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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國史館論叢 第52輯 高句麗 末期의 海洋活動과 동아지중해의 질서재편 高隋戰爭을 중심으로 윤 명 철* Ⅰ. 서 론 Ⅱ.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전쟁의 성격 Ⅲ. 고구려의 외교전략과 해양활동의 상관성 Ⅳ. 군사적 특성과 해양활동의 영향 Ⅴ. 결 론 Ⅰ. 서 론 본고는 7세기 한반도를 중심으로 야기되는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작업을 고구려를 축 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고구 려와 수 당의 전쟁, 백제, 고구려의 멸망으로 귀결되는 신라의 三國統一이다. 이에 관한 연구성과는 비교적 활발하여 많은 업적이 있다.1) 본고는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기본 토 * 東國大學校 講師. 1) 본고의 주제와 직접 관련있는 논문은 다음과 같다. 申采浩 著, 李萬烈 註釋, 朝鮮上古史 (丹齋 申采浩先生 紀念事業會, 1992). 李昊榮, 新羅 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 ( 사학지 15, 단국대, 1981)., 麗濟連和說의 檢討 ( 경희사학 9 10 합, 1982)., 新羅 三國統合過程硏究 序說 ( 사학지 22, 1989). 申瀅植,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 ( 한국사논총 2, 성신여대, 1977)., 三國統一의 歷史的 意義 ( 新羅史, 이화여대출판부, 1985)., 三國統一前後의 對外關係 ( 新羅 三國統一의 再檢討 제 5회 新羅文化 學術會議, 東國 大 新羅文化硏究所, 1985). 李鍾學, 高句麗 對隋戰史의 意義 ( 하늘 4, 공사, 1967). 邊太燮, 三國의 定立과 新羅統一의 民族史的 意味 ( 韓國史市民講座 5, 일조각, 1989)., 三國統一의 民族史的 意味 ( 新羅 三國統一의 再檢討, 1985). 金相鉉, 三國統一의 精神的 基盤 ( 新羅 三國統一의 再檢討, 1985). 盧重國, 高句麗 對外關係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 東方學志 49, 연대 국학연구원, 1985). 李萬烈, 高句麗와 隋 唐과의 전쟁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8). 林炳泰, 新羅의 三國統一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8). 손영종, 고구려의 영토확장 과정에 대하여 ( 조선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 67 - 대로 하면서 이 전쟁의 발생 배경과 과정,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은 방법론의 차용과 시각을 통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반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동아의 제국들이 직접 간 접적으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領土의 獲得과 爭奪을 둘러싼 國家間의 戰爭보다는 國 際秩序의 全面的인 改編을 시도하는 新 舊秩序의 대결로 인한 東아시아의 國際大戰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對外關係史의 경우는 사건의 전개에 國際的 契機가 작용하는데, 특히 재편의 轉換期에는 秩序의 對決이 결국 국제관계의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국제 역학관계의 본질과 전쟁을 분석하는 하나의 틀로서 동아지중해2) 라,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文定昌, 韓國古代史 上(柏文堂, 1971). 서인한, 高句麗 對隋 唐戰爭史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91). 堀敏一, 隋代東アジアの國際關係 ( 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 澤古書院, 1979). 鬼頭淸明, 日本 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 (交倉書房, 1976)., 七世紀後半の國際政治史試論 ( 論文集 7, 朝鮮史硏究會, 1970). 布目潮渢, 隋唐帝國の成立 ( 世界歷史 5, 岩波講座, 1978). 西嶋定生, 日本歷史の國際環境 (東京大出版社, 1985). 井上秀雄, 變動期の東アジアと日本 遺隋使から日本國の成立 (日本書籍, 1983). 2) 東아시아란 개념은 일본학계를 시발로 하여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으나 그 범 위, 개념, 역할 등에 대해서 통설은 없다. 全海宗은 東亞古代文化의 中心과 周邊에 대한 試論 p.3에서 東亞의 地理的 範疇를 기본적으로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고, 중국은 주로 중국북부, 일본열도는 本州와 四國, 九州와 그 부속의 島嶼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雲南이나 兩廣지방을 周邊으로 보고 있다. 高柄翊은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대, 1970)에서 東亞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개념정 의는 밝히고 있진 않으나 西歐에 대응하는 동양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井上 秀雄은 變動期の東アジアと日本 (1983)에서 고대의 동아시아는 中國王朝의 정치권력이 미치는 지역 혹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지역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특히 p.12에 서는 지도를 그려서 東아시아의 범주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분류는 아시아의 동쪽을 동북 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西嶋定生, 日本歷史の國際環境 (1985) pp.2 3에서 대륙의 역사 특히 중국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를 동아시아 역사로 보고 있다. 宮崎市定, 秦漢帝國 ( 中國の歷史 2, 講談社, 1974) pp.3 4에서 秦漢帝國의 출현은 동아시아 세계의 출현단서를 열어 놓았다고 하고 西아시아, 中央아시아 등과 구별하고 있다. 佐伯有淸, 古代の東アジアと日本 (敎育社, 1977)은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막연히 설정하고 한반 도 세력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대륙을 동아시아로 보고 있다. 武田幸男, 高句麗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989)는 명확한 개념설정이 없이 廣開土大王陵碑를 중 심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제 11회의 학술주제로 東北亞 古代文化의 源流와 展開 를 선택하 여 東北亞라는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다. 金元龍은 이 회의발표에서 동북아를 예니세이강에서 알타 이산맥이동, 만리장성에서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긴 선을 남계로 하는 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러 나 동북아라는 관점은 東南亞라는 상대적인 용어가 현대에 政治 軍事的인 觀點에서 이루어진 개념 이란 사실(永積 昭, 東南アジアの歷史, 現代新書 시리즈, 講談社, 1977)에서 그 성격에 대한 시 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평면적이고 미시적인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가지고서는 동아시아 지역은 물론 한반도의 국가들,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상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역사활동권의 설정과 유형화는 한 시대, 특정국가, 일정한 문화 패턴을 가지고 분류해서는 문제점을 초래한다.

- 68 - 國史館論叢 第52輯 는 개념을 차용하고자 한다. 동아시아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황해를 주축으로 남해 등을 매개로 하여 문화 정치 경제 외교적 측면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상호 영향을 주는 역사활동권을 형성했다. 7세기에 이르면 각국의 해양활동능력이 발달함에 따라서 그 역 할과 활동범위가 더욱 확산되었다. 변화된 동아시아에서의 고구려의 역할과 역사적 위 치, 그리고 역학관계의 조정기능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고구려가 차지한 지정학적 조건과 해양활동 및 이 지역의 해양질서에 대한 성격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 자연지리적인 측면 외에도 지정학적 측면, 지경학적 측면, 그리고 지문화적인 측면이 결합돼서 종 합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또한 동일한 역사활동권 속에서도 중심부와 주변부의 존재가 분명히 있으므로 국가별, 종족별, 문화별에 따라 구분하고, 동일한 역사체라 해도 시대와 역할에 따라 달 라져야 한다. 본고에서는 분석대상인 7세기 전후를 기준으로 하여 동아시아의 범주를 다음과 같이 설정한다. 지 리적으로 韓半島와 日本列島, 그리고 大陸의 南部地域, 더 정확하게는 현재 베트남과의 접경지역, 즉 옛 越南地域 위쪽의 中國南方地方과 黃河를 중심으로 한 華北地域, 그리고 북방유목종족들이 활동하면서 넘나들던 北方 邊境地域을 포함한다. 이 지역은 상호간에 정치적으로 직접 간접의 연 관성을가지고 있었으며,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동일한 범위안에 포함되고 있다. 그런데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동아시아지역을 역학관계의 비중에 따라서 다시 中心部와 周邊部로 분할할 경우에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국지역, 한반도와 그 북부의 일부지역, 그리고 일본열 도의 서부지역이 된다. 이들 지역들은 동아문화의 핵을 이루고 있을 뿐더러 정치 군사 역학관계에 서도 직접적으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이 이러한 상호관련성과 복잡한 역학관계를 연출하게 된 배경에는 해양을 매개 로 해서 역사활동을 해왔고, 해양을 통해서 각국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그 중간에 있으면서 그 조정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필자는 一國史적 연구가 가진 한계를 보완하고, 동 시에 東아시아라는 범주의 광범위성을 극복하며, 집약적인 성격을 명확히하기 위하여 동아시아라 는 개념을 잠정적으로 취하면서, 한반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해양에 地中海적인 성격을 적용하 여 이해하고자 한다. 지중해는 일반적으로 2 3개의 육지로 둘러싸여 海洋으로서는 獨立性을 缺如한 것을 말한다. 大陸 地中海와 多國間地中海로 구분하고 있다. 대륙지중해는(multicontinental-mediterrean-sea) 대륙과 대륙에 둘러싸인 지중해를 말한다. Afroeurusian-mediterrean-sea, Artic-mediterrean-sea, Ostralo -mediterrean-sea, America-mediterrean-sea, BlackSea-mediterrean-sea가 있다. 그 외에 多國間 地中海(multinational-mediterrean-sea)에는 발틱지중해, 스칸디나비아지중해, 걸프지중해, 남중국해 지중해가 있다. 지중해는 육지질서와 해양질서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沿岸이 여러나라로 갈라지며 해양에 대한 利害도 대립되기 쉬워서 海域支配權의 對立을 둘러싸고 列强의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많다. 지중 해 연안의 국가들은 海洋能力의 우열에 영향을 받으면서 勢力再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해역을 지배하게 되면 沿岸의 각 대륙에 대한 지배도 가능하기 때문에 그 결과 해양제국이 형성되기도 한다. 에게해나 유럽아프리카 지중해는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이스 페니키아 로마 카르타 고 사라센 스페인 등은 植民地의 結束과 海上通商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양능력을 확대하였다. 지중해는 해양문화의 성격을 구비하고 있는 만큼 이동성(mobility)이 강하고 國境이 없으므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질서구축의 軸이 된다. 또한 비조직적이고 비연속적인 교섭상의 특성으 로 인하여 정치 군사적인 것보다는 交易 문화 등 구체적인 利害關係를 중시하는 질서이다. 동아시아의 해양활동지역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제도들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 해 등을 포함하고 있어 지중해적 형태와 성격을 띠고 있다. 동아지중해는 동아시아라는 보다 廣範 圍한 범주속에서 중심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변부는 東亞地中海의 역사활동에 직접 간접으 로 영향을 주었던 지역을 말한다. 특히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갖고, 동아지중해의 중핵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역학관계의 조정역할을 해왔다.

- 69 - 다. 따라서 고구려가 속해 있는 역사지리적인 영역에 동아지중해의 개념과 성격을 부여 하고, 그것에 의거해 7세기의 대사건을 이해하고자 한다. 셋째, 각 전쟁들을 일관되게 連續性을 가진 사건으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즉 高句麗와 隋의 첫 충돌부터,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 백제의 멸망, 고구려의 멸망, 신라의 당군축출 까지를 각각 구분되고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발생 배경, 그리고 역사적 의미와 역학관계 의 본질이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진행과정이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전쟁들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삼국통일전쟁의 한 과정으로 파악하고, 국제적인 관점에서는 동아지중해전으로 이해하고 고 수전쟁은 이 대 사건의 발발로 파악하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목적과 방법론을 토대로 하여 1절에서는 고구려를 軸으로 한 東亞秩序 의 재편과정과 전쟁의 성격을, 2절에서는 각국의 외교활동을 분석하여 海洋活動과의 關 聯性과 비중을 추적하며, 3절에서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쟁참여 당사국들이 가진 해양 활동능력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追跡 記述하고, 그것이 戰勢와 秩序再編 및 고구려의 興亡에 구체적으로 끼친 영향을 軍事的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전쟁의 성격 東아시아의 정치질서는 6세기말이 되면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중국대륙에서는 5 胡 16國 시대를 거쳐 약 150년동안 지속되어 오던 南北朝 시대가 隋에 의해 통일되었다. 隋의 통일로 東아시아의 국제관계에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 갔다. 본 절은 隋의 통일 이 고구려의 역사발전에 구체적으로 끼친 영향을 알기 위하여 隋의 對內外的 政策과 고 구려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대응책 등 동아시아 전반의 질서변화와 고구려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隋의 대내정책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隋는 통일 이후 우선 內治에 힘을 쓰면서 국력을 신장시켜 나갔다. 南北朝를 政治的 軍事的으로 통일한 이후 文化的 經濟的 統一 을 지향하면서 주변국과의 力學關係를 조정하려는 일련의 정책들을 취했다.3) 그 가운데 서 사회경제의 발전을 위한 시책들은 본고의 목적과 관련되어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특 히 運河의 建設과 交易의 發展을 도모하는 정책은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 미를 가지고 있다. 운하건설의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4) 하나는 남북을 연결함으로써 交 3) 翦伯贊 編, 이진복 김진옥 譯, 中國全史 上(학민사, 1991) pp.367 374. 4) 이와 관계되는 자료는 아래의 책이 참고된다. 翦伯贊 編, 이진복 김진옥 譯, 위의 책 pp.371 372. 尹乃鉉, 中國史 (민음사, 1991) pp. 250 251.

