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 3 70 년 어둠에서빛으로 제3부화해의대장정 - 제3장 4 3의해원 ( 解寃 ) 과화해 / 장윤식제1절화해와상생
3. 화해와상생의상징마을 제주도의일부마을에는 4 3으로인한상흔을씻고주민간화합을도모하고자마을단위별 4 3희생자와호국영령, 순국선열등을함께추모하는공간이조성되고있다. 또한 4 3 당시어려운여건속에서도중산간에서해안마을로피난했던주민들을따뜻하게감싸줬던사례가발굴되기도한다. 이를소개하면다음과같다. 1) 애월읍하귀리영모원 ( 英慕園 ) 하귀리는일제강점기야학운동등항일운동가를많이배출한곳이다. 민족의식을고취하던그들이해방직후하귀중학원등교육기관설립을주도하고일부는교사가되기도했다. 1945년개교한하귀중학원학생들은 1947년 3 1절집회와연이은 3 10 총파업등에적극적으로참여했다. 문에이후전도에걸친검거선풍의와 [ 그림 1] 애월읍하귀리영모원중에하귀중학원생대부분을 1947년여름제주경찰서에구금하기도했다. 이때는대부분석방됐지만재판에넘겨져실형이나벌금형이선고된경우도더러있었다. 이러한상황에서 1948년 4 3 발발과 5 10 선거무효화이후하귀리주민에대한당국의탄압이거세어졌고이에학생과청년등은피난처를찾아나섰다. 하지만몸을숨긴것이또다른빌미가되어쫓고쫓기는상황이반복되고애꿎은가족이희생당하는등숱한시련을겪었다. 토벌대에의한대표적희생사건은 1948년 5월가문동웬뱅듸사건을비롯해 12월의외도지서장작사건, 비학동산학살, 하귀국민학교집결과색출사건등이다. 뿐만아니라 1948년 12월 30일에는무장대가하귀리를습격해국민학교건물과민가일부를불태우고숙직교사와민보단원을학살하는등무장대에의한희생도있었다. 이렇듯전대미문의참화를입은하귀리는침잠의길로접어들수밖에없었다. 하귀 라고하면색안경끼고취업등사회생활에불이익을당하는일까지비일비재했다. 영모원조성당시하귀2리의고창선과함께공동추진위원장을맡아앞장서서일했던하귀1리배광시 ( 남, 1938년생 ) 는 하귀리는일제때는독립운동가들이많아눈총을받
더니, 그사람들이해방이후에왕성하게활동하고하귀중학원이나단국중학원에재직했던선생님들이요즘말로진보적시각을가졌다고, 또학생들이그선생들을잘따른다고모두당국의눈밖에났습니다. 그래서 4 3사건을거치면서지금 80세좀넘을나이일우리선배들이엄청희생당했어요. 그런데문제는여기서끝이아니라, 4 3사건이끝난후에도하귀라고하면취직이나취학등에막대한지장이온다는것이었습니다. 사람한테만연좌가있는게아니라마을이름에도연좌제가따르는형국이었어요. 그래서마을이름을바꾸기로했습니다. 라고증언했다. 결국 1953년북제주군조례에의거하귀1리를동귀리로, 하귀2리를귀일리로개칭했다. 전통적인마을이름까지바꿨으니주민들마음이편할리없었다. 또한마을이름이다르니점점마을간갈등도심해지고재산권행사등에도여러가지불편한점이생겨났다. 이에따라 1990년들면서마을이름을환원하자는움직임이일기시작했다. 누대로이어오던마을이름을찾아정체성을회복하고, 점점멀어져만가는두마을의갈등을극복하자는여론이형성된것이다. 결국 1995년 1월 1일북제주군조례제1337호에의거원래의하귀1리와 2리로법정리명이환원되기에이른다. 그이후이명 ( 里名 ) 환원을기념하는사업을하자는얘기가나돌았다. 배광시는 리명이다시환원되니까그이전보다훨씬 1리, 2리마을사람들간의소통도잘되고화합이좋았죠. 그래서이를기념하는문화사업을해보자는이야기가나왔고그중하나가 하귀 라는마을이름까지변경해야했던 4 3희생자영령들을군경에의했든, 무장대에의한희생이든한자리에모실추모공간얘기가나왔어요. 