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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흥사단 시민역사강좌 - 인물로 살펴보는 근현대사 산책 <독립운동가의 삶과 비전, 그리고 인간관계> 제 5 강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험난한 길을 걸은 여운형 이규태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일시 : 2011년 10월 26일 오후 7시 장소 : 흥사단 강당

2 흥사단 시민역사강좌, 인물로 살펴보는 근현대사 산책! 독립운동가들의 일대기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의 철학, 독립운동 방략, 국가 세계 비전,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상세하게 살펴봄으로 써 독립운동사의 흐름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O 일 시 : 2011년 9월 27일 ~ 11월 2일 (첫주 화요일, 이후 매주 수요일) 저녁 7 9시 (90분 강의, 30분 질의) O 장 소 : 흥사단 강당 (대학로 소재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2번 출구 중간에 위치) O 주 최 : 흥사단 O 주관 : 흥사단 평생교육센터 O 참가비 : 전 강좌 2만원 / 개별강좌 5천원 ( 학생 및 시민단체활동가는 무료) O 수료증 : 전체 6강 중 4회이상 수강시 발급 (교과부 인가 흥사단평생교육센터 명의) <강좌 안내> 일시 09.27(화) 10.05(수) 10.12(수) 10.19(수) 10.26(수) 11.02(수) 주 제 독립협회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전파한 서재필 한철호 (동국대 교수) 독립을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김명섭 (강남대 교수) 교육과 신앙 활동을 하며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했던 손정도 이덕주 (감리신학대 교수)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항일독립운동의 통합을 주창한 김원봉 한상도 (건국대 교수) 좌우합작의 험난한 길을 걸은 여운형 이규태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대공주의를 주창한 대한민국 디자이너 안창호 박만규 (전남대 교수) 수강신청을 안 하신 분은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후 행사 안내 및 각종 정보를 전하겠습니다. 4강 이상을 참가하신 분께는 수료증 을 발급해 드립니다. 강좌자료는 흥사단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문의 : 흥사단 기획국( / yka@yka.or.kr)

3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험난한 길을 걸은 여운형 민족통일전선만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한다 이규태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1. 몽양( 夢 陽 ) : 태양을 꿈꾸며 태어나다 운동의 실질적 디자이너 3. 상해임시정부와 적도( 敵 都 )를 뒤흔든 조선독립의 주장 4. 회유와 협박,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조국해방에 대한 일념 5. 해방의 준비 : 조선건국동맹 6. 민족통일전선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을 염원 7. 좌절된 조국통일 : 민족통일전선만이 민족의 미래 1. 몽양( 夢 陽 ) : 태양을 꿈꾸며 태어나다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출생했다. 위로 3남매가 있 었지만, 모두 유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여운형의 수태는 집안의 경사였다. 태양을 치마 폭에 품은 꿈을 꾸었다는 며느리의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호를 몽양( 夢 陽 ), 즉 태양을 꿈꾸다 로 지 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중국지도를 놓고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여운형이 태어난 시점의 조선은 민중의 저항과 외세의 침략으로 몰락하는 와중에 있었다. 특 히 그의 나이 8세 되던 해에 발생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어린나이의 그에게 붕괴되어 가는 조국 의 현실은 느끼게 했다. 집안 어른들 중에 동학에 직접 가담하여 관군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4 14살이 된 1900년 서울에 올라와 일본과 미국유학 경험을 가진 숙부 여병현( 呂 炳 鉉 )의 권유로 여운형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배재학당( 培 材 學 堂 )에 입학했다. 여운형은 독립협회 관계자인 서재필( 徐 載 弼 ) 등이 강사로 나온 배재학당에서 영어, 역사, 산술, 화학, 물리 등 근대적 학문을 최초로 접했다. 또한 배재학당 내에 서재필이 조직한 협성회( 協 成 會 )의 토론회 에 참가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몽양은 여러 가지 정치적 주제에 관해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 리하고 표현하는 기술을 익혔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몽양은 봉건적 조선사회의 모순에 대해 논리 적인 자각을 가질 수 있었고, 동시에 당시 조선 최대의 웅변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선교사 학교인 배재학당은 일요일 예배 참석을 강요했고, 불참한 몽양은 정직하게 고백했던 대가로 정학을 당했다. 격분한 여운형은 3년 과정의 배재학당을 중퇴해버렸다. 그리고 들어간 곳이 민 영환( 閔 泳 煥 )이 세운 흥화학교( 興 化 學 校 )였다. 흥화학교에는 배재학당에서와 같이 숙부 여병현이 교사 로 있었다. 17세 되던 1903년 10월 조부가 사망하자 몽양은 흥화학교를 중퇴하고, 실업( 實 業 )을 강조 하던 여병현의 권유로 재차 통신원( 通 信 院 ) 부설 우무학당( 郵 務 學 堂 )에 입학했다. 체신관련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가 본격적으로 망해가기 시작했다. 1905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되었다. 그달 30일 몽양이 다니던 흥화학교 교장이자 시종무관장( 待 從 武 官 長 )이었던 민영환이 자결했다. 한 달만 더 다니면 통신원 기술관으로 채용되고 고액의 월급이 보장되 어 있었지만, 몽양은 우무학교를 자퇴해버렸다. 민영환의 죽음은 몽양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감명과 교훈으로 남았다. 몽양은 40년이 지난 해방직후까지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남긴 국민에게 고함이란 유서를 글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외 울 정도였다. 몽양은 거리에 나와서 민영환의 죽음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가슴을 울리는 몽양의 호 소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1906년 3월 오십을 갓 넘은 아버지가 타계했다. 이제 몽양이 의지할 데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의 곁에는 1905년 아버 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재혼한 부인 진씨( 陳 相 夏 )와 동생 여운홍( 呂 運 弘 )이 있었을 뿐이다. 여운형과 여운홍이 3년상을 치루는 동안 한반도는 의병운동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우국지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상중인 여운형에게 몰려든 것은 1907년이었 다. 몽양은 상중이었음에도 이들에게 집을 개방해 지리, 역사, 산수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일종의 사숙( 私 塾 )인 사립 광동학교( 光 東 學 交 )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國 債 報 償 運 動 )이 전개되자 몽양은 양 평에 지회를 설치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몽양은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탈상 후 서울에 올라온 몽양은 동생 여운홍의 학비를 대기 위해 장로교 목사인 클라크(C. H. Clark)의 조수가 되었다. 여운형은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총본산격이었던 승동교회( 勝 洞 敎 會 )를 출입했 다. 전덕기( 全 德 基 )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승동청년회( 勝 洞 靑 年 會 )에는 이동녕( 李 東 寧 ), 이회영( 李 會 榮 ) 등의 애국자를 비롯해 안창호( 安 昌 浩 ), 최남선( 崔 南 善 ), 김좌진( 金 佐 鎭 ) 등이 출입하고 있었다. 이곳 에서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과 함께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됐다. 도산의 연설 제목은 대한의 장래였다. 그 내용인즉 오늘의 한국인은 몽매파( 夢 昧 派 ). 절망파( 絶 望 派 ) 회의파( 懷 疑 派 ) 세 파 뿐이고, 진정한 애국자와 일꾼은 적다 는 것이었다. 여운형 형제로서는 처음 듣는 애국적 웅변이었다. 이날 여운형은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아 장차 자신도 저런 애국자 웅변가가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부친의 탈상이 끝난 1908년 집안의 신주단지를 깨뜨리고 노비를 해방하는 등 당시로 - 4 -

5 선 혁신적 조치를 취했다. 미신타파라는 근대의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론 기독교의 영향이 지대했 다. 한편으로 몽양은 각 지방에서 요원의 불처럼 일어나고 있던 학회운동( 學 會 運 動 )에도 가담했다. 몽 양은 1908년 기호학회( 畿 湖 學 會 )의 평의원이 되었으며, 1910년에는 강릉 초당의숙( 草 堂 義 塾 )에서 청년 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나 초당의숙에서 을지문덕과 이순신 안중근을 가르친 지 불과 반년 만에 한일 합방 이 찾아왔다. 불온사상 을 가르치던 초당의숙은 메이지( 明 治 )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초당의숙에서 나온 여운형은 각지를 외로운 미아처럼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한 동안 기독교에 심취했다. 당시로선 기독교 선교사들이 일종의 치외법권을 지니던 때였기 때문에 기독 교는 독립운동에 일정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여운형은 전도사로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나서 는 한편, 평양의 장로교회연합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했다. 여운형은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서울-평 양을 오가며 5개년의 신학교 과정 중 2년을 마쳤다. 그러나 이제 몽양은 기독교전도사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독립을 위한 한 길로 나설 것인 가를 결정할 기로에 서게 되었다. 비밀결사 신민회( 新 民 會 ) 사건이 터진 것이다. 여운형은 망명을 꿈 꾸기 시작했다. 후일 몽양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했고, 한국인으로선 최연소 장로가 되었던 김규식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로녹대학 유학을 거쳐, 당시 경기 충청노회( 老 會 ) 서기이자 전국일요학교연합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김규식은 1912년 몽골로 망명해 버렸다. 차라리 몽골에 가 모피장사를 할망정 빼앗긴 조국강산에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순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913년 서간도를 비롯한 만주지방에 전도여행을 다녀온 여운형 역시 중국망명을 결심했다. 장 차 조국의 운명이 일본, 미국, 중국의 국제관계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생각에 몽양 자신은 중국으로, 동생 여운홍은 미국으로, 사촌 여운일( 呂 運 一 )은 일본으로 유학을 결정했다. 향리의 전답을 팔아 유학 비용을 마련했고, 기독교 학습을 명목상의 이유로 내세워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14년이었다 독립운동의 실질적 디자이너 여운형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 金 陵 大 學 =현 남경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그 사이 중국에선 반봉건 근대화의 물결이 높이 치솟고 있었다. 1915년 일본이 21개조의 요구를 내 걸고 중국을 위협하자, 여운형은 손문( 孫 文 ), 송교인( 宋 敎 仁 ), 진독수( 陳 獨 秀 ) 등과 만나 동아시아의 반 일전선( 反 日 戰 線 ) 결성문제를 논의했다. 몽양은 조선과 중국은 입술과 이빨의 순치( 脣 齒 )관계이다. 입 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조선독립의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양국의 혁명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고 주장했다. 이 시기부터 반제국주의 연대 연합을 강조 하는 여운형의 사상적 특징들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졸업 후 1917년 여운형은 당시 동양의 마드리드라고 불린 상해( 上 海 )로 이주했고, 러시아에서 는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하여 세계가 진동했다. 일단 생계를 위해 북경로( 北 京 路 ) 1번지의 협화서국( 協 和 書 局 )에서 일하면서 여운형이 처음 상해에서 주력한 일은 동포청년들의 구미유학 알선과 도항절차 알선이었다. 1918년 중반까지 여운형은 약 70여 명의 청년들의 구미유학을 알선해 주었다. 그 중에는 흥사단원 장리욱( 張 利 旭 )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6 1918년 볼셰비키정권은 소수민족의 해방과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했고, 태평양 건너 미국 에서는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여운형은 상해고려민친목회( 上 海 高 麗 民 親 睦 會 ) 를 조직해 총무가 되었다. 회장에는 신석우( 申 錫 雨 )가 추대되었고, <우리들 소식>이란 기관 지를 발행했다. 이 친목회가 발전하여 상해교민단( 上 海 僑 民 團 ) 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여운형은 장덕수( 張 德 秀 ), 김철( 金 澈 ), 한송계( 韓 松 溪 ), 서병호( 徐 丙 浩 ), 조동호( 趙 東 祜 ), 선 우혁( 鮮 于 爀 ) 등과 일종의 토론그룹을 만들어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조선의 운명에 대해 촉각을 세우 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세계는 재편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문제도 해결될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위해서 몽양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18년 8월 이들 6명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 新 韓 靑 年 黨 ) 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 독일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고,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평화회 의가 열린다는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윌슨대통령의 특사로 파견된 크레인(Charles R. Crane)이 파 리강화회의에서 중국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상해 영파로( 寧 波 路 ) 칼튼(Calton) 카페에서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니, 대표를 파견하여 주장함이 좋을 것이다 고 연설했다. 어렵게 크레인을 만난 여운형은 조선문제를 호소한 결과, 크레인 으로부터 조선의 입장은 지지하지만,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받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다만 너희들의 유일한 방법은 자체적으로 뭔가 강력하게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를 한다는 무 언가를 보여준다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미국을 압박할 수도 있고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길이 생기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에 여운형은 장덕수와 함께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2통을 작성해 크레 인과 상해 <밀라드 리뷰> 신문사 사장인 밀라드에게 전달하고, 신한청년당 조직을 보다 강화할 필요 성을 절감했다. 일제 정보문서에 따르면 신한청년당의 당원은 4-5백 명 정도로 상해, 북경, 천진( 天 津 ), 만주, 간도, 노령 각지와 조선 내에 분산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영어와 외교에 능한 우사( 尤 史 ) 김규식( 金 奎 植 )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몽양은 1919년 1월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초빙했다. 한편 여운형은 일본에 대표를 파견하여 재일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종용했다. 1차로 조소앙, 2차로 장덕수, 3차로 이광수를 파견하여 재일유학생들의 2 8독립선언 을 준비하도록 했다. 장덕수는 유학생들로부터 8백 원을 모금하여 상해 조동호에게 보냈다. 여운홍은 여운형의 지시로 1919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말 일본 요코하마( 橫 浜 )에 도착했다. 그는 동경 2 8독립선언의 주도자 인 최팔용( 崔 八 鏞 )을 만나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움직임을 전해 듣고 2월 8일 동경YMCA회관에서 독립 선언이 행해지는 장면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여운홍은 장덕수를 만나 여운형의 지시를 전한 후 국 내로 잠입했다.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여운홍이 3 1독립선언의 민족대표 인 월남( 月 南 ) 이상재( 李 商 在 ), 최남 선( 崔 南 善 ), 함태영( 咸 台 永 ), 이갑성( 李 甲 成 ) 등과 만난 것은 2월 27일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 견한 일이며, 동경에서 목격한 2 8독립선언의 진상을 전한 여운홍은 그날 상해로 탈출했다. 또한 상해의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의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김규식 부인), 백남규 등을 파견하여 3 1독립운동의 봉기를 역설하였다. 장덕수는 국내 1차 파견에서 3천 원을 모금하고, 2차 파 견에서는 이상재 손병희 등을 비롯한 다수의 지도자들을 만나 3 1운동 봉기를 촉구했다. 장덕수는 - 6 -

