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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례 / Contents 입교 및 운영 안내 1 교육일정 3 답사일정 5 서울 한양도성과 문_홍순민 7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_고연희 21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백제 금동용봉향로_최응천 29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_장남원 41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_서윤경 49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_홍대한 59 김홍도의 풍속화첩_조인수 95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_임영애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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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입교 및 운영 안내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입교 및 운영 안내 운영개요 연수과정명 :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주 제 : 걸작의 탄생 기 간 : 2012년 8월 5일(월)~9일(금) (5일간, 10:00~17:00) 연수 학점 : 직무연수 2학점(30시간) 수강 인원 : 인천관내 초 중등교원 80명 장 소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석남홀(대강당) 강의 구성 : 30시간(이론강좌 18시간, 현장답사 및 실습 12시간) 운영방침 수료자격 : 총 연수시간의 90%(27시간) 이상 출석자에 한하여 수료증을 수여 하고, 그 미만의 경우와 1일이라도 결석하는 연수자는 수료증 수여 불가(예외 없음) 이수결과는 소속 교육청 및 학교에 통보 매일 3회(입실시, 점심시간 후, 퇴실시) 자필 출결 확인 입교안내 연수대상자는 8월 5일(월) 09:20까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1층 석남홀 앞 데스크 접수 (09:30~10:00 개강식 및 오리엔테이션) 준비물 : 필기도구(강의교재 제공) 기타사항 접수시 배부해드린 패찰은 항시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중에는 반드시 휴대폰 전원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대강당은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취식은 로비 휴게의자 및 야외공간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중식은 별도로 제공되지 않습니다.(도시락 혹은 박물관 주변 식당 이용) 데스크에 비치된 주소록의 인적사항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문의처 : 전시교육과 교원연수 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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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육일정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교육일정 주 제 : 걸작의 탄생 기 간 : 2013년 8월 5일 ~ 8월 9일 장 소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석남홀 일자 시간 주제 강사 비고 09:30~10:00 개강식 - 10:00~12:00 서울 한양도성과 문 홍순민(명지대학교) 이론강의 8.5 (월) 12:00~13:00 점심식사 8.6 (화) 8.7 (수) 8.8 (목) 8.9 (금) 13:00~15:00 15:00~17:00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백제 금동용봉향로- 고연희(이화여자대학교) 이론강의 최응천(동국대학교) 이론강의 10:00~12:00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장남원(이화여자대학교) 이론강의 12:00~13:00 점심식사 13:00~15:00 15:00~17:00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서윤경(한국미술연구소) 이론강의 홍대한(숙명여자대학교) 이론강의 10:00~12:00 선사인의 타임캡슐, 바위그림 장석호(동북아역사재단) 이론강의 12:00~13:00 점심식사 13:00~15:00 김홍도의 풍속화첩 조인수(한국예술종합학교) 이론강의 15:00~17:00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임영애(경주대학교) 이론강의 09:00~18:00 현장답사 담당자 현장실습 10:00~12:00 전시실 교육 12:00~13:00 점심식사 유물해설사 (박물관 자원봉사자) 13:00~15:00 체험실습 체험교사 (박물관 자원봉사자) 15:00~15:30 종강식 - 각 강의는 (50분 수업, 10분 휴식) 2회로 구성됩니다. 현장실습 현장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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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답사일정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답사일정 답사일시 : 2013년 8월 8일(목), 09:00~17:30 집결장소 : 문학경기장 동문(문학경기장역 2번 출구) 집결시간 : 09:00 답사일정(A차) 09:00 출결 확인 및 패찰 배부 후 승차 09:10~10:30 이동 10:30~12:30 리움 12:30~13:00 이동 13:00~14:00 점심식사 14:00~16:00 국립중앙박물관 16:00 출결 확인 후 이동 16:00~17:30 해산(문학경기장) 세부일정은 교통사정 등으로 인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 비 물 : 편한 복장, 모자, 필기구, 간식 및 물, 개인상비약 등 차 량 : A차(01~40), B차(41~80) 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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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 한양도성과 문 홍 순 민 (명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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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울 한양도성과 문 9 서울 한양도성과 문 목 차 1. 서울 도성의 위상과 변천 2. 도성문의 구성과 의식체계 3. 도성의 축조와 변천 1. 서울 도성의 위상과 변천 도성( 都 城 )은 서울이다. 서울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였다. 도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가리키지만, 그 뜻을 넘어 서울 자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 서울은 좁게는 도성 안을 가리켰다. 하지만 도성 외부로 약 10리에 이르는 지역은 성저십리( 城 底 十 里 )라 하여 서울의 외곽을 이루는 구역이었다. 북으로는 대체로 북 한산 자락, 동으로는 중량천, 남과 서로는 한강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도성은 좁은 범위의 수도이자 왕도인 서울을 지키는 군사 시설이었다. 하지만 도 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적은 별로 없었다.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당시에도 도성 이 군사적 기능을 한 바는 별로 없다. 도성은 평상시에는 성안 분 들과 성밖 것 들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밤에는 통행을 금지시키는 시설이 되기도 하였다. 도성은 서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태조 3년 11월 도평의사사에서 태조에게 올린 글에 도성의 개념과 위상이 잘 드 러나 있다. 종묘는 조종( 祖 宗 )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나라의 존 엄을 보이고 정령( 政 令 )을 내는 것이며, 성곽( 城 郭 )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명( 天 命 )을 받아 국통( 國 統 )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 양으로 서울을 정하였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입니다. ( 都 評 議 使 司 狀 申 寢 廟 所 以 奉 祖 宗 而 崇 孝 敬 宮 闕 所 以 示 尊 嚴 而 出 政 令

1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城 郭 所 以 嚴 內 外 而 固 邦 國 此 皆 有 國 家 者 所 當 先 也 恭 惟 殿 下 受 命 啓 統 俯 從 輿 望 以 定 都 于 漢 陽 萬 世 無 疆 之 業 實 基 於 此 ) 태조실록 권 6, 태조 3년 11월 3일(기해) 도성은 주산( 主 山 )인 북쪽의 백악산( 白 岳 山 )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좌청룡 ( 左 靑 龍 )인 동쪽의 타락산( 駝 酪 山 ) 안산( 案 山 )인 남쪽의 목멱산( 木 覓 山 ) 우백호( 右 白 虎 )인 서쪽의 인왕산( 仁 王 山 )으로 이어지는 내사산( 內 四 山 )의 능선을 따라 쌓여 있었고, 그 총 연장은 18km쯤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능선의 최고점을 따라 쌓은 것이 아니라 바깥쪽 경사면으로 조금 내려 쌓았다. 방어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성은 석성이다. 맨 밑부분에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돌로 성벽을 쌓고 성벽 위에 추가로 여장( 女 牆, 성가퀴)을 만들었다. 성돌은 쌓은 시기에 따라 돌의 재질과 크기, 다듬은 모양이 서로 다르다. 맨 처음 태조 연간에 쌓은 돌들은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은 채 쌓아서 각 돌의 크기가 크고 거칠다. 세종 때 성을 고치면서 새로 쌓은 돌들은 크기가 한 변이 약 15~20cm 정 도로 작으며, 모서리를 둥글게 궁굴렸다. 세종 때 돌들은 대체로 검게 변색이 되었다. 따라서 성벽 전체의 느낌이 고색이 나면서 부드럽다. 숙종 연간에 도성을 크게 고쳤는데, 이 때 쌓은 돌들은 네 명이 들어야 할 정도로 크며, 면을 평면으로, 변을 직선으로 다듬었다. 돌들을 수평으로 선을 맞추지 않고 높고 낮게 쌓으면서 모서리를 깎아서 귀를 맞추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규격 적이다. 숙종대 이후에 쌓은 부분은 대체로 숙종대 것과 비슷하다. 태조 연간 도성을 설계하면서 백악산 정상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600척( 尺 ) 단위로 구역을 설정하여, 각 구역마다 천자문으로 번호, 곧 자호( 字 號 )를 매겼다. 구역은 모두 97로서 천자문의 첫 글자 천( 天 )에서 시작하여 조( 弔 )에서 끝난다. 각 시기에 성을 쌓을 때 전국에서 민정( 民 丁 )을 징발하였는데, 군현 단위로 쌓을 부분을 지정하였고, 성을 쌓은 다음에는 그 군현이 쌓은 구역이 시작하는 곳에 군 현의 명칭을 새겨 놓았다. 이는 그 부분이 무너지면 그 군현에 책임을 묻기 위한 조처였다. 태조대의 도별 담당 구역은 다음과 같다. 동북면(함흥 이남) : 天 ~ 日 (9 字 ) 강원도 : 月 ~ 寒 (8자) 경상도 : 來 ~ 珍 (41자) 전라도 : 李 ~ 龍 (15자) 서북면(안주 이남) : 師 ~ 弔 (24자)

16 서울 한양도성과 문 11 세종 4년에 도성을 다시 고쳐 지을 때도 태조대와 같이 天 ~ 弔 97자로 구분하 였다. 도별, 군현별 담당 구역을 정하여 주었고, 그 담당 구역을 표기한 각자가 남아 있다. 숙종 연간을 전후하여 쌓은 부분에는 중국 연호, 간지, 수축에 관계한 인명을 새겼다. 2. 도성문의 구성과 의식체계 도성에는 네 대문과 네 소문, 그리고 이름없는 암문( 暗 門 )들이 있어 안팎을 통하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네 대문은 남쪽의 숭례문( 崇 5 門 ), 서쪽의 돈의문( 敦 義 門 ), 북 쪽의 숙정문( 肅 靖 門 ), 동쪽의 흥인문( 興 仁 門 )이며, 네 소문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의 소의문( 昭 義 門 )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대문을 건너뛰어서 창의문( 彰 義 門 ), 혜 화문( 惠 化 門 ), 광희문( 光 熙 門 )이다. 암문은 큰 도로가 이어지지 않는 산지에 적병의 눈에 띄지 않고 드나들기 위해서 만든 문들이다. [소의문] 소의문( 昭 義 門 )은 남대문(숭례문)과 서대문(돈의문) 사이에 있던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의문은 석축에 홍예문이 하나 나 있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가 있는 일반적인 도 성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한강의 용산, 마포, 서강 등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소의 문은 서쪽으로 나가는 장례 행렬이 나가는 문이었고, 문 밖 가까운 위치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소의문 안쪽 정동 일대에 서양 외교 공관이 들어 서면서 서양인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점차 문 바깥쪽으로 확장되었다. [돈의문] 돈의문( 敦 義 門 )은 도성의 서대문이다. 도성에서 한강변의 마포, 서강, 양화진 등의 포구와 무악재를 넘어 개성 평양 의주로 이어지는 서북로로 나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1899년 5월 전차가 개통되기 이전의 돈의문은 육축과 문루 그리고 좌우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다. 단, 성벽 위의 여장은 모서리가 일부 마멸되어 있다. 문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숭례문에 비해서 좁은 중로( 中 路 ) 규모인데,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으나 대체로 문 좌우의 초가 건물들이 침범하여 좁고 다소 무질서한 모습을 하고 있다. 1899년 5월 청량리에서 경교를 잇는 첫 전차 노선이 돈의문을 통과하였다. 그에

1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따라 돈의문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 좌우변의 가가들이 철거되어 도로는 넓어지고 그 양쪽 변에 기와집들이 질서 있게 드러났다. [창의문] 창의문( 彰 義 門 )은 혹은 자하문( 紫 霞 門 )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의 서북 소문이다. 창의문을 나서면 세검정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가거나, 홍지문( 弘 智 門 )을 나서 모래 내를 따라 서북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연결된다. 창의문 밖은 풍광이 좋은 곳으로서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혜화문] 혜화문( 惠 化 門 )은 도성의 동북방에 있는 소문으로서 강원도와 함경도로 나가는 길이 열리는 문이다. 내륙으로 통하는 문이었던 만큼 강으로 통하는 서쪽의 문들에 비해서 통행량은 적었다. 전차가 닿지도 않아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흥인문] 흥인문( 興 仁 門 )은 도성의 동대문이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문밖에 반원형으로 둘 러싼 옹성( 甕 城 )이 있고,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2층으로 되어 있어 개성 있는 외관을 갖추고 있다. 동쪽으로 나가는 대로의 출발점이며 성안으로는 운종가가 이어져 도성 가로망의 동서 중심축을 이룬다. 1899년 전차 개통시 전차 선로가 문을 통과하게 되었으며, 흥인문 안 바로 남쪽에 전기 발전소와 전차 차고가 있어 새로운 문물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광희문] 광희문( 光 熙 門 )은 도성의 동남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두모포 등 동남쪽 한강변에 포구가 발달하면서 통행량이 많아지고, 이름도 한강과 통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수 구문( 水 口 門 )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문으로 장례행렬이 나가고, 늘 시신이 쌓여 있어 시구문( 屍 口 門 )이라는 명칭은 일본인들이 악의적으로 강조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을 검색하면 屍 口 門 은 나오지 않는다. [숭례문]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은 여러 문들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정문이다. 그 외형도 가장 크고 화려하였다. 흥인문과 숭례문만 문루의 지붕이 중층이어서 다른 문들과 쉽게 구별된다. 또 숭례문은 편액의 글씨가 직서( 直 書 ) - 위에서 아래로 쓰여져 있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18 서울 한양도성과 문 13 <숭례문의 위치와 기능>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들어오면 약간 굽은 길이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청계천의 광통교를 지나 운종가와 만난다. 이 길은 운종가와 같은 폭으로서 대로인데 별도의 도로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길은 도성을 들어와 서울 중심가로 향하는 대표적인 길이다. 숭례문은 도성의 남대문이지만 그 위치가 정남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까 닭은 우선 정남에 목멱산이 있어서 비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쪽이 아닌 서 쪽으로 비킨 까닭은 서쪽 한강변에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노량진 등 바닷배가 정박하는 포구가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포구에 집결하는 물산을 도성 안으로 유통 하는 데 서쪽의 물동량이 많기 때문에 숭례문, 소의문, 돈의문이 가까운 거리에 밀 집하게 되었다. <숭례문의 훼손과 변질> 숭례문에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진 때는 1907년 고종을 강제로 황제위에서 퇴위 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올려 일제가 마음대로 조종하기 시작한 융희( 隆 熙 ) 연간이다. 1907년 10월 통감( 統 監 )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는 후일 대정( 大 正 ) 천황이 되는 당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 嘉 仁 ]를 초청한다. 다음 사진은 요시히토와 그를 맞이한 영친왕 그리고 기라성 같은 일제 관료들과 그들에 빌붙은 친일파 관료들이 경회루 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가운데 작은 아이가 영친왕, 오른쪽의 카이젤 수염을 기른 청년이 요시히토, 보기에 앞줄 맨 오른편에 보이는 흰 수염 기른 자가 이토 히로부미, 요시히토의 오른쪽에 있는 이마 벗겨진 자가 이완용이다.

1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요시히토가 더럽고 누추한 숭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례문의 좌우 도성 가운데 서쪽 부분을 헐어 도로를 내었고, 이듬해에는 동쪽 부분도 헐어 내었다. 이로써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는 천덕 꾸러기가 되었다.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헐려 없어지고 주위는 일본식 축대로 마감 되어 문의 지면이 주위 도로면보다 높아졌다. 문 주위로 넓은 길이 나고 전차 선로는 홍예문으로 통과하지 않고 주위 도로로 이동하였다.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헐려 없어지고 주위는 일본식 축대로 마감되어 문의 지면이 주위 도로면보다 높아졌다. 문 주위로 넓은 길이 나고 전차 선로는 홍예문으로 통 과하지 않고 주위 도로로 이동하였다. 사람들은 홍예문으로 통과하기도 하고 주위 도로로 통과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 것은 1907년 10월 일본 가인( 嘉 仁 ) 황태자의 방한을 기화로 숭례문 좌우의 도성을 헐어 없앴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을 식민지 도시로 만들어가는 일제의 본격적인 개조 사업의 출발이었다. 1950년에서 53년까지 서울에 폭탄과 포탄 총알이 빗발치는 그 혹독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숭례문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자기를 지켰다. 1956년에는 전쟁으로 망가진 곳을 보수하고, 1962년에는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새로운 부재를 끼워넣은 중수 공사를 하였다. 이렇듯 숭례문은 태조대 창건 이래 늘 같은 모습을 유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체가 모두, 때로는 부분 부분 고치고 바뀌어 왔다. 근대 일제 식민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는 좌우 성벽이 잘려나가 문 아닌 문이 되어 버렸고, 그 뒤로 현대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는 더욱 초라해져 보이고 골병이 들어갔다. 그렇게 길 가운데 홀로 남아 있는 숭례문을 인도와 연결하여 주변에 공원을 조성한 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숭례문을 개방한 때가 2005년 5월 27일이었다. <숭례문의 죽음과 부활>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던 숭례문이 불탔다. 서기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경 토지 보상을 적게 받아 불만이 쌓였다는 노인이 불을 질렀다. 처음에는 연기가 나고 소방차들이 오고 물을 쏘고 하니 저러다가 불길을 잡겠지 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물길은 애먼 기와 지붕에만 쏟아질 뿐 정작 불길이 번지는 내부로는 가 닿지 못한 채 애간장만 태웠다. 불길은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봐라 쏟아붓는 물길을 비웃으며 마 음껏 기승을 부리다가 11일 새벽 2시쯤 불구름 한 번 크게 일구더니 제풀에 잦아 들었다. 여러 매체들은 처음에는 사다리로 2층 누각에 올라가 시너를 뿌리로 일회용 라이 터로 불을 붙였다 고 전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참 모호하고 부정확한 표현

20 서울 한양도성과 문 15 이다. 우선, 누각( 樓 閣 ) 이라는 표현부터가 문제가 있다. 전통 건축에서 2층으로 되어 있을 경우, 1층은 각이라고 하고 2층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 누라고 한다. 누각 이라면 그 1층과 2층을 합쳐서 부르는 표현이 된다. 2층 누각 이라면 1층은 다른 것이고 2층이 누각인데 그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누각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2층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숭례문은 문이다. 도성 성벽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낸 것이다. 그 홍예문 주 위의 성벽은 안팎이 모두 장대석 석축으로 쌓여 있고, 좀 먼 부분은 네 귀가 궁글 려진, 다시 말해서 동글게 모가 깎인 사고석으로 쌓여 있다. 좀 동그란 사고석은 세종 때 쌓은 것이다. 홍예문 주위의 석축 부분은 육축( 陸 築 )이라고 한다. 그 육축 위에 목조 건축물을 지었으므로 이를 문루( 門 樓 )라고 하는 것이다. 문루가 없다고 도성의 문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석축에 나 있는 홍예문에 문짝이 달려 있어 열고 닫기 때문이다. 서소문인 소의문이나 동소문인 혜화문 등은 조선시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문루가 없었다. 그러나 문루가 있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은 것은 당연하다. 우선 기능상 문루는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 將 臺 )나 회의소, 그리고 군졸들의 파수 초소로 쓰인다. 또 그러한 실제적 군사적 기능 이외에 의장 기능도 갖는다.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이름이 붙은 여덟 문 가운데 문루가 2층으로 된 것은 숭 례문과 흥인문 둘 뿐이고 다른 문들은 문루가 단층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불에 탄 것은 바로 그 문루이고, 발화 지점은 문루 가운데 2층이라는 것이다. <숭례문의 가치> 숭례문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 있는가? 나는 숭례문이 거기 오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데 가장 큰 가치가 있다고 본다. 조선 태조대 이후 온갖 풍파 곡절을 다 겪으면서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도성의 대문 가운데서도 제1의 문 이었다. 주위에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숭례문은 작아 보이고, 낡아 보 이게 되었다. 더 이상 서울 장안에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오그라들었다. 그렇지만 숭례문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서울의 얼굴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되고, 돌아왔을 때 반가움의 눈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표상이었다. 그렇게 우리 마음 저 깊은 데 자리 잡고 있는 고향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2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3. 도성의 축조와 변천 도성을 축조하는 공사는 1396(태조 5)년 1월 9일 개기( 開 基 ),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착공하였다. 성문 공사는 별개의 공사가 아니라 자연히 도성 공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므로 숭례문의 착공일도 이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9월 24일 도성을 쌓는 일이 끝나 동원되었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이 무렵 도성의 여덟 문에 월단( 月 團 ), 곧 육축과 누합( 樓 閤 ), 다시 말해서 문루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최종 완공은 아니고 기본 골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문의 이름도 지어졌는데, 숭례문은 정남에 있는 문으로서, 속칭 남대문이라고 하였다. 태조실록 1398(태조 7)년 2월 8일조에 도성의 남문, 곧 숭례문이 완공되어 태 조가 가서 보았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숭례문이 최종 완공되어 오늘날로 치자면 임금의 참석하에 준공식을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시 공사는 일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 이후 봄까지 농한기에만 하는 것이므로 두 해 겨울에 걸쳐 이루 어진 것이다. 4월 26일 정도전( 鄭 道 傳 )이 서울의 위치, 도성 및 궁궐, 관아, 저자 주택, 그리고 사방의 풍광 등 여덟 경치를 읊은 팔경시( 八 景 詩 )를 지어 바쳤다. 정 도전은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경복궁 주요 전각의 이름도 지었다. 이로 보건대 인의 예지신( 仁 義 禮 智 信 ) 유교의 오상( 五 常 ) 개념을 적용한,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 문들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조실록 권 8, 태조 4 年 (1395) 윤9월 10일( 辛 未 ) 임금이 도성( 都 城 )의 터를 순시하여 보았다. 上 巡 觀 都 城 基 태조실록 권 8, 태조 4년(1395) 윤9월 13일( 甲 戌 ) 처음으로 도성조축도감( 都 城 造 築 都 監 )을 설치하여 판사, 부판사, 사( 使 ), 부사( 副 使 ), 판관, 녹사 등을 두었다.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甲 戌 / 始 立 都 城 造 築 都 監 置 判 事 副 判 事 使 副 使 判 官 錄 事 命 判 三 司 事 鄭 道 傳 定 城 基 태조실록 권 9, 태조 5년(1396) 1월 9일( 戊 辰 ) 경상, 전라, 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安 州 )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 咸 州 ) 이남의 민정 ( 民 丁 )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터를 정한 데다가 자호( 字 號 )를 나누어 정하였다. 백악( 白 岳 )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천( 天 ) 자부터 붙

