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芳 松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구술 구술 일시 구술 장소 채록 연구 방 2012년 5월 1일 화요일 10:00~12:00 서울 도봉구 창동 한국음악사학회 사무실 재옥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평양에서 서울로 피난 및 재동국민학교 시절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선생님, 오늘 선생님 출생하고 유년에 대해서, 그리고 국악계 입문한 내용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볼 건데요. 말씀 부탁드립니다. 음. 우리 집안에 대해 얘기를 약간 할게요. 우리 집안은 에 회덕 懷 德 씨 宋 氏 집안입 니다. 회덕 씬데, 우리 선조님 조선후기 때 평안도에 뭐라 그러나, 취직라 하기는 그렇고 그 관직을 하나 얻어 가지고 평안도로 올라갔어요. 올라간 때가 조선말기라 거기 서 그냥 주저앉아서 다시 충청도로 내려오질 않고 거기서 살게 됐어요. 그래서 일제시대 에 우리 할아버님 1 은 삼 형제가 계셨는데, 우리가 막내할아버지 손 孫 예요. 근데 저희 할아버지 삼 형제 중에서 막내인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도 일제시대 가장 출세를 한 격 라, 군수 郡 守 를 지냈어요. 평안남도 平 安 南 道 중화군 2 中 和 郡 군수. 그래서 우리 집안은 굉장 히 땅 많은 대지주 大 地 主 였어요. 그래서 굉장히 잘살았는데, 저희 할아버지의 아들로 큰아버지가 있고 우리 아버지 3 가 둘째예요. 근데 큰아버님은 할아버지께서 일본유학을 시켜가지고 명치대학 4 明 治 大 學 에 가서 공부하시고, 공부가 끝나시고는 조선총독부 5 朝 鮮 總 督 府 에 근무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삼청동 6 三 淸 洞 에다가 큰 한옥을 사줘가 지고 거기서 큰아버지가 출퇴근을 하시다가 해방을 맞았어요. 해방 맞기 전에 우리 아버 님도 할아버지께서 일본유학을 시킬라고 했는데, 우리 아버님은 그 당시에 일제 치하 1 보섭( 宋 普 燮 1885-1950): 평남남도 중화군( 中 和 郡 ) 군수( 郡 守 ) 역임. 1950년 6.25사변 때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피랍되었고 9.28 수복 때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황해도 인근에서 총살됨. 2 중화군( 中 和 郡 ): 평안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황해도 수안군, 서쪽은 용강군 강서군, 남쪽은 황해도 황주군, 북쪽은 강동 군 대동군과 인접. 3 기도( 宋 基 道 1917-1964): 배재고보( 培 材 高 普 ) 졸업. 일제강점기 배재학당( 培 栽 學 堂 ) 시절 축구선수였음. 세계우표사 경영. 1950 년대 문선명( 文 宣 明 ) 선생 세운 통일교회(원명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재정부장을 역임. 4 명치대학( 明 治 大 學 ): 일본 메지대학(Meiji University). 동경( 東 京 ) 소재. 1881년( 明 治 14) 기시모토 다쓰오( 岸 本 辰 雄 )가 세운 메 지대는 와세다( 早 稻 田 )대와 함께 일본 정치 경제 문화계의 인물을 배출한 명문대학임. 5 조선총독부( 朝 鮮 總 督 府 ): 1910년 8월 29일 국권피탈과 함께 서울에 설치되어,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까지 한국을 식민통치 하다가, 1945년 9월 9일 정식 항복조인식까지 존속했던 일제침략기관. 6 삼청동( 三 淸 洞 ):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4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므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해가지고 출세하고 싶은 생각을 안가지시고. 그냥 배재학당 7 培 材 學 堂 을 졸업하시고는 바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선생님 8 으로 간 곳 황해도예요. 황해 도 재령 載 寧 라는 데 가서 교사를 할 때에 내가,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한 거죠. 그러니 까 우리 원적 9 原 籍 은 평안남도 중화군 청학면 청학리인가? 거기가 우리 원적고, 내 태 어난 곳은 황해도고. 지금 호적 상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103번지지. 그 호적 정리를 하고 나서 우리 아버님 그 주소루 해서 지금 호적등본 띠면은 내 본적 용산구 효창동 103번지로 나와요. 그래서 재령 載 寧 에서 내가 출생을 해가지고, 그 다 음에 거기서 국민학교 교사로 아버님 재직을 하시다가 해방을 맞았어요. 그래서 우리 가 평양 平 壤 으로 올라간 거죠. 올라갔는데 그 당시에 북한에 김일성가 정권을 잡고 나 서는, 대지주 大 地 主 를 전부 그 뭐라 축출 逐 出 즉 몰아냈어. 그래가지고 우리 집안은 도망 씨 가문( 家 門 )의 할아버지 3형제(왼쪽 분 나의 할아버지) 을 하게 된 신세가 됐어요. 근데 할아버지께서 군수시절에 굉장히 선정 善 政 을 많 베풀 었대요. 내가 들은 얘긴데. 가령 할아버님 주민들에게 좋은 선정을 베푸니까 고맙다 고 닭 같은 거를 갖다가 바치면은, 절대 받지 못하게 했대요. 왜, 그 사람들은 그 닭 큰 재산인데, 우리집으로 말하면은 소가 우리집 재산듯. 우리는 닭 없어두 얼마든지 7 배재학당( 培 材 學 堂 ): 1886년 미국 감리교( 監 理 敎 )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a)가 세운 기독교 계열의 중등학교. 초대 대통령 승만을 비롯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 사립학교임. 8 지금의 초등학교 교사. 9 원적( 原 籍 ): 호적법에서 혼인나 입양 따위로 적을 옮기기 전의 본래의 호적. 15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잘 살았지. 근데 그 사람에게는 그것 전재산나 마찬가진데, 전부 돌려줘라. 그래서 굉장히 주민들로부터 호감을 많 샀대요. 그래서 우리는 몸만 피해가지구 내려왔어요. 우리가 그때 해주 10 海 州 로 내려왔대요. 왜 그러냐하면 육로 陸 路 루 해서 내려 올 수가 없는 형편었고, 도망하는 형편라 해주로 내려올 때, 짐을 하나도 못 가져왔대요. 그런데 동네 주민들 행상 行 商 처럼 짐을 꾸려가지고, 그 중화 中 和 에서 해주까지 날라다 줬대요. 그 짐을. 내가 기억 나요. 해주에서 배를 하나 사가지고. 그것도 통통통통 하는 배는 소리가 나면, 붙잡히니깐. 노 櫓 를 저어가지고 가는 배를 하나 사가지고 거기서 한밤 중에 우리 식구들 짐하고 싣고 내려왔어요. 내가 그때 네 살인가 다섯 살었는데 기 억 나요. 나는 호기심 많아가지고 배에서 올라 와보면, 들어가 저 배 밑창으로 내 려가. 라고 근데 그 사공 沙 工 하고 아버님은 계속 노를 져서 가야되니까. 그래서 해주에서 인천 仁 川 쪽으로 온 걸루 알고 있어요. 그렇게 피난을 와가지고 우리가 갈 데가 없으니까 큰아버님 집에 간 거죠. 삼청동 三 淸 洞 에. 그래 그 삼청동의 한옥 韓 屋 에서 합해서 할아버 지와 할머니도 함께 사는 거예요. 근데 내가 지금 기억으로는 삼청동 한옥을 할아버지가 굉장히 큰집을 사줬어요. 미음(ㅁ)자 집예요. 그래가지고 하늘 가운데 보였어요. 거 기서 우리 큰아버님 댁하고 우리 식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함께 같 살은 거죠. 사 는 동안에 내가 국민학교 갈 나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갔나 하면 재동국민 학교 齋 洞 國 民 學 校 라고 있어요. 낙원동 樂 園 洞 거기서 쪼금 올라가면 거기 재동라고 있는 데, 재동국민학교에 내가 입학을 했어요. 네. 몇 년도시죠 선생님? 그게 하여튼 햇수를, 하여튼 내가 일곱 살 때가 들어갔으니까. 42년생니깐 49년일 거 예요. 그래 입학을 해가지고 거기서 내가 국민(초등)학교 1학년 댕기고, 내 옛날 사진을 보면 그때 소풍라고, 산보 散 步 라고. 하여튼 그 소풍을 어디로 갔냐 하면, 창경원[ 昌 慶 宮 ]으로 가서 찍은 사진 하나 있는데, 그게 어디 구석에 있을 거예요. 그 기억 나고. 그 다음에 그 재동국민학교에서 다니다가 하두 두 집안, 큰아버지네 육 남매인가 그렇 고, 우리가 육 남매고 그러니깐, 그냥 맨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니깐 할 수 없 삼청 동 집을 팔아가지고 분가 分 家 를 하게 돼요. 그래 큰아버님은 용산경찰서 앞에 가고, 우리 는 원효로 元 曉 路 에 그래서 원효로에서 6 25사변 나기 전까지는 내가 전차 電 車 를 타고 재 동국민학교를 다닌 거예요. 근데 그 당시에 원효로에서 효자동 孝 子 洞 까지가 쪼끄만 전차 10 해주( 海 州 ): 황해도( 黃 海 道 ) 16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있어요. 여기 딸랑딸랑 하면서 가는 작은 전차고. 동대문에서 저 노량진 가는 거는 긴 전차가 있어요. 앞뒤에서 운전하는. 거기는 사람 많으니까 긴 전차가 다녔고, 효자동 에서 원효로 가는 거는 쪼끄만 전차가 다녔어요. 그래서 고걸 타고 재동국민학교 다녔던 그 기억 나네요. 네. 육 남매가 어떻게 되시나요? 누님 한 분 계시고, 형님 있고, 그담에 나, 그담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 그래서 육 남매, 그 중에 내가 세 번째예요. 셋째시군요. 그러면 그 황해도에 계실 때, 혹시 그 주변에서 국악나 그런 거를 접해보 신 경험은 있으신가요? 뭐 아주 어렸을 때니까, 그땐 내가 어린애니깐 그런 거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지요. 재동국민학교 때 창경궁 소풍(1949. 5. 19.) 17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6.25사변 부산 피난시절 성남국민학교 및 개성중학교 그럼 내려오신 다음에 부산 쪽으로 피난을 가셨다고 하셨는데요? 6 25사변 일어나가지고 그때는 인민군 하두 빨리 밀고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가 도 망을 못 갔어요. 그렇게 피난을 못 가구 피난을 어디루 갔나 하면은, 지금 서울대학교 자 리가 옛날에 그 관악산 冠 岳 山 밑에 아버님 해방하구 남 以 南 에 내려오셔서 그 당시에 남대문에 무슨 청과시장에서 일을 하셨던 거 같애요. 그래서 그 청과물을 대주는. 지금 으로 말하면 그쯤에 서울대학 쪽 굉장히 농촌었어요. 농촌지방에서 고구마니 감자 니 뭐 런 채소류를 요즘 말로 말하면 납품하던. 거기 계신 분과 친분 있어서 글루 피 난을 간 거예요. 그 여름을 거기서 지냈어요. 근데 우리가 지주손 地 主 孫 기 때문에 그 명 단을 북 인민군들 가지구 다녔던 모양에요. 그러니깐 아버님은 낮에는 관악산에 올라가서 피신을 하고, 밤에만 내려와 가지구 같 자고. 그러니까 먹을 게 없으니까 아 버님은 그 당시에 낮에는 심심하니까 산에 가서 도토리를 따 가지구 내려와서 도토리밥 을 해먹었던 기억 나고. 그때 고구마 줄거리 11 라는 거, 고구마 줄거리를 껍데기 베 껴가지고 원효로에서 된장 갖다가. 근데 그걸 원효로에 가기 위해선 어떻게 하느냐. 거 기서 지금의 봉천동으로 해가지구 흑석동 黑 石 洞 으로 해가지구, 지금 중앙대학교 있는 데 루 해가면 한강 漢 江 뚝 나와요. 그러면 그때 쌕쌕 12 라고 저 무스탕 13 라구 하는 몸통 앞에 프로펠라 달린 비행기, 그게 한강철교에 폭탄을 막 그러면 그 뚝에 엎드리구 그러 던 기억 나요. 그래서 원효로 가서 된장 같은 것두 지구와 가지구, 거기서 고구마 줄거 리를 끓여 먹었어요. 하다가 9 28수복 收 復 때 원효로로 우리 식구가 나와요. 그때 기억 인민군들 철수를, 대부대는 철수를 했는데 소부대가 철수를 안 하고. 그러니까 막 인민군도 왔다 갔다 하고. 그때 국군 國 軍 하고 미군 美 軍 은 마포 麻 布 쪽에 들어와 있고. 그 러는 상황에 아버님 배재학당 培 材 學 堂 을 나왔기 때문에 영어를 좀 했어요. 그래서 수복 11 고구마 줄기. 12 제트기를 속되게 르는 말. 13 무스탕(Mustang):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미국 공군의 전투기 름. 18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해가지구 들어오는 미군 거기에 아버님 통역하셨던 기억 나요. 그러다가 제 막 북 진 北 進 해서 올라가다가 1 4후퇴 때 우리는 서울역으로 가서 부산 釜 山 으로 피난을 갔는 데, 참 그 당시에 내 지금 기억나는 것 우리가 탔던 그 열차가 어떤 열차인가 하면 석탄 싣는 열차 있지요? 거 반쪽 짜리. 근데 우리는 굉장히 럭키lucky였어요. 왜, 반쪽 짜리 는 짐 싣고 그 위에 사람 올라타기 때문에 굴다리 들어 갈 때도 괜찮은데, 화차 火 車 있지요? 화차 그 우에 탄 사람들은 굴 들어 갈 때는 게 그냥 전부 납작하게 엎드러 뻣 쳐야지. 그래 그때는 런 디젤 기관차가 아니라 석탄 차라 굴 지나고 나면은 얼굴 새 까맣고. (웃음) 근데 그때 기억으로는 서울역을 출발을 해가지고 부산까지 일주일 걸려 서 갔어. 왜냐면 피난민 열차는 언제나 군수물자 軍 需 物 資 나르는 런 기차가 먼저 가 야지, 피난민 기차가 먼저 가도록 안 두니깐. 가다가 또 어느 역에 서면 언제 떠날지 모르는 거야. 그때 사람들은 또 내려서 불피워 가지구 밥해 먹다가 출발한다고 하면 막 끓는 그거, 끓던 냄비 싣고 타고. (웃음) 그러면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부산에 서 우리는 어디에 정착을 했나하면 범내골라고. 서면 西 面 쪽예요. 그때는 참 부산의 서면만 하더래두 굉장히 외곽지라 촌라 그러나. 피난민 동네 올라갈라면 논 있고 막 그랬어요. 서면에서 동래 東 萊 까지는 딸랑딸랑 하는 전차 타고. 서면에서 저 광복동 光 復 洞 시내 쪽에 긴 전차 다니고. 그럴 때였어요. 그래서 거기서 우리 식구가 피난민 그 촌 에서 가마니로 집을 짓고 대나무로 기둥 삼아가지고 거기서 생활을 했는데, 아버님 배 재학교 다닐 때 영어를 좀 하셔서. 