7 2월 20일경 재차 서울에 들어온 후 인천에 잠복해 있다 경찰에 검거됐다. 선우혁은 2월 하순 선천( 宣 川 ), 평양 등지에 가서 3 l독립선언의 기독교측 민족대표 인 남강( 南 岡 ) 이승훈( 李 昇 薰 ), 양순백( 梁 旬 伯 ), 길선주( 吉 善 宙 ) 등을 만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로 보낸 것을 전하고 지금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시점이며 자금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역설했다. 이어 강규찬 안세환 변린서 이덕환 등을 만나고 평양 서울을 거쳐 상해로 돌아왔다. 평양에서는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윤원삼 안세환 등 여러 사람이 주동이 되어 고종 국장일에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결 정했다. 그 결과 파고다공원 계획이 구체화 되었다. 동지들을 국내와 일본으로 밀파한 여운형 자신은 간도 시베리아 방면으로 떠났다. 당시 블라 디보스토크는 노령, 간도지역 조선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1919년 1월 니콜리스크 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가 개최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 문제를 논의했고, 2월에는 윤해( 尹 海 )와 고창일( 高 昌 一 )이 파리를 향해 떠난 상황이었다. 곧이어 2월말에는 니콜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 ( 全 露 韓 族 會 )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노령,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모여 전로국내조선인회의( 全 露 國 內 朝 鮮 人 會 議 )를 개최했다. 여운형이 간도에서 간민회의 김약연, 정재면 등과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니콜 리스크에 도착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여운형은 니콜리스크에서 이동녕( 李 東 寧 ), 박은식( 朴 殷 植 ), 문창 범( 文 昌 範 ), 조완구( 趙 琬 九 ), 원세훈( 元 世 勳 ), 이승복( 李 昇 福 )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채성하( 蔡 成 河 ), 강우규( 姜 宇 奎 ), 이발( 李 發 ), 김치보( 金 致 甫 ), 정재관( 鄭 在 寬 ), 강한택( 姜 漢 澤 ), 오영선( 吳 永 善 ), 김하구( 金 河 球 ), 이강( 李 剛 )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일을 비롯해 독립운동 전반에 관해 의견 을 교환했다. 노령에서는 벌써 임시정부의 형태인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여운형의 이런 일련의 활동 결과, 3.1독립운동이 촉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길림( 吉 林 )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 의 촉매 역할을 했고, 또한 북간도의 3.13의거, 필라델 피아 4.16의거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3.1독립운동은 우연히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자연발생 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운형과 같은 조국해방의 열정을 가진 치밀한 조직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몽양은 말 그대로 3.1독립운동의 디자이너 였던 것이다. 3. 상해임시정부와 적도( 敵 都 )를 뒤흔든 조선독립의 주장 노령( 露 領 )의 독립운동 중심지를 순방하고 있던 여운형이 3 1독립시위를 들은 것은 하얼빈에 서였다. 여운형이 3월 중순 상해에 돌아왔을 땐 이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와 분위기가 비등해 있었다. 상해에서는 이미 신규식( 申 圭 植 ), 이동녕, 이시영( 李 始 榮 ), 김구( 金 九 ), 신채호( 申 采 浩 ), 조용은 ( 趙 鎔 殷 ), 장덕수, 조완구, 김동삼( 金 東 三 ), 조성환( 曺 成 煥 ), 조소앙( 趙 素 昻 ), 현순( 玄 楯 ), 최창식( 崔 昌 植 ), 신익희( 申 翼 熙 ), 이광수( 李 光 洙 ), 최근우( 崔 謹 愚 ), 문일평( 文 一 平 ), 정인보( 鄭 寅 普 ), 안정근( 安 定 根 ), 조동 호, 한원창( 韓 元 昌 ), 한진교( 韓 鎭 敎 ), 선우혁, 김순애( 金 淳 愛 ), 이봉수( 李 鳳 洙 ), 강대현( 姜 大 鉉 ), 안승원( 安 承 源 ), 김병조( 金 秉 祚 ), 조상섭, 이원익( 李 元 益 ) 등 30여명이 모여 독립문제가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전 개되고 있었다. 3 1운동의 여파로 각지에서는 임시망명정부 수립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지상( 紙 上 ) 선언에 불과했지만 한성정부( 漢 城 政 府 )가 발표되었고, 노령지방에 국민의회정부, 상해에는 임시정 - 7 -

8 부가 구성되는 형편이었다. 이 세 임시정부는 곧 통합했는데 형식적으로는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정부 의 법통을 계승하고, 내용적으로는 상해정부와 노령국민의회정부가 통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상해는 당시 세계적 국제도시로서 한반도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힘이 닿지 않았다. 활동의 여백이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한인 마 을들이 없는 상황에서 상해에 임정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예관( 睨 觀 ) 신규식( 申 圭 植 )과 같은 보이지 않는 위대한 애국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규식은 원래 구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부위( 副 尉 )로 있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1911 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름을 신정( 申 檉 )으로 개명하고, 손문( 孫 文 )이 이끄는 동맹회( 同 盟 會 )에 조 선인으로서는 처음 가맹하여 10월의 무창봉기( 武 昌 蜂 起 )에 참가해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신해혁명에 참가하면서 중국의 혁명지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나, 청나라 정부와 일본관헌이 체포하려 하자 상해 의 프랑스조계로 도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망명해온 독립운동가와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1912년 7월 동주공제( 同 舟 共 濟 :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자) 를 표방하면서 동제사( 同 濟 社 ) 를 조직하였다. 재상해한인공제회( 在 上 海 韓 人 共 濟 會 )라고도 한다. 이사장에 신규식, 총재에 박은식( 朴 殷 植 )이 선출되었고, 그 밖에 김규식( 金 奎 植 ), 신채호( 申 采 浩 ), 조소앙( 趙 素 昻 ), 홍명희( 洪 命 熹 ), 문일평 ( 文 一 平 ), 박찬익( 朴 贊 翊 ), 조성환( 曺 成 煥 ), 신건식( 申 健 植 ), 김용호( 金 容 鎬 ), 신철( 申 澈 ), 장건상( 張 建 相 ), 정원택( 鄭 元 澤 ), 여운형( 呂 運 亨 ), 조동호( 趙 東 祜 ), 김승( 金 昇 ), 민제호( 閔 濟 鎬 ), 민필호( 閔 弼 鎬 ), 김갑( 金 甲 ), 정환범( 鄭 桓 範 ), 김용준( 金 容 俊 ), 민충식( 閔 忠 植 ), 이찬영( 李 贊 永 ), 김영무( 金 英 武 ), 이광( 李 光 ), 신석우( 申 錫 雨 ), 한진산( 韓 震 山 ), 김덕( 金 德 ), 신상무( 申 相 武 ) 등 30여 명이 관여하였다. 동제사 회원은 3백여 명에 달하였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활동했다.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청년교육, 에 주력하면서, 장차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을 중국 및 구미에 유학시키기로 하고 유학예비교육을 위하여 1913년 12월 상해 프랑스 조계 안의 명덕리( 明 德 里 )에 박달학원( 博 達 學 院 )을 설립했다. 강사는 박은식( 朴 殷 植 ), 신채호( 申 采 浩 ), 홍명희( 洪 命 熹 ), 문일평( 文 一 平 ), 조소앙( 趙 素 昻 ) 등과 미국 화교인 모대위( 毛 大 衛 ) 등이었으며, 교과목은 영어, 중국어, 지리, 역사, 수학 등이었다. 3기에 걸 쳐 100여명의 조선청년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국의 각 대학과 구미 각국에 유학할 수 있도록 알 선해 주었다. 이 중에는 뒷날 신규식의 사위가 된 독립운동가 민필호( 閔 弼 鎬 )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뒤에 임시정부의 실무를 담당할 세력을 배출하였고, 독립운동의 중추적 구실을 할 인재를 양성했다. 동시에 조선과 중국의 혁명지사를 서로 연결하고 두 국민 사이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신아동제사( 新 亞 同 濟 社 )를 조직했다. 여기에 참가한 인사들 중 중국인 은 중국혁명의 핵심중진들이었는데, 송교인( 宋 敎 仁 ), 진영사( 陳 英 士, 일명 其 美 ), 호한민( 胡 漢 民 ), 진기미 ( 陳 其 美 ), 대계도( 戴 季 陶 ), 요중개( 廖 仲 凱 ), 진과부( 陳 果 夫 ), 호림( 胡 霖 ), 오철성( 吳 鐵 城 ), 추로( 鄒 魯 ), 서겸 ( 徐 謙 ), 장부천( 張 溥 泉 ), 굴영광( 屈 映 光 ), 은여려( 殷 汝 驪 ), 장계란( 張 季 鸞 ), 호로( 胡 露 ), 백문울( 柏 文 蔚 ), 여 천민( 呂 天 民 ), 당소의( 唐 紹 儀 ), 당노원( 唐 露 園 ), 황개민( 黃 介 民 ), 양춘시( 梁 春 時 ), 장정강( 張 靜 江 ) 등이었다. 신규식이 살았던 집에는 진기미( 陳 其 美 )의 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어 진기미와 한집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규식의 집 바로 건너편에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진독수의 집이 있고, 그 집에는 5.4운동을 리드한 <신청년> 잡지 편집부 자리라는 간판이 지금도 있다. 즉 신규식의 중국혁 명의 핵심인물들과 깊은 교분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동제사 박달학원 등을 바탕으로 여운형을 비 롯한 수많은 인물들을 키워냈을 뿐만 아니라 임정의 보이지 않은 하부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9 신규식은 구한말 정통군인 출신으로서 중국어에 정통했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죽 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1909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1910년 망국의 소식 을 듣자 다시 음독자살하려고 했으나 나철( 羅 喆 )에 의해 구원되었다. 그래서 예관( 睨 觀 )이라는 호를 썼 고, 이후 항상 색안경을 쓰고 다녔으며, 이승만이 원인이 되어 임정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1922년 9월 25일 순국했다. 중국혁명과정을 통해 새로운 공화 정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문무( 文 武 )를 겸비한 선각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신 규식의 조카였다. 1919년 3 1운동의 폭발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가장 당황한 것은 물론 일본제국주의였다. 일제의 대처방안은 교활했다. 일단 3.1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 탄압하면서 무단통치 에서 소위 문화통치 로 불리는 민족분열정책으로 전환했던 것이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에게도 투자의 기회가 주 어졌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조선어 신문의 발행이 허용되었다.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각종의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총독부에 매수된 친일지식인들이 동원되어 자치론( 自 治 論 )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이런 자치론은 실력양성론 조선민족개조론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자치론의 선봉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동경 2 8선언의 주동자이자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이었 던 춘원 이광수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일제는 파괴책동에 골몰했다. 임시정부가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있었 기 때문에 일본영사관 경찰력을 동원한 파괴행동은 일단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몇몇 임정요인에 대한 체포공작이 진행되었지만 그것으로는 임정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없었다. 일제 당국자들이 고안해 낸 가장 최고의 방법은 임정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작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임정의 핵심적 인사들 을 회유 협박해 귀순시키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바로 이와 같은 일제의 임정와해 귀순공작에 걸려든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치론의 주창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제가 최초로 노린 인물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일제는 여운형을 일본에 초청, 그를 설득 귀순시키거나 아니면 자치론 동조자로 만들어 상해 임정을 와해시키려 했다. 일제는 여운 형을 자치론자의 입장에 서있는 온건론자로 오판했다. 공작은 1919년 8-9월부터 본격화됐다.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 谷 川 好 道 ) 조선총독의 지휘 하에, 일본조합교회의 와타세 츠네요시( 渡 瀨 常 吉 ), 무라카미 타 다요시( 村 上 唯 吉 ) 등이 상해 YMCA총무인 후지다 큐코( 藤 田 九 皐 )와 기무라 기요마츠( 木 村 淸 松 )를 통해 여운형의 도일( 渡 日 )을 주선했고, 척식장관 고가 렌조( 古 賀 廉 造 )는 여운형의 신변안전을 보장했다. 여운형은 내가 도일하는 목적은 일본정부 당국에게 한민족의 독립운동의 열정을 설파하려는 것이다. 나는 민족의 의사가 오직 절대독립의 요구에 있다고 확신한다. 내가 일본에서 말할 것도 오직 이 확신의 설명 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도일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본행이 순전히 개인자격의 방 문이며, 임시정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성명서를 1919년 11월 발표했다. 그러나 임정 내부는 여운형의 일본방문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가 꾸려진 지 불과 몇 개월, 당연히 일제의 탄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 서 일제에 의한 광범한 학살 검거 투옥 등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제에 대한 강경여론이 지배적이 었다. 때문에 일본인과 접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오해를 살 소지가 충분했다. 신판 이완용이다., 여 운형은 일본정부의 밀정이었다., 여운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매수되어 임시정부를 파괴할 것이다. 심지어 이동휘를 비롯한 노장층은 여운형이 일제에 매수되어 친일파로 전락했다, 민족의 - 9 -

