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적석목곽분의 發生과 消滅에 관한 一考 朴 永 福* Ⅰ. 序 言 Ⅱ. 發生에 관한 諸論據 1. 起源 2. 發生時期 Ⅲ. 金氏系列의 登場 1. 建國說話 2. 土着勢力 問題 3. 金氏勢力의 活動 4. 尼師今으로 登場 Ⅳ. 移流民의 通路 1. 말갈족의 등장 2. 이동의 길목 Ⅴ. 消滅에 관한 論據 1. 殉葬法과 喪服法 2. 佛敎收容에서 본 背景 3. 火葬制度의 登場 4. 火葬法과 發生時期 Ⅵ. 結 論 I. 序 言 삼국시대고분에 관한 연구는 근년에 들어서면서 많은 학술조사로 인하여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모으는 대상 중에 하나가 고신라시대 고총인 적석목곽 분의 발생과 소멸시기에 대한 논의로 이 새로운 묘제의 發生이 고신라의 비약적인 국가발 전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현재까지 이 고분의 발생動因에 대해 고분이 갖고 있는 유구의 특성을 추출하여 구조의 독특한 축조방법을 세분, 그 계통을 추구하여 주로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하여왔다. 또 한 이들 고분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유물에 대해서도 그 용도와 착용하였던 위치에 따라 앞선 시대와는 다른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이들 출토유물에 대한 세밀한 검중도 가 해지고 상대적인 비교를 통하여 편년의 자료로 삼아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발생과 소멸시기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갖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고신라사회에 등장하는 이 적석목곽분이 어디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아니면 자체적인 발전인가에 대하여서도 서로 상이한 견해를 표출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의 * 국립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 224 - 國史館論叢 第33輯 기회가 마련되리라고 생각된다. 적석목곽분의 연구자들은 고신라사회에 출토유물과 축조방 식이 새로운 묘제가 나타나게 된 원인으로 모두 이 신라사회 자체내에서 큰 변화가 발생 하였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 적석목곽분보다 앞선 시기에 있었다고 보 이는 토광목곽분에서 발전한 목곽분의 목곽과 고구려의 적석총에서 적석부가 결합하고 다 시 봉토의 분구가 후보되어 지금까지 사용하여 오던 장법과는 매우 상이한 새로운 묘제로 진행되었다고 보았다.* 한편에서는 지역적으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지만 매장방법으로 사용되는 목곽분은 목곽분의 원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북방유라시아 대륙에서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에 분포된 목곽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의 사실들은 유적과 유물을 하나씩 검토하여 보면 서로 관련이 있는 내용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차이가 보인다. 이 적석목곽분은 자체적인 발전보다는 새로운 고분의 건 설자로 생각되는 種族이 신라사회로 이주하면서 등장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이 독특한 고분의 건설자가 잘 알려진 김알지로 대표되는 김씨세력의 신라 사회 등장과 아울러 신라국의 비약적인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있으므로 이들 세력이 무슨계기 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문헌기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며 나아가 이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 한 고분이 어째서 소멸하게 되는가를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고신라의 정치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많은 선후학들의 관심과 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Ⅰ. 發生에 관한 諸論據 경주지역 주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의 수량을 정확하게 파악 할 수 없지만 상당수는 외형상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 고분 중에 신라형성기를 벗어나면서 새롭고 특이한 묘제가 발생하는데 이 고분을 소위 적석목곽분이라 부른다.*** 고고학상 분묘의 연구는 민족간의 내세관이나 사생관의 차이와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 姜仁求, 신라積石封土墳의 구조와 계통 ( 韓國史論 7, 서울대, 1981)., 慶州의 新羅積石封土墳 ( 三國時代 墳丘墓硏究, 嶺南大學校, 1984)., 新羅古墳硏究에 있어서 몇가지 補正 ( 先史와 古代, 韓國古代學會, 1991) p.84. ** 崔秉鉉, 新羅의 成長과 新羅 古墳文化의 展開 ( 韓國古代史硏究 4, 1990) pp.160 162. *** 주 1) 姜仁求(1981) 積石封土墳이라고도 한다.
- 225 - 있는가 등 복합적인 문화양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 문화기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포함 하고 있으며 고분의 축조는 전통속에서도 매우 보수성이 강하므로 묘제는 잘 변화하지 않 는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신라묘제는 일반적으로 토광목관분과 토광목곽분의 발전단계를 지나 새로운 묘제인 적석목곽분이 나타나므로 이에 대한 많은 의문점을 해결하려는 노력과 연구가 있어 왔다. 이는 고분의 규모가 외형상 거대하여 경외감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하고, 출토 유 물이 다양하고도, 독특하여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만큼 이러한 고분을 축조하 여온 주인공이 누구인가, 그 기원과 소멸시기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추구하는 연구는 매 우 어려운 작업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을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1. 起 源 적석목곽분의 기원에 대하여 이 고분이 갖고 있는 축조방식의 구조적 특징을 계통적인 양식의 발전으로 보아 적석부와 목곽부를 따로 분리하여 목곽부는 漢代의 목실분에서 온 것이며, 이는 평양지방의 낙랑목곽분에 실제 예가 있고, 적석부는 대구 대봉동지역에서 발 견된 지석묘의 적석 상태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박진욱은 목곽부가 한대의 목곽에서 온 것이 아니라 경주입실리 토광목곽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목곽뿐만 아니라 그 유물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았다. 적 석부는 앞서 보았던 변형지석묘의 지하구조를 계승한 사람들에 의해 발생한 무덤형식이라 고 보았다.** 이것은 앞서 보았던 목곽의 전승을 단지 낙랑인가 경주인가에 대한 논의로 국한시켜 외 래적인 한의 영향보다는 경주지방 재래의 토광목곽분에서 찾은 그 나름대로 참신한 지적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밖에 경북 칠곡군 구암리 고분은 석곽적석분으로 전형적인 양식이고, 그 시원양식은 선사시대의 석관묘와 적석총이 복합상태로 구성되었고, 구암리 고분의 목곽과 적석의 원류 는 시베리아 분묘의 구조, 곧 스키타이인, 시디아인의 분묘, 알타이 문화로서의 파지리크, 시베 등을 예***로 들고 있어 이 고분의 구조적 특징이 북방문화에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석목곽분의 기원은 외래적인 예도 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재적으로 한반도의 전통적인 고분양식들이 결합 내지 복합으로 발전한 양식으로 파악하여 서로간의 의견의 * 梅原末治, 大正 13年度 古蹟調査報告書 (1924) pp.265 268. ** 박진욱, 신라무덤의 편년에 대하여 ( 고고민속 4호 5, 1964) pp.54 61. *** 金宅圭 李殷昌, 鳩岩洞古墳發堀調査報吿 (嶺南大學校, 1978) pp.134 135.
- 226 - 國史館論叢 第33輯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이 갖고 있는 특이한 구조에 대하여 한반도 이외의 지역으로 그 원류를 확 대한 것은 새로운 관점이라 하겠다. 이들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금관관식은 그 외 관이 독특한 槨의 조각으로 표현되어, 기원과 계통을 추적하기 어려웠지만, 북방아시아에 서 남러시아에 걸쳐서 풍미한 스키타이 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남러시아 알 렉산드로포울에서 나온 은관을 예로 들었다. 또한 서백러시아 샤만관에서 온다고 지적하고 있어* 신라보관**의 출토는 다른 유물들과 더불어 북방의 외래적인 문화요소가 들어왔을 가능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 제시로 이 고분의 기원을 한반도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북 방 아시아에서 찾아야 된다는 내용이다. 그 기원의 고찰은 목곽분 문화의 본고장인 카자크 공화국, 중 소접경지대에 위치한 이시크, 황남대총 남분 적석부의 환 목조는 혹해 북안 스 키타이 수장묘, 이 중 목곽은 하이알타이, 파지리크, 쿠르칸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여, 북방 아시아 초원지대의 목곽분 문화라고 하고 있다. 이는 외래적인 문화에서 전파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내로 기마민족이 이주하여 왔지 않은가 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상반된 의견에서는 기원지와 경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중간에 경로를 나타내는 흔적이 없는 데다가, 두 유적의 축조년대 차이가 너무 크다고 하였다. 따 라서 신라적석목곽분의 기원은 고구려의 적석총이 남파되고, 거기에 내려와 있던 목곽의 구조가 가미되고 다시 봉토의 분구가 후보되어 형성된 복합적 산물이라고 하였다.**** 현재로서는 어떤 의견도 타당성을 확보하기에는 미흡하고, 이 고분의 구조가 자체적인 발전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이 보다는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의 북방적인 요소가 많으 므로 일단은 북방아시아 목곽문화에 연관이 있다는 의견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방의 외래적인 요소들을 시공간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작업일 것 이다. 특히 아무리 기동성을 갖는 기마민족이라 할지라도 신라의 경주지역은 한반도내 에서도 가장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그들이 종횡무진하였던 초원지대와는 지리적 여건이 같지 않음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적석목곽분을 조영하였던 종족은 기마민족으로 한반도내에 들어온 통로는 고구려, 백제의 영역을 벗어나는 동해안을 따라 내려 왔다고 보인다. 이들이 한반도내에서 특히 경 주에 유입되기 이전에 어디엔가 정착하였을 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견해들을 보이고 있 다.***** 이러한 의견은 사로국 시기에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백산맥 부근의 전투를 * 國立博物館, 壺衧塚과 銀鈴塚 (1946) pp.24 28. ** 金元龍, 新羅金冠의 系統 ( 趙明基博士華甲紀念佛敎史學論叢, 1965) pp.285 294. *** 주 2) 崔秉鉉(1990) pp.159 162. **** 주 1) 姜仁求(1991) p.84.
