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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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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1 년도자원봉사교육생일정 Ⅰ. 이론교육 순번강의주제일시시간강사비고 1 인천지역의선사문화 1.29( 토 ) 14:00~16:00 2 김석훈 2 인천의고인돌문화 - 강화도를중심으로 1.29( 토 ) 16:00~18:00 2 강동석 3 미추홀의위치에대하여 2.12( 토 ) 14:00~16:00 2 김상열 4 삼국시대의인천 - 문학산성을중심으로 2.12( 토 ) 16:00~18:00 2 백종오 5 강도시기고려의문화 2.26( 토 ) 14:00~16:00 2 김형우 6 유적을통해본강도시대 2.26( 토 ) 16:00~18:00 2 이희인 7 7 대어향과고려시대의인천 3.5( 토 ) 14:00~16:00 2 강옥엽 8 조선시대인천의행정체계 3.5( 토 ) 16:00~18:00 2 남달우 9 조선시대인천의교육기관 3.12( 토 ) 14:00~16:00 2 연창호 10 고문서를통해본조선시대인천의인구 3.12( 토 ) 16:00~18:00 2 임학성 11 인천석남동출토복식 3.19( 토 ) 14:00~16:00 2 송미경 12 국가의보장지강화 3.19( 토 ) 16:00~18:00 2 배성수 13 근대열강의침략과인천의개항 3.26( 토 ) 14:00~16: 청일전쟁, 러일전쟁과인천 3.26( 토 ) 16:00~18:00 2 서민교 15 개항후근대문물의유입과조계설정 4.2( 토 ) 14:00~16:00 2 황은수 16 개화기 ~ 일제강점기인천의산업과경제 - 철도를중심으로 4.2( 토 ) 16:00~18:00 2 견수찬 17 일제강점기인천의도시발전과정 4.9( 토 ) 14:00~16:00 2 추교찬 18 목공예 ( 목가구 ) 4.9( 토 ) 16:00~18:00 2 황지현 19 고려초기청자및녹청자 4.16( 토 ) 14:00~16:00 2 이종민 20 토기의이해 4.16( 토 ) 16:00~18:00 2 박진영 21 고려시대청자 ( 상감청자포함 ) 4.23( 토 ) 14:00~16:00 2 장남원 22 분청사기 4.23( 토 ) 16:00~18:00 2 안성희 23 조선시대백자 ( 청화백자포함 ) 4.30( 토 ) 14:00~16:00 2 방병선 24 불상의이해 4.30( 토 ) 16:00~18:00 2 신은영 25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5.7( 토 ) 14:00~17:00 3 김현권 26 조선말기회화사 5.14( 토 ) 14:00~16:00 2 윤현진 27 한국근대회화사 5.14( 토 ) 16:00~18:00 2 이현아 28 금속공예 ( 범종, 은장도포함 ) 5.21( 토 ) 14:00~16:00 2 김윤정 29 설문조사및실무교육공지 5.21( 토 ) 16:00~17:00 1 ( 박물관 ) 합계 58
4 Ⅱ. 실무교육및시연평가 실무교육 - 교육기간 : 5. 23( 월 ) ~ 7. 2( 토 ) - 교육내용 : 전시실유물해설과체험교실운영교육 1차시연및평가 - 시연및평가기간 : 7. 11( 월 ) ~ 7. 23( 토 ), 평일및토요일 - 시연내용 : 전시실유물코너및체험프로그램중선호주제신청후 - 시연내용 : 시연실시 - 평가방식 : 박물관-자원봉사자공동평가단구성후시연성적평가 Ⅲ. 워크샵 수습봉사자오리엔테이션및답사 - 워크샵일시 : ( 토 ) 09:30~16:00 예정 - 인천지역관내박물관또는문화유적 Ⅳ. 수습봉사 수습자원봉사자활동 - 수습봉사기간 : 월 ~12월 - 수습분야 : 유물해설, 체험교사, 간행물편집, 영상기록등 - 의무수습봉사시간 : 40시간이상 Ⅴ. 2차시연및평가 2012년도위촉분야시연및평가 - 시연및평가기간 : 12월중 - 시연내용 : 11월중내년도위촉분야신청후심화된시연- 및평가 - 평가방식 : 박물관-자원봉사자공동평가단구성후시연성적평가 2 차평가후위촉자선정평가단회의에서종합평가후위촉및유급결정 실무교육및시연평가의세부일정은추후공지
5 / Contents 인천지역의선사문학 7 인천의고인돌문화 - 강화도를중심으로 23 미추홀의위치에대하여 37 삼국시대의인천 - 문학산성을중심으로 61 강도 ( 江都 ) 시기고려의문화 87 유적을통해본강도시대 99 7 대어향과고려시대의인천 111 조선시대인천의행정체제 129 조선시대인천의교육기관 143 고문서를통해본조선시대인천의인구 163 인천석남동출토복식 171 국가의보장지강화 181 근대열강의침략과인천의개항 193 청일전쟁, 러일전쟁과인천 207 개항후근대문물의유입과조계설정 221 개화기 ~ 일제강점기인천의산업과경제 철도를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인천의도시발전과정 251 한국의목공예 257 고려초기청자및녹청자 275 토기의이해 287 고려시대청자 ( 상감청자포함 ) 301 분청사기 315 조선시대백자 ( 청화백자포함 ) 323 불상의이해 333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347 조선말기회화사 367 한국근대회화사 379 금속공예 ( 범종, 은장도포함 )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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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석훈 ( 영선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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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천지역의선사문화 9 김석훈 ( 영선고등학교 ) 목차 Ⅰ. 머리말 Ⅱ. 구석기시대 Ⅲ. 신석기시대 Ⅳ. 청동기시대 Ⅴ. 맺음말 Ⅰ. 머리말 2000년초부터최근까지인천지역의향토 ( 지역 ) 사에대한연구가활발히진행되고있다. 특히, 고고학적분야에서는택지개발이활발하게이루어짐에따라해방이후최대의전성기를맞고있다. 이러한사회적분위기속에서 인천 은종전까지수도권의그늘에가려져 주인없는도시 로인식되어왔던점을탈피하고, 이제는자라나는 2 세들을위한애향적분위기가제고되어야할시점이다. 특히, 2014년은우리고장에서는월드컵이개최되는의미있는해이다. 따라서인천을방문할국내 외손님에대해인천의내재된향토색을표출하며, 내고장의자랑거리를알릴수있는기회를갖어야하겠다. 이를위해서는무엇보다도정체성확립을위한지침서가필요하다고생각된다. 인천지역의정체성은개항이후개항장같은임해도시로서의발전과정에서특색이나타나듯바다와연관성속에서찾아야할것이다.
1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여기서는 그 일부로서 우리 고장의 밑뿌리가 되는 인천지역의 선사문화 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구석기 시대 인간의 자연 극복력이 부족했던 선사시대, 그 중 구석기시대는 자연환 경이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특히 자연 환경과 생활환경이 어우러진 장소에 동굴이나 물가에서 막집을 짓고 살던 구석기인은 사냥 어로 채집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이어갔고, 환경의 변화 에 따른 먹거리의 변화는 生과 死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임과 동시에 이동의 계기를 제공하였던 셈이다. 태초의 인천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를 살핌에 있어, 먼저 인천지역 에도 구석기 유물 및 유적은 존재할까? 더 밝혀질 가능성은 없을까? 그리 고,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환경 요소로 작용했던 현재의 황해 모습은 언제 형성되었을까?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1. 인천지역의 구석기 시대에 대한 특징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유형은 동굴유적(cave site)과 해안가 강가의 한데유적(open site)으로 구별되는데, 동굴유적의 경우 동굴 자체가 집 역할을 하였고, 내부에서는 각 동물 뼈화석들이 출토되어 구석기인들의 식생활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물가의 한 데유적은 주변의 자갈돌을 이용하여 뗀석기를 가공함으로서 그들의 석기 제작 기술은 물론 삶의 전반에 관한 단서를 파악할 수 있다. 인천지역의 경우 현재까지 구석기 시대의 단일 유적은 찾지 못했지만, 지형상 해안가에서의 존재 가능성이 크며, 해안가에 접한 야산의 동굴이 나 바닷가의 해식동 등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특히 강화도 북부 일대 는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기수역(汽水域)이며, 한강과 임진 예성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11 인천지역의 선사문화 인천지역 구석기 시대의 흔적은 무엇이 있을까? 구석기는 크게 격지(flake)와 몸돌(core)로 나뉜다. 격지는 연모로 쓰 기 위해 큰 돌에서 떼어낸 조각이며, 몸돌은 격지를 만들고 난 나머지 돌 을 말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전기 구석기는 돌의 가장자리 양쪽을 엇갈려 떼어 S' 자 모양의 휘임날을 만들거나 모루에 대고 때려 직접떼기의 거친 수법으 로 다목적 연모를 만드나, 후기 구석기로 갈수록 간접떼기로 정교한 날을 가진 전문적 용도의 석기를 만들게 된다. 석기는 용도에 따라 주먹도끼 찍개와 같은 사냥도살용, 긁개 밀개의 부엌조 리용으로 나뉜다. 인천지역에서 찾은 유물을 살펴 보자. ① 주먹도끼(Hand-axe) : 사냥용으로 분류되는데, 석재의 가장자리에 엇갈림 떼기를 베풀어 날카로운 날을 만들었으며,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암을 사용하였다. 영종도 송산 유적(중산동 해안가)에서 지표 채집하였다. ② 사냥돌(Bola-stone) : 사냥용 연모로서 돌을 공처럼 둥글게 가공하 여 칡넝쿨과 같은 끈을 묶어 던져 먼거리에 있는 짐승을 잡는 연모이 다. 재질은 석영이며, 송산 유적에서 지표채집하였다. ③ 몸돌(Core) : 격지석기를 만들고 난 나머지 부분을 도구로 사용하였 으며, 사냥돌과 같은 둥근 모습이다. 재질을 석영제이며, 삼목도에 서 발견되었다. ④ 긁개(Side-scraper) : 격지석기로서 날 부분의 가장자리에 정교한 떼기를 베풀어 도구를 만들었다. 동물가죽 혹은 나무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하는 부엌조리용 도구이다. 삼목도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 강화군 오상리에서는 석영제 몸돌과 격지석기가, 장정리에서도 뗀석 기가 출토된 바 있다. 이 도구들은 구석기 시대의 전형적인 뗀석기이며, 주변에 널리 산재된 암석을 이용해 도구를 제작하였다. 또한 주로 해안가 및 야산에서 찾아지 고 있어 어로 사냥생활과 밀접한 당시 도구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들이
1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구석기 유적을 찾는데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또한 문학산이나 삼목도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의 특징을 지닌 지층(고토 양층)이 찾아져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3. 인천지역에서 더 존재할 가능성은? 지금까지 인천과 주변도서의 조사 상황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인 천과 가까운 해안지역인 경기도 화성군과 평택지역에서 구석기가 찾아지 며, 충남 해역의 초락도 웅도 안면도 호도 빙도에서 몸돌 및 격지 석기와 함께 구석기 시대의 퇴적층이 확인되어 황해안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의 존재에 확신성을 더해 준다. 현재 상황속에서 행정당국과 유관 학술 기 관의 끊임없는 지원과 활동을 위한 지혜가 모아져야 할 것이다. 4. 구석기 시대의 황해안은? 구석기 시대는 지질연대에서 신생대 제4기 갱신세(Pleistocene)에 해 당한다. 이 시대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번갈아 발생하며, 우리 나라는 빙 하가 덮은 흔적은 없고 빙하주변지역(peri-glacial area)으로 남아 있었 음이 밝혀졌다. 빙하기에는 한국 중국 일본이 연륙(land-bridge)된 상태로서 걸어서 왕 래가 가능하였다. 마지막 뷔름빙하기는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에 끝나며, 점차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바다의 기원을 이룬다. 황해의 경우 빙하기에는 육지로, 간빙기에는 현재와 비슷한 바다가 형 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서 최후 간빙기로 추정되는 12~13만년 전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적어도 3m 이상 높았으며, 그 이후 점차 빙하가 도래하면서 해수면의 하강과 한랭하고 건조한 기후에 따른 사막과 황토 화 작용이 중요한 환경 변화로 밝혀지고 있다. 빙하기에는 현재의 해수면 보다 낮은 지역에서 이동과 생활이 있었을 것이며, 당시의 흔적은 수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 인천지역의 선사문화 13 Ⅲ. 신석기 시대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약 1만년전에 끝남과 동시에 빙하가 물러가고, 따뜻한 자연환경 속에서 중석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 이 때 부터를 후빙기라 부른다. 현재 중석기 시대의 흔적들이 점차 밝혀지고 있으나, 황해 섬 지역에서는 신석기인이 남긴 삶의 흔적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구석기 시대가 뗀(타제)석기와 이동 생활을 특징으로 했다면, 인천 섬 지역의 신석기인들은 간(마제)석기와 토기의 사용이 공통적 요소이다. 인천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확인된 섬은 경기만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백령도 연평도 모이도 당도 강화도 석모도 주문도 볼음도 우도 덕적도 소야도 굴 업도 백아도 울도 문갑도 장봉도 시도 신도 모도 용유도 삼목도 영종도 작약도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 오이도 등 대부분의 섬에서 찾아지며, 모두 130여 곳 에서 확인되었다. 섬지역의 고고유적은 지리적 여건상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원형 보존이 가능한 곳이 많지만, 최근 지자체의 실시와 함께 개발(매립) 로 인한 형질변경과 주민들의 무관심이 어울려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인천 내륙지역의 경우도 송도 동막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많은 유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구두로 전언되고 있어 아쉬움만 남는다. 섬지역도 더 훼손되기 전에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지금까지 나타 난 섬지역의 생활상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1. 섬지역에 신석기 유적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먹거리(어 패류)가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천 중심의 경기만 일대는 세계 5대 갯벌중의 하나로서, 어 패류가 자랄 수 있는 바다환경을 갖춘 식량자원의 寶庫이기 때문이다. 갯벌 형성의 유리한 점은 이 지역일 대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이다. 약 8~9m에 이르는 간만의 차는 한 강으로부터 유입되는 부유물질을 바닷가에 차분히 가라앉혀 갯벌을 만들 기 때문이다. 또한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져 많은 어류가 자랄 수 있는 해 수공간을 이루고 있고, 수심도 깊지 않아 연해에서는 수중 어로생활도 가 능하였을 것이다.
1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또한내륙과섬사이에거리가매우가까워신석기인이섬지역으로유혹되었던것이다. 특히, 갯벌은선사시대인간의활동범위속에포함된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다. 2. 어떤방법으로바다를건넜을까? 인천지역의경우가까이는영종도부터멀리는덕적군도에이르기까지섬마다유적이분포하는데, 동력이없던신석기시대에어떻게이동하였을까가궁금증을더해간다. 유사한관련자료를통해가늠해볼수있겠다. 아직황해안에서는선사시대에배와관련된유물은찾지못했으나함북서포항유적에서뼈로만든노 ( 櫓 ) 가찾아졌다. 그리고, 이웃중국의경우기원전 6000년전에해당하는하모도유적에서나무노가여러개찾아져당시에도배를이용했다는확연한흔적을찾아볼수있다. 아마도몇년전신안앞바다에서침몰한중국 ( 원나라 ) 배가갯벌속에묻혀남아있었듯이, 당시의배도어떤형태로든지흔적의일부는남아있으리라생각된다. 따라서유물의보존환경이양호한해양토탄층의조사가절실히필요한것이다. 아마도통나무배나뗏목 ( 혹은떼배 ) 을만들어연안항해기법으로이동하였을것이며, 오랜경험에의해해류보다조류의흐름을적절히이용했을것이다. 가까운섬간의경우는썰물때드러난갯벌 ( 특히모래펄갯벌 ) 을통해건넜을것이다. 3. 삶의흔적 ( 유적 ) 은어떻게남아있을까? 황해섬지역의경우유적의형태는크게 2가지형태이다. 하나는한장소에서여러시기에걸친삶의흔적 ( 文化層 ) 이겹겹이층위 ( 層位 ) 를이루며나타나는유물포함층 ( 遺物包含層 ) 유적이며, 다른하나는패각이쌓여있거나경작지에널려있어형성된조개더미 ( 貝塚 ) 유적이다. 지금까지인천섬지역의경우조개더미유적이약 60여곳, 유물포함층유적이 20 여곳으로조개더미유적이훨씬많다. 유물포함층유적의대표적인예는영종도송산유적이며, 조개더미유적
15 인천지역의 선사문화 15 은 시도 숙이 백령도 말등 영흥도 소장골 덕적도 진리 등 각 섬마다 산재되 어 있다. 다음, 섬지역의 신석기인들은 어느 곳을 택하여 살았을까? 유적들이 분 포하는 위치와 주변 지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물포함층의 경우 만(灣)에 형성된 사주(砂洲) 혹은 사구(砂丘) 지형 에 많이 형성되며, 또한 해안가에 평평하게 펼쳐진 대지(주로 경작지로 이용)에서도 그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조개더미도 해안가 혹은 해안가로 뻗은 산자락(串)에 형성된 경우가 많 다. 물론 바다에서 떨어져 나타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 징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으로 뒤로는 산이 둘러싸여 추운 바람을 막아주며, 앞으로는 갯벌 그리고 바다와 접하고 있으나 만(灣) 지 형의 특성상 외해로부터의 물난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 지 밝혀진 유적의 높이는 해발고도 약 10m 이내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현대 사람들이 보아도 아늑한 지형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대부분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이 문제는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옷에 대한 자료는 보존의 어려움으로 자료를 찾기란 힘들다. 오늘날까 지 남아 있는 예가 드물며, 짐승의 가죽이나 나뭇잎 등을 이용하였을 것 이며, 송산유적에서 출토된 가락바퀴(방추차)는 직조와 관련시킬 수 있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식량은 유적의 성격에서 나타나듯 조개더미(貝塚) 유적이 대부분을 차 지함으로서 일부는 알 수 있다. 조개더미의 구성을 보면 인천 섬지역의 경우 90% 이상이 굴(石花)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굴이 풍부하여 주된 식 량자원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어류 및 기타 식량의 구체적 이름은 발굴 유적이 증가함으로서 밝혀져야 할 과제인 것이다. 눈들유적에서 씨앗의 일부가 확인되었으나 현재 분석중에 있다. 해안가 유적인 영종도 송산유적이나 삼목도 운서동유적에서 다수의 화 덕자리가 찾아졌는데, 그 용도는 아마도 이들을 조리하기 위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1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집터는경기만지역중영종도운서동눈들유적에서모두 4기가발굴되었다. 형태는원형내지말각방형이며, 모두땅을파고만든움집이다. 바닥은단단히다지기위해점토를굳혀처리하였고, 기둥을세우기위한기둥자리도확인되었다. 집터내부는도구를저장하기위한저장구덩 ( 竪穴 ) 과취사나난방을위해만든화덕자리가확인되었다. 의식주문제는발굴유적의절대적증가를기다려야할것이며, 자료의축적이이루어지면삶의모습이선명해질것이다. 또한조개더미유적을통해해당유적에서살았던기간, 계절, 이동경로등이파악되어야할것이다. 5. 신석기시대의흔적 ( 유구 ), 유물종류는무엇이있을까? 유구의종류는화덕자리, 집터, 돌무지, 움 ( 저장구덩 ) 등여러가지가있으나, 가장많이확인된화덕자리를중심으로살펴보자. 화덕자리는불을피웠던곳이다. 역할은취사나난방, 밤에는조명의역할을하지만, 인천지역의경우 ( 영종도, 삼목도유적 ) 대부분은집터가없이집중되어있어주된용도는취사였을것이다. 단지, 바닷가이면서취사시설을갖추고있음에도조개더미나여타의유적이발견되지않은점이특이하며, 앞으로해결할숙제이다. 화덕의모양은원형내지타원형으로주변의모난돌을깔아만들었고, 크기는지름이약 1m 안팎의것이가장많다. 화덕주변에서는숯과불에그을린돌과모래가섞여있으며, 내부에서는토기조각들이출토되기도한다. 유물은발굴조사나지표조사에의해확인된유적에서공통적으로토기조각들이출토된다. 아마도신석기시대이지역주민에게는토기가생활의필수품이었던것같다. 토기의생김새는한반도의경우각지역마다다양한모양이나타나는데, 인천섬지역의경우반계란형 ( 혹은포탄형 ) 으로곧은입술에뾰족한바닥을하고있다. 토기의크기는입술조각으로보아암사동유물같은대형토기는없으며, 입술지름이 20cm 정도의소형토기가많이차지한다. 제작은주변의
17 인천지역의 선사문화 17 점성이 강한 진흙과 모래알을 혼합해 사용하였으며, 그릇을 단단허게 하 기 위한 보강제로서 활석 운모 장석과 같은 광물을 고루 섞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작수법은 질그릇의 크기에 따라 다른데, 소형이라는 점과 그릇의 단 면을 관찰해 보면 손빚기(手捏法) 내지 테쌓기(輪積法)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릇 표면에 새겼던 문양은 주목적이 장식이지만, 작업을 하기전 그릇 부위별이나 공간 배치에 따라 머리속 구상을 먼저 하였던 것이다. 따라 서, 문양은 당시 사람들의 사유관념을 나타내주는 좋은 자료이나, 대개의 경우 풍요나 다산을 기원하는 경향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문양 역시 각 지역별 전통과 보수성이 강한 흔적으로 보인다. 인천 섬 지역의 경우 부위별로 문양을 보면 입술부분은 짧은 빗금무늬 (短斜線文), 몸통부분은 고기뼈무늬(魚骨文), 바닥은 무늬없이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문양은 새겨진 속성을 분류하여 유적의 연대를 가늠하는 요 소로 쓰이기도 한다. 석기는 토기에 비해 다양하지 못하고, 수적인 면에서 간석기 보다 뗀석 기 출토유적이 많은 편이다. 유적들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돌화살 촉이며, 갈돌 그물추 돌도끼 숫돌 뗀석기 등이 출토된 바 있다. 6. 유적의 연대는 어느 정도일까? 연대측정방법은 2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숯자료를 이용한 방사성탄 소연대측정(절대연대측정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표준 유적의 유물을 기 준으로 비교 유적과 유물양식을 서로 비교하여 선후관계를 측정하는 법 (상대연대측정법)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절대 연대측정 자료는 송산유적의 경우 C14 측정 결과 지금부터 5,080~5,365년 전(신석기 중기)으로 측정되어 인천 섬 지역에서 는 가장 오랜 연대가 검출되었다. 시도 조개더미에서도 약 3,100년 전(신 석기 후기) 안팎으로 검출된 바 있다. 상대연대측정 방법에 의해 눈들유적은 신석기 중기~후기, 삼목도 유적 은 신석기 후기로 비정되며, 기타 지표채집에 의해 밝혀진 유적도 거의 대부분 신석기 후기(약 3,000년전)로 가늠되고 있다. 앞으로 신석기 유적은 내륙에서 찾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섬지역 만
1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큼은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기록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7. 신석기 시대의 황해안은? 마지막 빙하가 약 1만년 전에 후퇴하고 후빙기가 되면서 현재와 비슷 한 자연 환경을 이루게 된다. 빙하기 동안 바닥을 드러내던 황해는 기온 상승에 따라 빙하가 녹고, 낮은 지역부터 점차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여 황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해안가 생활을 주로 하던 신석기인은 해수면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했고, 그 변화에 맞춰 선사인의 살림터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듯 해수면 변동은 선사시대 연구에 한 몫을 한다. 신석기 시대 황해안이 형 성과정에 대해서는 충남 태안반도 일대 가로림만의 해수면 변동을 단계 별로 연구한 결과가 있어 참고해 보자. 가로림만 조간대의 해수면 변동 곡선은 표 1 과 같다. <표 1> 가로림만의 해수면 변동 곡선 표 1 을 살펴보면 지금부터 5,000년 전을 조금 지나 현재의 해수면 에 이르렀고, 그후 현재의 해수면 보다 2m 가량 상승했다가 약 1000년이 지난 4,050년을 정점으로 점차 하강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고학적 유적에서 나타난 각종 자료를 통해 해수면 변동을 밝힌 예도 있다. 경기도 일산의 선사유적 조사에서 실시한 규조류 분석에서도 지금 부터 6,000~5,000년 사이에 해진극상기(海進極上期)가 있었고, 지금부터 3,050± 80~2,460± 70년 사이에 현재의 해수면 보다 적어도 5m 이상의
19 인천지역의 선사문화 19 해수면 상승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충청도 전라도 해안 즉 서남부 해안 지역의 지형학적인 연구를 통 해서도 지금부터 6,000~3,000B.P 사이에 현재 해수면 보다 2~3m 정도 높 았고, 그 이후 현재까지 안정적인 해면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이 밝혀지 기도 했다. Ⅳ. 청동기 시대 1. 청동기 시대의 일반적 특징은 무엇일까? 이 시대는 한반도의 경우 보통 기원전 10~4세기에 해당하며, 처음 금속 제 연모 즉 청동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청동제품 으로 대표적인 것은 청동검이며, 동검과 함께 간석기ㆍ민무늬토기ㆍ그리 고 무덤으로서 고인돌(支石墓)ㆍ돌널무덤(石棺墓)ㆍ독무덤(甕棺墓) 등이 대표적 유적ㆍ유물이다. 경기만 지역의 경우 현재까지 확인된 청동기 시대의 특징적 요소는 강 화도의 고인돌 유적군이며, 최근에 인천 서구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집터가 밝혀지고 있다. 여기서는 최근에 새로 발굴된 집터유적을 중심으 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인천의 청동기 유적은 어디에 위치할까? 이 시대의 집터는 일반적으로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그러나 경기 만지역의 경우 내륙보다는 다양한 입지조건을 보이는데, 낮은 구릉지대는 물론 해안가에도 입지함이 밝혀졌다. 입지요인은 생계경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며, 구릉과 해안 즉 육지 와 바다를 이용한 광역화된 생업 경제 체제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즉, 구릉에 위치한 유적이 한강수계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김포평야가 펼쳐져 있어 한강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경기만의 영종도 송산 유적이 나 도서지역의 고인돌을 고려하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대표적인 유적은 낮은 구릉에 위치한 원당동ㆍ동양동ㆍ검단동 유적이
2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있고, 해안가유적은영종도송산유적과고지형상해안가구릉지에해당하는문학산유적이있다. 특이한점은청동기유적이발견되는구릉지형에서대체로구석기유적이같이찾아진다는점이다. 이것은생활ㆍ생계양식의유사성을보여주는것으로유물을통한상세분석이필요하며, 해안지역의경우청동기유적과신석기유적이같이발견된다는점이다. 결국내륙처럼동굴이나강가에입지할수없는인천지역의경우생계에필요한경제활동이유리한지점을중심으로유적이형성되었음을의미하며, 시대별입지유형이구별되는내륙에비해경기만의지역성을띤다고볼수있다. 3. 인천지역의청동기유적은어떤성격을띠고있는가? 인천지역의집터는대부분움집이며, 평면형태는 ( 세 ) 장방형ㆍ방형ㆍ말각방형ㆍ원형등다양한형태가있지만장방형이 70% 로서가장많다. 이것은가옥구조를결정짓는속성으로서한강유역의특징을보여준다. 장방형의긴변은약 5~6m 정도, 짧은변은 2~3m 정도가평균적이며, 동양동집터의경우약 12m에달하는것도있다. 움의깊이는 20~40여cm로서신석기시대에비해낮은편이며, 일반적인움의깊이는 60~30cm에해당하고있어다른청동기유적과비교해도낮은편에속한다. 바닥은생토를그대로쓰거나점토다짐을하였으며, 화덕의설치여부는자료의한계상알수없다. 특히, 동양동유적의경우 3기가확인되었는데, 화덕시설이없다는점, 출토유물의유사성 ( 이중구연토기ㆍ석촉ㆍ석부ㆍ지석등 ) 등이상사점이고, 상이점은 1호가 2호에비해 2배정도의크기라는점이다. 발굴자도지적했듯이 2호는집터의기능보다석기제작지 ( 공방지, Factory site) 로서의역할을언급하고있지만, 필자는 1호의경우도같은기능을했던것으로보고자한다. 그이유는두집터모두연중거주에필수적인화덕시설을갖추지않았다는점이며, 추웠던시기를제외하고계절적으로일정한목적을갖고사용한공간으로해석되기때문이다. 두집터사이에는약간의차이점도발견되는데, 세분화된 1ㆍ2차가공
21 인천지역의선사문화 21 시설의구분이어느정도가능할것같다. 2호집터의경우망치돌과다수의석편조각이출토되었고, 1호집터는찰절도구가출토되는차이점으로볼때, 2호집터에서 1차가공을한다음더넓은공간에서마무리석기제작을한것으로추정된다. 그러나아직보고서미간, 찰절도구등석기유물에대한상세설명부족등으로제한점이있어향후구체화된연구가필요하다. 4. 인천지역의청동기유적은어떤성격을띠고있는가? 인천지역에서발굴된집터수에비해출토유물은매우빈약한편이다. 토기는이중구연토기ㆍ무문토기가있으며, 간석기로는석촉ㆍ석창ㆍ반달돌칼ㆍ돌방추차ㆍ돌끌ㆍ달도끼등이있다. 특히, 달도끼는環狀石斧또는바퀴날도끼라하며, 중심구멍에나무를끼워사용한무기의일종인석기이다. 중심부의구멍부위가두껍고, 가장자리로갈수록얇아져날카로운날을이루도록하였다. 이유물은북부지방의고인돌에서주로발굴된바있으며, 팽이형토기와관련된유적에서출토되고있다. 인천지역의경우집터 ( 원당동 4구역 14ㆍ17호 ) 에서 2점이발굴되었다는주목할일이며, 집터내토기의형태도팽이형토기인지의여부에관심을가져야할것이다. 현재, 팽이형토기는강화도집터유적에서유일하게출토된바있다. 달도끼의용도에대해서는출토지가고인돌이아니라는점과희귀성을고려할때집단간의방어목적은물론집단내계층발생이있었음을시사하는것으로볼수있다. 즉인천지역의복합사회의실마리를제공한다고볼수있다. 따라서구체성을더하기위해서는집터의공간적위치ㆍ유물의구성을비롯한주변유적과의관련성을통해비교고찰이필요하다. 5. 인천지역의청동기유적은어느시기에해당할까? 청동기시대의유일한편년자료는불노동 3 구역청동기시대집터의방 사성탄소연대측정결과 BC. 730~470( 보정연대 ) 를얻었다. 이연대는주변
2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지역을이해하는상대편년자료가될것이며, 필자는강화도고인돌의상한연대를 BC. 8~7로고찰한바있어이를뒷받침한다. 또한돌널무덤의형식이이른시기이고, 문학산유적이전기로추정되고있다는점에서어느정도편년이일치됨을알수있다. Ⅴ. 맺음말 현재인천지역은옹진군지역이포함되면서우리나라에서단일행정구역으로가장큰면적을지니고있다. 더욱이수도권에위치하고있어개발의손길이광범위하게급속도로이뤄지고있어더욱더고고학적인관심이필요하다. 이제는이들을통한연구의심화와정리가필요한시기이며, 이를토대로인천의역사는재조명되어야할것이다. 즉인천지역의선사문화는바다와밀접한연관성을갖고있으며, 밑뿌리가되는섬지역및해안지역중심의선사분야야말로정체성구명작업에시금석이될것이다.
23 강동석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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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인천의 고인돌 문화 25 인천의 고인돌 문화 - 강화도를 중심으로 강동석 (문화재청) 목 차 Ⅰ.인천의 고인돌 분포현황 1) 강화도 지역 2) 인천내륙 3) 기타 도서지역 Ⅱ.강화도지역 고인돌의 입지와 분포 특징 Ⅰ. 인천의 고인돌 분포현황 1) 강화도 지역 강화도 지석묘는 일제강점기 이래 몇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지석묘 축조집단의 성격과 지석묘의 구조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더욱이 1990년 대 초에 비롯된 각종 분포조사는 지석묘의 입지와 분포, 형식과 구조, 규 모 등에 대한 다양한 계량적 정보를 제공하였고, 이를 이용한 통계분석을 통해 강화 지석묘 축조집단의 사회성격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강화 지석묘의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남부지역에서 확인된 2개의 소군집 을 제외하고 대부분 북부지역에 밀집 분포된 양상을 보인다. 산지를 중심 으로 분포지역을 나누면, 크게 고려산 일대의 삼거리 고천리 부근리 망월리
2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지석묘군과 별립산-별악봉 일대의 교산리지석묘군으로 구분된다. ① 고려산일대의 지석묘군 고려산은 강화도를 동서방향으로 횡단하는 여러 산지 중 하나로, 봉천 산 별립산과 함께 강화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산의 남쪽은 혈구산과 연결되어 있어 대부분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북쪽산록은 능선 들 사이로 곡간대지와 선상지가 발달해 있다. 고려산일대의 지석묘들은 대부분 북쪽산록과 기슭에 분포하고 있으며, 삼거리 고천리 부근리 오상리 망월리 지석묘군 등 모두 5개의 지석묘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거리지석묘군은 강화도 내의 여러 군집 중 가장 밀집도가 높은 곳이 다. 모두 30기의 지석묘가 분포하며, 4개의 소군집과 개별분포양상을 보 이는 지석묘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군집은 2~8기의 지석묘들이 개별분포 를 보이며 산기슭과 산사면, 능선 등에 축조되었는데, 산기슭에 입지하는 지석묘의 수가 가장 많으며, 능선 상에도 7기가 입지하고 있다. 능선에 입지하는 지석묘는 대부분 북방식지석묘라는 특징을 보인다. 소군집 내의 지석묘 형식은 개석식과 북방식 지석묘가 혼재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 분 개석식 또는 북방식이 각각 하나의 군집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삼거리 지석묘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67년에 국립박물관에 의해 한차례 이루어졌다. 당시 조사는 소동부락의 지석묘군에 대해 이루어졌는데, 강 화도의 북방식 지석묘의 축조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발굴조사였 다. 조사결과, 지석주변과 묘실바닥에서 작은 할석들을 깔아 지석을 보강 하였으며, 묘실내부도 마찬가지로 할석들이 깔아 시상을 마련하였음이 밝 혀졌다. 유물은 마제석촉 4점과 무문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지석묘 주변에 서도 방추차와 유경식석검이 출토되었는데, 이 석검은 서북한 지역에서 각형토기와 공반되는 유물로 소동 부락지석묘와 인접한 지역의 주거지에 서 발견된 각형토기와 함께 서북한지역과의 연관성을 추론할 수 있었다. 고천리 지석묘군은 고려산(436m) 정상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산마루를 따라 축조된 군집이다. 강화도의 대부분 지석묘는 능선이나 산기슭, 평지
27 인천의 고인돌 문화 27 또는 구릉에 분포하지만, 이 지석묘의 경우 해발 250~300m의 산마루에 입 지하고 있어 다른 지석묘군과 차별성을 보인다. 이 지석묘군은 20기의 지 석묘가 3개의 소군집을 이루고 있다. 산마루 남쪽의 약간 경사진 면에 위 치한 소군집은 북방식 2기와 개석식 1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방식 지석 묘 중 하나는 묘실의 단벽이 유실되어 내부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삼거 리에서 고려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에 위치한 소군집은 가장 많은 지석묘가 분포하는데, 북방식 9기, 개석식 2기가 축조되어 있다. 고천리지석묘군은 북방식이 16기, 개석식이 4기로 북방식의 비율이 높으 며, 입지와 분포 면에서 볼 때 삼거리 지석묘의 축조집단에 의해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왜냐하면 비록 고천리지석묘군이 삼거리와 오 상리 지석묘군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지만, 삼거리 지석묘가 분포하는 능선 과 연결되어 있고 모두 능선과 산마루라는 조망권의 확보가 유리한 곳에 지석묘가 축조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한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망월리지석묘군은 2001년에 수목의 간벌(間伐)작업 과정에서 발견 된 유적으로 여기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북방식이 대부분이며, 크게 두 개 군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하나의 군집은 곡간에 형성된 소하천과 인접한 완산사면에 위치하는데, 개석을 추정되는 석재와 묘실의 장벽 등이 노출 되어 있다. 이 곳에 분포하는 지석묘의 수는 약 10여 기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소군집은 인접군집과 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지 점에 위치한다. 민묘 조성과정에서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묘실의 장벽이 남아 있고, 주변에 개석으로 보이는 석재들도 산재해 있다. 오상리 지석묘군은 고려산의 남서쪽 산사면과 구릉에 분포하고 있는 지 석묘군으로 3개의 소군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분포 수를 보이는 군집은 선문대 고고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이 군집 은 얕은 구릉의 정상부를 따라 10기의 북방식 지석묘와 2기의 개석식 지 석묘가 분포하고 있는데, 이중 북방식 지석묘 10기가 발굴되었다. 조사결 과,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ㅍ 자 형태이고, 장축방향은 대부분 북동-남서
2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방향을 이루고 있었다. 묘실과 주변에서는 각형토기편을 비롯하여 마제석 촉, 환상석부, 관옥, 마제석검편, 반월형석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려산 일대에서 삼거리지석묘군 다음으로 가장 분포수를 보 이는 곳은 부근리지석묘군이다. 이 지석묘군은 하점면 부근리와 송해면 상도리 하도리에서 확인된 28기의 지석묘들인데, 주로 2~5기로 구성된 지 석묘들이 소군집을 이루며 분포한다. 부근리지석묘군은 사적 제137호와 같이 평지에 축조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구릉이나 산기슭과 같은 지석 묘 축조집단의 생활공간으로 추정할 수 있는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 체로 개석식 지석묘들로 구성되어 있다. 부근리지석묘군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고려산과 봉천산을 잇는 좁 은 평지에 축조된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로서 남한지역에서 가장 규모 가 큰 북방식지석묘이다. 묘실은 판석 두 매를 놓고 단벽 또한 각각 한 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막은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개석 은 장축 6.5m 단축 5.2m 두께 1.2m의 크기로 강화도 내에서도 가장 큰 지석묘이다. ② 별립산-별악봉 일대의 지석묘군 별립산과 별악봉은 강화의 최북단에 위치한 산지로 고려산과 마찬가지로 강화도를 동서로 횡단하고 있다. 간척이전 지형을 보면, 고려산과 별립산 -별악봉은 현재 사적 제137호인 강화 지석묘가 입지한 좁은 평지로 연결 되어 있다. 이 일대에서는 모두 42기의 지석묘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별 립산과 별악봉 사이의 구릉성 산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일부는 별립산 남 록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분포한다. 먼저 교산리지석묘군을 살펴보면, 교산리 지석묘군은 별악봉(167.3m)과 별립산(399.8m) 사이에 형성된 구릉성 산지의 능선과 산기슭에 입지하고 있다. 이 군집에서는 모두 28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는데, 삼거리 지석묘 군과 함께 강화도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보이고 있다. 교산리 지석묘군은 7개의 소군집과 개별분포를 보이는 5기의 지석묘로
29 인천의 고인돌 문화 29 이루어져 있다. 이들 소군집들은 구릉과 산기슭, 능선상에 분포하고 있는 데, 개석식 지석묘로 이루어진 소군집들은 대개 구릉과 산기슭에 분포하 는 반면, 북방식 지석묘는 해발 100m이상의 전망이 좋은 능선 상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교산리 지석묘군의 형식에 따른 입지분포, 밀집도 는 삼거리 지석묘군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한편 별립산-별악봉 일대에서 밀집된 양상을 보이는 교산리 지석묘군과 다르게 별립산 남록에는 1~2기의 지석묘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분 포하고 있다. 지석묘들은 모두 간척평야와 접한 해발 20m 내외의 낮은 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간척이전에는 해안과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③ 길상산 일대의 지석묘 길상산(해발 320m)은 강화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산지로서 조선 중기까지 강화본도와 분리되어 별도의 섬을 이루고 있었다. 길상산 일대의 지석묘 는 구제발굴조사에 앞서 진행된 지표조사과정에서 확인되었는데, 지금까 지 강화도에서 조사된 지석묘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석묘는 길상산의 동북쪽에 자리한 선두리의 작은산뒤 마을에서 확인되었다. 지석 묘는 단독으로 분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3기~9기의 소군집을 이루 고 분포하고 있다. 모두 20여 기가 발견되었다. 2) 인천내륙 최근까지 인천 내륙지역에 알려진 대표적인 지석묘는 시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된 대곡동지석묘군과 학익동 주안동 문학동지석묘 등이었으며, 강화도 에 비해 분포수나 밀집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최근에 대 곡동지석묘군에 대한 본격적인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강화도 지석묘군과 비교되는 지석묘 축조집단이 인천 내륙지역에도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천 내륙지역의 지석묘 밀집지역을 살펴보면, 크게 문학산과 가현산 일
3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대로나눌수있다. 1 문학산일대의지석묘문학산일대에는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분포하고있었던것으로보고되었다. 1953년에발행된 韓國史前遺蹟遺物地名表 에의하면청학동에도고인돌 1기가있었다고하지만, 현재남아있는것은학익동고인돌 2기, 주안동고인돌 1기, 문학동고인돌 1기뿐이다. 학익동지석묘는모두 7~8기정도가있었으며, 몇기씩무리를이루어분포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이지석묘에대한발굴조사는 1927년이래몇차례진행되었다. 최초의조사는조선총독부에의해 3기가발굴조사되었다. 모두북방식이었으며, 지석묘내부에서무문토기편과석촉, 석도, 지석등이출토되었다. 이후 1927년의자료에의하면경성대학에서지석묘 3기를발굴한후 2기를복원하였다는기록으로볼때, 한차례더발굴이진행되었던것으로보인다. 이조사에서는석부와갈돌등다수의석기류가출토되었다고전한다. 이러한일제강점기의조사기록을보면, 학인동지석묘는일본인의인천지역거주또는빈번한왕래가이루어지면서일찍이주목받았던것같다. 그렇지만이지석묘군은소년형무소가들어서면서 1기만남았고 1998년에동일부지에남아있던북방식지석묘 1기더발굴되어현재인천시립박물관에모두이전복원되었다. 한편주안동지석묘는 1956년 仁川鄕土史料 에의하면, 3기의지석묘가있었다고전하지만, 사진자료를통해볼때자연암반으로추정되며완전한형태의지석묘는사미부락에있었던 2기의지석묘를들수있다. 이것은 1957년국립박물관과이화대학에의해발굴조사가이루어졌는데, 유물은출토되지않았지만단벽을갖춘북방식지석묘임을확인할수있었다. 이밖에문학산일대에는문학산서쪽도천현주변에문학동지석묘가있었다. 1962년에발굴조사가이루어졌으며, 유물은출토되지않았다. 현재인천수봉공원에상석만이전된상태이다. 이처럼문학산일대에분포하고있었던지석묘중원래위치에있는것은
31 인천의 고인돌 문화 31 한 기도 없으나, 문헌상에 나타난 지석묘 수는 모두 12기 정도로 보인다. 이들 지석묘는 대부분 북방식지석묘로 확인되어 문학산일대의 지석묘 형 식은 북방식이 우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② 가현산 일대의 지석묘 가현산일대는 인천내륙에서 가장 많은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 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지석묘군은 대곡동지석묘군인데, 원래 김포시 대 곡리지석묘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5년 경기도 김포시 검단면이 인천 광역시 서구로 편입되면서 인천의 지석묘군이 되었다. 그동안 대곡동지석 묘는 1977년에 간행된 문화유적총람에 소개된 이래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 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분포조사는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가장 최 근에 실시된 지표조사는 인하대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A~E군 등 5 개의 소군집에서 99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대곡동지석묘군는 현재 정확히 지석묘의 분포 수나 형식 등을 파악할 수 없지만, 인천북부지역의 대규모 지석묘군인 점은 확실하며, 주변의 마산 리 석모리지석묘군과 함께 하나의 통합된 지역공동체에 의해 축조된 지석 묘군 으로 보여 진다. 3) 기타 도서지역 강화도와 인천내륙을 제외한 영종도, 옹진군 일대의 도서지역에도 군집 을 이루지 않지만 지석묘가 발견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영종도 운남도 지석묘를 들 수 있으며, 그 밖에 덕적도, 백아도, 청라도 등에서도 지석 묘가 확인된다. 운남동지석묘는 영종도에 위치한 지석묘로서 1962년 인천고등학교 향토 반 학생들에 의해 처음 발견된 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1963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이 지석묘는 지석과 폐쇄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주변에서 발견되어 북방식지석묘로 추정되며, 유물은 지석묘 내부의 부식
3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토층에서 청자편과 도기편이 출토되었다. 덕적도의 지석묘는 서울대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모두 2기가 발견되었는데, 이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덕적도 진리 추정지석묘 1 2 로 명명하였다. 한편 백아도에서는 개석에 채석흔이 있고, 개석 밑에 지 석을 가지고 있는 지석묘 1기가 확인되었으며, 청라도에서도 지석묘 1기 가 조사되었지만, 덕적도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지석묘의 형식은 확인할 수 없었다. Ⅱ. 강화도지역 고인돌의 입지와 분포 특징 강화도와 인천내륙, 도서지역에 모두 27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 다. 이 중에서도 강화도는 북부지역에 한정되어 160여 기가 지역별로 소 군집을 이루며 밀집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인접한 인천내륙를 포함한 경기지역과 비교하여 지석묘 형식, 입지적인 면에서 차별성을 지니고 있 다. 먼저 강화도 지석묘는 각 형식별로 규모와 입지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 다. 강화도에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의 형식은 서북한지역과 마찬가지로 북방식과 개석식만이 발견되었을 뿐, 남방식 지석묘는 확인되지 않고 있 다. 강화도에 분포하는 160여 기의 지석묘 중 형식구분이 가능한 132기에 서 북방식은 76기, 개석식은 56기로 북방식이 개석식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각 지석묘 형식별 개석크기는 북방식 지석묘의 경우 대체로 대 중 소의 구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대부분 소형에 속하며, 개석식과 혼재하거나 소군집을 이루며 분포한다. 그러나 신삼리, 점골 등 의 중형지석묘와 강화, 대산리, 양오리지석묘 등 대형지석묘는 군집과 분 리되어 단독분포를 보이며, 차별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개석식 지석묘의 크기는 전체의 약 85%가 0~4.0 에 해당하는 소형의 것들로 북방식과 같이 대형의 지석묘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석묘 형식별 입지분포 양상을 살펴보면, 구릉과 산기슭에서는
33 인천의 고인돌 문화 33 북방식 33기, 개석식 46기로 개석식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능 선, 산사면, 산마루 등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개석식 지석묘의 분포비율 은 낮아지고, 북방식 지석묘의 수가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평 지에는 북방식 지석묘만이 입지할 뿐 개석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지석묘의 축조는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 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주변의 지형과 공간을 이해하고 그 이해방식에 따 라 지형적으로 입지하고 공간적으로 분포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산능선 이나 산마루, 산사면, 평지와 같이 매우 현저한 지형적 요건을 갖춘 곳에 북방식 지석묘가 주로 입지하고 있다는 것은 북방식 지석묘가 당시 지석 묘 축조집단의 사회정치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 다. 특히 부근리 점골, 양오리, 대산리, 부근리 강화 지석묘와 같이 대형 지석묘들은 모두 북방식으로 구릉의 정상부나 능선, 해안가와 접한 평탄 지에 단독으로 축조되어 의도적으로 특정장소에 대한 공간적인 배려가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지석묘와 비교하여 인천내륙의 대곡동지석묘군에도 강화도와 같 이 높은 밀집도를 보이며 대규모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약 50%에 해당하는 지석묘의 형식을 알 수 없어 형식별 입지 분포현황을 파악할 수 없지만, 북방식지석묘의 경우 대체로 능선의 정상부에 분포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강화도 지석묘의 형식분포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강화도 지석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지석묘의 규모, 형식별 입지분포, 소 군집 분포양상 등을 고려하여 분포유형의 설정이 가능하다. 지석묘 분포 유형의 설정은 지역적인 차원의 연구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한 지석묘 축 조집단의 지역적 범위가 성립되지 않으면 쉽게 접근하기 힘들다. 강화도 는 한정된 지역적인 범위 내에 지석묘가 밀집분포하고 있는 지역으로, 지 석묘의 형식, 규모, 입지, 밀집도 등 제 양상들이 비교적 다양하게 나타 나고 있어 분포유형 설정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강화도 지석묘는 지석묘의 형식과 규모, 소군집 지석묘의 분포양상, 입 지 등을 고려해 볼 때 Ⅰ, Ⅱ, Ⅲ의 세 가지 분포유형 설정이 가능하며, 이들 분포유형들 사이에는 일정한 위계관계도 발견된다. 먼저 Ⅰ유형은
3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8기의 개석식 혹은 북방식 지석묘들이 소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들로, 산기슭, 구릉과 같이 주거지, 경작지로 주로 사용되었을 생활공간 내에 분포하고 있다. 삼거리, 부근리, 교산리, 오상리 등 거의 모든 지석묘군 에서 나타난다. 입지적으로 이 유형의 지석묘들은 산지의 계곡에서 형성 된 소하천과 같이 음료수나 농업용수의 확보가 쉬운 곳에 인접하여 축조 되는 경향이 있으며, 단독으로 축조된 북방식 지석묘와 같이 차별화된 장 소에 입지하지 않고 생활공간 내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사회내부적 으로 수직적 분화가 덜 진전된 단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Ⅱ유형은 Ⅰ유형에 비해 무엇보다도 입지적인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Ⅰ 유형의 지석묘들이 소군집을 이루며 산기슭이나 구릉과 같은 생활공간 내 에 축조되었다면, Ⅱ유형은 능선이나 산마루, 구릉의 정상부 등 전망이 좋은 곳에 입지한다. 또한 이 유형의 지석묘들은 교산리와 고천리의 일부 지석묘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석묘들이 북방식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채석과 축조과정에서 개석식보다 정교한 축조기술과 많은 노동력 이 투입되는 북방식의 지석묘가 해발 100m 이상의 산마루 능선과 같은 주 변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차별적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은 지석묘 축조집단 내부의 계층분화가 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유 형의 지석묘 피장자는 이러한 계층화된 사회에서 정치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었던 계급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유형의 지석묘들은 모두 삼거리와 교산리 지석묘군에 속하는 것들로 지역적인 편 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Ⅲ유형의 지석묘들은 사적 제137호인 부근리 지석묘, 양오리, 대산리 지 석묘와 같은 대형 북방식 지석묘들이다. 이 지석묘들은 고려산 일대의 지 석묘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구릉의 정상부와 평지에 입지하고 있다. 사 적 제137호 강화 지석묘는 고려산과 봉천산-별립산을 연결하는 강화북부 지역 유일의 평지에 축조되었는데, 이 지석묘는 이러한 입지와 규모를 볼 때 사회적 이념적 행위의 반복을 위해 배려된 특정한 공간에 배치되어 기 념물과 같은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지석묘 축조과정에서 이루 어지는 공동의 의례수행을 통해 집단간의 단일한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35 인천의고인돌문화 35 지역적인통합을확인하는중요한의미를가졌던것이다. 이러한대형지석묘는축조과정에서대규모의노동력을동원하고통제할수있는정치력과경제력이절대적으로요구되며, 또한입지적으로도어느지석묘보다차별성을보이고있기때문에 Ⅲ유형의지석묘는강화북부지역의지석묘사회에서최상위계층의무덤이며기념물로볼수있을것이다.
3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37 김상열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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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39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김상열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Ⅰ.미추홀과 인천 1.백제의 건국신화 2.彌鄒忽 牙山 密頭里說 3.彌鄒忽 楊洲ž坡州說 4.미추홀 인천설 Ⅱ.백제의 관문,능허대 1.대중국교통로서의 인천 2.능허대와 대진 Ⅰ. 미추홀과 인천 한강유역이 역사상에 뚜렷이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건국되면서부터이다. 문헌상 백제의 역사는 夫餘族인 沸流와 溫祚로 대별되는 집단이 남하하여 토착세력인 마한의 영향력이 행사되고 있었던 한강유역에 이주하여 정착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문헌사료와 고고학 자료가 빈약한 백제 의 역사는 건국과 성장과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三國 史記 에 나타난 백제 초기기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近肖古王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하고 4세기 중반 이후 만주지역에 존재하던 기마민족이 남하하여 세운 일종의 정복왕조로 보아 온조왕대의 백제형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고, 둘째는
4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후대의 사실들을 온조왕대의 기록으로 소급 부회한 것으로 보는 절충론적 인 경향이며, 끝으로 온조왕대의 국가형성으로 인정하려는 긍정적인 경향 이다. 이렇듯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역사는 사료의 신빙성 여부로 견해들 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3세기 이전 한강유역의 고고학적 자료 또 한 결핍되어 있어 백제의 건국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절 충론적인 입장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온조집단이 도읍하였던 慰禮城과 비류집단이 도읍 을 정했던 彌鄒忽의 위치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게속되고 있다. 위례성 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에 稷山으로, 삼국사기 에는 알 수 없는 곳(未 詳地分)이라 하였고, 미추홀에 대해서도 삼국사기 에는 今仁州로, 삼 국유사 에는 仁州 로 표기하여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온 조집단의 최초 정착지에 대해 정확한 위치를 지적하기는 어려우나, 백제 초기 지배세력의 성립과 연결시켜 볼 수 있는 백제초기의 토성과 고분들 이 서울시 일원 한강 남쪽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온조집단이 정착하였던 대략적인 위치는 현재 서울시 범주에 속해 있는 한강 남쪽의 평야지대로 보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백제의 국가형성은 온조집단과 비류집단의 결합을 통해 시작하고 있으므로, 비류가 도읍을 정하였던 미추홀의 위치 또한 서울과 가까운 인 천지역일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근래에 미추홀의 인천설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개진되고 있으므 로, 이들 견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인천지역의 초기 백제에 관하여 설명 하고자 한다. 1. 백제의 건국신화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의 초기역사는 사료의 박약함과 고고학적 근거의 결핍으로 인해 4세기 전반까지의 백제사를 분명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헌사의 입장에서 백제의 국가형성은 서울지역을 중심으 로 한 온조집단과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류집단의 결합을 통해 시작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비류와 온조를 두 축으로 한 백
41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41 제의 건국신화이다.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온조집단이 비류집단을 흡수하 는 것으로 백제의 건국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백제의 건국신화는 그 내용 은 빈약하지만 ① 溫祚傳承, ② 沸流傳承, ③ 仇台傳承, ④ 都慕傳承 등 다양한 전승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溫祚傳承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鄒牟이다. 혹은 朱夢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卒本夫餘에 이르자,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세 딸만 있는데, 주몽을 보고서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 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후에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장자는 비류라 하고, 차자를 온조라 했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月郡의 아가씨에게 장가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태자로 삼으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여 마침내 烏干, 馬黎 등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들이 그에게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들은 마침내 漢山에 이르러 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로 가서 살려고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하건대 이 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漢水를 끼 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가로 막혔으니, 그런 자연적인 요해와 지리는 얻기 어 려운 지세입니다. 도읍을 여기에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 까? 라고 하니,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彌鄒忽로 가서 살 았다. 온조는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를 十濟라 했다. 이 때는 前漢 成帝 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비 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위 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온조는 도읍을 새로 정했으며, 백성들이 편히 살 므로 마침내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죽으니, 그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 로 돌아왔다. 그 후 줄곧 백성들이 즐겨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서 百 濟라 했다. 그의 세계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夫餘를 성으 로 삼았다( 三國史記 권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王 卽位年條).
4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② 沸流傳承 일설은 이렇다.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優台로서 북부여왕 解扶婁의 庶孫이고 그 어머니는 召西奴로 졸본사람 延陁勃의 딸이다. 그 녀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비류이고 차 자는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후에 주몽이 부여에 서 용납되지 않으므로 전한 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 졸본으로 달아나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아 내로 맞아 왕비로 삼았다. 그녀는 창업의 기반을 열 때 자못 내조가 있었 으므로 주몽은 그녀를 총애하고 비류 등을 대하기를 자기의 아들과 같이 하였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난 아들 孺留가 오자 이를 세워 태자를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업을 조성하는데 힘썼 는데 이제 대왕이 죽자 나라가 유류에게 들어갔다. 우리는 여기에 헛되이 있으면서 울적하게 근심하는 것 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좋은 땅을 찾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하는 것이 낫겠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浿水와 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여기서 살 게 되었다( 三國史記 권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王 卽位年條). ③ 仇台傳承 백제란 그 선대가 대개 馬韓의 속국이었고 부여의 별종이었다. 仇台라는 자가 있어 帶方 옛터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왕의 성은 夫餘氏이고 호를 於羅瑕라고 하였는데 백성들은 鞬吉支라고 불렀다( 周書 권 49, 列 傳 41, 異域 上). 백제의 선조는 고려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 왕의 한 侍婢가 있었는데 홀 연히 잉태를 했다. 이를 기르도록 명하였는데 이름을 東明이라 하였 다 동명의 후예 구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인신에 돈독하여 처음으로 대방 옛터에 나라를 세우니 요동태수 公孫度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점차 번창하고 강성해져서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隋書 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條).
43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43 ④ 都慕傳承 백제 太祖 都慕大王은 日神이 강령해서 부여를 떠나 나라를 열고 천제가 籙을 주어 여러 韓을 총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續日本記 권 40, 延曆 9 년 7월조). 위와 같이 백제의 시조에 대하여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온조를 시조 로 하는 ①은 고구려의 주몽과 직결되는데 반하여, 비류를 시조로 하는 ②와 구태를 시조로하는 ③은 고구려와는 관련없이 부여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④는 부여와 고구려를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속에서 나타난 것으 로 이해된다. 국내 기록인 ①과 ②에는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백제의 연맹체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연맹초 기에는 비류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한강유역의 문화적 기 반을 토대로 성장한 온조집단이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는 비류 사후에 비류집단이 온조에 귀부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비류 집단을 흡수한 온조집단이 목지국을 비롯한 마한세력을 아우르면서 백제 는 고대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①과 ②의 전승에서 비류의 근거지로 알려진 미추홀은 비류집단이 남하하 여 정착한 도읍으로 위례성의 위치와 함께 초기백제사에 있어서 매우 중 요한 곳이다. 미추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와 지리지에 미추홀이 인천으로 표기된 이래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彌鄒 忽國, 彌鄒國, 또는 沸流國 등으로 일컬어지며 인천지역이었음이 긍정되 어 왔다. 彌鄒國의 유적으로 문학산성이 지목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천군 의 남쪽 2리에 南山石城이 있다고 기록된 이후부터이고, 이후 東史綱目, 輿地圖書, 京畿邑誌 등에서 문학산성을 비류와 연결시켜 이 산성 이 비류의 성 이라는 인식이 정착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미추국의 중 심유적은 문학산성으로 믿어 왔다. 이는 세조 6년(1460) 관교동에 仁川都 護府의 官衙가 세워진 후 미추국의 범위를 가까운 문학산성으로 비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학산성은 백제의 성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백 제의 성은 평지에 흙으로 조영하는 평지성이나, 문학산성은 산정상에 포
4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곡식으로 쌓은 石城이기 때문이다. 즉 인천지역에 비류가 정착하였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매우 박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미추홀로 비 정한 예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2. 彌鄒忽 牙山 密頭里說 ① 밀두리설의 착안 미추홀의 인천설에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것은 牙山 密頭里說이다. 밀두리설은 金聖昊의 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原 (지문사, 1982년 초 간)에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의 밀두리를 미추홀로 비정함으로써 비롯되 었다. 김성호는 미추홀과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 에 미추홀을 今仁州, 위례성을 未詳地分 으로, 삼국유사 에는 미추홀은 仁州, 위 례성을 今稷山 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今仁州 와 仁州 는 서 로 다른 지역이며, 삼국유사 가 가리키는 인주는 충청남도 아산군의 인 주면으로 비정함 ② 밀두리설의 근거 인천이 인주 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고려 인종 때이고, 아산 인주 는 고려초에 성립 삼국사기 今仁州 에 대해 삼국유사 의 仁州 는 舊仁州 즉 아산 인주 에 해당 인천에는 미추홀에 해당하는 지명이 없는 반면 아산 인주 에는 밀두리가 있음 용을 미리(彌里 密) 또는 미(彌) 라 하였으며, 두(頭 tu) 와 (鄒 tu) 는 동음 밀두 와 미추 를 동일지명임 비류가 帶水를 건너 정착한 海濱彌鄒忽 은 土濕水鹹 한곳 임에도 정착한 이유는 선착 가능한 포구였을 것이므로, 밀두리는密頭川 하구에 위치한 海浦임 해빈미추홀 은 아산 인주 의 밀두리임.
45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45 ③ 밀두리설의 비판 인천과 아산의 지명에 대한 김윤우의 비판 - 인천 고려 인종 때부터 공양왕 2년(1390)까지 인주 로 불림 - 아산 고려초기에 인주, 현종 9년(1018)이후 명종 7년(1177)이전에 牙州 로 개명 삼국유사 편찬보다 약 100년~250여년 이전에 아주 로 개명되었으므로, 一然이 미추홀의 위치를 밝히는 註에서 옛 행정구역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기 어려움 삼국유사 에 나타난 인주 는 당시 통용되던 인천의 고려 때 행정구역 으로 보아야 함 - 밀두리 아산의 밀두리는 19세기경부터 불려왔으며, 조선시대이전에는 육지에 인접한 바다로 보이기 때문에 2천여년전의 비류의정착 지로 볼수 없다. 국어학계의 비판 - 밀두리의 두(tu) 자와 미추홀의 추(tu) 자를 동음자로 보고 있으나 추 의 고 음이 tu 가 아니고 음운 상으로 미추 밀두(miju miltu) 의 변화가 있을 수 없음. 미추홀이 선착 가능한 포구일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함. - 비류가 土濕水鹹 한 미추홀에 정착한 것은 소금의 산지 또는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고, 해상교통이 가능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것임 - 경기만 남부보다는 백제의 한성과 가까운 인천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 인천지역은 신석기시대 이후 한반도의 교역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임 영종도 송산선사유적의 흑요석과 금강식 토기 능허대 아래의 代津을 통한 대중국 교섭 3. 彌鄒忽 楊洲 坡州說 ① 양주파주설의 착안 삼국사기 지리지에 미추홀로 비정되어 있는 인천지역에는 삼국시대
4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성곽이나 대규모 주거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반면, 양주인근에는 六 溪土城, 七重城, 哨城里城址와 大田里城址 등 모두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성곽이 발견됨. 인천의 고명인 買召忽은 양주의 고명인 買省忽과도 통함.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전승에는 택지개념이 보이고 있어 후대의 윤 색 가능성이 큼 ② 양주파주설설의 근거 광개토왕비문의 기술순서 - 광개토왕의 백제의 78성을 공취한 기술에 있어 순서상 미추성이 앞 부분에 위치 인주이씨의 정통성을 위한 삼국사기 의 윤색 - 삼국사기 의 온조전승에 나타난 풍수사상은 여말선초에 나타난 것 으로 백제초기에 풍수에 관한 개념이 없었을 것임 - 이러한 택지개념이 들어 있는 삼국사기 의 온조전승은 고려시대 혼 인정책을 통해 급부상한 인주이씨가 지역기반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 해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큼 인천의 고고학 자료의 부족 - 미추홀의 중심으로 평가되는 문학산성의 규모와 축조시기에 의문이 있는 반면, 양주 일대에는 육계토성, 칠중성, 초성리성지와 대전리성 지 등의 삼국시대 성이 보임 - 미추홀에 대한 고구려의 지명인 매소홀은 양주고읍 고지명인 매성홀 과 음운상 통함 - 浿河를 대동강수계로 帶水를 임진강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구태설화 의 대방고지에 일정한 역사성을 부여하고, 우태와 구태를 동일인으로 이해한다면 비류집단의 정착지는 대방군의 인근 지역 곧 한강 이북에 서 찾는 것이 자연스러움 ③ 양주파주설의 비판 광개토왕비문의 공취성의 기술순서에 대한 비판 -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성의 기술 순서상 아단성(아차산성으로 비정)
47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47 이 먼저 나옴. 고모루성은 중원고구려비에도 나옴(충남 덕산, 충북 음성설이 있음). 이와 같이 불완전한 성의 기술 순서를 놓고 경기 북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을까는 의문 - 광개토왕의 미추성 공략을 고구려수군이 한강에 진입하거나 회군할 때 고구려선단의 후미를 차단할 수 있는 백제의 군항을 강타한다는 전략 적인 측면과 백제 왕실 직영의 소금산지 장악을 통해 백제에 대한 압박 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어 미추성의 위치 비정 은 재고의 여지가 있음 삼국사기 윤색에 대한 비판 - 인천지역이 고려 초기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李子淵의 딸이 문 종과 결혼하여 숙종을 낳고, 그의 손자 李資謙의 차녀가 예종과 결혼 하여 인종을 낳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급부상하게 됨 - 온조전승에 미추홀의 지리적인 특성으로 표현한 해빈 과 토습수함 은 장자인 비류의 무지와 독선을 강조하고 그 세력의 몰락을 설명하 는 것으로, 인주이씨가 지역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해 부회하였다면 왜 멸망한 미추홀을 예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이 듬 -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은 인종 23년(1145)으로 이자겸의 난(인종 5년 1127)으로 이미 몰락한, 또 편찬 당시의 왕인 인종을 시해하려 하였던 인주 이씨의 본거지인 인천지역을 위해 문헌을 조작하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 양주파주설에서 주장한 것처럼 인주이씨의 정통성을 위해 역사의 한 부분을 조작하였다면, 그것은 패망한 비류의 미추홀이 아니라, 중시 조인 이허겸의 연원에서 나타나듯이 왕비족인 가락허씨와의 연관성에 서 찾아보아야 할 것임 4. 미추홀 인천설 ① 역대 지리서와 사서에 미추홀을 인천으로 표기하고 있음 삼국사기 권35 잡지 4 지리 2의 기록 - 邵城縣은 본래 고구려의 買召忽縣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의
4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仁州 ( 慶原이라고도한다. 買召는彌鄒라고도한다 ) 이다 삼국유사 에는미추홀은인주이고, 위례는지금의직산이다라고표기함 온조전승에표기된바와같이부아악에올라가살만한땅을살펴보았는데, 서쪽으로는큰바다가막혀있다고한것과땅이습하고물이짜다라는기사를종합하여보면인천지역일가능성이큼 인천의건치연혁과관련된기록 문헌연혁관련기사비고 1 三國史記地理志 (1145 년 ) 2 洪元用記 (1450 년 ) 3 高麗史地理志 (1451 년 ) 4 仁川府陞號壁上記 (1460 년 ) 5 世宗實錄地理志 (1473 년 ) 6 東國輿地勝覽 (1481~1530 년 ) 買召忽縣一云彌鄒忽 郡之初則彌鄒國也至三國時降稱郡城縣其由則無聞焉當高麗睿宗時土姓侍中李資謙之女入爲睿宗妃誕仁宗以故加號曰仁州父老諺云高麗順宗肅宗時郡客舍後大廳作御室焉高麗之季定昌大君卽位推以爲七代之鄕陞爲慶源府賜紅鞓於首戶長逮壬申開國之後還降爲知郡仍收賜鞓至甲午年改州爲川因爲知郡事 仁州,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新羅景德王改名邵城爲栗津郡領縣顯宗九年屬樹州任內至肅宗朝以皇妣仁睿太后李氏內鄕陞爲慶源郡仁宗時以皇妣順德王后李氏內鄕改今名爲知州事恭讓王二年陞爲慶源府王初卽位賜州戶長紅鞓 仁川卽古彌鄒忽國也在高句麗爲買召忽縣至高麗肅宗朝以皇妃仁睿太后李氏內鄕陞爲慶源郡仁宗以皇妃順德王后李氏內鄕改今名爲知州事恭讓二年崇七代鄕陞爲慶源府 仁川郡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鄒忽一云慶原 買召新羅改名邵城爲栗津郡領縣高麗顯宗戊午屬樹州任內至肅宗時以皇妣仁睿王后李氏內鄕陞爲慶源郡仁宗時以皇妣順德王后李氏內鄕陞爲知仁州事恭讓王二年辛未陞爲慶源府本朝太祖元年壬申復舊號爲仁州大宗癸巳例改爲仁川郡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鄒忽新羅景德王改邵城爲栗津郡領縣高麗顯宗九年屬樹州肅宗朝以仁睿王后李氏之鄕陞慶源郡仁宗又以順德王后李氏之鄕改知仁州事恭讓王二年陞慶源府王初卽位以七代御鄕陞之且賜州戶長紅鞓本朝太祖元年復位仁州太宗十三年改今名例爲郡世祖六年以昭憲王后外鄕陞爲都護府 仁川府邑志 (11) 名宦條 姜希孟 (1424~1483) 7 東國輿地志本百濟彌趨忽高句麗以爲買召忽縣新羅景德王時改柳馨遠
49 미추홀의위치에대하여 49 (17C 후반 ) 8 輿地圖書 (18C 중엽 ) 9 海東地圖 (18C 중엽 ) 10 增補文獻備考 (1770 년 ) 11 燃藜室記述 (18C 말 ) 別集 16, 地理典故 12 仁川府邑誌 (1843 년경 ) 13 仁川府邑誌 (19C 전반 ) 14 大東地志 (1861 년 ) 名邵城爲栗津郡領縣高麗顯宗時省八樹州肅宗時陞爲慶源郡仁宗時又改爲仁州肅宗時以王后李氏之鄕陞仁宗時又以順德王后李氏之鄕陞爲州恭讓王二年陞慶源府王初卽位以七代御鄕陞之且賜州戶長紅鞓本朝初復爲仁州恭定王十三年改爲仁川郡惠莊王六年陞爲都護府以昭憲王后外鄕陞 初則彌鄒國也至三國時降稱邵城縣當高麗睿宗時土姓侍中李資謙之女入爲睿宗妃誕仁宗以故加號仁州其後麗季定昌大君卽位以七代之鄕陞爲慶源府逮我朝還降爲知郡又其後改州爲川仍爲知郡事又其後陞爲都護府去戊辰八月以逆僧胎鄕降號爲縣丁丑二月復舊爲府此則邑誌與勝覽小異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新羅景德王改邵城高麗顯宗屬樹州肅宗陞慶源郡仁宗改知仁州事恭讓王陞慶源府本朝太宗初復爲仁州太宗改今名爲郡世宗陞爲都護府使 百濟彌鄒忽高句麗買召忽縣新羅邵城縣高麗仁州顯宗入樹州肅宗陞慶源郡仁宗改仁州恭讓王陞慶源府朝鮮仁川郡初爲仁州太宗十四年改今名爲郡世祖五年陞府肅宗十四年降縣二十四年復舊 仁川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新羅改邵城高麗屬樹州後陞慶源郡改仁川恭讓王陞慶源府以七代御鄕賜戶長紅鞋太祖元年復爲仁州降郡爲縣太宗改爲仁州郡世祖庚辰還陞府昭憲王后外鄕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新羅景德王改邵城爲栗津郡領縣高麗顯宗九年屬樹州今富平肅宗朝以仁睿王后李氏之鄕陞慶源郡仁宗又以順德王后李氏之鄕改知仁州事恭讓王初以七代御鄕陞慶源府且賜州戶長紅鞓本朝太祖元年復爲仁州太宗十三年改今名爲郡世祖六年以昭憲王后外鄕陞爲都護府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新羅景德王改邵城爲栗津郡領縣高麗顯宗九年屬樹州今富平肅宗朝以仁睿王后李氏之鄕陞慶源郡仁宗又以順德王后李氏之鄕改知仁州事恭讓王初以七代御鄕陞慶源府且賜州戶長紅鞓本朝太祖元年復爲仁州太宗十三年改今名爲郡世祖六年以昭憲王后外鄕陞爲都護府 本百濟買召忽一云彌鄒忽國新羅景德王十六年改邵城爲栗津郡領縣高麗顯宗九年屬樹州肅宗陞慶源郡以文宗妃仁睿太后李氏之鄕卽肅宗母仁宗改知仁州郡事以睿宗妃文敬王后李氏之鄕卽仁宗母屬郡唐城屬縣載陽恭讓王二年陞慶源府以七代御鄕本朝太祖元年復爲仁州太宗十三年改仁川郡世祖五年以昭憲王后沈氏外鄕后外祖門必大陞都護府中宗二十一年移水原鎭于府三十年復還水原肅宗十四年降縣以逆僧胎鄕二十三年復陞 (1622~1673) 奎章閣古大 歷代典故 百濟屬國 : 彌鄒忽國.. 奎章閣奎 奎章閣奎 17362
5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⑮仁川府邑誌 (1871년) 本高句麗買召忽縣 一云彌趨忽 新羅景德王 改邵城爲 栗津郡領縣 高麗顯宗九年 屬樹州 今富平 肅宗朝 以 仁睿王后李氏之鄕 陞慶源郡 仁宗 又以順德王后李氏 之鄕 改知仁州事恭讓王初 以七代御鄕 陞慶源府 且 賜州戶長紅鞓 本朝太祖元年 復爲仁州 太宗十三年 改今名爲郡 世祖六年 以昭憲王后外鄕 陞爲都護府 ⑯仁川府邑誌 (1891년) 古號彌雛國 至三韓 降稱邵城縣 高麗睿宗朝 土姓侍 中李資謙之女 睿宗妃 誕仁宗 故加號曰仁州 其後麗 季 定昌大君卽位 以七代御鄕 爲慶源府 至本朝 還降 爲知郡 又其後改州 爲仁仍 爲知郡事 後陞爲仁川都 護府 ⑰仁川府邑誌 (1899년) 本高句麗買召忽縣 一云彌趨忽 新羅景德王 改邵城 爲栗津郡領縣 高麗顯宗九年 屬樹州 今富平 肅宗朝 以仁睿王后李氏之鄕 陞慶源郡 仁宗 又以順德王后李 氏之鄕 改知仁州事 恭讓王初 以七代御鄕 陞慶源府 且賜州戶長紅鞓 本朝太祖元年 復爲仁州 太宗十三年 改今名爲郡 世祖六年 以昭憲王后外鄕 陞爲都護府 ⑱仁川府邑誌 (1899년) 本高句麗買召忽縣 一云彌趨忽 新羅景德王 改邵城 爲栗津郡領縣 高麗顯宗九年 屬樹州 今富平 肅宗朝 以仁睿王后李氏之鄕 陞慶源郡 仁宗 又以順德王后李 氏之鄕 改知仁州事 恭讓王初 以七代御鄕 陞慶源府 且賜州戶長紅鞓 本朝太祖元年 復爲仁州 太宗十三年 改今名爲郡 世祖六年 以昭憲王后外鄕 陞爲都護府 奎章閣 奎 藏書閣 B15BB 17 奎章閣 古915.12In2b 藏書閣 貴 K ②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한 이유 海濱 미추홀이 土濕水鹹함에도 비류가 도읍한 이유는 미추홀이 해상활 동을 할 수 있는 교역이 가능하다는 점과 소금의 산지와 소금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므로, 비류는 전통적으로 해상교통의 중심지 였던 인천지역에 정착하였을 것임 영종도 송산선사유적에서 黑曜石製와 소위 錦江式土器 가 출토되는 것은 인천 지역이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의 동북부와 서남해안과의 교 역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임 백제는 고구려로 인해 육로가 경색되었기 때문에 凌虛臺 아래의 大津 을 이용하여 산동반도에 이르는 登州航路를 개발하여 중국과 통교하였 다. 別離고개, 사모지고개 (三呼峴), 妓巖전설 등 중국으로 떠나는 백 제사신들에 대한 전설은 백제 왕성 위례성과의 연결통로를 나타내는
51 미추홀의위치에대하여 51 것으로, 인천지역이백제전기까지해상교통의중심지임을보여주는것임 고대사회에있어서소금은매우중요한것으로철산지와소금산지의확보는국가적인관심사였고인천지역이근래까지많은소금을생산했던지역임은주지의사실로, 소금을매개로하는해상교역망을장악함으로써정치적성장을꾀하고자하였던비류는소금산지인이곳인천지역에정착하였을가능성이큼 3 미추홀은인천의어느곳인가 미추홀의중심유적으로지목되어온것은문학산성임 - 문학산성은둘레 577m의석성으로비류의도읍지로보기에는매우좁고높은곳이며, 토축성이며평지성인백제의성곽과차이가있다는비판이있음 - 최근고고학자료가축적되면서백제의석성의일반적인석축방식은외면을편평히다듬은돌로쌓는것인데, 문학산성성벽도백제의석성으로볼수있다는견해가있음 관교동-문학동분지 - 삼국시대초기의도읍은대체로평지에서벗어난구릉의대지에자리잡는것이일반적이다. 이러한조건을갖춘지역으로문학산과맞은편에위치한승학산이이루고있는관교동 문학동분지를들수있다. 문학산은노적산, 연경산, 문학산, 수리봉, 길마산등 5개의봉우리가동서로일렬횡대를이룬약 2.5km 길이의작은산괴이다. 동쪽으로남동염전의갯벌, 도장리에서승학천을따라승기로이어지는저지대가고대에는바닷물이들어오거나습지로되어있었기때문에문학산과승학산이이루는관교동 문학동분지는섬과같은지리적환경을이루고있어초기국가단계의도읍으로는좋은입지조건을갖추고있는곳이므로비류가도읍하기에적합한곳임 - 이를뒷받침하는것이백제토기의발견이다. 문학산동사면과무주말유물산포지에서백제토기의출토는이곳에백제시대생활권이형성되었음을뒷받침하는것임 문학산을중심으로한방백리의땅
5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 관교동 문학동 분지는 미추홀의 중심지이지 그 전체 범위는 아닌 것 으로 추측된다. 비류집단의 세력은 온조집단에 비견할 정도의 세력이 었을 것이므로, 미추국의 범위를 확대하여 볼 필요가 있다. - 온조가 남하 당시 마한왕이 동북지방 1백리의 땅을 주었다는 기사에 비추어 본다면, 미추국의 규모 또한 方百里 의 규모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문학산 주변과 동으로 인천의 진산인 소래산까지, 서쪽으로는 영종도까지 포함하는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함. ④ 미추홀 인천설의 반성 미추홀 인천설을 부정하는 이유는 지금의 인천지역에 비류가 도읍하였 다고 볼만한 적극적인 고고학적 근거, 즉 당시의 성 또는 고분과 같 은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임 백제초기사는 삼국사기 의 백제 초기기록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백제초기사는 문헌으로서 삼국사기 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대체할 것 이 없는 실정으로, 기록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역사적인 맥락을 잡 아야 하는 것처럼, 미추홀의 위치 비정도 같은 맥락에서 삼국사기 에 미추홀이 인천으로 비정된 이래 역대 지리지와 사서의 인천조에 한결 같이 수용하고 있는 기록에 대해서 그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다. 그러므로 현재 서 울에서 멀지 않은 서해안 어느 지역에서 비류의 정착지로 볼 수 있는 토성 또는 고분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인천을 미추홀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임 미추홀 인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한결같은 결론은 상술한 바와 같 다. 이와 반대로 인천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인천설을 주장하는 학자 들이 새로운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새로운 견해에 대한 비판만을 함으로써 인천설을 지탱하고려만 한다고 비판한다. 남의 주 장하는 것은 매우 용이한 일이다. 그러므로 미추홀 인천설을 수성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원인천지구에 대한 적극적인 학술조사와 문헌의 적
53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53 극적인 해석을 통해 미추홀 인천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밝혀내야 함 Ⅱ 백제의 관문, 능허대 1. 대중국교통로서의 인천 능허대는 백제가 東晋과 교역을 시작한 近肖古王 27년(372)부터 熊津으 로 남천하는 蓋鹵王 21년(475)까지 중국으로 내왕하는 사신들이 머물던 客館으로, 1990년 인천광역시지정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 다. 이곳에 候風하던 사신이 府西 10리 多所面에 위치한 大津에서 배를 띄어 중국 산동반도의 登州 萊州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백제가 중국과 통교하기 시작한 것은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때의 일이 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백제는 근초고왕 27년(372)에 중국의 晋에 처 음으로 사신을 보내 대중관계를 맺었고, 그 다음해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 하였다고 한다.1) 이러한 사실은 중국측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咸安 2년 춘정월, 백제 林邑王이 각각 사신을 보내 方物을 바쳤다. 함안 2년 6월, 사신을 보내 백제왕 餘句를 배하여 鎭東將軍領樂浪太守로 하였다. ( 晋書 卷9, 本紀, 簡文帝紀) 위의 내용은 백제의 조공과 함께 동년 6월 근초고왕을 진동장군영낙랑태 수로 봉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양측 사료에 모두 공식적인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국 성장의 결과 이다. 같은 책에는 290년까지 마한이 여러 차례 진에 조공한 기사가 전하 여진다.2) 진서 에 마한이 사라지고 백제가 공식적인 외교대상으로 등장 하는 것은 성장을 계속하던 백제가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마한의 잔여세력 을 복속하고 한반도 서남부의 대표적 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기 때문이다. 1) 二十七年春正月遣使入晋朝貢 二十八年春二月遣使入晋朝貢 (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條). 2) 晋書 권97 列傳 67 馬韓條.
