총독의표현처럼농촌의피폐상황을극복하는데있어서그원인을조선농민의 무지식 에기인한다고보고이를극복하기위해서좀더조직적인행정체계와농촌진흥운동의병행을추진하고자실시하였던것이다.* 따라서이운동의가시적효과는전국곳곳에서나타났는데시작된지채 1 년도지나지않아양주군진흥회는군내 486 개

378 마을진흥회원들의노력으로 11 만 2568 원이라는거금을저축했다.* 이와같이자급자족에의한경비의절약과저축은자력갱생계획을선전하는데매우효과적인방편이었다. 그러나위의세부항목을살펴보면주로짚신 농기구 절미 가죽등극히영세한가내수공업의형태를띠고있을뿐총독부에서실질적으로농촌경제의활성화를모색했다는의지는엿볼수없다. 이는파탄의길로접어든조선농촌의위기를호도한것에불과했다.* 앞서지적하였듯이농촌진흥운동기간양주군내의자작농은몰락하고소작농은증가하는현상이두드러지게나타났는데, 이사실만을보더라도농촌진흥운동은총독부의선전도구로기능하였을뿐임을알수있다. 한편총독부는몰락한소작농을상대로소액의자금을대부하였다. 대부조건은금융조합가입자로서이자율은월 1% 이내로매우낮았으나실제로는고금리로운영되었다.* 1935 년양주군의소액자금대부상황을표로나타내면다음과같다.* <1935 년양주군소액자금대부상황 > 실시면수조합수조합원수대부자금대부금액 11 개면 12 개 258 명 6,059 원 5,422 원 대부상황에서알수있듯이농촌구제정책은주로총독부의시혜만을강조했을뿐실질적인농민경제의향상에는큰효과가없었다. 즉, 소액자금을대부받을수있는농민이조합원으로한정되었으며, 양주군전체소작농을감안했을때그실질적효과는거의없는형편이었다. 또한 1936 년이후에는적색농조운동과같은민족운동의대응차원에서황도정신 ( 皇道精神 ) 을앙양하여황국신민의기틀을마련하고자하였다.* 특히지주와소작문제에대해서는미풍양속의개선과합리적 도덕적상호우의로해결해야한다는지극히피상적인견해로농촌현실에대처하려고하였다.* 이는국민총동원운동과그맥을같이하면서시국인식및생업보국 ( 生業報國 ) 을강조하여농촌사회의정신적공황을초래하였다.* 1936 년 8 월우원일성총독이퇴임하면서농촌진흥운동은실질적으로완료되었다. 3 년여에걸친농촌진흥운동은자력갱생이라는기치아래농촌의생활개선과식량부족타파에역점을두면서진행되었다. 그러나실질적으로는농촌생활의질적향상을이루지못하였다. 즉, 남양주의경우 1935 년대부액가운데미상환금이약 90% 에달하였다. 농민생활의궁핍상은보통학교학생들의수업료미납현상에서도드러나는데그로인해자퇴 퇴학하는경우도빈번하였다 년일제의국세조사당시조선의문맹률은약 70% 에달하는것으로집계되었다. 이때일제는 1 면 1 교설립과간이학교의증설을계획하였으나그성과는부진하였다. 이러한가운데농촌의형편은더욱어려워져급기야학교자체가폐교되기까지하였다.* 식민지교육제도자체가교육의기회를극히제한하고있었지만농촌아동의경우취학률이더욱저조했음을감안할때폐교조치는무산아동의교육기회자체를박탈하는것이었다해도과언이아니다. 따라서농촌진흥운동은농촌의생활안정과자력갱생이라는가식적구호아래에서절대빈곤에허덕이던대다수의농민들을식민지농정체제로재편하기위한것이었다. 남양주에서진행되었던농촌진흥운동역시농민에게실질적인생활안정과교육기회를보장하지못하였다.* 결국이운동은친일지주계층을제외한대다수민중에게는식민지착취와탄압을의미하였다.* 또한기타민족운동의쇠퇴과농촌경제의파탄을초래하였다.

37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3 절사회생활상 * 3. 사회사업실태 일제의식민지지배정책이대부분조선인을착취하는형태로전개되는가운데그들의기만적지배정책을위장하기위한방안으로조선인에대한사회구제사업을전개하였다. 식민지농정의재편을위해단행된토지조사사업과산미증식계획에따른농촌사회의파괴는당시총독부로서는매우민감한부분이었다. 그중실업문제는가장중대한사안이었다. 당시조선의농가는 60 억에이르는부채를안고있었으며농민들에게는원리금상환능력이거의없는형편이었다. 이에총독부는 년대조선의농민문제가빈곤문제와직결되어계급투쟁 민족운동으로까지발전할수있다는판단아래보다효과적이고실질적인사회사업의필요성을절감하게되었다.* 일제는사회사업의목적을크게두가지로인식하였다. 첫째, 인류의행복을추구하는것이며, 둘째, 평화적인사회를실현한다는것이다. 그리고타파대상으로는빈곤을들고있었다. 협의의사회사업에서극복해야할문제는빈곤을들수있으며문제해결을위한각각의사적사업이바로사회사업이라고인식하였다.* 일제는이러한인식아래지방행정을장악하고식민통치의효율성을제고시키기위하여각종토목공사를시행하였다. 경기도는사회사업의비용으로지방비가운데구호비 582 원을계상 ( 計上 ) 하여이재민구호, 고아 행려병자수용과이들의사망시매장등에관한사업을실시한이래지방비의약 1% 를사업비로충당하였다.* 한편 1916 년부터 1936 년까지경기도를 5 개관구로나누었으며, 양주군은의정부토목관구에편입되었다.* 1931 년이후총독부의방침에따라소위궁민을구제한다는명목으로 3 차에걸친토목사업이이루어졌다. 제 3 차궁민구제사업은제 2 등도로인청량리에서금곡간도로의포장공사였으며공사비는 65 만원으로책정되었다.* 특히청량리 금곡간은서울과경기도북부를잇는교통의요충지로서, 경기도에서는 1933 년 5 월당시군수였던송문화 ( 宋文華 ) 의요청을받아들여지방비 3500 원을책정하고두험교 ( 豆險橋 ) 를가설하였다.* 그러나이러한사업의실시도공사비의전액을지원받지는못하였으며동원된농민들역시직업적안정을바랄수없는 하루살이날품팔이꾼 에지나지않았다. 즉, 평상시의정부예산으로는이들거대실업자군 ( 細民 ) 을구제할수없었으며후일중일전쟁도발로인한한반도의병참기지화과정에서이들의노동력을어느정도수용할수있었다.* 즉, 총독부는사회사업이라는명목으로여러가지즉흥적인사업을전개하였으나그실적은극히저열한수준이었다. 이는당시양주군의사회사업시설이농번기에탁아소를운영하는정도였다는점에서도능히짐작할수있다.* 빈곤의타파를사회사업의가장큰목표로인식하였던일제는당시인구의약 30% 가절대빈곤에처한사실을인정하면서도 * 대책마련에서는이미세금납부능력을상실한궁민들에게소득세를감면해준다는지극히비상식적인정책으로일관하였다. 특히그대책들은무산자의사상적전환이나폭동의징후를억제하는형태로나타났다. 한편일제의식민지농정에서신음하던조선인들에게, 특히현금확보가어려운농민들에게의료사업의확대 실시는매우중대한사안이었다. 일제는 1932 년 8 월 20 일이후 3 개년간 7 만 5000 원을하사하여구료 ( 救療 ) 자금으로충당하고이를실시하려고하였다. 이에경기도에서도구료계획을세워은사금 2000 원, 국고보조금 2160 원으로구료사업을실시하고자하였다.* 중점사업은도립병원경영, 종두비의부담, 도축림사수의배치, 전염병예방비에관한보조등이었다. 그러나도립병원은 1930 년대에 3 개소밖에없었으며, 이러한병원체계로는자연재해와전염병발생시그대처능력을기대하기어렵다 년 4 월양주군주내면에천연두가발생하여 3 명이사망하였고이후장티푸스등의전염병이잇달아발생하였다. 이때총독부위생과는전염병발생의근본적인예방과방역에적극대처하지못하였으며환자역시일반개인의원에서치료를받게하여사망자가속출하는등전염병에대한군민의불안감만가중되었다.* 그후 1933 년 3 월에는회천면봉양리에서천연두환자가발생하였는데이때에는매우적극적으로예방하였다.* 이는당시천연두가전국적으로창궐하여당국에서도적극대처할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이와같이일제의위생사업은진료권을교부하여현금을확보하거나구급상자를배포하는방식의극히일회적인처방에치중하였다.* 이러한의료구호형태는일제의목적대로가시적효과는얻을수있으나, 실제로진료권을교부받아직접진료를받은인구는경기도에서 년동안평균 7000 명정도에지나지않았다.* 한편일제는전염병예방을위하여양주군에모범정호 ( 井戶 ) 25 개를지정하고보조금액 2090 원을지원하여식수를관리하였다.* 또한일반인들의위생관을일신시킨다는목적으로 1928 년 ( 화도면 ) 과 1931 년 ( 시둔면 회천면 이담면 ) 에위생전람회를개최하여 * 전시효과를거두었다. 그러나일제의의료 위생사업은총독부의독자적경비로운영된것이아니라일반인들의의연금과민족의식에호소해서충당하는경우가대부분이었다. 따라서일제의조선인에대한의료사업은 1930 년이후국고보조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아실제로유명무실하게되었고농촌의참상은한층더심화되었다.

38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운동 *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운동 * 1) 3 1 운동의전개와경기지역확산과정 3 1 운동은조선이강화도조약으로세계자본주의질서에강제편입된이후위정척사운동에서갑오농민전쟁과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으로이어져온항일투쟁의연장선상에서일어난것이었으며, 자주독립국가에대한민족의강한열망이집약적으로표출된것이었다. 또한이운동은 1920 년대이후새로운민족해방운동의지평을연획기적인사건이었다.* 3 1 운동은 1919 년 3 월 1 일서울에서의시위를계기로 3 월중순이후전국으로급속히확대되었다. 3 월초순까지는북부지방, 부 ( 府 ) 군청소재지, 교통이편리한지역등에서주로시위가발생하였다. 그러나중순이후에는중남부지방, 면단위이하지역, 심지어산간벽촌에이르기까지독립만세의함성이메아리쳤다. 시위공간의확산과더불어참가계층의폭도확대되었다. 학생 교사 종교지도자 노동자 소부르주아 하급관리 양반유생등민족구성원대다수가운동에참여하였다.* 이러한운동의확산과계층의저변화는일제의식민지지배체제확립이후정치 경제 사회적인수탈과그에따른생활상태의악화에대한생존권확립차원에서비롯된것이라할수있다. 3 1 운동은크게네시기로나누어볼수있다. 첫째시기는 2 월말까지로민족대표들이운동을준비한단계이다. 둘째시기는 3 월초순까지의운동초기단계로, 서울 평양 개성등주요도시를중심으로만세시위가전개된시기이다. 이때는학생과청년 지식인들이시위를주도하였고도시의노동자와상인층이참여하였다. 셋째시기는 3 월중순 4 월초순에이르는운동의최고조기로, 전국각농촌으로운동이확산되고도시에서는운동이다시일어나는단계이다. 지식인층이운동을주도하였고농민들의참여가확대됨과동시에무장시위가펼쳐지는등시위가격렬하게전개된시기이다. 마지막시기는 4 월중순이후, 일제의가혹한탄압으로운동이점차퇴조한단계이다. 경기지역의 3 1 운동도 3 월초순의초기단계를거쳐, 3 월하순부터 4 월초순에이르는시기에집중적으로격렬하게전개되다가, 4 월중순이후소멸과정을거쳤다는점에서전국의만세운동전개과정과큰차이가없다. 그러나경기도는다른지역보다도치열하게만세운동이전개되었다. 경기도 21 개부 군모두에서운동이일어나지않은곳이없을정도로확산되었다. 경기지역은지리적으로서울을둘러싸고있는전국의중심부이며요충지이다. 한강의수운을통해강원 충북지방과연결되고, 남북으로철도와도로가관통하여서울에서일어나는일들이쉽게전해지는길목에있었다. 그리하여경기도는역사의굽이굽이마다그중심무대가되어왔다. 따라서일제의강점과탄압에맞서저항하는과정에서끊임없이치열한투쟁을전개했던것이다. 이러한지리적배경과운동경험을기반으로전개된경기지역 3 1 운동의절정기는 3 월하순에서 4 월초순까지의기간이었다. 경기도전체시위횟수 283 회의 90% 에달하는 254 회의시위가이시기에집중되었다.* 이통계수치가총독부관헌에서확인한것만을종합했음을감안하면실제로는이것보다훨씬많았을것이다. 이러한수치만을가지고볼때도경기도의시위횟수는전국에서가장많은숫자였고, 참여인원도가장많아연 17 만명에달하였다. 특히이기간에시흥군에서는 23 회, 고양군에서는 33 회, 수원군에서는 25 회, 양주군에서 18 회의시위가펼쳐졌으며, 경기도내에서는하루평균 12 개지역에서시위가일어났다. 경기지역의 3 1 운동은처음부터민족대표와의연계가미약한가운데시작되었다. 기독교 천도교관련민족대표의출신지역이대부분북부지역이었던것과도관련하여, 경기지방의종교조직기반은상대적으로약했던것으로보인다. 경기도전체의 3 1 운동을선도해가는가장핵심적인역할을한것은향촌사회의지식인 청년 학생들이었다. 특히이들은운동의초기단계에서울등도시지역에서유포된선언서 각종유인물과도시의운동경험을각지역에전파하거나, 태극기등을제작 배포하는과정에서각종비밀결사 결사대를조직하여시위를이끌어가는등선도적인역할과활동을벌여나갔다.* 운동의초기단계에서지식인 청년 학생의선도적인역할은 3 월초순의경기지역피기소자가운데그들이압도적다수를차지하고있었던것에서확인된다. 그러나이것은지역적으로대도시와중소도시에서의양상이었으며운동이읍 면 리등으로확산되는과정에서는농민으로대표되는민중의자발적인참여로확산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한편 3 월하순부터 4 월초순에는시위운동의양상이치열하여일본헌병 경찰과충돌하는폭력투쟁방식으로발전하였다. 그내용은주로시위대가일제식민통치말단기구를공격, 파괴하는형태로전개되었다. 경기도에서도시위대가경찰관서 17 개소, 주재소 12 개소, 군청 면사무소 35 개소, 우편소 12 개소를공격하여파괴시켰다. 그리고일본인및친일파가옥 14 호도공격하였다. 본문에서살펴보겠지만남양주지역에서도헌병주재소를습격했던화도면마석우리에서의시위가이러한폭력투쟁의형태를띠었다. 이처럼시위가폭력적인방식으로발전하자일제는시위군중을향해발포하거나시위가담자를대량으로체포 고문하는등탄압이가혹해졌다. 그러나일제는운동이확산되는초기과정에서부터시위진압을위해당시조선의치안을담당하고있던헌병들을투입하였다. 시위형태가적극적인양상으로전개되는 3 월하순 4 월초순무렵부터는더욱강압적인방식으로시위군중을진압하였다. 경기도에서일본군경이시위군중에발포한횟수는 58 회이상이었으며, 운동이가장집중적으로전개되었던 3 월하순 4 월초에 104 명의조선인이피살되었고, 190 명이부상을입었다. 체포된인원은헤아릴수없이많았다. 3 1 운동이전국적으로확산되어전개되는과정에서자행된제암리학살사건도이시기의일이다. 4 월 15 일일본군 20 사단 70 연대유전 ( 有田 ) 중위가이끄는군인들이일본순사가피살된데대한보복조치로, 제암리주민을교회당에모이게하고교회를불지르는한편교회밖으로도망나온사람들에게발포하여 22 명을사살하였다. 이들중천도교신자는 15 명이고, 감리교신자및기타가 7 명이었다. 그리고교회밖에있던사람 2 명도참살하여모두 24 명을학살하였다. 이처럼독립만세시위가폭력투쟁으로발전해간것은 3 월하순이전의운동이서울등도시를중심으로한청년 학생의선도투쟁으로시작 전개되었던것에비해서, 3 월하순이후의운동은마을단위의농촌에서농민들의참여가확산되는가운데대규모시위 폭력투쟁으로발전한결과였다.* 이밖에도경기도는경성부를둘러싸고있는외곽지대로서상공업이집중발달한곳이었다. 때문에그주민구성은농민외에도중소상인 자영업자 노동자등으로다양하였으며, 이들도다수가시위에참여하였다. 그러나일제의대대적인탄압으로 3 월하순 4 월초순에집중적으로일어났던경기도의 3 1 운동은 4 월 15 일수원에서의시위를끝으로종식되었다. 그렇다면이지역에서일어났던 3 1 운동의구체적인전개과정을살펴보도록하겠다.*

38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운동 * 2) 남양주지역의 3 1 운동전개과정 식민지당시남양주지역이속했던양주군의 3 1 운동은 3 월 13 일과 14 일이틀에걸친미금면평내리를시작으로, 3 월 31 일진접면부평리에서의시위에이르기까지총 22 회에달하는독립만세시위가벌어졌다. 양주군전체 16 개면가운데회천면과은현면을제외한 14 개면의주민들이참여한그야말로거군적인민족운동으로전개되었다. 3 1 운동재현장면월산교회 3 1 운동기념비 미금면평내리에서점화된독립만세시위의불길은 1000 여명이참가한 3 월 15 일와부면송촌리 덕소리의시위를거쳐, 3 월 18 일 1000 여명이참가하고 10 여명의사상자를내는등최초의유혈사태를빚은화도면마석우리에서의만세시위를정점으로하여차츰소강상태에접어들었다. 3 월 26 일이담면동두천리 ( 현동두천시 ) 에서의대규모시위를전개한이후 3 월 31 일까지거의모든면에서 30 여명에서 800 여명규모로연일계속된항일투쟁을전개하였다. (1) 미금면 ( 渼金面 ) 양주군최초의독립만세시위였던미금면평내리 ( 현평내동 ) 의독립만세시위 * 를주도한인물은평내리의구장 ( 區長 ) 인이승익 ( 李昇翼 ) 이었다. 45 세의중년농민으로서동리의구장을맡고있었던이승익은동리주민들의여론과민심을잘파악하고있었을뿐만아니라동리주민들의신망을널리받고있어평내리의독립만세시위를주도하기에적합한인물이었다. 이승익은이미 3 월 1 일서울에서의독립선언과만세시위에관한소식을듣고있었다. 3 1 운동의확산과정을살펴보면, 3 월 1 일당일에는서울을비롯한전국주요도시에서일제히봉기하였으며그후에는철도연선을따라대도시에서중소도시로, 그리고읍 면 리와산간벽지로파급된다. 양주군최초의독립만세시위였던미금면평내리의시위가일어나던 일무렵에는일반농민들에게까지서울과전국주요도시에서전개되고있었던 3 1 운동의내용이널리알려지게되었다. 이러한사실은평내리독립만세시위관련자로체포되어징역 6 월을선고받았던농민우보현 ( 禹輔鉉 ) 의검사신문조서 * 에서도확인된다. 이승익은일본총독장곡천호도 ( 長谷川好導 ) 가서울의독립만세시위가전국으로확산되는것을저지하기위해말단행정기관장들에게배포한이른바고유문 ( 告諭文 ) 을주민들에게낭독해준다는명분으로 3 월 13 일주민들을마을주막앞으로소집하였다. 총독의고유문은 국민들은쓸데없는유언비어에열중하여되지도않는일에광분하지말라. 제국 ( 帝國 : 일본 ) 은전승국이므로일한합병 ( 日韓合倂 ) 에관하여는조금도변경의여지가없다. 라는내용이었다. 여기에모인 100 여명의주민들은야유를퍼부었을뿐만아니라, 만세를부릅시다. 라고외치고는곧바로평내리에서독립만세시위를전개하였다.* 평내리주민 150 여명은다음날인 14 일에다시집결하여평내리에서만세시위를벌인후금곡리에있는면사무소를향하여행진하였다. 그러나금곡으로가는두번째고개를 200m 내려갔을때, 일본헌병들로보이는일본인비전림길 ( 飛田林吉 ) 등의저지를받았다. 해산을명령하는일본인들에맞서평내리주민이승익 이석준 ( 李錫俊 ) 등은 2000 만동포가조선의독립을기뻐해만세를부르는것이당연하지않느냐. 고말하며시위를계속하려하였다. 그러자이들은이승익 이석준을비롯한우보현 김영하 ( 金永夏 ) 정기섭 ( 丁基燮 ) 이보영 ( 李輔永 ) 등 6 명의주민을주동자로체포하였다. 이때체포되었던 6 명은 5 월 8 일경성지방법원에서이승익징역 10 월, 이석준 우보현 김영하 정기섭 이보영등은징역 6 월을선고받아복역하였다. 이로써양주군최초의독립만세시위이자질서있고평화적인방식으로이루어졌던미금면평내리주민들의시위는막을내렸다. (2) 와부면 ( 瓦阜面 ) 와부면에서의독립만세시위는송촌리 ( 현조안면송촌리 ) 의이정성 ( 李正成 ) 김춘경 ( 金春經 ) 김현모 ( 金顯模 ) 김정하 ( 金正夏 ) 등이주도하였다. 이들은 3 월 14 일모여다음날시위군중을이끌고와부면일대를순회하는대규모독립만세시위를감행하기로계획하였다. 다음날인 15 일이른아침송촌리에서마을주민및부근주민 100 여명이모여함께만세시위에들어갔다. 이들은같은송촌리의김덕여 ( 金德汝 ) 정일성 ( 鄭一成 ) 이갑동 ( 李甲同 ) 오성준 ( 吳成俊 ) 김덕오 ( 金德五 ) 이정운 ( 李正雲 ) 김윤경 ( 金允京 ) 이건흥 ( 李建興 ) 등과함께태극기를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 를외치면서면사무소가있는덕소리로행진하였다. 시위행렬은조안리 ( 현조안면조안리 ) 와그부근동리들을지나면서전태현 ( 全泰鉉 ) 김현유 ( 金鉉有 ) 박경식 ( 朴景植 ) 문광채 ( 文光彩 ) 이내한 ( 李來漢 ) 박수만 ( 朴壽萬 ) 등을비롯한주민들이가담함으로써그규모가 500 여명으로커졌다. 마침내시위농민들은덕소리까지진출하여출동한일본헌병들과충돌하였고, 주동인물 3 명이체포되면서분위기가더욱격화되었다. 마을주민 3 명이체포되자, 와부면주민들은이들의석방을요구하며체포된주민들이수감되어있는헌병주재소를습격하였다. 돌을던지고곤봉을휘두르며맞서는주민들의완강한저항에직면한일본헌병들은마침내공포를발사하는한편시위인원가운데 37 명을체포하고시위대를해산시켰다.* 이때일본측의기록을보면덕소리시위에참가하여체포된대부분의농민을야소교도 ( 耶蘇敎徒 : 기독교도 ) 라고하였다.* 그러나시위당일 40 명을체포하고시위대를해산하는것만으로일제의대응이끝난것이아니었다. 일본헌병대는 17 일에다시마을을수색하여송촌리주민 21 명을체포하였다.* 3 월 15 일과 17 일에체포되었던 61 명가운데 17 명이기소되어 4 월 25 일경성지방법원에서재판을받았다. 양주지역에서개별사건으로는최대의기소인원이었다. 당시시위주도자였던이정성 김춘경 김현모등 3 명은징역 1 년 6 월, 김덕여 정일성 이갑동 오성준 김덕오 이정운 김윤경 이건흥 전태현 김현유 박경식 문광채 이내한 박수만등 14 명은징역 8 월을선고받아복역하였다.* 와부면덕소리에서의독립만세시위는농민들이최초로일본헌병과충돌한사건이었다. 또한일본헌병은시위참가농민가운데 61 명을대거체포하였을뿐만아니라비록공포라하더라도시위대를향하여발포까지하였다. 이같은사실은와부면덕소리에서의시위농민과일본헌병과의충돌에서비록희생자가없었다고는하나, 당시일제측과와부면시위농민들사이의분위기가어떠했는지충분히말해주고있다. 이렇듯독립만세시위가양주전역으로확산되는과정에서심화하고있던농민들과일제측의대립양상은며칠후화도면마석우리시위에서일본경찰의발포로시위농민 5 명이사망하는유혈사태로나타나게된다. (3) 화도면 ( 和道面 ) 3 1 운동이전국으로확산되는과정에서나타난폭력투쟁의양상이남양주지역에서는화도면마석우리시위에서나타났다. 3 월 18 일밤 10 시