10 치욕이며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병균 이라고까지 극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었던 안창호만은 여운형의 도일에 찬성했던 것이다. 안창호는 여운형에게 여비를 주면서, 여군( 君 ), 용기를 내오.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유가 있겠지만, 여군이 동경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 중요하오. 여군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는 지금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군을 지지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아무쪼록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주고 오도록 하 오. 이때의 여운형의 나이는 34세, 안창호는 41세로서 안창호는 여운형을 동생처럼 아꼈던 것이다. 안창호의 격려로 용기를 얻은 여운형은 비밀리에 동경으로 향했고, 그와 동반한 사람은 26세 의 장덕수, 23세의 최근우(일본에서 합류), 22세의 신상완( 申 尙 玩 )이 전부였다. 장덕수는 2 8독립선언 에 참가한 후 국내로 잠입했다 체포된 후 전남 하의도( 荷 衣 島 )에 연금된 상태였다. 여운형은 그를 연 금 상태에서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여운형이 상해를 몰래 빠져나간 사실을 뒤늦게 안 이동휘는 11월 17일,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여운형 적도행( 呂 運 亨 敵 都 行 ) 사변( 思 辯 )의 건을 의제로 하여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동휘는 여운형이 돌아오면 경무국장으로 하여금 당장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 에 대해 안창호는 여운형이 동경에 간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동경에 간 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그가 동경에 가서 일본 정부에 매수가 된다면 천 번 죽어 마땅하지만 그 반대로 조선의 독립을 적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그들 정부의 대신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논의한 다면 이보다 더 통쾌한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전 세계에 보도되면 국내외적으로 우리 임시정부의 입장이 유리하면 유리했지 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주장했다. 안창호는 어디까지나 결과를 보아 문책하자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아 그래, 안 총판의 마음대로 일본놈들이 넘 어 간답디까? 두고 보시오. 안 돌아오거나 일본정부의 밀정이 돼서 돌아오기가 십상팔구요 라고 강경 론을 계속 주장했다. 저녁때까지 토론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안창호의 주장대로 여운형이 돌아온 후 사정을 조사해서 처리하도록 결정되었다. 여운형은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약 3주간 동경에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여운형은 고가 척식장관과 4차례, 다나카 기이치( 田 中 義 一 ) 육군대신과 2차례, 미즈노 렌타로( 水 野 鍊 太 郞 )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1차례, 도코나미 다케지로( 床 次 竹 二 ) 내무대신과 1차례, 노다 우타로( 野 田 卯 太 郞 ) 체신대 신과 1차례, 하라 케이( 原 敬 ) 수상과 1차례, 그리고 여명회( 黎 明 會 )를 이끈 당대 일본의 최고지식인 요 시노 사쿠조( 吉 野 作 造 )와도 수차례 회담했다. 일제는 여운형을 회유 귀순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 일단 언론을 통해 마치 몽 양이 자치운동을 하기 위해 동경에 온 것인 양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또한 국빈( 國 賓 )에게나 관람시키 는 천황의 비원( 秘 園 )인 아카사카이궁( 赤 坂 離 宮 )을 여운형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몽양과 회견한 고관들 은 한편으론 여운형에게 자치운동을 권하면서 정치적 지위보장을 약속했고, 다른 한편으론 위압적이 고 신변위협적인 언사를 통해 여운형을 굴복시키려 했다. 또한 임정을 탈퇴하여 종교가로서 전도사업 에만 열중한다고 약속하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미끼도 던졌다. 일본조합교회의 와타세는 여운형에게 20-30만 엔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11월 27일 제국호텔에서 수백 명의 내외신 신문기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여운형의 연설은 매우 힘이 넘쳤다

11 주 린 자 는 먹 을 것 을 찾 고, 목 마 른 자 는 마 실 것 을 찾 는 것 은 자 기 의 생 존 권 을 위 한 인 간 자 연 의 원 리 이 다. 이 것 을 막 을 자 가 있 겠 는 가! 일 본 인 이 생 존 권 이 있 는 데 우 리 한 민 족 만 이 홀 로 생 존 권 이 없 을 수 있 는 가! 일 본 인 이 생 존 권 이 있 다 는 것 을 조 선 인 이 긍 정 하 는 바 이 요, 조 선 인 이 민 족 적 자 각 으 로 자 유 와 평 등 을 요 구 하 는 것 은 신 이 허 락 하 는 바 이 다. 일 본 정 부 는 이 것 을 방 해 할 무 슨 권 리 가 있 는 가! 세 계 는 약 소 민 족 해 방, 부 인 해 방, 노 동 자 해 방 등 세 계 개 조 를 부 르 짖 고 있 다. 이 것 은 일 본 을 포 함 한 세 계 적 운 동 이 다. 조 선 의 독 립 운 동 은 세 계 의 대 세 요, 신 의 뜻 이 요, 한 민 족 의 각 성 이 다. 어 느 집 에 서 새 벽 에 닭 이 울 면 이 웃 집 닭 도 따 라 울 게 마 련 이 다. 그 러 나 그 닭 은 다 른 닭 이 운 다 고 우 는 것 이 아 니 고 때 가 와 서 우 는 것 이 다. 때 가 와 서 생 존 권 이 양 심 적 으 로 발 작 된 것 이 조 선 의 독 립 운 동 이 요, 결 코 민 족 자 결 주 의 에 도 취 한 것 이 아 니 다. 여운형의 발언은 조선의 청년지사 독립을 주장하는 사자후, 제국수도 한켠에서 불온언 사 난무, 여운형군 독립주의를 고집이라는 제목으로 각 신문을 장식했다. 여운형이 자치론을 고 백할 줄 알았던 일본당국은 초조해졌다. 환갑을 넘긴 각료 4-5명이 십여 차례 이상 식민지에서 온 30 대 중반의 청년 한사람에게 매달렸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은 일본의회 내에서도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여운형이 일본의 수도에 와서 신문기자회견과 강연회 등을 통해 조선의 독립 을 내놓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솜털 하나 건드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 당국자들은 차마 사태 가 여기에 이르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1920년 1-2월 동안 일본의 제국의회( 帝 國 議 會 )에서는 여 운형의 방일문제를 둘러싼 심각한 논란이 벌어졌고, 궁지에 몰린 하라( 原 敬 ) 수상은 2월 28일 중의원 ( 衆 議 院 )을 해산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운형이 동경에서 벌인 활약상이 알려지고 몽양이 상해로 돌아오자 비판적이었던 분위기는 급변했다. 임정의 기관지 <독립신문> 등에는 일본에서의 활동상이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여운형이 일제에 매수되었다고 주장했던 국무총리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 국무원포고 2호를 통해 여운형의 일본행이 독립운동의 일환 이었다고 정정했다. 박은식도 <독립운동지혈사( 獨 立 運 動 之 血 史 )>에서 여운 형의 일본행이 도일선전( 渡 日 宣 傳 ) 활동이었다고 기술했다. 몽양의 일본방문은 여운형 개인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위상과 위신을 드높인 일이었다. 또한 여운형을 독립운동 선상의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게 했다. 정치가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여운형이 대중 앞에 부각되고 객관화되는 전기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몽양 개인에게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 진 경험이었다. 즉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것도 형식적으로 개인의 자격이라 할지라도, 원칙만 확 고하다면 실질적으로는 조선독립이라는 조직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아가 어떤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던 간에, 그리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던 간에, 민족해방과 민 족자주를 향한 자신의 떳떳함이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는 자신감과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51 : 49>라도 그것이 민족의 이익이 된다면 누구라도 협상할 수 있다는 여운형식 행동양식을 만들 어낸 경험이었던 것이다

12 4. 회유와 협박,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조국해방에 대한 일념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김구, 손정도( 孫 貞 道 ) 등과 함께 일제타도의 물리력을 준비하기 위하 여 한인노병회( 韓 人 勞 兵 會 )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도, 점차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자들과 빈번하게 만나기 시작했다. 이미 파리강화회의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의 민족자결주의도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에 는 적용될지 몰라도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과는 전혀 무관함이 밝혀진 상태였다. 국제적으로 식민지조선 의 독립을 지지 원조해 줄 국가는 없는 상태였다. 이때 혁명으로 등장한 소비에트가 약 소민족에 대해 재정적, 이념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나섰다. 소비에트가 평등한 국가, 평등한 세 계, 계급간의 평등, 민족국가 간의 평등 평화를 내세웠을 때 독립운동가라면 끌리지 않을 사람은 아 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21년 11월부터 미국의 제안으로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담에 맞서 코민테른도 1921년말 극동피압박민족대회 개최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이미 1920년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서 민 족 식민지테제 를 채택한 후, 동년 9월 바쿠에서 중동 각국대표를 모아 바쿠동방민족대회 를 개최한 바 있었다.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는 바쿠대회의 동양판으로 동아시아 공산당 성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는 조선대표 54명, 중국대표 37명, 일본대표 13명, 몽골대표 14명 등이 참석했는 데, 조선대표는 모두 23개 단체에서 뽑힌 사람들이었다. 여운형은 일크츠크파 대표로 참석했고, 그 외 에 홍범도( 洪 範 圖 ), 김규식( 金 奎 植 ), 이동휘( 李 東 輝 ), 고한( 高 漢 ), 김시현( 金 始 顯 ), 최고려( 崔 高 麗 ), 한명서 ( 韓 明 瑞 ), 현순( 玄 楯 ), 김철( 金 澈 ), 김원경( 金 元 慶 ), 권애라( 權 愛 羅 ), 최창식( 崔 昌 植 ), 김영진( 金 永 鎭 ), 유건 혁( 柳 健 赫 ), 정광호( 鄭 光 好 ), 김단야( 金 丹 冶 ), 임원근( 林 元 根 ), 백남신( 白 南 信 ), 장덕진( 張 德 震 ) 등이 참석 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가구( 張 家 口 )에서 몽골의 고비사막을 지나 고린( 庫 倫 )으로, 다시 적색( 赤 色 ) 거인의 도시 울란바토르에서 일크츠크로 이어지는 험난한 길을 뚫고 1922년 1월 7일 여운형 일 행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역광장을 메운 수만 군중의 열렬한 환영에 여운형은 일행을 대표해 연설 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영하 20-30도의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열광적 환영과 대표연설 때문에 동줄 기에 땀이 흘렀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개회총회에서 김규식, 김원경, 김단야와 함께 대회운영 의장단에 뽑힌 여운형은 개회식 연설을 했고, 5회 회의에서는 조선의 혁명운동 이란 보고를 하기도 했다. 박경이란 이름을 사용한 이 보고에 서 여운형은 상해에서 조선인들이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한 회의를 준비하고 있음을 밝혔다. 여운형은 조선에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라는 것, 공산주의자들도 현 단계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상해임시정부를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여운형은 워싱턴회의를 격렬한 어조로 비판 했는데 이는 김규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몽양은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을 만나 상해에서 자기가 보아온 파벌적이고 교조적이었던 공산주의자와는 다른 공산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일본공산주의자 지도자 가타야마 센( 片 山 潛 )과 동반한 첫 만남에서, 레닌은 가타야마에게 조선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할 수 있는가 라고 질 문했고, 여운형에게는 일본혁명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둘은 모두 찬성 의 뜻을 표시했다. 레닌은 여운형과 가타야마의 손을 움켜쥐고 조일( 朝 日 )연대와 국제연대를 강조했 다. 여운형은 바로 이것이 혁명가의 자세구나 하는 점을 절감했다고 한다