라고했다. 이명 ( 里名 ) 환원기념문화사업을추진하기위해하귀발전협의회를중심으로추진위원회 ( 공동위원장배광시 고창선 ) 를구성해수차례논의를거듭한끝에 4 3영령은물론일제강점기하귀리의얼을지켜온순국선열과 6 25와베트남전참전희생자를한자리에모신추모공원을조성키로했다. 즉, 하귀리를지켜왔고, 역사의소용돌이에희생당한영령들을위로하는영모원조성사업이시작된것이다. 추진위원회는이를위해본격적인모금활동을벌였다. 그첫활동으로 2000년 부정에항거할줄아는하귀혼 ( 魂 ) 을살리자며 하귀혼살리기 마을축제를개최하고걸궁패가마을을돌며주민과상가, 자생단체등을대상으로모금을시작했다. 그결과단이틀동안 3천여만원이라는거액을모을수있었다. 출향인사들의모금도이어졌다. 특히서울의경보전기김용현사장은주민모금액에버금가는 3천 100만원을기탁해커다란도움을주었다. 김사장의헌금기탁은더욱의미가깊었는데, 그것은기탁자의부모가 4 3 당시무장대피습에의해희생당했기때문이다. 영모원조성이 4 3 당시군경에의한피해뿐만아니라무장대에의한희생자까지도한데모셔화합을추구하기위함이라는취지설명을듣고선뜻기탁을한것이다. 이밖에도전국각지의
향우회, 재일동포등이대거모금에동참했고, 2003 년 5 월 27 일영모원제막식을가질 수있었다. 영모원조성취지는아래의 위령단을세우는글 에잘나타나있다. 국가와민족을위해사명을다하였다면이는애국자로서그정신과위업을길이보전하고계승시켜나가는것은우리모두의사명이다. ( 중략 ) 일제강점으로국권을빼앗겼을때야학을개설하여청소년들에게독립정신을고취하고독립만세를외치다일본경찰에피검되어모진고문과형옥을치르셨던선열들의넋과세계평화와자유수호를위해국방전선과해외전장에서산화한전몰호국영령을추모하고, 4 3에무고히희생된채구천을헤매는원혼들의명복을빌고자향민의뜻을모아영현비 ( 英顯碑 ), 충의비 ( 忠義碑 ), 위령비 ( 慰靈碑 ) 를세운다. 이영역 ( 靈域 ) 은선인들이남긴숭고한충절의정신을기리며, 후세교육의장으로삼고자한다. 영모원에는가운데위령단이세워져있고우측에 영현비 와 충의비 좌측에 위령비 가세워져있다. 위국절사영현비 에는일제치하민족혼을심고자크고작은저항운동을벌인강문일과박영순 (1955년 8월 15일독립유공자건국포상 ) 등 22명의항일운동가를비롯해모두 100여명의넋을기리고있다. 또 호국영령충의비 는한국전쟁과베트남전쟁에서산화한충렬의넋과 4 3 당시무장대에의해희생된 47명의영혼들을위로하고있다. 4 3희생자위령비 에는모두 303명의 4 3희생자의넋을기리고있다. 영모원의화해정신은위령비문에도드러난다. 이돌앞에서는더이상원도한도말하지말자. 다만섬나라이땅에태어난이들 은모두한번쯤여기와서고개를숙이라. 하귀리영모원조성은이민 ( 里民 ) 화합방안의일환으로시작되었고그효과를누리고있다. 매해 1월 3일지내는위령제에는도내거주주민들뿐만아니라출향인사들까지참석하여선열들의얼을되새기고있다. 또한이를계기로주민들간의친교를더욱돈독히하고있다. 특히마을젊은이들이위령제에주도적으로참여할뿐만아니라, 제단정비에솔선수범하는등세대전승의모범을보이고있다. 실제재무부차관을역임했던고범준박사는생전에영모원위령제를찾아 나는원래하귀리가고향인데, 어느순간고향마을 ( 이름 ) 이없어져본의아닌실향민이되어버렸었다. 고회고할만큼이명 ( 里名 ) 환원과영모원조성은주민들에게커다란의미를지닌것이다. 또한매해 3월 1일, 4월 3일, 6월 6일에는마을회의임원들이참배를하는등선열들의
