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팔당호 ( 八堂湖 ) 에괴었다가계속북서방향으로 120 km가량의거리를흐르면서왕숙천 ( 王宿川 ) 중랑천 안양천등의지천을합류한다. 하구의김포평야를지난뒤파주시에이르러곡릉천을합치고, 임진강과만난뒤김포반도의북부를돌아강화만 ( 江華灣 ) 에서마침내서해바다로들어간다. 물

Similar documents
2014 경영학회_브로셔 내지

경영학회 내지 최종

(연합뉴스) 마이더스

01 02

愿묒쭊援??섏젙諛깆꽌?댁?0907

•••••1301(•••).pdf

_¸ñÂ÷(02¿ù)

º´¹«Ã»Ã¥-»ç³ªÀÌ·Î

¹é¹üȸº¸ 24È£ Ãâ·Â


<B9CEBCBCC1F828C8AFB0E6B1B3C0B0292E687770>

hwp

5 291

10월추천dvd

178È£pdf

(연합뉴스) 마이더스

ÆÞ¹÷-Æîħ¸é.PDF



_report.hwp

CONTENTS 2011 SPRG Vol


¼øâÁö¿ª°úÇÐÀÚ¿ø

<FEFFBE0CB77CBCF4C548C0B D638002E B D >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82-대한신경학0201

0.筌≪럩??袁ⓓ?紐껋젾 筌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2. 1) 7 ( ). (1) 1),. ( 湖西 ),. 19,., , (2).,,,,.,,., ),.. 1) 조광, 초기천주교의충청도선교와그사회문화적특성, 2014, p.11~30. 프란치스코교

더바이어102호 01~09

<322DB3EDB9AE2E687770>

03-교통이야기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ºÎÆò»ç¶÷µé187È£-ÃÖÁ¾


º»ÀÛ¾÷-1

È޴ϵåA4±â¼Û

60

ITFGc03ÖÁ¾š

쌍백합23호3

2014도서목록본문

글청봉3기 PDF용

아침 송(頌) 유자효 자작나무 잎은 푸른 숨을 내뿜으며 달리는 마차를 휘감는다 보라 젊음은 넘쳐나는 생명으로 용솟음치고 오솔길은 긴 미래를 향하여 굽어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길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99È£ÃÖÁ¾

에너지절약_수정

µ¶µµºÎ·Ï1~64

2016년 신호등 3월호 내지A.indd

Microsoft PowerPoint _Monthly InsighT 19년 1월.pptx

(001~010)206교과-앞부속(수정)

11+12¿ùÈ£-ÃÖÁ¾

<C6C8B5B5C0E5C5CD20B8AEC7C3B7BF2E696E6464>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DocHdl2OnPREPRESStmpTarget


152*220


2007중국답사기

01¸é¼öÁ¤


4-Ç×°ø¿ìÁÖÀ̾߱â¨ç(30-39)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Microsoft PowerPoint - MonthlyInsighT-2018_9월%20v1[1]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141018_m

해피메이커 표지.indd

상업도시 중심 잠실마루쉼터 송파나루길 한강 조망이 좋은 잠실대교 남단에 위치한 잠실마루쉼터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낮에는 한강어도를 볼 수 있으며 밤에는 아름다운 저녁노을과 멋진 한강 건강한 생태를 느낄 수 있는 잠실어도에서 물고기도 관찰하고 서울과 경기


* pb61۲õðÀÚÀ̳ʸ

레이아웃 1

~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표지안 0731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해오름summer2009

¹ßÇ¥¿äÁö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T hwp

GGWF Report는사회복지분야의주요현안에관하여정책의방향설정과실현에도움을주고자, 연구 조사를통한정책제안이나아이디어를제시하고자작성된자료입니다. 본보고서는경기복지재단의공식적인입장과다를수있습니다. 본보고서의내용과관련한의견이나문의사항이있으시면아래로연락주시기바랍니다. Tel

선거공보-저해상도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µ¿¼�Çѹ溴¿øb60Ü¿ïÈ£š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레이아웃 1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ÃѼŁ1-ÃÖÁ¾Ãâ·Â¿ë2

내지 뒷

untitled

<33312DBCADBFEFBFACB1B820C6F7C4BFBDBA203331C8A32834BFF93235C0CFC0DA2DBAAFB9CCB8AE2DB1E8B0A9BCF6292E687770>


src.xls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연구위원 김 현 아 연구위원 허 윤 경 연구원 엄 근 용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2019달력-대(판형키워)

런데 1925 년 7월에있었던전대미문의을축년대홍수로인해제방이유실되는사고가발생하였다. 당시측정된수위는한강인도교에서 11.76m, 구용산에서 12.74m, 뚝섬에서 12.95m 로신용산제방안에있던이촌동은순식간에침수되었고신 구용산과영등포등에서도제방이무너져시가지와농경지가모두물

