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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제4장 신앙생활 석교리는 인근에 있는 마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속인이 많고, 마을 공동체 신앙과 가정신앙이 현재 에도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기독교와 천주교 등의 종교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독교의 경우 정착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기독교 정착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양 상은 석교리 사람들의 신앙관을 잘 드러내 준다. 한편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에 마을이 포함되면서 마을 공동체 신앙이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 개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산신제와 탑제의 경우 점차 그 의미와 형식이 퇴색하던 것이 행정중심복합도시 189 석교리의 신앙시설물 116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문제로 인해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더욱 마을제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행정중 심복합도시 건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마을의 상황에서 마을제가 더욱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마 을 사람들은 마을제에 그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탑제와 산신제를 지내며 탑신과 산신에게 마을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인해 없어지는 것을 막아달라는 구체적인 바람을 표현했다. 마 을의 공동체 신앙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상황에서 그 이전과는 다른 역동성을 가진 것이다. 이 장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공동체 신앙, 무속, 가정신앙, 기성종교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공동체 신앙으로는 산신제, 탑제, 봉화제를 기술하였다. 봉화제는 개발 상황 속에서 올해 처음으로 생겨난 공동체 의례로, 생겨나게 된 배경과 진행과정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개별신앙으로는 무속, 불교, 기독 교, 천주교, 가정신앙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으며, 이중 무속에 대한 비중이 크게 기술되고 있다. 석교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무속인의 숫자가 월등하게 많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더욱 특징적인 것은 무속인과 마을 사람들의 관계가 매우 가깝고 자연스러운 점이었다. 이것은 예전부터 마을에 무속인인 많았 던 석교리의 내력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또한 지금 살고 있는 무속인들이 주로 석교리로 시집을 와서 무업 을 시작한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무속 부분에서는 석교리의 무속인의 내력, 입무과정, 무업활동, 마을 사 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기술하였다. 1. 공동체 신앙 석교리의 공동체 신앙은 산신제와 탑제가 있다. 산신제와 탑제의 시작이 언제인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사람들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제와 탑제 를 지내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해마다 거르지 않고 제를 지내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 8월 11일에 석교리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예정지로 발표되면서 마을의 공동 의례는 많은 변화 양상을 보였다. 석교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 내에서 개발에 대한 극심한 반대양상을 보였는데, 이 과 정에서 마을의 공동의례는 기존의 의미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면이 있었다. 기존에 산신제와 탑제가 마을의 무사와 안녕을 막연하게 기원하는 것이었다면, 개발상황에서는 국가의 건설 사업에 의해 사라질 위 기에 처한 마을을 지켜달라는 간곡한 바람이 제의 진행과정에서 시종 줄곧 표현되었다. 조선중기에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탑신과 산신을 모셔 그 위기를 모면했다면, 현재 마을 사람들은 국가의 건설 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마을을 지켜달라는 바람으로 공동 의례를 지내게 된 것이다. 한편 새로운 공동체 신앙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정월대보름 탑제가 끝나고 봉화제라는 마을 공 동제의가 만들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탑제가 끝난 후 달집을 만들어 태우는 의식을 봉화제라 명명하고 진행 하였다. 봉화제의 내용과 진행과정에는 개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입장과 고민이 잘 드러나고 있다. 마을의 공동체 신앙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건설과정에서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조사자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며 공동체 신앙을 살펴보았다. 제4장 신앙생활 117

1) 탑제와 산신제의 유래와 역사 산신제와 탑제의 시작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데, 마을 사람들은 조선시대 중기로 짐작하고 있다. 심 규만(1938년생, 남)씨는 임진왜란 전후로 그 시기를 짐작했는데, 어려서부터 마을 어른들이 임진왜란 때와 연관시켜 그 시작 시기를 얘기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 임진왜란 전후에 마을 전체가 돌림병에 걸려 사 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지나가던 스님이 탑을 세우고 산신제를 정성껏 지내면 마을이 평안하게 될 것이 라고 하면서 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현재까지 마을 사람들은 산신제는 음력으로 시월 초하루에, 탑제는 정월 대보름에 제를 지낸다. 심규만씨는 연기군 내에서 산신제와 탑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흔치 않다며 마을의 토속문화 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심규만 노인회장이 이야기하는 산신제와 탑제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는데. 아주 옛날에는 왜. 지금은 홍역 마마 같은 것 예방주사를 놓잖아. 옛날에는 그게 없었잖아. 근데 홍역이 들으면 애기들이 싹 죽잖아. 싹 죽고 어른들도 마마 걸리면 얼굴이 얽고 그러 잖아. 이 부락이 역병이 부락에 들어서.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거여. 어른들이 요 앞 중간 탑 옆에 묘가 있어. 지금은 많이 변화가 됐지만 이렇게 동산이었다고. 어른들이 거기 모여서 걱정을 한 거여. 동네가 역병이 들어 폐동을 하것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스님이 그 지금 말하자면 스님이 지 나가다가 동네사람들이 많이 앉아걱정을 하니까 같이 않아 얘기를 한 거여. 스님한테 물어 본거여. 어 떻게 해야 부락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노승이 그런 얘기를 해주고 간 거여. 부락을 보존하려 면 저 지금은 여기가 큰길이지만 예전에는 거기가 큰길이라고. 고개 넘어오는데 거기 입구에다가 돌탑을 하나 놓고 중간에 하나 놓고 여기에 탑하나 놓고. 보름날 탑제를 지내라. 그러면 이 부락이 보존을 한다 해서 그때부터 시작이 됐다는 거여. 그게 그것이 우리 부 락에 임진왜란때 생겼는지 임진왜란이 1592년 정도 될 거여. 그때 탄생 했는지. 임오군란때 탄생했는 지 그때 그 시기로 보는 거여. 그 시기로 보니께. 이게 생겼고. 저 뒤에다가 산제당을 짓고 거기다 산신 제를 10월 초하루날 지내라 해가지고 산신제 지내고 탑제하고 그래서 부락이 유지됐다 이거여. 지금도 우리 부락같이 하는 데가 별로 없어. 지금도 잘돼. 우리 부락은 토속문화. 연기군내에서 자부를 해. 토속 문화로 자부를 한다고.(심규만, 1938년생, 남) 탑제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미신타파를 하고 조국 을 근대화 한다는 명목으로 박정희 정권은 석교리의 탑제 역시 지내지 말고 탑을 때려 부수라 고 각 행정 단위에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 심규만씨는 마을 이장을 보고 있으면서 탑을 없애지 않고 보호했 다고 한다. 오히려 탑 앞에 제단을 만들고 탑을 정비하는 노력을 보였다. 새마을 운동때, 박정희 대통령때 미신타파한다고 다 때려부수라고 하는데 내가 이장 볼 때 내가 안 때려부셨어. 다른 부락은 다 때려부셨어. 호탄은 다 때려부셨다가 다시 만들고. 우리 부락은 안 때려 부 셨어. 이렇게 잘 해놨어. 미신을 믿으니께 타파하라는 거지 토속문화아녀 118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석교리 탑제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새마을 사업 때 다른 마을에서 탑제를 비롯한 마을의 제가 많이 사라 진 것과 달리 아직까지 그 의미를 유지하며 제가 진행되고 있다. 근래 들어 탑제에 관한 마을 주민들의 참여 나 금기에 관한 엄격한 규율이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1년 행사 중 탑제를 가 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2006년에 진행된 탑제는 그 이전과 비교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을이 개발상황에 직면하면서 마 을 사람들은 그 이전과는 다르게 탑제에 의미를 부여했다. 마을 사람들은 탑신에게 마을이 개발되지 않았으 면 하는 구체적인 바람을 기원했다. 마을 이장을 비롯한 마을을 이끌어가는 대표들은 탑제를 정성스럽게 올 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했다. 지난해보다 더욱 원칙적이고 활기 있게 탑제를 지내고자 하는 노력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며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이 많은 만큼 탑제에서 기원하는 축원 또한 이러한 마을사람들의 소망이 깊게 반영되어 있었다. 2) 탑제 탑제는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 아침에 진행된다. 예전에는 새벽 첫닭이 울기 전에 탑제를 지냈다고 하나 현재는 아침 9시를 전후로 제가 시작된다. 마을에서는 탑제를 지내기 위해서 제관과 축관을 선출하고 제를 준비한다. 제관은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고 탑제 당일 제사를 주관하며, 축관은 축문을 쓰고 탑제 당 일 제관을 돕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과 축관을 선출했다고 하나, 현재는 이장이 제 관이 되고 노인회장이 축관이 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 2006년 탑제의 성격 2006년 정월대보름 탑제는 다른 해보다 더욱 활기차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인 해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탑제가 더욱 형식과 내용면에서 강화되는 면을 보였다. 탑제를 지낼 당시 마을사람들은 토지공사의 실사를 거의 받지 않은 상태였으며,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대해 대항이 아닌 저 항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마을 지도부와 마을 사람들은 탑제를 지내며 마을 사람들의 단합을 유도 하고, 마을의 역사성을 확인하며 개발에 대한 반대운동에 탄력을 얻고자 하였다. 마을 사람들 또한 탑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점차 의미와 형식이 약화되어가던 탑제가 행정중심복합도시 개발 상황에서 강화 되는 면모를 보인 것이다. (2) 2006년 탑제의 진행 과정 조사자는 2006년 2월 8일부터 2월 12일까지 탑제의 준비와 진행과정을 참여관찰 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참여 관찰한 내용을 시간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2006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있었던 탑제의 준비과정, 진 행과정에 촛점을 두고 서술하였다. 제4장 신앙생활 119

표8. 2006년 탑제의 준비와 전개 과정 일자 내용 시간 2월 10일 제관선정 오후 7시 2월 8일 풍물 연습시작 오후 2시 2월 11일 (탑제 전날) 2월 12일 (탑제 당일) 축문 작성 왼새끼 만들기 마을 방송 탑제 장보기 부적쓰기 탑에 촛불 켜두기 탑제 음식 준비와 안내방송 1탑 탑제 지내기 2탑 탑제 지내기 3탑 탑제 지내기 지신밟기 오전 9시 오전 10시 40분 오후 1시 오후 2시 30분 오후 3시 30분 오후 6시 30분 오전 8시 50분 오전 9시 10분 오전 9시 35분 오전 10시 오전 11시 (3) 탑의 위치 석교리에 탑은 총 4기가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4개의 탑을 각각 1탑, 2탑, 3탑, 4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1 탑은 석교리에서 장재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 고개에 비석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서낭댕이 고개는 예전에 마을의 입구였으며, 1탑은 마을의 입구인 이 고개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마을 진입로가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삼성천 앞으로 도로가 생기면서 서낭댕이 고개는 마을 뒷길로 그 역할이 변화했지만, 마을 진입로 가 생기기 전에는 장재리와 대평리를 오고가는 마을의 입구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주로 농로와 서낭댕이 고개 밑에 사는 일부 마을 사람들이 대평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고개를 넘어 다니고 있다. 2탑은 1탑에서 마을 회관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남양홍씨들이 마을에 기증한 정자 옆에 돌탑의 형태로 세워져 있다. 정자를 만들면서 2탑은 본래의 크기의 절반이 땅속에 묻혀 예전 모양에서 많이 변형이 되었다. 3탑은 아랫마을 마을 창고 옆에 세워져 있는데, 돌 탑 꼭대기에 돼지모양의 돌이 올려 있다. 3탑 뒤에 있는 골자기 이름 또한 여기서 유래해 돼지골이라고 불린다. 3탑에 올려져 있는 돼지 모양의 돌에는 재미있는 이 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돼지 돌의 대가리 가 마을 앞뜰로 향하고 있고 동네 방향으로 똥 구녁 을 들이대고 있다는 것을 두고 돼지가 입으로 먹고 똥을 동네에 싸 동네에 복과 재수를 가져오게 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4탑은 3탑 바로 앞으로 3m 정도 사이를 두고 있다. 길 옆 논둑 위에 서있으며, 탑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 다. 4탑의 위치는 2탑과 4탑의 일직선상에 자리 잡고 있다. 탑제를 지낼 때 4탑 앞에는 따로 진설을 하지 않 고, 3탑 제가 끝나면 제관이 술을 받아서 탑위에 뿌리는 것으로 제가 끝난다. 120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4) 탑제의 준비 과정 탑제 준비는 탑제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다. 일주일 전부터 제관과 축관을 선정하는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탑제 전날 축문과 부적쓰기, 왼새끼꼬기, 제수장보기, 탑에 왼새끼 둘러치기, 탑에 촛불켜기 등의 대부분의 준비가 진행되었다. 1 제관선정 제관은 마을 이장으로 정해져 있으나 축관 선정을 두고 마을에서는 탑제 일주일 전부터 논의가 시작되었 다. 축관은 몇 년 전부터 노인회장이 하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올해 노인회장이 이종희(76세, 남)씨에서 심 규만(71세, 남)씨로 바뀌게 되면서 누구를 축관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이종희씨가 노인회 장을 내놓게 되었지만 다시한번탑제축관이되어축문을읽고싶다고하면서마을에서 논의들이 분분하게 진행이 되었다. 탑제 몇 일전에는 이종희씨가 축관이 되는 것으로 결정이 되는 듯 했으나 다시 이장과 마을 대표들이 논의를 한 끝에 탑제를 이틀 앞 둔 날에는 최종적으로 현재의 노인회장인 심규만씨가 축관을 맡기 로했다. 예전에는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과 축관을 선정했다고 하나 몇 년 전부터는 마을의 이장과 노인회장이 자 동적으로 제관과 축관을 맡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제관 역시 마을의 이장인 이국환씨가 맡았는데, 이씨는 집 안에 초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탑제 제관을 맡았다. 예전에는 탑제 금기가 강해 상을 당한 사람은 탑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러한 금기가 많이 사라져 제관인 이장이 상을 지냈음에도 탑제 제관이 되 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 풍물연습 탑제를 4일 정도 앞두고 마을에서는 장구, 꽹과리, 북, 징을 마을 창고에서 꺼내와 마을회관에 가져다 두 었다. 몇 년 전부터 풍물을 치던 노인들이 작고하면서 마을에서 풍물은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석교리 풍물이 아주 대단했다 면서 정월대보름날이면 하루 종일 풍물패들이 지신밟기를 하며 참 푸지게 놀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때 풍물을 잘 다루던 노인들이 작고하면서 점차적으로 석교리 의 풍물은 쇠했다고 하며, 2004년도에는 외부에서 풍물패를 불러와 탑제를 지내기도 했다. 노인회 총무인 이종영(1944년생, 남)씨는 이장이 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로 인해 자리를 많이 비워, 대부 분의 마을 대소사를 고민하고 관여하고 있는데 이번 탑제를 예전처럼 풍물을 치고 제를 올리고 싶어 했다. 탑제 일주일 전부터 조사자가 마을회관에 가서 탑제 얘기를 하면, 이번 탑제에는 풍물을 치면서 탑으로 가야 하는데 하며 어떻게 풍물을 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였다. 이번 탑제에는 이종영씨가 적극적으로 풍물을 칠 것을 고민하게 되면서, 탑제 일주일 전부터 풍물 연습이 시작되었다.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연습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니며, 이씨가 마을 창고에서 풍물을 꺼내 와 마을회관에 놓고 시간이 날 때 연습을 했다. 탑제 전에 두 번 정도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풍물 연습이 이 루어졌다. 풍물을 지휘하는 상쇠가 없어 조사자가 함께 가락을 맞추어주기도 했으며, 탑제 당일에는 금남면 신촌리에 사는 김아연씨를 초청해 상쇠를 맡기고 제를 진행하였다. 제4장 신앙생활 121

