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여전히가깝고도먼나라이다. 역사수업현장에서많은학생들에게일본은나쁜나라이며극단적인경우복수의대상으로여겨지기도한다. 역사교사인나에게도일본역사를객관적인입장에서깊이있게접해볼기회가없었으며한국사교과서도한반도울타리안에서만서술되어고대한 일간의교류에대해서는깊이생각해보는기회가쉽게주어지지않았다. 일본인들은고대사콤플렉스때문에역사를왜곡하고한국인은근대사콤플렉스때문에일본문화를무시한다. 라는혹자의말처럼근대시기일본의침략전쟁은여전히우리에게큰상처로남아있으며우리사회에서일본문화를세심히살펴볼수있는기회는흔치않다. 혹자의말처럼역사학습은현장성이있어직접보고느끼는일은진한감동과함께큰학습효과를선물한다. 이런의미에서이번답사는나에게보석처럼귀한시간이었다. 이번답사가일본사에다가설수있는좋은기회가되길기대하며답사지를시대순으로정리해보는것으로답사보고서를대신하고자한다. 1. 빛은한반도로부터, 요시노가리유적고조선과삼한사람들이집단적으로이주하여청동기문명과벼농사를전해주어일본야요이문화가시작된장소로한일역사교류가시작된역사적인장소이다. 답사지중가장인상적인장소가어디였는가? 라는질문에내머릿속에요시노가리가떠오른것은아마도이곳이교류가시작된첫유적이었기때문이었을것이다. 바다를건너이곳에첫발을내디딘사람들은어떤마음이었을까?... 요시노가리유적은기원전 3세기부터기원후 3세기까지의야요이시대 600 여년전기간의마을발전과정을확인할수있는소중한유적이다. 이중요시노가리역사유적은야요이시대후반기인 3세기무렵의시대상을재현해놓았는데마치그시대로돌아간듯한착각이들정도로세심히복원해놓았다. 수혈식거주구가 4동, 고상창고가 2동, 모노미야구라 ( 전망루 ) 가복원되었고, 분묘전시관에는일본최대분릉묘가처음발굴된그대로전시되어있다. 한국계의청동기와무문토기가나와한국의세형동검집단의일본진출과정을연구하는데도귀중한자료로여겨진다. 때마침산정상부에쌓인눈은신비한분위를한층고조시켰다. 2. 무령왕릉과유사한유물이다수출토된, 후나야마고분후쿠오카에서구마모토로가는길목에있는후나야마고분은앞은네모지고뒷부분은원형의형태인열쇠구멍모양의전방후원분이다. 전방후원분은일본을기원지로보는것이통설이었으나일본에는완성된형만있고시원형이없으며한반도에서영산강유역에서존재가확 - 1 -
인되기시작하면서한반도에서발생, 전파된것으로보는견해도있다. 전방후원분은고분군내에서도가장높은곳이나전망좋은곳에위치하고, 규모나부장품도특별하여주로그지역의수장층의무덤으로알려져있다. 머릿속으로상상만하던전방후원분을만난다는것만으로설레는답사지였다. 직접와보니눈으로확인하기엔큰규모때문인지앞이네모지고뒤는둥글다라는것이오히려와닿지않았다. 이곳에서는집모양의석관과함께무령왕에서출토된유물과유사한금동관, 금귀고리, 금동신발등이다수의유물이출토되어마치공주에있는듯한착각을불러일으키며신비로운분위기를고조시켰다. 3. 일본최초의사찰, 아스카데라... 백제에서불사리와함께혜총, 영근, 혜시등승려... 사공인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박사인장덕백매순, 와박사마나문노, 양귀문, 능귀문, 석마제미등과화공인백가를파견했다. 소가노우마코는선조의집을헐고처음으로법흥사를지었다. 이곳은아스카의진신원이라고한다. 때는 588년이다. 일본서기 아스카데라는 588년백제로부터부처의사리를헌납받은일본조정의실세소가노우마코가발원해 596년창건한일본최초의본격적인사찰이다. 창건을위해백제로부터많은기술자들을초청해불당과탑을축조했다. 본당의금동불석가여래상은일본내에현존하는가장오래된불상으로 아스카대불 이라불린다. 아스카데라는두차례낙뢰로화재가일어나본당이소실됐지만에도시대에재건됐다. 아스카대불도보수되어얼굴의일부, 왼쪽귀부분, 오른쪽가운데손가락 3개만이원래것이라고한다. 창건당시아스카데라는 3개의금당이탑을둘러싸고있는대사찰이었으나가마쿠라막부시대에대부분소실됐고, 현재본당은에도시대에재견된것이다. 오랜세월의풍파속에서많은것들이훼손되어당시의모습을온전히느낄수없었지만지금의작은규모의사찰이더욱정감있게다가왔다. 오랜세월의풍파와두차례의낙뢰에도불구하고원래의모습을간직하고있는 아스카대불 의섬세한세손가락이모습이더욱신비롭게다가왔다. 벚꽃이만개한아름다운아스카데라를상상해보는것으로짧은답사일정의아쉬움을달래본다. - 2 -