Transcription:

3 하천여행기 15 서울시민들의 애환과 꿈을 안고 흐르는 큰 물줄기, 한강 김 종 성 여행작가 (sunny21@daum.net) 서울만큼 복 받은 도시가 또 있을까 싶다. 자전거를 타고 는 뜻으로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아리수'나 '욱리하'는 모 조금 달리거나 지하철, 버스를 타면 한 시간 안에 크고 작은 두 '큰물'을 뜻한다. 한강이란 이름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강과 산을 만날 수 곳이 서울이다. 국립공원 북한산 외에 동 알 수 없지만 백제가 동진과 교류하며 '한수'(漢水) 또는 '한 서남북 42개의 산이 뼈대를 이루고, 한강과 안양천, 중랑천 강'(漢江)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을 비롯해 36개의 하천이 서울의 핏줄을 만들고 잇다. 머물 여타의 큰 강들이 그렇듯, 한강의 이름도 지역에 따라 다 면 도시요 나서면 대자연인 곳이 서울이라 할만하다. 그 가 르게 불린다. 태백에서는 '골지천'(骨只川, '골지'는 '골짜기'란 운데 한강은 서울에서 가장 뚜렷하게 눈에 띄는 자연 상징물 뜻), 정선에선 '조양강'(朝陽江), 영월에선 '동강'(東江), 여주 가운데 하나로, 시민들은 강을 바라다보면서 팍팍한 도시의 에선 '여강'(麗江)으로 부른다. 이렇듯 한강은 단순한 물길이 삶에서 많은 위안을 느낀다. 아닌 물로 이우러진 역사책이다.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또한 한강은 한성백제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도로 란 큰 물길 두 개가 합쳐진 강이다.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 금 서 천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젖줄이기도 하다. 한강은 '큰 대봉 아래 검룡소에서, 북한강은 북한 지역 강원도 금강군 물줄기'를 뜻하는 '한가람'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시대마다 옥전봉에서 각각 발원해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합쳐지 이름을 달리했다. 고구려는 현재 서울 수돗물 이름과 같은 ' 며 비로소 한강을 이룬다. 아리수'(阿利水), 백제는 '욱리하'(栯里河), 고려는 맑고 밝다 북한강, 남한강 두 물이 만나는 양수리 마을의 두물머리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류한 한강은 경안천을 팔당호에서 무리를 지어 사는 물고기 사냥꾼, 가마우지

만나고, 팔당호 ( 八堂湖 ) 에괴었다가계속북서방향으로 120 km가량의거리를흐르면서왕숙천 ( 王宿川 ) 중랑천 안양천등의지천을합류한다. 하구의김포평야를지난뒤파주시에이르러곡릉천을합치고, 임진강과만난뒤김포반도의북부를돌아강화만 ( 江華灣 ) 에서마침내서해바다로들어간다. 물고기사냥용으로사육되는독특한새가마우지. 물속으로 잠수후날개를말리려양팔을쭉벌리고있는모양이언제 보아도익살스럽다. 북한강과남한강이만나는마을양수리 이른아침수도권경의중앙선전철양수역에내려물빛과 안개에마음이설레는곳, 두물머리를향해갔다. 두물머리 가있는양수리 ( 경기도양평군양서면 ) 는북한강과남한강두물줄기가만나한강이되는수변마을이다. 번잡한일상을벗고자, 추억을담고자, 멋진사진을찍고자남녀노소사람들이사시사철찾아오는곳이다. 강가와연꽃밭사이의오솔길같은산책길을 10 여분지나면피어오르는물안개처럼저앞으로두물머리가나타난다. 두물머리에서추억을담는사람들의사진속에는거대한느티나무가빠지지않는다. 느티나무는언뜻한그루로보이지만사실은세그루가한데어우러진것인데마치한몸처럼보인다. 400여년동안묵묵히서서오고가는사람들의추억속에존재해준고마운존재다. 이아름드리노거수나무에기대어서서강을굽어보면나도모르게안온한느낌이몰려온다. 강위의물안개처럼시간마저도천천히흘러가는것같다. 예전이곳이나루터였던것을알리기라도하려는듯이두물머리앞에는늘나룻배한척이홀로떠있다. 쓸쓸하고외로워보이기도하는이풍경을왜그리사람들은좋아하는지, 이른아침엔나룻배를향해사진을찍는사람들이총총히서있다. 산사의아침만큼이나고요한강가의아침을느낄수있는곳이다. 두물머리에서한강이된강물은팔당댐이있는팔당호에서잠시머물다간다. 팔당호엔보기드문새인가마우지, 고니등이모여살고있어눈길을끈다. 잡은물고기를바로삼키지않고입속에담아두는습성때문에아시아어부들에게 63빌딩에서내려다본겨울한강의전경 6,70년대까지한강에서물놀이를즐겼던서울시민들세번의토목공사로사람들과멀어져버린한강 1925 년을축년대홍수로촉발된한강개발 팔당호를지나수도서울로들어선한강은이제옛날처럼출렁거리며흘러가지않는다. 물흐르는소리도들리지않는 하천과문화 Vol. 12 28 29 No.1 겨울

