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실크로드열전 ] 3 현장의서역기행... 걸어서 110 개국 입력 : 2015.11.21 08:05 대륙이다시꿈틀대고있다. 오랜세월세계사의주축이었던구대륙유럽과아시아를관통하는거대한땅유라시아가잠에서깨고있다. 중국은일찌감치 일대일로 ( 一帶一路 ) 구상으로이지역에대한야심을드러냈다. 우리정부도 ' 유라시아이니셔티브 ' 를시작했다. 기업들도앞서거니뒤서거니진출을시작했거나준비를서두른다. 하지만지역에대한역사문화적이해가없이는자칫역풍을부를수있다. 이런 인식의공백혹은부족 을메우기위해조선비즈는국내대표연구집단인중앙아시아학회와새로운연재물을기획했다. 실크로드의시작부터최근까지길을열고넓혀온주역들의이야기를통해이광활한뉴프론티어를재조명한다. 격주로모두 10 회에걸쳐연재한다. [ 편집자주 ] 실크로드를이야기하자면당나라시절의서역기행을빼놓을수없다. 그주역이현장 ( 玄奘, 602~664) 이다. 그는당나라초기뛰어난고승이자불교경전번역가였다. 우리에게는삼장 ( 三藏 ) 법사로도유명하다. 경장 ( 經藏 ), 율장 ( 律藏 ), 논장 ( 論藏 ) 에두루통달해서얻은별칭이다. 삼장법사여행길에손오공은없었다 삼장법사라는이름이우리에게도친근한것은 서유기 ( 西遊記 ) 덕분이다. 명나라시대의소설작품에나오는기상천외한기행의주역이삼장법사다. 그가천축으로불경을구하러가던도중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를차례로만나일행이되어겪게되는무용담은다양한형태로각색돼국내에도소개됐다. 하지만그내용은어디까지나소설일뿐이다. 현장이불경을구하러서역기행에오른것은사실이지만, 그는아무런일행도없이홀로모험의길을나섰다. 그가인도로가기위해중국국경을넘은때는 629 년 ( 唐太宗貞觀 3 年 ) 8 월, 그의나이 28 세되던해였다. 당시즉위한지 4 년밖에되지않은당태종 (599~649, 재위 626~649) 은백성의어느누구도중국땅을벗어나실크로드로가는것을허락하지않았다. 하지만현장은혼자서월경을감행했다. 불법 ( 不法 ) 이었다. 이유는단하나, 바로 불법 ( 佛法 ) 을구하기위해서 였다.
현장모습추정복원도 17 년간 2000km 기행...130 개국견문 그렇게시작된현장의여행은햇수로무려 17 년이걸렸다. 오랜세월동안그가직접걸어서다닌나라만해도 110 개국이었다. 귀로전해들은 20 여개국까지포함하면그가직간접으로접한나라는 130 개국이훌쩍넘는다. 그가다닌길을거리로계산해도총 5 만여리, 지금의단위로는 2000km 에달한다. 중앙아시아와인도의불교유적지가운데그의발길이닿지않은곳을찾기가어려울정도였다. 현장은그긴시간각지의대덕 ( 大德, 고승 ) 들을찾아다니며스스로불교의깊은뜻을터득했다. 드디어 645 년 1 월무사귀환했다. 장안으로돌아오면서그는경전 657 부와부처의육사리 ( 肉舍利 ) 150 과, 석가상 7 구를갖고왔다. 떠날때국법을위반했던터여서귀국후죽음을각오했지만, 뜻밖에도당태종은그를열렬히환영했다. 당태종의입장에서는그럴만했다. 현장이 17 년간보고들은중국서쪽나라들의정보는더할수없이요긴한것들이었기때문이다. 당태종은그가가져온경전을전시보관하기위해 652 년장안에대자은사 ( 大慈恩寺 ) 를지었다. 그안에는대안탑 ( 大雁塔 ) 을세웠다. 대안탑은원래 50 여미터높이의오층탑이었으다. 하지만화재등으로인해세차례중수를거쳐야했다. 현재 7 층 (64m) 인모습은 17 세기에중수한것이다. 탑의 1 층출입구좌우벽에는 652 년태종이현장에게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비 ( 大唐三藏聖敎序碑 ) 와고종의 술삼장성기 ( 述三藏聖記 ) 비가세워져있다. 이두비석에도현장은 삼장 으로언급되고있다. 12 권에 7 세기중앙亞 - 인도의모든것담아 현장의 대당서역기 는 646 년 7 월에완성됐다. 모두 12 권으로편성된 대당서역기 는엄밀하게말하면여행기라기보다는지리서에가깝다. 그가치는이루말할수없다. 7 세기전반중앙아시아와인도에관한유일한기록이다.