22 서울 한양도성과 문 17 여서 백악의 서쪽에서 마무리하여 조( 弔 ) 자까지 붙였다. 서쪽 산 석령( 石 嶺 )까지 아울러서 땅의 척수가 모두 5만 9천 5백 척( 尺 )이다. 6백 척마다 한 자호( 字 號 )를 붙였으니 모두 97자( 字 )이다. 한 자호를 6호( 號 )로 나누고 두 자호마다 역사를 감독 할 판사( 判 事 ), 부판사( 副 判 事 ) 각 1원( 員 )씩, 사( 使 ) 부사( 副 使 ) 판관( 判 官 ) 중에서 12원( 員 )을 두었다. 각 도 주군( 州 郡 )의 민호( 民 戶 )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 天 ) 자로부터 일( 日 ) 자까지는 동북면, 월( 月 ) 자에서 한( 寒 ) 자까지는 강원도, 내( 來 ) 자에서 진( 珍 ) 자까지는 경상도, 이( 李 ) 에서 용( 龍 ) 자까지는 전라도, 사( 師 ) 자에서 조( 弔 ) 자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심히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하였다. 戊 辰 / 徵 慶 尙 全 羅 江 原 道 及 西 北 面 安 州 以 南 東 北 面 咸 州 以 南 民 丁 十 一 萬 八 千 七 十 有 奇 始 築 都 城 旣 度 城 基 分 定 字 號 始 自 白 岳 之 東 起 天 字 終 于 白 岳 之 西 止 弔 字 幷 西 山 石 嶺 得 地 凡 五 萬 九 千 五 百 尺 每 六 百 尺 爲 一 字 號 凡 九 十 七 字 每 一 字 分 六 號 每 二 字 置 監 役 判 事 副 判 事 各 一 員 使 副 使 判 官 中 十 二 員 計 各 道 州 郡 民 戶 多 少 自 天 字 止 日 字 東 北 面 月 字 止 寒 字 江 原 道 來 字 止 珍 字 慶 尙 道 李 字 止 龍 字 全 羅 道 師 字 止 弔 字 西 北 面 督 役 者 不 分 日 夜 上 以 寒 甚 禁 夜 役 참고 : 천자문 天 地 玄 黃 宇 宙 洪 荒 日 月 盈 仄 辰 宿 列 張 寒 來 暑 往 秋 收 冬 藏 閏 餘 成 歲 律 呂 調 陽 雲 騰 致 雨 露 結 爲 霜 金 生 麗 水 玉 出 崑 岡 劍 號 巨 闕 珠 稱 夜 光 果 珍 李 柰 菜 重 芥 薑 海 鹹 河 淡 鱗 潛 羽 翔 龍 師 火 帝 鳥 官 人 皇 始 制 文 字 乃 服 衣 裳 推 位 讓 國 有 虞 陶 唐 弔 民 伐 罪 태조실록 권 9, 태조 5년(1396) 1월 9일( 戊 辰 ) 도성( 都 城 )을 개기( 開 基 )하였으므로 백악( 白 岳 )과 5방( 方 )의 신( 神 )에게 치제( 致 祭 ) 하였다. 以 都 城 開 基, 致 祭 白 岳 及 五 方 之 神 태조실록 권 9, 태조 5년(1396) 2월 28일( 丙 辰 ) 성 쌓는 역부들을 돌려보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 石 城 )을 쌓았는데, 높 이가 15척이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 土 城 )을 쌓 았는데, 아래의 폭이 24척, 위의 폭이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 었다. 수구( 水 口 )에는 구름다리[ 雲 梯 ]를 쌓고 그 양쪽에다 석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6척, 길이가 1천 50척이다. 동대문( 東 大 門 )은 그 주위 지세가 우묵하고 낮으므로

2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린 다음에 성을 쌓았으므로, 그 공력이 다른 곳보다 배나 들었다. 丙 辰 / 放 築 城 役 城 基 高 嶮 處 築 石 城 高 十 五 尺 長 一 萬 九 千 二 百 尺 平 山 築 土 城 下 廣 二 十 四 尺 上 廣 十 八 尺 高 二 十 五 尺 長 四 萬 三 百 尺 水 口 築 雲 梯 兩 傍 築 石 城 高 十 六 尺 長 一 千 五 十 尺 東 大 門 以 其 地 洿 下 排 橛 疊 石 而 後 城 之 故 其 功 倍 他 태조실록 권 10, 태조 5년(1396) 9월 24일( 己 卯 ) 성 쌓는 역사가 끝났다. 정부( 丁 )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 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 石 城 )으로 쌓았다. 간간( 間 間 )이 토성( 土 城 )의 운제 ( 雲 梯 )가 빗물의 충격을 받아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았다. 또 운제( 雲 梯 ) 한 곳을 더 두어서 수세( 水 勢 )를 나누게 하였다. 석성( 石 城 )으로 낮은 곳을 덧쌓았다. 또 각문( 各 門 )의 월단 누합( 月 團 樓 閤 )을 지었다. 정북( 正 北 )은 숙청문( 肅 淸 門 )이다. 동북( 東 北 )은 홍화문( 弘 化 門 )이니 속칭 동소문( 東 小 門 )이라 한다. 정동( 正 東 )은 흥인문 ( 興 仁 門 )이니 속칭 동대문( 東 大 門 )이라 한다. 동남( 東 南 )은 광희문( 光 熙 門 )이니 속칭 수구문( 水 口 門 )이라 한다. 정남( 正 南 )은 숭례문( 崇 5 門 )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한다. 소북( 小 北 )은 소덕문( 昭 德 門 )이니, 속칭 서소문( 西 小 門 )이라 한다. 정서( 正 西 )는 돈의문 ( 敦 義 門 )이다. 서북( 西 北 )은 창의문( 彰 義 門 )이라 하였다. 築 城 役 訖 放 丁 其 春 節 所 築 有 因 水 湧 頹 圯 者 以 石 城 築 之 間 以 土 城 雲 梯 爲 雨 水 所 衝 以 致 圯 毁 處 復 築 之 又 置 雲 梯 一 所 以 分 水 勢 石 城 有 低 下 者 加 築 之 又 作 各 門 月 團 樓 閤 正 北 曰 肅 淸 門 東 北 曰 弘 化 門 俗 稱 東 小 門 正 東 曰 興 仁 門 俗 稱 東 大 門 東 南 曰 光 熙 門 俗 稱 水 口 門 正 南 曰 崇 5 門 俗 稱 南 大 門 小 北 曰 昭 德 門 俗 稱 西 小 門 正 西 曰 敦 義 門 西 北 曰 彰 義 門 태조실록 권 13, 태조 7년(1398) 2월 8일( 乙 酉 ) 도성( 都 城 )의 남문( 南 門 )이 이루어졌으므로, 임금이 가서 보았다. 乙 酉 / 都 城 南 門 成 上 往 觀 之 1398(태조 7)년 2월 8일에 도성의 남문, 곧 숭례문이 완공되어 태조가 가서 보 았다는 것은 육축 위의 문루까지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1422(세종 4)년에는 도성 가운데 토성( 土 城 )으로 된 부분을 석성( 石 城 )으로 바꾸는 공사를 했다. 이때는 숭례문은 태조대 모습 그대로 있었다. 1447(세종 29)년 8월, 당시 좌참찬

24 서울 한양도성과 문 19 정분( 鄭 苯 )이 담당하여 도성의 숭례문 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낮은 지 대를 돋우고 홍예문을 내고 문루를 건축하는 큰 공사였다. 이 공사는 1448(세종 30)년 3월 17일 상량( 上 樑 )을 하고, 5월에 준공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말년의 공 사로 숭례문은 태조대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보수 정도가 아니라 실제 로는 중건( 重 建 )이었다. 세종실록 권 117, 세종 29년(1447) 8월 30일(기축) 숭례문( 崇 5 門 )을 새로 짓는데 좌참찬( 左 參 贊 ) 정분( 鄭 苯 ) 등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분( 苯 )이 오로지 토목( 土 木 )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 ( 營 繕 )하는 일이 서로 이어지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 新 作 崇 5 門 命 左 參 贊 鄭 苯 等 監 督 其 役 苯 專 以 土 木 之 事 爲 己 任 營 繕 相 繼, 先 意 承 迎, 財 力 匱 竭 세종실록 1447년(세종 29) 8월 30일에 숭례문을 새로 짓는 일을 당시 좌참찬인 정분( 鄭 苯 )에게 맡겼다는 기사로 보아서 이 무렵에 숭례문을 새로 짓는 공사를 준비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권 118, 세종 29년(1447) 11월 12일(신축)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때가 바야흐로 추워서 얼음이 얼으니, 숭례문( 崇 5 門 )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정지하고자 하나, 다만 두렵건대 개춘( 開 春 )이 되면 질역( 疾 疫 )이 성행할 것이므로 감히 못한다. 장차 정부 ( 政 )에 의논하겠다. 공사가 진행 중이나 겨울 추위로 어려움을 겪다. 세종실록 권 120, 세종 30년(1448) 5월 12일(병신) 세자( 世 子 )가 의정 하연( 河 演 ) 황보인( 皇 甫 仁 ), 찬성 박종우( 朴 從 愚 ) 김종서( 金 宗 瑞 ), 참찬 정분( 鄭 苯 ) 정갑손( 鄭 甲 孫 )을 인견하고 종서( 宗 瑞 )의 상서( 上 書 )한 조건을 의논하 는데, 임금의 뜻을 전하기를, 일곱째, 흥작( 興 作 )하는 일은 차츰차츰 제거하였고, 또 지금 남대문( 南 大 門 )의 일도 이미 끝이 났다. 파하지 않은 일을 또 일체 정지하여 파하려 하니, 경 등은 하나하나 상의( 商 議 )하여 아뢰라 하니... 世 子 引 見 議 政 河 演 皇 甫 仁 贊 成 朴 從 愚 金 宗 瑞 參 贊 鄭 苯 鄭 甲 孫 議 宗 瑞 上 書 條 件 傳 上 旨 曰... 其 七, 興 作 之 事, 稍 稍 除 去 且 今 南 大 門 之 役, 已 告 畢 矣 1448년(세조 30) 5월 12일에는 숭례문 공사가 이미 끝나 있다.

2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1479(성종 10)년에도 숭례문을 크게 보수하는 공사를 벌여, 4월 2일에 입주( 立 柱 ) 기둥을 세우고 5월에 준공하였다. 기둥을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부분적으로만 손을 본 것이 아니라 크게 고치는 공사, 곧 중수( 重 修 )였던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 가운데서도 무너지거나 불에 타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런데, 굳이 뒤집어 생각해 보자면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이때 숭례문은 무너졌거나 아니면 크게 망가졌어야 한다. 도성과 도성의 문들은 외적의 침입을 막 아내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그런데 그 외적이 서울까지 침범하는 상황에서도 멀쩡히 있었다는 것은 기실 자랑거리가 못된다. 숭례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버리고 도주한 당시의 임금과 관료들, 장졸들에게 할 말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 도성을 크게 고쳤고, 그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서 손을 보았기에 숭례문도 필요에 따라서 고쳤을 것이므로 부분적으로는 모습이 바뀌었겠지만, 아무튼 크게 보자면 숭례문은 조선 후기에서 말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제자리 제 모습을 지켜왔다.

26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고 연 희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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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23 정선( 鄭 敾, 1676~1759)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목 차 1. <금강전도>에 대하여 2. <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정선의 진경산수화( 眞 景 山 水 畵 )는 대개 문인들이 유람한 공간과 거주한 공간을 그 리고 있다. 대표작을 꼽자면, 유람공간의 그림으로는 <금강전도( 金 剛 全 圖 )>, 거주공 간의 그림으로는 <인왕제색도( 仁 王 霽 色 圖 )>이다. 금강산은 조선후기 문사들에게 최 고의 절경으로 선정되어 가보기가 열망되던 곳이었다. 정선이 그린 수없이 많은 금 강산도 가운데 금강산의 전모를 웅걸차게 담아 그린 <금강전도>는 정선 금강산도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인왕산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의 명당주거지로 인정되어 권세가가 들어서던 곳이고 정선이 늘그막에 저택을 마련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인 왕산 일대의 기운과 수려함을 잘 표현한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그린 한양그림 중 으뜸이다.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는 정선 개인의 득의작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수준의 국보급 작품들이다. 특히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관동의 금강산과 서울의 인왕산 등 대표적 명산( 名 山 )으로 드러낸 조선 시대 회화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두 점 산수화가 점한 한국회화사에서의 우뚝한 위 상은 영원히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본 강의는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의 회화적 우수성을 살피고 이들 작품의 제작 배경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 두 점의 거작은 뛰어난 작품성과 민족사적 의미를 동 시에 가진다는 점에서, 여러 연구자들이 주목하였고 그들 나름의 해석을 펼쳤다. 이에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함으로써 이 두 작품에 대한 다각적 이해를 돕고자 한다.

2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1. <금강전도>에 대하여 <금강전도>, 1734년, 종이에 수묵담채, cm,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217호 먼저 <금강전도>를 소개하겠다. 그림을 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한 눈에 보이 도록 그려져 있다. 세로 130cm의 제법 큰 화면의 중심에 커다란 산의 덩어리가 위치 하였는데 그 크기는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면을 채운 금강산 모든 바위 봉우 리에는 필선이 기운차게 베풀어져 있다. 또한 이 거대한 산덩어리는 구름 속에 그 모습만 드러난 듯 바다에 표류하는 듯 그 주변이 하늘색과 흰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금강전도>의 화면은 전반적으로 강렬하고도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게 된다. 화면의 왼편을 보면, 金 剛 全 圖, 謙 齋 라는 그림제목과 화가이름(호)가 선명하게 적혀있고, 謙 齋 라 적은 아래 謙 齋 라는 백문방인(글씨가 하얗게 드러나는 사각형태의 도장)이 찍혀있다. 화면의 오른쪽을 보면 긴 글이 적혀 있다. 번역하여 소개하면, 일만 이천 봉우리 드러낸 뼈를 뉘라서 뜻으로써 참모습을 그려내리( 寫 眞 ). 뭇향기는 동해 끝 해 솟는 나뭇가지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도다. 바위봉우리는 몇 송이 부용( 芙 蓉 )인 양 하얀 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 무가 현모한 도의 문을 가렸구나. 설령 내가 발로 직접 밟아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니 그 어찌 베개 아래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 라 하여 그 당시 일반적으로 거론되던 금강산의 기상과 아름다움 및 실경산수그림의 효용성( 臥 遊 )을 말하였다. 이 글 아래에 작고 단정하게 적힌 네 글자는 甲 寅 冬 題 (갑인년 1734년 겨울에 쓰다)이다. 곧, 정선 59세 겨울 이전에 그려진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 글은 정선이 쓴 글이 아니다. 이 작품의 구성법, 필묵법, 그리고 금강산이 그림의 주제로 각광받은 시대적 배경 등은 모두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끄는 요소들이었다.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 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우리 문화의 내재적 자생적 발전론을 기대하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명( 明 )이 몰락하고 청( 淸 )이 중국을 제패하고 치욕의 정묘호란까지 치르면서 조선의 문사들은 스스로 중국문명을 계승하노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자 하였다. 이를 조선중화사상( 朝 鮮 中 華 思 想, 청오랑캐가 중국땅을 차지하였으니 중화문명은 조선이 계승한다는 사상)이라 부 른다. 조선중화라는 것은 고려로부터 있어온 소중화( 小 中 華 ) 개념을 반영하여 조선 후기에 대두된 개념이다. 조선시대 전 중기에는 중국의 산수라 할 수 있을 듯한 비 실경의 산수가 그려지다가 조선후기에 조선의 실경이 산수화의 주제가 된 것은 조선

30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25 중화사상이 태동한 때문이라는 것이 해석자들의 주장이다. 조선중화사상 아래 기존의 성리학은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되었고, <금강전도>는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제작 되었다. 조선이 중심이 되었기에 조선국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며, 금강산은 음 양조화의 태극문양을 보이는데 성리학적 사유를 반영한 구성이라고 해석된다. 즉 조선중화사상과 조선성리학을 정선이 잘 소화하여 이러한 걸작을 낳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화의 교류실제와 문화사적 관점에 입각한 해석이다. 금강산에 관심을 가지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문사들의 문화생활은 중국으로부터 입수된 중국 기행문학과 이를 그린 명산도계열의 영향을 반영한다. 안동김씨일문(김창협 김창흡 중심)을 중심으로 금강산 유람이 열병처럼 번졌으며 천기 ( 天 機, 하늘의 기밀)의 획 득과 표현을 내세우며 좋은 시를 얻고자 한다며 여행을 일삼았다. 정선은 이들의 후원을 받았고 이들이 여행한 곳들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당시 중국에서 입수된 중국명산도 시리즈물의 명산( 名 山 ) 표 현의 공식을 활용하고 있다. 정선은 그들이 다닌 곳을 중심으로 금강산의 전도와 세부도를 수없이 반복하여 그렸다. 그들의 요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는 그가 그린 금강산 세부도(유람자들이 집중적으로 방문하는 곳을 그린 그림)의 집합체로 내용을 채우고 중국식 명산표현의 공식을 활용하여 그 려진 그림이라는 점이다. 금강전도는 금강산 전체를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이러한 금강산 구성법은 정선 금강산도를 독창적으로 만들도록 하였고 그의 개인적 기량이 더하여져 우수한 작품이 탄생하였다. 2. <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cm,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를 보면 화면을 압도하는 시커먼 먹 표현의 바위봉우리 아래로 하얀 연운이 뭉실거리며 피어오르고 그 아래로 소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는 장관이 인상적인 화면이다. 화면을 가득 메운 산이 장중하고, 특히 화면의 아래 위로 처리된 검은 먹칠의 과감하고 힘찬 붓질이 독특하게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화면 중 하단은 부드러운 흰 연운이 감싸면서 그림의 운치를 감돌게 하는데 연운 끝자 락에 저택의 지붕만이 활짝 올라간 요소가 조합되어 그림의 오묘한 운치가 감돌게 된다.

3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화면의 오른편 위에 仁 王 霽 色 謙 齋 (인왕의 날이 개다 겸재)라는 글이 적혀있고, 그 아래 謙 齋 라는 백문방인과 元 伯 이라는 주문방인(글씨가 붉게 드러나는 사각형 태의 도색)이 찍혀있고, 그 다음 줄에는 辛 未 潤 月 上 浣 (신미 윤월 상완)이라 적혀 있다. 1751년 음력 윤 5월 상순에 그렸다는 뜻이다. 정선이 이를 그린 때는 76세 여름이다. 노년의 자신감 넘치는 붓질임을 알 수 있다. <인왕제색도>는 훗날 18세기 후반기에 심환지(정조대의 영의정)에게 입수되었다. 심환지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시 한 수를 적어 붙여두어 전하고 있었다. 그 내 용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삼각산 봄 구름비 보내니 넉넉하고, 만 그루 소나무 푸른 빛이 그윽한 집을 둘렀구나. 주인옹은 반드시 깊은 장막에 앉아 홀로 하도( 河 圖 )와 낙서( 洛 書 )를 완상하시리 이다. 이 그림의 가장 주된 특성은 실경의 흰색 암봉을 시커멓게 처리한 점이다. 만약 이 검은 바위가 필선으로 그려졌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명작 <인왕제색도>는 없었을 것이다. 정선은 무슨 이유로 바위를 시커멓게 그렸으며, 도대체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그림일까. 인왕산만을 주제로 그렸을 리는 만무하다. 심환지의 제발시도 말해주듯이 인왕산 아래 번듯한 지붕의 주인공의 저택과 그 배경의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즉 누구의 집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연구자들의 해설은 이러한 점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시커먼 바위에 대하여는, 비온 뒤의 젖은 바위라는 해설과 인왕산의 기운을 표현 하려고 한 표현법이라는 두 가지 해설이 있다. 霽 色 (제색)이란 그림 제목이 비온 뒤 갠 산을 표현하고 있으니, 아직 젖은 바위라고 보는 것도 자연스럽고도 흥미로운 해석이다. 실제로 해가 나면 눈부시게 흰빛이던 인왕산 암벽은 날 흐리고 비가 오면 우중충한 색으로 변하면서 묘한 기운을 발하기 때문이다. 한편 기운의 표현이라는 해석은 인왕산의 문화사적 해석이 반영된 것이다. 인왕산은 무학대사가 경복궁의 주산으로 삼아야 할 산이라고 할 만큼 한양에서 기운이 좋은 산으로 공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왕산 아래로 권력가가 운집하였고 인왕산 기운 아래서 명사가 난 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옛 지도의 인왕산 봉우리는 시커멓게 그려졌다. 정선이 그린 인왕산 계곡의 바위들도 날씨에 관계없이 검은 먹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울러 정선이 바위를 검게 칠한 기법은 당시 유입되어 있는 청대 초기의 중국명산도 판화집 (특히, 명말청초에 판화도 제작에 기여가 컸던 소운종( 簫 雲 從 )의 태평산수도( 太 平 山 水 圖 ) )의 표현기법이 활용되었다는 점이 실증적 관점의 예로 제시되어 있는 이 론이다. <인왕제색도>에 오른편 아래 자리한 집은 누구의 집일까. 이는 그림의 주제와 결부 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정선의 벗 이병연의 집이라는 하나의 해석이 오래되

32 정선 진경산수화의 최고봉,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27 었고, 이후 정선 자신의 집이라는 해석이 새로 나와 있다. 두 해석 모두 여러 정황을 종합한 추정이다. 이병연설은 그림이 그려진 때가 정선과 교유하며 그림과 시로 쌍 벽으로 칭송된 장본인 이병연(1671~1751)의 타계 며칠 전이었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평생지기가 곧 죽어가는 데 이러한 대작을 그린 이유라면 그림으로 쾌유를 비는 화 가의 마음으로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는 것이 이러한 해석을 하는 연구자들의 주장 이다. 이병연의 저택은 육상궁 뒤편에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조선중화주의와 조선성리학을 소화하여 그림을 그린 정선의 거대한 위상을 돋보이게 해준다. 그 말 년의 최고작이 벗의 죽음 앞에 바쳐진 그림이라는 사실은 매우 감동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편 이 그림이 정선 자신의 집을 그렸다는 주장은 벗이 죽어가는데 정 선은 그의 자부심 표현으로 대작을 그렸다고 들린다. 그러나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다. 정선은 인왕산 아래 동네 순화방 인왕동(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로 이사 하여 60대 무렵부터 거주지 주위의 한양경관을 그리면서 화풍 확립의 전성기를 맞 는다. 정선은 1745년 1월, 5년 동안의 양천현령에서 물러난 후 그 동안 그림으로 번 돈으로 솟을 대문을 증축하여 집을 짓고, 이황과 송시열의 필적이 있는 외조부 댁 소장의 주자서절요서( 朱 子 書 節 要 序 )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이황과 송시열의 유거 처와 함께 외조부의 풍계유택과 자신의 인곡정사( 仁 谷 精 舍 )를 그려 합철함으로써 벌열가에 비해 차별되었던 명문의식을 드높게 표명한 바 있다. <인왕제색도>의 집이 정선의 집이라는 해석은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이 제작되었을 것이라 보는 해석이다. 실제로 이병연에 대한 정선의 입장에 대하여는 분명한 기록이 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앞서 소개한 심환지의 글에서 주인옹이 하서와 낙도를 감상한다는 구절은 이 집주인이 정선 자신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정선에 대한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정선의 특징 중 하나가 음양설에 밝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그림 속 두 갈래 폭포 중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 아래로 집이 위치한 점은 정 선의 주택 부근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해석의 타당성이 높아진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누구의 집을 그린 것이든, 그 집이 인왕산의 기운 아래 자리잡고 있다는 내 용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즉 이 그림은 인왕산의 표현에 그림의 무게축이 옮겨가 있고, 바로 이 점에 감상의 초점도 놓여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두 작품과 연관하여 참고해 볼만 한 서적으로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참고문헌>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그림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안휘준 정양모 외, 한국의 미,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 회화 공예