다. 위쪽물길이수많은댐들로막혀서, 한강은이제우리에갇힌맹수처럼되었다. 대한민국경제발전의신화를표상하는한강이지만이젠그저사람들이만들어놓은양쪽시멘트제방사이에서가만히엎드려있는것처럼보인다. 1980 년대한강종합개발계획 (1982 년 ~1986 년 ) 당시준설 ( 물의깊이를증가시키기위해강, 하천바닥에쌓인모래나돌을파내는일 ) 로낮아진한강수위를유지하기위해만든신곡보 ( 경기도김포시 ) 와잠실보가한강을콘크리트어항처럼가둬사계절내내일정한수심을유지한다. 지난가을찾아갔던만경강, 흐드러지고굽이쳐흐르던만경강에비하면한강은거의직선의강이다. 한강이지금처럼시멘트제방으로뒤덮인거대한구조물이된것은 20세기이후다. 한강의역사에서실로짧은 100 년도안되는기간동안에한강은그이전모든세월을합친수준의변화를겪어야했다. 그계기는일제강점기인 1925 년 을축년대홍수 였다. 한강물이범람해남대문까지밀려왔을정도였다고하니실로엄청난홍수였다. 사람들의충격은대단했고, 이후한강범람을막는데총력을기울였다. 그결과한강에는제방이들어서기에이르렀고, 강은시민들로부터격리되기시작했다. 1967 년여의도종합개발사업, 1970 년대강남개발, 1982 년한강종합개발사업등세번에걸친거대한토목공사로한강은제모습을거의잃어버리고말았다. 1967 년김현옥서울시장이추진한 ' 한강개발3개년계획 ' 에따라강변을메워제방을쌓았고, 제방위에강변도로가건설되고, 여의도가물에잠기지않도록윤중제가건설되고, 잠실이내륙이됐다. 한강가에택지개발과도로건설이본격적으로진행된것이다. ( 중략 ) 이어서울올림픽과아시안게임대비용으로 1982 년부터 1986 년까지진행된 ' 한강종합개발계획 ' 에따라 2개의수중보 ( 잠실보와신곡보 ) 와올림픽대로, 한강둔치공원이들어섰다. - 서울시 < 한강의어제와오늘 > 가운데그럼에도서해바다가있을한강하구로저무는부드럽고고운노을이자전거바퀴를자꾸만붙잡는다. 하루라도평원의한적한곳을달리면서마음을침묵과빛으로채우지 않으면, 갈증난코요테와같은심정이들었다는아메리카인디언. 허전하고우울한마음이들적마다금속말 ( 자전거 ) 을타고아메리카인디언처럼달려오는곳이또한한강이다. 유구한한강역사에어울리는명소와풍경과이야기가담겨있어계절마다여러번달려가도식상하거나지겹지가않다. 1925년을축년대홍수로발견하게된암사동선사유적지강동구암사동에있는선사유적지는선사시대의마을유적으로사적제267 호이다. 이유적지는아이러니하게도 1925 년 을축년대홍수 때처음으로학계에알려졌다. 한강의범람으로유물포함층이지상에드러나면서많은석기와빗살무늬토기조각이노출되었던것이다. 당시는일제강점기인관계로일인학자들이엄청난양의토기 석기를채집하였다고한다. 광복후에도여러차례조사가이루어졌으나발굴된면적은전체의극히일부에지나지않을정도로암사동유적은방대하다. 1970 년대전까지만해도팔당댐에서한남대교에이르는한강변좌우에는수많은선사시대유적이펼쳐져있었으며역사시대유적도부지기수로널려있었다고한다. 하지만지금은개발이라는이름아래그많던유적지는모두사라지고암사동선사유적지만이유일하게살아남아강이있는곳에사람이있음을희미하게전하고있을뿐이다. 뉴욕에센트럴파크, 런던엔하이드파크가있다면우리에게는서울숲이있다! 35만평의규모로조성된서울에서 3번째로큰공원답게자전거를타고오르락내리락, 구석구석산책을즐길수있다. 한강변을따라서울숲으로이어지는산책로겸자전거길을통해갈수있어꼭들르게되는곳이다.