- 70 - 國史館論叢 第52輯 通의 불편에서 발생하는 南方과 北方간의 지역적 편차를 극복하고 문물의 원활한 교환 을 통해서 하나의 經濟圈을 이루고자 하는 데 있다.5) 즉 국가내부의 경제를 건실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6) 다음은 產業의 진흥과 활발한 交易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당시의 교역은 南北 地方間의 교역 뿐만 아니라 국제간에도 추진되었다. 북부에선 北方 種族들과의 교역이 있으며7) 남방에선 南海貿易의 활성화 역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 고 있다. 수양제는 607년 610년에 常駿과 王君政 등을 赤土國(현 말레이 반도)에 파견 하였는데, 이 지점은 한대 이후 중국과 교류를 했고 동서교역의 중요한 곳이었다.8) 그런데 運河의 건설과 교역의 활성화는 상호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南海交易을 통해서 남방의 물자를 옛 南朝地域으로 수입한 다음, 그것을 다시 운하를 이용한 內陸交 通을 통해서 華北 등 북부지방과 내륙으로 운반을 하였다.9) 이때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의 통로로 해양을 동시에 사용했다.10) 이러한 해양교통의 이용은 결국 東南亞 등의 南海 貿易圈11)과 華北地方 내지 그 이북지역과의 交易圈을 하나로 형성하였다. 해양교통을 활용한 수의 남해교역은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隋는 교역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동아지중해 交易圈의 가치를 인식했고, 나아가 부활과 확장을 기도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爆帝의 대만정복이나 사신들의 남해방면 파견 등은 이러한 경제적 가치를 목적으로 한 행위였을 것이다.12) 수와 연접해 있는 나라들은 북방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가 있다. 이들 나 라들은 이미 남북조 시대부터 각국간에, 그리고 남북조와 각각 정치 외교적 교류와 함께 경제적 교류를 했었다. 이처럼 東亞地中海를 사이에 둔 하나의 경제적 교역권이 미비한 상태로나마 구축되었고, 그 질서가 있었다면 1차적으로 그 교역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布目潮渢, 앞의 논문 p.258. 5) 航運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8) pp.25 35에는 이 시기 운하경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6) 宮崎市定은 アジア史硏究 第四(東洋史硏究論叢刊 4-4) pp.9 14에서 中國經濟를 단계별로 나누 고 있는데 세번째로 運河經濟時代, 네번째로 海岸經濟時代를 설정하고, 그것의 경제적 성격과 영향 을 열거하여 중국에서 운하와 해양이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7) 周書 권 50, 異域下 突厥傅.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 企圖와 突厥 ( 韓滿交流史硏究, 동화출판공사, 1989). 盧泰敦, 5 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政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 ( 동방학지 44, 1984). 8) 李永采, 海洋開拓爭觀簡史 (海洋出版社, 1990) p.100에 의하면 이때 常駿 등은 廣州를 출발하여 월남을 거쳐서 갔다. 孫光折, 中國古代航海史 (海洋出版社, 1989) pp.255 256에 의하면 당시 隋는 이미 대만 등 남양 10개국과 해양교통관계를 완료했음을 알 수 있다. 9) 汶江, 古代中國與亞非地區的海上交通 (泗川省 社會科學院出版社, 1989) p.77. 10) 航運史話 (1978)제 1장 참조. 11) 羽田明, 古代帝國の成立 3부 2장(京大東洋史 1, 1981). 宮崎市定, 앞의 책 2, pp.469 487. 12) 春秋戰國時代, 秦, 漢, 三國時代 등에 南北貿易 그리고 南海質易이 시행된 예는 羽田明, 古代帝 國の成立 3부 2장과 宮崎市定, アジア史硏究 2(東洋史硏究論叢刊 4-2) pp.469 487까지는 古代 中國의 南洋關係史가 설명되어 있다.

- 71 - 자 할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즉 통일된 수는 정치적 측면과 함께 경제적 측면에서 東亞 地中海의 力學關係를 재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內部統一 作業은 자연히 海洋文 化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발달을 추진하였으며, 동아지중해의 經濟的 宗主權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수의 對高句麗戰爭이 발생한 하나의 원인과 그 전개 양상을 이해할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수의 통일은 東아시아 전체에 강한 충격을 가져와 그 周邊種族과 國家들에게 적 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그리하여 국제질서의 基本構圖가 붕괴되고 新秩序를 위한 再編 움직임들은 각국들의 외교정책으로 나타났다. 南北朝時代에 행해진 동아시아 외교의 기본형태는 高句麗 등 주변세력이 南北朝의 갈 등을 이용한 實利追求의 等距離 外交를 전개한 것이다. 즉 周邊國들을 대상으로 하여 以 夷制夷라는 전통적인 주변민족 분열정책을 펴던 중국이 오히려 등거리 외교의 대상자체 가 되었다. 이러한 등거리외교는 비단 高句麗만이 아니라 北方의 柔然 등 유목민족들도 활용을 하였다.13) 柔然은 북방에 있으면서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北魏를 괴롭혔다. 유연은 당시 중국 의 南北朝 분할상태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南朝의 국가들에 사신을 빈번하게 파견을 하 였는데 이는 남조의 국가들과 友好關係를 맺어 北魏를 위협하려는 외교정책의 소산이다. 심지어는 군사적인 작전까지 도모한다. 유연의 사신이 宋에 파견되는 것과 관련하여 유 연과 북위의 交戰이 있었고, 宋과 北魏의 交戰이 있어서 그 사신의 방문목적에 대한 일 정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14) 宋과 柔然은 각각 상대방에게 北魏를 협공하고자 하는 제 의를 하기도 한다.15) 한편 북방에서 일어난 吐谷渾의 성장은 이 北方의 力學關係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 다. 吐谷渾은 북위와 송에게서 책봉을 받았으나 북위에 상대적인 역학관계상 宋과 긴밀 한 관계를 유지한다.16) 그리고 南朝 및 柔然과 연결하여 北魏를 견제하고자 하였다.17) 柔然의 이러한 태도는 高句麗와도 利益이 일치되어 공동의 입장을 牽制하는 상태에도 이르게 된다. 北魏의 멸망으로 인한 東魏와 西魏의 분열, 다시 北齊와 北周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상 황은 北朝, 나아가서 南北朝와 東亞秩序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북주는 북제를 멸한 후에 고구려를 공격18)함으로써 양 지역간의 갈등이 재연되고 있 13) 盧泰敦의 앞의 논문(1984)에서는 北魏를 압박하기 위하여 高句麗와 柔然이 連和, 南朝의 국가들과 柔然이 連和한 것 등이 있다. 北魏와 柔然 吐谷渾 등 북방세력 및 南朝와의 상호역학 관계를 보 여주는 실례에 대해서는 盧泰敦, 위의 논문 pp.l9 35에 나와 있다. 朴漢濟 南北朝時代의 南北 關係 ( 韓國學論叢 4, 국민대, 1981) 등. 14) 盧泰敦, 위의 논문 P.24 참고. 15) 南齊書 권59, 열전40 芮芮傳. 16) 宋書 권96, 鮮卑吐谷渾傳. 17) 盧泰敦, 앞의 논문 p.31. 18) 三國史記 권45, 列傳5 溫達傳.

- 72 - 國史館論叢 第52輯 음을 예고하였다. 또한 북방에선 알타이 산록에서 발흥한 突厥은 柔然의 지배에서 벗어 나(552년) 强國으로 등장을 하면서 북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북주와 대결을 하는 등 대격 변을 예고하였다. 여기에 新羅의 성장과 해양활동에 따른 北朝와의 交涉始作,19) 또한 야 마도를 중심으로 한 倭國의 급속한 성장과 한반도내 국가들과의 활발한 교섭 등은 東亞 秩序 전체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동아시아는 이렇게 질서의 재편작업이 필연적으로 요구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처럼 남북조시대 후기의 국제정세는 중국의 北朝국가들, 柔然, 突厥, 高句麗, 契丹 등의 북방세력과 南朝, 百濟, 新羅, 倭 등의 남방세력이 多元的인 勢力均衡狀態를 이루고 있었다.20) 그러나 미묘한 均衡과 緊張關係가 감도는 東亞의 국제정세는 隋의 통일로 인 하여 均衡이 깨어지고, 역학관계의 기본구도가 붕괴되었다. 요컨대 南北朝를 대상으로 한 주변 민족의 對中等距離外交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젠 통일된 중국이 오히려 주변세력의 갈등을 利用助長하면서 외교상의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 은 그동안 명분으로 존속해 오던 중화질서의 개념을 탈피하여 실질적인 종주권확립을 실현코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21) 이러한 국제질서의 재편 속에서 동아지중해 沿岸의 질서에도 變動이 일어났다. 南北朝 의 분열은 황해로 하여금 南進해 내려가는 大陸的 秩序와 北進해 오는 海洋的 질서가 遭遇하는 場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중국대륙에서는 북조와 남조가 군사적 충돌을 하면 서 中華의 覇者임을 확인하면서 淮河를 기준으로 경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중국대륙에서의 구분은 黃海를 內海로 하고 있는 한반도의 각국과 왜국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百濟, 新羅, 倭 등의 周邊國은 고구려의 압력으로 黃海以北으로 올라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南朝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對南朝 偏重體制 속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 다.22) 한편 고구려는 北朝의 국가들과 형식상의 책봉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항상 긴장관계 를 유지하고 있었고, 突厥 靺鞨의 일부 契丹의 일부 등과 대결상태에 있었다.23) 그리고 百濟와 新羅 등의 세력이 北朝와 외교관계를 맺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국가들은 地政學的인 位置와 外交의 성격상 海洋秩序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역학관계의 질적 변 동을 가져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19) 위의 책 권4, 新羅本紀 眞興王 25년(564). 20) 慮泰敦은 앞의 논문 p.56에서, 북방세력중심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力學關係를 해석하고 있다. 그 러나 고구려는 地政學的인 위치로 인하여 北方勢力과 海洋勢力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21) 金浩東, 古代遊牧國家의 構造 ( 講座中國史 2, 지식산업사, 1989) pp.291 294. 22) 百濟는 宋義熙 12년, 腆支王代부터 南朝 국가들의 册封을 받아왔다. 倭는 宋代부터 5명의 왕이 中 國으로부터 册封을 받았다. 宋書 권97, 列傳 57 夷蠻 東夷 百濟. 南齊書 권58, 列傳 39 蠻東南夷傳 百濟. 23)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7 陽原王 7년조. 突厥이 新城과 白巖城을 공격, 突地稽의 粟末部는 고 구려에 적대적이었다. 隋書 권 84, 突厥傳.

