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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역 승정원일기 인천광역시 옹진군, -장봉도, 선재도, 영흥도, 덕적도, 굴업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2 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장봉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2년 4월 26일(경인) 양근 등 읍진의 관리들의 포흠에 대하여 다시 조 사하여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장봉 만호 윤창업이 경복궁 건축에 들보감으로 고종 2년 10월 2일(계사) 쓸 목재가 떠내려오는 것을 건져 올려 보냈다는 강화 유수 이인기의 장계 고종 3년 11월 15일(경오) 장봉 만호를 별장으로 고쳐 하비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3년 11월 16일(신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4년 6월 24일(병오) 병비의 관원 현황 성정각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우부승지 윤현 고종 5년 윤4월 29일(병자) 기 등이 입시하였다 고종 5년 6월 14일(경신) 병비의 관원현황 고종 6년 6월 24일(갑자) 신명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6년 11월 10일(정축) 자경전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김병학 등이 입시하였다 고종 8년 6월 20일(기묘)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0년 6월 13일(경신) 서상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2년 6월 6일(신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4년 5월 14일(무진)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6년 4월 30일(계유) 이종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8년 5월 7일(무진)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8년 8월 19일(무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0년 6월 25일(계유) 이호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1년 4월 14일(무오) 군병과 군량미를 보장하여 병비에 힘쓸 것을 청 하는 판돈녕부사 민영목의 상소 경기 연안의 해방 사무 민영목의 상소에서 청한 고종 21년 4월 21일(을축) 고종 21년 5월 27일(신축)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대로 각도의 망정결을 경기로 보낼 것 등을 청하 는 의정부의 계 경기 연해의 해방영 둔전에 대해 남양 등의 목장 개간지를 해당 아문에 획급해주겠다는 사복시 일 제조 등의 계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남양 등의 겸감목관을 오늘 정사에서 감하하겠다 는 병비의 계 고종 21년 6월 30일(임인)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경기 감사 김굉집 등 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3년 7월 29일(기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3년 12월 29일(정해) 병비의 관원 현황 신병이 있는 장봉 별장 최치진을 파출할 것을 청 고종 24년 윤4월 27일(갑인) 하는 병조의 계 고종 24년 윤4월 27일(갑인) 병비의 관원 현황

3 고종 26년 1월 30일(병자) 신병이 있는 장봉 별장 호성한을 파출할 것을 청 하는 병조의 계 고종 26년 1월 30일(병자) 김재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6년 2월 11일(정해)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6년 4월 29일(갑진) 장봉 별장 최대완의 어미의 나이가 75세이므로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6년 4월 29일(갑진)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7년 10월 29일(을축) 이정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8년 7월 29일(신묘) 허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9년 6월 1일(정해)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정문석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9년 6월 1일(정해)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9년 7월 30일(을묘) 정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30년 2월 7일(경신) 통진의 둔전답 등을 해연총제영에 이속시켜 군수 에 쓰도록 할 것을 청하는 내무부의 계 고종 30년 3월 13일(을미)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이동섭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30년 3월 13일(을미) 윤용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병이 있는 문성 첨사 이학산 등을 개차하고 후 고종 31년 9월 17일(경인) 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고종 33년 12월 11일(신미, 대부도와 영종도를 합하여 대부군으로 만들 것 양력 1월 13일) 등을 청하는 전 현감 이응선의 상소 고종 36년 12월 21일(갑오, 영종도 사람들이 상언한 군을 설치하고자 한 안 양력 1월 21일) 건은 시행할 수 없다는 의정부 참정 김성근의 계

4 4 - <내 용> / 고종 2년 4월 26일(경인) / 양근 등 읍진의 관리들의 포흠에 대하여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전번에 삼가 자전의 하교를 받들고 지방 고을의 관리들의 포흠에 대하여 끝까지 사실을 조 사하여 보고하도록 각도에 행회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방금 경기 감사 조재응( 趙 在 應 )의 장계를 보니 양근( 楊 根 )ㆍ안성( 安 城 )ㆍ용인( 龍 仁 )ㆍ적성( 積 城 )ㆍ연천( 漣 川 )ㆍ화량( 花 梁 )ㆍ덕 포( 德 浦 )ㆍ장봉( 長 峰 ) 등 8개 읍진( 邑 鎭 )에서 수만 포의 곡식이 다 아전과 하례와 민간에서 유용되고 포흠되었는데, 증명할 장부가 없어 내력을 찾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존한 범인들이 다 도피하여 아직 체포하지 못하고 있기에, 잡아들이도록 연이어 신칙한 뒤에 다 시 보고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1백 포 미만의 포흠은 번거로워 일일이 다 거론하지 않 았고, 포흠하기 시작한 연도와 곡식 이름과 수량을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수령을 교체한 뒤에 만약 진범이 나타나면 장오죄( 贓 汚 罪 )의 법으로 시행하고, 아전이나 방임( 房 任 )도 또한 차례로 차출할 일에 대하여 말을 만들 어 지시하소서. 하였습니다. 읍진에서 포흠을 한 놈들이 1백 20여 명인데, 양주( 楊 州 )에서 1백 석을 포흠한 한 명만이 지방에 유배되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다 죽었거나 도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으로 보면 일체 법으로 처리할 길이 없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다시 엄정하게 조사한 뒤에 수정하여 보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년 10월 2일(계사) / 장봉 만호 윤창업이 경복궁 건축에 들보감으로 쓸 목재가 떠내려오는 것을 건져 올려 보냈다는 강화 유수 이인기의 장계 강화 유수( 江 華 留 守 ) 이인기( 李 寅 夔 )의 장계에, 경복궁 건축에 들보감으로 쓸 목재가 떠 내려오는 것을 장봉 만호( 長 峯 萬 戶 ) 윤창업( 尹 昌 業 )이 위험을 무릅쓰고 건져 올려보냈습니 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듣고 보니 매우 가상하다. 이러한 내 뜻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가자하고, 자 급에 구애받지 말고 1년 간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 3년 11월 15일(경오) / 장봉 만호를 별장으로 고쳐 하비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아뢰기를,

5 5 - 지금 경기 감사 유치선( 兪 致 善 )의 보고를 보니, 장봉 만호( 長 峰 萬 戶 )는 본영의 장교 중에 서 임명하는 자벽과( 自 辟 窠 )로 되어 임기가 차면 망보( 望 報 )해야 하는데, 원래 자급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규례상 의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개호( 改 號 )를 하거나 자리를 바꾸거나 좋은 쪽으로 변통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자격이 이미 구애되는데 자리를 바꾸는 것 은 갑자기 논의할 수 없는 일이니, 별장( 別 將 )으로 고쳐 하비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년 11월 16일(신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김병주는 나왔다. 정운익( 鄭 雲 翼 )을 도총관으로, 이중영( 李 重 榮 )ㆍ이학주( 李 鶴 周 )를 부총관으로, 박유붕( 朴 有 鵬 )를 동지로, 이면희( 李 冕 熙 )를 훈련원 도정으로, 정운귀( 鄭 雲 龜 )를 내금위장으로, 김기명 ( 金 沂 明 )ㆍ유정주( 兪 廷 柱 )ㆍ방윤겸( 方 允 謙 )을 오위장으로, 김영진( 金 永 鎭 )을 어영청 기사장으 로, 구동식( 具 東 植 )을 총융청 파총으로, 신효철( 申 孝 哲 )을 영종 첨사( 永 宗 僉 使 )로, 조현택( 趙 顯 宅 )을 공충도 수군우후로, 박만엽( 朴 晩 燁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이종빈( 李 宗 彬 )을 승천보 만호( 昇 天 堡 萬 戶 )로 삼았고, 공충도 병마절도사에 단부한 김선필( 金 善 弼 )과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단부한 오하영( 吳 夏 泳 )열 서로 직임을 바꾸었는데,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 든 것이다 / 고종 4년 6월 24일(병오)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참지 강건은 나왔다. 강진용( 姜 振 龍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 고종 5년 윤4월 29일(병자) / 성정각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우부승지 윤현기 등이 입시하였다 진시( 辰 時 ). 상이 성정각에 나아가 대신과 정부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입시한 우부승지 윤현기, 가주 서 정응철, 사변가주서 김우현, 기사관 박정양과 최봉구, 영의정 김병학, 행 상호군 김학성 ( 金 學 性 ), 행 이조판서 한계원, 행 예조판서 조석우, 수원부 유수 이경하( 李 景 夏 ), 행 대호군 김세균, 공조 판서 이풍익( 李 豐 翼 ), 병조 판서 김수현( 金 壽 鉉 ), 행 대호군 이용희( 李 容 熙 ), 행 호군 이원희( 李 元 熙 ), 종정경 이종승( 李 鍾 承 ), 교리 이혁준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6 6 - 하고, 이어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김병학이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묻기를 마치 자 상이 이르기를, 차대를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천신( 賤 臣 )을 이 직임에 다시 두신 것이나 천신이 이 직임을 이미 물러난 뒤에 다시 맡은 것이나 진실로 공사 간에 타당하지 못합니다. 나이 많고 덕있는 원보( 元 輔 )와 훌 륭한 공적을 이룬 정승들이 서로 이어 은퇴를 고하여 마침내 그 지위를 구차히 채운 자가 바로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형편없는 천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에 정승을 임명하는 것 이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정승 임명을 발표하는 날에 백관들의 의논은 반드시 도대 체 저 사람은 중서( 中 書 )를 몇 번이나 맡는 것인가. 자기가 나라를 위해 무슨 옳은 일을 도 모하고 성상을 제대로 보좌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금방 물러났다가 또 도로 무릅쓰고 차지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아니면 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듯한 태도이구나. 라고 말할 것 이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장차 뭇사람들의 의혹을 어떻게 풀 것이며 여론을 어떻게 진정시킬 것입니까. 신이야 기왕 잘못된 몸이니 오히려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식자들이 속으로 한탄할 것이니 조정을 위한다면 이러한 조치를 어찌 애석히 여기지 않겠습 니까. 지금 신이 예의와 염치를 팽개치고 전하의 앞에 무릅쓰고 오른 것이 어찌 예전에 공 효를 이루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 요행히 되지나 않을까 생각해서이겠습니까. 진실로 처음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 확실하게 사양을 하지 못해서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더럽혀졌는 데, 처음 스스로 한계를 긋지 못했던 자가 지금 반드시 사양하고야 말겠다. 라고 한다면, 성 상께서 신의 본심을 통촉하지 못하시고서 그 전후가 판연히 다르다고 문책하실까 스스로 생 각되었습니다. 때문에 신이 부득이 황송한 심정을 머금고 나와 성상의 뜻을 만에 하나라도 메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주( 附 奏 )하는 것은 체모가 지엄하고 상소로 진달하는 것은 글솜씨가 졸렬하여 낮은 데로부터 듣는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했습니다. 때문에 오직 조 그마한 땅을 빌려 품고 있는 진심을 모두 진달드려 이해를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이 원로대신으로 자처하여 의기양양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겠습니까. 만 번 바라건 대, 신의 직임을 깎으시고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다시 임명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만드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나와서 명을 받았으므로 내가 매우 기쁘다.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전유하시면서 내린 교지를 삼가 보았는데, 사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써 성념( 聖 念 )에 지극히 근심하고 계셨습니다. 생각건대, 지금 국가가 멀리 보고 대비해야 할 크나큰 우환으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근년 이래로 금령을 엄준하게 하여 무릇 법을 범하면 문득 죄를 주고 있는데도, 오히려 다시 뱀이나 지렁이처럼 서려 있어서 그 자 취가 망측합니다. 도적떼가 될까 염려가 될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 외구( 外 寇 )를 끌고 들 어와 각종 변괴가 발생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기필코 섬멸하여 한 나라에 함께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분개하는 여론이 그러하고 왕법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간간이 며칠 동안 국문하여 사류의 우두머리들을 섬멸했다 하지만, 잠깐 깨어졌다 더욱 견고해지고 잠깐 꺼졌다가 다시 치성해져서 또 무슨 화를 만들어내지나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들이 서로 얽혀 만연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인심이 그릇되어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7 7 - 이들을 만약 눈을 밝게 뜨고 용기를 내어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하기를 우 임금이 홍수와 맹수를 깨끗이 소통시키고 몰아낸 뒤에 그만둔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꼴 이 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 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그 근원을 궁구해보면, 이는 오랑캐들의 음사한 여기( 厲 氣 )로서 공격하여 물 리치기 쉬운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미혹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이리저리 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로 정학( 正 學 )이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연전에 경연 에서 주달할 때 또한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 를, 덕을 닦지 못하고 학문을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근심이다. 고 하셨습니다. 지금 만약 덕을 닦고 학문을 궁구하여 우리 도가 크게 밝아진다면, 비유컨대 태양이 환히 비춤에 무지개가 저절로 사라지듯이 백성들이 선에 옮겨가고 허물을 멀리하면서 옳은 도리를 밝게 알 것입니다. 백성들을 매우 빠르게 교화시키는 것은 또한 전하께서 몸소 솔선하는 교화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시종일관 성상의 생각을 학문에 돈독히 하시고, 그 일에 때맞추어 민 첩히 힘써 그 덕을 일신하십시오. 그리고 경전의 뜻을 탐색하여 의리의 근원을 환히 알고, 역행하여 발전하는 것을 참으로 알아서 계속적으로 광명한 경지로 나아간다면, 정령( 政 令 ) 과 거조가 바른 데서 한결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옆에서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는 자 들이 집집마다 수사( 洙 泗 )의 행실에 종사할 것이며 염락( 㾾 洛 )의 책을 읽을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저 일종의 사특한 설은 그 틈을 엿볼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정학을 밝힌다 는 것입니다. 무릇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지런히 하여 물에 빠진 사람과 불타고 있는 사람을 급급히 구 제하듯이 하소서. 그리하여 전에 물든 사람들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주어 각각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보존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백성을 고르게 밝혀주고 화합시키는 경지에 도 달하는 것은 진실로 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정학을 강명하라는 경의 말 이 진지하고도 간절하니, 마땅히 항상 가슴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수령들이 직무를 방치하는 것을 전후로 신칙하셨는데, 사무가 적체되는 것이 문제일 뿐만 아닙니다. 아전들이 혹 농간을 부림에 백성들이 그 피해를 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수령이 말미를 받는 데 대한 관찰사의 공문을 몸소 가지고 와서는 그 가고 머물고를 마음대 로 하니, 법을 제정한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이조에 분부하여 하나하나 적발하여 곧장 파 직으로 논죄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런 내용을 공문으로 각각의 해당 도신( 道 臣 )에게 신칙 하여, 말미를 받는 데 관한 공문을 해당 수령이 지니고 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정식에 의 거하여 이조에 바로 송부함으로써 상고하는 바탕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묘당에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즉시 내려보내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행 상호군 정기세( 鄭 基 世 ), 행 호군 이삼현( 李 參 鉉 )을 모두 정부 당상으로 도로 차임하고, 형조 판서 김유연( 金 有 淵 )을 정부 당상으로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8 8 - 하였다. - 탑교( 榻 敎 )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강원도 관찰사 조석여( 曺 錫 輿 )가 상주한 것을 보니, 그 내용에, 본도의 상정( 詳 定 )은 본래부터 넉넉하지 못하여, 매번 환곡의 모조( 耗 條 )를 돈으로 대답한 것 가운데에서 4160냥 을 해마다 보충해왔습니다. 그런데 계해년 봄 이정청( 釐 整 廳 )의 절목( 節 目 )으로 인하여 각읍 의 상정이 남든 부족하든 스스로 읍에서 담당하게 되었으므로 그 4000여 냥을 보충해오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경상 수입 가운데에서 3710냥을 덜어내서 환자의 탕감으로 인해 발생한 경상 지출의 부족분을 채웠으니, 상정이 현재 축난 것이 거의 8000냥에 가깝 습니다. 그런데 각읍의 수입과 지출은 그 과다가 고르지 않으므로 부족한 고을은 매번 백성 에게서 징렴하는 고질이 많고, 넉넉한 고을은 쓸데없는 비용에 돌아가기 쉬우니, 많은 데서 덜어 부족한 곳에 더해주어 대상에 따라 고르게 시행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분 기마다 장부를 마감 정리할 때 영문( 營 門 )에서 조목조목 검사하여, 넉넉한 곳의 것을 옮겨 다 부족한 곳을 돕기를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여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고질적 병폐를 바 로잡을 수 있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소서. 하였는데, 이 사안을 윤허하셨습니다. 넉넉한 것과 부족한 것을 적절히 헤아려 손익하는 것은 일찍이 이정청의 절목이 있었으니, 지금 일정하게 하여 변통하지 않음으로써 징렴하는 폐단이 있기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애당 초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넉넉한 이쪽의 것을 옮겨 부족한 저쪽의 것을 돕는 것은 정식을 거듭 밝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상주한 대로 시행을 허락하되 그해의 비용으로 들 어갈 것을 절약하여 지나치지 않게 한다면, 해마다 넉넉하여 부족할 리가 절대 없을 것입니 다. 이쪽 것을 옮겨 저쪽 것을 돕는 즈음에 철저하게 조사하여 혹시라도 가하( 加 下 ) 두 글 자로 번거롭게 보고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더욱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 강원도 관찰사 조석여가 상주한 것을 보니, 그 내용에, 강릉부( 江 陵 府 )는 지역이 광대하여 전결( 田 結 ) 총수가 가장 많은데, 그 문서들이 화재를 입은 뒤 증거할 문헌이 없습 니다. 형세상 시급히 양전( 量 田 )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현재 관아 건물을 다시 건축하고 있 어서 일에 지장이 많습니다. 그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공문을 보내 거행토록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지로 윤허하셨습니다. 전정( 田 政 )의 문란이 요즈음과 같은 때가 없는데 하물며 화재를 당한 뒤여서 증거할 문서가 없으니 더욱 급히 다시 양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 아 건물의 재건축이 만약 준공되면 추수하기를 조금 기다려 즉시 거행하여 기필코 실효가 있게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 이장렴( 李 章 濂 )이 장계한 것을 보니, 본영의 관할인 교동( 喬 桐 )은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지만 병졸과 무기가 모두 넉넉하지 못합니다. 주문( 注 文 )과 장봉( 長 峯 ) 양진을 교동에 이속시켜 임기응변할 수 있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소서. 하였습니다. 해부 ( 該 府 )는 양서( 兩 西 )의 해안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역입니다. 지금 그 두 진을 이속 시키면 기각( 掎 角 )의 형세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의지할 수 있 습니다. 수신( 帥 臣 )의 이번 요청은 심원한 계획에 부합됩니다. 특별히 시행을 허락하고, 관 할과 절제의 방법은 해당 방영( 防 營 )으로 하여금 정식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

9 9 - 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윤현기가 말하기를, 재신( 宰 臣 )들은 시안을 아뢰시오. 하니, 김학성 등이 아뢰기를,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윤현기가 말하기를, 옥당은 소회가 있으면 아뢰시오. 하니, 이혁준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빈대( 賓 對 )에 외람되이 올라 성학( 聖 學 )에 부지런할 것으로 성상께 우러러 진 술하였는데 가납하시는 비답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아직도 송축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학문하는 방법은 성심( 誠 心 )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또한 입지( 立 志 )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서 덕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있지 아니하니, 잠깐이라도 멈춤이 없는 것은 성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단 함이 없는 것은 입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과 뜻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닙 니다. 마음은 체( 體 )이고 뜻은 용( 用 )입니다. 반드시 정성으로써 뜻을 세운 뒤에야 저절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명 광대( 高 明 光 大 )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공 자께서 아홉 길 높이의 산을 만드는 데에 비유하였으니 만약 한 소쿠리라도 흙이 모자라면 이것은 중단이며, 맹자께서 하루 햇볕을 쪼이는 것과 같다는 경계로써 비유하였으니 만약 열흘 동안 춥게 하면 이것이 멈춤입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있었느냐 방심하고 있었느냐 의 징험은 상응하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심에 돈독히 하시고 입지에 용기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경전 의 뜻을 연구하여 옛 성인의 전해오는 심법( 心 法 )을 체득하시고, 전대의 역사를 토론하여 역대 치란의 자취를 거울삼되, 밤낮으로 진실하게 하면서 스스로 노력하여 멈추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앎을 극진히 하여 사물을 궁구하는 것과 백성을 보존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어느 것이든지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바라건 대, 성명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것이 매우 좋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윤현기가 아뢰기를, 오늘 빈대에 대간은 한 사람도 나와 참여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패초 를 어긴 대간들을 모두 사헌부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10 / 고종 5년 6월 14일(경신) / 병비의 관원현황 병비에, 판서 김수현( 金 壽 鉉 )은 나왔다. 서승보( 徐 承 輔 )를 부총관으로, 이규용( 李 圭 容 )ㆍ최창수( 崔 昌 洙 )를 동지로, 이남보( 李 南 輔 )를 내금위장으로, 김무( 金 懋 )ㆍ방윤직( 龐 允 直 )을 오위장으로, 김종문( 金 文 )ㆍ장의관( 張 儀 寬 )을 경복궁 위장으로, 한용대( 韓 龍 大 )를 경희궁 위장으로, 심의일( 沈 宜 一 )ㆍ권종석( 權 鍾 奭 )ㆍ박추 진( 朴 樞 鎭 )을 수문장으로, 김한철( 金 漢 哲 )을 훈련원 습독으로, 주순원( 朱 順 元 )을 방답 첨사 ( 防 踏 僉 使 )로 이방선( 李 邦 善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이기덕( 李 基 德 )을, 첨지에 남유굉( 南 有 宏 )을 단부하였다 / 고종 6년 6월 24일(갑자) / 신명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명순( 申 命 淳 )을 지사로, 장봉호( 張 鳳 昊 )를 오위장으로, 조병옥( 趙 秉 鈺 )을 조사위장으로, 이규서( 李 奎 書 )를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어상우( 魚 相 愚 )를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유기천( 柳 冀 天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조위현( 趙 瑋 顯 )을 경주 영장으로, 이교필( 李 敎 弼 )을 공주 영 장으로, 유해로( 柳 海 魯 )를 함경도 중군으로, 조존성( 趙 存 成 )을 개성부 중군으로, 서홍순( 徐 泓 淳 )을 남병영 ㅡ우후로, 김원성( 金 元 性 )을 첨지로, 장현유( 張 鉉 由 )를 오위장으로, 이희갑( 李 熙 甲 )을 훈련원 정으로, 조근영( 趙 根 榮 )을 도총부 경력으로, 유기백( 柳 冀 伯 )을 전라도 병마우 후로, 이규신( 李 圭 臣 )을 오위장으로, 김민근( 金 敏 根 )을 충익위장으로, 손붕주( 孫 鵬 周 )를 훈련 원 판관으로, 이지회( 李 智 會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박정양( 朴 定 陽 )을 북평사로, 이희모( 李 熙 模 )ㆍ김상겸( 金 尙 謙 )을 오위장으로, 유규동( 柳 奎 東 )을 훈련원 주부로, 김기석( 金 箕 錫 )을 수 원부 중군으로, 이주언( 李 周 彥 )을 전라도 중군으로, 심흥택( 沈 興 澤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이우권( 李 佑 權 )ㆍ이교준( 李 敎 俊 )을 부장으로, 한흥규( 韓 興 奎 )를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로, 한익문( 韓 益 文 )을 당포 만호( 唐 浦 萬 戶 )로, 백남익( 白 南 益 )을 훈련원 부정으로, 조승현( 趙 承 顯 )을 첨정으로, 김이규( 金 履 奎 )를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로, 고석표( 高 錫 豹 )를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김응화( 金 應 化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신혜( 申 橞 )를 오위장으로, 원우상( 元 禹 常 ) 을 선전관으로, 김봉익( 金 鳳 翼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의열( 金 義 烈 )을 용진 만호( 龍 津 萬 戶 ) 로, 문시용( 文 時 用 )을 산양회 만호( 山 羊 會 萬 戶 )로, 풍학조( 馮 學 祖 )를 오위장으로, 오장선( 吳 長 善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장석용( 張 錫 瑢 )을 수문장으로, 김지해( 金 之 海 )를 정포 만호( 井 浦 萬 戶 )로, 강효능( 康 孝 能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송근주( 宋 根 柱 )를 오위장으로, 정기택( 鄭 騏 澤 )을 어영청 파총으로, 이치정( 李 致 貞 )을 구녕 만호( 仇 寧 萬 戶 )로, 이교준( 李 敎 俊 )을 금오 별 장( 金 烏 別 將 )으로, 이남보( 李 南 輔 )를 선전관으로, 이병수( 李 秉 秀 )ㆍ정사문( 鄭 思 文 )을 오위장 으로, 서철순( 徐 澈 淳 )을 훈련원 첨정으로, 백경환( 白 璟 煥 )을 충익위장으로, 유규동( 柳 奎 東 )을 훈련원 판관으로, 한기영( 韓 基 榮 )을 공충도 수사우후로, 이우권( 李 佑 權 )을 경상좌도 수사우 후로, 장도환( 張 道 煥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이종은( 李 鍾 殷 )을 훈련원 주부로, 여동엽 ( 呂 東 曄 )을 부장으로, 김학희( 金 鶴 喜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곽조운( 郭 祚 運 )을 전라좌도 수군

11 11 - 우후로, 차경식( 車 敬 軾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로, 이교춘( 李 敎 春 )ㆍ서항순( 徐 恒 淳 )ㆍ최한철 ( 崔 漢 喆 )ㆍ안양필( 安 良 弼 )을 오위장으로, 박원진( 朴 元 鎭 )을 충익위장으로, 조지현( 趙 贄 顯 )을 삼군부 종사관으로, 이봉규( 李 鳳 奎 )를 부장으로, 유규동( 柳 奎 東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현구 ( 李 鉉 九 )를 판관으로, 조희영( 趙 希 永 )을 오위장으로, 이한영( 李 翰 榮 )을 선전관으로, 배용구( 裵 龍 九 )를 훈련원 주부로, 이면우( 李 勉 愚 )를 동지로, 손응태( 孫 應 泰 )를 도총부 경력으로, 구연 상( 具 然 相 )을 부장으로, 원우상( 元 禹 常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수익( 李 秀 翼 )을 판관으로, 오 정선( 吳 正 善 )을 선전관으로, 이창권( 李 昌 權 )을 훈련원 주부로, 이건절( 李 建 晢 )을 선전관으로, 조용하( 趙 容 夏 )ㆍ채은묵( 蔡 殷 默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유희동( 柳 曦 東 )ㆍ김정우( 金 鼎 祐 )ㆍ손덕 현( 孫 德 顯 )을 부장으로, 김규화( 金 奎 華 )ㆍ이교석( 李 敎 錫 )ㆍ현익건( 玄 翼 健 )ㆍ이응원( 李 應 遠 )ㆍ 최석기( 崔 錫 基 )를 수문장으로, 이완복( 李 完 馥 )을 선원전 수문장으로 삼았다. 화녕전 수문장 에 윤태영( 尹 泰 榮 ), 진동 권관( 鎭 東 權 管 )에 정민수( 鄭 民 洙 ), 서수라 권관( 西 水 羅 權 管 )에 김재 인( 金 在 仁 ), 마마해 권관( 馬 馬 海 權 管 )에 손완기( 孫 完 基 ) 소농 권관( 小 農 權 管 )에 홍치순( 洪 致 淳 ), 율포 권관( 栗 浦 權 管 )에 배영락( 裵 榮 樂 ), 광평 권관( 廣 坪 權 管 )에 한인진( 韓 璘 珍 ), 묘동 권 관( 廟 洞 權 管 )에 호치승( 胡 致 昇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김원식( 金 源 植 )과 주부 안세업( 安 世 業 )ㆍ장세룡( 張 世 龍 )ㆍ박희순( 朴 熙 淳 ), 이상은 정식에 따라 감하하였다. 한익문( 韓 益 文 )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최수룡( 崔 秀 龍 )ㆍ최응균( 崔 應 均 )ㆍ김승열( 金 承 烈 )ㆍ고상겸( 高 尙 謙 )을 주 부 가설로 삼았다. 동지에 김상의( 金 尙 宜 ), 첨지 세 자리에 유영( 柳 瑛 )ㆍ박신근( 朴 信 根 )ㆍ김 진민( 金 鎭 民 ), 훈련원 주부에 김석기( 金 錫 起 )를 단부하고, 본원에서 나가는 경주 영장 조위 현( 趙 瑋 顯 ), 공주 영장 이교필( 李 敎 弼 ), 함경 중군 유해로( 柳 海 魯 ), 개성 중군 조존성( 趙 存 成 ), 남병영 우후 서홍순( 徐 泓 淳 ),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부사정( 副 司 正 )에 정익현( 鄭 益 鉉 )을 단부하였다. 동지 스무 자리에 박제길( 朴 齊 吉 )ㆍ정홍인( 丁 鴻 仁 )ㆍ이계철( 李 繼 喆 )ㆍ김원영( 金 元 永 )ㆍ김중선( 金 仲 璇 )ㆍ홍관집( 洪 觀 楫 )ㆍ최 효득( 崔 孝 得 )ㆍ최희완( 崔 喜 完 )ㆍ유안주( 劉 安 柱 )ㆍ이복연( 李 福 延 )ㆍ양주오( 梁 柱 五 )ㆍ김노성( 金 魯 成 )ㆍ하시담( 河 始 淡 )ㆍ엄진일( 嚴 鎭 一 )ㆍ전치복( 全 致 福 )ㆍ황희완( 黃 熙 琬 )ㆍ홍종륜( 洪 宗 崙 )ㆍ 김정억( 金 廷 億 )ㆍ정희혁( 鄭 僖 赫 )ㆍ정사문( 鄭 思 文 )을 단부하고, 첨지 열일곱 자리에 임원준( 任 元 準 )ㆍ홍재승( 洪 在 升 )ㆍ강문형( 姜 聞 馨 )ㆍ장현유( 張 鉉 由 )ㆍ이규신( 李 圭 臣 )ㆍ이희모( 李 熙 模 )ㆍ 김상겸( 金 尙 謙 )ㆍ이병수( 李 秉 秀 )ㆍ송근주( 宋 根 柱 )ㆍ신혜( 申 橞 )ㆍ안양필( 安 良 弼 )ㆍ남상선( 南 相 善 )ㆍ조병옥( 趙 秉 鈺 )ㆍ장덕오( 張 德 五 )ㆍ이정호( 李 貞 祜 )ㆍ김민근( 金 敏 根 )ㆍ백경환( 白 璟 煥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김준현( 金 駿 鉉 )ㆍ이교직( 李 敎 直 )ㆍ정창현( 鄭 暢 鉉 )ㆍ구대식( 具 大 植 )ㆍ허 익( 許 )ㆍ남계준( 南 啓 寯 )ㆍ이민화( 李 敏 華 )ㆍ이익( 李 )ㆍ조희두( 趙 羲 斗 )ㆍ이하룡( 李 河 龍 )ㆍ강규 동( 姜 奎 東 )ㆍ박수영( 朴 秀 英 )을 단부하였다 / 고종 6년 11월 10일(정축) / 자경전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김병학 등이 입시하였다 사시( 巳 時 ). 상이 자경전에 나아갔다.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대신과 정부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김병학, 제조 김세균, 우부승지 이기호, 가주서 이봉덕, 기사관 박제용, 별겸 춘추 조용하, 검교대교 조경호, 우부승지 이기호, 가주서 이봉덕, 사변가주서 차유성, 기사관 박제용, 별겸춘추 조용하, 영의정 김병학, 우의정 홍순목, 정부 당상 이경하ㆍ이주철ㆍ김세

12 12 - 균ㆍ유진오ㆍ이장렴ㆍ이원희ㆍ엄석정ㆍ이삼현ㆍ허습, 수찬 정우현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고, 의관 이경년( 李 慶 年 )ㆍ홍현보( 洪 顯 普 )ㆍ박시영( 朴 時 永 )ㆍ김재호( 金 在 瑚 )가 나와 기둥 밖에 엎 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병학이 앞으로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아뢰기를, 의관을 대령시켰습니다. 들어와 진료하게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현보 등이 차례로 상의 건강을 진료하고 물러나 기둥 밖 에 엎드렸다. 병학이 말하기를, 맥후를 아뢰라. 하니, 현보 등이 아뢰기를, 맥은 좌우 삼부( 三 部 )가 고릅니다. 하였다. 상이 의관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대( 次 對 )를 시작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학이 아뢰기를, 종묘와 영녕전에 가끔씩 비가 새는 곳이 있어 장마를 지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해 왔으나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이번에는 공사를 하여 새롭게 고쳐야지 잠시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건도감으로 하여금 초봄의 길일을 가려서 공사를 시 작하여 준공을 보도록 하게 하고 신주를 옮겨 봉안하는 의식절차는 이전에 행해 오던 예에 따라 그때 가서 품지하여 거행할 것을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체가 중대하니 신주를 임시로 옮겨 봉안하는 절차는 예조로 하여금 규례를 상고하여 거 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봉상시의 율목경차관( 栗 木 敬 差 官 )이 매 식년( 式 年 ) 때마다 번갈아가며 삼남 지방에 내려가 는데 내년이 바로 그해입니다. 이것이 비록 유래가 있는 정해진 규례이기는 하나 최근 많은 폐단을 낳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지나는 길에 음식대접과 거마( 車 馬 )를 제공해야 하는 걱 정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고을들은 생활의 지장을 초래하고 있으니 변통하는 조 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밤나무를 베거나 바치는 일은 모두 각도로 하여금 차원( 差 員 )을 별도로 정하여 거행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음직( 蔭 職 )으로 처음 수령이 된 자는 임기를 6년으로 하는 것이 정해진 법입니다. 함열( 咸 悅 )과 아산( 牙 山 )은 다같이 두 번에 걸쳐 조운선을 거느리고 운반한 후에 승진하기 때문에 임기를 3년으로 정한 자리이나, 아산에서는 조운선을 거느리고 운반하는 임무가 이미 혁파 되었으니 이전처럼 승진시킬 수 없습니다. 임기를 그대로 놓아 두고 변통시키지 않는 것은 정확한 정사가 아니므로 지금부터 6년의 임기를 적용하도록 전조( 銓 曹 )에 분부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13 13 - 하였다. - 거조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데는 본래 구별이 없으며 음직으로 등용되는 경우도 각기 정해 진 길이 있어 모두 이를 통해 선발됩니다. 그러나 오직 중인 출신의 생원과 진사만이 오랫 동안 벼슬길에 적체가 되어 이에 대한 불만이 실로 없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충훈부 의 자체 추천으로 임명하는 자리와 예빈시의 참봉을 한 번은 중인 출신의 생원과 진사 가운 데 전조( 銓 曹 )에서 검의( 檢 擬 )하여 임명하고, 한 번은 충의( 忠 義 ) 가운데서 충훈부의 자체 추천으로 임명하여 자리를 돌려가면서 임명하는 것이 아마도 억울함을 풀어 주는 정사에 합 당할 듯합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또 아뢸 것이 있습니다. 근래 충훈부의 충의 가운데 종종 내력이 분명하지 않아 허위로 기록한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음로( 蔭 路 )에서 햇수에 따라 올라가는 품계이니, 어찌 그냥 뒤섞어 놓은 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일을 굳이 하나하나 따질 필요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정밀하게 선발하여 무슨 공을 세운 누구의 후손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소상하게 기록하여 묘당에 일일이 보고한 후 이송하여 자체 추 천할 수 있도록 규정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억울함을 풀어 주는 정사이다. 지금 벼슬 자리에 있는 자가 승륙할 때에는 그 대임자를 우선 검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은 경기 감영에서 자체 추천하며 그 임기는 1년으로 되어있어 진영에 속한 섬사람들이 신구 관리를 보내고 맞아들이는 일에 지쳐 있다고 합니다. 사정이 그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니 다시 24개월로 임기를 정하여 부서진 보루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피 폐된 상황을 막게 하여야겠습니다. 그곳은 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실로 서울을 보호하는 가리개 역할을 합니다. 문수진( 文 殊 鎭 )에 대하여 말하자면, 지형적으로 요충지인 점과 거리 면에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으니 그 지휘권을 모두 진무영( 鎭 撫 營 )에 소속시키고 교대할 때 는 반드시 직접 만나 교대하며 떠나고 머무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규정 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나오라. 하였다. 기호가 말하기를, 재상들은 일을 아뢰시오. 하니, 경하 등이 아뢰기를,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기호가 말하기를, 옥당은 품은 바를 아뢰시오. 하니, 우현이 아뢰기를, 군왕의 마음은 모든 교화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군( 聖 君 )들은 모두가 심학의 공부에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니, 그 핵심은 경( 敬 )입니다. 대체로 경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 까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일에 관철되어 있는 것으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잡 념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왕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 로 이 경( 敬 )을 놓아 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이 보기에 전하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

14 14 - 는 마음과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부지런하고도 간절하니 매우 흠앙해 마지않습니다. 지난 달 때맞지 않게 우레가 쳤을 때 전하께서는 음식을 줄이고 자신을 질책하는 전교를 내렸습 니다. 두려워하고 근신하는 마음이 전교의 말씀 사이에 가득 담겨져 있었으므로 그 마음이 하늘의 마음에 응답하여 재앙을 상서( 祥 瑞 )로 만들었습니다. 경( 敬 )은 학문하는 일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바라건대 전하가 두려운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수양 공 부에 더욱 힘을 쏟으며, 자주 신하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힘쓰고 공경하며, 참된 마음과 실 천 궁행의 학문을 정치에 적용해 본다면 훌륭한 학문과 훌륭한 정치가 다만 여기에서 벗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노력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좋은 말을 하였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기호가 아뢰기를, 오늘 빈대( 賓 對 )에 양사( 兩 司 )의 관원이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 니다. 패초를 어긴 대간( 臺 諫 )들을 모두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 榻 敎 )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어 대신들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 로 물러나왔다 / 고종 8년 6월 20일(기묘)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판서 강노는 나왔다. 정순조( 鄭 順 朝 )ㆍ이현우( 李 顯 佑 )ㆍ변철연( 卞 哲 淵 )을 동지로, 임응준( 任 應 準 )ㆍ한돈원( 韓 敦 源 ) ㆍ신정희( 申 正 熙 )ㆍ조희복( 趙 羲 復 )을 부총관으로, 이민수( 李 敏 樹 )를 훈련원 도정으로, 홍준모 ( 洪 俊 模 )를 겸사복장으로, 조승희( 趙 升 熙 )ㆍ허전( 許 琠 )ㆍ홍우섭( 洪 宇 燮 )ㆍ강인성( 康 仁 誠 )을 오위장으로, 박해귀( 朴 海 龜 )ㆍ남정우( 南 廷 祐 )를 충익위장으로, 홍양환( 洪 亮 煥 )ㆍ정치하( 鄭 致 厦 )를 창덕궁 위장으로, 최석홍( 崔 錫 弘 )을 훈련원 주부로, 윤용구( 尹 用 求 )를 문신겸선전관으 로, 권인하( 權 寅 夏 )ㆍ엄학영( 嚴 鶴 永 )을 수문장으로, 임익준( 任 翊 準 )을 전라 중군으로, 이유직 ( 李 庾 稙 )을 군산 첨사( 群 山 僉 使 )로, 이효수( 李 孝 秀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유영준( 柳 永 俊 ) 을 덕포 첨사( 德 浦 僉 使 )로, 나경운( 羅 卿 雲 )을 미전 첨사( 美 錢 僉 使 )로, 전재영( 田 在 英 )을 초지 첨사( 草 芝 僉 使 )로, 박계익( 朴 桂 益 )을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김재국( 金 在 國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이렴( 李 濂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제한집( 諸 漢 緝 )ㆍ양주한( 梁 柱 漢 )을 단부하였다. 금위영 창검 파총 이 일( 李 一 )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 하였다 / 고종 10년 6월 13일(경신) / 서상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5 15 - 서상정( 徐 相 鼎 )ㆍ정운익( 鄭 雲 翼 )을 도총관으로, 정범조( 鄭 範 朝 )를 동지중추부사로, 김성구 ( 金 聖 求 )를 내금위장으로, 이능학( 李 能 學 )ㆍ박효환( 朴 孝 煥 )을 오위장으로, 이수만( 李 秀 萬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구천희( 具 天 喜 )ㆍ이민두( 李 敏 斗 )ㆍ이용( 李 鎔 )ㆍ송의호( 宋 義 浩 )를 수문장으 로, 이덕희( 李 德 熙 )를 경상 좌병사로, 이덕순( 李 德 純 )을 나주 영장으로, 나원식( 羅 元 植 )을 장 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박문린( 朴 文 麟 )을 화수산 별장( 花 水 山 別 將 )으로, 임동선( 林 東 善 )을 금사 별장( 金 沙 別 將 )으로 삼았다. 가설( 加 設 )한 훈련원 판관 세 자리에 윤광익( 尹 光 翼 )ㆍ김 홍구( 金 鴻 求 )ㆍ윤창근( 尹 昌 根 )을 단부하고, 부장에 유상풍( 兪 相 豐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민영준( 閔 泳 焌 )ㆍ유치목( 兪 致 穆 )ㆍ허장( 許 樟 )을 단부하였다.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 이규선( 李 奎 璿 )은 한 임기 동안만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고, 전라 감영의 중군 정채화( 鄭 采 和 )를 특별히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12년 6월 6일(신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행 판서 이재원( 李 載 元 )은 나왔고, 참판 정해륜( 鄭 海 崙 )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참의 김진휴( 金 震 休 )는 병이고, 참지 장시표( 張 時 杓 )는 입직이고, 승지 - 원문 빠짐 - 이기준( 李 基 俊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규서( 李 奎 書 )ㆍ이교응( 李 敎 應 )을 선전관으로, 채규상( 蔡 奎 常 )을 내금위장으로, 이응렬( 李 應 烈 )을 우림위장으로, 이강현( 李 康 鉉 )ㆍ유치삼( 兪 致 三 )ㆍ이 위소( 李 暐 沼 )ㆍ조병대( 曺 秉 大 )ㆍ이규하( 李 圭 河 )ㆍ김병도( 金 炳 道 )ㆍ신영필( 愼 永 弼 )ㆍ권상철( 權 尙 喆 )ㆍ박경진( 朴 經 鎭 )ㆍ김호인( 金 好 仁 )ㆍ신추( 申 錘 )를 오위장으로, 박제복( 朴 齊 復 )을 충익위 장으로, 김기현( 金 基 鉉 )을 충장위장으로, 이종구( 李 鍾 九 )ㆍ김수성( 金 秀 性 )을 창덕궁 위장으 로, 김진원( 金 鎭 黿 )ㆍ서영직( 徐 永 稙 )을 경희궁 위장으로, 윤석인( 尹 錫 仁 )을 선전관으로, 이재 경( 李 載 經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유신( 李 裕 臣 )ㆍ이종환( 李 鍾 煥 )ㆍ추익조( 秋 益 祚 )ㆍ김문환 ( 金 文 煥 )을 수문장으로, 오신묵( 吳 信 默 )을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으로, 김완철( 金 完 哲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장용규( 張 溶 奎 )를 단부하였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채규상( 蔡 奎 常 )ㆍ이종의( 李 種 懿 )ㆍ이겸영( 李 謙 榮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이건우( 李 建 宇 )ㆍ이세응( 李 世 應 )ㆍ오재혁( 吳 載 爀 )ㆍ유상민( 劉 尙 敏 )ㆍ지한규( 池 漢 奎 )를 단부하였다. 분 부총관 이용직( 李 容 直 )ㆍ윤자승( 尹 滋 承 )ㆍ김익용( 金 益 容 )ㆍ남정익( 南 廷 益 )ㆍ이문영( 李 文 永 )ㆍ 이봉의( 李 鳳 儀 )ㆍ정완묵( 鄭 完 默 )ㆍ이민상( 李 敏 庠 ), 분오위장 이인복( 李 寅 復 )ㆍ이관의( 李 寬 儀 ) ㆍ이응화( 李 應 華 ), 분도총부 도사 심흥택( 沈 興 澤 )ㆍ이창권( 李 昌 權 )ㆍ윤석인( 尹 錫 仁 )ㆍ권병엽 ( 權 秉 曄 )ㆍ심의창( 沈 宜 昌 )ㆍ조문규( 趙 文 奎 )ㆍ구연식( 具 然 軾 )ㆍ이민두( 李 敏 斗 )를 감하하였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양주화( 梁 柱 華 )를 단부하였다 / 고종 14년 5월 14일(무진) / 병비의 관원 현황

16 16 - 병비( 兵 批 )에, 판서 김병시( 金 炳 始 )는 병중이었고, 참판 홍재현( 洪 在 鉉 )은 병중이었고, 참 의 윤치성( 尹 致 聖 )은 입직하다가 나왔고, 참지 이헌영( 李 永 )은 병중이었고, 우부승지 박용대 는 나왔다. 김상덕( 金 商 德 )을 호위청 별장으로, 김정규( 金 鼎 奎 )를 제물포 만호( 濟 物 浦 萬 戶 )로, 김영식( 金 泳 植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호군에 이승오( 李 承 五 )ㆍ윤우선( 尹 宇 善 )ㆍ신도희 ( 申 道 熙 )를, 부호군에 조준영( 趙 準 永 )ㆍ이면영( 李 冕 榮 )ㆍ홍우창( 洪 祐 昌 )ㆍ윤상현( 尹 相 賢 )ㆍ이 원규( 李 源 珪 )ㆍ김구현( 金 九 鉉 )ㆍ조신희( 趙 臣 熙 )ㆍ구희조( 具 羲 祖 )를, 부사직에 최홍주( 崔 弘 周 ) ㆍ이봉덕( 李 鳳 德 )ㆍ이희원( 李 喜 元 )ㆍ김만식( 金 晩 植 )ㆍ이건창( 李 建 昌 )ㆍ조동필( 趙 東 弼 )ㆍ이재 윤( 李 載 允 )ㆍ박내면( 朴 來 冕 )ㆍ권현( 權 炫 )ㆍ민영규( 閔 泳 奎 )를, 부사과에 김철희( 金 喆 熙 )ㆍ공재 범( 孔 在 範 )ㆍ김내현( 金 來 顯 )ㆍ한익뢰( 韓 益 雷 )ㆍ김명래( 金 命 來 )를 단부하였다. 겸 동래진병마 첨절제사 독진수성장( 兼 東 萊 鎭 兵 馬 僉 節 制 使 獨 鎭 守 城 將 )에 윤치화( 尹 致 和 )를 단부하였다 / 고종 16년 4월 30일(계유) / 이종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종건( 李 鍾 健 )을 선전관으로, 서치홍( 徐 致 弘 )ㆍ성정호( 成 定 鎬 )ㆍ원세익( 元 世 翼 )ㆍ최경선 ( 崔 敬 善 )ㆍ이창렬( 李 昌 烈 )을 오위장으로, 조종철( 趙 鍾 哲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응직( 金 應 稷 )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태현( 李 泰 鉉 )을 남병사로, 고제희( 高 濟 羲 )를 상주 영장으로, 김기조 ( 金 基 祚 )를 당포 만호로, 임태준( 林 泰 俊 )을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김주영( 金 柱 潁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호군에 오하영( 吳 夏 泳 )ㆍ신환( 申 桓 )을, 부호군에 김종한( 金 宗 漢 ) ㆍ김완수( 金 完 秀 )ㆍ조병세( 趙 秉 世 )ㆍ오정선( 吳 正 善 )을, 부사과에 구성희( 具 星 喜 )ㆍ조광우( 趙 光 祐 )를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18년 5월 7일(무진)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민태호( 閔 台 鎬 )는 나왔고, 참판 조영하( 趙 榮 夏 )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으 며, 참의 홍재정( 洪 在 正 )은 입직이고, 참지 김재환( 金 載 瓛 )은 병이고, 동부승지 홍승목은 나 왔다. 장영급( 張 泳 汲 )ㆍ윤자원( 尹 滋 愿 )ㆍ최창진( 崔 昌 鎭 )ㆍ윤종두( 尹 鍾 斗 )를 오위장으로, 박봉빈( 朴 鳳 彬 )을 조사오위장으로, 구연소( 具 然 韶 )ㆍ홍영보( 洪 穎 普 )를 충익위장으로, 조윤문( 趙 允 文 )을 경복궁 위장으로, 신욱( 申 㮋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조존승( 趙 存 昇 )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구연희( 具 然 喜 )를 광주 중군( 廣 州 中 軍 )으로, 임백은( 任 百 殷 )을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으로, 이 규안( 李 奎 顏 )을 경기 중군( 京 畿 中 軍 )으로, 조병응( 趙 秉 應 )을 평안 중군( 平 安 中 軍 )으로, 방기 원( 方 夔 源 )을 남병영 우후( 南 兵 營 虞 候 )로, 강익황( 姜 益 璜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손만기 ( 孫 萬 基 )를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이정필( 李 正 必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한경원( 韓 敬 源 )을, 호군에 조은승( 曺 殷 承 )ㆍ홍종헌( 洪 鍾 軒 )ㆍ이현익( 李 玄 翼 )ㆍ이만 운( 李 晩 運 )을, 부호군에 김경균( 金 敬 均 )ㆍ조면호( 趙 冕 鎬 )ㆍ이민중( 李 敏 中 )ㆍ양주성( 梁 柱 星 )ㆍ 허경( 許 璥 )ㆍ양필환( 梁 弼 煥 )ㆍ정재하( 丁 載 夏 )ㆍ홍학주( 洪 鶴 周 )ㆍ민영은( 閔 泳 殷 )을, 부사직에

17 17 - 서상태( 徐 相 泰 )ㆍ권봉환( 權 鳳 煥 )ㆍ이윤구( 李 允 九 )를, 부사과에 오성선( 吳 成 善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경기 병마절도사에 이규안( 李 奎 顏 )을 단부하였는데, 차함으로 제수하라는 전지 를 받든 것이다. 정령관( 正 領 官 )에 한성근( 韓 聖 根 )을 단부하고, 부령관( 副 領 官 )에 윤웅렬( 尹 雄 烈 )ㆍ김노완( 金 魯 莞 )을 단부하고, 참령관( 參 領 官 )에 우범선( 禹 範 善 )을 단부하였다 / 고종 18년 8월 19일(무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조영하( 趙 寧 夏 )는 나왔고, 참판 조희일( 趙 熙 一 )은 병이고, 참의 김규식 ( 金 奎 軾 )은 입직하고, 참지 이면우( 李 冕 雨 )는 병이고, 동부승지 홍승목은 나왔다. 민태호( 閔 台 鎬 )를 지중추부사로, 성욱호( 成 郁 鎬 )를 동지중추부사로, 이낙희( 李 樂 熙 )를 내금위 장으로, 이승옥( 李 承 鈺 )ㆍ안학주( 安 鶴 柱 )를 오위장으로, 김봉호( 金 鳳 昊 )를 경희궁 위장으로, 신욱( 申 㮋 )ㆍ서창순( 徐 昌 淳 )을 훈련원 주부로, 이범조( 李 範 祖 )ㆍ정인학( 鄭 寅 學 )을 문신겸선전 관으로, 윤경선( 尹 慶 善 )을 훈련도감 파총으로, 이교복( 李 敎 復 )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송계 헌( 宋 啓 憲 )을 영종 첨사( 永 宗 僉 使 )로, 오한영( 吳 翰 泳 )을 동진 첨사( 東 津 僉 使 )로, 장형준( 張 亨 浚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관 가설에 유기선( 柳 冀 先 )을 단부하고, 훈 련도감 초관에 성교수( 成 敎 修 )를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이능기( 李 能 基 ), 호군에 김영목( 金 永 穆 )ㆍ윤우선( 尹 宇 6 善 )ㆍ윤태경( 尹 泰 經 )ㆍ오경윤( 吳 慶 潤 ), 부호군에 홍은모( 洪 殷 謨 )ㆍ김유행 ( 金 裕 行 )ㆍ박해철( 朴 海 哲 )ㆍ이용원( 李 容 元 )ㆍ이원일( 李 源 逸 )ㆍ이희갑( 李 熙 甲 ), 부사직에 이재 윤( 李 載 允 )ㆍ조종필( 趙 鍾 弼 )ㆍ홍시형( 洪 時 衡 )ㆍ정재진( 鄭 在 晉 )ㆍ김학선( 金 鶴 善 ), 부사과에 신 덕균( 申 悳 均 )ㆍ이원기( 李 元 祺 )ㆍ장석조( 張 錫 祚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경상 좌병사에 이 기혁( 李 基 赫 )을 단부하였는데, 한 임기를 잉임( 仍 任 )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0년 6월 25일(계유) / 이호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호준( 李 鎬 俊 )을 지중추부사로, 서광태( 徐 光 泰 )ㆍ윤석원( 尹 錫 元 )ㆍ이청렬( 李 淸 烈 )ㆍ신성 흠( 愼 性 欽 )을 오위장으로, 한진행( 韓 鎭 行 )을 나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이승렬( 李 升 烈 )을 충 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오순영( 吳 順 泳 )을 경기 중군으로, 민영일( 閔 泳 一 )을 개성 중군으로, 윤영규( 尹 泳 奎 )를 청산도 첨사( 靑 山 島 僉 使 )로, 심인택( 沈 寅 澤 )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강 화순( 姜 和 淳 )을 동지중추부사로, 박태원( 朴 泰 遠 )을 금위영 초관으로, 이승한( 李 升 漢 )을 전라 도 병마우후로, 구연하( 具 然 河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이학선( 李 學 善 )을 전라우도 수군우 후로, 이근풍( 李 根 豐 )을 선전관으로, 이민긍( 李 敏 兢 )을 내금위장으로, 조희완( 趙 羲 完 )을 훈련 원 정으로, 이봉우( 李 鳳 宇 )를 훈련원 첨정으로, 조흥철( 趙 興 哲 )을 경상 중군으로, 이남집( 李 南 輯 )을 동지훈련원사로, 오도연을 첨지중추부사로, 유림을 중추부 도사로, 김기태( 金 箕 台 )를 훈련원 주부로, 허호( 許 鎬 )를 북병영 우후로, 이규안( 李 奎 顏 )을 동지중추부사로, 민인호( 閔 寅 鎬 )를 훈련원 도정으로, 이정현( 李 鼎 鉉 )ㆍ송진환을 수문장으로, 오만선( 吳 萬 善 )을 동진 첨사 ( 東 津 僉 使 )로, 윤석오( 尹 錫 五 )를 동지훈련원사로, 이유식( 李 儒 植 )을 선전관으로, 남궁영( 南 宮

18 18 - 泳 )을 부장으로, 김재우( 金 在 遇 )를 어영청 파총으로, 이제선( 李 濟 善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한치림( 韓 致 林 )를 훈련원 도정으로, 유응로( 柳 應 魯 )ㆍ하석락( 河 錫 洛 )을 훈련원 첨정으로, 오치혁( 吳 致 赫 )을 수문장으로, 송익상을 경상 중군으로, 안익( 安 榏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경 민( 李 慶 敏 )을 첨지중추부사로, 이병승을 선전관으로, 이근철( 李 根 哲 )을 중추부 도사로, 윤영 ( 尹 暎 )을 총리영 파총으로, 서광돈을 충익위장으로, 김병주를 오위장으로, 이상익( 李 相 翼 )을 훈련원 주부로, 황흔( 黃 炘 )을 수문장으로, 이규선( 李 奎 選 )을 운총 만호( 雲 寵 萬 戶 )로, 홍언주 ( 洪 彥 周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희( 李 )를 조사위장으로, 유응로를 선전관으로, 김종균( 金 從 均 ) 을 훈련원 첨정으로, 한기순( 韓 耆 淳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순원( 李 順 元 )을 훈련원 첨정으로, 정규찬( 鄭 圭 瓚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유응로를 황해도 병마우후로, 홍응석( 洪 應 錫 )을 광량 첨 사( 廣 梁 僉 使 )로, 김정수( 金 正 秀 )를 천성 만호( 天 城 萬 戶 )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선전관으로, 양 성환( 梁 性 煥 )을 훈련원 판관으로, 채규붕( 蔡 奎 鵬 )을 선전관으로, 박하형( 朴 夏 炯 )을 수문장으 로, 홍희윤( 洪 熙 潤 )을 경상 중군으로, 임성기를 오위장으로, 홍순조( 洪 順 祚 )를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로, 김제언( 金 濟 彥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최진근( 崔 鎭 根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 으로, 박옥룡( 朴 玉 龍 )을 입암 별장( 笠 巖 別 將 )으로, 고창규ㆍ김정화ㆍ최명익을 오위장으로, 김 원식( 金 源 植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박경삼( 朴 景 三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로, 안익상( 安 翼 相 )을 부장으로, 임윤기( 任 胤 祺 )를 수문장으로, 한희석( 韓 羲 錫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임익준( 任 翊 準 )을 절영도 첨사( 絶 影 島 僉 使 )로, 김충협( 金 忠 協 )을 경상 중군으로, 김인오( 金 仁 梧 )를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김성곤( 金 成 坤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배종엽( 裵 鍾 燁 )을 가 배량 만호( 加 背 梁 萬 戶 )로, 김상준( 金 商 俊 )을 안골 만호( 安 骨 萬 戶 )로, 구연수( 具 然 壽 )를 장목 포 별장( 長 木 浦 別 將 )으로, 이규원( 李 奎 元 )ㆍ이민집( 李 敏 集 )을 훈련원 부정으로, 박면동( 朴 勉 東 )을 부장으로, 최형규( 崔 炯 逵 )를 수문장으로, 임일권( 林 逸 權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박 장환( 朴 章 煥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김수정( 金 守 丁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최석 지( 崔 錫 枝 )를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김계연( 金 啓 淵 )을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로, 김영호( 金 永 浩 )를 수인 별장( 修 仁 別 將 )으로, 이규학( 李 奎 學 )을 충익위장으로, 임백우( 任 百 禹 )를 충장위장 으로, 이태용( 李 泰 鎔 )을 부장으로, 이인항( 李 寅 恒 )을 수문장으로, 서우순( 徐 瑀 淳 )을 초도 첨 사( 椒 島 僉 使 )로, 김재훈( 金 載 勳 )을 고풍산 첨사( 古 豐 山 僉 使 )로, 손병준( 孫 柄 濬 )을 유원 첨사 ( 柔 遠 僉 使 )로, 김응호( 金 膺 浩 )를 소이 만호( 所 已 萬 戶 )로, 이승준( 李 昇 俊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최재학( 崔 在 鶴 )을 금정 별장( 金 井 別 將 )으로, 호광표( 扈 光 表 )ㆍ김순영( 金 淳 英 )ㆍ윤동순 ( 尹 東 舜 )ㆍ최창렴( 崔 昌 濂 )ㆍ박기우( 朴 起 羽 )를 오위장으로, 이인엽( 李 寅 曄 )을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로, 최재호( 崔 載 鎬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이기선( 李 基 善 )을 아오지 만호( 阿 吾 地 萬 戶 )로, 장중술( 張 重 述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노태건( 盧 泰 鍵 )을 자모 별장( 慈 母 別 將 )으 로, 이진규( 李 晉 奎 )를 오위장으로, 민일호( 閔 一 鎬 )를 충익위장으로, 이사훈( 李 思 勳 )을 충장위 장으로, 양재덕( 梁 在 德 )을 수문장으로, 김문종( 金 汶 鍾 )을 갈파지 첨사( 坡 知 僉 使 )로, 윤태흥( 尹 泰 興 )ㆍ오병문( 吳 炳 文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조태승( 趙 泰 昇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강효 흡( 康 孝 洽 )을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한경식( 韓 景 植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윤자현( 尹 滋 峴 )을 충익위장으로, 이인협( 李 寅 協 )을 충장위장으로, 이민집을 선전관으로, 유완근( 柳 完 根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조병두( 曺 秉 斗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민재식( 閔 在 植 )ㆍ이 용직( 李 庸 稙 )ㆍ최종연( 崔 鍾 淵 )ㆍ이승학( 李 承 鶴 )ㆍ신학희( 申 鶴 熙 )ㆍ유재응( 柳 載 應 )을 오위장으 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훈련원 부정으로, 손경헌( 孫 璟 憲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승구( 李 承 九 ) ㆍ이만우( 李 晩 宇 )를 훈련원 주부로, 김원식( 金 源 植 )ㆍ임일권( 林 逸 權 )을 오위장으로, 구춘서 ( 具 春 書 )ㆍ이병헌( 李 秉 憲 )을 선전관으로, 구중감( 具 重 瑊 )을 수문장으로, 이길선( 李 吉 善 )ㆍ이

19 19 - 기표( 李 基 豹 )ㆍ홍주현( 洪 周 鉉 )ㆍ이학무( 李 學 懋 )ㆍ이봉익( 李 鳳 翼 )을 오위장으로, 이철희( 李 徹 熙 )ㆍ서익보( 徐 翊 輔 )를 훈련원 첨정으로, 허철( 許 )을 훈련원 판관으로, 고대규( 高 大 奎 )를 수 문장으로, 김원규( 金 元 奎 )를 경상 중군으로, 박형우( 朴 亨 祐 )를 충익위장으로, 김기반( 金 基 盤 ) 을 충장위장으로, 조남익( 趙 南 益 )을 부장으로, 이원유( 李 元 裕 )를 수문장으로, 민정식( 閔 貞 植 ) 을 통제영 우후로, 고영기( 高 英 岐 )ㆍ김병주( 金 炳 周 )를 오위장으로, 민덕현( 閔 德 顯 )을 충장위 장으로, 한진형( 韓 鎭 衡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유석형( 柳 錫 衡 )을 수문장으로, 유정주( 兪 廷 柱 )를 충익위장으로, 박병용( 朴 炳 容 )을 중추부 도사로, 윤명근( 尹 明 根 )ㆍ이해영( 李 海 永 )을 훈련원 주부로, 최운환( 崔 雲 煥 )을 금위영 초관으로, 윤선용( 尹 善 容 )을 오위장으로, 홍용관( 洪 用 觀 )을 우위솔로, 심흥택( 沈 興 澤 )을 부장으로, 김창수( 金 昌 壽 )를 수문장으로, 홍종원( 洪 鍾 源 )을 경상 중군으로, 양주식( 梁 柱 植 )ㆍ허장( 許 樟 )ㆍ박홍일( 朴 弘 鎰 )을 수문장으로, 박준모( 朴 準 模 )를 훈 련원 주부로, 장교준( 張 敎 駿 )을 수문장으로, 유달원( 兪 達 源 )ㆍ권귀인( 權 龜 仁 )ㆍ하성일( 河 成 一 )ㆍ박흥식( 朴 興 植 )ㆍ맹호용( 孟 浩 瑢 )을 오위장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관 백광혁( 白 光 爀 ), 주 부 진응표( 秦 膺 杓 )ㆍ양종률( 梁 鍾 律 )ㆍ김명렬( 金 命 烈 ), 이상은 가설( 加 設 )인데 감하( 減 下 )하였 다. 진응표를 훈련원 판관 가설로, 박봉식( 朴 鳳 植 )ㆍ박용래( 朴 龍 來 )ㆍ백학진( 白 鶴 鎭 )을 훈련 원 주부 가설로, 이종순( 李 鍾 順 )ㆍ장두언( 張 斗 彥 )ㆍ이준호( 李 駿 鎬 )를 선전관으로, 유기완( 柳 冀 完 )ㆍ강이회( 姜 彝 會 )ㆍ이종규( 李 鍾 奎 )ㆍ이계홍( 李 啓 弘 )을 부장으로, 정수방( 鄭 秀 昉 )ㆍ이응 상( 李 應 相 )ㆍ한용재( 韓 用 在 )를 수문장으로, 임성준( 任 聖 準 )을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삼았 다. 갑암 권관( 甲 巖 權 管 )에 김유영( 金 裕 榮 )을 단부하고, 삼천포 권관에 원재유( 元 在 鍮 )를 단 부하였다. 충주 영장 이승렬, 경기 중군 오순영, 개성 중군 민영일, 청산도 첨사 윤영규, 격 포 첨사 심인택,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으로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 든 것이다. 훈련원 주부에 이후근( 李 厚 根 )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범룡( 李 範 龍 )을 단 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신석규( 申 錫 圭 )ㆍ김진민( 金 鎭 民 )ㆍ홍영보( 洪 穎 普 )를 단부하 고,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병승( 李 秉 承 )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에 이준한( 李 駿 漢 )을 단부하고, 훈련원 판관 가설에 이인식( 李 寅 植 )ㆍ이건호( 李 建 鎬 )ㆍ조경현( 趙 璟 顯 )ㆍ이석호( 李 晳 鎬 )ㆍ안철승( 安 轍 承 )ㆍ이병훈( 李 秉 薰 )ㆍ이규춘( 李 奎 春 )ㆍ이면규( 李 冕 珪 )ㆍ정명원( 鄭 明 源 )ㆍ 이양렬( 李 亮 烈 )ㆍ이학승( 李 學 承 )ㆍ송귀호( 宋 龜 浩 )ㆍ이용삼( 李 容 三 )ㆍ정순용( 鄭 舜 鎔 )ㆍ권동진 ( 權 東 鎭 )ㆍ신태휴( 申 泰 休 )ㆍ황헌주( 黃 憲 周 )ㆍ고진혁( 高 鎭 赫 )ㆍ최성환( 崔 星 煥 )을 단부하고, 훈 련원 주부 가설에 진방( 陳 芳 )ㆍ조희은( 趙 羲 誾 )ㆍ신제원( 愼 濟 遠 )ㆍ유동근( 柳 東 根 )ㆍ김종려( 金 鍾 呂 )ㆍ김한근( 金 漢 根 )ㆍ추교신( 秋 敎 臣 )을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에 김준모( 金 浚 模 )ㆍ한인수 ( 韓 仁 秀 )ㆍ김의협( 金 義 協 )ㆍ김재항( 金 在 恒 )ㆍ임극양( 林 克 養 )ㆍ유용( 劉 榕 )ㆍ한원영( 韓 元 榮 )ㆍ송 계택( 宋 啓 澤 )ㆍ정윤록( 鄭 允 祿 )ㆍ장현규( 張 賢 逵 )ㆍ김재술( 金 在 述 )ㆍ서경락( 徐 京 洛 )ㆍ이겸영( 李 謙 榮 )ㆍ길원례( 吉 元 禮 )ㆍ김수( 金 洙 )ㆍ김문상( 金 文 尙 )ㆍ장원화( 張 源 華 )ㆍ김용길( 金 龍 吉 )ㆍ조성 규( 趙 性 奎 )ㆍ이약곤( 李 若 坤 )ㆍ송인혁( 宋 寅 赫 )ㆍ오재근( 吳 在 根 )ㆍ김재빈( 金 在 斌 )ㆍ김득연( 金 得 淵 )ㆍ전기풍( 田 基 豐 )ㆍ김현교( 金 顯 敎 )ㆍ김광현( 金 光 鉉 )ㆍ김인호( 金 麟 浩 )ㆍ강봉상( 康 鳳 祥 )ㆍ이 철모( 李 喆 模 )ㆍ김홍식( 金 弘 植 )ㆍ오안묵( 吳 安 默 )ㆍ조형한( 趙 亨 漢 )ㆍ장유겸( 張 有 謙 )ㆍ우석정( 禹 錫 鼎 )ㆍ한형규( 韓 瀅 圭 )ㆍ신석규( 辛 錫 圭 )ㆍ유인근( 柳 寅 根 )ㆍ최윤종( 崔 允 鍾 )ㆍ박민학( 朴 敏 學 )ㆍ 이석규( 李 奭 奎 )ㆍ김병언( 金 秉 彥 )ㆍ유경훈( 劉 敬 勳 )ㆍ주의준( 朱 儀 俊 )ㆍ전인헌( 全 寅 憲 )ㆍ오원모 ( 吳 遠 模 )ㆍ박상순( 朴 常 順 )ㆍ김대후( 金 大 厚 )ㆍ이인봉( 李 寅 鳳 )ㆍ김석종( 金 錫 宗 )ㆍ이병모( 李 秉 謨 ) ㆍ이재범( 李 載 範 )ㆍ김재진( 金 在 鎭 )ㆍ장석호( 張 錫 浩 )를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가설에 이청 렬( 李 淸 烈 )을 단부하였다. 충청 중군 오진섬( 吳 鎭 暹 )은 한 임기를 더하여 잉임( 仍 任 )하였다. 부사과에 서상은( 徐 相 殷 )ㆍ장귀택( 張 龜 澤 )ㆍ채규붕( 蔡 圭 鵬 )ㆍ신좌희( 申 佐 熙 )ㆍ이봉규( 李 鳳 珪 )

20 20 - ㆍ이가희( 李 可 熙 )ㆍ오정선( 吳 定 善 )ㆍ김기정( 金 基 禎 )ㆍ홍병만( 洪 秉 萬 )ㆍ이규진( 李 圭 珍 )ㆍ홍석 범( 洪 錫 範 )ㆍ박긍수( 朴 兢 壽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21년 4월 14일(무오) / 군병과 군량미를 보장하여 병비에 힘쓸 것을 청하는 판돈녕부사 민영목의 상소 판돈녕부사 민영목( 閔 泳 穆 )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들으니, 군병은 백년 동안 쓰지 않을 수 있으나 나라는 하루라도 방 비가 없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방비가 있고 나서야 근심이 없는 것이니, 근심이 이른 뒤 에 방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한 지 십수 년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국경에는 사건이 많아졌고 변고가 거듭 불어나 어렵고 위 태함이 날이 갈수록 급박합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이니, 변하고 통하는 기틀 은 오직 스스로 강성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문사( 文 事 )가 있더라도 반드시 무비( 武 備 )가 있어야 한다. 약함과 강함은 짝이 되니 떨치고 일어나지 않 으면 자립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시국이 옛날과 매우 판이하여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권세와 이익을 떠받듭니다. 권세와 이익은 위엄과 무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통상하는 항구는 반드시 중병( 重 兵 )으로 보호해야 하는데 유독 우리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옛 버릇에 젖어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생각지 않은 근심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용기는 분노에 미치지 못하고 지혜는 도모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근심이 지극히 가까워 방비를 시급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저 경기 연 안은 서울의 대문이나 뜰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천연적으로 지역이 험준하니 반드시 지켜 낼 수 있는 곳인데, 방비하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되어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사의( 事 宜 )를 생각하였습니다. 대체로 해안을 방비하 는 법은 바다를 차단해야 하니 전적으로 수군에 의거해야 하는데, 지금 관할하는 바는 육군 이 수비하는 것뿐이니 매우 소홀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에게 해방 ( 海 防 )의 통제를 따르게 한 뒤에야 바다와 육지의 방비가 바야흐로 모두 완비될 것입니다. 교동( 喬 桐 )은 외딴 섬으로 군병과 양식이 모두 부족하여 통어사( 統 禦 使 )의 명칭은 이름만 있 고 실제는 없는데다가 해방영( 海 防 營 )에 소속되어 있으니 체제가 서로 모순됩니다. 수군의 절제사가 때에 따라 바뀐 전례가 한 번이 아니니, 참작하여 변통하는 것이 아마도 시기와 형편에 알맞을 것입니다. 남양( 南 陽 )의 대부도( 大 阜 島 )는 영흥도( 靈 興 島 )의 남쪽과 덕적도( 德 積 島 )의 동쪽에 끼여 있어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며, 둘레에 있는 아홉 섬의 1000호 에 가까운 백성들은 모두 물길에 익숙합니다. 요해처에 망대( 望 臺 )를 만들고 대포를 안치하 면 영흥도, 덕적도와 더불어 앞뒤에서 적을 공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의 진영을 만들어 별장( 別 將 )을 두되 신의 아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고 전적으로 통제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청과 아전들은 아직도 목관( 牧 官 ) 때 설치한 대로 있어서 그 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번거롭게 비용을 더 지출하지 않아도 병비( 兵 備 )가 거의 완전할 것 입니다. 연안 고을의 포군( 砲 軍 )은 원래의 정원이 1870명이지만 군사 훈련을 견딜 만한 사람은 겨 우 3분의 2이고 나머지는 불 때고 심부름하는 무리인데,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영방( 營 房 )을 설치하고 계기( 械 器 )를 수집하며 조련하는 방법을 차례로 거행하되, 총리아문의 포아

21 21 - 병( 砲 牙 兵 ), 수어청( 守 禦 廳 )의 별파진( 別 破 陣 ), 진무영( 鎭 撫 營 )의 새로 조련하는 군병은 각자 지급( 支 給 )하여 교습하는 것이 이미 제도가 되어 있으니 지금 변동하여 소란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항상 조련하고 신칙하여 유사시에 징발하여 조달하는 것이 실로 편리할 것 입니다. 경기 연안의 한쪽 면의 수로는 서쪽으로 풍덕( 豐 德 )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 通 津 )이 있으 며, 육로는 인천의 제물포항( 濟 物 浦 港 )과 남양의 마산포( 馬 山 浦 )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 로 가는 직통 길입니다. 해구( 海 口 )의 방어는 강화영( 江 華 營 )에 부속시켜 육지의 수비를 전 담하게 할 것이며, 해방영이 현재 부평( 富 平 )에 주둔하고 있으니, 풍덕과 남양에 마땅히 다 시 두 갈래의 방어막을 두어 호응하고 연락하게 하면되겠는데, 군병을 나누어 세력을 약하 게 하는 일은 병법에서 꺼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두 곳에 별도로 본토의 용사를 각각 2, 3대( 隊 )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고 병법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하여 오랫동안 해읍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게 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위급할 때 효력을 얻기가 쉬울 것입니다. 옛날에는 군병이 전부( 田 賦 )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병을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바뀌어 장정( 長 征 )을 하므로 운반하여 공급하는 일이 모두 고을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일의 형편이 그러하니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 將 吏 )는 대략 2000인인 데, 1인이 하루에 3되를 먹고 하루에 드는 자금이 3전( 錢 )이니, 1년이면 곡식이 1만 4400 포( 包 )가 되고 돈은 21만 6000민( 緡 )이 됩니다. 사목( 事 目 )에서 획정한 포군의 군량미 800 여 섬과 사창( 社 倉 )의 모곡( 耗 穀 ) 6000냥으로는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마음 에 의혹이 있으니 속히 규정을 정해야 합니다. 병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군량미는 원 래 나오는 근본이 있어야 항상 계속할 수 있다. 고 말합니다. 빌건대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헤아려서 세액( 稅 額 )을 나누어 주어 넉넉하게 군량을 보장하소서. 군병이 먹 을 것이 풍족하게 되는 것은 오직 위에서 명령하는 바에 달려 있습니다. 또 군량미를 넉넉하게 하는 데에는 둔전( 屯 田 )만한 것이 없는데 둔전은 반드시 공한지( 空 閑 地 )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인천, 남양, 장봉( 長 峯 ) 등지에 있는 목장은 말떼가 거의 없는데, 토지는 모두 비옥하여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혁파하여 그 땅에 둔전을 경영하 도록 허락하고, 소속된 토지의 총 결수( 結 數 )도 아울러 이관하고, 급하지 않은 자금은 덜어 내어 실용하면, 진실로 양쪽으로 이익이 되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영과 진에 군량미와 자금이 넉넉하더라도 기계와 의장( 衣 裝 ) 및 운송하는 비용을 일 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으니, 만일 재물을 늘리는 방도가 없으면 갑자기 군용이 결핍 될 것입니다. 어로세( 漁 撈 稅 ), 염전세( 鹽 田 稅 ), 선박세( 船 舶 稅 ) 등 세 가지 세금을 앞서 떼어 주시는 은택을 입었으나 징수하는 돈이 많지 않습니다. 각궁의 면세를 경기 감영에서 잉여 를 취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있으나, 다른 도에 있는 망정결( 望 定 結 )이 아직도 많으니, 모 두 경기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 내어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을 제외 하고 모두 해방( 海 防 )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일정한 규례를 삼는다면, 경상 비용을 더 허비 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저축한 것으로 경비를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해롭게 하지 않고 재물을 손상하지 않는 데에는 이보다 편리한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병비( 兵 備 )는 중대한 임무입니다. 국가의 안위( 安 危 )가 매여 있는 바인데, 더구나 이렇게 처 음 제도를 설치하는 때에는 더욱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에게 의뢰하여 야 합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쓸모 없는 선비로 무슨 취할 만한 재능이 있겠습니까. 위중( 威 重 )함은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지 못하고 사려( 思 慮 )는 뜻밖의 일을 응대하지 못하며, 나이는

22 22 - 또 노쇠하여 분주한 일을 감당하지 못하니, 이는 신의 말을 굳이 듣지 않고도 성상께서 모 두 밝게 아시는 바입니다. 조정의 거조는 결단코 아이들의 장난을 보듯이 하여 오래도록 잘 못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여기에 진술한 것은 모두 시급하고 절실한 사정에 관계됩니 다. 사사로운 충정에 감격하여 말을 절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세히 보시고 만일 채납할 만하시면 묘당으로 하여금 상세히 따져서 국사에 시행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 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은 비록 물러나 초야에 묻힌다 해도 더불어 영광이 되겠습니 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아뢴 모든 조목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실하고 시급한 것들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고종 21년 4월 21일(을축) / 경기 연안의 해방 사무 민영목의 상소에서 청한 대로 각도의 망정결을 경기로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경기 연안을 총관하는 해방 사무( 海 防 事 務 ) 민영목( 閔 泳 穆 )이 상소한 데 대하여 비답하시기 를, 진술한 여러 조목들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실하고 시급한 것들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상소를 가져다 보니, 그 하나는, 지금의 관할하는 것은 단지 육군이 맡아 방비하고 있는 데, 매우 소홀하니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 水 軍 )은 해방영( 海 防 營 )에게 지휘를 받도록 허 락해 주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해안의 요충지는 오로지 수군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현재 아문에서 관할하는 것은 수천 명의 육군일 뿐이니, 견고하게 지켜야 하는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소홀하여 어찌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을 아울러 통 괄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분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교동( 喬 桐 )은 외딴 섬으로 군병과 군량미가 모두 부족하여 통어사( 統 禦 使 )의 명 칭이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으므로 때에 따라 변혁한 전례가 한 번만이 아니니, 참작하여 변통하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통어사의 호칭은 있으나 군대의 편제나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전혀 모양을 갖추지 못하여 그전부터 변혁한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습니다. 게 다가 지금은 해방영에 소속되어 있으니,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수군절도사와 통어 사의 직위를 감하( 減 下 )하고 해당 부사가 방어사의 자격으로 시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남양( 南 陽 ) 대부도( 大 阜 島 )는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로 거주하는 백성들이 물길에 익숙하니, 망대를 설치하고 포를 안치하여 별도의 진영을 만들고 별장을 두되 본 아 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도록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이 섬은 영흥도( 靈 興 島 )와 덕적도 ( 德 積 島 )의 사이에 끼여 있으니 실로 해문( 海 門 )의 요충지입니다. 진영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반드시 깊이 재량한 것이겠지만 별장의 한 자리는 해당 아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연안 고을의 포군은 원래의 정원이 1870명인데 군사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 람은 겨우 3분의 2이고 그 나머지는 불을 때거나 심부름하는 사람인데, 역시 없어서는 안

23 23 - 됩니다. 영방( 營 房 )을 설치하고 계기( 械 器 )를 수집하며 차례로 훈련하되 총리아문의 포아병 ( 砲 牙 兵 ), 수어영( 守 禦 營 )의 별파진( 別 破 陣 ), 진무영( 鎭 撫 營 )의 새로 훈련된 군병들은 항상 조련하고 신칙하여 유사시에 징발하여 조달하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연안 고을에 있 는 포군의 무기를 정비하고 기예를 연마시키고 세 영의 군병들을 조련하고 신칙하여 징발하 고 조달하는 등의 일은 아울러 이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경기 연안의 한쪽 면의 물길은 서쪽으로 풍덕( 豐 德 )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 ( 通 津 )을 경유하며, 육로는 인천의 제물포항과 남양의 마산포( 馬 山 浦 )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로 가는 직통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다 입구의 방어는 강화영( 江 華 營 )에 부속시켜 육지 의 수비를 전담하게 할 것이며, 해방영이 현재 부평에 주둔하고 있으니, 풍덕과 남양에 의 당 두 갈래의 방어막을 두어 호응하고 연락해야 하는 데, 군병이 나뉘면 위세가 약해지니 두 곳에 별도로 본토의 용사를 각각 2, 3대( 隊 )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으면서 병법에 익 숙한 사람을 가려서 오래도록 해읍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물이나 육지의 요충지에 별도로 본토의 병사를 선발하여 묶어서 조련시키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두 고을의 수령을 가려서 차임하고 오래도록 맡긴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이것은 별도로 전조( 銓 曹 )에 신칙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 將 吏 )는 대략 2000인인데 1인이 하루에 3되를 먹 고 하루에 드는 자금이 3전( 錢 )이니, 일 년이면 곡식이 1만 4400포가 되고 돈은 21만 6000민( 緡 )이 됩니다. 사목으로 획정한 포군의 군량미 800여 섬과 사창의 이자 6000냥으 로는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으니 바라건대 해당 관청에 신 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헤아려 세액을 나누어 주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군병이 있으면 군 량미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는 일의 형세로 보아 당연합니다. 이것은 바로 제일의 관건인데 돈과 곡식을 맡고 있는 관청에서 세입과 세출이 아직 넉넉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으니, 옮 겨 획급해 주는 것은 거론하여 의논하기 곤란합니다. 그 하나는, 군량미를 넉넉하게 하는 데는 둔전( 屯 田 )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 인천, 남양, 장 봉( 長 峯 ) 등지의 목장은 말들이 거의 없고 토지가 모두 비옥하여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혁파하여 그곳에 둔전을 경영할 것을 허락하고 소속한 토지의 총 결수( 結 數 )도 아 울러 이관하도록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둔전의 제도는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공한지에 서 실용( 實 用 )을 거두도록 하자고 상소에서 아뢴 말은 스스로 짐작하고 헤아린 것이 있으 니, 목장 중에서 옮길 만한 것과 혁파할 만한 것을 경시( 冏 寺 )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 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영진( 營 陣 )에 군량미와 자금이 넉넉하더라도 기계( 器 械 )와 의장( 衣 裝 ) 및 운송하 는 비용도 1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습니다. 다른 도( 道 )에 있는 망정결( 望 定 結 )이 아직도 많으니 한결같이 아울러 경기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 내어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을 제외하고 모두 해방( 海 防 )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일정한 규례를 삼게 하소 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정한 군량미의 액수 이외에 들어가는 기계, 의장, 물자를 운송 하는 비용이 필경 많을 것이니, 각도에 있는 망정결을 아울러 경기로 보내고 이미 궁결( 宮 結 )에 있는 것은 삭제하며,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에서 나머지를 계산하여 해당 아문에 소속시켜 비용을 보충하도록 하되, 이는 토지의 정사( 政 事 )에 관계된 것이니 호조에서 관문 ( 關 文 )을 발송하여 알리고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4 / 고종 21년 5월 27일(신축) / 경기 연해의 해방영 둔전에 대해 남양 등의 목장 개간지를 해당 아문에 획급해주겠다는 사복시 일제조 등의 계 또 사복시 일제조와 이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경기 연해의 해방영( 海 防 營 ) 둔전( 屯 田 )에 대한 사안은, 의정부의 회계( 回 啓 )를 따라 남양 ( 南 陽 ), 장봉( 長 峯 ), 인천( 仁 川 ) 세 곳에 있는 목장 개간지를 상소에서 청한 대로 해당 아문 에 획급( 劃 給 )해 주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통어사( 統 禦 使 )를 감하한 후 경기 연안 수군이 이미 해방 아문( 海 防 衙 門 )에 속하였습니다. 따라서 해서( 海 西 )와 호서( 湖 西 )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일체로 절제하게 하고, 덕적( 德 積 )ㆍ 덕포( 德 浦 )ㆍ주문( 注 文 )ㆍ영흥( 靈 興 )ㆍ장봉( 長 峯 )의 전최( 殿 最 )는 기영( 畿 營 )으로 하여금 구관 하게 하고, 남양( 南 陽 ), 장봉( 長 峯 )ㆍ인천( 仁 川 ) 목장은 이미 태복시에서 복계하여 당해 아문 에 갈라 붙였으니, 목관( 牧 官 )을 모두 감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 남양 등의 겸감목관을 오늘 정사에서 감하하겠다는 병비의 계 또 병비의 말로 아뢰기를, 의정부 초기로 인하여 남양( 南 陽 )ㆍ인천( 仁 川 )ㆍ단천( 端 川 )ㆍ장봉( 長 峯 )의 겸감목관을 모두 감하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오늘 정사에서 감하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6월 30일(임인) /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경기 감사 김굉집 등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제도( 諸 道 )의 포폄 계본( 褒 貶 啓 本 )을 뜯어 보니, 경기 감사 김굉집( 金 宏 集 )의 계본 가운데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 장중술( 張 重 述 )에 대해서는 작은 섬에서 노성( 老 成 )한 체한다. 하였고, 황해도 병마절도사 정운익( 鄭 雲 翼 )의 계본 가운데 소이 만호( 所 已 萬 戶 ) 임연( 林 演 )에 대해서 는 공사를 하려면 마땅히 더 성실해야 한다. 하였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종건( 李 鍾 健 ) 의 계본 가운데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 김성국( 金 星 國 )에 대해서는 막중한 군부( 軍 簿 )의 보고

25 25 - 가 어찌 사실과 다른가. 하였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민경호( 閔 敬 鎬 )의 계본 가운데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 장택교( 張 擇 喬 )에 대해서는 비방을 어찌 다 믿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하고( 下 考 )에 두어야 하는데도 중고( 中 考 )에 두었습니다. 경상 감사 조강하( 趙 康 夏 )의 계본 가운데 분산 별장( 盆 山 別 將 ) 정기영( 鄭 基 榮 )에 대해서는 관방( 關 防 )이 가볍지 않은데 순초( 巡 哨 )에 더욱 부지런하다. 하였고, 전라 감사 김성근( 金 聲 根 )의 계본 가운데 삼도 별장( 三 島 別 將 ) 이용기( 李 龍 基 )에 대해서는 1년이 지나 그 서민 이 부유하게 되었다. 하였고, 통제사 이원회( 李 元 會 )의 계본 가운데 섬진 별장( 蟾 津 別 將 ) 김 기열( 金 基 烈 )에 대해서는 요찰( 瞭 察 )을 자세히 하고 환곡을 받아들이는 데 근신( 勤 愼 )한다. 하였으니, 모두 중고에 두어야 하는데도 상고( 上 考 )에 두었습니다. 강원 감사 민치서( 閔 致 序 )의 계본 가운데 삼방 별장( 三 防 別 將 ) 김희련( 金 希 連 )에 대해서는 진( 鎭 )이 쇠잔하다고 혹 방수( 防 守 )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황해도 병마절도사 정운익( 鄭 雲 翼 )의 계본 가운데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 최재호( 崔 載 鎬 )에 대해서는 나이가 젊 어 날카로우니, 혹 비방을 부르지 않으랴. 하였고, 통제사 이원회( 李 元 會 )의 계본 가운데 안 골 만호( 安 骨 萬 戶 ) 김상준( 金 尙 俊 )에 대해서는 유연함이 강함을 제압하니 미련한 사람도 수 그러들었다. 하였고,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 박기린( 朴 基 璘 )에 대해서는 금송( 禁 松 )에 꽤 부지런하고 대포( 代 布 )가 균일하다. 하였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종건( 李 鍾 健 )의 계본 가운데 식송 만호( 植 松 萬 戶 ) 이윤평( 李 允 坪 )에 대해서는 관문의 요충을 다스림에 본디 흠이 없다. 하였고, 황해도 수군절도사 민치설( 閔 致 卨 )의 계본 가운데 금사 별장( 金 沙 別 將 ) 전호 신( 全 浩 信 )에 대해서는 더욱 직임 살피기에 힘쓰고 성실함이 귀하다. 하였고, 전라좌도 수 군절도사 이희갑( 李 熙 甲 )의 계본 가운데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 경흥준( 景 興 俊 )에 대해서는 잔파한 관방이니 한결같은 규모로 방수하였다. 하였고, 우수사 민경호의 계본 가운데 남도 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 이기영( 李 基 永 )에 대해서는 이미 풍속이 완악함을 알고는 먼저 간리 ( 奸 吏 )를 살폈다. 하였으니, 모두 하고에 두어야 하는데도 상고에 두어, 아주 엄명하게 전최 하는 뜻이 없습니다. 해당 도신과 수신을 모두 추고하여 경책하고, 장봉 별장 장중술, 소이 만호 임연, 창주 첨사 김성국, 임치 첨사 장택교는 모두 하고로 시행하고, 삼방 별장 김희련, 문산 만호 최재호, 안골 만호 김상준, 구소비포 별장 박기린, 식송 만호 이윤평, 금사 별장 전호신, 녹도 만호 경흥준, 남도포 만호 이기영은 순전히 폄하한 말이어서 그 무식함을 알 수 있으니, 모두 파 출하여야 합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종건의 계본에는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 김화건( 金 和 鍵 )의 건( 鍵 ) 자를 건( 健 ) 자로 썼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민겸호의 계본에는 임치 첨사 장택교( 張 擇 喬 )의 택( 擇 ) 자를 택( 澤 ) 자로 썼습니다. 성상께 아뢰는 문자는 얼마나 조심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처럼 잘못 썼으니,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고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3년 7월 29일(기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박주양( 朴 周 陽 )은 병이고, 참의 홍헌술( 洪 憲 述 )은 병이고, 참지 이교하( 李 敎 夏 )는 입직인데 나왔고, 동부승지 정인흥이 나왔다.

26 26 - 이창호( 李 昌 鎬 )를 겸 훈련원도정으로, 이용겸( 李 容 謙 )을 내금위장으로, 이규현( 李 奎 炫 )을 선 전관으로, 김연하( 金 演 夏 )를 훈련원 첨정으로, 백낙균( 白 樂 均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이 한익( 李 漢 翼 )ㆍ이병룡( 李 秉 龍 )ㆍ맹계선( 孟 繼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어득찬( 魚 得 璨 )을 주부 로, 우충식( 禹 忠 植 )을 인동 만호( 仁 同 萬 戶 )로, 이병승( 李 秉 承 )을 공주 영장( 公 州 營 將 )으로, 윤 창근( 尹 昌 根 )을 청주 영장( 淸 州 營 將 )으로, 장봉진( 張 鳳 鎭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구연 팔( 具 然 八 )을 강화 중군( 江 華 中 軍 )으로, 유장렬( 柳 漳 烈 )을 함흥 중군( 咸 興 中 軍 )으로, 오치기 ( 吳 致 箕 )를 동지로, 민준호( 閔 俊 鎬 )를 훈련원 정으로, 이항로( 李 恒 魯 )를 첨정으로, 한중섭( 韓 仲 涉 )을 판관으로 삼았다. 이민석( 李 敏 錫 )을 가리포 첨사( 加 里 浦 僉 使 )로, 송치영( 宋 致 榮 )을 동지로, 유기선( 柳 冀 先 )을 선전관으로, 구창서( 具 昌 書 )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선용( 金 善 容 )을 충청 병사로, 유긍로( 柳 兢 魯 )를 황해 병마 우후로, 이충호( 李 忠 鎬 )를 고산리 첨사( 高 山 里 僉 使 )로, 유돈수( 柳 敦 秀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홍학주( 洪 鶴 周 )를 성진 첨사( 城 津 僉 使 )로, 허호( 許 鎬 )를 고령 첨사( 高 嶺 僉 使 )로, 한창리( 韓 昌 履 )를 전라 병마 우후로, 이희모( 李 熙 模 )를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손응태( 孫 應 泰 )를 혜산 첨사( 惠 山 僉 使 )로, 이종철( 李 鍾 哲 )을 순천 영 장( 順 天 營 將 )으로, 홍채( 洪 埰 )를 선전관으로, 이민철( 李 敏 哲 )을 전라 좌병마 우후로, 윤치성 ( 尹 致 聖 )을 동지로, 정운익( 鄭 雲 翼 )ㆍ민종호( 閔 宗 鎬 )ㆍ이교창( 李 敎 昌 )을 동지훈련원사로, 차 호진( 車 好 鎭 )을 경상 좌수 우후로, 유진규( 兪 鎭 奎 )ㆍ정규섭( 鄭 圭 燮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 교영( 李 敎 榮 )ㆍ이용은( 李 容 殷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김재석( 金 在 奭 )을 황해 수우후로, 이규현( 李 奎 炫 )ㆍ정용기( 鄭 龍 基 )ㆍ하도일( 河 道 一 )ㆍ권응규( 權 應 圭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규 진( 李 圭 珍 )을 주부로, 이교민( 李 敎 敏 )을 선전관으로, 정희열( 鄭 熙 悅 )을 중추부 도사로, 이종 규( 李 鍾 奎 )를 훈련원 판관으로, 박완혁( 朴 完 赫 )을 방답 첨사( 防 踏 僉 使 )로, 김완주( 金 完 周 )를 주문 첨사( 注 文 僉 使 )로, 김재우( 金 在 遇 )ㆍ이계선( 李 啓 善 )을 훈련원 부정으로, 민태식( 閔 台 植 ) 을 주부로, 김계흥( 金 啓 興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고남식( 高 南 植 )을 남고 별장( 南 固 別 將 )으로, 이계호( 李 啓 好 )를 선전관으로, 신홍일( 申 弘 一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이완길( 李 完 吉 )을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김기영( 金 基 英 )을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김규삼( 金 奎 三 )을 남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로, 최영서( 崔 永 書 )를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정광원( 鄭 光 源 )을 용 진 만호( 龍 津 萬 戶 )로, 한몽환( 韓 夢 煥 )을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조성섭( 趙 性 涉 )을 식송 만호 ( 植 松 萬 戶 )로, 백명홍( 白 明 弘 )을 오로량 만호( 吾 老 梁 萬 戶 )로, 홍채( 洪 埰 )ㆍ이기주( 李 起 周 )를 훈련원 첨정으로, 구주현( 具 周 鉉 )을 별영 파총( 別 營 把 摠 )으로, 권시흥( 權 時 興 )을 막령 만호 ( 幕 嶺 萬 戶 )로, 조상옥( 趙 尙 沃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최공복( 崔 公 福 )ㆍ이세직( 李 世 稙 )ㆍ 심후택( 沈 厚 澤 )ㆍ임찬화( 林 贊 化 )ㆍ오익선( 吳 翼 善 )을 오위장으로, 손여인( 孫 汝 仁 )ㆍ안영조( 安 永 祚 )ㆍ한수경( 韓 守 璥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계선( 李 啓 善 )을 선전관으로, 윤규선( 尹 奎 善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교민( 李 敎 敏 )을 훈련원 부정으로, 민치승( 閔 致 昇 )을 판관으로, 이 교영( 李 敎 榮 )ㆍ전원근( 田 源 根 )ㆍ이규연( 李 圭 淵 )을 주부로, 조재오( 趙 載 五 )를 선전관으로, 이 상희( 李 象 羲 )ㆍ윤태일( 尹 泰 逸 )을 훈련원 주부로, 최일녕( 崔 日 寧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안응정( 安 應 禎 )을 수문장으로, 오태영( 吳 泰 泳 )을 훈련원 판관으로, 석태로( 石 泰 魯 )를 수문장 으로, 이병화( 李 秉 和 )를 갈파지 첨사( 波 知 僉 使 )로, 김성곤( 金 成 坤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김영득( 金 永 得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하순일( 河 順 一 )을 중추부 경력으로, 전학용( 全 學 容 )을 훈련원 주부로, 이지효( 李 志 孝 )를 수문장으로, 이원식( 李 源 植 )을 선전관으로, 김격순 ( 金 格 淳 )을 황척파 만호( 黃 拓 坡 萬 戶 )로, 신표희( 申 杓 熙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민제( 李 敏 濟 ) ㆍ이풍래( 李 豐 來 )를 별영 초관으로, 이건수( 李 建 壽 )ㆍ조병온( 趙 炳 瑥 )을 부장으로, 김기명( 金 基 明 )을 훈련원 주부로, 이우로( 李 友 魯 )를 별영 초관으로, 김정항( 金 定 恒 )을 볼하 첨사( 乶 下

27 27 - 僉 使 )로, 남기완( 南 基 完 )을 훈련원 주부로, 윤영진( 尹 泳 璡 )ㆍ이기욱( 李 起 郁 )ㆍ홍우겸( 洪 祐 謙 ) ㆍ백명기( 白 命 基 )를 선전관으로, 임병호( 林 炳 鎬 )ㆍ이창섭( 李 昌 燮 )을 부장으로, 유석용( 柳 錫 用 )ㆍ안동표( 安 東 彪 )ㆍ조기동( 趙 基 東 )ㆍ이창익( 李 昌 翼 )ㆍ김종학( 金 宗 學 )ㆍ박조영( 朴 祚 永 )을 수문장으로, 윤치봉( 尹 致 鳳 )을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으로, 임순초( 林 淳 楚 )를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이용선( 李 容 善 )을 남도 참군( 南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인화보 권관( 寅 火 堡 權 管 )에 김 규천( 金 奎 天 )을 단부하였다. 공주 영장 이병승( 李 秉 承 ), 청주 영장 윤창근( 尹 昌 根 ), 삼척 영 장 장봉진( 張 鳳 鎭 ), 강화 중군 구연팔( 具 然 八 ), 함경 중군 유장렬( 柳 漳 烈 ), 가리포 첨사 이민 석( 李 敏 錫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동지훈련원사에 김병일( 金 炳 一 )을 단부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지중추부 사 가설에 진상욱( 秦 尙 彧 )과 이응준( 李 應 浚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 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유기선( 柳 冀 先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하용제( 河 龍 濟 ), 이원식( 李 源 植 ), 황찬( 黃 穳 ), 강유형( 姜 有 馨 ), 윤석정( 尹 錫 禎 ), 윤자복( 尹 滋 復 ), 이민원( 李 敏 源 ), 이규성 ( 李 圭 晟 ), 김익래( 金 益 來 ), 유풍렬( 柳 豐 烈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첨정 가설 열다섯 자리에 이교석( 李 敎 奭 ), 성낙호( 成 樂 頀 ), 안형순( 安 亨 淳 ), 최주현( 崔 周 顯 ), 윤석기( 尹 錫 祺 ), 조존찬( 趙 存 贊 ), 이광렬( 李 光 烈 ), 홍주범( 洪 周 範 ), 이창환( 李 昌 煥 ), 김진환( 金 鎭 桓 ), 이희성( 異 熙 成 ), 이 장환( 李 章 煥 ), 강형준( 康 亨 俊 ), 권명호( 權 命 鎬 ), 홍종욱( 洪 鍾 郁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가설 서른한 자리에 이병홍( 李 秉 弘 ), 이기헌( 李 琦 憲 ), 김진풍( 金 振 豐 ), 이준성( 李 駿 性 ), 윤희 영( 尹 喜 永 ), 권형진( 權 瀅 鎭 ), 원익상( 元 益 常 ), 임선호( 任 宣 鎬 ), 원세록( 元 世 祿 ), 민영석( 閔 泳 錫 ), 채규승( 蔡 奎 昇 ), 박인화( 朴 寅 和 ), 이두황( 李 斗 璜 ), 하흥룡( 河 興 龍 ), 김재한( 金 在 漢 ), 구준 희( 具 俊 喜 ), 김흥학( 金 興 鶴 ), 김천봉( 金 千 奉 ), 권종렴( 權 鐘 濂 ), 민인호( 閔 麟 鎬 ), 윤홍식( 尹 弘 植 ), 이희상( 李 熙 相 ), 이원영( 李 元 榮 ), 남석린( 南 錫 麟 ), 이상우( 李 商 雨 ), 김홍제( 金 鴻 濟 ), 이원 호( 李 源 鎬 ), 이찬서( 李 纘 緖 ), 정순룡( 鄭 淳 龍 ), 권우섭( 權 友 燮 ), 유길로( 柳 吉 魯 )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주부 가설 여덟 자리에 부장 고재신( 高 載 臣 )ㆍ홍의섭( 洪 宜 燮 )ㆍ이홍선( 李 弘 善 ), 수문 장 정재욱( 鄭 在 旭 )ㆍ정명장( 鄭 命 長 )ㆍ전경식( 全 敬 植 )ㆍ장흥식( 張 興 植 )ㆍ한경문( 韓 景 文 )을 단 부하였는데, 이상은 승서( 陞 敍 )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선전관 가설에 민영국( 閔 泳 國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에 김우열( 金 佑 烈 )을 단부하고, 첨지에 김상우( 金 商 羽 ), 박형우( 朴 亨 祐 ), 이정호( 李 貞 祜 )를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규례대로 제수한 것이다. 부사과에 강석현( 康 錫 鉉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주부 가설에 정광원( 鄭 光 源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김윤구( 金 潤 九 ), 훈련원 주부 맹계 선( 孟 繼 善 ), 이상 가설직은 정식에 의거하여 감하( 減 下 )하였다. 겸 내금위장에 조희빈( 趙 羲 斌 )을 단부하고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3년 12월 29일(정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백남익( 白 南 益 )은 병이고, 참의 조문하( 趙 文 夏 )는 입직인데 나왔고, 참지 홍헌술( 洪 憲 述 )은 병이고, 승지- 원문 빠짐 - 임상준( 任 商 準 )을 지훈련원사로, 양주현( 梁 柱 顯 )을 선전관으로, 신덕( 申 )과 오은영( 吳 殷 泳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현직( 李 賢 稙 )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윤계환 ( 尹 啓 煥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이충려( 李 忠 呂 ), 유달원( 兪 達 源 ), 박제식( 朴 齊

28 28 - 植 )을 단부하였다. 이창하( 李 彰 夏 )ㆍ어득찬( 魚 得 璨 )을 훈련원 판관으로, 장준홍( 張 俊 泓 )ㆍ박 진희( 朴 晉 熙 )ㆍ조재홍( 趙 載 弘 )을 주부로, 최대( 崔 垈 )를 동지중추부사로, 정우식( 鄭 愚 植 )을 내 금위장으로, 박승보( 朴 承 輔 )를 선전관으로, 조기택( 趙 基 澤 )을 충청 중군으로, 정규일( 鄭 逵 一 ) 을 인차외 만호( 仁 遮 外 萬 戶 )로, 민준호( 閔 俊 鎬 )를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으로, 원유상( 元 有 常 ) 을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으로, 신응균( 申 膺 均 )을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으로, 조희중( 趙 羲 中 )을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으로, 유긍로( 柳 兢 魯 )를 통우후( 統 虞 侯 )로, 신종균( 申 從 均 )을 훈련원 정 으로, 김중삼( 金 重 三 )을 첨정으로, 김노승( 金 魯 昇 )을 판관으로, 이수일( 李 秀 一 )을 주부로, 정 운오( 鄭 雲 五 )를 강원 중군으로, 조동철( 趙 東 哲 )ㆍ황종륜( 黃 鍾 崙 )을 오위장으로, 정옥( 鄭 沃 )을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이창렬( 李 昌 烈 )을 함흥 중군으로, 오원영( 吳 元 泳 )을 경상 우병영 우후로, 장영급( 張 泳 汲 )을 동지중추부사로, 김재우( 金 在 遇 )를 선전관으로, 이규현( 李 奎 炫 )을 훈련원 주부로, 최주현( 崔 周 顯 )을 평남 만호( 平 南 萬 戶 )로, 김중삼( 金 重 三 )을 서수라 만호( 西 水 羅 萬 戶 )로, 이창하( 李 彰 夏 )를 훈련원 첨정으로, 유담( 柳 潭 )을 주부로, 조희문( 趙 羲 聞 )을 황 해 병마 우후로, 전원근( 田 源 根 )을 황해 수군 우후로, 배영락( 裵 榮 樂 )을 전라 우수영 우후로, 조존우( 趙 存 禹 )를 겸 훈련원도정으로, 이계선( 李 啓 善 )ㆍ이건호( 李 建 鎬 )를 부정( 副 正 )으로, 임 승학( 林 承 學 )ㆍ이풍의( 李 豐 儀 )를 판관으로, 심의준( 沈 宜 駿 )을 첨지로, 이정호( 李 貞 祜 )를 충장 위장( 忠 壯 衛 將 )으로, 강이회( 姜 彝 會 )를 훈련원 판관으로, 이상곤( 李 相 坤 )을 주부로, 서상은( 徐 相 殷 )을 부장( 部 將 )으로, 황건순( 黃 建 順 )ㆍ박기훈( 朴 基 勳 )을 오위장으로, 김상윤( 金 相 潤 )을 좌 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원준( 元 浚 )을 훈련원 주부로, 김한구( 金 翰 求 )를 부장으로, 이준호( 李 駿 鎬 )를 훈련원 첨정으로, 구연창( 具 然 昌 )을 주부로, 신홍균( 申 泓 均 )을 별영 초관( 別 營 哨 官 )으 로, 유협( 柳 )을 훈련원 주부로, 이근주( 李 根 周 )를 수문장으로, 이건호( 李 建 鎬 )를 선전관으로, 마두원( 麻 斗 元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재희( 金 載 熙 )를 판관으로, 이찬희( 李 贊 熙 )를 좌변포도 청 종사관으로, 허규( 許 珪 )를 선전관으로, 맹효술( 孟 斅 述 )ㆍ신기석( 辛 琦 錫 )을 오위장으로, 김 재우( 金 在 遇 )를 훈련원 부정으로, 이신재( 李 信 在 )ㆍ남기완( 南 基 完 )을 첨정으로, 김성태( 金 星 泰 )를 중추부 경력으로, 신좌희( 申 佐 熙 )를 훈련원 주부로, 박영전( 朴 暎 銓 )을 판관으로, 백낙 형( 白 樂 亨 )을 주부로, 신경균( 申 慶 均 )을 좌사어( 左 司 禦 )로, 김신묵( 金 信 默 )을 훈련원 첨정으 로, 이건수( 李 建 壽 )를 중추부 도사로, 이경권( 李 敬 權 )ㆍ염창진( 廉 昌 鎭 )을 훈련원 주부로, 유 기준( 兪 起 濬 )을 우익찬( 右 翊 贊 )으로, 유훈( 劉 塤 )을 훈련원 판관으로, 정현조( 鄭 賢 朝 )를 주부 로, 강일형( 姜 日 馨 )ㆍ윤영수( 尹 英 秀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김병억( 金 炳 億 )을 좌위솔( 左 衛 率 ) 로, 박도연( 朴 道 淵 )ㆍ이진명( 李 震 明 )을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으로, 유재식( 柳 在 植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로, 김흥준( 金 興 俊 )을 위도 첨사( 蝟 島 僉 使 )로, 홍태경( 洪 泰 璟 )을 고군산 첨사 ( 古 群 山 僉 使 )로, 함의문( 咸 義 文 )을 장곶 첨사( 長 串 僉 使 )로, 손세규( 孫 世 奎 )를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로, 원형익( 元 亨 益 )을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으로, 김상연( 金 相 演 )을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 으로, 최동환( 崔 東 煥 )을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로, 박만섭( 朴 萬 燮 )을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 로, 오익제( 吳 益 濟 )를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노태건( 盧 泰 鍵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김 승권( 金 承 權 )을 수인 별장( 修 仁 別 將 )으로, 강성익( 姜 聖 益 )을 고돌산 별장( 古 突 山 別 將 )으로, 윤호선( 尹 鎬 善 )ㆍ노진구( 盧 鎭 九 )를 수문장으로, 강문석( 康 文 錫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으로, 임찬화( 林 瓚 化 )를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주형엽( 朱 亨 燁 )을 보산 별장( 保 山 別 將 )으로, 이 주영( 李 周 永 )을 선전관으로, 허장( 許 樟 )을 훈련원 주부로, 남궁복( 南 宮 濮 )을 부장으로, 이승 윤( 李 承 潤 )을 수문장으로, 남정헌( 南 廷 獻 )을 우부솔( 右 副 率 )로, 송순억( 宋 淳 億 )을 내금위장으 로, 유풍렬( 柳 灃 烈 )을 선전관으로, 윤병헌( 尹 秉 憲 )을 수문장으로, 김봉규( 金 奉 圭 )를 좌시직( 左 侍 直 )으로, 임윤영( 林 允 永 )을 산산 첨사( 蒜 山 僉 使 )로, 김이연( 金 利 淵 )을 수구 만호( 水 口 萬 戶 )

29 29 - 로, 심상황( 沈 相 璜 )을 우세마( 右 洗 馬 )로, 표인근( 表 仁 根 )을 전라 중군( 全 羅 中 軍 )으로, 김응현 ( 金 應 鉉 )을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로, 김성수( 金 聖 洙 )를 지세포 만호( 知 世 浦 萬 戶 )로, 이시 영( 李 時 永 )을 선전관으로, 이방헌( 李 邦 憲 )ㆍ백낙순( 白 樂 淳 )을 부장으로, 서상빈( 徐 相 斌 )ㆍ장 우구( 張 禹 九 )ㆍ김정현( 金 定 鉉 )ㆍ윤자수( 尹 滋 壽 )를 수문장으로, 이우영( 李 愚 英 )을 경기전 수문 장( 慶 基 殿 守 門 將 )으로 삼았다. 삼천포 권관( 三 千 浦 權 管 )에 박현도( 朴 顯 道 )를 단부하였다. 훈 련원 판관 맹계선( 孟 繼 善 )과 주부 어득찬( 魚 得 燦 ), 이상은 감하하였다. 훈련원 판관 가설에 백남선( 白 南 善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주부 가설에 김한오( 金 漢 五 )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첨정 이건호( 李 建 鎬 )와 중추부 경력 김봉익( 金 鳳 翼 ),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첨정 이계선( 李 啓 善 )과 선전관 오태영( 吳 泰 泳 ), 이상은 서로 바 꾸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부사과 박계응( 朴 桂 應 )ㆍ이덕수( 李 德 秀 )ㆍ전영록( 田 永 祿 )ㆍ정희운 ( 鄭 憙 運 )ㆍ이정식( 李 廷 )ㆍ안재흥( 安 在 興 )ㆍ이승학( 李 承 學 )ㆍ유일권( 劉 一 權 )ㆍ염창진( 廉 昌 鎭 )ㆍ 이병홍( 李 秉 弘 )ㆍ이민익( 李 敏 翊 )ㆍ서익보( 徐 翊 輔 ), 전 부장 김두영( 金 斗 榮 )ㆍ문홍조( 文 弘 祚 ) ㆍ김영규( 金 泳 奎 )ㆍ한승락( 韓 承 洛 )ㆍ최영식( 崔 永 植 ), 전 수문장 송희정( 宋 熙 鼎 )은 이번에 절 충장군을 가자하였다. 동지중추부사에 윤계환( 尹 啓 煥 )을 단부하고, 가설에 이우영( 李 愚 榮 )ㆍ 최병익( 崔 炳 翼 )ㆍ최평식( 崔 平 植 )ㆍ김선식( 金 植 )ㆍ김시영( 金 時 榮 )ㆍ이창환( 李 昌 煥 )ㆍ박윤수( 朴 潤 秀 )ㆍ김상혁( 金 尙 爀 )ㆍ이익연( 李 翼 淵 )ㆍ정영묵( 鄭 永 默 )ㆍ박근식( 朴 根 植 )ㆍ김덕홍( 金 德 弘 )ㆍ 박기원( 朴 基 元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이충려( 李 忠 呂 )ㆍ유달원( 兪 達 源 )ㆍ박제 식( 朴 齊 植 )을 단부하였다. 오위장 가설 두 자리에 김영진( 金 永 珍 )과 최학묵( 崔 學 默 )을 단부 하였는데, 이상은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 민준호( 閔 俊 鎬 ), 홍 주 영장( 洪 州 營 將 ) 원유상( 元 有 常 ),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 신응균( 申 膺 均 ),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 조희중( 趙 羲 中 ), 통우후( 統 虞 候 ) 유긍로( 柳 兢 魯 ), 강원 중군 정운오( 鄭 雲 五 ), 이상은 이번 에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내금위장 두 자리에 민태 식( 閔 台 植 )과 유진화( 兪 鎭 華 )를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이번에 절충장군을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내금위장 두 자리에 심의일( 沈 宜 一 )과 이경한( 李 景 漢 )을 단부하였는데, 이 상은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 백지운( 白 志 雲 )과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 김득신( 金 得 信 ),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백치 첨사( 白 峙 僉 使 ) 최치 진( 崔 致 晉 ),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김계흥( 金 啓 興 ),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훈련원 첨정 가설 서른두 자리에 이병홍( 李 秉 弘 )ㆍ이기헌( 李 琦 憲 )ㆍ김진풍( 金 振 豐 ) ㆍ이준성 ( 李 駿 性 )ㆍ윤희영( 尹 喜 永 )ㆍ권영진( 權 濚 鎭 )ㆍ원익상( 元 益 常 )ㆍ임선호( 任 宣 鎬 )ㆍ원세록( 元 世 祿 ) ㆍ민영석( 閔 泳 錫 )ㆍ채규승( 蔡 圭 昇 )ㆍ박인화( 朴 寅 和 )ㆍ하흥룡( 河 興 龍 )ㆍ김재한( 金 在 漢 )ㆍ구준 희( 具 俊 喜 )ㆍ김흥학( 金 興 鶴 )ㆍ김천봉( 金 千 奉 )ㆍ권종렴( 權 鍾 濂 )ㆍ민인호( 閔 麟 鎬 )ㆍ윤홍식( 尹 弘 植 )ㆍ이희상( 李 熙 相 )ㆍ이원영( 李 元 榮 )ㆍ남석린( 南 錫 麟 )ㆍ이상우( 李 商 雨 )ㆍ김홍제( 金 鴻 濟 )ㆍ이 원호( 李 源 鎬 )ㆍ이찬서( 李 瓚 緖 )ㆍ정순용( 鄭 淳 龍 )ㆍ권우섭( 權 友 燮 )ㆍ유길로( 柳 吉 魯 )ㆍ권봉규( 權 鳳 圭 )ㆍ구연욱( 具 然 郁 )을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승서( 陞 敍 )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판관 가설 스물한 자리에 유기완( 柳 冀 完 )ㆍ오학선( 吳 學 善 )ㆍ유용근( 柳 龍 根 )ㆍ유치양( 柳 致 養 )ㆍ강요 선( 姜 堯 善 )ㆍ유근익( 柳 根 益 )ㆍ이태헌( 李 台 憲 )ㆍ안윤중( 安 允 中 )ㆍ양희수( 梁 僖 洙 )ㆍ이태용( 李 泰 鎔 )ㆍ고재신( 高 載 臣 )ㆍ홍의섭( 洪 宜 燮 )ㆍ이홍선( 李 弘 善 )ㆍ정재욱( 鄭 在 旭 )ㆍ김경식( 金 敬 植 )ㆍ장 흥식( 張 興 植 )ㆍ정명장( 鄭 命 長 )ㆍ한경문( 韓 景 文 )ㆍ윤상욱( 尹 相 旭 )ㆍ고의상( 高 義 相 )ㆍ채규선( 蔡 圭 璿 )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 가설 두 자리에 김약성( 金 若 性 )ㆍ신석린( 申 錫 麟 )을 단부하였 는데, 이상은 승서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내금위장 두 자리에 변득규( 邊 得 圭 )와 구연춘 ( 具 然 春 )을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선전관 가설에 유장렬( 柳

30 30 - 漳 烈 )을 단부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4년 윤4월 27일(갑인) / 신병이 있는 장봉 별장 최치진을 파출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아뢰기를,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최치진( 崔 致 晉 )이 신병이 갑자기 위중해져 길에 올라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실제 병이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전례대로 개차해서는 안 되니, 파출( 罷 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4년 윤4월 27일(갑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심상학( 沈 相 學 )은 시사( 試 射 )에 나아갔고, 참의 임상호( 任 尙 鎬 )는 입직하였고, 참지 정원화( 鄭 元 和 )는 배위( 陪 衛 )에 나아갔고, 승지- 원 문 빠짐 - 노기조( 盧 基 朝 )를 동지로, 홍규( 洪 圭 )를 동지훈련원사로, 정남조( 鄭 南 朝 )를 선전관으로, 이종 림( 李 鍾 林 )을 내금위장으로, 문재학( 文 在 學 )ㆍ이유철( 李 裕 鐵 )ㆍ고세규( 高 世 逵 )를 오위장으로, 남계헌( 南 啓 憲 )ㆍ진기룡( 陳 起 龍 )을 창덕궁 위장으로, 심헌택( 沈 憲 澤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이규연( 李 圭 淵 )ㆍ이기원( 李 基 元 )을 별영 초관으로, 홍종욱( 洪 鍾 彧 )을 수문장으로, 서병정 ( 徐 丙 鼎 )을 전라 병사로, 송일찬( 宋 一 儹 )을 가덕 첨사( 加 德 僉 使 )로, 신원균( 申 元 均 )을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로, 강성문( 康 成 文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문석구( 文 錫 久 )를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삼았다. 부사과에 이장성( 李 璋 成 ), 부사용에 소철규( 蘇 喆 圭 )를 단부하였다 / 고종 26년 1월 30일(병자) / 신병이 있는 장봉 별장 호성한을 파출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호성한( 胡 成 翰 )이 일 때문에 올라오다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 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이유 없이 체직을 도모한 것과는 다르니,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1월 30일(병자) / 김재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1 31 - 김재우( 金 在 遇 )를 훈련원 정으로, 홍택후( 洪 澤 厚 )를 첨정으로, 정환교( 鄭 煥 敎 )를 만포 첨 사( 滿 浦 僉 使 )로, 홍승익( 洪 承 翼 )을 갈파지 첨사( 波 知 僉 使 )로, 이기방( 李 起 邦 )을 경상우도 병 마우후로, 박제식( 朴 齊 植 )ㆍ김재민( 金 在 敏 )을 오위장으로, 강세영( 姜 世 榮 )을 선적 첨사( 善 績 僉 使 )로, 홍재묵( 洪 在 默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이명의( 李 明 宜 )를 조령 별장( 鳥 嶺 別 將 )으 로, 박기원( 朴 基 元 )을 동지로, 황종순( 黃 鍾 淳 )을 첨지로, 홍우범( 洪 祐 範 )ㆍ이풍호( 李 豐 鎬 )를 선전관으로, 신홍모( 申 鴻 模 )를 총어영 초관으로, 김여진( 金 麗 振 )을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로, 김기용( 金 基 溶 )을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김용주( 金 龍 周 )를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로, 김성수 ( 金 聖 洙 )를 사량 만호( 蛇 梁 萬 戶 )로, 진석주( 陳 錫 柱 )를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으로, 박윤성( 朴 崙 成 )ㆍ임재식( 林 載 植 )을 오위장으로, 한규복( 韓 圭 復 )을 선전관으로, 장덕환( 張 德 煥 )을 훈련원 첨정으로, 양인수( 梁 仁 洙 )를 주부로 삼았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풍호( 李 豐 鎬 )를 단부하였 다. 강희서( 姜 希 瑞 )ㆍ김상우( 金 商 羽 )를 오위장으로, 이덕우( 李 德 宇 )ㆍ오정묵( 吳 貞 默 )을 훈련 원 주부로, 현은정( 玄 殷 禎 )을 위도 첨사( 蝟 島 僉 使 )로, 김흥원( 金 興 元 )을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 로, 이종선( 李 宗 先 )을 고풍산 첨사( 古 豐 山 僉 使 )로, 임영숙( 任 榮 淑 )을 여도 첨사( 呂 島 僉 使 )로, 위문규( 魏 文 奎 )를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정한섭( 丁 漢 燮 )을 독용 별장( 禿 用 別 將 )으로, 김경 익( 金 璟 益 )ㆍ민계식( 閔 繼 植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종석( 李 鍾 奭 )을 선전관으로, 이한응( 李 漢 膺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기홍( 金 基 洪 )을 수문장으로, 윤경( 尹 璥 )을 충장위장으로, 심은택 ( 沈 殷 澤 )을 훈련원 부정으로, 유석응( 柳 錫 膺 )을 첨정으로, 송재수( 宋 在 洙 )를 중추부 도사로, 유인학( 柳 寅 學 )을 수문장으로, 이태용( 李 泰 鎔 )을 선전관으로, 이항로( 李 恒 魯 )를 훈련원 첨정 으로, 이기장( 李 起 張 )을 중추부 도사로, 최봉현( 崔 鳳 賢 )을 훈련원 주부로, 이기완( 李 起 完 )을 수문장으로, 김규천( 金 奎 天 )을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현상묵( 玄 尙 默 )을 가배량 만호( 加 背 梁 萬 戶 )로, 강효응( 康 孝 應 )을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김춘성( 金 春 成 )을 여현 첨사( 礪 峴 僉 使 )로, 전경진( 田 景 桭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장석동( 張 錫 東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교 환( 李 敎 桓 )ㆍ이재봉( 李 在 鳳 )을 주부로, 오동영( 吳 東 泳 )을 총어영 초관으로, 이곤태( 李 昆 泰 )를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김양필( 金 良 弼 )을 충익위장으로, 최영호( 崔 永 灝 )를 창덕궁 위장으로, 김호성( 金 浩 性 )을 중추부 경력으로, 임기호( 任 麒 鎬 )를 훈련원 첨정으로, 남필원( 南 弼 元 )을 중 추부 도사로 삼았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한규복( 韓 圭 復 )을 단부하였다. 조범구( 趙 範 九 )ㆍ윤 긍주( 尹 兢 周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변천만( 邊 千 萬 )을 용진 만호( 龍 津 萬 戶 )로, 김성근( 金 聖 根 )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성경유( 成 慶 裕 )를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으로, 이용식( 李 龍 植 )을 동지로, 이진하( 李 振 夏 )를 중추부 경력으로, 한계석( 韓 啓 錫 )을 훈련원 판관으로, 조 희린( 趙 羲 麟 )을 수문장으로, 이관용( 李 觀 用 )을 좌부솔로, 이봉규( 李 鳳 珪 )를 훈련원 판관으로, 이방헌( 李 邦 憲 )ㆍ정관식( 鄭 寬 植 )ㆍ변석린( 邊 錫 麟 )을 주부로, 김윤수( 金 胤 洙 )를 좌익찬으로, 이규영( 李 奎 鑅 )을 선전관으로, 이관현( 李 觀 鉉 )ㆍ김두희( 金 斗 煕 )ㆍ한긍리( 韓 兢 履 )ㆍ민기호( 閔 夔 鎬 )ㆍ허당( 許 瑭 )ㆍ이경호( 李 京 浩 )ㆍ백남철( 白 南 轍 )을 부장으로, 강이회( 姜 彝 會 )를 총어영 초관으로, 송찬회( 宋 贊 會 )를 수문장으로, 노진구( 盧 鎭 九 )를 훈련원 첨정으로, 구흥조( 具 興 祖 ) 를 총어영 파총으로, 위종식( 魏 鍾 植 )을 초관으로, 홍우겸( 洪 祐 謙 )을 혜산 첨사( 惠 山 僉 使 )로, 남성원( 南 性 元 )을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심상원( 沈 相 元 )ㆍ장원선( 張 元 善 )을 훈련원 첨정으 로, 이가희( 李 可 煕 )를 부장으로, 이원창( 李 源 昌 )을 수문장으로, 김현욱( 金 顯 旭 )을 중추부 도 사로, 이관희( 李 寬 煕 )를 훈련원 판관으로, 오태영( 吳 泰 泳 )을 수문장으로, 이교영( 李 敎 榮 )을 안원 만호( 安 原 萬 戶 )로, 유덕주( 劉 德 柱 )를 금갑도 만호( 金 甲 島 萬 戶 )로, 김연하( 金 演 夏 )를 총 어영 초관으로, 정두회( 鄭 斗 會 )ㆍ김항출( 金 恒 朮 )을 훈련원 주부로, 남유희( 南 惟 煕 )를 초도 첨

32 32 - 사( 椒 島 僉 使 )로, 허중( 許 重 )을 동관첨사( 潼 關 僉 使 )로, 장교준( 張 敎 駿 )ㆍ권낙종( 權 洛 鍾 )을 부장 으로, 이찬희( 李 贊 煕 )를 총어영 초관으로, 최상은( 崔 祥 殷 )을 오예포 첨사( 吾 乂 浦 僉 使 )로 삼았 다. 동지에 김우열( 金 佑 烈 )ㆍ김영수( 金 永 秀 )ㆍ이장복( 李 長 福 )ㆍ서유문( 徐 有 文 )ㆍ이수영( 李 守 永 )ㆍ오유진( 吳 有 鎭 )ㆍ이현국( 李 鉉 國 )ㆍ이석규( 李 錫 圭 )ㆍ강형근( 姜 亨 根 )ㆍ백희배( 白 羲 培 )ㆍ우 병규( 禹 秉 奎 )ㆍ박완룡( 朴 完 龍 )ㆍ김화식( 金 華 植 )ㆍ유영숙( 劉 永 淑 )ㆍ이정두( 李 貞 斗 )를 단부하 고, 첨지에 한영규( 韓 濚 圭 )ㆍ김봉희( 金 鳳 煕 )ㆍ민장호( 閔 章 鎬 )ㆍ박인화( 朴 寅 和 )ㆍ최형겸( 崔 亨 謙 )ㆍ정상우( 鄭 祥 瑀 )ㆍ정홍기( 鄭 洪 基 )ㆍ박수경( 朴 秀 敬 )ㆍ안창기( 安 昌 基 )ㆍ김상익( 金 商 翊 )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에 오창성( 吳 昌 成 )을 단부하고, 판관 가설에 김호성( 金 浩 性 )ㆍ안 일수( 安 馹 壽 )를 단부하였다. 내금위장에 남종희( 南 鍾 煕 )ㆍ이상곤( 李 相 坤 )ㆍ이병휘( 李 秉 輝 )를 단부하고,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 다. 선전관 가설에 이규집( 李 奎 集 )을 단부하고,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대호군에 조경호( 趙 慶 鎬 )ㆍ조병호( 趙 秉 鎬 ), 호군에 김병익( 金 炳 翊 )ㆍ조 영하( 趙 榮 夏 )ㆍ유치희( 兪 致 喜 )ㆍ심의홍( 沈 宜 弘 ), 부호군에 윤명섭( 尹 命 燮 )ㆍ김병수( 金 炳 秀 )ㆍ 윤상연( 尹 相 衍 )ㆍ이교영( 李 敎 榮 )ㆍ서의순( 徐 誼 淳 )ㆍ조문하( 趙 文 夏 )ㆍ오병문( 吳 炳 文 )ㆍ김원현 ( 金 元 鉉 )ㆍ조동협( 趙 東 協 ), 부사직에 안종면( 安 鍾 冕 )ㆍ조병집( 趙 秉 輯 )ㆍ조한국( 趙 漢 國 )ㆍ김사 철( 金 思 轍 )ㆍ신정균( 申 政 均 )ㆍ이조신( 李 肇 信 )ㆍ김석룡( 金 錫 龍 ), 부사과에 송세현( 宋 世 鉉 )ㆍ임 헌상( 林 軒 相 )ㆍ조병식( 趙 秉 植 )ㆍ윤호선( 尹 鎬 善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훈련원 첨정 가설 에 임동식( 林 東 植 )ㆍ서영구( 徐 榮 九 )ㆍ윤석훈( 尹 錫 勛 )ㆍ채규항( 蔡 奎 恒 )ㆍ이기상( 李 基 相 )ㆍ김진 호( 金 振 浩 )ㆍ조종성( 趙 鍾 成 )ㆍ신창희( 申 昌 煕 )ㆍ홍희( 洪 )ㆍ김유봉( 金 儒 鳳 )ㆍ박계동( 朴 啓 東 )ㆍ고 제현( 高 濟 賢 )ㆍ이석훈( 李 碩 薰 )을 단부하고, 판관 가설에 윤정림( 尹 定 林 )ㆍ성하영( 成 夏 永 )ㆍ이 민승( 李 敏 昇 )ㆍ조영호( 趙 泳 浩 )ㆍ황신호( 黃 信 浩 )ㆍ한장리( 韓 長 履 )ㆍ김영배( 金 濚 培 )ㆍ이호덕( 李 鎬 悳 )ㆍ이만용( 李 萬 用 )ㆍ안영원( 安 永 元 )ㆍ조희붕( 趙 羲 鵬 )ㆍ김용호( 金 龍 浩 )ㆍ유흥렬( 柳 興 烈 )ㆍ 유인혁( 劉 仁 赫 )을 단부하고, 주부 가설에 윤석규( 尹 錫 奎 )ㆍ이용진( 李 容 鎭 )을 단부하였다. 전 주 영장 신정균( 申 政 均 ), 순천 영장 윤명근( 尹 明 根 ), 황해 중군 조응현( 趙 應 顯 ), 경기 중군 이민복( 李 敏 復 ), 강원 중군 김재붕( 金 在 鵬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 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첨지 세 자리에 남종희( 南 鍾 煕 )ㆍ이상곤( 李 相 坤 )ㆍ이병휘( 李 秉 輝 ) 를 단부하였다. 가리포 첨사 신태홍( 申 泰 弘 )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첨정 가설에 한규복( 韓 奎 復 )ㆍ이풍호( 李 豐 鎬 )를 단부하고, 첨지 에 김경희( 金 景 煕 )ㆍ김재민( 金 在 敏 )ㆍ장준모( 張 準 模 )를 단부하고, 호군에 유승환( 兪 承 煥 )ㆍ이 휘철( 李 彙 徹 ), 부호군에 이근용( 李 根 )ㆍ김영돈( 金 永 敦 )을 단부하였다. 이시준( 李 時 俊 )을 훈련 원 주부로, 이승하( 李 昇 夏 )를 삼방 별장( 三 防 別 將 )으로, 유지혁( 劉 智 赫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으로, 이세하( 李 世 夏 )를 총어영 초관으로, 허주( 許 注 )를 부장으로, 김규찬( 金 奎 燦 )ㆍ홍문환 ( 洪 文 煥 )ㆍ여명기( 呂 明 基 )ㆍ박희양( 朴 煕 陽 )ㆍ주석남( 朱 錫 南 )ㆍ한기석( 韓 箕 錫 )을 수문장으로, 서상빈( 徐 相 斌 )을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으로, 구헌식( 具 憲 植 )을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오 근영( 吳 根 泳 )을 남도 참군( 南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화녕전 수문장( 華 寧 殿 守 門 將 )에 손제만( 孫 濟 萬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6년 2월 11일(정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영환( 閔 泳 煥 )은 나왔고, 참판 엄세영( 嚴 世 永 )은 병이고, 참의 조인승( 曺 寅