이곳 재 지세력이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227-2. 發生時期 현재까지 이 적석목곽분의 발생시기는 새로운 고고학적인 자료의 발굴조사로 인하여 시 대가 점점 올라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적석목곽분의 가장 앞선 시기는 2 3세기로 보고 있다.* 현재 조사된 오래된 유적의 하나인 목곽적석분은 경주 월성로 가-5호 고분으로, 이곳에서 발굴된 노유소호 등 표식적 인 유물에 의한 년대를 4세기초 내지 4세기 전기인 300년대 로 추정 하고 있다.** 이 보 다 늦은 시기로 보는 예로는 5세기 초반경이 되어야 고총고분이 나타나며 이런 근거의 하 나로 訥祗麻立干 十九年(435) 修葺歷代園陵이라는 기사에서 신라사회에 새로운 묘제가 개 시되는 증거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한편 김씨세력에 관한 문헌기록은 김알지의 설화부터 시작되어 탈해왕 9년에 처음 등장 하고, ****) 유리이사금조*****에서도 김씨 성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들 김씨계열의 신라사회 등장에 관한 내용으로 앞서 본 문헌 기록들 보다는 시대가 떨어지지만 그들의 시조는 성한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금석문이 발 견되었다. 즉 문무왕릉비에서는 星漢王이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하고, 흥덕왕릉비에서는 太祖 星漢 이 24대조라고 하여 성한왕을 미추왕과 동일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따른 다면 성한이 김 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왕이다. 아달라 이사금대 등장하는 신라 군주인 구도**는 군사활동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백제와의 전투***를 지휘하고 있으므로, 실제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군사적인 바탕을 가진 세력 중의 하나로 ***** 朴南守, 新羅上古 金氏系의 起源과 登場 ( 慶州史學 6, 東國大學校, 1987) pp.1 22. 姜鍾動, 3 4세기 斯盧國의 辰韓統合過程에 대한 考察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1). * 주 1) 姜仁求(1991) p.94. 2세기 종전년대에서 약간 여유를 두어 수정하였다.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1987) p.211. 300년보다 늦어질 수 없다고 함 ** 國立慶州博物航, 竣州市 月城路 古墳群 (1990) p.439. 전체적인 연대는 4 6세기로 보고 있다 주 1) 姜仁求 p.100. *** 申敬澈, 古代箱子考 ( 釜山史學 9, 1985) pp.92 94.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9년조. ***** 三國史記 권1, 儒理尼師今, 金姓亦與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 金昌鎬, 新羅太祖星漢王의 재검토 ( 歷史敎育論集 5, 1983) pp.91 106. 李基東, 太祖星漢의 問題와 興德王陵碑의 發見 (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郎徒, 1984) pp.365 376), 태조를 성한으로 보았다. ** 三國史記 권1, 阿達羅尼師今 19년, 伐休尼師今 2년. *** 三國史記 권1, 伐休尼師今 5년, 6년, 7년.
- 228 - 國史館論叢 第33輯 서, 김씨세력 핵심으로 등장한 구도가 바로 미추의 父*로 되어 있어, 이러한 내용을 감안 하면, 이들의 가계를 소급하여 이보다 앞선 선조대에 이들의 활약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 다. 이 적석목곽분이 신라사회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고 김씨계열과 연관이 있 다고 가정한다면, 그 축조시기는 기록에서 본 미추왕의 재위시기인 3세기 중반보다도 이 른 시기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독특한 묘제 를 가진 기마민족 일파가 4세기 전반기에 경주에 도달하므로써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이 출 현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묘제의 출현지역이 경주라고 보고 있지만, 한반도 내에서 처음부터 경주지역에 기마 민족이 정착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확언할 수 없다. 이는 김씨세력의 최초의 활동지역 이 경주지역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Ⅰ. 金氏系列의 登場 신라건국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이는 김씨계열이 신라사회에 출현하게 되는 건국초기 에 는 어떤 기록이 있는가를 설화에서 찾아보고 이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자 한다. 1. 建國說話 1) 赫居世居西干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이고 기원전 57년에 즉위하였다. 나라이름은 서라벌이라 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은 조선의 유민이라고 기록되어 최소한 이들이 본래 이 지역에서 살아온 것 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하여 왔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혁거세는 소벌공과 또는 6부조상들이 자제를 데리고 나라를 세우기 위한 논의를 했을 때에 나타나고 있다. 장소는 나정이라는 샘물터 곁이고, 큰 알 혹은 자란이라 하는 붉은 알로, 이 알을 깨어 보니 어린아이가 나와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니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 었다. 이를 보호 내지 안내하던 백마는 간 곳이 없다 하였으나, 유사 에서는 길게 울다 * 三國史記 권1, 味鄒尼師今立條, 仇道即味鄒之考也 三國遺事 권1, 味鄒王 竹葉軍條, 第十三 味鄒尼叱今 金関智七世孫 이라 하여 2대가 차이난다. ** 주 11) 朴南守(1987) p.17. 구도계가 경주에 유입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 주 2) 崔秉鉉(1990) pp.160 161. **** 三國史記 권1, 始祖조.
- 229 - 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유사 가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들 기록 중에 중요한 내용은 탄생지에 관한 기록이다. 양산아래의 나무숲 사이에 나 정이라는 샘이 명시되어 있는 점, 대란으로 상징되고 말이 안내하는 이 신화는 난생설화와 천마사상과 함께 수목숭배사상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이 다. 2) 閱英 혁거세 5년, 용이 알영정에 나타나 그의 오른쪽 갈비뼈에서 한 계집애를 낳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기를 새, 우물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그 계집아이가 자라 덕기가 있어 시조가 이를 듣고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왕비인 알영의 출생에 관한 내용으로 사기 에서는 용으로만 표현되고, 유사 에서 는 계통이라고 되어 닭과 용으로 표현하였다. 유사 의 내용은 닭이 강조되고, 입술이 닭부리와 같다는 것은 날짐승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월성 북천에서 목욕을 시키었다는 기록은 혁거서간을 欲於東泉 身光光彩 鳥獸率 舞*** 목욕시킨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왕과 왕비의 문화적인 의식의 한 형태로 출신지역 과 연관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알영정, 샘물과 북천의 물에서 용과도 관계가 깊으며 용은 하늘을 오르며 구름과 비를 조화있게 다루는 농업의 신으로 승화, 연결되고 후대에도 천자를 뜻하는 상서러움을 나타 낸다. 鷄는 일반적으로 닭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들과 가장 가까운 날짐승으로 지상에 살던 우 리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고 지켜주는 토템으로 남아 있다.**** 새로 상징되는 이 닭은 조 류숭배사상, 앞서 본 혁거세의 백마의 청마사상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初王生於鶴井 故或云鶴林國 以其鶴龍現瑞也( 三國遺事 권1, 新羅始祖條).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출생한 까닭에 혹은 계림국이라 하니 상서를 나타낸 까닭이었 다. 그러나 혁거서간은 나정곁 林間에서, 왕비는 闕英井에서 태어나 서로 각각 다른 장소 인 데도 불구하고 계정이라는 새로운 명칭 흑은 장소로 일원화하여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두 개의 탄생지 전설이 복합적으로 합쳐진 내용으로 두 종족집단이 결합하는 상징성으로 보고 나아가 계림국은 김알지가 탄생할 때 닭이 숲속에서 울었으므로 국호로 삼게 되는 이유를 삽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三國遺事 권1, 新羅始祖 赫居世王. ** 三國史記 권1, 始祖 5년조. *** 三國遺事 권1, 新羅始祖 赫居世王. ****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條, 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者飛揚. ***** 李丙廉, 譯註三國逍事 p.196. 后자의 誤字가 아닌가 보았다.
