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울진의반핵운동 해방이후우리나라는통일국가의달성과더불어사회민주화라는과제도동시에안고있었다. 물론이두과제는서로분리되어있었던것은아니었다. 사회의민주화를달성하는것이곧통일로나아가는길이었고, 또한통일은사회의민주화없이는불가능한것이었다. 그리고이런과정이바로이땅에살고있는민중들의삶의질을향상시켜나가는것이기도하였다. 울진에서일어난반핵운동도결국삶의질을향상시키기위한민중층의요구에서제기된것이었다. 반핵운동은원전건설이일방적으로계획되고건설된이후환경문제와관련된생계문제로시작되어, 핵발전소증설문제, 새로운원전부지지정문제, 핵폐기물처리장선정문제등을그원인으로하였다. 이문제들은운동과정에서거의동시다발적으로제기되었지만, 대체로큰쟁점을중심으로네시기로나누어정리할수있다. 1) 제 1 절생존권보장및핵폐기물처리장반대운동 (1988. 11~1991. 5) 1.? 원자력인근주민생존권보장공동대책위원회? 의활동울진군에서주민들의조직적인반핵운동이나타나기시작한시기는 1989년초였다. 1986 년소련의체르노빌원전의참사이후원전의안전성문제가전세계적으로제기되자, 우리나라에서도원자력발전소가건설된지역주민들의관심이고조되었다. 울진에서는 1988년 9월부터상업운전을시작한울진 1호기가 50일만에발전기고장으로가동이중단되고, 2) 또 11월에는중수노출사고가발생하자주민들의불안감은더해갔다. 그리하여 1989년 1월에원자력발전소의인근지역인북면에서원자력발전소로인한피해대책과보상을요구하는? 원자력인근주민생존권보장공동대책위원회?( 이하? 생존권대책위? 로줄임 ) 가결성되었다. 3) 1988년 11월에북면부구 1리지역의청년 20여명은원자력발전소문제를비롯한지역의여러현안들을해결하기위해주민조직을결성하기로뜻을모았다. 원자력발전소가가동되면서많은위험과불안요소가발생하여직? 간접적으로주민들의생계에위협을주고있어원자력발전소에인접해있는주민들의권리를보장받고, 각종사고로부터주민의생존권을보호하기위한협의체를구성하기로한것이었다. 이후몇차례의회의를거쳐 1월 24 일 14개리, 동공동협의회로? 생존권대책위? 를결성하고, 대표위원 4명, 간사 1명, 실무위원 10명, 위원 75명 ( 각리 2~3명 ) 등을두었다.? 생존권대책위? 는원자력발전소의건설과가동에관련하여북면주민들의민원을해결하는데일차적인운동의목표를두었다. 결성당시북면주민들이문제로느끼고있었던것은핵발전소로부터의안정성확보대책과핵발전소로인한경제적피해대책등이었다. 곧원전인근주민의이주대책문제, 방사능비상방제훈련의인근주민대책문제, 인근부락및근접거리방사능계측기설치보관문제, 한전하구수인접으로인한수원오염에따른상수도이전문제, 대수호및취수정설치로인한인접부락의식수및농업용수의부족문제, 발전소제방설치로인한인접부락의침수및해일현상에대책문제, 핵발전의안정성에대한불안감등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3월에들면서핵폐기물처분장의건설문제가현안으로떠올랐다. 1989년 1월한국에너지연구소의연구결과를토대로핵폐기물처분장후보지역가운데기성면과북
면지역이각각 3순위와 5순위로선정되었기때문이었다. 4) 이에따라 3월 9일? 생존권대책 위? 는 7 개항의내용이담긴결의문을채택하였다. 1 핵폐기물영구처분장설치를적극반대한다. 2 방사능누출시주민비상방어계획을수립하라. 3 임시핵폐기물처분장시설공개및폐기물증감사항을진실대로공개하라. 4 주민의생존과직결되는모든사항을신속히해결하라. 5 허위홍보와왜곡보도를즉각중단하라. 6 주민의건강진단을주기적으로실시하라. 7 방사능계측기설치를보완하라. 이와함께? 생존권대책위? 는앞으로추진해야할활동사업도정하였다. 즉 1 실업난해소를위한주민우선채용, 2 인근지역간이상수도시설확장, 3 부구 1리제방축조, 4 농업용수해결, 5 해안침식및매몰현상으로인한피해보상, 6 방파제주변해안해산물의채취, 7 인근지역경보기설치등이었다.? 