5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또한 이러한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서 로의 필요에 의한 쌍방적인 외교행위로 해석된다. 4세기 이후 중국은 양 자강을 경계로 南朝와 北朝로 갈려져 있었다. 晋(265~316)이 유목민족인 5胡(흉노 갈 선비 저 강)의 침입으로 강남으로 밀려가 東晋(317~420)이 되 었고, 강북에는 5호의 여러 국가가 성립됨으로써 중국은 남북이 서로 군 사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동진은 그들 나름대로 한족을 중심 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지배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백제와의 관 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정세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남북의 대립으로 인해 진의 지배력이 동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자 고구려 美川王이 요동의 西安平을 공 격하고, 남쪽으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함으로써 현도군과 요동군을 고 립시키는 동시에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 나 이로 인해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前燕과 남쪽으로는 백제와 경계를 이 루게 되어 전연과는 요동군과 현도군을, 백제와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땅 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고구려는 慕容皝의 침입을 받아 국도가 함락되자 전연과는 화의를 맺고, 고국원왕은 백제의 북경을 두 차례 침범함으로써 남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는 근초고 왕 24년(369)3)과 26년(371)4)에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는데, 두 번째 전투 에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남으로는 마한의 잔여세력을 복속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위협적인 존재 로 성장하면서 마한을 대신하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중심국가로 부상하 면서 진과의 외교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전사로 백제와 고구려는 구수관계에 놓이게 된다. 고 구려는 전연을 멸하고 등장한 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백제는 전 진과 대립하고 있는 동진과 통교함으로써 중국과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대 립하고 동서로 연결되는 형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조와 백제 3) 二十四年秋九月 高句麗王斯由 帥步騎二萬 來屯稚壤 分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稚壤 急 擊破之 (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4年條). 4)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 帥 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6年條).
55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55 는 남조와만 통교한 것은 아니다. 장수왕은 남북조 모두 통교하였고, 백 제는 개로왕 18년(472) 北魏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당시 양국의 사정에 따라 중국의 남북조와 관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구수관계에 놓인 백제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 통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로를 이용하여 통교하여야만 하였다. 백제가 이 때 이용한 해상 교통로가 登州航路였다. 등주항로는 한강 하류역인 인천을 출발하여 德物 島(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이다. 이는 백제 를 공격할 때 唐의 蘇定方이 이용한 항로가 산동반도의 萊州에서 덕물도 를 거치는 항로였음에서도 알 수 있다.5) 인천이 백제사신의 출항지가 된 것은 백제의 한산에서 서해로 빠지는 한강 하류역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 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상술한 바와 같이 인천은 전통적인 해상활동 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등주항로는 비교적 안전한 항로였다고 는 하지만,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6)에도 나타나듯이 당시의 조선기 술이나 항해술로 비추어볼 때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 은 아니었다. 한성백제시대의 대중관계7) 중국사서 번호 연도 내용 삼국사기 기년 조공 봉책 조공 조공 조공 봉책 조공 봉책 봉책 (진) (진) (진) (진) (진) (진) (진) (진) (송) 근초고왕 27년 근초고왕 28년 근구수왕 5년 침류왕 원년 전지왕 2년 전지왕 12년 함안 함안 서명 2년 2년 晋書 晋書 태원 9년 태원 11년 晋書 晋書 의회 12년 영초 1년 宋書 宋書 5) 朴廣成, 凌虛臺에 대하여 韓國中世史硏究, 인하대학교, 1991, 쪽. 6)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 津 託命自然之運 ( 三國史記 권25, 百濟本紀 3, 蓋鹵王 18年條).
5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조공 (송) 견사 (송) 조공 (송) 조공 (송) 봉책 (송) 조공 (송) 조공 (송) 조공 (송) 기타청구 (송) 허가 (송) 관작청구 (송) 봉책 (송) 관작청구 (송) 봉책 (송) 조공 (송) 조공 (송) 조공 (송) 기타청구 (위) 견사 (위) 견사 (위) 비유왕 3년 비유왕 4년 비유왕 4년 비유왕 14년 개로왕 18년 개로왕 년 정평 원가 원가 원가 원가 원가 원가 원가 원가 원가 대명 대명 대명 대명 대명 태시 태시 연흥 연흥 연흥 2년 2년 6년 7년 7년 17년 20년 27년 27년 27년 1년 1년 2년 2년 7년 3년 3년 2년 년 5년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宋書 冊府元龜 宋書 宋書 魏書 魏書 魏書 표에서 보듯이 근구수왕 5년(379)에 동진으로 파견된 사신은 악풍을 만 나 회항하는 등 총 65회 중 3차례나 중도에 회항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 다.8) 그러나 백제는 舫 으로 표현된 대형선박을 이용하였고, 또 488~490 년의 해전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전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중국과 통교할 수 있었다.9) 2. 능허대와 대진 현재는 해변이 매립되어 해안도로가 옆을 지나고, 주변에 아파트가 둘러 져 있어 능허대의 옛모습은 찾을 수 없다. 다만 1988년에 능허대공원 정 7) 유원재, 백제의 대외관계 한국사 8, 1995, 118쪽에서 전재. 8) 三國史記 권 24, 百濟本紀 2, 近仇首王 5년 및 권26, 백제본기 3, 文周王 2년 東城王 6 년조 참조. 9) 李道學, 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1997, 371~372쪽.
57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57 화작업을 통해 정자가 세워지고 연못이 조성되어 그나마 고풍스러운 느낌 을 갖게 할 뿐이다. 능허대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전해진다. ① 대진은 부서 십리 多所面에 있으며, 삼국이 鼎峙하였을 때 고구려에 의하 여 백제의 조천로가 경색되었으므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산동반도의 등주 래주에 도달하였다. 능허대가 부서 10리 원우 미면(또는 원우금면)에 있는데 청량산 여록이 해변으로 들어가 100척의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위에는 30여 명이 앉을 만하며 대양을 바라보 매 막힘이 없었다. 대진은 백제가 조천할 때의 출선처이다. 그 밑에 기 암이 있다. 전하기를 백제사신이 기녀를 데리고 와서 候風하다가 막상 배 에오르던 날 遠別의 정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바위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 에 후인들이 그 바위를 기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輿地圖書 仁川都護府 形勝條) ② 능허대는 부서 10리에 있으며 바다에 임하여 높이 100척으로 솟아 있어 대양을 바라보매 막힘이 없다. 밑에 대진이 있는데 삼국이 정치하였을 때 고구려에 의하여 백제의 조천로가 경색되었으므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 신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산동반도의 등주 래주에 도달하였다.( 仁川府邑 誌 古蹟條) ③ 가는 벼랑으로 나 있는 오솔길, 넓은 모랫벌에 끊어진 언덕.(權諰, 凌虛 臺 炭翁集 권 1) ④ 능허대 아래는 곧 서해 바다가 드나드는 포구이다. 대는 겨우 10여장의 산인데 바닷가 포구에 높게 솟아 있어 자루와 같다.(李奎相, 一夢稿 권19) ①과 ②의 기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①에서는 대진과 능허대가 각 각 다소면과 원우미면에 소속되어 있어 조금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한 반면 ②에서는 능허대 아래에 대진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7년 작성된 근세조선오만분지일지도 에도 능허대는 현재의 위치와 일치하지 만, 대진은 송도역 맞은편의 송도시장 부근으로 표시되어 있다. 즉 능허 대는 해안 섬처럼 솟아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곳이고, 중국으로 향하던 선 박의 발선처는 대진이었다는 것이다. 즉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②의 기록
5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에 따라 능허대가 포구처럼 인식하게 된 것이다. ③과 ④의 기록처럼 능 허대로 통하는 길이 오솔길인 점에서 그곳이 포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0) 능허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부천시 쪽에서 인천시 구 산동을 거쳐 만수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別離峴이라 하고, 인천구읍 관 교동에서 능허대 쪽으로 이르는 문학산 서편고개를 三呼峴(사모지고개)이 라 부른다. 중국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할 때 한 산에서 부평의 별고개를 넘고 이 고개를 넘어 능허대에서 배를 타고 떠났 다. 그 때 사신을 배웅하러 따라 나왔던 가족과 친지들은 별고개에서 전 송하며 이별을 나누었다 하여 별리현이라 불리었고, 사신들도 사모지고개 에 오르면 멀리 보이는 별고개에 아직도 서 있던 가족들을 바라보며 큰소 리로 세 번 부르며 아쉬움을 달랬다 하여 삼호현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柳馨遠의 東國輿地志 에는 능허대를 客官, 鄕射堂과 함께 宮室條로 분류 하고 있다. 별리현 삼호현전설과 ①의 기암전설, 그리고 동국여지지 의 분류를 보면, 능허대는 후풍하는 백제사신들의 객관이 있었던 곳이며, 주 변의 대진에서 출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능허대라는 명칭은 인천부읍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에 모두 능허 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33년 일본인에 의해 편찬된 인천부사 구 적명소조에는 凌壺臺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어 발음에 따른 오 기인 것 같다. 능허대의 능허는 하늘높이 나른다 는 뜻으로 중국의 옛 시구에 자주 나타나는 말이다. 능허대라는 명칭은 蘇東坡의 赤壁賦 에서 글자를 따다가 합자한 것으로 보인다.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이라 한 데서 만경을 건넌다 는 능만경의 凌 자와 浩浩乎如憑虛御風 이라 한 데서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는 빙허어풍의 虛 자를 따서 만경창파 를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르듯 건넌다 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 다. 소동파는 송대 사람이므로 능허대라는 명칭은 백제 당시가 아닌 후대 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1) 능허대를 통해 중국과 통교한 것은 근초고왕대에서 개로왕 21년(475)까 10) 尹龍九, 인천의 百濟文化 연보 10,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0, 34~36쪽. 11) 朴廣成, 앞의 글, 1991, 346~348쪽.
59 미추홀의 위치에 대하여 59 지의 100여년간에 불과하다.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熊津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 기간동안 백제와 중국사이에는 조공 봉 책 견사 청구 및 허락 전쟁 회맹 등의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 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최초로 대중관계를 맺은 진과는 372년 간문제가 근초고왕을 鎭東將軍領樂浪太守 로 봉한 이래 8차례나 통교하였으며, 그 내용은 모두 조공과 봉책에 관련된 것이었다. 진을 대신하여 宋이 서자, 벡제는 송과 통교를 계속하였다. 송은 腆支王을 鎭東大將軍 으로 봉책하 여 진의 외교관계를 계승하였다. 조공과 봉책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毗有 王은 易林 式占 腰弩 등을 요청하는 등 백제가 문화적 욕구를 위해 적극적 으로 대중관계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로왕대에는 왕에 국한된 봉 책관계에서 신하들에게까지 관작을 요청하기도 하고, 남조에 국한하지 않 고 북위와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등 심화된 대중관계의 일면을 보여준 다.12) 대중국 통교의 관문이었던 능허대의 역할은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 실하면서 끝이 난다. 웅진으로 남천한 백제는 백마강을 통하여 통교하였 고, 고구려는 한강을 점령한 후에도 육로를 이용하였으며, 한강유역을 점 령한 신라는 남양의 黨項城을 통하여 중국과 통교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신라는 남양만의 唐城(당항성)과 영암방면에서 흑산도를 항로로 이용하였다. 후백제가 오월과 통교한 곳도 나주였으며, 고려 역시 북쪽에 거란이 막고 있어 예성강을 통하여 통교하였으므로, 능허대가 있는 인천 지역은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 다.13) 12) 兪元載, 百濟의 歷史와 文化, 學硏文化社, 1996, 244~248쪽. 13) 朴廣成, 앞의 글, 1991, 349~250쪽.
6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61 백종오 ( 충주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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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삼국시대의 인천 63 삼국시대의 인천 -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백종오 (충주대학교) 목 차 Ⅰ.머리말 Ⅱ.문학산성의 현황 Ⅲ.문학산성의 변천과 인천 Ⅳ.맺음말 Ⅰ. 머리말 문학산성(文鶴山城)은 인천광역시 문학산 정상부(해발 232.8m)에 위치 하고 있는 석축성이다. 문학산은 서쪽의 학익동, 청학동에서 시작하여 문 학동, 연수동을 거쳐 동쪽의 곡창지대인 선학동까지 이르는 동서로 긴 산 지로서 남쪽에서 인천의 중심지를 감싸고 있는 인천을 대표하는 산이다. 지리적으로 문학산성은 북쪽으로 인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 로는 서해바다가, 남쪽으로는 연수구의 신시가지가 조망이 되고 있다. 해 안과 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해안 인접지역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에서 백제 초기 도읍 지인 비류성으로 언급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이 성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이미 고성(古城) 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후기까지 성내
6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선조실록 에는 임진왜란 중 인천의 사민 (士民)이 왜병을 격퇴하였으며 숙종실록 에는 양란이후 문학산성의 수축 논의가 이루어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문학산성에 대한 근 현대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산림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기본 자료로 작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가 있다. 이 책에는 유적 의 위치와 명칭, 규모를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해방이후인 1949년 인천시 립박물관의 조사와 1958년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동문지 복원과 표석 설치 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미군기지 건설이 발의되고 1960년부터 문학산 정상부와 서문지를 헐어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년 이후 미군부대와 한국군이 주둔하면서 통제구역으로 설정되었으며, 현 재는 군사시설에 의해 현상변경과 파괴가 심하게 이루어진 상태이다. 1997년 인천광역시에서 유적의 보호 및 정비를 위한 계획수립차원에서 지 표조사가 실시되었고14) 1999년과 2002년 인하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학산 일대의 문화유적을 정밀지표조사를 진행하면서 산성과 그 주변 문화유적 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다.15)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문학산성의 현황을 문헌 검토와 축조방법, 등으로 나누어 정리한 후 문학산성의 시기별 변천과정 을 인천지역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맺는말에서 는 인천지역 성곽 조사연구의 향후 과제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산성은 간단한 지표조사만 이루어졌기 때문 에 그곳에서 채집된 유물 역시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문학산성의 현황과 그 변천 과정을 살핀다는 것은 무리가 따 를지 않을 수 없다. 추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문학산성의 실체가 보다 명확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14) 仁川廣域市, 1997, 文鶴山城 地表調査 報告書. 15) 인하대학교 박물관, 1999, 문학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인하대학교 박물관, 2002,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65 삼국시대의 인천 65 Ⅱ. 문학산성의 현황 삽도 1 문학산성 위치 및 성곽 분포도 삽도 2 문학산성 위치도(1917)
6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1. 문헌검토 문학산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각종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봉수 에 대한 기록을 제외한 문학산성과 관련된 문헌기록 및 이전 조사보고 내 용을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문학산성 관련 자료16) 出 典 資料 ① 世宗實錄地理志 ② 新增東國輿地勝覽 ③ 東史綱目 內容 南山古城은 군 남쪽 2里에 있다. 둘레는 1백60보이며, 사면이 높고 험하다. 안에 작은 샘이 있다. 남산고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430척이다. 문학산 정상에 비류 성터가 있고 성문의 扉板이 아직도 남아있 고 성내에는 沸流井이란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맑다. 勝覽 에서 기록하지 않은 것이 개탄스럽다. ④ 輿地圖書 ⑤ 大東地志 ⑥ 京畿誌 ⑦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彌鄒王의 옛 도읍지이며, 石城의 터가 있고, 임진왜란시 부사 金善敏이 古城을 增修하여 성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무찔렀다. 古城은 文鶴山에 있으며 둘레 430척이다. 彌鄒忽古城 혹은 南山古城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1리 문학 산에 있으며 둘레는 사백삼십척이다. 성벽은 동문 부근 석축으로서 높이 7~8척, 길이 7~8칸, 둘레 약600칸의 토루의 자취를 보인다. 문학산성 동문으로부터 서북으로 약 150m 되는 한층 얕은 곳에 석축의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석축이 倒壞되어 태반이 매몰되 ⑧ 仁川鄕土史料 었고 몇 십년 전까지도 맑은 물이 항시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다. 표고 280m 가까운 높은 산상에 이 같은 우물이 있는 것은 지질 학적으로 보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 우물을 판 것은 산 성의 축조와 때를 같이하였으리라고 본다. 성은 內 外城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성은 석축의 성벽으로 둘 레 약 200m로 되어있고, 내성은 토축의 성벽으로 둘레 약 100m ⑨ 文化遺蹟總攬 로 되어 있다. 자연의 험지를 이용하여 문학산정에 이룩한 성벽 은 5m 이상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성중에는 우물이 있고 성벽 은 현재 대부분 붕괴되어 그 석조물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으며 동북면이 다소 완전하게 남아있다.
67 삼국시대의인천 67 위 < 표 1> 을보면 18세기에편찬된안정복의 동사강목 에서백제비류성으로언급하고있다. 이와관련해서는 문화유적총람 ( 文化遺蹟總覽 ) 에서토축내성이있음을보고하고있어이토축성이백제에의해축조된것으로볼수있으나현재까지내성은지표상에서확인되지않아단정하기가어렵다. 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 의기사에서는성벽이석성 ( 石城 ) 으로축조되었으며성내에봉수 ( 烽燧 ) 가있다는기록이있어이미봉수가건립되었으며당시까지성곽의기능을유지하고있던것으로여겨진다. 다음으로 1531년에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는 고성 ( 古城 ) 으로칭하고있어 16세기에는이미성곽이퇴락하여폐성 ( 廢城 ) 된것을알수있다. 또한 여지도서 ( 輿地圖書 ) 의기록에임진왜란시성벽을증수 ( 增修 ) 하여이곳에서왜적과의전투가있었음을언급하고있다. 산성의명칭에대해서는남산석성 ( 南山石城 ), 남산고성 ( 南山古城 ), 비류성 ( 沸流城 ), 문학산성 ( 文鶴山城 ), 미추홀고성 ( 彌鄒忽古城 ) 등으로불리고있다. 성의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 에서만 160보 ( 步 ) 이며나머지기사에서는모두 430척 ( 尺 ) 으로기록하고있다. 2. 구조및축조방법 문학산성은문학산정상부를중심으로축조된테뫼식의석축성이다. 토 축의내성이있었다고하나현재확인되지않는다. 4) 성곽의규모는둘레 3) 1 世宗實錄 卷 148, 地理志仁川郡條. 2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9, 仁川都護府山川條. 3 東史綱目. 4 輿地圖書, 仁川都護府古跡條. 5 大東地志 卷 4, 仁川城池條. 6 京畿誌, 仁川府邑誌城池條. 7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8 史料收集委員會, 1956, 仁川鄕土史料. 9 文化公報國文化財管理局, 1977, 文化遺蹟總攬. 4) 문학산성의내성은 1949 년기록을통하여처음확인되는데둘레약 100m 의토축성벽으로 1950 년대초까지남아있었음을알수있다.( 李慶成, 1949, 文鶴山城, 仁川의名所古蹟, 32 쪽.) 그러나 1959 년이후군부대를지으면서山頂을削平하고후미진곳은覆土하였으므로현재는확인되지않는다.( 인하대학교박물관, 1999, 앞의책, 88~89 쪽.) 이내성은봉수대가운
6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577m 이며, 면적은 20,800 m2 (6,300 평 ) 이다. 평면형태는동서방향을장축 으로하는마름모꼴로북벽이길고남벽이짧다. 각성벽의현황 5) 은다 음의 < 표 2> 와같다. 표 5 성벽현황 북벽 동벽 남벽 서벽 계 길이 227m 110m 112m 128m 577m ( 잔존 339m) 구간 NO.19~246 NO.246~355 NO.356~467 NO.468~0~NO.18 시설 동문지, 수구 서문지 성내고도는북서쪽이높고남동쪽이낮은지형을이루고있다. 산의 8~9부능선을이용하여축조하였는데동 서벽쪽으로능선이이어지고있으며남 북벽아래로는가파른급경사를이루고있다. 성벽은동벽과남벽의잔존상태가양호하며북벽과서벽은군사시설로인해현상파괴가이루어졌다. 잔존성벽의길이는 339m이다. 성돌은다듬은장방형석재를이용하여단과열을맞추어맞물리게축조하여평면모습이 품 ( 品 ) 자형을이루고있다. 성돌의크기는높이 12~30cm, 너비 25~80cm, 뒷심길이 30~60cm 내외이다. 간간히뒷심이긴심석 ( 深石 ) 을이용하여뒷채움석재들과맞물리게하였다. 성벽하단에지대석은보이지않으며아래에서위로오르면서석재의크기가작아지고있다. 일부구간에서는돌출된자연암반을그대로체성벽으로이용한것이확인된다. 성벽기저부는암반층을정지하여그대로성벽을쌓거나기초부에석재다짐층을조성한후성벽을축조하였다. 석재다짐층이확인된구간의높이는 1.3m이다. 암반층을기저부로이용한경우에는성벽하부에서보강석축시설이일부확인된다. 성벽의단면형태는하단은거의수직을이 영되면서조성한방호벽일가능성이매우높은것으로여겨진다. 5) 구간은 文鶴山城地表調査報告書 를참조하였으며, 이를중심으로四方성벽의기준을설정하였다.
69 삼국시대의 인천 69 루고 있으며 상단으로 가면서 약간 안으로 들여쌓기하여 규형(圭形)을 이 루고 있다. 삽도 3 장미산성 북서벽 <삽도 4 장미산성 북벽 문학산성의 성벽을 구성하는 성돌의 경우, 가로와 세로 비율이 2:1, 3:1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함과 동시에 판석형 석재를 일정비율 혼용하여 축조하였다.19) 그리고 문학산성 성벽은 웅진 사비기 충남지역에서 확인되 고 있는 백제석성의 성돌의 장방형 석재의 가로와 세로 비율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웅진 사비기 정착된 석성의 성돌 규격이 한성기 어느 한 시기에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근한 예로 장미산성과 설봉산성의 발굴결 과에서도 판석형 석재를 일정비율 혼용하여 축조한 양상이 관찰된다. 이 러한 축조양식은 백제 한성기 석축산성의 중요한 특징으로 파악된다. 또 성벽 하부에 석재 다짐층을 조성한 후 성벽을 축조 하였고 보강석축을 하 부에 조성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예를 든 두 산성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축 조양상이다.20) 따라서 이와 같은 자료들은 고대 성곽의 축조주체 문제를 19) 고대 석축산성으로 보고된 유적은 설봉산성, 설성산성, 망이산성, 자미산성, 반월산성, 장미산성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에서 확인된 축조방법 중 먼저 성벽의 면석을 살펴보면 세장방형 석재와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웅진 사비기 석축산성에서 보이는 가로:세로 비 가 2:1 또는 3:2의 장방형 석재의 사용 예와 대조를 보인다.(서정석, 2002, 百濟의 城郭, 학 연문화사, 233~240쪽.) 설봉산성의 경우 2차 서문지구간 외벽은 쐐기돌 없이 장방형 석재를 2~3단 쌓고 그 위에 세장방형 석재를 1단 올리거나 세장방형 석재 위에 장방형 석재를 1단 쌓 는 방법이 확인된다. 특히 장방형 석재는 사각추 형태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이러한 축조기법은 고대 산성의 축조기법으로 알려져 있다.(金虎俊, 2004, 利川 雪峰山城 築城技法 考察 文化 史學 21, 韓國文化史學會. ) 20) 한성기 석축성의 축조기법은 지형에 따라 계곡부와 능선 상면의 2가지 경우에서 볼 수 있다.
7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살필 수 있는 한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 성곽 관련 시설물로는 봉수대 와 문지, 우물 등이 있다. ① 삽도 5 설봉산성 북벽 봉수대는 세종실록지리지 를 비롯한 각종 지지(地誌)와 읍지(邑 誌)에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대 부분 성산봉수(城山烽燧) 로 표기되어 있다. 대응노선은 남으로 안산 정 왕산봉수(正往山烽燧)와 북으로는 부평 축곶봉수(杻串烽燧)를 연결하는 연변봉수이다. 1942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에 는 지름 2칸의 만두형(饅頭形)의 봉수대가 남아있고 이를 미추왕릉(彌鄒 王陵)으로 보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21) 1949년의 조사에서는 봉돈이 토 축(土築)의 원루(圓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22) 군부대 건설시 완전히 멸실되었다. ② 문지는 성벽 파괴가 심하여 지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성 내로 진입하는 도로가 서벽에 개설되어 있는데 원래 주출입문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1958년 인천시에 의해 개수(改修)되었 계곡부의 성벽은 성 안쪽을 성벽 상면까지 점토다짐으로 채우는 특징이 있다. 이 토축부는 외벽 까지 이어지며 초축시기를 가늠하는 자료로 이용된다. 이러한 토축부는 성벽 상면으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내부에 평탄지 확보와 빗물 등의 성내 用水가 성벽으로 침투하는 것 을 막고 원활한 배출을 위한 용도로 쓰였으며 뒷채움석을 고정시켜 성벽이 밀려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하였다. 능선 상면은 편축법에 의해 성벽이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경사가 심한 경우에는 암반을 ㄴ 자로 깎아낸 후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다. 이러한 계단식 기저부는 성벽이 성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굴착한 것으로 성벽 하중의 분산과 마찰면의 확보를 위해 계단식으로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연약지반과 지하수의 침투가 예상되는 구간에서는 암반층까지 퇴적토를 걷어내고 점토와 잔돌, 대형석재를 이용하여 1m 정도를 다진 후 성벽을 축조하기도 하였고, 계곡부에는 외벽의 기저부를 점토로 덧 데고 기단석을 올리는 경 우도 있다.(白種伍, 2007, 仁川沿岸의 古代城郭에 대하여 文化史學 27, 韓國文化史學會, 177~178쪽.) 21)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5쪽. 22) 봉수대가 산 정상에 볼록하게 솟아있는 관계로 문학산을 일명 배꼽산으로 불리웠다.(李慶成, 1949, 烽燧, 文鶴山方面古蹟傳說調査報告書, 仁川市立博物館, 42쪽.)
71 삼국시대의 인천 71 으나 이후 다시 파괴되었다. 이전 자료23)에 소개된 당시 사진을 보면 개 구부 형태의 암문으로 규모는 높이 2.2m, 너비 1.8m로 추정된다. ③ 우물지는 비류정(沸流井) 이라 하여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언급되 어 있다. 이곳은 전 동문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 었으며 광복 직후까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20m 깊이의 맑은 물이 흘렀 다고 전한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현상이 남아있었으나 이후 군사시설 이 건립되면서 매몰된 상태이다. Ⅲ. 문학산성의 변천과 인천 인천지역의 중심인 문학산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했던 곳 으로 여겨진다. 2000년 실시된 문학동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 석영석기 2점과 빗살무늬토기 4점이 출토되어 이른 시기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24) 다만 조사지역이 넓지 않고 출토 유물도 한정되어 있어 정확한 문화상은 알기 어렵다. 반면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비교적 풍부하게 나타난다. 고인돌 의 경우 학익동에 7~8기,25)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 있었다고 전 해지며, 현재 확인되는 것은 학익동 2기, 주안동 1기, 문학동 1기가 있 다. 남아있는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으로 추정된다. 우선 인천광역시립박 물관으로 이전된 학익동 고인돌은 판석을 이용하지 않고 각 열마다 크기 가 일정한 2개의 괴석으로 장방형 무덤칸을 만드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 주안동과 문학동 고인돌은 1979년 8월에 수봉공원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 8월 남구 문학동 미추홀 공원으로 이전되었다.26) 주안동 고인돌은 23) 이종화, 1965, 인천향토사료-문학산-, 흥신문화사. 24) 서영대 윤용구 김현준 강동석, 2000, 仁川 文鶴洞 先史遺蹟, 인하대학교박물관 기전문화 재연구원, 27~31쪽. 25) 岡田貢, 仁川近郊の史蹟と史話 ( 朝鮮硏究 (6月號), 1929, pp.2~6)에는 8기라고 했으나, 1933 년에 간행된 仁川府史 에는 7기라고 했다. 26) 인하대학교박물관, 2010, 연학초등학교 북측 재개발지역 내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15~16쪽.
7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발굴을 통해 북방식 구조임이 밝혀졌고27) 문학동 고인돌은 뚜껑돌만 잔존 하지만 그 형태로 보아 북방식으로 추측된다. 특히 주안동 고인돌의 뚜껑돌 에는 지름이 약 3~6 정도의 성혈(性穴)들이 파여 있다. 이들 고인돌의 입 지는 학익동 고인돌을 중심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문학산 북쪽 기슭에서 수 봉산 남쪽 기슭으로 연결되는 얕은 구릉에 분포한다. 그리고 이 지점은 바 다로 통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28) 인천지역에서 수습된 청동기시대 유물도 대부분 문학산 일대에 분포한 다. 수습유물의 대부분은 간돌도끼와 같은 석기류이다. 고인돌이 군집한 문학산과 수봉산 일대는 산록에서 경지와 연료 등을 확보하기 용이하고, 크고 작은 간석지에서 바다의 식량자원을 획득하기 쉬운 입지를 갖고 있 다. 그러므로 이 일대에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가진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29) 그리고 이 점은 성읍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다. 1. 고대 주지하듯이 삼국사기 에 기록된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2가지 전승이 있 다. 하나는 온조왕 즉위조에 본문으로 기재된 온조 시조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세주로 나온 비류 시조설화이다. 양자의 세부 내용에는 엄 연한 차이가 있지만, 온조와 비류가 북쪽에서 남하했다는 점과 형이 비류 라는 점, 그리고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했다는 내용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삼국사기 의 건국신화는 한반도 북방에서 출자한 2개의 정 치 집단이 연합하여 백제가 탄생한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온조설화에서는 아버지를 고구려의 주몽이라 하였고, 비류설화 에서는 부여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優台)라고 하여 출자를 다르게 기술했 27) 李慶成, 1959, 仁川의 先史遺蹟物 調査槪要, 梨大史苑 1, 70쪽. 28) 윤용구 강동석, 2000, 인천의 청동기문화 문학산일대 유적 유물을 중심으로, 앞의 책, 인하 대학교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87~90쪽. 29) 김상열, 2002, 靑銅器時代의 文鶴山,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인하대학교박물관, 82~85쪽.
73 삼국시대의 인천 73 다. 또한 남하 과정도 온조설화에서는 곧장 위례성이 조망되는 부아악(負 兒嶽)에 다다른 반면 비류설화에서는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어 서로 이동경로가 달랐음을 시사한다.30) 특히 비류설화 에서는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가 우태와 혼인했다가 다시 주몽과 혼인 하였다. 이를 초기 농경사회의 유습31)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비류 설화는 온조설화보다 더 오래된 토착신앙의 형태를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32) 아마도 처음에 온조집단과 비류집단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별개 의 소국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에는 비류집단이 정착한 미추홀의 위치에 대해서 비교적 명확 하게 밝혀 놓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한산주(漢山州) 관할 의 율진군(栗津郡) 소성현(邵城縣)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었으며, 매소홀(買召忽)은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불렸다. 신라의 소성현 이 고려시대의 인주(仁州)였으므로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에 비정된다.33) 이 와 같은 삼국사기 의 내용은 이후 고려사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그대로 전제되었다.34) 인천지역이 비류집단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백제의 건국신화에서도 포 착할 수 있다. 온조설화에서 비류는 온조와 달리 바닷가(海濱) 인 미추 홀에 정착했고, 그곳의 지리적 특징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다(土濕水 鹹) 는 것이었다. 또한 비류설화에서 패수와 대수를 건너 남하한 점도 비 류집단이 서해안을 따라 이동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미추홀의 홀(忽) 이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지명어미이고, 삼 국사기 지리지의 미추홀이 모두 고구려 영현으로만 나타난 것은 의문이 30)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50~51쪽. 31)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31쪽. 32) 金杜珍, 1999, 百濟始祖 溫祚神話의 형성과 전승,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208~214쪽. 33) 三國史記 권35, 잡지 4, 지리 2, 한주조, 栗津郡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 州[一云慶原 買召一作彌鄒]. 34) 高麗史 권56, 지 10, 인주조,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 新羅景德王改名邵城 爲栗津郡領 縣.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경기, 인천도호부, 건치연혁조,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鄒忽] 新羅景德王改邵城 爲栗津郡領縣.
7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될 수 있다. 홀 이 성과 같은 뜻이라면 미추홀은 미추성(彌鄒城) 으로도 표기가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에는 광개토 왕 6년(369)에 백제를 공격하여 빼앗은 58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 에 미추성(彌鄒城) 도 포함되었다. 즉 4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영역에는 미추성이 있었으며, 그곳은 곧 비류집단이 정착한 미추홀과 동일한 지역 으로 볼 수 있다. 비류집단이 인천지역을 기반으로 한 독립 소국이었다는 입장에서 그 실 체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매소(買召), 미추(彌鄒) 의 음이 삼국지(三國志) 한전에 등장하는 모수국(牟水國)과 통하므로 마한의 모 수국을 인천에 비정한 견해가 있었고,35) 마한의 진왕을 백제의 고이왕으 로 파악한 연구에서는 목지국(目支國)을 인천에 비정하기도 했다.36) 특 히 후자의 연구에서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문학동과 관교동 일대를 목 지국의 중심지로 보았다. 비류집단을 목지국으로 보기는 어려움이 따르지 만 청동기 유적과 백제토기 산포지가 문학산 일대에서 확인된다는 점37) 에서 의미가 있다. 더욱이 문학산 정상부에 축조된 문학산성은 본래 토성 을 삼국시대 말기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38)으로 당시의 기와편과 축성기 법이 나타난다. 곧 문학산성은 성곽의 평면이 파사형(爬巳形)이며, 이를 위해 작은 석재를 쌓고 긴 석재인 심석(深石)을 간간히 찔러 넣어 뒷채움 한 잡석과 물리도록 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39) 문학산성이 비류와 관련 있다는 전승은 조선후기까지도 이어졌다.40) 미추홀의 비류집단은 어느 시기에 위례성의 온조집단과 연맹을 형성하 였다. 백제 건국신화에서 비류와 온조가 형제관계로 설정된 것은 이를 반 영한다. 대개 백제 왕계에서 고이왕계의 등장은 비류집단과 연관되어 설 35) 兪昌均, 1983, 韓國 古代漢字音의 硏究 Ⅱ, 啓明大出版部, 58~59쪽 盧重國, 1988, 앞의 책, 60~61쪽. 36) 千寬宇, 1979, 目支國攷, 韓國史硏究 24, 한국사연구회, 26~27쪽. 37) 인천대학교박물관, 1999, 문학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38~41쪽. 38) 仁川廣域市, 1997, 앞의 책, 99쪽. 39) 인하대학교박물관, 1999, 앞의 책, 86~87쪽. 40) 安鼎福, 東史綱目 제1상,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今仁川 俗傳文鶴山上有沸流城基 城門扇板至 今猶存 城內有沸流井 味淸冽云 勝覽不載可歎].
75 삼국시대의 인천 75 명된다.41) 관심을 둔 지역도 초고왕계가 한산(漢山)과 한성(漢城)을 강 조한 반면 고이왕계는 비류집단의 기반인 미추홀이 속한 서부(西部)를 중 시하였다.42) 아마도 고이왕계의 집권기 동안에 비류가 온조의 형으로 나 타나는 건국신화가 재정립되었을 것이다.43) 백제의 한성도읍기 동안 미추홀은 서부의 핵심이었지만 369년 광개토왕 의 공격으로 한차례 탈취 당하였고,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략으로 고구 려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백제의 미추성이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매소홀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가 지속되는 와중에 백제는 동성왕과 무령왕을 거치면서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고 제도정비를 이루면서 중흥을 맞이하였다. 또한 신라도 고구려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체제정비에 들어갔다. 지증왕대에 순 장의 금지(502), 국호의 확정(503), 주군현제의 실시와 지방장관인 군주 (軍主)의 파견(505)이 이뤄졌고, 법흥왕대에는 율령의 반포(520)와 불교 공인(528)이 이뤄져 고구려와 백제에 뒤쳐지지 않는 국가체제를 만들었다. 한편 고구려는 545년 안원왕이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놓고 대란(大亂) 이라 표현될 만큼 극심한 내부 혼란에 휩싸였다.44) 신라의 거칠부가 포 섭한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이 신라에 망명해 오면서 고구려가 정란 때문에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 말한 것45)으로 보면 당시 정 란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목민족인 돌궐이 연연 (蠕蠕)을 제압하고 북방의 신흥강자로 부상하여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압 박하였다.46) 41) 李基白, 1959, 百濟 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역사학회, 10쪽 千寬宇, 1976, 三國의 國 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134~137쪽 盧重國, 1988, 앞의 책, 71~74쪽. 42) 千寬宇, 1976, 앞의 논문, 137쪽 金杜珍, 1999, 앞의 논문, 217~218쪽. 43) 金杜珍, 1999, 앞의 논문, 214~222쪽. 釋利貞傳 의 가야 건국신화에서도 대가야왕인 伊珍阿 豉는 금관가야왕 金首露의 형으로 설정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 고령현, 건치연 혁조). 이는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확보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金泰植, 1988, 6세기 전반 加耶南部諸國의 소멸과정 고찰, 韓國古代史硏究 1, 한국고대사학회, 191쪽). 44) 日本書紀 권19, 흠명 7년 7월조. 45) 三國史記 권44, 열전 4, 거칠부전. 46) 盧泰敦, 1976,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13, 한국사연구회, 36~39쪽.
7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이 같은 상황에서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바탕으로 551년 한강유역 공략에 나섰다. 우선 공격을 주도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강하류 일대로 진군하였다. 당시 성왕은 고구려의 6군을 탈취하 는 성과를 올렸는데, 인천지역도 포함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왕의 선공과 승전에 힘입은 진흥왕은 고구려의 10개 군을 빼앗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 다. 이때 확보한 고구려 10군 의 위치는 竹嶺以外 高峴以 內 로 표현되는데, 대략 한강 상류 일원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강유역을 함께 공 략해 분점했던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바로 다음해부터 급격 하게 변하였다. 552년 백제가 한성에서 물러나고 그것을 신 라가 차지해 버린 것이다. 빠 르게 백제의 점령지역을 잠식 해 간 신라는 553년 한강유역 일대에 새로 얻은 땅이라는 의미로 신주(新州)를 설치했 다. 백제가 76년 만에 회복한 한성과 인천지역은 불과 1~2 삽도 10 문학산성 출토 삼국시대 유물 (인하대학교 박물관, 재편집) 년 사이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발원지를 수복하 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성왕은 가야와 왜를 끌어들이여 554년 신라 의 관산성(管山城; 옥천)에 대규모 공격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신주 군주 인 김무력에게 성왕이 전사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백제는 대패를 당했다. 이로써 한강유역은 신라의 안정적인 지배가 이뤄졌고, 555년 10월 진흥왕 은 이곳을 직접 순행하여 새로 편입된 지역에 대한 강역을 확정지었다.
77 삼국시대의 인천 77 한강유역에 설치된 신주는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 南川州) 북 한산주(北漢山州) 한산주(漢山州) 순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으나, 신문왕 5년(685)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면서 한산주로 고정하였 다. 이 시기 인천지역도 한산주에 포함되었고, 매소홀현이라는 이름이 계 속 유지되었을 것이다.47) 이후 경덕왕은 한화정책을 통한 왕권강화를 추 진하면서 재위 16년(757)에 전국의 지명을 모두 한자화시키는 개혁을 단 행했다. 이때 한산주가 한주(漢州)로 개명되었고, 매소홀현이 소성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덕왕 이후 신라하대(新羅下代)로 접어들면서 중앙에는 극심한 왕위쟁 탈전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세력이 나타났다. 나말려초의 인천지역에도 인주 이씨, 부평 이씨, 강화 위씨 등의 호족세력이 등장했 는데, 이 중 인주 이씨는 문학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다. 지금도 문학산 동남쪽에는 인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의 묘가 있다.48) 인주 이씨의 시조는 당으로부터 이씨를 사성 받았다고 했는데,49) 이는 인주 이씨가 당과의 해상무역 속에서 성장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2. 고려 나말려초의 호족들은 지역 기반을 그대로 지키면서 고려의 문벌귀족으 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고 고려왕실은 이들과 중첩된 혼인을 통해 지배권 을 유지하였다. 1011년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공주로 피신했던 현종을 보좌 한 김은부(金殷傅)는 3명의 딸을 모두 현종에게 출가시켰다. 그리고 그의 딸인 원성태후가 낳은 아들들이 덕종 정종 문종으로 즉위하면서 안산 김씨 47) 호암산성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의 뒷면에는 仍伐內力只乃末 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우물 호암산성 및 연지 발굴조사보고서 ). 지명인 仍伐內 는 고 구려의 仍伐奴縣과 같은 곳으로 지금의 금천구 시흥 일대이며, 乃末 는 신라 관등 중에 하나인 奈末과 같다. 잉벌노현이 경덕왕 16년(757)에 穀壤縣으로 개명되었으므로 앞의 명문은 지명변경 이전까지 신라에서 고구려 군현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던 근거가 될 수 있다. 48) 김성태 김기태, 2002, 문학산의 유적, 앞의 책, 인하대학교박물관, 267쪽. 49) 高麗史 권95, 열전 8, 이자연전, 其先新羅大官 奉使入唐 天子嘉之 賜姓李 子孫徙居邵城縣 卽 仁州也.
7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는 당시 최대 문벌가문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김은부의 부인인 안효국대 부인(安孝國大夫人)이 이허겸의 딸이었다. 말하자면 이허겸은 안산 김씨 를 통해 왕실의 외척이 되었던 셈이다. 현종은 왕비의 외조부인 이허겸에 게 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와 식읍 1,500호를 내려줬다.50) 이는 인주 이씨가 중앙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 었다. 인주 이씨를 문벌귀족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 子淵)이었다. 이자연은 1052년 자신의 장녀를 문종의 왕비(仁睿順德太后) 로 들이면서 시중(侍中)에 올랐고, 나머지 두 딸도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는 106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왕실 외손은 13왕자 6공 주에 이르렀다. 특히 인예태후의 소생으로 순종 선종 숙종 3명의 왕이 즉 위하였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보응승통(普應僧統) 규(規) 도 그녀의 아들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인주 이씨의 영향력은 왕실뿐만 아 니라 종교계까지 뻗어 있었다. 이후로도 이자연의 아들인 이호(李顥)는 순종에게 딸을 보냈고, 다른 아들인 이석(李碩)과 이정(李頲)도 딸을 선 종비로 들였다. 이 중 이석의 딸인 사숙태후(思肅太后)는 선종을 이어 왕 이 된 헌종의 모후가 된다. 이처럼 인주 이씨가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대두되면서 그들의 근거 지인 인천지역도 위상이 달라졌다. 고려 건국 후 소성현은 1018년에 수주 (樹州) 소속으로 관할이 변경 되었을 뿐 여전히 현에 머물렀다. 하지만 숙종 때 모후인 인예태후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원군(慶源 郡)으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인종 때에는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자겸의 딸)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지주사(知州事)를 두고 인주(仁州)로 높였 다.51) 특히 숙종은 이자의(李資義)의 난(1095)을 진압하고 왕이 된 기념 으로 어머니의 고향을 경원(慶源) 이라 이름 짓고 군으로 승격시킨 것으 로 보인다.52) 50) 高麗史 권88, 열전 1, 후비 1, 원성태후 김씨전. 51) 高麗史 권56, 지 10, 지리 1, 인주조. 52) 윤용구 김상열 최진식, 2002, 문학산의 유래, 앞의 책, 인하대학교 박물관, 64쪽.
79 삼국시대의 인천 79 인주 이씨가 왕실과 중첩된 혼인관계로 엮이면서 권력이 집중되자 왕위 계승과 관련된 대립이 발생했다. 이자연의 손자이자 이정의 아들인 이자 의는 선종비인 사숙태후의 사촌오빠라는 후광을 받으며 강력한 외척으로 등장했다. 그는 사숙태후의 아들인 헌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자신의 동생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소생의 한산후(漢山侯) 균을 다음 대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이에 인예태후의 아들이자 헌종의 숙부가 되는 숙종이 이자의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인주 이씨가 약간의 타격 을 받았으나 이자겸(李資謙)이 다시 외척으로 등장하면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호의 아들인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예종과 인종에게 모두 시집보내 고, 한안인(韓安仁) 세력을 축출하여 권력을 독점했다. 이자겸은 척준경 (拓俊京)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전횡을 일삼 았다. 그러나 인종에게 회유당한 척준경에게 제거당하면서 7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인주 이씨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53) 문종대부터 인종대까지 외척으로 군림한 인주 이씨의 근거지였던 인천 은 5대 왕의 외향(外鄕)이자 5대 왕비의 내향(內鄕)이었다. 신증동국여 지승람 에서는 이것을 칠대어향(七代御鄕) 이라 표현했다.54) 이는 고려 의 7대 임금이 인주 이씨와 외척 관계에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인주는 1390년에 경원부(慶源府)로 다시 승격되었으나,55) 이것은 인주 이씨와는 관련이 없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후 폐가입진(廢假入 眞) 을 명분으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공 양왕의 선대에 대한 추존작업이 이뤄졌는데, 조상을 현양하는 의미에서 인주를 부로 올리고 읍호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인주 이씨로 인해 인천은 왕실의 외척과 관련된 전통을 갖게 되었고,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 어졌다. 53) 高麗史 권127, 열전 40, 이자겸전. 5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9, 경기, 인천도호부, 건치연혁조, 恭讓王二年 陞慶源府[王初卽位 以七 代御鄕 陞之 ]. 55) 高麗史 권56, 지 10, 지리 1, 인주조.
8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3. 조선 조선 건국 후 태종이 즉위하면서 관제와 지방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이 시행되었다. 태종은 1413년 각도의 군현 이름을 천(川) 또는 산(山) 자를 넣어 고치는 지명 개편을 단행했다.56) 이에 따라 인주가 인천군(仁川 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천이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 등장했다. 인천군 은 1459년 세조비인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외향이라는 이유에서 인천도호부 (仁川都護府)로 승격되었다.57) 자성왕비 윤씨의 본관은 파평이었고, 어머 니 흥령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의정부사(參贊議 政府事) 이문화(李文和)의 딸로 인천의 저성(著姓)이었다. 그러므로 자성왕 비의 내향은 파주이고, 외향은 인천이 되는 셈이다.58) 조선시대에는 인천의 읍치가 읍주산(승학산) 남록에 있었으므로 문학산 일대가 중심이 된다. 때문에 문학산성은 인천의 핵심 관방시설이었다. 문 학산성은 산이름이나 고을이름을 따서 남산석성(南山石城) 남산고성(南山 古城) 문학산고성(文鶴山古城) 인천산성(仁川山城) 등으로 불렸다. 문학산 성 내의 산 정상부에는 봉수가 설치되었는데, 조선시대 5대 직봉(直烽) 중에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는 변경지방에서 중앙으로 직접 연결되 는 직봉과 그 사이의 보조선망을 이루는 간봉(間烽)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서울의 남산을 마지막 기착지로 삼는다.59) 직봉은 동북쪽 두만강변의 함경도 경흥 우암 봉수대에서 출발하는 1거 (炬), 동남쪽 경상도 동래의 응봉 봉수대에서 출발하는 2거, 서북쪽 압록 강변의 평안도 강계 여둔 봉수대에서 출발하는 3거, 마찬가지로 압록강 입구 의주의 고정주 봉수대에서 출발하는 4거, 그리고 서남쪽 순천 돌산 56) 太宗實錄 13년, 10월 신유조. 57) 世祖實錄 5년, 11월 계미조, 以慈聖王妃外鄕 陞仁川郡爲都護府. 58) 자성왕비의 외향이라는 이유로 인천군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처럼 내향인 原平府도 波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세조실록 5년, 10월 경술조, 慈聖王妃內鄕 陞原平府爲波州牧 ). 59) 조선시대의 擧火法은 5거법을 사용했는데, 평상시에는 1개, 적이 육지에 출현하면 2개,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침입하면 4개, 교전이 발생하면 5개를 올렸다. 그리고 교전이 계속 이어 지면 狼糞을 사용했다. 한편 바다의 경우 적선과 해상에서 교전이 일어나면 4개,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5개를 올렸다( 經國大典 兵典 烽燧條).
81 삼국시대의 인천 81 봉수대에서 출발하는 5거로 이뤄졌다.60) 그 중 5거는 순천의 방답진에서 진도 여귀산을 거쳐 수원, 남양, 안산을 지나 인천의 문학산 봉수에 이른 다. 문학산을 지난 봉수는 다시 김포 통진 강화 양천 일대로 두루 퍼져나가 고 최종적으로 남산의 제5봉수대에 도착했다. 문학산 봉수는 성산봉수(城 山烽燧)로 불렸으며, 세종 즉위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61) 1942년 까지 지름 3.6m의 토만두형(土饅頭形) 봉수대가 남아있었고,62) 1949년의 조사에서는 그것이 토축으로 된 원루였다고 했다.63) 현재는 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멸실되었다. 직봉이 설치될 만큼 군사적 거점이었던 문학산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시킨 곳이기도 했다. 선조실록 에는 인천고성에서 험한 지형을 이용 해 승리했음을 전하고 있는데,64) 인천고성은 문학산성을 의미한다. 여 지도서 에서는 이때 왜군을 물리친 사람이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라 고 전한다. 여지도서 와 읍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부평에서 조선군을 물리치고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주둔하다가 일 부 병력을 나누어 인천을 공격하였다. 이때 인천부사 김민선은 문학산성 을 보수하는 등 만반을 방어 태세를 갖추어 왜군을 맞이하였고 안대평(安 垈坪)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문학산성 내에 있었던 안관당(安官堂) 은 그와 관련된 건물이라고 전해지지만 정확하지는 않다.6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유사시 서울을 사수한다는 도성수비 론(都城守備論)이 등장하면서 숙종과 영조대에 대규모 도성 수축이 이뤄 졌다. 이때 문학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수축 논의가 일어났 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66) 이후 문학산성은 별다른 조치 없이 유지되다 가 개항기에 접어들면서 인천연안의 방비가 중요해 지자 일부 수축되었던 60) 增補文獻備考 권123, 兵考 15, 烽燧條. 61) 世宗實錄 지리지, 경기, 부평도호부, 인천군조, 烽火一處 城山在郡南. 新增東國輿地勝覽 권9, 경기, 인 천도호부, 봉수조, 城山烽燧[在府南二里 南應安山郡吾叱耳 北應富平府杻串山]. 62)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5쪽. 63) 李慶成, 1949, 烽燧, 文鶴山方面古蹟傳說調査報告書, 42쪽. 64) 宣祖實錄 권46, 26년 12월 임자조, 故仁川山城 九月山城 彌陀山城 及幸州之戰 皆以地險取勝. 65) 김상열, 2002, 문학산의 역사, 앞의 책, 인하대학교박물관, 125~126쪽. 66) 肅宗實錄 권46, 34년 5월 정해조.
8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것으로 보인다. 신미양요(1871)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 誌) 67)에 따르면, 문학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왔다고 한다. 이에 문학산 성의 수축을 위해 둔전(屯田)을 운영하자 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으며,68) 계(契) 조 직을 통한 자체적인 보수 노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9) 그러나 1883년 제물포에 개항장이 열리 고 읍치가 현재 중구 일대로 옮겨지면서 문학산 일대는 점차 쇠락해 갔다. 게다가 삽도 11 화도진도 1914년 일제에 의해 부제(府制)가 실시되 면서 인천부 일부와 부평을 합해 부천군(富川郡)이 신설되고 인천부는 인 천항으로 축소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문학산 일대는 전통적 원형 이 파괴되었고, 광복 이후가 돼서야 이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Ⅳ. 맺는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산성의 현황과 시기별 변천과정에 대하여 제한된 범위와 자료를 가지고 살펴보았다. 이러한 한계는 문학산성에 대 한 시굴조사나 발굴조사가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문학 산성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인천지역의 고대성곽에 전반적으로 해당하 는 문제이다. 따라서 문학산성의 구체적인 축조기법과 축성시기 등을 밝 히고 나아가 상호 비교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드러나는 실 67) 邵城陣中日誌 는 1871년 4월 6일부터 5월 23일까지 48일간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함선과 인천도호부가 교전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당시 인천부사인 具完植의 조카가 숙부 의 방어 준비과정과 내외 사정을 소상히 묘사하여 신미양요 때 조선군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68) 邵城陣中日誌 4月 20日條. 69) 邵城陣中日誌 仁川府射砲契節目條.
83 삼국시대의 인천 83 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발굴조사를 진행하기에도 커다란 문제점이 따른다. 여기에서는 다소 논의에서 벗어나지만 향후 인천지역 성곽의 조 사연구에 있어 반드시 고려할 사항을 몇 가지 제시하며 맺는말을 대신하 고자 한다. 첫째, 조사연구 방법의 체계화가 필요하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성곽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성곽 조사 과정에서 혹은 출토 유구의 해석 등에 대한 표준적인 절차나 방법론적인 접근이 이루어지 못하고 있다. 즉 성곽 조사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학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성곽 조사의 전문성 확보 는 물론 지역간 성곽의 상호 비교, 시기별 변천과정 분석을 통한 국가별 공유관계의 검토 등 연구의 다양화와 수준 제고의 기폭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성곽 조사 과정에서 향후 정비 복원과 관련된 제 사항이 포함되 어야 한다. 예컨대 인천지역의 많은 성곽들이 정비 복원 되었으나 그 결 과에 대해 누구나 만족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보수 복원 과정에 비전문 가 집단이 깊숙이 개입하거나 복원을 위한 조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들 이 오랫동안 시정되지 못하고 단순히 답습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섣부 른 유적 정비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유 적의 원형 훼손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손실을 가져왔다. 앞으로 다양한 분 야의 연구자들의 참여와 연구를 보장하여 정비 복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올바른 역사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모든 조사 자료와 연구 성과 를 집대성하고 종합화하는 최종 목표는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달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종래의 성곽 조사연구는 성곽의 외형에만 치중하였기 때문 에 지극히 단조로운 정보만을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곽 유적에 대한 흥미 상실을 가져왔다. 성곽의 외형에 대한 치중은 성 내부에 체육시설, 군 사시설 등의 난립을 수반하게 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는 유적 훼손을 초래하
8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였다. 앞으로 성곽 조사연구에 있어서 성곽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나 사 건, 지역민의 삶과 전승, 성곽 주변의 경관 보존 등에 초점을 맞추고 역사 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각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70) 우리나라에는 남한지역에만 2,100여 개소의 성곽이 남아있다. 이러한 성곽은 우리 곁을 지키면서 우리를 이어주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 점만으로도 성곽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서도 매우 높은 매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성곽의 올바른 가치 를 찾는데 함께 노력할 때인 것이다. 참고문헌 경기도박물관, 2001, 한강 경기3대 하천유역 종합학술조사Ⅱ. 경기도박물관, 2003,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 Ⅲ.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2004, 포천 반월산성 종합보고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0, 전국유적목록. 文化公報國 文化財管理局, 1977, 文化遺蹟總攬. 史料收集委員會, 1956, 仁川鄕土史料.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우물 호암산성 및 연지 발굴조사보고서.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2001, 계양산일대 문화유적지표조사 보고서. 陸軍士官學校 陸軍博物館, 1998, 京畿道 金浦市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0, 강화도의 국방유적. 仁川廣域市, 1997, 文鶴山城 地表調査報告書. 仁川廣域市, 1997, 桂陽山城 地表調査報告書. 인천시립박물관, 1949, 文鶴山方面古蹟傳說調査報告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70) 白種伍, 2007, 앞의 논문, 179~180쪽.
85 삼국시대의 인천 85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4, 인천북부 종합학술조사. 仁川直轄市, 1993, 仁川市史. 인하대학교 박물관, 1999, 문학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인하대학교 박물관, 2002,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인하대학교 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仁川 文鶴洞 先史遺蹟.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中原文化財硏究院, 2006, 忠州 薔薇山城 發掘調査報告書. 한국보이스카웃연맹, 1990, 韓國의 城郭과 烽燧.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한양대학교 박물관, 1986, 京畿道 百濟文化遺蹟 地表調査報告書. 한양대학교 박물관, 1995, 수안산성 지표조사보고서. 한양대학교 박물관, 2003, 金浦 文殊山城 守安山城 試掘調査報告書. 岡田貢, 1929, 仁川近郊の史蹟と史話, 朝鮮硏究 (6月號). 姜眞周, 2006, 漢江流域 新羅土器에 대한 考察, 檀國大學校 碩士學位論文. 金杜珍, 1999, 百濟始祖 溫祚神話의 형성과 전승, 韓國古代의 建國神 話와 祭儀, 一潮閣. 金泰植, 1988, 6세기 전반 加耶南部諸國의 소멸과정 고찰, 韓國古代史 硏究 1, 한국고대 사학회. 金虎俊, 2004, 利川 雪峰山城 築城技法 考察 文化史學 21, 韓國文化 史學會.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盧泰敦, 1976,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13, 한국사연구회. 白種伍, 1998, 京畿南部地域의 百濟山城(Ⅰ), 京畿道博物館年報 2, 京畿道博物館. 白種伍, 2004a, 百濟 漢城期 山城의 現況과 特徵, 白山學報 69, 白山學會. 白種伍, 2004b, 安城川流域 方形土城의 性格, 京畿史學 8, 京畿史學會. 白種伍, 2007, 仁川沿岸의 古代城郭에 대하여, 文化史學 27, 文化史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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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김형우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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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강도시기 고려의 문화 89 강도(江都)시기 고려의 문화 김형우 (문화재청) 목 차 Ⅰ. 고려대장경의 간행 Ⅱ.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달 Ⅲ. 이규보의 문학세계 Ⅳ. 고려청자의이해 Ⅴ. 선원사의 성격 Ⅰ. 고려대장경과 강화도 (1) 개관 강화도읍기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경판 해인사고려대장경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 하여 16년 만에 완성한 재조대장경은 본래 강화도의 대장경판당 에 있었 으나 현재는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8만 장이 넘는 목판이므로 팔 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 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 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9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 대장경이란? 대장경은 경, 율, 논의 삼장으로 구성되며,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이 다.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의 의가 높은 유산이다. 삼장(三藏)의 경(經)은 부처가 설한 근본 교리이고, 율(律)은 교단에서 지켜야할 윤리 조항과 생활규범이며, 논(論)은 경과 율에 대한 승려나 학자들의 의론과 해석을 일컫는다. 고려시대에는 대장경을 두 차례 판각하였다. 첫번째의 것을 초조대장경 (初雕大藏經)이라 하고 두번째의 것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한다. (3) 대장도감이 주관 고려시대 재조대장경의 판각업무를 관장하던 관서는 대장도감 이다. 초 조대장경의 판각업무를 맡아보았던 관서의 명칭은 전하지 않으며, 고려의 초조대장경판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1236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 여 판각업무를 시작하였다. 도감의 본사(本司)는 대몽항쟁기의 도읍인 강 화에 두어 판각사업을 주관하게 하고, 분사(分司)를 지방에 두어 그 일을 분담하게 하였다. # 분사대장도감 대장도감의 분사는 경남 남해에 있었다. 종경록 권27에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高麗國 分司南海大藏都監) 이라는 표시가 있다. 분사대장도 감의 소재지는 남해도였으나, 남해도의 행정관할이 진주목에 속해 있었으 므로 진주분사대장도감으로 일컫기도 한다. 분사대장도감의 명칭은 선 문염송집, 조당집 등 몇몇 곳에 표시되어 있다. 분사를 남해도에 둔 것은 남해안 지방 일대가 당시의 최고집권자 최씨 일족의 경제권역인 데다 교통수단이 육지보다 편리하여 경판용 목재의 조달 등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4) 판각사업기간 1236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판각하기 시작하였고, 16년 걸려 1251년
91 강도시기고려의문화 91 ( 고종 38) 9 월에완료되자고종은강화성의서문 ( 西門 ) 밖에있는대장경 판당 ( 大藏經板堂 ) 에서여러신하들과함께그완성을경축하는행사를가 졌다. (5) 경판제작과정 1 여러대장경을수집 대조하여목록을만들고오류를정정한다. 우리나라의초조대장경, 북송본 ( 北宋本 ) 대장경, 거란본 ( 契丹本 ) 대장경등을수집, 일일이대조하여목록을결정하고여러차례에걸쳐오류를정정한다. 이일은개태사 ( 開泰寺 ) 의수기 ( 守其 ) 승통의책임하에이루어졌으며, 많은학식있는스님들이참여하였다. 2 종이에필사한다. 대장경의교정본에의거하여경전의내용을한글자한글자정성을다하여종이에먹으로쓴다. 고려시대에는전문적으로불경을베껴쓰는사경승 ( 寫經僧 ) 이많이있었으며, 목판에새기기위해종이에필사된것을판하본 ( 板下本 ) 이라한다. 3 판재를마련한다. 산벗나무등의나무를베어바닷물에담가부식과해충을방지하고, 판재로만들어소금물에삶아서그늘에말린다음, 일정한크기로자르고판각할수있도록다듬는다. 4 판재에글자를새긴다. 종이에쓴판하본을판재에뒤집어붙인후초벌새김, 재벌새김, 마무리새김의과정을거쳐글자를새긴다. 각수 ( 刻手 ) 가판각을완료하면판을보호하기위해각목으로마무리하고, 옻칠을한뒤네귀퉁이를동판으로고정하고장식한다. (6) 의의 국보 32호인해인사의고려재조대장경판은그규모가방대할뿐아니라세계의어느대장경보다도정확하게만들어져세계불교문화유산중에단연으뜸가는보배이다. 또한이를낳은당시고려의불교문화도세계적수준이었던것도잘말해주고있다. 이대장경판은고려의대몽고항쟁기
9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간동안강화 ( 江華 ) 에서이루어진사실은큰의미가있다. 30년간의전쟁와중에 16년이라는긴세월과무수한인력재력을들여이거대한대장경조성불사를이루어낸것이다. 이대장경의간행사업은대몽항쟁전쟁중에왕성한민족의식과문화의식, 그리고일반민중의불교신앙심에힘입어완수될수있었다. 몽고의침입에대처함에있어서대내적인결속을민족의식속에서찾고, 특히우리는대장경을조성할수있는민족이라는문화적긍지를의식하게하고몽고를야만시함으로써대몽고항쟁의지표를명백히할수있었다. 또한대장경의조성이성공적으로이룩될수있었던것은당시고려불교의높은수준과그전통적저력때문이었다. 대장경을조성하는일은워낙거대한사업이었기때문에불교계가쏟은정력도대단한일이었다. 고려재래의대장경본을위시해서북송본 ( 北宋本 ), 거란본 ( 契丹本 ) 등의여러경전을수집하고, 편집, 교정하는일이결코쉬운일은아니기때문이다. 이때교정의총책임을맡았던분은수기 ( 守其 ) 스님인데, 그는개태사의승통으로학식이뛰어난화엄종승려였다. 고려대장경은동아시아의불교문화유산을응축시킨세계적보물이고, 이를어려운여건에서조성하고보존시켜왔다는점에서고려문화의축척을가늠할수있게한다. (7) 총량과연인원, 기간, 소요자재의추정 # 총경판수 : 81,258 장 ( 문화재청국보설명,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경판 1 장크기 : 가로 70 cm내외, 세로 24 cm내외, 두께 2.6 cm ~4 cm # 책페이지수 : 약 32 만페이지 ( 목판 1 장 4 페이지 약 8 만장 ) # 총글자수 : 약 5,000 만자 ( 목판 1 면약 300 자 ) # 통독가능기일 : 약 30 년 ( 하루 4~5 천자독서기준 ) # 쌓았을때의높이 : 약 3200m ( 목판 1 장두께약 4cm 약 8 만장 ) 백두산보다높음 # 총무게 : 약 250t ( 목판 1 장약 3kg 약 8 만장 ) 1t 트럭 250 대분량 # 소요목재 : 지름 40cm 나무약 15,000 그루 # 소요한지 : 약 50 만장 ( 필사본 16 만면의 3 배추정 ) # 한지제작인원 : 연인원약 1 만명 (1 인 1 일 50 장제작기준 ) # 필사인원 : 연인원약 5 만명 (1 인 1 일 1000 자필사기준 ) # 판각인원 : 연인원약 125 만명 (1 인 1 일 30~40 자판각기준 )
93 강도시기 고려의 문화 93 [<KBS역사스페셜2(효형출판, 2001)>282~298쪽 참고] 2. 금속활자 인쇄술 (1) 개요 인쇄술은 고려시대의 기술학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야 중의 하나였다. 방대한 고려대장경의 간행은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목판인쇄술은 한 가지의 책을 다량 인쇄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여러 가지 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는 데에는 활판인 쇄술만 못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일찍 부터 활판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 며,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을 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강화군) 발명하였다. (2) 발명 배경과 시기 고려시대에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합한 먹과 종이의 제조 등이 어우러진 결과 였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발명되었으리라고 추측되 며, 강화도읍 시기에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 이는 서 양에서 금속활자가 시작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간행한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3)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12세기 인종 때 최윤의 등이 지은 50권 1질인 국가의례서인데, 강화도로
9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천도할 때 예관이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우가 가지고 있던 1질에 의거하 여 강화도에서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였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있는 <신인상정예문발미 新印詳定禮文跋尾>에 기록되어 있다. 몽고군 의 침략에 항전하고 있던 중에 거질의 책을 금속활자로 찍어냈다는 것은 천도 이전에 이미 주자인쇄의 경험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4)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 이 책 권말의 최이(崔怡)의 지(誌)에, 이 책은 선문(禪門)에서 가장 긴 요한 책인데, 전하는 것이 드물어 주자본(鑄字本)에 의거하여 1239년(고 종 26) 다시 새겨 널리 전하게 하였다. 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금속활자 가 1232년 강화로 천도하기 이전인 13c 초 개경에서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탕책을 뒤집어 새긴 것이지만, 중앙관서가 정교하게 새겼 기 때문에 활자본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5) 직지심체요절 直指心體要節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 책은 1377년 7월 청주목(淸州牧)의 교 외에 있던 흥덕사(興德寺)가 찍어낸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 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 이다. 그 인쇄본을 살펴보면 글자의 먹색 에 진하고 엷음의 차이가 심하며, 특정 글자가 유달리 옆으로 기울어지고 글줄이 곧바르지 않다. 본문 중에 거꾸로 식자되거나 인쇄 중에 탈락된 것이 있으며, 글자획에 칼로 새긴 자국이나 나뭇결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초기의 금속활자본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6) 조선시대의 활용 고려시대에 발명되어 사용된 금속활자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더욱 개량 되었다. 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이어서 세종 때에는 갑인자 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 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세종 때에는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종 전에는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이제는 밀랍
95 강도시기 고려의 문화 95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 률을 올렸다. 3. 이규보의 문학세계 (1) 개요 이규보(1168~1241)는 고려시대 최대 의 문인이자 무인집권기를 대표하는 관료이다. 본관은 황려(黃驪:驪州). 초명은 인 저(仁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 이규보묘(인천시기념물 제15호) 운거사(白雲居士). 만년에는 시 거 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한다. 벼슬은 정당문학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다. 경전(經典)과 사 기(史記)와 선교(禪敎)를 두루 섭렵하였고,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하였으며 명문장가였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文 翰)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며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최씨정권 하의 문한직 관리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것이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2) 동명왕편 그가 지은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도 우리나라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 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전통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 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골 침략 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9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3) 대장경을 판각할 때 군신이 기원하여 고한 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정유년(1237)에 행하였다.] 국왕은 태자 공 후 백 재추, 문무 백관 등과 함께 목욕 재계하고 끝없는 허 공계, 시방의 한량없는 제불보살과 천제석(을 수반으로 하는 삼십삼천의 일체 호법영관에게 기원하며 고합니다. 심하도다, 몽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 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혼암함도 또한 금수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때문에 그들이 경유하는 곳에는 불상과 경전을 마구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에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대장경(大藏經)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버렸습니 다. 아, 여러 해를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되었습니다. 여러 부처의 대자비심(大慈悲心)에 대해서도 이런 짓을 하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제자 등이 지혜가 어둡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방어할 계책을 못하고 힘이 능히 불승(佛乘)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큰 보배가 상실되는 재화를 보게 되었으니, 실은 제자 등이 무상한 소치입니다.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금구옥설(金口玉說)은 본래 이루게 되거나 헐게 되는 것이 아니요, 그 붙여 있는 바가 그릇이라 그릇의 이루어지고 헐어지는 것은 자연의 운수입니다. 헐어지면 고쳐 만드는 일은 또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국가가 불법을 존중해 받드는 처지이므로 진실로 우물우물 넘길 수는 없는 일이며, 이런 큰 보 배가 없어졌으면 어찌 감히 역사가 거대한 것을 염려하여 그 고쳐 만드는 일을 꺼려하겠습니까? 이제 재집(宰執)과 문무 백관 등과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이미 담당 관사(官 司)를 두어 그 일을 경영하게 하였고, 따라서 맨 처음 초창한 동기를 고찰하였 더니, 옛적 현종 2년에 거란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서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 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 단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불다천이 어느 정도를 보살펴 주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지성으로 하는 바가 전조(前朝)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으니, 원하옵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 三十三天)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양찰하셔서 신통
97 강도시기 고려의 문화 97 한 힘을 빌려 주어 완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모후(母后)와 저군(儲 君)이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제자 등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法門)을 보호하고 부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 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제자 등은 간절히 비는 마음 지극합니다. 밝게 살펴 주 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4. 선원사의 성격 (1) 개관 고려왕조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에 수도를 두고 있던 고 종 32년(1245)에 진양후 최우(崔瑀)에 의하여 선원사가 창건되었다. 당시 최고권력자이던 최우는 몽고군에 의해 불탄 대장경을 다시 조성하여 부처 님의 가피력으로 병란을 물리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이라는 기구를 세 웠고, 여기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장경을 체계적으로 봉안하고 관리하며, 이 대작 불사를 성공적으로 회향하기 위하여 대장도감 옆에 선원사 를 세웠던 것이다. 선원사의 초대주지로 진명국 사(眞明國師)가 취임한 이래, 원오국사(圓悟國師), 원감국사 (圓鑑國師), 혜감국사(慧鑑國 선원사지 (사적 제259호) 발굴 師) 등이 법등을 이었으며, 수백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던 고려시대 동방 제이총림(東方第二叢林)이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대장경이 선원사 를 떠나 해인사로 옮겨간 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이후 폐허된 것으 로 생각된다. 문화재청은 1977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692-1번지 일대를 사적 259호 선원사지(禪源寺址)로 지정하였으며, 1996년부터 5년간 발굴조사가 진행 되었다. 선원면이라는 지명은 선원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9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 선원사의역사 선원사 ( 禪源寺 ) 는대몽항쟁의정신적지주로삼기위해서창건되었다. 대장도감이라는임시국가기관에서제작된대장경판을체계적으로봉안, 관리함과아울러선림의칼 ( 禪林之劍 ) 로몽고군을물리치려는염원으로선원사가창건되었던것이다. 낙성회에는진명 ( 眞明 ) 국사를맞이하여법주 ( 法主 ) 로삼았으며, 원오국사등국내의고명한승려 3,000명이초청되었다. 초대주지에임명된진명국사는신화 ( 神化 ), 신정 ( 神定 ) 스님등훌륭한납자 200명을거느리고선원사에와서 1252년까지 6년동안주석하며선원사의기틀을다졌다. 진명국사는선원사초대주지를마치고바로조계산수선사 ( 修禪社 ) 로내려가제4대조사가된당대의제일가는선승이다. 1252년에원오 ( 圓悟 ) 국사가선원사제2대주지가되어 4년동안재임하였으며, 그뒤조계산수선사의제5세조사가되었다. 원감 ( 圓鑑 ) 국사는선원사에서원오국사에출가하여구족계를받았으며, 나중에수선사의제 6세조사가되었다. 혜감 ( 慧鑑 ) 국사는 1300년경선원사의주지로재직한후에수선사제 10세조사가된분으로, 선원사에주석할때, 원나라몽산덕이 ( 夢山德異 ) 스님이보내준육조단경을선원사에서간행하였다. 그후식영연감 ( 息影淵鑑 ) 스님은선원사를복원을위한상소문을지어중흥에힘썼으며, 환암혼수 ( 幻庵混修 ) 스님은선원사에서식영스님으로부터능엄경을배운후나중에수선사의주지가되었다. 이처럼선원사는조계산수선사 ( 현松廣寺 ) 와더불어고려시대제2대선찰로명성이높았으며, 진명혼원 ( 眞明混元 ), 원오천영 ( 圓悟天英 ), 원감충지 ( 圓鑑冲止 ), 혜감만항 ( 慧鑑萬恒 ), 식영연감 ( 息影淵鑑 ), 환암혼수 ( 幻庵混修 ) 등고려시대를풍미하던덕높은선승들이법등을이어도량을수호한대가람이었다.