13 구추백( 瞿 秋 白 )과 함께 한 레닌과의 두 번째 회동에서, 레닌은 조선이 농업국가이며 식민지 상 태이기 때문에 먼저 민족운동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 중요하며,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자들과 도 연계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공산혁명에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할 줄 알 았던 레닌이 민족운동과 민족해방이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한 모습은 여운형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 로 오래도록 자리 잡았다. 여운형이 상해로 돌아온 것은 1922년 3월초였다. 사실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이었지만,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에서 돌아온 여운형은 임시정부 개조운동에 전념했다. 여운형의 생각은 임시정부를 광범한 민족통일 전선에 기초한 조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국민대표회의 를 통해 임정의 한계를 뛰어넘어 운동세력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미 1921년부터 준비조직이 가동 중에 있 었다. 외교운동이든 무력투쟁이든 어떤 노선을 취하든 모든 독립운동은 통일 단결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목표였다. 1923년 1월 3일 개막된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사수파), 아니면 부 분적으로 개조할 것인가(개조파), 임정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체를 꾸릴 것인가(창조파)를 둘러 싸고 논란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 국민대표회의는 운동세력의 통일 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창조파 대부분이 임정을 버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로 떠나버린 상태에서, 통일 전선을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던 안창호와 여운형은 임정 사수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궁지에 몰린 안창호도 북경으로 떠나버렸고, 여운형도 한동안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생계를 위해 상해의 사립 동방대학 영문교사로 취직한 여운형은 상해교민단장과 인성학교장 만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다 북경주재 소련대사 레프 카라한을 만나게 되었다. 여운형은 이전부터 중 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반제투쟁의 연장선상에 조선독립이 놓여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즉 중 국의 민족해방이 조선의 독립과 긴밀한 연관관계에 놓여 있으며 국제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카라한을 만난 자리에서 여운형은 중국에서는 아직 공산혁명이 불가능하며 중국혁명을 위해서 공산 당은 국민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 러시아는 군사적 지원을 해야 한다 는 입장을 밝혔다. 카라한은 이 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여운형이 중국혁명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운형은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면서 국공합작의 보이지 않는 조정자의 한사람으로 활약했다. 그 덕분에 몽양은 구추백( 瞿 秋 白 )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당원대우를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손문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몽양은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으로 부터 당원대우를 받은 유일무이한 조선인이었다. 여운형은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을 성공한다 면 곧바로 조선의 독립 내지 조선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 천에 옮겼던 것이다. 조종( 朝 中 )연대를 위한 여운형의 활동은 이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운형은 상 해에서 중국인 오산( 吳 山 )을 비롯해 임정측의 윤현진( 尹 顯 振 ), 조동호( 趙 東 祜 )와 함께 중한호조사( 中 韓 互 助 社 )를 조직했다. 오산은 손문이 영도하는 광동정부의 사법부 차장이었으며, 중한호조사의 의장이 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손문이 중한호조사의 사장, 여운형이 부사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몽양은 손 문과 동지 혹은 개인적 고문역할을 했다고 술회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한편 중한호조사에는 국 민당 관련자들만이 관계한 것이 아니었다. 후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모택동( 毛 澤 東 )도 당시 중 한호조사 장사( 長 沙 )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모태동과 수차례 만났다고 그의 인상을 기

14 록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1926년 1월 광동( 廣 東 )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해 중국국 민혁명의 전세계적인 사명이란 제목의 연설을 했다. 여광( 呂 光 )이란 이름을 사용한 이 연설에서 몽 양은 중국혁명은 단순히 중국만의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전세계에 파급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인 민들은 무엇보다도 이 사명을 명심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1926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국민당군의 북벌( 北 伐 )에 따라 여운형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무한 ( 武 漢 ), 삼진( 三 鎭 )을 점령한 1926년 9월 여운형은 20만의 군중 앞에서 내빈으로 축사를 했다. 축사에 서 몽양은 이제 혁명군이 양자강을 파죽지세로 넘어 북상중이다. 가까운 장래에 중국은 통일된다. 중 국이 통일되면 조선의 해방 독립은 약속된다 고 주장했다. 1927년 15만 노동자의 제3차 봉기에 힘입 어 북벌군이 상해를 해방시키자 북벌이 완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4 12 상해쿠데타가 일어 났고, 중국재벌과 제국주의 열강, 장작림을 등에 업은 장개석은 총구를 공산당으로 돌려 노동군의 무 장해제, 공산당원 노동자의 체포 학살이 무참히 자행되었다. 여운형은 간신히 학살과 체포의 위험에 서 탈출할 수 있었다. 여운형은 1928년 봄 생계를 위해 상해 복단대학( 復 旦 大 學 )에 취직했다. 체육을 담당한 여운형 은 축구부 학생들을 이끌고 필리핀 등지로 원정여행을 떠났다. 마닐라에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 방을 위해 아시아 모든 민족이 단결해 공동 투쟁해야 한다. 구미제국주의를 아시아 전역에서 구축해 야 하며 먼저 필리핀이 독립해야 한다 고 연설했다가 현지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계속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1929년 7월 10일 상해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몽양은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여운형이 출감한 것은 1932년 7월이었다. 형기만료 4개월을 남겨놓고 몽양을 풀어준 일제의 속셈은 발목을 잡아보자는 것이었다. 몽양 을 친일파나 대일협력자로 만들어 중국문제 해결에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고, 1932년 이래 기만적인 농촌진흥운동을 본격화하고 있던 총독 우가끼 카즈시게( 宇 垣 一 成 )는 몽양이 출옥하자 마자 이 운동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고, 경무국장 이케다 기요시( 池 田 淸 )는 몽양에게 4백석 추수 농장 을 제공하겠다고 유혹하기도 했다. 출옥한 여운형이 선택한 것은 합법적인 독립운동의 길이었다. 1933년 2월 여운형은 <조선중앙 일보( 朝 鮮 中 央 日 報 )>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이 신문은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3대신문으로 유 명했고, 특히 진취적이며 젊은 신문으로 이름이 있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에는 사회주의자나 민족 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주필에 이관구( 李 寬 求 ), 편집국장 김동성( 金 東 成 ), 영업국장 홍증식( 洪 增 植 ), 편집국원에 이태준( 李 泰 俊 ), 김복진( 金 復 鎭 ), 윤석중( 尹 石 重 ), 고경흠( 高 景 欽 ), 김남천( 金 南 天 ), 이승만( 李 承 萬 ), 박팔양( 朴 八 陽 ) 등 당대의 일류들이 집결해 있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민족적 사회적 범죄자나 총독부와 타협한 인물, 특권층의 비리를 적나라하 게 폭로했다. 한강유역의 홍수와 낙동강 영산강 수해 때는 몽양 자신이 침수가옥에 들어가 인명을 구하고 구호품을 나눠줄 정도였다. 신문사 사장이 체면이나 겉치레를 차리지 않고 직접 일선에 나서 서 민중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당시 경쟁지 관계였던 송진우( 宋 鎭 禹 )의 <동아일보>와 방응모( 方 應 謨 )의 <조선일보> 측은 몽양의 처신이 점잖지 못하다고 힐난했지만, 방응모는 자가용, 송 진우는 인력거, 여운형은 걸어서 라는 말이 돌아다녔다

15 <조선중앙일보>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 반대도 엄정했다. 조선총독부가 추진하고 있던 자작농 창설 계획의 허구성을 공박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추진하고 있던 물산장려운동, 브나르도 운동 에 대해서도 비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즉 이 운동들이 식민지 문제의 본질적 해결책이 안 되며 결국은 총독부의 자력갱생 농촌진흥책으로 전락해버린다는 지적이었다. <조선중앙일보>가 지닌 특징 중 하나는 스포츠에 대한 강조였다. 신문사상 스포츠란을 만든 것은 <조선중앙일보>가 처음이었다. 여운형에게 체육은 심신을 단련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청년들 에게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북돋우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중앙일보> 사장시절도 오래갈 수는 없었다. 1936년 한 해 동안 <조선중앙일보>는 12차례의 수색 및 발행금지 조치를 당할 정도였다. 1936년은 베를린올림픽이 벌어진 해이기도 했다. 동양의 군국주의국가 일본도 이에 적극 호응하면서 대대적인 선수파견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선수 들도 참가했지만 조선의 대표가 아니라 일본대표로 일장기를 달고 나선 것이었다. 선수들은 일장기를 달고 출전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했지만 몽양은 출전을 권유했다. 나가서 조선 청년 의 기개를 뽐내라는 것이었다. 손기정( 孫 基 禎 ) 선수가 1936년 8월 8일 열린 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은 8월 9일 저녁이었다. 조간인 <조선중앙일보>는 호외를 뿌렸고, 다음날 신문은 온통 이 소식으로 가 득 차 있었다. 신문은 온통 조선을 빛낸 청년 손기정 남승룡( 南 昇 龍 )에 대한 기사로 도배되었다. 신 문마다 조선출신 청년이 마라톤 제패, 반도남자의 의기( 意 氣 ) 상징 등의 제목이 붙었다. 이 와중에 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가 교묘하게 뭉개져 말소되어 있었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었다. 일반적으로 일장기 말소사건의 모든 공로가 <동아일보>에 있는 것처럼 말해지지만, 실상은 그 렇지 않다. 제일 먼저 교묘하게 일장기를 말소한 것은 바로 <조선중앙일보>였다. 8월 15일의 일이었 다. <조선중앙일보>의 사진이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자 검열용 제1판에선 일장기가 그대로 들어가 있 었지만, 검열을 통과한 2판부터는 일장기를 말소하고 신문을 간행했던 것이다. 10일 뒤 <동아일보>의 사진부 기자가 이를 본떠 사진 속의 일장기를 말소시켰던 것이다. 8월 25일이었다. <동아일보>는 기자 5명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1937년 6월 속간될 수 있었다. 속간 사고( 社 告 ) 에서 <동아일보>는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조선통치의 익찬( 翼 贊 )을 기한다 는 공약을 내걸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사장의 책임을 물어 친일파인 성원경( 成 元 慶 : 동아일 보 취체역), 이범익( 李 範 益 : 知 事, 中 樞 院 參 議, 間 島 省 長 ), 고원훈( 高 元 勳 : 知 事, 中 樞 院 參 議 )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사장을 바꾸면 속간시키겠다는 것이 총독부측의 제안이었다. 신문사측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1937년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잠시 도산 안창호와 몽양 여운형의 관계를 살펴보자. 안창호는 1932년 4월 29일 상 해 홍구공원에서 발발한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건강상 문제로 가출옥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2월 18일자에는 安 島 山 과 呂 本 社 長 故 國 에 와서 첫 會 見 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수 일 전 에 가 출 옥 하 여 평 양 에 와 있 는 안 도 산 ( 安 島 山 )을 만 나 기 위 하 여 본 사 여 사 장 ( 呂 社 長 )은 영 동 ( 嶺 東 )지 방 여 장 ( 旅 裝 )을 풀 사 이 도 없 이 1 6 일 오 전 6 시 평 양 역 착 열 차 로 평 양 에

16 왔 고, 안 도 산 도 고 향 강 서 ( 江 西 )에 가 있 다 가 이 날 오 후 두 시 반 차 로 입 양 함 에 여 본 사 장 은 평 양 역 까 지 나 가 플 랫 폼 에 서 감 격 에 넘 치 는 회 견 을 하 였 다. 상 해 에 서 손 을 나 눈 지 이 미 5 년 반 에 각 각 고 역 을 치 르 고 나 오 는 같 은 코 스 를 밟 아 조 선 하 늘 아 래 첫 악 수 를 하 니 양 편 이 모 두 감 개 무 량 한 듯 잠 깐 은 서 로 말 이 없 었 다. 곧 同 車 (두 시 반 차 )로 오 윤 선 ( 吳 胤 善 ) 장 로 의 집 으 로 가 서 저 녁 때 까 지 여 러 가 지 이 야 기 로 회 포 를 풀 었 다. 도산과 몽양은 서로 긴 말이 필요로 하지 않은 관계였다. 도산과 몽양은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고, 정치적 비전과 전략전술도 유사했다. 1938년 3월 10일 병환으로 도산 이 사망하자 그 반향에 대해서 일본경찰은 주의 깊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1938년 3월 16일자 안창호의 사망에 대한 部 民 의 감상에 관한 건이라는 경고특비( 京 高 特 秘 ) 제512호의 2에는 특요시찰 인물 여운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특 요 ( 特 要 ) 여 운 형 ( 呂 運 亨 ) 안 창 호 와 는 수 십 년 조 선 내 에 서 는 물 론 해 외 에 서 도 함 께 조 선 독 립 운 동 을 위 하 여 활 동 한 특 수 관 계 도 있 고, 특 히 해 외 에 서 는 파 벌 이 달 라 자 신 은 기 호 파 ( 畿 湖 派 ), 안 창 호 ( 安 昌 浩 )는 서 북 파 ( 西 北 派 )의 파 벌 을 초 월 하 고 친 교 를 거 듭 하 였 다. 그 가 사 망 하 기 1 0 일 전 병 원 에 문 안 한 당 시 이 미 거 의 죽 은 상 태 로 악 수 를 나 누 었 다. 과 거 에 동 일 주 의 ( 同 一 主 義 )를 위 하 여 활 약 했 던 동 지 를 잃 는 다 는 이 유 에 서 무 언 중 에 슬 픔 의 이 별 을 하 였 는 데, 특 수 한 관 계 인 만 큼 안 창 호 ( 安 昌 浩 )의 사 망 에 대 한 애 수 가 깊 다. 몽양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 검사가 몽양에게 국내외에서 제일 친한 사람을 두 명씩 말 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국내에서는 벽초( 碧 初 ) 홍명희( 洪 命 熹 ), 야자( 也 自 ) 이만규( 李 萬 珪 )를, 해외에서는 도산( 島 山 ) 안창호( 安 昌 浩 ), 우사( 尤 史 ) 김규식( 金 奎 植 )이라고 진술했다. 한편 김구를 키운 철혈의 어머니 곽낙원( 郭 樂 園 ) 여사와 아들 김인( 金 仁 ), 김신( 金 信 )의 상해로 의 탈출을 앞장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여운형이었다. 1935년 당시 황해도 안악( 安 岳 )에서 살고 있던 김구의 일가족을 상해로 보내기 위해, 김선량( 金 善 亮 )은 인천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편을 몽양에게 부 탁했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로 인천행이 어렵게 되자, 결국 몽양의 도움으로 일가족은 신의주-안동을 거쳐 중국 땅에 들어갔다. 여운형은 신문사 사장으로서 중국특파원에게 전보를 보내는 형식으로 김구 와 연락도 주고받으면서 김구 일가족의 중국탈출을 도왔던 것이다.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몽양을 취 조했고, 몽양은 김구의 가족들이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닐 뿐더러, 부모형제가 모여 사는 것은 사람 의 자연스런 정리이다. 이것을 도와준 것을 비난하면 잔인무도한 일이다 며 항변했다. 몽양은 일제로 부터 엄한 비난과 조사를 당해야 했지만, 신문사 사장이란 지위를 이용하고 인륜을 내세워 무사할 수 있었다