리에서 사는 순하고 착한 사슴들이 살고 있어 공원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한강 위에 놓인 역사의 흔적들, 한강 다리 태곳적부터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을 한강은 많은 인구가 밀집한 수도 서울에 물을 공급해주는 축복의 젖줄이다. 또한 쉴 새 없는 확장을 이어온 개발 앞에서 때로 장애물이 되기도 한강가 뚝섬유원지의 이채로운 명소 자벌레 건축물 했다. 1900년 최초로 한강에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한강을 건 너기 위한 수단은 오직 배뿐이었으나, 100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 31개나 되는 다리들이 한강 위를 지나고 있다. 지금 한강다리들은 기가 막히게 옛날 한강 위로 사람이 다 녔던 길목인 나루터 자리들에 건설됐다. 강남개발과 근대화 추진으로 서울의 모습이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고 그 과정에 서 한강다리들이 만들어진 것 같지만, 그 이전에 이미 서울 의 줄기로 이어져온 길의 연장선에 한강다리들이 자연스럽 서울숲엔 귀엽고 순한 사슴들이 살고 있어 꼭 들르게 된다. 게 들어선 것이다. 노량진에는 한강대교가 놓였고, 마포나루 서울숲이 자리하고 있는 뚝섬은 원래 유원지가 있던 곳으로 옛날 시외로 피서를 나가지 못하는 시민들이 와서 놀던 곳이 었다고 한다. 뚝섬은 이름과 달리 섬이 아니었다. 조선 시대에는 뚝섬, 전관, 전교, 살곶이벌, 독도(둑纛 섬島) 등으로 불리기도 하 였다. 조선 태조 때부터 임금이 사냥을 하고 무예를 검열하 던 곳이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섬과 모양 이 같다고 하여 뚝섬, 둑섬 또는 한자음으로 뚝도, 둑도라고 한강엔 서른 개가 넘는 많은 다리들이 강남북을 이어주고 있다. 했다. 이곳에 한강변에서 가장 가까운 전통재래시장 '뚝도시 장'이 지금도 남아있다. 지금 뚝섬은 성수동, 자양동, 구의동 일대에 한강변으로 펼쳐진 지역과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지역을 일컫는 다. 2000년대에 들어서 옛 뚝섬 경마장(뚝섬 체육공원)에 서 울숲이 조성되었다. 서울숲은 숲을 테마로 한 공원으로 장 대하고 울창한 숲과 넓은 잔디밭, 숲속 호수와 한강, 중랑천 이 어우러지는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속의 숲이다. 넓은 우 한강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살곶이 다리 하천과 문화 Vol. 12 30 31 No.1 겨울

에는마포대교가, 양화진에는영화대교가들어섰다. 광나루에들어선것이광진교이고송파진에는잠실대교가지어졌다. 성수대교는옛뚝섬나루에, 두모포에는동호대교가, 한강진에는한남대교, 서빙고나루에는반포대교, 동작나루에는동작대교가만들어졌다. 예전황포돛배와나룻배가다니던그길위로지금은다리가놓였을뿐, 서울에서한강을건너는흐름은조선시대나지금이나정확하게일치한다. 한강의남과북을이어주는지금저많은한강다리는땅위건물위건길이란것이얼마나질기고강하게사람들을이어주는지, 모양만바뀔뿐그역사는얼마나오래된것일수있는지보여주는우리의동맥이라고할수있다. 그리고저다리들을통해한강은서울에서가장중요하고문화적이며공공적인역사공간으로존재해왔다. 한강이란공간과그위로이어지는물길로한국인들은살아왔고지금도살고있고, 앞으로도살아갈것이다. 한강의여러다리들중전설이깃든유서깊은돌다리가있는데바로 ' 살곶이다리 ' 다. 살곶이다리는태종이만들기시작해 1475 년 ( 성종 6년 ) 에야완성된다리다. 옛날에는이다리를건너송파나루로갔다고한다. 송파나루에서강원도와충청북도로가는뱃길이이어졌으니강원도, 충청북도그리고멀리경상도까지한양을왕래할때쓰이던요긴한다리였다. 물의저항을덜받으려마름모꼴로다듬어둔예쁜돌기둥이무려 84개나되고길이가 76 미터가넘고너비도 6미터나된다. 백성도건널수있는돌다리로서는우리나라최초라고하니그래서더정이가고값지다. 이다리를만들때태종이몸소지휘했다. 한낱다리공사에왕씩이나나섰나, 그까닭은이다리의이름이살곶이다리로불리게된이야기와섞인다. 왕자의난내환에속이상할대로상한태조이성계가함흥에은거하던중, 아들태종이부왕을달래기위해보낸사자들을모두죽여버리고함흥차사라는말만만들었다. 그가공양왕을내쫓고왕위를찬탈했을때이에격분한유생들이개성두문동에들어가서나오지않아두문불출이라는말을지었던적이있으니그의두번째창작고사인셈이다. 자꾸 죽여버리니찾아오는사람이뜸해져심심했는지결국한양으로들어온다. 아버지를맞으러나온태종이있던곳이지금의살곶이다리자리다. 이성계는분노를가득담아화살하나를날렸지만맞추지못하고땅에떨어졌다. 화살이떨어져꽂힌곳이라해서 살꽂이벌 이라불렀다. 태종은그곳에지금의돌다리하나를만들어아버지의화살을기념했다. 군사적인목적에서친인간적인다리가된한강잠수교도빼놓을수없다. 한강을자주오가는자전거족에게가장인기있는한강다리는단연반포대교밑잠수교가아닐까싶다. 보행자를위해편안하고넓은인도가있는광진교도있지만, 손쉽게접근할수있는잠수교는여타한강다리들의추종을불허한다. 한강을건너는다리는서른개가넘을정도로많지만, 대부분차량위주의교량으로자전거나도보로건너는데불편함이많다. 그런점에서잠수교는차보다사람을대우하는다리로군계일학의존재다. 이런좋은다리가 1976 년처음지어질땐군사적인목적으로생겨났단다. 한강다리들가운데는전쟁상황을감안한군사전략적입장에서설계된경우가많았다. 한강의경관을해친다는평군사적인목적에서시민들에게친근한다리가된잠수교잠수교북단강변에있는 서빙고북부철도건널목