99 이희인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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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유적을 통해 본 강도시대 101 유적을 통해 본 강도시대 이희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Ⅰ. 머리말 Ⅱ. 강화천도의 과정 Ⅲ. 강도시대의 유적 1) 궁궐과 성곽 2) 무덤 3) 절터 1. 머리말 강화도는 13세기 대몽항쟁기에 고려왕조의 수도가 옮겨 자리했던 곳이 다.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으로 일시적인 피난을 하는 것은 많이 찾아 볼 수 있지만 일국의 수도를 아예 옮기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로 고려시 대를 이해하는데 강화가 차지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특히 남북분단이 되 어 북한에 있는 고려관련 자료를 직접적으로 살펴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 서 우리가 고려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강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강화가 남한에서 고려의 중앙문화를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는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정작 강화에서 고려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 다. 대표적인 예로 고려시대 강화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부분인 강도의 궁궐과 성곽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고려궁
10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지는수차례의발굴조사에서도고려시대와연관지을수있는자료가확인되지않아강도의궁궐위치가아직미궁에빠져있으며, 대장경과관련된사찰인선원사에위치비정문제에대해서도최근들어논란이되살아나기도하였다. 이러한상황의배경에는당시유적이멸실또는훼손된경우가많은것이주요한원인이될수있다. 특히강도가자리했던현재의강화읍지역의경우이미도시화가이루어져유적을찾기가거의불가능에가까울정도이다. 다행히도최근여러조사가이루어지면서새로운자료가확인되면서고려시대강화도연구에필요한새로운자료가확보되고있어앞으로전망을밝게해주고있다. 이밖에도강화도곳곳에는강도시대강화의모습을살펴볼수있는자료가아직많이남아있다. 남한에서는유일하게고려왕릉과왕비릉이자리잡고있고강화도곳곳에고려인들의무덤떼가확인되고있다. 또한지금은폐허가된채건물흔적과기와장만남기고있지만전란을견디어내야만했던고려인들의정신적불안을해소하기위해불사를일으켜만들었던사찰들도곳곳에남아있다. 2. 강화천도의과정 고려는몽골과의관계는희종 7년 (1211) 금에파견된고려의사신단 10 명이몽고군에의해몰살되면서악화되었다. 고종 6년이후정기적인징구 ( 徵求 ) 형식의몽골과의관계는저고여 ( 著古與 ) 의피살사건으로단절되었고, 고종 18년 (1231) 에는몽골의 1차침략으로전개되었다. 이에고려는이듬해에몽골과일단화의를맺고, 강화도로천도를단행하였다. 강화도가천도지로주목된이유는수전에취약한몽골군의약점을이용할수있고, 육지와핍근하면서도조석간만의차와조류등의효과가크며, 개경과가깝고, 지방과의연결 ( 조운등 ) 이편리하다는지리적인장점을갖추었기때문으로생각되고있다. 강화도로의천도가공식적으로논의된것은몽골이철수한직후인 1232 년 2월의일이고, 천도를결정한것은동년 6월 16일이었으며, 고종이강화도에입어한것은 7월 7일이었다. 고종 19년 (1232) 7월 6일고종이개경을출발하여 7일에강화승천보에
103 유적을 통해 본 강도시대 103 당도하였다. 그러나 강화천도는 사전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고종은 강화현 의 객관(客館)에 임시 거처하게 되었다. 강화천도가 단행된 후 빠르게 수 도로서의 제반시설작업이 진행되었다. 강화현은 고려 왕실이 천도하면서 군으로 승격되어 읍호를 강도(江道, 일명 沁都)라 하였다. 고종 19년(1232) 6월에 궁궐공사가 시작되었고, 1234년에는 여러 도의 장정들을 동원해 궁궐 및 백사를 조영하는 등의 주거시설과 함께 방어시 설도 축조되었다. 천도하던 해에 3,874척 하에 이르는 내성(內城)공사가 시작되었고, 1233년에는 외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1237년에 길이 37,076 尺 하에 이르는 외성이 완공되었으며, 1235년에는 강화제안(江華堤岸)을 추가로 쌓았고 1250년에는 둘레 2,960여 間, 17개 성문의 중성을 쌓았다. 이처럼 강화는 도성의 면모를 갖추면서 강도라 지칭되었다. 천도 당시 개경에서 10만호가 강화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見子 山 화산(남산) 등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농지의 개간이 진행되어 고종 43년(1256)에 승천포(昇天浦) 연안 간사지 에 대규모 둔전(屯田)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또한 태조를 비롯한 재궁(梓 宮)이 강도로 이장되고, 개경일대의 사찰들을 모방하여 많은 사찰이 조영 되었다. 그리하여 팔관회, 연등회와 같은 종교 행사가 대대적으로 개최되 는 등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춘 강화는 문화적으로도 발전하게 된다. 그리 고 고종 23(1236)에는 대몽항쟁의 의지로 팔만대장경 판각작업에 들어가 고종 38년(1251)에 완성을 보았다. 이처럼 강화는 임시수도적인 성격을 벗어나 정치적 수도로 자리 잡았으며, 팔만대장경 판각과 같은 대규모의 역사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수도로서의 진면목을 갖추었던 것이다. 강도로 천도한 고려는 몽골의 제 2차 침입(1232년 8월~12월)을 시작으 로 1235년부터 1239년까지의 제3차 침입, 1247년부터 1248년까지의 제4 차 침입, 1253년부터 1254년까지의 제5차 침입, 1254년부터 1259년까지 의 제6차 침입 등 5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무인집 권세력은 강도를 거점으로 하여 내륙의 전투를 지휘하며 항전을 계속했 다. 그리고 소강상태에 들어가면 몽골과 외교관계를 지속하면서 강도로의 진입을 막아내었다. 몽골도 강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국왕의 친조(親 朝) 혹은 태자의 입조(入朝) 및 출륙천도(出陸還都)를 요구하였으며, 침 입시마다 강도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직접적인 공격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고종 45년(1258) 3월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이듬해 4월 태자
10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가입조하고, 뒤이어강도의내성과외성을파괴하였으며, 고종이승하하는등의일련의사건은고려가몽골과의화의를진행하기에이르렀다. 이에고종을이어원종이즉위하고 1270년개경으로환도하면서강화는수도로서의역할을마치게되었다. 3. 강도시대의유적 1) 궁궐과성곽 고종 19년 (1232) 강화도로천도가결정된후궁궐과관아, 성곽이조영되기시작했다. 강도가세워진곳은오늘날강화읍이자리한일대로강화도의동북쪽에위치한다. 이지역은북쪽으로는강화북산 ( 송악산 ) 이, 남쪽과동쪽은각각남산과견자산, 서쪽에는고려산자리잡고있어사방이산지로둘러싸인분지를이루고있어방어에유리한지형조건을갖추고있다. 또한강화읍서북쪽에있었던승천포를통해개경과, 동쪽의갑곶을통해내륙지역과연결될수있는교통상의요지이기도하다. 이렇듯강화읍지역의지리적이점은고려가도읍을건설한주요한원인이되었을것으로보인다. 이처럼강도가오늘날강화읍지역이가지는방어와교통에유리한지리적인이점이주요한원인이지만개경과입지조건이매우유사한풍수적인조건도주요한검토대상이었을가능성도높다. 강도의궁궐은고종 19년 (1232) 강화천도가결정되자군대를동원해궁궐을조영하기시작했다. 궁궐의완성이언제일어났는지는정확히알수없으나 1234년고종이내전에서소재도량 ( 消災道場 ) 을진행하는것으로보아최소한 1233년말에는궁궐의틀이어느정도완성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그러나이후에도지속적으로부분적인보수나개창은계속되었던것으로보인다. 강도의궁궐과관청등은개경을모델로하여건립되었고, 그에따라명칭과구조, 배치역시개경의그것과같았을것으로파악되고있다. 지금까지연구결과나개경만월대의위치와구조등을고려할때현재의고려궁지가자리한주변지역을궁궐위치로보는것이일반적인견해이다. 다만지금의고려궁터에대한여러차례의발굴조사에서도관련된유
105 유적을통해본강도시대 105 구나유물이발견되고있지않아자세한내용을파악하는데어려움이있다. 강도의궁궐이외에이궁과별궁도건립되었다. 이궁내지가궐을창건하면나라나왕의운수를연장할수있다는연기설의영향으로고종 46년 (1259) 2월마니산에이궁을창건하였고, 같은해 4월삼랑성과신니동가궐이지어져 1264년완공되었다. 마니산이궁은지금흥왕리에있으며, 삼랑성가궐은전등산경내, 신니동가궐은선원면지산리로비정된다. 이가운데마니산이궁은현재그터가남아있으나삼랑성과신니동가궐은구체적인흔적이확인되지않고있다. 궁궐과함께강도가도읍으로서위상을갖추기위해서는성곽이설치되어야했다. 강도의성곽에대한기록은단편적이어서자세히파악하기는어렵지만내성, 중성, 외성의 3개의성곽이축조되었던것으로파악되고있다. 고려사 에서내성의축조기록은보이지않지만내성을허물었다는기사와함께 新增東國輿地勝覽, 江都誌, 與地圖書 등자료를종합할때강도가 3성체제로구성되었을가능성이높은것으로보인다. 또한개경의성곽체제가궁성 ( 宮城 ), 황성 ( 皇城 ), 나성 ( 羅城 ) 의 3성체계로구성되어있는데, 강도가개경을모델로조영되었다는점에서성곽도개경의그것과같은체제를갖추었을가능성이높을것으로보인다. 그러나당시성곽의구체적인형태와위치에대해서는기록이없는실정으로지금으로서는 3개의성곽이모두토축 ( 土築 ) 으로조성되었다는정도만알수있다. 문헌기록에의하면내성은주위가 3,874척 ( 약 1,240m) 이며, 외성은 37,076척 ( 약 11,860m) 으로전한다. 현재강도의성곽가운데그흔적이남아있는것은강화읍외곽을둘러싸고있는토축성이유일하다. 이성은중성으로불리우고있는데기록상의내, 중, 외성가운데어느것에해당하는지는아직정확히알수없다. 그러나강화읍을중심으로환축한성곽의구조로미루어보아지금의중성이강도를최외곽에서둘러싼도성 ( 都城 ) 으로파악하는것은무리가없을것으로판단된다. 이처럼궁궐과성곽의모습을정리해보면강도는송악산, 견자산, 남산, 그리고그사이를동서로흐르는동락천일대가중심지역이었던것으로보인다. 강도는고종 21년궐남리에대풍으로화재가발생해수천채의집이불탔다고하며고종 32년에도견자산북리에서민가 800여채가불에탔다는기록으로보아많은인구가밀집해살고있었음을추정해볼
10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수있다. 그러나강도의중심지역은이미도시화가이루어진상태로그흔적을찾아보기는어렵다. 이밖에아직그성격이명확하게알려져있지는않지만고려산과하음산, 교동의화개산등지에서도고려시대사용된것으로알려진성곽들이남아있다. 2) 무덤 지금까지조사된바로강화에는왕릉을비롯해대략 23개소이상의고려시대고분 ( 군 ) 이분포한다. 무덤은후대의생활공간과분리되어있는경우가많다. 그래서후대의생활터전에자리해훼손되거나멸실되기쉬운건물과집자리에비해상대적으로보존이잘되어있어, 관련유적이많지않은강도시대강화의모습을이해하는데중요한자료가되고있다. 강화도는강도시대사망한고려희종의석릉 ( 碩陵 ) 과고종의홍릉 ( 洪陵 ) 등왕릉 2기와가릉 ( 嘉陵 ) 과곤릉 ( 坤陵 ) 등왕비릉 2기가자리하고있어남한지역에서는유일하게고려최상위묘제를살펴볼수있는곳이다. 최근몇년간석릉과가릉, 곤릉등에대한발굴조사가이루어져왕 ( 비 ) 릉의구조가밝혀진바있다. 왕릉이외에도정확한피장자는알수없지만능내리와인산리, 연리에서왕릉과비슷한규모와구조를가진석실묘가분포하고있고, 다른지역에서쉽게찾아볼수없는판석으로된석곽묘등상위계층의무덤들이군집을이루고있는등고려상위계층묘제에대한자료를제공하고있다. 이밖에강화곳곳에서석곽묘와토광묘등고려시대에나타나는거의모든묘제가확인되고있는데고분군의분포밀도또한다른내륙지역과비교했을때매우높다. 하지만현재까지강화고려고분에대한조사는시작단계로서대부분의고분군들에대해서는이렇다할조사가이루어지지않고있어자세한내용을파악하기위해서는향후조사결과를기대할수밖에없다. 한편강화지역고려시대고분을이해하기위해서는당시고분의유형과구조에대한내용을파악할필요가있다. 따라서고려시대묘제를간략하게나마살펴봄으로서강화도고려고분의이해를돕고자한다.
107 유적을통해본강도시대 107 고려시대고분은여러가지유형이있지만가장일반적인것은고분은석실묘 ( 石室墓 ) 와석곽묘 ( 石槨墓 ), 토광묘 ( 土壙墓 ) 등이다. 석실묘는고려시대최상위계층의묘제로왕실의무덤으로이용되었다. 석실묘의구조는크게묘역과석실구조로나누어살펴볼수있다. 산지의사면에장방형묘역을조성한뒤석축또는석단을이용해 3~4단으로묘역을구분한다. 묘역의최상단에는曲墻을두르고그안에봉분이위치해묘역의중심을이룬다. 봉분의하단에는장식과봉분보호의기능을하는병풍돌을설치하며, 그바깥으로난간석을두른다. 묘역의 2~3단에는석인상과석물을배치하고하단에정자각을설치한다. 석실은판석또는할석을이용벽체를축조하고판석수매로천장을구성한방이다. 평면형태는대부분장방형으로가로세로가각각 2~3m 내외이며높이또한 2m 정도다. 입구의바닥에는문지방석을깔고, 양쪽장벽에기둥돌을세운뒤판석 1 매로마감한다. 입구에서는나무문으로이중문을설치한다. 석실바닥의가운데에는보통관대가설치되고, 석실바닥은석비례층을그대로사용하기도하지만판돌또는벽돌을시설하는예가많다. 벽과천장에는벽화가그려진다. 석곽묘는 4벽을판석이나할석을이용해축조하고내부에목관을안치하는형태이다. 석곽묘는축조방식에따라다듬어진판석 ( 板石 ) 으로사방벽면과덮개를구성하는판석조석곽묘 ( 板石造石槨墓 ) 와치석된할석 ( 割石 ) 또는자연석을이용해벽체를축조하는할석조석곽묘 ( 割石造石槨墓 ) 로구분된다. 판석조석곽묘의구조는대략길이 2~3m, 너비 1m내외높이, 0.9~1.2m의장방형형태로석실묘보다규모가축소되고너비에비해길이가길어진형태이다. 벽면과천정에는벽화가그려진경우가있으며, 석실묘에서나타나는석단등외부묘역시설이설치되는예도많아상류계층의무덤으로파악된다. 할석조석곽묘는길이 2~3m, 너비 40~80cm정도로판석조석곽묘에비해규모가작고, 축조수준또한상대적으로조악하다. 매장주체부이외에별도의시설이설치되지않는것이보통이다. 토광묘는구덩이를파고목관또는시신을직접안치하는단순한형태로할석조석곽묘와더불어가장널리확인되는고려고분의유형이다. 토광묘는길이2m, 너비 0.5~0.7m 내외의크기로, 별도의시설없이매장주체부만조성되는것이대부분이다. 석곽묘와토광묘는보통 2~3기에서많게는수백기가모여고분군을형성한다. 이밖에석관이나토기에유골을
10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안치하는화장묘도널리사용된것으로알려져있지만실제발굴을통해확인된예는매우적다. 이상과같은고려고분의각유형은被葬者의계층에따른차이를반영하고있는데, 석실묘는왕실의묘제, 석곽묘중판석조석곽묘는고위관료층, 할석조석곽묘와토광묘는그이하의무덤으로구분될수있다. 강화도고려고분은섬전체에걸쳐고르게분포하고있는데, 홍릉을제외한나머지능은모두진강산에소재하고있다. 진강산은강화도의중앙부에자리한산으로이곳은본래강화현의속현인진강현의진산으로알려져있는곳이다. 진강산에는석릉과가릉, 곤릉이자리하고있으며가릉에인접해능내리석실묘가위치하고있어강도시대왕실의묘지로활용되었음을알수있다. 홍릉의경우강화읍서쪽의고려산기슭에홀로위치하고있다. 진강산은왕실의묘지뿐만아니라당시지배층의묘지로도활용되었다. 고려시대묘지명가운데강화에매장된인물은 7명으로모두강도시대관료들이다. 이들가운데김취려와유경현, 최항, 이규보등 4명이진강산일대에묻힌것으로파악되고있다. 당시왕릉과관료의묘지로진강산일원이선택된이유에대해서는아직알려진바없다. 한편왕릉을제외한지금까지파악된강화도의고려시대고분들은아직정확한피장자를알수없어모두강도시대의것으로판단할수는없다. 강도시대이전에강화에는강화현과하음현, 진강현등의토착세력이존재했으며이들도분명히무덤을조성했을것이다. 물론지금까지확인된고려시대고분 ( 군 ) 들가운데강도시대에조성된무덤의비율은현재로서는알수없지만개경으로부터 10만호의인구가급속하게유입되면서인구가급격히팽창한강도시대에조성된고분의수가적지는않았을것으로보인다. 3) 절터 지금까지강화에는문헌상으로 63개의사찰이전해지고있어여타지역이비해유적이유난히많다. 삼국시대부터강화에불교사찰이건립되기시작한것으로알려져있지만본격적으로조성되기시작한것은강도시대부터로추정된다.
109 유적을 통해 본 강도시대 109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천도가 단행된 후 우선적으로 성곽과 궁궐, 관아 등이 조영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왕실과 지배계층의 정신적 불안을 해소하는 장치로서 사찰의 건립도 요구되었다. 강도시대의 사원은 개경의 것을 대부분 옮겨온 것으로 고종 21년(1234) 2월 고려사 의 기록에 때에 비록 천도한 초창기이나 구정(毬庭) 궁전 사사(寺社)의 이름이 모두 송도(松都)를 따랐다 거나 팔관(八關) 연등 (燃燈) 행향(行香) 도장(道場)이 모두 옛 식 대로였다 하여 불사가 중요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도에는 봉은사(奉恩寺), 법왕사(法王寺), 현성사(賢聖寺), 묘통사(妙 通寺), 왕륜사(王輪寺), 건성사(乾聖寺), 복령사(福靈寺), 천수사(天壽 寺), 미륵사(彌勒寺), 혈구사(穴口寺), 묘지사(妙智寺)등의 사찰이 있었 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사찰의 대부분은 개경에 있던 주요 사찰들 과 동일한 이름이다. 사찰의 이전은 천도와 함께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데, 고종 20년(1233) 봉은사를 시작으로 현성사, 법왕사 등이 세워졌고 왕륜사, 묘통사, 건성사, 복령사 등은 몽고군의 3차 침략(1235~1239) 이 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원종 년간에도 천수사, 안화사, 보제사, 미륵사 등이 건립되었다. 그 중 보제사(普濟寺)의 경우는 원종대 대표적인 국왕의 친행사원(親幸寺院)의 하나로 복구된 것이다.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강화도호부의 佛宇 및 古蹟 條에는 전등사(傳燈寺),정수암(淨水庵) 국정사(國淨寺) 적석사(積石寺) 월명사(月 明寺) 수월사(水月寺) 미륵사(彌勒寺) 서왕사(西王寺) 덕장사(德藏寺) 홍릉 사(弘陵寺) 백령사(白蓮寺) 용장사(龍藏寺) 선원사(禪源寺) 등 다수의 사 찰이 등장하는데 이중 상당수는 강도시대에 존재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강도의 사찰건립과 불교행사는 전란기의 재정상태로 개경에서처 럼 될 수는 없었다. 천도 초기에 개경 사찰의 이전은 왕실과 관계 깊은 일부 사원에 국한 되었으며, 이전된 사찰들이라 하더라도 예전과 같이 운 영되기는 어려웠다. 강도의 기반시설이 정비되어가고 안정을 되찾아가면 서 작은 규모나마 사찰들이 들어섬으로써 과거 개경시대에서의 불사운영 의 분위기를 다시 회복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강도시대 사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봉은사와 법왕사다. 봉은사 는 천도직후에 건립되었다. 건립시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종
11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1년고종이봉은사에행향하였다는기록으로미루어보아천도직후에옮겨진것으로추측된다. 봉은사는태조왕건의초상을모신진전사원으로연등회때임금이태조의초상에알현하던곳이다. 법왕사는태조 2년 (919) 년창건된절로팔관회때임금이행차하는곳으로고종 32년견자산부근의화재로연경궁과함께법왕사가소실되었다는기록으로보아지금의견자산북쪽에있었을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상과같이강도시대불교사찰은개경과같은수준은아니지만상당히번성했음을알수있다. 그러나강도시대의사찰가운데현재그정확한위치를알수있는경우는매우적다. 또한유적의대부분은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않아정확한시대나성격을알수없다.
111 강옥엽 (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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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113 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7 강옥엽 (역사자료관) 목 차 1. 고려사 연구의 동향 2. 고려사의 성격 3. 고려시대 인천, 7代御鄕 4. 고려시대 인천의 지역적 위상 : 王都, 교통의 요지, 보장처, 정신적 기반 1. 고려사 연구의 동향 - 고려시대의 본격적인 연구는 광복 후 시작되어 震檀學會를 중심으로 한 李丙燾의 고려시대의 연구 (을유문화사,1948), 金庠基 동방문화 교류사논고 (을유문화사,1948)와 그 외에 白南雲 조선봉건사회경제 사(상) (1937)등의 연구 - 새로운 연구는 6 25가 끝난 뒤부터 시작, 역사학보 의 간행에 크게 힘입게 되었다. 이병도의 한국사 (중세편)과 김상기의 고려시대 사 는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 년대 토지제도(姜晋 哲), 병제사(李基白), 정치제도(邊太燮), 사회경제사(金龍德,李佑成, 閔丙河), 사상사(金哲埈) 년대 지방제도사(河炫綱), 유교정치사상(李熙德), 고려사회문제 (朴菖熙,金毅圭,李光洙),지방제도(朴龍雲), 노비문제(洪承基), 권문세 족(閔賢九), 土姓문제(李樹健), 불교사상(金杜珍,崔柄憲,許興植) 년대 박종기,채상식,노명호,장동익,윤용혁,이혜옥 등 각 부문에 많은 논문들이 발표됨.
11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 지배적인 사회계층의 성격과 그 변질과정 연구 고려건국기의 호족 의 성격과 고려의 문벌귀족, 고려후기의 권문세족 및 신흥사대부 문 제, 무신란과 무신정권 등에 주목 발전적 측면에서 파악 2. 고려사의 성격 고려는 918년 왕건에 의해 성립되어, 1392년 조선왕조가 세워지기까지 474년을 유지했던 왕조이다. 따라서 500년의 고려사회를 간단히 특징짓기 는 어렵다. 대체적으로 1170년 의종 24년 발생했던 무신란을 정점으로 전 기와 후기로 구분하거나, 이를 더 세분화하여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는 1270년 원종 11년을 후기로 설정하여 전기, 중기, 후기 3기로 구분해서 특징짓기도 한다. 중세사회의 성격 :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연구가 진척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려를 중세사회로 규정하는데 큰 이 의 가 없다. 고려사회가 중세라는 점은 고대사회의 편성원리인 골품제의 극 복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에서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체제를 이 분이 루고 있었는데 신라에서 고려 로 전환하는 사이에 지방호족세력과 지식층인 6두품출신이 등장 하여 골 품제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대적 이며 폐쇄적인 골품체제에서 보다 개방되고 전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 라 할 수 있다. 고려가 중세사회라는 것은 지방호족의 대두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왕경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지방세력의 성장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는데 신라말기에는 토착적인 촌주출신과 왕경에서 내려간 중앙 귀족들이 그 지방의 호족으로 대두하여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들 지방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그 지배층으로 변조하였으므로 그것 을 중세사회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것도 중세사상의 성립으로 볼 수 있 다. 신라의 진골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고 당 송 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를 실시한 점에서도 고대적인 사
115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115 회에서 중세사회로 전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 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세적 요소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 의 고대적인 토지소유관계와 농민에 대한 수취관계의 모순을 시정하려 하 였는데 태조의 조세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 제정이 그것이다. 기본적인 토 지제도인 전시과의 시행은 일보 전진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지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일반농민이 조상대대로 이어받아 경작하는 민 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의 일반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그들 농민지위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토지소유적인 것과 농 민의 성장은 신라의 고대적인 것과 다른 중세적인 성격의 표현이었다. 그 리고 중세사회의 성격은 다음 조선의 근세사회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 던 것이다. - 고려의 성립(918년) ㄱ. 중서부 해상세력을 한 왕건세력의 등장과 후삼국의 통일: 국호를 高麗,연호를 天授, 開京에 도읍을 정함. 태조 13년(930) 안동(古昌)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태조 17년(934) 홍성(運州)에서 후백제군을 대파 30여성을 탈취 군사적 우위를 확보함. 태조 18년(935) 견훤의 귀부와 신라의 투항. 19년(936) 후백제의 멸망 ㄴ. 태조의 정책과 성격 : 호족연합정책 강력한 집권정책 표방 신라의 정통성 계승 표방 신라왕녀와 결혼, 두 딸을 경순왕에게 출가시킴 重幣卑辭 로 호족들 우대 후백제 계열에 대한 차별성 결혼정책으로 29명의 后妃를 둠 6왕후와 출신지역 : 신혜왕후 柳씨(정주) 정화왕후 吳씨(나주) 신명왕후 劉씨(충주) 신정왕후 皇甫씨(황주) 신성왕후 金씨(경주) 정덕왕후 柳씨(정주) 23명 부인의 출신지역: 경주(2) 명주(2)평주(4) 신주(1) 진주(1) 홍주(1) 협주(1) 廣州(2) 昇州(1) 춘주(1) 동주(2) 의성(1) 해주 (1) 불명(3)
11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귀부호족에게 왕씨성 하사 기인제도 및 사심관제도 마련 政誡 1권, 誡百寮書 8편 관료층 규찰 役分田 실시 - 고려사회의 성격문제 ① 문제제기 爵位: 전형적인 귀족사회는 귀족들이 하나의 특권적인 신분으로서 사회를 지배. 지배적인 특권이 재능이나 능력이 아닌 가문 과 혈 통에 의해 세습됨. 서양의 경우는 이러한 특권이 작위 를 수여받 음으로써 인정되고, 후손에게 세습됨. 그러나 고려의 경우는 封爵 制를 통해 작위귀족을 배출하였으나, 세습 되지는 않음. 관리 충원방식: 고려의 신분제는 작위보다는 관리로 出仕함으로써 얻어지는 것. 그런데 고려의 관리충원방식은 科擧制度와 蔭敍制度 를 동시에 운용 귀족제설과 관료제론 ② 귀족제사회설의 내용과 그 개념 ㄱ. 귀족제 사회설의 제기: 일제시대부터~ 년대에 걸쳐 진행 ㄴ. 귀족제 사회설의 논거: 蔭敍制 및 功蔭田柴: 음서의 종류: 門蔭(5품이상관), 功蔭(공신자손), 祖宗苗裔蔭敍 (역대 왕의 내외손) 음서 시행 시기: 정규음서, 특사음서 음서 연령: 18세로 규정, 그러나 10세, 15세, 심지어 5세에 초직 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음서의 수혜인원: 1인 1자, 1인 多子, 탁음자를 달리하면 여러 명 가능 등. 공음전시법: 처음에는 勳田 형태, 문종대 이후 관인 우대보호책 으로 5품이상의 문무양반에 대해 일률적으로 지급.(1품: 田 25결, 柴 15결 / 5품:田 15결, 柴 5결) 대체로 음서로 관인이 되어 5품이상관으로 진급한 蔭職출신
117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명중 재상급 2품 이상 승진자가 39명(60%) 과거 수석합 격자중 아무런 관력을 남기고 있지 못한 인원이 60% 통혼권의 형성: 귀족의 누대적 세습 여부, 폐쇄적 혼인관계를 통 해 정치적 특권을 소수 귀족층만이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 확인문제 慶源(仁州) 李氏: 10대에 걸쳐 5명의 수상과 20명에 가까운 재상 배출. 閥閱 海東甲族 등으로 불림.(이자연의 3딸은 문종 비, 이자겸의 3딸은 각각 예종비와 인종비가 됨) 海州 崔氏: 崔冲을 비롯 10여대에 걸쳐 6명의 수상과 10여명의 재상 배출. (경원 이씨, 강릉 김씨, 광양 김씨, 남평 문씨, 정주 유씨, 정안 임씨, 언양 김씨, 횡천 조씨 가문 등과 혼인) 인종때 宋사신 徐兢 고려는 族望을 숭상해서 국상은 다수가 勳 臣 戚臣이 임명. ③ 官僚制 家産官僚制說과 그 비판 관료제: 근대적 소산물로 합리화 능률화를 목적으로 규칙의 지배, 沒主觀性, 전문화, 계층적 권한질서 등을 속성으로 하는 집행이나 관리조직. 이 조직을 구성하는 인적요소인 행정간부 곧 관료들도 인격적으로는 자유여서 오직 객관적인 관직의무에만 복종하고, 명확한 관직권한을 가지며, 그들의 선발은 전문자격에 따라 자유 로운 계약에 의함.( 가산제) 가산제: 전근대사회에서 전통적 지배의 한 형태. 지배자의 권리는 그의 고유권으로 간주되어 그것이 임의의 소유대상과 같은 방식 으로 專有되며, 경제적 권익도 그와 동일한 양식으로 처분이 가능하다는 특징. 이 가산제 지배자가 그의 권력을 국가권력으로 발전시켰을 때 그 국가를 家産國家라 함. 여기에 상당한 정도로 관료제적 요소가 나타 남으로써 가산관 료제의 개념도 도출됨. 즉, 가산관료제란 결국 가산제사회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합목적적인 직무분배에 의하여 신분적 인 階序制組織을 이루어 형식적으로는 관료제적인 방식으로 기능 하고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통치구조로 파악됨. 가산관료제는 본질적으로 가산제 지배구조에 원점을 두고 있 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 행정간부도 근대관료제의 그들과는
11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몰주관적인 자격에 의하여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와의 개인적인 성실관계에 따라 그가 자의 적으로 선택하였고, 또 그 지배도 가산제적이었다. 과거 급제자라고 무조건 과거집단 혹은 과거관료로 묶어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관리 등용을 위한 국가고시제는 귀족제나 관료제 사회에서나 모두 시행될 수 있다. 요컨대 과거는 정치 경제 사회 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 하는 하나의 방법(과거제도 귀족제적 운영방식으로 치러졌음을 의미). ④ 貴族制社會說의 보강과 고려사회성격의 이해 방향 귀족제설의 비판과 재검토: 귀족의 범위문제/ 귀족가문/ 귀족의 경제기반 등( 일반인과 구별되는 신분적, 정치적 특권이 주어진 가족에서 태어난 인간, 또는 신분제 사회에서의 지배 신분층 등 으로 폭넓게 규정) 이런 성격과 특징을 지닌 귀족층이 대부분 국가 요직을 점유하고, 정책의 결정이나 가치의 배분을 귀족제적으로 운영하여 갈 때 그 사회는 귀족제사회. 다각적 검토 요망 貴族官人社會: 절충적 입장. 고려 전기는 귀족제성 성격이 강한 사회, 고려 후기는 관료제적 성격의 사회로 규정. 3. 고려시대 인천, 7代御鄕 1) 고려의 건국과 인천의 호족 : 통일 후 중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신라는 경덕왕(742~764)때를 고비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앙 에서는 귀족들간의 권력쟁탈이 일어나고, 지방에서는 무력과 재력을 축적 한 호족(豪族)들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주민을 지배하다가 마침내 후삼국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 혼란의 시대인 신라 하대(下代)는 150 년간에 20명의 왕이 교체되고, 그 중 많은 왕이 내란으로 희생되었다. 9세기 말 신라의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해적과는 다른 성격의 해상세력이 몇 몇 해안지방에서 토
119 7 대어향과고려시대의인천 119 착세력과규합하여등장하게되는데이들이해상호족 ( 海上豪族 ) 이다. 이들해상호족은신라의통제에서완전히벗어나독자적인사무역을행하고이를바탕으로경제적인부를축적하였을뿐아니라군사력까지겸비하게되었다. 이시기대표적인해상호족으로는송악에기반을두고예성강유역과강화도에이르는지역에서두각을나타낸왕건 ( 王建 ) 일가를들수있다. 왕건의선대 ( 先代 ) 는고구려유민으로서송악을근거지로세력을규합하여발전하였고, 왕건의부친인왕융 ( 王隆 ) 의시대에는이미예성강유역의호족세력으로성장해있었다. 왕건의집안이예성강을통해해상으로드나들며무역에종사했다면출입구에해당하는강화도에도어느정도세력기반이형성되어있었을것이다. 결국왕건은송악에기반을둔호족으로위로는패강진과아래로는예성강하구의토착세력을규합하면서, 신왕조를건국할수있는기반을다져나갔던것이다. 이렇듯나말여초 ( 羅末麗初 ) 는새로운사회세력인호족에의해지배되던호족의시대라고할수있다. 이러한시기에호족출신인왕건에의해많은호족이결속되면서고려가건국되었다. 나말여초의호족세력은인천지역에서도대두하는데, 그중대표적으로들수있는것이인주이씨 ( 仁州李氏 ), 부평이씨 ( 富平李氏 ) 그리고강화위씨 ( 江華韋氏 ) 의경우이다. 인주이씨는그시조가통일신라경덕왕때아찬의벼슬에있던이허기 ( 李許奇 ) 로전해내려오는데, 고려사 에는인주이씨의선조에대하여명확한시대적족적배경을밝히지않고있지만, 그선조가신라의대관 ( 大官 ) 이라는점, 사신으로입당 ( 入唐 ) 하였다는점, 당의천자가이를가상히여겨이씨성을내려주었다는것은 이씨가록 과일치를보이고있다. 왕건이해상무역을통해성장한기반을바탕으로고려를성립할수있었듯이, 인주이씨역시해상무역을통해축적한경제적기반을바탕으로하여고려의대표적인문벌로성장할수있었다. 인천이씨세보( 仁川李氏世譜 ) 에는이허겸의아들눌 ( 訥 ) 과손자성간 ( 成幹 ) 이있다. 그런데성간의부인이개성왕씨로서그아버지가고려태조왕건이라하였다. 당시태조가혼인관계를통하여강력한호족세력을통합하고자하였으니고려초인주이씨는왕실과의혼인이이루어질정도의강력한호족세력이었음을알수있다. 부평이씨의시조는이희목 ( 李希穆 ) 으로 부평이씨대동보 ( 富平李氏大同
12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譜) 에 의하면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으로 책봉 되었으며 관계(官階)가 삼중대광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는 940년 삼한공신(三韓功臣)의 책정, 토성(土姓) 분정, 군현(郡縣)의 개 칭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삼한공신 책정과 함께 이루어진 토성분정은 토착성씨집단을 국가차원에서 확정하는 조치로서 고려정부의 집권력 확립 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지역적 기반을 인정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희목이 삼한공신이었다는 것 은 그가 호족출신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군진세력과 서해의 해상세력을 겸비한 기반 위에서 성장한 강화 교동 통 진지역의 호족들도 지리적인 여건과 해상세력이라는 특성상 강력한 호족 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강화 위씨이다. 목 종 현종대에 크게 등용되어 문하시중에까지 이르게 되는 위수여(韋壽餘) 는 고려사 에 강화현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강화현인이었다는 것 은 그 지방 호족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강화위씨는 세종실 록 지리지 강화현의 성씨조에 토성 최(崔) 위(韋) 황(黃) 고(高) 중 두 번째 성씨로 나타나고 있다. 위수여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하시중에까지 올라 번성하게 됨에 따라 그에 관한 기록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외 대부 분의 호족들은 강화의 최 황 고씨의 경우처럼 세종실록 지리지 의 인천 지역 성씨조를 통하여 그 성씨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2) 7代御鄕 인천 : 고려의 지방제도는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책과 중 앙정부의 행정력 침투과정과 함께 정비되어 갔다. 태조대는 후삼국을 통 일하기 이전은 물론이고 통일한 이후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호족들이 지방행정은 물론 지방 농민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처음으로 파견되는 것은 6대 성종대 일이다. 성 종대에는 3성(省) 6부(部) 등 정치제도의 기반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관이 파견되어 호족세력의 지배 하에 놓여 있던 지방의 행정력과 군 사력이 중앙으로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현종대에 이르러 지방관제는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현종 9 년(1018)에 각 도의 안무사를 파하고 전국에 4도호(都護) 8목(牧)과 56지 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고려
121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121 의 지방제도는 4도호부 8목을 중심으로 그 밑에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상주시키는 56개 주와 군, 28개의 진, 그리고 20개의 현으로 편 성되었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정비과정에 인천지역도 몇 차례 변화를 겪게 되었지 만 그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인천(인 주)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 년(757)에 소성현이 되어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에는 다시 수주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숙종조(1096~1105)에 이르러서 경 원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숙종의 모후인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인천은 다시 인종조(1123~1146)에 인주로 가호(加號)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인종의 모후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주 이 씨는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동안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 궁주 가운데 인주 이씨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 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평 산 박씨 파평 윤씨 강릉 김씨 등 거족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일대 벌족세 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편 헌종대에 누이동생 원신궁주가 낳은 한산후(漢山侯)를 옹립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이자의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큰 타격을 받았으나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자비를 인주 이씨 문중에서 간택하여 순덕왕후(이자겸의 2녀)가 예종비가 됨으로써 예종대에 다시 인주 이씨가 외척의 권세를 회 복하게 되었다. 순덕왕후는 예종비가 된 후 인종과 두 궁주를 낳았는데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경태후로 추존되고 경원군을 인주로 가호하여 지 주사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종 4년(1126)에 인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하려던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딸들인 두 인종비가 모두 폐비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중서령 임원후(中書令 任元厚)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이 가 곧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이다. 공예태후는 부평 이씨인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공예태후는 의종 명종 신종 등 3왕과 2왕자 4궁 주를 낳았다. 인주 이씨가 몰락한 후에는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12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등의 경주 김씨가 귀족사회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권세는 인주 이씨 에 미치지 못하였다. 공양왕 2년에 인주를 올려 경원부로 삼았다 고 하여 인주가 경원부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승격된 사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그 사유를 동국여지승람 에는 칠대 어향(七代御鄕), 동국여지승람 에 실려 있는 강희맹(姜希孟)의 승호기(陞號記) 에서는 칠대향(七代鄕) 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천부읍지 에는 동국여지승람 의 기 록과 같이 칠대향(七代鄕) 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여지도서 에는 칠대 향(七代鄕) 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로 보면 칠대향 칠대 어향 칠대 지향 이라는 말은 같은 뜻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인천은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 5대 왕의 외향(외가)이 되고 문종 순종 선종 예종 인종 5대 왕비의 내향(친정)이 된다. 따라서 이 7대 동안 인천은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이 되고 특히 순종 선종 인 종 3대는 왕의 외향인 동시에 왕비의 내향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 종 선종 인종은 인주 이씨 왕비의 소생이면서 인주 이씨를 왕비로 맞이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御)자는 엄밀하게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로서 어향이라고 할 때 왕의 고향 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뜻을 확대하여 7 대 동안 인천이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칠대 어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양왕은 왕위에 오르자 왕 2년(1390)에 그의 조상을 높혀서 4 친(親)에게 작시(爵諡)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7대조인 신종의 선대 7대왕(문종~인종, 인종 다음의 의종은 인종의 장자이고, 의종 다음의 명 종은 인종의 3자이며, 명종 다음의 신종은 인종의 5자이니 신종의 선대는 인종이 됨) 중 5대왕이 인천을 외향으로 하고 5대 왕비가 인천을 내향으 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상을 높이고 알리려는 뜻에서 인주를 부(府)로 승 격시키는 동시에 읍호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3) 해상교통과 자연도 및 강화 교동도 : 고려의 전반기에 걸쳐 예성 항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송나라와의 교류가 두드러지는데,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는 양국 사이의 외교적 형식을 통한 공적(公的) 교역보다도 사적(私的)인 민간 교역으로 말미암 아 크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양국 사절의 왕래한 횟수와 송상의
123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123 내항(來航)한 횟수를 비교하여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고려 광종 13년으 로부터 인종 의종 시대에 걸쳐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건너간 것이 약 57회이며,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건너온 것이 약 30회임에 대하여 송상이 건너온 횟수는 현종 3년으로부터 충렬왕 4년까지 약 260여 년 동안 약 120여 회에 달하였으며 내항한 송상의 총인원도 최소한도로 약 5,000명을 헤아릴 수가 있는 것으로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듯 예성항을 중심으로 활발한 해상활동에 전개되는 시기에 자연도 (영종도)와 강화 및 교동은 예성강의 관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삼 남(三南)의 물자들이 거의 대부분 서해를 통하여 예성강을 거슬러 개경으 로 수송되었고, 또한 아라비아나 송나라 상선들 또는 고려의 상선들이 모 두 서해에서 강을 거슬러 수도 개경까지 직접 무역활동을 하였다. 그러므 로 자연도는 대중국무역의 무역항으로 또 강화와 교동은 해상교통의 중심 지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당시 송은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통과하는 연로에 고려관(高麗館, 亭) 이라는 객관(客館)을 세우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하였는데 (북송의 서울은 開京이었고 남송의 서울은 杭州였다). 고려에서도 송나라 사신과 상인이 통과하는 항로상에 객관을 설치하여 내왕하는 그들을 극진 히 대우하였다. 고려도경 에 의하면, 흑산도(黑山島)에는 관사(館舍, 흑산도에는 宋使가 기착하지 않아 객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음)가 있었 으며 군산도에는 군산정(群山亭), 마도(馬島)에는 안흥정(安興亭), 자연 도(紫燕島)에는 경원정(慶源亭), 예성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 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자연도는 인천의 속도이며, 지금의 영종도이다. 자연도에 설치되어 있던 객관명이 경원정이다. 경원정은 자연도의 태평 암(太平巖, 구읍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도경 에 의하면 경원정 은 산을 의지하여 건립되어 있고 객관 옆에는 막옥(幕屋) 수십 칸이 있으 며 그 주변에는 주민들의 토옥(土屋)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도란 명칭은 경원정 동편에 많은 제비가 날아다녔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당시 송사(宋使) 일행이 자연도에 도착하여 접반(接伴) 윤언식과 지광주 (知廣州)의 서찰을 가지고 마중나온 역관(譯官) 탁안의 영접을 받았는데 병장의례(兵仗儀禮)가 더욱 후했으며 정사 부사 삼절 등이 경원정에 도착 하여 접반 지광주와 상견례를 가졌는데 그 음식과 상견이 전주례(全州禮) 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2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당시 고려에서는 송나라 사신과 상인들에 대한 대우가 극진하였다. 예를 들어 문종 32년(1078)에 송나라 신종이 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 神州) 영비순제(靈飛順濟) 라고 하는 큰 배 두 척을 만들게 하여 모 두 신주(神舟) 라고 명명하고 사신 안수와 진목 등으로 하여금 신주 두 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게 하여 고려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예성강에 도착하자 고려에서는 병부상서 노단을 연반(筵伴)으로 삼아 서교정(西郊 亭)에 이르게 하고 또 형부상서 김제를 연반으로 파견하였으며 사신이 순 천관(順天館)에 들 때 호부상서 김양감과 예부시랑 이양신을 관반(館伴) 으로 삼았다. 그런데 송선(宋船)이 흑산도에 들어선 후부터 예성강에 이 르기까지 서해연안의 여러 항구에서는 관리들로 하여금 그들을 영송하게 하고 밤에는 배가 통과하는 항로 주변의 산마루에 봉화를 올려 그들을 인 도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 후에도 항례(恒例)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고려 상인들의 송나라와의 무역은 송상의 대(對) 고려무역만큼 활 발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들도 매년 여름에 무역품을 싣고 주로 명주(明州) 에 가서 송나라 시박사(市舶司)의 감독과 보호하에 교역을 행하였다. 고려시대의 해로(海路)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을 남긴 사적으로 인종 원 년(1123) 2월에 고려 견사(遣使)를 수행한 서긍의 견문록 고려도경(高麗 圖經) 이 있다. 서긍은 변경(薦京;현 開封)에서 출발해 고려 수도 개경 (開京;현 개성)에 이르기까지의 항로를 해로(海路) 1부터 6까지로 나누어 일지식(日誌式)으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지명을 오늘의 지명에 비정하여 서긍 일행의 항로를 정리해 보면 영파(寧波)에서 출범해 정해 (定海)를 지나 남방연해로를 따라 북상하여 양자강 하구의 사미(沙尾)에 서 동북방향으로 항진하다가 황해 남부에서 바다를 횡단한다. 한반도 서 남단인 전라남도의 흑산도에 도착한 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군산 인 천 강화도를 지나 예성강 하구에 이르러 정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긍 일행은 3월 14일 변경을 출발해 6월 13일 고려 수도 개경 에 이르렀으므로 총 여정이 약 90일간이었다. 또 5월 16일 명주(明州;현 寧波)에서 출범해 6월 12일 예성강에 도착했으니 순 항해 일정이 26일간 이었고, 그 중 정해(定海)에서 흑산도까지 9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송대(宋代) 이전의 한 중간의 교통로는 주로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육로로 한반도의 서북경(西北境)에서 요동지방을 거쳐서 북중국에 이르는
125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125 것이다. 해로(海路)는 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한반도의 서해안에서 산동 반도 북안(北岸)의 등주(登州)나 내주(萊州)에 이르는 것과 양자강 하류 의 명주(明州)나 양주(揚州)에 이르는 것이 있다. 두 해로는 각기 우회항 로와 직항로가 있다. 산동 북안에 이르는 우회항로(북방우회로)는 한반도 의 서해안을 북상하여 요동반도 동남연해의 장산군도(長山群島), 등주 북 방의 묘도군도(廟島群島) 등 도서를 경유하는 것이고, 직항로(북방직항 로)는 옹진반도 서해를 건너는 것이다. 양자강구(揚子江口)에 이르는 우 회항로(남방우회로)는 옹진반도 서남해에서 산동반도 남안(南岸)으로 바 다를 건너 그로부터 중국의 연해를 남하하여 양자강구에 이르는 것이고, 직항로(남방직항로)는 한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하여 흑산도 근해에서 서남 방으로 양자강 하류지방에 곧장 도착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와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는 항로는 대체로 같으나 꼭 일치한 것 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계절과 풍향에 따라서 다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서해안에 위치했던 인천의 자연도와 강화 교동도는 대중 국무역이나 교통로상에 있었기에 비록 출발지나 귀착지 같은 번화로움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중간 경류지로서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4) 대몽(對蒙)항쟁과 강화도 : 고려왕조가 최충헌(崔忠獻) 일가의 무 신집정기(武臣執政期)에 접어든 직후인 13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는 몽골[蒙古]의 출현으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고 있었다. 즉, 만주의 서북부 하이랄[海拉爾] 부근의 유목민족이었던 몽골은 고려 희종(熙宗) 2 년(1206) 테무진[鐵木眞](후에 징기스칸[成吉思汗]으로 추대)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황제[元나라 태조(太祖)]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사방의 여러 나 라를 정복하여, 1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대정복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목적으로 침입한 것은 고종 18년(1231)의 일이며 이후 고종 46년(1259)까지 총 6차에 걸쳐 약 30년 동안 계속되었다. 몽골 이 고려를 침입해 들어온 것은 고려 고종(高宗) 18년(1231)의 일이나, 그 보다 앞선 고종 5년(1218) 거란 유족(遺族)에 대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고 려에 입경한 것이 침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즉 거란 유족이 대요수국 (大遼收國)을 건국하여 몽골과의 결별을 선언하자 1216년 몽골은 동진국
12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東眞國)과 연합하여 협공을 시작하였는데, 거란 유족이 협공을 피하여 압록강을 건너 고려 경내에 진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다가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하여 장기전 상태에 있었다(1218). 이 에 몽골군도 거란 유족을 쫓아 고려로 진입하게 되었으며, 고려를 구원한 다는 구실로 고려 몽골 동진 3국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마침내 1219년 강동 성을 함락시키고 거란 유족을 섬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은 형제맹약(兄弟盟約) 의 체결로 이 어졌는데, 이후 몽골은 이 조약을 내세워 과다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는 등 갖가지 횡포를 자행하여 결국 양국간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고 종 12년(1225) 1월에 몽골의 사신 자꾸예[著古與]가 귀국 도중 함신진(咸 新鎭;의주)에서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삼아, 1231년 8월 살리타[撤禮塔] 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살리타군은 8월 압록강을 건너 자꾸예가 피살된 함신진을 포위하니 바로 제1차 여 몽전쟁 의 시작이었다. 제1차 침략 이후 몽골의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와 다루 가치의 지나친 내정 간섭과 극심한 횡포 등으로 말미암아 고려의 몽골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에 달하게 되자, 결국 제1차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화 의조약이 파기되고 몽골군의 재침을 가져오게 되었다. 제1차 전쟁이 종결 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제2차 여 몽전쟁이 발발하였다. 몽골이 전쟁 종결 이후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 조건을 제시하자 고려 정부는 몽골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의식 행동을 취 하게 되는데, 바로 강화도로의 천도(遷都)와 서북면 지역에서의 다루가치 의 제거 축출 시도, 개경의 수비 병력 증강, 백성들의 산성(山城) 및 해 도(海島)로의 강제 이주 등과 같은 조치였다. 그러므로 제1차 침공이후 물러났던 몽골군이 재차 침공하려 할 즈음 고 려 조정은 수도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전시(戰時)의 새 로운 도읍지로 산간 내륙 지방이 아닌 강화도가 선정된 것은 전적으로 최 우의 의도였다. 즉, 제1차 여 몽전쟁이 지속되고 있던 고종 18년(1231) 12월에 최우는 승천부(昇天府)의 부사(副使) 윤린(尹璘)과 녹사(錄事) 박 문의(朴文璇)로 하여금 피난지로서 강화도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 보고하 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도입보(海島入保) 를 최적의 방책으로 고종 19년(1232) 7월에 강화도로 입도한 이래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기까 지 고려는 39년간(1232~1270)의 강도시대(江都時代) 를 열게 된다.
127 7대 어향과 고려시대의 인천 127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궁궐과 관해 시설과 함께 방어 (防禦) 시설의 축조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바로 강도(江都)를 둘러 싼 성곽(城郭)의 축조가 주된 역사(役事)였다. 강도의 성곽은 내성(內 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의 3중으로 중첩(重疊)하여 쌓았으나, 내성의 축조시기를 알려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내성의 주된 목적이 궁성(宮 城)을 수호하기 위한 것임을 볼 때, 천도 초기 궁궐의 축조와 동시에 이 루어졌다고 여겨진다. 내성의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확인되는 바,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874척(尺)이라 하였다. 한편 그 위치에 대 해서는 이견(異見)이 있으나, 대체로 현재 남아있는 강화산성(江華山城) 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조정의 강화 천도는 궁궐 관아 및 성곽의 축조라는 대역사(大役事)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강화도라는 일개 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였다. 대규모 건설에 따른 역부(役夫)의 징발 이주가 있었고, 특히 왕족 문무 관리 이속(吏屬) 군졸 및 그 가족 식솔도 적지 않게 이주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갑자기 늘어난 인구의 식량 조달은 강도시대 조정의 심각한 과제 였다. 초기에는 개경이 지리적으로 근접하였기에 주로 개경으로부터 경제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이 피폐화되었을 뿐 아니라, 병란으로 인하여 지방으로부터의 조세 징수가 어렵게 됨으로써 도내(島內)에서 자체 해결하는 쪽으로 변화하여 갔다. 이는 국가에 의한 대규모 간척(干拓)사업과 이주민들의 신전(新田) 개간으로 이루어졌다.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조정은 국민적인 결집을 유도하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그 정신적인 기반으로 거국적인 사업을 추진하였으니 바로 팔만대장 경의 조성이었다.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고려대장경)의 조판은 당시 최 고 권력자인 최이(崔怡)의 주도로 강화 천도 2년 후인 고종 23년(1236)에 시작되어 그 아들인 최항(崔沆)이 집권하던 고종 38년(1251)에 이르기까 지 무려 16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제2차 여 몽전쟁 이후, 고종 46년(1259) 4월 고려가 항복하여 태자[후에 원종(元宗)]가 원나라에 입조(入朝)할 때까지 몽골군의 침략은 되풀이되 었다. 그로 인하여 고종 41년(1254) 제6차 침략 때에는 한해 동안 무려 20만명 이상의 남녀가 포로로 잡히고, 무참히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12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겪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고려는 끈질지게 대 항하면서 버티어 나갔다. 특히,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奴婢)와 천민(賤民)들까지도 싸움터에 나서기도 했다. 고려 조정의 천도와 더불어 신도(新都)로 건설된 강화도는 대몽항쟁을 고수하며 정권을 지속시켰던 최씨 일가의 몰락으로 인하여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즉, 최씨 일가의 마지막 집정자 최의가 고종 45년(1258) 문신 유경(柳璥)과 무신 김준(金俊) 등에 의하여 제거되자 몽골과의 강화 (講和)를 주장하는 문신들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화의(和議)가 성립되었 던 것이다. 화의는 개경으로의 출륙 환도(還都)를 전제로 이루어졌기에 강도의 파괴 쇠락을 수반하였다. 몽골은 화의의 조건으로 출륙 환도와 함 께 항쟁의 상징인 강화산성(내성)과 외성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고종 46년(1259) 6월 내성과 외성이 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대몽항쟁은 삼별초(三別抄)의 항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으나, 이들도 원종 14년(1273)에 제주도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됨으로써 대 몽항쟁은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의 종식은 곧 국왕권의 회복과 왕정의 복구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원의 간섭이 시작됨으로써 고려의 정치체제는 무신 정권 이전으로 의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편성되었다. 그것은 원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고려의 국왕이 측근세력을 육성 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측근정치의 형태였다. 고려와 원과의 관계는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한족들이 각지에서 봉 기하였고, 이와 때를 맞추어 고려에서는 공민왕 5년(1356)에 반원개혁이 성공함으로써 원의 간섭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측근정치의 구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반원개혁이 성공한 뒤에는 공민 왕의 측근세력이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면서 점차 와해되어 갔 고, 이후 고려의 정치는 기존의 권문세족과 이 시기에 새로이 성장한 신 진사대부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4. 고려시대 인천의 지역적 위상 : 王都, 교통의 요지, 보장처, 정신적 기반
129 남달우 ( 인하역사문화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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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체제 131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체제 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목 차 1. 조선 건국 직후 인천의 읍호 인주 2.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 개혁 이후 인천군 3. 인천도호부로의 승격 년 인천부읍지 에 보이는 인천의 행정 체제 6. 인천현으로 강등 7. 감리서와 각국 영사관의 설치 * 행정의 정의 : 입법과 사법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행위 1. 조선 건국 직후 인천의 읍호 인주 고려 숙종 때 개정된 인천의 읍호인 경원은 왕 또는 왕비와 관련되어 출현한 명칭으로 보았다. 慶源은 고려시대 인천만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 함경북도 북단에 위치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松江省에 접하고, 서쪽은 종성군, 남쪽은 경흥군, 북쪽은 온성군에 접하고 있는 지 역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후자의 경원에는 한때 이성계의 高 祖인 安社(후에 穆祖로 추존)가 慶源 龍堂 東林 古城에 머물렀고, 안사 의 아들 行里(후에 翼祖로 추존) 또한 이 곳의 千戶를 지냈다. 후에 중국 元나라가 멸망하자 고려는 이곳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지금의 경흥군 을 합쳐 孔州 로 불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목조와 익조의 활동지역이었던 이곳을 경원 이라 하고 고려말 경원부 였던 인천을 인주
13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로 복구하였다 2.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 개혁 이후 인천군 경기는 공양왕 2년(1390)에 좌 우도로 분리되는데, 경기좌도에는 양광 도의 한양(漢陽) 남양(南陽) 인주(仁州) 안산(安山) 교하(交河) 양천(陽 川) 금주(衿州) 과주(果州) 포주(抱州) 서원(瑞原) 고봉(高峯)과 교주도 의 철원(鐵原) 영평(永平) 이천(伊川) 안협(安峽) 연주(漣州) 삭령(朔寧) 등을 속하게 하였다. 경기우도에는 양광도의 부평(富平) 강화(江華) 교동 (喬桐) 김포(金浦) 통진(通津)과 서해도의 연안(延安) 평주(平州) 백주 (白州) 곡주(谷州) 수안(遂安) 재령(載寧) 서흥(瑞興) 신은(新恩) 협계 (俠溪) 등이 속하게 되었다. 태종 13년(1413)은 조선 지방제도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 때로, 군 현의 등급 및 읍호의 개정 작업이 시행되었다. 전국을 8도로 정하고 道 아래 목사, 대도호부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을 두었다. 이때의 개편으 로 지방제도에 있어 근간인 주 부 군 현의 등급이 규정되었으며 이러 한 규정은 조선 후기까지 통용되는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1413년의 지방제도 개혁은, 첫째 예전의 유수부나 대도호부가 아닌 單府官의 칭호 를 모두 도호부로 통일시키고, 둘째 감무는 현감으로 개칭하며, 셋째 知 州事는 郡으로 하되 그 중 州 자를 붙인 곳의 이름은 山 이나 川 으로 개 정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주는 인천군으로 개정되어 현재의 이름인 인천이 탄생하는 것이다. * 유수부 : 정2품 * 부윤 : 종2품 3. 인천도호부로의 승격 세조 6년(1460) 다시 인천은 도호부로 승격된다. 그런데 인천의 도호부 승격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차이가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인천부읍지 에는 세조 6년 세종의 妃인 소헌왕후의 외향이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고 하였으며, 대동지지 에는 세조 5년 소헌왕후의
133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체제 133 외향이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 에는 단 지 세조 5년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서 문제점이 두 가지 나타난다. 하나는 과연 소헌왕후의 외향이기 때문에 인천이 도호부 로 승격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년 도가 세조 5년(1459)인가, 또는 6년인가 하는 점이다. 소헌왕후의 아버지는 청송 심씨 溫이고 심온의 어머니가 인천 문씨 門必 大의 딸이다. 그리고 소헌왕후의 어머니는 순흥 안씨 天保의 딸이다. 그 러므로 소헌왕후의 내향은 청송이고 외향은 순흥이 되며, 인천은 소헌왕 후의 陳外家(아버지의 외가)가 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의 소헌왕후 와 관련된 읍호의 승격 기록은 경상도 靑松郡을 승격시켜 都護府로 삼았 으니, 소헌왕후의 內鄕인 까닭이다 라는 것만이 보일 뿐이며, 인천이 소 헌왕후의 외향이기 때문에 승격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느다. 인천의 도호부 승격은 世祖의 비인 貞熹王后 윤씨와 관련된 때문이다. 정 희왕후의 아버지는 파평(파주) 윤씨 璠이며 어머니는 인천 이씨 文和의 딸이다. 즉 정희왕후의 내향이 파평이고 외향이 인천인 것이다. 이 때문 에 파평과 인천은 읍호가 승격된다. 세조실록 권 18, 세조 5년 10월 2 일(경술)의 기록에 慈聖王妃(정희왕후)의 內鄕이라 하여 原平府를 승격 시켜 坡州牧으로 삼았다 는 기록과, 세조 5년 11월 5일(계미)에 자성왕 비의 외향인 인천군을 도호부로 삼았다 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천은 소헌왕후의 외향이기에 도호부로 승격된 것이 아니라 정희 왕후의 외향이기 때문이며, 그 승격 년도 또한 세조 5년이 된다. 한편 조선초기에 있어 지방행정구획의 명칭은 人口의 多寡로 정해졌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가 다음에 보인다. (가) 郡縣名號 本以人口多少爲定71) (나) 陞大邱縣爲郡 以居民一千三百戶也72) (다) 原平 密陽 善山 平山 春川 成川 肅川七郡 以一千戶以上 陞爲都護府 瑞興 載寧二縣 以一千戶以上 陞爲郡73) 위는 1천호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군 또는 도호부로 승격 71) 世宗實錄 권 2, 세종 즉위년 12월 甲辰. 72) 세종실록 권 4, 세종 원년 5월 庚午. 73) 태종실록 권 29, 태종 15년 4월 癸亥.
13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시켰다는 내용이다. 즉 조선 초기 군이나 도호부로의 승격 기준은 戶口 1,000이상이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호부로 승격 될 당시 인천의 호구는 1,000에 미치지 못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인 천조에 의하면 세종 때의 戶가 357, 口는 1,412이다. 그런데 이러한 戶가 도호부로 승격될 당시인 세조 때에 와서 갑자기 1,000호 이상으로 증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세조 때 인천의 도호부 승격은 왕실과 관련된 승격이라는 포상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4. 경국대전 에 규정된 외관직 규정 吏典 外官職 階及遷官加階行守 並同京官. 觀察使 都事 仕滿三百六十 守令 仕滿一千八 百 堂上及未挈家守令 訓導 仕滿九百乃遞. 移任守令 通計前任 遷官. 當農 月 則勿遞 春分前 不足五十日以下者遞 崇義殿職 授奉祀一人 畿外諸 陵殿參奉 觀察使 擇本道人 擬啓 永安道 洪原 以北 平安道 博川 以西 敎官除授時 加一階 守令 敎官 托故窺免者 准其遞期 不敍. 敍時 還除外 官 年過六十五歲者 勿外敍 堂上官及未挈家者 不在此限 親年七十歲 以上者 勿差 三百里外遠邑守令 京畿 從二品 觀察使一員 正三品 牧使四員 廣州 驪州 坡州 楊州 從三品 使 崇義殿 都護府使七員 水原 江華 富平 南陽 利川 仁川 長湍 從四品 守 崇義殿 郡守七員 楊根 豊德 安山 朔寧 安城 麻田 高陽 從五品 令 崇義殿 都事一員 判官五員 左道水運 右道水運(並無祿官 察訪 敎授 訓導 審藥 檢律 驛丞 渡丞 同) 廣州 驪州 水原 縣令五員 龍仁 振威 永平 陽川 金浦
135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체제 135 從六品 監 崇義殿 察訪三員 迎曙道屬驛 則 碧蹄 馬山 東坡 靑郊 狻猊 中連 良才道屬驛 則 樂生 駒興 金嶺 佐贊 分行 無極 康福 加川 菁好 長足 同化 海門 平丘道屬驛 則 綠楊 安奇 粱文 奉安 娛賓 雙樹 田谷 白冬 仇谷 甘泉 連洞 縣監十員 砥平 抱川 積城 果川 衿川 喬桐 通津 交河 連川 陰竹 陽城 陽智 加平 竹山 敎授十一員 卽上州府諸道同 從九品 訓導二十六員 卽上君縣諸道同 審藥一員 檢律一員 驛丞三員 重杯道屬驛 則 慶信 盤乳 石谷 金輪 終生 南山 慶安道屬驛 則 德豊 楊花 新津 安平 阿川 吾川 留春 桃源道屬驛 則 仇和 白嶺 玉溪 丹棗 湘水 渡丞七員 碧瀾(右道水運判官兼) 漢江 臨津 路梁 洛河 三田 楊花 薦擧 京外東西班 三品以上 每三年春孟月 各薦三人 三品至無職 每年春孟月 東 班三品以上 西班二品以上各薦 堪爲 守令 萬戶者 並毋過三人 若犯贓汚 敗 常之罪 則幷坐擧主. 每年春孟月 議政府 六曹 當上官及 司憲府 司諫院 官 員 各薦堪爲觀察使 節度使者, 忠勳府 薦功臣子孫才堪吏任者 凡薦擧者 曾經試才及 已行六品以上顯官外 四書中一書 五經中一經 從自願試取 凡 收告身及 罷職者 每冬夏季月 具罪名啓聞 兵曹同 褒貶 京官則其司 堂上官 提調及 屬曹堂上官 外官則觀察使 每六月十五日 十二月 十五日等第啓聞 司憲府 司諫院 世子侍講院 則無等第 守令則 觀察使 與兵馬節度使同議 濟州三邑則 牧使等第報觀察使 京官滿三十日 外官滿 五十日 方許等第 因推罪犯限內未等第者 畢推後其等觀察使雖遞 等第以 啓 十考者十上則賞加一階 階窮者陞職, 牧以上則否 二中於無祿官敍用, 三中罷職. 五考三考二考者 並一中勿授右職, 二中罷職 藝文館 成均館 承 文院 校書館 七品以下官中者, 其都目物遷轉, 有遞兒衙門前衘官中者 後等 褒貶前勿敍 一年四都目者中則 越一都目 下則越二都目取才 堂上官 守 令 一中罷職.
13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考課 諸司官員 卯仕酉罷 日短時辰仕申罷 事緊司則 仕罷後一員留待直宿員. 宗 廟署 文昭殿 活人署 官員及 社稷署有錢穀諸司一員 勿與會 凡諸司 直宿官 員 本曹直宿堂下官 初昏署名封進 又受通行標信于承政院巡檢(闕直宿者罷 黜) 翌日朝還納 每節季 刑曹 漢城府 開城府 掌隸院 堂下官 决訟道數 啓聞. 三朔內 漢城府 掌隸院 小事則三十道 大事則二十道 刑曹 小事則五十 道 大中事則三十道 不准者降一階. 開城府則不拘道數 每歲季本曹 具諸 司官員 實仕及雜故. 觀察使 具守令七事 實蹟啓聞 七事 農桑盛 戶口增 學 校興 軍政修 賦役均 詞訟簡 姦猾息 周年病滿三十日者 議親功臣十惡外 五犯罪者 並勿赦前啓聞罷職 閑散人則經一年乃敍(閑散人 謂議親功臣而置 散者) 兵曹同 宗親及大小員 凡一會稱病不進者 司憲府 宗簿寺 檢擧 啓聞論罪 褒貶居下等及犯私罪 罷職者 經二年乃敍 議親功臣居下等者經 一年 堂上官不在此限 收告身還受者 亦以罷職日始計 兵曹同 凡 犯罪者 居下等者 置簿憑考 兵曹同 錄事書吏 有故不仕滿百日 無故滿 三十日者 削事罷黜 二十九日以下者 收贖還仕. 罷黜後願還仕者聽 在喪者 喪畢還屬通計前仕 書吏名簿 本曹踏印以考 勤慢 奸僞. 戶典 外官供給 諸鎭將供給 用衙祿田 不足則用官屯田, 無衙祿田 官屯田處 鎭將 諸鎭軍官 諸邑敎官及主鎭將 虞侯 軍官 竝用軍資 府 奴三 婢五 大小馬 各二. 大 都護府以下 奴二 婢四 大小馬 各二. 郡以下 奴二 婢三 大小馬 各一. 未挈 家鎭將 堂上官 奴二, 其餘 奴一 馬則 竝大二 小一. 軍官 奴及大小馬 各 一, 敎官 奴及大馬 各一. 水軍將及軍官 無馬 兵典 外官職 節度使 虞侯 評事 仕滿七百二十, 未挈家僉節制使 萬戶 則九百乃遞 節度 使稱主鎭 節制使 僉節制使稱巨鎭 同僉節制使 萬戶 都尉 稱諸鎭 僉節制 使 萬戶 以試武藝者 差之 武科 兼司僕 內禁衛 不在此限 已行僉節制使 萬戶者 雖未經守令加階
137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체제 137 京畿 從二品 兵馬節度使 一員 觀察使 兼 正三品 折衝 水軍節度使 二員 一觀察使兼 從三品 兵馬僉節制使 四員 廣州鎭 水原鎭 楊州鎭 長湍鎭 竝守令帶 諸道同 水軍僉節制使 一員 月串鎭 從四品 兵馬同僉節制使 十四員 廣州鎭管 驪州 利川 楊根. 水原鎭管 富平 南陽 仁川 安山 安城. 楊州鎭管 坡州 高陽. 長湍鎭管 江華 豊德 朔寧 麻田. 竝守令帶. 水軍萬戶 五員 月串鎭管 永宗浦 草芝梁 濟物梁 井浦 喬桐梁. 縣監帶 從六品 兵馬節制都尉 二十二員 廣州鎭 鑛主鎭管 驪州 砥平 陰竹 陽智 竹 山果川. 楊州鎭管 永平 抱川 積城 交河 加平. 水原鎭 水原鎭管 振威 陽 川 龍仁 衿川 陽城 通津 金浦 長湍鎭管 漣川 喬桐. 竝守令帶. 監 牧 有牧場 守令兼 刑典 推斷 凡拷訊 訊杖 長三尺三寸, 上一尺三寸則 圓徑 七分, 下二尺則廣八分 厚二 分(用營造尺) 以下端, 打膝下不至膁肕(겸인-정강이), 一次無過三十度 取 旨乃行 庶人及犯盜者否 功臣 議親拷訊 啓請時 竝錄功臣議親以啓 外 則報觀察使 濟州三邑則報節制使 文武官 內侍府 士族婦女 僧人 觀察使 啓聞, 濟州三邑則節制使報觀察使 啓聞 本曹 開城府 觀察使 流以下直斷. 各衙門 笞以下 直斷 不用刑衙門 用皮鞭 節度使所管人 軍務外所犯 杖 以上 移文觀察使 推斷(이하 생략 년 인천부읍지 에 보이는 인천의 행정 체제 官員 府尹 一員 : 1895년 지방제도 개혁 이후 설치 驛院 慶信驛 在府東十里, 重林驛 在府東三十五里.
13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역원(역과 원) 경신역(慶信驛) 부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과 중림역(重林驛) 부에 서 동쪽으로 35리에 있다 이 있다. 公廨 客舍 二十間, 三門 三間, 東軒 十五間, 內東軒 三十三間, 公 須 六間, 三門 三間, 使令廳 九間, 鄕廳 十三間, 軍官廳 七 間, 訓武堂 六間, 作廳 二十七間, 獄舍 四間 공해(관아 건물) 객사(客舍) 20칸이다, 삼문(三門; 내삼문) 3칸이다, 동헌(東軒) 15칸이다, 내동헌(內東軒) 33칸이다, 공수(公須) 6칸이다, 삼 문(三門; 외삼문) 3칸이다, 사령청(使令廳) 9칸이다, 향청(鄕廳) 13칸이다, 군관청(軍官廳) 7칸이다, 훈무당(訓武堂) 6칸이다, 질청(作廳) 27칸이다, 옥사(獄舍 : 감옥) 4칸이다 등이 있다. 戶口 四千八百八戶, 二萬一百八十九口 男一萬一千一百八十一口, 女九千八口 호구(가호와 인구) 가호(家戶)는 4,808호이며, 인구는 2만 189명이다 남자가 1만 1,181명 이며, 여자가 9,008명이다 結摠 一千八百七十九結三負一束. 결총(농사를 짓고 있는 논과 밭의 총수) 1,879결(結) 3부(負) 1속(束)이다. 6. 인천현으로 강등 한편 숙종 14년(1688)년 인천도호부는 逆僧의 胎鄕 이라는 이유로 縣 으로 강등되었다. 이 반역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楊州 牧使 崔奎瑞 가, 靑松面에 妖邪한 자가 있어 스스로 神靈이라 하고, 徒黨을 모아 백성
139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체제 139 을 유혹하고 있으므로 체포해 조사하고, 그 凶謨의 실상을 캐내 政府에 급히 보고하였다. 이와 관련되어 체포된 자가 20여 인이었는데 그들의 수 괴는 呂還이라는 중이었다. 이들은 1688년 7월 15일에 여환 황회 정원태가 楊州 사람 金時同 崔永吉 李元明과, 永平 사람 鄭好明 李末立 鄭萬一 등과 더불어 각기 軍裝과 長劍 등을 준비하고, 城中에 몰래 들어가서 비오기를 기다렸다가 대궐을 침범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 날 비가 오지 않 아 계획은 실패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斬刑에 처해지고 妻子와 재산은 몰 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逆謀가 발생하면 일반적으로 주모자를 비롯한 관 련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처 자 녀는 노비에 정속하고, 당사자의 주거지 는 파가저택하며, 해당 고을 수령은 파직하고, 읍호를 강등시켜 토지와 호구를 타읍에 분속하거나 고을을 혁파하여 타읍에 소속시키며, 심할 경 우에는 교화의 책임을 물어 유향 품관과 이속들을 타읍에 강제 이주시키 는 조치를 취한다. 이러한 조치는 역모 가 발생한 지역의 읍호를 강등 조치함으로써 해당 지역민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교화시키는데 목적이 있 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인천부읍지 의 인천이 역승의 태향 이라는 이유로 강등되었다 는 기록은 의문점이 있다. 숙종실록 에는 여환이 통진사람으로 되어 있 고, 대신 여환과 관련된 황회가 인천출신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읍호가 강등된 경우에도 10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다시 예전의 읍호를 복구시켜 주었다.74) 이에 의거 인천은 다시 숙종 23년 도 호부로 복구되었다.75) 7. 감리서와 각국 영사관의 설치 (이하는 2003년 인천시에서 발간한 인천시사 권2에서 발췌) 74) 續大典 권 5, 刑典 推斷, 縣令以上降縣監 縣監勿革而序諸縣之末 限十年復舊. 그런데 이러 한 규정은 조선 전시기에 걸쳐 시행되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조 48년에 영의정 金 致仁이 瑞興은 본래 都護府였는데, 趙大立의 사건이 있은 후 특별히 1백 년 동안 縣으로 강등 했었습니다. 이제 1백 년의 한정이 이미 지났으니, 도로 도호부로 승격시킴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여 100여 년 만에 복구된 사례도 보이기 때문이다( 영조실록 권118, 영조 48년 1월 14일). 75) 인천이 도호부로 복구된 년도는 여지도서 에는 丁丑년 2월이라 하였고, 대동지지 에는 숙 종 23년이라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 에는 숙종 24년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여지도서 에 년 도의 간지와 월이 기록되어 있기에 이를 따랐다. 숙종실록 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14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인천항의개항이확정되고 1883년 4월 13일최초로상업종사목적의일본인이내항하였으나그수가아주적었고본격적인개항은같은해 6월경에야이루어졌다. 그러므로인천항에서통상사무를취급할필요성이생긴것역시 6월이후의일이었다. 고종 20년 (1883) 8월 19일에조선은통상사무를취급하기위한기구로감리서를설치하였다. 감리서는인천, 부산, 원산등 3개항장에두었으며개항장의해관 ( 통상 ) 사무를관장하였다. 인천감리서의위치는내동의구법원자리로지금은한진아파트가있는곳이다. 대개감리는지방행정장관직을겸하는경우가많았고때로는지방행정장관이감리직을겸하는경우도있었을뿐아니라개항초기에는통상사무가그다지번잡하지않았으므로부아에서그지방의행정사무와함께통상사무도처리하였던것으로보인다. 감리서는갑오개혁의지방제개편에따라고종 32년 (1895) 5월 26일에폐지되었다. 이지방제개혁의내용은 8도를폐지하고전국을 23부의행정구역으로나눈것이었다. 각부에는관찰사 1명, 참사관 1명, 주사약간인, 경무관 1인씩을두어지방행정을담당하게하였다. 개항장인제물포에는인천부가설치되었는데이때감리서를폐지하고그사무를일반지방행정관서에서관장하도록하였다. 그러나개항장과개시장의사무적인분량이증가하고타기관과의연관성이증대하였기때문에이업무를일반행정과함께처리하기란불가능하였다. 따라서감리서가폐지된지 1년 4개월만인건양원년 (1896) 8월 7일에다시감리서를복설하고대외통상사무를일원화해야만했다. 1895년지방제도개정으로새롭게설치된인천부는 12개군을관할하였는데, 인천군 김포군 부평군 양천군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 수원군 남양군 강화군 통진군 교동군 ( 뒤에교동은강화에병합 ) 으로관찰부는제물포에두었다. 1895년지방제도개정에의해이전까지지방행정기관으로유지되던부 목 군 현의명칭이군으로통일되면서, 군정 ( 軍政 ) 성격을지녔던강화유수부 ( 江華留守府 ) 도폐지되고새롭게일반행정기관인강화군이설치되었다. 1895년 5월 26( 음력 ) 일자로실시된 23부제지방행정구역은불과 1년 2개월여의짧은기간만에급격한개혁에대한반발로폐지되고, 1896년 8월
141 조선시대인천의행정체제 141 4일자로 13도제도가실시되었다. 그주요내용을살펴보면, 우선조선시대실시되었던 8도인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평안도에서,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도를남북으로나뉘어 13도체제로전환하였다. 또한수도인한성부를제외하고광주 개성 강화 인천 동래 5곳을부로지정하고, 지방장관으로부윤 ( 府尹 ) 을두었다. 경기도를구성하고있는군은모두 38개로, 종전과마찬가지로군의등급은면의수와결호수에따라 5등급으로나누어졌고, 관등 ( 官等 ) 관질 ( 官秩 ) 에적합한인물들을군수로배치하였는데, 인천과강화에는부윤이파견되었고부평과교동은 1895년과마찬가지로 4등군이되었지만, 구획상의별다른변동은없었다. 그리고 1895년지방제도개정때강화군에통합되었던교동을다시군으로독립시켰다.
