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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제7장 신앙 1. 교회 마을에서 교회를 다니는 주민은 거의 없지만, 2004년도까지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세일교회 라고 했던 이곳은 1960년대 중반에 생겼으며, 신자수의 부족으로 2004년도에 문을 닫았다. 그것을 관리해오던 주민도 이사를 가면서 교회의 명맥은 끊긴 것이다. 관리자는 강희근 (당시 용호1리 소징이 거주)였는데, 이후 조치 원에서 교회를 열었다가 지금은 천안에 있다고 한다. 교회가 있었을 당시 신도수는 4~5명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교회를 다닌 장봉훈의 어머니(여, 71세)는 하 룡에서 유일한 교회 신자였다. 하룡은 오랫동안 산신제를 지내왔고, 가신신앙을 모시는 집이 많기 때문에 교회 신자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8남매를 낳아서 기르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고자 다닌 것이 그녀의 개종 이유였다. 이후 아들 장봉훈도 교회에서 중신을 보아서 신자 며느리 를 얻은 덕에 함께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문을 닫고부터 교회 나가는 일이 어려워졌다. 아들 장봉훈이 교육 공무원이기 때문에 농사를 일요일에 지을 수 있다는 이유로 며느리 역시 주일에 시간을 비우 기 어렵게 되었고, 자신도 건강이 악화되어서 교회 다니는 일 마저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내판의 성 결교회에서 승합차가 태우러 오기 때문에 그 차편을 이용하면 된다. 용호1리에서 1명, 용호2리에서 2명이 그곳에 다니고 있다. 그녀의 며느리는 마을에서 나가면 교회에 다닐 계획이다. 2. 가신신앙 1) 용호1리 가신신앙 현황 용호1리에서 가신의 신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사자가 인터뷰를 해본 결과 마을에서 가신이 남아 있는 경우는 장광의 터주신이었을 뿐 성주나 조왕, 삼신 등의 신체를 보전, 전승하고 있는 집은 없었다. 처음 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며, 부녀자들은 자신의 시어머니들까지 모셨다가 그분이 돌아가시자 가신 역시 집에 서 내보냈거나 헌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을 때에 가신을 내보냈다. 이렇게 가신을 물려받거나 옮기는 시점 제7장 신앙 401

에서 대부분 가신을 내보낸 것이다. 다음은 40년 전에 새 집을 지을 때 장광 의 터주 단지를 없앤 경우인데, 그녀는 그 이후 갑자기 몸이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 고한다. 사례) 오기순(여, 1939년생, 하룡거주) 조사자 : 할머니도 가신 모시세요? 오귀순 : 없슈. 그거 치웠어. 우리도 했었는데, 집 짓기 전에는 사뭇 터주 단지 해놓고, 거기다 마당질 해서 나락 놓고, 그거 도구통에다 찧어가지고 시루 해놓고, 집 지을때 쏵 치웠어. 조사자 : 치울 때는 어떻게 하셨는데요? 오귀순 : 몰러. 그거 치워서 그런가. 나 집 지을 때 죽다 살아났슈. (왜요?) 집을 짓는데, 집을 지을라고 장꽝을 다 치우고 했는데, 집을 지을라고. 옛날에는 (헛청을 가리키며) 이것도 아니었어. 어 른들은 이 밑에 집에 사랑방에서 얻어서 살고, 또 아이들은 밑에 얻어서 살고. 우리 둘이는 여기서 살았는데. 여기서 자다가 눈을 뒤집어 쓰고 까물어쳐서 죽을 뻔 했댜.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께 장꽝을 치워서 그렇더라고. 장꽝을 밥이라도 떠놓고 건든다고 신호를 했어야 했는데..모두 있는 거를 그냥 해가지고 그렇더라구. 아주. 그렇게 해서 따고 그렇게 해서 살 아났지.뭐. 집 지을라다 죽을 뻔 했어. 그래 이것도 마음대로 못 건든다는겨. 윗집에서 살적 에 그게 있었어. 어른들이 믿는 게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내려와서 여기서 하다가 집 짓는 데 쏵 치웠지. 그렇게 해서 아이구. 그래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니께 편해. 하는 게 없어서 편 해서 그런지 아픈 데가 많아. 조사자 : 그때 시어머니는 뭐라고 하셨어요?? 오귀순 : 어른들도 다 허락하고 한 거지. 그럼유. 어른들이 있응께 어른들이 하라고 한거지. 조사자 :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하셨데요? 오귀순 : 저 꼭대기 할머니네. 터주단지 있어. 성주 단지는 방에다 하는걸 성주고. 옛날에 성주 단지가?? 아이구 그런거 있었지. 부녀회장들, 거기는 엄청했어. 어른들이 시방들은 없어. 다 치우고. 오씨는 자신이 갑자기 죽을 만큼 아팠던 때와 장광의 터주 단지를 예방 없이 없앤 때가 일치하자 그것을 자신이 함부로 터주 단지를 없앤 데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신을 더 이상 모시지 않 을 경우에는 아는 사람 에게 부탁을 하거나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죽을 때에 맞춰서 없 애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하룡에 거주하는 연복희(여, 84세)는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3대째 터주를 모셔온 주민으로 한 시어머니 밑에서 두 며느리가 터주를 모셔온 경우이다. 사례) 연복희(여, 1923년생, 하룡 거주) 연씨의 시부모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지은 것은 작은 시동생 2살 때이다. 그러니까 70년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살던 집이 좁아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 자신의 시할아버지가 터주 단지를 시장에서 사 왔다고 한다. 대략 13년 정도 이 집에서 살다가 큰 며느리였던 연씨가 시집을 오는 바람에 시어머니는 현재 장래헌(하룡 끝집)으로 새 집을 지어서 내려가고 살던 집은 그 부부에게 주었다. 그때부터 시어머니가 모셨 402 연기군 동면 용호1리