4. 일본국보 1호가있는곳, 고류지고류지는 603년건립된교토최고의사찰로호류지, 시텐노지와함께쇼토쿠태자가건립한일본 7대사찰중하나이다. 고류지에는일본이가장자랑하는국보 1호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있다. 일찍이독일철학자칼야스퍼스는이불상에대해 지구상의모든시간적속박을초월애도달할수있는인간존재의가장정결하고원만하며영원한모습의상징 이라고최고의찬사를바쳤다고한다. 그는 이불상만큼인간실존의영원한평화의이상을확실히구현한예술품은일찍이본적이없다 고경탄했다고한다. 많은인파로붐벼서일까?, 짧은관람시간때문일까? 너무어두운조명과고매한명성때문이었을까?, 아직은안목이부족한탓일까? 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집중하기가힘들었다. 야스퍼스처럼반가사유상의고매한아름다움에온전히매료될수없었다. 오히려세상모든사람들의근심을듣고해결할듯 11개의얼굴과수십개의팔에각종도구를들고있는십일면관음보살의현실적모습이오히려마음을파고들었다.... 고류지를만들었다고하는진하승은쇼토쿠태자의브레인이었다. 그의집안하타씨는도래씨족으로아스카의야마토노아야씨와함께일본고대역사와문화의주춧돌이되었다. 그의집안은일본전체에널리퍼져살고있었는데진하승의본거지는교토였고훗날그의후손들이태자를더해태진이라쓰고, 우즈마사라고불리고있듯이우즈마사지역 ( 광릉사일원 ) 을본거지로세력이뻗어있었다. 그가태자와어떻게인연을맺게되었는지는확실치않지만도래인으로서대대로계승해온군사나외교지식이쇼토쿠태자가참신한정치를펼칠수있는배경이되었다는것은의심의여지가없다. 소가노우마코가태자와라이벌관계일때태자는도래인의힘을비리리고자진하승을비롯한하타씨를등용했다. 진하승에대해서는태자의측근으로많은공적을쌓았다는사실외에는생몰년을비롯해별로알려진것이없지만태자가배불파와싸울때그가태자를도와승리를이끌어낸것은군정인으로서참여했다는사료의기록에서확인할수있다. 태자가불교를적극받아들일때진하승이미륵반가상을주존으로모신광륭사가바로그의씨사였다.... 이후진하승의이름은역사사료에서소식이끊긴다. 그러나태자가죽고난뒤에도그는교토에서조용히살며오래도록장수했던것으로보인다... - 3 -
5. 삼국고대문화의종합판, 호류지호류지는아스카문화의중심지이다. 일본이자랑하는세계최고의목조건축물이자, 중국과한반도의불교건축과예술이일본에건너가변화하는과정을보여주는 동아시아미술의보고 로도불린다. 특히고구려, 백제, 신라등삼국시대문화를종합했다고할수있을만큼일본이한반도의직접적인문화적영향권하에있었음을여러건축물과불상, 그림등이웅변하고있다. 사라져버린백제목조건축의실상을알기위해선호류지를봐야한다 고말할정도이다. 호류지는쇼토쿠태자와스이코천황이요메이천황의병이낫기를발원하여 607년완성했다고전해진다. 하지만원래부터그랬던것은아니다. 서원은쇼토쿠태자가세운사찰, 곧호류지를가리키며동원은쇼토큐태자를모신사찰, 즉조구오인으로나라시대에창건됐다. 헤이안시대에이르러두사찰은하나로합해졌다고전해진다. 이곳에는현재국보가 19점, 중요문화재가 36점이나있다. 호류지에는아스카, 나라시대의불상, 그림등다양한명품들이전시되어있지만가장큰감동을주는전시물은백제관음이다. 2m가넘는크기의 8등신이훌쩍넘는목조관음상은얼금에머금은온화한자색으로인해삼국시대의기품있는예술전통을곧바로떠올리게한다. 머리에드리우고있는투조보관과양옆의수식에서부터두발을딛고있는연화대에이르기까지 7세기초백제장인의솜씨가확연하다. 부드러운얼굴과눈썹의선, 배를앞으로약간내민듯한유연한자세, 백제마애불상에서볼수있는살포시머금은 백제의미소 는이관음상에왜구다라 ( 백제 ) 라는명칭이붙었는지고개를끄덕이게한다. 봄과가을정해진시기에일년에두번공개하는구세관음은백제위덕왕의아버지성왕을추모해만들어왜의왕실에보냈다고한다. 당시쇼토쿠태자는성왕이환생한인물로통했다고한다. 성왕은일본에불교를전파한왕이다. 문화재관련역사수업을할때종종우리나라에목조건축물이남아있지않은이유를 나무는불에타기쉽다. 라는식의목재와관련지어설명하곤했었다. 이곳에서백제목조건축양식의원형을보여주며너무나도위풍당당한오중탑의모습을마주하며한편으론말문이막히고한편으로너무나도부러웠던시간이었다. - 4 -
6. 규슈를 호령했던 정청, 다자이후~...중국 구당서에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닷물이 핏빛이었다 라는 백촌강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663년 8월 텐지천황은 400여척의 배에 2 만 7000여명의 군사와 함께 백제 땅으로 건너왔다. 8월 27일과 28일 백촌강(동진강 하구)어 귀에서 나당연합군과의 대접전이 벌어지고 왜의 수군은 궤멸하였다. 이 후 3천여 명에 이르는 백제 지배층과 패전한 일본 수군은 일본으로 도피했고 신라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다만에 방어 요새(수성, 산성)와 다자이후 정청을 만들었다. 