14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143 연창호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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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145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 향교, 서원을 중심으로 연창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서론 1. 조선의 교육기관 - 성균관, 사학, 서원, 향교 2.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 서원, 향교 3. 조선시대의 교육과 인천지역의 관계 서론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가 유교 때문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고을의 모든 군현에는 오늘날의 초중등교육기관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고을의 가장 중심지에 향교를 두었고 경치 좋은 명당 자리에는 서원을 두었다. 지금 전국 어느 곳의 도시를 가도 교동 이란 동네이름과 교동초등학교 는 거의 다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의 대학과 같은 것이 있어왔다. 삼국 시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오늘날의 국립대학과 비슷한 국학, 국자감, 성균관 등이 시대를 달리해 면면히 계승되어왔고, 사립대학과 비슷한 서 원창설은 서양이나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시대는 앞설 수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전통교육기관은 과거의 유물로 박제되어 교육 기능은 사라져 버 렸다. 서구의 물결이 조선에 들어와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근대적인 학 교가 설립되어 서구적인 교육 내용이 소개되어 전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14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서당, 향교, 서원의 모습은 흔적과 건물은 남아 있으나 학생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시대의 유교 교육기관에서는 제향(祭享)과 교육(敎育)을 동시에 강 조하였다. 교육의 공간은 단순한 교육만이 아니라 선현에 대한 제사를 중 시해 지역공동체의 통합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유교 이데올로기를 지역 민들에게 주입시키고 확대 재생산하는 효율적인 통치 수단이었다. 조선시 대의 교육기관은 모두 유학과 관련 있고, 특히 성리학 중심의 교육기관이 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에서 제향하는 것은 유교의 제사 중시에서 기원 한다. 인천은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고난과 희망, 오욕과 영광의 모든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보기드문 장 소이다. 개항이전에도 인천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관할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서원2곳, 향교 4곳이 있다. 인천의 교육기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을 이해한 바탕위에서 가능하므로 먼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을 살펴 본 후 인천의 교육기관을 다루고자 한다. 1. 조선의 교육기관 - 성균관, 사학, 서원, 향교 1) 성균관 성균관은 조선의 고등교육을 맡았던 최고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있었다. 소과 합격자로 1년에 200명씩 선발해 3년간 교육을 하였고 대과를 준비하 고자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 성균관은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을 봉사하 는 문묘(文廟)와 유생들에게 강학하는 명륜당(明倫堂)과 유생을 기숙시키 는 재(齋) 등의 건물이 있다. 문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 서 양무(兩 廡)로 이루어져 있어 대성전에는 공자(孔子), 사성(四聖), 십철(十哲)의 위패를 봉사하고, 동 서 양무(兩廡)에는 공문(孔門)의 72제자를 비롯해 우리나라와 중국명현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제사는 봄, 가을 2회 실시 하였는데 이를 석전제(釋奠祭)라고 한다. 그리고 명륜당은 강학을 하는 곳으로 그 앞마당의 양편에 유생을 기숙시
147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147 키는 동서 양재(兩齋)가 자리잡고 있었다.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 를 수용했다. 교과목은 사서와 오경중심이었다. 2) 사학(四學) 사학은 중등교육기관으로 중앙에 둔 것이다. 사학은 고려 때 개성에 두 었던 동부 서부 중부 남부 북부의 5부학당에서 유래한 것인데 문종때 북학 학당을 폐지해 4부학당으로 하여 각각 정원을 100명으로 하였다. 지금도 종로구에 중학동이 있는데 이 때의 학당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학당 건물은 향교나 성균관과 비슷하게 지어 기숙사인 동재, 서재를 두 었으나 대성전 등 향사를 지내는 공간은 없었다. 교육을 맡은 관원은 성 균관 관원이 겸직하는 교수와 훈도가 있었다.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성격을 띠면서 모든 제도를 성균관의 예에 따랐다. 작은 성균관이라 생각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입학 자격은 일차적으로 관리의 자제에게 주어 졌으며 때로 선비의 자제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8세부터 입학이 허용되고 15세가 되어 시험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주었는데 합격하지 못한 생도는 더 머물러 공부했다. 교과목은 향교와 다를 바 없으나 사서 를 위주로 하고 오경 가운데 하나를 골라 시험을 보았다. 3) 서원 서원은 일종의 사립학교로 조선이야 말로 서원의 천국이었던 나라였다. 서원은 강학(講學)과 더불어 선현을 제향(祭享)하기 위해 16세기 이후 사 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제향하는 명현은 우리나라의 명현인 것이 특징이다.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성균관과 함께 서울에 사부학당을 세우고 지방마다 향교(지방 소재 국립 고등학교 에 해당)를 세워 관학(官學)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관학인 향교는 관 료주의적인 운영으로 인하여 15세기 말 이후 교육기능은 쇠퇴하였다. 향 교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 균관으로 가게 되며, 다시 대과에 응시하여 고급관직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16세기 이후 향교는 과거 준비장으로 변
14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질되었다. 그러자 양식 있는 선비들이 관학을 기피하였으므로 생도가 미 달되기에 이르렀고, 우수한 교관들은 모두 떠나버려 향교에 남은 자들은 군역을 회피할 목적으로 학문에는 뜻이 없고 벼슬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 었다. 이와 같이 관학이 부진을 면치 못하자 사림이라는 재야 지식인들에 의 해 설립된 것이 서원이다. 사림은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어 받은 야 은(冶隱) 길재(吉再)가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다시 김 숙자는 아들 金宗直에게 그의 학통을 잇게 하였는데, 김종직이 金 宏 弼 鄭 汝 昌 金馹孫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커졌다. 서원의 시작은 중국의 당, 송 시기로 송나라의 수양서원, 석고서원, 악 록서원, 백록동 서원이 4대 서원으로 유명하고 그 중에서도 주자(朱子) 가 강론한 백록동 서원이 특히 유명하였다. 이후 서원은 선현 제향과 학 생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함께 하였으므로 사(祠)와 재(齋)를 갖춘 곳 을 서원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1543년(중종38)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때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安珦)의 옛 집터에 세운 백운동 (白雲洞) 서원이다. 주세붕은 안향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사와 재를 아울러 갖춘 최초의 서원이다. 이 후 퇴계 이황이 서원설립을 적극 주도해 명종, 선조, 숙종 시기를 거치 면서 남설(濫設)되어 사액(賜額)서원만도 130여개에 이르렀다. 초기에 서원은 선비들이 사당에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 그 학덕을 본받 고자 공부하던 곳으로서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였으며, 향촌 사회의 도서관 역할도 담당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확산된 서원은 정치 세력의 후원과 경제적 기반을 발판으로 지방 관료들도 간섭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고을 수령을 좌지우지하는 작폐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서원은 특권이 있어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군역이 면제 되었으므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하여 국고 수입의 감소를 초래하였 고, 양민이 서원의 노비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유생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학문 대신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 몰하고, 때로는 양민을 토색하는 불량 유생의 협장 소굴이 되기도 하였 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71)으로 사액서원 가운데 一人一
149 조선시대인천의교육기관 149 院원칙에따라사표가될만한 47개서원만을남겨두었다. 서원은유생들이책을읽고학문에힘쓰는곳이지만선현에대한제향을하는곳이었으므로서원이설립되는장소는배향하고자하는선현의연고지여야만했다. 그래서배향하고자하는선현의출생지이거나고향, 또는성장한곳이거나유배지, 관리로근무하였던곳이거나후학을가르쳤던곳, 묘가있거나충절과연관된곳을서원의입지로정하였다. 서원의공간구성은강학 ( 講學 ) 공간을앞쪽에두고제향공간을뒤쪽에두는전학후묘 ( 前學後廟 ) 의형식을기본으로한다. 서원의강학공간, 제향공간, 부속공간은각각담장을둘러쌓아각공간마다고유한영역을형성한다. 이들건물은기본적으로정문과사당을잇는중심축에정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을배치하고강당옆좌우에는동재와서재를대칭으로배치하였으며, 장서각, 장판각, 제기고, 전사청, 고직사등은적절히배치하였다. 서원들머리에는홍살문이세워져있고, 그주변에하마비나하마석이있다. 홍살문은궁궐이나능묘, 관아입구에신성한곳임을알리기위해새우는것으로서두개의둥근기둥을세우고, 지붕없이붉은살을세워박고서가운데에태극문양을새긴문이다. 홍살문에붉은칠을한것은잡귀를쫓기위한것이고, 서원입구에세운것은이문안에선현의신위가봉안되어있으므로이곳에들어오는사람들은반드시경건한마음으로참배하라는주술적인의미가담겨져있다. 홍살문을지나면서원의정문인외삼문이나온다. 외삼문은솟을대문으로이루어진솟을삼문과평삼문으로나무어지는데누문으로된곳도있다. 외삼문을들어서면외삼문과강학공간사이에누각을세운서원도있다. 누문이나누각의 2 층누마루는원생들이공부하는도중휴식을취하거나시회 ( 詩會 ) 를열며풍류를즐기던공간이다. 누각을지나면원생들의교육을위한공간이있다. 강학공간은일당양재 ( 一堂兩齋 ) 의원칙에따라동재와서재를강당전면이나후면의좌우양쪽에배치하였다. 동재와서재는원생들이기거하면서공부하던기숙사와같은곳으로서강당을향하여섰을때오른쪽의건물을동재, 왼쪽의건물을서재라부른다. 동재에는서재보다선배가되는원생들이기거하였다.
15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4) 향교 향교의기원은고려仁宗代이다. 유학을중시한조선은고려의향교제도를더욱체계적으로발전시켜지방에서의지역민을교화시키는데향교를적절히사용하고자하였다. 향교의구조는성균관구조의축소판이다. 선성 ( 先聖 ) 의위패를모신대성전이있고그아래좌우에선현의위패를모신동서양무가있다. 이대성전과동서양무를문묘라하는데문묘가없으면향교라할수없다. 문묘의앞뜰에강학을하는명륜당이있고그좌우에유생을기숙시키는동서양재가있는데동재에는양반, 서재에는양반이하의교생을수용하였다. 향교의구조는문묘와명륜당이중심으로성현에대한제향 ( 祭享 ) 과교육을위한공간건축을하였다. 향교의교수관은교수 ( 敎授 ) 와훈도 ( 訓導 ) 이다. 경국대전에는교수는종 6품, 훈도는종9품으로한다고했으나전국 330개고을에설립된향교에모두파견할수는없었다. 그래서생원, 진사로서보충하는경우도있었다. 향교는수령의지휘감독을받았고교도직임명권이수령에게있어자연히수령의입김이크게작용했다. 향교의학생을교생 ( 校生 ) 이라하는데서원보다는신분적인면에서융통성이있어양반이외의평민도입학할수있었다. 향교의생도는나이가 16~40세까지로일단교생이되면군역을면제받으므로입학하기위해열심히공부하였다. 향교의재정은학전 ( 學田 ) 에서충당했고이에는지역양반의기부, 국가의지원이있었다. 경국대전에의하면향교의입학정원은부, 대도호부, 목은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15명이었다. 향교의교과내용은시문을짓는사장학 ( 詞章學 ) 과경서를공부하는경학 ( 經學 ) 으로구분되며역사도공부했다. 생도들의성적은출석부에따라매기는원점법 ( 圓點法 ) 을적용하였다. 해마다 6월에전체생도가시험을치루고시험에서우수한성적을낸생도에게는진사시와생원시에응시할수있는자격을주었으며때로는알성시에응시할특전도주었다. 조선중기이후서원이향교를압도하자향교는교육기능보다제향의례에더초점을두었으며, 향약보급에도힘을기울여교화기능쪽으로기울어졌다.
151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 서원, 향교 1)학산서원 학산서원은 문학산 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었으며, 인천부사로 재임했던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34년 (1708)에 창건한 서원이다. 서원의 완공과 함께 국왕이 학산(鶴山)이란 액호를 내렸고 같은 해 사액제를 시행해 인천 지역의 인재 양성과 풍속 교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정조10년(1798)에는 이단상의 아들 이 희조(李喜朝)가 역시 인천 현감을 지낸 공덕을 추모해 인천유림의 건의에 따라 학산서원에 함께 배향되었다. 학산서원은 조선 후기 서원 건립의 일반적 목적인 선현배향과 더불어 지 방교육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천의 학문적 기반을 넓혀 나간 중요한 문화기관이었다. 인천의 학문적 경향은 근기학파로 노론계열 의 인물인 이단상, 이희조 부자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인천 지역의 학문 과 교육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학산서원은 흥선대원기 때의 서원철 폐정책으로 훼철된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과 일제강점으로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문학산 터널 입구 근처에서 학산서원이라 새긴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 재실과 강당 그리고 사당의 건물초석이 확인되었 다. 그러나 도시의 확장과 함께 다시 유실되고 최근 문학산 터널 공사로 인해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2002년 인천시 남구청의 문학산 일대 역사유적에 대한 용역이 시행되고 이에 대한 인하대박물관의 학술조사보고를 통해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 학산서원터에는 표지석 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어 이곳이 서원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15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학산서원 제향 인물> 1. 이단상 ( 李端相 1628 ~ 1669) 자는 유능이고 호는 정관재 서호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이정구의 송자이며 이명한의 아들이다. 송시열, 송준길 등과 교유하였다. 1649년 (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설서, 봉교, 부수찬, 교 리, 대간, 청풍부사 응교 등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인천부사가 되었다 그 후 사퇴한 후 양주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64년 (현종 5) 집의가 되고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을 겸하였다. 그 의 문하에서는 아들인 이희조와 김창협, 김창흡, 임영, 윤지선 등의 학자 가 배출되었다. 그는 응교로 있으면서 언론의 개방을 주장하고 정개청의 서원향사에 반대하였다. 또 송시열, 송준길 등의 인재 등용을 건의하고 호남 지방의 대동법 시행 문제에 대해서도 거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양주의 석실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는 대 학집람, 사례비요, 정관재집, 성현통기 등이 있다. 2. 이희조(李喜朝 1655~1724) 자는 동보이고 호는 지촌 간암이며 시호는 문간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이정구의 증손이며 이명한의 손자이다. 이단상의 아들이며, 송시열의 문 인이다. 이이, 김장생, 김집, 송시열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김 창협, 김창흡, 임영 등과 교유하였다. 1680년(숙종 6) 유일(遺逸)로 천거 되어 의금부도사, 공조좌랑, 진천현감, 인천현감, 서연관, 지평, 천안군 수, 장악원장을 역임하였고, 1707년 장령을 거쳐 해주목사로 있을 때 석 담에 있는 이이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을 세웠다. 대사헌, 이조참판, 찬 선, 좨주를 지내고 1721년(경종1) 신임사화로 영암에 유배되고, 다시 철 산에 이배되던 중 정주에서 죽었다. 영조 즉위 후 유생들의 상소로 신원 되었다. 그는 인심도심설에 관하여 이이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기발(氣發)에서 는 성명과 형기의 어떤 면에서 원인하는가에 따라서 도심과 인심으로 나 뉘지만, 마음 가운데에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면에서 서로 작 용하여 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중용의 중이라는 의미는 정이가 불 편불의라 하고 주희가 무과불급이라 하여 미발과 기발을 달리 해석한 것
153 조선시대인천의교육기관 153 같지만, 정이는미발, 기발을함께말하여미발의측면에서말하고, 주희는정자의말을보충하여기발지중의입장에서해석하였다고하였다. 中이란둘을겸한것이라하여理로표현하였다. 또한비은 ( 費隱 ) 을소당연과소이연으로분리시키는것에반대하여비 ( 費 ) 로표현하였다. 그는순자의성악설을이단으로배척하는등이단에대해극력배척하였다. 또한그는노론과소론으로분파되기이전에는박세채를따랐으나, 윤휴를이단으로배척하고윤증에대하여배사론 ( 背師論 ) 으로일관하면서송시열의노론을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지촌집 이있고사후좌찬성에추증되었으며평강의산앙재영당에도제향되었다. 2) 인천향교 < 인천시남구문학동 시도유형문화재제11호 > 인천향교의기원은고려인종 10년설과조선태조7년설이있으나모두확인불가능하다. 최항의중수기로보아고려인종시기의향교건설을전혀배제할수는없으나조선태조7년의창건설이신빙성이있는것으로추정된다. 조선태종6년, 세조12년, 숙종27년에중수된증거가 1980년중수공사시에명륜당천정에서나온오천 ( 烏川 ) 정종빈 ( 鄭宗賓 ) 의上樑重修文에나온다. 조선초기유학을지방민들에게보급할목적으로건립된향교는지역인재육성의산실이었다. 그러나병자호란시기에재난을당해위패만근근히봉행해오다숙종시기에크게중수하였다인천향교는조선중기이후서원세력에밀려문묘제향의기능만을유지하다가국권피탈이후 1914년에는부천군에속하게되고이름도부천향교로바뀌고 1941년에는부평향교에合龕되었다. 광복이후부평향교로부터분리되어이름도인천향교로복원되었다. 오늘날인천향교의시설은문묘로서대성전과동서양무의강학을위한명륜당, 동서양재등이갖추어져있고校直廳, 守僕舍, 三門紅箭門등이있다. 대성전은맞배지붕에정면3칸, 측면3칸이며명륜당은팔작지붕에정면5칸, 측면2칸이다. 인천향교는기능면에서제향과교육의기능을모두수행하였고석전제는五聖뿐만아니라우리나라의儒賢 18위까지제사지내며二월上丁日에 1
15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회만 봉행한다. 이울러 교육 기능면에서 명륜학당을 운영하고 향교회관을 교육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인천향교를 카메라들고 답사하는 날은 겨울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 이 없어 한적했다. 정말 향교는 이제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관리인 아저씨만 홀로 지키고 있었다. 매월 두번 제향하는데 10여명 정도 참석하 고 석전제는 1년에 한번 인천유지들 200여명 정도가 참석해 성대히 치른 다고 한다. 3)부평향교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 아쉽게도 부평향교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 헌이 없다. 고려 인종2년 설(부평향교안), 인종5년 설(부평향교지), 인종 6,7년 설이 있으나 모두 추정일 뿐이다. 조선이 개국되면서 부평향교는 매우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천의 북부지역인 부평지역뿐만 아니 라 인근의 부천시 지역, 서울 구로구 일대의 고척, 개봉, 오류, 온수, 천 왕, 항동 일대가 모두 부평향교의 관할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 왜란 시기에 위패만 겨우 건지고 향교에 보관중인 문헌이 소실되었으며 병자호란시기에도 대성전이 불타고 문헌도 불타 列聖位版만 겨우 구출하 였다 한다. 이후 52년이 지나서 숙종14년에 문묘를 재건하고 열성위판을 공촌동에서 가져와 현재 위치인 계산동에 향교를 재건축하게 되었다. 조 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지역의 인재들이 서원을 주로 활용하고 향교를 홀대하였지만 인천지역의 경우는 서원이 그리 많지 않아 향교에서 일정정 도 유생들의 교육을 전담하였다고 생각된다.
155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155 부평향교의 대성전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3칸이며 명륜당은 정면5 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형태이다. 부평향교에 봉안된 列聖位牌는 五聖位 (孔子, 顔子, 曾子, 子思, 孟子)를 위시해 程 朱 兩公과 우리나라 儒賢18 현이다. 인천향교와 같이 2월 上丁日에 釋奠祭를 지낸다. 4)강화향교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소재 시도유형문화재 제34호(강화군)> 강화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 내가면 고천리에 창건되었다. 고종 19 년(1232) 강화읍 갑곶리로 옮겼다가 고종 46년 서도면 불음도로 옮겼고 조선 인조 2년(1642)에는 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겼으며, 인조 7 년(1629)에 유수 이안눌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우는 등 비로소 완 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현종 14년(1673) 유수 민시중이 남 산골로 옮겼으나 영조 7년(1731)유수 유척기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경내에는 중국 5聖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하던 명륜당 및 내 외삼문 등이 있고, 동 서무는 터만 남았는데 현재의 건물들 은 근래에 중수 또는 신축된 것이다. 강화향교를 답사하며 살펴보니 특이한 것이 첫째 향교의 명륜당 자리가 여고 운동장의 교단으로 바꾸어진 것이고 그 옛날 남자들이 공부했던 곳 이 이제는 강화여고가 자리잡아 여학생들의 배움의 전당이 된 것이다. 둘 째는 향교의 배치가 대개 전학후묘의 건물배치인데 이곳은 드물게도 명륜 당이 동쪽 바깥쪽으로 빠져나가 있다. 향교의 규모가 컸기에 이런 배치를 했으리라 짐작된다. 셋째는 강화에는 서원이 드물어 대부분의 유생들이 이곳 강화 향교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립인 서원보다도 관학인 향교의 교육이 강했던 곳이 강화가 아닌가 한다.
15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5)교동향교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148 소재 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강화군)> 교동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 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 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도읍과 읍에 조상이나 성현의 위패를 모신 문 묘를 설치했다고 한다. 안향은 이곳 교동도에서 2개월정도 체류했던 것으 로 보이며 이때 공자상을 놓고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있고, 제사공 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 외삼문, 제 기고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聖과 우리나라의 18유현을 배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 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 능만 남아있다.
157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157 6)충렬사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소재 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강화군)> 충렬사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 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사당이지만 교육공간을 갖추고 있는 서 원으로서 흥선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유서 깊은 서원이다. 김상용 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게 성이 함락되자 순 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을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 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 서재는 없어졌다고 하나 답사해 보니 명륜당 대 신 성취당이 서재 겸 강학 공간이고 동재는 편액 없이 있었다. 사당과 책 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 있다. 충렬사는 풍수상 명당자리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 보면 종가 댁 같은 고풍이 풍 기는데 입구에 표지판이 없어 일반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을 것으로 보 였다. 명륜당 대신에 성취당이란 강학공간을 두었고 사당 주위에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충렬사 사당 양쪽으로 심어 놓아 운취를 더해 주고 있었다. 이곳은 중국의 성인이 아닌 우리나라 강화에서 순국한 분 들의 위패를 모신 것이 특징하다. 그러면서도 서원기능을 해 서원처럼 제 향과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다.
15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충렬사 제향인물> 김상용(金尙容 1561~ 1637)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 호는 선원 풍계 계옹이다. 김상헌의 형이며, 돈녕부 도정을 역임한 김극효의 아들이자 좌의정 정유길의 외손자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90년(선조 23)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 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으로 피난했다가 정철의 종사관으로서 왜군 토벌과 명 군사 접대에 공을 세워 1598년 (선조 31) 승지로 발탁되었다. 그 뒤 왕의 측근 으로서 전란 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고, 성절사로서 명에 다녀왔다. 1601년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곧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 목사로 밀려나 고,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잠시 한성우윤 과 도승지를 지냈다. 1617년(광해군 9)에 인목대비를 쫓아내야 한다는 이른바 폐모론이 일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에는 판돈녕부사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때에는 유도대장으로서 한성을 지켰다. 1630년(인 조 8)에 기로소에 들어갔고, 2년 뒤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곧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주를 받들고 빈 궁,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 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하였다. 한때 그의 죽음에 대해 자기가 불 을 지른 것이 아니라 실수로 불을 낸 것이라는 이설도 있었다. 그러나 박 동선, 강석기, 신익성 등의 변호로 정려문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에 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실록 의 졸기 에 의하면 김상용은 강
159 조선시대인천의교육기관 159 화의남문루에올라가화약을장치한뒤좌우를물러가게하고불속에뛰어들어타죽었는데, 그의손자한명과노복한명이따라죽었다고한다. 그는어려서외할아버지인정유길에게서고문과시를배웠고, 성혼과이이의문인으로서황신, 이춘영, 이정구, 신흠등과친했으며당색이다른정경세와는도학으로서사귀었다. 정치적으로는서인에속하였는데, 인조초에서인이인물공천때문에노서와소서로갈리자노서의영수가되었다. 김상용은시와글씨에뛰어났다. 특히서체는이왕 ( 二王 : 왕희지와왕헌지 ) 의필법을본뜨고, 전 ( 篆 ) 은중체를겸했다는평가를받았다. 평양의 숭인전비 와풍덕군수장인정의비에전액을남겼다. 시조는유고에오륜가 5편, 훈계자손가 9편등이전하고이밖에도 가곡원류 등에여러편이실려있다. 문집으로는 1640년에아들형제가목판본으로편집, 간행한 선원유고 가있는데여기에시639수, 차자7편, 소2편, 잡저13편등이수록되었다. 잡저가운데 기몽설 은대학과중용을토론한내용으로서경학을연구하는데중요한자료이다. 현재국립중앙도서관에소장되어있다. 강화충렬사외에양주석실서원, 정주봉명서원, 안변옥동서원, 상주서산서원, 정평모현사등에제향되었고시호는문충이다. 남양주시와부읍석실에묘와신도비가있다. 3. 조선시대의교육과인천지역의관계 인천은근대개항이후한국사에서매우중요한역할을수행해왔다. 서양문물과과학기술이조선말기와대한제국시기에선박을타고서울의관문인인천에첫발을내딛었던것이다. 근대개항기에있어인천이매우중요한지역임은주지의사실이지만그이전의인천지역의교육기관도매우중요한의미를지니고있다. 첫째우리나라에서최초로문묘에공자상을배향한향교는강화군의교동향교이다. 고려말기성리학을소개한안향이최초로배를타고중국에서강화교동도로들어왔는데원나라에서유교관련물품을다수들여왔
16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다. 그중공자상을비롯한희귀한것들을강화도로들여왔던것이다. 이를기념해향교에서문묘에공자상를처음으로설치한곳이교동향교이다. 성리학을가장중시한조선의지식인사대부는안향을우리나라성리학의소개자로추대해그후많은서원에서배향하고있다. 현재교동향교의석전제는전국의유림들이모이는유서깊은제전이다. 둘째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령에도불구하고훼철되지않고강화의충렬사는사 ( 祠 ) 로서드물게도 47개의사액서원에들어있는우리나라의대표서원중의하나이다. 서원은서원이란명칭을쓰는것이대부분이지만일부서원은祠라는명칭을쓰기도하였다. 祠는효제충신을강조하는유학에서일반서원보다도한층더품격이있었던것이다. 우리나라를대표하는중요한명현이나충신을배향하고교육하는곳이서원이지만흥선대원군시기 900개이상이철폐되었고, 살아남은 47개의서원은一祠一人配享의원칙을지키도록하였다. 충렬사에배향한김상용은충군애국을몸소실천한조선의충신을대표하는인물로서평가받았던것이다. 인천인근에는김포의우저서원 ( 중봉조헌선생배향 ) 과강화의충렬사가훼철되지않은 47개의서원에들어있는데이를통해서인천인근지역민들의서원운영의투명성과지명도를확인할수있다. 셋째인천지역은인천향교, 부평향교, 강화향교, 교동향교등의관학위주의교육이발달하였지만이외에도실학과관련된소남윤동규의실학정신이있는곳이도림동일대이고, 정통성리학이라고자부했던서인계열의기호학파가있던곳이문학서원이다. 인구비례로보면강화의과거합격자가다른지역에비해상대적으로많고양명학의본거지인강화학파가자리한곳으로볼때새로운학문의경향에개방적인태도로수용했던것을알수있다. 이렇게다양한학문이발달했던곳이인천지역으로서이것은개항이후서양문물과사상을받아들이는데개방적, 적극적으로나아갈수있는바탕이되었던것이다. 인천이다문화시대의국제적인도시로발달하는데이런전통성을잘간직하고계승한다면지리적인이점을극대화할수있을것이다.
161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161 과거 소과 지역별 안배 생원과 진사과(소과) 합격정원- 특징: 지역별 안배 지역 한성부 경기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함길도 합계 생원과 진사과 식년시 초시(대과 1차)의 합격자 정원- 지역별 안배/ 2차 회시는 성적순으로 33명 지역 관시 한성시 경기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함길도 합계 정원 조선 시대 인천지역 과거급제자(인천학연구 5호 참조)- 생원, 진사 총 288명중 인천 87명, 부평 68명, 강화130명, 교동2명, 영종1명 성별- 전주이씨 38명, 파평윤씨 17명, 청주한씨 14명, 진주유씨 13명, 여흥민씨 10명 향교에 봉안된 인물 4성-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10철-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아, 자공, 염유, 자로, 자유, 자하의 10명으로 孔門10哲이라고 함. 6현-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장재, 소응으로 송나라 유학자들임 18현-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 적,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로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 18명이다 향교 교관의 지위 및 교생 교노비의 규모 邑格 敎官 부 교수(종6품) 대도후부, 목 교수 도호부 교수 군 훈도(종9품) 현 훈도 校生數 90명 각 60명 70명 50명 30명 校奴婢數 30구 각25구 20구 10구 10구 學田 10結 10結 10結 7결 5결
16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163 임학성 ( 인하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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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인천의 연구 165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인천의 인구 임 학 성(인하대학교) 목 차 1. 고문서(古文書)란? 2. 호적문서(戶籍文書)의 명칭 및 종류 3. 생활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자료. 호적(戶籍) 4. 주민은 거의 상업에 종사 5. 평균 4.5칸짜리 초가집에서 거주 6. 인천 주민의 약 ⅓은 타처에서 이주해 온 사람 1. 고문서(古文書)란? 자의(字意) : 옛 文書. * 文書 書類 뿐 아니라 書籍 記錄 謄錄 帳簿類 등을 모두 포함. But, 학계에서 정의하는 文書 는 書籍 記錄 謄錄 帳簿類 등과는 구별 되는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작성된 文獻(글)을 말함. 文書 는 ① 반드시 특정의 대상(發給者 vs 受取者)이 있어야 하며, ② 兩者 사이에 文書를 授受(發 受)하는 목적이 있어야 함. 즉, 甲 과 乙 사이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授受되는 글을 文書라 할 수 있다. 古 의 시기 설정 :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양하나, 대체로 1910년까지 의 문서를 옛 문서 로 취급함. 고문서의 분류 : 발급자 또는 발급기관을 기준으로 ① 國王文書, ②
16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王室文書(王室 또는 宮房에서 발급한 문서), ③ 官府(官吏)文書(官府 또는 官 吏가 公的인 입장에서 발급한 문서), ④ 私人文書(公的인 입 장이 아니라 私的인 입장에서 私人으로서 발급하는 문서), ⑤ 寺社文 書(佛寺에서 발급한 문서), ⑥ 書院文書, ⑦ 結社文書(褓負商 社會團 體 會社 組合 등 모든 結社에서 발급한 문서) 등의 國內文書(한국인 사이 에 이루어 진 경우)와, 外交文書(한국과 외국[주로 중국 일본] 사이 의 외교문서)로 구분할 수 있다. 2. 호적문서(戶籍文書)의 명칭 및 종류 1) 준호구(準戶口 准戶口): 오늘날의 호적등본 (戶籍騰本)과 유사한 문서로, 私人의 신청에 의하여 관부(漢城府 및지방 관아)에서 호적대장(戶籍 大帳 ; 3년 간격으로 작성 * 子 卯 午 酉의 式年 )에 기록된내용(人的 사항)을 그대로 옮겨 적은 후<호적대장 작성 후 변한 내용이 있으 면 수정하여 * 準 > 신청자인 私人에게 발급한 문서.* 문서 양식상의 특징 連書 2) 호구단자(戶口單子 *戶籍單子): 호구신고서 (戶口申告書)의 성격을 지닌 문서로, 호적대장을 改修하기 위하여 私人(戶主)이 家內의 인적 사항을 조목조목(* 單子 ) 적어 관부에 제출한 문서. 2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관부에서는 이전 호적대장 등을 대조하여 착오여부를 확인 한 후 1부는 호주에게 돌려 보냄. * 문서 양식상의 특징 列書 人的사항 : ① 호주를 비롯하여 家內 거주자의 職役 이름 年齡 本 貫 및 가족관계, ② 호주와 妻의 四祖(父 祖父 曾祖父 外祖父)의 직역 및 이름, ③ 소유하고 있는 奴婢(대체로 率居 뿐 아니라, 外居 逃亡奴婢 까지도 포함) 및 奴妻 婢夫 雇工 등의 이름과 연령 등. 3. 생활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자료. 호적(戶籍) 조선왕조의 호적제도는 1896년 9월 1일에 반포된 戶口調査規則 (칙령
167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인천의 연구 167 제61호)과 이틀 후인 9월 3일에 반포된 戶口調査細則 (내부령 제8호)으 로 그 이전과 형식 내용 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공란의 戶籍表 (戶籍樣式)를 官에서 인쇄하여 傳給한 점과, 가옥에 대한 항목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新式戶籍 ( 光武戶籍 )을 통하여, 인구에 관한 것으로는 戶主의 년령 성관 직업 四祖, 처 자녀 등의 동거친속, 동거하는 寄口 및 雇傭人, 가족원의 거주이동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가옥에 관한 것으로는 가옥의 소유상태(己有냐, 借有냐?), 가옥의 구조(瓦家냐, 草家냐?), 가옥의 규모 (間數)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96년 이후 전국적으로 매년 수많은 호적이 작성되었는데, 인천의 것은 1898년(광무 2년)에 작성된 畓洞戶籍 과 杻峴外洞 (현재의 경동 일대) 2책 만이 남아있다(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 소장). 답동호적에는 총 184戶, 축현외동호적에는 총 224戶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등재되어 있다. 4. 주민은 거의 상업에 종사 답동호적 184호(家)에 거주한 주민수는 총 597명으로 1호당 인구수는 3.2명이었다. 嬰 幼兒를 기재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1호당 인구수는 대 략 5명은 넘었다고 판단된다. 한편 남자가 334명, 여자가 263명으로 남자가 71명이 더 많아 성비(여자 100%대 남자수)는 127%로 나타났다. 답동에 거주한 184명의 호주(戶主) 직업을 살펴봤더니 商業이 163명으로 압도적이었다(이 가운데 米商 4명, 木商 2명, 酒商 1명 有 *酒商은 38세 의 과부). 기타 직업으로는 객주(客主: 개항장에서 외국상인과 한국인 객 상 간의 거래중개자. 민족상인)와 부군(負君: 짐꾼), 순검(巡檢: 오늘날 의 순경)이 각 2명씩, 십장(什長: 일꾼들을 감독 지시하는 우두머리)과 전신부(電信夫) 등이 각 1명씩이었다. 답동이 개항장 인근에 위치하였기 에 역시 대부분의 주민이 상업에 종사하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16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5. 평균 4.5칸짜리 초가집에서 거주 답동에 있었던 184채의 집은 모두 초가집으로 나타났다. 호주 본인이 소 유[기유(己有)]하고 있는 집이 175채(95%), 타인 소유의 집을 빌린[차유 (借有)] 것이 9채(5%)였다. 가옥의 크기는 1.5칸(한 칸 반)부터 무려 22칸짜리까지 분포했으나, 4칸 짜리가 58채(32%)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3칸짜리가 42채(23%), 5칸 짜리가 31채(17%) 등이었다. 결국 답동 주민들은 한 집당 평균 4.5칸짜리 초가집에서 거주한 셈이 된다. [참고] 비슷한 시기 경상남도 11개 군을 조사한 결과, 45,000여 호 중 3 칸 가옥이 53%, 3칸 이하 가옥이 90%를 차지함(1904년). 충청도 지역의 평균 칸수는 공주와 진천이 3.5칸, 청주가 3.3칸, 보은이 4.0칸 등으로 나타났다(1906년). 개항장 인천의 가옥은 전통 향촌지역과 비교하여 다소 규모가 컸음을 알려 준다. 6. 인천 주민의 약 ⅓은 타처에서 이주해 온 사람 답동호적의 전체 주민 184호 가운데 36.4%인 67호가 전입(轉入)해 온 것 으로 나타났다. 인천 관내에서의 전입 가호 9호를 제외하면 전체 주민의 31.5%(58호)가 타처에서 전입한 셈이 된다. 타처에서 이주해 온 58호의 前거주지는 평안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25개 지역으로 나타났는데, 이 가 운데 서울이 23호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도가 18호, 충청 황해도가 각 4 호, 전라 경상도가 각 3호, 제주도가 2호, 강원도가 1호 등이었다. 한편 축현외동호적의 경우, 전체 주민 224호 가운데 27.2%인 61호가 전 입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 관내에서의 전입 가호 2호를 제외하면 전 체 주민의 26.3%(59호)가 타처에서 전입한 셈이 된다. 타처에서 이주해 온 59호의 前거주지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19개 지역으로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 서울이 22호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도가 15호, 경상도가 8호,
169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인천의 연구 169 평안도가 7호, 강원도가 3호, 황해도가 2호, 충청 전라도가 각 1호 등이 었다. 결국,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항장 인천으로 몰려들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주된 이유는 商業에 종사하기 위해서였다.
17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171 송미경 ( 서울여자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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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173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송미경 (서울여자대학교) 목 차 Ⅰ. 머리말 Ⅱ.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고찰 Ⅲ. 맺음말 Ⅰ. 머리말 2004년 12월 22일 인천광역시 서구 석남동 도로공사 현장에서 회곽묘가 발견되어,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팀이 유물을 수습하였다. 현장에 나간 박물관 학예연구팀은 유물을 수습하여 박물관으로 옮겼고, 유물을 정리한 결과 총 50여점으로 분류되었다. 복식류 16건 33점과 치관제구 13건 16점 이다. 복식류는 여성용 단령 1점, 대금형 상의 3점, 저고리 5점, 적삼 1점, 장 옷 2점, 장유(長襦) 1점, 전단후장형 상의 1점, 철릭 1점, 답호 1점, 치 마 6점, 말군 1점, 바지 5점, 소모자 2점, 너울 1점, 주머니 1점, 버선 3 점이다. 치관제구(治棺諸具)는 구의(柩衣) 1점, 옷감 1점, 자리 1점, 자리밑천 1 점, 편의 3점, 홑이불 1점, 소렴금 1점, 소렴종교 1점, 대렴금 1점, 멱목 1점, 악수 1점, 표주박 1점, 구슬 1점, 삽 2점이다.
17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Ⅱ.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고찰 1. 여자 단령(團領) 보공(보공)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수습 당시 직사각형으로 접혀있었 다. 조선왕조실록 에 원삼(圓衫)이나 단삼(團衫)으로 기록되어 있는 옷으로 추정된다. 여자단령은 크기가 매우 커서 학자들 사이에 단령의 용 도에 이견이 있을 정도이다. 즉 현실적으로 입기에는 거대하기 때문에 수 의용(壽衣用)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석남동 출토 여자단령은 앞 길이 133cm, 뒷 길이 131cm, 화장 66cm, 품 81cm이다. 군청색 무문단 홑옷으로 가슴과 등에 금사로 공작 1쌍과 파도, 괴석, 모란과 구름송이가 직성되어 있다. 깃 모양은 남자의 단령(團領)과 같으나, 소매와 무 그리고 옷고름의 형태가 남자 단령과는 구별된다. 여 자의 단령의 가장 큰 특징은 옷의 크기가 크며 소매를 수구에서 1/2로 접 어 반소매처럼 만든 것이다. 석남동 단령도 이와 유사한 형태이다. 무의 형태도 동시대 남성 단령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형태로 앞 뒤에서 맞주름 을 잡아 무 상단의 겉에서 상침으로 고정하였다. 옷고름도 남성용 단령과 구별되는 자색 주(紬)로 만든 나비 4.5cm, 길이 56cm의 제비부리 댕기가 달려 있다. 석남동 여자단령의 가치는 무문단 바탕 옷감에 금사흉배가 직성된 유물 이 수습된 것이다. 이는 원말 명초 유물에서는 종종 볼 수 있지만, 현재 까지 우리나라에서 보고된 바는 없었던 최초의 유물이다. 2. 장옷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에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 겨 남자와 같이 하니 장의(長衣)를 의(衣)상(裳) 사이에 이루게하고... 라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에는 남자의 옷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장옷은 목판깃에 좌우대칭형에 겨드랑이에 삼각형 무가 달린 겉옷이다. 인천 석남동 출토 장옷은 솜장옷 2점이 수습되었다. 1점은 주(紬), 1점은 소화문릉(小花紋綾)이 겉감에 사용되었다. 주(紬)로 만든 장옷은 습용(襲 用)으로 사용되었다.
175 인천석남동출토복식 철릭 철릭은고려시대후기원나라에서도입된옷으로고려와조선시대초중기까지남자들의평상복으로입었던옷이다. 상의 ( 저고리 ) 와하상 ( 치마 ) 이연결된원피스형태의옷이다. 1점이수습되었으나, 훼손이매우심하여상의와하상의일부분만남아있는상태이다. 매우고운모시로만든홑철릭으로깃은이중깃이며깃머리가훼손되어깃의형태도정확히는알수없다. 주름은 0.15cm의고운주름이잡혀있다. 4. 답호 답호는철릭과함께고려시대후기원나라에서도입된옷으로, 곧은깃형태의남자포의일종이나, 소매가짧은옷으로포류위에덧입는옷이다. 인천석남동출토복식에서 1점이수습되었다. 겉안감모두주 ( 주 ) 로만든겹답호이다. 답호는깃모양과무모양, 겨드랑이아래옆선의길이와소매의형태등으로구분을할수있다. 석남동출토답호는이중깃이며, 옆선의길이가길어조선시대초기답호의특징을지니고있다. 5. 대금형 ( 對襟形 ) 상의 ( 上衣 ) 인천석남동에서수습된대금형상의는 3점이다. 깃이서로마주보고있는형태의상의류로서명칭이붙여진것이다. 3점모두좌우대칭형이며, 섶에주름이있다. 이같은형태의복식은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의강릉김씨묘에서수습된조선시대초기 (1530년대추정 ) 복식이있다. 인천석남동대금형복식 2점은겉감은단 ( 段 ), 안감은주 ( 紬 ) 로만든만든저고리의일종으로, 깃은목판깃이며옆이트여있다. 이중한점은가슴과등에금선공작흉배 ( 金線孔雀胸背 ) 가직금 ( 織金 ) 되어있다. 위에서설명한대금형 2점과형태와옷감이완전히구별되는대금형상의 1점이있다. 2점의대금형상의가저고리의일종이라고하면, 1점의대금형상의는적삼류이다. 옷감은고운숙초 ( 熟綃 ) 로만들어가볍고얇다.
17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깃 나비는 3.8cm로 가늘고 고대가 9cm로 일반적인 고대 나비의 1/2 정도 로 좁은 것이 특징이다. 6. 전장후단형(前長後短形) 상의(上衣)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가운데 전장후단형 상의가 1점 수습되었다. 면포 (棉布)로 만든 겹 상의로 앞이 뒤보다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훼손이 심 한 상태로 수습되었다. 앞길이는 85cm, 뒷길이는 68cm이다. 뒤가 짧은 이 러한 형태의 옷은 조선시대 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깃의 형태는 방령형 (方領形)이나, 석남동 출토 전장후단형 상의는 목판깃에 대금형으로 다른 무덤에서 수습된 것과는 구분된다. 7. 저고리 인천 석남동 출토 복식의 저고리는 5점이 수습되었으며 겹 2점과 솜저고 리 3점이다. 깃의 형태는 모두 목판깃이며, 저고리 길이는 75~77cm 내외 의 긴 저고리로 양옆에 트임이 있다. 8. 적삼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중 적삼 1점이 수습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금형 상의 적삼과는 깃모양과 섶모양이 다른 형태이다. 면포(棉布)로 만든 것 으로 사각으로 접어 시신의 머리를 괴는 용도로 사용되어 접힌 흔적대로 훼손이 심하다. 대금형 상의 적삼과 가장 큰 차이는 깃이 교임형(交衽形) 이고, 겨드랑이에 큰 삼각형 무가 달려 있는 것이다. 9. 장유(長襦)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 중 장유 1점이 수습되었다. 장유(長襦)는 포(袍) 보다 짧고, 저고리보다 긴 저고리의 일종이다. 또 다른 명칭으로 조선시 대 초기 문헌에 등장하는 과두(裹肚) 라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77 인천석남동출토복식 177 이장유는마포 ( 麻布 ) 로겉안감을만든겹옷으로, 위에서언급한적삼과 함께시신의머리를괴는데사용되었으며, 훼손이매우심하다. 10. 치마 인천석남동에서는 6점의치마가수습되었다. 홑치마 2점, 겹치마 2점, 솜치마 2점이다. 이가운데 3점은치마허리와주름이완전하며, 1점은치마주름이완전히풀린상태이다. 인천석남동출토치마중 4점은조선시대초기치마의특징을잘보여주는 다아트형 치마이다. 이타아트형치마는홑치마, 겹치마, 솜치마에모두타아트를잡아치마앞중심을살짝들어올린것같은효과가있다. 이러한치마는 16세기중기의출토복식에서들어올린깊이가 15cm 정도되는예복용으로추정되는홑치마에서종종볼수있었으나, 석남동출토복식의치마는홑, 겹, 솜치마에서모두해당되어흥미롭다. 11. 바지 5 점이수습되었지만, 습에사용되어일부편 ( 片 ) 으로만남아형태를알 수없다. 12. 말군 ( 襪裙 ) 말군은남녀구분없이말을탈때겉옷위에입는뒤가트인바지의일종이다. 많은인천석남동출토복식중특별한유물가운데 1점이다. 말군은현재까지문헌과회화에서만볼수있었으나유물에서수습된것은처음이다. 수습당시에말군은사각형으로접혀있어보공용으로사용되었던것으로보인다. 숙초 ( 熟綃 ) 로만들었으며홑옷이다.
17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13. 소모자 ( 小帽子 ) 소모자는형태에따라육합일통모 ( 六合一統帽 ) 라고불리기도한다. 조선시대초중기출토복식에서다수수습되는유물이다. 석남동유물에서는 2 점이수습되었다. 1점은 4쪽을이어붙인형이고, 1점은 6쪽을이어붙인형태이다. 4쪽을이어붙인소모자는현재까지유일한것이다. 겉감은면마교직 ( 交織 ) 이고, 안쪽에는목화솜위에검정펠트가놓여있다. 6쪽을이어붙인소모자는겉감은면주 ( 綿紬 ), 속에는목화솜과갈색모직펠트가덮어져있다. 14. 너울 조선시대여자들의외출용쓰개류의한가지이다. 조선시대초기에는궁중과양반계급의여인들이사용하다가, 조선시대말기에는궁중가례와능행및궁궐에서착용하였다. 형태는너울립 ( 笠 ) 과그립자 ( 笠子 ) 위에드리우는천으로이루어져있다. 석남동출토복식가운데수습된너울은완벽한형태를유지하고있다. 15. 주머니 석남동출토복식가운데매화꽃이수놓여진두루주머니 1 점이수습되었 다. 정교하게수놓여져있으며, 매듭장식도완전하게남아있다. 16. 버선 습용 ( 襲用 ) 으로신겨진버선으로홑으로만든 3 벌을겹쳐신겨져있었 다. 거친마포 ( 麻布 ) 로만든버선 2 켤레와면포 ( 棉布 ) 로만든버선 1 켤레 를겹쳐있었다.
179 인천석남동출토복식 기타치관제구 치관제구 ( 治棺諸具 ) 란, 염습 ( 殮襲 ) 을할때사용되는것으로, 인천석남 동에서는구의, 명정, 돗자리, 자리밑천, 멱목, 면포, 소렴금, 소렴종교, 대렴금, 악수, 표주박, 구슬, 삽이수습되었다. (1) 구의 ( 柩衣 ) 와명정하관 ( 하관 ) 할때관을덮는것으로, 연화만초문사 ( 蓮花蔓草紋紗 ) 와주 ( 紬 ) 를사용하여겹으로만들어져있었으나, 훼손이매우심하여일부만남아있다. 명정은피장자의신분과성씨를알수있으나, 석남동출토명정에서는아쉽게도지구 ( 之柩 ) 라는글씨만남아있다. (2) 돗자리칠성판위에깔았던돗자리로경사는삼실 [ 麻絲 ], 위사는왕골을사용하여엮고가장자리는주 ( 紬 ) 를이용하여테두리장식을둘렀다. (3) 자리밑천돗자리밑에깔았던면포로만들었으며, 겹이다. (4) 멱목 ( 幎目 ) 시신의얼굴을덮는것으로면포로만들었으며, 홑이다. (5) 소렴금 ( 小殮衾 ), 대렴금 ( 大斂衾 ) 소렴과대렴에사용된이불이다. 소렴금은굵은면포를사용하여홑으로만들었다. 대렴금은겉감과안감모두주 ( 紬 ) 로만들었다. (6) 소렴종교 ( 小殮縱絞 ) 소렴을할때묶는옷감으로일부가남아있으며, 거친마포로만들었다. (7) 악수 ( 幄手 ) 시신의손을싸는것으로, 겉안감모두주 ( 紬 ) 로만들었으며속에는솜을두었다. 사각형의형태에끈이 2개달려있다.
18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8) 표주박 작은박을반으로나눈뒤끈으로연결하였다. (9) 구슬 구슬 3 개가끈으로연결되어있다. (10) 삽 ( 翣 ) 삽이란발인을할때상여앞과뒤에서들고가는것으로 2 쌍이수습되 었다. 나무와대나무로만들었다. Ⅲ. 맺음말 인천석남동출토복식은수습당시까지보고된복식과는다른형태의것이다수발견되어시대추정에곤란함이있었다. 이는곧석남동출토복식의연대가조선시대여자복식가운데가장올라가는것이라할수있다. 이후에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수습한강릉김씨복식이인천석남동복식과유사한점이있었다. 참고로단국대소장강릉김씨복식은 1530년대전후로추정한다고한다. 인천석남동출토복식가운데대금형상의, 말군, 자수주머니등이독특하다. 특히말군은유일한유물이다. 그외도여자단령과대금형상의에사용된금선단흉배의경우에는직성 ( 織成 ) 이되어있는것도현재까지가장연대가이른것으로밝혀졌다. 다아트치마또한석남동회곽묘주인공이살았던당시에는평상복에서주름을잡아치마자락을걷어올려사용했던사실을알수있었다. 석남동출토복식의시대추정은현재까지비교할수있는절대연대의복식이수습되지않아확실하지는않지만, 대금형상의와치마의형태, 남자답호와철릭, 사용된직물등을참고하여시기를추정하면단국대소장강릉김씨복식과동일하든지조금더앞선시기가아닐까생각한다. 더불어사용된직물을보면인천석남동회곽묘의주인공은최상위계층이아니었을까추정된다. 물론시기와신분의추정은이후더많은자료가보고되면수정되어야할것이라생각한다.
181 배성수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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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국가의 보장지 강화 183 국가의 보장지 강화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목 차 1. 강화도의 지리적 환경 2. 保障地란? 3. 임진 병자란과 강화도 4. 보장지 경영 1. 강화도의 지리적 환경 수많은 간척지로 형성된 국내에서 5번째로 큰 섬 - 3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간척으로 하나의 큰 섬이 됨. -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 진도에 이은 국내에서 5번째로 큰 섬 선박의 정박처가 많지 않은 천혜의 요새 - 동쪽과 북쪽은 물살이 매우 거센 염하와 조강이 흐르고 있 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서해바다에 면해 있으면서 넓은 갯벌이 형성 - 특히 동, 북의 염하와 조강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만조 시에 만 정박이 가능 도성에서 매우 가까운 수도방어의 요충지 - 한강 하구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던 지역 - 고려시대 이후로 조운수로가 거치는 길목에 해당하여 많은 선박들 이 통행했던 지역 - 개성과 한성에서 뱃길로 반나절 거리에 위치하여 도성을 향하는 해로의 관문에 해당
18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 保障地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왕조는 이 곳을 거점으로 약 38년동안 외침에 대항할 수 있었다. 이 후 강화도는 도성에서 멀지 않은 데다, 험한 물살과 넓은 갯벌로 접 근하기가 쉽지 않은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국가의 보장지 또는 인후 지지라 불리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보장지(保障地) - 국가와 왕실이 외침의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피난하여 그 지역을 의지해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거점. - 보장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대비가 필요한데 평소 일반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살 수 있도록 세금을 감면하고 경작지를 확보하는 등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가의 보장지로 인식되 었던 곳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강화도는 水戰에 약한 중국을 대 비하기 위함이었고, 남한산성은 일본의 침입을 대비키 위함이었다. 인후지지(咽喉之地) - 사람 몸의 목 또는 기관지에 해당하는 지역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 로 특정지역의 방어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할 입출구에 해당하는 곳. - 조선시대 강화도에 대한 인후지지 라는 표현은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14년(1581)부터 시작되며, 이후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강 화도가 바다에서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으 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임진 병자란과 강화도 임진왜란기 : 보장지로서의 부각 -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로 강화도가 거론(지 세가 험하고 下三道와의 교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부각) - 같은 해 영의정 유성룡이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강화로 옮길 것 을 건의(도성의 최종방어선 구축) 정묘호란기 : 인조의 피난 - 인조 5년(1627) 1월 27일부터 4월 10일까지 70여 일 동안 국왕
185 국가의보장지강화 185 과조정이강화에피난하였고, 이곳을거점으로후금에저항하면서화친조약을체결. - 후금과의화친조약체결일은 3월 3일이었지만, 전주에서분조를이끌었던소현세자가강화로합류하고, 각도에서차출된근왕병을돌려보낸후인 4월 10일이되어서야조정과왕실이환궁하였다. 병자호란기 : 강화의함락 - 인조 14년 (1636) 12월병자호란발발 - 12월 14일개성이함락되자종묘사직의신주와세자빈, 세자원손, 봉림대군등왕실가족과이를호위하는조정대신들은강화로피난하였고, 이튿날인조와소현세자는남한산성으로피난 - 강화유수장신에게舟師大將을겸임케하여수군을정비시키고, 강화일대의해로를봉쇄토록함. - 12월 30일청의군사가통진에집결하여 20여일동안선박을수집하고, 주변의민가를헐어뗏목을건조. - 강화검찰사김경징과유수장신은청군이수전에약하다하여별다른방어대책을세우지않았고, 이에비해청의장수도르곤은문수산성에올라강화부를정찰 - 1월 21일통진의청군은홍이포로강화부를공략한뒤, 상륙작전을감행하여 1월 22일강화부를함락시켰다. 4. 보장지경영 1) 행정제도의정비강화유수부의설치 - 留守府 : 중국의행정제도로구왕실의왕족, 귀족에대한통치를목적으로전왕조의도읍에설치한행정기구 - 조선건국이후개성유수부를설치하여고려의귀족세력을통치하고자하였는데, 여기에군사적목적이더하여져유사시왕도를호위하는배도 ( 陪都 ) 로서의기능도수행 - 정묘호란당시강화에서외침을피할수있었던인조는 1627년환궁후에강화부를강화유수부로승격
18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교동설치 -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강화도로 이전 - 인조 7년(1629) 경기수영을 삼도수군통어영(경기, 황해, 충청)으로 승격시킨 후 교동으로 이전 설치 진무영의 설치 - 숙종 4년(1678) 10월 독자적인 발병(發兵)의 권한이 없던 강화유 수에게 밀부(密符)를 주고 진무사(鎭撫使)를 겸임케 하여 강화유수 의 군사적 권한을 강화시켜 주었다. - 진무사가 관할하는 진무영(鎭撫營)을 중영(中營)으로, 주변에 4개의 외영(外營)을 배치하여 유사시 외영의 병력을 강화에 투입. 전영(前營) : 부평부 (속읍 인천부) 좌영(左營) : 통진부 (속읍 김포군) 우영(右營) : 풍덕부 후영(後營) : 연안부 (속읍 백천군) 2) 진보(鎭堡)의 이전과 설치 진보의 개념 - 진 :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했던 지방행정구역. 통일신라시대 변경 지역의 방어를 위해 청해진(淸海鎭), 혈구진(穴口鎭) 등이 처음 설치 되었다. 조선시대의 진에는 절도사(節度使)가 관할하는 주진(主鎭), 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이 관할하는 거진(巨鎭), 만호(萬戶) 등이 관할하는 제진(諸鎭) 등 3등급의 진이 있었다. - 보 : 변경지역에서 외적의 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군사시설로 보루 (堡壘)라고도 한다. 고려 정종때의 무신 최충이 서북로병마사 등 의 지역에 14개의 보를 처음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제진과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주로 종 9품의 별장이 관할하였다. 진과 보는 설치목적과 형태에 차이가 있어 조선초기까지만 하여도 구분되어 설치되었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그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강화도 12진보의 이전과 설치 (<표 1> 참조) - 조선전기 이미 강화에 설치되어 있었던 진보는 월곶진, 용진진, 정 포보, 철곶보, 덕포진(덕진진) 등 5개였다. - 효종 7년 외부에서 이전해온 진보 : 제물진(인천), 초지진(남양)
187 국가의 보장지 강화 세기에 새로이 신설된 진보는 화도보(숙종 때 선두보로 이전), 광성보, 장곶보, 인화진, 승천보 등 5개였다. - 이외에 숙종 20년 축조된 문수산성 내에 문수산성진을 두고 별장 을 배치하여 진무사의 관할하에 두었는데 이를 강화의 진보에 포함 시킨다면 진무영 관할의 진보는 모두 13진보가 된다. 3) 방어시설의 축조 돈대 (<표 2> 참조) - 돈대는 중국 요동지방의 성제인 봉후(烽堠), 연돈(煙墩), 적대(敵臺) 등에서 파생된 것으로 경계, 경보와 방어기능이 조화되어 있는 성 곽시설이다. 숙종 5년(1679) 강화도의 해안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정조대 축조된 화성의 공심돈 등에 응용되었다. - 강화도 돈대의 축조과정 숙종 5년(1679)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아래 어영군과 승군 등 15,000명의 인력이 투입되어 80일 동안 48개의 돈대를 축조 1690~1696년 : 검암돈대(선수돈대) 축조 1718년 : 선두포 제방 축조에 따라 양암, 갈곶돈대 혁파 1718~1726 : 북쪽 해안의 빙현, 철북, 초루, 작성돈대 축조 조선후기 강화도에는 모두 53개의 돈대가 설치되었고, 병인양요 이후에 축조된 용두돈대까지 포함한다면 54개의 돈대가 강화도 해안에 설치되었다. - 강화도 돈대의 특징 보장지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성곽시설. 돈대마다 3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15일씩 돌아가며 근무했다. 강화도 돈대는 진무영-진보-돈대의 지휘체계를 갖는다. 돈대는 경계를 위한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릉지나 절벽 위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 - 돈대의 구조 2층 구조를 하고 있는데 하층의 석벽에는 포혈을 내고 화포사격 이 가능하게 하였고, 상층에는 성첩을 둘러 조총 등의 개인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부에 5칸의 돈사(墩舍)를 두어 3칸은 창고, 2칸은 숙소로 사용.
18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외성 - 48개의 돈대를 축조하고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였던 염하 연안에 외 성을 축조 - 숙종 17년(1691) 옥포에서 초지까지 43리의 외성을 토축으로 축조 - 숙종 44년(1718) 옥포에서 휴암돈대까지 연장 축조 - 영조 18년(1742) 조수로 무너진 토축구간을 전성으로 개축 - 영조 29년(1753) 무너진 전성을 다시 석축으로 개축 - 외성구간에 6개의 문루를 설치 : 조해루(朝海樓;월곶진 문루),복파 루(伏波樓), 진해루(鎭海樓;강화도의 관문), 참경루(斬鯨樓;용진진 문루), 안해루(按海樓;광성보 문루), 공조루(控潮樓, 덕진진 문루) 문수산성 - 병자호란 때의 경험으로 문수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숙종 20년 (1694) 통진부의 문수산 정상과 염하 해안을 연결하는 성곽을 축조 - 석축으로 축조하였으며, 3개의 성문(북문, 서문, 남문)과 3개의 암 문을 두었다. - 산성내에는 문수산성진을 설치하고 별장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강화산성 - 숙종 36년(1710) 병자호란 당시 거의 파괴되었던 강화 내성을 남 산까지 확장 개축 - 강화유수부와 행궁 등의 국가시설의 최종방어선 - 둘레 7.1km의 석축성으로 성내시설로는 성문 4개, 암문 4개, 수문 2개가 있었으며, 현재는 성문 4개와 암문 1개, 수문 1개만이 남아있다. 4) 국가시설의 이전과 설치 정족산 사고(史庫) - 사고(史庫)는 조선시대 역대 왕실의 기록인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 - 조선 초 한성의 내사고와 충주, 성주, 전주에 외사고 등 4사고가 설치 -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소실되었고, 보존된 전주사고본 실록은 선조 36년(1603) 등서(謄書)를 위해 강화도로 옮겼다 년 5벌로 다시 간행된 실록은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189 국가의 보장지 강화 189 강화 마니산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의 5사고에 보관되었다. - 마니산사고는 효종 4년(1653) 실화로 인하여 많은 서적들이 소실되자 숙종 4년(1678) 정족산성 내에 새로운 사고로 이전하게 되었다. 외규장각(外奎章閣) - 규장각은 정조 원년(1776)에 세워진 왕실도서관으로 역대 임금의 친필 서화 등을 비롯하여 각종 도서를 보관하던 곳 - 정조 5년(1781) 비상시를 대비하여 강화에 외규장각을 세우고 왕 실의 족보 인장 서화 등을 보관케 하였다 년 병인양요 때 강화를 점령한 프랑스 군에 의해 건물은 불에 타 폐허가 되었으며 이 곳에 보관 중이던 왕실의 귀중한 서책들은 약탈되었다. - 외규장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 1 칸을 더두어 채광을 조절하였다. 외규장각 둘레로 벽이 둘러져 있 으며 서쪽벽은 행궁의 동행각을 이용하고 있다. - 밖으로 통하는 문은 북쪽담장 가운데에 일관문(昵觀門), 동쪽으로 정문과 협문이 있으며, 서쪽벽으로 건물을 지키는 병사들의 숙소인 위장직소(衛將直所)가 있다. - 특이한 것으로 건물 마당에 전돌이 깔려있는데 이는 도서들의 포 쇄(曝曬;보관중인 도서들의 먼지를 털고 햇빛과 바람을 쏘여 습기 를 제거하는 작업) 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행궁(行宮) - 행궁은 유사시 또는 국왕의 행차 시 임금이 유숙하던 장소. - 정묘호란이 끝나고 강화도에서 난을 피했던 인조가 환궁하자, 인조 9년(1631) 강화유수 이시백(李時白)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축조 - 유수부 관아의 뒤편에 정면5칸 측면 5칸의 규모로 축조하였으며, 후원에 척천정(尺天亭)이라는 정자와 연못까지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외규장각의 동측으로 숙종의 어진(御眞)을 모신 장령전 (長寧殿)과 영조의 어진을 모신 만령전(萬寧殿), 태조의 어진을 모신 봉선전(奉先殿) 등의 국가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5) 간척사업 - 간척 : 간석지(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로 전환시키는 것
19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 강화도에서의 간척은 강도시기이던 고려 고종 43년(1256) 조강 연 안의 제포와 와포에 제방을 쌓아 좌둔전을, 염하 연안의 이포와 초 포(옥포)를 막아 우둔전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서쪽의 창 후리에서 황청리를 잇는 외성을 쌓고, 그 안쪽의 간석지를 개간한 것이 지금의 망월평이다. - 조선후기 강화도가 보장지로 경영되면서 유사시 강화도로 유입되는 피난민과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간척사업이 실시되었다. -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인 1636년 강화유수 장신이 송해면 당산리에 삼간포언(三間浦堰)을 축조한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특히 현종 5년(1664)에 가릉포 제방이, 숙종 33년(1707)에는 선두포 제방이 축조되면서 이전까지 하나의 섬과 마찬가지였던 마니산 일대가 강화도 본도에 포함되었다. <표 1> 숙종 5년(1679) 당시 강화도 12진보 현황 鎭堡 說鎭관계 * 設鎭년도 월곶진 1629년 移設 (교동 ) 효종 7년 (1656) 제물진 1656년 移設 (인천 ) 용진진 存置 화도보 新設 광성보 新設 효종 7년 (1656) 효종 7년 (1656) 효종 7년 (1656) 효종 9년 (1658) 숙종 3년 (1677) 효종 7년 (1656) * 숙종 2년 (1676) 효종 8년 (1657) 효종 8년 (1657) 현종 10년 (1669) 1666년 移設 ( 덕포진) 1656년 移設 초지진 (안산 ) 덕진진 장곶보 新設 인화진 新設 승천보 新設 철곶 (강화 풍덕 ) 정포 移設강등 ( 장봉) 숙종 4년 (1678) 위치 鎭將 강화읍 월곶리 병마첨사 강화읍 갑곶리 병마만호 선원면 연리 선원면 연리 불은면 덕성리 병마만호 별장 별장 불은면 덕성리 병마만호 길상면 초지리 병마만호 화도면 장화리 별장 하점면 인화리 병마만호 송해면 당산리 별장 양사면 철곶리 수군첨사 내가면 외포리 별장 병력 비 고 군관 16명 1665년 수군첨사 토졸 66명 병마첨사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군관 토졸 16명 66명 18명 37명 16명 35명 15명 45명 24명 63명 23명 68명 15명 86명 16명 36명 25명 16명 1665년 수군만호 병마만호 1665년 수군만호 병마만호 1665년 수군만호 병마만호 1678년 별장 만호 * 1627년 신설
191 국가의 보장지 강화 191 <표 2> 관할 鎭 堡의 변화 및 53돈대의 현황 번호 소속 鎭堡 1679년 년 1759년 월곶진 월곶진 돈대명 둘레 첩수 거리 월곶돈 124보 보 옥창돈 104보 41 1,120보 망해돈 90보 보 제승돈 106보 보 염주돈 84보 보 갑곶돈 113보 40 1,400보 가리산돈 94보 34 1,300보 좌강돈 96보 37 1,200보 용당돈 94보 36 1,390보 화도돈 92보 보 오두돈 80보 33 2,154보 광성돈 88보 보 손석항돈 66보 31 2,010보 덕진돈 90보 40 1,650보 초지돈 83보 보 장자평돈 94보 39 2,300보 17 섬암돈 93보 40 2,100보 18 택지돈 84보 37 1,250보 동검북돈 205보 85 1,750보 2 3 월곶진 4 제물진 5 6 제물진 제물진 용진진 용진진 화도진 화도진 광성보 광성보 營門관할 덕진진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초지진 19 택지돈대 20 별장 선두보 후애돈 - 營門관할 23 갈곶돈대 24 별장 초지진 營門 장곶보 장곶보 장곶보 91보 40 비고 1,450보 양암돈 - - 1,645보 갈곶돈 - - 1,645보 분오리돈 84보 보 송곶돈 94보 보 미곶돈 92보 38 1,440보 북일곶돈 93보 40 1,260보 숙종 44년 (1718) 혁파
19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번호 소속鎭堡 1679년 1696년 1759년 돈대명 둘레 첩수 거리 비고 27 장곶보장곶돈 96보 40 1,260보장곶보장곶보 28 - 검암돈 73보 보 1690년~1696 년축조 29 송강돈 93보 40 3 里 18보 1,098 보營門관할송강돈대營門 30 굴암돈 88보 36 4 里 1,440 보별장 31 건평돈 88보 38 9 里 3,240 보 32 정포보정포보망양돈대망양돈 98보 40 4 里 1,440 보 33 삼암돈 91보 55 3 里 1,080 보별장 34 석각돈 58보 27 1,916보 35 계룡돈 79보 33 1,525보營門관할계룡돈대營門 36 망월돈 100보 42 3,100보별장 37 무태돈 109보 47 1,470보 38 인화돈 98보 44 1,350보인화보 39 인화보인화보광암돈 42보 38 2,724보 40 귀등곶돈 90보 보 작성돈 86보 38 1,500보 1726년축조 초루돈 85보 보 1720년축조 43 철곶보불장돈대불장돈 81보 보 44 별장철곶보의두돈 76보 보 철북돈 82보 보 1719년축조 46 철곶보 불장별장 천진돈 94보 보 47 승천보 승천보 석우돈 73보 보 빙현돈 67보 보 1718년축조 49 승천보소우돈 71보 25 1,096보승천보 50 승천보숙룡돈 82보 보 51 營門관할 낙성돈 96보 보 52 적북돈 96보 보월곶진월곶진월곶진 53 휴암돈 83보 30 1,110보
193 배성수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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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근대 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개항 195 근대 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개항 배성수(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Ⅰ. 근대 열강의 참략 1. 서세동점과 중국 일본의 개항 2. 조선의 개항 Ⅱ. 인천의 개항 1. 제물포 개항 2. 인천지역의 방위 시설 강화 3. 감리서 및 각국 영사관의 설치 Ⅰ. 근대 열강의 침략 1. 서세동점과 중국 일본의 개항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한 서구 유럽열강은 중 공업 위주의 독점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서 제국주의화하였다. 이들은 계 속적인 원료 공급과 상품시장으로서의 식민지를 필요로 하면서 세계를 분 할해 나갔다. 이러한 여파는 동아시아에도 밀어닥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인 왕조들은 서구 열강세력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열강의 상품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청나라 남부의 항구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 란드 국적의 선박들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청에서는 해금령을 해제하여
19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광동을비롯한 5개항구를개방하였다. 그러나무역선들이점증하게되자, 1757년에무역제한령을내리게되었다. 그리하여개항장은광동하나로제한되고, 무역의방법도관허무역 ( 공행 ) 을하도록하였다. 그러나아편전쟁 (1840~42) 과애로우호전쟁 (1856~60) 의패전과그처리결과로맺은조약에따라양자강유역및북부지역에도추가로항구를개항하고공행을폐지하며, 열강에대해치외법권및최혜국대우, 토지임차등을인정하고관세도마음대로매길수없게되었다. 일본역시 1853년미국의페리제독에의해강제개항하여시모다, 하코다테의두항구를개항하고이후 1858년요코하마등 5개항의통상을허용하고치외법권및관세자주권을잃게되는미 일수호통상조약을맺었다. 이러한서구열강에대한굴욕적인조약체결은당시막부반대운동과함께천왕중심의정치체제로의복귀및근대화를골자로하는메이지유신으로귀결되었다. 2. 조선의개항 19세기들어서양배들이한반도연안에자주나타났다. 당시사람들은배모양이이상하다하여 이양선 ( 異樣船 ) 이라고불렀다. 물론이러한이양선의출몰은이미인조때시작되었는데네덜란드의상인하멜일행이표류하다가제주에도착한일이있었지만당시의사건은풍랑에휘말려표류한사건에지나지않았다. 이에반해 19세기한반도연근해에출몰한이양선들은제주도, 울릉도등의여러섬을측량하거나우리근해에접근하여정탐하고해도 ( 海圖 ) 를작성하기도하는등조선과의통상및침략을위한물밑작업이목적이었다. 이양선의출몰이빈번해지면서조선과서구열강과의충돌은불가피할수밖에없었다. 1) 병인양요 1866년 1월일어난병인사옥에서프랑스선교사 9명과조선인신도 8,000여명이학살당하자프랑스는이를구실로같은해 9월 18일, 극동함대사령관로즈제독이이끄는 3척의군함을조선에파견하였다. 로즈제독이이끄는프랑스함대는 1866년 10월 13일인천앞바다의작약도에
197 근대열강의침략과인천의개항 197 정박한뒤, 다음날인 10월 14일강화도갑곶진을통해강화도에상륙하였다. 강화도는삼남지방과양서지방의조운선이서울로향하는조운수로의길목에위치하는매우중요한지역이었고, 프랑스군은강화도를근거로하여조선정부에압박을가함으로써병인박해에대한보복과보상을관철시키고나아가양국간에조약을체결하고자하였던것이다. 별다른저항없이강화도갑곶나루에상륙한프랑스군은 10월 16일강화부를함락시켰다. 강화부관아와외규장각등국가시설을장악한프랑스군은강화부외규장각에소장되어있던각종의궤등왕실도서 340권과은괴 19상자를전리품으로약탈하였다. 프랑스군이강화도를점령했다는소식을접한조선정부는순무영을설치하고순무사에이경하, 순무중군에이용희등을임명하여전투지휘부를구성한뒤통진의문수산성에군사를주둔시키면서전투를대비하였다. 프랑스군은조선군의움직임이심상치않다는것을알고 10월 24일새벽정찰대 70여명을문수산성으로파견하여조선군과치열한전투가벌였다. 그러나프랑스군의화력에밀린조선군이퇴각하면서문수산성마저프랑스군에의해점령되었다. 한편통진의덕포나루에주둔하고있던순무천총양헌수는 11월 8일약 500여명의군사를거느리고프랑스군몰래강을건너강화도에잠입하여정족산성에주둔하였다. 조선군이정족산성에잠입했다는정보를입수한프랑스군은대령올리비에에게병사 150명을주어조선군을섬멸하도록지시하였고, 11월 9일오전정족산성인근에도착하여조선군의동태를살피고있었습니다. 양헌수가이끄는조선군은주력부대를동문과남문에배치한뒤에프랑스군이가까이근접하기를기다리다프랑스군이산성밖 100여m 지점에이르렀을때공격을개시하였다. 비록재래식무기의성능이떨어지긴했지만, 조선군의화력이집중되자노출된지역에위치하였던프랑스군의피해는커질수밖에없었다. 전투가시작된지 30여분만에 150여명의병사중 30여명의사상자가발생하게되었고, 결국프랑스군은퇴각할수밖에없었다. 정족산성전투는병인양요당시조선군이거두었던유일한승리였으며, 이전투의승리로당시전황은역전되어결국프랑스군의철병을가져오게되었다.