부산 피난시절(1951) 범내골에서의 5남매(효인 충국 효숙 방 문규) 19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인연으로 해가지고 미군부대 쪽에서 통역장교는 아니고 하여튼 그 비슷하게 하면서 미 군장교들과 사귀었어요. 사귀다가 아버님께서 학생시절부터 우표 郵 票 를 굉장히 많 수 집을 했었어요. 구한말 舊 韓 末 우표 뭐 런 거 우표, 그 외에 마패 14 馬 牌, 뭐 런 요즘 말 로 말하면 좀 골동품지. 근데 그 미군장교들 그때 우표수집 하는 게 유행었는지 그 래. 그 미군장교들 하고 사귀면서 그 사람들 원하는 거 제공해주고. 그래서 집은 가마 니집에 살았지만 미군수품을 굉장히 많 먹었어요. 쪼콜렛을 많 먹었던 기억 나. 그러다가 아버님 제 광복동 光 復 洞 라고, 부산에 그 광복동 그러면 서울의 명동 明 洞 처럼 사람 굉장히 분비는 곳야. 하여튼 영도다리 건너기 전에 거기에 카메라점에 쪼끄만 윈도우 한 쪽을 빌려가지구 우표책을 요렇게 놓고. 고 옆에 피엑스 15 PX가 있었어. 미군 피엑스PX. 그래서 미군들 피엑스PX 물건 사가지구는 아버지 상점에 들려가지고 우표도 또 사고, 그래가지고 그 우표사업 굉장히 잘됐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그 사업 을 수복 후에 서울 올라와가지고는 신세계백화점 옆에 거기 옛날에 무학성 舞 鶴 城 빌딩 라고 있었어요. 지금 그 무슨 큰 호텔 16 거기 들어가 있던데. 그때 거기서 세계우표사 라고 해가지고 사업을 벌렸죠. 근데 그건 나중에 수복하고 나서 57년인가 58년도에 우 리가 올라왔고. 그 전까지는 내가 그러니까 국민학교 2학년 댕기다가, 부산 피난가가지 고 성남 城 南 국민학교라는 데를 내가 다녔어요. 나는 학년을 내리지 않고 바로 그냥 진학 을 했어요. 우리 형님은 하나 내려가지고, 나보다 2학년, 두 학년 위였는데 형님은 하나 내려가지고 들어가서 공부를 했고. 나는 그냥 그대로 들어 가가지고 거기서 공부를 했는데, 그것두 건물을 쓴 게 아니라 천막 같은 가건물 假 建 物 을 지어가지고 거기서 공부 를 했어요. 그 본 本 건물은 뭐 했느냐, 그때 보니깐 군악대 軍 樂 隊 가 거기 들어 왔던 거 같 애. 맨날 그 군악 연습하고 운동장에서, 우리는 그냥 가건물에서 공부하고. 그래서 거기 서 내가 국민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는 개성중학교 開 城 中 學 校 라고 서면 西 面 에 있는 개성 중학교로 내가 진학을 했죠. 그 개성중학교가 부산상고 釜 山 商 高 라고 있는데, 부산상고에 렇게 뭐라 그러나? 옛날 일제시대엔 5학년까지 있었는데, 해방되고 나서 중학교, 고 등학교를 그러니깐, 고등학교는 부산상고. 지금 부산상고가 됐고, 중학교는 개성중학교 14 마패( 馬 牌 ): 직경 10cm 가량으로 만든 구리쇠의 둥근 패. 한 쪽에 자호( 字 號 )와 연월일을 새기고, 반대쪽에 말의 그림을 새겼음. 말의 수는 한 마리로부터 열 마리까지고, 조선시대 대소관원( 大 小 官 員 ) 공사( 公 事 )로 지방에 나갈 때 역마( 驛 馬 )를 징발( 徵 發 )하는 표로 썼음. 상서원( 尙 瑞 院 )에서 마패를 주었는데, 어사( 御 使 )가 인장( 印 章 )으로 대용하며, 어사가 출두( 出 頭 )할 때 역졸 ( 驛 卒 ) 마패를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두 를 외쳤음. 15 PX(Post Exchange): 미군부대 내에 설치된 매점. 16 대연각( 大 然 閣 ) 호텔: 서울 중구 충무로 소재 22층 호텔. 1971년 12월 25일 화재로 168명의 사상자를 냄으로써 유명해진 호텔임. 20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라고. 그래 내가 개성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지요. 선생님, 아까 군악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요. 잠깐 그 경험을 하셨다고 하는데, {응.} 그때 군악대 렇게 혹시 좀 자세하게 생각나시는 그런 것들 있나요? 근데 뭐 그때 우리 공부 헐 때 그냥 그 시끄럽게 들렸던 기억밖에 안 나고, 그담에 기억 나는 게 딴딴따 딴따라라~딴딴딴딴 ( 미미레 도도시도~레도레도 음정에 맞춰 노래) 하 는 게 거 많 부는 거, 그걸 들었던 기억 나. 혹시 뭐 악기 중에서 렇게 좀 좋게 들리셨다거나 하는 것은 없으셨어요? (웃음) 그 당시에는 아 진짜 사람들 정말 죽지 못해 사는 형편에 가마니집에 살면서, 우리는 그 당시에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버님 미군들하고 좀 거래를 했기 때문에 비록 가마니집에 살았지만은 먹는 거는 참 잘 먹었어. 그 당시에 우리 어머님은 손 좀 크셔 가지고, 범일동시장 凡 日 洞 市 場 가면은 고등어 같은 것두 한두 마리를 사는 게 아니라 짝으 로 사셨어. 짝으로 사면 장사치가 그 피난민촌 언덕까지 올라와 가지구 피난민 동네까지 배달을 해줘. 그럼 어머님은 그걸 또 막 손질해가지고는 돼지 기름에 지져가지고는 그 옆 에 못사는 사람들, 피난 온 사람들 다 먹을 게 없는 사람들잖아. 그래 그거를 다 나 눠주고. 그 피난민 중에 한 분 문선명 17 文 鮮 明 선생님라고 통일교회 창설하신 그분도 우리 집 뒤에, 흙담집 짓고 살았어. 그래 내가 자주 갖다 줬어, 먹을 거를. 그래서 그때 부터 친해져가지고 나는 그분 사랑을 참 많 받았지.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그래서 우 리 집안 통일교회하고 인연을 맺게 돼 거기서. 그 인연으로. 나중에 내가 대학시절에 우리 아버님과 통일교 관련해서 얘기도 쪼금 할 거야. (웃음) 그럼 그 시대 상황하고 부산에 국악나 런걸 접할 기회도 많지 않으셨겠네요. 그때는 뭐 국악구 양악구, 음악 난 참 그때 기억 자네들은 그 뭔지 모를 거 야. 꿀꿀죽라는 게 있어. 미군들 먹다 남은 거 있잖아. 그런 걸 렇게 모아가 지고, 그거를 솥에다가 끓는 거야. 끓여가지구 지게꾼들 뭐, 헌데 그 냄새는 그게 그렇게 좋아. 그냥 국민학교 때 꼭 시장을 거쳐서 우리 동네를 가야되니깐. 그게 먹어 보고 싶은 거야. 냄새가 하도 좋으니깐. 근데 비싸지도 않았어. 나도 그 지게꾼 옆에 앉아서 먹었는데 되게 맛있었어. 기억. 근데 재수 좋으면 닭다리도 먹다 남은 거 한 반쪽 정도. (웃음) 고기도 그래서 그 당시엔 그랬어. 그리구 옷 같은 것도 군복 있잖 17 문선명( 文 宣 明, 1920~2012): 종교인. 평북 정주( 定 州 ) 출생. 일본 와세다( 早 稻 田 )대 부설 고등공업학교 졸업. 1954년 세계기독 교통일신령협회(일명 통일교회) 창립, 1975년 미국세계일보 창간, 1982년 워싱톤타임지 창간, 1989년 한국에서 세계일보 창간. 2000년 만국평화상 수상. 아버지의 기도 (1998)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2009) 등 있음. 21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아. 그 군복을 물들여가지고 입는 것 다반사 茶 飯 事 였고, 참 그 피난민 생활라는 것 참 어려웠지. 그 중에두 그래두 학교는 빠지지 않고 내가, 다닌 것만 해도 참 고마 운 일지. 상경하여 배재학교 시절, 그리고 성악가의 꿈 그러면 부산에서 중학교 다니셨어요? 2학년까지 개성중학교에 다니다가 제 서울로 올라왔지. 네. 서울에는 어디에 정착하셨나요? 서울에 올라와가지구 지금 노량진 露 梁 津. 김영삼 金 泳 三 대통령 지금 거기 우리 옛날 살 던 그 동네에 살더라고. 내가 요즘에 중앙대 박사과정 거기 출강하러 월요일마다 거기 그 옆을 지나가거든. 흑석동 중앙대학교 中 央 大 學 校. 뒷문으로 들어갈라면, 그 김영삼 씨 집 입구에 순경들 늘 지켜. 골루해서 뒷문으로 들어가는데, 그 상도동 언덕으로 올라가게 되면은 그 왼쪽으로 지금 김영삼 씨 댁 있는 데가 옛날 일본사람들 살던 적산가옥 18 敵 産 家 屋 라는 데가 있었어. 부산서 올라와서 거기서 살았어. 우리가. 그러면은 올라오셔가지고는 어떤 일을 아버님께서 하셨나요? 아버님은 맨날 제 그 세계우표사 世 界 郵 票 社 라는 데 가서 일을 하시고, 우린 제 거기서 노량진역까지 내려가 가지고 거기서 전차를 타고 남대문에서 내려서 남대문에서 옛날에 거기 명지대 明 知 大 라는 게 있었는데, 걸루 해가지고 배재학교가 지금 호암아트홀과 옛날 대법원 大 法 院 옆에 거기에 있어. 지금은 다 없어지구 벽돌집 하나만 남고, 전부 다 빌딩 들어갔어. 그럼 배재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가신 거네요. 그렇지. 근데 우리 집안 아버님께서 배재학당 培 材 學 堂 을 나오시고 우리 형님 배재 나 18 적산가옥( 敵 産 家 屋 ): 해방 후 일본인들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나 건물. 22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1950년대 상도동 시절의 부모님 : 기도( 宋 基 道 ) 변옥랑( 邊 玉 娘 ) 오고 나도 배재 나오고 내 동생도 배재 나왔어. 우리 집안은 배재 집안야. 그래서 아버 님 때부터 렇게 아버님 배재학당에 다녔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의 학생시절에 영어 선생을 하던 경렬 19 李 庚 烈 선생님라고 흥렬 20 李 興 烈 선생님 작곡가 흥렬 선생님의 형님 되시는 분, 아버님 그분한테 영어를 배웠대. 근데 내가 배재 다닐 때 그 선생님은 요즘 말로 말하면은 정년퇴임을 하시고, 그냥 뭐 렇게 나와서 강의하시는. 그래서 아 버님 가르치시던 선생님 밑에서도 내가 영어도 배우고 했지. 그러면 중학교를 졸업하시고 바로 배재고등학교로 그렇지. 바로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지. 학창시절에 실례지만 성적은 어떠셨나요? (웃음) 성적은 내가 1등 해본 적은 없는데 5등 안에는 들었어. 그래서 나는 늘 아들 보구 야, 1 등은 못 하더래도 10등 안 정도만 들면 된다. 난 그냥 그렇게 얘기를 했었어. 딱히 좋아하시던 과목 있으셨어요? 19 경렬( 李 庚 烈, 생몰년 미상): 배재중학교 영어 교사. 작곡가 흥렬( 李 興 烈 )의 형. 20 흥렬( 李 興 烈, 1909~1980): : 작곡가. 함경남도 원산( 元 山 ) 출생. 일본 동양음악학교( 東 洋 音 樂 學 校 : 현 동경음대의 전신) 졸업. 가곡 바우고개 를 비롯해 400여 곡 작곡. 흥렬작곡집 (1934) 꽃동산 (1937) 흥렬가곡집 (1955)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1502-503쪽 참조. 23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난 제일 싫어했던 게 수학을 싫어했어. 근데 내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대수 21 代 數 선 생님었어. 한데 하 참, 난 수학을 그 뭐 공식 외워야 되구, 풀어야 되구. 걸 왜 해야 됩니까? 하는 걸 내가 잘 물었어. 왜냐하면 나는 음악대학 갈 생각을 하고, 그땐 또 소 설 같은 걸 또 그렇게 내가 몰래 보구 그랬어. 요즘 만화를 보는데, 난 소설을 굉장히 좋 아했어. 연애소설 같은 거를. 그래서 그 선생님은 내가 공부를 못했으면 그런데, 공부도 꽤 하는 놈 공부를 안 하고 그러니깐. 그러고 그냥 음악대학을, 음악 하겠다고 그러니 깐 선생님으로서는 굉장히 섭섭했겠지. 자기 따라서 공계열 理 工 系 列 로 가기를 바랬는 데. 근데 뭐 내가 목소리가 좋았었는지 하여튼 변성기 變 聲 期 지나고 나서부터는 그때 통 일교회 統 一 敎 會 도 초창기고 래서 중등부, 고등부 때 무슨 행사 있으면 내가 나가서 노 래 불르곤 했지. 그리구 또 우리 음악선생님도 굉장히 나를 귀여워해서 요즘 말로 말하 면 렛슨lesson지. 음악시간 외에 불러가지구 좀 렇게 가르쳐주고, 그래서 음악하 구 친하게 됐었지. 그러면 그 부산에서 같 피난생활 하시던 문선명 선생님, 그 통일교회에 가족 분들 그 쪽에 가셔서 그렇지. 그렇게 인연을 맺어가지고 서울 올라와서도 네. 음악을 그때 접하시게 되시는 건가요? 부모님과 함께 찍은 누님의 졸업(숙명여대) 사진(1959년) 21 대수학( 代 數 學 ): 개개의 숫자 대신에 숫자를 대표하는 일반적인 문자를 사용하여 수의 관계, 성질, 계산 법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24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하여튼 우리 누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셨어. 그래서 그 학교, 우리 누님 그 숙명 22 淑 明 을 나왔는데, 숙명여고 淑 明 女 高 에서 배운 노래를 집에 와서 그냥 불르면은 난 또 그거 따라 불르구 했던 그 기억 나. 그러면서 음악에 대해서 나도 관심을 가지고, 다 잘한다 고 막 박수 쳐주면 그 기분도 괜찮았고. 그리구 또 목소리도 괜찮다 그러고. 그러니깐 뭐 또 음악선생도 음악대학 성악과로 가도록 지도두 해주시고. 그러니깐 그 음악실에 가서 가끔 렛슨 받고 그러면은, 그때 그 백건우 23 白 建 宇 라고 지금 피아노하는 백건우 군 배재 중학교 학생으로 들어왔어. 입학을 했는데 입학 조건 그때 뭐였나 하면은, 몇 개 과목 만 듣고 나머지는 피아노가 그때 배재학교에 있었어. 그 피아노로 연습할 수 있는 그 기 회를 주는 걸로. 그러니까 그때 내 지금 기억 거 쪼끄만 녀석 얼마나 놀고 싶어 할 거 야. 근데 백건우 아버지는 내가 보니까 깡마른 분 지휘봉 있지, 하얀 지휘봉. 고걸 가 지고 그냥 고 어린애 손을 그냥 때려가면서 허, 그게 참 안쓰러웠어. 근데 굉장히 가난 했던 걸로 내 기억 돼. 그래서 너 여기서 피아노 연습 못 할 땐 집에 가면 어떻하니? 그랬더니 밥상에다가 올려놓고, 손가락 연습을 하고 그런다고. 근데 그때 내가 기억 으로는 중학교 1학년 녀석 소련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24 Rakhmaninov 작품을 막 연주하 고, 야, 그래서 난 대단하다 말야. 헌데 녀석은 그냥 놀구 싶으니깐 내가 음악실에 가면 형! 나 여기서 놀 테니까 아버지 오면은 빨리 알려달라고. (웃음) 그러면 그래 그 래, 그 대신 조건 하나 있다. 너, 나 성악곡 요거 가끔 반주 좀 해줘. 아 그럼 물론 해 준다구. (웃음) 그래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기억 나. 