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읽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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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 차 저자 서문 8 추천의 글 11 일러두기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안 한 것과 못한 것 고슴도치인가, 해오라기인가? 인간의 규례인가, 주의 방법인가?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하얘지는가, 검게 되는가? 고래가 물고기인가?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활 노래인가, 활 다루는 법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왼쪽인가? 아다롯벳요압인가, 아다롯과 요압의 집인가? 사로잡혀간 자인가, 앗실인가? 슬로밋은 매제인가, 누이인가?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 야베스의 기도 여자가 아내를 둘 수 있는가?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려야 하는가?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아리엘의 아들인가, 사자 같은 사람인가? 건포도 떡인가, 포도즙 한 잔인가? 톱질을 시켰는가, 톱으로 잘랐는가? 후람인가, 후람의 아버지인가? 228

4 28.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인가, 아내인가? 마온 사람인가, 암몬 족속 외의 사람인가? 죄의 자백이 없는 화평 헌물 호새인가, 선견자인가?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누가 누구에게 물었는가? 어깨를 내어미는가, 뒤로 빼는가? 날인가, 낮인가? 욥에게서 지혜가 아주 떠났는가?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떼를 지은 객인가, 개울 길의 통로인가? 전쟁인가, 정해진 기한인가? 하나님이 내 원수인가? 몸의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 황소가 새끼를 낳는가? 욥의 시대에 오르간이 있었는가? 너의 경외함인가, 너에 대한 두려움인가? 예언인가, 대언인가? 가인은 왜 아벨을 죽였을까?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구원하신다? 도둑들은 낮에 무엇을 할까? 하나님이 강한 자를 보존하시는가? 하나님의 기운인가, 하나님의 영인가? 욥의 살인가, 욥의 고기인가? 타인인가, 아담인가? 하나님은 사악한 왕인가? 분노로 벌을 주셨는가, 안 주셨는가? 뇌물이나 속전인가, 대속물인가? 들소인가, 유니콘인가? 하마인가, 베헤못인가? 악어인가, 리워야단인가? 비유인가, 해석인가? 몸인가, 배꼽인가? 예수님도 기원이 있는가? 바르게 읽는 성경

5 63. 강도인가, 여행자인가? 기생인가, 창녀인가? 하나님도 후회하고 뉘우치시는가? 네 바람인가, 네 영인가?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바벨론 성인가, 바빌론의 딸인가? 영광을 회복하는가, 뛰어남을 외면하셨는가? 식굿 왕인가, 몰록의 장막인가? 누가 누구를 누르는가?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인가?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가? 괴이한 것이 보이는가? 친구가 많으면 해를 당하는가? 지혜를 잃는 자, 죄를 짓는 자?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423 추천 참고 도서 432 목 차 7

6 저자 서문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고, 죄와 심판도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저희 집 다락에서 발견한 신약성경을 읽다가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 복음의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원자로 믿고 영접하였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저는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의 신분에 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제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 다. 그래서 매일 성경 읽는 시간과 읽을 분량을 정해두고 꾸준히 성경을 읽었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읽는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속성,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하나씩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제가 읽던 개역성경은 한국 사람인 제가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감계, 괘념, 체휼, 빙거, 힐난 등과 같은 어려운 단어들은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뜻을 알 수 있었고, 올응, 노자, 합개, 대승, 칠면석척 등과 같은 동물 이름 앞에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등장하는 없음 이 라는 구절을 대할 때마다 제게는 이 성경 말씀이 정말로 완전한가? 하는 의문이 생겼고, 어떤 구절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고 다른 구절에는 순종해야 구원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교리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게 만들었습 니다. 저는 개역 성경을 읽으면서 부딪치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다른 한글 역본들과 영어 역본들을 비교하며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왜 역본마다 내용이 서로 다른가? 에 대한 의문만 늘어갔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한국 교회에는 말씀보존학회가 등장하여 어느 역본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가? 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동안 동일한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대한 토론은 많이 지켜보았지만, 성경 본문 자체에 대해 이렇게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을 던지는 토론은 처음이었습

7 니다. 하지만 개역 성경과 그 성경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정죄하는 그 단체의 무례하고 과격한 언동으로 인해 토론은 공격적이고 소모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정제되지 않은 토론으로 인해 오히려 말씀의 권위에 대해 불신하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가정과 교회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여파로 지금도 유독 한국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 말씀보존학회에 속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배척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성경 논쟁을 계기로 하여 저는 킹제임스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스스로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의문을 품고 있던 구절들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읽고 공부하면서 저는 명쾌한 답을 얻게 되었고, 정말 이것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글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출간된 후에는 흠정역과 여러 한글 역본들을 대조해가며 그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고 있으며, 날마다 가족들과 함께 이 성경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읽어보고 나서, 발견하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성경은 다른 어떤 역본들보다 읽고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아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둘째, 이 성경에는 빠진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개역에 나오는 없음 이라는 구절이나 어떤 사본에는 ~라고 되어 있다. 라는 구차한 변명의 글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셋째, 이 성경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을 직접 읽고 공부해 본 결과, 제가 그 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쉽게 이해가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다른 구절들과 대조해보니 이 말씀, 이 번역이 정말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 이 성경이 교리적으로 대단히 올바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역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을 부인하고, 자기 행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가르치는 반면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삼위일체, 몸의 부활, 단번 속죄, 구원의 확실하고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 올바른 교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 서문 9

8 저는 킹제임스 성경 속에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말씀들(단어들)이 순수하고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역본들을 대조하면서 공부하다가 새롭게 깨달은 내용, 잘못 알고 있던 개념을 바로 잡게 된 경험,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번역본들 간의 번역 상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한 내용 등을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다가 이번에 이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여러 성경 역본들을 비교하며 그 차이점을 살펴본 후, 잘못된 번역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올바른 번역인지를 설명하는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 역본 자체를 지지하고 옹호하거나 다른 역본들을 사용하는 분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바르고 정확하게 제시하기 위한 것이니 오해나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며 그분을 알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놀라운 복이라고 생각합니 다. 이 책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갈급한 많은 분들에게 영적으로 도전을 주고,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데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그 동안 주 안에서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고 교제하며 격려해주신 킵바이블( 여러 형제자매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책의 출간을 허락해 주신 정동수 목사님께도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완전하고 흠 없는 진리의 성경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010년 4월 파주에서 언론정보학 박사 김 문 수 10 바르게 읽는 성경

9 추천의 글 2009년 봄부터 김문수 형제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가 운영하는 성경지킴이 사이트( 좋은 글들을 올려주셔서 저를 비롯 해 많은 성경 신자들이 그 동안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재물, 학식, 명예 등의 자랑거리가 많으면 예수님을 믿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현대 사회에서 학식이 많은 분들이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을 보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김문수 형제님은 세상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가정적으로도 행복한 분입니다. 특히 김문수 형제님은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며 학사부터 박사까 지 공부를 했고 현재 대학에서 스피치와 토론 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어학적으로 많은 재능을 가진 분이 우리가 출간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한 절 한 절 다른 역본들과 비교해 가면서 매일 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쁘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쁜 이유는 이처럼 학식이 많고 논리정연하며 성경 지식이 많은 분이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믿음의 최종 권위로 받아들이며 또한 그 성경을 옹호하기 위해 주옥같은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한편 염려가 된 것은 혹시 흠정역 성경 안에 눈에 띄는 심각한 오류가 발견될까 내심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김문수 형제님의 눈에 그런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의 흠 잡을 데 없이 흠정역 성경이 잘 번역되었다는 평가를 접하고는 참으로 기뻤습니 다. 우리말 표현에서 미미한 차이를 가져올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성경 본문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평가를 받고 그 동안 저를 비롯해서 여러 형제들이 수고한 번역과 교정 노력이 이제 거의 고정 단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여러 형제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근 1년 동안 김문수 형제님이 사이트에 올려준 글들을 보고 국내외에서 너무 기뻐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고슴도치인가, 해오라기안가? 라는 제목의 글에 예쁜 고슴도치 사진이 올라오면서 내용이 전개되는 글을 보고 그때부터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한편 조금 연세가 드신 분들은 컴퓨터 화면으로 이런

10 글들을 다 볼 수 없으니 책으로 엮어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이번에는 기존의 한글 성경들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차이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글들만 모아 책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글들 외에 다른 형제들이 쓴 영적인 사색의 글들과 또 김문수 형제님의 다른 글들은 따로 모아서 나중에 기회가 오면 출간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대개 70-80세로 끝이 납니다. 이 짧은 시간에 하나님을 위해 또 그분의 말씀을 위해 무언가 글을 써서 후대에 남기는 것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입니다. 앞으로 김문수 형제님을 비롯해서 여러 형제/자매들이 영적으로 유익을 주는 많은 글을 써서 성도들을 기쁘게 하고 유익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배도의 시대에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김문수 형제님의 이 책이 이런 일을 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촉발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김문수 형제님은 2010년 9월부터 미국의 근본적인 침례교 신학대학원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고 그 뒤에 목사로 성도들을 섬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 다. 자매님과 두 아이들의 삶이 주님 안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앞으로 김문수 형제님이 좋은 목사와 크리스천 저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구원으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문수 형제님의 속사람의 갈망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알기에 저는 한 점의 유보도 없이 모든 분에게 적극적으로 이 책을 추천합니다.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적 보화가 풍성히 넘쳐날 줄로 확신합니다. 2010년 4월 인천에서 정 동 수(공학박사) 인하대학교 교수 사랑침례교회 목사 12 바르게 읽는 성경

11 일러두기 본서에서 비교를 위해 사용한 영어 역본들의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KJV: King James Version NKJV: New King James Version NLT: New Living Translation GNT: Good News Translation MSG: The Messag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RS: New Revised Standard Darby: The Darby Bible Webster: Webster's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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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사사기를 읽다 보면, 재판관(사사) 1) 들이 활동하던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레위 사람이 우상을 섬기기도 하고, 첩을 두기도 하고, 어떤 도시에서는 집단으로 남색을 하고, 배다른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해 보이는 사건은 아마도 재판관(사사)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로 드리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동안 개역 성경을 읽으면서,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로 드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척 불편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어찌 자기 딸을 번제물로 바치는가? 또 하나님은 어떻게 그런 번제물을 받으시는가? 간단히 번제물 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처참합니다. 일단 짐승을 잡아 죽여, 단 주위에 피를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이 모든 것을 불 위에 놓고 태워서 드리는 겁니다. 앞 문장의 짐승 이라는 단어 대신에 사람 혹은 딸 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차마 상상도 하기 힘든 잔인한 장면입니다. 개역 성경으로 이 사건을 읽어보면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서원합니 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11:31) 그리고 개역 성경에 의하면 입다는 아래와 같이 서원을 이행합니다.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삿11:39) 1) 재판관은 여호수아 이후로부터 사울 시대까지 이스라엘을 치리한 지도자,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법을 집행하던 사람들 즉 지금의 판사들과는 매우 달랐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는 재판관을 표현하기 위해 고대 중국에서 재판관과 비슷한 일을 하던 사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4 이런 잔인한 내용을 읽으면서도 저는 입다가 주님 앞에서 너무 경솔하게 서원을 했다는 것만 안타깝게 생각했을 뿐 그 내용에 대해서 크게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사기에 의하면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삿21:25). 그래서 입다가 딸을 번제로 바치는 것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어처구니 없는 사례들 중의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으로 이 구절들을 대조해 본 결과 입다가 자기 딸을 죽여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역: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삿 11:37-39) 흠정역: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입다의 딸이 입다가 경솔하게 말한 그 서원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번제물로 바쳐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것은 다음의 링크에 나오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저는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에 근거하여 입다의 딸이 번제물이 되어 바쳐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입다는 어떻게 주님 앞에서 자기의 서원을 실천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개역 성경의 잘못된 표현들 왜 사람들은 개역 성경을 읽으면서 입다의 딸이 죽임을 당해 번제물이 되었을 2)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을까요?] 16 바르게 읽는 성경

15 거라고 너무도 쉽게 믿어버리는 걸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사기 11장 내용을 번역함에 있어서, 개역 성경은 몇 가지 부분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 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1) 입다는 정말로 사람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는가? 입다가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번제물로 드리려고 생각했을까요? 입다가 주님께 서원하는 대목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개역: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1) 흠정역: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KJV: Then it shall be, that whatsoever cometh forth of the doors of my house to meet me, when I return in peace from the children of Ammon, shall surely be the LORD s, and I will offer it up for a burnt offering. 개역 성경은 입다가 나를 영접하는 그는, 그를 이라고 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입다가 나를 맞이하는 것은, 그것을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입다를 환영하러 나오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whatsoever (무엇이든), it (그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입다가 서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도한 것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 다. 그의 의도가 정말 사람을 번제 희생물로 드리는 것이었다면, whatsoever 와 it 이 아니라 whoever 와 him(her) 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 성경은 이것을 그는, 그를 이라고 번역하여 마치 입다가 처음부터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작정한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개역 성경으로 그는, 그를 이라는 부분을 읽으면, 누구라도 입다가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처럼 오해하게 될 겁니다. (2) 번제를 드리는가, 번제 헌물을 드리는가? 레위기 1장에서 7장까지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의 종류와 드리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이를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데 반해 흠정역 성경은 이를 태우는 헌물, 죄 헌물,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17

16 범법 헌물, 화평 헌물, 음식 헌물로 옮기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과 헌물을 드리는 것의 의미 차이에 대해서는 성경지킴이 사이트( KJB 문서란에 있는 게시물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3)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어떤 종교적인 의식절차를 수행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제사라고 하면, 짐승을 잡고 피 뿌리고 각 뜨는 모습들이 먼저 연상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이런 종교적인 프로그램을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헌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태우는 제사(번제) 의식을 통해서 번제 희생물이 준비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은 번제 헌물이지 제사 의식이 아닙니 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화평 헌물이신 예수님이지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미사나 각종 성사와 같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예배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입다가 자기 딸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린다고 읽으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느 여인의 비명소리가 귀에 울릴 겁니다. 하지만, 이를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 헌물로 하나님께 바친다고 읽으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살아가 는 입다의 딸의 모습이 떠오를 겁니다. 이것은 제 머리 속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사사기 11장 31절 말씀이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개역 성경은 번제라는 제사(희생물을 태우는 의식)를 드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입다가 번제라는 제사 의식을 수행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를 읽다 보면 마치 입다의 딸이 제물로 불태워진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사사기 11장 31절 말씀이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shall surely be the LORD's),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나이다. (I will offer it up for a burnt offering)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 헌물로 주님께 바쳐서 자기 딸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이처럼 태우는 제사를 드리는 것 과 번제 헌물을 드리는 것 은 의미의 차이가 큽니다. 3) [일천 번제인가? 천 개의 번제 헌물인가?] 18 바르게 읽는 성경

17 (3) 처녀로 죽었는가, 처녀로 살았는가?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역 성경은 사사기 11장 37-39절 말씀에 나오는 처녀 됨을 이라는 표현에 원래 원문에는 없던 죽음을 이라는 단어를 추가해서 마치 입다의 딸이 서원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입다가 바친 귀한 예물인 그녀를 한 순간에 불살라지는 소, 양, 염소와 같이 취급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녀로 하여금 주님의 소유가 되어 주님의 전에서 일평생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헌신하며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사사기 11장 37절 속에 들어 있습니다. 개역: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삿 11:37) 개역 성경에는 입다의 딸이 처녀의 몸으로 죽는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원문에는 죽음을 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역 성경에서도 사사기 11장 37-39절에 나오는 죽음 이라는 단어를 아주 작은 글씨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흠정역 성경으로 이 구절을 읽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흠정역: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삿11:37) 입다의 딸은 자기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한다고 했습니다. 의미가 손상되 지 않도록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직역을 했기 때문에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가 있습니다. 처녀 됨 이 무엇일까요? 입다의 딸이 처녀가 된다 는 것인가 요? 입다의 딸이 어린 여자아이였는데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처녀가 된다는 건가요? 아니면 입다의 딸이 유부녀였는데 다시 처녀가 된다는 걸까요? 저도 처음엔 이게 become a virgin 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KJV: And she said unto her father, Let this thing be done for me: let me alone two months, that I may go up and down upon the mountains, and bewail my virginity, I and my fellows(삿 11:37). 처녀 됨 이라는 표현은 처녀가 되는 것 (상태의 변화)이 아니라 명사로서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19

18 처녀임, 처녀 됨, 처녀성, 동정 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virginity 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6절에는 예수님이 출생할 당시에 살았던 안나라는 여자 대언자 가 나오는데 그녀가 처녀성을 벗어난 것 (from her virginity)을 가리켜서 결혼하 여 남편과 같이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흠정역: 또 아셀 지파에 속한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여대언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나이가 매우 많더라. 그녀가 처녀 생활을 벗어나 칠 년을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6) KJV: And there was one Anna, a prophetess, the daughter of Phanuel, of the tribe of Aser: she was of a great age, and had lived with an husband seven years from her virginity; 처녀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 결혼하는 것이라면 입다의 딸이 자기의 처녀 됨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결혼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4) 이해가 됩니까? 즉 사사기 11장 37절의 의미는 입다의 딸이 효녀 심청처럼 처녀의 몸으로 제물이 되어서 죽는 것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일평생 동정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애곡한 것입니다. 아마도 입다의 딸은 전적으로 주님만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의 친구들과는 분리되어서 당시의 제사장 비느하스와 함께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벧엘에서 주님께 수종을 들며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삿20:27-28). 이어지는 사사기 11장 38절은 입다의 딸이 자기가 일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함을 애곡하면서 서원을 이행하기 전 동무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헌물로 바쳐진 사람은 이제 그 혼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서원이나 혹은 그녀가 자기 혼을 속박하려고 말한 그녀의 서약을 듣고서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면 그녀의 모든 서원은 유효하며 그녀가 자기 혼을 속박하려고 말한 모든 서약이 유효하리라(흠정역 민30:4). 입다의 딸이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는 그런 서약을 했다면 아버지인 입다가 4)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마도 virginity를 처녀 됨 보다는 눅2:36처럼 처녀 생활 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20 바르게 읽는 성경

19 이를 취소시킬 수가 있었겠지만 이번 서원은 입다 자신이 서원한 것이므로 이를 취소할 수가 없고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입다의 딸은 평생을 처녀로 살아야 했습니다. 입다의 딸이 애통해 한 것은 자기가 죽게 됨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처녀 됨 (her virginity) 곧 처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애곡한 것입니다. 개역 성경은 마치 입다의 딸이 번제 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입다의 딸은 주님께 바쳐져서 일평생 결혼하지 않고 처녀의 몸으로 주님을 섬겼을 겁니다. 2. 입다는 어떻게 자기의 서원을 이행했을까? 입다의 딸이 번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고 하면 다음 성경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입다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삿 11:35-36). 입다: 주께 약속한 서원은 취소할 수 없다. 입다의 딸: 아버지께서 서원한대로 내게 이행하소서. 두 부녀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입다는 자신의 서원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이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입다가 자기의 서원을 이행했다면 자기 입에서 낸 대로 입다의 딸은 태우는 희생물 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죽여서 희생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시는가? 당연히 아닙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일 뿐이었고 실제로 모리아 산에서 바쳐진 번제 헌물은 숫양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을 불에 태워 바치는 의식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21

20 너는 결코 네 씨 가운데 하나라도 몰렉을 위하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지 말고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21).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그와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은 주께서 미워하시는 일 곧 그분께 가증한 모든 것을 자기 신들에게 행하되 심지어 자기 아들딸들을 불에 태워 자기 신들에게 드렸느니라(신12:31).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의 산당들을 세우고 자기들의 아들딸들을 불에 태웠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아니한 것이요,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아니한 것이라 (렘7:3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태워서 희생물로 바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 주님께서는 이를 미워하시며 가증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주님께서 명령한 적도 없고, 주님께서 생각조차 하신 적이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오직 한 번,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헌물로 삼으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은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들을 위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요일2:2). 반면에 마귀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도록 했습니다. 아바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며 스발와임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불에 태워 스발와임의 신들인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더라(왕하17:31). 또 그들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들을 세워 몰렉을 위하여 자기 아들딸들 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느니라.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도 아니요, 또 그들이 이런 가증한 짓을 행하여 유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것은 내가 생각한 것도 아니니라(렘32:35). 그때에 그가 자기를 대신하여 통치할 자기의 맏아들을 취해 성벽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큰 격노가 임하므로 그들이 그에게서 떠나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갔더라(왕하3:27).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은 마귀 숭배자들이나 하는 가증스러 운 짓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살아있는 딸을 죽여서 번제 희생물로 삼으라고 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위에서 언급한 성경 말씀들을 살펴보면, 입다의 딸이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이 된 것이 22 바르게 읽는 성경

21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2) 번제 헌물이 된 입다의 딸은 태워서 바쳐져야 하는가? 이에 앞서 먼저 입다가 서원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입다가 주님께 서원할 때 자기의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영접하러 나오는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 서원 내용에 의하면, 입다가 자기 집에 도착하기까지는 주님께 드리는 헌물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입다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whatsoever 라고 했습니다. 입다가 whoever (누구든지)라고 하지 않고, whatsoever (무엇이든지)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칠 생각은 없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입다가 바치고자 하는 헌물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헌물이 무엇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헌물을 드리는 방법 역시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헌물의 종류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드리는 방법이 각기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번제로 드릴 수 있는 헌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레위기 1장을 보면, 번제의 헌물이 소일 경우, 양일 경우, 염소일 경우, 날짐승일 경우, 각각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번제의 헌물이 사람일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레위기에는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처리한 다음에 불에 태우라는 말씀이 없는 걸로 봐서 사람에게는 태워서 드리는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레위기에 사람을 태우는 헌물로 바치는 규례가 없는 걸로 봐서 입다의 딸도 태워서 바치는 방식으로 바쳐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태우는 헌물(번제)이 짐승 이외의 다른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레위기 2장에 는 음식 헌물이 나옵니다. 이는 드리는 헌물의 종류로 보면 음식 헌물인데, 드리는 방식으로 보면 일부를 불에 태워 향기로운 냄새를 드린다고 했으니 태우는 헌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유형의 번제 헌물은 없을까요? 성경을 읽다보면, 도시 전체가 불에 태워져서 주님께 바쳐진 적도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한 다음에 여리고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불에 태웠습니다.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23

22 그들이 도시와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불로 태웠으나 은과 금 그리고 놋과 쇠 기구들은 주의 집의 보고에 두었더라(수6:24).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약탈, 방화를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그냥 전쟁에서 이겨서 그 민족을 정복하고 약탈한 것이라면 그들이 그 성읍 가운데서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 데려가고, 그 가운데서 은금을 탈취하고, 소와 양을 끌어가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이것은 도시 전체를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 헌물로 볼 수 있으며 그 근거는 신명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그 도시에서 얻은 모든 노략물을 그 도시의 거리 한가운데 모으고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그 도시와 그곳의 노략물 전부를 불로 태우라. 그 도시는 영원히 폐허 더미가 되어 다시 건축되지 아니하리라(신13:16). 모든 것을 불에 태우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중에 있는 옷이나 식량, 가축들을 하나도 전리품으로 챙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불로 태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의 죄악, 그 도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동시에,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태우는 헌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태우는 헌물을 바치는 중에도 불에 태우지 않는 사례가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은과 금 그리고 놋과 쇠 기구들은 주께 거룩히 구분되었은즉 그것들을 주의 보고에 들일지니라, 하니(수6:19) 여리고 성에서 빼앗은 은과 금, 놋과 쇠 기구들은 주님께 거룩히 구분되었으니 태우지 말고 주님의 집의 보고에 들여 놓으라고 하십니다. 번제로 드리는 헌물 중에서 불에 태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 주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것들은 태우지 말고, 주님의 보고에 들이라고 합니다. 입다는 서원을 하면서 자기를 맞이하는 그것 을 번제의 헌물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자기를 맞이하러 나온 것은 그의 딸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소, 양, 염소, 비둘기 같은 짐승이 아니므로 레위기에 나오는 짐승 헌물과 같이 불에 태워서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에(레18:21), 불에 태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의 딸은 주님께 거룩히 구별되어 주님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 (수6:19)입니다.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삿11:31)라는 입다의 서원은 이렇게 자기 딸을 불에 태우지 24 바르게 읽는 성경

23 않고, 자기 딸을 살아있는 그대로 주의 집에 들여놓는 방식으로 이행되었으리라 고 생각합니다. (3)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을 헌물로 받으시는가?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고 이제 그 서원을 이행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며 가증하게 여긴다고 하시면서 그런 헌물은 요구한 적도 없고 받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딸을 죽이지 말고 산 채로 하나님께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을 헌물로 바치면 받으실까요? 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 방법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불에 태워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살아있는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사람 헌물은 주님께서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론이 레위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헌물로 주 앞에 드릴지니 이것은 그들이 주를 위해 섬기는 일을 집행하게 하려 함이라(민8:11). 헌물은 가축이나 음식으로만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 말씀에는 아론이 레위 사람들을 주님 앞에 헌물(offering)로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 즉 헌물로 바쳐진 레위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을 위해 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입다의 딸도 이렇게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 몸이 되어 시집을 가지 않고 처녀의 몸으로 일평생을 회중의 성막에서 수종을 들며 하나님께 헌신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단 한 순간만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참으면 되지만,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주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입다의 딸은 주님께 바친 헌물이 되어, 일평생 묵묵히 이 힘든 길을 걸으며 주님께 헌신했으리 라 생각합니다. 3.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하나님에 대하여, 입다에 대하여, 입다의 딸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아직도 하나님이 잔인하고 가증스럽게 입다의 딸을 태우는 희생 제물로 삼았다고 생각합니까? 아직도 입다가 멍청하고 비정한 아버지로 보입니까? 아직도 입다의 딸이 아버지 살아있는 헌물이 된 입다의 딸 25

24 때문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불쌍한 소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사사기 11장 40절 말씀이 시집도 못 가보고 억울하게 죽은 입다의 딸의 넋을 위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진혼제로 보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헌물로 받을 때, 사람을 죽여서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헌물로 받으십니다(민8:11, 13, 21). 입다는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입다의 딸은 위의 말씀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살아있는 헌물이 되어서 평생 처녀의 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을 겁니다. 신약시대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레위 사람들이 주 앞에 헌물로 바쳐져 주를 섬기는 일을 한 것처럼, 입다의 딸이 자기를 구별하여 처녀의 몸으로 평생 주를 섬긴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살아있 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보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께 순종하며,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성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입다의 딸과 같은 살아있는 사람 헌물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26 바르게 읽는 성경

25 2.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3:4) 흠정역: 왕이 기브온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거기로 갔으니 이는 그것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더라.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 개를 드리니라. KJV: And the king went to Gibeon to sacrifice there; for that was the great high place: a thousand burnt offerings did Solomon offer upon that altar.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의 어느 마을에는 산 위에 절이 하나 있습니다. 절 아래에는 작은 계곡이 있는데 새벽 4시만 되면 부처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그 차가운 계곡물에서 몸을 씻고 절에 들어가서 돌부처 앞에 삼천 배를 올린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절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천 번 절을 해야 돌부처 눈썹 하나가 끄떡인다고 합니다. 돌로 새긴 눈썹이 움직일 리야 없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면 돌부처도 감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치성을 올려서 부처를 감동시키면, 부처가 자기들의 문제 - 질병, 가난, 염려 등 - 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한때 저희 또래 학생들 가운데서는 종이학 천 마리 접기가 유행이었습니다. 큰 유리병을 하나 사서 거기에 작은 색종이로 종이학을 접어서 한 마리 두 마리 모읍니다. 천 마리를 다 모으면 그것을 예쁘게 포장해서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이성 친구에게 선물로 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데 씁니다. 그 지극한 정성에 상대방이 감동하리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그렇게 시간을 내서 색종이를 접기보다는 꽃집에 가서 장미꽃 백 송이, 천 송이를 주문해서 프러포즈를 한다고 합니다. 부처에게 삼천 배를 하는 것이나, 종이학을 천 마리 접어서 건네주는 것이나, 장미꽃 100송이, 1000송이를 바치는 것이나 결국은 한 가지로 통하는데 곧

26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상대방을 감동시키겠다는 겁니다. 이런 지극한 정성이 부처의 눈썹을 움직이고, 여자 친구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이와 같은 정성어린 행위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거 나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낼 수 있을까요? 벌써 십여 년 전부터 한국 교회에는 이처럼 사람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 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종교 행위가 등장했습니다. 일천 번제 라는 이름을 가진 이런 종교 의식은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부흥사들은 열왕기상 3장 4절 말씀을 인용하여 솔로몬이 하나님으 로부터 지혜를 얻게 된 것은 그가 일천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라며, 하나님께 뭔가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은 솔로몬처럼 일천 번제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지극한 정성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가르칩니다. 이 일천 번제 라는 이름의 헌금에 대해 설명하자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소원이 있으면 먼저 기도 제목을 정하여 헌금 봉투에 적고,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매번 헌금 봉투에 헌금을 담아서 드리는데 그렇게 천 번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대개의 경우 일천 번제 헌금 봉투는 맨 위에 제목으로 일천 번제 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고, 기도 제목(소원)을 적는 란, 봉헌자, 금액, 제 ( 몇 번째 헌금인지 표기) 등을 적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 회(천 번 중에서 일천 번제는 비단 헌금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의식에도 도입되고 있습니다.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1997년에는 어느 교회에서 우리는 2000년 1월 1일이 1,000번째 새벽기도회가 되도록 오늘부터 매일 새벽기도회를 일천 번제로 드리 기 시작했다. 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도 일부 교회에서는 일천 번제 헌금, 일천 번제 새벽기도회, 일천 번제 예배 등의 이름으로 이런 종교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종교 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예물에 매수되 거나,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에 감동하시거나, 얄팍한 인간의 계산에 맞장구를 쳐주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그런 모습을 보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너희 한국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행17:22). 1) 1)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로 번역함 28 바르게 읽는 성경

27 이번 글에서는 이런 미신적인 종교 행위가 과연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검증해 보고, 일천 번제와 같은 종교적 행위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해악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일천 번제 를 드렸는가, 일천 번 제 를 드렸는가?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3:4, 개역) 많은 목회자들과 부흥사들이 열왕기상 3장 4절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께 천 번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려면, 일천 번제 헌금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한 것이며 그런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읽을 때 띄어쓰기에 주의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일천 번제 라고 했지 일천 번 제 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에는 일천 + 번제 (a thousand burnt offerings)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일천 + 번 + 제 (thousand times offerings)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일천 번제란, 솔로몬이 한번에 천 마리의 번제 예물 을 하나님께 드린 것인가, 아니면 솔로몬이 천 번(회수로 1,000번)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인가 하는 겁니다. 영어 성경으로 한 번 읽어볼까요? KJV: And the king went to Gibeon to sacrifice there; for that was the great high place: a thousand burnt offerings did Solomon offer upon that altar. 솔로몬은 제단에 a thousand burnt offerings 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 마리의 희생제물을 말하며 천 번의 제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숫자는 천 임에도 불구하고 앞에 단수를 가리키는 부정관사 a 가 사용된 것은 천 마리의 희생물이 한번 의 제사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천 마리의 희생예물을 드리는 제사를 단 한 번 드렸지 천 번씩이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 다. 한자로 읽어 볼까요? 일천 번제 ( 一 千 燔 祭 )에서 번제 ( 燔 祭, 태울 번, 제사 제)란 제물을 하나님께 태워서 드리는 것이지 번 ( 番, 순서 번) + 제 ( 祭 ), 즉 제 몇 번째의 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끝까지 제1번제, 제2번제, 제3번제. 제1000번제 이렇게 헌금봉투를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29

28 천 번 채워야 온전한 일천 번제가 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마음속으로 성도들이 혹시라도 역대기하 1장 6절 말씀을 보게 될까 봐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일천 번제를 가르칠 때 역대기하 1장 6절은 안 보여주고 열왕기상 3장 4절 말씀만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역대기하 1장 6절을 성도들이 읽게 되는 순간 자기들의 거짓말이 모두 들통 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역: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대하1:6) 흠정역: 솔로몬이 거기로 즉 주 앞에 있던, 회중의 성막에 있던 놋 제단으로 올라가 그 위에 번제 헌물 천 개를 드렸더라. KJV: And Solomon went up thither to the brasen altar before the LORD, which was at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and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 upon it. 하나님께서는 국한문혼용 성경이 없는 성도들이나 영어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성도들이라도 그런 거짓된 가르침에 속지 않도록 아예 개역 성경에도 열왕기상 3장 4절 말씀에 나오는 일천 번제란 제사를 천 번이나 드린 것이 아니라 천 마리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린 것이라는 것을 명시해 놓으셨습니다. 솔로몬이 드린 것은 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천 개의 헌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 어떤 목사님은 솔로몬은 재력이 넉넉해서 한꺼번에 천 마리 희생을 드렸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유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천 번에 걸쳐 나누어서 할부로 드리는 것이다. 라고 성도들에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정말로 목회자가 성경 말씀을 몰라서 그렇게 가르친다면 무지한 목사요, 성경 말씀을 알면서도 그렇게 가르친다면 주님으로부터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이와 같이 종교를 빙자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종교사기는 당장에 중지되어야 합니다. 2. 솔로몬은 일천 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는가? 최근 발간된 전병욱 목사의 저서 중에 하늘을 감동시킨 일천 번제 예배자 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고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전병욱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존경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종교의식을 강조하고 있어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제목 자체가 지성이면 감천, 즉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 라는 동양의 무속 기복사상을 담고 있습니 30 바르게 읽는 성경

29 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두 가지 면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지 예배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보다는 예배자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또한 예배자의 그런 노력들이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철저히 인본주의 시각에 서 예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제목에서 드러나 있듯이 이 책은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책에서는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감동을 받아 우리가 구하는 것을 채워주신 다고 했는데, 성경은 인간의 노력이나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분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 외에는 달리 없습니다. 이 책의 제1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최상의 것을 골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다. 이런 일천 번제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복을 누렸다. 과연 솔로몬이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설마 강대국 이스라엘 왕의 재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아신다면 고작 희생 짐승 1,000마리가 최상의 것이라는 주장은 하지 못하시겠지요? 그리고 일천 번제가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일천 번제를 받고 감동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전병욱 목사는 하나님께서 고작 희생물 1,000마리에 감동해서 그 보답으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었다고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들이 바치는 일천 번제와 그분의 지혜를 맞바꾸는 거래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직도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려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믿으십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일천 번제와 솔로몬의 기도 응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1) 솔로몬은 자기가 가진 최상의 것을 바쳤는가? 하나님께서 가난에 쪼들리고, 굶주려 허덕이던 차에 솔로몬이 한꺼번에 바치는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31

30 천 마리의 희생 예물을 받고는 그 지극한 정성에 감동을 받아서 그에게 나타났을까 요? 사실 솔로몬과 같은 부자에게는 희생제물 천 마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솔로몬의 하루 식량은 고운 밀가루 삼십 고르와 굵은 가루 육십 고르와 살진 소 열 마리와 초장의 소 스무 마리와 양 백 마리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다마사슴과 살진 날짐승이 있었더라(왕상4:22,23).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솔로몬의 식탁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만 하더라도 엄청납니다. 소 30마리와 양 100마리면, 일반인에게는 엄청난 양이지만, 이는 솔로몬의 하루 식량 중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희생 제물 천 마리라고 해 봤자 솔로몬에게는 열흘 치 양식거리도 안 되는데 고작 그 정도를 바친 것으로는 지극한 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로 치자면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열흘 치 식량에 해당하는 이만 원짜리 쌀 10kg 한 봉지를 바치고서는 엄청난 정성을 들였다고 주장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정말 자기의 소유 중에서 최상의 것을 바쳤습니까? 솔로몬이 갖고 있던 그 많은 가축과 재산과 금과 은이 본래 다 누구의 소유입니까?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하지 아니하리니 숲의 모든 짐승과 천 개의 작은 산 위의 가축이 다 내 것이니라. 산의 모든 날짐승도 내가 알며 들의 들짐승들도 내 것이로다. 가령 내가 주린다 할지라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리니 세상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내 것이로다.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50:9-13) 누가 나보다 앞섰기에 내가 그에게 갚아야 하느냐? 무엇이든지 온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욥41:11). 다윗 역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헌물을 바치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며 내 백성은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이렇게 자원하여 드릴 힘이 있겠나이까?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왔사오니 우리가 주의 것에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위하여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려고 예비하여 저축한 이 모든 것이 주의 손에서 왔사오며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29:14,16). 천하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주의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에 사용한 모든 짐승들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솔로몬에게 주신 32 바르게 읽는 성경

31 것입니다. 그 짐승들이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그중에서 일부를 하나님께 돌려드렸더니 주께서 수지맞았다며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재물이나 예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이 일천 번제에 감동하여 지혜를 주셨는가? 전병욱 목사를 비롯하여 일천 번제를 주장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일천 번제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일천 번제를 드리면 하나님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영원한 희생물을 드림으로 구약의 제사는 폐지되었습니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셨나이다. 내 귀를 주께서 여셨고 번제 헌물과 죄 헌물은 주께서 요구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오나이다.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 있나이다(시40:6-7). 주께서 번제 헌물과 죄 헌물을 요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시기에 성경책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물이 되고자 오셨습니다. 위 시편을 인용하며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위에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희생물과 헌물과 번제 헌물과 죄로 인한 헌물은 주께서 원치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시나이다, 하셨는데 그것들은 율법에 따라 드리 는 것이라.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10:8-9). 주님께서는 분명히 첫째 것(구약의 제사 의식)을 제거하시고, 둘째 것(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구약시대에 드리던 일천 번제를 드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와 효력을 부정하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 자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 입에서 다시 번제를 드리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까? 둘째, 성경에 나오는 번제는 결코 무언가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구약시 대의 번제 희생은 희생물 전체를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이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죄 헌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화평 헌물, 범과를 속하기 위한 범법 헌물과는 달리 문제를 해결하거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헌물이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33

32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목적 없이 주 앞에 자기 자신을 드려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말씀 어디에도 소원을 이루고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번제를 드리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성경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서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받았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일천 번제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주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주장하니 이거야말로 성경에도 없는 거짓된 가르침 으로 성도들을 속이고 갈취하는 가증한 행위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일천 번제에 감동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돌부처 앞에 삼천 배를 해서 부처를 감동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종이학 천 마리나 장미꽃 천 송이로 여러분의 여자 친구를 기쁘게 하고, 감동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천 번제와 같은 종교 의식에 의해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일천 번제가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면 그분께서는 기뻐하시기는커녕 무섭게 진노하실 겁니 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은 원치도 않으시고, 기뻐하지도 않으신 다. 고 하셨습니다(히10:8). 우리는 자랑스럽게 저는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라 고 자기 의를 내세울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64:6).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희생헌물보다 낫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5:22). 또한 그런 희생물보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십니다(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절을 할까? 내가 번제 헌물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갈까? 주께서 수천의 숫양이나 수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내 범죄로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혼의 죄로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오 사람아, 그분께서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6:6-8)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일천 번제 의식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는 율법의 행위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그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감동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면, 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셨고 또 그에게 그의 소원대로 지혜로운 마음을 주셨을까요? 34 바르게 읽는 성경

33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것은 천 개의 희생 예물에 감동해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찾아오신 것이며, 그에게 지혜를 주신 것도 다윗과의 약속을 지켜서 다윗의 왕국을 굳건하 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천 개의 희생물을 하나님께 바친 후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시는데 솔로몬이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잘 살펴보면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아뢰되, 주께서 전에 내 아버지 다윗에게 큰 긍휼을 베푸시고 나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게 하셨사온즉 오 주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내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제 굳건히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같이 많은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셨사오니(대하1:8-9)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복을 주사 영원히 그의 왕국을 굳건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삼하7:8-16). 그리고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삼하7:12)라는 말씀처럼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다스려야 할 지 통치자로서 크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아버지 다윗 왕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약속을 생각해내고 그 약속을 주장하며 이렇게 구하고 있는 겁니다. 오 주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내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제 굳건히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같이 많은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내가 이 백성 앞에서 나가고 들어오게 하시옵소서. 이같이 큰 주의 이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매(대하1:9-10)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천 번제 예물을 받으셨으니 이제 자기 소원을 들어주실 차례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그에게 지혜를 주신 사건이 기록된 성경 말씀(왕상 3장, 대하 1장) 중 그 어디에서도 일천 번제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하는 요지는,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이 다윗 왕국이 견고히 서도록, 제가 주의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 이었습니 다. 그리고 솔로몬이 가진 이 소원, 이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을 재판하도록 주의 종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사 내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같이 큰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라.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주께서 그 말을 기쁘게 여기시니라(왕상3:9-10).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35

34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서 일천 번제 희생물을 받고 기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 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왕 상3:10).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 이유는, 솔로몬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았고, 또한 그것을 구하는 동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일천 번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분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확신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것이라(요일5:14). 이제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일천 번제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주신다. 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기도가 응답되도 록 하려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분의 뜻대로 기도하라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 다. 3. 왜 한국 교회에는 일천 번제가 잘 먹히는가? 한국의 목회자들이나 부흥사들은 일천 번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제도가 주는 금전적 매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사이에 는 일천 번제만 잘 가르쳐 놓으면 삼년간 놀고먹을 수 있다. 라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 역시 일천 번제와 같은 독특한 종교 의식에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첫 번제, 둘째 번제, 셋째 번제 이렇게 해서 천 번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왜 일천 번제와 같이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거짓된 교훈이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일천 번제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거나 그르거나, 교회로서는 그 헌금 제도를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일천 번제 예배를 통해서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헌금 봉투에 넣어서 바치는 헌금은 동전이 아니라 지폐이고, 그 금액은 적게는 천 원, 많게는 만 원이나 그 이상입니다. 그게 천 원으로 천 번이면 백만 원이고, 만 원짜리로 천 번이면 천만 원이 됩니다. 일천 번제 드리는 사람이 10명이냐 100명이냐에 따라 교회 수입은 적게는 천만 원, 많으면 10억까지 올라가는데 이를 마다할 리가 없지요. 더구나 36 바르게 읽는 성경

35 은행처럼 다달이 적립한 금액을 나중에 원리금과 함께 돌려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는 꼬박꼬박 할부로 납입하는 헌금을 받기만 하면 되니 이처럼 좋은 헌금 제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끊고 회개하지 않는 한, 성도들의 믿음을 타락시키고 종교를 이용해서 금품을 갈취하 는 일천 번제 헌금이 사라지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둘째, 일천 번제라는 종교 의식은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한국인의 심성에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는 말처럼 계속 시도하면 아무리 굳은 사람의 마음도 녹이듯이, 부처건 성황신이건 지극한 정성으로 치성을 올리면 하늘도 감복하기 마련이라고 믿는 것이 한국인의 종교성 - 보다 정확히 말해서 미신 -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속히 안 들어주시면 들어주실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겠 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는 것이 우리의 끈기와 정성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달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 번의 끈질긴 헌금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그분의 은혜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고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은 돌부처나 고목 앞에 삼천 배 올리는 사람의 미신적 종교행위나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셋째, 지난 번 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기 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맙긴 하지만 뭔가 허전해 합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자기가 해 놓은 공로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공허감을 느낍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대언자 엘리사가 자기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겼을 텐데, 요르단 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서는 버럭 화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거기에 무언가 내 행위, 내 공로를 더하고자 하는 것,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의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에서 너무 쉽게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내가 40일 금식기도해서 어렵게 얻어낸 것이다. 일천 번제를 드려서 겨우 힘들게 받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자신이 대견스럽게 생각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집니다. 결국 이런 종교행위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의에 대해서 어떻게 보실까요?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37

36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그런 인간적인 노력으로 만들어낸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물건 같으며, 더러운 누더기 같은 것입니다. 넷째, 일천 번제가 호응을 받는 이유는 한국 교회 안에 들어온 기복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물,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함께 나누는 연보가 언제부터인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헌금과 축복을 관련지어 가르칩니다. 헌금을 드려야 복 받는다, 야곱처럼 별미 헌금을 바쳐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 등과 같이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고 복 받으라는 기복 신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천 번제도 이런 기복 신앙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라면, 왜 이 예물을 드리는지, 어떤 일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지를 적어야지, 거기에 자기 소원(좋은 말로 미화하면 기도 제목)을 왜 적습니까? 하나님이 뇌물로 헌금 받아먹고 소원 들어주는 분입니까? 이거야말로 무당 앞에서 복채를 쌓아놓고 소원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한국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천 번제는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배금주의에 물든 종교인들이 치성 드리기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심성을 이용하여 자기 의를 쌓는 수단으로,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미신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4. 왜 일천 번제가 문제가 되는가? 그렇다면, 이 일천 번제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되는지 생각해 보겠습 니다. 첫째로, 일천 번제는 성도들에게 성경에 어긋난 기복 신앙을 가르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쳐야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준 다. 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물을 매개로 해서 사람들과 거래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기도 응답을 받는 데에는 가난한 사람들보 다 부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기도나 부자의 기도나 모두 들으십니다. 또 온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무엇으로 내가 이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시50:9-13) 일부 목회자나 부흥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축복받으려 38 바르게 읽는 성경

37 거든 별미 (평상시 내는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의 특별한 예물)를 갖다 바치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내게로 가져와 내가 먹게 하고 이로써 내가 죽기 전에 내 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 하니라(창27:4).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그 장자의 권리를 이어받을 아들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받게 하신 것이지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매한 것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일천 번제 헌금을 드려서 기도가 응답되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알았더라면 한 마디 했을 겁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하였은즉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하나님을 일천 번제라는 뇌물로 매수하여 복을 받으려는 행위는 분명히 기복 신앙이요, 그 재물과 함께 멸망 받을 짓입니다. 둘째로, 일천 번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종교 의식이므로 피해야 합니다. 기복 신앙은 내가 무언가를 행하여 그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복을 불러들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화를 물리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액땜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는 것처럼 일천 번제 역시 내가 하나님께 천 번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이 지성이면 감천 이라 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시며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인과응보 사상에 기초해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복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이제 너는 스스로 그분을 제대로 알며 또 그분과 평화롭게 지내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화와 복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느냐?(애3:38)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부지런히 기도하고, 매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물론 모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일천 번제와 같은 종교 의식으로, 나의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내 행위로 기도 응답을 받았다거나, 이런 복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고 자신의 의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39

38 일천 번제는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대신에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일천 번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오해하게 만드는 종교 의식이므 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천 번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거나, 천 마리의 예물을 바치라고 하는 가르침은 인간이 만든 종교에나 있을까, 성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고,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것을 가지고, 소원을 이루려면 일천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왜곡해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 어디에 도 하나님을 감복시키려거든,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으려거든, 천 번의 예물이 나 천 번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 번째의 예물이 도착하기까지 기도응답을 보류하고 있을 만큼 매정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고 기도할 때에 무엇을 구하든지 모든 것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을 원하든지 너희가 그것들 을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것들을 받으리라(막11:24).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우리가 이처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들어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나, 행위나, 일천 번제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7:11)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이 성도들의 헌금 봉투를 하나씩 세어보면서 자기 자녀들이 천 번을 채웠나 못 채웠나를 살펴보면서 기도 응답을 해 줄까 말까 망설이는 엄격하고 인색하신 절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40 바르게 읽는 성경

39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8:32)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결코 인색하거나 냉혹하신 분이 아닙니다. 일천 번제로 드리는 인간의 노력과 정성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히4:16). 천 번, 아니 만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일천 번제를 바치라고 하거나, 그런 인간의 정성에 하나님이 감동할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런 가르침에 대해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5. 글을 맺으며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천 번제라는 종교 의식은 교회의 수입을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성도들을 성경 말씀의 진리 가운데 바르게 세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복 신앙과 인간적 의를 앞세우며,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긍휼을 모독하는 미신적인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양적인 무속 사상은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쌓아올리는 자기 의를 더러운 옷 같이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서 은혜의 왕좌 앞에서 필요한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 때문입니다. 일천 번제와 같이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거짓된 가르침이나 사람이 만든 제도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믿고, 말씀의 진리 위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가? 41

40 3.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흠정역: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저는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의 초청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교회에 나오는 가정을 보면 참 부러웠습니다. 저를 교회로 초청한 친구는 자기네 집이 삼 대째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삼 대째 믿는 집안은 안 되어도 좋으니 제발 가족들이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만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온 가족이 다 믿는 가정, 몇 대째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가정은 언제나 칭찬과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믿는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교리가 아닌 실제 생활에서는 교회에서 알게 모르게 개인의 신앙 못지않게 가문과 믿음의 뿌리를 강조했습니다. 목사님 설교에서도, 부모가 믿음 생활을 잘 해야 자녀가 잘 된다. 고 가르쳤고, 유아세례를 받게 해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인을 쳐 놓아야 마귀가 손을 대지 못한다. 고 하면서 아직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안고 나와서 엄마가 아이 대신 신앙고백을 하라. 고 했습니다. 제 친구들은 나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고, 목사님이나 성경학교 교사들은 디모데후서 1장 5절 말씀을 그들의 자랑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개역) 그들에 의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모계 쪽으로 유전이 되는 모양인지,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거쳐서 디모데에게까지 신앙의 유산이 상속되었다고 합니다.

41 물론 나중에 안 것이지만 믿음이 부모로부터 유전된다느니, 모태신앙이니, 유아 세례니 하는 것들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집안일수록 사람을 가문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서 목사님이나 장로님 댁 아들딸들은 대부분 소위 신앙의 명문 가문 끼리 혼인을 통해 그들만의 인맥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후배 중에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믿음도 좋고 성실한 자매가 있었는데 장로님 댁 아들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은 했지만 결혼 후 시댁에서 엄청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신앙생활에서 가문과 혈통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한국 교회만의 문제인지 혹은 제가 다닌 교회가 전통 사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교회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교회 내에서도 이렇게 가문과 집안 내력을 따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걸로 압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은 집안 내력이나 가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교를 들어봐도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봐도 불신 가정에서 믿음 생활을 하는 제가 위로받을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성경 말씀조차 사람이 그와 같은 가문이나 조상의 은덕을 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개역) 개역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아비의 죄는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 대까지 은혜를 입는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천 대까지 복 받고,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은 삼사 대까지만 이른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참 너그럽고 후한 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믿음의 조상을 두지 못한 제게는 큰 상처가 되었고 마음 한편에는 이 말씀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찌 된 건가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으니(수24:2),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그 아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앙갚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집안은 천 대까지 은혜를 받아야 하니 한 세대가 40년이라면 약 4만년 쯤, 한 세대를 100년으로 잡으면 10만년쯤은 아무 탈 없이 놀고먹을 수 있어야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43

42 하지 않을까요? 나중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답을 발견했기 때문에 위 구절들이 제게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역본들과의 번역 차이 문제 그리고 동일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글킹제임스역과 흠정역 성경이 출애굽기 20장 6절에 대하 여 각기 다르게 번역함에 따라 이 문제는 다시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출애굽기 20장 6절의 번역 문제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가? 출애굽기 20장 6절을 다른 역본들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른: 나를 사랑하며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 것이다. 개정: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 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우리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1000대까지 사랑을 베푼다. 공동: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쉬운: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걸쳐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 것이다. 흠정역: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한글킹: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자비를 나타내리 라. 현대인: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 자손 수천 대까지 사랑을 베풀 것이다. 현대어: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내린 명령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 지 그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44 바르게 읽는 성경

43 NIV: but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NLT: But I lavish unfailing love for a thousand generations on those1 who love me and obey my commands. / 1Hebrew for thousands of those NASB: but showing lovingkindness to thousands, to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NRSV: but showing steadfast love to the thousandth generation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NKJV: but showing mercy to thousands, to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KJV: And shewing mercy unto thousands of them that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MSG: But I m unswervingly loyal to the thousands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GNT: But I show my love to thousands of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obey my laws. Darby: and shewing mercy unto thousands of them that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Webster: And showing mercy to thousands of them that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위에 열거한 22개 역본들 중에서 수천 대 라고 번역한 역본은 15개이고, 수천의 사람들 로 번역한 역본은 7개입니다(KJV, Webster, Darby, NKJV, MSG, NASB, 흠정역).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말씀보존학회의 한글킹제임스역에서는 이 구절을 수천 대 라고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generation (세대) 이라는 단어가 없는데도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둘째는, 이처럼 서로 다른 번역이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 NLT(뉴리빙역)가 스스로 사실을 실토했다는 점입니다. NLT 역본에서는 for a thousand generations on those (천 대 동안)이라고 번역하면서, 난하주에는 1Hebrew for thousands of those 라고 표시해 놓았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원래 수천 명의, 수많은 이라고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히브리어 성경에는 원래 세대 (generation)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45

44 를 의미하는 단어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원래 성경에 세대가 없으면 번역할 때에도 세대를 안 넣으면 됩니다. 특정 단어를 삭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문에 없는 단어를 임의로 삽입하는 것도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말씀을 변개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문과 동일하게 옮긴 수천의 사람들 혹은 수많은 사람들 이라는 표현이 옳습니다. 2. 관련 구절들의 문제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를 해 보니 이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왜 다른 역본들이 자꾸 세대(generation)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려고 하는지 그들의 심정이 부분적으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우선 출애굽기 20장 6절에서 하나님이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는 말씀은 다른 성경 구절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34장 7절, 신명기 5장 10절, 신명기 7장 9절에도 유사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개역: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7) 흠정역: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KJV: Keeping mercy for thousands,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and that will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visiting the iniquity of the fathers upon the children, and upon the children s children, unto the third and to the fourth generation. 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10) 흠정역: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KJV: And shewing mercy unto thousands of them that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이상의 구절들에는 앞의 출애굽기 20장 6절과 마찬가지로 generation (세대) 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for thousands, 흠정역 성경의 수천에게 라는 번역이 옳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7장 9절에는 세대(generation)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46 바르게 읽는 성경

45 히브리어 성경에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도, 당연히 흠정역 성경에도 세대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개역: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7:9) 흠정역: 그런즉 너는 주 네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이시요, 신실한 하나님이신 줄 알라. 그분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되 KJV: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thy God, he is God, the faithful God, which keepeth covenant and mercy with them that love him and keep his commandments to a thousand generations; 여기에는 히브리어 성경에 세대를 나타내는 도르 가 들어가 있고, 영어 킹제임 스 성경에도 generatio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 구절을 천대까 지 라고 정확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혹시 앞의 출애굽기 20장 6절과 맞추기 위해서 여기에서도 수천 명에게 라고 하지나 않을까 했는데, 원문에 해당 단어가 있으면 넣고, 원문에 없으면 없는 대로 번역한다는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습니 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천대까지 라고 번역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 성경의 번역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한글킹제임스역이나 다른 역본들은 원문대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어기 고 인간적인 기준과 자의적인 잣대로 원문에 없는 단어를 추가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기 20장 6절에 자꾸 세대라는 단어를 넣으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출애굽기 20장 5절에 삼사 대까지 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6절에도 세대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둘째는, 출애굽기 20장 6절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명기 7장 9절에 to a thousand generations 라고 되어 있으니 그것과 맞추기 위해서 세대 (generation)라는 단어를 거기에도 삽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들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원칙, 즉 원문대로 번역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어기는 것이고, 주께서 섭리로 보존해 주신 단어들을 임의로 추가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사람들 주장대로라면, 요한복음 1장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이야기를 넣어야 되고, 사무엘기하에 다윗이 간음하는 대목이 있으니 그 사건을 역대기상에 도 기록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될 겁니다. 복음서는 각기 그 수신 대상자와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47

46 기록한 관점이 다릅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사무엘기의 기록과 주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국의 영광과 흥망을 기록한 역대기의 기록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기의 본문 구절과 신명기의 본문 구절이 일치해 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장 6절에서 세대 라는 단어를 안 쓰셨다면 그 단어 없이 번역하면 되고, 하나님께서 신명기 7장 9절에서 세대 라 는 단어를 쓰셨다면 그 단어를 넣어서 번역하면 되지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제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금도 말씀에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번역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가 훼손되지 않고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흠정역 성경은 세대 라는 단어가 원문에 없는 출애굽 기 20장 6절, 출애굽기 34장 7절, 신명기 5장 10절 등에서는 없는 대로 번역을 했고, 세대 라는 단어가 원문에 있는 신명기 7장 9절에는 세대 를 넣어서 번역했습 니다. 그러니 흠정역 성경의 번역은 정확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출애굽기 20장 6절의 번역이 정확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다루었 습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7장 9절 말씀에 의해서 조상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면 그 후손이 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사실일까요? 신명기 7장 9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7장 9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천대까 지 언약과 긍휼을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 어디에 그 명령을 지키는 자의 자손들이 그 조상의 은덕으로 잘 된다거나 은혜를 입는다거나 긍휼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다음을 계속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천대까지 인가, 천대에게 인가? 저희 식당을 방문하신 손님께 오전 11시부터 1시까지 런치를 무료로 제공합니다. 식당 앞에 이런 광고 문구가 붙어 있으면, 이것을 어떻게 읽습니까? 오전 11시에게 런치를 무료로 제공하고, 12시에게도 런치를 공짜로 주고, 1시에게도 런치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읽습니까? 아니면 오전 11시부터 1시 사이의 시간 동안 손님들에게 런치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겁니까? 문장 구조를 알기 쉽게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분해해 보겠습니다. - 주어: 저희는 - 동사: 제공합니다. 48 바르게 읽는 성경

47 - 직접목적어: 런치를 - 간접목적어: 방문하신 손님께 - 부사구: 오전 11시부터 1시까지 도대체 식당 주인이 런치를 누구에게 준다는 겁니까? 손님께 런치를 드립니까? 11시, 12시, 1시에게 런치를 제공하는 겁니까? 어느 누구도 11시나 12시, 1시가 무료로 런치를 받아먹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신명기 7장 9절은 출애굽기 20장 6절과는 다른 문장입니다. 비교 설명을 위해서 출애굽기 20장 6절을 to a thousand generations 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는 NIV를 인용하여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but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출20:6, NIV). - 주어: the LORD your God - 동사: show - 직접목적어: love - 간접목적어: to a thousand generations 출애굽기의 경우라면, 수여동사 show 의 간접목적어(수여대상)가 to a thousand generations 이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love, 직접목적어)을 누리는 수혜자가 천대 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문장은 I gave a book to him. 과 같은 구조입니다. 단, 실제 원문에는 세대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이 구절은 수천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음으로 신명기 7장 9절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로 살펴보겠습니다.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thy God, he is God, the faithful God, which keepeth covenant and mercy with them that love him and keep his commandments to a thousand generations; - 주어: the LORD thy God - 동사: keepeth - 직접목적어: covenant and mercy - 간접목적어: them(주를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 - 부사구: to a thousand generations(천대에 이르기까지) 출애굽기와 신명기 구절의 차이점이 보입니까?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두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49

48 구절을 나란히 대조해 보겠습니다. 출20:6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niv) 신7:9 keepeth covenant and mercy with them... to a thousand generations 출애굽기 20장 6절에서는 show 의 간접목적어가 to a thousand generations 이지만, 신명기 7장 9절에서 keep 의 간접목적어는 to a thousand generations 가 아니라 them 입니다. 위 문장에서 주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대상(간접목적어)이 누구입니까? 주를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천 세대 라는 기간입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천대 자손들 에 게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라면, 주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킨 them 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무엇을 받습니까? 이번에는 신명기 7장 9절의 to a thousand generations 는 부사구이며, them 이 목적어라는 것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자체 내장사전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keep, covenant, with 라는 세 단어가 동시에 들어가는 성경 구절 중 위 문장과 같은 형식으로 된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마음을 다해 주 앞에서 걷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을 베푸시나이다(왕상8:23). And he said, LORD God of Israel, there is no God like thee, in heaven above, or on earth beneath, who keepest covenant and mercy with thy servants that walk before thee with all their heart: 문장에서 부사구는 빼도 되지만 목적어는 빼면 안 됩니다. 위 열왕기상 8장 23절에는 부사구가 없다는 것 외에는 문장 형식은 신명기 7장 9절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꼭 같이 keep A with B 가 사용되었습니다.,who(LORD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 keepest covenant and mercy with thy servants 이 문장에서 직접목적어는 언약과 긍휼 (covenant and mercy)이며, 그 언약과 긍휼을 받아 누리는 수혜자들(간접목적어)은 주의 종들 (thy servants)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문장이며 부가적 설명을 위해 그 뒤에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를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7장 9절 말씀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keep 의 간접목적어 즉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과 긍휼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50 바르게 읽는 성경

49 그들의 천대 후손 (to a thousand generations)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그들 (them)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7장 9절의 천 대까지 는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입니다. 즉 조상 덕에 그 자손 천대가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언약과 긍휼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천대까지 에서 대, 세대 는 generation 인 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 는 시간의 회전, 즉 시대, 거주, 영원히, 세대, 항상, 자손 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반드시 후손, 자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너희와 함께하는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 사이에 대대로 영구히 맺는 언약의 증표가 이것이니라(창9:12). KJV: And God said, This is the token of the covenant which I make between me and you and every living creature that is with you, for perpetual generation s: 위의 창세기 9장 12절에 사용된 generations 를 후손, 자손으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나와 너희와 함께하는 살아있는 모든 창조물 사이에 영원한 자손들 동안 맺는 언약 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기간을 나타내는 말인데 자손들 동안 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내가 나와 너희와 함께하는 살아있는 모든 창조물 사이에 영원한 자손들에게 맺는 언약 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됩니다. 지금 이 언약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과 그와 함께 방주에 들어갔던 창조물 사이에 세우는 언약이지 영원한 자손들에게 세우는 언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한 후손들에게 주는 약속이 아니라 주께서 대대로 영구히 지키시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7장 9절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사랑하 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라는 말씀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자들(대상)과의 언약을 천대까지(오랜 시간) 잊지 않고 이행하시겠다는 뜻이지 그들의 뒤에 태어날 천대에게 언약을 지킨다 는 뜻이 아닙니다. 언약은 언약을 맺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지키는 겁니다. 후속 세대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과 언약을 맺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에게는 언약의 내용에 따라 그분의 긍휼이 베풀어지지만, 언약을 맺은 적이 없는 그 후 세대에게 는 언약의 혜택이 없는 것은 물론 지킬 언약 자체가 없습니다.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51

5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 이름을 크게 하고, 그가 복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십시오. 그러나 내 언약은 내가 내년에 이 정한 때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더불어 세우리라, 하시니라(창17:21).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로서 그의 언약을 자동으로 상속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아브라함의 이삭과 따로 정한 때에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다음 구절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레26:42).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신명기 7장 9절의 조건에 꼭 맞는 사람입니다. 만약 아브라함 덕분에 그 집 가문에 속한 자는 천 세대 뒤의 후손에게까지도 약속이 유효하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삭과 언약을 맺고 왜 야곱과 따로 언약을 맺었겠습니까?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 아, 저는 신명기 7장 9절 말씀의 의미가, 조상이 믿음 생활 잘 하면, 그 후손은 조상 잘 만난 덕에 천 대까지 혜택을 입는다. 라는 뜻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주께서 천 대까지(장구한 시간 동안) 잊지 않고 그분의 언약을 이행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2) 다윗의 공덕인가, 다윗과의 언약인가? 우리는 흔히 조상의 은덕을 입을 수 있다는 근거로 다윗의 유다 왕국을 거론합니 다. 남쪽 유다왕국은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와 도덕적 부패로 말미암아 당연히 멸망했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기억하셔서 참고 봐 주셨다는 주장입니다. 사무엘기하 7장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나옵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행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그에게 벌을 주리라. 그러나 내가 네 앞에서 물리친 사울에게서 내 긍휼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7:14-15).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랐으니 그 후손들이 죄를 많이 52 바르게 읽는 성경

51 지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 7장 9절 말씀처럼 조상 다윗의 공덕으로 하나님 의 긍휼을 입어서 멸망당하는 것을 면하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주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려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전에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또 다윗과 그의 아들들에게 영원토록 등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더라(대하21:7). 위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지 않으신 것은 다윗의 공덕 때문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이라고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다윗이 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약속을 이행하시 는 겁니다. 이것과 같은 표현이 출애굽기에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출2:24)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의 신음을 듣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 것은, 평소 그분께 잘 보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면을 봐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세우신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천대가 되건 만대가 되건 변함없이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심 깊은 조상의 공덕으로 그 후손이 덕을 볼 수 있다거나, 믿음이 좋은 집안은 그 자손까지도 하나님께 특혜를 받는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이제 신명기 7장 9절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까? 신명기 7장 9절에는 그분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언약을 지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 을 지키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의 후손들입니까? 눈을 씻고 봐도,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킨다고 했지, 그 후손들에게, 몇 대 뒤에 올 자손 세대들에게 언약을 지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물론 그 후손들이 믿음이 좋은 조상을 본받아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과도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도 같은 복을 주실 겁니다. 그러나 후손들의 영적 상태와는 무관하게 그 조상의 믿음 덕분에 후손들에게도 자동으로 그 약속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선조를 둔 덕분에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는다거나, 조상이 주께 복을 받아서 이룩해 놓은 것들을 어느 정도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 자손 세대가 조상의 공로 때문에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53

52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신명기 7장 9절 말씀은 우리가 조상의 은덕이나 공로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우리가 주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각 사람이 그분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은 조상의 공로를 인정하시는가? 한 때 우리나라에는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라는 책이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풀리고, 집안에 우환이 있고, 병든 사람이 있는 이유는 모두 조상들에게서 상속된 저주 탓이라는 이런 해괴한 논리는, 당시의 암울한 경제현실과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데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안 되면 조상 탓을 하는 한국인의 심성과 잘 맞아 떨어져 꽤나 유행을 탔고, 이 책의 인기에 편승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렇게 끊어라 라는 실용지침서(?)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조상의 공로 여하에 따라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저주를 내리실까요?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해 이 속담을 사용하여 이르기를,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자녀들의 이가 시리게 되었다, 하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겔18:2) 그 날들에 그들이 다시는,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자녀들의 이가 시리게 되었다, 하지 아니하리라(렘31:29).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왜 아들의 이가 시리게 될까요? 오직 신 포도를 먹은 사람만 이가 시리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어지는 에스겔서 18장에서 죄를 짓는 혼이 죽는다고 하시지, 아버지가 불법을 행했다고 해서 그 죄 값을 아들이 담당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사악한 자의 악도 그 사악한 자의 위로 돌아가게 됩니다. 보라, 모든 혼은 내 것이라. 아버지의 혼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혼도 내 것이니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의 의가 그 위에 임하고 사악한 자의 악이 그 위에 임하리로다(겔18:4, 20). 물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조상들의 무법한 행실을 배워서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54 바르게 읽는 성경

53 형벌을 받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듣기 어려운 환경은 조상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것이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죄와 불법을 대신 담당하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의 의로 그 자녀를 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공로로 천 대까지 복을 누린다면,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는데 왜 그의 손자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창6:8).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의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창9:25) 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노아, 다니엘, 욥을 3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이 아들딸은 건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4:20). 자기 아버지가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들의 아들, 딸이라고 해도 부모 덕분에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는 자기 자녀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 공로로 자녀가 함께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조상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에서는 신자가 자기들보다 훌륭한 덕을 많이 쌓은 성인들의 공덕을 입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의 공로 이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공로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55

54 4. 글을 마치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조상들의 공덕으로 복을 받는다거나 은혜를 입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왜 많은 사람들은 이를 오해하여 믿음 좋은 조상을 둔 집안은 자자손손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 할까요? 첫째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조상을 숭배하는 문화에 오랜 동안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상의 묘 자리를 잘 쓰고, 제사를 잘 모시고, 조상의 음덕을 입어야 자손이 잘 된다는 전통적인 생각들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모태신앙이라는 잘못된 개념, 유아세례(유아세례 의 세례문답은 부모가 대신 받습니다)나 추도 예배와 같이 비성경적인 제도, 신앙의 가문을 따지는 풍조 등과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부모의 공로와 덕을 의지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종종 교회에서는 기도의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 면서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려면 어머니들이 열심을 내야 한다며 새벽기도회로 철야기도회로 각종 집회로 동원합니다. 부모들은 자기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열심히 하면 자녀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님의 기도가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힘이지 부모의 공로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불신자 자녀에게 물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녀들이 주 앞에서 형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 자녀들 사이의 문제이지 부모의 공로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자녀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지, 부모의 믿음이 좋다고 자녀들이 그 공로로 구원받겠습니까? 자녀들이 공부를 해야 성적이 올라가지, 엄마가 100일 작정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공로로 성적이 올라가고, 대학에 합격하겠습니까? 둘째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 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은혜로 거저 받는 것보다 자기가 무언가 기여를 해서 얻어낸 것에 대해서 아주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태도는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착한 일을 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않아도 그분을 믿고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고 하면 그들은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구원을 받으려면 고행을 하고, 각종 종교의식을 행하고, 금욕생활을 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럴싸 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구원받으려면 맹목적으로 복종하 56 바르게 읽는 성경

55 고 재산을 헌납하라고 하면 그런 가르침에는 순순히 따르고 깊이 빠져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종교의식에는 자기 의 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현대판 나아만 장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종들이 가까이 나아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만일 대언자가 주인에게 명하여 어떤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면 주인께서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셨으리이까? 그런즉 하물며 그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몸을 씻어 정결하게 되라, 함이리이까? 하매(왕 하5:13)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네 병을 고치려면 열흘간 금식을 하고, 성전을 하나 짓고, 주께 엄청난 액수의 헌물을 바쳐라. 라고 했으면 나아만이 말을 잘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르단 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 버럭 화를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금식을 하고, 성전을 짓고, 헌물을 바치고, 뭔가 자기가 병을 고치는 데 기여하는 행동을 했으면 (특히 그 행위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내가 ~ 했으니 병이 나았다. 라는 뿌듯한 자랑거리가 되는데, 은혜로 거저 낫게 해준다 고 하니까 못 받는 겁니다. 나아만처럼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라는 생각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제게는 아들이 두 명 있습니다. 제 아들들에게 용돈 관리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심부름을 했을 때 칭찬 스티커를 받았을 때, 기분이 좋아서 기특하다고 용돈을 주었더니 정말 신이 나서 열심히 착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만족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자신의 능력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아빠, 심부름했는데 얼마 주실 거예요. 왜 오늘은 안 주세요? 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용돈이 이전에는 아빠가 은혜로 준 용돈 이었는데, 요즈음은 내가 일해서 번 돈 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내 돈, 내 돈 합니다. 아빠의 은혜의 선물은 간 곳이 없고 자기 공로, 자기 의만 남은 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생각, 나는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는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는 생각, 이것이 바로 자기 의에 해당합니다. 저 또한 그런 유혹에 자주 빠집니다. 최근 아침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의 응답으로 누군가의 건강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당장 나오는 반응이, 내가 아침마다 기도했더니, 이런 말이 입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라면, 주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분에게 치유의 능력을 베푸셔서 라고 할 겁니다.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57

56 내가 주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켰으니, 나를 포함하여 내 자손들이 천 대까지 복을 받을 것 같습니까? 내가 의로운 일을 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차례, 곧 하나님은 나에게 빚을 지신 것이고, 하나님은 당연히 내게 천 대까지 은혜로 갚으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사거나, 내가 행하는 율법의 행위로, 내가 힘써 세우는 자기 의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주십니다. 그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시나니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롬9:15-16). 만약 그것이 하나님 그분의 선한 의지와 긍휼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로나 행위에서 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롬11:6).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과 복은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우리 조상의 공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고, 자비와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나옵니다. 노아가 의인이라서 주께 은혜를 입었습니까? 아니면, 노아가 주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까? 어느 것이 먼저인지 성경을 찾아봅시다.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창 6:8-9). 나에게 임하는 축복이건, 나의 아들 딸, 자손들에게 임하는 축복이건 그것은 우리의 행위나 믿음이 좋은 조상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조상의 공덕으로 수천 대까지 자손들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없기를 바라며 짧은 글 한 편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토마스 풀러라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네 세대의 가족을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구세주의 족보가 네 세대에 일어난 현저한 네 변화로 수 놓여 있음을 발견하였나이다. 58 바르게 읽는 성경

57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낳았나이다. 불량한 아비가 불량한 아들을 낳았나이다. 아비야는 아사를 낳았나이다. 불량한 아비에게 선한 아들이외다.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았습니다. 선한 아비에게 선한 아들이 났나이다.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았나이다. 선한 아비가 불량한 아들을 낳았나이다. 오, 주님! 알았나이다. 제 아비의 경건이 제게 물려지지 못한다는 것은 저에게 슬픈 소식이옵니다. 그러나 또 제가 알게 되었나이다. 무도한 불경건도 유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제 아들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1) 1) 오스왈드 샌더스 저, 영적훈련, 나침반사, p.70 조상 덕에 자손 천 대까지 은혜를 누리는가? 59

58 4. 안 한 것과 못한 것 저는 오랜 기간 개역 성경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 문체와 용어에 길들여져 있어서 다른 번역본들로 성경을 읽으면 그 차이점이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때로는 이런 차이점 때문에 심각한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차이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마치 회색 바탕 위에 있는 검은 점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순수한 흰색 바탕에 올려놓고 보면 쉽게 발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은 최근에 사사기를 읽으면서 깨달은 바를 한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그 동안 사사기 1장과 2장을 연이어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갖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무능함을 왜 불순종이라고 하실까? 개역 성경에 의하면, 사사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 로 되어 있고 이어지는 2장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을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가나안 족속과 싸워서 쫓아내려고 했는데 힘이 약하여, 능력이 모자라서 다 쫓아내지 못했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심각한 범죄가 될까요? 이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사사기를 읽으면서 여러 역본들을 대조해 보니 어떤 성경에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고 되어 있고, 어떤 성경에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고 되어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했거나, 쫓아내지 아니 하였거나, 결론적으로는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서 안 나가고 버텼다는 게 되겠지만, 이 두 가지 표현 사이의 의미 차이는 제법 큽니다. 아시다시피 못하였다. 는 것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시도하고 노력은 했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아니하였다. 는 것은 애초부터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제 경우에도, 숙제를 안 한 학생과 숙제를 못한 학생, 출석을 안 한 학생과 출석을 할 수 없었던 학생에 대해 각기 다르게

59 처리합니다. 제 강의에 출석을 안 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야단을 치고 그만큼 점수를 감점하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출석을 못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 사유를 들어보고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처벌을 하지 않습니다. 정의의 잣대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열심히 순종했지만 목표한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실까요?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중 이번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가나안 족속과 연합하 고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는가? 이에 대해 흠정역 성경과 개역 성경을 대조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개역: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삿1:19) 흠정역: 주께서 유다와 함께하셨으므로 그가 산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주민들은 철 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두 가지 번역 모두 골짜기의 거주민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21절에서 흠정역 성경은 그들이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는데 반해 개역 성경은 그들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라고 합니다. 이처럼 두 번역이 차이를 드러냅니다. 개역: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삿1:21) 흠정역: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매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이 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느니라. 개역: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삿1:27) 흠정역: 므낫세도 벧스안과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다아낙과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도르와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이블르암과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 과 므깃도와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매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 거하려 하였더라. 그런데 이제 28절에 와서는 개역 성경도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안 한 것과 못한 것 61

60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개역: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 더라(삿1:28) 흠정역: 이스라엘이 강성한 뒤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그들을 철저히 쫓아내지는 아니하였더라. 만약 이스라엘 자손들이 정말로 능력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안 도와주셔서 적들을 쫓아낼 수 없었다면, 개역 성경에서는 이 구절도 지금까지의 문맥 흐름과 같이 다 쫓아낼 수는 없었더라. 라고 옮겼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전의 구절들처럼 할 수 없었다. 라는 주장을 더 이상 펼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공물을 받은 내용이 드러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조건으 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엄히 명하시기를,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셨지, 가나안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일을 시키거나 공물을 바치게 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능력이 있었으면서도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집니 다. 이후에 나오는 구절들에서도 두 역본은 계속해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와 쫓아내지 못하였다. 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개역: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삿1:30) 흠정역: 스불론도 기드론의 거주민들과 나할롤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매 가나 안 족속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공물을 바치는 자가 되었더라. 개역: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삿1:31) 흠정역: 아셀도 악고의 거주민들과 시돈의 거주민들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런데 사사기 1장 32절을 읽어보면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개역: [아셀이]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삿1:32) 62 바르게 읽는 성경

61 흠정역: 아셀 족속이 그 땅의 거주민들인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정말로 피 흘리기까지 싸웠는데도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면 역으로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쫓겨났어야 합니다. 즉 1장 34절에 오는 단 지파처럼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 내쫓기는 게 정상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으로 쫓아내었으니 그들이 단 자손이 골짜기에 내려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삿1:34). 이스라엘 자손이 정말 가나안 족속을 대적하여 싸웠다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거나 그들에게 역습을 당해서 내쫓기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32절과 같이 그들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쫓겨나지도 않는 어중간한 결과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32절에 의하면, 아셀 지파가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였다고 합니다. 도대체 가나안 족속들은 바보들만 모인 민족들일까요? 자기들을 쫓아내려고 덤비는 이스라엘 족속을 그들 가운데 거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 도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들과 손을 잡고, 그들과 동맹을 맺고 서로 통혼하고, 어울려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32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들과 연합한 것 을 보여 줍니다. 개역 성경과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 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는데, 적군을 쫓아내지 못해서 적군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거주했다는 이런 이상한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 다. 개역: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삿 1:33) 흠정역: 납달리도 벧세메스의 거주민들과 벧아낫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 땅의 거주민들인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와 벧아낫의 거주민들이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가 되었더라. 제가 원어 성경을 읽을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정말로 쫓아낼 수 없다. 와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가 원어로는 같은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2장으로 넘어가니 이제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나옵니다. 안 한 것과 못한 것 63

62 흠정역: 너희는 이 땅의 거주민들과 동맹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느냐?(삿 2:2)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나안의 거주민들과 동맹을 맺지 말라고 하셨습 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과 동맹을 맺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단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순종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의 제단을 헐지 아니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우상숭배를 했을 겁니다. 사사기 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어찌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느냐? 너희가 왜 순종할 수 없었느냐? 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왜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십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취한 행위에 대하여 사사기 2장에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내용으로 보건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던 것 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는 것 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사 기 1장의 개역 성경은 19절의 철 병거를 갖춘 골짜기 거민들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에서 모두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쫓아내지 않은 거나, 쫓아내지 못한 거나 그게 그거 아니냐할 지도 모르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자 사이의 의미는 아주 큽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한(불순종한) 이스라엘 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되겠지만, 만약 (열심히 순종했지만)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스라엘 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셨다고 하면, 정의와 긍휼의 하나님을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원칙도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기 때문입 니다. 안 한 것과 못한 것, 이 둘은 확실히 다릅니다. 사사기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먼저 순종하지도 않았으면서도 할 수 없었다. 고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찾아내고 자신의 죄를 숨기는 자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여 지키는 자가 되고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욕심이나, 사탄의 제안과 타협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정말로 능력이 부족하여 할 수 없을 때 에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 간구하여 그분의 도움을 받아 그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64 바르게 읽는 성경

63 5. 고슴도치인가, 해오라기인가? 얼마 전, [엄지뉴스]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애완동물로 개가 1위, 고양이가 2위 그리고 고양이에 이어 고슴도치가 3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집에서 고슴도치를 기르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보 사이트를 찾아보니 성경에 고슴도치가 나온다고 합니다. 1)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직접 개역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또 그것으로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비로 소제하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사14:23)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사34:11)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습 2:14) 개역 성경에는 고슴도치가 세 번 등장하며 세 번 모두 파멸과 황폐함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고슴도치가 황폐함의 상징이라는 점은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고슴도치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니, 제가 키우는 고슴도치가 과연 생존 능력이 강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역 성경에 기록된 고슴도치와 관련된 구절들을 읽고는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위 성경 구절들을 자세히 음미하면서 읽어 본 결과, 읽으면 읽을수록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구절을 가지고 말이 되니 안 되니 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불경스럽다고 하는 분이 1) 관련자료: 이 기독교 사이트(KCM)에서 제공하는 성경동물사전의 내용 중,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bittern(고 슴도치)로 되어 있다. 라는 내용은 잘못된 것입니다. KJV에 bittern으로 표기된 것은 맞지만 bittern은 고슴도치가 아니라 해오라기를 말합니다.