382 이달용 ( 李達鎔 ) 을중심으로화도면월산리의김원석 ( 金元石 ) 이승면 ( 李承冕 ) 남궁우룡 ( 南宮又龍 ) 윤준 ( 尹俊 ) 이윤원 ( 李允遠 ) 구영식 ( 具永植 ) 김필규 ( 金弼奎 ) 권은 ( 權殷 ) 강선원 ( 姜善遠 ) 등은답내리와월산리주민 200 여명과함께야간을이용하여독립만세시위를감행하였으나, 주동자 3 명이일본헌병에체포되었다. 그러자시위대열은한시간만에 1000 여명으로증가하였고마침내마석우리헌병주재소앞으로몰려가검거된인사들의석방을요구하였다. 시위가담자가급격히증가하고시위가격화되는기미가보이자일본헌병들은시위군중을향하여무자비하게발포하였다. 일본헌병의발포로앞에서시위를주도하던이달용 손복산 ( 孫卜山 ) 신영희 ( 申榮熙 ) 유상규 ( 兪相奎 ) 이교직 ( 李敎稙 ) 등 5 명이사망하였고 * 이재혁 ( 李載赫 ) 윤균 ( 尹均 ) 강덕여 ( 姜德汝 ) 윤정석 ( 尹丁石 ) 원대현 ( 元大鉉 ) 등 7 명이중상을입었다. 일본헌병들은다음날새벽시위에관련된김필규 강선원 윤성준 ( 尹性俊 ) 남궁우룡 김원석등 5 명을체포하여고문을가하는등악행을저지르고재판에회부하여실형을선고하였다. 마석우리에서의독립만세시위는양주지역의 3 1 운동과정에서발생한첫번째의유혈사태로, 5 명이사망하고 7 명이중상을입었다.* (4) 진접면 ( 榛接面 ) 3 월 29 일금곡리에서 400 여명의주민들이시위를벌이자일본헌병들이시위군중에게발포함으로써주민 1 명이사망하고 3 명이부상을입었으며 1 명이체포되었다.* 서울에서손병희등민족대표들의 3 1 독립선언소식을들은봉선사승려이순재 ( 李淳載 ) 와김성암 ( 金星岩 ) 은 3 월 29 일서울창성동에서약종상 ( 藥種商 ) 을하는김석로 ( 金錫魯 ) 와함께부평리를비롯한주변마을주민들을모아독립만세시위를감행하기로하였다. 서울에서의 3 1 운동을비롯한제반정세에대한소식은약종상을하는김석로가봉선사승려들에게제공한듯하다. 이들은우선봉선사가있는부평리부근의주민을모아시위운동을벌이기위하여독립만세시위의촉구와방침을제시한문건을제작 배포하기로했다. 문안은이순재가작성하고문서제작은김성암과김석로가맡았다. 문건의명의는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 로하고, 내용은대체로 지금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 개국이독립국이될것을결정하고있는모양이니조선도이기회에적극적으로독립운동을벌이면독립의목적을달성할수있다. 는희망적인정세소개와함께구체적으로어떻게, 어느지역에서독립만세시위를벌일것인지를제안하는것이었다. 이들 3 명은시위촉구문건을 200 여장정도만들어동료승려인강완수 ( 姜完洙 ) 등의도움을얻어그날밤 9 시무렵부터다음날 5 시무렵까지부평리와부근의진벌리 중촌리등 4 개마을의각민가에배포하였다. 봉선사승려들이배포한유인물이진접면주민들에게구체적으로어떠한영향을끼쳤는지는정확히알수가없다. 그러나다음에언급할 3 월 31 일부평리의독립만세시위는봉선사승려들의시위촉구에자극받아일어났을가능성이높은것으로보인다. 이사건으로기소된이순재 김석로 김성암 강완수는경성지방법원에서이순재 김석로가징역 1 년 6 월, 김성암이징역 1 년 2 월, 강완수가징역 1 년을선고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이순재는 1 년 6 월, 김석로는 1 년, 김성암 강완수는각각징역 8 월을다시선고받아복역하였다. 이들중이후지속적인독립운동으로주목되는사람이김성암 * 인데, 그는출옥후 1925 년북경으로망명해의열단과조선민족전선연맹활동에이어상해임시정부내무차관과국무위원으로까지활동하였다.* 한편부평리의이재일 ( 李載日 ) 은 3 월 29 일밤자신의집으로전달된 당신이거주하는마을의주민들을모아그마을광릉천 ( 光陵川 ) 강가에모여서독립만세를부르라. 는내용의통문을받았다. 이통문은부근의봉선사승려인이순재 김성암 강완수, 그리고김석로가제작 배포한것으로보인다. 이재일은그뜻에찬동하여즉시마을사람들과통문을돌려읽고대책을논의한후, 3 월 31 일광릉천강가에서독립만세시위를벌이기로결정하였다. 3 월 31 일이재일 김순만 ( 金順萬 ) 등을주모자로최대봉 ( 崔大奉 ) 박석몽 ( 朴石夢 ) 최대복 ( 崔大福 ) 유희상 ( 柳熙庠 ) 이흥록 ( 李興錄 ) 양삼돌 ( 梁三乭 ) 등마을사람 100 여명이광릉천에집결하여조선독립만세를외쳤다. 일제는헌병들을출동시켜시위를해산시키는한편, 시위주동자 8 명을체포 기소하였다.* 이사건으로기소되어재판을받은이재일은징역 1 년, 양삼돌은징역 6 월, 이흥록은징역 3 월, 최대봉 박석몽 최대복 유희상은각각태형 90 대를선고받았다.* (5) 별내면 ( 別內面 ) 장흥면 ( 長興面 ) 에서격렬한만세시위가전개되고있던 3 월 29 일, 별내면퇴계원리 ( 현퇴계원면퇴계원리 ) 에서도 200 여명의주민들이시위를벌여 5 명이체포되었다.* 한편별내면고산리에거주하던 19 세의유생인유해정은일본천황에게독립만세시위의정당성을알리는편지를써서발송하였다. 유해정은 3 월하순 임금님을속이고한국을강탈한나머지태황제 ( 고종 ) 폐하를독살까지하였으니, 참으로이가갈림을참을수없다. 만국이구한국의독립을승인하였음에도불구하고이를돌려주기를꺼린다면분개한백성이일제히궐기하여불의의나라에보복할것이다. 나도한자루의칼을품었으니, 한번죽음으로써원한을씻을날이있을것이다. 미국의파리강화회의위원은조선을독립시키기로결정하였다. 연합국이손을잡고그죄를물을때에는호랑이앞의토끼신세가될것이다. 라는내용의글을동경부지사에게전송하였다. 이사건으로유해정은일본천황에대한불경행위로징역 3 년을선고받아복역하였다.* (6) 진건면 ( 眞乾面 ) 진건면오남리 ( 현오남면오남리 ) 에서는 3 월 29 일나상규 ( 羅相奎 ) 손삼남 ( 孫三男 ) 엄본성 ( 嚴本成 ) 이종갑 ( 李鍾甲 ) 여원필 ( 呂元弼 ) 권노적 ( 權魯赤 ) 한백석 ( 韓白石 ) 등을중심으로수십명의주민이집결하여독립만세시위를벌였다.*

38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운동 * 3) 독립만세시위의전개양상과특징 서울과인접하고있는이지역은언제나서울에서일어나는일들에직 간접인영향을받고있었다. 3 1 운동에서도예외는아니었다. 이지역의 3 1 운동은전국적추세에발맞추어 3 월중순에서하순사이에집중적으로발생하였다. 양주지역은 3 월 13 일과 14 일이틀에걸친미금면평내리에서의봉기를시작으로, 3 월 31 일의진접면부평리의시위에이르기까지총 22 회에달하는독립만세시위가일어났으며, 양주군전체 16 개면가운데회천면과은현면을제외한 14 개면의주민들이참여한그야말로거군적인민족운동이었다. 이지역의독립만세시위에서주목되는시위전개의특징을든다면, 최초의미금면평내리에서처럼같은인물이주도하여이틀연속으로시위가진행된경우는있었지만, 같은지역에서주동인물을서로다르게해서 2 회이상발생한경우가없다는사실이다. 이것은농촌지역이라는특성상시위운동을지도해나가는인적역량을지속적으로공급하기가어려웠다는점을시사하고있다. 또한아직조직적인운동단체가없었던사정을반영한다. 다른측면에서고려해보면 3 1 독립만세시위이후후속독립운동을방지하기위한일제와친일분자들의역공세와보복적인탄압이가혹했음을뜻한다고볼수있을것이다.* 이지역에서시위가전개된형태를정리하면, 대략세가지로나눌수있다. 우선독립만세시위가한마을에국한되고인근마을로확산되지않은경우이다. 진접면금곡리 (3. 29.) 부평리 (3. 31.), 별내면퇴계원리 (3. 29.), 진건면오남리 (3. 29.) 등지의독립만세시위가여기에해당하는데시위규모도대부분수십명에서 100 여명이고규모가클경우 400 여명이었다. 다음은처음에마을단위로출발하였으나점차인근마을주민들과연합하여면사무소가있는곳으로진출하여일제의말단행정기관인면사무소주변에서적극적인만세시위를벌인경우이다. < 남양주 3 1 운동현황 > 일시장소참가인원운동양상피해상황일본의대응참고사항 3 월 13 일 미금면평내리 3월 14일 만세시위 만세시위면사무소행 3 월 15 일와부면송촌 덕소리 500 만세시위 3 월 18 일밤화도면마석우리 1000 야간만세시위헌병주재소행 3 월 24 일진접면금곡리 13 만세시위 3 월 29 일진접면금곡리 400 만세시위 기소 6 피체 61 기소 17 사망 5 부상 7 피체 8 사망 1 부상 3 피체 1 헌병출동 헌병출동발포 헌병출동발포 헌병출동발포 3 월 29 일별내면퇴계원리 200 만세시위피체 5 헌병출동 3 월 29 일진건면오남리수십명만세시위 3 월 일밤진접면진벌 중촌리 시위선동유인물 200 여장배포 이장주도 기독교도다수 기소 3 봉선사승려 3월 31일진접면부평리 100 만세시위기소 8 출전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 1,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 3 1운동사 ( 상 ) -, 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등의관련기록참조. <3 1 운동관련수형자명단 *> 성명 연령 직업 거주지 형량 이정성 41 농업 와부면송촌리 1년 6월 김춘경 26 1년 6월 김현모 41 1년 6월 김덕여 45 8월 정일성 18 8월 이갑동 25 8월 오성준 35 8월 김덕오 38 8월 이정운 36 8월 김윤경 52 8월

384 이건흥 34 8 월 전태현 32 8 월 김현유 39 8 월 박경식 38 8 월 문광채 59 8 월 이내한 37 8 월 박수만 23 8 월 이재일 44 진접면부평리 1 년 양삼돌 23 6 월 최대봉 22 태형 90 대 박석몽 57 태형 90 대 최대복 28 태형 90 대 유희상 39 태형 90 대 이흥록 69 3 월 이순재 29 승려 1 년 6 월 김석로 30 약종상경성부창성동 년 김성암 22 승려진접면부평리 8 월 강완수 24 승려 8 월 이승익 45 농업미금면평내리 10 월 우보현 58 6 월 이보영 30 6 월 정기섭 34 6 월 김영하 36 6 월 이석준 50 6 월 출전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쪽참조. 미금면평내리 ( ), 와부면송촌리 덕소리 (3. 15.) 의독립만세시위가대표적인경우인데, 시위가소규모에서대규모로확대되고또이틀에걸쳐시위를전개하였다. 마지막은시위의양상이처음에는만세시위의차원에서시작되었지만독립투쟁이가열될수록공격적인양상으로발전한경우이다. 대체로처음에는단순한형태인만세시위를전개하다가점차면사무소나헌병주재소를공격하면서일본헌병 경찰과직접충돌하는양상으로변해갔다. 이러한적극적인폭력투쟁의양상을띠게되는본질적인계기는 3 1 운동이전일제가무단통치를해온과정에서내적으로반일 반외세감정이고조되었던것을반영한다. 또한직접적으로독립만세시위에참여했던민중들이운동의확산과정속에서의식을발전시킨결과였다. 검거된주민의석방을요구하며과감하게헌병주재소를공격대상으로삼아격렬한시위를전개했던화도면마석우리 (3. 18.) 의시위가이유형에속한다. 지금까지살펴본이지역 3 1 운동의전개과정에서나타나는이러한양상은농촌지역으로 3 1 운동이확산되는과정에서나타나는양상과유사한모습이다. 이지역의독립만세시위를주도한지도자들이나시위에참가한주민들은농업지역이라는지역특성에서농민이절대다수를점하고있었다. 비록제한적이나마당시체포 기소되어재판을받았던기록에근거해작성한다음표에서보는바와같이시위주동자들은 90% 가까이농민들이었다. 이농민들을연령별로보면 30 대가가장많고그다음으로 20 대, 40 대, 50 대, 10 대, 60 대가그뒤를잇고있는데, 와부면송촌리의이정성 (41 세 ), 진접면부평리의이재일 (44 세 ), 미금면평내리의이승익 (45 세 ) 등의예와같이 40 대초 중반의농민들이지도자로활약하고있으며 20 대와 30 대가시위대의중심을이루고있었다고파악할수있다. 여기에서또하나주목할것은이들가운데는미금면평내리의이승익과같이마을의구장 ( 이장 ) 나아가면서기등이초기의독립만세시위에서주동자로활약하였다는사실이다.* 여기서일제가 1917 년의면제 ( 面制 ) 확립이후에도이장까지는자신들의통치체제내에포섭하지못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면제가각종행정규제와세금부과, 주민통제등지방의자치적전통을파괴함으로써주민들의불평의대상이었고, 박봉이나 ( 면서기의경우 ) 무보수로 ( 이장의경우 ) 말단행정기관장인면장의보조요원으로활용되었던면서기와이장들의반일감정이반영된것으로볼수있을것이다. 아울러이들은지역에서농민들과일상생활을함께하면서식민지아래농민들이겪고있던어려움을함께경험하고있던농촌지식인계층으로볼수있다. 따라서이러한구장들의주도로독립만세시위가전개되었다는사실은구장들이주민들의폭넓은신뢰를받고있었음을말해준다고하겠다. 반면에양주군에서일어난대부분의시위에서면사무소는주요한집결지및공격대상이되고있다. 조선총독부는 1917 년면제를법제화함으로써식민지행정의말단기구로서면제를확립하였다. 이에기반하고있던면장들은향촌사회의말단실무를관장하며마을의여론을조절하는기능을하였던구장들과는달리일제의말단행정기관장으로서 3 1 운동과정에서일본인들과합세하여적극적인친일활동을전개하는경우가많았다. 이글에서는언급하지않았지만 3 1 운동당시양주군광적면의면장이하용 ( 李河鎔 ) 의경우가대표적이다.* 그러나향촌사회는여전히전통적인면리제 ( 面里制 ) 위에서리를중심으로운영되었다. 특히이장은일정한지식과소양을갖추고서농민들을대변하고있었다. 이들중상당수는운동에적극참여하여마을주민을동원하고, 사전연락을하는등중요한역할을하였다. 대표적인인물로는미금면평내리의이승익을들수있다.

385 <3 1 운동관련수형자연령분포 > ( 단위 : 명 ) 구분 / 연령 세 세 세 세 세 세계 농민 유생 1 1 상인 1 1 승려 3 3 계 출전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쪽참조. 남양주지역의 3 1 운동전개양상을살펴볼때, 다른지역의운동방식과마찬가지로만세를고창하고시위를하는일반적인방식과주민들의시위를선동하는유인물을배포하는등의형태로독립만세시위를전개하였다. 이러한평화적시위에일제는헌병병력을출동시켜구타 발포 체포등의무력적방법을동원하여진압하였다. 우리민족의독립만세시위에대한일제의이러한진압양상은시위가일어나던초기부터그강도를더해가며시종일관하였다. 제한된자료에의거하더라도양주군에서는 10 명의군민이학살되었으며, 10 여명의부상자가생겼다. 또한최소한 198 명의시위주도인물들이체포되었으며그중 47 명이기소되어실형을받았다. 이들체포 기소된군민들이체포, 감금, 조사, 재판, 수형과정에서겪은온갖형태의악형으로인한고통은이루말할수없었다. 그러나전민족적인 3 1 운동은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에커다란타격을주었고일제는 1910 년대헌병경찰에의한무단통치를계속유지할수없는상황에이르게되었다. 우리민족의수그러들줄모르는독립의의지를다시확인하고, 국제적으로는제암리만행이알려져국제외교상비난의여론이거세지자일제는좀더기만적인술책으로조선에대한정치적지배와경제적수탈을강화시킬필요를느끼게되었다. 그리하여 3 1 운동이후이른바문화정책으로한국인을기만, 유혹하여식민통치의목적을달성하고자하였다. 또한조직적이지못하고산발적으로진행되다끝난 3 1 운동에대한평가와반성으로중국상해에대한민국임시정부가수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주권국민의대표기관으로서, 또대내적으로는독립운동의통할기구로서의구실을담당하게되었다. 이외에도 3 1 운동은민족의식과민족정신에새로운자각과힘을주어교육의진흥, 신문예운동, 산업운동등에도영향을미쳐독립의기초를다지는데기여하였다.