190 191 192 193 190, 191 풍물연습 192 징을 치고 있는 윤찬진씨 193 그릇을 잡고 노는 임천순씨 3 축문쓰기 탑제 전날 아침 심규만씨는 집에서 축문을 썼다. 심씨는 아침에 축문을 쓴 후 바로 마을회관으로 와 마을 사람들에게 내용을 설명했다. 심씨는 마을회관 방에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한문으로 된 축문의 내용을 설명해 줬는데, 특히 축문의 내용 중 관재소멸 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관재소멸은 관에서 백성들에게 주는 고통이라고 설명하며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오면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 지금의 마을 상황이 관재가 아니냐며 축문의 내용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번 축문은 더욱이 예전 이장인 이국환씨 아버지와 전 노인회장인 이종희 씨가 만들어 놓은 축문을 그대로 읽지 않고 심씨가 마을 상황에 맞추어 다시 쓴 것이다. 이 축문을 가지고 심 씨는 시간이 나는 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내용과 의미를 설명했다. 부락어른들이 탑에 축을 무슨 말을 읽는지 잘 모르시잖아. 이게 종희 형님이 읽던 축을 내가 그대로 베껴놨는디 약간만 두 군데만 내가 고쳤어요. 유세차 하는 것은 인제. 금년 병술년 아녀. 정월달이고 무 122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오라는 것은 초하루 일진입니다. 15일 오늘 일진이 임신일. 유학이라는 것은 나를 낮춰서 어린 배우는 사람. 여기는 축읽는 사람 이름을 쓰는거여. 감히 공경해서 이렇게 고해드립니다. 석탑지신이라는 것은 돌로 싼 탑의 신이시여. 어 이제 무엇을 할라고 하느냐하면 이제 석교리 이장 이국환이가 정성것 제물 을 올립니다 이런 얘깁니다. 고대궐상 높고 큰 집을 짓게하고 우리 동네가 크고 높고 훌륭한 집이 많이 들어서게 집을 짓게하고. 보호해주고 보호해주고. 또또 보호해주고. 이 부락을 이렇게 해주십사 하는 얘기여 이 탑에 신보고. 그렇게 해서 천년이 가도록 우리부락을 오래도록 잘 보존해주시오 그런 얘기 여. 그러고 사람은 번화하고 자식을 나면 잘크고 빛나게 해달라. 곡식 오곡이라고 안혀 오곡. 벼 보리 콩 이런것을. 여러 잡곡을 풍년되고 잘 되게 해주시오. 그 다음에 가축 집에서 기르는 짐승은 잘크게 해주 고 새끼도 잘 낫게 해주시오. 이러면 다 들어갔잖아. 훌륭한 집 다 잘 돼게 해달라고 했고. 그 다음 삼재 팔난여. 사람이 하늘에 비안오면 그것도 재해예요.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나는 것도 재해아녀요. 큰 재해아녀요. 불같은 것 나도 큰 재해 아니냐이거요. 그런 재를 하고 사람이 살라면 얼마나 고생이 많 습니까 그런 어려운 것. 이런 것. 옛날에는 지금은 그런 것이 없지만. 옛날에는 술 조사하지 뭐 우리 동 네 같으면 행정복합도시 와가지고 언제 떠날지모르는 그런 관재아녀 이게. 벼슬아치들이 우리 백성들 에게 주는 고통 그런 것을 다 없애게 해달라 이런 얘기여. 삼재팔난하고 관재를 다아 없애주시오. 그거 를 누가 얘기하느냐. 석교리 동민이 한마음이되서 기도하고 또 원합니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그냥 하면 안되잖아요. 이런 걸 빌라면 구신한테도 뭘 갔다줘야하잖아. 삼가서 술하고 삼사실과를 놓고서 정 성것 공경하고 공손하게 조옥 펴놓고 드립니다. 술은 마시고 떡같은 건 잡수고 가시오. 이게 그 얘기요. 이게 한문을 모르시는 양반들은 이게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모르잖아. 내가 설명을 했으니까 대충 알잖 아. 저런 뜻으로 읽는구나.(심규만, 1938년생, 남) 축문은 오후에 다시 한지에 붓글씨로 다시 작성이 되었는데, 이는 촬영팀 3) 의 요구에 의해서 붓글씨로 다 시 쓰게 된 것이다. 촬영팀은 탑제 기간 내내 마을 사람들에게 그림이 안나온다 는 표현을 하면서 이전과 는 다른 탑제 과정을 유도하고 전통식으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오후에 심규만씨는 붓을 가지고 한지에 축문 을다시썼다. 3) 2006년 탑제는 국립민속박물관 영상팀의 촬영이 함께 진행되었다. 영상팀은 탑제의 진행과정에서 좀더 전통적인 모습을 마을 사람 들에게 주문하기도 하였는데, 이를테면 제관의 복장을 한복으로 입어야한다는 것과 축문을 볼펜으로 쓸 것이 아니라 붓으로 썼으면 좋겠다는 것 등이다. 마을 사람들은 촬영팀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 촬영팀의 이러한 요구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마을의 탑제를 영 상으로 기록하러 왔다는 것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하고, 마을에 탑제가 영상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또 한 행정중심복합도시 반대 운동에서 방송국과 같은 매체에서 전혀 자신들이 이야기를 다루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촬영팀의 등장은 마치 방송에 탑제 지내는 것이 방영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지도부들은 기자들까지 적극적 으로 섭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마을의 탑제를 알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 내에 생태마을을 만들어 마을을 보존한다는 이야기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생태마을로 선정돼 마을이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제4장 신앙생활 123

194 심규만씨가 쓴 축문 195 축문의 내용을 설명하는 모습 4 왼새끼 꼬기 왼새끼는 탑제 전날 오전 10시 40분부터 꼬기 시작했다. 심규철(1942년생, 남)씨는 집에서 짚을 가져와 회 관 남자 노인방으로 가져왔다. 먼저 짚을 꼬기 시작하면서 옆에 앉아 있던 심규태(1936년생, 남), 이종명 (1930년생, 남), 이종영(1944년생, 남)씨가 함께 왼새끼 를 꼬기 시작했다. 마을 최고령인 김재원(1920년생, 남)씨도 잠깐 거들었는데, 이종영씨가 대신 왼새끼 를 이어받아 마지막까지 꼬았다. 왼새끼를 꼬는 도중 심규만씨는 심규태씨를 보고 형님은 왼손잽이라 왼새끼를 잘 꼰다고 둘러앉아 새 끼를 꼬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고 심씨는 그거하고는 달라 이사람아 하며 대답을 하기도 했다. 이종영씨 는 왼새끼가 생각만큼 잘 안된다며 왼새끼 안돼네 이거. 내가 새끼 잘 꼬는디. 우리아버지하고 하루 저녁에 가마니를 두 개를 삼았는디 하며 오랜만에 꼬는 왼새끼를 어색해했다. 왼새끼는 20분 정도 꼬았으며, 방에 노인들은 꼬는 것을 바라보며 왁자하게 이야기를 했다. 새끼를 꼬며 마을 사람들은 언제 탑에 왼새끼를 둘 러 멜 것인지를 의논하였으며, 시간은 오후 4시나 5시 정도에 매자고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탑 앞 에 촛불을 켜놓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해 탑제에 왼새끼는 해질무렵 회관에 남자들이 둘러 앉아 꼬았다고 하며, 이것을 탑에 들고 가 탑에 둘러쳤다. 탑에 왼새끼를 둘러치면 어둑어둑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촬영팀이 마을에 탑제를 영상으로 기록 하게 되면서 이러한 마을의 탑제 일정들이 조정이 되었다. 저녁에는 촬영이 잘 안된다는 촬영팀의 요청에 196 왼산내끼 꼬기 197 구경하는 노인들 124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왼새끼 꼬는 것과 탑에 왼새끼를 둘러매는 것 은 작년보다 급하게 진 행되었다. 5 탑에 왼새끼 둘러 매기 탑에 왼새끼 둘러메 기는 왼새끼를 꼰 다음 바로 진행되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었다. 보통 탑에 왼새 끼를 둘러메는 것은 탑 198 왼새끼를 꼬는 심규철씨 199 왼새끼를 꼬는 이종영씨 제 전날 저녁에 진행되었다고 하나, 촬영팀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이번 탑제에는 오전에 진행이 되었다. 지 난 해에는 오후에 마을회관에서 남자 노인들이 왼새끼를 꼬고, 그 옆에서 심규만씨가 천하대장군 이라는 부적을 썼다. 마을 사람들은 왼새끼와 부적을 가지고 탑으로 가서 탑에 왼새끼를 둘러치고 그 안에 부적을 붙였다고 한다. 이번 탑제에는 촬영팀이 오게 되면서 아침에 왼새끼를 꼬고 바로 이것을 탑으로 가져가 둘러매게 되었다. 부적은 종이가 없어 쓰지 못하고 왼새끼만 들고 탑에 둘러메었다. 오후에는 부적을 써서 다시 탑으로 가서 부적을 새끼 줄 안으로 끼워넣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하였다. 해지기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한다는 촬영팀의 요구에 탑제의 일정이 혼선을 빚으며 진행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촬영팀의 요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그동안 해왔던 탑제 과정을 지키는 것보다 촬영을 통해 석교리의 탑제가 알려지고 영상으로 기록 되는 것에 의미를 더 가지고 있었다. 촬영팀을 두고 마을에서는 각각의 이해와 요구가 엇갈리고 있었는데, 한 쪽에서는 마을이 없어지니까 영 상으로 남겨놓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하는 입장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영상으로 탑제 과정이 기록되면 200 1탑에 왼새끼 둘러매기 1 201 1탑에 왼새끼 둘러매기 2 제4장 신앙생활 125

