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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04 타임라인으로보는대한제국 06 대한제국행사 BEST 궁중문화축전 12 조선으로떠나는시간여행 17 궁중생활체험하기 20 궁궐의밤 24 역사와문화가흐르는궁궐 32 4대궁과종묘알아보기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 38 MAP 40 한눈에

Transcription:

한양의 중심이었던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法 宮,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북으 로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지금 의 세종로)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 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 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 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 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 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 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 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복원되었다. 경복궁의 명칭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 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 景 福 宮 )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의 원인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두 불타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1592년 4월 30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 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달리 <선조실록> 5월 3일자 기사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 고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본의 장수였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 5월 3일자에는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 秦 宮 )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라고 적혀 있어, 왜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궁궐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의 상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 볼 때 화재의 원인은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1 광화문과 궁궐 담장 光化門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는 4대문 경복궁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에 달하고, 평균 높이는 5m, 두께는 2m 정도이다. 담장의 사방에는 4대문을 만들고, 1426년(세종 8)에 건춘문(建春門 -동), 광화문(光化門-남), 영추문(迎秋門-서), 신무문(神武門-북)이라 이름 붙였다. 이는 각각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운데 자리한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전통적인 오행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3개의 홍예문이 나 있는 높은 석축 위에 중층의 문루가 높이 앉아 있는 장려한 건물이다. 전면 담장의 두 끝 모퉁이에는 망루인 동십자각 (東十字閣)과 서십자각(西十字閣)을 세워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었다.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동십자각은 도로 확장으 로 인해 담장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궐 밖의 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되었다.

광화문의 수난과 복원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자 경복궁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을 없애려 하였다. 그 러나 극심한 반대 여론에 부닥치자 마지못해 경복궁 동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놓고 말았다. 그 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석축만 남고 부서진 것을 1968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으나, 당시 도로와 주변 건물의 축에 맞추었기 때문 에 원래 모습이나 위치와는 차이가 있었다. 재건한 광화문은 2006년에 철거하고 다시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세 번의 이 전 끝에 드디어 2010년에 원형복원되었다. 용성문 用成門 흥례문 興禮門 광화문 光化門 협생문 協生門 동십자각 東十字閣 육조거리에 서 있었던 해태상 지금은 광화문 좌우에 가까이 앉아 있는 해태 상이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에서 약 80m 떨어진 육조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육 조거리란 당시 광화문 앞으로 조선의 중추적인 관서들이 늘어서 있어 붙은 이 름이다.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는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받아 버린다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1890년대 사진을 보면 해태상 앞에 ㄴ 자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데, 이는 왕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여기에서 탈것으로 부터 내려야한다는 하마(下馬) 표지였다. 해태상에서 광화문까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걸어서 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03

2 근정전 일원 勤政殿 옛 모습을 되찾은 궁궐의 중심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 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 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의 접 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궁궐전각 밑에 놓인 섬 돌)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마당이 바로 조정(朝 庭)이다. 남쪽 회랑에 근정문(勤政門)을 두었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외행각 남쪽에는 흥례문(興禮門)을 내었다. 일제가 조 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근정문 바깥 영역을 철저히 파괴했으나, 2001년에 흥 례문과 외행각, 영제교 등을 복원하여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근정전은 국보 제223 호, 근정문 및 행각은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정과 품계석, 쇠고리 근정전의 마당, 즉 조정( 朝 庭 )에 깔려 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 러 거칠게 다듬었다. 조정 한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온 길은 어도( 御 道 )라 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어도 좌우에는 신하들이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을 세웠다. 근정전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 동그란 쇠고리가 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왕과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있을 때 햇빛이나 비를 가려 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근정전에서 열리는 조회 근정전에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었다. 조회 에는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여하였다. 품계석 앞에 신하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자리는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영제교의 서수 근정전 勤 政 殿 근정문 勤 政 門 영제교 永 濟 橋 흥례문 興 禮 門 처마 밑의 그물과 오지창의 용도 근정전 처마 밑에 그물이 걸려 있는데 이를 부시 라고 한다. 최근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 터 사용하던 것이다. 새의 배설물은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지만 강한 산성이라 목조건물인 궁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회랑이나 궐담 등 그물을 치기 힘든 곳에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 05