38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년대이후의민족운동 * 우리나라가일제의식민지가된이후우리민족앞에는두가지과제가놓여있었다. 하나는일제로부터독립하여민족해방을이루는것이고, 다른하나는새로운근대민족국가를수립하는것이었다. 자발적인근대화과정을거치지못하고식민지로전락한우리나라로서는이두가지과제를동시에해결해야했다. 따라서 1920 년대이후민족 사회운동역시반일반제를통한민족해방과궁극적인민족국가수립을지향하게되었다. 특히 1920 년대이후우리민족 사회운동은이전시기와달리민중이주체세력으로전면에나서게되었다는점에서주목된다. 3 1 운동은민중스스로가자신의힘을깨우치는계기가되었다. 또이념적인측면에서사회주의의급격한확산은민족 사회운동의방향을크게좌우하였고조직적인면에서도힘을싣게되었다 년대운동세력의성장을바탕으로우리민족은 1930 년대를거쳐해방을맞이하기까지전국적으로끊임없는민족해방투쟁을전개하였다. 이글에서는광범위하게는양주지역까지포함하여남양주지역의일제시기민족 사회운동의전개, 발전과정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우선 1920 년대전국적으로활발했던청년운동의양상이양주지역에서는어떠한형태로나타났는지를보았다. 또 1930 년대에는봉안이상촌운동을통해민족주의운동의한양식을고찰할수있었고, 1940 년대에는여운형의조선건국동맹과양주지역의관련성을살펴보았다.

38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년대이후의민족운동 * 1) 1920 년대청년운동과양주금융조합파업사건 (1) 청년운동과양주청년회 1920 년대이후우리민족 사회운동의양상은크게달라졌다. 특히 3 1 운동으로표출된전민족의독립에대한의지와대중적힘은일제의폭압적인무단통치를이른바문화통치로바꾸었다. 문화의창달과민력의충실 을시정방침으로하는문화통치는기만적이고개량적인성격을띠고있었지만, 한편으로는우리민족으로하여금새로운민족운동의장으로들어서게하였다. 이에따라국내는물론이고국외의민족운동양상은이전과상당히다르게성장, 분화되었다. 일제에의해제한적인범위에서나마허용된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자유는 1920 년대비밀리에진행되던결사운동을공개적인활동으로이끌어냈다. 청년운동을중심으로하는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등대중운동의성장은 1920 년대초민족운동에한획을그었다. 특히청년운동의조직적인진출은가히폭발적인양상이었다고해도과언이아니었다 년대초반에집중적으로조직된청년단체는 1920 년 251 개단체에서 1922 년 488 개단체에이르러, 당시유행하던 우후죽순 ( 雨後竹筍 ) 이라는표현이실감날정도였다. 초기청년단체들은일반청년단체와종교청년단체, 여성청년단체, 관제청년단체로나눌수있다. 여기서일제의개량화정책에따라조직된관제청년단체를제외한대부분의청년단체는민족주의와계몽주의를이념으로하여활동하고있었다. 특히초기청년단체의운동론은문화운동론이었다. 그내용은자본주의적인진화론적사고를바탕으로한지덕체삼육 ( 三育 ) 의발달, 교육의보급, 산업의발달등을핵심으로하고있었다. 그외국경지대에가까이있던청년단체들은국외의무장투쟁세력들과연계하여독립운동자금을모금하는데주력하기도했다. 당시청년단체들은일정한지역의중심지를따라조직되었지만활동은분산적이고고립적이었다. 따라서이들청년단체를하나의강령과조직으로묶으려는시도가 1920 년중반부터이루어지기시작하였다. 이러한노력은 1920 년 6 월 18 일의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 ( 朝鮮靑年會聯合期成會 ) 로결집되었고그결과 1920 년 12 월 1 일조선청년회연합회 ( 朝鮮靑年會聯合會 : 이하청년연합회 ) 가결성되었다.* 청년연합회는당시경성에서조직된조선노동공제회 ( 朝鮮勞動共濟會 ) 와함께초기국내의전국적인민족운동단체의위상을가지고있었다. 청년연합회가결성됨으로써청년운동은초기의분산성을어느정도극복할수있었다. 또집행위원제를채택하여이후청년단체들의체제변경 ( 회장제 집행위원제 ) 에도영향을주었다. 초기청년연합회는계몽과선전활동에역점을두었다. 창립당시사회혁신, 지식광구 ( 廣求 ), 건전한사상으로의단결, 덕의 ( 德義 ) 존중, 건강증진, 산업진흥, 세계문화에의공헌이라는 7 대강령을내걸었다.* 또헌장에서는각청년단체의상호친목에관한회합을수시로개최하고풍기개량, 잡지와도서의간행, 강연이나강습 야학의개최, 청년의취학을위한편의도모, 운동회개최, 산업단체조직장려와이에대한조사연구, 생활개선에관한사업을실시할것과대중들의의식적인각성을위한각종활동을구체적인사업으로명시하였다.* 지역청년단체들의활동은대부분이에기반하는경우가많았다. 그러나 1 년여사이에자체적인한계로문화운동이침체되어가자청년연합회는 1922 년 3 월제 3 회정기총회이후물산장려운동과민립대학설립운동에주력하기시작했다. 민족운동의부흥을꾀하기위한방침으로전국의청년단체와대부분의민족운동단체인사들이참여한가운데전개된두운동은개량적 타협적성격을띠고있었는데, 당시전국적인호응을얻었다.* 청년연합회의집행위원은물산장려회와민립대학기성회의간부로활동했고, 지방의소속청년단체들은실행기관역할을담당하여강연회활동과물산장려를위한시위운동등을적극적으로전개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의경우에는지역의대표를청년회에서선출하여, 민립대학기성회지방부의임원으로활동하게하는경우도있었다. 이에대해서울청년회를비롯한사회주의자들은청년연합회의개량적인운동방침을격렬하게비판하기시작했다 년 3 월전조선청년당대회 ( 全朝鮮靑年黨大會 : 이하청년당대회 ) 에서는 물산장려운동박멸 을결의하면서이운동을중산계급의 경제상현상유지의이기적운동 일뿐만아니라 계급의식을말살시키려는음모의운동 으로규정했다.* 전국 90 여개단체와 200 여명이참석한가운데치러진청년당대회는무산계급과노동계급의선구로서민중을위해활동할것을선언하여이후청년운동에새로운경향을가져왔다.* 결국물산장려운동과민립대학설립운동이모두실패로돌아가자지역의청년단체들은청년연합회에대한지지를철회하고새로운대안을모색하기에이르렀다. 이제청년들은종전의민족주의운동이보여주었던한계를넘는새로운사상적대안을필요로했던것이다. 이러한모색은 1924 년 4 월 21 일조선청년총동맹 ( 朝鮮靑年總同盟 : 이하청총 ) 으로귀결되었고이후청년운동은청총의주도하에이루어지게되었다.* 이와같은 1920 년대초기청년운동의경향은 3 1 운동이후의양주지역에도새로운바람을일으켰다. 전국적으로청년단체결성이불길처럼일어나던 1922 년 5 월양주청년회 ( 楊州靑年會 ) 가조직되었다. 창립기사는볼수없지만당시대부분의청년단체가그랬듯이양주청년회역시양주지역의유지들과인텔리청년들을중심으로결성되었을것이며회체제는회장제를채택한것으로추측된다. 그이념과활동역시당시청년연합회의강령에따라계몽과선전활동을중심으로하였을것이다. 그러나양주청년회는개량화되기시작한청년연합회의이념에는더이상찬동하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년 3 월에조직된청년당대회에참가 * 했다는기록을볼수있는데청년당대회는청년연합회에반기를들고탈퇴한청년단체를중심으로조직되었기때문에당시양주청년회의입장을미루어짐작할수있는것이다. 곧이어 5 월 13 일의장구명회 ( 具明會 ) 의사회로제 2 회정기총회가개최되었다.* 총회에서는지난 1922 년도활동경과와청년당대회및조선민립대학기성회창립총회에대한경과를보고하였다. 그리고민립대학기성회양주지방부위치에대한건은이사회에일임하기로했다. 또한회체제를회장제에서이사제로변경하고다음과같이새로운간부진을구성했다. 이사장 : 구용조 ( 具容祖 ) 상무이사 : 구명회 ( 具明會 ), 윤흥업 ( 尹興業 ) 이사 : 이준용 ( 李准 )( 足 + 容 ), 김현경 ( 金顯敬 ), 김기윤 ( 金基潤 ), 구봉식 ( 具鳳植 ), 김용구 ( 金容龜 ), 이기종 ( 李基鐘 ), 김종화 ( 金鐘和 ), 이복영 ( 李福永 ) 그러나이후양주청년회의뚜렷한활동상은발견되지않는다. 신문자료에의하면 1923 년 9 월과 11 월에동아일보사와조선일보사양주지국의후원아래양주청년회주최로테니스대회가열린다는신문광고가눈에들어올뿐, 별다른활동은보이지않는다.* 그밖에 1923 년 11 월 17 일양주군시둔면금오리천도교구에서금오청년회 ( 金梧靑年會 ) 창립총회가개최되었다.* 금오청년회는자료상확인할수있는유일한면단위청년단체이다. 창립총회는윤원세 ( 尹元世 ) 의사회로진행되었는데먼저규칙이통과되었고, 내빈이사항 ( 李思恒 ) 의축사가이어졌다. 그리고습관개선, 지방개량, 산업증진등을목표로설정하였다. 이자리에서선출된간부명단은다음과같다.

388 회장 : 윤원세부회장 : 윤자선 ( 尹滋善 ) 총무 : 이재국 ( 李載國 ) 고문 : 현종학 ( 玄鍾學 ), 강석홍 ( 姜錫弘 ) 임시서기 : 강석홍간사 : 강순직 ( 姜順直 ), 탁준석 ( 卓準錫 ) 사회주의청년운동이기세를잡기시작하던당시청년운동의상황으로미루어볼때금오청년회의성격은새로운기운에편승했다기보다는오히려이전의문화운동적인요소가더짙었다고할수있다. 금오청년회는이후에도윤원세를중심으로하여식산흥업 ( 殖産興業 ) 을주요목적으로활동을계속했던것으로보이는데, 적어도 1927 년까지는유지되었던것같다.* 그러나창립총회이후에는활동기사가전혀보이지않아구체적인내용은알수없다.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양주청년회는사회주의청년운동의영향에어느정도부응하려는듯했지만청년당대회참가이후별다른변화의모습을보이지않은채활동이흐지부지되고있었다. 또한금오청년회가조직되기는했으나당시의분위기와는달리개량적인성격을띠고조직되었으며이후어떠한개편의흔적도, 진전된활동도없었다. 이것은양주지역의청년운동이침체되어갔음을말하는것이며, 곧다른부문의사회운동이활성화되지못했음을의미한다 년대청년운동이지닌역사적특성은사회운동을추동하고선도하는역할이었다. 따라서사회운동이활성화되고조직화되었던지역은거의대부분청년운동이활발하게전개되고있었으며그활동가들이다른부문운동에깊숙이관여하는경우가많았다. 양주지역사회운동의침체는이후에도지속된것으로추측된다 년 동아일보 에실린전국각지역에대한탐방기사중양주에관한내용은이와같은사정을잘보여주고있다. 석시 ( 昔時 ) 의번영지가적막한농촌, 사회단체는절종 ( 絶種 ) 이라는기사제목이그대로말해주듯이금오청년회가조직된이래양주지역의사회운동에는별진전이없었던것같다. 양주지역의청년운동이침체된원인은여러가지가있겠지만, 일차적인원인은지속적으로운동을유지할만한중심적인세력이없었던점으로보인다. 다음 동아일보 기사는이와같은상황을잘반영하고있다.* 원래양주군은상금 ( 尙今 ) 까지문맹 ( 文盲 ) 에퇴치 ( 退治 ) 가못되야농업 ( 農業 ) 을주 ( 主 ) 로하고노동을부업 ( 副業 ) 으로한관계상사상단체 ( 思想團體 ) 는소 ( 少 ) 할뿐약간 ( 若干 ) 의유지 ( 有志 ) 가잇다하야도경성 ( 京城 ) 에집중 ( 集中 ) 함으로농촌부락 ( 農村部落 ) 에는특별 ( 特別 ) 한시설 ( 施設 ) 이별무 ( 別無 ) 함으로일대유감 ( 一大有感 ) 으로사 ( 思 ) 하는바이다. 전통적인농업지역인양주지역의주민은대부분농민이고이들은모두가난과무지속에서허덕이고있었다. 당시양주지역의공식적인교육기관이라고는양주공립보통학교 ( 楊州公立普通學校 : 이하양주공보 ) 뿐이었다. 보통학교만졸업해도지역유지의대우를받았던상황이었고, 그나마일부지식인들이배출되어양주지역을떠나서울이나해외로활동무대를옮기는경우가대부분이었다. 따라서양주지역에사회운동의뿌리가내리기란쉽지않았을것이다. 이와같이취약한사회운동기반은지역차원의문제가발생했을때그문제점을잘드러낸다 년 11 월양주공보에는일본인교장의부정사건이발생했다 년봄양주공보학생과부속학교인농잠학교학생이실습으로사육한누에 190 여원어치를교장인궁내충의 ( 宮內忠義 ) 가농잠학생이우종 ( 李雨宗 ) 의명의로양주공동판매소에판것이폭로된것이다.* 이과정에서양주청년회나금오청년회의진상조사나지원활동을찾아볼수없었던것은아쉬운점이다. (2) 양주금융조합파업사건 1924 년조용한양주지역에서일대파란이일어나는사건이발생했다 년 11 월에있었던양주금융조합 ( 楊州金融組合 : 이하양주금조 ) 이사배척사건이그것이다. 11 월 13 일양주금조직원들이일본인이사매근시차랑 ( 梅根時次郞 ) 에대한불신임안을의결하고총사직하는사태가벌어진것이다.* 즉, 이사가공공금융기관인조합의근본정신을위반하고조선인부하직원들의인격을무시할뿐만아니라, 모든일을독단적으로처리한다는것이이유였다. 이들이제출한불신임안의내용은다음과같다. 1 이사매근시차랑은조합정신을몰각하고일반조합원에게고리대금업자의행동을하는일. 2 이사의위신을잃고유언무행하므로직무상철저치못한일. 3 조합원을안하 ( 眼下 ) 시하고부하직원의인격을무시하여자기독단적행동이며직원간반감을일으켜정신적원조가무하야조합사무상일대장해를끼치는일. 4 조합원에게대하야불친절함으로지방민의반감을초기 ( 招起 ) 하는일. 5 부하감독을엄정히못하고직원간에이간으로상호간에친목을교난 ( 攪難 ) 케하는일 여조합원의공정한사무기관임을불구하고일개인의사무적행동을감행하는일. 7 연체자에대하여는연체사유를불문하고조합으로서행치못할혹독한처단에인하여일반조합원에게반감을일게하야고의로반제 ( 返濟 ) 치않는경향이점차증가하는일. 8 금년과여 ( 如 ) 한수재로일반농가의경제상고통도불문하고극악한고리대금업자의수단으로지불명령또는능위 ( 能爲 ) 함으로조합원의애원성이항상그치지않는일. 9 모범적행사는없을망정차에반하야자기의부주의로인하야생기는현금출납부족액을허위한출장 ( 出張 ) 으로조합원의금전을소비하는등임의로공금을사용하는일. 양주금조의이사배척운동은양주금조의가혹한농민수탈에대한반발과함께조선인서기들에대한일본인이사의차별과무시에의한불만이결합되어나타났다 년여름에는경기도지역을중심으로심한수재와가뭄이잇달아발생하였다. 추수철이되어도수확량이턱없이부족한농촌에서는식민지정부의가혹한수탈에각종고리대금업까지성행하여농민들의불만이상당히고조되어있는상황이었다. 양주지역역시예외는아니었다. 당시양주금조는운영자금만해도 25 만 26 만원에달하고농민들에대한대부금이 10 여만원에이르렀다.* 그런데추수철을맞아도대부금을회수하지못하자일본인이사는돈을갚지못하는농민들을상대로재산을경매처분하여단 1 개월사이에 원을가로챘다는것이다. 게다가일본인이사는지난 10 월조선인조합장이종협 ( 李鐘協 ) 이엄연히출근했음에도불구하고독단적으로평의원회를소집하는등조합장에게조합의사무에관해서는아무런의논도하지않았고, 조선인인부하서기들에게모욕적인언사를서슴지않았다는것이다. 심지어지필묵도자기돈으로사서쓰라는등횡포가극심했다. 이에조선인서기들이모두사표를던지고이사의퇴임을요구하자조합측은도리어주동했던서기 4 명을면직조치하였다. 이에조선인조합장까지사표를던지고일본인이사의죄상을기록한인쇄물을만들어감독관청과그밖의요로에배부하는등사건은점차확대되어갔다.

389 이후양주금조의이사배척사건이어떻게전개되었는지는구체적인자료가없어서알수없지만약한달뒤인 12 월 29 일제 5 회평의원회가개최되어사무원채용과경비예산변경, 조합원가입승낙여부등을결정하였다는 * 기사를통해양주금조의이사배척운동이어느정도해결된것으로추측된다. 그과정에서청년회와구체적인연계활동이있었는지는알수없지만이사건은양주지역의사회운동가들은물론주민들까지긴장시켰던커다란사건이었다. 그러나양주금조사건을고비로 1920 년대후기양주지역의사회운동에는주목할만한사건이보이지않는다. 당시우리나라민족운동의양상은매우복잡하게변해가고있었다 년대중반이후사회주의운동이국내민중운동을장악하기시작하였고 1925 년 4 월조선공산당 ( 朝鮮共産黨 : 이하조공 ) 이창건되었다. 비록모든사회주의계열을포괄하지는못했지만조공의출현은당시민족운동에커다란충격을던져주었다. 조공은 1928 년해체되기까지수차례의검거와재건을거듭하면서대중운동을지도해나갔고, 서울파를중심으로한조공에가담하지않았던사회주의자들의대중에대한영향력도결코무시할수없었다. 한편민족독립과자본주의건설을지향하던민족주의운동은독립운동의방법과자본주의건설방법을둘러싸고좌우로갈라졌다. 일찍부터실력양성을주장하던민족주의우파는그들의주장이좌절되자 1920 년대중반이후일제와정치적타협을모색하면서이른바 자치운동 을펴나가기시작했다. 이에반해절대적이고즉각적인독립노선을주장하면서물산장려운동에참가하던민족주의좌파는자치운동이대두하자민족주의우파와결별하고사회주의자들과연합하고자했다. 그결과가바로 1927 년 2 월 15 일에창립된신간회 ( 新幹會 ) 였다. 신간회는 1931 년 5 월공식적으로해산될때까지전국 150 여지회, 4 만여명의회원을갖고있던대규모의민족협동단체였다. 본부뿐만아니라특히지회는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등모든부문운동이조직적으로연계되어있었기때문에일제의노골적인탄압을받았다. 심지어지회창립조차갖은구실을대면서금지시킨경우가많았다. 양주지역의경우에도 1929 년 4 월지회를설립하고자했지만경찰의방해로성사되지못하여 1929 년 10 월말현재 30 여명의회원이있었지만지회가없는본부직속회원인상태였다.* 그러나 1929 년 12 월민중대회사건으로신간회본부의간부가대부분검거되자신간회노선이온건화하기시작했다. 또사회주의운동내부에서도신간회를민족개량주의단체로규정하면서노선을전환하자신간회는 1931 년공식적으로해체되었다. 이로써좌우민족연합전선은무너졌고국내민족운동의양상도크게달라지게되었다.

