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남산(서울) 1. 환구단 2. 명동거리 3. 명동예술극장 4. 명동성당 5. 우표박물관 6.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7. 남대문시장 8. 숭례문 9. 문화역서울 284 10. 안중근의사 기념관 개요 11.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12. 남산봉수대 13. 남산팔각정 14.N서울타워 15. 서울한양도성-남산구간 16 남산골한옥마을-개요 17. 남산골한옥마을-전통한옥 18. 장충단공원 - 1 -
1. 환구단 대한제국의 꿈을 품은 제단 둥근 형태의 제단 이란 뜻의 환구단은 19세기 말,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이 국권 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내외적으로 권위를 높이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곳입니다. 고종은 이 곳에서 국호를 대한제국 으로 선포한 후, 하늘에 제사를 지 내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습니다. 1910년부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에 서양식 건물들을 세우는데요, 이때 환구단 의 건물들을 훼손하고 서양식 호텔건물을 짓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석고단, 답도 와 삼문 그리고 황궁우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고단은 1902년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환구단 안에 세웠습니다. 황궁우 앞의 답도는 황제를 위한 길로, 돌계단과 3개의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황궁우는 하늘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인데요, 건물 외관은 팔각형입니다. 울타리 난간에는 나쁜기 운을 물리치고 화재를 막아준다는 해치 라는 상상의 동물이 앉아있고, 건물기둥 과 지붕 사이에는 건물을 장식해주는 여러 개의 공포( 貢 包 )가 있습니다. 황궁우 의 내부는 3층에 있는 24개의 창을 통해 밝기를 조절해 주었는데요, 천장에는 발톱이 일곱개 달린 칠조룡 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칠조룡은 조선시대와 대한제 국시기에 왕이나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대국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특이 한 용인데요. 독립된 근대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고종황제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 징물입니다. - 2 -
2. 명동거리 대한민국 쇼핑과 경제의 중심지 명동거리에는 커다란 쇼핑백을 든 관광객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그리고 직장인들이 섞여 항상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들이 명동으로 오는 이유는 최신 패스트패션 브랜드들과 뛰어난 품질의 한국 화장품 브랜드, 맛있는 먹거리를 만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동이 지금처럼 상업화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데요, 당 시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쪽인 명동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초기에는 일본인들의 상업지구로 개발되었습니다. 광복 이후의 명동은 문화의 거리가 되었는데요. 당시 명동에 있던 많은 다방들은 예술인들이 문학과 예술, 사상을 논하고 토론하던 만남의 장이었습니다. 주점들도 성황을 이루어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예술가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명동은 문화와 쇼핑 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명동에서 유명한 유네스코길,명동 8 길, 콴첸루 거리를 비롯해 곳곳에 대형쇼핑몰과 화장품 판매점, 문화시설과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습 니다. 특히 오후 5 시부터 11 시까지는 노점상과 길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더욱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 3 -
3. 명동예술극장 명동 문화예술의 시작 명동예술극장은 일본인 이시바시 료스케가 설계하여 1934년에 명치좌( 明 治 座 ) 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 이후에는 시공관 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되었습니다. 1957년부터는 국립 극장으로 사용되었는데요, 1970년대에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이 건 물은 금융회사에 매각되었습니다. 명동이 상업화 되면서 예술인들이 떠나가고, 건물이 일반 사무실로 사용 되면서 명동예술극장은 예술의 중심지라는 역할을 잃어갔습니다. 1990년대에는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이게 되는데요, 명동예술 극장을 사랑했던 명동상인들과 예술인들은 건물 보존운동을 전개하여 극장을 살 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2003년도에 정부는 건물을 공식적으로 매입하였고, 리노 베이션을 거쳐 2009년 연극전용극장으로 재개관 하게 되었습니다. 리노베이션 당시 바로크양식의 외부모습은 유지하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극장 옥상에는 문화의 빛 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의 유리 구조물을 설치했는데요, 햇빛 이 유리 구조물을 통과해 객석을 밝혀 따듯한 느낌을 줍니다. 객석은 무대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배우의 연기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많 은 관람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 4 -