34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백제 금동용봉향로- 최 응 천 (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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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1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 목 차 1. 머리말 2. 부여 능산리 절터 3. 백제 금동용봉향로 4. 금동용봉향로를 통해 본 백제인의 사상 1. 머리말 향이란 산스크리트어인 간다(Gandha)를 번역한 것으로서 원래 고온다습한 인도 에서 악취를 없애고 실내의 습기를 제거하고자 쓰이던 것이었다. 이것이 점차 수행 자들이 지니던 필수품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고 불교의 성립과 함께 부처님 앞에 올리는 공양물로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향을 담고 피우기 위한 향로는 불교가 전래 되기 앞서 기원전 무렵인 중국 한대( 漢 代 )에 이미 청동기로 박산향로( 博 山 香?)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박산향로가 전래된 사실을 옛 낙랑지역에서 발견 된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만 향로의 본격적인 제작과 사용은 역시 불교의 전 래와 함께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쌍영총( 雙 楹 塚 ) 고분 벽화 행렬도에 보이는 머리에 인 향로의 모습이나 단석산 신선사( 斷 石 山 神 仙 寺 )의 마애상 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잡고 공양하는 조각 등을 통해 삼국시대 후반쯤 부터는 이미 향로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원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대( 漢 代, B.C. 06~A.D. 219)에 만들어진 당대 도가사상의 상징물이었던 박산향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금동 대향로는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향로 중에 세밀한 형태나 구성, 크기, 조각기술 등의 여러 면에서 가장 월등한 최고의 걸작이다. 일반적으로 몸체 상단부분의 중첩된 산 봉우리 조각과 몸체 하단부의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 承 般 ), 다리 받침의 3단 구성으로 이루어진 중국 박산향로는 전한( 前 漢 )시대에 화려한 조각품으로 거듭난 후 후한( 後 漢 )

3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이후에는 점차 도식화되어 간다. 중국 한대에 제작된 뚜껑 달린 항아리의 뚜껑부분 조각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비교하여 저부조이면서 금 상감 기법이라는 다른 방식으 로 주조되었으나 산과 능선의 묘사, 능선 가장자리에 새겨진 도식적인 직선 무늬, 우에서 좌로 표현된 동선 및 시선 처리가 상당히 유사하다. 이와 같은 저부조 형식 의 조각은 한대에 나타나는 공통된 형상이다. 반면, 서한 중산왕국의 유승 묘( 劉 勝 墓 )에서 출토된 고부조의 박산로는 전체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와 가장 유사한 예로 알려져 있다. 중국 남조(420~589)묘의 화상전에서도 백제금동대향로와 유사한 향로 들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중국 중부 하남성 등주에 위치한 5세기 후반경의 남조 묘 벽돌에 새겨진 향로는 용이 똬리를 튼 모양의 받침이 매우 독특하다. 뚜껑 부분의 봉황과 산악의 표현을 비롯한 세부묘사가 도상적으로 매우 흡사하며 산악 부분에 동 식물과 인물 등의 세부 묘사들이 표현되었는지 여부는 분명치는 않지만 유사한 도상들이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세기 중~후반경의 중국 강소성 상주 척 가산 남조 묘의 벽돌에 묘사된 향로는 꼭대기의 봉황이 유난히 강조된 듯 보이고 산악의 표현이 다소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조각되었다. 따라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원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중국의 화상전이나 벽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롭다. 2. 부여 능산리 절터 538년 지역적으로 협소하였던 웅진( 熊 津 )을 떠나 부여( 扶 餘 )로 천도하게 된 백제는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123년 동안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는 등 불교문화가 더욱 융성해 지면서 많은 사찰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그에 따르는 탑, 불상 등의 불교조상이 활발히 이 루어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사리기( 舍 利 器 )와 범종( 梵 鐘 ), 향로( 香?) 등의 불교금속 공예품도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불교공예품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탑 안에 봉안시키기 위한 사리를 보호하거나 장엄하기 위한 사리기였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사리장엄에 관해서는 588 년에 백제에서 승려와 불사리를 보냈다는 일본서기( 日 本 書 紀 ) 의 기록이나 구아리 ( 舊 衙 里 ) 폐사지( 廢 寺 址 )에서 출토된 목탑 심초석( 心 礎 石 ) 중앙부에 뚫려진 사리공을 통해 이 시기에 사리공양( 舍 利 供 養 )과 함께 사리장엄구( 舍 利 莊 嚴 具 )가 제작되었음을 추측하여 왔다. 그러나 부여 능산리 목탑지 아래의 심초석 위에서 567년에 제작된 화강석제 사리감( 舍 利 龕 )이 출토됨에 따라 6세기 중엽경에 이미 사리장엄과 제작이

38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3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용봉향로( 金 銅 龍 鳳 香?)는 백제 금속공예의 탁월함을 여실히 입증해 준 작품으 로서 놀라우리만치 완벽한 조형성과 함께 당시 백제인이 지녔던 수준 높은 종교사 상과 정신세계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데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92년부터 95년까지 4차에 걸쳐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된 부여 능산리 유적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절터로서 아래로부터 중문, 목탑, 금당, 강당( 中 門, 木 塔, 金 堂, 講 堂 )의 순서로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시대 초기 가람( 伽 藍 ) 구조를 하고 있음이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었다. 이 절터는 사비도성( 泗 沘 都 城 )의 외 곽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 羅 城 )의 바깥쪽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고 발굴조사 시 공방지( 工 房 址 )로 추정되었던 제 3,4 건물지와 같은 공방이 회랑( 回 廊 )이 지나가는 자리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사찰은 건립 당시부터 단순한 불교사원이 아닌 능산리 고분군의 원찰( 願 刹 ) 혹은 능사( 陵 寺 )로 추정되고 있다. 3. 백제 금동용봉향로 이 향로는 1993년 10월 부여 능산리 사지의 회랑 부근에 위치한 제 3건물지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그 높이가 64cm에 이르는 대작으로서 아래로부터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노신( 爐 身 )의 하부 받침을 물고 있는 대부( 臺 部 )와 불륨있는 앙련( 仰 蓮 )의 중첩 연판( 蓮 瓣 )으로 구성된 노신부( 爐 身 部 ), 그리고 박산( 博 山 )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된 개부( 蓋 部 )의 3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뚜껑의 정상에는 날개를 활짝 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 不 A 長 生 )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 三 神 山, 蓬 萊 方 丈 瀛 洲 山 을 일컫음)을 상징적으로 표 현한 것으로 믿어진다. 한대( 漢 代 )의 박산향로에는 삼신산에 살며 불로장생한다는 신선들이나 동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때로는 신선들의 세계와 당시 생활 풍속 등이 묘사되기도 한다. 동물들은 실재하는 동물 이외에 주로 상상의 동물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상상의 동물들은 임금이 선정( 善 政 )을 베풀 때 나타난다는 용, 봉황, 기린( 龍, 鳳 凰, 麒 麟 ) 등의 상서로운 동물이 많이 표현된다. 그 가운데 봉황은 주로 향로의 정상에 두게 된다.

3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능산리 출토의 금동향로 역시 이와 같은 중국 박산로( 博 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나 하부의 승반( 承 盤 )과 간주( 竿 柱 )를 대신하여 머리를 들어 노신의 받침을 물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대부를 구성한 점이 자못 이채롭다. 유사한 구성을 지닌 중국 향로로는 중국 상해박물관( 上 海 博 物 館 )에 소장된 후한( 後 漢 ) 초기의 금동향로를 들 수 있는데, 특히 개부 정상에 한 마리의 봉황을 배치한 모습이라던가 승반 없이 몸 체를 휘감은 용의 몸체로 대부를 삼고 있는 형태가 매우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진 중국 향로는 박산형의 개부를 제외하고는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나팔형 간주, 접시 모양의 넓은 승반으로 구성된 보다 단순한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아울러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도자기를 재료로 하는 향로가 제작되기도 하며 박산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와 형태만이 잔존하는 추상화된 작품이 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능산리 출토 금동향로의 대부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 곡진 몸체의 후미( 後 尾 )와 그곳에서 뻗어나온 구름 모양의 갈기를 투각 장식하여 받침으로 삼았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 뒤까지 길게 뻗어 있고 길게 찢어진 입 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용의 입 안에 물려진 짧은 간주 위로는 노신의 하부 받침을 연결시켰다. 이처럼 용이 물고 있는 형태로 연결시킨 모습은 신라의 금관총( 金 冠 塚 ) 출토의 초두( 鐎 斗 )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의장이다. 간주에서 연결된 기둥은 노부의 둥근 내저면( 內 底 面 ) 안 으로 약간 솟아올라 그 끝단에 별도의 고리로 끼워 고정시켰다. 한편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의 외측면은 잎이 넓은 앙련( 仰 蓮 )으로 3단의 층단을 두어 중첩 장식되었는데,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 부분에는 평행사선문을 음각하여 연잎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백제 특유의 유려한 연판은 무령왕릉( 武 寧 王 陵 ) 출토의 은제 잔탁( 盞 托 )이나 부여 외리( 外 里 )에서 출토된 문양전( 文 樣 塼 )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생 동감 넘치게 표현되고 있다. 층단을 이룬 연판은 동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이 가장 폭이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제일 하 단의 연판에는 2줄의 음각선으로 복엽( 複 葉 )을 묘사하고 있다. 그 위에 붙은 각각의 연판 안으로 물고기, 신조( 神 鳥 ), 신수( 神 獸 )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진 양각으로 장 식하였으며 제일 상단의 연판과 연판 사이의 노신 여백 면에도 연판의 부조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동물상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서로 대칭을 이루며 반대편에 배치된 고개를 뒤로 돌린 학처럼 생긴 새와 물고기의 경우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지니고 있어 같은 문양판이 반복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물뿐이 아니라 상단 연판의 한 면에는 요고( 腰 鼓 )를 연주하는 모습의 주악천인상( 奏 樂 天 人 像 )과 그

40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5 아래의 오른쪽 연판에도 동물을 타고 있는 듯한 1구의 인물상이 장식되었다. 따라서 이 노신면에는 두 마리의 새를 중첩 표현한 연판 상단의 여백면을 포함하여 도합 23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지만 수중생물과 날짐승 등을 특정한 규칙에 의해 배열한 것 같지는 않다. 노신의 상단 연판 위에는 1단의 문양띠를 두어 유려한 당초문을 음각시켰으며 그 위로 직립 구연의 턱을 만들어 박산형의 뚜껑을 끼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개부의 하단 구연부에도 동일한 문양대를 배치하여 이 두 문양대가 서로 맞닿도록 구성한 배려를 볼 수 있다. 노신 상부에 얹혀진 개부는 74개의 산과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그 능선에는 1단의 문양대를 배치하여 내면에 집선문( 集 線 文 )을 장식하였다. 이 산봉우리와 계곡 사이 에는 각종의 진금기수( 珍 禽 寄 獸 )와 인물상이 드라마틱하게 고부조( 高 浮 彫 )로 묘사되어 있는데, 6그루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하여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도 보인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 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산중을 거닐거나 나무 밑에서 참선을 하는 인물, 낚시를 하거나 말을 타고 수렵하는 인물상 등 도합 16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과 동물들은 거의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다리의 동물들은 앞발을 들어 앞으로 전진하는 운동감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으며 기마인물상의 경우 말의 목과 사람의 시선은 오른쪽(뒤편)으로 돌 리고 있으나 왼쪽으로 달리는 자세이다. 기사( 騎 士 )가 머리를 돌려 조류나 맹수를 향해 화살을 쏘는 파르티아식 활쏘기는 중국에서는 한대부터 출현하는 문양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후한시대 금착수렵문 동통에 표현된 수렵문은 다소 복잡한 구성을 띄고 있으나, 단조로운 선들로 산 능 선을 표현한 부분 및 힘차게 달리는 말과 무사의 역동적인 모습, 사슴, 호랑이 등의 동물과 새들의 생생한 묘사는 한대 양식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용, 연꽃과 더불어 신선세계, 혹은 불상이나 보살상이 함께 표현된 도상은 중앙아 시아에서 자주 애용된 소재이다. 특히 용의 입김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도상은 중국 산동성 청주시 용흥사( 龍 興 寺 ) 소장의 불상의 대좌 조각과 상당히 흡사하다. 또한 꿈틀대고 있는 용과 신선세계가 함께 표현된 도상은 5세기 후반 북위시대에 조성된 산서성 운강석굴 제10굴 전실 입구 조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산봉우리 사이로 사슴, 사자 등의 동물들과 새들이 용을 중심으로 상단부와 하단부 양쪽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각되어 있다. 나름대로 다양한 방향으로 동물들의 움직이는

4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려 하였으나 백제금동대향로에 표현된 동물들 보다 긴장 감이 떨어진다. 한편 뚜껑에 뚫린 연기 구멍은 중단에 4개와 상단부에 4개를 둥글게 돌아가며 포 치하였는데, 이들 모두 솟아오른 산악의 뒤편에 가려져 정면에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렇지만 구멍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그 외연을 투박하게 처리한 금속의 타격흔적을 볼 수 있어 주조 후에 다시 구멍을 뚫은 것으로 추측된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주악천인상이 각각 5가지의 악기( 琴, 阮 咸, 鼓, 縱 笛, 簫 )를 연주하고 있는데, 소발( 素 髮 )로 깎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묶여 있으며 통견( 通 肩 )의 도포자락과 악기마다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완함 1), 종적, 배소 등의 악기는 서역의 벽화(키질석굴[3~9세기], 운강석굴 [460~524년])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 중앙아시아의 영향이 명확히 드러난다. 여기서 거문고로 논의되고 있는 형태가 독특한 악기는 5~6세기경의 남조 벽돌무덤의 벽면에 새겨진 죽림칠현( 竹 林 七 賢 ) 2) 과 영계기 에서 혜강이 들고 있는 악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유행하던 거문고 형식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표 현된 북은 남방계 항아리북으로 논의되고 있으나 유사한 도상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용, 연꽃, 악사가 3단 구조로 함께 등장하는 화면 구성은 고구려 장천 1호분 청룡보살 비천 기악도와 673년경에 제작된 국립청주박물관 소장의 계유명( 癸 酉 銘 ) 아미타불비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미타불비상의 양쪽 측면에 용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마치 용의 입김으로 인해 연꽃잎이 생성하듯 묘사가 되어 있으며 그 위에 광 배를 하고 있는 신선들이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용과 연 꽃의 생성, 그리고 악사들의 소재를 이용한 화면 구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악사와 악사 사이에 솟아 있는 5봉우리의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응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들은 모두 날개를 접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상부의 봉황을 응시한 측면관의 모습인 반면 그 가운데 유독 1 마리의 새만은 고개를 위로 쳐들어 봉황의 후면을 올려보는 후면관으로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즉 이 새가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봉황의 후면에 해당되도록 구성하였다는 1) 완함이라는 명칭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이었던 완함이 비파를 잘 연주해서 유래된 용어이고, 완함이 비파를 계량하여 만든 것이 루안이라는 중국 악기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월금이라고 부른다. 2) 죽림칠현은 위나라가 후한왕실을 찬탈하고 정치적 전환기에 자신만의 시대를 진지하게 살아간 당 대의 전위적 지식인들로 노장사상을 계승하고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청담인( 淸 談 人 )이 었다. 도교가 유행하면서 그들이 도교적 의미를 지닌 종교 우상으로 승화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42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7 것은 봉황과 개부가 주조 당시부터 움직이지 않게 접합된 점으로 미루어 이곳을 처음 부터 의도적으로 후면에 배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덧붙여 이 새를 중심으로 그 아래 부분에는 기마인물상과 함께 유일하게 도철문( 饕 餮 文 )이 새겨진 점도 주목 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 그 반대편에는 봉황의 정면부와 양쪽으로 비켜져 고개를 돌린 동일한 모습의 2마리 새 사이로 완함( 阮 咸 )을 연주하는 주악상이 배치되고 그 아래로 낚시하는 신선이 장식되어 있는 방향이 처음부터 정면을 이루도록 구성된 것이라 하겠다. 개부의 정상에는 보주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한 마리의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가슴 윗부분에는 연기가 나올 수 있도록 2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음이 주목된다. 머리 위로 솟은 벼슬과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 예리한 눈, 그리고 턱 아래 붙은 보 주와 활짝 편 날개 뒤로 치솟아 있는 환상적인 긴 꼬리 등 봉황의 자태를 그 어느 작품보다 가장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이 향로에 보이는 전체적인 구성에서 간취되는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음양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 수중동물, 즉 음의 대표적인 용을 받침으로 하여 그 위의 노신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수중생물이나 물과 관련된 동물을 연판 안에 배치 하였으며 상부의 뚜껑 부분에는 산악과 나무 등과 함께 지상의 동물 및 인물상, 신선 등을 등장시키고 천상계( 天 上 界 )인 정상에는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있음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금동향로는 금속공예로서의 탁월한 주조기술뿐 아니라 당시 백제인이 지녔던 수준 높은 종교사상과 정신세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4. 금동용봉향로를 통해 본 백제인의 사상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제가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한성시대( 漢 城 時 代 )인 384년의 일이지만 이 시기에 해당하는 불교유적이나 유물은 현재까지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웅진 이후의 불교 유물도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시기 백제미술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무령왕릉의 발굴품들로서 비록 525년의 하한을 지닌 왕실 부장품이라는 피장자의 신분상 특성을 지닌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 수준 높았던 백제인의 미의식과 예 술관, 나아가 종교적, 사상적 측면을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4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기록상으로만 볼 때 6세기 전~중엽의 활발하였던 불교관계의 내용에 비해 실제적 으로 백제 불교미술과 그 조상활동은 6세기 중엽을 지나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즉 창왕명 석조 사리감이 만들어졌던 567년은 이 유물이 출토된 자리가 목탑지 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에 이르면 정림사지를 비롯한 부여 지방에 많은 절들이 조영되고 그에 따른 탑과 불상의 제작이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사리장엄의 본격적인 의궤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불교신앙의 교리적인 측면이 크게 부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시대가 조금 내려와 태안( 泰 安 )과 서산 ( 西 山 )의 마애불( 磨 崖 佛 )을 비롯하여 예산 사면석불( 禮 山 四 面 石 佛 )과 같은 불교조 각이 융성을 이루게 되는 등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 사이는 백제 불교미술의 극성기인 동시에 사상적으로도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향로는 불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노신의 바깥부분에 장식 된 연판문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구성원리나 세부 표현에서는 오히려 도교적 성격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즉 이 향로는 음양으로 대표되는 용과 봉황의 구성, 노신 외면의 박산( 博 山 )마다 표현된 각종의 인물상과 가상의 동물은 물론이고 낚시하는 장면과 수렵의 인물상, 도철문 등은 불교와 상반되는 도교적 요 소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산악과 동물의 모습은 이미 고구려 고분벽 화의 표현에 널리 찾아볼 수 있는 모티브인 동시에 특히 기마인물상이나 수렵의 장면 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거의 일맥상통한다. 백제의 경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제 탁잔에 장식된 산악과 용의 모습을 통해 이미 도교적 요소가 잠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송산리( 宋 山 里 ) 6호 전축분( 塼 築 墳 )이나 능산리 동하총( 陵 山 里 東 下 塚 )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 四 神 圖 ) 등을 통해 백제에서도 도교의 영향이 미술과 사상 전반에 걸쳐 매우 넓게 확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백제는 종교적으로 삼국 중 유일하게 불교나 유교, 도교 같은 사상 및 문화를 자유 롭게 수용하였다. 백제에는 4세기 중엽 장생불사( 長 生 不 死 ) 사상과 방술( 方 術 ) 등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634년 궁궐 남쪽에 연못 조성 시 못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 方 丈 仙 山 )을 섬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위태로운 정세와 계속되는 왕 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불로불사의 신선에 대한 동경과 추구를 염원했던 당시 백제 지식인층의 도교사상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흥법 보장봉노 보덕이암 조( 興 法 寶 藏 奉 老 普 德 移 庵 條 )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보장왕 ( 寶 藏 王 )이 삼교( 三 敎 )를 병흥( 倂 興 )하려 하고 연개소문( 淵 蓋 蘇 文 )이 도교( 道 敎 )를 구하자 하매 반룡사( 盤 龍 寺 )에 있던 고구려의 중 보덕화상( 普 德 和 尙 )이 여러 번 이를 막고자 간하다가 650년에 신통력으로 방장( 方 丈 )을 날려 완산주( 完 山 州, 지금의 全

44 백제의 염원을 태우다 - 백제 금동용봉향로 39 州 )의 고대산( 孤 大 山 )으로 옮겼으며 결국 불교가 쇠하고 도교가 융성함에 따라 고구 려가 패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이 기록이 시사하듯 삼국시대 후반 7세기에는 불교보다 도교가 크게 득세하였고 이러한 고구려의 사상적 변화는 백제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은 백제에 서도 불교사원에까지 도교적 요소가 가미된 산경문전( 山 景 文 塼 ) 등이 제작될 수 있 었으며 나아가 백제 금속공예의 진수로 평가받기에 마땅한 금동용봉향로가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므로 이 금동용봉향로는 노장사상과 산 해경( 山 海 經 )에 등장하는 동물과 신선 등 도교를 밑바탕에 둔 백제 도교가 가장 극 성하였던 시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제작시기는 능산리 절터의 창건 시기이며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6세기 중~후반을 지나 산경( 山 景 )과 귀형 문전( 鬼 形 文 塼 )이 제작되었던 7세기 전반과 그다지 오랜 차이가 없는 7세기 전~중엽 쯤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동대향로가 제작된 시기는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예술적으로 최고의 관인들을 초빙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 했던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안한 왕권의 지속과 귀족 세력 간의 내부 권력 다툼으로 불행하게 죽은 선왕들의 불로장생과 극락왕생을 소망하는 백제왕들의 간 곡한 기원과 소망이 당대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향로로 탄생된 것이다. 이후 이 향 로는 왕실의 능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례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백제 멸망과 동시에 장구한 세월, 땅속에 묻히게 되었고 다시금 이 세상에 출현함으로써 잃어버린 백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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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고려의 영원한 초상( 肖 像 ), 운학문( 雲 鶴 紋 ) 청자( 靑 瓷 ) 장 남 원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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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43 고려의 영원한 초상( 肖 像 ), 운학문( 雲 鶴 紋 ) 청자( 靑 瓷 ) 1) 목 차 1. 국보 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2. 고려의 운학, 상서로움의 표시 3. 조선으로 계승된 운학문 4. 조선의 문인들이 본 운학문 청자 5. 영원한 고려의 초상으로 고려의 청자는 국가가 안정됨으로써 당시 중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도자 산업사 에서 점차 뚜렷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10세기 중엽 수도 개경 인근의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본격적으로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했고, 이후 전라도 강 진이 요업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11~12세기에는 청자의 기술과 조형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 북방의 요업 기술과 장식 기법이 유입되면서 고려는 짧은 시간에 자기( 瓷 器 ) 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기술력을 향상시켰다. 12세기경에 이르면 그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미 생활 용기로 자리 잡은 청자는 오래전 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도기( 陶 器 )나 금속기의 형태와 기능상의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 陶 瓷 )만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나가게 되었다. 청자에 운학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절정의 시기부터이다. 음각이나 양각, 상감 같은 여러 기법으로 완, 발( 鉢 ), 접시, 병, 합( 盒 ) 등을 운학문으로 장식했다. 이 가운데 특히 운학문이 그려진 매병( 梅 甁 )에서는 고려청자 절정기의 면모가 두루 보인다. 1) 본 글은 2013년 네이버캐스트에 게재되었던 원고임. =134&contents_id=24561#cbox_module