19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 신미양요 미국도 오래 전부터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자 그동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어먼 호의 격침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은 이 사건이 조선을 새로 운 교역상대국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강경한 대 응 조치를 취하게 된다.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군 1,200여 명이 군함 5척에 나누어 타고 조선 원정에 나섰다. 5월 30일 인천 앞바다 작약도 북쪽에 정박한 미 해군은 한강 수로의 탐사를 이유로 정찰대를 실 은 소형선박을 손돌목 쪽으로 출발시켰고, 광성보를 수비하고 있던 조선 과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도 막대하였지만 미국 의 포함 모노카시호가 크게 파손되었고, 미국측은 이에 대한 보상과 사과 를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가 터무니 없다고 판단하 여 대응하지 않는 한편, 하루 빨리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6월 10일 미국함대는 조선 정부의 적절한 사과가 없었다는 것을 구실로 강화도에 대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같은 날 초지진을 함락 시킨 미군은 6월 11일 새벽 덕진진을 점령하고 곧이어 광성보로 향하여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500여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별였다. 이 전투에서 350명의 조선군은 미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 당시 미 해군의 슐레이 소령은 신식병기 한 자루 없이 끝까지 진 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한 조선군의 용맹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병기 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 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 다가 죽은 병사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W.S.Schley, 기함에서의 45년 (1904) 중에서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게양되어 있던 수(帥) 자기를 내리고
199 근대 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개항 199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미군으로서는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 그들의 목표, 목적을 수정해야만 했다. 미군의 예상과 달리 조선 정부의 강경한 자세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군은 7월 2일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군사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서신을 보내고 다음날 본국 으로 철병하게 되었다. 3) 운요오호 사건 앞의 두 사건과는 달리 운요오호 사건은 단기간에 일어난 사건이면서 조선의 개항을 가져오게 되는, 사건의 당사자인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보자 면 성공적인 무력행사였다. 1875년 4월 부산과 동해안에서 무력시위를 벌 인 운요오호는 그 해 9월 서해안에 다시 출현하여 무력침공을 자행하였 다. 9월 21일 운요오호는 초지진 앞바다에 정박한 뒤 신선한 물을 얻는다 는 구실로 보트를 내려 초지진에 무단으로 상륙하였다. 초지진에 주둔하 고 있던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자 운요오호에서도 응사하여 초지진을 파괴 하였다. 간조 때문에 상륙이 어렵다고 판단한 운요오호의 함장은 배를 돌 려 남하하여 영종진을 포격하고 일시 점령하였다. 당시 영종진은 일본군 의 포격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35명의 병사가 전사하였다. 운요오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국교를 일거에 타결하고자 했던 일본 은 안팎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1875년 12월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 隆]를 전권변리대신으로 삼아 부산으로 보내어 조선과의 통상교섭을 책임 지게 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보다 깊이 있는 협의를 위해 강화도로 갈 것이며, 이에 조선이 응하지 않으면 그대로 서울로 직향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일본 대표단을 태운 전함이 인천 앞바다 에 정박하자 조정에는 위기감이 확산되었다.76) 결국 조선의 개국을 권장 하기 위한 청의 사절이 도착하고 좌의정 이최응이 건의한 완화책에 국왕 이 찬성하여 접견대신에 신헌(申櫶), 부관에 윤자승(尹滋丞)을 임명, 강 화로 파송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통상교섭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회담장소와 절차 등을 결정하기 위한 예비교섭에서 조선 측은 일본대표단의 강화부 진입을 반대 하여 초지진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강화부 관아 76) 承政院日記 고종 13년 1월 4일.
20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에서회담할것을요구하여결국일본대표단은호위병 400명을이끌고강화부에들어와부내연무당에서정식회담을진행하였다. 일본은먼저일본정부가왕정복고이후수차례에걸쳐사신과서계를보내어양국간의국교를조정하려고하였음에도불구하고, 조선이이를거절한이유가무엇이며, 운요오호에대한불법포격까지가한사실을집중추구하면서사과를요구하였다. 이에신헌은일본의사신이나서계에는예의에어긋나는것이많아수납을거절한것은어쩔수없는일이었다고대응하였다. 또운요오호가예고없이근기해역을침범하였으니변방의장수가이에발포한것도정당한조치였다고강변하여일본측의요구를거절하였다. 공식적으로 3차례에걸쳐진행된회담에서의견의격차를좁힌양국은결국 2월 3일통상조약을조인하게되었다. 강화도조약은근본적으로는모든독립국가는평등한주권을향유한다는서구적이념과원칙에입각하여한 일관계를재규정함으로써동아사아적국교체제를거부한것이다 ( 제1조 ). 그러나간접적으로중국의종주권을부정함으로써조선에대한침략의도를내포하고있는것이다. 이러한성격은 8월에조인된조일수호조규부록및통상장정등을통해살펴볼수있다. 이들은모두불평등조약으로서부산과동해, 서해에서각각한곳씩항구를개방하여일본의경제군사적침투를보장하였으며, 영사재판권에의한치외법권이인정되고조계에해당하는거류지가설정된것등이다. 무관세무역역시국내시장보호와국가재정확보를위해불가결한관세권을상실한것으로, 이때문에밀려드는자본제공산품으로부터국내산업을보호할길을잃게되었다. Ⅱ. 인천의개항 1. 제물포개항 인천의개항문제가제기된것은고종 19년 (1879) 4월이었는데조 일수호조규가체결된지 3년 2개월, 원산개항이허용되기 2개월전의일었다. 조 일수호조규의제 5관에부산초량항을개항하는외에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중에서 2개처를더개항하되개항시기는고종 13년
201 근대열강의침략과인천의개항 201 (1876) 2월부터기산하여 20개월이내로하도록규정되어있었다. 그러나조선정부는추가개항에소극적이었고일본측의적지선정도지연되었기때문에두곳의추가개항이늦어지고있었다. 특히인천의개항문제는인천과부평에서서울에이르는육로가강화를통하여오는수로보다훨씬이용하기편리하였으므로조선은이를일본측에게알리지않으려노력하였다. 1877년 10에진행된개항문제는큰진전을보지못하고 1879년윤3월부터재개되었는데이때인천의개항문제가제기되었다. 대리공사로임명된하나부사는군함을이끌고제물포일대를탐사한후제물포개항방침을정하고조선과추가개항장설정문제를해결하기위한회담을열었다 ( 월 ~ 7월17일 ). 조 일간회담의중요주제는원산과인천 2곳의추가개항문제였다. 일본측의요구에대해조선은원산항개항을인정하는대신인천의개항문제에대해서는처음부터강경한거부자세로일관하였다. 조선은인천이서울과가까워서이곳을개항하면서울의시장이피폐하고민생이어려워질것을예상하여보장중지라는이유를들어반대하였다. 그러나일본은오히려 여러가지물화가유통되어백성들의삶이풍요로와질것이며, 일본이자주내왕하면다른외국에서엿보는것도막을수있다 라면서설득하고자하였다. 제물포개항을둘러싸고다시회담이진행된것은고종 17년 (1880) 11 월 16일부터이다. 이때에는개항문제뿐아니라서울에일본공사를주재시키는문제까지함께제기되었다. 서울에상주하는변리공사로임명되어온하나부사는예조판서에게보내는서계가아니라국서를휴대하고국왕에게직접봉정하겠다고통고하였다. 이주장은전례가없었고조약상에도규정되어있지않은것이었으며위정척사론이팽배하던사회분위기때문에상당한논란이야기되었다. 그러나 11월 26일에고종이직접하나부사를인견하고국서를받음으로써공사상주문제까지해결되었다. 이국서에는하나부사가서울에상주하며교섭의일을관장한다는내용이포함되어있어서일본공사의상주를묵인하는것으로간주되었다. 이로서조선에서처음으로외국사신의상주를허용하는일이되었다. 서울에상주하게된하나부사는김홍집과협상을진행하였다. 개항의
20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설항시기와인천항에서방곡령시행문제등이타결되자고종 18년 (1881) 2월 1일에제물포의개항문제는타결되었다. 그러나임오군란의발생으로그시기가늦춰지고고종 20년 (1883) 1월 1일을기해인천은개항하게되었다. 회담을시작하고 3년 8개월이소요되었다. 2. 인천지역의방위시설강화 1) 개항전후인천연안의방비목적 1876년강화도조약에따라조선의개항이결정된이후, 제물포가개항후보지로부각되면서조정에서는인천연안의방비가논의되었다. 이는개항후보지의지형측량을위한일본선박의무단상륙에대비함이고궁극적으로는인천의개항을저지하기위함이었다. 인천연안에방비를하지않으면안되는이유로첫째이지역이강화에못지않은보장중지라는점, 둘째손돌목등의험로가위치하는강화수로를경유하는것보다이지역을통해도성으로향하는것이훨씬용이하고거리상으로도가깝다는점, 셋째일본측이이미인천, 부평을거쳐서울로향하는도로를알고있다는점등이제시되었다. 서해에서도성으로이르는길은강화수로를이용하는것과해안에상륙하여육로를이용하는것이있다. 조선의지형을모르는외국선박의경우수로를이용하여통상을요구해왔고, 이러한과정에서프랑스와미국의함대가이를저지하려는조선군과강화도에서격전을치르게된것이다. 따라서조정에서는강화도의덕진진과초지진, 통진의덕포진에포대를설치하고강화수로에대한방비를강화하였다. 그러나, 1876년강화도조약이후일본인들은도성으로의접근이강화수로보다훨씬수월하고거리도짧았던인천과부평을통하는육로를알게되었고, 이러한사실은조정에서근심이아닐수없었다. 만일일본측이합의를무시하고무력시위를할경우방비시설이어느정도갖추어져있던강화도와통진에비해인천연안지역은상대의무력에대해무방비상태였다. 더구나, 1875년일본군함운요오호에의해영종방어영이함락당한상황에서인천연안을방어할군사력은전무하였다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또, 일본이외에다른나라와는어떠한조약도체
203 근대 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개항 203 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측의 육로 이용 정보가 서구열강에 흘러든다면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천 부평연안의 방 비 강화는 서해로부터 도성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하여 일본을 비롯한 서구세력에 의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2) 화도진과 연희진의 설치 1878년 8월 27일 고종은 여영대장 신정희를 공역감동당상(工役監董堂 上)에 임명하여 인천과 부평의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여 방비하도록 하였 다. 이에 따라 인천 연안의 방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먼저 인천 제물포에 포대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포대 축조에는 석 질이 좋고 단단하다고 알려진 강화도의 석재(石材)를 채취하여 사용하였 다. 1879년 7월 1일 인천과 부평 해안의 포대 설치가 마무리 되었다는 무 위소의 보고가 있자 포대를 관할할 진을 설치하였는데, 인천 제물포에는 화도진(花島鎭)을 설치하였고, 부평에는 연희진(延喜鎭)을 설치하여 훈련 도감과 각 군영의 훈련관(訓練官) 중에서 쓸만한 자를 두 진의 별장으로 부임케 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무위도통사 민겸호(閔謙鎬)의 건의에 따라 인근에 있는 1개 면을 각각 두 진에 소속케 하였다. 화도진에 소속되어 있던 포대들은 모두 8개로 제물포 주변에 있던 묘도 북변포대, 묘도 남변포대, 북성 북변포대, 북성 남변포대, 제물 북변포 대, 제물 남변포대와 인천의 남쪽에 있던 호구포대, 장도포대 등이다. 이 들 포대들은 각기 2개~8개의 포좌를 설치하여 수로를 통해 상륙하는 외적 의 선박에 대비하고 있었다. 화도진과 소속 포대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 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부 평에 설치하였던 연희진과 소속 포대들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연희진의 위치가 서구 연희동 247 번지 근린공원 일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구전에 따라 가정포대와 용 두포대의 명칭 및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화도진의 예에 비추어 본다면 연희진에 소속되어 있던 포대도 6~7개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인천 연안에 대한 방비에도 불구하고 1880년 인천의 개항이 결정되자 화도진과 연희진의 기능과 역할이 쓸모없게 되었고, 급기야 1882년 6월 28일 연희진은 혁파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으로 이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일본 및 외국선박의 상륙을 저지하고 연안방비를 강화
20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화도진과 연희진은 창설된지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본연의 기능을 상실케 되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개항 이후 화도 진은 연안방비를 담당하던 업무에서 개항장의 치안질서 유지 및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는 외국인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로 전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중심성의 축조 1882년 연희진이 혁파된 이후 부평 연안의 방비는 허술해 질 수밖에 없 었다. 이에 해안에서 부평부로 진입하는 계양산 자락의 경명현(일명 징맹 이 고개)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중심성은 당시 부평부 사였던 박희방(朴熙房)이 부평 부민들의 기부금으로 축조한 성으로 계양 산 정상에서 경명현을 거쳐 맞은편 중구봉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한 성이 다. 중심성의 축조와 관련된 유일한 기록은 중심성 사적비이다. 이 석비 는 중심성의 문루에서 서쪽으로 약 20m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훼손이 심하여 1949년 7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한국전쟁 당 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석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으로 높이가 5척(151 ), 폭이 1.5척(46 ), 두께가 0.8척(25 )였다고 전한 다. 따라서 비문을 확인할 수 있는 석비의 실체나 탁본은 현재 전하지 않 는다. 다만, 현재 석비를 받치고 있던 귀부의 일부가 서구청 내에 보관되 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간행한 인천고적조사보고서 에 수록되어 있는 중심성사적비문 필사본에 의하면 부평도호부사 박희방 (재임기간 : ~ )이 1883년 9월 29일 조칙에 따라 중 심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적비가 세워진 것이 10월 이므로 공사기간은 1개월이 넘지 않는데 공사기간이 짧은 것은 대다수의 부민이 동원되었고 성 자체가 정밀하게 축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자성(一字城)의 중앙부인 경명현 고개마루에 문루를 쌓았는데 문을 경 명문(景明門), 누각을 공해루(控海樓)라 하였다. 성의 축조와 아울러 서 쪽에 장대(將臺)를 두어 병사들을 조련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한 군기(軍 器)를 보수하고 해안의 포대에 병사를 재배치하여 성을 방비하고자 하였 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연희진이 혁파된 이후에도 부평 연안의 포대들은 해안 방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부평부에서 이들을 관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평부사 박희방은 부민의 뜻을 모아 축조했다 하여 성의
205 근대 열강의 침략과 인천의 개항 205 이름을 중심성(衆心城) 이라 하였으며, 공사가 완료된 후 사적비를 세웠다. 4)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의 설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해지고, 조청상민수륙장정(朝淸商 民水陸貿易章程)에 의해 사실상 조선의 해방(海防)이 무력화되자 고종은 이를 극복하고 연해의 방비를 자주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부평 연해의 관문으로 쌓은 중심성(衆心城)도 그 중 하 나로 축성을 통해 부평지역의 해안방어 체제를 재정비하고 궁극적으로는 도성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하여 유사시를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경 기 서해안 지역의 해안 방어는 각 영문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 에 일관된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비하고자 1884년 1월 기연 해방영(畿沿海防營)을 부평에 설치하여 경기도 연해지방의 방비를 담당하 게 하였다. 기연해방사무(畿沿海防事務)에는 민영목(閔泳穆)이 임명되었 고 그는 해안을 방어할 병사와 포군(砲軍)의 조련을 관장하였다. 기연해 방영의 영문(營門)을 부평도호부에 설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헌 기록이 없어 조금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저간의 상황 으로 유추해 볼 때, 다른 연해 고을에 비해 도성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 중앙의 통제가 용이하였다는 점과 경기와 양서지역에 이르는 관할지역의 중앙에 부평이 위치한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885년 3월 서울 용산의 만리창(萬里倉)터로 기연해방영이 이설되기까지 부평지역은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과 육군을 통제하면서 경기 연안의 해방(海防)을 담당하는 전략적 기지로서 기능하였다. 3. 감리서 및 각국 영사관 설치 인천항의 개항이 확정되고 1883년 4월 13일 최초로 상업종사 목적의 일 본인이 내항하였으나 그 수가 아주 적었고 본격적인 개항은 같은 해 6월 경에야 이루어 졌다. 그러므로 인천항에서 통상사무를 취급할 필요성이 생긴 것 역시 6월 이후의 일이었다. 고종 20년(1883) 8월 19일 조선은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한 기구로서 감리서를 설치하였다. 감리서는 인천, 부산, 원산 등 3곳의 개항장에 두 었으며 개항장의 해관(통상) 사무를 관장하였다. 감리서가 설치된 개항
20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초기에는통상사무가그다지번잡하지않았으므로지방관아에서행정사무와함께처리하였던것으로보인다. 인천의감리서역시고종 27년 (1890) 에서기관을증원시키기이전까지는부사의겸직으로부사로서의임무가주이고감리직은부차적인임무로다뤄진듯하다. 감리서는갑오개혁의지방제개편에따라고종 32년 (1895) 5월 26일에폐지되었다. 이지방제개혁의내용은 8도를폐지하고전국을 23부의행정구역으로나누는것으로, 개항장인제물포에는인천부가설치되고감리서를폐지하였다. 그러나개항장과개시장의사무량이증가하고타기관과의연관성이증대하면서폐지 1년 4개월만인건양원년 (1896) 8월 7일에다시감리서를복설하고대외통상사무를일원화하였다. 복설된감리서는각국영사교섭과조계 항내사무일체를관장하였다. 또한경무관을두어개항장의경찰기능을담당하였고개항장에설치한재판소판사를감리가겸함으로써재판기능도담당하게되었다. 인천개항후가장먼저영사관을설치한나라는일본이었다. 고종 20 년 (1883) 10월 31일에양식 2층목조건물인영사관을준공하였다. 소요된건축자재는전부일본에서직적수입하였다고한다. 영사관은지금으중구청자리에위치하였으며부속경찰서와감옥도설치되어있었다. 1910년조선총독부설치이후에는인천부청사로사용되었다. 청나라영사관은고종 21년 (1884) 1월에설치되었다. 청은이사관 ( 理事官 ) 을파견하여영사업무를보게하였다. 청이사부는청일전쟁기간에임시폐쇄되었다가 1898년다시개관하였다. 청영사관이있던곳은지금의선린동화교학교자리고구내에는순포청과전보국이있었다. 영국영사관은정확한설치연대는알수없으나지금의항동 1가올림포스호텔부근언덕위인천해관부근에있었으며, 러시아영사관은 1902년 10월 31일에각국조계부근영국교회부속병원을빌려서개관하였다가나중에선린동에청사를신축하고이전하였다.
207 서민교 ( 고려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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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인천 209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인천 서민교 (고려대학교) 목 차 1.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2. 열강의 중국분할과 일영동맹 3. 러일전쟁 4. 러일전쟁후의 국제관계와 한국병합 -한국의 식민지화과정 1.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1894년 5월 조선에서 세금 감면과 일본 배척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를 중 심으로 한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갑오농민전쟁) 청국은 원세개 가 주선하여 조선정부로 하여금 청국에 원병요청을 하게 하였고 청국군대 가 출병하자 일본은 천진조약에 근거하여 청국에 대항 출병을 단행하였 다. 조선의 농민군은 청국과 일본군의 개입을 우려하여 조선정부와 화해 하였지만(=전주화약) 양국 군대는 조선의 내정 개혁을 둘러싸고 대립을 격화시켰고, 일본은 청국과의 교섭이 실패하자 단독으로 조선 정부에 압 력을 가해 내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최후통첩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7월말 일본군은 경복궁을 포위하여 강제적으 로 내정개혁 단행에 착수하는 한편 청국 군대의 수송선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정식 선전포고는 8월에 들어가 행해졌다. 기습 공격을 감행한 다음 선전포고를 행한다는 국제법에 위반하는 전쟁 돌입
21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방식이그후에도관례화되는계기가되었다. 한편전쟁발발직전에영국과체결한치외법권을철폐하는일영통상항해조약의체결도전쟁발발에영향을주었다고지적되고있고당시의회로부터탄핵안이결의되는등제2차이토내각의국내정치에서의위기상황도대외전쟁을통해국내의정치적위기해결을하려는수단으로선택되었다고볼수있다. 정부를격렬하게비판하던일본의회도개전과동시에정부비판행위를즉시중단하고당시연간예산의두배에달하는거액의전쟁관계예산과법률안을모두만장일치로승인하였다. 전쟁수행을위해국가가하나가되는거국일치적인기민성이잘나타나고있다. 전쟁의양상은거국적으로군비확장정책을통해철저히준비해온일본이근대화되고잘조직된군대를이용해압도적인우세속에서전쟁을수행해갔다. 이에비해청국은막상뚜껑을열고보니근대화의개혁에서도뒤처지고내부의정치적대립으로국력을충분히발휘할수도없는상황에빠져있었다. 영국이일본에호의적인입장으로바뀌면서국제정세도유리해졌고, 일본해군은황해해전에서청국의북양함대를궤멸시켰으며육군은조선에서청국군대를일소하고나아가요동반도와산동반도의일부를제압하였다. 결국약 2억엔의전쟁비용과약 10만의병력을동원한전쟁은약 8개월만에일본의승리로끝나게되었다. 1895년 4월일본의이토히로부미수상과무츠무네미츠외상을전권대표로청국의이홍장사이에강화가성립되어시모노세키 ( 下關 ) 조약이체결되었다. 이조약의내용은 (1) 청국은조선의독립을인정한다 (= 청국이조선에서배제되는것을의미함 ), (2) 요동반도, 타이완, 팽호제도를일본에할양한다, (3) 배상금으로 2억량 (= 일본돈으로약 3억 1000만엔 ) 을지불한다. (4) 새로운일청통상항해조약의체결과사시, 중경, 소주, 항주의개시와개항, 및치외법권의승인등을약속받았다. 결국청일전쟁을통해일본은아시아최초의식민지영유국가로등장하였으며조선에서청국세력을일소하여일단조선을일본의영향력하에장악할호기를맞이하였다. 더불어전쟁비용을훨씬능가하는전쟁보상금의획득은일본의군수산업근대화와산업혁명의자금으로활용되었고전쟁도성공만하면좋은비즈니스가될수있다는나쁜교훈을남겨주게
211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인천 211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청일전쟁의 결과는 청국이 잠자는 사자 가 아니라 종이호랑이 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 여 구미 열강의 중국분할이 가속화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렇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은 만주 에서의 자국 이익에 중대한 침해가 된다고 생각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 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하였다(= 삼국간섭). 러시아의 요구에 당황한 일본은 이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 하고 러시아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물론 청국에게는 따로 3000만 량(=약5000만 엔)의 보상금을 따로 받는 조건이었다. 거국적인 승 전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은 러시아의 행위에 대해 일본은 와신상담 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더욱 더 군비확장과 국력을 충실히 하는 정책으로 전 환하게 된다. [일본의 타이완지배]: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할양되었던 타이완에서는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타이완민주국 을 선언하고 일본에 무력저항을 꾀했다. 일본은 새로이 식민지획득 전쟁 을 일으켜 타이베이를 점령하고 최종적으로는 1915년에 이르기까지 타이 완의 게릴라식 저항을 종식시켰다. 이 과정에서 타이완 측은 약 1만 7천 여 명이 희생되었고 일본 측도 약 4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은 타이완 에서 군정을 실시하였고 1897년에 타이완총독부관제를 제정해 일단 민정 으로 이행하면서 타이완총독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를 실시 하였다. 일본의 타이완 지배는 현지의 지주, 상인 등 부유층을 회유하면 서 진행되었고 한편으로 빈농 등 민중은 종종 반일무장봉기를 획책하는 등 저항을 꾀했지만 저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으로 일관한 일본의 지배정책은 비교적 안정적인 것이었고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 었다. [민비시해사건에 대하여]: 청일전쟁기간 중에 조선에서의 내정개혁(=갑오 경장)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삼국간섭에 의해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상이 저하된 것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주도권 행사가 여의치 않 게 되었다. 300만엔 차관 제공 등의 회유책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러시 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조선에서는 1895년 7월 이른바 친로파정권이 성
21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립되었다. 러시아가 일본과 본격적인 무력충돌을 일으킬 의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조선주재공사 를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으로 교체하고 대원군을 이용해 친일파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한 궁중쿠데타를 획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민비시해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이노우에 공사가 주범이며 단순하고 무지한 육군 군인인 미우라 신임공사가 하수인 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먼저 일본 정 부의 지시 및 교사 여부는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건의 주범은 당 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의 군인 및 외무성경찰과 외교관, 우익인 현양사 계열의 조선 낭인을 모두 지휘할 수 있었던 인물인 미우라 고로라고 하는 점이다. 또 시해 현장에서 직접 하수인으로 활약한 인물들은 지금까지의 통설대로 조선낭인만이 아니라 일본군인 장교가 직접 개입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일본의 우익 민간인들이 자행했다고 하고 강변하고 있고 또 이들이 한국병합 후에 자신들의 공로를 과시하기 위해 저마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을 너무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문제점도 있다. 또 하나 친일정권부활을 위한 궁중쿠데타가 중요과제였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조선왕실 특히 고 종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민비시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채택 되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민비시해사건에 관여한 인물 중에 후쿠자와의 영향을 입었던 국권파의 한 그룹인 게이오(慶應)출신 우익의 움직임이 시해사건 1년 전에 발생한 김옥균의 암살사건과 묘하게 연결고리를 가지 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2. 열강의 중국분할과 일영동맹 청일전쟁이 끝난 후 청국의 실력이 약하다는 것이 폭로되자 열강은 중 국시장의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898년 독일이 산동반도의 요주만을 조차하였고 영국이 구룡반도와 위해위(威海衛)를 이듬해에는 프 랑스가 광주만을 각각 조차하였다.
213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인천 213 한편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청국에게 반환하게 했던 러시아는 요동반 도의 여순과 대련항을 조차함으로서 일본의 분격을 초래하였지만 일본은 한국(=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개명함)에서의 러시아와의 세력관계를 고려하여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러시아와의 협조노선을 택할 수밖 에 없었다. 열강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청국에서는 강유위, 양계초 등에 의해 입 헌주의적 개혁을 통한 국력의 충실을 꾀하는 변법자강운동 이 일어났지 만 1898년 서태후가 주도한 보수파의 쿠데타에 의해 변법파는 일소되고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청국에서는 배외주의적 움직임이 고양되었고 산동성에서는 청조를 도와 서양세력을 축출하자는 부청멸양 (扶淸滅洋) 을 외치는 의화단(義化團)이 세력을 얻었고 1900년에는 북경 에까지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국 정부는 구미 열강 에게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른바 의화단사건의 발생이다. 일 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더불어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청국을 항복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1901년에는 청국과 북경의정서(北 京議定書)를 체결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사실상 만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였고, 청국 과 사이에 러청밀약을 체결해 만주에서의 독점적 권익을 승인시켰다. 이 러한 사태에 가장 위기감을 느낀 것이 일본과 영국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 확대에 대해 위협을 느낀 일본의 입장은 둘로 나뉘게 되는데 첫째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주장한 일러협상론 으로서 러시 아와 전쟁을 해서 승리를 거둘 자신이 없다면 모험적인 정책을 피하고 만한교환 을 행하여 만주를 러시아에 양보하고 한국에서라도 일본의 권 익을 지키자는 입장이었다. 둘째는 이에 대하여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 모(山縣有朋)와 카츠라 타로(桂太郞) 수상 및 고무라 주타로 외상 등 군 인 및 관료그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영동맹 을 체결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러시아와의 대결자세를 보이게 된다. 영국의 입장에서도 당시 발칸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가 대두하는 것 을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일러양국이 서로 협조하게 되는 것을 꺼려하여 일영동맹론을 환영하였고 결국 일러협상론이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사 이에 1902년에 일영동맹이 성립되었다. 일영동맹협약의 체결은 일본이 근
21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대에 들어와 구미열강과 맺은 최초의 대등조약이었고 일본은 이로서 자신 들이 구미열강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 계기가 되 었으며 구미열강의 대립을 이용하면서 대외적으로 세력을 팽창시키는 정 책을 채용하게 되었다. *근대 일본의 원로(元老)에 대하여 근대 일본의 원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 有朋),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마츠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이노 우에 가오루(井上馨),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 오오야마 이와오(大山 嚴) 등 7명에 명치말기 이후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사이온지 긴모치(西 園寺公望) 가 추가되었다. 공가(公家) 출신인 사이온지를 제외하면 모두 다 사츠마번 혹은 조슈번 츨신의 번벌 정치가로서 오오쿠마 시게노부(大 隈重信)를 제외한 메이지시대 수상경험자는 모두 원로의 반열에 올랐다. 원로에 대해서는 헌법은 물론이고 다른 법적인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 지만 그들 대부분은 메이지국가 건설에 크게 공헌한 장로급의 정치가로서 천황의 자문에 응해 중요한 국무사항, 특히 내각을 개편할 경우에 수상후 보자를 추천하거나 중요한 외교안건에 기획에 관여하는 등 사실상 메이지 천황 시기의 국가운영의 최고지도자역할을 담당하였다. 3. 러일전쟁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가 만주를 실질적으로 무력장악하자 일본은 더 욱 더 군비확장 정책에 박차를 가하였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 작하였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일영동맹에 고무된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 이 원만히 타결되지 않는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정책을 입안하고 있었 다. 일본국내의 일부에서는 크리스찬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와 사회주의자 코도쿠 슈스이(幸德秋水, ), 사카이 도시히코(堺 利彦, 1870~1933) 등이 비전론, 반전론을 주장하였지만, 초기에는 전쟁을 꺼려하던 국민 여론도 국민동맹회와 대러동지회가 결성되어 전쟁 열기를 고무시키는 분위기 하에서 점차 개전론으로 옮겨갔고 또 당시 일본의 국
215 청일전쟁, 러일전쟁과인천 215 내유력신문들도러일전쟁의개전열기를부추기고있었다. 일본정부는 1903년 8월이래로만주문제와한국문제의해결을위해러시아와협상을계속했지만결국한국에서의일본의정치적, 군사적우월권을러시아가인정하지않았기때문에결렬되고말았다. 일본정부는 1904년 2월원로와정부및군부의수뇌부를소집하여어전회의를개최하고대러개전을결정하였다. 일본해군의여순공격과육군의인천상륙을통해한국의서울등주요지역을무력점령하면서러일전쟁이개시되었다. 이전쟁역시선제기습공격을가하고이어서선전포고를하는야비한방식으로도발되었다. 청일전쟁과유사하게먼저한국의정치중추부를무력으로제압한다음강제적인동맹관계를통해한국정부를전쟁에끌어들이는방식을택하고있다. 러일전쟁은일본에게있어서는그야말로국가의명운을건운명적인싸움이었고, 세계최강의육군대국으로불리는러시아에게일본이승리를거두리라고예상하는국가는거의없었다고하겠다. 일본은당초부터무척힘든전쟁이될것이라예상하였고엄청난전비가필요하다는사실도인식하고있었다. 이로인해일본은미국과동맹국인영국에서외국채를모집하여전쟁에대비하였고또개전초기에이미가네코겐타로 ( 金子堅太郞 ) 을미국에파견해테오도르루즈벨트대통령에게강화의중재를타진해놓고있었다. 전쟁의경과는전제국가러시아국내의반전운동등의영향도있어러시아가충분히전력을발휘하지못하는사이에일본에게유리한전개양상으로전개되었다. 일본육군은개전약 11개월만에 3개사단병력의손실을감수하면서겨우여순을공략하는데성공하였고더불어여순의러시아태평양함대를제압할수있었다. 이어서 1905년 3월의봉천회전의승리로남만주에서일본이승기를잡는데성공하였다. 또 5월에일본해군은도고헤이하치로 ( 東鄕平八郞 ) 가지휘하는연합함대가유럽에서부터지구의반을돌아온러시아의발틱함대를맞이하여전멸시킴으로서사실상승리를거두었다 (= 일본에서는일본해해전이라고부르는데현해탄을지나부산과울산사이의동해안에서전투가행해졌다 ) 그러나러일전쟁은이전과는달리엄청난물량소모전의경향을띄고있 었고장기간의전쟁에일본의국력이감당할수있는한계를넘어서고있
21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었다. 더불어러시아도 1905년 1월의수도페테르부르크에서발생한 피의일요일사건 등국내에서의반제혁명의분위기로험악한정세를보이고있었다. 이러한전황에서미국의루즈벨트대통령의알선에의해 1905년 9월미국의포츠머스에서일본의고무라주타로전권대사와러시아의전권대사비테 (Vitte, 1849~1915) 사이에강화회의가개최되어난항끝에포츠머스강화조약이조인되었다. 포츠머스조약에서러시아는 (1) 한국에대한일본의지도, 보호, 감리권을인정하였고, (2) 여순, 대련의조차권과남만주철도와부속의권리를양도하였고, (3) 북위 50도이하의사할린과부속도서를할양하였다. 또연해주와캄챠카에서의어업권도승인하였다. 그러나일본국민이승전의축제분위기속에서바라고있던전쟁배상금은한푼도받아내지못했다는것이국내에알려지자강화조약체결의날승전축하회를위해모여든군중들이폭동을일으키는대소동이연출되기도했다.( 히비야 ( 日比谷 ) 폭동사건 ) [ 러일전쟁의전쟁비용과교훈 ]: 러일전쟁에서일본이사용한비용은 17억엔에이르는거액이었다. 수년간의국가예산에해당하는금액이었다. 그중 8억엔은미국과영국에서모집한외채에서나머지는증세와각종국채를발행하여충당하였다. 한편러일전쟁은세계전쟁사에서유래가없을정도로엄청난물량소비전의양상을보여줬다. 95년에들어가면서일본은무기, 포탄, 군인이부족해더이상전쟁을지속할수없을지경이되었고북만주를거쳐러시아영토를쳐들어갈여력도남아있지않게된상태에서강화회의가개최되었다. 구미열강들은앞으로의전쟁은전후방이따로없는국가가총동원되는총력전 (Total War) 양상을띄게될것이라는교훈을얻었다. 하지만승리에도취한일본은동양의정신이서양의물질을제압하였다는신화에빠져정신주의를강조하는경향이더욱짙어졌다. 1941년미국과영국등에대한선전포고도이러한정신주의의산물이었을가능성이크다고보인다. [ 러일전쟁기일본의양심 - 비전론 ( 非戰論 -]: 일본국민의대부분이러일전 쟁을열광적으로환호하는가운데극소수의반전론도있었다는것이주목 할필요가있다. 기독교인도주의입장에서의우치무라간조 ( 內村鑑三 ) 이
217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인천 217 나 사회주의자인 코도쿠 슈스이(幸德秋水)와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를 비롯해 요로즈초호(萬朝報) 와 헤이민(平民)신문 등의 언론을 통해 반전운동을 전개했고 또 여류문인인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는 여순공 략전에 참전중인 동생에게 보내는 반전을 노래하는 시(詩) 너는 죽어서 는 안 돼! 를 발표하였다. 4. 러일전쟁후의 국제관계와 한국병합-한국의 식민지화과정 러일전쟁의 유리하게 끝나면서 일본은 러시아를 한국에서 구축하는데 성공하면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1905 년 미국과 비공식적인 카츠라 태프트 협정을 체결하고 영국과는 제2차 일 영동맹의 개정을 통해 열강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먼저 러일전쟁기간을 통하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한국정부를 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다. 이미 일본군(=한국주차군)이 무력으로 서울 경 기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일의정서를 통해 일본은 한국에서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징발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국제법적 으로도 하자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이미 무력으로 강점하고 있는 상 태에서 맺어진 의정서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전쟁 중인 1904년 8월에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재정과 외교고문이 고용하게 하여 양 부문을 일본이 장악하였다. 1905년 11월의 제2차 한일 협약(=을사보호조약)은 전대미문의 불법 강제에 의한 조약으로 한국은 일 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한국에 통감부 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한국통감으로 임명되었다. 고종황제는 보호조약 자체가 무효라고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불거졌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심신이 불안정한 순종황제를 즉위시켰다. 또 제3차 한일 협약(=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한국 정부의 내정권 마저도 탈취하였다. 이 어서 한국군이 해산되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민비시해사건 직후의 의병투 쟁에 이어 후기 의병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본 국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철저하게 무력탄압을 가하였다.
21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1909년통감을물러난이토히로부미가안중근에의해사살당하는사건이발생하였고일본정부는본격적인한국합병을결정하여 1910년 8월에한국은일본에의해본격적인식민지로전락하였다. 일본은조선총독부를설치하고초대조선총독에는 3대통감인테라우치마사다케 ( 寺內正毅, ) 육군대장이육군대신을겸직한채로임명되어철저한무단통치를행하였다. 한편만주에서는 1906년관동도독부가여순에설치되었고이어서장춘 ( 長春 ) 과여순 ( 旅順 ) 간의철도연선을경영관리하기위해남만주철도주식회사 (= 만철 ) 이설립되어만주에서배타적이권을확보하였다. 미국과당사국인청국이반대하였지만일본은일영동맹과 1907년의일러협약을배경으로열강의승인을얻는데성공하였다. [ 이토히로부미한국통감에대하여 ]: 이토히로부미 ( 伊藤博文 ) 가근대일본의메이지헌법체제를만든공로자로유명한것은새삼말할것도없지만이미 1881년정변에서정권을장악한다음일본의일인자로군림하던노회한정치가였다. 그러한그가 1909년하얼빈에서안중근에의해사살당하고, 안중근은그의살해이유중에동양평화의파괴자이자약속을저버리고한국을보호국으로만든주범이라고통박하였다. 여기서이토는한국의식민지화, 즉한국병합의주역이라는달갑지않은이미지를얻게된다. 하지만각도를달리해보면이토는청일전쟁이후일본의중앙정계의주류파의위치가흔들리기시작했고러일전쟁기에는온건파로서또러일협상파의거두로만한교환론을주장하면서일영동맹을배경으로러시아와전쟁을불사하는강경파군부및야마가타계열관료와대립하는입장을보였다. 결국일영동맹파의승리와러일전쟁의발발은그의정치적위상에짙은그림자를드리우게된다. 그가한국통감으로오게되는이유도여기에있었다고보여지며, 그가통감으로한국에와서먼저착수한것이강력한군부의입김 (= 예를들어한국주차군의지휘권을부여받고온것등 ) 을견제하고한국통감의지위를발판으로다시정권의핵심으로부각하려는야심이있어서였다고보여진다. 따라서그는한국에서도일본중앙과한국현지의군부를견제하면서경찰력에의한치안확보에주력하였고, 군부의병합주장에대해과다한비
219 청일전쟁, 러일전쟁과인천 219 용을감당할수없다고견제하면서한국을항구적이고안정적인보호국으로만들려고하였다. 단기간에가시적인성과를올리려한이러한정책의추진이고종황제의퇴위를강행하였고이로인해오히려의병투쟁을자극해버린결과일본군부가다시한국에서입지가강화되는결과를초래하고말았다. 한국측의저항을간과했던이토의정책적과신이었다고하겠다. 결국이토는의도했던성과를얻지못하고통감의지위를팽개치게되었던것이다. 이토의죽음이한국병합의최대의비판자를사라지게하여결과적으로는병합이예상보다매우앞당겨졌다고도볼수있다.
22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21 황은수 ( 인하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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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개항 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조계 설정 223 개항 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조계 설정 황은수 (인하대학교) 목 차 1. 동아시아 각지의 개항장 설정과 그 유형 1) 조계의 연원과 유형 2) 인천의 조계 설정과 주요 시설 2. 근대 문물의 유입 경로와 상인 상품 1) 국내외 간의 기선 정기항로 2) 각국 각지 상인의 개항장 인천 진출 3) 인천의 대외무역 구조와 주요 상품 15세기 이후 세계의 여러 문명권들은 바다를 통해 급작스럽게 상호 소 통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문명권은 구래로부터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에 입각한 조공 책봉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 의 교류도 이와 유사한 관계 속에서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돌연 19세기에 접어들어 이러한 관계는 동아시아 지역에 일어난 내 외적 인 문제로 인해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었다. 외적으로 제국주의를 표방한 구미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 전쟁에 박차를 가하며 동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동아시아를 제외한 세계의 대부분 지역 을 직 간접적으로 점유한 구미 열강은 최종 목적지인 중국을 향해 동 서 양 방향에서 급속하게 접근해온 것이다. 이들은 만국공법 관계라는 미명 하에 선진 기술을 바탕으로 무력시위와 전쟁 등을 일으키며 개국통상을 요구했고, 그 결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통상조약체
22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제를 받아들이며 내부 및 외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또, 내적으로는 수백 년 동안 존속되던 동아시아 국가 간의 정치 경제적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균열은 조공 책봉 관계의 중심인 종주국 중국[청조 (淸朝)]이 흔들리면서 다 방면으로 전이되었다. 1. 동아시아 각지의 개항장 설정과 그 유형 1) 조계의 연원과 유형 동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된 조계제도는 동북아 3국 및 서구 국가들 모두 에게 낯선 제도였다. 하지만 그 근간은 조공질서에 있었고, 오랜 시간동 안 조계의 원시형태가 작동하고 있었다. 1835년 청조는 서북 변경의 조공 국 중 하나인 코칸드 왕국에 변경의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가지 양 보를 해주었다. 합의조항 안에는 코칸드왕국이 신쟝(新疆) 카슈가르에 정 치적 대표를 상주시킬 권리, 이들 대표가 외국상인에 대해 사법 및 치안 권을 행사할 권리, 외국인이 반입한 상품에 대해 관세를 징수할 권리 등 을 공인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난징조약 이전에 청조는 자신 의 조공국에 대해서도 변경의 치안을 위해서라면 영토 내에 치외법권과 관세징수권을 인정하는 정도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1842년 난징조약 제2조 지금 이후로 대황제는 영국인민이 권속을 데리 고 대청국 연해의 廣州(1843), 福州(1844), 廈門(1844), 寧波(1843), 上海 (1843) 등 다섯 항구에서 거주 통상 하는 것을 허락한다 에 의해 외국 인의 거주 통상권이 인정되었다. 1843년 10월 8일 虎門塞追加條約 제6 7 조로 조계제도가 구체화되어 편의상 외국인의 거주와 무역은 영사와 지방 관리의 합의로 그 지역을 정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1843년 11월 8일 영국 영사 일행이 처음으로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 현성(縣城) 내에 영국영사관을 개설하고, 동월 17일 정식 개항을 공포했다. 그런데 현성 내의 외국인의 수는 계속 증가했고, 언어풍속이 상이한 중국인과의 접거 로 인해 빈번한 소요가 발생했다. 또, 외국인이 거주하거나 점포를 열기 위해 토지를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성내의 중국인 거리로부 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급속도로 강화되었고, 청조의 입장에서
225 개항 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조계 설정 225 도 잡거로 인한 기존 사회질서의 혼란을 걱정해서 주민과의 격리를 바랬다. 이에 양측은 1845년 11월 29일 上海租地章程 을 체결하여 현성 밖의 황푸강(黃浦江) 가에 외국인 거주구역 을 획정하였다. 그러나 이 장정은 어디까지나 영국인들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 프랑스 등의 반발을 샀고, 1854년 7월 5일에 가서 제2회 租地章程을 통해 영국의 배타적 관할 을 방기하고 공동조계로 전환하였다. 상하이 공동조계는 선거를 통해 7명 의 대표를 뽑아서 시참사회(市參事會)를 조직했다. 이곳을 통해 공동조계 의 각종 도시행정(도로, 잔교, 가로등, 위생시설, 경찰서 등)이 자치적으 로 행해졌다. 이외에도 미국의 조계가 있었으나 1863년 영국 조계와 합병 하였고, 1844년에 설정된 프랑스 조계는 공동조계와 유사했으나 시참사회 구성원 15명 중 8명이 프랑스인이었다. 이후에도 제국주의 열강들은 무력 시위 및 전쟁 등을 통해 중국에 많은 조계지를 얻어냈다. 난징조약 이후 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 조계를 설정한 나라는 모두 9개국이었으며, 각지 의 조계 총수는 28개소에 달하였다. 전관조계는 영국이 7개, 프랑스 4개, 일본 5개, 미국 2개, 독일 2개, 러시아 2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각 1개, 공공조계가 2개, 그리고 연태에 외국인 거류구 가 있었다.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 을 통해 시모다(下田) 하코다테(函館)을 개항했으나 이곳은 보급기지[미국영사는 주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본 격적인 개항은 1858년에 미국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 차례로 체 결한 수호통상조약 에 의해서 이루어졌다[안세이(安政) 5개국 조약]. 이 조약에 의해 1859년 가나가와(神奈川)[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 등 3 개항의 개항이 먼저 이루어졌고, 니가타(新潟) 효고(兵庫)[고베] 등이 차 례로 개항하였으며, 에도(江戶)[도쿄] 오사카(大阪)도 이어서 개시(開市) 하였다. 여기에 설정된 조계는 통상 외국인거류지(外國人居留地) 라 불 렀고, 각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① 중국의 조계 - 상하이(上海) : 영국 프랑스 전관조계, 공공[공동]조계 조계가 팽창하여 거대 국제도시가 탄생 - 옌타이(煙台)[芝罘] : 외국인거류구(Foreign Quarter), 14개국의 영사관이 설립되었으나 외국인의 치외법권 행정권 등이 무효, 옌타이 산 거류구 지역은 인천의 응봉산 일대와 유사한 모습
22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② 일본의 거류지 - 시모다(下田) : 보급기지(영사만 주재) - 요코하마(橫浜) : 전통 포구에서 에도[도쿄]의 관문으로 부상, 지 정학적으로도 인천과 매우 흡사 - 도쿄(東京) : 개시장(開市場)[츠키지(築地) 거류지], 일본의 수도 에도 거류지와 잡거지가 설정되었으나 항구는 개항하지 않음 - 오사카(大阪) : 개시장[카와구치(川口) 거류지] 개항장으로 변경, 거류지는 상업 중심지에서 선교의 중심지로 변모 2) 인천의 조계 설정과 주요 시설 ① 일본(전관)조계 년 9월 30일 조인 朝鮮國仁川口租界約書 = 朝鮮國仁川港ニ於テ居留地借入約書 - 행정 사법권은 영사에 의해 수행, 택지의 競貸 지권의 발급은 조선정부 ② 청국(전관)조계[仁川華商租界] 년 4월 2일 조인 仁川口華商地界章程 - 사법권은 영사, 행정권 및 택지 경매 등은 양국 상무관이 회동하 여 운영 ③ 각국(공동)조계 년 10월 3일 조인 AGREEMENT RESPECTING AGENERAL SETTLEMENT AT CHEMULPO = 仁川濟物浦 各國租界章程 년 정식 출범, 1889년 12월 신동공사(紳董公司)가 조직되어 조계 운영 ④ 주요 시설 - 인천항 감리서와 외국 공관 - 항만[잔교, 갑문식 도크], 세관, 경인철도 - 공원과 사교 클럽 :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 제물포 구락부 - 교육 : 감리서 외국어학교 - 공립보통학교(창영), 소학교(아사히
227 개항 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조계 설정 227 소학교), 화교학교(중산), 미션 학교(영화, 박문) 등 - 종교 : 동본원사, 성공회 내리교회, 답동성당 등 - 금융 및 상업 : 은행, 상업회의소, 미두취인소, 회사 및 양행 등 - 우편 전신 및 상하수도 - 위생 : 병원, 검역소 - 양관, 묘지, 유곽 등등. 2. 근대 문물의 유입 경로와 상인 상품 1) 국내외 간의 기선 정기항로 1876년 부산의 초량이 개항장으로 지정되자, 그 해 11월부터 미쓰비시 (三菱) 회사는 일본정부 명령항로 중의 하나인 長崎-五島-對馬島-釜山의 우편선로를 다달이 정기 운항했다. 상품의 적하량이 점차 증가하여 화객 (貨客)을 다 싣지 못할 정도가 되자 1880년 3월부터 항해 및 정박일수를 단축하여 1개월에 2 3회의 비율로 운항하고 발선지를 나가사키에서 고베 로 변경했다. 이와 함께 부산항에는 일본정부의 요청과 보호에 의해 제일 국립은행 오쿠라구미(大倉組) 미쓰비시 회사의 부산지점이 개설되어 일본 인 조계를 중심으로 조선침략의 경제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 미쓰비시는 1880년 3월 기존의 나가사키-부산선을 원산까지 연장하여 개항(同年 5월) 을 준비했고, 1881년 2월 神戶-釜山-元山-海蔘威 항로를 신설했다. 인천 항로는 1881년 5월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年2회로 배선되었다가, 인천 개항 직후인 1884년부터 월1회로 증편되었다. 1882년 영국, 미국, 청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의해 조선은 서구에도 개항을 하게 되고, 청국에 대해서는 전통적 관계를 근대적 통상조약체계 로 전환한다. 1876년 이래로 조선의 대외무역(해운업 포함)은 일본이 거 의 독점하고 있었지만, 1883년부터 다른 열강들이 조선으로 진출하여 동 북아시아 지역에 있어 조선항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조선 항로에서 일본의 독점을 가장 먼저 위협한 것은 영국의 이화양행 (怡和洋行, 자딘 메디슨 상회)이다. 1883년 8월부터 상하이-인천-부산-나 가사키 간에 기선 남승호(南陞號)를 월 2회 운항하면서 무역품을 수송하
22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고조선정부로부터세곡수송특권까지얻었으나, 적자등의이유로 1885 년 1월에운항을중단하게된다. 이어서청국의윤선초상국이 1883년 11 월부터상하이-인천간에기선부유호 ( 富有號 ) 를월 1회운항시키지만, 부유호가청불전쟁에징용되고적자등의이유로 1884년 1월이후로운항이중단되었다. 독일의세창양행 ( 世昌洋行 ) 도인천거류화상및독일상인의자금지원과세곡수송특권을받아 1885년 3월부터상하이-인천간에기선희화선 ( 希化船 ) 을운항하지만, 무역부진등의이유로동년 9월에운항을중단했다. 청국및구미열강의정기항로유지기간에서알수있듯이일본해운업에큰타격을주지는못했으나, 어느정도위협을느낀일본정부는계속해서조선항로의개설과유지를위해막대한지원을아끼지않았고, 자국기선회사들의경쟁을종식시키기위해회사들의통합을유도하여거대해운회사가설립되었다. 새롭게설립된일본우선회사는 1885년 10월인천지점을설치하고일본상인의건의에따라기존의조선항로를재편했으며, 1886년 3월에는長崎 - 仁川 - 煙臺 ( 芝罘 )- 天津간의항로를신설하는등조선항로를더욱강화하고있었다. 그러다가얼마후조선에대한종주권강화정책을진행하며, 일본의세력확장을강하게의식하고있던청국은상하이-인천항로를재개설하게된다. 이항로는인천에진출해있던많은화상 ( 華商 ) 들의청원을받은원세개 ( 위안스카이 ) 가한중직접항로의개설을결정, 1888년 3월부터윤선초상국의광제호 ( 廣濟號 ) 가 20일에 1회씩上海 - 煙臺 -( 歸路營口경유 )- 仁川노선을운항하였다. 청의윤선초상국은인천항로에서운임을일본우선회사보다저렴하게설정하는것과함께청국인荷主와밀약을체결하는등일본측을견제하면서정기항로를운영하였다. 이에일본우선회사는 1889년임시선을증편하여煙臺 - 仁川간의운임을초상국과동액으로설정하고, 집하력을강화시키기위해노력한다. 또, 러시아의기선회사가조선정부에정식으로기선운항을신청하여부산및원산항로도더이상독점할수없게되자, 1889 년 4월일본우선회사는上海 - 煙臺 - 仁川 - 釜山 - 元山 - 海蔘威간의항로를신설하여기선비후환 ( 肥候丸 ) 으로 4주에 1회정기운항했다. 한편, 1892년부터일본의오사카상선회사가고베와부산간에월 3회의정기운항을시작했고, 1893년부터는 2주마다 1회고베-시모노세키-부산-인천항로에기
229 개항 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조계 설정 229 선을 취항하기 시작하면서 조선항로에서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했다. 개항장은 인적 물적 교류의 창구가 되었다. 이에 제국주의 열강들은 개 항장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적 침략을 시작하고, 개항장 간에 정기항로를 개설하면서 자국 세력의 확장을 기도한다. 기선을 운용하는 정기항로는 신속성, 정기성, 안정성, 대량수송 등의 장점들이 부각되어 제국주의 열강들은 앞 다투어 기선 정기항로를 개설해 나갔고, 이것은 제국주의 열 강의 동아시아 및 조선 진출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버팀목으로 자리했다. <도표-1> 1888~93년 조선의 대외 정기항로 日本郵船株式會社(日) 輪船招商局(淸) Shevelev(露) 2) 각국 각지 상인의 개항장 인천 진출 위와 같이 한중일을 잇는 정기항로망은 조선의 인천항을 중심으로 보다 긴밀히 맺어지게 되었고, 기선회사들의 경쟁으로 운임비가 절감되고 점차 무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기선을 이용한 개항장 간의 내 외국인 이동도 보 다 활발해졌다. 1880년대 후반 이후 조선 정부는 해외를 왕래하는 조선인에 대한 관리 규정, 즉 오늘날의 여권 및 출입국 관리규정 같은 것을 마련하게 된다. 우선, 1888년 2월 인천항의 감리서에서 본항에 와서 배를 타는 官員의 憑票 소지 여부에 대한 정해진 규정이 없으니 各營 各局에 관문을 보내어 某署의 관원이 某事로 외국 및 內地를 前往하는지 本衙門에 보고할 수 있
23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도록 해달라 는 문서를 통리아문으로 상송했다. 이에 정부는 삼항에 日 本輪便에 我國 紳商이 빙표를 휴대하지 않고 함부로 輪船에 올라 遊覽 혹 은 通商을 칭하며 외국을 왕래하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들 중 다수가 定見이 없어 말썽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부득이 檢飭하니, 該港 경찰관이 왕래하는 我國 官商의 성명 거주 및 왕래 목적을 신고 받아 매달 보고 하 라는 관문을 내렸다. 그래서 1888년 3월(음력)부터 조선의 각 개항장 경 찰서에서 화객기선(貨客汽船)을 타고 왕래하는 조선인을 검칙하고, 그 결 과를 개항장 감리서에서 중앙 정부에 매달 보고하게 되었다. 이를 기재한 자료인 摘奸成冊 에 나타나는 각계각층의 조선인 중에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동하는 이들이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의 본거주지는 대부분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인 한성, 동래 (부산), 의주 등의 지역이다. 한편, 활동 범위는 인천-부산 국내 개항 장뿐만 아니라, 인천-청국(天津, 營口, 煙臺, 上海, 香港 등), 인천[대부 분 부산 경유]-일본(長崎-下關-神戶-大阪-橫浜) 등 동북아시아 각지의 개 항장으로 정기항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① 개항장 객주 : 구문을 정부에 납부하고 개항장의 매매독점권을 장악. ② 인천항 신상(紳商) 회사 : 대한제국기 민족적 성격의 합자회사. - 서상집[한국형 매판], 정치국[개항장 이주 상인] ③ 구미계 이화양행, 타운센드, 세창양행 ④ 화교[화상(華商)], 동순태 3) 인천의 대외무역 구조와 주요 상품 개항장 인천은 경인지방을 직접적 배후지로 하고,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일부 강원도 일부를 유통권에 포섭하고 있었다. 또한, 청국상인의 진출이 두드러진 지역이어서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이 상권 경쟁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서울의 인후부 로 불린 인천은 서울과 같은 유통 권을 대상으로 상권대립이 심각했다. 인천은 서울시장의 전통적 유통권을
231 개항 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조계 설정 231 그대로 포섭하고 있어 서울시장과 인천 간의 상품가격에 따라 상품이 이 동하고 있었다. 특히, 대일수출의 대표적 상품이던 미곡의 인천항으로의 유출이 심화되면서 풍작인 해에도 양질의 조선미를 수출하고 값싼 외국미 가 수입되는 기아수출의 양상도 나타났다. ① 미면(米綿) 교환체제 : 조선에서 생산된 농산물(미곡, 콩,우피 등)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공산품(면제품 중심)의 수탈적 교환 방식. 일본의 산업혁명에 이바지. ② 1890년 전후 주요 수출입 상품 - 수입품 : 면직물(옥양목, 한랭사, 목면, 방적사 등), 동 아연 석탄, 성냥, 석유, 목재, 술, 소금, 담배 등. - 수출품 : 쌀, 대두, 소맥, 대맥, 쇠가죽, 금, 인삼, 해산물 등. ③ 밀무역 : 홍삼, 해삼, 금 등.
23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33 ~ 견수찬 ( 인천광역시중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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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35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 철도를 중심으로 - 견수찬 (인천광역시 중구청) 목 차 1. 머리말 2. 인천항과 철도교통 3. 수인선 부설의 배경 4. 수인선의 부설 5. 수인선의 변천과 쇠퇴 6. 맺음말 1. 머리말 근대사회에서 철도는 과학기술의 총아이자 근대산업사회의 대표적인 사 회간접자본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구축되기 시작한 철도 망은 그 구축의 배경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이해관계와 기능을 담당하였 다. 특히 서구열강이 식민지에 구축한 철도망은 본래의 순수한 산업적 사 회적 기능 외에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축과 경제적 약탈이라는 또다른 기 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가 지니는 필연적 인 약탈적 속성이 철도망 구축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경 인철도에서 비롯된 한국의 근대 철도망 구축도 이러한 서구열강의 침략적 이고 약탈적인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철도 건설을 통해 서구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산업을 일으키고자 했던 대한
23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제국 정부의 의도가 이미 경인철도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부터 왜곡 되기 시작하였고, 청국 및 러시아와의 한반도 쟁탈전에서 승리한 일본제 국주의의 경제적 군사적 필요에 의해 한반도의 철도망이 구축되었기 때문 이다. 같은 맥락에서 근대 인천의 발전상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 인선과 수인선 등 근대 인천의 철도교통망도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군사 적 필요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된 식민지지배의 경제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인천은 개항장이 형성된 인천항 일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도시로 성장하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일본과 일본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도시의 기능과 모습이 변모하였다. 이 글에서 주로 살펴보고 자 하는 수인선의 건설배경과 변천상도 크게는 식민지 도시 인천을 경영 했던 일본인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 상을 항만과 철도기능의 변천과 관련지어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개항장에서 식민지 외항에 이르기 까지 부침하는 근대 인천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 인천항과 철도교통 1883년 개항 후 인천은 단숨에 조선 대내외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는 수도 관문항으로서의 역할과 중계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담당 했기 때문으로, 인천항은 이러한 독점적 위치를 토대로 개항 직후 상당한 호경기를 구가하였다. 개항 초기 인천항은 목포에서 신의주에 이르기 까 지 서해안 일대 주요 항구를 아우르며 항만을 통해 수입된 수입품을 분배 하고, 각지의 생산물을 인천항으로 집하하여 수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 다.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조선 총 무역액의 40 50%를 담당하는 제일의 무역항으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이 시기 조선 무역액 가운 데 인천항이 담당했던 비중은 다음의 표 1에 잘 나타난다.
237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37 표 1. 주요 무역항 무역액 순위와 인천항의 위치(1885~1932)77) 1위 수 출 2위 3위 수 입 1위 2위 3위 1위 총 액 2위 3위 부산 인천 원산 인천 원산 부산 인천 부산 원산 부산 인천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부산 인천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원산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1906 부산 인천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진남포 부산 인천 진남포 인천 부산 경성 인천 부산 진남포 부산 인천 군산 인천 부산 경성 인천 부산 경성 부산 인천 진남포 인천 부산 경성 인천 부산 경성 부산 인천 진남포 인천 부산 경성 부산 인천 경성 28% 부산 군산 인천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경성 호남선개통 부산 인천 군산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진남포 인천 인천 부산 경성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경성 1918 부산 진남포 경성 부산 경성 인천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군산 인천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진남포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진남포 인천 부산 경성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군산 인천 부산 경성 부산 인천 경성 부산 인천 군산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군산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군산 부산 인천 군산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군산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군산 18% 부산 인천 진남포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진남포 18%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진남포 17% 부산 인천 진남포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진남포 18%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진남포 17% 부산 진남포 인천 부산 인천 신의주 부산 인천 진남포 16% 무역총액중 인천항비중 54% 경인선개통 49% 경부선개통 경의선개통 45% 18% 인천항갑문선 거준공 21% 인천항은 개항 직후인 1885년 전국 총 무역액의 54%를 차지한 이래 1902 년 49%, 1907년 45% 등 줄곧 40 50%대를 유지하며 1910년까지 조선제일 의 무역항이라는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철도가 등장하고 후발 개항장들 77) 仁川府史, 인천부, 1933에서 인용
23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이 본격적으로 인천항과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인천항의 독점적 지위는 위 협받기 시작하였다. 1899년 경인철도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만 해도 경인철도는 오히려 인천 항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이었다. 경인철도 개통 이전까지 서울과 인천 간의 교통은 우마차로 경인도로를 이용하거나 인천 용산간에 취항하는 기선을 이용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경인철도의 완공으로 육로로 12시간 넘게 걸리던 서울~인천간이 1시간으로 단축되면서 인천항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동시간이 대폭 단축됨에 따라 인천에서 유숙 하는 인원이 줄어들어 여관업이 크게 타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물자의 운 송이 원활해져 표 2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된 이후 그 폭이 크지는 않지만 수출입액의 증가세가 완연해 졌다. 표 2. 인천항 수출입 무역액 추이(1884~1939)78) 연도 수 출 수 입 계 연도 수 출 수 입 계 , , , , , ,750 1,440,132 1,433,217 1,062, ,825 1,320,909 1,455,737 1,913,814 3,739,890 2,410,670 1,652,342 4,343,963 2,870,077 2,735,396 3,653,723 2,931,888 2,928,827 2,389,029 4,905, , ,610 1,348,406 1,469,815 1,688,708 1,843,759 2,572,161 3,165,935 3,041,327 2,435,310 3,703,115 5,017,086 3,709,383 5,858,605 7,785,651 6,289,816 6,888,421 9,183,883 8,071,466 10,265,107 16,568,779 16,803,763 14,135,494 20,751, ,465 1,126,230 1,620,963 1,759,912 2,074,915 2,254,510 4,012,293 4,599,152 4,103,432 3,114,136 5,024,024 6,472,823 5,623,197 9,608,495 10,196,321 7,942,158 11,232,384 12,053,960 10,806,862 13,918,830 19,530,667 19,732,595 16,521,523 25,657, ,787,824 5,818,133 5,255,952 8,131,133 7,138,966 9,868,824 15,654,549 26,375,456 24,596,016 42,413,219 43,261,345 39,728,419 60,152,086 63,562,566 59,843,790 57,111,117 55,839,066 47,476,098 42,258,676 38,524,133 44,195,577 43,066,552 60,218,754 66,326,962 18,488,575 17,589,203 14,217,121 12,833,422 17,394,041 21,293,536 29,083,259 64,612,597 51,253,966 52,836,427 58,404,260 53,562,289 66,095,719 66,459,271 68,043,080 74,930,846 84,337,362 83,290,435 70,039,531 51,627,625 59,662,712 75,572, ,121, ,775,896 22,276,398 23,407,336 19,473,073 20,964,555 24,533,007 31,162,360 44,737,808 90,988,053 75,822,982 95,249, ,665,605 93,290, ,247, ,021, ,886, ,041, ,176, ,766, ,298,207 90,151, ,858, ,639, ,340, ,102,858 78) 仁川府史 (인천부, 1933) 와 인천항변천사 (인천항운노동조합, 1995) 및 仁川港 (인천상공회의소, 1931)을 토대로 작성.
239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554,220 3,316,498 4,055,204 3,907,913 17,892,584 13,350,584 12,666,523 16,525,966 20,446,804 16,667,082 16,721,727 20,433, ,754,220 92,606, ,860, ,960, ,372, ,740, ,660, ,978, ,601, ,417,000 그러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어 경인선과 연결되고, 1906년 경의선까 지 개통되어 한반도를 종관하는 철도망의 기초가 구축되면서, 인천항의 독점적 지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뒤늦게 개항한 목 포, 진남포, 군산 등이 어느 정도 교역항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때이기 도 했는데,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됨으로써 부산의 입지가 매우 강화되 었고 더불어 진남포, 군산, 신의주 등도 인천의 경쟁자로 떠올랐다. 때문 에 인천은 1908년 이후 수출에서 부산에 뒤지게 되었으며, 수입과 교역 총액에서도 1914년 이후 부산 다음으로 밀려나고, 진남포와 군산의 실적 이 뛰어난 몇몇 해에는 3위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전국의 대외교역량에서 인천항이 차지하는 비중도 날로 감소하여, 경부 경의선 개통 직후인 1907 년 45%에 달하던 비중이 1912년에는 28%로, 1916년에는 18%로 급감하였 다. 표 2에서는 대외교역이 어느정도 완만히 증가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만, 이는 전체 교역량의 급격한 증가와 경쟁 항만의 성장속도에 비하면 인천항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천항이 경부 경의선의 개통에 따른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하게 된 것 은 1918년에 갑문선거를 완공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표 2에 보이는 대 로 갑문선거가 완공된 이듬해부터 인천항의 교역량이 의미 있는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1919년 급격히 늘어났던 교역량은 이후 한 두 해 동안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기도 하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 안정적으로 증가하 고 있다. 이는 갑문선거의 확충으로 대형 선박이 항구에 직접 접안 할 수 있게 되면서 보다 많은 물동량을 확보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러한 경향은 다음 표 3의 인천역 운송실적에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 다.
24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표 3. 인천역 운송실적의 변천(1909~1940)79) 연도 여객인원 승차 하차 111, , , , , ,883 52,536 65,225 49,775 60,809 38,143 50,868 84, ,054 46,243 52,159 75,786 95,030 91,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87 화물톤수 발송 도착 79,733 28, ,896 40, ,088 33, ,275 33, ,885 39, ,452 38, ,143 53, ,631 61, ,509 78,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2 1,022, ,715 여객 64,376 57,914 59,362 53,026 49,704 42,057 55,832 54,079 94, , , , , , , , , , , , , , , , , , , , , ,137 철도 운송 수입 화물 198, , , , , , , , , , , , , , , ,600 1,051,103 1,188,809 1,186,563 1,088,564 1,096,699 1,184,783 1,317,418 1,672,867 1,939,872 2,320,237 2,333,511 3,038,426 3,463,441 3,514,179 총액 262, , , , , , , , , , , , , , ,241 1,015,386 1,213,997 1,360,084 1,357,839 1,236,772 1,200,931 1,308,630 1,449,190 1,808,956 2,075,035 2,492,948 2,508,135 3,160,752 3,655,100 3,816, 수인선 부설의 배경 1920년대 중반 이래 일제는 조선의 산업을 개발하여 식민지 수탈을 고도 화하여 본토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인 철도망의 확충이 시급했다. 따라서 1927년 조선총독부는 조선국유철도12개년계획 을 확정하여 1927년부터 12년간 3억 2천만원을 투자하여 국유철도 5개선 860마일을 신설하고, 기 왕에 부설되어있던 주요 사설철도 5개선 210마일을 매수하기로 하였 79)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의 해당 연도분을 토대로 작성.
241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41 다.80) 이러한 총독부의 정책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투자욕구를 자극하여 제2의 사설철도 붐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미 1910년대 후반부터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논의되던 수여선 부설문제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928년 8월 28일 동경에서 京 東鐵道株式會社가 창립된 데 이어 1단계 수원~이천 구간 공사를 8개월 만 에 마치고 1930년 11월 30일 개통하였다.81) 2단계인 이천~여주 구간도 이듬해 12월 7일 완공되어 73.4km 전체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 수여선 부설은 경기도 내륙의 곡창지대와 경부철도를 연결하여 米穀의 반출을 원 활히 하고 日本人의 진출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동철도는 화 물과 여객의 증가로 상당한 영업이익을 누렸는데,82) 이렇게 수여선이 성 공적으로 개통되면서 인천에서 수인선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 다.83) 또한 1920년대 후반부터 계속된 인천항의 경기침체도 수인선 부설에 대 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1918년 갑문선거 완공 이후 회복세를 보이던 인천항의 교역은 앞의 표 2와 표 3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1920 년대 후반부터 정체되고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경부 경의선의 개통에 따라 부산항의 역할이 증대되고 군산, 목포, 신의 주, 진남포 등 새로운 항만이 쌀을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물동량 상당부 분을 잠식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철도 종관선으로 인해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고 인천항의 경기가 위축되어 가던 시기에 그 돌파구로 대 두되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수인선 이라는 새로운 철도망의 확충문 제였다. 수인선 부설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仁川商業會議所였는 일제침략과 한국철도,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pp.147~155 ; 철도청, 한국철도100 80) 정재정, 년사, p ) 每日申報, 1930년 11월 일 ; 中外日報, 1930년 9월 14일 ; 朝鮮總督府 官報 第1177號, 1930년 12월 4일. 82) 鐵道廳, 韓國鐵道史 3, 1979, pp.547~ ) 수인선에 관한 대표적인 논저는 다음과 같다. 崔美香, 水仁線 挾軌鐵道와 空間形成에 관한 考察, 綠友會報, 인천문화원, 國內唯一의 挾軌 名物 水仁線 鐵道, 인천문화 9, 李昌植, 日帝下의 水驪 水仁線의 鐵道考, 畿甸文化 3, 畿甸鄕土文化硏究會, 尹玉炅, 水仁線 鐵道의 기능변화에 관한 연구, 地理敎育論集 28, 甄洙燦, 京東鐵道(水驪 水仁線)의 부설과 변천, 인하사학 10, 2003.
24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데, 1926년 1월 25일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은 仁川에서 水原을 거쳐 동해안 강원도 江陵에 이르는 횡단철도 부설 요망서 를 제출하였다.84) 인천에서 수원을 거쳐 강원도 강릉을 통하는 횡단철도를 요망한다 ① 조선의 중앙지점에 있어서 서해안에서 동해안을 관통하는 지점 에 가장 유의해야 한다. ② 영등포~수원간은 매년 홍수에 의한 철도의 피해가 많고 교통운 수상 불편함이 적지 않아서 지선을 설치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③ 경부, 경의 본선은 단선이기 때문에 물자수송에 막대한 장해를 가지고 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극단적으로 원가를 폭등시키고 화차의 쟁분전을 연출시키는 등 전년의 실례가 많이 있다. 미곡생 산증식 실현의 날에 있어서는 한층 더 수송상의 불편을 초래할 것 이다. 그리고 철도 수송상의 결함의 하나로 용산중계에 원인이 있 으며, 경부선 중 가장 미곡생산지로서 수송상 최고의 적정위치에 있는 수원에서 지선을 설치하는 것은 무엇보다 초미를 다투는 일이 라고 인정한다. ④ 현재, 경부연선에서 인천에 도착하는 화물은 곡류를 주로 하여 12만 7천여톤에 이르고, 또한 동 지방을 향하여 발송시키는 화물은 모든 잡화류 등 19만톤에 이르고 이것들은 수원~인천간 직로지선이 설치되는 것에 의하여 화물수송의 곤란함과 혼잡함을 완화시켜야 한다. ⑤ 소금수급의 독립은 조선총독부의 열성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 전매국 주안출장소의 관리에 속하는 기성염전은 1,087정보에 달하 여 장래 증설시킬 수 있는 소래면 예상지 500여 정보를 합하여 약 1,600정보에 달함에 있어서는 1억 3천만근의 생산을 기대할 수 있기 에 이것의 배급상 본선의 신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⑥ 소금의 수용은 경부선을 주로 하여 현재 부산 부근은 청도염사 에 의하 는 상황이 어도 주안소금은 완성은 당연히 관염의 공급 84) 仁川府, 仁川府史, 1933, pp.819~821.
243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43 지가 된다. 또한 동해안에 있는 어장의 대부분의 소금은 신속한 공 급을 필요로 하는 사정이 있어 이 또한 청도염으로 대신함에 관염 으로 할 필요가 있다. ⑦ 강원도는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산업발달이 늦어지는 것도 본 선 개통의 실현에 있어서는 곡류, 생우(生牛), 목재, 해산물 등 다 수의 물자를 볼 수 있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⑧ 미곡증식계획에 기초하는 토지 개량지 면적을 봄에 있어 충남, 경기, 평안, 황해의 4도에 있어서 총 면적의 8할 3분에 달하고 이 러한 지방의 생산품은 대부분 인천항으로 모이며 철도수송의 곤란함 은 상상 이상이다. 요망서 에서 仁川商議는 한반도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함 으로써 강원도 등 내륙의 개발을 촉진할 수 있고, 경부선 및 경인선의 수 송부담을 분산하는 동시에 주안 등 서해안 관염의 내륙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천과 경부선 각지와의 발착화물을 영등 포 또는 용산을 중계로 하여 우회할 수 밖에 없었던 불편이 없어져 경기 도의 남동부, 강원도의 남부 및 충청북도의 북부 일대를 개발하고 인천의 상권으로 할 수 있다는 점도 내세우고 있다. 4. 수인선의 부설 수인선 부설을 위한 인천지역 상공인들의 움직임은 건의에 그치지 않고 더욱 구체화되어, 1926년 5월경에는 일본인 사업가가 소래 남동 문학 해 안을 종단하야 문학면 관교리를 經하야 인천에 이르는 수인선의 노선계 획을 정하고 주식회사설립을 추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85)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계획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같은 해 10월 인천과 수원지역의 상공인들이 공동으로 경동철도기성회를 결성하기에 이른 다.86) 인천상업회의소는 1927년 1월에 재차 수인선 부설을 요구하는 진 정서를 당국에 제출하게 되는데,87) 이 때문인지 이해 5월경에는 일본 내 85) 每日申報, 1926년 5월 25일. 86) 每日申報, 1926년 10월 22일.
