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es of passage Gyeonggi-do 고 양 시 의 일 생 의 례 Goyang
高 陽 고양시의 일생의례 Ⅰ. 출산 의례 出 産 儀 禮 가. 기자 祈 子 우리나라는 가계를 잇는 것이 남자에게 국한되어 왔으므로 대를 이을 아들을 낳 는 것은 중요한 의무였다. 그러나 아이의 성별은 인간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므로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여 아들을 출산하고자 하는 습속이 생기게 되 었다. 이러한 것을 기자 라고 한다. 예전에는 시집을 온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큰 걱정을 하였다. 혹여 아들을 낳지 못해 시댁에서 쫓겨나게 되어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 들을 낳기 위해 치성( 致 誠 )을 드리거나 여러 방법을 써 보기도 한다. 그래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스스로 남편에게 첩을 얻어 주어 아들을 낳아 대( 代 )를 잇게 한다. 그러 나 여러 방법을 통해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는 집안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아들이나 자식은 자기 팔자에 타고 나고, 명줄을 타고 나야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지역에서는 특별한 기자 행위나 장소는 없으며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거나 산에 가서 산신 기도를 드리거나 무당을 찾았다. 출산 기도를 드릴 때는 삼각산이 나 유명 사찰로 갔다. 태몽 胎 夢 임신을 한 여성이나 가족이 꿈을 꾸면 그것을 태몽 이라고 한다. 태몽을 통해서 태아의 성별을 짐작해 보거나 그 사람이 갖게 될 자식의 수를 헤아려 보기도 한다. 구렁이가 나오면 아들이며, 애호박이나 붕어가 나오면 딸이다. 구렁이가 꿈에 나오 208 한국인의 일생의례
면 선생님이 된다고 했는데 실제로 설문동의 장윤지씨는 구렁이가 나오는 꿈을 꾸 었더니 아들이 선생님이 되었다. 씨가 있는 것은 아들이고, 씨가 없는 것은 딸이다. 또한 같은 밤이라도 밤송이가 보이면 딸이고, 굵은 알밤이 보이면 아들이다. 열매 를 따거나 보더라도 꼭지가 있고, 누렇게 잘 익은 것이면 아들이고, 꼭지가 빠지거 나 아직 덜 익은 것이면 딸이다. 지붕 위에 박이 열리면 아들이고, 밭에 박이 열리 면 딸이다. 태아의 성별 및 출산일 예지법 태몽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태아의 성별을 알아본다. 임신부의 배를 보 고 성별을 짐작한다. 배 모양이 앞으로 볼록하여, 뒤에서 볼 때 임신한 것 같지 않으 면 딸이다. 배가 두루뭉술하고 넓적하면 아들이다. 태아가 뱃속에서 노는 모습을 가 지고 성별을 점치기도 한다. 아이가 엄마의 배를 찰 때 바깥쪽을 주로 차면 아들이 고, 심장 쪽을 주로 차면 딸이다. 그리고 아들을 임신한 경우에 고기가 특히 먹고 싶 어진다. 설문동의 장윤지씨는 아들을 가졌더니 병아리를 보고 먹고 싶어져서 실제 로 병아리를 먹은 적이 있다. 태중 금기 胎 中 禁 忌 임신부는 여러 가지로 조심을 해야 한다. 특히 음식과 행동에 금하는 것들이 있 다. 좋지 못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고, 초상집에는 가지 말며, 빗자루를 깔고 앉 지 말아야 한다. 임신 중에 똬리를 깔고 앉으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 개고기를 먹으 면 형제간에 싸우고, 닭고기를 먹으면 닭 뼈가 몸에 들어가 태아에게 해롭고, 오리 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손 발가락이 붙고, 토끼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눈이 빨개진 다고 한다. 임신을 한 여자는 매사에 신중해야 했다. 그녀의 행동이 태어날 아이에게 영향 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는 행동을 조심하고, 음식을 가려 먹었다. 앉을 때는 늘 바른 곳에 바른 자세로 앉도록 노력한다. 바닥에 깔아 놓은 자리의 끝 에 앉지 않으며, 방의 구석에도 가능하면 앉지 않는다. 임신부가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이 있다. 특히 아이를 낳을 산달( 産 月 )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두투고기, 오리고기, 상어고기, 닭고기,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 경기도 고양시 209
다. 특히, 오징어나 문어와 같은 뼈 없는 것을 먹으면 뼈 없는 자식을 낳는다고 여겼 다고 한다.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가 오리처럼 붙는다. 상 어고기와 닭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피부가 거칠고 매끄럽지 못하다. 돼지고기를 먹 으면 아이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돼지처럼 꿀꿀거린다. 임신부 외에도 태아가 있는 집안에서는 몇 가지 금기 사항이 있다. 산달( 産 月 )에 는 집의 어디도 고쳐서는 안 된다. 특히 구들을 새로 놓거나 못을 박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하면 아이가 언청이로 태어난다. 또 집안에 있는 쥐구멍을 막지 않는다. 만 약 쥐구멍을 막으면 임신부가 아이를 낳을 때 난산( 難 産 )으로 고생을 한다. 옛날에는 출산한 집 근처에서 개나 닭을 잡지도 않았으며, 가족 역시 상갓집에 가지도 않았고, 개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거나 부정한 짓을 하지도 않았다. 그 리고 삼이 나가는 사흗날까지 깨도 볶지 않았다. 유산 流 産 방지 및 유산법 예전에는 낙태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유산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겼으며, 생겨난 아이는 당연히 낳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부득 이한 사정이 있을 때는 낙태를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아이가 너무 많은 경우 이다. 이때 임신한 여자는 임신 사실을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낙태를 한다. 병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 낙태를 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독이 있는 풀을 삶 아서 먹는 것이다. 이 외의 방법으로는 간장을 한 사발 마시거나, 높은 곳에서 일부 러 떨어지거나 구른다. 태아가 충격을 받아 자연유산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러 방법을 써 보아도 낙태가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출산을 하게 되는데, 명을 타고 난 아이는 아무리 없애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난산 難 産 방지 및 대처, 안산법 安 産 法 및 단산법 斷 産 法 해산이 더딜 경우에는 의학적인 방법을 쓰는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을 병용하는 데 아주까리를 방구석에 세워 둔다거나 부적을 붙이거나 옴나무 가시를 대문 위에 걸기도 한다. 또한 쳇바퀴(말안장)를 깔고 앉거나 지붕 위에 얹기도 한다. 210 한국인의 일생의례
다. 해산 解 産 해산 준비 임신부의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 오면 출산에 따른 준비를 한다. 흔히 첫아이는 친정에서 해산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산모가 약 1개월 전쯤에 친정으로 가는 경우 도 있고, 시댁에서 낳기도 한다. 지금은 대부분 산부인과에서 낳는다. 해산일이 되 어 산기가 보이면 산모는 출산 준비를 한다. 진통이 시작되면 임신부의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아이를 받아 본 경험이 많은 다복한 부인, 산파라 불리는 조산원, 그리 고 산부인과 의사 등이 아이를 받는다. 산시 産 時 방향의 길흉 아이가 태어나는 시( 時 )는 그 해의 띠와 관련이 있다. 호랑이띠인 해에는 호랑이 가 활동하는 시간인 밤에 태어나는 것이 아이에게 좋다. 특히 남자아이는 호랑이띠 인 해와 말띠인 해에 태어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산실 産 室 임신부가 있는 집에서는 산달이 가까워지면 아이 낳을 준비를 한다. 출산 준비 는 대개 시어머니가 담당하는데 아이에게 필요한 기저귀, 배냇저고리, 포대기 등과 산모가 먹을 미역을 장만한다. 미역은 예정일이 있는 달에 사 두었다가 만약 달을 넘기게 되면, 다시 산달[ 産 月 ]에 새로 사 오기도 한다. 그리고 산실도 정해 둔다. 산실은 보통 임신부가 평소에 생활하던 방으로 정한 다. 그런데 첫아이는 친정에 가서 낳기도 한다. 임신부의 진통이 시작되면 우선 방 을 따뜻하게 하고 바닥에 짚을 깔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이때 바 닥에 깔아 놓는 짚은 깨끗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방에 짚을 깔아 놓는 이유는, 볏 짚이 깨끗하고 양수를 잘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기능적 의미와 함께 곡령의 힘을 빌 려 순산키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점순씨의 경우, 한지를 깔아 두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이후에는 방바닥에 양회종이를 깔고 면으로 된 천을 깔고 그 위에서 출산 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임신부가 해산할 때 대부분은 시어머니가 아이를 받으며 며느리의 해산바라지 경기도 고양시 211
를 한다. 시어머니가 안 계실 경우는 남편이나 삼할머니 라고 불리는 산파가 조산을 담당하였다. 난산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삼할머니를 불러오고 산모에게 남편의 허리를 잡게 하거나 남편의 무릎을 산모의 배에 대고 문지르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 였다. 또 새벽에 대문을 열어 두고 그 문고리를 씻은 물을 먹이기도 하는데 이는 자 궁이 열리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문을 닫는 한밤중에는 이러 한 방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집에서 아이를 낳을 때도 금기를 지켜 왔다. 산모의 심리적 안정과 부정 방지, 질병 예방 차원에서 행했던 것 같다. 태 胎 의 처리 태는 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태를 자를 때는 되도록 쇠붙이를 피하여 수수 깡을 칼날같이 깎아서 자르기도 하고 아기 받은 이가 이[ 齒 ]로 자르기도 했다. 해산 이 끝나면 깔았던 양회종이에 볏짚과 태를 싸서 잘 두었다가 태우는데 이를 산불 피 운다. 고 한다. 재를 태울 때는 끝까지 지켜보면서 재가 사그라지면 긁어 모아서 뿌 려 버린다. 타인이 가져가서 약재로 쓰거나 하면 아기에게 좋지 않다. 윤정임씨의 경 우,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은 시어머니가 가위 혹은 수수깡으로 자른다. 탯줄은 3일 째 되는 날 태운다. 한 뼘 가웃 남기고 아기 쪽으로 세 번 훑고 나서 동여맨 후 자른다. 태를 훑는 것은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태를 길게 자르면 아이가 대 소 변을 잘 본다고 한다. 태가 잘 나오도록 하기 위해 산모의 엄지발가락에 태를 감아 두기도 하였다. 태는 깨끗한 마당에서 불을 놓아 태우는데, 이때 다른 사람이 보면 부정 탄다고 하여 사람이 없는 곳에서 아이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태웠다. 왕겨에 불을 놓은 것에 태우는 것이 가장 잘 탄다고 한다. 태의 재는 나중에 사용하기 위하 여 보관하기도 한다. 해산 국밥 해산을 하면 곧 바로 삼신할머니에게 태어난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산모 는 삼신상에 올렸던 미역국을 먹는다. 첫국밥은 대개 시어머니가 끓여 준다. 212 한국인의 일생의례
금줄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이의 성별에 따라 금줄을 친다. 여기서 는 금줄을 인줄 이라고 한다. 아들은 솔가지, 숯, 고추를 달고 딸은 솔가지와 숯을 달 았다. 금줄은 7일에서 삼칠일까지 쳐 놓은 다음 거둔다. 금줄은 매우 과학적인 풍속으로 질병 예방과 산모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 아 기의 출생을 알리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표식으로, 왼새끼(악귀 퇴치, 액막이 기 능, 거룩함과 신성함 의미 내포)로 꼬아 대문에 걸어 둔다. 아들은 빨간 고추(남자 상 징과 악귀 퇴치의 의미) 숯(붓을 상징, 공부 잘하라는 의미와 객귀를 물리치는 기 능)을 달고, 딸은 솔가지(여자 상징, 절개, 바느질 잘하라는 의미) 숯 종이 미역 등을 달아놓기도 한다. 요즘에는 대부분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을 하지만, 이러한 일이 보편화된 것 은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젊은 부부가 독립하여 일가를 이루는 경우나 친정 또 는 시집과 떨어져 사는 경우에 병원에서 해산하는 경우가 있었다. 병원이 많이 생 기면서 출산을 병원에서 하고 산후 조리를 산후 조리원에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라. 산후 産 後 산실 출입 부정한 사람은 산실( 産 室 )에 들어갈 수 없다. 상가( 喪 家 )에 출입했던 사람, 말이 나 개고기를 먹은 사람, 술 취한 사람, 도살장에 갔다 온 사람과 상주( 喪 主 )등이 해 당한다. 초칠일 기간에는 이를 엄하게 가리며, 삼칠일까지는 조심하도록 노력한다. 아이의 아버지라 하여도 만약 술을 마셨다거나 상가( 喪 家 )에 다녀오는 등 부정한 일 이 있다면 산실에 들어갈 수 없다. 삼신상[ 産 神 床 ] 아이가 태어나면 삼신상을 준비하는 집이 많았는데, 산실 윗목에 볏짚을 깐 상 위에 밥 3그릇, 국 3그릇을 놓아둔다. 아이의 무병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경기도 고양시 213
3일 동안 차린다. 몸조리 산후 조리 기간에 산모가 두부 호박 죽처럼 무른 음식을 먹으면 이가 빠진다 하여 금하였고 김치도 먹지 않았다. 산모의 몸은 한 달이나 칠칠일(49일)이 지나야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 게 오랜 기간을 방 안에서 몸조리만 할 수 없어 보통은 한칠일에서 삼칠일 동안 몸조 리하고, 빠르면 출산하고 2~3일 안에 바깥으로 나와 집안일을 해야 했다. 산모는 출산을 하고 바로 몸을 씻지 않는다. 특히 찬물이 몸에 닿지 않도록 조 심한다.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는 정도만 한다. 산모는 몸의 회복을 위 해 쑥을 삶아 나는 연기를 쐬며 좌욕을 하거나 기왓장을 삶아서 깔고 앉아 있기도 하였다. 산모라고 하여 특별히 보양식을 먹는 경우는 드물었고 다만 평소보다 식사를 자 주 하였다. 보통 하루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을 먹는데, 매끼와 그 사이 참을 먹었다. 매번 새로 차리지 않고 한 번 식사를 하면 남겨 두었다가 참으로 먹는다. 아이를 낳 고 몸이 많이 부었을 경우는 호박을 고아서 먹는다. 수유 授 乳 출산 후 바로 젖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 동안은 밥을 씹어서 아이에게 먹이거나 입에 쌀을 넣고 씹어서 그것을 물에 다 끓여 먹였다. 또는 쌀을 완전히 으깨서 주기 도 하였다. 3일이 지나야 아이에게 처음으로 젖을 먹인다. 마. 육아 育 兒 아기의 옷 배냇저고리는 임신 9개월째에 만든다. 오래전에 만들면 안 좋다고 해서 9개월째 에 만든다. 9개월째에 저고리 옷감을 잘라다가 삶아서 놓고 만들고 시간이 남으면 수도 놓았다. 타래버선도 수를 놓아서 만든다. 포대기, 기저귓감, 애기 이불, 목화솜 214 한국인의 일생의례
