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 역사 교육 교재 (교재 원고) 대한민국 국방부 - 1 -
<국방부 용역과제> 과제명 : 장병 역사교육 교재 제작 및 컨텐츠 개발 연구기간 : 2010. 11. 5. ~ 2011. 3. 4. 연구 책임자 : 이 현 수 박사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공동 연구자 : 장 창 하 박사 (선문대학교 교수) 이 민 원 박사 (원광대학교 교수 / 동아역사연구소장) 김 광 동 박사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연구수행기관 : 한국군사문제연구원 - 2 -
주제 1. <고조선의 건국> 우리 민족의 뿌리 고조선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드넓은 만주 벌판과 한반도에 자리 잡은 우리의 조 상들은 언제부터 시원( 始 原 )의 역사를 펼쳐 왔는가? 이를 민족의 형성과 그 뿌리 인 고조선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1. 역사의 저편 구석기 시대 역사는 인류와 함께 살아 왔고 영원히 살아간다. 세월을 붙잡아 둘 수 없듯이 인생 또한 붙잡아 둘 수 없다. 그러나 살아 온 지난날의 우리 조상들의 삶의 잔해( 殘 骸 )는 우리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만~350만 년 전으로 거 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화석이 발견된 오스트랄로피데쿠스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이 현생 인류의 3분의 1정도였으나, 직립보행을 하여 두 손으로 간 단하고 조잡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인류는 처음에 나무로 된 도구를 사 용하다가 곧 이어 돌로 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요령성, 길림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 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시간적으로는 구석기 시대부터이 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와 그 주변 지역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이다. 충북 단양의 금굴,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충남 공주시 석장리, 경기도 연천군 전 곡리 등에서 주먹 도끼를 비롯한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 되었다. 그 중에 서도 1979년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아시아에서는 최초였다. 주먹도끼란 사람 이 주먹에 쥐고 사용하기에 편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전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주로 발견되었는데 한반도에서도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부터 50만 년 전, 금강( 錦 江 ) 기슭의 석장리( 石 壯 里 ) 마을에도 한 무리의 사람 들이 살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자 그들은 겨우내 살았던 동굴 에서 나와 물가의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집 1) 을 짓고 새 살림터를 마련하였다. 강가의 1) 움집은 먼저 땅을 파고 나서 단단한 나무로 기둥과 서까래를 세운 뒤, 짚이나 풀을 얹어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았다. - 3 -
자갈을 주워 석기를 만들고, 사냥 나가 잡아 온 사슴, 멧돼지의 가죽을 벗겨 여자들 은 옷을 만들었다. 이렇게 아담한 보금자리를 꾸미는 일이 끝나자 남자들은 또 사냥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냥은 늘 여럿이 함께 다녔다. 코뿔소나 곰 같은 큰 짐승을 만나면 여럿이 몰이 잡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면 자기들끼리 통하는 신호 수단을 가져야 했고 그것이 발전하여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마땅한 사냥감이 없을 때는 먼 데까 지 찾아 나서야 했기 때문에 때로는 몇 주일씩이나 걸리는 오랜 여행이 되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지해 살고 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에게 자연은 때때로 두려 움의 대상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사냥을 나갈 수 없었고, 천둥 번개 속에서 공포 를 느꼈으며 내리는 비속에서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달( 月 )이 차고 기우는 순환의 원 리도 그들에게는 예사로 비치지 않았다.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자연의 섭리는 지혜의 눈을 뜨게 했다. 수십만 년에 걸친 문화의 축척은 4만 년 전부터 시작된 후기 구석기 단계에 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고 사람들의 활동 범위는 보다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석장리의 석기가 바이칼(BaiKal)호 부근의 레나(Lena)강 유역이나 흑룡강 하류에서 나오는 석기와 같은 모습을 모여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때의 사람들은 벌써 오늘날 우리들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진화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활에도 큰 발전이 있었다. 석기 만드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의미 있는 예술 활동도 시작되었는데, 울주군( 蔚 州 郡 ) 태화 강변에 자리 잡은 반구대의 바 위그림도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은 강변 바위 아랫부분에 새겨져 있는데 높 이 3m, 너비가 무려 10m에 이르는 거대한 암각화( 巖 刻 畫 )이다. 우선 보이는 것은 엄 청나게 많은 고래 그림이다. 당시 사람들은 고래잡이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바위에 새겼을 것이다. 바위에는 고래 외에 상어 거북 호랑이 사슴 멧돼지 여우 늑대 등 여러 동물들과 사냥하는 모습 등 약 300여 점이나 되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이 잘되기를 기원하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직접 조상이 되며, 뒤이어 신석기 문화를 일으켜 민족 주류를 형성하게 된 다. 2. 신석기 시대와 민족 주류 형성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빙하가 물러가고 따뜻 한 날씨 속에서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 동안의 기나긴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문화는 농경과 목축의 시작, 마제석기와 토기의 사용, 정착생활과 촌락 공동체의 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식량채집 생활을 한 - 4 -