- 73 - 한편 北朝의 여러국가들과 북방의 유목종족들 역시 南朝와 高句麗의 견제로 인하여 백제나 倭 등과 원활한 外交關係를 성립시킬 수가 없었다. 柔然, 吐谷渾, 契丹, 突厥, 靺 鞨 그리고 東北亞 覇者의 위치를 갖고 있었던 高句麗 등은 수시로 관계의 변화를 연출 하면서 北朝의 국가들과 대결을 하였다. 北朝는 또한 南朝의 국가들과 대결를 이어가면 서 명분과 실제적인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조가 남조 의 간섭을 피해 百濟, 新羅, 倭 등과 능동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는 없었다. 北朝의 국가들 중에서는 북위가 백제와 잠시 관계를 가진 외에는 北齊가 6세기 중반이 넘어서 야 新羅24) 百濟25)와 교섭을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과 방해가 상대적으로 강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외교질서 속에서 고구려는 1차적으로 광대한 영토의 확보와 강력한 군사력, 그 리고 해양활동능력을 바탕으로 하고, 2차적으로는 對中 등거리 외교와 軍事的 安定政策, 그리고 백제 신라에 대한 適當한 壓力을 바탕으로 하여 국제질서의 調整者 역할을 하였 다. 黃海를 全方位로 활동할 수 있는 地政學的 位置를 활용하면서 양 질서의 중간에서 實利를 취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6세기에 들어오면서 질서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러한 서부 북부전선에 서의 갈등관계는 2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南部戰線에서 전력의 현저한 약화가 초래 된 것이다. 百濟의 攻擊과 新羅의 北邊領土 奪取26) 등을 허용하여 질서재편의 씨앗을 뿌 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와 백제로 하여금 北朝의 北齊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 를 마침내 허용하고 만 것이다.27) 그것은 黃海를 매개로 해서 모든 국가들이 교섭을 맺 을 수 있는 政治的 條件, 해양문화의 발달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이렇게 東亞秩序에 海洋秩序가 본격적으로 작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잠시간의 긴장관계를 바탕으로 한 균형 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均衡과 緊張關係가 감도는 黃海海上이 隋의 통일로 均衡이 깨 어지게 되었다. 위에서 제시한 동북아 外交環境의 條件變化는 그 질서의 中心軸이며 地 殼變動의 진앙지였던 隋로 하여금 능동적인 정책을 취하게 하였을 것이다. 南北朝를 통일한 隋는 大陸秩序와 海洋秩序를 공유하는 국가가 되었으므로 상황에 적 응하면서 全方位外交를 펼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였다. 해양적 질서는 國境이 마주치 거나, 정치 군사적으로 이익이 예민하게 부딪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의 항해수준으로 보아 해양영토의 개념이나 인식은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韓半 24) 眞興王 26년, 北齊 天統 원년 (565). 25) 威德王 17년 18년, 北齊 武平 원년(570) 2년(571). 26)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 陽原王 7년. 27) 위의 책 권4, 新羅本紀 眞興王 25년 및 권 27, 百濟本紀 威德王 17년조. 그런데 盧泰敦, 앞의 논문 PP.50 51에서 고구려가 突厥 등 북방세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新羅와 密約을 하고 漢江流 域 등에 대한 신라의 領有權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 고구려가 해양질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 74 - 國史館論叢 第52輯 島나 日本列島는 隋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28) 따 라서 수는 形式的인 册封關係를 유지한 南朝국가들의 政策을 그대로 유지해도 되었다. 반면에 大陸的 秩序는 직접적인 軍事衝突을 일으키는 관계이고 東亞의 宗主權 確立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북방에서는 突厥이 柔然의 압 박으로부터 벗어나고(552년), 他鉢可汗이 즉위하면서(572년) 국세가 팽창하여 이 시기에 는 隋를 위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隋의 대외정책과 외교는 中國海洋世界의 統合으로 경제적 가치를 획득하고 해 양질서가 균열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희석시킨 다음, 大陸과의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순 서를 취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隋는 북방세력과의 결탁가능성이 농후했고 黃海의 海洋的 秩序를 조정했으며,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覇者였던 고구려를 제압하는 것이 급선 무였다. 위에서 열거한 두 가지 對內 外的 요인은 隋로 하여금 東亞秩序의 전면적인 재편을 요구하게 하였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동은 중국의 分裂體制로 인하여 상대적 이익을 얻어왔던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葛藤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政治 外交의 多重放 射狀秩序29)의 한 軸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國內政策은 물론 對外政策에 대한 전 28) 聖德太子가 隋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敎書 내용은 자주의식의 발로란 차원 이외에도 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군사적인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혜택을 크게 받지 않았 던 탓이다. 日本書紀 권22, 推古 16년조, 其辭曰 東天皇敬白 西皇帝. 隋書 권81, 列傳 46 東夷倭國傳, 其國書曰 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 29) 이 용어는 5세기 이후에 변화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형태에 특성을 부 여하여 만든 개념으로서 필자의 조어이다. 5세기 이전까지 각국간의 정치적 교섭과 군사적 충돌은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관계였다. 중심 부의 국가들은 직접 교섭을 하고, 주변국가들은 중국의 제국가나 고구려 등 중심국과 직접 교섭 을 맺는 것이 아니라 각각 인접국가들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다수 국가의 이익, 동아전체의 이익을 놓고 발생하는 복잡한 교섭, 국제적 충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질서는 1 2개의 중심국가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그것을 반경으로 政治 軍事 經濟的 能力에 따라 周邊部, 反周邊部 邊方으로 편성되었다. 東亞의 질서와 역학관계는 중국 을 중핵으로 하여 국가적 능력 외에 거리나 자연조건 등 교섭의 교통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 형 태였다. 그런데 5세기에 들어서면서 東亞의 外交形態는 변화가 생긴다. 즉 點과 點을 연결하는 線의 외교 가 아니라, 周邊部에서 中心部를 향하여 다수의 線으로 연결되는 放射狀 형태로 변모된다. 그것도 하나의 중심부가 아니라 3내지 4정도의 核을 중심으로 동시에 전개하는 多中 혹은 多核放射狀 外 交형태로 되었다. 즉 중국의 南 北朝와 高句麗 그리고 북방의 柔然 등을 중심축으로 해서, 주변에 포진해 있는 동아의 각국들은 中國 혹은 媒介國家를 거치지 않고 동시에 여러 국가와 直接關係를 맺기 시작한다. 또 中心國들 사이에도 복합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되고 주변국들간에도 인접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직접 교섭을 맺었다. 이러한 외교형태의 변화는 특히 동아시아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해양문화가 빠 른 속도로 발달한데 기인한다. 전 시대에는 해양교통의 한계로 인하여 직접 교섭할 수 없었던 국 가들이 이제는 직접, 빈번하게 교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외교는 고구려를 軸으로 한 일방적이고 평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관계, 즉 동아시아 多重放射狀 外交 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多重放射狀 外交는 동아시아 전체와 관련된 것이고, 외교의 전개과정

- 75 - 면적인 修正이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라는 측면 외에 양국간에 충돌을 야기시킨 구체적 요인, 즉 隋 의 통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고구려의 손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계기적 측면 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南北朝의 분열로 인하여 형식적인 册封關係속에서 실질적으로는 등거리외교30)를 하던 고구려는 이제 統一中國인 隋와 覇權의 向方을 놓고 실질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했 다. 百濟 新羅 倭 등 남부의 세력들은 고구려의 견제로 北朝와 교섭을 하지 못하고 심지 어는 南朝와의 交涉도 방해를 받았었다. 倭 5王 중 武王이 宋에 받친 上表文에는 高句麗 가 倭의 對宋交涉을 방해하는 사실이 나타난다.31) 그러나 수가 장강 이남까지 통일한 후 백제와 신라는 獨自的인 對隋外交를 벌였다.32) 이것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두가지를 의미 했다. 하나는 백제와 신라가 獨自性을 주장하며 對隋外交를 벌임으로써 고구려에게 정치 외교적인 압력을 간접적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는 隋에게 對高句麗 압력을 요청함으로써 직접적인 압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고구려는 北方 西方, 그 리고 南部戰線에서 긴장을 이용한 군사적인 압력의 가능성을 언제든지 갖게 되었다. 이 것은 한반도의 견고한 覇者地位가 도전받게 된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통일중국인 수에 견줄만한 해양질서는 사라지거나 약화가 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國際的 位相의 低 下를 가져와 東아시아 秩序의 중심부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명분적인 손실 외에 경제적 손실도 있었다.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었던 요동지역은 과거부터 각 종족간에 이루어진 교역상의 거점 이며, 이동시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한반도와 중국의 화북지방, 북방의 유목종 족, 그리고 서부의 종족들이 모두 고구려를 중간으로 해서 커다란 원을 형성하고 있었 다. 따라서 地政學的으로는 정치 군사상의 전략적인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地經學的 인 측면에서 교역상의 상당한 이익을 취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북조시대에는 남북간은 물론 北魏와 庫莫奚 契丹 地豆于 勿吉 柔然 高句麗 등 북방 의 각 종족들 사이에 官營貿易과 私貿易들도 활발히 이루어졌었다.33) 따라서 이 시기에 도 다수의 나라들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해양 활동이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 었다. 그것은 먼저 한반도의 정세와 외교 관계에서 나타난다. 30) 徐榮洙, 앞의 논문 pp.124 127. 31) 宋書 권97, 夷蠻傳 倭國. 梁書 권54, 諸夷傳 百濟에는 고구려에 의해 南朝와의 교섭이 19년간 방해받은 사실이 나타 나고 있다. 32) 新羅는 隋와 7번, 百濟는 8번의 외교관계를 가졌다. 申瀅植, 韓國古代國家의 對外關係 (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1984) pp.305 306 도표 참고. 徐榮洙, 앞의 논문 p.138 도표 참고. 33) 松田壽男, 貂皮質易と遊牧國 ( 內陸アジア史論集, 1979) pp.208 211. 前田正明, 北魏官營貿易に關する考察 西域貿易の展開を中心として ( 東洋史硏究 13 6, 1955). 李在成, 初期庫莫奚의 成長과 周邊諸族 ( 東洋史學硏究 28, 1988) p.30.

- 76 - 國史館論叢 第52輯 고구려가 영토 서북지대에 있는 靺鞨 등과 중국 북부 혹은 남부지역을 연결하여 교역상 의 이익을 취득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고구려는 嫩河流域 일대에 거주하던 南室韋에 철을 수출하였다.34) 당시 중간에는 粟末部 등 적대적인 집단이 있어서 양지역이 직접 교 통하기에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교역을 전개하였으며35) 돌궐과도 대규모 교역을 하였다.36) 柳城은 朝陽(營州)인데 당시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37) 契丹과 隋의 교역 등 公貿易, 私貿易들이 이루어진 곳이다38) 이처럼 6세기말 7세기초에 고구려는 동북아 제종족들과도 활발하게 교역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室韋와의 교섭 기록 가운데서 貂皮交易을 한 사실이 보이는 것은 3세 기 對吳交涉 당시39)와 동일하게 고구려가 南方지역과 북방의 遊牧種族들과의 중간거점 역할 내지 중간교역을 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음의 사건은 고구려와 남부지방과의 교역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文咨王은 北魏에 사신 悉弗을 보내 朝貢의 量과 종류가 줄어든 사실에 대하여 해명을 하고 있다. 즉, 전 에는 夫餘와 涉羅에서 황금과 珂를 공급받아 북위에 주었는데 이제는 양국을 차지한 勿 吉과 百濟의 방해에 의하여 그것을 못하고 있다고 변명하는 것이다.40) 이 기록에 의하면 耽羅41)가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거나, 최소한 珂라는 보물이 어떠한 교역과정을 거쳐 고구려에 들어와 사용이 되었으며, 일부는 北魏에 조공품으로 보냈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後貢使相尋 歲致黃金二百斤 白銀四百斤 42)라는 기록은 당시 공물의 품목과 수량 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던 것을 알려준다.43) 그런데 고구려는 北魏 등 북방과만 교역을 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당시 교섭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교역을 겸하고 있었으며, 吐谷渾이나 柔然 등이 남조와 경제적 교역 을 한 사실은 그들보다 많은 교섭을 가진 고구려가 당연히 교역을 했을 개연성을 나타 낸다. 고구려와 남조지역과의 교섭은 동진 이후 계속된 것으로 보여진다. 宋書, 南齊 書, 梁書 등의 高句麗傳에는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가 항상 있었다 하 여44) 당시 고구려인들의 사신과 貢物의 바침이 아주 빈번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34) 李龍範, 韓滿交流史硏究 (동화출판공사, 1989) pp.166 167. 隋書 권84, 室韋傳, 唐書 권219, 室韋傳, 土少金鐵 率貿於高麗 器有角弓楛矢. 35) 盧泰敦, 高句麗의 漢水流域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 韓國史硏究 13, 1976) pp.49 50. 36) 資治通鑑 권180, 隋紀 4 煬帝 上之上 大業 원년조, 雲起旣入其境 使突厥詐云 向柳城與高麗交 易 敢漏泄事實者斬. 盧泰敦, 위의 논문(1976) p.52에서 이때 대규모의 평화적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37) 盧泰敦, 위의 논문 p.52. 38) 李在成, 앞의 논문 p.48. 39) 三國志 권47,吳書 2 吳主傳, 貢貂皮千枚 鶡雞皮十具. 40) 魏書 권100, 列傳 88 高句麗, 但黃金出自夫餘 珂即涉羅所產 涉羅爲百濟所幷. 41) 李弘植,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87) p.138에서 沙羅는 耽羅라고 보았다. 42) 魏書 권100, 列傳 88 高句歷. 43) 金鍾完, 南北朝時代의 朝貢關係 槪觀 ( 震檀學報 61, 1986) p.78.