64 계실 지도 모르지만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 의문을 가지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첫째 구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서 14장 23절에 의하면, 그것으로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곳(바빌론)을 고슴도치 소굴, 물웅덩이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슴도치는 물웅덩이에서 살지 않으며 물웅덩이 주변에 굴을 파지도 않습니다. 고슴도치는 사막과 같이 건조한 곳에서 삽니다. 고슴도치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기르면 금방 피부병에 걸리거나 진드기, 곰팡이에 감염되기 때문에 집에서 고슴도치를 기를 때에는 사육장을 항상 건조하게 관리해 주어야 합니다. 설마 고슴도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것도 모르고, 이 말씀을 기록하지는 않으셨겠지요? 둘째 구절인 이사야서 34장 11절은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돔 땅이 황무하게 되며 에돔 시내는 유황 연기를 뿜는 역청이 될 것이라고 했고, 거기에 당아,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당아,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라니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황폐함을 나타내기 위해 새들의 종류를 나열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포유류에 속하는 고슴도 치가 목록에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 열거된 동물들은 모두 새들이어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조류들 가운데 포유류가 끼어 있어서 느낌이 어색하다거나 문장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슴도치가 등장하는 위 성경 구절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사야 14장은 바빌론에 대한 심판, 이사야 34장은 에돔에 대한 심판, 스바냐 2장은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황폐해진 파멸의 장소를 나타낼 때에는 새들이 등장합니다.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까지 번쩍이는 것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또 어디든지 사체가 있으면 거기로 독수리들이 함께 모여들리라(흠정역 마24:27-28). 그가 우렁찬 음성으로 힘차게 외쳐 이르되, 저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그녀가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며 온갖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 되었도다(계18:2).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 안에 서서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날짐승을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너희는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만찬에 함께 모여 왕들의 살과 대장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의 살과 말 탄 자들의 살과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나 작은 자나 큰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계 66 바르게 읽는 성경

65 19:17-18). 요한계시록에서 바빌론이 가증한 새들의 집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사야서에서 심판받은 바빌론이나 에돔 땅에서 살게 될 동물도 고슴도치가 아니라 새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 구절인 스바냐서 2장 14절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슴도치의 신체 구조와 습성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 구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고슴도치는 몸집에 비해서 다리가 아주 짧고 가느다랗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완만한 경사는 고슴도치가 기어오르지만 기둥이나 벽과 같이 수직으로 된 곳은 고슴도치가 기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둘째, 깃들이다 라는 것은 조류가 둥지를 트는 것을 말합니다. 고슴도치는 기둥 꼭대기에 오를 수도 없을 뿐더러 기둥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 수도 없습니다. 고슴도치는 땅 속에 굴을 파고 삽니다. 셋째, 고슴도치가 창에서 울 것이며 라고 했는데 고슴도치는 젖먹이시절 잠시 삐삐거리는 소리를 낼 뿐 소리를 내어 우는 동물이 아닙니다. 눈도 못 뜨고, 기지도 못하는 젖먹이 고슴도치는 어미와 함께 땅 속 동굴 속에서 생활하지 창으로 기어오를 수 없습니다. 최근에 고슴도치를 키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위 성경 구절을 개역 성경으로 읽는다면 다들 성경이 엉터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고슴도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슴도치의 습성을 모르실까요? 진리의 성경 말씀이 잘못된 정보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실수로 성경 기록자 들에게 잘못된 내용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딤후3:16)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의 잘못도 아니고 성경 기록자들의 잘못도 아니며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내용을 엉뚱하게 고쳐 적은 게 분명합니다. 즉 최초로 기록된 원문에는 과학적이고 올바른 내용이 기록되었지만 이 원문을 옮긴 사본들 중에서 일부 사본에서는 누군가가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도록 성경의 단어들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쳤을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수가 없지요. 여러 역본들을 대조해 본 결과, KJV, Darby, Webster역에서는 다른 역본들과 고슴도치인가, 해오라기인가? 67

66 달리 고슴도치 (hedgehog)라는 부분이 모두 해오라기 (bittern)라고 되어 있습 니다. 위의 구절들을 흠정역 성경으로 읽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또 내가 그곳을 해오라기의 소유가 되게 하며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멸망의 빗자루로 쓸어버리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사14:23). 다만 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그것을 차지하며 또 올빼미와 까마귀가 그것에 거하리니 그분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돌들을 팽팽히 드리우실 터인즉(사34:11) 양 떼들과 민족들의 모든 짐승이 그것의 한가운데 누우며 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그것의 위 문인방에 깃들이고 그것들의 노래 소리가 창에서 나며 문지방이 황폐하리라. 그가 백향목으로 지은 것을 드러내리라(습2:14). 이사야서 14장 23절에서 해오라기가 물웅덩이에서 산다는 것, 이사야서 34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곳은 새들의 처소가 된다는 것(계18:2), 스바냐서 2장 14절에서 해오라기가 문인방에 깃들이고, 거기서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누가 읽어도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황폐함과 파멸의 상징으로 고슴도치를 언급한 개역 성경은 분명히 그 내용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자칫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성경 내용은 엉터리이며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었다는 생물들의 특징도 모르는 분이라는 비난의 빌미를 제공해 줄 우려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이 고슴도치 (hedgehog)라고 기록한 부분은 킹제임스 성경에서와 같이 해오라기 (bittern)라고 해야 맞습니다. 히브리어로 고슴도치라는 단어와 해오라기라는 단어는 서로 철자가 비슷하거 나 혼동을 일으킬만한 단어가 아닌데 왜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요? 이는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영어 역본들이 킹제임스 성경과는 전혀 다른 사본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사진을 찍었는데 자기 얼굴이 실제 모습보다 못생기게 나왔다고 투덜대 는 사람에게, 우리는 농담 삼아 원판이 좋아야 복사판이 좋지. 라고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에 사용된 번역 저본( 底 本 )이 좋아야 그것을 이용한 번역본도 좋습니다. 좋지 않은 본문, 변개된 본문을 사용하면, 아무리 번역자의 실력이 좋고, 문장력이 뛰어나도 정확하고 올바른 성경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마7:16) 68 바르게 읽는 성경

67 6. 인간의 규례인가, 주의 방법인가? 이전에는 성경 공부를 할 때에만 역본들을 비교해가며 읽었는데 요즈음에는 성경 읽기를 할 때에도 여러 성경들을 대조해가면서 읽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성경 읽는 속도는 이전보다 많이 느려졌지만 다른 역본들과 비교하면서 읽을 때 더욱 선명하게 와 닿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최근에는 사무엘기하를 읽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은혜를 베푸셔서 나단을 통해 그와 그의 집에 대한 복된 말씀과 언약을 전해 주시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흠정역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받은 후 다윗이 주 앞에 드리는 고백이 제가 이전에 개역 성경으로 읽던 것과는 다릅니다. 개역: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삼하7:19) 흠정역: 그러나, 오 주 하나님이여, 이것은 주의 눈앞에 오히려 작은 일이었으며 주께서는 앞으로 오랜 시간 뒤에 주의 종의 집에 있을 일을 또한 말씀하셨사오니, 오 주 하나님이여,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 NIV: And as if this were not enough in your sight, O Sovereign LORD, you have also spoken about the future of the house of your servant. Is this your usual way of dealing with man, O Sovereign LORD? KJV: And this was yet a small thing in thy sight, O Lord GOD; but thou hast spoken also of thy servant s house for a great while to come. And is this the manner of man, O Lord GOD? 개역: 주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습니다. 흠정역: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입니까? NIV: 이것이 당신이 사람을 다루는 일상적인 방식입니까? KJV: 이것이 사람의 방법입니까?

68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은 두 가지 면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규례 와 방법 이라는 단어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은 인간의 규례이다 와 이것이 과연 사람의 방법입니까? 라는 전혀 상반된 다윗의 반응입니다. 이에 두 가지 중에서 어떤 표현, 어떤 번역이 적합한지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규례인가, 방법인가? 개역 성경은 주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다. (삼하7:19)고 합니다. 국어사전 에 의하면, 이 규례는 권리와 의무 관계를 다루는 법이나 규칙을 의미하기도 하고 관례, 관습, 방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무엘기하 7장 19절 말씀에 사용된 개역 성경의 규례 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치리자로 삼고, 네 이름을 높여주 었고, 이스라엘에게 안정된 처소를 주고, 네 뒤를 이을 씨가 왕국을 굳게 세우고, 인자와 긍휼을 그에게서 거두지 않고, 그 왕좌를 영원히 굳게 하겠다. 고 하셨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법이나 의무 규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법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그분의 선한 의지와 계획에 의해 그분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 언약의 내용을 살펴봐도 법적 의무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이렇게 복을 주겠다., 장차 네 왕국이 이렇게 될 것이다. 고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로 보건대, 이 구절은 법이나 규칙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대우하시는 방법, 다윗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규례라는 말의 의미는 법이나 규칙이 아닌, 방법, 방식, 관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규례라는 단어는 법규와 관례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므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무엘기하 7장 19절에서는 보다 의미가 명확한 방법, 방식, 관례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규례가 아니라 방법으로 번역했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 이 부분이 manner, way, custom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도 법규라는 의미로 잘못 이해할 수 있는 규례보다는 방법, 방식 이라는 번역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70 바르게 읽는 성경

69 2.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한 것인가? 사무엘기하 7장 19절 말씀은 평서문으로 읽느냐, 의문문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정확한 번역을 통해서 바른 의미를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비교를 위해서 우선 위에서 소개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과 NIV 이외에 다른 영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해당 부분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Webster: And {is} this the manner of man, O LORD God? - 오, 주 하나님, 이것이 사람의 방법입니까? NKJV: Is this the manner of man, O Lord GOD? - 오, 주 하나님, 이것이 사람의 방법입니까? NLT: Do you deal with everyone this way, O Sovereign LORD?1 / 1{Or This is your instruction for all humanity, O Sovereign LORD} - 오 주권자 하나님, 당신이 모든 이를 이런 방법으로 다루십니까? 난하주에는, 오 주권자 하나님, 이것이 모든 인류를 위한 당신의 가르침입니다. NASB: And this is the custom of man, O Lord GOD. - 오 주 하나님, 이것이 사람의 관습입니다. RSV: (해당 부분이 삭제되고 없음) NRSV: May this be instruction for the people, O Lord GOD! - 오 주 하나님, 이것이 백성들을 위한 가르침이 되게 하소서. (카톨릭 성경과 쉬운성경도 이와 유사한 내용임) Darby: And is this the manner of man, Lord Jehovah? -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방법입니까? MSG, GNT: (해당 부분이 삭제되고 없음) 성경 번역본별로 내용이 아주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만,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성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해당 구절을 아예 삭제해 버린 성경 (2) 이것이 사람의 방식입니다. 라고 번역한 성경 (3) 이것이 정말 사람의 방법입니까? 라고 번역한 성경 인간의 규례인가, 주의 방법인가 71

70 어떤 표현이 적합할지에 대해서는, 성경의 전후 문맥과 다윗의 인격과 성품, 성경의 다른 증거와 일반 상식 등에 기초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주님의 복된 말씀과 언약 앞에서 다윗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내 백성의 치리자로 세웠다. 네 이름을 높여주었다. 이스라엘에게 안정된 처소를 주겠다. 네 뒤를 이을 씨가 왕국을 굳게 세우게 하겠다. 그를 징계는 하되 나의 인자와 긍휼을 그에게서 거두지 않겠다. 네 집과 왕좌가 영원히 굳게 설 것이다. 고 하셨습니다(삼하7:8-16). 이 말씀을 듣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에 다윗 왕이 들어가 주 앞에 앉아 이르되, 오 주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니이까? 내 집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나이까? 그러나, 오 주 하나님이여, 이것은 주의 눈앞에 오히려 작은 일이었으며 주께서는 앞으로 오랜 시간 뒤에 주의 종의 집에 있을 일을 또한 말씀하셨사오니, 오 주 하나님이여,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삼하7:18-19) 오 주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니이까? 내 집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나이까? 주의 눈에는 이것(지금까지 주신 복)도 오히려 작은 일이었으며 오랜 시간 뒤에 제 집에 있을 일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 속에 나타난 다윗의 마음 상태는 다음 중 어디에 해당합니까? 1 무덤덤함 2 놀라움 3 슬픔 4 기쁨 5 두려움 6 감사 7 분노 제 생각에는 지금 다윗이 너무 놀라운 약속을 받아서 마음이 기쁨으로 들떠있고 감사로 가득 찬 상태라고 봅니다. 따라서 정답은 2번, 4번, 6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받은 다윗의 태도는 다음 중 어떻게 나타나리라 생각하십니 까? 아래에 소개된 다윗의 말 다음에 이어질 말로 어떤 표현이 더 적합할까요? 다윗: 주께서 나에게 복을 주고, 이처럼 놀라운 언약을 주셨으니 1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의 방법입니다. 사람의 관습에 의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주께서 사람의 규례대로 행하셨네요. 2 오 주여,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이 이 놀라운 약속들이 정말 사람의 방법입니까? 제 생각에는 다윗의 놀라움과 감사, 감격, 겸손함이 제대로 나타나게 하려면, 72 바르게 읽는 성경

71 둘째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2) 어느 표현이 본문의 문맥과 일치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복된 약속의 말씀을 듣고, 다윗은 지금 두 가지 면에서 놀라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와 같이 미천한 자에게 주께서 그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격입니다. 둘째는, 그 언약의 내용들이 너무 놀라운 것들이며, 일반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약속들이라는 점에서 놀랍니다. 이런 맥락 가운데서 그 다음에 어떤 표현이 오는 것이 적합할까 요? 1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개역) 2 오 주 하나님이여,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 (흠정역) 1과 같이 읽으면, 글의 흐름이 지금까지의 문맥에서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감사하던 다윗이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어, 하나님께서 제게 복을 주시고, 제 왕좌를 영원히 굳게 하시겠다고요? 그야 당연하지요. 그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례니까 요. 그리고 친절하게도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알려주셨네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규례대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방법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십니까? 감당할 수 없는 그분의 은혜 앞에서 한없이 낮아져서 그 말씀에 감격하고, 주께 감사하던 다윗이 왜 이렇게 갑자기 기고만장해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사람의 규례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까? 이건 다윗의 겸손한 성품이나 주께 감사를 드리는 다윗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문장 흐름과도 맞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지금 놀라움과 감사, 황송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면, 주께서 나에게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다니, 오 주 하나님이여,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 라고 고백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3) 하나님이 사람의 규례를 따르는가? 문맥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이 정말로 개역 성경에 나오는 표현과 같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만약 사무엘기하 7장 19절의 내용이, 그것은 주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하신 겁니다. 라는 뜻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품을 모독하는 구절이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간의 규례인가, 주의 방법인가 73

72 법도와 율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대로 행하면 우리가 그 가운데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 적은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규례대로 따랐다는 이야기 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를 그들에게 주며 내 법도를 보여 주었고(겔 20:11)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규례를 따랐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의 규례대로 행하였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까? 때로는 이웃을 사랑하거나 선을 베푸는 일처럼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지와 계획대로, 자신의 법규와 방식대로 행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람의 규례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이 말은 대단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표현입니다. (4) 이것이 정말 주께서 사람의 규례대로 행하신 것인가? 하나님께 불손한 표현이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행하셨다. 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축복과 언약을 하나씩 세어보면서 그중에 인간의 규례대로 행한 것이 과연 몇 개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개역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했다고 되어 있으니 개역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삼하 7:8) 목동이 왕이 된다는 인간의 규례나 관습이 있습니까? 일반적인 관습은 왕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인간의 관례입니다.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삼하 7:9) 하나님이 사람과 동행하는 이런 일이 흔한 일이며, 사람의 방법이나 관례입니 까? -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7:9) 천한 목동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인간적 규례입니까? 왕이나 귀족, 74 바르게 읽는 성경

73 용사가 명성을 떨치는 것이 인간의 관례 아닙니까? -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삼하7:10) 같은 사무엘기하 7장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삼하7:23) 하나님이 땅의 어느 민족을 큰 능력으로 다른 민족에게서 구원해 내시고, 주의 소유로 삼은 일이 있습니까? 이게 하나님이 인간의 규례대로 행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행하신 것입니까? - 네 몸에서 날 자식(씨, seed 단수)을 세워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죄를 지으면 징벌은 하겠지만 긍휼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삼하7:12-15). 세상 어느 나라가 영원히 견고하게 선 적이 있습니까? 이게 흔히 보는 인간의 방식입니까? 주께서 변함없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인간의 방법, 인간의 관례대로 행한 것입니까? 인간에게 한없는 자비와 긍휼이라는 게 있습니까? -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6). 인간의 규례에 따르면, 왕조도 바뀌고 나라도 망하고 왕위도 흔들립니다. 영원히 굳건하게 보전되는 왕국, 영원한 왕위가 인간의 규례에 의한 것입니까? 위에 열거한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주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행하신 것입니까? 그게 아니면, 주께서 이 모든 은혜를 특별히 다윗에게만 허락하시는 것이 인간의 규례입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규례를 따라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이런 구절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롬9:16). 하나님은 그분께서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이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복과 언약을 살펴보았으나, 그 가운데에서 주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행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나단으로부터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다윗도 아마 마찬가지 인간의 규례인가, 주의 방법인가 75

74 였을 겁니다. 주님, 제가 지금까지 겪고 들은 바로는 아직 주님으로부터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규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방법(규례, 관습)이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다윗이라면 위와 같이 고백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것 이란 다윗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복과 언약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규례나 방법에 따라서 주신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윗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사무엘기하 7장 19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수사의문문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Who knows? (누가 알겠어?) (즉 아무도 모른다 는 뜻입니다.) 이게 정말 사람이 할 짓입니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무엘기하 7장 19절 말씀은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무엘기하 7장 19절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사무엘기하 7장 21절 말씀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주의 마음대로 주께서 이 모든 큰일을 행하사 주의 종이 그것들을 알게 하셨나이다(삼하7:21). 위 구절을 잘 살펴보십시오. 주께서 이 모든 큰일을 행하신 것이, 인간의 규례대로 행하셨다. 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주의 뜻대로 (개역), 주의 마음대 로 (흠정역), according to thine own heart (KJV) 행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분명히 주께서는 사람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 이 큰일을 행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무엘기하 7장 19절과 7장 21절을 이어서 읽으면 보다 의미가 선명해질 겁니다. 오 주 하나님이여,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이니이까?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주의 마음대로 주께서 이 모든 큰일을 행하사 주의 종이 그것들을 알게 하셨나이다(삼하7:19-21). 개역 성경은 사무엘기하 7장 19절 말씀을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의 규례를 따르는 분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고, 주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들과 다윗에게 76 바르게 읽는 성경

75 허락하신 복된 말씀과 약속을 그저 인간의 관례에 따른 것으로 표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감격하고 감사하는 다윗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내게 그런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은 인간의 규례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하다. 라고 하여 다윗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여러 증거들(다윗의 태도, 성경 본문의 문맥, 본문 내용에 대한 검토,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의 비교 등)에 비추어 볼 때, 특별히 사무엘기하 7장 21절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사무엘기하 7장 19절 말씀은 주께서 인간의 규례대로 행하신 것 (개역)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과연 이것이 사람의 방법입니까? 라고 번역하며, 그 의미는 이것은 주의 뜻으로 말미암아 주의 방법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규례인가, 주의 방법인가 77

76 7.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흠정역: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제가 처음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그리스도예수안에)이나 한글킹제임스성경 (말씀보존학회)을 만났을 때 가장 낯설고 어색하게 느꼈던 부분 중 하나는 혼 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지금까지 개역 성경을 사용할 때에는 혼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킹제임스 성경을 읽다보면 혼이라는 단어가 제법 많이 나옵니다. 개역 성경은 soul 이라는 단어를 주로 영혼 으로 번역하고, 일부 경우(예컨대 같은 구절 내에 영 이 등장할 경우)에는 마음, 정신, 사람 등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영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개역 성경에서 혼, 영혼, 마음, 정신, 사람 등이라고 표현된 부분들도 모두 soul 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를 매번 혼 이라고 번역합니다. 저는 그 이전까지는 혼을 개역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주로 마음, 영혼, 정신 등으로 생각하거나 어릴 때 <전설 따라 삼천리>나 염라대왕과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전래동화에서 본 것처럼 죽은 사람의 넋, 혼령, 유령 정도로 생각했습니 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혼 (soul)들은 음식을 먹기도 하고,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판단하기도 하고, 여행을 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 즉 생명체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서 이 혼(soul)이라는 단어는 사람 그 자체를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습니 다. 어떤 구절에서는 혼(soul)을 마음 으로 바꾸어 읽어도 될 정도로 혼이 사람의 정신적인 작용을 나타낼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혼이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참고로, 영어 성경에서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정신작용으로서의 마음을 나타낼 때는

77 heart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성경은 혼의 존재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낯설게 여길까요? 저도 그랬고, 많은 분들이 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익숙지 않고 낯선 느낌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더니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 문화권에서 혼 이라고 하면, 살아있는 사람을 의미하기보다는 혼백사상에서 이야기하는 혼령, 넋, 유혼 등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아마 많은 분들이 혼이 무엇이냐고 하면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겁니다. 우리나라 전설에는 저승사자가 죽음에 이른 사람에게서 혼을 꺼내 염라대왕 앞으로 데려가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오랜 동안 이런 동양의 무속적인 혼 개념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는 성경에서 말하는 혼의 개념이 익숙지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믿는다는 분들 중에도 혼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개역 성경 자체에 이런 동양적 혼백 사상의 입장을 지지해 주는 구절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한국에 널리 퍼져있는 장로교회에서 주로 영혼/육 이라는 이분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을 영-혼-육 의 삼분설로 보느냐, 영혼-육 의 이분설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어느 입장을 택하느냐에 따라 주요 교리들이 크게 달라집니다. 기본적으로 이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 하는 인간론에 대한 것이지만 이 인간론이 달라지면 구원론이 달라집니다. 예컨대,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반드시 죽으리라. 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영혼이 죽었다고 할 경우와 영이 죽었다고 할 경우 -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영이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는 것을 말함 - 죄로 인해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깨닫고,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느냐 하는 구원론에 대한 설명이 달라집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 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별로 논쟁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지만 장로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칼빈주의 교리나 침례교 회의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따라서 논의하 는 문제가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무오성에 도전을 한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원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등 우리 믿음의 본질적인 영역을 해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대처해야겠지만, 그렇게 심각하지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79

78 않은 교리의 차이에 따른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그냥 신학자들끼리 알아서 토론하라고 그분들께 넘겨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이번에 쓰는 글들이 장로교회 교리에 따르면 이게 맞다. 거나, 칼빈이 이렇게 말했다. 거나 웨슬레는 이렇게 말한다. 라고 사람의 전통과 주장에 권위 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를 지지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에 대해 반대할 겁니다. 결국 이런 식의 소모적 논쟁은 남는 게 하나도 없고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최종 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훨씬 더 배울 점이 있고, 말씀에 대한 믿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루신 예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율법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눅10:26) 저 역시 혼에 대한 이 글을 전개함에 있어서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한 문제로 한정시키고자 합니다. 1. 혼이란 무엇인가? 제가 성경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혼은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 혼, 몸을 따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 성경적 용례에 의하면, 혼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역: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행27:37) 흠정역: 그 배에 있던 우리는 전부 이백칠십육 혼이더라. KJV: And we were in all in the ship two hundred threescore and sixteen souls. 개역: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창46:27) 흠정역: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태어난 아들들은 두 혼이었으며 야곱의 집의 모든 혼 곧 이집트에 이른 혼은 일흔 혼이었더라. KJV: And the sons of Joseph, which were born him in Egypt, were two souls: all the souls of the house of Jacob, which came into Egypt, were 80 바르게 읽는 성경

79 threescore and ten. 개역: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출12:15) 흠정역: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 서 끊어지리라. KJV: Seven days shall ye eat unleavened bread; even the first day ye shall put away leaven out of your houses: for whosoever eateth leavened bread from the first day until the seventh day, that soul shall be cut off from Israel. 개역: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시107:18) 흠정역) 그들의 혼이 온갖 음식물을 몹시 싫어하매 그들이 사망의 문들에 가까이 이르느니라. KJV: Their soul abhorreth all manner of meat; and they draw near unto the gates of death.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흠정역: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 KJV: Then they that gladly received his word were baptized: and the same day there were added unto them about three thousand souls. 혼에 대한 성경 구절들은 위에서 열거한 것들보다 훨씬 많고 표현들도 다채롭지 만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았습니다. 이 구절들을 읽어보면 혼은 곧 살아있는 사람 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동양의 혼백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혼(soul)은 죽은 사람의 혼령, 원혼, 유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시편 107편 18절을 보면, 그들의 혼이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까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혼이 음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까이 이르게 된다는 걸로 보아 이 구절에 나오는 혼은 음식 투정도 하는 존재이며, 음식을 계속 거부하면 죽음에 이르게 되겠지만 아직은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81

80 사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혼은 죽은 사람의 넋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혼이 사람의 정신적 활동인 마음, 정신,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위 성경 구절들은 정말 이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혹시 마음이 빵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정신이 빵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독서는 마음의 양식 과 같이 추상적 의미의 양식이 아니라 실제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불에 구워먹는 빵 말입니다. 정신이 빵을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출애굽기 12장 15절에 의하면 혼은 빵을 먹고 삽니다. 이것으로 보아 혼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 심리적 기제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soul)은 영혼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을 보면, 침례를 받은 사람들을 혼 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기록을 아무리 살펴봐도 영혼이 물속에 들어가서 침례를 받는 이야기는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 그 혼(soul)이 정말로 영혼이라 면 사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영혼을 어떻게 데리고 물에 들어가서 침례를 주었으며 그 영혼들을 한 명 두 명 세어서 3,000까지 세었을까요? 이것은 혼이 물에 들어갈 수 있으며, 침례를 받을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있어서 한 명 두 명 셀 수 있는 존재 곧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혼(soul)이 살아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은 영어사전에서 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어 사전에서 soul 의 용례를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soul : 3 [수사 또는 부정어와 함께] 문어 사람, 인명, 한 인간 an honest soul 정직한 사람. Not a soul was to be seen.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The ship sank with 300 souls on board. 그 배는 300명을 태운 채 침몰했다. Don t tell a soul.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오. 4a 수뇌자, 중심인물, 지도자 the soul of the movement 그 운동의 중심인물 5 [the soul] (정신의 구현이라고 본) 인물;(어떤 덕( 德 )의) 권화( 權 化 ), 화신, 전형, 귀감 the great souls of antiquity 옛날의 큰 인물들 정직한 사람을 영어로 an honest soul 이라고 하며, the great souls 는 위인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soul 을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전혀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전에 기록될 정도로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영어 성경이나 영어사전에서만 soul 이 사람 이고, 한글 성경을 사용하는 한국에서는 혼은 마음, 정신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 까? 그렇다면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사람(soul)이 빵을 먹고, 한국에서는 사람의 82 바르게 읽는 성경

81 마음(soul)이 빵을 먹습니까? 이것은 언어가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 나 대단히 어색하게 여기는 이유는, 성경 말씀에 기초한 혼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무속신앙이나 철학, 심리학 등에 기초해서 혼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성경은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을 혼 (soul)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혼이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고(시107:18), 두려움 을 느낀다고 해서(행2:43) 혼이 정신이나 마음, 심리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혼(사람)이 행하는 활동 중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2. 혼(soul, 네페쉬, 프쉬케) 에 대한 개역 성경의 입장 성경의 번역 용례에 의하면, 영은 spirit 혼은 soul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개역: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57:16) 흠정역: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항상 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영과 및 내가 만든 혼들이 내 앞에서 쇠할 것이기 때문이라. KJV: For I will not contend for ever, neither will I be always wroth: for the spirit should fail before me, and the souls which I have made. 이사야서 57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성경은 분명히 영과 혼을 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도 이사야 57장 16절 말씀에서 분명히 soul 을 혼이라고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만약에 개역 성경이 이 구절에 나오는 soul을 영혼 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영혼은 영과 혼을 의미하므로 위 구절은 그 영과 영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라는 이상한 표현이 되어 버립니다. 풀장 (pool은 수영장이므로 수영장장), 역전 앞(한자로 앞전 자를 사용하므로, 역 앞앞), 돼지족발( 足 은 발족이므로, 돼지 발발), 라인 선금 밖에(line=선=금)와 같은 표현은 우스개 이야기에나 어울리지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는 영과 영혼 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 성경에서 soul 이라는 단어는 주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1) 개역 성경은 soul 이 인격체로서의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역 성경에서는 혼(soul)을 살아있는 인격체로서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83

82 사람의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일부분으로 이해하거나, 영과 혼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영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때문에 개역 성경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soul 을 영혼, 마음 등으로 번역하지만, soul 의 의미가 사람을 구성하는 일부분(정신활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때에만 혼 이라고 번역합니다. 개역: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35:18) 흠정역: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냐민이라 하였더라. KJV: And it came to pass, as her soul was in departing, (for she died) that she called his name Ben-oni: but his father called him Benjamin. 개역: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창49:6) 흠정역: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은밀한 일에 가담하지 말며, 내 존귀야, 너는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도다. KJV: O my soul, come not thou into their secret; unto their assembly, mine honour, be not thou united: for in their anger they slew a man, and in their selfwill they digged down a wall. 개역: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 지라(왕상17:22) 흠정역: 주께서 엘리야의 목소리를 들으셨더라. 그 아이의 혼이 다시 아이에게 들어가서 그가 살아났으므로 KJV: And the LORD heard the voice of Elijah; and the soul of the child came into him again, and he revived. 개역: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욥33:22) 흠정역: 참으로 그의 혼은 무덤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이르느니라. KJV: Yea, his soul draweth near unto the grave, and his life to the destroyers. 84 바르게 읽는 성경

83 개역: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57:4) 흠정역: 내 혼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내가 불 위에 놓인 자들 가운데 누웠으니 곧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라. 그들의 이빨은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예리한 칼이로다(시57:4). KJV: My soul is among lions: and I lie even among them that are set on fire, even the sons of men, whose teeth are spears and arrows, and their tongue a sharp sword(시 57:4).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 다(시 94:17) 흠정역: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라면 내 혼이 거의 침묵 속에 거하였으리라. KJV: Unless the LORD had been my help, my soul had almost dwelt in silence. 개역: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124:7) 흠정역: 우리의 혼이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같이 피하였나니 올무가 끊어지므 로 우리가 피하였도다. KJV: Our soul is escaped as a bird out of the snare of the fowlers: the snare is broken, and we are escaped. 개역: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5:6) 흠정역: 내가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문을 열었으나 나의 사랑하는 이는 스스로 물러나 가셨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실 때에 내 혼이 쇠하였나니 내가 그분을 찾았으나 만날 수 없었고 그분을 불렀으나 그분께서 내게 응답하지 아니하셨도다. KJV: I opened to my beloved; but my beloved had withdrawn himself, and was gone: my soul failed when he spake: I sought him, but I could not find him; I called him, but he gave me no answer. 개역: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애2:12)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85

84 흠정역: 그들이 도시의 거리들에서 부상당한 자들같이 기절하고 자기 혼을 자기 어머니 품에 쏟으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즙이 어디 있나이까? 하는도다. KJV: They say to their mothers, Where is corn and wine? when they swooned as the wounded in the streets of the city, when their soul was poured out into their mothers bosom. 위 구절들은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 성경이 모두 soul 을 혼으로 번역한 사례들 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보듯이 soul이 사람의 일부분을 가리킨다고 생각될 수 있는 구절들에서는 개역 성경도 soul 을 혼이라고 번역합니다. 반면 개역 성경에는 빵을 먹는 혼이나 이집트로 내려간 혼이나 침례를 받은 혼과 같은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살아있는 혼 (살아있는 존재, 생명 체)으로 만드신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개역 성경은 같은 구절 내에 영(spirit)이 등장하면 soul 을 영혼 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한다. 성경 말씀에서 영은 spirit 이고 혼은 soul 이라고 구분되어 있습니다. 개역: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57:16) 흠정역: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항상 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영과 및 내가 만든 혼들이 내 앞에서 쇠할 것이기 때문이라. KJV: For I will not contend for ever, neither will I be always wroth: for the spirit should fail before me, and the souls which I have made. 개역 성경은 soul 을 영혼이라고 주장하다가도 하나님께서 영과 혼과 몸을 하나씩 따로 언급하시는 대목이 나오면 영혼이라는 번역을 포기하거나 이에 대한 다른 대책을 강구합니다. 위의 이사야서 57장 16절 말씀처럼 같은 성경 구절 내에 spirit 과 soul 이 동시에 나오면, 하나는 영으로 다른 하나는 영혼으로 번역할 경우,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럴 경우, 개역 성경은 어떤 방법을 써서 이런 문제를 피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무엘기상 1장 15절에서는 영이 슬픈 여자 를 마음이 슬픈 여자 로, 혼을 쏟아놓은 것 을 심정을 통한 것 으로 번역합니다. 개역: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86 바르게 읽는 성경

85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 상1:15) 흠정역: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영이 슬픈 여자이니이다. 내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다만 주 앞에 내 혼을 쏟아 놓았을 뿐이오니 KJV: And Hannah answered and said, No, my lord, I am a woman of a sorrowful spirit: I have drunk neither wine nor strong drink, but have poured out my soul before the LORD. 이사야서 26장 9절에서는 soul 은 영혼으로 옮기고 그 대신 영이라는 단어를 중심 이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개역: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26:9) 흠정역: 밤에 내가 내 혼으로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참으로 아침 일찍 내 속에서 내 영으로 주를 찾으오리니 주의 심판이 땅에 있을 때에 세상의 거주민들이 의를 배우리이 다. KJV: With my soul have I desired thee in the night; yea, with my spirit within me will I seek thee early: for when thy judgments are in the ear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will learn righteousness.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는 soul 을 마음 으로, 영을 신 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개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혼(soul)과 영(spirit)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 고 혼과 영이라는 단어를 없애 버리고, soul 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영(spirit)을 신( 神 )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에는 마음을 나타내 는 단어로 heart 라는 단어가 별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주신다고 했는데, 개역 성경은 이를 신( 神 )을 준다고 함으로써 마치 마귀숭배자들 의 강신술이나 무당의 신 내림인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개역: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42:1) 흠정역: 내가 떠받쳐 주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선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 KJV: Behold my servant, whom I uphold; mine elect, in whom my soul delighteth;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87

86 to the Gentiles.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과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도저히 사람이 변명할 수 없도록 영, 혼, 몸을 하나씩 따로따로 언급하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개역 성경 번역자들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이 영, 혼, 몸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역: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흠정역: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KJV: And the very God of peace sanctify you wholly; and I pray God your whole spirit and soul and body be preserved blameless unto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흠정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KJV: For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ding asunder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 이 구절들에서도 soul 을 영혼이라고 번역하게 되면 영과 영혼 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혼 이라고 있는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3) 개역 성경은 soul 이 아닌 것도 혼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서 혼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soul 이 아닌 데도 혼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몇 군데 있습니다. 혼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개역 성경이 어찌 된 일일까요? 개역: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88 바르게 읽는 성경

87 두려워하더라(행5:5) 흠정역: 아나니야가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을 거두매 이 일들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KJV: And Ananias hearing these words fell down, and gave up the ghost: and great fear came on all them that heard these things. 영어 킹제임스 성경 사도행전 5장 5절의 ghost 를 공포영화에서나 나오는 유령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숨을 의미합니다. KJV: And Jesus cried with a loud voice, and gave up the ghost(막15:37). give up the ghost 라는 표현은 마가복음 15장 57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숨을 거두다, 운명하다, 죽다. 라는 의미의 관용구입니다. 아래의 누가복음 12장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 혼을 그에게서 요구하시면 죽는 것이므로 숨을 거두는 것이나 혼이 떠나는 것이나 의미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어 보입니 다.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20) 흠정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게서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KJV: But God said unto him, Thou fool, this night thy soul shall be required of thee: then whose shall those things be, which thou hast provided? 개역 성경은 시편 88편 10절에서도 soul 이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제가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역: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 幽 魂 )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 리이까(셀라)(시88:10) 흠정역: 주께서 죽은 자들에게 이적들을 보이시겠나이까? 죽은 자들이 일어나 주를 찬양하리이까? 셀라. KJV: Wilt thou shew wonders to the dead? shall the dead arise and praise thee? Selah. 개역 성경은 이 구절에서 유혼( 幽 魂 )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혼이라는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89

88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유혼(원혼, 망혼)과 살아있는 남자 청년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중국영화 <천녀유혼>에 나오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바로 저 유혼을 의미합니다. 한자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단어의 뜻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유혼: 1영혼( 靈 魂 )이 육체( 肉 體 )를 떠나 부유( 浮 遊 )함 2또는, 그 영혼 유혼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도는 것 혹은 떠돌아다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과연 성경은 죽은 이의 영이 떠돌아다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6장 20-26절을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 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다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직무를 태만히 했거나, 영계를 다스리 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권력 누수현상이 발생했다고 봐야 합니다. 또한 개역 성경은 위 구절에서 죽은 자 (the dead)가 유혼이라고 합니다. 이는 혼을 죽은 사람의 넋, 혼령으로 이해하는 동양의 혼백사상, 무속신앙에서 유래한 것이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개역 성경에는 유혼( 幽 魂 )뿐만 아니라 유령( 幽 靈 )도 등장합니다. 개역: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마14:26) 흠정역: 제자들이 그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여 이르기를, 영이다, 하고 무서워서 소리 지르거늘 KJV: And when the disciples saw him walking on the sea, they were troubled, saying, It is a spirit; and they cried out for fear. 유령이란 죽은 사람의 영이 이 세상에서 못 다한 일이나 억울한 한( 恨 )이 있어서 편히 쉬지를 못하고 계속 현세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어릴 때부터 구약성경을 배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와 풍습, 문화, 세계관을 알게 해주는 탈무드를 읽어봐도 악마는 등장하지만 유령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것이 영이라고 생각하고 무서워한 것입니다(참고. 눅24:37). 개역 성경은 유혼( 幽 魂 )이나 유령( 幽 靈 )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또 그 유혼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혼령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무속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90 바르게 읽는 성경

89 말씀인데, 성경에서 이런 위험한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는 soul 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왜 개역 성경에서 는 혼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어려울까요? 또 개역 성경은 인격체인 사람을 혼이라고 부르는 것을 왜 그토록 꺼리는 걸까요? 이는 개역 성경의 번역자들이 동양의 무속신앙에 영향을 받아서 혼(soul)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 개역 성경의 혼에 대한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잘못된 방향으로 정립되어 있습니 - 개역 성경은 인격체로서의 살아있는 사람을 혼이라고 하지 않는다. - 개역 성경은 혼을 마음, 정신, 심정 등과 같은 정신작용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 개역 성경은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soul을 영혼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단, 하나님께서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도록 영, 혼, 육 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이 혼이라고 옮긴다. - 개역 성경은 유혼의 존재를 인정하며 죽은 자(the dead)를 유혼이라고 한다. 개역 성경의 잘못된 인간관, 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결국 잘못된 가르침을 계속 양산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인간관은 인간수명은 120세로, 이 수명을 다 못 채우고 죽은 불신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 라는 베뢰아(성락교회, CBA)측 의 귀신 교리를 옹호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시키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건전하고 바른 진리를 전파하는데 장애가 됩니다. 3. 살아있는 영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생령과 살아있는 혼 이야기를 하고자 쓴 글인데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 글은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 가 생령 (살아있는 영)인가, 살아있는 혼 (living soul)인가를 살펴보기 위한 글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살아있는 혼 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이란 단어에 대해서 낯설어하고, 개역 성경 번역자들이나 무속인들처럼 혼을 사람이 죽으면 몸에서 빠져나오는 혼령 으 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혼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91

90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경에서는 혼이란 살아있는 인격체로 서의 사람 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에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 혼, 몸을 각각 나누어서 말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시작과 기원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 안에는 사람의 시작, 죄의 시작, 언약의 시작 등과 함께 각종 이름들의 기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흠정역: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KJV:...she shall be called Woman,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는 것이 우리말로는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Man 에서 취하였으니 Woman 이라고 부르리라, 히브리어 로는 이쉬 에게서 취하였은즉 이솨 라 하리라, 공동번역에서는 이런 파생관계에 따른 어감을 살리기 위해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고 표현합 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도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서로 대구가 되도록 병행해 서 보여주는 병행체 문장이 나타나는데, 그 문장들을 통해서 사람과 혼이라는 단어가 어떤 어근에서 파생하였는지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이 생령 이라고 번역하고, 흠정역 성경이 혼 이라고 번역하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이 soul 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네페쉬 는 창세기 2장 7절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된지라(창2:7) 흠정역: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KJV: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땅(아다마)의 흙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네솨마)을 불어넣으 시니(나파흐), 사람이 살아있는 혼(네페쉬)이 되니라.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아다마의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네솨마를 나파쉬하시니 네페쉬가 되니라. 가 됩니다. 스트롱코드 사전을 찾아보면, 생령 혹은 혼으로 번역되기도 한 네페쉬(5315)는 92 바르게 읽는 성경

91 스트롱코드 5314번 나파쉬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나파쉬는 숨을 쉬다, 호흡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에서 파생된 네페쉬는 호흡이 있는 사람, 호흡하는 생명체 를 뜻하는 말입니다. 네페쉬가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KJV - soul 475, life 117, person 29, mind 15, heart 15, creature 9, body 8, himself 8, yourselves 6, dead 5, will 4, desire 4, man 3, themselves 3, any 3, appetite 2, misc 45 즉 이 단어는 혼으로 475회, 생명체로 117회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단어는 대부분 soul (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life (생명체, 생물)를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네페쉬 하야를 생령(살아있는 영)으로 번역한 개역 성경의 번역이 맞을 가능성이 1%라도 있으려면, 성경에서 네페쉬가 영(spirit)으로 사용된 사례가 최소한 하나쯤은 나와야 하는데 위에서 보시다시피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영 (spirit)을 나타내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아흐 라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아래 구절에 나오는 영(spirit)은 히브리어 성경에 루아흐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역: 그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욥4:15) 흠정역: 그때에 내 얼굴 앞으로 한 영이 지나가므로 내 몸의 털이 곤두섰느니라. KJV: Then a spirit passed before my face; the hair of my flesh stood up: 그런데 개역 성경은 엉뚱하게도 정작 루아흐 (영, spirit)는 혼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개역: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흠정역: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 KJV: Who knoweth the spirit of man that goeth upward, and the spirit of the beast that goeth downward to the earth? 위 구절에서 개역 성경이 혼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루아흐 (영)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이므로 위 구절에서는 혼이 아니라 영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은 혼을 의미하는 네페쉬는 영이라고 하고(창2:7), 영을 의미하는 루아흐는 혼이라고 번역하는(전 3:21)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성경 번역을 할 때 번역자들의 신념이나 세계관에 따라서 용어를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93

92 선택하거나 표현을 바꾸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이해하고 주께서 사용하신 그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 네페쉬는 혼을 의미합니다. 어원으로 따져 봐도, 단어사전을 찾아봐도,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살펴봐도 네페쉬는 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지 영을 의미하는 용도로 사용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 는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혼이라고 옮기는 것이 맞습니다. 네페쉬를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이야기하면 말이 되지만, 만약 네페쉬를 영 (spirit)이라고 우기면 다음 구절들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개역: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1) 흠정역: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창조물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 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KJV: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th, which the waters brought forth abundantly, after their kind, and every winged fowl after hi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위의 창세기 1장 21절에서 개역 성경이 생물 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히브리어 네페쉬 입니다. 혹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물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spirit)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개역: 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수10:28) 흠정역: 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빼앗고 칼날로 막게다와 그것의 왕을 쳤으며 그 안에 있던 모든 혼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 같이 막게다 왕에게 행하였더라. KJV: And that day Joshua took Makkedah, and smote it with the edge of the sword, and the king thereof he utterly destroyed, them, and all the souls that were therein; he let none remain: and he did to the king of Makkedah as he did unto the king of Jericho. 94 바르게 읽는 성경

93 개역 성경 여호수아기 10장 28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 에 나오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네페쉬입니다. 칼날로 사람(네페쉬)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칼날로 영(spirit)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네페쉬가 영이라면 여호수아기 10장 28절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민수기 6장에는 하나님께서 나사르 사람의 서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기로 서원한 사람은 시체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모나 형제, 자매의 시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자신을 더럽히 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역: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민6:6) 흠정역: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에는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 것이요, KJV: All the days that he separateth himself unto the LORD he shall come at no dead body. 네페쉬에 살아있는 (하야) 대신에 죽은 (무트)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네페쉬 무트 라고 하면 시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네페쉬로 인해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죽은 네페쉬는 죽은 사람(생명체)입니까? 죽은 영 (spirit)입니까? 이것까지도 억지로 끼워 맞춰서 죽은 영과 접하지 말라. 는 뜻이라고 우기는 분이 나타날지도 몰라서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구절을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개역: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있음이니라(민19:13) 흠정역: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의 성막을 더럽히느니라. 그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니 거룩히 구분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부정할 것이요, 그의 부정함이 여전히 그에게 있느니라. KJV: Whosoever toucheth the dead body of any man that is dead, and purifieth not himself, defileth the tabernacle of the LORD; and that soul shall be cut off from Israel: because the water of separation was not sprinkled upon him, he shall be unclean; his uncleanness is yet upon him.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95

94 민수기 19장 13절은 죽은 네페쉬를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시체는 만질 수 있지만 영은 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죽은 영 이 아니라 분명히 죽은 사람의 시체입니다. 이 시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 무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네페쉬가 영(spirit)입니까? 혼(soul, 살아있는 사람, 생명체)입니까? 성경에서 네페쉬 하야 (호흡이 있는 생명체, 살아있는 혼)와 네페쉬 무트 (시 체, 죽은 사람)의 용례를 살펴보면, 네페쉬란 영(spirit)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 7절은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혼이 맞습니다. 4. 예수님의 증언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가 살아있는 영인지, 살아있는 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창세기 말씀을 증거로 신청하겠습니다. 예수님 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창세기는 일점일획도 틀린 곳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 두 확실한 증거는 이번 논의를 마무리 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합니다. 먼저 창세기 2장 7절을 생령(living spirit)이라고 가정을 하고 이를 다른 말씀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 성경의 주장: 창세기 2장 7절, 아담은 살아있는 영 이 되었다. 여기서 예수님을 증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니라(눅24:39). 예수님의 증언에 의하면, 아담은 영이 되었기 때문에 살과 뼈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창세기 2장 21, 23절을 증거 문서로 채택하겠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1,23). 창세기 2장 21절에는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의 아내를 일컬어 자기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담에게 살과 뼈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개역 96 바르게 읽는 성경

95 성경의 주장대로 아담이 영(spirit)이라면(창2:7),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은 뼈와 살이 없기 때문에(눅24:39) 아담은 뼈와 살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21, 23절은 아담에게 뼈와 살이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셋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일점일획도 어긋남 이 없는 창세기 말씀이 거짓이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아담이 영이 되었다. 고 주장하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까? 저는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창세기 기록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잘못 된 것은 바로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 를 억지로 살아있는 영 이라고 하는 개역 성경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 를 살아있는 혼으로 번역하면 위의 구절들과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혼(soul)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하므로 당연히 뼈와 살도 있고,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빵도 먹고, 여행도 하고, 두려움도 느끼고, 침례도 받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 는 살아있는 영 (living spirit)이 아니라 살아있는 혼 (living soul)이라고 해야 올바 른 번역입니다. 5. 신약성경의 증거 창세기 2장 7절을 생령(살아있는 영)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흠정역: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KJV: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was mad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was made a quickening spirit. 개역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여 아담이 산 영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의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병행체로 영 이라 고 표현된 두 단어가 원문에서 같은 단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어 원문으로 보면, 아담은 살아있는 혼(프쉬케)이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프뉴 마)이 되었다. 로 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둘 다 영이라고 했지만, 그리스어 성경에는 사용된 단어가 다릅니다. 첫 사람 아담의 경우 프쉬케(혼)라는 단어를,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97

96 마지막 아담의 경우 프뉴마(영)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영은 프뉴마, 혼은 프쉬케, 몸은 소마라고 합니다. 혹시 프쉬케가 영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분이 계실지도 몰라서 개역 성경이 프쉬케라는 단어를 뭐라고 번역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프뉴마)과 혼(프쉬 케)과 몸(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 전5:23, 개역) 위와 같이 개역 성경도 영, 혼, 몸 중에서 프쉬케는 혼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혼을 영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쉬케가 영이라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하나님이 영과 영과 몸 을 보전해 주신다 는 겁니까? 개역 성경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성경이 프뉴마(spirit, 영)와 프쉬케(soul, 혼)라는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프쉬케를 영(spirit)이라고 잘못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개역 성경의 창세기 2장 7절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비교의 대상이 없이 네페쉬 하야 (살아있는 혼, 개역 성경은 생령이라고 함)가 단독으로 사용되었지만,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는 창세기 2장 7절과는 달리 혼(soul, 프쉬케)과 영(spirit, 프뉴마)이 같이 등장합니 다. 첫 사람 아담의 경우에는 soul (혼), 마지막 아담의 경우에는 spirit (영)으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선명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말씀에서 사용된 구약성경 인용부분이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기록자인 사도 바울도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 게 구약성경 창세기 2장 7절이 살아있는 혼 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는 영(spirit)이 아니라 혼(soul)이 라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같은 구절 안에서 혼과 영을 함께 언급하셨습니다. 또한 혼과 영을 나타내는 각기 서로 다른 단어 프쉬케(혼, soul)와 프뉴마(영, spirit)를 사용하심으로써 번역하는 자들이나 읽는 자들이 절대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이 하신 말씀들이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 혹은 사악한 자들에 의해 함부로 변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말씀들을 보존해주셨고, 말씀의 본래 뜻이 훼손되거나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98 바르게 읽는 성경

97 골라서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개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확히 구분되 는 단어들을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기들 마음대로 번역하여 프뉴마도 영, 프쉬케도 영으로 번역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보존해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창세기 2장 7절에서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혼(soul)이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몸에 하나님의 숨(영)을 불어넣 어 만드신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 하야 는 생령(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혼(living soul)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신 혼(soul), 영(spirit)이라는 단어 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 내부의 증거 즉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통해서, 창세기 2장 7절 말씀이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에게 주신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말씀은 바로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함부로 변개하거나 마음대로 번역하는 자들의 어리석고 무지한 행위를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인증 키, 안전장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라는 것을 확인해 주셨으므로, 이 구절이 인용하고 있는 창세기 2장 7절의 내용도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니라.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6. 마무리 및 개인 적용 처음에 글을 쓰면서, 이 글의 방향은 교리 논쟁이나 단순히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읽느 냐? 에 대한 문제로 한정시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그 몸에 하나님의 숨(영)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살아있는 완전한 생명체(혼)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것을 이렇게 읽습니다. 창세기의 다른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물에서, 하늘에서 짐승을 내라. 고 하셔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그분께 서 친히 만드신 존재라는 겁니다. 제가 60억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제 가족과 주변사람들도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저는 생령인가, 살아있는 혼인가? 99

98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만드신 몸에 숨을 불어넣으신 존재로서 주께서 그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다시 땅의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생이란 참 덧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최근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까?,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하나?, 다른 집에는 이렇게 저렇게 산다던데. 하면서 비교하는 마음 등으로 마음이 많이 복잡했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두다보니 제가 영원한 것에 대해 소홀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려주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흙으로 돌아갈 몸, 땅에 속한 몸이 장차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을 믿고,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고 투자를 해야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영원하시고(시 102:26), 주의 말씀은 영원하고(사40:8),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주의 성도들(요일 2:17)이 영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 매일 아침 교회 성도들 한 명씩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하고, 또한 제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교회를 통해 또 인터넷 공간을 통해 다른 분들과 함께 나누는 생활을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에서는 원문과 번역본의 단어를 서로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해서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런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꼭 필요한 분들이 아니라면 괜히 히브리어, 그리스어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그걸 배워야겠다고 결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좋은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00 바르게 읽는 성경

99 8. 하얘지는가, 검게 되는가? 개역: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욜2:6) 흠정역: 그들의 얼굴 앞에서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받으며 모든 얼굴이 검게 되리라. 구약성경 요엘서에는 메뚜기 재앙이 등장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털벌레, 메뚜기, 자벌레, 쐐기벌레 등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양식을 끊어버리 십니다. 털벌레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자벌레가 먹으며 자벌레가 남긴 것을 쐐기벌레가 먹었도다(욜1:4). 그가 내 포도나무를 황폐하게 하였으며 내 무화과나무의 껍질을 벗기되 깨끗이 벗겨 내버렸으므로 그것의 가지들이 하얗게 되었도다(욜1:7). 요엘 1장에서는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식량 부족과 기근, 가뭄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말랐고 무화과나무가 시들며 석류나무와 종려나무와 사과나무와 심지어 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으니 이는 기쁨이 말라 사람들의 아들들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이로다(욜1:12). 오 주여, 불이 광야의 초장들을 삼키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들을 태웠으므로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이다(욜1:19). 물 많은 강들이 마르고 불이 광야의 초장들을 삼켰으므로 들의 짐승들도 주께 부르짖나 이다(욜1:20). 그런데 주의 날이 임함을 알리는 이 재앙 앞에서 백성들의 낯빛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1) 낯빛이 하얗게 된다. (2) 낯빛이 검게 된다.

100 동일한 대상이나 현상을 묘사할 때 여러 가지 방식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이것이 맞고 저것은 틀렸다는 식의 비교보다는 어느 것이 더 우수하고 적합한 표현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날이 임함을 알리는 재앙 앞에서 사람들의 낯빛은 각 번역본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엘서 2장 6절 말씀에 나오는 백성들의 낯빛이 번역본들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색칠되어 있는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흠정역: 그들의 얼굴 앞에서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받으며 모든 얼굴이 검게 되리라. 개역: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개정: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공동: 뭇 민족은 그 앞에서 떨며 낯빛이 창백해지는구나. 새번역: 그들이 접근하면 모두들 자지러지고, 모두들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다. 현대어: 그들이 몰려오자 만민들이 두려워 떨고 겁에 질려 그들의 얼굴이 모두 샛노래진 다. 현대인: 그들을 본 사람들이 질겁하여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KJV: Before their face the people shall be much pained: all faces shall gather blackness. NKJV: Before them the people writhe in pain; All faces are drained of color. RSV: Before them peoples are in anguish, all faces grow pale. NRSV: Before them peoples are in anguish, all faces grow pale. NASB: Before them the people are in anguish; All faces turn pale. NIV: At the sight of them, nations are in anguish; every face turns pale. Darby: Before them the peoples are in anguish: all faces turn pale. Webster: Before their face the people shall be much pained: all faces shall gather blackness. 사람 얼굴빛이 참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번역자들과 번역본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색깔로 표현된다는 것이 놀랍기도 102 바르게 읽는 성경

101 하고 무척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15가지 번역본을 그 다채로운 색상별로 분류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됩니다. 하얗게 되다(3): 개역,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창백하다(7): 공동번역, NKJ, RSV, NRS, NAS, NIV, Darby 샛노래진다(1): 현대어 새파랗게 질린다(1): 현대인 검게 되다(3): 흠정역, KJV, Webster 주의 재앙 앞에서 사람들의 얼굴빛은 흑, 백, 청, 황, 창백(엷은 푸른빛이 도는 흰색) 이렇게 다섯 가지로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백하다 의 사전적 의미가 얼굴빛이나 살빛이 핏기가 없고 푸른 기가 돌 만큼 해쓱하다 는 뜻이니 다소 어감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얘지다, 새파랗게 질리다 등도 이 부류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창백하다 라는 표현을 쓴 번역본들과 검게 되다 로 표현하는 번역본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엘을 통해 이 말씀을 기록하실 때, 주의 재앙으로 인한 사람들의 낯빛을 이처럼 다채로운 색상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은 사람들의 얼굴이 검게 되거나, 희게 되거나, 새파랗게 질리거나, 누렇게 뜨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실까요? 저는 이스라엘 백성의 얼굴빛에 대한 성경의 표현이 단순히 색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의 날이 어떤 날이며, 그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 요엘서에 언급된 주의 날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런 색상에 대한 표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 말씀들을 묵상하고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엘서 2장 6절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공부하면서 저는 이 성경 구절에서, 킹제임스역의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 라는 표현이 여타 다른 역본들의 창백해지다 (turn pale)라는 표현보다 훨씬 적합하고 우수한 번역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1. 검게 되다 는 주의 날을 맞은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 두 가지 번역은 어감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주의 재앙 앞에서 크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하얘지는가, 검게 되는가? 103

102 극단적인 주장이 될 듯합니다. 우선 이 말씀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재앙으로 인해 사람들은 울부짖고(1:5), 애곡하고(1:8,9), 부끄러워하고(1:11), 기쁨을 잃 고(1:12), 두려워 떨고(2:1), 고통 받고(2:6)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고통과 공포와 절망 앞에서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슬픔, 두려움, 고통, 염려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을 테고, 그 결과 안색이 창백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역본들에서는 이런 심리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창백해지다, 하얘지다, 새파 랗게 질리다, 하얗게 질리다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이 상태를 gather blackness 라고 표현했습니 다. 제가 가진 영어사전에는 gather color (혈색이 좋아지다)는 나오는데 gather blackness 라는 표현은 안 나옵니다. 브루어(E. Cobham Brewer)의 Dictionary of Phrase and Fable, 1898 에서 Blackness 항목을 찾아보니 이렇게 예문과 의미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All faces shall gather blackness (Joel ii. 6) - i.e. be downcast in consequence of trouble - 재난의 결과로 풀이 죽다, 낙심하다, 의기소침해지다 gather blackness 는 문자적으로 검게 되다 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속에는 낙심하다, 절망하다 와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앙으로 인한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만 놓고 볼 때에는 창백해지다 (turn pale)나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나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 검게 되다 는 주의 날 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백해지다 (turn pale)와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를 각 상황에 맞게 구별해서 사용한 킹제임스 성경이 더 나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 다. (1) 킹제임스 성경은 창백해지다 와 검게 되다 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처음에 gather blackness 라는 좀 생소한 숙어를 대하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알기로 원래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원문 비평가들은 어렵고 난해한 표현이 많을수록 더 중요하고 좋은 사본이고 말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turn pale, wax pale, grow pale 등과 같은 쉬운 표현들을 두고서 왜 하필이면 gather blackness 라는 104 바르게 읽는 성경

103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그들이 turn pale 과 같이 쉬운 단어들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 당시에는 그런 표현들이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성구 사전을 사용하여 과연 킹제임스 성경에는 turn pale (창백해지다)이라는 표현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찾아봤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한 주가 야곱의 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하게 되지 아니하리라(사29:22). Therefore thus saith the LORD, who redeemed Abraham, concerning the house of Jacob,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이제 너희는, 남자가 아이를 배어 산고를 겪느냐? 하고 묻고 또 알아보라. 남자마다 산고를 겪는 여인같이 자기 손을 허리에 대며 모든 얼굴이 창백하게 변함을 내가 봄은 어찌된 까닭이냐?(렘30:6) Ask ye now, and see whether a man doth travail with child? wherefore do I see every man with his hands on his loins, as a woman in travail, and all faces are turned into paleness? 분명히 킹제임스 성경에도 창백해지다 (turn pal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창백해지다 (turn pale)라는 표현이 사용된 위의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의 본문 배경은 검게 되다 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요엘이나 나훔의 기록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사야 29장과 예레미야 30장은 주의 두려운 날 이 아니라 모두 고난 받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사야서 29장 22절은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말하며, 예레미야서 30장 6절은 사람이 놀라서 혹은 식물이 시들어서 창백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이런 경우 검게 되다 가 아니라 창백해지다 라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요엘과 나훔의 성경 본문은 이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요엘서 2장은 주의 두렵고 큰 심판의 날에 대한 이야기며, 나훔서 2장은 니느웨에 대한 주의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주의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말할 때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창백해지다 (turn pale)와는 구별하여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라고 합니다. 그들의 얼굴 앞에서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받으며 모든 얼굴이 검게 되리라(욜2:6). 하얘지는가, 검게 되는가? 105

104 Before their face the people shall be much pained: all faces shall gather blackness. 그녀가 텅 비고 비어 피폐하게 되었도다. 마음이 녹으매 무릎들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에 큰 고통이 있고 그들의 얼굴이 다 검게 되는도다(나2:10). She is empty, and void, and waste: and the heart melteth, and the knees smite together, and much pain is in all loins, and the faces of them all gather blackness.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고 창백해지는 원인도 다르고 상황도 각기 다른데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이런 차이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창백해지다 (turn pale)라는 표현 한 가지만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주의 두렵고 엄중한 심판을 이야기할 때에는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2) 검게 되다 는 주의 날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는 표현이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요엘서 2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이 끼고 짙은 흑암이 덮인 날이라. 이 날은 아침이 산들 위로 퍼지는 것 같으니 이는 크고 강한 백성으로 인함이라. 이와 같은 것이 지금까지 없었고 그것 이후에도 많은 세대의 여러 햇수에 이르도록 없으리로다(욜2:2). A day of darkness and of gloominess, a day of clouds and of thick darkness, as the morning spread upon the mountains: a great people and a strong;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ny mor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many generations. 주의 날은 어둡고 캄캄하고, 구름이 끼고 짙은 흑암이 덮인 날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백성들의 낯빛을 blackness 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은 이런 성경 본문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창백해지 다 (turn pale)와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표현이 더 적합하고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3. 검게 되다 는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에서 사용된 검게 되다 라는 표현이 사람들의 심리 상태 뿐만 아니라 재앙의 실체와 그로 인한 사람들의 모습을 중의적으로 나타내고 106 바르게 읽는 성경

105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엘서 2장 6절에는 백성들의 얼굴빛이 변했다고 합니다. 왜 그들의 낯빛이 달라졌을까요? 사람의 낯빛은 기쁨, 슬픔, 분노, 걱정 등 심리 상태에 따라 변하기도 합니다.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므로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빛이 변하니라(창4:5). 그때에 왕의 안색이 변하고 그가 자기 생각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므로 그의 허리뼈 마디가 풀리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매(단5:6) 여기까지가 그 일의 끝이니라. 나 다니엘로 말하건대 내가 깊은 생각으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였으며 내 안색이 변하였으나 내가 그 일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였느니라(단 7:28).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의 얼굴은 신체의 일부분이므로 건강 상태에 따라서도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환자의 얼굴에 핏기가 없고 황달에 걸린 사람의 얼굴이 누렇게 뜨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얼굴빛은 영양 및 건강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상에서 나온 음식을 거부하자 그들을 담당하는 관리는 만약 그들의 얼굴이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게 보이면 어떻게 하느냐며 염려합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물과 콩을 먹고도 혈색이 더욱 좋아졌다고 합니다. 열흘이 끝났을 때에 그들의 얼굴이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기름지게 보이니라(단1:15). 이처럼 신체적 건강상태나 영양공급 상태에 따라서도 얼굴빛이 변합니다. 그렇다면, 요엘서 2장에 나오는 백성들의 얼굴빛은 무슨 색이 될까요? 요엘서 1장 16절을 읽어보면 이 백성들의 상태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우리 눈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욜1:16) 요엘서 1장 16절은 (1) 주께서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먹을 양식이 끊어졌고, (2) 그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것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습니다. 백성들의 심리 상태 즉 주의 재앙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지고, 슬퍼 애곡하고, 두려워 떨고, 고통스러워하여 얼굴빛 이 변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첫째 것 즉 먹을 것이 우리 눈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라는 하얘지는가, 검게 되는가? 107

106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식량의 부족, 기근, 가뭄, 황폐함을 겪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굶주리게 되면 백성들의 신체 상태는 어떠하며 그들의 얼굴빛은 무슨 색이 될까요? 사람이 굶주리면 체내의 어떤 부분이 무슨 작용을 일으켜 얼굴빛이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적인 과학 지식이 없어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성경이 이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7-9절에 의하면 기근으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의 얼굴은 숯보다 검다고 합니다. 그녀의 딸의 나사르 사람들이 눈보다 순결하고 젖보다 희며 그들의 몸이 루비보다 붉고 그들의 윤택함이 사파이어 같더니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으므로 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없으며 그들의 살갗이 뼈에 붙고 말라서 나무토막같이 되었도다.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낫도다. 밭의 열매가 부족하므로 이들이 타격을 받아 쇠약해지는도다(애4:7-9). 예레미야애가 5장 9-10 말씀을 보면 기근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피부가 솥같이 검게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의 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우리의 빵을 얻으며 우리의 살갗은 무서운 기근으로 말미암아 솥같이 검게 되었나이다(애5:9-10). 대언자 예레미야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기근으로 굶주리게 되면 사람들의 피부색이 검게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엘서 2장 말씀을 읽어보면, 주님으로 말미암은 재앙으로 인해 식량이 끊어지고, 논밭이 황폐해지고, 가뭄으 로 물이 많던 강들도 말라버렸습니다. 백성들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얼굴빛은 어떻게 변할까요? 주의 날 앞에서 두려움 과 낙심, 슬픔, 고통으로 인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신체적 상황까지 고려해 보면 그들의 얼굴은 검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blackness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주의 심판 앞에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마음 상태뿐만 아니라 기근으로 인해 굶주린 그들의 모습까지도 그려내 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처럼 검게 되다 라는 표현은 주의 날에 그들에게 임하게 될 재앙이 무엇이며, 또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보여주기에 참으로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4. 검게 되다 는 이것이 계시록의 주의 날 과 관련 있음을 보여준다. 개역 성경에는 요엘서 1장 15절, 2장 1절 의 말씀을 여호와의 날 이라고 108 바르게 읽는 성경

107 번역했는데,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이를 주의 날 (the day of the Lord)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주의 날 (the Lord's day)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도 나옵니다. 개역 성경은 이를 여호와의 날 과 주의 날 로 각기 다르게 표현하여 이 날들이 서로 다른 날들인 것처럼 말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요엘서에 나오는 주의 날이나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주의 날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이는 주의 날 에 임하게 될 일들을 살펴보면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요엘서 2장 6절의 검게 되다 라는 표현이 기근으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요한계시록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는 네 마리의 말과 그 말을 탄 기수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셋째로 등장하는 말이 검은 말과 그 탄 자입니다. 그분께서 셋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셋째 짐승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더라. 이에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이라. 그 위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또 내가 들으니 네 짐승의 한가운데서 한 음성이 이르되, 일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일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너는 주의하여 기름과 포도즙은 해치지 말라, 하더라(계6:5-6). 계시록의 검은 말 역시 기근을 상징합니다. 기근이 심해져서 양식을 저울에 달아서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로 식량 구하기는 어려워지고 일 데나리온으로는 (장정 하루 품삯에 해당함) 겨우 밀 한 되밖에 살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위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검은 색이 기근을 상징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으며, 요엘을 통해서 말씀하신 주의 날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 시는 주의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엘서 2장 6절의 검게 되다 라는 표현은 단순히 주의 날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마음 상태, 그 이상의 것들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글을 맺으며 요엘서 2장 6절 말씀은 역본들에 따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개역: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흠정역: 그들의 얼굴 앞에서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받으며 모든 얼굴이 검게 되리라. 하얘지다 (창백해지다, turn pale)와 검게 되다 (gather blackness) 이 두 가지 표현 중에서 어느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킹제임스 성경의 표현이 보다 적합하고 우수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얘지는가, 검게 되는가? 109

108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검게 되다 와 창백해지다 가 상황에 맞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 검게 되다 는 어둡고 캄캄한 날 즉 주의 심판의 날 분위기와도 잘 조화됩니다. - 검게 되다 는 주의 심판 앞에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마음 상태뿐만 아니라 기근으로 인해 굶주린 백성들의 검은 피부 모습을 더 생생하게 나타내 줍니다. - 검게 되다 라는 표현은 주께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신 주의 날 이 곧 요한계시 록에 나오는 주의 날 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단순히 주의 날이 임할 때 백성들이 두려워서 안색이 변하는 모습만을 묘사하고자 하셨다면, 얼굴색이 검게 되건, 하얗게 질리건, 새파랗게 질리건, 샛노래지건 별로 의미 차이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얼굴색을 통해서 두려워하는 모습 이외에 재앙의 실체와 그로 인한 결과, 주의 날의 분위기, 그리고 요한계시록과의 관련성까지 표현하고 자 하신 것이라면 blackness 라는 단어가 꼭 필요했으리라 생각합니다. gather blackness: 검게 되다, 재난의 결과로 낙담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짧은 두 단어를 통해서 재앙의 실체(기근)와 그로 인한 백성들의 모습(검은 피부)과 심리적인 상태(절망, 낙심, 공포로 안색이 변함) 그리고 심판의 날 분위기를 모두 유효적절하게 잘 그려내셨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역본을 대조해 가면서 성경을 읽다가, 백성들의 얼굴빛에 대한 묘사가 개역 성경에는 하얘지다 로 흠정역 성경에는 검게 되다 로 완전히 반대로 표현되 어 있는 것을 보고 번역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얼굴빛의 차이에는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관련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비교해가며 그 의미를 찾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의 말씀에는 색상을 나타내는 간단한 단어 하나에도 이처럼 오묘한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순수한 말씀들 (Words)을 보존하셔서 제게 전해 주셨으니 단어들(words) 하나 하나에도 주의하면서 읽어야겠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때에 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잠2:4-5) 110 바르게 읽는 성경