쥐 닭 토끼 현무 원숭이 백호 청룡 소 주작 양 뱀 호랑이 드므 월대의 구성과 시설물 말 향로 근정전 월대 위에는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난간을 두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四神) 과 십이지신 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근정전의 위상과 법전으로서의 격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동물상은 근정전과 왕 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동물들이며,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학과 친근함, 인간미가 느껴진다. 기단 좌우측에는 향 로가 있다. 이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근정전에서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향을 피우던 의기(儀器)이다. 궁궐의 주요 전각에 넓적하게 생긴 큰 독 드므 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화마(火魔)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 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감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것이다. 06

3 사정전 일원 思 政 殿 국정이 행해지던 곳 사정전은 왕의 공식적 집무실인 편전( 便 殿 )으로, 그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정전 좌우에 있는 만춘전( 萬 春 殿 )과 천추전( 千 秋 殿 )은 온돌방을 갖추어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보조 편전이다. 조선초기에 이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었으나, 고종 때에는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 졌다. 만춘전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88년에 복원했다. 사정전 앞의 행각은 왕실 재물을 보관하는 내탕고로 이용했다. 사정전은 보물 제1759호로 지정 되어 있다. 내탕고 內 帑 庫 천추전 千 秋 殿 사정전 思 政 殿 만춘전 萬 春 殿 상참에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세종대왕 사정전에서는 매일 새벽 3~5시 사이에 상참( 常 參 ) 이라는 어전회의가 열렸 다. 세종은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참에 참석했다고 한다. 어느 날 우의정 류관이 주상께서 매 일 회의에 참석하시느라 피곤하실 터이니 하루 걸러 참석하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라고 여쭈었더니 세종은 우의정께 서 매일 입궐하기 힘드신가 본데 앞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시려거든 미리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알리도록 하오 라 며 거절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에는 상참과 경연이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다. 07

4 강녕전과 교태전 康寧殿 交泰殿 왕실의 생활이 묻어 있는 곳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침전(寢殿)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 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 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강녕 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정(井) 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교태전은 경 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계 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보물 제811호)이 아름답다. 1917년에 창덕궁 의 침전이 소실되자 일제는 목재를 조달한다는 명분으 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현재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5년 에 복원한 것이다. 아미산 峨嵋山 교태전 交泰殿 강녕전 康寧殿 양의문이 여섯 짝인 이유 교태전이라는 이름은 주역의 원리와 닿아 있다. 교 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兩儀門)까지도 음양을 의미하는 뜻으로 이름을 지 었으니, 왕과 왕비가 만나 잘 교통하여 후손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뜻을 중전의 침전에 담고자 한 것이다. 양의문은 강녕전의 대문인 향오문과 특히 다른 점이 있다. 향오문은 두 짝으로 둔중한 데 비해 양의문은 여섯 짝으로 가볍게 만들었 다는 점이다. 교태전은 여인들의 처소였으므로 여인들이 힘 들이지 않고 여닫 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상들의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다. 전하와 중전의 어원 우리가 일반적으로 왕의 호칭으로 알고 있는 전하(殿下) 는 궁궐의 전각과 관련 있는 말이다. 전 하 는 전각 아래에서 엎드려 우러러본다는 극존칭의 의미로 전(殿) 에 사는 왕이나 왕비에게 붙이는 것이다. 왕비의 침전은 궁궐 한가운데 있고 궁궐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중궁전(中宮殿) 이라 하고, 왕비는 중전(中殿)마마 라 칭한다. 세자가 거처하는 곳은 내전의 동편에 배치하고 그 지역을 동궁(東宮)이라 불렀다.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09

5 흠경각과 함원전 欽 敬 閣 含 元 殿 왕실의 필요에 의해 내전 가까이 지었던 건물들 흠경각은 농업 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던 왕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다. 세종은 1438년에 흠경각 건립을 명 하고 여기에 옥루기륜( 玉 漏 機 輪 ), 앙부일구( 仰 釜 日 晷 ) 등의 시간 측정기구와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 簡 儀 )를 만들어 설치했다. 경복궁 내전 깊숙이 위치해 주로 불사( 佛 事 )를 행하던 함원전도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인 데도 세종 등 여러 왕과 왕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몇 차 례의 소실을 거쳐 1888년(고종 28)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의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가 창덕궁 재건을 위해 뜯어 갔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함원전 含 元 殿 흠경각 欽 敬 閣 10 앙부일구( 仰 釜 日 晷 )는 해시계, 옥루기륜( 玉 漏 機 輪 )은 물시계 장영실이 1434년(세 종 16)에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시간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 수 있는 다기능 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 모양으 로 된 점에 비추어 볼 때 당시 학자들은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었으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옥루기륜은 해시계의 단점을 보완한 자 동 천문 물시계이다. 물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인형들이 시각에 맞춰 정확하게 움직 이면서 목탁, 북, 징, 종을 자동으로 치게끔 만들어졌다.