33 33 - 承 )은 병이고, 참지 서의순( 徐 誼 淳 )은 입직이고, 동부승지 장석유는 나왔다. 심상훈( 沈 相 薰 )ㆍ서병무( 徐 丙 懋 )를 동지로, 조희승( 趙 羲 升 )을 동지훈련원사로, 김현영( 金 顯 永 )을 첨지로, 안학선( 安 鶴 善 )을 선전관으로, 남석룡( 南 錫 龍 )을 겸사복장으로, 유지성( 柳 之 星 ) 을 우림위장으로, 이휴익( 李 休 翼 )ㆍ이석규( 李 錫 圭 )ㆍ성경환( 成 慶 煥 )을 오위장으로, 조병승( 趙 秉 升 )을 조사위장으로, 홍윤주( 洪 允 周 )를 충익위장으로, 이승렬( 李 升 烈 )을 전라 우수사로, 박 동진( 朴 東 鎭 )을 안흥 첨사( 安 興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에 민계식( 閔 繼 植 )을 단부하고, 가설 세 자리에 김광수( 金 光 壽 )ㆍ김상현( 金 商 顯 )ㆍ박보현( 朴 普 鉉 )을 단부하고, 첨지에 김양필( 金 良 弼 ) 을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 네 자리에 김병하( 金 炳 賀 )ㆍ김만손( 金 萬 孫 )ㆍ김종학( 金 鍾 鶴 )ㆍ위 성용( 魏 聖 鏞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김익용( 金 益 容 ), 호군에 김석근( 金 晳 根 )ㆍ장준모( 張 俊 模 )ㆍ오유선( 吳 有 善 )ㆍ박기원( 朴 基 元 ), 부호군에 이승우( 李 承 祐 )ㆍ홍범( 洪 範 )ㆍ황종순( 黃 鍾 純 ) ㆍ김병하( 金 炳 賀 )ㆍ고응하( 高 膺 河 ), 부사과에 이인주( 李 寅 柱 )ㆍ정재묵( 鄭 在 默 )ㆍ차석주( 車 錫 柱 )ㆍ백태현( 白 泰 鉉 ), 부사정에 송재헌( 宋 在 憲 ), 부사용에 원인규( 元 寅 圭 ), 이상을 모두 단부 하였다.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김성근( 金 聖 根 )과 정방 별장( 正 方 別 將 ) 최대완( 崔 大 完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내금위장에 유석형( 柳 錫 衡 )을 단부 하고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6년 4월 29일(갑진) / 장봉 별장 최대완의 어미의 나이가 75세이므로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최대완( 崔 大 完 )이 어미의 나이가 올해 75세인데 법으로 볼 때 멀리 떠나 부임할 수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변장으로서 어버이의 나 이가 75세 이상인 자는 그 직임을 체차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4월 29일(갑진)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영환( 閔 泳 煥 )은 나왔고, 참판 윤홍대( 尹 弘 大 )는 병이고, 참의 이헌경( 李 軒 卿 )은 입직이고, 참지 김대현( 金 大 鉉 )은 병이고, 우부승지 한기동은 나왔다. 민정식( 閔 正 植 )ㆍ이석응( 李 奭 應 )ㆍ정신채( 鄭 新 采 )를 동지로, 오유선( 吳 有 善 )ㆍ조희철( 趙 羲 轍 ) 을 동지훈련원사로, 이민승( 李 敏 承 )을 겸 훈련원도정으로, 홍재영( 洪 在 英 )ㆍ권종석( 權 鍾 奭 )ㆍ 김응모( 金 膺 模 )를 선전관으로, 이민정( 李 敏 鼎 )을 내금위장으로, 이후익( 李 厚 翼 )ㆍ홍정섭( 洪 貞 燮 )ㆍ유동근( 柳 東 根 )ㆍ민덕현( 閔 德 顯 )ㆍ김명제( 金 命 濟 )ㆍ김영규( 金 甯 圭 )ㆍ이충려( 李 忠 呂 )ㆍ홍 낙섭( 洪 洛 燮 )을 오위장으로, 이호석( 李 鎬 奭 )을 조사위장으로, 홍순원( 洪 淳 瑗 )ㆍ이유행( 李 儒 行 )을 충익위장으로, 서정두( 徐 廷 斗 )를 선전관으로, 이종석( 李 鍾 奭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신 재( 李 信 在 )를 주부로, 유기직( 柳 冀 稷 )ㆍ이범교( 李 範 敎 )ㆍ윤희보( 尹 羲 普 )ㆍ조종서( 趙 鍾 瑞 )ㆍ고 석진( 高 碩 鎭 )을 수문장으로, 이인직( 李 仁 稙 )을 전라 우수사로, 김영조( 金 永 祚 )를 서생 첨사

34 34 - ( 西 生 僉 使 )로, 박승복( 朴 承 復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채준풍( 蔡 俊 豐 )을 고돌산 별장( 古 突 山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이규택( 李 圭 宅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조경호( 趙 慶 鎬 ), 호군 에 이규선( 李 奎 璿 ), 부호군에 김병길( 金 炳 吉 )ㆍ정이섭( 丁 理 燮 )ㆍ민창호( 閔 敞 鎬 )ㆍ이민정( 李 敏 鼎 )ㆍ권일규( 權 一 圭 ), 부사직에 민철훈( 閔 哲 勳 ), 부사과에 조중구( 趙 重 九 )ㆍ정해원( 鄭 海 遠 ), 부사용에 윤계연( 尹 啓 淵 )ㆍ유원혁( 劉 源 赫 )ㆍ박종현( 朴 宗 現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 유시봉( 柳 時 鳳 )과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 김기용( 金 基 溶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오위장 가설에 신원정( 申 元 貞 ), 한인수( 韓 寅 壽 ), 이덕윤( 李 德 潤 ), 정재용( 鄭 在 鎔 ), 문재학( 文 在 學 ), 조삼묵( 曺 三 默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7년 10월 29일(을축) / 이정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정직( 李 正 稙 )을 충장위장으로, 이관현( 李 觀 鉉 )을 훈련원 판관으로, 장기창( 張 基 昌 )을 혜 산 첨사로, 신석기( 申 錫 基 )를 선적 첨사( 善 績 僉 使 )로, 최우린( 崔 禹 麟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 로, 장인환( 張 仁 煥 )을 지도 만호( 智 島 萬 戶 )로, 김한정( 金 漢 鼎 )을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로, 김덕관( 金 德 寬 )을 정방 별장( 正 方 別 將 )으로, 강영식( 姜 永 植 )을 원산 별장( 元 山 別 將 )으로, 박 기용( 朴 基 容 )을 광량 첨사( 廣 梁 僉 使 )로, 안정학( 安 正 學 )을 고풍산 첨사( 古 豐 山 僉 使 )로, 김영 송( 金 永 松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김필하( 金 必 河 )를 고성 첨사( 古 城 僉 使 )로, 천재성( 千 在 成 )을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로, 정중억( 鄭 重 億 )을 식송 만호( 植 松 萬 戶 )로, 김석주( 金 錫 柱 )를 서 생 첨사( 西 生 僉 使 )로, 이관수( 李 冠 洙 )를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김영준( 金 永 濬 )을 유원 첨사 ( 柔 遠 僉 使 )로, 배진석( 裵 鎭 錫 )을 이진 만호( 梨 津 萬 戶 )로, 김경언( 金 敬 彦 )을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이면규( 李 冕 珪 )를 선전관으로, 조희관( 趙 羲 觀 )ㆍ반응연( 潘 應 淵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 의섭( 李 宜 燮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조용원( 趙 龍 元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이종호( 李 鍾 浩 )를 선전관으로, 이계훈( 李 啓 薰 )ㆍ김규창( 金 奎 昌 )을 훈련원 첨정으로, 엄흥묵( 嚴 興 默 )을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로, 김중련( 金 仲 連 )을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임찬호( 任 璨 鎬 )를 훈련원 부정으로, 이장용( 李 章 鎔 )을 주부로, 홍재영( 洪 在 英 )을 주부로, 최명환( 崔 明 煥 )을 금 정 별장( 金 井 別 將 )으로, 박재인( 朴 在 仁 )을 가상량 만호( 加 尙 梁 萬 戶 )로, 정완( 鄭 浣 )ㆍ최완식( 崔 完 植 )ㆍ이항진( 李 恒 鎭 )을 오위장으로, 김완재( 金 完 在 )를 영등 만호로, 최우현( 崔 遇 鉉 )을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안윤원( 安 潤 元 )ㆍ박종진( 朴 宗 鎭 )을 오위장으로, 구경조( 具 敬 祖 )를 충장위 장으로, 이은구( 李 殷 求 )를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이성치( 李 聖 治 )를 아산포 만호( 牙 山 浦 萬 戶 )로, 김홍규( 金 弘 奎 )를 고풍산 첨사로, 김석윤( 金 錫 允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김응구( 金 應 九 )를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정석희( 鄭 錫 禧 )를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김치혁( 金 致 爀 )을 발포 만호( 鉢 浦 萬 戶 )로, 한기환( 韓 基 煥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이응주( 李 膺 柱 )를 장수 별 장( 長 壽 別 將 )으로, 차석환( 車 錫 桓 )을 임토 별장( 林 土 別 將 )으로, 유상학( 劉 相 鶴 )을 가산 별장 ( 架 山 別 將 )으로, 이재흠( 李 在 欽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윤경근( 尹 景 根 )을 선전관으로, 전태현( 全 台 鉉 )을 훈련원 첨정으로, 조중엽( 趙 重 燁 )을 우부솔로, 이정직( 李 鼎 稙 )을 좌시직으 로, 김복한( 金 福 漢 )을 우시직으로, 이상준( 李 象 駿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시영( 李 始 榮 )을 우 사어로, 이종호( 李 鍾 浩 )를 중추부 도사로, 우춘희( 禹 春 煕 )를 훈련원 판관으로, 최봉윤( 崔 鳳 允 )을 서수라 만호( 西 水 羅 萬 戶 )로, 홍우상( 洪 祐 相 )을 좌익찬으로, 이병무( 李 秉 武 )ㆍ조국원( 趙 國 元 )ㆍ박노원( 朴 魯 源 )을 훈련원 주부로, 박능세( 朴 菱 世 )를 수문장으로, 김성규( 金 成 圭 )를 우

35 35 - 위솔로, 임순학( 林 淳 學 )을 훈련원 주부로, 이광휘( 李 光 輝 )ㆍ윤기선( 尹 岐 善 )을 수문장으로, 강 준대( 姜 俊 大 )를 화수산 별장( 花 水 山 別 將 )으로, 강봉로( 姜 鳳 魯 )를 훈련원 판관으로, 손병호( 孫 秉 浩 )를 주부로, 홍종기( 洪 鍾 起 )를 부장으로, 이규대( 李 奎 大 )를 총어영 초관으로, 이정직( 李 鼎 稙 )을 좌부솔로, 양선겸( 梁 善 謙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민굉( 李 敏 宏 )을 주부로, 이세하( 李 世 夏 )ㆍ이재호( 李 載 鎬 )를 부장으로, 김귀수( 金 龜 洙 )를 좌시직으로, 박영진( 朴 英 鎭 )을 선전관 으로, 안정상( 安 定 相 )을 부장으로, 박희덕( 朴 煕 德 )을 우변포도종사관으로, 김규환( 金 奎 煥 )을 총어영 초관으로, 김영진( 金 永 晉 )을 좌세마로, 이주승( 李 周 承 )을 훈련원 첨정으로, 심의준( 沈 宜 峻 )을 총어영 파총으로, 전복규( 田 福 奎 )를 총어영 초관으로, 장응룡( 張 應 龍 )을 사도 첨사 ( 蛇 渡 僉 使 )로, 안동국( 安 東 國 )을 청성 첨사( 淸 城 僉 使 )로, 임순필( 林 淳 弼 )을 훈련원 첨정으로, 송헌면( 宋 憲 冕 )을 총어영 초관으로, 조영중( 趙 英 中 )을 수문장으로, 권낙종( 權 洛 鍾 )을 수문장 으로, 이태형( 李 泰 亨 )을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정중환( 鄭 重 煥 )ㆍ김재수( 金 在 守 )ㆍ이근 배( 李 根 培 )를 오위장으로, 원명의( 元 明 義 )를 수문장으로, 정유석( 鄭 由 錫 )을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임태두( 任 泰 斗 )를 황해도 수군우후로, 신광우( 申 光 祐 )를 마량 첨사( 馬 梁 僉 使 )로, 김석 종( 金 奭 鍾 )을 산산 첨사( 蒜 山 僉 使 )로, 조헌묵( 曺 憲 默 )을 마도 만호( 馬 島 萬 戶 )로, 명효진( 明 孝 鎭 )을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으로 삼았다. 초사로 임기가 만료된 이민회( 李 敏 會 ), 신겸 희( 申 謙 煕 ), 이준호( 李 浚 鎬 ), 유장희( 柳 章 煕 ), 심우택( 沈 宇 澤 )을 선전관으로 삼았다. 장상기 ( 張 相 岐 )ㆍ안동완( 安 東 玩 )ㆍ이상진( 李 相 鎭 )ㆍ임건호( 任 建 鎬 )ㆍ선원균( 宣 元 均 )ㆍ송순명( 宋 淳 明 ) ㆍ오태근( 吳 泰 根 )ㆍ이인성( 李 寅 聖 )을 부장으로, 윤도( 尹 鍍 )ㆍ유석한( 柳 錫 漢 )ㆍ김태형( 金 泰 亨 ) ㆍ최계열( 崔 啓 烈 )ㆍ조동수( 趙 東 洙 )ㆍ이승현( 李 升 鉉 )ㆍ송순규( 宋 淳 奎 )를 수문장으로, 김좌모 ( 金 佐 模 )ㆍ강문영( 姜 文 瑛 )ㆍ장주환( 張 周 煥 )ㆍ박정우( 朴 正 祐 )를 총어영 초관으로, 이익교( 李 翼 敎 )를 경기전 수문장( 慶 基 殿 守 門 將 )으로 삼았다. 화녕전 수문장( 華 寧 殿 守 門 將 )에 김학현( 金 鶴 鉉 )을 단부하였다. 안무 중군 민인호( 閔 麟 鎬 )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 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부호군에 이무로( 李 茂 魯 ), 부사과에 민봉선( 閔 鳳 善 )ㆍ조종설( 趙 鍾 卨 )ㆍ이정공( 李 貞 恭 )ㆍ김덕배( 金 悳 培 )ㆍ김재묵( 金 在 默 )ㆍ박준홍( 朴 峻 洪 ), 이상을 모두 단부하 였다. 홍주 영장 이종겸( 李 鍾 謙 ), 안동 영장 이풍호( 李 豐 鎬 ), 삼척 영장 구주현( 具 周 鉉 ), 경기 중군 장기렴( 張 基 濂 ), 강원 중군 양성환( 梁 性 煥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정윤조( 鄭 閏 祚 ), 최문백( 崔 文 白 ), 김문효( 金 文 孝 )를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두 자리에 이완하( 李 完 夏 ), 김규한( 金 奎 漢 )을 단부 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 열한 자리에 백남승( 白 南 昇 ), 이병호( 李 秉 鎬 ), 김진우( 金 鎭 宇 ), 김삼 현( 金 參 鉉 ), 이규섭( 李 奎 燮 ), 조두현( 趙 斗 顯 ), 이교상( 李 敎 庠 ), 김동진( 金 東 振 ), 박명화( 朴 明 和 ), 유석환( 柳 錫 煥 ), 백광혁( 白 光 爀 )을 단부하고, 훈련원 판관 가설 열여섯 자리에 원직( 元 稷 ), 강한준( 姜 漢 駿 ), 홍진길( 洪 眞 吉 ), 서인근( 徐 仁 根 ), 정응선( 鄭 應 㷽 ), 황수옥( 黃 水 玉 ), 박종 인( 朴 宗 仁 ), 고학석( 高 學 錫 ), 김한경( 金 漢 景 ), 이남규( 李 南 奎 ), 염도희( 廉 道 希 ), 곽임도( 郭 林 道 ), 전상우( 全 相 祐 ), 박영엽( 朴 永 燁 ), 김교성( 金 敎 成 ), 이유태( 李 裕 泰 )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주부 가설 다섯 자리에 최순성( 崔 順 成 ), 서학조( 徐 學 祚 ), 박상길( 朴 相 吉 ), 이만근( 李 萬 根 ), 전 덕유( 全 德 侑 )를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승서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8년 7월 29일(신묘) / 허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6 36 - 허철( 許 )을 훈련원 정으로, 유기완( 柳 冀 完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이교민( 李 敎 敏 )을 초도 첨사( 椒 島 僉 使 )로, 홍건주( 洪 湕 周 )를 고령 첨사( 高 嶺 僉 使 )로, 구연욱( 具 然 煜 )을 고산리 첨사( 高 山 里 僉 使 )로, 서정규( 徐 廷 圭 )ㆍ권응규( 權 膺 圭 )를 동지훈련원사로, 이경용( 李 景 鎔 )ㆍ김 두희( 金 斗 煕 )를 훈련원 첨정으로, 성지영( 成 志 永 )을 광주 중군( 廣 州 中 軍 )으로 삼았다. 안무영 중군 김낙형( 金 樂 瀅 )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김재풍( 金 在 豐 )을 훈련원 도정으로, 심상진( 沈 相 璡 )ㆍ민영기( 閔 泳 琦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윤 영은( 尹 永 殷 )을 선전관으로, 조종직( 趙 鍾 稷 )을 절영도 첨사( 絶 影 島 僉 使 )로, 조희림( 趙 羲 林 )ㆍ 심형택( 沈 馨 澤 )ㆍ구연승( 具 然 昇 )을 훈련원 부정으로, 정상우( 鄭 祥 瑀 )를 부산 첨사( 釜 山 僉 使 ) 로, 김노찬( 金 魯 瓚 )을 황해 중군으로, 서병훈( 徐 丙 勳 )을 겸 훈련원도정으로, 강일형( 姜 日 馨 ) 을 첨지중추부사로, 이석진( 李 錫 璡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학영( 李 鶴 永 )을 판관으로, 이순관 ( 李 順 寬 )을 가덕 첨사( 加 德 僉 使 )로, 강원선( 姜 元 善 )ㆍ심형택( 沈 馨 澤 )ㆍ구연승( 具 然 昇 )을 선전 관으로, 오영묵( 吳 永 默 )을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으로, 김병욱( 金 炳 郁 )을 안흥 첨사( 安 興 僉 使 ) 로, 이민성( 李 敏 星 )ㆍ오중선( 吳 仲 善 )을 선전관으로, 이충려( 李 忠 呂 )를 겸사복장으로, 유정( 劉 貞 )을 함경 중군으로, 이경신( 李 敬 信 )을 가덕 첨사로, 이희두( 李 煕 斗 )ㆍ이용하( 李 龍 夏 )ㆍ김경 휘( 金 景 輝 )ㆍ이동근( 李 涷 根 )ㆍ안영조( 安 永 祚 )를 오위장으로, 이찬희( 李 贊 煕 )ㆍ이면규( 李 冕 珪 ) 를 훈련원 부정으로, 정찬건( 鄭 燦 健 )을 전라 중군으로, 김찬수( 金 瓚 洙 )를 병마우후( 兵 馬 虞 候 ) 로, 박민엽( 朴 敏 燁 )을 경상우도 병마우후( 慶 尙 右 道 兵 馬 虞 候 )로, 이종근( 李 鍾 根 )을 충장위장으 로, 윤상진( 尹 相 晉 )을 충익위장으로, 김흥원( 金 興 元 )ㆍ최용운( 崔 龍 雲 )ㆍ강태( 姜 泰 )를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으로, 김현구( 金 顯 求 )를 첨지중추부사로, 최경후( 崔 景 厚 )ㆍ배필관( 裵 必 寬 )을 경희궁 위장( 慶 煕 宮 衛 將 )으로, 이규현( 李 奎 炫 )을 훈련원 첨정으로, 박용빈( 朴 容 斌 )을 우변포 도청 종사관으로, 박찬규( 朴 燦 奎 )ㆍ박풍식( 朴 豐 植 )을 오위장으로, 양도환( 梁 道 煥 )을 내승( 內 乘 )으로, 윤하병( 尹 夏 炳 )을 중추부 도사로, 장진우( 蔣 鎭 宇 )를 훈련원 주부로, 서흥순( 徐 興 淳 ) 을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손해창( 孫 海 滄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현봉엽( 玄 奉 燁 )을 흑산도 별장( 黑 山 島 別 將 )으로, 김재선( 金 在 璇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박만조( 朴 萬 祚 )를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김의현( 金 義 鉉 )을 마량 첨사( 馬 梁 僉 使 )로, 김영철( 金 永 喆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이국현( 李 國 鉉 )을 입암 별장( 笠 巖 別 將 )으로, 한택규( 韓 宅 奎 )를 수양 별장 ( 首 陽 別 將 )으로, 이희봉( 李 羲 鳳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김시정( 金 時 貞 )을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성현기( 成 鉉 基 )를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김광인( 金 光 仁 )을 당포 만호( 唐 浦 萬 戶 ) 로, 유종근( 柳 鍾 根 )을 임토 별장( 林 土 別 將 )으로, 박지영( 朴 之 榮 )을 화수산 별장( 花 水 山 別 將 ) 으로, 김진형( 金 鎭 瑩 )을 경상좌도 수군우후( 慶 尙 左 道 水 軍 虞 候 )로, 홍재덕( 洪 在 悳 )을 황척파 만호( 黃 坧 坡 萬 戶 )로, 김성두( 金 星 斗 )를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문봉채( 文 鳳 采 )를 목포 만호( 木 浦 萬 戶 )로, 김달관( 金 達 寬 )을 천성 만호( 天 城 萬 戶 )로, 이인상( 李 寅 相 )을 마량 첨사( 馬 梁 僉 使 )로, 이응주( 李 膺 柱 )를 산산 첨사( 蒜 山 僉 使 )로, 강창준( 康 昌 俊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 로, 이영조( 李 永 祚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김진근( 金 振 根 )을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으로, 김 수택( 金 秀 澤 )을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황청일( 黃 淸 一 )을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로, 고상호( 高 相 昊 )를 벌등 첨사( 伐 登 僉 使 )로, 이보우( 李 輔 佑 )를 동관 첨사로, 이봉석( 李 鳳 錫 )을 발포 만호 ( 鉢 浦 萬 戶 )로, 구연승( 具 然 昇 )ㆍ이경호( 李 景 鎬 )를 훈련원 첨정으로, 최기봉( 崔 基 鳳 )을 독구미 첨사( 獨 仇 味 僉 使 )로, 이병우( 李 炳 祐 )를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길삼주( 吉 森 柱 )를 안성 첨사 ( 安 城 僉 使 )로, 정성길( 鄭 成 吉 )을 청성 첨사( 淸 城 僉 使 )로, 주방일( 周 邦 一 )을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임치문( 林 致 文 )을 평산 만호( 平 山 萬 戶 )로, 박세문( 朴 世 汶 )을 지세포 만호( 智 世 浦 萬 戶 ) 로, 최병윤( 崔 炳 允 )을 막령 만호( 幕 嶺 萬 戶 )로, 남정삼( 南 政 參 )을 지도 만호( 智 島 萬 戶 )로, 이봉

37 37 - 규( 李 鳳 奎 )를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김기현( 金 琦 鉉 )을 금갑도 만호( 金 甲 島 萬 戶 )로, 정두극 ( 鄭 斗 極 )을 식송 만호( 植 松 萬 戶 )로, 신준모( 申 準 謨 )를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으로, 조국원( 趙 國 元 )을 선전관으로, 김성원( 金 性 源 )을 오위장으로, 윤영은( 尹 永 殷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석규 ( 李 錫 珪 )를 우익찬으로, 이용욱( 李 容 郁 )을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로, 차기홍( 車 箕 洪 )을 오위장 으로, 이해경( 李 海 慶 )을 훈련원 첨정으로, 박종래( 朴 鍾 來 )를 전라우도 수군우후( 全 羅 右 道 水 軍 虞 候 )로, 윤봉대( 尹 鳳 大 )를 훈련원 판관으로, 김성두( 金 成 斗 )를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이원 식( 李 源 植 )을 중추부 경력으로, 고용현( 高 龍 鉉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찬희( 李 贊 煕 )를 선전관 으로, 강문영( 姜 文 瑛 )ㆍ안동면( 安 東 冕 )을 훈련원 주부로, 송찬회( 宋 贊 會 )를 훈련원 첨정으로, 송순명( 宋 淳 明 )을 부장( 部 將 )으로, 정행렬( 鄭 行 烈 )을 중추부 도사로, 유영길( 劉 永 吉 )ㆍ정준기 ( 鄭 準 基 )를 수문장으로, 우춘희( 禹 春 煕 )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학제( 金 翯 濟 )ㆍ이동렬( 李 東 烈 ) 을 판관으로, 김상진( 金 祥 鎭 )ㆍ김재찬( 金 載 燦 )을 수문장으로, 추희진( 秋 僖 縉 )을 훈련원 판관 으로, 임순국( 林 淳 國 )ㆍ이인기( 李 寅 基 )를 주부로, 최형석( 崔 瀅 錫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이세하( 李 世 夏 )를 훈련원 주부로, 손남구( 孫 南 九 )ㆍ주완조( 朱 完 祚 )를 오위장으로, 장지태( 張 祉 泰 )를 창덕궁 위장으로, 한승원( 韓 昇 源 )을 훈련원 주부로, 이준호( 李 駿 鎬 )를 총어영 초관으 로, 박경검( 朴 儆 儉 )ㆍ박승준( 朴 承 準 )을 경희궁 위장으로, 유기남( 柳 冀 南 )을 훈련원 판관으로, 임건호( 任 建 鎬 )를 부장으로, 김홍조( 金 弘 祚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 慶 尙 左 道 兵 馬 虞 候 )로, 안윤 규( 安 允 奎 )를 오위장으로, 이희길( 李 喜 吉 )ㆍ오유선( 吳 有 善 )을 창덕궁 위장으로, 변표원( 邊 杓 元 )을 오위장으로, 이경호( 李 京 鎬 )를 부장으로 삼았다 / 고종 29년 6월 1일(정해) /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정문석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정문석( 鄭 文 錫 ), 선전관( 宣 傳 官 ) 이용관( 李 容 觀 )ㆍ정철영( 鄭 鐵 永 )ㆍ이청렬( 李 淸 烈 )ㆍ윤석정( 尹 錫 禎 ), 내금위장( 內 禁 衛 將 ) 송계헌( 宋 啓 憲 ), 오위장( 五 衛 將 ) 조성호( 趙 聖 鎬 ) ㆍ김한석( 金 漢 錫 ), 충익위장( 忠 翊 衛 將 ) 홍우석( 洪 祐 碩 )ㆍ김계연( 金 啓 淵 ), 충장위장( 忠 壯 衛 將 ) 오원묵( 吳 元 默 ), 경희궁 위장( 慶 煕 宮 衛 將 ) 주흥렬( 朱 興 烈 ),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 임기수 ( 林 基 洙 )ㆍ박내규( 朴 來 奎 )ㆍ박태준( 朴 泰 準 ), 문신겸선전관 이원긍( 李 源 兢 )ㆍ심후택( 沈 厚 澤 )이 모두 병으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수문장( 守 門 將 ) 김 태정( 金 泰 貞 )ㆍ김동석( 金 東 奭 )ㆍ김윤식( 金 允 植 )ㆍ김형섭( 金 亨 涉 )은 제수되었는데 지방에 있으 면서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입사( 入 仕 )하지 않고 있으니 모두 개차하고,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김재선( 金 在 璇 )은 제수된 지 12개월이 되었는데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 우 놀랍습니다. 우선 파출( 罷 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9년 6월 1일(정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민영소( 閔 泳 韶 )는 나왔고, 참판 이용화( 李 容 和 )는 병이고, 참의 서상기

38 38 - ( 徐 相 耆 )는 병이고, 참지 이최영( 李 㝡 榮 )은 입직이고, 동부승지 이건창( 李 建 昌 )은 나왔다. 김상규( 金 商 圭 )ㆍ이완용( 李 完 用 )ㆍ김철희( 金 喆 煕 )ㆍ민치검( 閔 致 儉 )ㆍ변석연( 卞 錫 淵 )을 동지중 추부사로, 오정선( 吳 正 善 )ㆍ오순영( 吳 順 泳 )ㆍ심의호( 沈 宜 浩 )ㆍ송순억( 宋 淳 億 )을 동지훈련원사 로, 한인호( 韓 麟 鎬 )ㆍ송종억( 宋 鍾 億 )ㆍ이남규( 李 南 珪 )를 첨지중추부사로, 권창섭( 權 昌 燮 )을 훈련원 도정으로, 백남석( 白 南 奭 )ㆍ이교성( 李 敎 性 )ㆍ정환교( 鄭 煥 敎 )ㆍ한택리( 韓 澤 履 )를 선전 관으로, 장용진( 張 容 鎭 )ㆍ구연식( 具 然 軾 )을 내금위장으로, 이태한( 李 泰 漢 )ㆍ신세균( 申 世 均 )ㆍ 하준문( 河 俊 文 )ㆍ김진연( 金 鎭 淵 )ㆍ오현규( 吳 賢 奎 )를 오위장으로, 이인위( 李 寅 瑋 )ㆍ유봉로( 柳 鳳 魯 )를 충익위장으로, 최호영( 崔 浩 英 )을 충장위장으로, 조병규( 趙 炳 奎 )를 경희궁 위장( 慶 煕 宮 衛 將 )으로, 김완석( 金 完 錫 )ㆍ신연구( 申 演 求 )ㆍ김세혁( 金 世 爀 )을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으 로, 민형식( 閔 衡 植 )ㆍ윤두병( 尹 斗 炳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안인순( 安 仁 淳 )ㆍ최태신( 崔 泰 信 )ㆍ 우태현( 禹 泰 鉉 )ㆍ손석태( 孫 錫 泰 )를 수문장으로, 김영학( 金 永 鶴 )을 부장( 部 將 )으로, 김석준( 金 錫 俊 )을 강원 중군( 江 原 中 軍 )으로, 김재묵( 金 在 默 )을 경상좌도 병마우후( 慶 尙 左 道 兵 馬 虞 候 ) 로, 유승동( 柳 昇 東 )을 성진 첨사( 城 津 僉 使 )로, 강용건( 康 龍 健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한건 호( 韓 建 鎬 )를 황해도 수군우후( 黃 海 道 水 軍 虞 候 )로, 정민우( 鄭 民 佑 )를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김태희( 金 台 禧 )를 삼도 첨사( 三 島 僉 使 )로, 조철민( 趙 喆 民 )을 고금도 첨사( 古 今 島 僉 使 )로, 조 종식( 趙 鍾 植 )을 선사포 첨사( 宣 沙 浦 僉 使 )로, 이규삼( 李 圭 三 )을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로, 문시 양( 文 時 陽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이영환( 李 永 煥 )을 평산포 만호( 平 山 浦 萬 戶 )로, 이동식 ( 李 東 植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김호규( 金 浩 奎 )를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삼았다. 임 해 별장( 壬 海 別 將 )에 김창호( 金 昌 浩 )를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 가설에 이중휘( 李 重 輝 )를 단 부하였다. 대호군에 장석룡( 張 錫 龍 ), 호군에 정인학( 鄭 寅 學 )ㆍ이재경( 李 在 敬 )ㆍ이용직( 李 容 稙 )ㆍ정문석( 鄭 文 錫 )ㆍ이용관( 李 容 觀 )ㆍ김동운( 金 東 韻 ), 부호군에 이범창( 李 範 昌 )ㆍ노영경( 盧 泳 敬 )ㆍ이승우( 李 勝 宇 )ㆍ정원하( 鄭 元 夏 )ㆍ심기택( 沈 琦 澤 )ㆍ이면상( 李 冕 相 )ㆍ박해우( 朴 海 禹 )ㆍ 엄석관( 嚴 錫 瓘 )ㆍ정철영( 鄭 鐵 永 )ㆍ이청렬( 李 淸 烈 )ㆍ윤석정( 尹 錫 禎 )ㆍ조길하( 趙 吉 夏 )ㆍ정면석 ( 鄭 冕 錫 )ㆍ윤승필( 尹 承 弼 )ㆍ홍종영( 洪 鍾 榮 ), 부사직에 이원긍( 李 源 兢 )ㆍ홍종헌( 洪 鍾 憲 )ㆍ심상 준( 沈 相 駿 )ㆍ정만조( 鄭 萬 朝 )ㆍ김복한( 金 福 漢 )ㆍ남광희( 南 光 煕 ), 부사과에 신양균( 申 養 均 )ㆍ김 응권( 金 應 權 )ㆍ이규흠( 李 奎 欽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29년 7월 30일(을묘) / 정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정진영( 鄭 鎭 永 )을 내금위장으로, 권재원( 權 在 元 )을 훈련원 정으로, 심형택( 沈 馨 澤 )을 선전 관으로, 이민하( 李 民 夏 )ㆍ이시영( 李 始 榮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정준택( 鄭 俊 澤 )ㆍ강유문( 康 愈 文 )을 오위장으로, 구연승( 具 然 昇 )ㆍ이현희( 李 賢 煕 )를 훈련원 부정으로, 안국량( 安 國 良 )을 나 주 영장으로, 박준모( 朴 俊 模 )ㆍ김병수( 金 秉 洙 )를 오위장으로, 임순학( 林 淳 學 )ㆍ이좌한( 李 左 漢 )을 훈련원 첨정으로, 문홍벽( 文 弘 璧 )을 수문장으로, 이익준( 李 益 俊 )ㆍ최태인( 崔 台 寅 )ㆍ이 창식( 李 昌 植 )을 창덕궁 위장으로, 김창렬( 金 昌 烈 )을 적량 첨사( 赤 梁 僉 使 )로, 이제식( 李 濟 植 ) 을 벌등 첨사( 伐 登 僉 使 )로, 김두상( 金 斗 祥 )ㆍ천은석( 千 殷 石 )을 경희궁 위장으로, 송창로( 宋 昌 老 )를 우위솔로, 조동수( 趙 東 洙 )ㆍ박희양( 朴 煕 陽 )을 - 원문 빠짐 -, 김종흡( 金 鍾 洽 )ㆍ권시영 ( 權 時 永 )을 오위장으로, 양성록( 梁 成 祿 )을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남규원( 南 奎 原 )을 볼 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맹길순( 孟 吉 淳 )을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으로, 박창수( 朴 昌 秀 )를

39 39 -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노명권( 盧 明 權 )을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로, 김익조( 金 翊 祖 )를 옥포 만 호( 玉 浦 萬 戶 )로, 김성근( 金 聲 根 )을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로, 김기일( 金 基 逸 )을 천성 만호( 天 城 萬 戶 )로, 박인권( 朴 寅 權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이봉집( 李 鳳 集 )을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김봉문( 金 鳳 文 )을 목포 만호( 木 浦 萬 戶 )로, 최도희( 崔 道 煕 )를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장지황 ( 張 志 璜 )을 막령 만호( 幕 嶺 萬 戶 )로, 김현국( 金 賢 國 )을 연포 만호( 鍊 浦 萬 戶 )로, 강선( 姜 善 )을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최재헌( 崔 在 獻 )을 가배량 만호( 加 背 梁 萬 戶 )로, 김상기( 金 相 基 )를 분산 별장( 盆 山 別 將 )으로, 문세황( 文 世 璜 )을 산 별장( 山 別 將 )으로, 김용호( 金 容 濠 )를 오위 장으로, 유봉근( 柳 鳳 根 )을 훈련원 첨정으로, 구봉서( 具 鳳 書 )를 판관으로, 원명의( 元 明 義 )를 인차외 만호( 仁 遮 外 萬 戶 )로, 백윤기( 白 胤 基 )를 동인 만호( 同 仁 萬 戶 )로, 이태갑( 李 泰 甲 )을 동 지중추부사로, 김유성( 金 裕 成 )을 첨지중추부사로, 이청래( 李 靑 來 )를 충익위장으로, 신국균( 申 國 均 )ㆍ이홍근( 李 弘 根 )을 창덕궁 위장으로, 김홍규( 金 弘 圭 )를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한문교 ( 韓 文 敎 )를 소기 만호( 所 己 萬 戶 )로, 김봉수( 金 鳳 洙 )를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김학기( 金 學 )를 지세포 만호( 知 世 浦 萬 戶 )로, 이창백( 李 暢 白 )을 조라 만호( 助 羅 萬 戶 )로, 김만식( 金 萬 植 )을 어 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유국주( 兪 國 柱 )를 조산 만호( 造 山 萬 戶 )로, 김지풍( 金 之 豐 )을 오로량 만 호( 吾 老 梁 萬 戶 )로, 이동식( 李 東 植 )을 구월산성 별장( 九 月 山 城 別 將 )으로, 김여수( 金 汝 秀 )를 장 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김석규( 金 錫 圭 )를 첨지중추부사로, 변계준( 邊 啓 俊 )ㆍ강재택( 姜 在 澤 ) 을 경희궁 위장으로, 차갑신( 車 甲 信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용석( 李 容 錫 )을 서북 첨사로, 이 찬희( 李 贊 煕 )ㆍ이근홍( 李 根 泓 )을 선전관으로, 김규환( 金 奎 煥 )을 훈련원 주부로, 홍일섭( 洪 馹 燮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건수( 李 建 壽 )를 수문장으로, 심형택( 沈 馨 澤 )을 훈련원 부정 으로, 민찬호( 閔 贊 鎬 )ㆍ윤진승( 尹 鎭 升 )을 첨정으로, 한긍리( 韓 兢 履 )를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이순영( 李 淳 永 )을 총어영 초관으로, 윤영( 尹 泳 )을 오위장으로, 안종학( 安 鍾 學 )을 충장위 장으로, 최병훈( 崔 丙 勳 )을 훈련원 첨정으로, 최정택( 崔 定 澤 )을 주부로, 황정현( 黃 鼎 顯 )을 수 문장으로, 이강필( 李 康 弼 )을 선전관으로, 김사묵( 金 思 默 )을 훈련원 첨정으로, 유지연( 柳 志 淵 ) ㆍ윤석진( 尹 錫 晉 )을 판관으로, 한긍리( 韓 兢 履 )를 수문장으로, 홍종기( 洪 鍾 起 )를 훈련원 첨정 으로, 최정택( 崔 定 澤 )을 중추부 도사로, 심의경( 沈 宜 景 )ㆍ김상진( 金 祥 鎭 )을 훈련원 주부로, 이규현( 李 奎 炫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경의하( 慶 義 河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한봉( 李 漢 鳳 )을 판관으로, 전학룡( 全 學 龍 )을 주부로, 오인근( 吳 仁 根 )ㆍ윤영숙( 尹 泳 淑 )을 중추부 도사로, 이민정( 李 敏 鼎 )을 동지중추부사로, 신석렴( 申 錫 濂 )ㆍ전계환( 田 啓 煥 )을 오위장으로, 유제관( 柳 齊 寬 )ㆍ심의택( 沈 義 澤 )을 훈련원 주부로, 여양섭( 呂 養 燮 )을 부장으로, 강필로( 姜 弼 魯 )를 우변 포도청 종사관으로, 남정식( 南 廷 植 )을 혜산 첨사( 惠 山 僉 使 )로, 윤동일( 尹 東 一 )을 장수산 별장 ( 長 水 山 別 將 )으로, 신원정( 申 元 貞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으로 삼았다. 전주 영장 이한응( 李 漢 膺 ), 공주 영장 이승원( 李 承 遠 ), 홍주 영장 서상빈( 徐 相 斌 ), 삼척 영장 김범구( 金 範 九 ), 이 상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김춘모( 金 春 模 )ㆍ박정구( 朴 鼎 九 )ㆍ박대수( 朴 大 壽 )ㆍ권홍식( 權 弘 植 )ㆍ이종식( 李 鍾 植 )ㆍ정필영 ( 鄭 弼 榮 )을 오위장으로, 정태석( 鄭 泰 奭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강필( 李 康 弼 )을 총어영 초관으 로, 오경조( 吳 景 祚 )를 강원 중군으로, 김석준( 金 錫 俊 )을 황해 중군으로, 김규삼( 金 奎 三 )을 충 익위장으로, 양세완( 梁 世 完 )을 창덕궁 위장으로, 김인석( 金 仁 錫 )을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신태준( 申 泰 俊 )을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로, 김중현( 金 仲 鉉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이규형( 李 奎 衡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원식( 李 源 植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홍일섭( 洪 馹 燮 )ㆍ이해경( 李 海 慶 )ㆍ염학순( 廉 學 淳 )을 수문장으로, 서후상( 徐 厚 相 )을 오위장으로, 변태현 ( 卞 泰 鉉 )을 경희궁 위장으로, 김두희( 金 斗 煕 )를 중추부 경력( 中 樞 府 經 歷 )으로, 이창렬( 李 彰

40 40 - 烈 )을 훈련원 주부로, 이병우( 李 秉 愚 )를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삼았다 / 고종 30년 2월 7일(경신) / 통진의 둔전답 등을 해연총제영에 이속시켜 군수에 쓰도록 할 것을 청하는 내무부의 계 또 내무부의 말로 아뢰기를, 해연총제영을 지금 신설하였으니, 전에 해방영( 海 防 營 )이 관할하던 통진( 通 津 ), 풍덕( 豐 德 ), 영종( 永 宗 ), 장봉( 長 峰 ) 소재의 둔전답( 屯 田 畓 )을 모두 해영( 該 營 )에 이속시켜 군수( 軍 需 )에 보충하여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0년 3월 13일(을미) /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이동섭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이종칠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이동섭( 李 東 燮 ), 오위장 이운붕( 李 運 鵬 )ㆍ최성신( 崔 性 信 )ㆍ김용집( 金 溶 集 )ㆍ윤 지병( 尹 智 炳 ), 충장위장( 忠 壯 衛 將 ) 조숙희( 趙 琡 熙 ),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 김회민( 金 會 玟 ) ㆍ김학령( 金 鶴 齡 )ㆍ김규영( 金 奎 永 ), 경희궁 위장( 慶 熙 宮 衛 將 ) 최동선( 崔 東 善 )ㆍ형순원( 邢 順 元 )ㆍ박승준( 朴 承 準 ), 문신겸선전관 서병선( 徐 丙 宣 )ㆍ김근연( 金 近 淵 )이 모두 병으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고, 수문장 한의교( 韓 義 敎 )는 제수되었는데 지방 에 있으면서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입사( 入 仕 )하지 않고 있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그리고 새로 제수된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 김기홍( 金 基 弘 ), 지도 만호( 智 島 萬 戶 ) 남정은( 南 廷 殷 ),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 이규하( 李 圭 夏 ),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 김윤계( 金 允 季 ),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 김여수( 金 汝 秀 )가 모두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 니다. 변장( 邊 將 )의 직임은 일반적인 규례에 따라 개차해서는 안 되니, 모두 파출( 罷 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0년 3월 13일(을미) / 윤용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윤용구( 尹 用 求 )를 지중추부사로, 홍승목( 洪 承 穆 )ㆍ윤창섭( 尹 昌 燮 )ㆍ조인승( 曺 寅 承 )을 동지 중추부사로, 김중식( 金 中 植 )ㆍ박시순( 朴 始 淳 )을 첨지중추부사로, 윤영한( 尹 泳 翰 )을 훈련원 도 정으로, 민치기( 閔 致 驥 )를 겸 훈련원도정으로, 유인형( 柳 寅 衡 )을 내금위장으로, 유재현( 柳 在 賢 )ㆍ최선재( 崔 璇 在 )ㆍ홍종호( 洪 宗 鎬 )ㆍ장희복( 張 熙 復 )을 오위장으로, 박인모( 朴 麟 謨 )를 충익 위장( 忠 翊 衛 將 )으로, 한영준( 韓 永 駿 )ㆍ박민식( 朴 敏 植 )을 충장위장( 忠 壯 衛 將 )으로, 박장룡( 朴 長 龍 )ㆍ배한길( 裵 漢 吉 )ㆍ박석봉( 朴 錫 鳳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기만( 李 基 萬 )ㆍ김만록( 金 萬 祿 )ㆍ 최인길( 崔 仁 吉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상준( 李 象 駿 )을 수문장으로, 이민하( 李 民 夏 )ㆍ조영구

41 41 - ( 趙 寧 九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하윤홍( 河 胤 弘 )ㆍ차석규( 車 錫 圭 )를 수문장으로, 이문영( 李 文 永 )을 전라 병사로, 박희방( 朴 熙 房 )을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으로, 안영수( 安 寧 壽 )를 춘천 중군 ( 春 川 中 軍 )으로, 한국동( 韓 國 東 )을 경상 중군( 慶 尙 中 軍 )으로, 고청룡( 高 靑 龍 )을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로, 백남윤( 白 南 允 )을 지도 첨사( 智 島 僉 使 )로, 김정표( 金 貞 彪 )를 회령포 첨사( 會 寧 浦 僉 使 )로, 정석희( 鄭 錫 禧 )를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로, 이창의( 李 昌 儀 )를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 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김만흥( 金 萬 興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김성규( 金 成 圭 ), 신택희( 申 宅 熙 ), 송순욱( 宋 淳 郁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윤영규( 尹 泳 奎 )ㆍ이동섭( 李 東 燮 )ㆍ이정규( 李 廷 珪 ), 부호군에 민치설( 閔 致 卨 ), 부사정에 윤덕영( 尹 悳 榮 ), 이상을 단부하였 다. 대흥 첨사( 大 興 僉 使 )에 백남형( 白 南 炯 )을 단부하였는데, 특별히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 든 것이다. 겸 태안진병마첨절제사 호서수군방어사( 兼 泰 安 鎭 兵 馬 僉 節 制 使 湖 西 水 軍 防 禦 使 )에 이병승( 李 秉 承 )을 단부하였다 / 고종 31년 9월 17일(경인) / 신병이 있는 문성 첨사 이학산 등을 개차하고 후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또 군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 이학산( 李 鶴 山 ),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 강흥준( 姜 興 俊 ), 백치 첨사 ( 白 峙 僉 使 ) 곽성룡( 郭 成 龍 ), 아산 만호( 阿 山 萬 戶 ) 김동순( 金 東 淳 ), 장봉도 별장( 長 峯 島 別 將 ) 이창의( 李 昌 儀 )가 모두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고, 그 대임 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삼가 어람하시도록 올립니다. 하니, 황주진관 문성 병마동첨절제사( 黃 州 鎭 管 文 城 兵 馬 同 僉 節 制 使 )의 망에 대해 이학산 대 신 정헌대부( 正 憲 大 夫 ) 유인주( 劉 寅 柱 )를, 장연진관 오차포 수군동첨절제사( 長 淵 鎭 管 吾 叉 浦 水 軍 同 僉 節 制 使 )의 망에 대해 강흥준 대신 정헌대부 이원재( 李 元 載 )를, 백치진 병마첨절제사 ( 白 峙 鎭 兵 馬 僉 節 制 使 )의 망에 대해 곽성룡 대신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 이경학( 李 敬 學 )을, 경원 진관 아산병마만호 겸 합수장( 慶 源 鎭 管 阿 山 兵 馬 萬 戶 兼 合 守 將 )의 망에 대해 김동순 대신 선 략장군( 宣 略 將 軍 ) 박영주( 朴 榮 周 )를, 장봉도 별장의 망에 대해 이창의 대신 절충장군 김홍석 ( 金 洪 奭 )을 단부하고 계자인을 찍었다 / 고종 33년 12월 11일(신미, 양력 1월 13일) / 대부도와 영종도를 합하여 대부군으로 만들 것 등을 청하는 전 현감 이응선의 상소 전 현감 이응선( 李 膺 善 )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가문이 한미한 데다 재주 또한 용렬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참으 로 나라에 이로움을 주고 백성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일이 있기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 히 이렇게 우러러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신이 삼가 지방의 제도를 보건대, 돌산도( 突 山 島 ), 지도( 智 島 ), 완도( 莞 島 )에 새로 군읍( 郡 邑 ) 을 설치한 것은 실로 조정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큰 사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경성 과 가까운 섬으로 따지자면, 대부도( 大 阜 島 ), 영종도( 永 宗 島 ), 덕적도( 德 積 島 ), 주문도( 注 文

42 42 - 島 ), 장봉도( 長 峯 島 )를 거론할 수 있는데, 이곳은 모두 도성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섬으로 서 사해( 四 海 )의 선박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이런 까닭에 열성조( 列 聖 朝 )에서부터 수장( 戍 將 )을 두어 도성을 호위하도록 하였는데, 작년에 갑자기 진장( 鎭 將 )을 두는 제도를 혁파하고 이웃 읍에 부속시켰으니, 이는 이른바 담장을 없애어 도둑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 다. 근래 이 섬에서는 수장이 폐지된 뒤 수많은 수군( 水 軍 )이 해체되어 일이 없어지자 곳곳 의 수적( 水 賊 )들이 민가를 휩쓸고 다니며, 또 잡기에 능한 호객( 豪 客 )들이 마을 곳곳에서 싸 움을 일삼으며 재물을 약탈하니, 이대로 몇 년을 지낸다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필시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그 화가 점차 도성으로 뻗친다면 이는 실로 세 방면에서 도성을 지키려 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어찌 시급한 대부도 등 다섯 섬보다 급하지 않은 돌 산도 등 세 섬을 우선시한단 말입니까. 이 섬들이 지니는 중요성과 도성과의 거리를 두고 따져 보겠습니다. 대부도는 남양해( 南 陽 海 )에 위치한 섬으로서 앞을 향해 넓게 펼쳐진 지형에는 산석( 山 石 )이 구불구불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옛날 병자호란 때에는 오랑캐의 군대가 침몰되었던 곳입니 다. 또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영종도와 함께 호응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룬 까닭에 두 섬에다 진영을 설치하여 방어하였던 곳입니다. 덕적도는 경기와 호서( 湖 西 ) 사이 에 있는 섬으로서 옛날 당( 唐 ) 나라의 소정방( 蘇 定 方 )이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주둔시켰 던 곳입니다. 이 섬은 하늘을 찌를 듯한 세 개의 돌 봉우리가 주위를 빙 둘러 에워싸고 있 고, 섬 안은 물길이 갈라지는 항구를 이루고 있어 많은 선박들이 이곳으로 모이니, 실로 근 해( 近 海 )의 요충지라 하겠습니다. 주문도와 장봉도는 오래 전에 목장( 牧 場 )을 없앤 데다 이 번에 수장마저 혁파하였으니, 중요하기 그지없는 국토를 누가 차지하게 될지 알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섬의 좌우로 빽빽이 들어선 작은 섬들은 잠상( 潛 商 )과 유적( 流 賊 )이 출 몰하는 소굴이니, 이 섬들을 지킬 관리를 두지 않는다면 원주( 原 州 )의 양길( 梁 吉 )이나 울도 ( 鬱 島 )의 김호( 金 護 ) 같은 무리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저 돌산도 등 세 섬과 이 섬들을 비교하자면 저곳은 먼 지방에 있는 대수롭지 않은 섬이고, 이곳은 가까 운 지방에 있는 중요한 섬이거늘 어찌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한단 말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 보건대, 대부도와 영종도 두 섬을 합하여 대부군( 大 阜 郡 )으로 만 들고, 덕적도, 주문도, 장봉도 세 섬을 합하여 덕적군( 德 積 郡 )으로 만든다면 강화( 江 華 ), 교 동( 喬 桐 )과 함께 도성의 울타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백성을 모아 고을을 이루고 고 을을 모아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노련한 사람을 선발하 여 이곳을 지키게 하여 먼저 백성들을 구제하시고, 그 다음에는 수병( 守 兵 )을 주둔시켜 백 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키심으로써 군읍( 郡 邑 )을 안정시킬 방책을 세우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뜻을 모르는 가. 하였다 / 고종 36년 12월 21일(갑오, 양력 1월 21일) / 영종도 사람들이 상언한 군을 설치하고자 한 안건은 시행할 수 없다는 의정부 참정 김성근의 계

43 43 - 의정부 참정 김성근( 金 聲 根 )이 삼가 아뢰기를, 영종도( 永 宗 島 )의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 이병규( 李 柄 奎 ) 등이 영종도에 진( 鎭 )이 폐지된 후로 는 이 섬의 인민( 人 民 )들이 의지하고 살 데가 없어졌습니다. 여수( 麗 水 ) 돌산도( 突 山 島 )의 예에 의거하여 덕적도( 德 積 島 ), 주문진( 注 文 津 ), 장봉도( 長 峯 島 ) 여러 진의 방영( 防 營 )의 옛 터에 모두 군( 郡 )을 설치하소서. 라는 내용으로 행행( 行 幸 )하시는 길에서 상언( 上 言 )하니, 본 부( 本 府 )에 그렇게 하라고 주하하셨습니다. 삼가 지방의 연혁( 沿 革 )에 대한 일은 신중히 살 펴야 하므로 해당 지방 사람들이 청한 바를 그대로 허락할 수는 없으니, 군을 설치하자고 한 안건에 대해서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44 44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선재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4년 9월 18일(무진) 대동미를 바다에 전복시킨 예산 현감 김병헌을 함사추고할 것을 청하는 선혜청의 계 고종 8년 6월 7일(병인) 대부도에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삼군부의 계

45 45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선재도 / 고종 4년 9월 18일(무진) / 대동미를 바다에 전복시킨 예산 현감 김병헌을 함사추고할 것을 청하는 선혜청의 계 선혜청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 이의익( 李 宜 翼 )의 장계를 보건대, 남양 부사( 南 陽 府 使 ) 박유붕( 朴 有 鵬 )의 첩정( 牒 呈 )을 낱낱이 거론하면서 예산현( 禮 山 縣 )의 대동미를 실은 선박한 척이 본부 선재도( 仙 才 島 ) 앞바다에 이르러 전복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한 조각 나뭇잎이나 다름없는 작은 배에 다가 몇백 석의 무거운 곡식을 싣고서 고용한 격군과 감색관( 監 色 官 )에게 일임한 채 전혀 통제하지 않았으니, 일이 소홀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곡주관( 穀 主 官 )인 예산 현감 김병헌( 金 炳 憲 )에게 우선 함사추고( 緘 辭 推 考 )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8년 6월 7일(병인) / 대부도에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삼군부의 계 삼군부가 아뢰기를, 대부도( 大 阜 島 )에 이제 진영( 鎭 營 )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도의 지계( 地 界 )가 5, 6십 리에 불과하니 여러 섬들을 부속시킨 뒤에야 제대로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근방의 영흥도( 靈 興 島 ), 선재도( 仙 才 島 ), 풍도( 楓 島 ), 선감도( 仙 甘 島 ), 탄매도( 炭 埋 島 ), 불도( 佛 島 ) 등 의 전결( 田 結 )과 호구( 戶 口 )를 아울러 해진( 該 鎭 )으로 이속시키고 그 장적( 帳 籍 )의 마감도 본 진( 本 鎭 )에서 주관해야 할 것이니, 뜻을 기울여 단속해서 더욱 방수하는 데 힘쓰도록 분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46 46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영흥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8년 6월 7일(병인) 대부도에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삼군부의 계 고종 9년 5월 14일(정유) 수원 유수 신석희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목장을 혁파하고 진을 옮기는 것을 시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 고종 9년 7월 10일(임진)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9년 7월 10일(임진) 영흥도 첨사에 화량 첨사를 계하했다는 병조의 계 고종 9년 7월 10일(임진) 자미당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정부 당상을 인견할 때 도제조 김병학 등이 입시하였다 고종 10년 7월 24일(경오) 곡주관 영암 군수 구연식을 나처할 것을 청하는 호조의 계 고종 10년 10월 6일(신사) 경기 감사 김재현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파선된 배의 격군들을 압송하여 처벌할 것 등을 청하는 선혜청의 계 고종 11년 1월 7일(신해)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3년 윤5월 3일(계해)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3년 12월 27일(계 이교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축) 고종 16년 윤3월 9일(임오) 신정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8년 윤7월 16일(병 숙배 단자를 잘못 써서 들인 해당 병마절도사 등 오) 의 처벌에 대해 묻는 정원의 계 고종 18년 윤7월 17일(정 영흥도 첨사 이성면을 잡아 가두었다는 의금부의 미) 계 고종 20년 6월 25일(계유) 이호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1년 4월 14일(무오) 군병과 군량미를 보장하여 병비에 힘쓸 것을 청 하는 판돈녕부사 민영목의 상소 경기 연안의 해방 사무 민영목의 상소에서 청한 고종 21년 4월 21일(을축) 대로 각도의 망정결을 경기로 보낼 것 등을 청하 는 의정부의 계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22년 3월 5일(갑진)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3년 1월 30일(갑자)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경기 감사 박제관 등 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3년 1월 30일(갑자) 신형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5년 8월 4일(계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6년 7월 29일(계유)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해당 도신과 수신( 帥 臣 )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6년 7월 29일(계유) 19차 정사에서 이동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 다 고종 26년 11월 9일(신해) 신병이 있는 선전관 이근용 등을 개차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6년 11월 9일(신해) 이규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9년 9월 28일(계축) 병비의 관원 현황

47 고종 30년 2월 18일(신미) 해연총제사가 하직 인사를 하는 날 새로 만든 병 부를 전해 줄 것 등을 청하는 이수홍의 계 <내 용> / 고종 8년 6월 7일(병인) / 대부도에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삼군부의 계 삼군부가 아뢰기를, 대부도( 大 阜 島 )에 이제 진영( 鎭 營 )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도의 지계( 地 界 )가 5, 6십 리에 불과하니 여러 섬들을 부속시킨 뒤에야 제대로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근방의 영흥도( 靈 興 島 ), 선재도( 仙 才 島 ), 풍도( 楓 島 ), 선감도( 仙 甘 島 ), 탄매도( 炭 埋 島 ), 불도( 佛 島 ) 등 의 전결( 田 結 )과 호구( 戶 口 )를 아울러 해진( 該 鎭 )으로 이속시키고 그 장적( 帳 籍 )의 마감도 본 진( 本 鎭 )에서 주관해야 할 것이니, 뜻을 기울여 단속해서 더욱 방수하는 데 힘쓰도록 분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9년 5월 14일(정유) / 수원 유수 신석희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목장을 혁파하고 진을 옮기는 것을 시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 삼군부가 아뢰기를, 방금 수원 유수 신석희( 申 錫 禧 )의 장계를 보니, 남양부( 南 陽 府 ) 소재 화량진( 花 梁 鎭 )은 본 영의 관할 아래 있는데, 진의 모양이 피폐하고 매우 소홀합니다. 해부 소관인 영흥도( 靈 興 島 )는 화량진과 수십 리나 떨어져 있으며 원래는 대부도( 大 阜 島 )에 소속된 목장입니다. 지금 만약 목장을 혁파하고 진을 설치하여 화량진의 진장으로 하여금 영흥도로 이주하게 한다면 해부와 기각지세( 掎 角 之 勢 )를 이루어 강화도의 좁은 어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니, 해방( 海 防 )이 더 엄중하게 되고 진변( 鎭 邊 )의 수비가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 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진의 모양이 매우 피폐하고 저곳은 지형이 좋으니, 이곳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저곳 에 옮긴다면 진변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장을 혁파하고 진을 옮기는 것을 장 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9년 7월 10일(임진)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판서 강노( 姜 㳣 )는 병이고, 참판 조희복( 趙 羲 復 )은 병이고, 참의 장태수( 張

48 48 - 泰 秀 )는 병이고, 참지 허국( 許 㥌 )은 입직인데 나왔다. 지사에 김재현을 단부하였고, 동지에 방우규( 方 禹 規 )를 단부하였고, 덕포진( 德 浦 鎭 ) 관할 영 흥도( 靈 興 島 ) 수군동첨절제사( 水 軍 同 僉 節 制 使 )에 김민혁( 金 敏 赫 )을 단부하였다. 지사에 빈자 리를 만들어 남성원( 南 性 元 )을 단부하였고, 겸 경기병마수군절도사에 김재현을 단부하였다 / 고종 9년 7월 10일(임진) / 영흥도 첨사에 화량 첨사를 계하했다는 병조의 계 병조가 아뢰기를, 대신이 경연에서 아뢴 대로 화량 첨사( 花 梁 僉 使 )를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계하했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9년 7월 10일(임진) / 자미당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정부 당상을 인견할 때 도제조 김병학 등이 입시하였다 시( 時 ). 상이 자미당( 紫 薇 堂 )에 나아갔다.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정부 당상을 인견하는 데에 함께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김병학, 부제조 조경호, 대교 한기동( 韓 耆 東 ), 교리 조한익 ( 趙 漢 益 ), 가주서 김재정( 金 在 鼎 ), 기사관 백시흡( 白 時 洽 )ㆍ강병적( 康 炳 迪 ), 우부승지 홍원식, 가주서 김재정, 사변가주서 박종형( 朴 鍾 瀅 ), 기사관 백시흡ㆍ강병적, 영의정 김병학, 우의정 홍순목, 정부 당상 김세균( 金 世 均 )ㆍ이용희( 李 容 熙 )ㆍ서형순( 徐 衡 淳 )ㆍ정기원( 鄭 岐 源 )ㆍ이장 렴( 李 章 濂 )ㆍ조기응( 趙 基 應 )ㆍ강노( 姜 㳣 )ㆍ임상준( 任 商 準 )ㆍ김원식( 金 元 植 )ㆍ이학영( 李 鶴 榮 )ㆍ 조희복( 趙 羲 復 ), 교리 조한익( 趙 漢 翼 )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의관 이경년( 李 慶 年 )ㆍ이한경 ( 李 漢 慶 )ㆍ홍익보( 洪 翼 普 )ㆍ이석주( 李 碩 柱 )가 나와 기둥 밖에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김병학이 앞으로 나와 문안하고, 아뢰기를, 의관이 대령하였으니, 입진하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한경 등이 차례로 옥후를 진찰하고, 물러나와 엎드렸다. 김병학이 말하기를, 맥후를 아뢰라. 하니, 조한경 등이 아뢰기를, 맥후는 좌우 삼부가 고릅니다. 하였다. 상이 의관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또 약방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상 이 이르기를, 차대( 次 對 )를 하겠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근래 파주( 坡 州 )의 마정( 馬 井 ), 신속( 新 屬 )의 두 읍과 장단( 長 湍 )의 상도( 上 道 ) 한 면에서

49 49 - 강가에 위치하여 강물에 휩쓸려 나간 전지에 대해 백지징세( 白 地 徵 稅 )한 것을 기영( 畿 營 )에 서 상세히 살펴 논의해 보고하라는 뜻을 계품하여 행회( 行 會 )했습니다. 방금 전 감사 박영 보( 朴 永 輔 )의 보고한 것을 보니, 두 읍에서 백지징세한 것을 충분히 살펴보니, 파주의 마정 과 신속 두 고을은 허결( 虛 結 )이 모두 8006결( 結 ) 1부( 負 ) 5속( 束 )이었고, 장단의 상도면 한 면은 강의 포구가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이 79결 45부 6속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강가의 도랑과 밭두둑이 해를 거듭할수록 침식되어 조수가 불어나고 물러가는 사이 일망무 제의 돌과 모래밭이 점점 완전히 강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농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물고기와 용이 땅굴을 파서 살고 배들이 왕래하게 되었으니, 전지의 일부가 유실되고 다른 곳에서 전지가 생겨났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수령이 장부를 가지고 비교해 헤아리는 것도 이미 이처럼 상세함을 상실했고 곤궁한 부락의 민정상 또한 차마 징 수하지 못하는 점도 있으니, 앞에서 말한 두 고을의 허모세( 虛 耗 稅 ) 165결 47부 1속을 10 년을 기한하여 특별히 면세를 허락하여 조금이나마 힘을 펼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 비록 10년 이내라 할지라도 강천( 江 川 )의 형세가 바뀌어 만약 경작하고 개간할 만한 곳이 있으면 일일이 기경( 起 耕 )하도록 권장하여 기경에 따라 세금을 거두어 원래의 총수를 회복하도록 하여 결정( 結 政 )을 중하게 여기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동북도( 東 北 道 )의 능침( 陵 寢 )과 신당( 神 堂 )을 봉심함에 있어 연로의 민읍에 끼칠 폐단을 생 각하여 해마다 기한을 물리어 정하였습니다. 지금은 가을 농사가 한창일 때라 또한 주전( 廚 傳 )의 민폐가 없지 않으니, 아울러 우선 정지하고 내년을 기다렸다가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관찰사가 봄가을로 행순( 行 巡 )하는 것은 곧 백성을 위해 도와주려는 의도인데, 공억( 供 億 ) 의 비용이 이미 백성에게서 나온다면 무릇 폐단을 끼침을 또한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이번 가을에 팔도의 부락을 행순하는 일을 아울러 정지하고, 기내에 있는 동서 능 원( 陵 園 )과 묘소( 墓 所 ), 동북도의 각릉침에 대한 봉심을 근례에 의거하여 도내의 품계가 높 은 수령이 대신 행할 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식과( 式 科 )의 대소 초시( 初 試 ) 날이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가을 농사일이 한창 많 을 때를 당하여 역에서 주전하는 것은 민읍에 끼치는 폐해가 없지 않으니, 제도( 諸 道 )의 도 사( 都 事 )를 근례에 의거하여 차임해 보내지 말고 각도신( 道 臣 )으로 하여금 시험을 주관하게 할 일로 미리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 김병시( 金 炳 始 )의 보고한 것을 보니, 우도( 右 道 )의 감시( 監 試 )를 매양 영하 ( 營 下 )에 옮겨 설치했는데, 현재 공해( 公 廨 )를 짓는 역사가 한창이어서 시소( 試 所 )를 설치한 다면 서로 지장이 없지 않으니 편의를 쫓아 다른 고을에 옮겨 설치하겠습니다. 라는 내용이 었습니다. 영하의 사세가 이미 이와 같으니 반드시 하루의 여정이 걸리는 부근의 읍 가운데 이설하고, 도사( 都 事 )를 이미 차임해 보내지 않았으니 도신( 道 臣 )이 이주( 移 駐 )하여 시취한

50 50 - 뒤에 임지로 돌아갈 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가산 군수( 嘉 山 郡 守 ) 김필구( 金 弼 求 )는 작년 도목 정사에서 마땅히 병마우후( 兵 馬 虞 候 )로 옮겨 제배해야 했는데, 수재( 水 災 )를 입은 고을은 천전( 遷 轉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일찍이 계 품한 적이 있었으므로 현재 임기가 이미 찼으나 해조( 該 曹 )에서 승진시켜 의망( 擬 望 )할 수 없다 합니다. 그에게 병우후 이력을 쓰도록 허락할 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근래 수원 유수( 水 原 留 守 )의 장계의 요청으로 인하여 화량 첨사( 花 梁 僉 使 )를 옮겨 영흥도 진장( 靈 興 島 鎭 將 )으로 할 일로 무부( 武 府 )에서 복계( 覆 啓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진장의 칭호는 합당하지 않으니, 예전 그대로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사용할 것을 해조로 하여 금 다시 하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지난번 북백( 北 伯 )의 보고로 인하여 온성부( 穩 城 府 )의 사초도( 莎 草 島 ) 목장에 남아 있던 말 을 분배하여 역참( 驛 站 )으로 보내 부족한 숫자를 채우게 하였습니다. 방금 당해 도신 홍우 길( 洪 祐 吉 )의 장계를 보니, 본도의 목장을 지금 이미 혁파하였으므로 당해 부사가 띠고 있 는 감목관( 監 牧 官 )의 겸함( 兼 銜 )을 따라서 감하할 일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목장을 혁파했다면 목관의 직임은 곧 빈 직함이니, 장계의 요청대로 감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도화서 관원이 이번에 수고를 다하여 실로 기록할 만한 공이 많았는데, 성상께서 특별히 상으로 공을 갚으려는 생각을 하시어 이에 수령에 검의( 檢 擬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만 약 현재 자리가 비어 있을 때 아울러 우선적으로 의망해 들인다면 장기간 근무한 이들의 적 체를 초래하여 원망을 품게 할 염려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신의 뜻은 사이사이 자리가 비 어 생길 때 차임해 보내도록 하여 양쪽 다 편하게 하는 정사가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 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도화서 관원은 사이사이 자리가 비어 생길 때마다 우선적으로 조용하도록 하 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고 영의정 서매수( 徐 邁 修 )의 면례( 緬 禮 )가 멀지 않았다 합니다. 상신( 相 臣 )이 무덤을 옮겨 장사 지낼 때에 장례 물품 및 담꾼을 지급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이번에 도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할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이건필( 李 建 弼 )을 정부 당상에 차하( 差 下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51 51 - 김병학이 아뢰기를, 아직 차임하지 않은 선무사 당상의 대임으로 지삼군부사 이용희( 李 容 熙 )를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가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대임을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 한계원( 韓 啓 源 )이 올린 계본을 보니, 정주( 定 州 )의 백성들이 원납( 願 納 )한 일에 대해 각별히 회사관( 會 査 官 )을 정하여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했더니, 사람 이름과 돈의 수가 각각 상고하여 근거할 것이 있고 뭇 공초에서 지적한 것이 문적에 환하게 실려 있어 실로 털끝만한 의심의 여지도 없었습니다만, 조광순( 趙 光 淳 ) 등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점은 여지없이 헛소문으로 드러나 대간( 臺 諫 )의 소장에서 논한 것들이 저절로 사실과 어긋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는데, 판부( 判 付 )한 중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조광순이 죄가 있고 없고는 여기서 이미 변별되었는데, 윤기주( 尹 基 周 )가 허위를 날조한 것 은 진실로 또한 너무도 반복 무상하고 소장에서 함부로 분관( 分 館 )의 일을 논함에 있어선 한껏 유감을 드러내고 협잡을 일삼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어 신의 부서에서 정배할 것을 계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남을 무고한 죄에 다른 반좌( 反 坐 )는 또 다른 해당 형률이 있 으니, 이는 별개의 범죄 행위라 그대로 놔둘 수가 없습니다. 추가로 변방에 멀리 정배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소장에서 논할 때에 그가 알았는가 알지 못했는가는 우선 놔두고라도 시골의 무 식한 사람이니 심히 책할 것도 못된다. 게다가 이미 정배했으니, 변방 먼 곳에 정배하는 것 은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은 일의 체모를 위함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하교하시니, 이는 특별히 천지와 같이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에서 나온 것입니다. 조광순은 근래 조정에서 거두어 썼기 때 문에 그 도내에서 자신보다 나은 자를 원망하게 되는 인정에서 비롯된 혐의가 없지 않은데, 윤기주의 상소 중에 세 가지 큰 죄 라고 한 것은 사계( 査 啓 )에서 이미 사실과 어긋나는 죄 과로 결론이 났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신보다 나은 자를 원망하게 되는 인정에서 비롯한 혐의라는 것은 이치상 비록 혹 그럴 수도 있겠으나, 조광순은 도내의 민심을 많이 잃어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인가? 하자, 김병학이 아뢰기를, 혹 자기네들 가운데에서 인심을 잃어 그렇게 된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는 앞으로 나오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52 52 - 이번 도목 정서에서 초사( 初 仕 )의 자리를 모두 별천인( 別 薦 人 )으로 차출하라. 하자, 조기응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거행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초사의 빈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리가 나는 대로 우선 차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강노가 아뢰기를, 지난번 삼군부의 별천인을 묘당에서 정부 공사관이나 삼군부 낭청으로 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하고 또한 병조로 하여금 구별하여 처리하도록 할 일로 경연에서 아뢰어 윤허를 받은 바 있습니다. 물러나간 뒤에 응당 구별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구별할 것이 있는가? 하자, 강노가 아뢰기를, 그 중에 공사관이나 낭청의 자격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구별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물러나서 구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홍원식이 말하기를, 재신( 宰 臣 )들은 일을 아뢰시오. 하자, 강노가 아뢰기를, 전 함흥( 咸 興 )의 중군 유해로( 柳 海 魯 )는 새로 가자되어 아직 부임하지 않은 상태인데 부모 상을 만나 자급이 강등되었습니다. 이는 죄를 지어 파출한 것과는 차이가 있고 자급을 회복 해 주는 것이 또한 근례에 많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부모상을 만났기 때문에 그랬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홍원식이 말하기를, 옥당은 생각이 있으면 아뢰시오. 하자, 조한익이 아뢰기를, 신은 너무도 용렬한 재주로 여러 번 경악( 經 幄 )에 올라 우러러 성학( 聖 學 )을 권면한 것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는데, 이번 극심한 무더위를 당하여 쌍척( 雙 隻 )의 강대( 講 對 )를 정지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어 밝혀 광명한 경지에 이르는 성인의 공부는 단지 방책( 方 冊 )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회하고 놀이하는 즈음에도 나름대로 날로 고명한 지경 에 올라가는 경( 敬 )이 있는 것입니다. 바쁜 정무 사이에 점차적으로 때때로 민첩하게 학문 에 힘쓰신다면 인심( 人 心 )과 도심( 道 心 )의 정미한 지극한 공부가 마침내 중도( 中 道 )를 잡는 경지로 돌아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급선무로 삼으소서. 삼복( 三 伏 ) 도 지나고 서늘한 기운이 점차 조석으로 생기고 있습니다. 수시로 자주 신료를 접하시어 연 역의 맛을 더욱 완미하고 부유한 공업을 크게 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술한 말을 응당 유념하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홍원식이 아뢰기를, 오늘의 빈대( 賓 對 )에 양사에서 한 사람도 참여한 이가 없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 다. 패초를 어긴 대간을 모두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53 53 -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탑교( 榻 敎 )를 냄 - 상이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 하고, 이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 러나왔다 / 고종 10년 7월 24일(경오) / 곡주관 영암 군수 구연식을 나처할 것을 청하는 호조의 계 호조가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 김재현( 金 載 鉉 )의 장계를 보니, 남양 부사 이용의( 李 容 儀 )의 첩정을 들어 말하기를, 전라도 영암군의 대동미를 실은 배가 남양부 영흥도( 靈 興 島 ) 앞바다에서 침몰하 였는데, 줄곧 건지려고 했으나 형적조차 없어 구조의 일을 철수했다. 고 하였습니다. 곡주관 ( 穀 主 官 ) 영암 군수 구연식( 具 然 軾 )을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처벌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 시기에 수령을 나문하여 처벌하면 가을 농사에 지장이 있을 것이니 특별히 보류하고, 우선 죄명을 지닌 채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 고종 10년 10월 6일(신사) / 경기 감사 김재현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파선된 배의 격군들을 압송하여 처벌할 것 등을 청하는 선혜청의 계 선혜청이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 김재현( 金 在 顯 )의 장계를 보니, 남양 부사( 南 陽 府 使 ) 이용의( 李 容 儀 )의 첩 정( 牒 呈 )에, 경상도 후조창( 後 漕 倉 )의 장자( 張 字 ) 조선( 漕 船 ) 1척이 상납한 뒤 빈 배로 돌아 오는 길에 본부 영흥도( 靈 興 島 )의 초입 부근에서 파선되어 격군( 格 軍 ) 1명이 물에 빠져 죽 었습니다. 그 선박의 사격( 沙 格 ) 등에게 문목( 問 目 )으로 취초( 取 招 )하여 첩정합니다. 한 것 을 일일이 들어 거론하고, 이미 싣고 있는 곡물이 없었고 또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있었 으므로 비록 고의로 파선시켰다고 의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해서는 법의 뜻이 엄중하므로 엄히 신문해야 할 것인데, 달리 더 조사할 만한 정절( 情 節 )이 없습니다. 많은 사 람이 갇혀 있게 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니 아울러 해도( 該 道 )로 이송하여 참작하 여 처벌하도록 하고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잡아다 처치하도록 하소서. 파선된 배의 잡물( 雜 物 )은 즉시 옮겨 가고, 건져서 묻은 격군에 대해서는 그 시체의 부모에게 알려 주라는 뜻으 로 아울러 해도 도신에게 이문( 移 文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물에 익숙하고 배에는 곡물을 싣지 않았으니, 설령 뜻밖의 풍파를 만났다 하 더라도 파도를 따라 잡아매어 제어할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끝내 온 배가 파손되도록 하였 으니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감색( 監 色 )이 육로로 지레 먼저 돌아간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하여 용서하는 바가 있을 수 없으니, 그 파선된 배의 격군들을 본도로 압송하여 지레 먼저 돌아간 놈들과 아울러 엄히 형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처벌하도록 하소서. 파손된 배의 목물( 木 物 )은 이미 경기에 있으니 본청에서 규례대로 속공

54 54 - ( 屬 公 )하겠습니다. 선척( 船 隻 )은 사목대로 생징( 生 徵 )하여 개조( 改 造 )하도록 영남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1년 1월 7일(신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판서 서상정( 徐 相 鼎 )은 나왔다. 오길선( 吳 吉 善 )을 부총관으로, 이휘재( 李 彙 載 )ㆍ이교익( 李 敎 益 )을 동지로, 김철균( 金 澈 均 )을 선전관으로, 박양순( 朴 養 淳 )ㆍ임성모( 任 聖 模 )ㆍ김익홍( 金 益 洪 )ㆍ오경석( 吳 慶 錫 )ㆍ홍범성( 洪 範 成 )을 오위장으로, 김익정( 金 益 鼎 )을 조사오위장( 曹 司 五 衛 將 )으로, 최석진( 崔 錫 晉 )ㆍ유용근 ( 柳 龍 根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기석( 李 基 碩 )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이종긍( 李 鍾 兢 )을 통제 영 중군으로, 구춘식( 具 春 植 )을 갈파지 첨사로, 엄석윤( 嚴 錫 允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삼았다. 진무사 겸 삼도수군통어사에 신헌( 申 櫶 )을 단부하고,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에 김 영구( 金 永 求 )를 단부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박승유( 朴 承 儒 )를 단부하고,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에 조희풍( 趙 羲 豐 )을 단부하고, 겸 의주진병마절제사 양서운향사( 兼 義 州 鎭 兵 馬 節 制 使 兩 西 運 餉 使 )에 황종현( 黃 鍾 顯 )을 단부하고, 겸 회령진병마절제사 북전위장토포사( 會 寧 鎭 兵 馬 節 制 使 北 前 衛 將 討 捕 使 )에 오진영( 吳 晉 泳 )을 단부하였다 / 고종 13년 윤5월 3일(계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이재원( 李 載 元 )이 나왔다. - 이하 원문 빠짐 - 김기홍( 金 箕 弘 )을 훈련원 도정으로, 신숙( 申 橚 )을 겸 훈련원 도정으로, 김이현( 金 彜 鉉 )ㆍ정계 량( 鄭 季 良 )ㆍ박영건( 朴 永 建 )을 오위장으로, 서유영( 徐 有 英 )을 조사오위장으로, 이유필( 李 儒 必 )을 훈련원 판관으로, 조신희( 趙 臣 熙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윤기선( 尹 岐 善 )을 무신겸선전관 으로, 김돈영( 金 惇 泳 )을 부장으로, 오형선( 吳 亨 善 )ㆍ이인희( 李 寅 羲 )ㆍ박태양( 朴 泰 陽 )ㆍ정두영 ( 鄭 斗 榮 )을 수문장으로, 이희눌( 李 熙 訥 )을 충청 수사로, 구완식( 具 完 植 )을 황해 수사로, 차덕 종( 車 德 種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신우돈( 申 宇 墩 )을 적량 첨사( 赤 梁 僉 使 )로, 김기주 ( 金 基 柱 )를 회령포 만호로, 서준풍( 徐 俊 豐 )을 위봉 별장( 威 鳳 別 將 )으로, 박진화( 朴 震 華 )를 화 수산 별장( 花 水 山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박시중( 朴 時 仲 )을 단부하였고, 첨지 세 자리는 이익하( 李 翼 夏 ), 이종식( 李 種 植 ), 조존봉( 趙 存 鳳 )을 단부하엿다. 부사과( 副 司 果 )에 이양호( 李 養 浩 ), 이재병( 李 載 秉 ), 홍익섭( 洪 益 燮 ), 이민보( 李 敏 甫 ), 이병하( 李 炳 夏 ), 이혁영( 李 赫 永 )을 단부하엿다 / 고종 13년 12월 27일(계축) / 이교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55 55 - 병비에, 판서 - 이하 원문 빠짐 - 이교인( 李 敎 寅 )ㆍ신석봉( 申 錫 鳳 )을 동지로, 이건혁( 李 健 爀 )을 첨지로, 오진섬( 吳 鎭 暹 )ㆍ유승 현( 劉 升 鉉 )을 오위장으로, 권응선( 權 膺 善 )을 조사오위장( 曹 司 五 衛 將 )으로, 이원기( 李 元 祺 )ㆍ 목승석( 睦 承 錫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정인석( 鄭 寅 錫 )ㆍ원재정( 元 在 貞 )ㆍ윤영한( 尹 泳 翰 )ㆍ홍병 직( 洪 秉 稷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한용규( 韓 用 奎 )ㆍ이창렬( 李 昌 烈 )을 부장으로, 이교현( 李 敎 絢 )ㆍ이상협( 李 象 協 )ㆍ오재삼( 吳 在 三 )을 수문장으로, 이재호( 李 載 浩 )를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 으로, 조성준( 趙 性 駿 )을 평안도 병마우후로, 조존복( 趙 存 復 )을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김은종 ( 金 殷 鍾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삼았다. 부장에 진방( 陳 芳 ), 동지에 안세업( 安 世 業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유정( 柳 珽 )ㆍ김연하( 金 演 夏 )ㆍ김후곤( 金 厚 坤 )ㆍ이용석( 李 容 奭 ), 부사맹 에 서회보( 徐 晦 輔 )ㆍ조성위( 趙 性 瑋 )ㆍ정필조( 鄭 弼 朝 )ㆍ조병선( 趙 秉 善 )ㆍ민영하( 閔 泳 夏 ), 부사 용에 이재용( 李 在 容 )ㆍ양재규( 梁 在 奎 )를 단부하였다 / 고종 16년 윤3월 9일(임오) / 신정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정희( 申 正 熙 )를 지훈련원사로, 김인호( 金 寅 浩 )ㆍ남효순( 南 孝 淳 )을 동지로, 이현도( 李 玄 道 )ㆍ조병진( 趙 秉 縉 )ㆍ이승무( 李 承 武 )ㆍ박사규( 朴 思 圭 )ㆍ김문기( 金 文 基 )를 오위장으로, 이봉 렴( 李 鳳 濂 )ㆍ윤이열( 尹 彝 烈 )을 충익위장으로, 윤성모( 尹 誠 模 )를 어영 기사장으로, 태중엽( 太 重 燁 )을 경복궁 위장으로, 최춘보( 崔 春 輔 )ㆍ홍낙환( 洪 樂 煥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주영( 李 周 永 )ㆍ이원영( 李 源 永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한규직( 韓 圭 稷 )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김윤규 ( 金 潤 圭 )를 전라감영 중군으로, 용재옥( 龍 載 玉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강재무( 姜 在 武 )를 청수 만호( 淸 水 萬 戶 )로, 방희년( 方 希 年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삼았다. 지사에 이응 인( 李 應 寅 )을 단부하고, 동지 가설에 이규석( 李 奎 奭 )을 단부하고, 첨지에 손광현( 孫 光 鉉 )을 단부하고, 부사맹에 홍순봉( 洪 淳 鳳 )ㆍ강완( 姜 浣 )ㆍ이원로( 李 源 老 )ㆍ신석두( 申 錫 斗 )를 모두 단 부하였다. 전 현감 김교영( 金 敎 濚 )을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에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18년 윤7월 16일(병오) / 숙배 단자를 잘못 써서 들인 해당 병마절도사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정원의 계 또 아뢰기를,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 이성면( 李 成 沔 )의 숙배 단자를 잘못하여 만호( 萬 戶 )로 써서 들임 으로써 수고로이 하문하시게 하였습니다. 원 단자는 수정하여 들이겠습니다만 임금께 아뢰 는 문자를 이처럼 소홀히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라우며, 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받아들였으 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해당 병마절도사( 兵 馬 節 度 使 )와 통례원 관원에 대해 엄 하게 처벌해야 마땅합니다만 본원이 추고를 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시행할 만한 벌이 없으 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나처하고, 그대도 추고를 받으라.

56 56 - 하였다 / 고종 18년 윤7월 17일(정미) / 영흥도 첨사 이성면을 잡아 가두었다는 의금부의 계 의금부가 아뢰기를,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 이성면( 李 成 沔 ), 통례원 가인의 김장헌( 金 章 憲 ) 등을 모두 잡아다 가 처벌하라고 전지를 내리셨습니다. 이성면은 방금 대명하였기에 잡아 가두었고, 김장헌은 잡기( 雜 技 )에 관계되므로 전례에 따라 형조로 이송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0년 6월 25일(계유) / 이호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호준( 李 鎬 俊 )을 지중추부사로, 서광태( 徐 光 泰 )ㆍ윤석원( 尹 錫 元 )ㆍ이청렬( 李 淸 烈 )ㆍ신성 흠( 愼 性 欽 )을 오위장으로, 한진행( 韓 鎭 行 )을 나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이승렬( 李 升 烈 )을 충 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오순영( 吳 順 泳 )을 경기 중군으로, 민영일( 閔 泳 一 )을 개성 중군으로, 윤영규( 尹 泳 奎 )를 청산도 첨사( 靑 山 島 僉 使 )로, 심인택( 沈 寅 澤 )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강 화순( 姜 和 淳 )을 동지중추부사로, 박태원( 朴 泰 遠 )을 금위영 초관으로, 이승한( 李 升 漢 )을 전라 도 병마우후로, 구연하( 具 然 河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이학선( 李 學 善 )을 전라우도 수군우 후로, 이근풍( 李 根 豐 )을 선전관으로, 이민긍( 李 敏 兢 )을 내금위장으로, 조희완( 趙 羲 完 )을 훈련 원 정으로, 이봉우( 李 鳳 宇 )를 훈련원 첨정으로, 조흥철( 趙 興 哲 )을 경상 중군으로, 이남집( 李 南 輯 )을 동지훈련원사로, 오도연을 첨지중추부사로, 유림을 중추부 도사로, 김기태( 金 箕 台 )를 훈련원 주부로, 허호( 許 鎬 )를 북병영 우후로, 이규안( 李 奎 顏 )을 동지중추부사로, 민인호( 閔 寅 鎬 )를 훈련원 도정으로, 이정현( 李 鼎 鉉 )ㆍ송진환을 수문장으로, 오만선( 吳 萬 善 )을 동진 첨사 ( 東 津 僉 使 )로, 윤석오( 尹 錫 五 )를 동지훈련원사로, 이유식( 李 儒 植 )을 선전관으로, 남궁영( 南 宮 泳 )을 부장으로, 김재우( 金 在 遇 )를 어영청 파총으로, 이제선( 李 濟 善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한치림( 韓 致 林 )를 훈련원 도정으로, 유응로( 柳 應 魯 )ㆍ하석락( 河 錫 洛 )을 훈련원 첨정으로, 오치혁( 吳 致 赫 )을 수문장으로, 송익상을 경상 중군으로, 안익( 安 榏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경 민( 李 慶 敏 )을 첨지중추부사로, 이병승을 선전관으로, 이근철( 李 根 哲 )을 중추부 도사로, 윤영 ( 尹 暎 )을 총리영 파총으로, 서광돈을 충익위장으로, 김병주를 오위장으로, 이상익( 李 相 翼 )을 훈련원 주부로, 황흔( 黃 炘 )을 수문장으로, 이규선( 李 奎 選 )을 운총 만호( 雲 寵 萬 戶 )로, 홍언주 ( 洪 彥 周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희( 李 )를 조사위장으로, 유응로를 선전관으로, 김종균( 金 從 均 ) 을 훈련원 첨정으로, 한기순( 韓 耆 淳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순원( 李 順 元 )을 훈련원 첨정으로, 정규찬( 鄭 圭 瓚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유응로를 황해도 병마우후로, 홍응석( 洪 應 錫 )을 광량 첨 사( 廣 梁 僉 使 )로, 김정수( 金 正 秀 )를 천성 만호( 天 城 萬 戶 )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선전관으로, 양 성환( 梁 性 煥 )을 훈련원 판관으로, 채규붕( 蔡 奎 鵬 )을 선전관으로, 박하형( 朴 夏 炯 )을 수문장으 로, 홍희윤( 洪 熙 潤 )을 경상 중군으로, 임성기를 오위장으로, 홍순조( 洪 順 祚 )를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로, 김제언( 金 濟 彥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최진근( 崔 鎭 根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

57 57 - 으로, 박옥룡( 朴 玉 龍 )을 입암 별장( 笠 巖 別 將 )으로, 고창규ㆍ김정화ㆍ최명익을 오위장으로, 김 원식( 金 源 植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박경삼( 朴 景 三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로, 안익상( 安 翼 相 )을 부장으로, 임윤기( 任 胤 祺 )를 수문장으로, 한희석( 韓 羲 錫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임익준( 任 翊 準 )을 절영도 첨사( 絶 影 島 僉 使 )로, 김충협( 金 忠 協 )을 경상 중군으로, 김인오( 金 仁 梧 )를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김성곤( 金 成 坤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배종엽( 裵 鍾 燁 )을 가 배량 만호( 加 背 梁 萬 戶 )로, 김상준( 金 商 俊 )을 안골 만호( 安 骨 萬 戶 )로, 구연수( 具 然 壽 )를 장목 포 별장( 長 木 浦 別 將 )으로, 이규원( 李 奎 元 )ㆍ이민집( 李 敏 集 )을 훈련원 부정으로, 박면동( 朴 勉 東 )을 부장으로, 최형규( 崔 炯 逵 )를 수문장으로, 임일권( 林 逸 權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박 장환( 朴 章 煥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김수정( 金 守 丁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최석 지( 崔 錫 枝 )를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김계연( 金 啓 淵 )을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로, 김영호( 金 永 浩 )를 수인 별장( 修 仁 別 將 )으로, 이규학( 李 奎 學 )을 충익위장으로, 임백우( 任 百 禹 )를 충장위장 으로, 이태용( 李 泰 鎔 )을 부장으로, 이인항( 李 寅 恒 )을 수문장으로, 서우순( 徐 瑀 淳 )을 초도 첨 사( 椒 島 僉 使 )로, 김재훈( 金 載 勳 )을 고풍산 첨사( 古 豐 山 僉 使 )로, 손병준( 孫 柄 濬 )을 유원 첨사 ( 柔 遠 僉 使 )로, 김응호( 金 膺 浩 )를 소이 만호( 所 已 萬 戶 )로, 이승준( 李 昇 俊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최재학( 崔 在 鶴 )을 금정 별장( 金 井 別 將 )으로, 호광표( 扈 光 表 )ㆍ김순영( 金 淳 英 )ㆍ윤동순 ( 尹 東 舜 )ㆍ최창렴( 崔 昌 濂 )ㆍ박기우( 朴 起 羽 )를 오위장으로, 이인엽( 李 寅 曄 )을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로, 최재호( 崔 載 鎬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이기선( 李 基 善 )을 아오지 만호( 阿 吾 地 萬 戶 )로, 장중술( 張 重 述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노태건( 盧 泰 鍵 )을 자모 별장( 慈 母 別 將 )으 로, 이진규( 李 晉 奎 )를 오위장으로, 민일호( 閔 一 鎬 )를 충익위장으로, 이사훈( 李 思 勳 )을 충장위 장으로, 양재덕( 梁 在 德 )을 수문장으로, 김문종( 金 汶 鍾 )을 갈파지 첨사( 坡 知 僉 使 )로, 윤태흥( 尹 泰 興 )ㆍ오병문( 吳 炳 文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조태승( 趙 泰 昇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강효 흡( 康 孝 洽 )을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한경식( 韓 景 植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윤자현( 尹 滋 峴 )을 충익위장으로, 이인협( 李 寅 協 )을 충장위장으로, 이민집을 선전관으로, 유완근( 柳 完 根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조병두( 曺 秉 斗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민재식( 閔 在 植 )ㆍ이 용직( 李 庸 稙 )ㆍ최종연( 崔 鍾 淵 )ㆍ이승학( 李 承 鶴 )ㆍ신학희( 申 鶴 熙 )ㆍ유재응( 柳 載 應 )을 오위장으 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훈련원 부정으로, 손경헌( 孫 璟 憲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승구( 李 承 九 ) ㆍ이만우( 李 晩 宇 )를 훈련원 주부로, 김원식( 金 源 植 )ㆍ임일권( 林 逸 權 )을 오위장으로, 구춘서 ( 具 春 書 )ㆍ이병헌( 李 秉 憲 )을 선전관으로, 구중감( 具 重 瑊 )을 수문장으로, 이길선( 李 吉 善 )ㆍ이 기표( 李 基 豹 )ㆍ홍주현( 洪 周 鉉 )ㆍ이학무( 李 學 懋 )ㆍ이봉익( 李 鳳 翼 )을 오위장으로, 이철희( 李 徹 熙 )ㆍ서익보( 徐 翊 輔 )를 훈련원 첨정으로, 허철( 許 )을 훈련원 판관으로, 고대규( 高 大 奎 )를 수 문장으로, 김원규( 金 元 奎 )를 경상 중군으로, 박형우( 朴 亨 祐 )를 충익위장으로, 김기반( 金 基 盤 ) 을 충장위장으로, 조남익( 趙 南 益 )을 부장으로, 이원유( 李 元 裕 )를 수문장으로, 민정식( 閔 貞 植 ) 을 통제영 우후로, 고영기( 高 英 岐 )ㆍ김병주( 金 炳 周 )를 오위장으로, 민덕현( 閔 德 顯 )을 충장위 장으로, 한진형( 韓 鎭 衡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유석형( 柳 錫 衡 )을 수문장으로, 유정주( 兪 廷 柱 )를 충익위장으로, 박병용( 朴 炳 容 )을 중추부 도사로, 윤명근( 尹 明 根 )ㆍ이해영( 李 海 永 )을 훈련원 주부로, 최운환( 崔 雲 煥 )을 금위영 초관으로, 윤선용( 尹 善 容 )을 오위장으로, 홍용관( 洪 用 觀 )을 우위솔로, 심흥택( 沈 興 澤 )을 부장으로, 김창수( 金 昌 壽 )를 수문장으로, 홍종원( 洪 鍾 源 )을 경상 중군으로, 양주식( 梁 柱 植 )ㆍ허장( 許 樟 )ㆍ박홍일( 朴 弘 鎰 )을 수문장으로, 박준모( 朴 準 模 )를 훈 련원 주부로, 장교준( 張 敎 駿 )을 수문장으로, 유달원( 兪 達 源 )ㆍ권귀인( 權 龜 仁 )ㆍ하성일( 河 成 一 )ㆍ박흥식( 朴 興 植 )ㆍ맹호용( 孟 浩 瑢 )을 오위장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관 백광혁( 白 光 爀 ), 주 부 진응표( 秦 膺 杓 )ㆍ양종률( 梁 鍾 律 )ㆍ김명렬( 金 命 烈 ), 이상은 가설( 加 設 )인데 감하( 減 下 )하였

58 58 - 다. 진응표를 훈련원 판관 가설로, 박봉식( 朴 鳳 植 )ㆍ박용래( 朴 龍 來 )ㆍ백학진( 白 鶴 鎭 )을 훈련 원 주부 가설로, 이종순( 李 鍾 順 )ㆍ장두언( 張 斗 彥 )ㆍ이준호( 李 駿 鎬 )를 선전관으로, 유기완( 柳 冀 完 )ㆍ강이회( 姜 彝 會 )ㆍ이종규( 李 鍾 奎 )ㆍ이계홍( 李 啓 弘 )을 부장으로, 정수방( 鄭 秀 昉 )ㆍ이응 상( 李 應 相 )ㆍ한용재( 韓 用 在 )를 수문장으로, 임성준( 任 聖 準 )을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삼았 다. 갑암 권관( 甲 巖 權 管 )에 김유영( 金 裕 榮 )을 단부하고, 삼천포 권관에 원재유( 元 在 鍮 )를 단 부하였다. 충주 영장 이승렬, 경기 중군 오순영, 개성 중군 민영일, 청산도 첨사 윤영규, 격 포 첨사 심인택,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으로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 든 것이다. 훈련원 주부에 이후근( 李 厚 根 )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범룡( 李 範 龍 )을 단 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신석규( 申 錫 圭 )ㆍ김진민( 金 鎭 民 )ㆍ홍영보( 洪 穎 普 )를 단부하 고,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병승( 李 秉 承 )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에 이준한( 李 駿 漢 )을 단부하고, 훈련원 판관 가설에 이인식( 李 寅 植 )ㆍ이건호( 李 建 鎬 )ㆍ조경현( 趙 璟 顯 )ㆍ이석호( 李 晳 鎬 )ㆍ안철승( 安 轍 承 )ㆍ이병훈( 李 秉 薰 )ㆍ이규춘( 李 奎 春 )ㆍ이면규( 李 冕 珪 )ㆍ정명원( 鄭 明 源 )ㆍ 이양렬( 李 亮 烈 )ㆍ이학승( 李 學 承 )ㆍ송귀호( 宋 龜 浩 )ㆍ이용삼( 李 容 三 )ㆍ정순용( 鄭 舜 鎔 )ㆍ권동진 ( 權 東 鎭 )ㆍ신태휴( 申 泰 休 )ㆍ황헌주( 黃 憲 周 )ㆍ고진혁( 高 鎭 赫 )ㆍ최성환( 崔 星 煥 )을 단부하고, 훈 련원 주부 가설에 진방( 陳 芳 )ㆍ조희은( 趙 羲 誾 )ㆍ신제원( 愼 濟 遠 )ㆍ유동근( 柳 東 根 )ㆍ김종려( 金 鍾 呂 )ㆍ김한근( 金 漢 根 )ㆍ추교신( 秋 敎 臣 )을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에 김준모( 金 浚 模 )ㆍ한인수 ( 韓 仁 秀 )ㆍ김의협( 金 義 協 )ㆍ김재항( 金 在 恒 )ㆍ임극양( 林 克 養 )ㆍ유용( 劉 榕 )ㆍ한원영( 韓 元 榮 )ㆍ송 계택( 宋 啓 澤 )ㆍ정윤록( 鄭 允 祿 )ㆍ장현규( 張 賢 逵 )ㆍ김재술( 金 在 述 )ㆍ서경락( 徐 京 洛 )ㆍ이겸영( 李 謙 榮 )ㆍ길원례( 吉 元 禮 )ㆍ김수( 金 洙 )ㆍ김문상( 金 文 尙 )ㆍ장원화( 張 源 華 )ㆍ김용길( 金 龍 吉 )ㆍ조성 규( 趙 性 奎 )ㆍ이약곤( 李 若 坤 )ㆍ송인혁( 宋 寅 赫 )ㆍ오재근( 吳 在 根 )ㆍ김재빈( 金 在 斌 )ㆍ김득연( 金 得 淵 )ㆍ전기풍( 田 基 豐 )ㆍ김현교( 金 顯 敎 )ㆍ김광현( 金 光 鉉 )ㆍ김인호( 金 麟 浩 )ㆍ강봉상( 康 鳳 祥 )ㆍ이 철모( 李 喆 模 )ㆍ김홍식( 金 弘 植 )ㆍ오안묵( 吳 安 默 )ㆍ조형한( 趙 亨 漢 )ㆍ장유겸( 張 有 謙 )ㆍ우석정( 禹 錫 鼎 )ㆍ한형규( 韓 瀅 圭 )ㆍ신석규( 辛 錫 圭 )ㆍ유인근( 柳 寅 根 )ㆍ최윤종( 崔 允 鍾 )ㆍ박민학( 朴 敏 學 )ㆍ 이석규( 李 奭 奎 )ㆍ김병언( 金 秉 彥 )ㆍ유경훈( 劉 敬 勳 )ㆍ주의준( 朱 儀 俊 )ㆍ전인헌( 全 寅 憲 )ㆍ오원모 ( 吳 遠 模 )ㆍ박상순( 朴 常 順 )ㆍ김대후( 金 大 厚 )ㆍ이인봉( 李 寅 鳳 )ㆍ김석종( 金 錫 宗 )ㆍ이병모( 李 秉 謨 ) ㆍ이재범( 李 載 範 )ㆍ김재진( 金 在 鎭 )ㆍ장석호( 張 錫 浩 )를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가설에 이청 렬( 李 淸 烈 )을 단부하였다. 충청 중군 오진섬( 吳 鎭 暹 )은 한 임기를 더하여 잉임( 仍 任 )하였다. 부사과에 서상은( 徐 相 殷 )ㆍ장귀택( 張 龜 澤 )ㆍ채규붕( 蔡 圭 鵬 )ㆍ신좌희( 申 佐 熙 )ㆍ이봉규( 李 鳳 珪 ) ㆍ이가희( 李 可 熙 )ㆍ오정선( 吳 定 善 )ㆍ김기정( 金 基 禎 )ㆍ홍병만( 洪 秉 萬 )ㆍ이규진( 李 圭 珍 )ㆍ홍석 범( 洪 錫 範 )ㆍ박긍수( 朴 兢 壽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21년 4월 14일(무오) / 군병과 군량미를 보장하여 병비에 힘쓸 것을 청하는 판돈녕부사 민영목의 상소 판돈녕부사 민영목( 閔 泳 穆 )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들으니, 군병은 백년 동안 쓰지 않을 수 있으나 나라는 하루라도 방 비가 없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방비가 있고 나서야 근심이 없는 것이니, 근심이 이른 뒤 에 방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한 지 십수 년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국경에는 사건이 많아졌고 변고가 거듭 불어나 어렵고 위 태함이 날이 갈수록 급박합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이니, 변하고 통하는 기틀

59 59 - 은 오직 스스로 강성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문사( 文 事 )가 있더라도 반드시 무비( 武 備 )가 있어야 한다. 약함과 강함은 짝이 되니 떨치고 일어나지 않 으면 자립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시국이 옛날과 매우 판이하여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권세와 이익을 떠받듭니다. 권세와 이익은 위엄과 무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통상하는 항구는 반드시 중병( 重 兵 )으로 보호해야 하는데 유독 우리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옛 버릇에 젖어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생각지 않은 근심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용기는 분노에 미치지 못하고 지혜는 도모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근심이 지극히 가까워 방비를 시급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저 경기 연 안은 서울의 대문이나 뜰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천연적으로 지역이 험준하니 반드시 지켜 낼 수 있는 곳인데, 방비하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되어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사의( 事 宜 )를 생각하였습니다. 대체로 해안을 방비하 는 법은 바다를 차단해야 하니 전적으로 수군에 의거해야 하는데, 지금 관할하는 바는 육군 이 수비하는 것뿐이니 매우 소홀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에게 해방 ( 海 防 )의 통제를 따르게 한 뒤에야 바다와 육지의 방비가 바야흐로 모두 완비될 것입니다. 교동( 喬 桐 )은 외딴 섬으로 군병과 양식이 모두 부족하여 통어사( 統 禦 使 )의 명칭은 이름만 있 고 실제는 없는데다가 해방영( 海 防 營 )에 소속되어 있으니 체제가 서로 모순됩니다. 수군의 절제사가 때에 따라 바뀐 전례가 한 번이 아니니, 참작하여 변통하는 것이 아마도 시기와 형편에 알맞을 것입니다. 남양( 南 陽 )의 대부도( 大 阜 島 )는 영흥도( 靈 興 島 )의 남쪽과 덕적도( 德 積 島 )의 동쪽에 끼여 있어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며, 둘레에 있는 아홉 섬의 1000호 에 가까운 백성들은 모두 물길에 익숙합니다. 요해처에 망대( 望 臺 )를 만들고 대포를 안치하 면 영흥도, 덕적도와 더불어 앞뒤에서 적을 공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의 진영을 만들어 별장( 別 將 )을 두되 신의 아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고 전적으로 통제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청과 아전들은 아직도 목관( 牧 官 ) 때 설치한 대로 있어서 그 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번거롭게 비용을 더 지출하지 않아도 병비( 兵 備 )가 거의 완전할 것 입니다. 연안 고을의 포군( 砲 軍 )은 원래의 정원이 1870명이지만 군사 훈련을 견딜 만한 사람은 겨 우 3분의 2이고 나머지는 불 때고 심부름하는 무리인데,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영방( 營 房 )을 설치하고 계기( 械 器 )를 수집하며 조련하는 방법을 차례로 거행하되, 총리아문의 포아 병( 砲 牙 兵 ), 수어청( 守 禦 廳 )의 별파진( 別 破 陣 ), 진무영( 鎭 撫 營 )의 새로 조련하는 군병은 각자 지급( 支 給 )하여 교습하는 것이 이미 제도가 되어 있으니 지금 변동하여 소란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항상 조련하고 신칙하여 유사시에 징발하여 조달하는 것이 실로 편리할 것 입니다. 경기 연안의 한쪽 면의 수로는 서쪽으로 풍덕( 豐 德 )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 通 津 )이 있으 며, 육로는 인천의 제물포항( 濟 物 浦 港 )과 남양의 마산포( 馬 山 浦 )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 로 가는 직통 길입니다. 해구( 海 口 )의 방어는 강화영( 江 華 營 )에 부속시켜 육지의 수비를 전 담하게 할 것이며, 해방영이 현재 부평( 富 平 )에 주둔하고 있으니, 풍덕과 남양에 마땅히 다 시 두 갈래의 방어막을 두어 호응하고 연락하게 하면되겠는데, 군병을 나누어 세력을 약하 게 하는 일은 병법에서 꺼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두 곳에 별도로 본토의 용사를 각각 2, 3대( 隊 )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고 병법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하여 오랫동안 해읍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게 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위급할 때 효력을 얻기가 쉬울 것입니다.

60 60 - 옛날에는 군병이 전부( 田 賦 )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병을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바뀌어 장정( 長 征 )을 하므로 운반하여 공급하는 일이 모두 고을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일의 형편이 그러하니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 將 吏 )는 대략 2000인인 데, 1인이 하루에 3되를 먹고 하루에 드는 자금이 3전( 錢 )이니, 1년이면 곡식이 1만 4400 포( 包 )가 되고 돈은 21만 6000민( 緡 )이 됩니다. 사목( 事 目 )에서 획정한 포군의 군량미 800 여 섬과 사창( 社 倉 )의 모곡( 耗 穀 ) 6000냥으로는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마음 에 의혹이 있으니 속히 규정을 정해야 합니다. 병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군량미는 원 래 나오는 근본이 있어야 항상 계속할 수 있다. 고 말합니다. 빌건대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헤아려서 세액( 稅 額 )을 나누어 주어 넉넉하게 군량을 보장하소서. 군병이 먹 을 것이 풍족하게 되는 것은 오직 위에서 명령하는 바에 달려 있습니다. 또 군량미를 넉넉하게 하는 데에는 둔전( 屯 田 )만한 것이 없는데 둔전은 반드시 공한지( 空 閑 地 )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인천, 남양, 장봉( 長 峯 ) 등지에 있는 목장은 말떼가 거의 없는데, 토지는 모두 비옥하여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혁파하여 그 땅에 둔전을 경영하 도록 허락하고, 소속된 토지의 총 결수( 結 數 )도 아울러 이관하고, 급하지 않은 자금은 덜어 내어 실용하면, 진실로 양쪽으로 이익이 되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영과 진에 군량미와 자금이 넉넉하더라도 기계와 의장( 衣 裝 ) 및 운송하는 비용을 일 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으니, 만일 재물을 늘리는 방도가 없으면 갑자기 군용이 결핍 될 것입니다. 어로세( 漁 撈 稅 ), 염전세( 鹽 田 稅 ), 선박세( 船 舶 稅 ) 등 세 가지 세금을 앞서 떼어 주시는 은택을 입었으나 징수하는 돈이 많지 않습니다. 각궁의 면세를 경기 감영에서 잉여 를 취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있으나, 다른 도에 있는 망정결( 望 定 結 )이 아직도 많으니, 모 두 경기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 내어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을 제외 하고 모두 해방( 海 防 )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일정한 규례를 삼는다면, 경상 비용을 더 허비 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저축한 것으로 경비를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해롭게 하지 않고 재물을 손상하지 않는 데에는 이보다 편리한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병비( 兵 備 )는 중대한 임무입니다. 국가의 안위( 安 危 )가 매여 있는 바인데, 더구나 이렇게 처 음 제도를 설치하는 때에는 더욱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에게 의뢰하여 야 합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쓸모 없는 선비로 무슨 취할 만한 재능이 있겠습니까. 위중( 威 重 )함은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지 못하고 사려( 思 慮 )는 뜻밖의 일을 응대하지 못하며, 나이는 또 노쇠하여 분주한 일을 감당하지 못하니, 이는 신의 말을 굳이 듣지 않고도 성상께서 모 두 밝게 아시는 바입니다. 조정의 거조는 결단코 아이들의 장난을 보듯이 하여 오래도록 잘 못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여기에 진술한 것은 모두 시급하고 절실한 사정에 관계됩니 다. 사사로운 충정에 감격하여 말을 절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세히 보시고 만일 채납할 만하시면 묘당으로 하여금 상세히 따져서 국사에 시행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 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은 비록 물러나 초야에 묻힌다 해도 더불어 영광이 되겠습니 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아뢴 모든 조목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실하고 시급한 것들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61 / 고종 21년 4월 21일(을축) / 경기 연안의 해방 사무 민영목의 상소에서 청한 대로 각도의 망정결을 경기로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경기 연안을 총관하는 해방 사무( 海 防 事 務 ) 민영목( 閔 泳 穆 )이 상소한 데 대하여 비답하시기 를, 진술한 여러 조목들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실하고 시급한 것들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상소를 가져다 보니, 그 하나는, 지금의 관할하는 것은 단지 육군이 맡아 방비하고 있는 데, 매우 소홀하니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 水 軍 )은 해방영( 海 防 營 )에게 지휘를 받도록 허 락해 주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해안의 요충지는 오로지 수군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현재 아문에서 관할하는 것은 수천 명의 육군일 뿐이니, 견고하게 지켜야 하는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소홀하여 어찌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을 아울러 통 괄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분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교동( 喬 桐 )은 외딴 섬으로 군병과 군량미가 모두 부족하여 통어사( 統 禦 使 )의 명 칭이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으므로 때에 따라 변혁한 전례가 한 번만이 아니니, 참작하여 변통하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통어사의 호칭은 있으나 군대의 편제나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전혀 모양을 갖추지 못하여 그전부터 변혁한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습니다. 게 다가 지금은 해방영에 소속되어 있으니,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수군절도사와 통어 사의 직위를 감하( 減 下 )하고 해당 부사가 방어사의 자격으로 시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남양( 南 陽 ) 대부도( 大 阜 島 )는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로 거주하는 백성들이 물길에 익숙하니, 망대를 설치하고 포를 안치하여 별도의 진영을 만들고 별장을 두되 본 아 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도록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이 섬은 영흥도( 靈 興 島 )와 덕적도 ( 德 積 島 )의 사이에 끼여 있으니 실로 해문( 海 門 )의 요충지입니다. 진영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반드시 깊이 재량한 것이겠지만 별장의 한 자리는 해당 아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연안 고을의 포군은 원래의 정원이 1870명인데 군사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 람은 겨우 3분의 2이고 그 나머지는 불을 때거나 심부름하는 사람인데,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영방( 營 房 )을 설치하고 계기( 械 器 )를 수집하며 차례로 훈련하되 총리아문의 포아병 ( 砲 牙 兵 ), 수어영( 守 禦 營 )의 별파진( 別 破 陣 ), 진무영( 鎭 撫 營 )의 새로 훈련된 군병들은 항상 조련하고 신칙하여 유사시에 징발하여 조달하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연안 고을에 있 는 포군의 무기를 정비하고 기예를 연마시키고 세 영의 군병들을 조련하고 신칙하여 징발하 고 조달하는 등의 일은 아울러 이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경기 연안의 한쪽 면의 물길은 서쪽으로 풍덕( 豐 德 )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 ( 通 津 )을 경유하며, 육로는 인천의 제물포항과 남양의 마산포( 馬 山 浦 )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로 가는 직통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다 입구의 방어는 강화영( 江 華 營 )에 부속시켜 육지 의 수비를 전담하게 할 것이며, 해방영이 현재 부평에 주둔하고 있으니, 풍덕과 남양에 의 당 두 갈래의 방어막을 두어 호응하고 연락해야 하는 데, 군병이 나뉘면 위세가 약해지니 두 곳에 별도로 본토의 용사를 각각 2, 3대( 隊 )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으면서 병법에 익 숙한 사람을 가려서 오래도록 해읍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물이나 육지의 요충지에 별도로 본토의 병사를 선발하여 묶어서 조련시키는

62 62 - 일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두 고을의 수령을 가려서 차임하고 오래도록 맡긴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이것은 별도로 전조( 銓 曹 )에 신칙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 將 吏 )는 대략 2000인인데 1인이 하루에 3되를 먹 고 하루에 드는 자금이 3전( 錢 )이니, 일 년이면 곡식이 1만 4400포가 되고 돈은 21만 6000민( 緡 )이 됩니다. 사목으로 획정한 포군의 군량미 800여 섬과 사창의 이자 6000냥으 로는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으니 바라건대 해당 관청에 신 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헤아려 세액을 나누어 주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군병이 있으면 군 량미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는 일의 형세로 보아 당연합니다. 이것은 바로 제일의 관건인데 돈과 곡식을 맡고 있는 관청에서 세입과 세출이 아직 넉넉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으니, 옮 겨 획급해 주는 것은 거론하여 의논하기 곤란합니다. 그 하나는, 군량미를 넉넉하게 하는 데는 둔전( 屯 田 )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 인천, 남양, 장 봉( 長 峯 ) 등지의 목장은 말들이 거의 없고 토지가 모두 비옥하여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혁파하여 그곳에 둔전을 경영할 것을 허락하고 소속한 토지의 총 결수( 結 數 )도 아 울러 이관하도록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둔전의 제도는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공한지에 서 실용( 實 用 )을 거두도록 하자고 상소에서 아뢴 말은 스스로 짐작하고 헤아린 것이 있으 니, 목장 중에서 옮길 만한 것과 혁파할 만한 것을 경시( 冏 寺 )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 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영진( 營 陣 )에 군량미와 자금이 넉넉하더라도 기계( 器 械 )와 의장( 衣 裝 ) 및 운송하 는 비용도 1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습니다. 다른 도( 道 )에 있는 망정결( 望 定 結 )이 아직도 많으니 한결같이 아울러 경기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 내어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을 제외하고 모두 해방( 海 防 )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일정한 규례를 삼게 하소 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정한 군량미의 액수 이외에 들어가는 기계, 의장, 물자를 운송 하는 비용이 필경 많을 것이니, 각도에 있는 망정결을 아울러 경기로 보내고 이미 궁결( 宮 結 )에 있는 것은 삭제하며,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에서 나머지를 계산하여 해당 아문에 소속시켜 비용을 보충하도록 하되, 이는 토지의 정사( 政 事 )에 관계된 것이니 호조에서 관문 ( 關 文 )을 발송하여 알리고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통어사( 統 禦 使 )를 감하한 후 경기 연안 수군이 이미 해방 아문( 海 防 衙 門 )에 속하였습니다. 따라서 해서( 海 西 )와 호서( 湖 西 )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일체로 절제하게 하고, 덕적( 德 積 )ㆍ 덕포( 德 浦 )ㆍ주문( 注 文 )ㆍ영흥( 靈 興 )ㆍ장봉( 長 峯 )의 전최( 殿 最 )는 기영( 畿 營 )으로 하여금 구관 하게 하고, 남양( 南 陽 ), 장봉( 長 峯 )ㆍ인천( 仁 川 ) 목장은 이미 태복시에서 복계하여 당해 아문 에 갈라 붙였으니, 목관( 牧 官 )을 모두 감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63 / 고종 22년 3월 5일(갑진)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김윤식( 金 允 植 )은 나왔고, 참판 조은승( 曺 殷 承 )은 입직이고, 참의 민긍식( 閔 肯 植 )은 병이고, 참지 이범진( 李 範 晉 )은 병이고, 좌부승지 유지영은 나왔다. 한경원( 韓 敬 源 )ㆍ이시성( 李 時 成 )을 지사로, 이규석( 李 奎 奭 )을 지훈련원사로, 임백은( 任 百 殷 ) 을 동지로, 조희승( 趙 羲 升 )ㆍ윤선응( 尹 善 應 )ㆍ이용익( 李 容 益 )을 동지훈련원사로, 이윤용( 李 允 用 )을 훈련원 도정으로, 임형준( 任 衡 準 )ㆍ백낙준( 白 樂 駿 )ㆍ김경희( 金 景 熙 )를 선전관으로, 이 교일( 李 敎 一 )ㆍ김광묵( 金 光 默 )을 내금위장으로, 남계흥( 南 啓 興 )ㆍ서병윤( 徐 丙 潤 )ㆍ오응상( 吳 應 常 )ㆍ김종구( 金 宗 九 )ㆍ임봉운( 林 奉 雲 )을 오위장으로, 안후선( 安 厚 善 )ㆍ정석우( 鄭 錫 祐 )ㆍ오 언영( 吳 彥 泳 )을 충익위장으로, 서형돈( 徐 亨 墩 )을 충장위장으로, 박성대( 朴 聖 大 )ㆍ석민서( 石 民 瑞 )를 창덕궁 위장으로, 김생민( 金 生 民 )을 경희궁 위장으로, 임찬호( 任 璨 鎬 )ㆍ이근용( 李 根 )을 선전관으로, 조정구( 趙 鼎 九 )ㆍ윤태흥( 尹 泰 興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홍채( 洪 埰 )를 부장으로, 권종석( 權 鍾 奭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송찬회( 宋 贊 會 )를 선전관으로, 양주현( 梁 柱 顯 )을 수원 중군( 水 原 中 軍 )으로, 송인원( 宋 仁 源 )을 경상 중군( 慶 尙 中 軍 )으로, 조종철( 趙 鍾 哲 )을 신 도 첨사( 薪 島 僉 使 )로, 상귀( 尙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김형중( 金 衡 重 )을 갈파첨사( 波 僉 使 ) 로, 이선영( 李 善 永 )을 경상우도 병마우후( 慶 尙 右 道 兵 馬 虞 候 )로, 이흥선( 李 興 善 )을 영흥도 첨 사( 靈 興 島 僉 使 )로, 서익보( 徐 翊 輔 )를 평남 만호( 平 南 萬 戶 )로, 김용현( 金 龍 現 )을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김동현( 金 東 玹 )을 천성 만호( 天 城 萬 戶 )로, 백시영( 白 時 榮 )을 백마 별장( 白 馬 別 將 ) 으로 삼았다. 선전관 가설에 유봉수( 柳 鳳 秀 )를, 부장에 민홍식( 閔 鴻 植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이돈하( 李 敦 夏 )ㆍ민영환( 閔 泳 煥 )ㆍ이학영( 李 鶴 榮 )ㆍ박재위( 朴 載 緯 ), 부호군에 임면호( 任 冕 鎬 ) ㆍ김승규( 金 昇 圭 )ㆍ박해철( 朴 海 哲 )ㆍ이민긍( 李 敏 兢 )ㆍ서정규( 徐 廷 圭 )ㆍ임원호( 任 原 鎬 )ㆍ백남 석( 白 南 奭 )ㆍ백남설( 白 南 卨 )ㆍ정인우( 鄭 寅 愚 )ㆍ유병록( 劉 秉 祿 )ㆍ김재복( 金 載 馥 ), 부사과에 이 기조( 李 基 肇 )ㆍ조성학( 趙 性 鶴 )ㆍ정인석( 鄭 寅 奭 )ㆍ유진규( 兪 鎭 奎 )ㆍ이기동( 李 起 東 )ㆍ오영탁( 吳 瀅 鐸 )ㆍ김기룡( 金 基 龍 ), 부사과에 이회영( 李 會 英 )ㆍ변상훈( 邊 相 勳 )ㆍ한민원( 韓 敏 源 )ㆍ이세우 ( 李 世 愚 )ㆍ고규진( 高 圭 晉 )ㆍ최익주( 崔 翼 柱 )ㆍ윤순의( 尹 舜 儀 )ㆍ오기선( 吳 機 善 )ㆍ윤원식( 尹 元 植 ) ㆍ안익상( 安 翼 相 )ㆍ신석현( 申 錫 賢 )ㆍ이진황( 李 晉 璜 )ㆍ이동섭( 李 東 燮 ), 부사맹에 한철회( 韓 喆 會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급제( 及 第 ) 김광석( 金 光 錫 )ㆍ박항래( 朴 恒 來 )ㆍ박영상( 朴 永 商 )ㆍ 이명호( 李 命 鎬 ), 이상은 이번에 절충( 折 衝 )을 가자하였는데, 병조가 복계( 覆 啓 )하여 판하한 것이다 / 고종 23년 1월 30일(갑자) /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경기 감사 박제관 등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정인흥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여러 도의 포폄 계본을 뜯어 보니, 경기 감사 박제관( 朴 齊 寬 )의 계본 가운데 영흥도 첨사 ( 靈 興 島 僉 使 ) 이흥선( 李 興 善 )에 대해서 어찌 가혹한 평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 고, 충청 수사 구연창( 具 然 昌 )의 계본 가운데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 김홍현( 金 弘 鉉 )에 대해서 늙고 병들었다고 말하지 말라. 라고 하였고, 평안 감사 남정철( 南 廷 哲 )의 계본 가운데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 길봉순( 吉 鳳 順 )에 대해서 잔약한 진( 鎭 )에 일이 적었다. 라고 하였고, 평안

64 64 - 병사 원우상( 元 禹 常 )의 계본 가운데 창주 첨사( 昌 州 僉 使 ) 이준식( 李 浚 植 )에 대해서 밝게 살 피는 것을 더욱 엄히 해야 한다. 라고 하였고,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 배진우( 裵 晉 祐 )에 대해서 말을 듣고 모습을 보니 앞으로 공효가 있겠음을 알겠다. 라고 하였고,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 홍용호( 洪 龍 浩 )에 대해서 칭찬하거나 헐뜯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 다. 라고 하였고, 안무사 조병직( 趙 秉 稷 )의 계본 가운데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 김창남( 金 昌 南 ) 에 대해서 감히 소홀히 한 것이 없다. 라고 하였으니, 모두 중고( 中 考 )에 두어야 하는데도 상고( 上 考 )에 두었고, 황해 병사 민경호( 閔 敬 鎬 )의 계본 가운데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 윤병오 ( 尹 秉 五 )에 대해서 살피고 신칙하는 것에 더욱 힘써야 한다. 라고 하였고, 전라 좌수사 이희 갑( 李 熙 甲 )의 계본 가운데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 김형수( 金 亨 秀 )에 대해서 진이 쇠잔해졌다. 라고 하였고, 전라 우수사 이용관( 李 容 觀 )의 계본 가운데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 백승현 ( 白 承 顯 )에 대해서 공효를 기대할 수 있다. 라고 하였고, 강원 감사 남정순( 南 廷 順 )의 계본 가운데 삼방 별장( 三 防 別 將 ) 장규환( 張 奎 煥 )에 대해서 일이 적다고 말하지 말라. 막고 지키 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라고 하였고, 경상 감사 남일우( 南 一 祐 )의 계본 가운데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 전도성( 全 道 盛 )에 대해서 순금( 巡 禁 )에 더욱 부지런히 해야 한다. 라고 하였고, 통 제사( 統 制 使 ) 정운익( 鄭 雲 翼 )의 계본 가운데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 김정극( 金 廷 極 )에 대해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다. 라고 하였고, 평안 병사 원우상( 元 禹 常 )의 계본 가운데 율 포 권관( 栗 浦 權 管 ) 김완규( 金 完 奎 )에 대해서 공효를 기대할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모두 하고( 下 考 )에 두어야 하는데도 상고에 두어, 전최( 殿 最 )를 엄히 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각 해당 도신과 수신을 모두 추고하여 경책하고, 영흥도 첨사 이흥선, 서천 첨사 김홍현, 노 강 첨사 길봉순, 창주 첨사 이준식, 시채 첨사 배진우, 천마 첨사 홍용호, 유원 첨사 김창남 은 모두 중고로 시행하고, 문산 만호 윤병오, 녹도 만호 김형수, 다경포 만호 백승현, 금오 별장 전도성, 구소비포 별장 김정극, 임토 별장( 林 土 別 將 ) 이창익( 李 昌 翼 ), 율포 권관 김완규 는 모두 하고로 시행하소서. 삼방 별장 장규환은 전부가 다 폄( 貶 )하는 말이니,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3년 1월 30일(갑자) / 신형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형모( 申 馨 模 )를 동지로, 오재철( 吳 在 哲 )을 첨지로, 한창교( 韓 昌 敎 )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원요( 金 元 堯 )를 경상 중군으로, 최현룡( 崔 顯 龍 )을 갈파지 첨사( 波 知 僉 使 )로, 장교준( 張 敎 駿 )을 별영 초관으로, 김영순( 金 永 順 )을 우익찬으로, 남순원( 南 順 元 )을 선전관으로, 박보경 ( 朴 輔 景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희근( 金 喜 根 )을 판관으로 삼았다. 별영 초관 가설에 구연항 ( 具 然 恒 )을 단부하고, 훈련원 판관 가설 다섯 자리에 정귀조( 鄭 龜 朝 ), 신태설( 申 泰 卨 ), 이풍 재( 李 豐 載 ), 이철순( 李 徹 純 ), 김범구( 金 範 求 )를 단부하고, 주부 가설에 이희상( 李 熙 相 )을 단부 하고, 호군에 이원회( 李 元 會 ), 박난수( 朴 蘭 壽 ), 이교민( 李 敎 敏 )을 단부하였다. 김재우( 金 在 遇 ) 를 훈련원 부정으로, 홍재하( 洪 在 夏 )를 첨정으로, 이교상( 李 敎 庠 )을 중추부 도사로, 엄주환 ( 嚴 柱 煥 )을 전라우도 수군우후로, 이준기( 李 峻 器 )를 훈련원 첨정으로, 유협( 柳 )을 판관으로, 어병완( 魚 秉 玩 )을 주부로, 박경의( 朴 景 義 )를 광량 첨사( 廣 梁 僉 使 )로, 이재순( 李 在 淳 )을 미조 항 첨사( 彌 助 項 僉 使 )로, 이명헌( 李 明 憲 )을 선전관으로, 윤달원( 尹 達 源 )을 훈련원 주부로, 이