4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1. 국보 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지금 전하는 고려의 청자 운학문 매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제68호 매병이다. 작고 나지막한 반구형( 盤 口 形 )의 짧은 구연( 口 緣, 입의 가장자리)은 둥글게 부푼 팽만한 몸체와 대조를 이루면서 탱탱한 긴장감을 준다. 몸체 아래쪽으로는 날씬한 곡선을 그리며 잘록하게 좁아졌다가 벌어져, 강하게 팽창된 어깨와 대조를 이루면서 위엄을 더해준다. 자토( 赭 土, 검은 흙)와 백토( 白 土 )를 사용하여 몸 전체에 운학문을 상감 했는데, 목 아래에는 백상감으로 두 줄 원문( 圓 文 )을 두르고 그에 잇대어 여의두( 如 意 頭 ) 무늬를 돌렸 으며, 병의 바닥 쪽에는 흑백상감으로 두 겹 연잎 [ 蓮 瓣 ] 무늬를 넣어 장식하였다. 동체( 胴 體 ) 전면에 펼쳐진 운학문은 원( 圓 ) 안쪽과 그 바깥 바탕에 사진1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 13 각각 그려졌는데, 간격과 배치가 일정하여 매우 세기, 높이 42.1cm, 간송미술관 소장. 장식적이다. 원은 두 겹으로 안쪽은 검은색, 바깥 국보 제68호 쪽은 흰색으로 메워 상감하고, 어깨에서 몸체 아래까지 모두 6단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이 6단은 한 단에 7개씩, 총 42개의 원형 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형 창 안에는 하늘로 비상( 飛 上 )하는 학과 구름을, 그 바깥에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학을 구름과 함께 새겨 넣어, 학의 움직임이 서로 사방으로 교차하는 형상이다. 자칫 평면적이고 단조로울 수 있는 기면( 器 面 )을 효과적 배치로 확장시켜 깊이감과 아울러 입체감까지 더했다. 이처럼 정밀하게 계산된 듯한 문양의 구성과 배치는 고려의 또 다른 공예 기법인 나전칠기( 螺 鈿 漆 器 )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한 장식에 머물지 않고 팽창감과 안정된 비례를 준 기법에서 고려인의 치밀함과 재기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도자기에서 몸체를 파내어 다른 색 흙을 메워 넣는 기법인 상감( 象 嵌 )은 이미 중국 당나라(7~9세기) 때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흙을 사용하여 상감한 것은 고려만의 특기였다. 다른 성질의 흙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상감 기법은 빚는 과정에서도 까다롭지만, 흙마다 수축 팽창률이 서로 달라 불에 굽

50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45 고 식히는 동안 기면이 파이거나 튀어나와 완제품을 얻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은 얕은 상감으로 요변( 窯 變 )을 최대한 줄이는 기 법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2. 고려의 운학, 상서로움의 표시 구름과 학은 무슨 의미였을까? 왜 그들은 도자기에 구름과 학을 저토록 자주 그려 넣었을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구름과 학은 길상( 吉 祥 )을 상징한다. 일부 중국 회 화에 나타나는 학 그림은 고려청자의 운학문 장식과 매우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휘종( 徽 宗, 1082~1135) 등이 그렸다고 하는 서학도( 瑞 鶴 圖 ) 가 그렇다. 1112년 정월 어느 날 갑자기 황도 변경( 卞 京 )의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학들이 무리지어 궁전 위로 날아들어 한참 동안 머물자, 휘종은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서학도>에는 궁정 지붕 위로 열여덟 마리의 학이 여러 모습으로 날고, 두 마리는 지붕 양끝에 앉아 있다. 다른 배경 없이 구름 위로 날고 있는 학들 가운데, 날개를 펼치고 다리를 수평으로 쭉 뻗어 나는 모습은, 고려청자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학과 비교된다. 하늘을 나는 학은 중국 고대 부터 선정( 善 政 )의 상징으로 활용되어왔기에, 중국 송 황실도 이를 통해 의장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선학( 仙 鶴 )의 이미지는 상서( 祥 瑞 )로움으로 가시화되었다. 구름 사이를 나는 운학과는 다르지만 하북성 선화( 宣 化 ) 지역에서는 요( 遼 )나라 시대 무덤이 여러 기 발굴되었다. 거란의 상류층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무덤들이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엽에 조성된 이 무덤 벽화들에는 그들의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학( 鶴 )이 그려져 있다. 장광정 묘(1093), 장문조 묘(1093) 등에는 물풀과 붉은 꽃 사이로 노니는 학이 그려졌고, 6호 묘 후실 서남 벽화에는 물풀과 꽃 사이에서 부리로 땅을 쪼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장세고 묘(1117)에는 병풍 같은 화면에 꽃과 새들이 있는데, 그중 학은 괴석이나 꽃 등과 함께 그려졌다. 물론 요대( 遼 代 ) 벽화에 그려진 다양한 자세의 학들과, 여백이 넓은 화면 위에 구름과 학으로 이루 어진 고려청자의 운학문을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그러나 11세기 전반기에 매장이 이루어진 요나라의 진국( 陳 國 )공주와 부마 합장묘 전실( 前 室 ) 동벽과 서벽 상단에는 각각 운학문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고, 최근 발굴 성과가 알려진 요령성( 遼 寧 省 ) 서 북부 부신( 阜 新 )의 몽골 자치현 관산( 關 山 ) 지역의 요대 무덤에서도 선명하고 상세 한 운학문이 문의 윗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운학문이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이 밖에 송 원대 도자기, 남송대 금속기 등에서도 운학문 장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동안 고려의 맑은 하늘과 고려인의 고운 심성에 종종 비유되곤 했던 청자 운학문은 다른 무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 속에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 도자기에서 구름과 학이 어우러진 운학문을 찾기는 어렵다. 송대 자주요( 磁 州 窯 )에서는 장식 문양의 하나로 학 그림이 사용되기는 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거나, 물가에 학이 서 있는 장면이 도자기, 베개 등에서 보이기는 하나 그 수가 많지 않다. 송대 요주요( 耀 州 蓔 ) 청자완에는 각화( 刻 畵 ) 기법으로 입에 무엇인 가를 물고 있는 쌍학이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흔히 발견되는 무늬가 아니다. 더구나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함조문( 銜 鳥 文 ) 혹은 색조문( 咋 鳥 文 )과 관 련이 있을 수도 있다. 중국 송대 이래 학에 대한 상징이 굳건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에 학 무늬가 즐겨 사용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직접 적으로 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느 일정 시기에 중국에서 회화나 도안 등으로 전래된 운학의 이미지가 고려를 통해 굳건히 그리고 널리 자리 잡게 된 것 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운학이 청자에 빈번하게 그려진 점은 고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 조선으로 계승된 운학문 그래서였을까? 운학문은 흥미롭게도 조선 초까지도 청자의 장식 소재로 애용되었다. 상감 운학문은 일일이 조각하는 방법 외에도, 학이나 구름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찍고 그 부위를 메우는 인화( 印 花 ) 기법 위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보니 바람 위로 꼬리를 끌며 풍성하게 나는 구름은 그저 동글동글한 구슬더미나 빗방울처럼 바뀌었고, 하늘을 가르는 학의 수려한 날개와 늘씬한 다리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변해갔다. 전성기 운학문에서 볼 수 있는 치밀한 조각 솜씨나 사실적 세부 표현은 생략되거나 점차 무뎌졌다. 하지만 상감 장식이 중요한 문양으로 비중 있게 취급된 것은 여전 했다. 조선왕실의 백자 위주 사용 정책으로 청자는 급속한 변화를 맞지만, 가마터나 생활 유적 등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소량이 지만 청자가 제작되었고, 때로는 외국산 청자들이 수입되기도 했다. 조선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관심을 표현한 글이나 수장의 자료는 대체로 18세기 이후의 역사서와 문집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이후로 증가한다.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 고려청자는 격조 있고 깊이 있는 고급 물건, 혹은 사사로움이 끼

52 고려의 영원한 초상, 운학문 청자 47 어들 수 없는 진품 등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고려 사적이 기록된 역사 서나 문집 같은 텍스트를 통한 이해와, 전해지는 실물에의 경험이 합해져 일정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지 싶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서적과 문물이 급속히 전래 되는 조선후기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고려 관련 기록들에 관심이 촉발되어 고려청자의 이미지가 확고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4. 조선의 문인들이 본 운학문 청자 조선의 기록에서 우리는 고려의 운학문 청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조선후기 성 해응( 成 海 應, 1760~1839)의 문집인 연경재 전집( 硏 經 齋 全 集 ) 에는 고려말의 유 학자 안향( 安 珦, 1243~1306)의 개성 옛 집터에서 얻게 된 한 말들이의 청자 항아 리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성해응은 1788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후 각종 편찬 사업에 종사한 인물로, 당시 그와 교유한 사람들 가운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같은 북학파 인사들이 있었다.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 포천에 머물며 연구와 저술을 지속하였는데, 이 기간에 정조의 명에 따라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성해응이 이 항아리의 용도와 크기 등을 서술하며 의례용기로서 쓰임이 법도와 격 식에 맞다고도 했다. 흥미롭게도 성해응이 기록한 이 청자 항아리에 대한 세세한 형상은 조선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화동옥삼편( 華 東 玉 糝 編 ) 고려기( 高 麗 器 ) 에 나타나 있다. 또 항아리를 빌려간 신위( 申 緯 )도 그 내용을 글로 남겼다. 결국 고려말 안향의 집에 있었던 운학문 청자 항아리는 나중에 심상규( 沈 象 奎 )의 집에 전세되어 보관되어왔으며, 이를 다시 자하 ( 紫 霞 ) 신위가 8년이나 가져다 쓰고 되돌려주었는데, 이유원이 그것을 본 것이다. 심상규와 성해응, 이유원, 신위가 함께 살아 있던 기간은 1814년부터 1838년 사이 이고, 특히 1845년에 죽은 신위가 8년간 지니다 심상규에게 돌려주었다면, 19세기 전반에 일어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항아리의 문양을 설명하면서 여섯 마리 학과 열여덟 송이의 구름으로 장식되었다고 하니 운학문이 그려진 매병을 설명하는 내용이라 추정된다. 현전하는 유물들 가운데 이와 비슷한 사례를 살펴보면,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운학문 매병이나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운학문 매병 등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이 그중 가장 비슷하다. 임하필기 벽려신지( 薜 荔 新 志 ) 에는 일본 사람들은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값을 아끼지 않는다. ( ) 옛 무덤을 파고들어 가다가 왕릉에서 옥대( 玉 帶 )를 발굴

5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하고 또 운학( 雲 鶴 )이 그려진 자기 반상기 한 벌을 발굴하였는데, 값이 700금( 金 )이나 되었다 라는 대목도 나온다. 운학문 자기를 발굴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갑신년( 甲 申 年 )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 것과 그의 문집이 출간된 시기를 가늠하면 19세기 전반기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학문 청 자가 이미 일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5. 영원한 고려의 초상으로 근대기에 청자 수집의 열풍이 불었고,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68호 매병도 그때 세상에 알려졌다. 이 매병이 주인을 찾게 된 것은 1935년, 간송( 澗 松 ) 전형필( 全 鎣 弼, 1906~1962)이 30세 때의 일이다. 야마모토에 의한 최우의 무덤 도굴로 세상에 나오게 된 이 매병은 고려청자 거간으로 유명했던 스즈키 다케오( 鈴 木 武 雄 ), 대구의 수집가 신창재( 愼 昌 宰 )를 거쳐 다시 경성의 골동품상 마에다 마치로( 前 田 才 一 郞 )에 게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골동상인 신보기조( 新 保 喜 三 )에 의해 간송에게 이 매병이 소개된 것이다. 명품을 알아본 간송은 망설임 없이 2만 원(당시 경성의 8칸짜리 기 와집 20채 값, 현재 서울의 집값을 평균 3억이라 한다면 그 20배 정도로 추정)을 지불하고 소장하게 되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망국 과 도굴과 전란의 고단한 세월을 견딘 끝에 세상의 빛을 받은 것이다.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고려식 청자는 끊임없이 재현되었다. 특히 일본 자본으로 세워진 한양고려소( 漢 陽 高 麗 燒 ), 삼화고려소( 三 和 高 麗 燒 ) 등 청자 재현 공장에서 운학문이 새겨진 상품들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한국인으로 개성에서 공방을 연 도공 황인춘( 黃 仁 春, )이 운학문 상감 청자 제품을 만들어내면서 그 전 통은 현대로 이어졌다.

54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서 윤 경 (한국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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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51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목 차 1. 서론 2. 고구려 고분유형과 전개과정 3.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 및 시대적 특징 4. 고구려 회화의 미적 특질 및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5. 결론 1. 서론 고구려 고분벽화는 4 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 회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동아시아 최대의 벽화고분군을 이룬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은 중국 집안과 환인지역의 38기와, 북한 평양과 안악지역의 82기 등 총 120기에 이른다. 1) 고분벽화에는 고분 주인의 초상화, 인물화, 산수화, 수렵도, 행렬도, 기타 생활풍속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들과 불교와 신선사상을 포함한 도교 등 종교사상과 관련된 도상, 그리고 천계, 천상을 표현하는 신화적 존재 및 상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에 고분벽화는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현실적인 고증자료로, 또한 인생관, 우주관 및 내세관을 비롯한 상장관념과 예제문화의 산물로 다뤄졌다. 더욱이 동아시아 고대 회화사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시기 타 지역에서 전개되던 회화의 양상과 비견해 높은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와 위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고구려 전반의 고분유형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구조와 회화의 제재 및 시대적인 특징 등을 유추해본다. 아울러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한 미적 특질과 고분벽화에 반영된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논의하고자 한다. 1) 정호섭, 高 句 麗 古 墳 의 造 營 과 祭 儀, 서경문화사(2011), pp. 104~116 참조.

5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2. 고구려 고분유형과 전개과정 고구려 고분은 중국 집안지역과 북한 등지에 총 13,000여 기에 달하고 있다. 이 러한 고구려의 고분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 積 石 塚 )과, 굴식 돌방무덤에 흙을 덮은 봉토무덤( 石 室 封 土 墳 )으로 분류된다. 돌무지무덤은 다시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또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구분된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고유의 묘제로, 고구려의 전 중기를 대표하며,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 독로강 및 대동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압록강 유역의 중국 길 림성 집안지역에는 1만 여기 이상의 돌무지무덤이 확인되었다. 대형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은 장군총으로 대표되는데,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계단을 쌓아 7층을 올렸다. 밑바닥은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는 34m, 높이는 13m이다. 사각형의 한 면에는 각기 큰 돌을 4개씩 모두 16개의 호석을 기대어 놓았다. 쌓아 올린 장대석들은 모두 1,100여 개에 달하며, 무덤의 내부는 석실로 축조되었다. 이러한 대형의 기단식 돌 무지무덤은 입지나 규모, 여러 가지 묘역 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왕릉급이거나 최상위 지배층의 고분으로 평가된다. 굴식 돌방무덤에 흙을 덮은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평양지역에서 출현하였으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에서 동일하게 지배층의 주된 묘제로 축조되고 있다. 지상이나 반지하에 연도가 딸린 돌방( 石 室 )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있는데( 封 土 ), 주로 횡혈식 구조로 이루어져 도굴을 많이 당했지만, 내부의 묘실에 벽화가 남겨져 고분벽화의 기본적인 무덤 구조를 이룬다. 이들 벽화고분은 중국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은 묘제로 동양의 보편적인 사상인 천원 지방( 天 圓 地 方 )의 원리에 입각해 천정부는 하늘을 상징하여 고임돌을 응용한 둥근 궁륭형으로, 현실은 방형으로 이루어졌다. 굴식 돌방무덤은 묘실의 구조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뉘는데, 다실분, 이실분, 단실분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다실분으로는 안악3호분, 요동성총 등이 대표적이다. 이실분은 전실과 현실로 구성된 고분이 기본형이며, 장천1호분, 덕흥리고분,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등이 대표적이다. 단실분은 연도에 독립된 현실이 있는 형태로 통구 사신총, 오회분 4,5호묘, 수산리벽화분, 개마총,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 다수의 벽화 고분 등이 해당된다.

58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 및 시대적 특징 고구려 고분벽화는 회화의 주제를 통해서 시기별 전개과정을 나누어볼 수 있다. 2) 일반적으로 초기-중기-후기로 구분되는데, 초기는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 묘주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한 실내생활의 제재와 행렬도, 배례도 등 행사 및 생전의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그림이 그려졌다. 중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인물과 생활풍속의 장면에, 불교의 전파 이후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연화화생도, 예불도 등 불교적 주제의 내용과 연꽃 장식무늬, 천상을 표현하는 별자리, 도교적 성격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진 사신도( 四 神 圖 )가 독자적으로 혹은 뒤섞여 그 려진 시기이다. 후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으로, 도교사상의 주제인 사신도가 사실상 벽화의 유일한 주제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보이는 고 분벽화 가운데 대표적인 고분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은 묵서 기록에 의해 영화( 永 和 ) 13년 (357)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어 기년명이 있는 벽화고분의 가장 이른 예로 주목된다. 또한 묵서에는 동수( 冬 壽 ) 라는 인물이 69세의 나이로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주인공에 대해 학계에서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석실봉토벽화고분으로, 널길과 앞방, 좌우 곁방, 널방 그리고 널방을 ㄱ 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회랑으로 구성된 다실묘로 구성되었는데, 천장과 각 방의 벽면은 인물과 풍속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벽화들로 채워졌다. 그 가운데 무덤주인공 부부의 모습과 웅장하고 생동감있게 표현된 행렬도는 초기 고분벽화의 대표적인 회화로 알 려졌다. 이밖에도 방앗간, 우물, 부엌, 고깃간, 차고, 외양간, 마구간, 의장대열 등의 벽화는 4세기 중반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발견된 덕흥리 벽화고분은 벽화의 상태가 양호하고, 다양한 화면구성 그리고 영락( 永 樂 ) 18년(408)을 포함한 600여 자의 명문이 전해져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벽화무덤이다. 연도와 전실, 현실이 갖추어진 이실묘로 구성되었으며, 천정부는 높은 궁륭평행고임식으로 마무리되었다. 무덤의 앞칸에는 무덤주인인 진( 鎭 )의 초상화와 정사도, 유주 13군의 태수 배례도, 행렬도, 막부관리도 등이 있으며, 전실과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의 서벽에는 묘주행차도가, 2) 고구려 고분벽화에 관한 주요 논고는 김용준, 고구려고분벽화연구 (1958); 김원룡, 한국벽화고분 (1980); 강현숙, 高 句 麗 古 墳 硏 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1999); 손수호, 고구려고분연구 (2001); 전호태, 고구려고분벽화연구 (2000); 정호섭, 高 句 麗 古 墳 의 造 營 과 祭 儀,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9) 등을 참조. 사진자료는 조선유적유물도감간행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990) 참조.

5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동벽에는 우차를 탄 부인의 행차도가 호화스럽게 묘사되었다. 현실로 들어서면 북 벽에 무덤주인의 또 다른 초상화를 만날 수 있는데, 주인의 오른편에 비어있는 공 간은 주인의 부인을 위한 자리로 추정된다. 천정부에는 수렵도와 해, 달, 별, 견우와 직녀, 신선, 옥녀, 상서로운 짐승 등 천상의 존재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특히 수 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기마무사들이 말을 타고 사냥하는 박진감 있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인물과 생활풍속을 주제로 하면서 불교계와 도교계의 주 제와 장식문양이 점차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중기로 접어드는데, 대표적인 고분은 평양지역의 약수리고분, 쌍영총, 수산리고분, 감신총 등이 있으며, 집안지역의 각저총, 무용총, 장천1호분 등을 들 수 있다. 평양지역의 약수리고분은 연도와 전실, 전실 옆에 동서의 감실과 현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정은 궁륭형의 삼각고임식이다. 벽화는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초기의 예로서, 인물풍속도에는 주인공의 생전의 중요한 생활장면을 그린 대형의 수렵도와 행렬도가 있다. 그 밖에도 별자리, 구름무늬 등 풍부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내세관과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쌍영 총은 대표적인 중기 벽화고분으로 말각조정의 천정구조에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진 무덤 구조이다. 전실과 현실 사이에 독특하게 두 개의 팔각기둥이 있어 쌍영총이라 일컫는다. 벽화의 내용은 묘주부부상, 생활풍속에 사신도가 함께 그려졌고, 불교적 소재의 연화문, 화염문, 공양행렬도 등은 당시의 불교계가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수 산리고분은 연도가 있는 단실묘이다. 벽화는 묘주상과 행렬도 및 기예도 등이 그려 졌으며 입구인 연도에는 수문장을 배치하였다. 벽화는 힘이 있으면서도 간결한 고 구려 화풍을 잘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우아한 기법으로 인물상을 표 현하고 있는데, 특히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우아한 복장의 여성상은 일본 다카마츠 고분[ 高 松 塚 ]의 여인도와 유사하여 양국의 교류를 짐작케 한다. 집안지역의 각저총은 유명한 씨름도가 있는 무덤으로 각저총이란 명칭도 이 그림 에서 유래했다. 무덤 구조는 전실과 현실 두 칸이며, 특히 전실과 현실의 벽면에 가 지가 우거진 거대한 나무들은 당시 수목의 표현을 잘 보여준다. 벽화 내용은 장막이 드리워진 실내를 배경으로 묘주 부부의 생활도가 있으며, 현실 남벽에 씨름 장면을 표현했는데 당시 씨름 행사는 고구려의 인기있는 운동종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장례의식이었다고 한다. 무용총은 각저총과 나란히 축조되었으며, 이실묘의 구조이다. 벽화는 승려로 보이는 손님을 접대하는 묘주생활도, 말 탄 인물들이 질주하며 사냥 하는 장면을 표현한 수렵도, 가무를 즐기는 연회의 장면이 대표되는데, 화면 전체에 운동감과 긴박감이 실감나게 표현된 수렵도와 흥겨운 춤사위와 연주가 흐르는 무용

60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55 도는 고구려 벽화의 백미로 꼽힌다. 장천1호분은 연화를 비롯한 각종 무늬와 가무, 씨름, 출행, 곡예, 사냥장면 등 다채로운 생활상, 수렵도, 비천과 보살, 불상 예배도, 사신도, 문지기상 등 다양한 제재의 장면들이 표현되어 고구려 문화와 풍속을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 중 유일한 예불도는 선정인( 禪 定 印 )의 수인 ( 手 印 )에 양옆에 사자가 있는 대좌 위에 앉아있는 불상을 표현하고 있어 초기 불상의 형식을 알려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후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시기로, 벽화는 다듬어진 돌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 평양지역의 강서대 묘와 강서중묘, 집안지역의 통구사신총, 오회분 4,5호묘가 대표된다. 강서대묘는 고구려 후기벽화를 대표하는 고분으로, 화강암으로 올려진 묘실 위에 석회와 진흙을 번갈아 다져 봉분을 올렸다. 묘실 네 벽에는 뛰어난 상상력과 유연 하고 힘찬 필치로 사신도가 표현되었다. 통구 사신총은 다양한 장식문양과 천상세계의 각종 선인들을 표현하였으며, 묘실은 사신도가 주제로 그려져 후기의 회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오회분 4,5호묘는 말각조정의 단실묘로,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이 서로 흡사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4호묘 네 벽면의 주제는 사신이며, 천정 에는 해와 달, 별자리 외에 해신과 달신을 비롯해 불의 신, 농사의 신, 대장장이 신, 수레바퀴의 신, 숫돌의 신 등 여러 종류의 문명신과 악기를 다루는 천인들이 등장 한다. 화면 전체는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으며, 환상적인 천상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4. 고구려 회화의 미적 특질 및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고구려 고분벽화는 4세기경부터 7세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고대사회의 여러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벽화의 내용은 묘주를 포함한 인물과 생활풍속 가운데 묘주의 공적, 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장면과 풍요로움이 사후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주제들을 표현하였다. 또한 영혼의 승천으로 내세의 영생을 구했던 사후관과 세계 관이 천상의 각종 선인과 불교계의 주제 및 장식문양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벽화는 주로 무덤 안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특히 고구려 특유의 강한 기상과 국제적 감각을 발휘한 힘차면서도 활달한 화풍이 단연 돋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묘주상은 고대 동아시아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특질을