근데 그 녀석 나중에 내가 캐 나다 유학할 때 보니까 뭐 윤정희 25 尹 靜 姬 하고 결혼을 해가지구 파리에서 산다는 얘기를 들었고, 내가 국악원장 시절(1978~1980)에 공간사랑 空 間 舍 廊 에서 한번 셋서 윤정희 하고 만난 기억 나. 참 엉뚱한 녀석다. 그랬어. (웃음) 그 아버님은 굉장히 반대했 을 텐데 그럼 음악을 고등학교 때 대학가면 전공을 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굳히시면서, 집안 어른들하고 트러블trouble나 런 건 없으셨어요? 22 숙명여고( 淑 明 女 高 ). 23 백건우( 白 建 宇, 1946년생): 피아니스트. 서울 출생. 미국 줄어드음대 대학원 졸업. 한 작곡가의 전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그는 2007년 제13차 차코프스티국제콩쿠르 피아노부문 심사위원었고, 2010년 은관문화훈장과 제11회 한불문화상을 수상함.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810-11쪽 참조. 24 라흐마니노프(Sergey Vassilievich Rakhmaninov, 1873~1943): 작곡자.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출생. 1885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하여, 여기서 7년간 피아노주법을 배웠다. 또 음악론도 배웠고 1891년 피아노 연주의 최고 영예를 획득했다. 25 윤정희( 尹 靜 姬, 1944년생): 대한민국의 여배우.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하여 당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카로 유명하였 다. 2012년 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주연을 맡아 칸 영화제에 참석한 바 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 25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그러니까 내가 통일교회 가서도 그때 뭐 초창기니까, 쪼끄만 교회 청파동 靑 坡 洞 에, 아주 허름한 집에서 모는데 거기 뭐 행사할 때 노래하구 그러니까 박수치고 막 그러니깐 아 버님도 아 그놈 꽤 하는 모양다. 하고 그렇게 그냥 생각하셨겠지. 어머니나 아버님은 사실 요즘 어머니, 아버지처럼 그렇게 자식들에 대해서 뭘 해야 된다 런 그거는 없었 던 걸로 기억돼. 먹구 살기 바빴기 때문에 애들은 자기가 알아서 자기 몫 챙기고. 형님은 법대 法 大 가시고, 고려대 법대 가시고 나는 음악대학으로 가기로 한 거지. 그러면 어떤 거를 전공 하실려고 하셨는지요? 그러니까 원래 서양음악 성악과를 전공 하 실려고. 근데 아까 렛슨 받으셨다는데 렛슨비 같은 거는 따로 근데, 내 기억으로는 렛슨비는 갖다 준거 같지가 않어. 그래서 아버님 가끔 야, 그래 도 선생님 뭘 좀 갖다드려야지. 그래서 아, 그래요? 그럼 주세요. 갖다 드릴께요. 허 구. 근데 우리 음악선생님 김치석 26 金 致 錫 선생님라고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던 걸로 기억 돼. 헌데 나두 참 눈치가 없었지. 그걸 지도해주고 그러면 요즘말로 하면 렛슨비 를 꼬박 꼬박 내고 해야 하는데 근데 선생님 렛슨비 내라는 말씀도 안하시니깐 난 모르 는 거야. 그냥 선생님니까 다 가르쳐주는 모양다. 그래 그 선생님 음악대학 갈라 면은 코르위붕겐 27 을 떼야 된다. 그래 코르위붕겐 을 띠고, 그 담에 콩코네 28 라는 거를 15번인가 20번까지는 해야 된다. 그게 뭐냐면 멜로디를 노래처럼 만든 거 있어.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부르는 거지. 그담에 오페라 아리아aria 중에 하나 해야 된다. 그래 모차르트Mozart 곡 중에서 내가 뭐냐? 논 피안 드라~ 파팔로~ 뭐 하는거 아리아도 하 나 띠고. 그리고 나서 가을인가? 그때 1월 달인가 2월 달에 입학시험을 치는데, 그전에 그래도 음악선생님 친구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니깐 내가 소개를 해주마. 그러니깐 가서 렛슨을 받아라. 그 선생 지도를 받아라. 니가 지금 준비한 것만 가지고 가도 복습만 하면 된다. 그래서 소개받은 분 김학상 29 金 學 相 선생라고 하는 성악가 교 수님었어. 그래 그 교수님을 소개해주면서 음악선생님 뭐라 그러나 하면, 그 교수님 한테는 렛슨을 받으면은 한 달에 얼마씩 렛슨비를 꼭 드려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 26 김치석( 金 致 錫 ): 성악가(테너). 일본 도호( 東 洋 )음악학교 유학 때 서울대 음대 김학상( 金 學 相 ) 교수와 함께 성악을 공부했고, 광복 후 배재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 역임.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504쪽 참조. 27 코르위붕겐 (chorübungen): 음정 연습을 하기 위한 성악 교본의 하나. 프란쯔 뷜너(Franz Wüllner, 1832 1902)가 쓴 3권으로 된 교본. 음정, 리듬, 시창, 합창의 연습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28 콩코네 (Giuseppe Concone, 1801~1861)가 엮은 5권의 성악교본. 29 김학상( 金 學 相, 1915~1961): 성악가 테너. 일본 도호( 東 洋 )음대 졸업 후 현제명과 함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설립 후 정착기 에 노력했으며, 한국의 초기 오페라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상론은 宋 芳 松,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408 쪽 참조. 26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웃음) 그래서 내가 아, 렛슨을 받으면 돈을 주는 거구나. 하는 걸 그때 깨달은 거지. 나 도 참 그런 거 보면 굉장히 멍청했어. (웃음) 그래 내가 우리 김치석 선생님, 고등학교 때 음악선생님을 내가 잊을 수가 없어. 그 선생님 김학상 교수님을 소개해줬고, 김학상 교수님을 통해서 내가 국악과로 오게 됐어. 그러면 고등학교 때는 국악하고는 전혀 상관없으셨네요. 전혀 상관 없었지. 생각두 별루 안하시구. 그렇지. 나는 성악 렛슨을 준비를 해가지구 김학상 교수님하구 복습을 했던 거지. 근데 그 교수님 그 당시에 집 없어서 어디 사셨나 하면은, 지금 그 을지로 6가에 거기 메 티컬 센터Medical Center가? 거 바로 뒤에 옛날 약학 藥 學 대학 건물 있었어 거기, 벽돌 건물. 그 캠퍼스 안에 교수님 사셨어. 그래서 거기 가서 렛슨을 받은 거야. 그러니깐 참 그 교수님두 그때 6.25때 뭐 했는지 전쟁 후 얼마 안 되구, 59년도니깐. 6.25사변 의 그 후유증에 벗어나지 못한 채 집도 없으니깐 학교 사택 舍 宅 에, 사택도 아니야. 그냥 그 건물 안 한 쪽에 거기서 내가 렛슨 받은 기억 나. 배재고등학교 졸업사진(1960년 2월) 27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그러면은 국악으로 전공을 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시나요? 어. 근데 그 선생님 렛슨을 해주시고 나서 하루는 군, 거기 앉게. 그리고 자네 내가 하 는 얘기를 절대 곡해 曲 解 하거나 섭섭하게 들으면 안되네. 단 내가 해주는 야기를 반드 시 부모님허구 가서 상의를 하도록 해라.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실려고 하시는지요? 그랬 더니 자네가 지금 준비해가지고 온 모든 거를 보면은 성악과 聲 樂 科 에 충분히 입학할 수가 있 다. 거 떨어질 것 같애서 내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하시면서 국악과 國 樂 科 얘기를 하시는 거야. 작년에 국악과라는 데가 생겼는데 젊은 놈들 전부 양악만 하겠다 그러구, 국악은 하겠다고 하는 사람 없어서 참, 자기도 선생 입장에서 학생들의 장래를 굉장히 생각하게 되 면은 거 좋은 현상 아니다. 하고 나는 깨닫고 있다. 자네가 성악을, 성악가가 되기 위해 서 들는 노력의 반만 국악과에 들어가서 공부를 그 열성을 가지고 하게 되면은 나중에 졸업 하고 나면 교수가 될 수 있는 그런 길 훤히 보는데, 자네는 여기 성악과 들어와 가지고 졸업을 하면은 기껏 해서 음악선생으로, 중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밖에 못나간다. 그리고 아주 돌출하게 뛰어났다고 해도 뭐 오페라opera 공연하는데 출연 出 演 해서 뭐 편지 왔소. 하 는 엑스트라extra로 하다가 주인공은 더더욱 하기 어렵고 바리톤baritone은. 그러니 내가 생 각컨대, 자네가 국악과를 지금 들어와서 여기 지금 굉장히 초창긴데 거기서 공부를 하게 되 면은 자네의 앞길 열릴 걸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부모님하고 한번 상의를 해라. 그리고 그 답을 자기한테 해 달래. 그 얘길 듣고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거 기분 나빠 죽겠 는 거야. 나, 떨어질 것 같으니까 선생님 미리 국악과로 보낼라고 하는 거 아닌가 허구 섭 섭하기두 하고. 그래 부모님께 그 얘길 안 했어요. 근데 그 다음에 두 번째 렛슨 받으러 갔을 때 부모님하고 상의를 했냐? 그래서 안 했는데요. 그랬더니 왜 안했녜. 그래서 아 교수 님 솔직히 기분 나빠가지구, 제가 성악과 떨어질 것 같애서. 자네 그 입시준비 한 거는 완 벽하게 했기 때문에 틀림없 들어간다. 하지만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은 떨어질까 봐 하는 얘기가 아니고, 자네의 장래에 관한 거니깐 꼭 가서 부모님께 상의를 드리고 대답을 가 져오래. 그래 그담에 가서 아버님한테 김학상 교수님 러러한 말씀을 하시던데 아 버님하고 꼭 상의를 하고 결과를 얘기해달라고 그러는데 아버님 생각은 어떠세요? 그 랬더니, 아버님 가만히 들으시더니 그 교수님은 앞을 내다보는 선생님다. 그러니깐 그 선생님 하라는 대로 따라서 하도록 해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요? 그러니 그렇게 말씀을 들으니깐 그 선생 입장에서는 역시나 그러면서 자네 바로 위에 선 28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배인 성악한 권오성 30 權 五 聖 군도 본래 성악을 지망을 했고, 했다가 그 교수님의 권유로 국 악과를 그 선배 얘기를 해주더라고. 그런 선배도 있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교수님, 저는 국악의 국 자두 모르는데, 입학시험 날짜도 한 달인가 두 달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말래. 그러면서 소개를 해주는 선생 황병기 31 黃 秉 冀 선생님었어. 황병기 선생님 그 당시에 강사루 국악과에 한말숙 32 韓 末 淑 선생 라고 소설 쓰는 분 있어. 지금 황병기 선생님의 사모님 되신. 그분도 가야금을 가르쳐 주러 나오셨었어. 근데 그 당시엔 결혼을 안 한 상태였어. 그냥 강사로 나오셨던 그 선 생님 소개를 받은 거야. 그 선생님 어디 사셨냐하면 삼청동 三 淸 洞 어디 사신 걸로 기억 나 그때. 그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가야금을 하나 사야 된대. 그래 하나 샀어요. 사 가지 구 뭘, 공부를 했냐 하면 입시 때 영산회상 靈 山 會 相 중령산 33 中 靈 山 초장 初 章 있지. 그거를 가야금으로. 그러니깐 악보는 난 오선보 五 線 譜 는 볼 줄 알아도 정간보 井 間 譜 는 볼 줄 모르 잖아. 그러니까 오선보로 황 선생님 해준 거 가지고 연습을 한 달 반을 해가지구 시험 을 보러 간 거지. 선생님 당시 가야금 가격 얼마 정도 했었나요? 몰라. 난 그때 기억 안 나는데, 우리 어머님 가서 하나 돈 주고 사신 걸로 알고 있어. (웃음) 그래서 한 달 반 정도 연습을 하셨어요? 한 달 정도 렛슨을 받은 거야. 그 중영산 中 靈 山 초장 배우구 그걸루 시험을 본거야. 근데 가야금을 처음 접하셨을 때 아 참 좋다! 라던가 하는 생각 드셨어요? (웃음) 좋구 뭐구 그때는 갑자기 입학은 해야 되고 그러니깐, 제 실기시험을 봐야 될 거잖아. 그러니깐 그 소개받은 황병기 선생님 가야금 하시는 분니깐 가야금. 그기 제일 쉬운 곡인 모양야 중령산. (웃음) 그러니까 무슨 연습곡니 뭐니 런 거 없잖 아. 그냥 바로 다로징 다로징 34 하면서. (웃음) 그러면 그 선택을 하실 때 그때 국악에 대한 인식을 하셨어요? 30 권오성( 權 五 聖, 1941년생): 국악론가. 호는 소암( 韶 巖 ).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 참조.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120-21쪽 참조. 31 황병기( 黃 秉 冀, 1936년생): 국악작곡가. 가야금 연주자. 서울 출생. 1961년 한국 최초로 서양 오케스트라와 가야금을 협주한 국악 인다. 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역임.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925-29쪽 참조. 32 한말숙( 韓 末 淑, 1931년생): 소설가. 서울 출생. 가야금을 배운 경험 있어 서울대학교 국악과 창설 후 강사로 초빙되어 출강하 였다. 황병기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33 영산회상( 靈 山 會 相 )의 두 번째 곡. 34 입으로 가야금 악기소리를 내는 말, 가야금 구음( 口 音 ). 29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아, 전혀 없는 거지. 나는 성악과 갈라구 다 준비했다가 갑자기 입시 한 달인가 한 달반 남겨 놓고 국악과로 가겠다고 해서 소개받은 게 황병기 선생님니까. 권오성 선생의 그 구술총서 읽어봤더니 단소 短 簫 를 해가지구 (웃음) 단소를 해가지고 들어갔다구 그러던 데, 나는 가야금을 해가지구 들어갔어. 근데 어떠셨어요? 가야금을 타실 때, 선생님 손 좀 두꺼우시잖아요. 