등은 친정에서 해 준다. 아이가 처음 입는 옷을 첫 저고리 또는 배냇저고리 라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집 안에서는 첫아이의 첫 저고리를 잘 보관하여 두었다가 동생들에게 물려 입힌다. 아 이가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나 어머니가 첫 저고리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 아이의 명 이 길도록 첫 저고리에는 단추를 달지 않고 실타래로 묶는다. 아이가 뱃속에서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로 구부리고 있기 때문에 태어난 후에 도 그 자세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래서 아이의 팔을 펴서 천으로 묶여서 싸서 놓는 다. 3일 뒤에 아이의 팔이 펴지면 배냇저고리를 입힌다. 산모와 아이는 3일이 지나 야 몸을 씻고 아이는 이때 배냇저고리를 입는다. 한이레가 되어야 입히기도 한다. 배냇저고리를 입힌 후에도 팔을 펴서 일주일간 천으로 묶어 놔야 한다. 아이의 팔 이 계속 접히기 때문이다. 작명 作 名 예전에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면 아이들이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도 이름을 곧바로 짓지 않고, 출생 신고도 제때에 하지 않았 다. 보통은 두세 살이 될 때까지 정식의 이름이 아닌 별칭( 別 稱 )을 불렀다. 일부러 이름을 험하게 지어 막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아이의 명이 길어진다고 한 다. 아이의 이름은 대개 할아버지가 항렬에 맞춰서 지었다. 목욕 손발톱 두발 頭 髮 의 처리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몸을 씻겨 준다. 몸에 양수가 끼어 있어 이를 닦아 내지 않 으면 아이가 이 물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아이의 상태를 봐 가면서 씻 겨 준다. 매일 씻기는 것이 좋지만 실제로 그리 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아이를 씻 길 때는 제일 먼저 입을 씻겨 준다. 다음 얼굴을 씻기고 몸을 씻긴다. 두발의 수가 적은 아이는 숱이 많아지라고 깎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두발 은 1년이 지난 후에 깎거나 자연히 두면 빠지기 때문에 깍지 않는 경우도 한동안은 자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100일이 지난 후에 아이의 손발톱을 깎는다. 경기도 고양시 215
아기를 위한 잔치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면 잔치를 열어 준다. 백일을 넘기면 큰 고비는 넘겼 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백일잔치는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성대하게 하지만 보통 가 족과 가까운 이웃에게 백일 음식을 나누는 정도로 한다. 백일에는 흰무리(백설기)와 수수팥떡(수수경단)을 만들어 가족과 친척, 이웃이 함께 먹는다. 특히 떡은 백 사람에게 나눠 먹으면 장수한다고 하여 여럿이 나눠 먹 는다. 그리고 아이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하여 머리맡에 상을 차려 준다. 상에는 미 역국 1그릇, 밥 1공기를 차려 놓고 삼신자손 우리아기 병 없이 쑥쑥 잘 자라게 해 주 십시오. 라고 외우면서 합장을 하거나 손을 비빈다. 집에 따라서는 미역국 3그릇, 밥 3그릇을 올리는데, 이는 삼신할머니에게 세 그릇을 드려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 기 때문이다. 상에 차려 놓았던 음식은 내려서 아기 어머니가 먹으면 삼신할머니로 부터 힘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돌잔치는 대동을 풀어 먹인다. 고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동네 어른을 비롯하여 많 은 사람을 초청하여 대접해야 좋다고 한다. 노인들이 계시는 경우에는 자손의 번창 함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될 수 있으면 돌잔치를 크게 한다. 아이의 살이 풀리기를 기원하여 백설기와 붉은 수수떡을 한다. 이는 액막이로 아이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뜻으로 열 살이 될 때까지 한다. 돌상을 차리고 아이를 상머리에 앉혀 놓고 어른들이 상 주변에 둘러서서, 아이 의 장래를 점치며 축복하는 의미로 돌잡이를 한다. 돌잡이는 돌상 잡이라고도 한다. 상 위에 공책, 연필, 돈, 활, 실, 국수, 주발에 담은 쌀 등을 아기의 손이 닿을 만한 자 리에 올려놓고 아이가 마음 내키는 대로 잡도록 한다. 최근에는 청진기, 마이크, 골 프공 등 새로운 직업을 나타내는 물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돌잔치에 모인 어른들은 아이가 무엇을 집을지 흥미로워하며 지켜본다. 최근에는 집에서 돌잔치를 하는 경우가 흔치 않고, 연회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 다. 봉일천, 원당, 구일산, 일산 신도시 등의 대규모 식당이나 뷔페에서 돌잔치를 하 는 경우가 많다. 핵가족인 젊은 부부들이 돌잔치를 집에서 열려고 하더라도 식기류 나 도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 청소를 하고 요리 준비와 뒷정리를 하는 것이 부 담스럽기 때문에 전문 연회장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216 한국인의 일생의례
첫나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은 외가( 外 家 )를 갈 때가 첫나들이인 경우가 많다. 아이가 낯선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아프기도 하기 때문에 첫나들이는 조심스럽다. 그래서 집에서 출발할 때 엄마나 할머니는 아이의 콧등이나 이마에 솥 밑에 있는 검 정을 묻혀서 내보낸다. 그리고 친정에 도착한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변소를 거쳐 방 으로 들어간다. 혹 오는 길에 아이에게 붙을지도 모를 부정한 것들을 변소에 모두 버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건강과 장수 長 壽 기원 간기는 아기가 잠을 안 자고 울며, 얼굴이 노랗고 파란 똥을 싸는 병이다. 손바닥 과 손가락 사이의 마디에 있는 파란 핏줄을 따 준다. 그리고 뽕나무 속에서 자라는 벌레를 잡아서 들기름에 볶아 준다. 어린아이들이 열이 나고 아플 때는 땅딸기를 졸여서 한 방울씩 먹인다. 볼거리를 앓으면 개똥을 주워서 밀가루와 함께 개어서 그것을 볼거리 난 곳에 붙 여 주거나 고약에 빨랫비누를 가루 내어 뿌려서 붙였다. 또는 밧 또는 바시라는 넓 적한 침 종류의 칼로 환부를 째고서 고약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두드러기가 돋았을 때는 가운데 솔잎에 아이를 세워 놓고 소금으로 두드러기 돋 은 데를 문질러 주면서 소금에도 두드러기 돋냐? 고 세 번을 중얼거리면 나았다. 마마는 주로 겨울철에 많이 걸렸으며 홍역보다는 전염성이 덜했다. 마마에 걸리 면 고열이 나고, 열꽃이 돋았는데 홍역할 때 돋는 열꽃보다 더 크고, 두 개씩 쌍쌍으 로 돋았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손톱 속에서부터 귓속까지 온 몸에 돋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는 마마에 걸리면 약으로 치료하면 더 심해진다고 해서, 민 간요법이 행해졌다. 일주일에 한번, 또는 매일 무당을 불러서 절구에 빻은 5판 3홉 (8홉)의 쌀과 삶은 통팥(팥을 찧으면 몸에 돋은 열꽃이 터진다고 생각해서 꼭 통팥 을 썼다.)으로 시루에 한 켜의 떡을 만들어 놓고, 무당이 대국서(중국을 지칭) 오신 마마님(또는 큰 손님, 별상마마님) 제발 살펴주십시오. 라며 빌었다. 이때 만든 떡은 절대로 먹지 않았으며, 볏짚으로 넓적하게 엮은 오랭이 라는 것에 떡을 쌓아서 뒷산 참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저절로 없어지도록 버려두었다. 무당이 해 주는 기원 말고도 앓고 있는 아이의 부모가 정안수를 떠놓고 빌기도 경기도 고양시 217
했다. 하루에 세 번 빌기도 하고, 손이 귀한 집에서는 하루 종일 빌었다고 한다. 방법 은 환자가 있는 방 쪽의 마루에 정안수를 올려놓은 상을 놓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 고 입에는 참나무 가지를 물고서 치성을 드렸다. 마마를 앓는 이는 옆에서 다른 사람이 이를 죽이면 자기 몸에 있는 이를 죽이는 흉내를 내면서 열꽃을 터뜨렸고, 황소의 엉덩이에 말라붙은 똥을 긁어내면 자신의 얼굴이나 몸을 긁어 마마자국이 생기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마가 돌면 이를 죽이 거나 상처 내는 일을 자제했다고 한다. 마마는 주로 겨울에 돌며, 한 마을에 들어오면 석 달 동안 돌았고, 그 후에 사라졌 는데 이는 계절이 바뀌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에 초상이 발생해도 시신을 묻지 못했 으며, 겨우내 묻지 않고 산속에 두었다가 마마가 나간 후에 묻었다고 한다. 마마를 무사히 넘기면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몸 보신약을 많이 복용시켰는데, 앓 고 난 직후는 소화 기능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용 든 약이나 행주강에서 잡은 메기를 푹 끓여서 소금을 넣고 그 국물을 먹였다. 홍역은 마마와 마찬가지로 고열과 함께 좁쌀 크기의 빨간 열꽃이 돋지만 크기가 작았고, 상처가 거의 남지 않았으며, 주로 여름에 발생했다. 2세에서 5세 사이의 아 이들에게 가장 많이 걸렸는데, 일생에 한 번은 꼭 걸리는 병으로 어렸을 때 안 걸리 면 어른이 되어서도 걸리고, 죽어서도 걸린다고 했다. 홍역에 걸리면 그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가마솥에 보리를 볶아 끓여 먹었다. 요즘에도 보리차를 즐겨 먹는데, 그것 은 보리가 열을 식혀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한 절대로 바람을 쏘 이지 않게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아이가 경기할 때는 영사( 靈 砂 )를 갈아 먹였다. 영사는 깊고 높은 산 속에서 돌 을 3년 동안 구워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수은을 고아서 만든 한방 약재 로 붉은 것과 흰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꽃자주색으로 빛나는 영사를 곱게 갈아서 먹 이며, 젖먹이 아기에게는 산모의 젖꼭지에 발라서 먹게 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족제 비를 삶아 먹는 것이 있다. 족제비를 잡아서 가죽을 벗긴 후 뼈 채 처마 밑 빗물이 새 지 않는 곳에 몇 년이고 말려 두었다가 경기할 때면 그 살점을 조금 떼어내서 들기 름과 함께 뚝배기에 넣고 마냥 고아서 그 국물을 먹였다고 한다. 백일해는 어린이의 호흡기 전염병으로 한번 걸리면 평생 동안 면역이 된다. 아 이가 백일해를 앓으면 배에 구멍을 동그랗게 내고 꿀을 넣고 끓여서 그 국물을 마 218 한국인의 일생의례
시게 했다. 배가 없는 여름철에는 배나무 가지와 잎을 꿀과 섞어 끓였다고 한다. 또 한 꽈리를 삶거나 날것으로 먹였다. 요즘에는 보기 드물지만 과거에는 어린 여자아 이들이 꽈리를 잘 불고 다녔는데 재미가 있어서 뿐만 아니라 병 치료에도 도움이 되 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의 사망 아이가 죽으면 바로 산에 가져다 묻는다. 관을 쓰지 않으며 헌 옷가지나 천으로 싸서 묻는다. 아이의 시신을 묻으러 갈 때는 밭고랑을 넘지 않는다. 또한 묵밭(오래된 밭)이 있는 곳을 지나지 않는다. 이는 혹 죽은 아이의 동생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해서 이다. 아이를 묻는 곳은 방위를 보아 손이 없는 곳으로 정한다. 예전에는 전염병으로 아이들이 많이 죽어서, 마을마다 아이들을 묻는 애장터가 곳곳에 있었다. 아이가 경기를 하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 경기를 일으킨 아이는 고열에 시달리다 가 눈이 뒤집히기도 한다. 이때 아이의 손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면 손가락 사이로 파 란 줄이 생겨 손가락 끝을 향해 올라간다. 만약 이 줄이 손가락의 첫 마디를 뚫고 지나 가면 아이는 어김없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파란 줄이 첫 마디를 지나기 전에 줄이 생긴 손가락의 첫 마디를 바늘로 모두 따 주어야 한다. 바. 기타 삼신[ 産 神 ] 삼신은 어느 집에나 있다고 여겨지지만 아이들이 없는 집에서는 특별히 삼신만 을 위한 의례를 베풀지는 않는다. 열 살 미만의 아이가 있거나 곧 출산할 여자가 있 는 집에서는 삼신을 각별히 위한다. 삼신의 노여움을 타면 아이나 산모의 몸에 이상 이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출산하고 한칠일 동안은 집안에서 고기나 빵, 고구마 같 은 것을 굽지 않는다. 삼신이 노하여 아이의 살을 타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기 때문 이다. 나물을 불에 데쳐도 마찬가지이다. 또 만약 음식에 고춧가루를 사용하면 아 이의 눈이 빨개진다.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출산을 하지 못하는데, 삼신의 샘이 굉장하기 때문이라 경기도 고양시 219
고 한다. 특히 삼신은 자기가 있는 집안을 챙기기 때문에 며느리와 딸은 한 용마루 아래서 같은 해에 출산을 하지 않는다. 금기 및 관습 산모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동제( 洞 祭 )를 지낼 때 산모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또 집안에서 정성을 드리는 사람들은 멀리서 산모를 보게 되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돌아서 간다. 산모 역시 이 기간에는 외출을 삼간다. 백일 전에는 같은 젖먹이끼리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의 복을 다른 아이 가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수지> 220 한국인의 일생의례