6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보인다. 후한 말기부터 고분벽화의 핵심 제재로 등장한 묘주상은 대부분 장막 안의 평상 위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단독 좌상으로 그려졌으며, 엄숙하거나 근엄한 신 상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주변의 시립한 인물들은 주인공에 비해 작게 묘사되어 고대 인물화 특유의 위계묘사법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게 표현되어 대상 인물을 닮게 나타내는 초상화의 특성은 아직 발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벽화 초기의 회화양식은 주로 중국 동북지역 요양지방의 전통과 결부되어 논의되고 있다. 또한 대규모의 행렬도 형식은 후한시대 고분에서 자주 표현되던 것으로 중국 화북지역, 산동지역과의 영향관계가 간취된다. 중국 지역 과의 영향관계 이외에,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산악문과 수목문 등의 산수 화적인 모티프, 특히 고구려에서 발전하게 되는 수렵장면 등은 초기부터 활기찬 묘 사를 보여주고 있어 고구려의 기질을 잘 나타낸다. 중기 이후 표현되는 생활풍속계의 장면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인물과 복식 및 활 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이 비교적 길거나 턱이 둥글게 생긴 용모, 점무늬의 좌임 ( 左 袵 ) 저고리와 바지 및 색동 주름치마, 새 깃털을 꽂은 관모 등은 고구려 고유의 복식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의 공식적인 기마행렬도 대신 소규모의 병렬식 출행도가 등장하고, 풍속 장면도 무용도, 씨름도 등 내용이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졌다. 연화 화생상과 비천, 불상을 예배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등 불교적인 모티프가 증가하기도 한다. 말을 타고 달리며 뒤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파르티안샷( 安 息 騎 射 法 )으로 사냥 하는 모습, 악무상과 함께 갖가지 묘기로 곡예하는 백희잡기, 눈이 깊고 코가 우뚝 한 특징의 심목고비상( 深 目 高 鼻 像 ) 서역인 모습 등은 고구려의 문화가 한반도 안에 안주하던 것이 아니라, 서역까지도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후기의 선인상은 도교의 대두로 다양하게 다루어졌는데, 해와 달을 머리 위로 든 복희와 여와형의 남신과 여신을 비롯하여 불의 신 축융이나 야장신, 제륜신과 같은 신화 속의 선인들이 우아하고 세련되게 묘사되었다. 특히 후기 벽화의 대표적인 주 제인 사신도는 뱀과 거북이 서로 휘감으며 팽팽하게 긴장하는 움직임을 연출하기도 하며, 백호와 청룡을 묘사함에 주변의 율동적인 운기문들을 어우러지게 표현하여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벽화장면을 통해 고구려의 세련되고 정 교한 예술수준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유려하고 역동감이 넘치는 고구려의 힘찬 기상을 확인할 수 있다.

62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결론 고구려가 동아시아 고대문화를 선도하였음은 동시기 타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 한강 유역에 분포하는 백제의 적석총이나 신라 영역에서 확인되는 벽화고분과 석실 축조방법 및 각종 부장품 등은 고구려의 고분에서 선도적인 양식을 찾을 수 있어 삼국 문화에서의 고구려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일본의 아 스카시대 고분 문화에 끼친 영향은 벽화분에서 언급된다. 일본의 다카마츠벽화분에 묘사된 여인의 긴 주름치마는 수산리벽화분이나 쌍영총벽화분의 주름치마와 비슷하게 묘사되었고, 키토라벽화분의 사신은 고구려의 사신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북위시대의 벽화고분에서도 고구려의 벽 화양식과 비슷한 회화가 간취되어,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관계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즉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 동아시아의 사회와 문화의 제양상을 말해주는 실 증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에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당 위성을 확인하게 되며,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 구조사를 지속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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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 홍 대 한 (숙명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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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61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 목 차 1. 石 塔 造 成 4를 통해 본 건립목적 2. 附 元 勢 力 에 의한 석탑건립 3. 고려석탑의 유형과 양식 4. 경천사 십층석탑과 라마양식 석탑건립 5. 경천사 십층석탑과 문화재 보호 1. 石 塔 造 成 記 를 통해 본 건립목적 삼국과 통일신라 석탑건립은 처음 국가중심으로 시작해, 왕실, 승려 등으로 분화가 이루어졌다. 고려석탑은 조성기를 통해 통일신라 보다 건립세력이 다양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692년 최초의 원탑인 황복사 삼층석탑이 건립된 이래 9세기 초까지 왕실 중심의 원탑건립이 지속되는 반면, 9세기 중엽에 이르면 원탑건립이 감소하면서, 국가태평 기원이 중심 내용을 차지하게 된다. 표 1은 고려시대 석탑의 조성 기록을 건립목적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왕위계승문 제로 인한 중앙정부 혼란, 거란의 침략에 따른 위협과 民 의 피해, 원 간섭기간 새롭게 나타난 원 황실 추복을 위한 석탑건립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석탑은 부처의 묘탑이라는 종교적 기능 외에도, 부처에 의탁해 현실의 고통과 혼란을 극복하려던 목적에 따라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분 명칭 제작시기 비고 Ⅰ 중앙 정부 혼란기 佛 國 寺 三 層 石 塔 墨 書 紙 片 948년( 靖 宗 4), 1013년( 顯 宗 15) 重 修 4, 形 止 4 金 山 寺 五 層 石 塔 979년( 景 宗 4) ~ 982년( 成 宗 1) 金 山 寺 重 創 4 芝 峴 里 三 層 石 塔 991년( 成 宗 10) 국가태평 統 和 銘 安 城 長 命 寺 石 塔 誌 997년( 成 宗 16) 국태민안, 香 徒

6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구분 명칭 제작시기 비고 東 臺 塔 誌 石 1005년( 穆 宗 8) / 1508년( 正 德 3) 승려발원 聖 楓 寺 址 五 層 石 塔 1009년( 穆 宗 12) 戶 長, 국가, 朝 野 開 心 寺 址 五 層 石 塔 1010년( 顯 宗 1) 추정 僧 俗 娘, 光 軍, 香 徒 Ⅱ 거란 침락기 Ⅲ 원 간섭기 興 國 寺 址 多 層 石 塔 1021년( 顯 宗 12) 강감찬, 국가태평 高 興 上 林 里 三 層 石 塔 1021년( 顯 宗 12) 국가, 국왕, 불법 獅 子 頻 迅 寺 址 四 獅 子 石 塔 1022년( 顯 宗 13) 국왕축수, 국가태평 淨 兜 寺 址 五 層 石 塔 1031년( 顯 宗 22) 국가태평, 전쟁종식, 形 止 4 普 賢 寺 九 層 石 塔 1044년( 靖 宗 10) 황제칭송, 國 泰 民 安 小 台 里 五 層 石 塔 1109년( 睿 宗 4) 황룡사 출신 승려 長 岬 寺 靑 石 塔 1162년( 毅 宗 16) 왕실추복, 승려창건 開 天 寺 石 塔 1214년( 高 宗 1) 廣 陵 候 沔 新 光 寺 五 層 石 塔 1342년( 忠 惠 王 복위 3) 敬 天 寺 址 十 層 石 塔 1348년( 忠 穆 王 4) 원황실 추복 (표1. 조성 기록을 남긴 석탑의 시기별 건립 목적) 표1에 기재된 주된 건립목적은 국가태평, 국태민안과 같이 국가의 안녕 기원이다. Ⅰ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光 宗 과 景 宗 의 왕권강화를 거쳐 成 宗 때 체제정비가 본격적 으로 정착되고 관료중심의 귀족층이 형성됨으로써 고려시대 지배구조의 기본 틀이 완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성 기록을 갖춘 석탑이 成 宗 때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지방통제와 밀접한 관련을 시사한다. 성종 2년(982) 12 牧 에 外 官 파견을 계기로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으로 침투되기 시작한다. 지방관의 파견은 재지 호족의 재편을 가져왔는데, 일부는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한 사례도 있으나 대부분 鄕 吏 로 격하되면서 종래의 독자적 지위를 상실했다. 戶 長 과 副 戶 長 등의 鄕 吏 職 制 가 마련된 것 역시 성종 2년 외관 파견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 점은 성종 때에 이르러 호족들의 지위와 성격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반영 한다.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경주 출신의 육두품 계통이 주류를 형성 하고, 일부 후백제 출신들이 가세하는 형국이었다. 이들은 성종에게 정치이념을 제공 해주고 중요 정책결정에 참여했다. 1) 당시 지배적 지위를 누렸지만 본래부터 신라는 1) 이기백(1974), 高 麗 成 宗 代 政 治 的 支 配 勢 力 - 慶 州, 羅 州 地 方 출신의 儒 學 者 들과 近 畿 地 方 출신의 豪 族 系 官 b들, 韓 國 史 4, 국사편찬위원회, pp. 169~170.

68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63 평화적으로 고려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구 신라계 출신들은 줄곧 후대를 받았으며 정치, 사회적 진출에 있어서도 유리했다. 성종 때 건립된 석탑의 위치를 보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인 반면 구 신라지역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성종 2년의 지배체제 정비가 1차적으로 구 신라지역을 제외한 구 백제와 개경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방 세력들이 석탑을 건립하고 국가와 국왕의 축수를 기원한 조성 기록을 남긴 이유는 약해진 호족 들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Ⅰ기 석탑의 조성은 지방제 도의 정비에 따라 호족층이 중앙정부의 통제에 흡수되는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Ⅱ기 석탑은 穆 宗 2회, 顯 宗 5회, 靖 宗 1회, 睿 宗 1회에 걸쳐 건립되었는데, 현종 때 집중되고 있다. 이 시기는 成 宗 12년(993)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顯 宗 원년 2차 침입을 거쳐 현종 10년(1019) 3차 침입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현종은 즉위 2년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몽진 길에서 겪은 지방 통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향리제 도와 삼성육부를 근시기구를 중심으로 개편함으로써 내치에 전력했다. 현종은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는 등 호불정책을 추진했다. 현종 22년 건립된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국가태평과 전쟁종식을 목적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때는 거란 과의 전쟁이 끝난 시기로 終 戰 을 기념하고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방 民 들의 염원을 담은 일종의 승전기념탑의 성격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사지 오층석탑의 발원 내용은 국가, 長 吏, 郡 內, 老 少 男 女 百 姓 의 세 입장으로 구분된다. 국가에 대해서는 覇 業 과 기틀이 길이 흥성하고 안정되어 오랫동안 보존 되며 국왕의 수명이 더하기를 기원하였다. 장리들에 대해서는 재앙에 들지 않고 福 壽 가 불어서 곳곳마다 모두 좋아하고 사람마다 業 을 즐기며 이웃 나라의 군대는 빨리 멸망하고 위로 나라가 더욱 편안해서 백곡이 풍년들고 萬 民 이 和 樂 太 平 하기를 기원 했다. 군내 남녀노소백성들은 오래 살고 수명을 더하며 복을 받고 재앙이 사라져서 길이 편안함을 보존하고 항상 즐겁게 지내기를 기원하였다. 내용상 원문의 내용은 長 吏 에게 있음이 분명한데, 장리층이 국가와 民 사이의 매개적 역할 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책임지는 위치로서 부각되었다. 현종 때 불사증가와 지방에서의 석탑건립이 늘어난 것과 관련해 연등회와 팔관회의 부활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양 행사는 중앙집권적 입장과 지방 호족들의 분 권적 성향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었음을 의미한다. 거란의 침입이라는 위기 앞에서 지방과 중앙을 떠난 고려라는 공동체적 일체감은 이러한 갈등을 해소시키는 타협점을 찾게 만들었다. 당시 중앙과 지방 사이의 갈등해소는 군사권은 중앙정부에 돌리고 농경을 비롯한 대민관계의 소관사는 지방호족에게 맡겨지는 형식의 타협을 통해 해 소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성종 6년 이후 폐지되었던 팔관, 연등회의 부활은 중앙

6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정부와 지방 사이의 갈등해소를 가져왔으며 현종 때 지방민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는 빈번한 왕실축수 목적의 불사경영의 배경이 되었다. 이상 살펴 본 현종 때의 정치상황은 앞서 전개되었던 왕위계승,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작업,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기인한 국가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 결과 통일신라 원탑의 발원내용인 국왕과 왕실의 추복 보다는 국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석탑이 건립되었다. 고려시대 석탑건립 목적이 정치상황과 연계되어 있음은 현종 때까지 지속되던 석탑 조성 기록이 睿 宗 때에 이르러 단절되는 상황을 통해 입증된다. 즉 현종 10년을 끝으로 외적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고, 국 정의 안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Ⅲ기 석탑은 장갑사와 개천사 석탑의 조성기록을 통해 왕실발원 석탑건립을 알 수 있다. 睿 宗 이 1122년 4월 사망 후 李 資 謙 에 의해 仁 宗 이 즉위하지만 비리와 왕 권도전을 빌미로 숙청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 결과 난을 일으킨다. 仁 宗 13년 (1135)에는 西 京 에서 妙 淸 이 난을 일으키는 등 현종 이후 안정된 왕권이 위협받고, 중앙귀족 역시 분열양상을 보였다. 더욱이 毅 宗 24년(1170)에 발생한 무신 난은 왕 권을 지탱하던 문신 중심의 문벌귀족사회를 와해시키게 되었다. 1170년 반란을 통해 집권한 무신정권은 元 宗 11년(1270)까지 지속되는데 崔 忠 獻 은 明 宗 과 熙 宗 두 왕을 폐하고 神 宗 과 熙 宗, 康 宗, 高 宗 네 왕을 옹립하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 2) 따라서 왕권은 무력화되고 지방 지배구조 역시 무신정권에 좌우되는 등 중앙지배체제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을 보인다. 毅 宗 과 高 宗 때 건립된 왕실발원의 석탑건립은 왕권강화를 기원하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장갑사 청석탑의 경우 왕실의 후원을 받던 불교 승려에 의해 오직 왕실추복만을 목적 으로 건립되었다. 무신집권기 지방 세력에 의한 석탑건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배경에 대해서는 무신 들의 토지겸병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무신들은 전국에 걸쳐 農 場 이라는 새로운 토지소유 체제를 형성하였는데, 3) 농장에 소속된 토지는 강점에 의해 확보되었다. 4) 따라서 현종 이후 중앙정부에 귀속된 향리세력과의 마찰이 불가피했으며, 동시에 토지 탈점으로 인한 지방민에 대한 수탈은 지방 세력과 무신정권간의 대립을 불러 왔다. 무신집권기간 발생한 수많은 반란은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석탑건립을 매개로 한 중앙과 지방의 연계는 불가능했고 무신정권기간을 거치 2) 최당택(1986), 高 麗 崔 氏 武 人 政 權 과 國 王, 韓 國 學 報 42, pp. 214~217. 3) 송병기(1969), 高 麗 時 代 의 農 場 - 12 世 紀 以 後 를 中 心 으로, 韓 國 史 硏 究 3, pp. 15~16. 4) 有 井 智 德 (1985), 高 麗 朝 における 土 地 奪 占 について, 高 麗 李 朝 史 の 硏 究, 東 京 ; 國 書 刊 行 會.

70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65 면서 석탑건립의 양적 감소와 규모의 축소를 가져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Ⅲ기 석탑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14세기는 高 宗 18년 몽고군의 대대적인 침략이 개시되면서 또다시 전쟁으로 인한 공포에 시달렸다. 고려는 오랜 기간에 걸친 몽고 와의 전쟁관계를 청산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 였으나, 원의 지속적인 간섭으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된다. 5) 충렬왕 이후 신광사와 경천사 십층석탑은 원 황실에 예속된 상황에서 건립된 석탑으로 이전까지 건립목적 으로 제시되던 고려국왕의 축수와 왕실추복, 국태민안 등의 내용이 원 황실로 발원 대상이 바뀌었다. 경천사 석탑은 원 황실을 추복하기 위해 부원배가 건립과정에 주 동적으로 참여했다. 동시에 고려와 원 황실의 지원이 이루어졌는데 양국의 인척관 계를 고려한다면 일종의 왕실 발원탑으로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원 황실과 관련된 석탑건립은 고려 말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지만, 고려 시대 석탑건립이 단순히 발원자의 개인적인 목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정치상 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또한 신광사 오층석탑은 조성기 를 남긴 석탑 중 유일하게 별도의 조성목적을 기재하지 않고 건립 시기만을 기록했 는데, 신광사가 원나라 順 帝 의 발원으로 창건된 것을 고려한다면 경천사 석탑과 같 이 원 황실을 추복하기 위해 건립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 건립으로 추정되 는 석탑 중에는 조성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지만 원 황실 추복을 위해 건립된 석탑 이 있을 수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광사와 경천사 십층석탑의 위치는 개경과 인접한 서해안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곳은 예성강과 연결된 서해를 통해 해상으로 중국과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며, 동시에 원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할 때 거치게 되는 벽란도가 위치해 있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표면적으론 원 황실을 추복하기 위한 목적 으로 이들 석탑이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에는 고려 내륙 깊숙이 라마교 석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고려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5) 고익진(1973), 元 과의 關 係 의 變 遷, 韓 國 史 7, 국사편찬위원회, pp. 390~401.

7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2. 附 元 勢 力 에 의한 석탑건립 신광사는 태조 6년(923) 창건 이후 현종, 문종, 숙종이 차례로 방문하였고 이 때 나한과 관련된 재가 개설되었다. 신광사사적비문에 의하면 충숙왕 복위 2년(1333) 원 順 帝 가 원찰로 삼아 원나라에서 직접 공장을 파견해 공사를 진행했다. 신광사가 원나라 공장들에 의해 중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탑은 고려석탑 양식 으로 건립되어 주목된다. 이것은 순제가 파견한 공장들이 목조건축을 담당했던 기 술자였기 때문에 석공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부족한 공장들은 고려에서 조달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순제가 원나라 공장을 파견했을 때 고려의 시중 김석 현과 밀직부사 이수산도 감독으로 참여한 기록으로 미루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한 당시 원에서 탑파에 대한 중요성이 낮았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은 건국 초기 라마식 불탑을 건립하고 있으나 13세기 이후부터는 불탑건립이 축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 결과 순제는 별도의 불탑을 건립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고려석탑 양식으로 조탑했을 가능성이 높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忠 穆 王 4년(1348) 大 施 主 重 大 匡 晋 寧 院 君 姜 融 과 대시주 院 使 高 龍 鳳, 大 化 主 省 空 이 참여해 건립되었다. 姜 融 는 조부가 진주 관노출신으로 충선왕이 원에 머물 때 측근세력으로 성장한 부원배다. 高 龍 鳳 역시 부원세력이며 省 空 은 務 安 君 人 朴 氏 法 名 省 空 墓 誌 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문신 崔 瑞 의 아내로 말 년에 비구니가 되었다. 향년 70세가 된 올해 延 祐 5년( 戊 午 年, 忠 肅 王 5, 1318) 7월 초2일에 병이 위독 해지자, 드디어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妙 蓮 社 主 法 인 兩 街 都 僧 統 에게 청하여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법명을 省 空 이라 하였다. 법복을 갖추어 계를 받고, 이에 奴 한 명을 시주하여 출가시켰다. 6) 묘지명을 통해 경천사 석탑건립의 大 化 主 로 참여한 省 空 은 묘련사에서 출가한 박 씨이며 기록상 부원세력과 관련이 없다. 부군 崔 瑞 역시 원과 특별한 관련기사를 살필 수 없다. 반면 姜 融 과 高 龍 鳳 은 부원세력으로 석탑 조성기에 황제폐하의 축수를 기원한 것 역시 고려 국왕이 아닌 원 황실에 대한 축수였다. 고려 말에는 원에서 직접 물자와 인력을 파견해 원찰을 창건하는 사례도 있지만 이같이 고려인 부원배에 의해 원 황실을 위한 불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앞서 언 6) 金 龍 善 (2001), 崔 瑞 妻 朴 氏 墓 誌 名,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72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67 급한 省 空 이 대화주로 참여한 것은 경천사와 묘련사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원 세력과 관련된 고려 말 불사가 단순히 원 황실과 부원세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순수한 종교적인 측면에서 고려인의 참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조형에 대해선 기단을 제외하곤 목조 탑파 양식을 따르고 있어, 경천사 석탑을 원 장인들이 직접 건립하였다는 통설 역시 재검토가 필요하다. 비록 외 형은 원양식이 반영되었다고 하더라도 건립은 고려 공장들이 진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전쟁 종전과 개경 환도를 통해 고려는 원 간섭기라는 특수한 정치상황에 직 면한다. 이 때 원 황실 또는 부원세력과 관련된 불사와 석탑이 건립되고 있어 원과 관계된 세력이 새롭게 후원자로 등장한다. 주목되는 점은 이른바 원의 영향으로 건 립된 라마양식 석탑이 경천사 십층석탑과 마곡사 오층석탑과 같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북한지역에 남아 있는 해주 다라니당 등 라마양식을 보이는 석조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의 라마탑 양식을 직접적으로 수용한 석탑은 건립되지 않았다. 이것은 라마교가 고려 황실을 중심으로 운영됐을 뿐, 지방에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던 이유에 기인한다. 이러한 추론의 배경에는 충정왕 때부터 일기 시작한 반원 분위기의 확산을 들 수 있다. 忠 惠 王 이 원에 잡혀가서 사망한 사건은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한 것 으로, 고려 관리들 역시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本 朝 編 年 綱 目 의 增 修 를 명하는 忠 穆 王 의 교서 가운데 일부다. 태조께서 개국하신지 이제 429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의 典 章, 문물과 嘉 言, 선 행이 감추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에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7) 본조편년강목 은 충선왕의 지시에 따라 충숙왕 4년 閔 漬 에 의해 選 進 된 史 書 다. 8) 충선왕은 고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알리고자 사서 편찬지시를 내렸다. 9) 사서 증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의 개국연대를 언급한 것을 보면 고려의 역사성과 전통 성을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0) 이는 고려의 사직이 위협을 받은 데 따른 관리들의 불안을 대변한 것으로, 고려를 元 과 명백히 구분하려는 경향을 알 수 있다. 11) 7) 高 麗 史 권37, 忠 穆 王 2년 10월 庚 申 敎 曰. 8) 閔 賢 九 (1987), 閔 漬 와 李 齊 賢 - 李 齊 賢 所 閔 漬 墓 誌 銘 의 紹 介 檢 討 를 중심으로, 李 丙 燾 九 旬 紀 念 韓 國 史 論 叢, 知 識 産 業 社, pp. 348~349. 9) 邊 東 明 (1991), 鄭 可 臣 과 閔 漬 의 史 書 編 纂 活 動 과 그 傾 向, 歷 史 學 報 130, pp. 21~24. 10) 金 塘 澤 (1998), 整 治 都 監 의 설치를 통해 본 고려 관리들의 원에 대한 불만, 元 干 涉 下 의 高 麗 政 治 史, 一 潮 閣, p. 140.