던 터주를 연씨가 모시게 되었고, 시어머니는 다시 새집으로 가서 새 터주를 모시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죽을 때에 장래헌의 부인에게 그녀가 터주를 못 모실 터이니 내보내라고 한 유언 때문에 가족들은 무당을 불 러서 상여가 나가는 날 터주 나가는 길을 닦고 없앴다. 연씨가 모시던 터주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도 계속 모셔왔지만 거동이 불편해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 역시 아이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것 을 없애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2) 절기 떡고사 이렇듯 가정에서 신체를 모시는 일이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떡고사 는 남아서 가신신앙 활동의 명맥 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떡 고사는 주로 가신을 모셨으되 신체는 내보낸 사람들도 많이 한다. 낡은터의 임 헌칠은 절기마다 고사를 올리고 있지만 신체는 모시지 않는 경우인데, 그의 부인은 신체를 모시는 집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없앴다고 한다. 길융화복을 가리기 위해서 모셔놓은 신체이기 때문에 주변의 상황 이 좋고 나쁨에 따라서 그러한 결정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체의 유무를 떠나서 용호1리에서 가신을 모시는 가정에서는 부녀자들이 절기를 지켜서 떡고사를 올리고 있다. 이렇게 떡고사를 올리는 집은 대략 10여 집 된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이들이 지키는 절기는 초 3일, 정월 대보름, 음력 7월 7일, 음력 10월 중, 동지 날 등이며, 모시는 신은 성주신, 터주신, 용왕신 등이다. 다음은 정월 대보름에 홍준표씨와 임진수씨 댁에서 올린 떡고사를 참여 관찰해서 기록한 것이다. 사례) 홍준표(여, 1936년생, 소징이 거주)의 정월 대보름 고사 조사 일시 : 2006년 2월 11일 낮 12시~저녁 8시 조사 장소 : 소징이 샘, 홍준표씨 댁 용호1리 소징이에 거주하는 홍준표는 매년 소징이 샘에서 용왕치기를 지낸다. 소징이 샘은 소징이 앞 논둑에 있으며, 여름에는 목욕을 할 수 없을 만큼 물 이 차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사용하기에도 좋을뿐더 러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도 좋다고 한다. 생활 용수 로 우물물을 사용할 당시 낡은터 주민들도 와서 길어 가거나 그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이 꼭 물을 마시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특히, 소징이 뒷산의 지세가 여인이 머리를 감듯 앞으로 머리카락이 흘러 내리는 모양인데, 그 샘의 자리가 여인이 머리를 감 474 소징이 샘 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하여서 주민들은 샘의 입지가 특별해서 없애지 않고 보존해왔다고 한다. 2~3년 전 에는 연기군청의 자금 지원을 받아 샘에 자갈을 깔고 주변을 다지는 등 정비를 하였다. 홍준표는 11일 밤에 용왕 치기를 하려고 오전 11시부터 샘 청소를 하였다. 먼저 고여 있던 샘물을 품기 위 제7장 신앙 403

해 동네에서 모터를 빌렸다. 모터를 사용하여 물을 다 비우고 나서 샘 벽에 낀 이끼나 물때를 빗자루로 제거 하였다. 물때를 제거할 때 샘 박아놓은 돌이 떨어지면서 지저분해지는 바람에 바가지로 물을 계속 퍼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물은 1~2시간 만에 다시 가득 고인다고 하였다. 475 샘을 청소하고 있는 모습 476 샘을 푸고 있는 모습 홍씨는 저녁을 먹고 나서 제물을 준비하였다. 보통 용왕 치기에는 흰 시루 떡과 밥, 청수, 미역을 올린다. 고사 는 부엌의 전구가 끊어지는 바람에 저녁 7시에 지냈다. 먼저 장독대에서 터주 고사를 지내고, 샘에 제물을 놓은 다음 소징이 샘에서 용왕 치기 를 지낸다. 아래 글은 홍씨가 고사지내는 모습을 참여 관찰하여 기술한 것이다. 홍씨는 밥이 다 되길 기다렸다가 부엌 뒤 장독대로 갔다. 장독대 중앙에 이미 짚을 열십자로 깔아놓았다. 477 준비하기 478 제물 진설하기 제물을 놓고 나서 홍씨는 하늘로 두 팔을 뻗었다가 다시 가슴으로 모으고 절을 하면서 중얼거리듯 기도했 다. 이렇게 여러 번 하다가 동서남북으로 돌면서 절을 하였다. 사방으로 절을 한 다음 홍씨는 마당 샘에 제물 을 놓은 뒤 떡 시루와 제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소징이 샘으로 나갔다. 44) 하늘에는 보름달 빛으로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했고, 간간히 개 짖는 소리가 났다. 이미 그 44) 홍씨가 조사자에게 제물 쟁반을 맡겨서 조사자 역시 제물을 들고 소징이 샘까지 따라갔었다. 그러나 평소에 홍씨가 혼자서 고사를 지낼 때에는 한번에 모두 옮길 수 없어서 두 번에 걸쳐서 옮긴다고 하였다. 404 연기군 동면 용호1리

곳에도 짚이 십자로 깔려있었다. 홍씨는 말없이 짚에 제물을 놓고 촛불을 킨 다음 하늘로 팔을 뻗어 절을 하 기 시작했다. 홍씨의 기도 소리는 처음에 커졌다가 점차 끝으로 갈수록 잦아들었다. 479 480 481 482 483 484 479 터주 고사 제물 차림 480 절을 하는 모습 481 동쪽으로 절하는 모습 482 남쪽으로 절하는 모습 483 서쪽으로 절하는 모습 484 샘의 제물 차림 제7장 신앙 405

485 486 487 488 489 490 485 촛불켜기 486 절하기 487 동쪽으로 절하기 488 남쪽으로 절하기 489 서쪽으로 절하는 모습 490 기도 불 밝히기 406 연기군 동면 용호1리

491 492 493 494 491 고시래 하기 492 촛불 밝혀두기 493 음복하기 494 우물에 넣은 미역 동서남북 돌면서 수차례 절을 하고 나서 홍씨는 기도 길을 밝히기 위해 샘의 귀퉁이에서 짚 한 묶음을 불 태웠다. 이것은 자신의 기도가 용왕신에게 잘 전해질 수 있도록 불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용왕 치기를 올리기 전에 기도 불을 밝혀야 하지만 이것을 서둘러 끝내려고 나중으로 미뤘다고 하였다. 45) 짚에 붙은 불이 금방 사그라지고 시커먼 재가 길쭉하게 남았다. 짚에 불씨가 사라지자 홍씨는 밥과 떡, 미역을 차례로 우물 속에 떨어뜨렸다. 떡과 밥은 조금만 넣었으나 미역은 통째로 다 넣었다. 그 뒤 조사자에게도 음복하라며 떡 과 물 한 사발을 떠주었다. 고사떡은 다음날 마을 회관에서 함께 나눠먹을 예정이었다. 홍씨에게 용왕 신에 게 무엇을 빌었느냐고 물어보니, 우리 큰 아들 잘 되라고 빌었지 라고 하였다. 45) 조사자가 버스 시간에 맞춰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홍준표가 깊게 생각하여서 고사를 보다 일찍 끝낸 감이 있다. 제7장 신앙 407

