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전의아바나는 카리브해의몬테카를로 였다. 유태인출신갱스터마이어랜스키는미국의지하세계보스들이오래전부터꿈꾸어오던카지노왕국을아바나에다건설했다. 금주법이래갱스터들은늘사법당국과 FBI 로부터쫓겨다녔다. 그들은안전한투자처를아바나에서발견했고, 믿음직한보호자를발견했다. 매년바티스타에게 3~5 백만달러를지불하고카지노독점권과안전을보호받기로합의했던것이다. 아바나맙 (Havana Mob) 의보스들은곧거액의자금을아바나에투입했고, 거대한호텔군이말레콘해안가에들어서기시작했다. 곧 1950 년대붐이시작되었다. 카지노와트로피카나댄스홀이함께하는환상적인밤이미국인관광객들의마음을사로잡았다. 아바나는어느덧환락가가되었다. 인기가수프랭크시나트라도자주아바나에서보스들과어울려술을마셨고, 번돈을여기에투자했다. 1957 년존 F. 케네디상원의원도보스인산토스트라피칸테에게서섹스파티를접대받았다고 < 아바나녹턴 (Havana Nocturne)> 의저자 T. J. 잉글리쉬는밝히고있다. 오케스트라가연주하는맘보와차차차는환락의도시아바나의밤공기처럼자연스러운음악이었고, 곧미국을거쳐전세계로퍼지게되었다. 1959 년게릴라세력이권력을장악했다.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내려온털보게릴라들은시내에진주하자마자카지노와환락가의기자재를꺼내불태웠다. 마이어랜스키-바티스타동맹이만들어낸밤의세계는이제돌아올수없는과거사가되었다. 이와더불어밤의세계에기생하던음악인들의운명도순식간에바뀌었다. 관광객은썰물빠지듯빠져나갔고, 일자리도사라졌다. 맘보와차차차가흘러넘치던밤은옛말이되고, 대형오케스트라도해체되었다. 몇몇음악인들은일자리를찾아미국으로갔다. 하지만
대부분의음악인들은남았고, 새로운사회건설에동참했다. 트로바가수카를로스푸에블라 (Carlos Puebla) 1 가대표적이다. 1. 체에게헌정한노래 " 언제까지사령관께 "(Hasta Siempre Comandante) 는그의대표작이다. 코스타가브라스감독은이를칠레의쿠데타를그린영화 < 계엄령 > 에서사운드트랙으로이용한다. 그는혁명전헤밍웨이가단골이었던술집 보데기타데메디오 의전속가수였고, 같은이름의음반을내기도했다. 혁명은트로바음악에게손을내밀었다. 트로바음악은서민적정서에뿌리를두었고, 상업적이지않았다. 상업적이지않았기에미국적이지도않았고시장에휘둘리지도않았다. 악기도기타하나면족했다. 기타는멜로디, 화성, 리듬을갖춘자족적인악기이다. 피아노와달리늘손에들고다닐수도있다. 게다가식민시대이래트로바음악에는반정부독립투쟁의전통까지갖추고있었다. 저항가요의정신도스며들어있었던것이다. 그러하니혁명정부와트로바음악의밀월은자연스러웠다. 맘보, 차차차, 볼레로같은춤곡도혁명정부의탄압을받지는않았다. 하지만미국이지배하는회사와시장에영향을받았기에자연스레퇴조해갔다. 늘그렇듯이새로운사회를건설하는과정은새로운정치체 (body politic) 를창설하는과정이다. 그과정에자연스레국민들을동원하고재교육하는훈육이국가적과업으로등장하면서새로운음악도필요했다. 트로바음악을갱신하려는음악인들의움직임은 1967 년에가시화되기시작했다. 문예진흥원에해당하는카사데라스아메리카스 (Casa de las Americas) 가주관하는저항가요페스티발이열렸고, 걸출한청년가수인파블로밀라네스 (Pablo Milanes) 도참여했다. 혁명기의쿠바였지만, 외부세계와소통은여전히이뤄지고있었다.