7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충숙왕을 기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反 元 경향은 고려 말 원의 불교였던 라마불교의 불탑이 고려에 유행하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공민왕대의 개혁이 반원 적인 성격과 반원세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주목된다. 7차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을 거쳐 원 간섭기에 들어가는 원종 11년(1270)부터 경천사 십층석탑이 건립되는 충목왕 4년(1348) 사이에는 약 80년의 시간이 존재한 다. 이 시기 라마탑의 영향이 감지되지 않는 것은 라마불교가 고려 敎 禪 佛 敎 보다 높은 수준의 교리체계를 보유하지 못했던 점이 중요했다. 고려 관리들의 원에 대한 불만은 충정왕대에 이르러 원의 지배체제를 부인하는 反 元 경향을 나타내게 되는데 恭 愍 王 즉위과정을 통해 노골화 되었다. 충혜왕이 유배 도중 사망하자, 새로운 고려 국왕으로 충혜왕의 아들인 元 子 와 왕기가 물망에 올랐다. 원은 원자에게 왕위계승을 하려했으나, 12) 고려 내부에서는 왕기에 대한 지지가 높 았다. 13) 원의 지원으로 왕위를 계승한 충목왕은 경천사 십층석탑이 건립되는 재위 4년에 사망한다. 이후 왕기와 충목왕의 庶 子 인 왕저가 왕위 물망에 오르는데, 14) 고려 출신 기황후는 왕기의 즉위를 반대했다. 15) 원은 왕저, 즉 忠 定 王 을 왕위 계승자로 내정했다. 16) 고려 국내에 왕기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음에도 그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배경에는 고려 내부의 반원 분 위기가 중요했다. 그런데 충정왕은 즉위 3년(1351) 뚜렷한 이유 없이 퇴위되고, 17) 왕기가 등극한다. 공민왕은 위왕의 딸 魯 國 公 主 와 혼인함으로써 18) 원의 정치적 후 원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당시 丞 相 이었던 脫 脫 이었던 것 같다. 19) 탈탈은 파직되었다가 충정왕 원년(1349) 복직되었으며, 20) 파직상태였던 한 해 전에 11) 閔 賢 九 (1981), 益 齋 李 齊 賢 政 治 活 動, 震 檀 學 報 51, pp. 233~ ) 高 麗 史 節 要 25, 忠 惠 王 後 4년 12월, 高 麗 史 권110, 韓 宗 愈 傳. 13) 왕기는 충목왕의 즉위 이후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元 의 永 寧 寺 에서 普 愚 가 행한 법회에 참가한 후 귀국해 정치를 맡게 되면 보우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왕기의 자신감은 고려 내부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음을 바탕으로 하였을 것이다. ( 李 英 茂 (1977), 太 古 普 愚 國 師 의 人 物 과 思 想, 建 大 史 學 5, p. 4. 참조) 14) 高 麗 史 節 要 권25, 忠 穆 王 4년 12월. 15) 東 文 選 권101, 사재소감 박강전. 16) 高 麗 史 권37, 忠 定 王 元 年 2월 甲 戌. 17) 高 麗 史 권37, 忠 定 王 3년 10월 壬 午. 18) 高 麗 史 節 要 권26, 충정왕 원년 10월. 19) 高 麗 史 節 要 권26, 공민왕 원년 4월. 20) 高 麗 史 권37, 忠 定 王 원년 윤 7월.

74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69 경천사 십층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 탑이 탈탈의 원찰로 생각된다. 21) 신증 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이 후대의 것이고 탈탈의 복권과 관련하여 연관 지은 자의적인 기록에 머물 수 있으나 고용봉이 석탑건립을 주도했고 탈탈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탈탈의 원찰로 이 석탑이 건립되었다면, 고용봉과 탈탈의 관계를 통해 탈탈의 복권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석탑이 건립되기 한 해 전인 충목왕 3년(1347) 원은 정치도감 활동을 통해 금강산에 유배 중이던 고용봉을 소환했다. 22) 따라서 부원배였던 고용봉은 더더욱 원의 지원이 자신의 입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복권과 함께 원 황실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그의 매 제였던 신예가 충목왕 4년에 辛 王 23)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 었음을 통해 확인된다. 3. 고려석탑의 유형과 양식 고려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양식을 탈피해 다양한 유형으로 분화, 발전했다. 석탑유형의 다양성은 고려석탑의 성격을 규정짓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초 석탑의 제 유형을 고찰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고려석탑 양식의 변화 원인과 발전단계 조망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까지 고려석탑의 유형 24) 은 신라석탑을 원형으로 기단과 옥개석의 변화에 초 점을 맞춘 분류방식이 일반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 석탑은 통일신라의 석탑양식과 구 고구려와 백제지역에서 유행했던 석탑양식이 혼재되어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석탑의 특징인 동시에 연구의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학들이 제시한 고려석탑 분류 안을 정리하면 표2와 같다. 21)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13, 京 畿, 豐 德 郡 佛 宇 條. 22) 高 麗 史 권37, 忠 穆 王 3년 10월. 23) 高 麗 史 권125, 辛 裔 條. 24) 類 型 (type)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一 群 의 사물에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간주되는 형식 이다. 따 라서 고려석탑의 유형이란 고려라는 시간적 연속성과 지역이라는 공간적 범주 속에서 동일한 양 식을 공유하는 석탑을 지칭한다. 반면 樣 式 (style)이란 각 유형의 석탑을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표 현상의 특징으로 세부적으로 기단, 탑신, 옥개의 구성과 장엄조식 등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공통 된 속성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7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연구자 고려석탑의 유형분류 비고 衫 山 信 三 25) 고구려계-백제계-신라계 系 列 鄭 永 鎬 26) 신라석탑계-백제석탑계-특수양식 系 列, 樣 式 李 暻 會 27) 신라식계승-백제식계승-절충-혼합-특수양식 樣 式 尹 張 燮 28) 초기탑파(신라계승-백제계승양식-절충형식-특수형식) 중기탑파(절충형식-모전탑) 時 間, 樣 式 朴 慶 植 고구려계-백제계-신라계석탑-복고풍 양식 系 列, 樣 式 申 龍 澈 고구려식다각다층탑-백제식결구형탑-신라식이중기단-고려식다층-라마식 時 間, 構 造 천득염 백제계석탑(시원양식-전형양식-순수백제 계승양식-백제 신라 절충양식) 樣 式 박홍국 전탑(경주권-대구-안동-중부권), 모전석탑, 전탑형 석탑 지역, 재료, 형식 리화선 29) 4각형, 다각 다층형, 특수형, 절충형 구조형식 리창언 30) 일반형 6종, 특수형 2종 김병현 31) 괴석 정사각 중층 전형양식-전탑과 모전석탑-사사자석탑-다각탑-보협인탑 (표2. 고려석탑의 유형분류) 표2를 통해 현재 통용되는 고려석탑의 일반적 분류유형은 - 系 와 - 式 임을 알 수 있다. 系 는 일군의 석탑 중 상호 관련 혹은 유사한 점이 있어 한 갈래로 이어지는 탑파양식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 系 에 속하는 석탑은 비록 시대나 지역은 달라도 동일한 양식을 바탕으로 건립된 것이다. 25) 衫 山 信 三 (1944), 朝 鮮 の 石 塔, 寶 蓮 閣. 26) 鄭 永 鎬 (1998), 한국의 석조미술, 서울대학교 출판부. 27) 李 暻 會 (1965), 韓 國 石 塔 樣 式 과 그 변천에 관한 계통적 연구(1), 건축 9-2, 대한건축학회. 28) 尹 張 燮 (1994), 韓 國 建 築 史, 東 明 社. 윤장섭은 초기와 중기 탑파라는 시대성을 기준으로 석탑의 유형분류를 시도했다. 折 衷 이란 개념은 대립하는 둘 이상의 욕구를 하나의 행동으로 불완전하나마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윤장섭이 사용한 절충의 개념은 일반형 석탑과 모전석 탑의 두 가지 요소를 동반하는 석탑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양식을 기반으로 한 유형구 분에 있어서는 일반형 또는 모전석탑 중 유형의 기본이 된 석탑양식을 기준으로 상호간의 영향관계 만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재언한다면 두 가지 석탑의 양식이 반영되었더라도 이것은 둘 중의 한 석탑을 기본으로 후자로부터 부분적인 표현기법을 영향 받아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충이라는 구분은 일반형 석탑에 대비되는 상대적 개념의 특수형 석탑과도 다르며 기본형에서 벗어난 이형과도 상이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29) 리화선(1989), 조선건축사 - 조선부문사,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pp. 285~ ) 리창언(2002), 고려 유적연구,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pp. 113~ ) 김병현(1992), 高 麗 時 代 一 般 形 石 塔 에 關 한 硏 究, 석사학위논문, 한국교원대학교.

76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71 式 은 양식으로 저술을 확인해 보면 형식과 양식을 혼재해 사용한 문제점이 드러 난다. 아마도 고려석탑이 신라 전형양식 석탑과 같이 한 갈래로 발전한 것이 아닌, 다양한 양식 요소들이 합쳐져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조탑 시기), 지역, 형식 각각의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곤란했기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주의가 필요하다. 양식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공통된 문화요소를 바탕으로 동일한 유형을 형성하는 계열성 내지 형 식요소의 결합이다. 따라서 양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보편성이란 전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고려 전기 석탑은 건국 초 개태사와 같은 몇 예를 제외하면 太 祖 에 의해 開 京 을 중심으로 불사가 집중됐다. 따라서 초기 석탑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近 畿 地 方 에 밀집 조성된 지역적 특징을 보인다. 이 시기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성을 탈피해 5층 이상의 고층을 지향하고, 단층과 대좌형 기단, 감실표현, 8각과 6각 등 다각평면, 옥개석, 탑신받침 등 새로운 변화가 관찰된다. 본인은 복고적 경향을 보이는 고구려계, 백제계 석탑과 고려 일반형 석탑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양식으로서 신라양식 석탑을 계승양식으로 구분한다. 계승양식은 삼국과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모방한 고려시대 건립의 석탑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고려석탑의 유형] 고구려계 석탑은 고구려 팔각목탑양식을 토대로 오대, 송의 건축양식으로부터 영향 받아 건립된 석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개경과 북계지역에 집중되었고 목 탑의 영향이 이 지역에서 유행한 것은 고려 건국과 함께 개경과 서경에 세운 목탑 건립의 의도가 석탑에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백제계 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을 모방함으로써 32) 단층기단과 여러 매의 석제를 이용해 결구한 초층 탑신부를 특징으로 한다. 이외에 미륵사지석탑에서 유

7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래한 평박한 옥개석과 탑신받침을 이용한 독특한 탑신부 구성을 들 수 있다. 신라계 석탑은 일반형과 특수형으로 구분되는데, 일반형은 신라 정형의 석탑이며 特 殊 形 은 사사자석탑과 같이 기단부 4 隅 에 사자를 기둥으로 세우거나 평면이 방형 에서 팔각으로 변화하고, 재료에 있어 화강석이 아닌 점판암을 사용한 청석탑을 포 함한다. 사사자탑과 청석탑은 고려시대 석탑건립의 특수한 경우로, 통일신라 석탑에서 시원을 찾을 수 있어 신라계 이형석탑 범주에 포함된다. 고려양식은 평면과 구성에 있어 신라계 일반형 석탑을 기본형으로 삼았고, 고구려 백제계석탑 양식을 수용하고 추가적으로 고려인들의 미의식이 더해진 새로운 유형 이다. 특수형은 계승양식에선 나타나지 않는 유형으로 아육왕탑(보협인탑), 경천사 십층석탑 등 외래양식 석탑과 독특한 지방양식을 반영한 운주사 다층석탑 群 이 있다. 고려석탑은 이들 유형이 개별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며, 고려의 모든 조탑 역량과 문화욕구가 종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외부 형식에 따른 구분보다는 제 양식 석탑을 건립한 영조집단의 건립목적과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왜 그러한 양식을 선호 했고 조형하였는지에 대한 검토가 중요하다. 유형 석탑명 고구려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北 界 지역 팔각구층석탑 백제계 왕궁리 오층석탑, 은선리 삼층석탑, 금산사 오층석탑, 읍내리 오층석탑, 장하리 삼층석탑 등 계승 양식 신 라 계 특 수 형 일반형 사자탑 청석탑 개심사지 오층석탑, 보천사지 삼층석탑, 보원사지 오층석탑, 춘궁리 오층석탑, 춘궁리 삼층석탑 등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삼층석탑,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 금장암지 사사자 삼층석탑 청석탑 고려 양식 고려식 일반형 고려식 특수형 남계원 칠층석탑, 홍제동 오층석탑, 죽산리 오층석탑, 신복사지 삼층석탑, 북문외삼층석탑, 정도사지 오층석탑, 소대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 등 아육왕탑(보협인탑), 경천사지 십층석탑, 운주사 다층석탑 등 (표3. 고려석탑 유형분류) 32) 백제계 석탑은 미륵사지 서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模 倣 해 나말여초 기간 구 백제지역을 중심 으로 출현한 석탑을 지칭한다. 여기서 모방이란 현재 제작되고 있는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미륵 사지 서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방이란 複 寫 와는 다르며 시원양식을 토대로 현재라는 시간성이 결합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간행된 연구논문 중에는 이러한 재창조로서의 模 倣 을 模 倣 樣 式 (Two Modes of colonial s Mimicry)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단순한 양식의 모방일 뿐 모방이 일반 범주의 양식으로 정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용 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윤대석(2001), 식민지인의 두 가지 모방 양식, 韓 國 學 報 27, 일지사, pp. 43~68에서 모방양식을 언급하고 있다.)

78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경천사 십층석탑과 라마양식 석탑건립 14세기 고려 말에는 농업생산력이 발달하여 계층이완과 토지소유 형태가 변화하고 토지분급제, 수취제도와 국가재정 등 사회경제 분야가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는 원 간섭기간으로 고려가 원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충렬왕 34년의 군현개편은 군현의 官 格 을 조정하기에 앞서 主 縣 의 격을 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개편작업은 중앙관제의 정비와 맞물려 이루어졌으나 핵심은 고려와 元 관제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시책과 연결되어 이루어졌다. 당시 개편은 고려 전기부터 경제 군사적 중요도가 높았던 전통적인 大 邑 은 존속시킨 채 정치적 이유로 관격이 상승된 군현조정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현병합에 元 중서성이 개입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의 정치적 의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복잡한 구조로 운영되던 고려 군현제의 폐단으로 인해 수취 불균형과 이로부터 비롯된 농민유망과 항쟁의 예방을 위해서도 군현 병합책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또한 주현화 현상은 비록 원이나 고려국왕의 권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고려 전기 이래의 복합적 영역구성이나 주 속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고려적인 군현제의 와해와 함께 전면적인 군현의 개편과 조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원 간섭기 이후 국가의 군현지배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른바 중간기구가 확대되고 그것에 따르는 소속기구들의 증가 현상이다. 33) 새로운 군현지배기구의 등장과 함께 당시까지 군현에서 대민수취를 전담하던 향리집단에 대한 전면적인 제도개편이 이루 어졌는데 향리와 토호적인 성격이 배제되고 단순 행정집단으로 명확한 성격규정이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村 分 職 이 其 人 에게 맡겨졌으며 12세기 이래 중앙 관인층과 동정직자의 귀향 추세가 더욱 가속되어 향촌사회에서는 지방 관품세력이 대두하였다. 이 시기 재정운영은 원의 직 간접적인 간섭 때문에 파행적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른 제도 개혁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충렬왕대 사회경제적인 모순이 심화되고 그에 따라 民 의 저항이 증대하였다. 당시 재정관서로는 迎 送 庫, 盤 纒 色, 國 贐 色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과렴이나 시장 에서의 강제 교역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원 간섭으로 인해 충렬왕이 왕실의 경제적 기반을 공적으로 확보하지 못하였던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되었다. 고려 말의 국가와 왕실의 모순된 재정구조는 앞선 시대와 달리 불사의 축소를 가져 왔고, 왕실이 발원한 불사 역시 급격히 위축됐다. 그 결과 연복사 수리 기록과 같이 33) 신안식 편(1992), 14세기 고려의 사회와 경제, 한국역사연구회회보 11, 한국역사연구회, p. 3.

7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왕실 원찰에 대해서마저 수리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거나, 사대부의 사원 수리에 대한 반대여론까지 야기된다. 연복사는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普 濟 寺 다. 큰 전각을 能 仁 殿 이라고 하며 그 앞문을 神 通 門 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무너졌으므로, 지금 城 中 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지어서 채색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34) 비정상적인 국가재정 구조로 인해 왕실과 중앙정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 장을 통한 강제교역을 추진했다. 그 결과 상인층은 수탈의 대상인 동시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위 연복사 수리에 참여한 상인집단은 자발적인 참 여도 있었겠지만 국가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당시 수리 불사에 강제적으로 동원되 었을 가능성도 높다. 고려 말의 정치, 경제적 문제로부터 기인한 내부 모순은 석탑건립에도 반영되는데 첫째 국가 또는 왕실발원의 불사가 전무하며, 35) 부원세력을 중심으로 원 황실 추복 목적의 불사가 이루어지고, 지방 군현제 개편의 결과 향리층의 쇠퇴와 함께 지방 역시 석탑건립이 감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여건에서 석탑 역시 라마양식이라는 외래 양식의 수용을 거부할 수 없었다. 라마식 석탑은 원 간섭기간 라마불교미술의 영향으로 건립된 외래양식 석탑을 지칭한다. 라마교 불교미술은 티베트에서 신봉되던 화려하고 정교한 미술양식 으로서 고려 후기 불상과 부도, 사리기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라마교미술의 고려 유입은 원 황실과 고려와의 혼인관계, 라마교 승려들의 고려 입국, 원 황실과 귀족 들의 불사 및 원 공장들의 활동 등 당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며 유입된 극히 이례 적인 새로운 미술경향이다. 그런데 라마양식의 영향을 받은 라마식 석탑과 라마교 불교미술을 동격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라마불교미술이 회화, 금속공예, 사경, 부도 등 여러 분야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지만, 석탑의 경우 라마탑을 直 模 한 것이 아닌 당시 라마불교의 고려 유입에 따른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영향만이 확인되기 때문 이다. 34)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4, 開 城 上. 35) 적어도 공민왕 즉위 원년(1351)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했던 정방 해체를 시작으로 반원 개혁정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왕실발원의 불사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후 공민왕이 주도한 반원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하자 국가재정은 조금씩 개선되었다. 특히 공민왕대 불사가 증가하는 것은 노국대장 공주의 사망과 함께 그녀를 위한 원찰건설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80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75 라마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 경천사 십층석탑과 마곡사 오층석탑에 불과하고 양식적 영향이 경천사 십층석탑의 기단구조와 마곡사 오층석탑 상륜의 라 마탑형 금속기 정도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의 라마탑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라마탑과의 유사성 혹은 라마탑 양식을 따른 사리기 연구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喇 嘛 塔 이란 티베트나 네팔 등지의 라마불교 국가에서 건립된 불탑으로 기원은 인 도의 복발식 탑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대 라마탑은 10여 기가 남아 있는데 1275년 건립의 산시성 석조 라마탑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마곡사 오 층석탑의 라마탑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1271~1279년 건립의 북경 妙 應 寺 白 塔 이 있다. 라마탑의 공통적인 특징은 높이가 10m 이상 되는 대형이며 亞 자형 이중기단 위에 복발탑신을 놓은 후 상부에 하층기단과 유사한 1단의 亞 자형 기단을 다시 놓아 13층의 탑찰을 설치한 후, 정상부에 화개장을 표현했다. 따라서 한국석탑과는 형식과 양식 면에서 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별도의 탑파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경천사와 마곡사 석탑을 라마식 석탑으로 분 류하는 이유는 단지 기단과 마곡사 석탑 위에 올려진 라마탑 청동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경천사지는 개경의 서남부 扶 蘇 山 에 위치한 사찰로 오관산과 부소산 사이의 부소 군이 왕건 선대의 거주 지역이었고, 신라의 풍수사 八 元 이 나타나 부소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을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나오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부소산이 송악이 되고 부소군은 송악군이 되었다고 한다. 36) 라는 기록을 통해 태조 선대 때부터 인연이 깊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睿 宗 부터 恭 愍 王 까지 行 幸 한 고려사 기록에는 睿 宗 은 경천사에서 1117년 忌 辰 道 場 을 베풀었고, 仁 宗 은 1134년 문경태후의 추모제를 베풀었으며, 毅 宗 이 빈번히 방문했고 공민왕은 경천사에서 충숙왕의 忌 日 을 지낸 것으로 보아 앞서 언급한 고려왕실의 조상숭배와 관련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行 幸 國 王 睿 宗 仁 宗 毅 宗 恭 愍 王 방문횟수 년(1113) 12년(1134) 8년(1154) 19년(1370) 방문시기 12년(1117) 15년(1137) 11년(1157), 3회 21년(1143) 19년(1165), 3회 (표4. 고려 역대국왕의 경천사 방문기록) 36) 김창현(2002), 고겨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 신서원, p. 20.