4. 명동성당 대한민국 천주교회의 상징 명동의 제일 높은 언덕에 위치한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 당입니다. 2014년 교황님의 방문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입니다. 성당은 프랑스인 코스트신부가 고딕양식으로 설계했고, 한국인 신자들의 무료 건축봉사와 중국 청 나라에서 온 벽돌공들의 기술이 더해져 189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정면의 본당 은 45미터의 종탑과 예배당, 지하성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종탑에서는 하루 에 세 번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려 기도시간을 알려줍니다. 본당의 스테인드글라 스 창문은 회색 벽돌기둥들을 비추며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데요, 2층 성 가대석에는 우리나라 성당 중에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지 하성당에는 5명의 성인과 4명의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곳은 추모 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에 엄숙하고 조용합니다. 본당건물 뒤에 있 는 성모마리아상은 민주화 운동 당시 청년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자애로운 어머 니이자 시민들의 평안을 기원하던 명동성당의 수호자입니다. 명동성당의 수호자 에게 기도를 올리고 잠시 마음의 평화를 얻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 5 -
5. 우표박물관 우표 역사의 집대성 중앙우체국 지하에 자리한 우표박물관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되었던 모든 우표와 세계 각국의 우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곳에는 세계 최초의 우표인 페니블랙 과 대한민국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의 실물을 볼 수 있습니 다. 전시실에서는 시대별 우체부 모형을 세워 우편 업무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요, 우체부의 역할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문화와 시대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온 희귀한 우표들도 볼 수 있는데요, 소리가 나 는 레코드 우표, 착시효과를 이용한 입체우표와 홀로그램 우표, 판독기로만 볼 수 있는 암호를 이용한 우표는 누구나 신기해하는 인기 전시품입니다. 유명한 애 니메이션 주인공이 모델인 우표는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체험전시실 에는 우표에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데요, 뮤지엄 샵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엽서를 가져오면, 엽서 속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기계를 사용 해 볼 수 있습니다. 우표거울 앞에서는 우표 속 모델이 된 것처럼 사진을 남겨 보는 것을 어떨까요? - 6 -
6.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인류와 함께한 화폐 반구형 돔 지붕이 인상적인 이 건물은 1907년 일본 제일은행이 사용하기 위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공사 중간에 조선은행이 건물을 인수하 여 1912년에 완공하는데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한국은행 으로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게 됩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역사가 깃든 이 건물을 한국 은행 화폐박물관 으로 리노베이션하여 개관했습니다. 내부 전시실은 1층과 2층으 로 구성됩니다. 1층에서는 한국과 세계 화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일본의 고대 동전과 중국의 화폐 원판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지갑 속에 지폐가 있다면, 위폐감별기에 넣어 보세요. 내가 가진 지폐가 진짜인지, 가짜인 지 알 수 있답니다. 2층에는 모형금고와 체험학습실이 있는데요, 모형금고에서 1억 원의 돈가방을 들고 자유롭게 사진촬영을 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디지털 폭포에 흐르는 각국의 지폐에 손을 대면 그 지폐를 사용하는 국가의 정보도 볼 수 있습니다. 2층 복도에는 버려진 지폐를 재활용하여 만든 벤치가 있는데요, 약 8천 6백만 원의 돈방석에 앉아 부자가 된 기분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 7 -
7. 남대문시장 600년 전통의 재래시장 조선의 태종은 한양도성에서 물자가 가장 많이 모이는 남대문 일대에 시장을 만 들어 상인들에게 분양했습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조선 팔도의 모든 물건 과 상인들이 모이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세계에서 들어온 구호물자와 미군부대에서 나온 초콜릿과 군용품, 사진기와 시계등이 거래 되었는데요, 이를 막기 위해 단속반이 등장하면 순식간에 시장이 사라지기도 해 서, 도깨비시장 이라는 별명도 있었답니다. 이 후 서울시는 남대문시장을 현대적 인 시장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약 40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건물을 지었고, 2005 년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남대문시장에는 현재 약 1만개가 넘 는 상점들이 있습니다.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는 주로 아동복, 액세서리, 안경, 카 메라 등인데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한국전통상품이나 김, 인삼가공품 등의 특 산품을 판매하는 가게도 많이 생겼습니다. 시장골목 가운데 있는 노점들은 다양 한 음식으로 손님을 유혹합니다. 손칼국수와 갈치조림, 왕만두, 어묵튀김 등은 꾸준한 맛으로 단골손님과 관광객들을 언제나 배부르게 해준답니다. - 8 -