- 230 3) 脫解尼師今 國史館論叢 第33輯 본시 多婆那國의 출생으로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1천리 되는 곳이라 하여 신라출신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금관국을 거쳐 해로를 따라 진한 아진포구에 도달하고 처음에는 알 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진한에 도달하였을 때는 어린이로 변하였다. 까치 한마리가 따라 왔으므로 성을 석씨라 하고, 학문에 오로지 힘쓰고 지리를 아는지라 호공의 집이 吉 지 라 하여 빼앗아 살았으니 후에 月城 그곳이었다.* 앞에서와 같이 탈해는 정명국 사기 의 다파나국과 같은 국명으로 해 도에서 온 사람 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금관국이 가락국으로, 진한이 계림으로, 월성의 호공집을 빼앗는 과 정에서 탈해가 본래 대 장장이였다는 사실로 미 루어 선진기 술 집 단의 이주를 뜻하고, 남해 차 차웅의 사위가 되고 곧 이어서 대보로 삼아 군국정권을 위임하고 있어 상당한 세 력임을 나타내 고 있다.** 이 건국설화에 보이는 호공은 어떤 인물이며, 왜 탈해가 이 집을 빼앗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호공***은 탈해보다는 신라사회에 먼저 등장하고 있으며, 혁거서간 시기에 마한에 사신으 로 다녀왔다. 그 족성은 모른다고 하면서도 왜인이라 하였다. 이는 토착민이 아님을 나타 내고, 그 이름을 호공이라 하여 특히 바다를 건너 왔음을 뜻한다. 호공의 집을 탈취하려는 대상으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다. 이는 탈해집단과 선주한 호공집단이 대립관계 보다는 아 직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어 경쟁관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보여주며 또한 이는 이들의 출처가 바다를 건너온 동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탈해가 즉위하면 서 호공을 곧 대보****로 삼아 대립관계에서 협력관계로 전환하였음을 보여주어 호공도 아직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밖에 탈해 3년에는 신라와 왜의 관계가 적대관계*****에서 최초로 우호적인 관계로 변화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도 탈해와 호공의 출 처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4) 金閱智 金城 시림숲 사이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호공을 보냈더니 금색의 작은 궤가 걸려 있 고 흰닭이 울고 있어 왕이 사람을 시켜 가져다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 있어 하늘이 나 에게 준 것이 아니냐 하며 거두어 길러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라 하고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하여 국호로 삼았다.**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條. ** 三國史記 권1, 南解次次雄 5년, 以長女妻之 七年以晚解爲大輔委以軍國政事. *** 三國史記 권1, 始祖 赫居世居西干 38년조.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2년 春정월, 拜瓠瓢公委大輔. ***** 三國史記 권1, 始祖 8년, 倭人行兵 欲犯邊 開始祖有神德 乃還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3년, 下五月 與倭國結好交聘.
- 231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 一作鳩林 亦有白鶴鳴於樹下 如赫居世之故事 鳥獸相 隨 册位太子 後讓於婆姿 不即王位 因金櫃而出 部生俱道 一作仇刀 道生味鄒 鄒即王位 新 羅金氏 自闕智始( 三國遗事 권1, 金闕智 脫解王代). 앞에서 본 삼국사기 의 기록에는 금성으로 되어 있는 지명이 유사 에서는 월성으 로 나타났을 뿐 별 차이가 없다. 다만 혁거세의 고사와 같다고 하였는데 백마가 흰 닭으로 대상 동물이 바뀌었고, 알지는 왕비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지배자의 도래를 알리는 동물이 닭으로 표현된 것은 이들 종족들의 조류숭배사상을 가진 동일한 토템에서 연유한 것이 아 닌 가 느껴진다. 5) 설화에 대한 검토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신라건국기의 설화에서 나타나는 주체는 잘 알려 진 말, 까 치, 닭, 용 등이 연관이 있고, 백마, 백계, 까치 등 하늘을 나르는 천신 사상과 조류숭배사 상을 보여준다. 이들이 출현하는 장소로는 나정, 알영정, 시림 또는 구림으로 우물, 숲과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뜻하고 있고, 새와 숲이 특히 강조되어 국호를 계림으로 삼은 것 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김알지의 출현으로 더욱 김씨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만을 선택하였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나, 대체적으로 3성의 설화도 각각 잘 기록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천마사상은 세계 여러 민족들간에 널리 전하여온 것으로써 백마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는 동양에서는 천마와 관계되는 것이 모두 서역제국의 특산물로 유목 민 과 관계가 깊게 나타나고 있어 신마사상 또한 유목민족적 성격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하였 다.* 앞의 전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말이 하늘로 올라 갔다는 것은 하늘과 지상이 서로 교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는 어린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상징하고, 또한 천 신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음도 아울러 알 수 있다. 울창한 숲, 나정이라는 우물, 말과 함께 하늘을 나르는 새는 유목민들이 항상 초원과 사막에서 동경 하는 이상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이 전설의 주체는 기마민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그들 종족과 연관이 있어 그들을 보호하여 주며, 나아가 神 的인 존재로 숭상되어 건국설화에 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생명의 원향인 이상세 계는 인류기원신화에 나타나 시조설화 내지 신의 탄생 형태로 나타나고, 사후영혼이 귀환 하는 장제습속이나 사후 귀환하는 동일세계로 보았다.** 앞서 본대로 죽은 자에게 새 깃털 을 넣어 승천하고자 하는 염원을 나타내며, 이러한 예들이 발굴조사에서 출토하고 있는 금 관, 조익형관식, 과대, 천마도 등 고고학적 자료로 현출되고 있다. 여기 금관식에서 나무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9년조. * 李在重, 中國과 韓國 古代墳墓美術品에 보이는 有翼默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p.16. ** 玄容駿, 新羅의 他界觀 (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5, 1984) pp.37 63.
- 232 - 國史館論叢 第33輯 와 숲의 표현, 조익형에서 새의 사상, 천마도장니에서 천마사상을 엿볼 수 있고 김알지 설 화에서 그가 탄생할 때 지상에 내려와 울었던 닭은 천신강림의 뜻과 같고, 새는 당연히 승 천하고자 하는 염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 나타난 설화속에 金色궤가 나무가지에 걸린 것 은 역시 나무는 숲이고, 나무궤는 목곽으로 다시 탄생 때와 같이 되돌아가는 장례습속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의 기조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내용들이 서로 다른 종족들이 갖고 있던 설화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으로 보아 신라건국의 박, 석, 김 3성의 출처를 추측 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건국의 토대는 이 지역 토착민의 발전과 더불어 주변지역의 정치 적인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종족들이 이동,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2. 土着勢力 問題 경주지역에서 신라의 성장과 발전은 씨족사회의 사로 6촌이 변천하면서 촌의 원시적 칭 호가 행정구역상의 6부로 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 6부의 명칭도 자비마립간 시기 에 결정이 되고 위치도 큰 변화가 없고, 신라 건국에 중심적 역할을 한 종족이 대개 설화 에 등장하는 박, 석, 김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6촌의 위치가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2개의 촌명으로 구성되 었다**고 하여 경상도 일원으로 확대해 보는 견해와는 서로 다른 견해였고 경주지역 주변 으로 한정한 의견이 상당히 폭넓게 받아 들여졌다. 이러한 서로 다른 의견은 신라건국 주체자들과의 문제로 결부되어 6촌 위치가 경주지역 에 근거지를 둔 것인가 아니면 이 지역의 외곽지역에서 유입 또는 정복하여 온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는 시기가 언제였는가 하는 문제와도 결부되어진다. 적석목곽분이 북방의 목곽분전통과 출토유물의 북방적 성격으로 보아 사로의 건국자들 이 북쪽에서 내려왔을 것임에 틀림없으며, 사로국 건국 당시에는 일단 경주평야에 집합, 정착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적석목팍분의 축조를 사로국의 건국과 같은 시기로 추정하는데 이러한 시기의 검토는 한 반도내에서의 발생과 경주지역의 출현문제와 맞물려 있다. 신라의 건국에 주체적인 활 동을 한 종족들의 유입에 관해서는 몇개의 기록이 보인다. 新羅 始祖)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地間爲六村. 始祖三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 * 李丙燾, 古代篇 ( 韓國史, 1959) pp.365 369., 始祖說話와 六村의 名稱 및 그 位置 ( 韓國古代史硏究, 1979) pp.596 608. ** 金哲俊,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 歷史學報 1, 1952) pp.42 47. *** 金元龍, 斯盧 6村과 慶州古墳 ( 歷史學報 70, 1976) pp.1 14.
- 233 居 瓠公者未詳其族性 本倭人 初以瓠繁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儒理尼師今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三國史記 권1).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간에 헤어져 6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신라가 건국함에 있어서 먼저 조선유민이 이 지역에 유입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어서 혁거세 탄생 설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앞서본 혁거세가 기마종족일 가능성 과 이들이 시조로 추앙될 수 있는 세력으로, 탈해 역시 철기를 소유한 유이민임을 간접적 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변에 벌써 다른 나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국가의 정치적인 영향이 새로운 이 유민을 만들고 아울러 사신으로 간 호공도 왜인임을 밝히고 있고, 낙랑 멸망의 사실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었다. 신라건국에 앞선 촌락사회가 소국단계로 발전하여 사로국을 형성, 경주지역의 정치적 지배자로 토착민이 아닌 이주민으로 파악하고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2세기로 이른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기왕의 견해 중에는 토착세력으로 김씨족을, 그 뒤에 박씨족이 이동해 와 김씨 세력과 사로국을 성립시켰다고 보는 의견에** 다시 사로국의 건국에 대한 새로운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즉 삼성의 세력근거지를 경주지역에 한정시키지 않을 때 혁거세는 상주, 석씨세력은 울산 감포지역, 김씨세력은 경주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의 근거지가 서로 다른 곳일 가능성은 이들 삼성의 설화가 각각 다른 내용 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중 김씨세력인 알지의 탄생은 기록에 나타난 것과 같이 탈해왕대에 출현하고 있어 시기적으로는 삼성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가 되고 있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권력의 추이도 기록에 준하면 거서간 이사금으로 지배세력이 이행 되 어가는 과정에서 김씨세력의 등장은 미추이사금(262 284)이 최초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되고 있어 신라사회에 늦게 합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김씨 세력보다 먼저 지배세력으로 신라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박씨와 석 씨계열이 어느정도 기반이 형성되어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결국 신라의 역 사는 김씨세력이 중심이 되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순서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었 다고 가정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가장 늦은 시기에 등장하여 역시 이 사회에 늦게 들어 왔음에 틀림이 없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증거의 또 하나의 예는 미추이사금조에 알지, 세한, 아도, 수유, 욱보, 구도, 미 * 李鍾旭, 斯盧六村의 政治社會組織과 그 性格 (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p.12 20. ** 金哲俊,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 ( 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pp.71 79. *** 虛重國, 鶴林國攷 ( 歷史敎育論集 13 14, 1990) pp.169 202.