것과는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통해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 활동 을 전개함으로써 그들의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것은 실로 신석기 혁명이라 할 만큼 큰 발전이었다. 농사를 지어 더욱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공동 체의 규모가 확대되어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한강 유역의 암사동( 岩 寺 洞 )에서는 이 시기에 수백 명이 함께 모여 살았던 유적이 발견되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한 곳에 머물러야 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움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어들인 후, 그 곡식을 담기도 하고 음식물을 끊 여 먹기 위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반도 전역과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빗살 무늬 토기 2) 이다. 그러면 신석기 시대의 주민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또 이들은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구석기 시대로부터 이 땅에 살아 온 사람들은 신 석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따뜻한 날씨 속에서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며 민족의 주류 를 형성하고, 민족 문화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구석기 시대의 이동 생활에서 벗어나 큰 강을 끼고 한곳에 모여 살게 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한민족의 원형을 만 들어 나가게 되었다. 이때의 빗살무늬 토기 문화는 한반도로부터 시베리아 바이칼호 부근, 흑룡강 유역 까지 전해졌고, 남쪽으로는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그 다음 단계인 무문토기 문화 단계에서는 앞서 있던 빗살무늬 토기 문화를 이어 받아 발전시킴으로써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한 황하 문명이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 라고 배워 왔다. 그런데 최근 요하 유역에서 매우 뛰어난 문화 수준의 엄청난 유물들 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황하강 유역보다 훨씬 앞선 문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밝혀졌 다. 그렇다면 동북아시아 문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요하 문명의 실질적인 주인 은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지금 요하 유역이 현재 중국 땅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 하지만 요하 유역에서 발견된 돌무지무덤이나 빗살무늬 토기 비파형 동검 과 북방식 고인돌 등은 만리장성 이남의 옛 중국 땅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문화 양 식이다. 오히려 만주와 한반도의 문화 양식에 더욱 가깝다. 예컨대 요하 유역의 우하 량( 牛 河 粱 )유적지에 산재해 있는 거대한 돌무지무덤의 형태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대 표적인 계단식 돌무지무덤인 장군총(장수왕릉)과 서울 석촌동의 한성 백제 시대의 것 으로 추정되는 돌무지무덤과 그 형식이 똑 같다. 더욱이 이러한 무덤에서 발굴된 옥 으로 만든 곰 조각상이나 강원도 고성에서 발굴된 한국 최초의 신석기 시대의 옥 귀 걸이나, 전남 여수의 패총에서 나온 옥 유물들이 그 재질과 형식에서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2)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대체로 바닥이 뾰족하고 겉면이 빗살무늬로 장식되 어 있다. - 5 -
물론 요하 유역의 문화를 이룬 사람들이 만리장성 남쪽으로 내려가 중국문명의 발 전에 영향을 미친 것 또한 사실이겠지만, 하지만 유물 유적의 형태와 양식으로 볼 때 요하 유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요하 유역의 문화는 한국 역사 속의 생활 모습이나 문화양식과 밀접한 관련 이 있기 때문에, 이 문화의 주인은 한국인의 조상과 더 관련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 정사인 삼국지 와 후한서 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문화의 주인공 을 동이족( 東 夷 族 )이라고 불렀다. 중국측에서 보면 동방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며, 항상 중국민족인 화하족( 華 夏 族 )과 대치되고 있었다. 이들이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 는 것이며, 신석기 시대의 문화 전통을 바탕으로 청동기문화를 꽃피우면서 고조선으 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3.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전쟁, 그리고 권력의 탄생 신석기 시대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찾아 왔을까? 바로 청동기 시대이다. 이 시대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부터 기원전1500년경에 만주와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청동기 시 대를 연다. 청동기 시대라고 모두 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썼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 다. 그 시대에도 대부분은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했다. 이것을 보면 청동기는 주로 지배층에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서서히 신분에 차이가 생겨났고 농사가 한층 더 발달하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리를 다스리는 지배자의 힘이 더욱 커졌다. 지배자들은 힘을 키우기 위해 전쟁을 하기 시작했는데, 청동으로 만든 무기로 남의 땅이나 재물 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았고, 때로는 전쟁에서 진 사람들을 끌고 와 노비로 삼기도 했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이 출현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지배자는 제천 행사 도 주관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청동 거울과 청동 방울을 가슴에 달고 등장 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청동 방울을 통해서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태양을 상징하는 청동 거울을 통해서는 신의 뜻을 읽고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 빗살무늬 토기는 무문 토기 3) 로 바뀌게 된다. 