발자취를더듬으며그넋을기리고있다. 이제영모원은하귀리주민의화합뿐아니라역사의고비고비에서유명을달리한하귀리의희생자들을보듬어역사의화해를시도하는상징적공간으로자리매김되고있다.( 제주4 3평화재단, 4 3과평화 제15호, 2014). 2) 애월읍상가리위령단 ( 慰靈壇 ) 애월읍상가리는 2006년 3월 25일 4 3희생자 42위와 6 25 참전및월남전참전희생자등호국영령 19 위를한데모아추모하는위령단을건립했다. 이위령단건립논의는 2003년 3월임시향회를통해구성된마을지편찬소위원회에서출발한다. 이때 [ 그림 2] 애월읍상가리위령단선출된 7인의소위원회 ( 김재문, 변옥규, 강상래, 양홍준, 양용택, 양동훈, 변승택 ) 는마을지편찬모금과더불어위령단건립기금모금도함께하면좋겠다는의견을모았고이를마을에제안키로했다. 이에따라같은해 6월상가리개발위원회 마을지편찬위원회합동회의를열고위령단건립을최종의결하고전권을소위원회 ( 위원장김재문 ) 에위임키로했다. 소위원회는전몰군인과 4 3희생자를한울타리에모신위령단을건립키로하고, 여러차례의회의를통해부지 ( 애월읍상가리 1328번지의 12, 471m2 ) 를확정하고위령단을건립한것이다. 위령단을건립하는취지는고성기시인이쓴 위령단을세우는글 에잘나타난다. 우뚝솟은한라영봉은그날의슬픔을산자락에묻고목이메인채말이없습니다. 굽어보는남태평양쪽빛바다속절없이푸릅니다. 오늘우리는선조의맥박소리들리는마을작은언덕에모였습니다. 삼가옷깃을여미고북받쳐오르는오열을삼키며산화하신영령들의넋을기리는제단을이곳에세웁니다. 우리상더럭마을주민들의정성과염원을모아비극의눈물을닦습니다. ( 중략 ) 영령들이시어! 우리들작은정성을한데모아위령단을세우고삼가명복을비오니맺힌한일랑이제다잊으시고편히눈감으소서. 희생의참뜻과뜨거운마음을영원히기리고후손에게전하렵니다.
이제단에화해와용서의향불을피워큰사랑을베풀겠습니다. 이제역사의물줄기가밝은미래로힘차게흐를것이니영원히살아빛날영령들이시어! 위령단의오른쪽에세워진위령비에 42위의 4 3희생자, 왼쪽충의비에는 19위의전몰군인영령의이름을새겼다. 이곳위령단에서는매해 4월 6일합동위령제를지내고있다.( 상가리, 상가리와 4 3사건, 2011). 3) 장전리추모원 ( 追慕苑 ) 장전리추모원은 4 3으로억울하게희생된영령들과 1950년 6 25전쟁으로산화한호국영령들의넋을기리기위해장전리민들이힘을합쳐조성한공간이다. 2014년 9월마을총회에서추모원을조성하기로의견을모으고, 제주특별자치도예산지원과지역자생단체 [ 그림 3] 장전리추모원및독지가들의성금등을모아 2015년 6월공사를시작하여그해 11월조성을완료했다. 제주시애월읍장전리 550번지에들어선추모원에는호국영령과 4 3희생영령명단이각인된위령단 ( 慰靈壇 ) 을비롯해위령단의좌우양옆으로호국영령을기리는충혼비 ( 忠魂碑 ) 와 4 3영령을기리는위령비 ( 慰靈碑 ) 가세워졌다. 또한위령단하단에시인오승국의 진혼서시 ( 鎭魂序詩 ) 추모시비와추모원을조성하게된이유와경과를담은표석이설치되어있다. 추모원을조성하며한라영산의혈기가뻗쳐솟고녹고뫼정기가감겨서린땅, 우리마을주민들의끈끈한삶을지켜본 니를 동산에추모원을조성한다. 1948년 4 3사건, 그광란이몰고온비극은우리현대사에서가장불행한역사로기록되고있다. 평화로운우리마을도진압작전이란이름아래초토화되는비운을겪어야했다. 이소용돌이속에서좌우이념이무엇인지도모르고순박하게살아온마을주민일백여명이무고하게억울한희생을당했다.