서 이러한 가치 있는 민속이 외부에 더욱 알려졌으면 하는 기대들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복잡한 마 을 사람들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촬영팀의 요구는 더욱 마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 과정 에서 탑제의 준비와 진행은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와 과정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점심 시간 전까지 2탑까지 왼새끼 둘러매기 과정이 진행되었으며, 3탑은 오후에 천하대장군 부적을 쓰 고 난 다음 왼새끼를 둘러맸다. 202 203 204 205 202 2탑을 청소 203 왼새끼가 매어진 2탑 204 3탑에 왼새끼 둘러매기 205 4합에 왼새끼 매는 모습 6마을방송 점심식사를 마치고 심규만씨는 집으로 짚을 가지러 갔다. 내일 있을 봉화제 를 준비하기 위해 동아줄을 엮을 짚을 가지러 간 것이다. 심씨는 집에 가서 먼저 가축들 밥을 주고 짚을 오토바이에 싣고 마을 회관으로 왔다. 마을회관에 와서 심씨는 마을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탑제와 봉화제가 내일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 는 내용이었다. 특히 봉화제를 하는데 있어 마을사람 개개인들의 소원을 적어서 태울 소지를 준비하라는 내 용을 강조해서 방송하였다. 마을의 분위기는 탑제를 앞두고 점점 활기를 띠고 진행되고 있었다. 126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부락 전 주민들에게 안내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내일은 정월대보름 날입니다. 물론 보름 탑제를 모든 부락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침 일찌감치 탑제를 모시겠습니다만은 탑제를 모신 뒤에 어~ 부락민들이 봉화제 준비를 하고자 합니다. 봉화제를 올려서 우리 부락민들이 모든 소원을 빌을 수 있도록 다같이 봉화제에다가 자기 소원을 달아가지고 불로 태워서 모든 소원이 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원을 하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여러 가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라도 고통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라 도 탑제를 지낸 후에 봉화제를 오늘부터 준비를 해서 내일 해질 무렵에 아랫마을 제방 둑에서 식을 거 행하고자 합니다. 부락어른들께서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탑제와 내일 봉화제에 참석을 해주시기 바랍니 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는 왼새끼를 한발식이라도 꼬아가지고 거기다가 자기소원을 글로 종이에 써가 지고 산내끼에다 달아서 봉화준비한데다 걸어놓고서 불을 질러서 자기소원이 성취되도록 하는 식이 되 겠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준비를 하셔가지고 내일 탑제를 모신 뒤에 그 봉화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쓴 글과 동시에 산내끼다 달아서 왼새끼여야 됩니다. 왼새끼를 꼬아서 거기다 달아서 불을 질러 가지고 모든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금년에는 여러 가지 원하는 게 많이 있을 깁니다. 게중에도 출향하신 가족들이 잘 돼야지만 우리가 고향에서 편안한 거 아닙니까 그러한 소 원. 또 애기들이 잘 자라는 일취월장하게 하는 소원 또 노인양반들이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자는 듯 이 가게 해달라는 소원. 이러한 모든 소원을 달아서 내일 봉화제에 올리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 하오니 지금 방송을 듣는 데로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내일 탑제를 모시 고 봉화제 준비를 해서 저녁 4시나 5시 경에 봉화제를 올리려고 합니다. 그 장소는 아랫마을 제방둑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설치 한 뒤에 그걸 올릴 려고 하오니 준비를 하오니 아까 말씀 드린 데로 그러한 준 비를 해가지고 나오셔서 자기 소원을 봉화제에다 달아 메고 불을 놓아서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 니다. 이상 말씀드렸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회관으로 몇 명의 할머니들이 모였다. 방송을 잘 듣지 못한 할머니 몇 분이 무슨 일이 있는 지를 물어보러 온 것이다. 조선태 할머니는 심규만 어르신을 보고 예전에는 또랑또랑하니 알아듣게 잘 하 더니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예전처럼 못한다며 무슨 얘기를 했 는지 물었다. 전에 없던 봉화제를 하게 되면서 심규만씨와 봉화제를 함 께 의논한 마을의 남자들은 봉화제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마을 사람들 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206 마을 방송을 하고 있는 심규만 노인회장 7제수장보기 장보기는 탑제 전날 대평리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이장인 이국환(1960년생, 남)씨와 심규태(1936년생, 남)씨 둘이 마을회관에서 만나 장보기에 나섰다. 시간은 오후 2시 30분이었다. 탑제 장보기는 먼저 대평리 대운떡방앗간 에서 백설기 가루를 빻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떡방아를 맡긴 후에는 바로 맞은 편 밑 골목에 있는 미라상회 로 갔는데, 여기에서 대부분의 제수 장보기가 이루어졌다. 탑제 장보기는 3탑에 각각 제수 를 진설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품목으로 3군데 것을 구입했다. 이씨와 심씨는 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하며, 탑제 장보기를 하고 있으니 좋을 것으로 달라는 얘기를 먼저 꺼냈다. 먼저 이씨는 명태를 보기 시작했다. 심 제4장 신앙생활 127

씨는 옆에서 명태 양짝에 눈이 있는 것으로 달라고 해야혀 하며 이씨와 주인을 향해 이야기 했다. 명태는 탑에 2마리씩 올리기 때문에 총 6마리를 구입했는데, 양쪽에 눈이 있는 것을 일일이 살피고 신중하게 구입을 했다. 사과 또한 마찬가지로 심씨가 사과를 고르면서 마을 제사이기 때문에 썩은 것은 안 되고 좋을 것을 골 라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리 저리 사과를 뒤적였다. 심씨는 내가 우리 마누라 제사를 지내도 안 고르 는 데 첨 고르네. 내가 이게 흠이 있으면 나만 욕 얻어 먹는거 아녀 하며 마을 제사 장보기가 까다롭다는 것 을 설명했다. 과일을 고르는 중에 이씨는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설 명절에 담은 동동주가 있느냐고 확인을 하고, 3병 정도만 내일 쓰자고 부탁을 했다. 이씨와 심씨는 과일과 명태 등을 다 고른 후 마지막으로 소지 종 이를 주인에게 달라고 하였다. 주인은 한 10장도 주면 되겠느냐며 묻고 이씨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이씨 는 종이에 적어 놓은 제수 물품이 빠진 것이 없는 지를 확인하며 주인에게 계산을 부탁하였다. 계산기를 두 드리며 주인은 이씨에게 영수증을 써줘야 하느냐고 묻자 이씨는 써줘야지유. 동네 돈인데 내가 어떻게 장 부 없이 동네돈을 써유 하며 답을 했다. 장을 보고 마을회관에 도착한 시간은 3시 30분이었다. 207 208 209 210 207 백설기 가루를 빻고 있는 모습 208 명태의 눈을 확인하는 심규태씨 209 장을 보고 마을회관에 도착한 이국한 이장 210 사과와 배를 고르는 모습 128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11 부엌에 놓아둔 제수 212 미라상회에서 구입한 제수 영수증 표9. 탑제를 위한 제수 구입 내역 날짜 품목 장소 참여인원 이동수단 비용 백설기 떡방아 대운방앗간 이국환 심규태 자가용 5,000원 2월 11일 배 9개, 사과 9개, 곶감 2줄, 밤 1되, 대추 1되, 명태 6마리, 소지종이 10장, 초 3개 미라상회 이국환 심규태 자가용 74,000원 동동주 3병 이국환씨 고모가 명절에 담은 술을 얻어옴. 8 天 下 大 將 軍 부적쓰기 제수를 구입하기 위해 장을 보고 오는 사이 마을회관 남성노인방에서는 심규만씨가 天 下 大 將 軍 부적을 쓰고 있었다. 남성노인방에 있는 책상에 있던 벼루를 꺼내어 손수 붓글씨로 부적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심 씨는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붓글씨를 썼는데, 붓글씨를 잘쓴다 는 어른들의 얘기에 중학교 때 8 개월 배운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심씨는 먹을 갈 때는 팔의 기운으로 갈고, 쓸적에는 황소기운으로 쓰라는 213 부적을 쓰고 있는 모습 214 1탑에부적부치기 제4장 신앙생활 129

215 2탑에부적부치기 216 부적이 붙은 3탑 거여 이게 먹을 막 갈면 곱게 안 갈리거든. 먹을 갈 때는 팔의 기운으로 갈고 쓸 적에는 황소기운으로 써야 한다 하며 힘있게 부적을 써내려갔다. 부적은 총 4개의 탑에 붙일 4장을 만들었다. 부적을 완성한 후 심규만씨는 심규철씨와 함께 부적을 붙이 기 위해 탑으로 출발했다. 먼저 2탑으로 향했는데, 오전에 왼새끼를 둘러 매놓지 않아 먼저 서둘러서 2탑으 로 향한 것이다. 심규철씨는 금줄과 비를 들고, 심규만씨는 부적을 가지고 갔다. 심규철씨와 심규만씨는 먼 저 탑 주위를 비로 쓸고, 주위에 풀을 뽑아냈다. 탑 주위를 청소를 하는 도중 이종영씨, 이국환씨, 이종남씨 가 와서 일을 거들었다. 탑에 왼새끼는 심규만씨와 심규철씨가 메었으며, 그 다음에 부적은 심규만씨와 이 국환씨가 고정시켰다. 부적붙이기는 3탑, 1탑, 2탑의 순서로 진행이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2탑에 부적을 고 정시킨 시간은 오후 5시 10분이었다. 9탑에촛불켜기 탑제 전날의 마지막 준비는 탑에 촛불을 밝혀 놓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장 이국환씨는 탑에 불을 밝혀 놓 기 위해 1반 반장 김용태씨 집에 가서 양동이 를 얻어 와서 탑에 미리 놓아 두고 있었다. 심규만씨와 심규 철씨가 부적을 붙이고 있을 때 얻어 온 것이다. 양동이 에 촛불을 담아 놓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로, 이씨 217 1탑에촛불밝히기 218 2탑에 촛불 밝히기 219 3탑에촛불밝히기 130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는 예전에는 참기름으로 심지를 만들어 종발에다 놓고 불을 밝혀 놓았다며 예전 일을 이야기했다. 현재는 촛불을 켜놓고, 바람이 불어 꺼지기 때문에 양동이 를 씌워 놓아 꺼지는 것을 예방하고 있었다. 탑 앞에 밝 혀 놓은 촛불은 아침 탑제가 시작할 때까지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5) 탑제 지내기 다음 날 아침 마을회관에서는 탑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조사자가 마을회관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분주하게 준비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이복분(1938년생, 여), 윤찬진(1940 년생, 여), 송영칠(1939년생, 여), 허순금(1936년생, 여)씨가 둘러 앉아 시루떡을 불에 올려놓고 커피를 마시 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허순금씨는 시루번 반죽을 했다. 이들은 아침 8시에 와서 시루떡 만들 준비를 했다고 한다. 남성노인들은 방에 서서히 모이고 있었는데, 심규만씨와 심규철씨가 두루마기 차림으로 회관에 앉아 달 집 태우기에 올릴 소지를 쓰고 있었다. 심규만씨는 심규철씨 소지를 대신 써주고 있었는데, 소지 종이에는 심광용 짝을 찾아 주세요 라는 심재철씨의 아들의 소원을 기원하는 내용을 대신 붓으로 써주고 있었다. 붓 글씨를 쓰고 있는 도중 남자들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으며, 신촌리의 김아연씨가 도착해 풍물 칠 준비를 하 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서서히 모이자 심규만씨는 이종영씨에게 장구치고 꽹매기 칠사람 나오라고혀. 사람들 많이 모 이고. 비디오 촬영한다고 히야 하며 방송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게 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종영씨가 마이크를 들고 9시부터 탑제를 시작하니 속히 마을회관으로 나오라는 탑제 안내 방송을 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 탑제를 지내는 날입니다. 지금 탑제를 지내기 위해서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부락 주민들께서는 많이 참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 탑제를 모시는 날입니다. 부락의 액운을 때우기 위해서 탑제를 지내는 날이니 만큼 부락어른들께서는 지금 방송을 들으시는 데로 속히 마을회관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탑네 지낼 준비가 다 되어 있어서 9시부터 탑제를 지낼 예정이오니 방송을 들으신 데로 마을회관으로 속히 좀 나와 주시면 고맙겠습니 다. 이상 안내말씀 드렸습니다. 이씨의 탑제 안내 방송이 끝나자 1반 반장 김용태 씨는 반장들 다 나오라고 해야지 하고, 심규만씨는 크 게 해야지 크게 하며 이씨를 나무랬다. 이씨는 마이크에 대고 하는데 뭐 크게 하느냐고 심씨에게 대꾸를 했 다. 이씨는 저 양반 마이크만 잡으면 혈압이 올라 가꼬 죽을까 무서워 겁난다 며 행정중심복합도시 원천반 대 위원장을 맡고 있는 심씨가 몇 일전 군수면담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 쓰러질 번한 일을 두고 하는 얘기다. 심씨는 행정도시 찬성하는 얘기만 나오면 확 뒤집힌다 며 군수가 계속해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찬성하는 얘 기를 하니까 성질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고 설명하며, 그 날 하도 소리를 질러 집에 와서 잠을 못 잤다고 이 야기를 했다. 마침 이때 민속학자라고 하는 씨가 마을회관에 도착해 이 광경을 보고 태극기 밑에 투쟁! 생존권 사수 라고 적힌 머리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씨는 이 사진 한 장이 여기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 같아 사진을 찍 제4장 신앙생활 131