24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자산가의 후원으로 수인선 인가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88) 이러한 인천과 수원의 여론은 수여선 부설을 추진중이던 경동철도사에도 자극이 되어 1928년에는 수여선을 인천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수립되게 되 었다.89) 경동철도사는 당시의 경제 여건으로 수인선과 수여선을 동시에 부설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수여선을 먼저 개통하고 그 영업추이에 따라 水仁線 부설 여부를 결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수여선 개통 후 경동 철도사가 내륙의 자동차운수업체 인수에 매달리면서 수인선은 그 추진이 한동안 중지되었고, 그 사이 일본에서 또 다른 수인선 계획이 추진되기도 하였다.90) 일시 중지되었던 水仁線 부설 문제는 수여선이 완전 개통되고 경동철도 사의 자동차운수업체 인수가 마무리되는 1932년경에 가서야 다시 검토되 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보조금 문제가 쉽게 해결될 기미 를 보이지 않자, 경동철도는 1933년 들어 인천지역 상공인들의 협력을 얻 는데 주력하였다. 인천상업회의소에서도 교통부 회의를 개최하여 검토하 는 등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다.91) 때를 같이하여 1934년에 접어들어 수여 선의 영업이익이 크게 증가하는 등 수인선 부설에 긍정적인 여건이 형성 되었고,92) 수인선의 채산성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따라서 경동철도 에서도 부설계획을 구체화하여 철도국에 정식 부설허가를 신청하게 되었 다. 이러한 경동철도사의 노선 연장계획은 수인선을 추진하는데 그치지 않고 경동철도를 강원 내륙지방까지 연장하여 명실상부한 동서횡단철도로 완성 하려는 데까지 이르고 있었다. 1934년 가을에는 경동철도 경영진이 원주 와 횡성을 방문하고 주식 모집에 관해 협의를 갖는 등 상당한 진전을 보 이기도 하였다.93) 그러나, 흥호리까지 실측을 마쳤음에도 주식모집이 여 87) 每日申報, 1927년 1월 20일. 88) 水仁鐵道 不遠間認可 -京阪資産家의 應援下, 東亞日報, 1927년 5월 8일. 89) 京東鐵道의 仁川延長出願, 中外日報, 1928년 11월 19일. 90) 仁川府, 앞의 책, p ) 每日申報, 1933년 5월 10일. 92) 京東鐵道 決算 總會는 十二日, 東亞日報, 1934년 8월 5일. 93) 京東鐵道의 延長 原州橫城을 貫通, 每日申報, 1934년 9월 12일 ; 原州與湖里까지 京東鐵
245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45 의치 않아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경동철도는 1935년 9월 23일 총독부로부터 수원~인천간 철도부설인가를 얻게 되었다.94) 이어 자금확보를 위해 주당 50원씩 40,000주의 공모를 통해 총 200만원의 증자를 결정하고 인천측에 100만원 상당의 주식 모집 을 요청하였다. 또한 자금확보를 위해 경영진이 직접 인천을 방문해 주식 모집 설명회를 갖는 한편, 철도국 공제조합으로부터 180만원을 차입하여 건설비용을 확보하기도 하였다.95) 그 결과, 1936년 5월 16일에는 종점 예정지인 인천 花町 매립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6월 1일부터 본격적인 부 설공사에 돌입하였다.96) 공사 과정에서는 토지 수용 가격 문제로 지주들 과 분쟁이 계속되기도 하였고,97) 소래철교 공사와 관련해 인근 포구의 어민들과 분쟁을 빚기도 하였다.98) 이렇게 공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애초 130만원으로 책정했던 공사비가 개통 당시에는 260여만원으로 크게 증액되었다.99) 때문에 수인선의 경제성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이 대두되 어 회사와 주주들 간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하였다.100) 당시 재원이 부족한 사설철도는 당국의 보조금과 주식발행을 통해 대부 분의 건설자금을 마련했는데, 수인선의 경제성이 의문시되면서 경동철도 사와 주주간에 불입금문제로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때문에 자금사정이 道를 延長, 每日申報, 1934년 12월 26일 ; 京東鐵道를 延長하야 金化電鐵까지 接續, 每日 申報, 1935년 2월 11일. 94) 水原仁川間의 鐵道敷設을 認可, 朝鮮中央日報, 1935년 10월 3일 ; 수원 인천간에 새 철 도, 신한민보, 1935년 10월 31일. 95) 水仁鐵道敷設에 株式募集依賴, 每日申報, 1935년 12월 12일 ; 京東鐵道 二百萬圓 增資, 東亞日報, 1935년 12월 18일 ; 百八十萬圓 借入, 東亞日報, 1935년 12월 18일. 96) 貿易 二億圓 突破 記念 仁川 第二築港 起工式 경동철도기공식 등 거행, 東亞日報, 1936년 4월 25일 ; 仁川에 大祝賀會 第二築港, 仁水鐵道起工式 等, 東亞日報, 1936년 5월 15일. 97) 이런 분규는 송도유원지 개발과 관련해 땅값이 폭등한 文鶴, 南洞 등에서 특히 격렬하였다( 京東鐵道 仁川水原間 用地買收에 難色, 每日申報, 1936년 7월 5일 ; 京東鐵道 水原仁川間 敷設 用地買收에 非難, 每日申報, 1936년 7월 21일). 98) 京東鐵橋 加設은 七百漁民 死活問題, 東亞日報, 1936년 6월 21일. 99) 昭和12年 朝鮮總督府統計年報, 朝鮮總督府, 1939, pp ) 京東鐵道 拂込公約 無視라고 분개, 朝鮮商工新聞, 1936년 11월 20일(水原市, 水原市史, p.1255에서 재인용)
24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계속 어려워져 수인선 부설 자체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이런 와 중에 주식이 폭락하여101) 수인선에 대한 회의론이 극에 달하였다.102) 이러한 비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토지수용문제가 점차 진전을 이루 면서 17개 역 내정지를 발표하면서 1937년 2월부터 수인선 부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103)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수인선에 대한 일반 인의 기대도 다시 높아져 개통을 고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소래철교 공사가 난항을 겪는 등 해안 간석지 노선 공사에 어려움이 많아 수 차례 연기된 끝에 7월 19일에서야 개통식을 갖고 완성을 보게 되었 다.104) 그동안 수인선의 경제성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경쟁적으로 보도 하던 언론에서도 개통에 이르러서는 그 소식을 전하면서 강원도 오지의 물자수송, 관염의 수송, 경성 물자의 반출, 송도유원지와 연계한 관광객 유치 등 인천과 중부조선의 개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며 기대감을 나타 내고 있다.105) 수인선은 착공한지 1년 2개월만에 개통을 완료하고 1937년 8월 6일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106) 총 연장 52km의 협궤선인 수인선은 17개의 정차장과 임시정류장을 설치하고 수원-인천간을 1시간 40분에 연결하였는데, 총 17 개소의 정차장 가운데 10개소는 정식 정차장으로 역사를 두고 역원이 배 치되었지만, 7개소의 임시정류장은 역사와 역원이 없었다. 101) 京東鐵道 水仁線, 經濟價値 疑問視, 朝鮮商工新聞, 1936년 11월 26일(尹玉炅, 水仁線 鐵道의 기능변화에 관한 연구, 地理敎育論集 28, 1992, p.40에서 재인용). 102) 朝鮮商工新聞, 1926년 2월 26일(尹玉炅, 앞의 글, p.40에서 재인용). 103) 仁川 水原間新鐵道 驛十七個所內定, 每日申報, 1937년 2월 23일. 104) 仁川水原間의 鐵道 工事遲延을 未免, 每日申報, 1937년 5월 9일 ; 水原 仁川間 鐵道 七 月一日부터 開通, 每日申報, 1937년 6월 15일 ; 水原 仁川間 鐵道 七月十九日에 開通, 每 日申報, 1937년 6월 24일 ; 水原仁川間鐵道 十九日에 開通式, 每日申報, 1937년 7월 13 일 ; 水原-仁川間 鐵道 今日부터 運輸開通, 東亞日報, 1937년 8월 7일. 105) 水仁鐵道 二十日開通, 東亞日報, 1937년 7월 2일 ; 水仁鐵道 開通祝賀, 東亞日報, 1937년 7월 9일 ; 京東鐵道의 水仁線 開通, 朝鮮商工新聞, 1937년 8월 7일(윤옥경, 앞의 글에서 재인용) 106) 朝鮮總督府官報 第3168號, 1937년 8월 6일 ; 水原-仁川間鐵道 今日부터 運輸開通 西海岸 干潟地를 橫斷, 東亞日報, 1937년 8월 7일.
247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47 그림 86. 수인선 안내도 ( 조선철도협회회지 16, 1937에서 전재) 5. 수인선의 변천과 쇠퇴 수인선은 개통 후 수여선과 연계하여 중부내륙지방과 인천항간에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기능을 수행했는데, 화물의 수송기능이 주를 이루었다. 하루 1~2편의 버스에 의존하던 때에 비해 개통 후 수원~인천간의 인적 물적 교류는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수인선의 성공적인 개통에 힘입어 경동철도는 폭주하는 화물을 감당하기 위하여 창고시설과 인입선을 확충 하고 역사를 증축하는 등 사세를 확장해 갔다.107) 특히 내륙의 미곡을 중 심으로 하는 곡류와 소금 등이 속속 집하되면서 인천의 경기는 다시금 호 황을 구가하였다. 앞의 표 2에 나타나듯이 1936년 수출액 72,754,220원 수이입액 158,960,305원에 그쳤던 인천항의 물동량은 수인선 개통후 크게 증가하여 1938년에는 수출액 129,860,789원 수입액 214,740,541원에 달 할 정도로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108) 때문에 개통 후 채 1년도 못되어 협궤를 광궤로 개수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총독부 당국자들로부터 제기되 107) 水原市, 앞의 책, pp.1256~ ) 昭和12年 朝鮮總督府統計年報, 朝鮮總督府, 1942, pp
24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기도 하였다.109) 또한 수인선을 이용하는 화물과 여객이 꾸준히 증가하면 서 1940년경에 이르면 노선의 광궤화 및 개량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에 이르렀다.110) 인천부세진흥회는 수인선 광궤화와 노선 개량의 필요성 을 지적하는데서 나아가 인천항역의 확장을 요구하기도 하였다.111) 이러 한 움직임은 이듬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이를 통해 당시 인천지역 경제계가 수인선의 경제적 역할에 높은 기대치 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동철도 영업실적(1937~1942)112) 수 총 액 , , , , , ,987 입 지 객차 화차 잡수 수입 수입 입 139,97 219, ,01 392, ,54 276, ,48 275, ,75 287, ,30 161, ,763 55,287 41,237 43,738 59,680 55,298 총 액 보선비 기차비 324, , ,71 6 출 운수 비 총계비 및 ,916 27, ,72 128,09 258,90 111,22 102, ,91 120,62 344,20 123,52 102, ,08 169,44 469,60 134, , , , 비 고 관련비 634,61 131,01 283,54 118,67 101,04 7 기 타 수익금 1 9,311 76, , ,438 1,955-6,195 97,468 61,617 67,863 75, , ,961 조선철도 경동선 그러나, 개통 초기에 상당한 영업이익을 누렸던 경동철도는 1940년부터 운송수익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재정상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 국, 경동철도는 1942년 8월 조선철도주식회사에 매각되어113) 경동선 109) 朝鮮商工新聞, 1938년 4월 22일(수원시, 위의 책, p.1261에서 재인용). 110) 水仁線廣軌化 改良을 陳情, 每日申報, 1940년 4월 12일. 111) 水仁線廣軌改替와 港驛改築新要望, 每日申報, 1940년 10월 4일. 112) 표는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의 해당년도 자료를 토대로 작성. 113) 每日申報, 1942년 7월 18일 ; 8월 5일
249 개화기~일제강점기 인천의 산업과 경제 249 으로 개칭 운영되었다. 경동선은 1945년 해방이후 敵産으로 미군정에 접 수되었다가 1946년 5월 17일부로 여타 사철과 함께 국철에 흡수되었 다.114) 수인선은 국철화 이후 화차를 새로 도입하고 폐쇄했던 역을 부활 시켜 계속 운영되었지만,115) 도로교통의 발달에 따라 쇠퇴일로를 걷게 되 었다. 6. 맺음말 근대 인천의 철도교통은 개항장에서 식민지 외항으로 굴곡을 겪은 인천 항의 변천과 궤를 같이하여 건설되고 운영되었다. 특히 이 글에서 중점적 으로 살펴 본 수인선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부설과 군산, 목포 등의 부상 으로 인천항의 독점체제가 붕괴된 이후 1920년대 후반부터 오랜 침체에 빠진 인천의 경기부양을 위해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부설한 사설철도이 다. 1921년 인천지역 일본인 사업가들의 단체인 인천상업회의소 에서 처음으로 수인선과 한반도 횡단철도 건설을 주창한 것은 동서횡단철도를 건설하여 일본인 경제영역을 확충하고 미곡 등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여 인천항의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인선은 수여선을 부설한 경동철도주식회사 에 인천지역 일본인들이 출자를 하는 형태로 구체화 되어 1937년 협궤 철도망으로 완공되었다. 수 인선은 개통 후 수여선과 연계하여 중부내륙지방과 인천항간에 화물과 여 객을 수송하는 기능을 수행했는데, 화물의 수송기능이 주를 이루었다. 수 인선 개통 이후 수여선 연변의 미곡과 남동역 및 소래역 주변 염전의 소 금 등이 속속 집하되면서 인천의 경기는 다시금 호황을 구가하였고, 인천 항의 물동량도 크게 증가하여 노선의 광궤화 개량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 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일제의 전시경제체제와 도로교통의 발달로 인해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114) 法令 第75號 朝鮮鐵道의 統一, 美軍政法令總覽, 韓國法制硏究會, pp.199~200 ; 운수부, 경남 경춘 조선철도 등 3개 사설철도의 접수식 거행, 서울신문, 1946년 5월 3일 ; 운수부총 무과장, 3개의 사설철도회사 접수에 관해 기자회견, 東亞日報, 1946년 5월 19일 ; 朝鮮銀行 調査部, 朝鮮經濟年報(1948年版), 1948, pp.Ⅰ-158~159 ; 鐵道廳, 韓國鐵道史 2, pp.251~ ) 水仁線 野牧驛 復活, 朝鮮日報, 1949년 7월 18일.
25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51 추교찬 ( 인하대학교 )
252
253 일제강점기 인천의 도시 발전과정 253 일제강점기 인천의 도시 발전과정 년 인천 대화재에 대하여 추교찬 (인하대학교) 1907년 7번의 화재가 발생 그 가운데 피해가 큰 화재 - 3월 5일 화재 - 7월 18일 화재 - 7월 31일 화재 - 10월 19일 화재 - 12월 16일 화재 - 12월 21일 화재 1907년 3월 5일 화재
25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 화재발생 지역 당시 조선정(朝鮮町) 1정목(현재 신포동 신포시장 일대) - 화재 발생 시간 및 진화 : 새벽 4시 40분 무렵 ~ 9시 15분 - 화재 피해액 소실가옥 - 400여 호(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이재민 - 3,000여 명 손해액 - 200만원 - 주요 피해자 조선일일신문사(朝鮮日日新聞社), 택합명회사(宅合名會社), 중야곡상점(中野谷商店), 근강오복점(近江吳服店) 등 - 화재 원인 발화한 중촌신조(中村新助) 집 하녀 과실 1907년 7월 18일 화재 - 화재발생 지역 당시 본정(本町) 3정목 (현재 중구 중앙동4가 공영주차창 뒤쪽 제일 은행 앞)
255 일제강점기 인천의 도시 발전과정 화재 발생 시간 및 진화 : 오전 9시 30분 경 ~ 11시 30분 - 화재 피해액 : 소실가옥 50여 호, 피해액 20만원 - 주요 피해자 : 칼월터, 중야곡수웅(中野谷秀雄) 등 1907년 10월 19일 - 화재발생 지역 당시 본정(本町) 4정목 (현재 중구 중앙동 4가 염염집 아래 블록) - 화재 발생 시간 : 오전 11시 20분경 시작 ~ 12시 - 화재 피해액 : 10만원 - 주요 피해자 : 천정병원(淺井病院) 등 1907년 12월 16일 화재 - 화재발생 지역 당시 중정(仲町) 1정목(현재 중앙동 진흥각 제일은행 블록) - 화재 발생 시간 및 진화 : 오후 7시 30분 경 ~ - 화재 피해액 : 15만원 - 주요 피해자 : 청한양행(淸韓洋行), 河野竹之助, 中野常次郞 등
25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1907년 12월 21일화재 - 화재발생지역당시화방정 ( 花房町 ) 2정목 ( 현재북성동차이나타운풍미 공화춘블록 ) - 화재발생시간및진화 : 오후 3시경 ~ 4시 30분 - 화재피해액 : 창고소실, 손해액 17,000~18,000엔 - 주요피해자 : 木村淸太郞창고 화재이후의대책 - 천황및통감, 민간의피해금품모집 - 일본거류민단및각국거류지회경비로소방장비구입 - 피해지역도시개조및도로확장 - 건축재료강제
257 황지현 (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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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한국의 목칠공예 259 한국의 목칠공예 황지현 (국립중앙박물관) 목 차 Ⅰ. 한국 목칠공예의 흐름 Ⅱ. 한국 목공예 이해의 기초 Ⅲ. 朝鮮時代 木家具 Ⅳ. 韓國의 螺鈿漆器 Ⅰ. 한국 목칠공예의 흐름 인류가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자연에서 가장 손쉽게 구하고 다룰 수 있는 재료는 나무였다. 나무는 사람의 손길을 거친 후에도 부드러운 촉감과 아름다운 나뭇결을 간직하고 있어 이를 이용한 木工藝는 우리에게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잘 전해준다. 습기나 벌레의 해를 막고 장식으로도 이용된 漆工藝 역시 옻나무의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목공예 대부분은 그 바탕에 옻칠을 한 경우가 많아 목공예와 칠공예의 역사를 함 께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목칠공예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살펴볼 수 있다. 이 중 기 원전 4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는 牙山 南城里 遺蹟에서 출토된 칠조각 (漆片)들은 이 시기 우리 나름대로의 木漆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우리나라 목칠공예품 중 출토지가 확실하고 가장 오래된 것은 慶 南 昌原 茶戶里 古墳群과 光州 新昌洞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기원 전 1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곳 출토 木漆器와 그 제작도구의 수준으로
26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미루어 우리나라에서 목칠공예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3세기 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 목칠공예는 古墳壁畵, 역사서, 고분 출토품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平床과 음식상(食床), 백제 武寧王陵 에서 나온 금속판을 덧붙인 옻칠한 나무 관(木棺)이나 금박 칠 그림(漆 繪)으로 장식한 베개(頭枕)와 발받침(足座), 三國史記 에 기록된 신라 목공木工 담당 관청과 고분 출토 漆器 등은 삼국시대 목칠공예품의 사용 과 전문화된 제작기술에 대해 알려준다. 통일신라시대 목칠공예품으로는 경주 雁鴨池에서 출토된 나무 바탕에 칠 을 한 木心漆器가 있다. 이것은 무덤의 껴묻거리가 아닌 실제 생활용품으 로서 당시 생활화된 목칠기의 사용과 제작기법의 발달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옻칠한 나무 容器에 銀板을 붙이고 다시 칠을 한 목심칠 기는 나전칠기의 선행기법인 平脫기법이 이 시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관청의 물품을 관리하는 中尙署, 都校暑에 목칠기를 만드는 여러 분야의 匠人이 소속되어 기술별로 분화된 작업을 담당하였 다. 또, 高麗史, 宣和奉仕高麗圖經 등에 기록된 立式生活 가구와 儀式에 사용된 목칠기는 당시 다양한 목칠공예품의 제작과 사용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목칠공예품은 대부분 나전칠기와 불교 관련 공예품이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는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을 구어 남녀의 역할 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한 집안에서도 남녀가 생활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각각의 공간 특성에 맞는 목가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목가구 는 좌식생활을 하는 韓屋에 맞게 폭이 좁고 높이가 낮았으며 일부 여성용 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검소하고 단순하게 제작되었다. 또 家廟制度의 실시로 조상에게 올리는 祭禮가 철저히 지켜졌는데 조상의 神主를 모시고 祭를 지내는 祠堂에서 사용하는 가구가 만들어져 집안 대대로 전해졌다. 목가구와 함께 나무 용기 표면에 칠, 자개. 얇게 펴서 채색한 소의 뿔인 華角으로 장식한 공예품도 활발히 제작되어 궁중이나 상류층 혹은 여성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261 한국의목칠공예 261 Ⅱ. 한국목공예이해의기초 1. 나무의종류 남북으로국토가긴우리나라는나무의종류가다양하다. 또, 사계절이뚜렷한온대기후의영향으로나이테가선명하다. 나이테는봄에서초여름에걸쳐성장이빨라그지름이크고, 늦여름에서가을에는성장이더뎌지름이작아, 이것이한쌍이되어오랜세월이지나면나이테를형성하기때문이다. 따라서나무종류에따라재질과무늿결이저마다독특한성질을갖고있어제작하려는물건성격에알맞은목재를선택하는것이무엇보다도중요하였다. 목가구에사용되는나무는힘을받는기둥재 ( 骨材 ), 널판으로사용하는板材, 장식용으로사용하는附材로나누어사용하였다. 기둥재는곧고단단한나무의곧은결 ( 柾木 ) 을판재는무늬가뚜렷한나무를늘결 ( 板木 ) 로마련하였고부재는소용돌이나엇갈린무늬를이룬뿌리부근의根材, 대나무등을사용하였다. 소나무우리나라건축에서가구에이르기까지가장널리사용되는나무이다. 수축팽창이크지않고우리나라전역에고르게분포되어주변에서쉽게구할수있다. 나뭇결이부드럽고시각적으로도안정되어보이므로문방가구에애용되었다. 가구의기둥과쇠목 ( 두기둥사이에가로대는나무 ), 동자 ( 문판의좌우, 상하에위치한널판을나누고힘을보강하기위한나무 ) 등의기둥재와장과농의판재로도사용되었다. 단단하고습기에도강해찬장과찬탁, 뒤주, 소반등부엌가구의재료이기도하였다. 오동나무오동나무의섬유질은습도조절이쉬워종이, 옷등습기에약한물건을보관하는데적당한재료이다. 또, 판재를얇게켜도터지지않고가벼우며광택이없어검소한분위기를추구하는사랑방용품의재료로많이사용되었다. 단, 표면이무르고판재색이흰것이단점이다. 이러한점을
26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보완하기위해나무표면을인두로지진후볏짚으로문질러단단한무늬 결만남기는烙桐法을사용하기도하였다. 느티나무느티나무는다른나무에비해수명이길어높고굵게자라는나무이다. 또, 나뭇결이아름답고분명한느낌을주어남성과여성용품에널리사용된다. 반닫이, 궤등에는두꺼운판재로사용되어단단하고묵직한느낌을준다. 소용돌이모양무늬나용목 ( 龍木 : 옹이나밑동근처의용이뒤엉킨형상의무늬목 ) 이아름다워장식재로많이사용되나수축팽창의폭이크고뒤틀리는단점이있다. 먹감나무단단한감나무에자연적인검은먹이들어있는나무이다. 황갈색을띠고있는바탕에검은색이어우러져추상적이면서도水墨畫와같은느낌을준다. 검소하고부드러운느낌으로사랑방, 안방모두사용되었다. 은행나무은행나무는다른나무에비해넓은판재를얻을수있으며얇게켜도터지거나휘지않는다. 또, 탄력이있어흠이잘생기지않고좀, 벌레의해에강하며가벼워서운반에도편하므로예로부터소반의재료로널리이용되었다. 배나무배나무는나뭇결이곱고탄력이있으면서도단단하다. 따라서도장, 扇貂, 壯刀와같은물건을조각하기위한재료로사용된다. 또, 크기에비해큰힘을지탱할수있고무늿결이강하지않아탁자, 장과농의기둥과쇠목 ( 두기둥사이에가로대는나무 ), 문변자 ( 뒤틀림을막기위해문판의둘레에대는테두리 ) 등에사용되었다. 참죽나무 참죽나무는나뭇결이굵어느티나무와비슷한느낌을주지만뒤틀림이 별로없고튼튼하며큰힘이필요한가구의기둥재, 골재, 쇠목등에쓰
263 한국의 목칠공예 263 인다. 붉은 색을 띠고 있어 검은 오동나무 판재와 함께 사용하였다. 피나무 부드러우면서도 넓고 두꺼운 재료를 구할 수 있어 속을 파내는 함지에 사용된다.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무늿결이 아름다워 장과 농의 앞 판재로 쓰인다. 2. 짜임과 이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목가구는 주로 온돌에서 사용되었기 때문 에 온 습도의 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 뒤틀림과 터짐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였다. 뚜렷한 온도의 차이로 아름다운 목리를 얻을 수 있지 만 환경에 따라 수축팽창이 심하므로 넓은 판재는 휘거나 터지기 쉽다. 그러므로 짜임과 이음에 대한 구조적인 복안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비교적 넓은 판재로 구성된 장과 농의 전면前面을 쇠목이나 동자 등의 골재로 분 할하여 머름칸이나 쥐벽칸, 복판 등 좁은 면들로 재구성하였다. 무늬가 좋은 판재는 2~3mm 가량 되게 얇게 켜서 수축팽창이 별로 없는 오동나무 나 소나무 판재에 결을 엇갈려 붙인 후 골재에 끼웠는데 이 때 접착제나 금속 못 대신 홈에 끼우는 기법을 사용해 홈 안에서 수축팽창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게 하였다. 즉, 넓은 판재를 사용하기 보다는 단단하고 가느 다란 기둥재로 면을 분할하고 기둥재에 홈을 파고 판재를 끼워 넣어 환경 변화에 따라 목재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보다 튼 튼한 구조를 위하여 접착제나 나무못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꼭 필요한 부분에만 사용하였다. 이는 간결한 선과 명확한 면 분할이 특징인 조선 목가구 제작에 필수적인 방법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보이 지 않는 내부 구조까지 고려한 격조 높은 기법이었다. 1) 짜임 기둥재와 기둥재, 기둥재와 쇠목, 기둥재와 판재를 이어주는 방법이다. 겉으로 보이는 단면에 따라 크게 4가지 종류로 나뉜다.
26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맞짜임겉으로보이는단면이직각으로연결되는것. 속으로촉을끼워넣어힘을보강하였다. 연귀짜임단면을서로엇비껴짜여진부위가 45도로만나는짜임 턱짜임한쪽의단면을다른쪽에새겨물리는방법 사개짜임단면이마치손가락을맞물린것처럼짜는방법 2) 이음필요한만큼의목재가없을때목재끼리서로이어주는방법이다. 쪽매이음판재와판재를직접이어주는방법. 단면모양, 이을때의처리방법에따라빗쪽매이음, 반턱쪽매이음, 오늬쪽매이음, 제혀족매이음, 딴혀쪽매이음등이있다. 촉이음판재와판재사이에촉을끼어넣어겉으로는표시가나지않지만전체적인이음을보강해주는방법. 촉모양에따라나비장촉이음, 원두촉이음등이있다. 3. 꾸밈 1) 옻칠옻나무에서나오는액을칠로서이용하는것이다. 옻나무에상처를내면액체가나와공기에닿으면암갈색이된다. 이러한生漆을골고루섞어가며 40 까지열을가해수분을증발시키고여과과정을거쳐불순물을없애정제된칠을만든다. 우리가보통모는검은칠은옻나무액에산화철을넣어검게만든것이고붉은칠은정제된옻나무액에수은성분이들어있는붉은朱粉을섞어만든다. 붉은칠과검은칠은주로궁중용품에이용되다.
265 한국의목칠공예 265 2) 나전소라, 전복, 진주조개의속껍질을잘게썰어만든조각으로자개혹은貝殼이라고도한다. 진주빛광택이나는오색영롱한빛을띠면서화려한느낌을주는데특히우리나라에서는청록빛깔을띤복잡한색상의전복껍질을많이사용하였다. 이러한나전을목기의표면에붙여장식하는방법을나전칠공예라고한다. 3) 화각물에불린어린소의뿔을얇게펴서일정한크기의사각으로얇게갈아투명하게만든것을角地라고하는데그위에붉은색, 노란색, 초록색등의화려한石彩로그림을그린후그림이그려진면을물건표면에붙이는것이다. 4) 대나무 낙죽법 : 대나무를뜨거운인두로지져무늬를나타나게하는방법 양각법 : 무늬를선각하고무늬외의바탕을일정하게긁어내고검은칠을하여무늬를돋보이게하는방법 죽장 : 나무로된물건표면에대나무를가늘게쪼개기하학적무늬나글자무늬를만들어붙이는방법 5) 낙동법 오동나무판재의표면을뜨거운인두로지져서태운후볏짚으로문질러 단단한무늿결만남기고연한표면을깎여나가게하는방법. 6) 착색과도장자연그대로의목재를그대로사용하면때가타고표면이약하여흠이나기쉽다. 이를보완하기위해표면에색을입힌후기름이나옻칠을입히는방법이사용되었다. 착색은감, 치자, 먹물을이용하거나생솔가지의연기를쏘이고혹은황토분이나白土粉혹은산화철이함유된石間硃를물에타서바르고천으로색의농도를조절하며닦아낸다. 표면에바르는것으로는호두, 잣, 동백, 피마자등식물성기름을사용
26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하는데굵은베로표면을문지르면엷은막이형성되어물건을보호할수 있고윤기가나게된다. 또, 옻나무에서채취하는옻을묽게하여바르면 적당한윤기와함께단단한칠이표면을보호하여오랫동안사용할수있다. 4. 장석 장석은물건의사용을편리하게해주고목재와의연결부분, 모서리를튼튼하게해줄뿐만아니라나뭇결을돋보이게하는금속장식이다. 원래는물건을편리하게사용하고힘을보강하기위해사용되었으나조선후기에이르러장식성과화사함이강조되는여성용품에장식용으로장석이사용되었는데특히경상도일원에서크게발달하였다. 재료로는주로무쇠와주석그리고백동이가구의용도와형태에따라선택되었다. 1) 경첩 : 가구의문과몸체를연결하여문을여닫는기능 2) 들쇠 : 가구를들어옮기거나서랍, 문을잡아당기는기능 3) 고리 : 문을여닫을때잡아당기거나다른문에걸쳐자물쇠를채우는기능 4) 자물쇠 : 여닫이문에부착되거나채워져서열쇠로열도록하는장치. 뻗침대, 고리, 앞바탕과함께구성 붙박이형자물쇠 - 숨은자물쇠 : 자물통이없고자물쇠장치가감추어져있거나앞바탕위에열쇠구멍만보이도록한것. 은혈자물쇠라고도한다. - 선자물쇠 : 가늘고긴사각기둥의형태를지닌것. 쥐꼬리자물쇠라고도한다. - 두껍닫이자물쇠 : 자물통속에잠금장치가되어있고아래구멍에열쇠를밀어넣어열리도록한것. 북통자물쇠라고도한다. - 꺽쇠형자물쇠 : 천판과앞면의꺾인부분에ㄱ자형으로금속판을고정하고원형배꼽장식을붙여여닫게한것. 거북형자물쇠라고도한다.
267 한국의목칠공예 267 독립형자물쇠 : ㄷ자형자물쇠, 물형자물쇠 5) 앞바탕 : 자물쇠, 들쇠, 고리등의받침으로나무의손상을막고장식기능 6) 뻗침대 : 위, 아래로여닫는문의들쇠역할, 자물통을끼울수있는역할, 문을열어젖혔을때뚜껑의무게를받쳐주는역할 7) 광두정 : 머리가넓은못으로못자국이나목재의흠집을감추는역할 8) 감잡이 : 모서리나접합부분을양면에서단단하게감아쥔장석 9) 귀잡이 : 두목재가이어지는접합부위에직각으로부착 10) 통귀쌈 : 3면이모이는귀퉁이부분을통째로감싸주는장석 Ⅲ. 朝鮮時代木家具 조선시대는유교의윤리관에따라남성과여성의위치와역할이뚜렷이구분되어한집안에서도생활공간이분리되었다. 따라서사랑방, 안방, 부엌등각각의특성에맞는목가구와생활용품이제작되어사용되었다. 또, 방바닥에앉아서생활하는한옥은천장이낮고실내가좁아여기에놓이는목가구는시각적인부담을줄이고보다넓은공간을확보하기위하여작고간결하게만들어졌다. 현재전해지는목가구는대부분조선후기의것들로단단한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4등의곧은결을기둥재로이용하고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등의늘결을판재로사용하여자연스런나뭇결의재질을살렸다. 또, 대나무혹은마디져엇갈리거나소용돌이무늬를이룬뿌리부근의목재등을활용하여자연스러운장식이되도록하였다. 1. 사랑방가구 사랑방은조선시대家父長의공간으로학문을닦는서재즉文房이자남자손님에대한접대의장소로쓰여정치, 경제, 문화등사회적교류가주로이곳에서이루어졌다. 따라서사랑방은주인의안목과격을알리는척도가되어士大夫들의높은안목과세련된취향에맞도록꾸며졌다. 사랑방의주인인사대부, 선비들은비록사회지배층이기는하였으나淸
26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貧을 덕목으로 삼아 그들이 사용하는 가구나 생활용품도 간결하고 격조가 높은 것을 선택하였다. 재료로는 시각적으로 부드럽고 소박한 소나무와 오동나무가 주로 사용되었고 느티나무와 먹감나무의 나뭇결을 이용한 장 식으로 自然美를 강조하였다. 특히 먹감나무의 검은 무늬는 마치 墨畵와 같아 선비들의 문방용품에 자주 애용되었다. 소나무나 오동나무로 만든 가구 중에는 인두로 지져 나뭇결을 드러내거나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표 면에 붙여 장식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보통은 들기름이나 호두 기름으로 표면을 문질러 목재가 트는 것을 방지했을 뿐이다. 文匣 문갑은 서류를 보관하고 각종 문방용품을 진열하는 가구이다. 보통 뒷마 당으로 통하는 창문 아래나 아랫목 옆 벽면에 놓았다. 높이가 낮아 벽면 에 시원한 여백을 주었고 폭은 방에서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도록 좁게 만들었다. 한 짝으로 된 單文匣과 두 개가 한 조를 이룬 쌍문갑이 있는데 단문갑은 보통 쌍문갑에 비해 높이가 비교적 높다. 소품을 넣기 위한 작 은 서랍과 선반으로 이루어진 것과 서랍과 선반을 네 짝의 두껍닫이 문으 로 감춘 형태도 있다. 四方卓子 卓子欌 사방탁자는 사방이 트이고 각 충의 넓은 판재를 가는 기둥으로 연결한 가구로 책이나 玩賞品, 문방용품 등을 올려놓는데 사용되었다. 보통 3층 이나 4층이 일반적이며 한 층이나 맨 아래 층에 문을 달아 장처럼 만들거 나 서랍을 설치하여 보관의 기능을 높이기도 하였다. 단순하고 절제된 느 낌으로 현대적 감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가구로 평가받는다. 하단이나 중 앙의 한두 층에 장을 설치하고 나머지 측널과 뒷널이 막힌 형태는 탁자장 이라고 한다. 書案 서안은 글을 읽고 쓸 때 사용하는 책상의 일종이다 한옥은 바닥에 앉아 서 생활하는 좌식생활로 서안도 여기에 맞추어 책을 하나 정도 펼 수 있 는 정도의 작은 크기에 높이도 낮았다. 재질이나 장식 등 주인의 취항에 따라 다양한 것이 전해지지만 선비들이 늘 곁에 두고 사용한 가구여서 단
269 한국의 목칠공예 269 순하면서도 격조가 높은 것들이 많다. 經床 경상은 원래 사찰에서 불경을 읽을 때 사용한 책상의 일종으로 적어도 16세기 경에는 사랑방에서 서안으로도 사용되었다. 천판의 양끝은 말려 올라가 두루마리 귀를 가지고 있고 다리는 S자형의 虎足形 다리이며 다리 에는 대나무 마디모양 혹은 당초무늬의 조각 장식이 달린 것이 특징이다. 두루마리 귀는 두루마리나 접책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硯床 연상은 벼루를 보관하고 종이, 먹, 붓 등의 文房四友와 연적 등의 소품 을 한 곳에 모아두고 정리하는 문방가구로 서안 옆에 두었다. 연상은 벼 루를 두는 뚜껑이 있는 상단과 소품을 놓은 트인 하단 그리고 그 중간의 서랍으로 구성되었다. 紙筒 축으로 된 색간지(色簡紙:두껍고 질이 좋은 색 편지지)나 종이를 꽂아 보관하는 통 考備 색간지나 두루마리 등을 옆으로 꽂아 보관하는 편지꽂이의 일종. 2. 안방가구 안방은 안주인이 자녀를 기르고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가는 공간으로 따뜻 하고 화사한 분위기로 꾸며졌다. 따라서 안방가구는 나뭇결이 아름다운 느티나무, 먹감나무, 물푸레나무가 주로 이용되었고 여성 취향에 맞게 나 전이나 화각으로 장식되기도 하였다. 또, 사랑방가구와는 달리 꽃 새와 같은 무늬, 富와 福, 長壽를 기원하는 十長生, 吉祥文 등으로 꾸며지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주석이나 白銅으로 만든 각종 금속 裝錫으로 부착하여 기능성과 함께 장식성을 강조한 것도 특징이다.
27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장과농장과농은사계절의변화에따른많은의복과버선, 옷감, 솜등을보관하기위한가구이다. 내부에층이있으나측널이분리되지않고한판으로되어있으면장, 각층이분리되면농으로구분된다. 농은한짝씩분리되어움직이기쉽도록측널에들쇠가달려있다. 의걸이장옷을포개어넣어구김이생기는장과농의단점을보완하기위해옷을걸쳐둘수있는횃대를내부에설치한옷장이다. 보통 2층으로만들어져위층에는옷을보관하고아래층에는冠帽나帶등소품을보관할수있도록하였다. 빗접 퇴발낭 ( 머리를빗을때빠진머리카락을모아두는종이 ), 빗, 거울, 빗 치개, 빗솔등을보관하는함이다. 3. 부엌가구 조선시대가옥에서부엌은방과떨어져있었기때문에음식을장만해서마당, 대청을거쳐방으로운반하여야했다. 따라서부엌가구는크게부엌에서사용된종류와음식을나르고밥상으로도사용된소반종류로나뉜다. 부엌에서사용된가구로는찬장, 찬탁, 뒤주등이있다. 두꺼운판재와굵은기둥으로구성되어단순하면서도건강한아름다움을보여준다. 조선시대가옥구조는부엌과방이떨어져있고음식그릇으로는무거운놋그릇이나사기그릇을사용하였다. 따라서소반은옮기기편하고그릇의무게를견길수있도록단단하면서도판재를얇게켤수있는나무가사용되었다. 또, 한사람이상하나를사용하였기때문에집집마다크기가작은여러개의소반이마련되어소반의숫자로그집안의威勢와생활규모를가늠할수있었다. 다리모양, 상판의모양, 생산지역에따라다양한종류가전한다.
271 한국의목칠공예 271 찬장과찬탁찬장은그릇이나음식을보관하는가구로그릇의무게와음식으로인한쥐, 해충의피해를고려하여단단하면서도해충에강한나무를사용하였다. 찬탁은식기를얹어놓는가구로유기나자기와같은그릇의무게를감당하기위해튼튼한목재를선택하였는데중간층에문을달아보관의기능을높인종류도있었다. 뒤주곡물을담아두는가구로크기가다양하고쌀과잡곡을구분해서보관하였는데보통큰것은쌀을작은것은잡곡을보관하는용도로사용하였다. 소반의종류 - 다리모양에따른분류 : 호족반, 구족반, 일주반등 - 상판모양에따른분류 : 반월반, 사각반, 원반, 화형반등 - 생산지에따른분류 : 해주반, 통영반, 나주반, 강원반등 4. 기타 궤, 반닫이나무로짜서옷, 제기, 책등다양한물건을넣어둘수있는다용도가구이다. 나뭇결이좋고두꺼운판재로사개짜임을하여튼튼하게만들고무쇠로된큼직한장석을달아단순하고튼튼한느낌을준다. 반닫이는앞판의반정도를여닫이문으로사용하여천판위에이불이나여러물건을올려놓을수있었다. 궤는천판의반정도를문으로사용하여윗닫이라고도하였다. 반닫이에비해높이가낮고폭이넓은편이다. 약장한약재를담아두는장으로약재의종류에따라많은서랍이연속적으로설치되어질서정연한아름다움을보여준다. 서랍에는약재의이름을써넣었고하단에는잠금장치가설치된장이나서랍을두어극약이나독약을보관하였다.
27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Ⅳ. 韓國의 螺鈿漆器 1. 고대 한국 나전칠기의 시작을 알려주는 직접적 기록이나 현존 유물은 없다. 그러나 古墳 出土 漆器나 관련 유물, 類似 裝飾技法의 存在는 통일신라시 대 나전칠기 제작의 추정 근거가 된다. 가장 오래된 漆器 關聯 資料는 아산 남성리 출토 漆片이다. 이와 함께 樂浪 漆器나, 낙랑 칠기와는 다른 계통의 昌原 茶戶里 遺蹟 출토 칠기도 존재하고 있다. 百濟 武寧王陵 出土 頭枕과 足座, 新羅 天馬塚 皇南大塚 등에서 출토된 칠기는 三國時代 칠기 전통이 계속되었음을 알려준다. 기법상 나전칠기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평탈 기법이다. 특히 三國史記 에 보이는 平脫器 使用 禁止 기록이나 雁鴨池 出土 平脫器는 통일신라시대 나전칠기 제작의 단서가 되고 있다. 2. 고려시대 현재 전해지는 한국 나전칠기는 고려( )의 작품부터이다. 고려 나전칠기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 아래 제작되어 더욱 우수한 품질을 이어 갈 수 있었고 특히 왕실 전용물품을 제作하는 中尙署에는 螺鈿匠, 漆匠 등이 소속되었다. 1132年 高麗에 使臣으로 온 宋 徐兢의 宣和奉仕高麗 圖經 에 '細密하고 精巧하여 貴하다고 할만하다'라는 평가에서 나전 제 작이 고려 전기에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또, 元宗 13년 (1272) 元의 요구에 따라 大藏經을 넣어둘 함을 만들기 위해 鈿函造成都 監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현존하는 나전경전함과 연결되는 기록으로 주목 된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 나전은 세계적으로 20점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 해 몇 가지 고려 나전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자개와 함께 金屬 線으로 唐草文의 줄기나 경계선을 만들고 적색, 황색 등으로 伏彩한 玳瑁 를 같이 사용한 점이다. 이와 함께 경전함에서 볼 수 있듯이 주문양인 국 화문과 C形의 螺鈿片 여러 개가 합쳐 국화문을 감싸면서 문양을 구성하며
273 한국의 목칠공예 273 이러한 문양은 금속선인 줄기를 따라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현존 고려 나전칠기는 대부분 불교용품, 여성용품이지만 기록상 나전 筆 匣, 硯匣, 盆 등의 종류는 다양한 기종의 나전칠기가 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3. 조선시대 儒敎國家인 조선( )이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와 화려한 나전칠기 는 이질적인 면모가 강했다. 그러나 조선 全時期를 통해 나전의 명맥이 끊어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세련되고 정교한 고려 나전칠기와는 달리 조 선 특유의 전통을 세워 발전해 나갔다. 조선은 국가 공업품 需要를 充當하기 위해 각 관청에 匠人을 예속시켜 서 울의 京工匠에는 漆匠과 螺鈿匠이, 지방 官衙의 外工匠에는 漆匠이 所屬 되어 나전칠기 생산을 담당하였다. 조선 나전칠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문양 종류의 확대, 구도와 문양 배 치의 다양성, 그리고 표현방법 등에서 조선 나름대로의 새로운 방향을 모 색하고 정착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또, 英祖, 正祖 이후 富의 축적과 신 분질서의 변동을 바탕으로 나전칠기 사용 계층이 확대되고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다양한 종류가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선 나전칠기의 시기 구분은 대략 문양 종류와 표현 방법, 그리고 기법 을 통하여 前期, 中期, 後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전기는 15-16세 기를 전후한 시기로 고려 나전칠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계열과 꽃문양의 크기가 확대되고 문양의 배치가 자유로워지는 등 새로운 특징을 보이는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법적으로는 고려 나전의 전통을 계승하는 계열에서는 毛彫法이 나타나고 꽃의 크기가 커지는 계열에서는 打擦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기는17-18세기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부터 부흥기라고 할 수 있 는 영 정조 시기로 전기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의 작품이 나타난다. 즉, 四君子, 花鳥, 포도와 같은 문양 종류가 나전칠기에 응용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고려 나전칠기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작된 나전칠기들 도 나타난다. 그리고 前期에 새롭게 創案된 타찰법이 적극 활용되었다.
27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후기는 19-20세기 초이다. 이 시기는 나전칠기의 사용 계층이 늘어나면서 器種이 다양해지는 한편 문양의 종류나 표현도 전기나 중기와는 달리 대 중적인 성향으로 나타난다. 즉, 福을 기원하고 吉祥을 의미하는 여러 가 지 文樣이 표현되거나 龜甲文과 같은 기하학적 문양, 山水文樣 등이 애호 되었다. 특히 이 時期에는 타찰법, 끊음질, 모조법 등 多樣한 技法들이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魚皮와 나전을 함께 사용하는 방법, 器物 전체에 나전을 붙이는 방법도 말기에 나타난 현상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삼대자, 전통 목가구, 대원사, 1994 나선화, 소반, 대원사, 1989 박영규, 한국의 목가구, 삼성출판사, 1982 박영규, 한국의 목공예, 범우사, 1997 박영규 김동우, 목칠공예, 솔출판사, 2005 배만실, 이조 목공가구의 미, 보성문화사, 1978 이종석, 한국의 목공예, 열화당, 1986 이종석 외, 목칠공예, 중앙일보사, 1981 최순우 박영규, 한국의 목칠가구, 경미출판사, 1982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문방제구, 1992 국립중앙박물관, 김종학화백수집 조선조목공예, 1989 국립민속박물관, 목가구, 2006 서울역사박물관, 한국의 목가구, 2002 서울역사박물관, 나무의 방, 2007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옛 가구의 아름다움, 1996 호암미술관, 조선목가구대전, 2002
275 이종민 ( 충북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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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고려 초기 청자 및 녹청자 277 고려 초기 청자 및 녹청자 이종민 (충북대학교) 목 차 1.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차문화와 중국도자 2. 차 소비지의 중심이동과 한국 청자의 출현 3. 국가운영체제의 확립과 청자중심 생산지의 이동 4. 품질의 다양화와 경서동계 조질청자의 생산 한반도에서 청자가 처음 제작되고 고려의 대표적인 도자공예품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차문화의 유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차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일부 상류층을 대상으로 음용되었으며 남북국시대부터는 상당히 보편화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문화의 유행이 직접적인 청자제작으로 이 어지는 과정은 아니러니하게도 혼란했던 9~10세기의 정세와 관련이 있으 며 차도구를 중심으로 한 청자들이 처음 한반도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초 기청자는 이러한 차도구가 중심이 된 초기의 청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소위 해무리굽완 이라 불리우는 다완과 관련 생산품들을 일컫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초기청자의 제작단계 이후, 청자는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지역을 중심 으로 저렴한 생산비를 들인 청자류가 탄생하였는데 대충 성형하고 재성분 이 많이 함유된 유약을 입힌 후 유색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대량생산했던 청자류가 바로 녹청자 이다. 녹청자는 동시대에 제작된 청자류에 비해
27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품질이매우낮아현재조질청자라는용어로불리우며인천경서동일대와해남진산리일대의가마터에서생산된예가알려져있다. 이글에서는청자가탄생하기까지의시대적여건과청자가만들어진직후의과정, 그리고청자문화의확산과정에서품질은비록좋지않았지만다양한계층을대상으로한조질청자가만들어진과정을간단히정리해보고자한다. 1.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 의차문화와중국도자 한반도에서차가하나의문화로자리잡기시작했다고볼수있는사료적인근거는善德女王 (632~647) 때이다. 그에앞서금관가야의시조金首露王의부인許황후에의해인도로부터차가전래되었다고보는설도있으나이를뒷받침할사료는없다. 본격적인차의성행시기는興德王 3년 (828) 大廉이唐으로부터차의종자를가져와왕의명으로지리산에심기시작한이후부터로알려져있으며 9세기에는국내의상류층사이에차문화가상당히보급되었던것으로추측된다. 중국으로부터의차문화유입이국내통일신라기의차도구형성에얼마만큼영향을주었는지알수있는자료는거의없다. 그러나통일신라시대상류층들의고급기호를만족시켜주는문화적요소들은대부분唐으로부터유입되고있었기때문에차와관련한도구중국산차도구들역시중국산제품이주로사용되었다고생각된다. 통일신라시기에제작되었던많은도기들중에서차와관련이있을것으로추정되는기명은당시의상류계층이살고있었던경주의안압지출토유물을통해확인할수있다. 이곳에서는일부침탄된넓은바릿대 ( 다완추정 ) 와함께茶俎로알려진경질도기가출토되어차문화를향유하는데필요한기명이도기로제작되고있었음을유추해볼수있다. 이들이외에컵형태의파수배나녹유잔탁등의제작예가사지나건물지등에서출토되고있어차, 술등과더불어고급음료를음용하는데자체적으로생산한고급도기가사용되고있었음을알게해준다. 통일신라시대에차를음용하는데사용되었던기명들은무엇보다도중국산자기가중심을이루었다. 중국산도자기는당시에중요한수입품목의
279 고려초기청자및녹청자 279 하나였으며집권층의기호를충족시켜주는중요한역할을하였다. 현재까지통일신라시대에수입된중국도자는심심치않게지방에서도발견되고있으나가장많은출토예는역시王京이었던金城 ( 慶州 ) 에서보이고있다. 통일신라시대에수입된중국도자의유형은청자, 백자, 흑유자기, 삼채등중국에서제작된도자의종류가망라되어있으며도자의원산지도다양하다. 일제강점기때경주에서출토되었다고전하는 < 황유갈채첩화장식주자 > 는長沙銅官窯의제품이며경주안압지발굴조사시에수습된 < 청자완 > 2점과부여부소산성출토의 < 청자완 > 2점은 8세기후반에서 9세기중반사이에유행했던중국다완의정수를보여주는예이다. 익산미륵사지에서는월주요산 < 청자화형완 > 과함께河北省邢窯産백자완 2점은통일신라말기에급증했던차문화의유입과음다풍습의확산에따라수입된도구임을증명해준다. 장보고유적으로유명한완도장도에서는 1991~1997년의발굴조사를통하여월주요계청자완, 발, 호, 병, 주자, 항편등과함께邢窯, 혹은定窯系로추정되는백자완, 호, 제작지미상인갈유병편등이발견되었다. 또한통일신라말에성립된九山禪門의하나였던충남보령성주사지출토품에는중국만당기의월주요계청자옥벽저완편, 정요계백자옥벽저완편, 북송기의요주요계청자편과정요계백자접시편등이수습되기도하였다. 이렇게 9세기대에수입된중국산도자의예는주로다완이나일부주자에집중되어있으며발견지도경주권일대와각지방의사찰이나건물지가중심을이룬다. 이와같은사실은통일신라후대의수입도자가차도구를중심으로이루어졌다는것을말해주며이를향유하는계층은상류의집권층과사찰에서도를행하는스님들이중심에있었다는것을알게해준다. 결국이러한음다풍습의성행은한반도에서다완을중심으로한청자의제작을개시하게한중요한동인이되었던것이다.
28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사진 1. 월주요산 완, 사진 2. 장사요산 주자 사진 3. 월주요산 완. 장도 출토 장사요산 물항아리 2. 차 소비지의 중심이동과 한국 청자의 출현 차의 유행과 수요는 9세기대의 남북국시대를 지나 10세기 초반의 후삼 국, 곧이어 고려초로 지속되었다. 정치, 문화의 중심은 경주에서 개경으 로 바뀌었으며 개성주변의 권력층과 지방호족, 스님들이 여전히 차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0세기 초반의 후삼국시기는 치열한 영토권 확보전쟁으로 인해 차와 중국제 차도구의 유통에 막대한 장애를 초래하였으며 공급처 역할을 했던 중국의 경우도 五代十國이라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으면서 차의 수요 와 공급은 단절에 가까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이미 다례는 초기 고려정부에서 집행하는 각종 대소사와 외교사절의 접대 등에는 차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여기에서 차와 관련된 재료와 도구가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차와 관련된 산업에 대 해경제적 가치를 알고 있었던 초기 고려의 집권층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이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최대의 시장으 로 부상한 개성 주변에는 중국 남방의 대표적 청자가마인 越州窯와 같은 구조를 가진 가마들(塼築窯)이 건설되었으며 중국 차그릇 셑트와 똑같은 유형의 청자를 생산해 내기 시작하였다. 즉, 차문화의 확대와 필요한 차 도구의 자체생산이 청자를 생산하게된 가장 큰 동기였으며 이는 중국인
281 고려 초기 청자 및 녹청자 281 도공들을 직접적으로 데려옴으로써 가능하였다.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도자생산은 지하굴형태의 소형가마에서 도기를 생산 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지상에 건립된 40m 짜리 대형 전축요는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가마였으며 이전의 단계와 는 분명히 다른 생산시설물이었다. 1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청자를 생산한 지역은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일산시 원당, 양주 부곡리, 배천 원산리, 봉천 봉암리 등지였으며 고려정부가 주도하는 일정한 제도안에서 동일한 규격과 품목의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0세기 말경은 변화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송과의 외교관계가 단절 되고 거란이 세운 요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장인의 주체도 중국인에 서 고려인으로 대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다완을 모방한 형태는 변화되어 내저원각이 나타나고 굽이 좁아지는 변화를 보이며 그릇 종류도 다양화되었다. 또 여주 중암리, 서산 오사리, 진안 도통리, 대구 진인동, 칠곡 창평리 등지에서 전축요를 소규모화시켜 청자들을 생산하였다. 사진 4. 배천 원산리 요지 사진 5. 시흥 방산동 요지 사진 6. 시흥 방산동 출토 완류
28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사진 r. 시흥 방산동 출토 갑발류 사진 ㄴ. 시흥 방산동 출토 주자류 3. 국가운영체제의 확립과 청자중심 생산지의 이동 혼란했던 10세기의 고려정부는 4대 광종이후 호족들을 제어하면서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으며 6대 성종대부터 8대의 현종대에 이르는 10세기말~11 세기초반 지방통치제제를 확립하였다. 이제 한반도의 남단지역도 고려정 부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11세기 초반에 이를 무렵 청자의 중심지는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전 남도서해안가가 중심이 되는 서남부지역으로 바뀌었다. 예로부터 강진을 위시한 서남부지역은 王建 가계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이 일대는 전통적 으로 도기요업이 성행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청자는 강진, 해남, 장흥, 고흥 등지의 해안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되었으며 다양한 품질의 청자 가 생산되면서 상당량은 서해안의 조운로를 따라 개성으로 흘러 들어갔 다. 개성으로부터 먼 서남부지역으로 생산지가 이동한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고려정부와 서남부일대의 세력간에 매우 긴밀 한 정치적, 경제적 공조체제가 가동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1세기의 청자중에는 고려의 식생활문화에 맞는 종류들이 생기고 형태도 일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기종은 아직 차도구가 중심을 이루나 다른 생 활용기들도 생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가마는 토축요로 불리 우는 10여m 가량의 작은 소형가마에서 청자를 생산했으며 초벌기술을 새 롭게 습득함에 따라 상품 청자는 비색에 가까운 유색을 보이기도 한다. 당시 청자생산의 중심은 강진으로 여기에서 가장 우수한 청자들이 생산되 었으며 주변 지역의 요장에서 강진의 청자들을 모방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283 고려 초기 청자 및 녹청자 283 공급하는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11세기 이후 강진 이 청자생산의 중심을 이루는 구조는 적어도 고려 중기가 되기 전까지 지 속되었다. 사진 9. 강진 용운리 사진 10. 강진요 생산 사진 11. 강진 용운리 10-1호 요지 청자완 9호 출토 반구편병 4. 품질의 다양화와 경서동계 조질청자의 생산 11세기 후반경 청자의 품질은 더욱 다양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초기 청자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소위 해무리굽완 의 비중이 점차 줄 어들고 크기도 작아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완을 중심으로 한 초기청자의 제작과정은 변화를 겪기 시작하였다. 특히 11세기 후반에는 중국과의 관 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요와의 관계를 적절히 청산하고 송과의 관계가 활성화되면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한족의 본류문화가 국내에 적극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약 80년간 거의 단절을 이루었던 송의 문화와 변화된 도자양식이 국내청 자에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이 즈음인 듯하다. 청자의 형태는 변하기 시작 했으며 여러 종류의 기종이 만들어졌고 특히나 품질은 더더욱 다양화되어 최고급 청자류로부터 아주 저급하게 제작된 하품들도 생산되었다. 이때에 요업을 시작한 생산지들이 바로 인천 경서동과 해남 진산리 일대의 가마 군이다. 이들 지역에서 생산된 품목과 생산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간단한 성
28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형방식, 초벌을 하지 않고 시유한 후 한 번에 구워내는 단벌번조방식, 가 마구조, 태토와 유약의 조합 등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은 원거리를 이동하여 공급된 도자라기보다는 해당지역과 가까운 곳의 경 제력이 빈약한 소비층을 위해 청자를 공급하던 곳이었다. 마침 시기적으 로는 청자의 소비가 왕성해지고 소비도 일상생활뿐 아니라 무덤을 쓸 때 에 청자를 중요한 부장품으로 인식하면서 상당량의 조질청자가 생산, 공 급되었다. 인천 경서동의 청자는 품질면에서 수준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계통의 청자가 없었다면 다양화된 청자의 소비욕구를 채워주지 못했었을 뿐 아니라, 청자의 소비층도 그만큼 한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 한 점에서 고려인의 생활사를 폭넓게 이해하는데 경서동의 조질청자는 매 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사진 106. 해남 진산리 17호 요지 사진 105. 인천 경서동 요지
285 고려 초기 청자 및 녹청자 285 사진 107. 인천 경서동 출토 완 사진 109. 인천 경서동 출토 접시의 굽 사진 108. 인천 경서동 출토 반구병 사진 110. 안성 매산리 고분출토 일괄
28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87 박진영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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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토기와 이해 289 토기와 이해 박진영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1. 토기의 발생 2. 토기의 제작 3. 시대별 토기의 양상 1. 토기의 발생 빙하기가 끝나고 자연환경이 새롭게 바뀌면서 인류는 정착생활과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식물성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 에서 토기가 처음 제작되었다. 토기는 물에 개어 정선된 점토를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이전 저장용 도구와는 다른 토기의 특성을 들자 면 음식물을 끓이거나 쪄서 익혀먹을 수 있는 점과 식수의 저장이 가능하 다는 것이다. 이는 식수와 식량의 저장과 운반범위를 넓히면서 인간 활동 공간의 확대를 가져왔다. 또한 토기는 식수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생 활용품들을 운반하고 저장하는 데 사용가능하였다. 토기의 제작방식, 성 형방법, 장식 등은 토기를 제작하고 사용했던 사회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 고 있어 그 사회를 복원하는데 단서를 준다.
29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2. 토기의제작 (1) 점토 토기는점토를빚어만드는용기로, 점토는 1차점토와 2차점토로구분된다. 1차점토는모암이풍화된것으로흙의입자가거칠며가소성이부족하다. 1차점토로만들어진토기로는신석기시대의빗살무늬토기, 청동기시대의민무늬토기등이있다. 2차점토는모암으로부터이동된것으로입자가아주작고가소성이풍부하며, 삼국시대의토기등이 2차점토로만들어진것들이다. 점토는토기를굽는가마근처에서채취된것으로추정된다. 채취된흙은잘게부수고불순물을없애며, 첨가물을섞어토기를성형하고구울시에생기는갈라짐과뒤틀림등을방지한다. 첨가물에는석영, 활석, 석면, 모래, 토기가루, 조개껍질, 짚, 식물줄기, 등이활용된다. 2차점토인고운흙을걸러내는과정을수비라하는데점토를곱게간후체에걸러불순물을없애고점토에물을부어흙이가라앉으면물을빼내는것이다. (2) 성형 토기의전체적인기형을성형하는방법으로는다음과같은 5가지방법이있다. 1 손빚기는점토를손으로주물러서토기를만드는제작기법으로토우나소형토기를만들때사용된다. 2 테쌓기는일정한굵기의점토띠고리를만들어한단씩쌓아토기를만드는방법으로신석기시대토기의제작방법에서확인된다. 3 띠쌓기는긴점토띠를나선형으로감아올려토기를성형하는기법으로무문토기부터사용된다. 4 회전대성형은회전판에점토바닥과띠를붙이고회전력을이용하여형태를만드는기술로삼국시대토기에서부터사용된다. 5 물레성형은강한회전에서생기는원심력을이용하여토기의형태를
291 토기와 이해 291 뽑아내는 것이다. 비교적 발달된 기술로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토기 옹기 도자기의 제작에 활용된 방법이다. 물레성형은 짧은 시간에 빠르게 진행되어야 하는 작업으로 대량생산에 적합하다. 토기의 크기가 크거나 귀, 꼭지, 띠, 손잡이, 다리 등이 붙어 있는 토기는 부분을 따로 만든 후에 서로 접합시켜 토기를 완성한다. (3) 정면 토기의 성형이 끝나면 토기의 표면을 정리한다. ① 물손질은 손끝이나 가죽, 포등을 사용하여 토기의 표면을 다듬는 것 으로 물손질과 회전물손질로 나누어진다. 나무판 등으로 된 정면도구를 대고 토기를 회전시키면 목리흔이 나타나기도 한다. ② 문지르기(마연)는 도구로 토기의 표면을 문질러서 광택을 내거나 매 끄럽게 하는 방법이다. 토기 벽의 균열을 방지하고 수분이 토기에 스 며드는 것을 막아준다. 청동기시대 적색마연토기 등에서 나타난다. ③ 긁기는 조개껍질, 나무판 등을 토기표면에 대고 긁어 울퉁불퉁한 표 면을 매끄럽게 하는 방법이다. 점토대토기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④ 두드리기(타날)는 태토에 들어있는 공기를 빼고 기벽을 단단히 만들기 위해 두드림 판으로 표면을 때리는 것이다. 기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안에 내박자를 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타날문토기가 있다. ⑤ 깎기는 표면을 칼이나 예새로 기벽의 일부를 깎아내는 방법이다. (4) 소성 토기를 제작한 후 굽는 시설을 가마라고 하는데, 외부공기에 노출된 노 천요와 공기가 차단되는 밀폐요로 나눌 수 있다. 노천요의 형태는 긴 도 랑과 같이 생겼으며 온도는 600~800 로, 공기에 노출되어 적갈색의 토기 를 제작할 수 있다. 토기를 구울 때는 가마 바닥에 나무나 마른풀을 깔고 그 위에 토기를 놓은 후 다시 나무나 마른 풀을 덮고 그 위에 점토를 덮 은 후 바닥에 깐 나무와 마른풀에 불을 지핀다.
29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처음에는 가마의 바닥이 평평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바닥이 경사지게 된 다. 노천요는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사용되었다. 밀폐요는 아궁이, 소성실, 굴뚝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바깥의 공기와 차 단하는 구조로 평요와 등요 등이 있다. 제작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소성온 도를 점점 높일 수 있게 된다. 밀폐요에서 제작한 토기들은 회청색 계열 의 표면색조를 띄며 자연유리막이 형성되어 수분의 흡습성이 적어진다. 3. 시대별 토기의 양상 토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문화와 접촉하고 제작기술이 발달하 게 되어 토기표면이 단단해지며, 기능에 따른 종류도 다양해진다. 선사시 대의 토기들은 지역별 세력별로 다른 형태와 구성을 보이다가 점차 시 간이 흐르고 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광역적으로 통일되는 모습을 보인다. (1)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가 사용되는데 지역에 따라 기형과 문양의 양상이 다양하다. 북부, 중서부, 남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의 형태가 각각 다르며,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중서부지역의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다 른 지역에서도 분포하게 된다. 토기의 표면에는 새기개로 긋거나 토기의 표면을 누르는 문양, 점토띠를 붙인 문양 등이 있다. (2) 무문토기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토기로 토기의 몸체에는 문양이 거의 없고 아가리 부분에 무늬가 있다. 아가리의 장식에 따라 각목돌대문토기, 이중구연단 사선문토기, 공열문토기, 구순각목문토기, 외반구연토기, 점토대토기 등 다른 시기의 토기들을 구분할 수 있다. 이외에도 홍도, 흑도, 채색토기 등이 있다.
293 토기와 이해 293 (3) 경질무문토기 외 초기철기시대에는 기존의 무문토기가 경화된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 등이 등장했다. 이는 요동지역의 전국계 타날문토기의 영향 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후 한반도 서북부지역 낙랑의 영향을 받은 낙랑 계 토기가 확인되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나타난 다. (4) 삼국시대 토기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는 국가가 형성되고 새로운 토기문화와 제작기술이 도입되었다. 이전에 비해 토기의 색조와 종류가 다양해지고 흡수성이 적으며 태토가 곱고 단단해진 토기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각 정치체와 지역에 따라 일정한 형식의 토기들이 형성되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토기라고 불리게 된다. 고구려 토기는 한강유역에서 확 인되는 원통형의 납작바닥토기가 특징이고 백제토기는 둥근바닥의 항아리 와 세발토기(三足器)가 대표적이다. 신라 가야토기는 굽다리접시와 높 은 토기받침(器臺), 굽 있는 목긴항아리(長頸壺)가 특징적이며 토기들 중 특히 고온으로 구워져 석기(炻器)라고도 불린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신라토기의 기형이나 문양에서 단순화되는 경향 이 있으며 찍은무늬(印花紋)이 유행하고 유약을 바른 도기가 사용된다. 1) 고구려 고구려 토기는 연질토기로 평저발(平底鉢), 양이호(兩耳壺), 단지 등이 대부분이다. 초기 3세기 이전에는 회흑색의 단지, 항아리, 잔이 사용되었 으며 중기 4~5세기에는 회색, 황갈색의 줄무늬토기, 6세기 이후에는 더욱 다양해져 생활용구인 벼루, 베개, 거울 등이 사용되었다. 사실 고구려 토 기유물이 소량인 관계로 아직도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2) 백제 백제 토기는 흑회색 민무늬 경질토기 제작방법을 바탕으로 승석문과 같
29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은양식으로사선문 ( 斜線紋 ), 거치문 ( 鋸齒文 ) 등의문양을보이고있다. 기형은원저호 ( 圓低壺 ), 개배 ( 蓋杯 ), 삼족기 ( 三足器 ) 등이있다. 또한불교의전파로화장용 ( 火葬用 ) 골호 ( 骨壺 ) 와다양한기대 ( 器臺 ) 를의식용으로사용하였다. 3) 신라-가야신라토기에뚜껑굽다리접시,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 항아리, 손잡이잔등의종류가있다는점은가야지역과공통된다. 그러나가야토기에는뚜껑목긴항아리와바리모양그릇받침이많은데비해, 신라토기에는굽다리목긴항아리가중요한기종이다. 개별기형 ( 器形 ) 의수준에서비교해본다면차이점을더욱쉽게파악할수있다. 예컨대굽다리접시의경우, 신라토기는그릇뚜껑에굽다리모양꼭지가부착되고기하학적무늬가새겨지는데비해가야토기는단추모양꼭지가달리고애벌레무늬가찍혀있다. 굽다리의형태에서도신라토기가직선적인원통형의굽다리를이등분하여아래위엇갈리게사다리꼴 ( 梯形 ) 의큰투창을대각하단까지뚫는다면, 가야토기는보통곡선적인나팔모양의굽다리를 3단으로구획하고상 중 2단에만세장방형 ( 細長方形 ) 의좁은투창을상하일직선으로뚫는다. 물론다른기종에서도이와같은대비는뚜렷한편이기때문에양지역의토기양식의차이는분명한편이다. 고신라토기에서통일신라토기로의이행은자연스럽게이어지고있기는하지만, 통일신라기는고신라고유의문화와외래의당나라문물이합쳐지면서고유한부분과새로운부분이교차하고있기때문에통일신라토기만의특징이나타난다. 통일신라토기의특징은다리에아주작은구멍을가진뚜껑없는굽다리접시 ( 無蓋式高杯 ) 의등장, 인화문 ( 印花文 ) 토기의성행, 그리고유약의사용이라고할수있다. 한편고신라후기토기에서보였던뚜껑받이가있는뚜껑굽다리접시는아직명맥을이어가고있다. 통일기토기의모습을보여주는이른예는경주충효동돌방무덤 ( 忠孝洞石室墳 ) 에서출토된토기들이며, 그보다조금늦은예는경주안압지에서출토된토기들이다. 이안압지는 674년에완공되었으므로, 이인공연못에서발굴된토기들의상한연대는바로이해가되는것이다. 또한안압지는 8-9세기에걸쳐실제사용되었던일상용토기의자료를많이제공하고
295 토기와 이해 295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주로 인화문이 날인된 주발형토기와 화병형의 토기가 많이 나왔고, 벼루나 장군, 약탕관모양의 그릇 등 다양 한 모양의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한편 울릉도 천부동(天府洞) 고분 에서는 목이 긴 병과 몸의 한쪽이 납작해진 특이한 모양의 토기들이 나왔 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인 9-10세기의 토기들로 여겨진다. 고신라토기는 4세기 무렵부터 통일이전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그 성격을 여러 번 바꾸면서 후대에 이르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의미 에서의 신라토기의 전통은 실제로는 통일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그 명맥 을 잃고 있다. 그러나 그 전통은 통일신라기의 일상용토기를 통하여 고려 시대로 넘어 갔고, 또 형태와 질은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의 옹기에까지 이 어져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토기장> ① 인화문토기대접 구연이 직립하였으며 반원형의 몸체에 밖으로 벌어지는굽이 붙어 있는 형태로 그릇의 내 외면에는 반원권문이 찍혀서 표현되고 있다. ② 인화문토기광구병 넓은 구연에 긴 목, 납작한 몸체의 기형으로 병의 외면에는 이중원권문, 점열문 등이 도장무늬처럼 찍혀서 표현되었고 문양이 바뀌는 경계에는 선문이 돌아가고 있다. ③ 유개고배 다리에는 엇갈려 2줄의 투창이 뚫어져 있고 뚜껑의 손잡이는 다리와 유사 하다. 고배는 제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④ 유개고배 신라기의 고배에 비해 다리의 투창이 소형으로 되었으며 전체적인 크기도 작아진 모습으로 뚜껑에는 통일신라기 대표적인 문양인 인화문이 찍혀져 있다.
29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5 파상문장경호긴목은 3등분되어그사이에파상문이시문되고있고그밑으로편구형의몸체가이어지고있다. 고배와함께삼국시대영남지역에서출토되는대표적인그릇의종류이다. 6 원저단경호 원형바닥을가진구형호 ( 壺 ) 로, 어깨부분부터승문과횡침선이촘촘히 시문되어있으며두개의이 ( 耳 ) 가달려있다. (5) 고려시대 청자와백자가탄생되는시기지만, 역시토기가더널리쓰였다. 이토 기의형태가청자의형태와같은점으로미루어, 청자와토기제작이병행 되었으리라추측된다. 1) 고려도기고려도기는통일신라토기의연장선상에서청자와다른계통으로서민들의용기로사용되었다. 그러나고려시대의도자문화가청자에맞춰짐으로써소홀히다뤄진측면이있다. 고려초기 (918~1100년) 의도기가마터는영암구림리와강진용운리가대표적이다. 통일신라질그릇의전통을그래로이어받아경질의회청색질그릇과연질의회흑색질그릇이제작되었다. 돌대장식이있는큰질그릇항아리들과사각병, 광구병, 작은병, 대발등이새로운시대를예고하듯만들어졌으며, 11세기에들어서는전형적인광구병과항아리가제작되었다. 기벽도얇아지고세련되어지며접시, 완, 합등은청자로제작되어구분중기 (1100~1250년) 의질그릇들은청자의발달과함께더욱세련되어지며매병, 기름병, 주전자, 정병등이청자, 청동그릇과같은형태로제작된다. 회청색의경질도기가주류를이루며약간의연질도기도만들어진다. 후기 (1250~1392년) 의질그릇들은기벽이두꺼워지고몸체에타날기법의돗자리무늬가남아있는매병, 장군, 호, 술병등이주류를이룬다. 청자의형태와같은주전자, 매병, 술병이많이만들어졌으며, 이들질그릇들
297 토기와이해 297 은신분, 생활정도에따라다르게제작되었을것으로짐작된다. < 고려도기장 > 1 토기소병 - 전체적인크기와입구가작고몸체는둥글게팽만한형태의이러한 소형병들은고려시대기름병으로쓰여졌을것으로생각된다. 2 인화문토기병 - 광구형입, 긴목, 긴타원형의동체, 받침대가달린기형의병으로표면에는인화문이시문되어있다. 통일신라기의인화문토기병과유사하다. 3 토기편호 - 넓은입구를가진장동형의몸체의양쪽면을눌러편평하게만든 호로, 표면에는성형과정에서생긴문양과유약이남아있다. 4 토기호 - 구연에는돌대가돌아가고있어요철면을이루며어깨부분이둥그렇게팽창하였다가다시서서히좁아져저부에닿는다. 표면에는물레질흔적이많이남아있다. 5 파상문토기호 - 짧게직립한구연밑으로편구형의몸체에대가달린호 ( 壺 ) 로, 어깨 부분에는두줄의파상문이돌려지고있다. 6 토기호 - 편구형의몸체에양쪽에손잡이가달려있으며몸체의중앙부분에는 두줄의돌대가돌아가고있다.
29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7 토기호 - 어깨부분이둥그렇게팽창하였다가다시서서히좁아져저부에닿는 기형의호 ( 壺 ) 로어깨에는 4 개의이 ( 耳 ) 가달려있다. 8 과형토기주전자 - 흑회색의경질토기로참외모양의몸통과뚜껑에는 8개의골이위, 아래로이어져있으며뚜껑과손잡이앞에는귀가달려끈으로연결할수있게하였다. 기와막새 기와는양질의점토로제작틀을사용하여일정한모양을만든후구워낸건축부재이다. 지붕을덮어눈과빗물의침수를차단하고이를흘러내리게하여목재의부식을방지하면서동시에건물의경관과치장을위하여사용되는건축부재이다. 한반도에기와가처음으로유입하게된것은중국의한 ( 漢 ) 의무제 ( 武帝 ) 가위만조선을기원전 108년에멸망시키고, 한사군을설치한기원전 2-1세기경이라고할수있는데, 이때를전후하여한반도의북부지방에목조기와집의건축술이새로등장하여유입되었다고생각된다. 원래목조건축의지붕에는이엉이나볏짚, 그리고나무껍질과같은식물성재료를사용했을것으로보고있으나내구성이약하여자주교체해야했기때문에방수효과나강도가높은점토소성품으로서기와가출현하게된것이다. 이후우리나라의기와는그동안각시대와지역에따라다양하게변천되어왔다. 삼국시대에는고구려, 백제, 신라의삼국으로나누어져각각특색있게전개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이르러폭넓은복합과정을거치게됨으로써동아고와사상가장화려하고세련된기와문화를완성시킬수있었다. 기와는지붕에사용되는위치에따라그모양이나명칭이각각다르고그종류도매우다양한편인데, 현전시되어지고있는기와는지붕의추녀끝에사용되는대표적인기와인막새로써, 수키와끝에원형의드림새가부착된수막새와암키와끝에장방형의드림새를부착한암막새로구분되고있다. 막새는암 수키와의한쪽끝에각각접합하여제작한것으로연화, 당초, 보상화, 귀면, 금수등의다양한무늬가드림새에장
299 토기와이해 299 식되어시대와지역에따라다채로운변화를보여준다. 하지만, 고려시대를지나고조선시대에들어와서는전통적인기와의형태는점차변형되고제작수법도퇴락의기미를보이기시작하는데, 조선말기에이르러서전통적인기와제작술의단절과함께우리의고유기와가점차자취를감추게되어그맥을오늘에잇지못하게되었다. 막새기와의경우드림새부분을보면삼국시대에는연꽃무늬와인동문등이모티브가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불교의융성과관련된범자문양이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건물의용도에따라용, 박쥐, 회문, 연화문, 초문등다양한문양이확인된다. 함께전시되어있는중국기와에는유약이시유되어있으나우리나라의경우청자와가있기는하지만일반적으로기와에는유약이시유되지않았다. < 기와막새장 > 1 연화문수막새적색계열수막새로중앙에는자방, 그외부에는 4개의연잎과인동문을배치하고문양부의테두리를연주문으로둘렀다. 자방과연잎은여러개의선으로표현되었다. 2 연화문수막새적색계열수막새로중앙에는자방, 그외부에는 4개의연잎과, 기하학적으로변형된궐수문을배치하고문양부의테두리를도드라진선문으로둘렀다. 3 연화문수막새회색연질계로연자가표현된큰자방과넓은부채꼴모양으로부드럽게표현된 8개의연잎이정형화된형태로배치되었다. 사이잎은 T' 자형으로가늘지만뚜렷하게두었다. 4 연화문수막새 주연부의처리가조악하며, 중앙에는 4 과의연자가있는자방이있다. 8 엽의연잎사이로 3 각형으로돌출된특유의사이잎이배치되었고연잎의
30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끝은 각이 져 있다. ⑤ 연화문수막새 연잎이 내 외판 이중으로 중첩되었으며 모두 단엽의 모습으로 8엽 16 엽의 개수이다. 연잎의 형태는 유사하다. ⑥ 연화문수막새 통일신라기의 연화문은 연잎이 작아지고 개수가 많아지며 내 외 이중 으로 중첩된다. 연잎이 작은 편으로 내판은 5엽, 외판에는 11엽이 자리 잡고 있다. ⑦ 연화문수막새 자방에는 1+8과의 연자가 놓여져 있으며 연잎은 중판구성으로 내판은 단판이고 외판은 2개의 연잎이 붙은 복판이다. 연잎과 사이잎의 배치가 정형화되어 있다. ⑧ 귀면문수막새 악귀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벽사의 상징으로 귀면을 장식하였으며 수면 (獸面)을 의장화하였다고 하나 일부에서는 보주를 물고 있는 용의 특징도 찾을 수 있다. ⑨ 당초문암막새 막새의 위 아래 부분에는 연주문대가 돌아가고 있으며 문양부에는 당 초문이 둘러져 있다.