8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과 韓 國 寺 刹 全 書 등에 경천사와 관련된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창건 기록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大 東 金 石 書 에 경천사 13층 석탑은 풍덕 부소산에 있고, 부원군 강융이 글을 썼고, 元 順 帝 至 正 8년(1348)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따라서 예종이 행행하는 1113년 이전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석탑건립은 忠 穆 王 4년(1348)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종~예종 기간 국 왕의 경천사 방문이 빈번하다가 의종 19년(1165) 방문 이후 공민왕 19년까지 205 년간 행행기록이 없다. 다만 경천사의 위치가 예성강과 가깝고 교역항이었던 벽란도, 영안성과 근접한 위치였던 점이 여몽전쟁 이후 국왕들의 행행을 중지한 이유가 되 었을지 모르겠다. 경천사탑의 특징은 1차적으로 재료가 화강석이 아닌 대리석을 사용한 것이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에는 沈 香 石 이 부소산 근처에서 산출된다고 하는데 이 석재를 대리 석으로 추정할 수 있다. 37) 고려 말에는 경천사 석탑 이외에도 碑 身 石 이나 신륵사 나옹선사 부도 앞의 석등에도 사용되는 듯 새로운 조형재료로 각광을 받았다. 기단은 四 方 斗 出 의 亞 자형 평면인데, 신라와 고려석탑이 2층 내지는 단층기단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3층을 이루고 있다. 기단 각 면에는 1층(용, 사자 등 불교적 瑞 獸 像 ), 2층(현장 관련 求 法 行 장면), 3층(나한들의 수행모습)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조각을 표 현했는데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佛 格 이 높아지는 도상들을 배치하였다. 기단 모서리에는 마디가 있는 대나무 형태의 원형기둥을 모각해 우주로 삼았다. 갑 석은 매층 같은 형식으로 상하면에는 연화문을 조각했고, 측면에는 굽형을 노출시 켰다. 3층 갑석만은 상면에 난간형을 모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좌우의 엄지기둥과 더불어 중방과 돌란대를 설치하고 난간동자까지 표현해 매우 사실적인 난간을 보여 주고 있다. 38) 경천사 석탑의 기단은 북경 묘응사 백탑의 기단과 유사한 라마양식 석탑의 기단이다. 반면 마곡사 오층석탑 기단은 묘응사 백탑, 경천사 십층석탑과 달리 고려석탑의 기단양식을 채용하고 있다. 다만 상층기단 우주를 弧 形 으로 변한 점은 경천사 석탑 기단의 동자주와 유사한 것으로 마곡사 석탑 역시 세부적인 표현에선 라마석탑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주를 2조 내지 3~4조의 선 혹은 弧 形 으로 처리하는 것은 북한지역의 고려 중기 석탑에서도 발견된다. 37)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13, 京 畿 道 豊 德 佛 宇 條. 38) 朴 慶 植 (2008), 한국의 석탑, 학연문화사, p 박경식 선생은 경천사 십층석탑 탑신 하단부에 난간을 표현한 것은 신라 전형석탑에서 보이는 탑신괴임대를 의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82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77 사진1. 북경 묘응사 백탑 사진2. 경천사 십층석탑 기단부 주목되는 것은 경천사 석탑의 기단이 조선시대 금당 내부에 봉안된 수미단의 형상 과의 유사점이다. 조선 초 경천사 석탑을 모방하여 원각사지 다층석탑이 조성되고, 고려 말 라마탑 양식의 사리기 외 석종형 부도가 출현한 것을 고려한다면 이때 수 입된 라마불교미술의 양식이 불교미술의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10층이며 3층까지는 기단부와 같이 亞 자형 평면을 지닌 반면 4층 이상은 방형이다. 전체적으로 3층까지는 체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수직 고준한 느낌을 주고 있어 신라석탑과 다른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매층 탑신석의 모서리에는 원주형 우주를 모각했고, 다섯 면을 이용해 불교의 여러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지붕에는 각 장면의 조각내용을 알 수 있는 편액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1. 中 國 北 京 妙 應 寺 白 塔 기단 사진3. 경천사 십층석탑 기단 사진4. 마곡사 오층석탑 기단 각층 탑신석의 상단에는 목조건축의 평방과 창방을 비롯해 주두 등 목조건축 요 소를 충실히 재현했으며 하단에는 기단부와 동일한 모습의 난간을 설치했다. 옥개석 하면에는 多 包 系 건물의 공포가 모각되었으며 상면은 팔작지붕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낙수면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이 루고 있어 목조건축의 지붕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3층 옥개석은 이중의 지붕 구조를 보이고 있어 화려한 전각을 모방했다. 탑신석 1층 사방 각 면에는 彌 陀 會, 靈 山 會, 三 世 佛 會, 龍 華 會, 2층에는 多 寶 佛 會, 圓 覺 會, 華 嚴 會, 法 華 會 를, 3층에는 藥 師 會, 栴 檀 瑞 像 會, 消 災 會, 楞 嚴 會 를 조각했다.

8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4층에는 釋 迦 會, 地 藏 會, 圓 通 會, 涅 槃 會 를 표현했는데 현판만 남아 있다. 5층 이상 부터는 5구 혹은 3구의 불상을 조각했다. 불회도를 면석에 조각한 점은 현화사 칠 층석탑의 초층 탑신석에서 확인되며, 안양사 탑의 네 면에는 藥 師 會, 釋 迦 涅 槃 會, 彌 陀 會, 금경신주회 등 불회조각이 있었다. 39) (표5. 경천사 십층석탑 1층 탑신석 현황) 경천사 십층석탑의 불회도 좌우에는 금강역사 등 호법신들이 시립해 있어 천은사 금동불감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불감처럼 고려 후기에 유행했던 전각형 불 감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점은 고려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회도 내용에서는 고려 말에 새롭게 등장하는 도상적 특징이 보이고 복식의 표현에서도 새로운 요소들이 많아 고려와 원대의 불교조각과 신앙적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5. 경천사 십층석탑 탑신 도상 사진6. 목구조식 표현(용마루) 중국 불탑에 불회도가 조각된 사례는 오대 남당(937~975)의 양주 捿 霞 寺 塔 의 釋 迦 八 相 圖 와 기단부에 나한이나 사자와 같은 부조상들을 배치하는 형식은 요대 탑인 북경 天 寧 寺 塔 의 기단부 조각에서 발견된다. 이 외 남송대의 開 元 寺 동탑( 鎭 國 塔 ), 39) 李 崇 仁, 陶 隱 集 4, 衿 州 安 養 寺 塔 重 新 記.

84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79 서오층탑( 仁 壽 塔 )이 있는데, 두 탑은 팔각 기단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과 탑신에 다 양한 조각을 표현했다. 탑의 전면에 도상을 표현하는 것은 중국 강남 지역을 중심 으로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상의 내용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40) 경천사 십층석탑의 부조상에선 중국적인 요소가 나타나며 남송과 원 그리고 고려의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륜부는 탑신과 달리 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노반, 앙화가 있고 정상 부에 보탑형 보주가 설치되었다. 41) 이 중 원형 보주의 형식은 라마탑의 영향으로 간주된다. 사진7. 경천사 십층석탑 3층 옥개석 사진8. 원각사지 십층석탑 10층 옥개석 경천사 십층석탑 수리보고서에 의하면 상륜부의 원형을 十 자형 지붕으로 추정하 고 있다. 10층 옥개석 상면의 모서리에 용 조각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고, 3층 옥개부분처럼 모서리마다 용 조각이 놓이고, 내림마루 끝에 용을 조각했을 것으로 보아 십자형 지붕이 상륜처럼 마감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경천 사탑을 모본으로 건립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십자형 지붕을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 하였다. 42) 경천사탑 이후 경천사탑 형식처럼 목구조형식을 충실히 차용한 탑 조성 예들이 일부 나타나는 데 이 탑들에서도 상륜을 박공형으로 마감한 예들이 있는 것으로 미 루어 경천사탑의 10층 옥개 위 마감 역시 박공이 교차한 십자형 지붕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0) 정은우(2007), 경천사지 10층석탑과 삼세불회고, 高 麗 後 期 佛 敎 彫 刻 硏 究, 문예출판사, p ) 노반과 앙화 사이에 복발이 있으나 이것은 1960년대 수리 당시 추가된 것이다. 42) 국립문화재연구소(2006), 경천사 십층석탑 1, 해체에서 복원까지, 경천사 십층석탑 ; 국립문화 재연구소(2006), 경천사 십층석탑 2, 연구 논문, 경천사 십층석탑 ; 국립문화재연구소(2006), 경천사 십층석탑 3, 부재별 상세자료, 경천사 십층석탑

8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사진9. 고려불화에 보이는 박공 앞에 각이 꺾인 지붕 사진10. 수종사탑 박공 상륜부 이상 경천사 십층석탑의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탑신부에 새겨진 조성기에 의해 1348년이라는 절대연기와 함께 姜 融 과 高 龍 鳳 이라는 시주자 그리고 원 황제와 가족의 축연을 조성목적으로 밝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유송도록 에는 원에서 공장을 데려와 석탑을 건립했 다는 기록이 있어 원의 석탑 공장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경천사 석탑의 구조에 따르면 그 영향은 미미한 실정이다. 경천사 석탑은 기단과 탑신의 부조상이 중국의 영향 아래 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건축물에 있어 기단은 가장 보수적인 부분으로 기단 상부구 조는 쉽게 변하더라도 기단만큼은 쉽게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서 조형이 없는 상황에서 亞 자형의 기단은 라마탑의 영향을 고려할 수 있다. 기 단과 탑신의 부조상 역시 요대와 남송대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탑신 전체에 조각을 채운 불탑으로부터 영향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런데 기단의 구조와 관련하여 이것이 라마탑의 亞 자형 기단을 직모한 것인지 탑신 정상부 십자형 박공의 영향인지에 대해 검토가 요청된다. 북경의 묘응사 백탑을 비롯해 라마탑은 높이가 10~50m에 이르는 대형탑으로 재료 역시 대부분 전탑이다. 반면 경천사 석탑은 고층을 유지하고 있으나 평면적이 라마탑과는 비교가 안 될 정 도로 소형이다. 라마탑의 탑신은 대형의 복발형으로 현재 경천사 석탑의 기단규모를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복발형 탑신을 설치할 수 없다. 따라서 본래는 라마탑을 조성 하려 했으나 전탑과 석탑의 재료적인 차이, 석탑건립에 참여한 대부분의 공장이 고 려인인 관계로 이들에게 익숙했던 방형의 평면을 가진 탑신부를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亞 자형 기단만으로 라마탑의 영향 또는 라마탑이라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9~10세기 인도 남부와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에는 다양한 규격의

86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81 亞 자형 기단 스투파가 건립되었다. 또한 돈황에서도 등장하고 있어 亞 자 기단은 동 아시아 불탑건립의 보편적 경향 중 일부였지 라마탑 고유의 기단양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원 건국 이전의 요대 불상의 대좌에서도 이 같은 형식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라마탑이 비록 원대에 유행을 했으나 인도와 네팔 등지의 불탑으로 중국 내부에 서도 원 황실을 제외한 한족에겐 익숙하지 않은 형상이었다. 실제 묘응사 백탑 건 립을 원 공장이 아닌 네팔 출신 공장이 주도했고, 원의 멸망과 함께 전통적인 전각형 불탑으로 조탑 경향이 회귀한다. 따라서 고려에서 라마탑이 유행하지 않은 것은 정 형석탑에 대한 기호와 함께 중국 역시 황실과 같은 일부 계층에서만 라마탑을 선호 했기 때문이다. 사진 년대 마곡사( 朝 鮮 古 蹟 圖 譜 ) 사진12. 마곡사 오층석탑 청동제 상륜부 경천사 십층석탑과 함께 라마양식 석탑으로 분류되는 마곡사 오층석탑은 각 층의 체감이 적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없이 細 長, 高 峻 한 느낌을 주는 고려 후기의 석탑 이다. 기단부는 방형의 중층기단을 갖추었으나 상, 하 기단의 폭이 거의 동일하며 폭에 비해 높이(8m)가 높은 관계로 단층기단으로 오인되기 쉽다. 지대석은 2단 구성 으로 지표면에서 2~3cm 가량 노출된 하단과 그 위로 높이 294mm 내외의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 하단 모두 7~8매의 석재로 결구되었다. 상단 지대석은 전체적 으로 몰딩 처리 후 각 면에 2구씩의 안상을 음각했다. 서 측면을 제외하곤 훼손이 심하여 원형을 확인하긴 곤란하나 조선시대 목조불단의 안상과 유사한 양상이다. 하대석은 下 臺 底 石, 中 石, 甲 石 구성으로 하대저석은 상면에만 한 단의 쇠시리몰 딩을 각한 7매의 부재로 방형을 이루었다. 중석은 장방형으로 우주나 탱주가 없으며 판석을 맞대어 구성하고 그 위에 상, 하면 모서리만 접은 갑석을 올려놓았다. 갑석은 중석에서 3~6cm 정도 밖에 돌출되지 않아 단층 기단으로 오인되기 쉬운 요소이다.

8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상대석은 하대갑석 위에 놓인 상대중석과 갑석으로 구성됐다. 상대중석은 角 柱 形 우주와는 달리 2개의 둥근 突 出 線 을 조출하여 형식적인 隅 柱 를 표현했는데, 四 隅 의 隅 石 사이에 面 石 들을 1매씩 끼워 넣었다. 면석은 탱주 없이 짧은 3매의 판석을 맞 대었다. 갑석은 4매로 각면 중앙 부근에서 서로 맞대어져 있으며 下 部 端 은 빗 깎아 모만 접는 형식적 장식에 그쳤다. 하대갑석의 크기보다 조금 더 큰 정도로 시각적 으로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그림2. 기단 서측 입면 그림3. 상대중석 평면 그림4. 하대중석 평면 탑신석은 상대갑석 위에 2단의 탑신받침을 놓았다. 탑신받침은 하단이 상단 보다 큰 별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별도 장식은 없다. 그 위로 탑신석이 놓였는데 四 隅 에는 2단으로 접은 隅 柱 가 돌출되었다. 다른 층의 탑신석과는 달리 모서리를 모접기 한 점이 다르며 남면 중앙부에는 9 19cm 가량의 자물쇠 모양을 양각하여 門 扉 형식을 취했다. 2층탑신석은 단일석으로 四 隅 에 隅 柱 가 양각되었는데 우주는 모서리를 안쪽으로 접은 형태로 3~5층의 탑신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석재 역시 주종을 이루는 청색계통이 아닌 홍색이 섞인 화강석이다. 각 면에는 사방불을 양각했는데 동편부터 각기 阿 閦 佛 寶 相 佛 阿 彌 陀 佛 微 妙 聲 佛 로 추정된다. 3~5층의 탑신석은 그 높이와 폭만 체감비율에 따라 달라졌으며 그 형상은 공통적인 흐름을 갖는다. 4 隅 柱 는 副 柱 를 부가한 모습이며 면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초층과 3~5층의 옥개석은 낮은 한 단의 탑신 받침과 경사가 심한 낙수면, 轉 角 이 휘어 올라간 反 轉 曲 의 경쾌함과 탑신받침과 같은 높이로 내려온 隅 棟 의 곡선 등이 체감에 의한 각 층별 크기만 다를 뿐 공통적인 양상이다. 5층 옥개석만 낙수면 길 이가 다른 층보다 급격히 감축되어 노반석의 밑면 길이와 같다. 2층 옥개석은 초층에 비해 급격히 줄어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상층 탑신 받침은 생략되었으며 추녀 마루는 다른 층보다 높고 隅 棟 끝에는 유일하게 귀꽃장식을 표현했다. 2층에는 風 鐸 을 달았던 고리가 남동, 동서 처마 하부에 남아 있다.

88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83 동: 阿 閦 佛 서: 阿 彌 陀 佛 남: 寶 相 佛 북: 微 妙 聲 佛 (그림5. 마곡사 오층석탑 탑신석 사방불) 5층 옥개석 상면에 맞닿은 노반의 밑바닥은 정방형으로 옥개석 상면 크기와 동일 하며 그 위로는 측면 각호각형인데 호형 측면에 각 17엽의 단판 앙련을 조각하였다. 최상부는 평면 亞 형으로 최상부의 喇 嘛 式 청동탑을 받치고 있다.

8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앞서 살펴 본 경천사 십층석탑과 라마탑과의 관련성이 亞 자형 기단을 중심으로 살펴지는데 반해, 마곡사 오층석탑의 상륜부는 비록 청동으로 제작하였음에도 중국 라마탑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석탑의 세장한 형태와 단순한 판석형 2층기단을 고려하면 백제계 석탑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경천사 석탑의 건립과정을 고려했을 때 기단을 먼저 제작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라마탑의 조탑 의사를 갖고 건탑에 착수 했을 것이지만, 마곡사 탑은 일반형 석탑 상부에 청동제 라마탑을 추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러한 형식으로 조탑되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청동제 라마탑이 올려진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림6. 中 國 北 京 妙 應 寺 白 塔 사진13. 麻 谷 寺 오층석탑 상륜부 그림7. 麻 谷 寺 오층석탑 상륜부 왜냐하면 비록 5층 옥개석 상부에 노반석을 설치했지만 옥개석 평면적을 고려한 다면 지금의 노반석 보다 규모가 작아야 비례가 맞는다. 청동탑과 노반석의 면적은 상호 일치하고 있는 반면, 노반석과 5층 탑신의 연결방법은 후대에 청동제 라마탑을 부가했음을 추정케 하는 이유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는 고려 후기로 보고 있는데 탑신석에 조각된 사방불을 고려 한다면 14세기 말로 추정된다. 사방불은 통견의 법의를 착용하고 얼굴이 둥글고 살이 쪄 도톰한 편인데 어깨 폭이 좁고 위축된 형상은 고려 14세기 중 말기 목조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특히 1362년 제작의 경기도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388년 이전 제작으로 추정되는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상호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또한 서면 아미타불의 수인은 中 品 下 生 印 으로 고려 말 민중 중심 아미타신앙이 확산됨에 따라 아미타불이 대량으로 조성되었던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3) 43) 정은우(2007), 고려후기 불교조각 연구, 高 麗 後 期 佛 敎 彫 刻 硏 究, 문예출판사, p. 104.

90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85 반면 청동제 라마탑은 북경 묘응사 백탑과 매우 유사한데, 元 朝 8년(1271)에 쿠빌 라이가 직접 네팔의 유명한 건축가 河 尼 를 불러와서 세웠고 明 朝 天 順 元 年 (1457)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만일 현재의 백탑 외형이 1271년 건립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면 마곡사 청동탑의 제작시기를 13세기 후반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마곡사 오층석탑을 14세기 후반 건립으로 보았을 때, 석탑과 청동탑은 별개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반증 할 수 있는 것으로 노반석과 오층 옥개석의 부자유스러운 연결을 들 수 있다. 석탑 상륜부에 청동제 라마탑을 설치한 것은 한국석탑 상륜부가 탑파를 축약한 상징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5. 경천사 십층석탑과 문화재 보호 1) 경천사 십층석탑의 일본 반출 경천사 십층석탑 관련 근세의 기록으로는 1902년 세키노 타다시( 關 野 貞, 1867~ 1935)에 의해 촬영된 사진이다. 동경제국대학교 조교수였던 세키노 타다시는 메이지 ( 明 治 )정부의 명령으로 1902년 7월 5일부터 9월 4일까지 62일간 한국 전역의 문 화재를 조사해 朝 鮮 建 築 調 査 報 告 書 를 발표하였는데 경천사는 당시 석탑 1기만 남아 있을 뿐 황량한 폐사지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촬영된 사진은 경천사 십층석탑의 남서방향에서 촬영된 것으로 기단부 서 측, 3층 옥개석 서측, 6층 옥개석 남측, 10층 옥개석 북측이 심하게 파손된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사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상륜으로 10층 정상부 위에 사모지붕형 부재가 상륜으로 올려 있으나 1960년 수리복원 때는 복발형 상륜을 추가했다. 10 층 옥개석의 현황을 고려한다면 사모지붕 부재는 조성 당시의 것은 아니다. 세키노 의 보고서는 경천사 십층석탑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지만 동시에 폐사지에 방치되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그 결과 1907년 일본으로 반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9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사진14. 반출 이전의 경천사 십층석탑 그림8. 경성, 개성부지도의 경천사 위치 1907년 순종 결혼 가례에 일본 측 특사로 참석한 宮 內 大 臣 다나카 미쓰야키( 田 中 光 顯, 1843~1939)는 1월 20일 대한제국에 입국해 머물면서 경천사 십층석탑 반출을 주도했다. 당시 한성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던 곤도 사고로[ 近 藤 佐 五 郞 ]는 다나카의 부탁으로 경천사 십층석탑의 반출을 담당했는데 20여 명의 주민이 보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1907년 2월 4일 헌병들이 고종황제가 윤허한 일이라며 총칼로 위협 하며 몇 대의 수레를 이용해 무단 반출했다. 이때 급히 해체된 부재들은 짚자리로 묶어 포장하고 일부는 깨져서 방치된 조각들도 많았다고 해 무리한 해체로 훼손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탑 부재 반출에 대한 소문을 접한 군수가 허가받지 않은 반출임을 들어 저지하였지만 감시가 소홀해진 한밤중 일본으로 비밀리에 반출했다. 일본으로 반출 후 바로 조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제실박물관에 포장도 풀지 못한 상태로 방치됐다. 경천사가 비록 폐사가 된 상황이지만 이 탑은 병 치료에 영험이 있는 藥 皇 塔 으로 민간에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반출문제는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사진15. Homer B. Hulbert 사진16. Ernest T. Bethell

92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87 大 韓 每 日 申 報 는 석탑 반출 1개월 후인 3월~6월 간 수차례에 걸쳐 석탑반출에 대한 고발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 따르면 130~200여 명의 일본인들이 절터를 급습해 부재를 해체, 수레에 실어 개성역으로 옮긴 후 기차를 이용해 부산을 거쳐 다시 일 본으로 반출했다. 또한 부재 반출에 대한 허가가 없음을 들어 저지한 군수와 주민 들의 항의에 허가문서가 도착할 때까지 부재반출을 유보한다고 한 후 한밤중 주민 들을 무력으로 위협해 운반해 갔음을 밝히고 있다. 석탑 무단반출과 관련해 일본신 문인 萬 朝 報 와 二 六 新 聞 에서도 다나카 마쓰야키의 무단해체, 불법반출에 대해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반면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大 阪 朝 日 新 聞 ] 9006호에선 석탑 반출이 정당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유명한 두 탑(경천사와 원각사 십층석탑)을 일본으로 옮겨 오면 일본미술계에 행복한 일이라고 하여 다나카 미쓰야키가 조선에 사절로 왔을 때 그 뜻을 조선국왕에게 간청하였다고 한다. 이를 받아들인 조선국왕이 일본 궁내성에 경천사 십층석탑을 기증해 제실박물관 앞에 세 우고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고 전하면서 경천사 십층석탑 사진을 게재하였다. 또한 Japan Mail은 석탑 반출이 거짓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석탑 반출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점차 악화되었다. 심지어 일본 통감부 발행 영자지인 서울프레스는 다나카 마쓰야키의 석탑 반출이 수집가로서 너무 열심인 나머지 침착한 분별과 판단이 잠시 흐렸다며 잘못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인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와 영국인 어네스트 T. 베셀(Ernest T. Bethell, 1872~1909)는 경천사 석탑의 반출을 막아내 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어네스트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 두 신문의 발행을 맡고 있었는데 석탑 반출의 부당함을 최초로 신문기사화 했다. 역시 월간지 Korea Review 발행인 헐버트도 불법반출 소식을 접한 직후 현장을 방문, 약탈사실을 확인하고 목격자들의 증언과 현장사진을 확보했다. 그리고 코리아 리뷰에 당시 사건을 실어 약탈행위를 폭로했다. 아울러 일본 영자신문인 Japan Chronicle에 1907년 3월 석탑 불법반출을 현장사진과 함께 기고해 일본 내에도 부당함을 지적 하였다. 뒤이어 일본의 Japan Mail과 미국의 New York Post 등에도 불법약탈 사 실을 기고했고, 특히 Japan Mail이 이러한 약탈 사건은 있을 수 없으며 사실이 아 니라고 보도하자 헐버트는 현지 사진과 함께 현장 상황을 정확히 전달해 결국 Japan Mail을 굴복시켰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 밀사로 파견됐을 때도 현지 시문 쿠리에 드 라 콩페랑스(Courrier de la Conference)에 경천사 십 층석탑 사건은 일본이 조선문화를 파괴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헐버트와 베셀의 노력은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석탑 반출이 불법이 었음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9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석탑의 불법반출을 언급하면서 석탑 반환을 요구하였는데 이 역시 원활한 조선침략을 위해 여론을 무마하려던 정치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실박물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나카 미쓰야키는 석탑을 반환하지 않았다. 이후 여론이 악화 되고 베셀, 헐버트 등의 계속된 반환요구와 1916년 이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반환요구 등으로 포장도 풀지 못한 채 방 치되어 있던 경천사 십층석탑은 1918년 11월 15일 국내로 반환되게 되었다. 2) 경천사 십층석탑의 반환과 수리 1918년 11월 15일 국내로 반환된 석탑은 무분별한 해체와 운반과정에서 발생한 훼손으로 조립되지 못하고 경복궁 회랑으로 옮겨져 보관되다가 1919년 6월 11일 국립민속박물관에 귀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반환되었지만 당시 복원기술력으로는 훼손 부재를 수리해 조립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복궁 회랑에서 40년 가까이 원형을 찾지 못했다. 사진15. 국립박물관 귀속 당시 유물카드 그림 년 수리복원 당시 상륜부 복원안 1960년 당시 국립박물관 학예관 林 泉 ( 林 化 鳳, 1908~1965)의 주도 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 부재가 수리복원되었다. 파손으로 결실된 부분들은 당시에 주로 사용되던 시멘트 몰탈로 복원하고 중앙 적심부분은 작은 잡석을 섞은 시멘트 몰탈로 채워 넣었다. 몰탈 작업은 당시 수리기술자인 신상균 선생이 담당하였다. 찰주가 현존 하지 않는 찰주공에는 철근을 넣고 시멘트 몰탈을 채웠다. 상륜부는 1902년 사진에 확인되는 것과 달리 복발형태 부재를 시멘트로 추가 조성하여 조립했는데, 당시 복 원을 위해 작성한 복원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한다.