65 65 - 종욱( 李 鍾 郁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남석희( 南 錫 熙 )를 별영 초관으로, 박태성( 朴 泰 成 )을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로, 이민대( 李 敏 大 )ㆍ하순일( 河 順 一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응섭( 金 應 燮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마추룡( 馬 騶 龍 )을 정방 별장( 正 方 別 將 )으로, 임성택( 林 聖 澤 ) 을 자모 별장( 慈 母 別 將 )으로 삼았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명헌( 李 明 憲 )을 단부하였다. 호 군에 김종한( 金 宗 漢 ), 부호군에 박제순( 朴 齊 純 )ㆍ오인영( 吳 麟 泳 )ㆍ이교영( 李 敎 榮 )ㆍ조문하( 趙 文 夏 )ㆍ이순영( 李 順 英 ), 부사직에 김수형( 金 秀 馨 )ㆍ이승우( 李 勝 宇 )ㆍ김병직( 金 炳 稷 )ㆍ이승구 ( 李 承 九 )ㆍ김용규( 金 容 圭 ), 부사과 홍수인( 洪 秀 寅 )ㆍ박인환( 朴 寅 煥 )ㆍ심의학( 沈 宜 鶴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김재우( 金 在 遇 )를 선전관으로, 한용규( 韓 用 奎 )를 훈련원 첨정으로, 차호진 ( 車 好 鎭 )을 중추부 도사로, 허응( 許 應 )을 훈련원 판관으로, 강병진( 姜 炳 珍 )을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김인용( 金 仁 鏞 )을 첨지로, 남순원( 南 順 元 )을 훈련원 부정으로, 이경렴( 李 敬 濂 )ㆍ이승 구( 李 承 九 )를 주부로, 윤필영( 尹 弼 永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삼았다. 호군에 오치기( 吳 致 箕 ), 이남회( 李 南 會 )를 단부하였다. 김완근( 金 完 根 )을 오위장으로, 이용태( 李 容 泰 )를 문신겸선 전관으로, 이건대( 李 建 大 )ㆍ구주현( 具 周 鉉 )ㆍ이종욱( 李 鍾 郁 )을 수문장으로 삼았다. 호군에 송 응래( 宋 應 來 )ㆍ원석오( 元 錫 五 )ㆍ김익홍( 金 益 洪 ), 부호군에 박민식( 朴 敏 植 ), 이상을 모두 단부 하였다. 훈련원 주부 가설에 박순근( 朴 順 根 )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에 심형택( 沈 馨 澤 ), 홍건주( 洪 健 周 ), 채규준( 蔡 奎 駿 ), 백낙연( 白 樂 衍 ), 심하택( 沈 夏 澤 ), 윤병규( 尹 炳 圭 ), 남궁 표( 南 宮 杓 ), 채현식( 蔡 賢 植 ), 김규한( 金 圭 漢 ), 조정석( 趙 定 錫 )을 단부하고, 판관 가설에 이교 석( 李 敎 奭 ), 안형순( 安 亨 淳 ), 윤석기( 尹 錫 祺 ), 상운( 尙 澐 ), 성낙호( 成 樂 頀 ), 최주현( 崔 周 顯 ), 조 존찬( 趙 存 贊 ), 김종환( 金 鍾 桓 ), 강형준( 康 亨 俊 ), 권명호( 權 命 鎬 ), 이희성( 異 熙 成 )을 단부하고, 주부 가설에 조종찬( 趙 鍾 贊 ), 권형진( 權 瀅 鎭 ), 오창성( 吳 昌 成 ), 하흥룡( 河 興 龍 ), 김천봉( 金 千 奉 ), 윤희영( 尹 喜 永 ), 원세록( 元 世 祿 ), 이두황( 李 斗 璜 ), 김흥학( 金 興 鶴 ), 김진풍( 金 振 豐 ), 이장 환( 李 章 煥 ), 이창환( 李 昌 煥 ), 홍주범( 洪 周 範 ), 홍종욱( 洪 鍾 郁 )을 단부하였다. 최경선( 崔 敬 善 )을 오위장으로, 이병우( 李 秉 禹 )를 선전관으로, 이교석( 李 敎 錫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교직 ( 李 敎 稷 )을 별영 초관으로, 손관원( 孫 觀 遠 )을 파총( 把 摠 )으로, 김재우( 金 在 遇 )ㆍ서정두( 徐 廷 斗 )ㆍ이용식( 李 容 軾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중태( 李 重 泰 )를 판관으로, 이계호( 李 啓 好 )를 주부 로, 이준호( 李 駿 鎬 )ㆍ이민복( 李 敏 復 )을 선전관으로, 염학순( 廉 學 淳 )을 중추부 도사로, 이희진 ( 李 喜 晉 )을별영 초관으로, 장정학( 張 丁 鶴 )을 청성 첨사( 淸 城 僉 使 )로, 김상진( 金 祥 鎭 )을 중추 부 경력으로, 서상은( 徐 相 殷 )을 훈련원 첨정으로, 박경환( 朴 景 煥 )을 주부로, 김우석( 金 禹 錫 )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유기형( 劉 箕 炯 )을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로 삼았다. 부호군에 정용조( 鄭 龍 朝 )ㆍ유지희( 柳 芝 熙 )ㆍ김응모( 金 膺 模 )ㆍ정해식( 鄭 海 植 )ㆍ이덕우( 李 德 雨 )ㆍ이봉우 ( 李 鳳 宇 )ㆍ이남희( 李 南 熙 ), 부사과에 송세현( 宋 世 鉉 )ㆍ김석룡( 金 錫 龍 )ㆍ김정헌( 金 鼎 憲 ), 이상 을 모두 단부하였다. 이재준( 李 在 晙 )을 중추부 도사로, 곽한익( 郭 漢 益 )ㆍ최완식( 崔 完 植 )을 훈 련원 판관으로, 양상훈( 梁 相 燻 )을 지도 만호( 智 島 萬 戶 )로, 홍종환( 洪 鍾 桓 )을 사량 만호( 蛇 梁 萬 戶 )로, 이교철( 李 敎 哲 )ㆍ이종규( 李 鍾 奎 )ㆍ김교식( 金 敎 植 )을 훈련원 주부로, 송홍렴( 宋 弘 濂 ) 을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김득신( 金 得 信 )을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로, 주찬우( 周 贊 佑 )를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로, 김시황( 金 時 晃 )을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로, 한완규( 韓 完 奎 )를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로, 조남현( 趙 楠 顯 )을 지세포 만호( 知 世 浦 萬 戶 )로, 유정후( 柳 廷 厚 )를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정찬규( 鄭 燦 奎 )를 벌등 첨사( 伐 登 僉 使 )로, 신현조( 申 鉉 兆 )를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김기조( 金 基 祚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정진행( 鄭 鎭 行 )을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으로, 김성렬( 金 成 烈 )을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으로, 김정규( 金 正 圭 )를 훈련원 판관으로, 민 치승( 閔 致 昇 )을 주부로, 장한구( 張 翰 九 )를 삼방 별장( 三 防 別 將 )으로, 호봉주( 胡 鳳 周 )를 임토

66 66 - 별장( 林 土 別 將 )으로, 정창묵( 鄭 昌 默 )을 목포 만호( 木 浦 萬 戶 )로, 구창서( 具 昌 書 )를 훈련원 주 부로, 김백희( 金 伯 熙 )를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이종순( 李 鍾 淳 )을 사도 첨사( 蛇 渡 僉 使 )로, 김 의집( 金 宜 集 )ㆍ이장업( 李 章 業 )을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으로, 신기환( 辛 煥 )을 동지로, 유지 희( 柳 芝 熙 )를 첨지로, 강재경( 姜 在 敬 )ㆍ이충려( 李 忠 呂 )ㆍ오언영( 吳 彥 泳 )을 오위장으로, 김우 규( 金 禹 圭 )를 부장으로, 이민성( 李 敏 星 )을 수문장으로, 송응래( 宋 應 來 )를 동지로, 양주성( 梁 柱 星 )을 내금위장으로, 이정식( 李 正 植 )을 훈련원 주부로 삼았다.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 절도사에 이규안( 李 奎 顔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오재선( 吳 在 善 ), 부호군에 이정목( 李 廷 穆 )ㆍ 김재길( 金 載 吉 )ㆍ김득하( 金 得 河 )ㆍ이봉주( 李 鳳 周 )ㆍ이교선( 李 敎 善 )ㆍ이의식( 李 宜 植 )ㆍ이휘종 ( 李 輝 鍾 ), 부사과에 정근섭( 鄭 根 燮 )ㆍ김용관( 金 容 觀 )ㆍ김규삼( 金 奎 三 )ㆍ김재하( 金 在 夏 )ㆍ홍재 응( 洪 在 應 )ㆍ김태혁( 金 台 赫 )ㆍ이근우( 李 瑾 禹 )ㆍ홍태현( 洪 泰 顯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유 길로( 柳 吉 魯 )를 선전관으로, 김재일( 金 在 一 )ㆍ이재호( 李 載 鎬 )ㆍ박광현( 朴 光 鉉 )ㆍ이종환( 李 鍾 煥 )ㆍ김규환( 金 奎 煥 )을 별영 초관으로, 홍수종( 洪 壽 鍾 )을 부장으로, 김민식( 金 敏 植 )ㆍ백남기 ( 白 南 箕 )ㆍ한국선( 韓 國 善 )ㆍ김병찬( 金 秉 瓚 )을 수문장으로 삼았다. 갑암 권관( 甲 巖 權 管 )에 최 석태( 崔 錫 泰 )를 단부하고, 율포 권관( 栗 浦 權 管 )에 진후길( 陳 厚 吉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5년 8월 4일(계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판서 민영환( 閔 泳 煥 )은 병이고, 참판 김재은( 金 在 殷 )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 고, 참의 신병우( 愼 炳 佑 )는 입직인데 나왔고, 참지 장석유( 張 錫 裕 )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우부승지 이서영( 李 瑞 永 )은 나왔다. 이의면( 李 宜 沔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고현석( 高 玄 錫 )을 명월 만호( 明 月 萬 戶 )로 삼았 다. 동지에 박정규( 朴 鼎 圭 ), 유기태( 柳 冀 泰 ), 송재식( 宋 在 植 )을 단부하고, 가설( 加 設 )에 정주 영( 鄭 周 永 ), 강흥준( 姜 興 俊 ), 최상진( 崔 相 鎭 ), 권종택( 權 鍾 宅 ), 변영혁( 邊 永 赫 ), 문현상( 文 賢 祥 ), 이두진( 李 斗 鎭 ), 박수필( 朴 秀 弼 ), 김기영( 金 基 永 ), 양성록( 楊 聖 祿 ), 김양석( 金 良 錫 ), 남계 식( 南 啓 湜 ), 김홍식( 金 弘 植 )을 단부하고, 첨지 세 자리에 이경의( 李 敬 儀 ), 박원화( 朴 元 和 ), 권 극선( 權 克 善 )을 단부하고, 가설에 이수명( 李 守 明 ), 김학수( 金 學 秀 ), 김완철( 金 完 哲 )을 단부하 고, 훈련원 첨정 가설 네 자리에 윤용대( 尹 龍 大 ), 민치열( 閔 致 悅 ), 이풍호( 李 豐 鎬 ), 이정화( 李 正 和 )를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 가설에 유흥렬( 柳 興 烈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정해륜( 鄭 海 崙 )ㆍ한장석( 韓 章 錫 )ㆍ서상우( 徐 相 雨 ), 호군에 김석진( 金 奭 鎭 )ㆍ김홍규( 金 弘 圭 )ㆍ양주현( 梁 柱 顯 )ㆍ이응하( 李 應 夏 )ㆍ윤성진( 尹 成 鎭 )ㆍ조병필( 趙 秉 弼 ), 부호군에 김영적( 金 永 迪 )ㆍ이석영( 李 石 榮 )ㆍ이명철( 李 命 喆 )ㆍ황기연( 黃 耆 淵 )ㆍ신태관( 申 泰 寬 )ㆍ심상한( 沈 相 漢 )ㆍ이우면( 李 愚 冕 )ㆍ 이헌경( 李 軒 卿 )ㆍ이계흥( 李 啓 興 )ㆍ이규홍( 李 奎 鴻 )ㆍ오재만( 吳 在 晩 )ㆍ김승규( 金 昇 圭 )ㆍ이민승 ( 李 敏 承 ), 부사직에 이범구( 李 範 九 )ㆍ양봉제( 梁 鳳 濟 )ㆍ정익주( 鄭 益 周 )ㆍ이동기( 李 東 基 )ㆍ민영 국( 閔 泳 國 )ㆍ김병억( 金 秉 億 ), 부사과에 김중식( 金 中 植 )ㆍ김난규( 金 蘭 圭 )ㆍ장후근( 張 厚 根 )ㆍ안 철수( 安 喆 壽 )ㆍ윤상진( 尹 相 晉 )ㆍ박철호( 朴 澈 鎬 )ㆍ최한조( 崔 瀚 祖 )ㆍ함사윤( 咸 士 允 )ㆍ정재학( 鄭 在 學 )ㆍ김기환( 金 基 煥 )ㆍ신장희( 申 章 煕 )ㆍ최낙귀( 崔 洛 龜 )ㆍ이희승( 李 煕 承 )ㆍ최봉찬( 崔 鳳 燦 )ㆍ 이건회( 李 建 會 )ㆍ이은용( 李 垠 鎔 )ㆍ장승원( 張 承 遠 ), 부사정에 이병유( 李 丙 逌 ), 부사용에 김상 목( 金 相 穆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67 / 고종 26년 7월 29일(계유) /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해당 도신과 수신( 帥 臣 )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여러 도의 포폄 계본( 褒 貶 啓 本 )을 뜯어보니, 전 경기 감사 오준영( 吳 俊 泳 )의 계본 가운데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 이의면( 李 宜 沔 )에 대하여 진보( 鎭 堡 )의 작은 일로 더구나 두 번이 나 임하였다 고 평가하였고, 황해 병사 안정옥( 安 鼎 玉 )의 계본 가운데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 김인실( 金 仁 實 )에 대하여 험한 진이라 하지 않고 뜻을 다해 무마했다 고 평가하였고,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 이은구( 李 殷 求 )에 대하여 비방이 거의 없다 고 평가하였고,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 진석주( 陳 錫 柱 )에 대하여 멋대로 거조를 잃었다 고 평가하였으며, 황해 수사 남명선 ( 南 命 善 )의 계본 가운데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 윤사임( 尹 思 任 )에 대하여 다스림에 실로 잘못 이 없다 고 평가하였으니, 모두 중고( 中 考 )에 두어야 하는데 상고( 上 考 )에 두었습니다. 전 전라 우수사 조동훈( 趙 東 勳 )의 계본 가운데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 심종해( 沈 宗 海 )에 대하 여 저와 같이 잔피( 殘 疲 )하게 했다 고 평가하였고,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 김규천( 金 奎 天 ) 에 대하여 근래 진의 모양을 듣자니 거두어들이는 소란이 심하다 고 평가하였고, 전 평안 병사 이교창( 李 敎 昌 )의 계본 가운데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 김봉주( 金 鳳 周 )에 대하여 명예를 비방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고 평가하였고, 막령 만호( 幕 嶺 萬 戶 ) 김기호( 金 基 浩 )에 대하여 일하는 데 혹 관례에 어두우나 어찌 가혹한 평가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평가하였으니, 모두 하고( 下 考 )에 두어야 하는데 상고에 두었습니다. 전최를 엄격하고 분명하게 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각 해당 도신( 道 臣 )과 수신( 帥 臣 )을 모두 추고하여 경책하소서. 허사 첨사 윤사임, 영흥도 첨사 이의면, 문성 첨사 김인실, 임치 첨사 심종해, 천마 첨사 김 봉주, 수양 별장 진석주는 모두 중고로 시행하고, 문산 만호 이은구는 하고로 시행하고, 다 경포 만호 김규천과 막령 만호 김기호는 순전히 폄하하는 말이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알 만합니다. 모두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7월 29일(계유) / 19차 정사에서 이동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9차 정사를 하였다. 이동석( 李 東 錫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김신갑( 金 信 甲 )을 볼 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홍순영( 洪 淳 榮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박영복( 朴 永 福 )을 발포 만호 ( 鉢 浦 萬 戶 )로, 정후권( 鄭 厚 權 )을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삼았다 / 고종 26년 11월 9일(신해) / 신병이 있는 선전관 이근용 등을 개차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선전관 이근용( 李 根 )ㆍ권응규( 權 應 奎 )ㆍ조희빈( 趙 羲 斌 )ㆍ이용복( 李 容 復 ), 내금위장 윤자설

68 68 - ( 尹 滋 卨 ), 오위장 김동욱( 金 東 旭 )ㆍ위홍석( 魏 洪 奭 ), 조사오위장 윤기원( 尹 起 元 )ㆍ김주현( 金 疇 鉉 ), 창덕궁 위장 지한능( 池 漢 能 )ㆍ김일성( 金 日 成 )ㆍ조공진( 曺 羾 振 ), 문신겸선전관 김태제( 金 台 濟 )가 모두 신병으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고, 새로 제수된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 이동석( 李 東 錫 ), 조라포 만호( 助 羅 浦 萬 戶 ) 최두현( 崔 斗 鉉 )이 모두 어미의 병이 매우 위중한 관계로 곁을 떠나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 하였으니 모두 개차하고, 전라병마우후 이민승( 李 敏 承 )은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길에 올 라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실제 병세가 이미 이와 같더라 도 우후의 직임은 일반적인 규례에 따라 개차해서는 안 되니, 파출( 罷 黜 )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11월 9일(신해) / 이규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규준( 李 奎 濬 )ㆍ박선양( 朴 善 陽 )ㆍ임형준( 任 衡 準 )ㆍ이용관( 李 容 觀 )을 동지훈련원사로, 이 승한( 李 升 漢 )ㆍ이주영( 李 周 永 )ㆍ민영일( 閔 泳 一 )ㆍ조희창( 趙 羲 昌 )을 선전관으로, 이병훈( 李 秉 勳 )을 내금위장으로, 신상우( 申 桑 雨 )ㆍ오영선( 吳 榮 善 )ㆍ김진학( 金 鎭 學 )ㆍ최의재( 崔 義 在 )를 오 위장으로, 이규백( 李 奎 白 )을 충장위장으로, 윤길구( 尹 吉 求 )ㆍ윤상연( 尹 相 衍 )을 조사위장으로, 김구안( 金 九 安 )ㆍ최덕준( 崔 德 俊 )ㆍ최봉기( 崔 鳳 基 )를 창덕궁 위장으로, 권재칭( 權 在 稱 )을 경희 궁 위장으로, 유기직( 柳 冀 稷 )을 훈련원 주부로, 장석오( 張 錫 五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박제범 ( 朴 齊 範 )ㆍ심완기( 沈 完 基 )를 수문장으로, 김재붕( 金 在 鵬 )을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강용범( 姜 龍 範 )을 고산리 첨사( 高 山 里 僉 使 )로, 장석우( 張 錫 瑀 )를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으로, 송종순( 宋 鍾 淳 )을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으로, 유협( 柳 )을 전라 병마우후로, 서병기( 徐 丙 基 )를 방답 첨사 ( 防 踏 僉 使 )로, 최두현( 崔 斗 鉉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진석길( 陳 錫 吉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윤자설( 尹 滋 卨 )을 단부하고, 첨지에 이병홍( 李 秉 泓 )을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에 심희방( 沈 希 邦 )ㆍ한창정( 韓 昌 禎 )ㆍ김덕용( 金 德 鏞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김구 현( 金 九 鉉 )ㆍ이근명( 李 根 命 )ㆍ오익영( 吳 益 泳 )ㆍ조희일( 趙 煕 一 )ㆍ박용대( 朴 容 大 )ㆍ서정순( 徐 正 淳 )ㆍ한처유( 韓 處 裕 ), 부호군에 정의묵( 鄭 宜 默 )ㆍ유상백( 兪 相 伯 )ㆍ권응규( 權 應 奎 )ㆍ조희빈( 趙 羲 斌 )ㆍ윤기( 尹 錤 ), 부사직에 윤태흥( 尹 泰 興 )ㆍ조장하( 趙 章 夏 )ㆍ송규회( 宋 奎 會 )ㆍ이의덕( 李 義 悳 )ㆍ송병주( 宋 秉 宙 )ㆍ남정기( 南 廷 綺 ), 부사과에 송태헌( 宋 台 憲 )ㆍ박이양( 朴 彝 陽 )ㆍ김사준( 金 思 準 )ㆍ정규섭( 鄭 圭 燮 )ㆍ송기호( 宋 岐 浩 )를 단부하였다. 전 순천 영장 윤명근( 尹 明 根 )을 지금 어모장군( 禦 侮 將 軍 )으로 강등시켰다. 겸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관향사 친군서영외사( 兼 平 安 道 兵 馬 水 軍 節 度 使 館 餉 使 親 軍 西 營 外 使 )에 민병석( 閔 丙 奭 )을 단부하고, 겸 진무사 친군심영외 사( 兼 鎭 撫 使 親 軍 沁 營 外 使 )에 민영준( 閔 泳 駿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9년 9월 28일(계축)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민영소( 閔 泳 韶 )는 병이고, 참판 정원하( 鄭 元 夏 )는 병이고, 참의 남학희

69 69 - ( 南 學 煕 )는 병이고, 참지 엄석관( 嚴 錫 瓘 )은 나왔고, 행 우승지 이우면( 李 愚 冕 )은 나왔다. 백성희( 白 聖 喜 )를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삼았다. 부호군에 홍시형( 洪 時 衡 )을 단부하였 다. 부사과에 이도( 李 棹 ), 정하묵( 鄭 夏 默 ), 민상호( 閔 商 鎬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30년 2월 18일(신미) / 해연총제사가 하직 인사를 하는 날 새로 만든 병부를 전해 줄 것 등을 청하는 이수홍의 계 이수홍이 아뢰기를, 병조 계목( 兵 曹 啓 目 )으로 인하여, 남양 부사( 南 陽 府 使 )를 판관( 判 官 )으로 삼고, 대부도( 大 阜 島 ) 및 영흥도( 靈 興 島 )의 진( 鎭 )은 혁파하고, 해연총제사( 海 沿 摠 制 使 ) 및 판관의 병부( 兵 符 ) 를 만들어 보내도록 한 내무부 절목( 內 務 府 節 目 )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해연총제사의 병 부는 정원으로 하여금 새로 만들어서 주도록 하고, 남양 판관( 南 陽 判 官 )이 찰 병부는 전 부 사가 차던 것을 전해 주도록 하며, 병영에 지급할 좌척( 左 隻 )은 경리청( 經 理 廳 )에 지급한 것 을 옮겨 보내고, 감영에 지급한 좌척 및 대부도와 영흥도 첨사가 차는 병부로 나누어 지급 했던 것을 모두 거두어서 정원에 올려보내 태우도록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해연총제사가 찰 병부는 새로 만들어서 하직 인사를 하는 날 전해 주고, 판관의 병부는 전 부사가 차던 것을 전해 주도록 하며, 병영에 지급할 좌척은 경리청에 지급한 것을 옮겨 보내고, 감영에 지급 한 좌척 및 대부도와 영흥도 첨사가 차는 병부로 나누어 지급했던 것을 모두 거두어서 올려 보내도록 경기 감사, 해연총제사, 경리사( 經 理 使 )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70 70 - 인천광역시 옹진군 - 덕적도, 굴업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1년 1월 20일(임술) 신석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년 5월 1일(경자) 덕적진과 주문진 중에 한 자리를 경기 감영에 소 속시켜 자벽할 수 있는 변장자리로 만들 것을 청 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1년 5월 20일(을미) 희정당에서 대왕대비전이 수렴하여 약방이 입진 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조두순 등이 입시하여 전운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고종 1년 8월 8일(병자) 경기도 수군절도사 한원식의 장계에 대해, 묘당 을 시켜 좋은 계책에 따라 품처하도록 하라는 전 교 고종 1년 8월 9일(정축) 덕적진 굴업도에 정박하던 이양선이 물건을 약탈 해 간 사건에 대해 경기도 수군절도사 한원식을 엄하게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 고종 4년 6월 13일(을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6년 12월 21일(무오) 윤춘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9년 1월 3일(무자) 2차 정사에서 최운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9년 8월 1일(계축) 경기도 덕적진 등에 별무사 등을 설치했다는 삼 군부의 계 고종 10년 8월 22일(무술) 덕적 첨사 김태형을 파직시킬 것 등을 청하는 진 무사 김선필의 장계 고종 10년 8월 22일(무술) 서리를 보내 덕적진 첨사 김태형을 잡아올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고종 10년 8월 23일(기해) 병조가 덕적 첨사에 한진귀를 제수하였다 고종 10년 9월 19일(갑자) 덕적 첨사 전태형에 대해 형추하여 실정을 캐낼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목 고종 13년 1월 30일(임술) 신조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4년 2월 22일(무신) 덕적도 포구에 표류해 온 사람들에게 사정을 묻 기 위해 경역을 내려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 부의 계 고종 14년 3월 3일(기미) 덕적진에 표류해 온 청인을 육로로 돌려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14년 3월 14일(경오) 인천부 덕적진에 표류해 온 청인을 돌려보내는 절차를 규례대로 거행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14년 3월 17일(계유) 덕적진에 표류해 온 청인들을 홍제원에서 하룻밤 묵게 한 뒤 출발시킬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14년 9월 3일(을묘) 회답 자문을 지어서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 문원의 계 고종 14년 12월 28일(무신)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5년 1월 19일(기사) 신병이 있는 덕적 첨사 강세흠을 파직할 것을 청 하는 병조의 계 고종 15년 1월 19일(기사)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5년 3월 27일(정축) 회답 자문을 지어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 원의 계

71 고종 16년 11월 15일(갑신) 중희당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이최응 등이 입시하여 삼남에서 바치는 세미태의 체납분 을 돈으로 대납하는 문제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 다 고종 17년 4월 27일(갑자) 장계의 격례를 어긴 경기 수군절도사 이규서를 추고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고종 17년 5월 25일(임진) 덕적 첨사 전상신을 잉임하게 할 것을 청한 경기 수군절도사 이규서의 장계에 대해 회계하는 병조 의 계목 고종 17년 6월 16일(계축)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7년 11월 14일(무인) 병비가 8차 정사에서 장봉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 하였다 고종 18년 7월 12일(임신) 서광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8년 7월 15일(을해) 희정당에서 수령 등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서정 순 등이 입시하였다 고종 20년 1월 27일(기유) 포폄에서 엄명하게 전최하지 않은 개성 유수 홍 순형 등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0년 1월 27일(기유) 조희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0년 12월 29일(을해)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방답 첨사 조쾌복과 덕적 첨사 우창배를 서로 바 꾸라는 하교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1년 6월 5일(정축) 경기 수군절도사의 병부 등을 거두어 올려보내도 록 경기 감사에게 하유할 것을 청하는 이정래의 계 고종 23년 6월 14일(을해) 병비가 2차 정사에서 김재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 하였다 고종 25년 1월 29일(신사)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5년 1월 30일(임오) 만경전에서 수령과 변장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홍승오 등이 입시하였다 고종 25년 2월 1일(계미) 전영 소속 양화진을 별영으로 옮겨 소속시키라는 하교 고종 25년 2월 28일(경술) 병조가 덕적 첨사 김계연과 평신 첨사 임봉운을 서로 바꾸었다 고종 25년 6월 18일(무술) 병비가 4차 정사에서 유석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 하였다 고종 25년 8월 20일(기해) 덕적 첨사가 임기가 만료되면 장위영 초장 구근 과에 제수하라는 전교 고종 26년 7월 29일(계유) 26차 정사에서 김철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 다 고종 28년 3월 21일(을유) 어미의 나이가 77세이므로 멀리 떠나 부임할 수 없는 선사포 첨사 최상진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28년 3월 22일(병술)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8년 12월 2일(임진)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9년 12월 5일(기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30년 12월 7일(을묘) 박우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32년 2월 5일(정미) 군무아문이 사도 첨사에 유익윤을 임용하였다

72 고종 33년 12월 11일(신미, 양 력 1월 13일) 고종 36년 9월 19일(갑자, 양력 10월 23일) 고종 36년 12월 21일(갑오, 양 력 1월 21일) 대부도와 영종도를 합하여 대부군으로 만들 것 등을 청하는 전 현감 이응선의 상소 덕적도 벌목 문제를 지연시키고 있는 장례원 경 박기양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궁내부대신임시서 리 학부대신 이건하의 계 영종도 사람들이 상언한 군을 설치하고자 한 안 건은 시행할 수 없다는 의정부 참정 김성근의 계

73 73 - <내 용> / 고종 1년 1월 20일(임술) / 신석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석희( 申 奭 熙 )를 훈련원 정으로, 권교일( 權 敎 一 )을 부장으로, 홍승억( 洪 承 億 )을 문신겸선 전관으로, 김정묵( 金 鼎 默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이명식( 李 明 植 )을 북우후( 北 虞 候 )로 삼았다. 동지에 이재묵( 李 在 默 )을 단부하고, 부장 가설에 이내중( 李 來 重 )을 단부하였다. 이동 백( 李 東 伯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노홍식( 盧 弘 植 )을 고금도 첨사( 古 今 島 僉 使 )로, 오신범 ( 吳 信 範 )을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로, 이인철( 李 仁 哲 )을 서평포 만호( 西 平 浦 萬 戶 )로, 최치우( 崔 致 羽 )를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김태은( 金 泰 殷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이적항( 李 迪 恒 )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배헌명( 裵 憲 明 )을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홍석오( 洪 錫 五 )를 포이 만호( 包 伊 萬 戶 )로, 김응실( 金 應 室 )을 구령 만호( 仇 寧 萬 戶 )로 삼았다. 안주 영장( 安 州 營 將 ) 이태현( 李 泰 鉉 ),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 정태원( 鄭 泰 源 ), 경기 중군( 京 畿 中 軍 ) 이종봉( 李 鍾 鳳 ), 대흥 중군( 大 興 中 軍 ) 정형기( 鄭 亨 基 ), 함경 중군( 咸 鏡 中 軍 ) 이교응( 李 敎 應 )을 절충장군에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김국윤( 金 國 允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박 윤형( 朴 允 亨 )을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로, 김만석( 金 萬 石 )을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호경 환( 胡 敬 環 )을 정포 만호( 井 浦 萬 戶 )로, 김윤( 金 潤 )을 청수 만호( 靑 水 萬 戶 )로 삼았다. 부호군에 이태현( 李 泰 鉉 )ㆍ정태원( 鄭 泰 源 )을 단부하였다. 조명하( 趙 明 夏 )를 선전관으로, 김병익( 金 炳 翊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한정일( 韓 挺 馹 )을 수문장으로, 서상귀( 徐 相 龜 )를 공충 중군( 公 忠 中 軍 )으로, 정재하( 丁 載 夏 )를 황해 중군으로 삼았다. 동지에 장현덕( 張 鉉 德 )을 단부하고 첨지에 유의목( 柳 義 睦 )을 단부하였다. 김한순( 金 漢 珣 )을 동지, 변홍규( 邊 弘 圭 )를 첨지로, 민응호( 閔 應 鎬 )ㆍ남건중( 南 建 中 )을 오위장으로, 이계연( 李 季 淵 )을 전라 중군( 全 羅 中 軍 )으로, 윤풍성( 尹 豐 性 )을 첨지로, 이서주( 李 垿 柱 )ㆍ손영조( 孫 榮 祚 )ㆍ신재지( 愼 㦳 芝 )를 오위장으로, 홍희룡( 洪 羲 龍 )을 갈파지 첨사( 波 知 僉 使 )로, 최규상( 崔 圭 祥 )을 첨지로, 이한기( 李 漢 綺 )를 오위장으로, 이 완구( 李 完 求 )를 충장위장으로, 이지혁( 李 志 赫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봉규( 李 鳳 奎 )를 부장으 로, 윤석오( 尹 錫 五 )를 훈련원 부정으로, 백초수( 白 初 洙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민영( 李 敏 永 ) 을 도감 파총으로, 석응기( 石 應 麒 )를 마량 첨사( 馬 梁 僉 使 )로, 황이연( 黃 履 淵 )을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삼았다. 부호군 김상덕( 金 相 德 )ㆍ이일순( 李 一 純 )을 단부하였다. 조희복( 趙 羲 復 )ㆍ 최치영( 崔 致 永 )을 선전관으로, 정근원( 鄭 根 源 )을 부장으로, 여은섭( 呂 殷 燮 )을 우변포도청 종 사관으로, 안주관( 安 周 觀 )을 대현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삼았다 / 고종 1년 5월 1일(경자) / 덕적진과 주문진 중에 한 자리를 경기 감영에 소속시켜 자벽할 수 있는 변장자리로 만들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 조재응( 趙 在 應 )의 상소를 보니, 말하기를, 덕적진( 德 積 鎭 )과 주문진( 注 文 鎭 ) 중에 한 자리를 본영에 소속시켜 제 도( 道 )의 영곤( 營 梱 ) 및 사도( 四 都 )의 예에 의거하 여 특별히 감영이나 병영에서 자벽할 수 있는 변장( 邊 將 ) 자리로 만들어 감영의 여러 장교

74 74 - ( 將 校 )들이 천전( 遷 轉 )할 수 있게 해 달라. 고 한데 대한 비지( 批 旨 )에 진달한 바가 매우 좋 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라. 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경기의 각영 및 사도 의 유수의 영문에는 각각 구근( 久 勤 )도 있고 또 자벽( 自 辟 )도 있는데, 경기 감영은 다만 구 근만 있으니 의당 소외되는 한탄이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연전( 年 前 )에 이미 경연에서 아 뢰었는데 지금까지 시일을 끌고 있으니 전에 없던 일입니다. 소청대로 시행하게 하고 양진 ( 兩 鎭 ) 중에서 그들로 하여금 참작하여 배정( 排 定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년 5월 20일(을미) / 희정당에서 대왕대비전이 수렴하여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조두순 등이 입시하여 전운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진시( 辰 時 ). 상이 희정당( 熙 政 堂 )에 나아갔다. 대왕대비전이 수렴( 垂 簾 )하고 약방에서 입진( 入 診 )하였다. 대신, 의정부ㆍ비변사의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함께 입시할 때에 도제조 조두순( 趙 斗 淳 ), 제 조 윤의선( 尹 宜 善 ), 부제조 정태호( 鄭 泰 好 ), 가주서 목승석( 睦 承 錫 ), 별겸춘추 조희일( 趙 熙 一 ) ㆍ홍헌종( 洪 軒 鍾 ), 직각 이세용( 李 世 用 ), 우승지 강난형( 姜 蘭 馨 ), 가주서 안기영( 安 驥 泳 ), 사 변가주서 이태영( 李 泰 永 ), 별겸춘추 조희일( 趙 熙 一 )ㆍ홍헌종( 洪 軒 鍾 ), 좌의정 조두순( 趙 斗 淳 ), 행 호조판서 이돈영( 李 敦 榮 ), 행 병조판서 정기세( 鄭 基 世 ), 행 형조판서 김병교( 金 炳 喬 ), 지 중추부사 조석우( 曺 錫 雨 ), 행 대호군 신석희( 申 錫 禧 ), 남릉군 홍종서( 洪 鍾 序 ), 한성부 판윤 조헌영( 趙 獻 永 ), 행 대호군 임태영( 任 泰 瑛 )ㆍ허계( 許 棨 ), 행 호군 이경하( 李 景 夏 ), 교리 장세 용( 張 世 容 )이 차례로 나와 부복하고, 의관 정유증( 鄭 有 曾 )ㆍ이경혁( 李 景 爀 )ㆍ홍익보( 洪 翼 普 ) ㆍ정석윤( 丁 錫 胤 )이 나와 영외( 楹 外 )에 부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조두순( 趙 斗 淳 )이 앞으로 나아가 문후하기를 마치고 아뢰기를, 의관이 대령하였으니 그들로 하여금 입진하게 할까요? 하니, 상이 가하게 여겼다. 정유증( 鄭 有 曾 )이 차례로 진후( 診 候 )하고 물러나 영외에 부복하 기를 마치자 조두순( 趙 斗 淳 )이 말하기를, 맥후( 脈 候 )를 아뢰시오. 하니, 정유증 등이 아뢰기를, 맥후는 좌우 삼부( 左 右 三 部 )가 조균( 調 均 )하였습니다. 하니, 조두순이 말하기를, 탕제는 별도로 의논하여 결정할 것이 없는가? 하자, 정유증 등이 아뢰기를, 탕제는 별도로 의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조두순이 아뢰기를, 하지가 벌써 지나고 규벽( 圭 璧 )을 여러 번 거행하였지만 어제 내린 비가 티끌을 적시는 데 불과하였으니 민망스럽고 염려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비가 두루 흡족하게 내리지 않아서 농사가 매우 염려된다.

75 75 -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근간에 들으니 지방의 고을에는 간혹 흡족하게 내린 곳이 있다고 하며, 경기 가까운 곳에 서는 수근처( 水 根 處 )가 있어 모내기를 많이들 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인해서 아뢰기를, 신이 며칠 전에 삼가 대왕대비께서 내린 교지를 받들었는데, 의금부의 죄인 문안( 文 案 ) 가 운데서 신원하고 복관하기에 적합한 자를 탄신일 전에 논리( 論 理 )하여 입계하도록 하교하셨 습니다. 이는 참으로 국가를 소유한 입장에서 막중한 은전이며 막대한 형정입니다. 아마도 신과 같이 보잘것없고 비루한 자질로는 감히 오로지 하여 결단할 바가 아니니, 원임의 여러 재상들과 문안을 참고하고 익숙하게 상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기 때문에 앙달합니다. 하니,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번에 이 일은 내가 주상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려고 하여 왕위에 오른 첫 해의 명을 기원하는 근본을 삼으니 대신은 이를 알아서 대양하라. 무릇 해가 오래되어 분명하지 않은 일은 상세히 살피고 의언하여 상서와 화기를 인도하고 맞이하는 바탕이 되도 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이번의 하교는 탑교( 榻 敎 )로 써서 내려 반시( 頒 示 )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는 것이 아마도 좋 을 듯합니다. 하니,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이미 연설( 筵 說 )이 있었으니 저절로 모두 알게 될 것이다. 하자, 조두순이 아뢰기를, 이번의 자교( 慈 敎 )에 하늘에 영명( 永 命 )을 기원하고 상서와 화기를 인도하여 맞이하는 지극 한 뜻은 아무리 어리석은 지아비나 어리석은 지어미라 하더라도 누군들 그 덕을 숭앙하며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일은 형정( 刑 政 )에 관계가 되니 십분 심극( 審 克 )을 이루도 록 해야 하기 때문에 구구하게 앙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죄가 가벼운데도 억울하게 죽은 자와 중죄에 해당되더라도 5세( 世 )가 된 자는 모두 조사하 고 바로잡아 억울함을 펴게 해서 한 사람도 원통함을 품은 자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원임 동료 재상들과 서로 참고하여 상의하여 바로잡겠다는 것을 이미 앙달하여 윤허를 받 았습니다. 이것은 중앙과 지방에 반시( 頒 示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연설을 거조( 擧 條 )에 낼 까요? 일전의 전교 가운데 더 써넣어 낼까요? 하니,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일전의 전교와 오늘의 연설을 합쳐서 참작해 보면 다시 하교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대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경강( 京 江 )에 집주선( 執 籌 船 )을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주교( 舟 橋 )를 위해서 그렇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고 양남( 兩 南 )의 조운 사례가 지극히 중요해서입니다. 그런데 법이 오래되면 폐 단이 생기기 마련인데 지금 바로잡거나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남녘 사람에게는 배를 부리게 하고 북녘 사람들에게는 말을 부리게 하라. 고 하

76 76 - 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성격과 습관이 각기 저절로 같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장( 領 將 ) 가운데서 정해진 인원 외의 명색( 名 色 )을 가출( 加 出 )하는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그 수효를 원래의 관직 수와 비교하면 거의 서로 맞습니다. 그러 나 모두 성내의 한량이나 산관으로 할 일 없이 놀고 먹는 자들이라 주즙( 舟 檝 )이 어떤 일인 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배를 타고 파도를 헤치게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만들게 하니 그 피해는 강가의 고을에 미칩니다. 그리고 선주의 공적인 곡식이 해마 다 축이 나는 것도 오로지 배를 부리는 사람에게만 책임 지울 수 없습니다. 말하기 어려운 허다한 폐단은 하나하나 모두 열거하지 못하니 한 차례 경장( 更 張 )이 있지 않으면 앞으로 강회( 江 淮 )의 전운이 이뤄지게 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해사의 당 상과 더 진지하게 상의해서 다시 계품드리겠지만 우선 먼저 진달합니다.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세곡을 꾸려 실을 때에 해당 고을에서 반드시 감합기( 勘 合 記 )를 도사공( 都 沙 工 )의 처소에다 바치게 하는데, 몇 되나 몇 홉의 곡식이라도 만약 거둬들이지 못한 것이 있으면 사공인 자 가 다짐을 만들어 받아 줄 리가 없으며, 한 번 감합이 있은 이후에는 그 허실과 영축이 애 당초의 해당 고을에서 상관할 바의 일이 아닙니다. 근간에 와서 사공 무리의 포흠이 서로 잇달지만 징쇄하지 못하여 경사( 京 司 )에서 해당 고을에다 공문을 보내어 엄중히 독촉하므로 가끔 민간에 다시 징수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것은 사리에 있어 막심하기 이를 데 없다 하겠 습니다. 신이 몇 년 전에 이 일을 가지고 품주하여 거듭 금지하도록 한 바가 있었지만 전해 듣기로는 소요가 그전과 같다고 합니다. 이 뒤로는 감합한 선척이 있으면 절실하게 해당 고 을을 침탈하거나 책임지우지 말도록 하는 뜻을 낱낱이 각 아문에 알리도록 하고 또한 양남 에도 공문을 보내어 한 사람의 주민이라도 몰랐다는 탄식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돈과 곡식을 다루는 아문의 정비( 情 費 ) 명색은 그 정해진 법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리의 무리가 두려워하거나 거리낌 없이 과외로 침탈하며 징수하여 해마다 보태고 늘리는 것이 한 이 없습니다. 아무리 곡( 斛 )에 차는 쌀과 치수에 차는 무명이나 베라 하더라도 정비가 욕심 에 만족스럽지 않으면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퇴짜를 놓아 몇천 석의 곡식과 몇백 필의 베가 창고에 받아들여지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세월만 보내게 됩니다. 관에서도 심상하게 보아 오 직 장리( 掌 吏 )의 말만 듣고 필경에 바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욕심을 채운 뒤 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 고을 색리의 경우는 촌락에서 낸 것을 사채로 놓아 10배의 이식을 적용해서 주민들에게 바치도록 독촉을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팔도 민정의 위급함 이 모두 이런 등의 일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다시 전날의 풍습을 따 라 어려워함이 없이 법을 위반하면 낭관은 태거( 汰 去 )하고 해리는 형배( 刑 配 )하게 하소서. 그리고 본사에 있었던 무술년(1838, 헌종4) 절목이 몇 해 전 화재로 타 버려 지금 의거하 여 표준삼을 데가 없으니 전곡( 錢 穀 )을 맡은 각 아문으로 하여금 그 정비( 情 費 ) 책자를 가져 다 바치게 하여 서로 참작해서 산정( 刪 定 )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77 77 - 그대로 하되 각별히 신칙하여 다시는 지나치게 바치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하 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선정신 문헌공( 文 獻 公 ) 정여창( 鄭 汝 昌 )ㆍ문간공( 文 簡 公 ) 성혼( 成 渾 )은 백세토록 사림이 종앙 ( 宗 仰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전후 여러 선정의 치제( 致 祭 ) 때에 미처 함께 거행하지 못하였 으니 아마도 이는 겨를하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그들의 사판( 祠 版 )이 있는 곳에 지방관 을 일체로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여 즉위한 처음에 성대한 의식을 빛내도록 하는 것이 아 마도 좋을 듯하기 때문에 다시 이를 앙달합니다.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증 영의정 문헌공 윤행임( 尹 行 恁 )이 정조[ 正 廟 ]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우( 知 遇 )를 받아 경신년(1800, 정조24) 이후로 변함이 없는 충성심으로 오직 선왕의 일을 추모하고 계승하 는 데 두었으며, 이제 신원하고 복관한 지 이미 오래 된 뒤에도 오히려 한 차례 뜻을 보이 는 거사가 없었으니 실로 결함이 있는 은전이 됩니다. 들으니 본가에서 장차 연시( 延 諡 )를 행하려고 한다 하니 시호를 내려 주는 날 아울러 사제( 賜 祭 )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듯하기 때문에 앙달합니다.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공시 당상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대임으로 상호군 김학성( 金 學 性 )을 차하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형조 참판 민치구( 閔 致 久 )가 특자( 特 資 )한 뒤에 추영( 追 榮 )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후사가 된 집안에는 양대( 兩 代 )가 이미 국전( 國 典 )으로 추증을 받았으니 근간의 사례대로 그 의 본생조( 本 生 祖 )에게 옮겨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조두순이 아뢰기를, 부총관 원세현( 元 世 顯 )에게 추영하여야 마땅한데 후사가 된 집안에 시행할 만한 대상이 없 다고 하니 근간의 사례대로 그의 본생가에다 옮겨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강난형( 姜 蘭 馨 )이 아뢰기를, 여러 재상이 일을 아뢰겠습니다. 하니, 정기세( 鄭 基 世 )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경기 감사 조재응( 趙 在 應 )의 상소로 인하여 덕적( 德 積 )ㆍ주문( 注 文 )의 첨사 가운

78 78 - 데 한 자리는 본영에서 자벽( 自 辟 )하게 하여 열교( 列 校 )들을 천전시킬 것을 묘당에서 적합하 게 헤아려 배정하는 뜻으로 복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덕적ㆍ주문은 모두 적사 ( 積 仕 )하는 금군 및 경교( 京 校 )들이 천전하는 자리이므로 지금 이 두 자리를 갑자기 논의하 는 것은 실로 어렵습니다. 장봉 만호는 바로 교영( 喬 營 )에서 관할하는 진이니 이것으로 정 하고 과만( 瓜 滿 )을 기다려 자벽하게 하며 전최는 그전대로 교동의 곤수로 하여금 주관하라 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정기세가 아뢰기를, 전 첨사 이희눌( 李 熙 訥 )을 신자( 新 資 )하여 경주 영장으로 임명하고 일정한 달수가 차서 훈 융 첨사로 옮겨 임명하였는데 체임되어 돌아온 뒤에 영장 때의 사건에 소급 연좌되어 파면 되고 수자( 收 資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연품하여 자품을 복구해 준 사례가 많이 있 으니 자품을 복구시켜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강난형이 아뢰기를, 옥당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뢰겠습니다. 하니, 장세용( 張 世 容 )이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은 필부나 서민과는 다르니 그 정치를 창출하는 근본은 반드시 학문하는 가운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방금 효경( 孝 經 ) 을 이미 강독하고 잇달아 소학 을 강독하는 데 대체로 효경 의 뜻은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뜻에 근본하였으며, 또 소학 의 방향은 바로 마음을 공경하고 몸을 가다듬는 절차인데 실제로 대학( 大 學 ) 의 몸을 가다 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도리 와 서로 안팎이 되 기 때문에 우리 영종 대왕께서 이 책을 거듭 강독하시어 외우기를 자신의 말과 같이 하셨는 데 80세에 이르러서도 부지런히 하며 그만두지 않으셨습니다. 50년 동안 다스린 법이 실제 로 여기에서 기본이 되었으니 반드시 여기에서 법을 삼고 공경히 받든다면 태평스럽고 이상 적인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삼가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훌륭하니 의당 유념하겠다. 하였다. 강난형이 아뢰기를, 오늘 빈대에 양사( 兩 司 )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패초 를 어긴 대간들을 모두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전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염교( 簾 敎 )에 나옴 -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고,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신하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니, 차례로 물러 나왔다 / 고종 1년 8월 8일(병자) /

79 79 - 경기도 수군절도사 한원식의 장계에 대해, 묘당을 시켜 좋은 계책에 따라 품처하도록 하라는 전교 경기도 수군절도사 한원식( 韓 元 植 )이 덕적진( 德 積 鎭 ) 굴업도( 屈 業 島 )에 와서 정박하던 이양선( 異 樣 船 )이 섬 안으로 갑자기 들어와 민가 등에 저장하고 있던 물건을 빼앗아 갔다. 고 장계한 일 때문에 이규석에게 전교하기를, 변정( 邊 情 )에 관계되는 일이니, 묘당을 시켜 좋은 계책에 따라 품처( 稟 處 )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 1년 8월 9일(정축) / 덕적진 굴업도에 정박하던 이양선이 물건을 약탈해 간 사건에 대해 경기도 수군절도사 한원식을 엄하게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 또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경기도 수군절도사 한원식( 韓 元 植 )이 덕적진( 德 積 鎭 ) 굴업도( 屈 業 島 )에 와서 정박하던 이 양선( 異 樣 船 )이 갑자기 섬 안으로 들어와 백성들의 집에 저장하고 있던 물건을 빼앗아 갔 다. 고 장계한 일 때문에 전교에 변정( 邊 情 )에 관계되는 일이니 묘당을 시켜 좋은 계책에 따라 품처하게 하라. 고 명하셨습니다. 뭍으로 내려가 약탈한 곳이 마침 여섯 가구의 잔약한 섬이었으나, 풍요한 곳이었더라도 이러한 걱정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해방( 海 防 )이 허 술한 것을 말하면 한심합니다. 다만 돛에 바람을 받고 달려가는 것이 아득하여 자취를 볼 수 없었으니, 이는 본디 사세가 그럴 만하나, 방비하는 도리로서는 익숙해져 예사로 여겨서 는 안 되니, 연경( 沿 境 )의 각처에 특별히 망보고 살피도록 엄하게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바 닷길이 멀다 하더라도 지난달 그믐날의 일을 이제야 비로소 아뢰었으니, 매우 지체한 것입 니다. 그 수군절도사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다 하여 참작해서 용서할 수 없으니 엄하게 추고하고, 그 진( 鎭 )의 첨사( 僉 使 )는 그 수군절도사를 시켜 결곤( 決 棍 )하여 징계하고 격려하 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4년 6월 13일(을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김병주는 나왔다. 심경택( 沈 敬 澤 )을 도총관으로, 윤정구( 尹 正 求 )ㆍ김상현( 金 尙 鉉 )ㆍ성재옥( 成 載 玉 )을 부총관으 로, 이희관( 李 熙 觀 )을 선전관으로, 이효원( 李 孝 源 )ㆍ나응경( 羅 膺 涇 )ㆍ장언식( 張 彥 植 )ㆍ홍경조 ( 洪 景 祖 )를 오위장으로, 윤영신( 尹 榮 信 )ㆍ권명국( 權 命 菊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인무( 李 寅 懋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황정구( 黃 廷 耈 )를 수문장으로, 홍규( 洪 圭 )를 청산도 첨사( 靑 山 島 僉 使 )로, 필해진( 畢 海 鎭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삼았다. 부사과에 신건( 申 楗 )을 단부하였다.

80 / 고종 6년 12월 21일(무오) / 윤춘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윤춘수( 尹 春 壽 )를 훈련원 도정으로, 조병칠( 趙 秉 七 )을 선전관으로, 유기묵( 柳 冀 默 )을 오위 장으로, 이민식( 李 敏 植 )을 충익위장으로, 박인원( 朴 寅 遠 )을 안동 영장( 安 東 營 將 )으로, 김원묵 ( 金 源 默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허전( 許 㥏 )을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으로, 이규선( 李 奎 璿 ) 을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으로, 유기백( 柳 冀 伯 )을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으로, 이희갑( 李 熙 甲 )을 경기 중군으로, 송정현( 宋 正 鉉 )을 평안도 병마우후로, 홍영석( 洪 永 錫 )을 내금위장으로, 조병 동( 趙 秉 東 )을 오위장으로, 조익현( 趙 翼 顯 )을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박명하( 朴 鳴 夏 )를 서원 영장( 西 原 營 將 )으로, 정택원( 鄭 澤 源 )을 전라도 병마우후로, 윤치직( 尹 致 稷 )을 훈련원 정으로, 조장영( 趙 鏘 永 )을 오위장으로, 이재정( 李 載 貞 )을 충익위장으로, 박기묵( 朴 基 默 )을 창덕궁 위 장으로, 김규순( 金 奎 淳 )을 공충 중군으로, 원석현( 元 錫 玄 )을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이 병희( 李 秉 喜 )를 임자도 첨사( 荏 子 島 僉 使 )로, 이창식( 李 昌 植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이지 수( 李 芝 秀 )를 서평포 만호( 西 平 浦 萬 戶 )로, 김명희( 金 命 熙 )를 입암 별장( 笠 巖 別 將 )으로, 김세 욱( 金 世 旭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김기홍( 金 基 泓 )을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로, 전경억( 田 慶 億 )을 목포 만호( 木 浦 萬 戶 )로, 노재봉( 盧 在 奉 )을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송은손( 宋 殷 孫 ) 을 정방 별장으로, 심능무( 沈 能 武 )ㆍ오성초( 吳 聖 初 )를 오위장으로, 천의대( 千 儀 大 )를 창덕궁 위장으로, 이용겸( 李 容 謙 )을 도총부 경력으로, 정봉우( 鄭 鳳 愚 )를 북우후로, 왕제운( 王 濟 運 )을 오위장으로, 김진민( 金 鎭 民 )을 충장위장으로, 하성일( 河 成 一 )을 경희궁 위장으로, 신림( 申 林 ) 을 훈련원 첨정으로, 채규봉( 蔡 奎 鳳 )을 삼군부 종사관으로, 부용백( 夫 龍 伯 )을 오위장으로, 신 낙희( 申 樂 熙 )를 훈련원 부정으로, 원도상( 元 度 常 )을 도총부 경력으로, 김홍회( 金 弘 淮 )를 훈련 원 판관으로, 조숙하( 趙 肅 夏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안윤식( 安 潤 植 )을 광양 첨사( 廣 梁 僉 使 )으 로, 김용필( 金 龍 弼 )을 미전 첨사( 美 錢 僉 使 )로, 나치순( 羅 致 淳 )을 두모포 만호( 豆 毛 浦 萬 戶 )로, 호치달( 胡 致 達 )을 옥강 만호( 玉 江 萬 戶 )로, 강효건( 康 孝 鶱 )을 장수 별장으로, 조형준( 曺 衡 俊 ) 을 부산 첨사( 釜 山 僉 使 )로, 박승렴( 朴 承 濂 )을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로, 김기주( 金 基 柱 )를 청수 만호( 靑 水 萬 戶 )로, 이동규( 李 東 奎 )를 산양회 만호( 山 羊 會 萬 戶 )로, 박광연( 朴 光 淵 )을 구월 별 장( 九 月 別 將 )으로, 임기주( 林 基 宙 )를 도총부 도사로, 이근풍( 李 根 豐 )을 총융청 파총으로, 최 상린( 崔 祥 麟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박봉섭( 朴 鳳 燮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허정( 許 怔 ) 을 방산 만호( 方 山 萬 戶 )로, 정준기( 鄭 準 基 )를 선전관으로, 정익현( 鄭 益 鉉 )을 훈련원 주부로, 양도윤( 梁 道 潤 )을 수문장으로, 변창식( 邊 昌 式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윤병섭( 尹 秉 燮 )을 훈련도감 파총으로, 조존복( 趙 存 復 )을 훈련원 판관으로, 박광진( 朴 光 鎭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한용( 李 漢 用 )을 수문장으로, 한흥교( 韓 興 敎 )ㆍ이중억( 李 重 億 )을 훈련원 주부로, 윤용선( 尹 容 善 )ㆍ김두희( 金 斗 喜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오정선( 吳 正 善 )을 어영청 파총으로, 윤전( 尹 㙉 )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택성( 金 宅 性 )을 판관으로, 박장운( 朴 章 雲 )을 수문장 가설로, 민창호 ( 閔 敞 鎬 )ㆍ이규대( 李 奎 大 )를 선전관으로, 이관응( 李 觀 應 )을 무신겸선전관 가설로, 장용일( 張 龍 一 )ㆍ위종식( 魏 鍾 植 )을 부장으로, 민치검( 閔 致 儉 )ㆍ최성환( 崔 星 煥 )을 부장 가설로, 최길진 ( 崔 吉 鎭 )을 수문장으로, 김상묵( 金 相 默 )ㆍ방우량( 龐 友 亮 )을 수문장 가설로 삼았다. 인화보 권 관에는 전인실( 田 麟 實 )을, 인차외 권관에는 배상규( 裵 祥 奎 )를, 구갈파지 권관에는 최석묘( 崔 錫 苗 )를, 갈헌동 권관에는 정지홍( 鄭 芝 弘 )을, 중령 별장에는 최승관( 崔 承 寬 )을, 부전령 별장 에는 최재영( 崔 載 榮 )을, 임해 별장에 이기현( 李 基 炫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최응균( 崔 應 均 ), 주부 고상겸( 高 尙 謙 )ㆍ최수룡( 崔 秀 龍 )ㆍ김승렬( 金 承 烈 ), 이상을 정식에 따라 감하하였다.

81 81 - 김승렬( 金 承 烈 )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이관수( 李 寬 壽 )ㆍ김영엽( 金 泳 曄 )ㆍ박한종( 朴 漢 鍾 )을 주부 가설로 삼았다. 동지에 엄진일( 嚴 鎭 一 )을 단부하고, 첨지 세 자리에 임용준( 任 龍 準 )ㆍ 왕은주( 王 殷 疇 )ㆍ이헌우( 李 獻 宇 )를 단부하였다. 부사정에 홍병직( 洪 秉 稷 )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에 신응원( 申 膺 源 )을 단부하였다. 본원에서 거관한 평안 중군( 平 安 中 軍 ) 양주태( 梁 柱 台 ) 와 청성 첨사( 淸 城 僉 使 ) 안낙풍( 安 樂 豐 ), 이상은 한 임기에 한하여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 았다. 수문장 가설에 최우형( 崔 禹 亨 )을 단부하였다. 아산 만호( 阿 山 萬 戶 ) 이종진( 李 宗 珍 )과 황척파 권관 김달규( 金 達 奎 )를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 허전( 許 㙉 ),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 이규선( 李 奎 璿 ),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 유기백( 柳 冀 伯 ), 서원 영장( 西 原 營 將 ) 박명하( 朴 鳴 夏 ), 경기 중군 이희갑( 李 熙 甲 ), 평안도 병 마우후 송정현( 宋 正 鉉 ),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 이다. 동지 여섯 자리에 오성초( 吳 聖 初 )ㆍ차우식( 車 友 植 )ㆍ홍재신( 洪 在 愼 )ㆍ장인갑( 張 寅 甲 )ㆍ 박기묵( 朴 基 默 )ㆍ하성일( 河 成 一 )을 단부하고, 가설직 다섯 자리에 이용근( 李 庸 根 )ㆍ신중래( 辛 重 來 )ㆍ이운정( 李 運 鼎 )ㆍ정성( 鄭 城 )ㆍ한명진( 韓 命 鎭 )을 단부하고, 첨지 여섯 자리에 유기묵 ( 柳 冀 默 )ㆍ심능무( 沈 能 武 )ㆍ부용백( 夫 龍 伯 )ㆍ정현유( 鄭 顯 裕 )ㆍ변익환( 邊 益 煥 )ㆍ이재정( 李 載 貞 )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권종응( 權 鍾 應 )ㆍ장기락( 張 基 洛 )ㆍ오영선( 吳 榮 善 )ㆍ윤규선( 尹 奎 善 ) ㆍ신철( 申 㯙 )ㆍ이규설( 李 奎 卨 )ㆍ우충식( 禹 忠 植 )ㆍ양재한( 梁 在 漢 )ㆍ이춘영( 李 春 英 )ㆍ이봉희( 李 鳳 熙 )ㆍ허원( 許 洹 )ㆍ허권( 許 )ㆍ김홍신( 金 弘 信 ), 이상을 단부하였다 / 고종 9년 1월 3일(무자) / 2차 정사에서 최운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2차 정사를 하였다. 최운한( 崔 雲 翰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전태형( 全 泰 亨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차시창( 車 始 昌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의 세 자리에 조병두( 曺 秉 斗 )ㆍ윤병두( 尹 秉 斗 )ㆍ김증현( 金 曾 鉉 )을 단부하였다 / 고종 9년 8월 1일(계축) / 경기도 덕적진 등에 별무사 등을 설치했다는 삼군부의 계 삼군부가 아뢰기를, 경기도 덕적진( 德 積 鎭 )이 별무사 112명을, 경상도 가산산성진( 架 山 山 城 鎭 )이 포수 20명을, 황해도 황주목( 黃 州 牧 )이 화포군 131명을, 평안도 개천군( 价 川 郡 )이 신미년 11월에 설치한 30명 외에 이번에 더 설치한 20명을 합한 호위사 50명을, 그리고 자모산성진( 慈 母 山 城 鎭 ) 이 포수 20명을 설치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0년 8월 22일(무술) / 덕적 첨사 김태형을 파직시킬 것 등을 청하는 진무사 김선필의 장계

82 82 - 진무사 김선필( 金 善 弼 )의 장계에,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김태형( 金 泰 亨 )이 환곡을 규정 이상으로 대출해 주고 조세를 강제로 징수하고 형장( 刑 杖 )을 남발하였으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 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전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대임자를 구전으로 차출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내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 고종 10년 8월 22일(무술) / 서리를 보내 덕적진 첨사 김태형을 잡아올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의금부가 아뢰기를, 진무사 김선필( 金 善 弼 )의 장계에, 덕적진 첨사( 德 積 鎭 僉 使 ) 김태형( 金 泰 亨 )을 먼저 파직시 킨 뒤에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를 계하하셨습니다. 그가 지금 임소( 任 所 )에 있으니, 규례대로 본부의 서리( 書 吏 )를 보내어 임무를 교대한 후에 잡아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대명( 待 命 )하기를 기다려 나수하라. 하였다 / 고종 10년 8월 23일(기해) / 병조가 덕적 첨사에 한진귀를 제수하였다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한진귀( 韓 鎭 龜 )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삼았다 / 고종 10년 9월 19일(갑자) / 덕적 첨사 전태형에 대해 형추하여 실정을 캐낼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목 의금부 계목에,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전태형( 全 泰 亨 )이 원정( 原 情 )에 운운하였습니다. 전지 내의 죄상에 대 해 범범하게 지만이라 하였으니, 형추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판부하기를, 하찮은 소교( 小 校 )가 진( 鎭 )에 있으면서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이렇게 죄를 범하게 되 었으니, 그 죄를 따져보면 너무도 통탄스럽다. 엄히 한 차례 형문한 뒤 원악지( 遠 惡 地 )로 정 배( 定 配 )하라. 하였다.

83 / 고종 13년 1월 30일(임술) / 신조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조현( 申 祖 顯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승수( 李 升 洙 )ㆍ조희풍( 趙 羲 豐 )을 부총관으로, 구주원 ( 具 冑 元 )을 내금위장으로, 이호신( 李 浩 臣 )을 오위장으로, 조존우( 趙 存 禹 )를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신임( 申 林 )을 나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이규봉( 李 奎 鳳 )을 경기 중군으로, 이재정( 李 在 靖 )을 평안 중군으로, 이용헌( 李 龍 憲 )을 북병영 우후로, 임건수( 林 謇 洙 )ㆍ정재영( 丁 載 榮 )을 부총관으로, 이주식( 李 周 植 )을 함경 중군으로, 장두표( 張 斗 表 )를 통제영 우후로, 이종무( 李 宗 懋 )를 평안도 병마우후로, 박유성( 朴 有 性 )을 동지중추부사로, 김재환( 金 在 煥 )ㆍ신용래( 申 用 來 )를 오위장으로, 오정선( 吳 正 善 )을 훈련원 정으로, 이규성( 李 奎 性 )을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홍문섭( 洪 文 燮 )ㆍ장환규( 張 煥 奎 )를 오위장으로, 김교영( 金 敎 英 )을 충장위장으로, 김재우( 金 在 遇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조형오( 趙 亨 五 )를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으로, 정대관( 丁 大 寬 )을 첨지 중추부사로, 윤필구( 尹 弼 求 )ㆍ한유동( 韓 逌 東 )을 오위장으로, 조창하( 趙 昌 夏 )를 문신겸선전관 으로, 유기천( 柳 冀 天 )을 성진 첨사( 城 津 僉 使 )로, 정창조( 鄭 昌 祖 )를 동지중추부사로, 이주혁( 李 周 赫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태권( 李 泰 權 )을 부장으로, 방수영( 方 秀 英 )을 수문장으로, 조응하( 趙 應 夏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유기찬( 柳 冀 贊 )ㆍ전상문( 田 尙 文 )을 오위장으로, 정 인성( 鄭 寅 性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유완수( 柳 完 秀 )를 어영청 파총으로, 박영수( 朴 瑩 壽 )를 수 문장으로, 전석칠( 田 錫 七 )을 첨지중추부사로, 윤재선을 충장위장으로, 원준상( 元 俊 常 )을 훈련 원 첨정으로, 한봉득( 韓 鳳 得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김종관( 金 鍾 寬 )을 임자도 첨사( 荏 子 島 僉 使 )로, 전익조( 全 翊 朝 )를 오위장으로, 장대현( 張 大 鉉 )ㆍ김경현( 金 敬 鉉 )을 창덕궁 위장으 로, 강종( 姜 鍾 )ㆍ용서오( 龍 瑞 五 )를 경희궁 위장으로, 강영규( 康 泳 奎 )를 오위장으로, 이용관( 李 容 觀 )을 훈련원 부정으로, 하석영( 河 錫 泳 )을 도총부 도사로, 조희준( 趙 羲 準 )을 무신겸선전관 으로, 김응섭( 金 應 燮 )을 신지도 만호( 新 智 島 萬 戶 )로, 심헌지( 沈 憲 之 )를 오위장으로, 김홍구( 金 鴻 求 )를 선전관으로, 신홍균( 申 鴻 均 )을 훈련원 주부로, 박문발( 朴 文 發 )을 고성 첨사( 古 城 僉 使 )로 전기예( 田 基 豫 )를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로, 서오보( 徐 五 輔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재승 ( 李 載 升 )을 오위장으로, 심인택( 沈 寅 澤 )을 도총부 경력으로, 윤자익( 尹 滋 翊 )을 수문장으로, 강효기( 康 孝 箕 )를 고풍산 만호( 古 豐 山 萬 戶 )로, 박민덕( 朴 敏 德 )ㆍ정광은( 鄭 光 殷 )을 오위장으 로, 이기동( 李 起 東 )을 선전관으로, 김태희( 金 泰 熙 )를 도총부 도사로, 이병수( 李 秉 秀 )를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 김세진( 金 世 鎭 )을 오위장으로, 박종석( 朴 宗 碩 )을 창덕궁 위장으로, 홍우석( 洪 禹 錫 )을 창덕궁 위장으로, 송병찬( 宋 秉 瓚 )을 좌익위로, 민관호( 閔 觀 鎬 )를 좌위솔로, 김동훈 ( 金 東 勳 )을 동지중추부사로, 정유성( 鄭 惟 成 )ㆍ백성수( 白 聖 洙 )를 경희궁 위장으로, 정운경( 鄭 雲 景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승영( 李 升 榮 )을 부장으로, 허경( 許 璥 )을 훈련원 첨정으로, 신응 균( 申 膺 均 )을 훈련원 주부로, 이원식( 李 元 植 )을 고금도 첨사( 古 今 島 僉 使 )로, 이윤정( 李 允 正 ) 을 고성 첨사로, 강유중( 姜 裕 重 )을 마도 만호( 馬 島 萬 戶 )로, 채득원( 蔡 得 元 )을 첨지중추부사 로, 장호민( 張 好 民 )을 오위장으로, 최세검( 崔 世 儉 )을 창덕궁 위장으로, 안중업( 安 重 業 )을 창 덕궁 위장으로, 한기영( 韓 基 榮 )을 황해도 수군우후로, 신화석( 辛 華 錫 )을 오위장으로, 김정하 ( 金 鼎 夏 )ㆍ신학권( 辛 學 權 )을 경희궁 위장으로, 남준원( 南 俊 元 )을 훈련원 주부로, 윤병규( 尹 炳 圭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김상기( 金 商 耆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관응( 李 觀 應 )을 우변포도청 종 사관으로, 이기서( 李 基 瑞 )를 고성 첨사로, 박종석( 朴 宗 碩 )을 박채 첨사( 博 寨 僉 使 )로, 김창순 ( 金 昌 淳 )을 남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로, 한유영( 韓 有 榮 )ㆍ이병유( 李 秉 遊 )를 오위장으로, 김문 종( 金 汶 鍾 )ㆍ백민구( 白 敏 九 )를 창덕궁 위장으로, 이청렬( 李 淸 烈 )을 훈련원 첨정으로, 윤치화

84 84 - ( 尹 致 和 )를 첨지중추부사로, 강명흠( 姜 明 欽 )ㆍ어윤항( 魚 允 恒 )을 오위장으로, 박정병( 朴 正 秉 ) 을 훈련원 주부로, 한용락( 韓 龍 洛 )을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한재유( 韓 在 愈 )ㆍ정진옥( 鄭 振 玉 )을 경희궁 위장으로, 유과환( 兪 果 煥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정환( 李 廷 煥 )을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김덕희( 金 德 喜 )를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백용주( 白 龍 珠 )를 다경포 만호로, 김 문연( 金 文 淵 )을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전의홍( 全 義 弘 )을 금갑도 만호( 金 甲 島 萬 戶 )로, 최성 규( 崔 聖 奎 )를 평산포 만호( 平 山 浦 萬 戶 )로, 이정환을 서평포 만호( 西 平 浦 萬 戶 )로, 김노황( 金 魯 璜 )을 동지중추부사로, 신병우( 愼 炳 宇 )ㆍ양주한( 梁 柱 翰 )을 오위장으로, 서윤석( 徐 潤 錫 )ㆍ양성 한( 梁 成 漢 )을 창덕궁 위장으로, 신진옥( 申 振 玉 )ㆍ강지형( 姜 芝 馨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창석 ( 李 昌 錫 )을 훈련원 주부로, 김병옥( 金 秉 沃 )을 전라 중군으로, 서경삼( 徐 敬 森 )을 재덕 만호( 在 德 萬 戶 )로, 권유규( 權 維 奎 )ㆍ고운상( 高 雲 祥 )을 오위장으로, 조문규( 趙 文 奎 )를 선전관으로, 이 민식( 李 敏 植 )을 충장위장으로, 김치영( 金 致 英 )ㆍ최태석( 崔 泰 錫 )을 창덕궁 위장으로, 홍병완 ( 洪 秉 琓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민상( 李 敏 庠 )을 도총관으로, 임용준( 任 龍 準 )을 오위장으로, 서 덕훈( 徐 德 勳 )ㆍ진면형( 陳 勉 珩 )을 경희궁 위장으로, 박능청( 朴 能 淸 )을 오위장으로, 전의경( 全 義 敬 )을 창덕궁 위장으로, 배학채( 裴 學 彩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기섭( 李 基 燮 )을 부장으로, 한진규( 韓 鎭 奎 )를 경상 중군으로, 이상덕( 李 相 德 )ㆍ이병익( 李 秉 翼 )을 선전관으로, 홍승덕( 洪 承 德 )ㆍ이신재( 李 信 載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조승호( 趙 升 鎬 )ㆍ김재기( 金 載 耆 )ㆍ이재헌( 李 載 憲 )ㆍ심은택( 沈 殷 澤 )을 부장으로, 이호일( 李 浩 一 )ㆍ신채희( 申 采 熙 )ㆍ현곤( 玄 琨 )ㆍ윤치일( 尹 致 鎰 )ㆍ남석필( 南 錫 弼 )ㆍ배영락( 裴 榮 樂 )ㆍ방휘량( 龐 徽 亮 )ㆍ손동욱( 孫 東 昱 )을 수문장으로, 민태 식( 閔 台 植 )을 남도 참군( 南 道 參 軍 )으로, 이면식( 李 勉 植 )을 준원전 수문장( 濬 源 殿 守 門 將 )으로 삼았다. 화녕전 수문장( 華 寧 殿 守 門 將 )에 최충석( 崔 忠 錫 )을 단부하고, 인차외 권관( 仁 遮 外 權 管 )에 성건호( 成 建 鎬 )를 단부하고, 오촌 권관( 吾 村 權 管 )에 오상기( 吳 相 虁 )를 단부하고, 광평 권관( 廣 坪 權 管 )에 김기천( 金 基 天 )을 단부하고, 소파아 권관( 小 坡 兒 權 管 )에 김도순( 金 道 淳 )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장영급( 張 泳 汲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윤성모( 尹 誠 謨 )ㆍ원세익( 元 世 翼 )ㆍ김태현( 金 泰 鉉 )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에 김인국( 金 仁 國 )을 단부하였 다. 훈련원 판관 한윤기( 韓 允 基 )와 주부 박문환( 朴 文 煥 )ㆍ안일주( 安 一 柱 )ㆍ송덕립( 宋 德 立 ), 이상은 가설인데 정식에 따라 감하( 減 下 )하였다. 안일주를 훈련원 판관으로, 신석린( 申 錫 麟 ) ㆍ한도영( 韓 道 永 )ㆍ박종혁( 朴 鍾 爀 )ㆍ박윤경( 朴 潤 景 )을 주부로, 삼척 영장 조존우ㆍ나주 영장 신임ㆍ경기 감영 중군 이규봉ㆍ평안 중군 이재정ㆍ북병영 우후 이용헌, 이상에게 지금 절충 장군을 가자( 加 資 )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김홍구( 金 鴻 求 )를 단부하고, 대길호리 권관( 大 吉 號 里 權 管 )에 박영수( 朴 瑩 壽 )를 단부하고, 부사과 두 자 리에 김세정( 金 世 貞 )ㆍ최인식( 崔 仁 植 )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 여덟 자리에 김재환( 金 在 煥 )ㆍ김익조( 金 翊 朝 )ㆍ강낙규( 康 洛 奎 )ㆍ박종석( 朴 宗 碩 )ㆍ김경현( 金 敬 鉉 )ㆍ한용락( 韓 龍 洛 )ㆍ강 종( 姜 鍾 )ㆍ백민구( 白 敏 九 )를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열일곱 자리에 신용구ㆍ홍문섭ㆍ장환규 ㆍ윤필구ㆍ유기찬ㆍ정광은ㆍ박민덕ㆍ김세진ㆍ신화석ㆍ장호민ㆍ전상문ㆍ이재승ㆍ한유영ㆍ이 병유ㆍ강명흠ㆍ김교영ㆍ윤재선을 단부하고, 부사과 열다섯 자리에 윤영기( 尹 泳 璣 )ㆍ장기렴 ( 張 基 濂 )ㆍ양문환( 梁 文 煥 )ㆍ이풍의( 李 豐 儀 )ㆍ민영국( 閔 泳 國 )ㆍ김승연( 金 升 淵 )ㆍ김영섭( 金 永 燮 ) ㆍ이경권( 李 敬 權 )ㆍ이상곤( 李 相 坤 )ㆍ이수일( 李 秀 一 )ㆍ임백규( 任 百 圭 )ㆍ차영수( 車 永 洙 )ㆍ이긍 섭( 李 兢 燮 )ㆍ이병두( 李 秉 斗 )ㆍ이의순( 李 宜 淳 )을 단부하고, 부사과에 김광묵( 金 光 默 )ㆍ민건호 ( 閔 建 鎬 )ㆍ김진수( 金 鎭 秀 )ㆍ백낙경( 白 樂 京 )을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중일출륙( 中 日 出 六 )이다. 상호군 다섯 자리에 홍택범( 洪 宅 範 )ㆍ오윤근( 吳 潤 根 )ㆍ김기택( 金 基 宅 )ㆍ김병치( 金 炳 治 )ㆍ김동 필( 金 東 弼 )을 단부하고, 부사정 두 자리에 유기완( 柳 冀 完 )ㆍ소정규( 蘇 正 奎 )를 단부하였다.

85 / 고종 14년 2월 22일(무신) / 덕적도 포구에 표류해 온 사람들에게 사정을 묻기 위해 경역을 내려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박용대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지금 인천 방어사 이남집( 李 南 輯 )의 장계를 보니, 황당선( 荒 唐 船 )의 협선( 挾 船 ) 1척이 덕적 도( 德 積 島 ) 포구( 浦 口 ) 곁으로 표류해 왔는데, 사람이 모두 4명으로 그 가운데 1명은 배 안 에서 죽었고 나머지 3명은 말이 통하지 않으며 글자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고기잡이 하던 중국의 배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온 듯합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절차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도록 하고 시체는 우선 매장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언어와 문자가 이미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느 나라 어느 땅의 사람인지와 바닷길로 돌아갈지 내륙의 길로 돌아갈지, 상세히 저간의 사정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역( 京 譯 )을 내려보내어 이를 속 히 거행하도록 하고 머물러 있는 동안의 음식물을 주는 절차는 별도로 신칙한다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4년 3월 3일(기미) / 덕적진에 표류해 온 청인을 육로로 돌려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조정희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조금 전에 인천 방어사( 仁 川 防 禦 使 ) 이남집( 李 南 輯 )이 올린 장계를 보니, 덕적진( 德 積 鎭 )에 표류해 온 청 나라 사람 3명에게 해당 첨사와 서울에서 내려온 역관( 譯 官 )이 상세히 실정을 캐물으니, 바로 청 나라 등주부( 登 州 府 ) 문동현( 文 東 縣 ) 사람으로서 바람을 만나 표류해 온 자들이었으며, 육로( 陸 路 )를 통하여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보내는 절차를 묘당으로 하여 금 전지를 여쭈어서 분부하게 해 주소서. 그들을 우선 해당 진의 관청에다 옮겨서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매장한 시신과 배에 있던 여러 가지 기물들은, 그들의 말에 의하면, 7월 안으로 공문을 가지고 와서 실어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사나운 파도를 만나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먼 데 사는 사람들의 정상이 참으 로 몹시 참혹합니다. 간신히 살아 남은 세 사람이 육로를 통해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참으 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니 육로로 떠나 보내도록 하소서. 이들은 이미 외국 사람인 만큼 자문( 咨 文 )을 가지고 가는 관원을 별도로 임명할 필요는 없고, 이미 정해진 규례에 의거해 서 연로의 역학관( 譯 學 官 )과 차사원( 差 使 員 )으로 하여금 차례차례 넘겨주게 하소서. 머물러 있는 동안의 치료와 음식 공급 및 그들이 타고 갈 쇄마( 刷 馬 )는 아울러 각 해당 도로 하여 금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게 하소서. 또 시신과 배에 있던 기물에 대해서는 해당 진에 각별히 신칙해서 잘 지키도록 하고, 그동 안의 사연을 적은 자문을 승문원으로 하여금 짓게 하여 그들에게 맡겨서 들여보낼 수 있게 하소서. 이상과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86 / 고종 14년 3월 14일(경오) / 인천부 덕적진에 표류해 온 청인을 돌려보내는 절차를 규례대로 거행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인천부( 仁 川 府 ) 덕적진( 德 積 鎭 )에 표류해 온 청 나라 사람 3명을 즉시 올라오게 해야 합니 다. 근래의 규례에 의거하여 홍제원( 弘 濟 院 )에 들어가 있게 한 뒤 다시 실정을 캐묻고, 그들 이 입을 옷은 각 해당 관사에 분부하여 전례대로 지급하게 하며, 별도로 역관을 뽑아서 연 로( 沿 路 )의 역학( 譯 學 )들에게 넘기게 하고, 이어 각 해당 도의 감사들에게 신칙해서 차원( 差 員 )을 정해서 차례차례 호송하게 하고, 또한 만부( 灣 府 )로 하여금 미리 봉성장( 鳳 城 將 )에게 통지해서 압록강( 鴨 綠 江 )을 건넌 뒤에 호송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4년 3월 17일(계유) / 덕적진에 표류해 온 청인들을 홍제원에서 하룻밤 묵게 한 뒤 출발시킬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박용대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인천부( 仁 川 府 ) 덕적진( 德 積 鎭 )에 표류해 온 청 나라 사람 3명을 홍제원( 弘 濟 院 )에 들어가 있게 한 뒤, 본부의 공사관( 公 事 官 ) 및 역관으로 하여금 상세히 실정을 캐물어서 별단( 別 單 ) 에 써서 들이게 하였습니다. 지금 표류해 온 사람들이 모두 속히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 니, 하룻밤 묵게 한 뒤 출발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4년 9월 3일(을묘) / 회답 자문을 지어서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원의 계 승문원이 아뢰기를, 방금 성경( 盛 京 ) 예부( 禮 部 )에서 보내온 자문을 보건대, 덕적( 德 積 )에 표류한 한인( 漢 人 )을 데리고 간 역학( 譯 學 )에게 규례대로 은냥을 상으로 주어 보냈다. 하였습니다. 회답 자문을 규례대로 지어서 파발에 붙여 의주( 義 州 )로 내려보내어 봉성( 鳳 城 )에 전해주게 함으로써 성 경에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4년 12월 28일(무신) / 병비의 관원 현황

87 87 - 병비( 兵 批 )에, 판서 민겸호( 閔 謙 鎬 )는 나왔고, 참판 박내만( 朴 來 萬 )은 병이고, 참의 박해 철( 朴 海 哲 )은 병이고, 참지 서정훈( 徐 鼎 勳 )은 입직하였다. 이경하( 李 景 夏 )를 훈련원 지사로, 이재긍( 李 載 兢 )ㆍ유완근( 柳 完 根 )을 선전관으로, 민수현( 閔 壽 顯 )ㆍ임시형( 林 始 炯 )ㆍ이응상( 李 應 相 )을 오위장으로, 이규학( 李 奎 鶴 )을 조사오위장으로, 정 원화( 鄭 元 和 )ㆍ김유성( 金 裕 成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민성호( 閔 成 鎬 )를 경상 우병사로, 조희인 ( 趙 羲 仁 )을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으로, 강세흥( 姜 世 興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삼았다. 동지 중추부사에 안종식( 安 種 植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이기홍( 李 起 弘 )ㆍ오정현( 吳 鼎 鉉 )ㆍ최재형( 崔 在 亨 )을 단부하였다. 부사정에 서익보( 徐 翊 輔 )를 단부하였다 / 고종 15년 1월 19일(기사) / 신병이 있는 덕적 첨사 강세흠을 파직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김규홍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강세흥( 姜 世 興 )은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몇 달 내로 길 을 떠나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정장( 呈 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실제 병이 이와 같 다 하더라도 변장의 직임은 관례에 따라 개차할 수가 없습니다. 파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5년 1월 19일(기사)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겸호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고, 참판 박돈수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으며, 참의 박해철은 나왔고, 참지 한재현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좌부승지 김규홍은 나왔다. 유기대( 柳 冀 大 )를 훈련원 도정으로, 이규학( 李 奎 鶴 )ㆍ김몽구( 金 夢 求 )를 선전관으로, 민종호 ( 閔 宗 鎬 )를 내금위장으로, 이용준( 李 容 俊 )ㆍ권재풍( 權 載 豐 )ㆍ이긍진( 李 肯 鎭 )을 오위장으로, 이면영( 李 冕 榮 )ㆍ윤석오( 尹 錫 五 )를 조사위장( 曺 司 衛 將 )으로, 정인관( 鄭 寅 觀 )을 충익장으로, 홍종운( 洪 鍾 運 )ㆍ박내면( 朴 來 冕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박준용( 朴 準 鎔 )을 수문장으로, 박순창 ( 朴 順 昌 )을 부장( 部 將 )으로, 홍재희( 洪 在 羲 )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에 이원근( 李 元 根 )을 단부하였다. 상호군에 신응조, 호군에 한필교ㆍ서긍보ㆍ김노첨( 金 魯 瞻 ), 부호군에 윤치성( 尹 致 聖 )ㆍ홍철주( 洪 澈 周 )ㆍ윤석오( 尹 錫 五 )ㆍ김준구( 金 駿 求 )ㆍ이용복 ( 李 容 復 )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15년 3월 27일(정축) / 회답 자문을 지어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원의 계 승문원이 아뢰기를,

88 88 - 방금 성경( 盛 京 ) 예부의 자문이 나온 것을 보니, 작년 덕적도( 德 積 島 )에 표류해 온 한인( 漢 人 )을 데리고 온 역학( 譯 學 )에게 규례대로 은 1냥으로 포상을 하겠다. 교부소통사( 交 付 小 通 事 ) 정인흥( 鄭 麟 興 )이 휴대하여 귀국으로 돌아갔으니, 해당 역학으로 하여금 공손히 받게 하 라. 는 내용이었습니다. 잘 받았다는 뜻으로 회답 자문을 지어내어 의주부로 내려보내 성경 에 전달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6년 11월 15일(갑신) / 중희당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이최응 등이 입시하여 삼남에서 바치는 세미태의 체납분을 돈으로 대납하는 문제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진시( 辰 時 ). 상이 중희당에 나아갔다.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과 정부 당상이 인견을 위하여 함께 입시하 였을 때, 도제조 이최응, 제조 김유연, 부제조 이재완, 직각 홍영식( 洪 英 植 ), 가주서 박태순, 기사관 이기종( 李 起 鍾 )ㆍ이용직( 李 容 稙 ), 우부승지 민영규, 가주서 박태순, 사변가주서 서상 태, 기사관 이기종ㆍ이용직, 영의정 이최응, 행 이조판서 김병덕( 金 炳 德 ), 행 지삼군부사 민 겸호( 閔 謙 鎬 ), 좌참찬 김익진( 金 翊 鎭 ), 행 대호군 김유연, 예조 판서 윤자덕( 尹 滋 悳 ), 호조 판 서 김병시( 金 炳 始 ), 지삼군부사 조영하( 趙 寧 夏 ), 동지삼군부사 신정희( 申 正 熙 )ㆍ조희복( 趙 羲 復 ), 행 부호군 민영익( 閔 泳 翊 ), 교리 박제성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리고 의관 유한위( 劉 漢 緯 ) ㆍ정일귀( 鄭 一 龜 )ㆍ이명석( 李 命 錫 )ㆍ정집( 鄭 楫 )이 영외( 楹 外 )에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 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최응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겨울 날씨가 고르지 않은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침수와 수라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으시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으시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89 89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순하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의관이 대령하였으니, 들어와 진맥하게 하리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유한위 등이 차례로 진맥하고 나서, 이최응이 말하기를, 맥후( 脈 候 )를 아뢰오. 하니, 유한위 등이 부복하여 아뢰기를, 맥후는 좌우 삼부( 三 部 )가 고르십니다. 하였다. 이최응이 말하기를, 탕제는 의논하여 정할 것이 별로 없소? 하니, 유한위 등이 말하기를, 의논하여 바칠 탕제가 별로 없습니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세자궁이 오늘 시좌( 侍 坐 )한 것은 참으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 그지없을 복이므로 기뻐 경 축하며 연석( 筵 席 )에 나온 신하들이 기뻐하여 경하를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입시를 보려 하므로 시좌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입시 때마다 성대한 의례를 익히 보면 예지( 睿 知 )가 절로 나날이 진보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린 나이로 시좌하는 것은 본디 우리 왕가에서 이미 행해 온 예절이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어린 나이로 시좌하여 능히 열성조의 성대한 의례를 이으시니, 더욱이 경축하여 마지않습 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날씨가 그리 춥지 않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동지가 지났는데 날씨가 따듯하여 고르지 않으니 외간에는 혹 역질이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우면 절로 해로울 것이 없겠다. 하였다. 상이 의관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또 약방 신하들에게 그대로 머물러 차대( 次 對 )에 동참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차대를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좌의정은 신병이 아직 낫지 않아서 연석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각도의 세곡( 稅 穀 )을 서울로 나르는 것은 조선( 漕 船 )이 아니면 경선( 京 船 )이고 경선이 아니 면 토선( 土 船 )인데, 근래 주교사( 舟 橋 司 )의 안적( 案 籍 )에 등록된 것이 전보다 크게 줄고 조 창( 漕 倉 )의 배도 대부분 숫자가 모자라서 참으로 배정하여 실어 나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 서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배를 임차하여 바치게 하였으나, 세선( 稅 船 ) 한 척에 실을 수 있 는 것을 토선에 나누어 싣기로 가량하면 열 척이나 되므로 그 형세가 이렇게 많은 배를 장

90 90 - 만하기 어렵습니다. 영읍( 營 邑 )이 이 때문에 괴로움을 호소하며 그 어지러운 것을 견디지 못하다가 기한은 이미 지나고 칙교( 飭 敎 )는 여러 번 내렸으니, 무릇 봉행하는 처지에서 어 찌 아주 황송하지 않겠습니까. 어느덧 바닷바람은 높아졌고 겨울철도 깊어져서 거느려 나르 는 일이 장차 봄으로 늦추어질 것인데, 그러면 구납( 舊 納 )과 신봉( 新 捧 )이 적체되는 한탄을 가져올 뿐이고 고을과 창고에 저축한 것이 손상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우려되는 일이 어느 것인들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공부( 貢 賦 )에 관련된 법의 취지가 본디 엄중하여 워낙 그 사이에서 감히 변동할 수 없으나, 급박하여 어쩔 수 없는 실 상을 이미 알면서 일체 상례( 常 例 )로 강제한다면 도리어 국가에서 시의에 맞게 조처하는 정 사에 흠결이 있을 것이니, 삼남( 三 南 )에서 각 아문에 바치는 세미태( 稅 米 太 ) 중에서 정축년 (1877, 고종14) 이전의 것으로 아직 거두지 못한 것은 특별히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되 기 한을 정하여 날라 들여 반드시 세전에 끝내고, 새로 받아들일 세곡은 식례를 상고하여 받아 들이기 시작하여 얼음이 풀리거든 기한 전에 실어 보내라고 아울러 말을 만들어 관문( 關 文 ) 으로 신칙하도록 각각 그 아문에 분부하소서. 그리고 이제 드문 조치가 내려진 뒤에 구납전 조( 舊 納 錢 條 )와 신봉본색( 新 捧 本 色 )을 물론하고 혹 늦추어 기한을 넘기는 폐단이 있으면, 수 령을 가중하여 감률( 勘 律 )하고 도신을 각별히 논경( 論 警 )하는 것은 또한 사체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이것으로 모두 같이 경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공( 正 供 )을 대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임시방편이고 특별한 조치이니, 각 아문을 시켜 엄중한 관문을 보내어 신칙하여 신구( 新 舊 )의 미수( 未 收 )를 돈으로 대납하는 것과 본색 으로 바치는 것을 물론하고 모두 기한 안에 끝내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외읍( 外 邑 )에 호포( 戶 布 )를 설치한 것은 대개 부득이한 정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첩역 ( 疊 役 )이 이미 많은데 어린아이까지 억지로 채우고 허액( 虛 額 )이 채워지지 못하면 죽은 자에 게서도 오히려 징수하는 것은 가호에 배정하여 베를 거두어 경납( 京 納 )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골 양반이나 가난한 사람까지도 고루 같은 법을 쓰는 것이니, 무지한 상천( 常 賤 )일지라도 참으로 여기에 느끼고 삼가야 할 것인데 도리어 명분이 지극히 중한 것을 돌보지 않고 또한 본의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고서 감히 사족( 士 族 )과 대항하여 문득 말하기를 베를 내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나도 군사이고 저도 군사이다. 하고 거친 기 세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해괴하고 흉악한 행동을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위아래가 가려지 지 않고 백성의 심지가 정해지지 않으니, 역경( 易 經 ) 의 가르침으로 헤아리면 어찌 오싹 하여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범하는 놈이 있으면 나타나는 대로 법으로 엄중히 다스리고 일체 용서하지 말며, 또 반호( 班 戶 )로 말하면 스스로 뽐내고 스스로 뛰어난 체하 는 것을 능사로 여겨 이따금 베를 내지 않고 심하면 온 동리가 모면하는 자도 있는 것은 영 을 어기고 제 마음대로 하는 버릇 때문입니다. 영읍에서 철저히 살펴 알아내어 각별히 징려 ( 懲 勵 )하라고 진서와 언서로 베껴서 마을에 게시하여 모든 백성이 다 반드시 알게 하되, 이 처럼 각별히 신칙한 뒤에도 흐릿하여 살피지 못하고 제대로 일에 힘쓰지 않는 수령에게는 파직( 罷 職 )하고 나처( 拿 處 )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각도에 공문으로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포는 균일하게 하는 뜻인데 소민( 小 民 )이 완강하게 업신여기는 것은 명분을 범하는 것이 고, 대민( 大 民 )이 바치기를 거부하는 것은 조령( 朝 令 )에 대항하는 것이다. 법과 기강이 있는

91 91 - 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아뢴 대로 말을 만들어 공문으로 알려서 전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경외의 토호( 土 豪 )가 무단( 武 斷 )하는 버릇에 대해 전후로 신칙하여 금한 것이 한없이 많은 데 줄곧 방자하여 전혀 꺼리지 않아 동리의 음식은 약취하지 않는 것이 없고 잡기와 범도 ( 犯 屠 )는 스스로 와주( 窩 主 )가 되며 행패하고 포학을 부리는 것이 그지없어 거의 수한( 水 旱 ) 이나 도적의 해보다 심하니, 허둥지둥하여 지탱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백성이고 근심하다가 곤궁해지는 것도 우리 백성인데, 중외의 법을 맡은 신하 중에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조정의 명을 꺼릴 것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백 성의 원통함을 돌볼 것이 못되어 그런 것입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참으로 매우 개탄스 럽습니다. 우선 경고하는 뜻으로 다시 법사와 각각 그 도신( 道 臣 ), 수신( 守 臣 )에게 엄히 신 칙하여 조관( 朝 官 )이면 이름을 지적하여 계문( 啓 聞 )하고 사인( 士 人 )이면 곧바로 엄히 형추 ( 刑 推 )하여 원배( 遠 配 )하며 빼앗긴 물건은 모두 도로 찾아서 각각 백성에게 내어 주게 하되, 혹 사정을 두어 비호하려는 폐단이 있으면 엄중히 논하여 경책( 警 責 )하는 것을 면하기 어렵 거니와, 거행한 상황을 먼저 의정부에 신보하게 하여 그 근만( 勤 慢 )을 증험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토호를 금단하는 것은 조정의 신칙이 엄절한데도 법사와 방백( 方 伯 ), 수령이 무엇을 꺼려 서 다스리지 못하고 평민이 나날이 그 해독을 입는 것을 좌시하는가? 각별히 신칙하여 이름 을 지적하여 적발하고 철저히 엄하게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나라에 삼금( 三 禁 )이 있는데 송금( 松 禁 )이 첫째이기 때문에 전후에 경고를 반드시 더욱 밝 히고 반드시 엄하게 한 것인데, 요즈음 각도의 봉산( 封 山 )이 곳곳이 헐벗어 수백 년 길러서 무성하고 빽빽하던 것이 다시는 옛날 모양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궁실( 宮 室 )의 재 목과 배의 기구는 이제 손댈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영애( 嶺 隘 )가 허술해지고 논밭이 사태로 덮이니, 또한 어찌 작은 걱정이겠습니까? 헐벗는 원인을 캐어 보면 한마디로 말하여 도끼가 날마다 찾아가 절도 없이 함부로 베기 때문입니다. 가져다 쓸 나무 하나가 있으면 문득 열 나무를 베고 열 그루를 쓸 데가 있으면 백 그루까지 범하며, 완악한 조례( 皁 隷 )와 간사한 백성이 또 따라서 훔쳐 베어 몰래 파는 것이 날로 심하고 달로 성행하는데도 북돋우어 심는 정사는 논할 것도 없거니와 금지하여 보호하는 일도 이처럼 매우 느슨하니, 이것이 어찌 관 할하고 구검하는 처지에서 범연히 보고 버려둘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각각 그 도신을 시켜 따로 정탐을 보내어 낱낱이 찾아 살피고 송금이 엄하지 않은 수신( 帥 臣 )과 수령을 적발하고 논계하여 각별히 감죄하도록 하며, 북돋우어 심고 기르는 일을 감히 전과 같이 게을리하지 말라고 관문을 보내어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금은 여러 번 연석에서 신칙하였는데도 실효가 없을 뿐더러 함부로 베고 훔치는 것이 줄 곧 이러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 각각 그 도에 관문을 보내어 낱낱이 살펴서 아뢰고 북돋우어 심고 기르는 일도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이 가을에 성묘하러 갔던 길에 연로의 고을들이 잔폐한 정상을 대개 들어서 아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온양( 溫 陽 )의 결정( 結 政 )이 가장 지탱하기 어려운 병폐입니다. 그 고을의 양

92 92 - 전( 量 田 )은 이미 수백 년이나 오래 되어 안부( 案 簿 )는 조각나서 믿을 수 없고 경계는 어지러 워 구분할 수 없게 되어 경작하고 있는 토지를 묵힌 토지라고 거짓으로 속여 탈루시키니, 다시 일구고 새로 개간한 땅으로 총액에 보탤 것이 있더라도 살펴 조사하라는 조정의 명이 문득 겉치레가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그 고을의 아홉 면 가운데에서 다섯 면의 토지 결수 가 부족한데 임장( 任 掌 )들이 다 도피하므로 해마다 말썽이 나도 바로잡지 못하니, 장차 고 을 꼴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개량( 改 量 )은 나라의 성법( 成 法 )이라 생각합니다. 각별 히 도신과 수령에게 신칙하여 빨리 바로잡아서 호강한 자가 숨겨 빠뜨리고 훔쳐 농간하는 것은 철저히 살펴내고, 토지가 없는 가난한 집에 근거 없이 세를 거두는 것은 사실에 따라 면제하여 정부( 正 賦 )에 흠결이 없고 백성의 고통이 펼 수 있게 하라고 그 도에 관문으로 신 칙하고 그 밖의 고을들은 가장 심한 데를 집어내어 점차로 바로잡으라고 마찬가지로 분부하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 이명응( 李 明 應 )이 신보한 것을 보니, 공주목( 公 州 牧 ) 유등천면( 柳 等 川 面 )의 밭 11부( 負 ) 4속( 束 )과 논 11결( 結 ) 46부 3속, 평택현( 平 澤 縣 ) 서, 남, 북 세 면의 논 10결 97부 4속, 영동현( 永 同 縣 ) 현내면( 縣 內 面 )의 밭 84부 4속과 논 2결 76부 5속은 홍수가 범 람하여 밭도랑이 하천으로 변해 다시 일굴 희망이 없으므로 세를 독책하여 거두기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호서의 이런 고을들은 큰물이 가서 과연 치우치게 심한 재상( 災 傷 )을 입었는 데, 이제 벼가 없는 땅에서 납세를 독책한다면 국가에서 가엾이 여기고 돌보는 정사가 아닐 듯하니, 특별히 5년 동안만 면세하도록 하되, 개먹어 무너진 데에 진흙땅이 생기고 모래가 덮인 곳을 도로 일구는 것은 또한 변하지 않는 법이 있으므로 논밭의 실상을 조사하는 일을 철저히 하여 반드시 결부( 結 簿 )에 맞추라고 신칙하여 공문으로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과시( 科 試 ) 때에 시권( 試 券 )을 거듭 내는 자에게는 본디 당률( 當 律 )이 있다는 것은 전식( 典 式 )에 실려 있는 것인데, 요즈음 경사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받았으나, 지극히 중한 것 은 과시이고 더없이 엄한 것은 전식이니, 어찌 변함 없는 법을 굽혀 범한 것이 있는데도 징 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일은 뒤미처 캘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 이러한 폐단이 있으 면 한결같이 통편( 通 編 ) 의 정률( 定 律 )에 따라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므 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시 때에 시권을 거듭 내는 것은 본디 법금이 있는데, 선비가 어려움 없이 무릅써 범하 니, 매우 놀랍다. 지금 아뢴 대로 경외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지금 내수사가 신보한 것을 보니, 수원( 水 原 )의 용주사( 龍 珠 寺 )는 설치한 사체가 다른 곳과 차이가 있는데 지금 수백 칸의 옥우( 屋 宇 )가 곳곳이 무너졌으니 전례대로 보수할 물력을 편 의에 따라 획급하여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절은 이미 중히 여기는 바가 있어서 설치하였 으니, 수리하는 방도는 참으로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는 이미 시행한 예가 있으니, 공명첩 ( 空 名 帖 )을 3백 장만 만들어 주어 재물을 모아 일을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93 93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 이근필( 李 根 弼 )은 임기가 찼습니다. 이 도신은 다스리는 규범에 숙달하고 조치 가 마땅하여 고을의 폐단이 곳곳이 바로잡히고 백성의 고통을 마음을 다하여 제거하고 돌보 았는데, 더구나 이제 수재( 水 災 )를 당한 끝이겠습니까. 무릇 백성을 따르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일이 끝내 보람을 이루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니, 한 임기만 특별히 잉임( 仍 任 )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 榻 敎 )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민영위( 閔 泳 緯 )는 이 도에 나가 안찰( 按 察 )한 지 이제 두 해가 되는데 치적이 넉 넉히 나타나고 위혜( 威 惠 )가 함께 이루어져 여러 고을들을 탄압( 彈 壓 )하고 백성을 안정시킨 데에 드러난 실효가 있어서 온 도의 사민( 士 民 )이 다 오래 머무르기를 바라고 서울에 와서 호소한 것도 여러 번이니, 임기가 차거든 한 임기만 특별히 잉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충청 감사 이명응은 치적이 있다 하니, 임기가 장차 차면 참으로 잉임해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하여 마찬가지로 아뢰지 않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임기는 정월에 차는데, 호서의 쉰 세 고을에서 여러 번 머무르기를 바라는 호소가 있었다 하니, 치적을 알 만 합니다마는, 신은 지친간의 천거라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였는데, 충청 감사 이명응은 임기가 차거든 한 임기만 특별히 잉임시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음관( 蔭 官 )으로 정( 正 )을 지내고 승서( 陞 敍 )된 자는 봄에 연석에서 아뢰어 모두 가자( 加 資 ) 하는 은전을 베푸는데, 이제 듣건대, 전 정 이교영( 李 喬 榮 )은 세자 책봉례 때의 우익위로서 이미 우직( 右 職 )에 임용하라는 상전( 賞 典 )을 받았거니와, 승서와 우직의 조용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마찬가지로 가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충간공( 忠 簡 公 ) 조성복( 趙 聖 復 )은 후손이 가난하여 제사를 이어가기 어렵다 하니, 해조로 하여금 그 사손( 嗣 孫 )을 초사( 初 仕 ) 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는 조병대( 趙 炳 大 )가 아닌가? 연전 초사 때에 관례를 벗어난 일이라 하여 출사( 出 仕 )하지 않았다 하니, 임금을 속이지 않는 마음이 매우 가상하다.

94 94 -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형조 판서 홍재현( 洪 在 鉉 )과 호조 참판 민태호( 閔 台 鎬 )를 모두 정부 당상으로 차출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충훈부 유사 당상( 有 司 堂 上 )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완릉군( 完 陵 君 ) 이경우( 李 景 宇 )를 차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병조 참판 윤영신( 尹 榮 信 )은 승자( 陞 資 )한 뒤에 삼대를 추증해야 할 것인데, 후사로 들어간 집에는 베풀 만한 자가 없다 하니, 근자의 예에 따라 그 본생가에 옮겨 베푸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전 벽동 군수( 碧 潼 郡 守 ) 김준구( 金 駿 求 )는 전임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서 어사의 계청에 따라 파직되고 강자( 降 資 )되었습니다. 이 일은 작은 것에 속하거니와 경계한 지 이제 한 해 가 지났는데, 이러한 사람을 연석에서 여쭈어 복자( 復 資 )한 것은 전례가 많이 있으므로, 감 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어영대장 이경하( 李 景 夏 )는 신병이 있다 하여, 조방( 朝 房 )에 왔으나 연석에 나오지 않았습 니다. 사체로서는 매우 미안하니,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이어서 하교하기를, 국가에 별궁( 別 宮 )이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렇거니와, 아직도 겨를이 없었으므로, 장차 영 건( 營 建 )하려 한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오늘날 별궁을 영건하는 것은 과연 급한 일이니, 따로 상지관( 相 地 官 )을 보내어 살펴보고 길일도 관상감을 시켜 가려서 들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였는데, 지금 경용( 經 用 )이 군색하므로 토목을 일으키는 것은 과연 시기가 아니다마는, 별궁은 국 조( 國 朝 ) 이래로 있는 것인데, 아직도 영건할 겨를이 없었으니, 또한 온당치 못하다. 상지관 을 보내어 땅을 살펴서 가려 정하고, 영건소( 營 建 所 )의 당상에는 본소의 제조 및 호조 판서 를 차출하고 낭청에는 본소의 종사관 및 호조의 낭청을 차출하라.

95 95 - 하고, 또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였는데, 정관( 政 官 )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영건소의 당상과 낭청을 하비( 下 批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어의궁( 於 義 宮 )은 효종께서 잠저( 潛 邸 ) 때에 계신 곳인데, 전부터 국조의 대혼( 大 婚 )은 번 번이 별궁에서 행하였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별궁의 영건을 앞으로 한두 해 걸리면 세자의 가례가 그때에 맞을 듯하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그럴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별궁의 영건은 몇 칸이면 되겠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수백 칸이 되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례 때에 내외의 각사( 各 司 )가 함께 거행하려면 간살이 그 수가 되지 않을 수 없겠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집을 짓는 일은 높고 클 필요가 없고 튼튼한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튼튼한 것이 첫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의궁의 봄, 가을 봉심은 호조에서 하는가?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이최응이 아뢰기를, 국초에는 태평관( 大 平 館 )에서 예를 행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남별궁( 南 別 宮 )이 아닌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관은 남문 안에 있으나 남별궁이 아니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서에 나무를 나르는 곳이 있다 하므로 본소에서 먼저 5만 냥을 값으로 주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차례로 먼저 내려 주면 힘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산( 京 山 )의 나무는 혹 쓸 만한 재목이 있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경산의 나무는 크기는 하지만 조금 작더라도 단단한 먼 산골짜기의 나무만 못하고, 또 서 까래로 쓰기는 아주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96 96 - 안면도( 安 眠 島 )에도 저축한 나무가 있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과연 배를 만들 재목 7백 그루가 있는데 이것을 가져다 보태어 써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소의 제조와 호조 판서가 함께 모여 의논하도록 하라.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물러가서 회의하여 조처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의 가례는 60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에 혹 오래 된 큰 집으로 합당한 곳이 있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국동( 安 國 洞 ) 근처는 어떠한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상지관을 보내어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민영규가 말하기를, 재신들은 일을 아뢰오. 하니, 민겸호가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부평( 富 平 )의 연희진( 連 喜 鎭 )과 인천( 仁 川 )의 화도진( 花 島 鎭 )은 해문( 海 門 )의 요충으로 특별 하니, 읍진 사이에서 관할을 달리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각각 그 부근의 한 면( 面 ) 을 본진에 옮겨 붙이고 면의 결복( 結 卜 )도 옮겨 붙여서 본진에서 세( 稅 )를 잡고 상납과 환자 ( 還 上 )도 본진에서 구관하고 호적도 본진에서 수합하여 본읍에 붙이고 그대로 독진( 獨 鎭 )을 만들되, 덕적진( 德 積 鎭 ) 등의 예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연석에 나온 대신에게 하문하여 재결하여 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해문의 방수( 防 守 )는 딴 진과 차별이 있으니, 독진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어서 하교하기를, 도성 지역을 나누어 관장하는 일과 준천( 濬 川 ), 금송을 수성절목( 守 城 節 目 )에 더 넣는 등의 일을 접때 하교한 것이 있는데, 그동안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민겸호가 아뢰기를, 도성의 자내( 字 內 )는 북곡성( 北 曲 城 ), 삼청동 대천( 三 淸 洞 大 川 )부터 동으로 낙산 고봉( 駱 山 高 峯 )까지는 본소가 구검( 句 檢 )하고 북곡성부터 서쪽은 훈련도감이 분장하고 낙산 고봉 이 남은 어영청 소관이며 외산( 外 山 )은 보토소( 補 土 所 ) 남쪽 성북동( 城 北 洞 ), 안암동( 安 巖 洞 )부

97 97 - 터 수유현( 水 踰 峴 )까지는 본소가 구검하고 혜화문 대로( 惠 化 門 大 路 ) 이남은 어영청의 분계입 니다. 자내의 분장을 이제 고쳐 정하였으니 수성과 금송도 이에 따라 정식해야 할 것입니다 마는, 북한산( 北 漢 山 )이 이미 본소에 속하였으니 여러 가지 거행할 일이 매우 많아서 1원의 참군과 5명의 금송군으로는 구차하고 어려움을 면하지 못합니다. 참군 1원과 금송군 몇 명 을 더 두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준천의 본디 경계는 송기교( 松 杞 橋 )부터 광통교( 廣 通 橋 )까지는 본소가 구검하고 광통교부터 수표교( 水 標 橋 )까지는 용호영이 구검하고 수표교부터 효경교( 孝 經 橋 )까지는 훈련도감이 구검 하고 효경교부터 오교( 午 橋 )까지는 금위영이 구검하고 오교부터 오간수구( 五 間 水 口 )까지는 어영청이 구검하되, 오간수구 밖부터 영도교( 永 都 橋 )까지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합 력하여 구검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역을 나누어 관장하는 등의 일을 이렇게 할 것 없다. 또 북한산이 이미 본소 소관인데 또다시 지역을 나누어 관장시킨다면 참으로 치우치게 무겁게 된다. 전대로 삼영( 三 營 )에 분 수하되, 각각 그 영문의 사세를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거행하라는 하교가 있었더라도 변통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성을 쌓을 때 호료( 戶 料 ), 병포( 兵 布 )는 구례( 舊 例 )를 회복하여 지급하 는 것이 좋겠으나, 해조의 사세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호료, 병포는 절반만 마련하고 절반은 그 영문에서 지급하면 힘을 펼 수 있을 것이다. 본소는 이미 지역을 나누어 관장하 지 않았으니 수성 등의 일은 본디 논할 것이 아니다. 절목 안에 더 넣지 말고 금송 등의 일 도 논하지 말되, 준천은 본소가 이미 공동으로 하는 것이니, 용호영이 어찌 거행할 것이 없 겠는가. 또한 마찬가지로 하라. 본소는 각 군문( 各 軍 門 )을 총찰하는 것이니, 궐내, 궐외 각 영, 각사의 성첩( 城 堞 ), 금송을 적간하는 등의 일을 전례에 따라 입품( 入 稟 )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겸호가 아뢰기를, 이들 일을 물러가서 적당히 조처하여 정원을 시켜 계품하리까, 본소에서 초기( 草 記 )하리 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초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영규가 말하기를, 옥당은 생각하는 바를 아뢰오. 하니, 박제성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근신의 반열에 낀 이래로 여러 번 강대( 講 對 )하는 자리에 입시하여 빈연( 賓 筵 )의 말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보옵건대, 성상께서 백성의 일과 나라의 살림을 걱정하 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근심하고 힘쓰시는 것이 말씀하시는 사이에 나타나니, 신은 지극히 흠앙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치평( 治 平 )에는 기본이 있는데, 치평의 근본은 오직 학문 에서 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모시( 毛 詩 ) 의 강독을 마친 지 시일이 조금 오래 되 고 상서( 尙 書 ) 를 의논하여 여쭌 뒤에 여러 해가 지났으나 아직 강연( 講 筵 )을 열라는 명 을 받지 못하였으니, 감히 대궐 안에 한가히 계실 때에 복습하시는 공부가 있어서 그런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주자( 朱 子 )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가하기를 기다려서 글을 읽으면 읽을 만한 날이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천고의 귀감입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국조의 고사에는 날마다 상참에 납시고 이어서 세 차례 강석에 납신 것이 이미 열성께서 전수( 傳 授 )하신 법이 있으니, 우리 전하께서 만기가 날마다 폭주하므로 강대할 겨를이 없다. 하지

98 98 - 마시고 다시 더 분발하여 촌음을 아끼소서. 이는 신 한 사람이 바라는 것일 뿐더러 공경대 부와 여항의 사서인( 士 庶 人 )이 함께 바라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정령( 政 令 ), 시조( 施 措 )는 옛사람의 가르침에서 배우고 동궁을 도우려면 반드시 몸소 사물을 접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기강이 잡히지 않으면 공자의 예( 禮 )를 정제하라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민생이 넉넉하지 못하면 문왕의 다친 듯이 여기는 덕을 본받으소서. 유추하여 구해 보면 때 에 따라 행해야 할 천하의 만사가 책에 갖추어 있기 때문에 치평의 근본은 학문에 의지한다 고 하는 것이니, 신이 아뢴 것을 깊이 살피시어 위로 열성조에서 이미 행하신 규모를 몸받 고 아래로 조야에서 함께하는 심정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것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민영규가 아뢰기를, 오늘 빈대에 양사에서 한 사람도 진참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패초를 어긴 대간들을 모두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상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또 사관에게 먼저 물러가라 고 명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고종 17년 4월 27일(갑자) / 장계의 격례를 어긴 경기 수군절도사 이규서를 추고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도 수군절도사 이규서( 李 奎 書 )가 올린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전상신( 全 尙 信 )을 포 상하기 위한 장계를 보니,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기를 요청한다. 고 써야 할 것을 묘 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 고 한 것은 격례에 위배됩니다. 원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서 다시 수정해서 올려보내게 하겠습니다만, 주어( 奏 御 )하는 문자를 이렇게 소홀히 한 것은 매 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해당 수신( 帥 臣 )을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7년 5월 25일(임진) / 덕적 첨사 전상신을 잉임하게 할 것을 청한 경기 수군절도사 이규서의 장계에 대해 회계하는 병조의 계목 병조 계목에, 원 문건은 첨부하였습니다. 경기도 수군절도사 이규서( 李 奎 書 )의 장계를 보니, 덕적 첨사 ( 德 積 僉 使 ) 전상신( 全 尙 信 )은 군무( 軍 務 )를 중하게 여겨 화약( 火 藥 ) 100근, 군료( 軍 料 ) 20석 을 봉급을 털어 스스로 마련하고, 진( 鎭 )의 백성을 구휼하여 둔전( 屯 田 )의 허결조( 虛 結 租 ) 15석, 빈호( 貧 戶 )의 잡역전( 雜 役 錢 ) 100냥을 봉급을 털어 대납( 代 納 )하여 견감하고, 또 16석 의 쌀을 털어 굶주린 가구( 家 口 )를 구휼하였으며, 잔루( 殘 壘 )를 궁문( 宮 門 )이나 성문( 城 門 )의

99 99 - 자물쇠처럼 견고하게 하여 가난한 집들이 모래지가( 暮 來 之 歌 )를 불렀다고 하니, 포상하는 은전을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화약, 군료, 허결, 잡역을 모두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털어 잔폐된 상태에서 구원했고 계속 해서 굶주린 가구를 구휼하는 데 16포의 쌀을 털어 냈으니, 자물쇠처럼 견고하게 하고 모래 지가를 외운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장( 鎭 將 )은 일찍이 서쪽 지방 에서도 공적을 세웠는데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처럼 좋은 솜씨를 가 진 사람은 진실로 얻기가 쉽지 않으니, 특별히 잉임시킬 것을 허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책 임지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판부하였다 / 고종 17년 6월 16일(계축)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행 판서 이재면( 李 載 冕 )은 병중이고, 참판 민희식( 閔 羲 軾 )은 병중이고, 참의 홍영우( 洪 永 禹 )는 나오고, 참지 김재환( 金 在 瓛 )은 병중이고, 동부승지 강찬은 나왔다.홍균( 洪 均 )을 어영 기사장( 御 營 騎 士 將 )으로, 김학로( 金 學 魯 )를 백치 첨사( 白 峙 僉 使 )로 삼았다. 상호 군에 김병덕( 金 炳 德 ), 대호군에 정건조( 鄭 健 朝 ), 호군에 이승오( 李 承 五 )ㆍ박선수( 朴 瑄 壽 )ㆍ윤 성진( 尹 成 鎭 )ㆍ왕정양( 王 庭 揚 )ㆍ박용대( 朴 容 大 )ㆍ박제관( 朴 齊 寬 )ㆍ장석룡( 張 錫 龍 )ㆍ유만원( 兪 晩 源 )ㆍ신석년( 申 錫 秊 )ㆍ백낙훈( 白 樂 薰 )ㆍ원세정( 元 世 )ㆍ구준현( 具 駿 鉉 )ㆍ민종호( 閔 宗 鎬 )ㆍ김 태욱( 金 泰 郁 )ㆍ임흥준( 任 興 準 )ㆍ유인원( 劉 璘 源 ), 부호군에 장태수( 張 泰 秀 )ㆍ이휘병( 李 彙 秉 )ㆍ 이근명( 李 根 命 )ㆍ박홍수( 朴 弘 壽 )ㆍ윤치화( 尹 致 和 )ㆍ오익영( 吳 益 泳 )ㆍ서정순( 徐 正 淳 )ㆍ홍종학 ( 洪 鍾 學 )ㆍ한장석( 韓 章 錫 )ㆍ윤치담( 尹 致 聃 )ㆍ조병우( 趙 秉 友 )ㆍ윤승구( 尹 升 求 )ㆍ이인만( 李 寅 晩 ) ㆍ박주양( 朴 周 陽 )ㆍ신덕희( 申 德 熙 )ㆍ오한영( 吳 翰 泳 )ㆍ이규삼( 李 奎 參 )ㆍ이희춘( 李 熙 春 )ㆍ이종 서( 李 種 恕 )ㆍ이증우( 李 曾 宇 )ㆍ서상식( 徐 相 植 ), 부사직에 홍종영( 洪 鍾 永 ), 부사과에 홍우기( 洪 祐 冀 )ㆍ한병제( 韓 秉 濟 )ㆍ정필조( 鄭 弼 朝 )를 모두 단부하였다. 평안도 병마우후에 심의하( 沈 宜 夏 ), 남병영 우후( 南 兵 營 虞 候 )에 홍학주( 洪 鶴 周 ),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에 전상신( 全 尙 信 )을 특 별히 우선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 참군에 장덕호( 張 德 浩 )를 단부하고, 권지 훈련원 참군에 신준모( 申 準 謨 )를 단부하였다 / 고종 17년 11월 14일(무인) / 병비가 8차 정사에서 장봉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병비가 8차 정사를 하였다. 장봉진( 張 鳳 鎭 )을 부장으로, 조희승( 趙 羲 升 )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구영식( 具 永 植 )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이규삼( 李 奎 參 )을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 으로, 이사복( 李 士 福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최진화( 崔 振 華 )를 갈파지 첨사로, 조유증( 趙 有 增 )을 충청도 수군우후로 삼았다. 지중추부사에 이익순( 李 益 淳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서형순( 徐 衡 淳 ), 동지중추부사 한 자리에 조희철( 趙 羲 轍 ), 호군에 조병식( 趙 秉 式 )ㆍ박용대( 朴 容 大 )ㆍ장희동( 張 熙 東 ), 부호군에 홍순학( 洪 淳 學 )ㆍ이교영( 李 敎 榮 )ㆍ박해철( 朴 海 哲 )ㆍ윤경진 ( 尹 庚 鎭 )ㆍ이주흥( 李 周 興 )ㆍ이교응( 李 敎 應 )ㆍ이규학( 李 奎 鶴 )ㆍ백낙준( 白 樂 駿 ), 부사직에 김주

100 100 - 현( 金 疇 鉉 )ㆍ이범진( 李 範 晉 ), 부사과에 이지효( 李 志 孝 )ㆍ함창범( 咸 昌 範 ), 부사정에 이정직( 李 貞 稙 )ㆍ윤익( 尹 瀷 )ㆍ이경하( 李 敬 夏 ), 부사용에 홍태현( 洪 泰 顯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위도 첨사( 蝟 島 僉 使 ) 태세춘( 太 世 春 )은 한 임기에 한해서 잉임( 仍 任 )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 다. 군산 첨사 이용겸과 풍천 부사 유기동( 柳 冀 東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 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18년 7월 12일(임신) / 서광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서광정( 徐 光 鼎 )ㆍ김동운( 金 東 韻 )을 선전관으로, 서형순( 徐 珩 淳 )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이건식( 李 建 植 )을 충청도 병마우후로, 유승로( 柳 丞 魯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배용구( 裵 龍 九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민긍( 李 敏 兢 )ㆍ정주묵( 鄭 周 默 )을 선전관으로, 이의순( 李 宜 淳 )을 훈련도감 초관으로 삼았다. 이태권( 李 泰 權 )을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으로, 이상덕( 李 相 悳 )을 나 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이병규( 李 秉 奎 )를 경기 중군으로, 백낙륜( 白 樂 倫 )을 강화 중군으로, 이규용( 李 奎 鏞 )을 강원 중군으로 삼았다. 현제보( 玄 濟 普 )를 동지중추부사로, 홍학주( 洪 鶴 周 ) 를 내금위장으로, 오순영( 吳 順 泳 )을 도총부 경력으로, 임우호( 任 禹 鎬 )를 성진 첨사( 城 津 僉 使 ) 로, 홍준모( 洪 俊 謨 )를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조병원( 趙 秉 元 )을 조사위장으로 삼았다. 노귀 수( 盧 龜 壽 )를 충장위장으로, 이규원( 李 奎 元 )을 선전관으로, 이용복( 李 容 復 )을 영종 첨사( 永 宗 僉 使 )로, 허진( 許 璡 )을 부산 첨사( 釜 山 僉 使 )로, 박태원( 朴 泰 遠 )을 도총부 경력으로, 장진행( 張 晉 行 )을 함경 중군으로, 최민선( 崔 敏 善 )을 평안도 병마우후로, 성낙소( 成 樂 韶 )를 초도 첨사 ( 椒 島 僉 使 )로, 이창하( 李 彰 夏 )를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삼았다. 구영조( 具 永 祖 )를 도총부 도 사로, 왕은주( 王 殷 疇 )를 북우후( 北 虞 候 )로, 김태희( 金 泰 熙 )를 전라도 병마우후로, 주용진( 朱 龍 鎭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전유연( 全 有 衍 )을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윤은일( 尹 殷 一 ) 을 갈파지 첨사( 乫 波 知 僉 使 )로, 이용주( 李 龍 株 )를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 함계영( 咸 啓 榮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로, 이경진( 李 景 震 )을 금갑도 만호( 金 甲 島 萬 戶 )로, 한경식( 韓 景 植 ) 을 조라포 만호( 助 羅 浦 萬 戶 )로, 김중혁( 金 重 爀 )을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홍종완( 洪 鍾 完 )을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로, 김인구( 金 獜 九 )를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로, 강화수( 姜 華 秀 )를 목 포 만호( 木 浦 萬 戶 )로, 윤세옥( 尹 世 玉 )을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김용윤( 金 龍 潤 )을 미전 첨 사( 美 錢 僉 使 )로, 장규형( 張 奎 衡 )을 청수 만호( 靑 水 萬 戶 )로, 김백록( 金 百 祿 )을 보산 별장( 保 山 別 將 )으로, 김용승( 金 龍 升 )을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으로 삼았다. 황윤형( 黃 潤 亨 )을 오위장으로, 김서( 金 序 )를 충장위장으로, 이교원( 李 敎 元 )을 훈련원 정으로, 이호면( 李 鎬 冕 )ㆍ정인흥( 鄭 寅 興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박규환( 朴 奎 煥 )ㆍ권귀인( 權 龜 仁 )ㆍ박태웅( 朴 泰 雄 )ㆍ배명춘( 裵 命 春 ) ㆍ민영창( 閔 永 昌 )을 오위장으로, 김광한( 金 光 漢 )을 경복궁 위장으로, 이주영( 李 周 永 )ㆍ김재풍 ( 金 在 豐 )을 훈련원 부정으로, 윤규선( 尹 奎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구영조( 具 永 祖 )를 도총부 경력으로, 이병렬( 李 丙 烈 )을 훈련원 주부로, 김치규( 金 致 奎 )를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이용 호( 李 容 鎬 )를 도총부 도사로, 최창규( 崔 昌 奎 )를 수문장으로, 김기호( 金 基 鎬 )를 충청 중군으 로, 김병숙( 金 炳 肅 )을 좌익찬으로, 장원식( 張 元 植 )ㆍ홍우범( 洪 祐 範 )을 훈련원 주부로, 현은정 ( 玄 殷 楨 )을 경희궁 위장으로, 민치두( 閔 致 斗 )ㆍ이현의( 李 鉉 儀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용인 ( 李 容 仁 )을 부장으로, 김창수( 金 昌 洙 )를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김긍연( 金 兢 淵 )을 경복궁 위 장으로, 조태하( 趙 泰 夏 )를 훈련원 주부로, 김지옥( 金 枝 沃 )을 수문장으로, 조창현( 趙 昌 顯 )을

101 101 - 도총부 경력으로, 염학순( 廉 學 淳 )을 수문장으로, 안철승( 安 轍 承 )ㆍ이준한( 李 駿 漢 )을 선전관으 로, 장귀택( 張 龜 澤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노진구( 盧 鎭 九 )를 부장으로, 이동영( 李 東 榮 )ㆍ윤임 대( 尹 任 大 )를 수문장으로, 이필신( 李 弼 信 )을 조경묘 수문장으로, 이정호( 李 正 鎬 )를 경기전 수 문장으로 삼았다. 삼천포 권관( 三 千 浦 權 管 )에 변순철( 邊 順 哲 )을 단부하고, 운두리 권관( 雲 頭 里 權 管 )에 전성관( 全 成 官 )을 단부하고, 오정탄 권관( 於 汀 灘 權 管 )에 호치정( 胡 致 禎 )을 단부하 였다. 훈련원 판관 박윤호( 朴 潤 皓 )ㆍ박규진( 朴 奎 鎭 ), 훈련원 주부 김기종( 金 基 宗 )ㆍ안석윤( 安 錫 胤 )ㆍ호광표( 扈 光 表 )ㆍ김성태( 金 星 泰 ), 이상은 감하하였다. 천세현( 千 世 顯 )ㆍ김성태를 훈련 원 가설 판관으로, 이시창( 李 時 昌 )ㆍ안윤명( 安 潤 明 )ㆍ최완식( 崔 完 植 )ㆍ이덕교( 李 德 敎 )를 주부 로 삼았다. 홍주 영장 이태권, 나주 영장 이상덕, 경기 중군 이병규, 강화 중군 백낙륜, 강원 중군 이규용,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 원 주부에 신준모( 申 準 謨 )를 단부하였다. 본원의 거관 동지( 去 官 同 知 ) 스무 자리에 이봉우 ( 李 鳳 祐 )ㆍ노의수( 盧 儀 壽 )ㆍ구계춘( 具 桂 春 )ㆍ오익신( 吳 翊 臣 )ㆍ조인석( 趙 仁 錫 )ㆍ유학로( 柳 學 魯 ) ㆍ이종집( 李 鍾 集 )ㆍ오일용( 吳 逸 鎔 )ㆍ정석붕( 鄭 錫 朋 )ㆍ이순학( 李 順 學 )ㆍ윤익배( 尹 益 培 )ㆍ이달 홍( 李 達 泓 )ㆍ김광한( 金 光 漢 )ㆍ조병문( 曺 秉 文 )ㆍ최치기( 崔 致 基 )ㆍ이윤규( 李 胤 奎 )ㆍ박영식( 朴 永 植 )ㆍ손기정( 孫 基 楨 )ㆍ정기만( 鄭 基 晩 )ㆍ양유풍( 梁 有 豐 )을 단부하고, 첨지 열두 자리에 이종관 ( 李 鍾 觀 )ㆍ백남석( 白 南 奭 )ㆍ이민식( 李 敏 植 )ㆍ이창하( 李 彰 夏 )ㆍ윤이열( 尹 彝 烈 )ㆍ엄주철( 嚴 柱 哲 ) ㆍ황윤형( 黃 潤 亨 )ㆍ권귀인( 權 龜 仁 )ㆍ박규환( 朴 奎 煥 )ㆍ민영창( 閔 永 昌 )ㆍ민장호( 閔 章 鎬 )ㆍ고병 윤( 高 秉 允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정규찬( 鄭 圭 瓚 )ㆍ송귀호( 宋 龜 浩 )ㆍ백낙규( 白 樂 奎 )ㆍ유석 근( 劉 錫 菫 )ㆍ이경의( 李 敬 儀 )ㆍ한두원( 韓 斗 源 )을 단부하였다 / 고종 18년 7월 15일(을해) / 희정당에서 수령 등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서정순 등이 입시하였다 사시( 巳 時 ).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수령, 변장이 입시할 때에, 우부승지 서정순, 가주서 함우복, 기사 관 김천수ㆍ정하원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장단 부사( 長 湍 府 使 ) 이인만( 李 寅 晩 ), 부령 부사( 富 寧 府 使 ) 구연식( 具 然 軾 ), 청송 부사( 靑 松 府 使 ) 정현영( 鄭 顯 英 ), 임실 현감( 任 實 縣 監 ) 한기석( 韓 箕 錫 ), 정읍 현감( 井 邑 縣 監 ) 정기찬( 鄭 基 贊 ), 개령 현감( 開 寧 縣 監 ) 이휘재( 李 徽 宰 ), 울진 현령( 蔚 珍 縣 令 ) 왕근호( 王 謹 鎬 ), 적성 현감( 積 城 縣 監 ) 박연수( 朴 衍 壽 ), 고산 현감( 高 山 縣 監 ) 정대무( 丁 大 懋 )가 기둥 밖에 나아가 엎드렸다.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주용진( 朱 龍 鎭 ), 제 포 만호( 薺 浦 萬 戶 ) 김치규( 金 致 奎 ),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 홍종완( 洪 鍾 完 )이 계단 아래 순서대 로 섰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서정순이 아뢰기를, 수령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와 직책과 성명을 아뢰도록 하고, 변장 등은 선전관으로 하여금 직책과 성명을 아뢰도록 할까요?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인만 등이 차례대로 직책과 성명을 아뢰고, 선전관이 변장의 직책과 성명을 아뢰었다. 서정순이 아뢰기를, 수령, 변장 등을 물러가도록 할까요?

