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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Transcription:

국역 승정원일기 인천광역시 옹진군, -장봉도, 선재도, 영흥도, 덕적도, 굴업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2 - 인천광역시 옹진군 - 장봉도 <목 록> 번호 년대 전거 내용 1 1865 고종 2년 4월 26일(경인) 양근 등 읍진의 관리들의 포흠에 대하여 다시 조 사하여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장봉 만호 윤창업이 경복궁 건축에 들보감으로 2 1865 고종 2년 10월 2일(계사) 쓸 목재가 떠내려오는 것을 건져 올려 보냈다는 강화 유수 이인기의 장계 3 1866 고종 3년 11월 15일(경오) 장봉 만호를 별장으로 고쳐 하비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4 1866 고종 3년 11월 16일(신미) 병비의 관원 현황 5 1867 고종 4년 6월 24일(병오) 병비의 관원 현황 성정각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우부승지 윤현 6 1868 고종 5년 윤4월 29일(병자) 기 등이 입시하였다 7 1868 고종 5년 6월 14일(경신) 병비의 관원현황 8 1869 고종 6년 6월 24일(갑자) 신명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9 1869 고종 6년 11월 10일(정축) 자경전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김병학 등이 입시하였다 10 1871 고종 8년 6월 20일(기묘) 병비의 관원 현황 11 1873 고종 10년 6월 13일(경신) 서상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2 1875 고종 12년 6월 6일(신미) 병비의 관원 현황 13 1877 고종 14년 5월 14일(무진) 병비의 관원 현황 14 1879 고종 16년 4월 30일(계유) 이종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5 1881 고종 18년 5월 7일(무진) 병비의 관원 현황 16 1881 고종 18년 8월 19일(무인) 병비의 관원 현황 17 1883 고종 20년 6월 25일(계유) 이호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8 1884 고종 21년 4월 14일(무오) 군병과 군량미를 보장하여 병비에 힘쓸 것을 청 하는 판돈녕부사 민영목의 상소 경기 연안의 해방 사무 민영목의 상소에서 청한 19 1884 고종 21년 4월 21일(을축) 20 1884 고종 21년 5월 27일(신축) 21 1884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22 1884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대로 각도의 망정결을 경기로 보낼 것 등을 청하 는 의정부의 계 경기 연해의 해방영 둔전에 대해 남양 등의 목장 개간지를 해당 아문에 획급해주겠다는 사복시 일 제조 등의 계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남양 등의 겸감목관을 오늘 정사에서 감하하겠다 는 병비의 계 23 1884 고종 21년 6월 30일(임인)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경기 감사 김굉집 등 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24 1886 고종 23년 7월 29일(기미) 병비의 관원 현황 25 1886 고종 23년 12월 29일(정해) 병비의 관원 현황 신병이 있는 장봉 별장 최치진을 파출할 것을 청 26 1887 고종 24년 윤4월 27일(갑인) 하는 병조의 계 27 1887 고종 24년 윤4월 27일(갑인) 병비의 관원 현황

3-28 1889 고종 26년 1월 30일(병자) 신병이 있는 장봉 별장 호성한을 파출할 것을 청 하는 병조의 계 29 1889 고종 26년 1월 30일(병자) 김재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0 1889 고종 26년 2월 11일(정해) 병비의 관원 현황 31 1889 고종 26년 4월 29일(갑진) 장봉 별장 최대완의 어미의 나이가 75세이므로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32 1889 고종 26년 4월 29일(갑진) 병비의 관원 현황 33 1890 고종 27년 10월 29일(을축) 이정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4 1891 고종 28년 7월 29일(신묘) 허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5 1892 고종 29년 6월 1일(정해)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정문석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36 1892 고종 29년 6월 1일(정해) 병비의 관원 현황 37 1892 고종 29년 7월 30일(을묘) 정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8 1893 고종 30년 2월 7일(경신) 통진의 둔전답 등을 해연총제영에 이속시켜 군수 에 쓰도록 할 것을 청하는 내무부의 계 39 1893 고종 30년 3월 13일(을미) 신병이 있는 동지중추부사 이동섭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40 1893 고종 30년 3월 13일(을미) 윤용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병이 있는 문성 첨사 이학산 등을 개차하고 후 41 1894 고종 31년 9월 17일(경인) 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고종 33년 12월 11일(신미, 대부도와 영종도를 합하여 대부군으로 만들 것 42 1896 양력 1월 13일) 등을 청하는 전 현감 이응선의 상소 고종 36년 12월 21일(갑오, 영종도 사람들이 상언한 군을 설치하고자 한 안 43 1899 양력 1월 21일) 건은 시행할 수 없다는 의정부 참정 김성근의 계

4 - <내 용> 1. 1865 / 고종 2년 4월 26일(경인) / 양근 등 읍진의 관리들의 포흠에 대하여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전번에 삼가 자전의 하교를 받들고 지방 고을의 관리들의 포흠에 대하여 끝까지 사실을 조 사하여 보고하도록 각도에 행회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방금 경기 감사 조재응( 趙 在 應 )의 장계를 보니 양근( 楊 根 )ㆍ안성( 安 城 )ㆍ용인( 龍 仁 )ㆍ적성( 積 城 )ㆍ연천( 漣 川 )ㆍ화량( 花 梁 )ㆍ덕 포( 德 浦 )ㆍ장봉( 長 峰 ) 등 8개 읍진( 邑 鎭 )에서 수만 포의 곡식이 다 아전과 하례와 민간에서 유용되고 포흠되었는데, 증명할 장부가 없어 내력을 찾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존한 범인들이 다 도피하여 아직 체포하지 못하고 있기에, 잡아들이도록 연이어 신칙한 뒤에 다 시 보고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1백 포 미만의 포흠은 번거로워 일일이 다 거론하지 않 았고, 포흠하기 시작한 연도와 곡식 이름과 수량을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수령을 교체한 뒤에 만약 진범이 나타나면 장오죄( 贓 汚 罪 )의 법으로 시행하고, 아전이나 방임( 房 任 )도 또한 차례로 차출할 일에 대하여 말을 만들 어 지시하소서. 하였습니다. 읍진에서 포흠을 한 놈들이 1백 20여 명인데, 양주( 楊 州 )에서 1백 석을 포흠한 한 명만이 지방에 유배되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다 죽었거나 도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으로 보면 일체 법으로 처리할 길이 없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다시 엄정하게 조사한 뒤에 수정하여 보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 1865 / 고종 2년 10월 2일(계사) / 장봉 만호 윤창업이 경복궁 건축에 들보감으로 쓸 목재가 떠내려오는 것을 건져 올려 보냈다는 강화 유수 이인기의 장계 강화 유수( 江 華 留 守 ) 이인기( 李 寅 夔 )의 장계에, 경복궁 건축에 들보감으로 쓸 목재가 떠 내려오는 것을 장봉 만호( 長 峯 萬 戶 ) 윤창업( 尹 昌 業 )이 위험을 무릅쓰고 건져 올려보냈습니 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듣고 보니 매우 가상하다. 이러한 내 뜻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가자하고, 자 급에 구애받지 말고 1년 간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3. 1866 / 고종 3년 11월 15일(경오) / 장봉 만호를 별장으로 고쳐 하비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아뢰기를,

5 - 지금 경기 감사 유치선( 兪 致 善 )의 보고를 보니, 장봉 만호( 長 峰 萬 戶 )는 본영의 장교 중에 서 임명하는 자벽과( 自 辟 窠 )로 되어 임기가 차면 망보( 望 報 )해야 하는데, 원래 자급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규례상 의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개호( 改 號 )를 하거나 자리를 바꾸거나 좋은 쪽으로 변통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자격이 이미 구애되는데 자리를 바꾸는 것 은 갑자기 논의할 수 없는 일이니, 별장( 別 將 )으로 고쳐 하비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4. 1866 / 고종 3년 11월 16일(신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김병주는 나왔다. 정운익( 鄭 雲 翼 )을 도총관으로, 이중영( 李 重 榮 )ㆍ이학주( 李 鶴 周 )를 부총관으로, 박유붕( 朴 有 鵬 )를 동지로, 이면희( 李 冕 熙 )를 훈련원 도정으로, 정운귀( 鄭 雲 龜 )를 내금위장으로, 김기명 ( 金 沂 明 )ㆍ유정주( 兪 廷 柱 )ㆍ방윤겸( 方 允 謙 )을 오위장으로, 김영진( 金 永 鎭 )을 어영청 기사장으 로, 구동식( 具 東 植 )을 총융청 파총으로, 신효철( 申 孝 哲 )을 영종 첨사( 永 宗 僉 使 )로, 조현택( 趙 顯 宅 )을 공충도 수군우후로, 박만엽( 朴 晩 燁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이종빈( 李 宗 彬 )을 승천보 만호( 昇 天 堡 萬 戶 )로 삼았고, 공충도 병마절도사에 단부한 김선필( 金 善 弼 )과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단부한 오하영( 吳 夏 泳 )열 서로 직임을 바꾸었는데,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 든 것이다. 5. 1867 / 고종 4년 6월 24일(병오)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참지 강건은 나왔다. 강진용( 姜 振 龍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6. 1868 / 고종 5년 윤4월 29일(병자) / 성정각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우부승지 윤현기 등이 입시하였다 진시( 辰 時 ). 상이 성정각에 나아가 대신과 정부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입시한 우부승지 윤현기, 가주 서 정응철, 사변가주서 김우현, 기사관 박정양과 최봉구, 영의정 김병학, 행 상호군 김학성 ( 金 學 性 ), 행 이조판서 한계원, 행 예조판서 조석우, 수원부 유수 이경하( 李 景 夏 ), 행 대호군 김세균, 공조 판서 이풍익( 李 豐 翼 ), 병조 판서 김수현( 金 壽 鉉 ), 행 대호군 이용희( 李 容 熙 ), 행 호군 이원희( 李 元 熙 ), 종정경 이종승( 李 鍾 承 ), 교리 이혁준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6 - 하고, 이어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김병학이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묻기를 마치 자 상이 이르기를, 차대를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천신( 賤 臣 )을 이 직임에 다시 두신 것이나 천신이 이 직임을 이미 물러난 뒤에 다시 맡은 것이나 진실로 공사 간에 타당하지 못합니다. 나이 많고 덕있는 원보( 元 輔 )와 훌 륭한 공적을 이룬 정승들이 서로 이어 은퇴를 고하여 마침내 그 지위를 구차히 채운 자가 바로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형편없는 천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에 정승을 임명하는 것 이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정승 임명을 발표하는 날에 백관들의 의논은 반드시 도대 체 저 사람은 중서( 中 書 )를 몇 번이나 맡는 것인가. 자기가 나라를 위해 무슨 옳은 일을 도 모하고 성상을 제대로 보좌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금방 물러났다가 또 도로 무릅쓰고 차지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아니면 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듯한 태도이구나. 라고 말할 것 이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장차 뭇사람들의 의혹을 어떻게 풀 것이며 여론을 어떻게 진정시킬 것입니까. 신이야 기왕 잘못된 몸이니 오히려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식자들이 속으로 한탄할 것이니 조정을 위한다면 이러한 조치를 어찌 애석히 여기지 않겠습 니까. 지금 신이 예의와 염치를 팽개치고 전하의 앞에 무릅쓰고 오른 것이 어찌 예전에 공 효를 이루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 요행히 되지나 않을까 생각해서이겠습니까. 진실로 처음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 확실하게 사양을 하지 못해서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더럽혀졌는 데, 처음 스스로 한계를 긋지 못했던 자가 지금 반드시 사양하고야 말겠다. 라고 한다면, 성 상께서 신의 본심을 통촉하지 못하시고서 그 전후가 판연히 다르다고 문책하실까 스스로 생 각되었습니다. 때문에 신이 부득이 황송한 심정을 머금고 나와 성상의 뜻을 만에 하나라도 메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주( 附 奏 )하는 것은 체모가 지엄하고 상소로 진달하는 것은 글솜씨가 졸렬하여 낮은 데로부터 듣는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했습니다. 때문에 오직 조 그마한 땅을 빌려 품고 있는 진심을 모두 진달드려 이해를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이 원로대신으로 자처하여 의기양양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겠습니까. 만 번 바라건 대, 신의 직임을 깎으시고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다시 임명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만드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나와서 명을 받았으므로 내가 매우 기쁘다.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전유하시면서 내린 교지를 삼가 보았는데, 사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써 성념( 聖 念 )에 지극히 근심하고 계셨습니다. 생각건대, 지금 국가가 멀리 보고 대비해야 할 크나큰 우환으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근년 이래로 금령을 엄준하게 하여 무릇 법을 범하면 문득 죄를 주고 있는데도, 오히려 다시 뱀이나 지렁이처럼 서려 있어서 그 자 취가 망측합니다. 도적떼가 될까 염려가 될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 외구( 外 寇 )를 끌고 들 어와 각종 변괴가 발생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기필코 섬멸하여 한 나라에 함께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분개하는 여론이 그러하고 왕법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간간이 며칠 동안 국문하여 사류의 우두머리들을 섬멸했다 하지만, 잠깐 깨어졌다 더욱 견고해지고 잠깐 꺼졌다가 다시 치성해져서 또 무슨 화를 만들어내지나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들이 서로 얽혀 만연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인심이 그릇되어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7 - 이들을 만약 눈을 밝게 뜨고 용기를 내어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하기를 우 임금이 홍수와 맹수를 깨끗이 소통시키고 몰아낸 뒤에 그만둔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꼴 이 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 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그 근원을 궁구해보면, 이는 오랑캐들의 음사한 여기( 厲 氣 )로서 공격하여 물 리치기 쉬운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미혹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이리저리 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로 정학( 正 學 )이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연전에 경연 에서 주달할 때 또한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 를, 덕을 닦지 못하고 학문을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근심이다. 고 하셨습니다. 지금 만약 덕을 닦고 학문을 궁구하여 우리 도가 크게 밝아진다면, 비유컨대 태양이 환히 비춤에 무지개가 저절로 사라지듯이 백성들이 선에 옮겨가고 허물을 멀리하면서 옳은 도리를 밝게 알 것입니다. 백성들을 매우 빠르게 교화시키는 것은 또한 전하께서 몸소 솔선하는 교화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시종일관 성상의 생각을 학문에 돈독히 하시고, 그 일에 때맞추어 민 첩히 힘써 그 덕을 일신하십시오. 그리고 경전의 뜻을 탐색하여 의리의 근원을 환히 알고, 역행하여 발전하는 것을 참으로 알아서 계속적으로 광명한 경지로 나아간다면, 정령( 政 令 ) 과 거조가 바른 데서 한결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옆에서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는 자 들이 집집마다 수사( 洙 泗 )의 행실에 종사할 것이며 염락( 㾾 洛 )의 책을 읽을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저 일종의 사특한 설은 그 틈을 엿볼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정학을 밝힌다 는 것입니다. 무릇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지런히 하여 물에 빠진 사람과 불타고 있는 사람을 급급히 구 제하듯이 하소서. 그리하여 전에 물든 사람들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주어 각각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보존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백성을 고르게 밝혀주고 화합시키는 경지에 도 달하는 것은 진실로 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정학을 강명하라는 경의 말 이 진지하고도 간절하니, 마땅히 항상 가슴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수령들이 직무를 방치하는 것을 전후로 신칙하셨는데, 사무가 적체되는 것이 문제일 뿐만 아닙니다. 아전들이 혹 농간을 부림에 백성들이 그 피해를 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수령이 말미를 받는 데 대한 관찰사의 공문을 몸소 가지고 와서는 그 가고 머물고를 마음대 로 하니, 법을 제정한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이조에 분부하여 하나하나 적발하여 곧장 파 직으로 논죄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런 내용을 공문으로 각각의 해당 도신( 道 臣 )에게 신칙 하여, 말미를 받는 데 관한 공문을 해당 수령이 지니고 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정식에 의 거하여 이조에 바로 송부함으로써 상고하는 바탕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묘당에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즉시 내려보내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행 상호군 정기세( 鄭 基 世 ), 행 호군 이삼현( 李 參 鉉 )을 모두 정부 당상으로 도로 차임하고, 형조 판서 김유연( 金 有 淵 )을 정부 당상으로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8 - 하였다. - 탑교( 榻 敎 )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강원도 관찰사 조석여( 曺 錫 輿 )가 상주한 것을 보니, 그 내용에, 본도의 상정( 詳 定 )은 본래부터 넉넉하지 못하여, 매번 환곡의 모조( 耗 條 )를 돈으로 대답한 것 가운데에서 4160냥 을 해마다 보충해왔습니다. 그런데 계해년 봄 이정청( 釐 整 廳 )의 절목( 節 目 )으로 인하여 각읍 의 상정이 남든 부족하든 스스로 읍에서 담당하게 되었으므로 그 4000여 냥을 보충해오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경상 수입 가운데에서 3710냥을 덜어내서 환자의 탕감으로 인해 발생한 경상 지출의 부족분을 채웠으니, 상정이 현재 축난 것이 거의 8000냥에 가깝 습니다. 그런데 각읍의 수입과 지출은 그 과다가 고르지 않으므로 부족한 고을은 매번 백성 에게서 징렴하는 고질이 많고, 넉넉한 고을은 쓸데없는 비용에 돌아가기 쉬우니, 많은 데서 덜어 부족한 곳에 더해주어 대상에 따라 고르게 시행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분 기마다 장부를 마감 정리할 때 영문( 營 門 )에서 조목조목 검사하여, 넉넉한 곳의 것을 옮겨 다 부족한 곳을 돕기를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여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고질적 병폐를 바 로잡을 수 있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소서. 하였는데, 이 사안을 윤허하셨습니다. 넉넉한 것과 부족한 것을 적절히 헤아려 손익하는 것은 일찍이 이정청의 절목이 있었으니, 지금 일정하게 하여 변통하지 않음으로써 징렴하는 폐단이 있기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애당 초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넉넉한 이쪽의 것을 옮겨 부족한 저쪽의 것을 돕는 것은 정식을 거듭 밝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상주한 대로 시행을 허락하되 그해의 비용으로 들 어갈 것을 절약하여 지나치지 않게 한다면, 해마다 넉넉하여 부족할 리가 절대 없을 것입니 다. 이쪽 것을 옮겨 저쪽 것을 돕는 즈음에 철저하게 조사하여 혹시라도 가하( 加 下 ) 두 글 자로 번거롭게 보고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더욱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 강원도 관찰사 조석여가 상주한 것을 보니, 그 내용에, 강릉부( 江 陵 府 )는 지역이 광대하여 전결( 田 結 ) 총수가 가장 많은데, 그 문서들이 화재를 입은 뒤 증거할 문헌이 없습 니다. 형세상 시급히 양전( 量 田 )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현재 관아 건물을 다시 건축하고 있 어서 일에 지장이 많습니다. 그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공문을 보내 거행토록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지로 윤허하셨습니다. 전정( 田 政 )의 문란이 요즈음과 같은 때가 없는데 하물며 화재를 당한 뒤여서 증거할 문서가 없으니 더욱 급히 다시 양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 아 건물의 재건축이 만약 준공되면 추수하기를 조금 기다려 즉시 거행하여 기필코 실효가 있게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 이장렴( 李 章 濂 )이 장계한 것을 보니, 본영의 관할인 교동( 喬 桐 )은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지만 병졸과 무기가 모두 넉넉하지 못합니다. 주문( 注 文 )과 장봉( 長 峯 ) 양진을 교동에 이속시켜 임기응변할 수 있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소서. 하였습니다. 해부 ( 該 府 )는 양서( 兩 西 )의 해안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역입니다. 지금 그 두 진을 이속 시키면 기각( 掎 角 )의 형세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의지할 수 있 습니다. 수신( 帥 臣 )의 이번 요청은 심원한 계획에 부합됩니다. 특별히 시행을 허락하고, 관 할과 절제의 방법은 해당 방영( 防 營 )으로 하여금 정식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