8. 숭례문 600년 도읍지 한양의 정문 조선의 태조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도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만 들었습니다. 그 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을 남대문 이라고 불렀는데요. 정식이름은 예의를 숭상하는 문 이라는 의미의 숭례문 입니다. 숭례문은 조선의 왕이 공식 적으로 행차할 때 이용하는 문이었고, 전국의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4 개의 대문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문이었습니다. 세로로 걸린 현판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현판들과 방향이 다른데요, 숭례문을 지을 당시, 풍수지리적으로 한양 의 남쪽에 있는 관악산은 불기운이 강해 화재를 입을 수 있으니, 화재를 막기 위해 불타오르는 모양의 한문인 숭( 崇 ) 과 음양오행사상에서 불을 의미하는 예 ( 禮 ) 를 세워 달아 더 큰 불로 불길을 막자 는 의미로 세워서 단 것입니다. 색이 바랜 성벽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은 1907년 군대 강제 해산 발표에 격분한 대 한제국 군인과 일본군의 치열한 교전 흔적을 보여줍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현대식 도로를 만들면서 한양도성에서 이어지는 부분이 훼손되었습니다. 2008년에는 큰 화재로 지붕과 2층의 문루가 타버려서, 복원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지어졌던 모습으로 복원되고 있습니다. 성문을 수호하고 있는 황룡과 청룡을 지 나오면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현재의 서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9 -
9. 문화역서울 284 옛 서울역을 이용한 문화예술 공간 문화역서울 284. 건물의 사적번호인 284 를 붙여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이용 되고 있는 이 곳은 원래 조선말기 남대문정거장역 이라는 작은 역이었습니다. 일 제강점기에는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일본의 동경역과 같이 르네상스식 건물로 다 시 지어 경성역 이라는 기차역이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부터는 서울역 이 되어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사랑 받았습니다. 새로운 서울역사가 2004년에 들어 서면서 이 건물은 기차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지만, 3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나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둥근 돔형의 지붕과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건물에 들어서면 1층 중앙의 넓은 로 비가 나오는데, 로비의 천장에는 화합을 상징하는 강강술래를 형상화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이발소와 화장실로 사용했었던 공간이 있는 데요, 이곳에서는 원형복원공사 당시의 모습과 과거 자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문화역서울 284 에서 과거와 현재의 서울역을 만나보는 귀중한 시간을 가져보시 는 것은 어떨까요? - 10 -
10. 안중근의사 기념관 - 개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연해주에서 단지동맹( 斷 指 同 盟 )이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표시로 손가락을 한 마디 자른 후, 흐르는 피로 대한독립 이라는 글자를 태극기에 적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에서 조 선침략의 주모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대한독립 만세 를 외치다 현장에 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뤼순에 있는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사형선 고를 받고 순국했습니다. 기념관 건물은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의 동료들을 기 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건물은 12개의 직사각형이 하나의 건물로 합쳐지는 형태인데, 이는 안중근 의사가 속해 있던 비밀결사대 단지동맹 의 12명을 의미 합니다. 12개 중 투명한 건물은 의거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를 뜻합니다. 기념관 주변에 있는 석비들은 모두 안중근 의사가 생전에 직접 쓴 글들을 새겨넣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건물 앞에서는 의거 후 태극기를 펼쳐드는 안중근 의사 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 입구로 향하는 길, 대리석에 새겨진 글을 읽 고 차분한 마음으로 전시관으로 들어서면서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 11 -