109 9. 고래가 물고기인가? 제가 성경 공부를 할 때 대상을 작은 의미 단위로 나누어서 분석하고, 구조와 관계를 파악하고, 그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엮어서 서술하다 보니 종종 사람들로 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논리적으로 이해해서 믿느냐고 책망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성경 말씀을 인간의 지식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 다. 또한 제가 모든 성경 말씀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분석과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요, 순종의 대상입니다. 다만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믿음의 기초를 닦을 수가 없고 그 말씀을 생활 속에서 바르게 적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피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 라는 전제로 부터 출발합니다. 만약 제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으면 하나님께 묻고, 묵상하며, 성경 안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되,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그냥 그대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첫 출발점은 분석과 논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성경 말씀을 읽다가 잘 이해가 안 될 경우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겁니다. 어릴 때 피노키오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은 피노키오가 고래 배 속에서 탈출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당시 저는 고래 배 속이 얼마나 크면 사람이나 뗏목이 그 안에 다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교회에 다니면서 요나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피노키오를 떠올리며 그 물고기가 고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들 성경에 물고기 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어류이지 포유류에 속하는 고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 그 당시엔 개역 성경 - 을 찾아보았더니 과연 성경에 고래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110 않았습니다. 그래서 줄곧 무슨 물고기인지는 잘 모르지만 요나는 대형 다랑어 정도 되는 생선 배 속에 들어갔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자세히 공부하면서 이 물고기가 고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 개역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큰 물고기 라는 말이 세 번 나오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그 세 구절 중 두 구절에서 그 큰 물고기가 고래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개역: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1) 흠정역: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창조물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 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KJV: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th, which the waters brought forth abundantly, after their kind, and every winged fowl after hi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개역: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욘1:17) 흠정역: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더라. KJV: Now the LORD had prepared a great fish to swallow up Jonah. And Jonah was in the belly of the fish three days and three nights. 개역: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흠정역: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KJV: For as Jonas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whale s belly; so shall the Son of man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서 1장 17절과 마태복음 12장 40절 말씀을 비교해 보면 큰 물고기 가 고래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고래라고 믿으면 됩니다.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할 때에도 사람을 한 112 바르게 읽는 성경

111 입에 삼키고 배 속에 가두어 둘 수 있는 바다 생물이라면 고래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학적 지식에 의하면 물고기는 어류이고 고래는 포유류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서 1장 17절에 서는 큰 물고기라고 하셨다가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는 고래라고 하셨는데 두 말씀이 다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고래를 물고기라고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하나님의 생물 분류학이 사람들의 생물 분류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고래를 동물계 - 척추동물문 - 포유강으로 분류하고, 물고기는 동물계 - 척추동물문 - 어류강으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다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물을 분류하는 방식이 위에서 언급한 사람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창조물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서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창조물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0-21). 성경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어류와 조류를 만드시고, 여섯째 날에 포유류와 파충류를 만드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다섯째 날에 고래들과 물 속 생물들과 날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 땅의 짐승과 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생물 분류법을 기준으로 하여 생물을 만드셨다 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위의 창세기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는 날짐승 을 풍성히 내라고 하셨는데, 인간의 기준으로 궁창에서는 조류를 풍성히 내라 라고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조류이지만 날지 못하는 날짐승 인 펭귄이나 타조는 창조되자마자 지상으로 추락하여 즉사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거나 분별력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24). 창세기 1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식을 좇아 땅은 포유류를 내라 고 말씀하셨더라면, 고래, 바다표범, 물개 등과 같은 생물은 창조된 후 육지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괴롭게 헐떡이다가 죽고 말았을 겁니다. 하나님은 고래가 포유류이지만 그 큰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있도록, 풍부한 먹이를 고래가 물고기인가? 113

112 얻을 수 있도록 다섯째 날 물에서 물 속 생물들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래를 물 속 생물의 하나로 간주하시고 큰 물고기라고 부르십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큰 물고기란, 인간이 분류한 생물 계통수 즉 계-문-강-목-과-속- 종에 따른 어류로서의 물고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물을 분류하실 때 그 생물의 외형적 특징과 생활 습성과 생태환경을 고려하여 나누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의적인 분류 기준을 만들어 놓고 고래가 젖먹이 동물이라는 점만을 강조하여 고래가 어째서 물고기냐고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계통수 분류 방법이 옳다고 인정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 계획에 따라 물에서 물 속 생물과 함께 고래를 만드시고 그것에게 고래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고 그것을 큰 물고기 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세상 학문에만 권위를 두는 사람들의 교만한 태도가 잘못된 것이지 고래를 큰 물고기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 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그 물고기가 고래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셨더라면 그 물고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요나서 1장 17절에는 큰 물고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 물고기가 고래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으므로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생물 분류법이 사람의 것과 다르다는 것은 다음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날짐승 중에서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러하니라. 그것들은 가증한 것인즉 너희가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수염수리와 물수리와 대머리수리와 솔개 종류와 모든 까마귀 종류와 올빼미와 밤매와 뻐꾸기와 매 종류와 작은 올빼미와 가마우지와 큰 올빼미와 백조와 펠리컨과 수리와 황새와 왜가리 종류와 댕기물떼새와 박쥐니라(레11:13-19). 레위기에서 가증한 날짐승들을 나열하며 하나님께서는 박쥐를 다른 새들과 같이 날짐승으로 분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쥐가 어미의 배 속에서 태어나서 젖을 먹고 자라는 동물이라는 것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박쥐의 신체적 특징과 생활습성과 생태환경을 고려하여 그것을 날짐승이라는 분류 항목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래를 어류가 아닌 포유류로 분류하지만 하나님은 큰 물고기 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박쥐를 조류가 아닌 포유류로 분류하지만 하나님은 박쥐를 114 바르게 읽는 성경

113 날짐승으로 분류하십니다. 짧은 인간의 지식으로 어찌 하나님의 깊고도 오묘한 지혜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기준에 의하여 하나님의 기준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지혜와 명철을 구하며 그분께 배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사55:8). 고래가 물고기인가? 115

114 10.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오래 전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들 중의 한 가지는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답변을 찾아보고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기도 했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경 말씀 속에서 간단하게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1. 세 가지 이름을 가진 모세의 장인 성경에는 모세의 장인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 이 저도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 이드로, 호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배웠습니 다. 그 당시 저는 개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모세의 장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출3:1, 개역)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무리에게 먹였나이다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출2:18-20, 개역)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삿4:11, 개역) 출애굽기 3장 1절은 모세의 장인이 이드로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 절에는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준 일을 계기로 그 집에 유하면서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그 집의 사위가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십보라의 아버지 즉 모세의 장인이 르우엘이라고 합니다. 한편 사사기 4장 11절에서는 모세의 장인이 호밥이라고 합니다. 야곱(이스라엘), 여호수아(호세아), 사울(바울), 바사바(유스도, 요셉) 등과 같은 인물들에서 보듯이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갖는 일은 그다지

115 낯설고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장인이 이드로, 르우엘, 호밥과 같이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도 그리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2. 민10:29이 옳은가, 삿4:11이 옳은가? 그 동안 저는 모세의 장인 이름은 이드로 = 르우엘 = 호밥 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가던 중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상충되는 성경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민10:29, 개역) 위에 인용한 민수기 10장 29절은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로 알고 있었는데(출2:18-20),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이라면 호밥은 모세의 처남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말씀은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라는 사사기 4장 11절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고 저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동안 호밥은 모세의 장인으로 서 이드로, 르우엘과 동일 인물로 알았는데 느닷없이 호밥은 르우엘의 아들로서 모세에게는 처남이 된다고 합니다. 과연 호밥은 모세의 장인일까요, 아니면 모세의 처남일까요? 이런 문제 제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족보와 촌수 문제를 가지고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동안 성경 말씀은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던 제게 있어서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만약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라면 호밥을 장인 르우엘의 아들로 기록한 민수기 10장 29절은 틀린 것이 됩니다. 만약 호밥이 모세의 처남이라면, 호밥을 모세의 장인으로 기록한 사사기 4장 11절은 틀린 것이 됩니다. 즉 어느 쪽으로 판가름이 나건 하나님의 말씀은 흠이 있고 잘못 기록된 부분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단순히 모세의 가족 관계를 알아보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호밥에 대한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들, 증폭되는 의문 민수기 10장 29절과 사사기 4장 11절의 기록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은 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117

116 실제로, 안티예수, 안티기독교,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 등과 같은 단체에서는 성경의 무오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공격 수단으로서 바로 위와 같은 문제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답변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 기독교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기독교 관련 홈페이지를 찾아다니면서 이에 대한 답변을 검색해 보았지만, 명쾌한 답변을 제공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다. 대부분의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 히브리어로 장인이라는 단어와 처남이라는 단어가 같다. 그러니까, 장인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처남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장인을 나타내는 호텐이라는 말은 장인뿐만 아니라 처가집 남자 식구들 모두를 칭하는 표현이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답변에 만족하십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어떤 때에는 장인이고 어떤 때에는 처남이라면 이거야말로 성경 말씀을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개그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도대체 우리가 그 단어를 어느 경우에 장인으로 읽고 어떤 상황에서는 처남으로 읽어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말씀을 자기 백성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쾌하게 기록하셨을 텐데 왜 이 말씀은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고 저렇게도 번역할 수 있도록 헷갈리게 기록하셨을까요? 또한 히브리어로 어찌 기록되었건 간에 도대체 결론이 뭐라는 겁니까?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라는 건가요, 처남이라는 건가요? 저 답변대로 읽자면 장인일 수도 있고 처남일 수도 있다는 모호한 이야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 검색포털 크로스맵 1) 에서 제공하는 기독백과사전 코이딕에는 호밥 에 대해 아래와 같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호밥: 뜻은 사랑하는 자. 민10:29에서 그는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이라고 불리는데 그가 십보라(출18:2)의 오빠임이 명백하므로 모세의 처남이 다. 또한 삿4:11에는 모세의 장인 호밥 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모세의 처남 호밥 의 오기이다. 인터넷 사전의 내용이라고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위에서 인터넷 사전이 참고 구절로 제시한 출애굽기 18장 2절을 읽어보았더니 이드로가 십보라를 데려오는 이야기만 있을 뿐 호밥이 십보라의 오빠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1) 바르게 읽는 성경

117 또한 이 사전은 사사기 4장 11절 말씀이 잘못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 인터넷 사전을 만든 사람 혹은 운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오류가 있고 실수도 하는 불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제가 믿고 있는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그래도 혹시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나마 좀 의미가 통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당시 갖고 있던 영어 성경(NIV)을 찾아보았습니다. NIV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 어 있었습니다. Now Moses said to Hobab son of Reuel the Midianite, Moses father-in-law, (민10:29, NIV) Now Heber the Kenite had left the other Kenites, the descendants of Hobab, Moses brother-in-law(삿4:11, NIV), NIV에 의하면, 민수기 10장 29절에는 Hobab = son of Reuel = Moses' father-in-law 로 되어 있습니다. 즉, 호밥은 르우엘의 아들이며 모세의 장인이라 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NIV에서 사사기 4장 11절에는 Hobab = Moses' brother-in-law 즉 호밥은 모세의 처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에서는 동일한 호밥을 민수기 10장 29절에서는 모세의 장인이라고 했다가 사사기 4장 11절에서 는 처남이라고 하는 자체 모순에 빠져 버립니다. 물론 난하주에는 or father-in-law 라고 주를 달아놓긴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이상한 번역 기법(?)에 의거하여 일관된 원칙도 없이 어떤 때는 장인으로 번역하고 어떤 때는 처남으로 번역하다보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언제나 성경 문제는 성경을 통하여 성경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던 저로서는 성경 구절들끼리 충돌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으로 성경에 대한 의문점을 밝힐 수가 없게 되자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억측도 꾸며보게 되었습니다. 삿4:11은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라고 하고 민10:29은 호밥이 모세의 처남이라고 한다. 둘 다 성경 말씀이니 둘 다 맞는다고 가정하자. 즉 호밥은 모세에게 장인이기 도 하고 동시에 처남도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호밥은 십보라의 아버지도 되고 십보라의 오빠도 된다는 이야긴데 그러면 호밥이 자기 어머니와 근친상간 을 해서 십보라를 낳았다는 건가? 그래서 십보라는 호밥의 여동생으로서 모세에게 시집을 갔으니 호밥이 모세의 처남이 되고 십보라의 실제 아버지는 호밥이니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119

118 호밥은 모세의 장인도 되는 건가? 위 내용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답을 찾지 못한 채 이런저런 추리를 하다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생각 중 한 가지입니다. 당연히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잘못된 추론입니다. 하지만, 설령 위와 같은 억지 추측을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또 남아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8-21절과 사사기 4장 11절을 모두 받아들일 경우 르우엘 = 호밥 이 됩니다. 그런데 민수기 10장 29절에서는 르우엘의 아들 = 호밥 이 됩니다. 세 구절을 모두 종합하면, 호밥은 르우엘이며 동시에 호밥은 르우엘의 아들이 됩니다. A = B 이고 A = C 이면 B = C 도 성립합니다. IF {(호밥 = 르우엘) AND (호밥 = 르우엘의 아들)} THEN (르우엘 = 르우엘의 아들) 르우엘 = 르우엘의 아들이다??? 한 사람이 르우엘인 동시에 르우엘의 아들이 되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까지 억지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은 르우엘에게 호밥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 호밥이 아버지와 같이 르우엘이라는 이름도 함께 썼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추측일 뿐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성경적인 근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4. 해답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었다. 이 문제는 제가 이전에 혼자 성경을 연구하며 고민하다가 결국 미해결 문제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는 조금도 오류가 없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최근 다시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그 해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으며, 그분께서는 자기의 말씀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혜와 명철의 하나님은 호밥이 모세의 장인인지, 처남인지를 헷갈리시는 일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모세에게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기록하게 하셨을 때 당사자인 모세가 호밥이 자기 장인인지, 처남인지를 몰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에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셨을 때에 그 말씀은 분명히 오류도 없고, 내용도 모두 정확하고 진실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이나 필사가들이 그 최초의 성경 말씀들을 정확하게 옮겨 적었다면 그 사본들의 내용에도 오류가 120 바르게 읽는 성경

119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번역본)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어야 정상인데 만약 제가 가진 성경 번역본에는 오류가 있다면 이는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 번역본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쓰신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 - 당시 가지고 있던 개역 성경 - 이 일점일획도 틀린 곳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저에게 있어서 위와 같은 생각 즉, 내가 가진 성경이 원래 하나님께서 본래 기록한 성경과 내용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무모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나타내는 불경한 생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원본으로부터 여러 필사본들이 등장하면서 그 필사본 중에서 일부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 원래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으로 수정, 삭제, 첨가가 이루어졌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역 성경이나 NIV 이외에 각기 서로 다른 필사본에 기초하여 번역된 다른 번역본들에는 위의 말씀들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해서 여러 번역본들을 찾아보고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제가 도저히 제 머리와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풀 수 없었던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비교해 본 여러 가지 번역본들 중에서 다음 번역본들에서는 민수기 10장 29절 말씀이 개역 성경이나 NIV 등과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흠정역: 모세가 자기의 장인 미디안 족속 라구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KJV: And Moses said unto Hobab, the son of Raguel the Midianite, Moses father in law, Webster: And Moses said to Hobab, the son of Raguel the Midianite, Moses s father-in-law, 동일한 민수기 10장 29절 말씀인데 다른 역본들은 모두 호밥을 르우엘의 아들 로 기록하고 있지만 킹제임스 성경과 이를 번역한 흠정역 그리고 웹스터 성경은 호밥을 라구엘의 아들 이라고 합니다.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이 아니라 라구엘의 아들이라면 이제 민수기 10장 29절 말씀은 더 이상 다른 성경 구절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라구엘에게는 호밥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민10:29). 이 호밥은 모세의 장인이며(민10:29; 삿4:11) 출애굽기 2장과 3장에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121

120 의하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이름은 이드로 혹은 르우엘이라고도 불린다. 라구엘의 아들 = 호밥 = 르우엘 = 이드로 = 모세의 장인 기독교계 목사님들도 이런 의문에 대해 만족스럽게 상담을 해 주지 못했고 기독교 백과사전도 정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예 성경 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거나 성경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거라고 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히브리어 호텐을 장인으로도 해석하고 처남으로도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이 모순을 일으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해답은 원래부터 성경 말씀 속에 있었고 그 성경 말씀은 애초부터 민수기 10장 29절이나 사사기 4장 11절이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5. 라구엘이 르우엘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논리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이 아니라 라구엘의 아들이라는 것을 킹제임스 성경에서 발견하고 그 동안 고민하던 의문점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내심 흡족해 하며 혹시 이와 관련된 자료가 좀 더 있을까 싶어서 찾아보았더니 어떤 사람들은 르우엘은 라구엘과 동일 인물이며, 라구엘이라는 이름은 르우엘이라는 이름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언어적 변이를 일으킨 것일 뿐이다. 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 난감하지요? 문제 하나 해결했다고 좋아했더니 누군가가 또 다시 찬물을 끼얹어 버립니다. 그래서 과연 라구엘은 르우엘과 동일 인물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라구엘이 왜 르우엘이냐? 라고 물으면 그들 역시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기껏 발음이 비슷하니까 아마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 음가가 달라졌을 거라는 주장만 늘어놓습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성경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을 뿐입니다. 라구엘과 르우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본 결과 저는 그들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혹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증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르우엘이 라구엘이라는 이름으로 언어 변이(철자법, 발음 등)가 일어났 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의 이름을 122 바르게 읽는 성경

121 개명하는 것이라면 단시간에 이름이 바뀔 수도 있지만, 언어적 변이가 일어나려 면 많은 시간이 흐르거나 사회 전체에 큰 변화를 줄만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국어의 변화를 봐도 임진왜란 이후 맞춤법, 발음, 단어에 변화가 나타났고, 새로운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그 영향으로 신조어, 외래어가 생겨나는 등 언어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르우엘이 등장하는 출애굽기 2장 18절과 라구엘이 등장하는 민수기 10장 29절은 시간적 간격이 40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며칠 사이에 신조어나 이상한 발음이 등장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미디안 지역은 전통에 매여 살면서 목축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로 서,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만한 환경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큰 변화가 있었다면 모세, 미리암, 아론, 훌, 십보라 등의 이름에도 뭔가 변화가 일어났어야 하는데 왜 르우엘의 이름만 음가 변화를 일으켰다고 할까요? 둘째로, 만약에 르우엘이 라구엘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거나 혹은 르우엘의 발음이 변하여 라구엘이 되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르우엘의 발음 음가가 변하여 라구엘로 바뀌었다면, 모세가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기록할 때에는 그런 언어적 변이가 이미 다 이루어졌을 때일 겁니다. 그런 변화를 직접 겪은 모세로서는 읽는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도록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등장하는 장인의 이름을 하나로 통일해서 표기하거나 혹은 이름 옆에 별칭을 함께 표기하려 고 했을 겁니다. 모세가 르우엘과 라구엘을 구별해서 다르게 표기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호밥이나 이드로의 경우 모세의 장인 호밥, 모세의 장인 이드로 라는 명확한 수식어가 붙어 있으며 출애굽기 2장 18절을 보면 모세의 장인이 르우엘이라는 것도 명백합니다. 만약 라구엘이 르우엘과 동일인물이라면 왜 모세는 한 번도 모세의 장인 라구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분명 모세의 장인은 라구엘이 아니라 르우엘이며, 라구엘은 르우엘과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 다.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모세는 친절하게도 모세오경에서 이름이 바뀐 사람들에 대해서는 바뀌기 전후의 이름과 그렇게 바뀌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아브람-아브라함 (창17:5), 사래-사라 (창17:15), 야곱-이스라엘 (창 32:28), 요셉-사브낫바네아 (창41:45), 호세아-여호수아 (민13:16) 등과 같이 말 입니다. 그런데 르우엘-라구엘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 다. 모세가 기록한 오경이 아니라도 다른 성경 기록자들이 어디에선가, 예컨대 역대기상1장 27절과 같이 아브람이 있었는데 그는 곧 아브라함이라. 라는 표현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123

122 처럼 짤막한 언급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셋째로, 어떤 이들은 르우엘과 라구엘은 동일 인물이므로 사본을 옮겨 적을 때 어떤 필사가들은 르우엘이라고 적고 어떤 필사가들은 라구엘이라고 적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주장입니다. 사본이란 원본 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을 사본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안 베끼고 필사가들이 자기 마음대로 다르게 옮겨 적었다면 그것은 이미 변개된 사본이지 성경 사본이라 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존해 주신 성경에는 민수기 10장 29절에 모세의 장인, 라구엘의 아들, 호밥 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라구엘이 르우엘이라는 주장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은 주장이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6. 주의 말씀은 순수한 진리의 말씀이오니 왜 어떤 성경은 호밥을 모세의 장인이라고 하고 어떤 성경은 모세의 처남이라고 할까요? 왜 어떤 성경은 호밥을 라구엘의 아들이라고 하고 어떤 성경은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두 가지로 기록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세가 민수기 10장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눈이 침침하지 않고 힘이 약해지지 않았던 모세(신34:7)가 기억력이 흐릿해지고 치매 증상이 있어서 처가 쪽 족보를 잊어버리고 실수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르우엘과 라구엘의 이름이 비슷해서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이들 성경이 기초하고 있는 사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성경이 있습니다. 한 성경은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라고 했다가 호밥이 모세의 처남이라고 하면서 그 자체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호밥은 모세의 처남도 되고, 장인도 된다. 거나, 히브리어로 장인과 처남을 나타내는 단어가 같으므로 호밥은 모세의 장인이라고 읽어도 되고 모세의 처남이 라고 읽어도 된다. 거나, 르우엘은 르우엘의 아들이다. 라는 결론 즉 말이 안 되는 결론을 내리게 만듭니다. 반면 다른 성경에서는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며, 이 호밥은 르우엘 혹은 이드로 라고도 불리며, 그는 라구엘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른 어떤 성경 말씀과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세의 장인과 연관된 다른 성경 구절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위 두 성경 중에서 어느 것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124 바르게 읽는 성경

123 보존하고 있는 성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아무런 모순도 충돌도 일으키지 않고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성경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말씀을 필사하거나 번역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그 내용을 훼손했다면 그 성경 속에는 위와 같은 크고 작은 모순과 문제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한 그런 훼손된 성경을 가지고서는 이와 같은 난제를 풀려고 아무리 연구하고 묵상을 해도 (과거의 제가 그랬듯이) 갈수록 성경 말씀에 대한 의심만 생길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동안 성경 말씀의 무오성에 대해 고민하며 연구하던 어려운 문제가 올바른 성경 말씀을 펼쳐놓고 조명을 하니 이렇게 깔끔하게 풀립니다. 좀 더 일찍 킹제임스 성경을 만났었더라면 제가 저렇게 골머리를 앓으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오늘날까지 흠 없이 보존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주사,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며, 묵상하고, 그분의 뜻대로 믿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가, 처남인가? 125

124 11.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흠정역: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KJV: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 Not of works, lest any man should boast. 요한복음 3장 36절 말씀과 같이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누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역: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1) 흠정역: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런데 믿음 - 구원 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은혜, 믿음,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는 혼동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수식 관계가 불분명하여 두 가지로 해석될 소지가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게 되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은혜 덕분에 믿음 믿어서 구원받음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얻었다. 믿음 구원, 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것이 은혜 1) 개역 성경은 믿지 않는 을 순종치 아니하는 으로 바꾸어서 행위 구원을 강조함.

125 이 때문에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주장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셔서 구원을 주신다. 고 합니다. 또 다른 이는,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데 누구든지 믿는 자는 그 구원을 받게 된다. 고 합니다. 우리가 둘 중 어느 주장을 받아들이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라는 진리와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하지만, 첫째 주장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믿게 만든다. 라고 하면 이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 으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믿거나 믿지 않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었느냐, 주지 않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결국 사람에게는 선택권도 책임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사람은 믿거나 말거나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서 강제로 믿도록 만드시고(저항할 수 없는 은총), 반면 어떤 이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지 않아서 믿지 못하도록 만드신다. 는 겁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약속하신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기가 믿지 못하도록 만든 그 사람에게는 왜 믿지 않았느냐면서 지옥에 보내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둘째 주장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를 보내어 우리를 위한 화평 헌물로 삼으시고, 은혜로(율법, 선행, 도덕성, 수행 등을 전혀 요구치 않으심)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누구든지 그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로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 는 것과 믿어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교리적으로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개역 성경은 doctrine 을 교훈 이 라고 번역했지만 교리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에서 교훈은 instruction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성경을 가지고 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바른 교리를 만들고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 (doctrine)와 책망과 바로잡음 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저는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설교를 통해 알게 모르게 칼빈주의 예정론 교리를 배워 왔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여러 가지 의문점에 부딪혔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은혜를 주면 저 사람이 믿을 테고 안 주면 못 믿을 텐데, 내가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127

126 전도는 왜 해야 하나?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셔서 저 사람이 못 믿는 건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고 왜 그 안 믿는 사람을 심판하겠다고 하시는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다면,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은 왜 하는가? 차라리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으라고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니 우리로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더구나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개역 성경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저를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알겠는데 율법이나 선행을 요구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은혜인지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인지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은혜, 믿음,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발견한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들어가기 전에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국어 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말하기 를 가르칠 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수식어-피수식어(한정어-피한정어)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라는 겁니다. 예문 1: 나는 어제 저녁에 내가 사랑하는 소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위 예문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가 어떤 소녀를 사랑하는데, 그 소녀와의 교제를 허락해 달라고 그녀의 어머니를 만난 겁니까? 아니면 내가 한 소녀를 알고 있는데, 내가 그 소녀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위 문장은 수식 관계가 분명하지 못한 문장입니다. 이럴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누거나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낫습니다. 글이라면 쉼표를 찍거나 따옴표를 사용하여 수식 관계를 표시해 줄 수도 있지만, 스피치 문장에서는 말로 전달되기 때문에 문장부호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위 예문을 좀 더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도록 고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 소녀를 사랑한다면, 나는 어느 소녀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제 저녁에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128 바르게 읽는 성경

127 나는 어제 저녁에 내가 사랑하는 소녀, 그 소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나는 어제 저녁에 내가 사랑하는 소녀 의 어머니를 만났다. 예: 소녀의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나는 어느 소녀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제 저녁에는 그녀를 만났다. 나는 어제 저녁에 내가 사랑하는, 소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나는 어제 저녁에 내가 사랑하는 소녀의 어머니 를 만났다. 성경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기 쉽고,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하는데 개역 성경에는 이와 같이 수식이나 한정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역: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2:11) 흠정역: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KJV: For the grace of God that bringeth salvation hath appeared to all men,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위 문장의 주어는 the grace of God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를 수식하고 있는 말은 bringeth salvation (구원을 가져다주시는)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 아닙니다. 서술부는 그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 는 겁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구원을 가져다주 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 고 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라고 하면 하나님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한다는 주장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됩니다. 굳이 이대로 쓰자면, 쉼표를 찍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고 표현할 수도 있으나, 수식 관계를 확실하게 나타내려면 위 흠정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하는 게 맞습니다. 왜 들어가기에 앞서 수식 관계(한정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느냐 하면 한글개역 성경의 에베소서 2장 8절의 번역이 바로 위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129

128 2. 은혜로 구원을 받는가, 은혜로 믿게 되는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가, 은혜로 믿게 되는가?, 바꾸어 말하면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인가? 하는 겁니다. (1) 한글 역본들 비교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한글 역본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류의 번역으로 나뉩니다. 1 은혜로 믿어서 구원받는다.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공동: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쉬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현대인: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현대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2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 바른: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새번역: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말: 여러분은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가톨릭: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흠정역: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한글킹: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흠정역, 한글킹제임스역, 바른성경, 새번역, 우리말성경, 가톨릭성경은 모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고, 안 믿으면 그 은혜를 누릴 수 없어 구원을 못 받는다는 130 바르게 읽는 성경

129 겁니다. 그러나 개역, 개역개정, 공동번역, 쉬운성경,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은 모두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라고 번역하여 마치 믿음이 개인의 자발적 인 선택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어 성경은 그 후반부에 나오는 it is the gift of God 에서 it 이 가리키는 것이 믿음이라고 해석을 하여 믿게 된 것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 고 번역했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말에서는 단어나 구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수식관계가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도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되도록 여러 가지 의미로 기록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그 백성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명쾌하게 알기를 원하시지 성경을 읽으면서 헷갈리고 오해에 빠지고 엉뚱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겁니다. (2) 영어 역본들 비교 이번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어 역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KJV: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NIV: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NLT: God saved you by his grace when you believed. NASB: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NRSV: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NKJV: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MSG: Saving is all his idea, and all his work. All we do is trust him enough to let him do it. It s God s gift from start to finish! GNT: For it is by God s grace that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MSG)역은 가증스럽게도 grace, faith 와 같이 중요한 단어를 죄다 삭제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논의에서 제외하겠습니다. 영어 역본들 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By grace 즉 은혜에 의하여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은혜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은혜에 의해 믿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131

130 우리말 성경 중 일부 번역들은 은혜, 믿음, 구원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표현했지 만 영어 성경은 한결 같이 심지어 NIV, NASB 조차도 은혜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번역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믿음이 은혜가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구원을 돈 많이 내는 사람에게,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도덕성이 높은 사람에게, 고행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믿기만 하면 거저 주시겠다는 것이 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은혜를 거부하였기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현대어 성경과 같이 그렇게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뒤에 나오는 it is the gift of God 에서 it 이 믿음(faith)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십시오. KJV: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위 문장에서 through faith 는 부사구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 문장에 나오는 it 이 부사구 안에 나오는 단어를 가리킬 리는 없습니다. it 은 앞 문장 전체를 받습니다. 즉, 너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 다. 선물이란, 그것을 주는 사람이 손수 비용을 들여서 마련하여 자비를 베풀어 값을 받지 않고 거저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선물을 줄 때, 그것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물을 줄 때 손을 내밀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자에게는 그 선물이 자기 것이 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안 받겠다고 거절하면 그 선물은 그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선물을 받기 싫어하고 거절하는데 그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떠안겨서 강제로 받게 만드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전혀 죄를 뉘우치는 마음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리모컨으로 그의 마음을 원격 조종해서 억지로 믿도록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좋은 설교 말씀을 듣거나 아름다운 찬양을 듣고 마음에 격려가 되고, 감동이 생기면 은혜 받았다. 고 합니다. 혹은 누군가와 다툼이 생기면 은혜가 안 된다. 고 말하고, 그런 것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을 은혜롭게 처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은혜 나,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에서와 같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상대방에 132 바르게 읽는 성경

131 게 값없이 거저 베풀어 주는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라 는 엄청난 값을 치르시고 구원의 선물을 장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고, 마음씨 착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공로나 선행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거저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값없이 거저 주는 선물이 바로 은혜입 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을 갖게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가 아니라 너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흠정역: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KJV: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개역 성경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해석되도록 하여 혼동을 일으키도록 하지 말고 흠정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3) 다른 성경 구절들의 증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믿게 만드는가,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게 되는가? 에 대하여, 즉 은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다른 성경 말씀들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로마서 4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한 약속은 은혜로 되게 하려고 믿음에서 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은혜로 되게 하려고 믿음에서 나나니 그 목적은 그 약속을 모든 씨에게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곧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 그 약속을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 Therefore it is of faith, that it might be by grace; to the end the promise might be sure to all the seed; not to that only which is of the law, but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133

132 to that also which is of the faith of Abraham; who is the father of us all, 이 말씀에 의하면, 그 약속이 은혜로 되기 위해서는(by grace), 믿음에서 나야 한다(of faith)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번제 예물을 많이 드려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거룩한 생활을 해서,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고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고 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잘 나서 자기 공로로 얻은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창 15:6; 롬4:3; 갈3: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믿음의 법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도 율법이나 선행이나 도덕, 수양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5장 2절 말씀은 믿음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십니 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By whom also we have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wherein we stand, and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by whom),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into this grace wherein we stand) 들어갔는데(have access), 어떻게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믿음으로(by faith)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2절 말씀은 하나님의 거절할 수 없는 강압적인 은혜에 의하여 내가 내 의지나 판단과는 무관하게 억지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길, 죄를 용서받는 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놀랍고 복된 은혜를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 안으로(into)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믿음으로(by faith) 은혜 안에(into this grace)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6절, 로마서 5장 2절 말씀 역시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134 바르게 읽는 성경

133 은혜의 선물인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은혜로 믿게 되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3. 글을 맺으며 저는 장로교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장로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이며 장로교 교리나 칼빈주의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예전에 칼빈주의 예정론을 믿었던 것처럼 저와는 다른 교리를 믿고 있는 분들도 많이 계실 텐데 이 글이 혹시 그분들에 대한 공격이나 비판으로 비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 동안 고민하고 헷갈려 하던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의 의미를 성경 공부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지, 결코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거나, 어느 특정 교파의 교리를 지지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분들이나, 하나님 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분들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주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로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믿기만 하면 값없이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셔도 좋고,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제 돌이켜보니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들을 때 그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생각하고 감사하셔도 됩니다. 이처럼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돌이켜볼 때 자기가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된 것도, 믿음을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여기는 것(사후 해석)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믿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나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에게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 믿음을 갖게 만든다 는 가르침은 상당히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로 믿게 만들어서 구원한다 면 구원은 과연 선물인가?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135

134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이 믿고 안 믿는 일이 결정된다면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자유도 의지도 없는 로봇인가?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책임인가? 그런데 왜 공의의 하나님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 믿지 않게 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위와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책임론, 하나님의 공의, 전도무용론, 숙명론 등에 대하여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게 될 겁니다. 믿음이 우리의 선택이 아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은 예정론과도 관련이 있는 것인데 이 글에서 예정론까지 함께 다루기는 어려울 듯싶어 이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성경을 사용하여 그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때 바른 교리를 세우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동안 은혜, 믿음, 구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가져온 개역 성경 에베소서 2장 8절의 번역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정확한 번역에 기초하여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깊이 묵상하며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136 바르게 읽는 성경

135 12.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개역: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11:5) 흠정역: 토끼도 되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며 KJV: And the coney, because he cheweth the cud, but divideth not the hoof; he is unclean unto you. 토끼는 되새김질을 할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세상의 학문을 통해서 토끼는 반추동물이 아니다. 따라서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라고 배웠다면, 성경을 통해서 확실한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 과학 지식을 잠시만 보류해 두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레위기 11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을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장입니다. 곧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 사이에 구별을 두기 위한 법이니라(레11:47). 그런데 레위기 11장 5절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이들은 이 성경 말씀이 자기들이 배운 과학 지식과 다르다며 이 말씀이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구절을 빌미로 삼아서 아예 성경 말씀에 오류가 있다. 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무리들은 비단 안티예수, 반기독교 시민연합 등과 같은 적그리스도 단체들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임을 주장하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할 전직 대한성서공회의 총무가 공식적으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함으로써 연약한 신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레위기 11장 5절 말씀이 틀렸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민영진 목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의 글을 소개한 후, 이에 대해 성경 말씀과 과학으로 반증을 해 보겠습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공동체성서연구원에 실린 것으로 정확한 원문은 다음의 주소에서 볼 수

136 있습니다( 11. 토끼와 사반 레위기 11:4-6 민영진 목사(대한성서공회부총무) 구약성서에 토끼 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레위기 11장 4-6절에 또 한 번은 신명기 14장 7절에 이렇게 각각 한 번씩 나온다. 문제는 이 토끼가 우리말이나 영어 번역 성서에서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류( 反 芻 類 ) 동물로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로 토끼는 반추류 동물이 아니다. [표준새번역]과 일부 영어 번역은 오소리 (badger)까지 반추 동물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여기에 언급된 토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가축이다. 그러나 사반 의 경우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동물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판 의 우리말 음역( 音 譯 )이다. 무슨 동물인 지 확인할 수 없어서 발음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므로 우리말 번역으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 가 이 동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은 이것을 오소리 라고 번역하였다. 4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두 쪽으로 갈라졌더라도, 다음과 같은 것은 너희가 먹지 못한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5 오소리 (샤판)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6 토끼 (아르베넷)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레위기 11:4-6) 반추( 反 芻 )라고 하는 것은 한 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내어 씹는 일을 일컫는다. 소나 염소 등과 같이 소화가 곤란한 식물성( 植 物 性 ) 식물( 食 物 )을 상식( 常 食 )으로 하는 포유동물 ( 哺 乳 動 物 )에서 볼 수 있다. 반추류( 反 芻 類 ) 동물이라 함은 우제류( 偶 蹄 類 ) 중에서 소화 형태상으로 구분한 아목( 亞 目 )이다. 여기에 속하는 동물은 반추위 ( 反 芻 胃 )로 되새김질하는 특성을 가졌다. 초식성( 草 食 性 )인데 소, 양, 낙타, 사슴, 기린, 순록( 馴 鹿 ) 등이 이에 속한다. 반추위( 反 芻 胃 )라고 하는 것은 반추 동물의 위를 가리키는 말로, 3-4개의 실( 室 ), 또는 위( 胃 )로 나누는데, 소에 있어서는 식물( 食 物 )은 제1위인 류위( 瘤 胃 )에서 제2위인 봉소위( 蜂 巢 胃 )로 옮겨갔다가 다시 입으로 되돌아 와서 거듭 잘 씹어서 삼키면 다시 제2위를 거쳐 차례로 제3위인 중판위( 重 辦 胃 ), 제4위인 추위( 皺 胃 )에 들어간다. 제1위는 많은 식물과 물을 혼합 저장하고, 제2위는 벌집처럼 되어 있어 식물을 뭉쳐서 입으로 내보낸다. 제3위는 처녑 이라고도 하는데, 많은 엽상( 葉 狀 )의 판( 瓣 )이 있어 잘게 소화시키며, 제4위는 완전한 소화를 수행한다. 토끼류 (rabbit/hare/coney)나 오소리 (badger)는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들이 138 바르게 읽는 성경

137 다. 그런데 개역 레위기 11장 6절과 신명기 14장 7절에는 토끼 가 새김질을 하는 동물로 분류되어 있다. 심지어는 [표준새번역]에는 오소리 도 새김질하는 동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영어 번역 전통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KJV는 아르베넷 은 멧토끼 (hare)로, 샤판 은 집토끼 (coney)로 번역하였다. RSV는 아르베넷 은 산토끼 로, 샤판 은 바위 오소리 로 번역을 하였다. NIV는 아르베넷 을 집토끼 (rabbit)로 샤판 은 토끼 (coney)로 각각 번역하였다. 따라서 영어 번역에도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 아르베넷 을 토끼 (hare)라고 번역하고, 샤판 을 바위 오소리 (rock badger)라고 번역한 것도 그러하다. 또 영어 hare는 일종의 산토끼 로서 집토끼 (rabbit)보다는 크고, 뒷다리와 귀가 길며, 굴에 사는 습성, 곧 혈거성( 穴 居 性 )이 없는 것이 특징으로 소개되어 있다. rabbit이든 hare이든, 이 둘은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이다. 샤판 의 영어 번역 coney도 문제이다. 이것은 rabbit의 옛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둘 다가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이 새김질하는 동물 명단에 들어 있는 셈이다. 토끼(hare/rabbit)는 포유류 토끼목 토끼과 동물의 총칭이다. 아프리카 아메리 카 아시 아 및 유럽에 분포하며 종류가 많다. 일반적으로 토끼라면 유럽굴토끼의 축용종( 畜 用 種 )인 집토끼를 가리킬 때가 많다. 귀가 길고 꼬리는 짧으며 쥐목과 달라서 위턱의 앞니가 2쌍이고 아래턱을 좌우로 움직여서 먹이를 먹는다. 토끼류를 통속적으로 나누면 멧토끼류[ 野 兎 類 ]와 굴토끼류[ 穴 兎 類 ]로 대별된다. 이들 멧토끼 를 영어로 hare라고 한다. 굴토끼류는 땅에 굴 을 파고 살며 굴속이나 바위 밑에 마른 잎이나 털을 펴놓은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속에 새끼를 낳는다. 이 굴토끼류를 rabbit이라고 한다. 토끼류는 반추류 동물이 아니다. 샤판 을 오소 리 (rock-badger)라고도 번역하였으나 오소리는 족제비과에 속하는 짐승으로서, 너구리와 비슷한데, 몸길이 센티미터, 꼬리가 13센티미터 가량이고, 몸의 배면( 背 面 )은 갈색이며 털끝에 희백색의 털이 섞여 있어 서리를 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꼬리는 회갈색, 몸의 하면( 下 面 ), 사지( 四 肢 ), 주둥이, 머리 앞은 흑갈색이지만, 여름과 겨울에 따라 몸빛이 달라진다. 밤에 나무뿌리, 과실종자, 곤충, 뱀, 쥐, 토끼 등을 잡아먹는 잡식성( 雜 食 性 )이며, 2-4월에 서너 마리의 새끼를 굴속에서 낳는다. 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구약성서가 토끼 나 오소리 를 반추류 동물로 분류한 것은 민간 동물 분류에서 잘못 분류된 것이 그대로 성서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성서가 지니는 시대적 지식의 한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어 에르베넷 과 샤판 을 각각 토끼 와 오소리 라고 번역 은 하되 난외( 欄 外 )에 이러한 분류가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을 밝혀서 성서 독자가 잘못된 지식을 전달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가 토끼라고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139

138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아르네벳 이나, 오소리라 고 번역하고 있는 샤판 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토끼나 오소리가 아니라 실재로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반추류 동물이 있었는데, 다만 그것들이 이미 멸종한 동물(extinct animal)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역 성경이 히브리어 샤판 의 뜻을 몰라서 우리말로 그냥 사반 이라고 음역( 音 譯 )했듯이, 토끼라고 번역된 아르베넷 도 그냥 아르네벳 이라고 음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위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글을 읽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영진 목사의 글은 성경 말씀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성경 말씀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들 눈에 비친 대로 쓴 것이라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이분의 저서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목사의 말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지 성경 말씀으로 한번 검토해 보겠습 니다. 이번 글에서는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라는 문제와 함께 킹제임스 성경이 사반을 토끼라고 번역한 것은 적합한가? 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일단 저는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 5-6절 말씀에서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실한 믿음이 없는 분들과 이 말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들을 위해서 알기 쉽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살후3:2). 1.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되새김질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동물이 한 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내어 우물우물 씹는 행동을 말합니다. 외적 행동이 아닌 소화 흡수 과정을 중심으로 표현하자면, 일차적으로 소화시킨 음식물을 다시 섭취하여 1차 소화 과정에서 완전하게 소화시키지 못한 영양소를 재소화, 흡수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를 생각해 봅시다. 소는 위가 4개나 됩니다. 먼저 많은 음식물을 모아두는 혹위 가 있고, 벌집모양의 벽이 있는 벌집위 가 있습니다. 셋째는 주름이 아주 많은 겹주름위 가 있는데 여기서 수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가 먹은 음식물들이 140 바르게 읽는 성경

139 제대로 소화가 되는 진짜 위인 주름위 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개나 되는 위를 통해 소는 되새김질을 하면서 음식물 속에 있는 영양분을 알뜰하게 분해해서 흡수합니다. 그런데 토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토끼는 해부학적으로 네 개의 위를 가진 동물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토끼는 입을 우물거리며 무언가를 씹는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토끼가 되새김질하는 동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때문에 토끼가 되새김질한다는 성경 말씀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설프게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모세 당시 사람들은 과학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알고 기록한 것이니 그 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우리가 이해해줘야 한다. 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얼핏 듣기에는 하나님을 위해 변호하는 입장처럼 들리지만, 실상 그들의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모세 당시의 빈약한 과학 지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기록한 사람의 말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토끼를 키우는 분들은 토끼가 한 번 섭취한 음식물을 장 속에 있는 미생물을 통해서 분해한 다음에, 그것을 다시 되씹어 음식물 속에 있는 영양분을 완전히 흡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토끼의 식분 행동에 대하여 소개한 글을 한 편 정리해서 올립니다. 1) 토끼의 분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보통은 둥글고 단단하고, 다른 것은 부드러운 것으로 점막에 덮여 있습니다. 이것을 식변 (먹을 수 있는 변)이라고 하지요. 식변은 항문에서 바로 입으로 받아 잘 씹지도 않고 먹어버리므로 일반적으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습니다. 토끼는 생후 3주일부터는 식변을 먹는다고 하는데요. 자료에 의하면, 토끼는 이 식변을 먹고 비타민 B12의 기능을 강화한다고 하네요. 토끼실험에서 식변을 먹지 못하게 했더니 20-30일 만에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합니다. 식변을 둘러싸고 있는 점막은 토끼의 영양상태가 좋을 때에는 얇고(0.5%), 영양부 족일 때에는 두껍다고 합니다(0.9%). 이 점막은 결장의 횡행부와 하행부의 장선에 서 분비되는 점액으로 되어 있으며 성분은 당단백이고 많은 비타민 B12를 함유하 고 있습니다. 식분은 맹장을 거쳐서 직접 결장에 유입한 소화하지 않은 연한 식물과 소화관 내부의 미생물에 의해 합성된 비타민 B군이 결장의 점액에 의해 싸여져 수분이 흡수되지 않은 상태로 내려가 배설되는 것입니다. 토끼는 이것을 다시 항문에서 받아먹는 순환경로를 취하고 있습니다. 1) 달나라토끼농장( - 토끼상식 - 식분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141

140 밴쿠버 기독교 세계관대학원의 양승훈 교수는 한때 한국창조과학회 부회장까 지 지냈지만, 지금은 세상 철학과 타협하여 하나님께서 엿새 만에 세상을 만드신 성경 기록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성경이란 과학적 지식이 없던 그 당시 사람들이 자기들이 세상을 이해한대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세는 당시 사람들 이 이해하고 있었던 대로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움직이는 것으로 말했으며,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던 대로 (마치 되새김질 하는 짐승처럼 늘 입을 오물거리는) 토끼를 되새김질 하는 짐승으로 표현하였다. 성경 기자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기록했다. 고 하며 토끼가 되새김질한다 는 성경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 알고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양승훈 씨의 주장에 대해서 미국 조지아 대학에서 수의병리 학을 전공하신 김병재(ID: autrubjk)님께서 양승훈 씨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그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반박을 했습니다. 2) 우선 토끼의 되새김질에 대한 근거에 대한 증거 자료를 두 개만 들겠습니다. 1. Text of Rabbit medicine 2002 Frances harcourt-brown, BH 출판사 pp Ferrets, Rabbits, and Rodents. Clinical Medicine and Surgery. 2nd Edition Sounders 출판사. Chapter 15. Nutrition and Gastrointestinal Physiology p.155 위의 두 책을 근거로 볼 때 토끼는 음식을 먹은 후 미생물에 의해 분해해야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위에서 소화시키지 않고 바로 맹장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맹장으로 보낸 음식물들은 맹장에 있는 미생물들과 섞인 부드러운 형태로 항문을 통해 나오게 되고, 이를 입으로 받아먹어 오물거림으로써 미생물들이 작용하게 합니다. 이렇게 분해된 음식물들은 위로 보내져서 정상적인 소화 시스템을 거치게 됩니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 소화시키는 시스템을 되새김질이라고 하며 다른 반추동물들에서와 메커니즘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단지 식도를 통해 역류해서 되새김질을 하느냐 아니면 항문을 통해 배설한 후 되새김질을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 시스템은 반추류의 반추 시스템과 유사하여 유사 되새김질 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것을 유사 라고 부르는 이유는 토끼가 현재의 생물 분류 체계의 반추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바르게 읽는 성경

141 단지 오물거리기 때문에 모세 시대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해석(편집자 주: 양승훈씨의 주장을 말함)을 여러 군데서 접하게 되는데 이 또한 근거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초식동물들도 풀을 먹기 위해서는 대부분 입을 오물거리기 때문이지요. 입을 오물거리는 것만 가지고 되새김질을 했다고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모세가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이 글을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쨌든 토끼는 반추류에 속하지는 않지만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 맞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윗글에서 언급한 토끼의 식분(대변을 먹는 행위) 현상을 처음으로 밝혀낸 사람은 그리지멕 박사입니다. 그리지멕 박사는 레위기 11장 5-6절 말씀이 하나님 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전제 하에서 수년간 토끼를 관찰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먹이를 주고 옆에 앉았을 때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던 토끼들이, 모든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 잠이 든 시간인 밤 12시에서 새벽 3시 사이에 캄캄한 토끼 굴에서 혼자 몰래 되새김질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토끼는 일차적으로 소화된 음식물을 맹장의 미생물들과 섞어서 씨코트로프 (caecotroph)라는 물질로 배설한 후, 이것을 다시 입으로 씹어서 위에서 소화하지 못했던 영양소를 완전하게 소화 흡수합니다. 씨코트로프에 대해서는 1882년 프랑스 수의학지(French Veterinary Journal)에 처음으로 실렸으며, 많은 동물학 자들은 이 과정을 되새김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지멕(Grizimek)의 동물백 과사전은 토끼가 되새김질에 필수적인 씨코트로프를 생성하고, 또 셀룰로오스를 분해하는 세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을 반추동물이라고 명시하 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토끼가 소처럼 네 개의 위를 사용해서 되새김질을 하거나 먹은 음식을 게워내어 다시 되씹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토끼가 그렇게 했다가는 위산이 역류하여 식도가 다 손상되고 말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토끼를 위하여 그에게 맞는 되새김 질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장에서 반쯤 소화된 1차 대변을 항문에서 입으로 받아 다시 섭취하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비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헌신된 과학자들을 통해 토끼가 되새김질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143

142 따라서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는 킹제임스 성경 레위기 11장 5절 말씀은 옳습니 다. 굳이 이렇게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 이를 증명하건, 증명하지 못하건 그와 상관없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그 이해되지 않는 부분까지도 깨우쳐 주실 겁니다. 2. 사반을 토끼로 번역한 것은 적합한가? 레위기 11장 5절의 히브리어 솨판 은 싸판 (감추다, 은닉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이 은밀하게 숨는 속성을 가진 토끼나 너구리같은 동물일 거라고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레위기 11장 5절 말씀에 나오는 솨판 을 coney (토끼)로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은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여 토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솨판 을 coney(토끼)로 옮긴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우리말 흠정역 성경의 번역은 적합합니다. 한편 다른 한글 성경들은 레위기 11장 5절에 나오는 솨판 을 다음과 같이 옮겼습니다. 오소리(바른성경, 새번역, 우리말, 가톨릭, 쉬운), 사반(개역, 개역개 정, 공동번역, 현대어), 바위너구리(한글킹제임스) 등. 영어 성경 중에서는 KJV와 NIV는 이 솨판 을 coney (토끼)라고 옮겼고, NLT와 NKJV는 hylax (바위너구리) 로, NASB, NRSV, MSG 는 이를 rock badger (오소리)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 성경과 같이 솨판 을 사반이라고 음역을 하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반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그 사반이라는 동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오소리는 아시다시피 족제비과의 동물로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바위너구리는 몸집이 토끼 정도 크기이며 언제나 입을 우물거리는 습성이 있어서 마치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새김질은 하지 않습니다. 이제 어느 성경이 거짓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느 번역이 올바른 번역인지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솨판(토끼)은 되새김질을 한다. 라고 정확한 사실을 말씀하셨는데, 다른 역본들은 이 솨판을 오소리, 바위너구리 등으로 잘못 번역하여 결국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존해주신 성경 말씀으로 믿으며, 다른 역본들은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말씀보존학 144 바르게 읽는 성경

143 회에서는 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coney 를 토끼라고 번역하지 않고, 뉴리빙역 과 NKJV를 따라서 바위너구리라고 번역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글킹제 임스 성경이 영어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처럼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나 자기들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말씀이 나오면,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필요에 따라서 다른 역본들의 잘못된 번역을 따라갑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믿는 성도로서 이 점에 대해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며, 부디 다음 개정판에서는 한글킹제임스 성경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충실하게 그대로 옮겨주었으면 합니다. 3. 글을 맺으며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는 자들은 토끼가 반추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틀렸다고 합니다. 물론 과학자들의 동물 분류 방식에 따르면 토끼는 반추동물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반추동물이어 야만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토끼는 반추동물은 아니지만 1차적으 로 위와 장에서 소화한 음식을 식변의 형태로 만들어, 다시 섭취함으로써 반추동 물과는 다른 방식의 되새김질을 합니다. 토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에, 성경 말씀에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 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토끼가 입을 우물거리 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생각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처럼 잘못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과학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기록한 사람의 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오늘날 토끼가 이미 먹었던 음식물을 다시 한 번 되씹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정말 순수한 진리의 말씀이며, 조금도 오류가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불신자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전직 대한 성서공회의 총무였던 어느 목사님은 자신의 과학 지식에 근거하여 레위기 11장 5-6절 말씀이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분은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는 주장은 성서가 지니는 시대적 지식의 한계의 반영이다., 난외( 欄 外 ) 에 이러한 분류가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을 밝혀서 성서 독자가 잘못된 지식을 전달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성경 말씀의 내용은 틀렸고, 이렇게 잘못 기록된 이유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과학을 잘 모르는 시대의 무지한 사람들이 쓴 글이라서 그렇다고 해석합니다. 과연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로서,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가? 145

144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급한 다고 하는 대한성서공회의 총무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인지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토끼가 되새김질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했고, 킹제임 스 성경 번역자들은 그 당시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 원리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그대로 번역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었습 니다. 그리고 그리지멕 박사는 레위기 11장 5절 말씀이 일단 무조건 옳다고 믿고 토끼를 깊이 연구한 결과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보존되고, 전파되어,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의 입을 틀어막으시는 겁니다. 토끼가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이 말씀을 믿으시겠습니까? 성경에는 아직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따져보고 증명이 되고 이해가 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과학과 이성이 성경 내용을 증명하건 못하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성경 안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믿음은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를 둔 것이므로 그 누구도 이 믿음의 기초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주의 말씀을 믿는 이들에게는 이 말씀이 구원의 반석, 견고한 기초석, 믿음의 디딤돌이 되겠지만, 주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부딪히는 돌, 거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겁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주의 말씀을 부인하는 자들은 견고한 반석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서져 가루가 될 겁니다.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겠고 누구에게든지 그 돌이 떨어지면 그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리라, 하시니라(눅20:18). 146 바르게 읽는 성경

145 13. 활 노래인가, 활 다루는 법인가? 개역: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삼하1:18) 한글킹: (그가 또한 그들에게 명하기를 유다 자손에게 활의 용도 를 가르치라고 하더라. 보라, 그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니라.) 흠정역: (또 그들에게 명하여 활 다루는 법을 유다 자손에게 가르치게 하였으니, 보라, 그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느니라.) KJV: (Also he bade them teach the children of Judah the use of the bow: behold,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er.) 번역본들에 따라서 사무엘기하 1장 18절의 말씀을 활 노래, 활의 용도, 활 다루는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저는 흠정역 성경의 번역이 옳다고 믿습니다. 활 노래, 활의 용도, 활 다루는 법 등에서 무엇이 바른 표현인지는 성경 말씀에서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기하 1장 18절의 하반절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KJV: behold,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er. 위 문장에서 it 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활 노래 (2) 활의 용도 (3) 활 다루는 법 (4) 다윗이 유다 자손에게 (활 노래, 활의 용도, 활 다루는 법)을 가르치라고 지시한 사실 우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여호수아기 10장 13절 말씀이 필요합니다. 해가 멈추어 서고 달이 멈추어서 마침내 백성이 자기 원수들에게 원수를 갚으니라.

146 이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 (수10:13) 여호수아기 10장 13절을 통해서 우리는 야셀의 책이 노래 책 이 아니라 전쟁 관련 기록물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야셀의 책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중요한 전쟁에 대한 기록이나 교훈, 무기, 전술 등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수아기가 기록된 시기는 BC 143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여호수아기 10장 13절에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라고 표현한 것은, 여호수아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야셀의 책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이야깁니다. 야셀의 책은 BC 1430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다윗 왕이 활동한 시기를 BC 년으로 추정합니다. 이 정도면 이미 답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1)과 (4)의 주장은 탈락입니 다. 다윗 왕의 시대보다 400년이나 더 이전에 나온 책에 다윗의 애가가 기록되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보다 400년이나 더 먼저 있었던 옛날 책에 다윗의 지시 사항이 기록되어 있을 리도 없습니다. 활은 창세기 21장 20절에 처음 언급되어 있지만, 아마도 창세기 4장 22절에 나오는 두발가인에 의해서 이미 제작되었을 겁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도 활로 사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하시매 그가 자라서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라(창 21:20). 실라도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놋과 쇠로 된 것을 만드는 자들을 가르치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더라(창4:22). 그런즉 이제 원하건대 네 무기 곧 화살 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해 사냥한 고기를 얼마 취하여(창27:3) 그런데 이처럼 오래 전에 이미 사용된 활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요즘 초등학생들도 활의 용도가 먼 거리에서 표적을 맞히는 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활의 용도를 유다 자손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요? 죽은 자의 피로부터 강력한 자의 기름으로부터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 며 사울의 칼이 빈 채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삼하1:22). 그러므로 이것을 활의 용도라고 번역한 한글킹제임스역 역시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148 바르게 읽는 성경

147 길보아산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원인은 활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이 사울에게 심히 불리하게 되어 활 쏘는 자들이 그를 맞추매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들로 인하여 크게 다치니라(삼하31:3). 아마도 블레셋 군대에 비해서 이스라엘 군은 활의 위력, 사거리, 운용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토대로 유다 자손들에게 활 다루는 법을 가르쳤을 겁니다. 활 다루는 법을 누가 모르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활이란 시위에 화살 걸어서 당겼다 놓으면 발사되는 건데 그걸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활 다루는 법은 단순히 시위에 화살을 걸어서 당겼다 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단순한 내용이라면 야셀의 책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가치가 없습니다. 아마도 야셀의 책에는 활을 사용하여 표적을 조준하는 방법, 활의 사거리를 향상시키는 방법, 화살의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일어나는 사격 딜레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수부대의 역할 분담, 집단 전투에서 궁수의 배치 등과 같은 전술적인 활 다루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활 쏘는 자들이 그를 맞추매 (삼하31:3)라는 말씀을 통해, 저는 사울이 우연히 누군가가 쏜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지휘관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궁수부대의 집단 표적사격에 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거하여(삼상27:1,7) 블레셋 군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아기스는 다윗을 함께 전쟁에 데려가려고 했습니다(삼상 29:2-3). 다윗이 마음속으로 이르되, 이제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멸망하리니 블레셋 사람들 의 땅으로 빨리 도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없도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지경에서 나를 더 찾다가 나로 인해 절망하리니 내가 이와 같이 그의 손에서 도피하리라, 하고(삼상27:1)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한 기간이 만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삼상27:7). 블레셋 땅에 오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해온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편제와 무기 운용방법, 전술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길보아산 전투에서의 패인이 활에 있었다고 판단하고, 오늘날의 야전교범 혹은 전술 핸드북에 해당하는 야셀의 책을 참고로 하여 유다 자손들에게 활 다루는 법을 활 노래인가, 활 다루는 법인가? 149

148 가르치고, 실제 전쟁에서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무엘기하 1장 18절은 다윗이 유다 자손에게 활 노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활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고 번역한 흠정역 성경이 옳다고 생각합니 다. 150 바르게 읽는 성경

149 14. 무엇을 기준으로 왼쪽인가? 개역: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 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부윤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편에 있었더라(왕하 23:8) 한글킹: 또 그가 유다의 성읍들에서 모든 제사장들을 불러왔으며, 제사장들이 분향했던 산당들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혔고, 또 성읍의 통치자 여호수아의 문의 입구에 있던 문들의 산당들을 헐었으니, 그 산당들은 성읍 문의 왼편에 있었더라. 흠정역: 또 그가 유다의 도시들에서 모든 제사장을 데려오고 또 그 제사장들이 분향하던 산당들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더럽게 하며 또 성문들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는데 그것들은 그 도시의 감독자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도시의 문에서 사람의 왼쪽에 있었더라. KJV: And he brought all the priests out of the cities of Judah, and defiled the high places where the priests had burned incense, from Geba to Beersheba, and brake down the high places of the gates that were in the entering in of the gate of Joshua the governor of the city, which were on a man s left hand at the gate of the city. 대학에 다니던 시절, 저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가끔 외부에서 누군가 가 저를 찾아온다고 하면 당시에는 셔틀버스가 없어서 제가 직접 학교 정문까지 마중을 나가서 길을 인도하곤 했습니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학교 정문이었습니 다. 그런데 약속 장소를 정하면 가끔 서로 길이 어긋날 때가 있었습니다. 학교 정문 왼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서 계시면 제가 마중 나가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학교 정문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마중 나가는 저는 학교 정문 왼편에 있는 관악산 등산로 방향의 정류장으로 가고, 오시는 분은 학교를 향해서 오다가 정문 왼편이니까 봉천동으로 가는 쪽의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학교 정문의 왼편이라고 하면, 안쪽에서의 왼편이 될 수도 있고, 바깥쪽에서의 왼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150 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사람의 왼편 이라고 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23장 8절의 번역이 바로 그와 같은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문들의 산당들을 헐어버렸는데 그 산당의 위치를 표현하는 방식이 역본별로 다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on a man s left hand at the gate of the city 라고 했는데, 흠정역 성경은 이를 그대로 옮겨 도시의 문에서 사람의 왼쪽 으로 번역했습니다. 반면 대부분의 다른 역본들은 성문 왼편 이라고 했습니 다. 성문 왼편이라고 하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학교 정문 왼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 과 같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글킹제임스역은 열왕기하 23장 8절을 개역 성경이나 NIV 등과 같은 역본들 을 따라서 성읍 문의 왼편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역본들은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며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왜 이 구절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변개된 역본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따르는지 모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사본으로부터 번역을 할 때, 의미만 통하도록 하는 동적일치방식(dynamic equivalence)을 택하지 않고 철저하게 원문의 단어와 번역본의 단어가 일대일로 대응하도록 단어일치방 식 (verbal equivalence)을 준수하고, 문장의 형식조차 원문과 일치하도록 형식 일치방식 (formal equivalence)을 채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 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원칙을 그대로 준수하여 on a man s left hand at the gate of the city 라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52 바르게 읽는 성경

151 15. 아다롯벳요압인가, 아다롯과 요압의 집인가? 개역: 살마의 자손들은 베들레헴과 느도바 족속과 아다롯벳요압과 마하낫 족속의 절반과 소라 족속과(대상2:54) 흠정역: 살마의 아들들은 베들레헴과 느도바 족속과 아다롯과 요압의 집과 마나헷 족속의 절반과 소라 족속과 NIV: The descendants of Salma: Bethlehem, the Netophathites, Atroth Beth Joab, half the Manahathites, the Zorites, KJV: The sons of Salma; Bethlehem, and the Netophathites, Ataroth, the house of Joab, and half of the Manahethites, the Zorites. 역대기상 2장 54절에는 아다롯벳요압이 등장합니다. 개역 성경과 NIV 등은 이 부분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전체를 음역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아다롯벳요압 이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면, 아다롯은 지명입니다.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민32:3) 갓 자손은 디본과 아다롯과 아로엘과 아드롯과 소반과 야셀과 욕브하와 벧니므라와 벧하란과 성벽을 두른 도시들을 건축하고 또 양을 위해 우리를 지었으며(민32:34-36)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족속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수16:2) 고대의 지명들은 대개 그것을 발견하거나 정복하거나 다스린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을 창세기 10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에게서 난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름은 사람의 이름인 동시에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입니다. 사마리아라는 지명도 산의 주인이던 세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입니 다. 그가 은 이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서 그 산 위에 도시를 건축하고

152 자기가 건축한 도시의 이름을 그 산의 주인이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부르니라(왕상16:24).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집들과 처소가 영원할 줄로 생각하고 그 땅이나 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나 유명인의 이름을 따라서 부릅니다. 세종로, 충무로, 카네기홀, 케네디공항 등이 그런 실례들입니다. 그들은 속으로 자기들의 집들은 영원히 지속되며 자기들이 거하는 처소들은 모든 세대에 이를 줄로 생각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따라 자기들의 땅을 부르는도다(시49:11). 성경의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아다롯이라는 지명 역시 아다롯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압 역시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아다롯도 사람 이름이고, 요압도 사람 이름인 점을 감안하면, 아다롯벳요압과 같이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단어를 한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성씨가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이름 안에 두 개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다롯벳요압은 아다롯이라는 이름과 요압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 야 한다고 봅니다. 벳(Beth)은 벧엘, 벧세메스, 벧아웬, 벧브올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집이나 집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다롯벳요압은 아다롯 + 벧 + 요압으로서 아다롯이라는 사람과 요압의 집 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54 바르게 읽는 성경

153 16. 사로잡혀간 자인가, 앗실인가? 개역: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대상3:17) NIV: The descendants of Jehoiachin the captive: Shealtiel his son, 흠정역: 여고니야의 아들들은 앗실과 그의 아들 살라디엘과 KJV: And the sons of Jeconiah; Assir, Salathiel his son, 킹제임스 성경은 역대기상 3장 17절에서 앗실이 여고니야의 아들들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과 NIV는 Assir 가 prisoner 나 captive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사로잡혀간 으로 번역했습니다. 마치 Baker 라는 사람을 베이커라고 하지 않고 빵 굽는 사람 이라고 번역하거나 Smith 를 스미스 로 부르지 않고 그 대신에 대장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대기상 3장 16절에서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여고니야(Jeconiah his son), 그의 아들 시드기야(Zedekiah his son)라고 표현하면서 이름 뒤에 his son 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And the sons of Jehoiakim: Jeconiah his son, Zedekiah his son(대상3:16). 그런데 여고니야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살라디엘에 대해서만 his son 을 붙였고, 앗실에 대해서는 his son 이라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And the sons of Jeconiah; Assir, Salathiel his son,(대상3:17) 만약 Assir his son, Salathiel his son 과 같이 앗실 뒤에도 his son 이라는 표현이 있으면, 앗실이 여고니야의 아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냥 앗실(Assir)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다른 번역에서는 앗실(Assir)을 사람 이름이 아니라 포로나 사로잡혀간 자로 이해했나 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앗실(Assir) 뒤에 his son 이 빠진 데는 나름대로 어떤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154 첫째로, 앗실(Assir)은 여고니야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니라 입양된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측은 별로 타당성이 없어 보입니다. 역대기상 3장 18절에 나오는 여고니야의 다른 아들들의 이름 뒤에도 his son 이라 는 표현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역대기는 왕가의 계보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여고니야의 대를 잇게 되는 살라디엘에 대해서만 Salathiel his son 이라고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역대기상 3장 16절 말씀과는 맞지 않게 됩니다. 역대기상 3장 16절에서 여호야김의 대를 이은 것은 여고니야였지만 대를 잇지 않는 시드기야 - 역대기상 3장 15절에 나오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과는 다른 사람임 - 에게도 his son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고니야에 대해서 기록할 때에는 자식이 없는 자라고 기록하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역대기의 기록자가 살라디엘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에 대해서는 his son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예레미야서 22장 30절에 나옵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렘22:30). 예레미야서 22장 30절은 고니야에 대한 말씀인데, 이 고니야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대상3:16)를 말하며, 열왕기하 24장 6절에는 여호야긴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야긴 = 여고니야 = 고니야 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비록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내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빼내어(렘22:24) 이처럼 여호야김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니라(왕하24:6). 여고니야를 자식 없는 자 로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예레미야서 22장 30절의 후반부에 나옵니다. for no man of his seed shall prosper, sitting upon the throne of David, and ruling any more in Judah. 위 문장이 이유를 설명하는 for 로 시작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고니야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8명이나 있었지만 그의 씨 가운데 어느 156 바르게 읽는 성경

155 누구도 다윗의 왕좌에 앉아 다스릴 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왕가의 대는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자식 없는 자로 기록하라고 하셨고 이에 역대기상 3장 17절에서는 살라디엘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에 대해서는 모두 his son 이라는 표현을 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앗실(Assir) 뒤에 his son 이라는 명시적인 표현은 없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And the sons of Jeconiah; Assir, Salathiel his son, 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대상3:17). 그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여고니야의 가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역대기상 3장 17절의 여고니야의 아들들 명단에 앗실(Assir)이라는 이름을 올려 놓았고 이 앗실(Assir)을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그냥 그걸 믿을 뿐입니다. 실제로 앗실(Assir)이라는 이름은 이 곳 말고도 성경에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고핫의 아들들은 곧 그의 아들 암미나답이요, 그의 아들은 고라요, 그의 아들은 앗실이 요,(대상6:22) 그의 아들은 엘가나요, 그의 아들은 에비아삽이요, 그의 아들은 앗실이요,(대상6:23) 위 구절들과 중복되는 동일인물이긴 하지만 출애굽기 6장 24절, 역대기상 6장 37절에서도 앗실(Assir)을 사람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상 3장 17절의 앗실(Assir)을 사람 이름으로 읽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앗실이라는 이름은 사로잡혀간 자, 포로 라는 뜻이므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갈 즈음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앗실이라고 짓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사람 이름 자체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을 계기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아들, 호세아의 아들과 딸의 이름이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베냐민(원래 베노니)이 나 이가봇이라는 이름은 아이가 태어날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이름입니다. 여대언자에게로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니라.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사8:3). 고멜이 또 수태하여 딸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녀의 이름을 로루하마 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의 집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을 완전히 제거하리 라(호1:6). 사로잡혀간 자인가, 앗실인가? 157

156 이에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하리라(호1:9).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냐민이라 하였더라(창35:18). [그녀가] 말하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며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더라(삼 상4:21). 라헬은 난산으로 아들을 낳으면서 죽게 되며 자기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짓습니다(창35:18). 비느하스의 아내는 블레셋 과의 전쟁에서 남편이 죽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도 죽게 되자, 갑자기 산통이 일어나 아이를 낳게 되며 이런 비참한 사건들로 인하여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즉 영광이 없다, 어디에 영광이 있는가? 라고 짓습니다(삼상4:21). 그러므로 여고니야의 아들 앗실의 이름도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표하는 이름이거나 혹은 그 아이가 태어날 당시의 불행한 사건을 인하여 지어 준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의하면,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1:12) 역대기상 3장 17절에 나오는 앗실은 아마도 여고니야와 그의 가족들이 바빌론 에 포로로 사로잡혀 갈 즈음에 낳은 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무엘기 상 4장 21절에서 비느하스의 아내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이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라고 절망하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은 것처럼, 여고니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스라엘 땅에서 뽑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 하고 그 아이의 이름을 앗실(Assir, 죄수, 포로)이라고 지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158 바르게 읽는 성경

157 17. 슬로밋은 매제인가, 누이인가? 개역: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대상3:19) 새번역: 브다야의 아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이다. 스룹바벨의 아들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이며, 슬로밋은 그들의 누이이다. 흠정역: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들의 누이 슬로밋과 KJV: And the sons of Pedaiah were, Zerubbabel, and Shimei: and the sons of Zerubbabel; Meshullam, and Hananiah, and Shelomith their sister: 저는 최근 흔히들 제일 재미없다고 하는 역대기상의 족보를 하나하나 읽고 있습니다. 읽다보니 스룹바벨의 아이들을 소개하는 역대기상 3장 19절에서 개역 성경은 슬로밋을 매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을 비롯하여 모든 영어 성경들은 한결같이 sister (누이)라고 하여, 슬로밋이 스룹바 벨의 딸이라고 합니다. 한글 성경 중에서는 개역 성경과 개역개정만 매제 라고 하고, 나머지 한글번역본들은 모두 누이로 번역했습니다. 매제( 妹 弟 )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여동생의 남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손 들을 소개하는 족보에서 왜 갑자기 매제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지금 역대기상 본문의 전체 문맥에서 크게 벗어나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에 비추어 볼 때 매제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개역 성경이 매제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아호트 인데 이것은 여성형으로서 자매(sister) 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를 의미하는 매제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지만 매제라는 한자어 표현이 여동생을 의미하 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제는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슬로밋이 그들의 sister 라고 했지, 손위 누나인지 손아래 여동생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누이라고 하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 났거나 일가친척 중 같은 항렬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

158 형제(동기)를 지칭하는 말로 sister 와 같은 뜻입니다. 하지만 매제라고 할 경우, 손 위의 누나는 제외하고 손아래의 여동생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경이 본래 말씀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매제라고 하면, 오늘날 여동생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의미상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매제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번역하 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역 성경이 누이라는 쉬운 우리말을 놔두고 매제( 妹 弟 )라는 어려운 한자어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160 바르게 읽는 성경

159 18.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 개역: 므오노대는 오브라를 낳았고 스라야는 요압을 낳았으니 요압은 게하라심의 조상이라 저희들은 공장이었더라(대상4:14) 흠정역: 므오노대는 오브라를 낳았고 스라야는 가라심 골짜기의 조상인 요압을 낳았더 라. 그들은 기술자였더라. KJV: And Meonothai begat Ophrah: and Seraiah begat Joab, the father of the valley of Charashim; for they were craftsmen. 역대기상 4장 14절에는 요압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그는 가라심 골짜기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요압은 게하라심의 조상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의 차이는 인명, 지명 등이 있을 때, 그것을 고유명사로 처리해서 음역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의미를 풀어서 적을 것인가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대기상 4장 14절을 개역 성경은 음역을 하여 게하라심이라고 했고, 킹제임스 성경은 그 뜻을 풀어서 썼습니다. 게하라심 혹은 게카라심은 한 단어가 아니라 두 단어입니다. 게 는 히브리어 가이 로, 골짜기, 계곡을 말하며, 하라심 혹은 가라심 은 기술자, 장인을 의미합니 다. 신명기 27장 15절의 기술자(craftsman), 예레미야서 10장 3절의 장인 (workman)은 하라쉬 이며 이 단어의 복수형은 하라쉼 (가라심)입니다. 기술자(craftsman)의 손으로 만든 것 즉 새기거나 부어 만든 형상 곧 주께 가증한 것을 만들어 은밀한 곳에 두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신27:15). 그 백성들의 관습은 헛되니 사람이 숲에서 나무를 베어 내고 장인(workman)의 두 손이 도끼로 그것을 만들며(렘10:3) 그러므로 게하라심이라는 말은 the valley of Charashim 또는 the valley of craftsmen 이라는 뜻입니다. 기술자들의 골짜기 (the valley of craftsmen)라는 것은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지명입니다.