사례) 김영숙씨(여, 1955년 생, 낡은터 거주) 댁의 정월 대보름 고사 조사 일시 : 2006년 2월 11일 오후 4시 ~ 저녁 8시 30분 조사 장소 : 임진수씨 댁 김영숙은 직장 생활을 20년 동안 하느라 그의 집에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고사를 지내지 않다가 직장을 그만둔 작년부터 고사를 지내기 시작하여서 올해 두 번째로 하고 있다. 오랫동안 고사를 지내지 않 다가 다시 올리는 것은 고사가 번거로운 일이지만 1년에 한 번만 있고, 정성을 드리는 것이 더 마음 편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고사를 올리는 시간은 정해져있지 않지만 저녁 식사가 끝나면 바로 준비한다. 2006년에 는 7시 40분경에 지냈다. 김영숙은 터주신, 용왕신과 성주신에게 고사를 올리는데, 떡은 팥 시루떡과 흰 시루떡 두 개를 준비한다. 성주 신에게는 터주신에게 썼던 재물을 다시 올리기 때문이다. 떡시루는 스테인레스로 된 것을 쓴다. 팥 시루떡을 만 들기 위해서 쌀가루를 적당히 나눠 붓고 난 뒤에 쌀가루와 팥을 4번씩 번갈아 깔았다. 쌀가루가 시루 밑으로 새 지 않기 위해서 밑바닥에 종이나 천을 까는데, 김씨는 시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십자로 칼질한 무를 깔았다. 시 495 496 497 498 495 시루에무깔기 496 팥 시루떡 만들기 497 이음새 붙이기 498 쌀과 촛불 넣기 408 연기군 동면 용호1리

루 이음새에는 김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밀가루 반죽을 길게 붙였다. 떡이 다 쪄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40분가량 이었다. 46) 김영숙은 떡 위에 햅쌀 그릇을 놓고 촛불을 꽂은 다음 장독대로 가져갔다. 청수 그릇을 놓고 촛불도 켰 다. 김영숙은 손을 하늘로 뻗어서 다시 모으면서 절을 하였고, 동서남북으로 돌면서 각 7번씩 절을 하였다. 46) 떡이 다 익는 동안 김영숙은 아들과 함께 술을 한잔 하였다. 499 500 501 502 503 504 499 제물 놓기 500 절하기 501 동쪽으로 절하기 502 남쪽으로 절하기 503 서쪽으로 절하기 504 북쪽으로 절하기 제7장 신앙 409

터주고사를 지낸 다음 용왕고사를 올리기 위해서 마당에 있는 샘으로 갔다. 김영숙은 샘고사 제물을 마당 으로 가져나가서 샘 수도꼭지 앞에 놓은 뒤 터주고사와 같은 방법으로 동서남북으로 절을 하였다. 이렇게 고사를 드린 뒤에는 기도 자리를 밝힐 수 있게 한 동안 촛불을 켜두었다. 505 506 507 508 509 510 505 김영숙 마당에서 본 보름달 506 제물 놓기 507 절하기 508 동쪽으로 절하기 509 서쪽으로 절하기 510 북쪽으로 절하기 410 연기군 동면 용호1리

김영숙은 8시 경에 성주신에게 고사를 드리기 위해서 터주신에게 고사를 지낸 시루떡을 가지고 거실로 들 어왔다. 떡 시루를 거실 북쪽에 놓은 다음 절 세번 하였으며, 그 뒤에 시루떡을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다. 먼저 광에 놓은 다음 외양간으로 가서 소에게 먹이고, 그 다음에 경운기에 올려놓은 뒤 동서남북 하늘을 향해 한 해탈도없고병도없게 라고 외치면서 던졌다. 다시 집안 마당으로 들어가서 창고, 연장 창고, 다용도실 등 을 차례로 돌면서 떡 한 조각 놓았으며, 샘에 놓았던 제물도 거두었다. 김씨는 고사를 다 끝낸 다음 가족들을 불러서 음복 하였다. 집에 있던 남편 임진수와 그의 아들, 아들의 친구는 거실에서 담소하면서 떡을 먹었다. 511 성주고사를 위한 진설 512 절하기 513 고시래 조각 담기 514 광에떡놓기 515 소에게떡주기 516 경운기에 떡 놓기 제7장 신앙 411

517 518 519 520 517 하늘 향해 떡 던지기 518 공구 창고에 떡 놓기 519 다용도 창고에 떡 놓기 520 음복하기 3) 차 고사 용호1리 주민들은 교회를 다니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새 차를 구입했을 때에는 사고를 미연에 방치하 고자 하는 마음에서 제물을 차려서 차 고사를 지낸다. 고사를 지낸 뒤에는 차 안에 실이나 실을 감은 명태를 앞 좌석이나 뒤 트렁크에 싣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다음은 2006년 8월 27일에 있었던 임건수씨의 차 고사 를 지내는 데에 참여하여 기술한 것이다. 사례) 임건수씨(남, 1947년생, 낡은터 거주) 댁 일시 : 2006년 8월 27일 오후 7시 장소 : 임건수 씨 댁 마당 임건수씨는 둘째 아들 재도(남, 29세, 대전 거주)가 2주일 전에 스포티지 흰색 차를 구입하자 당일 집에서 차 고사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대전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이 자신의 아내와 함께 오후에 도착하였고, 부인이 412 연기군 동면 용호1리

521 돼지 머리 522 팥 시루떡 조치원 파밭에서 6시 넘어서 도착하자 진설을 시작했다. 고사 진설 음식으로 조치원 공복 상회에서 팥 시루떡 1말을 주문해놓고 찾아왔으며, 돼지머리 삶은 것도 조치원 시장에서 샀다. 배, 사과, 곶감, 밤 등 삼색실과를 미리 준비했다. 임건수의 뒷집에 거주하는 홍종오씨(여, 1939년 생, 낡은터 거주)가 진설하는 것을 도왔다. 차 앞에 고사 상을 차려놓은 뒤 임건수가 절을 하고 돼지 머리에 돈을 꽂았으며, 뒤 이어 임건수의 둘째 아들이 절을 하였다. 임건수의 처 강희순과 임건수의 형 형수인 곽씨 부인 역시 돈을 꽂았다. 헌작한 술은 차 바퀴에 뿌려놓았으며, 고사가 끝난 뒤에는 떡 한 접시를 차 위에 1시간 가량 올려놓았다. 47) 임건수 부부는 차 고사를 지낸다는 것을 낡은터 주민들에게 미리 알렸다. 그날 친목계 48) 회원들이 고속전 철 다리 밑에서 개고기를 삶고 술과 안주를 장만해서 일일 야유회를 갔었지만 그는 고사를 지낼 때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에는 그의 마을 주민들을 비롯하여 소징이에 거주 하는 그의 형 형수 49) 를 전화로 불렀다. 낡은터 마을 행사에는 대개 낡은터 주민들만 참석할 뿐그외마을주 민들은 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일부러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의 형 형수 역시 전화를 해서 오라고 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돈 1만원을 넣어가지고 왔다고 한다. 미리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저녁 식사 523 음식을 먹고 있는 낡은터 주민들 524 차에 떡을 올려놓은 모습 47) 조사자는 임건수씨 댁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6시부터 고사를 기다렸다가 임건수씨가 저녁 8시에 고사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집 아래에 있는 임덕수씨 댁에서 그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저녁을 먹다가 7시 30분에 나와 보니 임건수씨는 이미 고사 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먹으려고 하였다. 이 고사에 대한 내용은 제보자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48) 친목계를 보려면 사회 조직과 마을 공동체의 비공식적인 모임을 참고 하기 바란다. 49) 형 아버지-아들 관계를 보려면 친족을 참고하기 바란다. 제7장 신앙 413