생존권대책위? 가제기한상수도문제는원전이건설된후부구천의수질이오염되고, 건설용수의공급을위해만들어진대수호와임시취수정으로식수부족현상이심화되고있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제방축조는원전건설로해일현상의유발및흡수로인한부락침수현상이급증하고있었고, 농업용수도역시임시취수장및대수호건설로부구천용수가고갈되어농업용수부족현상이나타나고있었다. 해안선침식및매몰현상으로인한피해보상요구는원전건설및방조제건설로인해해류의방향이역류하여인근해안부락의해안선침식과원전을건설할때버린각종토사로인해해안선이매몰되어어획량이많이감소하여어업권의피해가예상되고있었기때문이었다. 또한방파제주변해안의해산물채취요구는영세어민들의생계보장을위한것이었다. 이러한주민들의대책마련요구에대해한전측이소극적인입장을보이자,? 생존권대책위? 에서는주민들의서명을받아한전측에향후보다적극적인직접행동에나설것을경고하는서한을보내기도하였다. 이후그들의요구는한전측과협상을통해상수도문제, 부구천제방공사, 환경감시체계의운영등은부분적으로해결을보기도하였으나, 농로개설등의요구는받아들여지지않았다. 이처럼원자력발전소의가동이후원자력발전소의고장이빈번하게일어나자, 주민들의불안감과불만은더욱높아지게되었다. 따라서북면주민들은 1989년 5월 11일에동력자원부, 과학기술처및한전에 11개요구사항을담은청원서를제출하였다. 1 원자력발전소건설로인한주민들의당면문제해결 ( 식수및농업용수고갈및상수원오염 ) 2 원자력발전소사고시대피계획수립 3 원자력발전소인근지역에설치한방사능감지기증설및작동사항의공개 4 지역주민학계, 언론계, 각사회단체로구성된감시단의구성 5 원자력발전소에관한정보및제반사항의공개
6 원자력발전소에관심이있는학계및언론계, 정계, 각사회단체가참여하는대토론회개최 7 후속기유치시주민여론수렴 8 울진원자력발전소내핵폐기물보관장건설의즉각중지 9 핵폐기물처분장의울진군내설치반대 10 방사능검진전문의료기관설립및주민정기검진 11 위의요구가관철될때까지원자력발전소의가동을중지하여줄것 이러한청원서의내용은당시까지아직원자력발전소로인한피해가뚜렷하게부각되지않았으므로원자력발전소의안전성문제에초점이맞추어진것이었다. 이처럼? 생존권대책위? 의 1989년상반기까지의주된활동은원자력발전소의가동으로인해피해를받고있는사항들과발전소의잦은고장으로주민안전에불안감을주고있던사항들에대한피해보상또는대책마련을요구한것이었다. 또한당시현안으로부각되고있던핵폐기물처분장의유치를반대한다는입장을분명히하였다. 하지만울진핵발전소 3?4 호기의건설에대해서는아직본격적인반대운동이전개되지않았다. 다만후속기건설은주민과협의하여줄것을요구하였다. 당시로서는주민들에게핵발전소라는문제가아직절실하게와닿지않았고, 주민들의입장에서는이를이용하여삶의현장과직접관련되는현안들을해결하려는의도가더강하였다. 따라서요구도청원서나진정서등제도화된방법을주로동원하였다. 1) 울진반핵운동에대해서는이득연, 1992, 주민환경운동의전개과정과의미구성 : 반핵발전운동을중심으로, 연세대학교대학원사회학과박사학위논문 ; 양종희? 박재묵, 1995, 울진및청하지역반핵운동과핵시설관련태도형성의요인 사회과학연구 11, 가톨릭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 이시재, 1996, 반핵운동과지역사회구조의변동에관한연구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논문집 3 등을참조하였다. 2) 조선일보 1988년 11월 5일. 3)? 생존권대책위? 를비롯한이때의운동에대해서는이득연, 1992, 앞의글 를주로참조하였다. 4) 1989년 1월현재한국에너지연구소가조사한핵폐기물처분장의순위는경북영덕군남정면우곡동, 경북영일군송라면지경리, 경북울진군기성면사동리, 강원삼척군원덕읍용화리, 경북울진군북면검성리, 전남강진군관산읍삼산리, 전남영광군백수읍구수리의순이었다.