다자이후는 한 때 나라와 교토처럼 북쪽 중앙 의 정청을 중심으로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융성했었다. 부산에서 200km 떨어진 규슈의 하카다만은 일본 열도 중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지 명 중에는 태백산, 묘향산 고조산, 구지봉 등 우리 이름과 똑 같은 지명이 많은 점도 흥미롭 다. 한 때 규슈를 호령했던 다자이후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 시절을 증명하듯 초석만이 쓸쓸히 그 터를 지키고 있다. 7. 고구려의 흔적, 다카마쓰 고분~ 교과서 속 작품을 만나는 일은 늘 설렌다. 고분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흔한 시골길 풍경으 로 마음까지 편안하게 했다. 다카마쓰 고분은 직경이 약 18m, 높이 5m로 주변 무덤에 비해 크기는 크지 않다. 회석을 다듬어 석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곽을 안치한 뒤 가옥형 천정석으로 덮고 봉토를 씌운 원형의 횡혈식 석곽봉토분이다. 보존을 위해 고분의 내부는 개방하지 않고 고분 옆에 전시관에서 무 덤의 모형을 만날 수 있었다. - 5 -
벽화가 그려진 석곽의 크기는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비좁았다. 벽화는 벽면에 회칠을 하고 채색한 것으로 사신도(남쪽의 주작은 보이지 않는다), 일상과 월상, 그리고 동서 양쪽 벽에 4명씩 그려진 여인군상 등이다. 특히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를 속 빼닮은 아스카 의 미인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여인군상을 이 곳, 일본에서 마주하니 기분이 참 묘하다. 8.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도다이지 일본 화엄종의 총본산인 도다이지는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이다. 또한 그 안에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튼 청동대불(비로자나불)이 있다. 8세기 들어 일본 열도는 율령체제가 성립되고 천황제가 확립됐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부에 서 유력한 호족들 간의 투쟁이 격화되어 반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집단 이주로 중앙지배는 뜻대로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 흉작이 거듭되고 질병이 창궐했다. 위기에 처한 신흥국가 일본은 국가적으로 민심을 수습해야 했고 왕실의 존엄성도 높여야했다. 이 같 은 필요를 인식한 쇼무 천황의 발원으로 745년 카스가산에 도다이지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쇼 무천황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와 이데올로기의 통일을 위해 전국에 사찰을 지었고 도다이지는 천황가의 우지테라로서 전국에 흩어져있는 국분사의 총본산으로 건설되었다. 도다이지와 대불 의 완성은 신흥 일본국의 탄행을 대내외에 알리는 의미 깊은 사업이다. 도다이지 창건의 대역사를 추진하고 완성하는 데는 한반도에게 건너간 사람들의 힘이 절대 적이었다. 도다이지와 대불주조의 발원, 설계와 제작을 지휘한 영변 스님은 오우미지방에 정 착한 백제계 씨족의 후손으로 이 곳에서도 백제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불전 뒤편 강당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일본 황실의 유물을 모은 쇼소인이 있다. 756년 쇼무 천황이 죽자 왕비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숟가락을 비롯해 칼, 거울, 무기, 목 칠공예품, 악기, 애장품을 49재에 맞춰 헌납한 것에서 시작된 쇼소인은 한국, 중국, 인도의 고 대유물을 포함해 소장품만 9000여 점에 달한다. 이 번에도 역시 쇼쇼인을 보는 것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 6 -