는다는 얘기를 했다. 씨는 마을 분들이 여기를 다 떠나게 되고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와 자기가 이곳에 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으면 이 사진을 보면서 회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심규만씨는 우리 마을은 원천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잘라 말했다. 방송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회관으로 모이기 시작하고, 이장 이국환씨는 시루떡과 어제 장을 봐온 제수 물 품을 챙겨 차에 실었다. 아침 8시 50분에 풍물패가 마을회관 남성 노인방에서 가락을 잠시 맞춰 본 후 마을 회관 앞에서 가락을 울리며 탑으로 출발하였다. 220 가락 맞추기 221 1탑으로 출발 11탑탑제 풍물패를 앞세우며 탑제 행렬은 1탑으로 향했다. 1탑으로 가는 도중 김용해씨의 축사 앞을 지나 던 중 풍 물소리에 소들이 놀라 잠시 풍물을 멈추고 축사를 통과한 다음 다시 풍물을 울리며 1탑이 있는 서낭댕이 고개로 올라갔다. 풍물패가 고개로 올라가고 있는 사이, 제관인 이국환씨는 제수를 차에 실어 먼저 1탑에 올라가 진설을 시 작하고 있었다. 이씨는 먼저 차에서 상을 꺼내 탑 앞에 놓았다. 상은 제수를 올려 놓을 큰 상과 술과 향불을 올려놓을 작은 상을 놓았다. 이씨가 상을 꺼내 놓은 도중 풍물패가 탑 앞에까지 와서 풍장을 치고 있었으며, 심규만씨와 심규철씨가 이씨를 도와 진설을 거들었다. 제상의 진설은 먼저 쌀이 담긴 대접을 올려놓아 밤새 워 켜놓은 촛불을 가운에 세우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시루떡을 상위에 올리고, 그 위에 명태 2마리 를 동쪽으로 향하게 해서 올려놓았다. 이국환씨는 그릇을 여러 개 꺼내 그 위에 대추, 밤, 곶감, 사과, 배를 순서대로 제상에 올려놓으면서 진설을 마무리 하였다. 진설을 마무리 하고 향에 불을 피운 시간은 오전 9시 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탑제는 제관이 향불을 불을 피우면서 시작되었다. 축관인 심규만씨는 제관 옆에 앉아 먼저 제관인 이국한 씨에게 술을 조금 따랐다. 축관인 심씨는 잔을 가셔야지 하면서 술을 제관에게 주었고, 제관은 이것을 잔 에 조금 받아 흔든 다음 탑에 붙여놓은 부적 天 下 大 將 軍 에 술을 가셨다. 술을 가신 후 잔을 상위에 올리고 제관은 홀로 재배하였다. 재배 후 축관은 다시 제관에서 술을 따랐으며, 제관은 이것을 받아 제상에 놓았다. 축관의 축문이 시작되었다. 132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탑제축문 유세차 병술정월 무오사 십오일 임신유학 심규만 감소고우 석탑지신 금의석교리 이장 이국환 공수 고 대궐상 보호차첩 권립천년 인물번화 오곡풍양 가축첨착 삼재팔난 관재소멸 석교리 동민 일심기원 근위 주관 경신현언 흥향 축문 읽기가 끝나자 제관과 축관은 재배했다. 재배를 한 다음 첨작을 했는데, 첨작은 단작으로 하였다. 축 관이 제관에게 술을 따라 주고 제관은 이것을 받아 술잔에 첨작하였다. 첨작을 한 후 축관은 제상 옆에 비닐 봉투에서 소지 종이를 꺼내 소지를 올렸다. 심재철씨는 징을 들어 소지가 끝남과 동시에 징 하고 힘껏 징 을 쳤다. 마지막 소지에 징은 세 번을 크게 울렸다. 소지는 석장을 올렸으며, 축관이 소지 종이 하나를 올릴 때마다 각기 다른 축원을 하며 소를 했다. 이 소지는 다른 소지가 아니오라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부락 일년 안에 삼백육십오일을 지 낼수록 온 동민이 소원성취하시고 건강하게 해주시오 징 이 소지는 다른 소지가 아니오라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동민들이 농사를 잘 짓게 하여 주 옵시고 모든 가축들이 일년 365 지나도록 모든 일이 소원성취하게 해주십사 소지를 올립니다. 징 이 소지는 다른 소지가 아니오라 우리 부락에서 자라나서 객지로 나간 출향인사들이 일년 365 일을 아무일 없게 해주도록 하여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해주십시오 징 징 징 소지 태우는 것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축관에게 행정수도나 못 오게 막아줬으면 좋겠어 잘 올라간다 고 하며 축관에게 당부를 했다. 소지가 끝난 다음에는 음복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음복을 하며 옛날 같으면 절 만 끝나면 떡 날라갔지 하며 예전에 제사가 끝나고 시루떡 음복이 치열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또한 (탑제)떡을 먹어야 1년 재수 있다는 거여. 예방으로 떡 쪼그만 먹는겨 하며 조사자에게 음복을 권하기도 했다. 이종영씨는 시루를 손에 들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시루떡을 나눠줬다. 1탑에서 제사를 지내고 음복까지 마 친 시간은 9시 30분 이었다. 다시 풍물패들이 악기를 들고 가락을 울리기 시작했다. 탑제 행렬은 2탑으로 향했다. 222 1탑에 도착한 탑제 행렬 223 진설하는 모습 제4장 신앙생활 133

224 225 226 227 228 229 224 명태 머리를 동쪽으로 놓는 모습 225 진설이 끝난 모습 226 향에 불을 붙이는 제관 227 축문을 읽고 있는 축관 228 소지를 태우고 있는 모습 229 제가 끝나고 시루떡을 나누어 주는 이종영씨 134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2탑탑제 탑제 행렬이 2탑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35분이었다. 제수 물품을 실은 제관의 차량이 풍물패와 함께 2 탑에 도착하게 되면서 진설은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제관은 차에서 먼저 상과 향불을 꺼내고 돗자리를 가 져와 탑 앞에 깔았다. 심규태(1936년생, 남)씨는 제관의 차에 실린 바구니를 날라 제상에 진설을 도왔다. 김 철식씨는 1탑 제사 때 쓴 동동주를 가지고 다니다 2탑 앞에 가져다 놓았다. 제상에 진설이 다 끝난 다음 제관 은 향에 불을 붙이면서 탑제를 시작하였다. 2탑제의 순서는 1탑과 동일하게 진행이 되었다. 2탑 탑제는 마을 사람들이 더 참여를 하였는데, 2탑이 마을 안에 있어서 풍물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2탑 제사에는 마을 최고령 노인인 김재원(1920년생, 남)씨가 참석해 탑제를 지켜보기도 했다. 심규봉(1947년생, 남)씨의 경우에는 카메라를 들고 나와 탑제 과정을 촬영하였는데, 올 한해 동안 중요한 일들은 계속 사진으 로 남겨놓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탑의 탑제는 오전 9시 50분이 넘어 끝이 났다. 2탑에 모인 사람들 은 모두 음복을 하고, 풍물패를 따라 3탑으로 걸어갔다. 230 231 232 233 230 2탑 진설 231 음복을 하는 마을 사람들 232 3탑으로 탑제 행렬 출발 233 풍물패를 따라가는 마을 사람들 제4장 신앙생활 135

33탑탑제 3탑 탑제는 오전 10시에 시작하였다. 3탑 탑제에는 마을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서 참여를 하였는데 3탑 뒤 에 사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그 수가 많이 늘어난 것이다. 3탑 탑제는 촬영팀의 요청에 의해 연출 이 진행이 되었는데, 촬영팀은 옛날 방식으로 탑제 과정을 해보자고 하며 제수를 지게로 가져 올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제관은 지게를 준비해 지게에 제물을 싣고 3탑으로 걸어가 탑 앞에 지게를 놓고 제수를 진설했다. 3탑 탑제의 진행은 1탑, 2탑과 동일하게 진행이 되었으며, 축관의 소지 축문은 조금씩 다르게 구술 되었 다. 마을 사람들은 심씨에게 행정수도 꼭 오지 말라고 하라니까 계속 잊어버리는 겨. 여기 원탑에서 행정중 심복합도시를 막아달라고 하고, 토지공사 절대 못오게 해달라 며 심씨에게 소지 축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축관인 심씨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오지 말게 해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에도 그런 소리는 안하는겨 하며 마을의 안녕, 나라의 안녕, 출향인사들의 안녕을 비는 축원을 되풀이 했다. 이 소지는 다른 소지가 아니오라 나라가 편해야 백성이 잘되고 나라가 편하게 하여주시어 백성들이 국태민안하기를 바라옵니다 징 이 소지는 다른소지가 아니오라 이 동네 주민들이 다 편하게 하고 출향인사들하고 자손들이 다 잘되 게 하여주기를 바라면서 소지를 올립니다. 석탑지신께서 잘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징 이소지는 다른 소지가 아니오라 우리 동네에서 객지로 나간 사람들이 잘 되게 하여주옵소서 징징징 3탑 탑제가 끝나고 바로 옆에 4탑에도 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제관과 축관이 제를 올리지 않고 이종남 (1947년생, 남)씨만 개인적으로 술을 올리는 것으로 끝이났다. 이 4탑에는 탑제 전날 天 下 大 將 軍 부적과 왼새끼를 꼬아서 달아 두었을 뿐 탑제 당일 마을 공동의 제사는 하지 않았다. 3탑 탑제가 음복을 하며 끝이나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으로 모였다. 마을 회관에 모여 남자들은 방에 서 잠시 휴식을 취했으며, 여자들은 주방에서 다과준비를 하였다. 다과 음식은 두부와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과일이었다. 234 3탑 진설 235 향에 불을 켜는 제관 136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36 237 238 239 240 241 236 축문을 읽고 있는 축관 237 제관, 축관 재배 238 술올리기 239 첨작 240 소지 241 소지의 끝에 울리는 징 제4장 신앙생활 137

4 지신밟기 탑제를 마치고 마을 사람들은 지신밟기 준비를 했다. 탑제 때 풍물을 쳤던 마을 사람들은 다시 풍물을 들 고 회관 앞에 나와 가락을 맞추기 시작했다. 먼저 풍물패는 이장인 이국한씨 집으로 향했다. 노인회관에 있던 남자들이 다 나와 풍물패를 따랐다. 집에 있던 이국한 이장은 집으로 들어오는 풍물 소리를 듣고, 먼저 마당에 상을 가져다 놓았다. 상위에는 솥단지에 쌀을 담아 가운데 초를 꼽아 놓고, 그 앞으로 청수물 을 올렸다. 마당에 도착한 풍물패는 먼저 마당에서 가락을 한 참 친 후, 집을 한 바퀴 돌아야지 하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에 먼저 수돗가로 가서 가락을 치기 시작했다. 수돗가에서 한 참을 치다가 상쇠 김아연씨는 뚫어라 뚫 어라 물구녁만 뚫어라(개개갱 개개갱 개개개개 개개갱) 하고 외치며, 수돗가 앞에서 신나게 가락을 울렸다. 마을 사람들이 집을 한 바퀴 계속 돌라고 하자, 풍물을 치던 이종영씨는 이 집은 돌을 수가 없다 며 수돗가 만 돌고 마당으로 가라고 상쇠 김아연씨에게 소리를 질렀다. 마당으로 풍물패가 다시 오자, 이국한씨는 상 앞에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재배하고, 청수물 밑 에 돈을 3만원 눌러놓았다. 이씨의 재배가 끝나자, 심규만씨는 이씨의 부인을 가리키며 현미 애미가 있구 나. 오늘 돈 좀 나오게 생겼구나. 이장네집 부자 되라고 우리가 온겨 하며 절을 하라고 소리쳤다. 이씨의 부 인도 나와서 절을 올렸으며, 부인은 3번 절을 하였다. 부인 역시 돈을 청수물 밑에 꽂았으며, 절이 끝나자 이종영씨는 상쇠 김아현씨에게 계속 쳐 계속 쳐야 돈이 나오지 하며 악기를 치라고 하고, 김아연씨는 가락 을 다시 울렸다. 풍물패들은 이번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풍물패의 반주에 노인회장 심규만씨가 굿거리 가락에 맞추어 소리를 했다. 풍물패들이 집의 지덕을 잘 눌러 이장 집이 부자가 되고, 이장 집이 부자가 돼야 우리 부락 이 잘 산다는 축원 덕담이었다. 계룡산 정기가 뚝떨어져서. 괴화산이 탄생하고 괴화산이 정기가 뚝떨어져서 어디 간줄을 몰랐더니 요런 명당이 생겼구나. 천지 갱매갱. 꾹꾹 눌러라. 이 터전이 어떤 터전이냐. 이씨 양녕대군에 13대 제 종가 제종가에 터전이라. 나갈적에는 빈발이요 들어올 적에는 찬발이라 갱매갱. 봉황이 집을 짓고 나 래를 탁탁치며 ---- 우리 이장이 부자돼야 우리 부락이 잘사느니라 갱매 갱매갱. 눌러라 눌러 이 터전을 눌러라. 꽹매갱 꽹매깽 심규만씨의 소리가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노인회장님 반신이 들렸고만 그랴 하며 소리를 잘 한다고 연 신 칭찬을 해댔다. 심씨는 이장을 보고 형님 안같은가 하면서 예전 이장의 아버지하고 이국한 이장이 영낙없이 닮았다 며 다시 한 번 사람들과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가 끝나고 이국한씨 부인이 찌개와 술을 상으로 내왔으며, 풍물패와 마을 사람들은 한참을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며 놀았다. 지신밟기는 이국한씨 집만 하고 끝났으며, 이씨의 집 지신밟기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은회관으로 다시 모 였다.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저녁에 있을 봉화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38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42 243 244 245 246 247 242 집으로 들어오는 풍물패 243 수돗가에서 지신밟기 244 절을 하고 돈을 그릇 밑에 꽂는 모습 245 상위에 올려진 쌀과 청수물 246 축원 비나리를 하는 심규만 노인회장 247 술과 안주를 먹는 마을 사람들 제4장 신앙생활 139