39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년대이후의민족운동 * 2) 1930 년대이상촌건설운동과소작쟁의 1930 년이후우리나라의사정은이전과판이하게달라졌다. 일제는만주를침략하고만주에서의지배체제를유지 강화하기위해식민지조선에대한수탈을더욱강화했다. 우선일체의대중운동을탄압하면서민중들의거센저항을압살하는한편, 각종미봉적인식민정책을구사했다. 그러나 1937 년일제가중일전쟁을도발함으로써이제까지의이중적인식민정책은완전한 수탈 그자체로돌아섰다. 일제는우리나라를중국침략을위한대륙병참기지로삼고물질적자원은물론인적자원까지수탈하는철저한수탈정책을펴나갔다. 이를위해우리민족자체를아예없애버리는 민족말살정책 까지서슴지않고실시하였다. 김용기의생가 이렇게객관적정세가변화하는과정에서민족 사회운동진영에도커다란변화가찾아왔다. 사회주의운동내에서는민족주의운동계열과의연합전선을포기하는대신혁명적노동조합 농민조합을기초로하는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주력했다. 이들은신간회를민족개량주의단체라고보고신간회를통한더이상의민족협동전선을부인했다. 민족주의운동도크게달라졌다. 이미좌파와는달리 자치운동 을통해일제와타협의길을걷고있던민족주의우파는일제의탄압정책이강화되자아예친일의길로접어들어 민족주의 로서의존재가치를상실하고있었다. 한편신간회를정치활동의장으로삼고있던민족주의좌파는신간회가해체되자새로운노선변화를모색하기시작했다. 이미 1928 년조선일보의제남사건 ( 濟南事件 ) 으로우경화경향을보였던민족주의좌파는신간회의 합법화운동노선 을채택하여명백한정치적후퇴를선언했다. 이들이선택한새로운길은대중들을직접적인정치투쟁의장으로이끌어내기보다는그것을전제로한의식고양운동이었다. 농촌계몽운동, 만주동포구제운동, 충무공현창운동 ( 忠武公顯彰運動 ), 조선학운동등이그것이다. 이러한운동들은당시민족주의우파와일정한공동보조아래에서진행되었지만각각의기본입장에는차이가있었다. 특히농촌계몽운동의경우, 동아일보 계열로대표되는민족주의우파는 브나로드운동 의목표를농촌근대화에두고있었지만, 민족주의좌파는민족독립투쟁의한도구로서민족의식을고취하기위해문자보급, 생활개선등에주력했다. 농촌계몽운동은 1930 년대전반기에걸쳐전국적으로확대되었다. (1) 이상촌건설운동농촌계몽운동의열풍은양주지역에도미쳤고다른지역과는다른독특한뿌리를내리게되었다. 그시발은진접면에서이루어졌다 년 1 월, 진접면장현리의전동에서는이상촌을세우고자하는노력이시작되었다. 당시대부분의농촌이그러했지만전동역시대대로가난과무지를벗어나지못하고도박과음주가만연한지역이었다. 때문에가정파탄이빈번하여심지어 홀아비촌 이라불리기까지하였다. 마을이이러한상황에이르자이재희 ( 李在熙 ) 는전동진흥회 ( 全洞振興會 ) 를조직하여농사를장려하고협동단결과생활개선에힘쓰고자했다. 그결과 3 년만인 1933 년 5 월에이르러전동주민 30 여호모두가자급자족이가능하게되었다. 또이들은양주금조로부터저리자금을빌려마을주민 36 명의명의로논과밭을매입하여공동경작을하기도했다.* 당시우리나라농촌의현실을고려할때이러한자급자족공동체는실로혁신적인것이었다. 한통계에따르면 년자작농의비율은 22.6% 에서 18.9% 로, 자작겸소작농은 37.5% 에서 28.4% 로감소한것과달리소작농은 39.8% 에서 52.7% 증가하였다.* 즉, 자작농이나자작겸소작농은해마다감소하는데반해소작농은매년증가하는추세였다. 양주지역역시예외는아니었다 년당시양주군청의소작농실태에관한조사는이러한상황을잘말해주고있다. <1930년대양주군자 소작농실태 > ( 단위 : 호 ) 면명 / 구분 지주 자작농 자작겸소작농 소작농 회천면 주내면 이담면 은현면 광적면 백석면 장흥면 시둔면 별내면 * 진접면 * 진건면 * 화도면 * 와부면 * 미금면 * 구리면

391 노해면 계 ,423 11,658 비고 : * 는현남양주시관할구역이다. 출전 : 동아일보 다음표에서보듯이전체농업인구 1 만 6497 명중자작농은 907 명으로 5.5% 에불과했고자작겸소작농도 20.7% 에지나지않았다. 반면에소작농은 1 만 1658 으로전체농업인구의 70.7% 에달하고있다. 따라서양주지역의농업상황은농업인구의대부분이소작농인매우열악한상태였다. 이것은당시전국의소작농실태와비교해도최악의수준이었다. 이러한양주군의상황에서출현한이상촌은양주군내부에서는물론이고바깥에서도실로충격적인것이었다. 이들의공동경작을 동아일보 는 유토피아의느낌을주는이상촌 이라표현하기도했다.* 그런데사실상의본격적인이상촌건설은와부면에서시작되었다. 해방후에그유명한 가나안농군학교 의기본골격이여기서비롯된것이다. 가나안농군학교교장을역임했으며막사이사이상을수상했던김용기 ( 金容基 ) 는이미이시기에그기초공사를시작하고있었다.* 1912 년 9 월 5 일와부면능내리 ( 현조안면능내리 ) 봉안마을에서태어난김용기는전통적인유교가풍이엄했던안동김씨문중의직계후손이었다. 그러나아버지김춘교는어려서부터그에게 사람이란땀을흘려서먹어야하는것이다. 라고가르치고 지금나라를위하는가장크고급한일은식량을증산하는일 이라고늘강조했다. 당시기독교복음에공감하고있던그의부친은 1919 년 3 1 운동이일어나자양주지역의운동을주도하였고 1925 년에는김용기를광동학교 ( 廣東學校 ) 에입학시켜기독교를바탕으로하는민족주의의식을심어주고자했다. 광동학교는여운형 ( 呂運亨 ) 이자신의집에세운기독교계학교로보통학교과정과중등학교과정을혼합한 4 년제학교였다. 후술하겠지만이때맺어진여운형과의인연은이후건국동맹 ( 建國同盟 ) 으로이어진다. 김용기가입학할당시만해도학생들의절반은상투를틀고갓을쓴어른들이었다. 재학시절내내우등을했던그는 예봉산의정기를타고난아이, 동대문밖에큰인물이났다. 는등의칭찬을들으며양주지역의기대를한몸에받았다. 그러나 지식인일수록농사를지어야한다. 는아버지의유언에따라그는농사에전념하기로했다. 주위의비난과손가락질을뒤로한지 2 년여만에탁월한농사꾼이라는소리를듣게된김용기는새로운꿈을품게되었다. 그것은바로 이상촌의건설 이었다.* 무일푼이었던그가광주 ( 廣州 ) 의한부자에게무작정가서돈 400 원을빌린일화는유명하다. 당시김용기는이상촌건설자금을마련하기위해광산에손을댔는데사기를당해가지고있던돈을모두날려버렸다. 그는광주에있던한사람을찾아가무조건돈을빌려달라고했다. 무엇을담보로하겠느냐. 는그사람의물음에김용기는다음과같이답했다고한다. 여기이, 제몸뚱이가담보물입니다. 젊은이몸뚱이말씀입니다. * 엉뚱하고도당찬이한마디는그부자를감동시켰고선뜻내어준 400 원은그의이상촌건설을위한초석을다지는데중요한밑거름이되었다. 그는마을뒷산황무지 3000 평을사서부인과함께맨손으로일구어첫해에고구마 40 가마니라는상상을초월한수확을거두었다. 3 년뒤인 1935 년김용기는마을앞에 4000 여평의땅을장만해자신의이상촌건설에동참할동지들을모으기시작했다. 그리하여친구인여운혁 ( 呂運赫 )* 을비롯하여이인준, 최광열등이뜻을모았고그의형제인김성기 ( 金聖基 ), 원기 ( 元基 ), 운기 ( 運基 ), 인기 ( 寅基 ) 가모였다. 이렇게 10 세대가모여봉안마을의이상촌건설이현실화되기시작했다. 이상촌의소문은인근군 면은물론서울과만주까지퍼졌고이상촌에들어오기를희망하는사람들도점차늘었다. 그들은가옥을짓고식구수에따라평수를분배했다. 그리고일체의담장을짓지않고집집마다산양을기르고그밖에토끼, 닭, 돼지등을사육하였다. 또복숭아, 포도, 배등과수원을만들고사이사이에고구마를심어비상시에식량을해결할수있도록했다. 이때김용기는 고구마 12 개월저장법 을개발했다. 이저장법은당시로서는상상도하기어려운일로서, 경기도농민훈련도장의책임자인일본인무전 ( 武田 ) 이훈련생 80 여명을데리고와서교육을받기도했다. 봉안이상촌은단순한공동생활이아니었다. 이들의생활양식은매우경제적으로구성되어있었다. 주택은물론이고의 식생활도종래의방식을버리고경제적으로개선되었다. 즉, 쌀주식주의를버리고하루한끼이상은반드시잡곡, 고구마등을먹도록했고의생활에서도일체의사치를배격하고활동하기편한의복으로개량해서입도록했다. 철저한공공의식을기초로해서자주사용하지않는농기구는마을의공동비품으로사용하였다. 그뿐만아니라모든주민이저축하여마을공동자금을만들고급한경우무이자로대부하기도했다. 이와같은공동생활을유지하기위해주민들은한달에한번씩정기적인모임을갖고주민들사이의화합과친목을유지하는데힘쓰는한편, 의식주개혁을위한끊임없는논의를거듭했다. 그결과 1935 년출발당시 40 여명이었던주민은 1940 년에이르러 64 명으로증가했고밭 6500 평이 1 만 3000 평으로, 논 9000 평이 1 만 3000 평, 과수원 4000 평이 1 만 2000 평으로늘어났다. 또각집마다 1 명이상을서울의중학교에입학시킬수있었다. 당시국내는일제의각종공출과대륙침략을명분으로하는갖가지수탈로인해전국이황폐화한상황에서교육은말할것도없고당장의호구지책도어려운상태였다. 이러한와중에이상촌의생활은일반대중으로서는상상하기어려운수준의것이었다. 그러나이상촌의주민들은작은범위의생활안정에만만족하지는않았다 년당시 27 세였던김용기는장로장립 ( 長老將立 ) 을받았는데, 식순의하나였던동방요배 ( 東方遙拜 ) 를거부하여일제경찰에구속되는수난을겪기도했다. 그뿐만아니라창씨개명을거부하고나섰고일제에대한공출거부를주도했다. 이상촌주민들이택한공출거부운동의방식은논농사의자진폐기였다. 이들의완강한거부운동은당시조선총독부의정무총감에게보고될정도였다. 이상촌의실상을파악한정무총감은김용기를전시생활과과장으로임명하고이상촌을농촌진흥운동에이용하고자했다. 그러나그는도리어정무총감을설득, 감화시키고일제경찰로부터이상촌의모든활동을보장받는성과를올렸다. 이상촌생활의안정은이상촌주민들의보호는물론이고 1940 년대이후양주지역에서활동하는여운형에게중요한피난처가되기도했다. (2) 소작쟁의 일제는조선을무력으로강점한이래식민지정책의일환으로무엇보다도농업개발에관심을기울였다 년대토지조사사업과 1920 년대산미증식계획은조선을일본의식량국으로전환하기위한기초였다. 이두정책으로조선에는식민지지주제의법적 제도적기틀이마련되고이를바탕으로오로지식량증산만을위한농업개발이있을뿐이었다. 이과정에서조선의농민은급격하게몰락하였고농민생활역시극도로피폐해갔다. 그러나 1930 년대에들어서면서농업공황을맞이하게되자기형적인식민지지주제는심각한위기에봉착하였다.

392 이에일제는각종농민구제정책을실시하였는데자작농창설계획, 농가경제갱생계획, 궁민구제토목공사사업을비롯한농가부채정리사업등이그것이다. 이러한정책의실시로자 소작인층의확대는물론, 조선인대지주마저몰락하였고, 그나마소농경제의안정에도전혀공헌하지못한채일본인지주의이익만도모하는격이되었다. 또한근본적이고구조적인농업정책이아니었음에도불구하고그동안치열했던농민들의생존권투쟁을약화시키고개량화시키는역할을했다. 특히 조선농지령 이나자작농창설계획등은농민운동의개량화를더욱부채질하였다. 한편 1930 년대에는각종통제정책이더욱강화되었다. 일제는이미 1925 년과 1926 년에발표된 치안유지법 과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등으로농민운동을탄압해왔다. 치안유지법 은대표적악법으로농민운동뿐만아니라일제의사회운동을탄압하기위한일제의통제장치로서, 1926 년부터 1943 년까지 치안유지법 위반사범은무려 2 만 4441 명에달했다.* 또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은각종집단적인사회운동을막기위한것으로, 특히집단소작쟁의나수리조합설치반대운동, 도로부역반대등을위한투쟁을탄압하는데유효하게사용되었다. 그뿐만아니라 1930 년 12 월지방자치제도를개정하여도 부 읍회의의원들에게각종경제적 사회적혜택과정치적권한을부여하여농민들을통제하는데앞장서게했다. 그밖에농촌진흥회, 향약, 관제청년단을비롯하여소방단, 자경단, 자위단등을조직하여농촌통제정책을보조하게하고농민운동을조직적으로방해 탄압하도록했다. 이러한상황에서농민운동은꾸준한자기발전을계속하고있었다. 3 1 운동이후비약적인발전을보인농민운동은 1920 년대사회주의운동의영향을받아합법적농민조합운동으로발전했다. 특히 1930 년대에들어서면서각지역에서는소작쟁의와관제농업정책반대투쟁이활발하게전개되었다. 이러한활동은주로농촌지역이었던경상남도와함경남도에서가장적극적으로나타났다. 이들은대부분 1930 년 8 월에채택된조선농민총동맹의 행동강령초안 의영향아래조직되어소작관계개선을위한투쟁을비롯하여반농민적농업정책에대한적극적인반대투쟁, 정치활동의자유를획득하기위한투쟁등을주로삼았다. 그러나이후농업공황과만주사변등을거치면서합법적농민운동은점차비합법적농민운동 ( 혁명적농민조합운동, 적색농민조합운동 ) 으로변화하였다. 이러한와중에양주지역에도초유의소작쟁의가발생하였다. 앞서살펴본것처럼양주지역은소작농의비율이 70.7% 에이르러다른지역에비해농민의객관적인조건이매우열악한상황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920 년대에이래단한건의소작쟁의도발생하지않았던양주지역에서이같은대규모소작쟁의가일어났다는것은실로충격적인사건이었다. 발생원인과과정에대해서는자세하게알수없지만 1933 년 5 월 8 일자 동아일보 에실린소작쟁의결과에대한기사 320) 에의하면약 150 여명의소작인이 900 여두락의토지에대한소작쟁의를일으킨것으로추측된다. 양주지역역사상처음있었던일이었고많은인원이동원되었기때문에사회단체는물론군당국까지문제해결에고심하였다. 결국양주군수송문화의중재로한사람의피해자도없이농민들의요구사항이그대로수용되었던것으로보인다.

39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8 장일제의식민통치와항일민족운동 제 4 절항일민족운동과사회운동 년대이후의민족운동 * 3) 1940 년대조선건국동맹과농민동맹 1937 년중국을침략한일제는곧바로조선을전시동원체제로전환하였다. 이미 1937 년 임시자금조정법, 1938 년 국가총동원법 등을제정해파쇼적통제를실시한일제는 1941 년태평양전쟁을일으켜제 2 차세계대전에가담하였다. 이에따라조선은일제의대륙병참기지로전환되어국내의모든인적, 물적자원이침략전쟁에희생되기시작했다. 중일전쟁을일으킨후일제는황국신민화정책을통해조선민중에게천황숭배사상을주입하여이들을전쟁터로내몰았다. 이를위하여신사참배를강요하고조선어사용을금지함으로써조선인의정신마저뿌리째뒤바꾸고자했다. 동시에민족 사회운동에대한감시와탄압도더욱강화하였다. 일제는 1938 년사상전향자들을모아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결성하였고수양동우회와흥업구락부를강제해산시켰다. 일제는민족 사회운동에대한탄압과동시에친일파를육성하는데많은노력을기울였다 년대이후줄곧민족분열정책을구사했던일제는이시기에이르러본격적인관제친일단체를조직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등은민족 사회운동계는물론이고문학, 종교, 예술, 언론등모든분야에걸쳐친일파를양성했다. 한편조선을대륙병참기지로만들기위한통제경제정책을실시했다. 이들은전쟁비용을조달하기위해금수탈을강화하고, 각종군수광물자원을비롯하여쇠붙이로만들어진것이라면생필품까지도공출해갔다. 또국내주요산업을군수산업으로강제전환하고국가자본을비롯한독점 금융자본을집중시켰다. 이처럼군수생산에만집중된공업구조는경공업과중공업의불균형을심화시키는비정상적인공업의발달을초래했다. 이에따라소비재산업에치중해있던조선인자본가가급속히몰락했다. 일제의수탈은물적자원에그치지않았다. 이들은 1939 년국민징용령을발동하여노동력을수탈하기시작했다. 조선민중은경찰력과행정력이동원된납치, 강제연행등에의하여근로보국대, 정신대, 군대위안부등으로끌려갔다. 또전쟁이본격화되자조선청년들을총알받이로내몰기위해 1943 년학도지원병제도를실시했다. 이러한상황에서조선민중들은노동쟁의, 공출항거운동등생존권투쟁을지속해나갔다. 또조직적인반일반전운동도전개되었는데, 징용이나징병 학병거부자들을중심으로무장대가형성되기도하였고국외항일부대에합류하는사람들도있었다. 민족운동세력들도변화된정세에대처하여새로운운동노선을채택하였다. 이들은친일분자와민족반역자들을제외한일체의반일세력을결집하여반전 반제민족통일전선운동을조직하기시작했다. 그러나일제의엄혹한감시와파쇼적통제체제하에서의활동은분산적이고고립적일수밖에없었다. 그중에서양주지역과관련을맺고있는것은여운형이이끄는조선건국동맹 ( 朝鮮建國同盟 : 이하건국동맹 ) 이었다. 건국동맹은일제의마지막발악이한창이던 1944 년 8 월에결성되었다. 그러나실제로여운형이건국동맹을구상한것은 1942 년겨울로소급된다.* 태평양전쟁이일어난후한창전쟁동원에광분하던일제는 1942 년 12 월동경에서귀국한여운형을 치안유지법, 조선임시보안령 위반등의혐의로즉각구속하였다. 이때여운형은감옥안에서 독립투사들을모두망라한광범한민족통일전선체를만들어민족의힘을집결시켜해방투쟁을전개하겠다. 는계획을세웠다.* 그리고 1943 년 7 월가석방된직후조동호 ( 趙東祜 ), 이상백 ( 李相栢 ), 최흥국 ( 崔興國 ), 전사옥 ( 全駟玉 ) 등과함께조선민족해방연맹을조직하기로결정했다. 이들은서울뿐만아니라각지방을돌아다니면서동지들을규합하였고 1944 년양평에서는여운형의환갑잔치를빙자하여 * 건국동맹조직을위한예비모임을갖기도했다. 또만주, 연안등에까지도동지를모으고자했다. 이와같이 1 년여의준비끝에 1944 년 8 월 10 일서울경운정삼광한의원에서비합법비밀결사체인건국동맹이결성되었다. 이자리에는여운형을비롯하여현우현 ( 玄又玄 ), 황운 ( 黃雲 ), 이석구 ( 李錫玖 ), 조동호등좌익계인사들이모였다. 이들은이제곧다가올일제의패망을예상하고. 따라서 민족해방 이아닌 건국 과해방준비사업에초점을맞추었다. 이를준비하기위해흩어진반일세력들을결집하여강력한조직을편성해야한다는데뜻을같이하고다음과같은강령을채택했다. 1 각인각파를대동단결하여거국일치로일본제국주의제세력을구축하고조선민족의자유와독립을회복할일. 2 반추축 ( 反樞軸 ) 제국과협력하여대일연합전선을형성하고조선의완전한독립을저해하는일체반동세력을박멸할일. 3 건설부면 ( 部面 ) 에있어서이레시위 ( 施爲 ) 를민주주의적원칙에의거하고특히노농대중의해방에치중할것. 건국동맹에는민족주의자와공산주의자가이념을넘어참가하였고친일세력을제외한애국인사들이상당수가담했다. 그리고중앙위원회산하에각도대표위원을구성하고지방조직결성에노력했다. 또각계각층을망라하여계층별조직을체계적으로마련하는데주력하여농민조직, 노동자조직, 청년학생조직, 학병 징병 징용거부자조직, 부녀조직, 사무원조직등이결성되었다. 특히농민조직은양주지역에서이상촌운동을펼치던김용기와도관련이있어주목된다 년가출옥한여운형이머물렀던곳이바로김용기의이상촌이자리잡았던능내리의봉안마을이었다. 앞서보았듯이김용기가배움을시작했던광동학교는바로여운형이세운민족교육학교였다. 그의선친또한여운형의신봉자였기때문에일찍부터여운형의애국심에깊이감명을받아왔던터였다. 그렇기때문에일제의감시와탄압을받아피신해온여운형을모든위험을무릎쓰고기꺼이받아들였던것이다. 김용기와그의이상촌은당시일제경찰도함부로대하지못했던상황이었기때문에여운형이건국동맹을구체화하기에좋은장소였을것으로추측된다. 그러나김용기가건국동맹과관련을맺은것은단지여운형에대한개인적인존경심때문만은아니었다. 비록그의봉안이상촌이어느정도일제의직접적인탄압에서벗어나있었다고는하지만식민지체제에서일제의갖가지제약을받으면서이상촌을건설한다는것은한계가있을수밖에없었다. 이점을고민하던김용기에게여운형의건국동맹은이러한상황을극복하기위한방안이었던것이다. 이제는소극적인이상촌건설이아니라보다적극적인방법이필요함을인식하였고이에농민들의항일구국단체를조직해야한다는여운형의주장에동조하게된것이다 년 10 월 8 일경기도용문산에서여운형과경기도각군의대표들이모여농민동맹을결성하였다.* 여기에는양주군대표인김용기를비롯하여이장호 ( 李章浩 ), 최용근 ( 崔龍根 ), 문의룡 ( 文宜龍 ), 권중훈 ( 權重勳 ), 신재익 ( 申在翼 ), 최용순 ( 崔龍淳 )( 이상양평 ), 신홍진 ( 辛弘鎭 : 여주 ), 박성복 ( 朴性復 : 고양 ), 주한점 ( 朱翰漸 : 홍천 ) 등이참가했다. 이들은조선해방을목적으로광범위한투쟁을전개하기로합의하고다음과같은투쟁방침을결정했다. 1 징용과징병실시의방해, 민심선동및교란등을목적으로각종서류와호적부가비치된재판소및각지방관공서에방화할것. 2 일반민심을선동하여각지방적으로반일투쟁을전개할것.