6 자경전 일원 慈慶殿 흥선대원군이 선물한 대비전 헌종(24대)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 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 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이다. 자경전은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 일원은 남향인 자경전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복안당( 福 安 堂 )을, 동쪽에 청 연루( 淸 讌 樓 )와 협경당을 연결한 복합 건물군이다. 복안당에는 온돌을 들여 겨울 용 침전으로, 청연루에는 누마루를 설치해 여름용 거실로 삼았다. 서쪽 담에 만수 무강을 기원하는 문양들과 갖가지 꽃나무들을 새겨 넣어 최고의 감상용 꽃담을 만 들었다. 또한 뒤편 담장에는 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굴뚝을 설치했다. 십장생 무늬 굴뚝(보물 제810호) 자경전에는 온돌방을 많이 마련했는데, 각 방들과 연결된 10개의 연기 길을 모아 북쪽 담장에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 다. 땅 밑으로 난 연기 길은 담장과 그 앞으로 한 겹 내밀어 쌓은 벽 사이로 이어 져 있다.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들을 묘사하고, 위 아래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굴뚝의 기 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연루 淸 讌 樓 자경전 慈 慶 殿 복안당 福 安 堂 십장생 굴뚝 十 長 生 烟 囱 협경당 協 慶 堂 고종을 즉위시킨 신정왕후의 힘 신정왕후 조씨는 남편 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하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대비가 되 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즉위시켜 신정왕후의 힘을 약화시켰다. 안동 김씨의 서슬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철종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인조의 8대 손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신정왕후는 철종 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차남을 양자로 삼고 고종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12세여서 10년간 수렴 청정을 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12

7 동궁 일원 東 宮 떠오르는 태양, 왕세자의 거처 왕세자는 새로 떠오르는 해처럼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내전의 동쪽에 거처를 배 치하고 이를 동궁이라 불렀다. 서쪽의 자선당( 資 善 堂 )은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 던 내전이고, 동쪽의 비현각( 丕 顯 閣 )은 공부를 하며 정무도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남쪽의 춘방( 春 坊 ) 터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이, 계방( 桂 坊 ) 터에는 의전과 경호를 담당하던 익위사가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부속 관청들이 있었다. 조선 초에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으며, 궐 안에 동궁전으로 자선당을 짓기 시작 한 것은 1427년(세종 9)이다.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1867년에 재건된다.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핑계로 1914년에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했다. 이 건물들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자선당 資 善 堂 비현각 丕 顯 閣 계방 터 桂 坊 춘방 터 春 坊 나라 밖 여행을 다녀온 수난의 자선당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고, 자선당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 은 일본인에게 팔려가기도 하였다.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빼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옮긴 뒤 조선 관 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돌들을 1993년에 김정동 교수가 발견하여 노력 끝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화재로 인해 이미 상해 버린 돌들은 자선당 복원 때 쓰이지 못하고 건청궁 동편 녹산 한쪽에 놓여져 있다. 13

8 함화당과 집경당 咸 和 堂 緝 敬 堂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 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동궁터 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 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전( 嬪 宮 殿 )으로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 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신정왕후가 이곳 흥 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 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 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함화당 咸 和 堂 집경당 緝 敬 堂 흥복전 興 福 殿 수다문과 궁녀들의 소망 흥복전의 서행각에는 수다문( 受 多 門 )이 있었다. 수다문은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었던 후 궁과 궁녀들의 소망을 그대로 반영하듯 많이 받는다 는 뜻을 담고 있어 눈에 띈다.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궁녀는 겉치 마를 뒤집어 입어 표시를 하고 그 후로는 여느 궁녀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하룻밤 승은을 입었다고 해서 바로 후궁이 되는 것도 아니고, 후궁이 된 뒤에도 매일 왕의 부름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여인네들에게는 수다문 이라는 이름이 남다르게 느껴졌을 법하다. 14