301 장남원 ( 이화여자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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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고려시대 청자 (상감청자포함) 303 고려시대 청자 장남원 (이화여자대학교) 목 차 1. 청자의 기술적 의미 2. 중국의 청자 발달 3. 고려 청자 백자의 시작 4. 비색청자의 완성과 발달 5. 여러가지 제작방법과 장식 6.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조형미의 변화 - 상감청자 1. 청자의 기술적 의미 고려의 청자는 점토로 기물을 만들고 유약을 입혀 1,150 내외의 고 온에서 구워낸 자기이다. 이 때 태토와 유약에는 철분이 포함되어 있 다. 고려초에는 1차번조로 청자와 백자를 구웠으나 대략 11세기경부터 는 700~800 에서 구워낸 후 유약을 입히고 다시 굽는 2차 번조가 일 반화되었다. 청자를 제작하려면 선결해야 할 기술적 요건이 있다. 우 선 1,000 이상의 고온을 낼 수 있는 가마시설과, 높은 온도에서 녹 는 잿물 유약[灰釉] 기술이 그것이다. 또 푸른빛을 내려면 환원번조의 기술도 전제되어야 한다.
30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 중국의 청자 발달 중국은 여러차례 정치적 혼란과 안정을 거듭하지만 대외무역과 경제 가 활성화되는 수(隋), 당(唐), 오대(五代)에 이르러 자기생산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수(隋, 581~618)대에는 양자강 이남은 물론 양자 강 이북에도 자기가마들이 발달하였으며 위진시대의 뒤를 이어 청자 발달이 계속된다. 태토 색이 밝아지고 유약의 점도와 광택이 개선되었 다. 하북성 자현(河北省 磁縣)과 하남성 공현요(河南省 鞏縣窯)등지에 서는 백자의 생산이 활발하여 북방의 도자기 산업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백자 외에 청자도 함께 발견되어 수대에 이미 백 자와 청자의 생산과 사용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새로 운 기형, 특히 계수형(鷄首形)의 구연부 형태를 띤 병과 장식을 부착 한 기물들이 많아지며 인화(印花) 첩화(貼花) 획화(劃花)기법 등이 사 용되었다. 문양 가운데는 연판문(蓮瓣文)이 증가하며 금속기를 모방한 복잡한 디자인도 유행하였다. 당(唐 : 618~907)대에는 국가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가운데 長安 은 인구 100만을 수용하는 국제도시로서 번성하였는데 동전 주조를 위 해 동기(銅器)의 사용을 자제하면서 자기 사용이 증대된다. 특히 음다 (飮茶) 풍습이 유행하여 제다(製茶)를 위한 다구(茶具)가 발달하며,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통해 당대 차의 종류와 다구로 사용되는 도자기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청자는 태토와 유약의 접착이 좋고 색이 안정된 고급품을 생산하게 되며, 백도(百度)와 유약의 투명도가 높은 백자 생산이 가속화되었다. 상우, 영파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월주요(越州窯), 온주의 영가 를 중 심으로 구요(歐窯), 금화 무차 지방이 중심이었던 무주요(婺州窯)등지 가 청자의 중심으로 그 질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유사한 도자기들을 생 산하였다. 이 때 남방의 절강성 월주(越州)지역과 북방 형주(邢州)의 청자와 백 자는 당시 중국도자의 양대 맥을 형성하여 남청북백(南靑北白) 이라 는 유행어를 낳았으며 우리나라와,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키스 탄, 아프리카 등지로 수출되어 명성을 떨쳤다.
305 고려시대 청자 (상감청자포함) 305 8세기 중엽부터 9세기 중엽까지는 청자와 백자 다완들 가운데는 굽의 접지면을 두텁게 깎는 이른바 옥벽저(玉璧底) 가 유행한다. 9세기 이 후 안록산의 난을 거치고 절도사의 힘이 강해지면서 그들이 자기 세력 권내에 있는 지역의 특산물 생산에 주력하였으니 절강지역 차와 청자 는 중요한 특산물이었다. 당 오대(五代, 907~960)에 이르는 시기는 당, 오대 10국, 후삼국, 고려, 거란이 동아시아에 공존하던 시기이다. 10세기 중국은 지방분권 으로 절도사의 세력이 강화되어 경쟁적인 도자기 제작이 이루어지고, 그들을 위한 관요(官窯)적 성격의 가마 발달한다. 청자는 절강성 상우 와 소흥(紹興)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월주요가 특히 유명하였는데 오월 국(吳越國)의 전씨(錢氏)왕실 비호하에 비색(秘色)청자가 생산되었다. 3.고려 청자 백자의 시작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黃海南道伯泉郡圓山里)를 비롯하여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京畿道始興市芳山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龍仁 郡以東面西里), 경기도 여주군 중암리(京畿道驪州郡仲岩里),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楊州郡長興面釜谷里) 원당면 원흥리 (元堂面元 興里) 안양시 비산동 (安養市飛山洞), 충청남도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瑞山郡聖淵面梧沙里) 보령군 천북면 사호리 (保寧郡川北面沙湖里) 등 지에는 현재도 대규모의 가마터들이 남아 있다. 물론 최근까지의 조사 를 통해 보면 대구시 동구 진인동과 강원도의 강릉(江陵) 같은 한반 도 동부지역에서도 고려시대 청자 요지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 고려초기에 청자를 제작했던 요장(窯場)들은 황해도와 경기 도를 비롯 충청남도, 전라도로 이어지는 한반도 서남부에 집중적으로 발달하였다. 이는 서해에 면(面)한 개경이 수도였다는 점과 도자생산 과 유통 측면에서 해상운송로가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점도 중요한 원 인이 되었을 것이다. 초기 청자의 생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가마축조 및 원료의 선 택 등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기술의 국내 유입이다. 경기도 시흥시 방 산동 요지 발굴에서 퇴적층 조사 결과 청자 백자를 생산한 가마와 중
30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복되는층위에서이전에축조사용하였던것으로보이는도기가마가발견되었다. 그런데청자가마와도기가마사이의손상되지않은퇴적층단면에서시간적인선후 ( 先後 ) 는보이나휴지기없이작업이이어지고있음이확인되었다. 즉, 청자의발생또는도입과정에서는기존의도기와다른생산방식및기술이급격히이식 ( 移植 ) 되었을가능성이높다. 40여m 길이의벽돌가마 [ 塼築窯 ] 와가마재임에서사용된다양한요도구및가마재임방법, 제작된자기들의양식면에서볼때한국의청자생산과정에서는중국의월주요계청자기술의전이가가장두드러진다. 이같은현상은북한에서발굴된황해남도배천군원산리역시마찬가지였다. 이시기에는청자뿐만아니라백자도함께생산되어우리나라에서백자의연원역시고려초로올라간다. 한편, 최근까지도한국의초기청자제작과관련하여장보고와의연관설을주장하는예가있다. 그러나고고학적, 역사적사실의정황으로보아현재로서는고려초국가권력의주도로이루어졌을가능성이가장크다. 제작지가개경을중심으로집중되어있는점, 가마터에서왕실의제사에사용되었을것으로추정되는기물들이발견되는점등에서그렇다. 나아가경기북부지역에도국가의수공업품을공급하던자기소가있었을가능성이제기됨으로써한국의초기청자제작시기요업의주체가누구였는지다시생각하게한다. 4. 비색청자의완성과발달 고려의청자는국가적안정을바탕으로중국주도의도자산업사에서갈수록뚜렷한모습으로자신을드러내게된다. 즉중부지방을중심으로청자생산이시작되는 10세기이후부터강진이요업중심지로부각되는 11세기까지청자발전기에는청자의질과형태, 그리고문양이안정된다. 그러나거란의침입으로고려와중국의공식적인국교단절이이어졌으므로 11세기청자에는외래적인특성보다는고려적인특징이강하다. 그러나 12세기경에이르면그간의기술력을바탕으로고려의특징이드러난다. 즉이미생활용기로서자리잡은청자는오래전
307 고려시대 청자 (상감청자포함) 307 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도기류나 금속기의 형태적 기능적 장 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만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인종 원년(1123)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의 수행 기록인 선화 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에서 고려 사람들은 도기 가운데 푸른 빛을 띠는 것을 비색(翡色)이라 한다 라고 하며 중국인의 눈으로 본 청자향로[陶爐], 청자항아리[陶樽]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인이 그들의 청자를 비색(秘色)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과 달리 고려인은 자신 의 청자를 비색(翡色) 이라 하여 중국의 그것과 구별하였음을 보여주 는 것이다. 이는 고려인들이 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중국과 구별되는 미감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또 淸代에 지어진 경덕진도록(景德鎭 圖錄) 에서도 고려시대 청자에 대해 중국의 이름난 가마인 월주요나 남송관요, 여요(汝窯) 등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 가 운데 참외모양 그릇과 술잔, 사자모양의 향로 등은 중국과 자못 다르 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고려 청자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독자적인 생산체계와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던 정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종대(1122~1146)에는 안정된 대외관계를 바탕으 로, 비록 내치의 혼란은 있었으나 문풍(文風)이 진작되고 불교 및 예 술이 발달하였으니, 청자의 조형도 이와 분위기를 함께 하였다. 고려의 비색은 이처럼 12세기를 정점으로 중 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 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중국 남송의 태평노인이 지은 수중금(袖中 錦) 에는, 건주(建州)의 차(茶), 촉(蜀) 지방의 비단, 정요(定窯)백 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高麗翡色)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라 하여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백자의 경우 하북성 정요 제품을 제일로 여기면서도 청자에 관해서는 고려비색 이 천하제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중국을 능가하는 독특한 세련미를 보인 고려청자의 완성도에 대한 감탄이며 고려비색이 주는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특히 이미 당~오대를 거치면서 질 좋은 청자를 보았던 중국인들이 송대에 이르러 이처럼 고려비색에 마
30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음을 빼앗긴 것을 더욱 그러하다. 인종 원년(1123)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수행 기록 고려도 경(高麗圖經) 에서는 고려 사람들은 도기 가운데 푸른 빛을 띠는 것 을 비색(翡色)이라 한다 라고 하며 중국인의 눈으로 본 청자향로[陶 爐], 청자항아리[陶樽]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인이 그들의 청자를 비색(秘色)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과 달리 고려인 은 자신의 청자를 비색(翡色) 이라 하여 중국의 그것과 구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고려인들이 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중국과 구 별되는 미감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또 청대(淸代)에 지어진 경덕진도록(景德鎭圖錄) 에서도 고려시대 청자에 대해 중국의 이름난 가마인 월주요나 남송관요, 여요(汝窯) 등 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참외모양 그릇과 술 잔, 사자모양의 향로 등은 중국과 자못 다르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 청자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독자적인 생산체계와 기술을 이미 보유하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려도경 <도로(陶爐)>에서도 산예출향(狻猊出香) 역시 비색인데 위에는 쭈그 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仰蓮)이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切)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 (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고 하여 당말 오대 월주요 비색청자나 당시 북방의 대표적인 여요(汝窯) 등지의 새로운 천청색(天靑色) 청자류와 조형적으로 유관함을 피력하고 있다. 고려의 비색은 이처럼 12세기를 정점으로 중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 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중국 남송시대 태평노인이 지었다고 전하는 수중금(袖中錦) 에는, 건주(建州)의 차, 촉(蜀) 지방의 비단, 정 요(定窯)백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高麗翡色)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 다 라 하여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백자의 경우 하북성 정요 제품을 제일로 여기면서도 청자에 관해서는 고려비색 이 천하제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중국을 능가하는 독특 한 세련미를 보인 고려청자의 완성도에 대한 감탄이며 고려비색이 주 는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특히 이미 당~오대
309 고려시대 청자 (상감청자포함) 309 를 거치면서 질 좋은 청자를 보았던 중국인들이 송대에 이르러 이처럼 고려비색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더욱 그러하다. 백보총진집(百寶總珍集) 권9의 <청기(靑器)>라는 대목에서도 중국의 여요((汝 窯)자기 태토가 매끄럽고 아름답다고 하면서 고려에서 새로 만들어 낸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최근 중국 절강의 항주(杭州) 같은 남송대 수도가 있었던 곳에서는 적지 않은 고려 청자가 건물터나 황궁터 주변에서 출토되고 있음이 보 고 되기도 한다. 대부분이 최상급의 고려비색 청자들이다. 중국으로부 터 청자기술을 도입한 지 100여년 만에 중국을 능가하는 기술을 이룬 것이다. 5. 여러가지 제작방법과 장식 청자는 형태와 제작 방법에서 도기나 금속기와는 다른 독자성을 갖는 다. 즉 흙의 특성과 제작의 목적에 따라 도기와는 다른 다양한 제작방 법이 시도되는데, 물레성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틀[型]을 사용하여 형 태를 만들거나, 부분적으로 문양을 눌러 찍거나, 또는 서로 형태가 다 른 부분들을 별도로 만들어 접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다. 청자는 표면장식에 따라 무문청자 음각(陰刻)청자 양각(陽刻)청자 철화(鐵畵)청자 진사(辰砂)청자 화금(畵金)청자 철채(鐵彩)청자 등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순청자는 무늬장식이 없는 순수한 청자이 며, 음각청자는 순청자 위에 음각기법으로 꽃이나 기타식물 또는 장식 문양을 넣은 경우를 말한다. 양각청자는 무늬를 돋을 새김하여 도드라 지게 하는 것이고 철화청자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붓에 철분 안료를 묻혀 회화적 방법으로 무늬를 그린 것이다. 그밖에 그릇의 벽면을 뚫어 장식하는 투각(透刻), 백토(白土)를 바르 는 퇴화(堆花), 다른 색의 흙을 섞어 만든 연리문(練理文)청자와 사람 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象形)청자 도판(陶板) 등이 있다. 한 마디로 고려의 장인들은 인간이 흙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 의 방법들이 시도되고 다시 반복되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31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6.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조형미의 변화 - 상감청자 상감 의 어원은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도자기를 비롯한 나무, 유 리, 금속 등의 표면에 무늬를 파고 그 안에 금 은 나전 흙 보석 자개 등을 넣어 채우는 장식기법을 총칭한다. 일본에서는 상안(象眼) 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금속의 경우에는 착금(錯金), 도자의 경우 에는 양감(鑲嵌) 또는 전채(塡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감기법은 그 역사가 오래되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이미 상 아에 철제장식을 상감했으며,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미 조개를 이용하여 상감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춘추 전국시대 청동기에 금 은을 선 또는 면으로 상감한 예나, 유리나 터 키석을 금속장식구에 감입한 예가 적지않게 남아 있고, 한 대(漢代)에 도 청동대구나 수레장식구 등에 정교한 상감을 사용한 바 있다. 이후 당대에 이르면 금속, 유리, 보석 등 여러재료를 활용한 상감기법이 특 히 금속공예 분야를 중심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금속공예에서 보석이나 다른 금속, 유리 등를 감입한 예가 있는 데, 특히 升平 13年銘 백제 칠지도(七支刀)의 예로 보면 일찍부터 일 부 고급 기법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나전칠공이나 은 입사 등에서도 그 재질과 명칭에는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방법을 응용 하는 기법이 이미 공예 여러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음은 알려져 있다. 고려도자 가운데 상감이 시문된 청자 백자는 이미 고려 당시부터 중 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의 관심을 받아왔다. 상감청자가 본격적으로 발 달하기 시작하는 것은 12세기 후반 이후 부터이지만 그 시작은 10세기 경 초기청자 제작기부터 였음이 발굴 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상감은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또는 바탕과 색이 다른 물질을 집어 넣는[감입: 嵌入] 보편적 공예기법으로 동서양에서 모두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이다. 고려의 금속공예에서는 입사(入絲) 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청자의 경우 몸체에 무늬 부분을 선 또는 면으로 파낸 후, 문양 부위나 또는 바탕에 백토(白土)나 자토(赭 土)를 넣어 메우고 다듬어 유약을 입혀 굽게 되므로, 굽게 되면 문양 은 백색 또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청자의 푸른 바탕 위에서
311 고려시대청자 311 강한색채의대비를이루었다. 도자기에상감기법이사용된예로는중국당 ( 唐 ) 대북방의황보진요 ( 黃堡鎭窯 ) 에서만들어진흑유자기가운데일부나타나고최근중국의산서성 ( 山西省 ) 혼원계장 ( 渾源界莊 ) 요지에서는 12세기중엽이후금대 ( 金代 ) 에만들어진것으로추정되는상감청자류가발굴되었으며, 하북성자주요 ( 磁州窯 ) 에서도여러가지방법의상감기법이사용되었다. 이들가마에서는색깔과질이나쁜흙으로도자기를만드는과정에서표면을감추기위해백토분장을하고그위에다시상감하는방법을많이사용하였는데이는고려가비색청자위에상감하던것과는조형의도면에서어느정도차이가있다. 고려상감기법은아마도비색청자기술이절정에달했던 12세기중엽을전후하여본격적인가능해졌을것으로추정된며 12세기말 ~13세기초를거치면서전국적으로활성화되어전성기를누린다. 강진과부안지역을중심으로크게발달한상감청자는문양에메꾸어넣은흰색과검은색의흙이옥 ( 玉 ) 빛의푸른바탕위에강한색채의대비를이뤄이제까지의청자가지녀온단색위주의단조로움에서벗어나다채롭고장식적인새로운면모를보여준다. 몽골 [ 元 ] 침입이후 13~14세기를지나면서약간의고급품을제외하면전반적으로청자의질은퇴보한다. 이제이전과같은투명한비색의좋은질은기대할수없게되었다. 몽고의침략에대항하여전쟁을치른이후국력이소모되면서전과같은청자제작이어려워졌기때문이다. 제작상의통제와집중력이약화되면서청자의문양은긴장감을잃게되고형태의유려함과제작의공교 ( 工巧 ) 함, 뛰어난유약, 번조기술등이해이해지는것을볼수있다. 따라서규모가작은요장들을중심으로간단하고장식적인문양시문이보편화되었다. 가마터조사에서도갑발을사용하는예가줄어들고손쉬운생산을위한저급한번조기술이일반화되었다. 결국유색이어둡고잡물이많으며둔탁한형태를가지는청자의제작이증가하게된것이다. 한편, 중국의 격고요론( 格古要論 ) 에서는 고려자기가운데분청 ( 粉靑 ) 은용천자기에흰꽃이있는것과같은데그가치를매길수없다 고했다는대목도흥미롭다. 즉, 용천자기처럼푸른색자기에흰색의문양이있었다는말이고, 그렇다면원 ( 元 ) 에수출되었던 고려자기 가상감청자였을가능성이높다.
31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명대(明代) 동기창(董其昌)은 그의 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 에서 명대 이전 중국 5대 명요(名窯)를 거론하면서 시요(柴窯), 여요(汝 窯), 관요(官窯), 가요(哥窯), 정요(定窯)와 함께 이들 가마보다는 못 하지만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었던 중국 및 외국의 가마들도 함께 소 개하였다. 이 때 대식국(大食國)의 가마와 더불어 우수한 것으로 고 려요(高麗窯) 를 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요 는 아마도 고려중 기 중국에 알려진 비색 또는 상감청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상감은 도자 장식에 정착되는 고려중기 이후에는 동시대 기법들 가운데 기술적으로 난이도가 높고, 공정이 복잡했으므로 제작 단계부 터 고급으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자의 質을 보여주는 번 조받침의 종류와 문양기법을 비교해보면, 상감기법을 사용한 도자는 가장 고급에 속하는 규석받침 을 사용한 예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심 지어 같은 가마내에서 서로 포개구운 것 가운데도 상감을 사용한 경우 와 그렇지 않은 경우 서로 다른 번조받침이 받쳐진 예들이 확인되었 다. 또 기종과 장식기법간에는 일정한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파 악된다. 그러나 음각, 양각 등의 문양들과 비교하면 상감기법을 사용 한 자기류가 가마터는 물론 소비유적에서도 가장 낮은 비율로 나타났다. 상감은 고려 중기 이후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가장 고급에 속하는 문양기법으로 다루어졌으며, 강진지역 188개 청자가마의 출토품을 분 석해보면 상감기법은 질적으로는 12세기중반 이후가 조형적으로는 정 점에 달하지만, 양적으로는 계율리와 사당리를 중심으로, 또 부안에서 는 유천리 일대를 중심으로 13세기이후 14세기까지 제작이 확대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지방 수요의 청자가마에 서는 상감자기의 제작이 쉽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자는 더 이상 한정된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지방 관청이나 일반에 이르기까지 생산이 확대되어 특정 지역이 아닌 전국 의 가마에서 같은 유형의 청자를 만들어 내는 또 다른 공예의 면모로 탈바꿈한다. 또 새롭게 중국에서 유행하던 청화백자(靑畵白瓷)의 기형 과 문양들이 도입되어 상감청자로 표현되기도 한다. 고려 말 청자의 쇠퇴와 가마터의 전국적 분산으로 고려 안정기와 같은 청자제작은 힘 들어진다. 전국에서 발견되는 고려말 조선초의 가마들을 살펴보면 제 작 기술면에서는 청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나 유색과 질에 있어
313 고려시대청자 ( 상감청자포함 ) 313 서는고려와구분된다. 우선갑발을사용하여엄선해구웠던것과비교하면고려말조선초에는청자를갑발에넣어구운예는드물다. 문양도매우소략해지고장식기법도거칠어진다. 고려전성기청자들이일정한형식을가지고제작되었다면고려말조선초에는과거의집중적대규모생산체계에서지방의소규모생산체제로바뀌면서지방적특색이강한청자들이제작된다.
31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315 안성희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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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분청사기 317 분청사기 안성희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1. 분청사기의 개념 2. 분청사기의 분장기법과 문양 3. 분청사기의 전개과정 4. 분청사기 가마터 현황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14세기 중엽 상 감청자에서 시작하여 16세기 전반에 백자에 의해 흡수, 소멸되는 일군의 도자기를 말한다. 기왕에는 청자, 백자와는 다른 특징과 내용을 담은 독 자성을 가진 자기로 평가되어왔다. 이제 분청사기의 개념과 분장기법 및 문양으로 본 특징, 시기구분에 의한 변천과정, 그리고 실제 가마터에서의 현황 등을 살펴 분청사기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분청사기의 개념 먼저 분청사기의 용어의 유래, 원료, 제작기법 등을 알아보겠다. 분청사기는 1930년대 고유섭(1905~1944) 선생이 그릇의 표면은 백토로 분장되었고 색은 회청이라는 의미에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 라고 명명한데 유래한다. 즉 회청색 태토에 백토를 분장하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구워낸 도자기이다. 실제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일본학자 사이에서 미시마[三島]라고 불렸을 뿐이
31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다. 근래에는 분청자, 분청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학술 용어로는 분청사기를 사용하고 있다. 분청사기의 태토는 천연산의 이차점 토로 특히 대체로 목절(木節)점토이다. 유약은 천연에서 얻을 수 있는 생 유(生釉)로서 장석 송회 석회석 점토 등의 조합이며, 주성분은 장석이다. 2. 분청사기의 분장기법과 문양 분청사기의 특징은 분장기법과 문양에 있겠다. 첫째, 상감(象嵌)기법이 다. 상감기법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선상감은 원하는 무늬를 선 각하고 여기에 백토나 자토(赭土)를 넣어 구우면 희고 검은 무늬가 선으 로 나타난다. 면상감은 원하는 문양을 면으로 판 후 상감하므로 나타나는 효과는 마치 판화와 같이 보인다. 상감기법은 특히 12세기 고려청자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여 15세기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에까지 이어진다. 둘째, 인화(印花)기법이다. 인화란 꽃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지만 반드시 화문이 아니더라도 일단 도장으로 일정한 무늬를 찍은 후 백토로 메우고 그 위에 유약을 씌워 구워낸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인화기법이 사용된 기 물에는 관사명 생산지명 장인명 등이 압인 혹은 상감기법으로 새긴 것이 있어 공납관계를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당시의 고급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사명에는 장흥고(長興庫, 1392-), 예빈시, (禮賓寺, ), 사옹원(司饔院, 1398-), 사선서(司膳署, ), 내섬시(內贍寺, ), 내자시(內資寺, ) 등과 임시관청으로공안부 (恭安府, ), 덕녕부(德寧府, ), 경승부 (敬承府, ), 인수부(仁壽府, 1400/ / )가 있다. 이들 중 장흥고와 인수부는 지방이름과 같이 새겨지기도 하는데, 청도 언양 금산(현 김천) 군위 합천 선산 인동 경주 의흥 등과 언양 군위 금산 선산 등 주로 경상도지역이 그것이다. 셋째, 박지(剝地)기법이다. 박지기법은 기면을 백토분장한 후 원하는 문 양을 그리고, 문양배경을 이룬 백토는 긁어버림으로써 하얀 문양만이 남 는다. 박지와 같은 기법은 면상감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에서부터 고려 청자에서 사용한 면상감기법에서 유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고 려시대에 비하여 대량생산이 요구된 조선시대에 와서는 배경을 긁어냄으
319 분청사기 319 로써제작과정을단순화시켰음을알수있다. 인화기법과는달리거의관사명이나타난예가없어당시공납품중에는박지기법을사용하지않았을것으로생각된다. 넷째, 조화 ( 彫花 ) 기법이다. 특히조화기법과박지기법은같이사용되는경우가많은데, 백토분장위에무늬를그릴때일단조화기법으로선을새긴다음일부분의배경만을긁어내면박지와조화기법이한번에나타나는경우가그렇다. 박지와조화기법은주로전라도지방에서생산했던것이특징이다. 다섯째, 철화 ( 鐵畵 ) 기법이다. 철화기법이란백토분장후에철분이많은안료를붓에다묻혀그림을그린것으로주로공주학봉리계룡산이그중심생산지이다. 그때문에계룡산분청사기라는별칭이있다. 여섯째, 귀얄기법이다. 귀얄이란풀비와같은도구에백토를묻혀분장한다. 그릇표면에백토귀얄의흔적이생생하게남아빠른운동감을느끼게하는효과를낸다. 귀얄분청사기는분청사기가백자로이행해갈때많이만들어져서백자와함께출토되는예가많다. 일곱째, 덤벙기법이다. 백토물에기물을덤벙담가백토를씌우는방법으로담금 ( 분장 ) 기법이라고도한다. 겉으로만봐서는연질백자와잘구별이가지않는다. 이상과같은일곱가지분장기법은분청사기의가장큰특징으로이는태토의잡물을감추어보다고급화하려는의도등에서시작되었다고보인다. 결국분장기법이백자와의관계에서모색되었다고할수있겠다. 3. 분청사기의전개과정 한편분청사기의변천은합리적인시기구분위에서그전개과정을파악해보아야할것이다. 현재시점에서는강경숙의 5단계에걸친시기구분론이가장일반적이라고볼수있다. 즉분청사기편년은 14세기후반에서 15세기까지의태동기, 15세기전반의발생기, 15세기전반에서 15세기중후반까지의발전기, 15세기후반에서 16세기초반까지의변화기, 16세기초반에서 16세기중반까지의쇠퇴기로크게나누어진다. 각각의시기구분기준은단순한왕조교체나왕위교체와는관계없이도자기와관련한
32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문헌기록과 당시의 제작상황, 현존하는 분청사기 양식 등에 근거한 것이다. 태동기는 상감청자문양의 해체 변모, 매병의 곡선 변화, 암록색의 유색 등 도자양식의 변화와 고려 말 강진 자기소의 해체로 인한 가마터의 전국 적인 확산이라는 시대상황에 기인한다. 즉 14세기 강진과 부안 등의 지역 에서 청자를 제조하던 장인들이 왜구의 침입을 피해 전국적으로 이동함으 로써 청자 가마터가 전국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건국 후에도 계속되는데 자기 수요의 증가와 국가의 사기 사용 장려에 의 해 전국의 가마터는 더욱 확산, 발전하게 되었다. 발생기는 14세기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지닌 상감기법의 연당초문이 지속되는 한편 성긴 인화 문이 발생하여 정착한다. 또한 1417년 이후 관사명을 공납용 기물에 새기 게 되고 집단연권문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때 문헌기록으로는 세종 초 (1424~1432) 조사된 세종실록 지리지 의 각 지방 토산조에 자기소 와 도기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요업의 생산 상태가 전국적으 로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가 있었으며 이들 가마에서 토산공물로 도 자기를 중앙에 상납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발전기에는 분청사기의 일곱 가지 기법이 모두 제작되고 박지 조화기법에서 분청사기의 특징이 발휘된다. 이때가 인화기법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으며 관사명과 함께 지 방명을 새기기도 하였다. 변화기가 되면 발전기의 여운 위에서 지방색이 더욱 뚜렷해지고 귀얄과 덤벙기법이 증가하면서 차츰 도자기 제작은 분청 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해 간다. 이 시기에 완성된 경국대전 공전(工典) 사옹원조(司饔院條)에는 380명의 장인이 등재되어 당시 경기도 광주의 조 선 관요[분원]의 성립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쇠퇴기에는 얕은 인화기법과 백토귀얄문만이 희미하게 남으면서 백자화가 더욱 진행된다. 4. 분청사기 가마터 현황 그런데 분청사기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는 가마구조와 교란되지 않은 폐기물 퇴적층으로부터 수습된 도편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요지에 대한 발굴은 무척 중요하고 이러한 요지에서 파악되는 가마구조와 출토도편에 대한 분석은 필수적이지만 생각보다 분청사기 가마터에 대한 대규모 학술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은 편이라고 하겠다. 간단히 지금까지
321 분청사기 321 발굴된 분청사기 가마터를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전라도지역에서 충효동 운대리 용산리 구성리 요지 등이 있으며, 충청도지역에서는 학봉리 송정리 용수리 평라리 구완동 사부리 요지 등이 있다. 그리고 경상도지역에는 다부 동 고지평 두동리 요지 등이 있다. 이상의 분청사기 가마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길이는 대략 20m가 조금 넘고 너비는 1.2~1.6m인데 15세기 전반 가마는 대체로 길이와 너비 의 치수가 적은데 비해 15세기 후기로 갈수록 길어지고 넓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모두 측면출입시설이 있어 보조불을 넣을 수 있었으나 번조실 안 의 불창시설의 유무는 가마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마터 출토 도편의 양상은 15세기 전반에는 고려의 전통이 남아있는 상 감기법과 성긴 인화문이 등장하며, 15세기 후반에는 귀얄 덤벙이 늘면서 백자화하는 경향을 많이 띠고 한편으로는 백자를 제작하였다. 이와 같은 15세기 후반의 경향은 16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다가 16세기 전반 분청사기 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지금까지 분청사기의 개념 및 특징, 변천과정, 가마구조 등을 살펴보았 다. 분청사기는 이제껏 15세기 세종 치세 연간에 민족문화가 완성된 시대 적 배경 아래 중국 도자와 달리 독자적으로 발달한, 어떤 한국미술품보다 한국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또한 일본의 다기나 도자기 발달에 공헌하 고 사랑받은 문화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청사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객관적인 것이며 실증적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이제 차츰 접할 수 있게 된 이 당시 동남아시아 특히 베트남이나 타이 도자기에 나타난 문양이나 기법에는 우리가 분청사기 특 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많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당대 중국 민요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적 도자제작의 범주에 분청사기도 포함된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분청사기의 편년과 시 기별 기법의 성쇠과정 또한 앞으로 가마터의 발굴이 더욱 진행된다면 수정 되어져야 할 부분이 분명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단순히 시대구분만의 문제 가 아닌 지역적 특색이 보다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32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323 방병선 ( 고려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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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조선시대 백자 (청화백자포함) 325 조선시대 백자 방병선 (고려대학교) 목 차 Ⅰ. 머리말 Ⅱ. 조선 왕실이 택한 그릇 1. 고려백자에서 조선백자로 2. 문헌을 통해 본 조선백자의 탄생 Ⅲ. 조선이 만든 그릇 - 분원의 설치와 운영 1. 조선전기 2. 조선후기 Ⅰ. 머리말 조선은 고려와 다른 정치, 경제 체제 뿐 아니라 독특한 사상과 문화 를 지닌 국가였다. 개국이래 지배계층들은 불교보다는 성리학을 주도 이념으로 삼았고, 지방분권적인 다양성보다는 중앙집권적인 통일성에 관심을 두었다. 또한 고려 말기 사회의 향락과 부패를 목격하면서 보 다 백성들의 모범이 되는 지배계층의 모습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조선 백자의 이해는 곧 이를 향유하고 제작하던 사람들의 이 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조선백자를 둘러싼 역사와 조형의 변천 을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 감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할 것이다.
32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Ⅱ. 조선왕실이택한그릇 조선이개국하자마자그릇이바뀐것은아니었다. 일단고려청자에뿌리를둔분청사기가관공서와왕실에서사용되었다. 그러나이는일시적인것이었고여러제례와실생활에필요한그릇들을고려와는다른것을사용할필요를느끼게되었다. 또한화려한장식과색상을자랑하는청자보다는사대부들의검소함을드러낼그릇이필요했던것이다. 여기에당시조선의문물제도에영향을미쳤던명이경덕진 ( 景德鎭 ) 에어기창 ( 御器廠 ) 을설치하고황실전용의백자를생산한것은세계도자의흐름이청자에서백자로, 조각칼에의한장식보다는붓을사용하는회화적인세계로의전이를예고하는것이었다. 1. 고려백자에서조선백자로 고려시대에도백자는제작되었다. 고려시대가청자전성시대이긴해도초기가마터인요지인용인을비롯해서부안이나강진등에서도백자는꾸준히만들어졌다. 아무문양이없는소문백자에서음각, 상형백자를비롯해서상감청자전성기에는상감백자도제작되었다. 그러나 13세기후반이후에는상감백자가사라지고소문백자만이일부제작되었는데가마터에서출토된파편들의수량만을대략보아도청자의 1% 도채안되는소량에불과하다. 조선이개국직후에사용했던그릇들은주로분청사기였던것으로여겨진다. 따라서태조이후당분간은분청사기가대전 ( 大殿 ) 을비롯한각관서에서공사용 ( 公私用 ) 의그릇으로사용되었던것으로보인다. 태종실록 을보면태종 7년 (1407) 성석린 ( 成石璘 ) 의상소에사치와향락을사대부와왕실의표본이라생각지않았던조선사대부답게금은기 ( 金銀器 ) 대신사기와칠기를사용할것을건의하고있다. 이는건국초나라의기틀을올곧게다져가기위한사대부의표본을그릇에서부터찾으려는것으로당연한것으로여겨진다. 이후의사료에도금은기대신사기나목기, 칠기를사용해야한다는건의가왕왕
327 조선시대 백자 (청화백자포함) 327 보이며 사기 사용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런 건의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요구했던 과도 한 금은 상납과 제작비용의 차이 등 정치, 경제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 문헌을 통해 본 조선백자의 탄생 조선시대 그릇이 조선다워진 데에는 무엇보다 세종대왕의 공헌을 빼 놓을 수 없다. 세종은 부왕인 태종의 강력한 왕권구축에 힘입어 명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보다 조선의 풍토와 조선 사람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릇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초부 터 명으로부터 많은 백자나 청화백자가 유입되었지만 조선에서 생산 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어기로 삼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자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즉 전국적인 도자기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선결과 제로 떠올랐음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여기서 세종실록 지리 지 의 기록이 오늘날 전해오고 있음은 큰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세종실록 지리지 의 도자기 부분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안에서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 (陶器所)로 구분한 후 품질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었다. 우선 지역별 로 살펴보면 경기도가 자기소 14곳, 도기소 20곳이며, 충청도가 자기 소 23곳, 도기소 38곳, 경상도가 자기소가 37곳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도기소가 34곳에 이른다. 전라도는 자기소 31곳에 도기소는 가장 많은 39곳에 이른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상품 자기소다. 상품 자기소는 경기도 광주가 1곳, 경상도 고령 1곳, 상주 2곳으로 전국에 걸쳐 4곳에 불과하다. 이들 지역에서는 백자는 물론이고 견치한 분청 사기도 채집되고 있어서 당시 상품은 백자와 정제가 잘된 분청사기를 총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 지역은 일단 사옹원 분원의 후보 지로 떠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 중에서도 사옹원 본원에서 가깝고 우수한 백토가 산출되며 수운(水運)이 편리한 곳은 경기도 광주다. 이곳은 훗날 분원(分院)의 땔감처로 지정되어 매 10년에 한 번 씩 분
32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원 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위와 같은 전국적인 자기와 도기 생산 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 후 세종은 왕실 그릇으로 백자를 선택하였고 품격에 맞는 고질의 정 제가 잘 된 백자 생산을 요구했던 것이다. 후대 기록인 성현(成 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에는 세종 연간에 어기로 백 자를 전용(專用)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1) 또한 세종이 세종실록 지리지 를 편찬하면서 어기(御器)를 무엇으로 결정할 것 인가에는 그간 조선 조정에 유입된 중국 백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명 사신에 의한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의 오끼나와인 유구 (琉球)와 일본을 통한 중국자기의 조선전래도 있었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결국 세종 연간은 조선백자의 기틀이 마련 된 중요한 시기였다. 여기에는 세종 임금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과 영 민함, 백성에 대한 사랑과 신료들에 대한 믿음이 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Ⅲ. 조선이 만든 그릇 - 분원의 설치와 운영 1. 조선 전기 조선전기 수공업은 국가에서 직접 생산, 유통, 판매를 책임지는 관 영수공업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자기도 마찬가지여서 국가에서 제작 과 판매를 관장하는 그야말로 철저한 관영수공업체제 하에서 생산되 었다. 이러한 조선의 국영 도자기 공장은 바로 사옹원(司饔院)의 분 원(分院)이다. 사옹원은 고려시대는 사옹방(司饔房)이란 명칭으로 불렸는데 임금의 식사와 그에 필요한 그릇들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한편 고려시대 사옹방은 별도의 관영 도자기 공장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각 도에서 생산되는 자기에 대해 그것이 자기소의 생산품인지는 불분 명하지만 관리를 통해 감독한 것은 분명하다. 조선이 세종과 세조를 거쳐 점차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체제의 정비 1) 成俔, 慵齋叢話 卷 10(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82, pp ).
329 조선시대 백자 (청화백자포함) 329 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관영수공업체제의 확립도 필요하게 되었 다. 당시 자기 생산은 앞에서 살펴본 전국의 자기소, 그 중에서도 백 자는 상품 자기소인 경기도 광주를 비롯해서 경상도 상주와 고령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에는 세종 7년(1425)에 명 황제 홍 희제(洪熙帝)가 조선에 백자 조공을 요구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당시 백자의 품질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듯 하다. 세종 연간 전국의 자기소 파악이 완료되자 이제는 국영 자기 공장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시되었을 것이다. 경기도 광주와 경상도 상주, 고령이 가장 우수한 자기를 생산하던 곳이었지만 연료 와 원료의 수급, 제작 기술의 역량, 서울과의 운송의 편리함 등을 고 려하면 경기도 광주에 국영자기공장을 설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들 지역 중 백자 제작이 가장 성행했던 지역이 선택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일까. 아쉽게도 이를 확정시킬 수 있는 단서 는 없다. 단지 몇 가지 상황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세조실록 을 보면 세조 13년(1467)에 사옹방이 사옹원으로 개칭되 고 정식으로 녹관(祿官)을 임명했다. 고려시대의 관사(官司)를 단지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관리를 임명했다는 것이 특이하 다. 즉 사옹원의 기존 관리 이외에 새로이 다른 임무를 띤 관리가 필 요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아마도 분원의 감독, 관리와 연관을 지 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원의 설치 장소는 수목이 무성하고 수운이 편리해서 분원에 소용 되는 나무를 공급해 주는 땔감처로 지정된 광주 6면과 양근 1면 혹은 양근 3면 안이 분명하다. 이는 중국이 명 청대에 걸쳐 경덕진 주산(珠 山) 일대에 반경 750m 정도의 면적에 어기창을 고정시킨 것과는 달리 분원이 차지하는 공간과 규모는 엄청난 것이다. 분원이 속해 있는 사옹원을 운영하는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 제거(提擧) 등의 중요 직책을 조정 대신과 종친들이 도맡게 되어 있 었다. 그런데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종친들의 입김이 상 대적으로 크게 작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는 영의정이 겸임하였으나 왕자와 대군도 그 역을 맡을 수 있었다. 다음 직급인 제조는 4인인데 문관이 겸임하고 나머지 3인은 종친이었다.
33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여기에부제조 5인은도승지가겸임하고역시나머지는종친이맡도록되어있으니이는누가봐도사옹원경영에종친들의입김이강하게작용하도록한체제로볼수밖에없다. 이러한이유로관영수공업체제아래서생산된분원백자는당연히왕실의미적취향이반영될뿐아니라경제적이권의한대상으로여겨졌던것이다. 따라서사옹원도제조와제조를왕실측근중의측근들이차지했던것은당연한일이다. 이는환관이나내무부관료가책임을도맡았던중국경덕진어기창과도구별되는것으로조선왕실이어기번조를얼마나소중하게생각했었는가를알게해주는것이다. 한편분원의실무책임자로볼수있는분원낭청인봉사 ( 奉事 ), 즉번조관 ( 燔造官 ) 은종 8품의품계를지니고있었다. 다음은장인에대해알아보자. 분원장인들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조에의하면 380명으로구성되어있었다. 그들은분원안의장인과분원밖에서장포 ( 匠布 ) 만을바치는외방 ( 外方 ) 장인으로나뉘어져있다. 2. 조선후기 다른수공업들이대부분양란을전후로관영수공업의형태에서벗어나민영화의길에들어선것과달리, 분원은어기번조 ( 御器燔造 ) 라는임무때문인지외형적으로는관영의모습을그대로유지하고있었다. 그러나내부적으로는많은변화를겪게되었다. 신분제의변화에따라장인의모집은부역제 ( 賦役制 ) 에서사실상의전속고용제 ( 雇用制 ) 로바뀌게되었고원료를확보하기위한노력은특히숙종 (1674~1720) 들어강화되어이러한노력들이영조와정조연간우수한백자를생산하는밑거름이되었다. 연료문제는광주와양근의분원땔감처에화전민이들어서면서이들에게세금을거두어땔감을사는방식으로전환되었다. 또한관요를십년에한번씩이전하면서소용되는막대한물력 ( 物力 ) 을절감하기위해숙종들어땔감과원료운송에편리한한강의지류인우천강변 ( 牛川江邊 ) 으로분원을고정하자는분원고정론이대두되었다.
331 조선시대 백자 (청화백자포함) 331 사회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의 실시에 따른 상품경제의 영향과 중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 중국 일본과의 중계무역에서 발생한 막대한 부의 창출 등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수요층의 확대가 이루어 지고 청화백자의 생산 증가, 상품으로서 자기를 제조, 판매할 수 있 는 사번(私燔)의 성행과 지방요의 활발한 활동 등이 뒤따르게 되었다. 19세기 들어 조선백자는 장식화 경향의 심화와 상품가치의 제고, 수요층의 취향 변화에 따라 전 시대에 보여주던 문인 취향의 고아한 품격과 격식보다는 중국자기를 모방한 장식성이 강한 자기로 변모되 었다. 분원운영은 중간사취의 만연으로 혼탁해졌으며 정부 재정의 고 갈로 분원 재정 역시 갈수록 어려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정선된 원 료와 기술로 최상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숫자를 채우는데 급급한 대량 의 자기 제조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문헌상으로는 전 시대와 거의 유사한 원료를 사용한 듯 하지만 분원리에서 수습되는 도편들은 정제 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 강도와 백색도에서 전 시기와 다른 모습 을 보여준다. 청화의 색상도 달라서 당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들 여오던 청화안료는 그다지 고급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분원 운영의 어려움은 결국 고종 연간 들어 분원 운영이 전적으로 민간에 위탁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막강한 후원세력과 수요층을 상실한 채 조선 백자는 일본 자기에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참고문헌 강경숙, 한국도자사, 일지사,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윤용이, 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정양모,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1991,
33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333 신은영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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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불상의 이해 335 불상의 이해 신은영 (검단선사박물관) 목 차 Ⅰ. 불상의 기원 Ⅱ. 불상의 형식 Ⅲ. 불상의 종류 Ⅳ. 불상의 재료와 제작방법 Ⅰ. 불상의 기원 불상(佛像)은 불교의 교리와 신앙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종교적 예 배 대상이다. 기원전 7세기경 인도에서 태어나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전 파한 석가모니를 조형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부처상에서 출발하였고, 넓은 의미에서는 예배대상이 되는 불타 뿐만 아니라 보살, 천부, 나한에 이르 기까지 모든 상을 포함한다. 이러한 불상을 만드는 주요목적은 부처 전생(前生)의 선업(善業)에 관 한 이야기나 일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 는 교화해설에 있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자비나 공(空), 해탈(解脫) 혹은 열반(涅槃)과 같은 추상적인 교리상의 개념을 불신(佛身)을 통하여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불상 표현은 시대나 지역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종교상의 규범을 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 교리의 내용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상의 도상적(圖像的) 특징이 된다.
33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무불상시대 불상은석가모니가열반하고 500여년이지난후부터만들어지기시작하는데, 이기간을불상이없는시대라하여무불상 ( 無佛像 ) 시대라고부른다. 이시기불교미술에서는부처를보리수나빈대좌, 부처의발자국 ( 佛足跡 ), 부처가설한진리를상징하는수레바퀴 ( 法輪 ), 불탑등상징적으로표현하는것이보편적인관습이었다. 아마도부처를인간적인형상으로표현해서는안된다는금기가있었기때문인듯하다. 불상의탄생 무불상시대가지나고불상이제작되기시작한시기는인도쿠샨왕조의가니슈카왕때인서기 2세기초로추정된다. 이무렵간다라와마투라지방에서거의동시에불상을제작한것으로보이는데, 그동안학계에서는두곳가운데어느쪽이먼저불상을제작하였는가를둘러싸고오랜논쟁이있어왔다. 현재는, 서구적인얼굴에두꺼운법의의옷주름을특색으로하는간다라불상과몸에착달라붙은법의에인도인의얼굴을한중북부마투라불상의모습이전혀다르다는점에서거의동시기에독자적으로만들어졌을것이라는동시설로가닥이잡혀진상태이며, 시차가있다하더라도미미하다고보고있다. Ⅱ. 불상의형식 부처가갖추어야할신체상의특징으로는대상 ( 大相 ) 32가지와소상 ( 小相 ) 80가지 (32 吉相 80 種好 ) 가있는데, 이상호는부처의형상을만드는데중요한기준이되었다. 인도를비롯하여중국, 우리나라, 일본의불상이그지역이다름에도불구하고유사한것은이러한도상규범이정해져있기때문이다.
337 불상의 이해 337 불상의 세부명칭 보살상의 세부명칭 1. 불신(佛身) 1) 육계(肉髻) : 부처의 머리 위에 혹처럼 살이나 뼈가 솟아난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 2) 나발(螺髮) : 오른쪽으로 말린 꼬불꼬불한 나선형 모양의 머리카락 3) 소발(素髮) : 민머리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머리 형태 4) 백호(白毫) : 부처의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5) 삼도(三道) : 불상의 목에 가로로 새긴 세 개의 주름
33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6) 보관(寶冠) : 보석으로 장식하여 불상의 머리 위에 얹는 관을 말한다. 고대 인도 귀인들의 머리장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상을 장엄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 보살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예들 들어, 관음보살은 보관에 아미타화불, 대세지보살은 수병, 미륵보살 은 탑이 새겨져 있다. 7) 화불(化佛)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부처. 응신불(應身佛) 또는 변화불(變化佛)이라고도 한다. 불, 보살이 중생 을 제도하기 위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것으로 작 은 여래형으로 표현 된다. 보통 관음보살과 대일여래는 보관에 화 불이 표현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광배에 작은 화불을 하는 경우 도 있다. 8) 영락(瓔珞) : 금, 은, 수정, 진주 등 보배구슬을 꿰어서 만든 것으로, 보살의 목이나 가슴 등에 늘어뜨리는 장신구의 하나 9) 법의(法衣) : 부처가 입는 출가의(出家衣)를 통칭하는 말로, 불상의 옷차림은 입는 방법에 따라 통견과 우견편단으로 나누어진다. 통견 (通肩)은 양 어깨를 모두 가리는 방식이고, 우견판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는 노출시킨 채 왼쪽 어깨에만 가사를 걸쳐 입는 방식 이다. 2. 광배(光背) 불, 보살의 머리나 몸체에서 발하는 빛을 조형화한 것으로, 원래 석가 모니불에만 나타나는 특징이었지만 점차 여러 보살과 신들에게도 사용되 었다. 불꽃무늬(火焰文)와 화불 및 여러 가지 식물무늬로 장식되며,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 그리고 이 둘을 포함하는 거신광(擧身光)으로 나눌 수 있다. 3. 대좌(臺座) 불, 보살 또는 천인, 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 그 형태는 불상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연화좌(蓮華座)를 비롯하여 사자좌(獅
339 불상의 이해 339 子座), 상현좌(裳懸座), 암좌(岩座), 운좌(雲座), 조수좌(鳥獸座), 생령 좌(生靈座) 등이 있다. 4. 수인과 지물 1) 수인(手印) : 불 보살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 모양. 수인은 교리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불상의 성격과 존명(尊名)을 밝 히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선정인(禪定印) : 부처가 선정에 든 것을 상징 * 시무외인(施無畏印) :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위안을 준다는 의미 * 여원인(與願印) :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준다는 의미 *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부처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 * 지권인(智拳印) : 이치(理)와 지혜(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 은 본래 하나라는 의미 * 전법륜인(轉法輪印) :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으로, 석가모니 가 불교의 진리를 전도할 때의 수인 * 합장인(合掌印) : 보통 예배를 드리거나 제자와 문답할 때 취하는 수인 *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 : 선정인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아미타불의 수인
34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 지물(持物) : 불상의 손에 쥐고 있는 물건. 수인(手印)에 상대되는 말로 계인(契印)이라고도 한다. 불, 보살의 본원(本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물에 의해서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여래 중에서는 약사불이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것 외에는 지물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보살의 경우, 관음보살은 정병(수병)이나 연꽃, 지장보살은 석장(錫杖)이나 윤보(輪寶), 범천은 불자(佛子), 제석천은 금강저(金剛杵), 다문천은 보탑(寶塔) 등을 들고 있다. 이밖에도 법구 (法具), 무기, 보주, 악기, 경책(警策), 경권(經卷), 염주 등 지물 의 종류는 다양하다.
341 불상의 이해 341 Ⅲ. 불상의 종류 * 불 :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미륵불 *보살 :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일광 월광보살 *명왕 : 공작명왕, 오대명왕 *천부 : 사천왕, 금강역사, 범천, 제석천, 팔부중, 비천, 가릉빈가 *나한 : 십대제자, 유마거사 1. 불(佛, 佛陀, 如來) 명 칭 성 격 불교의 창시자로서 역사적인 석가모니불상 (釋迦牟尼佛像) 부처이다. 석가는 종족의 이 름이고, 모니는 현명한 사람 이라는 뜻이므로,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수 인 협시보살 시무외 여원인 문수 보현 선정인 보살 대 웅 전 항마촉지인 관음 미륵 대웅보전 전법륜인 보살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모 아미타불상 (阿彌陀佛像) 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 는 부처로, 무량수불(無量壽 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 관음 대세 아미타구품인 지보살 전법륜인(설법인) 관음 지장 보살 佛)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는 불 전 무량수전 아미타전 극 락 전 산스크리트어 Vairocana'를 음역한 것으 로,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비로자나불상 (毘盧遮那佛像) 문수 보현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춘다 는 뜻이다. 화엄경 의 주 지권인 존불로서 부처의 광명이 모 보살 *삼신불 (三身佛) 든 곳에 두루 비치며 그 불 대적광전 대광명전 비 로 전 신에는 모든 세계를 포용하 고 있다는 의미이다. 동방 유리광세계에 살면서, 약사불상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藥師佛像) 수명을 연장해주는 의왕(醫 王)의 역할을 하는 부처이다. 손에 약합 일광 월광 보살 약 사 전
34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미륵은도솔천에서보살로있으 면서 56 억 7 천만년뒤불법이 쇠퇴할때이세상에여래로태 어나서못다구제한중생을구 미륵불상 ( 彌勒佛像 ) 제해준다고한다. 석가여래의뒤를이어이미부처가되기로정해져있는미래의부처인셈이다. 때문에미륵은현재의모습인보살상으로도, 미래의모습인여래상으로도표현된다. 시무외 여원인 용화수인 청광 신광 보살 미륵전 용화전 2. 보살 ( 菩薩 ) 명칭종류성격도상협시불전 관음보살 ( 觀音菩薩 ) 일반관음 大慈大悲의 보살, 중생이 어려움에 십일면관음불공견삭관음천수관음여의륜관음 처했을때, 그이름을외우기만하면여러가지모습으로나타나서중 마두관음준제관음수월관음양류관음백의관음 대세지보살 ( 大勢至菩薩 ) 문수보살 ( 文殊菩薩 ) 생을구제해준다고한다. 이보살은관음신앙이발달함에따라여러가지변화관음으로나타난다. 광명과지혜의보살, 모든중생의미혹함을없애주는힘을가졌다. 지혜를상징하는보살, 석존의교화를돕기위해서나타나는보살로, 보 보관에化佛 손에연화, 寶甁, 寶珠 11개의佛顔 손에견색 천개의손 6 臂 머리위에 馬頭 3 目 19 臂像 半跏坐 선재동자 버드나무가지 백의 보관 or 손에 보병 사자를탄 모습 아미타불원통전석가불관음전아미타불 - 석가불비로자나문수전불
343 불상의이해 343 현보살과짝을이 루어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삼존형 식을이룬다. 자비의실천을상 보현보살 ( 普賢菩薩 ) 징, 모든 부처의 理法을 실천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맡고있다. 코끼리를 탄모습 석가불비로자나불 보현전 석가모니불이입멸 미륵보살 ( 彌勒菩薩 ) 한뒤 56억 7천만년후에사바세계에태어나서중생을교화하는보살이다. 반가사유형 일반보살형 용화수인 석가불 미륵전용화전 六道의중생구제, 지옥에서고통받 고있는중생을구 제하기위하여영 지장보살 ( 地藏菩薩 ) 원히부처가되지않겠다고서원하고, 육도를윤회하면서고통받는중생을한사람도남김없이구제해준다는보살이다. 두건 손에석장 or 보주 아미타불 명부전지장전 현실의고통을없 일광 월광보살 ( 日光 月光菩薩 ) 애주고, 약사불을협시하면서그법을수호하는역할을한다. 이마 or 보관 에해, 달 약사불 -
34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Ⅳ. 불상의재료와제작방법 1. 석불 ( 石佛 ) 돌로만든불상. 불상제작초기부터만들어졌던것으로가장일반적인불상형태이다. 보통광배, 대좌등과함께입체적으로조각하지만, 머리나손을부분적으로따로조각해서끼워넣는경우도있다. 석재는매우다양하여나라마다각각다르다. 인도는붉은색을띠는사암제불상이, 중국은흰대리석불상이많은반면, 우리나라는대부분화강암으로만들었다. 2. 목조불 ( 木造佛 ) 나무로만든불상. 원래향나무로만든것으로인도우전왕이최초로만든불상도여기에속한다. 목조불상은시대나장소에관계없이많이제작되었을것으로짐작되나재료의취약성때문에남아있는예는극히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주로소나무를사용했으며, 고려시대이전으로올라가는유품은거의없으나조선시대에오면불상이나불감, 목각탱 ( 木刻幀 ) 에서그예를볼수있다. 3. 금불 ( 金佛 ) 금으로주조한불상. 32길상 80종호에부처는금빛이나야한다고되어있어불상제작초기부터만들어진것으로보인다. 그러나재료가비싸고귀해서별로유행하지못했다. 우리나라에서도순금상은많이만들어지지않았으나, 경주황복사 3층석탑에서출토된통일신라시대의금제불좌상과금제불입상등이남아있다. 4. 금동불 ( 金銅佛 ) 동이나청동으로만든불상에금을입힌것. 금이귀했기때문에, 부식
345 불상의이해 345 을방지하고황금과같은효과를내는금동불이크게유행하였다. 중국에서는불교의전래와함께남북조시대부터많이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마찬가지로개인용의작은호신불 ( 護身佛 ) 에서부터거대한상에이르기까지많이제작되었다. 금동불은주로납형 ( 蠟型 ) 으로주조되었다. 제작방법은우선철심 ( 鐵心 ) 에내구성이강한점토나석고로원형 ( 內型 : 안틀 ) 을만들고, 그위에밀랍을입힌후다시점토나석고로주형 ( 鑄型 : 바깥틀 ) 을만든다. 여기에열을가하면밀랍이녹아내리므로그부분에놋쇠물을부어넣어서불상을만든다. 이러한주조법은정밀하고복잡한형태를만드는데적합하다. 5. 철불 ( 鐵佛 ) 철로주조한불상. 우리나라에서는통일신라시대말에서고려시대에걸 쳐서유행하였다. 대표적예로,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광주철불좌상등이있다. 6. 소조불 ( 塑造佛 ) 점토로만든불상. 니상 ( 泥像 ) 또는소상 ( 塑像 ) 이라고도한다. 인도에서는일찍부터점토로불상을만들었을뿐아니라재료가풍부하여어느지역에서나흔히볼수있다. 우리나라에서는삼국시대이후에많이만들어졌는데, 현재남아있는작품은별로없다. 기록상으로는신라시대에양지가만든영묘사장륙상등이있으며, 유품으로는원오리사지출토소조불, 부석사소조불좌상, 성주사지출토소조불등이유명하다. 제작방법은우선몸체에서목부분까지골격이되는심목 ( 心木 ) 을세우고손가락등은철사로따로심지를만든다. 그위에삼베와같은천이나짚이섞인진흙을이중, 삼중으로붙여서완전한형태로만든다음회칠을한후도금한것이다.
34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7. 건칠불 ( 乾漆佛 ) 나무로간단한골격을만들고종이나천같은것으로불상을만든후, 옻칠을하고다시도금한것이다. 일반적으로다른불상에비해가벼운것이특징이다. 대표적예로, 조선시대의기림사건칠보살좌상과불회사건칠삼존불좌상등이있다. 참고문헌 강우방외, 불교조각 Ⅰ, 솔, 2005., 불교조각 Ⅱ, 솔, 김리나,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 일조각, 이숙희외, 한국미술문화의이해, 예경, 진홍섭, 불상, 대원사, 2006.
347 ~ 후 김현권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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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349 ~ 김현권 ( 문화재청 ) 목차 Ⅰ. 산수화 1. 개념 2. 한국의산수화발생 Ⅱ. 풍속화 3. 조선초기, 물아일체 ( 物我一體 ) 1. 풍속화의개념 4. 조선중기, 와유 ( 臥遊 ) 2. 조선시대풍속화의발생 5. 조선후기, 방고 ( 倣古 ) 3. 풍속화의두부류 6. 조선후기, 진경 ( 眞景 ) 4. 풍속화속시화일치 ( 詩畵一致 ) 7. 조선후기, 심회 ( 心會 ) 5. 해학과풍자 8. 조선말기, 신의 ( 信義 ) 9. 조선말기, 은거 ( 隱居 ) 10. 조선말기, 시서화일치 ( 詩書畵一致 ) Ⅰ. 산수화 1. 개념 동아시아에서산수화는자연을표현하되사실적인묘사보다는인간의의식에의해해석된자연을표현하는회화이다. 자연에대한인식은동서양간의많은차이가있다. 동아시아중심의동양에서자연은인간이순응하며살아가는곳이며안식처이자귀의처로인식되었고, 음미의대상이었다. 반면서양의경우는위험의대상이자극복의대상이었다. 이러한동
35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며살아가는곳이며안식처이자귀의처로인식되었고, 음미의대상이었다. 반면서양의경우는위험의대상이자극복의대상이었다. 이러한동양의자연관은대략 5~6세기경부터산수화가출현하게끔하였다. 이는서양에서순수하게자연을묘사한풍경화가 17세기의렘브란트같은화가에의해본격적으로그려졌다는점과비교하면약 1100여년이나앞서고있다. 2. 한국의산수화발생 현존하는산수화의역사는고구려까지올라간다. 고구려는북방계열의영향을강하게받았다. 산수화역시그러한영향하에제작되었음을무용총의 < 수렵도 > 에서살필수있다. 고려시대에는노영의 < 지장보살현신도 > 같은불교회화속에서산수표현을확인할수있으며, 기록상으로이녕의 < 예성강도 > 등이전한다. 고려시대후기에이르게되면이규보 ( 李奎報 ) 와이인로 ( 李仁老 ) 등의선비화가들이출현하였는데, 이들은소식에의해시작된문인화론을공유하기시작하였다. 문인화가의출현으로산수화는비약적으로발전하게된다. 문인화는외형만을추구하여어떠한대상을사실에가깝게그리는것이아니라, 대상이담긴의미, 또그것을보고느낀감정을나타내야한다. 즉회화라는예술품에작가자신의마음을맡기는것이다. 이러한문인화중에는산수화가큰비중을차지하였다. 산수화에옛선인들은어떤뜻을담아내고자했는가? 많은주제가있으나, 물아일체 ( 物我一體 ), 와유 ( 臥遊 ), 방고 ( 倣古 ), 진경 ( 意景 ), 심회 ( 心會 ), 신의 ( 信義 ), 은거 ( 隱居 ), 시서화일치 ( 詩書畵一致 ) 는대표적인주제이다. 3. 조선초기, 물아일체 ( 物我一體 ) : 강희안 ( 姜希顔 ) < 고사관수高士觀水 > 깊은숲속개울가너럭바위에한선비가턱을괴고엎드려있다. 큼직한잎이달린넝쿨이물가까지내려온것으로보아그곳은울창한나무숲에가려햇살이들기힘든깊은산속냇가로보인다. 이마가훌렁벗어지고양끝이슬쩍처진눈썹과눈, 그리고넉넉한크기의코를가진선비는
351 조선시대 회화사(초기~후기) 351 세상만사를 제법 겪고 이제는 주위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법한 너 그러운 노인의 모습이다. 또한 옷차림새로 보아 꽤 덕망이 높은 선비로 보인다. 그 선비는 조금 불편할 듯해 보이는 너럭바위에 자신의 몸을 맡 겼는데, 마치 바위의 모양에 몸을 맞춘 듯하다. 그렇지만 이 선비가 어찌 나 편안해 하는지를 표정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선비가 바위이 고 바위가 선비인 셈이다. 그는 물을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어느새 낮잠에 들고 말았다. 선비는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 듯,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림 속 선비의 모습은 마치 장자(莊子)가 나비 꿈(호접몽胡蝶夢)을 꾸는 모습처럼 보인다. 장자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 문득 깨어보니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일까. 라고 하였다. 비몽사몽 중에 있는 우스꽝스 러운 장자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사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깊은 철학이 담겨있다. 이 사상을 풀이 하면 내 자신과 바깥세상의 구별은 헛된 것일 뿐 본래는 하나 라는 뜻이다. 산수화는 이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예술이 기도 하다. 그림 속 선비는 바위와 하나가 되었기에 자연의 일부인 것이 다. 작가 강희안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생각을 하였고, 그렇기 때문 에 그 자연 속에 은거하고픈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림 속 선비는 바로 강희안이다. 강희안은 세종대왕 때 벼슬을 하였던 선비로, 그는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훈민정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였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 天歌)를 해설하였던 집현전 학자였다. 한편 그는 단종 때 집현전 직제학 에 올랐으며, 세조 때에는 중추원 부사까지 지내는 등, 줄곧 벼슬을 하였 다. 이러한 관리 생활 속에서도 그는 자연과 함께 하며 하나가 되고픈 마 음으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4. 조선중기, 와유(臥遊) : 이경윤(李慶胤) <관폭 觀瀑> 묵으로 묽게 칠한 천막 같은 곳에서 흰색의 두 줄이 표현되어 있다. 그 천막은 절벽이고 하얀 줄기는 폭포이다. 화면위의 오른쪽 모서리에 조그 맣게 열린 하늘 아래에서 폭포의 물이 쏟아진다. 이 정도 높이이라면 굉 장히 큰 규모로, 그림과 같은 폭포를 실제로 보면 두렵거나 놀랄 법 한
35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데, 이 선비의 모습에서는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태연하기 만 하다. 우렁찬 폭포 소리를 듣는 것일까? 우레 같은 소리를 듣는 사람 치곤 얼굴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그는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선 비에게 있어서 자연은 가장 편안한 곳으로 보인다. 그림 속 선비는 이 놀라운 광경을 감상하지 않고 왜 눈을 감고 있는가. 동양의 산수화는 독특한 목적 때문에 그려지기도 한다. 선비들은 아름다 운 경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지만 대개는 돌아온 뒤 에 그 광경을 회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옛 선비들은 그 그림을 두고두고 보거나 남에게 보여 주어 자신의 경험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선비들은 그때 그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혹 늙고 병들어 유람하지 못하게 되더라 도 이 그림을 보면서 그 때 자연 속에서 노닐었던 기분을 다시금 느낀다. 혹은 남의 그림을 보고 그림 속 자연을 떠올리며 그 자연 안으로 들어간 다. 우리도 옛날 사진을 보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이런 경우를 옛 선비들은 와유 즉 누워서 유람을 한다 라고 하였다. 그 러나 누워서 자연을 볼 수는 없으니 이 말은 그곳에 가지 않고서도 가장 편안한 자세인 누워 있는 것처럼 강과 산을 상상하며 즐긴다는 의미이다. 즉 자연과 자신이 하나 되는 물아일체를 그림을 보면 실현하고자 한 것이 다. 이경윤은 이런 종류의 그림을 자주 그렸다. 사실 그는 왕족 출신이다. 남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왜 그렸을까. 이경윤의 생애 중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있었다. 나라가 송두리째 일본에게 넘어갈 위기였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다행히 두 전란이 끝났지만 그는 50살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다. 이경윤은 이제 좀 조용한 세상에서 와유를 하며 살고 싶었을 것 이다. 5. 조선후기, 방고(倣古) : 심사정(沈師正), <방운림필의 仿雲林筆意> 그림 한가운데에는 풀로 엮은 초라하고 조그마한 정자가 놓여 있으며 정 자 뒤에는 대밭이 그려져 있다. 정자가 있는 언덕 바로 뒤에는 너른 강이 펼쳐져 있고 강 너머에는 산들이 보인다. 정말로 한적한 강촌의 풍경이 다. 이러한 그림의 분위기는 늦가을의 강촌을 생각나게 한다. 대나무들은 바
353 조선시대 회화사(초기~후기) 353 람에 이러 저리 흔들리고 있으며 정자 앞의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두 나 무는 그림 속 날씨가 겨울의 문턱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날씨 는 스산한 분위기를 돋아 준다. 차가운 바람에 낙엽마저 떨어져 버린 늦 가을의 강촌에는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시사철 푸르기만 한 소나무 마저 애써 날씨와는 상관없어 보이려 하지만 왠지 힘들어 보인다. 강촌의 모습을 정말로 쓸쓸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시장처 럼 제아무리 번화한 곳이라도 사람이 없는 곳은 적막하게 느껴질 뿐이다. 만일 이 그림에 배 한척과 어부가 있거나 정자 부근에 경치를 바라보는 선비가 그렸더라면 이렇게까지 적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심사정은 쓸쓸함을 나타내고자 산과 강, 나무와 정자의 표현을 비롯하여 색을 쓰지 않고 까칠한 붓으로만 강촌을 그렸다. 왜 심사정은 어떤 생각으로 볼수록 적막하고 깔끔한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 답은 그 림에 쓰여 진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운림(雲林)의 그림 뜻을 본받다. 현재(玄齋, 심사정) 운림은 예찬의 호로, 그는 몽고족이 중국을 지배한 시절인 원나라 때 화가였다. 그는 몽고족이 자신의 나라를 지배한 것 때 문에 과거에 나서지도 않고 은거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너무나 곧은 선비였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은 쓸쓸하고 스산하다. 더구나 그 의 성격은 너무나 깔끔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예쁘게 그리려 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군더더기가 있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일부러 이리저리 먹을 함부로 쓰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른바 문인화의 중요 기법인 먹 아 끼기를 금같이 하라 惜墨如金 를 보인 것이다. 심사정은 그의 그림을 본받아 그려서 예찬의 선비 정신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산수화에서는 이를 倣古라는 표현을 쓴다. 단순히 옛 그림을 베 끼는 것이 아니라, 옛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선비 정신을 본받아 그린다는 의미이다. 6. 조선후기, 진경(眞景) : 정선鄭敾, <인왕제색 仁王霽色> 하얀 안개가 휘 감고 있는 산허리 위에는 암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기와집이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은 어느 산의 중턱 부근을 그린 것으로, 바로 서울 청와대 뒤편에 보이는 인왕산이다. 한번 광화문에 가서 직접 인왕산을 보면 그리 특이한 산이라는 생각이 들
35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지 않는다. 다만 산위에 보이는 화강암 덩어리가 눈에 들어 올 뿐이다. 조선시대에 그려진바 없는 인왕산을 정선이 굳이 그린 이유는 어디에 있 을까. 바로 그가 살았던 곳이며 그가 어울렸던 문인들의 동네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에는 그의 스승인 김창흡과 벗 이병연이 살았던 곳이다. 당시 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하면 겸재 정선이요 시하면 사천(槎川) 이병연 (李秉淵)이다 라고 하였다. 이 두 문인은 당시 중국 청의 문화에 대한 반 감을 가지고 있었던 노론(老論)의 수장 김창흡의 제자였다. 그러니 이들 은 조선의 산천에 대해 어느 정도 애착을 가졌으며, 그러기에 정선은 진 경산수로, 이병연은 진경시로 당시 문화예술계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는 인왕산을 그리면서 스승과 벗을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러기에 실제보다 훨씬 웅장하고 기세 넘치게 그려 내었다. 그는 조선의 산천을 그리며 그 속에 문인의 이상을 담고자 하였던 것이다. 7. 조선후기, 심회(心會) : 이인상(李麟祥) <구룡연 九龍淵> 구룡폭포는 조선에서 그림의 소재로 곧잘 이용되었다. 조선의 풍속화가 로 유명했던 김홍도 역시 많은 산수화를 남겼다. 그의 그림을 보면 한눈 에 아 정말로 구룡폭포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각이진 바위 로 이루어진 절벽을 사실처럼 그렸고, 물줄기의 흐름도 실제와 유사하게 굴곡지어 흐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정말로 구룡폭포가 눈앞에 보이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면 이인상의 구룡폭포는 어떤가? 김홍도처럼 생생하지도 않고 정선 처럼 기세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단지 아련한 기억속의 오래된 폭포이다. 그렇지만 김홍도 그림과는 달리 투명한 유리처럼 깨끗하기만 하다. 그림 의 아래 한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737년 가을에 나는 임안세 어른을 모시고 구룡폭포를 구경했었습니다. 15년이 지나 이 그림을 그려 조심스럽게 드립니다. 그런데 몽당붓에 먹 을 묻혀, 뼈대를 그렸으나 살집은 그리지 않았고 색은 칠하지 않은 것 은 감히 거만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 두었기 때문 입니다.
355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년전에구경했던구룡연을그리려고하니기억이가물가물해서생각나지않았을것이다. 그러나억지로기억을되살려그경치를곧이곧대로그리려했다면그는이러한훌륭한그림을그리지못하였을것이다. 그러나이인상은더이상눈에비친경치에연연하지않고마음속깊이자리잡은구룡연에대한인상과감회를더듬어그리고자했다. 그래서이러한그림이세상에나타난것이다. 이인상의집안은조선시대명문중명문이었으나이인상의증조할아버지가서출이었기에궁궐내의관리를제대로못하고지방관직을하였다. 그는가난했기에생계를위해낮은벼슬이라도아쉬웠을텐데, 나중에는이마저도귀찮은듯사양하였다. 정말로최소한의끼니만거르지않으면된다는생각을했던것같다. 이러한이인상의삶은이그림과닮았다. 그는이그림을그리면서빼대만그리고살집을그리지않았다고하였다. 살집이라는것은바로먹과색을일컫는말이며뼈대는형태를이르는것이다. 먹과색을쓰면그림이고와지고풍부해진다. 그는그렇게할수도있었겠지만자신의청빈한삶을택한것과반대되는것이었기에거부하였다. 사실선비그림의이론중에서는바위의표현등에붓질을많이한그림은속되다고좋아하지않기도하였다. 그리고색도연하게칠하지화려하게하지않았다. 만일붓질과색이너무심하면그림이화려해져서청렴하고검소한선비의마음과는거리가멀다고생각했다. 다만필요한곳에만하였다. 그러나이인상은이조차거부하였다. 그는필요한곳도사치스럽다고생각했던것이다. 즉자신의삶과같은그림을원했던것이다. 이인상의이그림은기나긴세월을그린것이며, 자신의청빈한삶속에서이룩한문인화에대한생각을담아냈다. 그러니이그림은마음으로빚어낸그림이다. 이인상은이를심회 ( 心會 ) 라고표현하였다. 이러한정의는지금까지없었던것으로, 문인화의핵심을가장정확하게지적한용어이다. 8. 조선말기, 신의 ( 信義 ) : 김정희 ( 金正喜 ), < 세한도歲寒圖 > 선비들사이의변치않는지조와절개는선비그림에자주그려지는주제
35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이다. 우리는 김정희의 <세한도>의 그림과 편지 속에서 선비 정신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과 제자 이상적이 그려져 있다. 어떤 모습일까. 김정희는 유배라는 벌 중에도 유배지의 집 주위를 가시나무로 둘러 울타 리 밖을 못나오게 하는 엄한 벌을 받았다. 그야말로 울타리는 감옥의 철 창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안은 모든 자유가 빼앗긴 감옥이었다. 그림 속 집은 참담한 상황에 있는 김정희 자신을 비유하듯이 한껏 움츠린 집으로 표현되었다. 반면 그림 속 왼편에는 늠름한 잣나무가 있고, 오른편에는 건장한 소나 무와 모진 세월을 견뎌온 오래된 소나무가 서있다. 모두들 늘 푸른 나무 들이다. 이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김정희의 편지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 게 시드는 것을 안다 라고 하였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 들지 않는 것이어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이나,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푸르네. 지금 자네와 나의 관계는 이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 요 이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 이 쓰다. 김정희는 이 나무들의 모습이 제자 이상적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승이 유배를 당하고 있을 때 이상적은 변함없이 제자로서 정성을 다해 스승을 모셨다. 그런 제자를 보면서 <세한도>를 그릴 때 자신을 가두었던 쇠창살 같은 가시나무를 걷어버렸 다. 대신에 제자의 변치 않는 마음처럼 추운 겨울이 와도 항상 푸르른 잣 나무와 소나무를 표현하였다. 더군다나 집을 지키듯 앞뒤로 서 있는 나무 의 모습은 어려움에 처한 스승을 보호하려는 제자의 모습 같다. 이상적은 편지와 그림을 받고 앞에 두고 엎드려 절을 하며 보았다. 그리 고 스승의 처지에 너무나 슬퍼 눈물이 흐르는 것조차 몰랐으며, 또 제자 의 도리를 당연히 했건만 이를 그렇게 칭찬해주시는 스승의 모습에 머리 를 조아리며 감복하였다. 이 그림은 선비의 신의를 표현한 문인화 중의 문인화이다.