- 234 - 國史館論叢 第33輯 추로 이어진 김씨계통의 세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 실제 기록에 나오는 인명은 구도와 미추만이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이들 김씨세력의 경주사회 출현은 실제로 가장 늦은 시기가 될 것이 다. 여기에서 이들 세력이 한반도내의 어디에 존재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되 므로 이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3. 金氏勢力의 活動 김알지의 탄생에 따라 국호를 계림국으로 하였다고 하고, 월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김씨집단에 의해 처음으로 수축되어 김씨세력의 중심지로 보았다. 계림 즉 닭성이 한문표 기로 월성이 아닐까 하였다.** 위의 해석은 수긍이 가는 점도 있으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의하면 먼저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은 왜국 출신의 호공이며, 탈해이사금이 신라사 회에 등장할 때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김씨계통의 세보 는 구도, 미추만이 기록에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김알지의 탄생으로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는 내용은 믿기가 어려우며, 김씨세력의 본거지는 월성이 아니라, 그들이 구전으로 전승하여 오던 김씨계통의 건국 설화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 금석문에 나오는 성한이 미추와 동일인물이라고 할 때 알지 이후에 4대에 걸친 세보는 신라사회에서의 역할이 보이지 않고 있는 점에서도 더욱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알지를 계림국의 소국수장으로, 미추를 연맹장으로 파악하여, 이는 미추가 한단계 나아 가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다고 하는 점***은 나라의 명칭보다 국가발전의 한 과정으로 판단 한 점에서 이해가 되지만, 김씨세력의 중심지가 월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 고 생각된다. 계림국의 소국수장으로서의 지배영역이 앞서 혁거세, 박씨세력이 상주인 사벌국에서 경 주지역사회로 진출한**** 것과 같이 계림국의 지배영역으로 이 소국의 경주지역이 김씨 활동 무대가 아닐 수도 있다. 이른 시기에 월성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三國史記 권2, 味鄒尼師今,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 生味鄒之考也. ** 주 43) 盧重國(1990) pp.184 187. *** 주 43) 盧重國(1990) pp.187 191. **** 주 43) 盧重國(1990) pp.180 181.
- 235 赫居世尼師今 二十一年築京城 號曰金城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於金城. 脫解尼師今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 始林樹間 改始林名鶴林 因以爲國號. 婆娑尼師今 二十二年 春二月 築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三國史記 권1). 이 내용으로 보아도 신라의 건국 초기에 정치적으로 우세한 혁거세는 처음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고, 5년 후에 금성내에 왕궁*을 조영하여, 탈해가 월성에 근거 하였지만 즉위 하 였을 때는 금성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성은 혁거세 즉위 21년이라고 하여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축성을 하고 있다. 이는 김알지가 시림에 나타났을 때 그 위치를 금성**으로 기준을 삼은 점은 아직 월성이 왕궁이 아니고 탈해 세력이 점유하고 있다가 기 록대로 파사때에 석씨의 근거지로 왕성을 옮겨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는 이곳이 정 치 세력의 중심지로 활용되고 자연스럽게 승계되었을 것이다. 김알지로 대표되는 김씨 세력은 탈해왕 시기에 등장하고 탄생지인 시림을 계림으로 고 쳐 국호을 삼았다고 하였으나 알지가 이사금이 된 자료가 없고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王擇吉日 册位太子 後讓於婆姿不即王位( 三國遺事 권1, 金闕智 脫解王代) 味鄒尼師今立 其先閱智 出於鶴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大輔( 三國史記 권1). 기록으로 보아 알지는 신라건국 초기에 참여한 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보인다. 왜냐하면 태자로 책봉되었는데도 왕위를 승계하지 못하고 파사왕에게 양위하였고, 탈해 때에 궁중에 서 자랐다고 하고 대보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그 이후에 실제의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 고 탄생에 관한 설화만 남아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아직은 이들 세 력의 힘이 미치지 못해 경주지역에 진출할 수 없던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되고, 아니면 이 김씨족단 세보에만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 삽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이들이 탈해왕시기에 나타나 구도가 신라사회에 등장할 때까지 별다 른 기록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이 알지에 관한 내용은 신라건국의 초기에 참가한 실지 인 물이 아닐지 모른다. 김씨세력의 실제적인 지도층으로 구도가 신라사회에 등장할 때 우선 주의깊게 보아야 될 부분은 백제와의 투쟁에서 군사적인 세력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주지역의 핵 심세력으로 미추이사금의 출현은 이에 앞서 그의 父로 알려진 구도가 아달라이사금 시기 에 등장한다.*** * 三國遺事 권1, 新羅始祖, 營宮室於東山西籙 今昌林寺. ** 三國遺事 권1, 金闕智 脫解王代, 瓠公夜行月城西里 始林中이 시림의 동쪽에 금성과 월성이 모두 있어 착오라고 생각한다. ***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19년조, 伐休尼師今 2 5 6 7년조.
- 236 - 國史館論叢 第33輯 阿達羅尼師今 十九年 春正月 以仇道爲波珍湌仇須兮一吉湌. 伐休尼師今 二年二月 波珍湌仇道 一吉湌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此( 三 國史記 권2). 구도가 처음부터 파진찬으로 신라의 관등으로는 제4위에 해당되는 진골이상이 할 수 있 는 높은 관직에 임명되고 있어 상당한 잠재적인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 않았나 보여진다. 벌휴이사금 시기에 백제의 침입으로 구도가 전투를 행한 지역은 소문국 모산성 구양 원산 경 부곡성 계산 등으로 현재 의성 진천 예천 보은 등으로 구도 등의 김씨계가 소백산맥 일 대의 중부지역의 재지세력으로서 그 지역의 연맹장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파악하고 있다.* 백제의 신라 침입시작은 이에 앞서 탈해이사금 7년 백제왕이 지경을 개척하여 낭자곡 (청주)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어 회견을 청하였으나 가지 아니하였다.** 이는 신라와 백제 가 처음 조우할 때에는 지경인 국경 문제가 발단이 됨을 알 수 있다. 이 지경은 그 위치가 현재의 충북 청주로서, 어떠한 세력과 대치하게 됨을 보여주고, 회견을 청한 것과 같이 처 음은 평화적인 해결의 길을 모색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곧 이어서 탈해이사금 10, 14, 18, 19, 20년***에 걸쳐 서경, 와산성과 변경을 수차례 뺏고 뺏기는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 파사이사금, 지마이사금때에 이르러 사신이 교빙되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아달라 이사금 12년에 아찬 길선의 모반사건****으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길선이 어디에 있었는 지는 모르나 신라가 군사를 내어 친 곳은 백제의 성이므로 국경선에 가까운 어느 곳이 아 닌가 보이며, 이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성을 들어 백제편에 가담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 사건은 결국 신라의 실패로 귀결되었고 전투는 계속하여 주로 국경주변에서 일어났다. 백제가 다시 아달라이사금 14년에 국서의 2성을 습파하여 民口를 잡아가, 신라는 일길 찬 흥선과 왕이 백제를 치므로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보내고 화해를 청한 내용이 있다.***** 이때에 신라왕이 진출한 곳이 한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아마 이곳은 국경선 부근인 남한 강 유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전에는 백제와 싸운 장수의 이름이 없고, 이후 아달라때에 이르러 흥선과 왕이 직접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때에는 경주의 세력과 김씨 세력이 어떤 연관이 있지 않았나 추측되며, 처음으로 김씨 세력의 실체인 구도가 파진찬으 로 등장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후 별휴대에 구도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구도의 등장은 탈해이사금 9 년 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삽입되어 있는 것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알지의 등 * 주 11) 朴南守(1987) pp.11 12.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7년조.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10 14.19.20년조. ****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12년조. *****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14년조.