9 - 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윤현기가 말하기를, 재신( 宰 臣 )들은 시안을 아뢰시오. 하니, 김학성 등이 아뢰기를,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윤현기가 말하기를, 옥당은 소회가 있으면 아뢰시오. 하니, 이혁준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빈대( 賓 對 )에 외람되이 올라 성학( 聖 學 )에 부지런할 것으로 성상께 우러러 진 술하였는데 가납하시는 비답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아직도 송축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학문하는 방법은 성심( 誠 心 )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또한 입지( 立 志 )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서 덕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있지 아니하니, 잠깐이라도 멈춤이 없는 것은 성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단 함이 없는 것은 입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과 뜻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닙 니다. 마음은 체( 體 )이고 뜻은 용( 用 )입니다. 반드시 정성으로써 뜻을 세운 뒤에야 저절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명 광대( 高 明 光 大 )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공 자께서 아홉 길 높이의 산을 만드는 데에 비유하였으니 만약 한 소쿠리라도 흙이 모자라면 이것은 중단이며, 맹자께서 하루 햇볕을 쪼이는 것과 같다는 경계로써 비유하였으니 만약 열흘 동안 춥게 하면 이것이 멈춤입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있었느냐 방심하고 있었느냐 의 징험은 상응하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심에 돈독히 하시고 입지에 용기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경전 의 뜻을 연구하여 옛 성인의 전해오는 심법( 心 法 )을 체득하시고, 전대의 역사를 토론하여 역대 치란의 자취를 거울삼되, 밤낮으로 진실하게 하면서 스스로 노력하여 멈추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앎을 극진히 하여 사물을 궁구하는 것과 백성을 보존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어느 것이든지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바라건 대, 성명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것이 매우 좋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윤현기가 아뢰기를, 오늘 빈대에 대간은 한 사람도 나와 참여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패초 를 어긴 대간들을 모두 사헌부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10-7. 1868 / 고종 5년 6월 14일(경신) / 병비의 관원현황 병비에, 판서 김수현( 金 壽 鉉 )은 나왔다. 서승보( 徐 承 輔 )를 부총관으로, 이규용( 李 圭 容 )ㆍ최창수( 崔 昌 洙 )를 동지로, 이남보( 李 南 輔 )를 내금위장으로, 김무( 金 懋 )ㆍ방윤직( 龐 允 直 )을 오위장으로, 김종문( 金 文 )ㆍ장의관( 張 儀 寬 )을 경복궁 위장으로, 한용대( 韓 龍 大 )를 경희궁 위장으로, 심의일( 沈 宜 一 )ㆍ권종석( 權 鍾 奭 )ㆍ박추 진( 朴 樞 鎭 )을 수문장으로, 김한철( 金 漢 哲 )을 훈련원 습독으로, 주순원( 朱 順 元 )을 방답 첨사 ( 防 踏 僉 使 )로 이방선( 李 邦 善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이기덕( 李 基 德 )을, 첨지에 남유굉( 南 有 宏 )을 단부하였다. 8. 1869 / 고종 6년 6월 24일(갑자) / 신명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신명순( 申 命 淳 )을 지사로, 장봉호( 張 鳳 昊 )를 오위장으로, 조병옥( 趙 秉 鈺 )을 조사위장으로, 이규서( 李 奎 書 )를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어상우( 魚 相 愚 )를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유기천( 柳 冀 天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조위현( 趙 瑋 顯 )을 경주 영장으로, 이교필( 李 敎 弼 )을 공주 영 장으로, 유해로( 柳 海 魯 )를 함경도 중군으로, 조존성( 趙 存 成 )을 개성부 중군으로, 서홍순( 徐 泓 淳 )을 남병영 ㅡ우후로, 김원성( 金 元 性 )을 첨지로, 장현유( 張 鉉 由 )를 오위장으로, 이희갑( 李 熙 甲 )을 훈련원 정으로, 조근영( 趙 根 榮 )을 도총부 경력으로, 유기백( 柳 冀 伯 )을 전라도 병마우 후로, 이규신( 李 圭 臣 )을 오위장으로, 김민근( 金 敏 根 )을 충익위장으로, 손붕주( 孫 鵬 周 )를 훈련 원 판관으로, 이지회( 李 智 會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박정양( 朴 定 陽 )을 북평사로, 이희모( 李 熙 模 )ㆍ김상겸( 金 尙 謙 )을 오위장으로, 유규동( 柳 奎 東 )을 훈련원 주부로, 김기석( 金 箕 錫 )을 수 원부 중군으로, 이주언( 李 周 彥 )을 전라도 중군으로, 심흥택( 沈 興 澤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이우권( 李 佑 權 )ㆍ이교준( 李 敎 俊 )을 부장으로, 한흥규( 韓 興 奎 )를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로, 한익문( 韓 益 文 )을 당포 만호( 唐 浦 萬 戶 )로, 백남익( 白 南 益 )을 훈련원 부정으로, 조승현( 趙 承 顯 )을 첨정으로, 김이규( 金 履 奎 )를 천마 첨사( 天 摩 僉 使 )로, 고석표( 高 錫 豹 )를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김응화( 金 應 化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신혜( 申 橞 )를 오위장으로, 원우상( 元 禹 常 ) 을 선전관으로, 김봉익( 金 鳳 翼 )을 훈련원 판관으로, 김의열( 金 義 烈 )을 용진 만호( 龍 津 萬 戶 ) 로, 문시용( 文 時 用 )을 산양회 만호( 山 羊 會 萬 戶 )로, 풍학조( 馮 學 祖 )를 오위장으로, 오장선( 吳 長 善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장석용( 張 錫 瑢 )을 수문장으로, 김지해( 金 之 海 )를 정포 만호( 井 浦 萬 戶 )로, 강효능( 康 孝 能 )을 풍산 만호( 豐 山 萬 戶 )로, 송근주( 宋 根 柱 )를 오위장으로, 정기택( 鄭 騏 澤 )을 어영청 파총으로, 이치정( 李 致 貞 )을 구녕 만호( 仇 寧 萬 戶 )로, 이교준( 李 敎 俊 )을 금오 별 장( 金 烏 別 將 )으로, 이남보( 李 南 輔 )를 선전관으로, 이병수( 李 秉 秀 )ㆍ정사문( 鄭 思 文 )을 오위장 으로, 서철순( 徐 澈 淳 )을 훈련원 첨정으로, 백경환( 白 璟 煥 )을 충익위장으로, 유규동( 柳 奎 東 )을 훈련원 판관으로, 한기영( 韓 基 榮 )을 공충도 수사우후로, 이우권( 李 佑 權 )을 경상좌도 수사우 후로, 장도환( 張 道 煥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이종은( 李 鍾 殷 )을 훈련원 주부로, 여동엽 ( 呂 東 曄 )을 부장으로, 김학희( 金 鶴 喜 )를 무신겸선전관으로, 곽조운( 郭 祚 運 )을 전라좌도 수군