2. 핵폐기물처분장설치및후속기원전건설반대면민궐기대회울진주민들의직접적인행동을불러일으킨것은 1989년 8월울진에추가로 3?4호기를건설한다는정부의발표였다. 1) 그리고핵폐기물처분장의 1, 2순위로선정되었던영덕군에서핵폐기물처분장건설반대운동이격렬하게진행되자드디어? 생존권대책위? 는울진군내의핵폐기물처분장건설을반대하기위한대중집회와시위를주도하였다. 8월 26일주민약 500여명이참가한가운데? 생존권대책위? 의주최로부구초등학교에서? 핵폐기물처분장설치및후속기원전건설반대면민궐기대회? 가열렸다. 이날주민들은 핵폐기장설치마라, 죽은조상치를떤다, 주민생존위협하는핵발전소결사반대, 원전만도억울한데핵폐기장웬말인가 등의구호를외쳤다. 대회를마친뒤주민들은원자력발전소정문까지평화적인가두행진을벌였다. 이날대회에서제기된쟁점은추가원전건설의반대와핵폐기물처분장의건설반대, 그리고방사능방재훈련에의주민참여등이었다. 이날대회는울진군에서일어난최초의대중집회였다. 원자력발전소에대한주민들의불안감이높아가는가운데방사능피폭의혹사건이계속일어났다. 면민대회직전 1989년 6월에는영광원전근무자의부인이뇌가없는태아를유산하였고, 1989년 10월에는울진원자력발전소의근무자가백혈병으로사망한방사능피폭의혹사건이발생하였던것이다. 물론한전은당사자가방사선관리구역내에서근무한적이없고피폭량또한전무하므로사인은방사능과전혀관계가없다고밝혔지만, 주민들의불안은더욱고조되었다. 한편울진지역어민 200여명은 1990년 6월 5일원전의냉각수방출과방파제의보안등설치로마을앞어장을망쳐어획고가줄고있다며피해조사및 10 억원의피해보상을요구하였다. 이에대해울진원자력발전소측은해양연구소등의전문기관에현지조사를의뢰하였다. 조사결과어류는보안등과관계없이야간에해안으로이동하는습성이있다며, 보안등의영향이라면인접해안에도유사한현상이일어날것이나그렇지않고, 다만어장의위치에문제가있는것이므로피해보상을할수없다는입장을밝혔다. 2) 그러나방사능피해의혹사건은계속일어났다. 1989년 10월에북면에서생식기가없는기형송아지가태어난데이어, 1990년 5월다른두집에서양앞다리가작은기형송아지와입을다물지못하는기형송아지가태어나각각생후 11일과 20여일만에죽었던것이다. 이를계기로? 생존권대책위? 에서는원전주변에있는축산농가의기형송아지의발생에대한역학조사를의뢰하는진정서를한전에제출하였다. 이에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조사반을파견하여현장조사를한결과원전에서방출된방사성물질의영향은아니라고밝혔다. 물론주민들은이를신뢰하지않았다. 3) 또한 1990년 7월 6일울진원자력발전소의용역업체에서근무하던직원이간암으로사망하였는데, 그는 1989년 12월부터한전보수노동자들의작업복세탁을맡은뒤 1990년 6월원자력병원에서간암진단을받고사망한것으로방사능피폭이그원인이아닌가하는의혹을갖게하였다그러나 1990년 7월 19일원자력위원회는제225차회의에서한전이제출한울진 3?4호기건설계획을의결하였다. 4) 이사실이알려지자? 생존권대책위? 는 1989년 10월에있었던신규원전건설사업토론회에서원전의추가건설계획이있을때에는주민들의의견을최대한반영하기로한약속을무시하고일방적으로울진 3?4호기의건설계획이확정된것에대해울진원자력발전소측의입장과향후주민의견수렴을위한약속을이행해줄것을요구하였
다. 울진원자력발전소측은신규원전의건설추진계획은사업이확정시행될때까지는상당기간이소요될것이며, 본부지공사시행전에지역협력사업을포함한건설전반에걸쳐주민여론수렴을위한제반노력이필요하다고밝혔다. 하지만주민들의원전과추가건설로인해그불안감은증대되어갔다. 1) 서울신문 1989 년 8 월 12 일. 2) 한겨레신문 1990 년 6 월 6 일. 동력자원부? 한국전력공사, 1991, 원자력발전백서, 215 쪽. 주민들은 1986 년원전이들어서면서원자로를냉각한뒤초당 120 억톤씩냉각수를흘러보내는물때문에바다수 온이평균 18~20 도로정상수온보다섭씨 3 도가량높아마을앞 32 ha에이르는정치망의어장어장의 어획고가 5 년째줄어들고있다고밝혔다. 3) 이득연, 앞의글, 270~271 쪽. 4) 한겨레신문 1990 년 7 월 20 일.