9. 시모네세키, 조선통신사의숙소, 아카마신궁 & 청일강화기념관조선통신사가본토에첫발을내디딘, 시모노세키에는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 통신사의숙소로사용된아카마신궁, 청일강화기념관이있다. 조선전기에시모노세키는조선전기조선상인이거주했다는기록이있는데조선과시모노세키의교역이활발했음을보여준다. 1718년통신사신유한은시모노세키를 바닷길의요새로백성들은소금을팔아먹고살며아침, 저녁으로조수가있다. 서해도의목줄기에해당되므로해군수만명을배치하여외곽을정찰하고방어를하면천연의기지가된다 라고기록했다. 1905년경부철도가부설되자부산과시모노세키사이에는부관연락선이정기적으로운행되고일제강점기강제징용은대부분이길을따라이뤄졌다고한다. 통신사의숙소로사용된일본식용궁양식인 아카마신궁 은붉은빛건물과본궁아래연못이특징이다. 조선통신사들의필수관문이었던 아카마신궁 은안토쿠일왕을모신곳이다. 안토쿠왕은평안시대에서막부시대로넘어가던소용돌이속에 8살의나이로생을마감한비극적인물이다. 사명대사가아카마신궁에들러안토쿠천황을조문하는시를지은것을계로로이후의통신사들은그운자를따서여러편의시를남겼다. 현재아카마신궁에서소장하고있는통신사의시는석양을바라보며어린나이에세상을떠난일왕을추모하는내용을담고있는임수간의시한점뿐이다. 이시는올해유네스코세계문화에등재되었다고한다. 아카마신궁바로옆에는청일전쟁직후시모노세키조약을체결한장소인청일강화기념관이있다. 기념관안에는리홍장등청국대표단과이토히로부미등일본대표단의모습을재현해당시의모습을소개하고있다. 3차회의를마친리홍장은숙소로돌아가는길에일본청년에게저격당해회의가일시중단되기도했다. 리홍장의회복으로 4월 10일회의는재개되었고사건이후리홍장은큰길을피학고산길을왕복했다고한다. 이길은후에 리홍장 길이라고불리게되었다. 외로운고아와늙은이가어려운때를만나나라의운명은바다섬사이에서위태로웠네남은한은깊고깊어바다보다더하고... < 안덕사에서앞서온사신의시를차운함, 임수간 > - 7 -
10. 조선침략의전진기지, 히젠나고야성나고야성터는도요토미히데요시에의한임진왜란, 정유재란의조선침략기지이며, 한반도와일본간의오랜교류를단전시켰던불행한역사의현장이다. 전국시대일본을통일한도요토미히데요시는바깥세상으로눈을돌렸다. 조선에사자를보내복속할것과명나라침공에대한협력을요청했으나조선을거절했다. 그후에도대마도의소요시시게등이수차례협상을거듭하지만조선은완강했다. 협상이결렬됐다는소식을들은히데요시는히젠의나고야를전진기기로하기위해성을축조할것을규슈의다이묘에게명령했다. 가토기요마사, 데라자와히로타가가나고야성의건축을관장했다. 면적은 17만m의거대한규모로오사카성다음으로큰규모였다. 조선침략기간중히젠나고야는일본의정치, 경제의중심이되었다. 고니시유키나가가이끄는제 1진이조선을침략한것을시작으로임진왜란동안최종적으로 20만이상의병사가이곳나고야에서조선으로건너갔다. 정유재란때도나고야성은보급, 연락의중계지로중요한역할을했다. 나고야성터에인접한나고야성박물관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을 침략전쟁 이라고규정하고 일본열도와한반도와의교류사 를테마로고대부터현대까지수천년에걸친할일교류와관련된약220점의자료를상설전시하고있다. 전시품중당연나의눈길을끈것은수월관음도였다. 11. 도요토미권력의상징, 오사카성도요토미는가난한하급무사의아들로태어나주군인오다노부나가가천하통일을눈앞에두고죽자권력을쥐게되었다. 어릴적자신의환경에대한콤플렉스때문인지도요토미는최고권력자가되자극도의사치를부리기시작했다. 절과신사를위시하여가는곳마다화려한건축물을세웠다. 외양만화려한것이아니라건축물내부도멋진그림과조작으로채웠다. 그로인해일본미술사에서는이시기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 라고구분하여부른다. 도요토미가지은오사카성도마찬가지다. 도요토미는오사카성에천수각을지으면서아즈치성의그것을능가하고싶어서 5층누각전체를금과은으로도배하다시피했다. 심지어는화장실조차온통순금으로장식했던것으로전해진다. 그러나조선침략의늪에빠진도요토미가죽은뒤도쿠가와이에야스의막판대공세로오사카성을폐허로변하고말았다. 이에야스에게패한도요토미의아들이헤요리는이성에서자결로최후를장식한다. - 8 -