를 하지 않고 찾아왔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주민들은 아이구, 재도가 차를 샀어? 장하네 라며 차를 산 아들 에게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이날 낡은터 주민 중에 오지 않는 사람이 있자 임건수는 전화를 걸어서 오라고 하였으며, 늦게라도 오지 못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싸주기도 했다. 늦게 임건수의 친목계 회원이자 한 마을 사람인 임진수와 소징이 임헌곤이 와서 음식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은 뒤 일요일에 방영하는 소 문난 칠공주 를 9시까지 본 다음 집으로 내려갔다. 3. 마을 신앙 1) 용호1리 산신제 (1) 산신제의 배경과 과정 마을에 산제당을 세운 시기와 배경에 대하여 최근 10년간 연반계장을 맡은 장래묵(남, 1937년생)에 따르면 19세기 초 한 스님이 늦봄에 제를 지내는 향교(연기 향교로 추정)를 지나가다가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들렀는 데, 선비들이 멋진 산이 있다고 하여 그 산을 찾아 갔다. 미호천을 건너 스님이 다다른 곳이 바로 용산이었다 고 한다. 스님은 지세가 좋아서 둘러보던 중에 현재 동구나무가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글 읽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당시 여름철이면 글을 읽었다고 하던 물봉재 중턱에 위치한 모정에 찾아간 스님은 서당의 장의였 던 제보자의 5대조에게 찾아온 경위를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용산의 꼬리에 제단을 쌓고 산신에게 제물 을 바치면 대대손손 자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하였으며, 하룡 뒷산에 올라 제단의 위치도 정해 주었다. 그 는 마을사람들과 회의를 열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동의를 하자 스님 말대로 제단을 만들고 오늘날까지 이 어내려오게 되었다. 이후 마을에서 대부분이 자식을 4남매 이상 낳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산제를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산제단은 하룡마을 뒤로 노적산의 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지다 끝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산제단이 위치한 노적산 북쪽 줄기 끝자락 능선은 물봉재 50) 라고 한다. 이 제단은 용호1리 산신제가 2004년도에 연기 525 하룡 산제단 526 산제단 비 414 연기군 동면 용호1리

527 하룡 산제당 528 소롱골 샘 군 향토 유적으로 지정되어 2005년 9월 9일에 설치한 것으로 단은 대리석이며, 비에는 土 地 之 神 51) 을새겨 놓았다. 그 이전에는 시멘트 재질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단이 있었으며, 비는 없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단 주위에 천막을 치고 한지에 토지지신을 써서 매달고 음식을 진설하여 제를 올렸다. 산제당은 본래 흙벽 초가집이던 것을 40년 전에 지붕만 기와로 개축하여 사용해 오다, 4년 전 더 이상 유지가 힘 들 정도로 파손이 심하여 동면에서 지원을 받아 시멘트 벽돌재의 방 1칸, 부엌 1칸으로 지었다. 지붕은 주민들이 직접 굵기 약 20cm 내외의 소나무를 잘라서 집 벽 앞뒤로 놓고 그 위에 슬레이트(slate) 재질의 판을 맞배지붕 형으 로 올렸다. 사진에 보이는 짚은 용호1리 산신제를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서 2003년도에 덮은 것으로서 2004년도 추석 때 비가 오면서 벗겨졌다. 산제당 정면 왼쪽 벽 선반에는 제기, 의복, 산신제와 관련한 문서의 복사본 등이 있 으며, 바닥에는 전선과 짚자리가 있다. 산신제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산제좌목( 山 祭 座 目 ) 은 158년 전부터 쓰여 져 내려왔으며, 각 호의 호주 이름과 사용해야 하는 제물의 목록이 적혀 있다. 연기군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산신제와 관련한 문서 원본이 당에 있었으나 분실과 보관문제로 현재는 연기 향토사박물관에 맡겨두고 있다. 용호1리 산제사는 용호2,3리 문주리가 모두 산신제를 철폐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2004년도에는 용호리 산제사가 연기군 향토유적 제 44호로 지정을 받았다. 이것은 2003년도에 당시 산제계 회장이었던 장래묵이 용호리 산신제를 연기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받고자 노력하다가 하룡 주민들과 합의를 하고, 연기군 향토박물관의 도움을 받아서 달성한 것이었다. 장래묵은 오랫동안 산신계 의 회장으로 부임하면서 자신이 죽기 전에 꼭 이뤄내고 싶은 일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재 지정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룡 주민들은 향토유적으로 등록하기 위해서 산제당을 보수하고 책임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용호리를 비롯하여 내판 주민들에게까지 유적 지정을 위한 청원 서명을 500명 받아내기도 했 다. 또한 산제계에서는 필요한 자금을 하룡 연반계에 요청하였고, 연반계 회원들이 찬성하여 지원금 62만6천3 백80원을 얻었다. 산제당 보수시 찬조금을 30만 5천원을 받았기 때문에 약 32만 원 가량을 지원받은 것이다. 현재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받은 산신제와 산제당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따라 향후 전망이 불투명해 졌다. 도시 개발계획에 따라 물봉재가 깎인다면 산제당 역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도 회의에서 주민들은 먼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마을에서 떠나기 전에는 산제사를 지내는 데에 합의하였으며, 책 50) 물봉재: Ⅰ장 2절의 마을 지명 유래를 참고할 것. 51) 土 地 之 神 : 산신제에 쓰이는 위패대신 종이를 사용하였으나 현제는 비석에 새겨 놓았다. 마을사람들은 산신 이라고 부르며,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제7장 신앙 415

임자들 사이에서는 산제당을 계속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하룡에 대다수가 분포해 있는 결성 장씨 종중 회의에서도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금 지원 요청을 위한 문서 하룡 연반계 발신 : 하룡 연반계 및 산지계(계장 장래묵) 수신 : 하룡 산지계 장래헌 외 28명 일시 : 2003년 9월 22일 목적 : 하룡 산신제당을 군보(문화제)로 하기 위한 찬반을 물음 내용 : 산신제당 기와를 교체하고 보와, 도리, 석굴, 도색, 문을 보수하기 위한 전반적인 사항 위 사항을 보수하기 위한 견적서(설계)에 의하면 재료비 목재 : 175만원 석글과 도리 자체 구입하면 114만원 기와 : 전통식 기와 스레트기와 150만원 주추 : 대 6개 20,000 = 120,000원 소 4개 10,000 = 40,000원 인건비 : 목수 및 잡부 270만원 페인트 : 50만원 합계 : 661만원 위 내용에 따라 661만원 재정이 부담이 되어 계원 여러분의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반계 계금은 현재 841만원이며 연반계 계금으로 산제당을 제 보수하고자 합니다. 계원 여러분을 모시고 결론을 얻으려 하였으나 성원이 되지 못하여 서면으로 가,부를 물으려 하오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2003년 9월 22일 계장 : 장래묵 총무 : 임혁철 (2) 산신제 의례 과정 산신제는 음력으로 9월 그믐에 시작하여 10월 3일까지 진행된다. 산신제를 지내기전 제관을 선출하는데 마을 사 람 모두가 모여서 생기복덕을 따져서 깨끗한 사람 을 뽑는다. 제관과 축관은 3명으로 연령대가 높은 사람 중에 1 명, 중간인 사람 중에 1명, 낮은 사람 중에 1명 등 3명을 선출하여 2개월간 금기를 행한다. 또한 성혼하지 않은 사람 은 제관, 축관에 선출되지 못한다. 선출된 이들은 상가에 가지 않고,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예전에는 금기를 1년간 행했으나 현실적으로 지키기 힘들어 기간을 2개월로 줄였다. 조사자가 마을에 있는 동안 제사가 계속 연기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참여 관찰은 하지 못하였으며, 제보자(남, 장래묵)과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하였다. 1 1일(음력 9월 30일) 제관들은 그믐날 아침에 산제당으로 올라간다. 이때부터 마을사람들은 마을 입구와 집집마다 금줄을 쳐서 외 416 연기군 동면 용호1리