11 - 우후로, 차경식( 車 敬 軾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로, 이교춘( 李 敎 春 )ㆍ서항순( 徐 恒 淳 )ㆍ최한철 ( 崔 漢 喆 )ㆍ안양필( 安 良 弼 )을 오위장으로, 박원진( 朴 元 鎭 )을 충익위장으로, 조지현( 趙 贄 顯 )을 삼군부 종사관으로, 이봉규( 李 鳳 奎 )를 부장으로, 유규동( 柳 奎 東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현구 ( 李 鉉 九 )를 판관으로, 조희영( 趙 希 永 )을 오위장으로, 이한영( 李 翰 榮 )을 선전관으로, 배용구( 裵 龍 九 )를 훈련원 주부로, 이면우( 李 勉 愚 )를 동지로, 손응태( 孫 應 泰 )를 도총부 경력으로, 구연 상( 具 然 相 )을 부장으로, 원우상( 元 禹 常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수익( 李 秀 翼 )을 판관으로, 오 정선( 吳 正 善 )을 선전관으로, 이창권( 李 昌 權 )을 훈련원 주부로, 이건절( 李 建 晢 )을 선전관으로, 조용하( 趙 容 夏 )ㆍ채은묵( 蔡 殷 默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유희동( 柳 曦 東 )ㆍ김정우( 金 鼎 祐 )ㆍ손덕 현( 孫 德 顯 )을 부장으로, 김규화( 金 奎 華 )ㆍ이교석( 李 敎 錫 )ㆍ현익건( 玄 翼 健 )ㆍ이응원( 李 應 遠 )ㆍ 최석기( 崔 錫 基 )를 수문장으로, 이완복( 李 完 馥 )을 선원전 수문장으로 삼았다. 화녕전 수문장 에 윤태영( 尹 泰 榮 ), 진동 권관( 鎭 東 權 管 )에 정민수( 鄭 民 洙 ), 서수라 권관( 西 水 羅 權 管 )에 김재 인( 金 在 仁 ), 마마해 권관( 馬 馬 海 權 管 )에 손완기( 孫 完 基 ) 소농 권관( 小 農 權 管 )에 홍치순( 洪 致 淳 ), 율포 권관( 栗 浦 權 管 )에 배영락( 裵 榮 樂 ), 광평 권관( 廣 坪 權 管 )에 한인진( 韓 璘 珍 ), 묘동 권 관( 廟 洞 權 管 )에 호치승( 胡 致 昇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김원식( 金 源 植 )과 주부 안세업( 安 世 業 )ㆍ장세룡( 張 世 龍 )ㆍ박희순( 朴 熙 淳 ), 이상은 정식에 따라 감하하였다. 한익문( 韓 益 文 )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최수룡( 崔 秀 龍 )ㆍ최응균( 崔 應 均 )ㆍ김승열( 金 承 烈 )ㆍ고상겸( 高 尙 謙 )을 주 부 가설로 삼았다. 동지에 김상의( 金 尙 宜 ), 첨지 세 자리에 유영( 柳 瑛 )ㆍ박신근( 朴 信 根 )ㆍ김 진민( 金 鎭 民 ), 훈련원 주부에 김석기( 金 錫 起 )를 단부하고, 본원에서 나가는 경주 영장 조위 현( 趙 瑋 顯 ), 공주 영장 이교필( 李 敎 弼 ), 함경 중군 유해로( 柳 海 魯 ), 개성 중군 조존성( 趙 存 成 ), 남병영 우후 서홍순( 徐 泓 淳 ),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부사정( 副 司 正 )에 정익현( 鄭 益 鉉 )을 단부하였다. 동지 스무 자리에 박제길( 朴 齊 吉 )ㆍ정홍인( 丁 鴻 仁 )ㆍ이계철( 李 繼 喆 )ㆍ김원영( 金 元 永 )ㆍ김중선( 金 仲 璇 )ㆍ홍관집( 洪 觀 楫 )ㆍ최 효득( 崔 孝 得 )ㆍ최희완( 崔 喜 完 )ㆍ유안주( 劉 安 柱 )ㆍ이복연( 李 福 延 )ㆍ양주오( 梁 柱 五 )ㆍ김노성( 金 魯 成 )ㆍ하시담( 河 始 淡 )ㆍ엄진일( 嚴 鎭 一 )ㆍ전치복( 全 致 福 )ㆍ황희완( 黃 熙 琬 )ㆍ홍종륜( 洪 宗 崙 )ㆍ 김정억( 金 廷 億 )ㆍ정희혁( 鄭 僖 赫 )ㆍ정사문( 鄭 思 文 )을 단부하고, 첨지 열일곱 자리에 임원준( 任 元 準 )ㆍ홍재승( 洪 在 升 )ㆍ강문형( 姜 聞 馨 )ㆍ장현유( 張 鉉 由 )ㆍ이규신( 李 圭 臣 )ㆍ이희모( 李 熙 模 )ㆍ 김상겸( 金 尙 謙 )ㆍ이병수( 李 秉 秀 )ㆍ송근주( 宋 根 柱 )ㆍ신혜( 申 橞 )ㆍ안양필( 安 良 弼 )ㆍ남상선( 南 相 善 )ㆍ조병옥( 趙 秉 鈺 )ㆍ장덕오( 張 德 五 )ㆍ이정호( 李 貞 祜 )ㆍ김민근( 金 敏 根 )ㆍ백경환( 白 璟 煥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김준현( 金 駿 鉉 )ㆍ이교직( 李 敎 直 )ㆍ정창현( 鄭 暢 鉉 )ㆍ구대식( 具 大 植 )ㆍ허 익( 許 )ㆍ남계준( 南 啓 寯 )ㆍ이민화( 李 敏 華 )ㆍ이익( 李 )ㆍ조희두( 趙 羲 斗 )ㆍ이하룡( 李 河 龍 )ㆍ강규 동( 姜 奎 東 )ㆍ박수영( 朴 秀 英 )을 단부하였다. 9. 1869 / 고종 6년 11월 10일(정축) / 자경전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대신 등을 인견할 때 도제조 김병학 등이 입시하였다 사시( 巳 時 ). 상이 자경전에 나아갔다.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대신과 정부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김병학, 제조 김세균, 우부승지 이기호, 가주서 이봉덕, 기사관 박제용, 별겸 춘추 조용하, 검교대교 조경호, 우부승지 이기호, 가주서 이봉덕, 사변가주서 차유성, 기사관 박제용, 별겸춘추 조용하, 영의정 김병학, 우의정 홍순목, 정부 당상 이경하ㆍ이주철ㆍ김세

12 - 균ㆍ유진오ㆍ이장렴ㆍ이원희ㆍ엄석정ㆍ이삼현ㆍ허습, 수찬 정우현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고, 의관 이경년( 李 慶 年 )ㆍ홍현보( 洪 顯 普 )ㆍ박시영( 朴 時 永 )ㆍ김재호( 金 在 瑚 )가 나와 기둥 밖에 엎 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병학이 앞으로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아뢰기를, 의관을 대령시켰습니다. 들어와 진료하게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현보 등이 차례로 상의 건강을 진료하고 물러나 기둥 밖 에 엎드렸다. 병학이 말하기를, 맥후를 아뢰라. 하니, 현보 등이 아뢰기를, 맥은 좌우 삼부( 三 部 )가 고릅니다. 하였다. 상이 의관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대( 次 對 )를 시작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학이 아뢰기를, 종묘와 영녕전에 가끔씩 비가 새는 곳이 있어 장마를 지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해 왔으나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이번에는 공사를 하여 새롭게 고쳐야지 잠시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건도감으로 하여금 초봄의 길일을 가려서 공사를 시 작하여 준공을 보도록 하게 하고 신주를 옮겨 봉안하는 의식절차는 이전에 행해 오던 예에 따라 그때 가서 품지하여 거행할 것을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체가 중대하니 신주를 임시로 옮겨 봉안하는 절차는 예조로 하여금 규례를 상고하여 거 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 擧 條 )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봉상시의 율목경차관( 栗 木 敬 差 官 )이 매 식년( 式 年 ) 때마다 번갈아가며 삼남 지방에 내려가 는데 내년이 바로 그해입니다. 이것이 비록 유래가 있는 정해진 규례이기는 하나 최근 많은 폐단을 낳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지나는 길에 음식대접과 거마( 車 馬 )를 제공해야 하는 걱 정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고을들은 생활의 지장을 초래하고 있으니 변통하는 조 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밤나무를 베거나 바치는 일은 모두 각도로 하여금 차원( 差 員 )을 별도로 정하여 거행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음직( 蔭 職 )으로 처음 수령이 된 자는 임기를 6년으로 하는 것이 정해진 법입니다. 함열( 咸 悅 )과 아산( 牙 山 )은 다같이 두 번에 걸쳐 조운선을 거느리고 운반한 후에 승진하기 때문에 임기를 3년으로 정한 자리이나, 아산에서는 조운선을 거느리고 운반하는 임무가 이미 혁파 되었으니 이전처럼 승진시킬 수 없습니다. 임기를 그대로 놓아 두고 변통시키지 않는 것은 정확한 정사가 아니므로 지금부터 6년의 임기를 적용하도록 전조( 銓 曹 )에 분부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13 - 하였다. - 거조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데는 본래 구별이 없으며 음직으로 등용되는 경우도 각기 정해 진 길이 있어 모두 이를 통해 선발됩니다. 그러나 오직 중인 출신의 생원과 진사만이 오랫 동안 벼슬길에 적체가 되어 이에 대한 불만이 실로 없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충훈부 의 자체 추천으로 임명하는 자리와 예빈시의 참봉을 한 번은 중인 출신의 생원과 진사 가운 데 전조( 銓 曹 )에서 검의( 檢 擬 )하여 임명하고, 한 번은 충의( 忠 義 ) 가운데서 충훈부의 자체 추천으로 임명하여 자리를 돌려가면서 임명하는 것이 아마도 억울함을 풀어 주는 정사에 합 당할 듯합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또 아뢸 것이 있습니다. 근래 충훈부의 충의 가운데 종종 내력이 분명하지 않아 허위로 기록한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음로( 蔭 路 )에서 햇수에 따라 올라가는 품계이니, 어찌 그냥 뒤섞어 놓은 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일을 굳이 하나하나 따질 필요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정밀하게 선발하여 무슨 공을 세운 누구의 후손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소상하게 기록하여 묘당에 일일이 보고한 후 이송하여 자체 추 천할 수 있도록 규정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억울함을 풀어 주는 정사이다. 지금 벼슬 자리에 있는 자가 승륙할 때에는 그 대임자를 우선 검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병학이 아뢰기를,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은 경기 감영에서 자체 추천하며 그 임기는 1년으로 되어있어 진영에 속한 섬사람들이 신구 관리를 보내고 맞아들이는 일에 지쳐 있다고 합니다. 사정이 그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니 다시 24개월로 임기를 정하여 부서진 보루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피 폐된 상황을 막게 하여야겠습니다. 그곳은 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실로 서울을 보호하는 가리개 역할을 합니다. 문수진( 文 殊 鎭 )에 대하여 말하자면, 지형적으로 요충지인 점과 거리 면에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으니 그 지휘권을 모두 진무영( 鎭 撫 營 )에 소속시키고 교대할 때 는 반드시 직접 만나 교대하며 떠나고 머무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규정 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나오라. 하였다. 기호가 말하기를, 재상들은 일을 아뢰시오. 하니, 경하 등이 아뢰기를,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기호가 말하기를, 옥당은 품은 바를 아뢰시오. 하니, 우현이 아뢰기를, 군왕의 마음은 모든 교화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군( 聖 君 )들은 모두가 심학의 공부에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니, 그 핵심은 경( 敬 )입니다. 대체로 경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 까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일에 관철되어 있는 것으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잡 념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왕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 로 이 경( 敬 )을 놓아 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이 보기에 전하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

14 - 는 마음과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부지런하고도 간절하니 매우 흠앙해 마지않습니다. 지난 달 때맞지 않게 우레가 쳤을 때 전하께서는 음식을 줄이고 자신을 질책하는 전교를 내렸습 니다. 두려워하고 근신하는 마음이 전교의 말씀 사이에 가득 담겨져 있었으므로 그 마음이 하늘의 마음에 응답하여 재앙을 상서( 祥 瑞 )로 만들었습니다. 경( 敬 )은 학문하는 일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바라건대 전하가 두려운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수양 공 부에 더욱 힘을 쏟으며, 자주 신하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힘쓰고 공경하며, 참된 마음과 실 천 궁행의 학문을 정치에 적용해 본다면 훌륭한 학문과 훌륭한 정치가 다만 여기에서 벗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노력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좋은 말을 하였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기호가 아뢰기를, 오늘 빈대( 賓 對 )에 양사( 兩 司 )의 관원이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 니다. 패초를 어긴 대간( 臺 諫 )들을 모두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 榻 敎 )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어 대신들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 로 물러나왔다. 10. 1871 / 고종 8년 6월 20일(기묘)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판서 강노는 나왔다. 정순조( 鄭 順 朝 )ㆍ이현우( 李 顯 佑 )ㆍ변철연( 卞 哲 淵 )을 동지로, 임응준( 任 應 準 )ㆍ한돈원( 韓 敦 源 ) ㆍ신정희( 申 正 熙 )ㆍ조희복( 趙 羲 復 )을 부총관으로, 이민수( 李 敏 樹 )를 훈련원 도정으로, 홍준모 ( 洪 俊 模 )를 겸사복장으로, 조승희( 趙 升 熙 )ㆍ허전( 許 琠 )ㆍ홍우섭( 洪 宇 燮 )ㆍ강인성( 康 仁 誠 )을 오위장으로, 박해귀( 朴 海 龜 )ㆍ남정우( 南 廷 祐 )를 충익위장으로, 홍양환( 洪 亮 煥 )ㆍ정치하( 鄭 致 厦 )를 창덕궁 위장으로, 최석홍( 崔 錫 弘 )을 훈련원 주부로, 윤용구( 尹 用 求 )를 문신겸선전관으 로, 권인하( 權 寅 夏 )ㆍ엄학영( 嚴 鶴 永 )을 수문장으로, 임익준( 任 翊 準 )을 전라 중군으로, 이유직 ( 李 庾 稙 )을 군산 첨사( 群 山 僉 使 )로, 이효수( 李 孝 秀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유영준( 柳 永 俊 ) 을 덕포 첨사( 德 浦 僉 使 )로, 나경운( 羅 卿 雲 )을 미전 첨사( 美 錢 僉 使 )로, 전재영( 田 在 英 )을 초지 첨사( 草 芝 僉 使 )로, 박계익( 朴 桂 益 )을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김재국( 金 在 國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에 이렴( 李 濂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제한집( 諸 漢 緝 )ㆍ양주한( 梁 柱 漢 )을 단부하였다. 금위영 창검 파총 이 일( 李 一 )에게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을 가자 하였다. 11. 1873 / 고종 10년 6월 13일(경신) / 서상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5 - 서상정( 徐 相 鼎 )ㆍ정운익( 鄭 雲 翼 )을 도총관으로, 정범조( 鄭 範 朝 )를 동지중추부사로, 김성구 ( 金 聖 求 )를 내금위장으로, 이능학( 李 能 學 )ㆍ박효환( 朴 孝 煥 )을 오위장으로, 이수만( 李 秀 萬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구천희( 具 天 喜 )ㆍ이민두( 李 敏 斗 )ㆍ이용( 李 鎔 )ㆍ송의호( 宋 義 浩 )를 수문장으 로, 이덕희( 李 德 熙 )를 경상 좌병사로, 이덕순( 李 德 純 )을 나주 영장으로, 나원식( 羅 元 植 )을 장 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박문린( 朴 文 麟 )을 화수산 별장( 花 水 山 別 將 )으로, 임동선( 林 東 善 )을 금사 별장( 金 沙 別 將 )으로 삼았다. 가설( 加 設 )한 훈련원 판관 세 자리에 윤광익( 尹 光 翼 )ㆍ김 홍구( 金 鴻 求 )ㆍ윤창근( 尹 昌 根 )을 단부하고, 부장에 유상풍( 兪 相 豐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민영준( 閔 泳 焌 )ㆍ유치목( 兪 致 穆 )ㆍ허장( 許 樟 )을 단부하였다. 철도 첨사( 鐵 島 僉 使 ) 이규선( 李 奎 璿 )은 한 임기 동안만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고, 전라 감영의 중군 정채화( 鄭 采 和 )를 특별히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12. 1875 / 고종 12년 6월 6일(신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 兵 批 )에, 행 판서 이재원( 李 載 元 )은 나왔고, 참판 정해륜( 鄭 海 崙 )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참의 김진휴( 金 震 休 )는 병이고, 참지 장시표( 張 時 杓 )는 입직이고, 승지 - 원문 빠짐 - 이기준( 李 基 俊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규서( 李 奎 書 )ㆍ이교응( 李 敎 應 )을 선전관으로, 채규상( 蔡 奎 常 )을 내금위장으로, 이응렬( 李 應 烈 )을 우림위장으로, 이강현( 李 康 鉉 )ㆍ유치삼( 兪 致 三 )ㆍ이 위소( 李 暐 沼 )ㆍ조병대( 曺 秉 大 )ㆍ이규하( 李 圭 河 )ㆍ김병도( 金 炳 道 )ㆍ신영필( 愼 永 弼 )ㆍ권상철( 權 尙 喆 )ㆍ박경진( 朴 經 鎭 )ㆍ김호인( 金 好 仁 )ㆍ신추( 申 錘 )를 오위장으로, 박제복( 朴 齊 復 )을 충익위 장으로, 김기현( 金 基 鉉 )을 충장위장으로, 이종구( 李 鍾 九 )ㆍ김수성( 金 秀 性 )을 창덕궁 위장으 로, 김진원( 金 鎭 黿 )ㆍ서영직( 徐 永 稙 )을 경희궁 위장으로, 윤석인( 尹 錫 仁 )을 선전관으로, 이재 경( 李 載 經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유신( 李 裕 臣 )ㆍ이종환( 李 鍾 煥 )ㆍ추익조( 秋 益 祚 )ㆍ김문환 ( 金 文 煥 )을 수문장으로, 오신묵( 吳 信 默 )을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으로, 김완철( 金 完 哲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장용규( 張 溶 奎 )를 단부하였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채규상( 蔡 奎 常 )ㆍ이종의( 李 種 懿 )ㆍ이겸영( 李 謙 榮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이건우( 李 建 宇 )ㆍ이세응( 李 世 應 )ㆍ오재혁( 吳 載 爀 )ㆍ유상민( 劉 尙 敏 )ㆍ지한규( 池 漢 奎 )를 단부하였다. 분 부총관 이용직( 李 容 直 )ㆍ윤자승( 尹 滋 承 )ㆍ김익용( 金 益 容 )ㆍ남정익( 南 廷 益 )ㆍ이문영( 李 文 永 )ㆍ 이봉의( 李 鳳 儀 )ㆍ정완묵( 鄭 完 默 )ㆍ이민상( 李 敏 庠 ), 분오위장 이인복( 李 寅 復 )ㆍ이관의( 李 寬 儀 ) ㆍ이응화( 李 應 華 ), 분도총부 도사 심흥택( 沈 興 澤 )ㆍ이창권( 李 昌 權 )ㆍ윤석인( 尹 錫 仁 )ㆍ권병엽 ( 權 秉 曄 )ㆍ심의창( 沈 宜 昌 )ㆍ조문규( 趙 文 奎 )ㆍ구연식( 具 然 軾 )ㆍ이민두( 李 敏 斗 )를 감하하였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양주화( 梁 柱 華 )를 단부하였다. 13. 1877 / 고종 14년 5월 14일(무진) / 병비의 관원 현황