- 77 - 런데 이러한 교섭에는 사신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들에 의해서도 경제적인 교역이 이루어 졌다.45) 당시 남북조는 군사적으로 대치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相互依存性을 외면할 수 가 없어서 交易이 이루어졌다. 남방에서는 북방의 물건이, 북방에서는 남방의 物產이 현 실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江南은 造船術의 발달에 의한 원거리 상업이 발달하 여 동아시아 각국의 상품들이 집결되었기 때문에 북방에선 교역을 요구하였다46) 한편 남방측에서도 말의 수요는 대단한 듯해서 北魏使인 宋弁이 가져온 말이 쓸모없는 駑駘 라 하여 南齊의 武帝가 화를 낸 일이47) 있었다. 이러한 교역은 활발히 진행되어 사신들 이 오히려 더 물건 구입에 정신을 쏟고 있을 정도였다.48) 당시 조공이 公的貿易의 한 형 태였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使行이 교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증거는 朝貢 使에게 내리는 賞賜로도 확인된다. 남북조가 사신이나 민간인들의 교섭을 통해서 상호간에 교역행위를 활발하게 하였다 면 고구려 등 주변국과의 관계 역시 이러한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북조시대에 남북조와 통교한 나라들은 도합 200여 개에 달하지만 그 중에서 고구려가 단연 압도적으로 교섭빈도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는 남조와의 교섭에서도 남방 국가인 林邑이나 扶南보다도 많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49) 이처럼 고구려는 남북조시대에 주변국 가운데서 남북조 등과 등거리의교를 가장 빈번 하게 추진한 국가로서 陸路와 海路를 통한 다국간의 中間交易과 직접교역을 통해서 얻 는 경제적 이익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반적인 형태처럼 조공과 회사를 통한 교류만이 아니라 민간차원의 교역도 행해졌을 경우,50) 규모와 이익은 더욱 증가했 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수의 통일로서 이러한 이익은 얻기 힘들게 됐을 것이다. 수 는 고구려가 남북조 등거리외교를 통해서 얻었던 경제적 이익을 억제했을 것이며, 자국 과의 교역에서도 정치적인 논리를 배제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는 隋의 통일로 인하여 정치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 다. 그렇다면 이젠 상대적으로 고구려가 수의 征服對象이 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요인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제질서의 전면적인 개편, 즉 현실적인 위협의 제거이다. 통일된 수는 북방과 서방으로부터 현실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隋의 북방에는 突厥 이 위치하며 전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北方 遊牧種族들은 내부적인 성장을 完了하고 種族을 통일한 다음에는 정복욕과 경제 44) 南齊書 권58, 列傳 39 東南夷傅 高麗國 建元 3년조. 45) 당시 민간차원의 교역은 조공관계의 한 현상이다(金鍾完, 앞의 논문 p.77). 46) 朴漢濟, 南北朝 時代의 南北關係 (1981) p.179. 47) 南齊書 권47,王融傳. 48) 朴漢濟, 앞의 논문 p.181 49) 金鍾完, 앞의 논문 p.74. 도표 참고. 50) 金鍾完, 위의 논문 p.77.

- 78 - 國史館論叢 第52輯 적 욕구에 의해 중국대륙으로 침입해 들어갔다.51)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柔然을 제 압하고 등장한 突厥의 존재는 北魏와 柔然의 구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갈등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돌궐은 수 성립이전의 북제에게도 위협적인 세력이었으므로 북제는 수차 에 걸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따라서 隋가 突厥을 제압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膨脹이 아니라 威脅勢力의 除去란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돌궐은 수에게 결 코 종속되지 않았으며,52) 때로는 수보다 능가하였으며, 581년 582년에는 高寶寧과 연합 하여 수를 수세에 몰아넣기도 하였다.53) 한편 契丹은 고구려의 요서진출에 의해 압박을 받았으나,54) 584년 突厥의 침입 이후 외교적인 정책으로 隋의 보호를 받았다.55) 그러나 7세기 초에 이르면 군사적인 성장을 하여 오히려 隋와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역 학관계 속에서 隋는 주변의 諸種族들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특히 고구려 는 隋에게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고구려는 隋의 統一이 이루어지자 對外關係에서도 정책을 변경했다. 돌궐의 지배하에 있었던 室韋에 철을 수출하면서, 突厥과의 相互友好的인 관계를 모색한 것으로 여겨진 다.56) 高句麗와 돌궐의 우호가능성은 隋煬帝가 돌궐 방문시 고구려 사신을 만나 나타낸 양국의 연합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57) 알 수가 있다. 한편 靺鞨은 突地稽의 粟末部를 제 외한 諸部가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고, 거란은 遼西地方에 있으면서 고구려와 수 의 緩衝地帶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隋는 북방세력의 방어적 측면에서 고구려를 강제적으로 勢力圈下 에 편입시켜야 했다. 만약 고구려와 돌궐, 기타 북방세력들이 聯合戰線을 구축할 경우 고구려는 黃海北部沿岸과 遼西地方, 즉 水陸兩面으로 진공해 들어올 수 있다. 당시의 정 황으로 보아 고구려가 百濟 新羅를 동원하여 수를 공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만, 적어도 黃海沿岸을 통해서 隋의 후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방어상의 조 건을 고려할 때 수는 고구려를 강하게 압박하거나 침략을 해야 했다. Ⅲ. 고구려의 외교전략과 해양활동의 상관성 51) 金浩東, 앞의 논문 pp.261 263에서 遊牧社會와 定住社會의 갈등과 협조의, 숙명적인 관계에 대해 서 서술하고 있다. 52) 金浩東, 위의 논문 P.292. 53) 隋書 권1, 本紀1 高祖紀 및 권84, 列傳49 北狄 突厥傳 및 北齊書 권41, 高寶寧傳. 54) 隋書 권84, 列傳49 契丹傅. 55) 隋書 권84, 列傳49 契丹傳. 당시 契丹의 別部, 出伏部 등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에 內附하였다. 56) 隋書 권84, 列傳49 室韋, 其國無鐵 取給於高麗. 處泰敦, 앞의 논문(1976) p.51. 57) 隋書 권67, 列傳32 裵矩傅. 양국간의 전쟁이 발발한 요인으로 이 사건을 지적하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 79 - 앞에서는 隋의 통일로 인한 東亞秩序의 개편이 가져온 파장, 국제질서의 변동, 그리고 고구려와 수의 갈등요인을 살펴보았다. 이제 고구려의 對隋政策 혹은 對隋 外交政策과 해양활동과의 구체적인 관련성은 다음 과 같은 論證方法으로 규명고자 한다. 일단 당시의 국제질서에 적합한 外交活動을 海洋 과 연관시켜 일정한 틀을 제시해 놓고, 다음 단계로 고구려 외교정책의 실제를 살펴보고 자 한다. 그러면 외교와 해양활동과의 관련성, 나아가서 고구려 외교의 失敗要因과 해양 과의 관련성이 분명해질 수 있다. 첫째, 대외정책의 급선무는 고구려에 대한 隋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안심시키는 정책 을 취하는 것이다. 新興國家인 隋의 입장에서는 內治에 힘을 쓰고 경제력을 향상시키며 국력을 키우는 準備段階가 내부적으로 더 시급한 과제였다. 그리히여 北方과의 관계를 再編하고자 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구사했다. 예컨대 隋文帝는 突厥로부터 北方戰線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東과 西로 분할시키는 외교정책을 사용했다.58) 즉 東突厥과 西突厥로 분리시카고 (583년), 다시 양국으로 하여금 전쟁을 벌이게 하였다. 그리고 突厥의 국력이 약화된 틈 을 타서 隋文帝는 동돌궐을 정복하여 屬國으로 삼는 한편, 서돌궐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돌궐의 정복 이후 隋는 다음단계로 동몽고지역에서 일정한 세력을 지니고 수에 게 잠재적인 위협의 가능성 이 큰 契丹의 세력삭감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정책의 기초가 중국과의 안정이었다. 燕의 馮弘 문제로 잠시 北魏와 의 갈등이 있은 이후 대체로 戰線은 안정되어 있었다.59) 이러한 고구려는 隋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돌궐을 견제할 수 있는 背後勢力으로서의 이용가능 성도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러한 對隋關係의 기본적인 성격을 이해하여 보다 적극 적인 和親政策을 써야 했다. 고구려는 隋의 성립초기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면서 內政探索을 한 것으로 보인 다.60) 文帝가 北周로부터 禪讓을 받자 平原王은 隋에 사신을 보내고, 이어 隋는 평원왕 을 大將軍遼東郡公으로 封한다.61) 平原王은 그 다음 해 정월, 11월에 사신을 보내고, 동 왕 25년에는 정월, 4월, 겨울에 계속해서 사신을 보낸다.62) 이러한 사신의 빈번한 파견은 해마다, 때로는 한해에 몇 번씩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것은 책봉체제 속에 편입되어 시 간을 벌면서 隋의 통일이 가져온 東亞政勢의 급변에 대한 情報收集과 그에 대한 대응책 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63) 그러나 결국 고구려의 정책은 拒守之策으로 결정된다.64) 陳이 隋에게 멸망했다는 소 58) 翦伯贊 編, 이진복 김진옥 譯, 앞의 책 P.372. 59) 三國史記 권18, 高句麗本紀 長壽王 26년. 60) 徐榮洙, 앞의 논문 p.138. 61)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 平原王 23년. 62) 위의 책, 高句麗本紀 平原王 24년, 25년. 63) 李萬烈, 한국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84) p.492에서 이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 80 - 國史館論叢 第52輯 식을 듣자 군사를 정비하고 곡식 등을 비축하는 등 防守의 대책을 강구하였고,65) 隋文帝 가 평원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보여지듯 몰래 弩手를 매수까지 하고 있다.66) 이러한 행동 등은 수에게 심각한 경계심을 촉발시켰다. 그리하여 文帝는 장문의 글을 보내어, 직접 兵을 발하여 공격 할 수도 있으니 의혹을 품지말고 군사적인 대응을 하지 말 것을 종용 하고 있다.67) 이후 高句麗와 隋의 관계는 사신이 오고가는 등 형식적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가진 것 으로 보여진다. 591년 3월 嬰陽王이 새로 즉위하자 수는 高句麗王으로 封하고, 고구려는 이에 감사하는 사신을 보냈다.68) 그러나 양국은 결국 적대 관계로 발전하여 고구려가 요 서지방을 先攻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69) 둘째, 당시 고구려가 취해야 할 정책 중의 하나는 백제, 신라와 和親을 추진하거나, 양 국을 완전히 장악해서 對隋交涉을 막는 것이다. 廣開土大王 이래 고구려의 팽창으로 인하여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끊임없이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왔다. 또한 고구려의 海上權 掌握으로 인하여 중국의 北朝와 원활한 교섭을 가질 수가 없었고, 南朝와의 교섭도 방해를 받았다.70) 신라는 法興王 8년(521)에 梁에 사 신을 보냈다.71) 그런데 三國史記 新羅本紀에는 백제를 따라갔다는 기록이 없는데 반 하여72) 百濟本紀에는 동일한 해에 梁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양 기록에 차이가 있 는데 아마 이때 신라는 백제와 동행해서 왔다는 南史 의 기록이 옳은 듯하다. 이후 몇년이 지나 法興王 15년(528)에는 梁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의복과 향을 보내왔는데,73) 불교의 전래와 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를 매개로 바다건너 교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해양활동은 신라가 東海에서 南海를 거쳐 黃海로 그 활동영 역을 점차 확대했음을 보여준다.74) 그러나 이러한 정세는 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新羅는 眞興王代 64)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 平原王 32년, 王聞陳亡 大懼 理兵積穀 爲拒守之策. 隋書 권81, 列傳46 東夷傳 高麗. 65)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 平原王 32년. 66) 隋書 권81, 列傳46 東夷傳 高麗. 北史 권94, 列傳82 高麗傳, 昔年 潛行財貨 利動小人 私將弩手逃鼠下國. 67) 隋書 권81, 列傳46 東夷傳 高麗, 王若無罪 朕忽加兵 自餘落國 謂朕何也 王必虛心納朕此意 愼 勿疑惑 更懷異圖. 68)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嬰陽王 2년. 69) 위의 책, 高句麗本紀 嬰陽王 9년. 70) 위의 책 권26, 百濟本記 文周王 2년. 71) 위의 책 권4, 新羅本紀 法興王 8년 및 南史 권79, 列傳69 夷貊下 新羅傳. 72)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法興王 8년, 遺使於梁貢方物. 73) 위의 책, 新羅本紀 法興王 15년, 於時梁遣使賜衣著香物. 74) 法興王 9년(522) 3월에 伽耶王이 사신을 보내와서 혼인을 청하고, 동왕 19년(532)에는 金官伽耶를 통합하여 금관군을 둔다. 이러한 가야와 관계를 맺은 일련의 사실은 이미 521년경 신라의 세력 이 南海 東部海岸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 81 - 에 이르러 564년에는 北齊에 조공을 하였고, 565년에는 北齊로부터 使持節都督東夷校尉 樂浪公新羅王의 칭호를 받는다.75) 이 사실은 北魏가 고구려의 陽原王(550), 平原王(560) 을 책봉한76) 것이 東夷校尉라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됐음을 의미하 며 北齊의 遼河以東 지역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을 상징한다.77) 백제 역시 威德 王 14년(567)부터 남북조와 빈번하게 교섭을 가지며 위덕왕 17년(570)에는 北齊로부터 책봉을 받는다.78)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對北朝 交涉은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국제적 지 위를 약화시켰다. 앞에서 본대로 6세기로 접어든 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는 큰 변화가 왔다. 특히 백 제와 신라의 對中國 交涉이 활발해졌다. 이는 고구려의 海洋活動能力이 저하되고 海上權 統制에 실패함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海洋活動能力이 급속도로 伸張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신라의 국제무대 진출은 해양활동능력의 성장에서 한 요인을 찾을 수가 있다. 于山國의 정벌에서 보여지듯 신라는 동해를 횡단하여 鬱陵島를 정벌할 수 있는 능력 을 가졌다.79) 鬱陵島로의 항해는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에 닿는 것보다 항해기술상 난이 도가 높다. 더구나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는 경우라면 뛰어난 航海術과 성능 좋은 船舶을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80) 신라는 특히 眞興王의 漢江流域 점령후에 이러한 해양활 동능력을 강화시켰을 것이다.81) 眞平王 5년(583)에 船付署를 설치한 사실82)은 신라가 國 家政策으로 해양활동능력을 확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和親政策 혹은 連和政策을 취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필요하였다. 南北朝 시대와 달리 중국이 統一되고 백제와 신라가 成長한 이상 고구려는 南部戰線의 安定을 위해서도 백제 신라 등과 和親을 하는 것이 이 득을 준다. 북방과 서부전선의 긴장이 증폭되면서 국제질서의 재편이 시작되는 시점에 局地戰에 불과한 南進은 갈등을 심화시키고, 상대국들끼리의 同盟關係를 조장한다. 그리 고 무엇보다도 신라와 백제 양국이 수와 同盟關係를 가질 가능성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고구려는 隋가 통일한 다음 해인 590년에도 신라를 공격해 溫達將軍이 阿且山城 75) 三國史記 권4, 新羅本記 眞興王 25, 26년 및 北齊書 권7, 帝紀7 武成帝 河淸 3년. 76) 北齊書 권4, 文宣帝 天保 원년 9월조 및 권5, 廢帝 원년 정월. 77) 盧泰敦, 앞의 논문(1984) p.53. 78)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威德王 14년, 17년. 79) 위의 책 권4, 新羅本紀 智證王 13년(512). 80) 航海術의 경우 地形地物을 중간에 확인할 수가 없는 동해를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航路에 대한 완벽한 숙지가 있거나, 아니면 天文航法을 이용해야 가능하다. 81) 申瀅植,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1984) p.278., 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 ( 역사교육 10, 1967) P.65., 新羅의 發展과 漢江 ( 한국사연구 77) pp.46 47. 盧泰敦, 앞의 논문(1976) p.29. 盧重國, 앞의 논문 P.83. 金秉柱, 羅濟同盟에 관한 硏究 ( 한국사연구 46, 1984) p.38. 82)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眞平王 5년.