가를받던다리들은대부분이런경우인데, 폭격으로피해를입었을때가장빨리효과적으로복구할수있는구조를선택한결과다. 잠수교에도군사적목적도감춰져있다. 용산미군부대와남산- 강남권을연결하는잠수교는반포대교덕에항공촬영을해도드러나지않고, 폭격을피할수있다. 반포대교를우리나라최초의복층교량으로만들어준잠 수교는말그대로비가많이내리면 ' 잠수 ( 潛水 )' 하도록다른한강다리들보다훨씬낮게설계되어있다. 한강수위가 6.5m 를넘어서면잠수교는잠기게되기때문에한강수위가 5.5m 를넘어서면보행자통행이차단되고, 6.2m 를넘어서면차량도통제된다. 그래서 ' 잠수교가잠겨통제되었다 ' 라는뉴스가나오면시민들은서울에큰비가왔다는것을알수있다. 이를테면잠수교가서울의 ' 호우경보 ' 역할을하는것이다. 마치시골에서물이불어나면없어지는징검다리가연상되어정감이가는다리다. 잠수교가강물이불어나면잠기는잠수교로지어진데에는몇가지이유가작용했다. 그가운데홍수를방지하려했다는점이눈길을끈다. 높이를낮게함으로써한강의유속을낮춰홍수를대비하는역할을하도록한것이다. 잠수교는한강을걸어서혹은자전거를타고산책하듯오갈수있는유일한다리다. 한강이시민의사랑을받으며더강다워지고, 강남북의소통이원활해지려면이런친인간적인다리들이앞으로많이생겨나야하겠다. 한강야경의정점을찍는무지개분수도좋지만, 잠수교북단언덕위에서면어디선가에서 " 땡땡땡 ~" 향수를부르는소리가들려온다. 아련하고비현실적으로느껴지는그소리를따라잠수교위반포대교를향해언덕길을조금오르면정말도심속향수어린풍경이나타난다. 낡은철로위로빨간테두리를한길고둔중한차단봉이서있는 ' 서빙고북부건널목 ' 이다. 직원두분이근무하는유인철도건널목으로서울에몇개안남은귀한건널목이다. 서빙고북부건널목은한강가자전거도로옆에자리하고있어자전거족에게더욱특별하게다가오는곳이다. 한겨울적요하던강변풍경은한강철교를달려가는철마 일제가한강에최초로놓은다리한강철교 1950년한국전쟁당시많은희생을치루며파괴되었던한강철교와인도교의거친숨소리로활기를띈다. 한강에놓인첫다리인제1 한강교인한강다리와한강철교에다다랐다. 사실, 한강에최초로놓인다리는한강대교가아닌그옆철교인한강철교다. 하지만안타깝게도이철교의탄생은결코시민들의편의를위한목적이아니었다. 강화도조약으로개항된인천과서울을한시라도빨리연결시키려했던제국주의열강들의조선침탈목적이앞섰기때문이다. 노선은당시인천을통해들어와한강과만났던포구인노량나루를통과하는곳으로정해졌던것이다. 그후 20여년가까이지난 1917 년에이르러서야비로소사람이건널수있는다리가놓였다. 드디어배를이용하지않고걸어서한강을건너는시대가시작된것이다. 바로오늘날한강대교의전신이다. 한강철교를만들고남은자재를이용해만든터라규모는그리크지않았는데, 설상가상그악명높은 1925 년을축년대홍수때일부분이유실되었다가다시확장보수해지금의모습을갖추게됐다. 한국전쟁때에는북한의남하를막고자작전상한강철교와함께예고도없이너무일찍폭파시키는바람에당시다리를건너던수백명의피난민이그자리에서폭사하는비극 하천과문화 Vol. 12 32 33 No.1 겨울