16 - 병비( 兵 批 )에, 판서 김병시( 金 炳 始 )는 병중이었고, 참판 홍재현( 洪 在 鉉 )은 병중이었고, 참 의 윤치성( 尹 致 聖 )은 입직하다가 나왔고, 참지 이헌영( 李 永 )은 병중이었고, 우부승지 박용대 는 나왔다. 김상덕( 金 商 德 )을 호위청 별장으로, 김정규( 金 鼎 奎 )를 제물포 만호( 濟 物 浦 萬 戶 )로, 김영식( 金 泳 植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호군에 이승오( 李 承 五 )ㆍ윤우선( 尹 宇 善 )ㆍ신도희 ( 申 道 熙 )를, 부호군에 조준영( 趙 準 永 )ㆍ이면영( 李 冕 榮 )ㆍ홍우창( 洪 祐 昌 )ㆍ윤상현( 尹 相 賢 )ㆍ이 원규( 李 源 珪 )ㆍ김구현( 金 九 鉉 )ㆍ조신희( 趙 臣 熙 )ㆍ구희조( 具 羲 祖 )를, 부사직에 최홍주( 崔 弘 周 ) ㆍ이봉덕( 李 鳳 德 )ㆍ이희원( 李 喜 元 )ㆍ김만식( 金 晩 植 )ㆍ이건창( 李 建 昌 )ㆍ조동필( 趙 東 弼 )ㆍ이재 윤( 李 載 允 )ㆍ박내면( 朴 來 冕 )ㆍ권현( 權 炫 )ㆍ민영규( 閔 泳 奎 )를, 부사과에 김철희( 金 喆 熙 )ㆍ공재 범( 孔 在 範 )ㆍ김내현( 金 來 顯 )ㆍ한익뢰( 韓 益 雷 )ㆍ김명래( 金 命 來 )를 단부하였다. 겸 동래진병마 첨절제사 독진수성장( 兼 東 萊 鎭 兵 馬 僉 節 制 使 獨 鎭 守 城 將 )에 윤치화( 尹 致 和 )를 단부하였다. 14. 1879 / 고종 16년 4월 30일(계유) / 이종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종건( 李 鍾 健 )을 선전관으로, 서치홍( 徐 致 弘 )ㆍ성정호( 成 定 鎬 )ㆍ원세익( 元 世 翼 )ㆍ최경선 ( 崔 敬 善 )ㆍ이창렬( 李 昌 烈 )을 오위장으로, 조종철( 趙 鍾 哲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응직( 金 應 稷 )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태현( 李 泰 鉉 )을 남병사로, 고제희( 高 濟 羲 )를 상주 영장으로, 김기조 ( 金 基 祚 )를 당포 만호로, 임태준( 林 泰 俊 )을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으로 김주영( 金 柱 潁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호군에 오하영( 吳 夏 泳 )ㆍ신환( 申 桓 )을, 부호군에 김종한( 金 宗 漢 ) ㆍ김완수( 金 完 秀 )ㆍ조병세( 趙 秉 世 )ㆍ오정선( 吳 正 善 )을, 부사과에 구성희( 具 星 喜 )ㆍ조광우( 趙 光 祐 )를 모두 단부하였다. 15. 1881 / 고종 18년 5월 7일(무진)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민태호( 閔 台 鎬 )는 나왔고, 참판 조영하( 趙 榮 夏 )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으 며, 참의 홍재정( 洪 在 正 )은 입직이고, 참지 김재환( 金 載 瓛 )은 병이고, 동부승지 홍승목은 나 왔다. 장영급( 張 泳 汲 )ㆍ윤자원( 尹 滋 愿 )ㆍ최창진( 崔 昌 鎭 )ㆍ윤종두( 尹 鍾 斗 )를 오위장으로, 박봉빈( 朴 鳳 彬 )을 조사오위장으로, 구연소( 具 然 韶 )ㆍ홍영보( 洪 穎 普 )를 충익위장으로, 조윤문( 趙 允 文 )을 경복궁 위장으로, 신욱( 申 㮋 )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조존승( 趙 存 昇 )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구연희( 具 然 喜 )를 광주 중군( 廣 州 中 軍 )으로, 임백은( 任 百 殷 )을 개성 중군( 開 城 中 軍 )으로, 이 규안( 李 奎 顏 )을 경기 중군( 京 畿 中 軍 )으로, 조병응( 趙 秉 應 )을 평안 중군( 平 安 中 軍 )으로, 방기 원( 方 夔 源 )을 남병영 우후( 南 兵 營 虞 候 )로, 강익황( 姜 益 璜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손만기 ( 孫 萬 基 )를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이정필( 李 正 必 )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한경원( 韓 敬 源 )을, 호군에 조은승( 曺 殷 承 )ㆍ홍종헌( 洪 鍾 軒 )ㆍ이현익( 李 玄 翼 )ㆍ이만 운( 李 晩 運 )을, 부호군에 김경균( 金 敬 均 )ㆍ조면호( 趙 冕 鎬 )ㆍ이민중( 李 敏 中 )ㆍ양주성( 梁 柱 星 )ㆍ 허경( 許 璥 )ㆍ양필환( 梁 弼 煥 )ㆍ정재하( 丁 載 夏 )ㆍ홍학주( 洪 鶴 周 )ㆍ민영은( 閔 泳 殷 )을, 부사직에

17 - 서상태( 徐 相 泰 )ㆍ권봉환( 權 鳳 煥 )ㆍ이윤구( 李 允 九 )를, 부사과에 오성선( 吳 成 善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경기 병마절도사에 이규안( 李 奎 顏 )을 단부하였는데, 차함으로 제수하라는 전지 를 받든 것이다. 정령관( 正 領 官 )에 한성근( 韓 聖 根 )을 단부하고, 부령관( 副 領 官 )에 윤웅렬( 尹 雄 烈 )ㆍ김노완( 金 魯 莞 )을 단부하고, 참령관( 參 領 官 )에 우범선( 禹 範 善 )을 단부하였다. 16. 1881 / 고종 18년 8월 19일(무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행 판서 조영하( 趙 寧 夏 )는 나왔고, 참판 조희일( 趙 熙 一 )은 병이고, 참의 김규식 ( 金 奎 軾 )은 입직하고, 참지 이면우( 李 冕 雨 )는 병이고, 동부승지 홍승목은 나왔다. 민태호( 閔 台 鎬 )를 지중추부사로, 성욱호( 成 郁 鎬 )를 동지중추부사로, 이낙희( 李 樂 熙 )를 내금위 장으로, 이승옥( 李 承 鈺 )ㆍ안학주( 安 鶴 柱 )를 오위장으로, 김봉호( 金 鳳 昊 )를 경희궁 위장으로, 신욱( 申 㮋 )ㆍ서창순( 徐 昌 淳 )을 훈련원 주부로, 이범조( 李 範 祖 )ㆍ정인학( 鄭 寅 學 )을 문신겸선전 관으로, 윤경선( 尹 慶 善 )을 훈련도감 파총으로, 이교복( 李 敎 復 )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송계 헌( 宋 啓 憲 )을 영종 첨사( 永 宗 僉 使 )로, 오한영( 吳 翰 泳 )을 동진 첨사( 東 津 僉 使 )로, 장형준( 張 亨 浚 )을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관 가설에 유기선( 柳 冀 先 )을 단부하고, 훈 련도감 초관에 성교수( 成 敎 修 )를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이능기( 李 能 基 ), 호군에 김영목( 金 永 穆 )ㆍ윤우선( 尹 宇 6 善 )ㆍ윤태경( 尹 泰 經 )ㆍ오경윤( 吳 慶 潤 ), 부호군에 홍은모( 洪 殷 謨 )ㆍ김유행 ( 金 裕 行 )ㆍ박해철( 朴 海 哲 )ㆍ이용원( 李 容 元 )ㆍ이원일( 李 源 逸 )ㆍ이희갑( 李 熙 甲 ), 부사직에 이재 윤( 李 載 允 )ㆍ조종필( 趙 鍾 弼 )ㆍ홍시형( 洪 時 衡 )ㆍ정재진( 鄭 在 晉 )ㆍ김학선( 金 鶴 善 ), 부사과에 신 덕균( 申 悳 均 )ㆍ이원기( 李 元 祺 )ㆍ장석조( 張 錫 祚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경상 좌병사에 이 기혁( 李 基 赫 )을 단부하였는데, 한 임기를 잉임( 仍 任 )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17. 1883 / 고종 20년 6월 25일(계유) / 이호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호준( 李 鎬 俊 )을 지중추부사로, 서광태( 徐 光 泰 )ㆍ윤석원( 尹 錫 元 )ㆍ이청렬( 李 淸 烈 )ㆍ신성 흠( 愼 性 欽 )을 오위장으로, 한진행( 韓 鎭 行 )을 나주 영장( 羅 州 營 將 )으로, 이승렬( 李 升 烈 )을 충 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오순영( 吳 順 泳 )을 경기 중군으로, 민영일( 閔 泳 一 )을 개성 중군으로, 윤영규( 尹 泳 奎 )를 청산도 첨사( 靑 山 島 僉 使 )로, 심인택( 沈 寅 澤 )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강 화순( 姜 和 淳 )을 동지중추부사로, 박태원( 朴 泰 遠 )을 금위영 초관으로, 이승한( 李 升 漢 )을 전라 도 병마우후로, 구연하( 具 然 河 )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이학선( 李 學 善 )을 전라우도 수군우 후로, 이근풍( 李 根 豐 )을 선전관으로, 이민긍( 李 敏 兢 )을 내금위장으로, 조희완( 趙 羲 完 )을 훈련 원 정으로, 이봉우( 李 鳳 宇 )를 훈련원 첨정으로, 조흥철( 趙 興 哲 )을 경상 중군으로, 이남집( 李 南 輯 )을 동지훈련원사로, 오도연을 첨지중추부사로, 유림을 중추부 도사로, 김기태( 金 箕 台 )를 훈련원 주부로, 허호( 許 鎬 )를 북병영 우후로, 이규안( 李 奎 顏 )을 동지중추부사로, 민인호( 閔 寅 鎬 )를 훈련원 도정으로, 이정현( 李 鼎 鉉 )ㆍ송진환을 수문장으로, 오만선( 吳 萬 善 )을 동진 첨사 ( 東 津 僉 使 )로, 윤석오( 尹 錫 五 )를 동지훈련원사로, 이유식( 李 儒 植 )을 선전관으로, 남궁영( 南 宮