248 술상에 올라온 김나는 김치 찌게 249 집에서 나오는 풍물패 3) 산신제 산신제는 매년 음력으로 시월 초하루에 지낸다. 산신제가 생긴 이후로 해마다 거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은 제를 지내고 있다. 예전에 비해 산신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금기는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산신제 를 여전히 중요한 마을의 행사로 인식한다. 석교리 뿐만 아니라 괴화산 산신제는 괴화산 밑에 있는 다섯 마 을이 예전부터 지내왔으며, 현재는 네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1) 괴화산과 산신제 괴화산 산신제는 다섯마을에서 지내왔다. 괴화산 아래에는 다섯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다섯 마을은 반곡리, 석교리, 장재리, 석삼1리, 석삼2리이다. 이 다섯 마을 중 현재는 4개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데, 장재리의 경우 10여 년 전부터 산신제를 지내지 않는다. 현재 4개 마을이 같은 날인 음력 시월 초하루에 지내고 있으며, 시간은 각각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반곡리와 석교리의 경우 저녁에 제를 지내고 있으며, 석 삼 1리와 2리의 경우 아침과 오후에 제를 지내고 있다. 석삼 1리의 경우 2005년 산신제 당일 토지공사의 실사가 있어, 아침 8시 경에 급하게 산신제를 지내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마을의 이장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예전과는 다르기 때문에 형식적 으로 제가 진행된 것도 있지만, 토지공사의 실사에 대한 관심이 더욱 큰 것이어서 마을의 산신제는 더욱 간 소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이 마을의 산신제는 밤늦게 시작되었다고 하나, 점차 의미가 퇴색하면 서 시간이 점차 오후로 옮겨졌으며, 2005년 산신제는 토지공사의 실사문제로 인해 더욱 간소하게 제가 진행 되는 모습을 보였다. 2005년 석교리와 반곡리의 경우는 저녁 늦게 산신제를 지냈는데, 두 마을 다 통돼지를 잡아 제를 지내고 다 음날 마을 잔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석교리의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 반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이런 상황일수록 마을 제를 더욱 엄숙하게 지내야 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지 가 강했다. 140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 석교리 산제당의 위치 산제당은 괴화산 동남쪽 중턱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산제당 밑으로는 무속인 사찰인 태국사와 대불사가 있고, 그 아래로는 홍뜸이 자리잡고 있다. 산제당은 지리적으로 산제당 바로 위에 바위가 있어 바람을 막고, 양 옆으로는 골자기 능선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안정감을 준다. 현재의 산제당이 건립된 시기는 1970년대 초기이다. 당시 마을에 홍뜸(1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현재 의 산제당 건물을 지었다. 1반 사람들은 마을에서 건립자금과 개인 인건비를 받아서 산제당을 지었다고 하 는데, 그 이전의 흙벽돌 건물로 돼있던 것을 개보수 했다. 산제당 옆에 흙이 좋아서 그 흙을 찍어서 올리고 새마을사업 지원물품이었던 시멘트를 흙벽돌 위에 메웠다. 지붕은 두 차례 보수를 했는데, 1970년대 초기에 기와로 올렸던 것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1990년대 초기에 다시 한 번 슬레이트를 올렸다. 산제당의 구성은 제를 지내는 제실과 시루떡을 찌고 제수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으로 나뉜다. 제실은 통돼 지를 제물로 올리고 어른 2사람이 들어가면 여유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비좁다. 부엌 또한 마찬가지로 고양주 (제를 준비하는 사람) 1사람 정도가 시루떡을 준비할 수 있는 공간크기이다. 250 산제당 정면 251 산제당 측면 흙벽돌로 만들었던 산제당이 없었을 때에는 건물이 따로 없고 산제당 뒤편의 바위를 파내고 들어가 제를 지냈다고 한다. 윗말에 심규만씨는 자신이 어려서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른들이 그때 급하니께 집을 못 짓고 그때 옛날에 밀대로 만든 밀대 방석이라는 것이 있어. 천궁 밀 대집으로 맨든. 그걸 가지고 가서 뺑둘러 놓고 촛불켜놓고서. 지붕은 없고. 거기 가보면 산신당 있는 디 가보면 큰 바위가 있어. 큰 바위기 이렇게 그 밑이 파고서. 거기서. 그 밑에서 지냈다는 거여. 우리가 어 렸을 때 보니까 돌막으로 흙을 묻혀가지고 돌담으로 이렇게 졌어. 집을 해올린 산제당이 있었어. 보기 도 무서워 우리 어렷을 때 보면은. 제4장 신앙생활 141

(3) 제관선정 석교리 산신제의 제관은 축관과 고양주로 나뉜다. 축관은 축문을 준비하고 산신제를 주관하며, 고양주는 산신제에 필요한 모든 실무적인 준비를 한다. 마을에서는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산신제에 앞서 제관과 축 관은 생기 복덕을 가려서 운에 닿는 사람으로 뽑았다. 하지만 갈수록 마을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산신제의 축관과 제관을 뽑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고양주의 경우 산신제 당일 통돼지를 지게에 짊어지고 산제당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고양주가 노인으로 뽑혔을 경우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생기 복덕을 가려가면서 제관을 선정하는 절차에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부터는 마을 이장단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 이장과 각 반(1~4반)의 반장이 산신제를 주관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까지 지켜지던 제관선정과 산신제 준비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관 선정은 음력 시월 초 하루를 기점으로 3일 전에 이루어진다. 제관은 생기 복덕과 일진이 좋은 사람으로 선정된다. 산신제 3일 전 에 마을 회관에 동네의 어른들이 모여 갑자를 보며 적합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하게 된다. 이렇게 선택된 축관과 고양주는 3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한다. 고양주는 할일이 많은데 산신데 3일전에 산제당에 올라가 청 소를 하며 문에 창호지를 바른다. 그 다음날 해가 넘어갈 즈음에는 산제당 아래에 있는 우물을 파놓는다. 또한 산신제 3일 전부터 제관의 대문(삽작) 앞에 양 옆으로 세 군데에 황토 흙을 갖다놓아야 하는데, 이는 부 정한 사람은 들어오지 말아야한다는 주의를 의미한다. 또한 이장은 3일 동안 동네에 방송을 한다. 10월 1일이 산제날이니 육식을 하지 말고 비린 것을 먹지 말며 살생을 하지 마라 는 내용을 방송하며 산신제를 환기시킨다. (4) 산신제의 진행과 변화 음력으로 시월 초하루가 되면 제관으로 선정된 축관과 고양주는 해가 넘어가면 제물을 가지고 산제당으 로 올라간다. 중심 제물은 마을에서 직접 잡은 통돼지이며 돼지를 2 3사람(축관, 고양주, 이장)이 교대로 지게에 짊어지고 산제당으로 올라가 놓는다. 그 후 명태, 떡, 사과, 배, 대추, 밤, 감을 산제당 제단 위에 진설한다. 떡은 쌀 한되서홉(세홉) 을 빻아 와 백설기를 만들고 고물을 넣지 않는다. 집사는 우물을 파놓은 물로 불을 떼어 시루에 백설기를 찐다. 명 태는 눈이 달렸고 깨끗한 것으로 두 마리 준비하고, 시루 꼭지에다 명태를 꼽아 꼬리가 밑으로 가게 한다. 떡 시루는 옛날에 사용하던 납작접시(백자로 만든) 를 사용하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시루가 조선시대부터 전 해오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축관은 진설하고 나서 산제당 아래에 산 날맹이 에 내려와서 마짐시루를 떠다 놓으시오 라며 동네사람 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이 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떡을 각자 집안의 젯상에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산제당에 맨 먼저 떡을 진설할 수 있는 것이다. 축관은 산날맹이 에서 외친 후 다시 산제상으로 올라 간다. 산제당에 진설해놓은 젯상으로 다가가 빌기 시작한다. 비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날이 세도록 비 는 것이다. 주로 축관은 자손 잘되게 뜻대로 잘되게 해주십시오 라며 동네 주민들에게 축원 덕담을 한다. 또한 축관은 마을 사람의 이름이 적힌 소지(소지종이)를 일일이 챙겨 가지고 올라가 태운다. 일일이 동네 가구주를 불러가며 격식을 갖추지 않고 축사와 집사가 교대로 아무것이 집이 잘되게 해주십시오, 올해 농사 잘되게 해주십시오, 길거리 재난 당하지 않고 잘 살게 해주십시오, 우리 부락에 나가 있는 자손들 잘 크게, 공부 잘하게 해주십시오 등등의 축원 덕담을 한다. 제관과 축관은 이날 잠을 자서도 안 되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 새벽닭이 우는 시간이 되서야 축관과 142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고양주는 마을로 내려오게 된다. 돼지를 지게에 메고 내려온다. 아침에는 돼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한 근이 나 반근씩 나눈다. 돈을 받고 골고루 나누어준다. 그 돈은 마을 기금으로 쓴다. 그 날 오후에는 마을총회를 열어 산제에 들어가는 경비, 운영, 앞으로의 일들을 얘기한다. 총회를 수시로 하지만 산제를 마치고 하는 총 회는 마을의 가장 큰 총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2000년 즈음부터 산신제는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마을에서는 제관을 선정하지 못하였다. 갈수 록 마을의 인구가 고령화 되면서 축관과 고양주를 선정해 제를 지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통돼지를 고양주와 축관이 함께 산제당으로 가져가야 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제가 끝나고 다시 통돼지와 제물을 가지고 산으로 내려오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는 제관을 따로 선정하지 않고, 이장과 각 반의 반장들이 맡아서 진행을 하게 되었다. 4) 더불어 제관이 지키 던 금기도 많이 약화가 되어, 제관의 집 앞에 뿌려놓던 황토 흙을 더 이상 뿌리지 않게 되었다. 또한 제를 지낼 때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다음 날 새벽까지 농사 얘기만 하던 금기들이 약화가 되었다. 2005 년에는 산신제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했다. 제는 새벽 1시경에 끝이 났다. 2005년 산신제 일시 : 2005년 11월 2일(음력 시월 초하루) 장소 : 괴화산 산제당, 석교리 일원 252 산제당 주변 정리 253 제기를 깨끗이 닦는 모습 4) 5~6년 전부터 통돼지는 경운기를 통해 산제당까지 운반하고 있다. 각 반장들이 경운기 뒤에 타 돼지 다리 하나씩을 잡고 올라간다. 2005년 산신제에는 경운기를 사용하지 않고 4륜구동 트럭으로 산제당 중턱까지 올라가 거기서부터 김용태(1947년생, 남)씨가 통 돼지를 메고 산으로 올라갔다. 제4장 신앙생활 143

254 255 256 257 258 259 254 샘에서 제기 등을 닦는 모습 255, 256 산제당 청소 257 청소가 끝난후 다시 자리를 깐다. 258 산제당의 부엌 내부 259 주변정리가 끝난후 음료를 나눠 마시는 주민들 144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60 261 262 263 264 265 260~262 제물 구입 263~265 산제당 문종이 바르기 제4장 신앙생활 145

266 267 268 269 270 271 266 떡을 찔 시루를 준비 267 쌀가루를 시루에 붓는다. 268 시루번을 붙이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269 산제당 주변에 불을 밝히는 모습 270 통돼지를 젯상에 올려 놓은 모습 271 통돼지와 제물을 올려 놓은 모습 146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72 273 247 275 276 272 마을회관에서 모인 주민들 273 음복 상차림을 위해 준비중인 여자주민들 274 국솥에 끓여내는 고기국물 275, 276 음복하는 주민들 제4장 신앙생활 147

(5) 산신제 금기와 변화 산신제를 앞두고서 마을이 매우 엄숙했으며, 금기 또한 엄격하게 지켜졌다. 먼저 부정을 탄 사람은 산제 를 지낼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부정은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은 산제를 기점으로 3일 전에는 비린 것을 먹지 않고, 살생을 금하고 또한 죽은 짐승을 보지도 않았다. 심규만씨는 예전에 산제 3일전에는 김치를 담더라도 새우젓을 빼고 담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신제 전에는 사돈이 와도 닭을 잡지 않을 정도로 살생을 엄하게 금지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 산신제 제관으로 선출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부인이 생리를 하는 것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아예 젊은 사람들은 제관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또한 젊은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도 부정한 것 으로 생각하였다. 산제당에 대한 관리도 철저했는데 산신제 지낼 때는 산제당 부근에 소나, 돼지 등이 접근하면 부정탄다고 하여 짐승을 단속했다. 한편 마을에 초상이 있으면 산신제를 미루어 부정을 가린 다음 지내고, 개인이 초상 집을 다녀오면 산신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은 몸단속을 잘해야 했는데, 먼저 산신제 3일부터는 산제당 아래에 샘에 와서 목욕 재개를 해야 했다. 제관 집의 삽작(대문) 앞에는 황토 흙을 양옆으로 세군데에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산제당에서 제를 지낼 때에는 담배를 피우지지 않고, 새벽까지 농사이야기만 하면서 마을 사람 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의 경우 산신제 저녁에 시루떡 고사를 가정에서 지내는데, 산제당에서 진설이 끝나고 고양주가 산 날맹이로 내려와 마짐 시루를 떠다 놓으시오 하고 외치기 전에는 절대로 시루떡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현재 이러한 금기들은 많이 약화가 된 상황인데, 특히 제관이 된 사람이 지켜야 했던 금기들이 과거에 비 되 었다. 5~6년 전부터 제관선정이 생기복덕을 가려 일진에 닿는 사람을 뽑혀 산신제 금기가 어느 정도 유지가 되었다고 하나, 이장과 반장이 산신제를 주관하게 되면서는 산신제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찾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마을의 고령의 여성들은 산신제에 대한 영험함과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정타서 벌받은 이야기 마을에서는 산제당 옆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땐 사람이 눈을 한쪽 못쓰게 되었다 는 얘기가 마을에 전한다. 또한 10월 1일 산신제 당일 동네 사람 중 한명에게 산제에 쓰일 돼지를 짊어지고 가라고 제관이 지시를 하니 그 사람이 왜 하필 나보고 그 무거운 제물을 지고 가라고 시키냐 며 투덜거리며 욕설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사람의 입이 돌아가 한참 고생을 한후정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산신제는 더욱 엄격한 금기와 위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4) 개발 상황에서 만들어진 마을 제의 (1) 봉화제의 시작과 진행 5) 봉화제는 마을의 정월 대보름 행사이다. 이번 봉화제는 노인회장 심규만씨의 제안에 의해서 시작되어, 정 월 대보름 탑제 전날부터 갑작스런 준비가 시작되었다. 봉화제를 처음 해보는 것이라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148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어떻게 세워야 할지, 얼 만큼의 크기로 봉화를 만들지에 대한 분분한 논의가 있었다. 심규만씨는 탑제 전날 봉화제 안내 방송을 하며, 그 의미를 설명하고 봉화를 태우며 올한해마을과개인 의 소원을 빌어보자고 하였다. 심씨는 방송에서 이번 해에는 마을 주민들이 바라는 것이 많을 것이라면서, 그러한 소망들을 종이에 적어 내일 봉화제에 태워보자고 하였다. 심씨를 비롯한 마을의 대표들은 봉화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마을에 젊은 사람인 노민영씨에게 아는 기자들을 연락해 취재를 해가라고 하는 등의 홍보 전략을 고민하기도 했다. 탑제 전날 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들에서는 깻때 를 가져와 봉화를 만들기 시작했 다. 회관 앞에서는 마을사람 몇명이 봉화제에 쓰일 동아줄을 꼬는 작업을 하였다. 봉화는 당일 오후에 만들 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소원을 종이에 적었다. 이번 봉화제를 하면서 마을의 대표들은 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마을 상황을 돌 파해보자 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 최대한 마을의 행사를 홍보하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마을 내부적으로는 탑제를 어느 해보다 원칙적이고 활발하게 치러 봉화제로 그 기운을 이어가 마을에 활기와 단 합을 유도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표들의 노력은 대전에 있는 교회 아이들을 불러 봉화제를 할 때 깡통 돌리기 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언론사에서 올 것을 감안하고 최대한 활기찬 마을의 봉화 제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고 한 것이다. 봉화제는 저녁 9시가 넘어서 끝났다. (2) 봉화제 만장에 담긴 의미 봉화제 당일 심규만 노인회장은 만장을 제작했 다. 만장은 봉화제에 행진에 사용되었으며, 봉화가 타오를 때 소지로 타올랐다. 만장에는 마을 사람들 의 이름과 마을 공동의 소원을 적어 놓았다. 만장의 한 가운데에 큰 글씨로 온 동네 사람들 소원 발원, 남북통일 반드시 온다 삼재팔난, 관재소멸 등 을 적었다. 또한 심씨는 마을 방송에서 특히 봉화제의 의미중 에 관재소멸 이라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심씨는 지 금 행정중심복합도시 상황이 관(정부)에서 우리에게 재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재해는 정부에서도 277 봉화제 만장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없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자고 했다. 이 관재소멸 이라는 글귀에는 지금 이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봉화제를 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개발은 정부가 가져오는 재해의 다른 이름이 었다. 이들이 기원하는 것은 지금처럼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바람이 마을 공동의 봉화제를 만들게 하였으며, 만장의 글귀에는 이러한 봉화제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5) 심규만씨는 봉화제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보통 달집태우기 라고 하지만 심씨는 봉화제 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행사의 의미 와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제4장 신앙생활 149