뭐 하여튼, 지금 내가 손 놓은 지가 오래되니깐 전혀 기억도 안나. 기억도 안 나고. 하나 기억나는 건 뭔가 하면, 입시 때 시험 보러 가서 복도에 쭉 줄서서 한 사람 한 사람 차례 로 들어가잖아. 근데 그때 조재선 35 趙 在 善 하고 병원 36 李 秉 元 내가 기억나는 게 두 친구 야. 헌데 병원두 젓대를 불었어. 대금 大 笒. 조재선도 젓대를 불었는데, 기다리면 서 젓대를 부는데 거 그냥 기가 막히는 소리를 내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주눅 들어 가지구. 야, 거 딩동댕 다로징 하면서 거 나는 상대가 안 되는데 나는 진짜 기 氣 가 죽어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뭐 황병기 선생님, 장사훈 37 張 師 勛 교수님, 혜구 38 李 惠 求 교수 님 심사위원으로 앉아계셨는데, 내가 가야금 가지고 들어와서 중령산 초장, 준비 한 걸 연주하겠습니다. 그러니 해보게. 그래서 딩딩 하다가, (웃음) 하두 기가 죽어 들어가 서 그런지 그것마저도 틀렸어. (웃음) 그래 야, 거 난 국악과 다 들어갔구나. 그런데 발표난 거 보니까 내가 제일 잘했어. 그 당시에는 실기시험 뿐만 아니라 학과시험을 다 봤어. 어떤 과목들을 보셨나요? 그때 내가 기억나는 것 하여튼 댓가지 봔 걸루 기억 나. 근데 학과시험은 자신 있게 봤거든. 근데 제일 못 본 것 실기시험야. 근데 그 당시에 국악과에는 지망생 50명을 뽑았는데, 1지망생 10명도 안 된 걸로 내가 기억나. {미달네요.} 전부 양악과. 그러 35 조재선( 趙 在 善, 1938년생): 작곡가. 서울예대 국악과 교수. 경기도 천( 利 川 ) 출생. 아호는 청현( 聽 玄 ). 1959년 국악사양성소 및 1960년 상지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그는 1981년 미국 웨슬레얀(Wesleyan)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작품으로 젓대를 위한 시나위 (1965) 원색( 原 色 )의 율( 律 ) (1975) 하멸태자 (1976) 등 있고, 저서로 수제천의 분석 (1991)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688-89쪽 참조. 36 병원( 李 秉 元, 1941년생): 음악학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후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와주립 대학 교수.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245쪽 참조. 37 장사훈( 張 師 勛, 1916~1991): 음악학자. 서울대 음대교수. 경북 영주( 榮 州 ) 출생. 호는 운초( 云 初 ). 아악부원양성소( 雅 樂 部 員 養 成 所 ) 제4기 졸업생. 전공은 거문고. 1945년 미군정청( 美 軍 政 廳 )의 문교부 편수관 및 덕성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1년 서울대 국 악과 교수로 부임하여 1982년 정년퇴임함. 1947년 혜구( 李 惠 求 ) 등과 함께 한국국악학회( 韓 國 國 樂 學 會 ) 창립. 저서로 國 樂 論 攷 (1966) 韓 國 樂 器 大 觀 (1969) 韓 國 音 樂 史 (1976)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 권.1559-60쪽 참조. 38 혜구( 李 惠 求, 1908~2010): 음악학자. 서울 출생. 호는 만당( 晩 堂 ). 경성제국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방국에서 재직했고, 광복 후 1947년 장사훈( 張 師 勛 ) 등과 함께 한국국악학회( 韓 國 國 樂 學 會 )를 창립했으며, 1959년 서울대 국악과를 설립했고, 1974 년에 정년퇴임함. 저서로 韓 國 音 樂 硏 究 (1959) 韓 國 音 樂 序 說 (1967) 韓 國 音 樂 論 叢 (1976) 韓 國 音 樂 論 攷 (1995) 등 있 음.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1495-96쪽 참조. 30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니까 그 50명 중에 1지망으로 들어온 게 다섯 명도 안 된 걸로 알고 있어. 내 기억 지 금 병원, 조재선, 나 그담에 또 뭐 누군가? 그 나머지는 2지망생으로 들어온 거야. 양 악과 쳤다 떨어진 사람들. 그럼 처음에 하실 때는 가야금으로 전공을 할려고 들어가신 거예요? 전공을 할라는 게 아니라 입시 入 試 볼라고. 그럼 전공은 나중에 정해지는 건가요? 그렇지. 입학하고 나서는 나는 가야금은 안하겠다. 왜냐하면 자신 없는 거야. 기초도 아무것도 없고 그냥. 한데 아마 사전 事 前 에 나에 대한 정보를 선생님들 아셨겠지. 저 녀석은 성악과 칠라고 했던 녀석인데, 국악과로 갑자기 그거 해가지고 그냥 한거라는 그래서 그냥 뭐 낙제점수는 안 줬던 거 같애. 그러니깐 학과, 발표 그게 톱top지. 몇 명 되지도 않는데 톱지만은. (웃음)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입학, 그 후 방황과 휴학 그러면 론을 전공을 하겠다. 라고 하신거예요? 그렇지. 들어오자마자 제 나는 가야금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그러니깐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렇게 물었더니 론 理 論 을 하라고 그러더라고. 근데 론도 거 내가 뭘 알아야지. 국악의 국 자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때 내가 1960년, 진짜 입학을 해 가지고 그게 양악과 학생들하고 같 듣는 국악개론 시간라는 게 있었어. 근데 음악대 학의 교수 중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분은 혜구 교수님 밖에 없었어. 근데 그 혜구 교 수님 국악개론을 강의를 하시는데, 산조 39 散 調 강의를, 산조 라고 크게 칠판에 쓰시고 나서는 오늘 자네들하고 공부할 것은 산졸세. 그러면서 누굴 불르나 하면은 조청자 40 趙 39 산조( 散 調 ): 민속음악에 속하는 기악독주곡 형태의 하나. 19세기 말 김창조( 金 昌 祖 )의 가야금산조를 효시로 거문고산조, 대금산 조, 해금산조, 피리산조, 아쟁산조 등으로 발전하였다 40 조청자( 趙 淸 子, 1942년생): 가야금 연주가. 서울대 음대 국악과 시절 홍원기( 洪 元 基 ) 김병호( 金 炳 昊 ) 황병기( 黃 秉 冀 )에게 가야 31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淸 子 라고 우리 동기생 있어. 조청자 양. 악기실 가서 가야금 좀 가져오게. 그래 제 조청자 양 가서 가야금을 가져왔어요. 그 짧은 산조 한 10분짜리 하나 연주하게. 그 러니깐 그때 내가 들은 기억으론 조청자가 가야금을 굉장히 잘 탔던 기억 나. 조청자 는 어려서부터 가야금을 배운 거 같애, 산조. 아주 잘 타더라고. 하여튼 내가 중령산 초 장 틀리고, 나하곤 도대체 개임 상대가 안 되는 거야. 그걸 한참 연주를 하고 나더니 것 산졸세. 나는 산조에 대해서 잘 모르니깐 자네들 나중에 연구를 좀 해서 그걸 하 게. 그러면서 수업 그걸로 끝야. 야, 그래서 내가 너무 실망을 한 거야. 도대체 박 사가 잘 모른다고 그러면은 우리 같은 새내기가 뭘 알어. 그래 내가 거 속았구나. 국 악과 잘못 왔구나. 말야. 그리구 공부하고 싶은 생각 안 나는 거야. 근데 마침 그때 4.19의거가 막 나고 데모demo하러 그때 3학년인가 4학년 신경욱 41 辛 慶 昱 라고 하는 그 바리톤 하는 분 있었어. 그분 배재 培 材 선배야. 배재 출신인데. 그러고 또 장? 뭐라 고 하는 름은 모르겠는데, 그 형님도 배재 나왔는데 옛날에 좀 렇게 주먹 쓰던 그 형님들 앞장서 가지고 우리도 나가서 저 승만 李 承 晩 대통령 물러나라고 데모를 해야 된다고. 막 그러는데 그냥 그때 학장 현제명 42 玄 濟 明 교수님 학장었어. 현제명 학장 님 그 데모를 막다가 양반 쓰러지신 거야. 현제명 교수님 그래서 일찍 돌아가 셨어. 내가 60년도 입학했을 때 4.19 그때 돌아가셨으니까. 그러니까 그 1학기는 정말 학교 다니고 싶지가 않았고, 또 분위기도 안 좋았어. 애들 가야금을 가지고 연습실로 가야되는데, 거 떳떳하게 가야금을 못 들고 가는 거야. 악기실에서 렇게 문 열구 복 도 複 道 에 학생들 있나 없나 보구, 아무도 없으면 그때 막 뛰어서 3층 연습실로 올라가 고 그랬어. 2지망으로 들어왔으니깐 국악을 전공할라구 들어온 게 아니라, 작곡과 지 망했다가 떨어지구 뭐 성악과 지망했다가 떨어지고. 뭐 기악과 지망했다가 떨어진 친구 들 들어왔으니, 거 정말 군대로 말하면 오합지졸 43 烏 合 之 卒 라. 국악을 할라구 입학 한 게 아니라 들어와서두 양악만 하는 거야. 그래 나부터도 양악 렛슨도 받은 거야, 성악 을. 부전공라 그래서. 그때는 국악과 학생들도 부전공으로 양악을 꼭 하나씩 하게 돼 있었어. 그러니깐 나는 입학하면서 부전공으로 양악 쪽의 성악을 한 거지. 그래서 내 성 금을 사사하였다.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696쪽 참조. 41 신경욱( 辛 慶 昱, 1934년생): 서울대음대 졸업, 서울예술고등학교장, 서울시 오페라 총예술감독 및 단장 역임. 상론은 방, 한 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926쪽 참조. 42 현제명( 玄 濟 明, 1902~1960): 성악가. 교육자. 대구( 大 邱 ) 출생. 양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30년대에 주도적인 성악가로서 활동 하였으며, 후 <고향생각>, <나물캐는 처녀> 등 한국인의 애창 가곡을 많 작곡하였다. 서울음대 교수 및 학장 역임.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2087-89쪽 참조. 43 오합지졸( 烏 合 之 卒 ): 임시로 모여들어서 규율 없고 무질서한 병졸 또는 군중. 32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악 선생님 양천종 44 梁 天 鍾 선생님라고 바리톤을 하시던 그분 제 성악 렛슨을, 그 선생님의 성악 지도를 받았지. 그러다가 내가 한 학기 하고 휴학을 한 거야. 그때 통일교 회 쪽에서는 지방으로 전도 傳 導 를 내보냈어. 젊은 대학생들. 나두 경상북도 봉화군 奉 化 郡 법전면 法 田 面 풍전리 楓 田 里 라는데 가 가지구 1년 동안, 전도를 해서 교회를 세웠지. 거기 서 국악과에서 재미도 없었던 걸 만회하고 내년에 내가 성악과로 다시 칠라고. 가서 전도 해 가지고 교회도 세우고 그랬어. 그래서 지금 통일교회에서는 신앙 信 仰 의 부모라고 그 래. 내가 전도했던 사람들 360쌍, 뭐 720쌍 그런데 다 결혼도 하고, 요즘도 가끔 찾 아와. 통일교회에 나오시라고. 자네들나 잘 나가서 그거하게. 그리구 나는 지금 통 일교회 하고는 끊었어. 혜구 장사훈 스승의 가르침과 국악 원서의 탐독 그러면 일 년을 거기 계시다가 다시, 어떻게 다시 올라가게 되셨나요? 그렇지. 거기서 내가 그렇게 전도 傳 道 활동을 하다가, 혼자서 곰곰 생각을 해보니까 내 가 게 사나가 한번 칼을 뺏으면은 그래두 무라두 짤른다는 말 있듯. 그래두 그 교수님(김학상) 말씀 헛된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 양악과 내가 들어가서 성악 해봐 야 음악선생님 밖에 안 될 텐데. 그래 국악 해서 열심히 하면은 교수 된다 그랬는데. 거 내 하기 나름잖냐. 그래 1년 후에 복학을 하고나서는, 그러니까 나하고 같 공부 한 애들은 다 2학년으로 올라갔는데 나는 1학년으로 다시. 그래서 만난 것 성천 45 李 44 양천종( 梁 天 鍾, 1931년생): 성악가. 평북 강계 출생. 1962년 당시 경기여고 교사. 서울대 음대강사 역임. 상론은 방, 한국현대 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031-32쪽 참조. 45 성천( 李 成 千, 1936~2003): 작곡가. 카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본과를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작곡 전공으로 입학, 졸업 후 성신여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음대 교수 및 국립국악원장 역임.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1427-30쪽 참조. 33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成 千, 뭐, 백대웅 46 白 大 雄 최종민 47 崔 鍾 敏 런 3기생들 하구 제 같 공부 한 거지. 그러 면서 복학을 하면서 내가 선생님한테 찾아 가가지고, 운초 48 云 初 선생님하고 혜구 교수 님하고. 제 마음 다시 다잡아먹고 론 전공으로 내가 다시 공부하기 위해서 복학을 했으니깐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깐 선생님 저를 좀 끌어주십시 오. 그래서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한 거야. 그때 하라는 것 뭐냐하면 서울대 중앙도서 관 규장각 49 奎 章 閣 에 가서 뭐 런 것 좀 찾아와라. 그담에 뭐 런 악보를 베껴라. 그러면 서 만당 50 晩 堂 선생님 그 당시에 당주동 唐 珠 洞 라는 데 살으셨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쪽. 거기 지금 한옥 韓 屋 다 없어졌는데 그때 한옥 거기에 사셨거든. 자네 내 집으로 한번 오게. 그래서 갔더니 선생님 보여 주시는 게 뭔가 하면 당신 경성제국대학 京 城 帝 國 大 學 다니실 때 카드 박스를 보여주시더라고. 그것 뭐냐 하면 당신께서 우리 선생 님 영문학 英 文 學 을 하셨어. 그러니까 영시 英 詩 있잖아, 좋은 시라든지 또 영어로 된 책 중에서 좋은 문구 文 句 가 있잖아. 런 것들의 메모를 카드에 적어 두셔가지고 그걸 정리 를 렇게 해둔걸 보여주면서, 자네도 제 논문을 읽던지 책을 읽던지 국악 관련되는 걸 읽으면서 잘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은 그런 걸 요렇게 카드로 만들고, 요거는 어느 논 문에 나온 거다 요렇게 표시를 해놓고. 예를 들면 뭐 악학궤범 樂 學 軌 範 에 요런게 나 오는 거다 하면 요게 악학궤범 에 나오는 용어다 하는 걸 카드루 만들어 놓으래. 