18 - 泳 )을 부장으로, 김재우( 金 在 遇 )를 어영청 파총으로, 이제선( 李 濟 善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 로, 한치림( 韓 致 林 )를 훈련원 도정으로, 유응로( 柳 應 魯 )ㆍ하석락( 河 錫 洛 )을 훈련원 첨정으로, 오치혁( 吳 致 赫 )을 수문장으로, 송익상을 경상 중군으로, 안익( 安 榏 )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경 민( 李 慶 敏 )을 첨지중추부사로, 이병승을 선전관으로, 이근철( 李 根 哲 )을 중추부 도사로, 윤영 ( 尹 暎 )을 총리영 파총으로, 서광돈을 충익위장으로, 김병주를 오위장으로, 이상익( 李 相 翼 )을 훈련원 주부로, 황흔( 黃 炘 )을 수문장으로, 이규선( 李 奎 選 )을 운총 만호( 雲 寵 萬 戶 )로, 홍언주 ( 洪 彥 周 )를 첨지중추부사로, 이희( 李 )를 조사위장으로, 유응로를 선전관으로, 김종균( 金 從 均 ) 을 훈련원 첨정으로, 한기순( 韓 耆 淳 )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순원( 李 順 元 )을 훈련원 첨정으로, 정규찬( 鄭 圭 瓚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유응로를 황해도 병마우후로, 홍응석( 洪 應 錫 )을 광량 첨 사( 廣 梁 僉 使 )로, 김정수( 金 正 秀 )를 천성 만호( 天 城 萬 戶 )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선전관으로, 양 성환( 梁 性 煥 )을 훈련원 판관으로, 채규붕( 蔡 奎 鵬 )을 선전관으로, 박하형( 朴 夏 炯 )을 수문장으 로, 홍희윤( 洪 熙 潤 )을 경상 중군으로, 임성기를 오위장으로, 홍순조( 洪 順 祚 )를 서천 첨사( 舒 川 僉 使 )로, 김제언( 金 濟 彥 )을 이동 만호( 梨 洞 萬 戶 )로, 최진근( 崔 鎭 根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 으로, 박옥룡( 朴 玉 龍 )을 입암 별장( 笠 巖 別 將 )으로, 고창규ㆍ김정화ㆍ최명익을 오위장으로, 김 원식( 金 源 植 )을 소근 첨사( 所 斤 僉 使 )로, 박경삼( 朴 景 三 )을 등산 첨사( 登 山 僉 使 )로, 안익상( 安 翼 相 )을 부장으로, 임윤기( 任 胤 祺 )를 수문장으로, 한희석( 韓 羲 錫 )을 아이 첨사( 阿 耳 僉 使 )로, 임익준( 任 翊 準 )을 절영도 첨사( 絶 影 島 僉 使 )로, 김충협( 金 忠 協 )을 경상 중군으로, 김인오( 金 仁 梧 )를 우현 첨사( 牛 峴 僉 使 )로, 김성곤( 金 成 坤 )을 차령 첨사( 車 嶺 僉 使 )로, 배종엽( 裵 鍾 燁 )을 가 배량 만호( 加 背 梁 萬 戶 )로, 김상준( 金 商 俊 )을 안골 만호( 安 骨 萬 戶 )로, 구연수( 具 然 壽 )를 장목 포 별장( 長 木 浦 別 將 )으로, 이규원( 李 奎 元 )ㆍ이민집( 李 敏 集 )을 훈련원 부정으로, 박면동( 朴 勉 東 )을 부장으로, 최형규( 崔 炯 逵 )를 수문장으로, 임일권( 林 逸 權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박 장환( 朴 章 煥 )을 영흥도 첨사( 靈 興 島 僉 使 )로, 김수정( 金 守 丁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최석 지( 崔 錫 枝 )를 서북 첨사( 西 北 僉 使 )로, 김계연( 金 啓 淵 )을 여도 만호( 呂 島 萬 戶 )로, 김영호( 金 永 浩 )를 수인 별장( 修 仁 別 將 )으로, 이규학( 李 奎 學 )을 충익위장으로, 임백우( 任 百 禹 )를 충장위장 으로, 이태용( 李 泰 鎔 )을 부장으로, 이인항( 李 寅 恒 )을 수문장으로, 서우순( 徐 瑀 淳 )을 초도 첨 사( 椒 島 僉 使 )로, 김재훈( 金 載 勳 )을 고풍산 첨사( 古 豐 山 僉 使 )로, 손병준( 孫 柄 濬 )을 유원 첨사 ( 柔 遠 僉 使 )로, 김응호( 金 膺 浩 )를 소이 만호( 所 已 萬 戶 )로, 이승준( 李 昇 俊 )을 조니 만호( 助 泥 萬 戶 )로, 최재학( 崔 在 鶴 )을 금정 별장( 金 井 別 將 )으로, 호광표( 扈 光 表 )ㆍ김순영( 金 淳 英 )ㆍ윤동순 ( 尹 東 舜 )ㆍ최창렴( 崔 昌 濂 )ㆍ박기우( 朴 起 羽 )를 오위장으로, 이인엽( 李 寅 曄 )을 위곡 첨사( 委 曲 僉 使 )로, 최재호( 崔 載 鎬 )를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로, 이기선( 李 基 善 )을 아오지 만호( 阿 吾 地 萬 戶 )로, 장중술( 張 重 述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노태건( 盧 泰 鍵 )을 자모 별장( 慈 母 別 將 )으 로, 이진규( 李 晉 奎 )를 오위장으로, 민일호( 閔 一 鎬 )를 충익위장으로, 이사훈( 李 思 勳 )을 충장위 장으로, 양재덕( 梁 在 德 )을 수문장으로, 김문종( 金 汶 鍾 )을 갈파지 첨사( 坡 知 僉 使 )로, 윤태흥( 尹 泰 興 )ㆍ오병문( 吳 炳 文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조태승( 趙 泰 昇 )을 문성 첨사( 文 城 僉 使 )로, 강효 흡( 康 孝 洽 )을 무이 만호( 撫 夷 萬 戶 )로, 한경식( 韓 景 植 )을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윤자현( 尹 滋 峴 )을 충익위장으로, 이인협( 李 寅 協 )을 충장위장으로, 이민집을 선전관으로, 유완근( 柳 完 根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조병두( 曺 秉 斗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민재식( 閔 在 植 )ㆍ이 용직( 李 庸 稙 )ㆍ최종연( 崔 鍾 淵 )ㆍ이승학( 李 承 鶴 )ㆍ신학희( 申 鶴 熙 )ㆍ유재응( 柳 載 應 )을 오위장으 로, 구동석( 具 東 奭 )을 훈련원 부정으로, 손경헌( 孫 璟 憲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승구( 李 承 九 ) ㆍ이만우( 李 晩 宇 )를 훈련원 주부로, 김원식( 金 源 植 )ㆍ임일권( 林 逸 權 )을 오위장으로, 구춘서 ( 具 春 書 )ㆍ이병헌( 李 秉 憲 )을 선전관으로, 구중감( 具 重 瑊 )을 수문장으로, 이길선( 李 吉 善 )ㆍ이

19 - 기표( 李 基 豹 )ㆍ홍주현( 洪 周 鉉 )ㆍ이학무( 李 學 懋 )ㆍ이봉익( 李 鳳 翼 )을 오위장으로, 이철희( 李 徹 熙 )ㆍ서익보( 徐 翊 輔 )를 훈련원 첨정으로, 허철( 許 )을 훈련원 판관으로, 고대규( 高 大 奎 )를 수 문장으로, 김원규( 金 元 奎 )를 경상 중군으로, 박형우( 朴 亨 祐 )를 충익위장으로, 김기반( 金 基 盤 ) 을 충장위장으로, 조남익( 趙 南 益 )을 부장으로, 이원유( 李 元 裕 )를 수문장으로, 민정식( 閔 貞 植 ) 을 통제영 우후로, 고영기( 高 英 岐 )ㆍ김병주( 金 炳 周 )를 오위장으로, 민덕현( 閔 德 顯 )을 충장위 장으로, 한진형( 韓 鎭 衡 )을 훈련원 판관으로, 유석형( 柳 錫 衡 )을 수문장으로, 유정주( 兪 廷 柱 )를 충익위장으로, 박병용( 朴 炳 容 )을 중추부 도사로, 윤명근( 尹 明 根 )ㆍ이해영( 李 海 永 )을 훈련원 주부로, 최운환( 崔 雲 煥 )을 금위영 초관으로, 윤선용( 尹 善 容 )을 오위장으로, 홍용관( 洪 用 觀 )을 우위솔로, 심흥택( 沈 興 澤 )을 부장으로, 김창수( 金 昌 壽 )를 수문장으로, 홍종원( 洪 鍾 源 )을 경상 중군으로, 양주식( 梁 柱 植 )ㆍ허장( 許 樟 )ㆍ박홍일( 朴 弘 鎰 )을 수문장으로, 박준모( 朴 準 模 )를 훈 련원 주부로, 장교준( 張 敎 駿 )을 수문장으로, 유달원( 兪 達 源 )ㆍ권귀인( 權 龜 仁 )ㆍ하성일( 河 成 一 )ㆍ박흥식( 朴 興 植 )ㆍ맹호용( 孟 浩 瑢 )을 오위장으로 삼았다. 훈련원 판관 백광혁( 白 光 爀 ), 주 부 진응표( 秦 膺 杓 )ㆍ양종률( 梁 鍾 律 )ㆍ김명렬( 金 命 烈 ), 이상은 가설( 加 設 )인데 감하( 減 下 )하였 다. 진응표를 훈련원 판관 가설로, 박봉식( 朴 鳳 植 )ㆍ박용래( 朴 龍 來 )ㆍ백학진( 白 鶴 鎭 )을 훈련 원 주부 가설로, 이종순( 李 鍾 順 )ㆍ장두언( 張 斗 彥 )ㆍ이준호( 李 駿 鎬 )를 선전관으로, 유기완( 柳 冀 完 )ㆍ강이회( 姜 彝 會 )ㆍ이종규( 李 鍾 奎 )ㆍ이계홍( 李 啓 弘 )을 부장으로, 정수방( 鄭 秀 昉 )ㆍ이응 상( 李 應 相 )ㆍ한용재( 韓 用 在 )를 수문장으로, 임성준( 任 聖 準 )을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삼았 다. 갑암 권관( 甲 巖 權 管 )에 김유영( 金 裕 榮 )을 단부하고, 삼천포 권관에 원재유( 元 在 鍮 )를 단 부하였다. 충주 영장 이승렬, 경기 중군 오순영, 개성 중군 민영일, 청산도 첨사 윤영규, 격 포 첨사 심인택, 이상은 지금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으로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 든 것이다. 훈련원 주부에 이후근( 李 厚 根 )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범룡( 李 範 龍 )을 단 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신석규( 申 錫 圭 )ㆍ김진민( 金 鎭 民 )ㆍ홍영보( 洪 穎 普 )를 단부하 고, 훈련원 부정 가설에 이병승( 李 秉 承 )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에 이준한( 李 駿 漢 )을 단부하고, 훈련원 판관 가설에 이인식( 李 寅 植 )ㆍ이건호( 李 建 鎬 )ㆍ조경현( 趙 璟 顯 )ㆍ이석호( 李 晳 鎬 )ㆍ안철승( 安 轍 承 )ㆍ이병훈( 李 秉 薰 )ㆍ이규춘( 李 奎 春 )ㆍ이면규( 李 冕 珪 )ㆍ정명원( 鄭 明 源 )ㆍ 이양렬( 李 亮 烈 )ㆍ이학승( 李 學 承 )ㆍ송귀호( 宋 龜 浩 )ㆍ이용삼( 李 容 三 )ㆍ정순용( 鄭 舜 鎔 )ㆍ권동진 ( 權 東 鎭 )ㆍ신태휴( 申 泰 休 )ㆍ황헌주( 黃 憲 周 )ㆍ고진혁( 高 鎭 赫 )ㆍ최성환( 崔 星 煥 )을 단부하고, 훈 련원 주부 가설에 진방( 陳 芳 )ㆍ조희은( 趙 羲 誾 )ㆍ신제원( 愼 濟 遠 )ㆍ유동근( 柳 東 根 )ㆍ김종려( 金 鍾 呂 )ㆍ김한근( 金 漢 根 )ㆍ추교신( 秋 敎 臣 )을 단부하고, 오위장 가설에 김준모( 金 浚 模 )ㆍ한인수 ( 韓 仁 秀 )ㆍ김의협( 金 義 協 )ㆍ김재항( 金 在 恒 )ㆍ임극양( 林 克 養 )ㆍ유용( 劉 榕 )ㆍ한원영( 韓 元 榮 )ㆍ송 계택( 宋 啓 澤 )ㆍ정윤록( 鄭 允 祿 )ㆍ장현규( 張 賢 逵 )ㆍ김재술( 金 在 述 )ㆍ서경락( 徐 京 洛 )ㆍ이겸영( 李 謙 榮 )ㆍ길원례( 吉 元 禮 )ㆍ김수( 金 洙 )ㆍ김문상( 金 文 尙 )ㆍ장원화( 張 源 華 )ㆍ김용길( 金 龍 吉 )ㆍ조성 규( 趙 性 奎 )ㆍ이약곤( 李 若 坤 )ㆍ송인혁( 宋 寅 赫 )ㆍ오재근( 吳 在 根 )ㆍ김재빈( 金 在 斌 )ㆍ김득연( 金 得 淵 )ㆍ전기풍( 田 基 豐 )ㆍ김현교( 金 顯 敎 )ㆍ김광현( 金 光 鉉 )ㆍ김인호( 金 麟 浩 )ㆍ강봉상( 康 鳳 祥 )ㆍ이 철모( 李 喆 模 )ㆍ김홍식( 金 弘 植 )ㆍ오안묵( 吳 安 默 )ㆍ조형한( 趙 亨 漢 )ㆍ장유겸( 張 有 謙 )ㆍ우석정( 禹 錫 鼎 )ㆍ한형규( 韓 瀅 圭 )ㆍ신석규( 辛 錫 圭 )ㆍ유인근( 柳 寅 根 )ㆍ최윤종( 崔 允 鍾 )ㆍ박민학( 朴 敏 學 )ㆍ 이석규( 李 奭 奎 )ㆍ김병언( 金 秉 彥 )ㆍ유경훈( 劉 敬 勳 )ㆍ주의준( 朱 儀 俊 )ㆍ전인헌( 全 寅 憲 )ㆍ오원모 ( 吳 遠 模 )ㆍ박상순( 朴 常 順 )ㆍ김대후( 金 大 厚 )ㆍ이인봉( 李 寅 鳳 )ㆍ김석종( 金 錫 宗 )ㆍ이병모( 李 秉 謨 ) ㆍ이재범( 李 載 範 )ㆍ김재진( 金 在 鎭 )ㆍ장석호( 張 錫 浩 )를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가설에 이청 렬( 李 淸 烈 )을 단부하였다. 충청 중군 오진섬( 吳 鎭 暹 )은 한 임기를 더하여 잉임( 仍 任 )하였다. 부사과에 서상은( 徐 相 殷 )ㆍ장귀택( 張 龜 澤 )ㆍ채규붕( 蔡 圭 鵬 )ㆍ신좌희( 申 佐 熙 )ㆍ이봉규( 李 鳳 珪 )