102 102 -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 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고종 20년 1월 27일(기유) / 포폄에서 엄명하게 전최하지 않은 개성 유수 홍순형 등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아뢰기를, 여러 도의 포폄 계본( 褒 貶 啓 本 )을 열어 보니, 개성 유수( 開 城 留 守 ) 홍순형( 洪 淳 馨 )의 계본 가운데 여현 첨사( 礪 峴 僉 使 ) 백치균( 白 致 均 )에 대해서는 더욱 감독하고 신칙하는 데 힘써야 한다. 고 지목하였고, 백치 첨사( 白 峙 僉 使 ) 한굉리( 韓 宏 履 )에 대해서는 정사를 의당 신칙하 고 격려해야 한다. 고 지목하였으며, 경기 수사( 京 畿 水 使 ) 정완묵( 鄭 完 默 )의 계본 가운데에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주용진( 朱 龍 鎭 )에 대해서는 치적에 진실로 흠이 없다. 고 지목하였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서광정( 徐 光 鼎 )의 계본 가운데에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 김유연( 金 有 衍 )에 대해서는 보고를 더러 빠뜨렸다. 고 지목하였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平 安 道 兵 馬 節 度 使 ) 신환( 申 桓 )의 계본 가운데에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 김병주( 金 炳 周 )에 대해서는 봉화와 파 발마를 더욱 살펴야 한다. 고 지목하였고, 경상 감사 윤자승( 尹 滋 承 )의 계본 가운데에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 이회식( 李 會 植 )에 대해서는 당연히 중대한 지역이다. 고 지목하였고, 독용 별장( 禿 用 別 將 ) 이의길( 李 義 吉 )에 대해서는 소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성첩( 城 堞 )을 지키는 것은 바로 직분일 따름이다. 라고 지목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두 중고( 中 考 )에 두었어야 하는 데 상고( 上 考 )에 두었습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윤홍대( 尹 弘 大 )의 계본 가운데에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 김보영( 金 輔 榮 )에 대해서는 귀가 어두운 것이 어찌 해가 되겠는가. 고 지목하였고, 전라우도 수군절도 사 서광정( 徐 光 鼎 )의 계본 가운데에 남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 황윤곤( 黃 胤 坤 )에 대해서는 아전의 말을 믿지 말라. 고 지목하였고, 다경포 만호( 多 慶 浦 萬 戶 ) 김인구( 金 麟 九 )에 대해서 는 시험에 공공연히 응시하지 않았다. 고 지목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두 하고( 下 考 )에 두었어 야 하는데 중고( 中 考 )에 두었습니다. 평안 감사 김병덕( 金 炳 德 )의 계본 가운데에 보산 별장 ( 保 山 別 將 ) 김백록( 金 百 祿 )에 대해서는 방수( 防 戍 )에 이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업 무에 익숙해야 한다. 고 지목하였고, 병사 신환( 申 桓 )의 계본 가운데에 청수 만호( 靑 水 萬 戶 ) 장규봉( 張 奎 鳳 )에 대해서는 봉화와 파발마를 빠뜨리지 않아야 하는 전수( 典 守 )가 가벼운 것 이 아니다. 고 지목하였고, 수구 만호( 水 口 萬 戶 ) 이성서( 李 聖 瑞 )에 대해서는 더없이 중대한 국경의 보루( 堡 壘 )를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말라. 고 지목하였고, 북병사( 北 兵 使 ) 구준현( 具 俊 鉉 )의 계본 가운데에 아산 만호( 阿 山 萬 戶 ) 김인석( 金 仁 錫 )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한 평가 가 있다. 고 지목하였고, 방원 만호( 坊 垣 萬 戶 ) 김성건( 金 成 健 )에 대해서는 거의 허물이 없 다. 고 지목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두 하고( 下 考 )에 두었어야 하는데 상고( 上 考 )에 두었으니, 자못 엄정하게 전최( 殿 最 )하는 뜻이 없습니다. 각각 해당 수신( 守 臣 )과 도신( 道 臣 ), 수신( 帥 臣 )을 모두 추고하여 문책하소서. 여현 첨사 백 치균, 백치 첨사 한굉리, 덕적 첨사 주용진, 고군산 첨사 김유연, 여산 첨사 김병주, 금오 별 장 이회식, 독용 별장 이의길은 모두 중고를 시행하고, 남도포 만호 황윤곤, 다경포 만호 김 인구, 회령포 만호 김보영은 모두 하고를 시행하고, 이진 만호( 梨 津 萬 戶 ) 김상익( 金 相 翼 ), 청 수 만호 장규봉, 수구 만호 이성서, 아산 만호 김인석, 방원 만호 김성건, 보산 별장 김백록

103 103 - 은 포폄 계본의 말로써 수임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모두 파출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0년 1월 27일(기유) / 조희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조희순( 趙 羲 純 )을 지훈련원사로, 김규홍( 金 奎 弘 )을 동지중추부사로, 조희승( 趙 羲 升 )ㆍ이근 석( 李 根 奭 )을 동지훈련원사로, 민경호( 閔 敬 鎬 )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이정화( 李 鼎 和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민고( 李 敏 皐 )를 선전관으로, 서광현( 徐 光 顯 )을 내금위장으로, 이득연( 李 得 淵 )을 평안도 병마우후로, 민상능( 閔 相 能 )을 충청도 병마우후로, 이규용( 李 圭 鏞 )을 다대포 첨 사( 多 大 浦 僉 使 )로, 이병세( 李 秉 世 )를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이교원( 李 敎 元 )을 통어영 중 군( 統 禦 營 中 軍 )으로, 한진행( 韓 鎭 行 )을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으로, 윤수영( 尹 守 榮 )을 함통 중 군( 咸 統 中 軍 )으로, 오연긍( 吳 然 肯 )을 대흥 첨사( 大 興 僉 使 )로, 이정모( 李 廷 模 )를 지중추부사로, 변승연( 卞 承 淵 )을 동지중추부사로, 민긍식( 閔 肯 植 )을 내금위장으로, 심진택( 沈 鎭 澤 )ㆍ오경림 ( 吳 慶 林 )을 오위장으로, 조재관( 趙 載 觀 )ㆍ심의호( 沈 宜 浩 )를 선전관으로, 조흥철( 趙 興 哲 )을 오 위장으로, 신백희( 申 百 熙 )를 선전관으로, 조종철( 趙 鍾 哲 )을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남명선( 南 命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정은조( 鄭 誾 朝 )ㆍ조시영( 曺 始 永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민영일( 閔 泳 一 )을 황해도 병마우후로, 이원영( 李 源 永 )을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강태희( 姜 泰 喜 )를 충익위 장으로, 한현범( 韓 賢 範 )을 경복궁 위장( 景 福 宮 衞 將 )으로, 임광호( 任 光 鎬 )를 훈련원 정으로, 이기준( 李 起 俊 )을 선전관으로, 조흥룡( 趙 興 龍 )을 전라 중군으로, 임광호를 겸사복장으로, 이 정섭( 李 鼎 燮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신석헌( 申 碩 憲 )을 고금도 첨사( 古 今 島 僉 使 )로, 천의 민( 千 儀 敏 )을 오위장으로, 채순철( 蔡 順 哲 )을 경복궁 위장으로, 구동석( 具 東 奭 )ㆍ이규원( 李 奎 元 )을 훈련원 부정으로, 정지식( 鄭 志 植 )을 선전관으로, 최희봉( 崔 喜 奉 )을 고군산 첨사( 古 羣 山 僉 使 )로, 이국명( 李 國 明 )을 사량 만호( 蛇 梁 萬 戶 )로, 오순영( 吳 順 泳 )을 훈련원 정으로, 이교민 ( 李 敎 敏 )을 훈련원 주부로, 정인흥( 鄭 麟 興 )을 수구 만호( 水 口 萬 戶 )로, 이윤평( 李 允 坪 )을 식송 만호( 植 松 萬 戶 )로, 이익( 李 )을 서수라 만호( 西 水 羅 萬 戶 )로, 윤태영( 尹 泰 榮 )을 선전관으로, 김 태영( 金 泰 榮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연하( 金 演 夏 )를 훈련원 부정으로, 송시영( 宋 時 榮 )을 훈련 원 주부로, 한용규( 韓 用 奎 )를 금위영 파총으로, 최운환( 崔 雲 煥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 규상( 李 圭 象 )을 금위영 초관으로, 이민집( 李 敏 集 )을 선전관으로, 이제선( 李 濟 善 )ㆍ이교직( 李 敎 直 )ㆍ우충식( 禹 忠 植 )을 훈련원 첨정으로, 신용균( 申 用 均 )을 수문장으로, 이정규( 李 正 圭 )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재우( 金 在 遇 )ㆍ변철규( 邊 徹 圭 )ㆍ상직현( 尙 稷 鉉 )을 훈련원 판관으로, 장원 식( 張 元 植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김상현( 金 常 鉉 )을 여현 첨사( 礪 峴 僉 使 )로, 민치룡( 閔 致 龍 )을 백치 첨사( 白 峙 僉 使 )로, 김택귀( 金 澤 龜 )를 남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로, 최두현( 崔 斗 鉉 ) 을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로, 이제응( 李 濟 膺 )을 방산 만호( 方 山 萬 戶 )로, 김유명( 金 裕 鳴 )을 산산 첨사( 蒜 山 僉 使 )로, 강예석( 康 禮 錫 )을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로, 김병직( 金 秉 直 )을 이진 만 호( 梨 津 萬 戶 )로, 김석우( 金 錫 禹 )를 청수 만호( 靑 水 萬 戶 )로, 함기훈( 咸 基 薰 )을 보산 별장( 保 山 別 將 )으로, 김자일( 金 慈 逸 )을 청수 만호로, 오득경( 吳 得 璟 )을 방산 만호( 方 山 萬 戶 )로, 박동한 ( 朴 東 漢 )을 조령 별장( 鳥 嶺 別 將 )으로, 강효중( 康 孝 重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고진형( 高 鎭 亨 )을 임토 별장( 林 土 別 將 )으로 삼았다. 변석린( 邊 錫 麟 )ㆍ조재오( 趙 載 五 )를 훈련원 첨정으

104 104 - 로, 이덕우( 李 德 雨 )를 금위영 파총으로, 오원영( 吳 元 泳 )을 어영청 파총으로, 윤길병( 尹 吉 炳 ) 을 총융청 파총으로, 장택교( 張 擇 喬 )를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로, 김주영( 金 柱 潁 )을 다경포 만 호( 多 慶 浦 萬 戶 )로, 이서황( 李 瑞 璜 )을 구령 만호( 仇 寧 萬 戶 )로, 강성재( 姜 星 載 )를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으로, 천상근( 千 相 瑾 )을 방원 만호( 坊 垣 萬 戶 )로, 김현국( 金 賢 國 )을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로, 이의섭( 李 義 燮 )을 수구 만호( 水 口 萬 戶 )로, 김사객( 金 士 客 )을 아산 만호( 阿 山 萬 戶 )로, 이창현( 李 昌 鉉 )을 독용 별장( 禿 用 別 將 )으로, 호형문( 胡 亨 文 )을 정족 별장( 鼎 足 別 將 )으로 삼았 다. 채정묵( 蔡 鼎 默 )ㆍ이가우( 李 嘉 宇 )를 중추부 경력으로, 양문환( 梁 文 煥 )ㆍ방우량( 龐 友 亮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기승( 金 基 昇 )을 수문장으로, 위종식( 魏 鍾 植 )ㆍ김흥수( 金 興 洙 )를 훈련원 판관으로, 정규찬( 鄭 圭 瓚 )을 훈련원 주부로, 이상흥( 李 商 興 )을 금위영 초관으로, 조병진( 曺 秉 鎭 )을 어영청 초관으로, 조병필( 趙 秉 弼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명현( 李 明 鉉 )ㆍ이선영( 李 善 永 ) 을 훈련원 주부로, 박제성( 朴 齊 聲 )을 수문장으로, 장이태( 張 履 泰 )를 전라 중군으로, 김덕성 ( 金 悳 性 )을 오위장으로, 이한승( 李 漢 承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규화( 金 奎 華 )를 수문장으로 삼 았다. 허협( 許 鋏 )을 장곶 첨사( 長 串 僉 使 )로, 김성국( 金 星 國 )을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이종겸 ( 李 鍾 謙 )을 선전관으로, 정창현( 鄭 暢 鉉 )을 어영청 초관으로, 김경한( 金 慶 漢 )을 우시직( 右 侍 直 )으로, 김익수( 金 翊 洙 )를 우세마( 右 洗 馬 )로, 최성증( 崔 性 曾 )을 갈파지 첨사( 乫 波 知 僉 使 )로 삼았다. 전기봉( 全 基 鳳 )을 오위장으로, 이계무( 李 啓 茂 )를 경복궁 위장으로, 김설현( 金 卨 鉉 )을 중추부 경력으로, 김병선( 金 炳 善 )을 수문장으로, 정철영( 鄭 鐵 永 )을 내승( 內 乘 )으로, 안일주( 安 一 柱 )ㆍ김희성( 金 熙 聲 )ㆍ김규환( 金 圭 煥 )을 오위장으로, 김완근( 金 完 根 )을 경복궁 위장으로, 신성구( 申 聖 求 )를 중추부 도사로, 이전혁( 李 筌 赫 )ㆍ김재연( 金 在 淵 )을 오위장으로, 조종직( 趙 鍾 稷 )ㆍ허철( 許 )을 훈련원 주부로, 남석희( 南 錫 熙 )를 수문장으로, 이세응( 李 世 應 )을 금위영 초관으로, 양주익( 梁 柱 翼 )을 어영청 초관으로, 김복연( 金 福 淵 )을 임자도 첨사( 荏 子 島 僉 使 )로, 김완식( 金 完 植 )을 구산 첨사( 龜 山 僉 使 )로, 강봉순( 姜 鳳 舜 )을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김규재 ( 金 奎 載 )를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삼았다. 방한흥( 方 漢 興 )을 수문장으로, 김긍연( 金 兢 淵 )을 경복궁 위장으로, 왕은주( 王 殷 疇 )를 오위장으로, 이성연( 李 盛 淵 )을 부장( 部 將 )으로, 구상조( 具 相 祖 )ㆍ하순일( 河 順 一 )을 수문장으로, 손상희( 孫 尙 僖 )를 경복궁 위장으로, 신석현( 申 錫 賢 )을 수문장으로, 박문회( 朴 文 會 )를 전라 중군으로, 이두연( 李 斗 淵 )을 충익위장으로, 최덕현( 崔 德 鉉 )을 수문장으로, 박병용( 朴 炳 容 )을 부장으로, 노석일( 盧 錫 日 )을 수문장으로, 이상규( 李 庠 珪 ) ㆍ김창모( 金 昌 模 )ㆍ홍집주( 洪 集 周 )ㆍ이풍재( 李 豐 載 )를 선전관으로, 채규붕( 蔡 奎 鵬 )ㆍ홍종렬 ( 洪 鍾 烈 )을 부장으로, 신태제( 申 泰 濟 )ㆍ김영배( 金 榮 培 )ㆍ이기서( 李 基 緖 )ㆍ김원석( 金 源 錫 )ㆍ왕 처순( 王 處 順 )을 수문장으로, 서영보( 徐 榮 輔 )를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동인 권관 ( 同 仁 權 管 )에 김창현( 金 昌 鉉 )을 단부하고, 율포 권관( 栗 浦 權 管 )에 최상억( 崔 祥 億 )을 단부하 고, 묘동 권관( 廟 洞 權 管 )에 김병형( 金 秉 衡 )을 단부하고, 소길호리 권관( 小 吉 號 里 權 管 )에 김두 준( 金 斗 準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조의석( 趙 義 錫 ), 주부 백완혁( 白 完 爀 )ㆍ손광현( 孫 光 鉉 )ㆍ진중초( 秦 仲 初 )를 감하하였다. 백완혁( 白 完 爀 )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삼고, 최영환( 崔 英 煥 )ㆍ양종률( 梁 鍾 律 )ㆍ김명렬( 金 命 烈 )을 훈련원 주부 가설로 삼았다. 훈련원 주부 가설에 이 준식( 李 俊 植 )을 단부하였다.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 이병 ( 李 秉 ), 통어영 중군( 統 禦 營 中 軍 ) 이교원( 李 敎 元 ),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 한진행( 韓 鎭 行 ), 함경 중군( 咸 鏡 中 軍 ) 윤수영( 尹 守 榮 ), 대흥 첨사( 大 興 僉 使 ) 구연긍( 具 然 肯 )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다. 동지중추 부사에 민덕현( 閔 德 顯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민영기( 閔 泳 綺 )ㆍ이충려( 李 忠 呂 )ㆍ허도( 許 鍍 )를 단부하고, 지중추부사 가설 네 자리에 이덕희( 李 德 禧 )ㆍ오상묵( 吳 相 默 )ㆍ 이순영( 李 舜 榮 )ㆍ최한규( 崔 漢 奎 )를 단부하였다. 오위장 가설에 김의신( 金 義 臣 )ㆍ이현국( 李 顯

105 105 - 國 )ㆍ박기진( 朴 基 珍 )ㆍ장효진( 張 孝 鎭 )ㆍ김병묵( 金 秉 默 )ㆍ민치학( 閔 致 學 )ㆍ김두현( 金 斗 鉉 )ㆍ장 진섭( 張 鎭 燮 )ㆍ김상은( 金 尙 殷 )ㆍ김학연( 金 學 淵 )ㆍ장한규( 張 漢 奎 )ㆍ이태현( 李 台 鉉 )ㆍ임정기( 林 廷 麒 )ㆍ유병직( 劉 秉 直 )ㆍ최윤항( 崔 潤 恒 )ㆍ온영무( 溫 永 武 )ㆍ이경창( 李 景 昌 )ㆍ김완근( 金 完 根 )ㆍ 채신영( 蔡 愼 永 )ㆍ오희선( 吳 熙 善 )ㆍ홍재정( 洪 在 正 )ㆍ양성호( 梁 成 浩 )ㆍ장재유( 張 載 猷 )ㆍ이윤본 ( 李 潤 本 )ㆍ현재행( 玄 載 行 )ㆍ윤경렬( 尹 景 烈 )ㆍ박효진( 朴 孝 鎭 )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 가설 에 김갑균( 金 甲 均 )을 단부하고,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에 천중진( 千 重 鎭 )을 단부하고, 부사과에 김재두( 金 在 斗 )ㆍ정익원( 鄭 益 源 )을 단부하고,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기준( 李 起 俊 )을 단부하 고, 첨정 두 자리에 임광호( 任 光 鎬 )ㆍ민긍식( 閔 肯 植 )을 단부하였다. 부사맹에 김선진( 金 鮮 振 ) ㆍ홍종훤( 洪 鍾 萱 )ㆍ이용적( 李 容 迪 )을 단부하였다. 전 훈련도감 협련 파총 이창권( 李 昌 權 )을 특별히 가자하였다. 겸 창성방어사( 昌 城 防 禦 使 )에 이재정( 李 在 靖 )을 단부하였다. 문산 만호 ( 文 山 萬 戶 ) 조홍묵( 趙 泓 默 ),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 김치규( 金 致 奎 ), 구산 첨사( 龜 山 僉 使 ) 김완 식( 金 完 植 ), 선적 첨사( 善 積 僉 使 ) 임헌익( 任 憲 翼 )을 서로 바꾸었다. 부사과에 권국현( 權 國 賢 ) ㆍ김한구( 金 翰 求 )ㆍ장교준( 張 敎 俊 )ㆍ이계선( 李 啓 善 )ㆍ이재연( 李 在 淵 )ㆍ김창영( 金 昌 榮 )ㆍ윤귀 선( 尹 龜 善 )ㆍ김영진( 金 永 璡 )ㆍ이종빈( 李 鍾 彬 )ㆍ권석천( 權 錫 天 )ㆍ이기철( 李 起 轍 )ㆍ김순협( 金 淳 協 )ㆍ장문급( 張 汶 汲 )ㆍ이계명( 李 啓 明 )ㆍ정학교( 丁 學 敎 )ㆍ박승연( 朴 昇 淵 )ㆍ유석호( 劉 奭 浩 )ㆍ박 도형( 朴 道 衡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0년 12월 29일(을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겸판서 민영위( 閔 泳 緯 )는 나왔고, 참판 유만원( 兪 晩 源 )은 병이고, 참의 윤치화( 尹 致 和 )는 입직인데 나왔고, 참지 김종한( 金 宗 漢 )은 체직( 替 職 )되었다. 이재봉( 李 載 鳳 )을 지훈련원사로, 한형리( 韓 衡 履 )ㆍ오정현( 吳 鼎 鉉 )ㆍ박문회( 朴 文 會 )를 오위장 으로, 김사익( 金 思 翊 )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김정근( 金 楨 根 )을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으로, 정영택( 鄭 永 澤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이교성( 李 敎 性 )을 광주 중군( 廣 州 中 軍 )으로, 이 재준( 李 載 駿 )을 강화 중군으로, 조희완( 趙 羲 完 )을 북우후( 北 虞 候 )로, 김광묵( 金 光 默 )을 대흥 첨사( 大 興 僉 使 )로, 오익영( 吳 益 泳 )을 동지중추부사로, 홍용관( 洪 用 觀 )을 세자익위사 좌익위 로, 정선조( 鄭 選 朝 )를 세자익위사 우익찬으로, 왕근호( 王 謹 鎬 )를 충청도 병마우후로, 이주혁 ( 李 周 赫 )을 전라도 병마우후로, 이만익( 李 萬 翼 )을 세자익위사 우위솔로, 신좌희( 申 佐 熙 )를 훈 련원 판관으로, 박병용( 朴 炳 容 )을 인차 만호( 仁 遮 萬 戶 )로, 유석형( 柳 錫 衡 )을 동인 만호( 同 仁 萬 戶 )로, 김택성( 金 宅 性 )을 황척파 만호( 黃 拓 坡 萬 戶 )로, 김병도( 金 炳 道 )를 동지중추부사로, 우 기정( 禹 冀 鼎 )을 훈련원 정으로, 김응모( 金 膺 模 )를 선전관으로, 김연하( 金 演 夏 )를 훈련원 첨정 으로, 김윤영( 金 潤 英 )을 전라도 중군으로, 서재풍( 徐 載 豐 )을 내금위장으로, 정홍채( 鄭 弘 采 )를 우림위장으로, 이규회( 李 奎 會 )를 선전관으로, 이병두( 李 秉 斗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성렬( 李 聖 烈 )을 세자익위사 좌부솔로, 이규태( 李 圭 泰 )를 선전관으로, 조병응( 趙 秉 應 )을 겸사복장으 로, 백성기( 白 性 基 )ㆍ이교민( 李 敎 敏 )을 선전관으로 삼았다. 성재우( 成 載 羽 )를 황해도 중군으 로, 민영준( 閔 泳 駿 )을 조사위장( 曹 司 衛 將 )으로, 조재오( 趙 載 五 )를 중추부 경력으로, 허철( 許 ) 을 훈련원 첨정으로, 안경환( 安 敬 煥 )을 전라 중군으로, 이현의( 李 鉉 儀 )를 전라우도 수군우후 로, 최학규( 崔 鶴 圭 )를 동지중추부사로, 민상식( 閔 庠 植 )을 충익위장으로, 손관원( 孫 觀 遠 )ㆍ이 홍래( 李 洪 來 )를 훈련원 판관으로, 유찬( 劉 燦 )을 가덕도 첨사( 加 德 島 僉 使 )로, 이용학( 李 容 學 )

106 106 - 을 충익위장으로, 이윤의( 李 允 儀 )를 충장위장으로, 이민집( 李 敏 集 )ㆍ이종호( 李 宗 鎬 )를 훈련원 부정으로, 김제일( 金 濟 一 )을 전라도 중군으로, 김영수( 金 永 秀 )ㆍ김기룡( 金 騎 龍 )을 오위장( 五 衛 將 )으로, 신정희( 申 正 熙 )를 선전관으로, 이우로( 李 友 魯 )를 훈련원 주부로, 박태선( 朴 泰 璇 )을 전라좌도 수군우후로, 윤재성( 尹 在 性 )을 충익위장으로, 조재명( 趙 載 明 )을 중추부 도사로, 홍 재선( 洪 在 宣 )을 훈련원 주부로, 오희선( 吳 熙 善 )을 전라도 중군으로, 이종환( 李 鍾 煥 )을 갈파지 첨사( 乫 波 知 僉 使 )로, 신명소( 申 命 泝 )ㆍ신응만( 愼 應 萬 )을 오위장으로, 구춘서( 具 春 書 )를 훈련 원 첨정으로, 채정묵( 蔡 鼎 默 )을 금위영 초관으로, 홍재륜( 洪 在 倫 )을 전라도 중군으로, 우창재 ( 禹 昌 在 )를 가덕도 첨사로, 황원식( 黃 元 植 )을 미조항 첨사( 彌 助 項 僉 使 )로, 신종문( 辛 鍾 聞 )을 고금도 첨사( 古 今 島 僉 使 )로, 우창배( 禹 昌 培 )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신창희( 申 昌 熙 )를 오 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 오한룡( 吳 漢 龍 )을 용매 첨사( 龍 媒 僉 使 )로, 권재찬( 權 在 燦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으로, 홍창윤( 洪 昌 潤 )을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김룡( 金 瀧 )을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로, 진경두( 陳 景 斗 )를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우창기( 禹 昌 基 )를 오위장으로, 홍창식 ( 洪 昌 植 )을 경복궁 위장으로, 이호덕( 李 鎬 悳 )을 부장( 部 將 )으로, 허재찬( 許 在 瓚 )을 수문장으 로, 김명린( 金 明 麟 )을 전라도 중군으로, 곽정곤( 郭 定 坤 )을 충익위장으로, 서상열( 徐 相 說 )을 충장위장으로, 이종호( 李 宗 鎬 )를 선전관으로, 이교석( 李 敎 錫 )을 중추부 경력으로, 길봉순( 吉 鳳 順 )을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로, 이병우( 李 昞 宇 )를 전라도 중군으로, 김영무( 金 永 懋 )를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김성수( 金 聖 洙 )를 조라포 만호( 助 羅 浦 萬 戶 )로, 김영려( 金 榮 礪 )를 덕진 만 호( 德 津 萬 戶 )로, 김순기( 金 順 基 )를 조령 별장( 鳥 嶺 別 將 )으로, 이교문( 李 敎 文 )을 오위장으로, 김지선( 金 支 善 )을 경희궁 위장으로, 민영철( 閔 泳 哲 )을 부장으로, 김용덕( 金 庸 德 )을 수문장으 로, 신창희( 申 昌 熙 )를 전라도 중군으로, 심의홍( 沈 宜 弘 )을 훈련원 도정으로, 이길선( 李 吉 善 ) 을 충장위장으로, 허협( 許 莢 )을 오위장으로, 현학규( 玄 學 奎 )를 수문장으로, 김중효( 金 重 孝 )를 전라도 중군으로, 정필묵( 鄭 弼 默 )을 충익위장으로, 안후선( 安 厚 善 )을 충장위장으로, 이규연 ( 李 奎 演 )을 훈련원 부정으로, 이명현( 李 明 鉉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창렬( 李 彰 烈 )을 금위영 초관으로, 김규동( 金 奎 東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김득신( 金 得 信 )을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 로, 김관식( 金 寬 植 )을 발포 만호( 鉢 浦 萬 戶 )로, 최영석( 崔 永 錫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전종 록( 錢 鍾 祿 )을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으로, 심의풍( 沈 宜 豐 )을 동지훈련원사로, 김진복( 金 震 福 )을 오위장으로, 김중식( 金 中 植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김응식( 金 應 植 )을 수문장으로, 백명규( 白 命 圭 )를 전라도 중군으로, 이창록( 李 昌 祿 )ㆍ차봉구( 車 鳳 九 )를 오위장으로, 김상호( 金 商 浩 )를 경 복궁 위장으로, 김진희( 金 晉 熙 )를 부장으로, 강경순( 康 敬 淳 )을 수문장으로, 김영규( 金 永 奎 )를 오위장으로, 권병수( 權 昺 洙 )ㆍ김병륜( 金 秉 倫 )ㆍ손병호( 孫 秉 浩 )를 수문장으로, 정진희( 鄭 鎭 禧 ) 를 전라도 중군으로, 김봉희( 金 鳳 熙 )를 충익위장으로, 민덕현( 閔 德 顯 )을 충장위장으로, 이계 선( 李 啓 善 )을 선전관으로, 권종석( 權 鍾 奭 )을 훈련원 첨정으로, 임정학( 林 廷 學 )을 전라도 중군 으로, 백익원( 白 益 元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이병기( 李 炳 基 )를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임 연( 林 演 )을 소이 만호( 所 已 萬 戶 )로, 나승조( 羅 承 祚 )를 조도 만호( 鳥 島 萬 戶 )로, 전인상( 全 仁 常 ) 을 흑산도 별장( 黑 山 島 別 將 )으로, 이태동( 李 台 東 )ㆍ강낙기( 康 洛 基 )ㆍ박기형( 朴 基 亨 )을 오위장 으로, 안홍익( 安 鴻 翊 )을 수문장으로, 박준국( 朴 準 國 )을 전라도 중군으로, 박제홍( 朴 齊 弘 )ㆍ김 인승( 金 麟 昇 )을 오위장으로, 심상원( 沈 相 元 )을 부장으로, 장철식( 張 轍 植 )을 수문장으로, 허협 ( 許 鋏 )을 전라도 중군으로, 김태관( 金 泰 觀 )을 총융청 초관으로, 박승보( 朴 承 輔 )를 가덕도 첨 사( 加 德 島 僉 使 )로, 김화건( 金 和 鍵 )을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로, 박희협( 朴 羲 協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호영득( 胡 永 得 )을 임토 별장( 林 土 別 將 )으로, 김이호( 金 履 祜 )를 오위장으로, 안정인 ( 安 正 仁 )을 경희궁 위장으로, 장호민( 張 好 民 )을 전라도 중군으로, 이동식( 李 東 植 )을 막령 만

107 107 - 호( 幕 嶺 萬 戶 )로, 박중엽( 朴 仲 燁 )을 오로량 만호( 吳 老 梁 萬 戶 )로, 이항로( 李 恒 魯 )ㆍ이승정( 李 承 禎 )을 훈련원 첨정으로, 장귀택( 張 龜 澤 )을 훈련원 주부로, 권필선( 權 必 善 )을 부장으로, 백치 방( 白 致 邦 )을 수문장으로, 김헌주( 金 憲 周 )ㆍ주인섭( 朱 寅 燮 )을 오위장으로, 임정진( 林 貞 鎭 )ㆍ 박성관( 朴 性 寬 )ㆍ신기석( 辛 錫 )을 수문장으로, 고영주( 高 永 周 )ㆍ김두경( 金 斗 京 )을 오위장으로, 조재정( 趙 載 禎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종석( 李 鍾 奭 )을 부장으로, 임동현( 林 東 鉉 )을 수문장으 로, 이학래( 李 鶴 來 )ㆍ김정현( 金 鼎 炫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기태( 金 基 台 )를 중추부 도사로, 이석우( 李 錫 禹 )를 훈련원 판관으로, 김이호( 金 履 祜 )를 전라도 중군으로, 김수현( 金 秀 鉉 )을 동 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김채영( 金 采 榮 )을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조공진( 曺 羾 振 )을 이진 만호 ( 梨 津 萬 戶 )로, 이유신( 李 裕 信 )을 월송 만호( 越 松 萬 戶 )로, 김종성( 金 鍾 聲 )을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으로, 오대진( 吳 大 鎭 )ㆍ조재경( 趙 載 慶 )을 오위장으로, 김상익( 金 相 益 )을 경복궁 위장으로, 정두영( 鄭 斗 永 )을 부장으로, 최익형( 崔 翊 亨 )을 수문장으로, 이만우( 李 晩 宇 )ㆍ이민성( 李 敏 性 ) 을 훈련원 판관으로, 하석락( 河 錫 洛 )을 수문장으로, 이승정( 李 承 禎 )을 총융청 초관으로, 이완 기( 李 完 耆 )를 오위장으로, 김도성( 金 道 成 )ㆍ최대현( 崔 大 鉉 )을 수문장으로, 홍우영( 洪 祐 永 )을 전라도 중군으로, 강민회( 姜 敏 會 )를 동지중추부사로, 신석은( 辛 錫 殷 )을 첨지중추부사로, 홍재 호( 洪 在 豪 )를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김형식( 金 亨 湜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백지운( 白 志 雲 )을 검산 별장( 劍 山 別 將 )으로, 이근흥( 李 根 興 )ㆍ어병완( 魚 秉 玩 )ㆍ이근종( 李 根 琮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병헌( 李 秉 憲 )ㆍ이교영( 李 敎 榮 )을 훈련원 주부로, 김순경( 金 舜 暻 )을 오위장으로, 고용묵( 高 容 默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능하( 李 能 夏 )를 부장으로, 이건( 李 健 )을 수문장으로, 강문원( 姜 文 元 )을 전라도 중군으로, 임인호( 任 麟 鎬 )ㆍ조건하( 趙 健 夏 )를 훈련원 판관으로, 김 응직( 金 應 稷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김병섭( 金 秉 燮 )ㆍ남궁영( 南 宮 泳 )을 금위영 초관으로, 진정익( 秦 禎 益 )ㆍ김의석( 金 義 錫 )을 오위장으로, 백인홍( 白 仁 洪 )을 경희궁 위장으로, 방수권 ( 方 秀 權 )을 부장으로, 최양원( 崔 陽 源 )을 수문장으로, 양성환( 梁 性 煥 )을 훈련원 첨정으로, 윤 규선( 尹 奎 善 )을 훈련원 주부로, 이철희( 李 徹 熙 )ㆍ오원영( 吳 元 泳 )을 부장으로, 강진우( 姜 鎭 宇 ) 를 수문장으로, 차제흠( 車 濟 欽 )을 오위장으로, 김주현( 金 柱 顯 )을 경복궁 위장으로, 임장백( 林 章 伯 )을 경희궁 위장으로, 홍순명( 洪 淳 明 )을 수문장으로, 최경선( 崔 敬 善 )을 신도 첨사( 薪 島 僉 使 )로, 노병직( 盧 炳 稷 )을 중추부 경력으로, 이종겸( 李 鍾 謙 )을 훈련원 첨정으로, 허장( 許 樟 )을 중추부 도사로, 이선영( 李 善 永 )을 훈련원 판관으로, 변철규( 邊 徹 圭 )를 총융청 파총으로, 유돈 수( 柳 敦 秀 )를 선전관으로, 배영락( 裵 榮 樂 )을 중추부 도사로, 방우량( 龐 友 亮 )ㆍ김의수( 金 宜 秀 ) 를 훈련원 주부로, 정규일( 鄭 逵 一 )을 수문장으로, 이기혁( 李 基 赫 )을 겸 훈련원도정으로, 이훈 경( 李 勛 卿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안택순( 安 宅 舜 )을 호영 초관( 湖 營 哨 官 )으로, 김두경( 金 斗 京 ) 을 전라도 중군으로, 한민교( 韓 敏 敎 )를 위봉 별장( 威 鳳 別 將 )으로, 조희철( 趙 羲 轍 )을 동지중추 부사로, 이명하( 李 命 夏 )를 첨지중추부사로, 김용완( 金 龍 完 )ㆍ김성기( 金 性 基 )를 경희궁 위장으 로, 윤귀선( 尹 龜 善 )을 수문장으로, 이호증( 李 浩 增 )ㆍ조현길( 趙 顯 吉 )을 오위장으로, 이순학( 李 淳 鶴 )을 경복궁 위장으로, 은처영( 殷 處 榮 )ㆍ이준규( 李 俊 奎 )를 경희궁 위장으로, 조만기( 趙 萬 基 )를 경복궁 위장으로, 신복균( 申 復 均 )을 선전관으로, 김재석( 金 在 奭 )ㆍ박보경( 朴 輔 景 )을 훈 련원 주부로, 윤필영( 尹 弼 永 )을 수문장으로, 박증수( 朴 曾 洙 )ㆍ이인원( 李 寅 源 )을 오위장으로, 지명중( 池 明 重 )을 경희궁 위장으로, 양성환( 梁 性 煥 )을 선전관으로, 이명헌( 李 命 憲 )을 수문장 으로, 신상우( 申 商 雨 )를 훈련원 첨정으로, 편상오( 片 相 五 )ㆍ김현익( 金 顯 益 )ㆍ오현준( 吳 顯 準 ) 을 수문장으로, 한규동( 韓 圭 東 )을 전라도 중군으로, 한교서( 韓 敎 序 )를 오위장으로, 박재곤( 朴 載 坤 )을 경복궁 위장으로, 김홍기( 金 泓 基 )ㆍ윤계환( 尹 啓 煥 )을 경희궁 위장으로, 송병준( 宋 秉 俊 )을 수문장으로, 김상진( 金 祥 鎭 )을 총위영 초관으로, 이완태( 李 完 泰 )를 수문장으로, 이근용

108 108 - ( 李 根 鎔 )을 선전관으로, 이공렬( 李 公 烈 )ㆍ이원우( 李 原 宇 )ㆍ박진규( 朴 晉 圭 )ㆍ정재규( 鄭 在 圭 )ㆍ 김영규( 金 永 圭 )를 수문장으로, 이규방( 李 奎 邦 )을 남도 참군( 南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 관 김굉균( 金 宏 均 )과 주부 박용래( 朴 龍 來 )ㆍ박봉식( 朴 鳳 植 )ㆍ신석린( 申 錫 麟 ), 이상은 감하( 減 下 )하였다 /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통어사( 統 禦 使 )를 감하한 후 경기 연안 수군이 이미 해방 아문( 海 防 衙 門 )에 속하였습니다. 따라서 해서( 海 西 )와 호서( 湖 西 )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일체로 절제하게 하고, 덕적( 德 積 )ㆍ 덕포( 德 浦 )ㆍ주문( 注 文 )ㆍ영흥( 靈 興 )ㆍ장봉( 長 峯 )의 전최( 殿 最 )는 기영( 畿 營 )으로 하여금 구관 하게 하고, 남양( 南 陽 ), 장봉( 長 峯 )ㆍ인천( 仁 川 ) 목장은 이미 태복시에서 복계하여 당해 아문 에 갈라 붙였으니, 목관( 牧 官 )을 모두 감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 방답 첨사 조쾌복과 덕적 첨사 우창배를 서로 바꾸라는 하교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방답 첨사( 防 踏 僉 使 ) 조쾌복( 趙 快 福 )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우창배( 禹 昌 培 )를 서로 바꾸 라. 하였다 /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겸 병조판서 이재원( 李 載 元 )은 나왔고, 참판 조은승( 曺 殷 承 )은 나왔고, 참의 이동 연( 李 東 淵 )은 입직인데 나왔고, 참지 조경순( 趙 璟 淳 )은 병이고, 우부승지 권응선은 나왔다. 한응국( 韓 應 國 )을 동지중추부사로, 백낙신( 白 樂 莘 )ㆍ조존승( 趙 存 昇 )을 동지훈련원사로, 이응 화( 李 應 華 )를 선전관으로, 고운정( 高 雲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심의완( 沈 宜 琬 )을 좌변포도 청 종사관으로, 이승귀( 李 承 龜 )를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채현식( 蔡 顯 植 )을 수문장으로, 이 규선( 李 奎 璿 )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조희완( 趙 羲 完 )을 함경 중군으로, 이단석( 李 段 錫 )을 황해도 병마우후( 黃 海 道 兵 馬 虞 候 )로, 한정리( 韓 楨 履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 慶 尙 左 道 兵 馬 虞 候 )로, 전영섭( 田 榮 燮 )을 초지 첨사( 草 芝 僉 使 )로 삼았다. 부호군에 남계복( 南 啓 宓 )ㆍ이용관 ( 李 容 觀 )을 단부하였다. 방답 첨사( 防 踏 僉 使 ) 조쾌복( 趙 快 福 )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우창배 ( 禹 昌 培 )를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부사과에 김유현 ( 金 裕 鉉 )ㆍ김용덕( 金 庸 德 )ㆍ김춘영( 金 春 永 )ㆍ이관섭( 李 觀 燮 )ㆍ이승원( 李 承 遠 ), 이상을 모두

109 109 - 단부하였다. 남양 겸감목관 오경연( 吳 慶 然 ), 인천 겸감목관 윤수영( 尹 守 榮 ), 단천 겸감목관 민준호( 閔 俊 鎬 ), 장봉 겸감목관 장중술( 張 重 述 )을 감하하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 고종 21년 6월 5일(정축) / 경기 수군절도사의 병부 등을 거두어 올려보내도록 경기 감사에게 하유할 것을 청하는 이정래의 계 이정래가 아뢰기를, 병조의 계목에 경기 수군절도사를 지금 이미 감하하였으니, 해당 수군절도사가 차고 있던 병부( 兵 符 )와 수영( 水 營 )이 있는 덕적도( 德 積 島 )ㆍ덕포( 德 浦 )ㆍ주문( 注 文 )ㆍ영흥( 永 興 ) 4진 ( 鎭 )의 병부의 왼쪽을 거두어 불태우게 하소서. 한 일을 윤허하셨습니다. 모두 거두어 본원 으로 올려보내 불태우도록 하라고 경기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3년 6월 14일(을해) / 병비가 2차 정사에서 김재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병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김재홍( 金 在 泓 )을 부장으로, 홍성유( 洪 成 游 )ㆍ태학원( 太 鶴 元 ) 을 수문장으로 삼았다. 동지에 문기선( 文 基 璿 )을 단부하고, 첨지의 세 자리에 윤길병( 尹 吉 炳 )ㆍ민영기( 閔 泳 驥 )ㆍ김현생( 金 顯 生 )을 단부하였다. 우택영( 禹 宅 英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로 삼았다 / 고종 25년 1월 29일(신사)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김태욱( 金 泰 郁 )은 별시위( 別 侍 衛 )에 나아 갔고, 참의 오병문( 吳 炳 文 )은 입직이고, 참지 윤기원( 尹 起 元 )은 시위( 侍 衛 )에 나아갔다. 이규석( 李 奎 奭 )을 지훈련원사로, 정하원( 鄭 夏 源 )을 동지로, 윤석인( 尹 錫 仁 )을 선전관으로, 김 홍구( 金 鴻 求 )를 내금위장으로, 이도함( 李 道 咸 )을 대부도 첨사( 大 阜 島 僉 使 )로, 서병윤( 徐 丙 潤 ) 을 첨지로, 원우상( 元 禹 常 )을 겸 훈련원도정으로, 이계흥( 李 啓 興 )을 선전관으로, 서정두( 徐 廷 斗 )를 훈련원 첨정으로, 윤호선( 尹 鎬 善 )을 안원 만호( 安 原 萬 戶 )로, 신채희( 申 采 煕 )를 동인 만 호( 同 仁 萬 戶 )로, 유기선( 柳 冀 先 )을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으로, 한창리( 韓 昌 履 )를 청주 영장( 淸 州 營 將 )으로, 이규환( 李 圭 桓 )을 경기 중군( 京 畿 中 軍 )으로, 이규선( 李 圭 選 )을 안무 중군( 按 撫 中 軍 )으로, 민관식( 閔 寬 植 )을 남우후( 南 虞 候 )로, 이석호( 李 晳 鎬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병만 ( 李 秉 萬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박영도( 朴 永 道 )를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으로, 이인성( 李 寅 聲 )을 전라 중군으로, 이병두( 李 秉 斗 )를 충청도 병마우후로, 남명직( 南 命 稷 )을 훈련원 정으 로, 홍채( 洪 埰 )를 선전관으로, 윤병헌( 尹 秉 憲 )ㆍ이경기( 李 敬 器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승하( 李 承 河 )를 전라도 병마우후로, 정한모( 鄭 翰 謨 )ㆍ신성균( 申 性 均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구연항( 具

110 110 - 然 恒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김동식( 金 東 植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이병협( 李 秉 協 )을 강원 중군으로, 장기렴( 張 基 濂 )ㆍ이창하( 李 彰 夏 )를 훈련원 부정으로, 권기로( 權 驥 老 )를 훈련 원 주부로, 김계연( 金 啓 淵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한영모( 韓 永 模 )를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 홍택후( 洪 澤 厚 )ㆍ강이회( 姜 彝 會 )ㆍ한형리( 韓 炯 履 )를 훈련원 첨정으로, 고성필( 高 性 弼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고상민( 高 尙 旻 )을 대등 첨사( 代 登 僉 使 )로, 이창하( 李 彰 夏 )를 선 전관으로, 장언식( 張 彦 植 )을 훈련원 판관으로, 구범서( 具 範 書 )를 별영 초관으로, 이내복( 李 來 復 )을 수문장으로, 염학순( 廉 學 淳 )을 경상좌도 수군우후로, 정준영( 鄭 峻 永 )을 선전관으로, 김 규섭( 金 奎 燮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전용선( 田 容 善 )을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로, 조심용( 趙 心 庸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최대완( 崔 大 完 )을 정방 별장( 正 方 別 將 )으로, 홍채( 洪 埰 )를 훈 련원 부정으로, 백명기( 白 命 基 )를 중추부 도사로, 이종석( 李 鍾 奭 )ㆍ홍우겸( 洪 祐 謙 )을 훈련원 판관으로, 최명렬( 崔 鳴 烈 )을 부장으로, 최석곤( 崔 錫 坤 )을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김형섭( 金 亨 燮 )을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로, 이종진( 李 宗 珍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현인관( 玄 仁 寬 )을 제 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원재유( 元 在 鍮 )를 사량 만호( 蛇 梁 萬 戶 )로, 허소( 許 熽 )를 선전관으로, 황 기연( 黃 耆 淵 )을 조사오위장( 曹 司 五 衛 將 )으로, 이종석( 李 鍾 奭 )을 선전관으로, 심상원( 沈 相 元 ) 을 훈련원 주부로, 이재희( 李 在 煕 )를 전라우도 수군우후로, 김형태( 金 瀅 兌 )ㆍ남창원( 南 昌 元 ) 을 오위장으로, 김영준( 金 永 俊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장시윤( 張 始 潤 )을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우진석( 禹 辰 石 )을 원산 별장( 元 山 別 將 )으로, 안정욱( 安 正 旭 )ㆍ홍태섭( 洪 台 燮 )을 오위 장으로, 장주학( 張 柱 鶴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윤석진( 尹 錫 晉 )을 훈련원 주부로, 신국희( 申 國 煕 )를 성진 첨사( 城 津 僉 使 )로, 유진호( 兪 鎭 浩 )를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로, 정제국( 鄭 濟 國 )을 독 구미 첨사( 獨 仇 味 僉 使 )로, 김종석( 金 鍾 奭 )을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이용국( 李 龍 國 )을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로, 이여균( 李 如 筠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으로, 김항제( 金 恒 濟 )를 오위장으로, 박계환( 朴 啓 煥 )ㆍ박흥식( 朴 興 植 )을 창덕궁 위장으로, 호희연( 胡 煕 淵 )을 오로량 만호( 吾 老 梁 萬 戶 )로, 강윤흡( 康 潤 翕 )을 조산 만호( 造 山 萬 戶 )로, 이유행( 李 儒 行 )ㆍ이정호( 李 貞 祜 )를 충익위장 ( 忠 翊 衛 將 )으로, 최한기( 崔 漢 基 )를 황해 중군( 黃 海 中 軍 )으로, 유인형( 柳 寅 衡 )을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홍필유( 洪 必 裕 )를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서유성( 徐 有 聲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 종석( 李 鍾 奭 )ㆍ이창하( 李 彰 夏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성우( 李 聖 宇 )를 훈련원 판관으로, 김병 수( 金 柄 洙 )를 안원 만호( 安 原 萬 戶 )로, 조재오( 趙 載 五 )ㆍ이한익( 李 漢 翼 )을 선전관으로, 원준( 元 浚 )을 훈련원 첨정으로, 안우묵( 安 佑 默 )을 훈련원 주부로, 정재곤( 鄭 在 坤 )을 수문장으로, 송 병준( 宋 秉 畯 )을 중추부 경력으로, 구연창( 具 然 昌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규환( 金 奎 煥 )을 훈련 원 주부로, 홍일섭( 洪 馹 燮 )을 별영 초관으로, 김동욱( 金 東 旭 )을 중추부 도사로, 이득수( 李 得 秀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붕렬( 李 鵬 烈 )을 훈련원 판관으로, 고제현( 高 濟 賢 )을 훈련원 주부 로, 장교원( 張 敎 源 )을 수문장으로, 이규방( 李 奎 邦 )을 별영 초관으로, 윤영진( 尹 泳 璡 )을 훈련 원 판관으로, 이석형( 李 錫 珩 )을 선전관으로, 정규찬( 鄭 圭 瓚 )ㆍ신백( 申 栢 )을 부장으로, 홍우상 ( 洪 祐 相 )을 좌부솔로, 허당( 許 塘 )ㆍ신좌희( 申 佐 煕 )를 훈련원 첨정으로, 심하택( 沈 夏 澤 )ㆍ이철 순( 李 徹 純 )ㆍ이면규( 李 冕 珪 )를 별영 초관으로, 신성희( 申 星 煕 )를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한 용규( 韓 用 奎 )를 훈련원 주부로, 이민중( 李 敏 中 )을 수원 중군으로, 이대직( 李 大 稙 )을 혜산 첨 사( 惠 山 僉 使 )로, 이관희( 李 寬 煕 )를 훈련원 주부로, 이복우( 李 復 宇 )를 수문장으로, 박의풍( 朴 宜 豐 )을 삼도 첨사( 三 島 僉 使 )로, 박명화( 朴 明 和 )를 선전관으로, 이병철( 李 秉 哲 )ㆍ구연응( 具 然 膺 ) 을 별영 초관으로, 장교헌( 張 敎 憲 )ㆍ조영중( 趙 英 中 )ㆍ최상근( 崔 尙 覲 )을 부장으로, 임계현( 林 啓 賢 )ㆍ최구영( 崔 九 永 )ㆍ강덕증( 姜 德 曾 )ㆍ오연승( 吳 淵 承 )ㆍ강창원( 姜 昌 源 )을 수문장으로, 이 용선( 李 龍 善 )을 조경묘 수문장( 肇 慶 廟 守 門 將 )으로, 이연택( 李 連 宅 )을 준원전 수문장( 濬 源 殿 守

111 111 - 門 將 )으로, 김종구( 金 鍾 九 )를 훈련원 판관 가설로, 고제승( 高 濟 昇 )ㆍ정완( 鄭 浣 )ㆍ강윤길( 姜 胤 吉 )을 훈련원 주부 가설로 삼았다. 동지 가설에 김인오( 金 仁 梧 ), 최진형( 崔 鎭 衡 ), 이문백( 李 文 伯 ), 나홍석( 羅 弘 錫 ), 정재성( 鄭 在 性 ), 최일귀( 崔 日 貴 )를 단부하고, 율포 권관( 栗 浦 權 管 )에 김한갑( 金 漢 鉀 )을 단부하고, 양영만동 권관( 梁 永 萬 洞 權 管 )에 김노학( 金 魯 學 )을 단부하였다. 진주 영장 유기선( 柳 冀 先 ), 청주 영장 한창리( 韓 昌 履 ), 경기 중군 이규환( 李 圭 桓 ), 안무 중군 이규선( 李 圭 選 ), 남우후 민관식( 閔 寬 植 ), 개성 중군 박영도( 朴 永 道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 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첨정 가설에 김약성( 金 若 性 ), 서 한순( 徐 漢 淳 ), 배한영( 裵 翰 永 ), 조희준( 趙 羲 駿 ), 석현주( 石 炫 周 ), 이수봉( 李 守 鳳 ), 신석린( 申 錫 麟 ), 박내경( 朴 來 卿 ), 김동학( 金 東 學 ), 박정기( 朴 錠 基 ), 강용건( 康 龍 健 ), 장용진( 張 容 鎭 ), 김인 배( 金 仁 培 ), 정문용( 鄭 文 鎔 )을 단부하고, 판관 가설에 전기성( 田 箕 性 ), 신규모( 申 奎 模 )를 단부 하고, 주부 가설에 이기상( 李 基 相 ), 김진호( 金 振 澔 ), 이석훈( 李 碩 薰 ), 조종명( 趙 鍾 明 )을 단부 하였다. 부사과에 정화섭( 丁 華 燮 )ㆍ최치신( 崔 致 愼 )ㆍ황계현( 黃 啓 鉉 )ㆍ원희복( 元 煕 福 )ㆍ장이표 ( 張 利 杓 )ㆍ정중신( 鄭 仲 信 )ㆍ김장술( 金 章 述 )ㆍ홍종명( 洪 鍾 明 )ㆍ김주영( 金 柱 潁 ), 부사과에 오대 영( 吳 大 泳 )ㆍ심희택( 沈 羲 澤 )ㆍ이재직( 李 載 稷 )ㆍ이완휘( 李 完 輝 )ㆍ이한응( 李 漢 膺 )ㆍ홍수모( 洪 壽 謨 )ㆍ한국선( 韓 國 善 )ㆍ이종갑( 李 宗 甲 )ㆍ이승신( 李 承 信 )ㆍ최영기( 崔 永 祺 )를 단부하였다. 동지 에 김광수( 金 光 洙 ), 백영진( 白 永 鎭 ), 박세영( 朴 世 永 ), 박준흥( 朴 準 興 )을 단부하고, 첨지에 김 규흥( 金 奎 興 ), 허철( 許 㯙 ), 천일성( 千 一 成 )을 단부하고, 내금위장에 이상규( 李 庠 珪 ), 박태원 ( 朴 泰 遠 ), 이필( 李 )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 가설에 이용길( 李 龍 吉 )을 단부하였다. 본원의 거관( 去 官 ) 훈련원 판관 조재홍( 趙 載 弘 ), 김종구( 金 鍾 九 ), 문세진( 文 世 鎭 ), 한명규( 韓 命 奎 ), 이 상은 가설이므로 정식에 따라 감하하였다. 동지에 윤계환( 尹 啓 煥 )을 단부하고, 첨지에 이충 려( 李 忠 呂 ), 민병문( 閔 丙 文 ), 김봉희( 金 鳳 煕 ), 이필( 李 ), 박태원( 朴 泰 遠 ), 이상규( 李 庠 珪 ), 황윤 수( 黃 潤 秀 )를 단부하였다 / 고종 25년 1월 30일(임오) / 만경전에서 수령과 변장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홍승오 등이 입시하였다 미시( 未 時 ). 상이 만경전( 萬 慶 殿 )에 나아갔다. 수령( 守 令 )과 변장( 邊 將 )이 입시할 때에, 우부승지 홍승오 ( 洪 承 五 ), 가주서- 원문 빠짐 -, 기주관 장익후( 張 益 厚 ), 기사관 조동윤( 趙 東 潤 )이 차례로 나 와 엎드리고, 흥해 군수( 興 海 郡 守 ) 이병덕( 李 秉 德 ), 봉화 현감( 奉 化 縣 監 ) 서병수( 徐 丙 壽 ), 구 례 현감( 求 禮 縣 監 ) 남궁표( 南 宮 杓 )가 나와 기둥 밖에 엎드리고,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김계연 ( 金 啓 淵 ),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 한영모( 韓 永 模 ),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 고성필( 高 性 弼 )이 순서대로 계단 아래에 섰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홍승오가 아뢰기를, 수령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관직과 성명을 아뢰도록 하고, 변장은 선전관으로 하여금 관직 과 성명을 아뢰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병덕 등이 차례로 앞으로 나와 관직과 성명을 아뢴 다 음 선전관이 김계연 등의 관직과 성명을 아뢰었다. 홍승오가 아뢰기를,

112 112 - 수령과 변장들을 물러가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조동윤이 아뢰기를, 신이 본관에 대한 일로 우러러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한림 소시( 翰 林 召 試 )에 선발된 사람 은 한 달 간격으로 관직에 붙이는 것이 옛날부터 있어 온 규정입니다. 그러나 좌우 사관이 갖추어지지 않은 때를 만나면 한 달의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경연에서 여쭌 다음 연달아 관 직에 붙인 예도 많이 있습니다. 선발된 사람으로서 차례가 된 서상집( 徐 相 集 )을 해조로 하 여금 구전으로 관직에 붙이게 하여 패초한 다음 입직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탑교를 냄 -조동윤이 아뢰기를, 시정기( 時 政 記 )를 찬수( 纂 修 )하는 일이 긴급하니, 새로 제수된 검열 서상집을 서경( 署 經 )을 거치기 전에 출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고,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고종 25년 2월 1일(계미) / 전영 소속 양화진을 별영으로 옮겨 소속시키라는 하교 사알( 司 謁 )을 통해 구전( 口 傳 )으로 하교하기를, 전영( 前 營 ) 소속 양화진( 楊 花 鎭 )을 별영( 別 營 )으로 옮겨 소속시키고 덕적진( 德 積 鎭 )을 전영 에 소속시키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 고종 25년 2월 28일(경술) / 병조가 덕적 첨사 김계연과 평신 첨사 임봉운을 서로 바꾸었다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김계연( 金 啓 淵 )과 평신 첨사( 平 薪 僉 使 ) 임봉운( 林 奉 雲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5년 6월 18일(무술) / 병비가 4차 정사에서 유석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병비가 4차 정사를 하였다. 유석응( 柳 錫 膺 )을 선전관으로 삼았다. 동지에 서한용( 徐 漢 用 ) 을 단부하고, 가설에 이원재( 李 元 載 ), 오성학( 吳 聖 學 ), 최준성( 崔 俊 成 ), 이명구( 李 明 九 ), 오순 영( 吳 順 永 ), 김대유( 金 大 有 ), 홍대규( 洪 大 赳 ), 오치정( 吳 致 政 ), 김무갑( 金 戊 甲 )을 단부하였다. 첨지 세 자리에 안석정( 安 錫 楨 ), 이훈식( 李 勳 植 ), 피종윤( 皮 宗 潤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오봉 순( 吳 鳳 淳 )ㆍ정운귀( 鄭 雲 龜 ), 부호군에 임광수( 林 光 洙 )ㆍ백남석( 白 南 奭 )ㆍ안학선( 安 鶴 善 )ㆍ이 계흥( 李 啓 興 )ㆍ강태흠( 姜 台 欽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임봉운( 林 奉 雲 )과 평신 첨사( 平 薪 僉 使 ) 김계연( 金 啓 淵 )을 서로 바꾸고, 용매 첨사( 龍 媒 僉 使 ) 정홍재( 鄭 弘

113 113 - 㦳 )와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 조학봉( 趙 學 鳳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 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5년 8월 20일(기해) / 덕적 첨사가 임기가 만료되면 장위영 초장 구근과에 제수하라는 전교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는 임기가 만료되기를 기다려 장위영 초장( 壯 衛 營 哨 長 ) 구근과( 久 勤 窠 ) 에 임명하라. 하였다 / 고종 26년 7월 29일(계유) / 26차 정사에서 김철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26차 정사를 하였다. 김철수( 金 哲 秀 )를 정포 별장( 井 浦 別 將 )으로, 유승풍( 劉 昇 豐 )을 창덕 궁 위장으로, 김준철( 金 俊 哲 )을 덕포 첨사( 德 浦 僉 使 )로 삼았다. 호군에 송세헌( 宋 世 憲 )ㆍ허남 ( 許 爁 ), 부호군에 조희창( 趙 羲 昌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김계연( 金 啓 淵 )과 시답 첨사( 侍 踏 僉 使 ) 양식은( 梁 植 殷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 를 받든 것이다. 홍재협( 洪 在 莢 )ㆍ이용호( 李 容 鎬 )ㆍ이근홍( 李 根 泓 )을 선전관으로, 이동렬( 李 東 烈 )ㆍ유봉근( 柳 鳳 根 )ㆍ장운택( 張 雲 澤 )ㆍ이규문( 李 奎 文 )ㆍ손종인( 孫 宗 仁 )ㆍ최정규( 崔 廷 圭 )ㆍ 한문교( 韓 文 敎 )를 부장( 部 將 )으로, 이붕서( 李 鵬 緖 )ㆍ김능혁( 金 能 赫 )ㆍ최봉구( 崔 鳳 九 )ㆍ박재운 ( 朴 載 雲 )ㆍ이찬주( 李 瓚 周 )를 수문장으로 삼았다. 삼천포 권관( 三 千 浦 權 管 )에 김광인( 金 光 仁 ) 을 단부하였다. 이장신( 李 章 新 )을 경기전 수문장( 慶 基 殿 守 門 將 )으로 삼았다 / 고종 28년 3월 21일(을유) / 어미의 나이가 77세이므로 멀리 떠나 부임할 수 없는 선사포 첨사 최상진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선사포 첨사( 宣 沙 浦 僉 使 ) 최상진( 崔 相 鎭 )은 어미의 나이가 올해 77세인데 법 으로 볼 때 멀리 떠나 부임할 수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변장( 邊 將 )의 부모 나이가 75세 이상인 경우에는 그 직임을 체차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양주은( 梁 柱 殷 )과 서로 바꾸라. 하였다.

114 / 고종 28년 3월 22일(병술)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영환( 閔 泳 煥 )은 병이고, 참판 이용관( 李 容 觀 )은 병이고, 참의 신병우( 愼 炳 祐 )는 입직인데 나왔고, 참지 백시흡( 白 時 洽 )은 병이고, 동부승지 조중필( 趙 重 弼 )은 나왔다. 동지중추부사에 김일유( 金 逸 儒 )를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김문현( 金 文 鉉 ), 호군에 윤성진( 尹 成 鎭 ), 부호군에 윤창섭( 尹 昌 燮 ), 부사과에 노규남( 盧 奎 南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선사포 첨사( 宣 沙 浦 僉 使 ) 최상진( 崔 相 鎭 )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 양주은( 梁 柱 殷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내금위장 두 자리에 오정선( 吳 定 善 )과 이주영( 李 周 永 )을 단부하고,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8년 12월 2일(임진)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행 판서 민영소( 閔 泳 韶 )는 병이고, 참판 엄세영( 嚴 世 永 )은 병이고, 참의 신 극휴( 申 克 休 )는 병이고, 참지 엄석관( 嚴 錫 瓘 )은 나왔다. 이명구( 李 明 九 )를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추광엽( 秋 光 燁 )을 노량 별장( 鷺 梁 別 將 )으로 삼았 다. 동지중추부사 가설에 남명선( 南 命 善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 大 護 軍 )에 오준영( 吳 俊 泳 )ㆍ 김구현( 金 九 鉉 ), 호군( 護 軍 )에 이교영( 李 敎 榮 )ㆍ조병필( 趙 秉 弼 )ㆍ어윤중( 魚 允 中 )ㆍ김석근( 金 晳 根 )ㆍ서상조( 徐 相 祖 )ㆍ조문영( 趙 文 永 )ㆍ곽치숭( 郭 致 崇 )ㆍ유기대( 柳 冀 大 ), 부호군에 윤상학( 尹 尙 學 ), 부사직에 김병억( 金 秉 億 )ㆍ이상엽( 李 尙 燁 )ㆍ김한제( 金 翰 濟 )ㆍ홍종협( 洪 鍾 協 )ㆍ오광수 ( 吳 光 洙 )ㆍ이동영( 李 東 榮 )ㆍ정승모( 鄭 承 謨 ), 부사과에 민상호( 閔 尙 鎬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 다. 부장( 部 將 )에 유희연( 柳 煕 淵 ), 민일호( 閔 馹 鎬 ), 이규형( 李 奎 衡 ), 이수열( 李 洙 烈 )을 단부하 였는데, 이상은 그 직책에 잉임( 仍 任 )시키고 승륙( 陞 六 )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길주 진병마첨절제사 관북병마방어사( 兼 吉 州 鎭 兵 馬 僉 節 制 使 關 北 兵 馬 防 禦 使 )에 박정병( 朴 正 秉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9년 12월 5일(기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행 판서 민영소( 閔 泳 韶 )는 병이고, 참판 성대영( 成 大 永 )은 병이고, 참의 이 혼( 李 俒 )은 병이고, 참지 엄석관( 嚴 錫 瓘 )은 입직인데 나왔고, 우부승지 박용원( 朴 用 元 )은 나 왔다. 한응연( 韓 應 淵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최준성( 崔 俊 成 )을 노량 별장( 鷺 梁 別 將 )으로 삼았 다. 판중추부사 가설에 심순택( 沈 舜 澤 )을 단부하고, 동림 별장( 東 林 別 將 )에 황연성( 黃 連 成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성대영( 成 大 永 )ㆍ이교영( 李 敎 榮 ), 부호군에 남정기( 南 廷 綺 )ㆍ민형식( 閔 馨 植 )을 단부하였다.

115 / 고종 30년 12월 7일(을묘) / 박우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박우섭( 朴 友 燮 )을 동지중추부사로, 남윤원( 南 允 元 )을 동지중추부사로, 조희상( 趙 羲 相 )ㆍ이 태용( 李 泰 用 )을 첨지중추부사로, 민치설( 閔 致 卨 )을 훈련원 도정으로, 권응규( 權 應 圭 )를 겸 훈 련원도정으로, 이종호( 李 宗 鎬 )를 내금위장으로, 김상학( 金 商 學 )ㆍ박흥진( 朴 興 鎭 )ㆍ박준검( 朴 俊 儉 )ㆍ김요흥( 金 堯 興 )ㆍ김찬현( 金 燦 鉉 )ㆍ김종식( 金 宗 植 )을 오위장으로, 김병수( 金 炳 秀 )ㆍ정 항조( 鄭 恒 朝 )를 조사오위장으로, 최영석( 崔 榮 錫 )을 충장위장으로, 박겸호( 朴 兼 浩 )ㆍ김영제( 金 映 濟 )ㆍ나운경( 羅 雲 慶 )을 창덕궁 위장으로, 박순길( 朴 順 吉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범홍( 李 範 弘 )ㆍ이세응( 李 世 應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정창식( 鄭 昌 植 )ㆍ송두현( 宋 斗 鉉 )을 수문장으로, 이 용한( 李 用 漢 )을 경상 우병사로, 민준호( 閔 俊 鎬 )를 황해 수사( 黃 海 水 使 )로, 이종서( 李 鍾 緖 )를 전라 우수사( 全 羅 右 水 使 )로, 박준상( 朴 準 祥 )을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김영호( 金 永 昊 )를 임 치 첨사( 臨 淄 僉 使 )로 이병렬( 李 秉 烈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김준명( 金 俊 明 )을 원산 별장 ( 元 山 別 將 )으로, 이수명( 李 守 明 )을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로, 민홍식( 閔 弘 植 )을 노량 별장( 鷺 梁 別 將 )으로 삼았다. 용연 별장( 龍 淵 別 將 )에 한인추( 韓 仁 樞 )를 단부하고,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 에 조동화( 趙 東 華 )를 단부하였다. 동지중추부사에 정재승( 丁 載 昇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이시직( 李 時 稙 ), 홍종희( 洪 鍾 禧 ), 이희창( 李 熙 昌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윤용선 ( 尹 容 善 )ㆍ조운섭( 趙 雲 涉 ), 호군에 성대영( 成 大 永 )ㆍ이규승( 李 圭 昇 )ㆍ조희겸( 趙 羲 謙 ), 부호군 에 김인식( 金 寅 植 )ㆍ김병직( 金 炳 稷 )ㆍ윤상철( 尹 相 澈 )ㆍ홍종억( 洪 鍾 檍 )ㆍ조종순( 趙 鍾 純 )ㆍ박제 순( 朴 齊 恂 )ㆍ김동필( 金 東 弼 )ㆍ안학선( 安 鶴 善 )ㆍ이항의( 李 恒 儀 )ㆍ이규태( 李 圭 泰 )ㆍ마두원( 麻 斗 元 )ㆍ신상우( 申 桑 雨 ), 부사직에 이재현( 李 載 現 )ㆍ이세응( 李 世 應 )ㆍ심후택( 沈 厚 澤 )ㆍ심상황( 沈 相 璜 ), 부사과에 조영구( 趙 寧 九 )ㆍ임봉한( 林 鳳 翰 )ㆍ김수만( 金 壽 萬 )ㆍ김내우( 金 來 雨 )ㆍ이갑용 ( 李 甲 用 ), 부사정에 조영희( 趙 英 熙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32년 2월 5일(정미) / 군무아문이 사도 첨사에 유익윤을 임용하였다 군무아문이 사도 첨사( 蛇 渡 僉 使 )에 유익윤( 柳 翼 潤 ),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에 조희관( 趙 羲 觀 ),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에 홍석홍( 洪 錫 泓 ),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에 최상은( 崔 祥 殷 ), 삼도 첨사( 三 島 僉 使 )에 조경항( 趙 慶 恒 ),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에 박영재( 朴 永 宰 ),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에 이문선( 李 文 善 ), 마량 첨사( 馬 梁 僉 使 )에 박의완( 朴 宜 完 ), 서천포 첨사( 舒 川 浦 僉 使 )에 오 대영( 吳 大 泳 ),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에 최득필( 崔 得 弼 ),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에 남필중( 南 弼 重 ),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에 홍석권( 洪 碩 權 ), 덕적 첨사( 德 積 僉 使 )에 권치영( 權 致 永 ), 평남 만 호( 平 南 萬 戶 )에 김희림( 金 喜 林 ), 황척파 만호( 黃 拓 坡 萬 戶 )에 이주홍( 李 周 弘 ), 인차외 만호( 仁 遮 外 萬 戶 )에 정상기( 鄭 尙 基 ),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에 김경현( 金 景 泫 ), 사량 만호( 蛇 梁 萬 戶 )에 서유승( 徐 有 承 ),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에 박영선( 朴 永 善 ),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에 송덕순( 宋 德 淳 ), 마도 만호( 馬 島 萬 戶 )에 길영석( 吉 永 奭 ), 입암 별장( 笠 巖 別 將 )에 오정욱( 吳 廷 旭 ), 금성 별 장( 金 城 別 將 )에 전용하( 田 龍 夏 ), 삼방 별장( 三 防 別 將 )에 이진환( 李 鎭 煥 ), 노량 별장( 鷺 梁 別 將 ) 에 강흥준( 姜 興 俊 ), 임진 별장( 臨 津 別 將 )에 최순성( 崔 順 成 )을 임용하였다.

116 / 고종 33년 12월 11일(신미, 양력 1월 13일) / 대부도와 영종도를 합하여 대부군으로 만들 것 등을 청하는 전 현감 이응선의 상소 전 현감 이응선( 李 膺 善 )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가문이 한미한 데다 재주 또한 용렬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참으 로 나라에 이로움을 주고 백성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일이 있기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 히 이렇게 우러러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신이 삼가 지방의 제도를 보건대, 돌산도( 突 山 島 ), 지도( 智 島 ), 완도( 莞 島 )에 새로 군읍( 郡 邑 ) 을 설치한 것은 실로 조정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큰 사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경성 과 가까운 섬으로 따지자면, 대부도( 大 阜 島 ), 영종도( 永 宗 島 ), 덕적도( 德 積 島 ), 주문도( 注 文 島 ), 장봉도( 長 峯 島 )를 거론할 수 있는데, 이곳은 모두 도성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섬으로 서 사해( 四 海 )의 선박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이런 까닭에 열성조( 列 聖 朝 )에서부터 수장( 戍 將 )을 두어 도성을 호위하도록 하였는데, 작년에 갑자기 진장( 鎭 將 )을 두는 제도를 혁파하고 이웃 읍에 부속시켰으니, 이는 이른바 담장을 없애어 도둑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 다. 근래 이 섬에서는 수장이 폐지된 뒤 수많은 수군( 水 軍 )이 해체되어 일이 없어지자 곳곳 의 수적( 水 賊 )들이 민가를 휩쓸고 다니며, 또 잡기에 능한 호객( 豪 客 )들이 마을 곳곳에서 싸 움을 일삼으며 재물을 약탈하니, 이대로 몇 년을 지낸다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필시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그 화가 점차 도성으로 뻗친다면 이는 실로 세 방면에서 도성을 지키려 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어찌 시급한 대부도 등 다섯 섬보다 급하지 않은 돌 산도 등 세 섬을 우선시한단 말입니까. 이 섬들이 지니는 중요성과 도성과의 거리를 두고 따져 보겠습니다. 대부도는 남양해( 南 陽 海 )에 위치한 섬으로서 앞을 향해 넓게 펼쳐진 지형에는 산석( 山 石 )이 구불구불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옛날 병자호란 때에는 오랑캐의 군대가 침몰되었던 곳입니 다. 또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영종도와 함께 호응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룬 까닭에 두 섬에다 진영을 설치하여 방어하였던 곳입니다. 덕적도는 경기와 호서( 湖 西 ) 사이 에 있는 섬으로서 옛날 당( 唐 ) 나라의 소정방( 蘇 定 方 )이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주둔시켰 던 곳입니다. 이 섬은 하늘을 찌를 듯한 세 개의 돌 봉우리가 주위를 빙 둘러 에워싸고 있 고, 섬 안은 물길이 갈라지는 항구를 이루고 있어 많은 선박들이 이곳으로 모이니, 실로 근 해( 近 海 )의 요충지라 하겠습니다. 주문도와 장봉도는 오래 전에 목장( 牧 場 )을 없앤 데다 이 번에 수장마저 혁파하였으니, 중요하기 그지없는 국토를 누가 차지하게 될지 알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섬의 좌우로 빽빽이 들어선 작은 섬들은 잠상( 潛 商 )과 유적( 流 賊 )이 출 몰하는 소굴이니, 이 섬들을 지킬 관리를 두지 않는다면 원주( 原 州 )의 양길( 梁 吉 )이나 울도 ( 鬱 島 )의 김호( 金 護 ) 같은 무리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저 돌산도 등 세 섬과 이 섬들을 비교하자면 저곳은 먼 지방에 있는 대수롭지 않은 섬이고, 이곳은 가까 운 지방에 있는 중요한 섬이거늘 어찌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한단 말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 보건대, 대부도와 영종도 두 섬을 합하여 대부군( 大 阜 郡 )으로 만 들고, 덕적도, 주문도, 장봉도 세 섬을 합하여 덕적군( 德 積 郡 )으로 만든다면 강화( 江 華 ), 교 동( 喬 桐 )과 함께 도성의 울타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백성을 모아 고을을 이루고 고 을을 모아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노련한 사람을 선발하

117 117 - 여 이곳을 지키게 하여 먼저 백성들을 구제하시고, 그 다음에는 수병( 守 兵 )을 주둔시켜 백 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키심으로써 군읍( 郡 邑 )을 안정시킬 방책을 세우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뜻을 모르는 가. 하였다 / 고종 36년 9월 19일(갑자, 양력 10월 23일) / 덕적도 벌목 문제를 지연시키고 있는 장례원 경 박기양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궁내부대신임시서리 학부대신 이건하의 계 궁내부대신임시서리 학부대신 이건하( 李 乾 夏 )가 삼가 아뢰기를, 인천부( 仁 川 府 ) 덕적도( 德 積 島 )에서 벌목( 伐 木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장례원에 공문을 보내고 조회하여 속히 마무리를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사체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훈령( 訓 令 )을 내린 장례원 경 박기양( 朴 箕 陽 )과 이호익( 李 鎬 翼 )을 엄하 게 처벌해야 하는데, 본부( 本 府 )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 까?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모두 우선 본관( 本 官 )을 면직하고, 법부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라. 하였다 / 고종 36년 12월 21일(갑오, 양력 1월 21일) / 영종도 사람들이 상언한 군을 설치하고자 한 안건은 시행할 수 없다는 의정부 참정 김성근의 계 의정부 참정 김성근( 金 聲 根 )이 삼가 아뢰기를, 영종도( 永 宗 島 )의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 이병규( 李 柄 奎 ) 등이 영종도에 진( 鎭 )이 폐지된 후로 는 이 섬의 인민( 人 民 )들이 의지하고 살 데가 없어졌습니다. 여수( 麗 水 ) 돌산도( 突 山 島 )의 예에 의거하여 덕적도( 德 積 島 ), 주문진( 注 文 津 ), 장봉도( 長 峯 島 ) 여러 진의 방영( 防 營 )의 옛 터에 모두 군( 郡 )을 설치하소서. 라는 내용으로 행행( 行 幸 )하시는 길에서 상언( 上 言 )하니, 본 부( 本 府 )에 그렇게 하라고 주하하셨습니다. 삼가 지방의 연혁( 沿 革 )에 대한 일은 신중히 살 펴야 하므로 해당 지방 사람들이 청한 바를 그대로 허락할 수는 없으니, 군을 설치하자고 한 안건에 대해서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118 118 - 인천광역시 옹진군 - 백령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2년 6월 5일(무술)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년 8월 14일(병오) 백령진에 닻을 내린 수상한 선박을 제멋대로 돌 아가게 한 해첨사 임경모를 파출할 것 등을 청하 는 황해 수사 윤석구의 장계 고종 3년 3월 11일(경오) 조니 만호 함경억을 파출할 것을 청하는 황해 수 사 윤석구의 장계 고종 3년 3월 12일(신미) 조니 만호 함경억을 곤장을 친 후 백령진에 가둘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고종 4년 1월 9일(갑자)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4년 1월 12일(정묘) 신병이 있는 내금위장 김재휘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5년 3월 22일(경오) 죄인 이태규 등을 석방하라고 분부하겠다는 의금 부의 계 고종 7년 12월 24일(을유) 김건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8년 2월 5일(을축) 중국에 잡힌 대청도의 백성에 대해 자문을 지어 북경에 보낼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 고종 8년 5월 8일(정유) 백령 두모진에 표류해 온 대국인들을 데리고 가 기 위해 온 자들에게 부쳐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8년 5월 15일(갑진) 연생전에 영의정 김병학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고종 8년 5월 26일(을묘) 백령에 표류해 온 대국인들을 육로로 돌려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8년 6월 26일(을유) 회답 자문을 지어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 원의 계 고종 8년 7월 18일(병오) 회답 자문을 지어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 원의 계 고종 9년 9월 7일(무자) 동부승지 이보헌에게 속히 올라오도록 하유할 것 을 청하는 정원의 계 고종 9년 9월 10일(신묘)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0년 5월 17일(갑오) 자경전에서 강관 조병휘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고종 11년 4월 21일(계사) 백령 첨사에 의망할 사람이 부족하므로 다른 도 의 수령도 아울러 의망할 것을 청하는 병비의 계 고종 11년 5월 13일(갑인)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정수현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금위영의 계 고종 12년 8월 25일(기축) 유학 민영기를 백령진에 정배하라는 하교 고종 12년 8월 26일(경인) 죄인 민영기의 배소를 황해도 장연부 백령진으로 정해 압송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13년 2월 8일(경오) 도류 중에서 박문일 등은 모두 가벼운 죄이므로 놓아 보내라고 분부할 것을 청하는 형조의 계 고종 13년 윤5월 9일(기사) 죄인 성의길을 즉시 풀어 보내도록 도신에게 분 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119 고종 13년 7월 16일 조영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갑술) 고종 13년 8월 4일(임진) 사은 숙단에 주달한 문자를 잘못 써 들인 백령 첨사 이규흥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정원의 계 고종 13년 10월 5일(임진) 죄인 민영기의 배소를 황해도 장연부 백령진으로 정하여 압송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13년 12월 23일(기유) 백령진에 도배한 죄인 이학성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14년 2월 22일(무신) 서리를 보내 백령 첨사 이규흥을 잡아올 것을 청 하는 의금부의 계 고종 14년 3월 5일(신유)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14년 3월 24일(경진) 죄인 채종이 등을 석방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14년 5월 15일(기사) 백령 첨사 이규흥을 의처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 의 계목 고종 14년 8월 1일(계미) 백령진의 정배 죄인 민영기 등을 풀어줄 것을 당 해 감사에게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고종 15년 2월 26일(병오) 어미의 나이가 70에 이른 백령 첨사 이상우를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목 고종 15년 3월 23일(계유) 민영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6년 6월 13일(을묘)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박영찬 등을 개차할 것 을 청하는 금위영의 계 고종 16년 6월 25일(정묘) 조희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7년 1월 2일(경오) 강릉에 찬배된 죄인 구용운 등을 풀어주도록 당 해 도신에게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고종 17년 9월 18일(계미) 강원도 삼척에 정배한 죄인 장수성 등을 풀어 주 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17년 12월 20일(계축) 강원도 간선에 정배한 죄인 박준흥 등을 석방하 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17년 12월 29일(임술) 홍재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8년 1월 5일(무진)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이원의 등을 개차할 것 을 청하는 어영청의 계 고종 18년 3월 9일(신미) 황해 감사 강난형 등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백령 진 대청도에 표류한 중국인의 선재를 불태울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19년 3월 16일(임인) 홍만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19년 3월 19일(을사)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김봉출 등을 개차할 것 을 청하는 장어영의 계 고종 19년 6월 12일(병인) 강원도 강릉에 정배한 죄인 정순거 등을 풀어주도록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고종 19년 6월 22일(병자)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신숙 등을 개차할 것 을 청하는 병조의 계 고종 19년 12월 20일(임신) 대청도에 진을 설치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는 황해 감사 심동신의 장 계 고종 20년 1월 20일(임인) 장연 등에 오차진 등을 옮겨 설치하는 것을 그만 둘 것을 청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계 고종 20년 5월 13일(임진) 통어영 어사 이교복과 상피의 혐의가 있는 백령 첨사 허경에 대해 품처해 주기를 청하는 황해도 수군절도사 이규학의 장계에 대해 회계하는 병조 의 계목

120 고종 20년 5월 14일(계사)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1년 3월 14일(기축) 황해 감사 윤우선 등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죽은 중국 사람을 매장한 후 석표를 세울 것 등을 청 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21년 6월 5일(정축) 백령도의 백성이 화상( 華 商 )을 살해한 일 등에 대해 엄히 조사하여 치계할 것 등을 청하는 황해 감사 윤우선의 장계 고종 21년 6월 9일(신사) 전직의 임소에 있는 이교칠을 서리를 보내 잡아 올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고종 21년 6월 14일(병술)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1년 7월 28일(경오) 백령 첨사 현승운을 검찰관으로 임명하여 중국 어선들에 대해 증명서를 살펴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계 고종 21년 8월 1일(임신) 각도의 유지 도류안 중에 강원도 회양의 장운학 등을 즉시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21년 9월 19일(경신) 백령 첨사 이교칠에 대해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 낼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목 고종 21년 10월 7일(무인) 백령 첨사 이교칠의 죄에 대해 조율하여 보고하 는 의금부의 조목 고종 21년 12월 30일(경자) 백령도의 강도 이창서 등을 수영으로 압송하여 효수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22년 1월 29일(기사) 강원도 평강의 김정우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 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22년 10월 22일(정해) 장연부 백령진에 표류하여 온 사람을 육로로 돌 려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22년 11월 1일(을미) 백령진에 표류한 중국 사람이 달아났으므로 그 책임을 물어 해당 첨사 현승운을 파출할 것을 청 하는 황해 수사 민치설의 장계 고종 23년 1월 30일(갑자) 김기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3년 2월 4일(무진)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허유 등을 개차할 것 을 청하는 친군별영의 계 고종 23년 10월 7일(병인) 각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자 등을 모두 석방하라고 해 당 도신에게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고종 24년 6월 29일(을묘)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전세진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친군별영의 계 고종 24년 6월 29일(을묘)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5년 6월 27일(정미)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25년 6월 29일(기유)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이주영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고종 25년 6월 30일(경술) 신병이 있는 백령 첨사 구연춘을 파출할 것을 청 하는 병조의 계 고종 25년 12월 28일(을사) 추후 배소에 도착한 평해의 이덕여 등을 풀어 주 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26년 1월 19일(을축) 정배 죄인 양경장 등을 풀어 주도록 도신에게 분 부했다는 형조의 계 고종 26년 3월 24일(기사) 백령 첨사에 의망할 사람이 부족하므로 다른 도 의 우후도 아울러 의망할 것을 청하는 병비의 계 고종 26년 3월 24일(기사) 이범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21 고종 26년 3월 27일(임신) 전직의 임소에 있는 총어영 별장 구연창 등을 개 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고종 26년 12월 12일(계미) 겸 백령진관오차포 수군동첨절제사를 오차포 수 군첨절제사로 고쳐서 하비하겠다는 병조의 계 고종 27년 1월 29일(경오) 이풍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7년 2월 3일(계유)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이희진 등을 개차할 것 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고종 27년 11월 20일(병술) 병비가 2차 정사에서 이병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 하였다 고종 27년 11월 26일(임진)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홍태모를 개차할 것 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고종 29년 1월 5일(을축) 통천에 유배된 김영순 등에 대해 풀어 주도록 분 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29년 1월 27일(정해) 이한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29년 1월 28일(무자)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이병헌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고종 29년 12월 9일(계해) 시임 첨사를 감하하여 도로 구근과로 차출하고 장연 부사의 수군영장 겸함 등은 전례대로 하비 하겠다는 병조의 계 고종 30년 2월 1일(갑인) 수원 유수 민영상의 보고에서 청한 대로 대청도 등의 장적을 수원 유수영으로 이속시킬 것을 청 하는 의정부의 계 고종 30년 6월 27일(정축) 병비의 관원 현황 고종 30년 6월 30일(경진)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박희덕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친군총어영의 계 고종 30년 12월 29일(정축) 각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 강원도 강릉의 윤광 표 등에 대해,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31년 1월 28일(병오) 조명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고종 31년 2월 3일(경술)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이병권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고종 31년 2월 30일(정축) 삼척에 유배된 최병구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 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31년 6월 28일(계유) 강원도 평창에 도배된 신백초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고종 31년 10월 20일(계해) 용매 첨사 전두규를 개차하고 후임에 대한 단망 을 후록하여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고종 32년 2월 5일(정미) 백령 첨사 정규찬이 파출되었으므로 후임에 전 첨사 조존찬을 승차할 것 등을 청하는 총리대신 등의 계 고종 32년 4월 19일(경신) 박준양 등에 대해 사형을 집행할 것 등을 청하는 법부 대신의 계 고종 32년 12월 6일(임신, 양력 징역 3년의 처분을 받은 죄인 안경수 등에 대해 1월 20일) 백령도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내렸다 고종 32년 12월 28일(갑오, 양 제주부 제주군에 종신 유배된 죄인 이민굉 등을 력 2월 11일) 석방하라는 칙령 고종 33년 3월 1일(병신, 양력 죄인 이승원의 배소를 해주부 장연군 백령도로 4월 13일) 정하였다 고종 33년 3월 9일(갑진, 양력 죄인 서주보 등의 배소를 제주부 제주군 등으로 4월 21일) 정하였다

122 고종 33년 12월 5일(을축, 양력 l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정위 한봉호 등의 1월 7일) 배소를 전라북도 만경군 고군산 등으로 정하였다 고종 34년 2월 6일(을축, 양력 죄인 한봉호 등은 몇 등을 감해야 할 것인지를 3월 8일) 묻는 의정부찬정 군부대신 민영환의 계 고종 34년 2월 14일(계유, 양력 죄인 한봉호는 풀어 줄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찬 3월 16일) 정 군부대신임시서리 탁지부대신 심상훈의 계 죄인 구준서의 배소를 전라북도 함열군 고군산으 고종 34년 4월 4일(계해, 양력 로 정할 것을 청하는 군부대신 임시서리탁지부대 5월 5일) 신 심상훈의 계 고종 35년 4월 20일(임인, 양력 백령도에 종신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정한용 6월 8일)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고종 35년 5월 10일(임술, 양력 지도에 15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박효승 6월 28일)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고종 35년 11월 19일(무진, 양 추자도에 10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박명환 력 12월 31일)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고종 35년 11월 22일(신미, 양 윤치호 등을 역률로 다스릴 것 등을 청하는 5품 력 1월 3일) 정형기 등의 상소 고종 35년 11월 23일(임신, 양 윤치호 등의 역도를 징벌할 것 등을 청하는 정헌 력 1월 4일) 대부 김계문 등의 상소 고종 36년 7월 24일(기사, 양력 유배 죄인 원우상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8월 29일) 고종 37년 10월 17일(을묘, 양 유배 죄인 이범만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력 12월 8일) 고종 38년 2월 21일(정사, 양력 유배 죄인 유기환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4월 9일) 고종 38년 6월 24일(무오, 양력 유배 죄인 주석면 등에 대한 조칙을 다시 부표하 8월 8일) 라는 조령 고종 41년 4월 2일(경술, 양력 유배 죄인 이기동 등을 방축향리하라는 조령 5월 16일) 고종 42년 4월 6일(무신, 양력 유배 죄인 김봉석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5월 9일) 고종 42년 12월 24일(임술, 양 종신 유배 처분을 받은 죄인 김재풍 등을 석방 력 1월 18일) 하라는 조령 고종 43년 9월 16일(경술, 양력 11월 2일) 죄인 이재규 등의 배소를 황해도 장연군 백령도 로 정하겠다는 법부 대신의 상주

123 123 - <내 용> / 고종 2년 6월 5일(무술)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겸판서 김병기( 金 炳 冀 )는 나왔고, 참판 심응태( 沈 膺 泰 )는 입직이고, 참의 송겸수( 宋 謙 洙 )는 병이고, 참지 정창협( 丁 昌 夾 )은 병이고, 우부승지 이근필은 나왔다. 이종승( 李 鍾 承 )ㆍ조문현( 趙 文 顯 )을 선전관으로, 황양호( 黃 亮 浩 )를 우림위장으로, 권최환( 權 最 煥 )ㆍ이현찬( 李 玄 瓚 )ㆍ양주석( 梁 柱 石 )ㆍ김성희( 金 成 喜 )ㆍ안의석( 安 義 錫 )을 오위장으로, 이시 우( 李 始 愚 )를 충장위장으로, 임효직( 任 孝 直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유흥수( 柳 興 秀 )를 부장( 部 將 )으로, 조기년( 趙 冀 年 )ㆍ김태진( 金 泰 震 )을 수문장으로, 임경모( 任 景 模 )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이순원( 李 舜 元 )을 화량 첨사( 花 粱 僉 使 )로, 오치원( 吳 致 源 )을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 로 삼았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민응( 李 敏 應 )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에 조존주( 趙 存 周 )를 단부하였다. 대호군 오취선( 吳 取 善 ), 호군 박유붕( 朴 有 鵬 ), 부호군 김상현( 金 尙 鉉 )ㆍ 유내준( 柳 來 駿 )ㆍ조석원( 曺 錫 元 )ㆍ조준하( 趙 準 夏 )ㆍ이원규( 李 源 珪 )ㆍ김병시( 金 炳 始 )ㆍ신직모 ( 申 直 模 )ㆍ장인원( 張 仁 遠 )ㆍ백낙현( 白 樂 賢 )ㆍ원세정( 元 世 )ㆍ신선호( 申 善 浩 )ㆍ서광정( 徐 光 鼎 )ㆍ 홍언석( 洪 彥 錫 ), 부사직 이기주( 李 基 周 )ㆍ송달인( 宋 達 仁 )ㆍ백봉삼( 白 鳳 三 )ㆍ김두연( 金 斗 淵 )ㆍ 이석주( 李 錫 宙 )ㆍ여규익( 呂 圭 益 ), 부사과 유치호( 柳 致 好 )ㆍ김진호( 金 晉 浩 ), 부사정 김선주( 金 善 柱 )ㆍ신석연( 申 錫 淵 ), 이상을 모두 단부( 單 付 )하고,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 서연순( 徐 衍 淳 )은 특별히 1년에 한해서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2년 8월 14일(병오) / 백령진에 닻을 내린 수상한 선박을 제멋대로 돌아가게 한 해첨사 임경모를 파출할 것 등을 청하는 황해 수사 윤석구의 장계 황해 수사 윤석구( 尹 錫 九 )의 장계에서 백령진( 白 翎 鎭 )에 닻을 내린 수상한 선박을 당연 히 잡아서 억류했어야 하는데, 제멋대로 중간에 돌아가게 하였으니 변경의 실정을 생각할 때 엉성함이 막심합니다. 해당 첨사 임경모( 任 景 模 )를 우선 파출한 뒤에 그 죄상을 해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평상시에 잘 신칙하지 못하였기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라고 한 일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수상한 선박을 미처 실정을 심문하지 못한 것은 변방의 정사로 헤아려 볼 때 극히 소홀하 다. 그러나 잠깐 정박하였다가 곧바로 떠나가서 잡아서 힐문할 여유가 없었으니 용서할 만 한 단서가 있기도 하다. 해당 첨사는 우선 죄과가 정해질 때까지 행공하게 하라. 또 황해 수사는 대죄하지 말도록 회유하라. 하였다 / 고종 3년 3월 11일(경오) / 조니 만호 함경억을 파출할 것을 청하는 황해 수사 윤석구의 장계

124 124 - 황해 수사 윤석구( 尹 錫 九 )의 장계에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 함경억( 咸 慶 億 )이 기예를 관사 에서 실시하였으니 행동이 매우 놀라우며, 뇌물을 바치라고 백성들을 들쑤셔 놓아 원망하는 소리가 마구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선 파출한 후에 유사로 하여금 그 죄상을 여쭈어 처리하 게 하소서. 라고 한 일과 관련하여 조성교에게 전교하기를, 그간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리는 의도로 입법( 立 法 )한 것이 어떠했던가. 그런데 지금 이 장계의 내용을 보면 당해 진영의 장수가 법을 무시하며 탐욕을 부리기를 이렇게까지 기 탄없이 하였다. 죽여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빨리 효수( 梟 首 )를 시행함으로써 징계하 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아야 하겠다. 그러나 마침 경사스러운 때이고 자전의 전교도 받들었 으니, 특별히 한 등급을 감하여 수사가 모래 사장에 군민( 軍 民 )을 대대적으로 모아 놓고 곤 장 30대를 죽지 않을 정도로 호되게 쳐서 백령진( 白 翎 鎭 )에다 엄히 가두어 두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 3년 3월 12일(신미) / 조니 만호 함경억을 곤장을 친 후 백령진에 가둘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조성교가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황해 수사 윤석구( 尹 錫 九 )의 장계에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 함경억( 咸 慶 億 )이 뇌물을 바치라 고 백성들을 들쑤셔놓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여 탐학을 일삼았으니, 우선 파출한 후에 유사 로 하여금 그 죄상을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라고 한 일과 관련하여, 그간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으로 입법( 立 法 )한 것이 어떠했던가. 그런데 지금 이 장계의 내용을 보 면 당해 진영의 장수가 법을 무시하며 탐욕을 부리기를 이렇게까지 기탄없이 하였다. 죽여 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빨리 효수형을 시행함으로써 징계하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아 야 하겠다. 그러나 마침 경사스러운 때이고 자전의 전교도 받들었으니, 특별히 한 등급을 감하여 수사가 모래 사장에 군민( 軍 民 )을 대대적으로 모아 놓고 죽지 않을 정도로 곤장 30 대를 호되게 쳐서 백령진( 白 翎 鎭 )에다 엄히 가두어 두도록 하라. 고 판부하셨습니다. 군민을 모래 사장에 대대적으로 모아 놓고 죽지 않을 정도로 호되게 곤장 30대를 친 후에 백령진 에다 엄히 가두라는 뜻으로 당해 수신( 帥 臣 )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4년 1월 9일(갑자)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김병주는 나왔다. 이승보( 李 承 輔 )ㆍ유진오( 兪 鎭 五 )를 도총관으로, 이호준( 李 鎬 俊 )ㆍ조인섭( 趙 寅 燮 )ㆍ목인회( 睦 仁 會 )ㆍ박명재( 朴 鳴 載 )ㆍ이휘중( 李 彙 重 )ㆍ오길선( 吳 吉 善 )ㆍ이중영( 李 重 榮 )ㆍ이민상( 李 敏 庠 )을 부총관으로, 백희수( 白 希 洙 )ㆍ신숙( 申 橚 )을 겸 훈련원도정으로, 민승호( 閔 升 鎬 )ㆍ홍규( 洪 圭 ) ㆍ김상현( 金 商 玄 )을 선전관으로, 이상권( 李 尙 權 )을 우림위장으로, 신채( 申 寀 )ㆍ황중신( 黃 中 愼 )ㆍ이정현( 李 廷 顯 )ㆍ정종학( 鄭 宗 學 )ㆍ손형수( 孫 瀅 銖 )ㆍ김준철( 金 俊 哲 )을 오위장으로, 이면 호( 李 冕 鎬 )를 훈련원 판관으로, 이용겸( 李 容 謙 )ㆍ이관영( 李 寬 泳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박정하

125 125 - ( 朴 貞 夏 )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이민기( 李 敏 基 )를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 추정욱( 秋 正 旭 )을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삼았다. 부장에 이학선( 李 學 善 )을 단부하였는데, 정식에 따라 서 실직( 實 職 )으로 올린 것이다 / 고종 4년 1월 12일(정묘) / 신병이 있는 내금위장 김재휘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병조가 아뢰기를, 내금위장 김재휘( 金 在 徽 ), 우림위장 이상권( 李 尙 權 ), 오위장 손형수( 孫 瀅 銖 )ㆍ김준철( 金 俊 哲 ), 무신겸선전관 이관영( 李 寬 泳 )이 모두 신병이 중하여 직임을 볼 가망이 없고, 오위장 황 중신( 黃 中 愼 )ㆍ이정현( 李 廷 顯 )ㆍ정종학( 鄭 宗 學 )은 노병( 老 病 )으로 인해 시골에 있는데, 올라 올 가망이 없다고 하며, 새로 제수된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박정하( 朴 貞 夏 )는 부모의 나이가 금년에 71세인데 다른 형제가 없고, 진동 권관( 鎭 東 權 管 ) 한기석( 韓 基 錫 )은 승중( 承 重 )한 부 모가 금년 나이 73세로 모두 법에 있어서 먼곳에 부임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정장하여 체 직을 청하였습니다.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인 변장은 직임을 체차한다는 것이 법전에 실 려 있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5년 3월 22일(경오) / 죄인 이태규 등을 석방하라고 분부하겠다는 의금부의 계 의금부가 아뢰기를, 각도에서 석방할 죄수와 석방하지 않을 죄수의 명단을 올린 것에 대하여 계하한 것이 이러 하였습니다. 함경도 갑산부( 甲 山 府 )에서 천극형( 荐 棘 刑 )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이태규( 李 泰 逵 ), 전라도 광양현( 光 陽 縣 )에 먼 지역 유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이유호( 李 孺 虎 ), 고산현 ( 高 山 縣 )에서 3천리 유배와 3년 금고( 禁 錮 )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황종현( 黃 鍾 顯 ), 익산군 ( 益 山 郡 )에서 3천리 유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이희도( 李 羲 道 ), 무주부( 茂 州 府 )에서 3천리 유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홍익섭( 洪 翼 燮 ), 경상도 예천군( 醴 泉 郡 )에서 3천리 유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홍희록( 洪 羲 祿 ), 진주목( 晉 州 牧 )에서 먼 지역 정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윤치원( 尹 致 遠 ), 청송부( 靑 松 府 )에서 먼 지역 정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김정구( 金 正 九 ), 자인현( 慈 仁 縣 )에서 멀고 험악한 지역 정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김계운( 金 繼 運 ), 평안도 구성부( 龜 城 府 )에서 멀고 험악한 지역 정배에 사면령이 내리더라도 석방하지 않는다는 벌을 받고 있는 죄인 김상우( 金 相 佑 ), 숙천부( 肅 川 府 )에서 먼 지역 유배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이섭규( 李 燮 奎 )와 찬배( 竄 配 ) 죄인 이방희( 李 邦 熙 ), 중화부( 中 和 府 )에서 3천리 정배에 5년 금 고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정재기( 鄭 在 箕 ), 공충도 충주목에서 도( 徒 ) 2년 정배 벌을 받고 있는 죄인 조용재( 趙 容 在 ), 황해도 백령진( 白 翎 鎭 )에서 엄한 감금의 벌을 받고 있는 죄인 함 경억( 咸 慶 億 ) 등의 이름 아래 방( 放 ) 자를 찍어 내리셨습니다. 이태규는 둘러친 울타리를 제거한 뒤에 석방하여 보내고, 이유호ㆍ황종현ㆍ이희도ㆍ홍익섭 ㆍ홍희록ㆍ윤치원ㆍ김정구ㆍ김계운ㆍ김상우ㆍ이섭규ㆍ이방희ㆍ정재기ㆍ조용재ㆍ함경억 등은

126 126 - 석방하여 보내는 일로 각 해도 도신에게 분부하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7년 12월 24일(을유) / 김건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김건호( 金 健 浩 )ㆍ이렴( 李 濂 )을 오위장으로, 이돈하( 李 敦 夏 )를 문신겸선전관( 文 臣 兼 宣 傳 官 ) 으로, 박동보( 朴 東 輔 )를 수문장으로, 이보헌( 李 普 憲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최경선( 崔 敬 善 )을 오위장으로, 오기선( 吳 耆 善 )을 안동 영장( 安 東 營 將 )으로, 신정희( 申 鼎 熙 )를 충주 영장 ( 忠 州 營 將 )으로, 한홍렬( 韓 弘 烈 )을 전주 영장( 全 州 營 將 )으로, 한용신( 韓 用 臣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신명균( 申 明 均 )을 황해도 중군으로, 최종두( 崔 宗 斗 )를 선사포 첨사( 宣 沙 浦 僉 使 ) 로, 정재린( 丁 載 麟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이승준( 李 承 駿 )을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 최원준( 崔 元 準 )을 지도 만호( 智 島 萬 戶 )로, 신종협( 申 宗 協 )을 영등 만호( 永 登 萬 戶 )로, 왕은주 ( 王 殷 疇 )를 오위장으로, 이종건( 李 鍾 健 )을 훈련원 정으로, 이수만( 李 秀 萬 )을 문신겸선전관으 로, 채규상( 蔡 奎 常 )을 삼군부 종사관으로, 박정화( 朴 鼎 和 )를 공충도 병마우후로, 이봉헌( 李 鳳 憲 )을 선전관으로, 임기주( 林 基 宙 )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중효( 金 重 孝 )를 수문장으로, 심능무 ( 沈 能 武 )를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강인성( 康 仁 誠 )을 고성 첨사( 古 城 僉 使 )로, 김덕규( 金 德 奎 ) 를 오위장으로, 정상렴( 鄭 尙 濂 )을 창덕궁 위장으로, 조병진( 曺 秉 鎭 )을 도총부 도사로, 장호인 ( 張 好 仁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로, 전우춘( 田 遇 春 )을 평산포 만호( 平 山 浦 萬 戶 )로, 이계호( 李 啓 好 )를 선전관으로, 박희화( 朴 熙 和 )를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로, 강병석( 康 秉 錫 )을 영달 만호( 永 達 萬 戶 )로, 여완익( 呂 完 翊 )을 황룡 별장( 黃 龍 別 將 )으로, 우치구( 禹 治 九 )를 대현 별장 ( 大 峴 別 將 )으로, 지득원( 池 得 源 )을 오차포 첨사로, 이풍렬( 李 豐 烈 )을 고성 첨사로, 김경주( 金 景 周 )를 조라포 만호( 助 羅 浦 萬 戶 )로, 이종호( 李 鍾 浩 )를 마도 만호( 馬 島 萬 戶 )로, 박기찬( 朴 基 瓚 )을 자모 별장( 慈 母 別 將 )으로, 전기락( 田 基 洛 )ㆍ정책화( 鄭 策 和 )를 오위장으로, 신낙희( 申 樂 熙 )를 훈련원 부정으로, 성종호( 成 宗 鎬 )를 황해도 수군우후로, 김원식( 金 源 植 )을 독용 별장 ( 禿 用 別 將 )으로, 유석희( 柳 錫 喜 )를 선전관으로, 호성묵( 胡 聖 默 )을 오노량 만호( 吾 老 梁 萬 戶 )로, 윤영대( 尹 永 大 )를 내금위장으로, 양필환( 梁 弼 煥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김병헌( 金 炳 獻 )을 서성 별장( 西 城 別 將 )으로, 표건영( 表 健 永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시현( 李 時 鉉 )을 도총부 경력 으로, 한용교( 韓 用 喬 )를 금위영 파총으로, 이중억( 李 重 億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규설( 李 奎 卨 )을 판관으로, 정인태( 鄭 寅 台 )를 도총부 경력으로, 이한용( 李 漢 用 )ㆍ양주익( 梁 柱 翼 )을 훈련 원 판관으로, 이익희( 李 翼 熙 )ㆍ여동엽( 呂 東 曄 )을 주부로, 이인화( 李 寅 華 )를 창덕궁 위장으로, 허도( 許 鍍 )를 훈련원 주부로, 윤창선( 尹 昌 善 )을 부장으로, 이교칠( 李 敎 七 )을 무신겸선전관( 武 臣 兼 宣 傳 官 )으로, 차호신( 車 好 信 )을 장목포 별장( 長 木 浦 別 將 )으로, 오중선( 吳 仲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병주( 李 秉 周 )를 주부로, 오규환( 吳 奎 煥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유지성( 柳 之 星 )을 부장으로, 김기승( 金 基 昇 )ㆍ김상훈( 金 相 勳 )을 수문장으로, 구천희( 具 天 喜 )ㆍ조정현( 趙 靖 顯 )을 선전관으로, 양정환( 梁 鼎 煥 )ㆍ윤길헌( 尹 吉 憲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유기춘( 柳 冀 春 )ㆍ이규태 ( 李 圭 泰 )를 부장으로, 김기태( 金 箕 台 )ㆍ이병승( 李 秉 昇 )을 부장 가설( 部 將 加 設 )로, 오상묵( 吳 常 默 )ㆍ최봉현( 崔 鳳 賢 )을 수문장으로, 김홍두( 金 洪 斗 )ㆍ김기순( 金 箕 淳 )을 수문장 가설로, 이병 도( 李 秉 濤 )를 경기전 수문장( 慶 基 殿 守 門 將 )으로 삼았다. 소길호리 권관( 小 吉 號 里 權 管 )에 김 영조( 金 永 祚 )를 단부하고, 대파아 권관( 大 坡 兒 權 管 )에 이중겸( 李 仲 兼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127 127 - 판관 조석용( 趙 錫 容 ), 주부 김종건( 金 鍾 健 )ㆍ최학규( 崔 鶴 圭 )ㆍ장남규( 張 湳 奎 ), 이상은 가설에 단부하였는데 정식에 따라 감하( 減 下 )하였다. 오현기( 吳 顯 耆 )를 훈련원 판관 가설로, 조홍묵 ( 趙 泓 默 )ㆍ이건혁( 李 健 爀 )ㆍ오영렬( 吳 永 烈 )을 주부 가설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조운순( 趙 雲 順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유태로( 柳 泰 魯 )ㆍ남유언( 南 有 彦 )ㆍ임용준( 任 龍 準 ) 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에 정재현( 鄭 載 顯 )을 단부하였다. 본원( 本 院 )에 거관( 去 官 )하는 부 사과( 副 司 果 ) 자리에 김기명( 金 基 命 )ㆍ임사준( 任 思 準 )을 부직( 付 職 )하였다. 삼군부 초관에 채 규상을 단부하고,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봉헌을 단부하였다. 안동 영장 오기선ㆍ충주 영장 신정희ㆍ전주 영장 한홍렬ㆍ삼척 영장 한용신ㆍ황해도 중군 신명균, 이상에게 지금 절충( 折 衝 )을 가자( 加 資 )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태안방어사( 兼 泰 安 防 禦 使 )에 이희조( 李 熙 調 )를 단부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여덟 자리에 서한기( 徐 漢 琦 ), 문진열( 文 進 烈 ), 서규현( 徐 奎 賢 ), 강우진( 康 祐 鎭 ), 최진방( 崔 鎭 邦 ), 정상렴, 표건영, 이인화를 단부하였다. 첨지 중추부사 아홉 자리에 윤영대, 김사덕( 金 思 德 ), 윤성모( 尹 誠 模 ), 유기봉( 柳 冀 鳳 ), 김건호, 이 최신( 李 㝡 新 ), 김덕규, 전기락, 성건호( 成 建 鎬 )를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유영렬( 柳 永 烈 ), 윤홍 구( 尹 弘 求 ), 이희직( 李 希 稙 ), 이경현( 李 景 鉉 ), 한규학( 韓 圭 學 ), 이창석( 李 昌 錫 ), 차호진( 車 好 鎭 ), 신성구( 申 聖 求 ), 이규형( 李 奎 馨 )을 부직하였다 / 고종 8년 2월 5일(을축) / 중국에 잡힌 대청도의 백성에 대해 자문을 지어 북경에 보낼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 또 아뢰기를, 방금 황해 수사 윤협( 尹 )의 장계를 등보( 謄 報 )한 것을 보니,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서상귀( 徐 相 龜 )의 치보( 馳 報 )를 낱낱이 들어, 본진( 本 鎭 ) 대청도( 大 靑 島 )에 사는 백성이 거룻배를 타 고 혼자 나갔다가 저들에게 잡혔는데 당황지( 唐 黃 紙 ) 한 쪽지를 써서 준 뒤에 도로 난바다 로 향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투서는 궁지에 몰린 도둑의 계책에 지나지 않으나, 행동이 해괴한 것이 갈수록 더욱 통탄할 만합니다. 이것은 중국에 자문( 咨 文 )을 보내어 알 리지 않을 수 없으니, 승문원을 시켜 연유를 갖추어 자문을 지어 투입한 쪽지와 함께 의주 ( 義 州 )로 내려보내어 봉성( 鳳 城 )에 들여보내어 북경에 옮겨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8년 5월 8일(정유) / 백령 두모진에 표류해 온 대국인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온 자들에게 부쳐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 서원보( 徐 元 輔 ), 수사 윤협( 尹 )의 장계를 보니, 백령( 白 翎 ) 두모진( 頭 毛 津 ) 에 표류해 온 대국인( 大 國 人 ) 7명에게 저간의 사정을 물어보니, 바로 산동성( 山 東 省 ) 등주부 ( 登 州 府 ) 이산현( 移 山 縣 )의 행상( 行 商 )으로 표류해온 자들로서, 육로( 陸 路 )를 통해 돌아가기 를 원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어 해도( 該 道 ) 도수신( 道 帥 臣 ) 장계의 등보( 謄 報 )를 보니,

128 128 - 이죽마선( 二 竹 磨 船 ) 1척이 장연( 長 淵 ) 장동포( 墻 洞 浦 )에 와서 정박하고 있어 즉시 출동하여 뒤쫓아가 포획하니, 원선( 原 船 )은 닻을 달고 도망쳤고 협선( 挾 船 )은 이어 붙잡혔습니다. 체 포한 4명 가운데 2명이 또 등주부 사람인데, 7명의 표류인을 실어가기 위하여 표문( 標 文 )을 받아가지고 왔다고 하였고 2명은 바로 포루투칼[ 布 國 ] 사람으로 함께 배를 타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지금 다시 저간의 사정을 신문하여 캐묻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이미 표류하여 이르렀고 이어 또 데리고 돌아가기 위하여 왔으니 대선( 大 船 )이 있는 곳을 캐물어서 이들 편에 부쳐 보내도록 하고, 각종 물건은 낱낱이 검칙하여 숫자를 대조한 다음 주도록 하여 잃어버리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준비해온 선박을 저들이 만약 버린다 면 즉시 저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표문( 標 文 )은 답송( 答 送 )할 필요가 없으니 돌려 주도록 하고 떠나보낼 때를 기다려 장계로 아뢰도록 하며, 괴원( 槐 院 )으로 하여금 자문을 지어 들여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8년 5월 15일(갑진) / 연생전에 영의정 김병학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사시( 巳 時 ). 상이 연생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영의정 김병학( 金 炳 學 ), 강관 조기응( 趙 基 應 ), 참찬관 윤상정( 尹 相 定 ), 검토관 정학묵( 鄭 學 默 ), 가주서 한기동( 韓 耆 東 ), 기사관 백시흡 ( 白 時 洽 ), 별겸춘추 김영목( 金 永 穆 )이 각각 시전 제 1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김병학이 앞으로 나아가 문후( 問 候 )하고, 각전( 各 殿 )에 문후하였다. 상이 책을 폈다. 조기응( 趙 基 應 )이 요요초충( 喓 喓 草 蟲 ) 부터 초충삼장( 草 蟲 三 章 ) 까지 읽고 뜻풀이를 하였다. - 원문 빠짐 -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돌에 글자를 새겨 큰 길 가에 세웠는데, 이후로 무슨 시끄럽게 떠드는 소문이 있는 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대소( 大 小 ) 백성들이 모두 의리를 알 것이니, 시끄럽게 떠드는 소문도 마땅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선박이 비록 백 년 뒤에 우리를 침범하더라도 굳게 지키는 것을 고치지 않을 것이 며, 1천 척의 배가 다시 오더라도 우리 또한 병력을 증강하여 수비할 것이다. 저들이 지난 번 부평 부사( 富 平 府 使 )에게 보낸 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별도로 귀국 조정에 도 달할 다른 길을 구한다. 하였으니, 아마도 중국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중국은 이 일로 자문( 咨 文 )을 내보낼 리가 없을 듯하다. 설사 내보낸다 하더라도 무릇 중국을 왕복하 는 데 있어서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에 대해서는 과연 받들어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군신 상하 간에 굳게 지킬 큰 의리일 뿐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저들이 비록 예부( 禮 部 )에 가서 빌더라도, 예부( 禮 部 )가 들어

129 129 - 줄 리가 없으나, 또 혹시 자문이 나온다면 스스로 회답할 말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피추들 이 자문을 가지고 온다면 이것은 자문을 통하는 길에 어긋나니 어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른 도리로 배척해야만 장차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연설( 筵 說 )을 조지( 朝 紙 )에 반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서양 선박이 아직 물러가지 않아 안팎이 계속 소란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이 점 을 항상 근심하고 계실 것입니다. 출정한 군졸들이 한데에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먹고 자 고 있어 질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심지어 약물( 藥 物 )을 내려 주시고 노고( 勞 苦 )를 위문하는 거조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군사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졸들을 위해 항상 걱정하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자,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은 외람되어 원보( 元 輔 )의 직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계책도 입안하거나 건의 하지 못하여 서양 선박의 소추( 小 酋 )들로 하여금 멋대로 날뛰게 한지 지금 40일이나 되었으 니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해랑적( 海 浪 賊 )과 다름이 없어 눈 깜짝할 사이에 출몰하는데 대신( 大 臣 )이 하필 이 것을 이유로 인책하는가? 하자, 김병학이 아뢰기를, 병인년 이후로 지금까지 6년 동안 양추( 洋 醜 )들의 출몰이 없던 해가 없었기 때문에, 신이 항상 이 점을 통탄스럽게 여겼습니다. 지난번 성상의 분부를 신이 이미 받들어 읽어 보았 고, 또한 여러 신료들에게 돌려 보였습니다. 어떤 나라도 일찍이 위태롭지 않았던 나라는 없었으니, 군신 상하가 정도( 正 道 )를 굳게 잡으면 결국에는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는 끝내 망하기 마련이고 사람도 끝내 죽게 마련이지만, 올바름으로 지킨다면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재연( 魚 在 淵 ) 형제와 유풍로( 柳 豐 魯 )가 절의를 세운 것은 열렬 ( 烈 烈 )하다고 일컬을 만하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 또한 그들이 평소 완력( 腕 力 )과 의기( 義 氣 )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쟁 터에서 힘써 싸운 정상을 들어보니, 한쪽 다리로 서서 몇 명의 적을 죽인 것은 참으로 늠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풍로는 80여 세 된 늙은 부모가 있다고 하니 더욱 가련하고 측은하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유풍로의 종형( 從 兄 )을 수령으로 제수한 것은 불쌍한 이를 도와주는 성상의 생각에서 특별 히 나온 것입니다. 안팎이 이 말을 듣고 너나없이 감읍( 感 泣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규( 身 逵 )의 손자 종락( 種 落 )은 가증스러운 자들로, 저들의 배를 바라보고 절을 한 것에서 이미 그가 화( 禍 )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사학( 邪 學 )은 족속 ( 族 屬 )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에 감염된 자가 있으면, 남김없이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한다.

130 130 -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규의 손자가 저들의 배를 바라보고 절을 한 것은 더욱 그가 흉악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피추들은 필시 이로 인하여 이 자가 내응( 內 應 )하여 올 것으로 여길 듯합니다. 저들 배 안의 동정( 動 靜 )은 여기에서는 막연하여 알 수 없으나, 피추들은 간첩을 보낼 듯합 니다. 대저 병사( 兵 事 )는 적을 알고 나를 안 뒤에야 이길 수 있는 것인데도, 지금은 이와 같 지 못하니 이 점이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얼핏 듣건대, 우리나라의 사도( 邪 徒 )들이 피추를 유인하면서 조선( 朝 鮮 )의 군병( 軍 兵 )은 노 약자 수천 명에 불과하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저들이 곧장 나오게 된 것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 또한 저들의 배를 문정( 問 情 )하고 온 의주( 義 州 ) 사람의 전한 바를 들으니, 피추도 강화 ( 江 華 )의 방수 등에 관한 일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류( 邪 類 )들이 간첩질을 한 때문입 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가 비록 저들을 공격하더라도, 만일 저들의 사정을 모른다면 무슨 일로 먼저 범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우리가 저들을 모르는데 저들이 우리를 아는 것은 사도( 邪 徒 )들이 내통( 內 通 )해서 그런 것 이니, 사학( 邪 學 )의 무리들은 금수( 禽 獸 )만도 못합니다. 금수도 부모를 아는데, 이 무리들이 도리어 부모의 나라를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문 선전관( 勞 問 宣 傳 官 )이 와서 보고한 말을 들으니, 군졸들이 장막을 치고 방수( 防 守 )하 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장마와 무더위에는 대부분 견디기 어려울 듯하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밤낮으로 비바람과 이슬을 맞으니, 모두 병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점이 매우 민 망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군대가 어찌 일찍이 10일이라도 노고( 勞 苦 )한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지금은 40일이 나 노고( 勞 苦 )하고 있으니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군졸의 삼유( 衫 襦 )와 식물( 食 物 )을 이미 운현궁( 雲 峴 宮 )으로부터 실어온바, 뭇 사람들이 저 절로 기뻐하고 축하하니 뭇사람들의 마음이 굳게 단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출정한 어영청의 별무사( 別 武 士 )가 전한 말을 듣건대, 피추들이 이미 방수가 엄한 것을 알 고 있다고 한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저들 선박의 창경( 窓 鏡 )은 멀리까지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방수가 엄해졌다는 말을 듣고 는, 필시 예전처럼 깊숙이 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양 선박 1척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들어왔다고 한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131 131 - 천진( 天 津 ) 등지에 왕래한 배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피추들의 선박 제도는 매우 공교( 工 巧 )하다고 한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배 안에 심지어 채소 밭까지 있다고 하니, 그 공교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 선박이 아무리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깨뜨릴 날이 없겠는가. 지난 임진년에 원 균( 元 均 )이 패전한 뒤로, 이순신( 李 舜 臣 )이 거북선으로 적병을 대파하였다. 지금 만약 이 같 은 사람이 있다면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적임자를 얻어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면, 어찌 양추( 洋 醜 )들이 창궐하는 것을 근 심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 올 수 없다. 지금이라고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황해도에 와서 정박한 당선( 唐 船 ) 가운데 흑귀자( 黑 鬼 子 )와 백귀자( 白 鬼 子 )가 있었는데, 대 발국( 大 發 國 )에서 표류해 왔다고 한다. 그 배로 도로 실어 보냈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이 정박한 곳이 곧 철도인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곧 장연( 長 淵 )과 백령( 白 翎 )의 포구( 浦 口 )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일찍이 어느 고을 수령을 역임하였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신도 첨사( 薪 島 僉 使 )를 역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도( 薪 島 )는 어느 고을과 가장 가까운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용강( 龍 崗 )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철도와 동진( 東 津 )의 지형을 보았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철도는 곧 황해도( 黃 海 道 )입니다. 동진이 비록 신도( 薪 島 )와 같은 도( 道 )이지만 서로 500여 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형편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전해오는 말로 대략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도는 중국 국경과 몇 리쯤 떨어져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신진( 薪 津 )은 황해 수영( 黃 海 水 營 )의 규례처럼 바람이 높은 6개월 동안은 육진( 陸 鎭 )으로

132 132 - 나가서 방수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한 6개월 동안은 도진( 島 鎭 )으로 들어가 방수 합니다. 그런데 도진과 중국의 경계와는 수로( 水 路 )로 2000여 리에 불과하여 인가의 밥짓는 연기가 서로 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도 큰 바다인데 서양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혹 본 적이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신이 신진( 薪 津 )에 있었을 때에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횡도( 田 橫 島 )는 신진( 薪 津 )과 가까운 곳에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비록 문적( 文 蹟 )에 소상히 실려 있지 않지만,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신도가 곧 전횡도라 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도( 椴 島 )도 그 근처에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바다의 동서( 東 西 )가 각기 달라,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른 기운이 성하면 사악한 기운은 저절로 소멸되므로, 양추( 洋 醜 )가 소멸되는 것은 반드 시 그런 날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주부자( 朱 夫 子 )가 이르기를, 중원( 中 原 )의 오랑캐는 몰아낼 수 있지만, 한 개인의 사욕( 私 慾 )은 억제하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정도( 正 道 )를 지키고 사욕을 억제하면, 양추 들의 출몰은 근심할 것이 못 되며 또한 머지않아 소멸될 것입니다. 하였다 / 고종 8년 5월 26일(을묘) / 백령에 표류해 온 대국인들을 육로로 돌려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해서( 海 西 ) 도수신( 道 帥 臣 )의 장계로 인하여, 백령( 白 翎 )에 표류해 온 대국인( 大 國 人 ) 7명을 뒤에 온 대선( 大 船 )이 있는 곳을 탐문하여 그 배에 태워 돌려 보내도록 복계( 覆 啓 )하여 행회( 行 會 )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해도 감사 서원보( 徐 元 輔 )와 수사 윤협( 尹 )의 장 계를 보니, 원선( 原 船 )이 멀리 달아나서 돌려 보내지 못하고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선박을 마련해 주어서 돌려 보내도록 하고, 추격하여 붙잡은 당인( 唐 人 ) 2명과 포 루투칼인 2명을 함께 배에 태워 보내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 稟 旨 )하여 분부하게 하 소서.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표류해 온 사람이 이미 육지를 통하여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또한 대선( 大 船 ) 이 멀리 달아나 형적이 없으니 돌려 보내는 일은 형세상 방법이 없으니, 모두 추후로 도착 한 사람과 더불어 육로( 陸 路 )로 보내소서. 공궤( 供 饋 ) 및 난잡함을 금하고 연로( 沿 路 )에서 쇄마( 刷 馬 )하는 것은, 지나가는 각읍에 특별히 신칙하소서. 저들이 가지고 가는 물건 외에

133 133 - 선박 및 버리고 가는 물건은 보이는 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되, 불태워버릴 만한 것은 불태워버리고 절가( 折 價 )할 만한 것은 절가하여 일일이 검찰( 檢 察 )하여 혹시라도 잃어 버리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이어 역학( 譯 學 )과 차원( 差 員 )으로 하여금 차례차례 보내게 하고 자문을 발송하거든 장계로 아뢰도록 하되, 괴원( 槐 院 )으로 하여금 짓도록 하여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8년 6월 26일(을유) / 회답 자문을 지어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원의 계 승문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나온 2통의 자문( 咨 文 )을 보니, 도경( 都 京 ) 예부에서 보낸 자문은, 총리각국사무아 문이 주칭( 奏 稱 )하기를, 영국 사신이 조회( 照 會 )한 데 의거하여 영국 사람이 지난번에 구원 한 백령도( 白 翎 島 )에 표류해 온 포루투갈[ 布 國 ] 상선( 商 船 )은 모두 별다른 항목의 사정이 없 으니 응당 풍랑을 만나 난민이 된 사람에게 적용하는 전례에 비추어 구호하여 풀어 보내어 지난번의 글에 부합하도록 하라. 는 일이었고, 성경( 盛 京 ) 예부에서 보낸 자문은, 봉천부 부 윤( 奉 天 府 府 尹 ) 등의 아문에서 본국 상인 최원창( 崔 源 昌 )이 요양( 遼 陽 )에서 도적에게 창( 創 ) 으로 위협을 당한 일로 해당 주( 州 )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나문하여 정법( 正 法 )을 밝혔으니 장물( 臟 物 )을 전해 주고 호송하여 나라로 돌려보내겠다는 일로 갖추어 아뢰어 잘 알았다는 황지( 皇 旨 )를 받들었다. 는 것이었습니다. 백령도에 표류해온 사람들을 규례대로 호송하여 돌려보내겠다는 사유는 이미 지난번 자문에 서 갖추어 보고하였다는 뜻으로 도경에 회답 자문을 보내고, 요양에서 창상( 創 傷 )을 입은 우리나라 사람을 끝까지 구호해 주고 장물을 찾아 돌려보내 준다는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니 감사의 마음을 칭하는 거조가 있어야겠습니다. 삼가 앞으로의 사행( 使 行 )에 표( 表 )를 받들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다는 뜻으로 선통( 先 通 )할 자문을 지어내어 성경과 북경으로 들여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8년 7월 18일(병오) / 회답 자문을 지어 예부로 보낼 것을 청하는 승문원의 계 승문원이 아뢰기를, 도경( 都 京 ) 예부의 자문을 보니, 총리각국사무아문( 總 理 各 國 事 務 衙 門 )이 영국과 포루투갈 [ 布 國 ] 두 나라의 사신이 조회( 照 會 )한 것에 의거하여 부주( 附 奏 )한 것에 준하여 황지( 皇 旨 ) 를 받들었다. 영국 사람은 이미 돌아갔으니 자세히 조사할 것이 없고 포루투갈 사람 2명은 구류( 拘 留 )하는 것이 옳을지 즉시 자문을 지어 회답하여 이에 의거하여 대조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백령( 白 翎 )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과 포루투갈 사람을 영솔하여 돌려보낸 사유는 이미 지난번의 자문에서 다 밝혔으니 이번에 번거롭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회답 자문을 지어내 파발편에 의주( 義 州 )로 내려보내 봉성장( 鳳 城 將 )에게

134 134 - 전달하여 북경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9년 9월 7일(무자) / 동부승지 이보헌에게 속히 올라오도록 하유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또 아뢰기를, 동부승지 이보헌( 李 普 憲 )이 현재 황해도 백령진( 白 翎 鎭 )에 있으니, 교대한 뒤 속히 역말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체차하고 전망 단자를 들이라. 하였다 / 고종 9년 9월 10일(신묘)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강노는 나왔다. 참판 윤병정은 입직이고, 참의 김병익은 병이고, 참지 허국 은 병이다. 이근필( 李 根 弼 )을 도총관으로, 박규현( 朴 奎 賢 )ㆍ오진영( 吳 晉 泳 )ㆍ서상직( 徐 相 稷 )을 부총관으 로, 조응하( 趙 應 夏 )를 선전관으로, 송재헌( 宋 在 憲 )ㆍ김헌균( 金 憲 均 )ㆍ권기순( 權 基 醇 )을 오위 장으로, 이민응( 李 敏 應 )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정수현( 鄭 秀 鉉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정도인( 鄭 道 寅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유해진( 劉 海 鎭 )을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로 삼았다. 동지에 조명구( 趙 命 九 )를 단부하고, 첨지 두 자리에 조병만( 趙 秉 萬 )ㆍ유상희( 柳 相 羲 )를 단부 하고, 부총관에 이근필( 李 根 弼 )을 단부하였다 / 고종 10년 5월 17일(갑오) / 자경전에서 강관 조병휘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진시( 辰 時 ). 상이 자경전에 나아갔다. 진강할 때에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조병휘( 趙 秉 徽 ), 참찬 관 서원보( 徐 元 輔 ), 검토관 이순의( 李 舜 儀 ), 가주서 최정헌( 崔 鼎 獻 ), 겸춘추 김유( 金 㽥 ), 별겸 춘추 김학진( 金 鶴 鎭 )이 각각 시전 제6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것을 한 번 외웠다. 상이 책을 폈다. 조병휘가 군자누맹( 君 子 屢 盟 ) 에서부터 적적참토 우견획지( 躍 躍 毚 兎 遇 犬 獲 之 ) 까지를 읽고 이어 장구를 풀이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 講 官 )은 차하한 뒤에 오늘 처음으로 경연에 나왔는가?