그러면 나중에 그 용어가 모게 되면은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근거 根 據 가 생긴대는 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국악 논문을 읽는다든지 뭐하면 모르는 용어가 나오잖아. 그러 면 그런 용어를 다 요렇게 하나하나 해서 카드루 만들어 놓기 시작한 거야. 선생님 하라 는 대로. 그것 내가 올해 지금 만들려고 하는 현 한겨레음악대사전 에 데터베스 46 백대웅( 白 大 雄 1943-2011): 작곡가. 전남 광주( 光 州 ) 출생. 전남대 중앙대 음대 교수를 거쳐 1998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 예술원의 원장 역임. 관현악곡으로 국악관현악을 위한 용상( 龍 翔 ) 교향시 천안삼거리 오케스트라아시아를 위한 남도아리 랑 등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음악의 선율구조 (1982) 판소리 다섯마당 눈대목 (1992) 다시보는 판소리 (1996) 인간과 음악 (1992)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750-51쪽 참조. 47 최종민( 崔 鍾 敏, 1942년생): 음악론가. 2000년~2002년 제8대 국립창극단의 단장,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및 전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교수 역임.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806쪽 참조. 48 운초( 云 初 ): 장사훈( 張 師 勛, 1916~1991)의 호. 음악학자. 아악부원양성소( 雅 樂 部 員 養 成 所 ) 제4기 졸업생. 전공은 거문고. 1945년 미군정청( 美 軍 政 廳 )의 문교부 편수관 및 덕성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1년 서울대 국악과 교수로 부임하여 1982년 정년퇴임함. 저서로 國 樂 論 攷 (1966) 韓 國 樂 器 大 觀 (1969) 韓 國 音 樂 史 (1976)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 사, 2012), 하권.1559-60쪽 참조. 49 규장각( 奎 章 閣 ):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 顧 命 ) 유교( 遺 敎 ) 선보( 璿 譜 ) 등을 관리하던 곳( 官 署 )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 해 갔다. 50 만당( 晩 堂 ): 혜구( 李 惠 求, 1909~2010)의 호. 음악학자. 서울 출생. 경성제국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방국에서 재직했고, 광복 후 1947년 한국국악학회를 창립했으며, 1959년 서울대 국악과를 설립했고, 1974년에 정년퇴임함. 저서로 韓 國 音 樂 硏 究 (1959) 韓 國 音 樂 序 說 (1967) 韓 國 音 樂 論 叢 (1976) 韓 國 音 樂 論 攷 (1995)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 울: 보고사, 2012), 하권.1495-96쪽 참조. 34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database의 시초야. 그기. 그래 내가 만당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한 것 중에 하나가 그거 야. 그래서 내가 번 그 한국음악사학보 제48집에 내 자서전 1번 51 지난번 내가 보 내 준 그거 있잖아. 카드 박스라는 거. 그것 바로 그거라고. 그래서 그때 선생님 하 라는 대로 한 거야. 내가 규장각라는 곳에 어떤 책 있는지 내가 뭐 규장각 뭔지를 알었어? 그리고 그냥 규장각 가서 우리 선생님 책 좀 찾아오래요. 그러면은 그때 그 규장각 사서 司 書 가 누구냐 하면 상 52 뭐라고 내 지금 름 잊어먹었는데, 그 양반 어? 뭐 런 어려운 책을. 그리구 창문 열고 먼지 턱턱 털어가지고는 갖다 주고. 그럼 난 또 그걸 열심히 베끼는 거야. 그 당시에 제럭스 53 xerox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54 라 는 거 있잖아. 거 얇은 종 렇게 대고 먹지 깔고 렇게 볼펜으로 렇게 눌러쓰면 세 카피copy까지 만들 수 있어. 그럼 맨 우에 카피는 만당 선생님 갖다 드리고, 가운데 꺼 는 운초 선생님 갖다드리고. 나는 맨 아래 희미한 거 있잖아. 맨 아래 꺼. 그러면서 고악 보 古 樂 譜 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 선생님 하라는 대로 했는데, 그 당시에 국립국악원 어디 있었나 하면은 비원 秘 苑 앞에 거기 국립국악원 있었어. 지금 거 무슨 뭐 호텔 들어가 있던가? 하여튼 비원 그 바로 맞은쪽에 운니동 雲 泥 洞 에 국악원 있었어. 거기를 참 부지런히 다녔어. 국립국악원에 또 런 속악원보 55 俗 樂 源 譜 니 대악후보 56 大 樂 後 譜 니 런 거 쭉 있잖아? 그거를 나는 일일 다 자로 쟤 가지고, 요 몇 칸에 뭐 렇게 해가지 고는 그게 등사 57 謄 寫 라고 해서 있어. 렇게 가래방 58 라고 긁어가지고, 정간 井 間 을 만 들어 가지고 그걸 갱지 更 紙 에다 렇게 밀어가지고는 가서 거기다 황종 黃 鍾, 태주 太 簇 뭐 런 거 적는 거지. 그래도 참 열심히 했어. 내 시계 팔아가면서. 그때 내 지금 기억나 는 것 봉해룡 59 奉 海 龍 선생님라고 장악과 掌 樂 課 에 계시는 분인데, 봉해룡 선생님 나 51 방, 32년 동안의 체증을 풀어줄 한국음악대사전, 韓 國 音 樂 史 學 報 (서울: 한국음악사학회, 2012), 제48집, 409-429쪽. 52 상은( 李 相 殷 ): 도서관 사서( 司 書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규장각( 奎 章 閣 ) 사서. 2012년 10월 22일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특 별전시회의 개막식 때 나의 의궤 속의 우리 춤과 음악을 찾아서 (서울: 보고사, 2008)가 전시된 책의 하나로 선정된 인연으로 초청 을 받고 참석했을 때, 상은 선생의 소식을 물었더니 오래 전에 정년퇴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53 제록스(Xerox). 미국 제록스사의 사진식 복사기 복합기의 명칭. 여기서는 복사기를 말함. 54 먹지: 한쪽 또는 양쪽 면에 검은 칠을 한 얇은 종. 종 사에 끼우고 골필나 철필로 눌러 써서 한꺼번에 여러 벌을 복사한 다. 55 속악원보 ( 俗 樂 源 譜 ): 조선후기 장악원( 掌 樂 院 )에서 연주한 음악을 담은 고악보의 하나. 16정간보( 井 間 譜 )와 율자보( 律 字 譜 )로 기보됨. 1892년(고중 29)에 중수된 바 있는 7권 5책의 고악보는 인( 仁 ) 의( 義 ) 예( 禮 ) 지( 智 ) 신( 信 )의 다섯 편( 篇 )으로 구 성됨. 종묘제례악( 宗 廟 祭 禮 樂 ) 여민락( 與 民 樂 ) 낙양춘( 洛 陽 春 ) 등의 악곡 및 가야금보( 伽 倻 琴 譜 ) 현금보( 玄 琴 譜 ) 비파보 ( 琵 琶 譜 ) 방향보( 方 響 譜 )가 포함됨.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982-83쪽 참조. 56 대악후보 ( 大 樂 後 譜 ): 1759년(영조 35) 서명응( 徐 命 膺 ) 세조(1455-1468) 때의 음악을 모아 편집한 악보. 상론은 방, 한겨 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520-21쪽 참조. 57 등사( 謄 寫 ): 원본에서 베껴 옮김. 58 가리방(がりばん): 일본어 版 gariba 다. 철판에 파라핀 종를 올려놓고 철필로 써서 인쇄하는 방법. 59 봉해룡( 奉 海 龍, 1911~1995) : 대금 당적 단소연주가. 단소 명인.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서울 출생. 아악부원양성소( 雅 樂 部 員 35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를 참 기특 奇 特 하게 본 걸로 기억나요. 어? 학생 여기 와서 런 고악보를 다 베 끼고, 것두 또 악보까지 만들어가지고. 그러면서 표지는 내가 써주지. 하고 붓으로 속 악원보 런 거 써준 거, 내 지금 기억 나. 그때 내가 베꼈던 악보 일부가 지금 저 캘 리포니아California대학교 도서관에 있고, 일부는 국립중앙도서관 내 방문고 60 宋 芳 松 文 庫 에 있어. 거기 보면 1963년 몇 월, 내가 그 악보를 베끼고 나면 끝에 꼭 날짜를 내가 적었거든? 60년대 그러면서 열심히 내가 공부했지. 선생님 그러면 대학 때 그렇게 선생님들 말씀하신 거 외에, 뭐 커리큘럼curriculum 나 요런 것들 있었으면 말씀을 해주세요. 헌데 그 당시에 내 기억으로는 국악 관련되는 강의가 별로 없었어. 전부 양악 관련 학과 목을 많 들었어. 내가 복학하고 나서는 부전공으로 성악은 집어치우고 작곡을 했어. 부전공으로 작곡을 해가지고 양악작곡. 대위법 對 位 法, 화성법 和 聲 法 그걸 공부를 할라면 은, 내 작곡 선생님은 성재 61 李 誠 載 교수님었어. 그래 그냥 성재 교수님하구. 그때 성재 교수님 학생과장인가 뭘 맡아가지고 한 학기 동안에 작곡 렛슨을, 나는 그 당 시에 을지로 6가에 만당 선생님 강의하고 운초 선생님 강의만 듣구 양악과 선생님 강의 는 거진 안 들었어. 왜 그런가하면 휴강 너무 많은 거야. 근데 나는 그 당시에 어디서 주로 공부를 했냐면 문리대 文 理 大 있지. 지금 거기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그 건물 옛날 대학원 건물야. 문리대 대학원 건물인데 고거 하나 남았어. 마로니에. 그리구 극장 지 은데 있잖아. 거기가 서울대 중앙도서관 자리였어. 거기가 문리대. 난 도서관에서 살았 어. 거기서 도시락 두 개 싸가지 와가지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때 내가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도 태조 太 祖 부터 철종 哲 宗 까지 전부 처음부터 읽어가면서, 대학노트에다가 음 악 관련되는 기사 記 事 내가 렇게 대학노트에 써가지고. 그걸 장사훈 선생님 불광동 佛 光 洞 에 사셨는데, 갖다 드리면 선생님은 거기서 카드에다 렇게 또 옮기시고. 그것까지 는 좋은데 선생님께서 당신 름으로 1978년 문교부에 거 5년 프로젝트project로 해가 養 成 所 ) 졸업생. 유의석에게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및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상론은 방, 한겨레음 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805-806쪽 참조. 60 방문고( 宋 芳 松 文 庫 ): 구술자가 소장한 장서( 臧 書 ) 9.766권을 2007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여 만든 문고. 2008년 6월 27 일~7월 23일 국립중앙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음악학자 방 개인문고 설치기념 전시 (너른 우리 음악학의 바다)를 개최함. 전시회 때의 팜프렛에 의하면, 6월 27일 오후 5:00 개막식 때 플라라플르트앙상블(장수길 혜숙 정화), 오카리나와 가야 금 합주곡: 소나무(유경환 김영희 혜원), 헌정연주(거문고: 다경, 생황: 김지현, 해금: 한갑수)의 축하공연 있었음. 61 성재( 李 誠 載, 1924~2009): 현대음악인. 작곡가. 경기도 천( 利 川 ) 출생. 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가서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며 작곡과 음악학을 전공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피아노를 위한 주제적 12음과 4의 소 품 리에존 가야금 4현을 위한 도드리 등 있다.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1426-27쪽 참조. 36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지고 그 연구비를 타서 그거 하셨어. 그걸 내가 언제 알았나 하면은 내가 국립국악원 원 장으로 왔을 때, 문교부에서 런 프로젝트에 대한 지금으로 말하면 뭐지? 렇게 점수 내는 거 있잖아. 걸 해두 좋냐는 그걸 나한테 심사의뢰가 온 거야. 아, 보니깐 조선 왕조실록 그 음악기사를 채록하는 그거야. 근데 선생님 낸 연구비신청서인데 내가 끄 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오케O.K.를 한 거지. 그래서 난 참 그때 아, 런 걸로 문교 부에 신청을 하셔서 연구비를 받으시는구나. 하는 걸 내가 알았지. 헌데 그것 나중에 뭐 단국대학교인가 어디서 렇게 그때는 런 타프 인쇄를 활자 하나씩 뽑아서 하 는 그걸루 참 부실하게 연구결과를 내셨어. 그것 뭐 세종 世 宗 인가 어디까지 하다가 끄 쳐버렸는데, 내가 알고 있기로는. 헌데 나에 대한 말씀은 하나도 안하셔서 내가 좀 섭섭 해 했지. 내 거기서 또 하나 배운 것 있었어. 아, 내가 나중에 선생님 되면은 제자들 의 도움 받은 것은 도움 받았다고 하는 얘기를 꼭 적으리라. 하고 마음먹었어. 그때 그 학교 다니실 때 장사훈 선생님, 혜구 선생님 론 선생님들 외에 혹시 생각 나시는 선생님들 있으신가요? 어. 김만복 62 金 萬 福 선생님 지휘법 강좌. 생각 나는데. 그때 기억나는 것 뭐냐 하면은 김만복 선생님 지휘법을 가르치셨어. 헌데 양반 그때 미국서 돌아오신지 얼마 안됐을 때야. 굉장히 의욕적으로 가르쳐주셨는데, 그 양반 경상도 출신야. 근데 내 가 부산 釜 山 으로 우리 피난 갔기 때문에 경상도 그 사투리가 굉장히 정겹게 느껴졌어. 친 근해. 난 지금도 사실 대구 영남대학교 嶺 南 大 學 校 에 오래있다 왔기 때문에, 경상도 말하 는 사람 만나면 굉장히 반가워. 근데 그 당시에 선생님 경상돈데, 내 지금 기억나는 것 지휘법 중에 기억나는 것 뭐나하면 느그들 목욕탕 가제. 그래. 예. 그러면 너 거 목욕탕 가머 때가 요래 둥실둥실 떠 있제? 헌데 그 6.25세대에는 그 말 맞어. 