394 3 전쟁용물자운수를방해하기위하여정보를듣는대로철도를파괴할것. 4 징용 징병자및투사를도피시키고그들로반일운동을하게할것. 이러한건국동맹산하농민동맹은전국에걸쳐조직된것으로보인다. 처음시작은양주, 양평등경기도북부지역일대를중심으로하였지만점차여주, 광주, 이천, 고양, 서울등으로확대되었다. 그뿐만아니라함경남도등전통적으로농민운동이활발했던지역에도농민협회라는명칭으로건국동맹의지방조직이결성되었다. 이들비합법반일농민단체들은농민동맹의투쟁방침에따라학병이나징용 징병에끌려가게된청년들을조직적으로피신시키고, 유사시에는언제든지군대로전환하기위해조직적인군사훈련을실시했다. 예를들면농민동맹은강제징집대상이된청년수십명을용문산과예봉산일대에피신시키거나신체검사시의사와협의하여부정진단을내려징용 징병등에서면제되도록했다. 그밖에공출반대를위해논농사대신고구마농사를지어공출을합법적으로거부하기도했다. 또서울에서재학중인학생들을중심으로서울시내소학교직원과전문학생 30 여명을규합하여핵심부대를조직하도록하고이들로하여금각처에침투하여민족의식과배일사상고취에주력하는선전 선동활동을벌이게하였다. 이상에서남양주지역을포괄한양주지역의 1920 년대이후민족 사회운동에대해살펴보았다 년대청년운동이전국으로불길처럼번져갈때양주지역에서도양주청년회와금오청년회가조직되었다. 자료의한계로자세한활동상은알수없었지만다른청년회와마찬가지로이들청년회역시양주지역의유지들을중심으로하여계몽과선전활동을주로하였을것으로보인다. 그러나 1920 년대중반이후다른부문운동이활성화되지못했던점으로보아양주지역의민족 사회운동은그리활발하게발전하지못한것으로추측된다. 그이유는서울과지리적으로근접한지역이라는데서찾을수있을것이다. 양주지역은여러걸출한운동가들이배출된지역임에도불구하고이들대부분이인접한서울지역이나해외에활동근거지를두고있었다. 따라서정작뿌리깊은농촌사회인양주지역에서는지역운동을주도할만한선도자가부족했던것이다. 이러한양주지역민족 사회운동의양상은 1930 년대에들어서면서다른지역과는다른독특한형태로나타나게되었다. 진접면과와부면의이상촌건설운동이그것이다. 특히가나안농군학교교장이었던김용기장로가건설한와부면의 봉안이상촌 은그규모로보나형태로보나당시로서는획기적인것으로서언론은물론일제당국에게도상당한주목을받았다. 그뿐만아니라 1940 년대여운형의조선건국동맹의하부조직인농민동맹이이지역에서활동할수있는근거를마련했다는점에서도의미가있다. 이와같이남양주지역의민족 사회운동은민족해방과독립국가수립이라는과제아래끊임없이전개 발전하였다. 그리고그전통은단절된것이아니라오늘날현대사를이루는밑거름이되었다. 예컨대엄혹한시절에이상촌이라는형태로내린그뿌리가아직까지도가나안농군학교로이어지고있다는사실은남양주시역사에서매우중요한의미를지닌다고하겠다.

395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1 절민족의해방과정치상황 *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1 절민족의해방과정치상황 * 1. 해방과미 소의분할점령 1945 년 8 월 15 일일본이연합군에무조건항복함에따라한민족은식민지배에서벗어났다. 민족사의측면에서볼때일본제국주의식민지배는한민족에게가장치욕적인역사적경험이었다. 국가주권의형식적인실체가상실된것은한반도에한민족주권이성립한이래한번도그유래가없었던일이다. 한민족에게자행된일제식민지배의폭압성은다른어떤제국주의의그것보다도강도가높고야만적이었다. 또근대주의 근대화등의미명하에실행된경제개발역시전체일본제국주의경제블록에서일본자본주의를팽창하려는목적으로실시한정책의일부분에불과하였다. 따라서일제시기의경제성장은한반도주민집단의복리증진을의미하는것은아니었으며일본자본주의의팽창에따라한반도지역이경제적으로성장할수록대중들의생활은더욱어려워졌다. 해방미 소의분할점령그리고식민주의경제개발은제국주의지배의유산으로서구조적 지역적기형성과파행성 ( 跛行性 ) 을남겨놓았다. 이러한뿌리깊은제국주의지배의유산은이후새나라건설과정에서적지않은장애요인이되었고, 결국분단정권수립과전쟁이라는민족적비극으로치달은한국현대사의어두운측면의기본요인이되었다. 해방당시남양주지역은행정구역상양주군동부대부분지역을차지하였다. 당시양주군은지금의양주군, 구리시, 서울특별시일부그리고남양주시등을포괄하는넓은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양주군은서울과접해있었으므로그만큼다른지방보다서울로부터영향을크게받을수밖에없었다. 주민생활면에서양주군은서울동부지역시장권에속하였다. 또한정치적으로는서울과밀접하게연결되어있었다고보아야할것이다. 따라서당시양주지역은해방과함께일시에분출된변혁적정세의중앙적흐름이비교적신속하게반영되었다고할수있다. 해방의계기가주로외적조건에서주어진만큼한민족이일본의패전에주요역할을했다고보기는어렵다. 그렇지만일제의패망과해방의완성에서한민족의주체적역량이차지하는비중은다음의두가지점에서결코과소평가될수없다. 먼저일본의패전이연합군의군사력때문이라는것은부정할수없지만, 한편으로제국주의일본의종말은 1930 년대이래장기적 지속적으로전개된동아시아피억압민족의반제투쟁으로앞당겨진것이기도하다. 즉, 만주와중국에서항일연합전선이끈질기게감행한대일투쟁은일본을수렁에빠지게하였고, 이를일거에만회하기위해일본의군국주의일파가저지른확전 ( 擴戰 ) 도발이종국에는패전이라는파국을부른것이다. 두번째로고려해야할것은 8 15 해방은사실일제지배체제의형식적인종식만을의미할뿐이라는점이다. 따라서해방의완성은단절된민족주권을복구하는독립민족국가를수립하는것이었고이과정에서는외세와대극에위치하는민족주체역량은그무엇보다도중요한요소였다. 해방후한반도정세의기본윤곽은두계통의민족역량과외세가서로연합과갈등관계를맺고성립되면서드러났다. 우선해방과함께귀환한해외민족해방운동세력과혁명적정세에서급속히형성된국내건국준비세력은서로협력과갈등의양측면을보이면서역동적인민족주체역량의골간으로서정치판도의주역으로부상하였다. 그렇지만미소분할점령으로한반도에는보다복잡한정치상황이조성되었다. 군사적인점령은해당점령지역의정치적지형에막대한영향을주었는데, 그것은바로일시적인협력과근본적인대립이혼재된종전초기미소관계가한반도의각정치세력들에게투영되었다는것을의미한다. 미소점령당국은각각해외정치세력중자신이후원할세력을일찍부터분명히하였다. 소련은만주에서항일유격대활동을벌인김일성세력이, 미국은미국의이승만과중경의대한민국임시정부그룹이자신들의점령지역에서정치핵심으로부각하는것을적극지원하였던것이다. 한편국내에서벌어진건국운동에대해서는미소가서로상반된조치를취하였다. 소련은점령후해방과함께급속하게형성된인민위원회를그대로또는약간의개편을거쳐정권기관으로인정한반면미국은처음부터인민위원회를인정하지않았다. 미군정은점령초기조선총독부행정의기본골간을그대로유지하려하였으며급진적인민족주의세력이나민중세력보다는한국민주당구성원들과같이 영어를할줄아는, 부유한교육받은소수의신사 들을보다더신뢰하였다.* 따라서남한에서는인민위원회와미군정통치가대립하였고결국주한미군은인민위원회를해산시켰다. 현남양주시가속하였던당시양주군에서도해방과함께인민위원회가조직되었다. 이지역인민위원회와관련된자료를보면 1945 년 12 월 12 일군청회의실에서군내 16 개면대표와위원 100 여명이참석하여양주군인민위원회임시총회를개최하였음을알수있다.* 임시총회에서는동조합을면단위로설치할것과한글보급강습회를각면에설치할것을결정하였다. 그리고기타당면문제를논의하고규약을개정하였으며, 임원을다음과같이결정하였다. 위원장 : 이성호 ( 李星昊 ) 부위원장 : 이덕창 ( 李德昌 ), 박경환 ( 朴競桓 ) 산업부 : 유용상 ( 劉溶相 ), 이해성 ( 李海星 ) 재정부 : 서인수 ( 徐麟洙 ), 황경영 ( 黃敬泳 ) 보안부 : 오주영 ( 吳周泳 ), 주인수 ( 朱仁洙 ) 문교부 : 한준식 ( 韓準植 ), 이순의 ( 李淳儀 ) 선전부 : 김용선 ( 金容善 ), 한재인 ( 韓載麟 ) 보건부 : 노영삼 ( 盧英三 )

396 양주군인민위원회에서주도적으로활동한인물은이성호 이덕창등이었다.* 이중이성호는 1945 년 10 월의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경기도대표로참가하기도하였다. 이밖에도양주군에는해방과동시에전국농민조합총연맹 ( 全國農民組合總聯盟 ) 과같은대중사회단체의지부가만들어져활발한활동이전개되고있었다.*1945 년 12 월 12 일군청회의실에서개최된양주농민조합임시총회 * 내용을보면각읍면대표자다수가참석하여각읍면정세를보고한후현시국문제에관한건과소작쟁의조정, 기타사항을결의한다음산회하였다. 당시위원과부서는다음과같이정하였다. 조합장 : 이해성 ( 李海星 ) 부조합장 : 한준식총무부 : 이완기 ( 李完基 ), 황경수 ( 黃敬秀 ) 문교부 : 한준식, 박경환조직부 : 이해성 ( 李海星 ), 이순의, 주인수, 이경규 ( 李敬圭 ), 현진섭 ( 玄晋?) 외 3 부 해방후양주군의건국운동과농민운동은여운형 ( 呂運亨 ) 의활동과관련하여중요하다. 전쟁이막바지에다다른 1944 년 10 월 8 일건국동맹의계층별조직인농민동맹이경기도용문산에서비밀리에조직되었는데, 여기에는여운형을필두로하여주로경기동북지역인양평 양주 여주 고양, 강원도홍천등지의인물들이참여하였다. 양주지역에근거를둔인물은이전부터여운형와개인적으로깊은관계가있었으며후에이상촌운동 ( 理想村運動 ) 을벌인김용기 ( 金容基 ) 였다 년대농민조합운동의전통과함께이러한해방전후의건국준비운동역량은해방후이지역의건국운동과대중운동의활성화와밀접한관련이있었을것으로보인다.* 그러나미군이점령한남한에서는북한과달리초기부터인민위원회가미군정과대립하였고결국무력화되었으며, 미군정은인민공화국을정부로인정하는것에대하여공식적으로거부하는입장을취하였다. 나아가급진적인민족운동전반이미군정의견제와탄압을받았다. 결국애초에군사상의편의적발상에서그어진 38 선은점차미소의지배권이라는정치적인구분선이되었고, 이것이사회경제적인단절로이어져마침내는분단정권의성립이라는민족적위기를초래하였던것이다. 지리적으로남양주지역은분단선과인접하고있어해방직후부터이러한냉전적 이념적대립의긴장이표출될수밖에없었다.

39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1 절민족의해방과정치상황 * 2. 미군정통치와남양주지역 해방후현남양주시는미군점령지역이었다. 당시남한에주둔한부대는미태평양육군산하제 24 군단이었고, 그지휘자는잘알려져있다시피하지 (John R. Hodge) 준장이었다. 미제 24 군단은 1944 년 8 월하와이에서창설되어오끼나와전투등에서공훈을세웠다. 종전당시오끼나와에주둔해있었던미제 24 군단에게한국점령의임무가부여된것은 1945 년 8 월 11 일이었다. 그리고긴급한준비를거쳐 9 월 8 일제물포에상륙함으로써 38 선이남에서미군의점령이시작되었다.* 미군점령은남한에대하여전혀무지한상태에서이루어진것은아니었다. 미국은태평양전쟁이발발한이래이미한국에대하여점령과함께과도적인신탁단계를거쳐국제연합의보호하에독립시킨다는일정한계획을수립한상태였고이는종전후에재확인되었다. 다만미제 24 군단의남한진주가결정된 1945 년 8 월부터공식훈령이하달된같은해 10 월까지사령관하지는본국정부의훈령없이독자적인판단으로정령체제를수립하였는데, 이같이임의적으로정책판단을해야했던하지는처음부터소련과의협조에부정적이었다. 이러한경향에서비롯된조치들은과도기적인것에그치지않고지속적으로대소련협조노선에문제를제기하면서, 역으로는본국의정책수립계통에영향을주었으며남한정국을좌우하는요인으로작용하였다. 미군의점령계획은 3 단계로이루어져있었다. 우선서울을점령하여중앙정부를장악하고지휘체계를수립한후, 2 단계로부산에, 그리고 3 단계로군산에상륙하여전주를점령하는것이었다.* 9 월 8 일제물포에상륙한미군은 9 월 9 일인천을점령하고서울로진주하였다. 그리고그날로아베총독의항복을받은미군은총독부의일장기를내리고성조기를게양하였다. 점령과군정수립과정에서보여준미군의태도는당시해방의분위기에들떠있던한국인들에게는찬물을끼얹는것과도같은실망을주었다. 점령과정에서일본군과전투 ( 함경북도일부 ) 를벌였고, 선언적인차원에서나마한민족이해방되었으며향후한반도운명의주인은한민족임을천명하였던소련군의진주과정과비교할때미군의진주는그야말로적국에대한군사적점령이었을뿐그이상으로는볼수없었다. 이는해방자로서미국의면모에대한불신감이싹트기에충분한것이었다. 그렇지만미국이한국을일본과같은적성국가로규정한것은아니었다. 점령이전부터적어도한국민은 장래에독립이보장된 해방민으로취급되어야한다는것이하지의입장이었다. 다만미제 24 군은점령이전조선총독부와의교신에서얻은악의에찬정보를통해소련이점령하고있던북한의상황과남한의치안상황에대해우려하게되었고이것이진주직후미군정의정책에그대로반영되었던것이다. 미제 24 군이남한의정세에대하여본국에보낸첫전문의내용은남한이 불만붙이면금방이라도터져버릴것만같은화약고 라는것이었다. 이보고는남한정세의급진주의적경향에대한우려라고볼수있으며, 또한편으로는미국이정치적인중립을지킨다면점령체제가순조롭지못할것이라는사실을암시하는내용이기도하였다. 결국이것은종전이전에합의된대소련합의노선이실현불가능함을본국정부에인식시키고, 특정한한국의정치세력에대한미군정의지지 지원을통해미군정의토착민기반을조성해야한다는것이었다. 나아가향후의한반도처리과정에서미국과미국이지지하는세력이주도권을지니도록해야한다는인식이깔린것이었다. 이로써미군정은성립초기부터미국정부의공식적인입장인과도적이고정치중립적이어야한다는것과는달리분명하게연속적이며정치지향적인조치를취하였다. 구체적으로이것은급진적민족운동세력과친소좌익의배제, 친일경찰의청산보류, 이승만 한민당지원이라는형태로표면화되었다. 이러한미군정의조치는 3 년간의군정기간에좌우대립과민족대반민족의대립이라는민족내부의갈등을심화시켰고종국에는분단정권의수립으로이어졌다. 중앙미군정의성립과함께 1945 년 10 월부터 11 월까지경기도각지역에도지방미군정이성립되었다. 현남양주지역을포함한양주군에주둔한부대는제 68 군정중대였다. 제 68 군정중대가관할한지역은양주를포함하여포천, 가평, 광주, 양평, 고양군등이었다. 제 68 군정중대는 1945 년 10 월 21 일인천에상륙, 미제 7 보병사단에배속되어 10 월 28 일군정수행을위해양주로출발하였다. 그밖의지역을보면포천에는 10 월 30 일, 가평에는 11 월 1 일, 고양과광주에는 11 월 2 일, 양평에는 11 월 3 일에이동하였다. 당시경기도군정본부는서울 ( 경성 ) 에있었고, 양주군관할군정파견대지구사무소 (district seat) 는의정부에있었다. 제 68 군정중대는지역에군정지구사무소를설치한후각주둔지마다파견장교 1 명과사병 3 명이하만을남기고 1945 년 11 월 6 일서울로철수하였다. 양주지구군정파견대의초임책임장교는헨리 (William M. Hanley) 중위였다 ( 후임존풀로스대위 ).* 이렇게양주지역을포함한경기동북부의미군정체제는 1945 년 11 월초반이면대체로성립된다. 다음은 1946 년 1 월 2 일제 68 군정중대의드빌 (Joseph I. DeVille) 중령이군정장관에게보낸보고서의일부이다. 관할내모든지역은농업지역이고양주에약간큰직물공장그리고그밖에소규모공장이있다. 포천에는오래된은광이있는데지금은폐광이다. 처리할행정업무가산적해있었지만일본인들은우리가도착하기전에모두쫓겨났다. 중대가처한가장어려운문제는언어장벽이다. 유능한통역이매우부족하다. 한국인들은일본말하기를거부하였는데일본어로사무를처리한경찰관조차도그러하였다. 이러한문제는유용한현지주민을고용하면서완화되고있다.* 위의보고서에서도알수있는것처럼지방주둔미군이부딪힌가장큰문제는언어장벽이었다. 그러다보니지방주둔미군은지역내에영어를할수있는한국인에게크게의존할수밖에없었고중앙에서와마찬가지로이른바 통역정치 의폐단이지방에서도나타났다. 또하나지적해야할것은지방미군정이기존일제의행정계통에어느정도의존하였다는점이다. 위보고서에도나와있는것처럼지방군정파견대가도착하였을때일본인은모두축출된상태였으나지방미군정역시중앙과마찬가지로지방경찰의 충분한 협조로행정을집행하였던것이다. 이러한과정을통해서해방직후에성립하여실질적인지방행정을담당해온인민위원회는사실상붕괴되기시작하였다. 특히서울과인접해있던양주지역의경우에는다른지방보다일찍토착인민위원회체제가붕괴되었을것으로추측된다. 미군정통치 3 년간은해방이후한민족주권이성립되기까지과도기적성격을지닌것이었지만, 그것은단순한과도기가아니라이후한국현대사를결정지어버린기간이었다고할수있다. 미군정통치는해방직후의폭발적인대중적정치열기를기반으로하여일어난급진적인혁명적민족운동을진압하고남한지역을미국의이해가반영된지역으로묶어두는데성공하였으며이과정에서친일잔재처리등의민족적과제는희석화되고말았다. 또한미군정은통일민족국가의건설이라는전민족적열망에서괴리된채단독으로성립한남한정권의모체가되었다.