9 향원정과 건청궁 香遠亭 乾淸宮 고종을 위해 지은 궁 안의 궁 함화당과 집경당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 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 전쟁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정은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조성한 것이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 궁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 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 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 에 헐린 후 1939년에는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향원정은 보물 제17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비극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 섭을 시작한다. 이에 친러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 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깡패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저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 른바 을미사변이다. 향원정 香遠亭 관문각 터와 전기 발상지 고종은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향원지 북쪽에 는 최초의 발전소를 지어 건청궁의 밤을 밝혔고,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은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이었으나, 1891년에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으로 하여금 서양 식 3층 건물로 다시 짓게 했다. 향원지의 물을 이용한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전기 를 물불 이라 불렀다 한다. 당시 전기의 도입은 에디슨전기회사를 통해 이루어졌 는데, 이는 동아시아 최초였다. 그 무렵 에디슨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다! 16

열상진원샘 건청궁에서의 마지막 밤과 아관파천 경복궁 전각들 중 궁 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 이다. 그러나 고종이 건청궁에서 생활한 것은 10년 남짓한 세월뿐이다. 을미 사변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드 디어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변복을 한 채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 러 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 이라 한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복수당 福 綏 堂 장안당 長 安 堂 곤녕합 坤 寧 閤 청와대가 된 경복궁 후원 신무문 북쪽 경복궁 후원 영역에는 융문당( 隆 文 堂 ), 융무당( 隆 武 堂 )과 옥련정( 玉 蓮 亭 ), 경농재( 慶 農 齋 )와 왕이 직접 농사를 지 어 보던 내농포( 內 農 圃 ), 왕이 군사훈련을 점검할 수 있는 경무대( 景 武 臺 )등 여 러 건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이 후 원 영역에 총독관저를 짓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경복궁 후원 영역 이 경복궁에서 떨어져 나간 시점이다. 총독관저는 미군정기에는 군정장관의 관 저로, 그 이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다가 1960년에 청와대 라 개칭하였다. 17

10 집옥재 일원 集 玉 齋 청풍( 淸 風 )과 조선풍의 조화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다시 경 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1891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 던 집옥재와 협길당( 協 吉 堂 )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 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 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 八 隅 亭 )은 팔각 누각으 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반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되며, 각 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집옥재( 集 玉 齋 ) 현판 팔우정 八 隅 亭 집옥재 集 玉 齋 협길당 協 吉 堂 청풍 건축( 淸 風 建 築 ) 1880년까지는 청나라가 거의 유일한 선진 문물 수입 창구였다. 이 영향으로 집옥재와 팔우정을 비롯해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 흥 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도 청나라풍으로 지어졌다. 화려한 장식과 입체적인 공간, 벽돌과 같은 새로운 재료 사용 등이 청풍 건축의 매력이었다. 18

11 태원전 일원 泰 元 殿 왕위 정통성 확보를 위한 고종의 노력 왕자 출신이 아니었던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과 함께 왕권 승계의 정통성 시비에 대응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태원전( 泰 元 殿 )을 지어 역대 임금의 초상인 어진( 御 眞 ) 을 모심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1868년(고종 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원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후에는 명성 황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 殯 殿 )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문경전( 文 慶 殿 )은 위패를 모신 혼전( 魂 殿 )으로 건립했 다. 주변에 공묵재, 영사재 등 의례용 건물도 들어서 신성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 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이곳은 청와대가 가깝다는 이유에선지 5 16쿠데타 이후 청와대 경호부대가 들어섰으며, 1979년 이른바 경복궁 모의 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2006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공묵재 恭 默 齋 영사재 永 思 齋 태원전 泰 元 殿 왕실의 장례 왕이 승하하면 5일 동안 혼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세자가 즉위 하고, 왕의 시신은 관에 넣어 빈전에 안치한다. 국장은 5개월인데 이 기간이 지 나면 왕릉에 관을 옮겨 묻고, 왕의 혼을 담은 신주( 神 主 )를 혼전에 안치하여 삼 년상을 치른다. 1년이 되면 첫 번째 제사인 연제(소상)를, 2주기에는 상제(대상) 를 지내고, 그 두 달 후에는 담제를 지내 삼년상을 마친다. 19