135 135 - 하니, 조병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문임( 文 任 )을 거친 사람인데 강관으로 차하한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하겠다. 하였다. 조병휘가 아뢰기를, 신은 학식이 본래 없고 나이도 노쇠하였으므로 강관의 직임에는 합당치 않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 都 監 )의 일로 고생이 이미 많았는데 또 잡과( 雜 科 )를 치렀으니 고뇌가 또한 적지 않았 을 것이다. 손상받음은 없었는가? 하니, 조병휘가 아뢰기를, 다행히 질병은 면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 해백( 海 伯 )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편안히 갔다가 올라왔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성상의 은혜로 편안히 갔다가 올라왔습니다. 신이 하찮은 음관( 蔭 官 )으로서 평소 학식과 재주가 없어 성상의 명을 잘 받들지도 못했는데 세상에 드문 은혜를 전후로 받았으므로 송 구스러워 앙달할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내에 폐단은 없었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해서( 海 西 ) 지방은 본래 큰 폐단은 없고, 근래에는 수령들이 성심으로 정치를 잘해서 전성 ( 全 省 )이 지금은 거의 완전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성은 비록 모두 완전해졌다고는 하나, 혹 말할 만한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폐단은 지금 거의 제거되었고 비록 사소한 미진한 일들이 있기는 하나 번거롭게 아뢸 만하 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백이 정치를 잘해서 그런 것이다.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사실 한 일도 없는데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로부터 나가면 어느 나라에 접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서남쪽으로 중국의 등주( 登 州 )와 내주( 萊 州 )에 접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에서 등주와 내주까지의 거리가 몇리나 되는가? 중국까지의 거리는 몇리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136 136 - 바닷길은 비록 몇 리나 되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등주와 내주는 수천 리가 될 듯하며 중국은 거의 1만 리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 가운데 누가 정치를 잘 하던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전후로 내린 조정의 신칙이 엄절하였으므로 열읍의 수령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모두가 정치를 잘 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지적하여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악군( 安 岳 郡 )의 양전( 量 田 )을 다시 했다고 하는데, 또 다른 고을은 몇 곳이나 양전을 다 시 하였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안악, 평산( 平 山 ), 문화( 文 化 ) 세 고을의 전결( 田 結 )을 다시 측량하였는데 이밖의 여러 고을도 전결에 대한 정사가 문란하니, 이것은 양전을 다시 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 습니다. 그러나 일이 거창하므로 일제히 타량( 打 量 )할 수가 없고 매년 2, 3 고을씩 점차로 시행하여 빠진 전결을 조사해 내는 것이 매우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성( 山 城 )은 도합 몇 곳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수양( 首 陽 ), 장수( 長 壽 ), 구월( 九 月 ), 정방( 正 方 ), 대현( 大 峴 )으로 도합 다섯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 산성에는 과연 폐단을 없앴던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다섯 산성을 설치하던 초기에는 장사들을 지공하는 부담이 적지 않았고, 근래에는 더욱 조 잔하여 지탱해 보전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또한 마땅히 폐단을 제거할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물고기는 어느 곳에서 많이 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청어( 靑 魚 )는 장연( 長 淵 ), 풍천( 豐 川 ), 옹진( 甕 津 ), 강령( 康 翎 ), 초도( 椒 島 ) 등지에서 많이 나 고 석어( 石 魚 조기)는 해주( 海 州 )와 연평( 延 坪 ) 바다에서 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 唐 船 )이 바다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당선은 오로지 고기를 잡기 위해 오기 때문에 매양 장연 등 다섯 곳의 해양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연의 접경이 특별히 북쪽 지역과 가까운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장연에서 북경( 北 京 )까지의 거리가 바닷가 여러 고을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이 바다에 들어와 석어를 잡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137 137 - 석어는 연평에서 나는데 당선은 본래 이곳에 와서 잡는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령( 白 翎 )은 육지에서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넉넉히 100여 리는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령이 중국 지역과 가까운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백령에서 중국 지역과의 거리는 1만 리 가까이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도( 椒 島 )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풍천( 豐 川 )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주( 海 州 )에서 옹진( 甕 津 )까지의 거리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해주에서 옹진까지의 거리는 110리이고 소영( 蘇 營 )까지의 거리는 140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 講 官 )은 일찍이 외임을 거쳤는데 몇 곳이나 되는가? 하니, 조병휘( 趙 秉 徽 )가 아뢰기를, 동래 부사와 전라 감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찬관은 누차 지방 수령을 거쳤는데 몇 곳이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회덕( 懷 德 ), 천안( 天 安 ), 무안( 務 安 ), 서흥( 瑞 興 ) 등 네 곳인데, 서흥에 있을 때에 특별한 은 총으로 해백( 海 伯 )에 제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올해 얼마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신의 나이가 올해 67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염과 눈썹이 하얗기는 하나 회갑을 지내지 않은 사람과 같다.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황송합니다. 하였다. - 이하 원문 빠짐 / 고종 11년 4월 21일(계사) / 백령 첨사에 의망할 사람이 부족하므로 다른 도의 수령도 아울러 의망할 것을 청하는 병비의 계

138 138 - 병비가 아뢰기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를 지금 당장 차출해야 하는데 의망할 사람이 부족합니다. 다른 도의 수령을 아울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1년 5월 13일(갑인)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정수현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금위영의 계 금위영이 아뢰기를, 본영 천총 정수현( 鄭 秀 鉉 )이 전임인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임지에서 올라오려면 아직 멀었는 데, 오랫동안 자리가 비게 되는 것이 민망스럽습니다.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2년 8월 25일(기축) / 유학 민영기를 백령진에 정배하라는 하교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유학 민영기( 閔 泳 驥 )가 여리( 閭 里 )에서 행패를 부리고 평민들을 침학( 侵 虐 )했다고 하니 형 조로 하여금 한 차례 엄히 형신한 뒤에 백령진( 白 翎 鎭 )에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 고종 12년 8월 26일(경인) / 죄인 민영기의 배소를 황해도 장연부 백령진으로 정해 압송하겠다는 형조의 계 형조가 아뢰기를,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시기를, 유학 민영기가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고 평민을 괴롭 혔다고 하니, 추조로 하여금 한 차례 엄히 형신한 뒤에 백령진( 白 翎 鎭 )으로 정배하라. 고 명 을 내리셨는데, 다시 삼가 형추를 면제하고 당일로 압송하라. 는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에 죄인 민영기를 형추를 면제하여 황해도 장연부( 長 淵 府 ) 백령진( 白 翎 鎭 )을 배소로 정하 여 당일로 압송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3년 2월 8일(경오) / 도류 중에서 박문일 등은 모두 가벼운 죄이므로 놓아 보내라고 분부할 것을 청하는 형조의 계 형조가 아뢰기를,

139 139 - 도류 중에서 강원도 삼척( 三 陟 )의 박문일( 朴 文 日 )ㆍ양덕근( 楊 德 根 )ㆍ홍진모( 洪 晉 謨 )ㆍ최정대 ( 崔 丁 大 )ㆍ한경진( 韓 景 眞 )ㆍ종 기원( 己 元 )과 간성( 杆 城 )의 정완덕( 鄭 完 德 )ㆍ이정선( 李 鼎 善 )과 평강( 平 康 )의 송귀돌( 宋 貴 乭 )ㆍ김찬긍( 金 贊 兢 )ㆍ오어인노미( 吳 於 仁 老 味 )와 낭천( 狼 川 )의 김용 주( 金 用 周 )ㆍ이정이( 李 正 伊 )ㆍ김준칠( 金 俊 七 )ㆍ유문백( 柳 文 伯 )ㆍ성건지( 成 健 之 )와 김화( 金 化 ) 의 이순석( 李 順 石 )ㆍ김창옥( 金 昌 玉 )과 양구( 楊 口 )의 유성돌( 柳 聖 乭 )ㆍ이순업( 李 順 業 )ㆍ이만유 ( 李 萬 裕 )ㆍ최장성( 崔 長 成 )ㆍ권익수( 權 翊 壽 )ㆍ김팔석( 金 八 石 )ㆍ우한갑( 禹 汗 甲 )ㆍ김화중( 金 化 中 ) ㆍ강문흥( 姜 文 興 )과 회양( 淮 陽 )의 최치륜( 崔 致 崙 )ㆍ김동기( 金 東 基 )ㆍ임우준( 林 又 俊 )과 고성 ( 高 城 )의 장춘달( 張 春 達 )ㆍ지윤석( 池 允 石 )ㆍ최용현( 崔 龍 玄 )ㆍ주정묵( 朱 正 默 )과 금성( 金 城 )의 이치언( 李 致 彦 )ㆍ이군일( 李 君 一 )ㆍ김순철( 金 順 哲 )ㆍ유건혁( 劉 健 赫 )과 강릉( 江 陵 )의 김성만( 金 聖 萬 )과 평창( 平 昌 )의 김자전( 金 子 田 )ㆍ김용암( 金 用 巖 )ㆍ한조이( 韓 召 史 )ㆍ장현추( 張 玄 樞 )ㆍ김 정학( 金 正 學 )ㆍ오태순( 吳 泰 淳 )ㆍ이성재( 李 成 才 )와 평해( 平 海 )의 장인수( 張 仁 秀 )ㆍ한영인( 韓 永 仁 )ㆍ강차영( 姜 且 永 )ㆍ길연( 吉 連 )ㆍ이조이( 李 召 史 )ㆍ최형식( 崔 亨 植 )ㆍ이창달( 李 昌 達 )ㆍ박내열 ( 朴 乃 烈 )과 횡성( 橫 城 )의 김철몽( 金 哲 蒙 )ㆍ김규한( 金 奎 漢 )ㆍ김영순( 金 永 順 )ㆍ정재원( 鄭 在 元 )ㆍ 추계동( 秋 季 東 )ㆍ박인정( 朴 麟 貞 )과 통천( 通 川 )의 이봉갑( 李 鳳 甲 )ㆍ정양제( 鄭 良 濟 )와 홍천( 洪 川 )의 김은집( 金 殷 集 )ㆍ김문교( 金 文 敎 )와 흡곡( 歙 谷 )의 홍노미( 洪 老 味 )ㆍ조종헌( 趙 宗 軒 )ㆍ오 성수( 吳 聖 洙 )와 이천( 伊 川 )의 김윤하( 金 允 夏 )ㆍ김학문( 金 學 文 )ㆍ민상곤( 閔 相 坤 )ㆍ강자옥( 姜 子 玉 )ㆍ김기봉( 金 淇 鳳 )과 울진( 蔚 珍 )의 장인완( 張 仁 完 )ㆍ장말철( 張 末 哲 )ㆍ최남수( 崔 南 壽 )와 양 양( 襄 陽 )의 이옥여( 李 沃 汝 )ㆍ이기성( 李 基 聖 )과 철원( 鐵 原 )의 곽영우( 郭 永 宇 )와 충청도 천안 ( 天 安 )의 조연승( 趙 然 承 )ㆍ노희순( 盧 喜 順 )ㆍ주광국( 朱 光 國 )ㆍ이학영( 李 學 永 )ㆍ조순창( 趙 順 昌 ) ㆍ김덕룡( 金 德 龍 )과 충주( 忠 州 )의 박형( 朴 炯 )ㆍ이초섭( 李 初 燮 )ㆍ김경준( 金 景 俊 )과 아산( 牙 山 ) 의 이문수( 李 文 修 )ㆍ이쾌성( 李 夬 成 )ㆍ최승원( 崔 勝 元 )과 전의( 全 義 )의 서성철( 徐 聖 哲 )ㆍ지천옹 ( 池 千 翁 )ㆍ서이순( 徐 而 淳 )과 평택( 平 澤 )의 유인조( 柳 仁 祚 )ㆍ이조이( 李 召 史 )ㆍ신완이( 辛 完 伊 )와 당진( 唐 津 )의 나정유( 羅 貞 有 )ㆍ박화칠( 朴 化 七 )ㆍ김여범( 金 汝 凡 )과 목천( 木 川 )의 사만철( 史 萬 哲 )ㆍ이완식( 李 完 植 )ㆍ김진성( 金 振 聲 )ㆍ봉윤일( 奉 允 日 )과 정산( 定 山 )의 최쾌인( 崔 快 仁 )ㆍ정태 석( 鄭 太 石 )ㆍ김춘복( 金 春 福 )ㆍ서시억( 徐 時 億 )ㆍ최석증( 崔 錫 曾 )과 홍주( 洪 州 )의 김광렬( 金 光 烈 ) ㆍ김원보( 金 元 甫 )ㆍ이경렬( 李 慶 烈 )ㆍ양업이( 梁 業 伊 )ㆍ최경수( 崔 敬 秀 )와 연풍( 延 豐 )의 이점한 ( 李 点 漢 )ㆍ황두승( 黃 斗 升 )과 진천( 鎭 川 )의 김부룡( 金 富 龍 )ㆍ정철성( 鄭 哲 成 )ㆍ이명흠( 李 明 欽 )ㆍ 김성대( 金 聖 大 )와 은진( 恩 津 )의 김치삼( 金 致 三 )ㆍ주성보( 朱 成 甫 )ㆍ장기용( 張 基 用 )과 청주( 淸 州 )의 이수갑( 李 壽 甲 )과 회인( 懷 仁 )의 박창보( 朴 昌 甫 )ㆍ김형지( 金 亨 祉 )ㆍ박제선( 朴 齊 瑄 )과 대 흥( 大 興 )의 정운청( 鄭 雲 靑 )ㆍ정인규( 鄭 仁 圭 )ㆍ황갑철( 黃 甲 哲 )과 음성( 陰 城 )의 구성록( 具 聖 祿 ) ㆍ한혁상( 韓 赫 相 )과 연산( 連 山 )의 박완길( 朴 完 吉 )ㆍ김지곤( 金 芝 坤 )과 예산( 禮 山 )의 김석종( 金 奭 鍾 )ㆍ김두응( 金 斗 應 )과 제천( 堤 川 )의 전흥출( 田 興 出 )ㆍ황수현( 黃 壽 鉉 )ㆍ박제달( 朴 齊 達 )ㆍ김 점쇠( 金 点 釗 )와 청안( 淸 安 )의 홍영기( 洪 永 淇 )ㆍ박희영( 朴 禧 榮 )과 청산( 靑 山 )의 손악돌( 孫 岳 乭 ) ㆍ김필형( 金 必 亨 )ㆍ권도윤( 權 道 允 )ㆍ김두장( 金 斗 長 )ㆍ박조이( 朴 召 史 )와 괴산( 槐 山 )의 김익유 ( 金 益 裕 )ㆍ김만근( 金 萬 根 )과 문의( 文 義 )의 김정일( 金 政 鎰 )ㆍ노유능( 盧 有 能 )ㆍ김용이( 金 龍 伊 )와 보은( 報 恩 )의 박치경( 朴 致 敬 )ㆍ어경우( 魚 璟 愚 )와 영춘( 永 春 )의 윤보은( 尹 輔 殷 )ㆍ배치성( 裴 致 成 )ㆍ원약이( 元 藥 伊 )ㆍ박세영( 朴 世 永 )ㆍ유회수( 柳 晦 秀 )ㆍ이원삼( 李 元 三 )과 영동( 永 同 )의 최기 정( 崔 己 正 )과 직산( 稷 山 )의 이응룡( 李 應 龍 )ㆍ김달숙( 金 達 叔 )ㆍ김약여( 金 若 汝 )ㆍ손종석( 孫 宗 錫 ) 과 황간( 黃 澗 )의 양종주( 梁 鍾 周 )와 청풍( 淸 風 )의 황달원( 黃 達 元 )과 남포( 籃 浦 )의 박필구( 朴 必 九 )와 홍산( 鴻 山 )의 정태훈( 丁 太 勳 )과 서천( 舒 川 )의 김영현( 金 永 賢 )과 옥천( 沃 川 )의 임봉준( 任 鳳 準 )과 황해도 신계( 新 溪 )의 서여고매( 徐 女 古 梅 )와 신천( 信 川 )의 김성규( 金 性 奎 )ㆍ송종운( 宋

140 140 - 宗 云 )ㆍ김순복( 金 順 卜 )ㆍ김석필( 金 石 必 )ㆍ임지선( 林 之 善 )ㆍ최창익( 崔 昌 益 )ㆍ중 법률( 法 律 )ㆍ 최형도( 崔 亨 道 )와 연안( 延 安 )의 신수업( 申 守 業 )ㆍ윤근실( 尹 根 實 )ㆍ고재봉( 高 在 鳳 )ㆍ정석귀( 鄭 錫 龜 )ㆍ배동길( 裴 東 吉 )ㆍ이성중( 李 成 中 )ㆍ최유남( 崔 有 南 )ㆍ김영수( 金 泳 修 )와 재령( 載 寧 )의 김 검상( 金 檢 相 )ㆍ이호원( 李 浩 遠 )ㆍ김병희( 金 秉 喜 )ㆍ양돌이( 楊 乭 伊 )ㆍ안재욱( 安 在 郁 )ㆍ유성삼( 兪 聖 三 )과 배천( 白 川 )의 최철이( 崔 哲 伊 )ㆍ홍갑출( 洪 甲 出 )ㆍ양평산( 梁 平 山 )ㆍ이돌쇠( 李 乭 釗 )ㆍ심 노면( 沈 魯 冕 )ㆍ인윤급( 印 潤 汲 )과 은률( 殷 栗 )의 한진완( 韓 鎭 完 )ㆍ장석기( 張 錫 紀 )ㆍ신태희( 申 泰 熙 )ㆍ권이섭( 權 理 燮 )ㆍ유석구( 劉 錫 九 )ㆍ명중엽( 明 仲 燁 )과 강령( 康 翎 )의 관노 순복( 順 卜 )ㆍ박 장벌( 朴 長 伐 )과 봉산( 鳳 山 )의 관노 해진( 亥 辰 )ㆍ주원업( 朱 元 業 )ㆍ김기용( 金 基 瑢 )과 안악( 安 岳 ) 의 정용서( 鄭 龍 瑞 )ㆍ김용삼( 金 用 三 )ㆍ강경식( 强 敬 植 )과 풍천( 豐 川 )의 길귀손( 吉 貴 孫 )ㆍ김재영 ( 金 在 榮 )ㆍ박영덕( 朴 永 德 )ㆍ김석우( 金 石 右 )ㆍ유시운( 劉 時 雲 )ㆍ박규흔( 朴 圭 炘 )ㆍ유용손( 柳 龍 孫 ) 과 문화( 文 化 )의 윤희주( 尹 希 周 )ㆍ곽후팔( 郭 厚 八 )과 평산( 平 山 )의 송천만( 宋 千 萬 )ㆍ권명국( 權 明 國 )ㆍ윤조이( 尹 召 史 )ㆍ홍순익( 洪 順 益 )과 장련( 長 連 )의 김천손( 金 千 孫 )ㆍ강우현( 姜 禹 鉉 )ㆍ박 만손( 朴 萬 孫 )ㆍ김태평( 金 泰 平 )ㆍ박기상( 朴 己 尙 )ㆍ김현극( 金 賢 克 )과 백령( 白 翎 )의 정종이( 鄭 宗 伊 )ㆍ민영기( 閔 泳 驥 )ㆍ강복쇠( 姜 福 釗 )ㆍ한범대( 韓 範 大 )와 초도( 椒 島 )의 사노 천석( 千 石 )과 송 화( 松 禾 )의 이병훤( 李 秉 暄 )ㆍ곽문영( 郭 文 永 )ㆍ이원섭( 李 元 燮 )ㆍ오석인( 吳 錫 仁 )과 수안( 遂 安 )의 김재봉( 金 才 鳳 )ㆍ김희이( 金 希 伊 )와 토산( 兎 山 )의 김성구( 金 聖 九 )ㆍ종 석교( 石 交 )ㆍ송재권( 宋 在 權 )ㆍ백봉수( 白 鳳 洙 )와 곡산( 谷 山 )의 최한용( 崔 漢 用 )ㆍ이근우( 李 根 宇 )ㆍ송경을( 宋 景 乙 )ㆍ김 내희( 金 乃 希 )와 맹산( 孟 山 )의 이희일( 李 希 一 )ㆍ김중갑( 金 仲 甲 )과 평안도 순천( 順 川 )의 김상이 ( 金 尙 伊 )ㆍ최내봉( 崔 乃 奉 )ㆍ봉구정( 奉 九 鼎 )과 순안( 順 安 )의 김응선( 金 應 先 )ㆍ신문이( 申 文 伊 )와 삼화( 三 和 )의 고익한( 高 益 漢 )ㆍ유병렬( 柳 秉 烈 )ㆍ김윤경( 金 允 卿 )ㆍ신경보( 申 敬 甫 )와 곽산( 郭 山 ) 의 이명서( 李 明 西 )ㆍ김천길( 金 千 吉 )과 영원( 寧 遠 )의 양덕승( 梁 德 昇 )과 개천( 价 川 )의 장영완 ( 張 永 完 )과 운산( 雲 山 )의 윤계현( 尹 桂 玄 )ㆍ정학성( 鄭 學 聖 )과 초산( 楚 山 )의 정제석( 鄭 濟 石 )ㆍ김 우곤( 金 祐 坤 )ㆍ조치명( 曺 致 明 )ㆍ이현명( 李 賢 明 )ㆍ이현수( 李 賢 守 )와 성천( 成 川 )의 김일곤( 金 日 坤 )과 벽동( 碧 潼 )의 김응엽( 金 應 燁 )ㆍ민한문( 閔 漢 文 )ㆍ노병호( 盧 炳 浩 )와 철산( 鐵 山 )의 하돌석 ( 河 乭 石 )과 덕천( 德 川 )의 백순복( 白 順 福 )과 강계( 江 界 )의 이기암( 李 奇 巖 )ㆍ김교묵( 金 敎 默 )ㆍ정 원석( 鄭 元 石 )과 영유( 永 柔 )의 박기경( 朴 己 京 )과 함종( 咸 從 )의 조용범( 趙 用 凡 )과 희천( 熙 川 )의 송진옥( 宋 振 玉 )ㆍ김윤식( 金 潤 植 )과 전라도 고창( 高 敞 )의 용봉룡( 用 奉 龍 )과 용담( 龍 潭 )의 박치 신( 朴 致 信 )과 동복( 同 福 )의 권악지( 權 岳 只 )ㆍ윤주성( 尹 周 成 )ㆍ임하규( 林 夏 奎 )ㆍ김창곤( 金 昌 坤 ) ㆍ박종배( 朴 宗 培 )와 순창( 淳 昌 )의 박영수( 朴 永 守 )ㆍ박순석( 朴 順 石 )과 보성( 寶 城 )의 노만석( 盧 萬 石 )ㆍ임화경( 林 化 景 )ㆍ김상룡( 金 商 龍 )과 여산( 礪 山 )의 황영준( 黃 永 俊 )과 용안( 龍 安 )의 오만 용( 吳 萬 用 )ㆍ박근보( 朴 近 甫 )ㆍ조동석( 趙 東 錫 )과 운봉( 雲 峯 )의 정배근( 鄭 培 根 )ㆍ권유봉( 權 有 鳳 ) ㆍ안의식( 安 義 植 )과 낙안( 樂 安 )의 이희일( 李 喜 日 )과 창평( 昌 平 )의 강선호( 姜 善 浩 )ㆍ윤응수( 尹 應 秀 )와 임실( 任 實 )의 신창균( 申 昌 均 )ㆍ김양룡( 金 洋 龍 )ㆍ이재찬( 李 載 燦 )ㆍ이석조( 李 錫 稠 )와 익산( 益 山 )의 오희용( 吳 熙 容 )ㆍ이병규( 李 炳 圭 )와 강진( 康 津 )의 사노 돌몽( 乭 蒙 )ㆍ김창묵( 金 昌 默 )과 정읍( 井 邑 )의 하상운( 河 相 雲 )ㆍ김덕문( 金 德 文 )ㆍ이규원( 李 圭 元 )과 진안( 鎭 安 )의 오치준 ( 吳 致 㻐 )ㆍ신치련( 申 致 連 )과 남평( 南 平 )의 서쾌금( 徐 快 金 )과 흥양( 興 陽 )의 김기원( 金 基 元 )ㆍ김 택신( 金 宅 信 )과 광양( 光 陽 )의 박금돌( 朴 今 乭 )과 담양( 潭 陽 )의 노병극( 盧 秉 克 )ㆍ이남식( 李 南 植 ) 과 흥덕( 興 德 )의 박갑진( 朴 甲 辰 )ㆍ조병식( 趙 炳 植 )ㆍ유치관( 兪 致 寬 )ㆍ박양근( 朴 良 根 )과 나주 ( 羅 州 )의 김병규( 金 秉 圭 )와 화순( 和 順 )의 김호범( 金 好 範 )과 장성( 長 城 )의 최진화( 崔 鎭 華 )와 곡 성( 谷 城 )의 최진조( 崔 鎭 祖 )ㆍ임일룡( 林 一 龍 )과 고산( 高 山 )의 이정억( 李 定 億 )ㆍ이익렬( 李 益 烈 ) ㆍ김치호( 金 致 浩 )와 금산( 錦 山 )의 금석규( 琴 錫 奎 )ㆍ김고석( 金 古 石 )과 함열( 咸 悅 )의 신도교( 辛

141 141 - 道 敎 )ㆍ정완식( 鄭 完 植 )ㆍ안익중( 安 益 重 )과 남원( 南 原 )의 정수( 鄭 洙 )와 해남( 海 南 )의 나한구( 羅 漢 九 )와 금구( 金 溝 )의 안장길( 安 長 吉 )ㆍ홍종신( 洪 鍾 兟 )과 함평( 咸 平 )의 민명훈( 閔 命 勳 )과 고 부( 古 阜 )의 조봉철( 趙 奉 哲 )과 장수( 長 水 )의 김산옥( 金 山 玉 )ㆍ김영록( 金 永 祿 )ㆍ박정인( 朴 正 仁 ) 과 영암( 靈 巖 )의 정경환( 鄭 京 煥 )과 무주( 茂 朱 )의 전녹진( 田 祿 辰 )과 김제( 金 堤 )의 전재옥( 田 在 玉 )과 흑산도( 黑 山 島 )의 안정호( 安 鼎 鎬 )와 경상도 김해( 金 海 )의 중 가민( 可 敏 )ㆍ박남중( 朴 南 中 )과 성주( 星 州 )의 노순업( 盧 順 業 )과 금산( 金 山 )의 이건중( 李 建 中 )ㆍ성기만( 成 基 萬 )과 하양 ( 河 陽 )의 오상학( 吳 尙 學 )ㆍ박시만( 朴 時 萬 )과 삼가( 三 嘉 )의 장경운( 張 景 云 )ㆍ이수봉( 李 守 奉 )과 상주( 尙 州 )의 장만귀( 張 萬 貴 )ㆍ김추희( 金 樞 喜 )ㆍ이희서( 李 希 西 )ㆍ조선관( 趙 善 官 )과 비안( 比 安 ) 의 박준영( 朴 俊 永 )ㆍ박노돌( 朴 老 乭 )과 산청( 山 淸 )의 박치영( 朴 致 永 )과 거창( 居 昌 )의 정희범 ( 鄭 希 範 )ㆍ이상돌( 李 尙 乭 )과 단성( 丹 城 )의 임수복( 林 壽 福 )ㆍ최정록( 崔 正 祿 )과 용궁( 龍 宮 )의 최 광보( 崔 光 甫 )ㆍ전한경( 田 漢 敬 )과 진해( 鎭 海 )의 최치기( 崔 致 箕 )ㆍ김정보( 金 正 甫 )와 영천( 永 川 ) 의 지인식( 池 仁 植 )과 곤양( 昆 陽 )의 최우홍( 崔 遇 鴻 )과 영덕( 盈 德 )의 조원장( 曺 元 長 )과 하동( 河 東 )의 이흥빈( 李 興 彬 )ㆍ김용( 金 鏞 )ㆍ임재천( 任 在 天 )과 자인( 慈 仁 )의 정창순( 丁 昌 淳 )과 문경( 聞 慶 )의 이상희( 李 商 僖 )ㆍ최윤실( 崔 允 實 )과 울산( 蔚 山 )의 장은상( 張 殷 相 )과 예천( 醴 泉 )의 유윤 기( 柳 允 基 )와 고령( 高 靈 )의 박언보( 朴 彦 輔 )ㆍ임흥업( 林 興 業 )과 거제( 巨 濟 )의 김석봉( 金 錫 鳳 )ㆍ 전우석( 全 禹 錫 )ㆍ석금봉( 石 金 鳳 )과 함창( 咸 昌 )의 남이봉( 南 履 奉 )ㆍ정하룡( 鄭 河 龍 )과 웅천( 熊 川 )의 고정운( 高 正 雲 )과 의령( 宜 寧 )의 김초능( 金 初 能 )ㆍ박정언( 朴 正 彦 )과 의성( 義 城 )의 박영 도( 朴 永 道 )와 안의( 安 義 )의 이주호( 李 周 鎬 )ㆍ하일쾌( 河 一 快 )와 언양( 彦 陽 )의 도화경( 都 化 京 )ㆍ 이동응( 李 東 應 )과 선산( 善 山 )의 임원준( 林 元 俊 )과 진보( 眞 寶 )의 임백희( 任 百 喜 )ㆍ김응대( 金 應 大 )와 영해( 寧 海 )의 오정표( 吳 廷 杓 )와 현풍( 玄 風 )의 김사현( 金 士 玄 )과 진주( 晉 州 )의 고봉주( 高 奉 柱 )와 청도( 淸 道 )의 위여상( 魏 汝 相 )과 인동( 仁 同 )의 지호연( 池 浩 淵 )과 밀양( 密 陽 )의 장돌이 ( 張 乭 伊 )와 개령( 開 寧 )의 오동석( 吳 東 錫 )과 흥해( 興 海 )의 이유종( 李 有 鍾 )과 함경도 홍원( 洪 原 ) 의 지용운( 池 龍 雲 )ㆍ박창표( 朴 倉 杓 )와 북청( 北 靑 )의 문응주( 文 應 周 )ㆍ이병수( 李 秉 洙 )와 명천 ( 明 川 )의 이사광( 李 士 光 )ㆍ이인숙( 李 仁 叔 )ㆍ정석보( 鄭 石 甫 )와 이원( 利 原 )의 강인식( 姜 仁 植 )ㆍ 임백후( 任 百 厚 )ㆍ김준일( 金 俊 鎰 )과 길주( 吉 州 )의 박경로( 朴 景 老 )ㆍ김성언( 金 聖 彦 )과 단천( 端 川 )의 이영진( 李 英 振 )ㆍ박승호( 朴 升 琥 )와 안변( 安 邊 )의 김한룡( 金 漢 龍 )ㆍ정기락( 鄭 基 洛 )ㆍ윤 봉규( 尹 鳳 圭 )ㆍ이화선( 李 華 善 )ㆍ장이순( 張 履 淳 )과 덕원( 德 源 )의 조경술( 趙 敬 述 )ㆍ황기주( 黃 基 珠 )와 삼수( 三 水 )의 김병순( 金 炳 淳 )ㆍ김건하( 金 健 河 )와 영흥( 永 興 )의 강태주( 姜 太 周 )ㆍ김치만 ( 金 致 萬 )ㆍ곽맹식( 郭 孟 植 )과 갑산( 甲 山 )의 권정호( 權 正 好 )와 장진( 長 津 )의 김찬규( 金 贊 圭 ) 등 은 모두 가벼운 죄이므로 놓아 보내라고 각각 그 도신에게 분부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3년 윤5월 9일(기사) / 죄인 성의길을 즉시 풀어 보내도록 도신에게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형조가 아뢰기를, 백령진( 白 翎 鎭 )에 노비로 있는 죄인 성의길( 成 義 吉 )을 즉시 풀어보내도록 도신( 道 臣 )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142 / 고종 13년 7월 16일(갑술) / 조영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조영하( 趙 寧 夏 )를 겸 지훈련원사( 兼 知 訓 鍊 院 使 )으로, 오치영( 吳 致 永 )을 동지로, 오의진( 吳 義 鎭 )ㆍ노진방( 盧 鎭 芳 )을 첨지로, 이헌우( 李 獻 宇 )를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으로, 박제억( 朴 齊 億 ) 을 우익위( 右 翊 衛 )로, 이병려( 李 秉 呂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한용( 李 漢 用 )ㆍ이주혁( 李 周 赫 ) 을 수문장으로, 강규형( 姜 奎 馨 )을 안동 영장( 安 東 營 將 )으로, 조재관( 趙 載 觀 )을 청주 영장( 淸 州 營 將 )으로, 민정호( 閔 鼎 鎬 )를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허도( 許 鍍 )를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 으로, 양주현( 梁 柱 顯 )을 경기 감영 중군으로, 이장회( 李 長 會 )를 동지로, 김문제( 金 文 濟 )를 문 신겸선전관으로, 강건형( 姜 建 馨 )을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으로, 김무( 金 懋 )를 경상 감영 중군으 로, 정기택( 鄭 騏 澤 )을 다대포 첨사( 多 大 浦 僉 使 )로, 서우순( 徐 瑀 淳 )을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으 로, 홍종훈( 洪 鍾 勳 )을 개성 중군으로, 이범서( 李 範 敍 )를 충청 감영 중군으로, 이창렴( 李 昌 濂 ) 을 신도 첨사( 薪 島 僉 使 )로, 어상우( 魚 相 愚 )를 가리포 첨사( 加 里 浦 僉 使 )로, 이민고( 李 敏 皐 )를 내금위장으로, 서규언( 徐 圭 彥 )을 황해 감영 중군으로, 이규흥( 李 奎 興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로, 김선용( 金 善 容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이범조( 李 範 祖 )를 북평사로, 안상협( 安 祥 浹 )ㆍ 김선집( 金 善 集 )을 오위장으로, 손규헌( 孫 珪 憲 )을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박승대( 朴 承 大 )를 혜산 첨사( 惠 山 僉 使 )로, 양필환( 梁 弼 煥 )을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삼았다. 이응명( 李 應 明 )ㆍ한백유( 韓 百 裕 )를 첨지로, 방문용( 方 文 鏞 )ㆍ남효상( 南 孝 祥 )을 오위장으로, 조문규( 趙 文 奎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박후진( 朴 厚 震 )을 창덕궁 위장으로, 신만희( 申 萬 熙 )를 경희궁 위장으로, 이근풍( 李 根 豐 )을 훈련원 정으로, 우익주( 禹 益 疇 )를 방답 첨사( 防 踏 僉 使 ) 로, 이동혁( 李 東 赫 )을 지도 만호( 智 島 萬 戶 )로, 임상준( 任 商 準 )을 부총관으로, 박준원( 朴 準 源 ) ㆍ우창모( 禹 昌 模 )를 오위장으로, 안규환( 安 圭 煥 )을 경희궁 위장으로, 최응엽( 崔 應 燁 )을 미조 항 첨사( 彌 助 項 僉 使 )로, 곽시환( 郭 時 煥 )ㆍ허인( 許 寅 )을 창덕궁 위장으로, 홍우정( 洪 祐 鼎 )을 좌익위( 左 翊 衛 )로, 오익영( 吳 益 泳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정필준( 鄭 必 準 )을 부장으로, 박재후 ( 朴 載 厚 )와 오영규( 吳 英 奎 )를 오위장으로, 민기영( 閔 箕 泳 )을 금위영 파총으로, 윤광식( 尹 光 軾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 左 邊 捕 盗 廳 從 事 官 )으로, 원준상( 元 俊 常 )을 훈련도감 초관으로, 김대 엽( 金 大 燁 )을 창덕궁 위장으로, 지상규( 池 相 奎 )를 경희궁 위장으로, 김오현( 金 五 鉉 )을 좌익찬 ( 左 翊 贊 )으로, 남궁영( 南 宮 泳 )을 훈련원 첨정으로, 심인택( 沈 寅 澤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윤정( 李 允 正 )ㆍ이태묵( 李 泰 默 )을 오위장으로, 박종병( 朴 宗 秉 )을 선전관으로, 백남석( 白 南 奭 )을 도총부 경력으로, 오학민( 吳 學 敏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김석주( 金 錫 疇 )와 김동석 ( 金 東 錫 )을 오위장으로, 박병식( 朴 丙 植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재일( 李 載 一 )을 경희궁 위장으 로 삼았다. 장홍규( 張 泓 奎 )를 중추부 도사로, 안규진( 安 奎 鎭 )ㆍ김헌주( 金 憲 周 )를 오위장으로, 이병규( 李 秉 奎 )와 윤석인( 尹 錫 仁 )을 훈련원 부정으로, 이교린( 李 敎 麟 )을 첨정으로, 백원규( 白 元 奎 )와 김이연( 金 履 淵 )을 오위장으로, 하석락( 河 錫 洛 )을 도총부 경력으로, 김두식( 金 斗 植 )을 경상 감 영 중군으로, 지용환( 池 龍 煥 )을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박수영( 朴 洙 英 )ㆍ여홍섭( 呂 弘 燮 )을 오위장으로, 조석기( 趙 錫 琦 )를 창덕궁 위장으로, 김정은( 金 鼎 殷 )ㆍ박준홍( 朴 準 弘 )을 경희궁 위장으로, 김원묵( 金 元 默 )을 창덕궁 위장으로, 방수권( 方 秀 權 )을 경희궁 위장으로, 정동주( 鄭 東 周 )를 장곶 첨사( 長 串 僉 使 )로, 김재수( 金 在 修 )를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김상룡( 金 商 龍 )을

143 143 - 흑산도 별장( 黑 山 島 別 將 )으로, 김봉구( 金 鳳 求 )를 선전관으로, 이윤경( 李 允 慶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김두철( 金 斗 喆 )을 안골 만호( 安 骨 萬 戶 )로, 윤의현( 尹 宜 鉉 )을 선전관으로, 전세흥 ( 田 世 興 )을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신성하( 辛 聖 河 )를 창덕궁 위장으로, 박우권( 朴 佑 權 )ㆍ이 석준( 李 錫 俊 )을 경희궁 위장으로, 조국현( 趙 國 鉉 )을 도총부 도사로, 안도문( 安 道 文 )을 개운포 만호( 開 雲 浦 萬 戶 )로, 김종범( 金 宗 範 )을 창덕궁 위장으로, 박세회( 朴 世 會 )를 경희궁 위장으로 삼았다. 남병거( 南 秉 拒 )를 훈련원 주부로, 조신범( 趙 信 範 )을 벽위 첨사( 碧 圍 僉 使 )로, 김도현( 金 道 鉉 ) 을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이수영( 李 壽 永 )ㆍ최규민( 崔 圭 敏 )을 오위장으로, 이희영( 李 熙 永 )을 창덕궁 위장으로, 김찬( 金 粲 )ㆍ이면용( 李 勉 容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종륜( 李 鍾 倫 )을 오위장 으로, 우용도( 禹 龍 度 )를 창덕궁 위장으로, 김청록( 金 淸 錄 )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교영( 李 敎 榮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정재은( 鄭 在 誾 )을 경상 감영 중군으로, 임희진( 林 喜 鎭 )을 동지로, 최영극( 崔 永 極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강제춘( 姜 濟 春 )을 방원 만호( 防 垣 萬 戶 )로, 장한석 ( 蔣 漢 碩 )을 재덕 만호( 在 德 萬 戶 )로, 조성렬( 趙 性 烈 )을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으로, 박재익( 朴 載 益 )ㆍ이완기( 李 完 基 )를 창덕궁 위장으로, 정녹( 鄭 祿 )ㆍ전중민( 田 重 民 )ㆍ문진완( 文 鎭 完 )을 경 희궁 위장으로, 이치갑( 李 致 甲 )ㆍ안세업( 安 世 業 )을 오위장으로, 정인석( 鄭 寅 錫 )을 금위영 파 총으로, 이규증( 李 奎 曾 )을 도총부 도사로, 이규승( 李 圭 昇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백도경( 白 度 敬 )ㆍ안사필( 安 思 弼 )을 창덕궁 위장으로, 윤계환( 尹 啓 煥 )ㆍ조성선( 趙 性 善 )ㆍ안윤식( 安 允 植 )을 경희궁 위장으로, 윤명진( 尹 明 鎭 )을 충익 위장으로, 김태희( 金 泰 熙 )를 충장위장으로, 이긍용 ( 李 兢 鎔 )을 도총부 경력으로, 이희서( 李 熙 瑞 )를 훈련원 주부로 삼았다. 박인수( 朴 麟 洙 )를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하승락( 河 承 洛 )을 훈련도감 파총으로, 이병세( 李 秉 世 )를 선전관으로, 여창섭( 呂 昌 燮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상희( 李 象 羲 )를 주부로, 구연창( 具 然 昌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유과환( 兪 果 煥 )ㆍ윤의현( 尹 宜 鉉 )을 훈련원 첨정으로, 권중선( 權 中 璿 )을 주부로, 유인학( 柳 寅 學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조유증( 趙 有 增 )을 수문장으로, 이인교( 李 寅 喬 )와 신명연( 申 命 衍 )을 첨지로, 서광태( 徐 光 泰 )를 선전관으로, 박정병( 朴 正 秉 )을 훈련원 판관으로, 원재정( 元 在 貞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 右 邊 捕 盜 廳 從 事 官 )으로, 조성하( 趙 成 夏 )를 부 총관으로, 조석칠( 曺 錫 七 )ㆍ정창용( 鄭 昌 鎔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교헌( 李 敎 憲 )을 도총부 도 사로, 노병직( 盧 炳 稷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광우( 金 光 雨 )를 주부로, 구연긍( 具 然 肯 )을 무신 겸선전관으로, 이규설( 李 奎 卨 )을 수문장으로, 이우경( 李 雨 慶 )을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로, 이성 수( 李 聲 秀 )를 고군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김영권( 金 永 權 )을 조라포 만호( 助 羅 浦 萬 戶 )로, 김 홍식( 金 弘 植 )을 가배량 만호( 加 背 梁 萬 戶 )로, 김선( 金 璿 )을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허선( 許 㷽 ) 을 선전관으로, 박중승( 朴 重 昇 )ㆍ최봉현( 崔 鳳 賢 )을 훈련원 주부로, 이재헌( 李 載 憲 )을 부장으 로, 최원위( 崔 元 暐 )를 수문장으로, 양문환( 梁 文 煥 )을 삼군부 종사관으로, 강효덕( 康 孝 德 )을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윤경선( 尹 慶 善 )ㆍ민영일( 閔 泳 一 )ㆍ김태승( 金 泰 昇 )을 선전관으로, 이 의섭( 李 宜 燮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방헌( 李 邦 憲 )을 부장으로, 이승수( 李 升 秀 )ㆍ신정원( 申 正 遠 )ㆍ백남규( 白 南 奎 )ㆍ노의수( 盧 義 壽 )ㆍ임재현( 林 才 賢 )을 수문장으로, 이흥우( 李 興 宇 )를 조경 묘 수문장으로 삼았다. 평남 권관( 平 南 權 管 )에 이신재( 李 信 在 )를 단부하고, 오정탄 권관( 於 汀 灘 權 管 )에 정치언( 鄭 致 彥 )을 단부하고, 구갈파지 권관( 舊 波 知 權 管 )에 김종상( 金 宗 象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안 일주( 安 一 柱 )와 주부 신석린( 申 錫 麟 )ㆍ한도영( 韓 道 永 )ㆍ박종혁( 朴 鍾 赫 )ㆍ박윤경( 朴 潤 景 ) 등의 가설은 정식에 의거하여 감하( 減 下 )하였다. 한도영( 韓 道 永 )ㆍ박윤경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 장유( 李 章 有 )ㆍ안신문( 安 信 文 )ㆍ김석구( 金 錫 九 )ㆍ김달영( 金 達 泳 )을 주부로 삼았다. 동지에 안

144 144 - 윤식( 安 潤 植 )을 단부하고, 참지( 參 知 ) 세 자리에 이동삼( 李 東 參 ), 임용준( 任 龍 準 ), 이민식( 李 敏 植 )을 단부하였다. 안동 영장( 安 東 營 將 ) 강규형( 姜 奎 馨 ), 청주 영장( 淸 州 營 將 ) 조재관( 趙 載 觀 ),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 민정호( 閔 鼎 鎬 ),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 허도( 許 鍍 ), 경기 중군 양주 현( 梁 柱 顯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 원 주부에 고석현( 高 錫 玄 )을 단부하고, 훈련원 참군에 차순석( 車 順 碩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 에 김병치( 金 炳 治 ), 이민제( 李 敏 齊 ), 이창옥( 李 昌 鈺 ), 이호건( 李 浩 楗 )을 단부하였다. 동지 열 자리에 오영규( 吳 英 奎 ), 안규진( 安 奎 鎭 ), 김이연( 金 履 淵 ), 여홍섭( 呂 弘 燮 ), 이치갑( 李 致 甲 ), 박 준원( 朴 準 源 ), 박준홍( 朴 準 弘 ), 한재유( 韓 在 愈 ), 박세회( 朴 世 會 ), 김찬( 金 粲 )을 단부하고, 첨지 열다섯 자리에 이윤정( 李 允 正 ), 이태묵( 李 泰 默 ), 김동석( 金 東 錫 ), 안상협( 安 祥 浹 ), 김선집( 金 善 集 ), 방문용( 方 文 鏞 ), 김석주( 金 錫 疇 ), 백원규( 白 元 奎 ), 김헌주( 金 憲 周 ), 이교준( 李 敎 駿 ), 김 준구( 金 駿 求 ), 심의직( 沈 宜 稷 ), 조정하( 趙 鼎 夏 ), 조정현( 趙 靖 顯 ), 이민고( 李 敏 皐 )를 단부하였 다. 부사과에 우기정( 禹 冀 鼎 ), 남기원( 南 起 元 ), 정인식( 鄭 仁 植 ), 이득수( 李 得 秀 ), 허협( 許 ), 정 기순( 鄭 基 淳 ), 어병완( 魚 秉 玩 ), 이제선( 李 濟 善 )을 단부하였다 / 고종 13년 8월 4일(임진) / 사은 숙단에 주달한 문자를 잘못 써 들인 백령 첨사 이규흥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정원의 계 또 아뢰기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규흥( 李 奎 興 )의 사은 숙단( 謝 恩 肅 單 )에 하직( 下 直 )이라 잘못 써서 들 였는데, 신이 멍청하게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으니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 단 자는 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주달하는 문자를 이토록 소홀히 한 것은 일이 매우 놀라우 니, 당해 첨사 및 통례원 관원을 모두 엄중히 처벌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본원이 추고를 청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행할 만한 벌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잡아다가 처단하라. 그대도 추고 하겠다. 하였다 / 고종 13년 10월 5일(임진) / 죄인 민영기의 배소를 황해도 장연부 백령진으로 정하여 압송하겠다는 형조의 계 형조가 아뢰기를, 삼가 무위소 지구관( 知 彀 官 )의 구전 하교에 의거하여, 죄인 민영기( 閔 泳 驥 )에게 엄한 형신 을 한 차례 가한 뒤에 황해도 장연부( 長 淵 府 ) 백령진( 白 翎 鎭 )에 배소를 정하여 즉시 압송하 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3년 12월 23일(기유) /

145 145 - 백령진에 도배한 죄인 이학성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형조가 아뢰기를, 황해도 도류안( 徒 流 案 )에 들어 있는 백령진( 白 翎 鎭 )에 도배( 島 配 )된 죄인 이학성( 李 學 成 )과 평안도 도류안에 들어 있는 맹산현( 孟 山 縣 )에 정배( 定 配 )된 죄인 양성한( 梁 成 漢 ), 용천부( 龍 川 府 )에 정배된 죄인 임희주( 林 熙 疇 ) 등에 대해 방(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해당 도신( 道 臣 )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4년 2월 22일(무신) / 서리를 보내 백령 첨사 이규흥을 잡아올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황해 감사 이근필( 李 根 弼 )의 장계에,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규흥( 李 奎 興 )을 우선 파출하고 그 죄상을 유사( 攸 司 )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한 것에 대하여 계하하셨습니다. 이규흥 이 현재 임소( 任 所 )에 있으니, 규례에 의거하여 의금부의 서리( 書 吏 )를 파견하여 임무를 교 대한 뒤에 잡아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대명( 待 命 )하기를 기다려 나수하라. 하였다 / 고종 14년 3월 5일(신유)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판서 김병시( 金 炳 始 )는 나오고, 참판 이희로( 李 僖 魯 )는 병들었고, 참의 박 이도( 朴 履 道 )는 입직하고 있고, 참지 정종학( 鄭 鍾 學 )은 병들었고, 동부승지 박주양이 나왔다. 이교창( 李 敎 昌 )을 훈련원 도정으로, 채규상( 蔡 奎 常 )ㆍ이용겸( 李 容 謙 )을 선전관으로, 박정화 ( 朴 鼎 和 )를 내금위장으로, 박종현( 朴 宗 玹 )을 우림위장으로, 이창하( 李 彰 夏 )ㆍ최경선( 崔 敬 善 ) 을 오위장으로, 윤종의( 尹 宗 儀 )를 조사위장( 曹 司 衛 將 )으로, 김신배( 金 信 倍 )를 충익위장으로, 안사필( 安 思 弼 )ㆍ백도경( 白 度 敬 )ㆍ최증( 崔 曾 )을 경복궁 위장( 景 福 宮 衛 將 )으로, 한정리( 韓 禎 履 )를 훈련원 첨정으로, 민선호( 閔 善 鎬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신도균( 申 道 均 )을 선전관으로, 허진( 許 )을 부장으로, 박도영( 朴 道 榮 )ㆍ방수현( 方 秀 賢 )을 수문장으로, 이상우( 李 祥 宇 )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조기성( 趙 琦 性 )을 승천보 만호( 昇 天 堡 萬 戶 )로, 김준모( 金 俊 模 )를 문수 별 장( 文 殊 別 將 )으로, 이창렬( 李 昌 烈 )을 남포 별장( 南 圃 別 將 )으로, 정학선( 鄭 鶴 善 )을 조령 별장 ( 鳥 嶺 別 將 )으로, 김용욱( 金 龍 旭 )을 구소비포 만호( 舊 所 非 浦 萬 戶 )로 삼았다. 분도총관 두 자리에 심순택( 沈 舜 澤 )ㆍ정기회( 鄭 基 會 )를 단부하였고, 분부총관 열 여덟 자리 에 윤병정( 尹 秉 鼎 )ㆍ김학초( 金 學 初 )ㆍ김병연( 金 炳 淵 )ㆍ남정룡( 南 廷 龍 )ㆍ이인명( 李 寅 命 )ㆍ조경 하( 趙 敬 夏 )ㆍ이연응( 李 沇 應 )ㆍ이명응( 李 明 應 )ㆍ이세재( 李 世 宰 )ㆍ박제관( 朴 齊 寬 )ㆍ이병교( 李 炳 敎 )ㆍ정직조( 鄭 稷 朝 )ㆍ성재옥( 成 載 玉 )ㆍ정해륜( 鄭 海 崙 )ㆍ조강하( 趙 康 夏 )ㆍ홍원식( 洪 遠 植 )ㆍ조

146 146 - 문현( 趙 文 顯 )ㆍ정운귀( 鄭 雲 龜 )를 단부하였다. 분오위장( 分 五 衛 將 ) 열 다섯 자리에 상우현( 尙 禹 鉉 )ㆍ이두현( 李 斗 鉉 )ㆍ신석렴( 申 錫 濂 )ㆍ최학규( 崔 鶴 圭 )ㆍ김홍식( 金 弘 植 )ㆍ강태현( 姜 泰 鉉 )ㆍ 안규진( 安 圭 瑱 )ㆍ최진주( 崔 鎭 周 )ㆍ김계영( 金 季 永 )ㆍ이수영( 李 壽 永 )ㆍ송덕립( 宋 德 立 )ㆍ오기륜 ( 吳 箕 倫 )ㆍ백원규( 白 元 圭 )ㆍ장도성( 張 道 成 )ㆍ장환규( 張 煥 奎 )를 단부하였다. 분도총 도사( 分 都 摠 都 事 ) 스무 자리에 유기동( 柳 冀 東 )ㆍ장홍식( 張 弘 植 )ㆍ이극렬( 李 克 烈 )ㆍ이증우( 李 曾 宇 )ㆍ민 관식( 閔 寬 植 )ㆍ유창렬( 柳 漳 烈 )ㆍ조종철( 趙 鍾 哲 )ㆍ신응균( 申 膺 均 )ㆍ이세응( 李 世 應 )ㆍ이유필( 李 儒 必 )ㆍ오치혁( 吳 致 赫 )ㆍ정해식( 鄭 海 植 )ㆍ이덕우( 李 德 雨 )ㆍ송의호( 宋 義 浩 )ㆍ민치기( 閔 致 驥 )ㆍ 노병직( 盧 炳 稷 )ㆍ이규설( 李 奎 卨 )ㆍ이명현( 李 明 鉉 )ㆍ신찬희( 申 贊 熙 )ㆍ이상흥( 李 商 興 )을 단부하 였다. 분선전관( 分 宣 傳 官 ) 열 두 자리에 이교민( 李 敎 敏 )ㆍ이정규( 李 靖 奎 )ㆍ신상우( 申 商 雨 )ㆍ 이민보( 李 敏 甫 )ㆍ안필구( 安 弼 求 )ㆍ변형규( 邊 衡 圭 )ㆍ남궁복( 南 宮 濮 )ㆍ이유진( 李 儒 珍 )ㆍ안권( 安 權 )ㆍ신래희( 申 來 熙 )ㆍ조병천( 曺 秉 天 )ㆍ윤광두( 尹 光 斗 )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첨정 가설직에 박준성( 朴 準 成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신응조( 申 應 朝 ), 호군에 윤병정( 尹 秉 鼎 )ㆍ윤태경( 尹 泰 經 )ㆍ홍원식( 洪 遠 植 )ㆍ이순익( 李 淳 翼 ), 부호군에 조명교( 趙 命 敎 )ㆍ이승순( 李 承 純 )ㆍ심상한 ( 沈 相 漢 )ㆍ윤치성( 尹 致 聖 )ㆍ임헌대( 任 憲 大 )ㆍ윤성진( 尹 成 鎭 )ㆍ조문하( 趙 文 夏 )ㆍ이공우( 李 公 愚 ) ㆍ유기동( 柳 箕 東 )ㆍ이희정( 李 熙 正 )ㆍ성낙소( 成 樂 韶 ), 부사직에 권종록( 權 鍾 祿 )ㆍ기우현( 奇 禹 鉉 )ㆍ강탁( 姜 鐸 )ㆍ임상호( 任 尙 鎬 )ㆍ김명기( 金 命 基 )ㆍ오택우( 吳 宅 禹 ), 부사과에 이원기( 李 元 祺 ) ㆍ민선호( 閔 善 鎬 )ㆍ조종운( 趙 鍾 雲 )ㆍ백봉삼( 白 鳳 三 )ㆍ윤정구( 尹 定 求 )ㆍ이유진( 李 儒 珍 )을 모두 단부하였다. 오위장 이용회( 李 容 晦 ), 조양년( 趙 養 年 ), 박이찬( 朴 履 贊 ), 신상복( 愼 尙 復 ), 유상은( 柳 相 殷 ), 이 철원( 李 喆 遠 ), 이민도( 李 敏 度 ), 이정회( 李 楨 會 ), 노광영( 盧 光 永 ), 김노첨( 金 魯 瞻 ), 강일영( 姜 鎰 永 ), 김성찬( 金 聖 鑽 ), 한용리( 韓 容 履 ), 이진범( 李 震 範 ), 김한필( 金 漢 弼 ), 유태영( 柳 泰 永 ), 박상 하( 朴 相 何 ), 이형규( 李 珩 圭 ), 신의철( 申 義 喆 ), 민영세( 閔 泳 世 ), 김봉익( 金 鳳 翼 ), 우정동( 禹 鼎 東 ), 이원재( 李 元 在 ), 이정우( 李 貞 宇 )는 가설직으로 정식에 따라 감하( 減 下 )하였다. 어유간 첨사( 魚 遊 澗 僉 使 ) 강이석( 康 利 錫 ), 재덕 만호( 在 德 萬 戶 ) 김희조( 金 禧 祚 ), 줄온 만호( 溫 萬 戶 ) 이민석( 李 民 錫 ), 폐무산 만호( 廢 茂 山 萬 戶 ) 임대홍( 林 大 弘 ), 오촌 권관( 吾 村 權 管 ) 오상기 ( 吳 相 蘷 )에 대해서 철파( 撤 罷 )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전 만호 민귀호( 閔 龜 鎬 )를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에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14년 3월 24일(경진) / 죄인 채종이 등을 석방하겠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油 紙 ) 도류안( 徒 流 案 ) 가운데 강원도에 정배한 죄인인 김화( 金 化 )의 채종이( 蔡 宗 伊 ), 홍천( 洪 川 )의 윤소( 尹 釗 ), 삼척( 三 陟 )의 윤 조이( 尹 召 史 )ㆍ진명선( 陳 明 先 ), 춘천( 春 川 ) 의 홍종호( 洪 鍾 鎬 ), 평강( 平 康 )의 박완종( 朴 完 宗 ), 낭천( 狼 川 )의 이만혁( 李 萬 赫 ), 회양( 淮 陽 )의 이창적( 李 昌 迪 ), 평강의 강영규( 姜 永 奎 )ㆍ신봉학( 申 鳳 學 ), 삼척( 三 陟 )의 장석필( 張 石 必 ), 철원 ( 鐵 原 )의 유용길( 兪 龍 吉 ), 양양( 襄 陽 )의 이경만( 李 京 萬 ), 간성( 杆 城 )의 조수종( 曺 守 宗 ), 김화 ( 金 化 )의 박주호( 朴 周 鎬 ), 흡곡( 歙 谷 )의 박근성( 朴 根 成 ), 평강( 平 康 )의 이승건( 李 升 乾 ), 안협 ( 安 峽 )의 노비 설매( 雪 梅 ), 홍천( 洪 川 )의 양희득( 梁 喜 得 ), 평창( 平 昌 )의 연치장( 延 致 長 ), 양구 ( 楊 口 )의 김성항( 金 性 恒 ), 통천( 洞 川 )의 한삼동( 韓 三 同 ), 홍천( 洪 川 )의 추월명( 秋 月 明 ), 이원

147 147 - ( 利 原 )의 우순동( 禹 順 同 ), 강릉( 江 陵 )의 이의준( 李 義 俊 ), 양양( 襄 陽 )의 최성득( 崔 性 得 ), 춘천 ( 春 川 )의 김기영( 金 基 榮 ), 회양( 淮 陽 )의 정재형( 丁 載 亨 ), 금성( 金 城 )의 현성신( 玄 成 信 ), 회양 ( 淮 陽 )의 김한풍( 金 汗 豐 ), 통천( 洞 川 )의 최칠여( 崔 七 汝 ), 간성( 杆 城 )의 홍태경( 洪 泰 景 ), 철원 ( 鐵 原 )의 이준희( 李 俊 希 ), 춘천( 春 川 )의 홍대주( 洪 大 周 ), 평해( 平 海 )의 조경학( 趙 京 學 ), 이천 ( 伊 川 )의 김양록( 金 良 祿 ), 김화( 金 化 )의 구석이( 具 石 伊 ), 횡성( 橫 城 )의 김현수( 金 顯 洙 ), 정선 ( 旌 善 )의 김성득( 金 成 得 ), 회양( 淮 陽 )의 표성록( 表 成 祿 ), 양구( 楊 口 )의 윤태형( 尹 太 兄 ), 금성 ( 金 城 )의 김성칠( 金 成 七 ), 삼척( 三 陟 )의 최명섭( 崔 命 涉 ), 춘천( 春 川 )의 이재복( 李 載 馥 ), 고성 ( 高 城 )의 이기전( 李 基 全 ), 철원( 鐵 原 )의 조윤항( 趙 允 恒 ), 낭천( 狼 川 )의 나 조이( 羅 召 史 ), 평창 ( 平 昌 )의 곽중옥( 郭 仲 玉 ), 회양( 淮 陽 )의 김재관( 金 在 寬 ), 철원( 鐵 原 )의 홍덕준( 洪 德 俊 ), 흡곡 ( 歙 谷 )의 김차복( 金 次 卜 )ㆍ하대익( 河 大 益 ), 이천( 伊 川 )의 김행신( 金 行 信 ), 간성( 杆 城 )의 김경 채( 金 敬 采 ), 김화( 金 化 )의 강사진( 姜 士 辰 ), 인제( 麟 蹄 )의 김백만( 金 百 萬 ), 춘천( 春 川 )의 정치겸 ( 鄭 致 謙 ), 낭천( 狼 川 )의 이재삼( 李 在 三 ), 안협( 安 峽 )의 권만일( 權 萬 日 )ㆍ서상민( 徐 相 敏 ), 강릉 ( 江 陵 )의 이승락( 李 升 洛 ), 회양( 淮 陽 )의 박성관( 朴 聖 寬 ), 금성( 金 城 )의 김복손( 金 福 孫 ), 통천 ( 洞 川 )의 김대익( 金 大 益 ), 회양( 淮 陽 )의 차치항( 車 致 恒 ), 춘천( 春 川 )의 김영수( 金 永 守 ), 회양 ( 淮 陽 )의 김형득( 金 亨 得 ), 간성( 杆 城 )의 김호범( 金 浩 凡 ), 양구( 楊 口 )의 정기섭( 丁 箕 燮 ), 철원 ( 鐵 原 )의 이인증( 李 仁 曾 ), 홍천( 洪 川 )의 조규백( 趙 圭 白 ), 강릉( 江 陵 )의 임오철( 林 五 哲 ), 홍천 ( 洪 川 )의 안제일( 安 齊 日 ), 고성( 高 城 )의 권취대( 權 取 大 ), 흡곡( 歙 谷 )의 조재중( 趙 在 仲 ), 간성 ( 杆 城 )의 권석방( 權 碩 方 ), 회양( 淮 陽 )의 강달주( 姜 達 周 ), 고성( 高 城 )의 박계선( 朴 啓 先 ), 정선 ( 旌 善 )의 사노( 私 奴 ) 갑진( 甲 辰 ), 횡성( 橫 城 )의 김선이( 金 先 伊 ), 통천( 洞 川 )의 이계선( 李 啓 善 ), 고성( 高 城 )의 권준철( 權 俊 哲 ), 통천( 洞 川 )의 민순화( 閔 順 化 ), 춘천( 春 川 )의 김순서( 金 順 瑞 ), 양 구( 楊 口 )의 유공우( 劉 公 羽 ), 횡성( 橫 城 )의 박모금( 朴 謀 金 ), 간성( 杆 城 )의 이병률( 李 秉 律 ), 고성 ( 高 城 )의 신용환( 申 龍 煥 ), 인제( 麟 蹄 )의 강만석( 姜 萬 石 ), 낭천( 狼 川 )의 김희( 金 熙 ), 춘천( 春 川 ) 의 김석종( 金 石 宗 ), 철원( 鐵 原 )의 홍사형( 洪 士 衡 ), 낭천( 狼 川 )의 박기현( 朴 起 賢 ), 양양( 襄 陽 )의 장량원( 張 良 元 ), 이천( 伊 川 )의 허득( 許 得 ), 양구( 楊 口 )의 김성국( 金 成 局 ), 철원( 鐵 原 )의 현수옥 ( 玄 秀 玉 ), 통천( 洞 天 )의 임봉옥( 林 奉 玉 ), 고성( 高 城 )의 김영효( 金 永 孝 ), 철원( 鐵 原 )의 임대현 ( 林 大 玄 ), 평창( 平 昌 )의 김필근( 金 必 根 ), 강릉( 江 陵 )의 이국명( 李 國 明 ), 인제( 麟 蹄 )의 김중철 ( 金 仲 哲 ), 간성( 杆 城 )의 장봉근( 張 奉 根 ), 양구( 楊 口 )의 최용현( 崔 龍 賢 ), 흡곡( 歙 谷 )의 오창조 ( 吳 昌 祚 ), 간성( 杆 城 )의 석학이( 石 鶴 伊 )와 배소( 配 所 )에 도착하지 않은 자의 명단 가운데 김 화( 金 化 )의 김삼손( 金 三 孫 ), 안협( 安 峽 )의 이도일( 李 道 一 ), 충청도 목천( 木 川 )의 김상석( 金 相 碩 ), 해미( 海 美 )의 백동석( 白 東 石 ), 아산( 牙 山 )의 이춘손( 李 春 孫 )ㆍ백천여( 白 千 汝 ), 신창( 新 昌 ) 의 김종흡( 金 鍾 洽 ), 정산( 定 山 )의 박대구( 朴 大 邱 ), 괴산( 槐 山 )의 강덕원( 姜 德 元 ), 청안( 淸 安 )의 노준탁( 魯 俊 鐸 ), 단양( 丹 陽 )의 김여건( 金 麗 健 )ㆍ권희철( 權 喜 哲 ), 옥천( 沃 川 )의 양소선( 梁 小 先 ), 해미( 海 美 )의 김칠봉( 金 七 奉 ), 옥천( 沃 川 )의 신사원( 申 思 元 ), 신창( 新 昌 )의 송수경( 宋 守 京 ), 제 천( 堤 川 )의 오유선( 吳 有 善 ), 아산( 牙 山 )의 곽칠룡( 郭 七 龍 ), 청주( 淸 州 )의 한치홍( 韓 致 弘 ), 연기 ( 燕 岐 )의 김영도( 金 永 道 )ㆍ서성철( 徐 盛 鐵 ), 연풍( 延 豐 )의 임우표( 林 宇 杓 ), 옥천( 沃 川 )의 유한 창( 劉 漢 昌 ), 신창( 新 昌 )의 김사일( 金 士 日 ), 보은( 報 恩 )의 형순원( 邢 順 元 ), 회인( 懷 仁 )의 정완석 ( 丁 完 石 ), 음성( 陰 城 )의 이필우( 李 必 右 ), 황간( 黃 澗 )의 황학연( 黃 鶴 淵 ), 영춘( 永 春 )의 용정문 ( 龍 正 文 ), 회인( 懷 仁 )의 우경( 禹 璟 ), 청풍( 淸 風 )의 최희진( 崔 喜 珍 ), 연풍( 延 豐 )의 윤사성( 尹 士 成 ), 황간( 黃 澗 )의 이공억( 李 公 億 ), 영동( 永 同 )의 조도룡( 趙 道 龍 ), 노성( 魯 城 )의 박성철( 朴 聖 哲 ), 옥천( 沃 川 )의 황호술( 黃 浩 述 ), 제천( 堤 川 )의 최용( 崔 瑢 ), 아산( 牙 山 )의 김낙선( 金 洛 善 ), 목천( 木 川 )의 유석풍( 柳 錫 豐 ), 회덕( 懷 德 )의 최세권( 崔 世 權 ), 연기( 燕 岐 )의 서학동( 徐 學 同 ), 노

148 148 - 성( 魯 城 )의 김이진( 金 已 進 ), 비인( 庇 仁 )의 이치욱( 李 致 郁 ), 온양( 溫 陽 )의 배암석( 裵 巖 石 ), 전의 ( 全 義 )의 홍인옹( 洪 仁 雍 ), 제천( 堤 川 )의 안경호( 安 璟 好 ), 서천( 舒 川 )의 정성진( 鄭 成 辰 ), 단양 ( 丹 陽 )의 배주백( 裵 周 白 ), 천안( 天 安 )의 오명규( 吳 明 奎 ), 비인( 庇 仁 )의 박옥지( 朴 玉 只 ), 서산 ( 瑞 山 )의 손득룡( 孫 得 龍 ), 목천( 木 川 )의 이면오( 李 冕 五 )ㆍ김두만( 金 斗 萬 ), 노성( 魯 城 )의 박명 옥( 朴 命 玉 ), 전의( 全 義 )의 최이언( 崔 伊 彥 ), 노성( 魯 城 )의 윤치영( 尹 致 榮 ), 청양( 靑 陽 )의 김주안 ( 金 柱 安 ), 연기( 燕 岐 )의 김이봉( 金 利 鳳 ), 영춘( 永 春 )의 정준이( 鄭 俊 伊 ), 문의( 文 義 )의 엄관억 ( 嚴 寬 億 ), 회덕( 懷 德 )의 사노( 私 奴 ) 종문( 宗 文 ), 영동( 永 同 )의 이이악( 李 已 岳 ), 단양( 丹 陽 )의 김필용( 金 必 用 ), 진천( 鎭 川 )의 박규운( 朴 珪 云 ), 연기( 燕 岐 )의 박치영( 朴 致 永 ), 청산( 靑 山 )의 조 풍천( 趙 豐 天 ), 음성( 陰 城 )의 김부익( 金 富 益 ), 연기( 燕 岐 )의 정일포( 丁 日 包 ), 괴산( 槐 山 )의 우택 임( 禹 宅 任 ), 단양( 丹 陽 )의 김재홍( 金 在 弘 ), 보은( 報 恩 )의 정국팔( 鄭 局 八 ), 목천( 木 川 )의 이응보 ( 李 膺 輔 ), 진천( 鎭 川 )의 전군섭( 全 君 涉 ), 회덕( 懷 德 )의 배영철( 裵 英 哲 ), 황간( 黃 澗 )의 이상노 ( 李 尙 魯 ), 진천( 鎭 川 )의 임순종( 林 順 宗 )ㆍ김용진( 金 用 珍 )과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자의 명단 가운데 전의( 全 義 )의 정석위( 鄭 錫 褘 ), 황해도 풍천( 豐 川 )의 박신향( 朴 信 享 ), 수안( 遂 安 ) 의 안공식( 安 工 植 ), 안악( 安 岳 )의 강수복( 姜 守 卜 )ㆍ최월준( 崔 月 俊 ), 문화( 文 化 )의 김이곤( 金 利 坤 ), 장연( 長 淵 )의 유명수( 劉 明 秀 ), 신천( 信 川 )의 이명구( 李 明 九 ), 송화( 松 禾 )의 서업이( 徐 業 伊 ), 신천( 信 川 )의 김인오( 金 仁 五 ), 백령( 白 翎 )의 이성환( 李 聖 煥 ), 황주( 黃 州 )의 고경진( 高 景 鎭 ), 안악( 安 岳 )의 고진영( 高 鎭 永 ), 토산( 兎 山 )의 이동백( 李 東 白 ), 재령( 載 寧 )의 모종이( 牟 宗 伊 ), 곡산( 谷 山 )의 이회영( 李 會 永 ), 신천( 信 川 )의 이성칠( 李 成 七 ), 은율( 殷 栗 )의 강도영( 姜 道 榮 ), 장련( 長 連 )의 나문영( 羅 文 榮 ), 재령( 載 寧 )의 이득춘( 李 得 春 ), 풍천( 豐 川 )의 김상범( 金 相 範 )ㆍ고달홍( 高 達 弘 ), 송화( 松 禾 )의 최귀현( 崔 龜 鉉 ), 황주( 黃 州 )의 이희신( 李 熙 臣 ), 문화( 文 化 ) 의 이순업( 李 順 業 ), 곡산( 谷 山 )의 서종해( 徐 宗 楷 ), 토산( 兎 山 )의 조상진( 趙 相 晉 ), 평산( 平 山 )의 이일수( 李 逸 秀 ), 신천( 信 川 )의 장장오( 張 長 五 )ㆍ신백첨( 申 伯 添 )ㆍ김학도( 金 學 道 ), 봉산( 鳳 山 ) 의 정순용( 鄭 巡 用 ), 장련( 長 連 )의 이병수( 李 秉 洙 ), 은율( 殷 栗 )의 김윤상( 金 允 祥 ), 장련( 長 連 )의 김창석( 金 昌 石 ), 풍천( 豐 川 )의 김성종( 金 成 鍾 ), 재령( 載 寧 )의 관노( 官 奴 ) 용완( 龍 琓 ), 문화( 文 化 )의 관노 두만( 斗 萬 )ㆍ이경윤( 李 京 允 ), 토산의 조덕환( 趙 德 煥 ), 곡산( 谷 山 )의 송천만( 宋 千 萬 ), 장련( 長 連 )의 김판문( 金 判 文 ), 재령( 載 寧 )의 최판득( 崔 判 得 ), 풍천( 豐 川 )의 성병전( 成 炳 銓 ), 곡산( 谷 山 )의 황기종( 黃 基 鍾 ), 장련( 長 連 )의 최용진( 崔 龍 鎭 ), 백령( 白 翎 )의 사노 경록( 京 祿 )ㆍ김수복( 金 秀 福 ), 신계( 新 溪 )의 이화서( 李 化 西 ), 평안도 순안( 順 安 )의 서우순( 徐 于 淳 ), 창 성( 昌 城 )의 강용운( 姜 龍 云 ), 희천( 熙 川 )의 김진각( 金 振 恪 ), 위원( 渭 原 )의 조은금( 曺 銀 金 ), 상원 ( 祥 原 )의 송원철( 宋 元 哲 ), 삼등( 三 登 )의 김관찬( 金 觀 贊 ), 위원( 渭 原 )의 곽시영( 郭 時 榮 ), 맹산 ( 孟 山 )의 최순( 崔 淳 ), 위원( 渭 原 )의 송원배( 宋 元 培 ), 태천( 泰 川 )의 주의식( 朱 義 植 ), 개천( 价 川 ) 의 김응량( 金 應 良 ), 영유( 永 柔 )의 이윤성( 李 允 星 ), 벽동( 碧 潼 )의 이업동( 李 業 同 ), 운산( 雲 山 )의 김준민( 金 俊 民 ), 용강( 龍 崗 )의 김일선( 金 日 善 ), 순천( 順 川 )의 강원득( 姜 元 得 ), 삼화( 三 和 )의 조 병직( 趙 炳 稷 ), 맹산( 孟 山 )의 안장령( 安 長 令 ), 중화( 中 和 )의 사선영( 舍 善 永 ), 함종( 咸 從 )의 우주 명( 禹 周 命 ), 맹산( 孟 山 )의 김경현( 金 京 賢 ), 운산( 雲 山 )의 고석산( 高 石 山 ), 개천( 价 川 )의 정계량 ( 鄭 啓 良 ), 중화( 中 和 )의 임성룡( 林 成 龍 )ㆍ이민정( 李 敏 政 ), 덕천( 德 川 )의 손완종( 孫 完 宗 ), 벽동 ( 碧 潼 )의 손상천( 孫 尙 千 ), 박천( 博 川 )의 이원보( 李 元 甫 ), 증산( 甑 山 )의 이강우( 李 康 佑 ), 강동 ( 江 東 )의 이봉엽( 李 奉 燁 ), 순안( 順 安 )의 장봉한( 張 奉 漢 ), 맹산( 孟 山 )의 최군석( 崔 君 碩 ), 순천 ( 順 川 )의 방원길( 方 元 吉 )ㆍ김흥돌( 金 興 乭 ), 곽산( 郭 山 )의 최봉신( 崔 奉 信 ), 순천( 順 川 )의 사비 ( 私 婢 ) 계월( 桂 月 ), 삼화( 三 和 )의 정만원( 鄭 萬 源 ), 개천( 价 川 )의 이도업( 李 道 業 ), 함종( 咸 從 )의 정학선( 鄭 學 先 ), 맹산( 孟 山 )의 나의균( 羅 義 均 )ㆍ박기복( 朴 起 福 ), 함종( 咸 從 )의 김주석( 金 珠 錫 ),

149 149 - 태천( 泰 川 )의 한운길( 韓 云 吉 ), 중화( 中 和 )의 이금용( 李 今 用 )ㆍ백낙면( 白 樂 冕 ), 함종( 咸 從 )의 최치성( 崔 致 成 ), 박천( 博 川 )의 이명수( 李 明 守 ), 운산( 雲 山 )의 황응수( 黃 應 洙 ), 삼등( 三 登 )의 이 찬두( 李 贊 斗 ), 상원( 祥 原 )의 이기종( 李 起 宗 ), 영유( 永 柔 )의 성태용( 成 泰 鏞 ), 개천( 价 川 )의 이영 봉( 李 永 奉 ), 구성( 龜 城 )의 김치문( 金 致 文 ), 양덕( 陽 德 )의 김종원( 金 鍾 圓 ), 운산( 雲 山 )의 서봉준 ( 徐 鳳 準 ), 안주( 安 州 )의 임백주( 任 百 柱 ), 곽산( 郭 山 )의 이종만( 李 鍾 萬 ), 벽동( 碧 潼 )의 정기호 ( 鄭 起 鎬 ), 중화( 中 和 )의 노관영( 盧 寬 永 ), 삼등( 三 登 )의 조달승( 曺 達 昇 ), 구성( 龜 城 )의 오시행 ( 吳 始 行 ), 순안( 順 安 )의 윤현( 尹 ), 증산( 甑 山 )의 정동렬( 鄭 東 烈 ), 영원( 寧 遠 )의 임원첨( 林 元 瞻 ), 함종( 咸 從 )의 박치덕( 朴 治 德 ), 숙천( 肅 川 )의 임덕준( 任 德 俊 ), 전라도 금산( 錦 山 )의 강윤흥( 姜 允 興 )ㆍ김상규( 金 相 奎 ), 무주( 茂 朱 )의 이중화( 李 仲 化 ), 고부( 古 阜 )의 인덕순( 印 德 順 )ㆍ신응모 ( 申 應 模 ), 부안( 扶 安 )의 부윤집( 夫 允 執 ), 보성( 寶 城 )의 김조돌( 金 朝 乭 ), 고산( 高 山 )의 박문숙 ( 朴 文 叔 ), 옥과( 玉 果 )의 오기준( 吳 錡 俊 ), 낙안( 樂 安 )의 박종렬( 朴 從 烈 ), 영광( 靈 光 )의 나동순 ( 羅 東 淳 ), 김제( 金 堤 )의 문문성( 文 門 成 ), 함평( 咸 平 )의 오재항( 吳 載 恒 ), 진산( 珍 山 )의 김필성 ( 金 必 成 ), 무주( 茂 朱 )의 배삼득( 裵 三 得 ), 태인( 泰 仁 )의 곽용이( 郭 用 伊 ), 낙안( 樂 安 )의 신순룡 ( 申 順 龍 ), 순창( 淳 昌 )의 신봉해( 辛 鳳 海 ), 태인( 泰 仁 )의 현수석( 玄 秀 錫 ), 고산( 高 山 )의 이현장 ( 李 顯 章 ), 용담( 龍 潭 )의 정행관( 鄭 行 寬 ), 진안( 鎭 安 )의 정행철( 鄭 行 澈 ), 영암( 靈 巖 )의 박금석 ( 朴 今 石 ), 나주( 羅 州 )의 변경삼( 卞 敬 三 ), 장성( 長 城 )의 유주태( 柳 周 泰 ), 고산( 高 山 )의 허정운 ( 許 正 云 )ㆍ최석우( 崔 錫 右 ), 함열( 咸 悅 )의 김상국( 金 尙 國 ), 부안( 扶 安 )의 양지인( 梁 祗 仁 ), 담양 ( 潭 陽 )의 임경은( 任 慶 殷 ), 광양( 光 陽 )의 강대식( 姜 大 植 ), 장수( 長 水 )의 이두성( 李 斗 星 ), 무주 ( 茂 朱 )의 김춘부( 金 春 富 ), 함평( 咸 平 )의 이응대( 李 應 大 ), 흥덕( 興 德 )의 윤행원( 尹 行 元 ), 함평 ( 咸 平 )의 오보비( 吳 甫 非 ), 진산( 珍 山 )의 조성교( 趙 成 敎 ), 정읍( 井 邑 )의 박도성( 朴 道 成 ), 고산 ( 高 山 )의 박상( 朴 橡 ), 동복( 同 福 )의 권익선( 權 益 善 ), 영암( 靈 巖 )의 장량현( 張 良 玄 ), 해남( 海 南 ) 의 이원시( 李 源 始 ), 동복( 同 福 )의 김억용( 金 億 用 ), 태인( 泰 仁 )의 정성관( 鄭 聖 官 ), 보성( 寶 城 )의 홍석린( 洪 錫 麟 ), 고산( 高 山 )의 김천이( 金 千 伊 ), 남원( 南 原 )의 중 유순( 有 順 ), 정읍( 井 邑 )의 조 병철( 曺 炳 喆 ), 진안( 鎭 安 )의 한익우( 韓 益 愚 ), 임실( 任 實 )의 홍세후( 洪 世 厚 )ㆍ하석명( 夏 錫 命 ), 여산( 礪 山 )의 오치진( 吳 致 鎭 ), 금구( 金 溝 )의 윤병은( 尹 秉 殷 ), 무주( 茂 朱 )의 이정우( 李 正 宇 )ㆍ 유흥동( 柳 興 東 ), 순창( 淳 昌 )의 김귀복( 金 貴 福 ), 창평( 昌 平 )의 이우일( 李 愚 日 ), 장수( 長 水 )의 김 군대( 金 君 大 ), 임실( 任 實 )의 김학성( 金 學 成 ), 금산( 錦 山 )의 이신( 李 ), 화순( 和 順 )의 최화진( 崔 和 鎭 ), 흥덕( 興 德 )의 조인진( 趙 寅 振 ), 능주( 綾 州 )의 중 응철( 應 喆 )과 배소( 配 所 )에 도착하지 않은 자의 명단 가운데 남평( 南 平 )의 나시익( 羅 時 翼 ), 동복( 同 福 )의 임우춘( 林 遇 春 ), 경상도 금산( 金 山 )의 박영대( 朴 永 大 ), 문경( 聞 慶 )의 김만기( 金 萬 基 ), 진해( 鎭 海 )의 김원일( 金 元 一 ), 언 양( 彥 陽 )의 남상진( 南 尙 鎭 ), 봉화( 奉 化 )의 오영서( 吳 永 西 ), 산청( 山 淸 )의 정문오( 鄭 文 五 ), 봉화 ( 奉 化 )의 김원석( 金 元 石 ), 청송( 靑 松 )의 하도여( 河 道 汝 ), 신령( 新 寧 )의 김명보( 金 明 甫 ), 양산 ( 梁 山 )의 이영록( 李 永 祿 ), 진해( 鎭 海 )의 권윤석( 權 允 錫 ), 하동( 河 東 )의 양상창( 梁 相 昌 ), 함창 ( 咸 昌 )의 오영순( 吳 永 順 ), 성주( 星 州 )의 장진기( 張 振 基 ), 청도( 淸 道 )의 박형권( 朴 亨 權 ), 지례 ( 知 禮 )의 정사복( 鄭 四 福 ), 금산( 金 山 )의 강천노미( 姜 千 老 味 ), 단성( 丹 城 )의 양이완( 梁 已 完 ), 양 산( 梁 山 )의 김기호( 金 起 浩 ), 순흥( 順 興 )의 김원철( 金 元 哲 ), 김해( 金 海 )의 신완묵( 申 完 默 ), 신령 ( 新 寧 )의 손태순( 孫 泰 淳 ), 경산( 慶 山 )의 이복이( 李 福 伊 ), 인동( 仁 同 )의 김관상( 金 觀 尙 ), 개령 ( 開 寧 )의 김인영( 金 仁 永 ), 비안( 比 安 )의 오창근( 吳 昌 根 ), 예천( 醴 泉 )의 윤종말( 尹 種 ), 상주( 尙 州 )의 정한영( 鄭 汗 永 ), 선산( 善 山 )의 연광우( 延 光 羽 ), 함창( 咸 昌 )의 이돌교( 李 乭 釗 ), 함양( 咸 陽 )의 이한보( 李 漢 甫 ), 성주( 星 州 )의 김종이( 金 從 伊 ), 청송( 靑 松 )의 한창교( 韓 昌 敎 ), 사천( 泗 川 )의 김석현( 金 錫 玹 ), 곤양( 昆 陽 )의 박공칠( 朴 公 七 ), 연일( 延 日 )의 김사원( 金 士 元 ), 언양( 彥

150 150 - 陽 )의 윤중문( 尹 仲 文 ), 풍기( 豐 基 )의 임봉석( 林 奉 石 ), 청도( 淸 道 )의 최희재( 崔 希 才 ), 용궁( 龍 宮 )의 정원열( 鄭 源 悅 ), 함양( 咸 陽 )의 최학록( 崔 學 祿 ), 영덕( 盈 德 )의 김업이( 金 業 伊 ), 창원( 昌 原 )의 윤찬직( 尹 贊 直 ), 진주( 晉 州 )의 정여배( 丁 汝 培 ), 청송( 靑 松 )의 박정록( 朴 貞 祿 ), 삼가( 三 嘉 )의 홍재언( 洪 在 彥 ), 선산( 善 山 )의 김유홍( 金 有 弘 ), 의성( 義 城 )의 조갑경( 曺 甲 京 ), 영천( 榮 川 )의 나원국( 羅 元 國 ), 단성( 丹 城 )의 유학원( 柳 學 遠 ), 하동( 河 東 )의 조귀련( 曺 貴 連 ), 함양( 咸 陽 )의 신영암( 申 永 巖 ), 신령( 新 寧 )의 김사흠( 金 思 欽 ), 선산( 善 山 )의 정길흠( 鄭 吉 欽 ), 흥해( 興 海 )의 김재영( 金 在 英 ), 진해( 鎭 海 )의 김교준( 金 敎 準 ), 의흥( 義 興 )의 백학수( 白 學 水 ), 양산( 梁 山 )의 모인권( 牟 寅 權 ), 영양( 英 陽 )의 안계룡( 安 啓 龍 ), 남해( 南 海 )의 문덕로( 文 德 老 ), 청송( 靑 松 )의 김기종( 金 起 鍾 ), 의령( 宜 寧 )의 이홍여( 李 弘 汝 ), 진보( 眞 寶 )의 이원겸( 李 元 兼 ), 청송( 靑 松 )의 이인화( 李 仁 華 ), 웅천( 熊 川 )의 권순보( 權 順 甫 ), 양산( 梁 山 )의 최재원( 崔 在 元 ), 흥해( 興 海 )의 김병수( 金 秉 洙 ), 남해( 南 海 )의 송상구( 宋 象 球 ), 성주( 星 州 )의 이가열( 李 可 烈 ), 산청( 山 淸 )의 한영규( 韓 永 圭 ), 비안( 比 安 )의 장남석( 張 南 石 ), 언양( 彥 陽 )의 봉소득( 奉 小 得 ), 단성( 丹 城 )의 이선중( 李 先 仲 ), 김해( 金 海 )의 정치국( 鄭 致 國 ), 풍기( 豐 基 )의 신석률( 辛 石 律 ), 현풍( 玄 風 )의 박인보( 朴 仁 輔 ), 진주( 晉 州 )의 이종석( 李 宗 石 ), 군위( 軍 威 )의 홍용기( 洪 用 己 ), 진보( 眞 寶 )의 김광석( 金 光 石 ), 지례( 知 禮 )의 양치홍( 梁 致 弘 ), 현풍( 玄 風 )의 안성량( 安 聖 良 ), 창원( 昌 原 )의 이총이( 李 摠 伊 ), 김해( 金 海 )의 남순오( 南 順 五 ), 경주( 慶 州 )의 심욱조( 沈 旭 朝 ), 양산( 梁 山 )의 오중현( 吳 仲 玄 ), 문경( 聞 慶 )의 권복경( 權 福 京 ), 함경도 안변( 安 邊 )의 윤상채( 尹 尙 采 ), 정 평( 定 平 )의 김문섭( 金 文 涉 )ㆍ마기돈( 馬 箕 敦 ), 문천( 文 川 )의 노명길( 盧 明 吉 ), 고원( 高 原 )의 지 시중( 池 時 中 ), 길주( 吉 州 )의 김순인( 金 順 仁 ), 홍원( 洪 原 )의 전완근( 田 完 根 )ㆍ최영조( 崔 永 祚 ), 길주( 吉 州 )의 김순룡( 金 順 龍 )ㆍ정천만( 鄭 千 萬 ), 안변( 安 邊 )의 박정일( 朴 正 逸 ), 문천( 文 川 )의 김영택( 金 泳 宅 )ㆍ김태인( 金 太 仁 ), 장진( 長 津 )의 김원철( 金 元 哲 ), 명천( 明 川 )의 양기수( 梁 基 守 ), 정평( 定 平 )의 정시원( 鄭 始 元 ), 장진( 長 津 )의 이철장( 李 喆 長 ), 고원( 高 原 )의 최병한( 崔 炳 翰 ), 정 평( 定 平 )의 윤봉규( 尹 鳳 圭 ), 부령( 富 寧 )의 장억준( 張 億 俊 ), 고원( 高 原 )의 강용이( 姜 用 伊 ), 길주 ( 吉 州 )의 중 보안( 輔 安 ), 문천( 文 川 )의 양승완( 梁 承 完 ), 고원( 高 原 )의 장저성( 張 氏 星 ), 홍원( 洪 原 )의 박필동( 朴 弼 東 ), 부령( 富 寧 )의 봉치학( 奉 致 學 ), 단천( 端 川 )의 백석렬( 白 錫 烈 ), 안변( 安 邊 )의 이동건( 李 東 巾 ), 정평( 定 平 )의 이병행( 李 秉 行 ), 홍원( 洪 原 )의 이유방( 李 有 方 ), 문천( 文 川 )의 박재진( 朴 在 鎭 ), 명천( 明 川 )의 사노( 私 奴 ) 일성( 日 成 ), 부령( 富 寧 )의 사노 석흥( 石 興 ), 영흥( 永 興 )의 예학주( 芮 學 周 ), 길주( 吉 州 )의 이계백( 李 季 伯 ), 고원( 高 原 )의 궁치수( 弓 致 守 ), 덕 원( 德 源 )의 김지화( 金 趾 華 ), 문천( 文 川 )의 고시석( 高 時 石 ), 길주( 吉 州 )의 김삼봉( 金 三 奉 ), 안변 ( 安 邊 )의 강경희( 康 京 希 ), 명천( 明 川 )의 조완실( 趙 完 實 ), 문천( 文 川 )의 국창신( 鞠 昌 信 )과 배소 에 도착하지 않은 자의 명단 가운데 안변( 安 邊 )의 최여수( 崔 汝 秀 )ㆍ신석구( 申 錫 九 ) 등의 이 름에 방(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이들 모두를 즉시 석방하라고 각 해당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4년 5월 15일(기사) / 백령 첨사 이규흥을 의처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목 의금부 계목( 義 禁 府 啓 目 )에,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규흥( 李 奎 興 )이 원정( 原 情 )에 운운하였습니다. 문목( 問 目 ) 내의 죄상

151 151 - 에 대해 범범하게 지만( 遲 晩 )이라 하였으니 형추( 刑 推 )하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이 선전관을 지낸 사람은 형추하기를 청하지 말도록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판부하였다 / 고종 14년 8월 1일(계미) / 백령진의 정배 죄인 민영기 등을 풀어줄 것을 당해 감사에게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형조가 아뢰기를, 황해도의 유지 도류안( 油 紙 徒 流 案 ) 가운데 백령진( 白 翎 鎭 )의 정배 죄인 민영기( 閔 泳 驥 ), 강 원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 강릉부( 江 陵 府 )의 정배 죄인 유천용( 劉 天 埇 )에 대하여 방( 放 ) 자를 써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 내리신 대로 즉시 풀어줄 것을 각각 해당 감사에게 분부하 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5년 2월 26일(병오) / 어미의 나이가 70에 이른 백령 첨사 이상우를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목 병조 계목에, 원 문건은 첨부하였습니다. 첨부한 황해 수사 구완식( 具 完 植 )의 장계를 보니,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상우( 李 祥 宇 )는 어미의 나이가 70세로 형제가 없는 독자이니 법적으로 보아 직임 을 체직해 주어야 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즉시 개차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변방의 장 수로서 부모의 나이가 70세로 달리 형제가 없는 경우는 그 직임을 체직해 주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백령 첨사 이상우를 법에 따라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하였다 / 고종 15년 3월 23일(계유) / 민영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민영목( 閔 泳 穆 )을 동지로, 이종식( 李 種 植 )을 선전관으로, 김봉주( 金 鳳 周 )ㆍ이승해( 李 承 海 ) ㆍ장봉일( 張 奉 一 )ㆍ우신영( 禹 愼 英 )ㆍ이창순( 李 昌 淳 )을 오위장으로, 이익하( 李 翼 夏 )를 충익위 장으로, 윤우진( 尹 友 鎭 )을 충장위장으로, 오종구( 吳 鍾 九 )를 경복궁 위장으로, 엄주한( 嚴 柱 漢 )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권병룡( 權 秉 龍 )을 부장으로, 이동섭( 李 東 燮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윤양선( 尹 養 善 )을 선전관으로, 김기홍( 金 箕 弘 )을 경기 수군절도사로, 임백현( 林 百 鉉 )을 광주 중군으로, 김선호( 金 善 浩 )를 전라 좌수사로, 박영찬( 朴 永 瓚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백낙 원( 白 樂 源 )을 청산도 첨사( 靑 山 島 僉 使 )로, 신명연( 申 命 衍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김치영 ( 金 致 榮 )을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 유석관( 兪 碩 寬 )을 벌등 첨사( 伐 登 僉 使 )로, 우건영( 禹 健 英 )을 임진 별장( 臨 津 別 將 )으로 삼았다. 제주 감목관( 濟 州 監 牧 官 )에 김광추( 金 光 秋 )를 단부

152 152 - 하였고, 짓동 권관( 嗭 洞 權 管 )에 장형극( 張 亨 極 )을 단부하였고, 동지에 백영환( 白 永 煥 )을 단부 하였다 / 고종 16년 6월 13일(을묘)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박영찬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금위영의 계 금위영이 아뢰기를, 본영의 천총 박영찬( 朴 永 瓚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이고, 기사장 이병일( 李 秉 一 )은 전 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서 모두 임소( 任 所 )에 있어 올라올 기약이 없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6년 6월 25일(정묘) / 조희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조희복( 趙 羲 復 )을 지훈련원사로, 정운성( 鄭 雲 星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규대( 李 奎 大 )를 선 전관으로, 김명구( 金 命 求 )를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김상진( 金 商 鎭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 로, 홍기화( 洪 基 化 )ㆍ김종은( 金 鍾 殷 )을 첨지로, 이병오( 李 秉 五 )를 훈련원 판관으로, 조기하( 趙 基 夏 )를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장계환( 張 啓 煥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송희승( 宋 熙 昇 ) 을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으로, 구연상( 具 然 相 )을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으로, 조국현( 趙 國 顯 )을 경기 중군으로, 오중선( 吳 仲 善 )을 함흥 중군( 咸 興 中 軍 )으로, 박윤경( 朴 潤 景 )을 오위장으로, 백낙륜( 白 樂 倫 )을 선전관으로, 심의철( 沈 宜 哲 )을 도총부 경력으로 삼았다. 김기명( 金 沂 明 )을 다대 첨사( 多 大 僉 使 )로, 김상종( 金 尙 鍾 )을 강원 중군으로, 조병호( 趙 秉 鎬 )를 조사오위장으로, 백남석( 白 南 奭 )을 훈련원 정으로, 김정영( 金 正 永 )를 훈련원 판관으로, 박유진( 朴 有 鎭 )을 충청 도 병마우후로, 허유( 許 洧 )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백낙륜( 白 樂 倫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 병우( 李 秉 禹 )를 훈련원 주부로, 강재오( 姜 在 五 )를 충청 중군으로, 홍학주( 洪 鶴 周 )를 남병영 우후로, 조상진( 趙 相 鎭 )을 북병영 우후로, 김정영( 金 正 永 )을 훈련원 첨정으로, 구연춘( 具 然 春 )을 수문장으로 삼았다. 유운로( 柳 雲 魯 )를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김응섭( 金 應 燮 )을 고군 산 첨사( 古 群 山 僉 使 )로, 이재선( 李 在 善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로, 정익용( 鄭 益 鎔 )을 선전관 으로, 윤정선( 尹 正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옥균( 金 玉 均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안정구( 安 珽 求 )를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삼았다. 이희정( 李 熙 正 )을 광량 첨사( 廣 梁 僉 使 )로, 심인택( 沈 寅 澤 )ㆍ홍주섭( 洪 疇 燮 )을 훈련원 부정으로, 남궁복( 南 宮 濮 ))을 훈련원 주부로, 이흥문( 李 興 文 )을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로, 심정희( 沈 貞 熙 )를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최기준( 崔 基 俊 )을 덕 포 첨사( 德 浦 僉 使 )로, 이약곤( 李 若 坤 )을 노강 첨사( 老 江 僉 使 )로, 차영근( 車 永 根 )을 지세포 만 호( 知 世 浦 萬 戶 )로, 한정봉( 韓 正 鳳 )을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이하영( 李 夏 永 )을 포이 만호( 包 伊 萬 戶 )로, 조윤선( 曺 允 善 )을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으로, 엄충식( 嚴 忠 植 )을 자모 별장( 慈 母 別 將 )으로, 왕덕원( 王 德 元 )을 오위장으로, 김낙휘( 金 洛 輝 )를 갈파지 첨사로, 박국준( 朴 國 俊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강낙기( 康 洛 箕 )를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김재항( 金 在 恒 )을 산양회 만호( 山 羊 會 萬 戶 )로 삼았다. 김영풍( 金 永 豐 )을 훈련도감 파총으로, 윤영( 尹 暎 )을 훈련원 첨정

153 153 - 으로, 조종철( 趙 鍾 哲 )을 금위 파총( 禁 衞 把 摠 )으로, 김형중( 金 衡 重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박신항( 朴 信 恒 )을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로, 이유신( 李 裕 臣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병희( 李 秉 熙 )를 도총부 도사로, 임기상( 林 琦 相 )을 훈련원 주부로, 김홍두( 金 洪 斗 )를 수문장으로, 서상 은( 徐 相 誾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편재덕( 片 在 德 )을 오위장으로, 정지식( 鄭 志 植 )을 도총 부 경력으로 삼았다. 김계풍( 金 啓 澧 )을 미전 첨사( 美 錢 僉 使 )로, 강관석( 康 觀 錫 )을 아산 만호 ( 阿 山 萬 戶 )로, 도승록( 都 承 祿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권인하( 權 寅 夏 )를 훈련원 첨정으 로, 유치양( 柳 致 養 )을 훈련원 판관으로, 권종헌( 權 宗 軒 )을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로, 한득부( 韓 得 富 )를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김문욱( 金 文 旭 )을 오로량 만호( 吾 老 梁 萬 戶 )로 삼았다. 김영 풍( 金 永 豐 )을 훈련원 첨정으로, 윤병덕( 尹 秉 悳 )ㆍ이희영( 李 熙 榮 )을 훈련원 판관으로, 백낙균 ( 白 樂 均 )을 훈련원 주부로, 최형환( 崔 亨 煥 )을 산양회 만호( 山 羊 會 萬 戶 )로, 이상현( 李 尙 鉉 )을 선전관으로, 윤영기( 尹 泳 璣 )ㆍ유과환( 兪 果 煥 )ㆍ김용원( 金 鏞 元 )을 훈련원 주부로, 심의철( 沈 宜 哲 )을 훈련도감 파총으로, 이교영( 李 敎 英 )과 심병섭( 沈 秉 燮 )을 도총부 경력으로 삼았다. 이호 정( 李 鎬 定 )ㆍ윤길헌( 尹 吉 憲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서학관( 徐 學 觀 )을 부장( 部 將 )으로, 심원택 ( 沈 遠 澤 )을 선전관으로, 윤양주( 尹 養 柱 )를 도총 도사로, 장봉진( 張 鳳 鎭 )을 훈련원 판관으로, 최영오( 崔 永 五 )를 수문장으로, 김귀락( 金 龜 洛 )을 훈련원 주부로, 신정원( 申 正 遠 )ㆍ최운환( 崔 雲 煥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김주현( 金 疇 鉉 )을 좌부솔( 左 副 率 )로, 구광서( 具 光 書 )ㆍ이유하( 李 有 夏 )ㆍ조희중( 趙 羲 中 )ㆍ유인형( 柳 寅 衡 )을 선전관으로, 한두원( 韓 斗 源 )ㆍ김세희( 金 世 熙 )를 부 장으로, 백낙규( 白 樂 奎 )ㆍ이종구( 李 鍾 九 )ㆍ김성련( 金 成 鍊 )ㆍ조정일( 趙 鼎 一 )ㆍ박윤성( 朴 潤 晟 ) ㆍ유석훈( 劉 錫 薰 )을 수문장으로, 윤시봉( 尹 始 鳳 )을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화녕전 수문장( 華 寧 殿 守 門 將 )에 이규상( 李 圭 象 )을 단부하고, 평남 권관( 平 南 權 管 )에 김순제 ( 金 舜 濟 )를 단부하고, 인차외 권관( 仁 遮 外 權 管 )에 김인상( 金 麟 相 )을 단부하였다. 구 갈파지 권관에 윤용섭( 尹 鏞 燮 )을 단부하고, 건원 권관( 乾 原 權 管 )에 백일회( 白 日 繪 )를 단부하고, 삼천 포 권관( 三 千 浦 權 管 )에 김시진( 金 時 鎭 )을 단부하고, 묘동 권관( 廟 洞 權 管 )에 채현국( 蔡 顯 國 )을 단부하고, 운두리 권관( 雲 頭 里 權 管 )에 오영환( 吳 永 煥 )을 단부하고, 율포 권관( 栗 浦 權 管 )에 김 광학( 金 光 學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우범선( 禹 範 善 )ㆍ손봉현( 孫 鳳 鉉 )ㆍ유상익( 劉 相 益 )ㆍ정태규( 鄭 兌 奎 )ㆍ박규진( 朴 奎 鎭 )ㆍ천세현( 千 世 賢 ), 이상을 정식에 따라 감하( 減 下 )하였다. 유상익( 劉 相 益 )ㆍ조성길( 趙 性 吉 ) 을 훈련원 판관으로, 노한갑( 盧 漢 甲 )ㆍ서윤경( 徐 潤 慶 )ㆍ윤정순( 尹 廷 淳 )ㆍ이길원( 李 吉 源 )을 훈 련원 주부로 삼았다. 동지에 안윤식( 安 潤 植 )을 단부하고, 첨지 세 자리에 이동삼( 李 東 參 )ㆍ 이민식( 李 敏 植 )ㆍ상귀( 尙 )를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에 김재호( 金 在 鎬 )를 단부하였다. 삼척 영 장( 三 陟 營 將 ) 장계환( 張 啓 煥 ),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 송희승( 宋 熙 昇 ),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 구 연상( 具 然 相 ), 경기 중군 조국현( 趙 國 顯 ), 함흥 중군( 咸 興 中 軍 ) 오중선( 吳 仲 善 )에게 지금 절 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 두 자리에 박종선 ( 朴 宗 瑄 )ㆍ진명량( 秦 明 良 )을 단부하였고, 첨지 세 자리에 이재영( 李 載 英 )ㆍ박윤경( 朴 潤 景 )ㆍ 조병호( 趙 秉 鎬 )를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구춘서( 具 春 書 )ㆍ신송균( 申 送 均 )ㆍ이봉우( 李 鳳 宇 )ㆍ 신창희( 申 昌 熙 )ㆍ서익보( 徐 翊 輔 )ㆍ이근종( 李 根 琮 )ㆍ이종겸( 李 鍾 謙 )ㆍ방수현( 方 秀 賢 )ㆍ정환규 ( 鄭 煥 珪 )ㆍ최병선( 崔 炳 善 )ㆍ성낙호( 成 樂 頀 )ㆍ이양렬( 李 亮 烈 )ㆍ장현식( 張 玄 植 )ㆍ최두환( 崔 斗 煥 ) ㆍ김영규( 金 永 珪 )ㆍ이만식( 李 晩 植 )ㆍ허정( 許 )ㆍ이재호( 李 載 浩 )ㆍ윤구성( 尹 九 成 )ㆍ이봉재( 李 鳳 在 )ㆍ김종상( 金 宗 象 )ㆍ이신재( 李 信 在 )ㆍ이재하( 李 載 夏 )를 단부하였다.

154 / 고종 17년 1월 2일(경오) / 강릉에 찬배된 죄인 구용운 등을 풀어주도록 당해 도신에게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또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 강원도 강릉의 구용운( 丘 龍 云 ), 울진( 蔚 珍 )의 유호영( 劉 浩 永 ), 강릉의 김완길( 金 完 吉 ), 김화( 金 化 )의 조복록( 趙 福 祿 ), 울진의 김춘성( 金 春 成 ), 김화 김제택 ( 金 濟 澤 ), 인제( 麟 蹄 )의 김무현( 金 武 鉉 ), 통천( 通 川 )의 승 혜보( 惠 甫 ), 안협( 安 峽 )의 장준대( 張 俊 大 ), 이천( 伊 川 )의 최기린( 崔 淇 麟 ), 간성( 杆 城 )의 김덕흥( 金 德 興 ), 춘천( 春 川 )의 유경순( 兪 景 順 ), 회양( 淮 陽 )의 최흥업( 崔 興 業 ), 평해( 平 海 )의 문원명( 文 元 明 ), 오명철( 吳 命 哲 ), 간성의 김 창윤( 金 昌 允 ), 평강( 平 康 )의 강형철( 姜 亨 哲 ), 울진의 김인순( 金 仁 淳 ), 간성의 나영석( 羅 永 錫 ), 평창( 平 昌 )의 황종구( 黃 鍾 九 ), 강릉의 이순석( 李 順 石 ), 양양( 襄 陽 )의 이희덕( 李 喜 德 ), 낭천( 狼 川 )의 사노( 私 奴 ) 명선( 命 先 ), 김화의 이흥석( 李 興 錫 ), 통천의 권달헌( 權 達 憲 ), 울진의 최가춘 ( 崔 可 春 ), 춘천의 권순영( 權 巡 永 ), 평강의 이경진( 李 景 鎭 ), 안협의 이학선( 李 學 先 ), 회양의 이 춘경( 李 春 景 ), 안협의 박정규( 朴 挺 逵 ), 평창의 안세용( 安 世 瑢 ), 울진의 한영수( 韓 永 秀 ), 금성 의 구상의( 具 尙 義 ), 이천의 최형록( 崔 亨 祿 ), 정선( 旌 善 )의 정학주( 丁 鶴 柱 ), 이천의 이병원( 李 秉 瑗 ), 양구( 楊 口 )의 이진배( 李 晉 培 ), 양양의 박사의( 朴 思 義 ), 삼척의 정귀섭( 丁 龜 燮 ), 평창의 이경화( 李 京 化 ), 간성의 김용한( 金 龍 漢 ), 평해의 박종하( 朴 宗 河 ), 인제의 한광석( 韓 光 石 )ㆍ김 낙준( 金 洛 俊 ), 흡곡( 歙 谷 )의 전학중( 田 學 中 ), 안협의 이동기( 李 東 基 ), 홍천( 洪 川 )의 이응계( 李 應 桂 ), 정선의 박상선( 朴 相 善 ), 안협의 정인휘( 鄭 寅 暉 ), 고성( 高 城 )의 신성옥( 申 成 玉 ), 평창의 정위( 鄭 渭 )ㆍ마석만( 馬 錫 晩 ), 홍천의 박성화( 朴 聖 化 ), 평창의 진치삼( 陳 致 三 ), 울진의 김종우 ( 金 鍾 佑 ), 삼척의 이광석( 李 光 石 ), 평창의 김치도( 金 致 道 ), 김화의 김정한( 金 丁 漢 ), 춘천의 김 도야지( 金 刀 也 之 ), 평강의 임정수( 林 貞 守 ), 춘천의 이상덕( 李 象 德 ), 울진의 정남준( 鄭 南 俊 ), 양양의 조창진( 趙 昌 珍 ), 고성( 高 城 )의 임장회( 林 長 會 ), 삼척의 박창인( 朴 昌 仁 ), 고성의 조두하 ( 趙 斗 夏 ), 철원( 鐵 原 )의 문원섭( 文 元 燮 ), 이천의 유석우( 柳 錫 禹 ), 철원의 백석중( 白 石 仲 ), 평강 의 채인범( 蔡 仁 凡 ), 평해의 양장원( 梁 長 元 ), 양구의 김언근( 金 彥 根 )ㆍ이일용( 李 一 用 ), 안협의 백석관( 白 石 觀 ), 삼척의 김광언( 金 光 彥 )과 본조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 은 명단 가운데 양구의 김삼룡( 金 三 龍 ), 평해의 손수명( 孫 壽 明 ), 춘천의 김경수( 金 璟 洙 ), 충 청도 보은( 報 恩 )의 정원숙( 鄭 元 淑 ), 덕산( 德 山 )의 박 조이( 朴 召 史 ), 제천( 堤 川 )의 김쇠돌( 金 釗 乭 ), 남포( 藍 浦 )의 최영업( 崔 榮 業 )ㆍ오영환( 吳 永 煥 ), 비인( 庇 仁 )의 길삼쇠( 吉 三 釗 )ㆍ이재봉( 李 在 鳳 ), 천안의 김흥구( 金 興 求 ), 영동의 박원배( 朴 元 培 ), 비인의 박동희( 朴 東 喜 ), 문의( 文 義 )의 김영록( 金 永 祿 ), 예산( 禮 山 )의 국복이( 鞠 福 伊 ), 은진( 恩 津 )의 강세택( 姜 世 宅 ), 대흥( 大 興 )의 박 복록( 朴 福 祿 )ㆍ권유신( 權 有 信 ), 진잠( 鎭 岑 )의 이성방( 李 聖 方 ), 홍산( 鴻 山 )의 박동식( 朴 東 植 ), 연풍( 延 豐 )의 최창일( 崔 昌 一 ), 전의( 全 義 )의 천완철( 千 完 哲 ), 청양( 靑 陽 )의 신재도( 愼 在 道 ), 옥 천( 沃 川 )의 관노( 官 奴 ) 소외( 所 外 ), 덕산( 德 山 )의 김동호( 金 東 瑚 ), 청풍( 淸 風 )의 손정간( 孫 廷 侃 ), 대흥의 윤원선( 尹 元 善 ), 직산( 稷 山 )의 김기운( 金 基 云 ), 청산( 靑 山 )의 송지기( 宋 之 錡 ), 진 천의 맹이관( 孟 伊 寬 ), 천안의 유흥렬( 劉 興 烈 ), 정산( 定 山 )의 김명서( 金 明 西 ), 청안( 淸 安 )의 김 정운( 金 正 云 ), 보은의 허응대( 許 應 大 ), 회덕의 이은채( 李 殷 采 ), 한산( 韓 山 )의 정대룡( 丁 大 龍 ), 연기( 燕 岐 )의 김학규( 金 學 圭 ), 목천( 木 川 )의 여명록( 余 明 祿 ), 보은의 최철남( 崔 喆 南 ), 단양의 김창선( 金 昌 善 ), 제천의 조희주( 趙 熙 周 ), 진천의 송송대( 宋 松 大 ), 음성( 陰 城 )의 박승운( 朴 升 雲 ), 임천( 林 川 )의 서병곤( 徐 炳 坤 ), 연산( 連 山 )의 기익상( 奇 益 相 ), 제천의 김치간( 金 致 幹 ), 회 인( 懷 仁 )의 배봉식( 裵 奉 植 ), 노성( 魯 城 )의 김길성( 金 吉 成 ), 홍산( 鴻 山 )의 백운학( 白 云 學 ), 결성

155 155 - 의 홍승후( 洪 昇 厚 ), 예산의 정광여( 鄭 光 汝 ), 연산의 박무업( 朴 武 業 ), 홍천의 권승환( 權 承 煥 ), 회인의 강기로( 姜 耆 魯 ), 연풍( 延 豐 )의 강문석( 姜 文 錫 ), 목천의 우완진( 禹 完 鎭 ), 연산의 신상희 ( 申 尙 喜 ), 대흥의 유치원( 兪 致 遠 ), 연산의 이창근( 李 昌 根 ), 해미( 海 美 )의 민종철( 閔 宗 哲 ), 회덕 의 서문쇠( 徐 文 釗 ), 목천의 정기석( 鄭 己 石 ), 은진의 오수복( 吳 守 卜 ) 및 본조에서 유배하였으 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문의( 文 義 )의 김덕삼( 金 德 三 ), 황해도 연안( 延 安 )의 박문규( 朴 文 奎 )ㆍ박문저( 朴 文 著 ), 장연( 長 連 )의 김관봉( 金 寬 鳳 ), 장연( 長 淵 )의 김재삼( 金 在 三 )ㆍ계용철 ( 桂 用 哲 ), 토산( 兎 山 )의 최천서( 崔 天 西 )ㆍ이화석( 李 和 錫 ), 장연의 최용준( 崔 龍 俊 ), 풍천( 豐 川 ) 의 한석이( 韓 石 伊 ), 장연의 이완기( 李 完 基 ), 강령( 康 翎 )의 허흡( 許 洽 ), 문화의 김해운( 金 海 運 ), 곡산( 谷 山 )의 유화석( 柳 化 石 ), 안락( 安 樂 )의 이사열( 李 士 烈 ), 곡산의 홍몽환( 洪 夢 環 ), 백령( 白 翎 )의 이상쾌( 李 尙 快 ), 초도( 椒 島 )의 사노 춘근( 春 根 ), 백령의 우흥달( 禹 興 達 )ㆍ나동이( 羅 同 伊 )ㆍ사노 명손( 命 孫 )ㆍ김순석( 金 順 錫 ), 은율( 殷 栗 )의 김희출( 金 喜 出 ), 신천( 信 川 )의 김 조이 ( 金 召 史 ), 안악( 安 岳 )의 유윤주( 兪 允 柱 ), 신계( 新 溪 )의 조 조이( 趙 召 史 ), 수안( 遂 安 )의 윤종백 ( 尹 宗 伯 ), 장련의 조석주( 趙 石 周 ), 은율의 정족고망( 鄭 足 故 望 ), 안악의 임경학( 林 敬 學 ), 곡산 의 홍신문( 洪 辰 文 ), 재령( 載 寧 )의 최학주( 崔 學 柱 ), 은율의 김신평( 金 信 平 ), 배천( 白 川 )의 정지 용( 鄭 止 鏞 ), 수안의 김당달구( 金 唐 達 九 ), 은율의 이광엽( 李 光 燁 ), 재령의 윤명호( 尹 明 浩 ), 옹 진( 瓮 津 )의 김진옥( 金 振 玉 ), 송화( 松 禾 )의 우성문( 禹 聖 文 ), 신계( 新 溪 )의 이규헌( 李 奎 憲 ), 장연 의 관노 백민( 百 敏 )ㆍ장군수( 張 君 秀 ), 문화의 윤이오( 尹 利 五 ), 장련( 長 連 )의 임용운( 林 用 雲 ), 안악의 김세영( 金 世 榮 ), 토산의 오응봉( 吳 應 奉 ), 문화의 백언수( 白 彥 洙 ), 장련( 長 連 )의 손군성 ( 孫 君 成 )ㆍ안범권( 安 範 權 ), 풍천의 이동직( 李 東 埴 ), 백령의 박명록( 朴 命 彔 ) 및 본조에서 유배 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백령의 김명선( 金 明 善 ), 금천( 金 川 )의 박귀남( 朴 貴 男 ), 배천의 최득만( 崔 得 萬 ), 평안도 강서( 江 西 )의 박만재( 朴 萬 才 ), 숙천( 肅 川 )의 김상수( 金 相 守 ), 운산( 雲 山 )의 황재원( 黃 在 元 ), 양덕( 陽 德 )의 이택룡( 李 澤 龍 ), 위원( 渭 原 )의 오준영( 吳 俊 英 ), 태 천( 泰 川 )의 고인수( 高 仁 壽 ), 영원( 寧 遠 )의 서인택( 徐 仁 澤 ), 덕천( 德 川 )의 이원필( 李 元 弼 ), 영원 의 사노 금례( 今 禮 ), 벽동( 碧 潼 )의 정계채( 丁 桂 彩 ), 초산( 楚 山 )의 박만근( 朴 萬 斤 )ㆍ강귀용( 姜 貴 用 ), 벽동의 강수길( 姜 壽 吉 ), 초산의 배순동( 裵 順 同 ), 벽동의 이명석( 李 命 錫 ), 위원의 김 조 이( 金 召 史 ), 벽동의 이흥석( 李 興 錫 ), 순안( 順 安 )의 김명수( 金 命 秀 ), 초산의 양 조이( 梁 召 史 ), 가산( 嘉 山 )의 이종진( 李 宗 鎭 ), 순천( 順 川 )의 손복래( 孫 復 來 ), 태천의 김인섭( 金 麟 燮 ), 강서의 김영묵( 金 榮 默 ), 용강( 龍 岡 )의 지창구( 池 敞 九 ), 숙천의 이성환( 李 成 煥 ), 은산( 殷 山 )의 노문규 ( 魯 文 奎 ), 운산( 雲 山 )의 유치강( 劉 致 綱 ), 중화( 中 和 )의 이선명( 李 善 明 ), 영유( 永 柔 )의 양석규 ( 梁 石 圭 ), 운산의 임형로( 任 亨 魯 ), 벽동의 강해초( 姜 海 初 ), 강계의 유시화( 柳 時 華 ), 위원의 이 성원( 李 聖 元 ), 후창( 厚 昌 )의 유기풍( 劉 基 豐 ), 양덕( 陽 德 )의 정관준( 鄭 寬 俊 ), 맹산( 孟 山 )의 이관 영( 李 寬 永 ), 구성( 龜 城 )의 김태선( 金 泰 善 ), 안주( 安 州 )의 최두기( 崔 斗 機 ), 강동( 江 東 )의 김대구 ( 金 大 口 ), 양덕( 陽 德 )의 관노 일권( 日 權 ), 상원( 祥 原 )의 이보구( 李 保 九 ), 맹산의 정창윤( 鄭 昌 允 ), 안주의 이성백( 李 成 伯 ), 순천( 順 川 )의 박근영( 朴 根 英 ), 초산의 사노 순학( 順 學 ), 위원의 진흥준( 陳 興 俊 ), 맹산의 장원두( 張 元 斗 ), 삼등( 三 登 )의 장병삼( 張 炳 三 ), 개천( 价 川 )의 김진용 ( 金 振 用 ), 강동의 김 조이( 金 召 史 ), 영원( 寧 遠 )의 이명화( 李 明 化 ), 초산의 사노 석이( 石 伊 ) 및 본조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성천( 成 川 )의 조춘식( 趙 春 植 ), 위원( 渭 原 )의 김의성( 金 義 成 ), 가산( 嘉 山 )의 김수만( 金 壽 萬 ), 위원( 渭 原 )의 김호용( 金 好 用 ), 중화( 中 和 )의 박용준( 朴 容 準 ), 구성( 龜 城 )의 김태선( 金 泰 善 ), 전라도 낙안( 樂 安 )의 김산여( 金 散 如 ), 옥 과( 玉 果 )의 김정규( 金 鼎 奎 ), 여산( 礪 山 )의 연규환( 延 圭 桓 ), 강진( 康 津 )의 김만복( 金 萬 卜 ), 운봉 ( 雲 峰 )의 정수업( 鄭 壽 業 ), 동복( 同 福 )의 노비 몽채( 夢 采 ), 광양( 光 陽 )의 최만진( 崔 萬 珍 ), 익산

156 156 - ( 益 山 )의 김두성( 金 斗 成 ), 순창( 淳 昌 )의 강두황( 姜 斗 璜 ), 장성( 長 城 )의 기봉국( 奇 鳳 國 ), 광양의 구경혁( 具 景 焃 ), 진안( 鎭 安 )의 이종권( 李 宗 權 ), 무장( 茂 長 )의 천수룡( 千 壽 龍 ), 제주의 이희당 ( 李 禧 戇 )ㆍ남정호( 南 廷 皓 )ㆍ박영훈( 朴 泳 薰 ), 민영서( 閔 泳 序 ), 여도( 呂 島 )의 박시욱( 朴 時 頊 ), 금 갑도( 金 甲 島 )의 박광복( 朴 光 復 )ㆍ김진훈( 金 鎭 塤 ), 녹도( 鹿 島 )의 최을용( 崔 乙 用 ), 사도( 蛇 島 )의 이규연( 李 圭 淵 ), 지도( 智 島 )의 홍치은( 洪 致 殷 ), 강진( 康 津 )의 배경두( 裴 景 斗 )ㆍ이복백( 李 復 白 ), 신지도( 薪 智 島 )의 김응이( 金 應 已 )ㆍ김낙준( 金 洛 俊 )ㆍ전동일( 全 同 一 ), 녹도( 鹿 島 )의 양희주( 梁 希 周 ), 지도( 智 島 )의 이석보( 李 石 甫 ), 사도( 蛇 島 )의 이계수( 李 啓 洙 ), 여도( 呂 島 )의 박종석( 朴 宗 石 ), 금갑도( 金 甲 島 )의 박사진( 朴 士 眞 ), 신지도( 薪 智 島 )의 송지국( 宋 持 菊 ), 고금도( 古 今 島 )의 유극로( 兪 克 老 ), 지도의 장국원( 張 國 元 )ㆍ김응거( 金 應 擧 ), 위도( 蝟 島 )의 이명칠( 李 明 七 ), 마도 ( 馬 島 )의 권원숙( 權 元 淑 ), 임자도( 荏 子 島 )의 김병엽( 金 秉 燁 ), 녹도의 김인보( 金 仁 甫 ), 금갑도 의 손동희( 孫 東 熙 ), 임자도의 이영세( 李 永 世 ), 신지도의 박대범( 朴 大 凡 ), 임자도의 김상기( 金 商 淇 ), 순천( 順 天 )의 정길이( 鄭 吉 伊 ), 옥과( 玉 果 )의 이범룡( 李 凡 龍 ), 강진의 호돌이( 扈 乭 伊 ), 신지도의 최준학( 崔 俊 鶴 ), 진산( 珍 山 )의 맹학재( 孟 學 在 ), 장수( 長 水 )의 김우현( 金 友 鉉 ), 여산 의 한석기( 韓 錫 基 ), 만경( 萬 頃 )의 김순이( 金 順 伊 ), 진산( 珍 山 )의 경준( 慶 焌 ), 고금도의 박인수 ( 朴 仁 洙 ), 능주( 綾 州 )의 이광보( 李 光 甫 ), 동복( 同 福 )의 김선( 金 橏 ), 장성( 長 城 )의 손덕문( 孫 德 文 ), 금갑도( 金 甲 島 )의 이건중( 李 建 重 ), 무안( 務 安 )의 조형한( 趙 亨 漢 ), 옥구( 沃 溝 )의 이유설( 李 裕 卨 ), 순천( 順 天 )의 정문석( 鄭 文 石 ), 정읍( 井 邑 )의 정신교( 鄭 信 敎 ), 해남( 海 南 )의 조고두( 趙 高 斗 ), 옥과( 玉 果 )의 이성화( 李 聖 化 ), 익산( 益 山 )의 나희빈( 羅 熙 斌 ), 장흥( 長 興 )의 이정실( 李 正 實 ), 남원( 南 原 )의 이선호( 李 先 浩 ), 진산( 珍 山 )의 정학점( 鄭 學 漸 ), 나주( 羅 州 )의 강유보( 姜 有 甫 ), 운봉( 雲 峰 )의 이상기( 李 相 淇 ), 순창( 淳 昌 )의 김명길( 金 命 吉 ), 함열( 咸 悅 )의 양기욱( 梁 淇 燠 ), 해남의 김학록( 金 學 錄 ), 고부( 古 阜 )의 박성규( 朴 聖 奎 ), 장흥( 長 興 )의 권용일( 權 用 一 ), 김 제( 金 堤 )의 이채중( 李 采 仲 ), 정읍( 井 邑 )의 신낙규( 申 珞 奎 ), 진도( 珍 島 )의 이치명( 李 致 明 ), 순천 ( 順 天 )의 하지흡( 河 志 洽 ), 흥양( 興 陽 )의 맹기호( 孟 基 鎬 ), 고창( 高 敞 )의 이치서( 李 致 西 ), 운봉 ( 雲 峰 )의 박수창( 朴 秀 昌 ), 구례( 求 禮 )의 우부곤( 禹 夫 坤 ), 흥양의 정사만( 鄭 士 萬 ), 함평( 咸 平 )의 이윤석( 李 允 錫 ), 광양( 光 陽 )의 송문정( 宋 文 禎 ), 정읍의 최종달( 崔 鍾 達 ), 낙안( 樂 安 )의 오경렬 ( 吳 慶 烈 ), 임피( 臨 陂 )의 이계현( 李 啓 玄 ), 동복( 同 福 )의 정이철( 鄭 以 哲 ), 진안( 鎭 安 )의 김태현 ( 金 泰 鉉 ), 구례의 조용진( 趙 鏞 晉 ), 임실( 任 實 )의 최운철( 崔 云 哲 ), 순창( 淳 昌 )의 심상렬( 沈 相 烈 ), 고부의 김승운( 金 升 云 ), 금산( 錦 山 )의 전달매( 全 達 梅 ), 순천의 하기언( 河 基 彥 ), 여산( 礪 山 )의 한재성( 韓 在 成 ), 남평( 南 平 )의 조상룡( 趙 尙 龍 ), 태인( 泰 仁 )의 최덕흥( 崔 德 興 ), 운봉의 장 광표( 張 光 表 )ㆍ정우준( 鄭 禹 俊 ), 영암( 靈 巖 )의 문왕만( 文 王 萬 ), 곡성( 谷 城 )의 이학선( 李 鶴 善 )ㆍ 이명이( 李 明 伊 ), 장흥( 長 興 )의 나길봉( 羅 吉 奉 ), 고산( 高 山 )의 권계순( 權 啓 順 ), 장성의 백치일 ( 白 致 一 ), 진산( 珍 山 )의 김정훈( 金 貞 勳 ), 광양( 光 陽 )의 김용신( 金 用 信 ), 광주( 光 州 )의 심능률 ( 沈 能 律 ), 김제의 전육( 田 堉 ), 함평( 咸 平 )의 김양조( 金 良 祚 ), 고부( 古 阜 )의 이이손( 李 二 孫 ), 여 산( 礪 山 )의 오창남( 吳 昌 南 ), 익산( 益 山 )의 송상엽( 宋 尙 燁 ), 무장( 茂 長 )의 문정환( 文 正 煥 ), 남평 ( 南 平 )의 변정석( 卞 正 石 ), 금산( 錦 山 )의 이홍상( 李 鴻 相 ), 곡성의 엄정술( 嚴 正 述 )ㆍ김호희( 金 昊 熙 ), 광양( 光 陽 )의 이 조이( 李 召 史 ), 여산의 김상헌( 金 相 軒 ), 무장의 신상은( 辛 相 殷 ), 화순( 和 順 )의 최장길( 崔 長 吉 ), 장수( 長 水 )의 정덕원( 鄭 德 源 ), 순천의 박성관( 朴 性 寬 ), 지도의 이종수 ( 李 宗 秀 ), 신지도의 김영수( 金 英 守 )ㆍ김석현( 金 錫 賢 ), 금갑도의 조중현( 趙 仲 鉉 ) 및 본조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남평의 장영순( 張 永 珣 ), 강진( 康 津 )의 정필건( 鄭 必 健 ), 고금도의 유흥식( 柳 興 植 ), 함평의 방영춘( 方 英 春 ), 경상도 울산( 蔚 山 )의 김명보( 金 鳴 輔 ), 함양( 咸 陽 )의 임해달( 林 海 達 ), 남해( 南 海 )의 신성호( 申 性 浩 ), 산청( 山 淸 )의 이군옥( 李 君 玉 ), 함