부인과 외부의 좋지 않은 기운을 막는다. 제관은 직접 조리를 해서 식사를 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당에서 30m 정도 아래에 있는 소롱굴 우물에서 목욕재계를 한다. 이어서 제관들은 산제당과 산제단, 우물을 청소하고 더불 어 제당문을 새 한지로 교체한다. 그리고 밤을 지내기 위하여 마을 아래에서 전선으로 전기를 끌어온다. 제관들 은 제와 관련한 얘기만을 나누고 되도록이면 서로 얘기를 삼가고 각자 집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2 2일(음력 10월 1일) 아침에 제관들은 유사에게 제에 입을 의복을 맡겨 세탁하게 한다. 유사는 이 의복을 조치원에 나가 세탁 소에 맡기고 저녁에 찾아서 당에 가져다 놓는다. 이때 유사가 장을 보는데, 제에 올리는 음식들은 좋은 것으 로 고르며 물건 값은 흥정하지 않는다. 제수를 마련하는 비용은 마을 공금인 하룡 연반계금을 사용하는데, 여기에 더하여 하룡에 거주하는 각 호마다 1,000원의 비용을 더 낸다. 남아 있는 산제기록 문서에는 1988년, 1989년, 1991년 마을사람에게 1,000원을 모금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장래묵의 말에 따르면 2003년에는 연 반계금으로만 제를 지냈으며 2004년에는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1,000원을 모금했다고 한다. 유사가 장을 보러나간 사이 제관들은 마지막으로 아침 목욕을 하고, 오후에는 제에 올릴 음식을 제관들이 직접 요리를 한다. 제는 2일 밤 자정에 지내기 시작하여 3일 오전 중에 끝이 나는데, 자정이 되기 전에 의복 을 갈아입고 마련한 음식을 가지고 올라간다. 제단은 제당에서 약 20m 떨어진 능선에 있다. 주위에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깔고 음식을 단 위에 진설한다. 현재는 비가 있으나 작년까지는 한지에 토지지신 이라고 써서 천막에 붙였다. 진설되는 음식은 대추, 밤, 곶감, 사과, 소머리, 무나물, 배추나물, 고사리나물, 마른 명태 2마리, 산자, 술, 밥 등이다. 밥은 제관 중 한 사 람의 집에서 수확한 햅쌀로 짓는다. 진설할 때는 밥을 지은 작은 솥 그대로 주걱을 꽂아 올린다. 잡은 그대로 소머리를 올릴 때에는 식칼을 입에 물린다. 술은 원래 제당에서 빚어야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므로 산신제 1 주일 전에 제관 중 한명이 담근다. 제가 시작 되면 초에 불을 붙이고 초헌이 술을 한잔 올린다. 이어 축관이 축을 읊고 아헌과 종헌이 각각 술 을 올린다. 축문은 예전부터 쓰인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쓴 것을 복사하고, 복사한 축문에 매년마다 년과 일을 적어 사용한 뒤 불에 태워 없앤다. 마지막으로 소지를 올리는데, 1,000원씩을 모금 했을 경우에는 돈을 낸 집 모두의 소지를 올리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마을 전체 소지 한 장만을 올린다. 529 산제당 내부 530 산제당 아궁이 제7장 신앙 417

3 3일(음력 10월 2일) 제의가 끝나면 제관들은 음식, 천막을 치우고 주변정리를 한다. 음식은 일단 제당 안에 보관 하고 제관들 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각자 집으로 내려와 짧은 잠을 청한다. 12시경이 되면 제관들은 음식을 하룡에 있는 1리 마을회관으로 가지고 내려온다. 소머리는 삶아서 내고, 제에 올린 술과 밥, 새로이 지은 밥 등을 음복하며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점심을 먹는다. 마을사람들은 제관에 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고 어떤 말로 마을의 안녕을 빌었는지를 물어 본다. 모두가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 며 한해의 농사와 집안 얘기를 나누고 흥이 돋으면 풍물을 치고 놀았다. 토지지신 촛 대 밥 소머리 마른 명태 촛 대 무나물 배추 나물 고사리 나물 대추 밥 곶감 사과 산자 술병 술잔 531 솥과 밥주걱 532 산신제 진설도 (3) 산제 관련 자료 <하룡 산신제 축문> 維 歲 次 <월, 일, 년> 幼 學 姓 名, 敢 昭 告 于 土 地 之 神, 伏 惟 顧 我, 四 十 餘 戶 之 人, 소 種 而, 生 者, 山 之 氣 也, 四 十 餘 家 之 口, 소 而 居 者, 山 之 土 也, 人 非, 神, 誰 賴, 神 非, 人 疇 依, 家 家 致 潔, 人 人 盡 誠, 擇, 吉 日, 掃 明 壇, 敢 薦, 明 神 之, 己 佑, 者 而 亦 祈, 明 神 之 將, 陰 隙 者, 男 耕 桑, 皆 受, 基 宜, 士 業 商, 兵 軍, 得 安, 各 得, 基 福, 招, 吉 祥 於, 巷, 之 口, 逐, 染 疫 於, 山 之 左, 一 日, 二 日 無 作, 神, 羞, 千 歲, 萬 歲, 永 賴, 神 休, 敢 裝, 牲 페, 庶 幾, 歆 格, 尙, 饗 제물잔설해노코소리벗틈 相 喆 향사하세요 3번 반복 418 연기군 동면 용호1리

533 534 535 536 538 537 539 533 현재 사용 중인 목기 534 예전 제기 535 문서 보관함 536 향토 유적 지정서 537 제의 538 행전 539 도포끈 419 제7장 신앙