17 5. 해방의 준비 : 조선건국동맹 여운형은 1936년 12월에 시행된 사상범보호관찰령에 따라 설치된 보호관찰소 제1호 제1행에 이름이 올라간 피보호자였다. 보호관찰소는 독립운동 전력이 있는 출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경성, 함흠, 청진, 평양, 신의주, 대구, 광주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었다. 보호관찰소의 피보 호인이 되면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보호관찰소의 보도관에게 가서 반성문도 쓰고 시국강연도 들어야 했지만, 여운형은 한 번도 보호관찰소에 간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일제의 여러 가지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일제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여운형은 1930년대 말부터 해방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정세와 전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 수가 중요했다. 몽양이 1940년부터 1942년에 걸쳐 다섯 차례 정도 동경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된다. 표 면적인 이유는 동경에서 공부하는 조카 여경구( 呂 慶 九 )를 방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해방에 대 한 적극적인 준비작업의 일환이었다. 여운형의 동경 방문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동경 의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을 통해 정세의 추이와 고급정보를 획득하려는 목적이었고, 두 번째는 조선 안에서 신변의 위협을 모면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세 번째 이유는 동경유학생 중 쓸 만한 청년들을 계 몽시켜 지하운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일제가 여운형의 동경행을 승인한 것은 그를 중국문제 해결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일제는 중국시절 여운형이 장개석( 蔣 介 石 ), 왕정위( 王 精 衛 ), 오패부( 吳 佩 孚 ), 염석산( 閻 錫 山 ) 등 과 교류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39년 5월말 왕정위가 일본을 방문해 일본정부 요인과 일련의 회담을 가졌다. 일본은 왕정위를 부추겨 그를 점령지역 괴뢰정권의 수반으로 내세우려는 공작을 진행 중이었다. 왕정위로부터 여운형의 얘기를 들은 일본당국은 조선군 참모부에 여운형의 설득을 명령했 다. 그 결과 여운형은 1940년 3월 초순 동경에 가게 되었다. 여운형은 당시 육군성 병무과장에서 제1군 참모장이 된 다나까 류키치( 田 中 隆 吉 ) 소장을 만났 다. 부임지인 산서성( 山 西 省 ) 태원( 太 原 )으로 떠나기 직전이던 다나까의 임무는 산서군( 山 西 軍 ) 염석산 ( 閻 錫 山 )과의 화평공작이었다. 다나까는 몽양에게 장개석 왕정위를 만나 화평공작을 해달라고 요청했 다. 여운형은 완곡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한편 여운형은 일본의 극우파 오오카와 슈메이( 大 川 周 明 ) 를 만나기도 했다. 오오카와는 5 15쿠데타의 지도자이자 육군대학 교수, 법학박사, 인도철학 전공에 영어가 능숙했다. 회담을 통해 몽양을 존경하게 된 오오카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여운형에게 도움을 주었다. 여운형은 오오카와의 소개로 고노에 후미마로( 近 衞 文 麿 ) 수상을 만나기도 했고, 우가끼 카즈 시게( 宇 垣 一 成 ) 전 조선총독과도 회담했다. 이러한 모든 접촉은 여운형에게 일본이 패망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일본 은 중국대륙 침략에 힘이 달리는 것이 확실했다. 여운형은 자신을 중국 화평공작에 이용하려는 일제 의 회유책을 비껴가면서, 일본이 처하고 있는 정치 군사적 상황과 관련된 주요 정보를 얻을 수 있었 다. 이러한 정보가 바로 해방에 대한 확신과 준비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몽양의 둘째딸 여연구( 呂 鷰 九 )가 집필한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2001년)에는 그동안 알 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 < 쪽(요약)> 처 음, 아 버 지 는 다 나 까 소 장 에 게 불 려 갔 다. 그 는 정 부 로 부 터 아 버 지 를 회 유 하 라 는 과 업 을 받 았 다. 그 는 아 버 지 에 게 중 국 에 가 서 장 제 스 와 왕 정 위 를 잘 구 슬 려 일 본 과 화 평 하 고 공 산 당 과 싸 우 게 해 달 라 고 간 청 했 다. 그 는 요 구 하 면 무 엇 이 든 지 주 겠 으 니 그 저 중 국 에 만 가 달 라 고 애 원 했 다. 아 버 지 는 나 는 거 짓 말 을 할 줄 모 르 는 사 람 이 다. 이 런 일 은 안 한 다. 며 딱 잘 라 거 절 했 다. 돌 아 오 는 길 에 경 구 오 빠 는 그 렇 게 단 도 직 입 적 으 로 거 절 하 다 가 는 그 들 의 손 에 죽 을 수 있 지 않 는 가. 라 고 물 었 다. 그 놈 이 애 걸 하 는 걸 보 지 않 았 나. 물 에 빠 진 놈 지 푸 라 기 라 도 잡 는 다 고 절 대 로 나 를 쉬 이 죽 이 지 못 한 다. 두 고 봐 라. 이 제 더 높 은 놈 이 나 타 날 테 니. 아 버 지 의 말 이 맞 았 다. 다 음 날 에 도 전 수 상 고 노 에 ( 近 衞 文 麿 )가 도 쿄 회 관 으 로 아 버 지 를 불 러 내 중 국 에 가 달 라 고 애 원 도 하 고 위 협 도 했 다. 이 번 에 도 역 시 아 버 지 는 점 잖 게, 사 리 정 연 하 게, 그 리 고 단 호 하 게 거 절 했 다. 궁 지 에 빠 진 놈 들 은 이 문 제 를 마 지 막 으 로 천 황 에 게 제 소 했 다. 아 무 리 도 도 한 여 운 형 이 라 도 감 히 천 황 의 명 이 야 거 절 하 지 못 할 거 라 고 생 각 했 던 것 이 다. 천 황 이 부 른 다 는 전 갈 을 받 고 아 버 지 는 긴 장 감 을 감 추 지 못 했 다 고 한 다. 천 황 까 지 나 서 리 라 고 는 생 각 못 했 던 것 이 다. 어 떻 게 할 것 인 가. 거 절 할 수 도 없 는 처 지 이 고 보 니 생 각 이 무 거 웠 다. 지 금 까 지 는 유 연 하 면 서 도 대 바 르 고, 지 조 를 굽 히 지 않 고, 능 란 한 임 기 응 변 으 로 일 제 와 의 관 계 를 유 지 해 왔 다. 그 런 데 이 제 는 정 말 막 다 른 골 목 에 이 른 것 이 다. 아 버 지 는 드 디 어 최 후 가 왔 다 는 것 을 알 았 다. 그 순 간 아 버 지 머 리 에 떠 오 른 것 은 피 값 이 라 도 해 야 한 다 는 단 순 한 생 각 이 었 다 고 한 다. 아 버 지 는 마 음 을 진 정 하 고 최 후 순 간 에 어 떻 게 할 것 인 가 를 곰 곰 이 생 각 했 다. 아 버 지 는 죽 음 으 로 써 조 선 민 족 의 기 개 를 떨 치 고 인 민 들 에 게 애 국 심 을 고 취 하 는 데 이 바 지 할 수 있 다 면 서 슴 없 이 나 설 각 오 가 되 어 있 었 다. 어 차 피 사 람 은 한 번 죽 기 마 련 인 데 값 있 는 죽 음 이 야 말 로 얼 마 나 바 람 직 한 것 인 가. 하 물 며 그 죽 음 이 일 제 의 패 망 을 촉 진 하 는 도 화 선 이 될 수 있 음 에 랴. 이 렇 게 생 각 하 니 오 히 려 마 음 은 든 든 해 졌 다. 그 러 나 아 버 지 가 천 황 과 대 결 했 던 이 야 기 는 아 직 까 지 세 상 에 알 려 지 지 않 았 다. 해 방 을 전 후 해 서 한 동 안 소 문 이 떠 돌 았 으 나 그 때 아 버 지 가 그 소 문 을 일 축 해 버 려 점 차 가 라 앉 았 다 고 한 다 년 경 구 오 빠 는 운 명 하 기 직 전 에 야 너 의 아 버 지 는 천 황 한 놈 쯤 해 제 낄 자 신 이 있 었 다. 그 놈 이 꺼 꾸 러 지 면 일 제 의 아 성 은 무 너 질 것 이 며 조 선 의 독 립 도 쉬 이 될 것 이 라 는 생 각 까 지 했 었 다. 면 서 그 때 일 을 기 록 한 것 을 나 에 게 넘 겨 주 었 다. 그 내 용 은 다 음 과 같 다. 하 루 는 저 녁 식 사 후 아 저 씨 (여 운 형 )가 나 를 조 용 히 윗 방 으 로 불 렀 다. 나 라 와 민 족 을 위 해 죽 을 각 오 가 되 어 있 느 냐? 갑 자 기 웬 일 일 까 생 각 하 며 나 는 그 렇 다 고 대 답 했 다. 내 일 나 와 같 이 가 면 다 시 살 아 오 지 못 할 수 가 있 는 데 아 내 와 아 이 들 이 앞 으 로 살 아 갈 수 있 는 가? 나 는 긴 장 하 며 이 미 각 오 가 돼 있 다 고 했 다. 내 일 천 황 을 만 나 게 된 다. 나 는 놀 랐 다. 나 는 가 슴 이 떨 리 는 것 을 겨 우 참 고 있 었 다. 그 러 나 아 저 씨 는 태 연 하 게 나 는 그 놈 과 만 나 일 본 말 을 하 고 싶 지 않 고 통 역 을 데 리 고 가 자 니 아 무 나 선 정 할 수 없 어 너 를 택 했 다. 하 룻 밤 동 안 잘 생 각 해 보 고 내 일 다 시 만 나 자 고 말 했 다. 다 음 날 내 가 결 심 이 되 었 다 고 했 더 니 가 족 이 눈 치 체 지 못 하 게 나 가 자 고 했 다. 그 는 나 에 게 다 음 과 같 은 주 의 사 항 을 주 었 다. 첫 째, 어 떤 환 경 에 처 해 도 내 가 하 는 대 로 따 라 하 며 주 눅 이 들 거 나 당 황 해 하 지 말 것, 둘 째, 나 는 조 선 말 을 하 겠 으 니 통 역 을 정 확 하 게 하 며 내 가 어 성 ( 語 聲 )을 높 이 면 같 이