당시그지역의기후, 풍토, 민족, 습관, 언어, 물산, 종교, 미술, 전설등이상세하게담겨있다. 그런 대당서역기 는당태종에게도아주중요했지만, 지금이곳 실크로드를연구하는학자들로서도필독서라할만하다. 사실이책은현장이직접쓴것은아니었다. 그가체험하고견문한내용을다른승려인변기 ( 辯機 ) 에게구술해집필하도록한것이다. 변기는왕의칙령으로 645 년부터현장의경전번역을돕기시작했다. 짧은기간에무려 4 부의경전번역을마쳤다. 그만큼총명했다. 하지만변기는자신의기량을다펼치기도전에극형에처해졌다. 황제의딸, 그것도기혼의여인을사랑한죄값이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는법현의 법현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과함께 3 대여행기로손꼽힌다. 이들세구법승중에서도가장오랜기간여행하고, 가장많은국가를방문했던인물이바로현장법사이다. 2001 년탈레반의포격으로폭파된바미얀서대불 ( 왼쪽 ) 과동대불. 각각 38 미터과 55 미터다. / 사계절제공 그는자신이돌아본 7 세기인도와중앙아시아의상황을정확하게기억했다. 그중에서도특히우리의관심을끄는것은아프가니스탄의바미얀대불에관한기록이다. 이석불은불행히도 2011 년탈레반의폭파만행으로지금은역사속으로사라져버렸다. 탈레반에폭파된바미얀대불의최초문헌 대당서역기는그바미얀대불에대한최초의문헌기록이기도하다. 중국을떠난지 3 년만에아프가니스탄에도착한현장은바미얀국왕의왕궁에서공양을받으며, 바미얀의불교사원지이곳저곳을방문했다. 15 일동안머물면서그는자신이본금빛반짝이는높이 38 미터와 55 미터의대불에대해기록을남겼다. 55 미터높이라면지금으로치면 20 층아파트높이에해당하는어마어마한크기다. 이곳을오가는사람들에게이정표가돼주었을거대한금빛불상은현장에게꽤큰충격이던모양이다.
그는귀국길에들른중앙아시아의호탄에관해서도상세한기록을남겼다. 그기록이얼마나믿을만한지는이곳에서발견된유물들이그대로입증해준다. 특히호탄의한사원지벽면에그려진용녀전설도 ( 龍女傳說圖 ) 는 대당서역기 의내용과정확히일치한다. 단단월릭용녀전설도 이야기는다음과같다. 성의동남쪽에큰강의강물이갑자기끊겼는데, 왕이알아보니물속에사는용녀의소행이었다. 남편을잃고홀로된용녀가새로이지아비를얻고싶어심통을부린것이었다. 이때나라의한대신이자청하여말을타고강물로들어가용녀의남편이되어물길을되살렸다. 지금은희미해져버린벽화의옛사진에는아름다운용녀와강물로말을타고들어가는대신이그려져있다. 대신이타고있는점박말은호탄지역의특산말이다. 고대비단전설에관한기록도 고대비단전설에관한그림인잠종전설도 ( 蠶種傳說圖 ) 에관련된기록도있다. 호탄사람들은뽕과누에를원했으나구할수가없었다. 호탄왕은중국에혼인을청했고신부에게뽕과누에를가져와옷을스스로만들어입으라고했다. 그말을들은신부는남몰래뽕과누에종자를구하여자신의왕관에숨겨호탄에가져왔다. 나무위에그린이그림은 20 세기초영국탐험가오럴스타인이호탄에서북동쪽 100 킬로미터떨어진타클라마칸사막에있는단단윌릭에서발견했다. 현재영국박물관에소장된이그림에는호탄사람이뽕과누에종자가숨겨져있는신부의왕관을가리키는장면이나온다.