- 82 - 國史館論叢 第52輯 에서 전사하였다.83) 고구려는 그후 對隋戰爭의 過程 중에도 百濟 新羅와 交戰을 함으로 써 남북으로 동시에 긴장관계를 가졌다. 세번째, 고구려가 취해야 할 外交政策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突厥과의 同盟이었다. 고구려는 隋를 견제하기 위하여 北方勢力들과 同盟關係를 추진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동반자의 자격은 突厥이 가지고 있었다. 수가 통일되기 전까지 돌궐 은 遼西進出을 꾀하는 고구려와 對決構圖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大凌河의 契丹族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고구려와 돌궐의 혈투 등이 그것이다.84) 특히 陽原王 7년(551)에 는 돌궐이 新城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물러난 적이 있었다.85) 이처럼 돌궐 은 고구려에 침입을 하는 입장이지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우려는 별로 없는 관계에 있 었다. 물론 예외도 있어 利稽察은 高句麗와 靺鞨에게 크게 격파되기도 하였다.86) 그런데 隋의 통일과 압박으로 인하여 北方三角의 力學關係에는 변화가 왔다. 돌궐은 583년 수를 공격했다가 대패했고, 수의 분열정책에 의해 東 西突厥로 나눠지게 되었다. 따라서 기본 적으로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수에 對應을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力學關係를 전제로 할 경우 외교형태에 따라서 突厥과의 同盟은 可 能했을 것이다. 초기에는 돌궐과의 연락이 원활하게 취해진 것 같지는 않다. 중간에 거 란이나 말갈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7) 그런데 隋煬帝는 607년 돌궐지역을 순행하 다가 突厥의 酋長인 啓民可汗의 장막에서 고구려의 사신을 만난 것을 계기로88) 고구려 침공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이것은 高句麗와 突厥의 동맹관계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사실이다.89) 이처럼 隋를 가운데 두고 北方種族들간의 동맹관계 성립은 언제나 가 능했었다. 자국의 이익에 충실하여 外交戰을 펴는 돌궐을 고구려의 동맹관계로 끌어들이 느냐 못하느냐가 당시 고구려에게 주어진 외교상의 최대 관건이었다. 당시 거란의 거취도 고구려의 북방외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거란은 고구 려 수 돌궐의 중간에서 각 부족별로 이합집산하면서 역학관계의 변수로 작용하였다. 네번째, 고구려는 왜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왜는 주변부에 위치한 나라로서 아직은 신질서 편성에 직접적인 역할을 할 정도의 정 치력이나 군사력을 갖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구려로서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 니고 있었다. 수와 왜의 동맹이 이루어질 경우 왜는 해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의 배후를 83) 위의 책 권45, 列傳 溫達. 84) 李龍範, 앞의 논문(1976) pp.196 197. 盧泰敦은 앞의 논문 p.53에서 말갈과 거란을 둘러싼 양국간의 상호대립 항쟁은 555년 이후부터 580년대 말까지 주로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85)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 陽原王 7년. 86) 隋書 권84, 北狄 突厥傳. 87) 堀敏一, 隋代東アジアの國際關係 (1979) p.118. 88)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記 嬰陽王 18년 및 隋書 권84, 列傳49 突厥. 89) 盧重國, 앞의 논문 (1976) p.87.

- 83 - 위협할 수 있고, 백제와 신라가 수의 편으로 기울어지는데 간접적인 압력을 구사할 수가 있다. 반대로 왜를 고구려의 우군으로 편입시킬 경우 수의 외곽포위 전략을 저지할 수 있고, 백제와 신라 양국을 견제할 수가 있다. 특히 백제와 왜의 우호적인 관계로 보아 백제의 역할에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그외에도 고구려의 외교적 위상을 명분상으로 나 실질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 이처럼 대왜관계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외교적 비중이 나 전략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고구려의 외교전략수립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었다. 이상과 같이 당시 변화된 국제질서 속에서 고구려에서 주어진 외교환경에 대한 고찰 을 해보았다. 이러한 환경에 대응하여 이상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제질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전략 전술적 대응을 하여야 한다. 다음은 논제의 성격상 해양활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고구려의 대응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高句麗는 百濟 新羅와 和親을 하면서도 自國의 勢力圈안에 잡아두기 위해서는 양국과 중국의 관계를 孤立策으로서 단절시켜야 한다. 따라서 對中交涉의 窓口를 封鎖하거나, 黃海의 制海權을 장악하여 對中交通路의 연결고리를 확실하게 끊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 나 고구려의 해양력 등 국력이 약화될 경우, 隋는 비단 軍事的인 壓迫 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 왜 등을 자신의 세력권안에 두는 포위전략을 구사하여 고구려에 대한 외교적인 압 박을 강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고구려가 해양활동 능력을 강화시킬 경우, 隋는 항해상 의 위험 을 무릅쓰면서까지 百濟, 新羅와의 교섭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水軍 을 이용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수의 배후를 기습할 가능성도90) 부담되므로 해양력을 활용한 수의 압력도 완화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對突厥 外交關係에서도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海洋活動 능력이 전혀 없고 隋의 배후를 칠 기회가 적은 돌궐의 입장에서 고구려의 해양활동 능력은 수를 억제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 닌다.91) 이러한 기본구도 속에서 고구려가 해양질서의 主導權을 장악하고 있고 隋의 배후를 위협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면 돌궐과 정치 외교적 동맹을 맺을 확률 은 그만큼 커진다. 양국의 동맹은 隋를 北과 東, 兩方向에서 압박함으로써 수로 하여금 해양방어에 힘을 분산시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남조와 유연을 연결시킨 것 은 고구려 해양활동이 수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92) 이처럼 해양은 고구려 의 외교전략을 수정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전쟁의 진행과정을 검토함으로써 해양능력의 弱化가 당시 外交構圖 90) 美川王과 故國原王 대에 있었던 後趙와의 對北燕 聯合作戰은 遼東이나 遼西地方에서 隋를 해상으 로 공격할 가능성을 보여 준다. 91) 突厥 이전에 柔然, 吐谷渾 등이 北魏 등 北朝努力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南朝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은 사실은 양 세력간의 기본적인 力學關係가 크게 작용한 때문이다. 盧泰敦, 앞의 논문(1984) p.31. 및 朴漢濟, 앞의 논문 p.108 참고. 92) 朴漢濟,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일조각, 1988) p.212.

- 84 - 國史館論叢 第52輯 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는지의 여부와 그 정도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고구려의 간섭과 압력을 피해서 중국의 南北朝와 交涉을 했던 백제와 신라는 수가 통 일을 하자 각각 신속하게 교섭을 하면서, 오히려 對高句麗共同戰線의 형태를 추진한 다.93) 예컨대 百濟는 통일 전에는 陳과, 통일후에는 隋와 등거리 교섭을 유지하면서 중 국의 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한 것으로 보인다.94) 그런데 威德王 36년(589) 隋가 陳을 멸 망시키고 통일을 한해에 隋의 전선이 耽牟羅國에 표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덕왕은 이 전선이 백제영역을 통과하여 돌아갈 때 隋 일행을 후대하였으며, 사자를 파견하여 글 을 보내면서 陳의 평정을 치하했다.95) 이에 대해 隋의 高祖인 文帝는 詔書를 보냈다.96) 양국은 이 사건을 긴밀한 외교관계의 조건으로 활용하여 우호관계에서 군사동맹의 제 의라는 단계로 발전한다.97) 즉 百濟는 高句麗와 隋의 첫 충돌이 일어났던 598년에 長史 王辯那를 보내 방물을 바치고, 수가 요동정벌이 있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어 군사의 軍道가 되기를 청한다.98) 그 후 607년 3월에는 佐平 王孝隣을 수에 보내 고구려의 토벌 을 요청했고,99) 이어 608년 3월에 재차 사신을 보냈다.100) 백제의 적극적인 對隋 우호적 태도는 수와 왜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隋는 文 林 郞 裴淸을 倭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백제의 남로를 거쳐서 들어갔다.101) 이러한 일은 백제의 중개와 호위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것으로 간주되며, 특히 이 使行은 당시의 국 제 질서로 보아 고구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102) 百濟의 對隋 우호적 태도는 武王 12년(611)조의 다음 기사에서 실감할 수 있다. 봄 2월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치려하므로 왕 93) 백제와 신라는 각각 상대방과 갈등관계를 유지하면서도 對高句麗戰에 대해서는 동일한 입장을 가 지고 있었다. 94)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威德王 24년, 28년, 29년, 31년, 33년조의 기사에 의하면 백제가 남 조와 수 사이에서 외교상의 줄다리기를 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95) 위의 책, 百濟本紀 威德王 36년. 96) 北史 권94, 列傳82 百濟 및 隋書 권81, 列傳46 東夷 百濟. 97)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武王 8년, 9년, 12년. 98) 隋書 권81, 列傳46 東夷 百濟 및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威德王 45년. 99)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武王 8년. 100) 위의 책, 百濟本紀 武王 9년. 101) 위와 같음. 隋書 권81, 第4 倭國傳 大業 4년. 日本書紀 권22, 推古 16년 夏4월에는 遺隋使가 裴世淸으로 되어 있다 ( 唐使人裴世淸下客十 二人 從妹子臣至於筑紫 ). 그런데 거의 동일한 내용을 가진 사서들의 기록을 비교하면 당시 사신들이 백제의 沿岸을 따라 서 항해한 다음에 九州 北部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책 推古 17년 기사에는 吳國으로 갔던 백제사가 바다 가운데에서 표류하다가 倭國에 도착한 것이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당시 백제는 隋와 교섭하는 데에 고구려에게 방해를 받아 남방항로를 택한 것으로 판단된다. 102) 井上秀雄, 앞의 책 p.48 참조.