봉화제의 진행 2월 11일 : 봉화제 전날 봉화제 준비는 2월 11일(음력 정월 열 나흗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며칠 전부터 봉화를 들깨대로 만들기로 하고, 봉화제 당일 오후부터 그 준비를 하기로 했다. 먼저 노인회장 심규만씨는 오후 1시에 마을 방송을 하였다. 내일 있을 탑제와 봉화제의 의미를 얘기하고, 개인적으로 바라는 소망을 적은 종이를 적어 서 내일 봉화에 태우자고 하였다. 마을 방송이 끝나고 심규만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러 가서 짚을 가져왔다. 심씨가 짚을 가져와 마을회 관 앞 길 바닥에 펼쳐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짚을 꼬기 시작했다. 짚을 꼬은 다음 구멍에 나무 막대기를 넣 고 한 사람이 그것을 잡고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짚을 계속 이어주었다. 278 279 280 281 278 짚준비 279 동아줄 꼬기 280 지켜보는 송지화씨 281 동아줄 2개를 하나로 합쳐꼬기 150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오후 4시가 되자 마을 사람들은 들깨대를 가지러 갔다. 심규봉씨, 김철식씨, 000씨가 트럭에 타고 밭 으로 갔다. 심규만 노인회장과 다른 마을 사람들은 내일 있을 탑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3탑에 금줄을 치 고 있는 도중에, 트럭을 타고 들깨 대를 가지러 가는 일행들을 만났다. 들깨대는 마을에서 농사를 많이 하 고 있어, 가장 흔하면서도 요긴하게 봉화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282 봉화제 땔감을 준비하러 가는 마을 사람들 2월 12일 봉화제 당일 아침에 탑제를 마친 마을 사람들은 봉화제 준비로 부산했다.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각기 맡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이종남씨와 이승한씨는 봉화제에 사용할 깡통을 만 들고 있었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깡통돌리기를 하러 온다고 해서, 깡통을 그 전날부터 준비해 점심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부터는 마을 사람들이 들 깨대로 봉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제 미리 삼성천 공터에 가져다 둔 들깨대를 가지고 봉화를 만들었다. 283 깡통 만들기 그리고는 짚을 가져와서 공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이 것은 봉화에 불을 피울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 가정에서는 소원을 담은 소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윗말의 심규철(1942년생, 남)씨는 마을회관에서 띠종이 위에 상용 사업 번창하여 소원 성취 望, 광용 짝을 주시옵소서 를 적었다. 아랫말의 홍아기(1930 년생, 여)씨도 직접 소원을 한지 종이 위에 적었다. 심규만 노인회장은 커다란 종이 위에 마을 공동의 소원을 적어 내려갔다. 284 마을 공동 소지 285 심규철씨 소지 286 홍아기씨 소지 제4장 신앙생활 151

저녁 6시 30분 정도가 되자 초등학생들을 태운 승합차가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다. 이 아이들은 교회에 다 니는 아이들로, 어제 석교리 앞에서 쥐불놀이를 하다가 봉화제 얘기를 듣고 오게 되었다. 봉화제 전날 심규 만 노인회장과 이국한 이장은 초등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사람에게 마을의 행사를 얘기하고 참여했으면 좋 겠다는 부탁을 하였다. 최대한 봉화제를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부탁을 한 것이다. 아이들은 마을 부 녀자들이 준비한 저녁을 마을회관에서 먹고 봉화제에 참여했다. 287 교회에서 온 아이들1 288 교회에서 온 아이들2 마을회관 앞에서 풍물이 울리기 시작했다. 태국사의 법사가 꽹과리를 잡고 풍물패를 이끌었다. 김용태씨 가 북을, 이종영씨가 장구를, 씨가 징을 잡았다. 풍물패는 마을을 한 번 돌았다. 마을을 돌면서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풍물패가 아랫말 앞에 있는 삼성천 다리 앞에 서서 한참을 악기를 치며 사람들이 모이길 기 다렸다. 마을 사람들이 풍물패 주면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풍물패가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앞에는 윗말의 씨가 만장을 들고 앞장을 섰다. 마을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만장이 펄럭이며, 봉화 방향으로 걸어갔다. 봉화 앞에 풍물패가 도착하고, 마을 사람들이 봉화 주위에 둘러섰다. 풍물패는 봉화주위를 돌면서 가락을 울렸다. 심규만노인회장과 이국한 이장이 봉화 앞에 있는 짚 으로 만든 공을 들어 불을 붙인 후 봉화에 불을 지폈다. 심규만 노인회장은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 이 잘 되게 보살펴주십시오 하며 봉화를 바라보며 축원을 했다. 봉화에 불이 활활 타오르자 풍물패는 가락 을 더욱 크게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봉화가 다 꺼지고 난 다음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부녀회원들이 준비한 찌개와 술을 삼성천 다리 위에서 먹었다. 152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289 290 291 292 293 289 봉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풍물패 290 풍물패 291, 292 봉화제 행진 293 봉화에 불붙이기 제4장 신앙생활 153

294 타오르는 봉화 295 소원을 비는 마을 사람들 2. 무속 1) 석교리의 무속인 내력 석교리는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무속인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석교리에는 현재 총 5곳의 무속인 사찰 이 있어 일반적인 마을과 다르게 무속인의 집중 분포를 보인다. 무속인 사찰뿐만 아니라, 조계종에 속해 있 는 사찰이 있어 사월 초파일이 되면 인근 마을과 도외지에서 찾아오는 신자들로 마을은 활기를 띤다. 그래 서 인근마을의 사람들은 이러한 석교리를 두고 무당이 많은 동네 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마을 사람들 또한 이러한 마을의 분위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우며, 자신들 또한 초파일 이나 백중과 같은 때에 마을에 살고 있는 보살들을 찾아가 연등을 달고 무사안일을 기원한다. 또한 일상적 으로 무속인들과 어울리면서 이들과 대화하고 생활하면서 무속이 신앙생활이라기보다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무속인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마을 사람 중의 하 나로 인식하고 있다. 아랫말에 살고있는 송정섭(1929년생, 여)씨에 의하면 마을로 시집오던 당시에 마을에 무당이 6명이 있었 다고 한다. 송씨는 이들을 선녀네 할머니(태산댁), 시알할머니, 동수네 할머니, 진산할머니, 옥환 154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네 할머니, 종덕이 어머니 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신내림을 받아서 마을에서 무업을 행했다고 한다. 이 중 진산에서 시집온 진산할머니 가 가장 큰 굿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진산 할머니는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굿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북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경을 읽고 앉은 굿을 했다. 현재 마을에서 무업을 하고 있는 사람은 총 5명이다. 5명 무속인의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 랫말에 수도사를 운영하는 배보살은 선녀네 할머니 가 시어머니이며,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2대째 무업을 하고 있다. 윗말에 위치한 석불암의 안기풍 법사는 마을에서 종덕어머니 라고 불리었던 어머니의 뒤를 이 어 무업을 하고 있다. 윗말에 위치한 태국사의 홍보살은 배보살과 6촌동서 사이로 배보살에게 내림굿을 받 아 무업을 하고 있다. 나머지 2명의 보살은 외지에서 유입된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은 석교리에 무속인이 많은 이유를 괴화산과 연관 짓고 있다. 괴화산을 영험한 산으로 믿고 산신제를 정성스럽게 지내온 마을 사람들은 괴화산이 계룡산과 마주보고 있어 더욱 영험한 기운이 산에 있 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속인들이 괴화산 아래 석교리로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2) 무속인과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마을 사람들은 무속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속인의 요란한 굿 소리에 도 불만이 없다. 오히려 이들이 굿을 보러가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마을 사 람들은 새로운 무속인이 마을에 이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다. 윗말에 사는 김용태(1947년생, 남)씨 는 이러한 마을의 분위기를 두고 교회는 반대해도 무당이 오는 것은 막지 않는다 고 이야기한다. 과거부터 마을에 무속인이 많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무속인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 을에 시집을 와서 신내림을 받고 무업을 행하는 것이 석교리 무속인의 특징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더욱 이들 의 사정을 잘 알고 무업 활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무속인과 마을 사람들은 거리감 없이 친 근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5명의 무속인 중 3명은 마을에서 살다가 신내림을 받고 무업을 행하고 있는 경우 이다. 수도사의 배보살과 태국사의 홍보살은 시집을 와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다가 신내림을 받고 무업을 하고 있다. 홍보살의 경우는 무업을 하기 전 마을에서 부녀회장을 하기도 했다. 석불암의 안기 풍 법사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신내림을 받고 무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무업을 시작하고도 마을의 행사가 있으면 그전과 다름없이 참여해, 일상적으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린다. 석교리의 무속인은 마을의 평범한 일 원일 따름이다. 한편 외지에서 이주한 보살이 2명이 있는데, 이들 또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 다. 마을 사람들과 겨울에는 회관에서 함께 점심을 해먹고, 화투를 치면서 일상적인 생활을한다. 그리고 큰 굿이 들어 왔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음식 준비를 부탁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하는 굿을 구경하기도 하고, 음식을 얻어먹고 오기도 한다. 제4장 신앙생활 155

296 298 297 299 296 마을 관광에 참여한 배보살과 마을 사람들 297 마을 관광에 참여한 홍보살과 마을 사람들 298 노인 잔치에서 노래를 부르는 조보살 299 석불암에 굿을 보러온 마을 사람들 3) 무속인과 무속시설 마을의 무속인은 2006년 4월까지 5명이 살고 있었다. 이 중 대불사의 조태진 보살이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인해 이주하게 되면서 현재는 4명이 살고 있다. 조태진 보살은 경남 상주로 이주하였으며, 이주 전 대불사 대웅전을 다른 사찰에 헌납하는 회향식을 가졌다. 다른 무속인들도 이주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는 입무과정, 석교리 정착과정, 무업활동 등을 통해 석교리 무속인의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156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표10. 석교리 무속인의 특징 성명 사찰명 출생지/ 강신지 출생연도 신병유형 강신연령 입무방식 모시는 신 성장시 종교배경 무당인친지 배한순 (배보살) 수도사 충북 부강 /금남면 석교리 1930 정신적 신병 48세 내림굿 동자신 무속 시어머니 (선녀네 할머니) 홍숙자 (홍보살) 태국사 / 석교리 정신적 신병 43세 내림굿 미륵부처 기독교 6촌 동서 (배보살) 안기풍 (안법사) 석불암 / 석교리 정신적, 육체 적신병 동자신 무속 어머니 (종덕 어머니) 조태진 (조보살) 대불사 경북 선산 1940 정신적 신병 신내림 받지 않음 신내림 받지 않음 달마조사 무속 고모 최무진 (최보살) 금당사 1956 정신적 신병 내림굿 옥황상제 무속, 기독교 어머니 (1) 수도사 1 수도사 내력 수도사는 괴화산의 북서쪽의 비교적 산 높은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처님과 동자신을 모셔놓은 굿당 과 안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옥 뒷편에는 산신을 모셔놓은 제실이 있다. 굿은 주로 부처님과 동자신을 모 셔놓은 굿당에서 한다. 수도사는 배보살이 신내림을 받고 난 다음 밭으로 있던 땅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배 보살 남편의 꿈에 지금의 수도사 위치에 법당을 지으라는 신몽을 받고 수도사를 짓게 되었다. 수도사는 배 보살이 거주하는 안방과 그 옆에 동자신과 부처님을 모셔놓은 굿 당으로 나뉘어 있다. 수도사의 배보살은 시어머니에 이어 석교리에서 2대째 무업을 이어오고 있다. 배보살의 시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태산댁 과 선녀네 할머니 로 불리었다. 시어머니는 태산에서 시집을 왔으며, 큰손녀의 이름 이 선녀였다. 배보살은 48세에 신내림을 받았다. 당시는 병원이 많지않던 시절이라, 아픈 사람이 많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병원이 생기면서 아픈 사람보다는 재수와 안녕을 기원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주로 정월과 시월 에 재수 굿 을 많이 하고 있으며, 4월 초파일과 백중에 마을 사람들과 인근 이웃마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2 배보살의 신내림 배보살의 고향은 선말(충청북도 부강면)이다. 배보살은 일제강점기에 보국대에 뽑히지 않기 위해 15살 어 린나이에 석교리로 시집을 오게 된다. 시집와서 배보살은 4~6마지기의 벼농사와 목화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았다. 그때 당시 배보살은 신내림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농사일을 하면서 지냈다. 제4장 신앙생활 157