- 237 - 장 이전에 두번에 걸친 백제의 침입이 있었고, 이후 10년에 백제가 차지하였던 와산성을 다시 뺏으면서 신라가 군사적인 우위를 갖게 되는데 김씨세력의 등장이 바탕이 된 것이라 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사적인 활약상에 대해 김씨세력의 등장을 경주의 세력으로 보지 않고 소백산맥 일대*卿 내지 경북 영주를 김알지의 탄생지로 보고 이들을 재지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 다.** 이러한 논지에서 김씨세력이 소백산맥일대에 정착하였다가 어느 시기에 신라 중심지 인 경주지역으로 들어가 미추이사금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씨세력이 초기에는 소백산맥 일대의 재지세력이라 할 때에 이들이 경주지역에 나타나 는 시기를 문헌기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4. 尼師今으로 登場 구도가 아달라이사금대에 등장하여 벌휴시기에 가장 큰 활약을 했고 후에 와산*** 공격 실책으로 악산곡 성주로 격하되고 있지만, 조분이사금조****에 의하면 구도의 女, 김씨계 玉 帽 부인이 벌휴의 자인 骨正과 혼인하여, 이 세력과 석씨계 세력과의 혼인이라는 결합을 통하여 벌휴대에는 경주지역으로 진출하고 있다고 보인다. 나해가 이사금에 오른 것은 父, 母, 妃가 昔씨였고 적손인 조분을 제쳐놓은 것은 나이가 어렸다고 하였지만, 그 보다는 나 해의 母는 昔씨이고, 조분의 母는 金씨여서 김씨세력이 약세였다고 보았다.***** 이 나해는 조분왕의 妹를 妃로 맞고 있는 점에서는 大孫인 조분의 이사금 옹위싸움에서 일방적인 승리보다는 조분계와 협의, 추대형식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해의 왕자 인 이음*과 태자인 우노**가 정치권력과 군사적인 힘을 강화하여 석씨계의 세력을 공고히 하지만, 조분도 역시 나해의 女를 맞이함으로써 나해왕의 사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이중 적인 혈연과 옥모부인의 김씨계가 조분에게는 더욱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분이 이사금이 되고 나서도 우노를 대장군***으로 삼고, 서불감****까지 올라 아직은 나 * 주 11) 朴南守(1987) p.15. ** 주 11) 姜鍾動(1991) pp.49 63. *** 申瀅植, 新羅王位繼承考 ( 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p.64. 이는 김부족이 그들의 본거지를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三國史記 권2, 助賁尼師今, 姓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骨正_葛文王 母金氏 玉帽夫人 仇 道葛文王之女 妃阿爾兮夫人 奈解王之女也 前王將死遺言 以壻助賁繼位. ***** 주 58) 申瀅植(1971) p.64. * 三國史記 권2, 奈解尼師今 12년, 拜王子利音 或云奈音 爲伊伐湌 兼知內外兵馬事. ** 三國史記 권2, 奈解尼師今 14년,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往救之 *** 三國史記 권2, 助貴尼師今 2년, 以伊湌于老爲大將軍 **** 三國史記 권2, 助貴尼師今 15년, 拜伊湌于老爲舒弗邯 兼知兵馬事
- 238 - 國史館論叢 第33輯 해계열인 석씨의 협력이 필요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노세력이 이사금의 옹위를 받지 못하고 조분의 弟인 점해로 이양되었다. 이와 같이 세력의 이합집산 속에서 점해의 앞선 이사금이었던 조분은 그의 女인 광명부인이 김 씨계인 미추와 혼인함으로써 조분계로 세력을 모으고, 김미추*는 그의 母가 朴씨, 妃는 昔씨로 이는 신라건국의 3성의 세력을 바탕으로 혈연적인 결집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고시 왕위 계승은 우선 선거에 의한다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 추대의 배경은 왕비계였음을 특징으로 보았다.** 이러한 결론과 같이 김씨계열이 경주 중앙정치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방법도 구도의 女 인 옥모부인이 벌휴왕의 子와 혼인한 것을 매개로 진출하여 미추이사금대에 가서 신라를 김씨 왕국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Ⅳ. 移流民의 通路 1. 말갈족의 등장 고신라의 적석목곽분을 조영한 김씨세력은 처음부터 경주지역에 있지 않았고 소백산맥 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재지세력으로 보았다. 이들이 한반도내로 이주하게 되는 경로는 고구려나 백제지역에서는 그 유적과 유물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고, 이 고분구조의 특징성 을 보이는 유적이 없어, 문화의 전파보다는 종족의 이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목곽문화 가 원거리에서 온 것으로 그 중간단계의 고고학적 유적이 밝혀진 바가 없어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한반도내로 들어오는 경로를 문헌적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이는 당 연히 고구려나 백제영역을 벗어난 동해안***길이 될 것이며, 이곳에 출몰하였던 말갈****에 관한 기록이 추적에 보탬이 될 것이다. 溫神王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爲拒守之計.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 十一二. 八年 春二月 鞋賴賊三千來 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 戰克之 殺虜五百餘人( 三國史記 권23). * 三國史記 권2, 味鄒尼師今,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 주 58) 申瀅植(1971) p.69. *** 李殷昌, 新羅金屬工藝의 原流的인 中央 Asia 古代文化 ( 韓國學報 26, 1982) pp.163 167. **** 李丙燾, 國譯三國史記 권23, 溫祚條 2년 주에 말갈은 함경도방면의 예맥(동예)을 잘못 지 칭한 것으로 보았다. 이 지역의 통로만 추적함.
- 239 - 말갈족에 관한 기록은 백제 온조왕 2년(서기전 17)에 보이며, 말갈의 위치가 백제의 북 쪽 국경에 위치하여 백제에 대한 공격의 가능성을 감안하여 대비하고 있다. 왕은 그들이 용기 와 술수에 능하니 이에 대한 준비를 잘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백제 가 건국하기 이전부터 이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곧이어 다음해에 말갈이 북경을 침입하여, 이를 매우 적극적으로 막아 대단한 전과를 거두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이때에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삼고 있어 한강유역이 그 경 계가 되므로 침입의 통로는, 고구려 중심영역을 피하여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태백산맥 에서 서쪽을 넘어 왔을 것이다. 이들이 백제의 심장부인 위례성을 공격했다는 점으로 보아 상당한 세력임을 알 수 있겠다. 2. 이동의 길목 말갈족*의 내침지역은 북쪽국경, 한강유역인 慰禮城, 大斧峴(평강), 미천 靑木山(영평) 七重城(임진강), 述川城(여주), 馬首山(금화), 高木城(춘천)** 등으로 파악되고 있어 이들 지명의 위치로 보아 말갈은 원산에서 안변을 거쳐 평강, 연천, 한성, 여주에 이르는 지역을 공략대상으로 삼아 내침하며 이들 지역은 백제의 거의 전역에 해당되는 광범위한 곳이다. 신라지역은 大領柵(대관령), 泥河(강롱), 長領(영흥), 悉直(삼척), 孤鳴(청송호명산), 彌秩夫(흥해) 등지로 내침하고 있어 태백산맥 동쪽 강릉, 서쪽 대관령, 동남쪽으로 삼척, 청송, 흥해까지 진출하고 있다.*** ① 婆娑尼師今 二十六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② 祗摩尼師今 二年 三月 百濟遣使來聘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 五將軍 助之 敵聞而退( 三國史記 권1). 신라에는 지마이사금 14년(125)때에는 泥河****를 거처 대관령을 목표로 하여 습격하였 다. 사료 ①②는 백제에게 청병을 하고 있는데, 신라와 공동의 적으로 함께 대처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보이고, 백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말갈 때문에 많은 고초를 받았고, 이는 한편 말갈에 대한 전투경험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하고자 하였다고 보인다. 이는 백 제 장군의 파견을 적이 듣고 물러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해석된다. 이 시기의 기록 * 俞元載, 三國史記 偽靺鞨考 ( 史學硏究 29, 1979) pp.1 45. 말갈 一連表를 참고함. ** 앞으로 나오는 地名들은 원칙적으로 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內容에 따랐다. *** 주 69) 俞元載(1979) p.11 표 참고 **** 崔炳云, 西紀 2世紀頃 新羅의 領域擴全北史學 6, 1982) p.38. 泥河를 낙동강 상류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
- 240 - 國史館論叢 第33輯 은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교빙하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청병에 응하였을 가 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함경도, 강원도 북부는 원래 동예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다.* 동옥저**가 혁거세 에게 양마 20여 필을 사신을 통해 보내고, 남해 차차웅대에는 북명인이 예왕인***을 바친 일 련의 기록은 신라의 건국과 초기부터 함경도지역의 세력과 상호 교류가 있었다고 보인다. 앞서 본 유리이사금 시기에 화려(영흥)와 불내(안변) 두현 사람이 공모하여 북변을 기 마를 이용하여 침입하고 있다. 이들 현의 지역이 영흥과 안변이므로 이들이 침입한 북변이 함경도에서 남하한 곳으로, 앞서 본 말갈의 침입과 같은 통로로 생각된다. 연합공모한 군 대를 기병으로 이용하여 처음으로 전투에서 말을 사용한 기록으로 보아 이들 지역이 험난 한 산악지대임을 감안할 때 공격과 방어 모두 기동성 있는 기마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 고, 옥저에서 양마를 희사하였음에서도 기마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신라에서 기마를 전투에 처음 이용한 내용은 탈해이사금 8년 백제와 계산성(보은)과 구 양성(옥천) 싸움에서 나오며 기병 2천을 보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경주에서 매우 먼거 리여서 신라의 힘이 미쳤는지 의심이 되며, 맥국*****의 예로 보아 이 지역에 있던 소국의 역 사적 경험이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백산의 재지세력이 김씨였다고 할 때 이들이 일찍부터 기마기술을 가진 기마족단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V. 消滅에 관한 論據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이 적석목곽분들이 어느 시기에 소멸되 는 가 하는 시기문제는 학자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적으 로 5세기 전반에서 7세기를 넘지 않는 시기에 횡혈식석실분으로 대치되어 이들 고분이 소 멸된 다고 보고있다.* * 주 68) 李丙燾 및 주 69) 俞元載(1979) pp.35 37. ** 三國史記 권1, 始祖赫居世 53년조. *** 三國史記 권1, 南解次次雄 16년조. **** 三國史記 권1, 脫解尼師今, 八年百濟遣兵 攻蛙山城冬十月又攻狗壞城 王遣騎二千 擊走之. ***** 三國史記 권1, 儒理尼師今 17년, 秋九月華麗不耐二縣人 連謀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以兵 要曲河西敗之 王喜與貊國結好. * 尹世英, 古新羅伽倻古墳의 編年에 關하여 ( 白山學報 17, 1974) p.104. 5세기말 이후에 夫塚을 설정함. 주 12) 金元龍(1987) p.258.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 崔秉鉉, 新羅石室古墳의 硏究 ( 崇實史學 5, 1988) pp.62 64. 법흥왕 연간으로 보아 6세기 중반.