160 역대기상 4장 14절의 후반부에 보면, 세미콜론 다음에 가라심의 골짜기 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옵니다. for they were craftsmen. 여기에서 for 라는 접속사가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왜냐하면 그들은 기술자들 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그런데 그들은 기술자들이었다. 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기술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골짜기라고 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기술자들의 골짜기라고 불리다가 이것이 나중에 일반 명사로 굳어져서 가라심 골짜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NIV나 그 영향을 받은 개역 성경의 번역자들은 요압이 가라심 골짜기의 조상이다. 라고 하자니 뭔가 어색함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사람이 어떻게 골짜기의 조상이 될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하고 게하라심이라는 단어 전체를 고유명사처럼 취급하여 게하라심의 조상이라고 번역한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음역을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하라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신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게하라 심의 조상이라고 하면 게하라심이 사람 이름이라고 오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기술자들의 골짜기, 가라심의 골짜기 라는 것은 사론 평야 쪽에 있는 롯(Lod, 룻다) 근처에 있습니다. 이곳은 항구 도시 욥바를 중심으로 하는 두 성읍(아벡, 롯) 중 한 곳입니다. 욥바는 아시다시피 요나가 주를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배를 탄 곳으로(욘1:3)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곳(행9:36)이며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레바논에서 벌목한 백향목을 수운한 곳(대하2:16; 스3:7)입니 다. 롯은 욥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지역을 두고 에브라임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영토 분쟁을 벌인 것도 아마 그런 중요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은 게하라심이 사람 이름이나 고유명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기술자들의 골짜기라는 증거를 느헤미야기 11장 35절에서 보여줍니다. 개역 성경도 이 구절에서 공장 골짜기 라고 했지 게하라심이라고 번역하지는 않았습니 다. 개역: 로드와 오노와 공장 골짜기에 거하였으며(느11:35) 흠정역: 롯과 오노와 기술자들의 골짜기에 거하였으며 KJV: Lod, and Ono, the valley of craftsmen. 162 바르게 읽는 성경

161 요압은 가라심(기술자들) 골짜기의 조상이다. 라는 성경 말씀을 두고, 사람이 어떻게 골짜기의 조상이 될 수 있느냐? 며 이를 낯설고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다. 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현대 사회에 도 기술자들의 골짜기 (the valley of craftsmen)가 존재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 일대에 있는 실리콘 골짜기(Silicon Valley)가 그에 해당합니다. 프레드릭 타만 박사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입니다. 이 말을 듣고 프레드릭 타만은 사람인데 어떻게 골짜기의 아버지가 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에는 실리콘 밸리가 있고, 한국에는 대덕테크노밸리, 홍릉벤처밸리가 있는 것처럼, 성경은 이스라엘 땅에 가라심 밸리가 있었고 가라심 밸리의 조상은 요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압은 가라심(craftsmen, 기술자들) 골짜기의 조상이다. 라는 표현은 전혀 어색한 표현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에 나타난 이 지역의 역사, 문화, 산업 등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 163

162 19. 야베스의 기도 개역: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흠정역: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원하건대 주께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내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주께서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그에게 주셨더라. KJV: And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Oh that thou wouldest bless me indeed, and enlarge my coast, and that thine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thou wouldest keep me from evil, that it may not grieve me! And God granted him that which he requested. 얼마 전 기독교 서점에 가 보았더니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이 많이 눈에 띕니다. 야베스의 기도, 다시 쓰는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의 기도, 그 후, 어린이를 위한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 기도의 숨겨진 진실, 야베스의 영성 등 역대기상 4장 10절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 한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두꺼운 책들을 여러 권 쓸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역대기상 4장 10절에 단 한 번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가 왜 그렇게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 이면에는 야베스 의 기도를 통해서 형통하게 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과 기복 신앙 등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브루스 윌킨슨이 지은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보다는 기도를 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주의 뜻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는 이렇게 기도하면 반드시 된다. 라는 식의 기도에 대한 인스턴트식 가르침에 치우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보다는 자기 자신의 야망과 유익을 구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

163 들이 십자가와 자기 부인보다는 개인의 부귀와 평안을 더 좋아하고, 순종과 헌신보다는 축복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메시지들이 잘 먹혀 들어간다 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야베스가 기도한 내용처럼 기도해야 한다거나 야베스 의 기도를 기도의 표준으로 삼아서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 내용대로 기도하면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 복을 받고, 존귀하게 되며, 자기의 영역을 넓히게 되며,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며, 환난과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오해 저는 성경에 야베스의 기도가 나온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그것을 따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야베스의 기도는 분명히 성경에 있다., 야베스의 기도를 하면 존귀한 자가 된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으로 보아 이런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라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 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1) 야베스의 기도는 성경에 있으므로 성경적인가? 야베스의 기도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마귀도 있고 우상숭배도 있지만 마귀를 섬기는 것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나쁜 것들이고 야베스의 기도는 좋은 것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야베스의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야베스의 기도가 그토록 좋은 기도라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너희는 야베스처럼 기도하라. 라고 가르쳤을 겁니다. 성경은 한번도 야베스의 기도를 칭찬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히스기야의 기도도 있습니다. 그 기도 내용도 당연히 좋은 내용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히스기야처럼 수명을 15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성경에 나오는 기도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다고 여기거나, 모두들 그 기도를 따라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야베스의 기도 165

164 (2) 야베스처럼 기도하면 존귀하게 되는가? 가난하고 고통받던 야베스가 야베스의 기도를 드린 후에 존귀한 자가 되었다. 라는 주장 역시 옳지 않습니다. 역대기상 4장 10절에 그의 기도가 나오기 이전에 4장 9절에서 이미 그는 존귀한 자였습니다(Jabez was more honourable). 야베스는 자기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자더라. 그의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 하며 이르기를, 내가 고통을 겪으며 그를 낳았다, 하였더라(대상4:9). 성경 어디에도 야베스가 야베스의 기도 를 드린 결과 존귀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야베스가 그 기도를 드려서 존귀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자인 야베스가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순서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3) 그래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그것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으로 보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옳고 그의 기도가 성경적이다. 라는 주장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 게 반석에게 말하여 물을 내라. 고 하셨는데 모세는 마치 자기가 물을 주는 것처럼 반석을 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을 주셨습니다. 물이 솟아난 것은 모세가 사용한 방법에 있지 않고 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면 주는 겁니다. 모세와 아론이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 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크게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사람들은 야베스가 좋은 내용으로 기도를 했으니까 들어주셨겠지. 라고 생각 하며 야베스의 기도가 잘 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베스가 뭐라고 기도했건 간에 그런 기도 덕분에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 달려있지 야베스의 기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 의 기도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야베스가 무엇을 구했나, 어떻게 기도했나를 연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기도가 주의 뜻에 맞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탐욕을 부려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혼을 야위게 166 바르게 읽는 성경

165 하는 것을 보내셨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기도가 올바르고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시되 그들의 혼에게 야위게 하는 것을 보내셨도다(시 106:15). 하나님께서는 야베스가 요구한 것을 주셨으며(And God granted him that which he requested)(대상4:10),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한 것도 주셨습니다(And he gave them their request)(시106:15). 그러므로 구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기도가 모두 다 좋은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야베스가 요구한 것을 들어주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주고자 하셨기 때문이지 반드시 그 기도 내용이 올바르고 훌륭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하여 성경은 솔로몬의 기도에서처럼, 야베스가 이것을 구하매 주께서 그 말을 기쁘게 여기시니라. 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그에 해당하는 긍정적 평가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2. 야베스의 기도 내용 (1) 주께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개역 성경에는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로 되어 있는데 이는 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바라크 가 두 번 연속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 같은 단어를 연속으로 두 번 사용하는 것은 강조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 강조의 의미를 살려서 참으로 내게 복을 주사 라고 옮겼습니다. 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아브람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는데 이는 아브람을 통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1-3).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만큼 중요한 복이 있을까요? 물론 건강의 복이나, 재물의 복, 야베스의 기도 167

166 사업이 잘 되는 복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런 복들을 실컷 누리다가 결국에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면 그런 복들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주께 복을 구하는 기도라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야베스가 구한 복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생각해 보시고, 좋은 점은 본받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본받지 않으면 됩니다. (2)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야베스는 주님께 자기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했습니다. 지경(coast)이란 땅의 경계를 말하며 이것은 경계를 나타내는 지계표(landmark)에 의해 구분되었습니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스라엘의 토지법에 의하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땅을 영원히 팔 수 없었습니다. 땅을 영원히 팔 수 없나니 땅은 내 것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나와 함께 머무는 자니라(레25:23). 상속 재산인 땅을 팔았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친족이 다시 무를 수가 있었으며 무르지 않아도 희년이 되면 다시 원래 소유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각 지파와 가족들에게 분배된 땅들은 상속재산으로 자손들에게 물려졌으며 누군가가 임의 로 자기 땅을 확장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자기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7). 야베스에게는 이미 물려받은 땅이 있었으며 그는 자기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였지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경을 더 넓혀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만약 그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여 각 지파별로, 각 가족별로 상속 재산이 정해진 이후의 사람이라면 이런 기도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지 않고는 그의 지경을 넓힐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명기 27장 17절 말씀을 인용하여 야베스가 동족의 땅을 탐내고 자기 땅을 확장시킬 마음을 품었다며 그의 야망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베스가 등장하는 역대기상 4장 10절 이후 13절과 15절에는 갈렙의 아들들과 사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사사 옷니엘이 나옵니다. 그나스의 아들들은 옷니엘과 스라야요, 옷니엘의 아들들은 하닷이더라(대상4:13). 168 바르게 읽는 성경

167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아들들은 이루와 엘라와 나암이요, 엘라의 아들들은 곧 그나스더 라(대상4:15). 이 말씀들을 통해서 야베스는 아직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여 그 땅에 거인 족속이나 철병거로 무장한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부스 족속만 하더라도 다윗 왕 시대가 되어서야 정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들에게 거인 족속을 몰아내고,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어 그들의 영토를 더 넓히라고 합니다(수17:15-18). 갈렙 역시 헤브론 산지를 자기에게 주면 아낙 자손을 쫓아내 고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습니다(수14:12-14).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네가 큰 백성이므로 에브라임 산이 네게 너무 좁을진대 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올라가 브리스 족속과 거인들의 땅에서 너를 위하여 나무를 베어 내라, 하니(수17:15) 그러므로 이제 그 날 주께서 말씀하신 이 산을 내게 주소서. 거기에 아낙 족속이 있었으며 그 도시들이 크고 성벽으로 둘린 것을 당신도 그 날 들으셨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매(수 14:12) 만약 야베스가 갈렙이나 옷니엘 등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라는 그의 기도는 동족의 땅을 빼앗아서 자기가 차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 산을 내게 주소서. 라고 구한 갈렙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겠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잘못 적용하여, 주님, 제게 부동산을 더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값비싼 노른자 알짜배기 땅을 주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쉬운성경 을 읽는 분들 중에는 혹시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나에게 땅을 더 많이 주십시오. 나와 함께 계셔 주시고,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누구한테도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대상4:10, 쉬운성경). 야베스의 기도를 참고로 하여 큰 꿈을 품고 자신이 행하고 있는 사역의 범위나 활동 영역을 넓혀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때에는 먼저 그것이 나의 야망이나 나의 사역의 성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야베스의 기도 169

168 주님을 위하여 마귀의 세력을 몰아내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인지 잘 분별하여 올바른 동기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사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사 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저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라는 표현에는 은연 중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라는 이 표현 속에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마법사 지니처럼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종이나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역시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하던 당시에 한 지휘관이 군목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셔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 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군목은,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서 나의 일을 시킬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편이 되어서 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흠정역 성경에 나오는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사 라는 표현 속에는 주님을 내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길에 동행하겠다는 헌신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의기투합하지 않고서는 그분과 함께 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3:3) 우리가 주님의 길에 동행하면 자연히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의 손이 우리에게 선하게 임하십니다. 에녹은 그렇게 주와 함께 걸었고(창5:24),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그가 형통하게 되었으며(창39:2),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사 그를 창대하게 하셨으며(대상11:9), 느헤미야 역시 주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느2:8, 18).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창5:24). 170 바르게 읽는 성경

169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창39:2). 만군의 주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으므로 이처럼 그가 점점 더 창대하게 되었더라(대상 11:9). 느헤미야는 주님의 편에 서서 주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며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신 것을 몸소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개역: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느2:8) 흠정역: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편지를 내사 그가 그 집에 속한 궁궐의 문들과 그 도시의 성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짓기 위한 들보들을 만들도록 내게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위에 임한 내 하나님의 선한 손에 따라 왕이 내게 허락하니라. 개역: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느2:18) 흠정역: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내 위에 선하게 임한 하나님의 손과 또 왕이 내게 하신 말씀을 고하였더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이처럼 그들이 자기 손을 강하게 하여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니라. 느헤미야 2장에서 보듯이 개역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이 나를 도왔다 며 도움 이라고 번역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손에 따라, 내 위에 선하게 임한 하나님의 손 과 같이 그 능력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주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믿는 성경은 야베스가 주의 손이 나를 도우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구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성경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증언하듯이 자연히 그 삶의 결과는 형통하게 마무리됩니다. (4)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개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우리가 아프거나 가난하거나 사업이 야베스의 기도 171

170 형통하지 못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런 것에서 벗어나서 건강하고, 돈 잘 벌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가르칩니 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아무런 환난도 겪지 않고 무사안일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을 거치거나 불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 물, 불과 같은 고난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과 불을 통과해야 하지만 그런 때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강들을 건널 때에 강들이 네 위로 넘쳐흐르지 못하며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에 타지도 아니하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핍박했을 때 사도들은 그런 위협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위협을 제거해 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 그들의 위협을 보시고 또 주의 종들이 전적으로 담대히 주의 말씀을 말하게 하시며(행4:29) 사도 바울 역시 제자들을 권면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환난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혼을 굳건하게 하며 그들을 권면하여 믿음 안에 거하게 하고 또 우리가 반드시 많은 환난을 거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야 하리라 하더라(행14:22). 킹제임스 성경에 의하면, 야베스는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악에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 신 기도(마6장), 주께서 드린 기도(요17장)와도 일치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13).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나는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기도하지 아니하며 다만 그들을 악에서 지켜 주시라고 기도하나이다(요17:15). 172 바르게 읽는 성경

171 I pray not that thou shouldest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thou shouldest keep them from the evil. 이런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역대기상 4장 10의 나를 악에서 지키시며 는, 마태복음 6장 13절의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라는 기도와 요한복음 17장 15절의 그들을 악에서 지켜주소서 라는 기도에 해당하며 이렇게 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 슬픔과 근심이 찾아온 것은 죄 때문이므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으로부터 보호받으면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는 부분도 자연히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야베스의 기도는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구한 기도이지 개역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환란을 벗어나서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고, 무사안일, 만사형통 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를 잘못 인용하여 개인의 안일과 태평을 구하는 기복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야베스의 기도에는 분명히 우리가 본받을 만한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야베스의 기도를 무슨 만사형통을 위한 보증수표처럼 가르치는 책들의 입장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또한 야베스의 기도를 인용하여 야베스처럼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 는 식으로 기도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기도하는 사람에 중점을 둔 가르침이나,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움직여준다. 라는 식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의지에 따라서 야베스가 구하는 것을 주셨다고 했지 야베스의 기도가 훌륭하고 본이 되는 기도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구했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신 사실을 기록한 것일 뿐, 야베스의 기도에 무슨 신비한 효험이 있다거나, 야베스가 기도한 내용대로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거 나, 야베스의 기도를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이 인기를 끌면서, 역대기상 4장 10절에 나오는 야베스 의 기도를 기복적인 것으로 가르치거나, 기도를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보고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다룬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분석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실제로 기도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만 기도하러 가야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173

172 20. 여자가 아내를 둘 수 있는가? 개역: 나함의 누이인 호디야의 아내의 아들들은 가미 사람 그일라의 아비와 마아가 사람 에스드모아며(대상4:19) 흠정역: 나함의 누이요, 그의 아내인 호디야의 아들들은 가미 족속 그일라의 아버지와 마아가 족속 에스드모아며 NIV: The sons of Hodiah's wife, the sister of Naham: the father of Keilah the Garmite, and Eshtemoa the Maacathite. KJV: And the sons of his wife Hodiah the sister of Naham, the father of Keilah the Garmite, and Eshtemoa the Maachathite. 역대기상에는 호디야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 개역 성경과 NIV는 킹제임스 성경과 완전히 다르게 번역을 했습니다. 개역 성경은, 나함의 누이( 女 ) = 호디야의 아내( 女 ) 혹은 나함의 누이( 女 ) = 호디야( 女 ) 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은 나함의 누이( 女 ) = 그의 아내( 女 ) = 호디야( 女 ) 라고 하여 호디야를 여자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남자 호디야가 등장합니다만, 그 남자 호디야의 표기법은 여자인 Hodiah (스트롱코드 1940)와는 달리, Hodijah (스트롱코드 1941)로 되어 있으 니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들의 형제 세바냐, 호디야, 그리다, 블라야, 하난,(느10:10) And their brethren, Shebaniah, Hodijah, Kelita, Pelaiah, Hanan, 히브리 원문에 역대기상 4장 19절의 호디야 라는 부분이 여성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호디야는 여성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호디야가 여자라면, 개역 성경의 표현은 나함의 누이 = 호디야 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함의 누이( 女 ) = 호디야의 아내( 女 ) 라고 읽으면 호디야가 남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일단 본문의 호디야가 여자라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과

173 NIV는 그 다음부터가 문제가 됩니다. 나함의 누이인 호디야의 아내의 아들들은 가미 사람 그일라의 아비와 마아가 사람 에스드모아며(대상4:19, 개역) 개역 성경에 의하면 나함의 누이인 호디야는 분명히 여자인데 그 호디야라는 여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주장이 되어 버립니다. 만약 개역 성경이나 NIV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여자에게 아내가 있다. 는 내용이 있는 것처럼 되어버려, 동성 간의 결혼이 성경에 나오는 제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주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지 못하도록 역대기 상 4장 19절에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의 명단을 넣어두셨습니다. 위의 구절이 정말 여자와 여자가 결혼을 한 것이라면 그들 사이에서는 자식들이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역대기상 4장 19절은 여자가 아내를 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은 것입니다. 나함이라는 남자와 그의 누이이자 그의 아내인 호디야라는 여자가 결혼을 하여 그들 사이에서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역대기상 4장 19절을 호디야라는 여자가 아내를 두었다. 라고 번역한 개역 성경과 NIV의 번역은 단순한 실수나 무지에 의한 오역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자들이 호디야가 여성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호디야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말씀을 왜곡시켜 번역을 한 것은 이들 성경 번역자들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이거나 동성 간의 결혼을 정당화시키고 싶어 하는 자들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NIV 번역에 참여했던 버지니아 몰렌코트는 1985년 자신이 레즈비언(여성 동성연애자)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였으며, 동성연애는 항상 나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왔다. 고 했습니다. 그녀가 동성애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쓴 책 동성애자들은 나의 이웃인가? 에서는, 성경은 매춘이나 폭력에 의한 강간 같은 범죄만을 책망할 뿐 동성끼리의 진실한 동성연애는 책망하지 않는다. 고 주장하는 그녀의 사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NIV의 번역은 바로 이와 같은 레즈비언 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봅니다. 여자가 아내를 둘 수 있는가? 175

174 21.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흠정역: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KJV: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말라기서 3장 말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읽기에 말라기서 3장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안 내는 백성들을 저주하고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말라기서 3장은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고, 십일조를 안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말라기서 전체 말씀들을 자세히 잘 읽어보면 이 말씀들은 거듭난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는 주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대언자 말라기를 통해 하신 말씀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말라기서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안 드리면 저주를 내리고 십일조를 잘 내면 복을 주신다.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지 않는 백성들과 또 그것들을 가로채는 타락한 제사장들을 저주하셨고 이제는 그런 제사장들과 율법 대신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 니다.

175 1.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흠정역: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KJV: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개역 성경에는 온전한 십일조 라고 되어 있고 흠정역 성경에는 모든 십일조 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어느 번역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저는 원어 분석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두 번역을 비교할 목적으로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의 온전한 과 흠정역 성경의 모든 은 히브리어로 콜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등장합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속에 생명이 있어 땅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채소를 먹을 것으로 주었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30). 창세기 1장 30절의 모든 이 바로 히브리어 콜 이며, 개역 성경도 여기에서는 모든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위의 구절을 온전한 짐승, 온전한 날짐승, 기는 온전한 것, 온전한 푸른 채소 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콜 이 들어가는 구절을 말라기서 안에서만 찾아도 제법 많은 구절들이 나옵니다.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말2:9). 우리 (모두)에게 한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냐?(말2:10)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말3:9).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말3:12).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말4:1).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모세의 율법을 (말4:4)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177

176 이런 성경 말씀들에 나타난 용례를 살펴볼 때, 말라기서 3장 10절의 콜 은 온전하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을 뜻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것 을 all 로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도 모든 으로 정확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이 번역을 잘못하여 온전한 십일조 라고 하는 바람에 여기서 수많은 거짓 교리들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정확히 10분의 1을 떼어야 온전한 십일조가 된다고 가르치고, 어떤 이는 소득뿐만 아니라 장학금, 은행 이자, 주식 상승분, 용돈, 길에서 주운 돈, 아파트값 상승분 등도 모조리 10분의 1을 떼어서 바쳐야 온전한 십일조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주택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4천만원을 대출받았는데 그것도 어쨌든 통장에 돈이 들어왔으니 400만원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 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의 논지는 온전한 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계산을 철저히 해서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실수로 정규 소득 외의 부수입 등을 십일조에서 누락시킬 수 있으므로 아예 넉넉하게 10분의 2, 10분의 3을 드려야만 우리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지 않게 되며 그나마 안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올바른 교리는 올바른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데(딤후3:16), 성경 번역이 저렇게 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교리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계산한 십일조를 원하신다면 근채(나물) 하나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정확하게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마23:23) 말라기서 3장 10절 말씀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 모든 십일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이 말씀을 가르치면서 부패한 제사장들 의 비리에 대해서는 모른 척 눈감아주고, 성도들을 향하여는 모든 수입들에서 십일조를 정확하게 떼어서 바쳐야 온전한 십일조가 되니까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해라, 안 그러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잘못된 성경 번역 때문입니다. 목회자 178 바르게 읽는 성경

177 들이나 성도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전한 십일조라는 엉터리 번역에서 나온 거짓 교리들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2. 복을 주나 안 주나 하나님을 시험해 봐도 되는가?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십일조를 내면 복 받는다. 라고 가르치는 분들은 말라기서 3장 10절에 와서는 더욱 더 열띤 목소리로 말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주십니다. 이것을 못 믿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꼭 한 구절 바로 말라기서 3장 10절에서 십일조와 연관해서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는지 못 받는지 먼저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로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해도 될까요? 성경 말씀은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는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 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가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는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Let no man say when he is tempted, I am tempted of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with evil, neither tempteth he any man: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tempt)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7). Jesus said unto him, It is written again, Thou shalt not tempt the Lord thy God.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179

178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 7절에서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입니 다. 너희가 맛사에서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한 것 같이 그분을 시험하지 말라(신6:16). Ye shall not tempt the LORD your God, as ye tempted him in Massah. 마태복음 4장 7절과 신명기 6장 16절의 시험하다 라는 단어는 tempt 로서 신약에서는 그리스어 페이라조,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나싸 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서 3장 10절의 시험하다 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영어로 prove, 히브리어 바한 이 사용되었습니다. 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다음 구절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단어가 같은 구절 내에서 동시에 사용되었고, 신구약성경에 모두 등장하는 구절을 골랐습니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 입증하고 내가 행한 일을 보았느니라(시95:9). When your fathers tempted me, proved me, and saw my work.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 입증하고 사십 년 동안 내가 행한 일들을 보았느니 라(히3:9). When your fathers tempted me, proved me, and saw my works forty years. 우리는 위 두 말씀들을 통하여 시험하다 (tempt)와 입증하다 (prove)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empt = 그리스어 페이라조 = 히브리어 나싸 = 시험하다 prove = 그리스어 도키마조 = 히브리어 바한 = 입증하다, 확증하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의 입증하라 에 사용된 prove 가 말라기서 3장 10절의 시험하다 (prove)와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 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Examine yourselves, whether ye be in the faith; prove your own selves. Know ye not your own selves, how that Jesus Christ is in you, except ye be reprobates? 180 바르게 읽는 성경

179 말라기서 3장 10절의 시험하다 (히, 바한)라는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 라. (tempt)는 뜻이 아니라 입증하라 는 것입니다. 아래 시편의 말씀에 나오는 시험하다 는 마음의 상태를 입증하는 것을 말하며, 창세기 42장 15절은 요셉의 형제들이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와서 그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시17:3a). Thou hast proved mine heart;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말을 입증할지니라. 파라오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동생이 여기에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에서 나가지 못하리라(창42:15). Hereby ye shall be proved: By the life of Pharaoh ye shall not go forth hence, except your youngest brother come hither. 에베소서 5장 10절의 입증하라 (헬, 도키마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해 보라는 겁니다. 11, 12절에 나오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인지, 9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인지 입증해 보라는 겁니다. 주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입증하라(엡5:10). Proving what is acceptable unto the Lord. 흠정역 성경에서는 말라기서 3장 10절에 나오는 KJV의 prove 를 시험하다 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유혹하다 (tempt)의 의미로 읽으면 안 되고, 누가복음 14장 19절의 시험하다 와 같은 의미 즉 그 본성, 상태, 능력 등을 드러내다. 로 읽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니 원하건대 나를 용서하라, 하며(눅14:19) And another said, I have bought five yoke of oxen, and I go to prove them: I pray thee have me excused. 말라기서 3장 10절 말씀은 내가 이렇게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을 쏟아 부어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라. 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이 복을 주나 안 주나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서 3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고 하십니 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고 마음을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181

180 낮추고 죄에서 돌이키겠다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 보이고 마음의 상태를 입증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십일조와 헌물을 주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주님이 되심을 확증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들이 마땅히 십일조를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집행함으로써 주께서 신명기 14장 28-29절에서 약속하신 복을 부어 주시는 분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 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율법에서 정한 의무에 따라 레위 사람들에게 십분의 일을 드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복도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는 분명히 십일조와 연관하여 아무런 복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구약시대가 다 끝나가는 말라기서에서 느닷없이 복 타령입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십일조가 잘 안 들어오니까 구약시대 막판에 복을 경품으로 내걸고 십일조 잘 내기 이벤트라도 하시는 겁니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복이 약속되어 있지 않지만, 셋째 십일조, 즉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십일조에 대해서는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신명기 14장 28-29절에 약속된 복은 십일조를 잘 드려서 받는 복이 아니라 주께 드린 십일조를 주의 뜻대로 잘 분배하고 마땅히 써야 할 곳에 쓸 때 받게 되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 3장 10절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는다. 라고 가르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주장이 되는 겁니다. 3. 이제부터라도 십일조를 잘 드리면 저주를 벗게 되는가?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분들은, 대개 십일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한 죄로 저주를 받게 된다. 고 하면서 이제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해서 저주를 벗고 복을 받으라. 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교회 예배에 빠졌다고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며, 십일조를 안 낸다고 저주를 내려서 집안이 망하거나 가족들이 무서운 질병에 걸리게 하는 분이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너희들 이 십일조를 안 내고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라고 182 바르게 읽는 성경

181 하지 않고, 너희가 이미 저주를 받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만일 너희가 들으려 하지 아니하며 그것을 마음에 두려 하지 아니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심지어 저주를 보내어 너희의 복들을 저주하리라. 참으로 내가 이미 그것들을 저주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말2:2).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으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말3:9). 제사장들은 주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였고(말1장),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주의 사자로서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말2:7-8). 그들과 더불어 온 백성이 주의 것을 강도질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말3:9). 이제 이런 연약한 백성과 불완전한 율법 대신에 이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주께서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실 것입니다(말3:1). 그분께서는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다시 회복시키실 겁니다(말 3:3-4). 그리고 그분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실 겁니다(말3:5). 이는 실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의 말씀의 엄중한 부담입니다 (말1:1). 물론, 말라기를 읽고 이것을 십일조 내면 복 받는다. 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엄중한 부담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말라기서는 참으로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는다. 는 축복의 메시지가 아니라 너희가 이미 저주를 받았다. 라는 심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이제부터 라도 열심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겁니까? 이제부터 주의 단에 깨끗하고 좋은 것만 드리면 된다는 겁니까? 지금까지 강도질한 십일조와 헌물들을 도로 갖다놓고, 네 배를 물어내면 된다는 겁니까? 말라기서 말씀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열심히 내서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라. 고 하거나 최상급 희생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기분을 풀어드려라., 율법을 철저 히 지켜서 죄에 대해 용서를 받으라. 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게 되면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희생예물을 드릴 일이 없으니 제사장과 레위 사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레위 사람과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주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그것을 폐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183

182 그런데도 십일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 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게 하리라(말4:5,6).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주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갈3:13).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이제는 십일조, 희생 헌물 등과 같은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의 죄와 악을 속할 수가 없고, 오직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바로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 도를 소개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5:39). 이래도 말라기서의 말씀이 십일조를 드려라, 십일조를 안 드리면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늘에서 복이 쏟아진다. 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말라기서를 기록하셨는지, 주께서 말라기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라기서에 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라기서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 다. 말라기서의 주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십일조를 비롯한 구약의 제사와 율법이 폐지되므로, 이제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는 것입니다. 184 바르게 읽는 성경

183 22.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려야 하는가? 개역: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암4:4) 흠정역: 벧엘에 가서 죄를 짓고 길갈에서 범죄를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KJV: Come to Bethel, and transgress; at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 and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and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 아마도 재물에 관심이 많은 교회 재정 담당자들이나 목회자들이라면 아모스서 4장 4절을 개역 성경이나 현대 역본들로 읽고 싶어 하고 또 성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싶을 겁니다. 한 달에 한 번도 아니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걷을 수 있다니 이게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입니까? 그러나 그런 욕심을 가진 분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읽게 되면 아마 크게 실망하게 될 겁니다. 그런 분들은 한 달에 한 번이나 일 년에 한 번도 아니고, 삼 년에 한 번 십일조를 가져오라니 이 킹제임스 성경은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이며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번역한 번역자들에게 잘못이 있고 그들의 번역본에 오류가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글은 제가 이미 KeepBible.com의 게시판에 두 편이나 올린 적이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는 아래 말씀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곡식, 포도즙, 기름, 씨, 나무 열매 등과 같은 땅의 소출과 소, 양 등의 가축 중에서 드렸습니다. 너는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 떼와 양과 염소 떼의 처음 낳은 것과 네가 서원하는 서원 헌물과 네 자원 헌물과 네 손의 거제 헌물을 네 성문 안에서 먹지 말고(신12:17)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모든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14:22)

184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레27:30). 소 떼나 양과 염소 떼의 십일조에 관하여는 어떤 것이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든지 열째 것이 주께 거룩한 것이 되리니(레27:32) 자, 우선 이 말씀을 듣는 당시의 일차적 수신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려면 뭔가 소득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곡식을 추수하고, 포도 열매를 따고, 소 떼와 양 떼가 새끼를 낳아서 번식을 해야 십일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한 십일조 품목들 중에서 사흘에 한 번씩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씨를 뿌린 지 사흘 만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곡식이나 과일 나무가 있다면 삼 일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작물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에서 대부분의 작물은 일 년에 한 번 수확합니다. 그러므로 삼 일마다 곡식이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가축은 어떻습니까? 소의 임신 기간은 약 280일, 양의 임신 기간은 약 180일입니다. 새로운 가축이 태어나려면 최소한 6개월에서 9개월 이상을 기다려 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흘에 한 번씩 가축의 십일조를 드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새로운 가축이 태어나지 않더라도 이미 가지고 있는 가축들 중에서 사흘에 한 번씩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우기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일 년이 채 못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키우던 모든 가축이 사라지고 말 겁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양을 10만 마리 가지고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새로운 가축이 태어나는 것과 무관하게 사흘에 한 번씩 가지고 있는 양들을 막대기 아래로 통과시켜서 열째 것들은 십일조로 바친다고 하면, 이 사람이 키우는 양의 숫자는 매 사흘마다 10%씩 감소하게 됩니다. 즉, 사흘에 한 번 기존 양들 숫자의 90%씩만 남게 되겠지요. 10만 마리의 양이 있다고 하면 사흘 후에는 9만 마리, 다시 사흘이 지나면 81,000마리, 다시 사흘이 지나면 72,900마리, 그 다음에는 65,610마리 50회차(150일 후)가 되면 572마리가 되고, 80회차(240 일 후)가 되면 24마리, 100회차(300일 후)가 되면 10만 마리나 되는 양이 고작 2-3 마리밖에 남지 않습니다. 모압 왕 메사 정도는 되어야 양을 10만 마리, 20만 마리씩 키울 수 있지(왕하3:4) 일반 이스라엘 백성은 도저히 저렇게 많은 양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양을 100마리 정도 키우는 일반인이라면 30회차(90일 후)만 지나면 양이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수리적 계산으로는 44회차까지 186 바르게 읽는 성경

185 가겠지만 하나님께 양을 소수점 단위로 잘라서 드릴 수는 없을 테니 10마리 후부터는 무조건 1마리씩 바치는 것으로 가정할 경우 30회차면 끝납니다.) 저런 식으로 십일조를 한다면, 아마도 일 년이 채 안 되어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축들은 탐욕스러운 레위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을 적용하는 목회자들도 더러 있는 모양입니 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꾸준히 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돈을 아껴서 적금을 들었는데, 만기가 되어 저축한 돈을 찾을 때가 되면 목사님이 적금 찾은 총액에서 다시 십일조를 내라고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전세 보증금이 부족하여 은행에서 4천만원을 대출받았는데, 어쨌든 통장에 4천만원(빚)이라는 소득(?)이 들어왔으 니 400만원을 십일조로 내라고 한답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교인들이 하나님 의 말씀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악용하여 성도들을 속여서 재산을 갈취하는 종교 사기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석하고, 성도들 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땅의 소산이건 가축이건 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매번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품목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무모한 명령을 내렸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 십일조가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는 십일조(민18:24), 둘째는 집회의 십일조(신12:11-12; 14:22-27), 셋째는 삼 년에 한 번 이웃들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입니다(신14:28-29; 26:12).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이스라엘에서는 제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이 안식을 누리는 안식년으로 경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과 제 6년에는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모두 모아서 레위 사람, 나그네, 아버지 없는 자,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모스서 4장 4절이 말하는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입 니다. 그러므로, 아모스서 4장 4절 말씀은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가 아니라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려야 하는가? 187

186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라고 해야 옳습니다. KJV: and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암4:4) NKJV: Your tithes every three days(삼일마다).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히 after three years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개역 성경과 NKJV, NIV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 역본들은 삼 일마다 십일조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성경에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있지만(신14:28-29; 26:12), 삼 일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없습니다. 과연 어느 성경이 거짓이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까?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188 바르게 읽는 성경

187 23.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흠정역: 보라, 내가 레위 자손이 섬기는 일 곧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십분의 일을 다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었느니라(민18:21). KJV: And, behold, I have given the children of Levi all the tenth in Israel for an inheritance, for their service which they serve, even the service of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이 글은 십일조에 대한 글입니다. 글을 읽는 도중에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과 다르거나,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오더라도 너무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고 제발 글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읽고 나서도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십일조에 대해 저와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 분이 있다면, 자신의 드리는 삶을 한 번 돌아보시고 자신의 믿음대로 결정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의 취지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삶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지 십일조를 하는 분들 혹은 하지 않는 분들을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헌금의 표준, 성도의 마땅한 의무 라고 가르치고 있고, 누군가가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을 경우, 그를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 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 (말3:9, 개역)라며 정죄하거나, 황충이 그 재산을 먹어버릴 것이다. (말3:11, 개역)라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써 율법의 요구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이 십일조라는 헌금이 교회 재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 다. 목회자들의 입장에서는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경우,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 것이

188 설명하기도 쉽고 설득력도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언제, 얼마쯤 들어올지 모르는 감사헌금보다는 교인들이 경제활동을 하는 한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예산을 편성하고 운영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십일조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강단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들어서 십일조가 의무라는 것을 강조하며,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게 되고 십일조를 안 하면 하나님의 것을 훔친 죄로 저주를 받는다고 선포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 다. 각종 부흥회, 헌신예배, 임직예배 시간에도 강사로 초청받아 온 목사님들 역시 교인들에게 십일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합니다. 강사로 온 목사님들은 자기가 아는 누군가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려서 복을 받았다느니, 누구는 십분의 일로는 성이 안 차서 십 분의 이, 십 분의 삼을 바쳤더니 그 결과 사업이 크게 번창했다느니, 어떤 이는 십일조를 떼어먹고 나서 집안에 큰 우환이 생겼다는 간증까지 소개해 가면서 십일조와 축복과의 관계를 입증하기에 바쁩니다. 더 나아가 십일조 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 십일조 안 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 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교인들을 비교하 곤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 고 하면서 반강제로 하나님 앞에서 헌금에 대해 약속을 하도록 만듭니 다. 이처럼 십일조를 성도의 의무로서 강제로 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셔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운영된다고 믿는 자들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일부 목회자 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어서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잘 모르고 있거나 혹은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여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와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된 성도들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에 있는 김재근 목사님의 글, 십일조와 그리스도인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바로 위에 소개한 글과 일부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성경적으로 1) 190 바르게 읽는 성경

189 검토해 보고, 십일조에 대해서 흔히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헌금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며,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그것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1)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다. 먼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을 잘 나누어서 연구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신약 교회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있고,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함부로 적용해 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이것은 나와 너희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의 언약 곧 너희가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창세기 17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 니라. 고 하셨으니,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할례와 안식일, 십일조 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우리는 십일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 다. 십일조가 왜 필요했는지 성경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이스라 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하였노라(민18:24).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191

190 이스라엘(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레위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아무런 상속 재산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지파들로 하여금 레위 사람들의 먹을 것을 공급하도록 하기 위하여 십일조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신 겁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레위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할 레위 지파 사람들이 있습니까?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 목사님들 중에 이스라엘의 셋째 아들 레위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목사가 레위 사람이고 제사장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와서 억지로 적용하려고 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상속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지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제도입니다. (2) 십일조 율법을 지키려면 나머지 율법도 다 지켜라. 만약 누구든지 십일조라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나머지 율법들도 다 지켜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는 할례(구약의 율법)를 받은 사람들에 게 말씀하고 있는데, 할례뿐만 아니라 십일조라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갈5:3). 만약에 그 모든 율법 중에 한 가지라도 어기면 결국 모든 것에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께서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이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192 바르게 읽는 성경

191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분들 중 대부분은 율법은 이미 폐하여졌기 때문에 안 지켜도 된다. 라고 답변하실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율법이 폐하여진 것을 믿고 그렇게 가르치는 분들이 왜 십일조 율법만은 굳게 붙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마 할례는 성도들에게 지키도록 해봤자 돈이 안 되지만 십일조는 지키도록 하면 많은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쉽게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다. 십일조 는 율법이 있기 430년 전부터 있었다. 라고 주장하는 분들을 위한 반론은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 율법을 지키고자 하십니까? 그런 분은 율법 모두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면 다 지키시고(결코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지킬 수 없거든 율법을 통해서 자기의 죄악 된 모습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할 뿐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 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주님께서는 첫째 것(구약의 제사와 같은 율법의 행위)을 제거하시고, 둘째 것(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을 세우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게 하셨습니다.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구약시대의 희생 헌물은 불완전하여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희생물을 드려야했 지만,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신을 드려 속죄하셨고, 그 효력은 한 번으로 영원합 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희생헌물이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희생헌물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193

192 을 드리는 일이 필요 없게 되었으니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레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십일조 제도 역시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구원받을 때에는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인정받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때에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듯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4: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이외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주님께서 완성하신 십자가 구속 이외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그분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완성하셨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으므로, 더 이상 십일조 와 같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2. 십일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제가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제도이며 십일조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면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습니 다. 그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주로 강단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님들이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는 그분들의 논리가 많이 퍼져 있습니다. 물론 그 논리들은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나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반론을 소개하는 한편 그에 대해 반박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십일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낱낱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이 있기 약 430년 전에 십일조가 있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강단에서 자주 쓰는 논리 중의 한 가지가 이스라엘에 십일조라는 율법이 등장하기 약 430년 전에 십일조가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는 율법의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덧붙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194 바르게 읽는 성경

193 속한 우리 역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이 있기 430년 전에 십일조가 있었으므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이런 논리는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할례가 율법으로 명시되기 430년 전에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가 있었으니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우리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율법이 있기 430년 전에 십일조도 있었고 할례도 있었는데 할례는 안 받아도 되고 십일조는 꼭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가 뭡니까? 둘 다 똑같이 율법 이전부터 있었는데 어떤 것은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그 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할례는 돈이 안 되지만, 십일조는 돈이 된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야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례나 십일조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짐승을 희생물로 바치는 의식은 율법이 있기 훨씬 더 오래 전 창세기 때부터 있었습니다(창3:21; 4:4). 그러므로 희생물을 드리는 것 역시 율법의 잔재가 아니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지금도 짐승을 잡아 희생물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 십일조가 있었다고 해서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이런 주장을 근거로 하여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으며,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2)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야곱도 십일조를 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 기록에 아브라함과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우리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분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4장 20절입니다. 네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하매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니라(창14:20). 창세기 14장 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전쟁에 서 얻은 것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십일조는 땅의 소산 과 가축 중에서 드리도록 되어 있지, 전쟁에서 빼앗은 것 중에서 10분의 1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 떼와 양과 염소 떼의 처음 낳은 것과 네가 서원하는 서원 헌물과 네 자원 헌물과 네 손의 거제 헌물을 네 성문 안에서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195

194 먹지 말고(신12:17)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모든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14:22)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레27:30). 소 떼나 양과 염소 떼의 십일조에 관하여는 어떤 것이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든지 열째 것이 주께 거룩한 것이 되리니(레27:32) 위 말씀들에 의하면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지은 곡식, 포도즙, 기름, 씨, 나무 열매, 가축을 길러서 얻은 소, 양 등을 대상으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노획물의 십분의 일 이었지 십일조가 아닙니다. 이제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 깊이 생각해 보라. 심지어 족장 아브라함도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4). 다윗은 그토록 많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지만, 한 번도 전쟁에서 빼앗은 것들 중에서 십일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얻은 것들을 싸움에 참여한 자들과 소유물 옆에 머물러 지킨 자들이 똑같이 나누어 가지도록 했고, 노략한 물건을 자기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만, 그중에서 십일조를 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일에서 누가 너희 말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오직 싸움에 내려가는 자의 몫이 물건 옆에 머무르는 자의 몫과 같을 것이요, 그들이 똑같이 나눌 것이니라, 하고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유다 장로들 곧 자기 친구들에게 노략물을 보내며 이르되, 주의 원수들에게서 취한 노략물 중에서 너희를 위해 마련한 예물을 보라, 하고(삼상 30:24,26) 오늘날 목사님들이라면 다윗에게 십일조를 떼어먹은 도둑놈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주의 대언자들이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제사장들 중 어느 누구도 다윗에게 전쟁터에서 빼앗은 것들 중에서 십일조를 납부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4장 20절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며 십일조~ 십일조~ 를 되뇌며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조하는 분들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발 히브리서 7장 1-10절만 읽지 마시고, 그 뒤에 나오는 11-28절도 같이 읽어주시기 196 바르게 읽는 성경

195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말씀의 의미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0분의 1을 드린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아브라함을 본받아서 십일조를 바쳐라 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7장 말씀에서 창세기 14장 20절의 사건을 인용하면서 너희도 아브라함처럼 십일조를 드려라. 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율법은 폐하여졌고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를 완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4장 20절 말씀이나 히브리서 7장 말씀은, 율법에 따라 레위 지파 아론의 계통을 잇는 제사장들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궁한 생명의 권능에 따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좇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통해 완전함이 올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의 제사장 체계 하에서 율법을 받았느니라) 다시 아론의 계통에 따라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또 있었겠느냐? 멜기세덱의 모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이 일어나신 것을 보니 그 일이 더욱 분명하도다. 이분은 육신에 속한 명령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시고 무궁한 생명의 권능에 따라 되셨으니 그분께서 증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시느니라(히7:11, 15-17). 히브리서 7장 말씀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제는 제사장 체계가 변하였고 율법도 변했으며(12절), 율법이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폐하여졌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하게 하셨다고 하십니 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히7:18-19). 그런데 이 히브리서 말씀 중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쓰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성경 말씀을 완전히 반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야곱이 십일조를 했다는 주장도 성경과 다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빵과 입을 옷을 내게 주사 내가 평안히 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게 하시면 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197

196 다, 하였더라(창28:20-22). 야곱은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지금 야곱은 빈털터리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 얹혀살려고 길을 가는 중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얻은 것에서 드리는 것이지, 앞으로 얻게 될 것에 대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야곱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지,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그냥 드리겠다가 아니라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셔서 나를 지켜주시면, 만약에 내게 빵과 옷을 주시면, 만약에 내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 주시면, 저도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약속하는 것이 하나님 과 거래하고 흥정하는 것이지 무슨 십일조입니까? 이 구절을 악용해서 어떤 부흥사들은 십일조를 선불로 내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가진 것 중의 십일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싶은 액수를 정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십일조를 선불로 미리 내라는 겁니다. 악덕 사채업자들이 돈 빌려줄 때 선이자부터 떼고 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은 사채업자들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곱은 십일조 서원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잔머리를 의지하는 약삭빠르고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 는 새로운 이름도 얻었고, 많은 재산을 모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께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까지 했는데 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습니까?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아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궁리 저 궁리 다 짜내어도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재물이 결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며, 자기의 잔머리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 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형 에서와 화목하게 되는 일을 겪으면서 그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흥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과거에 자기가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십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서원한 것이 부끄러웠을 겁니다. 하나님께 서 야곱과 함께 계셨고, 그에게 빵과 옷도 주셨고, 그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셨지만, 야곱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성경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198 바르게 읽는 성경

197 성경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한 적이 없으며, 야곱 역시 한 때 십일조 서원을 한 적은 있으나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우리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3)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 성경 말씀이 마태복음 23장 23절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23:23).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다른 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니 십일조도 내고 공의와 긍휼과 믿음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십일조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분들의 눈에는 왜 이 구절의 첫 머리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노한 음성이 안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이 말씀이 십일조 내라는 말씀입니까? 왜 십일조를 잘 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 인들에게 오히려 화를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3장 23절 말씀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를 안 냈다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까?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2)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구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인 들을 향하여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인정받고자 하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책망하신 겁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고,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제사장도 있었고 레위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는 (마23:23)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들처럼 십일조를 내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199

198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면 신약성경 어디엔가 주님께서나 혹은 그분의 사도들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성도들에게 가르친 내용이 한 마디쯤은 기록되어 있을 텐데, 성경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4) 십일조는 레위 사람의 것이고 오늘날은 목사가 레위 사람이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오늘날에는 목사가 레위 사람이기 때문에 레위 사람인 목사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배당은 성전이요, 강단은 제단이요, 목사는 레위 사람이요, 헌금은 제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십일조는 레위 사람의 것이니 교회에 바쳐라. 고 주장하는 목사님들 중에서 레위 사람의 피를 이어받은 목사님을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한국에 그런 분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제단이라고 주장하는 강단에서 짐승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없고, 그들이 제물이라고 주장하는 헌금봉투가 강단 위에서 불에 태워지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일천 번제를 드리라고 가르치는 교회에서 일천 번제 헌금봉투 1,000개를 강단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보 지 못했습니다. 번제라면 불에 태워서 바쳐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고 목사는 영적인 레위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돈은 영적인 소, 영적인 양, 영적인 곡식입니까? 어쩌다가 십일조로 드리는 곡식, 양, 소가 오늘날은 돈으로 바뀌었습니까? 그리고 그런 논리대로라면 교회에는 목사 이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무를 맡은 레위 사람들(찬양대원들), 악기를 연주하는 레위 사람(반주자),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관리인, 주차요원 등)도 있는데 이들에게 성도들이 낸 십일조를 주고 있습니까? 왜 목사만 레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로마 카톨릭주의라는 종교에는 특권을 누리는 사제가 있지만, 주님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몸인 교회에는 성도들 위에 군림하며 성도들보다 우월한 대접을 받는 사제가 없습니다. 목사나 집사는 모두 주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세워주기 위한 직분이지 특권 계급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은 모두 왕가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 다. 200 바르게 읽는 성경

199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를 완전하게 하신 이후로, 구약시대의 율법에 따른, 제사장, 제단, 희생예물 등은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구약시대의 레위 사람과 같은 신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십일조가 레위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는지도 짚어 보겠습니 다. 그분들은 십일조는 레위 사람의 것이다. 라고 하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나머지 십일조들에 대해서는 성도들에게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레위 사람의 것이므로 목회자 생활비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있으며 그 십일조들의 용도도 각기 정해져 있습니다. 첫째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이스라 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하였노라(민18:24).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받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거제 헌물로 주님을 위하여 드렸고, 주님의 그 거제 헌물은 제사장에게 주었습니 다. 레위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취해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로부터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그것의 거제 헌물로 주를 위하여 드릴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너희의 모든 십일조에서 주께 거제 헌물을 드리고 그중에서 주의 거제 헌물을 제사장 아론에게 주되(민18:26, 28)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십일조로서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집회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가족과 함께 누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누리는 사람들에는 가족 이외에 남종, 여종, 레위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다 가지고 거기로 가되 곧 너희의 번제 헌물과 너희의 희생물과 너희의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01

200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 헌물과 너희가 주께 서원하는 최상의 서원 헌물을 다 가지고 가서 너희와 너희 아들딸들과 남종과 여종과 함께 주 너희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것이요, 너희 성문 안에 거하는 레위 사람과도 그리할지니 레위 사람은 너희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느니라(신12:11-12).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모든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주 네 하나님 앞에서 곧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먹고 또 네 소 떼와 양과 염소 떼의 처음 난 것을 먹으며 이로써 주 네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셨을 때에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그 길이 너무 길어 네가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손에 들고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으로 가서 네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즙이나 독주 등 네 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고 거기서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너와 네 집안이 함께 먹고 기뻐할지니라. 네 성문 안에 있는 레위 사람은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는 자니 너는 그를 저버리지 말지니라(신14:22-27). 신명기 14장 22절에서 너는 네 씨의 소출에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여기의 너 는 레위 사람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처소까지 찾아가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나 집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십일조와 구별해서 이것을 축제의 십일조, 집회의 십일조, 가족용 십일조라 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들과 남종, 여종 등 집안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성문 안에 있는 레위사람들과 함께 그 십일조를 먹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삼년 만에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너는 네 모든 소출의 십일조 드리기를 다 마치고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7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으로 경작을 쉬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습니다. 삼 년마다(암 4:4) 즉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과 제 6년에는 그 해 소출의 202 바르게 읽는 성경

201 십일조를 가져다가 모두 모아서 레위 사람, 나그네, 아버지 없는 자,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웃들을 위한 십일조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둘재로 언급한 집회용 십일조와 출처는 같지만(신14:28, 그 해 소출의 십일조), 그 수혜 대상이 상속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과 가난한 이웃들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에게 율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이 셋째 십일조에 대해서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십일조는 레위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레위 사람용, 가족용, 이웃돕기 용 세 가지로 나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대개의 경우 십일조는 레위 사람의 것이다. 라고만 가르치지, 나머지 두 가지 십일조는 잘 안 가르쳐 줍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도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후에도 그것을 목사 사례비, 교회 행정 비용, 건물유지보수 비용, 행사비용 등으로 사용하지, 가난한 이웃들에 게는 좀처럼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전체 재정 중에서 구제를 위해 사용되는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 매우 작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주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제도이지, 어떤 이들의 주장과 같이 목회자들 사례비나 교회 재정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목사는 주의 몸인 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한 직책일 뿐 구약시대의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이미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에게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5) 십일조는 교회 운영에 꼭 필요하다(?) 십일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분들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라. 는 말라기서 3장 10절 말씀을 인용하며,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구약시대의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말라기서말씀은 먹을 것이 있게 하라고 했지 돈을 쌓아두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 운영에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는 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성도들이 자원하여 드리고 나누는 헌금을 통하여 유지됩니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03

202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들은 강단에서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의 예를 들어가면서, 가진 것을 하나님께 모두 다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더 많이 채워주실 것을 믿으라. 고 설교를 합니다. 하지만 왜 정작 자기 자신들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안 해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할까요? 십일조가 교회 운영에 꼭 필요하다고요? 구약시대에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이 먹는 것을 공급하는 데 사용되었지 성전 유지 보수비용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 다. 하나님의 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에는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함 으로 드린 예물을 사용했지,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을 짓는 데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그때에 백성이 자원하여 드리되 완전한 마음으로 주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 며 다윗 왕도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하니라(대상29:9).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혼을 속하기 위해 각기 반 세겔씩을 냈는데, 요아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위해서 일인당 반 세겔씩 내는 성전 세를 걷어서 사용했습니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려고 그들이 주께 헌물을 드릴 때에 부자들은 반 세겔보다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들은 덜 내지 말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죄 돈을 취하고 그 돈을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념이 되어 너희 혼을 속죄하리라(출30:15,16). 이 일 후에 요아스가 주의 집을 보수할 마음을 품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두루 선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부과한 것 즉 모은 돈을 주께 가져오게 하였더니(대하24:4,9)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빈궁한 생활을 고려하여 원래 반 세겔이던 성전 세를 할인해서 삼분의 일 세겔만 거두어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또 우리를 위하여 규례를 정해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을 부담하여 우리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일에 쓰게 하되(느10:32) 이처럼 성전 건축, 유지 보수,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는 돈은 십일조가 아니라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운영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십일조가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습니다. 204 바르게 읽는 성경

203 (6) 십일조는 헌금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십일조는 헌금이 아니라 음식입니다. 하나님께 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 중에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지 자기 임금의 십일조라든 지, 장사해서 번 돈의 십일조, 용돈으로 받은 것의 십일조 등과 같은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앞의 2번에서 살펴보았듯이 십일조를 드리는 품목들을 보면, 곡식, 씨앗, 나무열매, 기름, 포도즙, 소, 양 등 다 먹는 음식들입니다. 즉 십일조는 돈이 아니라 모두 먹는 것들입니다. 성경에 십일조를 돈으로 바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려고 했던 가축이 죽거나 팔아버리거나 해서 드릴 수가 없게 되면, 그때에는 그것을 무를 수는 있었는데 이때는 원래보다 오분의 일을 더해야 했습니다. 즉 십일조(10%) + 십일조의 20% = 12%를 내야 했습니다. 물론 이 12%에 해당하는 돈은 제사장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 말라기 대언자 시대에는 제사장이 그것을 돈으로 착복했을 수도 있겠지만 - 반드시 그 돈으로 레위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입하여 성전 창고에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십일조 중에서 조금이라도 무르려면 그는 거기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레27:30-31) 음식물은 썩거나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은 화폐로 환산해서 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런 문제점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음식물로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셨을 때에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그 길이 너무 길어 네가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손에 들고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으로 가서 네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즙이나 독주 등 네 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고 거기서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너와 네 집안이 함께 먹고 기뻐할지니라(신14:22-27). 이 구절은 앞에서도 인용한 구절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만약에 자기가 사는 곳에서 예배 처소까지 거리가 멀어서 십일조를 가지고 가기가 힘들 경우, 일단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택한 장소에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05

204 도착하면 그 돈으로 다시 소, 양, 포도즙 등을 사서 가족들과 레위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기뻐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십일조를 언제나 음식물로 받았지 돈으로 받은 적은 없습니다. 말라기서 3장 10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라. 고 하셨지, 십일조를 가져와서 내 집을 돈으로 채우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옛날 제가 교회에 다닐 때에는 성미( 聖 米 ) 제도가 있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밥을 할 때마다 쌀을 한 줌씩 덜어서 성미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교인들이 교회에 올 때에 그 주머니를 모두 성미 통에 쏟아 부어 쌀을 모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님 댁에서 필요한 양식으로 쓰기도 하고, 교회 찬양대원들이 점심 식사를 해 먹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차라리 이런 성미 제도가 구약시대의 십일조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7) 소득이 있으면 누구나 모든 영역에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직장인은 월급에서 십일조를 내고, 장사하는 사람은 수익의 십일조를 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수익이 아니라 매출액의 십일조를 내라고 합니다. 심지어 어린이들에게는 부모에게서 용돈 받은 것 중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경제활동에 종사했던 모든 이들이 십일 조를 냈던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제사가 있던 시절에 십일조는 누구나가 다 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 들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은 십일조 의무에서 면제 받았다." ( 신완식 님의 십일조는 비성경적"에 서 인용함) 중세 시대 로마 카톨릭주의의 부패상을 고발한 데카메론 을 읽어보면, 로마 카톨릭 사제가 선량한 부녀들을 미혹하여 남편만이 아내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 즉 함께 눕는 것 의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도 할머니나 못생긴 여자는 제외하고 젊고 예쁜 여자들에게만 말입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이 없고, 성경 말씀을 잘 모를 때에는 이렇게 로마 카톨릭 사제들처럼 말씀을 왜곡시켜 성도들을 속이고 빼앗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처럼 주의 진리의 말씀이 모든 성도들의 손에 있는 지금은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십일조의 확장판들이 등장하고 206 바르게 읽는 성경

205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에 인생의 십일조를 드려라. 고 하면서 날마다 하루 24시간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2시간 24분씩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의 십일조 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 는 학문 분야의 학술논문 10편 중 1편은 신앙과 관련된 주제로 써야 한다는 학문의 십일조 라는 것도 있나 봅니다. 실제로 루이지애나 공대의 빌 조단 교수는 학문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는 공대 교수로 학문의 주제가 신앙과 결합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공학의 윤리라는 주제로 연구를 해서, 연구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했다고 합니다. 시간의 십일조, 학문의 십일조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 멋있어 보이고, 존경스러워 보이고, 따라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 만한 것들입니다. 좋은 동기에서 따라해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부디 이런 것들이 새로운 율법이 되어 우리의 생활을 옭아매거나 자신과 다른 성도들에게 성경에 없는 의무를 지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교리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논리를 소개하고, 그에 대해 성경 말씀을 통해 반박을 해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십일조에 대해서 잘못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성경 말씀을 다시 하나하나 찾아보시고, 우선 구약시대에 있었던 이 십일조라는 율법 제도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시기 바랍니 다. 그런 다음에 과연 이런 율법이 오늘날 우리 거듭난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인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정리해서 알려드릴 뿐,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믿음을 지배하려고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성경 말씀에 대해 어떻게 믿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각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고후1:24). 3. 헌금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 제가 이렇게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며, 이제는 율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십일조와 같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고 하면 평소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에 은근히 부담을 느끼셨던 분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글에서 우리가 율법의 짐에서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07

206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소홀히 해도 된다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기 욕심껏 방탕하게 사용하고 관리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율법보다 더 큰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 6:14). 따라서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헌금을 안 드리면 죄를 짓는 것이다. 라는 죄의식이나, 이것은 성도의 의무다. 라는 의무감에서나, 내가 이것을 드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하여 헌금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함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갈5:1, 13). 갈라디아서 5장 1절과 13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율법에 서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어떤 속박의 멍에도 메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 자유를 가지고 자신의 정욕과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의의 종으로 살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 성도들은 어떤 마음과 어떤 기준으로 헌금을 드려야 할 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과 달리 이 일을 행하되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 고린도후서 8장에는 마케도니아 교회가 풍성하고 너그러운 선물을 넘치도록 하였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그들은 이 선물을 주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드리는 일을 함에 있어서 재물을 드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창세기 4장을 읽어보면,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아벨의 헌물은 받으셨고, 가인의 헌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읽습니다. 그 결과 아벨의 헌물과 가인의 헌물의 차이점 208 바르게 읽는 성경

207 은 무엇인지를 비교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물이 될 수 있는가 를 연구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헌물 은 받고 가인의 헌물 은 받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 중에서 가져왔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므로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빛이 변하니라(창4:4,5).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 에는 관심을 가지셨고, 가인과 그의 헌물 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의 헌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헌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고 덥석 헌물만 받아 챙기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아벨을 받으신 주께서는 자연히 그의 헌물도 받으셨습니 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의 글도 받아들이고, 그의 선물도, 그의 초대도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를 마음에서부터 배척하면 그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께 무엇을 얼마나 드릴까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림으로써 주께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미리 준비한다.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2). 그러므로 그 형제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후한 선물 곧 전에 너희가 통보를 받은 적이 있는 그 후한 선물을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내가 생각하였나니 그리하면 바로 그 일이 후한 선물답게 준비되고 탐욕에서 난 것 같지 아니하리라(고후9:5).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09

208 헌금을 드릴 때에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생각나는 대로 주머니에서 몇 푼 집어서 주는 것처럼 하지 말고, 선교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각각의 용도별로 따로 모아두었다가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드리기로 한 결심이 흔들리거나, 욕심이 생겨서 드리는 것을 포기하거나, 선물의 크기를 줄이거나 하지 않고 후히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미리 준비하면 탐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진정 선물답게 된다고 합니다. (3) 풍성하게 드린다. 고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로 하여금 풍성하고 너그러운 선물을 넘치도록 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모든 일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열심과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할지니라(고 후8:2,7). 율법에는 십분의 일이라는 규정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엇을 얼마만큼 드려야 한다거나, 어느 정도의 비율을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얼마나 드려야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냐에 대해 정해진 규정은 없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해 소출의 10분의 1을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로 드렸고(10%), 드리고 남은 나머지 90% 중에서 다시 10분의 1을 집회(축제)를 위한 십일조로 드렸습니다(9%). 즉 율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의무가 19%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법 아래에 있는 자로서 율법의 수준을 뛰어넘으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오해하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는 결코 신약시대의 헌금에 대한 강제 규정이나 새로운 지침이 아니며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월 소득이 500만원 인 사람은 20%를 드리더라도 나머지 400만원으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월 소득이 100만원인 분들의 경우 10%를 드리는 것도 힘에 겨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률적으로 몇 %를 드려야 한다고 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으며, 그렇게 획일적인 비율을 정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율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풍성함의 기준에 대해 우리에게 어떠한 의무적 비율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풍성히 드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정도에 따라, 각자 자기 형편에 알맞게,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정하시면 됩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드리시면 됩니다. 210 바르게 읽는 성경

209 (4) 계획을 세워서 드린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고후9:7) 우리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돈, 물질 등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처럼, 드리는 생활에도 계획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계획을 세우는 것을 계산적이라고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덮어놓고 왕창 드렸다가 나중에 후회하거나, 정작 생활의 다른 영역에서 쓸 것이 부족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때 자기 재산을 팔아서 바친 아나니야와 삽비라 가 성령을 속이려고 하다가 죽은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야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 하나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는데 그의 아내도 이 일에 은밀히 관여하였더라. 그가 일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거늘(행5:1-2) 그들은 왜 땅을 팔아서 바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바치려면 다 바칠 것이지 왜 일부를 숨겼을까요? 일부를 숨길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전체 땅 판 돈 중에서 일부를 드립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왜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까 요? 사도행전 5:1은 그러나 로 시작합니다. 이는 앞의 4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며 4장 마지막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이 키프러스 지방 출신의 요세라 하는 레위 사람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을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 그가 땅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6-37). 아마도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바나바가 땅을 팔아 바치는 것을 보고 따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바나바가 그렇게 자기 소유를 팔아 바치는 것을 사람들이 칭찬하자 자기들도 그런 칭찬과 영광을 누리고 싶어서 일을 저질렀으리 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남들을 따라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드렸다가 나중에 아까운 생각이 들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중 일부를 감추었으리라는 추측이 듭니다. 이와 같은 즉흥적인 태도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생활을 규모 있게 운영하는데 장애가 됩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즉 누구를 위하여, 얼마를, 언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드릴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11

210 (5)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다. 마음에 감동을 받은 모든 자와 영으로 자원하게 된 모든 자가 오고 그들이 회중의 성막 작업과 그분을 섬기기 위한 모든 것과 거룩한 의복들에 쓰도록 주의 헌물을 가져왔으니(출35:21) 광야에서 회중의 성막을 만들 때에도, 다윗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 다.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6) 즐거운 마음으로 드린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이 내게 헌물을 가져오게 하라. 또 너희는 마음에서 즐거이 그것을 내는 모든 자로부터 나의 헌물을 취할지니라(출25:2).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후9:7).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자들로부터 헌물을 받으셨습니다. 마음은 영 내키지 않는데 주변 사람 눈치나 분위기 때문에 마지못해 드리거나 강요에 의해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서 정한 의무로서 십일조를 드렸지만, 우리는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입니다. 드리는 삶의 영역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어떤 강제 규정도 만들어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은 율법을 따라 십일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께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이제는 의무로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주께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율법이 의무로 정한 최소한의 기준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었다면, 은혜의 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적어도 이 율법의 수준은 뛰어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이며, 저는 그렇게 믿고 행하고 있습니다. 212 바르게 읽는 성경

211 물론, 저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반드시 십일조보다 더 많이 드려야 한다. 라 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르침이 헌금에 대한 또 하나의 율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드려도 될 만큼 경제적 여건이 되는 분들 중에서 그렇게 드리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렇게 드리십시 오. 하나님은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분이 아니시며, 마지못해 의무감에서 억지로 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된 자로서 그 자유를 가지고 형제의 짐을 서로 지고,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따라, 혹은 선교사들을 위해, 혹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혹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각자 마음에 정한대로, 미리 준비하여,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풍성하게 드리면 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헌금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213

212 24. 아리엘의 아들인가, 사자 같은 사람인가? 개역: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효용한 일을 행한자라 저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대상 11:22) 흠정역: 갑스엘 출신 용사의 손자요,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는 많은 일을 행하였더라. 그가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였고 또 눈 오는 날에 내려가 구덩이에서 사자 한 마리를 죽였으며 KJV: Benaiah the son of Jehoiada, the son of a valiant man of Kabzeel, who had done many acts; he slew two lionlike men of Moab: also he went down and slew a lion in a pit in a snowy day. 역대기상 11장 22절은 브나야라는 사람의 업적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이를 병행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였으며 사자 한 마리를 죽였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서는 사자 같은 사람 이라는 표현 대신에 아리엘의 아들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들이 라는 말이 없고 아리엘 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압 아리엘 두 명 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이 문제가 됩니다. 아리엘을 그대로 음역을 할 것인가, 의미를 번역할 것인가? 그리고 번역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만약 아리엘을 번역하지 않고 모압 아리엘 두 명을 죽였다. 고 하면 대단히 어색한 표현이 됩니다. 첫째로, 아리엘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봉한 편지처럼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립니다. 둘째로, 성경이 브나야를 가리켜 많은 일을 행한 자라고 했는데, 아리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번역하지 않을 경우, 겨우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인 것이 왜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설명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음역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213 아리엘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리(사자) + 엘(힘센, 능력 있는 혹은 신성을 가진 존재) 입니다. 성경에서 이 아리엘은 지명, 인명,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사람 등으로 사용됩니다. 이사야서 29장 1절에서 아리엘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리엘에게, 아리엘에게, 다윗이 거하던 도시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햇수에 햇수를 더할지니라. 그들이 희생물을 잡을지라도(사29:1) 그런데 이사야서 29장 1절과는 달리 역대기상 11장 22절 말씀의 아리엘은 지명(예루살렘)이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죽일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리엘을 죽였다는 걸로 봐서 이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아리엘이라는 말 속에는 사자(lion)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지만 사자는 아닙니 다. 만약 이것이 사자라는 짐승이라면 모압 사자 두 마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동물원의 사자라면 혹시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사자에게는 국적 표시가 없었습니다. 삼손이 죽인 젊은 사자도 블레셋 사자, 이스라엘 사자 등과 같은 구분이 없이 그냥 사자라고만 되어 있습니다(삿14:6). 그리고 이게 정말 사자라면 성경은 브나야가 많은 일을 행하였다. 고 하는데, 그가 한 업적이라곤 고작 동물 세 마리 때려잡은 것 말고는 없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또 한꺼번에 사자 세 마리를 죽였다. 고 할 것이지, 본문과 같이 모압 사자 두 마리를 죽였고, 사자 한 마리를 죽였다. 라고 두 번으로 나누어서 기록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아리엘이 사람 이름으로 사용된 예가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사람을 보내어 우두머리 되는 자들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나단과 야립과 엘나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나단을 불러(스8:16) 그러나 역대기상 11장 22절의 아리엘은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이게 사람 이름이라면, 모압 아리엘 두 명을 죽였다. 가 되는데 사람 두 명이나 강아지 두 마리는 말이 되지만 홍길동 두 명, 김철수 두 명이라는 표현은 말이 안 됩니다. 성경이 두 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아리엘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라고 생각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슬그머니 피해가기 위해서 원문에는 없는 아들이라는 단어를 임의로 삽입하여 모압 아리엘의 두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아리엘의 아들인가, 사자 같은 사림인가? 215

214 이상에서 우리는 아리엘 은 그 의미를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것과 아리엘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아리엘은 모압 출신의 사람이며, 아리엘은 한 개인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리엘은 에스라서 8장 16절에서와 같이 한 사람을 나타낼 때에는 사람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역대기상 11장 22절과 같이 둘 이상의 사람을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될 때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가 됩니다. 이때 그 의미는 아리(사자) + 엘(힘센, 능력 있는 존재) = 사자 같은 사람,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사람 (lionlike men)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무엘기하 17장 10절에서 성경은 용맹스럽고 강한 사람을 사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비록 용감하여 마음이 사자의 마음과 같은 사람이라도 완전히 녹으리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왕의 아버지는 용사요, 그와 함께한 사람들도 용맹한 자들인 줄 알기 때문이니이다(삼하17:10). 그러므로 모압 아리엘 두 명은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이라는 뜻이며, 이는 강하고 용맹스러운 모압 용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리엘(사자 같은 사람) 뿐만 아니라 모압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모압 사람들 중에는 예로부터 강하고 용맹스러운 용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옛날 모압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는데(신2:9-11), 아마도 모압 족속 중에는 거인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도 있었을 겁니다(삼하8:2).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 족속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전쟁하며 싸우지도 말라. 내가 그들의 땅을 네게 소유로 주지 아니하리니 내가 아르를 롯 자손에게 소유로 주었느니라. 과거에 엠 족속이 그 안에 거하였는데 그 백성은 크고 많으며 아낙 족속처럼 키가 컸으므로 사람들이 그들 또한 아낙 족속처럼 거인으로 여겼으나 모압 족속은 그들을 엠 족속이라 불렀으며(신2:9-11) 다윗이 모압을 정벌한 후에 그들 가운데서 키가 두 줄 길이 이상 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인 이유는 바로 이 거인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을 가려내어 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평균 신장이 클 수도 있겠지만, 키가 보통 사람의 2배가 넘는다면, 이는 단순히 키 큰 사람이 아니라 거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을 땅에 내던지고 줄로 재어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이와 같이 모압 족속이 다윗의 종이 되어 예물을 가져오니라 216 바르게 읽는 성경

215 (삼하8:2). 이처럼 성경에서 모압 용사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이는 크고 강하고 용맹스러 운 자를 의미합니다. 그때에 에돔의 추장들이 놀라고 모압의 용사들이 벌벌 떨며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다 녹으리로다(출15:15). 그때에 모압 사람 만 명가량을 죽였는데 그들은 다 건장한 자들이요, 다 용맹한 자들이었 더라. 거기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삿3:29). 단순히 사자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만 해도 강한 자를 나타내는데,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이라고 했으니 브나야가 얼마나 강하고 용맹스러운 적들과 싸웠는지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브나야는 사자같이 용맹스러운 모압의 용사 두 명을 죽였고, 눈 오는 날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진짜 사자 한 마리를 죽인 위대한 용사였습니다. 따라서 역대기상 11장 22절은 흠정역 성경과 같이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였고 라고 번역하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 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엘의 아들인가, 사자 같은 사림인가? 217

216 25. 건포도 떡인가, 포도즙 한 잔인가? 개역: 또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매 명에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병 하나씩 나누어 주었더라(대상16:3) 흠정역: 또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각각 빵 한 개와 좋은 고기 한 조각과 포도즙 한 잔씩을 나누어 주었더라. KJV: And he dealt to every one of Israel, both man and woman, to every one a loaf of bread, and a good piece of flesh, and a flagon of wine. 역대기상 16장 3절에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궤를 장막에 들인 후, 그 앞에 헌물을 드리고 백성들에게 축복하고, 참여한 백성들에게 음식물을 나누어 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음식이, 킹제임스 성경에는 빵 한 개, 좋은 고기 한 조각, 포도즙 한 잔 이라고 되어 있는데 반해, 개역 성경에는 떡 한 덩이, 고기 한 조각, 건포도병( 餠 ) 하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어느 부분이 다른지 금방 발견하셨을 겁니다.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은 음식이 빵인지 떡인지 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빵은 밀가루 반죽을 불에 구워서 만드는 것이고, 떡은 곡식가루나 반죽을 증기로 쪄낸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죽을 불에 구운 빵을 먹었지 떡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를 고려하여 번역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 말씀은 있는 그대로 번역해야지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따라 이리저리 바꾸어서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을 살펴보면 빵과 떡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점이 눈에 띕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포도즙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개역 성경은 건포도병(건포도 떡)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포도즙과 건포도 떡, 한 쪽은 액체로 된 음료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체로 된 음식을 말하는데 어떻게 번역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요? 먼저 일반상식 수준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왕으로부

217 터 떡과 고기와 떡을 받았다. 고 하는 것과 빵과 고기와 포도즙을 받았다. 고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후자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떡과 고기 라고 하면 될 텐데, 떡과 고기와 떡 이라고 하니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듭니다. 왜 음식물 목록에 떡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을까요? 이는 고기의 앞과 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떡 중 하나는 떡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음식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즉 셋째로 등장하는 건포도 떡은 떡이 아닌 다른 음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개역 성경의 번역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실 음료는 하나도 없이 그 마른 떡과 고기를 힘겹게 씹어 먹으면서 다윗 왕을 원망했을 겁니다. NIV에는 포도즙뿐만 아니라 고기까지 빠지고, 빵과 케이크만 나옵니다. Then he gave a loaf of bread, a cake of dates and a cake of raisins to each Israelite man and woman(대상16:3, NIV).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서 빵과 고기와 포도즙은 이스라엘 사람들 에게 있어서 거의 표준 식단에 해당하는 세트 메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 다볼 평야에 이르면 하나님께 가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거기서 너를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가지고 가고 다른 사람은 빵 세 개를 가지고 가며 또 다른 사람은 포도즙 한 부대를 가지고 가리라(삼상 10:3). 이새가 나귀를 취해 빵과 포도즙 한 부대와 염소 새끼를 싣고 자기 아들 다윗의 손으로 그것들을 사울에게 보내니(삼상16:20) 이에 아비가일이 급히 빵 이백 개와 포도즙 두 부대와 이미 예비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오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이백 덩이를 취하여 나귀들 위에 싣고(삼상25:18) 사정 상 고기가 빠지는 경우는 있어도 빵 먹을 때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매번 포도즙이 함께 나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즙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14:18). 너희가 빵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즙이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은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신29:6). 침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즙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가 말하기를, 그가 마귀 들렸다, 하더니(눅7:33) 건포도 떡인가, 포도즙 한 잔인가? 219