19 높 일 것, 셋 째, 눈 길 은 앞 만 바 라 볼 것, 넷 째, 최 후 의 시 각 에 도 조 선 사 람 의 기 개 를 떳 떳 이 보 여 줄 것. 나 는 그 대 로 하 겠 노 라 다 짐 했 다. 그 는 혼 잣 소 리 처 럼 무 기 는 휴 대 할 수 없 으 니 여 차 하 면 한 두 놈 쯤 메 다 꽂 고 무 기 를 빼 앗 아 야 지 하 더 니 드 디 어 기 회 는 왔 다. 우 리 잘 싸 우 자. 사 람 은 어 차 피 한 번 은 죽 게 마 련 이 다. 오 래 산 다 고 해 서 값 있 는 삶 이 라 고 할 수 없 다. 세 상 에 는 산 사 람 보 다 더 값 있 는 삶 을 지 니 고 있 는 죽 은 사 람 도 있 다. 우 리 잘 싸 우 자 고 말 했 다. 나 도 결 사 의 각 오 를 하 고 나 니 오 히 려 마 음 이 평 온 해 졌 다. 지 정 된 장 소 에 이 르 니 까 만 승 용 차 가 대 기 하 고 있 었 다. 앞 뒤 로 엄 엄 한 호 위 속 에 궁 성 다 리 앞 에 서 차 를 내 렸 다. 그 러 자 다 리 건 너 건 물 로 안 내 했 다. 건 물 주 위 는 온 통 무 장 한 호 위 병 으 로 겹 겹 했 다. 긴 복 도 를 따 라 가 는 데 갑 자 기 무 릎 을 꿇 고 기 어 가 라 고 명 령 했 다. 나 는 천 황 이 상 봉 을 청 해 온 외 국 인 이 다. 나 는 우 리 의 예 법 대 로 한 다. 며 아 저 씨 는 곧 장 걸 어 갔 다. 놈 들 은 총 창 으 로 앞 을 막 고 당 장 엎 드 리 라 고 강 박 했 다. 이 때 황 홀 한 단 상 에 높 이 앉 아 있 던 사 람 이 손 짓 을 해 서 야 무 기 를 거 두 었 다. 자 세 히 보 니 그 사 나 이 가 바 로 천 황 이 었 다. 그 는 군 복 을 입 고 있 었 다. 천 황 앞 에 이 르 자 아 저 씨 가 말 했 다. 여 운 형 : 천 황 이 왜 조 선 인 여 운 형 을 만 나 자 고 했 는 가. 천 황 : 과 시 듣 던 바 와 같 군. 남 아 라 더 니. 여 운 형 : (재 차 같 은 질 문 ) 천 황 : 당 신 이 조 선 인 으 로 태 어 난 게 아 깝 다. 여 운 형 : 농 담 할 시 간 이 없 으 니 용 무 가 없 으 면 돌 아 가 겠 다.(한 단 어 도 빼 놓 지 않 고 통 역 하 려 고 애 쓰 는 나 의 이 마 에 는 진 땀 이 났 다.) 천 황 : 한 가 지 부 탁 이 있 는 데 대 일 본 제 국 을 위 해 수 고 를 해 줄 수 있 겠 는 가. 여 운 형 : 할 만 한 일 이 면 하 고 못 할 일 이 면 못 하 겠 다. 천 황 : 중 국 에 간 나 의 사 신 들 이 무 주 고 혼 ( 無 主 孤 魂 )이 되 었 는 데 일 본 사 람 을 보 내 서 야 안 되 겠 으 니 나 의 사 신 이 되 어 달 라. 여 운 형 : 목 적 은? 천 황 : 중 국 에 가 서 일 본 군 대 가 지 나 갈 길 을 빌 려 달 라 고 청 탁 하 는 것 이 다. 여 운 형 : 내 가 친 일 주 구 인 것 이 드 러 나 면 그 가 나 를 살 려 두 겠 는 가. 천 황 : 그 러 기 에 당 신 의 재 능 과 수 완 을 믿 는 것 이 다. 여 운 형 : 친 일 과 반 일 은 수 화 상 극 ( 水 火 相 剋 )이 거 늘 일 본 이 조 선 민 족 에 게 큰 재 난 을 들 씌 우 고 어 찌 조 선 사 람 에 게 친 일 을 설 교 하 는 것 인 가. 나 에 게 재 능 과 수 완 이 없 어 천 황 의 마 음 을 돌 려 세 우 지 못 하 는 것 이 한 스 럽 다. 천 황 : (노 하 여 ) 내 가 사 람 을 많 아 만 나 보 았 으 나 너 처 럼 오 만 무 례 한 자 는 처 음 이 다. 네 생 명 이 경 각 에 달 려 있 거 늘 나 의 명 령 을 듣 든 지 죽 든 지 어 느 한 길 을 택 하 라. 여 운 형 : 죽 는 것 이 무 서 워 서 야 어 떻 게 내 가 반 일 을 하 겠 는 가. 이 길 에 서 이 미 많 은 조 선 사 람 들 이 생 명 을 바 쳤 거 늘 앞 으 로 도 독 립 이 이 룩 될 때 까 지 민 족 의 넋 을 지 켜 죽 는 사 람 들 이 끝 없 이 늘 어 날 것 이 다. 천 황 : 그 럼 너 는 죽 여 달 라 고 청 을 들 려 고 나 한 테 왔 단 말 인 가. 여 운 형 : 아 니 다. 나 는 모 르 는 것 을 알 려 주 려 왔 다. 조 선 사 람 을 죽 일 수 는 있 지 만 조 선 민 족 은 없 애 지 못 한 다. 조 선 인 민 은 친 일 주 구 몇 놈 때 문 에 일 시 적 치 욕 을 당 하 고 있 으 나 우 리 인

20 민 은 영 웅 들 을 무 수 히 낳 고 우 리 힘 으 로 치 욕 을 씻 게 될 것 이 다. 이 것 은 진 리 다. 그 런 데 너 의 곁 에 는 이 진 리 를 아 는 자 도 없 고 또 알 아 도 말 해 주 는 사 람 도 없 으 니 내 가 수 고 로 이 렇 게 온 것 이 다. 천 황 : (침 묵 ) 여 운 형 : 내 말 을 알 아 듣 고 못 듣 는 것 은 그 편 의 총 명 성 에 달 려 있 겠 으 니 이 제 나 의 용 무 는 끝 났 다. 말 을 마 치 고 돌 아 서 는 데 어 느 새 무 장 한 괴 한 들 이 꽉 둘 러 쌌 다. 이 젠 죽 었 구 나. 아 저 씨 와 함 께 결 사 전 을 벌 여 야 한 다. 나 는 마 음 을 도 사 리 고 두 주 먹 을 쥐 었 다. 이 때 천 황 이 손 을 들 어 제 지 시 키 더 니 풀 죽 은 목 소 리 로 말 했 다. 천 황 : 여 선 생 이 조 선 사 람 인 것 이 아 깝 다. 내 부 하 중 에 선 생 같 은 이 가 없 으 니 나 를 좀 도 와 주 시 오. 여 운 형 : 자 기 죄 를 뉘 우 치 고 중 국 과 조 선 에 서 자 기 군 대 를 다 철 수 시 키 면 가 능 할 수 있 다. 천 황 : 과 시 듣 던 바 와 같 군. (김 빠 진 소 리 로 호 위 병 들 에 게 ) 길 을 내 주 고 나 를 대 신 해 서 문 밖 까 지 안 전 하 게 배 웅 하 라. 그 리 고 여 선 생, 오 늘 의 일 은 없 었 던 것 으 로 하 자. 피 차 를 위 해... 그 리 하 여 우 리 는 궁 성 밖 으 로 무 사 히 나 왔 다. 나 의 속 옷 은 물 론 겉 옷 마 저 땀 에 화 락 젖 은 것 을 밖 에 나 와 서 야 알 았 다. 그 런 데 아 저 씨 는 유 유 히 걸 어 나 오 셨 다. 죽 을 고 비 에 서 살 아 났 다 는 생 각 은 꿈 에 도 없 는 듯 아 저 씨 는 조 용 히 말 했 다. 난 사 실 결 사 전 을 각 오 했 다. 그 런 데 그 의 말 을 들 어 보 니 명 이 다 하 였 더 군. 살 아 나 가 서 광 복 전 을 준 비 해 야 겠 다 고 생 각 했 다. 돌 아 오 는 길 에 아 저 씨 는 활 기 에 넘 쳤 다. 경 구 야 너 도 보 았 지. 그 놈 이 얼 마 나 바 빠 하 는 가 를. 이 제 일 제 의 패 망 은 시 간 문 제 다. 그 놈 이 우 릴 살 려 준 것 은 자 비 심 이 있 어 서 가 아 니 라 무 서 워 서 그 랬 어. 내 가 그 저 순 순 히 잡 혀 죽 을 사 람 이 아 니 라 는 것 쯤 은 그 자 도 알 아 차 렸 거 든. 아 저 씨 는 나 에 게 오 늘 천 황 과 만 난 일 은 너 와 나 만 알 고 있 자. 천 황 에 게 갔 다 가 살 아 왔 다 면 오 해 가 생 길 수 도 있 고 복 잡 한 일 이 있 을 수 있 으 니 비 밀 을 지 켜 라. 가 족 에 게 도... 라 고 당 부 했 다. 오 빠 는 죽 을 때 까 지 이 비 밀 을 지 켰 다. 그 러 므 로 그 때 아 버 지 가 도 쿄 에 가 서 다 나 까 와 고 노 에 를 만 난 이 야 기 는 출 판 물 에 도 나 고 널 리 퍼 졌 지 만 천 황 과 만 났 던 사 실 은 누 구 도 몰 랐 다. 위 내용은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하면 일본당국이 몽양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몽양은 역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이 처해 있는 상황을 예측하고 해방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는 1944년 8월 건국동맹 의 결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942년 12월 동경에서 돌아온 여운형은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되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육해군 형법,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이었다. 내용인 즉 1942년 6월과 8월말 동경에서 귀국한 후 친구인 목사 오건영( 吳 建 永 ), 이재형( 大 山 載 馨 : 李 載 馨 의 창씨명)과 홍증식( 洪 增 植 ) 등에게 그해 4월 18일 미 군기의 동경공습 상황, 일본비행기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기술 물자의 저열성, 미국 내의 조선독립운 동 상황 등을 설명하면서 조선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몽양을 비롯한 관련 자 전원이 검거, 투옥되었다

21 몽양은 1943년 7월 2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1942년 12월에서 1943년 7월까지 몽양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어떻게 하든지 자신에 게 부과된 여러 가지 독립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결심과 일제의 멸망 직전이니 민족해방투쟁 단체 를 조직해야겠다 는 생각을 굳혔다. 즉 건국동맹 조직에 대한 구상이 형무소 안에서 이뤄졌던 것이 다. 조직의 명칭, 구조뿐만 아니라 어떻게 조직하고 해외독립운동단체들과는 어떻게 연계할 것이며, 국내에 산재한 동지들은 어떻게 규합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독립투사들을 모두 망라한 광범한 민족통 일전선체를 만들어 민족의 힘을 집결시켜 해방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마지막 발악하는 일제에게 한방 을 안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불원간 해방을 맞으면 분산된 힘으로는 건국사업에 돌진할 수 없는 만큼 분산된 조직들을 묶어 조직적, 주체적, 능동적으로 해방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구상 을 가지고 옥문을 나섰던 것이다. 석방된 몽양의 한쪽 발에는 집행유예의 올무에 묶여 있었다. 몽양은 가출옥 후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다. 일본당국은 세 차례나 끈질기게 전향문을 요구했고, 일본검사 스기모토 가구이치( 杉 本 覺 一 ) 는 자기가 쓴 전향문에 몽양이 날인할 것을 요구했다. 몽양은 이를 모두 거부했지만, 조선인 판사 백 윤화( 白 允 和 )가 날조한 몽양의 전향문이 일제에 제출되기도 했다. 일제는 끊임없이 전향을 강요하는 한편 학병지원 연설, 창씨개명 연설문 등 친일의 길로 몰아갔다. 합법적 행동과 비합법적 활동 사이에 서 몽양은 의연하게 대처해 나갔다. 일본인과 접촉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들과 만나면 주변에선 일 본놈들 돈을 받아썼다, 친일했다, 변절했다 는 따위의 비방이 난무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안타까운 환경에서도 몽양은 합법적 활동 반경에서는 일제 당국자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본래의 구상대로 철저하게 비합법 투쟁단체를 조직하는 작업에 나서기 시 작했다. 경성요양원에 문병을 가장한 일단의 애국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과 해방이 예 상되는 정세에 기초해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하고 이 조직을 통해 일제패망을 앞 당기는 한편, 건국을 준비하자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들은 조선민족해방연맹( 朝 鮮 民 族 解 放 聯 盟 ) 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하부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각지에 연락원을 배치해야 한다는 데 인식 을 같이했다. 조선민족해방연맹 을 조직하기로 했지만 곧바로 조직이 결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작 은 모임이 1944년 8월에 결성된 건국동맹 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건국동 맹 은 1944년에 갑자기 결성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의 수감생활 시기(1942년 12월-1943년 7월)에 구상 되고, 조선민족해방연맹 이라는 잠정적 명칭으로 1년여의 준비 작업을 거쳐 1944년 8월에 조직되었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조직결성 준비 작업을 주로 담당한 인물은 몽양이 가장 신뢰하던 조동호, 이림수( 李 林 洙 ) 등이었다. 이들은 무명을 파는 보따리장사로 위장하여 전라도로 갈 때면 무명 사러 다니는 걸 로, 함경도로 갈 때는 무명 팔러 다니는 걸로 여행허가를 받았다. 또 다른 곳에 갈 때는 약장사로 위 장하기도 했다. 이런 준비 작업에는 일정한 틀이 있을 수 없었다. 갖가지 기상천외한 방식이 구사되었 고 심지어 나이를 속인 몽양의 환갑잔치까지 활용되었다. 1944년 4월 경기도 양평의 시골집에서는 여 운형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나이를 두 살 늘려 잔치를 벌인 것이었다. 해외혁명단체와의 연결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해외에 나갈 때는 합법적인 명칭을 걸지 않고는 만주 같은 곳은 갈 수가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일제를 업고 내용적으론 반일운동을 위해