또 무문 토기는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서 부르거나 생긴 모양에 따라 부르기도 한다. 예컨데 평북 의 주의 미송리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는 미송리형 토기,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토기는 팽이를 닮았다고 해서 팽이형 토기로 불린다. 이 무문 토기는 요하에서 압록 강에 이르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는 초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 기이다. 특히 팽이형 토기는 대동강 유역에서 살던 고조선 사람들의 집터에서 주로 발견되었고 송국리형 토기는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출토된 토기이다. 무문 토기 이외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유적으로는 비파형 동검 4) 과 세형 3) 무문 토기는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무늬는 있다. 다만 신석기 시대의 빗 살 무의 토기에 비해 거의 무늬가 없다는 대칭의 의미가 강하다. 4) 고대 악기의 비파처럼 생긴 청동검을 비파형 동검 이라고 부르는데 날 중간에 돌기가 있고 칼자루 - 6 -
동검 그리고 고인돌 등이다. 이 비파형 동검은 주로 요령지방과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해서 요령식 동 검 또는 만주식 동검으로 불리기도 하며, 그 분포는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던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견된다. 반면 그 이후 등장한 1자형으로 생긴 날씬한 모양의 세형동검 은 한반도이남 지역 에서만 주로 발견되어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유적은 당시의 무덤 양식인 고인돌이 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의 가장 중대한 두 가지는 탄생과 죽음이다. 탄생은 신비요, 죽음은 경외( 敬 畏 )이다. 고대 사회에서 족장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거대한 고인돌을 통해 자신의 힘과 지위를 자랑하고 싶어 했다. 고인돌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한반도 남쪽에서 주로 발견되 는 바둑판처럼 생긴 남방식 고인돌과 한반도 서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탁자 처럼 생긴 북방식 고인돌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도 전남 화순과 전북 고창에 있는 대 규모의 고인돌 무더기와 전형적인 북방식인 강화도 고인돌이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만들어진 이들 고인돌은 이 시기에 큰 힘을 지닌 정치 집단 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 치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강력한 힘을 지닌 부족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청동으로 된 무기들을 활용하여 서로 간에 정복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힘이 센 집단은 더욱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치 집단 으로 성장하면서 드디어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4.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고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사회를 통합하면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이 고조선이 다.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 고조선은 하늘의 아들인 단군( 檀 君 )이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며 끝없이 펼쳐진 만주 평야에 그 터를 닦았다. 단군이 태어나고 나라를 세우 는 과정에 대해서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고조선( 古 朝 鮮 )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기( 古 記 )에 이르기를 옛적에 천황인 환인( 桓 因 )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아 들인 환웅( 桓 雄 )이 인간 세상을 다스려서 구제하고 싶어 하니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천하 를 두루 살펴보니 삼위태백산( 三 危 太 伯 山 )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에 알맞은 곳인지 라, 천부인( 天 符 印 ) 3개를 주면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의 무리를 거 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神 檀 樹 )아래에 내려와 그 곳을 신시( 神 市 )라 이르니, 그가 부분으로 내려갈수록 팽창되면서 곡선을 이룬다. - 7 -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비( 雨 師 ) 구름( 雲 師 ) 바람( 風 伯 )을 거느리고 농사에 관한 일, 사람들 의 목숨 질병 형벌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 때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톨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굴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얼마 후,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갔지만, 곰은 끝까지 잘 참아 마침내 21일 만에 예쁜 여자의 몸인 웅녀( 㷱 女 )가 되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해 주는 이가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 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한 뒤 아이를 낳으 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이 평양성( 平 壤 城 )에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조선( 朝 鮮 )이라 하니 그때가 경인 년( 庚 寅 年 )인 B.C 2333년이었다. 