곧유럽 68 혁명의열기가카리브에도몰려왔다. 젊은음악인들은밥딜런, 비틀즈, 존바에즈, 피티시거와같은영미권가수들을잘알고있었다. 베트남전쟁은젊은세대로하여금 새로운존재의방식 을모색하는계기를마련해주었고, 전세계젊은이들의화두가되었다. 같은스페인어권인남미의누에바칸시온 (Nueva Cancion: 새로운노래 ) 운동그룹과도금방친해졌다. 아르헨티나의아타우알파유팡키와메르세데스소사, 칠레의비올레타파라와빅토르하라, 브라질의쉬쿠부아르키와카에타누벨로주의음악도쉽게흡수할수있었다. 곧이들은기타만을고집하지않고다양한악기편성의필요성을느끼게된다. 음악의주제역시민족주의나체제옹호적인것을넘어서반전, 라틴아메리카의단합, 인권옹호로확장된다. 1969 년쿠바의예술영화원은누에바트로바음악인들을한군데로모았다. 클래시컬기타연주자인레오부로우웨르 (Leo Brouwer: 현재국립관현악단지휘자 ) 를책임자로 실험사운드그룹 (Grupo de Experimentacion Sonora) 을결성한것이다. 색소폰, 기타, 베이스, 피아노연주자에더하여싱어-기타리스트로파블로밀라네스, 노엘니콜라 (Noel Nicola), 사라곤살레스 (Sara Gonzalez), 실비오로드리게스 (Silvio Rodriguez) 를충원했다. 이가운데파블로밀라네스와실비오로드리게스는탁월한가창력과작곡으로이미 1970 년대말에세계적인명성을얻게된다. 로드리게스의첫음반두개는스페인에서베스트셀러가되었고, 밀라네스의노래 욜란다 (Yolanda) 는금방스페인어권의사랑가로자리를잡았다. 누에바트로바음악은조국애와동지애도노래하지만일상의즐거움, 사랑도빠트리지않는다. 체제옹호적인음악이기도하지만, 그렇게노골적이지않다. 때때로체제비판적으로비칠만한가사도등장한다. 그뿌리가서민적이고, 저항적요소를가지고있기때문에때로관료제와의불편한관계를표현하기도한다. 밀라네스의말처럼누에바트로바의본질은 삶에대한절대적인믿음 이기때문이다. 그도문화부장관을비판해서구설수에오른적도있지만, 젊은세대가수들은더욱파격적으로발언하고노래한다. 실비오와파블로의음악을접한지벌써 20 여년이지났다. 멕시코를다니면서공짜로파블로의공연을볼기회가한두번있었지만늘일정이맞지않아서놓쳤다. 실비오의공연은 2004 년 7 월에아바나의혁명광장에서볼수있었다. 하지만나의기호는늘파블로밀라네스에서멈췄다. 무엇보다카리브해의바닷물과같은투명하고경쾌한목소리에접하면스트레스는저만치도망가버린다. 그의음악을차안에크게틀어놓고달리면마치아바나의말레콘해변이나, 마이애미비치에와있는느낌을갖는다. 카리브의해의사랑이야기도그리심각하지않아서
좋다. 그댈좋아하니사랑해 (Te quiero porque te quiero), 만년의사랑을담은 세월 (Los anos), 욜란다 (Yolanda) 는중남미어느곳에서나쉽게들을수있는노래들이다. 욜란다 는처음듣는순간부터사랑하게되었다. 카리브의열정이넘쳐나는사랑가이다. 1943 년생이니 2010 년현재 68 세의나이다. 하지만아직도전세계를돌아다니며라이브공연을즐긴다. 2009 년에도스페인과남미를돌아다니며라이브공연을했다. 작년 9 월에쿠바-미국의해빙무드가무르익었을때미국은재빨리파블로밀라네스와세나이다로메우 (Zenaida Romeu) 의입국비자를내주어연주회를허락했다. 2003 년이래끊어졌던음악교류가다시시작된것이다. 실제로 국경없는평화 콘서트가실제로성사되었는지는확인하지못했지만, 그는미국내팬을많이가지고있는쿠바음악인이라는점은증명이되었다. 오랜투병생활을한덕분인지목소리는전성기처럼윤기가흐르진않지만, 여전히아름답다. 실비오로드리게스는뛰어난작곡으로, 아름다운가사로대중의사랑을받지만가창력이나목소리로는파블로가한수위다. 그는바야모에서태어났다. 바야모의여인 (La bayamesa) 란노래는오늘날쿠바의국가로불리고있는데, 여기서걸출한독립투사와애국자들이많이태어났다고한다. 그도카스트로체제에충실한