20 - ㆍ이가희( 李 可 熙 )ㆍ오정선( 吳 定 善 )ㆍ김기정( 金 基 禎 )ㆍ홍병만( 洪 秉 萬 )ㆍ이규진( 李 圭 珍 )ㆍ홍석 범( 洪 錫 範 )ㆍ박긍수( 朴 兢 壽 ),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18. 1884 / 고종 21년 4월 14일(무오) / 군병과 군량미를 보장하여 병비에 힘쓸 것을 청하는 판돈녕부사 민영목의 상소 판돈녕부사 민영목( 閔 泳 穆 )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들으니, 군병은 백년 동안 쓰지 않을 수 있으나 나라는 하루라도 방 비가 없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방비가 있고 나서야 근심이 없는 것이니, 근심이 이른 뒤 에 방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한 지 십수 년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국경에는 사건이 많아졌고 변고가 거듭 불어나 어렵고 위 태함이 날이 갈수록 급박합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이니, 변하고 통하는 기틀 은 오직 스스로 강성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문사( 文 事 )가 있더라도 반드시 무비( 武 備 )가 있어야 한다. 약함과 강함은 짝이 되니 떨치고 일어나지 않 으면 자립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시국이 옛날과 매우 판이하여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권세와 이익을 떠받듭니다. 권세와 이익은 위엄과 무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통상하는 항구는 반드시 중병( 重 兵 )으로 보호해야 하는데 유독 우리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옛 버릇에 젖어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생각지 않은 근심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용기는 분노에 미치지 못하고 지혜는 도모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근심이 지극히 가까워 방비를 시급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저 경기 연 안은 서울의 대문이나 뜰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천연적으로 지역이 험준하니 반드시 지켜 낼 수 있는 곳인데, 방비하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되어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사의( 事 宜 )를 생각하였습니다. 대체로 해안을 방비하 는 법은 바다를 차단해야 하니 전적으로 수군에 의거해야 하는데, 지금 관할하는 바는 육군 이 수비하는 것뿐이니 매우 소홀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에게 해방 ( 海 防 )의 통제를 따르게 한 뒤에야 바다와 육지의 방비가 바야흐로 모두 완비될 것입니다. 교동( 喬 桐 )은 외딴 섬으로 군병과 양식이 모두 부족하여 통어사( 統 禦 使 )의 명칭은 이름만 있 고 실제는 없는데다가 해방영( 海 防 營 )에 소속되어 있으니 체제가 서로 모순됩니다. 수군의 절제사가 때에 따라 바뀐 전례가 한 번이 아니니, 참작하여 변통하는 것이 아마도 시기와 형편에 알맞을 것입니다. 남양( 南 陽 )의 대부도( 大 阜 島 )는 영흥도( 靈 興 島 )의 남쪽과 덕적도( 德 積 島 )의 동쪽에 끼여 있어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며, 둘레에 있는 아홉 섬의 1000호 에 가까운 백성들은 모두 물길에 익숙합니다. 요해처에 망대( 望 臺 )를 만들고 대포를 안치하 면 영흥도, 덕적도와 더불어 앞뒤에서 적을 공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의 진영을 만들어 별장( 別 將 )을 두되 신의 아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고 전적으로 통제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청과 아전들은 아직도 목관( 牧 官 ) 때 설치한 대로 있어서 그 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번거롭게 비용을 더 지출하지 않아도 병비( 兵 備 )가 거의 완전할 것 입니다. 연안 고을의 포군( 砲 軍 )은 원래의 정원이 1870명이지만 군사 훈련을 견딜 만한 사람은 겨 우 3분의 2이고 나머지는 불 때고 심부름하는 무리인데,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영방( 營 房 )을 설치하고 계기( 械 器 )를 수집하며 조련하는 방법을 차례로 거행하되, 총리아문의 포아

21 - 병( 砲 牙 兵 ), 수어청( 守 禦 廳 )의 별파진( 別 破 陣 ), 진무영( 鎭 撫 營 )의 새로 조련하는 군병은 각자 지급( 支 給 )하여 교습하는 것이 이미 제도가 되어 있으니 지금 변동하여 소란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항상 조련하고 신칙하여 유사시에 징발하여 조달하는 것이 실로 편리할 것 입니다. 경기 연안의 한쪽 면의 수로는 서쪽으로 풍덕( 豐 德 )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 通 津 )이 있으 며, 육로는 인천의 제물포항( 濟 物 浦 港 )과 남양의 마산포( 馬 山 浦 )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 로 가는 직통 길입니다. 해구( 海 口 )의 방어는 강화영( 江 華 營 )에 부속시켜 육지의 수비를 전 담하게 할 것이며, 해방영이 현재 부평( 富 平 )에 주둔하고 있으니, 풍덕과 남양에 마땅히 다 시 두 갈래의 방어막을 두어 호응하고 연락하게 하면되겠는데, 군병을 나누어 세력을 약하 게 하는 일은 병법에서 꺼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두 곳에 별도로 본토의 용사를 각각 2, 3대( 隊 )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고 병법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하여 오랫동안 해읍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게 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위급할 때 효력을 얻기가 쉬울 것입니다. 옛날에는 군병이 전부( 田 賦 )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병을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바뀌어 장정( 長 征 )을 하므로 운반하여 공급하는 일이 모두 고을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일의 형편이 그러하니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 將 吏 )는 대략 2000인인 데, 1인이 하루에 3되를 먹고 하루에 드는 자금이 3전( 錢 )이니, 1년이면 곡식이 1만 4400 포( 包 )가 되고 돈은 21만 6000민( 緡 )이 됩니다. 사목( 事 目 )에서 획정한 포군의 군량미 800 여 섬과 사창( 社 倉 )의 모곡( 耗 穀 ) 6000냥으로는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마음 에 의혹이 있으니 속히 규정을 정해야 합니다. 병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군량미는 원 래 나오는 근본이 있어야 항상 계속할 수 있다. 고 말합니다. 빌건대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헤아려서 세액( 稅 額 )을 나누어 주어 넉넉하게 군량을 보장하소서. 군병이 먹 을 것이 풍족하게 되는 것은 오직 위에서 명령하는 바에 달려 있습니다. 또 군량미를 넉넉하게 하는 데에는 둔전( 屯 田 )만한 것이 없는데 둔전은 반드시 공한지( 空 閑 地 )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인천, 남양, 장봉( 長 峯 ) 등지에 있는 목장은 말떼가 거의 없는데, 토지는 모두 비옥하여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혁파하여 그 땅에 둔전을 경영하 도록 허락하고, 소속된 토지의 총 결수( 結 數 )도 아울러 이관하고, 급하지 않은 자금은 덜어 내어 실용하면, 진실로 양쪽으로 이익이 되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영과 진에 군량미와 자금이 넉넉하더라도 기계와 의장( 衣 裝 ) 및 운송하는 비용을 일 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으니, 만일 재물을 늘리는 방도가 없으면 갑자기 군용이 결핍 될 것입니다. 어로세( 漁 撈 稅 ), 염전세( 鹽 田 稅 ), 선박세( 船 舶 稅 ) 등 세 가지 세금을 앞서 떼어 주시는 은택을 입었으나 징수하는 돈이 많지 않습니다. 각궁의 면세를 경기 감영에서 잉여 를 취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있으나, 다른 도에 있는 망정결( 望 定 結 )이 아직도 많으니, 모 두 경기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 내어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을 제외 하고 모두 해방( 海 防 )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일정한 규례를 삼는다면, 경상 비용을 더 허비 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저축한 것으로 경비를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해롭게 하지 않고 재물을 손상하지 않는 데에는 이보다 편리한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병비( 兵 備 )는 중대한 임무입니다. 국가의 안위( 安 危 )가 매여 있는 바인데, 더구나 이렇게 처 음 제도를 설치하는 때에는 더욱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에게 의뢰하여 야 합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쓸모 없는 선비로 무슨 취할 만한 재능이 있겠습니까. 위중( 威 重 )함은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지 못하고 사려( 思 慮 )는 뜻밖의 일을 응대하지 못하며, 나이는

22 - 또 노쇠하여 분주한 일을 감당하지 못하니, 이는 신의 말을 굳이 듣지 않고도 성상께서 모 두 밝게 아시는 바입니다. 조정의 거조는 결단코 아이들의 장난을 보듯이 하여 오래도록 잘 못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여기에 진술한 것은 모두 시급하고 절실한 사정에 관계됩니 다. 사사로운 충정에 감격하여 말을 절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세히 보시고 만일 채납할 만하시면 묘당으로 하여금 상세히 따져서 국사에 시행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 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은 비록 물러나 초야에 묻힌다 해도 더불어 영광이 되겠습니 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아뢴 모든 조목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실하고 시급한 것들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9. 1884 / 고종 21년 4월 21일(을축) / 경기 연안의 해방 사무 민영목의 상소에서 청한 대로 각도의 망정결을 경기로 보낼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의정부가 아뢰기를, 경기 연안을 총관하는 해방 사무( 海 防 事 務 ) 민영목( 閔 泳 穆 )이 상소한 데 대하여 비답하시기 를, 진술한 여러 조목들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실하고 시급한 것들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상소를 가져다 보니, 그 하나는, 지금의 관할하는 것은 단지 육군이 맡아 방비하고 있는 데, 매우 소홀하니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 水 軍 )은 해방영( 海 防 營 )에게 지휘를 받도록 허 락해 주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해안의 요충지는 오로지 수군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현재 아문에서 관할하는 것은 수천 명의 육군일 뿐이니, 견고하게 지켜야 하는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소홀하여 어찌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을 아울러 통 괄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분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교동( 喬 桐 )은 외딴 섬으로 군병과 군량미가 모두 부족하여 통어사( 統 禦 使 )의 명 칭이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으므로 때에 따라 변혁한 전례가 한 번만이 아니니, 참작하여 변통하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통어사의 호칭은 있으나 군대의 편제나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전혀 모양을 갖추지 못하여 그전부터 변혁한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습니다. 게 다가 지금은 해방영에 소속되어 있으니,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수군절도사와 통어 사의 직위를 감하( 減 下 )하고 해당 부사가 방어사의 자격으로 시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남양( 南 陽 ) 대부도( 大 阜 島 )는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로 거주하는 백성들이 물길에 익숙하니, 망대를 설치하고 포를 안치하여 별도의 진영을 만들고 별장을 두되 본 아 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도록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이 섬은 영흥도( 靈 興 島 )와 덕적도 ( 德 積 島 )의 사이에 끼여 있으니 실로 해문( 海 門 )의 요충지입니다. 진영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반드시 깊이 재량한 것이겠지만 별장의 한 자리는 해당 아문에서 천거하여 차임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연안 고을의 포군은 원래의 정원이 1870명인데 군사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 람은 겨우 3분의 2이고 그 나머지는 불을 때거나 심부름하는 사람인데, 역시 없어서는 안

23 - 됩니다. 영방( 營 房 )을 설치하고 계기( 械 器 )를 수집하며 차례로 훈련하되 총리아문의 포아병 ( 砲 牙 兵 ), 수어영( 守 禦 營 )의 별파진( 別 破 陣 ), 진무영( 鎭 撫 營 )의 새로 훈련된 군병들은 항상 조련하고 신칙하여 유사시에 징발하여 조달하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연안 고을에 있 는 포군의 무기를 정비하고 기예를 연마시키고 세 영의 군병들을 조련하고 신칙하여 징발하 고 조달하는 등의 일은 아울러 이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경기 연안의 한쪽 면의 물길은 서쪽으로 풍덕( 豐 德 )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 ( 通 津 )을 경유하며, 육로는 인천의 제물포항과 남양의 마산포( 馬 山 浦 )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로 가는 직통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다 입구의 방어는 강화영( 江 華 營 )에 부속시켜 육지 의 수비를 전담하게 할 것이며, 해방영이 현재 부평에 주둔하고 있으니, 풍덕과 남양에 의 당 두 갈래의 방어막을 두어 호응하고 연락해야 하는 데, 군병이 나뉘면 위세가 약해지니 두 곳에 별도로 본토의 용사를 각각 2, 3대( 隊 )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으면서 병법에 익 숙한 사람을 가려서 오래도록 해읍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게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물이나 육지의 요충지에 별도로 본토의 병사를 선발하여 묶어서 조련시키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두 고을의 수령을 가려서 차임하고 오래도록 맡긴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이것은 별도로 전조( 銓 曹 )에 신칙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 將 吏 )는 대략 2000인인데 1인이 하루에 3되를 먹 고 하루에 드는 자금이 3전( 錢 )이니, 일 년이면 곡식이 1만 4400포가 되고 돈은 21만 6000민( 緡 )이 됩니다. 사목으로 획정한 포군의 군량미 800여 섬과 사창의 이자 6000냥으 로는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으니 바라건대 해당 관청에 신 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헤아려 세액을 나누어 주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군병이 있으면 군 량미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는 일의 형세로 보아 당연합니다. 이것은 바로 제일의 관건인데 돈과 곡식을 맡고 있는 관청에서 세입과 세출이 아직 넉넉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으니, 옮 겨 획급해 주는 것은 거론하여 의논하기 곤란합니다. 그 하나는, 군량미를 넉넉하게 하는 데는 둔전( 屯 田 )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 인천, 남양, 장 봉( 長 峯 ) 등지의 목장은 말들이 거의 없고 토지가 모두 비옥하여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혁파하여 그곳에 둔전을 경영할 것을 허락하고 소속한 토지의 총 결수( 結 數 )도 아 울러 이관하도록 하소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둔전의 제도는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공한지에 서 실용( 實 用 )을 거두도록 하자고 상소에서 아뢴 말은 스스로 짐작하고 헤아린 것이 있으 니, 목장 중에서 옮길 만한 것과 혁파할 만한 것을 경시( 冏 寺 )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 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영진( 營 陣 )에 군량미와 자금이 넉넉하더라도 기계( 器 械 )와 의장( 衣 裝 ) 및 운송하 는 비용도 1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습니다. 다른 도( 道 )에 있는 망정결( 望 定 結 )이 아직도 많으니 한결같이 아울러 경기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 내어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을 제외하고 모두 해방( 海 防 )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일정한 규례를 삼게 하소 서. 라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정한 군량미의 액수 이외에 들어가는 기계, 의장, 물자를 운송 하는 비용이 필경 많을 것이니, 각도에 있는 망정결을 아울러 경기로 보내고 이미 궁결( 宮 結 )에 있는 것은 삭제하며, 정식에 있는 공적인 비용에서 나머지를 계산하여 해당 아문에 소속시켜 비용을 보충하도록 하되, 이는 토지의 정사( 政 事 )에 관계된 것이니 호조에서 관문 ( 關 文 )을 발송하여 알리고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4-20. 1884 / 고종 21년 5월 27일(신축) / 경기 연해의 해방영 둔전에 대해 남양 등의 목장 개간지를 해당 아문에 획급해주겠다는 사복시 일제조 등의 계 또 사복시 일제조와 이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경기 연해의 해방영( 海 防 營 ) 둔전( 屯 田 )에 대한 사안은, 의정부의 회계( 回 啓 )를 따라 남양 ( 南 陽 ), 장봉( 長 峯 ), 인천( 仁 川 ) 세 곳에 있는 목장 개간지를 상소에서 청한 대로 해당 아문 에 획급( 劃 給 )해 주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21. 1884 / 고종 21년 윤5월 3일(병오) / 해서 등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절제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통어사( 統 禦 使 )를 감하한 후 경기 연안 수군이 이미 해방 아문( 海 防 衙 門 )에 속하였습니다. 따라서 해서( 海 西 )와 호서( 湖 西 )의 수군을 해방 아문이 일체로 절제하게 하고, 덕적( 德 積 )ㆍ 덕포( 德 浦 )ㆍ주문( 注 文 )ㆍ영흥( 靈 興 )ㆍ장봉( 長 峯 )의 전최( 殿 最 )는 기영( 畿 營 )으로 하여금 구관 하게 하고, 남양( 南 陽 ), 장봉( 長 峯 )ㆍ인천( 仁 川 ) 목장은 이미 태복시에서 복계하여 당해 아문 에 갈라 붙였으니, 목관( 牧 官 )을 모두 감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2. 1884 / 고종 21년 윤5월 5일(무신) / 남양 등의 겸감목관을 오늘 정사에서 감하하겠다는 병비의 계 또 병비의 말로 아뢰기를, 의정부 초기로 인하여 남양( 南 陽 )ㆍ인천( 仁 川 )ㆍ단천( 端 川 )ㆍ장봉( 長 峯 )의 겸감목관을 모두 감하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오늘 정사에서 감하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23. 1884 / 고종 21년 6월 30일(임인) / 전최를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경기 감사 김굉집 등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제도( 諸 道 )의 포폄 계본( 褒 貶 啓 本 )을 뜯어 보니, 경기 감사 김굉집( 金 宏 集 )의 계본 가운데 장봉 별장( 長 峰 別 將 ) 장중술( 張 重 述 )에 대해서는 작은 섬에서 노성( 老 成 )한 체한다. 하였고, 황해도 병마절도사 정운익( 鄭 雲 翼 )의 계본 가운데 소이 만호( 所 已 萬 戶 ) 임연( 林 演 )에 대해서 는 공사를 하려면 마땅히 더 성실해야 한다. 하였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종건( 李 鍾 健 ) 의 계본 가운데 창주 첨사( 昌 洲 僉 使 ) 김성국( 金 星 國 )에 대해서는 막중한 군부( 軍 簿 )의 보고