- 85 이 國智年을 隋에 보내어 행군기일을 물으니 양제가 기뻐하여 상품을 후하게 주고 尙書 起部郞 席律을 보내어 상의하게 하였다.103) 그런데 612년에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백제는 隋를 위해서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았 다.104) 한편 新羅의 경우도 對隋관계에서 백제와 유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수의 통일 이 전부터 교섭을 가졌고, 眞平王 18년(596)에는 승려 曇育이 隋에 들어가 동왕 27년에 돌 아왔다.105) 그러다가 동왕 30년(608) 1월에는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 하여 隋軍을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圓光으로 하여금 乞師表 를 짓게 하였다.106) 그런 데 삼국사기 의 기록에 의하면 隋煬帝는 이 乞師表를 받고서 대고구려 전쟁을 일으 켰다고 한다.107) 수의 통일은 왜의 대외관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倭는 倭五王 이후 중국 과의 교섭이 끊어졌으나 隋의 통일이후에는 빈번한 외교교섭을 가졌다. 당시 聖德太子의 정치가 실현되고 빈번한 교섭이 있었는데,108) 특히 608년에는 수의 사신 裴淸이 왜에 파 견되었다. 당시 遣隋留學生들은 후에 大化改新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정치 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109) 그런데 倭의 對隋交涉은 정치 외교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文化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수와 교환한 국서에는 왜의 자 주적인 對隋태도가 나타나고 있다.110) 고구려는 왜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판단된다. 수의 통일 이전부터 왜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605년에 사신을 파견하고 이어 610년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 다.111) 물론 이전에 고구려는 불상, 황금과 함께 승려들을 파견하였는데112) 이들은 당시 聖德太子의 스승이 되는 등 정치판도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608년 수에 보낸 국서에 자주적인 표현113)이 보이는 것은 왜의 자주 의식의 발로란 차원 외에도 성덕 태 103)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武王 12년. 北史 권94, 列傳82 百濟 및 隋書 권81, 列傳46 東夷 百濟. 104)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武王 13년. 北史 권94, 列傳82 百濟 및 隋書 권81, 列傳46 東夷 百濟, 資治通鑑 권 181, 隋紀 煬帝上之下. 105)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眞平王 27년. 106) 위의 책, 眞平王 30년조. 107) 위의 책, 眞平王 33년, 王遣使隋 奉表請師 隋煬帝許之行兵. 108) 日本書紀 권22, 推古條(600, 607, 608, 609, 614, 615). 109) 위의 책 권25, 孝德天皇紀. 井上光貞, 大化改新と東アジア ( 日本歷史 2, 岩波書店, 1975) 및 井上秀雄, 앞의 책 pp.52 53 참조. 110) 王仲殊 著, 桐本東太 譯, 中國からみた古代日本 (學生社, 1992) pp.132 155. 111) 日本書紀 권22, 推古 13년, 18년. 112) 위의 책, 推古 원년, 3년, 10년, 13년, 18년, 33년. 113) 위의 책, 推古 9년, 東天皇敬白 西皇帝.

- 86 - 國史館論叢 第52輯 자의 정치에 영향을 주었던 고구려의 영향114)이나 왜가 가진 동아시아에서의 외교적 입 지에 대하여 자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대왜 인식은 점차 강해진 듯해서 전리품 과 함께 사신을 보내서 대수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115) 그러나 꾸 준한 대수접근에서 보듯이 왜는 고구려의 적극적인 동맹자가 되지는 못했다. 앞에서 본대로 남부제국들의 對隋接近은 고구려의 지위를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對 隋戰에서 南部戰線의 불안정을 가져와 고구려의 입지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이같은 고구 려의 외교적인 불리함은 결국 百濟 新羅 倭가 황해를 건너 수와 통교함으로써 일어난 결 과들이었다. 즉 이같은 현상들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고구려에 의해 압박을 받았고 소외 되었던 南部海洋秩序가 隋와 직접 연결하여 旣存의 力學構圖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한 것 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결국 각국이 가진 해양활동능력의 성장과 高句麗의 해양활동능력이 가진 한계가 주요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고구려는 突厥과의 관계에서도 결국은 隋에 외교적인 패배를 하였다. 만약 고구 려가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百濟 新羅 등에 대하여 和親을 하면서, 北部戰線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강력한 해상세력으로서 수의 배후를 견제하였다면 돌궐의 외교적 입장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突厥은 결국 隋의 外交와 軍事作戰에 의해 격파되어 고구려 를 도와주는 세력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7세기 동아시아의 질서는 다음과 같은 형국으로 유지되었다. 즉 新羅와 百濟는 隋와 연결이 되었고, 백제는 倭 隋와 연결되었으며, 왜는 역시 百濟와 隋 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突厥은 결코 고구려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부분적으로 隋에 연결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는 결국 周圍에 포위된 形局이었다. 당시 국제적 역학관계로 보아, 고구려의 국력신장을 위한 정책대안의 과제 중 하나는 海洋活動能力의 强化이었다. 그럼에도 해양질서에 대한 인식을 신중하게 하지 못했고, 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동아지중해의 전략적 가치를 경시하였다. 그 래서 수를 배후에서 견제하거나, 혹은 大陸과 黃海에서 四面包圍하는 동아시아 외교전략 을 수립할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역으로 포위를 당한 채 對隋戰을 맞게 되었다. Ⅳ. 군사적 특성과 해양활동의 영향 고수전쟁은 598년 고구려의 遼西地方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어116) 614년까지 16년간에 隋書 권81, 東夷 倭國傳, 其國書曰 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 114) 조회승, 고구려가 고대일본에 준 정치 문화적 영향 ( 조선고대 및 중세초기사연구, 교육도 서출판사, 1992) pp.l77 180 에는 당시 야마도 조정에 끼쳤던 고구려의 영향에 대하여 기술하 고 있다. 115) 日本書紀 권22, 推古 26년. 116) 三國史記 권20,高句麗本紀 嬰陽王 9년.

- 87 - 걸쳐 일어난 대전쟁기간에 국한한 것이다. 이 전쟁은 그 이전까지의 전쟁과 다른 樣相으 로 展開되었다. 戰場의 범위, 戰爭의 성격, 戰爭이후 재편된 戰後秩序의 의미, 對唐戰爭 내지 新羅三國統一戰爭과의 契機性 등은 시각에 따라서 그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본고 는 이 전쟁을 다룸에 있어서 논제의 성격상 海洋活動이라는 주제와 관련지어서 논급하 고, 그 외의 것은 論旨展開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자 한다. 高隋전쟁은 그 이전의 전쟁과 다른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전쟁은 國際戰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전에 발생한 전쟁은 局地戰적인 성격, 혹은 국가와 국가간에 벌어지는 單線的인 성 격이 강했다. 물론 동아 각국간에는 필요에 따라 同盟關係를 맺으며 전쟁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지역을 놓고 직접적인 이해당사자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지, 전체 가 연관성을 갖고 광범위한 국제전의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17) 반면에 高隋戰爭은 勃發目的과 동기가 당시 東亞의 全面的인 秩序改編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군사적으로 전쟁의 직접적 當事國인 高句麗와 隋와의 全面戰이었 고, 周圍의 諸 國家와 種族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가한 전쟁이었다. 高隋戰爭이 갖는 국 제전적 성격은 전쟁 당사국들의 대수 대고구려 기본성격, 전쟁의 참여과정, 그리고 군사 작전에서의 참전정도 등의 판단지표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양군은 이미 군사편제와 군사동원에 있어서 국제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군사력의 상당부분은 말갈병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시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가했던 遼西 침공시에는 고구려가 靺鞨兵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격을 가하였다.118) 또한 거란의 일부도 동원되었는데, 584년 돌궐의 압박으로 만여 가구가 고구려에 귀속되었었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지리적으로 중국세력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군 사적으로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반면에 한반도 내에 형성된 역학관계상 隋의 강성과 긴장관계의 조성은 고구려를 배후에서 견제하게 하였고, 동시에 수의 고구려공격은 고구 려의 南進을 약화시키는 전략적 이점이 있으므로 百濟, 新羅 양국은 수에 대해서 전략적 友好感을 갖고 있었다. 그 사실은 전쟁기간인 607년 백제를 공격하고 난 이후 638년 신 라의 七重城을 공격할 때까지 고구려의 남진은 정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족히 알 수 있다. 어쨌든 고수전쟁은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전력을 북방으로 분산시키게 함으로써 백 제와 신라로 하여금 오히려 전력을 강화시키는 기회를 제공하였다.119) 이러한 戰略的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하여 백제는 더욱 적극적인 군사적 관계를 유 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막상 벌어지자 직접 군사를 파견하지는 않았다.120) 117) 중국의 北朝와 北方세력들은 전통적으로 숙명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대결을 벌였고, 또한 중국 내부의 남북조 대결, 한반도의 삼국대결구도는 복잡한 성격을 띨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전체가 연관성을 맺고 광범위한 국제전의 성격을 갖기에는 조건이 충족되지 못했다. 118) 三國史記 권20,高句麗本紀 嬰陽王 9년 및 隋書 권81, 列傳46 東夷 高麗 開皇 18년조. 119) 백제의 椵岑城 공격(611년), 母山城 공격(616), 신라의 椵岑城 탈환(618년)에서 보여지듯 양국은 이 시기에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 88 - 國史館論叢 第52輯 한편 신라의 탄력적인 외교태도는 역시 백제와 동일하게 나타났다. 고구려의 신라공격 이 607년에 두차례가 있었고, 608년에는 백성들이 8,000명이 잡혀가는 수난을 겪었다.121)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라 역시 수에게 고구려의 토멸을 요청하는 乞師表를 보낸다.122) 이를 접한 隋는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乞師表를 이용했다.123) 그러나 신라 역시 百 濟처럼 隋를 도와 고구려의 남부전선을 공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新羅의 眞平 王이 圓光에게 乞師表를 짓게 한 것은 王 30년인 608년이다.124) 신라는 3년의 시간을 두 고 상황을 살핀 것이다. 어쨌든 신라가 걸사표를 지어 수에 보낸 것을 알았을 가능성도 있다.125) 이처럼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수에 군사적인 도움을 준 것은 고구려로 하여금 적대국으로 인식하게 하였을 것이다. 한편 수의 경우는 국제성이 더욱 강하였다. 수가 통일 후에 돌궐 거란 고창국 서역지 역 등은 물론이고 남방의 林邑 琉球 赤土國 등 제국가들을 정벌한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수는 각 종족간의 내부갈등을 유도하여 격파시키거나 이민족을 동원 하여 다른 종족을 정벌하는데 활용하였다. 예컨대 605년 거란이 영주를 침입했을 때 돌 궐의 계민가한을 전투에 파견하여 거란을 격퇴하였다. 수의 대고구려전에서는 항복한 돌 궐의 일부, 말갈의 粟末部,126) 거란의 出伏部, 別部 그리고 奚 등이 군사적으로 참여하였 다. 또한 서역인들은 특히 축성운하건설 등 수의 내정과 정벌준비 사업에 동원되었는데 전쟁의 과정 중에는 遼水橋를 만들고, 六合城을 만드는 등 토목사업에 참여하였다.127) 고구려를 둘러싼 북방의 정세와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결 과적으로 이 전쟁은 고구려를 가운데 두고 隋와 北方勢力의 一部 그리고 南部의 百濟, 新羅가 연계성을 갖고 外廓包圍를 한 전쟁이었다. 다만 수는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인 도 움을 기대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복합적인 국제관계 속에서 직접 전쟁을 한 주 체는 고구려와 수였다. 高隋戰爭이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은 국제전의 성격과 함께, 전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戰 略이 사용되었고 다양한 戰術이 開發 補給되었다는 것이다.128) 특히 해양활동이 전쟁에 120) 三國史記 권27 百濟本紀 武王 13년(612) 및 北史 권94, 列傳82 百濟. 隋書 권81, 列傳46 東夷 百濟, 煬帝許之 令覘高麗動靜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 中國.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고구려의 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백제의 저의는 고구려의 압박을 약화하기 위하여 수를 이용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三國史記 에 있 는 聲言助隋 實持兩端 (百濟本紀 武王 13년조. 隋書 에는 聖言助軍 實持兩端 )라는 기록은 백제의 외교정책과 절박한 상황을 시사해 준다. 121)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記 嬰陽王 19년. 122) 위의 책 권4, 新羅本紀 眞平王 33년(611). 123) 隋書 권3, 帝紀3 煬帝上 大業 7년 2월조. 124)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眞平王 30년(608). 125) 위의 책, 新羅本紀 眞平王 33년조. 이 기록에는 行兵事在高句麗紀 라고 되어 있다. 126) 粟末部의 突地稽는 隋의 고구려 침입 즈음 遼河지방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盧泰敦, 앞의 논문(1976) p.52 참조. 127) 傳樂成, 隋唐五代史 (衆文圓書公司, 民國 74년) pp.27 28.