Ⅱ. 혼례 婚 禮 가. 의혼 議 婚 혼인 적령기 1940~1950년대에는 혼인을 보통 17~20세 정도에 하였다고 한다. 20세가 넘은 경 우에는 노총각이라고 하였다. 신부와의 연령차는 동갑내기 아니면 신랑이 한두 살 많았다고 한다. 특히 1950년대에 남자는 혼인 직후 군대를 가거나 군 복무 중에 혼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자의 평균 혼인 연령은 17~18세였다. 당시에 20세 정 도의 여성은 노처녀라고 불렀다. 중매 仲 媒 고양시 지역에서 혼인 상대를 찾는 방식으로는 이전에는 중매를 통하는 일이 많 았으나 요즈음은 연애결혼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혼인 상대를 찾는 범위로는 고 양 관내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인근 지역에서 맞이하는 경우에는 파주, 양주, 김 포 등지에서 친척이나 친지의 소개로 중매 과정을 거쳐 혼인이 이루어졌다. 두 집 안에서 중매가 이루어질 때는 친분으로 이루어지며, 이때 중매쟁이는 누구든지 가 능하다. 어느 집에 몇 살짜리 처녀, 총각이 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궁합을 먼저 본 후에 궁합이 맞으면 중매쟁이에게 기별을 넣는다. 중매쟁이가 왔다 갔다 하면서 혼 담이 이루어진다. 중매는 신랑감과 신붓감이 있는 양쪽 집안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이 행하게 된다. 당시에는 여전히 반상을 구분하는 의식이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중 매쟁이는 양쪽 집안의 문벌을 주로 따져서 중매했으며, 꺼리는 성씨도 존재하였다. 학풍을 따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재산은 크게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선보기 궁합 그간에 양가의 부모는 서로 방문하면서 선을 본다. 여기서 선을 본다는 것은 다 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고 부모끼리 만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미행( 微 行 ) 경기도 고양시 221
이라고 한다. 부모는 그 집의 형편과 당사자의 행실이 어떤가를 살펴보거나 의심스 러우면 친한 사람을 동원하는 등 이리 저리 잘 알 만한 사람을 통해 알아본다. 그런 과정에서 중매쟁이의 거짓말이 탄로 난다든지 혼인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혼인 을 결정한 후라도 사주를 돌려보내는 일이 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싫으면 혼인 못한다. 고 사주를 돌려보내면서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동네 사람 간의 결혼도 간혹 있었으며,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960년대 후반에는 연애결혼도 간혹 생겨났다. 설문동의 장윤지씨는 24세(1968년) 에 결혼하였는데 연애결혼이면서 신식으로 혼례를 하였다. 당시에 신식 혼례를 하 는 것은 드문 일이였다. 장윤지씨는 서대문에서 결혼식을 했다. 일산에는 결혼식장 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윤지씨는 친정에서 출발하고, 신랑은 신랑집에서 각자 출발 했으며, 하객들은 버스를 타고 왔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고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 이 일대를 돈 다음에 시댁으로 가서 잔치를 하고 그 이튿날 사당 차례를 지내고 그 날 저녁에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일주일 동안 떠났다. 서경자씨는 벽제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로 같은 마을에 살던 남편과 결혼 을 하였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서로 알던 사이라서 중매를 서서 결혼했다. 서 경자씨는 16세(1947년)에 혼인을 했다. 나. 납채 納 采 연길 涓 吉 납폐 納 幣 납채 納 采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편지와 함께 사주를 보낸다. 아직 사돈이 맺어지지 않았 기 때문에 사돈지라고 할 수 없고 그냥 편지를 보낸다. 이때 사주를 넣는 봉투를 따 로 만들었다. 사주를 전달하는 사람은 마을에서 아들을 낳고 팔자도 좋은 사람을 골 라서 보낸다. 또는 중매쟁이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사주는 생년월일과 이름을 써서 청 홍실로 묶고 홍색보자기에 싸서 보낸다. 설문동의 윤정임씨의 경우, 사주와 함 께 신랑 쪽에서 결혼할 날짜를 보내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222 한국인의 일생의례
연길 涓 吉 신붓집에서는 사주를 받아 보고 혼인을 하기로 결정하면 혼인 날짜를 받아서 신 랑 집에 아무 날 혼인합시다. 하는 편지와 함께 택일을 알린다. 택일은 신랑과 신부 에게 부정 타지 않고 아무런 해가 없는 날짜를 뽑는 것을 말한다. 납폐 納 幣 함은 혼례식 사나흘 전에 보내기도 하고, 혼례식 아침에 후행손님(후안손님, 후행) 이 인솔해서 신랑과 가마꾼, 하인이 신붓집으로 가지고 가기도 한다. 이때 혼 수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여럿이다. 신랑이 걸어서도 가지만 부유한 집에서는 말을 타고 가기도 한다. 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애비 라고 하며, 하인들이나 마을 사 람 중에서 고른다. 함진애비는 대를 잘 이으라는 의미에서 첫아들을 낳은 사람이어 야 하며, 자식들 중에서 먼저 죽은 자식이 없는 50대 정도의 나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들은 신붓집에 함을 건넨 후 그 날 돌아온다. 함에는 청 홍실, 혼서지, 색 시가 입을 옷 또는 옷감, 패물 등을 넣는다. 신부의 옷을 준비해 가는 경우에는 이 옷 을 입고 혼례를 올린다고 하지만 주로 옷감을 가져간다. 부유한 집에서는 치마저고 리 두 벌, 두루마기 감 한 벌, 은반지와 은비녀, 청 홍실, 혼서지 등을 함에 넣는다. 함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겹보자기로 싸고 그 겉에 또 보자기로 싸서 멜빵을 감 아 멨다. 멜빵으로 사용하는 천은 자르면 안 좋다고 해서 한 필 그대로 사용했으며, 나중에 아기 기저귀로 사용했다고 한다. 함진애비가 신붓집으로 들어갈 때는 대문간에 미리 준비해 둔 바가지를 깬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함진애비가 함의 멜빵을 벗지 않고 짊어진 채로 마루에 걸터앉 으면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벗긴다. 그러면 옆에 있던 신부 어머니가 함을 끌어안아 서 쌀과 청수, 또는 떡을 올려놓은 상 위에 함을 올려 두고, 절을 한 후에 풀어서 본 다. 이 떡을 봉치 라고 한다. 함을 개봉할 때는 신부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로 끄집 어낸다. 이때 빨간 것이 나오면 좋다고 한다. 다음은 설문동의 정창영씨와 윤정임씨의 사례이다. 예전에는 사주단지와 함께 결혼할 날짜가 적혀 있는 종이가 함께 왔다. 신랑집에서 혼인 날짜를 잡은 것이다. 신랑집에서 함이 오면 신랑 아버지가 쳐다보지도 않고 안에서 천을 꺼낸다. 빨간 천을 집으면 잘 산다고 믿었다. 함에 들어 있는 옷감으로 치마를 만든다. 저고리는 경기도 고양시 223
친정에서 준비한다. 혼서지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혼서지는 나중에 장례를 치를 때 관에 같이 넣어 둔다. 벽제동 서경자씨의 경우, 함을 받을 때는 신부 쪽에서 시루를 쪄 놓는다. 시루 위 에 함을 올려놓으면 신부의 아버지가 천을 꺼낸다. 빨간 천이 나오면 좋고, 파란 천 이 나오면 안 좋다고 하였다. 함에는 사주, 폐물, 옷감, 혼서지 등이 들어 있다. 폐물 로는 은반지를 하였다. 다. 혼례식 婚 禮 式 초행 初 行 혼인일이 되면 신랑이 신붓집으로 혼례식을 올리러 갔다. 1960년대까지도 전통 적 혼인식이 많았는데, 혼례 시간이 되면 신랑은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정식이었다. 민가에서는 말이 귀했기 때문에 부유한 가문이 아니라며, 말 대신에 트럭을 타고 가 거나 가마를 타기도 하고, 걸어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마는 지붕이 있는 경 우도 있고 지붕을 뜯어낸 경우도 있다. 이 가마는 신부가 신랑집으로 갈 때 타고 가 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선 연변의 능곡, 일산, 탄현, 파주 등지에서는 기차편을 이용 하는 신랑도 있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혼례식을 신랑집에서 행하는 경우도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이 예식장에서 혼인식을 하게 되었 는데, 능곡역, 일산역 일대의 예식장을 이용하거나 경제적으로 좀더 여유 있는 가정 에서는 서울 불광동의 예식장을 이용하였다. 신랑은 혼례식 당일 아침에 두루마기를 입고 조상님께 고하는 사당 차례를 한 후에 신부 집으로 간다. 신랑 일행이 신붓집으로 향할 때는 신랑집을 대표해서 후행 손님과 가마꾼과 하인들이 함께 간다. 이때 걸어서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1950년대 에는 트럭을 타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정창영씨는 말을 타고 처가 가서 대례를 지 내고 말을 타고 돌아와서 혼례를 치렀다. 가지고 간 빈 가마는 신랑이 혼례식장으로 들어갈 때 타는 것이며, 또한 신부를 데리고 올 때 사용하는 것이다. 후행손님은 작 은아버지나 작은할아버지 또는 삼촌 중에서 한 분이 한다. 신랑이 신붓집으로 가는 도중에 마을 청년들이 길가에 기다리고 있다가 재를 뿌 224 한국인의 일생의례
리는데, 재꾸래미한다. 또는 재꾸래미를 뿌린다. 고 한다. 신랑이 재를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피하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재꾸러미를 많이 받으면 흉사로 여겼다. 어른 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잡귀를 물리쳐서 신랑에게 아무 탈이 없 도록 해 달라는 의미를 지닌 행위라고 한다. 또는 신부가 시집가는 것에 심술이 난 동네 총각들이 장난치는 것이라고도 한다. 초례청 醮 禮 廳 신랑이 신부 마을에 도착하면 신부 집에서는 초례청을 차린다. 초례상에 차리는 것은 솔가지 꽂은 병과 삼색과실, 사과, 용떡, 팥과 쌀을 담은 그릇 둘 등이며, 신랑 과 신부 옆에는 장닭[수탉] 과 암탉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서 있다. 솔가지는 사철 푸 름을 잃지 않는 정절을 의미하며, 그릇에 담긴 팥과 쌀은 신부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가는데 붉은 팥은 잡귀를 물리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닭은 혼례를 마치면서 날 려 보내는데, 이때 기러기 날아간다. 고 소리친다. 용떡은 놋주발에 가래떡 만드는 하얀 떡을 담아서 몸통과 머리 부분을 손으로 뭉쳐서 눈사람 모양으로 만든다. 용떡은 초례를 치른 후에 썰어서 식구끼리 떡국을 끓여 먹는다. 혼례식 婚 禮 式 신랑이 신붓집으로 들어갈 때 바가지를 깨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혼례식은 대개 오시( 午 時 ), 즉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맞추어 진행된다. 결혼할 때 쓰 는 사모관대, 가마, 족두리, 기러기 등은 마을에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따라 서 신랑이 입는 관복은 동네마다 준비해 놓고 혼례를 할 때 빌려 쓰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 혼례는 홀기를 부르면서 진행되지만, 웬만한 집에서는 홀기를 부르지 않았다. 마을에서 행하는 혼례와 상례는 한 집안의 일이기는 하지만 마을 주민 전체가 참 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을의 혼례나 상례가 있을 때, 그 과정에서 필요한 다양 한 일은 연반계( 延 燔 契 ) 계원들이 참여해서 관장하였다. 특히 연반계는 상을 당하 였을 때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부의 머리, 화장 등 꾸미는 것은 동네 아주머니들 이 도와주었다. 대례를 치를 때 하님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초례청에서 깔아 둔 자리 밑에 수수깡이나 콩을 깔아 놓았다가 신랑이 입장할 경기도 고양시 225
때 돗자리를 잡아당겨서 곤두박질치게 한다거나 미끄러지도록 하는 경우도 있고, 신랑의 구두코에 밤송이를 넣어 두었다가 신랑이 신을 신으면서 찔려서 아프도록 하고, 합근례 때 신랑에게 안주를 준다면서 장작 두 개를 젓가락으로 사용해 긴 콩 나물을 집어 주어서 먹기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랑 중에는 이러한 행위 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즉, 신랑이 식장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상황을 눈치 채고는 돗자리를 걷어 콩을 모두 치우게 한 후에 혼례를 행한 경우도 있었다. 전안례 奠 雁 禮 신랑이 초례를 치르기 위해서 식장으로 들어갈 때 함진애비는 빨간색과 파란색 을 붙여서 만든 보자기에 싼 목기러기를 신랑에게서 받아서 신부 어머니에게 드린 다. 목기러기는 코에 청 홍 색실을 끼우고 대추를 달아매고, 청 홍 보자기의 홍 색이 드러나도록 싼다. 이때 기러기 날아간다. 라고 소리치면 신부 어머니가 행주 치마에 받아서 얼른 싸들고 쌀독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기러 기는 복된 것이니 날아가지 말고 잘 살라는 것이다. 신랑은 대례상 앞에 서서 집사 자의 지시대로 두 번 절을 하고 목기러기를 상 위에 놓아둔다. 이런 과정을 전안례 ( 奠 雁 禮 )라 하며, 목기러기는 신랑과 신부가 시집에 올 때 보내준다. 교배례 交 拜 禮 합근례 合 巹 禮 신랑이 전안례를 마치고 병풍으로 가린 대례상을 향하여 세 걸음 물러나 있으면 신부가 원삼에 족두리 차림으로 두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다. 이때 대례상 앞의 병풍을 치우고 신랑도 두 남자의 인도로 대례상 앞으로 간다. 신랑과 신부가 첫 대 면을 한 뒤에 신부가 먼저 세 번 큰 절을 할 때, 신랑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절을 받 으며, 다음에 신랑이 두 번 큰 절을 하면 신부는 앉아서 절을 받는다. 이를 교배례 ( 交 拜 禮 ) 라고 한다. 교배례에 이어서 신랑과 신부가 합환주를 나누어 마시는 합근 례를 한다. 합근례는 술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부부로 결합된다는 상징적인 의례이 다. 이 과정까지를 대례( 大 禮 ) 라고 하며 대례가 끝나면 신랑은 사모관대를 벗고 신 붓집에서 준비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큰 상을 받는다. 226 한국인의 일생의례