22 가는 형식이었다. 만주에서는 최근우( 崔 謹 愚 )가 일제의 관변단체인 협화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 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북경 및 관내지역은 이상백( 李 相 佰 )이, 연안은 이영선( 李 永 善 )이 담당했다. 연안 에 가서 무정( 武 亭 )과 최창익( 崔 昌 益 )을 만났다. 만주군관학교(7기)를 졸업하고 만주군 항공 조종사였 던 박승환( 朴 承 煥 )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1944년 8월 10일 경성부 경운정 삼광한의원에서는 역사적인 비밀회합이 열리고 있었 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패전으로 치달으면서 탄압의 강도는 더해가던 한 여름날, 몽양 여운형을 중심 으로 한의원 주인 현우현( 玄 又 玄 )을 비롯해 황운( 黃 雲 ), 이석구( 李 錫 玖 ), 김진우( 金 振 宇 ), 조동호( 趙 東 祜 ) 등 좌익계 노장층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았다. 비합법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되는 순간이었 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1943년 8월에 조선민족해방연맹이 조직되어 1944년 8월에 건국동맹으로 확대발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른 자료에는 여운형이 이기석( 李 基 錫 ), 김태준( 金 台 俊 ), 서중석( 徐 重 錫 ) 과 함께 인민전선을 논의하는 한편, 현준혁( 玄 俊 赫 ) 등을 찾아 조선해방연맹이나 조선인민위원회를 만 들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이때 여운형의 집에는 전사옥, 최용달, 구소현, 조동호 등의 소그룹이 출입했 고 김태준은 최용달을 통해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곧 1944년 시점에서 국내에 잔존했던 공산주의자 소그룹들, 이를테면 청진 일철( 日 鐵 )을 중심한 이승엽( 李 承 燁 ) 일파의 자유와 독립 그룹, 김일수( 金 一 洙 ), 김재갑( 金 載 甲 ), 서중석, 서완석( 徐 完 錫 ), 이정윤( 李 廷 允 ), 정창섭( 鄭 昌 燮 ), 김태준 일파의 공산주의자협의회그룹 등에게 여운형이 조선해방연맹 혹은 인민전선 인민위원회 조직을 제의했다는 주장이다.아무튼 건국동맹 이라는 명칭을 통해서 볼 때 여운형을 지도자로 한 그룹이 민족해방투쟁보 다는 건국과 해방준비사업에 보다 역점을 두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민족해방투쟁에 강조 점이 두어졌다면 독립투쟁연맹, 해방투쟁동맹, 해방동맹, 독립동맹 등의 명칭이 붙여졌을 것이다. 아무튼 건국동맹의 목적은 패망을 눈앞에 둔 일제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것과 다가선 해 방조선의 정국을 보다 주체적이고 주동적인 힘으로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는 광범한 민족세력을 집결시켜 건국사업에 매진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해 준비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기본과제였다. 이것은 건국동맹의 강령으로 집약되었다. 또한 삼불( 三 不 ) 이라는 규약도 채택되 었다. 그것은 1 건국동맹에 대해 일체 말을 하지 않는다( 不 言 ), 2 문서에 남기지 않는다( 不 文 ), 3 이 름을 말하지 않는다( 不 名 )는 원칙이었다. 몽양을 핵심으로 한 중앙조직에는 이기석( 李 基 錫 ), 최병철( 崔 秉 喆 ), 김세용( 金 世 鎔 ), 박승환( 朴 承 煥 ), 김문갑( 金 文 甲 ), 이상백( 李 相 佰 ), 허규( 許 珪 ), 이만규( 李 萬 珪 ), 이여성( 李 如 星 ), 이수목( 李 秀 穆 ), 정재철 ( 鄭 載 轍 ), 조동호( 趙 東 祜 ), 현우현( 玄 又 玄 ), 이석구( 李 錫 玖 ), 황운( 黃 雲 ), 김진우( 金 振 宇 ) 등으로 구성되었 고, 위원장은 물론 여운형이 맡았다. 이렇게 중앙위원회가 조직된 후, 이를 골간으로 건국동맹 지방조 직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 2명 내지 3명의 지방조직 책임자가 임명되었다. 각도 대표위원으로 신표성 ( 愼 杓 成 ) 김종우( 金 種 宇 ) 유웅경( 劉 熊 慶 ) 장준( 張 浚 )(충청남북도), 명도석( 明 道 奭 ) 김명규( 金 明 奎 )(경상 남도), 이상훈( 李 相 薰 ) 정운해( 鄭 雲 海 ) 김관제( 金 觀 濟 )(경상북도), 정건화( 鄭 健 和 ) 정재철( 鄭 載 轍 )(강원 도), 황태성( 黃 泰 成 )(전라남북도), 여권현( 呂 權 鉉 )(황해도), 김유창( 金 裕 昌 )(평안남도), 이유필( 李 裕 弼 )(평안 북도), 이증림( 李 增 林 )(함경남도), 최주봉( 崔 周 鳳 )(함경북도)이 임명되었다. 한편 중앙에서 각 지방 책임 자들과 연락 연대활동을 담당하기 위해 이석구 현우현 황운 이걸소 김문갑 등이 활동했다. 건국동맹 조직구성상의 또 다른 특징은 건국동맹이라는 모체조직을 중심으로 그 산하에 각

23 계층별 조직이 체계화되었다는 점이다. 건국동맹 산하에는 농민조직, 청년학생조직, 학병 징병 징용 거부자 조직, 노동자 조직, 부녀조직, 사무원조직 등이 조직되었거나 준비단계에 있었다. 한편 건국동맹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군사조직문제였다. 건국동맹은 전세가 연합군측에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된 1945년 3월경 후방교란과 노농군( 勞 農 軍 ) 편성을 계획했다. 조동호, 이석 구, 이기석은 공산주의자인 최원택( 崔 元 澤 ), 정재달( 鄭 在 達 ), 이승엽( 李 承 燁 ) 등과 함께 군사위원회를 조 직했다. 군사위원회의 목적은 국내 무장봉기와 철도파괴 등을 통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 다. 이를 위해 경기 황해도의 경인지구와 강원도 중심의 삼척지구에 책임자 파견 및 인물규합에 착 수했고, 대구, 부산, 목포, 흥남, 청진, 평진(평양 진남포) 각 지구의 책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건국동맹은 군사문제 대책과 관련해 세 가지 방향에서 준비작업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공산 주의자들과 군사위원회를 설치해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는 방안, 두 번째는 만주군관학교를 중심한 만 군조직을 활용하는 빙안, 세 번째는 연안의 조선의용군 중경의 광복군과 연합작전을 시도하려는 방 안이었다. 세 가지 방안은 서로 상호유기적인 관련을 갖고 추진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심도 깊게 논 의 연구된 것은 노농군 편성과 만군조직 활용방안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군사계획은 실행단계에 이 르지 못한 채 구상 준비단계에 그쳤지만, 그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해방 후 여운형의 건준 주위 로 많은 군사적 재원이 몰려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후, 군대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협의해 노농군 편성 군사행동 군대편성을 계획하는 한편, 학병 징병 징용거부자들과 연 계해 이들을 노농군 편성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것이 전체적인 계획의 윤곽이었다. 당시 군대편제 군 사행동과 관련한 계획을 세운 사람은 만군에 속해 있던 박승환이었다. 항공장교였던 박승환은 1944년 1월과 1945년 2월, 8월 등 세 차례 이상 국내에 들어와 여운형과 군사문제를 토의했다. 박승환은 또한 북경 연안(1943년말, 1945년 2월-7월)을 두 차례 이상 오가며 해외혁명단체와의 연락 및 연합군사행 동을 계획하는 한편 만군 내의 선진적 군인들을 포섭해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건국동맹이 지방 부문별 조직을 구축하는 활동과 함께 중시한 것은 해외혁명단체와의 연락 연대사업이었다. 당시 해외의 혁명단체들을 살펴보면, 중국 중경에는 임시정부와 그 산하에 이청천( 李 靑 天 ) 김원봉( 金 元 鳳 )이 이끈 광복군이, 8로군 지역인 연안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 華 北 朝 鮮 獨 立 同 盟 ) 과 무정( 武 亭 )이 이끈 조선의용대( 朝 鮮 義 勇 隊 )가, 소련 하바로프스크 밀영에는 김일성 빨치산부대가 있 었다. 각 항일투쟁단체들은 일제와 싸울 수 있는 군사행동 준비를 하면서 단체들 간의 연대를 시도했 지만, 준비단계에서 해방을 맞고 말았다. 어쨌든 건국동맹은 연안의 독립동맹 및 임시정부와 연계해서 연합작전을 계획하는 등 해외항 일단체와의 연락 연대사업에 열중했다. 연락사업에서 가장 주된 대상은 연안의 독립동맹세력이었다. 1942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개편을 통해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도 국내의 항일운동세력과 연계 를 시도하고 있었다. 독립동맹은 이극( 李 克 )을 파견해 여운형, 허헌, 이영 등과 접촉하려 했지만 이극 의 체포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40년대 초반 국내에는 독립동맹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고 이들과 접촉하려는 움직임이 존재 했다. 소설가이자 문학자였던 김태준( 金 台 俊 )은 그의 아내 박진홍( 朴 鎭 弘 )과 함께 1944년 11월 무정과 함께 국내 군사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연안을 찾아갔다. 이들은 일본군의 전선을 돌파해 산해관을 넘 고, 2-3개월씩 밤을 낮 삼아 걸어서 연안에 도착했다. 또한 소설가 김사량( 金 史 良 ) 역시 연안으로 스

24 며들었다. 김사량의 경우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친일 선전대에 끼어 북경에 도착해, 여기서 여운형의 연락원이었던 이영선( 李 永 善 )을 만나 목숨을 내걸고 찾아간 연안에서 그는 해방을 맞았다. 6. 민족통일전선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을 염원 1945년 8월 15일 이른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遠 藤 柳 作 )는 여운형( 呂 運 亨 )에게 치안유지에 관한 협력을 요청했고, 이에 여운형은 1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3개월 간의 식량을 보장할 것, 3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모든 정치운동에 대해 절대로 간섭 하지 말 것, 4 학생과 청년을 훈련, 조직하는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우리 건국사업에 동원, 조직하는 데에 간섭하지 말 것 등 5가지의 조건을 붙여 조선총독부 요청을 받아들 이고, 즉각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인의 눈에도 여운형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했던 <경성 일보>의 주필 나카호( 中 保 與 作 )는 여운형에 대해 조선의 학생층, 청년층, 인텔리층의 희망이었다. 영 국풍의 수려한 풍모는 서재에 있는 철학자를 연상시키지만,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활활 타오르는 혁명의 불꽃은 넓고 깊게 조선의 모든 계층을 소리 없이 매혹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고 평가했다. 정무총감과의 교섭 직후 여운형은 장권( 張 權 )에게 치안대 조직을, 이정구( 李 貞 求 )에게는 식량대 책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건국동맹원을 모아 앞으로의 활동 방침을 협의했다. 건준 활동을 치안유지로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국가건설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정치활동까지 확대할 것인 지에 대해 논의한 결과, 1 합법적 투쟁은 지하운동에는 올바르지 않지만, 정치운동에는 비합법적 수 단과 합법적 수단을 병행해 사용해야 하며, 해방 후 일어날 수 있는 민중의 정치열을 치안유지 활동 만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정치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며, 2 친일파 민족반역자 를 배제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들의 활동은 시민전체를 동원하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치안유지 활동만으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를 배제하기 어렵고, 또한 치안활동에 참가한 친일파 민족반역자 는 반드시 후에 정치활동에도 참가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 배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이유로 정치 활동까지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여운형이 생각한 정치활동이라는 것은, 우선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 권을 조선인이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협력단체로서가 아니라, 조 선총독부를 대신할 조선인의 권력기관 창설을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라는 명칭을 사용해 활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건준 의 활동은 형무소에서 정치범 및 경제범을 맞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모든 형무소와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사상범을 비롯해 경제관계, 노무관계 위반자 등 모든 조선인을 전원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여운형은 8월 16일 오전 9시, 이 강국, 최용달, 그리고 사상범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長 崎 祐 三 )와 서울지검 백윤화( 白 允 和 ) 검사를 대동 하고, 일제의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의 상징으로 많은 활동가가 수감되어 있었던 서대문형무소로 향해 즉각 조선인 정치범, 경제범들을 석방시켰다. 16일 정오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휘문중학교에서 엔도 정무총감과의 교섭내용을 직접 대중 앞에서 보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와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단결과 협력을 호소했다. 나아가 동일