540 541 542 543 540 항아리와 도구들 541 전선과 천막 542 조리 도구 543 촛대 (4) 신앙 조직 산제계 용호1리는 오랫동안 산제계를 운영해왔다. 이 산제계에 관해서는 산제계좌목 이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산제를 올릴 때 제물과 산제당 유지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고 산제를 유지해 나가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현재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신계가 그 이름은 남아 있으나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지는 않는다. 1980년대에 산제당 보수와 관련해서 용호1리의 1반과 2반, 3 반의 의견이 맞지 않고, 산신제를 유지해 나가는 데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자 용호1리 1반과 2반이 낡은터에 있는 용두암에서 산신제를 올리기로 하고 산제계에서 탈퇴를 함으로써 계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1990년대에 산제계와 하룡 연반계를 통합함으로써 산신제를 지낼 때 자금을 모은다 하더라도 현재 연반계 의 기금을 이용해서 제물 구입과 산제당 보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연반계 임원으로 선출한 사람 은 상장례와 마을관광 및 노인잔치 등 연반계 업무뿐만 아니라 산제와 관련한 업무까지 모두 맡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엄연히 산제계에서는 보다 상세히 결산 보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통합된 조직은 아니다. 단지 통합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산제계 정기 총회는 연반계 총회를 여는 정월 보름에 함께 열지만 토 420 연기군 동면 용호1리

의 안건이 있는 경우에는 임시로 모일 수 있다. 산제계 총회에서는 지난 해 산제에서 수입과 지출금액을 결 산하며, 임원진을 선출한다. 회의 장소는 하룡의 용호1리 마을 회관이다. 2005년도까지 산제계 회장은 장래 묵, 총무 임혁철이었으며, 2006년도에 새로 선출하여서 회장이 임혁철이고, 총무는 하룡 반장을 맡고 있는 장지순이다. 최근 2년 동안 산제계에서는 산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산제 회의를 수차례 열었으나 산제 금기를 지켜야 하는 시기에 마을에서 부정적인 일이 생기는 등 산제를 제때 진행시키지 못했다. 2006년도 2월에 최종적으 로 회의를 열어서 2006년도 음력 9월에는 산제를 올릴 계획을 하고 있다. 다음 표는 지난 2003년도 산제 결 산 보고와 2005년도~2006년도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2006년도 2월에 있었던 연반계 겸 산 제계 회의 내용은 사회 조직에 더 자세히 정리가 되어있다. 표33. 2003년도 산제 결산 보고 수 입(원) 지 출(원) 이월금 \ 400,000 도포 유건 \ 142,000 동면군의원 장래철 \50,000 소머리 \ 110,000 대전 장명석 \ 100,000 장래길 \ 30,000 장영석 \ 50,000 김재인 모친 \ 20,000 재물, 떡 1말, 밥쌀 1말, 재물(장래묵) 장길순 백미 5대 임귀철 나무 장봉훈 짚 창호지, 붓, 목정 \ 8,900 문종이 10장 \ 2,000 동태 10마리 \ 13,000 쟁반 \ 5,000 식칼 \ 5,000 전구, 소켓, 페인트 \ 17,300 합계 \750,000 합계 \ 303,200 잔액 \ 46,800 총 잔액 \ 446,800 표34. 2005년~2006년도 산제계 회의 과정 회의 일정 2005년 음력 9월 12월 경 2006년 2월 11일 2006년 2월 12일 2006년 2월 25일 2006년 음력 9월 회의 내용 마을에 상여가 지나가는 바람에 산신제가 2006년 2월로 연기됨 마을 회관에서 주민들이 모여서 2006년 정월 보름에 산제를 지내기로 함 산제 제관들 중 일부가 금기를 지키지 못한 관계로 산제가 취소됨 연반계 총회 때에 2월 25일에 다시 산제를 지내기로 합의함 마을에서 상이 난 것은 아니나 마을로 상여가 들어오는 바람에 산제가 다시 취소됨 산신제 지낼 예정임 제7장 신앙 421

4. 무속 신앙 - 마을 절 용두암 1) 용두암 소개 용두암은 1980년대 중반에 용호1리 낡은 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절이나, 정식 절로 등록 되어있지 않은 곳 으로서 불상을 모셔놓은 법당과 신당을 비롯하여 두 채의 가옥, 석불상, 우물로 구성된 작은 암자이다. 이곳 에는 이숙자(여, 1931년생)가 보살로 있으면서 불공을 비롯하여 신점, 재수굿, 치병굿 등을 하고 있다. 보살 이숙자는 연기군 동면 문주리 태생으로 그곳에서 19세에 내판의 김석두에게 시집을 가서 살다가 그가 군대 에 가있을 때 집 앞 우물에서 3년간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다가 신력이 내렸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재수 풀이를 해주던 이씨는 그곳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쌀과 돈으로 무당 굿을 하였다고 한 다. 줄곧 내판에서 살던 이보살은 용호1리 현재 자리 에서 무당을 하던 노인이 50만원에 집을 맡으라고 사 정하여서 이 곳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집은 본디 이 보살의 할아버지가 재가하여 거주하던 집으로 1950년대 초(1953년으로 추정)에 그 가족들이 모두 청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 보살이 용왕 고사를 올리는 우물 역시 그의 할아버지가 팠던 것으로 120여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44 용두암 전경 545 불상 546 용두암 보살 이숙자 422 연기군 동면 용호1리

547 548 549 550 547 용두암 법당 548 거주 공간 549 이숙자 보살 거주 공간 550 용두암 우물 2) 불공 드리기 용호1리 주민들은 설부터 정월 대보름 전까지 용두암을 비롯하여 인근 절에서 가족들의 한해 부귀와 안녕 을 소원하기 위해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용두암에서 정월 대보름 시주 쌀이 7 포대가 될 정도였다고 하나 현재에는 3포대 가량 된다며 신도 수가 반 절로 줄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주민들이 불공을 드린다고 하였다. 조사자가 용두암을 찾은 9일 오후 역시 주민 3명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당일 참석한 주민은 김인희씨 (여, 마을 이장 부인)과 장래묵(하룡 연반계 계장)의 부인과 마을 여자 주민이었으며, 마침 김인희씨는 불공을 끝내고 나오던 중이었다. 집 뒤 작은 법당으로 가보니 이숙자 보살과 장래묵의 부인이 함께 서서 불공을 드리 고 있었다. 법당 안은 문을 열어둔터라 겨울 찬 기운이 그대로 배어 있었지만 그곳에 서있는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보살의 경 읽는 소리와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법당 안을 울렸다. 보살은 자식의 수를 물어보더니 경을 읊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이씨가 불공을 드리는 것을 참여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다. 제7장 신앙 423