부조 예전에는 막걸리라도 한 초롱 가져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현금으로 부조한다. 또 한 이러한 부조 관행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호혜적인 관계의 표현으로써 친구 간에 라도 초청을 받으면 먼저 방명록을 보면서 자기 집의 큰일에 왔다 갔는지를 확인한 다고 한다. 잔칫날 주식으로 특별한 음식은 없고 국수장국을 하며 찬거리는 콩나물과 배추 김치 정도이다. 이 외에 누루미적(녹두전병)을 하면 최고로 쳤으며 고기는 없었다. 초야 初 夜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가 신붓집에서 머문다는 것은 신방을 신붓집에서 꾸미 고 첫날밤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방은 큰방, 안방을 꾸며서 준비한다. 밤중이 되면 밖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신랑과 신부는 첫날밤을 보내 게 된다.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낼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방문에 구멍을 뚫 고 신방 안을 들여다본다. 이때 첫날밤에 옷 벗기는 것 보러 가자. 라고 하면서 사 람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은 여러 가지로 어색한 신랑과 신부에게 첫날 밤을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데, 족두리 벗기는 방법 옷고름 푸는 방법 도 알려 준다. 시집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경우, 시댁 사람들이 문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면서 진 행되는 신방에서의 일은 신부에게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때 신부와 함께 신랑 집으로 따라왔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불안한 신부를 심리적 으로 도와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 신행 新 行 재행 再 行 현구고례 見 舅 姑 禮 근친 覲 親 신행 新 行 신랑은 신붓집에서 혼례를 치른 후에 자기 집으로 신부를 데리고 간다. 이러한 과정을 우귀( 于 歸 ) 라고 할 수 있는데 조사 과정에서 이 용어를 들을 수 없었다. 고 양시에서는 당일 우귀를 행하는 집안이 많은 편이며,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 경기도 고양시 227
으로 간 지 사흘째 되는 날 행하는 재행 과정을 통해서 삼 일 도배기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탄다. 이때 신부의 어머니는 가마 안에 팥, 찹 쌀, 멥쌀을 한 그릇씩 담아 넣어 주었다. 팥은 씨로 심어서 재산을 일으키라는 뜻으 로 넣었고, 찹쌀은 신랑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밥을 지어 먹고 찰떡같은 궁합으로 백년해로하라는 기원을 담아 넣은 것이다. 먼 길을 가는 동안 신부가 소변이 급할 경우를 대비하여 요강을 함께 넣었는데 방뇨하는 소리를 가마꾼에게 들키지 않게 소여물을 넣어 두었다고 한다. 조금 먼 거리일 때는 기차를 타고 일산역까지 온 다 음에 역에서 가마와 말로 바꿔 타기도 했다. 신부는 신랑집 안마당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가서 내린 뒤 안방으로 들어간다. 가마를 탄 채 대문간을 통과하거나 내려서 대문 앞에 피워 둔 불을 타넘고 엎어 놓 은 바가지를 밟아서 깨트리면서 들어간다. 부정풀이를 하는 것이다. 또한 가마에서 내린 신부가 대청마루에 엎어 둔 바가지를 발로 깨고 들어가거나 엎어 둔 솥뚜껑을 밟고 넘어가서 숟가락을 한 웅큼 손에 쥐어 주어 탁 집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친정에서부터 따라온 잡귀를 쫓아 보내려는 상징적 행위이다. 즉, 친정에서 부터 묻어 온 잡귀와 액을 물리치고 시집에서의 신성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도착하면 저녁 무렵이 된다. 신랑집의 잔치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잔치는 다음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네잔치에는 보통 국수와 집에서 잡은 돼지고기, 떡, 빈대떡 등을 준비한다. 술과 감주 등은 집에 서 만들지만 동네 사람들이 준비해 오기도 한다. 당시의 부조는 계란 한 꾸러미, 막 걸리 한 동이, 감주 한 동이, 국수 한두 관, 떡 등이 대부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러한 부조를 한 후에 가족 모두가 잔칫집에서 하루 종일 즐기고 이튿날까지 즐기기 도 한다. 형편이 매우 어려운 사람들은 빈손으로 그냥 와서 하루를 즐긴다. 시댁에 와서 잔치를 치르는데, 신부가 족두리를 쓰고 안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데 이것을 족두리 놀음 이라고 하였다. 혼수로는 장롱, 그릇, 수저, 옷, 이불 등을 해 온다. 신부 측 하님이 따라오는데 하 님은 3일째까지 함께 있다가 친정으로 간다. 228 한국인의 일생의례
현구고례 見 舅 姑 禮 신부가 시집에 도착하면 신방에 들여보내고 큰 상을 받게 한다. 이 상에 올렸던 음식은 거의 그대로 물리는데, 음식은 친정으로 보내어 친정집 마을 사람들이 나누 어 먹도록 한다. 신부가 도착한 후에 시간이 있으면 당일에 폐백을 드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 면 다음 날이나 사흘 안에 폐백을 올린다. 폐백을 드리기 전에 집안에 사당이 있는 경우에는 사당 차례를 먼저 한다. 사당 차례를 지낼 때는 삼색실과, 떡, 고기, 적 등 제사 지낼 때와 비슷하게 제사상을 차렸다. 그리고 관복을 입은 신랑과 원삼과 족두 리를 쓴 신부가 함께 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신랑의 관복은 보통 혼례가 끝나면 반납한 상태이므로 신랑의 경우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는다. 또 한 신랑은 옆에 서 있기만 하고 신부만 사당 차례를 하는 집안도 있다. 감실( 龕 室 )에 여러 위( 位 )의 위폐를 모셔 둔 경우는 여러 위에게 절을 하면서 사당 차례를 지낸다. 삶은 국수와 삼색과실을 차려 놓고 제사지내는 것과 비슷하게 대청에서 지방을 붙이고 지낸다. 이때 지방을 한꺼번에 모시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 위씩 바꾸어 모시면서 행하고, 이에 따라서 제수도 갈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즉, 조상이 몇 분이라면 그 수대로 별도로 지내게 된다. 이때 모시는 조상은 고조, 아버 지, 어머니, 친형제 등 직계뿐 아니라 고조부모의 형제분들, 증조부모 형제분들, 조 부모 형제분들, 삼촌들, 사촌들, 육촌들 등으로 내려오면서 지내는데 모두 수십 위 가 된다. 요즘은 사당 차례를 한꺼번에 쭉 차려 놓고 하는 경우도 있고, 직계 조상만 을 모시거나 조부모만 모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당 차례는 사당에서 드려야 하지만, 사당이 없어졌던 곳에는 지방으로 대체 한다. 제사상을 차려 두고 고조부모, 증조부모, 부모의 순으로 각각 지방을 써서 붙 이고 모시게 된다. 사당 차례는 시집의 조상이 몇 분이 계신다는 것을 신부에게 알 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당 차례를 하지 못한 집안에서는 1년 동안 기제사 를 행할 때마다 종헌관으로 참제하면서 인사를 올리기도 한다는 표현에서도 짐작 할 수 있다. 사당 차례를 지낸 그 날 저녁에 폐백을 한다. 신부는 친정에서 가지고 온 술, 닭, 밤, 대추 등을 차려 놓고 시부모로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인척 순서대로 큰절을 하 고 술을 올린다. 며느리에게 절을 받은 시부모는 신부의 치마폭에 대추를 던져 주며 경기도 고양시 229
아들딸 많이 낳고 잘 살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한다. 이때 폐백의 범위를 당내로 한정하지만, 자손이 번성한 집에서 폐백과 사당 차 례를 하면 절하다가 골병든다고 할 정도로 신부가 많은 절을 해야 하며, 모든 절차 를 마치고 밤 12시 정도가 되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절차를 마친 후에 는 마을에 사는 당내까지 집안 인사를 드리는데, 이것은 사당 차례를 마친 후에 곧 바로 다니기도 하고 시집온 지 2~3일 후부터 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때 촌수가 가까 운 집안에서는 밥을 해 놓고 신랑 신부를 불러서 밥을 먹이면서 인사하기도 한다. 폐백을 드린 이튿날 아침, 신부는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시부모님에게 문안 인 사로 큰 절을 한다. 시집온 지 삼 일만에 삼 일 입주 라 하여 신부가 부엌에 들어가 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형편에 따라서는 바로 다음 날부터 부엌일을 하 기도 한다. 처음으로 밥을 할 때는 친정에서 가져온 찹쌀, 팥으로 밥을 지어 시부모 에게 대접한다. 재행 再 行 혼인 후 3일째 되는 날 신붓집으로 재행을 간다. 이를 삼 일 두백이 라고 하며 음 식으로는 떡, 술, 고기(닭고기) 등을 가져가며, 돌아올 때도 사돈댁 선물은 처져서는 안 된다. 하며 올 때와 같이 상응하게 준비해 간다. 동상례 東 床 禮 재행을 가면 신부 동네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남의 처녀를 훔쳐 갔다고 하면서 대들보에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장작개비로 발바닥을 두들겨 팼다. 그러면 신 부 집에서는 사위를 잘 봐 달라고 온갖 음식을 내놓는다. 심지어 신부가 노래를 하 기도 하였다. 그러면 신랑을 풀어 주는데, 이를 신랑 달기 라고 한다. 심술궂은 마을 의 경우 그 정도가 매우 심하여 신랑이 기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신랑 다루기에는 신부 오빠들과 가까운 사람들 또는 신랑과 신부 또래의 이웃 사람들이 참여해서 장난치는 것인데, 집안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동네 사람들이 참 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230 한국인의 일생의례
근친 覲 親 시집온 새댁이 친정에 들리러 가는 것을 근친 이라고 한다. 근친은 보통 시집온 지 1~3년 사이에 행하는데, 보통 1년 정도 지나면 행한다. 이때는 집에서 만든 엿과 인절미 한 말을 해서 하인이 짊어지고 갔으며, 친정에서 시댁으로 갈 때는 여기서 해 보낸 것이 있으니까 거기서 대가가 있어야 된다. 고 하는 말과 같이 친정에 준비 해 갔던 것과 비슷한 양을 준비해서 가지고 간다. 근친을 갈 때는 신랑이 신부를 데 리고 가지만 신랑은 당일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가 돌아올 때도 신랑이 다시 가서 데리고 오거나 부유한 가정에서는 하인들과 함께 오기도 한다. 근친을 가면 한 달 정도로 오래 있다가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새댁에게는 큰 휴가 로 인식되었 다. 요즘은 2~3일 만에 돌아온다. 신부가 근친할 때 가져갔던 엿과 인절미는 타성의 집들까지 포함해서 동네 사람 들과 나누어 먹는다. 그것이 신부의 시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 채반을 동네 사람들에 게 알리는 의미도 있지만, 먹고살기 힘들 때 그것도 반갑지요. 라는 말처럼 형편이 어려웠던 당시에는 반가운 양식의 의미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귀한 음식 을 받 은 후 답례는 하지 않고 빈 접시를 돌려준다. 신부가 이렇게 근친을 다녀온 후에는 친정 동생이 혼인하거나 부모가 위급하다 든지 하는 큰일이나 있으면 갈 수 있었지만 여간해서는 못 갔다고 한다. 그래서 옛 날에는 시집간 새댁이 친정에 들르는 것은 평생 3번 정도였다고 한다. 전화가 없던 당시에는 친정과의 연락을 편지나 인편으로 하였다. 서경자씨는 친정과 시댁이 가까워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서 근친을 갔다. 근친 을 갈 때에 떡, 술, 음식을 준비해 갔으며 시댁으로 되돌아갈 때도 친정에서 떡, 술,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 친정에서 시댁으로 되돌아 갈 때는 시집에서 장만한 모재비(달강으로 만든 그릇 으로 쌀 두 말어치 정도의 떡을 담을 만한 크기)에 떡을 담아 간다. 떡은 절편이나 인 절미를 하는데 떡 외에도 엿, 술과 안주거리로 쇠고기를 가지고 간다. 친정에서 시 집으로 되돌아갈 때는 시집에서 받은 것보다 갑절이나 더 해 가야 하고, 역시 충분 치 못할 경우 시집살이가 고되고 계속 흉거리였다 한다. 중둥풀이는 시집으로 되돌아갈 때 시어머니와 시조모 등 직계 손위 여자에게는 주머니를, 친척 여자 어른이나 다른 식구들에게는 버선을 마련하여 가는 것이다. 중 경기도 고양시 231
둥풀이 주머니는 빨간 공단으로 만든 귀주머니인데 수를 놓기도 하고 빨간 매듭끈 을 달고 끈에는 장식노리개를 매단다. 잘 차리는 집에서는 시아버지 몫으로 버선과 옥색 허리빠[허리띠] 와 대님도 장만한다. 마. 기타 관례 전통 사회에서 성장하여 성년이 되면 남자는 관례( 冠 禮 )를 행하고, 여자는 계례 를 행함으로써 성인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그 의무와 권리를 깨닫고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특별한 성인 의식을 치르지 않고, 어른으로서의 신체적 능력을 지니 고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되면 당연히 성인이 된 것으로 여긴다. 유교 의식에 의해 치러지는 관례는 20세에 하는 것이나 그 이전에 혼인을 할 수 있으므로 15세부터 20세까지 관례를 한다. 계례는 원칙적으로 혼인을 정하면 했으 나 15세가 지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15세에 계례를 했다. 관례를 행하는 날짜는 의식을 행할 나이가 되는 해의 정월 중 하루를 택했는데 관례와 계례를 할 수 없는 경우는 나이가 되었더라고 성년이 되는 사람이나 그 부모 가 1년 이상의 복( 服 )을 입을 상을 당하고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할 수 없었다. 관례를 행하기 3일 전에 주인은 사당에 사당의 딸(아들)이 언제, 관례를 행합니 다. 라고 말씀 드리며 조상의 위패 앞에 간략한 제수를 차리고 축문을 읽어 고한다. 관례 시에는 먼저 관자의 머리를 빗어 올려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운다. 관을 씌 우면서 좋은 달, 좋은 날을 가려서 어른의 옷을 입히나니 너는 이제 어린 마음을 버 리고 어른으로서의 덕을 좇아 오래도록 장수하며 행복을 누릴지어다. 라고 축사를 한다. 어른의 출입복을 입히면서 좋은 달 좋은 때에 이어 너는 어른의 출입복을 입 었으니 삼가서 너의 거동을 의젓하게 가질 것이며 너의 덕을 더욱 삼가 높여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큰 복을 누릴지어다. 라고 두 번째 축사를 한다. 어른의 예복 을 입히고 유건을 씌우면서 세 번째 축사를 하고 다음엔 술 마시는 예법을 마지막으 로 가르친다. 관례의 절차를 다 갖추고 나면 자(별명)를 받는데 관자는 부족함이 많 사오나 밤낮으로 어른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라며 조상과 부모에게 절 232 한국인의 일생의례
하면 관례의 의식은 끝난다. 여자의 성인식인 계례의 절차도 관례와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간소하다. 다른 점은 계자와 청혼을 하고 계례를 하는 것이면 손님을 정해서 3일 전에 청하고, 계 자가 정혼하지 않고 나이가 15세에 이르러 계례를 하는 경우에는 특별히 손님을 청 하지 않고 집안의 부인이 주관한다는 것과 축사가 한번 뿐이라는 점 등이 다르다. 오늘날에는 성년례가 1984년 정부가 제정한 성년의 날인 5월 20일에 학교나 기 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고양시에서는 유림을 중심으로 고양 향교( 高 揚 鄕 校 )가 매년 성년을 맞는 젊은이들을 불러 성년 의례를 집행하고 있다. 성년 의례는 한동안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행 절차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성균 관에서 전통적인 관례를 간소화하여 제정한 성년례 의 순서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 일단 거의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관례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는 과정 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뜻있는 유림들의 노력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수지> 경기도 고양시 233