이벌어지기도했다. 이로인해서울인구 80% 와 2개사단의군병력도강을건너지못한채고립되는쓰라린역사도남겼다. 이렇듯많은역사속사연을품고있어서인가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 제250 호 ) 가되었다. 이들어설것이라고한다. 그옛날사람들로북적이던노들섬의영화가또다른모습으로재현될수있을지궁금해진다. 한강대교위에자리한작은쉼터인노들카페에들렀다. 노들이란 ' 백로가놀던징검다리 ' 라고뜻이다. 이를한자어로쓴것이 ' 노량 ' 이된다. 가까운한강변에노량진역, 노량수산시장이있다. 근현대사의아픔을품고있는한강대교와노들섬 이토록애환많은한강대교는일제강점기때부터야간조명을밝히며대표적인나들이명소로인기가높았다고한다. 그러나동시에자살명소로도악명이높았다니아이러니할뿐이다. 당시에는일촌대기 ( 一寸待己 ) 라하여 ' 잠깐만참으시고 ' 라는팻말을세워놓았다고하는데, 오늘날엔 ' 생명의전화 ' 까지설치돼있는것을보면그오명이이어지는듯해씁쓸할따름이다. 한강대교는노들섬이라는작은섬을품고있다. 정다운이름과달리노들섬은시멘트로각지게마무리한옹벽요새다. 6,70 대까지하얀백사장이펼쳐진아름다운모래섬이었다고하는데상상이안간다. 물이적던갈수기에는섬남쪽으로만강물이흐르고북단용산강변까지는하얗게모래밭이이어졌는데, 조선시대에는그규모가여의도보다컸다고전해온다. 그위로거대하게펼쳐진갈대숲절경은노을이질때면장관을이뤘고, 섬에는물맛이빼어난우물까지있어이를궁궐에바치기도했다하니상전벽해의무상함이이렇지않을까싶다. 내아버지가술회한기억에도한강의백사장은 1960 년대, 70년대초반까지만해도물놀이를즐기는사람들로끊이지않았다고한다. 이후한강종합개발로일정한수량이흐르는한강이조성되면서이제는시멘트인공수변을가진조그마한섬이되고말았다. 앞으로노들섬에는새로운문화시설 우리나라에서제일큰수산시장, 노량진수산시장서울의광진과송파진,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은한강의 5 대나루로손꼽혔다. 그가운데노량진은상류의한강진, 하류의양화진과더불어한양도성으로통하는가장중요한길목이어서이곳에는진 ( 鎭 ) 이설치되어군대가주둔하였다. 고려이전부터나루가있었지만, 조선시대에한양으로도읍을정한뒤로경제와군사등의측면에서한층중요시되었다. 용산과노량진간의왕래와전라도지방에서올라오는각종어물과개성 인천등지에서쏟아져들어오는인삼을비롯한여러지방산물들의집결장소였다. 노량진은수양버들이울창해서 ' 노들나루 ' 라고도불렸고, 노량진앞에떠있는한강의하중도 ( 河中島 ) 이름도노들섬이다. 노량진역은노량진수산시장과맞닿아있어사시사철바다의짠내가진동한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매일해산물이 450~500t, 서울전체거래량의 50% 가거래되고있으니오죽할까. 서울에서전철을타고이곳을지날때면언제나바다내음혹은생선비린내가한아름달려든다. 요즘같은겨울엔희미하지만그래도서울한복판에서이런냄새를맡을수있다니기분좋은일이다. 도심속항구 노량진 을지날때이야기다. 노량진동의명물노량진수산시장 ( 鷺梁津水産市場 ) 은노