398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1 절민족의해방과정치상황 * 3. 남북분단정권성립까지의정치상황 1948 년 8 월과 9 월남북에각각의정권이성립되었다. 불과 3 년전만하더라도한민족이라면이러한민족분단은누구도예측하지못하였고또꿈에서도상상할수없었던상황이었다. 분단정권의성립은그자체가격렬한민족내대립의산물이었을뿐만아니라, 한편으로보다처절한민족상잔을내포한것이었다. 해방초기좌우라는갈림에서서로대립했던다양한정치세력들이민족분단이가시화되자새롭게통일대반통일, 민족대반민족이라는계선으로재정비되었을만큼분단이라는문제는당시에가장핵심적이고사활적인민족문제로인식되었다. 종전후한국문제처리에대한미국의기본입장은 1943 년 12 월카이로회담이래연합국공동의신탁통치였다. 미소에의한분할점령이라는상황을예측하지는못하였지만미국의한국신탁방침은종전후에도변함이없었다. 남한에진주한미제 24 군사령부는 10 월까지구체적인점령정책훈령을받지는못하였지만미국의기본방침에대해서는이미숙지한상태였다 년 10 월하달된최초의기본훈령이었던삼부조정위원회 ( 三部調整委員會 ) 훈령 SWNCC 176/8 에는당훈령이일본의항복에서한국에신탁 (trusteeship) 이성립되기까지의임무를규정한다고하였는데이는미국정부의기본입장이신탁통치였다는것을분명히해주는것이었다.* 이에비해소련의입장은제안자였던미국만큼명확하지는않았다. 그러나소련역시미국이제안한신탁절차에반대하지않았고이는 1945 년 12 월모스크바 3 국외상회담에서도재확인된다. 모스크바 3 국외상회담은 1945 년 12 월 16 일개최되었다. 한반도의전후처리 에대하여미국과소련은처음에는상반된입장을보였다. 미국은기본입장에따라한반도에미 영 중 소의 4 개국신탁을실시하되약 10 년간실시한다는것이었고, 소련은미국이주도할것이뻔한이러한일방적인신탁방식과기간에반대하였다. 결국미국의안과소련의안이절충되어이른바 한국문제에관한결정 이채택되었다. 그내용의골자는우선한반도에임시한국정부를수립한다는것이었으며, 원조와협조형태의신탁을실시하되최장 5 년을초과하지않는범위에서실시한다는것이었다. 그리고임시정부의수립을위해서점령당사국인미국과소련이공동위원회를설치하여한국의정당사회단체와협의한다는것도결정에포함되어있었다. 즉시임시한국정부를수립한다는것, 이를위해미소공동위원회를설치한다는것은소련측제안이었고 4 개국신탁은미국측의기존안이었다. 모스크바결정은서로에게유리하지않은조항이함께포함된, 즉미소간의미묘한정치적입장차이가절충된산물이었다. 미국이소련의제안을받아들인것은신탁국을미 영 중 소로구성함으로써소련을제어할수있다는판단때문이었다. 반면에소련은미소공동위원회가정당사회단체와협의를통해서정부를수립하는것이좌익우세의한반도정세에서소련에유리하게작용할것이라고생각하였을가능성이크다. 그렇지만이러한절충성때문에모스크바협정은애초부터실현이불투명할수밖에없었다. 모스크바결정은문구상으로보면통일임시정부의우선적인수립을명시한것으로사실그초점이신탁이아닌 즉시독립 에맞춰진것이었다. 그리고적어도미소간에합의에의해산출된것이라는점에서실현가능성도보장된것이었다. 그러나미소점령군은점령직후부터해당점령지역의정치지형에깊숙하게개입하였고, 이러한상황은애초부터미소의합의에의한한반도처리에결정적인걸림돌이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협의대상이될것으로예측되는정당사회단체의좌우익구성은미국의이해와거리가있었다. 소련역시모스크바협정자체를결사반대하며소련을신탁제안자로악선전하면서반소운동을벌이는남한의우익정치세력을협의대상에대거포함시키려는미국의입장를받아들이지않았다. 결국 1946 년과 1947 년두차례에걸친미소공동위원회는끝내결렬되었다. 미소간의협상이평행선을그리며지체되는가운데남북한두지역에는과도적인정권기관이구성되어사실상정부역할을수행하고있었다. 북에는해방직후부터인민위원회가소련의후원아래행정권을행사하면서 1946 년 4 월토지개혁, 주요산업국유화등의여러가지개혁을단행하였다. 그리고 1946 년 10 월선거를통해임시인민위원회를인민위원회로재구성하였다. 남한역시 한국인화 (Koreanization) 라고불리는정책하에행정권한을한국인에게이양하는구상이실행되어 1946 년에이른바 남조선과도정부 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이구성되었다. 양점령지역에이처럼과도적정권조직이성립된것은, 점령지역에서자국의이해를확실하게보장하기위한미소점령당국의정책이반영된것이었으므로미소간의합의에기반한한반도의통일가능성은더욱더희박해졌다. 또한편민족내에서는혁명대반동의좌우대립이준내전상태로격화되면서평화적통일의길은더욱멀어지게되었다. 결국 1947 년미소간냉전이세계적으로확산되는가운데한국의독립문제는미국에의하여국제연합으로이관되면서분단정권의수립이가시화되었다.( )

39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1 절민족의해방과정치상황 * 남한선거 와대한민국수립 남한만의분단정권수립이가시화되자남한의광범위한정치세력은이에반대하며새로운정치적계선을형성하였다. 이러한움직임이현실화되어김구 김규식 홍명희등많은우파인사들이참여한가운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가평양에서개최되었다.( ) 그러나이러한노력에도불구하고남한선거는기정사실화되었다. 이미정읍발언 ( ) 을통해남한만의정부수립을주장한바있었던이승만은남한선거에대한반대는곧독립에반대하는반민족적인것이라고역설하였다. 선거에반대한수많은정치인사들과정당, 사회단체는경찰의탄압과우익청년단테러의표적이되었다. 당시남로당에서는 2 7 구국투쟁 을비롯하여 5 10 선거 에대한격렬한반대운동을벌였다. 양주군에서도 5 10 선거에반대한좌익세력이다수체포되어실형이언도되었다.* 1948 년 5 월 10 일에치러진남한선거는지향이다양한정치세력이활발하게활동하였던해방정국의양상과는대조적으로많은정치세력이참가를차단당하거나보이콧된가운데경찰과민보단 ( 民保團 ) 의삼엄한치안경계상태에서치러졌다. 선거에는등록유권자의 95.5%, 자격있는유권자의약 75% 인 748 만 7600 명이참가하였고 198 명의제헌국회의원이선출되었다. 세력별득표율을보면무소속이 42.5% 로가장높았고독립촉성회가 27.5%, 한민당 14.5%, 민족청년단 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1% 의순이었다. 이러한득표상황을보더라도 5 10 선거에참여한정치세력이매우제한적이었음을알수있다. 무소속의원의정치적성향이반이승만이라거나김구와김규식을대변한다는분석이있지만분명하지는않다. 현남양주시지역은당시양주을 ( 乙 ) 선거구에해당하는지역으로인구는 7 만 4315 명이었고여기에포함된면은진접 진건 화도 와부 미금 구리 노해면이었다.* 양주을선거구에서는 7 명이출마하여무소속의이진수가당선되었다.* 양주을선거구의선거상황과출마인별득표현황을보면다음과같다. < 제헌의회의원선거양주을선거구출마자별득표상황 > 성명 거주지 직업 경력 학력 소속정당단체 득표수 서울시서대문구 한국민주당 서울시종로구 대학졸 구리면인창리 김산 ( 金山 : 51 세 ) 남궁연 ( 南宮鍊 : 33 세 ) 안흥근 ( 安興根 : 53 세 ) 곽행서 ( 郭行瑞 : 42 세 ) 신형식 ( 申亨植 : 50 세 ) 구중서 ( 具重書 : 35 세 ) 이진수 ( 李鎭洙 : 39 세 ) 한국민주당청년부장극동기업주식회사사장농업농업경성도기공업회사대표농업서울약학대학이사장 서울시종로구출전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국회의원선거상황, 1971, 32쪽. 소학졸 대학졸 ( 日大 ) 계리사 조선민족청년단 선거를통해 1948 년 5 월 31 일임기 2 년의제헌국회가개원하였고, 7 월 20 일국회에서예상대로초대대통령으로이승만을선출하였다. 이에앞서 7 월 17 일대한민국헌법이공포되었으며해방 3 주년이되는 8 월 15 일대한민국이공식출범하였다. 남한에대한민국정부가들어서자북한에서도약한달뒤인 9 월 9 일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선포되었다. 절차상대한민국정부가국제연합의결의와선거감시그리고승인을거쳐서수립된반면북한정권은국제연합의한반도정권창출과정에정면대립하면서성립되었다. 국제연합은 5 10 선거에한반도거주민 2/3 의자유의사가반영된것은분명하지만 전국적대표성 인정은유보한다고하였다.* 그렇지만남한당국은대한민국이한반도의유일한정부라는것을천명하였다. 북한당국도남로당조직을통해소위연판장선거를남한에서실시하여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선출했다는것을명분으로북한정권이전한반도정권이라고주장하였다. 6,507 6,129 4,034 1,350 1,876 2,034 7,800

40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1 절민족의해방과정치상황 * 5. 전쟁전야 모스크바결정이발표되었을때만해도한국의독립은기정사실이었을뿐만아니라통일정부의수립역시당연한것이었다. 그러나모스크바결정을둘러싸고대립하는과정에서남북은미소점령국의영향하에서로다른정치질서를형성하였다. 북한은이른바민주기지론에입각하여사회주의적개혁을단행하면서사회개혁을가속화하였고, 이과정에서김일성의항일유격대세력중심의좌익주도권을확립하였다. 반면남한의정세는 혁명에대응하는 혼란의연속이었다. 미군정이남한혁명세력을제거하는과정에서는일제시기로부터그대로이어진 효율적인 경찰조직과서북청년단등청년단체가큰역할을하였다. 남한만의단독정권이가시화되자남한의정치지형은단정대반단정이라는계선으로재정비되면서많은우익민족주의들이단정에반대하였다. 그결과남한정권을구성한정치세력의폭은좁아지게되었으며, 이점이대한민국의정치적약점이자부담이될수밖에없었다 년에서 1949 년초까지남한에서는신생대한민국의존립자체를위협할정도로심각한일련의사건들이발생하였다. 제주도에서는 5 10 선거자체가실시되지못하였으며, 이후전쟁때까지유격전이벌어졌다. 또한여순사건 ( ) 은연대급에서일어난대규모의군반란으로신생정부로서는감당하기어려운사태였다. 대한민국의수립에만족하였던미국은대규모군반란과유격전이남한전역에서일어나자일단 1948 년말소련과의동시철군계획을철회하였다. 그리고미군사고문단의지휘하에여순사건진압작전에신속히돌입하는한편, 군내숙청과정에도직접관여하여군내좌익을일소하는데에도결정적인역할을하였다. 그만큼신생정부를향한격렬한무장반란으로부터대한민국을방어하는데에미국의역할은매우컸다고할수있다. 미국은위기상황이일단락된 1949 년 5 월부터주한미군을철수하기시작하였고 500 여명의군사고문단은그대로남겨두어한국군의작전 행정 인사 장비관리등을지휘감독하였다. 남한에서의유격투쟁은남로당의무모한소위 아성공격 ( ) 을상한점으로급격한하강곡선을그리고있었다. 수세적대응에도여력이없었던대한민국정부는반란이일단진압되고 1949 년 6 월미군이철수함과거의동시에북한에대한공세적대응으로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49 년 6 월부터 1950 년초까지 38 선옹진, 경기북부, 춘천등지에서무력충돌이빈번하게발생하는사태가벌어졌다. 당시의 38 선충돌은대대급이서로포격전을벌이면서상대방지역의 4 10 km지점까지진격해들어가는등소규모의단순한충돌을넘어서는상황까지벌어졌다. 현남양주지역은경기북부지역이었으므로 38 선충돌의영향을직접적으로받았다. 한편남북간의 38 선충돌외에도양주지역에서는은현면 광적면 남면등지에서야산대가활동하였고이들에의해유격전이벌어졌다. 남한이공개적 I 으로무력통일을내세운반면북한은평화통일공세를벌였다. 그러나북한의평화통일은대한민국정부세력을제외한나머지세력들과연대하여평화적통일을달성한다는것으로, 대한민국이존재하는한그자체로서평화적수단을절대시한것은아니었다. 북한은미국에의한일본의재무장에대해서민감하게반응하였으며, 남한의무력통일공세와맞물려서군사력을증강하고있었다.* 무력충돌과유격투쟁으로격화되었던 1949 년정세는 1950 년봄이되면서적어도표면적으로는폭풍전야와같이고요해졌다. 그러나제 2 대국회의원선거를앞둔남한의상황은농촌에서발생한정치불안의불씨를안고있었다. 농지개혁은이미기정사실화되고있었지만계속지연되는상태였다. 그런데현실적으로농지개혁보다심각했던것은식량문제로특히농촌절량농가문제는심각한지경에있다. 식량부족의원인은단순히자연적요인으로인한감량생산만이아닌미곡의대일본수출과연관되어있었다는점에서국제정치적차원의쟁점이었다 선거에서는무소속이대거당선되고기존의정당이모두 10% 이하의득표율을기록하면서이같은정세를반영하였다 선거에는제헌국회선거의두배에달하는 2209 명이출마하는등제헌국회의원선거때와다른양상을보였다. 양주을선거구의경우에도무려 17 명의후보가난립하였다. 선거결과는대한국민당으로출마한이진수가 5097 표로재선되었다. 양주갑선거구에서는사회당후보였던조시원 ( 趙時元 ) 이 14 명의후보와경합한끝에당선되었다. 60% 가넘는무소속의원의득표율은기존정당에대한불신과정국불안을반영한것이었으며이는바로제 2 대국회의파란을예고하는것이었다. 그러나제 2 대국회의활동은불과한달이채못되어전쟁발발로중단되었다.

40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2 절농지개혁 * 해방후한국의자본주의는농지개혁을실시하여자작농을창출하고, 귀속재산을불하하여개인자본가를육성하는두축에서발전의기틀을마련하였다. 이두가지개혁을통해지주층과일본인자본중심의식민지경제구조를해체하고광범한자작농과새로운자본가층을중심으로한근대적사회경제구조의창출이가능하였던것이다. 해방후한국사회에서지주제를해체하고농지를농민에게분배하는농지개혁을실시해야한다는점은당시어떠한정치사회세력도이의를제기할수없을만큼절박한문제였다. 해방후한국에서는일제시기의지주소작제가그대로지속되는가운데전국적으로농민경제가극도로열악한상황이었으므로남북한을막론하고농업개혁의필요성이절실했던것이다. 남양주는한국의농업문제를전형적으로보여주는지역이었다. 농지개혁당시남양주지역은양주군에속하였는데옛양주군에서는지주소작제가광범하게발전하였다 년 12 월말조사에의하면옛양주군은자작지가 4776 정보 ( 논 2357 정보, 밭 2419 정보 ) 인데비해소작지는 3 배이상인 1 만 7222 정보 ( 논 8942 정보, 밭 8280 정보 ) 에이를만큼지주소작제가발달하였다. 전체농가 1 만 7981 호중에서자작농은 1264 호로 7% 에불과하였다. 나머지농민들은소작을하면서살아갈수밖에없었다. 자작겸소작농이 4975 호였으며, 자기땅이전혀없는순소작농도 1 만 1600 호에달하였다. 또한소작농의호당면적은 1.06 정보이며, 자작농의호당면적은 0.28 정보에불과하였다.* 해방후부터 1946 년말사이에상당한토지가지주들에의해방매되었음을감안한다면옛양주군의지주소작제문제는위의통계수치보다더욱심각하였을것이다. 지주소작제는전국적인현상이었지만양주군의경우에도예외는아니었다.

402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2 절농지개혁 * 1. 농지개혁입법과시행 해방후한반도에서지주제가먼저해체된곳은북한이었다. 북한지역에서는사회주의국가인소련의군대가주둔하게되면서다수의지주층과그들을지원하는정치세력들이월남하게되었다. 이에따라사회주의세력중심의토지개혁이급속히실시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 년 3 월 5 일자로토지개혁법령을발포하였으며, 3 월한달안에토지개혁사업은완수되었다. 이에반해남한지역의농업개혁문제는간단하지않았다. 북한지역과반대로남한지역에는강력한지주층과그들의이해관계를반영하는한국민주당및보수적정치세력이존재하였고, 미군정은토지개혁에대한적극적인열의를가지고있지않았다. 정치권에서는격렬한좌우대립이, 농촌에서는지주와농민의갈등이심화되는가운데농지개혁문제는매우복잡한현상으로표출되었다. 그렇지만대한민국헌법에농지개혁의실시를명문화하였고정부수립이듬해인 1949 년 6 월 21 일 농지개혁법 이반포되어한국농업근대화의결정적계기가되는농지개혁이비로소실현될수있게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 이반포된뒤에도농지개혁의실행은뒤로미루어졌다. 그러다가 1950 년 3 월 10 일에그개정법이통과되어지지부진하던농지개혁은바야흐로현실화하게되었다 년 4 월 28 일에는농림부령제 18 호 농지개혁법시행규칙 이공포되었다. 그후농지개혁에관한대통령령제 375 호 농지분배점수제규정 이발표된것은한국전쟁이발발하기이틀전인 6 월 23 일이었다. 중앙에서농지개혁실무규정들이만들어진것을본다면그토록오랫동안논란이되었던농지개혁은막상실현되려는순간, 전쟁으로그기회를상실하게되었다고하겠다. 그러나최근의연구에서는중앙차원의지침이정비되기전부터이미각지역에서사실상의농지개혁이실시되었다는견해들이제기되고있다. 농지분배예정통지서 의배포등실제개혁이현장에서전개되었다는것이다. 즉, 조사된분배대상토지를분배농지로확정하기위해서 1950 년 2 월 3 일 농지소표취급요령 에의거하여전농지에대한실지조사가전국적으로일제히시작되었다. 농지소표 는농지개혁의근거가되는최초문서로각필지마다작성되었다. 작성된농지소표는경작자별로집계하여 농가별분배농지일람표 를 3 월 10 일까지작성하도록하였으며, 3 월 15 일부터 10 일간열람하게하였다. 이렇게해서분배가확정된농지는그농지의경작자에게분배예정통지서를교부하도록하였다.* 남양주지역에서사실상농지개혁이한국전쟁이전에실시되었는가에대해서는각지역에산재해있는자료들의수집 정리를통해보다구체적으로살펴볼필요가있다. 각지역마다차이는있지만전쟁이전의농지위원회회의록이나주요농지개혁관련기본장부들이남아있어이자료를이용한연구가진행되어야할것이다.