11.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삶을 볼 수 있는 전시관 지하 1층 참배홀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안 의사가 정좌한 모습의 동상이 있 고, 뒤로는 안의사가 혈서로 대한독립 이라고 쓴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제1전시실은 안 의사의 성장과정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안 의사 의 가문은 가족과 친척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안의사의 수감생활 중에 직접 수의를 보내며 옳은 일 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의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라고 말할 정도로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제2전시실은 국채보상운동과 의병활동 그리고 단지동맹 등 안의사의 국내외 활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제3전시실에서는 하얼빈 의거 현장과 법정투쟁, 수감 생활 중에 집필 한 안응칠역사 와 동양평화론 에 관련된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입체적 인 영상과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안의사의 마지막이 더 크게 와 닿습니다. 안 의사는 서른한살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의 의거는 일제 제국주의 침략 에 맞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에도 그 숭고한 의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12 -
12. 남산봉수대 조선시대의 통신 수단 남산 정상 팔각정 옆에 있는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중요한 국가사항을 알려주는 연락수단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밝혔습니다. 봉수는 평상시 에는 1개, 적이 출현하면 2개, 적이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적과 접전을 벌이면 5개를 올렸습니다. 130여년 전, 조선을 방문했던 미국 인 천문학자 퍼시벨 로웰 은 남산 봉수대의 횃불을 보고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오 는 빛 같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소식들은 경복궁 에서 잘 보이는 이 봉수대에 모여서 왕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원래 남산에는 5개 노선의 봉수대가 설치 되어 있었는데, 함경도, 부산, 평안도 내륙, 평안도 해안, 여수 등에서 출발해 전국을 거쳐 각 봉수대에 집결했습니다. 조선시대의 봉수제 도는 1895년 전신과 전화가 도입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남산 봉수대는 조 선시대 지도들을 참고하여 1993년에 복원했습니다. 봉수대에서는 관광객들을 위 하여 매일 정오에 봉수군이 주변을 순찰하고 봉수를 올리는 것을 재현하고 있습 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연기를 피워 올리는 의식이 끝나면 봉수의식도 종료됩니 다. - 13 -
13. 남산팔각정 남산의 쉼터, 팔각정 남산 팔각정은 1968년에 설치 되었습니다. 이 곳에는 원래 조 선의 태조 이성계가 세운 목멱 신사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 산을 조선시대에는 목멱산( 木 覓 山 )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성계는 남산의 산신령에게 목 멱대왕 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목멱신사 라는 사당을 세워 봄,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신사가 있는 남산을 보 호하기 위해 출입을 제한하고, 나무를 베어가거나 묘를 쓰는 일 등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남산에 식물원 과 공원을 만들어 일본인들의 휴식처로 만들고, 목멱신사는 인왕산으로 옮겨졌습니다. 광복 이후부터는 여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는데요, 정자를 팔각형으로 만든 이유는, 동양에서 신의 세계를 의미하는 원형과 인간 세계를 상 징하는 사각형의 중간이기 때문입니다. 목멱대왕이 있던 곳에 사람들이 함께 한 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팔각정 앞 광장에는 분수를 설치하여 여름에는 시원 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산에 오르느라 지친 관광객과 시민들에게는 도심 속의 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14 -
14. N서울타워 서울의 랜드마크 남산 정상에 1975년에 완공된 N 서울타워는 한국의 수도 서울의 상 징 입니다. N서울타워는 원래 TV 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기 위해 세운 전파탑이었습니다. 이곳이 시 민들에게 개방된 것은 1980년인데 요, 개방되자마자 서울의 관광명소 로 떠올라서 지금까지도 많은 시민 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N서울 타워의 높이는 236m이고, 남산 높이까지 더하면 479.7m 입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면 30초 만에 355m 높이의 전망홀에 이르 게 되는데,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미디어아트 덕분 에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 같은 느 낌이 들게 됩니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전망홀에서는 서울을 360도 방향으로 둘러 볼 수 있습 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동쪽으 로는 양평 용문산, 서쪽으로는 한 강과 인천 앞바다, 남쪽으로는 남 한산성, 북쪽으로는 멀리 북한의 송악산까지 관측이 가능합니다. 전망홀 위의 레스토랑은 실내가 90분마다 한 바퀴 돌기 때문에, 식사를 하는 동 안 서울을 한 바퀴 구경할 수 있는 데이트명소입니다.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에서 자주 나오는 야외 전망대에는 수많은 자물쇠가 달려있습니다. 이 자물쇠들은 소 원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씩 달기 시작한 것인데요, 여러분의 소원을 담은 자물쇠도 꼭 달아 보세요! - 15 -