218 주의 만찬에도 빵과 포도즙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고전 11:26). 그런데 다윗 왕이 마실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빵과 고기만 주어서 먹게 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자연스럽지가 못 합니다.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역대기상 16장 3절에 언급된 음식이 건포도 떡이냐 아니면 포도즙이냐 하는 것을 자세히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포도즙 한 잔, 개역 성경이 건포도병 하나 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아쉬솨 (스트롱코드 809)인데, 이는 눌려진 것, 빵, 단 과자, 포도주 병 을 의미합니다. 즉 이 단어 어디에도 건포도라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건포도를 의미하는 단어는 다음 성경 구절에서와 같이 짜무크 (6778, 건포도송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산꼭대기를 조금 지났을 때에, 보라,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을 얹은 두 마리 나귀에 빵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즙 한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이하므로(삼하16:1)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건포도 떡이 아니라 포도즙 한 잔(a flagon of wine)이라 고 했는데, flagon of wine 혹은 flagons 라는 표현은 아가서 2장 5절과 호세아서 3장 1절에도 등장합니다. 두 구절 모두 역대기상 16장 3절과 같은 아쉬솨 가 사용되었으니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포도즙인지, 건포도 떡인지 알 수가 있을 겁니다. 개역: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2:5) 흠정역: 큰 포도즙 병으로 나를 지탱하시오며 사과로 나를 위로하소서.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병이 났나이다. KJV: Stay me with flagons, comfort me with apples: for I am sick of love. 개역 성경은 아가서 2장 5절에서는 떡이라는 것을 슬그머니 빼버리고 건포도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의 기력을 도와주거나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쉬솨 를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아쉬솨 는 무엇입니 220 바르게 읽는 성경

219 까? 건포도 떡, 건포도, 포도즙 중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까요? 정답은 바로 조금 전에 인용한 사무엘기하 16장 1절에서 시바가 가지고 온 선물 속에 있습니다. 시바는 빵과 건포도와 여름 과일과 포도즙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들의 용도에 대해서는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들을 가져왔느냐? 하매 시바가 이르되, 나귀들은 왕의 집안사람들이 타게 하고 빵과 여름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며 포도즙은 광야에서 기진한 자들이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니(삼하16:2) 시바의 말에 의하면 광야에서 기진한 자들이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까? 사무엘기하 16장 1절에는 빵, 건포도, 포도즙이 모두 나옵니다. 그중에서 건포도입니까, 건포도 떡입니까, 포도즙입니까? 시바가 이것은 기진한 자들에게 마시게 할 포도즙이라고 하자 다윗은 그의 말을 수긍하면 서 이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아가서 2장 5절에서 기력을 찾고 몸을 지탱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건포도나 건포도 떡이 아니라 포도즙이 맞습니다. 포도즙에는 포도당이 풍부하여 몸 안의 노폐물을 제거해 줄뿐만 아니라 포도당 은 체내에 곧바로 흡수되어 에너지원으로 변하기 때문에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건포도에도 포도당 성분이 있긴 하지만, 건포도를 씹어 먹는 것보다는 포도즙을 마시는 것이 훨씬 소화 흡수가 빠릅니다. 아가서 2장 5절이나 역대기상 16장 3절의 아쉬솨 (flagon)는 포도즙을 담는 입구가 좁은 병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호세아 3장 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호3:1) 흠정역: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다른 신들을 바라보고 포도주 병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주의 사랑에 따라 또 가서 자기 친구에게 사랑받는 여인 그러나 간음한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니라. KJV: Then said the LORD unto me, Go yet, love a woman beloved of her friend, yet an adulteress, according to the love of the LORD toward the children of Israel, who look to other gods, and love flagons of wine. 호세아서 3장 1절에서도 개역 성경은 건포도 떡이라고 했고, 킹제임스 성경은 포도주 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포도즙이 아니라 포도주라고 번역하였는데 건포도 떡인가, 포도즙 한 잔인가? 221

220 이는 여기에 나오는 와인(wine)이 주의 만찬용이나 식사용 음료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방탕한 생활 및 이방신을 섬기는 의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잘못하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제사장과 대언자도 독주로 인하여 잘못하고 포도주에 잠기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그들이 환상에서 잘못을 범하며 재판에서 걸려 넘어지나니(사28:7) 행음과 포도주와 새 포도즙이 마음을 빼앗아 가느니라. 내 백성이 자기들의 나무토막에 게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막대기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나니 이는 행음의 영이 그들로 하여금 잘못을 범하게 하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밑에서 떠나 음행의 길로 갔기 때문이니라(호4:11-12). 또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스스로 눕고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집에서 정죄 받은 자들의 포도주를 마시느니라(암2:8). 호세아서 3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들이 비록 그런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본문의 내용이 개역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건포도 떡을 사랑한 것이었다면 본문의 의미가 대단히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분명히 건포도 떡을 먹는 행위는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건포도 떡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셨다는 엉뚱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호세아서 3장 1절은 건포도 떡을 사랑하고 그것을 즐겨 먹는 이스라엘 자손을 책망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호세아서 3장 1절 말씀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아쉬솨 를 사랑한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의식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 4장 11-12절에서는 그들이 행음과 포도주로 인하여 그 마음이 방탕하게 되어, 우상에게 조언을 구하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호세아와 비슷한 시대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대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섬기면서 정죄 받은 자들의 포도주를 마셨다고 합니다(암2:8). 이런 말씀들로 미루어 볼 때, 호세아서 3장 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포도 떡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사랑한 것을 보여 줍니다. 즉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flagons of wine, 즉 포도주를 담은 병이라고 번역해야 의미가 통합니다. 아가서 2장 5절과 호세아서 3장 1절에서 사용된 것과 꼭 같은 단어가 역대기상 16장 3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한결같이 flagon of wine 즉 포도즙 병, 포도즙 한 잔 등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역대기상 16장 3절에서 다윗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누어 준 222 바르게 읽는 성경

221 것은 건포도 떡이 아니라 포도즙 한 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상 16장 3절을 빵 한 개, 좋은 고기 한 조각, 포도즙 한 잔 이라고 옮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정확한 번역입니다. 건포도 떡인가, 포도즙 한 잔인가? 223

222 26. 톱질을 시켰는가, 톱으로 잘랐는가? 개역: 그 가운데 백성을 끌어 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을 하게 하니라 다윗이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모든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대상 20:3) 흠정역: 또 그 안에 있던 백성을 데려다가 톱과 쇠써레와 도끼로 그들을 자르니라. 다윗이 암몬 자손의 모든 도시에 이같이 행하고 온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라. KJV: And he brought out the people that were in it, and cut them with saws, and with harrows of iron, and with axes. Even so dealt David with all the cities of the children of Ammon. And David and all the people returned to Jerusalem. 사무엘기하 12장 31절과 역대기상 20장 3절에는 다윗이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한 후, 암몬 자손들에게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성경, 한글킹제임스역, NASB, Darby, Webster 역에서는 톱과 쇠써레와 도끼로 그들(암몬 자손)을 잘랐다. 고 번역하였고, 이 성경들을 제외한 나머지 영어 및 한글 역본들에서는 모두 이 부분을 그들에게 톱질, 써레질, 도끼질을 하게 하였다(노동을 시켰다). 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자손을 톱과 쇠써레와 도끼로 자르는 것은 너무 잔인해 보인다고 생각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이 부분을 고쳐서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기록이 흉악한 범죄에 대해 언급하거나, 잔인한 장면을 묘사하거나,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을지라도 번역은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분명히 이 부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톱으로 켜다, 자르다, 산산조각을 내다. 라 고 하였으며,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cut them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만약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암몬 자손들을 톱과 쇠써레와 도끼로 자른 것이 아니라 개역 성경에서와 같이 암몬 자손들에게 톱질, 써레질, 도끼질과 같은

223 중노동을 시켰다고 가정할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로, 성경은 그 도시 가운데 있던 백성을 모두 끌어내었다고 합니다. 암몬 자손의 장정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었을 테고, 도시 안에는 대부분 여자와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노인, 여자 들이 과연 톱질과 써레질, 도끼질을 능숙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연약한 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암몬 자손들의 노동력이 탐이 났다면, 전쟁터에 나온 장정들을 포로로 잡아서 노동을 시키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겁니다. 무거운 도끼를 들어 올릴 힘도 없는 암몬 자손의 어린 아이와 노약자에게 그런 중노동을 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한 두 도시가 아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도시에서 이와 같이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암몬 자손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자와 어린아이들일 테니 그 많은 사람들을 도시에서 다 끌어내어 모으면 상당한 숫자가 되었을 겁니다. 톱질을 하건, 도끼질을 하건 그 대상이 되는 목재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 그만한 목재와 일감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이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던 때도 아닌데 그 많은 사람들을 부려서 시킬만한 일거리가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셋째로, 장작패기, 밭 갈기, 톱질 등의 일을 하려면 도시 안에서 하게 할 것이지, 왜 모두 도시 밖으로 데려다놓고(brought out) 일을 시키느냐는 겁니다. 넷째로, 이상과 같은 일을 행한 후, 다윗과 온 백성 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 다(returned). 여기서 온 백성은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는 것이지 암몬 자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윗과 모든 백성이 돌아왔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온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대상20:3). David and all the people returned to Jerusalem. 돌아왔다 (returned)는 말은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출발했던 사람들이 다시 원래 장소로 복귀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애초에 예루살렘에서 살지 않았던 암몬 자손들은 예루살렘으로 사로잡혀 올 수는 있어도, 원래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아니므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all the people 이라는 표현 속에는 암몬 자손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암몬 땅에서 돌아왔을 때, 암몬 자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다윗 왕과 군대대장, 이스라엘 군사들, 감독관들은 톱질을 시켰는가, 톱으로 잘랐는가? 225

224 모두 (all)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그들만 남아있는데, 그들은 누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계속 남아서 도시 밖에서 부지런히 톱질, 써레질,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다윗이 암몬 자손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마자 다들 도시 안으로 숨거나 도망쳤 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기껏 힘든 전쟁을 해서 암몬 자손들을 정복한 다음에 그들에게 톱질, 도끼질 몇 번 시키고는 놓아 보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처럼 원래 성경에 기록된 내용대로 번역을 안 하고, 자기들 입맛대로 번역을 하면 꼭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다윗이 암몬 자손들을 단 한 명도 포로로 사로잡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다윗은 그들을 잡아다가 노동을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모두 죽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도시를 노략하고, 도시 안에 있던 사람들을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가 톱과 쇠써레와 도끼로 그들을 잘랐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이것이 잔인해 보일지 몰라도 거기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번에 정복한 곳은 암몬 자손의 땅 랍바이기 때문입니다. 암몬 자손의 맞은편에 가까이 가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며 그들과 상관하지도 말라. 내가 암몬 자손의 땅을 네게 소유로 주지 아니하리니 내가 그 땅을 롯 자손에게 소유로 주었느니라. (옛날에 거인들이 그 안에 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곳 또한 거인들의 땅으로 여겼으며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 족속이라 불렀느니라(신2:19-20). 이는 거인들의 남은 자들 가운데 남아 있는 자가 오직 바산 왕 옥뿐이었기 때문이라. 보라, 그의 침상 틀은 쇠 침상 틀이라. 그것이 암몬 자손의 랍바스에 있지 아니하냐? 사람의 큐빗으로 재면 그것의 길이가 구 큐빗이요, 그것의 너비가 사 큐빗이니라(신 3:11). 곧 거인들 가운데 남은 자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서 통치한 바산 왕 옥의 온 왕국이니 모세가 이들을 쳐서 쫓아내었더라(수13:12).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끝까지 살아남아 있던 거인은 바산 왕 옥이었고 그의 거처는 암몬 자손의 땅 랍바스에 있었습니다(신3:11). 그 곳은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거인들의 땅이라고 합니다(신2:20). 역대기상 20장 3절의 배경이 되는 곳은 사무엘기하 12장 26-31절인데, 그 말씀을 읽어보면 다윗이 지금 암몬 족속과 전쟁을 하여 점령한 도시가 바로 랍바입니다. 다윗이 온 백성을 함께 모아 랍바로 가서 그 도시와 싸워 그곳을 점령하고(삼하12:29) 226 바르게 읽는 성경

225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에서 거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직접 경험하였듯이 가끔 골리앗과 같은 거인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윗의 부하 장수들 역시 이스비브놉, 삽(삼하21:16-18) 등과 같은 거인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는 거인족 의 후손들이 어디엔가 살아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모압을 정벌한 후 모압에서 키가 두 줄 길이가 넘는 사람들을 다 죽여서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거인족의 후예를 말살시켜버렸습니다(삼하 8:2). 그리고 지금 정복한 암몬 자손의 땅 랍바야말로 거인 족속인 바산 왕 옥의 본거지였으므로 거인의 후손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드 사람 골리앗처럼 암몬 자손 중에서도 바산 왕 옥의 피를 물려받은 거인족의 후손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거인 족속들을 다 내쫓지 않고 남겨두었 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족속 중에서 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고 가자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수11:22). 위와 같이 거인 족속들을 남겨두면 나중에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가드 출신의 골리앗이라는 이름의 투사가 나오는데 그의 키는 육 큐빗 한 뼘이더라(삼상17:4). 이 일 후에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었는데 그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그 거인의 아들들 중에서 삽을 죽였더라(삼하21:18).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었고 거기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삼 하21:19). 또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고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개수가 스물네 개더라. 그도 그 거인에게 태어났더라(삼하21:20). 다윗은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암몬 자손들을 살려두지 않고 모두 죽였습니다. 톱질을 시켰는가, 톱으로 잘랐는가? 227

226 27. 후람인가, 후람의 아버지인가? 개역: 솥과 부삽과 고기 갈고리와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그릇들이라 후람의 아비가 솔로몬 왕을 위하여 빛난 놋으로 만들 때에(대하 4:16) 한글킹: 또 솥과, 부삽과, 고기 갈고리와, 모든 기구들이니, 후람의 아버지가 주의 전을 위하여 빛나는 놋으로 솔로몬왕에게 만들어 주었는데 흠정역: 그의 아버지 후람이 주의 집을 위해 솔로몬 왕에게 또한 솥들과 부삽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그것들의 모든 기구를 빛나는 놋으로 만들었더라. KJV: The pots also, and the shovels, and the fleshhooks, and all their instruments, did Huram his father make to king Solomon for the house of the LORD of bright brass. 역대기하 4장 16절에는 솔로몬 왕이 두로에서 데려온 기술자가 주의 집을 위해 솥들과 부삽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모든 기구를 놋으로 만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놋으로 그 모든 기구를 만든 사람이 후람의 아버지라고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은 후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Huram his father 라고 하여 Huram 과 his father를 동격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여 그의 아버지 후람 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후람은 솔로몬을 지도한 스승이었기 때문에 그(솔로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놋으로 이런 기구들을 만든 이가 후람인지, 후람의 아버지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위의 역대기하 4장과 동일한 사건을 다룬 열왕기상 7장을 찾아서 비교해 보면 됩니다. 역대기하 4장 16-17절에 상응하는 구절은 열왕기상 7장 45-46절입니다. 역대기하 4장 17절과 열왕기상 7장 46절을 비교해보면 이들 구절이 동일한 시대에 있었던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열왕기상 7장 45절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27 솥들과 부삽들과 대야들이더라. 히람이 주의 집을 위해 솔로몬 왕에게 이 모든 그릇을 빛나는 놋으로 만들었더라(왕상7:45). 열왕기상 7장 45절은 그것들을 만든 사람은 히람(역대기에서는, 후람)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역대기하 4장 16절에서 놋으로 기구들을 만든 사람도 후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후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후람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놋으로 기구들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후람이라는 사람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으로 놋 대장장이더 라. 그는 놋을 다루는 모든 일에서 지혜와 명철이 충만하며 솜씨가 좋더라. 그가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의 모든 작업을 수행하니라(왕상7:14). He was a widow's son of the tribe of Naphtali, and his father was a man of Tyre, a worker in brass: and he was filled with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unning to work all works in brass. And he came to king Solomon, and wrought all his work.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후람은 이스라엘 여인과 두로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후람이 놋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이유는 그가 어려서부터 두로 출신의 놋 대장장이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놋을 비롯한 각종 금속들을 다루는 일을 배웠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7장 14절은 후람이 과부의 아들 (a widow s son)이라고 합니다. 과부란 남편이 죽고 홀로 된 여자를 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솔로몬이 후람을 데려올 당시에 후람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람의 아버지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으므로 역대기하 4장 16절에 나오는 놋으로 된 물건들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경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역대기하 4장 16절에 나오는 놋 기구들은 후람의 아버지가 만든 것이 아니라 후람이 만들었으며, 이 구절은 후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후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킹제임스역은 후람아비 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면서, 개역 성경의 번역 을 따라서 후람의 아버지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후람의 아버지는 죽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 대장장이 일을 하지 못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분명히 Huram his father 라고 두 단어가 동격으로 사용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후람의 아버지 를 의미한다면 KJV는 Huram s father 나 the father of Huram 이라고 했을 겁니다. 따라서 역대기하 후람인가, 후람의 아버지인가? 229

228 4장 16절에서 놋으로 주의 집에서 사용될 각종 기구를 만든 사람은 흠정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후람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역대기하 2장 13절의 번역에 있어서도 KJV와 흠정역 성경과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역대기하 2장 13절 역시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내 아버지 후람 이라고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은 내 아버지에 게 속했던 자, 후람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 내가 이제 공교하고 총명한 사람을 보내오니 전에 내 부친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대하2:13) 한글킹: 이제 내가 명철을 지닌 기술자를 보내 드리오니, 그는 내 아버지 후람의 사람이었으며 흠정역: 내가 이제 명철이 있고 재주가 많은 사람 후람을 보내었는데 그는 내 아버지에게 속하였던 자니이다. KJV: And now I have sent a cunning man, endued with understanding, of Huram my father s, 개역 성경이나 한글킹제임스역은 역대기하 2장 13절에 등장하는 후람이 현재 두로 왕 후람 의 아버지 후람으로서 그가 자기 아들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흠정역 성경은 이 구절에 등장하는 후람은 놋을 비롯한 각종 금속을 잘 다루는 기술자 후람이라고 합니다. 과연 역대기하 2장 13절에 나오는 후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두로 왕의 아버지일까요, 두로 왕이 보내준 놋을 다루는 기술자 후람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구절과 동일한 상황,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열왕기상의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대기하 2장 13-14절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성경 말씀은 열왕기상 7장 13-14절 말씀입니다.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두로에서 히람을 데려왔는데(왕상7:13) 그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으로 놋 대장장이더 라. 그는 놋을 다루는 모든 일에서 지혜와 명철이 충만하며 솜씨가 좋더라. 그가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의 모든 작업을 수행하니라(왕상7:14). 열왕기상 7장 13절은 그가 히람이라고 했고(후람=히람), 이어지는 14절에서 여기서의 히람이라는 사람은 두로 왕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는 과부의 아들이며, 두로 사람 놋대장장이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하 2장 13절에 나오는 후람은 두로 왕의 아버지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여인과 두로 남자 230 바르게 읽는 성경

229 사이에서 태어난 놋 기술자 후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역대기하 2장 13절의 번역도 개역 성경이나 한글킹제임스역처럼 내 아버지 후람의 사람, 내 부친 후람에게 속한 자 처럼 후람을 두로 왕 후람의 아버지 라고 할 것이 아니라 흠정역 성경처럼 후람을 보냈는데, 그는 내 아버지에 게 속했던 자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후람인가, 후람의 아버지인가? 231

230 28.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 솔로몬 왕에게로 와서 주의 집에서 사용하는 기구들을 만든 후람의 어머니가 열왕기상 7장 14절에는 납달리 지파 사람이라고 되어 있고, 역대기하 2장 14절에 는 단의 딸들에 속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후람의 어머니가 속한 지파에 대해서 이처럼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두 말씀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보면서 이는 두 말씀이 서로 불일치하거나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물에 대하여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람의 어머니는 단 사람인가, 납달리 사람인가를 다루기 전에 먼저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기원과 그들 지파의 특징, 위치, 역사 등에 대해 살펴보겠습 니다. 1.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기원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야곱(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30장 6-8절 말씀을 보면 단과 납달리는 모두 야곱이 라헬의 하녀인 빌하를 통해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시고 또 내 목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하녀 빌하가 다시 수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니 라헬이 이르되, 내가 내 언니와 큰 싸움을 싸워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창30:6-8). 단과 납달리는 같은 어머니 빌하에게서 난 형제였기 때문에, 시므온과 레위, 요셉과 베냐민이 그랬듯이 아마 다른 형제들보다 각별히 서로 친밀했을 겁니다. 이들 두 지파는 이집트에서 나온 후 광야 생활을 할 때 항상 같은 편에 진을 쳤으며(민2:25, 29), 가나안에 들어간 후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할 때에도 같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신27:13; 수8:33). 북쪽 편에는 단 진영의 군기가 그들의 군대대로 있을지니라. 단 자손의 대장은 암미삿대

231 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또 납달리 지파라. 납달리 자손의 대장은 에난의 아들 아히라요, (민2:25,29) 이들 곧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설지니라(신27:13). 2.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성향 하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단과 납달리라는 야곱의 두 아들 혹은 이들에게서 나온 두 지파의 성향은 사뭇 달랐나 봅니다. 야곱의 축복 기도에서 단은 공격적인 뱀으로, 납달리는 좋은 말들을 하는 암사슴으로 묘사됩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지파들 가운데 하나로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가의 뱀이요, 통로의 독사로서 말발굽을 물어 말 탄 자가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6-17).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니 그가 좋은 말들을 내는도다(창49:21). 모세의 축복 기도에서도 단은 사자와 같이 강하고 용맹스럽게 될 것을 말하고 있고 납달리에 대해서는 은총으로 만족하고 주의 복이 가득한 존재로 표현됩니다. 단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단은 사자 새끼요, 그가 바산에서 뛰어 나오리로다, 하니라(신33:22). 납달리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오 은총으로 만족하고 주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소유할지로다, 하니라(신33:23). 단의 후손들이 보여주는 거칠고, 과격하고, 호전적인 모습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된 후, 좋은 말들을 내는도다. (창49:21) 라고 하는 납달리의 후손들과는 달리 단 지파의 후예 중 한 사람은 나쁜 말로 주의 이름을 모독하여 저주한 죄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여 저주하므로 그들이 그를 끌고 모세에게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단 지파에 속한 디브리의 딸 슬로밋이더라.)(레24:11) 단 자손이 미가의 집에서 우상을 빼앗아 올 때에 미가와 그 이웃사람들은 과격하고 성질 급한 단 자손 때문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리지 않게 하라. 성난 자들이 네게 달려들므로 네가 네 생명과 네 집안사람들의 생명을 잃게 될까 염려하노라,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 233

232 하고(삿18:25) 사자쯤은 가볍게 찢어 죽이고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을 때려잡은 삼손도 단 지파 출신입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주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더라.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단의 진영에서 주의 영께서 때때로 그를 감동시키기 시작하셨더라(삿13:24-25). 이처럼 단 지파의 특징은 힘, 패기, 용맹스러움 등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납달리 지파는 평상시에는 암사슴처럼 유순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전쟁에 임하면 크게 용맹을 떨쳤습니다. 사사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대장 시스라와 맞서 므깃도에서 싸울 때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습니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게데스납달리에서 불러 그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말씀하시기를, 가서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중에서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나아가라(삿4:6). 스불론과 납달리는 들의 높은 곳에서 죽기까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백성이로다(삿 5:18).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선포하지 말고, 그 대신에 긍정적 사고, 만사형통, 건강과 물질의 축복 등과 같이 부드러운 것을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들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 (사30:10). 그러나 풀어놓은 암사슴처럼 유순하고 온유한 납달리, 좋은 말들을 하는 납달리였지만 그들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을 하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말만 한 것은 아닙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싸울 때 그들은 단호한 입장을 취했고, 진리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이것이 주의 은총을 받은 납달리의 모습 곧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234 바르게 읽는 성경

233 3.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위치 원래 단 지파가 상속 재산을 분배받은 곳은 베냐민 지파의 왼쪽, 블레셋의 위쪽입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욥바, 가드, 에그론 등이 포함된 땅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는 사사 삼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블레셋과 자주 전쟁을 벌였습니다. 단 지파는 영토를 더 넓히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레센(라이스)을 점령하여 그 도시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단 자손의 지경이 그들에게 너무 적게 뻗어나갔으므로 단 자손이 올라가 레셈과 싸워 그것을 빼앗되 칼날로 쳐서 그것을 소유하여 그 안에 거하며 자기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레셈을 단이라 부르니라(수19:47).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들과 그의 제사장을 취한 뒤 라이스에 이르러 평온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고 그 도시를 불로 태우되 이스라엘에게 태어난 자기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도시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나 그 도시의 이름은 처음에 라이스더라(삿18:27,29).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남쪽에도 단 지파의 영토가 있고, 북쪽에도 단이라는 지명을 가진 도시를 중심으로 단 지파의 영토가 있습니다. 이 북쪽에 있는 단 지파의 땅은 납달리와 바로 인접해 있습니다. 두 지파는 원래부터 형제 사이였고, 광야 생활 때에도 바로 옆에서 진 치고 살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할 때에도 같이 있었습니다. 또 납달리는 그야말로 좋은 말들을 하는 유순한 암사슴과 같았기에 바로 옆에 단 지파가 이주해 와서 살아도 충돌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지파들 사이에 지파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한 지파가 다른 지파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일도 나타났는데 단과 납달리 사이의 이런 친밀한 관계 때문에 사실상 두 지파 사이의 구분도 모호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 사라진 단 지파와 은혜를 받은 납달리 성경의 기록 속에서 단 지파는 점점 사라져 갑니다. 사사기 18장 30절 말씀 이후 단이라는 명칭은 지명으로는 남아 있지만 단 지파, 단의 자손과 같은 명칭은 사무엘서, 열왕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역대기상에서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모인 사람들 중에서 단 족속이 등장하고(대상12:35), 다윗 왕 당시에 이스라엘 각 지파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들 명단에 단의 치리자가 등장합니다(대상 27:22).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 235

234 단 족속 중에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이만 팔천육백 명이요,(대상12:35) 단의 치리자는 여로함의 아들 아사르엘이니 이들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통치자였더라 (대상27:22). 그 이후로 성경의 역사서에는 단 지파의 기록이 없습니다. 기록상으로 마지막 단의 후손이라면 지난번에 읽었던 후람의 어머니가 마지막 인물일 겁니다(대하 2:14). 단 지파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데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요인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이 우상숭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 자손들은 라이스를 치러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서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을 빼앗아서 그것들을 섬겼습니다(삿18:14, 18, 30). 단 자손이 그 새긴 형상을 세웠으며 므낫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아들들은 그 땅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날까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니라(삿 18:30). 그리고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왕의 시대에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10개 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 왕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섬겼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중대한 죄였습니다. 이것에 관하여 왕이 의논한 뒤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이 너무 큰일이로다. 오 이스라엘아,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을 보라, 하니라. 그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으므로(왕상12:28-29) 이런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단 지파는 그 명맥이 끊어지고, 다른 지파들 속으로 흡수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12,000명씩 봉인된 자들 144,000명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단 지파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유다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갓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라(계7:4-8). 236 바르게 읽는 성경

235 단 지파는 그 뛰어난 용맹과 지도력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는 자가 될 수 있었지만(창49:16) 우상 숭배의 죄에 빠져 길 가의 뱀, 통로의 독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창49:17). 그들은 자기 길을 달려가는 자들을 물어서 뱀의 독을 주입하여 사람들을 쓰러뜨렸습니다. 단 지파는 뱀의 독과 같은 우상숭배를 전파하여 그 지파는 물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독 시켰고 그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단 지파는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요한계시록의 봉인된 자들의 무리에조차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단의 형제인 납달리는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했으나 나중에는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됩니다. 1) 그러할지라도 그 흑암은 그 땅이 괴로움을 당하던 때의 흑암과 같지 아니하리니 그때에는 그분께서 처음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가볍게 괴롭히시고 나중에 요르단 건너편 바닷길 옆 민족들이 거하는 갈릴리에 있는 그 땅을 더욱 심하게 괴롭히셨느니라. 어둠 속에 다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 곧 그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사9:1-2).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경계의 해안에 있는 가버나움에 와서 거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르단 건너편 바닷길 옆 이방인들의 갈릴리여,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지역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도다, 하였느니라(마4:13-16). 이로써 납달리에 대한 모세의 축복(신33:23)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납달리 땅과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흑암에 있던 자들이 주의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납달리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오 은총으로 만족하고 주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소유할지로다, 하니라(신 33:23). 5. 후람(히람)의 어머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성막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구들을 만들 때, 하나님 께서는 유다 지파의 브살레엘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단 지파의 아홀리압을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1) 개역 성경에는 이사야서 9장 1절의 갈릴리에 대한 기록이 반대로 번역되어 있으니 주의하시 기 바랍니다.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 237

236 또, 보라, 내가 그와 함께 단 지파에 속한 아히사막의 아들 아홀리압을 주었고 지혜로운 마음을 지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였으니(출31:6) 회중의 성막을 만들 때에도, 솔로몬이 주의 집을 건축할 때에도 단의 후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단 지파는 싸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나 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단 지파는 남쪽에 서는 해변 쪽으로 욥바 항을 끼고 있었고, 북쪽에 있는 도시 단은 두로, 시돈, 시리아 등과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교역을 통해서 여러 나라의 예술과 기술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겁니다. 후람의 경우 그렇게 이스라엘과 이민족이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으로 놋 대장장이더 라. 그는 놋을 다루는 모든 일에서 지혜와 명철이 충만하며 솜씨가 좋더라. 그가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의 모든 작업을 수행하니라(왕상7:14). 그는 단의 딸들에 속한 여인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인데 그가 금과 은과 놋과 쇠와 돌과 나무와 자주색과 청색과 고운 아마와 진홍색 실로 솜씨 있게 일을 하며 또 모든 종류의 새기는 것을 새기고 자기가 맡을 모든 양식을 찾아내니 당신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당신의 아버지 내 주 다윗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대하2:14). 열왕기상 7장 14절은 후람의 어머니가 납달리 지파의 과부였다고 하고 역대기 하 2장 14절은 단의 딸들에 속한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두 말씀은 표현 상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서로 상충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대기하 2장 14절에서 후람의 어머니가 단의 딸들에 속한 여인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실제적인 혈통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후람의 어머니의 친정은 단 지파였을 겁니다. 열왕기상 7장 14절에서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과부의 아들 (a widow s son of the tribe of Naphtali)이라고 했는데, 이는 후람의 어머니가 단 지파에 속해 있다가 납달리 지파로 시집을 갔거나(이렇게 가정할 경우 후람은 두로 사람과 재혼 후 낳은 아들이 됨) 혹은 단 자손으로서 납달리 지파에 소속된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납달리 지파에 속한 자로 간주되었다 고 생각합니다. 이 당시는 솔로몬 왕 시대이기 때문에 단 지파가 분명히 12지파 중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10지파를 차지하여 북이스라엘을 세우게 되므로, 적어도 르호보암 238 바르게 읽는 성경

237 왕 때까지는 12지파가 모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시기에 이미 지파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북쪽에 있던 단 지파는 차츰 세력이 약해져 사라져가고 점차적으로 납달리 지파와 통합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실제로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당시에도 유다와 베냐민 간에는 지파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언자 아히야는 자기 옷을 12조각으로 찢어 여로보암에게 그중 10개를 갖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열 지파를 주시고 나머지 두 지파는 남쪽 유다왕국에 주신다는 뜻입니다(왕상11:30-31). 그런데 열왕기상 12장 20-21절을 읽어보면, 20절에서는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고, 21절에서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가 다윗 왕국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여로보암이 돌아왔다는 것을 온 이스라엘이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회중에게로 불러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의 온 집과 베냐민 지파를 모았는데 선정된 자들 곧 용사들이 십팔만 명이더라. 이들이 이스라엘의 집과 싸워 왕국을 다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가져오려 하였으나(왕상12:20,21) 이는 이 당시 유다 지파라고 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함께 아우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이와 같이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관계도 아마 그 당시에는 납달리라고 하면, 납달리와 그 옆에 있는 단을 함께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후람의 어머니도 혈통 상으로는 단 족속 출신 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열왕기상 7장 14절은 납달리 지파라고 하고, 역대기하 2장 14절은 단의 딸들에 속한 자라고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는 사무엘기나 열왕기가 사실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면, 역대기는 왕조 사관에 의해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대기는 다윗 왕국의 정통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지는 족보 이야기로 시작하며, 여로보암 이야기가 짧게 언급된 것 외에는 북이스라엘 왕국 이야기는 빼고, 남유다 왕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 사건(삼하11장)이나 압살롬의 반역(삼하 15-19장) 등은 역대기에서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사무엘기나 열왕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 지파의 이야기가 역대기에는 단 지파와 납달리 지파 239

238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대상12:35; 27:22; 대하2:14). 역대기의 입장에서는 단 지파가 비록 세력이 미약해졌다고 하지만 분명히 이스라엘 12지파를 구성하는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배제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열왕기상과 역대기하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열왕기상에서는 후람의 어머니가 현재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납달리 지파에 속해 있다고 말하지만, 역대기하에서는 그의 본래 출신이 이스라 엘의 12 지파 중 하나인 단 지파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상 7장 14절과 역대기하 2장 14절은 둘 다 맞는 내용이며 동일한 대상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일부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한 신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단 지파가 있는데 그 단 지파의 절반 정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단군 조선의 설화에 등장하였다. 라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연대기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성경 연대기표에 의하면, 노아 홍수는 BC 2348년경으로 추정되고 역사학자들 은 단군 조선의 건국을 BC 2333년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단군 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셈의 후손들입니다. 사람들은 노아 홍수 이후에 바벨탑을 만들다가 주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자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는데 셈의 후손 중 동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시베리아,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BC 1451년 경입니다. 단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것은 이 시기 이후인데 그때에는 단군 조선이 세워진 지 벌써 800~900년이 지난 후가 됩니다. 그러므로 단 자손들이 단군 조선을 세웠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의 단(Dan) 지파와 단군의 단( 檀 )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단 지파의 단과 단군의 단이 같다고 생각하고 성경에 없는 저런 주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에 도착한 신 광야(wilderness of Sin)를 죄(sin)의 광야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40 바르게 읽는 성경

239 29.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인가, 아내인가? 개역: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으로 아내를 삼았으니 마할랏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라(대하11:18) 한글킹: 르호보암이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으니, 그녀는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이며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더라. NIV: Rehoboam married Mahalath, who was the daughter of David s son Jerimoth and of Abihail, the daughter of Jesse s son Eliab. 흠정역: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을 취해 아내로 삼았으며 또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을 아내로 삼았더니 KJV: And Rehoboam took him Mahalath the daughter of Jerimoth the son of David to wife, and Abihail the daughter of Eliab the son of Jesse; WEB: And Rehoboam took to himself Mahalath the daughter of Jerimoth the son of David for a wife, {and} Abihail the daughter of Eliab the son of Jesse; 역대기하 11장 18절에는 르호보암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 다. 그런데 번역본들에 따라서 르호보암의 아내가 각기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 다. 영어 KJV, Webster역, 흠정역 성경은 르호보암이 마할랏과 아비하일을 아내로 삼았다고 번역하였는데, 나머지 NIV, NASB, RSV, NKJV 등의 영어 역본들과 개역, 개역개정, 공동번역, 새번역, 바른성경, 가톨릭, 현대인의 성경 등 그리고 한글킹제임스역까지도 르호보암은 아비하일의 딸인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성경, 한글킹제임스역, NIV 등에서 주장하는 가계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가계도에 따르면 르호보암은 여리못과 아비하일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했고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가 됩니다.

240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라는 주장: 개역 성경, NIV 등> 반면 KJV, 흠정역, 웹스터역 등에서 주장하는 가계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아내라는 주장: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등> 킹제임스 성경은 르호보암이 다윗의 손녀인 마할랏을 아내로 삼고 또한 다윗의 조카이자 자기에게는 친척 아주머니뻘 되는 아비하일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다윗 왕가의 족보에 대해 조사하고자 성경 구절을 이리저리 다 찾아봤지 만, 역대기하 11장 18절과 관련된 더 이상의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맞는다는 믿음 하에 마할랏과 아비하일은 모두 르호보암의 아내 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여기저기서 작은 단서들을 모아놓고 하나씩 분석하여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 아닙니 다. 그 반대로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에 대한 242 바르게 읽는 성경

241 믿음에 기초하여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기록들을 이해하고 해석합니 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이 옳다는 믿음 하에 이것이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 로 NIV에는 역대기하 11장 18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Rehoboam married Mahalath, who was the daughter of David s son Jerimoth and of Abihail, the daughter of Jesse s son Eliab(대하11:18, NIV). NIV에는 역대기하 11장 18절에서 처음에 나오는 the daughter 이하 부분은, 관계대명사 who 의 계속적 용법으로 was 의 주격 보어가 됩니다. 그리고 of David s son Jerimoth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와 of Abihail (아비하일의)은 모두 daughter 를 수식합니다. the daughter of Jesse s son Eliab 은 Abihail 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르호보암은 마할랏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 마할랏은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이요, 이새의 아들 엘리암의 딸인 아비하일 의 딸이다. 라고 번역됩니다. 반면 KJV에서는 of Abihail 이 아니라 접속사 and 다음에 바로 Abihail 이 옵니다. And Rehoboam took him Mahalath the daughter of Jerimoth the son of David to wife, and Abihail the daughter of Eliab the son of Jesse; (대하 11:18, KJV) 즉 Mahalath the daughter of Jerimoth the son of David 와 Abihail the daughter of Eliab the son of Jesse 가 둘 다 took 의 목적어가 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 과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 을 아내로 삼았다. 라고 번역됩니다. 위 번역들을 비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충실하게 그대로 번역한 반면, 한글킹제임스역은 개역 성경이나 NIV의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면 르호보암이 아비하일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가 아니라 아내입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누구의 아내라고 하면서 어떤 여자를 소개할 때 NIV와 같이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따로 떼어서 설명하는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르호보암이 촌수로는 아주머니뻘 되는 아비하일과 결혼했다고 하니까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손위 친척 여성과 결혼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도 자기의 고모인 요게벳과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인가, 아내인가? 243

242 결혼했습니다. 아므람이 자기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취하매 그녀가 그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으니라. 아므람이 누린 삶의 햇수는 백삼십칠 년이었더라(출6:20). 아비하일의 아버지는 엘리압인데 그는 다윗의 제일 큰 형입니다. 만약 엘리압 이 늦둥이로 아비하일이라는 딸을 낳았다면 르호보암과 아비하일의 나이 차이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새는 자기의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심마와 넷째 느다네엘과 다섯째 랏대와 여섯째 오셈과 일곱째 다윗을 낳았으며(대상2:13-15) 그런데 성경은 왜 이처럼 귀한 지면을 할애해서 르호보암의 결혼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르호보암의 아내는 누구네 집 딸이다. 라는 수준이 아니라 증조부까지 거론하면서 말입니다. 왜 르호보암은 다윗의 가문에도 손을 뻗고 엘리압의 가문에도 손을 내밀고 있을까요? 역대기하 11장 21절 말씀을 살펴볼 때, 저는 르호보암이 결혼을 통하여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르호보암의 아버지 솔로몬은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암몬 족속의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파라오의 딸을 포함하여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과 에돔 족속과 시돈 사람들과 헷 족속의 여인들이라(왕상11:1). 솔로몬은 여자들 중에서도 특히 암몬 여인 나아마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르호보암을 낳았습니다. 르호보암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다윗의 도시에 묻히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암몬 여인 나아마더라. 그의 아들 아비얌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니라(왕상14:31). 나아마라는 이름은 이미 창세기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나아마는 희락, 사랑스 러움 을 의미하는 이름이며 가인의 후손 중 두발가인의 누이 이름입니다. 실라도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놋과 쇠로 된 것을 만드는 자들을 가르치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더라(창4:22). 하여간 암몬 여인 나아마는 솔로몬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웠 나 봅니다. 솔로몬이 다른 아들들을 다 제쳐두고 어리석은 르호보암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보면 그녀에 대한 총애가 지극했었나 봅니다. 솔로몬의 마음을 244 바르게 읽는 성경

243 사로잡은 예쁜 엄마 덕분에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르호보암은 항시 불안했을 겁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을 다스릴만한 지혜와 판단력을 갖춘 것도 아니고(왕 상12:8), 엄마는 암몬 여인이요 외가는 암몬 족속이니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고(왕 상14:31), 왕궁 내에는 다윗 솔로몬 시대부터 나라를 다스리며 섬겨온 노장파 신하들과 새로 등용되기 시작한 소장파 신하들의 알력이 있지만(왕상12:7-11), 그로서는 이를 중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 다윗 왕조 시대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이나 군대 대장들은 왕의 친인척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비새, 요압, 아사헬, 아마사와 같은 유명한 군대 대장들의 어머니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었는데 그 여인들은 다윗과 남매지간이었습니다. 즉 병권을 장악한 이 군대 대장들은 다윗의 조카들이었습니 다. 또한 다윗의 아들들은 왕을 모시는 요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누이들은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더라. 스루야의 아들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 헬 세 사람이요,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는데 아마사의 아버지는 이스마엘 족속 예델이었더라(대상2:16-17).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족속과 블렛 족속을 다스리는 자가 되고 다윗의 아들들은 왕을 모시는 우두머리가 되니라(대상18:17). 르호보암 왕 시대에도 아마 왕의 친인척들이 중요한 관직들을 차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르호보암이 왕권을 강화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왕족들과 의 결혼을 통해서 자기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삼는 한편 이새 가문의 맏아들인 엘리압이 낳은 딸 아비하일 - 족보상 솔로몬과 동급 서열 - 과 결혼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이 아내로 취한 수많은 여인들도 자식들을 낳았겠지만 솔로몬 의 사촌 누이인 아비하일이라면 그들에게는 서열상 웃어른이 되기 때문에 아비하 일을 아내로 둔 르호보암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을 겁니다. 르호보암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엘리압 가문에서는 자기 딸이 왕비가 된다고 하니 좋아했을 테고, 암몬 족속 여인의 아들로서 이렇다 할 정치적 지지 기반이 없는 르호보암으로서는 이렇게 결혼을 통해서 자기와 동맹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았을 겁니다. 솔로몬보다는 조금 숫자가 적긴 하지만 르호보암 역시 많은 아내와 첩을 두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아내가 18명, 첩이 60명이었다고 합니다. 르호보암이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자기의 모든 아내와 첩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취하여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더라.)(대하 11:21) 아비하일은 르호보암의 장모인가, 아내인가? 245

244 이처럼 르호보암이 다윗의 손녀인 마할랏과도 결혼하고,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 가문에도 손을 내밀어 아주머니뻘 되는 아비하일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은 아마도 암몬 여인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246 바르게 읽는 성경

245 30. 마온 사람인가, 암몬 족속 외의 사람인가? 개역: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대하 20:1) 흠정역: 이 일 뒤에 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암몬 족속 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며 싸우려 하므로 KJV: It came to pass after this also, that the children of Moab, and the children of Ammon, and with them other beside the Ammonites, came against Jehoshaphat to battle. 역대기하 20장 1절에서 개역 성경은 모압과 암몬 자손, 마온 사람들이 함께 여호사밧을 치러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마온 사람들이 아니라 암몬 족속 외에 다른 사람들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6 우선 앞 쪽의 지도를 잘 보고, 마온, 암몬 자손의 랍바 (랍바스), 엔게디 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마온 이라는 지명은 남왕국 유다의 헤브론 산지에 헤브론, 십, 갈멜 등과 함께 있습니다. 여호수아기에도 이 지명들은 나란히 등장합니다. 마온과 갈멜과 십과 윳다와(수15:55) 이곳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 지내던 곳이기도 하며(삼상23:25) 다윗에게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다윗을 박대한 미련한 사람 나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삼상25:2).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가므로 그들이 다윗에게 고하매 그런 까닭에 그가 바위로 내려가 마온 광야에 머물렀더니 사울이 그것을 듣고는 마온 광야에서 다윗을 추격하니라(삼상23:25). 마온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소유는 갈멜에 있었으며 그 사람이 심히 창대하여 양 삼천 마리와 염소 천 마리를 소유하였더라. 그가 갈멜에서 자기 양들의 털을 깎고 있었는데(삼상25:2) 이 마온 지역에 원래부터 마온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마온 족속이 있었는데 그들과 전쟁을 벌여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을 여기에 살게 하면서 그 땅 이름을 마온이라고 하고, 그들을 마온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 개역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여호사밧 왕 당시에 이스라엘을 침략해 온 그들이 마온 사람이라면 역대기하 20장 1-2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 역대기하 20장 1절에 나오는 모압, 암몬 사람은 함께 와서 이스라엘을 칠 수가 있지만, 마온 사람은 그들과 함께 올 수가 없습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암몬과 모압은 요르단 강 동편에 있고, 마온은 요르단강 서편 지역, 이스라엘 남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역대기하 20장 2절의 연합군 중에서 모압, 암몬 사람은 바다 건너 시리아 이편에서부터 쳐들어와서 사해 왼쪽의 엔게디까지 진군을 할 수 있지만, 마온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와서 그들 연합군과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바다 건너편에서 와서 엔게디에 이르는 것은 모압, 암몬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만 마온 사람들과 엔게디 사이에는 건너야 할 바다가 없습니다. 역대기하 20장에서 이스라엘을 침략한 사람들은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이 248 바르게 읽는 성경

247 아닙니다. 역대기하 20장 22-23절은 암몬, 모압과 함께 침략해 온 족속이 세일 산 자손 이라고 합니다. 세일 산 자손 즉 세일 산 거주민이라고 하면 성경에서는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을 말합니다. 그들이 노래하고 찬양을 시작할 때에 주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과 모압과 세일 산의 자손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패하였더라.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의 거주민들을 쳐서 철저히 죽여 멸하고 또 세일의 거주민들을 멸하여 끝을 낸 뒤에는 그들이 각각 다른 사람을 멸하는 것을 도왔더라(대하20:22-23). 그러므로 역대기하 20장 1절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 이들은 모두 롯의 후손임 - 암몬 자손 외에 다른 사람들 과 함께 왔다고 번역한 흠정역 성경이 맞습니다. 개역 성경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니까 그런 잘못을 변호하기 위해서 개역 성경을 기반으로 한 성경사전이나 참고서적 등에서는 마온은 곧 에돔을 의미하 는 것이므로 마온이라고 해도 된다. 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사사기 10장 12절 말씀에 걸리게 됩니다.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족속과 마온 족속이 너희를 학대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 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건져 내었거늘(삿10:12) 사사기 10장 12절은 마온 족속이 이스라엘을 학대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온 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에돔 족속의 땅을 피해서 지나갔 고, 사사들의 시대에도 에돔 족속으로부터 학대를 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온 족속을 에돔 족속과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정교하고 성경 말씀 자체에 방대한 단어사전, 자료사전 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두 군데에서 내용을 변개하거나 엉뚱하게 해석을 했다가는 다른 성경 구절들이 그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서 지적을 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 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마온 사람인가, 암몬 족속 외의 사람인가? 249

248 31. 죄의 자백이 없는 화평 헌물 개역: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 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대하30:22) 한글킹: 히스키야는 주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모든 레위 사람들에게 위로하여 말하였 더라. 그들이 칠 일의 명절 동안 먹고 화목제를 드리며 그들 조상의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더라. 흠정역: 히스기야는 주에 관하여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는 말을 하였더라. 그들이 명절 내내 이레 동안 먹으며 화평 헌물을 드리고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께 자백하는 말을 하였더라. KJV: And Hezekiah spake comfortably unto all the Levites that taught the good knowledge of the LORD: and they did eat throughout the feast seven days, offering peace offerings, and making confession to the LORD God of their fathers. 역대기하 30장에서는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주께서 명하신 규례이기도 하지만, 히스기야는 이 유월절 절기를 지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주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 우상숭배 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파발꾼들이 왕과 그의 통치자들에게서 편지를 받고 왕의 명령에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주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의 남은 자들 곧 아시리아 왕들의 손에서 피한 자들에게 돌아오시리라(대하30:6).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의 죄에 빠져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한 왕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레위

249 사람들이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는 이번 집회에서 레위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들의 잘못을 주께 자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지는 않고, 절기 내내 온통 먹고, 마시고, 뛰어놀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활동만 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 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화평 헌물을 바치고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어놀았습니다(출32:6). 역대기하 30장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레위 사람들도 주께 화평 헌물을 드리면서 먹고 마시고 뛰어 놀았을까요? 다음 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 헌물을 드리고 화평 헌물을 가져오며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32:6). 그들 레위사람들은 자기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 화평 헌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역대기하 30장 22절 말씀은 그들 레위 사람들의 임무가 주에 관하여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들 이 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번역본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능숙하게 잘 하는 사람들 이라고 하였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히 이들이 주에 관하여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하 35장 3절에서도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레위 사람들의 역할이 주님께 헌물을 드리며 성전에서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진리의 바른 교훈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주에 관하여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는 말을 하였더라. 그들이 명절 내내 이레 동안 먹으며 화평 헌물을 드리고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께 자백하는 말을 하였더라(대하30:22). 또 주께 거룩한 자들 곧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집에 두라. 그것이 너희 어깨의 짐이 되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제 주 너희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지니라(대 하35:3). 하지만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 대한 선한 지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많은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을 잡으면서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하였습니다(대하30:15). 죄의 자백이 없는 화평 헌물 251

250 그들은 지금까지 유월절 준비를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평상시에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해왔을 텐데 왜 이번 집회를 준비하면서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요? 그때에 둘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으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부끄러워하 며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번제 헌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이르러(대하30:15) 이는 그들이 그 동안 백성들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가르치 는 일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그들이 주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히스기야 왕이 친히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주에 관하여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는 말을 하였더라. 그들이 명절 내내 이레 동안 먹으며 화평 헌물을 드리고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께 자백하는 말을 하였더라(대하30:22).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하나님께 대한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한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 화평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 화평 헌물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인들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헌물입니다(요 일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요일 4:10). 사사기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며 화평 헌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화평 헌물을 드릴 때에는 자기들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돌이키는 과정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백성이 올라가서 하나님의 집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주 앞에 앉아 그 날 저녁때까지 금식하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주 앞에 드리며(삿 20:26) 그런데 이처럼 주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레위 사람들이 화평 헌물만 드리고, 절기가 계속되는 동안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활동만 하고 끝냈을까요?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히 레위 사람들이 주께 화평 헌물을 드리며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께 자백(confession)하였다고 합니다. 252 바르게 읽는 성경

251 And Hezekiah spake comfortably unto all the Levites that taught the good knowledge of the LORD: and they did eat throughout the feast seven days, offering peace offerings, and making confession to the LORD God of their fathers(대하30:22).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죄를 주 앞에 자백할 때, 주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 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9). 하지만 개역 성경이나 NIV를 비롯한 수많은 번역본들, 심지어 한글킹제임스역 조차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분명히 confession 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이 단어를 무시하고, 개역 성경이나 NIV의 번역을 좇아서 이것을 감사 라고 번역했 습니다. confession 은 분명히 자백 이지 감사 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 다. 한글킹제임스역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님께서 보존해 주신 confession 이라는 단어를 자백이라고 있는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오히려 개역 성경의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한글킹제임스역의 번역자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거나 개역 성경을 참고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히스키야는 주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모든 레위 사람들에게 위로하여 말하였더라. 그들이 칠 일의 명절 동안 먹고 화목제를 드리며 그들 조상의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더라(대하30:22, 한글킹). 다른 역본들과는 달리 킹제임스 성경은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백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기 죄를 자백했다고 믿습니다. 또한 성경 본문 자체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역대기하 30장에 나오는 주께 대한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 앞에 화평 헌물을 드렸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주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못한 죄에 대해 주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여 화평 헌물을 드렸습니다. 화평 헌물은 죄인이 하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헌물이므로 마땅히 레위 사람들은 주께 자기들의 잘못과 죄들을 자백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하 30장 22절 말씀은 흠정역 성경과 같이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 께 자백하는 말을 하였다. 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죄의 자백이 없는 화평 헌물 253

252 32. 호새인가, 선견자인가? 개역: 또 그 기도와 그 기도를 들으신 것과 그 모든 죄와 건과와 겸비하기 전에 산당을 세운 곳과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세운 곳들이 다 호새의 사기에 기록되니라(대하 33:19) NASB: His prayer also and [how God] was entreated by him, and all his sin, his unfaithfulness, and the sites on which he built high places and erected the Asherim and the carved images, before he humbled himself, behold, they are written in the records of the Hozai. 흠정역: 또 그의 기도와 하나님께서 그의 간청하는 말을 받으신 것과 그의 모든 죄와 범법과 그가 자신을 낮추기 전에 산당들을 짓고 작은 숲들과 형상들을 세운 곳들이 선견자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느니라. KJV: His prayer also, and how God was intreated of him, and all his sins, and his trespass, and the places wherein he built high places, and set up groves and graven images, before he was humbled: behold, they are written among the sayings of the seers. 역대기하 33장 19절 말씀은 므낫세의 행적에 대한 기록 문헌에 대한 설명입니 다. 킹제임스 성경은 므낫세의 행적이 선견자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고 번역하였고, 개역, 개역개정, 새번역, 우리말, 쉬운성경, NASB, NKJV 등에서는 호새의 사기, 호새의 역사책(the records of the Hozai)에 기록되었다. 고 번역하 였습니다. 이 문제는 호제 라는 히브리어를 고유명사로 간주하여 사람 이름으로 번역할 것인가, 본래의 의미대로 선견자들 (seers)이라고 번역할 것인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특히 역대기에서 호제 (스트롱코드 2374)라는 단어가 어떤 용례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밑줄 친 부분이 호제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입니다. 주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대상21:9)

253 이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들에 관한 왕의 선견자 헤만의 아들들이며 뿔을 들었더라. 하나님께서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대상25:5). 보라, 이제 다윗 왕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견자(로에, 7203) 사무엘의 책과 대언자(나비, 5030) 나단의 책과 선견자(호제, 2374) 갓의 책에 기록되어 있되(대상 29:29) 이제 솔로몬의 남은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언자 나단의 책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대언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향한 선견자 잇도의 환상 계시들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대하9:29) 이제 르호보암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언자 스마야의 책과 선견자 잇도가 만든 계보에 관한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계속해서 전쟁이 있었더라(대하12:15).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맞으러 나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돕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주 앞으로부터 진노가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왕이 레위 사람들을 주의 집에 두어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대언자 나단의 명령에 따라 심벌즈와 비파와 하프를 잡게 하였으니 주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하여 이같이 명령하셨더라(대하29:25). 또 히스기야 왕과 통치자들이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말들로 노래하여 주를 찬양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이 노래로 찬양하고 머리를 숙여 경배하니라 (대하29:30). 보라, 이제 므낫세의 남은 행적과 그가 자기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선견자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전한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대하33:18) 또 그의 기도와 하나님께서 그의 간청하는 말을 받으신 것과 그의 모든 죄와 범법과 그가 자신을 낮추기 전에 산당들을 짓고 작은 숲들과 형상들을 세운 곳들이 선견자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느니라(대하33:19). 아삽의 아들들로 노래하는 자들은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왕의 선견자 여두둔의 명령에 따라 자기들의 처소에 있었고 문지기들은 모든 문에서 섬겼더라. 그들은 자기들의 섬기는 일에서 떠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였기 때문이더라(대하35:15).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려면, 다윗의 호새 갓, 왕의 호새 헤만, 호새 갓의 책, 호새 잇도의 환상 계시, 호새 잇도가 만든 계보, 하나니의 아들 호새 예후, 호새인가, 선견자인가? 255

254 왕의 호새 갓, 다윗의 호새 아삽, 호새가 전한 말씀들, 왕의 호새 여두둔 등과 같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호제 를 고유명사로 읽으면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역대기의 기록자가 호제 라는 단어를 고유명사로서 특정한 사람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선견자를 나타내는 일반명사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제가 여러 선견자들의 이름 앞뒤에 붙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이는 일반명사로서 선견자(seer)를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습 니다. 만약 호제가 특정 인물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라면, 이 호제라는 사람은 다윗 왕 때부터 므낫세 왕 시절까지 죽지도 않고 수백 년 동안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은 역대기상 29장 29절에서 선견자(로에, 7203) 사무엘과 선견자(호제, 2374) 갓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모두 seer 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두 단어가 의미 차이가 없으며, 둘 다 일반명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사무엘과 갓이 각기 다른 신분이었거나 호제가 고유명사였다 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이를 번역할 때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했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역대기하 33장 19절의 바로 앞에 나오는 18절 말씀입니다. 보라, 이제 므낫세의 남은 행적과 그가 자기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선견자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전한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 그의 기도와 하나님께서 그의 간청하는 말을 받으신 것과 그의 모든 죄와 범법과 그가 자신을 낮추기 전에 산당들을 짓고 작은 숲들과 형상들을 세운 곳들이 선견자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느니라(대하33:18-19). 위의 두 구절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또 (also)라는 접속어로 연결되어 있습니 다. 그런데 18절의 선견자라는 단어와 19절의 선견자(개역 성경에서는 호새)라 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같은 단어(호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호제들이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전한 말씀은 이스라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한 그의 기도와 기도 응답과 그의 죄와 범법과 우상들을 세운 곳은 호제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라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읽어 봐도 첫째 호제는 선견자로 둘째 호제는 사람 이름 호새로 번역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구절은 선견자들이 므낫세 왕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에(18절), 므낫세가 기도한 내용과 그 기도가 응답된 것과 그의 죄와 우상을 세운 곳들이 선견자들의 말씀에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선견자들이 므낫세 왕에게 전한 256 바르게 읽는 성경

255 말씀이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한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선견자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고 번역해야 문맥이 자연스럽습니다. 선견자들이 전한 말씀과 그에 대한 므낫세의 반응은 선견자들의 글에 기록되어야지, 왜 호새의 역사책에 기록되겠습니까? 개역 성경 등이 선견자를 의미하는 호제를 고유명사로 간주하여 음역한 곳은 딱 이 한 구절 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 구절에 나오는 호제를 고유명사로 번역하여 호새의 사기라고 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제시하거나 혹은 호새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역사책을 증거 자료로 제시하면서 그 책 가운데 므낫세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다음 성경 말씀들을 통해 주의 대언자들은 자기가 왕에게 대언한 내용들을 책에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이제 다윗 왕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견자 사무엘의 책과 대언자 나단의 책과 선견자 갓의 책에 기록되어 있되(대상29:29) 이제 솔로몬의 남은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언자 나단의 책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대언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향한 선견자 잇도의 환상 계시들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대하9:29; 12:15 등) 다윗 왕의 행적은 사무엘의 책, 나단의 책, 갓의 책에 기록되어 있고, 솔로몬 왕의 행적은 나단의 책, 아히야의 대언과 잇도의 환상계시들에 기록되어 있고, 르호보암 왕의 행적은 스마야의 책과 잇도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므낫세 왕의 행적 역시 므낫세 왕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던 당시 선견자들 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하 33장 19절은 킹제임스 성경과 같이 므낫세의 행적이 선견자들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호새인가, 선견자인가? 257

256 33.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개역: 세초에 느브갓네살이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기구도 함께 가져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을 삼았더라 (대하36:10) 흠정역: 그 해가 다 지나갔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주의 집의 좋은 기구들과 함께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시드기야를 유다와 예루살렘 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더라. KJV: And when the year was expired, king Nebuchadnezzar sent, and brought him to Babylon, with the goodly vessels of the house of the LORD, and made Zedekiah his brother king over Judah and Jerusalem. 역대기하 36장 10절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시드기야를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 다. 개역 성경에는 시드기야를 여호야긴의 아자비(숙부)라고 기록하고 있고, 킹제임스 성경은 그의 형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역대기상 3장에 나오는 족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과 셋째 시드기야와 넷째 살룸이요,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여고니야와 그의 아들 시드기야더라(대상3:15-16). 요시야에게는 요하난,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 이라는 아들들이 있었고 그중 여호야김에게서 여고니야, 시드기야 라는 아들들이 태어났습니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죽은 뒤 백성은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합니다(대하 36:1; 왕하23:30).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대하36:1)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살룸이라고 불립니다(렘22:11). 두 구절 모두 요시야의 아들로서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1) 이 글에는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도 있고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 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257 된 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여호아하스 = 살룸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기상 3장 15절의 족보에 보면, 그는 요시야의 넷째 아들이었습 니다. 그때에 그 땅의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삼으니라(대하36:1). 주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자기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통치하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해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다시는 거기로 돌아오지 못하고(렘22:11) 그런데 이집트 왕 파라오느고가 여호아하스(살룸)를 폐위시키고, 엘리아김(여 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집트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폐위시키고 또 그 땅에 형벌을 내려 은 백 달란트와 금 일 달란트를 내게 하였으며 또 이집트 왕이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릴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였더라. 느고가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를 취해 이집트로 잡아갔더라(대하36:3-4). 또 파라오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는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잡아갔더니 그가 이집트로 가서 거기서 죽으니라(왕하23:34). 여호야김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왕으로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 왔을 때 3년 동안 바빌론 왕을 섬기다가 그 뒤에 바빌론 왕을 배신합니다(왕하 24:1). 그러잖아도 이집트 왕이 세운 친 이집트파 여호야김이 마음에 걸렸던 느부갓네살은 그를 족쇄로 결박해서 바빌론으로 잡아갑니다(대하36:6). 여호야김 시대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 동안 그의 종이 되었다가 그 뒤에 돌이켜 그를 배반하였더니(왕하24:1)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를 치려고 올라와서 족쇄로 그를 결박하여 바빌론으로 잡아가고(대하36:6) 그 뒤에는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여호야긴은 성경에서 여고니야, 고니야로도 불립니다. 보라, 여호야김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가증한 일들과 그에게 있던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느니라.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니 라(대하36:8).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역대기하 36장 10절에는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을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259

258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를 대신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 다. 그 해가 다 지나갔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주의 집의 좋은 기구들과 함께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시드기야를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더라(대하36:10). 다시 한 번 위의 역대기상 3장 15-16절을 보면, 시드기야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 시드기야로서 여호야김의 형제요 여호야긴의 숙부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여호야김의 아들로서 여고니야(여호야긴)의 형제입니다. 바빌론 왕이 여호야긴을 대신해서 왕으로 세운 시드기야는 전자, 즉 요시야의 셋째 아들이요, 여호야김의 형제요, 여호야긴 의 숙부가 되는 시드기야입니다. 여호야긴의 형제 시드기야가 아닙니다. 바빌론 왕이 또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더라(왕하24:17).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 왕이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는데 그는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유다 땅에서 왕으로 삼은 자더라(렘37:1). 열왕기하 24장 17절은 이 시드기야(맛다니야)가 여호야긴의 숙부라고 했고, 예레미야서 37장 1절은 그를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봐도 여기서의 이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형제가 아니라 숙부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열왕기하 24장 17절 말씀과 역사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이 시드기야를 그의 형제 라고 기록한 킹제임스 성경의 역대기하 36장 10절은 틀린 것일까요? 바빌론 왕이 또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더라(왕하24:17). 그 해가 다 지나갔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주의 집의 좋은 기구들과 함께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시드기야를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더라(대하36:10). 혹시 정말로 여호야긴의 형제인 시드기야가 왕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열왕기하 24장 17절은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집트 왕이나 바빌론 왕이 유다의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던 시절입니 다. 거의 망해 가는 나라의 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겠지만 이 강대국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누군가를 왕으로 추대하거나 왕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없었을 겁니다. 그랬다가는 당장에 반란자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260 바르게 읽는 성경

259 일부 학자들은 히브리어의 형제라는 말 속에는 친척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이것을 친척이라고 번역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충 쉽게 넘어가려고 합니다. 쉬운성경이 그런 번역을 채택했습니다. 봄에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신하들을 보내어 여호야긴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의 신하들은 여호야긴을 사로잡아 갔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값진 보물들을 바빌론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런 뒤에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친척 시드기야를 유다 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대하36:10, 쉬운성경).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처럼 원문 그대로 형제라고 번역하 는 것이 더 좋으며 주께서 형제라는 단어를 보존해 주신 만큼 그것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드기야를 숙부가 아닌 형제라고 번역한다 고 해서 성경 내용이 잘못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역대기에서는 말입니다. 역대기는 사실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역사책이 아니라 다윗 왕국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다윗 왕가의 계보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에서 역대기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 왕가의 계보가 나오는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우리는 부자지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계보를 이어가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마1:11). And Josias begat Jechonias and his brethren, about the time they were carried away to Babylon: 원래 역사적 사실대로 서술하자면, 위 계보는 요시야 - 여호야김 - 여고니야 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 왕 파라오느고가 세운(대하36:4; 왕하23:34) 꼭두각시 왕 여호야김을 다윗 왕가를 계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메시야 계보에서는 삭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빠지고 대신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니야가 들어가 있습니다. 요시야는 여고니야의 할아버지이 며 남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bear)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남자인 할아버 지 요시야가 여고니야를 낳았다(begat)고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bear 는 여자가 아이를 출산하는 것을 말하며, beget 은 아버지가 자식을 보다(얻다), 부자관계가 형성되다. 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요시야의 아들이 아닌 손자 여고니 야가 할아버지인 요시야와의 관계가 연결되는 것을 낳았다 (begat)라고 합니다. 유다에게는 원래 엘, 오난, 셀라라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엘과 오난이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261

260 죽자, 유다는 셀라까지 죽을까봐 막내아들 셀라를 며느리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 니다(창38). 씨를 이어가기 위해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를 속이고 그를 들어오게 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대상2:3-4). 다말이 낳은 베레스는 유다의 셋째 아들인 셀라에게 있어서 촌수가 어떻게 될까요? 형수가 낳은 아들이니 조카일까요, 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났으니 늦둥이 동생일까요? 유다와 다말은 합법적인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와 세라는 사생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생아: 법률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버지의 인지를 얻으면 서자가 된다. 사생자 사자. 만약 유다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면서 잡아떼고 내버리면 그 아이들은 사생아 가 됩니다. 그러나 유다가 그들을 아들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는 유다의 아들들이 됩니다. 이렇게 유다가 베레스와 세라를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부자 관계를 맺는 것도 beget 입니다. 역대기상 2장 3-4절에는 유다의 아들들이 모두 다섯이라고 했는데(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3명 + 며느리에게서 얻은 아들 2명) 이는 유다가 그 두 아이를 자기 아들들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아들들은 엘과 오난과 셀라인데 이 세 사람은 수아의 딸 곧 가나안 족속 여인이 유다에게 낳은 자들이더라. 유다의 맏아들 엘은 주의 눈앞에서 악하므로 그분께 서 그를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베레스와 세라를 유다에게 낳았더라. 유다의 아들들은 모두 다섯이더라(대상2:3-4).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begat)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1:3) 다른 예를 한 가지 더 들어보겠습니다. 야곱의 열한째 아들인 요셉에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들이며 그들에게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등과 같은 삼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를 자기 것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이집트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이집트 땅에서 네게 태어난 네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제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그들이 내 것이 되리라. 그들 다음에 네가 낳을 자들이 네 것이 되며 또 자기 형들의 상속 재산 가운데서 자기 형들의 이름을 따라 불리리라(창48:5-6).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들이었지만, 야곱이 그들을 이스라엘의 262 바르게 읽는 성경

261 아들들과 같이 인정함에 따라 자기들의 숙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도 그들은 숙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지파의 상속재산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야곱과 에브라임, 므낫세의 관계도 실제로는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지만 법률적으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이스라 엘의 아들 신분이 되는 겁니다. 역대기하 36장 10절의 기록도 이와 같이 혈통상의 촌수 관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 법적인 왕가의 계보를 다룬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야긴에게 있어서 시드기야는 자기 아버지 여호야김의 동생으로서 자기의 숙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여호야긴의 숙부 시드기야가 누구의 왕위를 계승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여고니야였 는데(여호야김 - 여호야긴), 여호야긴(여고니야, 고니야)은 주 앞에서 악을 행하 여 주께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통해 그를 폐위시킵니다. 여호야긴이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였더라(왕 하24:9). 그렇다면 폐위된 여호야긴의 뒤는 누가 계승하였을까요? 그 뒤에 왕이 된 시드기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다음 차례로 왕이 되었을 뿐이지 여호야긴을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숙부인 시드기야는 조카인 여호야긴 밑에 아들로 들어간 적도 없고, 그로부터 법적으로 왕위 계승자로서의 관계를 맺은 적도 없습니다.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서 다윗의 왕좌에 오른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여호야긴(=여고니야, 고니야)의 뒤를 이어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을 자가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렘22:30). 이 사람 고니야는 멸시받으며 부서진 우상이냐? 그는 아무 기쁨도 없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들이 쫓겨나되 곧 그와 그의 씨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쫓겨났느 냐? 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주의 말을 들을지어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렘 22:28-30). 하나님께서 고니야(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다윗의 왕좌에 앉을 자는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여호야긴 다음에 누가 왕이 되건 간에 그는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전대 왕이었던 자기 형 여호야김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야김 - 시드기야 라는 왕가의 승계가 이루어집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숙부인가, 형제인가? 263

262 정리를 하자면, 여호야긴은 자기 아버지 여호야김의 왕위를 계승하였고(여호 야김 -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자기 형인 여호야김의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여호 야김 - 시드기야). 그러므로 여호야긴과 시드기야 이 두 사람은 혈통 상으로는 조카와 숙부지간이지만, 다윗 왕가의 계보 상으로는 둘 다 여호야김의 후사로서 동등한 형제 관계가 됩니다. 여호야긴(조카)과 시드기야(숙부)가 혈연관계에 있어서 형제지간이라는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이 여호야김을 중심으로 하여 그를 계승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형제지간이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대기의 기록은 사실적 혈통관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법적인 다윗 왕가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하 36장 10절에서 시드기야가 여호야긴의 형제라고 한 킹제임 스 성경의 번역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분명히 형제 (히, 아흐, 스트롱코드 251)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주께서 역대기 기자에게 형제 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원문에는 형제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아자비나 숙부와 같은 단어로 함부로 바꾸어 번역한 다른 성경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264 바르게 읽는 성경

263 34. 누가 누구에게 물었는가? 개역: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고하였으나(스5:4) 쉬운: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이 건물을 다시 짓는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이오? 흠정역: 그때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 건물을 짓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라. NIV: They also asked, What are the names of the men constructing this building? NKJV: Then, accordingly, we told them the names of the men who were constructing this building. KJV: Then said we unto them after this manner, What are the names of the men that make this building?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있을 때, 강 이 편을 관할하는 총독과 그 동료들이 찾아와서 누가 너희에게 이 집을 건축하고 성벽을 보수하게 하였느냐? 고 물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강 이편의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료들이 나아와 그들에게 이같이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집을 건축하고 이 성벽을 보수하게 하였느냐? 하기에(스5:3) 그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답변이 에스라서 5장 4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NIV에서는 그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고 번역하였고, 킹제임스 성경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고 번역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두 번역에서는 주어와 목적어가 서로 바뀌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우리가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고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번역들을 조금 더 찾아보면, 에스라서 5장 4절의 번역은 세 갈래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64 (1) 새번역, 우리말성경, 가톨릭성경, 쉬운성경,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 NIV, NLT, NRSV, GNT 등은 모두 에스라서 5장 4절에서, 그들(총독과 그 동료들)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문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개역, 개역개정, 바른성경, NASB, NKJV, MSG 역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건축하는 자들의 명단을 알려주었다. 고 번역합니다. (3) KJV, 흠정역, 한글킹제임스역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이 건물을 짓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제일 말이 안 되는 것이 킹제임스 성경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총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너희에게 이 집을 건축하라고 했느 냐? 라고 물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건물을 짓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오히려 되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의 집을 건축하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더 잘 알고 있고 총독은 그들에게 조사하러 나왔는데 이처럼 반문을 하니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머리로 잘 이해가 안 되는 성경 말씀은 자기들 마음대로 고쳤습니다. NIV를 비롯한 많은 현대 역본들은 (1)번과 같이 그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라고 하여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번역본들은 70인역 을 본문으로 삼고 있는 역본들입니다. 70인역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추가하고, 삭제하고, 훼손한 오리겐의 헥사플라 5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리겐의 옛 말씀 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번역에 의하면, 총독이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너희에게 이 집을 건축하라고 했느냐? 라고 묻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4절에서 이 건물을 짓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연이어 질문만 하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총독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여 쌓는 것은 총독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바빌론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자치 구역을 만드는 행위로서 반역 행위로 간주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우리가 왕께 알리오니 이 도시가 다시 건축되고 그것의 성벽이 세워지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왕께서는 강 이편에서 아무 몫도 소유하지 못하시리이다, 하였더라(스4:16). 그러므로 이에 대한 제보를 받은 총독으로서는 절대로 그 일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지시로 그 일을 하는지 알아보고, 만약 그들의 건축 266 바르게 읽는 성경

265 작업이 정당한 법적 근거가 없다면 당장 중지시키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기세등등하게 찾아온 총독이 질문만 두 번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답변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물러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총독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답변을 듣고 자기의 권력으로는 이번 공사를 중지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나 봅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중대한 사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 속에 들어있을 겁니다. 따라서 (1)번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 내용을 삭제해버린 변개된 역본들의 번역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개역 성경과 NKJV 등은 적당한 선에서 의역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어와 목적어는 그대로 두고, (그들의 생각에) 의미가 자연스럽 게 통하도록 (2)번과 같이 우리가 그들에게 건축하는 자들의 명단을 알려주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에스라서 5장 3절과 4절을 연결시키기에는 이런 식의 의역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에스라 5장 전체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이 고소를 하여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으로 인해 에스라 4장에서 공사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대언자들의 말을 듣고 에스라 5장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총독과 그 동료들이 또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공사를 중단시키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건축하는 자들의 명단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면, 당장 그 공사를 주도하는 지도자들을 잡아가두고, 백성들이 건축하는 일을 못하게 막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어떤 말 을 듣고서는 공사를 중단시키러 온 본래의 목적도 잊은 채 페르시아 왕궁에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고 한 적이 있는지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스5:17), 회신이 오기까지는 이스라 엘 백성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관할 지역 내에서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총독들이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요?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공사를 중단시키지 못하고 왕궁에 사실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을까요?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어본 것은 이 일을 누가 명령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강 이편의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료들이 나아와 그들에게 누가 누구에게 물었는가? 267