12 경회루 慶會樓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 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태 종 12)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 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 층이며, 넓이 931 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 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 중궁(中宮) 부분이 가장 높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경회루는 주역( 周 易 )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의 3칸은 천지인( 天 地 人 )을, 12칸은 1년 열두 달을, 20칸 바깥에 있는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높낮이 경계 부분에는 들어열개(위쪽으로 들어 여는 문) 창호가 달려 있어 창호를 내리면 각각 닫힌 방이 된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 雜 像,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神 像 을 새겨 넣은 장식 기와)이 있다. 재건 당시에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 용을 연못에 넣어 물 과 불을 다스리게 했다 하며,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출토하여 국립고궁박물 관에 전시하고 있다. 경회루는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회루 慶 會 樓 경회루에 몰래 들어갔다 출세한 사연 일제강점기 때 헐리기 전 경회루 연못 둘레에는 사방을 둘러싼 담장과 동 서 남문이 있었으며 궁인들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세종 때 교서관에 근무하던 구종직이란 자가 숙직을 서던 어느 밤 경회루에 몰래 숨어들어가 풍치를 즐기다가 왕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가 경회루를 구경하고 싶어 미관말직의 몸으로 죄 를 저질렀다고 고하자, 세종은 풍류를 아는 자라 여겨 노래를 불러 보라 하였다. <춘추( 春 秋 )>까지 외우게 한 왕은 다음 날 구종직을 불러 정9품이던 그에게 종5품을 하사하였다. 흥청망청의 기원 흥에 겨워 즐기거나 돈을 마구 쓰는 모양새를 일컫는 흥청망청 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부 분 연산군, 경회루와 관련이 있다. 연산군은 조선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운평( 運 平 ) 이라는 기생으로 만들었는데, 이들 중 궁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 興 淸 ) 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경회루 등에서 흥청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고, 결국 맑 음을 일으키는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 하는 망청이 되었다. 21

경회루와 치마바위 전설 경회루의 2층 누각에 오르면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 다. 중종은 반정에 성공한 후 연산군과 관계된 처가 때문에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시켜야 했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함께 한 정분을 잊을 수 없어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에 있는 신씨의 집을 바라보곤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신씨는 경 회루에서 중종이 바라볼 때 눈에 잘 띄도록 궁궐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았다. 중종이 바위에 놓 인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 싶은 마음을 삭였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경회루와 관련하여 전해 온다. 비운의 단종과 경회루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이 조정을 장악하고 단종을 보위하던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과 궁인, 신하들까지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게 된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면서 옥새를 넘겨 준 곳이 바로 경회루이다. 이에 분개한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훗날을 기약하자며 만류했다고 한다. 이들은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해 경복궁 사정전 앞뜰에서 친국(親鞫)을 당하고 결국 사형에 처 해져 사육신이 되었다. 경회루전도 중 36궁 지도 출토된 청동룡 장고(醬庫) 함화당 서쪽에는 궁중 연회와 제례에 쓰이는 장을 보관하던 장고가 있다. 북궐도형에는 함화당과 집경당 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 두 곳에 장고가 있는데, 이 중 서편의 장고를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2005년 복원했다. 경사지 를 활용한 계단식 장독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2007년 전국에서 수집한 독을 지역과 용도별로 나누어 전시하고있다. 용도별 독 한국의 아름다운 독 지역별 독 예성문 22

13 수정전과 궐내각사 修 政 殿 闕 內 各 司 왕실 업무를 위한 관청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을 궐외각사라 하고,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청 들은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크게 네 부류로 나 눌 수 있다.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 등은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정치 행정기구였다. 내반원, 상서원, 상의원, 사옹원, 사복시 등은 왕족의 생활과 활동 을 보좌하던 실무 관서였다. 흠경각, 보루원, 관상감, 간의대 등은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과학 부서였고, 도총부, 내병조, 선전관청, 충장위 등은 궁궐 수비와 왕 족 경호를 맡은 군사 부서였다. 궐내각사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정전 은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1867년 수정전은 왕의 출입이 빈번하여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대를 두었다. 수정전은 일상 집 무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하기 도 했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 빈 터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 회를 개최하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수정전은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정전 修 政 殿 23

발행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