25 오후 3시, 6시, 9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해외 해내 3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경성중 앙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3회에 걸쳐 방송했다. 방송 내용은 신생 조선의 재건설 을 위하여 건준 을 결성했음을 알린 뒤, 당면의 긴급과제로서 안전확보와 조선 일본 양 민족의 마찰의 경계, 경비대나 청년대 등 치안유지 조직의 결성, 정규군의 편성, 식량확보와 배급체제의 유지, 통화 및 물가 등 신경 제정책의 수립과 실행 등을 제시했다. 안재홍의 방송내용은 조선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조선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어 그 신정부의 정책발표와 같은 인상을 민중들에게 주었다. 지 방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다양한 이름의 민중자치조직이 결성되었다. 그 결과 1945년 8월말 불과 2 주 사이에 중앙과 연락할 수 있는 지부만 145개를 초과했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전국의 행정단위(군 의 수)의 66%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민중들의 제1차적 공격대상은 감시, 체포, 고문, 징병, 징용, 노무, 식량공출 등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을 가장 괴롭힌 경찰서나 행정기관, 나아가 일제지배의 상징으로서의 신사에 집 중되고 있었다. 즉 이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해방직후 조선민중은 식민지통치기구의 해체를 최우선과 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과제가 민족반역자 에 대한 응징이었 다. 조선총독부도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부터 살상을 당한 사건도 있지만, 이것은 민 족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적 원한관계에 의한 것으로,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 살상 사건에 비교하면 미 약하다 고 판단하고 있었다. 즉 건준 은 새로운 정권의 수립까지 과도기에 있어 치안유지 등 긴급문제에 주체적으로 대응 하면서, 민중의 생활이나 경제적 조건의 확보 또는 정비를 통해서 새로운 정권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 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준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해 가자, 조선총독부는 즉시 건준 이란 간판 을 내리라고 위협하면서 국가권력은 아직까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송진우를 중심으 로 한 국내 보수세력들 역시 건준 을 친일주구단체 라고 일제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8.15 공작 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건국동맹 을 조직해 일본의 패망 후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여운형은, 1945년 8월 11 일, 단파방송을 수신하고 있었던 손웅( 孫 雄 )이라는 학생으로부터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정보를 듣 고, 국내에 있던 유력한 인물들과 협력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이때 여운형 이 협력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주요한 인물은 당시 국내에 있었던 송진우( 宋 鎭 禹 ), 안재홍( 安 在 鴻 ), 조만식( 曺 晩 植 ), 박헌영( 朴 憲 永 ), 허헌( 許 憲 ) 등이었다. 우선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보수세력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송진우 세력과 협 력하기 위해, 8월 12일과 13일 양일에 걸쳐 비밀교섭을 가졌다. 여운형의 대리인으로서 정백( 鄭 栢 )이 송진우측의 김준연( 金 俊 淵 )을 만났다. 여운형측은, 1 일제는 이미 포츠담선언에 의해 무조건 항복이 결정되었으므로 조선민족이 자주적으로 당면의 치안, 민생문제를 비롯한 주권확립에 매진할 것, 2 국 내에서 적과 항쟁하는 인민대중의 혁명 역량을 중심으로 국내외 혁명단체를 총망라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송진우측은, 1 일본의 지배가 완전하게 철폐될 때까지 그대로 참고 있어야 하며, 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조선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는 독립정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므 로 적과 투쟁할 수 없을 것, 2 중경( 重 慶 ) 김구 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해, 양자의

26 의견은 완전히 대립했다. 그 후도 여운형은 송진우 세력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다. 송진우는 측근들 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 고 강조하면서 여운형에게 비협력적이었다. 여운형이 송진우 세력에게 협력 을 요청한 이유는 송진우 주변에는 김성수( 金 性 洙 ) 그룹이 있고, 그들은 동아일보사, 방직회사 등을 경영해 보수세력 중에서는 상당한 능률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의 협력요청에 대한 송진우측의 주장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연합국의 진주나 임정 의 귀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논리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유일한 8.15 상황 에서의 정견이었다. 그 결과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는 연합하지 못한 채, 여운형은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안재홍이나 일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해 건준 을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진우 등 보수그룹이 건준 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에는 소위 송진우 선교섭설 ( 先 交 涉 說 ) 이라는 것이 그 배경에 있었다. 송진우 선교섭설 이란 조선총독부는 먼저 송진우에게 치안 유지에 관한 협력을 요청했고 송진우는 그것을 일제에 대한 협력행위로 인식하여 거부했는데, 여운형 은 그것을 받아들여 중국의 왕조명( 汪 兆 銘 )정권이나 프랑스의 비시정권, 필리핀의 라우엘정권과 같은 괴뢰정권으로서 건준 을 조직했다는 논리였다. 이런 논리를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송진우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김준연( 金 俊 淵 )이었는데, 그의 주장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 자 폭 탄 의 투 하 와 소 련 군 의 대 일 참 전 에 의 해 서 일 본 의 패 배 가 결 정 적 인 상 황 이 된 8 월 1 0 일, 우 선 총 독 부 보 안 과 장 이 소 자 키 ( 磯 崎 廣 行 )와 관 방 기 획 과 장 하 라 다 ( 原 田 大 六 ), 그 리 고 조 선 군 참 모 간 자 키 ( 神 崎 久 ) 등 이 시 내 모 처 에 서 송 진 우 와 만 나 정 세 의 중 대 함 을 설 명 하 면 서 행 정 위 원 회 와 같 은 것 을 조 직 하 라 고 요 청 했 다. 송 진 우 는 이 것 을 거 부 하 였 는 데, 다 음 날 과 1 2 일 에 도 하 라 다 와 경 기 도 보 안 과 장 다 나 카 ( 田 中 鳳 德 ) 등 이 찾 아 와 같 은 요 구 를 하 였 다. 8 월 1 3 일 에 는 경 기 도 지 사 이 쿠 다 ( 生 田 淸 三 郞 )와 경 기 도 경 찰 부 장 오 카 ( 岡 久 雄 )가 송 진 우 의 집 을 방 문 하 여 협 력 을 요 청 했 으 며 송 진 우 는 계 속 거 절 하 였 다. 오 카 경 찰 부 장 은 협 박 하 면 서 도 총 독 부 가 가 진 권 력 의 4 분 의 3 을 밀 어 주 고 또 신 문, 라 디 오, 교 통 기 관, 헌 병, 경 찰, 검 사 국 ( 檢 事 局 ) 등 을 다 밀 어 주 겠 다 고 하 며 일 본 인 의 거 류 와 사 유 재 산 의 보 호 에 협 력 해 주 기 를 요 구 하 였 다. 그 리 고 만 약 승 낙 한 다 면 지 금 당 장 에 정 무 총 감 엔 도 에 게 함 께 가 서 결 정 을 짓 자 고 권 유 하 였 다. 그 러 나 송 진 우 는 여 전 히 거 부 하 였 다. 8 월 1 4 일 에 는 김 준 연 자 신 에 게 도 조 선 총 독 부 로 부 터 협 력 요 청 이 있 었 지 만 거 부 했 는 데, 8 월 1 5 일 아 침 여 운 형 은 엔 도 정 무 총 감 에 게 가 서 협 력 을 약 속 하 고 일 제 의 괴 뢰 정 권 으 로 서 건 준 을 조 직 했 다. 이와 같은 김준연의 주장을 근거로 한국민주당 (한민당) 관계자는 건준 을 일제 주구단체라고 비난했다. 송진우 선교섭설 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정치공작이 개재하고 있었다. 8월 10일 조선총 독부는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에 의해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무조건항복)을 수락할 것이라 는 정보를 독자적으로 입수해 패전 후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조선 총독부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재류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 인과 일본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유혈사태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수뇌부는 권력의 붕 괴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사태의 두려움을 누구보다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정무총감

27 엔도는 1910년 조선총독부 문관관료로서 조선에 부임하여 1919년 8월까지 서기관, 비서관을 역임했던 인물로 3.1독립운동의 유혈참사를 잘 알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패전이란 상황에서 가장 긴급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치안확보 문제였 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도 종래와 같이 헌병이나 경찰을 사용한 억압적이며 강경한 치안확보 정책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켜 유혈의 불상사를 발생시킬 위험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 선총독부는 조선인지도자가 전면에 나서서 조선민중을 설득하는 방법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하였고, 그 적임자로 선정된 조선인지도자는 여운형, 안재홍( 安 在 鴻 ), 송진우 등 3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공작대상으로 선정된 3명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복수의 루트를 통해 동시 접근해 갔으며, 그런 정치공작을 통해 조직하려고 했던 것은 총독부에 협력하여 치안을 확보해 주는 어용조 직으로서 치안유지협력회( 治 安 維 持 協 力 會 ) 였다. 물론 이 정치공작 과정에서는 조선인에게 부분적인 권력이양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기타 여러 가지 지원 약속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협 력을 얻어내기 위해 자금의 원조나 교통수단의 제공, 총독부 관련기관 및 기타 시설의 이용 등 상당 한 편의가 이들 3명에게 제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공작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송진우가 협력을 거부한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협력 의사를 밝힌 여 운형과 안재홍이 총독부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그것을 역이용하여 건준 을 조직했기 때문이었다. 송진우 등 보수세력은 일제가 망하고 조선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8.15 상황 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이 최선책 이라고 반복해서 주장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운형은 송진우의 인식과는 정반대의 논리로 건국동맹을 통해 8.15 상황 을 준비하고 있었다. 죽 여운형은 송 진우가 말하는 망해 가는 놈의 손에서 자주적으로 총독부 권력을 접수하여 그것을 이용해 조선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송진우는 여운형 등의 협력요청을 거부하고 건준 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는 괴뢰 정권이라고 비난함으로써 민족내부에 갈등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건준 비판이라는 측 면에서 조선총독부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는 모순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것은 8.15 상황 을 자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송진우로서는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준 에 들어가 협력하고 싶지 않다 는 개인적 자존심과 아집의 결과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건준 이 활동을 개시하고 해방을 축하하는 조선민중의 시가행진이나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기업 등 중요기관이 접수되자, 8월 16일 조선총독부는 재류일본인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사태를 해명 했다. 당시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장으로서 그 자리에 불려왔던 호즈미( 穗 積 眞 六 郞 )의 증언에 의하면, 정무총감은 총독부가 표면에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가는 것은 오히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 기 때문에, 여운형에 대해서 치안에 협력하도록 의뢰했다. 그런데 여운형 일파는 마치 정권을 이양받 은 것같이 발표해 가정부( 假 政 府 ) 건설까지 연구하고 있는 모양인데, 결코 그런 넓은 범위의 위임을 한 것은 아니다 고 변명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은 사태가 된 것은 여운형이 자신들과의 약속을 깨고 건준 이라는 정권기관을 조직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건준 은 어디까지나 치안유지를 위한 조 선총독부의 협력단체임을 강조하면서 군부와 협력하여 건준 의 활동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먼저 조선군관구사령부는 8월 16일 관내 일반민중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해 일반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생업에 종사하고,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기를 요한다 고 하면서, 민심을 교란시키 고 또는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일이 있으면 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고 경고했다. 그리고

28 월 17일 경기도경찰부장 오카는 시위운동 등 일체의 직접행동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만약 그 와 같은 일이 있으면 경찰은 군과 협력하여 엄중한 처치를 취할 것이다 고 협박했다. 8월 18일에는 조선군관구사령부 나가야( 長 屋 尙 作 ) 보도부장은 방송을 통하여 조선군은 엄연히 건재 하고 있기 때문 에 만일 치안을 문란케 하려는 비적적( 匪 賊 的 ) 행위를 하는 자 가 있다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 고 단호히 무력을 행사 할 것이라고 재차 경고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처럼 여운형의 배신행위 를 비난하고 협박하면서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것은 적극적인 현상유지 정책이었다. 현재의 정세는 일본이 미영중소 4개국과의 전투행위를 일시 정지한 것 에 불과하며, 조선의 사태는 금후 일본과 공동선언의 상대국과의 사이에 이루어질 합의에 의해서 비로소 통치권의 수수( 授 受 )가 이루어지는 것 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조선에 있어서의 제국의 통 치권은 엄연히 존재하며 그 사이 총독부에 통치의 모든 책임 이 있다는 상황인식이 그 배후에 있었 다. 즉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패망한 상황에서도 조선에 있어서의 총독부 통치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 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경고나 협박에도 불구하고 건준 활동은 약화되기는커녕 점점 더 강화 되어 갔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군부와 협의를 계속한 결과, 정무총감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여운형 등 에 대한 정치공작이 군부와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이루어진 것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상황변화에 적 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정치운동단속요령을 작성해, 1 현저히 저하된 경찰력을 보강하여 종 래와 같이 조선총독부 스스로가 치안을 확보할 것, 2 건준 에 의해 접수된 중요시설 및 공공기관을 탈환할 것, 3 이 과정에서 발생될 조선인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을 모색할 것 등이었다. 왜냐하면 경찰기관의 7할 이상이 조선인이었는데 그들은 8.15 이후 거의 전원이 도망한 형태로 경찰기능은 완전히 마비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취한 방법은 군대에서 병사를 제대시켜 그들을 경찰관으로 임명함으로써 경찰력을 보강하는 방법이었다. 군인의 경찰관화 정책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군인을 경찰관으로 전속시킴으로써 경찰력을 확보한 조선총독부는 즉각 건준 에 의해 점거되 어 있었던 주요기관의 탈환을 개시했다. 8월 20일 경성사관구( 京 城 師 管 區 ) 사령관 코모다( 菰 田 康 一 ) 중 장이 경성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보병 약 2개 연대병력이 경비와 식량확보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경찰서, 관청, 신문사 등 조선인에게 접수되어 있었던 주요기관을 무력으로 탈환해 나갔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과 헌병대장은 종로경찰서에 안재홍 등을 소집해 건준 간판을 내리고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8월 21일에는 조선총독부 농상국장이 담화를 통하여 식량 및 기타 생활필수물자의 배 급, 그리고 조선식량영단 및 조선미곡창고의 운영은 종래와 같이 행한다고 강조하면서 유언비어에 동 요되지 말도록 요청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경성중앙방송국을 탈환한 후, 8월 23일 방송을 통하여 접 수 등과 같은 사태전개는 정전상태( 停 戰 狀 態 ) 당초에 있어서의 잘못된 판단 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법접수, 약탈적 행위 등 불상사태에 대해서는 엄중히 단속하고 종래 상태로 복귀 시키겠다는 방송 을 행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적극적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면서 본국정부로부터의 지시를 요청했다. 그 결과 8월 24일 일본정부로부터 최초의 기본지령이 조선총독부에 도착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에 있어서 우리 주권의 이전( 移 轉 ) 시기에 관한 건 : 조선에 관한 주권은 독립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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