266 이같이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집을 건축하고 이 성벽을 보수하게 하였느냐? 하기에(스5:3)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은 총독이 왕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편지 속에 들어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 내용은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서 하나님 의 집을 건축하게 하였고, 고레스 왕이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 왕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집의 기초를 놓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 집을 건축해오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빌론 왕 고레스의 제일년에 그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하나님의 이 집을 건축하게 하고(스5:13) 이에 그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의 기초를 놓았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그 집을 건축하여 왔으나 아직도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스 5:16) 우리는 에스라서 5장 13-16절에 있는 총독의 편지를 통해서 에스라서 5장 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답변한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총독과 그 동료들에게 이 건물을 짓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 구절은 물어보았다 (asked)가 아니라 말하였다 (said)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축하고 있는 자들의 이름은 자기네들이 더 잘 알 텐데 그걸 왜 총독에게 묻겠습니까? 또한 지금은 총독이 묻는 말에 답을 해야 할 입장인데 왜 도리어 질문을 하겠습니까? 누구의 지시로 이 공사를 하느냐는 총독의 질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세스바살과 고레스를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총독에게 이 이름들(세스바살과 고레스)이 무엇이냐? 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단순한 의문의 표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와 무게와 가치를 지닌 것인지를 묻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요셉으로부터 꿈의 내용을 이미 다 들었는데 왜 이 꿈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까요? 그 꿈의 의미가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요셉에게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 꾸짖는 겁니다. 그가 그 꿈을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고하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니라(창37:10).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을 쌓는 것을 뻔히 알면서 268 바르게 읽는 성경

267 왜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라고 말했습니까? 이는 너희가 하는 일의 의미는 왕을 배반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족속인 종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그 말을 듣고는 우리를 조롱하여 비웃고 업신여기며 이르되, 너희가 행하는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에(느2:19) 나발이 정말 다윗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다윗이 누구냐? 라고 물었을까요? 나발은 다윗이 뭔데? 난 다윗이 누군지 모른다. 나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나발이 다윗의 종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각각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들이 많도다(삼상25:10). 누군가가 당신이 누군데? 네까짓 게 뭔데? 라고 하면, 상대방은 당신이 누구인 지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분, 의미, 권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총독 앞에서 지금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뒤에는 총독 세스바 살이 있고 그 배후에는 고레스 왕이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세스바살 총독, 고레스 왕인데 이 이름들 (세스바살과 고레스)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총독 당신은 이 이름들의 권위를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닷드내와 스달보스내 앞에서 세스바살은 무엇이고 고레스는 무엇이오? 우리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명령을 내려서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이오. 라고 답하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건축하는 일을 중단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급히 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것이 정말 고레스 왕의 명령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에스라서 5장 4절 말씀이 얼핏 읽기에 이상해 보인다고 해서 주어와 목적어를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문맥이 어색한 느낌이 든다고 해서 자의적으로 의역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의역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본래 의미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고, 있는 그대로 믿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물었는가? 269

268 35. 어깨를 내어미는가, 뒤로 빼는가? 개역: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느 9:29) 흠정역: 그들을 다시 주의 율법으로 데려오려고 그들에게 증언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주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주의 법도를 범하여 죄를 짓고 어깨를 뒤로 빼며 목을 굳게 하고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나 이다. KJV: And testifiedst against them, that thou mightest bring them again unto thy law: yet they dealt proudly, and hearkened not unto thy commandments, but sinned against thy judgments, (which if a man do, he shall live in them;) and withdrew the shoulder, and hardened their neck, and would not hear. 느헤미야기 9장에는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들을 자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9장 29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하고 교만한 모습을 자백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 앞에서 교만하게 행한 모습을 개역 성경은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라고 했고, 흠정역 성경은 어깨를 뒤로 빼며 목을 굳게 하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바른 자세로 서 있는 상태에서 개역 성경처럼 어깨를 앞으로 내어 밀어 보십시 오. 상체가 앞으로 기울면서, 덩달아 고개도 숙여집니다. 이번에는 바른 자세에서 킹제임스 성경처럼 어깨를 뒤로 빼 보십시오. 상체가 젖혀지며 가슴도 배도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거기에 목에 힘까지 줘 보십시오. 직접 그 자세를 취해 보시면 어느 번역이 올바른 표현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어깨를 내어밀며 와 어깨를 뒤로 빼며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하는 완고한 모습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269 36. 날인가, 낮인가? 개역: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3:3) 한글킹: 내가 태어난 날과, 남자 아이를 배었다. 고 말했던 그 밤이 없었더라면 흠정역: 내가 태어난 그 낮과 사람들이, 사내아이를 수태하였다, 하던 그 밤이 소멸되었 더라면, KJV: Let the day perish wherein I was born, and the night in which it was said, There is a man child conceived. 한 언어로 기록된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래 글에 들어있는 어떤 단어가 다른 언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는 경우도 있고, 또 하나의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영어 단어와 우리말의 단어가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을 경우, 원문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단어가 어떤 맥락과 배경 하에서 사용되었는지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man 은 사람 일 수도 있고 남자 로 사용될 수 있으며, see 가 보다 라는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알다 라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으며, know 가 지식을 알다 일 수도 있고, 남자가 여자를 알다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brother 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서 형제, 형, 아우, 오빠, 남동생으로도 사용됩니다. 욥기 3장 3절의 day 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day 는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에서는 날 이라고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에서는 낮 이라는 단어 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day 라는 단어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날은 하루 즉 24시간을 의미하고, 낮은 일출에서 일몰까지의 시간을 말합니다. 욥기 3장 3절의 day 를 날이라고 할 것인지, 낮이라고 할 것인지 판단하기

270 위해서는 욥기 3장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기 3장은 욥이 자기의 날을 저주하는 내용인데 그 장의 주제는 첫머리인 3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욥기 3장 1절의 his day 를 자기의 생일 이라고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옮겨 자기의 날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욥3:1) 한글킹: 이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니라. 흠정역: 이 일 후에 욥이 자기 입을 열어 자기의 날을 저주하니라. KJV: After this opened Job his mouth, and cursed his day. 원래 his day 에는 탄생, 출생 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를 생일이 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자가 한 단어 한 단어를 정확하게 대응시켜 번역하지 않고 의역을 한 것인데,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 일치 번역 기법, 형식적 일치 번역 기법을 버리고, 현대 역본들의 동적 일치 번역 기법을 따를 경우 원문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his day 는 생일이라고 의역을 할 것이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의 표현대로 자기의 날 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킹제임스 성경에서 생일을 나타낼 때에는 birthday 라는 단어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생일과 관련된 단어의 용례를 찾아보면, 파라오 의 생일(창40:20), 헤롯의 생일(마14:6; 막 6:21) 등을 나타낼 때에는 his day 대신에 birthday 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이라면, 욥기 3장 1절 역시 cursed his birthday 라고 기록했을 겁니다. 둘째로, his day 를 자기 생일이라고 일관성 있게 주장하려면,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나오는 Lord's day 주의 생일 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욥이 자기의 날을 저주하는 그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욥기는 내용 면에서는 지혜 문학에 해당하며 그 형식적 특징은 시가서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시편이나 잠언과 마찬가지로 욥기에도 병행체 (parallelism)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욥기 3장 역시 병행체로 기록되어 있습니 다. 병행체란 대등한 단어나 구, 절, 문장을 나란히 제시하여 형식적인 면에서는 시적인 리듬감도 살리고, 내용면에서는 대비되는 표현들을 비교하거나 반복함으 로써 그 의미를 강조하여 독자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272 바르게 읽는 성경

271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말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젊은 자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요, 늙은 자들의 아름다움은 흰머리니라(잠20:29). 멸망에 앞서 교만이 나가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욥기 3장 3-8절은 다음과 같이 병행체 구조,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욥기 3장 3절과 8절 그리고 4,5절과 6,7절은 서로 대응 관계에 있으며 문장 단위로 대구를 이룹니다. 낮과 밤(3절) - 낮 (4,5절) - 밤 (6,7절) - 낮과 밤(8절) 3절: 낮과 밤이 소멸되었더라면 4-5절: 낮이 어둠에 덮였더라면 6-7절: 밤이 어둠에 잡혔더라면 8절: 낮을 저주하는 자들이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내가 태어난 그 낮과 사람들이, 사내아이를 수태하였다, 하던 그 밤이 소멸되었더라면, (욥3:3) 그 낮이 어두웠더라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 낮을 돌아보지 아니하셨더라면, 빛도 그 낮 위에 빛을 발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낮을 얼룩지게 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낮 위에 거하였더라면, 그 낮의 캄캄함이 그 낮을 무섭게 하였더라면 좋았으리라(욥3:4-5). 그 밤으로 말하건대 어둠이 그 밤을 붙잡았더라면, 그 밤이 그 해의 날수에 끼지도 아니하고 달수에 들지도 아니하였더라면 좋았으리라. 보라, 그 밤이 적막하였더라면, 그 밤에 기뻐하는 소리가 나지 아니하였더라면,(욥3:6-7) 그 낮을 저주하는 자들 곧 어느 때든지 소리를 높여 애곡하려 하는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욥3:8) 그리고 욥기 3장 3절은 그 구절 안에서 다음과 같이 대구( 對 句 )를 이룹니다. 내가 태어난 그 낮 - 사람들이 사내아이를 수태하였다 하던 그 밤 내가 태어난 그 낮과 사람들이, 사내아이를 수태하였다, 하던 그 밤이 소멸되었더라면, (욥3:3) 날인가, 낮인가? 273

272 Let the day perish wherein I was born, and the night in which it was said, There is a man child conceived. 위 구절에서 day 와 night 는 모두 동사 perish 에 연결되는 단어로서, day 와 night 는 서로 대응이 됩니다. 즉 여기에서의 day 는 night 에 대한 상대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day 는 날이 아니라 낮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욥기 3장 3절의 day 를 날 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 구절은 날과 밤이 소멸되었더라면 이 됩니다. 그런데 날에는 낮과 밤이 모두 포함되므로 날이 소멸되면 자연히 밤은 함께 소멸되므로 구태여 밤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날(낮과 밤)이 소멸되는데, 별도로 밤을 따로 언급하는 것은 어색한 표현이 되며, 날과 밤은 서로 대구를 이루지도 못하므로 대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명확하지 못하게 됩니다. 은혜로운 여자는 명예를 유지하며 강한 남자들은 재물을 유지하느니라(잠11:16). A gracious woman retaineth honour: and strong men retain riches. 잠언 11장 16절에서는 은혜로운 여자(woman)와 강한 남자들(men), 명예와 재물이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woman 에 대응하는 단어는 men 입니다. 즉, 여기서의 men 은 사람들이 아니라 여자에 대해 상대적인 단어로서 남자들을 말합니다. 이것을 억지로 은혜로운 여자는 명예를 유지하며 강한 사람들은 재물을 유지하느니라. 라고 하면 사람들이라는 단어에는 남자와 여자 가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병행체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모호해지고, 표현의 형식미도 손상됩니다. 그러므로 욥기 3장 3절을 번역할 때에도,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하고 시가 문학의 형식적인 표현미도 제대로 살리려면, day 를 날 이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낮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274 바르게 읽는 성경

273 37. 욥에게서 지혜가 아주 떠났는가? 개역: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욥 6:13) 흠정역: 나의 도움이 내 안에 있지 아니하냐? 지혜가 내게서 아주 쫓겨나갔느냐? KJV: Is not my help in me? and is wisdom driven quite from me? 욥기 6장 13절의 번역은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이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않은가?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번역하여 욥에게는 도움도 없고, 지혜도 쫓겨나서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욥 안에는 도움이 있으며, 지혜가 아주 쫓겨나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잠언 9장 10절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잠9:10). 이와 동일한 내용이 욥기 28장 28절에도 나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잠9:10)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니라(욥28:28). 그러므로 욥이 지혜 있는 자인지 아닌지는 그가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욥기 1장 1절에서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인정하셨습니다(욥1:8).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욥1:1, 8). 욥은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경배하며 주를 찬송하였고 (욥1:20-21), 온 몸에 심한 종기가 나서 괴로움을 당할 때에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274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욥2:10). 이에 욥이 일어나 자기의 겉옷을 찢으며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고(욥1:20-21; 2:10). 욥이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께 변함없이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것을 볼 때, 그는 지혜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욥기 6장 13절은 욥의 안에는 도움도 없고, 지혜도 쫓겨나서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욥의 안에는 도움이 있으며, 지혜도 아주 쫓겨나간 것은 아니라고 번역하 는 것이 욥기 전체의 흐름과 일치하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276 바르게 읽는 성경

275 38.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개역: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욥 6:14) 흠정역: 고난 받는 자를 그의 친구가 불쌍히 여길 것이로되 그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도다. KJV: To him that is afflicted pity should be shewed from his friend; but he forsaketh the fear of the Almighty. 욥기 6장 14절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 의하면, 욥은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사람이었는데, 욥은 그런 자기의 모습(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모습)을 그의 벗이 불쌍히 여겨주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 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을 해야지 왜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할까요?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그의 친구가 전능자 두려워하기 를 저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결 구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개역: (욥 = 피곤한 자 =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 vs (그의 벗) 흠정역: (욥 = 고난 받는 자) vs (그의 친구 =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 자) 욥기 6장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 - 욥기 4, 5장 - 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그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응답하여 이르되,(욥4:1) 그러나 욥이 응답하여 이르되,(욥6:1)

276 따라서 욥기 6장 14절은 욥이 자기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인데 이 구절에서 고난 받는 자(개역 성경에는 피곤한 자)는 욥이고, 그의 친구는 엘리바스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개역 성경,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는 누구일까요? 개역 성경은 고난 받는 욥이 곧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개역 성경,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개역 성경의 주장과는 달리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욥1:1). 하나님께서도 욥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하셨고(욥1:8; 2:3), 사탄도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욥1:9).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라(욥1:8-9; 2:3)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가 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요? 그것은 바로 욥의 고난을 보면서도 그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그의 친구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인지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고 눈먼 자 앞에 걸림돌을 놓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니라(레19:14). 그런즉 너희는 서로를 학대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레25:17, 36, 43) 그러므로 너는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길로 걷고 그분을 두려워할지니라 (신8:6).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되 그분을 존경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잠14:31). 위 말씀들에서 보는 것처럼,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 이웃을 학대하는 자, 형제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자, 종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고 엄하게 다루는 자, 278 바르게 읽는 성경

277 주의 명령들에 불순종하는 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서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며 그를 노리고 구덩이를 팠습니다(욥6:25, 27). 참으로 너희는 아버지 없는 자를 기죽게 만들며 너희 친구를 노리고 구덩이를 파는도다 (욥6:27). 그래서 욥은 그들을 가리켜 형편없는 위로자, 쓸모없는 의사들 이라고 했습니 다. 그런 것들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형편없는 위로자로다(욥16:2). 그러나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사들이니라(욥13:4). 성경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인정과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를 정죄한 그의 친구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욥기 6장 14절을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읽다 보면,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욥을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로 정죄하며,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됩니다. 하지만 욥기 6장 14절은 욥이 자기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로서, 내가 고난 받는 것을 보면 너희가 친구로서 마땅히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할 텐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너희의 행동은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다. 라고 항변하는 내용 입니다. 따라서 개역 성경과 같이 욥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몰아 부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욥기 6장 14절에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욥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욥의 친구들입니다.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279

278 39. 떼를 지은 객인가, 개울 길의 통로인가? 개역: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욥6:18) 흠정역: 개울들이 흐르는 길의 통로들은 옆으로 벗어나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소멸되느 니라. KJV: The paths of their way are turned aside; they go to nothing, and perish. 역사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에 비해서 욥기나 시편 같은 시가서에서 번역본들 간의 불일치가 더 많이 발견됩니다. 아마도 시적 표현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번역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번역본이 기초로 하고 있는 사본이 무엇이냐에 의한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기 6장 18절을 보면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은 번역이 완전히 다릅니다. 개역 성경은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광야에서 죽는다고 했고, 흠정역 성경은 개울물이 물길을 벗어나서 흐르다가 말라버리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욥기 6장 18절에서 죽거나 소멸되는 것이 객들인지, 개울물인지 알아보려면 그 전후에 나오는 구절을 읽어보면 됩니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속임수로 대하였고 그들은 개울들의 물살같이 지나가느니라. 그것들은 얼음 때문에 거무스레하고 그 속에는 눈이 숨겨져 있도다. 그것들이 따뜻하게 되는 때에 사라지고 날이 더울 때에 자기 자리에서 소멸되는도다(욥6:15-17). 욥의 형제들은 그를 개울과 같이 속임수로 대하고 개울물처럼 지나가버렸습니 다. 그것들 속에 얼음과 눈이 있더라도 날씨가 따뜻해지면 사라지고 소멸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물에 대한 이야깁니다. 욥기 6장 18절 역시 이런 맥락에서 개울물이 흐르는 물길에서 옆으로 벗어나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말라버린다는 뜻입니다. 대상들 - 떼를 지은 객들 - 은 광야를 가로질러서 목적지를

279 향하여 이동하는 사람들이지 시냇가를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상들 은 광야를 지나가는 일에 능숙한 사람들인데 시냇가를 따라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이켜서 광야로 가서 죽는 이상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욥기 6장 19-20절을 읽어보면, 위 구절의 의미가 떼를 지은 객들인지 물이 흐르는 통로인지를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데마의 무리들이 바라보고 세바의 일행들이 그것들을 기대하다가 거기에 이르러 자기들이 소망을 가졌으므로 당황하고 부끄러워하였도다(욥6:19-20). 욥기 6장 19-20절에는 데마의 무리와 세바의 일행들이 바라보고 그것들 을 기대하고 소망을 품었다가 당황해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데마의 무리들과 세바의 일행들이 간절히 기대하던 것들은 무엇일까요? 떼를 지은 객들일까요, 아니면 물일까요? 데마는 다마스커스와 메카 사이에 있는 무역 도시로서 데마의 무리란 무역 상인들을 의미합니다. 데마의 무리는 상인들을 습격하여 물건을 빼앗는 산적이나 도둑 떼가 아니므로 떼를 지은 객들 을 보고 기대와 소망을 품을 리가 없습니다. 사막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무역상인들 즉 데마의 무리들이 기대하고 있던 것은 물입니다. 그들은 혹시 물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멀리서 바라보고 그것들을 기대하고 왔다가 이르러보니 물길에서 옆으로 벗어난 물줄기 가 소멸되어 버려 허탈해하고 당황해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욥기 6장 18절을 번역할 때,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를 따라 이동하다 가 방향을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욥기 6장 15-20절은 욥이 자기의 형제들, 자기의 친구들이 말라버리는 시냇물과 같이 거짓되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사막에는 와디(건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우기 때에만 물이 흐르는 통로가 되고 평소에는 물이 없는 마른 시내입니다. 와디의 바닥은 사막의 모래가 풍화되 어 미세한 입자를 이루고 있고, 바싹 말라 있어서 의외로 배수가 잘 안 되며, 주변에는 물을 흡수할 나무나 풀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막에 비가 오면 물이 일제히 와디를 따라 저지대로 흐르면서 홍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막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홍수는 포클레인과 같은 중장비조차 떠내려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자와 같다고 하시면서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그것이 집에 부딪쳐서 집을 무너뜨린다. 고 하셨는데 그 홍수가 바로 이것을 떼를 지은 객인가, 개울 길의 통로인가? 281

280 말합니다(마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집이 무너져 그것의 무너짐이 심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마7:27). 하지만 그렇게 물길을 따라 흐르던 물이 넘쳐서 개울들이 흐르는 길의 통로를 벗어나 옆으로 흐르면 곧 모래 속으로 스며들거나 뜨거운 태양열에 말라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소멸되는 일이 일어납니다(욥6:18). 성경은 신실하지 못한 자를 가리켜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수증기(약4:14), 아침 구름이나 사라지 는 새벽이슬(호6:4)로 표현합니다.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약4:14).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오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선함은 아침 구름 같고 사라지는 새벽이슬 같나니(호6:4) 개울들의 길을 벗어나 곧 사라지는 물 역시 신실하지 못하고, 거짓된 욥의 형제들, 그의 친구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욥은 자기에게 거짓으로 대하는 형제들을 지나가는 개울 물살로 표현했고(욥6:15) 그런 개울물들은 결국 소멸된 다고 했습니다(욥6:18).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속임수로 대하였고 그들은 개울들의 물살같이 지나가느니라 (욥6:15). 개울들이 흐르는 길의 통로들은 옆으로 벗어나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소멸되느니라(욥 6:18). 시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막상 가까이 가 보면 바싹 말라있는 시내는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다가 멀리서부터 그것들을 기대하고 거기에 이른 사람들을 당황하 고 부끄러워하게 만듭니다(욥6:19-20). 그래서 성경은 거짓말쟁이를 마르는 시내로 표현하고(렘15:18), 거짓 자랑이나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을 비 없는 구름이라고 하고(잠25:14), 쉽게 변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를 물 없는 샘이나 물 없는 구름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벧후2:17; 유1:12). 어찌하여 나의 고통이 영원토록 계속되고 나의 상처가 고쳐지기를 거부하며 고칠 수 없게 되었나이까? 주께서는 내게 전적으로 거짓말쟁이같이 또 마르는 물같이 되려 하시나이까?(렘15:18) 누구든지 스스로 거짓 선물을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들과 바람 같으니라(잠25:14). 282 바르게 읽는 성경

281 이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다니는 구름이라. 그들을 위해 어둠의 안개가 영원토록 예비되어 있나니(벧후2:17) 이들이 너희와 함께 잔치를 할 때에 두려움도 없이 먹으니 너희의 사랑의 잔치에 얼룩이라.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물 없는 구름이요, 열매가 시들고 열매가 없으며 두 번 죽어 뿌리째 뽑힌 나무요,(유1:12) 그러므로 욥기 6장 18절에서 사라지고 소멸되는 존재는 떼를 지은 객들이 아니라 개울물이 흐르는 길의 통로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며, 그것은 거짓된 자, 신실하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떼를 지은 객인가, 개울 길의 통로인가? 283

282 40. 전쟁인가, 정해진 기한인가? 개역: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욥7:1) 개정: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흠정역: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기한이 있지 아니하냐? 그의 날들은 또한 품꾼의 날들과 같지 아니하냐? KJV: Is there not an appointed time to man upon earth? are not his days also like the days of an hireling? 다음 ( ) 안에 있는 보기들 중에서 알맞은 말은 무엇일까요?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는 (전쟁, 힘든 노동, 정해진 기한)이 있다. 여기에 정답을 추론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가 더 붙어 있습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는 가 있는데 그의 날들은 품꾼의 날들과 같다.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빈 칸에 들어갈 단어는 전쟁일까요, 힘든 노동일까요, 정해진 기한일까 요? 개역 성경은 이를 전쟁 으로, 개역개정 성경과 바른성경은 힘든 노동, 공동번 역과 가톨릭성경은 고역 등으로 번역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정해진 기한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의 날들이 품꾼의 날과 같다고 했으니 이 구절의 번역은 뒤에 나오는 품꾼의 날들 과 호응을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개역 성경과 같이 이 구절이 인생에게 전쟁이 있다는 뜻이라면 그의 날은 품꾼의 날이 아니라 군인의 날과 같다고 해야 합니다. 품꾼은 계약을 맺고 그 기간 동안 일을 해 주는 사람이지 전쟁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서가 되는 욥기 7장 1절 하반절에는 품꾼의 전쟁, 품꾼의 고생, 품꾼의 노동이 아니라 품꾼의 날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283 성경에서 품꾼의 날은 다음과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날들이 정하여졌고 그의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주께서 그의 한계를 정하사 그가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에게서 돌이키사 그가 품꾼처럼 자기 날을 마칠 때까지 안식하게 하옵소서(욥14:5-6). 이제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햇수대로 삼 년 안에 모압의 영광이 그 큰 무리 모두와 함께 경멸당하고 그 남은 자들이 심히 적어 미약하리라, 하셨도다(사16:14). 주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품꾼의 햇수에 따라 일 년 내에 게달의 모든 영광이 사라질 것이요,(사21:16) 욥기 14장 5,6절에서 사람은 품꾼처럼 그에게 정해진 날들, 주께서 그에게 지정하신 기간 동안 자기 날을 지내게 된다고 했고, 이사야서 16장 14절, 이사야서 21장 16절에서는 품꾼이 일정한 기간 동안 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용례에서 보듯이 품꾼의 날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기한, 사람에게 배정된 기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역 성경이 채택한 전쟁이라는 단어는 품꾼의 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처럼 품꾼이 고된 노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구절은 품꾼의 노동 활동에 대해서가 아니라 품꾼의 날들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앞에 나오는 내용 역시 품꾼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정해진 기간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정해진 기한 (appointed time)이라는 표현은 욥기 14장 14절에도 나옵니다. 여기에서 성경 본문의 내용은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살아있는 모든 날 동안 내게 변화가 이를 때까지 기다리겠다. 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 구절이 사람이 살다가 죽기 전까지의 기간,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살도록 허락하신 기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 나를 위하여 정하신 시간의 모든 날을 내가 기다리되 변화가 내게 이를 때까지 기다리겠나이다(욥14:14). If a man die, shall he live again? all the days of my appointed time will I wait, till my change come. 욥기 7장 1절 이후에 나오는 성경 본문 내용들을 살펴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종이 어두워지기를 바라고 품꾼이 자기 일의 품삯을 기다리는 것 같이(2절) 전쟁인가, 정해진 기간인가? 285

284 허무한 달들과 고달픈 밤들이 내게 정하여졌다(3절). 언제 밤이 지나고 날이 샐까(4절) 나의 날들은 북보다 빨리 헛되이 지나간다(5,6절). 나의 생명은 바람같이 지나가고 구름이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 같다(7-10절). 이런 구절들은 모두 그가 살아있는 기간과 관련된 것입니다. 욥기 7장 1절의 의미는 땅에 사는 사람에게 전쟁이나 고된 노동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과 같이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기한이 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286 바르게 읽는 성경

285 41. 하나님이 내 원수인가? 개역: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욥16:9) NIV: God assails me and tears me in his anger and gnashes his teeth at me; my opponent fastens on me his piercing eyes. 흠정역: 그분께서 진노하사 나를 찢으시고 미워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가시니 내 원수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KJV: He teareth me in his wrath, who hateth me: he gnasheth upon me with his teeth; mine enemy sharpeneth his eyes upon me. 주께서 원수들의 눈앞에서 우리에게 상을 차려주시면 원수들은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시23:5).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건치 아니한 자에게 넘기시고 사악한 자의 손에 던지셨기 때문에(욥16:11) 이제는 자기의 원수조차도 자기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다고 말합니다(욥16:9). 하나님께서 나를 경건치 아니한 자에게 넘겨주시고 사악한 자의 손에 던지셨도다(욥 16:11). 욥기 16장 9절을 개역 성경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욥의 원수가 되어서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다는 뜻이 되고, 킹제임스 성경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욥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에 욥의 원수가 욥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다는 뜻입니 다. 개역: (하나님 = 원수) 욥 흠정역: (하나님 욥) (원수 욥) 개역 성경으로 읽으면 하나님은 욥의 원수(enemy)가 됩니다. 욥기 29장을 읽어보면 욥은 백성들의 지도자였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286 그는 아버지 없는 자나 과부나 눈 먼 자,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공의를 행하는 자였기 때문에 그 도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원수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약 욥에게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대적자, 원수로 표현되는 마귀일 겁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수확하는 때는 세상 끝이요, 거두는 자들은 천사들이니 (마13:39) 욥기 1, 2장을 보면, 지금 욥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대적자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을 알고 계셨기에 그가 고난당 하는 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기 16장 9절은 킹제임스 성경처럼 하나님과 욥과 사탄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욥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에 그의 원수가 욥을 쏘아본다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NIV는 욥기 16장 9절에서 원수를 의미하는 enemy 라는 단어 대신에 opponent (상대방, 반대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킹제임 스 성경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통 털어 opponent 라는 단어가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opponent 라는 말은 상대방, 반대편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상대적 개념입니다. 내가 왼편에 있으면 opponent 는 오른편이 되고, 내가 토론에서 찬성 쪽을 맡으면 opponent 는 반대쪽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적 마귀는 과연 상대적 존재일까요? 내가 참된 것을 말하면 마귀는 거짓을 말하고, 내가 거짓을 말하면 마귀는 참된 것을 말할까요? 내가 악을 행하면 마귀는 정의의 편에 서게 될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 8:44). 성경 말씀에 의하면 마귀는 그런 상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의 상태나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나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상대적 개념의 opponent 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성도들의 enemy 일 뿐입니다. NIV의 번역자들은 세상 철학을 받아들여 상황 윤리를 주장하고, 선과 악이란 절대적 기준이 없고 그때그때 상대적 가치에 따라 결정된 다고 믿기 때문에 마귀를 opponent 라고 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히 enemy 라고 합니다. 한편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을 따르고 있는 번역본들인 바른성경, 개역개정, 288 바르게 읽는 성경

287 새번역, 우리말, 가톨릭역, 현대인의 성경, NLT, GNT, 메시지(MSG) 등은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수(enemy)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중에서 가톨 릭역과 MSG역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진노가 나를 짓찢으며 뒤쫓는구려. 그분께서 내게 이를 가시고 내 원수이신 분께서 내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시네(욥16:9, 가톨릭). 가톨릭역은 내 원수이신 분께서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역의 그분 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욥과 원수(enemy)지간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가톨릭역 의 그분 이 대적자 마귀라면 이것은 마귀를 높이는 표현입니다. 원수라면 놈 이지 어떻게 분 이 됩니까? 가톨릭역은 원수(enemy) 마귀에게 그분께서, 내 원수이 신 분께서 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메시지(MSG)역은 아예 God, my enemy! (하나님, 내 원수!)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합니다. Your anger tears at me, your teeth rip me to shreds, your eyes burn holes in me--god, my enemy!(욥16:9, MSG) 하나님이 내 원수라니! 욥이 하나님과 무슨 원수졌습니까? 이런 번역본을 성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요? 우리 성도들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마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바르게 답할 수는 분이라면 욥기 16장 9절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내 원수인가? 289

288 42. 몸의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 개역: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흠정역: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내가 아노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KJV: For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and that he shall stand at the latter day upon the earth:and though after my skin worms destroy this body, yet in my flesh shall I see God: 욥기에는 율법이나 성막, 옛날 족장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욥은 레위 지파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직접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욥1:5). 그들의 잔칫날이 지나가면 욥이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 헌물을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하였을까 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욥이 계속해서 이같이 행하였더라(욥1:5).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욥은 율법이 있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 다. 학자들은 욥이 아브라함 시대 혹은 그보다 더 이전 시대의 사람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욥은 이처럼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과연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욥기 19장 25-26절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꼽히는 욥기에서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이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약시대 사람들도 몸의 부활을 믿었다 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청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무르라. 나와

289 아이는 저기에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는(창22:5) And Abraham said unto his young men, Abide ye here with the ass; and I and the lad will go yonder and worship, and come again to you,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삭을 번제 헌물로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 산에 올라갔을 때, 그는 함께 간 청년들을 떼어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무르라. 나와 아이는 저기에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누가 돌아온다고 했습니까? 위의 킹제임스 성경에서 come again 의 주어는 무엇일까요? I and the lad (나와 아이)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지금 이삭을 죽여서 번제 헌물로 단 위에 드리러 갑니다. 그런데 그가 나와 아이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게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으므로,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몸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막연한 제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지어 죽은 자들로부터 능히 그를 일으키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또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느니라(히11:19).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능히 그를(이삭을) 일으키실 줄로 생각하였으므 로,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부활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이삭의 몸이 다시 살아나서 자기가 그를 데리고 조금 전에 헤어졌던 자기 청년들에게 돌아올 것을 확신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 욥 역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욥기 19장 25-26절에 나타난 욥의 믿음 고백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히7:25).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슥14:4). 몸의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 291

290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15:53).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 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하나님을 보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지금 계시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3:2). 욥기 19장 25-26절은 항상 살아계신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땅 위에 재림하실 것과 그때에 우리가 몸을 입고 부활하여 주를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을 기록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욥기에 기록된 욥의 고백 중 몸의 부활에 대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바꾸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개역)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개역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 밖에서, 즉 부활의 몸을 입지 못하고 영으로만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단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서 죽은 자들이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고 선포하였거늘 어찌하여 너희 가운데 어떤 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고전15:12)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1-53).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욥이 몸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 욥과 같이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몸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기초를 다음 292 바르게 읽는 성경

291 중 어느 말씀 위에 두고 있습니까? 어느 기초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참된 반석입니까? 개역: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흠정역: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몸의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 293

292 43. 황소가 새끼를 낳는가? 개역: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욥21:10) 한글킹: 그들의 수소는 틀림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암소는 새끼를 낳으며 낙태하지 않는도다. 흠정역: 그들의 황소는 새끼를 낳되 실패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암소는 새끼를 낳되 유산하지 아니하는도다. NIV: Their bulls never fail to breed; their cows calve and do not miscarry. KJV: Their bull gendereth, and faileth not; their cow calveth, and casteth not her calf. 황소가 새끼를 낳다니?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라고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이 잘못 된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들 나름대로 그 구절을 새끼를 배게 하다, 교미하다 등으로 고쳤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새끼를 낳는 것은 암소요, 암소가 임신하도록 씨를 제공하는 것은 황소이기 때문에 이런 번역이 더 타당해 보입니 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히 황소가 새끼를 낳는다. (Their bull gendereth)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gender 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성별(sex)을 의미하는 단어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gender2 vt., vi. 고어 =ENGENDER 사전을 찾아보니 gender 는 고어로서 engender 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en gen der, vt. 1. <감정 등을> 생기게 하다, 발생케 하다(produce) 2. 고어 낳다(beget) vi. 생기다, 일어나다

293 알고 보니 gender (engender)는 낳다 라는 뜻으로서 beget 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즉 황소가 출산을 해서 새끼를 낳지는(bear) 않지만, 황소도 새끼를 낳습니다(gender). 영어사전에 의하면, gender 라는 단어가 beget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여러 번 확인했듯이 여자가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bear, 남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beget 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축하하네, 자네 아들 낳았다면서?, 이번에 손자 보셨다구요? 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 주세붕( 周 世 鵬 : )의 오륜가( 五 倫 歌 ) 아버님이 날 낳으시고 어머님이 나를 기르시니 부모님이 아니셨더라면 이 몸이 없었을 것이다 이 덕을 갚고자 하니 하늘같이 끝이 없구나 2 정철( 鄭 澈 : )의 훈민가 아버님이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이 나를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셨다면 이 몸이 살 수 있었을까 이 하늘 같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까 주세붕의 오륜가나 정철의 훈민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아버님이 나를 낳으셨 다 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씨를 뿌리는 존재요, 아이를 낳는 것은 어머니라 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씨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씨는 아버지의 몸속에서 생산됩니다. 현대 의학에 의하면, 정자의 생성은 뇌 속의 뇌하수체와 고환에서 호르몬이 분비되어 정자의 생성을 자극하는데 정자의 형성은 고환 내에 있는 정세관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정원세포(spermatogonia)의 분할에서부터 성숙 정자 (spermatozoa)가 되기까지는 약 75일의 기간이 걸립니다. 이 기간 동안에 정자는 부고환(epididymis)에서 성숙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기간이 약 12일에서 21일 정도 됩니다. 그러므로 씨는 아버지가 낳는다고 합니다. 반면 여성의 난자는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태아 적부터 있던 미성숙 난자(난모 세포)가 사춘기이후 월경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1개의 난자가 성숙되어 배란되는 것입니다. 이 정자가 어머니의 몸속에 있는 난자와 만나서 결합하면 수정란이 되고 모태에서 태아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약 280일 정도가 지나면 아이가 황소가 새끼를 낳는가? 295

294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어머니가 아이를 출산한다(bear)라고 하며, 아버지 는 자식을 얻게(beget) 됩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남자는 단순히 씨를 뿌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낳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beget)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 것을 beget 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출산 이외에도 입양, 친자 인지, 법적 상속 등을 통해서 자녀를 얻거나 부자관계를 맺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컨대 남자인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begat), 이들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의 소생이 아니라 사생아들이었지만 유다가 그들을 자기 아들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유다가 그들을 낳았다(begat)고 합니다. 여고니야는 요시야의 손자였지만 그가 다윗 왕가의 계보에서 요시야의 뒤를 적법하게 계승한 자이므로 성경은 요시야가 여고니야를 낳았다고 합니다(마 1:11).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1:3)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마1:11).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이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 (beget)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황소가 새끼를 낳는다 (gender)고 표현한 것도 전혀 잘못된 표현이 아닙니다. 만약 황소가 새끼를 낳는다고 표현한 성경이 못 미덥다거나 이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분들은 마태복음 1장 2-6절도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할 겁니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배게 하고 이삭은 야곱을 배게 하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배게 하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배게 하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배게 하고 헤스론은 람을 배게 하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배게 하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배게 하고 나손은 살몬을 배게 하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배게 하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배게 하고 오벳은 이새를 배게 하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배게 하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배게 하고 이렇게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성경 말씀을 뜯어 고치는 것이 옳을까 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그대로 믿고, 그대로 번역하고, 그대로 읽는 것이 옳을까요? 296 바르게 읽는 성경

295 44. 욥의 시대에 오르간이 있었는가? 개역: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욥21:12) 흠정역: 그들은 작은북과 하프를 들고 오르간 소리에 기뻐하며 NIV: They sing to the music of tambourine and harp; they make merry to the sound of the flute. KJV: They take the timbrel and harp, and rejoice at the sound of the organ. 욥이 살던 시대에 오르간이라는 악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마 다른 성경 번역자들은 이걸 믿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으로는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도 않았기에 성경에 나오는 오르간을 피리, 플루트 등으로 바꾸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파이프오르간의 기원은 BC 26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 던 크테시비오스가 고안한 물 오르간(hydroulos)이라고 합니다. 이 장치는 물의 힘으로 일정한 압력을 보내는 송풍장치를 만들어 돌핀이라고 하는 삼각판( 三 角 瓣 )을 사용해 손가락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서 오르간의 원시적인 형태라고 합니다. 물 오르간은 후에 아라비아인이나 그리스인의 애호를 받아 차차 개량되어 송풍장치로 물 대신 풀무를 사용하는 뉴매틱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파되어 8-9세기 무렵부터 그리스도 교회에서 많이 쓰이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서 가인의 후손이 오르간을 만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는데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더라(창4:21). 여기서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모든 자들의 조상 이라는 말의 의미는 유발의 까마득한 후손들이 아주 오랜 뒤에 오르간을 만들었는데 유발은 단지 그걸 만든 사람들의 조상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후손들은 노아의

296 홍수 때 다 죽고 세상에 후손을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발이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라는 말은 유발이 이런 악기들을 개발하고 연주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유발과 그의 후손들은 죽었지만 하프와 오르간을 만들고 연주하는 방법은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서 보급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욥의 시대에도 다윗의 시대에도 오르간이 라는 악기가 사용될 수 있었던 겁니다. 또 내 하프는 애곡으로 변하였으며 내 오르간은 우는 자들의 소리로 변하였도다(욥 30:31). 작은북을 치고 춤을 추어 그분을 찬양하며 현악기와 오르간들로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시150:4). 물론 유발이 만든 오르간이나 욥의 시대에 사용되던 오르간이 현대식 전자오르 간이나 파이프오르간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과 구조를 가진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악기가 작동하는 원리는 같았을 겁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오르간이라는 악기는 길이가 다른 대나무관이나 금속관들을 다발로 엮어서 거기에 공기를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작동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악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른 악기들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흠정역 다니엘서 3장 5절에는 줄 달린 타악기 - 한글킹제임스역은 음역하여 덜시머로 번역함 - 가 등장합니다. 덜시머는 현이 달린 타악기를 말합니다. dul ci mer n. 1 음악 덜시머 사다리꼴의 현이 달린 타악기의 일종 2 기타 비슷한 미국 민속 악기 그런데 이것이 개역 성경에는 생황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역: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단 3:5) 흠정역: 너희는 코넷과 피리와 하프와 트럼본과 비파와 줄 달린 타악기와 온갖 음악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려서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형상에게 경배하라. 다음은 생황에 대한 정의입니다. 생황: <음악> 아악( 雅 樂 )에 쓰는 관악기의 하나. 큰 대로 판 통에 많은 죽관( 竹 管 )을 돌려 세우고, 주전자 귀때 비슷한 부리로 불게 되어 있다. 중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생황이라는 악기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생황은 298 바르게 읽는 성경

297 조선시대 궁중 아악에 사용되는 관악기인데 조선시대 아악에 쓰이던 악기가 왜 다니엘 시대에 등장할까요? 그리고 덜시머는 타악기인데 생황은 관 속에 공기를 불어넣어 연주하는 관악기입니다. 그러므로 덜시머를 생황으로 번역한 것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적합한 번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악기로는 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피리 (pipe, flute) 이외에 코넷(cornet)도 피리라고 하고(대하15:14), 오르간(organ) 도 피리라고 번역합니다(욥21:12). 개역: 피리 - 흠정역: 피리 (히: 하릴, pipe) 개역: 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하므로 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 듯하니(왕상1:40) 흠정역: 온 백성이 그를 따라 올라오고 백성이 피리를 불며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므로 땅이 그들의 소리로 인해 떠나가니라. 개역: 피리 - 흠정역: 코넷 (히: 쇼파르, cornet) 개역: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대하15:14) 흠정역: 그들이 큰 소리로 소리를 내고 나팔과 코넷을 불어 주께 맹세하매 개역: 피리 - 흠정역: 오르간 (히: 우가브, organ) 개역: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욥21:12) 흠정역: 그들은 작은북과 하프를 들고 오르간 소리에 기뻐하며 성경 속 등장인물이 활동하던 시대와 성경 번역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시간적으로 상당한 격차가 있고,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악기와 현대에 사용되는 악기를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어떤 악기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셨고, 또한 그 단어를 그대로 보존하셨다는 것을 믿기에 성경 말씀에 기록된 하프나 오르간이 어떤 형태로든 그 당시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욥의 시대에 오르간이 있었는가? 299

298 45. 너의 경외함인가, 너에 대한 두려움인가? 개역: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욥22:4) 흠정역: 그분께서 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너를 책망하시겠느냐? 그분께서 너와 함께 심판 자리로 들어가시겠느냐? KJV: Will he reprove thee for fear of thee? will he enter with thee into judgment? 욥기 22장 4절을 개역 성경으로 읽으면,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는 것이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냐? 라고 묻는 것이 됩니다. 욥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왜 책망 받을 일일까요? 말이 안 되는 이야깁니다. 나이도 많고 경륜도 깊은 엘리바스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번역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어색한 표현이 등장하는 겁니다. 흠정역 성경은 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너를 책망하시겠느냐? 라고 번역했 습니다. 두 번역의 차이점은 fear of thee 를 번역할 때, 이것을 주격으로 읽어서 너의 경외함 (thee가 경외하는 행위의 주체)으로 번역하느냐, 목적격으로 읽어서 너에 대한 두려움 혹은 너를 두려워하여 (thee는 fear의 목적어)로 번역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치사 of 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잘 몰라서 고민이 된다면, 킹제임스 성경의 내장사전 기능을 이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fear of thee 가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개역: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신2:25) 흠정역: 이 날 내가 온 하늘 아래 민족들로 하여금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소문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299 KJV: This day will I begin to put the dread of thee and the fear of thee upon the nations that are under the whole heaven, who shall hear report of thee, and shall tremble, and be in anguish because of thee. 신명기 2장 25절에서는 fear of thee 가 너를 무서워하여 (너에 대한 두려움)라 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또한 그렇게 번역되었습니다. 개역: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시 119:120) 흠정역: 주를 두려워하므로 내 육체가 떨며 내가 주의 심판들을 무서워하나이다. KJV: My flesh trembleth for fear of thee; and I am afraid of thy judgments. 시편 119편 120절 말씀은 fear of thee 가 주를 두려워하여 라고 번역되었습니 다. 이것을 욥기 22장 4절의 개역 성경처럼 당신(하나님)의 경외함 때문에 내 육체가 떨고 있다. 라고 하거나, 당신(하나님)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 육체가 떨고 있다. 고 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개역: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사2:10) 흠정역: 주의 두려움과 그분의 위엄의 영광으로 인하여 바위 속으로 들어가고 티끌 속에 숨을지니라. KJV: Enter into the rock, and hide thee in the dust, for fear of the LORD, and for the glory of his majesty. 이사야서 2장 10절에서 fear of the LORD 는 무슨 뜻일까요? 주께서 누구를 경외한다거나 주께서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거야말로 신성모 독입니다. 이는 주의 두려움 곧 주께 대한 두려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for fear of ~ : ~를 두려워하여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과 보급 덕분에 영어가 오늘날처럼 발전하고 풍부한 표현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정확하고 풍부한 영어 표현들을 자세히 읽다보면 위와 같은 영문법의 문제, 번역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너의 경외함인가, 너에 대한 두려움인가? 301

300 46. 예언인가, 대언인가? 개역: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흠정역: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KJV: Knowing this first, that no prophecy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여러 성경 번역들이 prophet 을 예언자, 선지자 등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이 prophet 이 미래 일을 알아맞힐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prophet 의 원래 의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언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구약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베레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탐구해 보시기 바랍니 다(행17: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행17:11) 1. 선지자(예언자)인가, 대언자인가? (1) 첫 대언자 아브라함 성경에서 prophet 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이며 가장 먼저 등장하는 prophet 은 아브라함입니다(창20:7).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대언자(prophet)이므로

301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시니라(창20:7). 아브라함이 만약 선지자나 예언자였다면, 그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거나(선지 자)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능력(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아브라함이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다가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아브라함을 prophet 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prophet 이라고 칭하신 것이 그에게 선지자나 예언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자기가 큰 민족을 이루고, 자기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창12:2-3).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약속을 온 세상에, 그 다음 세대에 전달할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대언자 이지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능력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2-3). (2) 대언자의 개념을 잘 보여주는 아론 성경에 둘째로 등장하는 대언자는 모세의 형 아론입니다. 이 구절은 특히 prophet 의 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구절이니 주의 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출7:1-2) 흠정역: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 또 네 형 아론은 파라오에게 말하여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KJV: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See, I have made thee a god to 예언인가, 대언인가? 303

302 Pharaoh: and Aaron thy brother shall be thy prophet. Thou shalt speak all that I command thee: and Aaron thy brother shall speak unto Pharaoh, that he send the children of Israel out of his land. 이 구절은 출애굽기 6장 30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라오가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론을 붙여주시면서 아론이 그의 대언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을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면, 아론은 그의 대언자가 되어서 그 말씀을 파라오에게 대신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 다. 출애굽기 7장 1,2절 말씀을 읽어보면 prophet 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자 즉 대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개역 성경도 어쩔 수 없이 이 구절을 대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prophet (히, 나비)이라는 말이 대언자라는 것이 이처럼 분명한데 왜 똑같은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선지자로, 다른 곳에서는 예언자로 번역되어야 합니까?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일관성 있게 대언자로 번역했습니다. (3) 예언과 대언의 차이 예언자는 자기가 직관이나 추리, 예지 능력, 환상 등을 통해서 본 것을 스스로 정리하여 앞날을 내다보고 자기 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말합니 다. 그러므로 예언의 내용에는 개인의 사적인 판단과 표현 방법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대언자는 주께서 그의 입에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를 말하며, 처음에 전달받은 내용에 대해 전달자가 그 내용을 사사로이 변개하는 것은 금지됩니다. 만약 최초에 받은 말씀에서 덧붙이거나 빼거나 내용을 변개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전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와 대언자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감록과 같은 책을 예언서라고 하지만 대언서 라고 하지는 않으며, 노스트라다무스를 예언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를 대언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유의하여 신약성경 베드로후서 1장 20-21절 말씀을 살펴보겠 습니다. 개역: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304 바르게 읽는 성경

303 흠정역: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KJV: Knowing this first, that no prophecy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개역 성경은 prophecy 를 예언이라고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은 대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 의하면, 성경 기록의 prophecy 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다. 고 합니다. 즉 성경의 기록을 전달하는 사람이 자의적인 해석을 붙이거나 전달자가 자기 나름대로 풀이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21절에서는 그 prophecy 는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prophecy 는 개인이 자기 머릿속에서 지어낸 내용이 아니며 또한 성경 기록 내용에 사사로이 개입하여 자기 말을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에 나오는 prophecy 는 예언일까요, 대언일 까요? 이 말씀에서 prophecy 가 미래 일에 대한 기록(예언)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개인이 통찰력과 예지 능력을 사용하여 미래를 전망한 것을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기술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prophecy 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한 것 곧 주께서 그 입에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성경 말씀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prophet 은 대언자이 며 prophecy 란 대언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인 대언자를 선지자나 예언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언과 대언자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는 다음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 다.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삼하23:2).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신 18:18). 예언인가, 대언인가? 305

304 2. 선견자에서 대언자로 성경 기록에 의하면, 대언자 (prophet)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 이스라엘에 는 선견자 (seer)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개역: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삼상9:9) 흠정역: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여쭈려 할 때에 이같이 말하기 를, 오라, 우리가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더라. 지금 대언자라 부르는 사람을 예전에는 선견자라 불렀더라.) KJV: (Beforetime in Israel, when a man went to enquire of God, thus he spake, Come, and let us go to the seer: for he that is now called a Prophet was beforetime called a Seer.) 사무엘기상 9장 9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에 선견자(seer)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후에는 prophet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견자란 seer 즉 앞을 내다보는 자 를 말합니다. 원래 선견자의 역할은 사람들에 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부르는 용어를 선견자 (seer)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선견자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진 능력자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집안 문제를 가지고 오고, 길흉화복을 묻고, 장래 진로상담을 받으러 오는 부작용이 생긴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선견자가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개인의 미래나 알아봐 주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찾아주고 있으니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사무엘기상 9장 9절 앞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존귀한 사람이니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니 이제 우리가 거기로 가사이다. 혹시 그가 우리가 가야 할 우리의 길을 보여 줄까 하나이다, 하므로(삼상9:6) 사울이 자기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으려고 종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자 그의 종이 선견자(사무엘)에게 가서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선견자를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고 개인의 앞길을 가르쳐 주는 자 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내다보다 는 의미를 지닌 선견자(seer)라는 용어 대신에 prophe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seer 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자 이를 prophet 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과 같이 306 바르게 읽는 성경

305 선견자를 선지자로 바꾸었다면 이게 하나님께서 용어를 바꾸신 목적에 맞을까요? 선견자는 앞을 내다보는 자, 선지자는 미리 아는 자, 둘 다 같은 뜻인데 무엇이 달라졌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라는 말을 듣고서는 장래 일을 미리 아는 자 라고 여기고, 다들 장래 문제에 대해 상담을 받으러 올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견자(seer)라는 용어의 부작용을 아시고, 이것 때문에 선견자 대신 다른 용어로 바꾸셨다면, 새로운 용어에는 선견자처럼 미래를 내다보거나 앞날을 미리 아는 자라는 개념이 들어가지 않게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본래의 임무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prophe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그렇다면 prophet 이라는 단어는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라고 번역되어야 옳습니 다. 3. 환영받는 예언자, 미움 받는 대언자 (1)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예언자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나는 누구랑 결혼하게 될 지, 내일은 내가 산 주식이 오를 지 내릴 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지 안 좋을 지 등.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자기의 장래 일을 미리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잠 27:1). 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하되 역경을 당하는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또한 이것과 저것을 마주보게 두신 것은 사람이 자기 뒤에 일어날 일을 찾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전7:14).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느니라. 언제 그 일이 있을지 누가 그에게 말하겠느냐?(전8:7) 또한 어리석은 자는 말도 많으니라.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나니 그가 있은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그에게 알려 주겠느냐?(전10:14) 사람에게는 자기의 미래를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미래의 일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예언인가, 대언인가? 307

306 욕망을 비집고 들어가 마귀가 틈을 타서 점술이나 마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찰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마녀나 네가 소유할 이 민족들은 때를 관찰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너에 관하여는 주 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느니라(신18:10,14). 하지만 신명기 18장 10,14절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술을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술은 모두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서 마귀에게 영이 지배당한 자들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왕이 두 길의 머리 곧 길이 나뉘는 곳에 서서 점을 치고 자기 화살들을 빛나게 하며 형상들에게 묻고 간을 들여다보았느니라(겔21:21). 우리가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어떤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점치는 것으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더라(행16:16).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슬쩍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술사 들에게 구하라, 할 때에 백성이 마땅히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사8:19)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개인의 길흉화복이나 미래 일을 점치는 것을 금하셨음에 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출산, 입시, 취업, 승진, 이사, 선거 등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에게 물으러 갑니다.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점집 대신에 기도원을 찾아가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무당들에게 길흉화복을 묻거나 사업문제, 자녀문제, 진로문제를 상담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성경에서 엘리야가 아합의 손금을 봐 줬다거나 사도 바울이 베스도의 앞날을 예언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지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처럼 개인의 운세나 미래를 진단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의 장래 일을 알 수 없으며, 또한 그에게 미래를 알려줄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전10:14). 하지만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의 비뚤어진 욕망 때문에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무당들은 그들로부터 열렬히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308 바르게 읽는 성경

307 (2)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대언은 사람들의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주께 여쭙고자 하니 이들 말고 여기에 그분의 대언자가 없나이까? 하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가 그를 통해 주께 여쭐 수 있으나 그는 나에 관하여 좋게 대언하지 아니하고 나쁘게 대언하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하지 마소서, 하니(왕상22:7-8) 위 말씀을 읽어보면 대언이 장래의 길흉을 알려주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미가야라는 대언자를 미워했습니다. 만약 미가야가 예언을 했다면 아합이 그를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 다. 예언이란 단순히 미래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인데 왕이 그를 미워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미가야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가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하면 이렇게 될 것이고, 순종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아합은 주께 불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 것입니다. 미가야를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대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동쪽으로 가면 불길하다. 든가, 오뉴월에는 물을 조심하라. 거나, 네 아들이 이번 수능시험에 합격할 것이다. 라는 예언을 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신 전달했을 뿐입니다. 물론 성경의 대언 중에는 미래에 대한 예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빌론 군대가 유대 왕국에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주의 집을 헐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갈 것이라고 한 예레미야의 대언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신 예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어떻게 경영하고 다스릴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경영 방침을 대언한 것이지 미래 일을 알아맞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대언 중에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언자들과 사도들 이 전달한 성경 말씀이 모두 예언은 아닙니다. 예언인가, 대언인가? 309

308 4. 예언의 은사인가, 대언의 은사인가? 그러나 모두가 대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자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므로 그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또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전하리라(고전14:24-25). 고린도전서 14장 24,25절에 기록된 것은 예언일까요, 대언일까요? 만약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을 했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미래 일을 신기하게 알아맞히 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어보니 prophecy 를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죄를 깨달으며, 판단을 받고, 자기 마음에 있는 은밀한 것들이 드러나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 며,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고백하게 된다고 합니다. 왜 그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판단을 받고,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예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언하는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마음속에 숨은 죄가 드러나게 되어,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린도전서 14장 24.25절의 prophecy 란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 대언의 은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런 대언자나 대언의 은사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대언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더 이상 계시나 대언이나 대언자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거나 대언의 말씀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미 모든 성도들에게 완전한 성경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 성경 말씀 이외에 새로운 계시나 대언이 더 있다고 주장하면서 덧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계22:18,19). 310 바르게 읽는 성경

309 47. 가인은 왜 아벨을 죽였을까? 개역: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8) 흠정역: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 NIV: Now Cain said to his brother Abel, "Let's go out to the field." And while they were in the field, Cain attacked his brother Abel and killed him. KJV: And Cain talked with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세기 4장에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일어난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자기 아우 아벨을 쳐 죽인 사건입니다. 그 동안 저는 성경말씀에 기록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이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혹은 자기 아우를 시기하여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희 교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세기 강해를 준비하면서 그 살인 사건이 단순히 시기와 분노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NIV를 읽어보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우리가 들로 가자. 라고 말한 다음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아벨을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 다. 바른성경, 새번역, 공동번역, 가톨릭성경, 쉬운성경,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 NLT, NRSV, GNT 등은 모두 NIV와 같이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번역들은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 시리아역을 따른 것입니다. NIV를 비롯한 위와 같은 번역들을 따를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생깁니다. 첫째, 가인이 아벨에게 말한 내용은 Let's go out to the field. 라는 문장에 의해 완전히 가려져 버립니다. NIV에 의하면 가인이 말한 내용은 우리가 들로

310 가자. 라는 단순한 내용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에는 우리가 들로 가자. 라는 문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NIV는 의도적으로 가인이 아벨에게 말한 내용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엉뚱한 문장을 넣어서 덮어버렸습니다. 동생이 특별히 형에게 잘못한 것도 없고, 들로 가자고 하는 형의 말을 안 들은 것도 아니고, 그저 동생의 헌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관심을 보이셨을 뿐인데 과연 그게 동생을 죽일 만한 이유가 될까요? 둘째, NIV와 같은 번역을 따를 경우,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단순히 일시적인 분노의 감정과 순간적 충동에 사로잡혀 저지른 우발적 범행으로 평가하 게 만듭니다. 가인이 동생에게 들로 가자. 라고 말한 다음에 들에 데려가서 곧바로 동생을 죽였다는 겁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말한 것과 동생을 죽인 사건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격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에는 분명히 and it came to pass 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문장의 첫머리에 오거나 시간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과 함께 사용될 경우에는 대부분 이것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8절 말씀과 같이 서로 분리된 두 문장 사이에 올 때에, 특별히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을 때에는 글자 그대로 번역을 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를 그 뒤에 라고 번역했고, 한글킹제임스역은 번역을 생략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글킹: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과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니라. 흠정역: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 한글킹제임스역에 의하면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는 시점과 아우를 죽이는 시점이 분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가인의 살인은 동생과 말다툼하 다가 우발적으로 빚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흠정역 성경과 같이 번역할 경우, 가인이 동생 아벨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아벨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인은 아벨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 후, 기회를 보아 동생을 쳐 죽인 것이 됩니다. 어느 번역이 더 적합한지는 일단 이 글을 끝까지 다 읽고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인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헌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동생의 것에만 관심을 두신 그 일이 못마땅해서 분하게 여기고, 동생을 시기했다 면 가인은 하나님께 대해 아주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312 바르게 읽는 성경

311 못한 것이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고 시기하고 분노했다고 하면 가인은 하나님의 관심을 끌려고 애를 쓴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동생에 대한 시기심, 질투심에 사로잡혔거나,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좌절감에 사로잡혀 그런 살인 사건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 그는 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형제를 죽였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요일3:12). 성경은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인 것은 그가 저 사악한 자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행위는 악하되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고 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를 미워하며, 악한 자는 의로운 자를 미워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하였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 라(요15:19). 이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하여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3:20). 요약하자면, NIV와 같은 번역을 따를 경우 가인이 저지른 살인 사건은 충동적이 고 우발적이며, 가인이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그것을 얻지 못하자 그 좌절감이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 분노로 변하여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을 따를 경우, 가인의 살인은 계획적이고 의도적이었으며, 그가 동생에게 뭔가를 제안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동생은 자기 제안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마귀에게 속한 그는 동생의 의로운 삶을 증오하여 그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는 도대체 가인은 아벨에게 무엇을 말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는 가인이 아벨에게 말한 내용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NIV는 가인이 아벨에게 말한 내용이 드러날까 두려워 Let's go out to the field. 라는 문장으로 이를 덮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 말씀들을 통해 가인이 아벨에게 뭐라고 말했는지에 대해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증거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주신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가인은 왜 아벨을 죽였을까? 313

312 덮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 없는 짐승이 대신 피 흘려 죽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창3:21). 그리고 그들에게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자 그들을 위해서도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만들어 주었을 겁니다. 아들들이 쑥쑥 자라면 처음에 만들어준 가죽옷은 더 이상 맞지 않을 테고, 오래 입다보면 가죽옷도 낡아서 해어졌겠지요. 그러면 아담은 아들들을 위해서 또 새로운 가죽옷을 만들어 주었을 테고, 가인과 아벨은 자라면서 이런 광경을 많이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피를 흘려 드리는 희생예물에 대해서 배웠을 겁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창4:3), 청년이 된 가인과 아벨은 모두 피가 죄를 속한다는 것과 하나님께 헌물을 드릴 때에는 생명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 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과일, 곡식, 채소 등과 같은 땅의 열매를 가지고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는 가인이 그(마귀)의 열망(his desire, 창4:7)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속해 있는(요일3:12) 마귀의 욕망들(the lusts of your father, 요8:44)을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 사람들 눈에 보기 좋은 거짓 종교를 창안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인은 자기가 만든 거짓 종교, 인간적인 종교,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종교,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보여주는 종교, 희생의 피에 대한 믿음은 없는 종교를 자기 동생 아벨에게 강요했을 겁니다. 창세기 4장 8절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말한 내용은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 다. 가인이 아벨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벨은 계속 그것을 거부했으며,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자기 형 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가인은 아벨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계획을 세운 후, 둘이 들에 있을 때에 자기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이로써 가인은 처음으로 살인한 자가 되었고, 아벨은 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가 죽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대언하다가 죽었다는 것은 제 추측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이로써 창세로부터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 니, 그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눅11:50-51).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언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 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 50-51절 말씀에서 창세로부터 흘린 대언자들의 피를 언급하면서 최초의 대언자가 아벨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가 죽은 최초의 314 바르게 읽는 성경

313 대언자가 됩니다. 아벨이 피를 흘리며 죽을 때 그 자리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누가 그를 죽였습니까? 바로 자기 형 가인입니다. 아벨은 가인이 만들어낸 거짓 종교를 거부하고 형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창세기 4장 8절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는 형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서 순간적인 분을 참지 못하고 일시적 충동에 의해 자기 동생을 죽인 사건을 기록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한 가인이 만들어낸 거짓 종교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형에게 진리의 말씀을 대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 아벨의 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왜 아벨을 죽였을까? 315

314 48.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구원하신다? 개역: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욥22:30) 흠정역: 그분께서 죄 없는 자들의 섬을 구출하시리니 네 손의 순결함으로 말미암아 그 섬이 구출되리라, 하니라. KJV: He shall deliver the island of the innocent: and it is delivered by the pureness of thine hands. 만약 욥기 22장 30절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값없이 구원받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신다. 즉 죄가 있는 자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고 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거저 구원받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번역에 차이가 날까요? 해당되는 단어를 원어 사전에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원어 성경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한국어, 영어)로 된 성경을 제게 주셨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번 글에서 제가 원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원어 사전을 참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원어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취지에서 이 글을 전개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섬 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이 (스트롱코드 336)를 스트롱코 드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니다 (not)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트롱코드 사전을 따라서 해석을 하면 아래와 같이 됩니다. 죄 없는 자들 (아니다, not) 구출하시리니 = 죄 없는 자들이 아니라도 구출하시리니

315 스트롱코드 사전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킹제임스 성경 말씀 위에 믿음의 기초를 두지 않고, 원어 사전 등에 권위를 두고 그 위에 믿음의 기초를 두게 될 경우 여러분이 의지하는 그 기초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초들이 무너지면 의로운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시11:3) 언젠가는 흔들리고 무너질 원어 사전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인 성경 말씀에 믿음의 기초를 두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이 (스트 롱코드 336)를 예로 들어, 원어 사전의 함정이 어떤 것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원어 사전을 동원해서 에스더기 10장 1절을 해석해 봅시다. 개역: 아하수에로 왕이 그 본토와 바다 섬들로 공을 바치게 하였더라(에10:1) 흠정역: 아하수에로 왕이 땅과 바다의 섬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였더라. KJV: And the king Ahasuerus laid a tribute upon the land, and upon the isles of the sea. 개역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에는 저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원어 사전에 권위를 두신다면 저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이 모두 섬들 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바로 히브리어 이 (스트롱코드 336)이기 때문입 니다. 원어 사전에 따르면 저 부분을 아니다 (not)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따른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땅과 바다가 아닌 것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였더라. 아하수에로 왕이 땅과 바다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게 하였더라. 분명히 사전대로 해석했는데 과연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합니까? 아하수에로 왕은 인도에서부터 이디오피아까지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왕입니 다(에1:1).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이 그가 다스리는 대륙과 바다 섬들의 백성들에 게 조공을 안 받았다거나 바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옳을까요? 스트롱코드 사전에는 히브리어 코드 336번 단어의 용례에 AV - island 1; 1 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사전에 수록된 단어의 의미는 not 이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이 단어를 섬 (island)이라고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전을 신뢰하지 말고 킹제임스 성경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전을 신뢰하시는 분은 한영사전을 동원해서 다음 문장을 영어로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구원하신다? 317

316 -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 이 나쁜 녀석,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 따끈한 매운탕 국물이 아주 시원합니다. 아마 한국어의 용례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 한영사전만 가지고 저 문장을 번역했다가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영어 문장이 만들어질 겁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그 언어가 사용되던 시대의 문화와 풍습, 어휘의 용법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들을 번역자로 사용하셨다면 그들에게 성경 말씀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주셔서 그분의 말씀이 온 세상에 바르게 전해지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욥기 22장 30절 말씀은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신다. 는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죄 없는 자들의 섬을 구출하신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이를 증언하고 있고 에스더기 10장 1절 말씀에서 사용된 용례가 이를 지지합니다. 이왕 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스트롱코드 336번에서 파생된 단어, 스트롱코드 338번 단어 이 는 섬에 사는 야생동물 (wild beasts of the islands)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섬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는지 섬은 빼버리고 그냥 시랑이라고 만 번역했습니다(사13:22). 개역: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사13:22) 섬들의 들짐승들이 그들의 황폐한 집에서 부르짖으며 그들의 좋은 궁궐에서는 용들이 부르짖으리라. 그녀의 때가 가까이 이르렀은즉 그녀의 날들이 연장되지 아니하리라. KJV: And the wild beasts of the islands shall cry in their desolate houses, and dragons in their pleasant palaces: and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개역 성경은 섬들의 들짐승들 에서 섬을 삭제하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용들 (dragons)은 들개로 둔갑시켰습니다. 개역 성경은 용들 의 정체를 숨겨주려 고 이것을 뱀(신32:33), 이리(욥30:29), 시랑(시44:19), 들개(사13:22), 악어(겔 29:3) 등으로 변신시켰지만, 킹제임스 성경에는 용의 정체가 모두 다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34장 14절에서도 개역 성경은 섬의 들짐승들(스트롱코 318 바르게 읽는 성경

317 드 338번)에서 섬이라는 단어를 빼고 번역합니다. 개역: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사34:14) 흠정역: 사막의 들짐승들도 섬의 들짐승들과 만나며 사티로스가 자기 동료들을 부르고 날카롭게 외치는 올빼미도 거기서 안식하며 자기를 위하여 안식처를 찾고 KJV: The wild beasts of the desert shall also meet with the wild beasts of the island, and the satyr shall cry to his fellow; the screech owl also shall rest there, and find for herself a place of rest. 이사야서 34장 14절에서 개역 성경이 이리라고 번역한 것도 실제로는 섬의 들짐승들(히: 이, 스트롱코드 338번)입니다. 시랑이나 이리라고 하는 것은 wolf 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제에브 (스트롱코드 2061)가 따로 있습니다(창49:27). 베냐민은 이리(wolf)같이 먹이를 강탈하리니 아침에는 탈취한 것을 먹고 저녁에는 노략한 것을 나누리로다(창49:27). 그리고 개역 성경은 이사야서 34장 14절에서도 섬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사티로스(반은 염소, 반은 사람인 잡종 괴물)를 수염소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에는 드래곤, 사티로스, 베헤못, 유니 콘, 리워야단 등의 생물들이 그대로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올바른 성경 말씀에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를 두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원어 사전이나 주석들이 킹제임스 성경과 충돌한다면 과감하게 그런 책들을 버리고 킹제임스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구원하신다? 319

318 49. 도둑들은 낮에 무엇을 할까? 개역: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욥24:16) 흠정역: 그들은 대낮에 자기를 위하여 집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어두워지면 땅을 파서 집들을 뚫으며 빛을 알지 못하나니 KJV: In the dark they dig through houses, which they had marked for themselves in the daytime: they know not the light. 땅을 파서 다른 사람의 집에 은밀하게 침입하는 자들은 아마 도둑들인 것 같습니다. 강도라면 굳이 집에 침입할 필요 없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폭력으로 금품을 빼앗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도둑들은 낮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요? 개역: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흠정역: 그들은 대낮에 자기를 위하여 집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개역 성경은 욥기 24장 16절에서 그들이 낮에는 문을 닫고 있다고 했고, 흠정역 성경은 그들이 대낮에는 자기들이 밤에 침입하고자 하는 집들에 표시를 해 둔다고 했습니다. 어떤 번역이 맞는지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읽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they had marked for themselves in the daytime. 라고 하여, 그들이 낮에는 집에 표시를 해 둔다고 했습니다. 원래 이 부분의 히브리어 단어 하탐 은 밀폐하다, 봉하다, 끝내다, 표시하다, 멈추다 등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문을 닫다 라고 번역하지 않고, 표시하 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봉하다 (seal, seal up)라는 뜻으로는 24번 사용된 반면, 표시하다 라는 의미로는 딱 한 번 사용되었는데 그 한 번이 바로 이번 욥기 24장 16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왜 이 구절에서만 보편적인 의미인 봉하다 대신에

319 잘 안 쓰이는 표시하다 (marked)를 사용했는지 저 역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 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을 동원하고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집에 침입하여 물건을 훔치고자 하는 도둑들은 낮에 무엇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개역 성경의 표현처럼 낮에는 문을 닫고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냥 단순히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훔치는 좀도둑이라면 낮에 실컷 자고 밤에 활동해도 지장이 없겠지요. 하지만 성경 본문은 어두워졌을 때 집을 뚫고 침입하는 도둑에 대한 이야깁니다. 집을 뚫자면 그 집이 어디에 있으며, 집안 구조는 어떠하며, 어디를 뚫어야 할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낮잠만 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낮에는 미리 뚫고자 하는 집에 대해 정찰하고 표시를 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이란 영화 중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엄한 규율을 강조하는 선생 님에게 가르침을 받는 아마드가 실수로 짝꿍의 숙제노트를 집에 가져오게 되는데, 한 번만 더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던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겁이 난 아마드는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집에서 한참이나 먼 그리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친구 네마자데의 집을 찾아 한참을 헤매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란의 집들이 얼마나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은 얼마나 복잡한지 실감이 날 겁니다. 그처럼 복잡한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어떤 집을 밤에 뚫고자 한다면 목표물인 집에 표시를 해 두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집을 다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 지역 도둑들의 문화입니다. 욥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아라비아의 우스 땅인데(욥1:1), 옛날 아라비아의 도둑들은 밤에 다른 사람의 집을 뚫기 위해 낮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잘 모른다면, 아라비아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모은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아마 아라비안나이트 를 모르시는 분은 없겠지요? 천일야화라고도 불리는 아라비안나이트 는 문학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옛날 아라비아의 정치, 종교, 상업, 문화, 풍습 등에 대해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페르시아부터 인도까지를 다스리는 샤리야르 대왕 시대인데, 세헤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배경은 샤리야르 대왕 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 된 고대의 이야기들입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솔로몬이 나 아브라함까지 등장합니다. 저는 어린이용으로 나온 동화책 이외에 국어대사전 크기의 큰 책 3권으로 구성된 완역판으로도 읽어보았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도둑들은 낮에 무엇을 할까? 321

320 결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풍습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참고자료로만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라비안나이 트 중에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Now we have found the man who knows our secret. We will put cross on the door of Ali Baba s house.then we will go and get our captain. He will kill Ali Baba. (이제 우리는 우리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를 찾았다. 우리는 알리바바의 집 문에 십자 표시를 해 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돌아가 두목을 데리고 오면 그가 알리바바를 죽일 것이다.) When Ali Baba s servant saw the cross on the door, she was frightened. Someone wants hurt my master, she thought. I will put across on every door in the town. That night the captain and the thieves came to town to kill Ali Baba. They could not find his house because there was a cross on every house. (알리바바의 하녀는 문에 있는 십자 표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군가가 내 주인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을의 모든 문에 십자 표시를 남겨야겠다. 그날 밤 두목과 도둑들이 알리바바를 죽이기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그들은 그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집에 십자 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를 읽어보면 알리바바의 집에 침입하기 위해 서 두목은 부하 한 명을 보내 알리바바의 집을 알아내고 그 집에 표시를 해 두게 합니다. 그리고 밤에 그 집을 뚫기 위해 찾아갑니다. 복잡한 골목과 비슷비슷 하게 생긴 집들 중에서 목표로 하는 어떤 집을 밤중에 정확하게 찾아가서 뚫기 위해 낮에 그 집에 표시를 해 두는 것, 이것이 당시 아라비아 지방의 도둑들이 낮에 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욥기 24장 16절 말씀이 그 당시 아라비아 지방의 문화를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 다. 대낮에 자기를 위하여 집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어두워지면 땅을 파서 집들을 뚫으며(욥 24:16) 322 바르게 읽는 성경

321 50. 하나님이 강한 자를 보존하시는가?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욥24:22) NIV: But God drags away the mighty by his power; though they become established, they have no assurance of life. 흠정역: 또 자기 능력으로 강한 자도 끌어들이나니 그가 일어서면 아무도 생명을 장담하지 못하느니라. KJV: He draweth also the mighty with his power: he riseth up, and no man is sure of life. 1.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인가, 악인인가? 욥기 24장 22절의 번역은 각 역본마다 다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들은 모두 이 구절의 행위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NASB는 주어를 He 라고 했지만, 문장 중간에 그의 능력으로 (by His power) 라는 부분에 He 를 대문자로 표기하여 이것을 하나님으로 읽도록 했습니다. 우선 욥기 24장의 주제를 살펴보면, 이 장은 욥이 세상에 존재하는 폭력과 악행에 대해 불평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부터 22절까지는 그런 악행들을 나열하고 있으며, 23-25절은 비록 지금은 악인들이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마침내 낮아지고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욥기 24장 22절에 또 (also)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also 라는 단어는 이 문장이 바로 앞에 나온 문장과 연결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주어의 인물이 앞의 문장에서 나온 어떤 행위뿐만 아니라 이번 문장에 서 나온 행위도 또한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는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사람을 죽이는 자, 간음하는 자, 남의 집을 뚫는 자 이야기가 나오고(14