12. 일본 성의 아름다움, 니조성 교토 시내 중심에 위치한 니조성은 성 전역이 국가 사적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 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유적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에도 막부를 연 초대 쇼군 도쿠 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왕이 있는 교토를 방문할 때 머물 숙소를 짓기로 하고, 1603년 니조성 을 완성했다.(지금의 니노마루 부분이다. 이후 3대 쇼군인 이에미츠가 현재의 규모를 성을 확 장한다. 이에야스 시대으 건축양식과 이에미츠 시대의 그림, 조작 등이 총집합되어 있어 모모 야마 시대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의 마루바닥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 해 발을 디딜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장치되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이 에미츠는 천황의 방문에 대비해 당대 최고의 미술 유파인 가노파 화가의 그림으로 접견실르 꾸몄는 데 1867년 마지막 쇼군이 메이지 천황앞에 무릎을 끊고 통치권을 넘겨준 곳도 바로 이 곳이다. 13. 도조 이삼평을 모신, 도잔신사~ 임진왜란의 또 다른 이름은 도자기 전쟁이다. 이삼평은 공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중 나베시 마군에 붙잡혀 일본으로 건너가 도자기의 신이 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이삼평은 자기생산에 적합한 백자석을 찾아 나베시마 영지의 여러곳을 전전 했고 아리타 서쪽지역에 요를 만들고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산에서 양질의 백자석을 발견해 덴 쿠다니 가마에서 일본 최초의 백자를 산업으로 창업해 아리타 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 도 이 곳에서 도자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14대 이삼평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도잔 신사 주변 상가는 온통 아기자기한 도자기 세상으로 답사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했 다 - 9 -
아는만큼보인다, 자세히보아야예쁘다 라는말들은역사답사에서진가를발휘한다. 이번답사를소중한기회로삼기위해일본사개론서, 나위문화유산답사기 ( 일본편 ) 을읽고사전오리엔테이션, 현장강의도놓치지않으려고노력했다. 대규모인원과짧은답사시간으로아쉬움도있었지만때로는선진문물의전달자로, 또다른삶의터전으로, 아픈전쟁의모습으로고대부터근대까지일본과의교류의모습을보며일본이가까운나라라는것을실감할수있었다. 또한우리의문화를받아들였지만이것을바탕으로자신만의문화를일구어낸일본인의독자적인모습도확인할수있었다. 이번답사를마치며한일교류사를일방적시각이아니라쌍방적시각에서보아야한다는점, 우리역사를우리만의입장이아니라교류사의입장에서보아야한다는점을새삼깨달았다. 삼국시대는사실상오국시대라는말도실감할수있었다. 무엇보다도이웃나라일본과의수천년의교류의흔적을직접보고, 체험하며근대사의아픈역사적상처를치유할수있는방안이무엇일까를깊이생각해보는계기가되었다. 마지막으로화해와공감을바탕으로한평화로운동아시아의미래를기원하며어느책에서보았던짧은글귀를되새겨본다.... 아랍인과유대인의경우처럼한국인과일본인은같은피를나누었으면서도오랜시간서로에대한적의를키워왔다... 한국인과일본인은수긍하기힘들겠지만그들은성장기를함께보낸쌍둥이형제와도같다. 동아시아의정치적미래는양국이고대에쌓았던유대를성공적으로재발견할수있는가에달려있다해도과언이아니다. 총, 균, 쇠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