지금 은 목욕탕물 깨끗하지만은 우리 6.25세대에는 하도 많은 사람들을 목욕탕에 그거 하 니까 목욕탕 들어가는 물에 때가 둥실둥실 떠 있었어. 그 지휘를 할라카머 때를 요래 가, 요래 몰아내고 내는 요 폼form으로 지휘를 요래 해야 된데. 라고 (웃음) 하는 그 기억 나. 그 기억밖에 안나. 그러고는 그 양반 그때 서울시향인가 어디 뭐 지휘자로 계셨기 때문에 매번 휴강야. 내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그 대신 휴강 안하고 강의 잘하 62 김만복( 金 萬 福, 1925~2006): 지휘자.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장. 1948년 서울교향악단에서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 그는 미국 캘리 포니아주립대학에서 지휘공부를 마친 후 1960년 김생려( 金 生 麗 )의 뒤를 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함.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304쪽 참조. 37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시는 분은 우리 만당 선생님하고 운초 선생님었어. 김성태 63 金 聖 泰 선생님도 그 작곡하 는 강의 아우, 하여튼 양악과 선생님들은 한 학기의 반 상은 휴강야. 그러니까 나 는 노트 빌려가지고 그거가지고 하고, 주로 공부는 문리대 중앙도서관에 가서 선생님 해 오라는 그런 거, 조선왕조실록 음악기사 뽑고. 내가 대학원 졸업하면서, 그리고 학 부 졸업하면서 악장등록 64 樂 章 謄 錄 을 번역한 것도 선생님 심부름 가서 찾아낸 자료의 하 나야. 악장등록 번역 및 우리문화연구회와의 인연 그러면 혼자서 번역을 하신 거예요? 아니지. 그때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그 아래층에 규장각 奎 章 閣 에는 책으로 되지 않고 렇게 초서 65 草 書 로 쓴 문서가 많았어. 헌데 그 초서를 읽는 세대가 없는 거야. 그래서 그 당시에 안동 安 東 에서 올라온 할아버지 한학자 漢 學 者 들 많았어. 그 아래층에. 근데 양반들은 그런 초서를 읽을 줄 아는 거야. 그걸 풀어쓰는 거니까. 늘 그 아래층 가면 은 노인네들 한문을 쭉 보면은 그거를 아주 율 律 을 붙여 가지구 어~으~어~어~어 건 요기서 끊어지구 하면서 가서 물어 보면 꼭 하얀 수염을 하신 할아버지들, 그러니 까 그런 분들한테 가서 물어보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고악보 古 樂 譜 에도 서문 序 文 같은 거 게 초서로 썼잖아? 거는 글자고 저거는 그 글자고, 요건 여기서 떨어지고 요기에 63 김성태( 金 聖 泰, 1910~2012): 작곡가. 서울 출생. 호는 요석( 樂 石 ). 서울대 음대교수. 연희전문 시절 축구선수였던 그는 현제명 ( 玄 濟 明 )의 지도로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5년 졸업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현 구니다찌음대)에 입학해 1939년 졸업한 후 경 성보육학교( 京 城 保 育 學 校 )를 거쳐 광복 후 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 1934년 동요곡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를 비롯해 가곡집 (1954) 김성태가곡집 (1971) 등을 출간함.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상권.324-25쪽 참조. 64 악장등록 ( 樂 章 謄 錄 ): 조선후기 장악원( 掌 樂 院 )의 일기책. 예조 전객사( 典 客 司 )에서 펴낸 일기책은 1637년(인조 15)부터 1753 년(영조 29)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도서관( 奎 章 閣 圖 書 館 : 도서번호 奎 12879)에 소장됨.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 1636) 직후 장악원의 실태 및 악학궤범 ( 樂 學 軌 範 )의 인출( 印 出 ), 그리고 악공( 樂 工 ) 악생( 樂 生 )의 봉족( 奉 足 ) 등의 기록 전함.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1124쪽 참조. 65 초서( 草 書 ): 십체( 十 體 )의 하나. 필획을 가장 흘려 쓴 서체로서 획의 생략과 연결 심하다. 전서( 篆 書 ), 예서( 隸 書 )를 간략히 한 것으로 행서( 行 書 )를 더 풀어 점획을 줄여 흘려 쓴 것인데, 초고( 草 稿 ) 따위에 쓴다. 38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구두점 66 句 讀 點 찍어야 되고. 런 걸 해라 하면은 한문은 구두점 어디서 끊어지는거 찍 을 줄 알면은 반은 아는 거래. 그래서 그 할아버지들 도움을 받고 악장등록 번역할 때는 혜구 선생님 주로 지도교수였거든. 만당 선생님 도움도 받고 그 할아버지들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에 악장등록 안에는 두 67 吏 讀 가 많 나와. 그래서 두사전을 가지고 두문 吏 讀 文 전부 찾아가지고, 런 거는 위백제호 爲 白 濟 乎 는 ~을 하시옵고. 뭐 다 있 어 그 문구들. 그래 그거 가지구 해서 번역을 했었어. 헌데 참 그때 생각을 하면은 내 가 굉장히 앞서 갔어. 앞서 갔다는 것 뭔가 하면은 내가 그때 대학교 4학년 땐가 막 그 런 번역하고 있을 당시에 우리 권 선배님. 권오성 權 五 聖 선배님하고 재숙 68 李 在 淑 선배가 그때 대학원 진학 한 걸루 알고 있어. 그때 나는 태조 太 祖 부터 철종 哲 宗 까지 미 다 점검 해 음악기사 뽑아서 장사훈 선생님 갖다 드렸는데, 그때 한 학기 과제가 그 마흔아홉 권 으로 된 그 조선왕조실록 영인본 그거 한 권의 음악기사 뽑는 거였어. 한 학기 과제가. 그때 내가 도서관에서 권 선배님지만은 아구, 선배님. 오래간만입니다. 어떻게 여 기까지. 아구, 과제로 거 한 학기 동안에 안에 있는 음악기사 뽑아야. (웃음) 아, 거 나 옛날에 다 했는데. (웃음) 했더니 그러냐고. 그거 좀 보여줄 수 없냐고. 그 거 운초 선생님한테 가보라고 내가 (웃음) 그랬던 기억 나. 그래서 나는 그때 주로 문리대 중앙도서관에서 살았기 때문에 음악대학에서 뭐하는 런 행사 같은 데는 별로 관심 없었고, 문리대 쪽에 오히려 그래 조동일 69 趙 東 一 학형 學 兄 만난 것도 문리대에서 만난거야. 그니깐 조동일 교수가 그 당시에 불문과 佛 文 科 를 졸 업을 하고 국문과 國 文 科 로 들어왔어. 편입해서 들어온 거지. 굉장히 의욕적으로 그 양반 우리문화연구회 70 라는 걸 만들었어. 대학생들 그때. 국문과, 사학과 뭐 렇게. 그래 서 그 동아리의 음악 부분에 나를, 형 좀 해 달라 그래서 함께 어울리면서 그때 뭐 하여튼 발표도 하고, 그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은 그분들 굉장히 생각 앞섰어. 근 66 구두점( 句 讀 點 ): 글을 마치거나 쉴 때 찍는 마침표와 쉼표. 67 두( 吏 讀 ): 한자의 음과 훈( 訓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표기법( 借 字 表 記 法 )의 하나. 68 재숙( 李 在 淑, 1941년생): 가야금 연주자. 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 신국악예술인회를 출범으로 1966년 제1회 발표회를 서울대 음 대 콘서트홀에서 가졌다. 그 외 다수의 연주 경력 있다.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하권.1363-64쪽 참조. 69 조동일( 趙 東 一, 1939년생): 국문학자. 경북 영양( 英 陽 ) 출생. 1962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국문과로 편입한 그는 서울대에 서 박사학위를 취득 후 계명대 영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취임. 만해예술상 대한민국학술원 상 제2회 민세상(2011) 제1회 벽사학술상 수상. 현재 계명대 석좌교수. 2004년부터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문학통사 (1983) 국문학사 (2011) 학문론 (2012) 등 있음. 70 우리문화연구회: 문리대 학부 및 대학원 재학생들로 구성된 연구동아리. 39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데 그때 우리문화연구회 그때 한 일곱 여덟 명었는데 전부 서대석 71 徐 大 錫 교수, 서울대 국문과 서대석 교수도 그 멤바 중에 한 명. 기중 宋 基 仲 박사라고 정문연 72 精 文 硏 에 있다 서울대 간 그 친구도 다 그 멤버였어. 우리문화연구회. 그 친구들 다 우리 한국학계에 중추 인물로 됐지. 그럼 그 당시에 국악에 굉장히 관심, 재미를 느끼시게 되신 거죠? 그런 문헌들, 선생님 심부름을 하면서 하나하나 내가 야 런 것도 있구나. 런 것도 있 구나. 그러면서 정말 용어 모르는 거 나오면 카드card에다 요렇게 착착착 데터, 요즘 말 로 말하면 데터베스database지. 그렇게 해놓으면서 하다보니까 재미가 들었던 거지. 서울대 재학시절 동기생 및 4.19의거에 대한 기억 그러면서 석사도 자연스럽게 진학하셨나요? 그렇지. 학부를 졸업하고, 그때 석사 碩 士 를 진학할 무렵 내가 ROTC 73 를 했어. ROTC 소위로 군대를 가야되는데, 군대 가기 전에 대학원 시험을 미리 봐놓고 입학해놓고 내가 군대를 갔나 그래. 그래서 내가 군대생활하면서 학점을 땄어. 그래서 굉장히 빨리 졸업 한 셈야. 내가 학부 때 1년 휴학했지만은. 그때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시험을 볼 때, 그때에는 영어가 제1외국어였고, 제2외국어를 한문으로 봤어. 근데 한문 공부를 그 당 시에 어떻게 했나 하면은 지금 성균관대학교에 그 동양철학과에 있는 항룡 74 宋 恒 龍 교 수라고. 그때 성균관대 석사학생었어. 최종민 崔 鍾 敏 친구라고 안동 安 東 인가 저 뭐 풍 71 서대석( 徐 大 錫, 1942년생): 국문학자. 서울대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한 후 국문과 교수 역임. 한국구비문학학회 회장(1993-1997) 한국고전문학회 회장(1995-1997) 역임. 2009년 제2회 우호학술상 수상. 야기의 의미와 해석 (2011) 무가문학의 세계 (2011) 한국신화의 정체성을 밝힌다 (2008) 등 있음. 72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옛 명칭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을 줄여서 부르는 말. 73 학사 장교 훈련단(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의 약자). 74 항룡( 宋 恒 龍 1940년생): 평북 박천( 博 川 ) 출생.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유학동학부 유교철학 전공 교수로 있으면서 유학대학장 역임. 저서로 한국도교철학사 노자를 렇게 읽었다 등 다수. 40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기 豊 基 친구라고 해가지고, 그 사람을 모셔다가 나하고 김정자 75 金 靜 子, 한만영 76 韓 萬 榮, 최 종민 렇게 동몽선습 77 童 蒙 先 習 부터 천자문 千 字 文 은 띤 걸로 하고 6개월을 그때 당시 唐 詩 까지 했나 그랬어. 그때 그분 굉장히 잘 가르쳐 준 걸로 기억 돼. 서울대 대학원 한 문시험을 그래서 잘 봤어. 그래서 내가 서울대 중앙도서관 규장각 奎 章 閣 에 나오신 할아버 지 한학자들 만나가지고 규장각도서를 가지고 물을 때 점을 띄어주면 해석은 내가 할 수 있었어. 그 확인 받는 건 만당 선생님한테 가서 확인을 받고. 그러면서 눈 쪼끔씩, 쪼 끔씩 뜨여지니까 재미가 그래서 그때부터는 혼자 했어. 그래서 나는 아까도 얘기했지 마는 거의 그 학점 따는 런 거는 양악 과목은 그냥 친구 노트 빌려서 그걸로 하고, 그래 그때 기억 조재선 趙 在 善 군 굉장히 가난했어. 조재선 군 우리 동기생들보다 나가 좀 많았어. 그래서 국악사양성소 78 國 樂 士 養 成 所 1기생들 3기, 국악과의 3기생들과 같은 입학년도야. 헌데 2기생으로 들어왔잖아 조재선가. 근데 친구가 양성소를 나와 가 지고 어느 사립학굔가 어디 거기에 편입해가지고 졸업을 했나 그래. 그래가지고 1년, 자 기 동기생보다 1년 앞서가지고 국악과 2기생, 나하고 같 시험본거야. 헌데 그 녀석은 작곡을 한다고 해가지고 내가 그때 도시락 두 개 싸가지고 가서 같 나누어먹고 공부하 고 그런 생각 나. 그때 청계천 복개 覆 蓋 가 안 되고 그래가지고 그때 거기에서 고약한 냄새도 나고 그러던 데야. 근데 거기에 못사는 사람들을 위한 포장, 요즘말로 말하면 포 장마차들 근데 조재선 (웃음) 그 친구가 보신탕라는 것을 소개해 내가 거기서 처 음 먹어봤고, 돼지 껍데기라는 거 있잖아? 그것두 그 친구 통해가지고. 그래 배가 고프 니까 내가 도시락 두 개 싸가지고 가면은 나눠먹는 거야. 근데 녀석 가끔 어디 가서 뭐 연주를 하면 그 수당 手 當 을 받았는지 아, 자기가 오늘은 돈 있다구 그래서 한 잔 내구 할 때 그런 돼지 껍데기 파는 데 소주 놓구, 먹던 기억 나고. 그러네. 그럼 친하게 지내셨던 그 당시 동기 同 期 들나 뭐 에피소드episode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헌데, 그 당시에 내가 음악대학 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선택적으로. 그 문리대 75 김정자( 金 靜 子, 1942년생): 가야금 연주자.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역임. 신국악예술인회를 출범하여 1966년 제1회 발표회를 서 울대 음대 콘서트홀에서 가졌으며, 그 외 다수의 연주회가 있다.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 권.447-48쪽 참조. 76 한만영( 韓 萬 榮, 1935~2007): 국악론가. 종교인. 세례명 바울. 서울 출생. 서울대 국악과 교수. 국립국악원장 역임.