322 절-16절), 그들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17절-20절), 21절은 다시 그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출산하지 못하는 불임 여인을 학대하며 과부에게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욥24:21) 욥기 24장 21절의 행위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악인입니까? 출산하 지 못하는 불임 여인을 학대하고, 과부에게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하여금 자녀들을 거느리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 다(시113:9).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야곱의 아내 라헬,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삼손을 낳은 마노아의 아내, 침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등 수태하지 못하던 많은 여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또 수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사 자녀들을 거느리고 기뻐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시113:9).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분입니다(신 10:17-18).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과부를 돌아보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 너희 하나님은 신들의 신이시요, 주들의 주시며 위대하시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니라. 그분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대가를 받지 아니하시고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위해 재판을 집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나니(신10:17-18) 따라서 우리는 욥기 24장 21절에 나오는 인물 즉 불임 여인을 학대하고 과부에게 선을 행치 않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인이 21절과 같은 짓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또한 (also) 22절에 나오는 일도 행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22절의 주어인 그 (He) 역시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21절에서 나쁜 짓을 저지른 그 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는가, 강한 자들을 끌어들이는가? 욥기 24장 21절의 주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 구절에 나오는 다른 단어들의 번역도 계속해서 꼬이게 됩니다. 개역 성경은 주어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킨다. 고 했고, 킹제임스 성경은 그(악인)가 자기 능력으로 강한 자를 끌어들인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강한 자 (the mighty)란 누구일까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지도자나 324 바르게 읽는 성경

323 실세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 지역의 실세는 욥 자신입니다. 욥기 29장을 읽어보면, 욥은 일반 백성들은 물론 통치자들과 귀족들조차도 그를 존경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축복하였고, 그가 재판장이 되어 공의를 행하며,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지켜주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욥이 말하는 진짜 강한 자 (the mighty)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악인들이 자기들의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자 는 누구일까요? 욥은 족장 시대 이전에 살던 사람으로 추정되므로, 그 시대의 강한 자를 찾으려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만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관련되는 구절을 두 개 발견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창6:4). There were giants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also after that, when the sons of God came in un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are children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ich were of old, men of renown. 그가 주 앞에서 강한 사냥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무개는 주 앞에서 강한 사냥꾼인 니므롯 같다, 하였더라(창10:9). He was a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wherefore it is said, Even as Nimrod the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창세기 6장 4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들 이 있었는데 그들이 강력한 자들 (mighty men)이었습니다. 창세기 10장 9절에서 는 노아의 홍수가 끝난 뒤에 세워진 인간 정부의 지도자 니므롯이 강한 사냥 꾼 (the mighty hunter)이었다고 합니다. 욥은 거인들에 대해서는 노아의 아들들 로부터 전해 들었을 테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그가 속한 민족이 동쪽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니므롯과 같은 강력한 용사 (the mighty)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욥기 24장에 등장하는 악인 곧 땅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력한 자도 끌어들였습니다. 그 강력한 자들이 거인들이 건, 고대의 용사들이건 간에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 강력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그들을 끌어들일 때 쉽게 한 패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강한 자를 보존하시는가? 325

324 3. 죽을 자가 일어나는가, 아무도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가? 맨 앞부분의 주어를 잘못 번역하는 바람에 결국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의 후반부를 완전히 뜻이 반대가 되도록 번역해 버렸습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자들은 주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분이 강한 자들을 보존한다고 했고, 보존한다고 했으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난다. 라고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 (the mighty men)을 그분의 능력으로 보존하셨는지, 아니면 그분의 능력으로 강한 자들을 땅에서 홍수로 쓸어버리셨는지는 창세기 6장과 7장의 노아 홍수 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서 면 아무도 생명을 장담하지 못한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의 그는 악인들 이 끌어들인 강한 자를 말합니다. 강한 자가 일어서면 왜 아무도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느냐 하면, 첫째는 그 강한 자들이 너무도 강해서 아무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째로, 그 강한 자들은 힘만 강한 것이 아니라 본성이 사악하고 난폭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당시에는 그들로 인해서 땅에는 폭력이 가득했습니다(창6:11). 땅도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폭력이 땅에 가득하더라(창6:11). The earth also was corrupt before God,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다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에(23절), 그들은 잠시 높여지겠지만 곧 사라지고 낮아지고 제거되고 잘려나갈 것입니다(24절). 비록 욥이 말하고 있는 욥기 24장 25절 당시에는 그렇게 되지 않아서(25절 상), 그 당시에는 악인들과 강한 자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겠지만, 욥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25절 하). 개역 성경은 욥기 24장 22절에서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 시니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거인 족속이나 니므롯 같은 강한 자들을 보호하는 분입니까? 개역 성경은 또 (also)라는 단어를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그 앞에 나오는 21절과 연결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욥기 24장 22절 후반부를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란, 욥이 욥기 24장에서 고발하고 있는 악인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자들, 즉 강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하나님이 강한 자들을 감싸주기 때문에 326 바르게 읽는 성경

325 죽어야 마땅한 그들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로 가 버린 것입니까? 욥기 24장 전체의 문맥에 맞게, 21절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게,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한 23-25절과 의미가 통하게 하려면, 흠정역 성경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능력으로 강한 자(the mighty)도 끌어들이나니 그가 일어서면 아무도 생명을 장담하지 못하느니라(욥24:22). 하나님이 강한 자를 보존하시는가? 327

326 51. 하나님의 기운인가, 하나님의 영인가? 개역: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27:3) 흠정역: 내 호흡이 내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내 콧구멍에 있을 동안에는 KJV: All the while my breath is in me, and the spirit of God is in my nostrils; 욥기 27장 3절에서 개역 성경은 하나님의 영 (the spirit of God )을 하나님의 기운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체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어떤 영향력이나 기운, 에너지일까요?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영원토록 거하신다는 진리의 말씀(요14:16; 고전3:16)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집회 때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 받아라! 라고 외쳐 댑니다. 그들은 성령님을 물질로 간주하기에 성령을 받은 위에 또 받아야 양이 많아져서 충만하게 된다고 여기고, 심지어 어떤 집회에서는 인도자나 설교자가 성령을 부어준다면서 성령님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자기 입술 가까이 대고서는 쉬익~ 쉬이~ 라고 바람 소리를 내면서 마치 자기가 성령님을 부리고 다스려서 부어주는 자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을 물질이나 에너지로 간주하기 때문에 성령을 많이 받아야 하고, 이미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도 또 성령을 받고 또 받아야 성령으로 충만해진다고 믿고 또한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은 양으로 측량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며, 사용하고 나면 닳거나 소모되는 기운이나 에너지가 아니며, 반 컵의 성령에 반 컵의 성령을 더해서 한 컵에 가득 차고 넘치는 성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살아계신 인격체로서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327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 (롬8: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신도들은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은 단지 어떤 힘이나 기운으로만 여깁니다. 또한 단전호흡을 가르치는 단학수련자들 이나 뉴에이지 사상가들도 성령님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우주 에너지, 천지 기운 등으로 부릅니다. 아래 글은 단학수련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기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린다. 프라나(Prana), 바이탤러티(Vitality), 오로라(aurora. 극광( 極 光 )), 바이오플라 스밀 에너지(Bioplasmic energy), 생명에너지, 생체에너지, Mitgen선, 생명의 힘, 에텔, 생명자기(Human magnetism), 영적유동체, 생명의 기운, 우주 기운, 영, 코스믹 에너지(Cosmic energy), 생명 자기적 파동, 성령, 하나님의 힘, 생명선, 천지 기운, 염력, 우주질( 質 ), 우주의식, 우주파동, 지상의식, 빛, 광명, 실상. 생명의 싹, 생명의 씨앗 등. 이렇게 용어는 다르지만 결국 氣 를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며, 슬퍼하기도 하시고,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기도 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일을 행하기도 하시는 인격체이심을 보여줍니다. (1) 성령님은 지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가르치시며(요14:26),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6:13), 하나님의 안에 있는 것들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고전2:11).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요14:26).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기운인가, 하나님의 영인가? 329

328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요16:13).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2) 성령님에게도 감정이 있으며 그분은 감정을 느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슬퍼하기도 하시며(엡4:30), 간절한 갈망도 갖고 계십니다(약4:5).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 4:30). 너희는 성경 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3) 성령님은 그분의 의지를 갖고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러서 일을 맡기기도 하시며(행13:2) 사역의 방향도 결정하 십니다(행16:6).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행13:2) 이제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닌 뒤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아시아에 서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 하시더라(행16:6). 물질, 기운, 에너지와 같은 것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감정을 느끼거나, 독자적인 의지를 가질 수가 없지만, 성령님께서는 인격체이시므로 이런 것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 27장 3절을 번역할 때, 개역 성경처럼 성령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에너지 나 기운 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330 바르게 읽는 성경

329 52. 욥의 살인가, 욥의 고기인가? 개역: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욥31:31) NIV: if the men of my household have never said, Who has not had his fill of Job s meat? 흠정역: 혹시 내 장막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오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만족할 수 없노라, 하지 아니하였던가. KJV: If the men of my tabernacle said not, Oh that we had of his flesh! we cannot be satisfied. 1. 살(flesh)과 고기(meat) 욥기 31장 31절에서 킹제임스 성경은 그의 살 (flesh)이라고 하는 반면, 다른 역본들에서는 주인의 고기, 욥의 고기 (meat)라고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flesh 는 살, 육체, 친척, 고기 등을 의미하고, meat 는 주로 음식, 식사를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음식 헌물(meat offering)은 고운 밀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얹은 것이지 고기를 헌물로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개역 성경과 NIV에서 사용된 주인의 고기(Job s meat)는 욥의 살로 만든 고기 요리가 아니라 욥이 사람들에게 베푸는 고기, 음식을 말합니다. 만약 욥의 장막 사람들이 욥으로 만든 고기를 배부르게 먹었다면, 욥은 지금 뼈다귀만 남은 상태일 테니 욥기 31장 31절을 말로 중얼거릴 수도 없겠지요. 그런데 성경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정말 욥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쇠고기, 양고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킹제임스 성경은 그의 살(욥의 살)이라고 합니다. 다음을 보면 좀 더 의미가 분명해질 겁니다. 2. 욥의 고기를 먹었는가, 욥의 살을 먹었으면 인가? 욥기 31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부분의 문장들이 If 로 시작하는 가정법

330 문장임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헛된 것과 함께 걸었다면, 내 발이 속임수로 치달았다면,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벗어났다면,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속았다 면, 내가 종들의 사정을 멸시하였다면, 내가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다면, 내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하게 하였다면, 내가 나 혼자 빵을 먹고 아비 없는 자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런 가정에 대한 욥의 대답은 나는 그런 적 없다.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라는 겁니다. 31절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욥의 장막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가 그의 살을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까지는)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저는 그들이 욥에 대해 그런 불만을 품지 않았으리라 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장막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원망들을 일을 한 적이 없었고(욥31:31), 지나가는 행인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욥31:32). 욥은 자기 장막에 거하는 남종이나 여종의 사정을 멸시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욥31:13-14). 만일 내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다툴 때에 내가 그들의 사정을 멸시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분께서 돌아보실 때에 내가 무어라 대답하겠느 냐?(욥31:13-14) 그러므로 욥의 장막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가 욥의 살을 먹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품었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욥은 혹시라도 내 장막에 속한 사람들이 내 살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면(if),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31장은 욥이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자기는 누구에게도 원망들을 만한 일이 없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게 번역을 하자면, 욥이 그의 장막에 속한 사람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내용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332 바르게 읽는 성경

331 53. 타인인가, 아담인가? 개역: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욥31:33) 흠정역: 혹시 내가 내 불법을 내 품에 숨김으로 아담같이 내 범죄들을 덮었던가. KJV: If I covered my transgressions as Adam, by hiding mine iniquity in my bosom: 욥이 살고 있는 곳은 아라비아의 우스 땅이며 우스라는 이름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등장합니다(창10:23).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욥이 살던 시기가 노아 홍수 이후에서 족장 시대 이전 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아담 - 므두셀라 - 노아 이렇게 전해졌을 테니 욥에게 있어서 아담의 이야기는 까마득히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4-5명만 거치면 전해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래서 욥기 31장 33절에서 욥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행한 일에 대해 아주 자연스럽게 언급할 수 있는 겁니다. 개역 성경이나 NIV 등은 이 부분의 아담을 일반 사람을 뜻하는 men 으로 바꾸었지만,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원래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Adam (고유명사, 최초의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욥은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죄를 지은 후, 자기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려고 했고 하나님 앞을 떠나 숨으려고 했던(창 3:7-8) 사실을 언급하며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 두 사람의 눈이 열리매 그들이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을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더라. 그들이 그 날 서늘한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하나님 앞을 떠나 동산의 나무들 가운데 숨으매(창3:7,8) 욥기 31장 33절 말씀에 사용된 아담(히, 아담, 스트롱코드 121번)은 언제나 최초의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었고, 킹제임스 성경에서도 모두 고유명사 Adam 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반면 호세아서 6장 7절에서 개역 성경과

332 NIV는 일반명사인 사람들 (men)을 아담 (Ada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호6:7) 흠정역: 그들은 사람들같이 언약을 어기며 거기서 나를 대적하고 배신하였도다. KJV: But they like men have transgressed the covenant: there have they dealt treacherously against me. 호세아서 6장 7절에서 개역 성경이 언급하는 아담(히, 아담, 스트롱코드 120번) 이라는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서 man 으로 408회, men 으로 121회, Adam 으 로는 13회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입니 다. 호세아서 6장에는 신실하시며 늦은 비와 이른 비처럼 일정하신 하나님과 아침 구름 같고 사라지는 새벽이슬 같이 변하기 쉬운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 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때, 호세아서 6장 7절의 사람들 (men)은 창세기의 아담과 같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 즉 쉽게 언약을 어기는 사람들 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람들같이 언약을 어기며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이라는 말이 최초의 사람 아담(Adam)을 의미할 때도 있고 일반적인 사람(man 혹은 men)을 의미할 때도 있는데, 만약 이것이 헷갈린다면 킹제임스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334 바르게 읽는 성경

333 54. 하나님은 사악한 왕인가? 개역: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욥34:18) 흠정역: 왕에게, 당신은 사악하다, 하는 것이 합당하냐? 또 통치자들에게, 당신들은 경건치 아니하다, 하는 것이 합당하냐? KJV: Is it fit to say to a king, Thou art wicked? and to princes, Ye are ungodly? 한 문장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다 보면, 번역자에 따라 표현이 약간씩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문장에 있던 단어를 없애거나, 새로 추가하거나, 다른 단어로 바꿔치기하거나, 본래 내용을 훼손하게 되면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할 때에는 이런 삭제, 첨가, 수정 등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 34장 18절 말씀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여러 역본들을 비교해 보면,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내용의 본질적인 부분이 변개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역: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고 한다. 왕은 비루한 존재다. 흠정역: 왕에게 사악하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냐? 왕에게 사악하다고 하면 안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왕에게 사악하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냐? 즉 왕에게 사악하다 고 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하는데 반해 개역 성경은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고 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왕에 대하여 서로 상반되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이 두 가지 번역은 결코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두 가지로 기록하셨을 리는 없을 테니 저 중에서 한 쪽은 분명히 잘못된 번역일 겁니다. 어느 번역이 옳은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욥기 34장 18절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왕 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전후 문맥을 통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34 의를 미워하시는 분이 다스리시겠느냐? 지극히 의로우신 분을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욥34:17) 그 앞에 나오는 욥기 34장 17절에는 다스리는 분 이 나옵니다. 다스리는 분이란 곧 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의하면, 그 다스리시는 분은 지극히 의로우신 분이라고 합니다. 왕으로서 다스리시며 지극히 의로우신 분이라 면 이는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신32:4). 그분은 반석이시요 그분의 일은 완전하니 그분의 모든 길은 공의이니라. 그분은 진실하 고 불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의로우시고 올바르시도다(신32:4).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 욥기 34장 19절을 살펴보면, 그분은 통치자들을 외모로 받지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중히 여기지 않으시며 사람들을 다 자신의 손으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통치자들을 외모로 받지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중히 여기지 아니하시 는 그분께 그리 말할 수 있겠느냐? 그분께서 그들을 다 자신의 손으로 지으셨느니라(욥 34:19). 욥기 34장 19절 말씀이 말하는 이런 왕은 누구일까요? 인류 역사 상 훌륭한 일을 한 왕들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만든 왕은 사람들 중에서는 결코 나온 적이 없습니다. 이 왕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신10:17), 가난한 자를 건지시며(시35:10),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만드신 분이십니다(잠22:2). 주 너희 하나님은 신들의 신이시요, 주들의 주시며 위대하시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니라. 그분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대가를 받지 아니하시고(신 10:17) 내 모든 뼈가 말하기를, 주여, 누가 주와 같으니이까? 주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훨씬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참으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시니이다, 하리이다(시35:10).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만나거니와 주는 그들 모두를 만드신 분이시니라(잠 22:2). 욥기 34장 17절과 19절은 이 왕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맥 가운데서 등장한 18절의 왕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엘리후는, 그렇게 공의로운 왕이신 하나님께 사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겠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336 바르게 읽는 성경

335 당연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가리켜 사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역 성경은 번역하기를 그는 왕에게 비루하다고 한다. 고 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구절에서의 왕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왕이신 하나님께 감히 비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개역 성경의 그 는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 까?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가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께 그런 불경한 표현을 쓸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까? 개역 성경에서 사용한 비루하다 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비루하다: [형용사]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하자면, 왕이신 하나님은 성질이 너절하고 더러운 존재 가 되어 버리며, 또한 하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존재 즉 하나님보다 높은 존재(개역 성경의 그 )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엘리후의 말처럼, 왕이신 하나님을 가리켜서 사악하다 (개역 성경,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고 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욥기 34장 18절 말씀을 번역할 때, 개역 성경과 같이 하나님을 가리켜서 사악하다 혹은 비루하다 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악한 왕인가? 337

336 55. 분노로 벌을 주셨는가, 안 주셨는가? 개역: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 로(욥35:15) 흠정역: 그러나 이제 그렇지 못하므로 그분께서 친히 분노하사 벌을 주셨느니라. 그럼에도 그는 극심한 곤경 속에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나니 KJV: But now, because it is not so, he hath visited in his anger; yet he knoweth it not in great extremity: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경 말씀을 이중으로 기록하셨을 리는 없는데 욥기 35장 15절 말씀에서 개역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이 약간 다른 정도가 아니라 내용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개역: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다. 흠정역: 그분께서 친히 분노하사 벌을 주셨다. 킹제임스 성경에 의하면, 엘리후는 고난 받는 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분노하사 벌을 주셨는데도 욥은 그런 극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그렇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까지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한다. 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반면, 개역 성경은 하나님이 욥에게 벌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욥이 헛되이 지식 없는 말을 한다. 고 합니다. 어느 번역이 옳을까요? 물론 여기서 엘리후의 지적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엘리후는 욥이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욥에게 진노하사 벌을 주셨다고 했는데, 욥은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눈에는 욥의 고난이 하나님께 받는 징벌로 보였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욥기 35장 15절을 말하고 있는 엘리후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은 벌(고난)을 받았을까요, 받지 않았을까요?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이겠지만 엘리후의 말을 통해서 재확인해 보겠습니다.

337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대답들이 사악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욥34:36). 그러나 그대가 사악한 자가 받을 심판을 이루었으니 공의와 정의가 그대를 붙잡는도다 (욥36:17). 엘리후는 분명히 욥이 고난당하는 것, 시험받는 것(be tried, 시련), 하나님으로 부터 진노의 형벌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입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벌을 주지 아니하셨다 라는 말이 나왔을 리는 없습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이 네게 진노하여 벌을 주셨는데도 어찌 네 잘못을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므로 욥기 35장 15절 말씀은 비록 엘리후가 발언한 내용은 잘못되었지만, 엘리후는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욥에게 벌을 주셨다. 라 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 맞습니다. 분노로 벌을 주셨는가, 안 주셨는가? 339

338 56. 뇌물이나 속전인가, 대속물인가? 개역: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욥36:18) 흠정역: 진노가 임하였으니 그대는 주의하여 그분께서 그대를 쳐서 제거하지 아니하시 도록 하라. 그때에는 큰 대속물도 그대를 건지지 못하리라. KJV: Because there is wrath, beware lest he take thee away with his stroke: then a great ransom cannot deliver thee. 욥기 36장 18절을 여러 다른 번역들과 대조하며 읽다 보면 두 가지 상반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여기서 분을 내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뇌물이나 속전인가, 아니면 대속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누가 분을 내는가? 욥기 36장 18절에서 분격, 진노를 발하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개역 성경은 욥이 분을 낸다고 했고, 개역개정 성경은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 하며, 우리말성경은 엄청난 분노로 일을 그르치지 말라. 고 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번역이 옳은지는 그 앞에 나오는 말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욥기 36장은 엘리후가 욥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엘리후는 사람들이 불순종하면 망하고 죽게 될 것이며(12절), 위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될 것인데(13절), 당신(욥)은 사악한 자가 받을 심판을 이루었으니 (17절) 공의와 정의가 그대를 붙잡았다(17절)고 합니다. 즉 엘리후의 말은 욥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그분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욥기 36장 18절의 진노는 누구의 진노를 말합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붙잡혀 심판을 받게 된 욥이 진노한다는 것입니까,

339 아니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까? 전후 문맥을 통해서 살펴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욥기 36장 18절 말씀에서 엘리후가 말하는 진노하시는 이 는 하나님입니다. 2. 뇌물이나 속전인가, 대속물인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를 구원하기 위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 재물, 뇌물, 속전 등과 같은 것들일까요, 죄를 위한 대속물일까요? 욥기 36장 18절에 나오는 ransom 을 뇌물이나 속전이라고 해야 할지, 대속물이라고 해야 할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역개정, 새번역, 우리말성경, 공동번역, 가톨릭역, 쉬운성경, 현대어 성경 등은 하나같이 이것을 돈, 뇌물, 속전, 재물, 재산 등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대속물 (ranso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정: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욥36:18) 새번역: 욥 어른은 뇌물을 바쳐서 용서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속전을 많이 바친다고 하여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 엄청난 분노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속전을 많이 바친다고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 이제 바짝 정신을 차리시오. 돈에 눈이 흐려져서는 안 되오. 뇌물을 듬뿍 바친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려도 안 되오. 가톨릭: 진노가 넘친다 하여 반항으로 이끌리지도, 속전이 넉넉하다고 하여 현혹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쉬운: 당신이 혹시 하나님의 진노에 빈정대며 대들까 겁이 나는군요. 그렇게 되면, 아무리 큰 예물을 바치더라도 구원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현대어: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뇌물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또한 재산 때문에 엉뚱한 길로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위에 열거한 구절들은 당신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분노를 나타내어 일을 그르치면, 그때에는 아무리 많은 속전이나 뇌물을 바쳐도 소용없습니다. 라 는 내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욥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분노를 발하지 말고, 몸을 사리고 마음을 겸손하게 낮춘 다음에 뇌물이나 속전을 바치면 하나님 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처럼 로마 카톨릭 사본을 따르는 뇌물이나 속전인가, 대속물인가? 341

340 번역들은 이것을 돈, 뇌물, 속전 등으로 번역하였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돈, 뇌물, 속전을 바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면죄부 교리도 이런 잘못된 성경본문과 잘못된 번역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아예 대속이라는 개념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다가 하나님을 조소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네가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너를 구원하실 분을 대적하지 말아라(욥36:18, 현대인). 영어 역본들을 살펴보면 KJV, NKJV, NASB는 이 부분을 대속물 (ransom)이라 고 번역했는데, 그 외 다른 역본들은 모두 이를 재산 (riches, NIV, MSG, GNT), 부 (wealth, NLT)라고 번역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와 그분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 즉 대속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신학적으로 우수하며 올바른 교리를 세우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진노가 임하였으니 그대는 주의하여 그분께서 그대를 쳐서 제거하지 아니하시도록 하라. 그때에는 큰 대속물도 그대를 건지지 못하리라(욥36:18). 원래 성경에 나오는 대속물 (ransom)이란, 사전적 의미로 죄수, 노예, 유괴된 사람, 저당 잡힌 물건들을 값을 주고 되찾아오는 것, 혹은 그렇게 되찾아 오는 데 드는 비용,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수단 을 말합니다. ransom 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신약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20:28, 참조 막10:45, 딤전2:6). 물론 납치범에게 잡혀있는 인질이나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를 돌려받기 위해서나, 종으로 팔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돈으로 몸값을 치르고 그를 구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돈, 뇌물, 속전 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wages)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에 342 바르게 읽는 성경

341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생명 대신 어린 양을 희생물로 바치고 그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들에 대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생명을 바친 이 어린 양을 대속물이라 고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시고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히9:28). 성경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물 (ransom)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0:28; 막10:45). 인질, 포로, 노예 등은 돈을 주고 해방시킬 수 있겠지만, 죄인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돈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대속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욥기 36장 18절에서와 같이 죄로 인한 심판과 형벌로부터 사람을 구해내는 것을 돈, 재물, 재산, 뇌물, 속전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뇌물이나 속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은이나 금과 같은 것으로는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대속물이 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뇌물이나 속전인가, 대속물인가? 343

342 57. 들소인가, 유니콘인가? 개역: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욥39:9) 흠정역: 유니콘이 기꺼이 너를 섬기겠으며 혹은 네 여물통 곁에 머물겠느냐? KJV: Will the unicorn be willing to serve thee, or abide by thy crib? 욥기 39장 9-12절은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 냐? 일반적으로 야생의 들소는 성미가 급해서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는 들소를 길들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다는 의미이지 결코 불가능하다 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들소를 길들인다면 외양간에서 먹이를 주며 기르고 짐수레를 끌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욥기 3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계속 욥이 알지 못하는 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나열하면서 네가 할 수 있느냐? 네가 아느냐? 네가 만들었느냐? 네가 다스리느냐? 라고 도전을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나열해 놓으시고 욥에게 질문을 하시는데, 만약 욥이 네, 하나님. 좀 힘들지만 할 수는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머쓱해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신 것들이 욥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들소 길들이기와 같이 힘들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은 열거되지 않았을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짐승은 결코 들소와 같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 들소라고 번역된 동물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유니콘 (unicorn)

343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들에서는 모두 이 유니콘을 들소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니콘은 뿔이 한 개이고 들소는 뿔이 두 개이므로 이 두 동물이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23장 22절에서 개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 들소의 힘과 같다고 했는데 들소는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에게 공격을 받아 잡아먹히는 약한 존재입니다. 개역: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민23:22) 흠정역: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그의 힘이 유니콘의 힘과 같도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작 사자에게도 쩔쩔 매는 들소 정도에 비유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안 됩니다. 더구나 소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는 가축이고 하나님께서는 소의 형상을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시106:19-20).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그 부어 만든 형상에게 경배함으로 자기들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도다(시106:19-20). 그러므로 민수기 23장 22절 말씀은 개역 성경의 번역이 말하는 들소가 아니라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훨씬 강하고 능력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유니콘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람들이 옛날부터 유니콘이라는 동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사전의 내용이 전적으로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자료를 통해 사람들이 유니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유니콘은 전설상의 동물로, 이마 한가운데에 이름 그대로 한 개의 뿔이 달려 있는데, 길이는 45cm 가량이며 아래는 하얀색, 중간은 검정색, 끝은 붉은색으로 얼룩덜룩해 보인다. 그 뿔의 구성 물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니콘의 모든 힘은 다 이 뿔에서 나오며, 적을 만나면 칼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갑옷이나 방패를 뚫어버린다. 또한 해독 능력이 뛰어나 중세 유럽에서는 그 뿔을 물에 담그기만 해도 바다나 호수 전체가 깨끗해진다고 믿었다. 유니콘은 영험한 능력이 무한대로 샘솟는 뿔을 갖고 있기 때문에, 힘이 세고 행동이 민첩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 들소인가, 유니콘인가? 345

344 백과사전에 의하면, 유니콘은 전설상의 동물이나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이 동물에 대해 9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유니콘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욥도 유니콘이라는 동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유니콘이라는 동물에 대해서 욥이 전혀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동물을 예로 들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욥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니콘을 모르고 있는 상태라면 욥은 도대 체 유니콘이 뭡니까? 라고 반문했을 겁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 속에 유니콘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유니콘이라는 단어에 대해 하나님과 욥 사이에 이미 공통의 인식과 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뿐만 아니라 발람, 모세, 다윗, 이사야 등도 유니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는 유니콘이 전설이나 상상 속에 나오는 동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역사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유니콘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증언도 있습니다. 유니콘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뿔이 달려 있으며(신 33:17; 시92:10), 아주 힘이 셉니다(민23:22; 24:8). 또한 유니콘은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나타냅니다(신33:17; 시92:10). 이 특별한 생물에 대해서 346 바르게 읽는 성경

345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베헤못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욥40:15), 유니콘이라는 외뿔 짐승에 대해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지상의 생물인지, 혹은 하늘의 생물인지, 아니면 유전자 변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유니콘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낼 때나 요셉 지파에 대한 축복에서도 나타나지만 시편 22편 20-21절 말씀에서는 개의 권세, 사자의 입과 함께 다윗과 메시야를 적대시한 존재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유니콘에 대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니콘은 전설이나 상상에 나오는 동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동물이다. - 유니콘에게는 뿔이 있다. - 유니콘은 아주 힘이 세다. 사람이 잡아서 길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 유니콘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 또한 유니콘은 다윗과 메시아에게 고난을 준 존재로도 등장한다. 성경에 더 자세한 것은 나와 있지 않으므로 유니콘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유니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민23:22; 24:8; 신33:17; 욥39:9-10; 시22:21; 29:6; 92:10; 사34:7 유니콘을 신화로 만드는 작업 AD 3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피지올로구스 (Physiologus)라는 책이 등장했습니다. 자연에 대해 박식한 자 라는 의미를 가진 이 책은 여러 가지 구전되어 오는 옛날이야기들을 편집한 책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동물 중에는 유니콘이라는 외뿔 짐승이 있는데, 이 짐승은 아주 힘이 세고, 날렵하고, 난폭하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유니콘도 순결한 처녀 앞에서는 양처럼 고분고분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녀를 미끼로 써서 유니콘이 처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을 때에는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피지올로구스 가 전 세계로 번역되어 퍼져 나가면서 유니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미 부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 피지올로구스 를 읽으면서 유니콘은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여기기 시작했고, 인간 심리와 동기의 근본을 성적 본능에서 찾는 심리학자들은 처녀를 좋아하는 들소인가, 유니콘인가? 347

346 유니콘의 외뿔을 남성의 성기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여 이를 남성의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힘에 대한 숭배, 남성의 성적 본능 등으로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시대 로마 카톨릭주의에서는 강한 힘과 능력, 해독작용을 가진 뿔이 달린 유니콘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고, 그 유니콘을 순종하게 만드는 순결한 처녀가 동정녀 마리아라고 주장하며, 이를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 는 근거로 활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 피지올로구스 라는 책이 나온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이며, 이 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들을 부인하며 그것들을 사실이 아닌 상징이나 영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는(영해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소굴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영지주의자들은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 유니콘을 신화나 상징으로 간주하지만, 피지올로구스 라는 책에 유니콘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성경에는 이미 유니콘 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며 그 유니콘은 욥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욥과 다른 시대에 살았던 발람, 모세, 다윗, 이사야도 유니콘이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신화를 다룬 책이나 사람들의 주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믿음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니콘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348 바르게 읽는 성경

347 58. 하마인가, 베헤못인가? 개역: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40:15) 흠정역: 이제 내가 너를 만들 때에 함께 만든 베헤못을 보라. 그가 소처럼 풀을 먹느니라. KJV: Behold now behemoth, which I made with thee; he eateth grass as an ox. 1. 베헤못은 하마가 아니다. 욥기 40장 15절에는 베헤못이라는 짐승이 등장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것을 하마라고 번역했는데,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이 동물이 하마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마는 hippopotamus 이며 behemoth 과는 다릅니다. (1) 하마의 꼬리가 백향목같이 움직이는가? 그가 자기 꼬리를 백향목 같이 움직이며 그의 돌들의 힘줄은 서로 얽혀 있고(욥40:17) 베헤못은 자기 꼬리를 백향목 같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하마가 꼬리를 백향목 같이 움직입니까? 백향목은 높이가 40m, 지름이 3m씩 자라는 웅장한 침엽수이며 수명이 2,000-3,000년씩이나 되기 때문에 수목의 왕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다음 페이지의 하마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저 정도 크기의 꼬리라면 혹시 버드나무 가지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거대한 백향목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2) 하마가 으뜸가는 짐승인가?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거니와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욥40:19). 하마가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하마는 덩치 면에서는 코끼리나 고래에게 뒤지고, 힘이나 용맹스러운 면에서도 그다지 뛰어나

348 <하마의 꼬리> 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마의 지능이 뛰어나게 높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마가 짐승 중에서 으뜸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으뜸이라 고 한 이 짐승이 하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마가 요르단을 입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가? 보라, 그가 강을 마시되 서두르지 아니하나니 그는 자기가 요르단을 입으로 빨아들일 수 있다고 믿느니라(욥40:23). 요르단 강은 만년설이 쌓인 헬몬 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서 사해까지 이르는 강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 직선거리로 약 104Km를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데 총 길이는 256Km가 되며 평균 폭은 약 30m 정도입니 다. 하마는 몸의 길이 m, 어깨 높이 1.5m, 몸무게 t 정도 되는 동물로 코끼리나 코뿔소 다음으로 몸집이 큰 동물에 속하기는 합니다만, 저 정도의 덩치나 물 먹는 양으로 볼 때, 요르단 강을 입으로 빨아들일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강폭이 좁고 얕은 상류에 하마 수십 마리를 풀어 놓아 마시게 한다면 몰라도, 그가 (he, 단수임) 요르단 강을 빨아들이지는 못 합니다. 350 바르게 읽는 성경

349 (4) 하마의 코가 올가미를 꿰뚫을 수 있는가? 그가 자기 눈으로 그것을 취하며 그의 코는 올가미들을 꿰뚫는도다(욥40:24). 하마의 코는 뭉툭하며 입보다 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마가 올가미 에 걸렸을 때 입으로 물어뜯는다면 몰라도 뭉툭한 코로는 올가미를 꿰뚫을 수는 없습니다. 하마의 입은 아주 커서 cm까지 벌릴 수 있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어서 이것으로 적을 공격합니다. 하마의 송곳니는 날카롭고 하마가 깨물 때의 턱 힘은 수 톤이나 되기 때문에 하마가 입을 벌려 악어를 물어뜯으면 그 단단한 악어가죽이 찢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마가 코를 써서 올가미를 꿰뚫는 일은 없습니다. 2. 베헤못이라는 짐승의 특징 킹제임스 성경은 그 짐승이 하마가 아니라 베헤못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게 어떤 짐승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베헤못은 실제 존재한 짐승이다. 이제 내가 너를 만들 때에 함께 만든 베헤못을 보라. 그가 소처럼 풀을 먹느니라(욥 40:15). 베헤못은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만드신 짐승으로서 욥이 살던 시대에 실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베헤못을 보라! 고 하셨는데 이는 당시 욥이 눈으로 베헤못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헤못은 결코 신화나 전설,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니라 지구상에 실존했던 동물입니다. (2) 베헤못은 풀을 먹는 초식 동물이다. 위의 욥기 40장 15절 말씀은 또한 베헤못이 풀을 먹는 초식 동물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거대한 초식 공룡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 베헤못은 힘이 센 짐승이다.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의 배꼽에 있느니라(욥 40:16). 베헤못은 힘이 센 짐승이었습니다. 이 짐승은 초식을 하기 때문에, 날카로운 하마인가, 베헤못인가? 351

350 발톱이나 이빨은 없고, 동작이 날랜 짐승은 아니었지만, 육중한 몸을 이용한 공격이나 허리를 중심으로 하여 꼬리를 휘둘러 치는 힘은 아주 강력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4) 베헤못은 대단히 거대한 덩치를 가진 짐승이다. 보라, 그가 강을 마시되 서두르지 아니하나니 그는 자기가 요르단을 입으로 빨아들일 수 있다고 믿느니라(욥40:23). 길이 256km, 평균 강 폭 30m 정도 되는 요르단 강을 자기 입으로 빨아들일 수 있다고 여길 정도라면, 아마 베헤못의 덩치는 엄청나게 컸을 겁니다. (5) 베헤못에게는 거대하고 기다란 꼬리가 있었다. 그가 자기 꼬리를 백향목같이 움직이며 그의 돌들의 힘줄은 서로 얽혀 있고(욥40:17) 욥기에서 베헤못의 꼬리를 백향목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통나무처럼 굵고 거대한 꼬리를 가진 짐승이었을 겁니다. 꼬리가 백향목(길이 40m, 지름 3m) 정도라면 전체 몸집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6) 베헤못의 코는 강하고 단단한 조직으로 되어 있다. 그가 자기 눈으로 그것을 취하며 그의 코는 올가미들을 꿰뚫는도다(욥40:24). 베헤못이 코로 올가미를 꿰뚫을 수 있다면, 그 코는 대단히 강하고 단단한 조직으로 이루어졌을 겁니다. 어쩌면 당시에 베헤못을 잡으려고 올가미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베헤못을 잡을 수만 있다면 한 번에 많은 식량을 얻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베헤못의 코는 올가미를 뚫을 정도로 강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짐승의 안면부에서 코는 입보다 더 많이 돌출되어 있으며, 콧잔등 부근이 강하고 단단한 조직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베헤못의 코끝에는 날카로운 뿔 같이 생긴 것이 달려있었으리라고 생각합 니다. (7) 베헤못은 튼튼한 골격을 지녔다. 그의 뼈들은 강한 놋 덩이 같으며 그의 뼈들은 쇠막대기 같으니라(욥40:18). 베헤못은 튼튼한 골격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헤못이 그렇게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다면 체중도 엄청나게 무거웠을 겁니다. 그 짐승이 지상에서 352 바르게 읽는 성경

351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으려면, 뼈들이 그 엄청난 하중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고 튼튼했을 겁니다. (8) 베헤못이 한 번에 먹는 양은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모든 들짐승이 노는 산들은 확실히 그를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욥40:20). 그렇게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려면 베헤못이 하루에 먹어치우는 양도 엄청났을 겁니다. 산들이 풀이나 나무열매를 내는 것이 그를 위하여 내는 것이라고 하는 걸로 봐서 베헤못이 한 번에 먹는 먹이의 양도 상당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9) 베헤못은 그늘진 나무 아래나 늪 속에 누워서 쉰다. 그가 그늘진 나무 아래와 갈대밭의 숨는 곳과 늪 속에 누워 있나니 그늘진 나무들은 자기들의 그늘로 그를 덮고 시내의 버드나무들도 그를 감싸는도다(욥40:21-22). 베헤못이 지상에서 육중한 몸을 지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쉬고자 할 때에는 다리에 실리는 몸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누워 있거나, 부력이 작용하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쉬었을 겁니다. 개역 성경은 그늘진 나무 를 연 줄기, 연 그늘 이라고 번역하여, 베헤못이 연 줄기 아래 엎드리고 연 그늘이 그를 덮는다고 했는데, 연잎 위에는 개구리가 놀고, 연잎 아래의 그늘에는 올챙이나 송사리가 살기에 딱 좋을 정도입니다. 백향목 같이 거대한 꼬리를 가진 짐승, 베헤못이 연 그늘 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10) 베헤못은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다.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거니와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욥40:19).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라고 합니다. 베헤못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물 중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짐승입니다. 그래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를 제어하실 수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하나님이 베헤못에게 칼을 주었다. 고 번역했는데, 베헤못은 초식 동물이므로 칼과 같이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등으로 무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하나님이 베헤못에게 칼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짐승에게 칼을 댈 수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즉, 욥이나 사람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이 베헤못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마인가, 베헤못인가? 353

352 베헤못이 거대한 덩치, 통나무 같은 꼬리, 단단한 뼈대, 단단한 코끝을 가지고 있었고, 지상의 동물 중 으뜸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보아 이 짐승은 거대한 초식공룡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살펴본 이 거대한 짐승 베헤못의 몇 가지 특징들 외에는 더 자세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나중에 하나님께 직접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354 바르게 읽는 성경

353 59. 악어인가, 리워야단인가? 개역: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수 있겠느냐(욥 41:1) 흠정역: 네가 낚시 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혹은 늘어뜨리는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 KJV: Canst thou draw out leviathan with an hook? or his tongue with a cord which thou lettest down? 하나님께서는 욥기 41장에서 리워야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욥기 41장 전체는 리워야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리워야 단을 악어라고 번역했습니다. 욥기 41장에서 뿐만 아니라 시편 74편 14편, 시편 104편 26절에서도 개역 성경은 리워야단을 악어로 번역했습니다. 다만 이사야서 27장 1절과 같이 날랜 뱀이라는 표현이 함께 등장한 구절에서는 날랜 뱀 악어 라고 하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리워야단이라고 옮겼습니다. 아래 구절들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시 74:14) 흠정역: 리워야단의 머리들을 산산조각 내시고 그를 광야에 거주하는 백성에게 먹을 것으로 주시며 KJV: Thou brakest the heads of leviathan in pieces, and gavest him to be meat to the people inhabiting the wilderness. 개역: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시104:26) 흠정역: 거기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만드사 그 안에서 놀게 하신 리워야단이 있나이다.

354 KJV: There go the ships: there is that leviathan, whom thou hast made to play therein. 개역: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27:1) 흠정역: 그 날에 주께서 자신의 매섭고 크고 강한 칼로 꿰뚫는 뱀 리워야단 곧 구부러진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KJV: In that day the LORD with his sore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punish leviathan the piercing serpent, even leviathan that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dragon that is in the sea. 욥기 41장과 위 말씀들을 중심으로 해서 리워야단이 어떤 짐승이었는지 살펴보 겠습니다. (1) 악어 낚시는 있어도 리워야단 낚시는 없다. 네가 낚시 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혹은 늘어뜨리는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욥41:1) 태국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악어 낚시와 악어 쇼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난폭한 짐승 리워야단은 낚시 바늘에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히 그렇게 위험한 일을 목숨 걸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2) 악어와는 함께 놀아도 리워야단과는 함께 놀 수 없다. 네가 새와 놀 듯 그와 놀겠느냐? 혹은 네가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를 묶겠느냐?(욥41:5)) 악어는 잘 훈련시키면 함께 놀 수 있습니다. 저는 2007년 여름방학 때, 두 아들들을 데리고 부산 벡스코에서 악어 쇼를 관람했습니다. 태국에서 온 조련사들 은 악어를 훈련시켜서 등에 타기도 하고, 껴안기도 하고, 심지어 악어 입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꺼내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리워야단과는 그렇게 함께 놀 수가 없습니다. 이 짐승은 길들이기는커녕 잡을 수도 없는 짐승입니다. (3) 악어 고기로 잔치를 벌일 수는 있어도 리워야단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네 벗들이 그를 가지고 잔치를 벌이겠느냐? 그들이 상인들 사이에서 그를 나누겠느냐? (욥41:6) 악어를 잡아서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일 수 있을까요? 옛날부터 열대지방의 356 바르게 읽는 성경

355 원주민들은 단백질 보충용으로 악어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악어 고기가 냉동육으로 포장되어 유통되고 있으며 그 종류도 스테이크용, 너겟용, 햄버거용 등 다양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제시하면서 그분의 위엄과 능력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악어 고기 잔치 와 같이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를 그에게 거론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악어는 잡아서 상인들이 부위별로 나눠 갖기도 하고,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일 수도 있지만, 리워야단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4) 악어는 작살로 잡을 수 있어도 리워야단은 작살로 잡을 수 없다. 네가 그의 가죽을 쇠꼬챙이로 채울 수 있겠느냐? 혹은 그의 머리를 물고기 작살로 채울 수 있겠느냐?(욥41:7) 얼마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캐미 콜린(Cammie Colin)이라는 16세 소녀가 몸길이 3미터가 되는 악어를 석궁으로 잡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악어 수렵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 보트를 타고 가다가 악어와 마주치게 되자 가지고 있던 석궁으로 악어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악어는 작살이나 석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리워야단은 쇠꼬챙이나 작살로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욥기 41장에 나오는 이 짐승은 악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성경이 말하는 리워야단의 모습 1. 리워야단은 갑옷처럼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욥41:13). 누가 그의 옷 껍질을 드러내겠느냐? 혹은 누가 자기의 두 겹 굴레를 가지고 그에게 갈 수 있겠느냐?(욥41:13) 2. 리워야단에게는 빙 둘러난 무서운 이빨들이 있다(욥41:14). 누가 그의 얼굴의 문들을 열 수 있겠느냐? 그의 이빨은 무섭게 빙 둘러 돋아 있도다(욥 41:14). 3. 리워야단의 몸에는 촘촘하고 단단히 결합된 비늘이 있다(욥41:15-17). 촘촘히 봉한 것처럼 서로 닫혀 있는 그의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비늘과 비늘이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사이에 공기도 들어갈 수 없으며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붙어 있으니 나눌 수도 없도다(욥41:15-17). 악어인가, 리워야단인가? 357

356 4. 리워야단의 입에서는 불이 나온다(욥41:19-21). 그의 입에서는 타는 등불들이 나오고 불꽃들이 튀어나오며 그의 콧구멍에서는 끓는 솥이나 가마솥에서 나오는 것 같이 연기가 나오는도다. 그의 호흡은 숯불을 지피고 그의 입에서는 불꽃이 나오며(욥41:19-21) 지구상에 있는 악어들 중에 입으로 불을 뿜을 수 있는 악어는 없습니다. 5. 리워야단의 살은 단단하다(욥41:23-24). 그의 살 조각들은 서로 연결되고 자기들 속에서 단단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그의 심장은 돌처럼 단단하고 참으로 맷돌의 아래 판같이 단단하도다(욥41:23-24). 6. 리워야단은 강력한 자들의 공격을 무시한다(욥41:25-30) 그가 일어설 때에는 강력한 자들이 무서워하며 쳐부숨으로 인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도다. 그에게 달려드는 자의 칼도 견디지 못하며 창이나 작은 창이나 사슬갑옷도 견디지 못하는도다. 그는 쇠를 지푸라기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나니 화살이라도 그를 도망하게 할 수 없고 돌팔매기구의 돌도 그에게는 지푸라기가 되는도다. 그가 작은 창도 지푸라기같이 여기나니 그가 창을 흔드는 것도 비웃는도다. 그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돌들이 있나니 그가 진흙 위에 뾰쪽한 것들을 퍼뜨리고(욥41:25-30) 강력한 자들(the mighty)이란 고대의 거인족들이나 니므롯과 같은 강력한 사냥꾼을 말하는데, 그들도 이 리워야단은 무서워했으며, 이 짐승에게는 칼, 창, 화살, 갑옷 등 어떤 무기와 방어 도구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대개 괴물이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나 영화에서는 괴물의 배 부분은 등갑보다 피부가 연하여 그 곳이 약점이 되곤 했는데, 이 짐승은 배 아래쪽에도 날카로운 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30절). 리워야단은 온 몸이 단단한 갑옷이나 다름없었으니 사람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겁니다. 7. 리워야단은 바다 생물이다(욥41:31-32). 깊음을 솥이 끓는 것 같이 끓게 하며 바다를 향유 단지같이 만드는도다. 그가 자기 뒤에 길을 만들어 빛나게 하므로 사람이 깊음을 백발 같다고 생각하리라(욥41:31-32). 리워야단은 바다에서 살며, 깊음을 끓어오르게 합니다. 이 짐승이 바다 위를 지나다닐 때에는 뒤에 하얀 물보라와 함께 지나간 자취를 남긴다고 합니다. 바다뱀이나 고래가 지나가도 그렇게 큰 이동 궤적은 만들어지지 않는데, 리워야 단이 지나가면 그 뒤쪽에 길이 생긴다고 하니 이 짐승이 얼마나 거대하고 동작이 날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도 리워야단이 바다에서 사는 생물이라는 358 바르게 읽는 성경

357 것을 보여줍니다. 이 크고 넓은 바다도 그러하오니 그 안에는 기어 다니는 것들 곧 작고 큰 짐승이 무수하나이다. 거기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만드사 그 안에서 놀게 하신 리워야단이 있나이다(시104:25-26). 8. 리워야단에게는 머리가 여러 개 있다(시74:14). 리워야단의 머리들(heads)을 산산조각 내시고 그를 광야에 거주하는 백성에게 먹을 것으로 주시며(시74:14) 리워야단은 단수인데 비해 머리들(the heads of leviathan)은 복수로 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악어라면 머리가 하나라야 정상입니다. 가끔 세포분열 과정에서 완전한 분할이 안 되어 머리 둘 달린 도마뱀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악어 종류 중에서 원래부터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종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은 악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머리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리워야단을 의미합니다. 바다에 살며, 여러 개의 머리들을 가지고 있는 거대하고 강한 짐승이라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적그리스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한 짐승이 올라오더라. 그의 뿔들 위에는 열 개의 관이 있고 그의 머리들 위에는 신성모독하는 이름이 있더라.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의 발은 곰의 발 같으며 그의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권능과 자기의 자리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는데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놀라며 그 짐승을 따르더라(계13:1-3). 9. 리워야단은 모든 교만한 것들의 우두머리다(욥41:33-34). 땅 위에는 그처럼 생긴 것이 없나니 그는 두려움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느니라.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 하시니라(욥 41:33-34). 리워야단은 신화나 상상 속의 생물이 아니며 어떤 상징이나 비유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생물입니다(욥41:33; 시104:26). 만약 상징이라 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한 장을 할애해서 리워야단의 신체 구조와 힘과 균형 잡힌 것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리워야단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며,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했습니다. 악어인가, 리워야단인가? 359

358 10. 하나님께 벌을 받는 리워야단 이사야 27장 1절에는 리워야단과 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 다(욥41:34; 사27:1).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여기에서의 리워야단은 단순히 바다 생물 리워야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에 주께서 자신의 매섭고 크고 강한 칼로 꿰뚫는 뱀 리워야단 곧 구부러진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27:1). 이사야서 27장 1절 말씀에서 언급된 그 날 은 적그리스도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잡혀서 불 호수에 던져지는 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들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왕국의 영광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이스라엘이 꽃을 피우고 싹을 내고 열매를 온 세상에 가득 채우며 (사27:6), 야곱의 불법이 깨끗하게 되며 (사27:9), 이스라엘이 돌아와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에서 주께 경배할 것 (사27:13)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크고 강한 칼로 리워야단을 벌하시는 그 날은 하나님께서 바다 생물을 사냥하러 나가시는 날이 아니라 바다에서 나온 짐승(사27:1; 계13:1; 19:20)과 용(사27:1; 계20:2)을 심판하시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한 짐승이 올라오더라. 그의 뿔들 위에는 열 개의 관이 있고 그의 머리들 위에는 신성모독하는 이름이 있더라(계13:1). 짐승이 잡히고 또 그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대언자도 그와 함께 잡혔는데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기적들로 속이던 자더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으로 불타는 불 호수에 던져지고(계19:20)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계 20:2) 개역 성경은 리워야단을 악어 로 변장시켰지만,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짐승이 악어가 아니라 리워야단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리워야단을 악어라고 하면 우리는 이사야서 27장 1절에서 리워야단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며, 마지막 날들에 대해 기록한 이사야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다 속에서 나오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크고 강한 짐승 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리워야단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검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기록들을 통하여 리워야단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짐승이며, 360 바르게 읽는 성경

359 그것이 지구상에 분명히 실존했으며, 크고 강하며 교만한 것들의 왕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악어인가, 리워야단인가? 361

360 60. 비유인가, 해석인가? 개역: 잠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1:6) 흠정역: 잠언과 해석과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과 그들의 은밀한 말들을 깨달을지니라. KJV: To understand a proverb, and the interpretation; the words of the wise, and their dark sayings. 잠언 1장 6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interpretation 에 해당하는 단어가 개역 성경에서는 비유 로 흠정역 성경에서는 해석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비유라면 parable 이라고 하지 interpretation 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장을 살펴보면 깨달으라! (understand)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4가지 요소가 콤마(,)에 의해 분리되어 열거된 것이 아니라 두 개씩 짝을 이루면서 세미콜론(;)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잠언과 해석;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과 그들의 은밀한 말들 a proverb, and the interpretation; the words of the wise, and their dark sayings a proverb, the interpretation 과 the words of the wise, their dark sayings 는 한 쌍을 이루면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잠언이란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이라는 뜻인데, 이는 후반부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잠언에 대한 해석)은 그들의 은밀한 말들 과 짝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이런 대구 관계를 생각해 보면, 전반부의 구절은 잠언과 그것에 대한 해석 을 짝지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 proverb 와 an interpretation 이 아니라 a proverb 와 the interpretation 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정관사 the 가 붙은 것으로 보아 이는 잠언과 그 잠언에 대한 해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언 중에는 잠언과 함께 그것에 대한 해석이 나란히 기록된 것들도 있습니다.

361 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개미의 길들을 깊이 살펴보고 지혜를 얻으라(잠6:6). 예를 들어 잠언 6장 6절에서 게으른 자는 개미의 길들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의 내용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일을 찾아서 하는 자발성, 시기를 분별하는 지혜, 부지런함,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 삶에 적용하여, 잠언 6장 9-11절 말씀과 같이 게으른 자는 가난하고 궁핍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 속에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 의도나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그들의 은밀한 말들 (their dark sayings)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의 드러난 말들 속에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은밀한 의미들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들이 없는 곳에는 구유가 깨끗하나 소의 힘으로 많은 소출을 얻느니라(잠14:4). 위의 말씀은 잠언(지혜로운 자의 말)인데 해석이 함께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경우 그것이 말하는 은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잠언 14장 4절 말씀처럼 실제로 소를 안 키우면 꼴을 베러갈 필요도 없고, 새벽에 소에게 먹일 죽을 끓일 필요도 없고, 구유 청소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귀찮은 수고를 감내하고 소를 키우면 얻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소를 사서 키워야 할까요? 우리는 잠언의 기록자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소를 키우라. 는 뜻으로 이 잠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압니다. 이 말씀의 숨은 뜻은 힘들거나 귀찮다고 해서 가치 있고 소중한 일에 투자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선한 일에 부지런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때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말씀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언을 읽으시면서 그 잠언에 대한 바른 해석을 깨달으시고, 또한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을 통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은밀한 의미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잠언과 해석과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과 그들의 은밀한 말들을 깨달을지니라(잠1:6). 비유인가, 해석인가? 363

362 61. 몸인가, 배꼽인가? 개역: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잠3:8) 흠정역: 그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네 뼈에 골수가 되리라. 한글킹: 그것이 네 몸에 건강이 되며 네 뼈에 골수가 되리라. KJV: It shall be health to thy navel, and marrow to thy bones. 대부분의 한글 역본들은 이 구절을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라고 하면서 몸 이라고 번역했고 현대 영어 역본들은 body, flesh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navel (배꼽)이라고 합니다. 같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했다고 하는 흠정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도 이 부분에서는 번역이 불일치합니다. 흠정역 성경에서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라고 한 것은 단어 대 단어가 대응되도록 영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한 것이고, 한글킹제임스역 에서 네 몸에 건강이 되며 라고 한 것은 본문의 의미만 통하도록 의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배꼽 대신에 몸이라고 한 것은, 주를 두려워하며 악을 떠나는 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된다. 고 하면 어색하게 들리고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여 의역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저 역시 배꼽이 건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배꼽과 건강을 관련지어 말씀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 배꼽이라고 되어 있으면 일단은 그것을 배꼽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배꼽과 건강의 관계에 대해서 전문적인 의학 지식은 없지만, 배꼽은 몸의 중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몸은 배꼽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룹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배꼽은 상체와 하체가 만나는 중간 지점입니다. 즉 몸의 중심에 해당하는 배꼽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전체 몸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제유법). 또한 포유동물

363 에게 있어서 배꼽은 모태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통로가 되던 자리입니다. 그래서 생명력을 공급받는 통로가 된다는 의미로 배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기 40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베헤못이라는 초식 동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의 힘은 배꼽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배꼽이라는 것은 힘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의 배꼽에 있느니라(욥 40:16). 저는 배꼽 아래를 중심으로 해서 몸의 기( 氣 )를 모을 수 있다는 호흡 수련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으며, 몸이 안 좋을 때에는 배꼽에 쑥뜸을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한의학의 주장도 신봉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주를 두려워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배꼽에 건강이 된다고 하니 그렇다고 믿습니다. 잠언 3장 8절에서 배꼽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지 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살펴볼 때, 배꼽은 몸의 중심, 영양분의 공급통로,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에 대한 번역자의 견해 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꼽의 기능이나 본문에서 사용된 배꼽의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더라도,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배꼽 이라고 기록하셨다면 그것을 그대로 번역하고, 그대로 읽고, 그대로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것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몸인가, 배꼽인가? 365

364 62. 예수님도 기원이 있는가? 개역: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흠정역: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 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KJV: But thou, Bethlehem Ephratah, though thou be little among the thousands of Judah, yet out of thee shall he come forth unto me that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goings forth have been from of old, from everlasting.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한 청년이 자기 가족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소개를 했습니다. 집안의 어른들은 그에게 도대체 예수가 뉘 집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아는 대로 그분에 대해 소개하다가 마태복음 1장을 펼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상들 중에 왕도 있고, 이렇게 족보까지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근본( 根 本 )이 미천한 태생은 아닌가 보구나.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근본 이라는 단어는 그의 출신, 혈통, 핏줄, 가문의 조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근본( 根 本 ): 1 초목의 뿌리, 2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 =근체( 根?) 기우( 基 宇 ), 근본 원칙, 3 자라 온 환경이나 혈통. 일본( 一 本 ). 그는 근본이 좋은 사람이다., 근본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은 역시 다르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개역 성경으로 읽으면 근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근본의 의미가 바로 혈통, 가문의 시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근본이 있다고 하거나 기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계신 예수님에게 근본, 뿌리, 가문의 시조가 있다고 하거나 기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과거의 한 시점에서부터 등장한 유한한 존재라고

365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각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설교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미가서 5장 2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미가를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을 비롯한 많은 현대 역본들이 이 말씀을 그릇되게 번역하여 말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장소에 대한 기록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분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의 후반부는 그분이 바로 영원 전부터 활동하고 계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 그러나 미가서 5장 2절 말씀이 다른 역본들에서 어떻게 변개되었는지 다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새번역: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동: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가톨릭: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NIV: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NLT: one whose origins are from the distant past. 각 역본에서 사용한 단어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역본들이 한결같이 예수님에게 기원(origins)이 있다. 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기원이라는 것은 시작점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주 오래 전, 상고 시대, 태초의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 다른 어떤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기원으로부터 나온 존재라면 하나님은 결코 창조주가 되실 수 없습니다. 예컨대 아득히 먼 예수님도 기원이 있는가? 367

366 옛날, 하늘과 땅이 만나 부딪히면서 그 사이에서 하나님이 나왔다고 한다면, 하나님 이전에 하늘과 땅이 있었다는 말이 되며 하나님의 기원(origins)은 하늘과 땅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원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의 기원은 조개껍데기다., 돈의 기원은 중국의 도전( 刀 錢 )이다., money 라는 단어의 기원은 로마의 여신 모네타(moneta)이다. 등과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나름대로의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장 14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지 어떤 기원에서 나오신 분이 아닙니 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 니라, 하라(출3:14). 로마 카톨릭 계열의 사본에서 나온 현대 영어 역본들은 기원 (origi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기원이 있는 존재,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간주합니다. origins 라는 단어는 혈통, 핏줄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것을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모든 인류의 핏줄은 거슬러 올라가면 첫 사람 아담에게 이릅니다. 즉, 공동번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지은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피를 물려받지도 않았고 마리아의 피를 이어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셨 고, 죄 없으신 자신의 피를 우리를 위해 흘려주셨습니다. 1) 그렇다면 왜 로마 카톨릭 계열의 사본에서는 이처럼 예수님이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어떤 기원을 가진 존재라고 표현할까 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원(origin)이 있다는 사상은 오리겐(Origen)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킨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지주의자 오리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에게도 기원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현대 역본 번역자들은 이와 같이 잘못된 오리겐의 사상을 추종하여 이런 엉터리 번역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한 분 밖에 없으며, 예수는 창조된 1)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예수님의 피 바로알기 (알 레이시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 에 발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68 바르게 읽는 성경

367 2등급 신이고, 성령은 영향력, 에너지, 기운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잘못된 사상은 신약성경의 번역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6) 새번역: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NIV: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개역 성경이나 새번역, NIV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긴 했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누리는 것은 자기가 가질 바가 안 된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사람과 같이 되었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기특하다고 여겨서 지극히 높여주셨다. 라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성경 번역은 잘못된 교리를 낳았고, 이런 잘못된 교리를 배운 자들은 교인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사탄은 하나님 과 맞먹으려고 하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타락했지만,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몸을 사리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덕분에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라는 해괴한 설교까지 등장합니다. 그런 주장은 곧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신분이었는데 자기 분수를 알고서 스스로 낮추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순종하여 십자가를 졌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다는 이야깁니다. 이런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의 사상은 오리겐이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들의 사상, 성경 번역, 설교, 가르침의 공통점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은 갖고 있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요, 권력 서열 2위의 신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 말씀을 아래와 같이 킹제임스 성경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빌 2:6) Who, being in the form of God,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 예수님도 기원이 있는가? 369

368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신 분이요, 그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권력을 찬탈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과 영광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 역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보다는 좀 열등한 서열 2위의 신이라고 주장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요1:1),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히1:3).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요1:1).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저는 미가서 5장 2절 말씀과 빌립보서 2장 6절 말씀을 여러 역본들로 대조해 본 결과,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정확하며 교리적으로도 바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개역 성경이나 새번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어떤 시조( 始 祖 )나 기원(origins)으로부터 시작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창조물의 기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골1:16-17).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또한 그분께 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골1:16-17). 370 바르게 읽는 성경

369 63. 강도인가, 여행자인가? 개역: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6:11) 흠정역: 네 빈궁이 여행자같이, 네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로다. 한글킹: 네 빈곤이 여행자같이 올 것이요, 네 빈궁이 강도같이 이르리라. KJV: So shall thy poverty come as one that travelleth, and thy want as an armed man. 1. 강도인가, 여행자인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thy poverty come as one that travelleth. 에 해당하는 부분이 개역 성경에서는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온다. 로 번역되었고, 흠정역 성경에서는 네 빈궁이 여행자같이 이른다.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강도와 여행자 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같은 단어가 강도도 되고 여행자도 될 수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가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립니다. 히브리어는 걷다, 길을 떠나다 라는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여행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 약탈자나 강도라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게 강도라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robber 라고 번역했을 겁니다. 본문의 문맥은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빈궁함이 찾아온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폭력이나 약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강도는 숨어서 약탈할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호6:9), 밤에 집으로 침입하기도 합니다(옵1:5).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이 제사장들의 무리가 동의하여 길에서 살인을 행하나니 그들이 음탕한 짓을 행하는도다(호6:9). 혹시 도둑들이 네게 이르고 강도들이 밤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들이 충분히 얻을 때까지만 훔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서 모으는 자들이 이르렀을지라도 그들이 포도 중 얼마는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끊어졌는가!)(옵1:5) 하지만 강도는 그 집에 오래 머물지 않고 충분히 노략하였으면 재빨리 떠나갑니

370 다(옵1:5). 그런데 빈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빈궁은 강도처럼 잠시 들렀다가 떠나지 않고 그가 부지런하게 되어 부유해지기까지 계속 머뭅니다. 그러므로 빈궁을 강도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 수사법이 아닙니다. 잠언 6장 11절 말씀은 잠자기를 좋아하고 게으른 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가난해진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는 행인, 나그네, 여행자가 어디로부터 와서 누구네 집으로 가는지, 언제쯤 불쑥 우리 집에 들르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나그네가 언제까지 머물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주인이 눈치를 주고 내쫓을 때까지는 안 나갈 수도 있습니다. 바로 빈궁이 그런 점에서 여행자와 같습니다. 스스로 부지런해져서 가난을 내쫓을 때까지는 빈궁이 눌러앉아 떠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단어로 보나 문맥으로 보나 이것은 여행자를 의미하지 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2. 강도인가? 군사인가? 둘 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고 하는데, 한글킹제임스역은 후반부를 네 빈궁이 강도같이 이르리라. 라고 번역했고, 흠정역 성경은 네 궁핍이 군사같 이 이르리로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킹제임스 성경에는 armed man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군사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지 강도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강도를 나타낼 경우에는 robber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강도들의 장막들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는 자들은 안전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풍성히 가져다주시는도다(욥12:6). The tabernacles of robbers prosper, and they that provoke God are secure; into whose hand God bringeth abundantly.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이 제사장들의 무리가 동의하여 길에서 살인을 행하나니 그들이 음탕한 짓을 행하는도다(호6:9). And as troops of robbers wait for a man, so the company of priests murder in the way by consent: for they commit lewdness. 만약 하나님께서 강도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셨다면 틀림없이 위와 같이 robber 라고 표현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잠언 6장 11절에는 robber 라는 단어가 아니라 armed man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무장한 군사를 의미합 372 바르게 읽는 성경

371 니다. 흠정역: 또 무장한 자들은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나아가며 후위대는 궤 뒤에 가고 제사장들은 가면서 나팔을 불었더라(수6:9). 한글킹: 무장한 자들이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 앞서 가고 후진은 궤를 따르니 제사장들은 가면서 나팔을 부니라. KJV: And the armed men went before the priests that blew with the trumpets, and the rereward came after the ark, the priests going on, and blowing with the trumpets. 흠정역: 이에 무장한 사람들이 포로들과 노략한 물건을 통치자들과 온 회중 앞에 두니(대하28:14) 한글킹: 이에 무장한 자들이 고관들과 온 회중 앞에 사로잡은 자들과 탈취물을 두니 KJV: So the armed men left the captives and the spoil before the princes and all the congregation. 흠정역: 그것이 골짜기에서 땅을 박차고 자기 힘을 기뻐하며 나가서 군사들을 맞되(욥 39:21) 한글킹: 그는 골짜기에서 땅을 긁으며 자기 힘을 즐기며 무장한 군인들을 맞으러 나가느니라. KJV: He paweth in the valley, and rejoiceth in his strength: he goeth on to meet the armed men. 위의 여호수아기 6장 9절과 역대기하 28장 14절의 전후 구절을 읽어보면 여기서 armed men 이라는 표현은 군사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욥기 39장 21절에서는 한글킹제임스역도 분명히 armed men 을 군인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강도에 해당하는 표현은 robber 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는 점, 그리고 armed men 이 군사들을 의미한다는 킹제임스 성경의 용례를 통해 살펴볼 때 위 잠언 6장 11절은 강도가 아니라 군사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잠언 6장 11절 말씀은 강도와 군사, 여행자와 강도를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빈궁(poverty)과 궁핍(want)을 여행자와 군사라는 단어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빈궁(poverty)은 가난한 것을 말하고 궁핍 (want)은 그 가난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핍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하게 되면 강도인가, 여행자인가? 373

372 뭔가 부족한 것(want)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부족한 것이 생겨서 그것 때문에 가난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기를 좋아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빈궁이 먼저 여행자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하게 찾아옵니다. 이 빈궁은 길을 가다가 들른 여행자와 같아서 언제 나갈지 모릅니다. 집 주인이 머무는 것을 묵인해 주면, 내쫓을 때까지는 눌러앉아서 안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빈궁하게 되도록 주인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번에는 필연적으로 궁핍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궁핍이 올 때에는 군사처럼 찾아옵니다. 여행자는 천천히 걸어서 오지만, 무장한 군사는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달려옵니다. 여행자는 이리저리 들렀다가 시내 구경도 하다가 불쑥 찾아오지만, 군사는 방황하지 않고 목표 지점을 향해서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하고서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웃집에 어젯밤 그의 친척이 찾아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집에 경찰이나 119구조대에서 찾아왔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잠자기를 좋아하고 게으른 자는 자기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가난해집 니다. 그럴 때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부지런히 일하여 가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빈궁이 눌러 앉아서 내쫓을 때까지는 안 나가고 버팁니다. 그 다음에는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남들이 다 알 수 있을 만큼 궁핍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네 빈궁이 여행자같이, 네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로다(잠6:11). 손을 느리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나 부지런한 자의 손은 부하게 만드느니라(잠 10:4). 오늘 하루도 주님을 위하여 우리 각 사람이 맡은 분야에서 부지런히 일합시다. 374 바르게 읽는 성경

373 64. 기생인가, 창녀인가? 개역: 그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잠7:10) 흠정역: 그런데, 보라, 창녀의 차림을 하고 마음이 간교한 여자가 거기서 그를 맞으니 KJV: And, behold, there met him a woman with the attire of an harlot, and subtil of heart. 1. 기생인가, 창녀인가? 개역 성경에서는 기생, 흠정역 성경에서는 창녀라고 번역했는데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우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생: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 창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 창부(娼婦). 음녀: 성격이나 행동이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 음부(淫婦). 기생은 춤, 노래 등으로 잔치나 술자리의 흥을 돋우어주는 여자를 말하지만 창녀는 매음을 통해 성적 향응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여자를 말합니다. 기생이라 고 번역하면 성경이 지적하는 음행의 죄 를 은근슬쩍 덮어두고 넘어가게 됩니다. 특히 잠언 7장 10절에서 말하는 harlot 은 매음녀를 비천하고 천박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prostitute, whore, harlot, slut 등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1) Prostitute 이것은 성적 접대를 제공하고 돈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원래 아무에 게나 무차별적으로 성행위를 제공하다. 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서 일반적으 로 창녀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단 한 번 레위기 19장 29절에서 몸을 팔다 라는

374 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Prostitute 가 몸을 팔다 라는 의미이므로, 같은 구절 내에 나오는 whore 와 whoredom 은 각각 창녀, 행음(창녀짓)이라는 의미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딸이 몸을 팔게 하여 창녀가 되지 말게 하라. 그 땅이 행음에 빠져 사악함으로 가득할까 염려하노라(레19:29). Do not prostitute thy daughter, to cause her to be a whore; lest the land fall to whoredom, and the land become full of wickedness. (2) Whore 이것은 prostitute 에 해당하는 영어 고어입니다. 돈을 받는 창녀와 음란한 행위를 하는 난잡한 여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위의 레위기 19장 29절과 같이 창녀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음녀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남편을 두고 타인과 간음을 행하는 아내(하나님을 버리고 우상과 연합한 이스라엘)를 가리킬 때(겔16:28, 33; 호4:1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큰 음녀(계17:1, 15, 16; 19:2)를 가리킬 때에는 음녀 로 번역되었습니다. 또 일곱 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와 이야기하며 내게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들 위에 앉은 큰 음녀(the great whore)가 받을 심판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라(계17:1). (3) Harlot 이것은 프랑스 고어 herlot 에서 나온 말로 처음에는 특정한 직업이 없는 부랑자나 건달(vagabond)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군대를 따라 다니며 군인들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는 여자들의 무리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면서 창녀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Prostitute 보다 좀 더 천하게 부르는 표현입니다. 잠언 7장 10절에 나오는 창녀가 바로 이 harlot 입니다. (4) Slut 이것은 단정하지 못하고 게으른 여자를 가리키는 독일어 schlutt, 스웨덴어 slata 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입니다. 원래는 단정하지 못함, 더러움이라 는 뜻에서 뻔뻔스럽거나 품행이 나쁜 여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가 발전해 왔습니다. 현대 영어에서는 품행이 문란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376 바르게 읽는 성경

375 2. 창녀는 그인가, 그녀인가? 잠언 7장에 나오는 이 어리석은 자와 창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끔 본문에서 그녀 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명사의 성별을 확실하게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그녀 (harlot)의 존재는 사라지고, 그 (남자) 가 대신 나타납니다. 잠언 9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여자 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역: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잠7:22) 흠정역: 그가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이, 곧장 그녀를 따라가는도다. 개역: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잠7:26-27) 흠정역: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상하게 하여 내던졌나니 참으로 많은 강한 남자들이 그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였느니라. 그녀의 집은 지옥에 이르는 길 곧 사망의 방들로 내려가는 길이니라. 개역: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9:18) 흠정역: 그러나 그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녀의 객들이 지옥의 깊음들 속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개역 성경의 번역자들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단수/복수 구분, 시제 표기, 성별 표기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 구절들에서 보는 것처럼 창녀(harlot), 어리석은 여자(a foolish woman), 낯선 여자(strange woman) 등을 그녀 가 아니라 그 라고 바꾸어 놓아서 읽는 사람들이 이것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3. 창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잠언 7장 10절에 나오는 창녀의 정체는 성경 본문에 나온 것처럼 몸을 파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잠언 7장 6-27절 말씀을 읽고 우리는 지혜자로부터 명철이 없는 젊은이처럼 창녀에게 유혹을 받아 그녀에게 이끌려가지 말라. 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가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룩하신 분을 알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 속에는 단순히 성매매를 하지 말라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기생인가, 창녀인가? 377

376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간음, 음행을 지적하실 때 그것이 성적인 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상과 연합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책망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대상 5:25; 겔23장). 따라서 저는 일차적으로 이것을 창녀의 유혹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잠언 1장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지혜로운 자의 말로부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은밀한 말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 다. 잠언 7장 26-27절처럼 정말로 창녀가 그녀의 손님을 살해합니까? 창녀의 집에 수색영장을 발부받아서 지하실을 뒤져보면 시체가 발견되고, 거기에 진짜 지옥의 문이 있습니까? 이 창녀는 문자 그대로의 창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저는 더 나아가 자기와 음행을 저지른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큰 음녀(계17:1) 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언 9장 13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여자 나 잠언 7장 5절에 나오는 낯선 여자 (strange woman) 역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창녀들의 어미 (계17:5)의 예표 혹은 큰 음녀의 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여자는 시끄럽고 단순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니 그녀는 자기 집 문에 앉고 도시의 높은 곳들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르게 가는 행인들을 불러 말하되(잠9:13-15) 그리하면 그것들이 너를 지켜 낯선 여자에게서 곧 말들로 아첨하는 낯선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리라(잠7:5). 지혜가 목소리를 높여서 사람들을 부를 때(잠9:3), 어리석은 여자도 시끄러운 목소리로 자기 길을 바르게 가는 행인들을 불러 진리를 대적하는 가르침을 전파합니다(잠9:13-15). 이 어리석은 여자는 지능지수가 떨어지는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훼방하여 말하는 여자를 말합니다. 또한 잠언 7장 5절에서는 어리석은 젊은이와 창녀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지혜가 너를 말들로 아첨하는 낯선 여자에게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낯선 여자 (strange woman)는 단순히 이방 계집, 외국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 여자라면 차라리 몸으로 유혹할 것이지, 말도 잘 통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들로 아첨해서 진리의 길에서 떠나게 미혹할 수 있을까요? 이 낯선 여자는 성경에 없는 낯선 교리를 가지고 와서 말로 사람을 미혹하는 여자를 말합니다. 잠언 7장의 낯선 여자와 창녀, 잠언 9장의 어리석은 여자,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모두 사람들을 유혹하는 여자들이고, 378 바르게 읽는 성경