- 241 -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로 보문동 부부총이 있다.* 이 고분은 외형상은 표형분으로 인식되어 夫塚은 적석목곽분이고, 婦塚은 횡혈식석실분으로 구축된 두 개의 서 로 다른 묘제가 혼재하고 있으므로 그 시기가 횡혈식석실분의 생성시기와 연결된다는 일 반적인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에서 나타나는 고분의 축조 양식과 그 출토유물의 상대적인 시대구분에서 얻을 수 있는 편년에 대해서는 합당한 논거 가 있어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한편 이제까지 조사된 유구와 유물로는 완전한 시기구분을 할 수 없는 점도 부인할 수 없어, 새로운 유구와 유물의 출현이 그 시대구분에 새로운 논란의 여지가 될 가능성이 상 존 하고 있다. 문헌기록도 마찬가지로 서로 보완할 수 있는, 하나의 다른 측면에서 뒷받침 이 될 수 있는 자료라는 관점에서 소멸시기의 배경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엉성하고 소략 한 문헌기록이어서 가정과 추론으로 이끌어 갈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1. 殉葬法과 喪服法** 신라의 정치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는 법흥왕때의 율령의 반시라고 할 수 있다. 이것과 더불어 전후시기에 보이는 내용이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사회, 문 화의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보여 이들 내용을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① 智證麻立干 三年 春三月 下今禁殉葬 前國王農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宮 五年 夏四月制喪服法 頒行( 三國史記 권4). ② 法興王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十六年 下令禁殺生( 三國史記 권4). ③ 新羅之初 衣服之制 不可考色 至第二十三葉 法興王 始定六部人服色 尊卑之制 猶是夷俗 至眞德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太宗皇帝詔可之 兼賜衣帶 遂還來施行 法興王制 自太大角干至大阿湌紫衣 上堂大奈麻 赤位大舍組纓 興德王即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 華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三國史記 권33, 雜志 2 色服). 주 1) 姜仁求(1991) p.109. 기원은 의성고분, 경주지방은 5세기대에 나타남. * 朝鮮總督府, 朝鮮古蹟圖譜 (1916) pp.43 44. ** 李杜鉉 외 喪禮 ( 韓國民俗學槪說), 1974) p.81. 상제들이 지금까지 입고 있던 통견과 소복을 벗고 喪制에 따라 상복을 입고 成服祭룰 지낸다. 喪服은 親疏에 따라 5종으로 나누어 입는다. *** 盧泰敦, 삼국의 성립과 발전 ( 한국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78) pp.191 195.
- 242 - 國史館論叢 第33輯 사료①에서 보면 智證마립간 즉위 1 2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3년부터 나타나고 있는 데, 이때 가장 먼저 행하여진 일이 순장을 금하는 영을 내린 것이다. 이에 앞서 어떤 내용 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즉위 후 시조묘에 제사하거나 배알을 하고 군국 정사를 맡을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는 선조에 대한 공경의 뜻과 천지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즉위 의식의 일종으로 파악, 이해되고 있다.* 순장을 금지하는 영을 내린 후 神宮 奈乙**에 제사지내고 있는 점에서 신궁의 제사와 함 께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한 명령이었음이 간접적으로 간파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장문제가 매우 다루기 힘든 사회적인 어려운 문제의 하나로 대두되 고 있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이 순장의 풍습은 여러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행하여져 내려 온 장례절차의 유습 가운데 하나로 신라사회에도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後漢書 東夷傳 扶餘條에 死則有槨無棺 殺人殉葬 多者呂百數 라 하여, 사람 이 죽으면 곽에 넣고 관은 없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백을 넘는다 하였다. 이 백이 란 숫자가 산술적인 인원 수를 말할 수도 있으나 많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이 기록은 물론 신라의 기록이 아니지만 지증마립간 시기에도 순장 유습이 있어 오랜동 안 이어져왔음이 확인된다. 신라사회의 순장은 분명히 왕이 돌아가면 남녀 각각 5인씩, 10명을 순장하게 되어 있 어, 앞서 부여의 경우보다는 상당한 수적인 차이를 보이며, 이는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인 원수가 줄었을 가능성이 있음도 아울러 유추된다. 국왕이 돌아가면 10명을 순장하였다는 내용에서 보면, 이 보다 신분상 낮은 귀족계급의 사람들도 왕보다는 적은 수이지만 순장하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의문 은 신라사회 순장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더욱 많았을 가능성과 더불어 이는 사회, 도덕적인 면에서 상당히 심각한 마찰을 야기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어 5 년에 상복법을 제정 반포 시행함으로써 지증마립간 시기 이전에 있었던 장례절차의 하나인 상복의 서열을 재정리하여 시행한 것으로, 순장법의 시행과 더불어 일련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 상복법은 사료 ②에 의하면 지증마립간을 이은 법흥왕 7년 율령의 반포로 백관의 공 복을 정해 이것 또한 사회 계층간의 서열을 정하고 바로 잡고자 한 것과 같은 의미로 판단 된다. 이 판단은 사료 ③에서 신라초기의 의복제도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고, 이어서 법흥왕 * 崔光植, 始祖廟祭祀 ( 韓國古代의 祭儀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pp.50 58. ** 三國史記 권3과 권32, 雜志 祭祀, 炤知王 9년, 智證王代에 나을 신궁에 관한 설치시기가 서 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 晉書 四夷傳, 東夷 馬韓조, 死者以生人殉葬 등의 기록이 있다.
- 243 - 때에 처음으로 6부 사람들의 복색으로 존비제도를 정했다고 하였다. 이는 관료들 뿐만 아 니라 6부의 사람에게도 모두 해당되고 있어 사회의 문란해진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 도가 엿보인다. 이것이 오히려 東夷의 풍속 그대로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이때에 새로 정한 의복제도가 법흥왕때가 처음이라고 하였지만, 東夷라고 표현함으로 이전에 신라고유의 의 복제도와 같음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상복법과 의복제도가 모두 신라인의 존비의 고유제도로서 이러한 법과 율 령이 제정, 반포 내지 시행되기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알 수 있고 사료 ③은 백관의 공복 은 삼국사기 의 기록 분류법에서는 색복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어, 공복의 4가지 의복 색에 의해 계급간 서열이 엄격하게 구분되었음이 감지된다. 사료 ③은 신라후대의 기록이지만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尊卑가 있어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는 기록에서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이어 풍속의 파괴를 좌시하지 않고 옛 국법에 따라 시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어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느슨해 진 신라사회의 기강을 또 다시 확립하고자 하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순장제에 이은 상복제는 신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인 복잡한 여러제도 중에 하나인 장례절차에 대한 극히 단편적인 내용이지만 사실적인 상황을 얻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럼 왜 이때에 장례절차에서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기도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검토하 여 보고자 한다. 이 지증마립간 시기는 신라의 지배계층이 시행하여 온 장법이 고고학적 자료에서는 적 석목곽분이라는 묘제를 축조하던 시기로 볼 때, 이전부터 실행되어 오던 장례의 기준이 순 장의 금지와 곧 이은 상복제로 인해 새로운 규범의 장법으로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장법이 다른 형태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는 순장금지령은 신라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어왔던 순장이 비인간적인 장례의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또한 적석목곽분의 축조에 따르는 많은 시간과 인원동원에서 오는 경제적인 손실을 인식, 고분이 갖고 있는 후장적인 장례절 차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이면의 사상을 검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상복법 역시 장례의식 을 주관하는 사람이나, 죽은 자의 서열에 따라 존비에 맞게 실행하도록 하여 낭비적인 요 소를 제거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그럼 왜 이때에 장례의식 절차에서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 三國史記 권17, 高句麗本紀 5 東川王 22년,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 244 - 國史館論叢 第33輯 2. 佛敎收容에서 본 背景 장례의식 절차에 대한 이러한 혁신적인 순장금지령과 상복제가 왜 필요불가결하였는가 를 그 당시의 사회적인 면에서 그 바탕이 되는 사상을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신라 지배층의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를 살인하여 순장한다는 비인간적인 유습 행위에 대한 자각이 인간생명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사상은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출토 유물과 거대한 봉토를 만들기 위한 토목공 사에서 보이는 사치와 낭비적인 후장제도가 가져온 부정적인 면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상 이 내포되었을 것이다. 이는 불교의 전래에 따라 불교사상이 신라인들에게 점차 확산되어 새 제도를 제정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반도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 온 것은 고구려가 처음 으로 소수림왕 2년(372) 전진에서 불상과 경문을 전해 주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동진으로부터이다. 그러나 불교가 신라에 공인된 시기는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 교가 계기가 됨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신라만이 150년 이상 뒤늦게 공인된 것은 국가적인 공인을 말하는 것으로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가 수용되었음을 알리는 자료들이 있다. 이 중 삼국사기 법흥왕 15년조에 처음 불법을 행하였다는 기록에 이어서 불교 가 들어온 내력을 설명하는 과정에는 訥祗王(417 458)과 昆處王(照知 479 500) 때에 묵호자와 아도화상이 온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들 기록은 지증마립간보다는 앞선 시기이고 곧 이어 등극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 음에서 지증마립간대에는 왕실과 지배계층들에게 잘 알려진 시기로 보아야 되겠다. 이와 같은 예는 공인 이전의 신라왕명 중에 자비 소지 지증 등의 불교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즉 비처(소지)는 지혜를 비추다 혹은 밝은 지혜, 지증(智哲路, 智大老)은, 즉 維 摩經 弟子品 第3에 受諸觸如知證으로 지혜를 증득함 혹은 바른 지혜에 의한 열반을 증 명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불교는 평등사상, 인과응보, 숙명론, 윤회사상, 체험사상 등으로 현실세계보다는 미래와 내세의 사후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세에 선업을 행하면 사후에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윤회사상은 영혼불멸의 원시사상 과 서로 통하고 있지만 이 불교사상이 신라 재래사상의 상층부분과 융합되는 데는 오랜기 간을 걸쳤을 것이다. * 三國史記 권4, 法興王 15년조, 三國遺事 권3, 阿道基羅. ** 辛鍾遠, 新羅의 佛敎傳來와 그 受容過程에 對한 再檢討 ( 白山學報 22, 1977) pp.138 159 168. 불교전래의 시기를 5세기초로 보았다.