157 157 - 양( 咸 陽 )의 음인학( 陰 仁 學 ), 선산( 善 山 )의 김사헌( 金 士 憲 ), 문경( 聞 慶 )의 최천용( 崔 千 用 ), 언양 ( 彥 陽 )의 하제윤( 河 濟 允 ), 순흥( 順 興 )의 양범기( 梁 範 箕 ), 진보( 眞 寶 )의 이동식( 李 東 植 ), 산청의 김창헌( 金 昌 憲 ), 의흥( 義 興 )의 최정관( 崔 鼎 寬 ), 김해( 金 海 )의 유의풍( 劉 宜 豐 ), 거제( 巨 濟 )의 함 선명( 咸 善 明 ), 청도( 淸 道 )의 정춘길( 鄭 春 吉 ), 자인( 慈 仁 )의 김용준( 金 龍 俊 ), 진보의 노경서( 盧 景 瑞 ), 문경의 봉복돌( 奉 福 乭 ), 진해( 鎭 海 )의 양명록( 梁 明 祿 ), 예천( 醴 泉 )의 경광국( 慶 光 國 ), 밀양( 密 陽 )의 경형국( 慶 珩 國 ), 청하( 淸 河 )의 박성호( 朴 性 浩 ), 선산의 김진욱( 金 鎭 燠 ), 의흥( 義 興 )의 인동혁( 印 東 赫 ), 함양( 咸 陽 )의 금재홍( 琴 在 弘 ), 의성( 義 城 )의 박응필( 朴 應 必 )ㆍ신경중 ( 申 敬 仲 ), 합천( 陜 川 )의 최모부( 崔 謀 夫 ), 거창( 居 昌 )의 박상래( 朴 詳 來 ), 상주( 尙 州 )의 어영선 ( 魚 永 善 ), 영해( 寧 海 )의 김치권( 金 致 權 ), 창녕( 昌 寧 )의 김양언( 金 良 彥 ), 의령( 宜 寧 )의 곽만금 ( 郭 萬 金 ), 김해의 송북술( 宋 北 述 ), 단성( 丹 城 )의 김양찬( 金 亮 瓚 ), 풍기( 豐 基 )의 김춘식( 金 春 植 ), 함창( 咸 昌 )의 임술( 林 述 ), 봉화( 奉 化 )의 신자정( 申 子 貞 ), 초계( 草 溪 )의 사일록( 史 日 祿 ), 자인( 慈 仁 )의 강운재( 姜 云 才 ), 선산의 김철수( 金 哲 秀 ), 합천의 조필남( 趙 必 男 ), 문경의 신 조 이( 申 召 史 ), 청송( 靑 松 )의 조원풍( 趙 元 豐 ), 하양( 河 陽 )의 안덕오( 安 德 五 ), 개령( 開 寧 )의 정덕유 ( 鄭 德 有 ), 곤양( 昆 陽 )의 홍성망( 洪 性 網 ), 영덕( 盈 德 )의 염통신( 廉 通 信 ), 남해의 임순근( 林 順 根 ), 함창( 咸 昌 )의 정국조( 鄭 局 朝 ), 경천( 慶 川 )의 김익조( 金 益 祚 ), 단성의 신영숙( 申 永 叔 ), 함 안( 咸 安 )의 이여배( 李 如 培 ), 하동( 河 東 )의 최만권( 崔 萬 權 ), 곤양의 김인서( 金 仁 瑞 ), 함양( 咸 陽 ) 의 강관( 姜 瓘 ), 풍기의 김연근( 金 連 根 ), 상주의 양주혁( 梁 柱 爀 ), 풍기의 권의진( 權 宜 鎭 ), 순흥 ( 順 興 )의 허계( 許 烓 ), 문경의 차하룡( 車 河 龍 ), 상주의 장완제( 張 琓 濟 ), 김해의 안주범( 安 周 凡 ), 예천( 醴 泉 )의 한석근( 韓 石 根 ), 함양의 박잉출( 朴 芿 出 ), 지례( 知 禮 )의 정대귀( 丁 大 龜 ), 진주( 晉 州 )의 오권수( 吳 權 洙 ), 남해의 김재경( 金 在 庚 ), 안동( 安 東 )의 이경조( 李 敬 祚 ), 경산( 慶 山 )의 신 응순( 辛 應 純 ), 영천( 永 川 )의 유동량( 柳 東 良 ), 거창의 성주호( 成 周 鎬 ), 화안( 化 安 )의 김돌이( 金 乭 伊 ), 봉화의 김상률( 金 尙 律 ), 예천의 김부희( 金 夫 喜 ), 상주의 김준홍( 金 俊 弘 ), 김해의 안광 석( 安 光 石 ), 영천( 榮 川 )의 서성중( 徐 成 仲 ), 선산의 소순복( 蘇 順 福 ), 문경의 홍재복( 洪 在 福 ), 금 산( 金 山 )의 임수오( 林 水 五 ), 용궁( 龍 宮 )의 김호걸( 金 好 傑 )ㆍ박용만( 朴 鏞 萬 ), 현풍( 玄 風 )의 김 광숙( 金 光 淑 ), 언양( 彥 陽 )의 전계륜( 田 季 崙 ), 금산의 노일귀( 盧 一 貴 ), 곤양의 김용길( 金 用 吉 ) 및 본조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의성의 장주석( 張 周 錫 ), 밀양의 홍도 남( 洪 道 楠 ), 남해의 김재선( 金 在 善 ), 상주의 김재연( 金 在 淵 ), 하양( 河 陽 )의 송윤옥( 宋 允 玉 ), 함 경도 경성( 鏡 城 )의 공덕원( 孔 德 遠 ), 정평( 定 平 )의 김주봉( 金 柱 鳳 ), 삼수( 三 水 )의 강 조이( 姜 召 史 )ㆍ이계천( 李 啓 天 ), 고원( 高 原 )의 김명신( 金 明 信 ), 덕원( 德 源 )의 유상익( 柳 相 益 ), 삼수의 김 흥석( 金 興 石 )ㆍ김준여( 金 俊 汝 )ㆍ장복이( 張 福 伊 )ㆍ신기동( 申 起 童 )ㆍ김명돌( 金 明 乭 )ㆍ김여석( 金 麗 錫 ), 장진( 長 津 )의 김성길( 金 成 吉 ), 영흥( 永 興 )의 이내범( 李 乃 範 ), 덕원의 모성숙( 牟 成 淑 ), 삼수의 주 조이( 朱 召 史 ), 홍원( 洪 原 )의 김달회( 金 達 會 ), 영흥의 원성은( 元 性 恩 ), 갑산( 甲 山 )의 이선동( 李 善 同 )ㆍ엄성오( 嚴 性 五 ), 문천( 文 川 )의 최진영( 崔 辰 永 ), 덕원의 김거복( 金 巨 福 ), 안변 ( 安 邊 )의 관노 주일( 周 馹 ), 고원( 高 原 )의 김사손( 金 四 孫 ), 단천( 端 川 )의 김제황( 金 濟 璜 ), 영흥 의 노소암( 盧 小 巖 ), 단천의 이석중( 李 石 仲 ), 안변의 김봉주( 金 鳳 周 )ㆍ조흥식( 趙 興 植 ), 경성의 우학이( 禹 學 伊 ), 홍원의 이인발( 李 寅 發 ), 고원의 양백흥( 楊 伯 興 ), 삼수의 박흥록( 朴 興 祿 ), 갑 산의 조 조이( 趙 召 史 ), 고원의 오화덕( 吳 化 德 ) 및 본조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 하지 않은 경성의 김춘흥( 金 春 興 )ㆍ문기홍( 文 基 弘 ), 갑산의 이미력( 李 未 力 ) 등에 대하여 방 (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 내리신 대로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당해 도신에게 각각 분부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158 / 고종 17년 9월 18일(계미) / 강원도 삼척에 정배한 죄인 장수성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김석근이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에 정배된 죄인 등을 써 들입니다. 강원도 삼척( 三 陟 )의 장수성( 張 守 成 ), 충청도 천안 ( 天 安 )의 조경식( 趙 景 湜 ), 천안의 김치운( 金 致 雲 ), 직산( 稷 山 )의 이종혁( 李 宗 爀 ), 충주( 忠 州 )의 송태식( 宋 泰 植 ), 옥천( 沃 川 )의 김석응( 金 錫 應 ), 해미( 海 美 )의 구관채( 具 寬 采 ), 황해도 수안( 遂 安 )의 홍대량( 洪 大 良 ), 평안도 덕천( 德 川 )의 최경수( 崔 京 秀 ), 순안( 順 安 )의 구백심( 具 伯 心 ), 운 산( 雲 山 )의 승( 僧 ) 응헌( 應 憲 ), 중화( 中 和 )의 남만길( 南 萬 吉 ), 양덕( 陽 德 )의 김순형( 金 純 兄 ), 전라도 순천( 順 天 )의 김기성( 金 基 星 ), 보성( 寶 城 )의 정홍이( 鄭 洪 伊 ), 순천의 신영식( 辛 泳 軾 ), 장흥( 長 興 )의 정정완( 鄭 正 完 ), 금갑도( 金 甲 島 )의 김학선( 金 學 善 ), 남평( 南 平 )의 홍순범( 洪 順 範 ), 옥과( 玉 果 )의 현상선( 玄 尙 善 ), 창평( 昌 平 )의 김석보( 金 石 甫 ), 광양( 光 陽 )의 박민호( 朴 民 浩 ), 함경도 경성( 鏡 城 )의 이인승( 李 仁 承 ), 경성의 김치환( 金 致 煥 ), 덕원( 德 原 )의 김수경( 金 秀 敬 ), 명천( 明 川 )의 김봉길( 金 奉 吉 )과, 본조에서 배소( 配 所 )로 보냈는데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강원도 철원( 鐵 原 )으로 가는 조양중( 趙 良 中 ), 평해( 平 海 )로 가는 신학민( 辛 學 敏 ), 횡성 ( 橫 城 )으로 가는 임길이( 林 吉 伊 ), 충청도 황간( 黃 澗 )으로 가는 강재길( 姜 在 吉 ), 문의( 文 義 )로 가는 장범룡( 張 範 龍 ), 예산( 禮 山 )으로 가는 하순학( 河 順 學 ), 황해도 백령( 白 翎 )으로 가는 김 화진( 金 華 鎭 ), 봉산( 鳳 山 )으로 가는 주상렬( 朱 尙 烈 ), 신계( 新 溪 )로 가는 이명구( 李 命 九 ), 백령 으로 가는 정창성( 鄭 昌 成 ), 백령으로 가는 노비 몽술( 夢 述 ), 평안도 중화( 中 和 )로 가는 정 조 이( 鄭 召 史 ), 벽동( 碧 潼 )으로 가는 노덕중( 盧 德 仲 ), 전라도 낙안( 樂 安 )으로 가는 박인식( 朴 仁 植 ), 영암( 靈 巖 )으로 가는 서응종( 徐 應 宗 ), 강진( 康 津 )으로 가는 이만흥( 李 萬 興 ), 경상도 김해 ( 金 海 )로 가는 진석복( 陳 石 福 ), 상주( 尙 州 )로 가는 이운선( 李 雲 善 ) 등은 특별히 방(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 내리신 것에 의거하여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당 도신에 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7년 12월 20일(계축) / 강원도 간선에 정배한 죄인 박준흥 등을 석방하겠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도류안( 油 紙 徒 流 案 ) 가운데 강원도( 江 原 道 ) 간성( 杆 城 )의 박춘흥( 朴 春 興 ), 평창 ( 平 昌 )의 김기홍( 金 基 鴻 ), 금성( 金 城 )의 강재희( 姜 在 熙 ), 삼척( 三 陟 )의 김만련( 金 萬 連 ), 평창의 서석봉( 徐 石 鳳 ), 춘천( 春 川 )의 정노첨( 丁 老 瞻 ), 김화( 金 化 )의 이화실( 李 化 實 ), 강릉( 江 陵 )의 박 문옥( 朴 文 玉 ), 평해( 平 海 )의 박재은( 朴 在 殷 ), 횡성( 橫 城 )의 송창운( 宋 昌 運 ), 간성의 이순봉( 李 順 奉 ), 금성의 정석조( 鄭 錫 祚 ), 금성의 정홍재( 鄭 弘 載 ), 회양( 淮 陽 )의 이봉이( 李 奉 伊 ), 울진( 蔚 珍 )의 우연수( 禹 連 守 ), 양양( 襄 陽 )의 박명수( 朴 明 水 ), 횡성의 이목인( 李 穆 仁 ), 평창의 김학연 ( 金 學 淵 ), 이천( 伊 川 )의 서영한( 徐 永 翰 ), 고성( 高 城 )의 최익환( 崔 益 煥 ), 평창의 정후동( 鄭 厚 東 ), 울진( 蔚 珍 )의 김주옥( 金 周 玉 ), 정선( 旌 善 )의 김천욱( 金 千 郁 ), 인제( 麟 蹄 )의 황학순( 黃 鶴

159 159 - 淳 ), 평해( 平 海 )의 김봉원( 金 奉 元 ), 울진의 김병률( 金 秉 律 )과 충청도( 忠 淸 道 ) 결성( 結 城 )의 염 도삼( 廉 道 三 ), 영동( 永 同 )의 이 조이( 李 召 史 ), 천안( 天 安 )의 박대규( 朴 大 奎 ), 영동의 노규홍( 盧 奎 洪 ), 직산( 稷 山 )의 황장수( 黃 長 水 ), 목천( 木 川 )의 권준이( 權 俊 伊 ), 황간( 黃 澗 )의 이복동( 李 福 同 ), 괴산( 槐 山 )의 전석진( 全 石 辰 ), 전의( 全 義 ) 안정문( 安 正 文 ), 회덕( 懷 德 )의 김학무( 金 學 武 ), 영동의 이상철( 李 尙 喆 ), 당진( 唐 津 )의 박노미( 朴 老 味 ), 단양( 丹 陽 )의 김영원( 金 永 元 ), 예산( 禮 山 )의 사비( 私 婢 ) 순덕( 順 德 ), 괴산의 정희정( 鄭 熙 正 ), 충주( 忠 州 )의 김만돌( 金 萬 乭 ), 신창( 新 昌 )의 박흥록( 朴 興 祿 ), 청주( 淸 州 )의 지경문( 池 敬 文 ), 회덕의 신삼석( 申 三 石 ), 진잠( 鎭 岑 )의 사 노( 私 奴 ) 금철( 今 哲 ), 온양( 溫 陽 )의 권만업( 權 萬 業 ), 직산의 박경수( 朴 敬 守 ), 덕산( 德 山 )의 이 지인( 李 志 仁 ), 영춘( 永 春 )의 김문중( 金 文 重 ), 영동의 이동국( 李 同 局 ), 목천의 나상직( 羅 相 稷 ), 대흥( 大 興 )의 오희권( 吳 希 權 ), 문의( 文 義 )의 홍진유( 洪 震 裕 ), 진천( 鎭 川 )의 강주갑( 姜 周 甲 ), 연 풍( 延 豐 )의 허우익( 許 又 益 ), 천안의 이의승( 李 意 承 ), 청양( 靑 陽 )의 이계원( 李 季 元 ), 옥천( 沃 川 ) 의 최덕중( 崔 德 仲 ), 괴산의 추내구( 秋 來 求 ), 청주의 한병추( 韓 丙 樞 ), 목천의 최진항( 崔 珍 恒 ), 천안의 정복룡( 鄭 卜 龍 ), 온양의 강신황( 姜 信 璜 ), 옥천의 윤병우( 尹 秉 友 ), 영동의 연두희( 延 斗 熙 ), 청양의 김이섭( 金 利 涉 ), 목천의 한정도( 韓 貞 道 ), 진잠의 김상순( 金 尙 順 ), 충주의 박경현 ( 朴 京 賢 ), 신창의 박춘원( 朴 春 元 ), 보은( 報 恩 )의 박중집( 朴 仲 執 ), 청안( 淸 安 )의 문희수( 文 希 守 ), 영동의 김방우( 金 邦 遇 ), 청양의 김 조이( 金 召 史 ), 전의의 김재순( 金 在 旬 ), 진잠의 송노상 ( 宋 老 翔 )과 황해도( 黃 海 道 ) 신계( 新 溪 )의 지영식( 池 永 植 ), 송화( 松 禾 )의 김시중( 金 時 仲 ), 토산 ( 兎 山 )의 김형신( 金 亨 申 ), 풍천( 豐 川 )의 김이신( 金 利 信 ), 수안( 遂 安 )의 박치병( 朴 致 柄 ), 토산의 백예지( 白 禮 之 ), 황주( 黃 州 )의 임덕순( 林 德 順 ), 백령( 白 翎 )의 김용길( 金 用 吉 ), 금천( 金 川 )의 김 기철( 金 基 哲 ), 서흥( 瑞 興 )의 이성근( 李 聖 根 ), 백령의 전만중( 田 萬 中 ), 백령의 강귀룡( 姜 貴 龍 ), 신천( 信 川 )의 백신용( 白 信 容 ), 재령( 載 寧 )의 김상만( 金 相 萬 ), 토산의 정공윤( 鄭 公 允 ), 백령의 사노( 私 奴 ) 남궁택( 南 宮 澤 ), 백령의 조수명( 曺 壽 命 ), 백령의 이춘식( 李 春 植 ), 수안의 홍경오 ( 洪 敬 五 ), 백령의 장용이( 張 龍 伊 ), 수안의 김무길( 金 茂 吉 ), 신계의 정칠곤( 鄭 七 坤 ), 신계의 문 집중( 文 執 仲 ), 은율( 殷 栗 )의 박관석( 朴 寬 錫 ), 은율의 왕자현( 王 子 賢 ), 재령의 유만석( 劉 萬 石 ), 곡산( 谷 山 )의 지고상( 池 高 尙 ), 송화의 원춘혁( 元 春 赫 ), 신계의 곽현기( 郭 玄 基 ), 풍천의 이기천 ( 李 奇 天 ), 수안의 이병효( 李 秉 孝 ), 송화의 이찬호( 李 瓚 浩 ), 송화의 정인구( 鄭 仁 九 ), 송화의 이 선문( 李 善 文 ), 금천( 金 川 )의 박봉길( 朴 奉 吉 ), 수안의 최세만( 崔 世 ), 은율의 정노랑( 鄭 老 郞 ), 신 천의 임응현( 林 應 顯 ), 토산의 김순대( 金 順 大 )와 평안도( 平 安 道 ) 희천( 熙 川 )의 김천석( 金 千 石 ), 안주( 安 州 )의 최익형( 崔 翊 亨 ), 중화( 中 和 )의 전길동( 全 吉 同 ), 벽동( 碧 潼 )의 승( 僧 ) 찬선( 贊 善 ), 덕천( 德 川 )의 김성보( 金 成 甫 ), 덕천의 이태진( 李 泰 鎭 ), 양덕( 陽 德 )의 권석풍( 權 錫 豐 ), 희천의 이흥철( 李 興 哲 ), 영유( 永 柔 )의 나성일( 羅 成 一 ), 양덕의 이치방( 李 致 芳 ), 운산( 雲 山 )의 엄흥윤 ( 嚴 興 允 ), 희천의 김창덕( 金 昌 德 )과 전라도( 全 羅 道 ) 동복( 同 福 )의 강희수( 姜 熙 洙 ), 화순( 和 順 ) 의 김두영( 金 斗 永 ), 무안( 務 安 )의 이일출( 李 日 出 ), 동복의 박수성( 朴 壽 成 ), 김제( 金 堤 )의 윤기 ( 尹 奇 ), 고금도( 古 今 島 )의 유진하( 兪 鎭 夏 ), 김제의 이춘길( 李 春 吉 ), 정읍( 井 邑 )의 송순철( 宋 順 哲 ), 동복의 최경식( 崔 景 植 ), 함평( 咸 平 )의 이익귀( 李 益 龜 ), 광양( 光 陽 )의 이석희( 李 石 喜 ), 광 양의 허욱( 許 㮋 ), 나주( 羅 州 )의 정종한( 鄭 宗 漢 ), 익산( 益 山 )의 백석교( 白 石 敎 ), 순천( 順 天 )의 임주철( 林 注 喆 ), 운봉( 雲 峯 )의 김병종( 金 炳 從 ), 옥구( 沃 溝 )의 정경환( 鄭 景 煥 ), 정읍의 최강보 ( 崔 江 甫 ), 함평의 이흥만( 李 興 萬 ), 곡성( 谷 城 )의 박원지( 朴 源 祗 ), 용담( 龍 潭 )의 주인현( 朱 仁 鉉 ), 동복의 이재영( 李 載 英 ), 진산( 珍 山 )의 정사읍사( 鄭 沙 邑 沙 ), 무안의 김경갑( 金 景 甲 ), 광양 의 제상만( 諸 尙 萬 ), 무장( 茂 長 )의 안효근( 安 孝 根 ), 동복의 황문룡( 黃 文 龍 ), 금구( 金 溝 )의 강문 선( 姜 文 善 ), 함평의 백불욱지( 白 不 郁 之 ), 남원( 南 原 )의 박연정( 朴 淵 正 ), 남원의 문관순( 文 寬

160 160 - 順 ), 화순( 和 順 )의 남백선( 南 白 先 ), 옥과( 玉 果 )의 채필준( 蔡 必 俊 ), 용안( 龍 安 )의 송명준( 宋 明 俊 ), 순천의 양동진( 楊 東 鎭 ), 용안의 유봉주( 劉 鳳 柱 ), 낙안( 樂 安 )의 최필현( 崔 弼 顯 ), 진산의 김재홍( 金 在 弘 ), 남원의 정필관( 鄭 必 寬 ), 장흥( 長 興 )의 박학돈( 朴 學 敦 ), 남원의 지지성( 池 之 成 ), 장성( 長 城 )의 윤택용( 尹 澤 鏞 )과 경상도( 慶 尙 道 ) 영해( 寧 海 )의 이학준( 李 學 俊 ), 영해의 이 용이( 李 龍 伊 ), 진보( 眞 寶 )의 원은상( 元 殷 常 ), 풍기( 豐 基 )의 박노길( 朴 老 吉 ), 영천( 永 川 )의 신영 춘( 申 永 春 ), 용궁( 龍 宮 )의 정재규( 鄭 在 奎 ), 비안( 比 安 )의 정치명( 鄭 致 明 ), 거창( 居 昌 )의 박원실 ( 朴 元 實 ), 안의( 安 義 )의 육병삼( 陸 秉 三 ), 함창( 咸 昌 )의 이봉이( 李 奉 伊 ), 영천( 永 川 )의 김사범 ( 金 士 凡 ), 합천( 陜 川 )의 정성원( 鄭 成 源 ), 용궁의 박명달( 朴 明 達 ), 함양( 咸 陽 )의 이헌재( 李 憲 載 ), 순흥( 順 興 )의 김순상( 金 順 尙 ), 고령( 高 靈 )의 김재홍( 金 在 弘 ), 청도( 淸 道 )의 신한기( 申 漢 基 ), 함창의 송철인( 宋 哲 仁 ), 예천( 醴 泉 )의 김정현( 金 貞 鉉 ), 영천의 이유형( 李 有 馨 ), 자인( 慈 仁 )의 김수복( 金 水 卜 ), 봉화( 奉 化 )의 이여관( 李 汝 寬 ), 울산( 蔚 山 )의 조수보( 趙 守 甫 ), 김산( 金 山 )의 김순길( 金 順 吉 ), 언양( 彥 陽 )의 이정오( 李 丁 五 ), 영천( 榮 川 )의 이상권( 李 尙 權 ), 흥해( 興 海 )의 전치억( 全 致 億 ), 장기( 長 鬐 )의 김성학( 金 聖 學 ), 비안( 比 安 )의 박내수( 朴 萊 壽 )와 함경도 ( 咸 鏡 道 ) 영흥( 永 興 )의 이협귀( 李 協 龜 ), 단천( 端 川 )의 임쌍동( 林 雙 同 ), 갑산( 甲 山 )의 최준호( 崔 俊 鎬 ), 북청( 北 靑 )의 정철영( 鄭 哲 永 ), 안변( 安 邊 )의 이희선( 李 羲 璇 ), 홍원( 洪 原 )의 송석준( 宋 錫 俊 ), 정평( 定 平 )의 김계락( 金 桂 洛 ), 영흥의 엄성구( 嚴 成 九 ), 홍원의 김윤기( 金 允 基 ), 이원( 利 原 )의 김유원( 金 有 源 ), 단천의 백정하( 白 正 夏 ), 갑산의 안정용( 安 鼎 鏞 ) 등에게 방( 放 ) 자를 써 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린 데 의거하여 모두 즉시 석방하라고 각 해당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7년 12월 29일(임술) / 홍재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홍재호( 洪 在 豪 )ㆍ정인춘( 鄭 寅 春 )을 오위장으로, 백낙륜( 白 樂 倫 )을 훈련원 정으로, 윤경선 ( 尹 慶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윤석인( 尹 錫 仁 )을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삼았다. 대호군에 한 돈원( 韓 敦 源 )ㆍ이근필( 李 根 弼 )이고, 호군에 이만운( 李 晩 運 )ㆍ남일우( 南 一 祐 )였고, 부호군에 박난수( 朴 蘭 壽 )ㆍ이교직( 李 敎 稙 )ㆍ엄세영( 嚴 世 永 )ㆍ이용원( 李 容 元 )ㆍ홍순학( 洪 淳 學 )이고, 부 사직에 이교하( 李 敎 夏 )ㆍ윤조영( 尹 祖 榮 )ㆍ김옥래( 金 玉 來 )ㆍ이준선( 李 駿 善 )ㆍ김규영( 金 奎 榮 )ㆍ 문준영( 文 俊 永 )ㆍ김학로( 金 學 魯 )ㆍ전재봉( 全 在 鳳 )ㆍ박두양( 朴 斗 陽 )ㆍ이종필( 李 種 弼 )이고, 부 사과에 황학수( 黃 學 秀 )ㆍ옥경련( 玉 景 鍊 )ㆍ김영덕( 金 永 悳 )이었다. 동지중추부사에 박제학( 朴 齊 學 )을 단부하였다. 변경함( 邊 慶 涵 )ㆍ김용식( 金 龍 植 )을 오위장으로, 이조영( 李 祖 永 )을 충익장( 忠 翊 將 )으로, 구동 석( 具 東 奭 )을 훈련원 주부로, 변득규( 邊 得 圭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삼았다. 호군에 진상욱( 秦 尙 彧 )ㆍ이용익( 李 容 益 )이고, 부호군 윤석오( 尹 錫 五 )ㆍ문마상( 文 馬 常 )이었다. 동지중추부사에 장희주( 張 禧 柱 )를 단부하였다. 박우명( 朴 禹 命 )ㆍ최택민( 崔 宅 敏 )ㆍ윤홍인( 尹 弘 仁 )을 오위장으로, 이종의( 李 種 懿 )를 백령 첨사 ( 白 翎 僉 使 )로, 허도( 許 鍍 )를 고령 첨사( 高 嶺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김순항( 金 淳 恒 ) 을 단부하였다. 임백현( 林 百 鉉 )을 내금위장( 內 禁 衛 將 )으로, 신백희( 申 百 熙 )를 선전관으로, 김

161 161 - 영덕( 金 永 悳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규상( 李 圭 常 )을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으로, 천세국( 千 世 國 )을 황해 중군( 黃 海 中 軍 )으로 삼았다.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 김익제( 金 翼 濟 ),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 이충호( 李 忠 鎬 ),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 백남설( 白 南 卨 ), 공주 영장( 公 州 營 將 ) 정인태( 鄭 寅 台 ),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 남준희( 南 俊 熙 )에게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신백희( 申 百 熙 )를 훈련원 첨정으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도총부 도사로, 정해종( 鄭 海 宗 )을 경복 궁 위장( 景 福 宮 衛 將 )으로, 최익천( 崔 益 天 )을 경희궁 위장( 慶 熙 宮 衛 將 )으로, 백이규( 白 履 圭 )를 가덕 첨사( 加 德 僉 使 )로 삼았다 / 고종 18년 1월 5일(무진)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이원의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어영청의 계 또 어영청의 말로 아뢰기를, 본청의 천총 이원의( 李 瑗 儀 )는 전임이 청산도 첨사( 靑 山 島 僉 使 )로, 기사장( 騎 士 將 ) 허유( 許 洧 )는 전임이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모두 임소( 任 所 )에 있는데, 올라올 기일이 아직 멀었 습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두는 것이 민망스러우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8년 3월 9일(신미) / 황해 감사 강난형 등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백령진 대청도에 표류한 중국인의 선재를 불태울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 강난형( 姜 蘭 馨 )과 수사( 水 使 ) 이규회( 李 奎 會 )의 장계를 보니, 백령진( 白 翎 鎭 ) 대청도( 大 靑 島 )에 표류한 중국인 9명을 조사해 보니, 모두 봉천부( 奉 天 府 ) 사람들로서 행상하던 중 무장현( 茂 長 縣 ) 고니포( 古 尼 浦 )에 표류되었다가 돌아가는 길에 본도에 다시 정 박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소지한 물건 중에 가져가 기를 원치 않는 것은 돈으로 대신 바꾸어 주고 파손된 선재( 船 材 )는 저들이 보는 앞에서 불 태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무장현에 표류해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다시 정박한 자들입니다. 배가 이미 파손되 어 저들이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니, 먼 곳의 사람을 회유( 懷 柔 )하는 의리상 그들 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학( 譯 學 )으로 하여금 의주( 義 州 )로 데려가 넘겨 주 어, 쇄마( 刷 馬 )를 주어 바꾸어 타도록 하고, 음식을 주고 보살펴 주는 일도 특별히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저들이 버린 파손된 선재를 불태우는 일과 소지한 물건을 가지고 가거나 돈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전례에 따라 허락하게 하고, 저들이 출발했다는 장계를 기다려 통 리기무아문으로 하여금 자문( 咨 文 )을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62 / 고종 19년 3월 16일(임인) / 홍만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홍만식과 조태현( 趙 台 顯 )을 동지중추부사로 삼고, 조병규( 趙 秉 圭 )를 첨지중추부사로 삼 고, 김종귀( 金 鍾 龜 )를 훈련원 주부로 삼고, 이창렴을 황해 수사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민덕현( 閔 德 顯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정환요( 鄭 煥 堯 )ㆍ조병윤( 趙 秉 允 )ㆍ민장 호( 閔 章 鎬 )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첨정 가설에는 한진행( 韓 鎭 行 )을 단부하고, 주부에는 최원 창( 崔 源 昌 )을 단부하였다. 서재풍( 徐 載 豐 )을 선전관으로 삼고, 김홍구( 金 鴻 求 )를 겸사복장( 兼 司 僕 將 )으로 삼고, 임백은( 任 百 殷 )ㆍ오지영( 吳 志 泳 )ㆍ방기원( 方 夔 源 )을 오위장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관 천세현( 千 世 顯 )ㆍ김성태( 金 星 泰 ), 주부 이시창( 李 時 昌 )ㆍ김종귀( 金 鍾 龜 )ㆍ최완식 ( 崔 完 植 )ㆍ유천혁( 劉 天 赫 ), 이상은 감하하였다. 동지중추부사 가설 두 자리에 손수영( 孫 秀 榮 ) 과 임정린( 林 廷 麟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가설 일곱 자리에 민치선ㆍ정해성ㆍ조시벽ㆍ 조동현ㆍ최계장ㆍ이민전ㆍ윤후를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 네 자리에는 박희수( 朴 羲 壽 )ㆍ윤현 참( 尹 顯 參 )ㆍ김영운( 金 永 運 )ㆍ이계흥( 李 啓 興 )을 단부하였다. 호군 김병익( 金 炳 翊 )ㆍ홍원식( 洪 遠 植 )ㆍ홍순형( 洪 淳 馨 ), 부호군 민영환ㆍ조정희ㆍ김명진( 金 明 鎭 )ㆍ이근수( 李 根 秀 )ㆍ김준구( 金 駿 求 )ㆍ서기순ㆍ김철희( 金 喆 熙 )ㆍ조충희ㆍ조운긍( 趙 雲 兢 )ㆍ김직선ㆍ심원택, 부사직 조한익ㆍ 홍세섭ㆍ유치일ㆍ윤상익ㆍ박제빈ㆍ송규원ㆍ정홍섭, 부사과 오병문ㆍ남정기ㆍ김용규ㆍ이강훈 ㆍ승이상ㆍ조희천( 趙 羲 天 )ㆍ정인흥,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우낙선( 禹 樂 善 )ㆍ김대흥( 金 大 興 )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삼고, 한광록( 韓 光 祿 )ㆍ조의석( 趙 義 錫 )ㆍ정일범( 鄭 一 範 )을 주부 가 설로 삼았다. 첨지중추부사 가설 네 자리에는 박희수ㆍ윤현참ㆍ김영운ㆍ이계익( 李 啓 益 )을 단부하고, 부호군에 김만원( 金 萬 源 )ㆍ최치권( 崔 致 權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이응준( 李 應 浚 )을 동지중추부사로 삼고, 이규형( 李 奎 馨 )ㆍ이학래( 李 鶴 來 )ㆍ진중표( 秦 仲 杓 )를 훈련원 주부 로 삼고, 김익제( 金 翼 濟 )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삼았다. 호군에 이희도ㆍ오경연ㆍ임백은, 부호군에 서광복ㆍ임원호ㆍ조동훈ㆍ이동수ㆍ김병호ㆍ이건희( 李 謇 熙 )ㆍ오지영ㆍ방기원, 이상 을 모두 단부하였다. 이병익( 李 秉 翼 )을 안동 영장으로 삼고, 이재욱( 李 載 旭 )을 상주 영장으 로 삼고, 민영국( 閔 泳 國 )을 순천 영장( 順 天 營 將 )으로 삼고, 심의호( 沈 宜 浩 )를 청주 영장으로 삼고, 이병수( 李 秉 洙 )를 충주 영장으로 삼았다. 이계흥을 선전관으로 삼고, 박태원( 朴 泰 遠 )과 황노직( 黃 魯 直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삼고, 이교명( 李 敎 命 )을 부장으로 삼고, 백남항( 白 南 恒 ) 을 장어영 초관( 壯 禦 營 哨 官 )으로 삼았다. 오위장 가설 다섯 자리에는 조병주( 趙 秉 周 )ㆍ한석 권( 韓 錫 權 )ㆍ최석전( 崔 錫 銓 )ㆍ백동진( 白 東 鎭 )ㆍ윤종의( 尹 宗 宜 )를 단부하였다. 안동 영장 이병 익, 상주 영장 이재욱, 순천 영장 민영국, 청주 영장 심의호, 충주 영장 이병수,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 고종 19년 3월 19일(을사)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김봉출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장어영의 계 또 장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천총( 千 摠 )인 전임 자성 군수( 慈 城 郡 守 ) 김봉출( 金 鳳 朮 ), 전임 벽동 군수( 碧 潼 郡 守 ) 이재정( 李 在 靖 ),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종의( 李 種 懿 ), 전임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 손규

163 163 - 헌( 孫 珪 憲 ), 기사장( 騎 士 將 )인 전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 양제하( 梁 濟 夏 )는 모두 임지에 있으 니, 올라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을 오랫동안 비워 두는 것은 걱정스 럽습니다.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9년 6월 12일(병인) / 강원도 강릉에 정배한 죄인 정순거 등을 풀어주도록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전교하시기를, 의금부와 형조의 도배 이하를 모두 특별히 풀어 주라. 고 명하셨습니다. 삼 가 전교에 의거하여 강원도 강릉( 江 陵 )의 정순거( 鄭 順 巨 )ㆍ김갑돌( 金 甲 乭 )ㆍ정영주( 鄭 英 柱 )ㆍ 이윤덕( 李 潤 德 )ㆍ노인업( 盧 仁 業 )ㆍ이병수( 李 炳 秀 )ㆍ배만필( 裵 萬 弼 )ㆍ이사강( 李 士 綱 )ㆍ김여만 ( 金 汝 萬 )ㆍ김말룡( 金 末 龍 ), 홍천( 洪 川 )의 무녀( 巫 女 ) 소아기( 小 阿 只 )ㆍ김경서( 金 敬 瑞 )ㆍ이흥관 ( 李 興 寬 )ㆍ정원서( 鄭 元 瑞 )ㆍ김응용( 金 應 用 )ㆍ이종은( 李 種 殷 ), 평해( 平 海 )의 김석돌( 金 石 乭 )ㆍ 유도수( 柳 道 洙 )ㆍ김귀단( 金 貴 丹 )ㆍ이수량( 李 秀 良 )ㆍ김필지( 金 必 之 )ㆍ문판돌( 文 判 乭 )ㆍ이국흠 ( 李 國 欽 )ㆍ김응( 金 ), 정선( 旌 善 )의 박사석( 朴 四 石 )ㆍ김관여( 金 寬 汝 )ㆍ홍종선( 洪 鍾 善 )ㆍ박철 기( 朴 喆 己 )ㆍ이득기( 李 得 基 )ㆍ홍순옹( 洪 淳 翁 ), 양구( 楊 口 )의 김재경( 金 再 京 )ㆍ황익진( 黃 益 鎭 ) ㆍ안완섭( 安 完 燮 )ㆍ이우호( 李 遇 鎬 )ㆍ엄쾌석( 嚴 快 石 ), 삼척( 三 陟 )의 장의길( 張 義 吉 )ㆍ박석현( 朴 石 賢 )ㆍ이중진( 李 中 振 )ㆍ신상무( 申 相 武 )ㆍ박경후( 朴 慶 厚 ), 회양( 淮 陽 )의 장홍급( 張 鴻 汲 )ㆍ장운 학( 張 雲 學 )ㆍ손형수( 孫 瀅 洙 )ㆍ정윤기( 鄭 允 基 )ㆍ함시택( 咸 時 澤 )ㆍ이광식( 李 光 植 ), 평강( 平 康 )의 김재훈( 金 在 訓 )ㆍ김유홍( 金 裕 弘 ), 인제( 麟 蹄 )의 박만석( 朴 萬 石 )ㆍ문사현( 文 士 賢 ), 낭천( 狼 川 ) 의 손봉학( 孫 鳳 鶴 )ㆍ김덕심( 金 德 心 )ㆍ최석우( 崔 碩 宇 )ㆍ김경삼( 金 京 三 )ㆍ공한규( 孔 翰 奎 ), 간성 ( 杆 城 )의 노비 규엽( 奎 燁 )ㆍ김용해( 金 龍 海 )ㆍ이원우( 李 源 祐 )ㆍ김기용( 金 基 用 )ㆍ안기선( 安 基 先 ) ㆍ이종팔( 李 宗 八 )ㆍ조치한( 趙 致 漢 )ㆍ김방구( 金 方 九 )ㆍ김병택( 金 炳 澤 )ㆍ김인호( 金 仁 浩 ), 안협 ( 安 峽 )의 이병두( 李 秉 斗 )ㆍ이갑순( 李 甲 順 )ㆍ윤금득( 尹 今 得 )ㆍ이양묵( 李 陽 默 )ㆍ권영근( 權 英 根 ) ㆍ김여배( 金 汝 培 )ㆍ김동술( 金 東 述 )ㆍ우인찬( 禹 仁 贊 )ㆍ김수안( 金 守 安 ), 평창( 平 昌 )의 김낙영( 金 樂 英 )ㆍ이수형( 李 壽 瀅 )ㆍ성봉상( 成 鳳 祥 )ㆍ김재호( 金 在 浩 )ㆍ안영춘( 安 英 春 )ㆍ이정기( 李 正 棋 )ㆍ 윤좌은( 尹 佐 殷 )ㆍ박내규( 朴 來 奎 )ㆍ정만원( 鄭 萬 源 )ㆍ김인효( 金 因 孝 ), 춘천( 春 川 )의 양성운( 梁 成 云 )ㆍ우정운( 禹 正 云 )ㆍ유정회( 兪 正 會 )ㆍ최봉섭( 崔 鳳 燮 ), 횡성( 橫 城 )의 김양시( 金 養 始 )ㆍ양면호 ( 梁 冕 鎬 )ㆍ김종술( 金 宗 述 )ㆍ이용필( 李 容 弼 ), 양양( 襄 陽 )의 방희실( 方 希 實 )ㆍ이학수( 李 學 洙 )ㆍ 김문재( 金 文 在 )ㆍ주성규( 朱 聖 規 )ㆍ김윤헌( 金 允 憲 ), 금성( 金 城 )의 김진학( 金 鎭 學 )ㆍ명덕술( 明 德 述 )ㆍ최일환( 崔 日 煥 )ㆍ이봉국( 李 奉 國 ), 고성( 高 城 )의 이윤식( 李 允 植 )ㆍ강문보( 姜 文 甫 )ㆍ승려 묘안( 妙 眼 ), 철원( 鐵 原 )의 노준석( 盧 俊 錫 )ㆍ이경집( 李 敬 集 )ㆍ김익왕( 金 益 枉 ), 통천( 通 川 )의 배 순석( 裵 順 錫 ), 울진( 蔚 珍 )의 이장호( 李 章 浩 ), 김화( 金 化 )의 김노식( 金 魯 植 )ㆍ차심백( 車 心 伯 ), 이천( 伊 川 )의 최필문( 崔 必 文 ), 흡곡( 歙 谷 )의 조석정( 曺 錫 貞 ), 충청도 신창( 新 昌 )의 최봉기( 崔 鳳 基 ), 충주( 忠 州 )의 함두성( 咸 斗 星 ), 연풍( 延 豐 )의 이칠손( 李 七 孫 ), 옥천( 沃 川 )의 김희운( 金 喜 雲 ), 서천( 舒 川 )의 이원억( 李 元 億 ), 황간( 黃 澗 )의 고제상( 高 濟 祥 ), 청산( 靑 山 )의 안시성( 安 時 成 ), 임천( 林 川 )의 박춘귀( 朴 春 龜 ), 석성( 石 城 )의 문영숙( 文 永 淑 ), 전의( 全 義 )의 문준여( 文 俊 汝 ), 온양( 溫 陽 )의 문사여( 文 士 汝 ), 홍산( 鴻 山 )의 문선옥( 文 先 玉 ), 회덕( 懷 德 )의 정소준( 鄭 小 俊 ), 옥천의 최치옥( 崔 致 玉 ), 예산( 禮 山 )의 나경식( 羅 敬 植 ), 서산( 瑞 山 )의 이재근( 李 在 根 ), 석

164 164 - 성의 한진유( 韓 鎭 愈 ), 청주( 淸 州 )의 나영석( 羅 永 錫 ), 해미( 海 美 )의 김희교( 金 喜 釗 ), 옥천의 이 봉주( 李 奉 柱 ), 서천의 윤치덕( 尹 致 德 ), 영춘( 永 春 )의 이홍보( 李 弘 甫 ), 한산( 韓 山 )의 김칠용( 金 七 用 ), 연기( 燕 岐 )의 조무장( 趙 舞 長 ), 청주의 탄한( 坦 漢 )ㆍ천길( 千 吉 ), 청양( 靑 陽 )의 안성백( 安 性 白 ), 괴산( 槐 山 )의 김자율( 金 自 聿 ), 회덕의 황경락( 黃 景 樂 ), 결성( 結 城 )의 정칠경( 鄭 七 敬 ), 연산( 連 山 )의 사비( 私 婢 ) 분이( 粉 伊 ), 덕산( 德 山 )의 김경념( 金 慶 念 ), 청산의 홍귀연( 洪 貴 淵 ), 결성의 백경채( 白 京 彩 ), 전의의 이동운( 李 東 云 ), 청안( 淸 安 )의 윤유신( 尹 有 信 ), 단양( 丹 陽 )의 안정득( 安 正 得 ), 연기의 지쾌성( 池 快 成 ), 영동( 永 同 )의 노기영( 盧 冀 榮 )ㆍ박상순( 朴 相 淳 ), 홍주 ( 洪 州 )의 이 조이( 李 召 史 ), 덕산의 강선봉( 姜 先 奉 ), 충주의 김명윤( 金 明 允 ), 결성의 김태성( 金 太 成 ), 청양의 박원영( 朴 元 英 ), 온양의 이지수( 李 芝 秀 ), 천안( 天 安 )의 박경현( 朴 敬 賢 ), 제천( 堤 川 )의 방수철( 方 秀 哲 ), 홍천( 洪 川 )의 방중근( 方 仲 根 ), 아산( 牙 山 )의 김재희( 金 在 熙 ), 온양의 이 건양( 李 建 陽 )ㆍ김갑우( 金 甲 佑 ), 황간의 이상철( 李 相 喆 ), 영동의 박선현( 朴 璿 鉉 ), 신창의 김후 권( 金 厚 權 )ㆍ고춘수( 高 春 秀 ), 충주의 정수보( 丁 壽 甫 ), 한산의 정복동( 鄭 福 同 )ㆍ박창배( 朴 昌 培 ), 황간의 김학선( 金 學 善 ), 임천의 김형식( 金 亨 植 ), 단양의 김한문( 金 漢 門 ), 대흥( 大 興 )의 박용이( 朴 龍 伊 ), 온양의 구석용( 具 石 用 )ㆍ김석규( 金 錫 奎 )ㆍ이학인( 李 學 仁 ), 연산의 권병규( 權 秉 奎 ), 연기의 강경능( 姜 景 能 )ㆍ한두회( 韓 斗 會 ), 영동의 김계환( 金 啓 煥 )ㆍ유재휴( 劉 載 休 )ㆍ천 은석( 千 銀 石 )ㆍ남진철( 南 振 哲 ), 영춘의 양승락( 楊 升 洛 )ㆍ이사범( 李 士 凡 )ㆍ황춘식( 黃 春 植 ), 청 산의 황필연( 黃 必 淵 )ㆍ김 조이( 金 召 史 )ㆍ이종협( 李 鍾 浹 )ㆍ유응호( 柳 膺 鎬 )ㆍ진병춘( 陳 丙 春 )ㆍ 송현극( 宋 玄 極 ), 천안의 송지청( 宋 之 淸 ), 진천( 鎭 川 )의 정주현( 鄭 朱 顯 )ㆍ임활용( 林 用 ), 옥천의 윤희갑( 尹 熺 甲 )ㆍ김만춘( 金 萬 春 )ㆍ최한배( 崔 漢 培 )ㆍ이재백( 李 再 伯 )ㆍ정호련( 丁 好 鍊 ), 회덕의 박광두( 朴 光 斗 )ㆍ김요명( 金 堯 明 )ㆍ구사옥( 具 士 沃 )ㆍ최판업( 崔 判 業 ), 진잠( 鎭 岑 )의 김종원( 金 宗 源 )ㆍ지위경( 池 渭 京 )ㆍ현성해( 玄 聖 海 ), 괴산( 槐 山 )의 이경학( 李 京 學 ), 문의( 文 義 )의 김정현( 金 丁 玄 ), 황간의 하홍이( 河 洪 伊 ), 당진( 唐 津 )의 차수년( 車 守 年 ), 한산의 유원선( 兪 元 善 ), 제천의 최재수( 崔 在 樹 )ㆍ백용해( 白 用 海 )ㆍ양상봉( 梁 相 鳳 )ㆍ문한장( 文 漢 章 ), 신창의 소일출( 蘇 日 出 )ㆍ 김만성( 金 萬 成 ), 은진( 恩 津 )의 권운서( 權 云 瑞 ), 회인( 懷 仁 )의 최치악( 崔 致 岳 )ㆍ허 조이( 許 召 史 ), 연산의 권연환( 權 璉 煥 ), 음성( 陰 城 )의 고 조이( 高 召 史 )ㆍ유석찬( 柳 石 贊 ), 괴산의 김성거 ( 金 成 琚 ), 충주의 최사량( 崔 士 良 )ㆍ이병순( 李 炳 珣 ), 남포( 藍 浦 )의 임학성( 林 學 成 ), 홍주의 구 창중( 具 昌 中 )ㆍ고수현( 高 守 玄 ), 은진의 김만관( 金 萬 寬 ), 비인( 庇 仁 )의 정동진( 鄭 東 鎭 )ㆍ김윤진 ( 金 允 眞 ), 목천( 木 川 )의 박광삼( 朴 光 三 )ㆍ김덕건( 金 德 建 ), 옥천의 이학영( 李 學 榮 ), 청안의 최 효원( 崔 孝 愿 )ㆍ김봉석( 金 奉 石 ), 황간의 이홍구( 李 弘 九 ), 진천의 이문오( 李 文 五 ), 예산의 임영 봉( 林 永 鳳 ), 정산( 定 山 )의 이두필( 李 斗 弼 )ㆍ이원재( 李 元 在 ), 음성의 김도순( 金 道 淳 ), 전의의 박원효( 朴 元 孝 )ㆍ권도혁( 權 道 爀 ), 단양의 이창근( 李 昌 根 )ㆍ박인우( 朴 寅 祐 )ㆍ장두남( 張 斗 南 ), 청양의 이지배( 李 之 培 ), 온양의 문경주( 文 景 柱 ), 황해도 수안( 遂 安 )의 안영협( 安 永 協 ), 배천 ( 白 川 )의 김장록( 金 長 祿 ), 연안( 延 安 )의 임춘봉( 林 春 奉 ), 토산( 兎 山 )의 김수갑( 金 守 甲 ), 재령 ( 載 寧 )의 이유명( 李 有 命 ), 신천( 信 川 )의 정일정( 鄭 一 丁 ), 신계( 新 溪 )의 영노( 營 奴 ) 정한( 正 漢 ), 신천의 양중달( 梁 中 達 ), 곡산( 谷 山 )의 이효원( 李 孝 元 ), 장연( 長 淵 )의 지광연( 池 光 淵 ), 재령의 이경학( 李 京 學 ), 서흥( 瑞 興 )의 이기조( 李 己 祚 ), 재령의 양정석( 梁 貞 錫 )ㆍ이녹이( 李 祿 伊 ), 풍천 ( 豐 川 )의 이석이( 李 石 伊 ), 장련( 長 連 )의 김치경( 金 致 景 )ㆍ이윤구( 李 允 九 ), 백령( 白 翎 )의 강상 진( 姜 尙 辰 ), 토산의 이업동( 李 業 同 ), 은율( 殷 栗 )의 김석균( 金 石 均 ), 신계의 안이중( 安 伊 仲 ), 금 천( 金 川 )의 김순돌( 金 順 乭 ), 배천의 박창수( 朴 昌 壽 ), 초도( 椒 島 )의 사노 오복( 五 福 ), 강령( 康 翎 )의 김평심( 金 平 心 )ㆍ유제안( 劉 濟 安 ), 평산( 平 山 )의 고경운( 高 景 運 ), 송화( 松 禾 )의 김치정 ( 金 致 貞 ), 장련의 김택수( 金 宅 壽 ), 토산의 정득교( 鄭 得 僑 ), 신계의 김두찬( 金 斗 贊 ), 풍천의 김

165 165 - 준영( 金 俊 英 ), 신천의 이산이( 李 山 伊 ), 초도의 기홍석( 奇 弘 石 ), 안악( 安 岳 )의 서정렬( 徐 鼎 烈 ), 백령의 최병일( 崔 秉 一 ), 토산의 변학이( 卞 學 伊 ), 장연의 김계태( 金 桂 泰 ), 백령의 김석철( 金 錫 哲 ), 초도의 박진석( 朴 鎭 石 ), 백령의 사노 복개( 福 介 )ㆍ사노 경진( 敬 晉 )ㆍ사노 춘복( 春 福 ), 초 도의 박영수( 朴 英 壽 ), 봉산( 鳳 山 )의 김용석( 金 用 石 ), 곡산의 윤도원( 尹 道 元 ), 황주( 黃 州 )의 신 기영( 申 基 永 ), 풍천의 문봉운( 文 鳳 雲 ), 재령의 이익렬( 李 益 烈 ), 곡산의 승려 호월( 浩 月 ), 신계 의 박화경( 朴 化 敬 ), 곡산의 이양한( 李 亮 漢 ), 토산의 박병칠( 朴 炳 七 ), 배천의 이덕하( 李 德 夏 ), 안악의 김계순( 金 季 淳 ), 신계의 정남교( 丁 南 敎 ), 장연의 황수경( 黃 秀 京 ), 은율의 장성급( 張 成 汲 ), 서흥의 최영원( 崔 永 源 ), 곡산의 김수만( 金 守 萬 ), 토산의 신찬민( 申 贊 敏 ), 강령의 이시옥 ( 李 時 玉 ), 배천의 조덕인( 趙 德 仁 ), 곡산의 박원일( 朴 元 一 ), 배천의 최선여( 崔 善 汝 ), 풍천의 한 여형( 韓 汝 亨 ), 장련의 김영민( 金 永 民 ), 곡산의 김경삼( 金 景 三 ), 풍천의 박인희( 朴 麟 喜 ), 토산 의 현봉익( 玄 奉 益 ), 안악의 고치만( 高 致 萬 ), 신천의 송문필( 宋 汶 弼 ), 장련의 김학윤( 金 學 允 ), 수안의 이기수( 李 奇 守 ), 금천의 신항일( 辛 恒 日 ), 풍천의 유백흥( 柳 白 興 ), 장연의 민성진( 閔 聖 辰 ), 송화의 김상련( 金 相 鍊 ), 강령의 김기홍( 金 基 洪 ), 수안의 김윤흥( 金 允 興 ), 금천의 유정로 ( 柳 正 魯 ), 장연의 이창실( 李 昌 實 ), 평산의 심의승( 沈 宜 承 ), 풍천의 조진홍( 趙 鎭 洪 ), 안악의 한 인겸( 韓 仁 謙 ), 배천의 노성범( 盧 性 範 ), 장련의 이응윤( 李 應 允 ), 배천의 황운하( 黃 雲 夏 ), 평산 의 손부천( 孫 夫 千 ), 배천의 김시형( 金 是 炯 ), 금천의 김재희( 金 在 熺 ), 풍천의 강진희( 姜 鎭 禧 ), 은율의 조경일( 趙 京 日 ), 평안도 양덕( 陽 德 )의 손수언( 孫 秀 彥 ), 위원( 渭 原 )의 윤두진( 尹 斗 辰 ), 가산( 嘉 山 )의 안유승( 安 有 承 ), 중화( 中 和 )의 김영운( 金 永 云 ), 철산( 鐵 山 )의 진덕준( 秦 德 俊 ), 가 산의 홍종환( 洪 宗 煥 ), 운산( 雲 山 )의 김학현( 金 學 顯 ), 철산의 정두영( 鄭 斗 永 ), 벽동( 碧 潼 )의 최 중엽( 崔 重 燁 ), 개천( 价 川 )의 김종갑( 金 宗 甲 ), 용천( 龍 川 )의 정인욱( 鄭 仁 郁 ), 영원( 寧 遠 )의 오충 손( 吳 忠 孫 ), 덕천( 德 川 )의 김석규( 金 碩 奎 ), 은산( 殷 山 )의 승려 진허( 眞 虛 ), 자산( 慈 山 )의 한홍 렬( 韓 洪 烈 ), 위원의 정갑풍( 鄭 甲 豐 ), 초산( 楚 山 )의 이건영( 李 鍵 榮 ), 위원의 배정로( 裵 鼎 魯 ), 영 변( 寧 邊 )의 승려 재흡( 在 洽 ), 순천( 順 川 )의 채치종( 蔡 致 宗 ), 위원의 김제환( 金 濟 桓 ), 강서( 江 西 )의 안성여( 安 成 汝 ), 구성( 龜 城 )의 오갑선( 吳 甲 善 ), 곽산( 郭 山 )의 허제( 許 堤 ), 영원의 배수복 ( 裵 壽 福 ), 중화의 이호철( 李 好 哲 ), 위원의 이영현( 李 永 鉉 ), 중화의 김홍원( 金 弘 源 ), 벽동의 이 배정( 李 培 正 ), 초산의 주영로( 朱 永 老 ), 위원의 문형섭( 文 亨 涉 ), 운산의 전금석( 田 今 錫 ), 위원 의 유학조( 劉 學 祖 ), 맹산( 孟 山 )의 장기만( 張 基 萬 ), 증산( 甑 山 )의 홍 조이( 洪 召 史 ), 맹산의 정 관호( 鄭 觀 好 ), 숙천( 肅 川 )의 임사극( 任 士 克 ), 맹산의 이준의( 李 駿 義 ), 양덕( 陽 德 )의 최덕행( 崔 德 行 ), 선천( 宣 川 )의 이중보( 李 仲 甫 ), 박천( 博 川 )의 이인원( 李 仁 源 ), 삼화( 三 和 )의 이쾌석( 李 快 石 ), 함종( 咸 從 )의 임명실( 林 明 實 ), 개천의 김석조( 金 石 祚 ), 위원의 한만억( 韓 萬 億 ), 운산의 황종학( 黃 鍾 翯 ), 맹산의 이익서( 李 益 瑞 ), 증산의 황학연( 黃 鶴 淵 ), 강동( 江 東 )의 조경운( 趙 京 云 ), 가산의 이남하( 李 南 夏 ), 용강( 龍 岡 )의 김약호( 金 若 浩 ), 위원의 안판동( 安 判 同 ), 숙천의 윤부응( 尹 夫 應 ), 구성의 김재록( 金 在 祿 ), 가산의 윤복용( 尹 卜 用 ), 초산의 문여한( 文 如 漢 ), 순 천의 임상우( 林 尙 禹 ), 개천의 성주성( 成 周 星 ), 삭주( 朔 州 )의 이용림( 李 用 林 ), 영유( 永 柔 )의 이 원보( 李 元 甫 ), 중화의 임광석( 林 光 錫 ), 순천의 이시우( 李 是 禹 ), 영원의 용재옥( 龍 載 玉 ), 증산 의 최영보( 崔 永 甫 ), 자산의 김여천( 金 汝 千 ), 운산의 이치행( 李 致 行 ), 양덕의 김원응( 金 元 應 ), 상원( 祥 源 )의 김행덕( 金 行 德 ), 곽산의 이행지( 李 行 之 ), 용천의 이덕원( 李 德 元 ), 전라도 장성 ( 長 城 )의 황대천( 黃 大 千 ), 곡성( 谷 城 )의 설광섭( 薛 光 燮 ), 보성( 寶 城 )의 김교응( 金 敎 應 )ㆍ김기 성( 金 其 成 ), 광주( 光 州 )의 김오성( 金 五 成 ), 화순( 和 順 )의 최판성( 崔 判 成 ), 순천( 順 天 )의 이재혁 ( 李 在 赫 ), 진산( 珍 山 )의 구미경( 具 美 卿 ), 흥양( 興 陽 )의 신사유( 申 士 宥 ), 낙안( 樂 安 )의 김용석 ( 金 用 石 ), 고산( 高 山 )의 문우석( 文 愚 錫 ), 해남( 海 南 )의 김재승( 金 在 升 )ㆍ이해달( 李 海 達 ), 담양

166 166 - ( 潭 陽 )의 신원균( 申 元 均 ), 옥구( 沃 溝 )의 정규봉( 鄭 圭 鳳 ), 임피( 臨 陂 )의 조병형( 趙 秉 亨 ), 낙안의 이학여( 李 鶴 汝 ), 무장( 茂 長 )의 홍도행( 洪 道 行 ), 함열( 咸 悅 )의 안성약( 安 性 若 ), 용담( 龍 潭 )의 윤 창진( 尹 昌 鎭 ), 함열의 김재홍( 金 在 弘 ), 김제( 金 堤 )의 정창석( 鄭 昌 錫 ), 구례( 求 禮 )의 김정근( 金 正 根 ), 옥과( 玉 果 )의 권경천( 權 敬 千 ), 김제의 고덕성( 高 德 性 ), 창평( 昌 平 )의 이덕준( 李 德 俊 ), 화순의 문삼봉( 文 三 奉 ), 임자도( 荏 子 島 )의 이언상( 李 彥 相 ), 곡성의 황태희( 黃 泰 熙 ), 구례의 김 영희( 金 榮 熙 ), 창평의 이문묵( 李 文 默 ), 동복( 同 福 )의 이석귀( 李 錫 龜 ), 능주( 綾 州 )의 이희( 李 熺 ), 남평( 南 平 )의 강영석( 姜 永 錫 ), 함평( 咸 平 )의 김준성( 金 俊 成 ), 광양( 光 陽 )의 우상륜( 禹 相 倫 ), 금갑도( 金 甲 島 )의 윤창식( 尹 昌 植 ), 영광의 김시곤( 金 始 坤 ), 순창( 淳 昌 )의 김환갑( 金 煥 甲 ), 정읍( 井 邑 )의 이병범( 李 丙 凡 ), 함평의 박윤수( 朴 允 秀 ), 위도( 蝟 島 )의 이덕( 李 德 ), 장흥( 長 興 )의 김광열( 金 光 悅 ), 금갑도의 오병한( 吳 丙 翰 ), 광양의 백익대( 白 益 大 ), 신지도( 薪 智 島 )의 홍시중 ( 洪 時 中 ), 담양의 박화묵( 朴 和 默 ), 고금도( 古 今 島 )의 정주한( 鄭 周 翰 ), 장성의 이창재( 李 昌 宰 ), 임자도의 서용기( 徐 容 棋 ), 고금도의 김여행화( 金 女 杏 花 ), 금갑도의 신섭( 申 㰔 ), 여도( 呂 島 )의 명창록( 明 昌 祿 ), 금갑도의 최쾌룡( 崔 快 龍 ), 김제의 최영학( 崔 永 學 ), 용안( 龍 安 )의 전경오( 田 敬 五 ), 임자도의 이유형( 李 有 馨 ), 흥양의 이무옥( 李 戊 玉 ), 나주( 羅 州 )의 이회철( 李 會 哲 ), 무장의 홍재윤( 洪 在 允 ), 강진( 康 津 )의 변기홍( 卞 基 弘 ), 남원( 南 原 )의 이만철( 李 萬 喆 ), 운봉( 雲 峰 )의 심 의덕( 沈 宜 德 ), 금구( 金 溝 )의 김영준( 金 永 俊 ), 태인( 泰 仁 )의 김상범( 金 相 範 ), 함열의 이건중( 李 建 重 ), 태인의 신순근( 申 順 根 ), 남원의 도일랑( 都 一 郞 ), 진산의 서달용( 徐 達 用 ), 영광의 김재 천( 金 在 天 ), 옥구의 우용구( 禹 庸 九 ), 순창의 유맹근( 劉 孟 斤 ), 김제의 황성필( 黃 成 必 ), 순천의 황인천( 黃 仁 千 ), 진도( 珍 島 )의 나동이( 羅 同 伊 ), 장수( 長 水 )의 박금동( 朴 今 同 ), 영암( 靈 巖 )의 권 월준( 權 月 俊 ), 진안( 鎭 安 )의 송병흠( 宋 柄 欽 ), 순창의 김응환( 金 應 煥 ), 순천의 권형돈( 權 亨 敦 ), 김제의 김호여( 金 浩 汝 ), 옥구의 조치광( 趙 致 光 ), 정읍의 신민화( 辛 玟 華 ), 동복의 피가( 皮 哥 )놈 복동( 卜 同 ), 강진의 한기백( 韓 基 伯 ), 여산( 礪 山 )의 김완석( 金 完 錫 ), 장수의 강우근( 姜 又 斤 ), 용 안의 이응신( 李 膺 新 ), 정읍의 이장철( 李 長 哲 ), 해남의 이원빈( 李 元 彬 ), 남평의 김명두( 金 命 斗 ), 진안의 최성환( 崔 聲 煥 ), 진산의 이황( 李 堭 ), 해남의 이기남( 李 基 南 ), 낙안의 백 조이( 白 召 史 ), 금산( 錦 山 )의 이준상( 李 俊 相 ), 동복의 김시영( 金 始 榮 ), 무장의 차희조( 車 希 祚 ), 운봉의 최봉석( 崔 奉 石 ), 남원의 이철원( 李 哲 元 ), 익산( 益 山 )의 김대군( 金 大 軍 ), 강진의 김두환( 金 斗 煥 ), 화순의 이홍갑( 李 洪 甲 ), 여산의 백낙년( 白 樂 年 ), 광주의 홍승학( 洪 承 學 ), 광양의 노비 흥 만( 興 萬 ), 장흥의 김학겸( 金 學 兼 ), 진산의 최복대( 崔 福 大 ), 여산의 강천석( 姜 千 石 ), 고산의 이 정천( 李 正 千 ), 장수의 김경석( 金 京 錫 ), 흥양의 김명원( 金 明 元 ), 보성의 양상종( 梁 相 宗 ), 용안 의 송진옥( 宋 振 玉 ), 고산의 서흥서( 徐 興 西 ), 곡성의 김연옥( 金 連 玉 ), 해남의 백진기( 白 鎭 棋 ), 낙안의 홍도문( 洪 道 文 ), 구례의 박광호( 朴 光 鎬 ), 해남의 이칠봉( 李 七 奉 ), 구례의 이돌이( 李 乭 伊 ), 장수의 박원석( 朴 元 石 ), 함평의 강우백( 姜 又 白 ), 장성의 김명서( 金 明 西 ), 익산의 오재훈 ( 吳 載 勳 ), 고산의 최용석( 崔 龍 錫 ), 고부( 古 阜 )의 이상신( 李 象 信 ), 흥덕( 興 德 )의 채용묵( 蔡 鏞 默 ), 용안의 양면수( 梁 冕 洙 ), 능주의 양길량( 楊 吉 良 ), 김제의 김준현( 金 俊 鉉 ), 용안의 김수근 ( 金 守 斤 ), 여산의 이만회( 李 萬 會 )ㆍ최중항( 崔 重 恒 ), 담양의 홍풍주( 洪 豐 周 ), 고산의 박영달( 朴 永 達 ), 진산의 김수철( 金 守 哲 ), 순창의 이정춘( 李 靖 春 ), 무장의 최경춘( 崔 慶 春 ), 무주( 茂 朱 )의 조병순( 曺 秉 珣 ), 여산의 이덕천( 李 德 川 ), 고창( 高 敞 )의 최백경( 崔 伯 景 ), 임실( 任 實 )의 김보국 ( 金 普 國 ), 흥양의 강원중( 姜 元 仲 ), 능주의 김상룡( 金 尙 龍 ), 낙안의 박주영( 朴 周 英 ), 용담의 장 복현( 張 福 賢 )ㆍ박선채( 朴 善 埰 ), 용안의 이군옥( 李 群 玉 ), 남평의 최명환( 崔 明 煥 ), 나주의 유춘 경( 柳 春 景 ), 임피의 이진협( 李 震 俠 ), 장흥의 최길동( 崔 吉 同 ), 금산의 오병규( 吳 秉 奎 ), 옥과의 이기문( 李 基 文 ), 임피의 송경옥( 宋 經 玉 ), 임실의 정해원( 鄭 海 源 ), 금산의 김창호( 金 昌 浩 ), 익

167 167 - 산의 이덕순( 李 德 純 ), 무장의 김연응( 金 連 應 ), 고부의 이기석( 李 起 奭 ), 운봉의 윤병선( 尹 炳 善 ), 함열의 이희규( 李 羲 奎 ), 진산의 이시무( 李 時 茂 ), 용안의 이승기( 李 承 祺 ), 익산의 김구현 ( 金 九 鉉 ), 강진의 조화영( 趙 化 永 ), 능주의 방운천( 方 雲 天 ), 장성의 한경수( 韓 京 水 ), 태인의 김 대호( 金 大 昊 ), 동복의 정환계( 鄭 煥 烓 ), 옥구의 김규진( 金 奎 鎭 ), 광양의 박시권( 朴 時 權 ), 동복 의 양진국( 梁 辰 國 ), 고산의 이심묵( 李 心 默 ), 김제의 이종윤( 李 鍾 允 ), 구례의 이화정( 李 化 正 ), 함열의 최세우( 崔 世 友 ), 고창의 조윤수( 趙 胤 秀 ), 남원의 변석주( 邊 碩 朱 )ㆍ이용순( 李 容 順 ), 장 성의 신태엄( 申 泰 嚴 ), 창평의 안성교( 安 星 敎 ), 장수의 황종륜( 黃 鍾 倫 ), 능주의 양광복( 梁 廣 福 ), 옥과의 신봉균( 申 鳳 均 ), 곡성의 정과형( 鄭 果 亨 ), 여산의 윤철구( 尹 喆 求 ), 장수의 홍성수 ( 洪 成 秀 ), 태인의 나병정( 羅 秉 貞 ), 동복의 김위천( 金 渭 千 ), 창평의 이진의( 李 鎭 儀 ), 고산의 박 원상( 朴 元 尙 ), 영덕( 盈 德 )의 송봉이( 宋 奉 伊 ), 광주의 홍종학( 洪 鍾 學 ), 금산의 조만길( 趙 萬 吉 ), 무주의 이승인( 李 承 寅 ), 태인의 홍병언( 洪 秉 彥 ), 익산의 박사형( 朴 士 衡 ), 여산의 조석현( 曺 錫 賢 ), 옥구의 배도성( 裵 道 成 ), 진산의 박시권( 朴 時 權 ), 운봉의 이유근( 李 有 根 ), 금산의 임홍석 ( 林 弘 錫 ), 장수의 박 조이( 朴 召 史 ), 광주의 심원필( 沈 遠 弼 ), 고창의 권영기( 權 永 夔 ), 순창의 김사익( 金 士 益 ), 무장의 허열( 許 悅 ), 장수의 이명실( 李 明 實 ), 익산의 송준명( 宋 俊 明 ), 남원의 조상길( 趙 尙 吉 ), 보성의 정군섭( 鄭 君 涉 ), 고부의 허각( 許 珏 ), 여산의 김응산( 金 應 山 ), 진산의 홍재원( 洪 在 元 ), 무장의 조두벽( 趙 斗 璧 ), 흥덕의 전소천( 田 小 千 ), 장성의 유상하( 柳 相 夏 ), 용 담의 이 조이( 李 召 史 ), 익산의 김양철( 金 良 哲 ), 금갑도의 박전홍( 朴 田 弘 )ㆍ박정서( 朴 正 緖 )ㆍ 배규용( 裵 奎 鏞 ), 지도의 정성보( 鄭 成 甫 ), 신지도의 김수철( 金 壽 喆 ), 금산 노비 순금( 順 金 ), 경 상도 언양( 彥 陽 )의 김치현( 金 治 玄 ), 흥해( 興 海 )의 김학성( 金 學 成 ), 군위( 軍 威 )의 함형벽( 咸 亨 璧 ), 진보( 眞 寶 )의 신태윤( 申 太 允 ), 진주의 허용( 許 鎔 ), 초계( 草 溪 )의 김용개( 金 用 介 ), 경산( 慶 山 )의 허여구( 許 汝 九 ), 김해의 한창달( 韓 昌 達 ), 문경의 정인원( 鄭 寅 原 ), 하양( 河 陽 )의 김계달 ( 金 啓 達 ), 합천( 陜 川 )의 박천종( 朴 千 鍾 ), 영덕( 盈 德 )의 문봉창( 文 奉 昌 ), 풍기( 豐 基 )의 엄태영 ( 嚴 泰 永 ), 신녕( 新 寧 )의 김창진( 金 昌 辰 ), 영해( 寧 海 )의 권도한( 權 道 漢 ), 고령( 高 靈 )의 이일용 ( 李 一 用 ), 언양의 사노 영길( 永 吉 )ㆍ김병준( 金 炳 濬 ), 장기( 長 鬐 )의 심의경( 沈 宜 慶 ), 문경의 조 산갑( 趙 山 甲 ), 함창( 咸 昌 )의 한 조이( 韓 召 史 ), 곤양( 昆 陽 )의 손창록( 孫 昌 祿 ), 진산( 晉 山 )의 최 진태( 崔 鎭 兌 ), 고령의 최경숙( 崔 敬 淑 ), 웅천( 熊 川 )의 김정현( 金 正 鉉 ), 진해의 차희정( 車 禧 貞 ), 신녕의 김상집( 金 相 集 ), 자인( 慈 仁 )의 김노홍( 金 魯 弘 ), 의성( 義 城 )의 김태욱( 金 泰 郁 ), 함창의 김이관( 金 利 貫 ), 자인의 김기학( 金 基 鶴 ), 장기의 문인화( 文 仁 化 ), 영일( 迎 日 )의 이치열( 李 致 熱 ), 순흥( 順 興 )의 김이훈( 金 利 勳 ), 남해의 이기호( 李 己 浩 ), 예천( 醴 泉 )의 김국영( 金 菊 永 ), 풍 기의 김천복( 金 千 福 ), 언양의 남길우( 南 吉 佑 ), 곤양의 이대호( 李 大 浩 ), 비안( 比 安 )의 이수명 ( 李 壽 明 ), 남해의 오치형( 吳 致 炯 ), 문경의 이치명( 李 致 明 ), 금산의 홍윤범( 洪 允 範 ), 장기의 설 용달( 薛 用 達 ), 영일의 이경억( 李 景 億 ), 진해의 이풍희( 李 豐 熙 ), 진해의 승려 행민( 行 敏 ), 예천 의 박춘실( 朴 春 實 ), 진주의 고순근( 高 順 根 ), 신녕의 원재동( 元 在 東 ), 함창의 박봉춘( 朴 奉 春 ), 삼가의 장춘봉( 張 春 奉 ), 문경의 이원근( 李 元 根 ), 장기의 주원명( 朱 元 明 ), 함양의 이철하( 李 徹 夏 ), 예천의 한홍규( 韓 弘 圭 ), 하양의 이수인( 李 壽 寅 ), 신녕의 장성만( 張 聖 萬 ), 용궁( 龍 宮 )의 윤정운( 尹 正 云 ), 현풍( 玄 風 )의 송인흠( 宋 仁 欽 ), 용궁의 장분손( 張 分 孫 ), 현풍의 구경오( 具 景 五 ), 거제의 이평집( 李 平 集 ), 합천의 이여종( 李 汝 宗 ), 거제의 박천돌( 朴 千 乭 ), 용궁의 가순업 ( 賈 順 業 ), 함창의 오대성( 吳 大 成 ), 흥해의 김병수( 金 秉 洙 ), 문경의 최영삼( 崔 永 三 ), 함안의 김 천만( 金 千 萬 ), 비안의 차종현( 車 宗 鉉 ), 예안의 남공년( 南 公 年 ), 단성( 丹 城 )의 이학조( 李 學 祚 ), 함양의 이호열( 李 鎬 烈 ), 하동의 김팔룡( 金 八 龍 ), 문경의 유봉여( 兪 奉 汝 ), 하동의 이덕실( 李 德 實 ), 안의의 정규창( 鄭 圭 昌 ), 밀양의 고용정( 高 用 正 )ㆍ박내건( 朴 來 健 ), 고성의 김난식( 金 蘭

168 168 - 植 ), 합천의 유구영( 柳 九 永 ), 금산의 한순교( 韓 舜 敎 ), 문경의 최화성( 崔 化 成 )ㆍ신형구( 愼 衡 九 ), 영일의 박성진( 朴 成 辰 ), 영천의 김병두( 金 丙 斗 ), 청하의 허성기( 許 聖 基 ), 영천의 정대현 ( 丁 大 鉉 ), 함창의 윤도야지( 尹 刀 也 之 ), 문경의 최봉록( 崔 奉 祿 ), 청송의 유응렬( 劉 應 烈 ), 영양 ( 英 陽 )의 최양인( 崔 良 仁 ), 영산( 靈 山 )의 손유태( 孫 有 泰 ), 곤양의 김의도( 金 義 道 ), 풍기의 박제 담( 朴 濟 淡 ), 영양의 홍영형( 洪 永 馨 ), 청도의 이호선( 李 浩 善 ), 청하의 김중갑( 金 仲 甲 ), 의성의 김순득( 金 順 得 ), 경주의 김명록( 金 命 祿 ), 고성의 이순록( 李 順 祿 ), 예천의 방인룡( 方 仁 龍 ), 창 원의 김태형( 金 泰 亨 ), 초계의 이숙현( 李 叔 玄 ), 상주의 김병로( 金 炳 魯 ), 산청의 이회정( 李 會 定 ), 비안의 간봉익( 簡 鳳 翊 ), 자인의 유교영( 柳 敎 永 ), 청하의 박문길( 朴 文 吉 ), 함창의 우수영 ( 禹 壽 榮 ), 금산의 이명석( 李 命 石 ), 진해의 박종훈( 朴 鍾 勳 ), 남해의 선덕흠( 宣 德 欽 ), 함양의 기 인현( 奇 仁 鉉 ), 거창의 김병돈( 金 丙 敦 ), 하양의 임재성( 任 載 成 ), 안의의 윤성도( 尹 成 道 ), 웅천 의 이성지( 李 聖 之 ), 함양의 이승조( 李 承 朝 ), 거창의 민병성( 閔 丙 聲 ), 산청의 김장옥( 金 長 玉 ), 인동( 仁 同 )의 백금옥( 白 今 玉 ), 선산의 김흥석( 金 興 錫 ), 예안의 박인구( 朴 寅 九 ), 거창의 이원하 ( 李 元 河 ), 함양의 임군하( 林 君 夏 )ㆍ진영탁( 陳 英 鐸 ), 하양의 김병세( 金 炳 世 ), 남해의 안기( 安 機 ), 사천( 泗 川 )의 원대숙( 元 大 叔 ), 문경의 박경진( 朴 敬 鎭 ), 하동의 김사현( 金 士 玄 ), 봉화의 최치홍( 崔 治 弘 ), 안동의 유주환( 兪 珠 煥 ), 인동의 공욱길( 孔 郁 吉 ), 삼가의 김재수( 金 在 秀 ), 언 양의 김병혁( 金 秉 赫 ), 함창의 김창환( 金 昌 煥 ), 청송의 황창근( 黃 昌 根 ), 상주의 송경선( 宋 敬 善 ), 예천의 고성희( 高 性 希 ), 창녕의 장도언( 張 道 彥 ), 비안의 정해청( 鄭 海 淸 ), 용궁의 노비 득 손( 得 孫 ), 봉화의 우정범( 禹 正 凡 ), 군위의 송기현( 宋 基 賢 ), 영덕의 김낙호( 金 洛 鎬 ), 함양의 정 홍상( 鄭 洪 相 ), 성주의 이벽현( 李 碧 鉉 ), 함양의 김동익( 金 東 益 ), 안동의 홍갑이( 洪 甲 伊 ), 예안 의 황선이( 黃 先 伊 ), 봉화의 복숙조( 卜 叔 兆 ), 예천의 김종석( 金 鍾 錫 ), 선산의 권목용( 權 穆 容 ), 의성의 구홍석( 具 弘 石 ), 삼가의 홍나경( 洪 羅 輕 ), 선산의 이동우( 李 同 愚 ), 안의의 서재운( 徐 在 雲 ), 영천의 이구봉( 李 九 鳳 ), 신녕의 김자근길( 金 者 斤 吉 ), 하양의 김호연( 金 浩 然 ), 고령의 유 장응( 柳 匠 應 ), 남해의 서익현( 徐 益 賢 ), 함경도 정평( 定 平 )의 김문연( 金 文 演 ), 고원( 高 原 )의 이 종섭( 李 宗 涉 ), 삼수( 三 水 )의 강재호( 姜 在 鎬 ), 안변의 김조영( 金 祖 永 ), 삼수의 이춘식( 李 春 植 ), 고원의 유동섭( 柳 東 燮 ), 삼수의 김적길( 金 廸 吉 ), 이원의 정윤영( 鄭 胤 永 ), 영흥( 永 興 )의 고금석 ( 高 今 錫 ), 안변의 이순오( 李 順 五 ), 홍원( 洪 原 )의 권기( 權 頎 ), 명천( 明 川 )의 윤기만( 尹 基 萬 ), 이 원의 임만주( 林 萬 柱 ), 안변의 오치심( 吳 致 心 ), 이원의 최일록( 崔 日 彔 ), 덕원의 배동칠( 裵 東 七 ), 안변의 최종진( 崔 宗 璡 ), 명천의 김창무( 金 昌 武 ), 문천( 文 川 )의 박인속( 朴 麟 續 ), 삼수의 박이만( 朴 履 萬 ), 갑산의 이기주( 李 基 柱 ), 영흥의 이인영( 李 仁 榮 )ㆍ김성필( 金 聖 必 ), 길주( 吉 州 ) 의 윤민동( 尹 敏 同 ), 경성( 鏡 城 ) 관노 한용( 漢 用 ), 길주의 지윤호( 池 允 浩 ), 고원의 남순서( 南 順 西 ), 영흥의 차경락( 車 京 洛 ), 정평의 김기후( 金 基 厚 ), 북청의 김진규( 金 震 奎 ), 안변의 김영호 ( 金 永 鎬 ), 홍원의 안승교( 安 承 敎 ), 고원의 김관존( 金 觀 存 ), 안변의 최중서( 崔 仲 瑞 ), 북청의 정 수영( 鄭 守 英 ), 덕원의 정기복( 鄭 基 復 )과 본조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은 명 단 가운데 낭천( 狼 川 )의 서범일( 徐 範 一 ), 임천의 이천일( 李 千 一 ), 운산의 김학현( 金 學 顯 ), 금 성의 양태현( 梁 泰 鉉 ), 신계의 이성룡( 李 成 龍 ), 옥천의 이치옥( 李 致 玉 ), 여산의 김세련( 金 世 鍊 ), 부령( 富 寧 )의 박서경( 朴 西 景 )ㆍ서상희( 徐 相 禧 ), 개령( 開 寧 )의 김민호( 金 玟 鎬 ), 선천( 宣 川 ) 의 임태록( 林 泰 祿 ), 안동의 김학풍( 金 學 豐 ), 선산의 정인태( 鄭 麟 泰 ), 함열의 김일태( 金 一 泰 ), 홍원의 안춘원( 安 春 源 ), 고금도의 최학길( 崔 學 吉 ), 임자도의 탁기환( 卓 琦 桓 ), 강릉의 승려 지 선( 智 仙 ), 연안의 이이녕( 李 彝 寧 ), 초도의 사노 만복( 萬 卜 ), 경성의 김 조이( 金 召 史 ), 정주의 김수명( 金 壽 命 ), 청안( 淸 安 )의 김봉계( 金 奉 桂 ), 하동의 김원명( 金 元 明 ), 청도의 장한홍( 張 漢 弘 )과 충청도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은 명단 가운데 남원의 조상길( 趙 尙

169 169 - 吉 ), 평창의 이용필( 李 容 弼 ), 경산의 성덕윤( 成 德 允 ), 장기의 곽기풍( 郭 基 豐 ), 창평의 맹홍술 ( 孟 弘 述 ), 봉화의 전후식( 田 后 植 ), 고산의 원한흥( 元 漢 興 ), 이원의 이상필( 李 象 弼 ), 강령의 신 보국( 申 甫 國 ), 문화( 文 化 )의 신용순( 申 用 淳 ), 김제의 배연대( 裵 連 大 ), 낙안의 김마동( 金 馬 同 ) 과 황해도에서 유배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은 명단 가운데 옥천의 최한배( 崔 漢 培 ), 가산의 홍종환( 洪 宗 煥 ), 청산의 송현극( 宋 玄 極 ), 곽산의 이행지( 李 行 之 ), 상원( 祥 源 )의 김행덕 ( 金 行 德 ) 등을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도의 도신들에게 분부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 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9년 6월 22일(병자) /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신숙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조동필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신숙( 申 橚 )ㆍ이인교( 李 寅 喬 ), 첨지중추부사 조정하( 趙 正 夏 )ㆍ이필기( 李 泌 基 ), 선전관 이교준( 李 敎 駿 )ㆍ신태희( 申 泰 熙 )ㆍ이계흥( 李 啓 興 ), 내금위장 구석조( 具 奭 祖 ), 오위장 구병선( 具 秉 善 )ㆍ안광영( 安 光 榮 )ㆍ민덕현( 閔 德 顯 )ㆍ유춘호( 柳 春 浩 ), 중추부 경력 안응호( 安 膺 浩 )가 모두 병으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김익제( 金 翼 濟 )는 승중 조모( 承 重 祖 母 )의 나이가 지금 70세여서 법으로 볼 때 먼 곳으로 부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9년 12월 20일(임신) / 대청도에 진을 설치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는 황해 감사 심동신의 장계 황해 감사 심동신( 沈 東 臣 )이 장계하기를, 대청도( 大 靑 島 )에 진( 鎭 )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가의 여부에 대해 충분히 헤아려 보았습니 다. 대청도는 백령도( 白 翎 島 ) 소속으로 땅도 좁고 백성도 적어 굳이 진을 설치할 필요가 없 을 듯합니다. 부근의 오차진( 吾 叉 鎭 )과 조니진( 助 泥 鎭 )은 모두 해로( 海 路 )의 요충지로 진보 ( 鎭 堡 )를 두어 방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옮겨 저기에 설치함은 또한 신중히 처리할 일에 관 계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군국사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고종 20년 1월 20일(임인) / 장연 등에 오차진 등을 옮겨 설치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계

170 170 - 통리군국사무아문이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 심동신( 沈 東 臣 )의 장계를 보니, 장연( 長 淵 )과 대청도( 大 靑 島 )에 진을 설치 하는 데에 대한 편리 여부를 자세히 상의하여 확정하였는데, 땅이 한편으로 치우쳐 있고 백 성이 적으며, 또한 백령진( 白 翎 鎭 )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따로 설치할 것이 없고, 부근에 오차진( 吾 叉 鎭 )과 조니진( 助 泥 鎭 ) 양 진은 모두 바닷길의 요충지로 응당 진보( 鎭 堡 )와 방수 ( 防 守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을 옮겨 저곳에 설치하는 것은 또한 어렵게 여기고 조 심해야 할 일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판부하기를, 군국사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고 명하셨습니다. 이 섬은 본래 백령도에 속하고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지금 굳이 별도로 진을 설치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바닷길의 요충지에 있는 양 진을 이 땅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은 더욱 이 무의미합니다.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0년 5월 13일(임진) / 통어영 어사 이교복과 상피의 혐의가 있는 백령 첨사 허경에 대해 품처해 주기를 청하는 황해도 수군절도사 이규학의 장계에 대해 회계하는 병조의 계목 병조 계목에, 원 문건은 첨부하였습니다. 황해도 수군절도사 이규학( 李 奎 鶴 )의 장계를 보니, 백령 첨사 ( 白 翎 僉 使 ) 허경( 許 璥 )은 통어사 이교복( 李 敎 復 )의 처조카로서 상피해야 할 혐의가 있으니, 해조를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상피법으로는 아랫사람이 갈려야 하니, 백령 첨 사 허경을 법전에 따라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하였다 / 고종 20년 5월 14일(계사)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한경원( 韓 敬 源 )은 나오고, 참판 정낙용( 鄭 洛 鎔 )은 병이고, 참의 박봉빈( 朴 鳳 彬 )은 규장각에 나아갔고, 참지 현필제( 玄 弼 濟 )는 입직인데 나왔고, 동부승지 조동만은 나왔 다. 윤하정( 尹 夏 楨 )을 지중추부사로, 이기혁( 李 基 赫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종건( 李 鍾 健 )ㆍ이종긍 ( 李 種 兢 )ㆍ임백현( 林 百 鉉 )을 동지훈련원사로, 이창렴( 李 昌 濂 )을 훈련원 도정으로, 임형준( 任 衡 準 )ㆍ김준구( 金 駿 求 )를 선전관으로, 유정로( 柳 鼎 魯 )를 내금위장으로, 조희주( 趙 羲 周 )를 겸 사복장으로, 이능섭( 李 能 燮 )ㆍ김준렬( 金 駿 烈 )ㆍ김원규( 金 元 奎 )를 오위장으로, 민귀호( 閔 龜 鎬 ) 를 충장위장으로, 이한승( 李 漢 承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승균( 金 昇 均 )ㆍ서광범( 徐 光 範 )을 문 신겸선전관으로, 남궁영( 南 宮 泳 )을 수문장으로, 변득규( 邊 得 圭 )를 금위영 초관으로, 이창호 ( 李 昌 鎬 )를 어영청 초관으로, 노기찬( 盧 璣 燦 )을 수문장으로, 이교칠( 李 敎 七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홍학주( 洪 鶴 周 )를 강원도 중군으로 삼았다. 오위장 가설에 한성운( 韓 成 運 )ㆍ박영 규( 朴 永 奎 )ㆍ유상은( 柳 相 殷 )ㆍ이재민( 李 在 敏 )ㆍ이준상( 李 遵 祥 )ㆍ이능전( 李 能 銓 )ㆍ곽영묵( 郭 永

171 171 - 默 )ㆍ김제근( 金 濟 根 )ㆍ정상천( 鄭 象 千 )ㆍ유정조( 柳 政 祚 )ㆍ유도일( 柳 道 一 )ㆍ안경수( 安 敬 壽 )ㆍ김 경희( 金 慶 喜 )ㆍ최도민( 崔 道 敏 )ㆍ박인수( 朴 麟 秀 )ㆍ이창혁( 李 昌 爀 )ㆍ유문( 柳 雯 )ㆍ최영춘( 崔 迎 春 ) ㆍ김종석( 金 宗 錫 )ㆍ지성해( 池 成 海 )를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 가설에 황헌주( 黃 憲 周 )를 단부 하고, 부장 가설에 황한주( 黃 翰 周 )를 단부하고, 수문장 가설 두 자리에 김제동( 金 濟 東 )ㆍ김 동학( 金 東 學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유만원( 兪 晩 源 ), 부호군에 유찬규( 劉 贊 圭 ), 부사과에 유 봉수( 柳 鳳 秀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21년 3월 14일(기축) / 황해 감사 윤우선 등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죽은 중국 사람을 매장한 후 석표를 세울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 윤우선( 尹 宇 善 )과 수사 이규학( 李 奎 鶴 )의 장계를 보니, 장연부( 長 淵 府 ) 백 령진( 白 翎 鎭 )에 표류하여 온 중국 사람 1명이 신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다가 곧 죽었습니다. 매장하고 석표( 石 標 )를 세우는 절차를 각별히 신칙하고 부서진 배의 재목은 공선( 空 船 )의 예 에 따라 연한이 되거든 불사르는 일을 묘당을 시켜 품지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번 에 표류하여 온 사람에게 문정( 問 情 )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참으로 그렇겠으나, 끝내 구제 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그 고을에 각별히 신칙하여 후히 매장한 후 곧 석표를 세우고 배의 재목은 착실히 유치해 둘 것이며, 연유를 갖춘 자문( 咨 文 )을 승문원을 시켜 지 어서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6월 5일(정축) / 백령도의 백성이 화상( 華 商 )을 살해한 일 등에 대해 엄히 조사하여 치계할 것 등을 청하는 황해 감사 윤우선의 장계 황해 감사 윤우선( 尹 宇 善 )의 장계에, 백령도( 白 翎 島 )의 백성이 무리를 모아 화상( 華 商 ) 을 살해하고 그들의 화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서는 별도로 사관( 査 官 )을 정해 엄히 조사하여 치계하게 하고, 해당 첨사 이교칠( 李 敎 七 )은 우선 파출한 다음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 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성내( 省 內 )에서 일어났는데도 즉시 살펴 알지 못 하였으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한 데 대하여 이정래에게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 回 諭 )하라. 하였다 / 고종 21년 6월 9일(신사)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이교칠을 서리를 보내 잡아올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172 172 - 황해 감사 윤우선( 尹 宇 善 )의 장계에,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교칠( 李 敎 七 )을 우선 파출하고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한 데 대해 계하하였습니다. 이교칠이 지금 임 소에 있으니, 규례에 의하여 본부의 서리를 보내 교대한 후에, 잡아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대명하기를 기다려 나수하라. 하였다 / 고종 21년 6월 14일(병술)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겸판서 이재원( 李 載 元 )은 나왔고, 참판 조은승( 曺 殷 承 )은 병이고, 참의 이동연( 李 東 淵 )은 입직이고, 참지 조경순( 趙 璟 淳 )은 병이고, 동부승지 이정래는 나왔다. 임상준( 任 商 準 )을 지훈련원사로, 민영익( 閔 泳 翊 )ㆍ오시중( 吳 時 中 )을 동지중추부사로, 백낙훈 ( 白 樂 薰 )ㆍ이의근( 李 義 根 )을 동지훈련원사로, 이원의( 李 瑗 儀 )를 선전관으로, 윤석인( 尹 錫 仁 ) 을 내금위장으로, 이규삼( 李 奎 參 )을 겸사복장으로, 강주흠( 姜 周 欽 )ㆍ오기모( 吳 箕 模 )ㆍ김재풍 ( 金 在 豐 )ㆍ홍영주( 洪 永 疇 )ㆍ김창식( 金 昌 植 )을 오위장으로, 이명순( 李 命 淳 )을 경복궁 위장으 로, 조완순( 趙 完 順 )을 경희궁 위장으로, 심기택( 沈 琦 澤 )ㆍ이의덕( 李 義 悳 )을 문신겸선전관으 로, 신복모( 申 福 模 )를 수문장으로, 이낙희( 李 樂 熙 )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강태희( 姜 泰 熙 ) 를 경기 중군으로, 현승운( 玄 昇 運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이유신( 李 裕 臣 )을 청산도 첨사 ( 靑 山 島 僉 使 )로 삼았다. 첨지 가설에 민긍식( 閔 肯 植 )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신석년( 申 錫 秊 )ㆍ 김창희( 金 昌 熙 )ㆍ정완묵( 鄭 完 默 )ㆍ조존승( 趙 存 昇 ), 부호군에 이태진( 李 泰 鎭 )ㆍ이정필( 李 正 弼 ), 부사과에 정인성( 鄭 寅 星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겸 태안진병마첨절제사 호서수군방어사 안흥수성장관향장( 兼 泰 安 鎭 兵 馬 僉 節 制 使 湖 西 水 軍 防 禦 使 安 興 守 城 將 管 餉 將 )에 홍재희( 洪 在 羲 ) 를, 선전관 가설에 양도환( 梁 道 煥 )을 단부하였다 / 고종 21년 7월 28일(경오) / 백령 첨사 현승운을 검찰관으로 임명하여 중국 어선들에 대해 증명서를 살펴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계 김문현이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근년에 바다에 관한 금령이 해제되면서 황해도 일대에 중국 어선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왕래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관청에서 조사하지 않는다면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게 될 뿐만 아니 라, 또한 포구의 무지한 백성들이 혹시 사단을 빚을 우려가 있습니다.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현승운( 玄 昇 運 )을 검찰관으로 임명하여 우리나라에 정박하고 있는 중국 어선들에 대하여 증 명서를 살펴 조사하는 한편 포구의 백성들을 단속하여 규정을 위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 단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73 / 고종 21년 8월 1일(임신) / 각도의 유지 도류안 중에 강원도 회양의 장운학 등을 즉시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김문현이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油 紙 ) 도류안( 徒 流 案 ) 중에 강원도 회양( 淮 陽 )의 장운학( 張 雲 學 ), 낭천( 狼 川 )의 손봉학( 孫 鳳 鶴 ), 간성( 杆 城 )의 배학진( 裵 學 振 ), 강릉( 江 陵 )의 유천만( 柳 千 萬 ), 김화( 金 化 )의 안 정옥( 安 正 玉 ), 흡곡( 歙 谷 )의 유성렬( 柳 星 烈 ), 간성의 전천여( 全 千 汝 ), 삼척( 三 陟 )의 이순흥( 李 淳 興 ), 홍천( 洪 川 )의 유태흥( 柳 泰 興 ), 김화의 이순영( 李 順 永 ), 금성( 金 城 )의 이복돌( 李 卜 乭 )ㆍ 오윤옥( 吳 允 玉 ), 고성( 高 城 )의 승( 僧 ) 화산( 花 山 ), 울진( 蔚 珍 )의 집종 필영( 必 永 ), 홍천의 김흥 주( 金 興 周 ), 평해( 平 海 )의 김재득( 金 在 得 ), 춘천( 春 川 )의 김천득( 金 千 得 )ㆍ송지훈( 宋 芝 勳 ), 평 해의 임성록( 林 聖 錄 ), 안협( 安 峽 )의 이도익( 李 度 益 ), 울진의 백경수( 白 慶 洙 ), 간성의 도문환 ( 都 文 煥 ), 양양( 襄 陽 )의 주인식( 朱 仁 植 ), 낭천의 방일문( 房 一 文 ), 양구( 楊 口 )의 이사진( 李 士 鎭 ), 양양의 유상용( 柳 相 用 ), 홍천의 함월룡( 咸 月 龍 ), 삼척의 조태경( 趙 泰 慶 ), 강릉의 강광수 ( 姜 光 守 ), 홍천의 송상련( 宋 相 連 )ㆍ김윤택( 金 允 澤 ), 통천( 通 川 )의 이맹칠( 李 孟 七 ), 양양의 이 완영( 李 完 永 ), 삼척의 김치백( 金 致 伯 ), 회양의 김영환( 金 永 煥 ), 철원( 鐵 原 )의 문초운( 聞 肖 雲 ), 금성의 승 재운( 在 云 ), 강릉의 김영기( 金 永 基 ), 김화의 천여석( 千 汝 石 ), 평해의 이태규( 李 泰 奎 ), 평창( 平 昌 )의 이원하( 李 源 夏 ), 양양의 이노진( 李 魯 鎭 ), 홍천의 김막동( 金 莫 同 ), 금성의 곽응률( 郭 應 律 ), 강릉의 이도일( 李 道 日 ), 양구의 김시원( 金 始 源 ), 평해의 문무희( 文 武 喜 ), 평 창의 장원조( 張 元 祚 ), 홍천의 박병옥( 朴 炳 玉 ), 울진의 김용봉( 金 用 鳳 ), 인제( 麟 蹄 )의 이상열 ( 李 相 說 ), 양구의 조용문( 趙 用 文 ), 간성의 권영규( 權 永 奎 ), 울진의 김두술( 金 斗 述 ), 횡성( 橫 城 ) 의 송용현( 宋 用 鉉 ), 안협의 박제정( 朴 濟 貞 ), 김화의 조봉학( 趙 鳳 學 ), 정선( 旌 善 )의 이학여( 李 學 汝 ), 안협의 종 용복( 龍 福 ), 금성의 박재권( 朴 在 權 ), 낭천의 강기풍( 康 基 豐 ), 충청도 보은 ( 報 恩 )의 이흥규( 李 興 奎 ), 정산( 定 山 )의 김덕업( 金 德 業 ), 홍주( 洪 州 )의 방중근( 方 仲 根 ), 진잠 ( 鎭 岑 )의 윤경동( 尹 敬 東 ), 회인( 懷 仁 )의 함광옥( 咸 光 玉 ), 단양( 丹 陽 )의 정완한( 鄭 完 漢 ), 연풍 ( 延 豐 )의 정원석( 鄭 元 錫 ), 보은의 정재봉( 鄭 在 鳳 ), 괴산( 槐 山 )의 박영삼( 朴 永 三 )ㆍ김성범( 金 盛 凡 ), 옥천( 沃 川 )의 양봉학( 梁 鳳 鶴 ), 영춘( 永 春 )의 정경오( 鄭 敬 五 ), 회덕( 懷 德 )의 서귀성( 徐 貴 成 ), 문의( 文 義 )의 심장홍( 沈 長 洪 ), 충주( 忠 州 )의 원한갑( 元 漢 甲 ), 진천( 鎭 川 )의 백운집( 白 云 集 ), 신창( 新 昌 )의 박준상( 朴 駿 祥 ), 청주( 淸 州 )의 권회규( 權 會 圭 ), 온양( 溫 陽 )의 황진성( 黃 鎭 成 ), 정산의 현인손( 玄 仁 孫 ), 목천( 木 川 )의 이인봉( 李 仁 奉 ), 신창의 박계백( 朴 啓 伯 ), 옥천의 김팽길( 金 彭 吉 ), 충주의 사노 철주( 哲 柱 ), 목천의 이도원( 李 道 元 )ㆍ김군석( 金 君 錫 ), 아산( 牙 山 )의 송덕유( 宋 德 裕 ), 문의의 박치갑( 朴 致 甲 ), 부여( 扶 餘 )의 백용여( 白 容 汝 ), 청산( 靑 山 )의 박 정소( 朴 正 韶 ), 정산의 최응봉( 崔 應 鳳 ), 전의( 全 義 )의 이성흠( 李 成 欽 ), 영춘의 박영지( 朴 永 址 ) ㆍ이계준( 李 啓 俊 ), 진잠의 이휘정( 李 輝 貞 ), 음성( 陰 城 )의 여화집( 余 和 執 ), 청풍( 淸 風 )의 이경 서( 李 京 西 ), 제천( 堤 川 )의 김치원( 金 致 元 ), 청양( 靑 陽 )의 박기수( 朴 基 守 ), 청풍의 김학래( 金 學 來 ), 정산의 하상락( 河 相 洛 ), 괴산의 이장석( 李 長 石 ), 영춘의 이유능( 李 儒 能 ), 청풍의 우형귀 ( 禹 亨 龜 ), 홍산( 鴻 山 )의 김천룡( 金 千 龍 ), 옥천의 안도치( 安 道 致 ), 청풍의 임동길( 林 東 吉 ), 영동 ( 永 同 )의 최철이( 崔 哲 伊 ), 황간( 黃 澗 )의 김윤장( 金 允 長 ), 영동의 곽구석( 郭 求 錫 ), 한산( 韓 山 )의 김윤식( 金 允 植 ), 서산( 瑞 山 )의 문상권( 文 尙 權 ), 회덕의 조학련( 趙 學 連 ), 예산( 禮 山 )의 원재일 ( 元 在 一 ), 한산의 배승준( 裵 承 俊 ), 홍산의 김여장( 金 汝 章 ), 문의( 文 義 )의 송규익( 宋 圭 翼 ), 서천

174 174 - ( 舒 川 )의 최학렬( 崔 學 烈 ), 부여의 김희성( 金 熹 成 ), 한산의 이원순( 李 元 順 ), 남포( 藍 浦 )의 김명 하( 金 明 夏 ), 음성의 시장석( 施 章 錫 ), 괴산의 봉달문( 奉 達 文 ), 정산의 한영배( 韓 永 培 ), 문의의 김형진( 金 亨 鎭 ), 전의의 손세근( 孫 世 根 ), 진천의 천월아( 千 月 牙 ), 황해도 풍천( 豐 川 )의 이경묵 ( 李 景 默 )ㆍ김문경( 金 文 京 ), 백령( 白 翎 )의 김순석( 金 順 石 ), 서흥( 瑞 興 )의 이해창( 李 海 昌 ), 김천 ( 金 川 )의 공운서( 孔 雲 瑞 )ㆍ박석숭( 朴 石 崇 ), 송화( 松 禾 )의 서광일( 徐 光 一 ), 풍천의 박필흥( 朴 必 興 )ㆍ최윤만( 崔 允 萬 ), 장련( 長 連 )의 서용기( 徐 用 基 ), 송화의 이수길( 李 壽 吉 )ㆍ유영우( 劉 永 祐 ), 초도( 椒 島 )의 이노일( 李 魯 日 ), 김천의 최우선( 崔 遇 先 ), 평산( 平 山 )의 윤학수( 尹 學 洙 ), 곡산( 谷 山 )의 이경린( 李 京 麟 ), 평산의 이집남( 李 集 男 ), 곡산의 윤태산( 尹 太 山 ), 평산의 장기봉( 張 基 奉 ), 김천의 김임권( 金 任 權 ), 풍천의 변치현( 邊 致 賢 ), 수안( 遂 安 )의 염만금( 廉 萬 金 ), 안악( 安 岳 )의 조학돌( 趙 學 乭 ), 곡산의 이장우( 李 章 宇 ), 안악의 이학길( 李 學 吉 ), 평산의 이윤석( 李 潤 錫 ), 서흥( 瑞 興 )의 윤기준( 尹 基 俊 ), 송화의 이승현( 李 昇 鉉 ), 곡산의 박노원( 朴 老 元 ), 봉산( 鳳 山 )의 반필주( 潘 弼 周 ), 신계( 新 溪 )의 최경문( 崔 景 文 ), 봉산의 신원필( 辛 元 必 )ㆍ황찬조( 黃 贊 祚 ), 황주( 黃 州 )의 김병원( 金 炳 元 ), 송화의 심의준( 沈 宜 俊 ), 토산( 兎 山 )의 안형중( 安 瑩 中 ), 송화의 박백동( 朴 伯 同 ), 신계의 조형하( 趙 亨 夏 ), 송화의 서찬권( 徐 贊 權 ), 수안의 정필준( 鄭 必 俊 ), 토 산의 이병두( 李 秉 斗 ), 곡산의 김성유( 金 成 裕 ), 토산의 김명집( 金 明 執 ), 수안의 조복손( 趙 福 孫 ), 신계의 손천만( 孫 千 萬 ), 평안도 순안( 順 安 )의 경복강( 景 福 綱 ), 강서( 江 西 )의 유영계( 柳 榮 啓 ), 증산( 甑 山 )의 김상영( 金 尙 永 ), 순안의 손종옥( 孫 宗 玉 ), 중화( 中 和 )의 송길이( 宋 吉 伊 ), 상 원( 祥 原 )의 김심술( 金 心 述 ), 강서( 江 西 )의 최중원( 崔 重 元 ), 상원의 강홍식( 姜 弘 植 ), 맹산( 孟 山 ) 의 김영학( 金 永 學 ), 강동( 江 東 )의 이흥준( 李 興 俊 ), 벽동( 碧 潼 )의 조수봉( 趙 壽 鳳 ), 위원( 渭 原 )의 신덕수( 申 德 秀 ), 삭주( 朔 州 )의 최학이( 崔 學 伊 ), 위원의 박문홍( 朴 文 弘 ), 삭주의 김인보( 金 仁 甫 ), 덕천( 德 川 )의 권영규( 權 永 奎 ), 순안의 조승윤( 曺 昇 允 ), 초산( 楚 山 )의 김창근( 金 昌 根 ), 삼 화( 三 和 )의 최춘기( 崔 春 祺 ), 용강( 龍 岡 )의 김복근( 金 福 根 ), 중화의 김병홍( 金 炳 弘 ), 양덕( 陽 德 ) 의 박제화( 朴 齊 和 ), 은산( 殷 山 )의 조용인( 趙 龍 仁 ), 삼화의 조후근( 趙 厚 根 ), 희천( 熙 川 )의 김종 류( 金 宗 瑬 ), 은산의 신태규( 申 泰 圭 ), 자산( 慈 山 )의 원낙창( 元 洛 昌 ), 강서의 임재소( 林 栽 昭 ), 운 산( 雲 山 )의 이중달( 李 仲 達 ), 영유( 永 柔 )의 신광서( 申 光 西 ), 용강의 김익효( 金 益 孝 ), 곽산( 郭 山 ) 의 이주성( 李 周 成 ), 영유의 최운경( 崔 雲 卿 ), 상원의 박일쇠( 朴 一 釗 ), 덕천의 민정호( 閔 丁 鎬 ), 자산의 김재석( 金 才 石 ), 박천( 博 川 )의 유자근순( 兪 自 斤 淳 ), 은산의 윤정복( 尹 正 福 ), 철산( 鐵 山 )의 노정하( 盧 鼎 河 ), 가산( 嘉 山 )의 박정근( 朴 廷 瑾 ), 곽산의 봉원숙( 奉 元 叔 ), 희천의 이찬직 ( 李 贊 直 ), 성천( 成 川 )의 고화순( 高 化 順 ), 위원의 손청룡( 孫 靑 龍 ), 운산의 장고음( 張 古 音 ), 삭주 의 박성관( 朴 聖 寬 ), 전라도 무주( 茂 朱 )의 황영수( 黃 永 秀 ), 화순( 和 順 )의 김봉석( 金 奉 石 ), 구례 ( 求 禮 )의 박문호( 朴 文 虎 ), 해남( 海 南 )의 조정길( 曺 丁 吉 ), 장수( 長 水 )의 이시종( 李 時 宗 ), 흥양 ( 興 陽 )의 김장석( 金 長 石 )ㆍ박기영( 朴 基 永 ), 해남의 설상철( 薛 尙 哲 ), 순천( 順 天 )의 김완성( 金 完 成 ), 장수의 예시영( 芮 時 榮 ), 옥과( 玉 果 )의 김천이( 金 千 伊 ), 진산( 珍 山 )의 강두만( 姜 斗 萬 ), 신 지도( 薪 智 島 )의 배상범( 裵 相 範 ), 임자도( 荏 子 島 )의 장진규( 張 鎭 奎 ), 장성( 長 城 )의 이흥룡( 李 興 龍 ), 금갑도( 金 甲 島 )의 김진옥( 金 鎭 玉 ), 진도( 珍 島 )의 전수업( 田 壽 業 ), 무주의 이순룡( 李 順 龍 ), 흑산도( 黑 山 島 )의 홍관석( 洪 觀 錫 ), 화순의 송석손( 宋 石 孫 ), 임실( 任 實 )의 정성태( 鄭 聖 泰 ), 강 진( 康 津 )의 고성남( 高 聖 男 ), 운봉( 雲 峰 )의 김한성( 金 漢 成 ), 강진( 康 津 )의 이갑수( 李 甲 守 ), 장흥 ( 長 興 )의 이윤성( 李 允 成 ), 장성의 최희철( 崔 熙 喆 ), 태인( 泰 仁 )의 박인영( 朴 仁 永 ), 강진의 구순 오( 具 順 五 ), 임자도의 신돌삼( 申 乭 三 ), 지도( 智 島 )의 오태석( 吳 泰 錫 ), 동복( 同 福 )의 김경성( 金 慶 成 ), 해남의 이영광( 李 靈 光 ), 여산( 礪 山 )의 송계용( 宋 啓 用 ), 구례의 이사련( 李 士 連 ), 보성( 寶 城 )의 우명칠( 禹 命 七 ), 흥덕( 興 德 )의 박의견( 朴 義 見 ), 구례의 권성서( 權 聖 瑞 ), 광양( 光 陽 )의 신

175 175 - 상래( 申 尙 來 ), 장수의 박의홍( 朴 義 弘 ), 보성의 전경숙( 田 敬 淑 ), 곡성( 谷 城 )의 박순기( 朴 淳 基 ), 진산( 珍 山 )의 한공렬( 韓 公 烈 ), 곡성의 황보진( 皇 甫 榛 ), 흥양( 興 陽 )의 안주묵( 安 柱 默 ), 보성의 장진회( 張 鎭 晦 ), 장성의 이영운( 李 永 雲 ), 고산( 高 山 )의 최병희( 崔 秉 喜 ), 광양의 김삼명( 金 三 明 ), 창평( 昌 平 )의 김중한( 金 重 漢 ), 강진의 박치백( 朴 致 伯 ), 동복의 유가식( 柳 可 植 ), 진산의 승 근호( 謹 浩 ), 보성의 박옥이( 朴 玉 伊 ), 흥양의 김충원( 金 忠 元 ), 무주의 여기영( 呂 祺 永 ), 낙안 ( 樂 安 )의 정대우( 丁 大 瑀 ), 순천의 박규팔( 朴 奎 八 ), 강진의 이성규( 李 聖 奎 ), 운봉의 최정석( 崔 貞 石 ), 진산의 김마불( 金 馬 不 ), 고산의 김덕수( 金 德 秀 ), 강진의 임성모( 任 聖 模 ), 남원( 南 原 )의 이기열( 李 奇 烈 ), 진안( 鎭 安 )의 최봉래( 崔 鳳 來 ), 남원의 배정천( 裵 正 千 ), 강진의 서인보( 徐 仁 甫 ), 운봉의 황봉현( 黃 鳳 顯 ), 순창( 淳 昌 )의 정국형( 鄭 國 亨 ), 고산의 김경오( 金 京 五 ), 진안의 홍종욱( 洪 鍾 旭 ), 금산( 錦 山 )의 송봉규( 宋 鳳 奎 ), 여산의 김감용( 金 甘 用 ), 임실의 이문규( 李 文 奎 ), 여산의 김복성( 金 福 星 ), 태인의 이근제( 李 根 悌 ), 동복의 윤조순( 尹 祖 淳 ), 순창의 명건후 ( 明 健 厚 ), 담양( 潭 陽 )의 김석호( 金 錫 好 ), 강진의 이세복( 李 世 馥 ), 경상도 산청( 山 淸 )의 김상주 ( 金 相 珠 ), 함양( 咸 陽 )의 양한기( 梁 漢 基 ), 영해( 寧 海 )의 조벽홍( 趙 璧 弘 ), 산청의 김원창( 金 元 昌 ), 영해의 하이숙( 河 而 淑 ), 영양( 英 陽 )의 문명득( 文 明 得 ), 지례( 知 禮 )의 조이화( 趙 已 化 ), 문 경( 聞 慶 )의 이공인( 李 公 仁 ), 거제( 巨 濟 )의 이재근( 李 在 根 ), 의성( 義 城 )의 윤덕순( 尹 德 順 ), 예천 ( 醴 泉 )의 정창준( 鄭 昌 俊 ), 경산( 慶 山 )의 이창식( 李 昌 植 ), 문경( 聞 慶 )의 김흥관( 金 興 寬 ), 언양 ( 彥 陽 )의 김창식( 金 昌 植 ), 영천( 永 川 )의 이수익( 李 秀 益 ), 고령( 高 靈 )의 한세환( 韓 世 煥 ), 삼가 ( 三 嘉 )의 박순봉( 朴 順 奉 ), 장기( 長 鬐 )의 박희연( 朴 喜 淵 ), 용궁( 龍 宮 )의 공학성( 孔 學 聖 ), 경산의 승 의담( 義 淡 ), 영덕( 盈 德 )의 김칠득( 金 七 得 ), 안의( 安 義 )의 김덕제( 金 德 濟 ), 지례의 승 화욱 ( 化 郁 ), 상주( 尙 州 )의 이연재( 李 淵 在 ), 경주( 慶 州 )의 오문백( 吳 文 白 ), 하동( 河 東 )의 박원갑( 朴 元 甲 ), 영양의 정훈교( 鄭 勳 敎 ), 고성( 固 城 )의 윤복순( 尹 卜 順 ), 안의의 이성춘( 李 聖 春 ), 하동의 이철주( 李 鐵 柱 ), 순흥의 종돌몽( 鍾 乭 蒙 ), 영해의 안광두( 安 光 斗 )ㆍ이열조( 李 悅 祖 ), 함양의 서 수만( 徐 水 萬 ), 자인( 慈 仁 )의 이민인( 李 民 寅 ), 예안( 禮 安 )의 신경무( 申 景 武 ), 안동( 安 東 )의 윤병 현( 尹 炳 玹 ), 밀양( 密 陽 )의 오우성( 吳 右 性 ), 칠원( 漆 原 )의 김원삼( 金 元 三 ), 창녕( 昌 寧 )의 윤명심 ( 尹 明 心 ), 봉화( 奉 化 )의 이종길( 李 宗 吉 ), 비안( 比 安 )의 신달범( 申 達 凡 ), 장기의 유응하( 柳 應 夏 ), 안의의 유순근( 柳 順 根 ), 단성( 丹 城 )의 김영서( 金 永 瑞 ), 사천( 泗 川 )의 심명문( 沈 明 文 ), 함 양의 유여심( 柳 汝 心 ), 순흥의 전일영( 全 日 永 ), 용궁( 龍 宮 )의 김부성( 金 夫 成 ), 양산( 梁 山 )의 윤 영관( 尹 永 寬 ), 영해의 진만억( 陳 萬 億 ), 함안( 咸 安 )의 안치홍( 安 致 弘 ), 개령( 開 寧 )의 임재풍( 林 在 豐 ), 안의의 이회신( 李 會 臣 ), 하동의 송치삼( 宋 致 三 ), 경주의 조명순( 趙 明 巡 ), 산청의 이근 실( 李 根 實 ), 지례의 김열수( 金 悅 秀 ), 함창( 咸 昌 )의 곽치구( 郭 致 九 ), 흥해( 興 海 )의 장흥성( 張 興 成 ), 풍기( 豐 基 )의 김응한( 金 應 漢 ), 연일( 延 日 )의 이원영( 李 元 永 ), 흥해의 임서홍( 任 瑞 弘 ), 함 양의 강장복( 姜 長 卜 ), 문경의 왕덕구( 王 德 九 ), 고성( 固 城 )의 조간중( 趙 干 仲 ), 거제의 원공선 ( 元 公 善 ), 장기의 임명현( 林 命 鉉 ), 영양의 유윤성( 柳 允 成 ), 흥양의 민재영( 閔 載 永 ), 연일의 김 규현( 金 奎 鉉 ), 순흥의 최달보( 崔 達 甫 ), 산청의 신봉손( 申 奉 孫 ), 함경도 덕원( 德 源 )의 김석록 ( 金 石 祿 )ㆍ조창식( 趙 昌 植 ), 북청( 北 靑 )의 옥순( 玉 淳 )ㆍ유치용( 兪 致 用 )ㆍ박준룡( 朴 俊 龍 )ㆍ김복 동( 金 福 同 ), 삼수( 三 水 )의 오진호( 吳 鎭 浩 )ㆍ김덕여( 金 德 汝 ), 고원( 高 原 )의 한경준( 韓 景 俊 )ㆍ김 공선( 金 公 先 ), 갑산( 甲 山 )의 서창석( 徐 昌 石 ), 길주( 吉 州 )의 진봉환( 陳 奉 煥 )ㆍ조석돌( 趙 碩 乭 )ㆍ 최계진( 崔 季 眞 ), 명천( 明 川 )의 구병희( 具 秉 曦 )ㆍ기경선( 奇 景 先 ), 안변( 安 邊 )의 정태긍( 鄭 泰 兢 ), 이원( 利 原 )의 정경로( 鄭 敬 老 ), 홍원( 洪 原 )의 지성해( 池 成 海 ), 영흥( 永 興 )의 문정록( 文 正 祿 ), 정 평( 定 平 )의 박주보( 朴 周 甫 )ㆍ안효용( 安 孝 用 ), 강원도 강릉의 이응규( 李 應 奎 ), 인제의 민영운 ( 閔 泳 運 ), 춘천의 송원석( 宋 元 石 ), 삼척의 이봉룡( 李 奉 龍 ), 평창의 노관악( 盧 寬 岳 ), 양양의 김

176 176 - 판손( 金 判 孫 ), 통천의 한전석( 韓 全 石 ), 간성의 고경돌( 高 京 乭 ), 낭천의 정윤석( 鄭 允 石 ), 평해 의 이순철( 李 順 哲 ), 평창의 박춘식( 朴 春 植 ), 통천의 박순봉( 朴 順 奉 ), 강릉의 김봉길( 金 奉 吉 ), 간성의 조용복( 曺 用 福 ), 철원의 변학규( 邊 鶴 圭 ), 회양의 안정서( 安 正 西 ), 양구의 조성용( 趙 成 用 ), 강릉의 이호현( 李 浩 絢 ), 춘천의 손태익( 孫 太 益 ), 낭천의 강형팔( 姜 衡 八 ), 인제의 이재현 ( 李 在 玄 ), 양구의 한의팔( 韓 義 八 ), 철원의 조봉길( 趙 鳳 吉 ), 회양의 김성술( 金 星 述 ), 양구의 한 만달( 韓 萬 達 ), 고성( 高 城 )의 이이서( 李 理 書 ), 평해의 김정진( 金 正 眞 )ㆍ김주학( 金 柱 鶴 ), 철원의 김용갑( 金 龍 甲 ), 평강( 平 康 )의 김영수( 金 英 秀 ), 춘천의 송인오( 宋 仁 五 )ㆍ김사수( 金 士 水 ), 충청 도 청풍의 한한철( 韓 漢 哲 ), 옥천의 조계희( 曺 啓 憙 ), 청산의 여달룡( 呂 達 龍 ), 면천( 沔 川 )의 백 판만( 白 判 萬 ), 황해도 수안의 이경준( 李 京 俊 ), 풍천의 김성규( 金 聖 圭 ), 송화의 사노 보비( 甫 非 ), 김천의 사노 정선( 正 先 ), 봉산의 배장단( 裵 璋 短 ), 황주의 이양보( 李 良 甫 ), 신계의 김기원 ( 金 基 元 ), 평안도 양덕의 한대언( 韓 大 彥 ), 함종( 咸 從 )의 노성술( 盧 聖 述 ), 강서의 최남룡( 崔 南 龍 ), 삼등( 三 登 )의 최영일( 崔 永 一 ), 벽동의 오관일( 吳 觀 一 ), 함종의 권성범( 權 聖 範 ), 운산의 김북천( 金 北 千 ), 강원도 인제의 박정호( 朴 正 浩 ), 삼척의 유대흥( 劉 大 興 )ㆍ이찬하( 李 贊 夏 ), 이 천( 伊 川 )의 양원명( 梁 元 明 ), 삼척의 임관석( 林 寬 石 ), 강릉의 최병두( 崔 秉 斗 ), 전라도 임자도의 백완세( 白 完 世 ), 여산의 박승진( 朴 承 軫 ), 임실의 남두욱( 南 斗 郁 ), 보성의 이승실( 李 承 實 ), 낙 안의 정대우( 丁 大 瑀 ), 해남의 임상관( 林 相 觀 ), 함평의 최영지( 崔 永 之 ), 장흥의 한재근( 韓 載 根 ), 나주( 羅 州 )의 서재운( 徐 載 雲 ), 해남의 장흥순( 張 興 淳 ), 경상도 성주( 星 州 )의 조이복( 趙 已 卜 ), 하동의 현진묵( 玄 鎭 默 ), 문경의 이응상( 李 應 祥 ), 청도( 淸 道 )의 정성옥( 鄭 性 玉 ), 함창의 임제능( 任 濟 能 ), 함경도 정평( 定 平 )의 김기헌( 金 箕 憲 )ㆍ이화윤( 李 化 允 )ㆍ김광암( 金 光 巖 ), 단천 ( 端 川 )의 김덕훈( 金 德 薰 ), 영흥( 永 興 )의 이태안( 李 台 安 ), 문천( 文 川 )의 이진우( 李 震 宇 ) 등의 이름 아래 방( 放 ) 자를 써서 내렸습니다. 삼가 써서 내리신 대로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도 도신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1년 9월 19일(경신) / 백령 첨사 이교칠에 대해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 낼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목 또 계목에,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교칠( 李 敎 七 )의 원정에 운운하였습니다. 문목 내의 사연에 대해 범 범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으니,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판부하기를, 형추는 그만두고 의처하라. 하였다 / 고종 21년 10월 7일(무인) / 백령 첨사 이교칠의 죄에 대해 조율하여 보고하는 의금부의 조목 의금부 조목( 照 目 )에, 원 문건은 첨부하였습니다.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이교칠에 대한 본부의 의계( 議 啓 ) 안에,

177 177 - 도망하여 달아난 자를 염탐하여 붙잡아 왔다고는 하지만 변금( 邊 禁 )을 엄하게 지켜 경계하 지 못했으니, 율례( 律 例 )에 있어 참작하여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조 율하면, 죄가 태오십( 笞 五 十 )은 속전( 贖 錢 )을 거두고 현재 직임을 해면하고 별도로 서용하는 데 해당되며, 사죄( 私 罪 )입니다. 하였는데, 판부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공( 功 )으로 1등( 等 )을 감하라. 하였다 / 고종 21년 12월 30일(경자) / 백령도의 강도 이창서 등을 수영으로 압송하여 효수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지난번 중국인들을 협박해 짐을 빼앗은 백령도( 白 翎 島 )의 강도 가운데 도망중인 주동자 이 창서( 李 昌 西 ), 유영석( 柳 永 石 ), 우재기( 禹 在 己 ) 등 세 놈을 기한을 정해 탐문해 붙잡을 것으 로 엄하게 신칙하여 공문을 보냈는데 방금 황해 감사 윤우선( 尹 宇 善 )의 보고를 보니, 말하 기를 이상의 세 사람을 지금 붙잡아서 본 감영의 옥에 가두었다. 고 하였습니다. 무리를 모아 불사르고 겁탈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흉패하고, 상무( 商 務 )에 관계된 바로서 또 한 가벼이 처리할 수 없습니다. 현재 갇혀 있는 세 놈을 다시 끝까지 조사하여 주동자를 적 발해 수영( 水 營 )으로 압송한 뒤, 당해 수신( 帥 臣 )으로 하여금 크게 군민을 모아 놓고 효수하 여 뭇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고, 그 나머지 두 놈은 엄하게 형장을 가한 뒤 멀리 유배하라고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2년 1월 29일(기사) / 강원도 평강의 김정우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윤길구가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 各 道 )의 유지 도류안( 油 紙 徒 流 案 )에서 강원도 평강( 平 康 )의 김정우( 金 貞 禹 ), 횡성( 橫 城 )의 이운겸( 李 云 兼 ), 간성( 杆 城 )의 심승석( 沈 承 石 ), 철원( 鐵 原 )의 이화종( 李 和 鍾 ), 낭천( 狼 川 )의 조덕창( 趙 德 昌 ), 울진( 蔚 珍 )의 김세경( 金 世 景 ), 양양( 襄 陽 )의 최삼산( 崔 三 山 ), 평강의 한 을록( 韓 乙 彔 ), 양양의 김성준( 金 成 俊 ), 춘천( 春 川 )의 이응기( 李 應 棋 ), 이천( 伊 川 )의 김만조( 金 萬 祚 ), 회양( 淮 陽 )의 김성묵( 金 聖 默 ), 인제( 麟 蹄 )의 박제범( 朴 濟 範 ), 안협( 安 峽 )의 이경수( 李 慶 秀 ), 횡성의 신영학( 辛 永 學 ), 홍천( 洪 川 )의 우수강( 禹 守 强 ), 회양의 김덕주( 金 德 周 ), 인제의 허일( 許 溢 ), 평강의 이치봉( 李 致 鳳 ), 평창( 平 昌 )의 이창주( 李 昌 柱 ), 횡성의 서경두( 徐 敬 斗 ), 김 화( 金 化 )의 홍종화( 洪 宗 化 ), 정선( 旌 善 )의 우백용( 禹 白 用 ), 평창의 윤쾌룡( 尹 快 龍 ), 낭천의 박 상순( 朴 相 淳 ), 충청도 전의( 全 義 )의 송병현( 宋 丙 玄 ), 부여( 扶 餘 )의 김상화( 金 尙 化 ), 연기( 燕 岐 ) 의 이영배( 李 永 培 ), 임천( 林 川 )의 김정원( 金 正 元 ), 한산( 韓 山 )의 한군일( 韓 軍 日 ), 온양( 溫 陽 )의 홍금봉( 洪 今 奉 ), 아산( 牙 山 )의 이경룡( 李 慶 龍 ), 청안( 淸 安 )의 박태진( 朴 泰 震 ), 연풍( 延 豐 )의 윤 성원( 尹 聖 元 ), 음성( 陰 城 )의 김영성( 金 永 聲 ), 태안( 泰 安 )의 맹덕계( 孟 德 桂 ), 진천( 鎭 川 )의 신구