조사 일시 : 2006년 2월 9일 오후 2시 35분~ 저녁 7시 20분 조사 장소 : 용두암 복장 진원 전수 전완...(탕탕탕)... 천완 광명 전수 밀웡...배다라니 낙향 도사 말 도루 도루 이리 저리 도루도루 반야 반야 새바라야...(탕탕탕탕) 나무 방주 시방 나무 상주 시방 나무 상주 시바아앙 나무 상주 시방 삼새 부처님께 옵소 자비하신 원 령으로 미옥한 우리 중생 들이옵니다. 크게 많은 모든 허물 모든 업장들을 돌보소소 나무 관세음 보살 나무 관세음 보살 시방 삼색 부처님께옵서 자비하신 훨령으로 크고 마는 모든 허물을 다 제치고 인생이 란 게 크고 많은 모든 허물을 다 지치고 인생이라니 크고 많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자 (탕탕탕) 일체 중생 들을 모든 무병 장수 일취 월장 받들고 악한 일 없이 (탕탕탕) 받들어 주시옵소사 충청남도 연기군이요 동면 용호리에도 하룡리에 부락이랍니다. (탕탕탕탕) 장씨 댁 한 가정이시니...(중략)... 이렇듯 이보살은 불상 앞에서 계속 목탁을 두드리면서 경을 읊다가 장래묵씨 집안과 자식들의 삼재를 풀 어주었고, 장래묵의 부인은 그 옆에서 두 손을 모아서 기도를 드리다가 절도 하면서 보조를 맞추었다. 다시 이보살의 경 읽는 소리가 높아지더니 서서히 끝이 났다. 악삼재를 제쳐주시고 어질고 선하신 한가정입니다. 그저 다섯 삼재가 오셨어도 다 합심으로 삼잽니다. 깊이 깊이 잠드시어 서~~~ 삼재 재우시고 혼수 삼재, 재수 삼재, 명기 내시고 서기 내시어 다 한집에서 이렇게 많이~ 많이 오신 삼재님은 내 귀에다 풍 경을 달고 으~~동남풍이 언뜻 불어와서 징하고 좋을 시절에 목 삼재님네가 도량을 하신답니다. 악 삼 재랑은 황아 춘풍 그늘 속에다가 깊이 깊이 잠드셔서 그저 장씨 한 가정에 아무런 연고 없이 그냥 그저 오뉴월 영천이 춘풍이 오므락 뚝딱 때려고 아무런 연고 없이 붙들고 받드시는 건 삼재님이시랍니다. 눈 도 꼼짝 하지 않게 그저 병술년 해오년에는 그저 이렇게 오실 적에는 몰랐적에는 가실 적에는 재수를 그저 앉은 자리 운도 주고 앉은 자리 명기 내고 이렇게 다 삼재님네가 오셨다 가시는 줄을 모르고 금년 태세가 금년 운기 자랑하시고 재수 자랑하시는 삼재님이 능직이시랍니다. 그저 으~장씨 한 가정에 아 무런 연고 없이 추들고 받들어서 일취 월장 시켜주시고 다 그저 친손자 외손자들 아주 아들에게 그저 무진생 나는 하남 자손, 중남 자손 다, 그저 하남 자손 삼형제 자손들 그저 어쨌든지 한 삼줄 한 탯줄에 다가 태어난 자손들 그저 재수를 줘도 같이 주고 운을 줘도 같이 주고 복을 줘도 같이 주고, 부모님 효도 를 줘도 같이 주고 나랏님 충성을 줘도 같이 주셔서, 삼형제 자손들이 그저 널피 널피 이 나라에 충신하 고 그저 어쨌든지 다 악한 자 제쳐놓고 착한 자만 선자에다 말끝마다 향내 나게, 하~~타관 놀에다(?) 권 세 높고 탕! 직장에를 나가더라도 그저 야튼 사람 권리 놓아서 신통 원력을 점지해주시길 부처님 도량 에 능직이랍니다. 일년 열두달 수년 가더라도 영복을 점지하시어 삼천 갑자 수병 장수 점지하랍니다. (탕탕탕탕...다시 큰 소리로 경을 읊으면서) 424 연기군 동면 용호1리

걱정마라 풍랑 간에 상문만 조심해라. 풍랑 간에 백배 사죄하고 상문만 조심하면 걱정마라 무병 장 수 시켜주마아~~ 땟밥 주고 말밥 주고,, (탕탕탕탕!) 사오월유월이냐... (탕!탕!) 칠팔월 구시월.(탕탕탕탕 탕 탕! 탕!) 으으 칠 팔월이로구나앙.. (탕탕탕탕) 상문 살이 쟁겼으니 (탕!) 상문만 조심하면 (탕!탕!) 권명 대주는 보상할테니 걱정 하지 말아라으아.. 소원 성불 (탕탕탕...탕 탕!)... 나무 관세음 보살..(탕...탕탕) 나무 관세음 보살... 관 (탕!) 세음 보살.. 관세음 보사알 관세음 보사알... 불공은 20여분이 진행되었으며, 보살 이숙자는 끝나고 나서 장래묵의 부인에게 괜찮으네.. 아주 많이 오 셨어. 너무. 손님들이 많이 오셨어도 괜찮아.. 라며 올 한해 삼재가 들었지만 괜찮을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장래묵 부인은 네.. 라고 답하며 한쪽에 두었던 가방을 집어서 내려갔으며, 보살은 마을 신도들이 불상 앞 에 시주한 돈을 걷고 나서 음복할 떡과 과일을 갖고 바로 내려왔다. 법당 안에는 정월 대보름 불공을 드린 사 람들이 한 되씩 놓고 간 쌀이 포대자루로 놓여있었고, 불상 앞에도 과일과 사탕 등이 놓여있었다. 551 552 553 554 555 551 시주 쌀포대 552 절하기 553 절을 하는 주민 554 불공을 드리는 주민과 이숙자 보살 555 시줏돈을 거두는 보살 제7장 신앙 425