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장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장을 역임. 국악개론( 國 樂 槪 論 ), 한국불교음악연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상 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2023쪽 참조. 77 동몽선습 ( 童 蒙 先 習 ): 조선 명종 때 유학자 박세무( 朴 世 茂 )가 서당에 처음 입학한 학동을 위하여 지은 책. 78 국악사양성소( 國 樂 士 養 成 所 ): 국립국악원 부설 교육기관. 지금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 전신. 1954년 10월 1일 문교부령 제38호 로 국악사양성소의 규정 공포됐고, 같은 해 10월 7일 대통령령 제946호에 의해서 국악사양성소가 설치됐으며, 1972년 7월 11 일 대통령령 제6279호의 공포로 국악사양성소는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됨. 41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중앙도서관에서 하다가, 시간표 봐가지고 강의 있을 때는 거기서 한 30분 걸려. 요렇게 뒤루 해가지구 요렇게 해서 을지로 6가까지. 거기 가서 강의 듣구 난 또 금방 문리대 쪽 으로 가고 그랬어. 그래서 사실 그렇게 음대생들 하고는 국악과 학생들라도. 또 사실 졸업한 그 3기생들 있잖아? 입학을 같 안했기 때문에 거 좀 서먹서먹하고 사실 그 런 거야. 또 가더라도 입학동기 入 學 同 期, 그러니까 뭐 그때 군대 갔다오고 뭐하고 남자들 은 입학동기를. 입학 그러니까 지금도 음대 동창생 하면 서우석 79 徐 友 錫 니 뭐 김형규 80 金 亨 圭 니 뭐, 우리 60년도 입학생들 있잖아. 서경선 81 徐 京 善 니 뭐 다 우리 동기들거든. 바올린 하는 김민 82 金 旻. 60년 입학생지. 그 친구들 부르지, 3기생 부르질 않 어. 그래서 대학은 입학년도를 동기생으로 삼어. 그럼 뭐 또 슈issue 같은 거나 에피소드episode, 뭐 런 일 있었다. 그런 것들은 없 으세요? 대학생활 때 난 참 그 4.19의거 때 라일락lilac. 오늘두 새벽 산행 때 도봉산 道 峰 山 갔 다 오면서 아참. 올해는 참 라일락 좀 늦는다. 게 4.19때 피는 건데. 문리대 그 교정 校 庭 에 라일락 많았어. 그래가지고 그때 4.19때 내가 저 종로4간가 거기에서 걸 어 올라 가가지구 문리대를 가는 그때, 막 그냥 청와대 쪽에서 지금 서울대병원 있잖아. 창경원 昌 慶 苑 뒤쪽으로 막 엥엥엥엥 하면서 그때 막 총 쏘고 그랬어. 그래서 대학생들 막 쓰러지고 하면 그걸 의대생들 싣고 서울대병원으로 오던 그 기억. 헌데 그때 4.19 때 그 라일락 피던 향기가 생각 나. 라일락은 4.19의거 때 피는 꽃인데. 헌데 쪼끔 늦 었어 올해는. 그래서 그 라일락 그러면은 4.19의거 생각 나. 헌데 난 데모는 그때 못 했지만은 (웃음) 그때 음대생으로써 입학했던 그때에 라일락 향기 생각은 나. 79 서우석( 徐 友 錫, 1940년생): 작곡가 음악평론가. 대구( 大 邱 ) 출생. 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 1964년 국립국악원 신국악 공모 때 칩거 ( 蟄 居 )로 응모했고, 1968년 합주곡 석각 ( 石 刻 )을 발표했으며, 1972년 독주곡 피리 소곡( 小 曲 ) 을 작곡. 음악동아 등에 음악평을 발표함.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860쪽 참조. 80 김형규( 金 亨 圭, 1942년생): 피아니스트. 한양대 음대 교수. 제4회 동아음악콩쿠르에 입상한 후 1965년 국립중앙극장에서 독주 회를 열었고, 1983년 12월 7일 영국 런던 퍼셀룸체서 독주회를 열었으며, 1990년 2월 8일 필란드 헬싱키에서 헬싱키교향악단과 협연했음.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531-32쪽 참조. 81 서경선( 徐 京 善, 1942년생): 작곡가. 서울 출생. 한양대 음대 교수. 1972년 미국 매사추체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4년부터 한양대 교수로 재직. 작품으로 관현악을 위한 궁성의 뜰에 (1998), 클라리넷과 첼로를 위한 3장 (1971), 17현 가야금을 위한 결 (1998) 등 있음.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권.847-48쪽 참조. 82 김민( 金 旻, 1942년생) 바올린 연주가. 서울대 음대 교수. 1963년 국립중앙극장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제3회 동아음악콩쿠르에 입상했으며, 1969년 국립중앙극장에서 도독( 渡 獨 )고별연주회를 열었다. 1973년 3월 25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1979년 귀국독주회를 열었으며, 1984년 KBS교향악단의 악장 역임. 상론은 방, 한국현대음악인사전 (서울: 보고사, 2011), 상 권.237-38쪽 참조. 42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내 아버님의 자식에 대한 교육관과 그 영향 등록금 관련 일화 중 기억나시는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아, 등록금? 등록금 얘기 나오니까 우리 아버님 생각 난다. 그게 뭔가 하면은 내가 아 까도 얘기 했지만은 부산 범내골 피난민 시절에 문선명 文 鮮 明 선생 그때 피난민촌 뒤에 있어가지고 그런 걸 인연으로 해서 우리 아버님 제 누님하고 통일교회에 열심히 나 가셔가지고. 통일교회는 초창기에 굉장히 가난했어. 헌데 그땐 뭐 부자인 사람 없었 지. 다 가난했지. 헌데 아버님께서 세계우표사를 운영해서 돈을 엄청 많 벌었어. 우리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은 돈을 가마니로 긁어 담았대. 가마니에 긁어 담았던 그 돈 어 디로 갔나하면 전부 통일교회로 들어간 거야.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 그 당시에 재정부 장 財 政 部 長 을 맡았어. 그러구는 집안나 자식을 위해서 돈을 쓰지를 않으신 거야. 내가 대학에 딱 들어가니깐 나를 불르더라구. 우리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자는 돈 뭐 고 사회가 뭐고, 런 거를 몸으로 부닺히면서 배워야 된다. 내가 고등학교까지 널 교육 을 시켰으니 너 대학생 됐으니깐, 제는 니가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해라. 그래서 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가정교사를 했어. 근데 그때 어린 마음으로 아버님한테 굉장히 서 운했던거야. 아버님 돈을 못 벌어서 날 좀 도와다오 하면은 그기 해가 되는데, 돈은 정말 엄청 많 벌은 걸로 내가 알고 있어. 근데 그걸 자식을 위해서나 집안을 위해서 쓰 지를 않고, 전부 교회 갖다가 하나님 사업을 위해서 쓴다고 하니깐, 얼마나 어린 마 음에. 그래 내가 아버님한테 막 따지고 그랬어. 아버님은 위선자 僞 善 者 라고. 성경 聖 經 에 는 목마른 자에게 물 한 그릇 주라고 그랬고, 웃을 사랑하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자 식은 웃도 아니냐고. 런 법 어딨느냐. 아버님은 뭐라 그랬나 하면은 여기 천 원짜 리가 있는데 하나님 뜻을 위해서 천 원을 쓰면은 천오백 원, 천 원의 가치를 얻을 수가 있는데, 자식나 집안을 위해서 쓰면 거 오백 원 가치밖에 못 건지니 내가 돈을 어디 다 써야 되겠냐. 그러니깐 하나님 뜻을 위해서 쓰는데 너 아무소리 하지 말라. 그러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버님 섭섭하고 야속하게 보고 그랬겠어. 그니깐 아버님 말씀 을 내가 잘 안 들었어. 교회두. 근데 우리 형님은 참 예스맨yesman 스타일style었어. 43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그니깐 형님은 전도 傳 道 나가잖아? 지방에 나가면은 나가는 차비두 주구, 거기 생활하는 비용도 주구, 근데 나는 갈 차비밖에 안 주는 거야. 그러니깐 당신께서는 날 믿은 거야. 저 놈은 한 寒 데 내다놔도 자기 먹을 거는 해결한다. 왜, 나는 사실 대학 들어가자마자 가 정교사 생활하면서 등록금을 내가 벌었거든? 그래 등록금 모자르잖아? 그럼 아버님한 테 가서 나 돈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은 돈 관계는 부자지간 父 子 之 間 에도 정확하게 해야 된다. 너 거 갚어라. 네. 그럼 얼마 꿔주는 걸로 해서 내가 등록을 하고, 그 담 내가 꼬박꼬박 그걸 갚었어. 아버님은 내가 어떻게 처신 處 身 을 하나 하는 거를 굉장히 눈 여겨 보신 걸로 내가 알고 있어. 저놈은 어딜 내다놔도 자기 몫은 자기가 해결하는 놈 다. 그러니깐 전도 傳 導 나갈 때에도 갈 차비만 딱 주지. 그러니깐 난 거기 가서 살아야 되 니깐, 그 당시엔 서울대학교 마크mark가 달린 교복을 입고 지방 가잖아? 그러면은 굉장 히 뭐라 그러나, 무시 못했어. 서로 자기네 집에 와서 자기애들 좀 가르쳐 달라 그러고, 기숙 寄 宿 은 해결되는 거야. 음악대학생었지만. 지금은 아마 안 그럴 거야. 그때 서울 대학교 마크 딱 단 거 있잖아. (웃음) 교복 입구 가면은 아주 대우받았어. 그럼 등록금은 졸업 때까지 혼자 해결을 다 하신 거예요? 그렇지. 그래서 나는 아버님에 대해서 많 원망을 했었지만, 아버님은 내가 대학교 4 학년 때(1964년) 돌아가셨어. 여기 뇌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내가 지금 제일 존경하는 분 우리 아버님야. 내가 막 따지거든. 아버님, 어떻게 자식한테 럴 수가 있습니 까? 그러면 나중에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눈 감고 가만히 계시다가 너도 나중에 자식을 낳아 길러 봐라. 그럼 끝야. 근데 내가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까 자식한테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건 보통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그렇게 못해. 난 그래서 내가 71년도에 제일 처음에 책을 딱 냈을 때, 우리 아버님 그리구 우리 아버님 돌아가신 날 어 (감정을 추스르며) 내 생일날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64년돈가 11월 9일 날 돌아가셨는데, (눈물 을 닦으며) 난 여태껏 내 생일라는 거를 한 번도 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우리 집 사람 내 생일 챙겨 줄때에는 꼭 음력으로 했어. 음력은 10월 2일인가 10월 3일었 는데, 아, 11월 9일 날 행사한 것 처음었던 게 내 환갑 還 甲.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2002년 처음 했고, 내가 올해가 만으로 고희 古 稀 때 11월 9일 날 할라 그러는데, (목소 리를 가다듬으며) 우리 아버님 참 보면은 말씀을 많는 안 하시는 분인데, 그분 민 족주의자 民 族 主 義 者 신 걸로 기억 돼. 김구 83 金 九 선생님을 굉장히 존경하셨고, 김구 선 83 김구( 金 九, 1876~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은 안동( 安 東 ). 아명은 창암( 昌 巖 ), 본명은 창수( 昌 洙 ), 개명하여 구( 龜, 九 ), 법명은 44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생님 말씀을 평소 많 했어. 내가 어릴 때. 부산 피난시절 같은 때에도 보면은 남자는 첫째 나라와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보탬 되는 삶을 살다 가야지, 자기 한 개인을 위 한 삶을 살면 안 된다. 는 그런 말씀을 평소 하시던 분라. 당신께서 그 문선명 文 鮮 明 선 생을 참 존경을 하고, 그분을 위해서 평생 모든 걸 다 바치시다가 일찍 가셨는데 사실 지 금 생각해보니까 오십도 못돼서 돌아가셨어. 그래 내 막내 동생(성국) 55세 때 간암으 로 갔고, 내 밑에 동생(충국) 그 녀석도 또 어떻게 뉴욕New York서 그때 그 간암으로, 그 래도 너네들은 아버님보다는 더 오래 살다가 갔으니 다행다. 하는 내 농담 비슷하게 자 위 自 慰 를 했는데, 우리 아버님 나의 그 정신교육을 굉장히 단단하게 시켰어. 그래서 내 가 캐나다Canada 가서도 사실 박사과정으로 들어갔지만은 공부는 학부부터 해야 됐어. 3학년 걸로. 왜냐하면 너무 수준 낮으니까. 그러니까 난 참 기 氣 가 막혔어. 그 당시에 나는, 정말 아버님으로부터에 그런 훈련을 안 받았으면 포기했을 거야 박사과정. 포기하 고 그냥 테크니컬 칼리지Technical College 같은데 가서 뭐 기술 하나 배워가지고 주저앉 았을 지도 몰라. 그러면서 토론토Toronto에 정착을 하고 살았을지 몰라. 근데 나는 참 그 때마다 아버님 같으면 걸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을, 그래서 아버님은 그래도 렇게 하셨으리라 생각을 하고 난 어려운 결정 같은 걸 할 땐 늘 아버님을 생각을 해. 그래 내가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서울대학교 조교수 助 敎 授 그거 고만두고 할 때에도, 포기서 내 고 내가 서울대 안 간 것도 아버님 같으면은 랬을 거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가 그 런 것도 탁 거절을 했어. 그 얘기는 나중에 내가 국악원장 시절 끝나고 나서 내가 왜 서 울대학교로 발령받고 안 갔나 하는 그 얘기할 때 내가 하겠지만은, 하여튼 우리 아버님 은 어떤 면에서 참 나를 오늘의 내가 있도록 길러준 분야. 그래서 나는 내 자식(상원) 지금 마흔 넘었지만은, (웃음) 하나 업 그레드upgrade를 시켜서 대학과정까지는 내 가 등록금 대주지만은, 대학원부터는 니가 벌어서 해라. 자네 할아버지는 나 고등학교 딱 졸업하니까 대학부터 자립정신 自 立 精 神 을 길러야 된다고 하면서 요구했는데, 그래도 나는 업 그레드시켜 학부까지는 내가 대주겠다. 