- 89 -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隋의 경우를 보면, 전쟁준비에 따른 物資와 軍糧米의 원활한 補給을 그 한 목적으로 해서 대운하 건설공사가 벌어졌으며129) 동시에 대규모의 造船工事를 추진하였다.130) 또 한 고구려의 守城戰을 돌파하고, 遼河渡河를 위한 각종의 新武器들이 개발되었다.131) 그 런데 가장 놀랄만한 변화는 수륙양면작전과 선박을 활용한 상륙작전의 실시이다. 이것은 戰爭遂行과정에서 水軍의 역할을 대단히 중시하여 해양활동의 본격적인 전략화를 뜻하 는 것이었다. 해양을 이용한 戰略 戰術은 中國勢力이 周邊民族을, 특히 남방132)이나 한반 도 내의 세력133)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전래의 戰略이다. 더구나 수의 경우는 이미 남쪽에서 대대적인 海洋遠征을 감행한 경험이 있었다.134) 隋는 南北朝 時代에 발전한 造船術을 더욱 발달시켜 煬帝때에는 강대한 수군을 보유 하였다.135) 그리하여 隋煬帝는 大業 初(604 605)에 해상을 통해 林邑136)에 출병했으며, 大業 3년(607)과 4년(608) 兩次에 걸쳐 琉球137)를 정벌하였다.138) 또 현재의 말레이반도 인 赤土國에 常駿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139) 이러한 몇가지 사실들은 해외원정을 추진하 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軍士移動과 上陸作戰이라는 해양전의 형태가 도입된 것을 뜻한다. 당시 동아시아 해양활동의 일반적인 수준과 군사적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수군을 활용한 시도는 戰線이 陸地의 國境이나 要塞地로 한정되어 있었던 종 128) 고구려문화사 (사회과학출판사; 논장, 1988) pp.27 32. 이지린 강인숙,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논장, 1988) 제 6장 참조. 129) 隋書 권3, 帝紀3 煬帝 上. 대운하 건설의 중요한 목적은 永濟渠의 북종점이 대고구려 원정군의 근거지였던 琢郡이었던 것 으로도 알 수 있다. 130) 위의 책, 帝紀3 煬帝 上 大業 3년, 秋七月 發丁男百餘萬築長城 西距楡林 東至紫河 一旬而罷 死 者十五六 八月壬午 車駕發楡林. 위의 책 권74, 列傳39 元弘嗣傳 및 資治通監 권181, 隋紀4 煬帝 上之中. 131) 고구려문화사 pp.83 115 참조. 132) 漢武帝가 기원전 112년에 楊僕에게 10만의 수군을 주어 南越을 정벌하게 한 것이나, 吳의 孫權 이 230년에 수군을 동원하여 대만 등을 정벌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133) 後漢 光武帝의 낙랑 정벌( 三國史記 권14, 高句麗本紀 大武神王 27년)이나, 魏 明帝가 바다를 건너 樂浪 帶方을 평정( 三國志 권30, 魏書30 東夷傳 韓)한 것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134) 大業 1, 2년에는 林邑 정벌, 大業 3년과 4년 유구정벌(汶江, 앞의 책 pp.74 75). 135) 汶江, 위의 책 p.75. 800인의 전사를 태울 수 있고, 5층으로 만들어진 五牙가 있었다. 隋煬帝가 江南으로 巡幸할 때 엔 龍舟를 만들었다. 그 크기는 높이 45척, 길이 200척, 有樓가 사층이고 최상층에는 正殿이 있 었다( 隋書 권3, 帝紀3 煬帝 上 大業 7년조). 수의 해양능력에 대해서는 孫光圻, 中國古代 航海史 (海洋出版社, 1989) pp.255 256 및 277 280 참고. 136) 현 越南의 동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37) 당시의 琉球는 오늘날 대만이다. 隋書 列傳 琉球國傳. 本位田菊士, 古代環支那海交通と南島 ( 東アジア古代文化 29, 大和書房, 1981, 秋). 138) 汶江, 앞의 책 pp.74 75. 139) 隋書 赤土傳에는 그 항해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해양수준과 활동에 대한 인식 을 보여준다.

- 90 - 國史館論叢 第52輯 래의 관념을 깨뜨렸다. 그동안 중국의 북조세력들은 기마전을 주로 하는 유목종족들과 전쟁을 치루어왔다. 고구려 역시 주요공격과 방어의 대상이 북방의 유목종족들이기 때문 에 육상전에 대한 비중이 절대적이었다.140) 그런데 隋의 통일로 해양전략이 활용되기 시 작한 것이다. 우수한 水軍力만 뒷받침되면 육로교통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全方位 攻擊이 가능해졌 고, 이에 따라 防禦的 측면에서는 全方位 防禦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방어자의 측면에서는 戰線의 廣範圍한 擴大로 인하여 불안한 요인이 가중되 고,141) 전선구축의 균형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隋는 이러한 효율적인 戰略의 活 用을 시도하였다. 한편 高隋戰爭의 성격이 변했음은 水陸兩面 作戰이 실시된 상황과 그것이 전세에 끼 친 영향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隋文帝 때 이미 周羅睺가 이끄는 수 의 水軍이 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平壤城으로 쳐들어오려 하였으나 중간에 풍랑을 만 나 돌아갔다.142) 당시 周羅睺의 水軍이 사용한 航路는 아마도 山東半島를 출발하여 沿岸 航海를 통해서 발해만을 옆으로 보면서 遼東半島의 卑沙城에서 멀리 떨어져서 平壤城으 로 들어오려는 항로였을 것이다. 그런데 주라후의 船隊가 출발한 것은 6월에서 8월 사이의 일이고, 돌아온 것은 9월이 다. 그렇다면 늦어도 8월까지는 바람(風)을 만났어야 한다. 그 당시의 黃海 北部의 海上 環境을 살펴보면서 전황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해보도록 하자. 이 지역은 내륙해안에 가까운 지역이고, 그 시기는 바람이 많이 부는 시기가 아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太風은 9월 이후에 많이 불고, 그 지역은 태풍의 영향권도 아니다. 더 구나 항해거리가 길지 않고, 중간중간에 섬들이 있어 기상이 나빠지면 언제든지 避航할 수가 있다. 따라서 특별한 天災地變이 아니면 주라후의 大船團이 거의 전멸할 정도로 해 상개황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주라후의 船團이 지형지물을 활용한 고구려 水軍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해보자. 隋煬帝는 612년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을 담은 조서를 발표한다. 여기에는 고구려인이 140) 고구려의 군사전술에 대해서는 社會科學院 考古學硏究所 編, 呂南喆 金洪圭 譯, 高句麗の文化 (1982) pp.4 5. 141) 海戰에 있어서 艦艇의 양호한 기동성과 다방면으로 이동 가능한 해양의 특성은 군사활동의 범위 와 군사행동의 선택폭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적으로 하여금 防禦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행동의 폭을 제한시킬 수 있다. 艦隊의 이동을 어떤 특정 방향에 대한 특정 목적으로 간주할 수 없는 특성때문에 함대의 움직임에 따라 적은 매우 다양한 압력을 받게 된다(Aston George, Sea Land and Air Strategy, London: John Murray Co, 1914; 김종민, 戰爭과 海洋戰略, 이성과 현실 사, 1992, p.69에서 재인용). 142)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8 嬰陽王 9년 및 隋書 권2, 帝紀2 高祖 下 開皇 18년조. 隋 書 列傳30 周羅睺傳, (開皇) 十八年 起遼東之役 徵爲水軍總官 自東萊泛海 趣平壤城 遭風船多 飄沒 無功而還. 資治通鑑 권178, 隋紀2 高祖上之下 周羅睺, 自東萊泛海 趣平壤城亦遭風 船多飄沒 九月己丑 師還 死者什八九.

- 91 - 말갈의 복장을 하고 요서지방을 침범했다는 기사가 있다.143) 大業 8년은 嬰陽王 23년 (612)이다. 그런데 隋煬帝(604 617)가 왕이 된 이후 그때까지 고구려가 靺鞨兵과 함께 요서지방을 공격한 사실은 없다. 이 戰爭에서 고구려가 遼西地方을 공격한 전투는 바로 598년 고구려의 先制攻擊뿐이다. 결국 大業 8년에 隋煬帝가 말한 遼西攻擊이란 598년 고 구려의 요서공격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疲劉海戍 란 기사는 당시 고구려가 수의 海岸 防衛施設을 빼앗고 요서지방을 공격했음을 알려 준다. 여기서 두가지 추론이 가능해진다. 첫째는 고구려가 수군을 동원해서 해안으로 공격해 들어갔을 가능성과, 둘째는 高句麗軍이 이때 요서지방에서 한 부분을 일시 점령하고 있 다가 주라후의 수군을 공격했을 가능성이다. 두 전투가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설사 고구려가 遼東地方만을 점하고 있어도 주라후 군대 와 고구려 군대와의 접전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특히 卑沙城은 그 이후 고구려와 수 당 간의 전투가 벌어지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卑沙城의 전략적 가치는 遼東半島 南端을 돌 아 압록강 유역으로 진공하는 육군의 저지나 혹은 바다로 들어오거나 韓半島 北部로 항 진해 가는 船團의 감시와 공격기능에 있다. 따라서 비사성이나 鴨綠江口에 있는 泊灼城 의 군대와 周羅睺의 수군이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144) 이처럼 隋軍이 이미 1차 침입시에 水陸兩面作戰을 구사했다는 사실은 곧 戰線槪念의 변화를 가져왔고, 당시 水軍의 역할이 深大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이러한 해양전의 활용은 隋煬帝의 1차 침입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우선 당시 隋의 군사 편제, 특히 水路軍 편제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隋의 고구려 遠征軍 편제는 모두 24군으로서, 左軍 12군과 右軍 12군으로 구성되 어 있다. 이 중에서 左軍의 3개군과 右軍의 8개군이 水軍이다.145) 左軍의 來護兒의 제 3 군은 溟海道에, 周法尙의 제 10군은 朝鮮道에, 于仲文의 제 12군은 樂浪道인데 모두 水 軍이고, 右軍 가운데는 제 1군 黏蟬道, 제 2군 含資道, 제 3군 渾彌道, 제 4군 臨屯道, 제 6군 堤奚道, 제 9군 碣石道, 제 10군 東施道, 제 11군 帶方道 등이 水軍編制로 되어 있 다. 그러나 실제로는 7개군만이 水路軍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편제상에서 보여지듯 당시 수로군의 그 임무와 공격로를 보면 鴨綠江 河口, 平 壤, 漢江流域 등 韓半島 西部海岸 전체가 대상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挾攻의 측 면 외에도 대규모 군사의 上陸作戰을 통한 背後 直接攻擊意圖를 나타낸다. 물론 기록을 143) 隋書 권4, 帝紀3 煬帝 下 大業 8년, 春正月 壬午 乃兼契丹之黨 疲劉海戍 習靺鞨之服 侵溢 遼西.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嬰陽王 9년, 王率 靺鞨之衆萬餘 侵遼西 라고 하여 말갈병을 직 접 거느린 것으로 되어 있다. 144) 이 전투에 대해서 北史 권11, 隋本紀 上 第11 과 권76, 列傳64 周羅睺傳 및 隋書 권64, 列傳29 周羅睺傳과 資治通鑑 권178, 隋紀 高祖 上之下 등은 전말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145) 三國史記 권20,高句麗本紀 嬰陽王 23년과 隋書 권3, 帝紀3 煬帝下 및 資治通監 권 181, 隋紀5 煬帝上之下. 서인한, 高句麗對隋唐戰爭史 (1991) pp.68 70.