3.? 울진반핵운동청년협의회? 및여타단체의활동? 생존권대책위? 가결성된같은해인 1989년 2월에울진읍에서반핵을표방한? 울진반핵운동청년협의회?( 이하? 반핵청년협의회? 로줄임 ) 가조직되었다. 이조직은지역의재야운동세력이라고할수있는한겨레신문후원회를중심으로전국교직원협의회의회원, 가톨릭농민회, 청년회등이참여하였다.? 반핵청년협의회? 는 핵과반생명적인제구조일체를추방하여건강한삶의틀을만드는것 을조직목적으로내걸었으며, 활동내용으로는 1 원자력발전소의추방을위한주민운동등의전개, 2 지역에서발생되는반 ( 反 ) 생명? 반 ( 反 ) 민중적구조에대한조사및철폐작업, 3 반핵유관단체와의연대, 4 민중? 민주단체와의연대등을내세웠다.? 반핵청년협의회? 의활동은주로주민들에게핵의위험성을알리는홍보활동에치중하였다. 대표적인활동으로는사동리주민들을대상으로실시한반핵홍보였다. 1986년부터사동에서대규모항만공사가진행되자, 주민들은이공사가핵폐기물처분장으로오는폐기물을수송하기위한것이아닌가하는의구심을갖고있었다. 이에? 반핵청년협의회? 는주민들에게반핵비디오를상영하면서핵의위험성을알리고, 또핵폐기물처분장의입지가결정되기전에는울진지역도가능성이있으므로사동항의건설을막아야한다고홍보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수산청에사동항의공사가핵폐기물처분장을위한사전정지작업을하고있는것이아닌지에대한내용을질의하기도하였다.? 반핵청년협의회? 는주민홍보작업과아울러핵폐기장설치반대면민대회에도참여하면서반핵과관련된다른지역이나조직과의연대활동도전개하였다. 당시영덕에서는울진과마찬가지로남정면이핵폐기물처분장건설후보지로선정되자, 이를반대하는운동이활발히전개되고있었는데,? 반핵청년협의회? 는영덕에서열린집회에도참가하였다. 또한전국적인수준에서반핵운동을펼치기위해조직되었던? 전국원자력발전소추방운동본부? 에참여하였다. 울진지역의반핵운동은초기에북면부구리의일부주민들과의식있는청년들이운동을전개하였지만, 주민들사이에원자력발전소에대한불안감이높아지면서이에대응하는새로운조직도결성되었다.? 생존권대책위? 와? 반핵청년협의회? 와는달리울진읍차원의운동조직으로지역사회단체에서상대적으로거부감이없던애향단체인향지회의주도하에지역의 26개사회단체가참여한? 환경보존회? 가 10월에결성되었다.? 환경보존회? 는원자력발전소의반대를전면적으로표방하지는않았지만, 발기인대회에서 가동중인울진원자력발전소 1?2호기의안전성에대한우려와핵폐기물처분장의건설기도에대한대처로서단체를조직한다 는결성취지를밝혔다. 그러나대체로이조직에참여한단체들이순수민간사회단체가아니라관변단체가많았던조직상의한계등으로특별한활동을하지는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