그러구 내가 아들 녀석 어렸을 때부 터도 넘어져서 잉 울면서 렇게 일으켜 달라면 절대 안 일으켜줬어. 일어나! 남자 는 털고 일어나서 그렇게 함부로 울고 그러는 게 아니야. 그렇게 좀 하드 트레닝hard training, 스파르타sparta 식으로 길렀는데, 딸은 또 그렇게 못 길렀어. 내가 요즘 많 원종( 圓 宗 ), 환속 후에는 두래( 斗 來 )로 고쳤다. 자는 연상( 蓮 上 ), 초호( 初 號 )는 연하( 蓮 下 ), 호는 백범( 白 凡 ). 황해도 해주 백운방( 白 雲 坊 ) 텃골[ 基 洞 ]출생. 상하[ 上 海 ]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 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되었다. 45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후회를 하면은 아빠는 딸두 좀 렇게 강력하게 길렀어야 되는데,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길러가지구 렇게 버릇 없어가지구 그렇다고 (웃음) 석사 때로 잠시 다시 돌아가서요. 석사 때는 어서 공부를 계속 하셨죠? 그렇지. 그래서 내가 입학을 해놓고 소위 少 尉 달고 광주 光 州 정리 松 汀 里 육군보병학교 가 서 훈련을 받고, 11사단 13연대 배치 받아가지구 지오피GOP대대의 전방초소 84 前 方 哨 所 로 들어갔어. 그래 들어 가서두 거기서 과제물 같은 거 해가지고, 휴가 나왔을 때 학교 와가지 고. 렇게 해가지고 졸업시기를 1년 단축을 시켰지. 서울대 석사학위논문(1967) 표지 학위취득 기념 사진(1968) 그러면 석사 졸업하시면서는 졸업시험나 논문을 또 따루 보셨나요? 그때 논문 내고, 종합시험 보고 다 했지. 그래서 석사논문은 내가 연음표 85 連 音 標 가지구 썼나 그래. 학부 졸업 때에는 악장등록 樂 掌 謄 錄 그것 가지고 썼고. 그렇하고 내가 졸업 을 하고, 바로 유학 갈 준비를 했나 그래. 재미를 붙여서 한참 하다가 학부 졸업하고, 군 대 가서 석사과정 하면서 석사학위 86 따고, 외국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 84 전방초소( 前 方 哨 所 ): GOP대대의 전방초소. 비무장지대(DMZ)의 수색중대 바로 뒤쪽 민통선( 民 統 線 ) 안에 배치된 부대의 초소. 85 연음표( 連 音 標 ): 우리나라 옛 기보법( 記 譜 法 )의 하나. 음의 고저( 高 低 ) 연결 기타 선율의 진행 등과 관련된 여러 부호로 표시하 는 기보법 연음표고, 서양 기보법의 네우마(neuma)와 비슷하기 때문에 Korean neumatic notation으로 번역된다. 가곡원류 ( 歌 曲 原 流 ) 여창가곡록 ( 女 唱 歌 曲 錄 ) 협률대성 ( 協 律 大 成 )에 여러 연음표가 사용되었다. 여창가곡록 에서는 드는표 누르 는표 막드는표 든흘림표 접어드는표 눌러떼는표 연음표 반각표 연음막드는표, 상 아홉 가지가 쓰였고, 협률대성 에는 드러내는표 눌러내는표 막내는표 가즌들흘림 홋든흘림 연음 장귀 반각표 볼떨어진장단표, 상 아홉 가지가 사용되었다. 상론은 방,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 하권.1203-204쪽 참조. 86 방, 連 音 標 의 問 題 點 에 대한 考 察, 서울: 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67. 連 音 標 의 問 題 點 에 대한 考 察, 李 惠 求 博 士 頌 壽 紀 念 音 樂 學 論 叢 (서울: 한국국악학회, 1969), 47-79쪽; 韓 國 音 樂 史 硏 究 (경산: 영남대출판부, 1982), 579-613쪽 및 근대 46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중앙청 대문 옆 문교부의 유학 자격고시 합격 발표 내가 그때 석사과정의 그 입시 준비할 당시에 한만영 韓 萬 榮 씨라고 있어. 한만영 씨가 문 리대 영문과 英 文 科 를 나왔고, 그때 국악과 3학년으로 편입을 했나 그래. 그래서 학부시 절에 우린 입학시험 준비하는데 한문도 같 공부하고 그랬어. 근데 나는 대학을 졸업하 고, 군대를 가기 전에 사실 만당 晩 堂 선생님의 조교 助 敎 를 하고 싶었어. 왜 그런가하면 선 생님 밑에서 내가 공부를 하다보니깐, 굉장히 나에게 심부름을 많 시켰지만은 그걸 통 해서 눈을 뜬 셈라 좀 계속하고 싶었는데, 그때 한만영 씨가 학부 학생시절인데 조교 로 한만영 씨를 쓰더라고. 근데 한만영 씨가 나보다 나가 조금 많았어. 영어선생 하다 가 들어왔기 때문에 사회 경험도 있고, 그래서 모든 면에서 굉장히 좀 능란했어. 세상을 보는 눈도 좀 넓었고. 그래서 선생님 그분을 택했는지 모르겠어. 그것 나한텐 많 서운했어. 실질적인 공부자료 런 건 내가 다 선생님께 챙겨드리고 도와드리고 했는데, 나를 조교로 안 쓰더라고. 그러면서 그때 내가 제대 除 隊 하고 석사논문을 준비할 땐가 그 래. 그때 67년돈가, 66년돈가. 67년도에 하여튼. 근데 방국 放 送 局 자리가 났다고, 에 치엘케와HLKY라고 그때 기독교방국었어. 거기 피디PD자리가 났어. 그래서 선생님 자네 방국에 갈 생각 없나? 하는 말씀을 하시는 거야. 근데 그 당시에 나보 다 먼저 권오성 權 五 聖 선배가 서울중앙방국라고 거기에 취직했는데, 한번 놀러갔는 데 방국을 가 보니까 공부하는 데가 아니야. 그냥 사람 들락거리구, 근데 나는 좀 조용 하게 앉아서 공부하는게 조교라도 하면은 자리 지키면서 공부할거 아니야. 선생님 도 와드리면서. 근데 조교하라는 말씀은 안하고 그건 또 한만영 씨를 떡 시키고, 나는 기독 교방국에 가라 그러니깐. 아, 게 영 마음에 안 찬거야. 그래 제가 생각해보겠습니 다. 하고 답을 즉시 안 드렸어. 그랬더니 그 다음 주 週 인가 군, 좀 오게. 그러시더 니, 자네 어떻게 됐나? 어떻게 결정을 했나? 그래서 선생님, 방국은 공부하는 데가 아니어서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랬더니 아, 사람아! 자네 석사두 끝나고 그러면 은 자네 용돈은 자네가 벌어서 써야 되지 않나. 언제까지 부모한테 손 내놓고 그러겠나. 로의 전환기적 음악양상 (서울: 한예종 전통예술원, 2003), 429-69쪽에 수록. 47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7 방 그래 아버님은 미 돌아가셨고, 그러니깐 우리 집안은 기우는 거야 그때부터.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우리 누님, 매부 댁에 정릉 貞 陵 에서 살은 거야. 그래서 선생님 말씀 옳 긴 옳은데, 방국은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래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아! 연대 87 延 大 나온 학생 거기(HLKY) 들어갈라고 말지 기 氣 를 쓰는 거를 막고 자네를 보낼라고 했는데, 기여코 싫다 그러니 할 수 없네. 그래서 거길 안 간거야. 그때 내가 도와드린 것 뭔가 하면 선생님 그 한국음악서설 88 韓 國 音 樂 序 說 인가, 서울대학출판 부에서 나올 때야. 그때 교정 校 正 을 내가 봐드렸어. 그런데 그 당시에 석사논문을 쓰구 접수하러 문리대, 그때 대학원 사무실 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횐가 됐지. 한국문화예 술진흥원 韓 國 文 化 藝 術 振 興 院 었어, 요즘 또 위원회로 바뀌었더라구. 거기 논문을 접수하 러 갔는데, 거기 대학원 게시판에 렇게 광고지를 보니깐 문교부의 해외유학시험 뭐 공 고 公 告 가 났어. 그래서 허 거 내가 빨리 유학 준비를 해서 떠나야 되겠다. 왜냐하면 조 교도 안됐지, 방국 가라는 것도 안 갔지, 내가 설 자리가 없는 거야. 내가 졸업하고 나 서 갈 때도 없고. 그러니까 나는 때 유학을 떠나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그 광고를 자 세히 읽어보니깐 아! 국사 國 史 시험두 봐야지, 영어시험두 봐야지, 그래야 되는 거야. 헌 데 국사는 내가 평소에 국악사에 관심 있어가지고 국사대관 89 國 史 大 觀 라고 병도 90 李 丙 燾 선생님의 국사대관 을 평소 늘 그걸 보던 그거라, 국사시험은 그거를 세 번 내가 읽고 갔나? 그렇하고 영어시험은 삼위일체 三 位 一 體 라고 하는 그거를 공부해가지구 시험 을 한 달 공부를 해가지구 가서 시험을 봤나 그래. 한 달 시험공부를 내가 했는데, 합격 자 발표를 지금은 그 중앙청 없어졌어. 근데 얼마 전에 우리 집사람과 함께 <마부> 馬 夫 라는 그 영화를 봤는데, 그기 옛날 그 배우들 나와. 신영균 91 申 榮 均 씨도 그때 갓 등장 해서 청년으로 그때 마부의 아들로 나오는데, 마부의 아들로서 그때 사법고시를 봤는데, 그 사법고시 발표를 중앙청 앞에 그 대문 옆에 큰 기둥 양쪽에 있어. 거기에 그걸 벽보 87 연세대학교의 준말. 88 李 惠 求, 韓 國 音 樂 序 說 (서울: 서울대출판부, 1967). 저자의 두 번째 논문집. 韓 國 音 樂 硏 究 (1957) 후 발표된 21편의 논문을 모 은 연구서. 내용은 I. 고대음악: 1. 安 岳 第 3 號 墳 의 奏 樂 圖, 2. 納 曾 利 考 ; II. 고려조 음악: 1. 한국의 左 坊 樂 과 右 坊 樂, 2. 洛 陽 春 攷, 3. 고려의 動 動 과 敦 煌 曲 十 二 月 相 思, 4. 雙 花 店, 5. 고겨 大 晟 樂 의 變 遷 ; III. 조음악: 1. 세종조의 宗 廟 祭 禮 樂, 2. 朴 堧 후세 에 준 音 樂 遺 産, 3. 龍 飛 御 天 歌 의 음악형식, 4. 李 朝 서울의 음악문화, 5. 白 雲 庵 琴 譜, 6. 靈 山 과 短 歌 ; IV. 종교음악: 1. 儀 禮 上 으 로 본 八 關 會, 2. 別 祈 恩 考, 3. 한국 梵 唄 의 沿 革 ; V. 旋 法 : 현행 歌 曲 의 界 面 調, 2. 靈 山 會 相 ; VI. 한국음악의 特 色 : 1. 한국과 일 본에 전래된 중국음악의 변화, 2. 국악과 양악의 차, 3. 음악과 詩 로 구성됨. 89 병도, 國 史 大 觀 (서울: 보문각, 1954). 90 병도( 李 丙 燾, 1896~1989): 역사학자 교육자. 호는 두계( 斗 溪 杜 桂 ). 경기도 용인 출생. 연구와 저술활동으로서 朝 鮮 史 大 觀 (1948)의 출간을 들 수 있다. 국사에 대한 인식 새로워지는 가운데 저술된 책은 뒷날 國 史 大 觀 (1954)으로 증보됐는데, 충실한 내용을 갖춘 본격적인 개설서로서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91 신영균( 申 榮 均, 1928년생): 영화배우 및 전 국회의원. 황해도 평산( 平 山 ) 출생.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 한 나라당 상임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48
제1장 유년 및 국악계의 입문 배경과 학창시절 처럼 붙여가지고 발표하는 그것, 보니까 옛날 생각나게 만드는 거야. 여보 여보! 저 기 옛날에 문교부 해외유학시험 발표하던 장소가 바로 저기야. 하, 그랬더니 옛날 중앙 청 그것두 그러니까 참 거 옛날 영화네. 그러면서 기억 나는데 그 당시에는 시험을 봐야지 유학을 가는 건가요? 그렇지. 문교부 해외유학시험에 통과를 해야, 외국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던 거야. 그러면 비용을 대거나 런 건 아니구요? 그런 건 아니었고, 자격고시를 봤어. 지금처럼 수월하게 갈 수 있는 상황 아니었네요. 그렇지. 굉장히 힘들었어. 그래 조재선 趙 在 善 군은 몇 번, 세 번째인가 되가지구 나갔는 데 나는 다행 한 번에 다 통과를 했어. 그래서 그때 정말 그 기분 아후, 그때 어디 서 그걸 시험을 봤나 하면 낙원동 樂 園 洞 거기에 건국대학교 정치대학라는 그 대학 낙 원동 어디 거기 있었어. 거기서 시험을 봤던 거야. 근데 아 그냥 시험 보는 날, 그때 겨 울인 걸로 내가 기억 되는데, 추워가지고 다방 茶 房 에 들어가서 기달리는데 ROTC 동 기를 만난거야. (웃음) 녀석들 야, 나는 거 재수 再 修 다. 근데 그냥 막 뻘건 줄로 친 걸 탁 보면서 말야. 야, 그래서 거기서 주눅 들은 거야. 나는 국사대관 나 겨우 읽 구, 문제집 뭔지도 난 몰르구. 근데 그 친구들은 외국유학 갈라구 허~ 문교부 시험을 통과를 해야 되니깐 자긴 두 번째라 그러구. 막 러는 얘길 들으니깐 그냥 겁 덜컥 난 거야. 야, 거 만만치 않은 거구나. 그러구 들어와서 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국사시험 을 잘 봤어. 뭐 임오군란 92 壬 午 軍 亂 에 대한 뭣을 써라. 내 지금 기억나는 것 그거밖에 생 각 안 나는데, 하여튼 그냥 잘 썼어. 근데 놈의 영어시험 문제라. 내 지금 기억나 는 것 뭐냐 하면은 작문을 짓는데 외국 나가서 뭘 공부할지에 대해서 영작 英 作 을 하래. 근데 나는 그때 외국유학 갈 생각을 안하고, 영어로 된 그 음악책들을 만당 선생님한테 많 빌려다 봤어. 삭스 93 Curt Sachs에 뭐 그 책들. 런 책들을 내가 그러니까 영어 공부는 그 원서를 내가 읽는 걸루 공부를 했어. 문법 같은 건 삼위일체 를 보고 했지만 은. 근데 작문은 그대신 용어 같은 거는 뮤지콜로지 94 musicology니 에쓰노뮤지콜로지 92 임오군란( 壬 午 軍 亂 ):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 訓 局 兵 )들의 군료분쟁( 軍 料 紛 爭 )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후 실각한 대원 군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 政 變 ). 93 삭스(Curt Sachs): 독일음악학자. 세계 제2차 대전 때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민감. 94 음악학( 音 樂 學 : musicology): 음악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총칭. 오늘날 음악학은 서양의 경우 음악사학( 音 樂 史 學 : historical musicology 또는 historico-musicology)지만, 서양음앙학은 크게 음악사학 및 음악심리학나 음향학 등을 포괄하는 체계적 음악 학(systematic musicology)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국악학회 및 한국음악사학회가 주도적으로 한국음악학을 끌 어오고 있다. 전통음악 위주의 학문적 연구를 하는 국악학( 國 樂 學 )을 한국음악학라고도 함.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