15. 서울한양도성-남산구간 600년 역사의 성곽 서울한양도성에는 조선 500년의 발자취, 일제강점기에서 6 25전쟁으로 이어지 는 격동의 근현대사가 쌓여있습니다. 남산은 한양 도성중 3구간에 해당하며 광 희문에서 시작해 남산을 넘어 숭례문까지 이어집니다. 거리는 5.2km, 대략 3~4 시간쯤 걸린답니다. 동그란 모양에 서울성곽길 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을 보고 걸 어가면, 성벽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남산 성벽은 성돌이 쌓여진 모양만 보고도 벽의 축성시기를 알 수 있는데요, 조선 태조, 세종, 숙종 때 세 번에 걸쳐 쌓았 습니다. 어떤 성돌에는 글자도 새겨져 있습니다. 경주, 함안, 경산 등의 고을이름 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공사실명제로 성벽이 무너지면 그 고을 사람 들이 다시 쌓아야 했습니다. 성벽에 숨어있는 암문은 전쟁 시에 몰래 군사와 물 자를 운반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 둔 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을 따 라가며 한양의 풍경을 즐기는 순성놀이 가 있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성곽을 따라 순성놀이를 해보세요! - 16 -
16. 남산골 한옥마을-개요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한옥마을 남산골 한옥마을은 1993년부터 4년에 걸쳐 한옥 다섯 채를 이전하고, 그 주변 을 전통 양식의 정원으로 만들면서 형성되었습니다. 천우각, 관어정, 청류정이라 는 이름의 정자들을 지어 전통정원의 모습을 재현해서 풍류를 즐길 수 있게 했 습니다. 국악당도 함께 지어서 한국전통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하고 있 습니다. 이 곳은 예전부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청학동 이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요, 조선시대 선비들과 사대부들은 정자와 누각을 지어 남산의 경치를 보며 여가 생활을 즐겼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청학동의 모습은 변했지만, 남산과 한옥마 을이 어울린 모습은 현재에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한옥마을에서는 조선시대의 한옥을 보고 체험 할 수 있습니다. 한옥들 내부에는 당시 집주인의 신분에 맞는 물건들을 배치해 놓아, 생활상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체험 프로그램도 운영중인 데요, 한옥에 직접 들어갈 수도 있고, 한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할 수도 있습니 다. 천우각 뒤의 무대에서는 전통음악, 전통무용, 전통무술시범 등 다양한 공연 들을 자주 열어 한국의 전통문화를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공예관에서는 한국의 전통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 17 -
17. 남산골 한옥마을-전통한옥 아름다운 전통가옥 나들이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신분과 쓰임새에 따라 각기 다른 다섯 채의 기와집을 볼 수 있는데요, 조선말기에는 세도정치와 외국의 근대문물의 유입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지고, 전통이 무너지면서 상류층과 일반인 가옥의 차이가 줄어들었습니다. 때문에 평민의 집에서도 상류층에서만 사용하던 전돌이 들어간 담장이나, 마루의 난간 장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상류층만이 사용했었던 솟을대문, 낮은 굴뚝과 가문의 제사를 지내는 재실을 따로 갖추고 있는 것을 통해 당시 상류층의 가옥 문화도 볼 수 있습니다. 정문에서 왼쪽부터 대한제국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의 집,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재실, 한양 8대 권세가 중 한 명이 었던 민영휘의 집,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의 집과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이승업 의 집이 순서대로 있습니다. 각 집마다 특징들이 뚜렷한데, 윤택영의 재실의 경 우, 용도에 맞춰서 장식을 배제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곳과 제사를 지내는 장소 를 구분하기 위해 단으로 사당을 높여 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영휘의 집 에서는 마루아래에 있는 환기구를 전돌로 만든 것이 특이합니다. 이승업 집은 도 편수라는 낮은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집에 다양하고 화려한 창살과 난간장식을 통해 자신의 실력과 권세를 나타내었습니다. - 18 -
18. 장충단공원 고종 황제가 세운 사당 도심 속의 휴식 공간인 장충단 공원은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 곳입니다. 1895 년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당시 많은 신하들과 병사들이 황후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는데요, 고종 황제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장충단 이라는 사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장충단 사당 을 헐고 한국 침략의 주동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 를 지었습니다. 광복 후에 박문사는 모두 철거되고, 이 곳은 공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장충단 공원의 상징인 장충단비 가 이곳에 남아 있는데, 비석에 적힌 한문은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황태자였을 때 직접 쓴 글씨입니다. 공원 안쪽에는 대한민국 독립에 관련된 기념물들도 있는데요, 3 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서 한을 보낸 것을 기념하는 파리장서비 와 고종황제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특 사인 독립운동가 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냇가의 수표교는 조선시대에 물 높이를 측정하는 기구인 수표 와 함께 종로의 청계천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이 흐르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조선시대 다리의 모습을 직 접 볼 수 있습니다. -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