403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2 절농지개혁 * 2. 농지분배 농지개혁사업은농지의매수 분배, 농지대가의보상과상환, 분배농지의소유권이전의 3 단계로진행되었다 년말을기준으로하여옛양주군에서시행된농지분배상황을집계하면다음표와같다. 지목 논 < 양주군농지분배상황 > 매수농지귀속농지계 ( 현재, 단위 : 호 정보 ) 호수필지면적호수필지면적호수필지면적 16,173 3,287 1, ,373 3,520 밭 11,111 15,834 2, , ,980 17,414 2,901 계 32,007 5,954 2, ,787 6,421 출전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사관계자료집 3 집, 1984, 쪽. 옛양주군에서농지개혁에의해실제분배된면적은매수농지 5954 정보, 귀속농지 467 정보, 계 6421 정보이다 년말현재소작지가논 8942 정보, 밭 8280 정보로총 1 만 7222 정보였는데, 실제분배된농지는이에비해 37.3% 에불과한 6421 정보이다. 이는많은농지들이방매 은닉 전환등의방식에의해분배대상에서제외되었기때문이다. 해방직후부터 1946 년말사이의농지방매를염두에둔다면실제농지개혁의대상은매우축소되었다고간주할수있다. 양주군의농지분배에서확인되는특징은귀속농지가매수농지에비해상대적으로적다는점이다. 전국적으로분배된농지 69 만 4894 정보중귀속농지는 29 만 1431 정보이며매수농지가 40 만 3463 정보로서, 귀속농지의비중은 41.9%(1970 년말기준 ) 에달한다. 특히한국농업의중심지역인전라남북도에서는귀속농지가매수농지를상회하였다.* 그에비하면경기도지역은귀속농지의비중이적은편이며, 남양주지역은경기도에서도그비중이현저히낮다. 경기도의전체귀속농지는 1 만 5485 정보, 매수농지 7 만 7188 정보로전체분배면적 9 만 2673 정보에서귀속농지가차지하는비중이 16.7% 인데비해, 양주군의귀속농지비중은 7.1% 에불과하다. 양주군에는일본인지주의침투가적고국유지도상대적으로적었음을보여준다. 왜냐하면경기도지역은예전부터서울의명문양반가문과같은부호들이토지를소유하고지주제를경영하였으므로일본인지주의침투가용이하지않았기때문이다. 다음으로는남양주지역의농지개혁의구체적인상황을확인하기위하여면 리단위자료들을검토하겠다. 먼저진접면의각리별농지분배상황은다음표와같다. 리명 매수농지 < 진접면의각리별농지분배집계표 > 귀속농지 논밭소계논밭소계 장현리 47,003 58, ,897 13,236 4,406 17, ,539 내각리 35,195 74, ,069 3, , ,884 내곡리 52,376 90, ,295-6,312 6, ,607 연평리 65,343 73, ,877 6,369 4,187 10, ,433 부평리 32,023 33,240 65, ,263 팔야리 35,372 25,103 60, ,475 진벌리 25,297 20,176 45, ,473 금곡리 45,970 50,849 96, ,819 수산리 22,562 31,676 54, ,238 합계 361, , ,406 23,195 15,130 38, ,731 출전 : 진접면, 분배농지수배자조서. ( 단위 : 평 ) 진접면에서는 85 만 8731 평이분배되었는데, 정보로환산하면약 정보이다. 그중에서귀속농지가차지하는비중은매우적다. 9 개리중 4 개리에만귀속농지가존재하였으며, 분배된귀속농지의면적은 3 만 8325 평 ( 약 12.8 정보 ) 으로서전체의 4.5% 에불과하다. 양주군은전반적으로귀속농지의비중이적었는데진접면은그중에서도더욱그비중이낮았다. 진접면에서는일본인지주의침투가다른지역에비해약했던것이다. 현남양주시에인접해있는구리시 ( 옛구리면 ) 의경우매수농지가 81 만 4729 평, 귀속농지 87 만 6828 평으로귀속농지의비중이매수농지를상회하였는데 * 이것은이일대에서예외적인현상으로보인다. 그렇다면진접면에서는농가별로어느정도의농지를분배받을수있었을까? 다음표는진접면의각리별농가의평균분배면적이다. 진접면에서호당평균분배면적이가장많은곳은연평리로서약 0.5 정보에해당하는 1480 평이며, 가장적은곳은수산리로서 969 평에불과하였다. 진접면전체평균분배면적은 1140 평이다. 평균적으로 0.38 정보에불과한토지를분배받은것이다. 계

404 여기서농지개혁이농민의토지소유규모를비약적으로향상시켜주지못하였음을알수있다. 농촌지역의농업인구가과밀하였으며, 더욱이많은소작지가방매 은닉등에의해농지개혁대상에서제외되어각농가에귀속될토지의몫은적을수밖에없었다. < 진접면각리별평균분배면적 > 리명 농가수 전체분배면적 농가별평균분배면적 장현리 ,539 1,021 내각리 ,884 1,174 내곡리 ,607 1,054 연평리 ,433 1,480 부평리 58 65,263 1,125 팔야리 62 60, 진벌리 33 45,473 1,378 금곡리 83 96,819 1,166 수산리 56 54, 합계 ,731 1,140 출전 : 진접면, 분배농지수배자조서. ( 단위 : 호 평 ) 진접면장현리의경우 500 평이하를분배받은농가는 35 호 (28.9%) 이었으며 2000 평이상의농지를분배받은농가도 14 호 (11.6%) 에불과하다. 그구체적인상황은다음표와같다. < 진접면장현리수분배농가의분배면적별현황 > 분배면적 수분배농가 ( 호 ) 1 500평 ,000평 39 1,001 2,000평 33 2,001 3,000평 8 3,001 4,000평 5 4,000평이상 1 계 121 출전 : 진접면, 분배농지수배자조서. ( 단위 : 호 평 ) 남양주지역에서농지개혁에관한종합적인보고자료가보관된곳은미금읍이다 년말작성된 농지개혁사관계자료보고서 ( ) 를통해농지개혁의실상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위자료의 귀속 매수별분배농가표 에의하면총 1251 호중에서귀속농지만을분배받은자는 73 호, 매수농지만을분배받은자는 1030 호이며, 귀속및매수농지를함께분배받은자가 148 호였다.* 여기서귀속농지는모두법령조약에의한일반귀속재산이었다. 즉, 귀속농지표 에의하면, 진접면의귀속농지밭 320 반보, 논 100 반보, 총 420 반보중에서소유권자불명의것, 즉소유권자의유무또는국적등이불명한것 ( 不在者의뜻과는다름 ) 으로귀속농지에속한것은없었다.* 또한 분배면적법 에서매수농지로규정하는농지는다음과같이다양하였다. 법제 5 조제 2 호와시행령제 10 조에따르면다음의농지들은매수대상이된다. 제 5 조제 2 호가, 나 : 비자경자로서매수된것제 5 조제 2 호다 : 소유한도를초과하여매수된것제 5 조제 2 호나 : 지방자치단체소유로서매수된것제 5 조제 2 호나 : 문교재단소유로서매수된것제 5 조제 2 호나 : 사찰소유로서매수된것시행령제 10 조 : 국유농지 매수농지표 에따르면, 미금지역에서매수된농지는비자경자의토지로밭 2189, 논 2925, 계 5114 와국유농지밭 24, 논 13, 계 37, 총밭 2213, 논 2938, 계 5151 이었다. 여기서비자경자소유는부재지주및동일읍면내에있으면서도타인에게경작케하고있는자의소유지이며국유농지는농지개혁실시당시국유로등기된농지와국유의도로 하천 잡종지 임야등으로서실시농지로분배된것을말한다.* 한편매수농지에서제외되는지목들이있었다. 농지개혁법 의다음항목들이다. 제 6 조제 1 항제 4 호 : 사용목적변경인허농지제 6 조제 1 항제 5 호 : 공인 ( 公認 ) 단체자경인허농지제 6 조제 1 항제 6 호 : 특수목적사용인허농지제 6 조제 1 항제 7 호 : 위토 ( 位土 ) 인허농지제 6 조제 1 항제 8 호 : 미완성개간간척농지

405 이중에서미금읍에서는밭 472 반보, 논 505 반보, 계 977 반보가위토인허농지로서매수대상에서제외되었다.* 다음으로 분배순위별분배농가표 에의하면미금읍에서는 농지개혁법 제 11 조에규정된분배순위중 1 순위에해당하는 당해농지경작자 만이농지를분배받았다. 본래 농지개혁법 제 11 조에의하여농민들은다음과같은순위에따라분배받도록규정되었다. 제 11 조제 1 호 : 당해농지경작자로서분배받은자제 11 조제 2 호 : 경작능력에비하여과소농가로서분배받은자제 11 조제 3 호 : 순국열사유가족으로서분배받은자제 11 조제 4 호 : 피고용농가로서분배받은자제 11 조제 5 호 : 국외귀환농가로서분배받은자 위와같이다양한자격에따라분배가이루어지도록규정되었으나실제로미금읍에서분배받은농가 1251 호는모두제 11 조제 1 호의당해농지경작자의자격으로분배받은것이다. 이는농지개혁이자신이소작하던농지를그대로그소작농의농지로인정하는매우단순한방식으로실행되었음을반증한다.*

406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2 절농지개혁 * 3. 피분배지주 농지개혁은농지를분배받는농민에게는자작농이되는사회적상승의기회를제공하였지만, 본래농지를가지고있으면서소작을주던지주들에게는비록유상매수이기는하지만자신의농지를포기해야하는사회적하강의계기가되었다. 일제시기양주군에는수많은대지주들이지주제경영을하고있었다 년시점에 30 정보이상의농지를소유한대지주들가운데양주군관내에농지를가지고있던지주는총 40 인 ( 일본인및회사포함 ) 이었다.* 이들중최대지주는사업가전형필 ( 全鎣弼 ) 이다. 그는양주군관내에서만 200 정보의토지를소유하고 679 명의소작인을두었다. 그는양주군외에도경성 고양 광주 여주 이천 시흥 개풍등에도토지를가지고있었으며총소유면적은 613 정보에달하였다.* 전형필을비롯하여양주군에대토지를소유하고있는대지주들은대부분경성 ( 서울 ) 에거주하는부재지주들이었다. 양주군안에거주하는대지주는한승석 한문석 우수익 입강상조 ( 入江常造 )* 4 명에불과하였다. 한가지유의할점은위의명단에등장하는대지주들이곧농지개혁당시의대지주라고단정할수없다는것이다 년이후몰락하여대지주대열에서탈락하거나새롭게대지주로성장한경우가빈번하기때문이다. 예를들어, 진접면의농지개혁자료를보면약 4 만 5000 평 (15 정보 ) 의농지를소유하면서동시에경기도의포천 가평 고양 여주, 충청남도의예산 서산등지에방대한농지를소유하였다가논 14 만 3499 평, 밭 17 만 8721 평, 총 32 만 2220 평 (107.4 정보 ) 을피분배당한법인지주광동 ( 光東 ) 학원이있다.* 이러한대지주들은이외에도상당수존재하였을것으로추측된다. 남양주에서농지를수용당한지주들의성격을좀더구체적으로확인하기위하여조안면 ( 당시와부면소속 ) 능내리의 분배농지대장 ( 총괄 ) 을통해이지역피분배지주들의거주지별분포를살펴보기로하겠다. < 능내리피분배지주의유형 > 지주속성피분배지주수피분배필지수 능내리거주지주 7 51 경기도인접지역거주지주 4 16 비고 : 기타는수종사소유지이다. 출전 : 조안면산업계, 분배농지대장 ( 총괄 ). 서울거주지주 6 97 면유지 1 5 기타 1 12 미상 3 계 면유지와수종사 ( 水鍾寺 ) 소유지를제외하고능내리에서농지를수용당한일반지주는총 17 명이다. 능내리안의재촌지주는총 7 명으로그들이분배당한필지는 51 필지 (27.4%) 에불과하였다. 부재지주는 10 명인데, 그중경성에거주하는지주가 6 명이고, 경기도인접지역에거주하는지주는 4 명으로, 이들은양주군의와부면팔당리 조안리와구리면및광주군에거주하였다. 특히경성에거주하였던이은호 ( 李殷鎬 ) 는전체피분배필지수 186 필지가운데 79 필지를소유하는대지주였다. 이은호를비롯하여서울에거주하는부재지주 6 명이 97 필지 ( 전체의 52.2%) 를점하였다 년당시양주군의농지 30 정보이상을소유하고있었던대지주 40 명가운데 36 명이경성거주자였으며, 능내리의사례에서도최대지주는역시경성거주자라는점에서알수있듯이, 남양주지역의농촌은그지역농민들의땅이아니라경성에거주하는대지주들의경제적기반이었던것이다. 그런점에서농지개혁은지주로부터농민에게토지를이전시켰을뿐만아니라지방의사회경제가서울에대한종속성에서벗어날수있는가능성을제공해준것이기도하였다. 한편, 앞의능내리 분배농지대장 에서한가지또다른사실을확인할수있다. 피분배지주이면서동시에수배농가인경우가보이는데예를들어, 능내리거주자정규동 ( 丁奎東 ) 은밭 27 평을분배당했으나동시에 3 필지 519 평을분배받은농민이기도하였다. 또한능내리거주자김선향 ( 金仙鄕 ) 은서울지주이은호로부터밭 327 평을분배받았으나, 밭 147 평을분배당해같은능내리의노홍근 ( 盧洪根 ) 에게넘겨주었다. 이처럼피분배지주이면서동시에수배농가인사례가발생한이유는토지와주거지의거리문제로가까운토지를소작하고먼거리의자기토지를소작하게한경우등으로추측된다. 따라서농지개혁당시피분배당한지주들가운데는지주계급이라기보다는오히려농민계급으로간주해야할인물들이포함되었음에유의해야할것이다.

407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2 절농지개혁 * 4. 농지상환과소유권이전등기 농지개혁은유상매수유상분배, 즉대상농지를국가가유상으로사들여서유상으로분배하는원칙에따라이루어졌다. 농지를분배받은농가는그농지의대가 ( 땅값 ) 를정부에납입해야했는데이를 상환 이라고한다. 상환액은매수농지의평가액 ( 농지개혁법 제 7 조 ), 즉지주에대한보상액과같다. 농지를분배받은농가는이금액을 5 년간 ( ) 균분해서매년정부가지정하는현물또는대금으로지정된장소에납입해야했다.( 농지개혁법 제 13 조 ) 정부가수납한매수농지의상환액은지주에게지불되는일반보상과특별및부속시설보상금으로쓰이며귀속농지의상환액은정부또는지방자치단체가실시하는농가개량사업을비롯한각종농업개발사업비로쓰였다.* 한편, 각농지마다농지상환액을책정하기위해서는합리적인기준이필요하였다. 이를위해정부는일반농지를평가할때공통배율제 ( 共通倍率制 ) 를채택하였다. 이는임대가격 ( 임대등급 ) 대비제로서각구 시 읍 면별로선정한표준중급농지의평년작생산고의 1.5 배를법정곡가 (1949 년 ) 로환산한것이그농지의토지대장상임대가격의몇배가되느냐를정하여그배율을각농지의임대가격에일률적으로곱하여산출하는방식이었다.( 농지개혁법 제 7 조제 1 항제 1 호, 농지개혁법 시행령제 조 ) 공통배율 = 중급농지평균생산고 1.5 법정가격 중급농지임대가격 이상의공식에의해서각시 구 읍 면별공통배율이결정되었다. 화도면의예를들면, 공통배율표는다음과같다. < 분배농지상환시남양주지역의공통배율표 > 구분 / 지역 공통배율 임대가격 1 원당석수 ( 石數 ) 논 중급농지반당임가 ( 원 ) 반당생산고의 15 할석수 임대가격공통배율 중급농지 1 원당석수 밭 반당생산반당임가 ( 원 ) 반당생산고의 15 할석수 별내 진접 진건 화도 와부 미금 비고 : 논은벼, 밭은보리 ( 대맥 ) 가기준곡물이다. 출전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사관계자료집 1집, 1984, 80쪽. 이상의기준에입각하여각농가들은자신에게부과된상환액을현금또는현물로납부해야했다. 본래납부기한은 1954 년도까지였으나전쟁을비롯한여러가지사정으로인하여농민들은상환액을제때에납부하기어려웠다. 미금지역의연도별농지대가상환추세는다음표와같다. 표에서확인되듯이, 미금지역에서는 1954 년도까지일부만이수납되었으며, 특히전쟁기간의수납량이저조하였다. 연기된상환문제는귀속농지의경우 1961 년도까지완료되었으며, 매수농지는 1961 년부터 1963 년까지 3 년간상환액징수가유보되었다가, 1964 년부터다시징수하기시작하여 1967 년에완료되었다. 농지개혁이실시된 1950 년이후 17 년만의일이었다. < 미금읍의농지대가상환액정산집계표 > ( 단위 : kg *) 연도 귀속농지 분배농지 연도 귀속농지 분배농지 , ,308 11, , ,167 18, , , ,048 63, , , , , , , , , , , , ,660 75, , , , ,258 계 73,648 1,720,703** 비고 : * 현금또는잡곡으로환산한경우도있으나, 모두벼의무게로환산한수치이다.

408 ** 매수농지에대해서는 1 만 40 kg이과오납되어농가에반환하였으며따라서총수납량은 171 만 663 kg이다. 출전 : 미금면, 농지대가상환액정산집계표, 농림부농림국. 한편, 보상을신청한지주에게는정부가지가증권 ( 地價證券 ) 을교부하였다. 본래농지개혁법시행령제 15 조에는 지가증권은 1950 년 5 월 31 일이내에교부 한다고규정하였지만, 실제로는이행되지못했다. 5 월까지도정부기관은지가증권을교부할만한행정능력을갖추지못한상태였으며, 더욱이 6 월에들어서는한국전쟁이발발하여지가증권을교부할기회를놓쳤기때문이다. 지가증권교부는 1 4 후퇴직후인 1 월 9 일에가서야농림부공문 농지제 1 호지가증권발급에관한건 에입각하여부산에서시행되었다. 피란지부산에서많은지주들은호구수단으로지가증권을액면의중간치이하로방매할수밖에없었다. 결국지주들에대한농지보상의목적으로발행한지가증권은지주들이산업자본가로전환하는데기여하기보다, 다른사업가들의손에헐값으로넘어가게되어이들을중심으로한자본축적이이루어지는상황을초래하였다.* 농지개혁사업은이상의농지의매수 분배, 농지대가의보상과상환으로끝난것이아니라, 농지를분배받은농민이소유권이전, 등기하는절차를거쳐야했다. 수배농가에대한소유권리의이전, 즉소유권이전등기는농지개혁사업의마지막마무리단계이다 년 8 월 31 일농림부는대법원과합의하여 분배농지소유권이전등기취급요령 * 을제정하여각시 도에시달했다. 이요령은상환을완료한분배농지의소유권이전등기에대한구체적절차와시행방법을규정한것으로서, 그특징은모든절차를 부동산등기법 에따르되분배농지등기의특수성을감안, 가급적간편하게처리되도록한점에있었다.* 그러나등기사무의전문성이부족하고 1954 년까지는법정상환기간내에일시상환을하는농가도극히적었으므로등기실적은 1954 년까지이전과부속등기를합해전국적으로모두 4325 건에불과하였다.* 법정상환기간이끝난 1955 년부터는등기업무도본격화되었으며등기대상건수도대폭증가하였다. 그러나일선행정에서는여전히처리능력에한계가있었다.* 1959 년 11 월말현재분배농지이전등기는전국적으로총수배농가 155 만호중에 65 만호가끝났는데미등기농가 90 만호중의 50% 인 45 만호가전매매 ( 轉賣買 ) 농가로추산되었다.* 법적규제에도불구하고미등기농가의 50% 인약 45 만호에이르는전매농가가발생한이유는다음세가지로정리할수있다. 첫째는불의의한국전쟁으로원수배자 ( 原受配者 ) 가사망또는행방불명된경우이다. 둘째는농촌경제의극심한변동으로농지를방매하고이농하는현상이현저하게나타났다. 셋째는소규모농지를분배받은영세농가의탈농으로농지의편중화가진행되었기때문이다. 이러한농지이동의결과분배농지를인수하여경작하고있는사실상의소유농가이면서도현행법상자신의명의로등기를할수없는실정이었던것이다. 한편, 정부는상환을완료한분배농지에대하여농지개혁사업의조속한종결을위해등기이행을권장 독려하고있었으나전매한당초의수배자가이미이농했거나소재불명인경우가태반이었다. 정부는전매농지에대한대책을신중히검토한결과상환을완료한농지는이를매수한자가실지경작자로서소유면적이 3 정보를초과하지않는적격농가인경우소유권을이전해주는것이농지개혁의취지에서볼때현실적인해결방안이라고결론지었다. 이에따라한시법 ( 限時法 ) 으로전문제 3 조부칙의 분배농지소유권이전등기에관한특별조치법 을마련하였다. 이법안은 1961 년 4 월 27 일국회본회의에서만장일치로통과되었다. 정부는국회에서이송되어온이법을 1961 년 5 월 5 일자법률제 613 호로공포하였다. 이법률은원래분배받은농가가소유권이전절차를마치지않은상태에서그농지에대한권리를타인에게양도하여분배받은농민과현소유자가다른경우소유권이전문제를해결하기위하여마련된것이었다. 이법의적용을받고자하는자는농지위원회의승인을얻어발부하는 상환완료증명 이나사실상의소유를증명하는서면을제출하도록하였다.* 미금읍에서는 1968 년 12 월 31 일현재등기신청한것까지를포함하여전매매분배농지이전등기건수가 1547 건에달하였다. 분배농지소유권이전등기에관한특별조치법 에의하여전매매이전등기된건수가 1519 건이었다. 이는상환완료후전매한토지를대상으로한다. 그리고 농지개혁사업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 에의하여처리된전매매이전등기토지는 28 건이었다. 이는상환완료전후를불문한것이다. 그리고 전매매분배농지이전등기건수표 ( 법제 15 조 ) 에수록된등기건수를포함하여미금읍에서분배농지소유권이이전등기된건수는 2725 건이었다. 이중 2683 건이등기이전에완료되었고, 42 건은 1968 년 12 월 31 일현재미완료상태였다.* 농민에게소유권이이전된건수가 2725 건이지만, 이중에서전매매에의한이전등기가 1547 건으로 56.8% 에달한다는것은, 농지개혁의근본취지인 경자유전 ( 耕者有田 ) 의이상을무색하게하였다. 매수농지의상환부담및농가들에부과되는각종조세, 영농정책의부재등으로인해수많은농가들이지주로부터매수한농가를포기해야했던사정을짐작할수있다. 정부수립후농지개혁은순탄하지못하였다. 개혁이실시되기이전에지주들이농지를사전방매하거나위장등록등의방법으로농지개혁의대상에서빠져나갔으며, 한국전쟁이일어나개혁사업이위기에처하기도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농지개혁을통해지주계급이소멸함으로써지주 소작인관계를기반으로하였던식민지구조가근본적으로해체되었다는점자체는부인할수없는농지개혁의역사적의의이다. 다만농지개혁에서본래의도했던취지는이후제대로실현되지못하였다. 경자유전의원칙은농민의몰락과이에따른재생소작제의부활로손상되었다. 농민들의삶의질을향상시키고농업을발전시키고자하는의도는정부의과중한토지세부과, 저곡가정책, 외국잉여농산물의도입등의결과로농업생산이정체됨에따라굴절되었다. 또한지주들이근대적산업자본가등으로재기하는데주목적을두었던지가증권의발행은한국전쟁의혼란속에서지주들이아닌다른사업가들의자본을축적하는데도움이되었고지주들자신은몰락하고마는결과를초래하였다. 일제시기부터근대적기업경영의훈련을쌓거나미국유학등으로해방후의사회변동에빨리적응할수있었던일부지주들만이새로운사회의주역으로계속자리를잡을수있었다. 이러한한계에도불구하고농지개혁은지주층의소멸, 농민의도시노동자화를촉진하는가운데본격적인한국자본주의발전의토대를마련하는일대사건이었던것이다.*