- 245 - 법흥왕은 불교공인 바로 다음 해인 16년(528) 下令禁殺生 이라 하여 불교에 8계제의 하나인 살생을 금하였다. 이는 앞서 본 지증마립간 3년(502) 下令禁殉葬 이란 내용과 꼭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명령사이의 기간은 약 26년이라는 시간적 간 격이 있지만 그리 먼 시기가 아니며 불교의 사상이 더욱 확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살생 과 순장은 서로 다른 용어이지만 죽이지 아니한다는 뜻보다 죽이지 말라는 명령의 적극적 인 의미가 내포되어 불교의 진리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순장을 금하게 되는 소위는 불교 교리*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3. 火葬制度의 登場 신라의 불교전래는 공인되기 이전에 벌써 신라사회의 사상적인 바탕으로 점차 확산되어 왔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순장제 금지와 아울러 상복제 실시로 장례의식도 큰 변화를 가 져와 왕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축조되어 왔다고 보는 후장적인 적석목곽분이 소멸되고, 이 지배층들의 새로운 묘제로 불교 교리에 따른 화장**과 이전부터 있어온 횡혈식석실분***으 로 대체되고 있다. 특히 화장제도가 가지는 장례의식에 따라 피장자를 燒葬함으로써 완전히 후장제도에서 薄葬형태로 변화하였다. 지증왕은 순장제 금지와 상복법을 시행하여 신라의 燒葬儀式에 개혁적인 변화를 가져왔 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그 자신에 대한 장례절차를 알 수 없음은 물론 장지 조차 도 기록이 없어 지증왕의 원자로서 즉위한 법흥왕과 그의 동생 입종의 아들인 진흥왕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法興王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謚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峰. ② 眞興王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王幼少 王太后攝政. 五年 春二月 興輪寺成 三月 許人出家爲僧尼 奉佛. 十年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送佛舍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 三十七年 安弘法師 入唐求法 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 秋八月 王薨 謚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峰 王幼年即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 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效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费也 國人以禮葬之. ③ 眞平王 三十六年 永興寺塑像佛自壊 未幾 眞興王妃比丘尼死( 三國史記 권4). * 주 58) 申澄植(1971) p.97. 이때에 순장금지와 상복제정은 불교와 관계를 지을 수 있다고 보았 다. ** 鄭吉子, 新羅時代의 火葬骨蔵用土器硏究 (崇實大學校 박사학위논문, 1990). *** 주 78) 崔秉鉉(1988) pp.62 64.
- 246 - 國史館論叢 第33輯 신라의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514 540)과 뒤를 이은 진흥왕(540 576)은 모두 같은 장소인 애공사 북봉에 장례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째서 이들이 같은 장소인 현 재 경주 효현리 와산지역에 장사를 지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몇 가지 내용을 추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사료 ②에서 진흥왕 5년(544)에 흥륜사가 준공되고 이어 국인이 출가하여 중이 되도록 허가하였다. 왕은 어려서 7세에 즉위하고 불교를 믿어 말년에는 스스로 법운이란 법명을 갖을 정도로 열심이라 하였다. 왕비 역시 법류란 법명을 갖고 영흥사에 거주하여 왕과 왕 비*가 모두 승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진흥왕과 왕비는 불교 승니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 부부는 왕의 장지에 함 께 합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왕비의 장례에 관해, 특이하게 國人이 禮儀로 장사 지 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장례의식은 기왕에 있어온 장례절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새로 운 방법의 장법으로 행하여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기록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사료 ③에서 진평왕 36년(614)에 영흥사의 흙으로 만든 부처상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기 록과 함께 비구니 진흥왕비가 죽어 부처가 열반한 것과 같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 한 기록은 국인의 장례기록과 함께 그 의미가 화장한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가정이 가능하다면 이때에 화장이 시작되었다고 보이지만 이보다 먼저 애공사의 북 봉에 장사지낸 법흥왕도 검토대상이 되겠다. 법흥왕은 불교의 공인과 함께 흥륜사를 개역하 고 그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고 하여 불교에 심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흥왕이 어려서 즉 위하였기 때문에 왕태후인 법흥왕비가 섭정*****하였음으로 초기의 기록인 국인의 출가(544) 와 흥륜사의 준공과 나아가 중국 양나라에서 사리(549)를 받는 일련의 사건들을 주도적으 로 행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왕태후도 독실한 불교신자로 보인다.* 여기서 법흥왕 이 애공사 북봉에 묻히고 왕비는 기록에 없지만 법흥왕과 함께 합장되었을 것이다. 법흥왕과 진흥왕의 장지가 애공사 북봉이라는 지명의 명칭은 애공사**의 애공이라는 단 * 三國遺事 권1, 王曆 第二十三 法興王, 妃巴刀夫人 出家名法流 住永興寺 始行律令 始行十齊 日禁殺 度人爲僧尼 三國遺事 권3, 原宗興法. ** 三國史記 권10, 興德王 11년, 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 하나의 예가 있다. *** 三國史記 권10, 閔哀王, 兵士尋而害之 君臣以禮葬之. **** 三國遺事 권3, 原宗興法. ***** 三國遺事 권1, 眞興王即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즉위년과 섭정한 왕후가 사기의 기록과 다르게 되어 혼란을 주고 있으나 왕태후로 본다. * 三國遺事 권1, 王暦 第二十三 法興王, 妃巴刀夫人 出家名法流 住永興寺 始行律令 始行十齊 日禁殺 度人爲僧尼. ** 韓國佛敎硏究院, 新羅의 廢寺 1(1974) pp.59 61. 삼층석탑이 유존한다.
- 247 - 어에서 피장자에 대한 슬픔을 내포하여 이 절이 이들을 위한 기복사원*의 성격을 띠고 있 지 않나 생각된다. 이외에 또 하나의 이유는 기왕에 묘지로 사용하여 오던 경주시내에 집중되어 있는 적석 목곽분의 장처에서 새로운 장소인 산기슭으로 옮기어지는 것을 적석목곽분에서 횡렬식석실 분으로의 변화라고 보는 견해**에서 처럼 장법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시기 전후의 역대왕들의 葬地에 대해서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文武王의 확실한 화 장에 관한 기록이 나오기 이전까지의 왕들의 장지를 보면 眞智王의 경우 永敬寺北***으로 되어 있다. 법흥왕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장처가 서로 가까운 장소로 선택되고 있는 점에 서 보면,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후 眞平王은 葬于漢只, 善德王 葬于狼山, 眞德王 葬沙梁部로 기재****되어 이들 대왕들은 역시 앞서 본 경주 중심부를 벗어난 외곽지 역을 장지로 삼고 있지만 집단성을 갖지는 않았다. 이들 왕들에 연이은 武烈王은 다시 장지를 葬永敬寺北으로 정하여 진지왕들의 장지와 같은 위치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점에서, 이 왕들의 집단적인 장지의 선택이 우연히 된 것 이 아니라 의도적인 면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위의 사실은 왕위 계승의 혈연과 관계가 있다고 보이는데 진흥왕 뒤를 銅輪系列과 金輪 系列의 왕위계승에서 볼 수 있는 世系*****에 분파가 나뉘어진 상황에서 장지의 장소선택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혈연의 분파에서 동륜계는 진평, 선덕, 진덕왕으로 승계되고 금륜계로는 진지, 태종, 무열왕에 이어지면서 이러한 혈족의 분파가 장지의 선택과 결부되 어 금륜계열의 왕들이 애공사 북봉 내지 영경사 북쪽에 모여 혈연을 중심으로한 집단적인 가족묘의 장지로 이용되고 있다고 유추된다. 이러한 장지의 선택으로 보아 장례의식도 같 은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 火葬法과 發生時期 신라의 불교의식에 따른 화장법은 茶毘한 후에 散骨이나 藏骨을 하고 있다. 무열왕 뒤 를 이은 문무왕의 화장은 확실한 문헌기록에서 그 이유와 절차를 알아보아 신라의 화장방 법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 黃壽永, 韓國의 佛敎美術 (1980) p.343. 감은사를 신문왕의 기복사원으로 보았다. 三國遺事 권3, 原宗興法, 遂乃葬北山地西嶺 內人哀之 卜勝地造蘭若名刺揪寺. ** 주 78) 崔秉鉉(1988) p.64. *** 三國遺事 권1, 王曆 第二十五 眞智王, 陵在哀公寺北. 현재의 위치로 보아 모두 서악 구릉 에 있다. **** 三國史記 권4 5, 眞平王 善德王 眞德王조. ***** 李弘稙 編, 역대왕실 세계표 ( 國史大事典, 1974) pp.2188 2189.