- 92 - 國史館論叢 第52輯 볼 때, 이러한 편제가 다 활용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지나 대규모의 해상작전을 통해 서 남부해안지대를 제외한 한반도 서쪽 전지역이 隋의 전쟁범위안에 들어온 것을 알려 준다. 이 점은 곧 전쟁개념에 변동이 생긴 것을 뜻한다. 더구나 2차 침입시의 수로군은 兵站部隊가 아닌 육로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는 전투부대로서 그 임무가 확대되었다.146) 직접적으로 전선에 참여하고 고구려에 영향을 끼친 隋軍은 수군총관 來護兒軍이다. 右 翊衛大將軍 來護兒의 水軍은 江 淮의 水軍을 거느리고 침공을 하여 배의 행렬이 수 백리 에 뻗칠 정도의 대규모였으며147) 평양에 1차로 진입하여 60리 밖에서 수도를 위협했 다.148) 원래 계획은 于仲文, 宇文述 등 육군과의 협공이었으나 단독으로 평양성으로 진 군해 들어가다 고구려 建武장군의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고구려 군 대는 수의 水軍을 內陸으로 끌어들어 陸地戰鬪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패배 한 來護兒의 군대는 돌아가 海浦에 진을 쳤다고 했는데 당시의 전황으로 보아 곧장 동 래로 돌아간 것 같지는 않다.149) 이러한 水軍을 이용한 單獨攻擊이 성공해서 平壤이 점령당했다면 戰勢는 달라졌을 수 도 있었다. 평양성이 점령 당했거나, 수의 군대가 상륙에 성공하여 내륙으로 들어가 북 상 작전을 폈다면 乙支文德의 육군은 배후가 불안한 가운데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 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해양방어가 매우 중대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방어선은 遼河를 따라서 북의 南蘇城에서 安市城까지 山城으로 구축되어 있 었다. 한편 요동반도 동쪽에는 끝의 卑沙城을 비롯하여 石城, 그리고 압록강 하류에 九 連城, 泊灼城 등이 있었다. 이러한 防禦體制의 구축은 遼河戰線이 공파당했을 경우에 2 차 防禦線의 역할을 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隋의 水軍이 요동반도로 상륙하여 遼河戰線 의 배후를 기습하거나 압록강 유역으로 상륙하여 국내성 혹은 평양으로 直攻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겨진다. 즉 隋의 水軍들의 해양활동을 통한 공격을 방어하고,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해안관방시설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50) 수의 제 4차 침입시에도 來護兒의 水路軍은 卑沙城으로 상륙하여 위협을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外交政策으로 수군이 철수한 일이 있었다.151)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해양활동 이 戰線의 槪念을 變貌시켰고 戰術의 革新을 가져와 水陸兩面 作戰이 실시되었으며, 水 軍의 독자적인 행동으로도 대규모 공격이 가능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高隋戰爭은 이처럼 대규모의 船團이 조직되고 黃海北部를 直航하면서 전투에 참여함 146) 서인한, 위의 책 p.83. 147)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嬰陽王 23년. 隋書 권4, 帝紀4 煬帝 下. 北史 권12, 隋本紀12 煬皇帝. 資治通鑑 권181, 隋紀5 煬帝 上之下. 148)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嬰陽王 23년. 149) 위와 같음. 資治通鑑 권 181, 隋紀5 煬帝 上之下 大業 8년 6월 己未. 隋書 권64, 列傳29 來護兒傳. 150) 압록강 하구 유역의 차단성 등 방어시설에 대해서는 손영종, 앞의 책 pp.192 193 참조. 151)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嬰陽王 25년. 隋書 권3, 帝紀3 煬帝下 大業 10년. 資治通鑑 권182, 隋紀 煬帝 上之下 大業 10년.

- 93 - 으로써 戰場의 양상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航海術의 발달과 뛰어난 조선술의 뒷 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수는 직전에 실시된 유구정벌에서도 바람을 이용하여 장거리 항해를 했었다.152) 이러한 항해술은 고구려 등 한반도의 국가들에게는 防禦戰線 의 확대를 가져와 戰力面에서 상당한 손실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戰線槪念의 변동과 上陸作戰의 실시는 원활한 수송전략과 군대의 신속 한 이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당시의 戰爭戰略, 戰術上의 限界, 그리고 무엇보다도 海洋 能力의 한계로 인하여 선박이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輸送手段으로서이다. 이것은 전쟁의 準備過程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림 高隋戰爭時 海洋戰圖153) 152) 隋害 赤土傳 大業 3년, 其年十月 駿等自南海郡乘舟 晝夜二旬 每値便風. 153) ① 598년 周羅睺, 6,000명 東萊에서 平壤城 直攻(中途失敗) ② 612년 來護兒, 평양성 60리까지 진격, 패퇴 ③ 614년 來護兒, 卑沙城 상륙

- 94 - 國史館論叢 第52輯 隋文帝는 605년에 通濟渠, 608년에는 永濟渠를 완성하여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신 속하게 대량으로 운송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隋煬帝는 610년에 전군에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7월 揚子江 淮河 以南 지역의 인부와 선박을 동원하여 礖陽(河南)과 洛口(山 東)에 보관 중인 軍糧을 琢郡으로 이동시켰다.154) 선박의 運送手段으로서의 기능은 전쟁과정에서도 나타났다. 遼河를 중심으로 해서 서 쪽은 遼澤이라는 濕地帶였는데 이곳을 통과해서 군수물자를 운송하기에는 조건이 안좋 았다. 육군만으로서는 병참의 보급선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지리적 한계를 인식한 隋軍은 水軍을 이용한 군수물자의 보급을 꾀했다. 수의 1차 침입시 水路軍은 6,000명으로서 水軍總管 周羅睺가 지휘를 하였는데 이들은 산동반도의 東萊에 집결하였다. 水路軍의 임무는 동래에서 朝島列島를 경유하여 바다를 건넌 다음, 요동반도의 남쪽 海岸線과 한반도 西海岸의 大同江 어구에 이르는 海岸線을 따라 요소요소에 정박하면서 육로군에게 군수품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155) 隋 煬帝의 침입시에도 군수물자의 이동은 수군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한편 선박은 軍隊의 신속한 移動에도 사용됐다. 陸軍은 遼河戰線에서 고구려의 防禦網 에 걸려 苦戰을 하거나, 아니면 遼澤 등으로 인하여 군사의 이동이 늦었다. 煬帝는 이러 한 경우 역시 군사의 이동에 선박을 이용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造船을 하였다. 당시 동원된 선박의 규모와 크기는 黃門侍郞 王弘 등을 강남에 보내 나무를 베어 龍 舟와 鳳船, 黃龍, 赤艦, 樓船 등 수만척을 건조케 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 해 8월 양제가 龍舟를 타고 江都에 巡幸을 나갔는데 그 배들의 행렬이 2백여 리였으며156) 그 크기는 높이 45척, 길이 200척, 樓가 4층이고 최상층에는 正殿이 있었다. 그런데 수는 이미 樓가 5층이고 戰士를 800인을 태울 수 있는 五牙를 건조하고 있었다.157) 그 외에도 煬帝는 浮景, 深, 彩, 朱鳥 등 수 萬艘을 건조했고158) 大業 初에는 또 東萊海口 즉 山東 半島에 幽州總管을 보내어 조선공사를 하게 하였다.159) 이렇듯 수나라는 거대한 선박을 제조하여 몇백척 단위로 이동하는 대규모의 작전160)을 펴는 등 군대의 신속한 이동에 철저를 기하였다. 앞에서 살펴 본 5차례의 高隋戰爭은 새로운 전략 전술, 신무기의 등장, 그리고 무엇보 다도 海洋戰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 154)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嬰陽王 22년. 資治通鉗 권181, 隋紀5 煬帝 上之下 大業 7년(611) 2월 壬午. 155) 徐仁漢, 앞의 책 (1991) p.60. 156) 隋書 권3, 帝紀3 煬帝上 大業 원년 8월. 文定昌, 韓國古代史 上(栢文堂, 1971) p.194. 157) 李榮采, 海洋開拓爭覇簡史 p.100. 158) 汶江, 앞의 책 p.75. 159) 隋書 권74, 列傳39 元弘嗣. 160) 隋書 권3, 帝紀3 煬帝下 大業 8년, 又滄海道軍舟艫千里 高帆電逝 巨艦雲飛 橫斷沮江 逕造平壤.

- 95 - 러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재편과정에서 국제전이 벌어졌고 해양활동이 정치 외교적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海洋活動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도입 됨으로써 戰線槪念의 大變動이 일어났고, 기존의 고구려 防禦體制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 났다. 요컨대 고구려가 制海權을 장악했더라면 수의 軍糧運送과 軍士移動을 억제할 수가 있 었고 平壤城, 卑沙城 전투에서 보듯이 상륙작전에 의한 背後奇襲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 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에게 주어진 外交, 國防上의 과제는 해양활동의 중요성 인식과 해양활동 능력의 강화이었다. Ⅴ. 결 론 6세기 말이 되면서 東아시아의 정치질서에는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隋에 의한 중국대륙의 통일은 동아시 外交形態의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동아지중해 沿岸의 질서에 變動을 야기시켰다. 그 영향으로 고구려는 동아질서의 中心部에서 후퇴하여 國際的位相 의 저하를 가져왔고, 한반도에서의 견고한 覇者地位가 도전받게 되었다. 해양활동과 多 重放射狀 外交를 활용해서 동아질서의 中心軸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國內政策은 물론 대외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의 정치 군사적 갈등을 중심으로 재편되던 동아질서는 결국 新羅 와 百濟는 隋와 연결되었고, 백제는 倭 隋와 연결되었으며, 왜는 역시 百濟와 隋에 연결 되었다. 그리고 북방의 突厥 및 契丹 등은 결코 고구려에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부분적으로 隋에 연결이 되었다. 결국 高句麗는 海洋活動의 실패로 인하여 수를 배후에 서 牽制하거나 大陸과 黃海에서 四面包圍하는 외교정책을 수립 할 수가 없었고, 역으로 포위를 당한 채 對隋戰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고, 수는 질서재편 작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멸망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161) 이 戰爭은 598년 고구려의 遼西地方 先攻으로 시작되어 614년 수가 멸망하기 1년 전 까지 16년간에 걸쳐 일어난 대전쟁이다. 그러나 交戰 당사국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동아 지중해의 전면적인 질서재편을 목적으로 다수의 국가들이 直 間接으로 참여한 國際戰的 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질서재편에는 해양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였고, 외교교섭에 서도 해양활동능력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전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戰略이 사용되었고 다양한 戰術이 開發 補給되었다. 해양을 활용한 군대와 군수물자의 조직적인 운반이 있 었고 水軍活動을 이용한 水陸兩面공격과 上陸作戰에 의한 후방기습 등 戰線槪念의 변화 와 함께 대규모 전쟁이 시도되었다. 고구려가 승리한 요인 중의 하나는 황해를 건너 평 양성으로 직공한 수의 해양능력을 방어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61) 傳樂成, 앞의 책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