잠종전설도 현장이귀국당시가지고온 7 구의불상은당시인도의각지역에봉안돼있던그림과조각을본으로해서만든모각상 ( 模刻像 ) 들이다. 현장이가져온각종경전과불상은장안에도착하자마자주작문남쪽에진열됐다. 많은사람들이와서봤다. 그다음날에는스무마리의말에실려떠들썩한행렬과함께홍복사 ( 興福寺 ) 로옮겨졌다고한다. 그후이유물들은 648 년 12 월장안의대자은사로이송됐다. 당시온도시가떠들썩했다고한다. 당시기록에 경전과불상을갖가지종류의수레위에안치하고, 불상앞양쪽에는각각큰수레를배치했다. 수레위에는깃발을단긴장대를두었고, 그뒤에는사자 ( 獅子 ) 가길을인도하게하였다. 당태종과황태자는안복문 ( 安福門 ) 누각위에서손에향로를들고이를보냈다 고돼있다. 현장이가지고온 7 구의불상에대한그후의내력은전혀알려져있지않다. 그것은안타까운일이지만적어도당대의불상양식을크게변화시켰을것은틀림없다. 현장법사의흥미로운이야기는이후에도오랫동안수많은사람들의입에회자되었다. 그내용은각색되어희곡으로도공연되었고, 원대부터는본격적으로책으로도출판됐다. 그것이바로 서유기 이다. 애석하게도원대 서유기 의원본은남아있지않다. 지금우리가읽는 서유기 는명나라말인 1570 년경오승은 ( 吳承恩 ) 이 대당서역기 를기초로찬 ( 讚 ) 한구어체장편소설이다. 경천사와원각사석탑의원대서유기
국립중앙박물관에소장된경천사지십층석탑 ( 왼쪽 ) 과서울탑골공원에있는원각사십층석탑 지금은사라진원대 서유기 에담긴이야기의장면이흥미롭게도한국의경천사십층석탑 (1348 년국보제 86 호 ) 과원각사십층석탑 (1467 년국보 2 호 ) 에새겨져있다. 경천사십층석탑은대리석으로만든석탑인데, 잘알려진대로친원세력이발원했고, 제작은원나라장인이한것이다. 경천사십층석탑이만들어지고 120 여년후인 1467 년지금의탑골공원에역시대리석으로원각사십층석탑이건립됐다. 두기의탑에는각종조각이있는데, 바로기단부에 서유기 가새겨져있다. 기단부는석탑을도는참배자의눈에가장잘띄는부분이다. 이곳에조각된 서유기 는명대 서유기 가간행되기이전, 원의 서유기 의장면을새긴것이다. 현재원대 서유기 의원본은없이단편적인자료로만확인되는상황에서이두탑에새겨진 서유기 의장면은더없이소중하다. 안타깝게도두탑의 서유기 조각부위는손상이심해몇몇장면을제외하고는선명하게드러나지않는다. 하지만고려말과조선초의우리탑에 서유기 이야기가등장한다는사실만으로도현장과우리의인연은각별하다고할수있을것이다.
경천사지십층석탑기단부에새겨진서유기등장인물들 임영애 경주대문화재학과교수. 경주대실크로드연구원을이끌고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전통사찰운영위원회와경상북도, 강원도등의문화재위원회에도참여하고있다. 한국과중앙아시아의불교조각사를주로연구한다. 이화여대신문방송학과를나와동대학원에서미술사학석사, 박사학위를받았다. 주요저서로는 서역불교조각사 교류로본한국불교조각 등이있다. Copyright (c) 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Contact webmaster@chosun.com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