25 - 가 어찌 사실과 다른가. 하였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민경호( 閔 敬 鎬 )의 계본 가운데 임치 첨사( 臨 淄 僉 使 ) 장택교( 張 擇 喬 )에 대해서는 비방을 어찌 다 믿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하고( 下 考 )에 두어야 하는데도 중고( 中 考 )에 두었습니다. 경상 감사 조강하( 趙 康 夏 )의 계본 가운데 분산 별장( 盆 山 別 將 ) 정기영( 鄭 基 榮 )에 대해서는 관방( 關 防 )이 가볍지 않은데 순초( 巡 哨 )에 더욱 부지런하다. 하였고, 전라 감사 김성근( 金 聲 根 )의 계본 가운데 삼도 별장( 三 島 別 將 ) 이용기( 李 龍 基 )에 대해서는 1년이 지나 그 서민 이 부유하게 되었다. 하였고, 통제사 이원회( 李 元 會 )의 계본 가운데 섬진 별장( 蟾 津 別 將 ) 김 기열( 金 基 烈 )에 대해서는 요찰( 瞭 察 )을 자세히 하고 환곡을 받아들이는 데 근신( 勤 愼 )한다. 하였으니, 모두 중고에 두어야 하는데도 상고( 上 考 )에 두었습니다. 강원 감사 민치서( 閔 致 序 )의 계본 가운데 삼방 별장( 三 防 別 將 ) 김희련( 金 希 連 )에 대해서는 진( 鎭 )이 쇠잔하다고 혹 방수( 防 守 )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황해도 병마절도사 정운익( 鄭 雲 翼 )의 계본 가운데 문산 만호( 文 山 萬 戶 ) 최재호( 崔 載 鎬 )에 대해서는 나이가 젊 어 날카로우니, 혹 비방을 부르지 않으랴. 하였고, 통제사 이원회( 李 元 會 )의 계본 가운데 안 골 만호( 安 骨 萬 戶 ) 김상준( 金 尙 俊 )에 대해서는 유연함이 강함을 제압하니 미련한 사람도 수 그러들었다. 하였고, 구소비포 별장( 舊 所 非 浦 別 將 ) 박기린( 朴 基 璘 )에 대해서는 금송( 禁 松 )에 꽤 부지런하고 대포( 代 布 )가 균일하다. 하였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종건( 李 鍾 健 )의 계본 가운데 식송 만호( 植 松 萬 戶 ) 이윤평( 李 允 坪 )에 대해서는 관문의 요충을 다스림에 본디 흠이 없다. 하였고, 황해도 수군절도사 민치설( 閔 致 卨 )의 계본 가운데 금사 별장( 金 沙 別 將 ) 전호 신( 全 浩 信 )에 대해서는 더욱 직임 살피기에 힘쓰고 성실함이 귀하다. 하였고, 전라좌도 수 군절도사 이희갑( 李 熙 甲 )의 계본 가운데 녹도 만호( 鹿 島 萬 戶 ) 경흥준( 景 興 俊 )에 대해서는 잔파한 관방이니 한결같은 규모로 방수하였다. 하였고, 우수사 민경호의 계본 가운데 남도 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 이기영( 李 基 永 )에 대해서는 이미 풍속이 완악함을 알고는 먼저 간리 ( 奸 吏 )를 살폈다. 하였으니, 모두 하고에 두어야 하는데도 상고에 두어, 아주 엄명하게 전최 하는 뜻이 없습니다. 해당 도신과 수신을 모두 추고하여 경책하고, 장봉 별장 장중술, 소이 만호 임연, 창주 첨사 김성국, 임치 첨사 장택교는 모두 하고로 시행하고, 삼방 별장 김희련, 문산 만호 최재호, 안골 만호 김상준, 구소비포 별장 박기린, 식송 만호 이윤평, 금사 별장 전호신, 녹도 만호 경흥준, 남도포 만호 이기영은 순전히 폄하한 말이어서 그 무식함을 알 수 있으니, 모두 파 출하여야 합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종건의 계본에는 인산 첨사( 麟 山 僉 使 ) 김화건( 金 和 鍵 )의 건( 鍵 ) 자를 건( 健 ) 자로 썼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민겸호의 계본에는 임치 첨사 장택교( 張 擇 喬 )의 택( 擇 ) 자를 택( 澤 ) 자로 썼습니다. 성상께 아뢰는 문자는 얼마나 조심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처럼 잘못 썼으니,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고하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4. 1886 / 고종 23년 7월 29일(기미)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박주양( 朴 周 陽 )은 병이고, 참의 홍헌술( 洪 憲 述 )은 병이고, 참지 이교하( 李 敎 夏 )는 입직인데 나왔고, 동부승지 정인흥이 나왔다.

26 - 이창호( 李 昌 鎬 )를 겸 훈련원도정으로, 이용겸( 李 容 謙 )을 내금위장으로, 이규현( 李 奎 炫 )을 선 전관으로, 김연하( 金 演 夏 )를 훈련원 첨정으로, 백낙균( 白 樂 均 )을 만포 첨사( 滿 浦 僉 使 )로, 이 한익( 李 漢 翼 )ㆍ이병룡( 李 秉 龍 )ㆍ맹계선( 孟 繼 善 )을 훈련원 판관으로, 어득찬( 魚 得 璨 )을 주부 로, 우충식( 禹 忠 植 )을 인동 만호( 仁 同 萬 戶 )로, 이병승( 李 秉 承 )을 공주 영장( 公 州 營 將 )으로, 윤 창근( 尹 昌 根 )을 청주 영장( 淸 州 營 將 )으로, 장봉진( 張 鳳 鎭 )을 삼척 영장( 三 陟 營 將 )으로, 구연 팔( 具 然 八 )을 강화 중군( 江 華 中 軍 )으로, 유장렬( 柳 漳 烈 )을 함흥 중군( 咸 興 中 軍 )으로, 오치기 ( 吳 致 箕 )를 동지로, 민준호( 閔 俊 鎬 )를 훈련원 정으로, 이항로( 李 恒 魯 )를 첨정으로, 한중섭( 韓 仲 涉 )을 판관으로 삼았다. 이민석( 李 敏 錫 )을 가리포 첨사( 加 里 浦 僉 使 )로, 송치영( 宋 致 榮 )을 동지로, 유기선( 柳 冀 先 )을 선전관으로, 구창서( 具 昌 書 )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선용( 金 善 容 )을 충청 병사로, 유긍로( 柳 兢 魯 )를 황해 병마 우후로, 이충호( 李 忠 鎬 )를 고산리 첨사( 高 山 里 僉 使 )로, 유돈수( 柳 敦 秀 )를 신광 첨사( 神 光 僉 使 )로, 홍학주( 洪 鶴 周 )를 성진 첨사( 城 津 僉 使 )로, 허호( 許 鎬 )를 고령 첨사( 高 嶺 僉 使 )로, 한창리( 韓 昌 履 )를 전라 병마 우후로, 이희모( 李 熙 模 )를 훈융 첨사( 訓 戎 僉 使 )로, 손응태( 孫 應 泰 )를 혜산 첨사( 惠 山 僉 使 )로, 이종철( 李 鍾 哲 )을 순천 영 장( 順 天 營 將 )으로, 홍채( 洪 埰 )를 선전관으로, 이민철( 李 敏 哲 )을 전라 좌병마 우후로, 윤치성 ( 尹 致 聖 )을 동지로, 정운익( 鄭 雲 翼 )ㆍ민종호( 閔 宗 鎬 )ㆍ이교창( 李 敎 昌 )을 동지훈련원사로, 차 호진( 車 好 鎭 )을 경상 좌수 우후로, 유진규( 兪 鎭 奎 )ㆍ정규섭( 鄭 圭 燮 )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 교영( 李 敎 榮 )ㆍ이용은( 李 容 殷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김재석( 金 在 奭 )을 황해 수우후로, 이규현( 李 奎 炫 )ㆍ정용기( 鄭 龍 基 )ㆍ하도일( 河 道 一 )ㆍ권응규( 權 應 圭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규 진( 李 圭 珍 )을 주부로, 이교민( 李 敎 敏 )을 선전관으로, 정희열( 鄭 熙 悅 )을 중추부 도사로, 이종 규( 李 鍾 奎 )를 훈련원 판관으로, 박완혁( 朴 完 赫 )을 방답 첨사( 防 踏 僉 使 )로, 김완주( 金 完 周 )를 주문 첨사( 注 文 僉 使 )로, 김재우( 金 在 遇 )ㆍ이계선( 李 啓 善 )을 훈련원 부정으로, 민태식( 閔 台 植 ) 을 주부로, 김계흥( 金 啓 興 )을 장봉 별장( 長 峯 別 將 )으로, 고남식( 高 南 植 )을 남고 별장( 南 固 別 將 )으로, 이계호( 李 啓 好 )를 선전관으로, 신홍일( 申 弘 一 )을 동관 첨사( 潼 關 僉 使 )로, 이완길( 李 完 吉 )을 옥포 만호( 玉 浦 萬 戶 )로, 김기영( 金 基 英 )을 제포 만호( 薺 浦 萬 戶 )로, 김규삼( 金 奎 三 )을 남도포 만호( 南 桃 浦 萬 戶 )로, 최영서( 崔 永 書 )를 어란 만호( 於 蘭 萬 戶 )로, 정광원( 鄭 光 源 )을 용 진 만호( 龍 津 萬 戶 )로, 한몽환( 韓 夢 煥 )을 덕진 만호( 德 津 萬 戶 )로, 조성섭( 趙 性 涉 )을 식송 만호 ( 植 松 萬 戶 )로, 백명홍( 白 明 弘 )을 오로량 만호( 吾 老 梁 萬 戶 )로, 홍채( 洪 埰 )ㆍ이기주( 李 起 周 )를 훈련원 첨정으로, 구주현( 具 周 鉉 )을 별영 파총( 別 營 把 摠 )으로, 권시흥( 權 時 興 )을 막령 만호 ( 幕 嶺 萬 戶 )로, 조상옥( 趙 尙 沃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최공복( 崔 公 福 )ㆍ이세직( 李 世 稙 )ㆍ 심후택( 沈 厚 澤 )ㆍ임찬화( 林 贊 化 )ㆍ오익선( 吳 翼 善 )을 오위장으로, 손여인( 孫 汝 仁 )ㆍ안영조( 安 永 祚 )ㆍ한수경( 韓 守 璥 )을 창덕궁 위장으로, 이계선( 李 啓 善 )을 선전관으로, 윤규선( 尹 奎 善 )을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이교민( 李 敎 敏 )을 훈련원 부정으로, 민치승( 閔 致 昇 )을 판관으로, 이 교영( 李 敎 榮 )ㆍ전원근( 田 源 根 )ㆍ이규연( 李 圭 淵 )을 주부로, 조재오( 趙 載 五 )를 선전관으로, 이 상희( 李 象 羲 )ㆍ윤태일( 尹 泰 逸 )을 훈련원 주부로, 최일녕( 崔 日 寧 )을 좌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안응정( 安 應 禎 )을 수문장으로, 오태영( 吳 泰 泳 )을 훈련원 판관으로, 석태로( 石 泰 魯 )를 수문장 으로, 이병화( 李 秉 和 )를 갈파지 첨사( 波 知 僉 使 )로, 김성곤( 金 成 坤 )을 서림 첨사( 西 林 僉 使 )로, 김영득( 金 永 得 )을 벽단 첨사( 碧 團 僉 使 )로, 하순일( 河 順 一 )을 중추부 경력으로, 전학용( 全 學 容 )을 훈련원 주부로, 이지효( 李 志 孝 )를 수문장으로, 이원식( 李 源 植 )을 선전관으로, 김격순 ( 金 格 淳 )을 황척파 만호( 黃 拓 坡 萬 戶 )로, 신표희( 申 杓 熙 )를 훈련원 첨정으로, 이민제( 李 敏 濟 ) ㆍ이풍래( 李 豐 來 )를 별영 초관으로, 이건수( 李 建 壽 )ㆍ조병온( 趙 炳 瑥 )을 부장으로, 김기명( 金 基 明 )을 훈련원 주부로, 이우로( 李 友 魯 )를 별영 초관으로, 김정항( 金 定 恒 )을 볼하 첨사( 乶 下