Ⅲ. 수연례 壽 宴 禮 가. 회갑 回 甲 61세가 되는 해의 생일을 회갑( 回 甲 ) 이라고 한다. 회갑은 화갑( 花 甲 ), 주갑( 周 甲 ) 이라고도 불리지만 고양시에서는 대개 회갑이라고 불리고 있다. 회갑은 자신이 태 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예전부터 회갑을 치르면 장수 를 했다고 여겼다. 회갑은 본래 생일날 치르는 것이 좋으나 그날 손이 있거나 날이 좋 지 않은 경우에는 따로 날을 잡아 행하였다. 최근에는 초대하는 사람들의 일정을 고 려하여 따로 날을 잡아 주말에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회갑은 반드시 여는 것이 아 니라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열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생활이 어렵다든지, 아 직 결혼하지 않은 자식이 있다든지, 근자에 초상이 난 경우에는 회갑을 열지 않는다. 또한 경사가 겹쳐도 좋지 않다고 하여, 자식의 혼례가 예정되어 있을 경우에도 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평균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회갑을 기념하기보다는 칠순을 기념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회갑을 집에서 열었기 때문에 초대부터 음식 장만까지 모두 자녀들이 직접 하였지만 최근에는 외부에서 여는 경우가 더 많다. 나. 회혼례 回 婚 禮 부부가 혼인한 해를 기준으로 61년이 지나면 그 자식들은 부모의 회혼례를 열었 다. 회혼례는 회갑과 마찬가지로 혼인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회혼례는 부부 중 한 쪽만 살아 있어도 안 되고, 먼저 죽은 자식도 있어 서는 안 된다. 또한 회혼례 대는 대개 나이가 80세를 넘기는 것이 보통이라 회혼례 를 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결국, 회혼례는 부모의 장수를 기념하면서 화목한 가 정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구실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수지> 234 한국인의 일생의례
Ⅳ. 상 장례 喪 葬 禮 가. 초종 初 終 임종 臨 終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크게 호상( 好 喪 )과 참상( 慘 喪 )으로 나눌 수 있다. 호상은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 는 것이고, 참상은 부모보다 먼저 죽거나 자녀들을 결혼도 못 시키고 일찍 죽는 것 을 말한다. 또한 나이나 부모의 생존과 상관없이 객사나 자살을 한 경우도 참상에 속하는데, 참상을 악상( 惡 喪 )이라고도 한다. 참상 중에서도 특히 부모보다 먼저 죽 는 것은 최고의 불효라고 여긴다. 죽음이 임박하면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눈이 흐려지거나 숨을 가쁘게 쉰 다든지 가래가 심하게 끓고, 맥이 약해지는 것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임종이 다가 왔다고 여긴다. 이러한 경우 가족들은 육감적으로 임종이 임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한다. 먼저 임종을 앞둔 사람의 거처를 안방으로 옮긴다. 안방이 아닌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객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안방으로 옮기게 되면 바로 머리를 북쪽 으로 해서 눕히며, 고양시 지역에서는 특히 윗목에 모신다. 이때부터는 가족들은 한 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수발을 든다. 그리고 임종을 지켜봐야 할 사람들에게 연락 을 취한다. 임종 순간에 조용히 눈을 감거나 고개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숨을 심하게 헐떡거리면서 힘들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임종을 확인하는 방법 은 코에 솜털을 대보거나 손목에 맥을 짚어 보기도 하고, 가슴에 직접 귀를 대 본다. 이때 솜털이 움직이지 않거나 맥이 없고,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사망한 것으로 본다. 또한 손발이 차가워지고 허리가 손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도 임 종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임종이 확인되면 상주들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는 것이 예 의이다. 곡을 하는 것을 애곡( 哀 哭 )이라 하는데 부모의 상( 喪 )일 경우는 아이고, 아 이고. 하지만 그 이외의 상일 경우는 어이, 어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우에 따 경기도 고양시 235
라서는 형제간이나 백부, 조부모의 상일 때도 아이고, 아이고. 를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장례가 끝난 이후 다시 어이, 어이. 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초혼 招 魂 임종을 확인하면 망인의 혼을 부르는 의식을 하는데 이를 초혼( 招 魂 ) 이라 한다. 초혼은 망인이 평소에 입던 옷을 들고 세 번 흔들면서 망인의 이름, 주소, 죽은 시( 時 ) 등을 하늘을 향해 외친다. 원당동 원당1통에서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골 OO씨가 O월 O일 O시에 돌아가셨습니다. 복! 복! 복! 이라고 외친다. 옷은 망인의 두루마기 나 속옷으로 하며, 윗옷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초혼을 다 외친 후 옷을 지붕 위에 두 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집 밖을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지붕 에 올린 옷은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발인하고 상여가 집 밖으로 나갈 때 내려서 망자 의 유품과 같이 태운다. 지붕에 옷을 올려놓는 것은 망자의 혼을 부르는 의식이 되 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에게 상이 났다는 것을 알리는 의미도 있다. 초혼은 집안사람이 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마을 사람 중 타성( 他 姓 )인 사람 이 한다. 최근에는 초혼을 따로 하지 않고 사잣밥 위에 고인의 옷을 올려 두는 것으 로 대신하기도 한다. 수시 收 屍 자손들은 망인의 몸이 굳기 전에 팔, 다리 등을 주물러서 펴 놓는데 이를 수시를 걷는다. 라고 한다. 사람은 죽게 되면 몸이 그 상태로 굳어지기 때문에 염습을 하기 전에 미리 몸을 바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손발을 깨끗하게 하고 비틀린 것을 바로 잡아 준다. 머리 방향은 북쪽으로 두고, 바닥에 소나무로 만든 칠성판을 깐다. 칠성 판은 미리 준비해 두는 집안도 있다. 수시가 끝나면 상주들은 망인을 홑이불로 덮 고 병풍을 두른 채 옆에서 곡을 한다. 이때 망인이 세상을 떠나고 24시간이 지날 때 까지 염습을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간혹 망인이 살아 돌아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자상 使 者 床 사잣밥은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타성바지가 차린다. 사자상은 대개 여성이 차리 며, 고인을 보지 않고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병원에서 임종을 하면 236 한국인의 일생의례
전통적인 상례 절차가 대부분 생략되기 때문에 사잣밥을 차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 다. 위치는 대문 앞에 차리는데 절구통을 거꾸로 엎어 놓고 그 위에 흰 종이나 도래방 석을 깔고 키를 얹혀 놓은 다음 잡곡을 섞지 않는 메(흰밥)와 나물(무나물) 7그릇을 놓고, 그 옆에 짚신 세 켤레, 망자가 신던 고무신 등을 놓는다. 그리고 메에다 저승갈 때 노잣돈 하라고 동전을 한 닢씩 꽂아 놓는다. 이렇게 차려놓은 사잣밥은 발인날 상 여에 싣고 가다가 다리를 건널 때 버린다. 상주 喪 主 및 호상 護 喪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자손들은 상주가 된다. 그 중 장남은 맏상주가 된다. 만 약 장남이 객지에 있으면 장남이 올 때까지 입관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 부득이하게 장남이 상례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면 장손이 맏상주가 된다. 상주는 부모를 잃은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망인 옆에서 계속해서 곡을 해야만 한다. 염을 마친 후 성복을 하기 전까지는 옷도 평상복을 입은 채 망인 옆을 지킨다. 호상( 護 喪 )은 상갓집에서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과거에는 젊은 나이에 죽 거나 환갑이전에 죽게 되면 맏상주가 어린 경우가 많았다. 또한 상주는 갑작스런 일 이다보니 경황이 없어 모든 장례 절차에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초상집의 일을 전체적으로 관리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였는데, 그가 바로 호상이다. 호상은 장례 절차에 밝고, 살아생전에 망인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맡는 것이 일반 적이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호상은 일가가 아닌 타성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두루 인정받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어야만 했다. 호상은 장례와 관련된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맡아서 한다. 만약 상주가 글을 모 른다거나 처음 상을 당해 본 경우라면, 모든 일에 대해 호상이 상주를 일일이 지도해 주어야 한다. 대개 임종 후부터 삼우제까지는 호상이 관여하는 것이 보통인데, 삼우 제까지 모든 제사에 축문이 있어 이를 상주에게 일러 주기 위함이다. 호상은 부고를 작성하고 일가 및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는 일도 담당한다. 예전 에는 부고를 손으로 직접 썼는데, 부고에는 발인 날짜 및 시간, 장소, 상주와 호상의 이름을 적었다. 부고를 본 지인들은 망인이나 상주뿐만 아니라 호상을 보고 조문을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초상집에는 호상실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조문객들 은 먼저 상주에게 문상을 하고 호상에게도 따로 문상을 하기도 했다. 경기도 고양시 237
과거 통신 시설이 좋지 못했던 시절에는 부고를 직접 인편으로 배달하는 경우 가 많았다. 부고는 동네 사람들 중 젊은 청년들이 주로 배달했는데, 부고는 집 안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문의 부고함에 끼워 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시집을 간 딸의 경우는 부고를 받자마자 곡을 해야 했기 때문에 부고가 집 마당까지 들어 갈 수도 있었으며, 이때 부고를 받은 딸은 머리를 풀고, 버선발로 곡을 하며 초상집 으로 갔다. 수의 壽 衣 와 관 棺, 장지 葬 地 의 준비 수의는 망인이 입는 옷으로 초상이 나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 만들어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의는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옷감을 구입하는 데도 돈이 들 기 때문에 여유가 있을 때 미리 준비해 둔다. 또한 수의를 미리 준비해 두면 오래 산 다는 속신이 있어 환갑이나 칠순이 지나면 수의를 장만하기도 한다. 수의는 부모님이 이승을 떠날 때 입는 옷이기 때문에 정성껏 준비한다. 그래서 대부분 날을 받아서 장만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손이 없다고 하여 윤달에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 길쌈을 하다가 좋은 옷감이 나오면 수의 때 옷감으로 쓰기 위 해 별도로 챙겨 두기도 할 정도로 수의는 정성을 다하여 좋은 옷감으로 만드는 것 이 좋다. 수의는 매듭을 짓지 않고 만들어야 하며, 주로 명주나 비단으로 만든다. 지금은 수의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수의를 만드는 것은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혼자 만들기 버거워 품앗이로 만들기 도 했다. 만약 부득이한 사정으로 수의를 장만하지 못한 경우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수의가 없을 때는 초상이 난 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수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수의와 마찬가지로 관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최근에는 임종 후 관 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은 소나무로 만드는 것이 보편적이며, 계죽나무도 사용한다. 오동나무가 더 좋기는 하나 구하기 힘들고 비싸서 대부분 가정에서는 소 나무를 사용한다. 평소에 좋은 소나무를 점찍어 두고, 따로 날을 받아 나무를 베서 그늘에 말려 둔 후 톱으로 크기에 맞게 판자 형태로 만들어 둔다. 이때 관의 형태로 미리 짜 둘 수도 있고, 판자만을 보관하고 있다가 상이 나면 대목을 불러 바로 짤 수 도 있다. 관은 잘 안 썩는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형편이 좋은 경우, 생나무를 베어 바 238 한국인의 일생의례