량진역이품고있는수산물전문도매시장이다. 경매장과도소매판매장, 2층의여러식당가로이루어진우리나라에서가장큰수산시장이다. 상인과경매인등종사인원만 3,400 여명이다. 선거철이면정치인들이 TV뉴스에나와민생행보를한다며꼭들르는단골장소이기도하다. 역사의사연을품고떠있는한강의섬 빨간색아치가예쁜서강대교를품은밤섬은지금도부활중이다. 지금이야밤섬, 노들섬, 선유도가한강의섬이지만, 여의도를비롯뚝섬, 잠실 ( 잠실도 ), 난지도는한강의대표적자연섬혹은하중도였다. 하중도는강이오랜시간흐르면서모래등의퇴적물이쌓이면서자연스레생긴섬이다. ' 택리지 ' 의저자이중환은 300년전강원도를여행하고나 서 " 홍수가나서산이무너지면토사가한강으로흘러들어한강의깊이가점점얕아진다 " 라고기록했다. 한강을따라흘러들어온모래와흙은자연제방과삼각주섬을형성했다. 한강변지명에섬도 ( 島 ) 와나루진 ( 津 ) 자가많이들어있는이유다. 현재한강에서보이는밤섬, 노들섬, 선유도를하중도의전부로생각하면오산이다. 불과 60년전만해도한강에는뚝섬, 잠실도, 여의도, 난지도같은큰섬을비롯해석도, 부리도, 저자도, 선유도같은크고작은 10 여개의섬들이그림처럼떠있었다고한다. 도서관간행물실에서우연히서울시가편찬한 < 한강의어제와오늘 (2001)> 이라는책자를보고정말이지 ' 깜놀 ' 한적이있다. ' 아, 내가아는한강이이렇게나아름다운강이었단말이야?!' 연이은성형수술로기괴하게변해버린어느아주머니의청초했던과거얼굴사진을보는기분이었다. 특히한강서강대교를품고있는밤섬은지날적마다눈길을끄는존재다. 밤섬은한자어율도 ( 栗島 ) 로표기되는섬으로섬의모양새가마치밤알을까놓은것처럼생겼다해서붙여진이름이다. 밤섬은모래밭인여의도와달리단단한암반으로된섬이었다. 1968 년한강의기적으로부르는 ' 여의도 ' 를개발하기위한골재, 모래, 흙등을조달하기위해밤섬은폭파, 해체를당하게된다. 1950년대주민들이살던밤섬의모습그전까지고기잡이와조선, 뽕나무 약초 ( 감초 ) 재배나염소방목등을하며살던 60여세대의주민들은결국마포구창전동으로이주하게되었고, 고향섬이그리워 2년에한번씩서울시에허가를받고밤섬에와서제사를지낸다. 당시만해도밤섬은한강의해금강이라고불릴정도로백사장과기암괴석의절경이아름다운섬이었고, 한강에물이적을때는여의도와백사장으로연결돼걸어서건널수있을정도였다고하니상상만해도설레는풍경이다. 40여년전, 그렇게여의도가생겨났고밤섬은사라지고말았다. 자연이란정말놀랍고신비로운것이, 파괴되었던이섬이해가갈수록원래의섬모습을되찾아가고있다는사실이다. 매년자전거를타고서강대교를지나갈때마다밤섬엔두터워지는모래톱과강변의갯벌이새살이돋아나듯생겨난다. 진짜한강의기적은이밤섬의부활이아닐까싶다. 양화대교아래선유도공원이있는선유도는 신선이노니는섬 이란이름처럼경치가빼어나기로유명한한강최고의명승지였다. 선유도는처음엔섬이아니었다. 원래는선유봉 ( 仙遊峰 ) 이라고불렸던곳이다. 말그대로신선들이노닐었다는선유봉은맞은편잠두봉 ( 지금의절두산 ) 과함께중국사 하천과문화 Vol. 12 34 35 No.1 겨울

픈역사를살펴볼수있고, 체험관에서는순교자를고문하거나처형할때사용한각종형구와형틀을볼수있다. 이후한강의강폭이넓어져섬이되었고, 1978 년그자리에정수장이건립됐다가지난 2000 년에폐쇄됐다. 골재채취장과정수장으로쓰이는바람에시민들에게서철저하게떨어져있었던선유도는섬은 80년만에시민공원으로돌아왔 경치빼어난선유봉이있었던선유도는지금도한강최고의명승지 한강의노을이가장멋지게펼쳐지는난지도노을공원 다. 사람들은비로소한강에선유도란섬이있다는것을알게됐다. 난초와영지가많아난지도 ( 蘭芝島 ) 라불렸던한강의섬은한때쓰레기매립지로버림을받았다가지금은가을억새풀이장관인하늘공원, 노을공원으로변모해시민들의사랑을받고있다. 근대기에는각광받는신혼여행지였고전국땅콩생산량의 30% 를차지하는땅콩산지이기도했다. 그러나 1978 년부터쓰레기매립지가되면서쓰레기섬으로불리다가 1992 년복원운동을통해생태공원으로거듭났다. 선유도공원과난지도공원은서울시민들이생각하는것이상으로중요한곳이다. 한강이근대화, 현대화과정에서얼마나처참하게난도질당했는지보여주는사례이자, 그런상처를딛고다시살아나는신호가된곳이기때문이다. 잠두봉에서구한말무시무시한이름으로바뀐 절두산 신도즐겨찾았다는절경이었다. 선유봉은일제강점기때여의도비행장을만든다는명목으로채석작업이이뤄져그높이가점점낮아지게됐다. 해방이후에도채석작업이진행됐 고결국, 그원형을잃게됐다. 잠두봉은뽕나무가많아붙여진이름인데절두산으로이름이바뀐데에는참혹한사연이있다. 1866 년병인박해때수많은천주교도가순교한곳이기때문이다. 절두산이란이름은머리가베어진곳이란데서유래했다. 인근에는당시천주교도의머리를벴던망나니들이칼에묻은피를씻던우물이있었다. ' 합정동 ' 이란이름이연유한곳으로우물은강변도로가건설되며사라졌다. 절두산순교성지에있는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서는순교자의흔적과천주교도의아 겸재정선이매일올라와한강풍경을그렸다는 소악루 한강남단의강서구엔겸재선생이 65~70 세 (1740~1745) 까지양천현의현령으로있으면서한강의풍경을많이그렸던누각 ' 소악루 ' 가있다. 누각이있는궁산은높이 75.8m로나지막한언덕같은산이지만서울에서한강을가장잘볼수있는곳이다. 궁산 ( 宮山 ) 이라는이름이독특하다싶었는데산자락에공자의위패를모신양천향교가있어서이곳을궁 ( 집宮 ) 으로여기어붙인이름이라고한다. 궁산은성산, 관산,