위에서 고조선을 세운이가 단군이며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의 아들임을 통해 천손민족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홍익인간( 弘 益 人 間 )의 건국정신이 스며져 있다. 원래 신화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져 있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건 국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이 때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환웅 부족은 멀리서 이동해 와서 토착 부족인 곰 을 숭상하는 부족과 연합하여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호랑이를 숭 상하는 부족이 연합형성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군은 제정일치( 祭 政 一 致 )의 지배자로서 주변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고 신성한 일로 삼았다. 하늘에 있 는 신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은 정치권력 을 행사하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배자인 동시에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제천 행사 등 을 주관하는 제사장이기도 했다. 제사장의 의미를 지닌 단군과 군왕의 의미를 지닌 왕검이라는 명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고조선의 역사 강역은 어디였을까.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청동기 시대의 대 표적인 유물 유적인 비파형 동검과 무문 토기 그리고 고인돌 등이 나오는 지역과 깊 은 관계가 있다고 볼 때, 요하 유역의 요령 지역과 요동 그리고 송화강 상류까지를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대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의 서북부 지역을 고조선의 역 사 무대로 간주해 볼 수 있다. 특히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만주 지역과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북방식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 만 아니라 이 시대의 유물인 무문 토기마저도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미송리형 토기 가, 대동강 유역에 팽이형 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조선 사람들은 요하 지역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걸 쳐서 살았으며, 그 중심세력은 요동과 평양 두 지역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8 -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다보아 가장 살기 좋은 곳, 기름진 땅에서 온갖 곡식이 무르익고, 철따라 아름다운 금수강산( 錦 繡 江 山 ), 그곳에서 하늘의 아들이 홍익 인간의 이념으로 다스리는 나라, 그것이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 그리던 이상 세계였다. 5. 고조선 사회의 성장 고조선은 건국 이래 천여 년 동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중국 땅에 서는 서쪽으로부터 은나라를 물리치고 진출한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많은 유이민들이 동쪽으로 밀려오는 형세를 보여 주는데, 이에 따라 고조선 사회도 한 차례의 변천과 정을 겪게 된다. 고조선 사회 내부의 문화 수준이 높아졌고,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사회 조직이 발 전되고 주변 여러 나라와의 접촉도 활발해졌다. 청동기술의 발달과 함께 철기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회 규모는 더욱 커져 갔다. 쇠로 만든 철제 농기구와 무기들 은 고조선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고 군사력이 강해지면서 상 비군을 두어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때의 사회상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료로서 <<한서( 漢 書 )>> 지리지( 地 理 志 )에는 고 조선의 법금 8조가 있다. 아쉽게도 우리 역사책이 아니지만 8조 중 지금은 3가지 항 목만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낭랑조선민( 樂 浪 朝 鮮 民 )에게는 법금 8조가 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배상하고 물건을 훔치면 그 집에 노비( 奴 婢 )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죄를 씻고자 할 때는 50만 전( 錢 )을 내야 했고 죄를 씻어도 부끄러워했으며, 결혼을 하려 해도 짝이 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고, 문 을 걸어 둘 필요도 없었다. 또한 여자들은 정절( 貞 節 )을 귀하게 여겼다. 법의 내용은 매우 엄격해 보이지만 그러나 죄를 짓는 것은 물론, 죄를 씻었다 하더 라도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으며, 여자들이 정절을 귀하게 여긴 것 등으로 보면 예( 禮 )의 관념이 법에 앞서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고, 벌써 이 때 사회윤리가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마다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곡식을 중하게 여기는 농경 사회였으며 노비제도와 신분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고조선의 변천과 종말 고조선의 서쪽 변방엔 중국에서 이동해 온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가운데 또 한 차례 유이민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진나라에 이어 일어난 한나라는 옛 연나라의 땅이 었던 곳에 노관( 盧 綰 )을 제후로 임명하였다. 노관은 한나라 고조( 高 祖 )유방( 劉 邦 )과 같 - 9 -