로 관을 짜고 그 위에 옻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생나무로 만든 관이나 옻칠을 한 관 은 시신만 썩고 관의 형태는 그대로 남을 정도로 잘 썩지 않는다. 관을 만들 때는 쇠 못을 쳐서는 안 되고, 나무못을 사용하거나 이음새나 홈을 만들어 관을 짜는 경우 가 많다. 장지는 미리 준비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임종 이후에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좋 은 장지는 양지바르고 땅이 평평하며, 수맥이 흐르지 않는 곳이다. 대개 장지는 지 관이 추천하는 곳을 택하며, 선산이 있는 경우에 그 안에서 위치를 정하는 것이 일 반적이다. 나. 염습 殮 襲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것을 습 이라 하고, 시신을 묶고 입관하 는 의식을 염 이라 한다. 망인이 세상을 떠나고 24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염습을 시작하는데, 이때 자손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이는 염 습을 하고 나면 자손들이 망인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3일 장이 일반화되면서 염습을 운명한 날 저녁에 하기도 한다. 염습은 가풍에 따라 할 수 있는 권한이 다르다. 부모의 시신은 남에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상주가 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주가 아닌 나이가 있는 일가 중 한 명에게 시키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마을 사람들 중 타성에게 맡기는 사례도 있었다. 염습은 가장 먼저 수세를 한 시신을 솜으로 닦아 주는데, 향나무로 우린 미지근 한 물을 준비하여 몸 전체를 닦는다. 상체와 하체에 각각 다른 솜을 사용한다. 그 후 코, 귀와 같이 몸에 구멍이 난 곳을 솜으로 막아 준다. 이어서 망인의 손발톱을 잘라 서 봉투나 따로 만든 주머니인 조발랑 에 담아 둔다. 이때 망인의 머리카락도 일부 잘라서 담아 두기도 한다. 이렇게 모아 둔 주머니는 입관할 때 관에 같이 넣어 두거 나 집에 따로 보관하기도 한다. 망인의 입에는 동전과 세 조각으로 깬 구슬, 그리고 세 번에 걸쳐 나눠 담은 쌀을 넣어 준다. 이것을 반함( 飯 含 ) 이라고 하는데, 저승에 갈 때 노자와 양식으로 쓰라는 의미이다. 경기도 고양시 239
다음으로 시신에 수의를 입힌다. 수의는 아랫도리를 먼저 입히고 윗도리를 입힌 다. 두 손을 배 위에 올리고 이불과 요로 시신을 감싼다. 그리고 삼베로 된 장포를 일 곱 가닥으로 나누어 묶는다. 이때 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하게 묶는 것이 중요 하다. 염을 잘 못하게 되면 나중에 시신이 썩을 때 뼈가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이장을 하게 되는 경우에 염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시신은 뼈를 추스르기 어렵 다. 염을 하는 순서나 방식은 남자나 여자나 큰 차이가 없다. 염습을 하는 과정은 상주들을 비롯한 자손들만 볼 수 있고, 외부인들이 봐서는 안 된다. 또한 이 기간 동안은 곡을 멈추고 경건한 분위기에서 진행하는 것이 올바 른 예법이다. 염습이 끝나면 입관( 入 棺 )을 한다. 관에 시신을 넣을 때는 남은 공간에 종이를 넣어 준다. 모래를 채워 넣는 경우도 있다. 이를 충광 이라 한다. 이렇게 관에 다른 물건을 채우는 이유는 행상을 할 때 시신이 움직여 상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 지하기 위함이다. 여자의 경우는 입관을 할 때 혼서지( 婚 書 紙 )를 같이 넣어 주기도 한다. 예전에 여자들은 혼서지를 자신의 생명과도 같게 여겼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 할 때도 몸에 지니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한편 입관을 할 때는 시간을 따져서 하는 것이 좋고, 길사( 吉 事 )가 있거나 망인과 상극인 사람은 입관하는 것을 보지 않는 것 이 좋다. 입관이 끝나면 관의 뚜껑을 덮고 위에 명정( 銘 旌 )을 덮는다. 명정은 일종의 주민 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망인의 관직이나 성씨를 적는다. 영좌 靈 座 혼백 魂 帛 염이 끝나면 빈소를 설치하고 그 안에 영좌( 靈 座 )를 만든다. 제청( 祭 廳 ) 이라고 도 한다. 영좌 위에 혼백상자나 영정 사진을 둔다. 혼백은 오색실을 사용해 나비 모 양으로 만드는데, 현장에서 즉석에서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혼백은 전문적 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만드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며, 최근에는 혼백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장의사에게 구입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혼백은 발인이 끝난 후 행상을 할 때 함께 가지고 장지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가 지고 돌아와서 삼우제가 끝난 이후에 땅에 묻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례가 점차 간 소화되면서 초우제만을 마치고 묻기도 한다. 240 한국인의 일생의례
다. 성복 成 服 과 발인 發 靷 성복 成 服 염습과 관련된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되면 상주들은 성복( 成 服 )을 하게 된다. 성복 은 상주들이 상복( 喪 服 ) 갖추어 입는 것을 말하는데, 입관이 끝난 후에 시작하는 것 이 보통이다. 입관을 하기 전에는 빛깔이 들어가지 않은 평상복을 입으며,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를 유지한다. 요즘은 상복을 장례용품점에서 구입해 입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모두 집에 서 만들어 입었다.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로 상복 만드는 것을 도 와주었다. 이때 상주를 비롯하여 친척이 많은 경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 에 여러 날이 소요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양시 일원을 비롯한 경기 북부지역의 성복례는 타지방과 달리 아주 독특하다. 입관이 끝나면 상주를 비롯한 복인들은 상복으로 갈아입기 전에 먼저 마당에 물이 든 물동이를 상 위에 놓고 그 옆에 상복을 놓는다. 평복을 한 맏상주가 맨 앞에 서 면 상주들이 물동이를 중심으로 둘러 선 다음 우로 세 바퀴, 좌로 세 바퀴 돌면서 서 로 인사를 나눈다. 서로 인사가 끝나면 다시 물동이를 중심으로 서서 앞서 행한 것처럼 다시 물동이 를 중심으로 집안의 웃어른께 절을 하고 좌우로 세 바퀴씩 돌며 동서남북을 향하여 절을 한다. 상복은 맏상주부터 갈아입는데, 맏상주가 끝나면 다음 상주 순으로 차례 로 돌며 절을 하고 갈아입는다. 상복은 남자는 굴건제복을 갖추고, 여자들은 소복차 림을 한다. 혼례를 치르지 않은 남자 상주는 굴건과 두건을 쓰지 않는다. 상복은 밑 에서부터 윗옷 순서로 갈아입는다. 상장은 부친상에는 대나무, 모친상에는 버드나 무를 사용한다. 상주들이 상복을 모두 갈아입으면 방 안으로 들어가 영좌 앞에 제물 을 차려놓고 제를 지낸다. 이를 성복제 라 한다. 이렇게 성복을 마치면 비로소 영좌에 상식( 上 食 )을 올릴 수 있게 되며, 또한 별도 로 복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성복제를 지낸다. 성복제를 지낼 때는 주, 과, 포, 전 등의 제물을 상에 차려 놓는다. 성복 전후로 바뀌는 가장 큰 변화는 성복 이후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조문을 받 게 된다는 점이다. 성복을 하지 않았을 때 조문객이 방문하면 상주는 평상복을 입 경기도 고양시 241
은 채 응대를 하지만 인사나 문상은 받지 않는다. 문상은 성복을 마치고, 성복제를 한 이후에 받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주는 성복하기 전에는 곡만 하다가 성 복을 마친 후에 망인을 향해 절을 할 수 있다. 요즈음은 장기가 짧기 때문에 성복제 전이라도 문상을 받는다. 조문 弔 問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망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애도의 뜻을 표 한다. 평소에 망인과 친분이 각별한 경우뿐만 아니라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주 민 대부분 조문을 가고, 부조를 한다. 조문을 갈 때는 몸을 단정히 하며, 의관을 정 제하고 간다. 조문객은 상주들이 성복을 한 이후에 가는 것이 예법이다. 그 이전에도 조문을 갈 수 있지만, 이때는 인사만 드리고 절은 하지 않는다. 성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망인의 죽음을 상주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조문객 역시 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망인을 비롯해 상주와 호상의 인품과 인간관계는 조문객이 얼마만큼 오고 누가 오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만큼 조문을 가는 것은 단순히 망인을 애도하는 것뿐 만 아니라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부고에 상주의 이름과 호상의 이름을 쓰며, 호 상에게 별도로 문상을 드리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장 례 치르는 동안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조문을 못 갈 수도 있다. 만약 마을에 제사가 있다든지 기제사가 있는 경우에는 초상집에 가지 않는다. 또한 여자의 경우, 임신을 한 경우에도 초상집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렇게 장례 기간에 조문을 하지 못하면, 적어도 탈상하기 전에는 반드시 조문을 가야 한다. 예전에는 삼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그 안에는 조문을 가야 했으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상주와의 인간관 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상 장례는 많은 노동력과 경제력이 소모되는 의례이다. 따라서 조문객들은 초 상집에 도움을 주기 위해 부조를 가져온다. 요즘은 대부분 돈을 부조를 내지만 예전 에는 물품이 귀했기 때문에 물품을 부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부조는 그 어떤 것을 주어도 정성껏 주면 상관이 없지만 대부분 상례를 치르는 데 필요한 물품을 주 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막걸리와 같은 술이나 쌀을 부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죽을 242 한국인의 일생의례
쑤어 부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죽은 미음이나 팥죽을 쑤어 주었는데, 죽은 상주 들을 위한 부조라고 한다. 또한 일가 중 형편이 좋은 경우에는 조문객의 점심 식사 를 맡아서 해 주기도 하였다. 물품으로 부조를 할 수 없을 때는 품앗이를 하여 노동력으로 부조를 하는 경우 도 있었다. 남자들은 상여를 메주기도 하였고, 여자들은 상복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 드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상여 놀이 고양시 지역에서는 상여 놀이가 많이 조사되지는 않았다. 성석동의 이태희씨 말 에 따르면 고양리(현 고양동)에는 상여 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상여 놀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발인 發 靷 요즘은 초상이 나면 삼일장으로 치르는 것이 흔하지만 고양시 지역에서는 본래 집에서 장례를 치를 때는 대개 5일장을 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7일장 혹은 9일 장까지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발인하는 날이 정해지면 발인을 위해 먼저 관을 안방에서 마당으로 옮긴다. 관 을 운구할 때는 대개 집안사람들이 하는 것이 보통이며, 4~6명이 짝을 이루어 옮긴 다. 관이 방을 나설 때는 문지방을 짚고 넘어가며, 바가지를 깬다. 이후 방을 치우고 쑥을 태워 냄새와 잡귀를 쫓는다. 마당으로 관을 옮기면 곧바로 상여에 관을 옮긴다. 상여는 보통 마을 상여에 개 인적으로 상여 꽃 장식을 구입하여 단다. 그러나 상여 꽃이 귀했을 때는 양철로 상 여 꽃을 만들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당으로 나와서 상여에 관을 옮기고 상여 앞에서 자손들이 모여 지내는 제사를 발인제라고 한다. 제물은 떡과 주ㆍ과ㆍ포 등을 올려놓는데, 마지막으로 집 을 떠나기 전 올리는 제의이기 때문에 대개 정성껏 제물을 차린다. 또한 제상 위에 영정과 혼백상자도 함께 마련한다. 발인제는 술을 한잔 올리고, 절을 재배한 후 곡 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리고 바로 철상을 하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나눠 준다. 발인하는 시간은 운상하는 시간과 하관하는 시간까지 고려하여 정하며, 경기도 고양시 243
대개 새벽이나 아침에 많이 한다. 발인제가 끝나면 행상을 시작한다. 상여는 크기에 따라 적게는 여덟 명이 메고, 보통 열 명이 멘다고 한다. 상여를 메는 사람들은 마을 상조계 소속의 사람들이 주 로 메어 준다. 상주는 상두꾼들에게 행상을 가던 중에 돈이나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 고, 행상을 모두 마친 후에 답례품을 주기도 한다. 행상을 시작하기 전에는 북을 치 면서 집을 향해 하직 인사를 한다. 운상 순서는 맨 앞줄에 명정 만사 영여 공포 상여 운아삽 상주 조문 객 순이다. 상두꾼들은 앞소리꾼의 선소리와 노랫가락에 맞추어 행상을 시작한다. 장지로 가는 도중 삼거리를 지나거나 다리를 건너게 되면 노제( 路 祭 )를 지낸다. 또한 망인과 관련이 있는 곳에서도 노제를 지낸다. 예를 들어 고향마을 앞이나 평소 에 잘 다니는 곳, 친한 친구의 집 앞 등이 포함된다. 노제는 주 과 포와 같은 제물 간단하게 차리고 상주가 곡을 하고 절을 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또한 행상 중에 조 문객이 당도하게 되면 노제를 지낼 때 문상을 하기도 한다. 망자의 의복 처리 및 부정 씻기 장례가 끝나면 초혼 때 사용한 망자의 옷을 비롯한 의복들을 모두 거두어 태운 다. 일반적으로 발인제가 끝나고 행상이 시작하여 관이 집에서 떠난 이후에 망자 의 의복을 처리한다. 망자의 옷은 초상집 마당에서 태우기도 하고 개울가에 가서 태우기도 한다. 또한 염습을 할 때 사용한 집기들과 솜 등도 모두 한꺼번에 태운다. 상가에 갔던 사람이 집으로 올 때는 집 앞에서 소금을 뿌린다. 이것은 부정을 막 는 의미이다. 또한 귀신과 부정을 막기 위해 문 앞에서 짚을 놓고 불을 태워 그것을 건너오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혹시나 상가에서 붙어 온 귀신이 그 불 을 보고 무서워 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라. 치장 治 葬 행상이 장지에 도착하게 되면 치장( 治 裝 )을 시작한다. 치장은 장지에 묘광( 墓 壙 ) 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묘광을 만드는 일은 대개 장지가 산에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이 244 한국인의 일생의례