409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3 절한국전쟁 * 제 3 절한국전쟁 * 1. 개전과인민군점령 한국전쟁은 1950 년 6 월 25 일인민군의남침으로시작되었다. 개전초인민군의공격목표는서울점령이었다. 그러므로공격에투입된인민군 2 개군단의작전도여기에초점이맞추어졌다. 서부전선의인민군 1 군단 3 사단과 4 사단은연천 운천에서의정부를거쳐서울에이르는공격축선에, 인민군 1 군단 1 사단은개성에서문산을거쳐서울에이르는공격축선에투입되었다. 동부전선의인민군 2 군단도춘천 가평 남양주를거쳐서울로이어지는공격축선에투입되었다.* 6 월 28 일인민군정예부대인 1 군단 3 사단과 4 사단이 105 전차연대의지원하에국군의주력이투입된동두천 의정부 미아리로이어지는방어선을뚫고서울에진입하였다. 이시점에개성에서남하한인민군 1 군단 1 사단도국군 1 사단과격전을치르면서파주문산을거쳐봉일천에서교전중이었다. 그런데동부전선에투입된인민군 2 군단 1 사단과 12 사단은국군 6 사단의선방으로춘천에서진격이지연되어, 인민군 3 사단과 4 사단이서울을점령하는시점에는겨우홍천북방에진출해있었다.* 인민군주력이남양주에이르기전인 6 월 28 일국군이한강이남으로후퇴하였기때문에, 개전초남양주지역에서는서울서북부에위치한파주 의정부지역과달리큰전투가벌어지지는않았다. 서울을점령한인민군은 3 일간머무른후, 6 월 30 일부터한강도하작전을펼쳤다. 이는미군이증원되기전에한강을건너평택 안성 충주 제천 영월선까지진출한다는작전계획에따른것이다.* 인민군은 7 월 3 일한강방어선을돌파하고, 4 일새벽에는한강남안에서남쪽을향하여공격을개시하였다. 전세가계속악화되자미국은 7 월 7 일유엔총회의결의를거쳐유엔군사령부를설치하고, 7 월 13 일일본에있는미 8 군사령부를남한으로이동시켜유엔군사령부역할을수행하게하였다. 유엔군사령관은미 8 군사령관워커가겸임하였다. 인민군의남진은계속되었다. 개전 50 여일이경과한 8 월 15 일경에는마산 왜관 포항선까지진출하였다. 이제낙동강을경계로하여유엔과인민군간의치열한전투가전개되었다.* 한편인민군점령하에들어간남양주에서는다른지역과마찬가지로인민위원회가조직되었고, 북한의전시동원정책에따라의용군모집사업이이루어졌다. 그리고주민동원이이루어졌는데남자들은남양주와양평을이어주는양수리다리복구작업과퇴계원방면의작업에, 여자들은이들의식사를제공하기위하여동원되었다.* 화도면 ( 현수동면 ) 운수리지역에서는청년들을중심으로반공투쟁조직대한민국백혼대 ( 白魂隊 ) 가조직되었다. 주도인물은당시운수초등학교에서교편을잡고있던이필용 ( 李弼鎔 ) 과대한청년단감찰부장을역임한윤순종 ( 尹順鍾 ), 그리고같은마을사람인김대영 ( 金大泳 ) 이었다. 이때같은운수리에사는김재선 ( 金在善 ) 이완의 ( 李完儀 ) 조영명 ( 曺永命 ) 변지준 ( 卞志俊 ) 윤천복 ( 尹千福 ) 등이뜻을같이하였다. 윤순종을대장으로하는백혼대가정식으로결성된것은 7 월 15 일이었다. 그러나백혼대는인민군치하에서는구체적인활동을펼치지못하고, 대원을늘리면서조직을강화하는데치중하였다. 즉, 유엔군의북상이본격적으로시작되는 9 월말이전까지는운수리사람들을중심으로인근입석리 지둔리일대의청장년을차츰규합, 외곽조직을강화하면서조직을정비했던것이다. 이기간에백혼대는인민군에협력했던인사들의동향을조사하거나, 태극기를비롯한각종반공포스터 삐라등을제작하는데힘썼다고한다.* 백혼대가본격적인활동을시작한것은 9 월 28 일유엔군이서울을탈환하고, 한국해병대가남양주에진입한 10 월초부터이다. 10 월 1 일백혼대는이미만들어놓은반공포스터 삐라수천매를운수리일대를포함하여마석우리 금곡리등지에살포하여우선주민들에게달라진전황을알렸다. 그리고이날밤 15 명의대원이모여, 향후투쟁방향을협의한후구체적인활동에나섰다. 10 월 1 2 일경윤순종대장을포함한 3 4 명의대원들은지둔리에서퇴각하는인민군으로부터장총 따발총 수류탄등군수물자를노획하였다. 당시인민군은철수하면서반공인사에대한학살을자행하였는데, 백혼대는 10 월 2 4 일에는마을의청장년을피신시켜희생을막는데전력을기울였다. 그리고패주하는인민군 1 명과여자빨치산 1 명을검거하여군부대에인계한적도있었다. 유엔군과국군이진주한이후에는인민군점령당시인민군에협력한인물 50 명의명단과그활동내력을당국에넘겨주었다. 이밖에인민군이물러나면서마을에들어온사람들의신원을파악하고임시통행증을발급하는등의활동을하였다고한다.*

410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3 절한국전쟁 * 2. 한국해병대의남양주전투 1950 년 9 월 15 일유엔군이인민군후방깊숙한곳에기동타격을가한인천상륙작전이성공하면서전세는일거에역전되었다. 상륙작전에성공한유엔군은서울을향하여진격하고, 낙동강전선의인민군은패퇴하기시작하였다. 9 월 25 일새벽 6 시국군 17 연대와미 32 연대는한강도하작전을실시하여서빙고와보광동 한남동일대에진출하였고, 자정무렵에는한양대학교부근의살곶이다리와무학봉 화양리까지진출하였다.* 9 월 26 일국군 17 연대는 3 대대를앞세우고뒤에 1 대대를따르게하여아차산줄기를따라북진하였다. 오후반나절이지나서용마봉을점령하고다시그북쪽 292 고지를확보하였다. 26 일저녁국군 17 연대 1 대대와 3 대대는망우리고개에도착하여경춘국도를차단하였다. 당시진격하는국군 17 연대병력과후퇴하는인민군병력은불과 m 를사이에두고혈전을벌이기도하였다.* 이날밤 11 시부터 4 시간동안망우리고개에서국군과인민군간에격전이전개되었다. 1 개대대병력의인민군이국군 2 개대대사이를파고들었기때문이다. 국군과인민군쌍방이큰손실을입었으며, 인민군은 500 여명의병력손실을입고후퇴하였다.* 그렇지만국군은추격전을펼치지않았다. 당시유엔군의당면한작전목표는서울탈환이었으므로, 이목표에충실하기위해망우리고개이동지역으로의진격은허용되지않았기때문이다.* 해병대북한강지구전첩비 9월 28일서울이탈환되자, 이틀후인 9월 30일남양주지역의인민군에대한추격전이개시되었으며, 이작전에는한국해병대사령부의지휘하에한국해병 1 2 5대대병력이투입되었다. 이작전은서울외곽의인민군을더욱바깥으로밀어내어, 서울을안정적으로확보하기위해서였다. 9월 30일오후한국해병대는서울을출발하여망우리까지진출하였다. 이때한국해병대의우측에는미보병 7사단이, 좌측은미해병 1연대가위치하고있었다. 10 월 1 일한국해병대사령부에는미해병대의함포및항공지원연락장교가도착하였다. 이들은한국해병대의단독작전수행에필요한함포및항공지원을담당하기위해서였다. 그리고미해병 7 연대에배속된한국해병 5 대대병력도한국해병대사령부로원대복귀하여남양주작전에투입되었다. 10 월 2 일한국해병 2 대대와 5 대대는아침일찍미 7 사단으로부터작전지역을인계받고, 5 대대는북쪽에 2 대대는남쪽에배치되었다. 그리고오전 10 시망우리고개를넘어경춘가도로진입하였다. 이들의공격목표는양수리와마석우리동쪽 5 km의경춘가도와한강연안을따라남으로형성된도로에주둔하고있는인민군을섬멸한다는것이었다. 그런데부대가구리인창리와교문리그리고남양주의도농리일대로진군하였을때, 도농리남쪽의고지로부터인민군의공격을받았다. 이는전혀예상치못한상황이었다. 인민군병력은 1 개연대규모였으며, 한국해병대는이들과교전하였다. 해병 2 대대는인민군에대한반격을펼쳐인민군을격퇴하고, 가운리와마산리까지진출하였다. 전투과정에서해병 2 대대 8 중대가고전하였으나, 5 대대의박격포화력지원을받아무난히목표한고지를점령할수있었다. 이전투에서인민군은 200 여명이사살되고 50 여명이포로로붙잡혔으며, 해병대도 16 명이전사하고 63 명이크고작은부상을입었다. 일시후퇴한인민군은병력을수습하여퇴계원리동쪽 2 km지점인진관리일대를거점으로삼은다음, 배양리일대에집결하였다. 인민군은한국해병대의진격을막기위해지금리 113 고지를선점하려는것으로보였다. 이에해병 5 대대는이지역에집중포격을가한후지금리 113 고지를먼저점령하여진지를구축하였다. 10 월 3 일에는해병 2 대대가금곡을점령하고이어계속진군하여부근의고지를확보한다음양정리로이동하여진지를구축하고경계태세에들어갔다. 이날해병 1 대대병력도남양주덕소에투입되었다. 해병 1 대대는미 7 사단에배속되어양주군일대에서패잔병처리임무를수행하다가새로운작전명령을받고이날금곡에진주한것이다. 10 월 4 일해병 5 대대는아침일찍경춘가도를따라전진하였다. 정오무렵에는마석우리까지진출하였으며, 계속동쪽으로전진하여북한강연안의답내리까지확보하였다. 한편해병 1 대대도 4 일덕소를출발하여북한강연안을따라오후늦게예봉산 ( 禮峯山 ) 남동쪽 6 km지점의족자도일대와송촌리까지진출하였고, 그과정에서인민군포로 27 명을후송하였다. 한국해병대는 10 월 5 일목표지역을모두장악함에따라, 10 월 6 일아침일찍작전을종료하고, 이날인창리에있는한국해병대사령부로집결하였다. 그리고새로운작전명령에따라인천으로이동해갔다. 9 월 30 일에서 10 월 6 일사이에펼쳐진한국해병대의남양주지역작전이성공적으로완료됨에따라, 서울동북방방어선이안정적으로확보될수있었다.* 그리고한국해병대가남양주에서전투를벌이고철수한이후인 10 월 9 일수동면내방리비금동밤나무골에서한국경찰대와퇴각하는인민군사이에전투가벌어졌다. 이전투에는남양주지역의향토방위대원들도참여하였는데, 중과부족으로경찰대와향토방위대병력 19 명이전사하였다.* 9 월 18 일서울탈환을전후한남양주일대에서의전투로남양주일대주민들은큰피해를입었다. 9 월 26 일망우리전투당시남양주주민들은교전을피해아차산으로피난하였으나, 그과정에서많은피해를입었던것이다.*

411 제 1 권역사 제 2 편역사 제 9 장민족해방과분단 제 3 절한국전쟁 * 3. 중국인민지원군의참전과 1951 년전황 10 월 1 일국군이 38 선을넘어북진하였다. 하루전날중화인민공화국의주은래수상은미군이북진할경우중화인민공화국도한국전에참전할것임을경고하였고, 이는 10 월 3 일미국에전달되었다그러나미국이이를무시하고북진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10 월중순 항미원조보가위국 ( 抗美援朝保家衛國 ) 의기치를내걸고중국인민지원군으로하여금한국전에개입하도록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의참전으로전세는다시역전되었다. 압록강까지진출한유엔군은후퇴를거듭하였다. 12 월 8 일유엔군은임진강과 38 도선을연결하는방어선까지후퇴하였다 년 12 월 31 일해가지자, 이미 38 선북쪽까지진출해있던중국인민지원군은일제히 38 선을돌파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은서울점령을목표로하였다.* 미제 25 사단한강도하기념비 1951 년 1 월 1 일유엔군은중국인민지원군의공세에밀려미 1 군단과 9 군단을서울외곽북방으로이어지는교두보선, 즉행주와의정부그리고남양주의퇴계원으로이어지는선으로철수하였다. 국군은그보다더남쪽인한강선까지철수하였다.* 1 월 2 일에도유엔군은전전선에서퇴각을계속하였으며, 일부부대는고양 도봉산및수락산을연결하는선에서주력의철수를엄호하고있었다. 1 월 3 일중국인민지원군 38 군과 49 군은수락산일대에주둔중인미 24 사단 17 연대를공격하였다.* 그리고앞서영평 화천지역에서국군 2 사단과 5 사단을저지선을돌파한중국인민지원군 66 군이 42 군의지원을받아가평남쪽까지진출하였다. 66 군과 41 군의선두부대가진출한곳은퇴계원일대를방어중인미 1 기병사단에서 25 km떨어진지점이었다. 더욱이한강이도보로도하할수있을정도로결빙되어있어, 중국인민지원군이한강을건너우회하여공격해올경우서울방어선의유엔군이포위될위험성이충분하였기때문에, 유엔군은더이상서울방어를고수하기가어려웠다. 이러한상황을종합적으로판단한리지웨이사령관은 3 일정오서울교두보에배치된부대에한강남안으로철수하라는명령을내렸다.* 중국인민지원군주력이남양주에진입하기전에유엔군의철수가단행되어남양주에서는큰전투가벌어지지않았다. 철수는 3 일오후부터시작되었으며, 한강에는 3 개의군사용부교와 5 개의민간도하용부교가설치되었다. 부교를이용하여 7 만 5000 여명의병력과장비가한강을건넜다. 민간인의철수는이승만의서울시민피난지시에따라, 1950 년 12 월 24 일부터이루어졌다. 피난대상은민간인은총 220 여만명이었다. 이중 100 여만명은 1 월 3 일이전에철수를하였으나, 나머지민간인은 1 월 3 일하루동안다섯개의부교를통해한강을건너게되었는데, 그혼란은이루말할수없었다. 1 월 4 일새벽유엔군의마지막후위가철수하면서한강부교는폭파되었다. 곧이어중국인민지원군 50 군과 39 군, 그리고인민군 1 사단병력일부가서울을점령하였고중앙청에는인공기가나부꼈다. 서울을점령한중국인민지원군은 1 월 5 일한강을건너진격을계속하면서, 우회작전을펼쳐수원과원주의중간지점까지진격하였다. 이에유엔군사령부는서부전선의유엔군이포위되어고립될수도있다고판단하여, 즉각한강남안방어선을포기하고, 평택 안성 원주 월포리로연결되는 37 도선으로철수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의공세에밀린유엔군이 37 도선을고수해야할지여부를두고고민하고있을때, 중국인민지원군공격이돌연중단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1 월 7 일이후더이상남진하지않고전진을멈춘것이다. 당시중국인민지원군은잇단전투로인해극도로피로한상태였다. 그래서 1 월 8 일이후중국인민지원군주력부대와인민군 1 군단일부는서울, 고양, 동두천, 마석우리, 가평, 김화일대에서휴식에들어갔다.* 이에유엔군은즉각반격을개시하여, 2 월 28 일에는한강남안에서양평 횡성 강릉을잇는선까지진출하였다. 이제서울재탈환은물론이고 38 도선회복도기대할수있게되었다. 3 월 7 일유엔군은리퍼작전을개시하였다. 작전내용은전선의중앙에돌파구를마련하여서부전선의중국인민지원군과동부전선의인민군을분리시킨다음, 서부전선에서서울을남쪽과동쪽에서포위공격하여서울에압박을가한다는것이다.* 리퍼작전의주력은미 3 사단과 25 사단, 국군 1 사단으로구성된미 1 군단이었고, 이중공격선봉부대는미 25 사단이었다. 미 25 사단의임무는경기도하남시와광주군분원에서한강을도하하여남양주금곡에서가평군청평에이르는경춘선을장악하여서울을동북방에서포위하는것이다. 경춘간의철도와국도는서울과중부전선최대요충지인춘천을잇는대동맥이며, 38 선이남에서서부전선과중부전선을연결하는혈맥이다. 따라서경춘간의도로를유엔군이장악하면중국인민지원군과인민군은퇴각하여 38 선이북에다전선을구축할수밖에없다. 이처럼미 25 사단의남양주도하작전은누가전세를장악하느냐하는중요한의미를지니고있는작전이었다. 한편국군 1 사단과미 3 사단은한강변에서서울주변의중국인민지원군 50 군과인민군 1 군단을견제하는임무가주어졌다. 동시에국군 1 사단은김포반도를탈환하여서울서측방을위협하는임무도주어졌다. 이같은국군 1 사단과미 3 사단한강남안에서의작전은곧있을서울공격을대비하는것이기도하지만, 양동작전을실시하여미 25 사단이남양주에서작전을펼치더라도중국인민지원군과인민군의이동을저지하려는목적도포함되어있다 이미한강남안하남시에진출해있는미 25 사단 24 연대와 27 연대의도하작전준비는 2 월 28 일부터시작되었다. 그런데이도하작전은상당한어려움이예상되었다. 한강폭은 m 나되었고, 눈이녹아물과얼음덩어리가섞여흐르는한강의유속은초속 2m 에달하였다. 또한한강양쪽의도로망은좋았으나모두진흙탕이었고, 한강건너팔당일대에는중국인민지원군이포진해있음이확인되었다. 그뿐만아니라건너편팔당쪽한강변지형이수륙양용차량의사용이적합치않은등, 도하작전을실시하는데는많은어려움이예상되었다 그래서 25 사단은면밀하게도하작전을준비하였다. 먼저도하작전연습을반복하였다. 각부대는한강지류를이용하여주선 ( 舟船 ) 의운반, 띄우기, 조작요령등을연습하고개별병사에게지형에맞는전투요령을교육시켰다. 그리고정찰도신중하고대담하게반복되어중요한정보도상당수입수하였다 미 25 사단 24 연대와 27 연대의공격은 3 월 7 일 5 시 50 분시작되었으며, 먼저공격준비사격이 20 분간실시되었다. 사격에는 10 개포병대대포 148 문, 전차 100 대, 중박격포 48 문, M16 25 대 (50 구경중기관총 100 정 ) 가참가하였다. 공격준비사격을 20 분이라는짧은시간만실시하였는데, 이는기습을중요시한것으로중국인민지원군이반격병력을집중할시간적여유를주지않기위해서이다. 하늘에는 10 여대의전투폭격기가공중대기하면서근접지원과저지임무를수행하였다. 앞에서살펴보았듯이미 3 사단과국군 1 사단이한강남안에서양동작전을실시한것도모두 25 사단작전지역에다른지역의병력이동을저지시키기위해서였다. 이처럼 25 사단도하작전의성공을위해대규모의작전이펼쳐졌고, 이도하작전을중시한리지웨이미 8 군사령관이나밀번미 1 군단장도도하작전현장에나타나작전의진행과중국인민지원군의반응을직접확인하였다. 6 시 15 분제 1 대대가도하를시작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은포공격으로응수하였으나, 미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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