배보살이 신내림을 받은 것은 48세의 일로, 둘째 딸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 신내림의 징조가 시작되 었다. 둘째 딸은 그때 당시 10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몇 달째 냉이 쏟아져 고생을 했다. 병원에서도 별다 른 치료를 할 수 없었다. 병원에 다녀도 둘째 딸의 몸 이 나을 기미가 없자 배보살은 어느 무속인에게 찾아 가 그 이유를 물었다. 무속인은 딸에게 신이 와서 그 러하며, 배보살이 신을 받지 않아 딸이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보살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신내림을 받았다. 신내림을 받고 둘째 딸의 몸은 깨 끗하게 나았다. 300 수도사 앞 마당에서 배보살(우측) 배보살의 신내림은 공주에 사는 무속인에게 받았다. 내림굿은 배보살이 살 던 집 마당에서 했으며, 3시간 이 넘게 마당에 앉아 울면서 자신도 모르게 옛날에 고생하면서 살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를 지켜보던 마 을 사람들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마을에서는 배보살의 신내림 굿을 한다고 해서 마을 사 람들이 와서 풍물을 쳐주었으며, 많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배보살의 신내림 광경을 목격했다. 배보살은 슬하에 9남매를 두었다. 배보살은 신내림을 받지 않고 벼농사만 짓고 살았다면 9남매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배보살은 현재 혼자 살고 있으며, 셋째 딸이 한 마을에 살고 있어 자주 왕래하고 있다. 현재는 나이가 들어 굿을 하지 못하는데, 굿이 생기면 대평리에 사는 법사를 굿당으로 불러 굿을 하고 있다. 배보살은 현재 77세의 나이로 무병을 조금씩 앓고 있다. 심장이 가쁘게 뛸 때가 많아 우황청심원을 상비 약으로 가지고 다닌다. 3 배보살 굿의 특징과 순서 배보살은 주로 정월달과 가을에 굿을 많이 한다. 5월과 6월은 액달이라고 해서 아픈 사람 아니면 굿을 잘 하지 않는다. 배보살이 주로 많이 하는 굿은 재수 굿과 병 굿이다. 배보살은 지랄병 이 난사람을두번고 쳤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지랄병이 와 엎어져 수도사를 찾았는데, 배보살이 굿을 해주고서 낫게 되었다. 그때 굿을 해서 나은 아이 한명이 결혼한다고 몇 달 전에 인사를 오기도 했다. 요즈음은 병원이 많이 생겨 이 러한 병굿보다는 재수굿을 많이 하고 있다. 배보살의 굿은 대략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법당에서 굿을 할 때와 집에서 굿을 할 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법당에서 굿을 할 때는 산신제, 용왕제, 조왕제, 칠성제, 성주제, 조상제의 순서로 지낸다. 산신제는 법당 뒤 바위에서, 용왕제는 수도사 샘에서 지낸다. 그 다음 조왕제는 부엌에서, 칠성제는 장독에서 지낸다. 성주제 부터는 법당 안으로 들어와서 지내고 조상제를 지내게 된다. 일반 가정에서 할 때는 산신제와 용왕제를 따 로 지내지 않는다. 배보살이 사용하는 무구는 북, 꽹과리이다. 양 쪽 손에 하나씩을 들고 치면서 경을 읽는다. 대부분을 앉아 서 이렇게 경을 하면서 굿을 하는데, 굿머리의 마지막인 조상해원경을 할 때는 일어서서 경을 읽고 축원을 한다. 이때는 공수를 받아서 한다고 하는데, 조상의 신이 들어와서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158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북으로 하지. 장구칠종 모르고. 북하고 꽹매기 치고. 양짝 손에다 하나씩. 그리고 경을 읽는다. 부엌 에서도 앉아서. 우리 할때만. 다 앉아서 한다. 인제 끄트머리 조상 다 나갈때에는 서서하지. 조상 나갈 때서서. 남의조상온것다보낼라니께. 서서하는 것 그건 여간해 모를걸. 다 인제 공수받아서 하는겨. 어떻고 어떻고 너는 어떻고. 어떤 조상이 죽어서 어떻고 어떻게 나간다고 이렇게. 고맙다고 해줘서. 배보살은 친정 할머니와 시어머니 조상이 자신을 보살펴 준다고 한다. 시어머니에게서 배보살은 무업을 이어받았다. 한 마을에 살고있는 홍보살은 육촌동서 관계로 배보살이 신내림을 도와주었다. 배보살은 점을 잘 치는데, 점은 주로 엽전과 오방기로 한다. 배보살은 나 같이 원신이어야지 배워서 하는 건 소용없다 고한다. 엽전을 던지면 그 사람의 어떻다 하는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방기를 사 용하는데, 오방기를 집게 하면 나오는 기에 따라 그 사람의 운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배보살은 남색기와 파란 색기가 안 좋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기를 잡으면 객신이 붙어있는 경우라고 한다. 그리고 빨강색기, 하얀색 기, 노란색기를 잡으면 운수가 좋다고 하는데, 빨간색기는 재수를 상징하고, 노란색은 조상인데 좋은 조상이 고, 하얀색기는 산신을 상징해 좋은 의미라고 한다. (점도 치나요?) 점치지. 엽전으로 한다. 다 나오지 어떻게 된다고. 그건 여간해 모를걸. 나같이 원신이 어야지 되지. 배워서 하는 건 소용없어. 점칠때는 엽전하고 오방기 남 새파랑 빨강, 하얀 것, 노란것. 빼 보면 알지 새파란 것 빼면 조상이고 객신이고. 뜬 객신. 빨강것은 재수. 노란것 잡으면 조상. 좋은 거고. 하얀것 잡으면 산신. 산신기라고 그것도 조상이 대감이라고 좋은 거여. 파란 것하고 남색이 안좋다. 남 색은 객신. 할 때 봐야 그것을 알지 그것 아나. 배보살의 경우 혼자 굿을 하기 힘들어 보통 둘씩 많이 하는데, 한 마을에 사는 홍보살과 더러 많이 했다 고 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조치원에 있는 법사와 굿을 함께 하고 있다. 배보살의 사월초파일 굿 2006년 5월 5일에는 수도사에 사월초파일 굿이 있었다. 조사자는 오후 2시부터 이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조사자가 수도사에 도착하니 반곡리 신도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연등을 달고 있었다. 법당 안에는 조치원에서 온 법사가 축원을 하고 있었다. 법사는 북을 두드리면서 굿을 했는데, 북 위에는 절을 올리고 있는 신도의 가족관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법사는 축원을 하는 중간에 이 가족들의 신상을 얘기하고 복을 빌었다. 법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굿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신도가 법당에 들어오면 먼저 새로운 촛불을 꺼내 촛 불을 켰다. 배보살이 옆에서 술을 따라 주고 함께 도와준다. 신도는 공양하기 위해 가져온 과일, 떡 등을 부 처님 전에 올려놓는다. 그 다음에는 법사가 북을 두드리며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축원을 한다. 한 30분 정도 이렇게 축원을 하는데, 축원이 끝나고 법사는 신도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조상신이 법사에게 얘 기해 주는 것을 다시 법사는 신도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 차례의 굿이 끝나게 된다. 아침부터 찾아오는 신도마다 이렇게 제를 계속 지냈으며, 굿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제4장 신앙생활 159

301 302 303 304 305 306 301 굿 준비하기 302 향초에 불을 붙이는 신도 303 조치원에서온 법사와 신도 304 재수 음식을 나누어 주는 배보살1 305 마루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신도들 306 재수 음식을 나누어주는 배보살2 굿을 하고있는 중간에 마을 사람들이 연등을 달기 위해서 수도사에 찾아왔다. 아랫말에 사는 장은순(1933년 생, 여)씨가 연등을 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씨는 며칠 전부터 배보살에게 연등을 달아달라고 부탁을 했는 데, 연등이 걸려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배보살에게 안 좋은 소리를 했다. 장씨는 직접 자신의 가족 이름이 적힌 명암을 찾아서 연등을 달았다. 배보살은 장씨가 오고 나서부터 미리 부탁한 사람들의 연등을 찾아 달기 시작했다. 연등에 부착할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배보살은 따로 부탁을 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 것도 달아 주었는데, 국한네는 구장을 보니께 하나 달아주어야 한다 며 연등을 달았다. 배보살의 사월초파일 굿은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까지 이어졌다. 160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307 연등을 들고 있는 장은순씨 308 연등달기 (2) 태국사 태국사는 괴화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산제당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태국사는 홍보살이 운영하고 있다. 홍보살은 석교리로 시집을 오고 난 후 신 내림을 받았다. 43세에 신내림 받고 계룡산에서 수도를 하다 선몽 을 받고 석교리로 오게 되었다. 태국사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윗말에 살고 있는 심규만씨의 밭이었다. 홍보살은 미륵부처님이 꿈에 나타 나 절을 지으라는 계시를 듣고 태국사를 짓게 되었다. 또한 홍보살은 태국사가 있는 괴화산을 두고 영험이 깃든 산이라고 얘기한다. 괴화산은 청룡백호가 들어오는 명산이라고 믿고있다. 홍보살은 신내림을 받았지만 굿은 잘 안하는데, 자신은 조용히 빌어주는 일을 한다고 얘기한다. 주로 몸 이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홍보살은 이들의 아픈 곳을 짚어내고 그 원인을 상세하게 이야기 해준 다. 아픈 곳을 짚어 낼 때는 신이 몸에 들어와 그 사람의 가족 내력과 조상신의 이야기를 일러준다. 그런 다 음 몸이 좋아지는 처방을 일러준다. 1홍보살의신내림 홍보살은 석교리로 시집을 오기 전까지 교회를 다니며 새벽기도를 많이 했다. 석교리로 시집을 오고나서, 시어머니는 홍씨에게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몸이 아프면 경을 읽을 정도로, 무업만 안 했 을 따름이지 반 무당이나 다름없었다. 시집오고 얼마 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홍씨에게 신이 오기 시 작했다. 홍씨의 남편도 몸이 아프다 죽었다. 홍씨에게 신이 오면서 집안은 이렇게 풍파가 나기 시작했다. 홍 씨도 계속 몸이 아파 약을 먹었다. 주위의 무당들은 홍씨가 신을 받지 않아 계속 몸이 아프고 풍파가 난 것이 라고하였다. 석교리에서 이미 무업을 하고 있던 수도사의 배보살이 홍보살을 보고 신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배보살은 홍씨의 시가로 6촌동서 사이다. 홍씨는 당시 심장병 증세를 보이며 사람만 봐도 무서웠다. 몸은 갈대처럼 말 라있었다. 홍보살은 빚을 얻어 신굿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굿을 하고 나서 홍씨의 병세는 낫기 시작 했다. 당시 신굿은 배보살과 함께 장기면에 살던 최법사가 해줬다. 최법사는 현재 작고했는데, 홍보살은 최 법사와 배보살을 두고 말하자면 선생 이라고 했다. 홍보살이 신내림을 받고 1년 동안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믿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제4장 신앙생활 161