94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89 그러나 임천 선생이 작성한 복원도에는 노반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돔형 상륜을 만 들고 1902년 사진 속의 사모지붕 부재를 올리고 있어 1960년 실제로 복원된 상륜 과는 차이를 보인다. 1959년 시작해 1960년 복원을 마친 상륜부 형태는 중앙에 보 주를 두르고 그 위는 연꽃 형태로 복원된 복발형 모습이었다. 3) 경천사 십층석탑의 해체, 정밀보존처리 1959년 시작해 1960년 완료된 수리복원 후 경천사 십층석탑은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져 다시 세상에 공개되었다. 수리를 통해 제 모습을 찾게 되어 위용을 인정 받은 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은 시멘트 성분이 점차 풍화되어 부재 탈락이 빈번하고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환경오 염에 노출되어 있어 정밀 보존처리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1995년 4월 20일~6월 24일 기간 정밀보존처리를 위해 해체 작업이 진행되었다. 해체 당시 145점의 부재와 시멘트 몰탈 잔편들을 수거한 후 정밀실측과 탁본, 균 열부 접착, 시멘트 몰탈 제거, 결실부분 신 석재 복원, 오염물 세척 등의 조치가 취 해졌다. 2004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대전으로 이전함에 따라 석탑의 부재들도 대전으로 옮겨져 보존처리를 지속했다. 보존처리가 완료된 2004년 8월 16일~9월 30일 46일간 해체된 145점의 부재들을 조립하기에 앞서 현황파악을 위한 가조립이 진행됐다. 이후 2005년 3월 2일~4월 20일 최종 복원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모든 부재가 이관되었다. 석탑의 부재는 2005년 3월 28일~8월 9일에 걸쳐 국립중앙 박물관 1층 역사의 길 공간에 조립되었으며 8월 9일 오후 2시 석탑의 이전과 복원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9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부록 1.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을 다룬 언론보도] 자료 년 3월 7일 <대한매일신보> 논설 - 田 中 子 爵 及 一 塔 자료 년 3월 21일 <대한매일신보> 잡보 - 玉 塔 奪 去 의 續 聞

96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91 자료 년 4월 13일 <대한매일신보> 논설 - 更 論 盜 取 玉 塔 자료 년 4월 19일 <대한매일신보> 논설 - 玉 塔 과 及 其 行 狀

9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자료 년 6월 4일 <대한매일신보> 별보 - 韓 國 寶 塔 問 題 자료 년 6월 5일 <대한매일신보> 별보 - 韓 國 寶 塔 問 題 의 續 論

98 고려시대 석탑의 이해 - 경천사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93 자료 년 4월 23일 <대한매일신보> 잡보 - 日 報 의 寶 塔 4 자료 년 6월 4일 <대한매일신보> 잡보 - 玉 塔 奪 去 의 顚 末 자료 년 6월 4일 <대한매일신보> 잡보 - 玉 塔 奪 去 의 顚 末 자료 년 6월 4일 <대한매일신보> 잡보 - 玉 塔 奪 去 의 顚 末

99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부록 2. 경천사 십층석탑 평면도] 그림1. 하대 저석 평면 그림2. 1층 옥개석 평면

100 김홍도의 풍속화첩 조 인 수 (한국예술종합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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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김홍도의 풍속화첩 97 김홍도의 풍속화첩 목 차 1. 풍속화 2. 김홍도 3. 단원풍속도첩 위작설 4. 단원풍속도첩 진작설 5. 신윤복 1. 풍속화 초중고 미술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 전통 회화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풍속화( 風 俗 畵 )이며, 그 중에서도 김홍도의 작품이 대다수이다. 풍속화는 과거에 살 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기에 학생들에게도 유용한 정보와 즐 거움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풍속화의 원래의 의도와 용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 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통치 이념이자 윤리 규범이었던 성리학 사상은 왕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강조하였다. 사회 지배층이었던 양반은 학문을 숭상 하여 성품을 단련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군자의 삶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회화는 성리학에 합당하는 교훈적이고 교양적인 내용을 담아야 했다. 조선시대 궁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진상되고 열람되었던 그림 역시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교 훈이 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농사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빈풍칠월도( 豳 風 七 月 圖 )와 무일도( 無 逸 圖 )가 중시되었다. 각각 빈나라 농민의 세시 풍속 모습과 농가의 정경을 노래한 시경( 詩 經 ) 의 빈풍칠월편 과 주공이 성왕에게 정권을 넘겨주면서 농사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안일함을 경계한 서경( 書 經 ) 의 무 일편 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렇게 농사짓고 누에치며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모 습은 일상적인 풍속을 기록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통치자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이해하고 보살피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묘사되었다.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풍속화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0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2. 김홍도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일상생활의 즐거움과 재미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본격적인 풍속화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사치스러운 일상생활의 쾌락을 솔직하게 묘사한 풍속 화는 속되고 천한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여전히 풍속화는 백성들의 행복하고 건전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여 통치자가 올바르게 정치를 펼치고 있음을 선전해야만 했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화가 단원( 檀 園 ) 김홍도( 金 弘 道, 1745~1806경)의 작품은 이러한 풍속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벼타작>을 보면 간결하고 사실적인 필치를 이용 하여 농민들이 흥겹게 일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착취당하며 헐벗고 굶주리는 피지배층의 모습은 숨겨지고, 웃음을 띠며 건강한 농민을 부각시켜 당시 사회를 이상 적인 모습으로 미화시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 에는 그 밖에도 <씨름>, <무동>, <서당> 등 주옥같은 풍속화의 걸작 25점이 포함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1918년 김한준( 金 漢 俊 )에게 구입한 이래 이 화첩이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단원풍속도첩 이라는 명칭을 얻어 지금까지 이와 같이 일컬어져 온 근거는 25점 가운데 13점의 그림 위에 찍혀 있는 김홍도인( 金 弘 道 印 ) 의 도장 때문이다. 한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개항기에 한진우( 韓 鎭 宇 )와 문혜산( 文 蕙 山 ) 같은 시정의 직업화가들이 단원풍속도첩 을 모사하여 서양인들에게 판매했던 모사본이 있다.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의 연구원 버나도(John Baptiste Bernadou, 1858~1908)가 1884년 3월부터 1885년 4월까지 한국을 방문하여 수 집한 것이 한진우의 모사본이다. 내용은 단원풍속도첩 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리고 현재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 화첩은 단원풍속 도첩 보다 5점이 적으며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대한제국기 때 모사된 것 으로 추정된다. 문혜산에 대해서는 구한말에 서양화풍의 불화( 佛 畵 )를 그린 대표적 화승이었던 고산당( 高 山 堂 ) 축연( 竺 演 )일 가능성이 크다. 축연의 속성이 문( 文 ) 씨이고 호가 혜산( 惠 山 ) 인데, 189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파계( 破 戒 )한 뒤 문혜산( 文 蕙 山 ) 이라는 속명( 俗 名 )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3. 단원풍속도첩 위작설 최근 이 화첩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최순우,

104 김홍도의 풍속화첩 99 오주석 등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일부 작품이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조심 스럽게 제시된 바 있었다. 그러다가 2008년에 출판된 이동천의 진상: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 에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 화첩이 진작이 아니라는 상세한 연구가 등장했다. (강관식, 단원풍속도첩 의 작가 비정과 의미 해석의 양식사적 재검토, 미술사학보 제39집 (2012), pp. 164~260) 사실 제작 시기를 둘러싸고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작품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서 화보풍에서 벗어나 당시의 일상생 활을 현장 사생하며 새로운 사실적 화법을 개성적으로 개척해나가던 30대 초반경 풍속화 초창기의 미숙함이 엿보이는 스케치풍의 그림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동주, 천주현), 화원화가로서 성숙기에 접어든 30대 후반과 40세 전후에 원숙하고 뛰어나며 박진감 넘치는 서민 풍속화를 대성한 대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안휘준, 홍선표, 유홍준, 이태호, 진준현, 정병모). 그리고 김홍도가 염가의 서민용 상품으로 단시간에 대충 쉽고 재미있게 대량 생산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오주석). 한편 에서는 이 화첩에 들어있는 25점 가운데 씨름 과 무동, 서당, 서화감상, 우물가, 대장간 같은 뛰어난 6점이나 더 소수 또는 다수의 작품들은 김홍 도의 진적일 가능성이 많지만 이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적지 않은 작품들은 모작이 거나 위작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원복, 진준현, 이동천). 반면 전체가 다 김홍도의 친필 진적으로 보기 어렵고 후대의 모본으로 보아야 한 다는 견해도 있다(강관식). 이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25점 전체가 다 친필로 보기 어렵고, 긍재( 兢 齋 ) 김득신( 金 得 臣, 1754~1822)의 풍속화풍과 유사성이 많은 요소들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단원풍속도첩 에서는 일반 화첩 그림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양하고 극심한 오손( 汚 損 ) 흔적이 많이 보이는 것을 주 목한다. 이 단원풍속도첩 은 도상과 필법 및 풍격 상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뉠 뿐만 아니라, 각 유형마다 수준과 양식이 많이 달라서 최소한 10여 명 내외에 달하는 많은 화가들이 그린 풍속화를 모아 놓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초중반경에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전범화 된 뒤 이후 세대의 도화서 화원들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를 모사하여 도화서의 교본용 화보를 만 들기 위해 제작했던 화고( 畵 稿 )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1. 묘사상의 많은 오류, 2. 도상과 필치에서 다양한 양상과 편차가 존재, 3. 여러 다른 지질과 규격의 종이를 사용, 4. 극심한 수정의 흔적, 5. 사각형 테두리선 안에 무리 하게 배치, 6. 심한 손상과 오염 등을 들고 있다.

10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4. 단원풍속도첩 진작설 위작 주장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와중에서 최근 반론이 제기되었다(이중희, 단원풍속도첩 의 진위 문제에 대하여, 동양 예술 21호 (2013), pp. 5~43). 이 논문에서는 단원풍속도첩 이 진적 친필이 분명하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앞의 주장이 이 화첩의 예술적인 진정한 성과나 가치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필치나 완벽한 묘사력에서 그의 진가를 찾으려는 것 이며, 김홍도는 탁월하고 정교한 필치의 풍속화가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실수나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전제 에 기대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작가를 지나친 완벽주 의자로 설정하였기에, 이 화첩의 편집 의도나 화풍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오히려 1. 화첩의 25면 작품은 그림마다 각각 특정 주제로 설계된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2. 김홍도의 인물묘사는 필기도구에서 모필과 죽필을 병용 하여 사용하였으며, 3. 이 화첩은 만년에 이르러서 풍속표현을 집대성하려는 의도 에서 제작되었다고 결론짓는다. 5. 신윤복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풍속화의 또 다른 세계를 펼쳐보인 신윤복( 申 潤 福, 1758경~1813 이후)은 양반들의 위선적이고 향락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다. 신 윤복의 작품은 혜원전신첩( 蕙 園 傳 神 帖 ) 30점을 포함하여 수십 점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이 제작된 배경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신윤복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화원이었던 신한평( 申 漢 枰 )의 아들이라는 것, 그도 화원이었다는 간단한 사실 외에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풍문만 전할 뿐이다. 신윤복은 상류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모습을 상세하고 우아하게 그렸는데, 당시 로서는 파격적으로 남녀의 애정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그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 서울이란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당시 서울은 조선의 가장 번화한 도시였 다. 평양이나 개성 등의 도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구의 밀집, 경제력, 그리고 문화적 역량을 고려한다면, 서울이야말로 유일한 대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은 사실적인 내용을 세련된 표현을 통해 형상화하였기에 커다란 인 기를 누렸다. 산수나 건물의 배경, 다양한 자세의 인물, 섬세한 감정표현, 산뜻한 채색

106 김홍도의 풍속화첩 101 등의 표현 기법을 통하여 신윤복은 실감나는 장면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보였다. 감상자들은 도덕적으로는 신윤복의 그림을 싫어하면서도 시각적으로는 이를 즐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신윤복 그림 속에서 드러나는 환락을 윤 리적으로는 거부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자신도 이를 즐기고 싶어 하는 모순적인 심리상태를 느꼈을 것이다. <김홍도 연표> 김홍도( 金 弘 道, 1745~1806경) 본관: 김해( 金 海 ) 자: 사능( 士 能 ) 호: 서호( 西 湖 ), 단원( 檀 園 ), 단구( 丹 邱 ) 표암 강세황( 豹 菴 姜 世 晃, 1713~1791)에게 그림을 배움 21세 (영조 41년 1765년) 도화서 화원 29세 (영조 49년 1773년) 영조 어진 제작 30세 (영조 50년 1774년) 사포서( 司 圃 署 ) 감목관( 監 牧 官 ) 32세 (정조 즉위년 1776년) <규장각도>, <군선도> 제작 34세 (정조 2년 1778년) <서원아집도>, <행려풍속도> 8폭 37세 (정조 5년 1781년) 정조 어진 제작 40세 (정조 8년 1784년) 안기찰방( 安 奇 察 訪 ) 44세 (정조 12년 1788년) 김응환과 금강산 사경 45세 (정조 13년 1789년)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 옴 47세 (정조 15년 1791년) 정조 어진 제작, 연풍현감( 延 豊 縣 監 ) 종6품 51세 (정조 19년 1795년) 연풍현감 해임, <수원능행도> 제작 53세 (정조 21년 1797년) 오륜행실도 밑그림 제작 56세 (정조 24년 1800년) <주부자시의도> 제작 61세 (순조 5년 1805년) <추성부도> 제작

107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참고문헌> 오주석, 단원 김홍도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유홍준, 화인열전 2 삼성문화재단,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풍속화

108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임 영 애 (경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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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105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 751(경덕왕10년)~775년?(혜공왕11년?) / 3.26m * 석굴암의 조각 (40구, 現 38구) 八 部 衆 像 (8구) / 金 剛 力 士 像 (2구) / 四 天 王 像 (4구) / 梵 天 과 帝 釋 天 (2구) 菩 薩 像 ( 文 殊, 普 賢 ) (2구) / 羅 漢 像 or 十 代 弟 子 像 (10구) / 本 尊 像 1구 十 一 面 觀 音 菩 薩 像 (1구) / 龕 室 菩 薩 像 (10구, 現 8구) <수리 전 석굴암> <현재 석굴암> 삼국유사 ( 孝 善 第 9 大 城 孝 二 世 母 神 文 王 代 )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慶 祖 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城 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大 城 이라 하였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福 安 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주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때에 고승 漸 開 가 興 輪 寺 에서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이르러 보시할 것을 권 하니, 복안은 베50필을 보시했다. 점개는 주문을 읽어 축원했다. 檀 越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지켜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111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宿 善 (지난 세상에 지은 좋은 일)이 없어 지금 와서 곤궁한 것입니다.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해서 뒷날 應 報 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이날 밤 나라의 재상 金 文 亮 의 집에 하 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 사람 들이 매우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만에야 폈는데, 대성 두 글자를 새긴 金 簡 子 가 있었으므로 다시 이름을 대성이라고 하고, 그 어머니를 집에 모셔 와서 함께 봉양했다. 이미 장성하자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는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변해서 귀신이 되어 시비를 걸어 말했다. 네 어찌 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달라고 청하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 하고 말했다. 대성은 그러마고 약속했다. 꿈을 깨자 땀이 흘러 자리를 적시었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서 곰을 위해서 長 壽 寺 (경주 마동 장수곡에 있던 절)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願 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石 佛 寺 를 세우고, 神 琳, 表 訓 두 스님을 청해 각각 거주케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모의 양육한 수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드문 일이었다. 착한 보시의 영험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龕 盖 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香 嶺 이라고 했다. 불국사의 雲 梯 (높은 사닥다리)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술이 여러 절 가운데서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옛 鄕 傳 에 실려있는 바는 이상과 같다. 절(불국사) 안에 전해져 있는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때의 大 相 대성이 천보 10년 (751)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하여 다음의 혜공왕 10년, 즉 대력 9년(774)의 12월 2일에 대성이 죽게 되어, 나라에서 절 짓는 공사를 완성하고는 처음으로 유가대덕인 항마를 이 절에 주지케 하였는데, (불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三 國 遺 事 孝 善 第 9 大 城 孝 二 世 母 神 文 王 代

112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107 * 경덕왕대 재상 金 大 城 (700~774) cf) 三 國 史 記 9 卷 新 羅 本 紀 9 景 德 王 4 年 (745) 四 年, 春 正 月, 拜 伊 湌 < 金 思 仁 > 爲 上 大 等. 夏 四 月, 京 都 雹, 大 如 鷄 子. 五 月, 旱. 中 侍 < 惟 正 > 退, 伊 湌 < 大 正 > 爲 中 侍. 秋 七 月, 葺 東 宮. 又 置 司 正 少 年 監 典 穢 宮 典. 三 國 史 記 9 卷 新 羅 本 紀 9 景 德 王 9 年 (750) 九 年, 春 正 月, 侍 中 < 大 正 > 免, 伊 湌 < 朝 良 > 爲 侍 中. 二 月, 置 御 龍 省 奉 御 二 員. 八 部 衆 像 1 天 (Deva) : 욕계, 무색계의 여러 천왕이나 보살 2 龍 (Naga) : 人 頭 龍 神 3 夜 叉 (Yaksa) : 머리가 세면인 귀신 4 乾 闥 婆 (Gandharva) : 음악과 의약의 신 5 阿 修 羅 (Asura) : 3 面 6 臂 6 迦 樓 羅 (Garuda) : 뱀 혹은 용을 잡아먹는 금시조 7 緊 那 羅 (Kinnara) : 음악신 8 摩 睺 羅 伽 (Mahoraga) : 뱀을 신격화한 樂 神 * 팔부중상은 언제부터 8구가 세트를 이루기 시작했는가? * 팔부중 8구 중 2구는 왜 다른 상과 크기가 다른가? * 8구의 팔부중상은 왜 양식적 특징이 서로 달라 보이는가? 金 剛 力 士 執 金 剛 = Vajra-pani * 붓다 수호 寺 域 수호 * 금강역사의 명칭문제 금강역사 / 仁 王 (X) * 아형 阿 形 과 훔형 吽 形 금강역사의 등장 * 1910년 보수공사 당시 석굴암에서 발견된 또 다른 금강역사의 파편은?

11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四 天 王 像 * 북방 多 聞 天 - 寶 塔 毘 沙 門 天 王 - 별도의 신앙으로 발전 * 사천왕상의 방위는 정확한가? 방위 梵 語 漢 譯 意 譯 意 味 東 方 Dhrtarasta 제두뢰타( 提 頭 _ 咤 ) 持 國 天 王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 西 方 Virupaksa 비루박차( 毘 樓 博 叉 ) 廣 目 天 王 크고 넓은 눈으로 서방국토수호 南 方 Virudhaka 비루늑차( 毘 樓 勒 叉 ) 增 長 天 王 중생의 이익을 증장 北 方 Vaisravana 비사문( 毘 沙 門 ) 多 聞 天 王 부처님의 설법을 경청 梵 天, 帝 釋 天 제석천(Indra) - 금강저( 金 剛 杵 vajra) 범천(Brahman) - 정병( 淨 甁 kundika) 文 殊, 普 賢 菩 薩 둥근 잔 / 경책( 經 冊 ), 경권( 經 卷 ) * 文 殊 菩 薩 Manjusri Bodhisattva 지혜 의 상징 上 首 菩 薩, 붓다의 대담자 * 普 賢 菩 薩 Samantha Bhadra Bodhisttva 넓게 뛰어남, 문수보살의 실천적 行 願 者 * 어느 보살이 문수이고, 어느 보살이 보현보살인가?

114 석굴암 불교조각 다시보기 109 十 代 弟 子 또는 羅 漢 像 나한( 羅 漢 ) = 아라한( 阿 羅 漢 ) 소승불교 수행의 네 단계 중 최고인 아라한 과( 科 )를 얻은 성자 부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제자 16명, 18명, 500명으로 확대 1 지혜( 知 慧 ) 사리불( 舍 利 佛 ) 2 신통( 神 通 ) 목건련( 目 建 蓮 ) 3 두타( 頭 陀 ) 마하가섭( 摩 訶 迦 葉 ) 4 해공( 解 空 ) 수보리( 須 菩 提 ) 5 설법( 說 法 ) 부루나( 樓 那 ) 6 논의( 論 義 ) 가전연( 迦 旃 延 ) 7 천안( 天 眼 ) 아나율( 阿 那 律 ) 8 지계( 持 戒 ) 우파리( 優 婆 離 ) 9 밀행( 密 行 ) 라후라( 羅 喉 羅 ) 10 다문( 多 聞 ) 아난다( 阿 難 陀 ) * 십대제자인가, 나한상인가? 本 尊 像 대좌 높이 160cm, 불상 높이 340cm = 500cm ( 丈 六 尊 ) 降 摩 觸 地 印 : 석가모니불 十 一 面 觀 音 菩 薩 像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북면 - 11 面 6 臂 관음보살입상 경주 낭산 출토 11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龕 室 菩 薩 像 8구의 보살상 + 유마거사 & 문수보살 유마거사(Vimalakirti) - 주미( 麈 尾 ) 문수보살 - 刀 印 혹은 針 印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

115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불교미술 기본 개념 및 용어 * 불교 이미지의 종류 - 佛像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미륵불, 약사불 등) - 菩薩像 (관세음보살상,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미륵보살상 등) - 羅漢像과 祖師像 - 神將像 (四天王像, 金剛力士像, 八部神將像) * 불상의 구성요소 : 佛身 / 光背 / 臺座 * 불상의 옷 입는 법 : 通肩 / 偏袒右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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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2013 선생님을 위한 문화교실 걸작의 탄생 발행일 : 발행처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60번길 26 TEL. (032) FAX. (032) 인 쇄 : 명우기획(Tel )

118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청량로 160번길 26 TEL : 032) FAX :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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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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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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