가수인지라, 그때그때적절한곡을써서정치적으로개입한다. 그래서카스트로와도친하며, 실비오와더불어국회의원이되기도했다. 한때민간문화재단인 파블로스밀라네스재단 을설립하기도했지만, 문화부의방해로뜻을접고말았다. 그의친체제적인노래가운데많은곡은쿠바인됨에대한자긍심을담은노래들이다. 이섬을사랑해 (Amo esta isla), ' 나는남았네 '(Yo me quedo) 가그런곡에해당한다. 나는남았네 는혁명이후마리엘보트사건에이르기까지수없이떠나간쿠바인들에대한감회를담았다. 그에따르면쿠바도부족함이많은미완의사회이다 ( 나는완전한사회에살고있지않네 No vivo en una sociedad perfecta). 남녀국민이함께고쳐야만하는사회이다. 그런사회지만그는 자그만것들과함께남는다. 무엇보다카리브해의바다와대지, 냄새와수수함을버릴수없기때문이다. 밀라네스의걸작가운데하나는 1975 년도에만든 < 파블로밀라네스, 니콜라스기옌을노래하다 > 라는음반이다. 니콜라스기옌은쿠바가나은걸출한대시인으로아프로-쿠바의정체성을시에다담았다. 많은음악인들이그의시를가지고작곡을했고, 노래로만들었다. 그의시에서착상한모티브를가지고작곡한기악곡가운데하나인멕시코작곡가실베스트레레부엘타스의걸작 센세마야 (Sensemaya) 는요즘도자주연주된다. 밀라네스도흑인이기에틀림없이젊은시절에피부색으로인한차별을느꼈을것이다. 피델카스트로는혁명직후 1959 년에 쿠바인됨은백인이상이고, 흑인이상이다. 쿠바인은특정인종에속하지않는사람 이라고선언했다. 곧흑인에게도좋은직장이주어졌고, 금지되었던해변출입도허용되었다. 하지만
피부색문제는쉽게해결되지않았다. 기옌의시를노래하는것은참으로조심스러웠다. 기옌은혁명이후작가예술가동맹의의장이되었고, 국회의원에다정치국원을역임하기도했지만, 피부색문제를공식의제로제기하는것은금기시되었다. 오늘날도자주불리는 조용하게 (De que callada manera) 는그렇게어렵게탄생했다. 이노래는흑백불평등사회에서주인과노예, 보스와피고용자의예속관계를잘표현한다. 괄호안에는노래하는화자의속마음이잘표현되어있다. 쿠바에서는이를초테오 (choteo) 라표현하는데, 일종의심리적방어기제를담은장치라고보면된다. 1975 년, 어렵게인종문제를제기한노래이기도하지만, 관광천국이된현쿠바정국에는큰반향을일으킬수있다. 관광과개방으로인해다시백인의힘이강화되고, 흑인들이열위에서는사회로급속하게재편되고있기때문이다. 관광부문은달러경제권이라백인들이독식한다. 흑인들은기껏해야택시기사나호텔청소부, 아니면음악인역할밖에할수없다. 지난 20 년남짓의개혁과개방은빈부격차를벌려놓았고, 흑백차별을크게벌려놓았다. 부에나비스타소시알클럽의리더싱어였던이브라임페레르 (Ibrahim Ferrer) 도라이쿠더의오디션을받기전에는입에풀칠하기위해서구두닦이를했다고한다. 흑인들에겐재능이있다고한들일자리를찾기가쉽지않다. 기옌과파블로밀라네스의시와노래는현단계쿠바사회의단면을비판하는텍스트로거듭읽힐수도있을것이다. 하지만이러한심오한뜻과는상관없이여성들이좋아하는노래인것같다. 밀라네스가노래를하면주로여자들이따라부른다. 그대웃으며나에게들어오네 (se me adentra usted sonriendo) 란가사는별로내키지않는, 성적억압관계를은유하는노래말이기도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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