때문에 믿기가 힘들었다. 홍보살은 아픈 사람을 보면 그 증세를 알아맞히고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면 그 사람이 나았다. 1년 정도 지나고서는 할아버지의 조화로 남을 살리는 월력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불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홍보살은 내림굿을 받고 있다. 내림굿은 1년에 한번 저녁에 하게 되는데, 신령 대우 를 해주기 위해서이다. 자신이 신령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례를 1년에 한 번씩 제를 지내 고마움을 표현한다고 한다. 나도 지금 1년에 한번씩 내림굿을 해요. 하루 저녁 씩만 하지. 그래 인저 왜그러냐면 그게 대우를 신 령대우를 하는거야 말하자면. 내가 신령으로 벌어먹었으니까 누가 소개해주면 인사하듯이 내내 마찬가 지여. 신령도 인제 인사를 해서 대우를 하면서 벌어먹여야지 그냥 벌어먹으면 안 벌어져. 2 괴화산 선몽과 홍보살의 석교리 정착 홍보살은 신내림을 받고 석교리에 잠시 있다가, 꿈에 선몽을 받고 유성으로 이주한다. 유성에서 얼마 간 있다가 홍보살은 다시 석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는데, 괴화산 미륵부처의 선몽을 받고 석교리로 다시 오 게 된 것이다. 꿈에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괴화산 산줄기를 보여주었다. 돼지 열 마리가 홍보살을 아 다니면서 밟았 다. 미륵부처님이 내려 점점 더 가깝게 내려왔다. 홍보살은 동네 사람들한테 소리쳤다. 그 분은 하얀 소 복을 입은 미륵 보살이었다. 남미륵 보다 더 큰 미륵이 산 말랭이에서 내려온 것이다. 홍보살은 엎드려 기도를 했다. 미륵부처님이 얘기했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살아라. 미륵부처님이 하늘에서 빙빙 돌아가며 계속 얘기했다. 산말랭이서 땅 속에서 산만큼 큰 미륵부처가 솟아나면서 나타난 것이다. 행정도시 들어 오기 전에도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났었다. 행정도시가 들어와도 너는 안 나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홍보 살은 미륵부처님의 계시대로 석교리는 행정도시 안 들어오게 빌고 있다. 이것이 나라를 위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괴화산은 청룡백호가 들어오는 산이다. 여기가 강을 둘러싼 터가 있다. 괴화산을 개발하고 까부시면 안 좋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는 산부터 명산이다. 절이 암만 많아도 손님이 들어오는 곳 이다. 망했던 사람도 들어오면 좋은 터다. 홍보살은 괴화산을 두고 남한 일대에서 몇 안 되 는 명당이라고 이야기하며, 특히 괴화산은 산신줄보 다 미륵부처 줄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아픈 사 람이 오면 잘 낫는다고 한다. 홍보살은 병원에서 못 고친다고 하는 사람도 여기에 와서 자신이 일러준 처 방을 듣고 나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홍보살이 얘기 하기를 나도 말허자면 일자무식인디 천상에서 호로 약줄을 받았다 고 자신의 신 줄을 이야기했다. 미륵 불의 약사 신 줄을 받은 이후 홍보살은 의사처럼 아 309 홍보살 162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픈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신이 조화가 붙어 병이 잘 안 나으면 그걸 먼저 굿으로 걷어주고 약 처방을 해서 낫게 한다. 3 홍보살의 무업활동 홍보살의 경우 신도가 찾아오면 신도의 형편에 따라 복비를 받는다. 가난한 사람은 조금씩 받아 빌어주 고, 많은 사람은 그 형편대로 받는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점을 보고 홍보살에게 찾아왔는데, 그 사람은 다른 곳에서 굿을 하는데 200만원이 든다고 얘기했다. 홍보살이 보니 그 사람은 다 죽게 생겼는데, 살펴보니 동토 가 걸린 것이었다. 홍보살은 그 사람에게 7만원만 가지고 오라고 했다. 당시 200만원이면 집을 한 채 살 정 도였다. 홍보살은 당시 7만원을 받고 물건을 사가지고 와서 빌었다. 그날로 그 사람이 나았다고 한다. 홍보살에게 굿을 하고 나은 사람들이 소문을 내면서 아픈 사람들이 찾아왔다. 홍보살에게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왔다. 자식 일곱을 키우면서 홍보살은 때거리 가 없었을 때가 있었다. 신내림을 받고 무업 을 시작하고 7년 정도는 무료봉사 하다 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륵부처님이 꿈에 찾아와 홍보살의 이 름을 부르며 홍숙자 복을 좀 주고 가야것다. 측은해서 복을 좀 줘야것다 하면서 그 다음부터 굳게(돈이 많 은) 손님들이 찾아 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벌면 빚을 갚고 자식들하고 먹고 살았다. 또 없는 사람들 은 그냥 차비를 대주고 돈이 없어 기도를 못한다 하는 사람은 기도비도 해주면서 살았다. 처음에 태국사 터 를 잡을 때도 외상 터 를 잡았었다. 현재 홍보살의 신도는 석교리 뿐만 아니라 대전, 유성, 서울 등지에서 찾아온다. 주로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홍보살은 아픈 사람들에게 처방을 해준다. 주로 민간치료와 비슷한 처방을 내리는데, 점술을 통해 그 사람의 안 좋은 곳을 말하고 처방한다. 주로 조상신이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주고 있는지를 많이 말 해주는데, 홍보살은 그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조상신들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붙어있느냐에 다르다 고 한다. 아픈 사람의 고통이 단지 몸의 부작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조상의 후생의 삶과 연관이 있다 고 이야기 한다. 4 조상신과 신도를 연결하는 중재자(혹은 상담자)로서의 역할 조사자는 2006년 7월 30일과 31일에 걸쳐 홍보살의 칠월칠석 재수굿을 볼 수 있었다. 매년 홍보살은 칠월 칠석 에 재수굿을 하는데, 이 굿은 찾아오는 신도들의 재수를 기원하는 내용을 가진다. 홍보살은 징을 두드 리고 경을 읽으며 신도 가정의 재수를 기원했다. 7월 30일(칠월칠석 전날)에는 찾아오는 신도들의 부정을 없애는 서낭제를 하고, 다음날에는 찾아 온 신도 들의 재수굿을 하였다. 재수굿 당일 오전에는 태국사 법당에서 홍보살이 신도 2명의 가택축원을 하며 재수굿을 하였다. 이들은 대전에서 왔는데, 1명은 태국사의 단골신도였고 1명은 단골신도를 따라 우연하게 온 경우였다. 홍보살은 경 을 읽으며 이 두 사람의 축원을 함께 해주고, 두 신도의 조상이 얘기해 주는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홍보살이 이 두 신도의 조상을 만나 조상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이것을 이들에게 얘기해주는 형식이었다. 이날 태국사에 처음 온 신도는 자신이 풀지 못하는 고민을 홍보살에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말 못할 고민 으로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다 우연한 기회에 태국사를 오게 되면서, 홍보살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다. 이 신도는 남편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은지 오래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는 가 제4장 신앙생활 163

족들에게도, 주위 아는 사람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었다. 불공으로 이러한 것을 삭이고 있다가, 홍보살이 재 수 축원을 하면서 이러한 것을 신력으로 짚어내면서 자신의 고민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홍보살은 1시간 30분이 넘게 이 신도와 이야기를 하였다. 신도는 집안의 문제, 자식들의 진로, 남편과의 관계 문제를 상담하였다. 홍보살은 조상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신도의 고민을 풀어 주려하였다. 홍보살은 신 도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고, 신도는 자신의 어려움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였다. 홍보살은 신도의 문제를 눈 에 보이지 않은 조상신의 내력으로 거슬러 올라가 신도에게 지금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을 이야기해주었다. 신도는 이러한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조사자는 석교리의 무속인을 만나며 정말 그들이 이야기하는 신의 세계가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 을 많이 가졌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일이니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속인을 만나면서 생각을 가다듬은 것은 무속인이 훌륭한 상담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신도들이 부담없이 찾아와 자 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무속인은 이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과정 자체에 무속인의 큰 역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무속인이 신도에게 이야기해주는 관점이 현실의 문제를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색다른 관점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현실의 문제를 조상의 문제와 연결시키며, 자신의 삶을 보다 근원적이고 폭넓게 돌아보게 하는 관점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칠월칠석 서낭제와 재수 굿을 보고 정리한 것으로, 재수 굿 부분에서는 홍보살과 신도의 대화를 그 대로 수록 정리하였다. 무속인과 신도가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소통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고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무속인의 역할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가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칠월칠석 서낭제 일시 : 2006년 7월 30일 장소 : 태국사 서낭당 조사자가 태국사 서낭에 도착하니 3시가 조금 넘었다. 홍보살은 서낭 앞에 앉아 제수 음식을 놓고 있었다. 제수음식으로는 수수, 좁쌀, 쌀밥, 두부, 막걸리, 오곡잡곡이 놓였다. 홍보살이 얘기하는 제수 음식들은 하나 같이 부정을 풀어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수수는 집안의 나쁜 살을 제살하는 것이고, 좁쌀은 부정한 것과 상문 살을 풀고, 쌀밥은 서낭신이 먹고 재수를 달라는 것이고, 두부는 인간시비를 다 걷어 달라는 것이고, 막 걸리는 서낭 줄에 앉은 사람들 다 잡수고 도와달라고 비는 것이고, 오곡잡곡 볶은 것은 홍보살이 굿을 하고 뿌리고 싶은 데로 뿌려 제살을 하는 것이다. 제수음식을 놓은 서낭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는데 홍보살은 이게 나라의 일을 관장하는 국사서낭이라고 했다. 예전 마을에 서낭당이 있을 때에는 서낭제를 마을 서낭당에서 지냈다. 하지만 홍보살이 이사 오고 얼 마 안 돼, 마을 서낭당이 없어지면서 태국사 앞에 있는 서낭에만 제를 올리고 있다. 홍보살은 마을에서 산신 제, 탑제를 지내거나 하는 큰 일이 있을 때 태국사 서낭 앞에서 축원을 해준다. 마을 서낭이 없어져 태국사 서낭 앞에서 마을의 일이 잘 풀리도록 축원을 한다. 이 날 서낭제 축원을 할 때도 국사서낭을 부른 다음에, 석교리 서낭을 불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제수 음식 앞으로는 7개의 깃발과 부적이 있었다. 7개의 깃발은 겉에 태극기로 둘어싸여 있었다. 이에 대해 164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묻자 홍보살은 나는 천상에서 칠방기를 받았다 며 다른 사람은 5개의 깃발만 가지고 있는데 나는 7개를 가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부적은 제사가 끝난 다음에 찢어버리려고 준비를 해놓았다. 부적을 펼쳐보니 여 러가지 무늬가 많았는데, 홍보살은 이게 백가지 살을 다 없애버리는 것이다 고 이야기했다. 310 311 313 314 312 315 310 서낭에 향불을 꼽고 있는 홍보살 311 서낭제 진설 312 홍보살이 사용하는 칠방기 313 부적 314 국사서낭 깃발 315 수수밥 제수 음식과 깃발, 부적을 서낭 앞에 준비하고서 굿이 시작되었다. 서낭 바위 사이에 향불을 피워놓아 연 기가 자욱하게 올라갔다. 홍보살은 징을 들었다. 징을 치며 경을 읽었다. 징징징징~ 징징징징~ 하면서 서낭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석교리 서낭신도 불렀다. 내일 재수굿이 있으니 여기 오는 신도들 부정 없게 해달라 고 축원을 하였다. 축원은 10분 정도 이어지다 징소리가 멈추었다. 홍보살은 부적을 찢었다. 옆에 검은 천이 있었는데, 꼬여 있 던 천을 이리 저리 흔들며 그 꼬여있는 고리를 풀어냈다. 풀어내면서 내일 굿이 잘 되게 해달라는 축원을 했다. 홍보살은 예전에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굿을 했는데 지금은 징으로만 하고 있다. 홍보살에 약사 신령이 제4장 신앙생활 165

316 막걸리를 올리는 홍보살 317 서낭제 경읽기 들어오면서 이 약사 신령은 홍보살에게 시끄럽게 굿 을 하지 말고 징만 울리면서 조용히 빌라고 하였다. 그래서 홍보살은 징만 가지고 대부분의 굿을 하고 있 으며, 법당에서는 주로 목탁을 두드리며 경을 읽는다. 칠월칠석 재수굿 일시 : 2006년 7월 31일 장소 : 태국사 법당 318 살풀이 조사자가 태국사에 도착하니 이미 홍보살은 굿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10시 30분 경 이었다. 홍보살은 앉 아서 경을 읽으며 찾아 온 신도들의 가정의 재수를 기원했다. 홍보살은 칠월칠석 재수굿은 칠성님을 위하는 칠성 불공 이라고 하였다. 홍보살은 대전에서 온 두 신도를 위한 가택 축원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신도는 대전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먼저 굿을 하기 전에 이 두 신도는 자신의 이름, 가족의 이름, 주소를 종이에 기재하였다. 홍보살은 두 사람이 적어 놓은 종이를 보고 굿을 하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온 신도 중에 1명은 계속 홍보살은 찾는 단골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단골신도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아침에 아파트 엘리베이트 안에서 만나 함께 태국사에 오게 되었다. 이 날 처음 오게 된 신도는 평소에 자주 다니던 팔공산 절에 가는 길이었는데, 단골 신도가 태국사에 가는 길이 라고 하자 따라오게 되었다. 홍보살은 법당 가운데 앉아 징을 두드리며 경을 읽었다. 징이 울리고 홍보살은 관세음 보살, 석가모니, 약 사여래, 일곱 칠성을 소리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오늘 칠월칠석에 일진 받고 생기복덕을 가려 이 정성을 발 원하오니 굽어 살펴주십시오 하며 축원을 이어나갔다. 166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징징징징 징징징징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생략).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일곱칠성 산 신, 칠성님네 (생략). 금일 정성 발원을 할 때는 이천은 하고 칠월은 초이레에 일진 받어 생기 복덕 생기 일진 받아 두고 이 정성을 발원하오니 굽어살펴주옵시고(생략) 이어서 홍보살은 팔도명산 신령들을 다 불러내었다. 백두산부터 시작하여 한라산 신령까지 부르고 마지 막에는 괴화산 신령을 불러 내어 축원을 했다. 그리고는 신령님들이 나한테 일러 너희 다 잘 보살펴 준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 고 소리를 하였다. 팔도명산 신령님네, 백두산 신령님네, 금강산 신령님네, 태백산에 신령님네, 지리산에 신령님네, 한 라산에 신령님네, 구월산에 신령님네, 삼각산에 신령님네, 계룡산 신령님네, 괴화산 신령님네, 동서 남 북 다 다녀도 사고 없이, 화재없이 해주시고, 인간구설 없게 도와주시고, 천리 운수 불러주시고 만리 운 수 불러 주시고(생략). 걱정마라 너의 운수, 너희 자손들 앞길 뒷길... 319 경을 읽고 있는 홍보살 320 절하는 신도 이렇게 굿이 끝나고 홍보살은 단골신도에게 다 괜찮은데 너희 남편 간 조심해야 된다고 이야기했다. 남편 의 운이 간수치가 안 좋아 지는 운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작은 애 이달의 운이 안 좋으니 잘 넘겨야 한다고 했다. 칠월만 조심해서 넘어가면 가정의 운수가 이어진다고 하였다. 신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않아도 이번 달에 남편 간 검사를 해보았다고 한다. 홍보살은 다시 한 번 검사를 해보고, 특히 남편이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홍보살 : 아저씨 간 조심 하라고 하네. 한 번 병원에 가서 검사 해봐. 간이 조금 나쁘다고 그러네. 딴 데는 괜찮은데. 단골신도 : 예 검사를 한 번 했는데 이상은 없었거든요. 초음파도 해보고 내시경도 해보고. 괜찮았어요. 홍보살 : 다시 한 번 해봐 피로 회복도 못하고. 하여간 술을 먹지 마라고 해야돼. 단골신도 : 예 홍보살 : 간수치가 나빠지는 운수야. 다른 데는 괜찮것어. 애는 괜찮것어? 단골신도 : 누구요? 홍보살 : 큰애. 근디 작은애 이달에는 부딪히는 운여. 이달 말이 지나면 괜찬은데, 조금 저기하더라도 다독다 제4장 신앙생활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