357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조선말기, 은거 ( 隱居 ) : 김수철 ( 金秀哲 ) <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 해가져온통어두운저녁시간에집주위와산과산사이에는밤안개가피어오르고있다. 그래서땅과산과하늘이언뜻분간이안된다. 산사이를감도는안개는꿈속같은기분을불러일으킨다. 짙은밤안개사이로바위와산들이보이는모습은그런분위기를돋아준다. 아래쪽바위주변에가시처럼뻗은나무에는하얀점이찍혀있다. 눈인가? 그점은나무에찍혀있으니무슨꽃같다. 그나무에잎이없다. 잎이없고꽃이피는계절은늦겨울이나초봄이다. 그때피는꽃중선비들이너무나사랑했던것은매화이다. 이하얀꽃은백매화이다. 매화는눈이내리고찬바람이부는가운데꽃이피고아름다운향기를뿜기에옛날부터거친세상에도흔들리지않는선비에비유된다. 특히흰매화꽃이피는매화는선비들이가장아끼고사랑했다. 옛날중국송에는임포 ( 林逋 967~1028) 라는한선비가있었다. 그는평생을혼자살면서세속의영리를버리고고적한가운데유유자적하며사는시인이었다. 그는시로써이름이나는것을싫어하였고후세에전하여질것이두려워시를읊되기록하지않기도하였다. 그는매화를부인으로삼고학을아들로삼아은둔하였다. 그래서이후한국과중국에서는매화하면임포를연상하곤하며, 매화서옥도를그리곤하였다. 김수철은이그림을그리면서무슨생각을하였을까? 자신도이런곳에서은거하면서여생을보내면어떨까하는생각을하였을것이다. 문인들은임금의명을받고관직에임하면서도언젠가는고향이나한적한산에들어가은거를하고자하였다. 이는선비들의영원한바램이었다. 10. 조선말기, 시서화일치 ( 詩書畵一致 ) : 김정희 ( 金正喜 ), < 불이선란不二禪蘭 > 예로부터난을그릴때지켜야하는몇가지법칙이있다. 난을그릴때는잎이서로만나하면서그사이에공간이만들어지는데, 마치봉황의눈과비슷해서봉안鳳眼이라고한다. 그리고잎의중간은보통두툼하기때문에그모양이사마귀배같다고해서당두螳肚라고한다. 또한잎끝이점점얇아져서뾰족하게되는데, 마치쥐의꼬리같다고해서서미鼠
35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尾라고한다. 난초그림들은모두이법칙을꼭지키고있지만심지어이그림보다 20년전에그린 < 산위의난초꽃山上蘭花 > 에서도지켜지고있다. 그러나 < 불이선인난 > 만은그런식으로그리지않았다. 봉안은조금씩분명하지는않으며, 당두같은모양은찾을수없다. 그리고잎의끝이서미모양처럼차츰얇아진모습이아니라, 제각각이다. 특히이세가지법칙을그림에나타내려면붓의이면저면을번갈아사용하는삼전법三轉法으로그려야한다. 이법은김정희스스로가꼭지켜야하는것으로누누이강조했던것으로, < 산위의난초꽃 > 에서찾을수있다. 그런데 < 불이선인난 > 은그법이제대로적용되지않았다. 먹의색깔에서도기존의난초그리는법을따르지않았다. 난은진한먹으로그려야만이윤기가흐르는잎을제대로표현할수있는데, 흐린먹만을사용하여썩썩그려나갔다. 이러니그난초는마치마른잡초같은모습이되고말았지요. 김정희는 < 불이선인난 > 에서여리면서단정한난초의모습을보여주려고한것이아니라, 강한기운과함께허허로움을보여주고자했다. 잎은대부분중간이마치부러질듯한두번꺾이면서세차게뻗어나갔다. 그모습에서곧곧한문인정신을느낄수있다. 그런데중간의몇몇잎은흐물흐물거리면서화면을가로지르고있다. 그잎들은그림에서풍기는강한느낌을조금수그러들게한다. 아마도세상에대한정도미움도사라진초탈한선비의마음을보여주는듯하다. 김정희는도대체어떤마음으로이난초를그렸을까. 아마도그는세상사람들이이루지못한무엇인가를난초에담으려고했던것같다. 우리는그림속에빼곡히써져있는글을통해서좀더알수있다. < 불이선인난 > 과비슷한난초그림은세상어느곳, 어느시대에서도찾아볼수없다. 그러나엉뚱하게도아주가까이에있었다. 바로난초주위에있는글씨들이다. 초서와예서, 기이한글씨의법으로그렸으니세상사람들이어찌이 를알아보며, 어찌이를좋아할수있으랴. 김정희는그림속아래의왼편에글을썼다. 글씨쓰는법으로난초를 그렸다고하네요. 그래서난의모습이마치글씨의획과같은것이었다.
359 조선시대 회화사(초기~후기) 359 설렁거리며 화면을 파고드는 몇몇 난 잎을 보니 마치 부드럽고 생동감 넘 치는 초서의 획이 생각난다. 예서의 획과 같은 잎은 더욱 많다. 대부분의 잎이 중간쯤에서 한두 번 꺾이는 모양은 마치 예서 획의 갈고리나 삐침을 생각나게 한다. 그 모습은 글씨 중에서 야也의 아래 획 삐침과 유사하다. 그러나 잎이 턱하고 끊어지듯 꺾이며 순식간에 뻗어나가는 기세는 김정희 글씨만의 특징으로, 달達의 책받침 획이나 난蘭의 오른쪽 획이 꺾이는 모 양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이 그림을 기이한 글씨의 법으로도 그 렸다고 한 것으로, 난초가 글씨이고 글씨가 난초인 것이다. 김정희가 이렇게 글씨 쓰듯이 난초를 그린 이유는 글씨와 그림의 원리가 같다(書畵同元)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자가 애초에 새 발 자국과 거북 잔등이의 문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또한 한국이나 중국, 그 리고 일본은 서양처럼 그림 그리는 붓이나 글씨 쓰는 붓이 다른 것이 아 니라 하나의 붓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므로 붓을 사용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더구나 난초 잎은 글씨의 획처럼 길기 때문에 글씨 쓰 는 법으로 그릴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옛 선비들은 이런 그림을 보고 글씨와 그림이 일치되었다고(書畵一致) 말하였다. 이로써 이 그림이 세상 속 난초가 아닌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김정 희는 세상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며, 또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하긴 뜻 깊은 이론이 그림 속에 스며있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으 며 잡초 같은 난초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불이선란>은 정성을 들여 잘 그리려고 애쓴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김정희는 손길 가는대로 머뭇거리지 않고 난초를 그렸다. 그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는 70세경(1855년경)이었다. 그때는 8년 동안의 제주 유배를 겪고 나서 얼마 뒤에 있었던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였 다. 슬퍼서 울다가 지치면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픔이 조금은 잊 어지는 것처럼, 이제 김정희는 너무나 슬퍼서 슬픔조차 잊어버렸다. 마 음속에는 세상에 대한 애착도 미움도 사라진 뒤였다. 그저 남은 생애를 조용히 보내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렇듯 마음을 비우고 그렸기에 다시는 그릴 수 없는 작품이 나온 것이다. 김정희는 화면 아래 왼편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쑥대머리 달준이를 위해서 설렁설렁 그렸으니, 이번 뿐 다시는 이렇
36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게그릴수없구나. 김정희가이그림을주려고했던사람은지체높은선비도아니었고제자도아니었다. 다름아닌옆에시중을들던쑥대머리시동달준이다. 그러니애써공들여그릴필요가없었고더더욱마음을비울수있었을것이다. 김정희는이그림을불교이야기와비유하였다. 이때김정희는불교에깊이빠져들었다. 사람이너무나힘들고삶이얼마남지않았을때종교를찾듯이. 난초그림을그리지않은지 20 년만에우연히본성의참모습을그려냈네. 문닫고찾으며또찾은곳이것이유마維摩의불이선不二禪이네. 김정희는깊은의미를담고있는시한수를지어난초그림에썼다. 선비들은한종이에그림을그리고시를옆에더하곤하였다. 왜냐하면선비들은마음과정신을수양하기위해시를짓고그림을그리곤했기때문이다. < 불이선란 > 을보면그림이기도하지만글씨이기도하다. 물론그림이갖는뜻과글의뜻도같다. 이를일컬어시와그림이일치 ( 시화일치詩畵一致 ) 되었다고하였다. 시를보면김정희가 20년만에난초를그렸지만그림그리는법을잊어버리기는커녕난의참모습을그렸다고하였다. 그리고는이난초그림을유마거사의불이선 ( 不二禪 ) 이라고하였다. 유마거사는석가모니의가르침을진실히따랐던사람이다. 그는여러보살들에게진정한깨달음인둘이아닌법 ( 불이법不二法김정희는불이선不二禪이라고함 ) 에대해물으니보살들은제각각설명하였다. 그후문수보살이유마거사에게되물었다. 그러나그는아무런대답을하지않았다. 글과말로표현할필요가없으며, 할수도없는것이깨달음이라는것이다. 정말어려운말이지만이렇게생각해볼수있다. 너무나아름다운경치를보면말문이탁막히면서설명할수없는경우와조금은비슷하다. 선禪혹은법法이란깨닭음으로, 말과글로이러쿵저러쿵얘기할수있는것이아니다. 진정한깨달음이란무엇으로도설명할수없는경지이다. 그순간은세상에서만들어진법칙조차사라지는것이다. 김정희는
361 조선시대 회화사(초기~후기) 361 난초그림이 불이선이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난초를 그리는 법칙조차도 의 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봉안이니 삼전법이니 하는 법으 로 그리지 않는 것이다. <불이선란>은 세상 밖의 난초로, 평생의 시련을 극복하고 정신을 수련함으로써 이룩된 뒤에야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불이선란>은 시와 글씨와 그림, 그리고 불교의 선이 하나로 일치된 그림이다. 옛날부터 선비들이 글씨와 그림이 같다니, 시와 글씨와 그림이 일치되는 것을 말해왔지만 그림과 글씨와 시를 선禪 즉 깨달음과 일치(시서화선일 치)시키지는 않았다. 오직 김정희만이 이룩한 경지로, 이 그림은 시서화 선일치가 어떤 것인가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문학, 서예, 그림, 불교학, 경학 등 모든 분야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김정희는 시의 끝에 이렇게 썼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억지로 요구하며 구 실을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유마거사의 침묵으로 사양하리라 아마도 세 상 사람들은 김정희에게 이 난초 그림이 왜 불이선이냐고 물었을 것이지 만 그는 아무말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알아 본 사람이 있었다. 쑥대머리 달준이에게 주려고 그린 <불이선란>을 본 제자 오규일 은 최고 경지의 문인화 임을 알아채고 스승을 졸라서 가져가버렸다. 달준 이는 영문을 몰라 쑥대머리만 긁적였을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허허 웃 고 말았던 추사 김정희는 다음해 유마거사가 침묵한 것처럼 세상에 아무 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Ⅱ. 풍속화 1. 풍속화의 개념 풍속화는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는 습속이나 여러 일들을 묘사한 그림으로, 20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풍속화는 개념을 어떻 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림의 용도나 제작의도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일상생활이나 습속이 표현된 그림 을 모두 지칭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는 기록화나 감계화, 종교미술까
362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지포함하기도한다. 두번째는생활상및습속의표현과아울러, 그림의용도역시별도의목적에의해제작된것이아닌일상적인감상용회화를지칭하는경우이다. 이는일반적으로조선후기에유행한풍속화를의미하는경우로, 조선시대의속화 ( 俗畵 ) 라는개념과유사하다. 2. 조선시대풍속화의발생 조선시대초기와중기에는고려말의전통을이어받아감계적목적을가진 < 무일도 >, < 빈풍도 >, < 경직도 > 등의그림이제작되었다. 이그림들은이후풍속화의발달에선구적역할을하게되어, 조선후기김두량의 < 사계산수 > 와같은그림을탄생케하였다. 또한이시기에는궁중행사장면을그린궁중기록화를비롯해 70세이상의문인관료출신들이모임을갖은후이를기념하고자모임장면을그린기로회도등이제작되었다. 이상의그림들은당시생활상이반영되어있어서풍속화에속할수도있으나감계화나기록화로구분하는것이보다정확하다. 조선후기에이르러서는의도되지않은일상적인행동이나습속을그린풍속화가등장하였다. 이러한풍속화의등장은실학의발달과구비및패관문학의유행, 그리고중세동아시아의미술흐름과밀접한관련이있다. 조선후기풍속화는윤두서나조영석같은문인화가들에의해시작되었으나곧김홍도와신윤복같은화원화가들에의해주도되었다. 풍속화는진경산수화와더불어조선후기의대표적인화목으로자리잡아유행하게되었고, 19세기에이르러남종문인화의유행으로인해쇠퇴하였다. 조선후기풍속화는소재와주제의독특함으로인해많은주목을받았으며, 당시의생활사나복식사, 문화사를연구하는데일차적이며중요한자료로인정받고있다. 3. 풍속화의두부류 조선후기풍속화는크게두부류가있다. 우선객관적사실의전달이라 는측면이강조된부류와감정표현이주가된부류가있다. 첫번째부
363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363 류의그림을주로그린화가는조영석을비롯하여윤두서를꼽을수있다. 조영석이나윤두서의그림은당시농가의정취를담아내기보다는비교적대상을정확하게묘사하고있다. 이들은관람자가장면이어떤것인지를정확하게알려주어관람자가사실의획득에도움이되어야한다는입장을가지고있었기때문에사실적인풍속화를제작한것으로알려져있다. 윤두서의 < 목기깍기 > 는그대표적인작품이다. 이그림은나무그릇을깍는장인들의모습을담았다. 단지그모습을담았다기보다는목기가어떻게선차 ( 旋車 ) 에의해깎여지는가를정확하게표현하고자하였다. 선차에걸린줄을장인의양발에걸은다음발을움직여선차가돌아가고선차끝에달린나무는다른장인이쥐고있는긴끌에의해목기의형태로만들어져간다는사실을알수있다. 이그림역시정확하게장면을묘사하는데충실하였으며감정의이입은없는상태이다. 장인들의모습에는목기를깎는고된모습이라든지혹은오고가는잡담으로인한정겨움등이표현되지않았다. 인물의표정은무표정하기만하다. 즉, 이그림은목기공방에서일어난정경을그렸다기보다는어떻게목기가만들어지는가에치중한그림이다. 조영석역시윤두서와유사한작품을남겼다. 그의 < 선반작업 > 에서선반을돌리는원리와그선반에의해기물이만들어지는상황이정확하게파악된다. 그의 < 새참 > 은그림의소재로볼때, 인물들간의왁자지껄한잡담이있어야하나, 그림속인물은조용하기만하다. 다만어린아이에먹을것을주는어른의입가에약간의미소가있어서앞서소개한그림과는달리, 인물의감정이감지된다. 풍속화에서인물의감정표현부각은김홍도에의해본겨적으로시작되었다. 김홍도의 < 새참 > 을보면, 조영석과같은소재를그린것이지만농사일을쉬고새참을먹는순간의정겨움을그대로담아내었다. 등장인물의함박웃는표정을보면새참의즐거움이느껴진다. 이처럼김홍도의풍속화는사실에바탕을두면서도등장인물들의감정을표현하는데주력하였다. 김홍도의대표작으로는 < 타작 > 을꼽을수있다. 추수장면을표현한이그림은상단의우측에있는갓쓴양반과나머지일꾼무리로구분된다. 이양반은땅의주인인듯하고일꾼들은소작농으로보인다. 인물의구성으로볼때, 이그림은조선시대농가의계층적인현실을표현하였다.
36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그러므로그림의분위기가상당히무거워질수있었음에도, 직관적으로는전혀그렇지않다. 그이유는바로등장인물들의경쾌한몸놀림과표정때문이다. 땅주인인양반은입는옷이나긴담뱃대로보아상당히부유한사람이라고볼수있지만, 기우뚱하게쓴갓이나한쪽다리를접어올리고볏단을괘고있는모습으로보아학덕이꽤있어보이지는않는다. 앞쪽에그려져있는막걸리단지의크기로보아술기운이꽤올랐을것같다. 혼자취해버렸으니일꾼들이심통이날만도한데, 가운데볏짚을들고있는더벅머리총각을제외하곤입가에한껏웃음을머금고있다. 결과적으로이그림의분위기는인물의구성등으로볼때화기애애할수없으나등장인물들의행동과표정에의해추수가갖는흥겨운분위기일색으로바뀌었다. 4. 풍속화속시화일치 ( 詩畵一致 ) 김홍도는조선후기의문인서화가인강세황과교유한인물로, 여느풍속화가와는달리문인취향을지녔던직업화가이다. 그래서그의그림대부분이서민을소재로한풍속화를그렸음에도종종아주문인화적인주제를담은그림을남기기도하였다. 김홍도의 < 마상청앵 > 은이른봄날말을타고가던선비가막잎이돋아난나무위에꾀꼬리한쌍이지저귀는모습을보고넋이나간모습이그려져있다. 그선비는이내시가머릿속에떠올랐는데, 그시를김홍도는이렇게적고있다. 어여쁜여인이꽃아래에서천가지가락으로생황을부나. 운치있는선비가술잔앞에밀감한쌍을올려놓았나. 어지럽다저황금빛베틀북이수양버들물가를오고가더니, 안개와비를이끌어다봄강에고운깁을짰구나. 이시에서첫구절은꾀꼬리의모습과소리를여인과생황소리에비유하였고둘째구절은나뭇가지에앉아있는한쌍의꾀꼬리가마치술잔앞에있는밀감에비유하였는데, 색깔때문이다. 꾀꼬리리가날아다니는모습을베틀의북이이리저리오가는모습에견주었으며그베틀이움직여
365 조선시대회화사 ( 초기 ~ 후기 ) 365 옷감이짜여지는모습을물가를날아다니는고운새의모습에비유하였다. 즉, 이그림은선비와봄날호숫가의정경을소재로한풍속화이지만그 내용은문인들이추구하였던시화일치를실현해내고있는것이다. 5. 해학과풍자 풍속화에서가장즐겨그려진소재는서민들을소재로한그림이다. 이러한부류의그림은단옷날의개울가풍경을비롯해, 씨름장면, 서당의모습등다양한소재를다루고있다. 그러나그림들이보여주는정취는대체로비슷하다. 즉그림의소재가되는풍경은다양하지만풍정속에는해학미를추구하고있다. 대표적인화가로는김홍도를들수있다. 김홍도의 < 서당 > 은여느마을의서당에일어날법한정경을아주생동감있게표현한작품이다. 한아이가훈장앞에서울고있고주위에는회초리와책이하나뒹굴고있다. 분명아이가뭔가를잘못하여훈장앞으로불려나왔고, 훈장은홧김에자신의책상위에있는책을던지고회초리를댄듯하다. 훈장의얼굴을보니, 그리학식과인덕이높아보이지는않은것같다. 아이는울고있고훈장은난감해하는표정을짓고있는모습에서는대립과온정이교차한다. 반면주위대다수아이들의모습에는웃음이넘쳐난다. 그아이가혼난모습에재미있어하는것이다. 단지장가든늦깍이학생만이엄한얼굴을하며울음을그치라고하였으며, 앞쪽두번째는우는학생의친구인지형인지화난얼굴을하고있다. 아마도웃는학생들에게상당히화가난모양이다. 주위인물들이보여준표정에는해학속긴장이곁들어있는것이다. 해학미과더불어풍속화의주요특징중하나는풍자미이다. 김홍도가해학의풍속화를그린화가라면신윤복은풍자의풍속화를그린화가이다. 물론신윤복의그림에는해학미가보이기도하지만풍자는그의풍속화가갖는중요한미적가치이다. 특히그는고상한양반들의이면을들추어내는그림을주로그렸다. 신윤복의 < 연소답청 > 은세명의양반과기녀가쌍을이루어나들이를가는중이다. 절벽에진달래가피어있어그림속장면의때가봄임을알수있다. 아직앳된양반들은기녀들의환심을사려고여러행동을한다. 이들은모두자신들이타는말을기녀들에게양보했다. 맨앞의양반은아예말구종을자처했다. 자신의갓은맨
36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뒤에따라오는말구종에게건네고자신은벙거지를쓰고있다. 뒤따르는양반은기생의담뱃대에불을붙여건네고있고, 이에기생은쑥스러운지머리를매만지고있다. 그림아래쪽의양반은오는중에기생과말다툼을하였는지표정이밝지못하다. 사실이러한양반의행태는평상시에는상상할수없는것으로, 양반의이면을그린것이다. < 연당야유 > 역시풍자적인그림이다. 갓끝으로보아당상관이상양반들이집안뜰에서의녀를비롯한기녀들을불러놓고연회를열었는데, 집주인은남의눈은아랑곳하지않고기생을희롱하고있다. 이를쳐다보는손님양반은여간못마땅해하고있다. 이처럼신윤복은허세부리는양반들의이면을적나라하게그렸던것이다. 신윤복의그림은당시세간에서돌려보았을것인데, 풍자적인묘사로인해후련한웃음을지었을것이다.
367 윤현진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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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조선말기회화사 369 윤현진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목차 1. 머리말 2. 조선후기회화전통의위축 3. 남종화의유행 4. 이색화풍의대두 5. 허련 장승업두계보의확립 6. 맺음말 1. 머리말 회화사에있어서조선말기는 1850년부터 1910년까지 ( 안휘준 ) 로, 진경산수화와풍속화, 남종화가중흥했던조선후기회화와구별되는특색을지닌다. 특히조선말기는역사적부침이심했던시기로, 대외적으로는구미열강과일본, 중국, 러시아등이자국의이익을위해조선에서각축을벌였으며, 대내적으로는안동김씨의세도정치, 대원군의쇄국정책, 개화파의등장과패퇴라는굵직한사건들이연달았던시기였다. 아울러이시기의화단에서는중인계층의활약이두드러져사대부또는화원이이끌었던조선후기이전의화단과는다른상황을보인다. 석파이하응 ( 石坡李昰應, 1820~1898), 추사김정희 ( 秋史金正喜, 1786~1856), 운미민영익 ( 芸楣閔泳翊, 1860~1914) 등의왕공사대부출신의화가들외에, 우봉조희룡 ( 又峰趙熙龍, 1789~1866), 고람전기 ( 古藍田琦, 1825~1854),
370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 등의 중인출신 화가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17세기 이래 시작되었던 중인 시사(日涉園詩社 稷下詩社 碧梧社 七松亭詩社 六橋詩社)가 활발히 결성되었 으며, 중인들의 전기(壺山外史 里鄕見聞錄 熙朝佚史 槿域書畵徵)가 중인출 신들에 의해 발간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회화는 김정희, 허련과 장승업에 대한 관심을 제외하 고는 전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전대인 조선후기에 비하면 학계의 충분 한 관심을 받지 못해 왔다.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가 위축되고, 남종화가 지나치게 사의적이고 획일적인 경향으로 치우쳤던 것은 사실이 나, 북산 김수철(北山 金秀哲)이나 석창 홍세섭(石窓 洪世燮, 1832~1884) 의 이색적인 화풍, 이하응이나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 1832~1914) 등 에 의해 이끌어진 1인 1기의 경향은 이 시기의 중요한 회화적 업적이다. 2. 조선후기 회화 전통의 위축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겸재 정선일파의 진경산수화나 김홍도, 김득신, 신 윤복 등이 구축했던 풍속화의 전통이 이 시기에는 순조롭게 계승되지 못 하였다. 혜산 유숙(蕙山 劉淑, 1827~1873)의 <세검정도(洗劍亭圖)>, 유 숙 전칭의 <대쾌도(大快圖)>, 시산 유운홍(詩山 劉運弘, 1797~1859)의 <기녀도(妓女圖)>, 임당 백은배(琳塘 白殷培, 1820~?)의 <기려강안도(騎 驢江岸圖)>,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의 <풍속화첩(風俗畵帖)> 등은 조 선후기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는 조선 후기에 비해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가 저변화되어 민화에서는 적극적으로 그려진 점은 주목 할 만 하다. 이러한 경향은 남종화의 경우에도 간취되는데, 조선후기에 남종화는 표 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2~1791), 능호관 이인상(凌壺館 李麟祥, 1710~1760) 등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말기의 남종화는 학식이 부족한 중인화가들에 의해 유행하면서, 획일적인 남종화 풍으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인다. 서양화법의 경우도 유사한데, 서양화풍은 이미 조선후기에도 수용 되어 남리 김두량(南里 金斗樑, 1696~1763)의 <묵구도(墨狗圖)>, <목우도(牧
371 조선말기의 회화사 371 牛圖)>,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현은 김덕성(玄隱 金德成, 1729~1797)의 <뇌공도(雷公圖)>,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 의 <연자초령의모도(延子髫齡依母圖)>, 이형록(李亨祿, 1808~?)의 <책가 도(冊架圖)> 등 일부 작품들에 나타났다. 이는 음영법이나 원근법 등을 일부 수용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말기의 석지 채용신(石芝 蔡 龍臣, 1850~1941)의 초상화들에 와서는 안면이나 의습의 표현에 있어서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화법적인 측면을 중요시한 나 머지, 내면세계까지 기운생동하게 표현하던 이전의 격조 높은 초상화에 비해 격이 하락하게 된다. 3. 남종화의 유행 조선말기의 화단에서 가장 유행한 것은 남종화이다. 남종화는 조선후기 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조선말기의 남종화는 조선후기의 전통을 계승했다기보다는 청대의 남종화를 위주로 하고, 명대와 원대의 남종화풍 을 쫒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김정희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김정희는 청대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들이었던 옹방강(翁 方綱) 부자, 완원(阮元), 주학년(朱鶴年)과 교우하고, 그들을 통하여 중 국의 문물과 서화를 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화관을 형성하였기 때문 이다. 또한 김정희는 금석학이나 고증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청대의 학 자들을 통해 쌓으면서 당시의 화단을 지배하였다. 김정희가 당시의 대표 적인 화가들의 서화관에 영향을 미쳤음은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에 실린 그의 평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예림갑을록 의 행방은 현재 알 수 없으나,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과 고유섭의 한국화론집성 에 의하면 예림갑을록 은 전기가 적은 것으로 되어 있고, 묵진(墨陣) 8인과 회첩(繪疊) 8인의 작품들에 대 한 김정희의 평을 실었던 것이다. 또 김정희의 평가는 6월 24일, 28일, 29일, 7월 7일과 9일, 14일 등 총 6차례(회화 세차례, 서예 세차례) 걸쳐 이루어졌다. 여기서 묵진 8인은 미파 김계술(渼坡 金繼述), 송남 이형 태(松南 李亨泰), 우범 유상(雨帆 柳湘), 소정 한응기(小貞 韓應耆), 고 람 전기, 이산 이계옥(耳山 李繼沃), 학석 유재소(鶴石 劉在韶), 우당 윤
37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광석(藕堂 尹光錫)이며, 회첩 8인은 김수철, 희원 이한철(希園 李漢 喆), 허련, 전기, 하석 박인석(霞石 朴寅碩), 유숙, 자산 조중묵(蔗山 趙 重黙), 유재소였다. 이 중 3차례에 걸쳐 김정희의 평이 이루어졌던 회화들은 주로 스산한 가 을 정취를 묘사한 남종화풍의 그림들인데, 이 중 1차례 평가받은 그림이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8폭의 병풍으로 표구되어 있다. 병풍에 있는 그 림은 김수철의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 이한철의 <죽계선은도(竹溪僊 隱圖)>, 허련의 <추강만촉도(秋江晩矚圖)>, 전기의 <추산심처도(秋山深處 圖)>, 박인석의 <고촌모애도(孤村暮靄圖)>, 유숙의 <소림청장도(疎林晴嶂 圖)>, 조중묵의 <추림독조도(秋林獨釣圖)>, 유재소의 <추수계정도(秋水溪 亭圖)>인데, 이들에 대한 김정희의 평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원인풍치(元人風致)기 있다, 원인의 심윤지기(深潤之氣)가 없다느니 하 여 원말사대가의 화풍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동인(東人)의 습기(習氣)를 범했다는 구절로 보아, 조선말기 이전의 우 리나라 화풍이 참고할만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요즘의 화법은 모두 태창(太倉) 일파로부터 기수(起手)하였다든가, 석 도(石濤)나 운남전(惲南田) 등 제가(諸家)와 같음이 없다든가 하는 평 으로 미루어, 청대의 사왕오운(四王吳惲)의 정통파 화풍과 석도와 같 은 개성파 화가들의 화풍이 원말사대가의 화풍과 함께 폭넓게 참고되 고 있었다. 갈필(渴筆), 홍염(烘染) 등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여 조선말기 회화의 필묵법 및 채색법의 문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수철의 작품에 대하여 솔이지법(率易之法: 간략하게 그리는 화법)이 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김정희가 김수철의 간결한 화풍을 특이하게 간 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가 당시 화단에 미친 영향은 회첩 8인에만 해당되었던 것은 아 니다. 그의 영향은 당시의 왕실, 사대부, 중인출신의 여기화가들, 화원들 등 각계의 화가들에게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회화사에서는 이들을 김정 희파 라고 칭하기도 한다. 김정희는 김정희파 의 화가들에게 그가 가진 영향력을 토대로, 당시 화단을 사의를 중시하는 남종화로 경도되게 하였
373 조선말기의 회화사 373 다. 남종화란 손재주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며, 서권기와 문자향을 발할 수 있는 학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학문이 부족한 중인출신의 화가들은 김정희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또한 김정희의 모 화사상(慕華思想)은 당시의 화단을 중국 지향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는 사귈만한 친구가 없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이나 허 련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의 화가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 흔하지 않다. 이러한 김정희의 영향력은 조선말기 이전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와 같은 화풍의 발전을 저해하고, 당시 화단을 남종화로 일원화하 게 하였다는 결과를 낳았다. 4. 이색화풍의 대두 조선말기의 화단에서 주목되는 것은 현대적 감각의 이색적인 화풍이 등 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색화풍은 김수철과 학산 김창수(鶴山 金昌秀)의 솔이지법 과 홍세섭의 참신한 구도의 화풍으로 구분된다. 김수철은 예 림갑을록 의 회첩 에 올라와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출신이었을 가능성 이 높으나, 김창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김수철은 산수도와 화훼도를 주로 그렸는데, 간략한 구도, 단순한 형태, 산뜻한 색채, 호초점(胡椒點)의 사용, 직선적이며 뚜렷한 구륵법의 주산 (主山) 묘사가 특징적이다. 김수철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후기의 학산 윤 제홍(鶴山 尹濟弘, 1764~?)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윤제홍 <송하관수 도(松下觀水圖)>의 춤추듯 가냘픈 소나무들의 형태, 생략적으로 표현된 인물, 담청을 위주로 한 설채법, 또렷한 구륵법, 호초점의 사용 등이 김 수철의 화풍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의 지우재 정수 영(之又齋 鄭隧榮, 1743~1831)의 일부 산수도에서도 호초점의 사용, 뚜렷 한 구륵법, 담청의 설채법 등에서도 김수철 화풍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김수철의 화풍과는 다른 성격의 이색화풍을 보이는 화가는 홍세섭이다. 홍세섭은 수묵의 영모화를 주로 그렸다. 그는 전형적인 사대부 문인화가 였는데, 조선말기 화단의 어느 계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홍세섭의 대표 작인<유압도(游鴨圖)>를 살펴보면 오리들을 조감(鳥瞰)한 구도로 그려 넣 었고, 농묵과 담묵을 번갈아가며 사용하여 묘사한 물결, 여기저기 찍은
374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크고 작은 묵점, 오리를 관찰력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 등은 대부분 중국의 명 청대 화보를 토대로 한 화풍을 따랐던 이전의 화조화에 비해 파격적으로 보인다. 홍세섭 회화의 파격미는 설산(雪山) 아래 가마우지를 담은 <야압도(野鴨圖)>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야압도>는 <유압도> 만큼 이나 배경의 대담한 생략과 자유분방한 붓질을 보여주는데, 추상화된 원 경의 설산과 농묵의 필선으로 추상적으로 처리한 산봉우리, 원경 산 아래 의 파도 표현, 가마우지의 사실적 표현 등은 홍세섭의 독창성을 잘 보여 주는 명작이다. 김수철이나 홍세섭과 같은 전통 화목에서 이색적 화풍을 보였던 화가들 외에 조선말기에는 한 가지 주제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이하응, 노천 방윤명(老泉 方允明, 1827~1880),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 1855~1921), 민영익 등은 묵란을 그렸고, 정학교의 괴석, 이교익(李敎翼, 1807~?), 일호 남계우(一濠 南啓宇, 1811~1890), 고진승(高鎭升)의 나비, 석연 이공우(石蓮 李公愚, 1805~)의 매화, 최석환(浪谷 崔奭煥, 1808~)의 포도, 박기준(朴基駿)의 부채, 양기훈(楊基薰, 1843~)의 기러기, 채용신 의 초상화 등은 한 가지 화목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화가들로, 조선말기 화단의 색다른 조류를 보여준다. 5. 허련 장승업 두 계보의 확립 조선말기의 화단에서 허련과 장승업은 각기 계보를 형성하여 현대의 화 단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허련은 진도 출신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제자였다가 초의선사의 소 개로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그가 쓴 소 치실록(小癡實錄) 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정희는 허련을 사람 됨이 심히 좋고, 화법은 우리나라 사람의 누습(陋習)을 깨뜨려 없앴으며, 압록강 이동에는 이와 같은 작품이 없소. 라고 신관호(申觀浩)에게 평가 한 것으로 보아, 김정희가 허련을 각별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허련은 원말사대가 중에서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의 화풍을 특히 많이 참 고하였다. 이러한 점은 김정희가 황공망을 염두에 두고 지어준 소치(小 癡, 황공망의 호는 大癡)라는 호와 운림산방(雲林山房, 예찬의 호는 雲
375 조선말기의 회화사 375 林)이라는 그의 당호(堂號)에서도 확인된다. 허련은 산수, 인물, 소나무, 대나무, 매화, 모란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 었다. 헌종 앞에서 그려 바친 산수화첩(山水畵帖) 을 비롯한 수많은 산수화를 남겼다. 그의 산수화는 거친 갈필, 푸르스름한 담청을 즐겨 쓴 설채법, 예찬이나 황공망계의 변형된 구도를 바탕으로 그의 독자적인 화 풍을 보인다. 그는 그의 그림들에 추사체로 시문을 적는 일이 많아 시서 화 삼절이라는 문인화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허련 은 모란꽃을 많이 그려 許모란 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모란은 부귀 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모란 병풍이나 화첩을 요구하는 가정이 많았다. 이의 수급을 위해 민화에서도 모란꽃 그림은 다수 제작되었는데, 허련이 모란꽃을 많이 그렸다는 것은, 이러한 당대의 요구에 부응했음을 의미한 다. 허련의 화풍은 그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 손자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 허련의 방계(傍系)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과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 또한 그들 의 화풍이 이어져 현대의 호남화단을 이루고 있다. 허련과 마찬가지로 장승업과 그의 후계자들도 현대화단에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장승업의 생애에 관해서는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逸士 遺事) 에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삼원인(三元人)으로 선대 는 무반이었고, 오원(吾園)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조실부모했으며, 집 안이 가난하여 떠돌다가 서울 수표교에 있는 역관 이응헌(李應憲)의 집에 서 기식하며 그 집에 소장되어 있던 원명(元明) 이래의 명인들의 서화를 접하고 눈이 트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했 고,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의 화명(畵名)은 궁중에까지 알 려져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민영환(閔泳煥)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다. 장승업은 조선초기의 안견, 조선후기의 김홍도와 함께 조선왕조 시대의 3대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장승업은 산수, 인물, 영모, 화훼, 기명절지 등 다양한 소재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 산수도에서는 원말사대가의 화풍, 미법산수 화풍 등 남종 화법을 수용하여 우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인 삼성미술관 리 움의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는 세련된 기량을 보여주며, 간송 미술관 소장의 <산수도>는 과장되고 기이한 형태를 보여주는 일격의 화풍
37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을보여준다. 그는산수화에서폭이좁고, 길이가긴화폭에그리기를좋아했는데, 이는중국청대회화의경향과관련이있는것으로생각된다. 또한허련의경우와마찬가지로푸르스름한담청을자주사용했는데, 이것도당시의안료와유행했던색채와관련이있다고생각된다. 장승업의인물화는도석인물 ( 道釋人物 ) 이주를이루고있는데, 인물들은모두중국인의모습이며, 의습이기이하고, 과장된얼굴표현은심전안중식 ( 安中植, 1861~1919) 이나소림조석진 ( 趙錫晋, 1853~1920) 을통해현대로이어져왔다. 이러한장승업의중국적취향은영모와화훼, 기명절지에서도나타난다. 이처럼장승업은뛰어난기량을지녀여러걸작을남겼으나, 중국적인취향을조선말기이래의화단에심어놓음으로써우리나라화단이토속적인미를발전시키는데지장을받게하는결과를낳았다. 장승업의화풍은안중식과조석진에게계승되었고, 이들을통하여그들의제자인심산노수현 ( 心汕盧壽鉉, 1891~1978), 청전이상범 ( 靑田李象範, 1897~1972), 소정변관식 ( 小亭卞慣植, 1899~1976) 등의현대화가들에게이어졌다. 안중식의 < 풍림정거도 ( 楓林停車圖 ) 를보면반복적이고과장된산의모습, 스산한느낌의담청의사용, 문기없는분위기에서장승업화풍의계승을뚜렷하게보여준다. 조석진도장승업의영향을받아형태의반복, 담청의애용을드러내지만그의 < 수포고촌도 ( 水抱孤村圖 )> 를보면, 보다투박하면서부드러운느낌이다. 안중식과조석진의화풍은노수현, 이상법, 변관식등에게이어졌으나, 이들은초기에만스승의화풍을따랐을뿐각기독자적화풍을이루면서장승업의화풍으로부터점차탈피하게되었다. 6. 맺음말 이상에서조선말기화단의제경향을기존의연구들을정리하며살펴보았다. 조선말기의화단은조선후기한국적화풍으로자리매김한풍속화나진경산수화의위축때문에그중요성이간과되었던측면이있다. 그러나조선말기화단에서중인화가들의대거등장이나, 새로운감각의이색화풍의등장, 그리고 1인 1기의경향은이시기의중요한업적이기도하다. 이시기화단에서가장주목할만한점은남종화의유행이며, 조선말기이전
377 조선말기의회화사 377 에사대부들의전유물이었던남종화가시대상의변화로중인층에의해폭넓게향유되었다는것이다. 이들에의해조선말기의화단이남종화의획일적경향을보이며, 동시에풍숙화나진경산수화가위축되는결과를낳았다는점에서는부정적평가를내릴수있으나, 새로운문화향유층이등장했다는것은화단이한단계진일보했다는것으로평가할수있을것이다. 아울러이들의후예가우리나라근대화단의중추세력이었다는점에서이들은더욱중요시되며, 앞으로학계에서조선말기화단에연구를더욱활발히진행해야할것으로생각된다. < 참고문헌 > 이동주, 우리옛그림의아름다움, 시공사, 1996 안휘준, 한국회화사연구, 시공사, 2000 홍선표, 조선시대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삼성미술관 Leeum 전시도록, 조선말기회화전, 2006
37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379 이현아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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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한국 근대 희화사 381 한국 근대 회화사 이현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Ⅰ. 한국회화의 근대로의 이행 Ⅱ. 근대 전통화단 Ⅲ. 근대 서양화단 Ⅰ. 한국회화의 근대로의 이행 1. 근대의 시작과 근대성 미술사에 있어서 근대란 그 이전의 미술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현대 미술의 성격이 비롯되는 구체적 계기 및 발단지점이다. 한국미술사에 있 어서 근대의 기점 문제는 여러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어 정확 한 구분을 하기는 어렵다. 한국미술사의 시대구분은 거의 왕조별로 구분 하고 있으나 미술분야에서의 근대의 시점은 조선후기(영 정조) ~ 1930년 대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한다. 본 교육에서는 조선말기 서화가 장승 업을 기준으로 그 이후의 미술을 근대회화의 시작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렇다면 근대성(Modernity) 이란 무엇일까? 근대성에 대한 정의는 학 자마다 그 의견이 아직도 분분한 개념이다. 보편적으로 근대성은 고대, 중세, 근대에서와 같이 역사적이자 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서양에 서의 근대성은 전통사회에 대한 부정과 함께 과학의 발달과 산업화를 통 해 획득한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예찬하는 것에서부터 그 개념이 탄생하였
382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다. 동양의 경우 근대성은 종종 서구화 의 개념과 유사하게 사용되는데 이는 당시의 서양의 시각이 전이되어 진보의 의미가 서구화로 인식되고 이를 근대성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기 존의 사고와 생활방식이 변화하면서 현실성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서구적 가치관이 동양의 가치관을 대체하게 되었다. 2. 미술계에 있어서의 근대적 변화 1) 새로운 미술제도의 실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미술계에는 근대미술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여러 변화들이 나타난다. 근대회화가 그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발전될 수 있었 던 것은 사회 내 외적인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중 하나가 새로운 미술제도의 실시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교육제도가 변화되어 1906년 에는 도화시간이 학교교육의 필수가 되었고 교과서에 삽화가 수록되어 자 연스럽게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근대적 미술단체의 설립도 이루어 져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되어 회원들의 그룹전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특히 근대 미술계에 있어 중요한 사건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시작이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지속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으로 약칭)는 20~40년대 근대화단의 양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총독 부의 후원으로 전국적으로 행해진 일종의 공모전 형태를 띤 것으로, 심사 위원과 수상제도가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식민정책의 일환인 일종의 문화 정책이었다). 선전은 해를 더할수록 점차 위상이 강해져서 그 영향으로 동양화에서 서양화로 그 비중이 높아져 1회때 3명이었던 서양화 입선이 1932년에는 86명이 되었으며, 미술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서화일치사상에 서 미술을 세분화, 전문화하는 양상으로 변화되어 갔다. 처음에는 동양/ 서양 조각/서 사군자 로 나누어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문인화와 서예 는 제외되고 일본화를 배운 세력과 한국내에서 전통 회화를 배운 세력들 간의 다툼으로 점차 전통화가 미술의 영역에서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산 수화는 점차 풍경화의 개념으로 변화되었고 돈을 주고 미술을 사는 풍조 가 생기면서 상품화되기 시작한다.
383 한국근대희화사 383 2) 서양미술의 2차파급서양미술의 1차파급은이미조선후기부터청나라로부터도입되었으나 19세기말이되면서양화가의내한으로보다본격적인서양미술의 2차파급이이루어진다. 특히주목할만한외국인은 1899년한국에온네덜란드인휴버트보스이다. 그는사실적인서양화법으로고종황제의초상및고관들의초상을많이그렸고, 서울을그린풍경등이전하고있다. 3) 새로운표상방식과장르의대두조선후기실학자들을통해들어온카메라옵스큐라와 19세기말사진술의전래는전통미술에대한시각의변화를가져왔다. 그림으로그려지던초상화는사진과초상기술을결합시켜더욱사실적인제작을할수있었고, 황철, 지석영, 김규진등은실제로사진관을운영하며사진을찍었다. 사진과함께근대기의새로운장르는만화와삽화의전래이다. 출판물 ( 특히신문 ) 에그려진삽화는근대기의시각문화를반영한것이었고당시우리에게는낯설었던시사만화가등장하였다. 4) 자연관의변화자연과하나되는전통사회의자연관은고금을통하여동양전통사회의미술을지배하였다. 그러나물질문명의발달과함께자연은이전의거대하고신비한개념에서하나의구체적인대상으로서화가들의의식을지배하게된다. 따라서화면에거대한자연을모두담아내고자하는의도보다는주변의자연경관을표현하는것이선호되었고, 관념속에존재하는자연이아닌현실속의자연을표현하는것에관심을갖게된다. 이에따라농촌이라는구체적인삶의터전을표현한농촌풍경화가제작되고, 식민지의암울한상황속에서한국적인산천을그림으로서자신의정체성을찾고현실을극복하고자하였다.
38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Ⅱ. 근대전통화단 세기말 ~ 1910 년대 : 조선말기회화의지속 장승업의뒤를잇는심전안중식 ( 安中植, 1861~1919) 과소림조석진 ( 趙錫晉, 1853~1920) 은조선말기에서근대로이어주는가교자역할을한다. 그들은직업화가로서전통적인화격을보여주었으며, 근대한국화의실질적인전환기에기여한공헌은지대하여 1920년대화단의양상과도밀접하게연관된다. 주로그린소재들은중국의고사, 전통적인관념산수, 신선도, 화조영모등보수적인성향을여전히보여주고있어이들은근대기의개막으로서보다는전통시대의종장으로분석되기도한다. 두화가의화풍적연원은오원장승업에서찾고있지만중국에서발행된화보의영향도많이받았다. 때로안중식이조석진보다근대적인작가로부각되는데, 이는조석진이꾸준히전통화풍을구사한것과는달리안중식은 1915년 < 백악춘효 >, < 영광풍경 > 등과같은사실적인실경화풍을구사하여근대적인사실주의를반영한다는점에서의의가있다이들은화가로서의작품활동외에도후진양성에중추적인역할을한다. 1911년최초의근대적미술학교인서화미술회에안중식과조석진이중심적인교사로써후진을양성하였으며, 1920년대에활동한이용우, 오일영, 김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등이이들에게사사받아이들의회화는안중식과조석진의영향이농후하다. 또한최초의유화가로알려진고희동역시일본유학전안중식과조석진에게전통화법을배웠으며 1920 년대에는서양화에서전통화로전향하게된다. 한편 1910년대활약한또다른대표적인전통화가는해강 ( 海岡 ) 김규진 ( 金圭鎭, 1868~1933) 을들수있다. 그는중국에서그림을배워중국풍으로묵매와묵죽을많이그렸으며창덕궁벽화로도유명하다. 개화문명을받아들여 1903년천영당사진관을운영하여한국미술사에있어사진기술의도입에선구적인역할을한작가이다. 또한그는 1915년서화연구회를조직하여문인화를지도한다. 채용신 ( 蔡龍臣, 1850~1941) 은근대기주목할만한초상화가이다. 무관관직재직시태조어진을포함한 7조의어진모사및고종어진제작도감의주
385 한국근대희화사 385 관화사를맡으며활동하다가상업화가로전향한후사진술과서양화기법 을수용하여극도로사실적이면서도전통적인인물화를그렸다 년대이후 : 전통화단계보의형성 1919년안중식이, 1920년조석진이타개함으로써 1920년대는새로운시대가시작된다. 1920년대화단은크게두계열로나뉘어지는데하나는전통적인수묵화정신으로체험적이고실증적인시각의산수와향토풍경을그리는계열이고다른하나는사실적인선묘와채색으로젊은여인상을비롯하여사실적표현으로화조, 동물들을소재로한계열이었다. 전자는동연사를중심으로한화가들이중심이며후자의대표적인개척자는김은호이다. 1) 수묵사경산수계열 1920년대이후수묵을위주로사경산수의한계보를형성하게된결정적출발은동연사 ( 同硏社 ) 의조직이다. 동연사는 1923년이상범, 변관식, 이용우, 노수현이중국화풍의탈피와일본화풍의배격을목적으로조직한단체로향토적인사실주의와현실적자연주의를특징으로한다. 동서양미술의융합을통해산수화개혁에앞장선동연사작가들의새로운시도는서양화와식민지상황에서편승하여들어온새로운일본화의현실적인소재와사실적인기법의자극과무관하지않다. 이는안중식과조석진으로대표되던전통적인한국화가주류를이루던 1910년대의화단에서의변화와자의식, 시대성을반영한다고할수있을것이다. (1) 청전 ( 靑田 ) 이상범 ( 李象範, 1897~1972) 동연사의네화가중우선이상범은초기에는스승안중식의영향을받아남북종 ( 南北宗 ) 절충화풍을보였으나점차독자적세계를개척, 향토색짙은작품들을그려냈다. 그러나동연사조직후전통적인남종화정신을계승하는수묵위주의산수풍경을그렸지만현실적시각으로관념적인산수풍경이아닌지극히평범한시골풍경과현실적생활감정을표현하였다.
386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2) 소정(小亭) 변관식 (卞寬植, 1899~1976) 동연사 작가 중 가장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는 작가는 변관식이다. 당시 이상범이 선전에서 인기를 얻자 선전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이상범과 는 차별된 화풍으로 기행에 기초한 실경산수를 그린다. 특히 다양한 산세의 금강산 그림을 많이 제작하였다. 다각적인 방향에서의시점을 구사하여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으며 이상범과는 달리 적묵법 (積墨法)을 주로 사용하여 변화를 주었다. (3)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 1904~1952) 조석진과 안중식으로부터 전통화법을 배운 이용우는 당시 전통화단에는 파격적인 제목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1930년대에는 한적 한 산경을 환상적인 형태로 그렸으나 1940년대 들어서는 향토적인 정 경에 눈을 돌려 경쾌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4)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1899~1978) 노수현의 화풍은 전통 관념산수화의 이상주의적 맥을 계승하여 동연사 작가들 중 가장 보수성이 강한 편이다. 동양화 연구는 물론 서양화도 연구해야 한다는 동연사의 취지와는 달리 노수현의 그림에는 서양화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다. 2) 채색 인물 화조계열 근대 일본화의 사실적인 인물화 및 화조화의 신감각에 토대를 둔 채색 인물 화조계열의 선구는 인천출신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이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들은 스냅사진과 같은 인상을 주며 이러한 경향에 대해 근대적이라 평가하고 있다. 섬세한 필선 과 맑고 우아한 색채의 사실적 표현은 당시의 도회감각을 보여주는 것이 었다. 김은호 인물화에는 계량한복을 입고 구두신은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가볍고 부유하는 듯한 당시 우리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은호가 주로 그린 미인도와 화조도의 세필채색화에는 일본화의 영향이 짙어 친일화풍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김은호의 화풍은 이영일 (李英逸, 1904~1984), 운보 김기창(金基昶, 1913~2001), 월전(月田) 장우성 (張遇聖, 1912~2005) 등으로 이어진다.
387 한국근대희화사 387 그밖에 1920년대이후전통화단에있어서의재 ( 毅齋 ) 허백련 ( 許百鍊, 1891~1977) 은예외적으로호남지방을중심으로관념적인산수를보여준다. 그는동경에수년간머무르면서일본화법이아닌중국의남종화법을배웠고한국에돌아와광주에정착하여고법의고전적인중국화법으로산수화풍을심화시키면서문하생을길러호남화파를형성하였다. 온화한성품에고전화론을충실히따르고시서화일체의문인화로서의화풍을보여줘전통계승의마지막남종화의대가로불리운다. Ⅲ. 근대서양화단 1. 서양화의시작과아카데미즘의정착 근대서양화단에있어일본으로부터이식된아카데미즘은오랜기간동안지속된주요흐름이었다. 우리나라최초의서양화가인고희동 ( 高羲東, 1886~1965) 을비롯하여서양화정착기인 1915~20년사이서양화를배운작가들은대부분일본유학을통해서양화를배우고한국에돌아왔고이를통해자연적으로당시동경미술학교에팽배한일본서양화과교수들의일본식아카데미즘이국내에도그대로전이되었다. 또한작가들의주요활동무대였던당시의선전은일본의문전을모방한형태로운영이되었고, 심사위원역시동경미술학교출신이많아일본아카데미즘양식의회화가곧선전입선과동일시되었다. 이시기회화들은화사한외광적묘사로한가로운인물을그린작품들이많았고, 역사 사회적그림은그려지지않았다. 대신단순한자연미의재현으로서향토적소재주의를고취시키는풍경, 인물, 정물에그치도록유도되었다. 그결과민족적감성은무력화되고저항이나사회의식은담을수없었다. 고희동은최초의서양화가로서동경미술학교에국비장학생으로유학하며서양화를접하게된다. 그의자화상은아직서양화기법은미숙하지만선례로서중요하게다뤄진다. 고희동에이어서양화를그린김관호 ( 金觀鎬, 1890~1959) 는우리나라최초의누드화를그린작가이다. 그의 < 석모 > 는일본문전에서특선한작품으로, 전체적인구도와표현에있어프랑스상징주의작가인샤반느의작
388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품과매우유사한데, 이는일본작가들이샤반느를좋아해영향을많이받았기때문이다. 이작품에는일본외광파의영향이잘보이는데인물을야외에위치시키고화면에흐르는미묘한빛의효과는인상파적요소를보여준다. 일본외광파는일종의일본식인상주의로동경미술학교의영향력있는교수인구로다세이키에의해발전되었다. 그는동경미술학교교수에서서양화를가르쳤던프랑스인라파엘코랑의화풍을받아들여일본식인상주의인외광파양식을유행시켰다. 감각적, 장식적으로밝은불빛과화려한자연, 투명한살빛, 감작적인여인들이그려졌으며이는인상파의아카데믹화를보여준다. 외광파의추종자들이동경미술학교의교수였기때문에일본유학을통해서양화를접한초기한국서양화는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교수들의화풍인외광파의영향을짙게보여준다. 나혜석 ( 羅蕙錫, 1896~1949) 은최초의여성서양화가로, 동경여자전문대학유학후 1918년에귀국하였다. 최초의여성서양화가지만그림에서는페미니즘적요소를찾을수없으며, 그녀의 < 자화상 > 은세심하지않고다소남성적인성향을보여준다. 서양화도입단계에정착된아카데미즘양식은이후이종우, 김종태, 김인승, 도상봉, 이쾌대등의작품에서도그영향이지속됨을볼수있다. 2. 향토주의미술운동의전개 향토예술 (heimatkunst) 은독일어에서온것으로 1906년일본문단에서쓰여지기시작했으며다시한국으로수입되었다. 일본에서의향토예술논의는중농주의에기반을둔반도회주의적문학으로 1906년부터 1924년까지주로이루어졌고, 우리나라에서본격적으로논의된것은 1930년대부터이다. 조선향토주의색은조선미술전람회를통해아카데미즘이되었고이것은일종의일본의이국취향이었다. 회화에서의향토주의는조선적인색채를통해향토색을표현하는흐름과조선적인전설이나풍속으로향토를표현한것들이대표적이다. 향토주의미술의대표적인작가는이인성과오지호등이다. 이인성은붉은조선땅의표현, 조선의유적및조선인의표현등을통해향토주의를보여주었고, 오지호는우리미술과일본미술의차이를자연기후, 풍토성의차이로파악하고조선적인색채 ( 원색 ) 가있다
389 한국 근대 희화사 389 고 보았다. 그는 우리나라의 자연은 청명하여 색채의 선명도와 그 명랑함 을 중시해야하는 반면 일본은 습한 지역과 명확치 않은 사계절 구름이 많 아 색채가 불투명하고 어둡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향토주의는 그림의 내용, 주제를 통해서가 아닌 색채, 즉 미의 형식만 강조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또 다른 한국에 대 한 오리엔탈리즘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조선미술열등론, 민족정체론 등 식민사관이 팽배했던 당시 상황하에서 우리미술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조 선적 인상주의를 수립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3. 기타 서양화단의 새로운 시도 1920년대부터 서양화단에는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아카데미즘이나 향토 주의 미술과는 다른 서양화들이 제작되었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주목 할만한 화가는 주경(朱慶, 1905~1979)이다. 1920년대 다른 화가들이 아카 데미즘과 인상파류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을 때 그는 고전파, 야수파, 입 체파, 추상미술을 시도했다. 그의 작품 파란 은 유기적 구성과 역동적 표현, 적 청 황색이 어우러진 색 표현, 무수한 곡선과 직선의 사용 등에서 세기 초의 미래파, 표현파가 갖는 비구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의 로트렉이라 불리우는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시인 이상의 친구 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유학을 통해 다양한 화풍을 접했던 구본웅은 일본에서 전위적 전람회에 출품한적이 있었고 귀국후에도 야수파, 표현주 의 화풍을 구사하였다. 한국 초기 추상미술 또는 모더니즘을 이야기 할때 자주 비교되는 작가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이다. 비슷한 연배의 두 작가 모두 일본유학을 통해 추상미술을 접하였다. 유영국은 귀 국 후 서울대, 홍익대 교수로 활동하며 국전 심사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 한 반면 김환기는 광복 후 프랑스로 떠나 작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김환 기가 추상미술을 하면서도 조선적, 향토적 정체성을 찾는 작업들을 보여 준 반면 유영국은 향토성을 거부하고 순수미술을 추구하였다. 특히 김환 기의 <론도>는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일찍이 추상미술을 시도하여 근대서 양화단의 새로운 시도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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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김윤정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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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금속공예 393 금속공예 김윤정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목 차 1. 금속공예의 재료 2. 장신구 3. 불교 공예 1. 금속공예의 재료 금속은 단단하다는 특성 때문에 인류의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또 한 열을 가하면 가공이 쉽고, 가공 후에는 광택이 나는 특성이 있어 장신 구를 제작하는 주재료로도 사용되어 왔다.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금속은 구리와 주석 합금인 청동이 다. 그리고 철제 무기의 등장과 함께 청동은 점차 장신구와 그릇 등의 생 활용품들로 제작되게 되었다. 금과 은은 광택이 아름답고 다른 금속에 비 해 얇게 펴지고[展性], 잘 늘어나는 성질[延性] 덕분에 장신구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 이상의 금, 은, 구리, 주석, 철은 오금(五金)이라 하여 전 통 금속공예의 주된 재료가 되었다. 금은 오금 중 으뜸으로 치는 금속이다. 금은 고대 국가의 신분을 상징하 는 중요한 재료여서 신분을 상징하는 여러 화려한 장신구들은 대개 금으 로 제작되었다. 금속들 중 전연성(展延成)이 매우 우수한 편에 속하지만 너무 물러서 다른 금속과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은도 무른편이어서 구리 를 약간 섞기도 하는데, 이를 정은(正銀)이라고 한다. 은은 조선시대 장
394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신구의재료로많이쓰였다. 구리 [ 銅 ] 는주로다른금속물을첨가하여합금을만들어사용한다. 첨가물은주로주석이되는데, 여기에납, 아연, 금, 은등을추가하여사용한다. 합금은같은물질을첨가하더라도비율에따라다른색과성질을나타낸다. 우리나라청동기시대의기물들은구리, 주석, 아연의합금이다. 구리와주석보다용융점이낮은아연을합금하는기술로인해좀더탄성력이있어쉽게깨지지않도록만들수있었고, 이는구리와주석만을합금하여만든중국의청동제품들과구분되는뛰어난기술로알려지고있다. 우리나라에는예부터동이많이생산되어서청동기시대이후에도식기, 장신구, 불교공예품등많은부분에서구리합금제품이사용되었다. 청동은구리에 6~25% 의주석을넣어녹여낸것으로주석이외에납 3~13% 이들어있는경우가대부분이다. 구리에주석을많이배합할수록은백색의빛을띠고, 반사율이높아진다. 그래서청동거울을만들때에는주석함량을높게하기도한다. 백동 ( 白銅 ) 은구리와주석함량이반정도가되는데, 이처럼주석성분이많아지면흰색을띠어서근세까지는백동이라고불렀다. 요즘에는구리에니켈을배합한합금을백동으로부른다. 유기 ( 鍮器 ) 는구리합금으로만든기물을말한다. 따라서구리와주석합금인청동, 구리와아연합금인황동, 구리와니켈합금인백동등이그재료가된다. 아연과니켈은인체에해로워황동과백동은식기보다는촛대, 화로등을만들때주로사용한다. 검은빛을내는오동 ( 烏銅 ) 은구리에금을섞은합금이다. 합금한금속은본래붉은빛을내지만기물이완성된후마무리단계에서인뇨 ( 人尿 ) 에담가두면검은빛으로변하며, 이를오동이라고부른다. 주로흰색을띠는백동과함께대비되어장식되도록가공한다. 2. 장신구 장신구는몸을치장하여자신을돋보이게하기위한것으로신분사회가 형성되고발전하게되면서사회적지위를나타내기위해제작되었다. 삼 국시대고분에서는많은양의화려한금은제장신구들이출토되었는데,
395 금속공예 395 피장자의신분에따라그종류와형태, 매장수량등을달리하였다. 통일신라와고려시대에는금속공예와보석가공기술이한층다양하게발달하였으며, 이러한기술들을기반으로화려한장신구들이많이제작되었다. 또한고려는송원과의교류로인해중국적인색채를띤장신구들도많아지고더욱다양화되었다. 고려의발달된장신구들은조선초까지그대로이어졌다. 그러나성리학이국가의지배이념으로자리잡게됨에따라이전시대의화려한장신구들이보다간소화된모습으로전개되었다. 1) 비녀 비녀는쪽을지어풀어지지않도록쪽머리에가로질러꽂는장신구의일종이다. 이는머리를수발하는것이주목적이면서장식의역할도겸하였다. 비녀에는잠 ( 簪 ) 과차 ( ) 두종류가있는데잠은원봉형 ( 圓棒形 ) 의길쭉한몸체에비녀머리가있는것이고, 차는긴집게처럼생긴두가닥몸체윗부분에장식이달린것이다. 차는고려시대까지사용되고조선시대에이르러서는잠이널리사용된듯하다. 이는조선시대의머리스타일이비녀가필수적인얹은머리와쪽진머리가기본형이었기때문이다. 특히조선후기에쪽진머리가유행하면서비녀의사용이일반화되었다. 조선시대에만들어진비녀의재료를보면금, 은, 구리, 백동, 놋, 비취, 산호, 나무, 뿔, 뼈가있다. 상류사회양반부인들은옥, 은, 은칠보 ( 銀七寶 ), 도금제 ( 鍍金製 ) 비녀를사용하였다. 순금비녀의사용은왕족에한했던것이지만상류층부인중일부가사용하기도하였고, 기생에게도금비녀장식을허용하였다. 비녀머리의형태는매우다양하여용, 봉황을비롯하여원앙, 물고기의머리, 목련, 석류, 호도, 매화와대나무잎, 대마디, 말뚝, 국화, 연꽃, 송이버섯, 완두등이있다. 2) 장도 칼은크게검과도로나뉘는데날이양쪽으로선것을검 ( 劍 ), 한쪽에만 날이있으면도 ( 刀 ) 라고부른다. 장도 ( 粧刀 ) 는글자그대로몸을치장하
396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는칼이다. 고대고분출토품에등장하는과대장식중에그모습이등장해서이른시기에장도와같은작은칼이있었음을알수있다. 장도는생활속의실용적목적으로사용되어종이를자르거나나무를다듬고과일을깎기도하였다. 조선후기이후부터는손칼로서의실질적인기능보다장식성이강조되어절개를상징하는여인들의노리개장식일부가되면서정교하고화려한장도가다양하게만들어졌다. 장도는칼집을갖춘작은칼로서, 노리개에찬것을패도 ( 佩刀 ) 라하고, 주머니속에지닌것을낭도 ( 囊刀 ) 라고하였다. 장도의종류는칼자루와칼집의재료에따라서은장도 ( 銀粧刀 ), 목장도 ( 木粧刀 ), 옥장도 ( 玉粧刀 ), 각장도 ( 角粧刀 ), 죽장도 ( 竹粧刀 ) 등으로나뉘고, 장도에는충절과절개를상징하는문양을주로새겼다. 일반장도뿐만아니라장도에젓가락을덧붙인첨자도 ( 籤子刀 ) 가유행하였는데외부에서식사를하는데사용하기도하고, 당쟁이심했던조선후기에는사대부들이음식에독이들어있는지확인하기위한용도로사용하기도했다고한다. 3) 노리개 노리개의유래는고려시대의여인들이허리띠에찼던금향낭 ( 金香囊 ), 금방울에서비롯되었다는설과신라의허리띠에달았던장식품에서비롯되었다는설이있다. 노리개는주체와띠돈, 매듭, 술, 끈목등으로구성된다. 명칭은묶인노리개의수에따라단작노리개, 삼작노리개로부른다. 드문예로다섯개의노리개가묶인오작노리개도있는데이는의식용으로사용했던것이다. 주체의형태는동자를비롯한인물류, 박쥐, 나비, 원앙, 매미등의동물류, 가지, 포도, 고추, 호도등의식물류, 종, 장고, 방울, 버선등의기물류가있는데대체로장수 ( 長壽 ), 부귀다남 ( 富貴多男 ), 제액 ( 除厄 ), 부부화합등을의미하는것들이다. 수술은쌍봉술과낙지발술, 딸기술등을사용했는데, 주체아래에늘어뜨려장식성을더했다. 노리개는계절과옷의색깔에따라혹은의식의경중을가려서찼으며친가와시가에서예물로받기도하고이것을대대로차녀에게물려주었다고한다.
397 금속공예 불교공예 고대에는주로왕과귀족들의위세를나타내기위한무덤부장용공예품들이많이제작되었으나불교가유입되고국가의지배이념으로자리잡게되면서불교관련공예품들이등장하게되었다. 불교공예는삼국시대고분금속공예품들에서볼수있었던발달된제작기술을토대로최고기술이집약되어제작되었으며, 당시최고수준의공예품이었다. 불교공예품은사용목적과기능에따라범음구, 공양구, 장엄구, 의식구, 승려의지물등으로구분해볼수있다. 범음구는부처의말씀인범음 ( 梵音 ) 을냄으로써대중들이진리를깨닫게하는것으로범종과금고, 경자등이이에속한다. 공양을올릴때사용하는공양구는정병, 향로, 꽃병, 발우등을들수있다. 장엄 ( 莊嚴 ) 이란아름답게꾸며장식함으로써그의미를한층돋보이게한다는의미로장엄구 ( 莊嚴具 ) 는그러한목적으로만든기물들을의미한다. 그러므로사리의의미와존엄성을잘나타내기위해제작된화려한용기들은사리장엄구라고하며, 사찰을꾸미기위한닫집이나, 기와전돌등도사찰장엄을위한장엄구로볼수있다. 의식구는불교의식때사용되는도구들로금강저나금강령등이이에속한다. 1) 범종 ( 梵鐘 ) 우리나라의대표적인불교공예중하나는범종이다. 범종은아침저녁의예불시간을알리거나의식의시작을알릴때사용한다. 이렇게범종을울림으로써범음 ( 梵音 ) 이퍼지게되면사람들의마음속에부처의진리를체득하게되어신앙심이고취되고, 더나아가서는고통받는중생들도구제받을수있다는심오한뜻이담겨있다. 이와같은불교이론은철저한수행을강조한소승불교와는달리대승불교에서강조하고있는것으로범종의제작역시중국, 한국, 일본등대승불교권국가들에서제작되었다. (1) 범종의구조적특징 범종의몸체를종신 ( 鐘身 ) 이라고하는데, 종신의외형은윗부분이좁고 배부분이불룩하다가종의다시종구쪽으로가면서점차오므라들어마
398 년 신규 자원봉사자 교육 치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종신의 가장 윗부분은 종각에 매달아 놓을 수 있도록 만든 고리가 있다. 이 손잡이는 주로 용의 모 습을 하고 있어 용뉴 (龍鈕)라고도 불린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 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긴 원통형의 음관(音管)이 달려 있 <삽도> 범종의 구조와 명칭 출전 : 최응천 김연수, 금속공예 (솔, 2003) 는데, 이는 용통(甬 筒), 음통(音筒)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용통은 속이 비어 있고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이는 종을 칠 때, 격렬한 진동을 신속히 없애주는 동시에 소리의 일부를 공중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고른 음향은 오래 보존하고 불필요한 고주파는 신속히 제거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몇몇 예들은 음관의 바닥면에 구멍 없 이 형태만 제작된 경우도 보이고 있어 음향에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인 기 능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지속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리가 부착된 종신의 상부는 천판이라고 한다. 천판(天板)과 종신이 이어진 모서리부분 은 연판문대가 돌아가며 시문되기도 했는데, 이를 견대(肩帶)라고 부른 다. 연판문대가 솟아오르게 장식된 견대는 입상화문대라고 하며, 고려 후 기 종의 특징이다. 종신 위아래는 문양대로 장식되어 있는데, 윗부분의 문양대를 상대(上帶), 아랫부분을 하대(下帶)라고 하며, 주로 연당초문 (蓮唐草文)이나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된다. 그리고 조선으로 가면 범자(梵字) 장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상대 아래로는 사각형의 연화장식의 문양대[蓮廓]가 4곳에 마련되어 있고, 연곽 안에는 9개씩의 연봉오리[蓮 蕾] 장식이 튀어 나와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 종의 특징으로 조선시
399 금속공예 399 대까지등장한다. 범종을울리기위해종신을때리는도구를당 ( 撞 ) 이라고한다. 당으로치는종신의부분은당좌 ( 撞座 ) 라하며, 연화형으로장식하여 2곳에마련한다. 당좌사이에는주악천인상 ( 奏樂天人像 ), 공양자상 ( 供養子像 ) 으로장식하거나위패 ( 位牌 ) 모양을두고안에명문 ( 銘文 ) 을새겨넣기도한다. (2) 시대별범종의특징범종은불교전래시기인삼국시대부터제작되었을것으로보이나, 우리나라에남아있는가장오래된범종은통일신라시대에제작된강원도오대산상원사에소장된범종이다. 이유물은용뉴와음관, 상대와하대, 연곽과도드라진연뢰등통일신라종의전형적인모습을보이고있다. 우리나라에남아있는통일신라시대범종의또다른예는국립경주박물관에소장되어있는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은경덕왕이부왕인성덕왕을위해제작하던것을혜공왕대에이르러서야완성한것으로, 이러한내용은종신에새겨진명문을통해확인할수있다. 앞서본상원사종에서와마찬가지로용뉴와음관, 상대와하대, 연곽등통일신라종의전형적인모습을잘보이고있으나상원사종보다크기가훨씬크고, 연곽안의연뢰는돌출된형태가아니라연꽃이납작하게표현되었다는점, 종구 ( 鐘口 ) 가능화 ( 菱花 ) 형의곡선이라는점에서차이가있다. 고려시대에는통일신라의범종의전형적인모습을바탕으로새롭게전개된다. 국내에남아있는가장이른시기의고려범종은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통화 28년천흥사명종이다. 이범종에는이전과다른고려범종의새로운특징이보여주목된다. 우선용뉴와음관이지속적으로표현은되지만이전의예들이용의머리가천판에붙어있던것과달리고려시대가되면용의머리가천판에서떨어져서표현되고있다는점에서구별된다. 그리고종신의당좌사이에위패형으로만든명문곽안에명문을새긴점은새로운고려적인요소라고할수있다. 전체적으로는용뉴와음관, 연곽과연뢰, 당좌, 공양자상의모습등은통일신라의전통적인양식을그대로따르고있다. 고려중기로가면전기에나타났던새로운요소들이더욱두드러지는특징을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청녕 4년명종은견대에입상화문대가표현되기시작하며, 용뉴의머리가천판에서완전히떨어져정면을바라
400 년신규자원봉사자교육 보는등고려적인특징이더욱잘나타나고있다. 그리고종신에는불좌상과위패형의명문곽이표현되어있다는점에서도고려적인요소를잘보여준다하겠다. 고려후기는상하대와연곽에돌아가는연당초무늬, 연뢰와당좌주위의연꽃잎등이중기의범종들에서보이는것보다좀더도식화된경향을보인다. 중기부터보이기시작했던입상화문대는더욱유행하며, 종신에는불보살상들사이로육자진언 ( 六字眞言 ) 이나타나기시작하여 13세기종의특징을이룬다. 고려말원간섭기가되면서중국종의영향이보이기도한다. 현재개성남대문루에남아있는연복사종은원나라의종장이만들어연복사에걸었던종으로우리나라에중국종이직접적으로유입되었던상황을보여준다. 조선범종은통일신라부터고려까지이어져온우리나라범종의전형적인모습을따른전통형범종양식에고려말에들어온중국범종의양식이반영된모습이혼재되어전개된다. 강화도고려궁지에보관되어있는범종은연곽과연뢰, 연당초무늬로장식된상대와하대등에서전통형범종의모습을보이지만, 음관이생략된채쌍룡으로표현된용뉴와종신중앙에가로방향의도드라진선을두른모습은중국종의특징이반영된것으로전통형과중국종의특징이혼합되어있다. 경기도양주의봉선사종역시전통형양식과고려범종양식이같이보인다. 특히종신에보이는보살상의모습은조선시대불화에서의보살상의모습으로시대적인특징을잘반영하고있다. 2) 금고 금고 ( 金鼓 ) 는청동으로만든북으로절에서시간을알리거나사람을모을때사용한다. 범종보다는단순화된용도로사용하는범음구이다. 금고의형태는주로뒷면을넓게뚫어공명구 ( 共鳴具 ) 를이루게한것이많은데, 고려시대에는공명구가좁아지거나앞뒷면모두가막혀있고, 측면에공명구가있는형식이보이기도한다. 고면 ( 鼓面 ) 에는당좌에두세줄의동심원돋을띠를둘러구획해놓는다. 가장이른시기의유물은통일신라의함통6년명 (865) 금고로통일신라의유일한예이기도하다. 이유물은고면에별다른무늬없이돋을띠로만
401 금속공예 401 구획 해 놓았는데, 고려시 대로 가면 당좌에는 주로 연꽃잎을 배치하고 바깥쪽 의 공간에는 운문(雲文)이 나 여의두문(如意頭文)과 같은 무늬를 배치하기도 한 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고 면 전체에 빠짐없이 여러 무늬가 배치되며, 점차 도 식화 경향을 보인다. 조선 <삽도> 금고의 구조와 명칭 출전 : 최응천 김연수, 금속공예 (솔, 2003) 에 가서는 당좌구의 구분이 거의 없어지고, 범자(梵字) 무늬가 새롭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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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2) 2호 주거지 주거지는 해발 58.6m의 조사지역 중앙부 북쪽에 3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는 현 지표층인 흑갈색사질점토층(10YR 2/3)을 제거하자 상면에 소토와 목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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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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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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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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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조석표 ( 한국연안 ) 항행통보 : 2014 년 7 호 87 항 정정 2014 년도조석표자료를별지의자료로교체 - 3. 개정수및비조화상수 (p.293 p.299) - 4. 기본수준점표성과 (p.300 p.317) 비고 측량 수로조사및지적에관한법률제 8 조제 3 항의규정에의거설치한기본수준점의 성과가신설 변경되어별지와같이추보표를발행하오니, 사용하고있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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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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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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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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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 송재룡 / 편집장 : 박혜영 / 편집부장 : 송영은 경희대학교 대학원보사 1986년 2월 3일 창간 02447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전화(02)961-0139 팩스(02)966-0902 2016. 09. 01(목요일) vol. 216 www.khugnews.co.kr The Graduate School News 인터뷰 안창모 경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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