377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자기 와 연합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여자들입니다. 아마 이 정도면 이런 여자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잠언 7장 14절을 통해서 우리는 그 창녀가 상당히 종교적인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면서, 내가 나와 하룻밤을 보낼 남자를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작정 기도를 했는데 기도 응답으로 이렇게 당신을 만났다. 라고 말하며 손님을 유인하는 아주 종교적인(?) 창녀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잠언 7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젊은이와 창녀 이야기에는 그처럼 종교의 간판을 걸고 나오는 창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창녀는 화평헌물들 이니 서원이니 하는 종교의식을 들먹이며 나아와서 사람을 유혹합니다(잠7:14). 물론 그녀는 그렇게 해서 미혹당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합니다(잠7:27). 내게 화평 헌물들이 있으며 이 날 내가 내 서원을 갚았노라(잠7:14). 그런데 우리는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창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빌론의 창녀, 큰 음녀는 종교의 이름으로 나아와서 땅의 왕들 위에 군림하며(계17:18), 음행으로 땅을 부패시키며(계19:2), 사람들의 혼을 매매하고(계18:13), 그녀와 음행한 자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요한계 시록 17장 1절에서는 그녀를 큰 음녀 (the great whore)라고 했으며 이어지는 5절에서는 바로 그 음녀(whore)가 창녀들의 어미(THE MOTHER OF HARLOTS)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17:5). And upon her forehead was a name written, MYSTERY, BABYLON THE GREAT, THE MOTHER OF HARLOTS AND ABOMINATIONS OF THE EARTH. 요한계시록 17장 5절에서 그 음녀를 창녀들의 어미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잠언 7장에 나오는 창녀 역시 문자 그대로의 그 당시 창녀를 의미하는 동시에 또한 바빌론의 큰 음녀에 대한 예표, 큰 음녀의 딸, 그녀의 부하들로 볼 수 있습니다. 잠언 7장에 나오는 창녀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술 따르고 춤추며 분위기를 돋우는 기생이 아닙니다. 그녀는 몸을 파는 창녀이며, 간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지옥에 이르게 하는 창녀입니다. 우리는 잠언 7장 말씀을 기생인가, 창녀인가? 379

378 통해서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며 또한 성경에 없는 낯설고 이상한 교리를 가지고 아첨하는 말로 접근하는 낯선 여자, 어리석은 여자, 종교적 인 모습을 한 창녀의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악하고 음란한 바빌론의 음녀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진리의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얻으라. (잠4:5),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다. (욥28:28)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지혜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부지런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말씀의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서야겠습니다. 380 바르게 읽는 성경

379 65. 하나님도 후회하고 뉘우치시는가?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슥 8:14) 한글킹: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진노케 했을 때 내가 너희를 벌할 생각을 하고 후회하지 아니하였듯이,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흠정역: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 진노를 일으켰을 때에 내가 너희를 벌하리라 생각하고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였노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KJV: For thus saith the LORD of hosts; As I thought to punish you, when your fathers provoked me to wrath, saith the LORD of hosts, and I repented not: 1. 하나님도 후회하고 뉘우치시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 다.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가리켜서 전지전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 께서 실수를 하시거나 자신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시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대해서 후회를 하실까요? 아마 하나님이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분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이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뉘우치는 분이라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신성을 모독하는 주장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 역본들로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가끔 하나님에 대해 후회한다, 뉘우친다 라고 번역된 본문을 볼 때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스가랴 8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I repented not. 이라고 하신 말씀을 개역 성경은 뉘우치지 않는다. 로, 한글킹제임스역은 후회하지 않는다. 로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으니 그 내용은 맞습니다. 사실 repent 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후회하다, 뉘우치다, 회개하 다 가 되지만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해서는

380 안 됩니다. 만약 저 부분이 I repented not. 이 아니라 The LORD repented. 이라 고 되어 있다면 어떻게 번역하시겠습니까? 주께서 뉘우치셨다. 라고 번역하시겠 습니까? 다음 성경 구절들을 읽고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6) 흠정역: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손을 내밀어 그것을 멸하려 할 때에 주께서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사 백성을 멸한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 네 손을 멈추라, 하시거늘 그때에 주의 천사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옆에 있더라. KJV: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upon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pented him of the evil, and said to the angel that destroyed the people, It is enough: stay now thine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place of Araunah the Jebusite. 사무엘기하 24장 16절에서 개역 성경은 하나님이 뉘우치셨다. 고 번역했습니 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망령된 발언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리기로 결심하셨을 때 장차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모르셨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이번 재앙은 생각해보니 내가 좀 심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미안하다. 정말 이번만은 내가 오판했다. 내가 후회한다. 반성할게. 이런 반응을 보이셨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사용된 repent 라는 단어를 아무 생각 없이 후회, 뉘우침, 회개로 번역하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것을 주께서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다. 고 번역했습니다. 개역 성경이 주장하는 뉘우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개역 성경에 나오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절도 찾아보겠습니다.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신32:36) 흠정역: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시며 그들의 권능이 떠나가고 갇힌 자나 남은 자가 없음을 보시고 자신의 종들로 인하여 뜻을 돌이키실 것이기 때문이라. KJV: For the LORD shall judge his people, and repent himself for his servants, when he seeth that their power is gone, and there is none shut up, or left. 382 바르게 읽는 성경

381 신명기 32장 36절 말씀에서 개역 성경은 주께서 후회하실 것이다. 라고 번역했 습니다. 주께서 공의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셨는데 그들의 권능이 떠나가고 갇힌 자도 남은 자도 없어지게 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 내가 괜히 내 백성을 심판했구나. 우상을 섬기고 나에 대해서 반역하더라도 심판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둘 걸. 내가 괜한 짓을 했어. 라고 하시면서 후회를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께 사용된 repent himself 라는 구절을 함부로 번역하 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개역 성경이나 한글킹제임스역을 읽으시는 분들은 로마서 11장 29절 말씀과 사무엘기상 15장 35절 말씀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한글킹: 이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심이니라. 개역: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 상15:35) 한글킹: 사무엘은 그가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보러 오지 아니하였으나, 그럼에도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였으며, 주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이들 번역들은 분명히 로마서 11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으면서 사무엘기상 15장 35절에서는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주장합 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합니까? 하나님께 사용된 repent, repentance 를 각각 후회하다, 후회 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아래 흠정역 성경의 번역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흠정역 성경은 아래와 같이 로마서 11장 29절에서는 뜻을 돌이키다 로 번역했고 사무엘기상 15장 35절에서는 슬퍼하다 로 번역했습 니다.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롬11:29). 사무엘이 자기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려고 다시 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위하여 애곡하였더라. 주께서는 자신이 사울을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셨더라(삼상15:35).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성경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구절은 창세기 6장 6절입니다. 하나님도 후회하고 뉘우치시는가? 383

382 개역: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6) 한글킹: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으니, 그 일이 그의 마음을 비통케 하였더라. 흠정역: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KJV: And it repented the LOR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그들은 이 구절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실패라고 주장합 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실패에 대해서 후회하면서 그 실패한 세상을 뒤엎으려고 지구에 대홍수를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한글킹제임스역도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할 것이라면 애당초 사람을 만들지 말거나,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좀 더 완전하게 만들 것이지 왜 그 따위로 만들었느냐는 불신자들의 조롱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면 서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 까? 개역 성경이나 한글킹제임스역은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it repented the LORD 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후회하셨다 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흠정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다는 뜻입니다. 2. Repent의 의미 사전을 통해 repent 의 어원과 의미를 찾아보면, repent 라는 단어가 repentir 에서 왔으며, to feel sorrow (슬픔을 느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슬퍼하다 에서 유래하여, 아쉽다, 유감스럽다, 후회하다, 회개하다 등으로 의미가 발전해 왔습니다. Origin: ; ME repenten < OF repentir, equiv. to re- re- + pentir to feel sorrow (< L paenit?re to regret, be sorry); see penitent [Middle English repenten, from Old French repentir : re-, re- + pentir, to be sorry (from Vulgar Latin *paenit-re, from Latin paenit-re).] re pent'er n. 384 바르게 읽는 성경

383 repent 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대개 후회하다, 뉘우치다, 회개하 다 라는 뜻으로 번역되지만,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후회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후회, 회개 등의 번역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그분의 감정에 대하여는 슬퍼하다 로 번역하 고 그분의 의지와 행하심과 관련해서는 돌이키다 로 번역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돌이키는가, 돌이키지 않는가? 개역: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한글킹: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또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시랴? 또한 이르신 것을 이루지 않으시랴? 흠정역: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민수기 23장 19절에서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된 repent 라는 단어를 후회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스가랴서 8장 14절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는다. 라고 번역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는 뜻을 돌이키는 분일까요, 돌이키지 않는 분일까요? 민수기 23장 19절과 로마서 11장 29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기록도 나타납니다.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려 하던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니라(출32:14).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손을 내밀어 그것을 멸하려 할 때에 주께서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사 백성을 멸한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 네 손을 멈추라, 하시거늘 그때에 주의 천사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옆에 있더라(삼하24:16).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재앙 즉 친히 그들에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사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욘3:10). 출애굽기 32장 14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려 하던 재앙에서 뜻을 하나님도 후회하고 뉘우치시는가? 385

384 돌이키셨고, 사무엘기하 24장 16절에서는 다윗의 죄에 대해 벌을 내리셨다가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고, 요나서 3장 10절에서는 니느웨에 내리기로 한 재앙에 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들은 민수기 23장 19절 말씀과 충돌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께서는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지 그분의 거룩한 성품이나 공의, 의로운 판단, 구원 계획에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후회를 하거나, 뜻을 돌이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까닭 없이 변덕이 생겨서 원래 내리고자 했던 재앙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주장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니느웨 백성들이 금식하며 재 속에 앉아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은 내리시기로 한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를 위해 칼을 갈고 계시고 활을 당기어 준비하고 계십니다(시7:12). 그러나 죄인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분은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그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자신의 칼을 가시리니 그분께서 이미 자신의 활을 당기시고 준비하셨도다(시7:12). 죄에 대해 심판하고 벌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고, 또한 죄인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때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냅니다. 주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을 따라 언제나 한결 같이 공평과 정의와 사랑의 기준에 따라 행하시는 분입니다. 주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심판과 형벌로 그분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고, 합당한 대속물을 가지고 나아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죄들의 사면을 통해 그분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God should not repent.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하심, 공의로우심, 약속, 구원의 계획에서는 조금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But, God repenteth of the evil when the sinner repenteth.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할 때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386 바르게 읽는 성경

385 66. 네 바람인가, 네 영인가?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슥6:5) 흠정역: 그 천사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것들은 하늘들의 네 영인데 그들이 온 땅의 주 앞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아가느니라, 하더라. KJV: And the angel answered and said unto me, These are the four spirits of the heavens, which go forth from standing before the LORD of all the earth. 스가랴서 6장에는 두 놋 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가 등장합니다. 이것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천사는 그들이 하늘들의 네 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 네 영을 네 바람 으로 번역했습니다. 개역, 개역개정, 가톨릭역, NRSV의 번역처럼 이것이 비인격체인 바람인지, 아니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처 럼 영(spirit)인지 성경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분명히 하늘의 네 바람이 있습니다(슥2:6; 단7:2).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스가랴서 6장 5절에 나오는 병거와 말들은 눈에 보입니다. 만약 이게 성경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라면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매일 아침 태양 마차를 끌고 동에서 서로 운행하는 것처럼, 말들이 끄는 병거에 의해 바람이 불게 된다고 하겠지만, 성경에는 바람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람이란 말들이 끄는 병거에 의해 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은 마음대로 분다(요3:8)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6장 7절을 보면 적갈색 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땅에 두루 다니려고 가기를 구하더라. (sought to go)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또 천사가 그들에게 너희는 나아가 이리저리 땅에 두루 다니라. 고 하니 그들이 그렇게 행했습니다. 즉 이들은 마음대로 부는 바람이 아니라 허락을 받고 나서

386 움직이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갈색 말들은 나아가서 이리저리 땅에 두루 다니려고 가기를 구하더라.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아가 이리저리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이처럼 그것들이 이리저리 땅에 두루 다니더라(슥6:7). 바람은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불게 됩니다. 바람은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어 어디로 가기를 구하거나, 허락을 받고 나서 두루 다니거 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람이 아니라 인격을 갖춘 하늘들의 네 영 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이기 때문에 의지도 가지고 있고, 천사와 상호 의사소통도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영, 호흡 등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번역 문제는 히브리어 성경이나 원어 사전을 찾아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각각의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본문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그에 해당하는 정확한 영어 단어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따를 수가 있습니다. 388 바르게 읽는 성경

387 67.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슥 3:2) 한글킹: 그리고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사탄아, 주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주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것이 불에서 꺼낸 나무가 아니냐? 하시니라. 흠정역: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오 사탄아,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곧 예루살렘을 택하신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이것은 불 속에서 잡아챈 그슬린 나무 조각이 아니냐? 하시더라. KJV: And the LORD said unto Satan, The LORD rebuke thee, O Satan; even the LORD that hath chosen Jerusalem rebuke thee: is not this a brand plucked out of the fire? 스가랴서 3장 2절 말씀은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에서는 주가 너를 책망하노라. 로 번역되었고 흠정역 성경에서는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 라.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을 처음 대하면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게 되는데, 그것은 이 말씀이 분명히 주께서 하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문장에서는 주어를 1인칭으로 사용하여 내가 라고 하지 않고, 3인칭을 사용하여 주께서 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글에 등장하는 존재는 모두 몇 명인지 세어보겠 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대제사장 여호수아, 주의 천사, 사탄,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그분, 나(스가랴) 이렇게 모두 5명이 등장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적어도 두 분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한 분은 스가랴에게 이 모든 것을

388 보여주시는 주(LORD) 하나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주의 천사 입니다. 여기서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구약성경에 나오는 주의 천사는 대부분의 성경 교사들이 동의하듯이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 을 의미합니다. 말씀하시는 이는 분명히 주(LORD)신데 어떻게 그분께서 다시 주께서 너를 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한 하나님, 한 주가 계신데(막12:32; 엡4:6; 딤전2:5; 약2:19) 그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전혀 다른 독립된 세 분(three persons)으로 존재하며 또한 이 세 분이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5:7).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one LORD)시니(신6:4)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one)이시니라(요일5:7).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나타내신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한 후 주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라고 하셨고(창3:22),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주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창11:6-7). 이와 같이 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께서 말씀하시지만, 그분은 삼위일체로 계시기 때문에 자기를 복수로 나타내시기도 하고 자신을 3인칭으로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판단 기준으로 하여 한글킹제임스역과 흠정역 성경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한글킹제임스역과 흠정역 성경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 아니라 어느 것이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번역했느냐를 가리는 작업이니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성경 모두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하 였다고 하였으므로 판단의 기준 잣대를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삼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KJV: And the LORD said unto Satan, The LORD rebuke thee, O Satan; even the LORD that hath chosen Jerusalem rebuke thee: is not this a brand plucked out of the fire?(슥3:2) 우선 킹제임스 성경에 사용된 영문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인칭 단수 직설법 현재형 동사에는 어미 -(e)th를 붙인다. 390 바르게 읽는 성경

389 이것은 대부분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The LORD rebuke thee. 라는 문장에서 the LORD 는 분명히 3인칭이며 단수입니다. 과거형이라면 rebuked 라고 했을 겁니다. 참고로 예문을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saith the LORD 라고 했는데, 이는 the LORD 가 단수 명사이며, 3인칭이며, 이 문장에서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니라(출4:22). And thou shalt say unto Pharaoh, Thus saith the LORD, Israel is my son, even my firstborn 그런데 스가랴서 3장 2절에서 그 뒤에 나오는 the LORD that hath chosen 에서 는 hath 가 사용되었는데, The LORD rebuke thee. 는 왜 rebuketh 가 아니라 rebuke 라고 했을까요? 혹시 rebuke 라는 동사는 어미 변화를 하지 않는 동사인 가 해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다음 구절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동사도 분명히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문장에서는 rebuketh 로 어미 변화를 합니다. 사람을 꾸짖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 많은 호의를 얻으리라(잠28:23). He that rebuketh a man afterwards shall find more favour than he that flattereth with the tongue. 그들이 성문에서 꾸짖는 자를 미워하며 올바르게 말하는 자를 몹시 싫어하는도다(암 5:10). They hate him that rebuketh in the gate, and they abhor him that speaketh uprightly. 앞에서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문장에서는 동사에 어미 -th를 붙인다. 고 했습니다. the LORD 가 3인칭 단수인 것도 맞고 시제가 현재인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이 문장이 직설법 문장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직설법이라면 rebuketh 가 되어야 하고 번역은 책망한다. 라고 해야 합니 다. 그러나 스가랴서 3장 2절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서는 3인칭 단수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미 -th를 붙이지 않고 rebuke 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이는 이 문장이 직설법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스가랴서 3장 2절에 나오는 The LORD rebuke thee. 라는 문장은 직설법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391

390 문장이 아니라 가정법 문장입니다. 영문법을 배우신 분들은 기원문은 가정법 현재로 표현한다. 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기원문은 가정법 현재로 취급하여 주어에 상관없이 동사의 원형을 사용합니다. 본문에서 rebuke 에 -th라는 어미를 붙이지 않고 동사의 원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이 문장이 기원문이기 때문입니 다. 보통 기원문에서는 조동사 may를 사용하는데(조동사 다음에는 동사 원형), 이를 생략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동사 원형이 옵니다. May God bless you! = God bless you! May God save the queen! = God save the queen! 스가랴서 3장 2절 말씀의 The LORD rebuke thee. 는 가정법을 사용한 기원문이기 때문에 번역을 할 때에는 기원문 형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개역 성경이나 한글킹제임스역과 같이 주가 너를 책망하노라. 가 아니라 흠정역 성경과 같이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유다서 1장 9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기원문입니다. 개역: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1:9) 한글킹: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느니라. 고 말하였느니라. 흠정역: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할 때에 감히 그에게 욕설로 비난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르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 원하노라, 하였느니라. KJV: Yet Michael the archangel, when contending with the devil he disputed about the body of Moses, durst not bring against him a railing accusation, but said, The Lord rebuke thee. 유다서 1장 9절 말씀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로 읽어보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확실히 기원문입니다. 흠정역 성경과 개역 성경은 이를 기원문으로 번역했는 데 한글킹제임스역만 이를 직설법 현재로 착각하여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느니 라. 라고 잘못 번역하였습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3인칭 단수 직설법 현재형 동사의 뒤에 붙는 어미 -th는 단순히 고어체 영어에서나 등장하는 불필요한 잔재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문장의 시제(tense)와 법(mood)을 알려주는 중요한 392 바르게 읽는 성경

391 지표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할 때에는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주의하여 번역해야 합니다.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기 원하노라 393

392 68. 바벨론 성인가, 바빌론의 딸인가? 개역: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슥2:7) 흠정역: 오 바빌론의 딸과 함께 거하는 시온아, 네 자신을 건질지어다. KJV: Deliver thyself, O Zion, that dwellest with the daughter of Babylon. 구약성경 스가랴서는 바빌론에서 1차로 귀환하여 주의 집을 재건하다가 대적 자들의 방해로 공사를 중단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즉 이 말씀의 수신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입니 다. 스가랴서 2장 7절 말씀에서 대언자는 시온에게 말을 걸고, 네 자신을 건지라. 고 촉구하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시온은 시온 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이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시147:12). 오 예루살렘아, 주를 찬양하라. 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하라(시147:12). 시온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볼 때 개역 성경이 말하는 바벨론 성 은 오역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가랴는 지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현재 바빌론 성에 거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는 바빌론 성이 없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빌론 성이 아니라 바빌론의 딸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바빌론의 딸들이 섞여 있었다 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서 이방의 아내를 취한 자들은 그녀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할 것을 명합니다(스10:10-11).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죄를 짓고 이방 아내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범법을 증가시켰으니 그러므로 이제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 자백하고

393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여 이 땅 백성과 이방 아내들로부터 너희 자신을 분리할지니라, 하매(스10:10-11) 스가랴서 2장 7절 말씀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의 딸과 함께 거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그들 자신을 건지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바빌론의 딸은 멸망 받을 존재로 나타나며(시137:8), 대언자 이사야와 예레미야 가 증언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사47:1; 렘50:42; 51:33). 오 멸망 받을 바빌론의 딸아, 네가 우리에게 베푼 대로 네게 갚는 자가 행복하리로다(시 137:8). 오 바빌론의 처녀 딸아,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오 갈대아 사람들의 딸아, 왕좌가 없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부드럽고 우아하다고 불리지 아니하리라(사47:1).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백성이 거룩하기를 원하시며(레11:45), 자기 백성이 바빌론의 음녀(계17:5)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그녀의 죄들에 참여 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계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우리는 바빌론의 딸로부터, 바빌론의 음녀로부터, 바빌론의 혼합 종교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야 합니다. 바벨론 성인가, 바빌론의 딸인가? 395

394 69. 영광을 회복하는가, 뛰어남을 외면하셨는가?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나2:2) 흠정역: 주께서 이스라엘의 뛰어남을 외면하신 것 같이 야곱의 뛰어남을 외면하셨으니 비우는 자들이 그들을 비웠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못 쓰게 하였느니라. KJV: For the LORD hath turned away the excellency of Jacob, as the excellency of Israel: for the emptiers have emptied them out, and marred their vine branches. 구약성경 나훔은 아시리아의 공격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 게 하나님께서 대언자 나훔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위로의 말씀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침략자 아시리아를 심판하신다는 소식입니다. 나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대언하여,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훔서 2장 2절은 이런 배경 가운데서 나온 말씀입니다.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흠정역: 주께서 이스라엘의 뛰어남을 외면하신 것 같이 야곱의 뛰어남을 외면하셨으니 개역 성경에서는 이때가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때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나 성경의 다른 기록들에 비추어보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주께서 니느웨 를 심판하시는 그때가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는 때라면 그 다음에는 야곱의 회복된 영광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나훔서 2장 2절에는 야곱의 영광이 회복되는 이야기는 없고 그와 반대로 약탈자들이 약탈하는 이야기, 포도나무 가지를 못 쓰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주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신다. 는 것이 아닙니다.

395 또한 침략자 아시리아가 망하고 나니까 야곱의 영광이 회복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시리아는 망했지만 바빌론이 남쪽 유다 왕국에 쳐들어와서 도시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집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갔습니 다. 이런 사건들을 살펴볼 때 이 말씀은 주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개역 성경이 회복하시되 라고 번역한 부분을 turned away (외면하셨으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아시리아가 강하고 능력이 많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탈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 때문에 그들을 외면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노략하고 파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넘치는 분노와 교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법을 행한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훔서 2장 말씀의 주요 내용입니 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나훔 2장의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나훔서 2장 2절 말씀이 주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신다.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께서 야곱의 뛰어남을 외면하셨다. 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을 회복하는가, 뛰어남을 외면하셨는가? 397

396 70. 식굿 왕인가, 몰록의 장막인가? 개역: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암5:26) 흠정역: 오히려 너희가 너희의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형상들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너희 신의 별을 가지고 다녔나니 KJV: But ye have borne the tabernacle of your Moloch and Chiun your images, the star of your god, which ye made to yourselves. 개역 성경으로 아모스서를 읽다보면 5장 26절에서 식굿 이라는 낯선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때 저는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식굿 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이 섬긴 형상들 중에서도 그런 이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여기에 나오는 왕 이라는 단어는 메레크 (몰록, 왕이라는 뜻도 있음)이 며, 씨쿠트 (식굿)가 장막 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번역자들이 원망스 러웠습니다. 고유명사인 몰록은 왕이라고 번역하고, 일반명사인 장막은 식굿이 라고 음역하여 고유명사인 것처럼 번역해 놓았으니 일반 성도들이 그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냥 성경 기록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몰록의 장막을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했다고 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울 텐데, 왜 이스라엘이 식굿이라는 이름의 왕을 섬긴 것처럼 번역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식굿 왕 이 맞는지, 몰록의 장막 이 맞는지는 성경 말씀이 스스로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유대인 설교자 스데반은 위의 아모스서 5장 26절을 어떻게

397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43절에서 그는 아모스서 5장 26절을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개역: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행7:43) 흠정역: 참으로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 곧 너희가 경배하려고 만든 형상들을 들고 다녔은즉 내가 너희를 바빌론 너머로 끌고 가리라, 함과 같으니라. KJV: Yea, ye took up the tabernacle of Moloch, and the star of your god Remphan, figures which ye made to worship them: and I will carry you away beyond Babylon. 신약성경은 개역이나 흠정역 모두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이 the tabernacle of Moloch (Gr, 스케넨 투우 몰록)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 다. 히브리어 씨쿠트 (식굿)가 고유명사였다면 그리스어 성경에서도 그대로 음역이 되었겠지만 신약성경은 이것을 장막 (σκηνη)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 므로 구약성경 아모스서 5장 26절도 몰록의 장막 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 원문의 단어를 음역하느냐, 뜻으로 풀어서 옮기느냐 하는 선택의 차이가 아닙니다. 몰록의 장막 이라고 해야 할 것을 식굿 왕 으로 번역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우상 숭배의 죄를 덮어 버리고, 이교도들에게 숭배를 받던 마귀들의 정체를 감추어 줍니다. 다른 역본들과 달리 킹제임스 성경은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 엄격하고, 단호하게 그것을 지적하 며, 마귀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조금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습니 다. 이것이 제가 킹제임스 성경을 신뢰하는 이유 중의 한 가지입니다. 식굿 왕인가, 몰록의 장막인가? 399

398 71. 누가 누구를 누르는가? 개역: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암2:13) 흠정역: 보라,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가 눌림같이 내가 너희 밑에서 눌렸나니 KJV: Behold, I am pressed under you, as a cart is pressed that is full of sheaves. 아모스서 2장 13절을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이 눌린다. 고 번역하였지만, 개역 성경을 비롯한 많은 현대어 번역들은 킹제임스 성경과는 정반대로 하나님 이 그들을 누른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개역개정, 우리말, 쉬운성경 등의 번역에서는 수레가 흙을 누른다. 고 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물론이고 영어 성경 어디에도 흙을 이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번역자들이 흙을 이라는 표현을 임의로 추가한 것은, 태(능동/수동)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을 하나님 이 그들을 누른다. 라고 번역하기 위해서는 앞부분도 능동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원래 앞부분도, 뒷부분도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누르다 가 아니라 눌린다 가 맞습니다.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많이 싣거나 사람을 많이 태우면 차체가 아래로 처지거나 바퀴가 짓눌립니다. 수레에 곡식 단을 가득 실으면 그 하중 때문에 수레가 눌립니다. 아모스서 2장 13절은 바로 이런 현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수레가 흙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가득히 실은 곡식 단 때문에 수레가 눌리는 것을 말하며, 뒷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서 눌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 밑에서 그토록 눌리게 되었을까요?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을 대적하여 죄를 범하였 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암2:4-12). 그들은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았고, 자기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말로 인해 잘못을

399 범했으며, 주께서 보내신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죄가 무거운 짐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욥7:20; 시38:4). 오 사람들을 보존하시는 주여,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주께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세우사 주를 대적하는 과녁이 되게 하시며 내가 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7:20)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무거운 죄 때문에 마치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처럼 짓눌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번역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성경에 없는 단어를 추가하고 수동태 를 능동태로 만들다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의 번역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거운 곡식 단과 짓눌리는 수레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범죄와 그들에 의해 눌리시는 하나님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모스서 2장의 문맥을 통해서 이 대응 관계를 이해하신다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무거운 죄 짐을 벗고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무거운 것과, 얽어매는 죄를 떨쳐버리고 믿음으로 경주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1) 누가 누구를 누르는가? 401

400 72.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KJV: I have seen all the works that are done under the sun; and, behold, all is vanity and vexation of spirit. 전도서 1장 14절의 바람 (개역), 영 (흠정역)은 모두 히브리어 루아흐 를 번역 한 것입니다. 루아흐라는 단어에는 바람, 숨, 영 등과 같이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어느 번역이 옳은지를 가리기 위해 원어 성경을 살펴보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의 전후 문맥을 통해서 해 아래서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 바람을 잡는 일인지, 영을 괴롭게 하는 일인지를 살펴보려 고 합니다. 이 표현은 전도서 1장 14절을 포함하여 전도서에 모두 9번 등장합니다. (1) 전도서 1장 14절 이 구절의 바로 앞에 나오는 13절을 살펴보면, 하늘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쓰라린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일들이 고통, 괴로움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둡시다.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에 관하여 찾아보고 탐구하려고 내 마음을 쏟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 받게 하셨느니라(전1:13). (2) 전도서 1장 17절 전도서 1장 17절에도 지혜를 찾는 일, 미친 것과 어리석은 것을 알기 위해 마음을 쓴 일이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18절에서는

401 그렇게 지혜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슬픔을 늘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전1:18). 즉, 영을 괴롭게 하는 것(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고통, 괴로움뿐만 아니라 슬픈 일이라고 합니다. 또 내가 지혜를 알기 위해, 미친 것과 어리석은 것도 알기 위해 내 마음을 주었으나 이것도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근심도 많나니 지식을 늘리는 자는 슬픔을 늘리느니라(전1:17-18). (3) 전도서 2장 11, 17, 26절 전도서 2장 11절, 17절, 26절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2장 17절에서도 해 아래서 이룩한 일이 내게 몹시 괴롭기 때문이라. 고 자세한 설명을 달아놓았습니다. 이것은 그런 수고가 바람을 잡는 노력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에 내가 내 손이 이룩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하여 행한 모든 수고를 바라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요, 해 아래에는 아무 유익이 없었도다 그 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으니 이는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므로 해 아래에서 이룩한 일이 내게 몹시 괴롭기 때문이라(전2:11, 17). 전도서 2장 26절은 그 앞에 나오는 22절과 연결됩니다. 22절에는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 (the vexation of his hear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을 vexation of spirit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로 보아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일은 바람을 잡으려는 노력 이 아니라 마음과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며 행한 자신의 모든 수고와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리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앞에서 선한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거니와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2:22, 26). (4) 전도서 4장 4, 6, 16절 전도서 4장 4, 6, 16절에도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4절과 6절에서는 해산의 고통 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어 있어 이것이 고통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해산의 고통과 모든 옳은 일을 다시 깊이 살펴보니 이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인가? 403

402 자기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도다. 이것도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한 손에 가득하고 평온한 것이 두 손에 가득하고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보다 더 나으니라 모든 백성의 끝이 없으며 심지어 그들 전에 있던 모든 자들의 끝도 없도다. 뒤에 오는 자들도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분명히 이것도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4:4, 6, 16). (5) 전도서 6장 9절 전도서 6장 9절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이 욕망으로 인해 헤매는 것보다 낫기는 하지만 결국 이것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욕망으로 헤매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조금 낫긴 하지만 결국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욕망으로 인해 방황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곧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의미가 통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욕망으로 인해 헤매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6:9). 전도서에는 이처럼 영을 괴롭게 하는 것 - 개역 성경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 으로 번역함 - 이라는 표현이 아홉 번이나 나오는데, 그 구절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말씀은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일들이 뜬구름 잡는 것과 같다. (우리말성경) 즉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전후 구절들을 살펴본 결과,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기를 위해 수고하며 행하는 모든 일들은 인생에게 참다운 만족을 주지 못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사람을 몹시 괴롭게 하고,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며, 욕망으로 인해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그런 수고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영을 괴롭게 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원어로는 이 구절이 바람으로도, 영으로도 번역이 가능하겠지만,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이런 전도서 전체의 흐름을 읽고, 또한 그런 표현이 등장하는 각 구절 속에서 그 말씀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고려하여 이를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옮겼는데, 이는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는 적합한 번역이라 고 생각합니다. 404 바르게 읽는 성경

403 73.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인가? 개역: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26:22) 흠정역: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상처들과 같아서 배 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 니라. KJV: The words of a talebearer are as wounds, and they go down into the innermost parts of the belly. 개역 성경에 의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 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개역이 말하는 별식(별미)이란, 한자어로 별식 ( 別 食 )으로 특별한 음식, 뛰어난 맛을 지닌 음식, 맛좋은 음식을 말합니다. 창세기 27장 4절과 욥기 33장 20절에 나오는 맛있는 음식 - 개역 성경에서는 별미라고 함 - 이 바로 잠언 26장 22절의 별식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내게로 가져와 내가 먹게 하고 이로써 내가 죽기 전에 내 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 하니라(창27:4). 이로써 그의 생명은 빵을, 그의 혼은 맛있는 음식을 몹시 싫어하며(욥33:20) 과연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퍼뜨리는 사람의 말들은 사람의 입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맛있는 음식일까요? 그 말들은 배 속 깊은 데로 내려가서 그것을 말하고 듣는 사람의 건강에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면, 성경은 그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칭찬하고 그런 언행을 장려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소문을 퍼뜨리는 자(talebearer) 는 남의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며(잠11:13),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에(잠26:20), 그런 자와 관여하지 말고(잠20:19), 소문을 퍼뜨리는 자처럼 행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레19:16)을 볼 수 있습니다.

404 소문을 퍼뜨리는 자처럼 두루 다니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니 그런즉 입술로 아첨하는 자와 상관하지 말지니라(잠20:19). 너는 네 백성 가운데서 소문을 퍼뜨리는 자처럼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또 서서 네 이웃의 피를 대적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9:16).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경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잠언 26장 20절 말씀에서 소문을 퍼뜨리는 자 때문에 다툼이 생긴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나오는 22절에서는 그런 자의 말이 맛있는 음식이라고 칭찬하실 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의 말에 대해 경계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 역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는 젊은 과부들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게으르게 지내는 것을 배워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수다쟁이와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가 되어 자기들이 마땅히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하나니(딤전5:13) 잠언 26장 22절 말씀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읽어보면, 다른 사람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별식이 아니라 상처들 이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사람들의 배 속 깊은 데로 내려가기 때문에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상처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언 26장 22절 말씀은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언행을 칭찬하고 그런 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406 바르게 읽는 성경

405 74.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가? 개역: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 25:23) 한글킹: 북풍이 비를 몰고옴과 같이 험담하는 혀는 성난 얼굴을 일으키느니라. 흠정역: 북풍이 비를 몰아내는 것 같이 성난 얼굴은 헐뜯는 혀를 몰아내느니라. KJV: The north wind driveth away rain: so doth an angry countenance a backbiting tongue. 개역 성경은 북풍이 비를 일으킨다고 했고, 한글킹제임스역 역시 북풍이 비를 몰고 온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흠정역 성경은 북풍이 비를 몰아낸다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번역이 서로 다릅니다.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살펴봅시다. 1.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구와 대응 관계에 대한 이해 우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문장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The north wind driveth away rain: so doth an angry countenance a backbiting tongue. 이것은 전형적인 병행체 문장으로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북풍 : 비 = 성난 얼굴 : 헐뜯는 혀 북풍과 비의 관계는 성난 얼굴과 헐뜯는 혀의 관계와 같다는 뜻입니다. 전반부 에서 북풍이 행위 주체이고 비는 북풍에 의해 조종당하는 객체가 됩니다. 따라서 후반부에서도 앞에 나오는 성난 얼굴이 행위 주체이고 헐뜯는 혀는 객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오히려 참소하는 혀, 험담하는 혀를

406 주체(원인)로 번역을 하고, 성난 얼굴을 객체(결과)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잠언에서 사용되는 병행체 구조가 완전히 깨어져 버립니다. 비교를 위해 이 구절과 완전히 같은 형식을 띠고 있는 전도서 10장 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죽은 파리들이 약제사의 향유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작은 어리석음도 지혜와 명예로 명성을 얻은 자를 그렇게 만드느니라. Dead flies cause the ointment of the apothecary to send forth a stinking savour: so doth a little folly him that is in reputation for wisdom and honour. 죽은 파리 : 향유 = 작은 어리석음 : 지혜와 명예로 명성을 얻은 자 죽은 파리와 향유의 관계는 작은 어리석음 과 지혜와 명성을 얻은 자 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또한 죽은 파리는 작은 어리석음에 대응되는 말이고, 향유는 지혜와 명성을 얻은 자에 대응되는 말입니다. 전반부에서 죽은 파리는 오염의 원인이 되고 향유는 그로 인해 부패하게 되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처럼, 후반부에 서 작은 어리석음이 원인이 되고 지혜와 명성을 얻은 자는 그 작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부패하게 되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전도서 10장 1절의 올바른 번역은 흠정역 성경과 같습니다. 죽은 파리들이 약제사의 향유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작은 어리석음도 지혜와 명예로 명성을 얻은 자를 그렇게 만드느니라. 잠언 25장 23절과 전도서 10장 1절은 다 원인 : 결과 = 원인 : 결과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후반부가 so doth 로 시작하면서 전반부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후반부에 나오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개역 성경과 한글킹제임스역은 후반부에 나오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바꿈으로 써 전반부의 대응 관계와 후반부의 대응관계를 불일치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본래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성경 말씀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2. Drive away 에 대한 이해 다음으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drive away 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 니다. 이것을 일으키다, 몰고오다 로 번역해야 할까요, 아니면 몰아내다 로 번역 해야 할까요? 다음에 소개하는 구절들을 읽어보고 drive away 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흠정역: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혹은 어떤 짐승을 자기 이웃에게 넘겨주어 지키게 408 바르게 읽는 성경

407 하였다가 그것이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갔어도 본 사람이 없으면(출22:10) 한글킹: 만일 어떤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어느 짐승이든지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것이 죽거나 다치거나 몰려 나갔어도 본 사람이 없으면 KJV: If a man deliver unto his neighbour an ass, or an ox, or a sheep, or any beast, to keep; and it die, or be hurt, or driven away, no man seeing it: 흠정역: 아버지 없는 자의 나귀를 몰아가고 과부의 소를 담보물로 취하며(욥24:3) 한글킹: 아비 없는 자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수소를 가져다가 저당잡는도다. KJV: They drive away the ass of the fatherless, they take the widow's ox for a pledge. 흠정역: 연기가 밀려가는 것 같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밀초가 불 앞에서 녹는 것 같이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68:2). 한글킹: 연기가 날려 가듯 그들을 쫓아내시며, 밀초가 불 앞에서 녹아 내리듯 악인으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멸망하게 하소서. KJV: As smoke is driven away, so drive them away: as wax melteth before the fire, so let the wicked perish at the presence of God. 출애굽기 22장 10절에서 driven away 는 가축이 원래 주인의 관할로부터 벗어나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기 24장 3절의 drive away 도 나귀를 빼앗아서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것을 말하지 아비 없는 자에게 나귀를 몰아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68편 2절 역시 연기가 날려간다 라는 뜻이지, 연기를 몰고 온다 는 의미가 아닙니다. away 라는 부사는 무엇으로부터 이탈, 분리, 벗어남,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지 휴대, 동반, 부대, 참여를 의미하 는 with 가 아닙니다. 따라서 The north wind driveth away rain. 은 흠정역 성경과 같이 북풍이 비를 몰아낸다. 고 번역해야지 개역 성경이나 한글킹제임스역처럼 북풍이 비를 일으킨다, 비를 몰고 온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3. 이스라엘의 기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과연 북풍이 비를 일으키거나 비를 몰고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북풍이 비를 몰고 오지 않는데 성경에 북풍이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가? 409

408 비를 몰고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과학 지식이 부족한 고대인들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기록한 글이거나 하나님께서 성경에 거짓된 정보를 기록하신 것이 됩니다. 잠언이 기록된 곳은 이스라엘이니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스라엘 의 바람과 비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1) 동풍과 남풍: 덥고 건조한 바람 동쪽이나 남쪽에서 부는 바람은 덥고 건조한 바람입니다. 곡식과 열매를 말리는 바람, 요나를 괴롭힌 뜨거운 바람이 동풍입니다. 보라, 참으로 그것이 심겼어도 형통하겠느냐? 동풍이 그것에 손을 대면 그것이 완전히 시들지 아니하겠느냐? 그것이 자기가 자라던 고랑에서 시들리라, 하라(겔17:10; 19:12). 해가 뜰 때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또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매 그가 기진하여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욘4:8). 남쪽에서 오는 바람도 뜨겁고 건조한 바람입니다. 그래서 남풍이 불면 날이 더워집니다. 너희가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더우리라, 하나니 그렇게 되느니라(눅12:55). (2) 서풍: 습한 바람 동풍이나 남풍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아니기에 비를 내리지 못합니다. 비가 내리려면 수증기를 많이 머금은 공기가 있어야 하는데 습기 찬 공기는 서풍을 타고 옵니다. 제가 이전에 팔레스타인(가나안)의 지리와 기후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읽었던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강우량은 물론 지방에 따라서 다르다. 그리고 산악지대에 비가 많이 오고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강우량이 적다. 습기는 지중해로부터 바다를 타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요르단 강 서쪽에 있는 고원지대에 이르면 공기가 차지는 동시에 수증기가 응결되어 비가 된다(곽안전, 팔레스틴의 지리, pp.51-52). 물론 성경 말씀도 이와 같은 사실을 증언합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에 서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비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때 자기 종을 시켜서 바다 쪽을 보라고 합니다. 410 바르게 읽는 성경

409 이에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왕상18:42-43) 갈멜 산에서 보이는 바다라는 것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를 말합니다. 그 바다에 서 작은 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얼마 후 큰 비가 내렸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왕의 병거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왕상18:44). 이와 같은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땅에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은 서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북풍: 차고 건조한 바람 북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으로서 습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비를 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서쪽에서 비구름이 오고 있는데 북풍이 강하게 불면 이 비구름들을 흩어버립니다(욥37:21-22). 그래서 북풍은 비를 일으키거나, 비를 몰고 오는 바람 이 아니라 비를 몰아내는 바람 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구름들 속에 있는 밝은 빛을 보지 못할지라도 바람이 지나가면서 그것들을 깨끗하게 씻느니라. 좋은 날씨가 북쪽에서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37:21-22). 위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풍은 비구름들을 몰아서 내쫓아 버리고 맑은 날씨를 가져오는 바람입니다. 따라서 북풍이 비를 일으킨다. 는 개역 성경이나 북풍이 비를 몰고 온다. 고 하는 한글킹제임스역의 번역은 잘못된 것이고, 북풍이 비를 몰아낸다. 고 번역한 흠정역 성경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북풍이 비를 몰아낸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엉뚱하게 북풍이 비를 몰고 온다. 라고 번역하여 성경 기록들을 거짓말로 만들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4. 후반부의 대동사 doth에 대한 이해 욥기 25장 23절 후반부에 나오는 so doth 라는 표현에서 doth 는 대동사로서 driveth away 를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대동사란 앞에 나온 동사를 대신하여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가? 411

410 사용하는 동사를 말합니다. You know much more than I do(너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위 문장에서 do 는 know 를 의미하는 대동사입니다. 대동사는 앞에 나오는 동사를 받으며 그 의미는 앞에 나온 동사의 의미를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즉, 잠언 25장 23절 전반부의 driveth away 가 몰아내다 라는 뜻이므로 후반부에 나오는 doth 역시 일으키다 가 아니라 몰아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험담하는 혀가 성난 얼굴을 일으키는 것 이라는 한글킹제임스역의 번역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서로 바뀌었으며, drive away 의 의미 역시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성난 얼굴이 헐뜯는 혀를 몰아내는 것 이 맞습니다. 5. 관련된 다른 말씀들 어떻게 하면 저 헐뜯는 혀를 몰아낼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에 대한 해답도 제시합니다. 너 거짓된 혀여, 무엇을 네게 줄까? 혹은 무엇을 네게 행할까? 강한 자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나무의 숯불이로다(시120:3-4). 헐뜯는 혀, 거짓된 혀를 물리치는 데에는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나무 숯불과 같은 강경한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잠언 25장 23절에서 성난 얼굴이 헐뜯는 혀를 몰아낸다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잠언 25장 23절에서 성난 얼굴은 북풍에 대응하는 말입니다. 비록 비와 같이 좋은 것을 몰아내느냐, 헐뜯는 혀와 같이 나쁜 것을 몰아내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무언가를 몰아낸다는 점에서는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난 얼굴과는 반대로 자비하고 밝은 얼굴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북풍과는 반대로 비를 몰아내 지 않고 은혜의 비구름을 불러들이게 될 겁니다. 잠언 16장 15절이 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왕의 얼굴빛에는 생명이 있나니 그의 은총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 같으니라(잠16:15). In the light of the king's countenance is life; and his favour is as a cloud of the latter rain. 잠언 16장 15절에서는 왕의 얼굴이 환하고 밝은 광채를 띠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그의 은총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잠언 16장 412 바르게 읽는 성경

411 15절 역시 잠언 25장 23절 말씀의 내용을 지지합니다. 잠언 25장 23절 말씀의 번역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사용된 drive away 의 용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도 바르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잠언 25장 23절 말씀이 어떤 의미이며 어느 것이 올바른 번역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010년 새해에도 주께서 이 글을 읽는 형제자매님들에게 항상 그분의 얼굴로 빛을 비춰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평강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께서 자신의 얼굴로 네게 빛을 비추사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주께서 자신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가? 413

412 75. 괴이한 것이 보이는가? 개역: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잠 23:33) 흠정역: 네 눈은 낯선 여자들을 바라볼 것이요, 네 마음은 비뚤어진 일들을 말하리로다. KJV: Thine eyes shall behold strange women, and thine heart shall utter perverse things. 잠언 23장에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자의 증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33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눈 과 마음 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얻는 정보들 중 많은 것들이 눈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시계를 보고, 신문을 보고, 신호등을 보고, 지도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보고, 심지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맛도 보고, 분위기도 살펴봅니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감각기관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롯은 소돔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의 죄악된 모습을 보고, 그들의 악한 말을 듣고 하는 가운데 그의 혼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벧후2:8). (이는 저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혼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롯은 분명히 이런 상황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소돔에서 나와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게 그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거주지를 정한 기준은 자기의 혼에게 좋은 곳이 아니라 가축들이 먹고 살기에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창13:10). 롯의 아내 역시 소돔을 떠나기가 아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6). 죄로 오염된 것들, 우리의 혼을 해롭게 하는 것들, 우리 마음을 유혹하는

413 것들은 보지 말고, 거기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고(창3:6) 다윗은 이웃집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결국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11:2). 저녁때에 다윗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왕의 집 지붕 위에서 걷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지붕에서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우므로(삼하11:2) 그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자기 힘으로 자신의 눈을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런 유혹을 피할 길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유혹을 피하기 위해 눈을 잘 관리하라고 가르칩니다(마5:28;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네게서 내버리라. 네가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라(마 18:9). 이 말씀은 그렇게 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죄를 범할 바에는 차라리 눈이 없는 게 더 낫다는 것이지, 눈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굳이 눈을 빼어 버리지 않더라도 눈을 다른 데로 돌려버리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후각이나 청각보다 훨씬 더 우리 의지대로 다루기 좋은 감각 기관입니다. 우리는 숨을 쉬다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숨을 안 쉬거나 귀를 틀어막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눈은 이와는 달리 우리 의지대로 통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 으로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돌리기 전에는 절대로 그 쪽에 있는 어떤 대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연히 경건하지 못한 장면, 자신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면 그때부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리면 됩니다. 정말로 눈을 돌릴 곳이 없으면 눈을 감거나 책이라도 꺼내 읽으면 됩니다. 소리는 들리고, 냄새는 나는 것이지만, 영상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입니다. 바로 이것이 잠언 23장 33절 말씀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기에 좀 장황하게 서론을 펼쳤습니다. 개역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면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인다. 고 합니다. 술에 취한 많은 사람들이 개역 성경과 같은 변명을 합니다. 자기는 가만히 길을 가고 있는데 전봇대가 다가와서 자기 이마를 치고 갔다고 괴이한 것이 보이는가? 415

414 하며, 자기 옆에 있는 여자가 술김에 자기 아내로 보여서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하며, 심지어 성범죄자들조차도 그 당시에는 술에 취해서 헛것이 보였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변명합니다. 사법부에서도 그들의 범죄가 심신 미약의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라며 그 죄에 대한 처벌을 관대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술에 취한 자가 눈에 이상한 것이 보여서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네 눈은 낯선 여자들을 바라볼 것이요 라며 능동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래 말씀에서 어떤 이의 눈에 여자가 보였는지 아니면 어떤 이가 눈으로 여자를 보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포로들 중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see) 그녀를 취하려는 소원이 있어서 그녀를 네 아내로 삼고자 하거든(신21:11) 삼손이 딤낫에 내려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고(see)(삿 14:1) 아브람이 이집트로 들어갈 때에 이집트 사람들이 그 여인을 보고(beheld) 그녀가 심히 아름다운 것을 보았으며 (창12:14) 성경에서 시각을 나타내는 동사 see, look, behold 등은 수동형으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습니다. 가끔 be seen 이라는 형태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 그 의미는 나타나다, 드러나다 라는 뜻이 됩니다. 특히 잠언 23장 33절에 사용된 behold 라는 단어는 한 번도 수동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영어 성경을 읽다보면, behold 라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보라 (see)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과 관심을 쏟아 주목하라 는 뜻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보다 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자세히 주의 깊게 살펴보다 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래 예들을 살펴보면, 야곱이 라반의 눈치를 살피는 것, 다윗이 사울이 진 친 곳과 그들이 누운 곳을 바라보는 것, 솔로몬이 하나님의 모든 일을 눈여겨본 것 등이 모두 behold 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얼굴빛을 보았는데(beheld), 보라, 그것이 자기를 향해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창31:2).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곧 그의 군대 대장 아브넬이 누운 곳을 바라보았는데(beheld) 사울은 참호 안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싸고 진을 쳤더라(삼상26:5). 그때에 내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눈여겨보고(beheld)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음을 알았으니 이는 사람이 수고하여 그것을 찾아내려 416 바르게 읽는 성경

415 할지라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 또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지라 도 능히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로다(전8:17). 이 behold 라는 단어 자체에는 주목하여 살펴보는 그 사람의 목표, 관심, 의지 등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능동형으로 사용합니 다. 즉, 술 취한 사람의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술 취한 자는 낯선 여자들을 바라볼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술에 취해서 헛것이 보여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술 마시기를 선택한 것도, 자신의 이성적인 통제력을 포기한 것도, 자신을 육신의 욕심에 내어맡긴 것도, 낯선 여자들을 바라본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비뚤어진 생각들은 주로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악한 정보들로 인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소중한 감각 기관인 눈을 잘 관리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마18:9). 술은 이성적인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우리 자신을 육신의 욕심에 내어맡기게 하여 우리 눈이 죄악된 것, 사악한 것, 해로운 것들을 바라보게 합니다(잠23:33). 네 눈은 낯선 여자들을 바라볼 것이요, 네 마음은 비뚤어진 일들을 말하리로다(잠23:33).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제어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육신이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성령님을 의지하고(갈5:17) 오직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엡5:18).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 5:17)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괴이한 것이 보이는가? 417

416 76. 친구가 많으면 해를 당하는가? 개역: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흠정역: 여러 친구를 두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다정한 자로 보여야 하나니 형제보다 더 친밀한 친구도 있느니라. KJV: A man that hath friends must shew himself friendly: and there is a friend that sticketh closer than a brother. 개역 성경으로 잠언의 말씀을 읽던 시절, 잠언 18장 24절을 읽으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에 는 분명히 친구를 많이 얻으면 해를 당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언의 다른 부분들은 친구는 어려운 때를 위해 있다. (잠17:17), 친구를 버리지 말라, 형제보다도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 (잠27:10)라고 말씀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두 가지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 속의 가르침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며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잠17:17). 네 친구와 네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며 네 재난의 날에 네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까이 있는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보다 나으니라(잠27:10). 나중에 킹제임스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이 잘못된 번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많은 친구를 얻으면 해를 입는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나쁜 친구들을 사귀고 악한 자들과 교제를 하면 해를 입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해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암논은 요나답이라는 간교한 친구를 사귀는 바람에 그의 악한 꾀와 부추김에 넘어가서 자신의 이복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고(삼하13:3), 그 결과 자신도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고, 다윗의 집안에 큰 해를 입혔습니다. 여호사밧

417 은 아합과 인척관계를 맺고 그와 연합하였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대하18 장). 이처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들을 부패시킵니다(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잠언 18장 24절 말씀은 친구를 많이 두면 해를 입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 친구를 두는 자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다정한 자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친구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면, 친구에게 선물도 하고, 친절도 베풀고, 시간도 함께 보내면서 그들에게 다정함을 나타내 보여줘야 합니다. 물론 그런 친구들 중에는 우정에는 별 관심이 없고 상대방이 베푸는 선물이나 친절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친절을 베풀던 친구가 가난해지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우정을 배신하고 그를 멀리하게 될 겁니다(잠19:7).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도 다 미워하거늘 하물며 그의 친구들이야 얼마나 더 그를 멀리하겠느냐? 그가 많은 말로 그들을 따라갈지라도 그들이 그에게서 떠나가느니라(잠 19:7).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잠언 18장 24절 말씀의 앞 뒤 내용이 접속사 and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뒤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아니라 순접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그런 많은 친구들 중에는 형제보다 더 친밀한 친구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좋은 친구들은 상대방이 가진 권력이나 재물 때문에 친구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나 듣기 좋은 말, 아첨하는 말만 하지 않고, 쓴 소리로 따끔하게 훈계하기도 하고(잠27:6), 함께 어울리고 부딪히면서 서로를 연단하여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잠27:17). 친구가 주는 상처는 신뢰할 수 있으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임수가 가득하니라(잠27:6). 쇠가 쇠를 예리하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예리하게 하느니라(잠 27:17).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나를 훌륭하게 성장시켜 주는 좋은 친구, 형제보다 더 친밀한 친구가 있을까요? 성경은 그런 친구를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가 나의 친구니라(요15:13-14). 친구가 많으면 해를 당하는가? 419

418 77. 지혜를 잃는 자, 죄를 짓는 자? 개역: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8:36) 흠정역: 그러나 나를 대적하여 죄를 짓는 자는 자기 혼을 해치나니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KJV: But he that sinneth against me wrongeth his own soul: all they that hate me love death. 잠언 8장 36절 말씀을 킹제임스 성경은 나(지혜)를 대적하여 죄를 짓는 자는 자기 혼을 해친다. 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이나 NIV 등의 많은 다른 번역본들은 이를 나를 잃는 자는, 나를 찾지 못하는 자는, 나를 놓치는 자는 등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런 역본들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 문제 를 성경 본문에서 슬그머니 삭제하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혜의 말씀은 성공하는 인생을 위한 비결 이 아니라 주를 두려워 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 을 가르칩니다(욥28:28; 잠16:6). 그런데 가장 중요한 죄 문제를 삭제하는 것은 잠언이 기록된 목적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니라(욥28:28). 긍휼과 진리로 말미암아 불법이 정결하게 되며 주를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잠16:6). 잠언 8장 36절 말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죄가 우리 혼을 해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 혼을 살릴 수 있을까? 를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말씀대로 자기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러나

419 죄의 문제를 쏙 빼어놓은 저 번역본으로는 잠언 8장 36절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 봐도 죄 가 자기 혼을 해치고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을 읽으면서도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자기 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탄의 전략 중 하나입니다.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4:4).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죄의 문제를 지적하며, 죄를 짓는 혼은 죽게 된다는 것,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죄인일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의 의가 그 위에 임하고 사악한 자의 악이 그 위에 임하리로다(겔18:20).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개역 성경이 말하는 나를 잃는 것 과 킹제임스 성경이 말하는 나를 대적하여 죄를 짓는 것 은 분명히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의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이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그 실체가 다른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사이비( 似 而 非 ) 혹은 짝퉁이라고 합니다. 사이비 번역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핵심적인 진리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중요한 진리를 빠뜨리거나 거짓 가르침들을 함께 섞어 놓습니다. 사탄이 처음부터 노골적인 악마숭배 교리를 가지고 나아와 가르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부터 경계심을 품고 이를 멀리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사탄이 본래 성경 내용과 상당 부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이비 번역본들을 가지고 나아오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우리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진짜에 가짜를 섞어놓은 혼합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된 가르침이나 사이비 교리에 속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확신하게 된 것에 거해야겠습니다.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지혜를 잃는 자, 죄를 짓는 자? 421

420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딤후3:13-14) 422 바르게 읽는 성경

421 78.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사무엘기하를 읽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왕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다윗이었지만 그도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릅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는 과정, 주 앞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는 모습,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들을 읽다보면 죄에 대한 경각심도 생기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언제 죄에 빠지기 쉬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쟁에 출정하지 않을 때, 게으름을 피우고 느지막하 게 침상에서 일어날 때, 눈으로 세상에 속한 것의 아름다움에 취할 때,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닫고(삼하11:1-2),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제 생활에 경계와 거울로 삼고자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사무엘기하 12장을 읽는 도중 잠깐씩 멈춰서 생각했던 번역본 간의 차이에 대해 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의 단어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유의해서 읽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1.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치열한 전쟁터에 내보내서 사지로 몰아 그를 죽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보내어 다윗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그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 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벌 중의 한 가지는, 다윗의 아내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그가 다윗의 처와 함께 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한 것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그의 가정에 내리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것을 공개적으로 행하심으로써 다윗의 사회적 체면, 명예에도 타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단순히 다윗을 괴롭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내를 빼앗긴 자의 아픔과 슬픔을 알게 하셨고, 주께서 허락한 가정의 소중함을

422 깨우쳐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다윗은 자기가 은밀하게 저지른 죄를 숨기려 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죄도 주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하나님이 사람들의 은밀한 죄를 공개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형벌의 내용이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에서 비슷하긴 하지만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개역: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12:11-12) 흠정역: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네 집에서 너를 대적하는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아내들을 네 눈앞에서 가져다가 네 이웃에게 주리니 이 해가 보는 데서 그가 네 아내들과 함께 누우리라. / 너는 그 일을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앞에서 해 앞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매 KJV: Thus saith the LORD, Behold, I will raise up evil against thee out of thine own house, and I will take thy wives before thine eyes, and give them unto thy neighbour, and he shall lie with thy wives in the sight of this sun. For thou didst it secretly: but I will do this thing before all Israel, and before the sun. 어디가 다르게 번역된 부분인지 한 눈에 알아보실 수 있겠지요? 개역 성경에는 주께서 이 일을 백주에 행하겠다고 하는데,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 해가 보는 데서, 해 앞에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주나 해 앞에서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하실 지도 모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상당한 의미 차이가 있습니다. 백주에 라는 말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서 대낮에 라는 뜻입니다. 반면, 해 앞에서, 해가 보는 데서 라는 말은 일광이 쬐는 낮 시간을 의미함과 동시에 공개된 장소, 노천,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아직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만약 누군가가 대낮에 벌거벗고 있으면 부끄러울까요, 안 부끄러울까요? 그가 백주에 벌거벗고 해 아래에서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하면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울 겁니다. 그러나 비록 대낮일지라도 집 안에서 문 걸어 잠그고 욕실 안에서 벌거벗고 목욕하고 있으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아내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눕는 일이 대낮에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 일이 집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상태에서 벌어진다면, 다윗으로서는 424 바르게 읽는 성경

423 분한 노릇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사회적 체면은 별로 손상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행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시간(대낮)과 공간(공개된 장소) 개념이 모두 포함된 해 앞에서, 해가 보는 데서 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이며 하나님이 집행하시는 형벌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집니다. 또한 실제로 사무엘기하 16장 22절 말씀을 보면, 이 형벌이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하여졌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집의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첩들에게로 들어가니라(삼하16:22). 이 형벌은 낮 시간에(before the sun), 해가 보는 데서(in the sight of this sun) 즉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지붕 위에 장막을 치긴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사방을 막는 가림막일 뿐 윗부분은 뚫려 있어서 해가 보고 있었을 겁니다. 다윗에 대한 징벌이 집행되는 모습을 보면, 사무엘기하 12장 11-12절의 형벌이 단순히 시간적으로 백주, 대낮 에 행해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공개된 형벌, 공개적 명예 손상 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시간대만을 나타내는 백주에 라는 단어보다 시간, 장소, 상황을 함께 나타내는 이 해가 보는 데서, 해 앞에서 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징벌 의도를 정확하게 잘 나타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후궁들, 아내들, 첩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예고하신 이 형벌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실행됩니 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악한 음모자 아히도벨은 모략을 베풀어 압살롬 에게 자기 아버지의 첩들과 함께 누울 것을 권했습니다. 당시의 풍습은 전쟁에서 이긴 자가 진 자의 아내와 첩들을 승리의 기념으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전대 왕의 아내나 첩들을 물려받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자기가 그 전대 왕의 모든 권리(왕권)를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울의 아내들 을 다윗의 품에 주심으로써 다윗이 사울에게 속한 모든 권리를 물려받은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주며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네게 주었느니라. 만일 그것이 너무 조금이었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삼하12:8).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425

424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자기를 지켜주던 아브넬 장군이 자기 아버지의 첩 리스바와 눕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이야의 딸 리스바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 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에게로 들어갔느냐? 하니(삼하3:7) 아도니야가 다윗의 품에 있던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하자 솔로몬이 이에 대해 크게 노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그녀가 이르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왕의 형 아도니야에게 아내로 주소서, 하매 솔로몬 왕이 자기 어머니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어찌 어머니께서 아도니야를 위해 수넴 여인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내 형이오니 그를 위해 왕국도 구하옵소서. 심지어 그를 위해 구할 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 서, 하고(왕상2:21-22) 이제 음모자 아히도벨의 계략으로 압살롬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기 아버지의 첩들과 함께 눕게 되는데 그 장소는 지붕(아마도 왕궁의 지붕)이었 다고 합니다. 개역: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삼하16:22) 흠정역: 이에 그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집의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첩들에게로 들어가니라. KJV: So they spread Absalom a tent upon the top of the house; and Absalom went in unto his father s concubines in the sight of all Israel. 다윗은 왕궁 지붕 위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훔쳐보다가 육체의 욕심에 이끌려 간음했는데(삼하11:2), 이제 바로 그 지붕 위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 아버지의 첩들에게로 들어갑니다(삼하16:22). (1) 후궁들인가, 첩들인가? 그런데 압살롬이 지붕 위에서 더불어 누운 여자들은 누구입니까? 개역 성경은 부친의 후궁들이라고 하고 흠정역 성경은 자기 아버지의 첩들이라고 합니다. 후궁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제왕의 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미상 양 자는 같다고 볼 수 있고 실제로도 그 대상들은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426 바르게 읽는 성경

425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 아내들 혹은 자기 아버지의 첩들 이라고 하셨으면 그대로 옮겨야지 이를 후궁 으로 옮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왕비나 왕후, 후궁 등의 용어는 그녀들이 왕궁에서 누리는 사회적인 신분이지 다윗과의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간음을 하여 남의 가정을 파괴한 다윗을 벌하시며 그의 가정에 같은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므로, 그녀들을 지칭하는 용어 역시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는 의도에 맞게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다윗이 이웃나라 왕의 후궁과 간음을 했다면 그에 대한 벌로 다른 나라의 왕이 다윗의 후궁을 취하는 것이 적합한 처벌이겠지만 이 사건은 다윗이 남의 아내와 간음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다윗의 아내와 함께 눕는 것이 합당한 처벌이 됩니다. 자기 아버지의 첩들 (하나님의 말씀)과 후궁들 (번역자의 표현)은 그 지칭하는 대상이 동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는 번역자의 자의적인 표현입니다. 대상이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의미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창세기 2장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그러나 여자는 창세기 3장 3절에서 그 말씀을 다음과 같이 변개하여 말합니다.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염려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매(창3:3)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 이었고 이브의 표현은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 였습니다. 이브의 생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의 한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둘은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나무를 금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무에서 나는 것 (of it)이라고 하셨고 이브는 나무의 열매 (fruit)라고 했습니다. 이브의 번역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에서 나는 것은 열매뿐만 아니라 잎, 줄기, 뿌리, 껍질, 수액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사용하지 않았고 결국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번역자의 생각을 더할 경우, 결국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427

426 말씀을 왜곡하게 되고, 불신하게 되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2) 아내들인가, 첩들인가? 다음으로 둘 다 사무엘기하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사무엘기하 12장 11절의 표현과 사무엘기하 16장 22절의 표현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왜 사무엘기하 12장 11절에서는 다윗의 아내들 (wives)이라고 했는데 사무엘기 하 16장 22절에서는 자기 아버지의 첩들 (concubines)이라고 했을까요? 아내와 첩을 구분할 때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함께 사는 여자를 아내라고 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그냥 데려와서 같이 사는 여자를 첩이라고 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적어도 이 성경 본문에서는 그런 구분이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아내들과 첩들을 완전히 서로 구별되는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구분하면 하나님이 다윗의 아내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는 아내보다는 상대적으로 등급이 한 단계 떨어지는 첩들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되어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이행하지 않으신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는 그런 구분 방법보다는 첫째 부인 이외의 나머지 부인을 모두 첩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첩(concubine) 이라는 단어는 일부다처제에서 둘째 부인 이하의 아내를 의미한다고 되어 있습니 다. 그러므로 첫째 부인인 미갈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둘째 부인, 셋째 부인, 넷째 부인, 다섯째 부인 등으로 부를 수 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첩들이라 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둘째 부인 이하로는 다윗의 아내들(삼하 12:11)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첩들(삼하16:22)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서 도망갈 때, 첫째 부인 미갈은 왕궁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왕궁에는 첩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왕이 가매 그의 온 집안이 그를 따르더라. 왕이 열 명의 여인 곧 첩들을 남겨 두어 집을 지키게 하니라(삼하15:16). And the king went forth, and all his household after him. And the king left ten women, which were concubines, to keep the house. 그러므로 지붕 위에서 압살롬과 함께 누운 여인들은 다윗의 첫째 부인 미갈을 제외한 그 외 나머지 부인들(첩들)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아내들과 첩들이 같은 의미라면 사무엘기하 16장 22절에서도 자기 아버지의 아내들(his father's wives)이라고 써도 될 텐데 왜 굳이 자기 아버지의 첩들(his father's concubines) 428 바르게 읽는 성경

427 이라고 하면서 사무엘기하 12장 11절과는 다른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첫째로, 이는 현재 왕궁에 남아있는 여인들의 신분은 다윗의 아내들이기도 하고 첩들이기도 하지만 아내들이라고 하면, 다윗의 첫째 아내인 미갈까지 포함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미갈이 다윗과 함께 피난을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신 듯합니다. 둘째로, 또한 사무엘기하 16장 22절에서 아버지의 아내들 이 아닌 아버지의 첩들 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자칫 오해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들에게로 들어갔 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아버지의 아내 = 어머니 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붕 위에서 압살롬과 함께 누운 여인들 중에는 압살롬의 어머니도 있었을 거라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필요한 상상을 미리 차단하고자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이는 압살롬의 어머니인 마아가 역시 다윗의 첩이니까 자기 아버지의 첩 이라고 표현하더라도 결국은 압살롬의 어머니 가 그중에 포함되는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번 압살롬의 입장에 서 생각해 봅시다. 압살롬의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의 첩 이라고 하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압살롬이 자기 어머니를 가리켜서 내 아버지의 첩 이라고 말할까 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내 어머니 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압살롬이 내 아버지 의 첩 이라고 말할 때에는 자기 어머니 마아가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아버지의 첩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압살롬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성경은 다윗의 첩들 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의 첩들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누구의 아버지입니까? 압살롬의 아버지입니다. 지금 본문에 나타난 가족 관계는 압살롬을 기준으로 해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압살롬의 입장에서 가족 관계를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의 첩들 이라고 하셨다면 그중에는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시각에서 자기 아버지의 첩들이라고 하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의 어머니 마아가는 제외됩니다. 또한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첩들과 함께 눕는 목적은, 압살롬이 다윗이 몹시 싫어하는 자가 된 것을 온 이스라엘이 듣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을 강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삼하16:21) 압살롬이 자기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제 추측입니다만, 성경이 압살롬의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의 첩들이라고 한 걸로 보아서 압살롬의 모친인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는 그술 땅에 그대로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429

428 남아 있었거나 다윗이 온 집안을 데리고 떠날 때(삼하15:16), 함께 피난을 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실 때 아무런 목표나 계획도 없이 다윗의 첩들 이라고 써도 되는 것을 굳이 자기 아버지의 첩들 이라고 구분해서 기록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글을 맺으며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은 참으로 세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께서는 그냥 간단히 대낮에 라고 해도 될 것을 이 해가 보는 데서, 해 앞에서 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주께서 내린 징벌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왕궁에 남겨둔 열 명의 여인들이 그의 아내들이기도 하고 첩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지만 각 상황에 맞게 아내들 과 첩들 이 라는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하십니다. 또한 압살롬과 함께 누운 그 여인들이 다윗의 첩들인지, 자기 아버지의 첩들인지를 구별해 놓으심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정제된 표현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으로 인하여 주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정제되었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시18:30). 정말 우리 주님께서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짧은 단어 하나에도 그분의 말씀하신 목적과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말씀의 단어들을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430 바르게 읽는 성경

429 백주에? 이 해가 보는 데서? 431

430 추천 참고 도서 <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1.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한영대역, 스터디, 큰글자, 박사, 신약성경 등), 그리스도예수안에( 2.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 S. 깁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3.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구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100가지 질문과 대답 ), S. 깁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4. 킹제임스 성경 입문서 (구 킹제임스 성경 길라잡이 ), B. 버튼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5. 킹제임스 성경 변호, E. 힐즈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6. 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 D. 웨이트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 에. 7.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T. 홀랜드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8. 바르게 읽는 성경, 김문수, 그리스도예수안에. 9. 신약분석성경 (한/헬/영 대역판), 송종섭 저, 신약원어연구소. 10. 뉴바이블, 송종섭 저, 신약원어연구소. 11. 우리말 성경 연구, 나채운 저, 기독교문사. 12. New Age Bible Versions, Gail Riplinger( 혹은 Final Authority, William P. Grady ( 혹은 Did the Catholic Church Give Us the Bible?, David W. Daniels( com 혹은 < 천주교 > 1. 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R. 존스 저, 정동수, 박노찬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2. 천주교의 유래 R. 우드로우 저,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3. 마틴로이드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 M. 로이드 존스 외,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4. 무엇이 다른가?, F. 리데나워 저, 생명의말씀사.

431 5. 교황 대신 예수를 선택한 49인의 신부들 R. 베닛, M. 버킹엄 저, 이길상 역, 아가페. 6. 종교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F. 리데나워 저, 정창영 역, 생명의말씀 사. 7. 무모한 신앙과 영적 분별력, 맥아더 저, 안보헌 역, 생명의말씀사. 8.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 로레인 뵈트너 저, 이송훈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9. 천주교도 기독교인가? 유선호 저, 하늘기획. 10. A Woman Rides the Beast, Dave Hunt( 혹은 Babylon Religion, David W. Daniels( 혹은 Queen of All, Jim Tetlow( 혹은 < 뉴에이지 운동 > 1. 천사와 UFO 바로 알기, 레이시 저, 정동수 편역, 그리스도예수안에. 2. 뉴에이지 신비주의 - 이교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의 현재, 김태한 저, 라이트하우스. 3. 뉴에이지 운동 평가, 박영호 저, 기독교문서선교회. 4. 뉴에이지 운동(IVP소책자57), D. 그릇하이스 저, 김기영 역, 한국기독학 생회출판부(IVP). 5. 뉴에이지 운동(비교종교시리즈7), 론 로우즈 저, 은성. 6. 뉴에이지에 대한 연구와 대책(울타리 문화교재시리즈6), 낮은울타리. < 창조와 진화 > 창조과학 A to Z, 김재욱, 생명의말씀사. 2. 창세기연구(상,하), 헨리 M. 모리스 저, 전도출판사. 3. 기원 과학, 한국창조과학회, 두란노. 4. 놀라운 창조 이야기, 듀안 기쉬 저, 국민일보. 5. 밝혀진 만물 기원과 창조 신비(창조과학시리즈1), 데니스 피터슨, 나침 반. 6. 숨겨진 공룡의 비밀, 듀안 기쉬, 서용연 역, 꿈을이루는사람들. 7. 자연과학과 기원, 이웅상 외 저, 한국창조과학회. 8. 한 손에 잡히는 창조 과학, 이은일 저, 두란노. 9. 가자! 신비한 공룡의 세계로, 폴 테일러 저, 송지윤 역, 꿈을이루는사람들. 10. 고대 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에델 R. 넬슨 외 저, 전광호, 우제태 역, 기독교출판공동체. 11. 심판대의 다윈 제2판 : 지적설계논쟁, 필립 E. 존슨 저, 이승엽, 이수현 추천 참고 도서 433

432 역, 까치. 12. 젊은 지구, J. 모리스 저, 홍기범, 조정일 역, 한국창조과학회. 13. 창세기에 답이 있다 구 신앙 대 신념, 켄 함, 폴 테일러 저, 한국창조과학 회. < 오순절 은사 운동 > 1. 오순절 은사 운동 바로 알기, W. 유인 외,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2. 무질서한 은사주의, 존 맥아더 저, 이용중 역, 부흥과개혁사. 3. 사단은 성도를 어떻게 속이는가?, 제시 펜 루이스 저, 전의우 역, 기독교문 서선교회. 4.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저, 부흥과개혁사. 5. 성령님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윤명길 저, 로고스 서원. 6. 방언의 실체, 윤명길 저, 로고스 서원. 7.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박영돈 저,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IVP). < 기타 > 1. 성경 바로 보기, C. 라킨 외, 정동수 외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2. 천국과 지옥 바로 알기, A. 레이시, 정동수 외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3. 예수님의 피 바로 알기, A. 레이시 외, 정동수 역, 그리스도예수안에. 4. 설교와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저, 정근두 역, 복있는사람. 5.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김남준 저, 생명의말씀사. 6.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김남준 저, 생명의말씀사. 7.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호라티우스 보나 저, 생명의말씀사. 8. 윌밍턴 종합성경연구 1,2,3, H. L. 윌밍턴 저, 박광철 역, 생명의 말씀사. 9. 하나님이 주신 보장된 삶, 빌 길햄 저, 유상훈 역, 도서출판NCD엔시디. 10. 하나님이 원하시는 크리스천, 빌 길햄 저, 도서출판NCD엔시디. 11. 예수님 위해 살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하라, 찰스 프라이스 저, 생명의말씀사. 12. 하나님의 열심, 박영선 저, 새순출판사. 13. 믿음의 본질, 박영선 저, 세움. 14.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헨리 모리스 저, 전도출판사. 15.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저, 부흥과개혁사. 16.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저, 부흥과개혁사. 17.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저, 부흥과개혁사. 18. 내가 왜 믿어야 하죠?, 김재욱 저, 생명의 말씀사. 19. 성경 신자들의 글 모음, 김재욱 저, 그리스도예수안에. 20. 에스라 성경 사전, 정동수 편역, 그리스도예수안에. 434 바르게 읽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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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집 제 5 권 [특별 기고] 說 敎 의 危 機 와 展 望 조재형 신부 한국천주교회의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小 考 정치우 복음화학교 설립자, 교장 [심포지엄] 한국 초기 교회와 순교영성 한반도 평화통일과 한국 교회의 과제 교황 방한의 메시지와 복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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