진산등으로도불리었다. 쓰임새에따라다양하게붙여진이 름으로보아작고낮은산이지만, 매우중요한위치에있는 곳임을짐작할수있었다. " 조선에가서양천현을보지못했다면조선을 다녀왔다고말하지말라." 옛중국사신들은조선시대양천현의아름다움을두고이 넓어진한강하구강변길에서연날리기를하는시민들 렇게말했다고한다. 아마도그들은궁산의누각소악루에올랐던것같다. 소악루 ( 小岳樓 ) 는중국동정호의악양루경치에버금간다고해서붙여진이름이다. 겸재정선이한강을바라보며그린 ' 안현석봉 '( 안현은현재의안산 ), ' 목멱조돈 '( 목멱은현재의남산 ) 그림이누각안안내판에담겨져있 어눈앞에펼쳐진한강과주변모습을옛풍경과비교해감상하기좋다. 겸재정선은양천향교에선정비가남아있을정도로목민관역할도충실히했지만현령시절가장큰업적은한강일대의아름다운풍광을후대에전한것이다. 경교명승첩 ( 京郊名勝帖 ), 양천팔경첩 ( 陽川八景帖 ) 등이그것이다.궁산과한강사이에널찍한강변도로가지나가고있어옛모습을짐작하기가쉽지않지만, 선생의그림처럼강건너삼각산 ( 북한산 ), 안산, 인왕산, 남산까지잘보인다. 더불어한강하류의물줄기가파노라마로한눈에들어오는게풍경이참좋다. 난지도공원을지나이어지는강변길에서만난행주산성 ( 경기도고양시덕양구행주내동, 사적제56 호 ) 은임진왜란때권율장군의행주대첩으로널리알려진곳으로흙을이용하여쌓은토축산성이다. 덕양산정상에축조된이산성은임진왜란당시의병과승명을포함한 2천3 백명으로왜군 3 만여명을크게물리친임진왜란 3대첩중하나인행주대첩이일어났던곳이다. 이싸움에서는우리나라의전쟁역사상 한강의자연성회복이곧관광자원이다. 한강은하류에서비로소그위용을드러낸다. 행주대교를지나김포대교에이르는구간에서한강은점차아득한강폭으로벌어진다. 드문드문갈매기들이날아다니고, 강의흐름은어느덧바다의흐름이느껴진다. 강변길의폭도함께넓어져하늘높이모형비행기, 연날리기를즐기는시민들이많다. 정권이바뀌면서한강은강물을다스리는치수에서물을이용하자는용수의대상이되고있다. 요즘엔한강을휴식과관광자원으로써활용하려는추세다. 사람이살던밤섬의마을이지금도남아관광지가됐더라면어땠을까생각해보았다. 자전거를타고한강을자주오가는시민의눈에, 강변의요란한편의시설 화려한위락시설보다는잃어버린한강의자연성회복이가장훌륭한관광자원이되는길이아닐까싶다. 한강을다시흐르는강으로, 자연성을회복한강으로만드는일은우리에게불가피한선택인지도모른다. 처음으로 ' 재주머니던지기 ' 라는전법이쓰였다. 아낙네들은긴치마를잘라짧게덧치마를만들어입고는치마폭에돌을주워담아싸움을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이름이바로여기서유래되었다고한다. 하천과문화 Vol. 12 36 37 No.1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