27 - 僉 使 )로, 남기완( 南 基 完 )을 훈련원 주부로, 윤영진( 尹 泳 璡 )ㆍ이기욱( 李 起 郁 )ㆍ홍우겸( 洪 祐 謙 ) ㆍ백명기( 白 命 基 )를 선전관으로, 임병호( 林 炳 鎬 )ㆍ이창섭( 李 昌 燮 )을 부장으로, 유석용( 柳 錫 用 )ㆍ안동표( 安 東 彪 )ㆍ조기동( 趙 基 東 )ㆍ이창익( 李 昌 翼 )ㆍ김종학( 金 宗 學 )ㆍ박조영( 朴 祚 永 )을 수문장으로, 윤치봉( 尹 致 鳳 )을 동도 참군( 東 道 參 軍 )으로, 임순초( 林 淳 楚 )를 서도 참군( 西 道 參 軍 )으로, 이용선( 李 容 善 )을 남도 참군( 南 道 參 軍 )으로 삼았다. 인화보 권관( 寅 火 堡 權 管 )에 김 규천( 金 奎 天 )을 단부하였다. 공주 영장 이병승( 李 秉 承 ), 청주 영장 윤창근( 尹 昌 根 ), 삼척 영 장 장봉진( 張 鳳 鎭 ), 강화 중군 구연팔( 具 然 八 ), 함경 중군 유장렬( 柳 漳 烈 ), 가리포 첨사 이민 석( 李 敏 錫 ),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동지훈련원사에 김병일( 金 炳 一 )을 단부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지중추부 사 가설에 진상욱( 秦 尙 彧 )과 이응준( 李 應 浚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 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유기선( 柳 冀 先 )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하용제( 河 龍 濟 ), 이원식( 李 源 植 ), 황찬( 黃 穳 ), 강유형( 姜 有 馨 ), 윤석정( 尹 錫 禎 ), 윤자복( 尹 滋 復 ), 이민원( 李 敏 源 ), 이규성 ( 李 圭 晟 ), 김익래( 金 益 來 ), 유풍렬( 柳 豐 烈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첨정 가설 열다섯 자리에 이교석( 李 敎 奭 ), 성낙호( 成 樂 頀 ), 안형순( 安 亨 淳 ), 최주현( 崔 周 顯 ), 윤석기( 尹 錫 祺 ), 조존찬( 趙 存 贊 ), 이광렬( 李 光 烈 ), 홍주범( 洪 周 範 ), 이창환( 李 昌 煥 ), 김진환( 金 鎭 桓 ), 이희성( 異 熙 成 ), 이 장환( 李 章 煥 ), 강형준( 康 亨 俊 ), 권명호( 權 命 鎬 ), 홍종욱( 洪 鍾 郁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가설 서른한 자리에 이병홍( 李 秉 弘 ), 이기헌( 李 琦 憲 ), 김진풍( 金 振 豐 ), 이준성( 李 駿 性 ), 윤희 영( 尹 喜 永 ), 권형진( 權 瀅 鎭 ), 원익상( 元 益 常 ), 임선호( 任 宣 鎬 ), 원세록( 元 世 祿 ), 민영석( 閔 泳 錫 ), 채규승( 蔡 奎 昇 ), 박인화( 朴 寅 和 ), 이두황( 李 斗 璜 ), 하흥룡( 河 興 龍 ), 김재한( 金 在 漢 ), 구준 희( 具 俊 喜 ), 김흥학( 金 興 鶴 ), 김천봉( 金 千 奉 ), 권종렴( 權 鐘 濂 ), 민인호( 閔 麟 鎬 ), 윤홍식( 尹 弘 植 ), 이희상( 李 熙 相 ), 이원영( 李 元 榮 ), 남석린( 南 錫 麟 ), 이상우( 李 商 雨 ), 김홍제( 金 鴻 濟 ), 이원 호( 李 源 鎬 ), 이찬서( 李 纘 緖 ), 정순룡( 鄭 淳 龍 ), 권우섭( 權 友 燮 ), 유길로( 柳 吉 魯 )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주부 가설 여덟 자리에 부장 고재신( 高 載 臣 )ㆍ홍의섭( 洪 宜 燮 )ㆍ이홍선( 李 弘 善 ), 수문 장 정재욱( 鄭 在 旭 )ㆍ정명장( 鄭 命 長 )ㆍ전경식( 全 敬 植 )ㆍ장흥식( 張 興 植 )ㆍ한경문( 韓 景 文 )을 단 부하였는데, 이상은 승서( 陞 敍 )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선전관 가설에 민영국( 閔 泳 國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에 김우열( 金 佑 烈 )을 단부하고, 첨지에 김상우( 金 商 羽 ), 박형우( 朴 亨 祐 ), 이정호( 李 貞 祜 )를 단부하였는데, 이상은 규례대로 제수한 것이다. 부사과에 강석현( 康 錫 鉉 )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원 주부 가설에 정광원( 鄭 光 源 )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김윤구( 金 潤 九 ), 훈련원 주부 맹계 선( 孟 繼 善 ), 이상 가설직은 정식에 의거하여 감하( 減 下 )하였다. 겸 내금위장에 조희빈( 趙 羲 斌 )을 단부하고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25. 1886 / 고종 23년 12월 29일(정해) / 병비의 관원 현황 병비에, 판서 민응식( 閔 應 植 )은 나왔고, 참판 백남익( 白 南 益 )은 병이고, 참의 조문하( 趙 文 夏 )는 입직인데 나왔고, 참지 홍헌술( 洪 憲 述 )은 병이고, 승지- 원문 빠짐 - 임상준( 任 商 準 )을 지훈련원사로, 양주현( 梁 柱 顯 )을 선전관으로, 신덕( 申 )과 오은영( 吳 殷 泳 )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현직( 李 賢 稙 )을 격포 첨사( 格 浦 僉 使 )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윤계환 ( 尹 啓 煥 )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이충려( 李 忠 呂 ), 유달원( 兪 達 源 ), 박제식( 朴 齊

28 - 植 )을 단부하였다. 이창하( 李 彰 夏 )ㆍ어득찬( 魚 得 璨 )을 훈련원 판관으로, 장준홍( 張 俊 泓 )ㆍ박 진희( 朴 晉 熙 )ㆍ조재홍( 趙 載 弘 )을 주부로, 최대( 崔 垈 )를 동지중추부사로, 정우식( 鄭 愚 植 )을 내 금위장으로, 박승보( 朴 承 輔 )를 선전관으로, 조기택( 趙 基 澤 )을 충청 중군으로, 정규일( 鄭 逵 一 ) 을 인차외 만호( 仁 遮 外 萬 戶 )로, 민준호( 閔 俊 鎬 )를 진주 영장( 晉 州 營 將 )으로, 원유상( 元 有 常 ) 을 홍주 영장( 洪 州 營 將 )으로, 신응균( 申 膺 均 )을 대구 영장( 大 邱 營 將 )으로, 조희중( 趙 羲 中 )을 경주 영장( 慶 州 營 將 )으로, 유긍로( 柳 兢 魯 )를 통우후( 統 虞 侯 )로, 신종균( 申 從 均 )을 훈련원 정 으로, 김중삼( 金 重 三 )을 첨정으로, 김노승( 金 魯 昇 )을 판관으로, 이수일( 李 秀 一 )을 주부로, 정 운오( 鄭 雲 五 )를 강원 중군으로, 조동철( 趙 東 哲 )ㆍ황종륜( 黃 鍾 崙 )을 오위장으로, 정옥( 鄭 沃 )을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으로, 이창렬( 李 昌 烈 )을 함흥 중군으로, 오원영( 吳 元 泳 )을 경상 우병영 우후로, 장영급( 張 泳 汲 )을 동지중추부사로, 김재우( 金 在 遇 )를 선전관으로, 이규현( 李 奎 炫 )을 훈련원 주부로, 최주현( 崔 周 顯 )을 평남 만호( 平 南 萬 戶 )로, 김중삼( 金 重 三 )을 서수라 만호( 西 水 羅 萬 戶 )로, 이창하( 李 彰 夏 )를 훈련원 첨정으로, 유담( 柳 潭 )을 주부로, 조희문( 趙 羲 聞 )을 황 해 병마 우후로, 전원근( 田 源 根 )을 황해 수군 우후로, 배영락( 裵 榮 樂 )을 전라 우수영 우후로, 조존우( 趙 存 禹 )를 겸 훈련원도정으로, 이계선( 李 啓 善 )ㆍ이건호( 李 建 鎬 )를 부정( 副 正 )으로, 임 승학( 林 承 學 )ㆍ이풍의( 李 豐 儀 )를 판관으로, 심의준( 沈 宜 駿 )을 첨지로, 이정호( 李 貞 祜 )를 충장 위장( 忠 壯 衛 將 )으로, 강이회( 姜 彝 會 )를 훈련원 판관으로, 이상곤( 李 相 坤 )을 주부로, 서상은( 徐 相 殷 )을 부장( 部 將 )으로, 황건순( 黃 建 順 )ㆍ박기훈( 朴 基 勳 )을 오위장으로, 김상윤( 金 相 潤 )을 좌 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원준( 元 浚 )을 훈련원 주부로, 김한구( 金 翰 求 )를 부장으로, 이준호( 李 駿 鎬 )를 훈련원 첨정으로, 구연창( 具 然 昌 )을 주부로, 신홍균( 申 泓 均 )을 별영 초관( 別 營 哨 官 )으 로, 유협( 柳 )을 훈련원 주부로, 이근주( 李 根 周 )를 수문장으로, 이건호( 李 建 鎬 )를 선전관으로, 마두원( 麻 斗 元 )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재희( 金 載 熙 )를 판관으로, 이찬희( 李 贊 熙 )를 좌변포도 청 종사관으로, 허규( 許 珪 )를 선전관으로, 맹효술( 孟 斅 述 )ㆍ신기석( 辛 琦 錫 )을 오위장으로, 김 재우( 金 在 遇 )를 훈련원 부정으로, 이신재( 李 信 在 )ㆍ남기완( 南 基 完 )을 첨정으로, 김성태( 金 星 泰 )를 중추부 경력으로, 신좌희( 申 佐 熙 )를 훈련원 주부로, 박영전( 朴 暎 銓 )을 판관으로, 백낙 형( 白 樂 亨 )을 주부로, 신경균( 申 慶 均 )을 좌사어( 左 司 禦 )로, 김신묵( 金 信 默 )을 훈련원 첨정으 로, 이건수( 李 建 壽 )를 중추부 도사로, 이경권( 李 敬 權 )ㆍ염창진( 廉 昌 鎭 )을 훈련원 주부로, 유 기준( 兪 起 濬 )을 우익찬( 右 翊 贊 )으로, 유훈( 劉 塤 )을 훈련원 판관으로, 정현조( 鄭 賢 朝 )를 주부 로, 강일형( 姜 日 馨 )ㆍ윤영수( 尹 英 秀 )를 문신겸선전관으로, 김병억( 金 炳 億 )을 좌위솔( 左 衛 率 ) 로, 박도연( 朴 道 淵 )ㆍ이진명( 李 震 明 )을 창덕궁 위장( 昌 德 宮 衛 將 )으로, 유재식( 柳 在 植 )을 허사 첨사( 許 沙 僉 使 )로, 김흥준( 金 興 俊 )을 위도 첨사( 蝟 島 僉 使 )로, 홍태경( 洪 泰 璟 )을 고군산 첨사 ( 古 群 山 僉 使 )로, 함의문( 咸 義 文 )을 장곶 첨사( 長 串 僉 使 )로, 손세규( 孫 世 奎 )를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로, 원형익( 元 亨 益 )을 수양 별장( 首 陽 別 將 )으로, 김상연( 金 相 演 )을 금성 별장( 金 城 別 將 ) 으로, 최동환( 崔 東 煥 )을 신지도 만호( 薪 智 島 萬 戶 )로, 박만섭( 朴 萬 燮 )을 서생 첨사( 西 生 僉 使 ) 로, 오익제( 吳 益 濟 )를 안의 첨사( 安 義 僉 使 )로, 노태건( 盧 泰 鍵 )을 구월 별장( 九 月 別 將 )으로, 김 승권( 金 承 權 )을 수인 별장( 修 仁 別 將 )으로, 강성익( 姜 聖 益 )을 고돌산 별장( 古 突 山 別 將 )으로, 윤호선( 尹 鎬 善 )ㆍ노진구( 盧 鎭 九 )를 수문장으로, 강문석( 康 文 錫 )을 장수 별장( 長 壽 別 將 )으로, 임찬화( 林 瓚 化 )를 대현 별장( 大 峴 別 將 )으로, 주형엽( 朱 亨 燁 )을 보산 별장( 保 山 別 將 )으로, 이 주영( 李 周 永 )을 선전관으로, 허장( 許 樟 )을 훈련원 주부로, 남궁복( 南 宮 濮 )을 부장으로, 이승 윤( 李 承 潤 )을 수문장으로, 남정헌( 南 廷 獻 )을 우부솔( 右 副 率 )로, 송순억( 宋 淳 億 )을 내금위장으 로, 유풍렬( 柳 灃 烈 )을 선전관으로, 윤병헌( 尹 秉 憲 )을 수문장으로, 김봉규( 金 奉 圭 )를 좌시직( 左 侍 直 )으로, 임윤영( 林 允 永 )을 산산 첨사( 蒜 山 僉 使 )로, 김이연( 金 利 淵 )을 수구 만호( 水 口 萬 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