178 178 - 성( 愼 九 成 )ㆍ나동이( 羅 同 伊 ), 영동( 永 同 )의 안주석( 安 冑 錫 ), 음성의 안덕순( 安 德 淳 ), 홍주( 洪 州 )의 이우천( 李 瑀 天 ), 괴산( 槐 山 )의 우순용( 禹 順 用 ), 아산의 목종기( 睦 宗 祈 ), 음성의 우종업 ( 禹 宗 業 ), 진천의 우도성( 禹 道 成 ), 비인( 庇 仁 )의 홍청북( 洪 淸 北 ), 남포( 藍 浦 )의 주두신( 朱 斗 信 ), 황해도 곡산( 谷 山 )의 박작지( 朴 作 支 ), 평산( 平 山 )의 이정홍( 李 正 弘 ), 풍천( 豐 川 )의 나진칠 ( 羅 珍 七 ), 금천( 金 川 )의 김재신( 金 才 信 )ㆍ김수보( 金 壽 甫 ), 연안( 延 安 )의 박성집( 朴 聖 執 ), 평안 도 가산( 嘉 山 )의 노순직( 盧 舜 稷 ), 태천( 泰 川 )의 김상준( 金 尙 俊 ), 맹산( 孟 山 )의 이재선( 李 在 璿 ), 영변( 寧 邊 )의 조영진( 趙 永 鎭 ), 선천( 宣 川 )의 이붕래( 李 鵬 來 ), 병산( 甁 山 )의 송기인( 宋 基 寅 ), 양 덕( 陽 德 )의 정부업( 鄭 夫 業 ), 개천( 价 川 )의 오영만( 吳 永 萬 ), 전라도 옥과( 玉 果 )의 김학봉( 金 學 奉 ), 장수( 長 水 )의 하룡( 河 龍 ), 진산( 珍 山 )의 변호겸( 卞 浩 謙 ), 영광( 靈 光 )의 하성칠( 河 星 七 ), 나주( 羅 州 )의 손창조( 孫 昌 祚 ), 진산의 박진하( 朴 璡 河 ), 운봉( 雲 峯 )의 전상룡( 全 相 龍 ), 금산( 錦 山 )의 이중실( 李 重 實 ), 진산의 최경재( 崔 慶 載 ), 보성( 寶 城 )의 장석준( 張 錫 俊 ), 동복( 同 福 )의 이 구영( 李 九 榮 ), 담양( 潭 陽 )의 송종만( 宋 鍾 萬 ), 금구( 金 溝 )의 권종률( 權 鍾 律 ), 무주( 茂 朱 )의 박권 호( 朴 權 鎬 ), 진안( 鎭 安 )의 김재희( 金 載 熙 ), 곡성의 이원주( 李 元 周 ), 영암( 靈 巖 )의 김숙이( 金 淑 伊 ), 장수의 신상록( 申 尙 祿 ), 장흥( 長 興 )의 박광현( 朴 光 賢 ), 고산( 高 山 )의 오대석( 吳 大 錫 ), 순 창( 淳 昌 )의 노윤건( 盧 允 建 ), 장수의 김윤흥( 金 允 興 ), 담양의 시봉준( 施 鳳 俊 ), 여산( 礪 山 )의 이 봉심( 李 奉 心 ), 순창의 김주일( 金 周 一 ), 여산의 최청룡( 崔 靑 龍 ), 곡성( 谷 城 )의 정인검( 鄭 仁 儉 ), 고창( 高 敞 )의 권장운( 權 長 云 ), 금산의 이태현( 李 泰 玄 ), 동복의 강윤신( 姜 允 信 ), 경상도 영천 ( 榮 川 )의 고준성( 高 俊 成 ), 초계( 草 溪 )의 양학성( 梁 學 成 ), 삼가( 三 嘉 )의 이원극( 李 元 克 ), 개령 ( 開 寧 )의 양한필( 梁 漢 馝 ), 인동( 仁 同 )의 고화만( 高 華 滿 ), 안의( 安 義 )의 이석인( 李 錫 仁 ), 합천 ( 陜 川 )의 박삼실( 朴 三 實 ), 언양( 彥 陽 )의 장의복( 張 義 福 ), 청송( 靑 松 )의 임차옥( 林 次 玉 ), 연일 ( 延 日 )의 박기원( 朴 基 元 ), 영양( 英 陽 )의 채학원( 蔡 學 源 ), 문경( 聞 慶 )의 손범성( 孫 範 成 ), 영천 ( 永 川 )의 최창규( 崔 昌 奎 )ㆍ유명칠( 兪 明 七 ), 고령( 高 靈 )의 김치조( 金 致 祚 ), 고성( 固 城 )의 오수 영( 吳 秀 永 ), 고령의 임창성( 任 昌 成 ), 함경도 고원( 高 原 )의 강응학( 姜 應 學 ), 문천( 文 川 )의 김은 규( 金 銀 珪 ), 고원의 박현표( 朴 玄 杓 ), 영흥( 永 興 )의 박기형( 朴 基 亨 ), 이원( 利 原 )의 김영택( 金 永 澤 ), 안변( 安 邊 )의 박문언( 朴 文 彥 ), 길주( 吉 州 )의 승려 의열( 義 悅 )과 본조에서 유배를 떠났으 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못한 경상도 성주( 星 州 )의 이순정( 李 順 貞 ), 황해도 백령( 白 翎 )의 강 남산( 姜 南 山 ), 김순기( 金 順 基 ), 장련( 長 連 )의 최도선( 崔 道 仙 ), 송화( 松 禾 )의 김성용( 金 成 用 ), 황주( 黃 州 )의 노성국( 魯 城 局 ), 은율( 殷 栗 )의 정흥길( 鄭 興 吉 ), 장련의 이원석( 李 元 石 ), 강원도 홍천의 김만이( 金 萬 伊 ), 춘천의 신용성( 辛 用 成 ) 등에 대하여 방( 放 ) 자를 써서 내렸으므로, 삼가 써서 내리신 것에 따라 모두 즉시 풀어 주라고 각 해도( 該 道 )의 도신에게 분부하겠습 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2년 10월 22일(정해) / 장연부 백령진에 표류하여 온 사람을 육로로 돌려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지금 황해 감사 조경하와 수사( 水 使 ) 민치설( 閔 致 卨 )의 장계를 보니, 장연부( 長 淵 府 ) 백령 진( 白 翎 鎭 )에 표류하여 도착한 중국 사람 7명에게 정상을 물으니 모두 산동성( 山 東 省 ) 등주 부( 登 州 府 ) 복산현( 福 山 縣 ) 사람들로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도착하였다는데, 저들이 수로로

179 179 - 돌아가기를 바라니, 가진 물건 가운데에서 가져가기를 바라는 것은 가져가게 하고 부서진 배의 재목은 저들이 보는 곳에서 불사르는 것이 일에 합당할 듯하기에 묘당으로 하여금 품 지하여 분부하게 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표류한 사람이 수로로 가든 육로로 돌아 가든 원하는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은 전부터의 규례인데, 더구나 같은 나라 사람들이 타고 갈 수 있는 배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속히 돌아가게 하되 선재( 船 材 )를 불사르고 옷을 만들 어 주고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규례대로 시행하고, 떠나기를 기다려 장문( 狀 聞 )하고 아울러 2인이 먼저 돌아간 연유는 승문원을 시켜 자문( 咨 文 )을 지어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2년 11월 1일(을미) / 백령진에 표류한 중국 사람이 달아났으므로 그 책임을 물어 해당 첨사 현승운을 파출할 것을 청하는 황해 수사 민치설의 장계 황해 수사 민치설( 閔 致 卨 )의 장계에, 백령진( 白 翎 鎭 )에 표류하여 도착한 중국 사람을 도 리에 의거하여 잘 깨우쳐 주지 못한 관계로 이 두 사람이 곧장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변경( 邊 境 )의 정세로 헤아려 볼 때 매우 소홀히 한 것이니 해당 첨사 현승운( 玄 昇 運 )을 우선 파출하고 그 죄상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라고 한 것에 대하여, 심동헌 에게 전교하기를, 참작할 점이 없지 않다. 특별히 용서하되, 우선 죄를 지닌 채 직임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고종 23년 1월 30일(갑자) / 김기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김기석( 金 箕 錫 )을 지훈련원사로, 오치기( 吳 致 箕 )를 동지로, 이남희( 李 南 熙 )를 오위장으로, 이우면( 李 愚 冕 )을 조사위장( 曹 司 衛 將 )으로, 이기원( 李 基 遠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에 윤계환( 尹 啓 煥 )을 단부하고, 첨지 세 자리에 배종한( 裵 宗 漢 )ㆍ심만택( 沈 萬 澤 )ㆍ남계 흥( 南 啓 興 )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에 박순근( 朴 順 根 )ㆍ한석관( 韓 錫 寬 )을 단부하였다. 가설 은 정식에 따라 감하하였다. 호군에 송응래( 宋 應 來 )ㆍ원석오( 元 錫 五 )ㆍ김익홍( 金 益 洪 )ㆍ신명 연( 申 命 衍 ), 부호군에 박민식( 朴 敏 植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정기택( 鄭 騏 澤 )을 겸 훈련원 도정으로, 김윤구( 金 潤 九 )를 훈련원 판관으로, 맹계선( 孟 繼 善 )을 주부로, 손성헌( 孫 成 憲 )을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구지현( 具 志 鉉 )을 안원 만호( 安 原 萬 戶 )로, 김응모( 金 膺 模 )를 진주 영장 ( 晉 州 營 將 )으로, 정해식( 鄭 海 植 )을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이덕우( 李 德 雨 )를 안동 영장( 安 東 營 將 )으로, 이봉우( 李 鳳 宇 )를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으로, 이규연( 李 奎 演 )을 함흥 중군( 咸 興 中 軍 )으로 삼았다. 부호군에 김명구( 金 鳴 求 )를 단부하였다 / 고종 23년 2월 4일(무진) /

180 180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허유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친군별영의 계 민경호가 친군별영( 親 軍 別 營 )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허유( 許 洧 )는 전임 아이 첨사( 阿 伊 僉 使 )로서, 현승운( 玄 昇 運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초관 주대림( 朱 大 臨 )은 전임 전라 우수영 우후로서 모두 임소에 있습니 다. 군병을 거느리는 직임을 오랫동안 비워 두는 것은 근심스러우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3년 10월 7일(병인) / 각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자 등을 모두 석방하라고 해당 도신에게 분부하였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도류안( 油 紙 徒 流 案 ) 가운데서, 강원도에서는 이천( 伊 川 )원노( 院 奴 )인 억손( 億 孫 ), 회양( 淮 陽 ) 김 조이( 金 召 史 )ㆍ장광록( 張 光 祿 )ㆍ서병선( 徐 炳 瑄 )ㆍ김상실( 金 尙 實 ), 양구( 楊 口 ) 강주영( 姜 周 永 )ㆍ신태화( 申 泰 華 )ㆍ양칠석( 梁 七 錫 )ㆍ이양석( 李 養 錫 )ㆍ김상익( 金 相 翊 ), 금성 ( 金 城 )사노( 私 奴 )인 복이( 福 伊 )ㆍ함원집( 咸 元 集 ), 낭천( 狼 川 ) 신봉석( 申 鳳 石 )ㆍ강욱우( 姜 禹 )ㆍ 강수( 康 壽 ), 안협( 安 峽 ) 김계전( 金 桂 典 )ㆍ김보균( 金 普 均 ), 김화( 金 化 ) 박봉성( 朴 奉 成 ), 춘천( 春 川 ) 이기문( 李 起 文 ), 철원( 鐵 原 ) 이금천( 李 今 千 ), 같은 죄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낭천 백도준( 白 道 俊 ), 이미 배소( 配 所 )로 출발했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평해 ( 平 海 ) 정춘이( 鄭 春 伊 )ㆍ박성로( 朴 聖 老 ), 회양 전명수( 田 命 洙 ), 낭천 김철진( 金 哲 振 ), 충청도 에서는 남포( 藍 浦 ) 강지협( 姜 之 俠 ), 진천( 鎭 川 ) 김원보( 金 元 甫 ), 예산( 禮 山 ) 나성조( 羅 聖 祚 ), 대흥( 大 興 ) 나원석( 羅 元 錫 ), 문의( 文 義 ) 유치원( 柳 致 遠 ), 회덕( 懷 德 ) 이순길( 李 順 吉 ), 청풍( 淸 風 ) 김치주( 金 致 柱 ), 남포 김성진( 金 聖 辰 ), 보은( 報 恩 ) 김봉근( 金 鳳 近 ), 예산 김도현( 金 道 玄 ), 청풍 이건양( 李 建 陽 ), 남포 신기준( 申 基 俊 )ㆍ최영조( 崔 永 祚 ), 덕산( 德 山 ) 채필문( 蔡 必 文 ), 예 산 엄봉규( 嚴 鳳 圭 ), 단양( 丹 陽 ) 윤태익( 尹 泰 益 ), 영( 永 ) - 원문 빠짐 - 겸( 兼 ), 연산( 連 山 ) 이 기수( 李 基 秀 ), 덕산 이묵강( 李 墨 江 ), 청양( 靑 陽 ) 정노규( 鄭 魯 逵 ), 보은 조명순( 趙 明 淳 ), 임천 ( 林 川 )- 원문 빠짐 -, 예산 장석겸( 張 錫 謙 )ㆍ안효경( 安 孝 涇 ), 보은 이환규( 李 煥 圭 ), 정산( 定 山 ) 임천범( 林 千 凡 ), 연풍( 延 豐 ) 송사복( 宋 士 福 ), 영동( 永 同 ) 김순무( 金 順 武 ), 홍주( 洪 州 ) 김석 제( 金 錫 濟 ), 제천( 堤 川 ) 김명제( 金 命 濟 ), 괴산( 槐 山 ) 유원춘( 柳 元 春 ), 진천 김교익( 金 敎 益 )ㆍ이 희원( 李 希 元 )ㆍ박팔증( 朴 八 曾 ), 연기( 燕 岐 ) 김봉제( 金 鳳 濟 ), 온양( 溫 陽 ) 조계환( 趙 啓 煥 ), 진천 진봉기( 陳 鳳 基 ), 임천 황연한( 黃 演 漢 ), 덕산 오일성( 吳 日 成 ), 신창( 新 昌 ) 박윤식( 朴 允 植 ), 대흥 ( 大 興 ) 이정학( 李 正 學 ), 괴산( 槐 山 ) 김유진( 金 有 珍 ), 청양 한원칠( 韓 元 七 ), 남포 김만록( 金 萬 祿 ), 신창( 新 昌 ) 엄덕봉( 嚴 德 奉 ), 같은 죄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문의 홍계 룡( 洪 繼 龍 ), 단양 정호선( 鄭 浩 善 ), 은진( 恩 津 ) 허임이( 許 林 伊 ), 옥천( 沃 川 ) 박재근( 朴 在 根 ), 이 미 배소로 출발했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천안( 天 安 ) 최윤길( 崔 允 吉 ), 한산( 韓 山 ) 김복만( 金 福 萬 ), 온양 김복남( 金 福 男 ), 제천 강경식( 姜 景 植 ), 임천 이기성( 李 基 成 ), 황해도에 서는 안악( 安 岳 ) 김만하( 金 萬 河 ), 배천( 白 川 ) 유덕인( 柳 德 仁 ), 재령( 載 寧 ) 김난천( 金 蘭 千 ), 문 화( 文 化 ) 김덕로( 金 德 魯 )ㆍ유복원( 柳 福 遠 )ㆍ홍우종( 洪 祐 鍾 ), 안악 최운서( 崔 云 西 ), 같은 죄로

181 181 -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문화 박성열( 朴 成 悅 ), 수안( 遂 安 ) 김봉룡( 金 奉 龍 ), 이미 배소로 출발했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신계( 新 溪 ) 박용선( 朴 用 善 ), 배천 김수경( 金 壽 景 ), 초도( 椒 島 ) 김주원( 金 周 元 ), 백령( 白 翎 ) 정복( 鄭 福 ), 사노인 성만( 聖 萬 )ㆍ최돌이( 崔 乭 伊 ), 평안도에서는 순안( 順 安 ) 현사수( 玄 士 守 )ㆍ장석일( 張 錫 一 ), 가산( 嘉 山 ) 김용기( 金 用 基 ), 용천( 龍 川 ) 장의선( 張 義 善 ), 벽동( 碧 潼 ) 고성남( 高 性 男 ), 중화( 中 和 ) 이재근( 李 在 根 ), 상원( 祥 原 ) 김귀복( 金 貴 福 ), 벽동 박승길( 朴 昇 吉 ), 용천( 龍 川 ) 조춘영( 趙 春 永 ), 철산( 鐵 山 ) 정시화( 鄭 時 化 ), 숙천( 肅 川 ) 강군택( 姜 君 宅 ), 양덕( 陽 德 ) 조오득( 趙 五 得 ), 개천( 价 川 ) 김제언( 金 濟 彥 ), 가산 김용기( 金 龍 基 ), 이미 배소로 출발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용천 조상기( 趙 尙 基 ), 중화 이완근( 李 完 根 ), 순천( 順 川 ) 이홍익( 李 洪 翼 ), 전라도에서는 진산( 珍 山 ) 이세안( 李 世 安 )ㆍ조석수( 曺 錫 壽 ), 장성( 長 城 ) 한학리( 韓 鶴 履 )ㆍ한치명( 韓 致 明 ), 금산( 錦 山 ) 이경현( 李 瓊 鉉 )ㆍ이광진( 李 光 鎭 ), 익산( 益 山 ) 임희원( 林 熙 源 )ㆍ김금룡( 金 今 龍 ), 순창( 淳 昌 )- 원문 빠짐 - 봉상( 鳳 祥 ), 광양( 光 陽 ) 한치선( 韓 致 先 ), 해남( 海 南 ) 이운학( 李 云 學 ), 여산( 礪 山 ) 승( 僧 ) 행민 ( 行 敏 ), 임피( 臨 陂 ) 유흥복( 劉 興 福 ), 화순( 和 順 ) 박문경( 朴 文 京 ), 동복( 同 福 ) 김복만( 金 福 萬 )ㆍ 김치운( 金 致 雲 ), 임실( 任 實 ) 정대현( 丁 大 鉉 )ㆍ신거복( 申 巨 福 ), 남원( 南 原 ) 임창현( 林 昌 鉉 ), 낙 안( 樂 安 ) 남익환( 南 翊 煥 ), 순천( 順 天 ) 정일덕( 鄭 日 德 ), 임실 엄무련( 嚴 戊 連 ), 용담( 龍 潭 ) 이천 규( 李 千 奎 ), 담양 이지민( 李 志 敏 ), 강진( 康 津 ) 김상렬( 金 商 烈 ), 순천 김병일( 金 秉 一 ), 임피 김 유근( 金 有 根 ), 흥덕( 興 德 ) 신숙진( 申 叔 眞 ), 동복 시봉석( 施 奉 錫 ), 영광( 靈 光 ) 장흥록( 張 興 祿 ), 용안( 龍 安 ) 김성언( 金 性 彥 ), 나주( 羅 州 ) 김상득( 金 尙 得 ), - 원문 빠짐 -김기종( 金 箕 宗 ), 고산 ( 高 山 ) 오윤근( 吳 允 根 ), 함열( 咸 悅 ) 김봉현( 金 奉 鉉 ), 용안 유항균( 柳 恒 均 ), 고산 송만( 宋 晚 )- 원문 빠짐 - 산( 山 ) 박봉석( 朴 鳳 錫 ), 고산 성하욱( 成 夏 郁 ), 무주( 茂 朱 ) 김진태( 金 振 台 ), 동복 박인석( 朴 仁 石 ), 무주 정은철( 鄭 恩 哲 ), 고산 임헌성( 任 憲 成 )ㆍ명건학( 明 健 學 ), 화순 박정삼( 朴 正 三 ), 같은 죄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옥과( 玉 果 ) 김상준( 金 尙 俊 ), 이미 배 소로 출발했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고산 박치홍( 朴 致 洪 ), 여산 이석현( 李 奭 鉉 )ㆍ김 윤진( 金 潤 鎭 ), 경상도에서는 장기( 長 鬐 ) 정만기( 鄭 晚 基 ), 단성( 丹 城 )정순주( 鄭 順 周 )ㆍ정재회 ( 鄭 在 晦 )ㆍ한치삼( 韓 致 三 )ㆍ박윤명( 朴 允 明 ), 영양( 英 陽 ) 오화집( 吳 化 集 ), 안동( 安 東 ) 백운환( 白 雲 煥 )ㆍ김동섭( 金 東 涉 ), 풍기( 豐 基 ) 이돌석( 李 乭 錫 )ㆍ송재헌( 宋 載 憲 )ㆍ채동일( 蔡 東 日 ), 용궁 ( 龍 宮 ) 전용기( 全 龍 基 ), 예천( 醴 川 ) 김원복( 金 元 福 )ㆍ김수만( 金 壽 萬 ), 언양( 彥 陽 ) 이춘실( 李 春 實 ), 예안( 禮 安 ) 노( 奴 )인 명철( 明 哲 ), 인동( 仁 同 ) 윤이남( 尹 二 南 ), 문경( 聞 慶 ) 윤성보( 尹 成 甫 ) ㆍ박지영( 朴 智 永 )ㆍ황만석( 黃 萬 石 )ㆍ이정문( 李 正 文 ), 상주( 尙 州 ) 송대현( 宋 大 顯 )ㆍ윤경부( 尹 景 溥 ), 장기 조순권( 曺 順 權 )ㆍ신규근( 辛 奎 根 )ㆍ탁광삼( 卓 光 三 ), 영천( 榮 川 ) 이은명( 李 殷 明 ), 밀양 ( 密 陽 ) 지암석( 池 巖 石 )ㆍ김수경( 金 水 京 ), 하동( 河 東 ) 이병휴( 李 炳 休 ), 순흥( 順 興 ) 박만옥( 朴 萬 玉 ), 개령( 開 寧 ) 양두환( 梁 斗 煥 ), 거창( 居 昌 ) 배찬서( 裵 贊 西 ), 함양( 咸 陽 ) 김춘옥( 金 春 玉 ), 함 창( 咸 昌 ) 김익수( 金 益 秀 ), 같은 죄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문경 최인이( 崔 仁 伊 )ㆍ박장욱( 朴 長 旭 ), 언양 최순지( 崔 順 之 ), 순흥 현치수( 玄 致 秀 ), 이미 배소로 출발했으나 아 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안의( 安 義 ) 김우상( 金 禹 相 ), 함양 김기봉( 金 基 奉 ), 남해( 南 海 ) 이수 훈( 李 秀 勳 ), 상주 이영복( 李 永 福 ), 함경도에서는 홍원( 洪 原 ) 최원순( 崔 元 順 )ㆍ박인관( 朴 仁 寬 ) ㆍ김화윤( 金 和 允 )ㆍ김준철( 金 俊 哲 ), 안변( 安 邊 ) 홍명선( 洪 明 善 )ㆍ엄성집( 嚴 性 集 )ㆍ이우경( 李 佑 景 )ㆍ한극리( 韓 極 履 )ㆍ신덕로( 申 德 魯 )ㆍ이문백( 李 文 白 )ㆍ박상진( 朴 相 鎭 ), 북청( 北 靑 ) 윤필화 ( 尹 弼 和 )ㆍ이원근( 李 源 根 ), 단천( 端 川 ) 김일찬( 金 一 贊 )ㆍ이상필( 李 相 弼 ), 이원( 利 原 ) 이용우( 李 龍 愚 )ㆍ서임선( 徐 林 善 )ㆍ한화석( 韓 化 石 ), 고원( 高 原 ) 백양근( 白 良 根 ), 영흥( 永 興 ) 김상수( 金 尙 秀 ), 같은 죄로 석방해야 하는데 아직 석방되지 않은 단천 김안변( 金 安 邊 ), 이미 배소로 출

182 182 - 발했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회령( 會 寧 ) 한원교( 韓 元 敎 ), 이원 이군오( 李 君 五 ) 등에 게 방( 放 ) 자( 字 )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린 데 의거하여 모두 즉시 풀어 주라고 각 해당 도신에게 분부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4년 6월 29일(을묘)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전세진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친군별영의 계 친군별영이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전세진( 田 世 鎭 )은 전임 창성 부사( 昌 城 府 使 )로서, 박항래( 朴 恒 來 )는 전임 나 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서, 박면동( 朴 勉 東 )은 전임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으로서, 이기원( 李 基 遠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남계흥( 南 啓 興 )은 전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서 모두 임소에 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오래 비워 두는 것은 근심스러우니, 모두 개차하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4년 6월 29일(을묘)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이병교( 李 炳 敎 ), 참의 홍시형( 洪 時 衡 )은 병 이고, 참지 김우현( 金 禹 鉉 )은 입직이고, - 승지는 원문 빠짐 -정우식( 鄭 愚 植 )을 훈련원 도정 으로, 양문환( 梁 文 煥 )ㆍ홍필유( 洪 必 裕 )를 선전관으로, 윤귀선( 尹 龜 善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이민중( 李 敏 中 )을 전라 병사로, 조희중( 趙 羲 中 )을 초도 첨사( 椒 島 僉 使 )로, 이재정( 李 在 靖 ) 을 내금위장으로, 이승구( 李 承 九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민항( 李 敏 恒 )을 판관으로, 이도함( 李 道 咸 )을 청주 영장으로, 이창렬( 李 昌 烈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유봉수( 柳 鳳 秀 )를 전주 영 장으로, 신종균( 申 從 均 )을 나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민영완( 閔 泳 完 )을 공주 영장( 公 州 營 將 ) 으로, 박원화( 朴 元 和 )를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으로, 남치원( 南 致 源 )을 경기 중군( 京 畿 中 軍 )으 로, 김병원( 金 炳 元 )ㆍ오연숙( 吳 然 淑 )을 오위장으로, 신정균( 申 正 均 )ㆍ심은택( 沈 殷 澤 )을 선전 관으로, 유기선( 柳 冀 先 )을 함경 중군( 咸 鏡 中 軍 )으로, 최우교( 崔 禹 敎 )ㆍ임귀성( 林 龜 成 )을 창덕 궁 위장으로, 이교성( 李 敎 性 )을 훈련원 정으로, 이규선( 李 圭 選 )을 충청 병마 우후로, 이기방 ( 李 起 邦 )을 선전관으로, 심은택( 沈 殷 澤 )을 훈련원 첨정으로, 민영철( 閔 泳 哲 )을 판관으로, 이 주영( 李 周 永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이인성( 李 寅 聲 )을 안흥 첨사( 安 興 僉 使 )로, 이정모( 李 鼎 模 )ㆍ현위( 玄 鍏 )를 오위장으로, 이계선( 李 啓 善 )ㆍ박추진( 朴 樞 鎭 )을 고산리 첨사( 高 山 里 僉 使 )로, 김채영( 金 埰 榮 )을 혜산 첨사( 惠 山 僉 使 )로, 이건호( 李 建 鎬 )ㆍ홍채( 洪 埰 )를 훈련원 부정 으로, 남택원( 南 宅 元 )ㆍ이한익( 李 漢 翼 )을 수문장으로, 이근응( 李 根 應 )을 안원 만호( 安 原 萬 戶 ) 로, 이민수( 李 敏 秀 )ㆍ김사민( 金 思 玟 )을 오위장으로, 홍채( 洪 埰 )를 선전관으로, 김재곤( 金 載 坤 ) 을 선적 첨사( 善 績 僉 使 )로, 조학봉( 趙 學 鳳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로, 이계선( 李 啓 善 )을 훈련 원 부정으로, 원준( 元 浚 )을 첨정으로, 어병완( 魚 秉 玩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용철( 李 龍 喆 )을 주문 첨사( 注 文 僉 使 )로, 김한구( 金 漢 九 )를 이산도 별장( 里 山 島 別 將 )으로, 박희덕( 朴 煕

183 183 - 德 )을 선전관으로, 백낙형( 白 樂 亨 )ㆍ민영철( 閔 泳 哲 )을 훈련원 첨정으로, 최기봉( 崔 基 鳳 )을 방 답 첨사( 防 踏 僉 使 )로, 오응묵( 吳 應 默 )을 청성 첨사( 淸 城 僉 使 )로, 염두하( 廉 斗 河 )를 문성 첨사 ( 文 城 僉 使 )로, 임귀성( 林 龜 成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김여화( 金 麗 華 )를 식송 만호( 植 松 萬 戶 )로, 이병위( 李 秉 偉 )를 분산 별장( 盆 山 別 將 )으로, 홍용호( 洪 龍 浩 )를 인산 별장( 釰 山 別 將 )으 로, 이재준( 李 在 晙 )을 훈련원 첨정으로, 권재윤( 權 在 允 )ㆍ염창진( 廉 昌 鎭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복연( 金 福 淵 )을 광량 첨사( 廣 梁 僉 使 )로, 엄태형( 嚴 泰 炯 )을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오연숙 ( 吳 然 淑 )을 마량 첨사( 馬 梁 僉 使 )로, 황진기( 黃 鎭 基 )를 월송 만호( 越 松 萬 戶 )로, 박원식( 朴 元 植 ) 을 남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로, 김재홍( 金 在 洪 )을 안골 만호( 安 骨 萬 戶 )로, 김정규( 金 鉦 圭 )를 당포 만호( 唐 浦 萬 戶 )로, 유풍렬( 柳 灃 烈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정규( 李 正 奎 )ㆍ하용제( 河 龍 濟 ) 를 훈련원 주부로, 박시전( 朴 時 銓 )을 고령 첨사( 高 嶺 僉 使 )로, 최홍주( 崔 泓 柱 )를 안무 중군( 按 撫 中 軍 )으로, 김학신( 金 學 信 )을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로, 최봉우( 崔 鳳 羽 )를 금갑도 만호( 金 甲 島 萬 戶 )로, 서연기( 徐 連 基 )를 마도 만호( 馬 島 萬 戶 )로, 김도제( 金 度 濟 )를 이진 만호( 梨 津 萬 戶 ) 로, 한용규( 韓 用 奎 )를 보산 별장( 保 山 別 將 )으로, 안정식( 安 廷 植 )을 정포 만호( 井 浦 萬 戶 )로, 김 익진( 金 益 鎭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이용화( 李 鏞 和 )를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이기룡( 李 基 龍 )을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으로, 김덕조( 金 德 祚 )를 섬진 별장( 蟾 津 別 將 )으로, 황종운( 黃 鍾 雲 )을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황이중( 黃 利 中 )을 발포 만호( 鉢 浦 萬 戶 )로, 최학렴( 崔 學 濂 )을 막 령 만호( 幕 嶺 萬 戶 )로, 태성공( 太 聖 貢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이인상( 李 寅 相 )을 장목포 별 장( 長 木 浦 別 將 )으로, 이상곤( 李 相 坤 )ㆍ임병호( 林 炳 鎬 )를 훈련원 판관으로, 강예석( 康 禮 錫 )을 독용 별장( 禿 用 別 將 )으로, 김한철( 金 漢 哲 )을 조라포 만호( 助 羅 浦 萬 戶 )로, 최한건( 崔 漢 建 )을 아산 만호( 阿 山 萬 戶 )로, 홍한섭( 洪 翰 燮 )을 중추부 도사로, 심의건( 沈 宜 建 )ㆍ김익모( 金 益 模 )ㆍ 차영수( 車 永 洙 )를 훈련원 주부로, 이준기( 李 峻 器 )를 별영 초관( 別 營 哨 官 )으로, 유인형( 柳 寅 衡 )을 우림위장( 羽 林 衛 將 )으로, 마두원( 麻 斗 元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득수( 李 得 秀 )를 주부로, 이재석( 李 載 晳 )ㆍ김중협( 金 重 協 )을 수문장으로, 강이회( 姜 彛 會 )를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홍 일섭( 洪 馹 燮 )을 별영 초관으로, 정영묵( 鄭 英 默 )을 부장으로, 왕근호( 王 瑾 鎬 )를 통어영 우후 ( 統 禦 營 虞 候 )로, 이동섭( 李 東 燮 )을 경상좌도 병마 우후로, 이규연( 李 圭 淵 )ㆍ김호준( 金 好 俊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준용( 李 埈 鎔 )ㆍ김교헌( 金 敎 獻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임창호( 任 昶 鎬 )를 부 장으로, 조건하( 趙 健 夏 )를 별영 초관으로, 구창서( 具 昌 書 )를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엄두원 ( 嚴 斗 源 )ㆍ박경환( 朴 景 煥 )을 훈련원 판관으로, 서응수( 徐 應 洙 )를 주부로, 김재소( 金 在 韶 )를 오위장으로, 홍채( 洪 埰 )ㆍ박희덕( 朴 煕 德 )을 훈련원 첨정으로, 장교원( 張 敎 源 )ㆍ이동주( 李 東 柱 )ㆍ송광현( 宋 光 鉉 )ㆍ홍재영( 洪 在 英 )을 선전관으로, 이기주( 李 起 周 )를 수문장으로, 박영도 ( 朴 永 道 )를 충청 수군 우후로, 이민제( 李 敏 濟 )를 수문장으로, 어병익( 魚 秉 翼 )ㆍ이계창( 李 啓 昌 )을 훈련원 주부로, 이창호( 李 昌 鎬 )를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병헌( 李 秉 憲 )ㆍ이교영( 李 敎 榮 )을 별영 초관으로, 안덕기( 安 德 基 )를 경희궁 위장으로, 박준모( 朴 準 模 )ㆍ추봉욱( 秋 鳳 旭 ) ㆍ임백규( 任 百 圭 )를 훈련원 주부로, 이승윤( 李 承 潤 )을 전라좌도 수군 우후로, 이민태( 李 民 台 ) 를 창덕궁 위장으로, 백낙형( 白 樂 珩 )을 훈련원 첨정으로, 민규동( 閔 奎 東 )을 주부로, 박내영 ( 朴 來 榮 )을 수문장으로, 강영준( 康 永 濬 )을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로, 홍택후( 洪 澤 厚 )를 별영 초 관으로, 허뇌( 許 賚 )를 수문장으로, 구흥조( 具 興 祖 )ㆍ이병무( 李 秉 武 )ㆍ이정태( 李 鼎 泰 )ㆍ조희관 ( 趙 羲 觀 )을 선전관으로, 이병정( 李 丙 鼎 )ㆍ이규복( 李 圭 復 )을 별영 초관으로, 정기현( 鄭 基 賢 )ㆍ 정행렬( 鄭 行 烈 )ㆍ박유제( 朴 有 悌 )ㆍ백남철( 白 南 喆 )을 부장으로, 이동근( 李 東 根 )ㆍ이병인( 李 秉 寅 )ㆍ이두훈( 李 斗 薰 )ㆍ이규화( 李 圭 華 )ㆍ손흥표( 孫 興 杓 )를 수문장으로, 조재홍( 趙 載 弘 )을 훈련 원 판관으로, 장석태( 張 錫 泰 )ㆍ문세진( 文 世 鎭 )ㆍ한명규( 韓 命 奎 )를 주부로 삼았다.

184 184 - 훈련원 주부에 이시영( 李 時 永 )을 단부하였는데, 본원의 거관( 去 官 )이다. 부사과 김상순( 金 商 淳 )ㆍ안우묵( 安 佑 默 )ㆍ이기원( 李 基 元 )ㆍ박영우( 朴 永 愚 )ㆍ박창엽( 朴 昌 曄 )ㆍ한영주( 韓 暎 柱 ), 전 주 영장 유봉수( 柳 鳳 秀 ), 나주 영장 신종균( 申 從 均 ), 공주 영장 민영완( 閔 泳 完 ), 개성 중군 박원화( 朴 元 和 ), 경기 중군 남치원( 南 致 源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 加 資 ) 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신정균( 申 正 均 )을 단부하였 다. 함경 중군에 유기춘( 柳 冀 春 )을 제수하였다. 친군서영 초관 두 자리에 김상익( 金 相 益 )과 정흥각( 鄭 興 珏 )을 단부하고, 수문장 가설에 이석훈( 李 碩 薰 )을 단부하고, 동지에 박은호( 朴 殷 浩 )ㆍ고건현( 高 建 鉉 )을 단부하고, 첨지 두 자리에 황기설( 黃 基 說 )ㆍ이익량( 李 翊 亮 )을 단부하 였다. 훈련원 판관 어득찬( 魚 得 燦 ), 훈련원 주부 장준홍( 張 俊 泓 )ㆍ박진희( 朴 晉 煕 )ㆍ조재홍( 趙 載 弘 ), 이상을 정식에 따라 감하하였다 / 고종 25년 6월 27일(정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영환( 閔 泳 煥 )은 나왔고, 참판 이희로( 李 僖 魯 )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참 의 신병우( 愼 炳 佑 )는 입직이고, 참지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동부승지 윤용식( 尹 容 植 )은 나왔다. 유승환( 兪 勝 煥 )을 동지로, 이석응( 李 奭 應 )ㆍ신철( 申 徹 )을 내금위장으로, 안광규( 安 光 奎 )ㆍ홍 종선( 洪 鍾 善 )ㆍ이유신( 李 裕 信 )ㆍ박형철( 朴 炯 徹 )ㆍ박희홍( 朴 喜 泓 )ㆍ노희석( 盧 喜 錫 )을 오위장으 로, 이병익( 李 秉 翊 )ㆍ김시풍( 金 始 豐 )을 충장위장으로, 우석홍( 禹 錫 弘 )을 훈련원 주부로, 김사 준( 金 思 準 )ㆍ홍우정( 洪 祐 禎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김태현( 金 台 鉉 )ㆍ고옥( 高 鈺 )을 부장으로, 최석범( 崔 錫 範 )ㆍ김성연( 金 聲 演 )ㆍ김장현( 金 章 鉉 )을 수문장으로, 구연춘( 具 然 春 )을 백령 첨사 ( 白 翎 僉 使 )로, 이근주( 李 根 周 )를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최오길( 崔 五 吉 )을 안무중군( 按 撫 中 軍 )으로, 유여수( 柳 麗 洙 )를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허전( 許 奠 )을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한 증혁( 韓 曾 爀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양선겸( 梁 善 謙 )을 회령포 만호( 會 寧 浦 萬 戶 )로, 전용 하( 田 龍 夏 )를 이진 만호( 梨 津 萬 戶 )로 삼았다. 동지에 한진명( 韓 鎭 明 )을 단부하고, 가설에 박 희인( 朴 煕 仁 )ㆍ조존상( 趙 存 常 )ㆍ박봉섭( 朴 鳳 燮 )ㆍ임철호( 任 哲 鎬 )를 단부하고, 첨지에 원준상 ( 元 俊 常 )ㆍ이민항( 李 敏 恒 )을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에 유인주( 劉 寅 柱 )ㆍ추교신( 秋 敎 臣 )ㆍ박민 영( 朴 敏 永 )ㆍ한응연( 韓 應 淵 )ㆍ이경록( 李 景 祿 )ㆍ조성원( 趙 聖 遠 )ㆍ안준석( 安 駿 錫 )ㆍ윤건( 尹 楗 )ㆍ 최익봉( 崔 翼 鳳 )을 단부하였다. 수인 별장( 修 仁 別 將 ) 신 ( 辛 )과 금오 별장( 金 烏 別 將 ) 이 기룡( 李 基 龍 )을 서로 바꾸었는데,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대호군 이용회( 李 容 晦 ), 호군 조제화( 趙 濟 華 )ㆍ이재환( 李 載 煥 )ㆍ이병익( 李 炳 翼 )ㆍ조희일( 趙 煕 一 ), 부호군 김병길 ( 金 炳 吉 )ㆍ이의영( 李 儀 榮 )ㆍ신태규( 申 泰 珪 )ㆍ김영석( 金 永 錫 ), 부사직 이중덕( 李 重 德 ), 부사과 홍가유( 洪 嘉 裕 )ㆍ윤영필( 尹 永 弼 )ㆍ이병교( 李 秉 喬 )ㆍ서상집( 徐 相 集 )ㆍ홍준표( 洪 準 杓 )ㆍ윤익병 ( 尹 益 柄 )ㆍ김소( 金 昭 )ㆍ정재두( 鄭 在 斗 ), 부사용 홍성후( 洪 性 厚 )ㆍ방성혁( 方 聖 赫 )ㆍ오재만( 吳 在 晩 ), 급제 조장하( 趙 章 夏 )ㆍ이원순( 李 元 純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 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첨정 이교석( 李 敎 奭 )과 내승( 內 乘 ) 신정균( 申 政 均 )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185 / 고종 25년 6월 29일(기유)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이주영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김승규가 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이주영( 李 周 永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이고, 이종철( 李 鍾 哲 )은 전임 철 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모두 임소( 任 所 )에 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오랫동안 비워 두는 것은 민망스러운 일이니, 아울러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5년 6월 30일(경술) / 신병이 있는 백령 첨사 구연춘을 파출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구연춘( 具 然 春 )이 갑자기 신병이 생겨 가까운 시일 내에 길에 올라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실제 병세가 비록 이 와 같다 하더라도 변장의 직임은 일반적인 규례에 따라 개차해서는 안 되니,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력을 허용하라. 하였다 / 고종 25년 12월 28일(을사) / 추후 배소에 도착한 평해의 이덕여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추후 배소에 도착한 인원 중에 평해( 平 海 )의 이덕여( 李 德 汝 ), 홍천( 洪 川 )의 함용기 ( 咸 龍 基 ), 회양( 淮 陽 )의 채병조( 蔡 炳 祚 ), 평강( 平 康 )의 이규환( 李 奎 煥 ), 횡성( 橫 城 )의 이양여 ( 李 養 汝 )ㆍ최덕일( 崔 德 日 ), 철원( 鐵 原 )의 김순철( 金 順 哲 ), 금성( 金 城 )의 윤정홍( 尹 廷 弘 ), 철원 의 김석길( 金 石 吉 ), 평해의 조계준( 趙 桂 俊 ), 횡성의 정 소사( 鄭 召 史 ), 홍천( 洪 川 )의 김창기( 金 昌 基 ), 양구( 楊 口 )의 최용보( 崔 用 甫 ), 철원의 황윤백( 黃 允 伯 ), 강릉( 江 陵 )의 강창국( 姜 昌 國 ), 이천( 伊 川 )의 이만식( 李 晩 植 )ㆍ신도영( 申 道 永 ), 횡성의 신우( 申 楀 ), 인제( 麟 蹄 )의 홍치경( 洪 致 敬 ), 회양의 김신방( 金 信 方 ), 울진( 蔚 珍 )의 김완석( 金 完 錫 ), 통천( 通 川 )의 김용손( 金 用 孫 ), 홍 천의 사비( 私 婢 ) 정수( 丁 隨 )ㆍ강주향( 姜 周 香 ), 금성의 박재복( 朴 在 福 ), 언양( 彦 陽 )의 정홍두 ( 鄭 弘 斗 ), 봉화( 奉 化 )의 김흥원( 金 興 元 ), 청하( 淸 河 )의 이봉춘( 李 奉 春 ), 청도( 淸 道 )의 고양여 ( 高 良 汝 ), 순흥( 順 興 )의 윤문삼( 尹 文 三 ), 영덕( 盈 德 )의 오덕중( 吳 德 重 ), 문경( 聞 慶 )의 오연성 ( 吳 連 聲 ), 안의( 安 義 )의 심동익( 沈 桐 益 )ㆍ민영윤( 閔 泳 允 ), 거창( 居 昌 )의 곽영춘( 郭 永 春 ), 안의 의 양순서( 梁 順 西 ), 영천( 永 川 )의 박제양( 朴 濟 陽 ), 함양( 咸 陽 )의 오성모( 吳 成 模 ), 언양의 치공 ( 穉 恭 ), 고령( 高 靈 )의 배동욱( 裵 東 郁 ), 합천( 陜 川 )의 김평심( 金 平 心 ), 성주( 星 州 )의 김만기( 金 萬 基 ), 금산( 金 山 )의 이응칠( 李 應 七 ), 순흥( 順 興 )의 배용문( 裵 用 文 ), 산청( 山 淸 )의 안재용( 安 才

186 186 - 用 ), 연일( 延 日 )의 신상길( 申 相 吉 ), 군위( 軍 威 )의 김경수( 金 景 壽 ), 삼가( 三 嘉 )의 임기호( 任 岐 浩 ), 울산( 蔚 山 )의 사노( 私 奴 ) 원형( 元 亨 ), 인동( 仁 同 )의 고거석( 高 擧 石 ), 경산( 慶 山 )의 이인석 ( 李 仁 石 ), 하동( 河 東 )의 조만억( 趙 萬 億 ), 영덕의 박영조( 朴 永 祚 ), 청송( 靑 松 )의 김학현( 金 學 玄 ), 인동의 사노 순만( 順 萬 ), 양산( 梁 山 )의 김원근( 金 原 根 ), 성주( 星 州 )의 조인수( 趙 仁 守 ), 경 산의 한경여( 韓 景 汝 ), 안의의 김익현( 金 益 鉉 ), 풍기( 豐 基 )의 성경호( 成 敬 鎬 )ㆍ박용인( 朴 容 仁 ), 문경의 허돈( 許 燉 ), 함창( 咸 昌 )의 김재성( 金 在 誠 ), 금산의 이관옥( 李 寬 玉 ), 풍기의 김문화( 金 文 化 ), 함양의 강덕신( 姜 德 信 ), 흥해( 興 海 )의 박기진( 朴 岐 鎭 ), 고령의 김용운( 金 用 云 ), 순흥의 방유진( 方 有 辰 ), 경주( 慶 州 )의 중 봉순( 奉 順 ), 청송의 중 경호( 敬 浩 ), 의흥( 義 興 )의 중 대전( 大 典 ), 함양의 백미역( 白 未 亦 ), 단천( 端 川 )의 노비 금록( 金 祿 ), 영흥의 송주현( 宋 冑 玄 ), 회령( 會 寧 )의 민기현( 閔 基 顯 ), 홍원( 洪 原 )의 이치서( 李 致 瑞 )ㆍ정소회( 丁 所 回 ), 고원( 高 原 )의 김영근 ( 金 永 根 ), 단천의 원시화( 元 時 化 ), 홍원의 김용덕( 金 用 德 ), 명천( 明 川 )의 김순갑( 金 順 甲 ), 단천 의 중 장훈( 長 訓 ), 동복( 同 福 )의 김한용( 金 漢 用 ), 화순( 和 順 )의 황영수( 黃 永 秀 ), 장성( 長 城 )의 김순업( 金 順 業 ), 김제( 金 堤 )의 함덕지( 咸 德 智 ), 창평( 昌 平 )의 최민봉( 崔 黽 奉 ), 구례( 求 禮 )의 - 원문 빠짐 -, 연산( 連 山 )의 - 원문 빠짐 -, 여산( 礪 山 )의 송종욱( 宋 鍾 勖 ), 순천( 順 天 )의 김영 규( 金 永 奎 ), 영광( 靈 光 )의 김흥길( 金 興 吉 ), 장성의 남구하( 南 九 河 ), 구례의 김조술( 金 兆 述 ), 고 부( 古 阜 )의 김백룡( 金 百 龍 ), 화순의 방수경( 方 守 京 ), 용안( 龍 安 )의 조준승( 曺 準 承 ), 함열( 咸 悅 ) 의 차문형( 車 文 亨 ), 금산( 錦 山 )의 이현경( 李 賢 京 ), 동복의 최치문( 崔 致 文 ), 고산( 高 山 )의 김만 관( 金 萬 寬 ), 용담( 龍 潭 )의 윤복원( 尹 復 元 ), 흥덕( 興 德 )의 김수환( 金 守 煥 ), 고산의 박성길( 朴 性 吉 ), 여산의 권환( 權 煥 ), 화순의 홍상덕( 洪 相 德 ), 여산의 정윤성( 鄭 允 成 ), 운봉( 雲 峰 )의 김금 대( 金 今 大 ), 여산의 박곡선( 朴 谷 善 ), 곡성( 谷 城 )의 노비 성업( 星 業 ), 태인( 泰 仁 )의 이흥세( 李 興 世 ), 진산( 珍 山 )의 장 소사( 張 召 史 ), 토산( 兔 山 )의 김덕준( 金 德 俊 ), 배천( 白 川 )의 이춘식( 李 春 植 ), 평산의 어약우( 魚 若 愚 ), 곡산( 谷 山 )의 황보정( 黃 甫 鋌 ), 토산의 조춘명( 趙 春 明 )ㆍ김인석 ( 金 仁 石 ), 평산( 平 山 )의 윤선양( 尹 善 良 ), 연안( 延 安 )의 윤달영( 尹 達 永 ), 백령( 白 翎 )의 박이정 ( 朴 利 正 )ㆍ유 소사( 劉 召 史 )ㆍ양흥길( 梁 興 吉 ), 초도( 椒 島 )의 강재근( 姜 載 根 )ㆍ송치호( 宋 致 浩 ), 토산의 이한성( 李 漢 成 ), 서흥( 瑞 興 )의 박민흠( 朴 敏 欽 ), 장연( 長 連 )의 강철주( 姜 哲 柱 ), 수안( 遂 安 )의 임성삼( 林 成 三 ), 배천의 원등원( 元 登 遠 ), 신천( 信 川 )의 안달화( 安 達 和 ), 연안의 김태득 ( 金 太 得 ), 김천( 金 川 )의 박인환( 朴 仁 煥 ), 배천의 정재권( 鄭 在 勸 ), 문화( 文 化 )의 김찬현( 金 贊 鉉 ), 장연의 백남호( 白 南 浩 ), 안악( 安 岳 )의 박명개( 朴 命 介 ), 재령( 載 寧 )의 김관엽( 金 寬 燁 ), 신 계( 新 溪 )의 최원석( 崔 元 石 ), 강령( 康 翎 )의 관노( 官 奴 ) 종업( 宗 業 ), 영유( 永 柔 )의 김성천( 金 成 天 ), 삼등( 三 登 )의 신윤선( 申 允 善 ), 숙천( 肅 川 )의 조일만( 趙 日 萬 ), 삭주( 朔 州 )의 고미백( 高 美 白 ), 박천( 博 川 )의 송태순( 宋 泰 順 ), 창성( 昌 城 )의 김창운( 金 昌 云 ), 덕천( 德 川 )의 김계택( 金 啓 澤 ), 중화( 中 和 )의 정흥( 鄭 興 ), 삼등의 서사언( 徐 士 彦 ), 운산( 雲 山 )의 김수봉( 金 守 奉 ), 성천( 成 川 )의 이치화( 李 致 和 ), 가산( 嘉 山 )의 김인언( 金 仁 彦 ), 삼화( 三 和 )의 김응민( 金 應 敏 ), 영월( 寧 越 )의 김병리( 金 秉 履 ), 상원( 祥 原 )의 최용악( 崔 龍 岳 ), 강서( 江 西 )의 조필석( 趙 必 石 ), 순안( 順 安 )의 신여섭( 愼 汝 涉 ), 영유( 永 柔 )의 조남훈( 趙 南 勳 ), 순안의 서상홍( 徐 相 弘 ), 함종( 咸 從 )의 이 정옥( 李 廷 玉 ), 운산의 권종운( 權 鍾 云 ), 박천의 엄윤섭( 嚴 允 燮 ), 숙천의 허은석( 許 銀 錫 ), 덕천 의 오상준( 吳 尙 俊 ), 삭주( 朔 州 )의 양주영( 梁 柱 永 ), 영유의 송창수( 宋 昌 守 ), 증산( 甑 山 )의 이귀 성( 李 貴 成 ), 청주( 淸 州 )의 유성필( 柳 聖 弼 ), 전의( 全 義 )의 정성국( 鄭 成 國 ), 회덕( 懷 德 )의 이여백 ( 李 汝 伯 ), 전의의 김봉돌( 金 奉 乭 ), 청안( 淸 安 )의 김광진( 金 光 鎭 ), 정산( 定 山 )의 이의렬( 李 義 烈 ), 청주의 이병식( 李 秉 植 ), 진천( 鎭 川 )의 김영인( 金 泳 仁 ), 제천( 堤 川 )의 손필수( 孫 必 守 ), 괴 산( 槐 山 )의 김사수( 金 士 守 )ㆍ장운급( 張 雲 汲 ), 청양의 김화경( 金 華 慶 )ㆍ오화선( 吳 化 先 ), 연기

187 187 - ( 燕 岐 )의 최정문( 崔 正 文 ), 청안의 강성칠( 姜 星 七 ), 비인( 庇 仁 )의 최준오( 崔 俊 五 ), 단양( 丹 陽 )의 안재근( 安 在 根 ), 청풍( 淸 風 )의 최명구( 崔 明 九 ), 진잠( 鎭 岑 )의 남원술( 南 元 述 ), 옥천( 沃 川 )의 노 봉해( 盧 奉 海 ), 단양의 임원수( 林 遠 守 ), 영춘( 永 春 )의 김옥민( 金 玉 敏 ), 진잠의 최지호( 崔 之 祜 ) ㆍ심상흠( 沈 相 欠 ), 정산의 김금봉( 金 今 奉 ), 음성( 陰 城 )의 이희병( 李 羲 炳 ), 진잠의 이장곤( 李 長 坤 ), 괴산의 원석준( 元 錫 俊 ), 청양의 김윤홍( 金 潤 洪 ), 회덕의 박정운( 朴 定 云 ), 제천의 박봉래 ( 朴 鳳 來 ), 임천( 林 川 )의 김병엽( 金 炳 燁 ), 진천의 강집( 姜 執 ), 비인의 강성조( 姜 成 祚 ), 단양의 서정묵( 徐 正 默 ), 청양의 신영희( 申 永 煕 ), 괴산의 양계순( 梁 啓 淳 ), 청안의 연유돌( 延 有 乭 )과 배 소로 출발은 하였으나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인원 중에 평해의 김정한( 金 正 漢 ), 자산 ( 慈 山 )의 한윤석( 韓 允 錫 ), 곡산의 이형식( 李 亨 植 ) 등을 풀어 주라고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린 것에 의거하여 모두 즉시 풀어 주라고 각 해당 도신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1월 19일(을축) / 정배 죄인 양경장 등을 풀어 주도록 도신에게 분부했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정배 죄인( 定 配 罪 人 ) 가운데 미방질( 未 放 秩 )에 들어 있는 평해( 平 海 )의 양경장( 梁 敬 長 ), 김제( 金 堤 )의 김선이( 金 先 伊 ), 진안( 鎭 安 )의 박성근( 朴 聖 根 ), 진천( 鎭 川 )의 신병헌( 愼 炳 憲 ), 영흥( 永 興 )의 권정규( 權 鼎 奎 ), 흥양( 興 陽 )의 신덕순( 申 德 順 ), 이원( 利 原 )의 강수길( 姜 水 吉 ), 예천( 醴 泉 )의 이학재( 李 學 宰 ), 김화( 金 化 )의 최안기( 崔 安 基 ), 영흥( 永 興 )의 정이건( 鄭 履 健 ), 철원( 鐵 原 )의 이영실( 李 永 實 ), 위원( 渭 原 )의 오태근( 吳 泰 根 ), 예천의 최 조이( 崔 召 史 ), 온 양( 溫 陽 )의 정진환( 鄭 鎭 煥 ), 강릉( 江 陵 )의 김석조( 金 錫 祚 ), 초산( 楚 山 )의 이병구( 李 秉 九 ), 백령 ( 白 翎 )의 김봉칠( 金 鳳 七 ), 위원의 최진태( 崔 鎭 泰 ), 초산의 김세택( 金 世 澤 ), 보은( 報 恩 )의 김영 우( 金 永 ), 평산( 平 山 )의 정원백( 鄭 元 伯 ), 괴산( 槐 山 )의 김영관( 金 永 觀 ), 장흥( 長 興 )의 김영국 ( 金 永 國 ) 등에 대하여 방(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리신 대로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당 도신에게 각각 분부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3월 24일(기사) / 백령 첨사에 의망할 사람이 부족하므로 다른 도의 우후도 아울러 의망할 것을 청하는 병비의 계 병비의 말로 아뢰기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를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의망할 사람이 매우 적으니, 다른 도의 우후 도 아울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88 / 고종 26년 3월 24일(기사) / 이범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범진( 李 範 晉 )ㆍ정현석( 鄭 顯 奭 )을 동지로, 이근석( 李 根 奭 )을 동지훈련원사로, 구석조( 具 奭 祖 )를 겸 훈련원도정으로, 홍태섭( 洪 台 燮 )을 내금위장으로, 민봉호( 閔 鳳 鎬 )ㆍ박기우( 朴 起 羽 )ㆍ노병직( 盧 炳 稷 )ㆍ윤광국( 尹 光 國 )ㆍ박영시( 朴 永 蓍 )를 오위장으로, 김춘희( 金 春 煕 )를 조사 위장으로, 정동욱( 鄭 東 旭 )을 충익위장으로, 백상만( 白 相 萬 )ㆍ최원명( 崔 遠 明 )ㆍ박병주( 朴 秉 珠 ) 를 창덕궁 위장으로, 이경기( 李 敬 器 )ㆍ임태두( 任 泰 斗 )를 수문장으로, 윤하병( 尹 夏 炳 )을 총어 영 초관으로, 이근호( 李 根 鎬 )ㆍ이내봉( 李 來 鳳 )을 수문장으로, 권일규( 權 一 圭 )를 전라 우수사 로, 이동섭( 李 東 燮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오정선( 吳 鼎 善 )을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주 창두( 周 昌 斗 )를 나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서덕희( 徐 德 禧 )를 함경 중군으로, 이기완( 李 起 完 ) 을 서수라 만호( 西 水 羅 萬 戶 )로 삼았다. 양영만동 권관( 梁 永 萬 洞 權 管 )에 최성규( 崔 星 奎 )를 단 부하고, 동지에 이원묵( 李 源 默 )을 단부하고, 첨지에 조존복( 趙 存 復 )ㆍ이상흥( 李 商 興 )ㆍ조익희 ( 趙 益 煕 )를 단부하고, 훈련원 판관 가설에 민준식( 閔 峻 植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홍철주( 洪 澈 周 )ㆍ정기회( 鄭 基 會 )ㆍ이봉의( 李 鳳 儀 ), 호군에 서병무( 徐 丙 懋 )ㆍ김홍규( 金 弘 圭 )ㆍ이근석( 李 根 奭 ), 부호군에 김유행( 金 裕 行 )ㆍ오유선( 吳 有 善 )ㆍ이호철( 李 鎬 喆 )ㆍ김병수( 金 炳 秀 )ㆍ이규하 ( 李 圭 夏 )ㆍ이근풍( 李 根 豐 )ㆍ이규집( 李 奎 集 )ㆍ구달조( 具 達 祖 )ㆍ조희창( 趙 羲 昌 )ㆍ이주영( 李 冑 榮 ), 부사과에 윤호섭( 尹 皥 燮 )ㆍ채홍백( 蔡 弘 伯 )ㆍ진갑현( 陳 甲 鉉 )ㆍ최규승( 崔 圭 升 )ㆍ이능복( 李 能 馥 )ㆍ김정재( 金 鼎 載 )ㆍ강인회( 姜 仁 會 )ㆍ이태래( 李 泰 來 ), 김재화( 金 在 和 )ㆍ배병근( 裵 秉 根 )ㆍ 이양렬( 李 亮 烈 ), 부사용에 김제섭( 金 濟 燮 )ㆍ우성하( 禹 聖 河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 고종 26년 3월 27일(임신)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총어영 별장 구연창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또 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별장 구연창( 具 然 昌 )은 전임 전라 병사로서, 기사장 이병식( 李 秉 植 )은 전임 나주 영 장( 羅 州 營 將 )으로서, 이상덕( 李 相 悳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모두 임소에 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오래 비워두는 것은 근심스러운 일이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6년 12월 12일(계미) / 겸 백령진관오차포 수군동첨절제사를 오차포 수군첨절제사로 고쳐서 하비하겠다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의정부의 초기로 인하여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를 독립된 진( 鎭 )으로 시행하도록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겸 백령진관오차포 수군동첨절제사( 兼 白 翎 鎭 管 吾 叉 浦 水 軍 同 僉 節 制 使 )를 오차 포 수군첨절제사( 吾 叉 浦 水 軍 僉 節 制 使 )로 고쳐 하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189 189 -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7년 1월 29일(경오) / 이풍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풍호( 李 豐 鎬 )를 훈련원 정으로, 이근홍( 李 根 泓 )을 첨정으로, 이계훈( 李 啓 薰 )을 판관으 로, 이민긍( 李 敏 兢 )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홍태모( 洪 泰 謨 )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이 효영( 李 斅 永 )을 오위장으로, 서익보( 徐 翊 輔 )ㆍ이근응( 李 根 應 )을 선전관으로, 김귀선( 金 龜 善 ) 을 부장으로, 민영욱( 閔 泳 旭 )을 통우후( 統 虞 候 )로, 심언택( 沈 彦 澤 )을 동인 만호( 同 仁 萬 戶 )로, 고유련( 高 有 連 )ㆍ박영근( 朴 永 根 )을 오위장으로, 유과환( 兪 果 煥 )을 중추부 경력으로, 김규형 ( 金 圭 瀅 )을 훈련원 주부로, 양주환( 梁 柱 煥 )을 전라 병마우후로, 강두응( 姜 斗 鷹 )을 오위장으 로, 채규준( 蔡 奎 駿 )을 선전관으로, 김규창( 金 奎 昌 )을 중추부 도사로, 김규형( 金 圭 瀅 )을 훈련 원 판관으로, 이홍선( 李 弘 善 )을 평남 만호( 平 南 萬 戶 )로, 임찬호( 任 璨 鎬 )ㆍ유풍렬( 柳 灃 烈 )을 훈련원 부정으로, 유석응( 柳 錫 膺 )을 총어영 초관으로, 이두용( 李 斗 鎔 )을 황해 중군( 黃 海 中 軍 ) 으로, 김규형( 金 圭 瀅 )을 동인 만호로, 심의민( 沈 宜 敏 )을 충익위장으로, 이재곤( 李 載 崑 )ㆍ정현 오( 鄭 顯 五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윤자복( 尹 滋 復 )을 훈련원 첨정으로, 석태로( 石 泰 魯 )를 총어 영 초관으로, 김종협( 金 鍾 協 )ㆍ이춘달( 李 春 達 )을 창덕궁 위장으로, 윤경근( 尹 景 根 )ㆍ신현모 ( 申 鉉 謨 )를 훈련원 첨정으로, 윤상대( 尹 象 大 )를 판관으로, 이호신( 李 浩 信 )을 창덕궁 위장으 로, 유풍렬( 柳 灃 烈 )을 선전관으로, 홍기후( 洪 岐 厚 )를 훈련원 판관으로, 유봉근( 柳 鳳 根 )을 주 부로, 서상빈( 徐 相 斌 )을 선전관으로, 채규준( 蔡 奎 駿 )을 훈련원 부정으로, 정완진( 鄭 完 軫 )ㆍ윤 영창( 尹 永 昌 )을 첨정으로, 홍일섭( 洪 馹 燮 )ㆍ한문교( 韓 文 敎 )를 주부로, 이승룡( 李 承 龍 )을 첨지 로, 조한익( 趙 漢 翼 )을 선전관으로, 이용호( 李 容 鎬 )를 중추부 도사로, 반응연( 潘 應 淵 )을 훈련 원 판관으로, 정창현( 鄭 暢 鉉 )을 부장으로, 김동욱( 金 東 郁 )을 첨지로, 남봉원( 南 鳳 元 )을 좌변 포도청 종사관으로, 추종욱( 秋 鍾 旭 )을 장곶 첨사( 長 串 僉 使 )로, 유풍렬( 柳 灃 烈 )ㆍ정완영( 鄭 岏 永 )을 훈련원 첨정으로, 추희진( 秋 僖 縉 )을 주부로, 장한익( 張 漢 翊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유순우( 劉 淳 祐 )를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최호영( 崔 浩 英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동렬( 李 東 烈 )을 주부로, 신종원( 愼 宗 源 )을 수문장으로, 안문항( 安 文 恒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로, 김득 종( 金 得 宗 )을 시채 첨사( 恃 寨 僉 使 )로, 김긍현( 金 兢 鉉 )을 선전관으로, 김지규( 金 芝 圭 )를 중추 부 도사로, 최정규( 崔 廷 圭 )를 훈련원 주부로, 박세민( 朴 世 珉 )을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로, 신병 업( 申 秉 業 )을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조성희( 趙 誠 煕 )를 우익위장으로, 임병( 林 炳 )을 총어영 초관으로, 엄천욱( 嚴 天 郁 )을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장두순( 張 斗 順 )을 유원 첨사( 柔 遠 僉 使 ) 로, 백남기( 白 南 箕 )를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로, 이병화( 李 秉 和 )를 안무 중군( 按 撫 中 軍 )으로, 백 찬범( 白 燦 範 )을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이봉조( 李 鳳 朝 )를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로, 한익문( 韓 益 文 )을 금갑도 만호( 金 甲 島 萬 戶 )로, 오재흥( 吳 在 興 )을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이경신( 李 敬 信 )을 가덕 첨사( 加 德 僉 使 )로, 김학신( 金 學 信 )을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로, 한춘옥( 韓 春 玉 )을 남 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로, 김장준( 金 長 俊 )을 발포 만호( 鉢 浦 萬 戶 )로, 이철민( 李 哲 民 )을 용진 만호( 龍 津 萬 戶 )로, 장운택( 張 雲 澤 )을 훈련원 주부로, 조순석( 曺 順 碩 )을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 로, 김광석( 金 光 錫 )을 사량 만호( 蛇 梁 萬 戶 )로, 배홍기( 裵 弘 基 )를 고돌산 별장( 古 突 山 別 將 )으 로, 김영준( 金 永 俊 )을 화수산 별장( 花 水 山 別 將 )으로, 박내민( 朴 來 敏 )을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 로, 정낙신( 鄭 洛 信 )을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이시중( 李 時 中 )을 오로량 만호( 五 老 梁 萬 戶 )로,

190 190 - 윤도준( 尹 道 俊 )을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김원규( 金 元 奎 )를 임토 별장( 林 土 別 將 )으로, 이용 덕( 李 容 德 )을 좌시직으로, 안세열( 安 世 烈 )을 안골 만호( 安 骨 萬 戶 )로, 김달관( 金 達 寬 )을 목포 만호( 木 浦 萬 戶 )로, 호곤섭( 胡 昆 燮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김승학( 金 承 鶴 )을 분산 별장 ( 盆 山 別 將 )으로, 이민봉( 李 敏 鳳 )을 선전관으로, 한긍리( 韓 兢 履 )를 훈련원 주부로, 박희양( 朴 煕 陽 )ㆍ박성래( 朴 晠 來 )를 부장으로, 김두희( 金 斗 喜 )를 수문장으로, 이진하( 李 振 夏 )를 훈련원 첨 정으로, 강봉로( 姜 鳳 魯 )를 주부로, 김성중( 金 聲 重 )을 부장으로, 윤하병( 尹 夏 炳 )ㆍ김학용( 金 學 容 )을 수문장으로, 이택화( 李 宅 和 )를 오위장으로, 심형택( 沈 馨 澤 )을 선전관으로, 우춘희( 禹 春 煕 )를 훈련원 주부로, 임순학( 林 淳 學 )ㆍ정학선( 鄭 鶴 善 )을 수문장으로, 장석조( 張 錫 祚 )를 훈련 원 주부로, 문천용( 文 天 用 )ㆍ이인창( 李 寅 昌 )을 부장으로, 김정두( 金 正 斗 )를 수문장으로, 이건 석( 李 健 奭 )을 백치 첨사( 白 峙 僉 使 )로, 이승룡( 李 承 龍 )을 첨지로, 윤영한( 尹 泳 翰 )을 강화 중군 ( 江 華 中 軍 )으로, 강운형( 姜 雲 馨 )을 다대 첨사( 多 大 僉 使 )로, 정기만( 鄭 基 萬 )을 미조항 첨사( 彌 助 項 僉 使 )로, 장상룡( 張 相 龍 )을 전라좌도 수군우후로, 최근규( 崔 根 奎 )를 창덕궁 위장으로, 신 술호( 申 述 鎬 )를 부장으로, 박세진( 朴 世 鎭 )을 수문장으로, 신최희( 申 㝡 煕 )를 총어영 군사마로, 김계환( 金 啓 煥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이재민( 李 在 旼 )을 독구미 첨사( 獨 仇 味 僉 使 )로, 이 장용( 李 章 鎔 )ㆍ이경호( 李 景 鎬 )ㆍ이한익( 李 漢 翊 )을 선전관으로, 윤석필( 尹 錫 弼 )ㆍ장영지( 張 永 芝 )ㆍ유상희( 柳 相 煕 )ㆍ박노원( 朴 魯 源 )ㆍ이종호( 李 鍾 浩 )ㆍ윤창균( 尹 昌 均 )ㆍ이관현( 李 觀 鉉 )ㆍ이 민굉( 李 敏 宏 )을 부장으로, 조광표( 趙 光 杓 )ㆍ최규헌( 崔 奎 軒 )ㆍ이남극( 李 南 極 )ㆍ양은춘( 楊 殷 春 ) ㆍ김찬수( 金 瓚 洙 )를 수문장으로, 구인서( 具 寅 書 )ㆍ한복리( 韓 福 履 )ㆍ조선영( 趙 善 永 )을 총어영 초관으로, 윤달선( 尹 達 善 )을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으로, 홍재욱( 洪 在 昱 )을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 고종 27년 2월 3일(계유) / 전직의 임소에 있는 천총 이희진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또 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천총( 千 摠 ) 이희진( 李 喜 晉 )은 전임 철원 부사( 鐵 原 府 使 )로서, 기사장( 騎 士 將 ) 이동섭 ( 李 東 燮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이창현( 李 昌 鉉 )은 전임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으로 서, 조병무( 曺 秉 武 )는 전임 성당 첨사( 聖 堂 僉 使 )로서, 이장하( 李 莊 夏 )는 전임 다대포 첨사( 多 大 浦 僉 使 )로서, 이규설( 李 奎 卨 )은 전임 황해 중군( 黃 海 中 軍 )으로서, 초관 이승윤( 李 承 潤 )은 전임 전라좌도 수군우후( 全 羅 左 道 水 軍 虞 候 )로서 모두 임소에 있습니다. 군병을 거느리는 직 임을 오래 비워두는 것은 근심스러우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7년 11월 20일(병술) / 병비가 2차 정사에서 이병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병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이병헌( 李 秉 憲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안후선( 安 厚 善 )을 법성 첨사( 法 聖 僉 使 )로, 윤병권( 尹 秉 權 )을 볼하 첨사( 乶 下 僉 使 )로, 김동욱( 金 東 旭 )을 영종 첨 사( 永 宗 僉 使 )로 삼았다.

191 / 고종 27년 11월 26일(임진)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홍태모를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또 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홍태모( 洪 泰 謨 )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아직 임소에 있습니다. 군대 를 거느리는 직책을 오래 비워 두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9년 1월 5일(을축) / 통천에 유배된 김영순 등에 대해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 강원도 통천( 通 川 )에 유배된 김영순( 金 榮 順 ), 평강( 平 康 )에 유 배된 백은봉( 白 銀 奉 ), 고성( 高 城 )에 유배된 김재익( 金 才 益 ), 회양( 淮 陽 )에 유배된 신달천( 辛 達 千 ), 김화( 金 化 )에 유배된 김복동( 金 卜 同 ), 홍천( 洪 川 )에 유배된 김광신( 金 光 信 ), 양양( 襄 陽 )에 유배된 김천득( 金 千 得 ), 고성에 유배된 김봉학( 金 鳳 學 ), 양구( 楊 口 )에 유배된 정덕화( 鄭 德 化 ), 금성( 金 城 )에 유배된 김치정( 金 致 正 ), 낭천( 狼 川 )에 유배된 진이익( 陳 利 益 ), 안협( 安 峽 )에 유 배된 배원석( 裵 元 錫 ), 울진( 蔚 珍 )에 유배된 조화영( 趙 和 永 ), 홍천에 유배된 김봉학( 金 鳳 學 ), 김화에 유배된 양사장( 梁 士 長 ), 홍천에 유배된 임순업( 林 巡 業 ), 횡성( 橫 城 )에 유배된 안춘심 ( 安 春 心 ), 이천( 伊 川 )에 유배된 김원복( 金 元 福 ), 통천에 유배된 유영근( 劉 永 根 ), 금성에 유배 된 서원식( 徐 元 植 ), 양양에 유배된 이보천( 李 寶 千 ), 울진에 유배된 이기호( 李 起 鎬 ), 평강에 유배된 정재수( 丁 在 洙 )ㆍ박별록( 朴 別 錄 ), 통천에 유배된 조경화( 趙 景 化 ), 양구에 유배된 유치 서( 柳 致 西 ), 울진에 유배된 김덕교( 金 德 敎 ), 강릉( 江 陵 )에 유배된 홍종우( 洪 鍾 愚 ), 김화에 유 배된 양백겸( 梁 伯 兼 ), 이천에 유배된 임성일( 林 聖 一 ), 고성에 유배된 주학신( 朱 學 信 ), 평해( 平 海 )에 유배된 곽진방( 郭 辰 芳 ), 낭천에 유배된 윤명남( 尹 命 男 ), 평강에 유배된 조도성( 趙 道 成 ), 삼척( 三 陟 )에 유배된 석종욱( 石 宗 旭 ), 금성에 유배된 유홍인( 劉 弘 仁 ), 흡곡( 歙 谷 )에 유배된 황찬보( 黃 贊 甫 ), 삼척에 유배된 박만지( 朴 萬 之 ), 강릉에 유배된 이쌍길( 李 雙 吉 ), 안협에 유배 된 신범표( 申 範 表 ), 낭천에 유배된 박용돌( 朴 用 突 ), 강릉에 유배된 최상운( 崔 相 云 ), 금성에 유배된 김윤여( 金 允 汝 ), 삼척에 유배된 민성원( 閔 成 元 ), 양양에 유배된 노상현( 盧 相 鉉 )ㆍ차덕 록( 車 德 祿 ), 횡성에 유배된 박장근( 朴 長 根 ), 금성에 유배된 중 순경( 順 京 ), 회양에 유배된 중 봉근( 奉 根 ), 김화에 유배된 중 경활( 京 活 ), 회양에 유배된 김태건( 金 泰 建 ), 간성( 杆 城 )에 유배 된 신녹균( 申 祿 均 )ㆍ박용업( 朴 用 業 ), 이천에 유배된 이진곤( 李 珍 坤 ), 금성에 유배된 김해준 ( 金 海 俊 ), 홍천에 유배된 장민여( 張 民 汝 )ㆍ안상출( 安 尙 出 ), 횡성에 유배된 음복손( 陰 卜 孫 )ㆍ 양덕심( 梁 德 心 ), 강릉에 유배된 이경묵( 李 京 默 ), 평강에 유배된 박성삼( 朴 成 三 )ㆍ강성원( 姜 聲 遠 ), 안협에 유배된 차봉필( 車 奉 必 )ㆍ최창민( 崔 昌 敏 ), 양양에 유배된 김용담( 金 龍 淡 )ㆍ정현증 ( 鄭 玄 曾 ), 이천에 유배된 윤봉현( 尹 奉 玄 ), 간성에 유배된 최양여( 崔 養 汝 )ㆍ현경훈( 玄 景 勳 ), 삼 척에 유배된 김성묵( 金 聖 默 ), 양양에 유배된 김도학( 金 道 學 ), 이천에 유배된 이두준( 李 斗 俊 )

192 192 - ㆍ이현덕( 李 玄 德 )ㆍ현석교( 玄 錫 敎 ), 간성에 유배된 김상묵( 金 尙 默 ), 강릉에 유배된 김운이( 金 云 伊 ), 김화에 유배된 성철성( 成 喆 星 ), 고성에 유배된 김한성( 金 翰 性 ), 양구에 유배된 권동훈 ( 權 東 勳 ), 횡성에 유배된 고봉상( 高 琫 相 ), 강릉에 유배된 이사현( 李 士 賢 )ㆍ고수경( 高 守 敬 ), 양 양에 유배된 이인범( 李 仁 凡 ), 이천에 유배된 곽봉필( 郭 鳳 弼 ), 양구에 유배된 서상신( 徐 相 信 ), 철원( 鐵 原 )에 유배된 박영기( 朴 永 基 ), 통천에 유배된 이치도( 李 致 道 ), 낭천에 유배된 장인국 ( 張 仁 國 ), 평해에 유배된 금석윤( 琴 錫 胤 ), 안협에 유배된 이종담( 李 宗 淡 ), 철원에 유배된 서 광준( 徐 光 俊 ), 이천에 유배된 박문태( 朴 文 泰 ), 평창에 유배된 박시손( 朴 時 孫 )ㆍ우한경( 禹 汗 景 ), 양구에 유배된 노지원( 盧 智 遠 ), 낭천에 유배된 이의헌( 李 義 憲 ), 횡성에 유배된 김대여 ( 金 大 汝 ), 안협에 유배된 김계수( 金 桂 洙 ), 간성에 유배된 김치건( 金 致 建 ), 정선에 유배된 구 성두( 具 星 斗 )ㆍ이진화( 李 進 化 ), 고성에 유배된 이성겸( 李 成 兼 ), 정선에 유배된 박술이( 朴 述 伊 ), 회양에 유배된 정재한( 鄭 在 翰 ), 횡성에 유배된 문기윤( 文 基 允 )ㆍ김경선( 金 京 先 ), 간성에 유배된 최창근( 崔 昌 根 ), 낭천에 유배된 송재옥( 宋 在 玉 ), 평강에 유배된 최기익( 崔 基 益 ), 평해 에 유배된 김내문( 金 乃 文 ), 통천에 유배된 김영두( 金 永 斗 ), 삼척에 유배된 정수산( 鄭 壽 山 ), 평창에 유배된 김석현( 金 錫 鉉 ), 정선에 유배된 김영조( 金 永 祚 ), 양구에 유배된 박용업( 朴 用 業 ), 평강에 유배된 김재선( 金 在 善 ), 고성에 유배된 황재훈( 黃 在 勛 ), 홍천에 유배된 이춘서 ( 李 春 西 ), 횡성에 유배된 선식( 宣 植 ), 평해에 유배된 김동호( 金 東 鎬 ), 고성에 유배된 김용호 ( 金 龍 昊 )ㆍ염창암( 廉 昌 巖 ), 강릉에 유배된 조석관( 曺 石 寬 ), 울진에 유배된 박춘이( 朴 春 伊 ), 삼 척에 유배된 김 조이( 金 召 史 )ㆍ강옥련( 姜 玉 連 ), 홍천에 유배된 이지달( 李 智 達 ), 김화에 유배 된 조군선( 曺 君 先 ), 삼척에 유배된 송우량( 宋 右 良 ) 및 도내에서 정배한 죄인으로 횡성에 유 배된 김봉용( 金 奉 用 ), 김화에 유배된 서희보( 徐 希 甫 ), 평강에 유배된 지성집( 池 成 集 )ㆍ이의로 ( 李 毅 魯 ), 낭천에 유배된 김성남( 金 成 男 ), 평해에 유배된 김진필( 金 振 弼 )ㆍ윤시길( 尹 時 吉 ), 울 진에 유배된 변두언( 邊 斗 彦 ), 통천에 유배된 김낙도( 金 樂 道 ), 흡곡에 유배된 윤치관( 尹 致 寬 ) 등의 이름 아래에 방(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충청도 단양( 丹 陽 )에 유배된 김재중( 金 在 中 ), 청안에 유배된 이계준( 李 癸 俊 ), 청산( 靑 山 )에 유배된 박맹삼( 朴 孟 三 ), 청양( 靑 陽 )에 유배된 박원실( 朴 元 實 ), 회인( 懷 仁 )에 유배된 곽작지( 郭 作 之 ), 연기( 燕 岐 )에 유배된 박경화( 朴 敬 化 ), 직산( 稷 山 )에 유배된 임영수( 林 永 水 ), 진잠( 鎭 岑 ) 에 유배된 박성집( 朴 成 執 ), 청안에 유배된 문석규( 文 錫 奎 ), 진천( 鎭 川 )에 유배된 유희삼( 柳 希 三 ), 정산( 定 山 )에 유배된 송경운( 宋 景 云 ), 직산에 유배된 김우석( 金 禹 錫 ), 목천( 木 川 )에 유배 된 나채인( 羅 采 仁 ), 홍산에 유배된 손철이( 孫 哲 伊 ), 회덕( 懷 德 )에 유배된 배창회( 裵 昌 檜 ), 임 천( 林 川 )에 유배된 이광집( 李 光 集 ), 홍산에 유배된 최춘택( 崔 春 澤 ), 연풍( 延 豐 )에 유배된 박 용이( 朴 用 伊 )ㆍ최 조이( 崔 召 史 ), 단양에 유배된 김풍진( 金 豐 辰 ), 전의( 全 義 )에 유배된 신상희 ( 申 象 煕 )ㆍ이성조( 李 盛 祚 )ㆍ김수일( 金 洙 一 ), 보은( 報 恩 )에 유배된 이상립( 李 相 立 ), 회덕에 유 배된 박용갑( 朴 用 甲 ), 청안에 유배된 박업이( 朴 業 伊 ), 청산에 유배된 박의택( 朴 義 宅 )ㆍ최경준 ( 崔 京 俊 ), 회덕에 유배된 최귀옥( 崔 貴 玉 ), 회인에 유배된 박업이( 朴 業 伊 ), 연기에 유배된 김 치운( 金 致 云 ), 청양에 유배된 전이조( 全 二 祚 ), 청안에 유배된 박만근( 朴 萬 根 ), 정산에 유배된 채용기( 蔡 用 基 ), 청산에 유배된 김수명( 金 守 明 ), 청양에 유배된 도근( 道 根 ), 정산에 유배된 이상아( 李 尙 牙 ), 청안에 유배된 임사명( 林 士 明 ), 직산에 유배된 임성용( 林 成 用 )ㆍ한보문( 韓 普 文 ), 연기에 유배된 송원이( 宋 元 伊 ), 진잠에 유배된 배수문( 裵 守 文 )ㆍ정내현( 鄭 來 鉉 ), 청양에 유배된 고육성( 高 六 成 ), 직산에 유배된 손순칙( 孫 順 則 ), 전의에 유배된 박용호( 朴 龍 浩 )ㆍ김흔 이( 金 欣 伊 )ㆍ김길동( 金 吉 同 ), 회인에 유배된 권성후( 權 聲 厚 ), 정산에 유배된 홍천년( 洪 千 年 ), 진잠에 유배된 강한근( 姜 漢 根 ), 남포( 藍 浦 )에 유배된 이창석( 李 昌 晳 ), 결성( 結 城 )에 유배된

193 193 - 차원배( 車 元 培 ), 연산( 連 山 )에 유배된 박성록( 朴 成 祿 ), 진잠에 유배된 이재근( 李 再 斤 ), 회덕에 유배된 이윤용( 李 允 用 ), 부여( 扶 餘 )에 유배된 김도진( 金 道 眞 ), 홍산에 유배된 관노( 官 奴 ) 영 두( 永 斗 ), 옥천( 沃 川 )에 유배된 문학천( 文 學 天 ), 괴산( 槐 山 )에 유배된 이병인( 李 丙 仁 ), 황간에 유배된 김사흠( 金 士 欽 ), 부여에 유배된 윤자익( 尹 滋 益 ), 신창( 新 昌 )에 유배된 김순근( 金 順 根 ), 영동( 永 同 )에 유배된 정응륜( 鄭 應 倫 ), 예산에 유배된 오종수( 吳 宗 守 ), 당진에 유배된 이세춘 ( 李 世 春 ), 청양에 유배된 김윤하( 金 允 河 ), 청산에 유배된 최화선( 崔 和 先 ), 회덕에 유배된 이 상한( 李 相 漢 ), 충주( 忠 州 )에 유배된 이순철( 李 順 哲 ), 아산( 牙 山 )에 유배된 박재현( 朴 在 玄 ), 한 산( 韓 山 )에 유배된 김성숙( 金 成 淑 ), 충주에 유배된 아봉악( 阿 奉 岳 ), 황간에 유배된 옥인백( 玉 仁 伯 ), 영춘( 永 春 )에 유배된 이봉학( 李 奉 學 ), 임천에 유배된 장현봉( 張 賢 奉 ), 영춘에 유배된 김두석( 金 斗 錫 ), 영동에 유배된 권병술( 權 秉 述 ), 대흥( 大 興 )에 유배된 이수현( 李 壽 鉉 ), 목천에 유배된 유병오( 柳 丙 五 ), 온양( 溫 陽 )에 유배된 강학길( 姜 學 吉 ), 목천에 유배된 김우보( 金 佑 甫 ), 온양에 유배된 유명준( 兪 明 濬 ), 영춘에 유배된 이광실( 李 光 實 ), 전의에 유배된 박내귀( 朴 來 龜 ), 영동에 유배된 김도순( 金 道 淳 ), 영춘에 유배된 박재수( 朴 在 洙 ), 청안에 유배된 황점성 ( 黃 占 成 ), 임천에 유배된 조민환( 曺 玟 煥 ), 천안에 유배된 김치조( 金 致 祚 ), 직산에 유배된 박 창식( 朴 昌 植 ), 황간에 유배된 최명식( 崔 命 湜 ), 단양에 유배된 최광순( 崔 光 淳 ), 진잠에 유배된 제보한( 諸 輔 漢 ), 전의에 유배된 김병희( 金 丙 喜 ), 괴산에 유배된 권종효( 權 鍾 涍 ), 정산에 유배 된 이윤백( 李 潤 白 ), 회인에 유배된 관노 순복( 順 福 ), 진천에 유배된 유천로( 柳 天 魯 ), 음성에 유배된 이익풍( 李 翼 風 ), 목천에 유배된 임순엽( 林 順 燁 ), 영춘에 유배된 이용선( 李 用 先 ), 단양 에 유배된 김병률( 金 秉 律 ), 음성에 유배된 정덕민( 鄭 德 敏 ), 대흥에 유배된 이자화( 李 子 化 ), 아산에 유배된 김여칠( 金 汝 七 )ㆍ송윤환( 宋 允 煥 ), 청양에 유배된 양경서( 梁 京 西 ), 임천에 유배 된 이처인( 李 處 仁 ), 아산에 유배된 강동석( 姜 東 石 ), 천안에 유배된 안학길( 安 學 吉 ), 예산에 유배된 박종화( 朴 宗 化 ), 노성( 魯 城 )에 유배된 이동기( 李 東 基 ), 영춘에 유배된 하남직( 河 南 直 ), 청안에 유배된 관노 삼윤( 三 允 ), 영동에 유배된 하명용( 河 命 用 ), 신창에 유배된 김윤환( 金 允 煥 ), 예산에 유배된 박계증( 朴 啓 增 ), 제천( 堤 川 )에 유배된 신성칠( 辛 聖 七 ), 회인에 유배된 이 순용( 李 順 用 ), 연풍에 유배된 이선봉( 李 先 奉 ), 회덕에 유배된 김 조이( 金 召 史 ) 등의 이름 아 래에 방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황해도 풍천( 豐 川 )에 유배된 이인순( 李 仁 順 ), 은율( 殷 栗 )에 유배된 김치순( 金 致 淳 ), 곡산( 谷 山 )에 유배된 백준학( 白 俊 鶴 ), 평산( 平 山 )에 유배된 김인호( 金 仁 浩 ), 토산( 兔 山 )에 유배된 장 기필( 張 基 弼 ), 풍천에 유배된 김희려( 金 希 呂 ), 토산에 유배된 김예겸( 金 禮 兼 ), 서흥( 瑞 興 )에 유배된 김광민( 金 光 民 ), 수안( 遂 安 )에 유배된 홍길원( 洪 吉 元 ), 황주( 黃 州 )에 유배된 황성남( 黃 聖 男 ), 봉산에 유배된 권해연( 權 海 淵 ), 수안에 유배된 김종필( 金 宗 必 ), 신계( 新 溪 )에 유배된 이성관( 李 成 寬 ), 평산에 유배된 최용환( 崔 用 煥 ), 황주에 유배된 정진서( 鄭 震 瑞 ), 봉산에 유배 된 변복규( 邊 復 圭 ), 초도( 椒 島 )에 유배된 유성진( 劉 成 振 ), 백령( 白 翎 )에 유배된 신봉한( 辛 奉 漢 )ㆍ오수남( 吳 秀 男 ), 김천( 金 川 )에 유배된 김득서( 金 得 西 ), 신천에 유배된 김춘경( 金 春 敬 ), 재령에 유배된 임재영( 林 在 英 ), 안악( 安 岳 )에 유배된 고복만( 高 卜 萬 ), 배천( 白 川 )에 유배된 이용환( 李 龍 煥 ), 장연( 長 淵 )에 유배된 윤두원( 尹 斗 元 ), 봉산에 유배된 김백술( 金 百 述 ), 풍천에 유배된 이득항( 李 得 恒 ), 문화( 文 化 )에 유배된 박치현( 朴 穉 賢 ), 신계에 유배된 김자준( 金 子 俊 ) ㆍ박찬규( 朴 贊 圭 ), 수안에 유배된 한의려( 韓 義 呂 ), 곡산에 유배된 현효득( 玄 孝 得 ), 신계에 유 배된 김동옥( 金 東 玉 ), 송화( 松 禾 )에 유배된 김복열( 金 福 悅 )ㆍ정성옥( 鄭 聖 玉 ), 장연에 유배된 박원능( 朴 元 能 ), 안악에 유배된 김용제( 金 龍 濟 ), 신계에 유배된 이재영( 李 才 永 ), 장연에 유배 된 이낙선( 李 洛 善 ), 문화에 유배된 유이습( 柳 而 習 ), 곡산에 유배된 김 조이( 金 召 史 )ㆍ김석봉

194 194 - ( 金 石 奉 ), 신계에 유배된 유동영( 柳 東 榮 ), 토산에 유배된 이성근( 李 聖 根 ), 평산에 유배된 서 수원( 徐 守 元 ), 장련( 長 連 )에 유배된 정상표( 鄭 尙 表 ), 곡산에 유배된 오상희( 吳 尙 希 ), 수안에 유배된 차천흥( 車 天 興 ), 신계에 유배된 이규제( 李 奎 濟 ), 은율에 유배된 오앵수( 吳 鸎 洙 ), 서흥 에 유배된 박문규( 朴 文 圭 )ㆍ이춘엽( 李 春 燁 )ㆍ이도영( 李 道 榮 ), 수안에 유배된 오성출( 吳 成 出 ), 재령에 유배된 이치영( 李 治 英 ), 서흥에 유배된 배준필( 裵 俊 必 ), 문화에 유배된 박순춘( 朴 淳 春 ), 황주에 유배된 정창후( 鄭 昌 垕 )ㆍ김종진( 金 宗 珍 )ㆍ이덕겸( 李 德 謙 ), 재령에 유배된 강정억 ( 康 正 億 ), 황주에 유배된 이태우( 李 泰 宇 ), 백령에 유배된 최성학( 崔 成 學 ), 재령에 유배된 정 재윤( 鄭 在 允 ), 문화에 유배된 방준채( 方 俊 寀 ), 강령( 康 翎 )에 유배된 박계용( 朴 啓 容 ), 김천에 유배된 박윤현( 朴 允 賢 ), 재령에 유배된 이복여( 李 卜 汝 ), 풍천에 유배된 정낙현( 鄭 洛 玄 ), 송화 에 유배된 김재근( 金 在 根 ), 안악에 유배된 장석두( 張 錫 斗 ), 서흥에 유배된 주성백( 朱 成 伯 ), 은율에 유배된 권종락( 權 宗 洛 ), 평산에 유배된 김경희( 金 景 煕 ), 은율에 유배된 이상도( 李 尙 道 ), 배천에 유배된 김정옥( 金 正 玉 ), 풍천에 유배된 박춘발( 朴 春 發 ), 장연에 유배된 채규홍 ( 蔡 圭 弘 ), 곡산에 유배된 황승해( 黃 承 海 ), 풍천에 유배된 조용택( 曺 龍 澤 ), 곡산에 유배된 김 평( 金 枰 ), 김천에 유배된 윤덕화( 尹 德 化 ), 신계에 유배된 김영복( 金 永 福 ), 토산에 유배된 이 희연( 李 希 連 ), 풍천에 유배된 정행준( 鄭 行 準 ), 토산에 유배된 조금석( 趙 今 石 ) 등의 이름 아래 에 방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평안도 양덕에 유배된 김덕건( 金 德 建 ), 함종( 咸 從 )에 유배된 정석조( 丁 石 祚 ), 초산( 楚 山 )에 유배된 김유곤( 金 有 坤 ), 벽동( 碧 潼 )에 유배된 김치권( 金 致 權 ), 강서( 江 西 )에 유배된 임백우( 任 百 禹 ), 삭주( 朔 州 )에 유배된 강용주( 姜 龍 周 ), 강서에 유배된 김석항( 金 錫 恒 ), 태천( 泰 川 )에 유 배된 성태영( 成 泰 永 ), 순천( 順 川 )에 유배된 우범선( 禹 範 善 ), 맹산( 孟 山 )에 유배된 강억이( 姜 億 伊 )ㆍ중 해익( 海 翊 ), 영변( 寧 邊 )에 유배된 최창홍( 崔 昌 弘 ), 철산( 鐵 山 )에 유배된 김암회( 金 巖 回 ), 곽산( 郭 山 )에 유배된 이시은( 李 時 殷 ), 초산에 유배된 유학이( 柳 鶴 伊 ), 성천( 成 川 )에 유배 된 명 소사( 明 召 史 ), 의주( 義 州 )에 유배된 김화전( 金 和 田 ), 영변에 유배된 편봉석( 片 奉 石 )ㆍ 정원갑( 鄭 元 甲 ), 초산에 유배된 김진옥( 金 振 玉 ), 위원에 유배된 김완식( 金 完 植 ), 강계에 유배 된 채원준( 蔡 元 俊 ), 후창( 厚 昌 )에 유배된 김산학( 金 山 學 ), 용천( 龍 川 )에 유배된 김창은( 金 昌 恩 ), 덕천( 德 川 )에 유배된 황석진( 黃 石 辰 ), 가산( 嘉 山 )에 유배된 김복여( 金 福 汝 ), 영변에 유배 된 이완순( 李 完 順 ), 강서에 유배된 조경간( 趙 京 干 ), 정주( 定 州 )에 유배된 김인학( 金 仁 學 ), 순 안( 順 安 )에 유배된 서상홍( 徐 相 弘 ), 위원에 유배된 김창성( 金 昌 成 ), 후창에 유배된 장흥규( 張 興 奎 ), 숙천( 肅 川 )에 유배된 이문표( 李 文 杓 ), 강서에 유배된 유동항( 柳 東 恒 ), 강계에 유배된 박계홍( 朴 桂 弘 ), 맹산에 유배된 심은택( 沈 殷 澤 ), 후창에 유배된 김재덕( 金 在 德 ), 구성( 龜 城 )에 유배된 이관엽( 李 寬 燁 ), 희천( 煕 川 )에 유배된 신정필( 申 正 弼 ), 위원에 유배된 조준석( 趙 俊 錫 ), 영유( 永 柔 )에 유배된 염치태( 廉 致 太 ), 상원( 祥 原 )에 유배된 이원서( 李 元 瑞 ), 순천에 유배된 윤지언( 尹 之 彦 ), 곽산에 유배된 임용업( 林 用 業 ), 맹산에 유배된 최대집( 崔 大 集 ), 벽동에 유배 된 배정순( 裵 正 順 ), 영유에 유배된 홍영록( 洪 永 祿 ), 선천( 宣 川 )에 유배된 한원칠( 韓 元 七 ), 운 산( 雲 山 )에 유배된 김용기( 金 龍 基 ), 함종에 유배된 박성범( 朴 聖 凡 ), 영유에 유배된 서옥준( 徐 玉 俊 ), 위원에 유배된 이화영( 李 和 永 ), 운산에 유배된 송학서( 宋 學 西 ), 양덕에 유배된 오윤해 ( 吳 允 海 ), 벽동에 유배된 김삼척( 金 三 陟 ), 강동( 江 東 )에 유배된 김희용( 金 喜 鎔 ), 순안에 유배 된 이용기( 李 龍 基 ), 초산에 유배된 피 소사( 皮 召 史 ), 삼화( 三 和 )에 유배된 유찬진( 劉 贊 珍 ), 함 종에 유배된 이약섭( 李 若 涉 ), 삭주에 유배된 김병대( 金 炳 大 ), 초산에 유배된 오덕봉( 吳 德 奉 ), 중화( 中 和 )에 유배된 문성권( 文 聖 權 )ㆍ피대철( 皮 大 喆 ), 덕천에 유배된 장도언( 張 道 彦 ), 강서 에 유배된 강준이( 姜 俊 伊 ), 운산에 유배된 김화윤( 金 化 允 ), 초산에 유배된 종 흥복( 興 卜 ), 상

195 195 - 원에 유배된 조영택( 趙 永 宅 ), 강계에 유배된 윤용주( 尹 龍 柱 ), 구성에 유배된 윤치호( 尹 致 浩 ), 함종에 유배된 김창수( 金 昌 水 ), 중화에 유배된 오동표( 吳 東 杓 ), 삼화에 유배된 신정옥( 申 正 玉 ), 용천에 유배된 관노 경오( 京 五 ), 가산에 유배된 송능학( 宋 能 學 ), 삼화에 유배된 서익주 ( 徐 益 周 )ㆍ박은서( 朴 殷 西 ), 용강( 龍 崗 )에 유배된 최명윤( 崔 命 允 ), 운산에 유배된 주상희( 朱 象 禧 ), 희천에 유배된 김진성( 金 辰 成 ), 벽동에 유배된 장석이( 張 石 伊 ), 영변에 유배된 최영환 ( 崔 永 煥 ), 용천에 유배된 공기화( 孔 基 華 ), 영원에 유배된 나필신( 羅 必 臣 ), 강계에 유배된 최 도화( 崔 道 華 ), 위원에 유배된 유윤교( 劉 允 釗 ), 초산에 유배된 홍도명( 洪 道 明 ), 상원에 유배된 백용수( 白 龍 洙 ), 초산에 유배된 이풍근( 李 豐 根 ), 희천에 유배된 장창석( 張 昌 石 ), 숙천에 유배 된 박돈수( 朴 敦 壽 ), 창성( 昌 城 )에 유배된 김태희( 金 台 希 ), 선천에 유배된 이기배( 李 基 培 ), 안 주( 安 州 )에 유배된 이운서( 李 雲 瑞 ), 삼화에 유배된 이봉석( 李 奉 石 ), 안주에 유배된 이태건( 李 泰 健 ), 용강에 유배된 김종운( 金 宗 云 ), 자성( 慈 城 )에 유배된 최일화( 崔 日 和 ), 중화에 유배된 김진선( 金 振 善 ), 위원에 유배된 이강능( 李 江 能 ) 및 도내에서 정배한 죄인으로 벽동에 유배된 홍대예( 洪 大 藝 ) 등의 이름 아래에 방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전라도 익산에 유배된 양정근( 梁 正 根 ), 임실( 任 實 )에 유배된 권해봉( 權 海 奉 ), 금산( 錦 山 )에 유배된 황문팔( 黃 文 八 ), 고산( 高 山 )에 유배된 신이담( 辛 而 潭 ), 임실에 유배된 최양주( 崔 梁 柱 ), 해남에 유배된 배갑용( 裵 甲 用 )ㆍ김창식( 金 昌 植 ), 옥과( 玉 果 )에 유배된 김만손( 金 萬 孫 ), 익산 에 유배된 관노 도천( 道 千 ), 무주( 茂 朱 )에 유배된 박경순( 朴 慶 珣 ), 용안( 龍 安 )에 유배된 박덕 산( 朴 德 山 ), 용담에 유배된 이운선( 李 雲 先 ), 무안( 務 安 )에 유배된 박동연( 朴 東 涓 )ㆍ정찬석( 鄭 贊 錫 ), 흥덕( 興 德 )에 유배된 이상득( 李 相 得 ), 순창에 유배된 김선옥( 金 先 玉 ), 장흥( 長 興 )에 유 배된 권상중( 權 尙 仲 ), 금갑도에 유배된 김완수( 金 完 洙 ), 제주( 濟 州 )에 유배된 박영락( 朴 永 駱 ) ㆍ정석오( 鄭 錫 五 )ㆍ고영중( 高 永 中 )ㆍ조종룡( 趙 鍾 龍 ), 고금도에 유배된 양성락( 梁 成 洛 ), 흥양 에 유배된 봉창( 鳳 昌 )ㆍ유영창( 柳 永 昌 ), 강진에 유배된 이원식( 李 元 植 )ㆍ노용주( 盧 龍 周 ), 지 도에 유배된 지정득( 池 丁 得 ), 녹도에 유배된 천산이( 千 山 伊 ), 용담에 유배된 허영이( 許 英 伊 ), 지도에 유배된 이창래( 李 昌 來 ), 고금도에 유배된 정성칠( 鄭 聖 七 ), 녹도에 유배된 전택구( 全 澤 九 ), 지도에 유배된 고태양( 高 太 陽 ), 동복( 同 福 )에 유배된 오진삼( 吳 鎭 三 ), 장흥에 유배된 이 청삼( 李 靑 三 ), 남원( 南 原 )에 유배된 윤기섭( 尹 基 燮 ), 영광( 靈 光 )에 유배된 종 기창( 基 昌 ), 해 남에 유배된 배봉철( 裵 奉 喆 ), 영광에 유배된 김규목( 金 圭 穆 ), 금갑도에 유배된 중 광해( 廣 海 ), 강진에 유배된 유철준( 兪 哲 濬 ), 광주( 光 州 )에 유배된 오지형( 吳 芝 亨 ), 익산에 유배된 이 기회( 李 奇 回 ), 고산에 유배된 김유종( 金 有 鍾 ), 능주( 綾 州 )에 유배된 신성준( 辛 聖 俊 ), 동복에 유배된 장한규( 張 漢 奎 ), 장수( 長 水 )에 유배된 신성국( 申 聖 國 ), 태인( 泰 仁 )에 유배된 강재근( 姜 在 根 ), 보성( 寶 城 )에 유배된 종 소사( 鍾 召 史 ), 광주에 유배된 김영문( 金 永 文 ), 정읍( 井 邑 )에 유배된 변익문( 卞 益 文 ), 금산에 유배된 한치중( 韓 致 中 ), 장수에 유배된 주응수( 朱 應 洙 ), 구례 ( 求 禮 )에 유배된 김치곤( 金 致 坤 ), 금산에 유배된 손성수( 孫 聖 秀 ), 진산( 珍 山 )에 유배된 구성 천( 具 性 天 ), 진안( 鎭 安 )에 유배된 김임득( 金 壬 得 ), 익산에 유배된 사비( 私 婢 ) 은섬( 銀 纖 ), 순 창에 유배된 김명언( 金 命 彦 ), 무장에 유배된 박명수( 朴 命 守 ), 장성( 長 城 )에 유배된 최종희( 崔 宗 希 ), 고산에 유배된 윤여홍( 尹 汝 弘 )ㆍ양계주( 梁 啓 舟 ), 장성에 유배된 송종순( 宋 鍾 淳 ), 진산 에 유배된 김용이( 金 龍 伊 ), 동복에 유배된 김유길( 金 有 吉 ), 고산에 유배된 이춘실( 李 春 實 ), 진안에 유배된 안삼진( 安 三 眞 ), 장흥에 유배된 송명석( 宋 命 碩 ), 임실에 유배된 김성환( 金 聖 煥 ), 순창에 유배된 박치화( 朴 致 和 ), 진산에 유배된 정성범( 鄭 聖 範 ), 해남에 유배된 임신우 ( 任 信 佑 ), 장성에 유배된 이동진( 李 東 鎭 ), 함평에 유배된 천도주( 千 道 柱 ), 진안에 유배된 권 달직( 權 達 稙 ), 고산에 유배된 김수동( 金 秀 同 ), 임실에 유배된 최영준( 崔 永 俊 ), 장수에 유배된

196 196 - 박제은( 朴 濟 殷 ), 무주에 유배된 권용기( 權 用 起 ), 진안에 유배된 최영수( 崔 永 守 ), 옥과에 유배 된 손재홍( 孫 在 弘 ), 진산에 유배된 김응여( 金 應 汝 ), 무주에 유배된 강학봉( 姜 學 奉 ), 고산에 유배된 양용준( 梁 龍 俊 ), 남원에 유배된 이성륙( 李 成 六 ), 장수에 유배된 이치옥( 李 致 玉 )ㆍ노금 용( 魯 今 用 ), 임실에 유배된 김석희( 金 錫 煕 ), 고산에 유배된 박계현( 朴 啓 炫 ), 금산에 유배된 김석호( 金 錫 浩 ), 순천( 順 天 )에 유배된 박실근( 朴 實 根 ), 강진에 유배된 장을석( 張 乙 石 ), 순창에 유배된 최주현( 崔 周 鉉 ), 옥과에 유배된 이문환( 李 文 煥 ), 임실에 유배된 유경업( 兪 敬 業 ), 여산 에 유배된 이장선( 李 章 善 ), 용담에 유배된 종 두인( 斗 仁 ), 진산에 유배된 이영석( 李 榮 錫 ), 장 수에 유배된 종 덕중( 德 中 ), 광양에 유배된 윤관실( 尹 寬 實 ), 담양에 유배된 허곤이( 許 坤 伊 ), 능주에 유배된 최 조이( 崔 召 史 ), 고산에 유배된 김교설( 金 敎 卨 ), 용담에 유배된 박봉준( 朴 奉 俊 ), 장수에 유배된 김점홍( 金 占 弘 ), 곡성( 谷 城 )에 유배된 이봉석( 李 奉 錫 ), 강진에 유배된 강 달성( 姜 達 成 ), 함열에 유배된 김지택( 金 芝 澤 ), 남원에 유배된 이형엽( 李 亨 燁 ), 담양에 유배된 이명구( 李 命 九 ), 순창에 유배된 허인호( 許 仁 鎬 ), 진안에 유배된 신 소사( 申 召 史 ), 구례에 유 배된 황상곤( 黃 尙 坤 ), 익산에 유배된 한명석( 韓 命 錫 ), 금구( 金 溝 )에 유배된 정은조( 鄭 恩 朝 ), 함평에 유배된 유남철( 劉 南 喆 ), 창평( 昌 平 )에 유배된 채원명( 蔡 元 明 ), 장수에 유배된 이병두 ( 李 秉 斗 ), 운봉( 雲 峯 )에 유배된 박용이( 朴 用 伊 ), 용담에 유배된 박광진( 朴 光 鎭 ), 무주에 유배 된 조 소사( 曺 召 史 ), 운봉에 유배된 김종하( 金 宗 河 ), 정읍에 유배된 이인현( 李 仁 鉉 ), 동복에 유배된 양주원( 梁 柱 元 ), 태인에 유배된 심재춘( 沈 在 春 ), 진안에 유배된 강일성( 姜 日 成 ), 곡성 에 유배된 김두연( 金 斗 演 ), 무주에 유배된 조계주( 曺 啓 注 ), 보성에 유배된 박돌개( 朴 乭 介 ), 흥덕에 유배된 이규석( 李 圭 錫 ), 진안에 유배된 천봉일( 千 鳳 一 ), 옥구에 유배된 조장용( 趙 長 用 ), 곡성에 유배된 박내원( 朴 乃 元 )ㆍ박일훈( 朴 一 勳 )ㆍ이한식( 李 漢 植 ), 익산에 유배된 하남주 ( 河 南 柱 ), 구례에 유배된 박여실( 朴 汝 實 ), 태인에 유배된 이중표( 李 中 標 ), 순창에 유배된 정 학선( 鄭 學 先 ), 구례에 유배된 하문국( 河 汶 局 )ㆍ정수영( 鄭 壽 永 )ㆍ한학인( 韓 學 仁 ), 고부( 古 阜 )에 유배된 하봉용( 河 奉 用 ), 운봉에 유배된 이근빈( 李 近 彬 ), 장흥에 유배된 김경이( 金 敬 伊 ), 용안 에 유배된 이명오( 李 明 五 ), 만경( 萬 頃 )에 유배된 엄해주( 嚴 海 州 ), 광주에 유배된 이충숙( 李 忠 叔 ), 흥양에 유배된 임인성( 林 仁 成 ), 용안에 유배된 김운경( 金 雲 景 ), 무안에 유배된 하영수 ( 河 永 守 ), 함열에 유배된 김천오( 金 千 五 ), 창평에 유배된 조윤승( 曺 允 承 ), 능주에 유배된 김 치우( 金 致 愚 ), 익산에 유배된 이정지( 李 正 之 ), 순창에 유배된 이봉수( 李 奉 洙 ), 운봉에 유배된 윤희만( 尹 希 萬 ), 남평( 南 平 )에 유배된 김중명( 金 仲 明 )ㆍ임병한( 林 秉 翰 ), 함열에 유배된 이경 애( 李 敬 愛 ), 강진에 유배된 임춘화( 林 春 化 ), 금구에 유배된 중 영선( 永 善 ), 옥구에 유배된 박 인배( 朴 仁 培 ), 정읍에 유배된 유영도( 柳 榮 道 ), 영광에 유배된 이순업( 李 順 業 ), 순천( 順 天 )에 유배된 박윤대( 朴 允 大 ), 남평에 유배된 최필원( 崔 必 元 ), 해남에 유배된 박순길( 朴 順 吉 ), 태인 에 유배된 김영식( 金 榮 軾 ), 함열에 유배된 최용이( 崔 用 伊 ), 금구에 유배된 박정안( 朴 廷 安 ), 동복에 유배된 이상범( 李 祥 凡 ), 익산에 유배된 설순필( 薛 順 必 ), 장수에 유배된 김장안( 金 將 安 ), 진산에 유배된 김태의( 金 台 義 ), 강진에 유배된 최군필( 崔 君 必 ), 진산에 유배된 김판석 ( 金 判 錫 ), 태인에 유배된 최성보( 崔 成 甫 ), 영광에 유배된 이관석( 李 寬 錫 ), 동복에 유배된 김 수보( 金 守 甫 ), 해남에 유배된 양병원( 梁 秉 源 ), 여산에 유배된 이윤영( 李 允 榮 ), 흥덕에 유배된 김은종( 金 銀 宗 ), 태인에 유배된 이추현( 李 秋 鉉 ), 강진에 유배된 서재식( 徐 在 植 ), 여산에 유배 된 노준여( 盧 俊 汝 ), 함열에 유배된 황무숙( 黃 茂 叔 ), 옥과에 유배된 이금석( 李 今 石 ), 용안에 유배된 조인득( 趙 仁 得 ), 태인에 유배된 전원보( 田 元 甫 ), 금구에 유배된 연병원( 延 秉 元 ), 능주 에 유배된 이보여( 李 甫 汝 ), 장흥에 유배된 이조광( 李 朝 光 ), 낙안( 樂 安 )에 유배된 안천록( 安 千 祿 ), 익산에 유배된 윤삼여( 尹 三 汝 ), 장성에 유배된 석진석( 石 鎭 碩 ), 금구에 유배된 송여근

197 197 - ( 宋 汝 根 ), 남원에 유배된 백 소사( 白 召 史 ), 광양에 유배된 김원순( 金 元 順 ), 고금도에 유배된 이금돌( 李 今 乭 ), 함열에 유배된 신성규( 申 成 圭 ), 진도( 珍 島 )에 유배된 한이창( 韓 耳 昌 ), 해남에 유배된 김수산( 金 壽 山 ) 및 도내에서 정배한 죄인으로 영광에 유배된 박광운( 朴 光 云 ), 능주에 유배된 남정직( 南 廷 稷 ), 화순( 和 順 )에 유배된 한만순( 韓 萬 巡 ) 등의 이름 아래에 방 자를 써 서 내리셨습니다. 경상도 상주에 유배된 김치명( 金 致 明 ), 청송( 靑 松 )에 유배된 전치홍( 田 致 弘 ), 영해( 寧 海 )에 유배된 이용귀( 李 龍 龜 ), 양산( 梁 山 )에 유배된 황용석( 黃 用 石 ), 영천( 榮 川 )에 유배된 나여구( 羅 汝 九 ), 단성( 丹 城 )에 유배된 신여일( 愼 汝 一 ), 지례에 유배된 오영( 吳 泳 )ㆍ조승재( 趙 升 才 ), 성 주( 星 州 )에 유배된 유양호( 劉 養 浩 ), 개령( 開 寧 )에 유배된 한병승( 韓 秉 昇 ), 웅천에 유배된 임 유성( 林 有 成 ), 장기( 長 鬐 )에 유배된 이화실( 李 化 實 ), 금산에 유배된 김덕용( 金 德 用 ), 선산( 善 山 )에 유배된 오우성( 吳 右 成 ), 순흥에 유배된 김석봉( 金 石 奉 ), 양산에 유배된 장재근( 張 在 根 ), 울산( 蔚 山 )에 유배된 최봉준( 崔 奉 俊 ), 함양( 咸 陽 )에 유배된 장인범( 張 仁 凡 ), 선산에 유배된 조국원( 趙 國 元 ), 고령( 高 靈 )에 유배된 김창훈( 金 昌 勳 ), 안의에 유배된 김원달( 金 元 達 ), 초계 ( 草 溪 )에 유배된 조 소사( 趙 召 史 ), 금산에 유배된 황귀보( 黃 貴 甫 )ㆍ황 소사( 黃 召 史 )ㆍ박춘명 ( 朴 春 明 ), 선산에 유배된 이춘필( 李 春 弼 ), 영양에 유배된 최흥주( 崔 興 柱 ), 영천( 永 川 )에 유배 된 안중손( 安 仲 孫 ), 청송에 유배된 김영권( 金 永 權 ), 영천( 榮 川 )에 유배된 박응혁( 朴 應 赫 ), 순 흥에 유배된 추동언( 秋 同 彦 ), 영양에 유배된 추연보( 秋 年 甫 ), 예안에 유배된 강덕원( 姜 德 元 ), 금산에 유배된 김원보( 金 元 甫 )ㆍ황치성( 黃 致 成 ), 남해에 유배된 이의복( 李 義 復 ), 인동에 유배 된 최정갑( 崔 正 甲 ), 비안( 比 安 )에 유배된 안학윤( 安 鶴 允 ), 안의에 유배된 신병세( 愼 炳 世 ), 지 례에 유배된 한응구( 韓 應 九 ), 하동( 河 東 )에 유배된 변학서( 卞 學 西 ), 봉화( 奉 化 )에 유배된 윤 기석( 尹 基 錫 ), 풍기( 豐 基 )에 유배된 백남수( 白 南 壽 ), 순흥에 유배된 권철이( 權 哲 伊 ), 하동에 유배된 정원득( 鄭 元 得 ), 울산에 유배된 중 해원( 海 願 ), 영천( 永 川 )에 유배된 박정도( 朴 正 道 ), 장기에 유배된 이성극( 李 聖 極 ), 금산에 유배된 차인복( 車 仁 卜 ), 창원에 유배된 김보여( 金 甫 汝 ), 단성에 유배된 박윤원( 朴 允 元 ), 사천( 泗 川 )에 유배된 사노( 私 奴 ) 석용( 石 用 ), 하동에 유 배된 김치주( 金 致 周 ), 영천( 永 川 )에 유배된 김성규( 金 成 圭 ), 경산( 慶 山 )에 유배된 여봉규( 余 鳳 奎 ), 창원에 유배된 이석완( 李 錫 完 ), 밀양( 密 陽 )에 유배된 박석인( 朴 錫 仁 ), 남해에 유배된 이 윤홍( 李 允 弘 ), 진보( 眞 寶 )에 유배된 공준명( 孔 俊 明 ), 선산에 유배된 사노 봉운( 鳳 運 ), 풍기에 유배된 김익희( 金 益 煕 ), 인동에 유배된 황운룡( 黃 沄 龍 ), 양산에 유배된 사노 금득( 今 得 ), 상 주에 유배된 김흥룡( 金 興 龍 ), 안의에 유배된 이성배( 李 成 倍 ), 거제( 巨 濟 )에 유배된 이용구( 李 容 九 ), 언양에 유배된 신경숙( 辛 敬 叔 ), 합천( 陜 川 )에 유배된 조학영( 趙 鶴 泳 ), 밀양에 유배된 서화삼( 徐 化 三 ), 청도( 淸 都 )에 유배된 윤영시( 尹 榮 時 ), 문경( 聞 慶 )에 유배된 홍원휴( 洪 遠 休 ), 청도에 유배된 원인수( 元 仁 水 ), 인동에 유배된 정성업( 鄭 聖 業 ), 하양( 河 陽 )에 유배된 김용산 ( 金 用 山 ), 풍기에 유배된 김순진( 金 順 辰 ), 금산에 유배된 안성원( 安 聖 元 )ㆍ신정원( 申 正 元 ), 용 궁에 유배된 이완석( 李 完 石 ), 청도에 유배된 중 일환( 一 煥 ), 함양에 유배된 배경한( 裵 卿 漢 ), 금산에 유배된 김화겸( 金 化 兼 ), 안의에 유배된 강파회( 姜 巴 回 ), 하동에 유배된 김태환( 金 太 煥 ), 함창( 咸 昌 )에 유배된 강성팔( 姜 成 八 ), 문경에 유배된 성재준( 成 載 晙 ), 영해에 유배된 김 태덕( 金 泰 德 ), 선산에 유배된 김기식( 金 基 植 ), 청하( 淸 河 )에 유배된 안경백( 安 景 伯 ), 청송에 유배된 장부안( 張 扶 安 ), 산청( 山 淸 )에 유배된 김찬명( 金 贊 明 ), 울산에 유배된 정치화( 鄭 致 化 ), 밀양에 유배된 김명운( 金 明 雲 ), 상주에 유배된 김양순( 金 良 順 ), 양산에 유배된 김만성( 金 萬 成 ), 상주에 유배된 윤상신( 尹 相 信 ), 함양에 유배된 서철순( 徐 喆 淳 ), 사천에 유배된 이순원 ( 李 順 元 ), 언양에 유배된 조일관( 趙 日 寬 ), 예안에 유배된 최응민( 崔 應 珉 ), 영천( 永 川 )에 유배

198 198 - 된 민남식( 閔 南 植 ), 산청에 유배된 윤정찬( 尹 廷 贊 ), 경산에 유배된 김관만( 金 寬 萬 ), 청도에 유배된 중 지찬( 智 贊 ), 상주에 유배된 중 법찬( 法 贊 ), 함안( 咸 安 )에 유배된 김한준( 金 漢 俊 ), 영천( 榮 川 )에 유배된 방운철( 方 運 喆 ), 장기에 유배된 이희준( 李 煕 俊 ), 청하에 유배된 김영택 ( 金 永 澤 ), 사천에 유배된 김경문( 金 瓊 文 ), 곤양( 昆 陽 )에 유배된 박창휘( 朴 昶 徽 ), 울산에 유배 된 원공선( 元 公 先 ), 연일에 유배된 이화일( 李 和 一 ), 상주에 유배된 중 행총( 幸 摠 ), 거제에 유 배된 김영택( 金 永 宅 ), 상주에 유배된 유흥경( 柳 興 暻 ), 예천( 醴 泉 )에 유배된 장준( 張 俊 ) 등의 이름 아래에 방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함경도 정평( 定 平 )에 유배된 김구흥( 金 九 興 ), 홍원에 유배된 정천흥( 鄭 千 興 ), 경성( 鏡 城 )에 유배된 중 해각( 海 覺 ), 문천( 文 川 )에 유배된 김계담( 金 桂 淡 ), 영흥에 유배된 박성순( 朴 聖 順 ) ㆍ임화익( 林 和 益 ), 홍원에 유배된 안덕심( 安 德 心 ), 함열에 유배된 임춘래( 林 春 來 ), 용안에 유 배된 홍재태( 洪 載 台 ), 홍원에 유배된 송경을( 宋 景 乙 ), 북청( 北 靑 )에 유배된 차석구( 車 石 九 ), 명천( 明 川 )에 유배된 장남한( 張 楠 翰 ), 영흥에 유배된 김재연( 金 載 淵 ), 안변( 安 邊 )에 유배된 박군섭( 朴 君 涉 ), 갑산에 유배된 송찬보( 宋 贊 甫 ), 길주( 吉 州 )에 유배된 김명호( 金 命 浩 )ㆍ김기 환( 金 基 煥 ), 명천에 유배된 왕지순( 王 之 淳 ), 길주에 유배된 장경순( 張 景 淳 ), 정평에 유배된 최광선( 崔 光 善 ), 명천에 유배된 박희수( 朴 煕 壽 ), 문천에 유배된 권귀동( 權 貴 同 )ㆍ송귀석( 宋 貴 石 ), 갑산에 유배된 이원영( 李 元 英 ), 명천에 유배된 장복규( 張 復 圭 ), 이원( 利 原 )에 유배된 김 상진( 金 尙 辰 ) 등의 이름 아래에 방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리신 대로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도 도신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9년 1월 27일(정해) / 이한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한응( 李 漢 膺 )을 훈련원 정으로, 조존우( 趙 存 禹 )를 황해 병사( 黃 海 兵 使 )로, 김기인( 金 基 仁 )을 동지중추부사로, 안광옥( 安 光 玉 )을 가리포 첨사( 加 里 浦 僉 使 )로, 윤병헌( 尹 秉 憲 )을 평남 만호( 平 南 萬 戶 )로 삼았다. 훈련원 첨정에 이교석( 李 敎 奭 )을 단부하였다. 진주 영장 허철( 許 ), 나주 영장 한용규( 韓 用 圭 ), 삼척 영장 하용제( 河 龍 濟 ), 개성 중군 신학( 申 ), 남우후 임태두( 任 泰 斗 )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구석 조( 具 奭 祖 )를 동지훈련원사로, 김혁희( 金 赫 煕 )를 첨지중추부사로, 허진( 許 璡 )을 동지훈련원사 로, 이명하( 李 命 夏 )를 동지훈련원사로, 임순학( 林 淳 學 )을 훈련원 첨정으로 삼았다. 가리포 첨 사 안광옥( 安 光 玉 )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오 정선( 吳 正 善 )을 전라 병사( 全 羅 兵 使 )로, 이병권( 李 炳 權 )을 오차 첨사( 吾 叉 僉 使 )로, 오동엽( 吳 東 曄 )을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박희덕( 朴 煕 德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이선재( 李 璿 載 )를 법성 첨사( 法 聖 僉 使 )로 삼았다. 호군에 구연욱( 具 然 郁 )ㆍ이현석( 李 顯 錫 )ㆍ조존우( 趙 存 禹 ), 부 호군에 이병규( 李 秉 奎 )ㆍ김응모( 金 膺 模 )ㆍ이상익( 李 相 翼 )ㆍ조한익( 趙 漢 翼 )을 단부하였다. 김 필구( 金 弼 求 )를 선전관으로, 민찬호( 閔 贊 鎬 )를 훈련원 판관으로, 이석문( 李 錫 文 )을 창덕궁 위 장( 昌 德 宮 衛 將 )으로, 이가희( 李 可 煕 )를 황해병마우후로, 민유세( 閔 瑜 世 )ㆍ이종욱( 李 鍾 郁 )을 동지중추부사로, 정규만( 鄭 奎 晩 )ㆍ서재우( 徐 宰 㘾 )를 오위장으로, 권낙종( 權 洛 鍾 )을 훈련원 주 부로, 정주영( 鄭 周 永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종원( 李 鍾 元 )ㆍ민영석( 閔 泳 錫 )을 문신겸선전관으 로, 심형택( 沈 馨 澤 )을 훈련원 부정으로, 신백( 申 柏 )을 총어영 초관으로, 박수린( 朴 秀 麟 )ㆍ김

199 199 - 민제( 金 民 濟 )를 오위장으로, 김명문( 金 明 文 )ㆍ허익( 許 熤 )ㆍ권용업( 權 用 業 )을 창덕궁 위장으 로, 김철규( 金 澈 圭 )ㆍ오응묵( 吳 膺 默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학영( 李 鶴 永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관현( 李 觀 鉉 )을 주부로, 유제관( 柳 濟 寬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 右 邊 捕 盜 廳 從 事 官 )으로 삼았 다 / 고종 29년 1월 28일(무자)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이병헌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또 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이병헌( 李 秉 憲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유완수( 柳 完 秀 )는 전임 오 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로서, 홍재준( 洪 在 駿 )은 전임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서 모두 임소에 있습니다. 군병을 거느리는 직임을 오래 비워 두는 것은 근심스러우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29년 12월 9일(계해) / 시임 첨사를 감하하여 도로 구근과로 차출하고 장연 부사의 수군영장 겸함 등은 전례대로 하비하겠다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의정부의 초기로 인하여, 오차진( 吾 叉 鎭 )을 장연부( 長 淵 府 )에 도로 소속시켜서, 장연부로 하여금 이전처럼 관검( 管 檢 )하도록 비하하셨습니다. 시임 첨사를 감하하여 도로 구근과( 久 勤 窠 )로 차출하고, 장연 부사의 수군영장( 水 軍 營 將 ) 겸함과 오차포 첨사( 吾 叉 浦 僉 使 )의 백령진 관 수군동첨절제사( 白 翎 鎭 管 水 軍 同 僉 節 制 使 )는 모두 전례대로 하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 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0년 2월 1일(갑인) / 수원 유수 민영상의 보고에서 청한 대로 대청도 등의 장적을 수원 유수영으로 이속시킬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윤달영이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수원 유수( 水 原 留 守 ) 민영상( 閔 泳 商 )의 보고를 보니, 황해도의 대청도( 大 靑 島 )와 소청 도( 小 靑 島 ) 두 섬은, 정묘조( 正 廟 朝 )에 둔전( 屯 田 )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잡역( 雜 役 ) 을 면제해 주고 본영( 本 營 )에 이속( 移 屬 )시킨 다음, 기패관( 旗 牌 官 )과 별무사( 別 武 士 )로 하여 금 돌아가면서 둔전을 감독하고 섬의 백성들을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호( 家 戶 )가 100여 호에 불과하고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채집하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꾸리는데, 모리 배( 牟 利 輩 )들이 백령진( 白 翎 鎭 )에 사주하여 관례( 官 隷 )들과 한통속이 되어 제멋대로 침탈하

200 200 - 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영( 營 )에서 누차 금지하고 신칙하였으나, 갈수록 더욱 심해 져서 마침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단을 막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할 방도는 다만 이적( 移 籍 )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두 섬은 서 쪽의 먼 바다 가운데에 있는바, 토양이 소금기가 많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니 이미 가련 하게 여길 일이고, 둔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한 것 또한 조정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진( 鎭 )의 관속( 官 屬 )이 침탈하여 끝없이 횡포를 부린단 말입니까. 애처로 이 하소연할 곳 없는 잔약한 백성들이 소장( 疏 章 )을 안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도로에서 방 황하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이에 속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니, 이후로는 두 섬의 장적( 帳 籍 )을 모두 수원 유수영( 水 原 留 守 營 )에 이속시켜서 백성들을 위무하여 편안 히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0년 6월 27일(정축)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민영소( 閔 泳 韶 )는 나왔고, 참판 조동만( 趙 東 萬 )은 병이고, 참의 송영대 ( 宋 榮 大 )는 입직이고, 참지 박규찬( 朴 奎 燦 )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동부승지 박시순( 朴 始 淳 )은 나왔다. 이주영( 李 冑 榮 )ㆍ송은준( 宋 殷 晙 )ㆍ한세익( 韓 世 益 )을 동지중추부사로, 신태희( 申 泰 煕 )를 동지 훈련원사로, 김문제( 金 文 濟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기원( 李 基 遠 )을 선전관으로, 신복희( 申 宓 熙 )ㆍ김상용( 金 商 鏞 )ㆍ차영욱( 車 英 郁 )ㆍ김병렬( 金 秉 烈 )ㆍ이석진( 李 錫 珍 )을 오위장으로, 김종 건( 金 宗 健 )ㆍ위석규( 魏 錫 珪 )ㆍ유봉학( 兪 鳳 學 )을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으로, 강재희( 姜 在 熙 )ㆍ지귀석( 池 貴 錫 )을 경희궁 위장( 慶 熙 宮 衛 將 )으로, 심상황( 沈 相 璜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규헌( 李 奎 )을 경리청 군사마( 經 理 廳 軍 司 馬 )로, 김순경( 金 淳 璟 )ㆍ최진옥( 崔 鎭 玉 )을 수문장 으로, 이원의( 李 瑗 儀 )를 경상 좌병사로, 구연식( 具 然 軾 )을 충청 수사( 忠 淸 水 使 )로, 이상협( 李 商 協 )을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 이병권( 李 昞 權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문시양( 文 時 陽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김원효( 金 元 孝 )를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정성길( 鄭 成 吉 )을 차령 첨 사( 車 嶺 僉 使 )로, 김학진( 金 學 珍 )을 강원 첨사( 康 遠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 두 자리에 장극식( 張 克 植 ), 김진석( 金 鎭 奭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권동진( 權 東 鎭 ), 박창 우( 朴 昌 祐 ), 이원창( 李 源 昌 )을 단부하였다. 선전관에 이석형( 李 錫 衡 ), 윤석천( 尹 錫 天 ), 이우범 ( 李 祐 範 ), 이한우( 李 漢 禹 ), 이교항( 李 敎 恒 ), 권석조( 權 錫 祚 ), 이민식( 李 敏 軾 ), 윤영성( 尹 泳 成 ), 이돈호( 李 敦 鎬 )를 단부하고, 부장( 部 將 )에 정기헌( 鄭 岐 憲 ), 이학모( 李 學 模 ), 이예로( 李 禮 魯 ), 김재순( 金 在 舜 ), 윤호( 尹 鎬 )를 단부하고, 수문장에 이용현( 李 庸 鉉 ), 박환규( 朴 瓛 圭 ), 최영석 ( 崔 永 錫 ), 신기현( 申 琪 鉉 ), 한영식( 韓 永 植 ), 김능순( 金 能 漘 ), 이종규( 李 鍾 奎 )를 단부하고, 협여 초관( 挾 輿 哨 官 )에 김헌경( 金 獻 輕 )을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그 직책에 잉임시키고 승륙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대호군에 김노광( 金 魯 光 ), 호군에 신병길( 愼 炳 吉 )ㆍ이완근( 李 完 根 )ㆍ김 제양( 金 濟 陽 ), 부호군에 오석묵( 吳 錫 默 )ㆍ이관기( 李 觀 基 )ㆍ신태선( 申 泰 善 )ㆍ이승한( 李 升 漢 )ㆍ 이상규( 李 庠 珪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201 / 고종 30년 6월 30일(경진)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박희덕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친군총어영의 계 또 친군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박희덕( 朴 熙 德 )은 전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여동엽( 呂 東 曄 )은 전임 철 도 첨사( 鐵 島 僉 使 )로서, 모두 임소에 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오래 비워 두는 것 은 근심스러운 일이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0년 12월 29일(정축) / 각도의 유지 도류안 가운데 강원도 강릉의 윤광표 등에 대해,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이경하가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油 紙 ) 도류안( 徒 流 案 ) 가운데, 강원도 강릉( 江 陵 )의 윤광표( 尹 光 杓 ), 평창( 平 昌 ) 의 김영오( 金 永 五 ), 회양( 淮 陽 )의 김흥록( 金 興 彔 ), 삼척( 三 陟 )의 김영완( 金 永 完 ), 간성( 杆 城 )의 윤두현( 尹 斗 鉉 ), 철원( 鐵 原 )의 하사영( 河 士 永 ), 고성( 高 城 )의 선병호( 宣 秉 鎬 ), 울진( 蔚 珍 )의 배 기영( 裵 基 榮 ), 인제( 麟 蹄 )의 임사선( 林 士 善 ), 안협( 安 峽 )의 이흥서( 李 興 瑞 ), 김화( 金 化 )의 곽억 복( 郭 億 福 ), 횡성( 橫 城 )의 권덕한( 權 德 漢 ), 철원의 신종필( 申 宗 弼 ), 양양( 襄 陽 )의 서치학( 徐 致 學 ), 간성의 최치문( 崔 致 文 ), 낭천( 狼 川 )의 송희조( 宋 熙 朝 ), 금성( 金 城 )의 곽남혁( 郭 南 赫 ), 철 원의 권익수( 權 益 洙 ), 금성의 이일주( 李 一 柱 ), 양구( 楊 口 )의 이화춘( 李 華 春 ), 낭천의 김창식 ( 金 昌 植 ), 홍천( 洪 川 )의 유응진( 柳 應 辰 ), 철원의 천두성( 千 斗 星 ), 금성의 방이수( 方 利 守 ), 삼척 의 주시옥( 朱 時 玉 ), 철원의 구경구( 具 敬 九 ), 삼척의 한영국( 韓 永 國 ), 홍천의 김석관( 金 錫 寬 ), 삼척의 장영기( 張 永 琪 ), 강릉의 최창수( 崔 昌 守 ), 인제의 황정언( 黃 正 彦 ), 통천( 通 川 )의 박잉출 ( 朴 芿 出 ), 강릉의 김석현( 金 錫 鉉 ), 간성의 강태주( 姜 台 周 ), 평강( 平 康 )의 이달지( 李 達 之 ), 안협 의 김두형( 金 斗 亨 ), 철원의 이근회( 李 根 晦 ), 김화의 유호석( 劉 好 石 ), 양구의 김한풍( 金 漢 豐 ), 김화의 이원모( 李 元 模 ), 양구의 조기홍( 趙 基 洪 ), 울진의 만흡( 晚 洽 ), 이천( 伊 川 )의 김종현( 金 宗 玄 ), 삼척의 주경섭( 朱 京 燮 ), 금성의 장학신( 張 學 信 )ㆍ신정대( 申 定 大 ), 회양의 이혁우( 李 赫 雨 ), 고성의 김윤성( 金 允 成 ), 통천의 김봉조( 金 鳳 祚 )ㆍ김만근( 金 萬 根 ), 양양의 김석주( 金 石 柱 ), 철원의 김고성( 金 固 城 ), 정선( 旌 善 )의 이태주( 李 泰 柱 ), 홍천의 지도치( 池 道 治 ), 통천의 정기태( 鄭 基 泰 ), 양양의 이경식( 李 景 植 ), 평해( 平 海 )의 김재찬( 金 載 贊 ), 이천의 전시달( 全 時 達 ), 인제의 이완실( 李 完 實 )ㆍ김관희( 金 官 熙 ), 평창의 이근우( 李 根 雨 ), 낭천의 김공집( 金 公 集 ), 김화의 장봉석( 張 奉 石 )ㆍ마일록( 馬 一 祿 ), 안협의 조문환( 趙 文 煥 ), 낭천의 천순서( 千 順 西 ), 통천의 관노( 官 奴 ) 길록( 吉 祿 ), 횡성의 김윤명( 金 允 明 ), 김화의 손성유( 孫 聖 有 ), 통천의 배정익( 裵 正 益 )ㆍ장판악( 張 判 岳 ), 평창의 김봉이( 金 奉 伊 )ㆍ윤자학( 尹 滋 學 ), 홍천의 송덕일( 宋 德 日 ), 낭천의 양관오( 梁 官 五 ), 안협의 방치보( 方 致 甫 )ㆍ김병하( 金 丙 河 ), 양구의 김오현( 金 五 鉉 ), 정선의 이풍회( 李 豐 會 ), 평강의 임응원( 林 應 元 ), 회양의 노병선( 盧 炳 先 ), 양양의 관노 시 운( 時 云 ), 고성의 차득수( 車 得 秀 ), 이천의 서유조( 徐 有 祚 ), 회양의 신유완( 申 有 完 ), 양양의 이 병선( 李 炳 善 ), 안협의 김익점( 金 益 漸 ), 낭천의 오준관( 吳 俊 寬 ), 강릉의 이금석( 李 今 石 )ㆍ임석 홍( 林 石 弘 )ㆍ진 조이( 陳 召 史 )ㆍ김동학( 金 東 學 ), 낭천의 허정일( 許 正 一 ), 홍천의 성규운( 成 圭