은 고향 사람이었는데, 고조가 죽고 혜제( 惠 帝 )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니, 섭정을 하 게 된 여태후( 呂 太 后 )가 노관을 미워하여 죽이려 했다. 이에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하니, 이때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 衛 滿 )이 노관을 따라 흉노로 가지 않고 무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동쪽의 고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상투를 틀고 동이의 옷을 입고 장성을 넘어 대능하를 건너와서는 고조선의 서쪽 땅에 살게 해 줄 것을 부탁하니, 이에 준왕( 準 王 )은 위만에게 서쪽 땅 100리를 내어 주면서 서쪽 변경 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규합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 갔다. 그런데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갈수록 힘이 커지자 위만은 욕 심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위만은 주위에 있는 고조선의 소읍( 小 邑 )을 아우르고 수도인 왕검성으로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BC194년) 고조선을 지배하게 된 위만은 점점 세력을 키워 위만의 손자 우거( 右 渠 )왕 때에 이 르러 힘이 한층 강해졌다. 그리고 이때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드렸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광 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 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 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하였다. 이에 한나라 무제( 武 帝 )는 기원전 109년 섭하( 涉 何 )라는 사신을 보내 우거왕과 담판 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에 섭하는 배웅 나온 고조선의 장수 장( 長 )을 죽이 고 패수를 건너 도망하였다. 그러자 한 무제는 섭하를 칭찬하고 요동 동부도위를 그 에게 맡겼다. 이에 고조선에서는 병력을 이끌고 동부도위에 쳐들어가 섭하를 죽이고 철저히 보복하니 이를 계기로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109년 가을, 무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 조선에 쳐들어 왔다. 누선장군( 樓 船 將 軍 ) 양복( 楊 僕 )에게는 수군( 水 軍 )을 주어 발해를 건너 바닷길로 공격하였고, 좌장군( 左 將 軍 ) 순체( 荀 彘 )는 육지로 대능하를 건너 왕검 성을 쳐들어가게 했다. 병력은 모두 5만 명 이었다 우거왕은 병력을 모아 요충지에서 방어 준비를 했다. 좌장군의 군대가 한 차례 공 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뒤이어 달려온 누선장군이 7천여 병력으로 왕검성을 공격하 였으나 성 안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우거의 군대가 재빨리 나아가 쳐부수니 첫 번 째 대결은 고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좌장군은 다시 고조선의 패수서군( 浿 水 西 軍 )을 공격했으나 실패하는 등 도저히 전 세를 뒤엎을 수 없었다. 이에 무제는 공손수( 公 孫 遂 )를 보내어 전열을 정비하였지만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고조선 내부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상( 朝 鮮 相 ) 역계경 - 10 -
( 歷 谿 卿 )이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항복할 것을 건의하다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리 1만 명을 이끌고 남쪽 진국으로 망명해 버렸고, 그 후 또 다시 조선상 노인( 路 人 )과 한음( 韓 陰 ) 그리고 조선니계상( 朝 鮮 尼 谿 相 ) 삼( 參 )과 장군 왕협( 王 㽠 ) 등이 왕에 게 항복을 권했으나 우거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은 벌써부터 한나라의 누선장군과 비밀리에 통하고 있던 터라 왕검성을 몰래 빠져 나와 한나라에 투항했고, 더욱이 삼은 우거왕까지 죽이고, 우거왕의 아들 장( 長 )도 한나라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이제 왕검성은 주인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왕검성은 살아 있었다.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기( 成 己 )가 끝까지 버 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나라의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 ( 最 )를 시켜 성안의 백성들을 달래고, 성기를 죽임으로써 왕검성은 드디어 함락되었고 고조선과 한나라의 기나긴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끝난 뒤 남은 건 패배뿐이었다. 고조선과 한나 라, 그 어느 쪽도 이긴 싸움이 아니었다. 오로지 왕검성이 무너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성기를 중심으로 한나라와 싸운 고조선 백성들의 정신만이 돋보였다. 비록 한나라는 왕검성을 함락시켰지만 그것은 고조선의 대신들이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 일 뿐 그들이 싸워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한나라 장수들은 작전의 실패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위산과 공손수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처형 되었고, 좌장군은 돌아가는 길로 죽음을 당했으며, 누선장군 또한 관직을 뺏기고 서민 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5) 섭하가 명분을 앞세워 저지른 우발 사건으로 일어난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한 나라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비단길(Silk Road)을 열면서 서역( 西 域 )에까지 손을 뻗 치고 대제국을 세우려던 한제의 야망에 불이 꺼지고 이때부터 한나라의 국세는 기울 어 가고 있었다. 고조선 사회에도 크나큰 변화가 있어 고조선은 종말을 고하고 뒤이 어 고구려가 일어나 위대했던 고조선의 명맥을 이어 가게 되었다. 드넓은 만주 벌판과 한반도를 주름잡았던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도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국가를 건설하고 민족 주류를 형성하면서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지만, 결국 패망할 때는 외부 침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 분열에 의해서 몰락하였다는 아쉬움 을 남기기도 했다. 생각할 문제 1. 고조선의 역사 강역을 만주대륙과 한반도로 보고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2. 무엇을 보고 고조선이 높은 수준의 사회윤리가 확립된 사회임을 알 수 있는 가? 3.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도 결국 패망할 때는 무엇 때문에 몰락하였는가? 5) 左 將 軍 徵 至 坐 爭 功 相 嫉 乖 計 棄 市 樓 船 將 軍 亦 坐 兵 至 列 口 當 待 左 將 軍 擅 先 縱 失 亡 多 當 誅 贖 爲 庶 人 <<사기>> 조선열전 -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