또한 1950년 6 25 한국전쟁은동족상잔의민족적비극이었다. 당시위기에처한조국을지키기위하여꽃다운젊은이들이결연히출정하여치열한전쟁터에서용감하게싸우다아홉명의용사가장렬히산화했다. ( 중략 ) 추모원의조성으로영령님들이영원한안식처가마련된것이다. 님들도이정든옛동산에모여편히쉬고정도나누며맺힌한도내려놓으시고고이영면하시리다. 이추모원은우리들의성지가되고후세들이평화와인권의소중한가치와충 효 예의산교육장으로삼게될것이다. 이것이님들의유지를받드는우리들의최선의도리라여기며, 추모원을영세에보전할것이다. 2015. 11. 21 장전리민일동 4) 남원읍신례리 4 3을계기로해안가마을과중산간마을사람들이더욱가까워진마을이있다. 바로남제주군남원읍신례1 2리가그곳이다. 신례리는 ' 한참 (2km)' 을사이에두고신례1리 ( 중산간 ) 와신례2리 ( 해안가-공천포 ) 로나뉜다. 4 3 당시신례1리에는 180가구 800여명이살고있었고, 신례2리에는 60여가구 300여명이살고있었다. 규모로따지면 1리가 2리보다 3배정도큰마을이다. 신례리역시 4 3의광풍에서자유롭지못했다. 다른중산간마을보다늦은 12월 11일에신례1리는소개령이떨어졌다. 소개령에따라마을주민들이 12일새벽이삿짐을꾸리던중우익단체인 학생연맹 의급습을받아주민 1명이목숨을잃은이후희생이이어졌다. 토벌대에의해신례1리주민들이죽음을당하는변고를치르는등불행을겪었지만살아남은사람들은소개지인신례2리주민들의따뜻한보살핌으로더이상의큰희생은치르지않았다. 신례2리주민들은 3배규모의 1리주민들이내려오자가구당 2, 3가구를받아들였다. 도의원을지낸양금석은 저희집은소개기간동안공천포 ( 신례2리 ) 에사는김대국씨의밧거리에살았습니다. 물론집을얻지못한주민들은모래판위나함바를지어서살았죠. 저희는거의김씨의가족과같이생활했습니다. 방이며부엌을같이사용하고, 굴묵에서밥도먹었습니다. 그당시모두어려웠던시기에참신세를많이졌습니다. 우리뿐만아니라저희마을모든사람들이아랫동네사람들에게신세를진것입니다. 모두고마워하고있습니다. 라고증언했다. 4 3 당시많은일가친척이피해를본정수현씨도비슷한기억을간직하고있다. 우리는오순란씨댁에서살았습니다. 당시폭도가족으로낙인찍혀있던우리가족은그고
마움을잊을수없습니다. 57 년이지난지금도그가족들과는친부모, 친형제처럼지내고 있습니다. 또한개인적인문제뿐만아니라마을차원에서도단합이잘이뤄져마을간다 툼이한번도없었습니다. ( 제주의소리, 2005. 4. 2.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