법당 밑 보살의 집에 내려와서 장래묵의 부인은 과일을 몇 조각 집어먹더니 옷에서 돈 2만원을 꺼내면서 이거 드릴려고 들어왔어요 하면서 보살에게 불공비 2만원을 건네었다. 그러자 보살은 그에게 당부하였다. 5분이 들어왔는데 괜찮을꺼여. 다만 7월 달에 초상집 갈일이 생기는데 그때 상문살이 끼니 거기는 가지마 하면서 한 해 동안 가려야 할 것을 알려주었다. 아침부터 법당에서 와서 순서를 기다리느라 피곤한 기색이 돌던 장래묵의 부인은 잠시 앉아 있다가 집으로 내려갔다. 용호1구 주민들은 설을 보낸 뒤에 정월 대보름을 기점으로 해서 용두암에 와서 가정의 화목과 자녀들의 건강 을 비는 불공을 드렸으며, 보살에게 남편과 자신, 그리고 자식들의 한해 신수와 생기 복덕을 들었다. 3) 고사 지내기 (1) 용왕 고사의 알림과 준비 과정 매해 정월 12일에 이숙자 보살은 돌탑 및 산신고사와 용왕고사를 지낸다. 용두암의 돌탑은 법당 뒷편에 있 다. 용왕고사는 우물에서 지내므로 우물은 미리 청소해야 한다. 올해에는 2월 11일에 모터로 물을 품어내었지 만 당일 한 번 더 돌려 부셔내기 위해서 인부를 불렀다. 그러나 그가 오지 않아서 이 보살은 우물 주변을 빗자 루로 쓸고 주변을 정돈하는 것으로 청소를 끝냈다. 고사에 올릴 제물은 11일 조치원 장에서 구입하였는데, 제 물을 장만하는데 비용은 12만원 정도 들었다고 한다. 이날 장만한 제물은 고사와 보름날 아침 불공에 쓰였다. 이숙자 보살은 산신고사와 용왕고사 일정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11일 저녁 마을 회관으로 내려 갔다. 그러나 당일 마을 주민들은 오지 않았으며, 내판에 있는 오랜 신도가 와서 도왔다. 평소에는 4~5명의 주민들이 도왔지만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제각기 집에 볼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52) 마을 주민 한치순은 파 작업에서 돌아와서 씻느라 시간을 놓쳤고, 장달진 노인회장 부인은 손님이 찾아오는 바람에 시간을 놓쳤다고 하였다. 이숙자는 섭섭해 하는 기색으로 내판 신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뒤에 다음날 마을 사람들에게 오지 않은 이유를 물어봐야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53) 이숙자 역시 당일 바람도 불고 우물 청소도 끝내지 못해서 고사를 지낼지 말지 망설였으나 이내 마음을 굳 혀 지내기로 하였다. 매년 정해진 날에 고사를 지내기 때문에 다시 날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판 신도는 하루 미루면 한 달이여 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이숙자는 먼저 떡을 쪘다. 시루에 종이를 깐 뒤 쌀가루를 퍼 담고 나서 시루 이음새를 붙이기 위해 물기 있는 천에 밀가루를 묻혔다. 내판 신도는 그동안 채 썬 무를 들깨 기름에 볶아 무나물을 했다. 흰쌀을 냄비에 앉혔고, 미역국도 고기를 넣지 않고 맑게 끓였다. 이숙자는 과일 과 밤, 대추, 명태 등도 신당에서 가져와서 씻고 물기도 닦았다. 작은 쟁반에 떡 시루와 청수, 감, 밤, 대추, 명 태 한 마리와 술병을 놓았다. 촛불이 바람에 꺼질 수 있어서 종이컵 초를 가져갔다. 산신고사 제물은 비교적 간단하므로 이숙자 혼자 갔으며 내판 보살은 남아서 용왕고사 제수 준비를 하였다. 52) 이숙자가 말하기를 과거에는 열명이 넘는 사람들이 와서 함께 고사를 올렸다고 하나 이것이 정확이 어느때를 말하는 것은 확실치 않 다. 그 이유는 마을 주민들은 최근 고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4~5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53) 이숙자는 나에게 자네가 와서 안왔는 가보다 라는 말을 전했지만 실상 촬영을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을 주민이 오지 않았는지는 확실 치 않다. 내가 한치순에게 물어봤을 때는 그런 기색을 읽지 못했고, 오히려 (너라도)가서 잘 도와줬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이 다. 진정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참석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용두암 보살과 신도들 사이에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는 아직 알수는없다. 426 연기군 동면 용호1리

556 557 558 559 560 561 556 시루떡 찌기 557 시루 이음새 붙이기 558 무 나물 만들기 559 제물 꺼내기 560 우물 주변 청소하기 561 미역국과 밥끓이기 (2) 산신 고사 지내기 산신은 남신이므로 의복을 차려입지 않는다. 6시 30분 이숙자 보살은 돌탑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놓고 촛 불을 킨 다음 술을 부었다. 이날 바람이 몹시 불어서 라이터 불이 계속 꺼지는 바람에 어렵게 촛불을 부쳤으 나, 그 불도 계속 흔들렸다. 이 보살은 마치 사람에게 하듯 돌탑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 시러워요. 나물 볶고 밥 하고 이만한 걸 들고 오는데도 다친 허리가 아프고... 이숙자는 과거에는 제수를 푸짐하게 장만했으나 허리가 아픈 다음부터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숙자 는 목탁을 두드리면서 경을 읊기 시작했고, 경은 물 흐르듯 나왔다. 손을 하늘로 올려 가슴 앞에서 모은 다음 허리를 숙이면서 이씨는 산신에게 용두암에 찾아왔던 사람들을 대면서 복을 기원하였다. 정면에서 동서남 제7장 신앙 427

북으로 몸을 돌려서 절을 한 다음 제자리로 서서 절을 한 뒤 탑 주변에 술을 붓고는 마무리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성주 신께 청수와 미역국, 밥, 촛불을 올렸다. (3) 용왕고사 지내기 이숙자가 산신고사를 마치자 내판 신도는 쟁반에 제물을 담아 샘에 가져갔다. 이숙자는 그 동안 하얀 신 복을 입었다. 용왕고사에서는 용왕신이 여신이어서 옷을 예쁘게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샘고사는 6시 50분 경 부터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바깥에는 손끝이 시릴 만큼 참 바람이 불어서 이숙자의 옷자락이 계속 바람에 날렸다. 라이터불도 잘 켜지지 않아서 간신히 촛불을 켰다. 술을 붓고 향 한 줌을 꽂았다. 562 563 564 565 566 562 준비하기 563 돌탑과 고사 음식 564 경을 읊는 이숙자 565 동쪽으로 절을 하는 모습 566 남쪽으로 절을 하는 모습 428 연기군 동면 용호1리

567 568 569 570 571 567 서쪽으로 절을 하는 모습 568 술을 붓기 569 돌탑 주변에 술붓기 570 성주신께 제물 놓는 모습 571 성주신 모시기 밖은 어두컴컴했으며, 집 앞의 가로등이 그들을 밝혀주었다. 이숙자는 무복과 고깔을 쓰고 징 한방을 크게 쳤다. 큰 소리로 경을 읊더니 이내 빠른 소리로 단숨에 몰입해갔다. 쾅 쾅 쾅 징소리가 사방으로 퍼졌 다. 그녀는 용호1리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용왕이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빌었다. 이숙자는 동서남북을 돌면서 절하고 우물을 돈 다음 소지 종이에 불을 붙였다. 종이가 타 들어가자 올려 보내기 위해 손을 높였다. 종이는 바람 때문인지 올라가다가 다시 떨어졌다. 이숙자도 바람이 불어서 잘 안 올라가네 라며 작은 목소리로 바람을 탓했다. 소지를 태운 뒤 술을 우물에 붓고 음식도 떨어뜨렸다. 이숙자 와 내판 신도는 음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사가 끝나니 7시 20분경이었다. 제7장 신앙 429

572 573 574 575 576 577 578 579 572 무복을 입는 이숙자 573 상차리기 574 향 피우기 575 동쪽으로 절하기 576 서쪽으로 절하기 577 우물 돌기 578 소지하기 579 고시래 하기 430 연기군 동면 용호1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