202 202 - 運 ), 고성의 홍흥( 洪 興 ), 회양의 진택( 震 澤 ), 평강의 서윤호( 徐 允 鎬 ), 이천의 송원일( 宋 元 日 ) ㆍ현기수( 玄 奇 修 )ㆍ박윤선( 朴 允 先 ), 양양의 김천명( 金 千 明 )ㆍ윤자풍( 尹 滋 豐 ), 평창의 강황주 ( 姜 黃 周 ), 회양의 양윤필( 梁 允 必 ), 통천의 이중회( 李 仲 會 )ㆍ지삼달( 池 三 達 ), 낭천의 허신( 許 信 ), 철원의 이장환( 李 章 煥 ), 평강의 임귀동( 林 貴 同 ), 낭천의 강권회( 姜 權 會 ), 안협의 노선지 ( 盧 善 之 ), 고성의 장덕진( 張 德 眞 ), 정선의 이필수( 李 必 水 ), 안협의 안광렬( 安 光 烈 ), 고성의 김 낙풍( 金 樂 豐 )ㆍ김석이( 金 石 伊 )ㆍ이승연( 李 承 淵 ), 간성의 박영섭( 朴 永 涉 ), 평창의 전영서( 全 永 西 ), 통천의 김덕현( 金 德 鉉 ), 간성의 박흥규( 朴 興 圭 ), 강릉의 유희숙( 柳 熙 叔 ), 고성의 양정근 ( 楊 正 根 ), 강릉의 차응조( 車 應 祚 ), 삼척의 정석환( 鄭 錫 煥 ), 이천의 김정근( 金 正 根 ), 충청도 목 천( 木 川 )의 김응길( 金 應 吉 ), 옥천( 沃 川 )의 한부인( 韓 富 仁 ), 목천의 문성일( 文 成 一 ), 황간( 黃 磵 ) 의 차부담( 車 夫 淡 ), 진천( 鎭 川 )의 문판성( 文 判 成 ), 서산( 瑞 山 )의 김인화( 金 仁 化 ), 청산( 靑 山 )의 이병덕( 李 秉 德 ), 천안( 天 安 )의 이태산( 李 泰 山 ), 청산의 정황운( 鄭 黃 云 ), 영동( 永 同 )의 정두혁 ( 鄭 斗 爀 ), 부여( 扶 餘 )의 홍금복( 洪 金 福 ), 괴산( 槐 山 )의 방장득( 方 長 得 ), 직산( 稷 山 )의 주인식 ( 朱 仁 植 ), 남포( 藍 浦 )의 정흥도( 鄭 興 道 ), 청산의 배영수( 裵 永 守 ), 온양( 溫 陽 )의 성석환( 成 昔 煥 ), 청풍( 淸 風 )의 이선장( 李 善 長 ), 덕산( 德 山 )의 강재근( 康 在 根 ), 제천( 堤 川 )의 이익규( 李 翼 奎 ), 진천의 노석규( 盧 錫 圭 ), 목천의 이태순( 李 泰 淳 ), 진천의 박완욱( 朴 完 昱 ), 아산( 牙 山 )의 추문실( 秋 文 實 ), 충주( 忠 州 )의 김성완( 金 成 完 ), 영동의 박석복( 朴 石 福 ), 비인( 庇 仁 )의 이돌쇠 ( 李 乭 釗 ), 천안의 정승완( 鄭 承 完 )ㆍ윤덕현( 尹 德 賢 )ㆍ김시봉( 金 時 奉 )ㆍ이인우( 李 寅 宇 ), 진천의 김완식( 金 完 植 )ㆍ김응준( 金 應 俊 )ㆍ최경팔( 崔 京 八 )ㆍ김철이( 金 哲 伊 ), 괴산의 정일종( 鄭 一 宗 )ㆍ 이용하( 李 龍 夏 )ㆍ김명수( 金 明 洙 )ㆍ문정보( 文 正 甫 ), 홍주( 洪 州 )의 박돈배( 朴 敦 培 )ㆍ이무송( 李 茂 松 )ㆍ황극성( 黃 極 成 ), 청양( 靑 陽 )의 김돌몽( 金 乭 蒙 )ㆍ박사언( 朴 士 彦 )ㆍ민창호( 閔 暢 鎬 )ㆍ오준길 ( 吳 俊 吉 )ㆍ김응천( 金 應 天 ), 은진( 恩 津 )의 김능선( 金 能 善 ), 평택( 平 澤 )의 김구용( 金 九 容 )ㆍ정기 현( 鄭 己 玄 ), 직산의 박재숙( 朴 在 肅 )ㆍ김치진( 金 治 鎭 ), 진천의 안우정( 安 禹 鼎 ), 목천의 박갑득 ( 朴 甲 得 )ㆍ박제정( 朴 齊 正 )ㆍ조윤식( 趙 允 植 )ㆍ김황서( 金 黃 西 )ㆍ이일천( 李 日 天 )ㆍ김준섭( 金 俊 燮 ), 대흥( 大 興 )의 안응구( 安 應 九 )ㆍ채성규( 蔡 性 奎 ), 단양( 丹 陽 )의 이우서( 李 禹 瑞 )ㆍ정태현( 程 泰 鉉 )ㆍ이언배( 李 言 培 )ㆍ권문약( 權 文 若 ), 예산( 禮 山 )의 유동혁( 劉 東 爀 )ㆍ이장언( 李 章 彦 ), 온양 ( 溫 陽 )의 황순흥( 黃 順 興 )ㆍ이덕행( 李 德 行 )ㆍ추약대( 秋 若 大 ), 결성( 結 城 )의 김여득( 金 汝 得 ), 연 기( 燕 岐 )의 이진실( 李 珍 實 ), 신창( 新 昌 )의 백지홍( 白 智 洪 )ㆍ홍산석( 洪 山 錫 ), 황간의 차준식( 車 俊 植 )ㆍ김대락( 金 大 洛 )ㆍ도학순( 都 學 順 )ㆍ최맹철( 崔 孟 哲 ), 면천( 沔 川 )의 김치극( 金 致 極 )ㆍ유중 일( 柳 仲 一 ), 영동의 이순혁( 李 淳 爀 )ㆍ윤용화( 尹 龍 華 )ㆍ이교학( 李 喬 學 )ㆍ정문호( 鄭 文 鎬 ), 진잠 ( 鎭 岑 )의 한태평( 韓 太 平 )ㆍ김진우( 金 鎭 瑀 ), 청안( 淸 安 )의 김인이( 金 仁 伊 )ㆍ정벽홍( 鄭 湢 鴻 ), 영 춘( 永 春 )의 손경천( 孫 敬 千 )ㆍ조상악( 曺 相 岳 ), 청산( 靑 山 )의 김근이( 金 根 伊 )ㆍ김권삼( 金 權 三 )ㆍ 김두성( 金 斗 星 )ㆍ허동기( 許 東 基 )ㆍ이해수( 李 海 秀 ), 부여의 조성록( 趙 成 祿 )ㆍ최판국( 崔 判 局 ), 임천( 林 川 )의 김한종( 金 漢 宗 ), 연풍( 延 豐 )의 손용옥( 孫 龍 玉 )ㆍ김치화( 金 致 化 )ㆍ이여정( 李 汝 貞 ), 남포의 서학수( 徐 學 洙 ), 전의( 全 義 )의 조석준( 趙 石 俊 )ㆍ오성효( 吳 成 孝 ), 정산( 定 山 )의 이 와룡( 李 臥 龍 )ㆍ김휘정( 金 輝 正 )ㆍ구환규( 具 煥 奎 ), 옥천( 沃 川 )의 김경락( 金 璟 洛 )ㆍ황하남( 黃 河 南 )ㆍ여한도( 余 漢 棹 )ㆍ김진기( 金 鎭 己 ), 아산( 牙 山 )의 민용식( 閔 容 植 )ㆍ박의규( 朴 義 圭 ), 서산 ( 瑞 山 )의 주삼복( 朱 三 福 )ㆍ이심도( 李 心 道 ), 이 조이( 李 召 史 ), 보은( 報 恩 )의 원국보( 元 國 甫 ), 회 인( 懷 仁 )의 정기만( 鄭 基 萬 )ㆍ이정숙( 李 正 淑 )ㆍ김재환( 金 在 煥 ), 충주의 진성원( 陳 性 元 ), 음성 ( 陰 城 )의 박봉춘( 朴 奉 春 )ㆍ정사길( 鄭 士 吉 ), 제천의 김계일( 金 桂 一 ), 회덕( 懷 德 )의 유동열( 柳 東 悅 ), 음성의 이재익( 李 在 翼 )ㆍ우상필( 禹 相 弼 ), 노성( 魯 城 )의 장문상( 張 汶 相 ), 연산( 連 山 )의 이 승조( 李 承 祚 )ㆍ신석근( 申 錫 根 ), 황해도 토산( 兔 山 )의 정태복( 鄭 太 福 )ㆍ이창실( 李 昌 實 )ㆍ김순

203 203 - 보( 金 順 甫 ), 배천( 白 川 )의 김경선( 金 景 善 )ㆍ남우연( 南 友 然 )ㆍ김순용( 金 順 用 )ㆍ홍계남( 洪 季 男 ) ㆍ박추양( 朴 秋 陽 )ㆍ문치엽( 文 治 燁 )ㆍ정명화( 鄭 明 和 )ㆍ권기준( 權 奇 俊 ), 풍천( 豐 川 )의 최명준( 崔 明 俊 )ㆍ김기영( 金 基 永 )ㆍ이영수( 李 英 秀 )ㆍ최석준( 崔 石 俊 )ㆍ노태은( 盧 台 殷 )ㆍ이정렬( 李 貞 烈 ), 연안( 延 安 )의 이원성( 李 元 成 )ㆍ최지형( 崔 枝 亨 )ㆍ김병돈( 金 秉 敦 )ㆍ이전옥( 李 篆 玉 )ㆍ임필성( 林 弼 成 )ㆍ나전( 羅 琠 )ㆍ유시형( 柳 時 馨 )ㆍ이택준( 李 宅 俊 ), 평산( 平 山 ) 조병성( 曺 秉 星 )ㆍ송익( 宋 釴 ) ㆍ민영현( 閔 泳 賢 )ㆍ손선경( 孫 善 卿 )ㆍ나홍묵( 羅 弘 默 )ㆍ윤계문( 尹 季 文 )ㆍ임정보( 林 鼎 輔 ), 장련 ( 長 連 )의 박성학( 朴 成 學 )ㆍ허알( 許 閼 )ㆍ여응준( 呂 應 俊 )ㆍ박순복( 朴 順 福 )ㆍ김기환( 金 箕 煥 )ㆍ양 주학( 梁 柱 學 ), 재령( 載 寧 )의 허운이( 許 雲 伊 )ㆍ이직순( 李 稷 淳 )ㆍ김전( 金 銓 )ㆍ이천응( 李 千 應 )ㆍ 차관성( 車 觀 成 )ㆍ이판옥( 李 判 玉 ), 장연( 長 淵 )의 강계호( 姜 啓 浩 )ㆍ송치경( 宋 致 景 )ㆍ유수형( 柳 壽 馨 )ㆍ김인덕( 金 仁 德 )ㆍ김영락( 金 永 洛 )ㆍ임판복( 林 判 卜 )ㆍ노승학( 盧 承 鶴 )ㆍ신용학( 申 用 學 )ㆍ전 형범( 全 亨 範 )ㆍ이왈오( 李 曰 五 ), 안악( 安 岳 )의 김경식( 金 景 植 )ㆍ이사언( 李 士 彦 )ㆍ이봉서( 李 鳳 瑞 )ㆍ정선경( 鄭 善 京 )ㆍ김낙순( 金 洛 淳 )ㆍ최원숙( 崔 元 叔 ), 봉산( 鳳 山 )의 이득록( 李 得 祿 )ㆍ이장운 ( 李 章 雲 )ㆍ박 무녀( 朴 巫 女 )ㆍ김남보( 金 南 甫 )ㆍ호승환( 胡 承 桓 )ㆍ조원숙( 趙 元 叔 ), 신계( 新 溪 )의 임춘화( 林 春 化 )ㆍ김낙헌( 金 樂 憲 ), 김천( 金 川 )의 박만철( 朴 萬 哲 ), 김천의 박호랑( 朴 好 郞 )ㆍ문홍 이( 文 弘 伊 ), 송화( 松 禾 )의 윤광헌( 尹 光 憲 )ㆍ이승식( 李 承 植 )ㆍ김동학( 金 東 鶴 )ㆍ조능학( 趙 凌 學 ) ㆍ김여익( 金 汝 益 ), 백령( 白 翎 )의 사노( 私 奴 ) 윤손( 允 孫 )ㆍ이준대( 李 俊 大 )ㆍ사노 산이( 山 伊 )ㆍ 김준석( 金 俊 石 )ㆍ윤흥식( 尹 興 植 )ㆍ장팔달( 張 八 達 )ㆍ이상현( 李 尙 賢 ), 신천( 信 川 )의 주종엽( 朱 宗 燁 )ㆍ명사언( 明 士 彦 )ㆍ장학범( 張 學 凡 )ㆍ박천길( 朴 千 吉 ), 초도( 椒 島 )의 한인수( 韓 仁 守 ), 황주 ( 黃 州 )의 유성근( 柳 成 根 )ㆍ고순룡( 高 順 龍 ), 문화( 文 化 )의 이계백( 李 季 伯 )ㆍ피한영( 皮 漢 英 )ㆍ고 정현( 高 貞 鉉 )ㆍ최익곤( 崔 益 坤 )ㆍ이성칠( 李 成 七 )ㆍ정대용( 鄭 大 用 )ㆍ김영심( 金 永 心 )ㆍ최윤신( 崔 允 信 ), 서흥( 瑞 興 )의 김병종( 金 秉 鍾 )ㆍ이 조이( 李 召 史 )ㆍ엄창영( 嚴 昌 永 ), 수안( 遂 安 )의 박경석 ( 朴 景 錫 ), 곡산( 谷 山 )의 최희석( 崔 希 錫 )ㆍ문학원( 文 學 元 )ㆍ이기년( 李 己 年 )ㆍ오철산( 吳 鐵 山 ), 은율( 殷 栗 )의 김원중( 金 元 仲 ), 강령( 康 翎 )의 김월성( 金 月 成 ), 평안도 순천( 順 川 )의 이계조( 李 啓 祚 )ㆍ김백용( 金 百 用 )ㆍ서상돈( 徐 相 敦 ), 순안( 順 安 )의 이경환( 李 景 煥 )ㆍ김주강( 金 周 江 ), 삼등 ( 三 登 )의 김주환( 金 周 煥 )ㆍ김천업( 金 千 業 )ㆍ양문석( 梁 文 錫 )ㆍ박성덕( 朴 聖 德 ), 맹산( 孟 山 )의 김 학성( 金 學 成 )ㆍ한을모( 韓 乙 模 )ㆍ신경천( 申 敬 天 )ㆍ박영선( 朴 永 先 )ㆍ권기삼( 權 夔 三 )ㆍ최광석( 崔 光 石 )ㆍ오한표( 吳 漢 豹 )ㆍ김복만( 金 福 萬 ), 영유( 永 柔 )의 한용석( 韓 用 錫 )ㆍ김돌쇠( 金 乭 釗 )ㆍ백경 중( 白 京 中 ), 중화( 中 和 )의 양재징( 梁 在 澄 )ㆍ김동진( 金 東 鎭 )ㆍ김석이( 金 錫 伊 )ㆍ황탁주( 黃 鐸 周 ) ㆍ최순달( 崔 巡 達 )ㆍ최치준( 崔 致 俊 )ㆍ김종우( 金 宗 祐 )ㆍ김성서( 金 成 西 )ㆍ김거부( 金 巨 富 ), 삭주 ( 朔 州 )의 김계학( 金 啓 學 )ㆍ사노 수봉( 水 奉 ), 철산( 鐵 山 )의 표덕준( 表 德 俊 )ㆍ최금석( 崔 今 石 )ㆍ 양주천( 梁 柱 天 )ㆍ임산여( 林 山 汝 ), 영변( 寧 邊 )의 신만룡( 申 萬 龍 )ㆍ이순렬( 李 淳 烈 ), 상원( 祥 原 ) 의 신경원( 申 敬 源 )ㆍ고금중( 高 今 重 )ㆍ이춘풍( 李 春 風 ), 양덕( 陽 德 )의 강도성( 姜 道 成 )ㆍ박학봉 ( 朴 學 奉 )ㆍ이다물( 李 多 勿 )ㆍ최복렬( 崔 復 烈 ), 은산( 殷 山 )의 양기완( 梁 基 完 ), 강서( 江 西 )의 김양 수( 金 良 守 )ㆍ김학성( 金 學 成 ), 가산( 嘉 山 )의 김기창( 金 基 昌 )ㆍ박상대( 朴 相 大 )ㆍ김상렬( 金 相 烈 ) ㆍ이우순( 李 又 舜 )ㆍ김윤필( 金 允 弼 )ㆍ김천이( 金 千 伊 ), 숙천( 肅 川 )의 허백선( 許 白 先 ), 강계( 江 界 )의 전만년귀( 全 萬 年 貴 ), 김장직( 金 長 稙 )ㆍ김순여( 金 巡 汝 )ㆍ이종오( 李 宗 五 ), 자산( 慈 山 )의 정찬교( 鄭 贊 敎 ), 벽동( 碧 潼 )의 이 조이( 李 召 史 )ㆍ김헌주( 金 憲 周 )ㆍ박경록( 朴 京 祿 )ㆍ조복이( 趙 卜 伊 )ㆍ최석린( 崔 錫 麟 )ㆍ김천이( 金 千 伊 )ㆍ이성의( 李 聖 儀 )ㆍ이치운( 李 致 云 )ㆍ조명옹( 曺 命 翁 ), 위원( 渭 原 )의 김문항( 金 文 恒 )ㆍ윤자성( 尹 滋 成 )ㆍ권흥록( 權 興 祿 ), 후창( 厚 昌 )의 윤필수( 尹 必 洙 ) ㆍ박춘근( 朴 春 根 )ㆍ사노 봉석( 奉 石 ), 창성( 昌 城 )의 최수복( 崔 水 福 )ㆍ김원일( 金 元 一 )ㆍ조여천 ( 趙 汝 千 ), 초산( 楚 山 )의 이경구( 李 景 九 )ㆍ김동규( 金 東 奎 )ㆍ안태민( 安 太 湣 )ㆍ권동혁( 權 東 赫 ),

204 204 - 성천( 成 川 )의 정광문( 鄭 匡 文 ), 증산( 甑 山 )의 김일권( 金 一 權 ), 선천( 宣 川 )의 이광희( 李 光 希 )ㆍ 오산이( 吳 山 伊 ), 운산( 雲 山 )의 김성백( 金 成 伯 )ㆍ김순칠( 金 順 七 )ㆍ윤효진( 尹 孝 鎭 )ㆍ이원성( 李 元 性 ), 안주( 安 州 )의 신석원( 申 錫 元 ), 정주( 定 州 )의 김서울( 金 西 鬱 )ㆍ박홍여( 朴 弘 汝 ), 희천( 熙 川 ) 의 박만돌( 朴 萬 乭 )ㆍ홍백천( 洪 白 川 )ㆍ조원경( 趙 元 敬 ), 곽산( 郭 山 )의 윤세희( 尹 世 熙 )ㆍ김진항 ( 金 鎭 恒 )ㆍ한문규( 韓 文 圭 )ㆍ하계도( 河 啓 圖 )ㆍ박덕여( 朴 德 汝 ), 태천( 泰 川 )의 김재만( 金 在 萬 )ㆍ 김백현( 金 伯 玄 )ㆍ강기연( 姜 奇 然 )ㆍ오순석( 吳 順 石 ), 강동( 江 東 )의 연창옥( 延 昌 玉 ), 박천( 博 川 ) 의 이능백( 李 能 白 ), 전라도 곡성( 谷 城 )의 손재부( 孫 在 富 )ㆍ한국원( 韓 國 源 )ㆍ김두세( 金 豆 世 )ㆍ 장대경( 張 大 景 ), 구례( 求 禮 )의 허홍성( 許 弘 性 )ㆍ이녹천( 李 祿 千 )ㆍ구희종( 具 稀 鍾 ), 남원( 南 原 ) 의 박영준( 朴 永 俊 )ㆍ장태석( 張 泰 錫 )ㆍ한용준( 韓 用 俊 )ㆍ김익기( 金 益 起 )ㆍ안효공( 安 孝 恭 )ㆍ장명 운( 張 明 云 )ㆍ서안두( 徐 安 斗 ), 정읍( 井 邑 )의 장경두( 張 京 斗 )ㆍ전군집( 全 君 集 ), 순창( 淳 昌 )의 우 승집( 禹 升 集 )ㆍ박재석( 朴 在 石 )ㆍ오연홍( 吳 然 弘 ), 금산( 錦 山 )의 최희철( 崔 希 哲 )ㆍ조찬희( 趙 贊 熙 )ㆍ황계문( 黃 季 文 )ㆍ김제의( 金 濟 義 )ㆍ여계형( 余 啓 亨 )ㆍ최종순( 崔 宗 順 ), 무주( 茂 朱 )의 김양필 ( 金 良 必 )ㆍ강용학( 姜 龍 學 )ㆍ박운교( 朴 云 敎 )ㆍ진병률( 陳 炳 律 )ㆍ이탁진( 李 鐸 辰 ), 광양( 光 陽 )의 송화삼( 宋 化 三 )ㆍ권중범( 權 仲 範 )ㆍ임성삼( 林 聖 三 )ㆍ송응수( 宋 應 壽 )ㆍ조금천( 趙 今 千 ), 태인( 泰 仁 )의 정기선( 鄭 奇 先 )ㆍ이종래( 李 鍾 來 )ㆍ김선산( 金 善 山 ), 보성( 寶 城 )의 송성여( 宋 成 汝 )ㆍ임덕 수( 林 德 水 )ㆍ김용갑( 金 龍 甲 )ㆍ성치준( 成 致 俊 ), 진산( 珍 山 )의 정진화( 鄭 鎭 華 )ㆍ강우회( 姜 友 會 ) ㆍ전양록( 全 兩 祿 )ㆍ김국신( 金 國 信 )ㆍ윤석의( 尹 錫 義 ), 함열( 咸 悅 )의 김영좌( 金 永 佐 )ㆍ박인달( 朴 仁 達 ), 장성( 長 城 )의 최선상( 崔 善 尙 )ㆍ중 계학( 戒 學 )ㆍ인밀억( 印 蜜 億 )ㆍ조윤학( 趙 允 學 ), 나주 ( 羅 州 )의 임선호( 任 善 鎬 )ㆍ우형정( 禹 亨 鼎 ), 강진( 康 津 )의 송용천( 宋 龍 千 )ㆍ신인영( 申 仁 永 )ㆍ윤 복만( 尹 福 萬 )ㆍ한광문( 韓 光 文 )ㆍ김창석( 金 昌 石 ), 해남( 海 南 )의 정경직( 鄭 敬 直 )ㆍ신원보( 申 元 甫 )ㆍ한화서( 韓 化 西 )ㆍ권주장( 權 周 章 )ㆍ김광여( 金 光 汝 )ㆍ박수영( 朴 壽 榮 )ㆍ이봉학( 李 奉 學 )ㆍ조 완순( 趙 完 淳 ), 임자도( 荏 子 島 )의 피병규( 皮 秉 奎 )ㆍ마희손( 馬 希 孫 ), 지도( 智 島 )의 윤흥만( 尹 興 萬 )ㆍ김흥국( 金 興 國 ), 여산( 礪 山 )의 지흥창( 池 興 昌 )ㆍ박치관( 朴 致 寬 ), 진도( 珍 島 )의 김정학( 金 正 學 )ㆍ신봉규( 申 鳳 奎 )ㆍ진치문( 陳 致 文 )ㆍ강은( 姜 蒑 ), 고군산( 古 群 山 )의 김용규( 金 容 圭 ), 위도 ( 蝟 島 )의 이원용( 李 元 用 ), 장흥( 長 興 )의 김천복( 金 千 福 )ㆍ김교운( 金 敎 云 )ㆍ이일두( 李 日 斗 )ㆍ손 정만( 孫 正 萬 )ㆍ박윤경( 朴 允 京 )ㆍ김한진( 金 漢 眞 )ㆍ신희선( 愼 希 善 )ㆍ박장백( 朴 長 伯 ), 고금도( 古 今 島 )의 최희경( 崔 喜 景 ), 만경( 萬 頃 )의 정태영( 程 泰 英 )ㆍ이필이( 李 弼 伊 )ㆍ정동원( 鄭 東 原 ), 용 안( 龍 安 )의 백낙문( 白 樂 文 ), 운봉( 雲 峰 )의 강극팔( 姜 極 八 )ㆍ신석운( 申 錫 云 )ㆍ김덕용( 金 德 用 )ㆍ 최순손( 崔 順 孫 )ㆍ심대숙( 沈 大 淑 )ㆍ김학수( 金 學 秀 )ㆍ심이숙( 沈 而 淑 ), 창평( 昌 平 )의 유재근( 柳 在 根 )ㆍ하치윤( 河 致 允 )ㆍ장태서( 張 太 西 ), 동복( 同 福 )의 유용채( 柳 容 采 )ㆍ김익제( 金 益 濟 )ㆍ방욱현 ( 方 旭 鉉 )ㆍ김봉선( 金 鳳 先 ), 흥덕( 興 德 )의 백인수( 白 麟 洙 )ㆍ박정유( 朴 涎 有 ), 능주( 綾 州 )의 김태 건( 金 泰 健 )ㆍ김덕보( 金 德 甫 ), 무안( 務 安 )의 함덕록( 咸 德 祿 ), 임실( 任 實 )의 고인영( 高 人 泳 )ㆍ김 귀복( 金 貴 福 )ㆍ김일남( 金 一 男 ), 광주( 光 州 )의 손달복( 孫 達 福 )ㆍ강재천( 姜 在 千 )ㆍ김성천( 金 性 千 ), 옥과( 玉 果 )의 장예준( 張 禮 俊 )ㆍ김정문( 金 正 文 ), 금구( 金 溝 )의 임기오( 林 其 吾 )ㆍ이만연( 李 萬 延 ), 영암( 靈 巖 )의 조선경( 曺 善 京 )ㆍ차의순( 車 義 順 ), 담양( 潭 陽 )의 이경렴( 李 京 廉 )ㆍ여견상 ( 余 見 祥 ), 낙안( 樂 安 )의 최해주( 崔 海 柱 )ㆍ변희원( 邊 希 元 )ㆍ최일삼( 崔 日 三 )ㆍ박재천( 朴 在 千 )ㆍ 이영수( 李 永 秀 ), 남평( 南 平 )의 김문언( 金 文 彦 )ㆍ김덕상( 金 德 相 ), 화순( 和 順 )의 김태산( 金 台 山 ) ㆍ박암회( 朴 岩 回 ), 익산( 益 山 )의 노진국( 盧 鎭 國 )ㆍ홍재량( 洪 在 亮 ), 순천( 順 天 )의 최석문( 崔 石 文 ), 장수( 長 水 )의 윤행근( 尹 行 根 )ㆍ하재두( 河 在 斗 )ㆍ정유곤( 鄭 有 坤 ), 고산( 高 山 )의 조협승( 曺 協 承 )ㆍ주만흥( 朱 萬 興 )ㆍ황우서( 黃 佑 瑞 )ㆍ하경률( 河 敬 聿 ), 진안( 鎭 安 )의 계형( 桂 瀅 ), 무장( 茂 長 )의 박문하( 朴 文 夏 ), 흥양( 興 陽 )의 임도원( 林 道 元 ), 경상도 하양( 河 陽 )의 백기환( 白 琪 煥 ), 안

205 205 - 의( 安 義 )의 천복만( 千 福 萬 ), 거창( 居 昌 )의 김수옥( 金 水 玉 ), 하동( 河 東 )의 오명협( 吳 明 協 ), 청송 ( 靑 松 )의 김타복( 金 他 卜 ), 언양( 彦 陽 )의 이송근( 李 松 根 ), 상주( 尙 州 )의 엄완석( 嚴 完 石 ), 자인 ( 慈 仁 )의 박희원( 朴 喜 元 ), 거창의 중 정감( 定 甘 ), 하양의 장중필( 張 仲 弼 ), 울산( 蔚 山 )의 박 조 이( 朴 召 史 )ㆍ김아팔( 金 阿 八 ), 비안( 比 安 )의 이경화( 李 敬 化 ), 단성( 丹 城 )의 남궁국서( 南 宮 國 西 ), 청송의 고여덕( 高 汝 德 ), 진보( 眞 寶 )의 유우봉( 柳 右 奉 ), 영양( 英 陽 )의 김원서( 金 元 西 ), 개령( 開 寧 )의 김재홍( 金 在 弘 ), 청하( 淸 河 )의 박 조이( 朴 召 史 ), 안동( 安 東 )의 김원집( 金 元 集 ), 삼가( 三 嘉 )의 김성일( 金 成 一 ), 청도( 淸 道 )의 이준직( 李 俊 稙 ), 사천( 泗 川 )의 이화실( 李 化 實 ), 지례( 知 禮 )의 복윤성( 卜 允 成 ), 선산( 善 山 )의 허횡( 許 宖 ), 하동의 정인필( 鄭 仁 弼 ), 함양( 咸 陽 )의 이익호 ( 李 翊 鎬 ), 삼가의 한점동( 韓 點 童 ), 연일( 延 日 )의 김순표( 金 順 杓 ), 선산의 최정선( 崔 正 先 ), 지례 의 이계성( 李 季 成 ), 안의의 최학조( 崔 學 朝 ), 장기( 長 鬐 )의 이승칠( 李 承 七 ), 창원( 昌 原 )의 김명 옥( 金 明 玉 ), 김해( 金 海 )의 홍복진( 洪 福 鎭 ), 영해( 寧 海 )의 김태덕( 金 泰 德 ), 선산의 김기식( 金 基 植 ), 청하의 안경백( 安 景 伯 ), 청송의 장부안( 張 扶 安 ), 산청( 山 淸 )의 김찬명( 金 贊 明 ), 울산의 정치화( 鄭 致 化 ), 밀양( 密 陽 )의 김명운( 金 明 雲 ), 상주의 김양순( 金 良 順 ), 양산( 梁 山 )의 김만성 ( 金 萬 成 ), 상주의 윤상신( 尹 相 信 ), 함양의 서철순( 徐 喆 順 ), 울산의 김윤채( 金 潤 彩 ), 장기의 최 인성( 崔 仁 成 ), 금산( 金 山 )의 최건만( 崔 建 萬 ), 인동( 仁 同 )의 김윤광( 金 允 光 ), 하동의 조영우( 趙 永 佑 ), 밀양의 황상우( 黃 相 禹 ), 용궁( 龍 宮 )의 박태성( 朴 泰 成 ), 풍기( 豐 基 )의 장재형( 張 在 衡 ), 영양의 김영석( 金 永 石 ), 안의의 송희준( 宋 熙 俊 ), 남해( 南 海 )의 백사윤( 白 士 允 ), 순흥( 順 興 )의 한기옥( 韓 箕 玉 ), 양산의 송진춘( 宋 辰 春 ), 용궁의 엄풍록( 嚴 豐 祿 ), 사천의 김득용( 金 得 用 ), 인 동의 배을룡( 裵 乙 龍 ), 영천( 榮 川 )의 정구구( 鄭 九 九 ), 순흥의 김성보( 金 性 輔 ), 초계( 草 溪 )의 박 대칠( 朴 大 七 ), 개령의 최창현( 崔 昌 鉉 ), 문경( 聞 慶 )의 유만안( 兪 晚 安 ), 산청의 임경서( 林 慶 瑞 ), 신녕( 新 寧 )의 임기순( 林 冀 淳 ), 영양의 이영수( 李 永 秀 ), 언양의 김한봉( 金 漢 鳳 )ㆍ안필상( 安 弼 相 ), 용궁의 이지술( 李 志 述 ), 영양의 이경수( 李 敬 水 )ㆍ구완보( 具 完 甫 ), 진주( 晉 州 )의 박인환 ( 朴 寅 煥 )ㆍ김문선( 金 文 先 ), 장기의 박근양( 朴 根 楊 )ㆍ정천일( 鄭 千 一 )ㆍ김운삼( 金 云 三 ), 청하의 이계윤( 李 啓 允 ), 군위( 軍 威 )의 김학구( 金 學 九 ), 거창의 이천응( 李 天 應 )ㆍ김칠남( 金 七 男 ), 단성 의 강순만( 姜 順 萬 ), 영천( 永 川 )의 유순봉( 柳 舜 奉 ), 함창( 咸 昌 )의 양주명( 梁 柱 明 ), 경주( 慶 州 )의 정시권( 鄭 時 權 ), 청하의 김창훈( 金 昌 勳 ), 언양의 천유선( 千 有 先 ), 청하의 사노 춘탁( 春 卓 ), 초 계의 엄행석( 嚴 行 碩 ), 영양의 노( 奴 ) 용학( 用 學 ), 단성의 이병두( 李 秉 斗 ), 언양의 윤현영( 尹 顯 榮 ), 거창의 이성칠( 李 成 七 )ㆍ이성록( 李 成 祿 ), 지례의 손백용( 孫 白 用 ), 언양의 심문삼( 沈 文 三 ), 청하의 윤정덕( 尹 正 德 ), 함양의 김형보( 金 亨 甫 ), 양산의 조성구( 趙 聖 九 ), 초계의 조육관 ( 趙 六 寬 ), 영천( 榮 川 )의 김태원( 金 泰 元 ), 장기의 김연집( 金 演 集 )ㆍ이용준( 李 用 俊 )ㆍ전우면( 全 禹 冕 )ㆍ이사홍( 李 士 弘 ), 청송의 이성서( 李 聖 西 ), 영천( 榮 川 )의 우사집( 禹 士 集 ), 청도의 유경민 ( 柳 敬 民 ), 상주의 김수봉( 金 水 奉 ), 청송의 안흥운( 安 興 雲 ), 사천의 임사준( 林 士 俊 ), 문경의 윤 몽술( 尹 夢 述 )ㆍ유봉의( 柳 鳳 儀 ), 산청의 최영신( 崔 榮 信 ), 영산( 靈 山 )의 김여경( 金 汝 卿 ), 청하의 이병모( 李 丙 模 ), 순흥의 이만익( 李 萬 益 ), 합천( 陜 川 )의 이원직( 李 元 稙 ), 청하의 백덕유( 白 德 有 )ㆍ남운운( 南 云 運 ), 문경의 서화성( 徐 化 成 ), 흥해( 興 海 )의 손상식( 孫 相 植 )ㆍ권성훈( 權 成 勛 ), 금산의 진대용( 陳 大 容 ), 순흥의 고상헌( 高 相 憲 ), 함양의 김태환( 金 兌 煥 ), 단성의 김한준( 金 漢 俊 ), 영천( 永 川 )의 김대만( 金 大 萬 ), 영양의 김영기( 金 永 奇 ), 영천( 榮 川 )의 홍종식( 洪 宗 植 ), 진 주의 김창대( 金 昌 大 ), 흥해의 이 조이( 李 召 史 ), 예안( 禮 安 )의 김춘오( 金 春 五 ), 함양의 정담이 ( 鄭 淡 伊 ), 순흥의 정귀문( 鄭 貴 文 ), 웅천( 熊 川 )의 홍우정( 洪 祐 貞 ), 영양의 김경중( 金 敬 仲 ), 봉화 ( 奉 化 )의 김시옥( 金 時 玉 ), 영천( 榮 川 )의 황명구( 黃 命 九 ), 영산의 이응삼( 李 應 三 ), 함양의 박기 종( 朴 淇 宗 ), 영천( 榮 川 )의 최도재( 崔 道 在 ), 경주의 최영국( 崔 榮 國 ), 함경도 안변( 安 邊 )의 김방

206 206 - 길( 金 方 吉 )ㆍ김종석( 金 宗 石 )ㆍ김성균( 金 成 均 )ㆍ김학신( 金 學 信 )ㆍ김천모( 金 天 模 )ㆍ고의진( 高 儀 鎭 )ㆍ송정환( 宋 定 煥 ), 명천( 明 川 )의 이영선( 李 英 善 )ㆍ김이호( 金 利 祜 )ㆍ천을성( 千 乙 成 )ㆍ오만수 ( 吳 萬 水 )ㆍ김화석( 金 化 石 )ㆍ나덕칠( 羅 德 七 )ㆍ윤부성( 尹 富 成 )ㆍ권홍서( 權 弘 瑞 ), 문천( 文 川 )의 최홍성( 崔 弘 成 )ㆍ한용기( 韓 用 基 )ㆍ안성운( 安 聖 云 ), 갑산( 甲 山 )의 한점동( 韓 点 童 )ㆍ박용빈( 朴 容 斌 ), 북청( 北 靑 )의 장계현( 張 啓 玄 )ㆍ이봉로( 李 鳳 魯 ), 정평( 定 平 )의 천순호( 千 淳 浩 )ㆍ배진혁( 裵 辰 奕 ), 홍원( 洪 原 )의 김영석( 金 永 石 )ㆍ최내숙( 崔 乃 叔 ), 부령( 富 寧 )의 김소회( 金 所 回 ), 길주( 吉 州 )의 이정렬( 李 貞 烈 )ㆍ백태경( 白 太 敬 )ㆍ정태봉( 鄭 泰 鳳 ), 고원( 高 原 )의 송치관( 宋 致 寬 )ㆍ윤경 오( 尹 景 五 )ㆍ김금득( 金 今 得 )ㆍ김상협( 金 相 協 )ㆍ서문유( 徐 文 有 ), 영흥( 永 興 )의 정계륜( 鄭 季 倫 ) ㆍ박주선( 朴 注 善 )ㆍ유치중( 兪 致 仲 )ㆍ이지규( 李 智 逵 )ㆍ문중호( 文 仲 鎬 )ㆍ조대원( 趙 大 元 )ㆍ김인 수( 金 仁 守 )ㆍ이준길( 李 俊 吉 ), 경성( 鏡 城 )의 권오규( 權 五 圭 )ㆍ박제우( 朴 濟 禹 ), 경원( 慶 源 )의 박 하섭( 朴 夏 燮 )ㆍ김봉명( 金 奉 明 ), 무산( 茂 山 )의 박월천( 朴 月 千 ), 종성( 鍾 城 )의 신성원( 辛 成 元 ), 회령( 會 寧 )의 김치규( 金 治 奎 ), 경흥( 慶 興 )의 박산춘( 朴 山 春 ), 단천( 端 川 )의 황수동( 黃 壽 東 )ㆍ 강태환( 姜 泰 煥 ), 용담( 龍 潭 )의 김호열( 金 好 烈 )ㆍ박내훈( 朴 來 薰 ), 순천의 조기섭( 趙 基 燮 ), 금성 의 윤준보( 尹 俊 甫 ), 풍천( 豐 川 )의 박치흥( 朴 致 興 ), 송화의 박화성( 朴 化 成 ), 봉산의 이명여( 李 明 汝 ), 평산( 平 山 )의 박군석( 朴 君 石 ), 예산( 禮 山 )의 김천복( 金 千 福 ) 등에 대해 방( 放 ) 자를 써 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리신 대로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도의 도신에게 분부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1년 1월 28일(병오) / 조명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조명호( 趙 明 鎬 )를 선전관으로, 정기헌( 鄭 岐 憲 )을 부장으로, 양선필( 梁 善 弼 )을 화수산 별장 ( 花 水 山 別 將 )으로, 정규찬( 鄭 圭 瓚 )을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 유협( 柳 )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삼았다 / 고종 31년 2월 3일(경술) / 전직의 임소에 있는 기사장 이병권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총어영의 계 또 총어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기사장 이병권( 李 昞 權 )은 전임( 前 任 )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로서, 유석규( 柳 錫 圭 )는 전 임 법성 첨사( 法 聖 僉 使 )로서 모두 임소( 任 所 )에 있습니다. 군대를 거느리는 직책을 오랫동안 비워 두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1년 2월 30일(정축) / 삼척에 유배된 최병구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207 207 -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각도의 유지 도류안( 油 紙 徒 流 案 ) 중에 강원도 삼척( 三 陟 )의 최병구( 崔 秉 九 )ㆍ최범이( 崔 範 伊 ), 간성( 杆 城 )의 노( 奴 ) 용석( 用 石 )ㆍ허연( 許 淵 ), 회양( 淮 陽 )의 이응칠( 李 應 七 ), 금성( 金 城 )의 오입조( 吳 立 朝 ), 김화( 金 化 )의 정창식( 鄭 昌 植 ), 정선( 旌 善 )의 김유상( 金 有 常 ), 김화의 한성길 ( 韓 性 吉 ), 평강( 平 康 )의 박원길( 朴 元 吉 ), 양구( 楊 口 )의 이학로( 李 學 老 ), 양양( 襄 陽 )의 임만돌 ( 林 萬 乭 ), 홍천( 洪 川 )의 김덕순( 金 德 順 ), 안협( 安 峽 )의 정계중( 鄭 啓 中 ), 강릉( 江 陵 )의 조병철 ( 曺 秉 轍 ), 양양의 이기재( 李 夔 在 ), 낭천( 狼 川 )의 최윤여( 崔 允 汝 ), 철원( 鐵 原 )의 권진만( 權 鎭 萬 ), 평강의 박형식( 朴 亨 植 ), 이천( 伊 川 )의 박대상( 朴 大 相 ), 인제( 麟 蹄 )의 금영규( 琴 永 圭 ), 금 성의 이성조( 李 聖 祚 ), 회양의 김사곤( 金 士 坤 ), 낭천의 최태준( 崔 太 俊 ), 평창( 平 昌 )의 김영두 ( 金 鈴 斗 ), 횡성( 橫 城 )의 김두봉( 金 斗 鳳 ), 홍천의 원덕현( 元 德 鉉 ), 평창의 황원동( 黃 元 同 ), 평강 의 황영권( 黃 永 權 ), 횡성의 홍기용( 洪 奇 用 ), 평강의 김창현( 金 昌 鉉 ), 안협의 조상호( 趙 相 浩 ), 삼척의 김영천( 金 永 川 ), 이천의 김두환( 金 斗 煥 ), 홍천의 이세구( 李 世 九 ), 강릉의 안기명( 安 基 命 ), 양양의 이용국( 李 龍 國 )ㆍ김봉달( 金 奉 達 ), 흡곡( 歙 谷 )의 김원근( 金 元 根 ), 정선의 박용호 ( 朴 用 鎬 )와 중 성우( 聖 禹 ), 금성의 황처중( 黃 處 中 ), 흡곡의 김영순( 金 英 順 ), 강릉의 김동학( 金 東 學 ), 회양의 최치권( 崔 致 權 ), 정선의 박근동( 朴 根 東 ), 김화의 이계환( 李 桂 煥 ), 흡곡의 주명 규( 周 明 奎 ), 양구의 김사심( 金 士 心 ), 간성의 박영섭( 朴 永 涉 ), 평강의 차덕수( 車 德 守 ), 횡성의 홍옥서( 洪 玉 瑞 ), 흡곡의 이광춘( 李 光 春 ), 안협의 이용운( 李 用 云 ), 평강의 유정희( 柳 定 羲 ), 홍 천의 하형오( 河 衡 吾 ), 양구의 나 조이( 羅 召 史 ), 인제의 박춘서( 朴 春 西 ), 양구의 김학준( 金 學 俊 ), 낭천의 조동연( 趙 東 淵 ), 김화의 강복순( 姜 卜 淳 ), 간성의 윤종순( 尹 宗 淳 ), 철원의 민원명 ( 閔 元 明 ), 삼척의 채성숙( 蔡 成 淑 )과 충청도 영춘( 永 春 )의 최만출( 崔 萬 出 ), 서산( 瑞 山 )의 이창 석( 李 昌 石 ), 진천( 鎭 川 )의 김홍달( 金 鴻 達 ), 청풍( 淸 風 )의 공재원( 孔 才 源 ), 청안( 淸 安 )의 성준호 ( 成 俊 浩 ), 은진( 恩 津 )의 한인식( 韓 仁 植 )ㆍ차보영( 車 保 永 ), 영춘의 노( 奴 ) 실공( 實 公 ), 회덕( 懷 德 )의 이기선( 李 紀 善 ), 회인( 懷 仁 )의 송계운( 宋 啓 運 ), 평택( 平 澤 )의 김인근( 金 仁 根 ), 단양( 丹 陽 )의 안종신( 安 宗 辰 ), 천안( 天 安 )의 최 조이( 崔 召 史 ), 한산( 韓 山 )의 조기준( 趙 基 俊 ), 충주( 忠 州 )의 서상홍( 徐 尙 洪 ), 은진의 정대인( 鄭 大 仁 ), 연기( 燕 岐 )의 이정여( 李 定 汝 ), 괴산( 槐 山 )의 김 교순( 金 敎 順 ), 대흥( 大 興 )의 김한익( 金 漢 翊 ), 연풍( 延 豐 )의 이만기( 李 萬 基 )ㆍ유광수( 柳 光 秀 ), 단양의 권홍일( 權 弘 鎰 ), 충주의 경희( 慶 熙 ), 옥천( 沃 川 )의 궁제곤( 弓 濟 坤 ), 단양의 김재관( 金 在 寬 ), 청산( 靑 山 )의 남상철( 南 象 哲 ), 보은( 報 恩 )의 지재정( 池 在 鼎 ), 은진의 양채환( 梁 彩 煥 )ㆍ 윤종석( 尹 宗 錫 ), 청안( 淸 安 )의 심규한( 沈 奎 瀚 ), 정산( 定 山 )의 이정옥( 李 定 玉 ), 음성( 陰 城 )의 박 춘길( 朴 春 吉 ), 연산( 連 山 )의 허즙( 許 楫 ), 황간( 黃 磵 )의 김치삼( 金 致 三 ), 신창( 新 昌 )의 이중경 ( 李 仲 㯳 ), 회덕의 김상필( 金 相 弼 ), 결성( 結 城 )의 주문양( 朱 汶 陽 ), 진천( 鎭 川 )의 손흥석( 孫 興 石 ), 진잠( 鎭 岑 )의 최윤학( 崔 允 學 ), 홍주( 洪 州 )의 문명성( 文 明 星 ), 노성( 魯 城 )의 이경복( 李 景 卜 )ㆍ권덕일( 權 德 一 ), 전의( 全 義 )의 임순오( 任 順 吾 ), 연기의 최차진( 崔 且 辰 ), 청산의 최학석 ( 崔 學 石 ), 평택의 김석주( 金 錫 柱 ), 청주( 淸 州 )의 김흥준( 金 興 俊 ), 홍주( 洪 州 )의 안 조이( 安 召 史 ), 노성의 박몽수( 朴 夢 守 ), 천안의 최석길( 崔 石 吉 )ㆍ이유선( 李 有 善 ), 노성의 이연범( 李 演 凡 ), 은진의 이명서( 李 明 西 ), 연산의 이연두( 李 演 斗 ), 청풍의 이수계( 李 穗 桂 ), 부여( 扶 餘 )의 서우엽( 徐 佑 燁 ), 제천( 堤 川 )의 한석만( 韓 錫 萬 ), 아산( 牙 山 )의 이상묵( 李 尙 默 ), 직산( 稷 山 )의 김 영회( 金 永 會 ), 온양( 溫 陽 )의 김귀식( 金 貴 植 ), 신창( 新 昌 )의 유항묵( 劉 恒 默 ), 연풍의 박성화( 朴 聖 化 ), 예산( 禮 山 )의 김명오( 金 明 五 ), 옥천( 沃 川 )의 이용화( 李 用 化 ), 연산의 심선택( 沈 善 澤 ), 평택의 신귀중( 申 貴 仲 ), 신창의 이영오( 李 永 五 ), 청양( 靑 陽 )의 김장연( 金 長 淵 ), 회인의 황시우 ( 黃 時 雨 )와 전라도 금산( 錦 山 )의 성영봉( 成 永 鳳 ), 무주( 茂 朱 )의 김옥선( 金 玉 先 ), 진산( 珍 山 )의

208 208 - 조임이( 趙 林 伊 ), 고창( 高 敞 )의 권주수( 權 周 守 ), 진안( 鎭 安 )의 천호보( 千 好 甫 ), 능주( 綾 州 )의 원 성여( 元 成 汝 ), 용담( 龍 潭 )의 이주백( 李 周 伯 ), 해남( 海 南 )의 이응엽( 李 應 燁 ), 함열( 咸 悅 )의 홍일 섭( 洪 馹 燮 ), 고금도( 古 今 島 )의 오성범( 吳 聖 範 ), 금갑도( 金 甲 島 )의 홍산정( 洪 珊 鼎 ), 진산의 이 화실( 李 化 實 ), 구례( 求 禮 )의 이원선( 李 元 善 ), 옥과( 玉 果 )의 한용인( 韓 用 仁 ), 금산의 왕의관( 王 儀 寬 )ㆍ박세혁( 朴 世 赫 ), 강진( 康 津 )의 장영식( 張 永 植 )ㆍ윤명언( 尹 明 彦 ), 영광( 靈 光 )의 김학순 ( 金 學 舜 ), 진도( 珍 島 )의 조익환( 曺 益 煥 ), 장흥( 長 興 )의 최군산( 崔 君 山 ), 창평( 昌 平 )의 박중기 ( 朴 仲 基 ), 보성( 寶 城 )의 김금당( 金 今 堂 ), 무주의 이만형( 李 萬 亨 ), 무안( 務 安 )의 변성용( 卞 成 用 ), 장성( 長 城 )의 백낙기( 白 樂 基 ), 남원( 南 源 )의 서종협( 徐 宗 協 ), 진산의 정광여( 鄭 光 汝 ), 용 담( 龍 潭 )의 주일출( 朱 日 出 )ㆍ이순옥( 李 順 玉 ), 금산의 황여칠( 黃 汝 七 ), 고산( 高 山 )의 백수창( 白 壽 昌 ), 용담의 하대운( 河 大 雲 )ㆍ박광서( 朴 光 西 ), 정읍( 井 邑 )의 고춘삼( 高 春 三 ), 보성의 김봉래 ( 金 奉 來 ), 광양( 光 陽 )의 노희복( 盧 希 卜 ), 운봉( 雲 峯 )의 김낙신( 金 洛 信 ), 강진의 김판용( 金 判 用 ), 장성의 윤화여( 尹 化 汝 ), 용담의 최낙선( 崔 洛 先 ), 운봉의 김형기( 金 亨 基 ), 남평( 南 平 )의 장익두( 張 翼 斗 ), 남원의 오봉철( 吳 奉 哲 ), 장수( 長 水 )의 김흥갑( 金 興 甲 )과 황해도 장련( 長 連 )의 김용복( 金 龍 福 ), 평산( 平 山 )의 김대진( 金 大 振 ), 송화( 松 禾 )의 박치찬( 朴 致 贊 ), 금천( 金 川 )의 고 순근( 高 順 根 ), 서흥( 瑞 興 )의 김봉준( 金 鳳 俊 ), 수안( 遂 安 )의 창성무( 昌 成 毋 ), 은율( 殷 栗 )의 이강 언( 李 康 彦 ), 수안의 조율록( 趙 律 祿 ), 신계( 新 溪 )의 권수동( 權 壽 同 ), 금천의 박종혁( 朴 鍾 爀 ), 은 율의 맹천염( 孟 天 炎 ), 서흥의 조명대( 曺 命 大 ), 은율의 최형효( 崔 亨 孝 ), 토산( 兔 山 )의 이필려 ( 李 必 呂 )ㆍ이백돌( 李 白 乭 ), 배천( 白 川 )의 홍정희( 洪 正 熹 ), 장련의 최덕옹( 崔 德 翁 ), 풍천( 豐 川 ) 의 유화섭( 劉 和 燮 ), 배천의 김기석( 金 其 錫 ), 연안( 延 安 )의 이황주( 李 璜 周 ), 재령( 載 寧 )의 조석 준( 趙 石 俊 ), 금천의 최춘복( 崔 春 福 ), 백령( 白 翎 )의 사노( 私 奴 ) 방명석( 方 命 石 )ㆍ하 조이( 河 召 史 ), 토산의 윤구열( 尹 九 烈 ), 서흥의 이한회( 李 漢 會 ), 백령의 주태환( 朱 泰 桓 ), 장연의 서광묵 ( 徐 光 默 ), 봉산( 鳳 山 )의 이종구( 李 宗 九 ), 안악( 安 岳 )의 양주룡( 梁 柱 龍 ), 신천( 信 川 )의 송인도 ( 宋 仁 道 ), 수안의 전양수( 全 陽 守 ), 안악의 이성오( 李 成 五 ), 황주( 黃 州 )의 주함흥( 朱 咸 興 ), 금천 의 전순여( 田 順 汝 )ㆍ김용려( 金 用 呂 ), 토산의 임오철( 林 五 哲 ), 신천의 이자삼( 李 自 三 )ㆍ길삼계 ( 吉 森 桂 ), 송화의 이손길( 李 孫 吉 ), 신천의 한승우( 韓 承 佑 ), 황주( 黃 州 )의 이준호( 李 俊 浩 ), 곡산 ( 谷 山 )의 이창은( 李 昌 殷 ), 수안의 전문도( 全 文 道 ), 송화의 김인주( 金 麟 柱 ), 곡산의 안홍주( 安 弘 周 )ㆍ김칠만( 金 七 萬 ), 신계의 고태준( 高 太 俊 ), 곡산의 이재봉( 李 在 奉 ), 수안의 윤병계( 尹 秉 桂 ), 금천의 이상각( 李 商 珏 ), 은율의 박준영( 朴 準 ), 안악의 우현덕( 禹 鉉 德 ), 황주의 안흥주( 安 興 周 ), 장련의 배학렬( 裵 學 烈 ), 황주의 문석지( 文 錫 志 ), 금천의 김동섭( 金 東 燮 ), 은율의 김태 화( 金 太 和 ), 신계의 주성섭( 朱 星 涉 ), 서흥의 소백술( 蘇 百 述 ), 토산의 정장원( 鄭 壯 元 ), 은율의 김기일( 金 基 一 ), 신계의 김덕기( 金 德 基 )ㆍ김가막이( 金 可 莫 伊 ), 수안의 김응구( 金 應 九 ), 은율의 박윤묵( 朴 允 默 ), 토산의 조희환( 趙 羲 煥 ), 황주의 김보길( 金 甫 吉 ), 은율의 백이황( 白 利 璜 ), 곡 산의 최학수( 崔 學 守 ), 백령의 이연승( 李 演 升 ), 재령의 이상훈( 李 相 勳 ), 신계의 김학봉( 金 學 奉 ), 서흥의 유상우( 劉 相 佑 )와 평안도 용천( 龍 川 )의 옥명익( 玉 明 益 ), 삼등( 三 登 )의 사완귀( 史 完 貴 ), 강서( 江 西 )의 이사열( 李 士 烈 ), 위원( 渭 原 )의 박흥기( 朴 興 奇 ), 순안( 順 安 )의 오시면( 吳 始 勉 ), 강서의 김동철( 金 東 哲 ), 삼등의 박수일( 朴 壽 日 ), 삭주( 朔 州 )의 박내봉( 朴 來 鳳 ), 맹산( 孟 山 )의 김영준( 金 永 俊 ), 강서의 김재식( 金 載 植 ), 양덕( 陽 德 )의 박도연( 朴 道 淵 ), 희천( 熙 川 )의 강 창호( 姜 昌 浩 )ㆍ정만기( 丁 萬 基 ), 중화( 中 和 )의 윤공서( 尹 公 瑞 ), 순안( 順 安 )의 김종엽( 金 宗 燁 ), 영원( 寧 遠 )의 주석겸( 朱 石 謙 ), 상원( 祥 原 )의 김진명( 金 進 明 ), 용천( 龍 川 )의 김문성( 金 文 成 ), 철 산( 鐵 山 )의 김응도( 金 應 道 ), 중화의 강호인( 姜 鎬 仁 ), 용천의 오용여( 吳 龍 汝 ), 용강( 龍 岡 )의 이 영식( 李 永 植 ), 자산( 慈 山 )의 강백문( 姜 伯 文 ), 숙천( 肅 川 )의 김수여( 金 守 汝 )ㆍ주승용( 朱 承 用 ),

209 209 - 성천( 成 川 )의 이경현( 李 敬 玄 ), 숙천의 박만금( 朴 萬 金 ), 삼등의 양원길( 梁 元 吉 ), 위원의 김난수 ( 金 蘭 秀 ), 구성( 龜 城 )의 민영복( 閔 泳 福 )과 경상도 함양( 咸 陽 )의 서윤재( 徐 潤 才 ), 풍기( 豐 基 )의 윤성보( 尹 成 甫 ), 문경( 聞 慶 )의 박복룡( 朴 卜 龍 ), 언양( 彦 陽 )의 표백손( 表 白 孫 ), 하동( 河 東 )의 이 원발( 李 元 發 ), 함양의 윤상엽( 尹 相 燁 ), 상주( 尙 州 )의 김도명( 金 道 明 ), 하동의 안학돌( 安 學 乭 ), 초계( 草 溪 )의 고복동( 高 卜 同 ), 양산( 梁 山 )의 윤민석( 尹 民 石 ), 창원( 昌 原 )의 김태주( 金 泰 周 ), 울 산( 蔚 山 )의 서종락( 徐 宗 洛 ), 칠원( 漆 原 )의 홍명조( 洪 命 祚 ), 흥해( 興 海 )의 엄기태( 嚴 基 泰 ), 김해 ( 金 海 )의 최익선( 崔 益 善 ), 선산( 善 山 )의 덕혜( 德 惠 ), 안의( 安 義 )의 성득용( 成 得 用 ), 울산의 이 성조( 李 聖 祚 ), 문경의 고완수( 高 完 秀 ), 성주( 星 州 )의 박봉국( 朴 奉 國 ), 영덕( 盈 德 )의 김덕신( 金 德 信 ), 하동의 정규( 鄭 奎 ), 의령( 宜 寧 )의 정대영( 鄭 大 永 ), 장기( 長 鬐 )의 이약순( 李 若 舜 ), 남해 ( 南 海 )의 문응찬( 文 應 贊 ), 지례( 知 禮 )의 봉태삼( 奉 太 三 ), 진해( 鎭 海 )의 안용보( 安 龍 甫 ), 의흥 ( 義 興 )의 이경범( 李 景 範 ), 남해의 이노직( 李 魯 直 ), 단성( 丹 城 )의 남상현( 南 相 賢 ), 진보( 眞 寶 )의 최한영( 崔 漢 榮 ), 칠원의 이홍길( 李 弘 吉 ), 안의의 전수학( 全 洙 學 ), 봉화( 奉 化 )의 정교원( 鄭 喬 源 ), 상주의 이학래( 李 學 來 ), 함양의 김재진( 金 在 進 ), 현풍( 玄 風 )의 성성구( 成 星 九 ), 창녕( 昌 寧 )의 박팽만( 朴 彭 萬 ), 함안( 咸 安 )의 장자근석( 張 者 斤 石 ), 예안( 禮 安 )의 이은상( 李 殷 相 ), 지례 의 최 조이( 崔 召 史 ), 현풍의 박동해( 朴 東 海 )와 함경도 북청( 北 靑 )의 박봉협( 朴 奉 協 ), 고원( 高 原 )의 김중수( 金 仲 秀 ), 안변( 安 邊 )의 한석태( 韓 石 泰 ), 정평( 定 平 )의 김덕준( 金 德 俊 ), 영흥( 永 興 )의 백시인( 白 時 寅 )ㆍ홍재명( 洪 在 明 ), 문천( 文 川 )의 최봉휴( 崔 奉 休 ), 의령의 김상욱( 金 相 郁 ), 회령( 會 寧 )의 최치삼( 崔 致 三 ), 고원의 김봉수( 金 奉 秀 )ㆍ안광렬( 安 光 烈 )ㆍ이재근( 李 在 根 ), 덕원 ( 德 源 )의 박치현( 朴 致 現 ), 문천( 文 川 )의 임영국( 林 永 國 ), 안변( 安 邊 )의 이점동( 李 點 同 ), 길주 ( 吉 州 )의 강대홍( 姜 大 鴻 ), 명천( 明 川 )의 진성길( 陳 成 吉 )과 각도에서 추후로 배소( 配 所 )에 도 착한 대상 가운데에서, 언양의 장완식( 張 完 植 ), 상주의 송건오( 宋 建 五 ), 문경의 김성삼( 金 聖 三 ), 봉화의 안덕삼( 安 德 三 ), 지례의 성태수( 成 泰 修 ), 예안의 박은오( 朴 殷 五 ), 함평( 咸 平 )의 전봉삼( 全 鳳 三 ), 태인( 泰 仁 )의 유시원( 劉 始 源 ), 고산의 송준호( 宋 俊 浩 ), 무주의 박용강( 朴 龍 崗 ), 고산의 한용주( 韓 用 住 ), 구례의 안양화( 安 良 化 ), 고창의 나종인( 羅 鍾 寅 )과 출발하였지만 아직 배소에 도착하지 않은 대상 가운데에서, 울진( 蔚 珍 )의 김명숙( 金 明 淑 ), 금성의 김태균 ( 金 泰 均 ), 철원의 김정우( 金 正 禹 ), 정선의 이정락( 李 正 洛 ), 목천( 木 川 )의 엄인영( 嚴 仁 永 ), 연기 의 한문영( 韓 文 永 ), 노성의 노순원( 盧 順 元 ), 덕산의 황운룡( 黃 云 龍 ), 천안의 김기흥( 金 基 興 ), 아산의 송인길( 宋 仁 吉 ), 전의의 김복성( 金 福 成 ), 온양의 김치순( 金 致 淳 ), 평택의 조석귀( 趙 錫 龜 ), 명천의 황성오( 黃 成 五 ), 삼수의 이성현( 李 性 玄 ), 갑산의 이건두( 李 建 斗 ), 안변의 신치관 ( 申 致 寬 ), 갑산의 김후돌( 金 厚 乭 ), 덕원( 德 源 )의 박준일( 朴 俊 日 ), 갑산의 김흥련( 金 興 連 ), 고원 의 차윤식( 車 允 植 ), 문천의 이용학( 李 龍 鶴 ), 삼수의 김인순( 金 仁 淳 ), 정읍의 양치준( 梁 致 俊 ), 임실( 任 實 )의 유세림( 柳 世 林 ), 강진( 康 津 )의 유명원( 劉 命 源 ), 창성( 昌 城 )의 박동실( 朴 同 實 ), 성 천의 박용진( 朴 容 鎭 ), 용강( 龍 岡 )의 백승묵( 白 承 默 ), 운산( 雲 山 )의 인천일( 印 千 一 ), 개천( 价 川 ) 의 정병훈( 鄭 秉 勳 ), 순천( 順 川 )의 이병순( 李 秉 舜 ), 초도( 椒 島 )의 윤순서( 尹 順 瑞 )ㆍ백익( 白 翊 ) ㆍ이성인( 李 聖 仁 ), 서흥의 손지현( 孫 志 顯 ), 풍천의 고충돌( 高 忠 乭 )ㆍ조병희( 趙 秉 熙 ), 평산의 나평숙( 羅 平 淑 ), 장연의 윤지봉( 尹 趾 鳳 ), 연안의 맹문호( 孟 文 浩 ), 연일( 延 日 )의 최일원( 崔 一 元 ), 문경의 경석린( 慶 錫 麟 ), 진주의 김한영( 金 漢 榮 ), 영양( 英 陽 )의 김창순( 金 昌 淳 )과 감등하 고 배소를 옮기게 한 대상 가운데에서, 옥천의 조영순( 趙 永 順 )과 장연의 김용우( 金 龍 宇 ) 등 에게 방( 放 )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삼가 써서 내리신 대로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 도의 도신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210 / 고종 31년 6월 28일(계유) / 강원도 평창에 도배된 신백초 등을 풀어 주도록 분부하겠다는 형조의 계 또 형조의 말로 아뢰기를, 도류안( 徒 流 案 ) 가운데에 실려 있는 잡범( 雜 犯 )으로서 사죄( 死 罪 ) 이하를 모두 풀어 주라. 고 전교하여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전교에 따라 강원도 평창( 平 昌 )의 신백초( 申 伯 初 ), 양 구( 楊 口 )의 김상순( 金 相 淳 ), 평강( 平 康 )의 사노( 私 奴 ) 양옥( 良 玉 ), 김화( 金 化 )의 김인순( 金 寅 順 ), 충청도 진천( 鎭 川 )의 이병권( 李 秉 權 ), 회덕( 懷 德 )의 이필준( 李 必 俊 ), 덕산( 德 山 )의 이금석 ( 李 今 石 )ㆍ서진구( 徐 鎭 九 ), 충주( 忠 州 )의 황수복( 黃 守 福 ), 덕산의 윤태신( 尹 泰 信 ), 온양( 溫 陽 ) 의 신수업( 申 壽 業 ), 황간( 黃 磵 )의 김찬흥( 金 贊 興 ), 정산( 定 山 )의 손상조( 孫 尙 祚 ), 은진( 恩 津 )의 양종규( 梁 宗 奎 ), 회인( 懷 仁 )의 김함종( 金 咸 從 ), 청양( 靑 陽 )의 오경선( 吳 敬 善 ), 부여( 扶 餘 )의 김 음성( 金 陰 城 ), 은진의 송영록( 宋 永 彔 ), 석성( 石 城 )의 김달청( 金 達 靑 ), 영동( 永 同 )의 마성종( 馬 聖 鍾 ), 옥천( 沃 川 )의 박 조이( 朴 召 史 ), 한산( 韓 山 )의 정덕장( 鄭 德 章 ), 대흥( 大 興 )의 정진기( 鄭 鎭 淇 ), 괴산( 槐 山 )의 중 상엽( 尙 葉 ), 옥천의 정충순( 鄭 忠 順 ), 정산( 定 山 )의 중 법유( 法 有 ), 직 산( 稷 山 )의 중 무경( 武 庚 ), 제천( 堤 川 )의 최진경( 崔 眞 景 ), 괴산의 이녹이( 李 祿 伊 ), 진잠( 鎭 岑 ) 의 여문섭( 呂 文 燮 ), 전의( 全 義 )의 전윤흥( 全 允 興 ), 괴산의 김준현( 金 俊 鉉 ), 황해도 금천( 金 川 ) 의 김시놈( 金 時 ), 장연( 長 淵 )의 박인겸( 朴 仁 謙 ), 문화( 文 化 )의 장세창( 張 世 昌 ), 서흥( 瑞 興 )의 문주범( 文 周 範 ), 백령( 白 翎 )의 진형준( 陳 亨 濬 ), 초도( 椒 島 )의 김홍기( 金 鴻 基 ), 송화( 松 禾 )의 최 석오( 崔 錫 五 ), 곡산( 谷 山 )의 박춘택( 朴 春 宅 ), 배천( 白 川 )의 김억용( 金 億 用 ), 서흥의 정광연( 鄭 光 淵 ), 초도의 박동흠( 朴 東 欽 ), 은률( 殷 栗 )의 변윤칠( 邊 允 七 ), 장련( 長 連 )의 함팔경( 咸 八 景 ), 백령의 박성오( 朴 星 五 ), 수안( 遂 安 )의 박봉렬( 朴 奉 烈 ), 금천의 이영하( 李 永 夏 ), 토산( 兔 山 )의 황정수( 黃 正 秀 ), 연안( 延 安 )의 정우용( 鄭 右 用 ), 배천의 김문호( 金 文 浩 ), 장연의 김여성( 金 汝 成 ), 문화의 박맹갑( 朴 孟 甲 ), 신계( 新 溪 )의 오작은봉( 吳 者 斤 奉 ), 금천의 조치문( 趙 致 文 ), 평안 도 강서( 江 西 )의 김동철( 金 東 哲 ), 삼등( 三 登 )의 박수일( 朴 壽 日 ), 삭주( 朔 州 )의 박내봉( 朴 來 鳳 ), 용강( 龍 岡 )의 백승훈( 白 承 勳 ), 상원( 祥 原 )의 김홍운( 金 弘 云 ), 희천( 熙 川 )의 장희완( 張 喜 完 ), 순 안( 順 安 )의 김한기( 金 漢 琦 ), 양덕( 陽 德 )의 석길( 石 吉 ), 용천( 龍 川 )의 이여대아기( 李 女 大 阿 只 ), 은산( 殷 山 )의 김홍원( 金 洪 原 ), 상원의 박언양( 朴 彦 陽 ), 창성( 昌 城 )의 박동실( 朴 同 實 ), 성천( 成 川 )의 박용진( 朴 容 鎭 ), 중화( 中 和 )의 이금석( 李 今 石 )ㆍ조학영( 趙 學 英 ), 영변( 寧 邊 )의 구영보 ( 具 永 甫 ), 개천( 价 川 )의 김춘식( 金 春 植 ), 전라도 여산( 礪 山 )의 민경렴( 閔 景 濂 ), 무안( 務 安 )의 이병근( 李 秉 根 ), 운봉( 雲 峯 )의 김 조이( 金 召 史 ), 신지도( 薪 智 島 )의 김정구( 金 鼎 九 ), 강진( 康 津 ) 의 박여아기( 朴 女 阿 只 ), 진산( 珍 山 )의 박군뢰( 朴 君 賚 ), 여도( 呂 島 )의 이문경( 李 文 京 ), 용담( 龍 潭 )의 김창신( 金 昌 信 ), 남평( 南 平 )의 김대길( 金 大 吉 ), 장수( 長 水 )의 최순보( 崔 順 甫 ), 금산( 錦 山 )의 양두환( 梁 斗 煥 ), 장흥( 長 興 )의 권병희( 權 炳 熙 ), 용담의 김수명( 金 守 命 ), 진산의 임원호 ( 任 源 鎬 ), 흥양( 興 陽 )의 김진규( 金 辰 奎 ), 부안( 扶 安 )의 김몽석( 金 夢 石 ), 장성( 長 城 )의 윤화여 ( 尹 化 汝 ), 무주( 茂 朱 )의 이정구( 李 鼎 九 ), 화순( 和 順 )의 이성화( 李 成 化 ), 고산( 高 山 )의 양순화 ( 梁 順 化 ), 함평( 咸 平 )의 이종문( 李 宗 文 ), 태인( 泰 仁 )의 홍두꺼비( 洪 乧 巨 非 ), 영광( 靈 光 )의 김득 주( 金 得 柱 ), 신지도의 장무상( 張 武 相 )ㆍ박태현( 朴 泰 鉉 )ㆍ최봉욱( 崔 鳳 旭 ), 고금도( 古 今 島 )의 정 홍식( 鄭 弘 植 )ㆍ장태영( 張 泰 永 )ㆍ김선구( 金 善 九 )ㆍ강치정( 姜 致 貞 )ㆍ위홍기( 魏 洪 琦 ), 위도( 蝟 島 ) 의 박종식( 朴 宗 植 )ㆍ조만증( 趙 晚 增 ), 임자도( 荏 子 島 )의 김흔( 金 炘 )ㆍ조왈갑( 趙 曰 甲 )ㆍ마명석

211 211 - ( 馬 命 石 ), 지도( 智 島 )의 이양활( 李 陽 活 ), 금갑도( 金 甲 島 )의 곽순필( 郭 淳 弼 ), 경상도 함창( 咸 昌 ) 의 한창리( 韓 昌 履 ), 창원( 昌 原 )의 김영환( 金 永 煥 ), 밀양( 密 陽 )의 홍종대( 洪 鍾 大 ), 남해( 南 海 )의 양호성( 梁 浩 成 ), 예안( 禮 安 )의 염이정( 廉 而 貞 ), 언양( 彦 陽 )의 이여아기( 李 女 阿 只 ), 봉화( 奉 化 ) 의 주봉석( 朱 奉 石 ), 비안( 比 安 )의 김석근( 金 石 根 ), 인동( 仁 同 )의 신길동( 申 吉 同 ), 거창( 居 昌 )의 이인수( 李 仁 水 ), 영천( 榮 川 )의 홍경쾌( 洪 景 快 ), 남해의 최종길( 崔 宗 吉 ), 상주( 尙 州 )의 이덕문 ( 李 德 文 ), 웅천( 熊 川 )의 양성원( 梁 星 元 ), 안의( 安 義 )의 맹원술( 孟 元 述 ), 현풍( 玄 風 )의 사노 용 문( 用 文 ), 성주( 星 州 )의 정치지( 鄭 致 之 ), 함양( 咸 陽 )의 주사룡( 朱 士 龍 ), 영천( 永 川 )의 유윤동 ( 劉 允 同 ), 신녕( 新 寧 )의 김원식( 金 元 植 ), 비안( 比 安 )의 채윤지( 蔡 允 之 ), 상주의 이철원( 李 哲 原 ), 함경도 북청( 北 靑 )의 태여순이( 太 女 順 伊 ), 경성( 鏡 城 )의 김평렬( 金 平 烈 ), 정평( 定 平 )의 조 정두( 趙 丁 斗 ), 홍원( 洪 原 )의 김대진( 金 大 珍 ), 명천( 明 川 )의 서병순( 徐 炳 淳 ), 삼수( 三 水 )의 장인 수( 張 仁 守 ) 등을 모두 즉시 풀어 주도록 각 해당 도신에게 분부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1년 10월 20일(계해) / 용매 첨사 전두규를 개차하고 후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또 군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용매 첨사( 龍 媒 僉 使 ) 전두규( 田 斗 奎 )를 개차하고 그 대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삼가 어 람하시도록 올립니다. 하니, 백령진관 용매량수군동첨절제사( 白 翎 鎭 管 龍 媒 梁 水 軍 同 僉 節 制 使 )의 망에 대해 전두규 대신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 조연항( 趙 璉 恒 )을 단부하고 계자인을 찍었다 / 고종 32년 2월 5일(정미) / 백령 첨사 정규찬이 파출되었으므로 후임에 전 첨사 조존찬을 승차할 것 등을 청하는 총리대신 등의 계 총리대신과 군무아문 대신이 아뢰기를,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정규찬( 鄭 圭 瓚 )이 파출되었으니 그 대신에 전 첨사 조존찬( 趙 存 贊 )을 3품으로 올려 차하하고,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 박형우( 朴 亨 祐 )가 개차되었으니 그 대신에 전 오위장 이정진( 李 貞 鎭 )을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는 칙지를 받들었다 / 고종 32년 4월 19일(경신) / 박준양 등에 대해 사형을 집행할 것 등을 청하는 법부 대신의 계 또 아뢰기를, 특별 법원( 特 別 法 院 )의 판결을 받은 모반 죄인( 謀 反 罪 人 ) 박준양, 이태용, 고종주와 모살 죄인( 謀 殺 罪 人 ) 전동석, 최형식에 대해서는 그날 밤에 사형을 집행하고, 모반 죄인( 謀 反 罪

212 212 - 人 ) 한기석, 김국선, 임진수, 허엽, 김명호와 모살 죄인 장덕현, 최형순은 전라도 제주목( 濟 州 牧 )에 유배하고, 모살 죄인 고치홍, 이여익, 이영배, 김한영, 서병규, 김내오, 이내춘, 조용 승은 황해도 백령도( 白 翎 島 )에 유배하고, 모살 죄인 윤진구는 전라도 나주목( 羅 州 牧 ) 흑산도 ( 黑 山 島 )에 유배하고, 정조원은 영광군( 靈 光 郡 ) 임자도( 荏 子 島 )에 유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는 칙지를 받들었다 / 고종 32년 12월 6일(임신, 양력 1월 20일) / 징역 3년의 처분을 받은 죄인 안경수 등에 대해 백령도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내렸다 징역 3년의 처분을 받은 죄인 안경수( 安 駉 壽 ), 김재풍( 金 在 豐 ), 남만리( 南 萬 里 )에 대해서 는 백령도( 白 翎 島 )에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하는 처분을 내리고, 이민굉( 李 敏 宏 ), 이충구( 李 忠 求 ), 전우기( 全 佑 基 ), 노흥규( 盧 興 奎 )에 대해서는 제주군( 濟 州 郡 )에 유배하는 처분을 내렸다 / 고종 32년 12월 28일(갑오, 양력 2월 11일) / 제주부 제주군에 종신 유배된 죄인 이민굉 등을 석방하라는 칙령 칙령을 내리기를, 제주부 제주군에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된 죄인 이민굉( 李 敏 宏 )ㆍ이충구( 李 忠 求 )ㆍ전우기( 全 佑 基 )ㆍ노흥규( 盧 興 奎 ), 해주부( 海 州 府 )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3년 유배( 三 年 流 配 )된 죄인 안경수( 安 駉 壽 )ㆍ김재풍( 金 在 豐 )ㆍ남만리( 南 萬 里 )를 모두 특별히 석방하라. 하였다 / 고종 33년 3월 1일(병신, 양력 4월 13일) / 죄인 이승원의 배소를 해주부 장연군 백령도로 정하였다 고등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의 처분을 받은 죄인 이승원( 李 升 遠 )의 배 소( 配 所 )를 해주부( 海 州 府 )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로 정하였다 / 고종 33년 3월 9일(갑진, 양력 4월 21일) / 죄인 서주보 등의 배소를 제주부 제주군 등으로 정하였다 고등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종신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서주보( 徐 周 輔 )ㆍ정병조( 鄭 丙 朝 )ㆍ김경하( 金 經 夏 )ㆍ이태황( 李 台 璜 ), 10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이범주( 李 範 疇 )는 배 소( 配 所 )를 제주부( 濟 州 府 ) 제주군( 濟 州 郡 )으로 정하고, 15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정만 조( 鄭 萬 朝 )는 배소를 나주부( 羅 州 府 ) 진도( 珍 島 ) 금갑도( 金 甲 島 )로 정하고, 15년 유배 죄인 우낙선( 禹 洛 善 )은 배소를 해주부( 海 州 府 )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로 정하고, 10년 유

213 213 - 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전준기( 全 晙 基 )는 배소를 나주부 나주군( 羅 州 郡 ) 흑산도( 黑 山 島 )로 정하고, 징역 1년의 처분을 받은 죄인 홍우덕은 감금할 처소를 나주부 해남현( 海 南 縣 ) 추자 도( 楸 子 島 )로 정하였다 / 고종 33년 12월 5일(을축, 양력 1월 7일) / l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정위 한봉호 등의 배소를 전라북도 만경군 고군산 등으로 정하였다 1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정위( 正 尉 ) 한봉호( 韓 鳳 鎬 )에 대해서는 전라북도 만경군( 萬 頃 郡 ) 고군산( 古 群 山 )에 정배하라는 처분을 내리고,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의 처분을 받은 죄 인 병졸 서완성( 徐 完 成 ), 황치순( 黃 致 純 ), 안윤성( 安 允 成 )에 대해서는 황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정배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 고종 34년 2월 6일(을축, 양력 3월 8일) / 죄인 한봉호 등은 몇 등을 감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 의정부찬정 군부대신 민영환의 계 의정부찬정 군부대신 민영환( 閔 泳 煥 )이 삼가 아뢰기를, 이번에 경축하고 진하( 陳 賀 )할 때의 반조문( 頒 詔 文 ) 가운데에, 각도( 各 道 )의 유배( 流 配 ) 이 하 죄인은 모두 죄의 등급을 감( 減 )하여 결정하고, 중앙과 지방에 감금( 監 禁 )된 죄인들도 범 죄 내용을 분명하게 조사하여 분별해서 등급을 감하도록 결정할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정상이 본래 가벼워서 용서해 줄 만한 사람에 대해서는 역시 해부( 該 部 )가 분명하게 조사해 서 품지하여 정탈( 定 奪 )하도록 하라. 고 반하( 頒 下 )하셨습니다. 전라남도 지도군( 智 島 郡 ) 고군산( 古 群 山 )에 1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한봉호( 韓 鳳 鎬 ) 와 황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종신토록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서완성( 徐 完 成 ), 황치순( 黃 致 順 ), 안윤성( 安 允 成 )은 각각 몇 등을 감해야 합니까? 본부에서 감히 마음 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였는데, 각각 1등씩 감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 고종 34년 2월 14일(계유, 양력 3월 16일) / 죄인 한봉호는 풀어 줄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찬정 군부대신임시서리 탁지부대신 심상훈의 계 의정부찬정 군부대신임시서리 탁지부대신( 議 政 府 贊 政 軍 部 大 臣 臨 時 署 理 度 支 部 大 臣 ) 심상 훈( 沈 相 薰 )이 삼가 아뢰기를, 본부 소관( 所 管 ) 유배 죄인의 등급을 1등씩 감하라는 칙명을 받들었습니다. 전라도 지도군 ( 智 島 郡 ) 고군산( 古 群 山 )에 1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한봉호( 韓 鳳 鎬 )는 풀어 주고, 황

214 214 - 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종신토록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서완성( 徐 完 成 ), 황치순( 黃 致 順 ), 안윤성( 安 允 成 )은 모두 15년 유배하는 처분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감히 여쭙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 고종 34년 4월 4일(계해, 양력 5월 5일) / 죄인 구준서의 배소를 전라북도 함열군 고군산으로 정할 것을 청하는 군부대신 임시서리탁지부대신 심상훈의 계 군부대신 임시서리탁지부대신( 軍 部 大 臣 臨 時 署 理 度 支 部 大 臣 ) 심상훈( 沈 相 薰 )이 삼가 아뢰 기를, 포형죄인( 砲 刑 罪 人 ) 구준서( 具 駿 書 )에 대해 특별히 1등을 감하도록 주하하셨습니다. 칙교 ( 勅 敎 )를 받들어 죄인 구준서를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에 처하되, 전라북도( 全 羅 北 道 ) 함열군 ( 咸 悅 郡 ) 고군산( 古 群 山 )으로 배소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백령도( 白 翎 島 )로 정하라. 하였다 / 고종 35년 4월 20일(임인, 양력 6월 8일) / 백령도에 종신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정한용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그 죄를 충분히 징계하였으니, 백령도( 白 翎 島 )에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하는 처분을 받은 죄 인 정한용( 鄭 漢 鎔 )과 박유태( 朴 有 泰 )를 모두 특별히 풀어 주라. 하였다 / 고종 35년 5월 10일(임술, 양력 6월 28일) / 지도에 15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박효승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지도( 智 島 )에 15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박효승( 朴 孝 承 ), 신도( 薪 島 )에 10년 유배하 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원긍( 李 源 兢 ), 초도( 椒 島 )에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여규형 ( 呂 圭 亨 )ㆍ지석영( 池 錫 永 ), 백령도( 白 翎 島 )에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안기중( 安 沂 中 ), 추자도( 楸 子 島 )에 2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임록길( 林 彔 吉 )을 모두 특별히 풀어 주라. 하였다.

215 / 고종 35년 11월 19일(무진, 양력 12월 31일) / 추자도에 10년 유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박명환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추자도( 楸 子 島 )에 10년 유배( 流 配 )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박명환( 朴 明 煥 ), 고금도( 古 今 島 )에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유인( 李 裕 寅 ), 7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대길 ( 金 大 吉 )ㆍ김순쇠( 金 順 釗 ), 임자도( 荏 子 島 )에 7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대준( 李 大 峻 ), 백령도( 白 翎 島 )에 7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유기환( 兪 箕 煥 )ㆍ이기동( 李 基 東 ), 5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동근( 李 東 根 )ㆍ김익환( 金 益 煥 ), 초도( 椒 島 )에 5년 유배하는 처 분을 받은 죄인 유홍록( 柳 弘 祿 )ㆍ홍봉길( 洪 鳳 吉 ), 철도( 鐵 島 )에 2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황기인( 黃 夔 仁 )은 모두 특별히 풀어 주라. 하였다 / 고종 35년 11월 22일(신미, 양력 1월 3일) / 윤치호 등을 역률로 다스릴 것 등을 청하는 5품 정형기 등의 상소 5품 정형기( 鄭 衡 基 )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법이라는 것은 인주( 人 主 )가 쥐고 있는 칼자루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공적 인 도구입니다. 가볍게 적용해야 하는 데에 무겁게 적용했다면 이는 형벌을 잘못 내린 것이 고, 무겁게 적용해야 하는 데에 가볍게 적용했다면 이것도 형벌을 잘못 내린 것입니다. 옛 날 현명한 임금은 나라를 다스릴 때에 덕으로써 교화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자 신도 모르게 허물을 짓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미연에 허물을 막는 방법이었으며, 형벌 로써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두려워하고 악을 고치도록 하여 감히 범하지 않도록 하 였으니, 이것은 이미 저지른 뒤에 금지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백성의 부모로서 어찌 형벌 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 않았겠습니까만, 만약 대단히 흉악한 악의 우두머리가 있다면 할 수 없이 형벌을 써서 한 사람을 징계함으로써 백 사람에게 경계를 삼도록 한 것이니, 이를테면 옛날 순 임금은 사흉( 四 凶 )을 벌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어질고 성 스러운 임금으로서 순 임금만 한 사람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형벌을 썼는데, 더구나 임금의 덕이 요순에 미치지 못하고 죄인들의 죄악이 사흉보다 심한데도 형벌을 쓰지 않는다면, 나 라를 위태롭지 않게 만들고자 한들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폐하께서는 요순의 덕이 있으시지만 사흉을 벌하는 위엄을 쓰시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저 독립협회는 단지 사 흉에 비할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천지가 생긴 이래 군신의 구분이 없었다면 그만이겠으 나, 만약 군신의 구분이 있다면 그들이 범한 죄는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우며 형법에 따른 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보건대, 지난번에 조칙( 詔 勅 )을 내려 협회의 열한 가지 죄에 대하여 열거하셨으니, 이 는 폐하께서 무척이나 이를 깊이 아시고 미워하신 것입니다. 저들 무리는 역당( 逆 黨 )의 소 굴로서, 비록 삼척동자라도 그들의 간사하고 흉악한 마음을 모두 훤히 알고 있어 맹세코 천 지 사이에서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이미 그들의 죄를 낱낱이 따지고서도 도리어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대성인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 고 살려 주기를 좋아하는 덕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덕이 협회의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데에

216 216 - 불과한 반면 그 해는 만민에게 미치고 그 화는 종묘사직에 미치니, 이는 진정한 덕이라 할 수 없으며 많은 해악만 낳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이 은혜에 감동하고 귀화하여 스스 로 새롭게 변모하고자 노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저 흉악한 자들은 도리어 더욱 방 자해지고 간악해져 의정부를 업신여기고 황명( 皇 命 )을 가볍게 여기며 점차 반역을 도모하면 서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으니, 이는 폐하께서 그들의 악을 길러 주고 그들의 반역을 도 와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래에 미칠 화란이 어찌 오늘 같은 정도에서 그치고 말겠습니 까. 신들이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한 상민( 商 民 )들은 폐하의 백성들로서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분발하여 죽음으로써 폐하께 보답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했던 일을 저 협회와 비교해 보면 충역( 忠 逆 ) 의 구분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며 폐하께서도 염려하고 계신 바입니다. 이 때문에 홍종우( 洪 鍾 宇 ), 길영수( 吉 永 洙 ), 박유진( 朴 有 鎭 ) 등에 대하여 유배에서 돌아오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전 경무사( 警 務 使 ) 김영 준( 金 永 準 )이 순역( 順 逆 )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상민들을 붙잡아 들이겠다는 말로써 큰길 에 방( 榜 )을 붙였으니, 민심( 民 心 )이 이 때문에 울분이 쌓이고 공의( 公 議 )가 이 때문에 어두 워진 것입니다. 그 후 윤치호( 尹 致 昊 )의 아비 윤웅렬( 尹 雄 烈 )이 후임으로 교체되어 왔는데, 그는 이전의 명을 거두어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상민의 두령인 박유진을 붙잡 아 들여 여러 날 동안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들 박유진, 홍종우, 길영수는 굳게 다짐하여 나 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로 함께 맹세한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모질게 붙잡아 놓고 꼬치꼬 치 조사한단 말입니까. 신은 매우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백령도( 白 翎 島 )에 유배된 유기환( 兪 箕 煥 )과 이기동( 李 基 東 )은 그 마음으로 말하면 온통 충성스러운 마음뿐이요, 그들이 한 일로써 말하면 황실을 보호하고자 한 것뿐이었는데도 저 자들에게 무함을 받았으며, 폐하께서는 저들의 당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무함을 분변하지 못한 채 도리어 역신( 逆 臣 )들의 의도대로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을 유배 보내고 말았습니 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하신다면 폐하의 신하된 자들 가운데 누가 다시 폐하를 위하여 절개 를 지키고 충성을 다할 자가 있겠으며, 대한의 인민들이 폐하를 어떠한 임금으로 알겠습니 까. 신들이 비록 보잘것없는 미천한 몸이기는 하지만 또한 폐하께서 똑같이 돌보아 주는 백성입 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고 충성과 반역의 구분이 없어진 때를 당하여, 그들과 의기( 義 氣 )를 함께하는 입장에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께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반성하시어 충 역( 忠 逆 )을 분변하고 치란( 治 亂 )의 기미를 밝히소서. 윤치호, 고영근( 高 永 根 ), 이상재( 李 尙 在 ) 등 몇 사람을 하나하나 붙잡아 들여 역률( 逆 律 )로 다스림으로써 난신적자로 하여금 두려워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유기환, 이기동, 박유진 및 지금 수배 중인 홍종우와 길영수에 대하여 속히 용서하는 은혜로운 처분을 내림으로써 인신( 人 臣 )들로 하여금 충성을 바치고 선을 권 면할 줄 알게 하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또한 여론과 같은 바가 있다. 하였다 / 고종 35년 11월 23일(임신, 양력 1월 4일) /

217 217 - 윤치호 등의 역도를 징벌할 것 등을 청하는 정헌대부 김계문 등의 상소 정헌대부( 正 憲 大 夫 ) 김계문( 金 啓 文 )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난신적자가 나라에 화를 끼치고 사특한 말이 정도( 正 道 )를 해치는 일이 어 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 독립협회처럼 패악한 경우를 신들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 저 윤치호( 尹 致 昊 ), 고영근( 高 永 根 ), 이상재( 李 商 在 ) 등의 흉악하고 사특하며 무도한 행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원한을 품어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일전에 내려온 칙유( 勅 諭 )를 읽어 보니, 역도( 逆 徒 )들의 열한 가지 조목의 죄상은 만 번 죽여도 용서받기 어려운데, 아직도 붙잡아 들여 처형하라는 명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들의 의혹이 더욱 심해집니다. 폐하께서 살려 주기를 좋아하고 형 벌을 시행하지 않으려는 덕이 있어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좌우에서 용서해 주기를 간해서 그런 것입니까?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일은 옛날의 명철한 임금과 제후들도 그만두지 않았던 바입니다. 국가의 형벌은 이와 같은 난역( 亂 逆 )의 무리들을 징벌 하여 토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흉악한 역적들에게 법을 굽힌 다면 어떠한 죄인에게 법률을 적용해야 마땅하단 말입니까. 또 윤웅렬( 尹 雄 烈 )로 말하건대, 비록 지금은 연좌( 連 坐 )하는 법을 폐지하기는 하였으나, 진실로 사람의 본성이 있는 자라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조정에 서서 법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비루하고 추악하며 음험한 행실은 사람이라 할 수도 없을 듯하니, 신들은 어이없이 서로 바라보며 경악할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굳게 결단하여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세 역적의 죄를 낱 낱이 다스리시고, 그 소굴의 다른 도당들을 조사하여 속히 나라의 법을 바르게 시행하시며, 차례로 윤웅렬의 음험하고 비루한 죄를 다스려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지난번 백령도( 白 翎 島 )에 유배된 이기동( 李 基 東 )과 유기환( 兪 箕 煥 )이 그동안 나라를 위해 충 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였던 것은 조야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드러난 허물이 있지 않은데도 난데없이 역당의 무함을 받아 아직도 견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삼 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 특별히 용서하는 명을 내려 충신과 역신이 명백하게 구분 되고 왕장( 王 章 )이 문란해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하신다면 국가와 신민들에게 매우 다행 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올바른 마음에서 나온 말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였다. 하였다 / 고종 36년 7월 24일(기사, 양력 8월 29일) / 유배 죄인 원우상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전라도 지도군( 智 島 郡 ) 고군산( 古 群 山 )에 3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원우상( 元 禹 常 ), 7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민영재( 閔 泳 宰 )ㆍ천응성( 千 應 聖 )ㆍ유근석( 劉 根 石 ), 황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3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황태산( 黃 泰 山 ), 1년 반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흥복( 金 興 福 )을 모두 특별히 풀어 주라.

218 218 - 하였다 / 고종 37년 10월 17일(을묘, 양력 12월 8일) / 유배 죄인 이범만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5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범만( 李 範 萬 ), 문경군 ( 聞 慶 郡 )에 5년 찬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종건( 李 鍾 健 )을 모두 풀어 주라. 하였다 / 고종 38년 2월 21일(정사, 양력 4월 9일) / 유배 죄인 유기환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황해도( 黃 海 道 )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5년 유배( 流 配 )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유 기환( 兪 箕 煥 )과 황주군( 黃 州 郡 ) 철도( 鐵 島 )에 3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병소( 李 秉 韶 )를 모두 풀어 주라. 하였다 / 고종 38년 6월 24일(무오, 양력 8월 8일) / 유배 죄인 주석면 등에 대한 조칙을 다시 부표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황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주석면( 朱 錫 冕 ), 전라남도 완도군( 莞 島 郡 ) 신지도( 薪 智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제갈형( 諸 葛 炯 ), 황해도 장연군 백령도에 15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민경식( 閔 景 植 ), 황주군( 黃 州 郡 ) 철도( 鐵 島 )에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규희( 金 奎 煕 ), 장연군 백령도에 3년 유 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석태( 金 錫 泰 )를 모두 석방하라. 는 태( 泰 ) 자 아래에, 전라남도 지도군고군산유삼년죄인김규필( 全 羅 南 道 智 島 郡 古 群 山 流 三 年 罪 人 金 奎 弼 ) 18자를 삽입하여 다시 부표( 付 標 )하라. 하였다. - 광무 5년 8월 13일 호외 관보( 號 外 官 報 )에 나온다 / 고종 41년 4월 2일(경술, 양력 5월 16일) / 유배 죄인 이기동 등을 방축향리하라는 조령

219 219 - 조령을 내리기를, 황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기동( 李 基 東 ) 과 이장회( 李 長 會 )를 모두 방축향리( 放 逐 鄕 里 )하라. 하였다 / 고종 42년 4월 6일(무신, 양력 5월 9일) / 유배 죄인 김봉석 등을 풀어 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황해도 황주군( 黃 州 郡 ) 철도( 鐵 島 )에 3년 유배( 流 配 )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봉석( 金 鳳 錫 ), 2년 반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유성준( 兪 星 濬 ), 완도군( 莞 島 郡 ) 추자도( 楸 子 島 )에 종신 유배( 終 身 流 配 )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국기춘( 鞠 基 春 ), 황해도 황주군 철도에 7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기세( 金 基 世 ),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7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박희병( 朴 羲 秉 ), 황주군 철도에 5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선재( 李 璿 載 ), 1년 반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만춘( 金 萬 春 )ㆍ김원근( 金 元 根 )을 모두 풀어 주라. 하였다 / 고종 42년 12월 24일(임술, 양력 1월 18일) / 종신 유배 처분을 받은 죄인 김재풍 등을 석방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전라남도 완도군( 莞 島 郡 ) 신지도( 薪 智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재풍( 金 在 豐 )ㆍ이충구( 李 忠 求 )ㆍ이용한( 李 龍 漢 )과 지도군( 智 島 郡 ) 지도( 智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강성형( 姜 盛 馨 )ㆍ민용훈( 閔 用 勳 )과 흑산도( 黑 山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조현( 李 祖 鉉 ), 15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장윤상( 張 允 相 )과 임자도( 荏 子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종림( 李 鍾 林 ),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사찬 ( 金 思 燦 )과 진도군( 珍 島 郡 ) 금갑도( 金 甲 島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최영화( 崔 榮 華 )ㆍ강인필( 姜 仁 必 )ㆍ이승린( 李 承 麟 )ㆍ홍병진( 洪 秉 晉 )과 황해도 황주군( 黃 州 郡 ) 철도( 鐵 島 ) 에 종신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김현귀( 金 顯 龜 )ㆍ윤석천( 尹 錫 天 )과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 도( 白 翎 島 )에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황학성( 黃 鶴 性 )ㆍ김성진( 金 聲 振 ), 3년 유배하 는 처분을 받은 죄인 정근협( 鄭 根 協 )을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 고종 43년 9월 16일(경술, 양력 11월 2일) /

220 220 - 죄인 이재규 등의 배소를 황해도 장연군 백령도로 정하겠다는 법부 대신의 상주 법부 대신이 삼가 상주하기를, 특지( 特 旨 )로 10년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이재규( 李 載 規 )와 2년 반 유배하는 처분을 받은 죄인 한홍석( 韓 弘 錫 )은 황해도 장연군( 長 淵 郡 ) 백령도( 白 翎 島 )에 배소( 配 所 )를 정하겠습 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221 221 - 인천광역시 옹진군 - 대청도, 소청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8년 2월 5일(을축) 중국에 잡힌 대청도의 백성에 대해 자문을 지어 북경에 보낼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 고종 11년 11월 13일(임자) 희정당에서 황해도 암행어사 조병필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김성근 등이 입시하였다 암행어사 조병필의 별단에 대해 황해도 각 고을 고종 11년 11월 19일(무오) 의 사기는 사실대로 뽑아내어 액수로 잡고 구규 를 더욱 밝힐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황해 감사 강난형 등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백령 고종 18년 3월 9일(신미) 진 대청도에 표류한 중국인의 선재를 불태울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대청도에 진을 설치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고종 19년 12월 20일(임신)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는 황해 감사 심동신의 장 계 고종 20년 1월 20일(임인) 장연 등에 오차진 등을 옮겨 설치하는 것을 그만 둘 것을 청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계 고종 30년 2월 1일(갑인) 수원 유수 민영상의 보고에서 청한 대로 대청도 등의 장적을 수원 유수영으로 이속시킬 것을 청 하는 의정부의 계

222 222 - <내 용> / 고종 8년 2월 5일(을축) / 중국에 잡힌 대청도의 백성에 대해 자문을 지어 북경에 보낼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 또 아뢰기를, 방금 황해 수사 윤협( 尹 )의 장계를 등보( 謄 報 )한 것을 보니, 백령 첨사( 白 翎 僉 使 ) 서상귀 ( 徐 相 龜 )의 치보( 馳 報 )를 낱낱이 들어, 본진( 本 鎭 ) 대청도( 大 靑 島 )에 사는 백성이 거룻배를 타고 혼자 나갔다가 저들에게 잡혔는데 당황지( 唐 黃 紙 ) 한 쪽지를 써서 준 뒤에 도로 난바 다로 향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투서는 궁지에 몰린 도둑의 계책에 지나지 않으나, 행동이 해괴한 것이 갈수록 더욱 통탄할 만합니다. 이것은 중국에 자문( 咨 文 )을 보내어 알 리지 않을 수 없으니, 승문원을 시켜 연유를 갖추어 자문을 지어 투입한 쪽지와 함께 의주 ( 義 州 )로 내려보내어 봉성( 鳳 城 )에 들여보내어 북경에 옮겨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1년 11월 13일(임자) / 희정당에서 황해도 암행어사 조병필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김성근 등이 입시하였다 신시( 申 時 ).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황해도 암행어사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우부승지 김성근, 가 주서 임상희, 기주관 오택우, 기사관 심상만, 암행어사 조병필( 趙 秉 弼 )이 차례로 나와 엎드 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 史 官 )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서 어사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조병필이 앞에 나아가니, 상이 이르기 를, 잘 다녀왔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왕령( 王 靈 )에 힘입어 무사히 다녀오기는 하였으나, 재주와 식견이 짧아서 만분의 일도 대 양( 對 揚 )하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황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계( 書 啓 )와 별단( 別 單 )은 다 보았으나, 이 밖에는 별로 큰 폐단이 없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본도 백성과 고을의 폐단이 이 밖에도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가장 큰 폐단은 별단에 아뢴 것 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 守 令 )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잘 다스렸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서계 가운데에 이미 칭찬하여 아뢴 것이 있습니다마는, 전 해주 판관( 海 州 判 官 ) 김온순( 金

223 223 - 蘊 淳 ), 황주 목사( 黃 州 牧 使 ) 김선근( 金 善 根 ), 전 연안 부사( 延 安 府 使 ) 정기석( 鄭 箕 錫 ), 전전 해주 판관 박봉하( 朴 鳳 夏 ), 전전 송화 현감( 松 禾 縣 監 ) 박제경( 朴 齊 敬 )이 모두 잘 다스렸습니 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 해주 판관은 승지의 아버지인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정( 三 政 )을 아뢴 것밖에는 또 큰 폐단이 없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삼정 밖에도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 과연 별단에 아뢴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정의 폐단을 말해 보라.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연례( 年 例 )로 기결( 起 結 )을 사정하는 것과 연안 남팔방( 南 八 坊 )의 허결( 虛 結 )과 금천( 金 川 )의 성향( 城 餉 )을 상납하는 것이 다 백성의 폐단이므로 이미 별단에 아뢴 것이 있 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포( 軍 布 )를 줄이고자 한 것은 백성이 바라는 바에 따라서 이 별단에 넣었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해서의 농사 형편은 흉년을 면하지 못합니다마는, 목화 농사가 더욱이 심하므로 도신( 道 臣 )이 이미 줄여 줄 것을 청하기는 하였으나, 신이 종적을 드러낸 여러 곳에서도 줄여 주기 를 바라는 백성의 호소가 많았으므로 과연 별단에 아뢴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말을 지나치게 입파( 立 把 )하고 계속하여 입파하는 폐단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과연 하문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나치게 입파하고 계속하여 입파하는 것은 이미 신칙하였는데도 이러한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조정의 신칙이 엄절할 뿐이 아니었는데도 겨우 얼마 안 지나서 또 다시 이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말을 함부로 타는 폐단은 삼사신( 三 使 臣 )이 금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삼사신이 어찌 신칙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나치게 잦은 사역원의 수본( 手 本 )과 뒤진 군관의 초료장( 草 料 狀 )이 말을 입파하는 폐단의 원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장 먼저 초료장을 금단해야 되겠다.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초료장이 한 번 나가면 그 호수( 戶 首 )가 지나치게 잦은 줄 알더라도 거행하지 않을 수 없 으니, 초료장의 금단이 곧 폐단을 없애는 요령입니다.

224 224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청도( 大 靑 島 )와 소청도는 장연( 長 淵 )과 옹진( 瓮 津 )에서 서로 얼마나 떨어졌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수로상의 거리가 100리 안팎이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섬 주민 중에서 맡아 거느릴 자가 없겠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어찌 거느리는 일을 감당할 만한 자가 없겠습니까마는, 진( 鎭 )을 설치하지 않으면 거느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섬에는 별장( 別 將 )의 해사( 廨 舍 )가 있으니, 세를 거두는 것이 600냥이면 이것으로 진료 ( 鎭 料 )가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해사가 있더라도 600냥은 진료로 쓰기에 너무 모자라므로, 그 조처할 방도를 과연 별단에 아뢴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청도와 소청도는 중국 지경에 가까운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대청도와 소청도는 우리나라의 극서( 極 西 )이므로, 바다로 등주( 登 州 )와 내주( 萊 州 )에 닿았 다고 예전부터 말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등주와 내주에서 떨어진 것이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만리 물길을 어찌 감히 억측하여 아뢰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산( 長 山 ) 남북 지경에 고기잡이하는 되[ 胡 ]가 출몰하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망보아 쫓는 것이 근래 엄하므로 감히 와서 고기잡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연에 방영( 防 營 )을 설치하면 미리 대비할 수 있겠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바닷가에 영을 설치하는 것이 더욱이 방어에 마땅하고 또 본도에는 방어영이 없으므로 별 단에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도 목장( 椒 島 牧 場 )의 폐단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도내 목장은 수초( 水 草 )가 좋지 않은 곳이 많은데 초도는 더욱이 심하므로 아뢴 것입니 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섬에서 정비( 情 費 )를 상납하는 것이 100여 냥이던 것이 이제는 200여 냥이 되었으니, 그것이 깊은 폐단이 된 것은 마땅하다.

225 225 -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이는 그 색장( 色 掌 )들의 징색( 徵 索 ) 때문에 깊은 폐단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행( 才 行 )과 효행은 나타난 자가 별로 없어서 별단에 넣지 않았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감히 아주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스스로 많이 삼가느라 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 반드시 가장 우수한 자가 없으므로 거론하지 않은 듯하다.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확실히 듣고 확실히 본 것이 없으므로 과연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탐방이 두루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재행과 효행이 가장 나타난 자가 없어서 그 랬을 것이다.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탐방에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송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계는 어느 곳에서 수정하였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본도와 연로에서 안렴( 按 廉 )하여 기록한 것은 모두 절에서 수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 중에서 유사를 시켜 품처하기를 청한 자는 그 다스리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 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신이 안렴할 때에 탐문한 실상이 이러하므로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신칙이 여러 번뿐이 아니었는데도 이처럼 탐장( 貪 贓 )하니, 참으로 매우 괴이하다.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장리( 贓 吏 )가 없는 것은 아니나, 조정의 호령이 엄절하므로 근래는 과연 많이 두려워 그쳤 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몇 달만에 다녀왔는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아홉 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며칠인가? 하니, 조병필이 아뢰기를, 230여 일입니다. 하였다. - 원문 빠짐 / 고종 11년 11월 19일(무오) /

226 226 - 암행어사 조병필의 별단에 대해 황해도 각 고을의 사기는 사실대로 뽑아내어 액수로 잡고 구규를 더욱 밝힐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황해도 암행어사 조병필( 趙 秉 弼 )의 별단( 別 單 )을 보니, 그 하나는 각 고을의 사기( 査 起 일군 논밭을 사정함)는 백징( 白 徵 )을 면하지 못하므로 허록( 虛 錄 )시키지 말고 사실대로 뽑아내어 액수로 잡는 일입니다. 전결( 田 結 )의 사기는 해마다 행하는 큰 정사인데, 억지로 요구하면 백징이 되기 쉽고 예사로 신칙하면 부질없이 장부에 허록한 수로 속( 束 )을 쌓아 결( 結 )을 이루어 점점 백성의 폐단이 될 것이니, 사실대로 뽑아내어 액수로 잡고 구규( 舊 規 ) 를 더욱 밝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는 연안( 延 安 )의 허결( 虛 結 ) 가운데에서 이미 연 수를 한정하여 임시방편으로 줄여 준 300여 결 외에 600여 결도 마찬가지로 줄여 주고, 토 산( 兎 山 )의 허결 30여 결과 장련( 長 連 )의 허결 200여 결도 줄여 주는 일입니다. 연안의 허 결 600여 결은 도신이 아뢴 바에 따라 이미 연석( 筵 席 )에서 여쭈어 수세( 收 稅 )를 멈추었으 나, 토산ㆍ장련 등의 허결은 연안 고을이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문 것과 차이가 있으니, 우선 전결을 사정하여 보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는 금천( 金 川 )에서 바치는 대흥 산성( 大 興 山 城 )의 향곡( 餉 穀 )은 계축년(1853, 철종4)의 예에 따라 특별히 하봉( 下 捧 )하는 일 입니다. 산성의 향곡을 하봉하는 것은 길을 열기 어렵고 또 전쟁의 대비를 생각하여 막 연 석에서 여쭈어 그대로 두었으니, 이것도 논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그 하나는 군포( 軍 布 )를 돈으로 대납하도록 묘당을 시켜 다시 품처( 稟 處 )하는 일입니다. 군포를 돈으로 대납하 도록 허가하는 것은 일의 체례가 가볍지 않고 각도에서 장계로 청한 것도 이미 마감하였으 니,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는 각역( 各 驛 )에서 말을 함부로 입파( 立 把 )하고 계속하여 입파하며 말을 교자( 轎 子 )로 바꾸고 교자 세( 貰 )를 억지로 거두고 위토( 位 土 )를 임 시방편으로 파는 따위 여러 폐단을 일체 금지하는 일입니다. 역의 폐단이 어느 도엔들 없겠 으며 어느 고을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본도는 세 도의 요충에 있어 사행이 잦으므로 지공( 支 供 )하는 일에 지치는 것은 참으로 어사가 논한 것과 같으나, 사람으로 짐승을 대신 하는 것도 이미 식례( 式 例 )를 어긴 것인데, 더구나 짐승을 바꾸어 교자로 하고 교자에 돈까 지 따르는 것이겠습니까. 위토를 임시방편으로 파는 것을 금단하는 일로 말하면 공문을 보 내어 알린 지 얼마 안 되니, 도신을 시켜 모두 상세히 살펴서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그 하나는 직로( 直 路 ) 다섯 고을에서 사행 때의 짐을 한 필마다 200근으로 공평하게 정하고, 복마( 卜 馬 )의 수는 해마다 미리 역관( 驛 官 )이 수본( 手 本 )을 올릴 때부터 수를 함부 로 늘리지 못하게 하고, 본도와 관서의 이른바 뒤진 군관( 軍 官 )의 초료( 草 料 )를 일체 엄금하 고, 역원( 譯 員 )의 짐도 모두 정식에 따라 시행하는 일입니다. 사행의 짐은 본디 정례( 定 例 ) 가 있으므로 근수와 말의 수를 감히 어길 수 없고 전후에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매우 엄절 한데 함부로 입파하는 것이 그러할 뿐더러 짐을 함부로 늘리는 것이 더욱이 심하니 모두 정 식에 따라 시행하고, 뒤진 자의 초료는 사신이 복명하기 전에는 오히려 행할 수 있으나 복 명한 뒤에도 다시 여전히 도로에서 낭자한 것을 예사로 여기니 뒤진 것을 장계로 아뢴 사람 이외는 사신이 들어온 뒤로는 모두 시행하지 말라고 세 도와 개성부ㆍ의주부 두 곳에 분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는 장연부( 長 淵 府 ) 대청도( 大 靑 島 ), 소청도에 한 진( 鎭 )을 설치하고 진장( 鎭 將 )의 봉료와 더 지방( 支 放 )하는 것은 그 섬의 화성수세조( 華 城 收 稅 條 )로 갈라 주고 모자라면 사창곡( 社 倉 穀 )의 모곡( 耗 穀 )으로 적당히 주고 황해 감영에서 자벽( 自 辟 )하는 자리로 만드는 일입니다. 대청도, 소청도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

227 227 - 니나, 화성의 곡물과 사창의 곡물을 갈라 쓰는 데가 각각 있고, 또 본영에는 이미 용매진( 龍 媒 鎭 )의 자벽하는 자리가 있으니, 장사( 將 士 )를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 있을 만합니다. 그대 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는 장연부를 높여서 방어영( 防 禦 營 )으로 만드는 일입니 다. 그 고을의 바닷가에 당선( 唐 船 )이 출몰하여 몰래 장사하는 폐단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일찍부터 잘 아는 것입니다마는, 망보고 쫓아가 잡는 일은 그 사람에 달려 있고 벼슬의 높낮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서둘러 영을 설치할 것 없습니다. 아직은 다시 탐 사하기를 기다려서 처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는 초도( 椒 島 )가 태복시에 바치는 말의 배년조( 排 年 條 )를 줄이도록 허가하고, 정비( 情 費 )를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엄금하는 일입니다. 배납조( 排 納 條 )는 이미 품처하였고, 정비를 함부로 받아들이는 일도 봄에 연석에 서 여쭌 것에 따라 본시를 시켜 금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8년 3월 9일(신미) / 황해 감사 강난형 등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백령진 대청도에 표류한 중국인의 선재를 불태울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 강난형( 姜 蘭 馨 )과 수사( 水 使 ) 이규회( 李 奎 會 )의 장계를 보니, 백령진( 白 翎 鎭 ) 대청도( 大 靑 島 )에 표류한 중국인 9명을 조사해 보니, 모두 봉천부( 奉 天 府 ) 사람들로서 행상하던 중 무장현( 茂 長 縣 ) 고니포( 古 尼 浦 )에 표류되었다가 돌아가는 길에 본도에 다시 정 박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소지한 물건 중에 가져가 기를 원치 않는 것은 돈으로 대신 바꾸어 주고 파손된 선재( 船 材 )는 저들이 보는 앞에서 불 태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무장현에 표류해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다시 정박한 자들입니다. 배가 이미 파손되 어 저들이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니, 먼 곳의 사람을 회유( 懷 柔 )하는 의리상 그들 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학( 譯 學 )으로 하여금 의주( 義 州 )로 데려가 넘겨 주 어, 쇄마( 刷 馬 )를 주어 바꾸어 타도록 하고, 음식을 주고 보살펴 주는 일도 특별히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저들이 버린 파손된 선재를 불태우는 일과 소지한 물건을 가지고 가거나 돈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전례에 따라 허락하게 하고, 저들이 출발했다는 장계를 기다려 통 리기무아문으로 하여금 자문( 咨 文 )을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19년 12월 20일(임신) / 대청도에 진을 설치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는 황해 감사 심동신의 장계 황해 감사 심동신( 沈 東 臣 )이 장계하기를, 대청도( 大 靑 島 )에 진( 鎭 )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가의 여부에 대해 충분히 헤아려 보았습니 다. 대청도는 백령도( 白 翎 島 ) 소속으로 땅도 좁고 백성도 적어 굳이 진을 설치할 필요가 없

228 228 - 을 듯합니다. 부근의 오차진( 吾 叉 鎭 )과 조니진( 助 泥 鎭 )은 모두 해로( 海 路 )의 요충지로 진보 ( 鎭 堡 )를 두어 방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옮겨 저기에 설치함은 또한 신중히 처리할 일에 관 계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군국사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고종 20년 1월 20일(임인) / 장연 등에 오차진 등을 옮겨 설치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계 통리군국사무아문이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 심동신( 沈 東 臣 )의 장계를 보니, 장연( 長 淵 )과 대청도( 大 靑 島 )에 진을 설치 하는 데에 대한 편리 여부를 자세히 상의하여 확정하였는데, 땅이 한편으로 치우쳐 있고 백 성이 적으며, 또한 백령진( 白 翎 鎭 )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따로 설치할 것이 없고, 부근에 오차진( 吾 叉 鎭 )과 조니진( 助 泥 鎭 ) 양 진은 모두 바닷길의 요충지로 응당 진보( 鎭 堡 )와 방수 ( 防 守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을 옮겨 저곳에 설치하는 것은 또한 어렵게 여기고 조 심해야 할 일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판부하기를, 군국사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고 명하셨습니다. 이 섬은 본래 백령도에 속하고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지금 굳이 별도로 진을 설치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바닷길의 요충지에 있는 양 진을 이 땅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은 더욱 이 무의미합니다.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고종 30년 2월 1일(갑인) / 수원 유수 민영상의 보고에서 청한 대로 대청도 등의 장적을 수원 유수영으로 이속시킬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윤달영이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수원 유수( 水 原 留 守 ) 민영상( 閔 泳 商 )의 보고를 보니, 황해도의 대청도( 大 靑 島 )와 소청 도( 小 靑 島 ) 두 섬은, 정묘조( 正 廟 朝 )에 둔전( 屯 田 )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잡역( 雜 役 ) 을 면제해 주고 본영( 本 營 )에 이속( 移 屬 )시킨 다음, 기패관( 旗 牌 官 )과 별무사( 別 武 士 )로 하여 금 돌아가면서 둔전을 감독하고 섬의 백성들을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호( 家 戶 )가 100여 호에 불과하고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채집하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꾸리는데, 모리 배( 牟 利 輩 )들이 백령진( 白 翎 鎭 )에 사주하여 관례( 官 隷 )들과 한통속이 되어 제멋대로 침탈하 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영( 營 )에서 누차 금지하고 신칙하였으나, 갈수록 더욱 심해 져서 마침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단을 막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할 방도는 다만 이적( 移 籍 )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두 섬은 서 쪽의 먼 바다 가운데에 있는바, 토양이 소금기가 많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니 이미 가련 하게 여길 일이고, 둔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한 것 또한 조정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229 229 - 것인데, 어찌하여 진( 鎭 )의 관속( 官 屬 )이 침탈하여 끝없이 횡포를 부린단 말입니까. 애처로 이 하소연할 곳 없는 잔약한 백성들이 소장( 疏 章 )을 안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도로에서 방 황하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이에 속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니, 이후로는 두 섬의 장적( 帳 籍 )을 모두 수원 유수영( 水 原 留 守 營 )에 이속시켜서 백성들을 위무하여 편안 히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30 230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연평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고종 3년 8월 9일(을미) 황해 감사 이종승의 장계 고종 3년 8월 10일(병신) 황해도 병마절도사 오하영의 장계에 대해, 대죄 하지 말고 회유하라는 전교 고종 10년 5월 17일(갑오) 자경전에서 강관 조병휘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고종 29년 3월 20일(무인) 천신하는 석수어를 기한 안에 봉진하지 못해 대 죄한다는 황해 감사 이경직의 장계

231 231 - <내 용> / 고종 3년 8월 9일(을미) / 황해 감사 이종승의 장계 황해 감사 이종승( 李 鍾 承 )이 장계한 해주목 연평도( 延 坪 島 )에 도래한 당선( 唐 船 )을 이양 선( 異 樣 船 )이라고 장계하였으니 황공하여 대죄한다는 일 을 가지고 전교하기를,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하라. 하였다 / 고종 3년 8월 10일(병신) / 황해도 병마절도사 오하영의 장계에 대해, 대죄하지 말고 회유하라는 전교 황해도 병마절도사 오하영( 吳 夏 泳 )이 장계하여 해주목 연평도에 도래한 당선을 제대로 요망하지 못한 강령 현감( 康 翎 縣 監 ) 조병식( 趙 秉 式 )과 뒤늦게 보고한 해주 판관 성혁수( 成 赫 壽 )를 모두 파직하고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전후에 올린 장계가 비 록 읍에서 올린 첩보에 따른 것이었으나 황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대죄합니다. 라고 한 데 대하여 전교하기를,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하라. 하였다 / 고종 10년 5월 17일(갑오) / 자경전에서 강관 조병휘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진시( 辰 時 ). 상이 자경전에 나아갔다. 진강할 때에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조병휘( 趙 秉 徽 ), 참찬 관 서원보( 徐 元 輔 ), 검토관 이순의( 李 舜 儀 ), 가주서 최정헌( 崔 鼎 獻 ), 겸춘추 김유( 金 㽥 ), 별겸 춘추 김학진( 金 鶴 鎭 )이 각각 시전 제6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것을 한 번 외웠다. 상이 책을 폈다. 조병휘가 군자누맹( 君 子 屢 盟 ) 에서부터 적적참토 우견획지( 躍 躍 毚 兎 遇 犬 獲 之 ) 까지를 읽고 이어 장구를 풀이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 講 官 )은 차하한 뒤에 오늘 처음으로 경연에 나왔는가? 하니, 조병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문임( 文 任 )을 거친 사람인데 강관으로 차하한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하겠다. 하였다. 조병휘가 아뢰기를,

232 232 - 신은 학식이 본래 없고 나이도 노쇠하였으므로 강관의 직임에는 합당치 않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 都 監 )의 일로 고생이 이미 많았는데 또 잡과( 雜 科 )를 치렀으니 고뇌가 또한 적지 않았 을 것이다. 손상받음은 없었는가? 하니, 조병휘가 아뢰기를, 다행히 질병은 면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 해백( 海 伯 )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편안히 갔다가 올라왔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성상의 은혜로 편안히 갔다가 올라왔습니다. 신이 하찮은 음관( 蔭 官 )으로서 평소 학식과 재주가 없어 성상의 명을 잘 받들지도 못했는데 세상에 드문 은혜를 전후로 받았으므로 송 구스러워 앙달할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내에 폐단은 없었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해서( 海 西 ) 지방은 본래 큰 폐단은 없고, 근래에는 수령들이 성심으로 정치를 잘해서 전성 ( 全 省 )이 지금은 거의 완전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성은 비록 모두 완전해졌다고는 하나, 혹 말할 만한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폐단은 지금 거의 제거되었고 비록 사소한 미진한 일들이 있기는 하나 번거롭게 아뢸 만하 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백이 정치를 잘해서 그런 것이다.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사실 한 일도 없는데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로부터 나가면 어느 나라에 접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서남쪽으로 중국의 등주( 登 州 )와 내주( 萊 州 )에 접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에서 등주와 내주까지의 거리가 몇리나 되는가? 중국까지의 거리는 몇리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바닷길은 비록 몇 리나 되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등주와 내주는 수천 리가 될 듯하며 중국은 거의 1만 리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 가운데 누가 정치를 잘 하던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233 233 - 전후로 내린 조정의 신칙이 엄절하였으므로 열읍의 수령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모두가 정치를 잘 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지적하여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악군( 安 岳 郡 )의 양전( 量 田 )을 다시 했다고 하는데, 또 다른 고을은 몇 곳이나 양전을 다 시 하였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안악, 평산( 平 山 ), 문화( 文 化 ) 세 고을의 전결( 田 結 )을 다시 측량하였는데 이밖의 여러 고을도 전결에 대한 정사가 문란하니, 이것은 양전을 다시 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 습니다. 그러나 일이 거창하므로 일제히 타량( 打 量 )할 수가 없고 매년 2, 3 고을씩 점차로 시행하여 빠진 전결을 조사해 내는 것이 매우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성( 山 城 )은 도합 몇 곳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수양( 首 陽 ), 장수( 長 壽 ), 구월( 九 月 ), 정방( 正 方 ), 대현( 大 峴 )으로 도합 다섯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 산성에는 과연 폐단을 없앴던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다섯 산성을 설치하던 초기에는 장사들을 지공하는 부담이 적지 않았고, 근래에는 더욱 조 잔하여 지탱해 보전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또한 마땅히 폐단을 제거할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물고기는 어느 곳에서 많이 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청어( 靑 魚 )는 장연( 長 淵 ), 풍천( 豐 川 ), 옹진( 甕 津 ), 강령( 康 翎 ), 초도( 椒 島 ) 등지에서 많이 나 고 석어( 石 魚 조기)는 해주( 海 州 )와 연평( 延 坪 ) 바다에서 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 唐 船 )이 바다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당선은 오로지 고기를 잡기 위해 오기 때문에 매양 장연 등 다섯 곳의 해양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연의 접경이 특별히 북쪽 지역과 가까운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장연에서 북경( 北 京 )까지의 거리가 바닷가 여러 고을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이 바다에 들어와 석어를 잡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석어는 연평에서 나는데 당선은 본래 이곳에 와서 잡는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령( 白 翎 )은 육지에서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넉넉히 100여 리는 될 것입니다.

234 234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령이 중국 지역과 가까운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백령에서 중국 지역과의 거리는 1만 리 가까이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도( 椒 島 )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풍천( 豐 川 )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주( 海 州 )에서 옹진( 甕 津 )까지의 거리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해주에서 옹진까지의 거리는 110리이고 소영( 蘇 營 )까지의 거리는 140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 講 官 )은 일찍이 외임을 거쳤는데 몇 곳이나 되는가? 하니, 조병휘( 趙 秉 徽 )가 아뢰기를, 동래 부사와 전라 감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찬관은 누차 지방 수령을 거쳤는데 몇 곳이나 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회덕( 懷 德 ), 천안( 天 安 ), 무안( 務 安 ), 서흥( 瑞 興 ) 등 네 곳인데, 서흥에 있을 때에 특별한 은 총으로 해백( 海 伯 )에 제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올해 얼마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신의 나이가 올해 67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염과 눈썹이 하얗기는 하나 회갑을 지내지 않은 사람과 같다.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황송합니다. 하였다. - 이하 원문 빠짐 / 고종 29년 3월 20일(무인) / 천신하는 석수어를 기한 안에 봉진하지 못해 대죄한다는 황해 감사 이경직의 장계 황해 감사 이경직( 李 耕 稙 )의 장계에, 천신( 薦 新 )하는 석수어( 石 水 魚 )가 연평도( 延 平 島 )에 물이 말라서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아 잡지 못한 관계로 기한 안에 봉하여 올릴 수 없습니 다.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민영돈에게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하라. 하였다.

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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