- 248 - 國史館論叢 第33輯 ① 秋七月一日 王薨 謚曰文武 群臣以遺言 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主石. ② 魏主西陵之望唯聞銅雀之名 終成一封之土 徒費資財 胎議簡牘 空勞人力 如此之類 非 所樂焉. ③ 屬 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 三國史記 권 7, 文武王下). ①에서 왕의 유언에 의해 장처가 정해지고 있다. 그 장소가 특이하여 지상의 능묘가 아 닌 동해구로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바위에 석관*처럼 시설되었다. 이 바위를 장지로 삼은 이유를 속전이라 하여 바다의 용이 되고자 염원하고 있어 불교 교리인 윤회사상에 입각했 음을 알 수 있다. ②에서는 묘가 거대한 봉토를 이루는 것은 한갓 헛되다 하고 이는 재물만을 허비하여 자기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후장적 장례의 허무함과 낭비적인 요소에 대한 부정 적 사고의 일면이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③에서는 장례기일을 10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절약된 기 간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장례의식은 고문밖 현재 경주 남산에서 서국식, 즉 소장으로 화장을 하고, 그 장소에는 능지탑**을 세웠고 장지는 동해안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고, 상 복법***은 평상의 규법을 따르고 상제도도 검ㅋ약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고에 의하면 신라의 화장묘의 출현은 일단 불교의 공인과 더불어 생각될 수 있으며 앞서 본 마립간시대의 적석목곽분의 소멸과 밀접한 관계를 가정할 수 있다. 불교사 상을 바탕으로 한 순장제 금지와 상복법의 시행, 새로운 국호의 사용, 백관의 공복제정 등 제반상황이 신라사회의 국가체제의 새로운 정비과정의 일환으로 보이는 내용과 적석목곽 분의 후장보다는 불교 교리에 따른 화장이라는 박장 내지 절장으로 사회제도가 변혁되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간단하게 신라시대의 화장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그 시기에 대한 검토를 하여 보고자 한다. 화장이란 인도 원주민의 장법으로 생명의 생성과 윤회전생을 위한 필수적인 장법임을 시사하여 불교 성립후 원시 불교의 철학으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경우는 부여지역에서 출토된 화장골장용 토기에 약 11개의 녹슨 동전이 수장되 어 있었고 그 동전은 수 오수전(수 문제 개황 원년 581)이므로 화장골장기의 상한을 최고 로 올려 보았다.***** 고신라 불승의 화장에 관한 기록은 緣光과 慈藏 뿐이고, 연광은 隋나라 仁壽년간(601 * 주 98) 黃壽永(1980) p.351. 길이 3.7, 폭 2.06, 높이 1.45m. ** 주 98) 黃壽永(1980) pp.333 338. *** 隋書 北史, 新羅조, 王及父母妻子喪服一年 **** 주 89) 鄭吉子(1990) pp.5 6. ***** 위의 논문 pp.24 28.
- 249-604)에 隋에 가서 智者 대사의 강설을 듣고 깨달아 묘법화경을 연구, 귀국하여 80세에 입 적하여 660년경이 된다고 보아 기록상으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예로 보았다.* 앞서 진흥왕 사료 ②에서 보면 이보다 앞선 시기인 진흥왕 10년(549)에 중국 양나라에 서 사리를 받아 흥륜사에 봉안한 것과 수에서 가져 오는 불사리(576)의 기록으로 보면 신 라는 이와 같이 화장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되겠다. 진평왕 사료 ③에 진흥왕의 왕비**가 진평왕 36년(614)에 돌아갔고, 앞서 본 법흥왕비의 경우도 화장의 가능성이 있다면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에는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는 애공사지와 영경사지 부근에 있는 법흥, 진흥, 진지, 무열왕능은 모두 거대한 봉 분을 갖추고 있다. 통일 이후의 화장을 한 역대 왕들은 화장하여 산골하였으므로 대부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이 의형으로 보아서는 화장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장골로서 토장한 경우에는 신덕왕능*** 같이 큰 봉분을 가진 석실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 횡렬식내의 화장묘의 예는 충효리 석실분 6호에서도 지적되고 그 축조시기도 6세기말 에서 7세기초로 잡고**** 있어 초기의 화장묘가 외형상으로는 봉분형태를 가질 수 있다고 생 각 판다. Ⅵ. 結 論 신라 고대사의 연구는 문헌과 금석문 자료의 발견으로 다각적인 면에서 검토하여 정차 사회구조를 밝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고고학에서도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쌓여 진 결과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 특히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경주지역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의 출현이 사로국이나 계림국과 같 은 소국에서 신라의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은, 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금 제 유물, 독특한 금관식류 등과 건국설화에서 감지되는 요소가 북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데 연유한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자료를 염두에 두고 문헌자료 속에서는 이 전통성과 보수 성이 강한 묘제가 어떻게 출현하고 왜 소멸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라건국에 등장하는 박, 석, 김 3성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소국의 지배자들이 연맹적 * 위의 논문 pp.21 22. ** 三國史記 권4, 진흥왕(540 575)은 7세에 왕위에 올라 37년간 재위했으므로 44세에 죽고 왕비는 614년에 죽어 왕과 동연배라면 80수를 넘게 장수했다. *** 朴日薰, 慶州三陵石室古墳-傳神德王陵 ( 美術資料, 1963) pp.27 29. 三國史記 권12, 神德王, 葬于竹城. 三國遺事 권1, 王曆, 火葬蔬骨于歲峴南. **** 주 89) 鄭吉子(1990) p.24.
- 250 - 國史館論叢 第33輯 인 성격을 갖고 교립되어 왔다고 하였던 견해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해석을 시도하여 경 주외곽에서 독립적인 소국을 유지하다가 경주로 진입하는 의견에 동의하여 그들의 설화에 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토착세력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김씨세력은 경주지역이 아니라 소백산맥을 중심한 재지세력으로 소국을 구성하였을 가 능성이 있다. 구도를 중심으로 군사적인 힘의 협력과 혼인을 통해 경주지역으로 서서히 진 출하였다고 보인다. 이 진출이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가 미추이사금의 대릉*이라고 판단되고 이는 곧 적석 목곽분의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미추의 계보로 보아 그 윗세대의 세보로 거슬러 기록되어 있지만, 이 중에서는 군사활동과 혼인관계에서 기록에 나타난 구도가 실제인물이 라고 볼 때, 적석목곽분이 축조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므로 미추이사금의 즉위 연대에 대한 기년문제가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3세기 중반경에는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였 다고 생각된다. 이 북방문화의 유입은 현재는 한반도 밖에서는 찾는 것이 어렵지만, 한반도 내에 이동경 로의 가능성을 문헌으로 보면, 동해안을 통해 침투하는 말갈의 길목으로 추정하여 보았다. 첫째는 강원도에서 강릉을 거처 대관령을 넘어 남쪽으로 접촉한 통로, 둘째는 태백산맥 동쪽에서 남으로 내려와 경주와 인접한 흥해까지 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이동 흑은 침입의 교통수단은 말을 사용하고 있음도 아울러 살펴보았다. 이 적석목곽분의 소멸은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해 경주 보문리 부부총으로 보고, 이때에 석실분으로 이행하고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기록에서 본 소멸시기는 지증마립간 3년 (502) 순장제 금지와 5년의 상복제 반시 등 일련의 장례절차에 대한 혁신적이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고히 하고자 강력하게 실행하여 장례의식이 변하였다고 이해된다. 이런 의식 의 변화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침투하여 확산된 사상이 근저를 이루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교리는 윤회사상과 더불어 적석목곽분의 후장적인 폐단을 차단하여 화장 의 장법과 석실분묘로 변하여 박장 내지 절장으로 이행되고 있다. 법흥왕, 진흥왕 등의 장지의 선택이 혈연관계로 집단성을 보여주고, 이는 또한 장례의식 절ᅵ차가 동일할 가능성도 보이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장법의 실행을 추측케 한다. 나아가 법 흥왕비와 진흥왕비가 독실한 불교의 신자로서 일생을 마쳤고 진흥왕비의 경우 특히 국민 의 예의로 치른 장례가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화장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 여 화장의 시작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경에는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 한다. * 三國史記 권1, 味鄒尼師今 23년, 葬大陵.