아니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산역을 하는 것 역시 마을 사람들이 도 와준다. 그러나 행상을 하는 사람과 산역을 하는 사람은 다르다. 산역을 하는 사람은 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장지에 도착하여 먼저 일을 시작한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산신제( 山 神 祭 )를 지낸다. 산신제는 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산신께 그 사실을 고하는 것으로 개토제( 開 土 祭 ) 라고도 한다. 묘소 위쪽에 주 과 포 등 제물을 올리고 제주는 산신께 술을 단잔으로 올리고 축 을 읽는다. 제주는 상주가 아니라 일꾼 중 깨끗한 사람을 골라서 지낸다. 산신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산일[ 山 役 ] 을 시작한다. 최근에는 산일을 사람을 고용하여 굴삭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일이 수월하고 시간이 단축되었지만 과 거에는 전부 인력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먼 저 괭이나 삽을 이용하여 광을 파는데, 광은 되도록 깊이 파 놓는 것이 좋다. 외광을 먼저 파고 그 중앙에 시신 크기 정도의 내광을 판다. 하관을 할 때에도 시( 時 )가 있는데, 미리 집안사람이 택일을 하거나 지관이 해 준 다. 이때는 호충 이라 해서 하관을 피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지관이 관을 내리기 전 에 미리 어떤 사람은 관을 보지 말라고 크게 소리쳐 알린다. 내광에 하관을 하고 그 위에 명정을 덮는다. 하관을 할 때는 명정뿐만 아니라 망 인의 유품을 함께 넣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유품을 넣을 경우, 도굴의 위험이 있어 최근에는 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광중에 운아삽( 雲 亞 翣 )을 같이 넣어 주기도 한다. 운아삽을 두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관 옆의 흙을 다져 준다는 의미로 관의 머리와 발 쪽이 아닌 손이 있는 곳 양 옆으로 하나씩 둔다. 하관을 마치면 관 위에 판자를 깔고 그 위에 흙과 잘 섞은 강회를 놓는다. 강회는 습기를 뿜어내서 좋기 때문에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취토는 상주가 가장 먼저 하는 데 세 번을 나눠서 한다. 취토를 상주가 가장 먼저 하는 이유는 상주가 매장을 스스 로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관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흙을 덮은 이후에 는 폐백을 산신께 바친다. 붉은 비단, 청 비단 다섯 치를 접어서 광중에 넣는다. 그리 고 다시 흙으로 묻기 시작한다. 빈 상여는 마을 상여가 아닌 경우에는 태운다. 영좌는 일단 일하는 곳에서 지장 이 없는 정결한 곳에 놓고, 임시로 빈소를 마련한다. 이곳에서도 조문을 받는다. 또 한 사용했던 물건들은 일꾼들이 도로 가져오며 재사용이 가능하다. 경기도 고양시 245
봉분을 만들기에 앞서 달구질을 해야 한다. 달구질을 잘 못하게 되면 내광에 물 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역꾼들이 모여 달구질을 지속적으로 해 준 다. 달구질을 할 때는 노래를 하며 흥을 돋우고, 상주는 일꾼들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광중을 덮는 흙은 백회를 흙과 물에 섞는 것을 먼저 광중의 3분의 1쯤 메운 후 산 역꾼들이 이를 밟아 단단하게 다진다. 이를 달구질 또는 회다지 라 한다. 달구질은 보통 초벌, 재벌, 세벌까지 한다. 많이 할 때는 다섯 번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상두 꾼들로 구성된 달구꾼 여러 명이 상여를 멜 때 쓰는 어깨걸이용 장대를 들고 광중에 들어가서 선소리꾼의 선창에 맞추어 서로 등을 마주 대었다가 돌아서서 마주 보는 동작과 함께 서로 발을 맞추며 바닥을 세게 밟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런데 고양시 지역의 달구질은 타지역과는 달리 광중에 들어가지 않고 광 밖에서 대나무로 된 달 구대를 가지고 다지는데, 이는 예부터 나라님(임금)을 차마 밟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고양시 지역은 왕릉의 조영의 영향이라 한다. 봉분을 세울 때는 좌향에 유의하여야 한다. 봉분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떼를 입히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봉분은 합장묘의 경우는 단분으로 하고, 합장하지 않은 경우에는 쌍분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봉분이 완성되면 산신께 감사하는 의미 로 평토제를 다시 지낸다. 이 역시 상주가 아닌 정결한 사람이 지낸다. 평토제(제주 제)를 지낸 후에 가주를 집에서 모신다. 가주는 지방의 일종으로 혼백에 해당한다. 지석( 誌 石 )은 성명과 생년월일, 방향, 생애 등을 간단하게 표시하여 땅에 묻는 다. 지석은 비석과는 별도로 하며, 일종의 누구의 묘인지 파악할 수 있는 명패와 같 은 역할을 한다. 마. 우제 虞 祭 와 탈상 脫 喪 삼우제 三 虞 祭 상주가 장지에서 혼백을 가져와 제청에서 혼백을 모셔 놓고 지내는 제사를 가리 켜서 초우제( 初 虞 祭 ) 라 한다. 초우제는 망자의 혼을 제청에 편안하게 좌정시키는 의미에서 치러지는 것이다. 장지에서 집까지 멀어 당일에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경우 에도 상주가 머무르는 곳에서 반드시 초우제를 지내야 한다. 초우제를 지낸 뒤 유 246 한국인의 일생의례
일( 乙, 丁, 己, 辛, 癸 )이 오면 재우제( 再 虞 祭 )를 지낸다. 또한 삼우제는 재우제를 지 낸 뒤 강일( 甲, 丙, 戊, 庚, 壬 )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이렇게 삼우제는 보통 3일 안에 지내는 것이 보통이나 위와 같이 날짜를 맞추다 보면 4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제 때는 기제사와 동일하게 제물을 올리며, 순서도 기제사와 유사하다. 따라 서 우제는 모두 초헌 아헌 종헌과 독축을 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호 상은 삼우제까지 상주를 도와줘야 한다. 삼우제를 마치면 묘소에 가서 혼백을 묘소 앞에 묻어 버린다. 혼백을 묻는 이유 는 혼백 대신 신주를 제청에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소상 小 祥 대상 大 祥 삼우제를 지내면 탈상하기 전까지 조석( 朝 夕 )으로 제청에 상식을 올리면서 망 인을 기리고 묘소에 가서 문안을 드린다. 상식은 평소에 먹는 음식들을 올리며, 항 상 상주가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상식을 올린다. 묘소에 인사를 갈 때는 굴건제복을 벗고 삼베 두루마기에 초립을 쓰고 상장( 喪 葬 )을 들고 나간다. 졸곡제( 卒 哭 祭 )는 상주가 울음을 멈춘다는 의미에서 치러지는 제사이다. 졸곡 제는 보통 석 달 만에 지내고 100일을 넘지 않는다. 보통 장사를 지내고 100일간은 상주가 수시로 곡을 한다. 그러나 졸곡제를 마친 이후에는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때는 곡을 하지 않고,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만 제를 올리며 곡을 한다고 한다. 소상은 장례를 치른 지 1년 만에 하는 의례이다. 이 날은 친족들을 모두 모아서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 소상 이후에는 허리에 두르는 요질을 벗는다. 대상은 2년 만 에 하는 의례로 대상을 치른 후 탈상을 할 수 있다. 대상 이후에는 머리에 두르는 수 질을 벗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경우는 소상 이 후에 탈상하기도 한다. 이것은 살아 계신 아버지를 배려하는 의미로 대신 심상( 心 喪 ) 3년이라 하여 마음속으로 삼년상을 치른다. 대상 한 달 후에 담제가 있다. 담제 때는 이미 복을 벗은 상태이며, 백립을 쓰고 이후에 날짜를 받아서 흰옷을 입는다. 상복은 소상과 대상을 거치면서 점차 줄어드 나 담제와 길제가 끝나고 탈상을 마친 후에 상복을 처리할 수 있다. 담제 이후에는 길제( 吉 祭 )를 지낸다. 길제는 사당이 있는 집에서만 하는 제사로 부모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제사이다. 부모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기 전에 신주의 경기도 고양시 247
내용을 바꾸는 절차가 필요한데, 이를 신주개제( 神 主 改 題 )라 한다. 신주개제는 길 제 전날 하며, 사당에서 하지 않고 신주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하게 된다. 이때 해 당하는 신주는 부모의 신주를 포함하여 4대조의 신주이다. 4대 봉사를 기본으로 하 는 상황에서 부모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면 새로운 종손의 5대조 신주는 사당에 모실 수 없게 된다. 따라서 5대조의 신주는 그 신주가 4대조에 해당하는 다른 지손의 사당 에 옮겨지거나 더 이상 모실 지손이 없으면 묘소에 매안하게 된다. 길제를 할 때는 상복을 입지 않고 도포에 두루마기를 입고 진행한다. 길제는 상 례에서 제례로 넘어가는 절차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당이 있는 가정이 줄어들면서 길제를 하지 않는 가정이 대부분이다. 탈상 脫 喪 탈상은 대상을 마친 후 할 수 있으며, 삼년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일년상의 경 우는 소상 이후에 탈상을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유교식 상례가 간소화되면서 삼우제 이후 탈상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탈상을 할 때는 탈상제를 지내며, 그 다음 기일부터는 기제사를 지내게 된다. 탈 상을 하면 상복 및 작지를 태워 버리는데, 옷감이 귀했을 때는 상복을 없애지 않고 잘 빨아서 집안의 쪽 보자기 등을 만들기도 한다. 탈상 이후에는 제청을 완전히 철 거한다. 바. 기타 이장 移 葬 이장은 묘를 옮기는 것으로 가묘를 했다가 묏자리가 나빠 자손들에게 우환이 생 겼다고 믿거나 풍수가 좋은 명당자리가 생기면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에 는 선산이 도로나 택지 개발 지역에 편입되어 이장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묏자 리는 잘 못 쓰면 자손들에게 우환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잘 쓰면 자손들이 번창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장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날을 지관에게 받아서 한다. 상주는 248 한국인의 일생의례
이 날도 상복을 갖춰 입고 정성을 다해 시신을 모신다. 먼저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께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단잔을 올린다. 산신제를 하는 이유는 치장 때와 마찬가지로 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산신께 그 사실을 고하는 것이다. 산신제를 지냈으면, 봉분을 헐고 외광을 판다. 그런 후 시신 이 보이면 칠성판에 시신의 형태를 그대로 옮긴다. 만약 묘가 오래되어 백골만 남 게 되었을 경우에는 머리 가슴 다리에 해당하는 뼈들을 수습하여 그대로 칠성판 으로 옮긴다. 또한 뼈마저 썩고 없을 때는 머리 가슴 다리 위치에 해당하는 흙을 담아 칠성판에 옮긴다. 수습한 시신을 옮겨 새로운 장지에 도착하면, 광중을 만들기 전에 다시 한 번 산 신제를 지내고 시신을 모신다. 화장 火 葬 근래 들어 화장( 火 葬 )을 행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벽제에 화장터 가 있어서 매장이 힘든 경우에는 대부분 화장을 하고 있다. 상례 관련 계 契 상례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의례이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는 모든 일을 치를 수가 없다. 부조를 돌리는 일부터 상여를 메는 일, 산일을 하는 일 등은 모두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를 위해 마을마다 상여계를 만들어 초상이 났을 때 힘 을 모아 도와주곤 했고, 마을에 상조계가 결성되어 있으면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가입하였다. 설문동의 경우 3개의 성씨가 모여 살았는데, 상여계는 같은 성씨끼리 구성하였 다고 한다. 타성은 정식 계원으로 될 수 없으나 돕기도 했다. 또한 상여계 소속의 상 여가 따로 있었다. 고양시 지역에서는 상여계를 상조계, 사촌계, 소동계라고도 불렀다. 특히, 원당 1통의 경우, 소동계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것으로 소동계원들이 마을 상여를 메 면서 돈을 받았다. 마을 상여는 12명이 멜 수 있는 상여였다. 소동계는 5, 6년 전에 없어졌다. 소동계는 계장, 소임(심부름꾼), 총무, 계원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계장은 몇 경기도 고양시 249
년마다 회의를 거쳐서 뽑는다. 소임은 품값을 받았다. 매년 12월에 정기 총회를 열 어서 1년에 한번씩 결산보고를 하였다. 소동계원이 상이 났을 때 일을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보통 쌀 2되를 부조하였다. 소동계는 약 70~80호 정도가 참여할 정도로 큰 조직이었다. 소동계원이 아닌 사람이 마을 상여를 빌릴 때는 상여 이용료를 비싸게 지불하였 고, 소동계원인 경우에는 상여 이용료를 아닌 사람의 3분의 1정도로 부담하였다. 상 여 이용료는 소임의 임금으로 지불되었다. 또한 쪽통문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알림장 같은 것으로 계원들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고 앞에 적힌 사람이 다 음 사람에게 부고를 알리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10~20여 년 전부터 장례식장 이용 이 늘어나면서 상여계는 점차 해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상엿집 마을 상여가 있는 지역에서는 상여를 보관할 수 있는 상엿집이 있었다. 상엿집 은 일반적으로 마을 뒷산 골짜기와 같이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 에는 상여가 마을의 공동 재산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상엿집을 관리하는 것은 중 요하였다. 또한 상여가 없는 마을에 상여를 빌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인적으로 상여를 구입하거나 아예 상여를 사용하지 않고, 운구차를 사용하게 되 면서 상엿집을 없애는 경우가 많아졌다. 객사자 客 死 子 의 처리 사람이 집 밖에서 임종을 할 경우 객사 라 한다. 사람이 임종을 할 때는 안방에서 맞이하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모두 객사로 간주한다. 객사는 참상 또는 악 상에 속하기 때문에 꺼린다. 객사를 하면 망인은 집에 들어올 수 없다. 또한 호상이 아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장사( 葬 事 )를 마친다. 어린아이와 미혼자 未 婚 者 의 죽음 과거에는 식량 부족으로 어린아이의 죽음이 많았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죽으 면 애장을 하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키워 보지도 못하고 자식을 죽인 것이라 큰 죄 악이라 생각한다. 애장은 장사를 치르지 않고, 부모가 직접 산에 묻는 경우가 대부 250 한국인의 일생의례
분이다. 매장을 할 때는 한밤에 아무도 몰래 근처 산에 가서 돌이 많은 곳을 파고 그 속에 묻는다. 이렇게 애장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어디에 매장을 했는지도 모르 는 경우가 많다. 미혼자의 죽음은 사고나 객사가 많기 때문에 장례를 지내도 묘를 쓰지 않고 화 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리걷이 상례를 마친 후에 씻김굿(자리걷이)을 한다. 문봉동 설문2리에 무당이 있어서 불러서 했다. 만약 씻김굿을 하지 않고 타성이 탈이 나는 경우에 욕을 먹을 수 있으 므로 자리걷이를 꼭 했다. <오수지> 경기도 고양시 251
Ⅴ. 제례 祭 禮 가. 제례 일반 제례는 크게 차례( 茶 禮 ), 기제사( 忌 祭 祀 ), 그리고 묘제( 墓 制 )로 나눌 수 있으며, 고양시 지역에서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와 같은 제사를 현재도 꾸준히 모시고 있 다. 고양시 지역에서는 사당이나 재실에서 묘제를 지내는 경우는 신주를 쓰는 경우 가 있지만 기제사에는 일반적으로 지방을 쓴다. 과거에는 차례도 명절 때마다 지냈 으며, 기제사도 4, 5대까지 모시는 경우가 많아 일 년에 제사를 치르는 횟수가 상당 히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간소화되고 횟수도 줄어들었다. 나. 차례 茶 禮 고양시 지역에서는 차례를 명절 제사 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간소화되어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과거 사당이나 재실에서 조상의 신주 가 모셔져 있는 경우에는 명절 때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식이나 단 오, 칠석 중구 동지까지 명절 때마다 조상께 음식을 바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추석에 조상께 풍년에 감사하며 햇곡식과 햇과일, 그리고 송편 등 을 바치듯이 모든 명절에는 그 때 먹는 절식을 올리며 감사의 제사를 지냈다. 예를 들어 동지 제사는 동지 때 먹는 절식인 팥죽을 올리곤 하였다. 차례는 아침에 지내 는 것이 보통이라 대개 음식 장만을 위해 밤을 새며 준비를 한다. 차례는 본가에서 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각 가정마다 지내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이런 것이 가능했 던 이유는 일가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인근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일가들이 마을을 떠나 이런 광경을 찾아보기 힘들다. 차례상은 마루나 안방에 차리는데, 대개 북쪽을 향하여 차린다. 현재 고양시 지 역의 대개의 가정에서는 한 상에 3대나 4대의 조상을 같이 모시지만, 원칙은 고조부 부터 따로 상을 차리면서 각각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하는 경우가 252 한국인의 일생의례
많았지만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제비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는 한 상에 차려 서 한 번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한 상에 차린다 하더라도 제물의 가짓수는 각 대수별로 두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부모인 경우에는 차례를 진행하면서 국과 적을 바꾸지만, 3 4대 조상은 국만 바꾼다. 한 상에 모두 모실 때는 산 사람을 기준으로 제일 왼쪽부터 순서대로 윗대 조상 의 지방을 붙인다. 좌고우비( 左 考 右 妣 )의 원칙에 따라 왼쪽에는 남자, 오른쪽에는 여자의 지방을 붙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 한 장에 왼쪽에 남자, 오른쪽에 여자 의 지위를 함께 써서 붙이기도 한다. 제물의 종류나 진설하는 방법은 가가례( 家 家 禮 )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 문에 일반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집이든 기제사와 비교했을 때 차례상을 준비할 때는 설에는 밥과 국 대신 떡국을 올리고, 추석에는 송편이 추가되며 햇곡식 으로 제물을 마련하는 것은 동일하다. 또한 맨 앞줄에는 과일을 두고, 다음에는 나 물과 건어물을 두며, 다음에는 탕과 적류, 그 위에는 떡, 국, 메를 올린다. 잔은 메 앞 쪽에 둔다. 과일은 조율이시의 순서로 두며, 제물은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진설 하는 것이 원칙이다. 차례는 기제사와 다르게 단잔( 單 盞 )만을 올리고, 축문을 읽지도 않는다. 또한 설 날 차례의 경우는 떡국을 올리기 때문에 밥을 말아주는 절차인 헌다( 獻 茶 )는 생략 된다. 다. 기제사 忌 祭 祀 고양시 지역에서 기제사는 3대 봉사와 4대 봉사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5대 이상부터는 묘제에서 모시고, 별도의 기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기제사는 망인이 돌아가시기 전날 지낸다. 이를 산 날 지낸다. 고도 부른다. 원 칙대로라면 돌아가기 전날 자시( 子 時 :밤11시~새벽1시)에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이 때부터 집안 청소와 제물을 준비한다. 자시에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하루에 첫 시( 時 ) 이고, 세상 만물이 조용한 시간이라 이때 신들이 활동하기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통행금지의 영향과 최근에는 일가친척들이 떨어져 사는 경 경기도 고양시 253
우가 많아서 전날 저녁에 지내는 경우가 많다. 기제사 때 기리는 망인은 한 명이지만 부부가 모두 고인이 된 경우에는 합설 을 한다. 그래서 지방도 두 개를 써야 하며, 상차림 역시 같은 제물을 두 개씩 차려 야 한다. 때문에 부모의 기제사인 경우, 아버지의 제사상과 어머니의 제사상은 형 태상 동일하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축문의 내용이 기일인 망인의 내용으로 구성 된다는 점이다. 지방은 좌고우비의 원칙에 따라 집사자를 기준으로 왼쪽은 아버지, 오른쪽은 어머니의 지방을 붙인다. 아버지의 지방에는 벼슬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 면 현고학생부군신위( 顯 考 學 生 府 君 神 位 ) 라고 쓰고 여자는 현비유인 씨신위( 顯 妣 孺 人 氏 神 位 ) 라고 쓴다. 지방은 대개 한지에 쓰며, 한 분만 돌아가시면 중앙에 쓰고, 두 분 다 돌아가시면 하나의 지방에 같이 쓰거나 따로 적는다. 지방과 축은 기 일 전날 미리 써 둔다. 기제사를 지낼 때는 대문과 창문을 열어 둔다. 상은 북쪽을 향해 마루나 안방에 차리며, 뒤로 병풍을 친다. 제물 준비는 여자들이 준비한다. 제물은 정성껏 준비해 야 하며, 장에서 구입할 때 깎아서도 안 되며 가장 좋은 제수를 고르려 노력해야 한 다. 또한 제물을 준비할 때는 먼저 먹어서도 안 되며, 고춧가루를 써도 안 된다. 과 일로 복숭아는 절대 써서는 안 된다. 제관들도 기제사를 지내려면 초상집 같은 곳은 피하여야 하며, 몸을 정결하게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진설을 할 때 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리는데 맨 앞줄에는 조율시이( 棗 栗 柿 梨 )의 순서로 과일 과 다식 약식 등을 차린다. 다음으로 나물을 차리고 그 위로는 탕을 준비한다. 탕 은 삼탕으로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 적 전 갱 메 등이 순서대로 올 라간다. 제물은 가가례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보인다. 고양시 지역의 기제사는 대부분 지방을 쓰기 때문에 분향을 먼저 한 후 강신재 배를 하고 참신한다. 강신은 신위가 강림하여 음식을 드시기를 청한다는 뜻이다. 그 후 제주가 초헌( 初 獻 )을 하고, 독축( 讀 祝 )을 한다. 이후 아헌( 亞 獻 ), 종헌( 終 獻 )을 하 는데 아헌은 보통 둘째가 많이 하였으나 요즘은 아헌, 종헌을 특별히 정하기보다는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일가나 친척 또는 특별한 손님이 있는 경우에도 아헌과 종헌 을 할 수 있다. 이후 첨작( 添 酌 )을 하고 삽시정저( 揷 匙 正 箸 ), 합문( 闔 門 )을 한다. 이 후 계문( 啓 門 )과 헌다( 獻 茶 )를 하고, 국궁( 鞠 躬 ) 재배를 한다. 이러한 절차는 조상님 이 편히 제물을 운감( 殞 感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후 축문 254 한국인의 일생의례
을 태우고 마지막으로 철상( 撤 床 )을 하고 음복( 飮 福 )을 하면 모든 제사 절차가 마 무리된다. 여자들은 가가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기제사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 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처음 왔을 때는 새로운 식구를 조상님께 인사 시킨다고 해서 여자들도 기제사에 참석한다. 여자의 경우는 재배( 再 拜 )를 하지 않고 사배( 四 拜 )를 한다. 또한 사당 차례 때도 여자의 참여가 허락되었다. 며느리가 시집온 첫 해에 종가 에 가서 조상들께 인사드리는 의례인 사당 차례는 집집마다 사당이 사라지면서 최 근에는 행하지 않고 있다. 부모님이 회갑 전에 돌아가시게 되면 회갑날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지낸다. 이것을 생신일 제사라고 하는데, 생신일 제사는 회갑 때뿐만 아니라 탈상하기 전까 지는 매년 망인의 생신에 제사를 지내 주기도 한다. 라. 묘제 墓 祭 기제사 때 모시는 4대조 이하의 조상을 제외한 그 윗대 조상들은 음력 10월에 묘 소에 직접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묘제( 墓 祭 ) 라고 하며, 고양시 지역에서는 시제( 時 祭 ) 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음력 10월에 묘소에 가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묘제는 대개 대종 종중회에서 주관하며, 묘제 전날 미리 도착한 다. 제수를 비롯한 각종 준비는 총무나 유사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며, 묘제 당일 날 에는 제관들은 제복을 반드시 갖추지만 일반 종종회원들의 경우, 대개 제복을 입지 않는다. 고양시 묘제는 일산 동구 성석동 전주 이씨 진남군파와 설문동의 하동 정 씨 문성공파, 마지막으로 덕양구 원당동 원당1통의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사례 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양시 일산 동구 성석동은 전주 이씨 진남군파의 집성촌이다. 현재도 후손들이 30호 이상 거주하고 있다. 입향 시조는 계원군으로 진남군의 4대(증손주)손이 되는 인물이다. 불천위제사는 진남군을 모시며 진남군은 정종의 6번째 아들이다.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4일에 지내며, 진남군도 함께 모신다. 현재 묘가 용인에 있고 묘 아래 재실이 마련되어 있어 13일부터 15일까지 시제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255
사진 1. 전주 이씨 진남군파 재실 전경 사진 3. 진남군 사당 사진 2. 전주 이씨 진남군파 재실 사진 4. 진남군 신주 하동 정씨 문성공파가 설문동에 들어온 지는 약 400년 정도 되었다. 입향 시조 는 정영정으로 16대까지 마을에 살고 있다. 하동 정씨의 시조는 정인지이다. 시제 는 매년 음력 10월 13일 낮에 재실에서 지낸다. 약 50명 정도가 모인다. 불천위제사 는 따로 모시지 않고 있다. 원당1통은 전체 100호 정도의 마을이며, 전주 이씨는 20호 정도 살고 있다. 원래 70호 정도의 마을이었으나 외지인이 많이 유입되었다. 입향조는 15대 전주 이씨 효 령대군파 이하겸이다. 현재 마을에 이하겸의 17대손까지 거주하고 있다.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지낸다. 시제는 오전 10시 정도에 시작한다. 재실 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선산에서 시제를 지낸다. 올해 양력 9월 5일에 종중 산 소를 벌초하였다. 직계 산소 벌초는 종중 산소 벌초 전에 하는 것이 보통이며, 9월 첫째 주 일요일에 한다. 예전에는 한날한시에 종중 산소와 직계 산소 벌초를 했으나 10년 전부터 분리하여 벌초하고 있다. 시제 비용은 종중 재산과 위토로 부담한다. 이인수씨가 시제 음식을 준비한다. 256 한국인의 일생의례
사진 5. 하동 정씨 재실 사진 6. 하동 정씨 묘제1 사진 7. 하동 정씨 묘제2 사진 8. 하동 정씨 재실 준공 당시 단체사진 방향은 북을 기준으로 조율이시, 홍동백서의 순으로 제물을 놓는다. 제물로는 주과 포, 인절미, 대추, 밤. 곶감, 적(육적, 소) 등이다. 원래는 제주를 빚어서 썼으나 30 년 전부터 약주를 사용한다. 시제를 지낼 때 축문을 읽으며 축문은 이인수씨가 직 접 쓴다. 시제 지내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맨 처음에 초헌관이 첫 잔을 올리고, 이후에 축 을 읽는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순으로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오수지> 경기도 고양시 257
Ⅵ. 고양시 일생의례의 특징 1) 출산 의례의 특징과 변화 고양시에서는 특별한 기자 행위나 장소는 없으며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거나 산 에 가서 산신 기도를 드리거나 무당을 찾았다. 출산 기도를 드릴 때는 삼각산이나 유명 사찰로 갔다. 아이가 태어나면 삼신상을 준비하는 집이 많았는데, 산실 윗목에 볏짚을 깐 상 위에 밥 3그릇, 국 3그릇을 놓아둔다. 아이의 무병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3일 동안 차린다. 백일 전에는 같은 젖먹이끼리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의 복을 다른 아이 가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대부분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을 하지만, 이러한 일이 일반화된 것 은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젊은 부부가 독립하여 일가를 이루는 경우나 친정 또 는 시집과 떨어져 사는 경우에 병원에서 해산하는 경우가 있었다. 병원이 많이 생 기면서 출산을 병원에서 하고 산후 조리를 산후 조리원에서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확산되었다. 2) 혼례의 특징과 변화 혼인을 통해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게 된다. 때 문에 과거 자식의 혼인을 결정하고, 주도했던 부모들은 자식들이 가정을 이루어 잘 살기를 마음으로 혼인 잔치를 준비한다. 그래서 혼담의 시작부터 식의 전개까지 신 랑, 신부가 잘 살기를 기원하는 장치들을 마련해 놓았다. 1940~1950년대에는 혼인을 보통 17~20세 정도에 하였다고 한다. 20세가 넘은 경 우에는 노총각이라고 하였다. 신부와의 연령차는 동갑내기 아니면 신랑이 한두 살 많았다고 한다. 특히 1950년대에 남자는 혼인 직후 군대를 가거나 군 복무 중에 혼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자의 평균 혼인 연령은 17~18세였다. 당시에 20세 정 도의 여성은 노처녀라고 불렀다. 과거에는 대부분 중매를 통해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258 한국인의 일생의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